헤겔 형이상학 산책 47-수학적 명제는 선천적 종합 명제인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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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47- 수학적 명제는 선천적 종합 명제인가?

 

1)

논리학은 정량을 다루는 가운데, 수 개념을 제시한다. 이 수는 정량을 대표하는 것 즉 상품을 대표하는 화폐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수가 지닌 모든 속성은 정량에서부터 유래한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수학에 관한 여러 가지 철학적 논의에 개입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에서 제시한 주장 즉 ‘수학적 명제는 선천적 종합 명제다’라는 주장이다. 헤겔은 이를 주석에서 다루는데, 그의 주장에는 우리의 흥미를 끌 만한 요소가 있어 여기 소개한다.

알다시피 칸트는 아주 기초적인 수학적 명제를 예로 든다. 즉 ‘7+5는 12라는 명제’다. 칸트는 여기서 ‘더하기’라는 개념을 분석하더라도, 그 더해진 수가 ‘12’라는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 12라는 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손가락을 이용해 7개를 세고, 더 나가서 5개를 더 세어야 한다. 이렇게 세어진 결과 구부려진 손가락을 직관하면서, ‘12’라는 수를 떠올린다. 그러므로 칸트는 개념을 넘어서 경험적 직관의 도움 없이는 위의 명제를 알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말한다.

헤겔은 칸트의 이런 주장을 비판하면서, 위의 수학적 명제는 분석적 명제라고 말한다. 즉 경험적 직관의 도움이 없어도 위의 명제가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에서 ‘더하기’란 가장 외면적인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적인 일자들 사이에 서로 외면적인 관계, 서로 동등하면서도 서로 구분되는 관계를 다룬다고 했다. 양자의 서로 동등한 관계가 곧 물질적 관계며, 양자의 서로 구분되는 관계가 공간적 관계다. 물질적인 관계와 공간적 관계는 상호 동전의 양면이다.

이런 양적인 것의 관계는 가장 외면적인 관계다. 여기서 서로 관계하는 일자들 사이에 어떤 내적인 연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외면성은 기하학적 공간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하학적 공간은(일단 여기서는 유크리트적 공간을 말한다) 텅 비고 동질적이어서 그 속에서 도형을 아무리 이리저리 이동하더라도 그 도형은 서로 합동이며 즉 도형의 내적 성질은 그런 공간적 이동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양적인 것은 가장 외면적 공간이어서 그 속에서 정량들이 맺는 관계는 그 정량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7개에 5개를 더하더라도, 전자의 개수가 7개인 것에는 변함이 없고 후자에 개수 5개 역시 그대로 남아 있으니, 12개의 개수가 보존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12개의 개수가 보존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직관이나 경험의 도움이 없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며 이는 분석적인 사실이다.

칸트는 12개의 개수가 있을 때 이를 ‘12’라는 총수로 표현하기 위해서 경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했으나, 이것은 언어적 표현의 문제이다. 12개의 개수를 ‘12’라는 수로 표현하는 것은 12라는 수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언어로 표현할 것이다. 만일 12개의 개수를 표현하는 언어가 ‘12’라는 수가 아니라, ‘한 다스’라는 언어이어서 그 결과를 ‘한 다스’로 표현하더라도 문제는 없다. 어떤 언어로 표현하느냐는 언어적 문제이지 ‘더하기’라는 사태의 본질은 아니다.

2)

칸트가 수학이 선천적 종합 명제라는 주장의 예로 또 하나 끌어들인 것이 기하학의 명제다. 그것은 곧 ‘직선은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다’라는 명제다. 이 명제가 선천적 종합 명제라는 주장에 대한 칸트의 논증은 간단하다. 직선이라는 개념은 질적인 개념이다. 직선은 ‘곧바른’, ‘단순한’ 선이라는 말이니 말이다. 반면 ‘최단은 양적인 개념이다. 즉 길이가 가장 짧은 것이라는 의미다. 질적인 개념에서 양적인 개념이 나오지 않으니, 위의 명제는 분석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명제다.

헤겔은 여기서 칸트가 직선 개념을 오해했다고 한다. 직선은 단순히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직선에는 이미 양적인 개념이 들어 있다. 즉 직선은 그저 ‘곧바른 것[Gerade]’ 가 아니라 ’곧바른 선[Gerade Linie]’이므로 위의 기하학적 명제는 양적인 개념에서 양적인 개념을 끌어낸 것일 뿐이다.

이렇게 칸트를 반박한 다음, 헤겔은 직선 개념에서 최단 개념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끌어낸다. 직선은 가장 ‘단순한’ 선이니 ‘자기 관계하는’ 선이고, 이런 ‘자기 관계’는 “어떤 종류이든 규정의 상이성이나 그 바깥의 점이나 선에 대한 관계도 정립되지 않은 것”이니, 따라서 ‘최단’의 선이다는 것이다. 그 논증의 핵심은 곧 직선은 두 점 사이에 놓인 축에서 벗어난 제3의 점을 거치지 않으므로, 즉 우회를 거치지 않으므로 최단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직선이라는 규정은 사실 다름 아니라 단적으로 단순한 선이다는 즉 그 탈자화(점의 운동) 가운데 단적으로 자기 관계하며, 그 확장 속에서 어떤 종류의 상이한 규정이나 자기 바깥의 점이나 선에 대한 어떤 관계도 성립하지 않는, 단적으로 자체 내 단순한 벡터[Richtung]라는 의미다.”(논리학 재판, GW21, S. 200)

헤겔의 논증은 겉으로 보기에도 좀 억지 또는 궤변처럼 보인다. 기하학적 명제에 관한 한, 칸트가 말한 것처럼 경험적 성격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하면서 기하학적 논증이 일정한 특수한 공간에서 성립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 서문에 보면, 거기서 헤겔은 기하학적 명제의 증명이 작도에 의존하며, 그런 작도는 경험을 통해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어서, 기하학적 명제가 순수하게 개념적이며 분석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여기서 비록 칸트가 예로 들기는 했더라도, 굳이 기하학적 명제를 끌어들여, 수학이 분석적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혼란스럽게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기하학은 해석기하학을 통해 수학으로 환원됐으며 해석기하학은 특수한 공간에 적용되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달리 순수한 양적인 공간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학적 명제의 성격에 관해서 이미 다분히 경험적인 기하학적 명제를 끌어들이지 않고 수의 관계를 통해서 분석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3)

알다시피 칸트는 이런 수학적 명제는 경험적이면서도 필연적(보편적)이어서, 그 때문에 선천적 종합 명제라 불렀다. 흥미로운 것은 헤겔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수학적 명제가 경험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것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 수학적 명제가 필연적이라는 사실 역시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수학적 명제가 분석적이라고 했다. 분석적이라면 필연적이 아닌가? 적어도 칸트의 용법에서는 그렇다. 그런데도 헤겔은 그 필연성을 부정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서 헤겔의 필연성 개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헤겔에서 필연성은 사태가 내적으로 연관돼서. 연관된 하나의 사태에서 다른 사태로 이행하는 것이 필요하고도 충분한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수학적 명제가 토대를 두고 있는 양적인 것의 관계는 서로 외면적인 것이다. 동일한 일자가 반복되면서 맺는 양적인 관계는 같은 것의 반복(물질적 측면)이어서 연속적이며 그런 한에서는 전적으로 동어반복적인 필연성을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이 관계는 서로 단적으로 다른 것의 관계(공간적 측면)이어서 불연속적이며 그런 한에서는 서로 무차별하다. 이런 무차별한 측면에서는 그 관계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수의 관계를 보면, 같은 것의 반복이라는 측면에서 분석적이다. 그러나 다른 것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체적 사물을 일자라는 것으로 추상화해서, 즉 단순한 물질이나 공간으로 볼 때, 이 사물의 수적 관계는 분석적이다. 그러나 어떤 일자를 구체적인 것으로 본다면, 이것들의 관계는 비록 수학적으로 표현되더라도 필연적이 아니고 우연적이다.

즉 손가락을 추상화하며 동일한 일자로서 볼 때 여기서 더하기는 분석적이다. 그러나 손가락을 구체적 사물로 볼 때(수자는 본래 손가락을 지시하는 명사였다는 것을 기억하라), 즉 손가락 두 개로 보지 않고 예를 들어 엄지와 검지, 중지로 보면, 이런 구체적 사물의 관계에서 더하기라는 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엄지와 검지를 더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며, 이를 통해 중지가 나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런 관계는 그때그때 구체적인 관계이며, 수적인 필연성을 지닌 관계는 아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칸트는 수학적 명제를 선천적 종합 명제라 했다. 헤겔은 수학적 명제는 분석적 우연의 명제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최근 언어철학자 크립케는 고정지시어를 경험적이며 필연적 명제라 했는데, 그의 주장은 칸트에 가깝다기 보다 헤겔에 더 가깝다.

4)

수학적 명제가 이처럼 추상적인 일자의 관계 즉 추상적인 물질이나 공간에서나 적용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헤겔은 수학의 한계를 본다. 근대에 들어와 수학은 자연과학의 도구로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때문에 철학자들은 수학적 관계를 일반화해서 세계의 모든 관계를 표현하려 시도했다. 즉 수학을 철학의 방법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헤겔은 자연과학에서 수학이 놓아준 성과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역학적 물체를 다루는 영역은 전적으로 양적인 영역이니, 여기서 수학을 적용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라 한다. 수는 정량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를 충분히 인정하는 가운데서도 수학적 관계를 일반화해서 자연 전체를 즉 생물학이나 심지어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할 때 이런 철학적 시도에 관해서는 비판적이다. 생물이나 인간의 경우에는 이미 더 복잡한 물질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니, 여기에 수학적 관계를 적용한다는 것은 생물이나 인간을 역학적 물체로 환원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진정한 사상, 가장 생동적이며 가장 운동적이고 단지 관계 속에서만 개념화되는 것이 이같은 탈자의 지반[즉 수] 속으로 옮겨지면서 죽은 운동이 없는 규정으로 변한다. 따라서 사상의 규정과 관계가 풍부할수록 수와 같은 형식으로 사상을 표현하는 것은 더욱 황량하고 자의적인 것이 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205-6)

물론, 헤겔은 수학적인 것이 감각적인 것과 사상의 가운데 있는 추상적인 일자의 영역 즉 양적인 영역이므로 수학적인 것은 사유를 통해 사상에 다가가는 예비적 단계로서 사유를 훈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가 수학을 배우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사상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로 수를 사용한다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기호이란 표면적인 유사성(도상)이나 단편적 흔적(지표), 관습적 관계(상징)만으로도 상징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삼위일체와 같은 수학적 상징이 그러하다.

그러나 헤겔은 ‘삼위일체’라는 수학적 상징은 개념의 발전 즉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 사이의 내적 필연적 연관을 성자, 성부, 성령과 같은 자연적인 가족적 관계로 오해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런 수학적 상징은 수가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개념의 내적 발전이나 연관을 은폐함으로써 오히려 그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하기도 한다는 한계가 있다. 다음과 같은 헤겔의 한탄을 들어보라.

“고대인은 사상규정을 위한 수적 형식의 불충분성을 매우 올바르게 통찰하고 있었으며 사상을 위한 임시변통 대신에 사상에 본래적인 표현을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요구했다. 고대인들은 숙고의 측면에서 오늘날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나았는가,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다시 수 자체와 수적 규정을 … 사상 규정 대신에 정립하면서 무능력한 유아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어떤 가상할 만한 것이며 근본적이며 심원한 것으로 여긴다.”(논리학 재판, GW21, S.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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