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대학강좌] 공자의 『논어』와 일상

공자의 『논어』와 일상

 

김정철(한국학중앙연구원)

 

1. 일상 언저리의 사상, 유학

한 번이라도 『논어論語』를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합니다. 경전이라고 알고 읽었는데, 별로 경전답지 못하다는 반응도 있고, 주로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다면서 시시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논어』는 왜 경전이 되었을까요? 바로 유학에서 성인(聖人)으로 높이는 공자의 행동과 가르침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선비들은 『논어』를 읽으면서 성인의 가르침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논어』에서는 공자가 제자들과 예禮, 정치, 경제부터 음악과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해 묻고 답하고 있습니다. ‘논어論語’라는 제목 자체가 묻고 답하는 형식의 어록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간단히 공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공자는 약 기원전 6세기 춘추시대 말기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거의 2500년 전에 살았던 셈이지요. 노魯나라 곡부 창평향昌平鄕 추읍鄹邑에서 태어난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 위나라 등을 떠돌다가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아버지 숙량흘은 지역의 낮은 관리였고, 어머니 안顔씨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고 전해집니다. 좋은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란 사람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공자는 키가 9척 장신에 머리모양이 울퉁불퉁했다고 합니다. 공자의 이름이 구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자는 중니仲尼로 그가 둘째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는 재정을 담당하는 벼슬(委吏) 등을 지내기도 했지만 공자는 무엇보다 배우고 익혀서 다양한 제자들을 길러내는 역할에 충실했던 좋은 선생님이었습니다. 논어의 처음도 배움에 대한 예찬으로 시작됩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또 공자는 스스로 자신의 일생을 몇 마디 말로 요약하기도 합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學問)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스스로 섰고(自立), 마흔 살에 의혹(疑惑)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天命)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고, 일흔 살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法度)를 넘지 않았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

이 부분은 얼핏 나이가 듦에 따른 깨달음의 과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성인으로 불리었던 사람이었지요. 아마 누구나 이렇게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지요. 이미 성인의 경지에 있었던 공자가 굳이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이야기한 이유는 제자들에게 나아갈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일상과 일생에 비추어 생각해봐도 이 구절은 쉽게 지나칠 부분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목표를 정하고 꿋꿋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며 살고 있는지 반성해 볼 기회를 주고 있지요. 천명을 안다는 말이나 귀가 순해진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에는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능력은 아닙니다.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각각의 성격과 상황에 맞는 가르침을 주었던 이유는 일상 속에서의 배움과 노력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2.  <논어>속의 일상 직접 읽어보기

– 도道는 일상 속에 있다.

중궁이 인仁에 대해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집 문을 나가서는 큰 손님을 대하듯 하고,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하고,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야 한다. 나라에 있어서도 원망이 없고 집에 있어서도 원망이 없어야 한다.” 중궁이 대답하였다. “제가 비록 명민하지 못하지만, 이 말씀을 실천해보겠습니다.”

仲弓問仁, 子曰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 仲弓曰雍雖不敏, 請事斯語矣.

인仁은 공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인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잘 모르겠다는 말도 하지요. 대신 구체적인 예를 통해 인이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바로 위 인용문이 대표적입니다. 집 문을 나서고, 백성을 다스리며,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은 모두 선비의 일상에 해당합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집 밖으로 나가 각자 일을 하고, 사람들과 만나 어울리는 일이 모두 일상에 해당하겠지요. 공자는 이러한 일상 곳곳에서 인仁을 실천하라고 가르칩니다.

큰 손님 대하듯이 한다는 말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함을 나타내고, 제사를 받드는 태도는 엄숙하고 신중해야 하죠.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은 논어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입니다. 역지사지의 태도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일상의 모든 공간이 인仁의 실천 무대인 셈이지요. 공자는 인仁의 경지를 특별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도 계승됩니다. 하지만 제자들 사이에도 생각의 차이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차이는 다음 인용문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자유가 말하였다. “자하의 문인 젊은이들은 물 뿌리고 쓸며 대답하고 답변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을 담당하면 잘 한다. 그러나 지엽枝葉(사소한 일)이니, 근본을 보면 볼만한 것이 없다. 어찌할꼬?”

子游曰, 子夏之門人小子, 當灑掃應對進退, 則可矣. 抑末也, 本之則無, 如之何?

자하가 이를 듣고 말하기를, “아, 자유가 지나치구나! 군자의 도가 무엇을 우선하여 전할 것이며, 무엇을 나중으로 미루어 게을리 하겠는가? 초목에 비유하면, 구획을 그어 구별하는 것과 같으니, 군자의 도가 어찌 속임이 있겠는가? 처음도 있고 끝도 있는 사람은 아마 성인이시겠지.”

子夏聞之曰, 噫. 言游過矣. 君子之道, 孰先傳焉, 孰後倦焉? 譬諸草木區以別矣, 君子之道焉可誣也? 有始有卒者, 其惟聖人乎.

‘물 뿌리고 쓸며 대답하고 답변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은 유학자들의 매우 기초적인 행동수칙입니다. 주로 처음 학문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교육하는 내용이었지요. 자하는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을 실천을 강조했지만, 자유는 자하의 제자들이 시시하고 사소한 일에 얽매여 근본에 다가서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학에서는 일상의 사소한 일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자하는 자유의 지적을 정면으로 받아칩니다. 일상의 사소한 일과 근본(道/仁)의 체현은 선후를 나눌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런 공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길을 넓히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子曰, 人能弘道, 非道弘人.

도(道)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일상과는 거리가 먼 근본적인 원리 혹은 진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도의 실천은 오직 사람을 포함한 사물들을 통해야만 가능합니다. 공자의 말은 바로 실천의 주체인 사람을 강조한 것이죠. 일상의 실천을 벗어나지 않는 공자의 가르침은 유학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중국의 풍우란(풍우란)이라는 학자는 다음과 같은 『중용』의 구절을 인용하여 유학의 핵심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군자(君子)는 덕성(德性)을 높이고 학문(學問)으로 말미암으니, 광대(廣大)함을 지극히 하고 정미(精微)함을 다하며, 고명(高明)을 다하고 중용(中庸)을 따르며, 옛 것을 잊지 않고 새로운 것을 알며, 후(厚)함을 돈독히 하고 예(禮)를 높이는 것이다.

君子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 敦厚以崇禮.

이 문장에는 일종의 대구가 있습니다. ①덕성(德性)을 높이고 학문(學問)으로 말미암으니, ②광대(廣大)함을 지극히 하고 정미(精微)함을 다하며, ③고명(高明)을 다하고 중용(中庸)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덕성은 하늘이 부여해준 선한 본성을 뜻합니다. 학문은 배우고 익히는 학습의 과정이지요. 유학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②와 ③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무엇이 광대하고 정미하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길(道)을 뜻합니다. 이 길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야할 길이고, 끝없이 펼쳐져 있기에 광대합니다. 하지만 직접 이 길을 걷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한발씩 내딛는 순간순간의 노력이 필요하겠죠. 이것을 정미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③도 비슷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풍우란은 불교, 도교와 비교하면서 일상을 떠나지 않으면서 근본적인 원리(道)를 추구하는 것이 유학의 특징이라고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유학은 일상의 철학이며 사상인 셈입니다.

 

 

제9장 잉여가치율[자본론강독]-19

제9장 잉여가치율[자본론강독]-19

정리 : 신준하

제3절 시니어의 ‘최후의 한 시간’

 

◯ 시니어의 주장 – 노동시간 단축 투쟁에 대한 반대 논리 개발이 목적

1일 노동시간= 11시간=시간

시간 : 단순히 자본을 보존, 시간 : 공장과 기계설비 마멸분 보상

시간 : 순이윤 생산, 마지막 1시간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비로소 이윤이 생산된다.

따라서 작업시간을 시간 늘리면 순이윤은 2배이상 늘어나고, 작업시간을 1시간만큼 줄이면 총이윤이 사라져버린다.

전체 노동시간

단순 자본(공장, 기계 등) 보존시간 순이윤 생산시간

 

노동시간을 늘려 순이윤 생산시간을 늘리면 이익이 늘어나고,

노동시간을 줄여 순이윤 생산시간이 줄어들면 이익이 없어진다.

◯ 마르크스의 반론

1)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고정자본 투입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재생산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 에 손해 보는 만큼 이익이다.

2) 노동자는 전체 노동시간을 통해 가치를 생산한다.

∵잉여가치율이 100%라면, 5시간동안 임금생산, 5시간동안 이윤 생산,

(5시간은 11시간의 절반), 시니어에 의하면 2시간동안 임금과 순이윤 생산,

그러나 1시간 만에 5시간 만큼의 임금 및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는 없다.

즉, 단순한 자본의 재생산 시간도 결코 낭비가 아니다. 노동이 아니면 면화는 면사로 전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보는 현상은 마지막 2시간에 임금과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지만, 본질은 11시간 전체가 마지막 2시간에 체현되어 있을 뿐이다.

3) 노동시간이 증가하면 증가한 만큼 이윤율이 배로 증가하지는 않는다.

11시간에서 13시간으로 증가, 증가분 1시간이 모두 잉여노동에 합쳐진다고 해도(모두 합쳐질 수는 없다, 늘어난 노동시간만큼 고정자본도 소모되므로) 잉여가치율이 100%에서 200%로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126%로 늘어날 뿐

4) 노동시간이 줄어든다고 해서 총이윤이 사라지진 않는다. – 3)의 경우와 같음

 

제4절 잉여생산물

잉여생산물 : 생산물 중 잉여가치를 대표하는 부분

잉여가치율≠잉여생산물/총생산물, 잉여가치/자본총액 , = 잉여가치/가변자본

잉여생산물의 상대적 크기 ≠ 잉여생산물/총생산물 , = 잉여생산물/필요노동을 표시하는 생산물

자본주의의 목적은 잉여가치의 생산, 따라서 부의 크기는 총생산물이 아니라 잉여생산물의 상대적 크기에 의해 측정되어야만 한다.

[서평] 한국현대철학과 자유의 씨앗

한국현대철학과 자유의 씨앗

 

 

최종덕(상지대, 철학)

이규성-한철연 1

1. 한국학이 존재하는가?

유럽이나 미국에는 중국학과 일본학이라는 학문체계가 존재한다. 단순한 지역학의 범주를 넘어서 사상사까지 닿아있다. 중국학은 선진유가부터 마오쩌둥에 이르는 광범위한 연구로 진행되고 있다. 일본학은 근현대 지식과 예술 범주에서 많이 다뤄지고 있는데, 서구 학자들에게 의외로 상당한 지적 호기심을 낳게 한다. 그런데 필자는 중국학이나 일본학과 같은 지식체계에 대해 비판적이다. 지식은 보편적이어서 지식의 지역성은 그 스스로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독일 관념론은 있어도 독일학이란 있을 수 없고, 독일 지식인조차도 그럴 필요를 갖지 못한다. 르네상스 사상사는 있어도 그것이 유럽학의 범주 안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1970년대부터 수많은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학과 일본학의 현실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중국학과 일본학이 정작 중국과 일본 안에는 없다는 사실만을 봐서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중국학이나 일본학은 유럽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지역 연구기관에서도 많이 연구되고 있다.  쉽게 추정할 수 있듯이 중국이나 일본은 정치경제학적 이유 때문에 그들의 외국 소재 중국학이나 일본학 연구기관에 상당한 재정지원을 해오고 있다. 한국도 외국의 한국학 연구에 지원을 많이 늘리고 있다. 한국학 연구지원을 늘리고 있지만, 연구지원의 내용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한국학이 아니라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수준이다. 유럽 혹은 미국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한국어 교실이나 한국문화 교과목이 개설된 경우는 있으나, 정작 한국학은 없다. 한국학의 범주로서 조선 성리학이 연구되는 사례는 있지만 그것도 동아시아학 연구에 포섭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학이 없는 이유가 한국정부 차원의 국제적 지원이 미흡해서인가? 아니, 그 이유보다 한국학의 실질적인 내용이 미흡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한국학이 중국학과 다른 내용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검토해야 한다. 한국학이라고 해서 기존의 중국학이나 일본학의 내용과 다를 것이 없다면 한국학의 주체적 확립이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 학자가 보기에, 그들은 한국학의 첫 페이지를 시작하는 단군 사상을 전통적인 동아시아 신화와 같은 원류의 하나일 뿐이며, 고려시대까지의 불교문화를 중국불교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 성리학은 주자학 이상의 대단한 논쟁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일제 강점기 학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해석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왜곡된 채로 서구학자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2. 주제의 특수성과 관점의 보편성

한국학이 성립하려면 두 가지 통로의 조건, 즉 i)주제의 특수성과 ii)관점의 보편성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통로로서 한국학의 주제는 특수한 내용이어야 한다. 한국학은 한반도에서 발현한 고민과 아픔을 담아낸 성찰과 비판의 관점을 요구한다. 그리고 중국학이나 일본학과 다르게 한국학이 가질 수 있는 차이의 차이를 드러내야 한다. 둘째 통로로서 한국의 주제를 해명하는 관점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한국학이 성립하려면 한국학이 지역학에서 벗어나 보편학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불교의 최고 전문가가 독일이나 일본의 학자에서 나올 수 있듯이, 노장자 철학의 최고 전문가가 중국이 아닌 한국 학자에서 나올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한국학은 지식의 보편의식을 필요로 한다. 보편성의 지식체계는 반드시 특수성의 차이를 바탕으로 하며, 그 위에서 비로소 종합이 가능해진다. 즉 개별의 차이가 있어야 개별간의 종합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차이가 없는 개체들 사이의 종합은 일방적 종속에 지나지 않으며, 차이를 무시한 개별자간의 종합은 결국 획일적이거나 교리적인 도그마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학 성립에 필요한 성찰과 비판은 반동적 성향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한국 지식계는 매우 특이적 상황에 직면하는데, 전통에 대한 반동과 일제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뜻이다. 세기말 한국 지식계의 반동성은 한국학 성립의 첫째 통로를 열어준다. 불행하게도 i)일제 강점과 ii)그에 이어진 분단 그리고 iii)연이어 우리 시회를 짓눌러온 독재권력은 지식의 보편화로 가는 통로를 막았으며, 문화의 연속성을 단절시켰다.

사상사의 단절과 정지는 한국철학사를 쓰는 데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1970년대 이후 출간된 많은 한국철학사 류는 단군에서 시작하여 성리학을 거쳐 실학과 동학을 기술하면서 끝나버린다. 다행히 한국학 정립의 기초적인 통로를 보여준 책 두 권이 최근 들어 연이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동학 이후에서 해방 이전까지 단절된 철학의 시공간을 채움으로써 한국철학의 완성본을 처음으로 제시한 책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권의 현대한국철학은 한국학 성립의 기본요건인 주제의 특수성과 관점의 보편성의 조건을 충족시킨 최초의 책이다.

그 두 권의 책은 이규성 선생의 <한국현대철학사론>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지은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이다.

‘최초’라는 말을 독자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리고 되풀이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이 두 권은 정말 i)처음으로 한국현대철학을 정리한 책이며, ii)처음으로 주제의 특수성과 관점의 보편성을 결합시킨 책이며, iii)처음으로 <한국학> 정초를 위한 사상사적 내용을 완성시킨 책이다. 한국철학이 한국학의 전부일 수 없지만 사상사적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현대한국철학의 정립은 한국학 성립의 필요조건이다.

 

3. 자유를 해명한 이규성의 책

이규성의 <한국현대철학사론>은 자유의 개념을 한국학에 접목시킨 최초의 업적을 낳았다. 세기말 조선 지식인 몇몇으로부터 개인의 자유 개념이 싹텄다. 군주의 천명으로 사회를 해석하는 기존의 유학과 달리 개인의 자유를 통해서 비로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희망을 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평등한 삶에 대한 민중의 희망을 대변하는 지식체계가 등장했다. 그것은 동학과 대종교 그리고 민중화된 양명학이었다. 불행히도 이렇게 힘들게 성취된 자유의 싹은 일제 강점에 부딪혀 꽃은커녕 잎도 피우질 못했다. 이런 한국 지성사를 저자 이규성은 ‘세계상실’이라고 표현했다. 이규성의 책은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자유와 상실의 혼란은 한국현대철학의 질곡을 보여주는 한마디의 통성이었다. 자유와 상실을 여실히 보여주기 위하여 저자 이규성은 세기말 지식인의 자료를 수집하고 해석하여 단절된 지식의 역사를 복원시켰다. 이 책을 채운 지식인들을 죽 대면 다음과 같다. 동학 사상의 최제우, 최시형, 이돈화, 김기전이며, 대종교 사상의 전병훈, 나철, 이기, 서일, 또한 양명학 계통의 신채호, 이회영, 이건창, 박은식, 나아가 동서양 결합지식계통으로 1960년대까지 이른 철학자로서 박종홍, 함석헌, 신남철, 박치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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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규성은 이들 한국 지식인의 대체적인 공통점을 자유 지향에 있다고 파악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 지향이란 “해방적 자유의 길이며 이러한 자유는 변증법적 이성의 영혼”이라고 이규성은 표현했다.(이규성 765) 이규성이 속으로 생각하는 자유를 서평자 나름대로 재정리하자면, 첫째 개인의 개체 차원의 독자성, 둘째 계급과 성차에서 벗어난 평등성, 셋째 백성은 계몽과 계도의 대상이 아니라 개인 각각이 그 스스로 자유를 인식하고 실현하는 잠재력을 자기 안에 이미 갖추고 있다는 개인의 자기-전성설, 넷째 사회경제학적 자립성, 다섯째 합리적이고 주지주의적인 관점으로 다 해명될 수 없는 구체적 삶의 세계를 사는 현존성이다. 예를 들어 동학사상은 주체적 개체성, 계급 없는 평등성, 자기 안에 우주론적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통일된 자아, 그리고 사회경제적 자립성을 지향했으며, 대종교 사상은 평등함과 경제적 자립 및 삶의 현존 그리고 누구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범신론적 종교관에 맞닿아 있었으며, 양명학 사상은 앞서 말한 心卽理에 기반한 양지의 이론으로 개체성-평등성-전성설의 윤리학, 자립성, 실천성 모두를 지향했다.(이규성 3부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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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의 <한국현대철학사론>은 당대 성리학과 현대철학적 사유 사이의 철학적 차이를 단호하게 구분했다. 그 차이는 “세계의 불안”으로 나타났다고 이규성은 표현했다.(이규성 24) 이 점은 기존의 연구에서 볼 수 없었던 최초의 학문적 진보이다. 실학도 성리학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여전히 백성을 계몽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기존의 성리학처럼 대인은 소인이 지향해야할 범례이며 거꾸로 소인은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계도되어야 하는 그런 명분을 실학도 계승했다. 반면 동학 이후의 세기말 한국현대철학의 반동은 일방향적 군주정치나 성인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 빈한한 유랑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군자와 성인이 소인과 백성을 훈교하도록 정초된 성리학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도탄을 직시했다. “서민적 지성이 시대의 조류에 맞서 자신들의 주체적 자각에 의거 백성과 나라의 자주성을 고민하고 확립” 해야 하는 시대였다고 이규성은 말한다.(이규성 24) 기존의 유가적 수양론에 의하면 성인의 훈교를 통해 무지한 자는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무지한 자가 훈교되지 않는다면 계속 무지한 채로 남게 될 수밖에 없음을 전제한다. 반면에 한국현대철학의 반동성은 이런 일방적 계몽화의 전제를 부정한다. 개체들 즉 백성은 이미 선험적으로 계몽된 상태이며 단지 미발현 상태일 뿐이라는 철학적 존재론에 있다. 그런 미발현 상태를 발현되게끔 바꾸어 주면 된다는 생각은 한국현대철학의 고유성이며 독특성이다. 그런 철학적 반동의 계기를 준 한국현대철학의 중심을 이규성은 조선양명학이라고 보았다. 양명학에서는 양지良知를 통하여 자기 안에 이미 내재되었던 성인과 군자를 찾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 양명학의 가능성을 이규성은 “연대의식과 인민주권으로 발전할 잠재성”이라고 표현했다.(이규성 345) 양지의 사유구조는 평등과 주체, 자립과 현존을 세울 수 있는 분명한 철학적 기초이다. 또한 양지는 양명학의 인식론적 기초인 지행합일의 논리 위에 정초되어 있다.

 

4. 우리에게 철학은 있는가?

현대한국철학의 주제로 또 다른 책이 새로 나왔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축약해서 ‘한철연’) 이름으로 나온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철학은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한철연의 이 책은 이규성의 한국현대철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재현되고 있지만, 이규성의 책보다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으며 매우 분명한 문제의식을 세우고 있다. 한철연의 책에서 한국현대철학의 문제의식을 대신한 한 마디의 표현이 있는데, 일본 제국주의자를 비판적으로 흘겨본다는 표현이다. 독립운동가 신규식이 일제에 항거하며 독약을 마시고 한쪽 눈을 잃었는데, 그 이후 그는 자신의 호를 한쪽 눈으로 흘겨본다는 뜻으로 예관晲觀이라고 붙였다.(한철연 344) 예관이란 반성하고 비판하며 행동하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한철연의 책은 우리에게 철학이 어떤 의미인지 지식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철학함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출세와 입신양명의 도구로 전락한 지식을 비판하며, 권력에 결탁하는 학문을 거부하는 새로운 비판과 부정, 저항과 혁명의 철학이 현대한국철학의 기초였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한철연 341) 한철연의 한국현대철학은 부제로 “동학에서 함석헌까지, 우리 철학의 정체성 찾기”에서 암시하듯이 철학의 의미를 스스로 질문하며 나아가 분열의 시대를 마주한 현대인의 철학적 지혜를 모색하고 있다.

한철연의 책은 현대인이 한국의 현대철학을 이해하도록 안내하는 입문서로서 최소한의 한국현대철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동학의 최제우, 대종교의 나철, 양명학의 박은식, 민족주의형 무정부주의의 신채호, 사회적 휴머니즘의 신남철, 실천철학의 박치우, 국가주의의 박종홍, 씨알철학의 함석헌의 철학을 잘 풀이해주고 있다. 한철연의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은 이규성의 책 <한국현대철학사론>에 등장한 현대지식인 중에서 부분적으로 선별한 철학자를 중심으로 좀 더 쉬운 표현으로 소개하고 있다. 동학의 최제우에서 씨알 함석헌에 관통하는 철학은 이념적으로 평등과 자유에 있었으며, 방법론으로 저항과 실천에 있었으며, 내재적으로는 주체와 성찰에 있었다고 이 책에서 잘 정리되어 있다. 한철연의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에 나온 8명의 한국현대철학자의 고뇌와 혁명의 철학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동학의 철학은 평등사상의 발로에 있었다. “사람이 한울이니 사람을 한울처럼 섬기라”는 평등사상은 누구나 자기 안의 한울님을 찾아내어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했다.(한철연 84) 기존의 성리학에서 주체가 군자이거나 군주이었지만, 이제 백성 한 사람마다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무계급의 철학을 말한다. 최제우(1824-1864)를 단박에 가 깨닫게 한 한마디의 말이 서평자의 마음에 와 닿았다.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한철연 77)는 말이 내 안의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라고 이 책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단군교로 시작한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1863-1916)은 단군을 부흥시키는 일에 머물지 않고 일제탄압에 정면으로 맞서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다. 천지인, 혹은 한인-한웅-한검이라는 3의 구성체는 단순히 절대적인 구원의 길을 제시한 단순 종교적 특성을 넘어서서, 인간이 살면서 겪는 “느끼고 숨 쉬고 부딪치는” 세 가지를 가리켜 ‘세 길’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인간은 이 세 길에서 방황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했다.(한철연 112)

황성신문을 창간한 박은식(1859-1925)은 사회진화론을 도입하여 서양과학에 친화적인 양명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 양명학이 한국현대철학에서 중요한 이유는 앞서 이규성의 자유론에서 언급되었다. 한철연의 책은 박은식이 말하려는 양지를 잘 요약해주었다. 양지는 주자학의 주지주의적 도덕론에서 벗어나 있으며, 오히려 맹자가 말한 측은심의 기반이라고 했다.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이 아닌 내재된 도덕적 정감의 의미를 포함하는데, 공정함과 시비선악의 기준으로서 성선함의 기초라고 설명한다. 특히 박은식은 양지를 자연을 밝게 통찰하는 앎, 순일하고 거짓없는 앎, 끊임없이 유행하며 쉬지 않는 앎, 두루 감응하며 막힘이 없는 앎,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과 차이가 없는 앎, 우주와 인간을 합일하는 앎이라고 쉽게 풀어주었음을 이 책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한철연 149)

우리에게 민족 개념이 들어온 역사는 짧다. 그나마도 박정희 군부독재 국가주의를 옹립하기 위한 이념적 도구로서 ‘단일민족’이라는 선전구호로 왜곡되었다. 이념적 도구가 아닌 주체로서의 민족 개념을 처음으로 안착시킨 철학자는 바로 신채호(1880-1936)였다.(한철연 173-6)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교수 지위)로 임용되었지만 과감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첫째 이유로서 전통이 유교적 세계관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둘째 이유는 자신의 스승 신기선을 포함해서 당시 유가적 전통을 따르는 집단이 친일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적 역사와 내적 성찰을 거치면서 신채호는 군주와 양반 중심의 일방향적 군주 사회가 아니라 백성과 민중이 주인되는 민족 개념을 형성하였다. 신채호의 민족주의는 오늘날 해석에 따르면 ‘방어적’ 민족주의에 해당한다. 민족이란 민중이 주인 되는 주체의 국민을 의미하며, 서구식으로 말하면 시민에 해당한다. 신채호는 나중에 국가 차원의 주인성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더 중시하게 된다. 결국 신채호의 철학적 관심은 1928년 이후 민족주의에서 탈피하고 사회진화론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나서 아나키즘으로 변화한다.(한철연 190) 이런 점에서 신채호의 철학은 한국현대철학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한철연 책은 신채호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민족주의자와 독립투사로만 부각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주체들이 자기성찰과 자기각오를 통해 궁극의 자유를 창조하는 사유의 발판”을 신채호가 마련했다는 점에서(한철연 194) 신채호 철학의 의미는 과거에 그칠 일이 아니라 미래의 지표로 될 수 있음을 이 책은 강조했다.

브렌타노 현상학 논문으로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한 신남철(1907-1958)은 헤겔과 고대그리스 자연철학 연구를 지속해 왔다. 헤겔의 정신철학 연구에서 신남철은 역사철학과 인식론을 연결시켰고, 나아가 철학을 현실역사에 접목시켰다.(한철연 215) 신남철은 헤겔의 정신철학을 단순한 관념의 발전이 아니라 세계와 인식주체 사이의 끊임없는 실천적 상호작용으로 해석한 점이 독특하다.(한철연 215) 결국 신남철의 관심은 서구 르네상스 문화가 조선역사에 출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묻는 실천적 질문이었다. 신남철은 그 답을 계몽과 인간 그리고 자유라는 세 가지 키워드에 초점 맞추었다. 1942년 7월 1일 매일신보에 실린 신남철의 “자유주의 종언” 은 그의 현실참여형 정치철학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 글에서 첫째 대동아공연권 개념을 강조한다. 이 점으로부터 신남철을 비롯한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세계보편주의로 오해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서구 국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위상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셋째 국가를 떠나서는 자유를 실현할 수 없다고 했다. 넷째 자본주의를 비판한다.(한철연 226-7) 이후 중국식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고 월북한다. 신남철은 1948년부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서양철학사를 강의하다가, 나중에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힌 후 1958년 사망했다. 결국 그는 정치적으로 남한 정부나 북한 정부에도 적응할 수 없었으며, 자유주의와 이상주의를 영원히 품고 있었던 휴머니스트였을 뿐이다.

총을 든 빨치산 철학자로 알려진 박치우(1909-1949)의 삶은 정말 실천철학의 범례였다. 박치우의 실천은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한다. 박치우는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숭의실업전문학교 교수와 조선일보기자로 있다가 월북했다. 그는 문학평론가이며 마르크스 철학의 학자였지만 유격투쟁의 일선에서 삶의 실천을 더 중시했다. 그는 빨치산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 1949년 태백산에서 사살되었다. 그는 근대철학의 방법론을 배우고 실천하려 했던 최초의 강단철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한철연 233) 그는 현실에서 실천으로 이행하는 철학적 단계를 그의 책 <사상과 현실>(1946)에서 해명하였다. 그것은 ‘교섭적 파악’, ‘모순적 파악’, 그리고 ‘실천적 파악’의 세 단계이다. 위기의 파악과 극복은 이성에 근거하지만 실제로는 ‘실천’으로만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 박치우의 기본 명제이다. 이를 그는 “로고스와 파토스의 변증법적 결합”이라고 불렀다.(한철연 239) 철학이 이론으로만 머물 때 가장 호사스러우면서도 가장 허울에 찬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박치우는 강조한다. 우리는 박치우의 실천 행로가 꼭 옳은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철학의 할 바가 무엇인지를 박치우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본다. “철학은 오늘. 이 땅, 우리에게 있어서 ,,,, 어떤 책임을 분담해야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박치우는 한시라도 떨어진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한철연 243) 한철연은 박치우에 대한 평가를 다음의 한 마디로 하고 있다. “한국에도 사유와 삶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분투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한철연 267) 박치우의 철학이 이 소절의 제목인 ‘우리에게 철학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면피로 될 수 있는지는 두고두고 생각해 볼 문제다.

이 글을 쓰는 서평자는 어렸을 적 학교에서 박정희 군부독재의 의식화 사업의 하나였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해 선생님에게 매를 맞은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국민교육헌장을 작성한 이가 박종홍(1903-1976)이다. 근대의 폭력적 권력이 전근대의 전제적 왕권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 퇴행의 역사, 박정희의 ‘10월 유신’이라는 이름도 박종홍이 붙인 것임을 서평자도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박종홍은 신남철이나 박치우처럼 경성제대 철학과 출신이었으며, 1968년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평온하게 은퇴했다. 다른 한국현대철학자들이 철학과 현실을 접목시키려 시도한 지식인으로 평가된다면, 박종홍은 철학과 현실에 권력까지 접목시킨 국가주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청년 지식기는 헤겔과 하이데거 그리고 퇴계를 통해서 전통철학과 서구철학을 연결하는 데 있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박종홍은 그의 후반기로 이행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보다는 집단의 운명을 강조한다. 집단의 공동체적 운명이 자각과 자유를 지닌 개체로서의 ‘나’보다 선행한다고 했다. 이러한 박종홍의 입장은 그가 향후 왜 독재권력에 적극적으로 승차한 정치적 이유를 알게 해준다. 그의 철학은 보통 ‘부정과 창조의 철학’으로 이름 붙여지기도 하는데, 그 내용인즉 부정을 통해 집단성의 힘을 창조한다는 데 있다. 박종홍에게 주체는 개체가 아니라 철저히 우리 민족이라는 결론에 이른다.(한철연 294-9) 해방 후 미군정 중심으로 경성제대를 편성한 ‘서울국립종합대학안’을 많은 지식인이 반대했지만 박종홍은 관여하지 않았으며 이승만 독재에 대해서도 박종홍은 묵인의 함구를 했다. 이러한 사실과 대조적으로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박종홍은 대통령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을 역임하는 둥 적극적인 권력참여를 했다.

씨알의 철학자로 알려진 함석헌(1901-1989)은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젊은 함석헌의 오산학교 시절은 일제 저항의 민족적 정신과 스승 유영모를 통한 노자 철학 그리고 개신교와 세계의 문화적 보편성에 다층적으로 영향받은 시간이었다. 이후 일본 유학기에 범신론적 종교성, 평화주의, 반자본주의, 노장 사상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 실천적 지식의 지평을 넓혔다. 함석헌의 철학은 평화사상과 생명사상으로 줄여 표현할 수 있다. 평화와 생명은 저항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함석헌 씨알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비폭력, 불복종, 총단결”로 요약되는 ‘민주시민을 위한 헌장’(1974)은 앞서 말한 박종홍의 국가주의 칙령인 국민교육헌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씨알의 지표였다. 한철연의 책에 써진 그대로 씨알의 의미를 서평자가 대신 요약하면, 씨알이란 진보의 역사를 끌고 가는 주체, ‘고난의 역사와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역사’의 주체이다. 서평자는 이 책에서 가장 기억나는 함석헌의 말이 있어서 인용한다. “저항하는 것이 사람이고,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한철연 334) 서평자는 함석헌을 현대 생명사상의 기초를 다져준 지식인으로 평가한다. 나의 이런 평가는 전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겼다. 함석헌의 생명의 원리는 첫째 자연적이며, 둘째 스스로 드러나며, 셋째 환경에 맞서 고난하며, 넷째 자유로우며 능동적이다.(한철연 321-8) 즉 생명 자체가 평화의 근원임을 보여준 것은 함석헌 철학의 역사적 혁명이었다.

 

5.  샘물과 유전

서평자 자신도 이번에야 깨달았지만, 이 두 권의 책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에게 한국현대철학의 책이 없었다는 점은 놀라우면서 창피한 일이다. 대부분의 한국철학사 책이 동학사상을 끝으로 맺고 있는데, 그 변명을 서평자가 대신 한다면, i)대종교에 대한 인식부족, ii)일제청산이 안 되고 오히려 일제권력이 지금까지 지배적이었다는 점, iii)월북 지식인에 대한 연구가 제한되어 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변명을 과감히 깨고 나온 이규성의 책과 한철연 공동저자의 책은 정말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규성의 책은 기초자료와 지식의 체계성에서 거의 완벽에 가깝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이니, 현대한국철학의 전문서로서 손색이 없다. 한편 한철연의 책은 전문서적이기 보다는 대중에 접근하는 책이지만 문제의식만큼은 분명하다. 한철연 책의 문제의식은 철학의 정체성과 우리에게 철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독자와 공유하고 싶은데 있다.

이규성의 책은 부제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에서 보듯 이규성은 망국에 대한 역사적 상실을 인간의 상실로 규정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내재된 자유를 통찰하고 현실화하는 데 있다고 한다. 결국 자유를 희구하는 지식체계를 한국현대철학의 특징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특징과 모순되는 지식체계가 이규성의 책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박종홍의 철학이 그것이다.

이규성의 책에서 보듯 박종홍의 철학체계 전반은 개체의 자존성보다 집단의 흥성을 보존하는 논리체계로,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의 권력을 옹호하는 지식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저자 이규성이 박종홍의 논리와 지식의 체계를 자신의 책 전반에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종홍의 철학적 연구범위는 선진유가 철학에서 주자와 성리학을 거쳐 동학사상과 대종교 및 신유학, 나아가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신남철과 박치우에까지 이를 정도로 광범위하다. 한국현대철학의 한 꼭지로서 박종홍을 다루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박종홍이 본 한국철학자를 일반화시켜 소개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제목이 ‘박종홍의 철학’이 아니라 현대한국철학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이규성은 자신의 책 <현대한국철학사론>에 등장한 한국현대철학자 16인을 소개하는 모든 소절 소절마다 박종홍의 입장을 매번 서술하고 있다. 서평자가 일부러 일일이 세어보았는데, 본문의 내용 910쪽 중에서 무려 최소 197쪽에 걸쳐서 박종홍의 명제를 소개하거나 해석의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을 정도다. 이 책은 한국의 현대철학자 16인을 소개하고 저자 이규성의 세계관을 주체적으로 보여주는 대단한 성과를 보여주었지만, 책을 자세히 읽는 독자에게 이 책은 ‘박종홍 철학’으로 비춰질 수 있다.

박종홍의 시대적 행적은 많은 논란을 갖고 있으며, 그의 철학을 해석하는 것은 사람마다 자유이다. 박종홍이 이승만 독재에 함구하고 박정희 군부독재를 화려하게 수사했다는 점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해석가들도 있기 때문이다. 서평자도 많은 해석들의 하나를 말할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는데, 박종홍의 철학은 이 책의 부제로 나온 “자유”의 지식계열에 결코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쨌든 박종홍의 문제만 제외한다면 이규성이 책은 체계성과 창조성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다행히 한철연의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은 박종홍의 현대사 행적을 여실히 말하고 있다. 이규성이 깊은 성찰을 통해 흩어낸 내재적 자유는 중요했다. 그런 이규성이 조각해낸 자유는 사막의 땅 밑에 깊이 숨겨진 오아시스의 샘물이라고 말해도 좋다. 한편 이규성에게 개인의 자유와 거리가 먼 박종홍은 땅 속의 유전이었다. 유전도 소중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샘물의 땅속 지도를 그리는 철학지평에 지하유전을 끌어들이면 샘물도 찾아 먹을 수 없게 된다.

서평자는 이 두 권의 책을 꼼꼼히 읽으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나의 한국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몰랐던 것이 너무 많았고, 내가 아는 척 한 것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두 권의 책은 단순히 한국의 현대철학사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삶의 이유를 스스로 묻게 해주었다. 철학은 답변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점을 정말로 실감하게 해 준 책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여름휴가 동안 이 두 권을 읽어 보시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강추한다. 편하게 읽고 싶은 분은 한철연의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을, 본격적인 독해를 하고 싶은 분은 이규성의 <한국현대철학사론>을 권한다.

<서평문끝>

 

[신간]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 – 동학에서 함석헌까지, 우리 철학의 정체성 찾기 –
저자 :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국현대철학분과)
동녘  2015.05.29

안녕하세요? 지난 5월 말 한철연 한국현대철학분과(예정)에서 집필한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동녘)이 출간되었습니다.

2013년 여름부터 이규성 선생님의 <한국현대철학사론> 윤독을 시작으로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분과원들의 매주 노력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구성원들의 전공이 한국철학이나 중국철학에 국한되지 않고 서양철학 전공자들과 함께 어우러졌기에 좀 더 다양하고 심도 있는 얘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처음, 우리가 다루려는 인물들을 철학자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이 온전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계속 이어갈 것입니다. 특히 한철연에서는 더욱 그래야 할 것입니다.

아래는 이 책에 대한 출판미디어매체의 소개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관심있는 회원 및 여러분들의 일독을 삼가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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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 현대철학’이란 이름으로 여러 인물을 소개하지만, 차례를 살펴보면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 사람이 왜 철학자로 분류된 것일까?’ 실제로 이 책에 소개된 인물 가운데 상당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적이 없으며 널리 알려진 철학 저술이나 논문을 남기지도 않았다. 강단에서 철학교육에 임한 경험도 없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들을 ‘철학자’로 부를 수 있을까? 저자들은 우리가 ‘철학’에 관해 일정한 상(像)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철학은 대학 전공학과에서 전수되는 학문 체계인 만큼 엄밀하고 실증적이며 논리적인 학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고정관념 속 철학의 상을 완강하게 견지한다면, 사실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 대다수는 ‘철학자’가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철학의 상은 주로 근(현)대 서양에서 형성된 것이고, 그나마 일본을 통해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바로 이러한 철학의 상, 이 시대 우리에게 고착화된 철학의 상에 얽매이려 하지 않는 태도가 이 책의 중요한 전제라고 강조한다.

저자 :
이병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구태환 상지대학교 강사
김정철 한국학중앙연구원 철학과 박사수료
이 지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진보성 방송통신대학교 강사
유현상 상지대학교 강사
조배준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원
박영미 한양대학교 강사

목차
머리말
1. 한국의 ‘철학’과 한국철학의 ‘현대’ – 이병태
2. 전통사회의 동요와 새로운 사유의 출현: 성리학 비판과 평등한 인간관 – 구태환
3. 최제우와 동학사상: 한울님을 모신 몸으로 산다 – 구태환
4. 나철과 대종교: 역사적 실천을 통한 한얼의 회복 – 김정철
5. 박은식의 민족주의적 양명학: 전통의 개혁을 통한 위기의 극복과 자주적 근대 모색 – 이지
6. 신채호의 민중중심사상: 민중의 주체성과 절대자유의 정신 – 진보성
7. 신남철의 휴머니즘: 사회주의적 이상을 꿈꾸다 – 유현상
8. 박치우와 위기의 철학: 철학의 당파성과 지식인의 실천 – 조배준
9. 박종홍과 국가주의: 강단 철학의 빛과 어둠 – 박영미
10. 함석헌의 ‘씨알 철학’: 씨의 세계를 꿈꾸다 – 유현상
11. 우리 시대의 철학 – 이병태
글쓴이 소개

우리에게도 ‘철학’이 있을까?
역사의 뒤편에 가려진 우리 철학을 한권의 책으로 만나다!

‘우리’ 철학 혹은 철학자는 있는가? 이 책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이 소개하는 ‘우리 철학자’들은 전통 지성의 세례를 받았지만 격변의 역사 앞에서 스스로 달리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독자적인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자 애쓴 인물들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최제우, 나철, 박은식, 신채호, 박치우, 박종홍, 함석헌 등은 인간과 삶, 사회 및 역사, 자연과 우주 등, 현대철학의 주요 주제들을 진지하게 탐문하고 신중하게 답하여 실천함으로써, 종교지도자나 독립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진정한 현대 ‘철학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 책의 출간은 한국 철학사에서 나타난 기나긴 ‘수용’의 역사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지적 모험을 감행한 이들의 사유를 통해, ‘우리’ 철학의 빛나는 가능성을 엿보고 역사의 뒤편에 가려진 우리 철학자들을 ‘발굴’해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최제우의 ‘동학’에서 함석헌의 ‘씨ㅇ·ㄹ 철학’까지
우리가 잘 몰랐던 한국 현대 철학자들의 철학과 사상!

한국철학은 우리 민족이 오랜 역사 속에서 자신들이 몸담고 살아온 자연 조건과 사회 상황에서의 경험들을 추상화하고 체계화해낸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오랜 기간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독자적인 사유 체계를 만들거나 외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사상으로 다듬어 갔다. 이런 한국철학에 관해 나온 책들은 대부분 원효나 지눌 등 불교 사상가와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 성리학자부터 시작해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등 조선 후기 실학자까지만 다루고 있다. 이 책은 그동안 동학사상 이전 까지만 주로 다뤄왔던 한국철학을 ‘현대’까지 이어나가고 있다. 그동안 학술서로는 한국 현대철학사상에 대한 연구와 함께 박종홍, 신남철, 박치우 등이 개별적으로 다루어지기는 했지만, 대중교양서로 한국현대철학이 체계적으로 소개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출간의 의미는 깊다.

이 책은 ‘한국 현대철학’이란 이름으로 여러 인물을 소개하지만, 차례를 살펴보면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 사람이 왜 철학자로 분류된 것일까?’ 실제로 이 책에 소개된 인물 가운데 상당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적이 없으며 널리 알려진 철학 저술이나 논문을 남기지도 않았다. 강…(하략)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도서출판 동녘의 신간 소개 (복사해서 주소창에 붙여넣기 하세요)
http://blog.naver.com/dongnyokpub/220380661486

제9장 잉여가치율[자본론강독]-18

제9장 잉여가치율[자본론강독]-18

정리 : 신준하

제1절 노동력의 착취도

최초 ; C=c+v, 500원=410원[c]+90원[v]
생산과정을 거치면서 ;
C=410원[c]+90원[v]+90원[s], C=C’ 500원에서 590원으로 됨.
* C와 C’의 차이는 s, 즉 90원의 잉여가치

◯ 생산요소가치 = 투하자본 가치
생산물가치가 생산요소가치 보다 크기 때문에,
생산물가치의 생산요소가치 초과분 = 투하자본의 증식분 = 잉여가치 : 동어반복

◯ 가치 생산에 투하된 불변자본이라 말할 경우, 그것은 언제나 생산 중에 실제로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만을 의미한다.(생산 중에 마모된 생산수단의 가치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불변자본의 일부만 생산물로 이전되는 경우와 전체가 이전되는 경우 모두 잉여가치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ex1)불변자본 일부만 생산물로 이전되는 경우

c=마멸된 기계가치 54원+원료가치 312원+보조재료 가치 44원
v=90원, 생산요소가치=500원

* 생산물 가치=590원, 따라서 잉여가치=90원
ex2)불변자본 전체가 생산물로 이전되는 경우

c=기계가치 1,054원+원료가치 312원+보조재료 가치 44원
v=90원, 생산요소가치=1,500원

* 생산물 가치=1,590원, 따라서 잉여가치=90원

◯ C=c+v → C’=(c+v)+s → C=C’
생산과정 속에서 실제로 창조된 새로운 가치[가치생산물]는 생산물의 가치와 다르다. 가치생산물은 590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90원[v]+90원[s]=180원이다.

c=0이라 가정할 필요가 있다.(잉여가치율을 계산해내기 위해서) → 가변량만을 계산하겠다.
ⅰ) 왜냐하면, 불변량과 가변량을 결합시키는 경우, 그 결과의 변동은 불변량을 제외 하더 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

ⅱ) 가변자본 부분은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
C’=410원 불변자본+90원 가변자본+90원 잉여가치
여기서 가변자본 90원은 주어진 양(불변량)이므로, 즉, [90원은 임금액으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변량을 취급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 90원은 죽은 노동 대신 살아있는 노동이, 정지된 양 대신 유동하는 양이, 불변량 대신 가변량이 등장한다. (즉,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는 원동력이고, 새로운 가치 (영여가치)를 생산한다).

(임금액이 90원으로 고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90원의 가변자본”, 또는 “일정한 자기증식하는 가치”라는 표현이 모순을 내포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이유는 이 표현이 자본주의적 생산에 내재하는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교환은 등가교환법칙에 위배되지 않으나,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노동력을 상품으로 교환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모순이다.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모순이다.

s/v : 1)가변자본의 가치증식 비율, 2)잉여가치율

필요노동시간 : 1노동일 중 노동력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부분필요노동 : 필요노동시간 중에 수행되는 노동

잉여노동시간 : 노동일 중 필요노동의 한계를 넘어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시간

잉여노동 : 잉여노동시간 중에 수행되는 노동

 

s/v = 필요노동/잉여노동,  잉여가치율은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착취도의 정확한 표현
cf) 이윤율 = s잉여가치/c불변자본+ v 가변자본

* 잉여가치율 계산방법 요약

c=0으로 본다

잉여가치량이 주어져 있다면, 새로 창조된 가치-잉여가치 = 가변자본
가변자본량이 주어져 있다면, 새로 창조된 가치-가변자본 = 잉여가치

제2절 생산물의 가치를 생산물의 비례 배분적 부분들로 표시

◯ 12노동시간 동안 30원의 가치를 가지는 20파운드의 면사를 생산
가치 구분 : 면사 가치30원=24원[c]+30원[v]+3원[s]
무게 구분 : 면사 20파운드=13파운드[면화]+2파운드[방추]+2파운드[v]+2파운드[s]
노동시간 구분 : 8시간[면화]+1시간36분[방추]+1시간12분[v]+1시간12분[s]

→16파운드의 면사(13파운드[면화]+2파운드[방추]) 및 9시간36분(8시간[면화]+1시간36분[방추])에는 노동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 처럼 보이고, 뒷부분은 노동자가 공중에서 면사를 뽑아낸 것처럼 보인다.
→이 방식은 옳은 것이나, 매우 조잡한 사고방식을 야기할 수도 있다.

[서평] 우리의 고향은 어디오?

우리의 고향은 어디오?

김재현의 <사랑하는 당신 미안해요> 불휘미디어, 2015

 

김재현은 <사랑하는 당신, 미안해요>라는 책을 냈다. 저자는 그의 책 마지막 페이지에 시 한 편을 그려내었다. 고향이라는 제목의 시다. 그의 시 앞 구절을 옮겨본다.(책 270쪽)

사람들이

고향을 물으면 없다고 대답했지요

고향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다시 물으면

출생지는 있지만 고향은 없다고

고향은 태어나 자란 곳

아늑하고 정겨운 추억이 있는 곳

부모와 가족, 친구들의 삶과 기억이 있는 곳

서평자 최종덕은 이 책의 저자 김재현을 1992년 독일에서 처음 만났다. 나의 기숙사 좁은 방에서 몇 날을 같이 지내면서 당시 최대의 문제였던 독일 통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독일 맥주로 시작해서, 성이 안 찼는지 시납스라는 독일 소주를 더 사다가 마시면서 말이다. 독일 통일 이야기는 자연스레 한반도 통일로 이어졌다. 그는 술도 약한 것 같았고 말주변도 없는 것 같았는데 한반도 이야기가 나오니 열변을 토했다. 당시 나는 독일에서 학위논문 막바지 준비를 했었는데, 김재현도 자신의 논문을 마무리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았다. 그 후 일 년이 지나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김재현을 서울서 만났다. 역사와 사회로 본 철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라는 학회에서 그를 만났다. 그 학회는 ‘한철연’이라는 짧은 이름으로 불려지던데, 그 학회의 많은 사람들이 술과 더불어 격정적인 논쟁을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 중에서 가장 조용했던 사람이 김재현으로 생각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도 겉보기와 다르게 꽤나 열정적인 모습을 비추었다.

20년 세월이 흘렀다. 그도 나도 나이 좀 들었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은 한철연 이라는 학술단체에 대한 애정이었다. 김재현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몸으로 절감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철학적 글쓰기는 우리 역사의 아픔을 저려낸 깊은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한철연의 역사는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를 비추고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남들이 많이 하는 역사철학이 추상적인 관념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그의 철학은 한국의 현실을 분석하는 날카로운 시간의 칼을 벼르고 있는 그런 역사철학이었다.

김재현의 책 <사랑하는 당신, 미안해요>는 사별한 그의 아내 이연숙을 기리는 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 가운데 김재현이 이연숙을 만나게 된 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보고 내 마음이 숙연해졌다. 앞에서 올린 그의 시 나머지를 마저 읽어야겠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곳이 고향이라고

당신이 떠난 지금 여기

더 이상

고향이 아니네요

당신이 없는 이 곳

더 이상

고향이 아니네요

이런 시를 쓴 김재현에게 나는 ‘한국의 많은 사람들도 출생지는 한국이나 고향이 없는 사람들이 많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김재현이 이연숙을 만나 후, 1978년 이연숙이 자유민주선언’ 유인물 사건으로 수감되었다. 김재현은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성동구치소에서의 세 번째 면회,(철창 사이로 멀리 떨어져서) 오늘은 얼굴을 약간 동안이라도 더 볼 수 있었고 직접 얘기도 했다. 졸업논문을 다 썼냐고 물어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을 뿐…. 만나 체온을 같이 나눌 수 있다면, 두 팔을 벌려 가슴에 안아 뜨거운 눈물을 마냥 흘리고 싶건만, 안타까움은 지속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고통받는 것이 낫지,,,”(책 253쪽) 이연숙의 아픔은 김재현의 아픔이었고, 김재현의 아픔은 우리 시대 모두를 대신했던 아픔이었다. 제대로 말하자면 우시 시대의 아픔을 그대로 투영되어진 청년의 삶, 바로 이연숙의 강건한 삶이었다. 김재현은 그 아픔을 이렇게 표현했다. “언어를 잃어버리는 극한 상황, 좌절을 통한 새로운 삶에의 욕구, 시대의 고통을 뼛속 깊이 느끼면서, 아니 淑(이연숙)의 고통이 머릿속에 온몸에까지 파고들어와 나도 온몸이 아프다”(책 252쪽) 그런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삶에의 욕구는 소거될 수 없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김재현에게 고향은 새로운 역사의 지평선에서 드러날 것이다. 이연숙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김재현도 삶은 이어갔다. “당시에 나는 고통스러운 생활 속에서도 니체의 글과 김수영의 시집, 시론집을 읽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 같아요.”(책 254쪽)

나는 김재현의 책 <사랑하는 당신, 미안해요>을 읽으면서 이연숙을 잃은 그의 아픔이 그 자신의 역사철학을 통해 새로운 역사적 고향으로 전화될 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한번 읽어 보실 것을 추천한다. 김재현 개인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만, 그 안에서 역사 그리고 삶과 사랑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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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망각과 기억의 변증법

망각과 기억의 변증법

 

이파르1

 

■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개인적 고통과 기억에서 사회적 기억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창문 틈을 모포로 틀어막고,

손톱이 빠지고 손가락이 골절되도록 닫힌 문을 열기 위해 애쓰다,

마지막 순간엔 학생증을 손에 꼭 쥐고 죽어간 아이들,

그 죽음을 생중계로 지켜봐야 했던 그 아픈 기억들.

세월호 참사 이후 지난 1년을 돌아보는 시각에는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지만, 1년

동안 가장 많이 접할 수 있었던 말은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였다.

 

잊는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

인간의 뇌 속에서 숙명처럼 반복되는 행위가 이처럼 중요했던 단일 사건이 또 있었을까.

이는 전대미문의 참사에 대한 기억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더없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1년이 지난 이 순간에도 각종 언론 지상과 다양한 인터넷 공간에서 사건의 원인에 대한 수많은 비판과 분석, 애도, 진상 규명의 중요성에 대한 외침 등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의 실체와 폐기 요구에서 보듯, 이 사건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진상 규명과 선체 인양도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신간 『망각과 기억의 변증법』은 전국 곳곳에서 세월호 참사에 관한 사회적 망각과 사회적 기억의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중견?소장 철학자들이 모여 이에 대한 고찰과 분석을 시도한다. 이는 개인적 아픔과 기억들을 넘어 참사의 교훈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과 논의의 한 과정이다.

 

■ 망각과 고통의 바다에서

국가의 ‘인양’으로

이 책은 세월호 참사가 개인의 기억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기억으로 자리잡아야 함을 이야기한다. 사회적, 집단적 기억이 갖는 본질적 가치가 사회구조의 변화와 사회 발전에 있다면, 우리 사회의 가치와 질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며, 그에 대한 대답과 합의 역시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1부 민주주의, 인간 그리고 공동체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가 변용, 왜곡되어온 사회 속에서 윤리적 공동체의 건설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이데올로기의 사슬과 지배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면서도, 이데올로기를 통한 정권 유지는 아직까지도 후진적 정치 환경의 핵심으로 기능한다. 세월호 사건이 일반 국민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는 과정에도 미디어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부 망각과 고통을 넘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호 참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지나간 옛일이 되고 있고, 보수 정치권에서 국민들은 피로감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기억을 위한 공감과 능력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는 세월호 특별위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나 선체 인양과 진상 규명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왜곡하려는 시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유가족들과 사회 구성원들이 고통을 안고 그 주변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매개로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며, 자신의 삶을 공적 담론 속에 새롭게 위치시키는 능동적 경험을 함으로써 단순한 망각과 고통을 넘어서서 과거의 사건을 새롭게 기

억할 수 있다고 필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단일한 고통의 사적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공적 차원에서 바라볼 때 고통의 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억의 새로운 양식이 된다.

-3부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

3부에서는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사회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방향과 지점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본다.

우리 사회 전반을 짓누르는 의식구조의 하나로, 배타적 편향성이 있고 이를 받쳐주는 편향적 유대 문화가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한다. 이러한 은폐와 광신을 종식시키고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공공적 앎을 확산시키는 것이요, 도덕적 직관주의와 공감의 확산이 필요하다.

한편 애도와 진실 규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또 다시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최근 상황을 바라보는 일부 젊은 세대의 시선과 의식이다. 경쟁 교육의 틀 속에서 자라난 그들에게 능력과 실적을 최우선으로 하는 메리토크라시적 규율은 너무나 당연한 듯 보인다. 우리 주변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교육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때, 과거의 시간을 멈추고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기 위한 움직임, 더 나은 삶을 위한 민주 시민 교육의 강화가 절실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세월호 참사 속에 걷혀지지 않는 갈등과 고통의 트라우마를 더 나은 사회의 건설이라는 차원과 연결시켜 극복하기 위한 작업을 이야기한다. 이는 고통과 슬픔의 기억이 서서히 희미해져갈 많은 사람들에게 함께 묻고 대답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필자들은 이 점에서 참사의 기억을 딛고 일어섬과 동시에 외상적 기억은 자연스럽게 망각하면서 과거의 사건을 새롭게 기억할 것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사회 진보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다시 끌어올리고자 하는 인양이 또 다시 중요해짐을 말하고 있다.

 

이파르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