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부터 (e)시대와철학에 실렸던 글들 중에서 편집자가 다시 뽑아올린 글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다시 쓴다]-③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다시 쓴다]-③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쯤에서 내가 첫 강의에서 한 말로 되돌아가기로 하지요. 같은 말을 되풀이하자는 뜻에서가 아니라, 딴 이야기를 하자는 뜻에서요.

다 아는 뻔한 말인데도 굳이 상기시켜 드렸듯이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도 없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가장 큰 단위로 여기는 우주도 없습니다. 또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은 다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가장 큰 단위로 여기는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 무한히 여럿이 됩니다.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가장 큰 단위로 받아들이는 우주는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은 하나가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가장 큰 단위로 받아들이는 우주는 하나입니다.

이 네 마디 말은 저마다 존재론이나 우주론의 주춧돌로 쓸 수 있는 것들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말로 주춧돌을 놓느냐는 개별 상황이나 집단 상황의 반영일 수도 있고, 시대가 요청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을 주춧돌로 삼기 꺼리고 그 쪽으로 돌려지는 생각을 거짓으로 못 박아 자꾸만 외면하려는 데에 까닭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의식 안에 자리잡고 있고, 자꾸 자맥질시켜 물 속에 잠기게 하려고 해도 끊임없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는 이 불길한 말에 끝까지 귀를 막을 수는 없지요.

더 솔직히 말할까요? 의식이 몰아내고자 하는 이 어둠의 소리는 사실 의식 활동의 숨은 전제들입니다. 없는 것이나 없다는 말을 빌리지 않으면 의식은 한 걸음도 발길을 떼 놓을 수 없습니다. 있는 것만 있는, 하나만 있는 세상에는 의식이고, 감각이고, 추억이고, 기대고, 행복이고, 불행이고, …… 그야말로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를 살려 내기 위해서도, 단위를 설정하고 법칙을 세우기 위해서도 이 세상의 삼라만상을 질과 양으로, 시간과 공간으로 나누고 그 나누어진 것을 다시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해서도 없는 것이 있어야 하고, 있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참말이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거나(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인데, 참말이 참말로 들리는 것은 거짓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멀쩡하게 있는 것을 없다고 우긴다고 해서 없어지나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는 세상에는 있을 것도 없고, 없을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하나로 이어진 물의 흐름을 지난날의 물방울, 지금의 물방울, 앞날의 물방울로 나누어 고정시킨 뒤에 물방울 저마다에 있었던, 있는, 있을이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거꾸로 없었던, 없는, 없을이라는 딱지를 붙이기도 하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이 딱지 이론을 조금 가까이서 눈여겨보기로 할까요?”

“선생님께서 앞 강의 시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고백을 장황하리만큼 길게 인용하신 것이 혹시 이 딱지 이론을 펼치기 위한 전제는 아니었나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과 연관되는 딱지 이론의 대가이니까요. 아다시피 아우구스티누의 시간은 살아 있는 시간(참된 운동)이 아니라 의식 속에 고정된(매장된) 시간 의식입니다. 이 점에서는 그 전통을 이어받은 후설(Husserl)도 마찬가지지요. 이 이론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지 못하게 핀으로 고정시키는 의식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를 이미 없는 것으로 미래를 아직 없는 것으로 못박습니다. 그러니까 있었던 것은 이미 없는 것이고, 있을 것은 아직 없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지금 있는 것? 그것은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을 이어 주는 흔들리는 접점 노릇을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거꾸로 말하면 이미 없는 것도 아니고, 아직 없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에드문트 후설(1859~1938) 출처: www.kitabinomurgasi.com

아우구스티누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없음과 연관지어 살펴보는 것도 흥미 있을 겁니다. 있음과 연관지어 있었던 것, 있는 것, 있을 것이 저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킨다면, 여기에 짝이 되는 없음의 계열은 없었던 것, 없는 것, 없을 것이 되겠지요. 여기에서 없었던 것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없을 것은 아직 있는 것을 가리키겠지요? 없는 것은 이미 있는 것과 아직 있는 것 사이를 이어 주는 흔들리는 접점 노릇을 합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은 여기에서 이미 있는 것과 아직 있는 것을 한편으로는 갈라놓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어 주는 징검다리 노릇을 하는데, 있는 것과 대비시켜 이야기하자면 이미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있는 것도 아닌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말장난 같다고요? 아닙니다. 나는 지금 여러분들을 붙들고 말장난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길은 멀고 마음은 급하고’라는 말이 내 심정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시간 축을 중심으로 우리의 의식 속에서 토막 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기능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본디 공간이 없는데 여기저기가 어디 있으며, 본디 시간이 없으니 과거가 따로 있고 현재가 따로 있고 미래가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마는 우리의 의식이 분별지를 요구하니 당분간 그 요청에 순응하기로 합시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숨이 가쁘고 두려웠습니다. 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음울하고 불길한 경고의 소리가 울려 왔습니다.

‘너는 지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 사유와 추론이 이루어지는 의식 공간에 한 발짝만 들어서도 의식의 칼날 아래 토막 나고 산산이 저며져서 형체조차 찾을 길 없는 것을 제물로 삼아 네 이론을 정당화하려고 하고 있다니, 바로 이런 오만을 경계하여 옛날 불가(佛家)에서 한 말이 있지 않더냐. 개구즉착(開口則錯). 입만 벙긋해도 틀린다. 차라리 입을 다물려무나.’

어쩌면 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직관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시간과 공간으로 파편화한 분별지의 영역으로 끌어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논하다니요? 이것은 작은 그릇 안에 큰 그릇을 담으려는 것이나 좁쌀 안에 우주를 집어넣으려는 시도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요,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습니다.

“자, 지금 우리는 시간 축 속에서 토막 난 운동의 시체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 여섯 토막 난 시체, 그야말로 육시처참한 시체의 부위들을 하나하나 들어 볼까요? 이것은 있었던 것, 이것은 그 짝이 되는 없었던 것, 또 이놈은 있는 것, 그 짝인 이놈은 없는 것, 그리고 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뭉개져 버린 것은 있을 것, 그리고 이 흉측하게 생긴 놈은 없을 것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한 배에서 태어난 놈들인데, 그리고 본디 하나였던 몸인데, 이렇게 의식이라는 백정이 토막 내 놓으니까 저마다 다른 놈인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이제부터 시체 해부 시간인데 어떤 놈부터 분해를 할까요? 시간의 흐름을 따라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자고요? 할 수 없지요. 여러분들의 의식이 그렇게 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으니, 그리고 한 방향으로 고정된 시간의 회로를 유일한 흐름인 것으로 알고 있으니 그 요구를 따를 수밖에요.

우리는 앞에서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시작된 서구 철학의 오랜 전통을 짐짓 받아들여 과거는 이미 없는 것으로, 미래는 아직 없는 것으로 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있음과 없음과 연관하여 정말 과거가 이미 없는 것이고, 미래가 아직 없는 것인지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있었던 것과 연관하여 과거를 살펴볼까요? 있었던 것은 아까 내가 말했듯이 이미 없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있었던 것을 이미 없는 것으로만 볼 수 있을까요? 지난 날 있었던 것이 지금도 있을 수 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창 밖의 저 관악산이 지난날부터 있었던 것이고, 지금도 있는 것이고, 내일도 있을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있었던 것은 이미 없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지금 있는 것, 앞으로도 있을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니까 있었던 것의 테두리는 이미 없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지금 있는 것과 앞으로 있을 것까지 담을 수 있는 크기를 가졌다는 말이지요.

이와 연관되는 자세한 이야기는 뒤로 돌리기로 하고 이번에는 있었던 것과 짝을 이루는 없었던 것을 살펴보지요. 앞에서 짐짓 없었던 것은 이미 있는 것이라고 단순화시켜 규정했지만 지금도 없는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네모난 동그라미라는 말을 뒷받침할 수 있는 형상은 지난날에도 없었던 것이지만 지금도 없는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있었던 것과 없었던 것에는 저마다 있음과 없음의 결이 동시에 숨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있음과 없음으로 추상의 최종 단계에서 나누어지는 원초적 관계가 어떤 때는 있었던 것으로 또 어떤 때는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실체화의 오류’(이런 식의 거만한 표현을 싫어한다는 것은 전에 한 번 이야기했지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있음과 없음은 있었던 것에도 없었던 것에도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과거를 이미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있었던 것을 이미 없는 것으로, 그리고 없었던 것을 이미 있는 것으로 단순 규정하고 더 넓은 테두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것만큼이나 섣부른 일이지요. 비록 우리의 의식이 이런 단순화를 통해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큰 힘을 얻기는 하지만요.

과거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현재와의 연관 속에서만 드러납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독립된 테두리 안에 들어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관계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데, 관계가 없으면 관계항도 없습니다. 관계항이 먼저고 관계가 나중이 아니라 관계가 먼저고 그 관계를 의식 공간에서 분석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관계항을 놓게 되더라는 이야기이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야기하자면 있음과 없음도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있는 것은 이 둘의 관계이고, 우리의 의식이 분석의 최종 단계에서 이 두 항을 실체화하는데, 여기에 따르는 위험이 너무 커서 서구 존재론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함정에서 벗어난 철학자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그러니 어찌 나라고 해서 이 함정에서 쉽사리 비켜 서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지난날이다, 과거다, 있었던 것이다,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못박는 그 무엇은 스스로 아직도 흐르고 있고, 또 앞으로도 흐를 것이지만 우리 의식은 그것을 고정시켜 완고하게 기억 속에 가두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요동치고 반란을 일으키는 과거의 모습을 직관하는 힘을 점점 잃어 가고 있습니다. 과거는 추억과 반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어 어쩔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스스로 움직여서 현재와 미래의 모습까지도 바꾸어 낼 힘을 지닌 살아 생동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니 과거가 이미 없는 것이라느니, 우리의 의식, 우리의 기억, 우리의 영혼 속에 간직되어 있어서 우리 머리나 몸에 간직된 정보를 통해서만 현재나 미래에 힘을 미칠 수 있다고는 말하지 맙시다. 과거는 있음과 없음이라고 실체화되어 고정된 그 어느 것이 아니라 그 나름으로 현실을 구성하는 함과 됨의 영역입니다.”

“잠깐, 잠깐만요.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지금 증명되지 않는 수사로 우리를 현혹하고 계시는데, 과거가 그 나름으로 살아 흐른다느니,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느니, ‘함’ 곧 능동의 힘과 ‘됨’ 곧 수동의 힘을 지닌 무엇이라느니 하는 말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더니 저에게 대들듯이 따져 물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넘나듦은 우리의 의식, 우리의 말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한 현상은 아니지요. 이를테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지난 추석에 말이야. 고향에 갔는데, 차에서 내리니까 어떤 사람이 서 있어. 많이 본 얼굴이야.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니까 그 사람이 고개를 돌리지 뭐야. 그제야 기억이 났지. 어렸을 때 내가 무던히도 골려 주었던 초등학교 동창이야.’ 이 말 속에서,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자연스럽게 넘나듭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유전 정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생명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과거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미래입니다. 과거가 거미의 꽁무니에서 실을 빼내 거미줄을 치고, 벌에게 밀랍을 만들게 하여 정교한 육각형 집을 짓습니다. 죽어 없어진 저 하늘의 별은 몇억 광년을 가로질러 이 하늘에서 저렇게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그럴 것입니다. 땅 속에서 뿜어 나온 과거의 불은 현재 저렇게 큰 바위로 웅크리고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부스러져 바닷속으로 흘러가서 밑에 깔렸다가 압력이 점점 커지면 다시 한 번 불길로 뿜어 오를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그런 힘이 주어질지는 모르지만 더 엄밀한 증명이 필요하다면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지요.”

그 학생은 못내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저는 그 학생에게 ‘자네의 그 표정을 만드는 힘도 자네의 과거일세.’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 보자[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⑤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 보자-6, 7강

 

이재유(건국대 외래교수)

 

제6강.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 보자(1)

?

1. 노동 가치론을 둘러싼 논쟁

 

(1) 아담 스미스(Adam Smith)

아담 스미스는 이전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내적 연관에 대한 탐구를 노동가치설의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는 스미스의 『국부론』 서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부는 국민이 매년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리품이고, 그것은 매년 국민의 노동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고, 체계적으로 이론이 구축되었던 것은 아담 스미스에 와서이다. 스미스는 이전의 중상주의, 중농주의가 단편적으로 파악하였던 상업노동, 농업노동이 부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일반이 부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스미스는 처음부터 일관성 있게 상품 가치에 대한 분석을 행하지는 않았다. 즉 상품의 가치는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시간으로 정해진다는 명제를, 가치는 산 노동의 일정량을 살 수 있는 상품의 양 또는 상품의 일정량을 살 수 있는 노동의 양으로 결정된다는 명제와 혼동하였다. 전자는 스미스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 특히 원시사회에서 노동자는 상품가치의 전액을 자기 노동의 보수로 받게 되며, 따라서 상품의 가치는 노동임금과 같게 됨을 자본주의 사회의 그것과 등치시키기 때문에 나온 가치 규정이었다. 그러나 후자는 임금과 잉여가치라는, 자본주의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경제 형태를 설명하기 위해서 나온 가치 규정이었다. 전자로서는 임금과 잉여가치의 발생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후자로서는 이들의 발생을 해명할 수 있다.

아담스미스,표지. 출처: anticap.wordpress.com

이러한 상품가치에 대한 이중적 혼란은 잉여가치론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잉여가치는 전자의 가치 규정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고 오로지 후자의 가치 규정에서만 나온다. 일단 스미스는 노동자가 원료에 부가한 가치는 두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노동자에게 속하는 임금(노동의 가치)과 자본가에 속하는 이윤(잉여가치)이 그것이다. 그래서 스미스는 이윤이 노동자가 그에게 지불된 임금과 동일한 양의 노동량을 초과하여 원료에 부가한 노동의 부분 즉 잉여노동임을 솔직히 나타내었다.

“노동자가 원료에 부가하는 가치는 (……) 두 개의 부분으로 분해된다. 즉 일부분은 그 노동자의 노동임금을 지불하고, 다른 부분은 그 고용주가 전대한 원료와 노임과의 전 자본에 대한 이윤을 지불한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151쪽)

다시 말하면 이러한 잉여노동이 잉여가치의 기원임을 스미스는 분명히 밝혀 두고 있다. 또한 이윤, 지대가 모두 잉여가치의 분신임을 명확히 하였다.

“노동은 그 자신 노동으로 분해하는 가격 부분의 가치를 측정할 뿐만 아니라, 지대로 분해하는 가격 부분, 이윤으로 분해하는 가격 부분의 가치도 또한 측정하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153쪽)

그러나 스미스는 잉여가치와 이윤, 지대를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오유를 범하고 있다. 하지만 잉여가치와 이윤, 지대는 동일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잉여가치가 이윤으로 전화될 때에는 상이한 자본의 생산 부문에 걸쳐 이윤율의 평균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윤과 잉여가치는 상이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잉여가치에서부터 이윤으로 나아가는 내적 연관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는 상품의 가치를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임금, 이윤, 지대의 합이라고. 스미스는 이 부분에서 또 다시 노동의 가치를 노동력의 가치와 일치시키며, 따라서 이윤, 지대가 노동 가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 토지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스미스는 그가 애초에 발견하였던 가치 명제를 스스로 버리게 되었다.

(2)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리카도는 스미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스미스에게서 보이는 이중적 혼란을 일소하고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의 내면적 분석을 보다 고도로 발전시켰다. 리카도는 자신의 저서 『정치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에서 노동에 의한 가치에 대한 스미스의 이중적 혼란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는 (가치의) 표준 척도로서 어느 때에는 곡물을, 또 다른 때에는 노동시간을 들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노동시간은 어떤 물품을 생산하는 데 투하한 노동량이 아니라, 그 물품이 시장에서 지배할 수 있는 노동량인 것이다. 그는 마치 이것들이 두 개의 동일한 표현인 것처럼 (……) 논하고 있다.” (데이비드 리카도, 『정치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7쪽)

“한 상품의 가치, 또는 그 상품과 교환될 어떤 다른 상품의 양은 그 상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상대적 노동량에 좌우되는 것이지, 그 노동에 지불되는 보수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데이비드 리카도, 『정치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5쪽)

리카도는 상품 가치의 크기는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발달된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가치의 외화 형태인 생산가격이 자본의 경쟁을 통해 가치와는 다르게 나타난다. 리카도는 여기서 성립하는 생산가격이 어디까지 노동량에 의한 상품가치 규정과 부합하는지, 또 양자 사이의 모순이 무엇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와 생산가격을 조화시키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생산에 직접 투여된 노동량뿐만 아니라 기계나 건물 등의 고정 자본에 포함된 노동도 똑같이 가치결정의 요인이 되며, 따라서 그 속에 사용되는 고정자본의 비율에 비례하여 얻어지는 이윤양의 차이 때문에 가치와는 달라진 생산가격이 성립한다. 또한 이러한 이윤양의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임금의 등락이 상품가치 자체의 변동의 요인이 됨을 리카도는 설명하고 있다. 즉 임금의 등귀는 필연적으로 이윤의 하락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가치가 노동량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는 것과 모순된다. 물론 리카도는 임금의 등락이 상품가치에 끼치는 작용이 그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의 변동이 가져오는 결과에 비하여 비율적으로 가볍기 때문에, 가치의 법칙은 여전히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노동시간과는 독립된 제 영향력이 가치 그 자체에 작용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가치법칙의 폐기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잘못은 리카도가 단순한 상품가치의 결정으로부터 잉여가치나 이윤이, 또한 일반적 이윤율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설명하지 않고, 애초부터 일반적 이윤율, 즉 생산가격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3) 칼 마르크스(Karl Marx)

마르크스는 상품가치의 근원, 실체가 노동이라는 점을 밝혀낸 것이 스미스와 리카도의 커다란 공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르크스 역시 스미스나 리카도와 마찬가지로 노동이 모든 상품 가치의 근원임에 동의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이 만들어 낸 모든 상품들과 구별되는, 상품을 만들어 낸 창조주이자 주체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인간의 주요 특성이 바로 ‘노동’ 자체이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인간 노동 자체를 다른 모든 상품처럼 시장에서 판매할 수 없으며, 다만 이러한 노동의 구현체로서의 노동력(다른 모든 상품들도 노동의 구현체이다)이 다른 모든 상품들처럼 시장에서 판매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과의 가치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노동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노동력은 이 노동력을 만들어 내는 창조주, 주체로서의 인간과 현실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특수한 상품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장에서 판매되긴 하였지만 아직 추상적이고 가능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는 노동력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즉 노동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인간의 노동을 마르크스는 ‘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이라 하는데, 노동력과 기계, 원료 등을 결합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고, 이는 종전보다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 내는데, 이 새로운 가치 부분이 바로 잉여가치이다. 그렇게 해서 잉여가치는 바로 자본, 지대에서 나오는 것(스미스, 리카도)이 아니라 바로 인간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은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이다.

또한 단순가격과 생산가격이 시장의 경쟁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아래의 도표를 보면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 C(기계) V(노동력) S(잉여노동) C+V+S(단순가격) P(이윤) C+V+P(생산가격) P-S
자본가 Ⅰ 90 10 10 110 20 120 +10
자본가 Ⅱ 80 20 20 120 20 120 0
자본가 Ⅲ 70 30 30 130 20 120 -10

<표1>: 같은 부문의 자본들 간의 경쟁을 바탕으로 시장에서의 가격경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 때문에 발생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암시하고 있는 표.

C(불변자본, Constant capital):기계, 공장부지, 원료 등을 뜻하는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자본을 뜻한다.
V(가변자본, Variable capital):노동자의 노동력을 뜻하는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본을 뜻한다.
S(잉여노동 또는 잉여가치, Surplus)
C+V+S:단순가격으로서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비용을 뜻하는데, 시장에 나오기 전의 그 상품의 가치를 나타낸다.
P(이윤, Profit):시장에서 그 상품이 팔렸을 때 실제 남는 이윤을 뜻한다.
C+V+P:생산가격으로서 단순가격이 시장에서 가격 경쟁을 통해 현실화된 가격이다.

표에서 자본가Ⅰ,Ⅱ,Ⅲ 모두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 데 총 100원(C+V)을 투자하고, 잉여가치율(S`=V/S)이 모두 100%라고 가정한다. 이때 상품은 단순가격으로 팔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경쟁에 따라 단순가격들의 평균으로 120원에 팔리게 된다. 그러면 자본가 Ⅰ,Ⅱ,Ⅲ 중 자본가Ⅰ이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다. 즉 단순가격에 10원의 이득이 더 붙는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자본가Ⅱ이고, 그 다음에는 자본가Ⅲ이다. 자본가Ⅱ는 단순가격과 생산가격이 같고, 자본가Ⅲ은 단순가격에서 -10원을 손해보고 있다. 가격경쟁에서 자본가Ⅰ이 우위를 점하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그런데 우위를 점하고 있으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요인이 무엇일까? 그것은 자본가Ⅰ이 자본가Ⅱ,Ⅲ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C/V)가 높다는 것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가 높다는 것은 가변자본이 적어진다는 것, 즉 노동자의 임금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적어지고, 불변자본이 많아진다는 것, 다시 말해 사람이 일하던 것을 기계로 대체한다는 것이며, 그 기계의 효율을 최대한 높여서 노동 강도를 엄청나게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구조조정’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가변자본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가변자본에 의하여 생겨난 잉여가치(S)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잉여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은 이윤율(S/C+V)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 이윤율은 경제성장률 지수의 척도이다. 위 표에서 보다시피 자본Ⅲ의 이윤율은 30/100인데 자본Ⅰ의 이윤율은 10/100이다. 서구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이 1~2%대에 머무르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이윤율 저하 경향은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이며, 이는 곧 노동력을 감소시킨다. 그리고 이 노동력의 감소는 다시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가져와서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하게 되며, 다시 노동력을 감소시킨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순환과정은이다. 노동력의 감소는 노동자의 임금 전체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며, 비정규직과 실직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화과정이 계속 되풀이되면서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황폐해진다.

2. 노동의 가치와 소외, 가치와 가격

 

1) 노동의 가치와 소외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과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소외가 발생하는 것은이 아니라 물적인 형태로서의으로부터 발생한다.

노동력이란 자연과의 관계, 나아가 사회적 관계를 실현시키는 인간의 구체적 실천활동 일반이 아니라, 자본가와 관계 맺는, 즉 자본에게 종속되고 착취되는 관계로서 노동자가 판매하는 상품의 실체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노동은 자연과의 관계, 나아가 사회적 관계, 즉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실현시키는 인간의 구체적인 실천적이고 변혁적인 활동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세계를 변혁시키는 실천활동이다.

2) 가치와 가격
가치란 자본주의 하에서의 역사적 개념으로서 모든 인간관계를 상품관계로 변환시키는 척도이다. 그리고 이때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의 가치이다.

“상품 시장에서 화폐소유자와 직접 대면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자이다. 후자가 판매하는 상품은 그의 노동력이다. 노동은 가치의 실체이며 또 내재적 척도지만 그 자체는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자본론』번역본(김수행 역), 726~7쪽)

이 노동력의 가치는 그 자체로 인간 노동의 소외 형태이다. 왜냐하면 인간 삶의 목적이 이 가치에 종속당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이 가치로서는 인간 자신의 삶의 목적을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노동력 가치의 현상 형태가 가격인데, 가격은 구체적으로 임금의 형태로서 우리 눈에 나타나게 된다. 가격 또는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와는 다르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경쟁 개념이 도입되기 때문이다. 또한 임금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도 동일 부문의 노동자의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최저임금제는 바로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에 근거해 책정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노동력의 가치의 현상 형태인 가격 또는 임금은 인간 노동이 소외된 형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개별 노동자의 임금인상에 매달리거나 생산성을 담보로 하는 임금인상은 인간 노동 소외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7강. 노동의 가치를 재구성해 보자(2)

1. 자본주의 경제의 양면성

자본의 이익을 최대한 늘리면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은, 제레미 리프킨(『노동의 종말』의 저자)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중적인 측면을 가지게 된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이전에는 인간의 노동을 통해 이루어졌던 일들이 기계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시기에는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가 거의 필요 없는 농장과 공장 및 사무실이 등장하게 될 것이며, 아주 정교화된 지식 분야에서만 소수의 엘리트 노동자만이 노동을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죽어라 일하기를 강요당하는 산업사회의 노예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게 됨에 따라서, 인간이 노동할 수 있는 노동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며, 이는 전반적으로 노동자의 일자리 수가 엄청나게 줄어듦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은 노동자가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임금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을지가 불분명해짐으로써 생계가 아주 불안정해지고, 이는 곧 경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뜻한다. 이는 현재에도 필요할 때만 노동자를 쓰는“노동 유연화 정책”, “구조조정 정책”과 맞닿아 있다.

 

2. 분배, 교환의 기준 1-리프킨(노동시간)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제레미 리프킨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이러한 모순을 경제에만 맡겨 두어서는 더 많은 고통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측면에서 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통해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게 된다. 하나는 실업에 따른 범죄 계층의 증가에 대응한 경찰력의 증가와 감옥의 증설이고, 다른 하나는 제3부문의 일자리 창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이 두 가지 중에서 두 번째를 위하여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는 제3부문의 영역은 사회?문화적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공식적, 비공식적인 비영리적 활동을 포함하는 영역이며, 이 영역에서 사람들은 공동체적 유대와 사회적 질서를 창출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역은 경제적 이익(자본의 이익)을 창출하는 시장의 영역과 대립되는 모든 비영리적 자치 활동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활동 영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 자산으로서 이 활동 또는 이 활동의 결과물, 그리고 정부의 재원이 이 이 영역에서 어떻게 분배, 교환되고 소통될 수 있는가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기준으로 분배, 교환되고 소통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들에는 시간은행(time bank), 타임 달러(time dollar) 등의 제도가 있다.

이 제도의 운영 방식은 다음과 같다. 어떤 특정인이 자진해서 자신의 전문적인 활동(노동)을 한 시간 제공하면, 한 시간 달러의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이 보상은, 여러 전문적인 활동들이 서로 질적으로 아주 다를지라도, 한 시간 달러로서 동등하게 이루어진다. 즉 각 활동(노동) 시간은 기여한 바의 특징과 종류에 관계 없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고 있는 이 제도 운영 방식은 사실상 본질적으로 시장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위의 자본의 생성(시장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과정에서 보았듯이, 질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 생산물이 교환되는 기준 역시도 1시간, 2시간 등으로 표현되는 자연 시간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시장 영역과 대립되는 제3부문 영역 사이의 교환, 분배 소통 방식의 기본적인 구조는 동일하기 때문에 이 두 영역 사이의 차이점이 사라진다. 이는 곧 위에서 말한 부정적인 측면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깊어질 수 있는 위험성이 많아질 수 있음을 뜻하게 된다.

이 제도는 19C에 J.그레이, P.J.프루동, R.오언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노동화폐 제도와 유사하다. 노동화폐는 금을 화폐로 사용하지 않고 노동시간을 화폐단위로 하여 노동자 자신들의 노동과 노동생산물이 국립중앙은행을 매개로 교환되는 제도이다. 즉 몇 시간 노동을 했는가 하는 증명서로서의 노동화폐를 국립중앙은행이 발행하고, 이 노동화폐를 다시 중앙은행에 가서 자기가 필요한 물건으로 교환한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오언에 의해 실행에 옮겨져 1832년 노동화폐로 노동생산물을 교환하는 국민평형노동교환소가 설립되었지만 3년을 못 넘기고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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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분배, 교환의 기준 2-맑스(각자의 필요)

이렇게 노동시간을 기초로 분배, 교환되는 방식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기본 구조이다. 그런데 이 구조에서는 내가 1시간을 열심히 일했다고 해서 1시간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노동시간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은 과학기술의 발달 정도, 숙련 정도, 교육을 받은 정도 등에 의해 결정된다. 이 중에서 중요한 것은 교육을 받은 정도인데, 왜냐하면 과학기술에 어느 정도 정통하고 있으며, 숙련되었는가를 객관적으로(수치상)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교육을 받은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 교육을 비롯해 더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쓰며, 이는 곧 사교육비의 엄청난 증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리프킨이 말하고 있는 시간은행 같은 경우는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시간은행에서의 시간 역시도 결국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교수의 노동 1시간과 블루칼라 노동자의 노동 1시간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들어 노동자의 생계가 엄청 위협받음과 동시에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이 다른 방식은 다름 아니라 맑스가 말하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즉 각자의 욕구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되는 방식이다. 이 방식 속에서는 그 누구도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방식을 대단히 현실과 동떨어진, 유토피아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이미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의 방식에 움터 있다. 친구들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연인, 동아리 등등의 관계에서 말이다.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이익이나 손해 등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받는다. 그러므로 이 방식은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이 방식을 어떻게 의식적으로 사회 전체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실현가능함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 보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 가면 서로가 서로에게 먹을 것과 담요, 음료수 등을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주고받는다. 서로에게 격려와 희망, 연대의 벅참을 주고받는다.

국외로 보면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등이 민중무역협정(PTA)(미국을 축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서 만든 협정)이라는 것을 체결하였다. 자유무역협정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은 화폐의 양으로 나타난다)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민중무역협정은 각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의 양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하는 방식이다. 쿠바는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를, 볼리비아로부터 천연가스와 콩을, 베네수엘라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 볼리비아로부터는 천연가스와 콩, 밀을, 볼리비아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 베네수엘라로부터는 석유 등을 필요한 만큼 서로 주고받는다.

우리가 노동하는 것은 각자가 필요한 것을 얻고 충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노동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분배 형식으로서의 노동시간이 문제가 아니라이 문제이다. 분배형식으로서의 노동시간은 결국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생산의 기초가 된다. 그렇지만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는 생산양식, 즉 계획 생산 양식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생산 양식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일회용 인간?[노동이야기]- ⑦

일회용 인간?[노동이야기]- ⑦

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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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정당하다

며칠째 이곳 J읍 인력에서 일을 얻고 있다. 몇 일 비가 온 후 날이 개었다. 오늘은 컨테이너 짐 하차, 일명 까대기 작업을 했다. 인력사무실에서 운동선수와 나, 둘이서 이 고추장 공장에 배치 받았다. 그는, “부지런히 까대고 일찍 집에 가자”고 했다. 공장에서는 오전에 일을 마치기를 요구한단다. 컨테이너 기사도 바삐 짐을 내려줘야만 다시 일하러 갈 수 있단다. 중국에서 제조해 컨테이너로 운송해 온 고추장, 20킬로 박스 한 컨테이너당 천 개씩 도합 2천개를 하차해야 한다.

박스를 파레트에 60개 씩 쌓아 올리면 지게차가 운반해 갔다. 운동선수는 숨도 안 쉬고 작업을 계속했다. 나도 보조를 맞춰나갔다. 그는, 자기는 지구력이 없어서 일찍 일을 못 마치면 지쳐 나가 떨어진다고 했다. 첫 번째 컨테이너를 비울 때까지 딱 한 번 쉬었다. 그것도 공장 직원(아줌마)이 커피를 갖다 주었을 때이다.

두 번째 컨테이너 작업을 할 때, 그가 갑자기 주저앉았다. 근육에 경련이 왔단다. 무심코 작업하는데, 나도 온 몸에 경련이 일었다. 나는 주저앉지는 않았다. 심장만 뛰면 계속 움직이리라, 생각하고 끝까지 달렸다.

오전 열 시 반, 마지막 박스를 파레트에 올리자, 지게차 기사가 창고 정리 좀 하고 가라 했다. 나는 단번에, 못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운동선수의 차에 앉아있었다. 지게차 기사가 와서, “이라와요, 잠깐만 (정리) 하면 돼”, 하고 나를 불렀다. 나는 지게차 기사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어른이 초등학생을 이용해 먹냐?”

창고에서 25킬로짜리 고추 마대를 운동선수와 둘이서 여덟 파레트 쌓아주었다. 이 정도 일 도와주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지게차 기사는 자기 할 일을 용역 노동자에게 떠 넘기는 것이니 이용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짜증을 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까대기하며 운동선수로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는 성미가 무척 급해서, 박스를 반듯하게 쌓아 올리되, 딱 한 번에 파레트 위에 놓아야만 한다. 내가 박스를 바로잡기 위해 조금이라도 꼼지락 거리면 작업시간이 늦어질 뿐만 아니라, 자기까지도 보면 힘이 빠진다고 야단이었다.

동정질까지 당했다. 작업 도중 나이를 묻길래 솔직히 대답했더니, “와, 대단하시네요. 나는 그 나이에 아저씨처럼 힘 쓸 거 같지 않아요”하고는 태도를 바꿔 “천천히 하세요”라고 했다. 동정과 모욕은 백지 한 장 차이 아닌가.

이튿날도 까대기 작업에 배치 받았다. 이번에는 파트너가 바뀌었다. 회사원인 그는 야간작업이어서 일하러 왔다 한다. 내 나이를 듣고는 아예 나의 작업 속도에 보조를 맞추었다. 도리 없이 다시 동정당했다. 어제보다는 작업하기 덜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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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가 이들의 편이 되어줄 것인가?

비 오기 4일 전, 그러니까 J 용역에 처음 온 날, 자동차 도색 공장에 일하러 갔다. 액티비티 카본, 활성탄을 교체하는 작업이다. 도색 과정에서 페인트 냄새를 잡아주는 것이 활성탄이다. 실내 작업장의 공기를 활성탄 박스를 거치도록 강제 송풍하면 페인트 냄새가 없어진다. 정수 과정에서 쓰이는 등, ‘활성탄’ 쓰임새로 보자면 친환경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작업자들에게는 이것이 노역이다. 쓰리 엠 마스크를 쓰지만 소용없다. 방진복을 입지만, 미세 가루는 방진복을 뚫고 들어온다. 또한 건조한 활성탄 가루가 습기를 찾아, 눈의 진액과 만나면 눈 주위에 달라붙는다.

일곱 명이 한 조가 되어서, 24칸, 사용한 약 천개의 활성탄 자루를 꺼낸 후 높이 1.5미터, 길이 3미터, 폭 2 미터의 박스에 다시 담는다.

꺼낼 때, 두 조가 되어, 한 사람이 3층에 설치된 박스 안으로 들어가 활성탄 자루를 꺼내 주면 다른 사람이 이것을 받아 옮겨 지상 1층으로 던진다. 아래 사람들이 이것을 항공마대에 담아 지게차로 폐기장으로 옮긴다.

네 개의 큰 박스에 칸막이가 24개이다. 폐기할 활성탄 자루를 다 꺼낸 후에는 다시 칸막이에 새로운 것으로 다시 담는다.

크레인으로 활성탄이 담긴 항공마대를 들어올려 3층 난간에 살포시 내려놓는다. 그러나 크레인은 항공마대를 완전히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3층 난간이 낡아서 중량에 못 이겨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장까지 달려들어 두 칸을 한꺼번에 작업한다. 한 칸에 각기 한 사람씩 두 칸에 들어가면 나머지 사람들은 항공마대로부터 탄 자루를 꺼내 손에 손으로 전달해 칸에 넣어준다. 항공마대에서 탄 자루를 꺼내 전달하는 반장은 빛의 속도이다. 크레인을 빨리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작업하는 곳은 그나마 수월했다. 그러나 크레인이 닿지 않는 칸이 있다. 엘리베이터로 2층까지 올린 다음 2층에서 3층까지는 계단을 통해 받아치기한다. 2층에 두 명이 계단으로 올리면 계단에 늘어선 세 명 사람들이 위로 전달 전달해서 맨 위 3층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한다. 우즈베키스탄 사람 A는 4-5킬로의 활성탄 자루를 공놀이하듯 한 손으로 빙글 돌려 올렸다. 나는 한 손으로는 들어 올려 전달하기 어려웠다. 두 손으로 받아, 머리 위로 치켜 올려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가슴은 터질 듯 뛰고, 숨은 턱 끝까지 닿았다. 이렇게 1000개를 올리고 나니, 새삼 체력 좋은 유전자를 남겨주신 조상에게 감사할 것 밖에는 없었다.

중국동포 형제 중 동생이 활성탄 박스로 들어가 새 것을 담는 중이었다. 형이 버럭했다. 빨리빨리 하라는 뜻이다. 덥고 먼지 많이 나는데 작업을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거다. 둘이 싸울 듯 했지만 그들은 형제이다. 열받은 동생이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작업했다. 더운 박스 속에서 답답했던 것이다. 나는 아찔했달까, 그가 걱정스러웠다. 활성탄이 호흡기를 통해 폐로 들어가면 인간의 장기는 그것을 해소해 내지 못한다. 그냥 폐에 붙어있게 된다.

그가 진폐증 진단을 받았다 하자.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회사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들, 이를테면 작업자를 채용하고 월급과 보험을 책임지느니, 외주를 줘서 이런 일들을 해치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작업자들이 임시직이었다지 않는가. 도장회사는 도급 주는 것으로 그들의 할 일을 다 한다. 그 와중에 용역 노동자들은 보호받을 길 없는 신세가 된다.

진폐 진단이 날지라도 동생 이 씨는 하소연할 곳이 어디에도 없다. 도장회사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그는 이 회사 직원이 아니요, 가끔(작년에도 한 번 왔었다) 와서 일했을 뿐이다.

회사는 D반장에게 도급을 주었다. 다시 말해서, 문제가 생기면 D반장이 책임지라는 뜻이다.

안전장구도 문제이다. 활성탄 같은 고농도 분진 작업시 특수 방진 마스크는 필수이다. 또한 김서리지 않는 고글을 작업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도급 맞은 반장이 한 번 쓰라고 비싼 장비를 사 줄 리 없다. 아주 형식적인 마스크, 청소할 때나 쓰는 M3를 제공했다.

회사는 큰 돈을 벌면서도 귀찮은 공사에 있어서는 어느 것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직영노동자를 고용한다면 4대 보험, 산업재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작업 시간은 지금 용역 노동자들이 하는 것 보다 두-세 배 늘어날 것이다.

물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방식이 오직 이윤 극대화만 중시해야 하는지, 법인 회사가 하도급 주고 그 비용을 지불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 한 것인지. 용역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을 방치하는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이튿날은 비가 왔다. 나는 활성탄 다시 작업을 하러 가면 쓰려고 보안경을 샀다. 가서, 쓰고 버리는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리라.

활성탄 작업이 끝났다. 다들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을 씻었다. A가 세수한 나를 보고, “예뻐요, 예뻐요”라고 했다. 거울을 보았다. A가 빈 말을 한 것은 아닌 듯하다. 얼굴은 그런대로 탄가루가 씻어졌으나 속눈썹 부위는 탄가루가 붙어있었다. 쌍꺼풀인 늙은 내 눈 주위는 눈 화장한 할머니급 여인의 그것처럼 (예뻐) 보였다.

형제 중 동생이 내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형님, 어려우시죠?” 나는 그의 행동이 순수한 호의임을 알아차렸다. 이해상관 없는 호의는 정신병도 치료하지 않는가. 나는 편히 그에게 어깨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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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배 농장 노동

까대기 이틀하고 무릎과 허리가 몹시 아파, 사흘 쉬었다. 다시 배 농장에 배치받아, 몇 일 간 지베레린 처리 작업을 했다. 배는 구슬만 했다. 배나무와 배를 연결하는 가느다란 꼭지에 지베레린을 발라 주면 배를 추석 때쯤 출하할 수 있다. 지베레린은 성장 촉진제이다. 이것을 칠하고 나서 적과 후 배에 봉지를 씌워주면 배가 크고 껍질은 얇되, 빛깔이 예쁘고 당도도 뛰어나다.

하여튼 좋아 보이는 것은 먹지 않는 것이 좋다. 가난한 밥상이 최고다.

지베레린은 차약과 비슷하게, 튜브에 담겨있다. 이것의 뚜껑을 열고, 그 위에 차솔 두 개를 겹친 것 같은 꼭지를 설치한다. 꼭지에 지베레린을 새어나오도록 한 후, 배 꼭지에 밀어넣으면 목적하는 위치에 약품이 발라진다.

작업은 쉬웠으나 조심할 것이 많았다. 지베레린이 배에 닿으면 배가 썩는다. 닿지 않도록 조심하되, 칠하지 않은 채 지나쳐서도 안 된다. 특히 배 잎사귀에 가려져 있는 것들을 빼 놓기 쉽다. 이것을 조심해야 한다.

여덟 사람이 일하러 갔다. 두 사람은 특별했다. 한 사람은 중국동포 여성으로, 제빵사이다. 다른 한 사람은 함께 까대기 한 회사원이다. 두 사람은 오늘 휴일이라서 일하러 왔다고 했다.

배 농장 부부는 사람들이 좋았다. 이 농장 4천 평, 도합 6개의 배 농장이 있다고 했다.

사진 ?이재원

이튿날에는 배밭 전문 여성 노동자들 11명과 함께 작업했다. 여성노동자 팀장이 우리 용역 노동자들까지 작업 지휘를 했다. 그들은 하루 일당 5만원을 받는다 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을 관찰할 수 없었던 나는 그들의 작업과 정서를 열심히 훔쳐보았다. 웃고 떠드는 와중에 싸움도 잦았다. 특히 ‘억측’을 하는 여성들이 어려웠다. 한 쪽이 길고 반대 쪽이 짧은 배나무 밭 두둑이 있다 하자. 긴 쪽을 맡게 된, 억측을 즐기는 여성 작업자들이, ‘꼭 나에게만 어려운 곳을 주는 군’이라는 식으로 불평했다.

억측하는 사람 자신을 할퀴고 주변 사람까지 해치는 것이라서, 억측을 자주 하는 사람은 친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억측하는 여성 노동자와 맞대기(일찍 자기 두둑을 끝낸 이들이 아직 끝내지 않은 배 두둑의 맞은편으로 가서 작업해오는 것)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고개를 쳐들고 배 씨알을 찾으려니 눈이 무척 아팠다. 일을 끝날 때 쯤 되어서는 고개를 쳐들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배나무 그늘과 그 녹색의 푸르름 때문에 일 년 내내 일하라 해도 일 할 수 있을 듯 기분이 좋았다.

여성 노동자들은 몇 일 후 배 봉지를 씌우는 작업을 시작한다. 아침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약 한 달 간 일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3천개를 싸면 하루 15만 원 정도 번다. 진위를 가릴 수 없으되, 여성 작업자들은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끼려, 그냥 나무 위에서 소변을 본다고 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렇게 돈 벌다가 몸을 망가트린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장마 전까지만 일하고, 7-8월 달에는 어디 틀어 박혀 내 계획에 따라 시간을 쓸 생각이다. 일이 없을 때까지 열심히 일을 따라 다녔다. 술을 안마시니 돈이 그대로 모여 있어 틀어박힐 경비는 충분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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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옘병(화염병) 맞을 놈들

k씨가 얼마 전 교회 장로가 되었다. k씨는 양 어금니가 없다. 식사하는 모양이 자연스럽지 않고 무척 어려워 보인다. 단무지도 씹어 삼키지 못하고 우물거리다가 뱉아 낸다. 그는 집이 근처인데도 중국 동포 형제들과 함께 용역사무실 숙소를 쓴다.

k는 장로되면서 천만 원을 교회에 냈다.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서인가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옘병 받아야 할 목사이군”이라고 중얼거렸다. 용역노동자, 한 푼 안 쓰고 모아야 일 년에 천만 원 저축할까 말까 하다. 점심 식사하는 중에 한 말이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뜩치 않았다.

k씨에게 은근히,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당신 소속 교회 장로는 몇 명인가?

-61명이다.

장로들 직업은 대개 무엇인가?

사장들이다.

장로되려면 교회에 내는 돈이 있는가?

-장로 장립식 행사비는 낸다. 그러나 그 외에 돈을 내는 것은 자유이다.

목사가 당신 직업을 아는가?

-다 안다.

당신이 노가다 하는 것도 아는가?

-물론 안다.

당신 어금니 다구앙도 못 씹는데, 교회 돈 내지 말고 이빨 치료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은가?

-남의 사생활에 대해 왜 그렇게 알려 하는고?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이 많은 푼수라서.

들은 이야기이다. 기지촌 여성들이 미국에 많이 갔다. 그들이 과거를 세탁할 길은 한인 교회 집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먹을 것 안 먹고 집사 되기 위해 헌금했다더라. 헌금 많이 하고 장로인 k는 구원받는 앞자리에 위치할까? 내 눈에는 하느님과 일대 일의 통로를 가진다는 특징을 가진 교회의 목사가 장로 장사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자와, 죄 없는 자가 아니라 죄 있는 자와 함께 있”었다(공지영).

일방적 대학구조조정 폐기와 대학공공성 실현을 위한 교수학술4단체 결의대회[ⓔ시대와철학알림]

일방적 대학구조조정 폐기와 대학공공성 실현을 위한 교수학술4단체 결의대회[ⓔ시대와철학알림]

 

주요 슬로건: 일방적 대학 구조조정 폐기, 대학공공성 실현, 비리사학재단 퇴출, 비정규교수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강의교수제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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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지 및 의의: 사상 처음으로 교수학술4단체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결의대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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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문제에 대한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추진에 대해 내부 결속력을 다지고 향후 더욱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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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6월 14일(금)

장소: 교육부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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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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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공공행동 선포 기자회견

11:30 – 개정 고등교육법 폐기와 대체법안발의 촉구 결의대회(비정규교수노조 주관)

15:00 – 본대회(대학구조조정 폐기와 대학공공성 실현 결의대회(4단체 공동주관)

– 4단체 대표 인사말

– 교육부 장관 면담 요청 및 서한 전달

– 연대사

– 문화공연(외부 초청)

– 연대발언

– 문화공연(내부)

17:00 – 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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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다시 쓴다]-②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다시 쓴다]-②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 것, 다시 말해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고, 없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다시 말해 어떤 방식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늘 이 세상에는 진짜로 있는 것도 없고 진짜로 없는 것도 없다고 주장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시지요?”

“이를테면 나 윤구병은 윤구병으로서는 있는 것이지만 나 밖의 다른 모든 사람으로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윤구병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그물코에 얽혀 있는 관계의 산물이라는 뜻이지요.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간적으로 여기 있는 것은 저기 없는 것이고, 저기 있는 것은 여기 없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고 미래는 아직 없는 것인데 지금 있는 것인 현재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을 형성합니다. 내가 시간과 공간을 비롯해서 여럿과 운동으로 드러나는 삼라만상 모두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여기에 있지요.”

“선생님은 없는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시공간에는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빠진 것이 있다는 말과 같다고도 하셨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없는 것은 빠진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없는 것이 갖는 특성 가운데 두드러진 것 하나가 바로 빠진 것, 결핍이지요.”

“그런데 빠진 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지금 없는 것을 가리키거나 어느 자리에 있는 것이 다른 자리에는 없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은 있을 것이 없다 함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있을 것은 반드시 과거에 있었던 것만을 가리키거나 지금 있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지만 머지않아 있게 될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 여기에도 없고 저기에도 없고 아무 데에서도 눈에 띄지 않지만 거시 세계나 미시 세계의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요.”

“아무튼 빠진 것은 무엇인가가 없음을 가리키는데 그 무엇은 있는 것을 가리킬 터이므로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 꼭 없음, 곧 허무의 실재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좋은 질문입니다. 자, 우리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썼던 낱말들을 다시 한 번 달리 규정하고 들어갑시다. 그 동안 나는 일부러 있음이나 없음 같은 낱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써 왔습니다. 우리 말에서 있음이나 없음을 하나의 개념어로서 쓸 경우에 자연스러운 우리말 질서를 깨뜨리는 흠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사이에 존재나 무(이런 말 내가 무척 싫어하는 까닭은 이미 밝혔지요?)의 여러 층위에 관해서 혼동이 있는 것 같으니, 앞에서 우리가 있는 것 바로 그것이라고 했던 것을 있음으로 고쳐 부르고, 아예 없는 것이라고 불렀던 것을 없음이라고 바꾸기로 하지요. 앞에서 여러 차례 밝혔듯이 있음이나 없음은 우리의 사유 공간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있음이나 없음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있음이나 없음을 두고 우리는 있다,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의 생각 속에 들어 있는 것인데, 생각은 사유의 공간에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이 공간을 벗어나는 것은 도무지 입 밖에 나올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주장대로라면 있는 것 바로 그것이나 있음이나 아예 없는 것이나 없음 같은 말도 존재나 무의 실상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할 수 없겠네요.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고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것을 근거삼아 이런 논의를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말도 맞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있다, 없다는 말을 빼 놓고는 여럿과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현상계를 의식에 제대로 반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뿐만이 아니에요. 있다, 없다는 말은 모든 인류의 사유에 바탕이 되는 기본 언어예요. 에이나이(einai)가 없는 그리스 말, 에세(esse)가 없는 라틴어, 에트르(etre), 비(be), 자인(sein)이 없는 불어, 영어, 독일어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언어학자들에게 우리말 있다, 없다에 해당하는 말을 일상 언어에서 빼놓고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 공동체가 어디 하나라도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내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존재론이 인식론이나 가치론 같은 철학 분야의 기초가 되는 까닭은 바로 있다, 없다는 말, 그리고 그 말이 반영하는 사유 체계의 주춧돌 위에 철학, 과학, 상식…… 이 모든 것의 기둥과 벽과 지붕과 창틀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의식이 어떤 경로를 밟아서 추상의 최고 단계에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이 개념을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가장 자주 쓰는 낱말로 삼았느냐를 밝힐 수 있느냐인데, 나로서는 아직 이 수수께끼를 풀 능력이 없어요.

다만 있다, 없다는 말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기에 앞서 어린 시절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말이고, 이 주어진 말의 통로를 따라 우리의 생각이 흘러가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은 이 말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만 밝히기로 하지요.

어쨌건 있음이나 없음은 우리 생각 속에 들어와 우리 사유의 가장 넓은 테두리를 이룹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은 이 울타리 안에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의 의식 공간에서 있음과 없음이 관계를 맺으면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있음은 여러 하나인 있는 것들로 분산되고 없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는 하되 없다는 규정 아닌 규정을 받아들이는 어떤 것으로 바뀌어 나름으로 있게 되고 있는 것으로서 어떤 힘을 지니게 됩니다.”

“선생님이 우리의 사유 속에 있는 것이든 현실 세계에 있는 것이든 있는 것, 또는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모든 것은 실재하는 것도 실재를 부정하는 것도 아닌 관계의 이름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려는 의도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있는 것,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여러 하나와 운동의 세계가 있음(하나)과 없음의 관계 맺음에서 비롯한다는 것도 받아들인다고 칩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럿과 운동 속에서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상대적 규정일 뿐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없는 것이 있는 것과 다를 바도 없으며,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극단의 가능성까지도 인정할 수 있겠지요. 불교 경전의 하나인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則是空 空則是色)’이라는 말도 그런 뜻을 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관계를 맺어 순간순간 바뀌는 이 연기(緣起)의 세계에서 ‘늘 머무는 것〔常住〕’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덧없이〔無常〕 생겨났다가 없어졌다〔生滅〕 하겠지요.

<반야심경>,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620&docId=556489&mobile&categoryId=1620

그런데 관계라는 이 끝없는 흐름의 어느 측면을 어떤 방식으로 고정시켜서 우리는 있는 것이라 일컫고, 또 어떤 측면을 일컬어 없는 것이라고 부르지요?”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어쩌면 우리는 이 논의를 통해서 의식이 저지르는 잘못 가운데 가장 큰 잘못인 실체화의 오류(이 끔찍한 말을 용서하기를!)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살아 있는 화석(化石) 언어라고 할 수 있는 한어(漢語)를 예로 들어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 갈까 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한어에는 명사가 따로 있고 동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글자가 놓이는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 명사가 되기도 하고 동사가 되기도 하는 일이 아주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글자가 전체 문장의 어디에 자리잡느냐에 따라서 고정된 실체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운동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섣부르다는 욕을 먹을 셈치고 물리학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한 낱말의 위상을 관계 고리의 어느 측면에서 관찰하느냐에 따라 낱말의 입자성과 파동성이 그때 그때 달리 드러나는데, 이것은 관찰자의 위치에 탓이 있는 게 아니라 낱말과 그 낱말이 반영하는 객관 세계의 여러 있는 것 안에 그것들을 고정시키는 공간과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운동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공간도 시간도 관계의 이름입니다. 공간이라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질〔quality〕은 저마다 따로 떨어져서 고정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간 관계 안에서 흩어진 모습으로 드러나는 질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시간이라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는 질들이 서로 엉켜 있습니다. 이를테면 앞에서도 예를 들었듯이 하나의 기타 줄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한데 엉켜서 이어진 음의 계열을 이루는데, 30센티미터의 기타 줄 안에 엉킨 채로 들어 있는 저마다 다른 이 소리들의 무한한 계열을 어떤 무모한 사람이 하나하나 따로 떼어 내어 공간 속에 늘어놓으려고 든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현악기의 줄을 건반 악기의 건반으로 바꾸려고 들 텐데, 이 경우에 30센티미터의 현악기 줄에 담긴 소리를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담는 건반 악기의 건반 수는 무한할 수밖에 없고, 만일에 이 우주 공간이 유한하다면 그 건반 악기는 우주 공간을 다 채우고도 우주 밖에서 무한히 늘어놓이는 건반들을 주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모순되면서도 불가사의해 보이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겠습니까? 현상 세계의 모든 현상들을 공간 속에 좌표화할 수 있다는 사고는 이런 단순한 좌표화의 실험조차도 견딜 수 없는 무지몽매한 단순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로써 밝혀졌을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이 우주가 원자(편의에 따라 이렇게 부릅니다만 물질의 최소 기본 단위라고 불러도 상관이 없겠습니다.)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고대 원자론자들로부터 현대 물리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공유하고 있는 전제를 틀렸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자를 만들고, 그 자로 질과 양을 나누고 재는 일, 공간 축과 시간 축이라는 좌표를 만들어 차원을 설정하고 그 단순화된 차원 속에 삼라만상을 배치하는 일은 삶의 필요에 따라 사람의 의식이 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 텅 빈 공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진공’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든 질이 다 빠진 텅 빈 순수 공간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시간의 흐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이른바 ‘비가역적’이라는 말도 바르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미 개념화한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이 우주는 서로 엉켜 있는 질〔quality〕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말을 더 단순화하면 이 우주(이 말도 개념입니다. 여기에 대응하는 실체는 없습니다.)에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습니다. 이 우주는 일관된 사유의 법칙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진화의 방향을 두뇌 용량을 늘리고 두뇌 회로의 길이를 연장하여 의식이 성장하는 쪽으로 돌려 삶의 길을 찾은 인간의 경우에 떼를 이루어 살아야 한다는 사정도 겹쳐, 말하자면 흐르는 물을 하나하나의 물방울로 고정시키려는 소망이 싹텄습니다. 그 소망의 가장 명료한 표현은 옛 그리스인들의 의식 속에 못박힌 뒤로 지금까지 이 우주를 재는 바뀌지 않는 잣대 노릇을 해 온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또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지 않는 세계에는 참된 변화와 운동은 없습니다. 우주 안에 있는 이러저러한 것들은 바뀔 수 있으나 우주는 바뀌지 않습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이러한 세계관의 반영입니다. 우주는 있는 것을 대표하는 하나, 곧 영원불변한 하나의 단위로 설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큰 단위가 설정되면 그 다음 일은 쉬워집니다. 그 큰 단위를 이루는 하부 단위들을 일정한 체계에 따라 설정하면 되니까요. 그리스 학문의 전통은 이것을 주춧돌로 삼아 세워졌고, 그 전통은 현대 과학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의심할 여지없는 전제 위에 서구 과학도 종교도 서 있습니다. 이 우주는 하나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우주는 그 사람들의 우주고 당신들의 우주입니다. 내 우주에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습니다. 거꾸로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내 우주에는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마찬가지 말입니다.”

김설미향의 두 자화상[보고 듣고 생각하기]

감성적 내일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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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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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본 웹진의 [문화보기] 코너에 성황리에 연재를 한 [나무이야기]와 작가의 블로그http://dandron.blog.me/에 있는?김설미향 작가의 그림에 대한 단상임을 알립니다.

1. 작가의 두 자화상이 있다. 하나는 드로잉 자화상들이다. 다른 하나는 [나무이야기]라는 타이틀의 자화상이다. 나무들을 자화상이라고 [과감히] 말하는 이유는, 작품에는 항상 작가의 의식이 따른다는 예술 일반론에 기대어 하는 말이다.

드로잉화 자화상들은 제목도, 번호도 없다. 이들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일그러지거나 뼈만 남은 듯 볼 품 없다. “음, 그림이 꿈틀거리는군요. 자기 얼굴은 자기가 잘 아는 법, 자화상의 진가를 느끼고 감”이라는, 알쏭달쏭한 덧글을 남기고 가는 이도 있다. 나도 덧글을 따라, ‘그림이 요동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려 애써본다.

그나마 작가의 자화상에 대한 설명에서 작가의 행복하지 않은 심정을 읽을 단초가 있다. 작가는 묻는다. “나의 가족은 무엇”인가? 잠자다가도 작가는 운다. 추측으로만 가능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의미이다. “쓰레게 줍는 노인들에게 슬프고”, 소비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 때문에 슬프다.

또 다른 작가의 자화상, [나무이야기]의 그림들은 드로잉 자화상에 비해 분위기가 다르다. 밝은 채색이 우선 시선을 붙잡는다. 연결되는 짧은 이야기들 덕분에 그림들에 논리적 순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숲 속의 나무가 행복한 봄을 즐긴다. 나무는 아이들(사람들)에게 풍성히 베풀어준다. 그러나 무참히 상처받는다. 상처받고 잠이 든 나무는 동료들의 위로에 따라 다시 깨어난다(다시 생명을 얻는다). 나무는 나비들과 새들을 포함하여 자연과, 사람들과 관계한다. 아마도 자화상은 자연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생명을 나누기를 꿈꾸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 ‘예술은 삶을 짓누르는 형식에다가 인간의 의미를 새겨 넣는다’는 경구가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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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림을 읽기 위하여 니체가 [비극의 탄생] 전반부(1-5절)에서 말하는 예술 일반론을 짧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고전 예술론과 니체에 의하면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그러나 단순한 자연모방이나 사실을 표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로부터 등을 돌려, 사실에 대한 인상이나 착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연의 모방이란 주관인 내가 객관인 자연과 상호 교호작용을 하는 방식이다. 니체는 교호작용의 예를 서정시인의 시작(詩作) 상태를 빌려 설명한다. 서정시인에게 기쁨(해방된 욕구)과 비애(억압된 욕구)의 상태에서 자연에 대해 자신을 주체로 인식한다. 결핍된 욕구인 열망이 해방받기 위해 분출된다(니체 식으로 말하면, 욕망이 주관을 이끌어낸다). 니체를 따라, 쇼펜하우어 식으로 말하면 어떤 욕구가 충족되면 다른 욕구가 다시 생기게 마련이다. 주관의 열망이 분출되면 자연 경관이 다시 우리의 욕구를 순수한, 의식 없는 인식을 갖도록 해 준다. 이렇게 해서 예술가의 창작 상태는 주관적 의지와 반성적 자연 상태를 나누어갖게 된다.

예술가가 이처럼 자연을 모방하게 되는 것은 가상에 대한 필요성 때문이다. 니체는 라파엘로의 그림(천국과 지옥)을 빌려, 예술가가 왜 가상을 필요로 하는지 설명한다. 인간은 그의 토대에서 고통스러운 존재이다(그림 하반부). 그러나 매 순간 가상(상반부)이 만들어내는 욕구 충족경험을 한다. 이렇게 하여, 표현된 것으로부터 새로운 가상인 즉 [가상의 가상] 세계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가상은 이 세계를 [살 만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니체의 유명한, “세계는 예술로서만 정당화된다”는 경구가 완성된다.

예술 일반론에 더하여 리얼리즘 예술론도 잠깐 살펴보자. 까간은 [미학 강의]에서 리얼리즘과 고전 문학의 차이를 명료히 했다. 고전문학에서는 성과 속, 미와 추의 게토가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리얼리즘에서는 이 게토가 무너진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그 내면은 추악하기 짝이 없다. 예술가가 현실의 미, 추를 적나라하게 밝히는 이유 역시 어떤 목적 때문이다. 예술 일반론에서 예술의 목적이 가상에 대한 필요였다면 리얼리즘 예술의 목적은 사회적 치유에 있다. “그대들, 젊은이들을 위해 시인은… 플라터너의 거친 혓바닥으로 폐결핵의 가래침을 낱낱이 핥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해악들을 제거하겠다는 것이 리얼리즘의 진수이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피카소를 어느 화풍이라고 규정하든, 그의 그림 [게르니카]에는 리얼리즘이 숨쉬고 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인간의 잔인성과 야만을 고발하고 있다. 말들이 죽어가고, 인간이 학살당하고 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사진도 있고, 신문 기사도 있다. 그러나 리얼리즘 예술을 리얼리즘 예술답게 하는 이유는 인간의 야만성을 고발하고(이것이 현실이다), 참 인간화된 세계는 이런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웅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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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제 김미향의 그림들을 다시 읽을 수 있다. 또 다른 자화상인 그림에 첨가된, 이해 가능한 절제된 경구들에는 풍성한 의미들이 숨어있다. 인간은 물론 자연과의 교호작용, 형제 관계를 형성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무의 눈을 보자. 그(녀)는 암, 수 구별 이전의 존재로서 나비(이성이 아니다)를 쫒고, 아이들을 쫒고, 죽었다가(잠들었다가) 다시 깨어(살아)난다. 자연이란 원래 ‘생명’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그래서 “시는 나와 같은 바보나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뿐”이라는 외침이 가능할 것이다.

우중충하고 암울한 드로잉 자화상에는 다행스럽게 귀에 헤드폰이 걸려있다. 작가가 위로받을 양식이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자세히 보면 그림은 적적성성(寂寂惺醒)하다.

?고요한 가운데 깨어있음이 분명하다. 눈은 차분하게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잠들어 있지도, 요동치지도 않는다. 다시 들여다 보면, 눈은 아마도 맑은 갈색이리라 짐작하게 된다. 어쨌든 눈은 맑다. 응시하는 시선이란 반성적 시선이요 현실에서 일어나는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시선이다.

작가는 오늘날 가족일반에 대해 반성한다. 가족 일반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현실을 사실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박범신은 이득과 희생을 강요하는 오늘 가족의 세태를 그리지 않았던가. 어느 여성은 옷 장사하는 시누이가 제사 때마다 짝퉁을 들고 와 강매하는 통에 죽을 지경이라는 하소연을 했다. 가족 관계에서조차 장사꾼의 이득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이라면 그런 장사꾼을 믿느니 차라리 창녀를 믿으라는 마크 트웨인의 경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족을 이처럼 갈기갈기 찢어놓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공평하지 못한 사회적 분배에 기인한다는 것을 누가 모르랴.

가족이란 내게 무엇인가? 소통하는 존재인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필자는 [비가 오면 우산이 되어주]는, [그림 6]에 기대어 작가의 의도를 과감하게 추측해 본다. “오늘은 내게 기대세요, 내일은 내가 당신에게 기댈께요.” 그림책의 나무들은 작가가 현실에서 살아가는 소명(Gerufe)을 보여주는 듯하다. “좋은 예술가가 되어 타인들(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 그녀의 바램이다. 나에게 와서 쉬라. 오늘 가족 일반에게 이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가족 공동체이다. 그게 아니라면 가족은 또 다른 지옥이다(홍 선생님 어록). 가족은 작은 사회이다. 가족이 이득관계로 지옥이듯이 사회 역시 이득관계로 지옥이라면, 이런 사회와 가족은 지양되어야 한다. 이 예술가의 의도이다.

드로잉 자화상에 이어지는 글 속의, 작가가 행복할 수 없는 요소들에 대해 반드시 짚어야 한다. 폐지줍는 노인과 몸 파는 여성들 때문에 고통받는 작가는 ‘창밖에 떨고 있는 저 개 한 마리 대문에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딘 것이 오늘 사회 현상임을 작가는 고발한다. 삶의 의미를 묻는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더 나은 사회는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는 사회여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사회이어야 한다.

작가가 인간으로 많은 약점을 지녔다하자(자화상에서 보듯, 수려하지 않은 외모이든, 시에서 보듯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든). 시인의 의도는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러나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 많은 장점을 지녔기에 그녀는 참 좋은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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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라 생각하고 가벼이 읽다가(보다가), 몸 어느 부위를 때리는 충격을 받는 것은 뎅커(Denker)로서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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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일!! 다시 읽는 현대 철학사 시즌3 : 정신분석학의 철학이 시작합니다[ⓔ시대와철학알림]

프로이트에서 들뢰즈까지 : 다시 읽는 현대 철학사 시즌3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함께하는 철학사 강의 그 세번째 강좌가 시작합니다.
2013년 6월 13일 부터 – 8월 22일 까지 매주 목요일 7시 30분-9시 30분 총 10강으로 진행되는 강의에 많은 신청 부탁드립니다.

<다시 읽는 현대 철학사 시즌3>: 정신분석학의 철학

-멘토와 힐링이 키워드가 된 시대, 정신분석학을 철학적으로 공부하기

정신분석학은 임상 치료에서 시작하여 임상 이론을 거쳐 거대한 사상적 흐름을 바꾸는 철학이 된다. 더 나아가 정신분석학은 일상생활의 필수어가 되고 문화와 정치를 설명하는 이론이 된다.

이러한 정신분석학의 영향력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에 비견된다. 이러한 지위에 오르기까지 여러 천재적인 인물들의 고뇌와 노력이 필요했다.

우선 과학적으로 고전주의적인 경향으로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적인 정신분석학을 창안한 프로이트는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파문당하지만 오히려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와 탈구조조의라는 새로운 철학적 흐름의 원류로 전환한 라캉도 있다. 이러한 라캉을 문화 비평과 정치 비판에 적용하여 세계 철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지젝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이와는 다르게 욕망의 해방을 꿈꾸는 낭만주의적 흐름이 있다. 프로이트의 총망하던 제자에서 이론적인 적대자가 된 융은 리비도를 성적인 차원에서 해방하여 신화와 동양철학복권하는 뉴에이지 철학의 기초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신비주의인 관점과는 달리 사회해방이론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의 가능성을 보여준 라이히가 있다. 이에 영향을 받아 마르쿠제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를 결합해서 욕망의 해방으로 상징되는 혁명적인 정치학을 제시한다. 게다가 단순히 프로이트나 라캉의 정신분석의 오이디푸스적인 가족 관계의 협소함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욕망의 해방 이론을 제시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분열분석이 있다.

마지막으로 기존 철학계의 남성중심성에 문제제기를 하는 여성주의적인 정신분석학의 흐름이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시적 언어의 해명을 통해, 주디스 버틀러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에 내재한 이성애중심주의와 남근중심주의를 비판하며 여성주의적 탈구조주의적 형성에 기여한다.

일시: 2013년 6월 13일 – 8월 22일 매주 목요일 7시 30분-9시 30분(총 10강)

장소: 프레시안 건물 1층 강연장 (마포구 서교동 395-73 bk빌딩)

주최: 프레시안 신문사,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도서출판 오월의 봄

강사: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교수진

수강료 -전체수강 : 25만원

-두 사람이 함께 신청할 경우 2명 35만원할인된 금액으로 신청 가능합니다.

-개별 강의 수강 : 강의당 3만원

신청 안내

무통장 입금 후 메일(admin@pressian.com)로 성함과 연락처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국민은행, 292501-01-121940 예금주:(주)프레시안]

강의문의: 02-722-8546(담당자 민정훈)

강좌 안내

1강 프로이트 1 – 무의식에 이르는 길 : 꿈, 히스테리, 성욕 ?연효숙 교수(6월 13일)

2강 프로이트 2 – 쾌락원칙을 넘어서 : 충동, 신경증, 초자아-연효숙 교수(6월 20일)

3강 라캉-프로이트로의 귀환-김성우 교수(6월 27일)

4강 지젝-욕망과 의지가 아닌 충동의 주체-김성우 교수(7월4일)

5강 융-무의식의 중층 구조, 집단적 무의식으로 이행?이정은 교수(7월 11일)

6강 라이히-해방! 사회적 소외에서 오르고노미로-이정은 교수(7월 18일)

7강 마르쿠제-일차원적 사회의 감옥을 부수는 에로스의 힘-박민미 교수(7월 25일)

8강 들뢰즈/가타리-정신분석에서 분열분석으로-신승철 교수(8월 1일)

9강 줄리아 크리스테바-아버지 법을 전복하는 어머니의 몸과 시적 언어-서영화 교수(8월 8일)

10강 주디스 버틀러-남근 중심적인 이성애 질서로서의 정신분석학 비판-윤지영 교수(8월 22일)

강좌 소개

<1강과 2강> 프로이트-연효숙(연세대 외래교수)

프로이트 1 : 무의식에 이르는 길 : 꿈, 히스테리, 성욕
프로이트 2 : 쾌락원칙을 넘어서 : 충동, 신경증, 초자아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그는 20세기에 무의식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금 21세기에도 무의식을 언급하지 않고 어떻게 현대적인 사상과 문화, 예술 심지어 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프로이트는 평생동안 자신의 진료실에서 새로운 사유의 혁명을 준비했다. 프로이트는 강단 철학의 영역에서 무시되었던 꿈의 의미를 해석하였으며, 히스테리 환자들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이 성욕에 집중되어 있음을 간파하였다. 후기에 프로이트는 인간 본성을 지배하는 쾌락원칙 너머의 죽음 충동을 역설함으로써 또다른 인간의 면모를 밝히고자 하였다. 충동이 억압되는 문명의 생활에서 누구나 다 조금씩은 신경증 환자가 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도 역설하였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간에 이후 수많은 현대 철학자들은 그의 문제 의식에 빚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3강> 라캉-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프로이트로의 귀환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알랭 바디우는 라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반(反)철학자인 라캉이야말로 철학의 르네상스를 위한 조건이다. 오늘날 철학은 라캉과 양립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실로 라캉은 1950년대부터 30년 동안 그 유명한 세미나를 통해 파리 지성계의 흐름을 주도하며 많은 후속 철학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다. 물론 정신분석학자인 그가 표방한 것은 “프로이트로의 귀환”이다. 하지만 그는 정신분석학을 임상의 공간이 아닌 철학의 차원으로 발전시킨다. 그의 정신분석학적으로 다듬어진 철학적 문제의식과 개념들은 문학과 영화 등 문화 비평에 두루 영향을 미치게 된다.

라캉의 사상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1950년대의 구조주의자로서의 초기 라캉과 1970년대 이후의 탈구조주의자로서의 후기 라캉이 그것이다. 정신분석학에 입문하면서 맨처음에 관심을 쏟은 상상계에서 벗어나 상징계에 초점을 맞춘 구조주의자로서의 라캉은 파리 지성계와 더 나가 세계 철학계의 새로운 철학적인 조류인 구조주의의 확산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초기 라캉에게 정신분석적인 치료의 성공은 무의식적인 증상(코드화된 메시지)을 통해서 말하는 ‘나, 즉 진실’에 귀를 기울이는 ‘상징적인 깨달음‘의 해방력에 의존한다. 그러나 라캉의 후기 단계에 이르면 그도 한때 믿었던 무의식적인 욕망이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힘이라는 생각을 버린다. 법을 위반하는 행위도 여전히 법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의 금지에 의해 욕망은 생겨난다. 그래서 욕망은 큰 타자에 등록되어 있다면 주체는 이와는 다르게 큰 타자 바깥에 이것과는 독립적으로 실존한다. 주체는 그것(이드), 즉 충동의 자리이다. 이렇게 라캉의 사상적 궤적은 다시 상징계로부터 리얼로의 옮겨가는 여정을 그린다.

<4강> 지젝-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욕망도 아니고 의지도 아닌 충동이 근대적 주체성의 핵심이다.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적인 개념을 가지고 독일 관념론을 해석하며, 독일 관념론의 변증법을 활용해서 정신분석학을 철학적 지반 위에 올려놓는다. 그는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을 가지고 영화와 문화, 정치와 조크의 사례 분석을 다양하고 날카롭게 시도하여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공감대와 호소력을 획득한다. 그는 상징계 중심의 구조조의적인 초기의 라캉보다는 리얼을 강조하는 후기의 라캉을 소개하고 문화 비평과 정치 분석에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지젝이 해체론으로부터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독일관념론으로 복귀한 이유는 데카르트가 발견한 주체성이라는 지반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는 포스트모던 철학의 주체 해체를 비판하고 근대 주체의 복권을 추진한다. 근대 주체의 복권이 그의 철학의 세 중심축(라캉의 정신분석학, 독일관념론의 변증법, 이데올로기 비판)을 하나로 엮는 핵심적인 주제이다. 그런데 지젝에 의하면 과학적 자연주의(뇌과학, 진화론 등)와 담론적 역사주의(해체주의)이라는 민주적 유물론과 이에 대한 영적인 반작용으로 일어난 뉴에이지 서구 불교와 선험적 유한성의 사유(하이데거)라는 네 가지 현대 철학적 경향들이 각기 주체 해체를 시도한다. 이러한 현대 철학의 주체 해체 경향에 맞서 지젝은 라캉의 무의식의 주체를 충동의 주체로서 포괄적으로 정교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초기 라캉에서 후기 라캉으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것이 욕망의 주체로부터 충동의 주체로의 강조점의 이동이다.

<5강> 카를 융-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무의식의 중층 구조, 집단적 무의식으로 이행

무의식을 언급하면 정신분석학, 프로이드, 리비도를 연상한다. 그러나 무의식을 리비도에 한정하면 인간 이해가 편협해지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할 법도 하다. 프로이드 제자들 중 그런 길을 걷는 사람은 정신분석학회에서 제명되거나 탈퇴당하는 강권 속에서 활동한다. 칼 융은 자신 스스로가 정신병 환자였으며, 의사로서 오랜 임상실험을 거치면서 무의식 층위를 확장하고 다층화한다. 무의식은 리비도로 한정되지 않는 인격성과 전체성을 지니며, 자아의 저편에 놓여 있는 참된 자기의 근간이다. 참된 자기에는 개인적 의식 이외에 태고 적부터 누적되어 온 원형적 의식, 집단적 무의식이 있으며, 이것이 개인들의 차이와 공통성을 설명하는 기반이다. 집단적 무의식을 통해 남성 안에서 여성성과 여성 안에서 남성성이라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측면, 신과 만나는 지점들을 프로이드와 다르게 전개해 나간다.

<6강> 빌헬름 라이히-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해방! 사회적 소외에서 오르고노미로

일찍이 프로이드 수제자이면서 애제자로 출발하지만, 프로이드 이론에서는 성해방이 개인문제로 환원되고 어릴 적에 성심리가 결정되면 변화 가능성이 낮다고 보기 때문에, 라이히는 프로이드에게 반기를 든다. 라이히는 무의식을 사회와의 연관성에 더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려고 한다. 성해방과 사회해방이 연관되어 있고, 사회해방은 성해방과 연관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운동에도 참여한다. 이를 통해 파시즘 같은 독재정치의 발현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곧 정신분석학에서 일탈하여 불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호탄이 된다. 프로이드학회에서도 마르크스주의자에게서도 모두 버림받은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새롭게 오르곤 에너지 이론을 만들게 된다. 인간의 성과 인격체는 인간을 감싸고 있는 생명 에너지의 작용이며, 그 에너지는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 에너지이기도 하다. 오르곤 에너지라는 생명 에너지를 통해 인간과 우주의 상호 작용을 설명하려고 하나,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7강> 마르쿠제-박민미(동국대 외래교수)

일차원적 사회의 감옥 부수는 에로스의 힘

마르쿠제는 프로이트를 위해 프로이트를 비판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맑스를 위해 프로이트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프로이트 이론에서 문명은 필연적으로 억압 위에서만 가능하다면, 맑스가 꿈꾼 사회는 풍요로운 문명을 전제로 하기에, 마르쿠제는 비억압적이면서 해방된 문명 사회의 가능성을 프로이트의 ‘에로스’ 개념에서 길어낸다. 마르쿠제는 자신이 목도한 서구 문명을 ‘일차원적 사회’라고 진단한다. 다양한 가치 판단을 허용하는 이차원적 사회와 달리, 전사회에 물질적 부를 숭배하는 획일적 가치가 판침으로써 그 이외의 가치를 도외시하는 일차원적 사회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탄식한다.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써 ‘상상력’의 활성화를 이야기한다. 삶 본능, 즉 에로스의 해방이, 그리고 상상력의 해방이 유토피아를 현실화할 것이라는 그의 외침이 귀에 쟁쟁하다.

<8강> 들뢰즈/가타리 ?신승철(동국대 외래교수)

정신분석에서 분열분석으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만남을 혹자는 번개피뢰침으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스스로는 여럿, 다양, 복수가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두 사람은 자본주의가 욕망을 생산하면서도 억제하는 이중구속의 모습을 보이는데 착안하여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이라는 부제를 단 『앙띠 외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욕망의 생산이라는 측면에 ‘욕망하는 기계‘를, 욕망의 억제라는 측면에 ‘기관 없는 신체’를 배치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스피노자와 라이히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프로이트-라캉 계열의 ‘정신분석’을 넘어선 ‘분열분석’으로 향한다. 분열분석은 정신분석의 전이(=동일시), 가족주의,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서 횡단성, 사회-역사적 무의식, 변용의 흐름의 입장에 서 있다. 이 두 사람은 정신분열증과 같은 ‘협착분열’을 넘어서, 대안적인 관계망과 주체성을 생산하는 ‘분열생성’이라는 입장에 서서 소수자운동과 대안운동의 모습을 그려냈다. 두 사람의 만남이 만든 색다른 무의식의 지도그리기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9강> 줄리아 크리스테바 ?서영화(한신대 외래교수)

아버지 법을 전복하는 어머니의 몸과 시적언어

근래 한국 사회의 진보 진영이 겪어내야 했던 일련의 사건들은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저항하기 위한 운동이 언제든지 또 하나의 보수적인 시스템의 일부로 전락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주체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크리스테바의 명제는 여전히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유효하다. 크리스테바는 상징계적 담론 질서와 그에 기반한 시스템의 전복과 파열의 가능성을 주체가 말하는 방식, 즉 시적 언어로부터 해명한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시적 언어가 상징계적 담론 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근원은 아이가 갖는 어머니 몸과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어머니 몸이 시적 언어의 의미 생산의 근거라는 크리스테바의 논의는 지속적으로 생물학적(자연주의적) 결정론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또한 어머니의 금기와 거부에 기반하여 시적 언어의 혁명성을 해명하는 논의는 상징적 질서를 반복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본 강의는 시적 언어와 몸, 그것도 어머니의 몸을 키워드로 크리스테바의 이론을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라캉과 버틀러의 논의를 참조함으로써,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시적 언어의 전복 가능성을 해명하는 크리스테바 이론의 고유한 힘과 그에 따를 수 있는 이론적 난점을 생각해 볼 것이다.

<10강> 주디스 버틀러-윤지영(가톨릭대 외래교수)

남근 중심적 이성애 질서로서의 정신분석학 비판

버틀러는 퀴어 이론의 대가이며 푸코, 데리다, 들뢰즈, 라캉이라는 프랑스 현대 철학의 지류에 영향을 받은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이다. 버틀러는 라캉의 성차 개념이 실재에 속한다는 것을 강력히 논박하며 성차란 상징계라는 아버지의 법질서에 속하는 것이며 이는 친족 구조의 변화와 함께 변혁 가능한 것이라 본다. 이로써 신성화되고 초월적 구조로 탈역사화된 상징계의 전환 가능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나아가 버틀러는 라캉의 남근 중심적 상징계뿐만 아니라 크리스테바의 모성적 공간인 기호계 역시 강력히 비판한다. 해체주의자인 버틀러에게 있어 크리스테바가 설정한 기호계역시 부권적 개편 방식의 일부로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신분석학 내에 내재한 이성애중심주의와 남근중심주의를 분쇄하는 흥미진진함을 펼쳐 보인다.

원문기사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98130527150714

 

 

자화상[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자화상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삶의 노래에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한다
?
나의 존재의 이유를 찾아 떠나는
끊임없는 약속과도 같은 물음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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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시월의 달을 짖고
봄의 휘날리는 구름섬과 같은
바람의 향기에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붉게 물든 어린 복숭아 향기를 기억하듯
나는 그렇게?짖는다
?
해가 뜨고 아주 가끔 바람이 내게로 와
비오는 산막골을 되찾듯 어린잎에 피어오르는 빗줄기에
작은 풀은?쓸쓸함에 기억을 도둑 맡고 있다
?
돌다리에 던지는 마음이 풍덩
어린아이는 밤하늘 반짝반짝 커다란 우주를
물빛에 차갑게 담는다
?
내 삶의 영혼 그 흔적의 자리 그림자는
자체의 흔들림을 가지고
밝음도 그 어둠도 가지지 않은 체를 건져 올린다.
?
그저 그 자리에 그 것일 뿐이다.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