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또는 상품유통[자본론강독]-20

화폐 또는 상품유통[자본론강독]-20

정리 : 신준하

3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 / 1절 가치의 척도

 

이제부터의 논의에서 금은 화폐상품으로 간주한다.

금은 모든 상품에 대해 질적으로 동일하고 양적으로 비교 가능한 가치표현의 재료로, 즉 가치의 일반적인 척도로 기능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단위 측정의 근거가 금이 화폐라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주지하고 있는 사실, 모든 상품에 내재한 공통적 속성 – 상품에 대상화된 인간노동- 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금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상품이 대표적인, 공통적인 가치척도인 화폐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가치척도로의 화폐를 가치척도의 필연적인 현상 형태로 생각해야 한다.

화폐가 가치척도로 기능함에 따라 늘어서있던 상품의 행렬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금이라는 화폐와 상품의 비교만이 남는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단순한 또는 개별적인 상대적 가치형태의 모습을 띠고, 전개된 상대적 가치표현은 화폐상품의 독특한 상대적 가치형태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그 가치형태의 모습은 ‘상품의 가격’이라는 형태로 사회에 출현한다. 다만, 화폐에는 가격을 매길 수 없다. 화폐가 다른 상품들을 상대로 통일적인 상대적 가치형태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등가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동어 반복적 관계일 뿐이다.

이제 화폐와 가격의 문제에 대해 고려해본다. 중요한 것은 상품의 가격 또는 화폐형태는 상품의 가치형태 일반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물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지점이다. 가치는 상품에 내재하며, 그것을 가치척도로 재고자 할 때 관념적인 금과의 상상된 관계에 의해 표현된다. 상품의 주인이 자신의 상품가치에 가격이라는 형태를 부여한다 할지라도, 아직 그의 상품이 금으로 전환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상품의 가치는 여러 크기의 상상적 금량이라는 동일한 명칭의 양으로 전환된다. 다만 상품의 가치를 배제한 채, 척도로의 가격이라는 사회적 형태만을 고려한다면 가격의 문제는 “화폐 재료”로부터 비롯한다. 즉, 특정상품의 가치는 동일한 양의 노동량을 포함하는 상상 속의 화폐상품의 양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논리적으로 유통되는 화폐상품의 재질이 복수일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상품만이 가치척도로의 지위를 유지한다. 이중의 가치척도가 가치척도의 기능과 모순 된다는 것이다. 이제 금이 가치척도로의 견고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금량을 가치들의 도량단위로 삼을 필요가 있다. 나아가 도량단위는 세부적으로 분할된 도량표준으로 발전한다.

출처: www.sal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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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금까지 고찰한 화폐의 기능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노동의 사회적 화신으로, 가치를 측정하는 가치척도로의 기능이며, 또 하나는 고정된 무게라는 속성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금의 양을 측정하는 도량표준으로의 기능이다. 맑스가 보기에 화폐형태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이 두 기능을 분리해서 사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화폐가 도량표준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도량을 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노동생산물로의 금 역시 잠재적으로 가변적인데, 이는 금이 가치척도가 되는데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금의 가치가 변동하더라도 (가치가 전환된 형태인) 여러 가치의 금량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상품가격이 오른다면, 그것은 나머지 요소들은 고정된 상태에서 상품가치가 올랐거나, 화폐 가치가 떨어진 것이고, 상품가격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상품가치가 내렸거나, 화폐 가치가 오른 것이다. 금의 가치가 변해도 도량표준으로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문제는 없는 셈이다. 한 가지 고려할 것은 문화적, 관습적 요소들에 의해서 화폐의 명칭이 그 무게 명칭으로부터 분리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결국 도량표준의 화폐명칭은 실제 무게와 동일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이름을 획득하고, 법률에 의해 규제된다. 이제 “1쿼터의 밀은 1온스의 금과 가치가 같다”고 표현하지 않고, “3파운드 17실링”의 가치가 있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렇다면 “3파운드 17실링”이란 것은 그러한 가격을 가진 상품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물의 명칭은 사물의 성질과 관련성을 가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화폐의 명칭들에서 우리는 상품의 가치 관계의 흔적들을 찾을 수 없다. 가격은 상품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의 화폐명칭이기는 하지만, 그 외현된 이름으로부터 가치관계의 논의를 시작할 수는 없다. 나아가 화폐형태와 상품 사이의 관계를 단순한 상대적 가치형태와 그것의 등가형태의 표현으로 간주하기도 어렵다. 즉, 가격이라는 형태는 상품의 가치와 더불어 수요/공급 등의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변화되어 출현하기에, 상품가치량의 지표로의 가격은 상품과 화폐 교환 비율의 지표이나,

그 역의 관계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생산성이 동일한 이상, 사회적 노동 시간이 동일하다면, 그 상품의 가치량은 동일하게 상품에 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가격으로 사회적으로 외화된 형태로 출현할 때는 사회적 조건이 그 거울 관계를 왜곡시킨다. 결국, 가격과 가치량 사이의 양적 불일치의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가격 형태에 내재하는 것으로 이 질적 모순은 거의 언제나 존재한다. 가격형태만을 가지지 가치가 없는 것(양심, 명예), 상상적 가격형태(미개간지) 등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상품이 그 가치를 고려할 때, 현실의 물질적 형태에서 벗어나 상상의 금과 비교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때의 금은 관념적인, 상상적인 금이지만, 주인이 상품에 가격이라는 형태를 부여하길 원한다면, 상품이 등가물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상의 금은 실제의 금으로 대체되어 출현해야 한다. 사실상 관념적 가치 척도에는 hard cash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의 금이 현실의 금으로 전환되는 순간, 노동생산물이라는 가치 형태가 그것이 그대로 반영되기보다 필연적으로 변형되어 ‘가격’이라는 모습을 가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도봉도서관강의]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2)

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2)

 

김우철(호원대 외래교수)

 

4. 욕구, 요구, 욕망

아기의 울음은 처음에는 배고픔이라는 본능적 욕구(need)를 전달하는 표현수단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울음에 대해 엄마가 보이는 사랑의 응답을 반복해서 경험하다 보면, 아기의 울음은 이제 엄마의 사랑에 대한 요구(demand)로 점차 바뀌어간다. 그러니까 배가 고파서 운다기보다 엄마의 사랑이 그리워서 운다는 뜻이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욕구의 주체는 이리하여 점차로 요구의 주체로 바뀌어 간다. 특히 언어교육이 이루어지고 초보적 수준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짐에 따라 아이와 엄마 사이에는 이런저런 요구들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된다.

아이의 성장과정이 늘 행복한 경험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기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첫 번째 상실의 아픔은 바로 젖떼기(離乳)이다. 태어나서 매일같이 마음껏 빨아오던 젖가슴이 이제 아무리 울고불며 찾아도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이 상실의 아픔을 통해서만 아기는 엄마의 젖가슴과 젖꼭지가 나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게 된다.

젖떼기 시기에 아이가 자지러지듯 울며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욕구의 만족이 아니다. 그것은 엄마와의 일체감 속에서 맛보았던 ‘사랑의 만족감’이다. 곧 엄마 품에 안겨 엄마 목소리와 숨소리를 들으며, 엄마 시선을 마주보며, 젖꼭지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면서 달디단 젖을 먹던 그 행복한 느낌을 되돌려달라는 요구이다. 그러나 아이의 요구는 이제 좌절을 맛보게 된다. 욕구야 앞으로도 이러저러하게 충족되겠지만, 한때 경험했던 완전한 사랑의 만족감은 영원히 상실되고 만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요구가 좌절되는 경험을 통해 아이는 엄마와 자신 사이에 놓인 간극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젖떼기나 배변 훈련을 통해서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양육 과정 속에서 엄마가 아이의 요구를 외면하고 거절하는 일은 더욱 자주 일어난다. 이것은 아이가 보기에 엄마가 더 이상 자신만을 사랑하거나 자신에게서 충분한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아이에게는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엄마는 진짜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내가 이렇게 애타게 부르는데 왜 나타나지 않는 거지? 엄마는 과연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의문에 싸인 아이는 마침내 엄마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즉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고, 그래서 무엇인가 찾고 있고, 그래서 무엇인가 욕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이처럼 엄마의 욕망(desire)을 깨닫게 된 아이는 이제 그 자신이 욕망의 주체로 탈바꿈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이는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를 간절히 욕망하기 때문이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는 아이가 무엇을 욕망할지를 엄마로부터 처음 배울 뿐 아니라, 엄마가 아이 자기 자신을 욕망해 주기를 욕망한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욕망해 주기를 욕망한다. 엄마의 욕망에 눈을 뜨고, 나아가 엄마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아이는 이제 마침내 엄마와 본격적으로 분리되는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아이의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이 단계를 가리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라고 이름 붙였다.

5. 욕망하는 주체의 탄생

‘오이디푸스(Oedipus)’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베의 왕으로서 신탁에 따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비극적 운명을 겪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프로이트는 이 신화가 아이의 정신적 성장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고, 반대 성의 부모와 성적으로 결합하려고 애쓰는 반면 같은 성의 부모를 증오하는 심리상태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남자아이 같으면 엄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증오하는 심리이고, 여자아이 같으면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증오하는 심리를 말한다. 이런 오이디푸스적 삼각관계는 어떻게 해서 아이 마음 속에 자리하게 되는 걸까?

정신분석학에서는 그 원인을 엄마의 욕망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아이가 아버지의 남근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아이는 엄마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던 차에, 엄마에게는 없고 아버지에게는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남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남근이 바로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라고 믿게 된다. 프로이트는 모든 아이(남아와 여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기에 남근이 이처럼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보고 그 시기를 남근기(2세~6세)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시기의 아이는 남녀 성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즉 여자 생식기가 남자 생식기와 달리 몸 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설령 안다 하더라도 아이의 관심은 그런 해부학적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엄마에게 없는 것이 (그래서 엄마가 아이 자신 말고 욕망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결여한 것이 엄마가 늘 사랑과 관심을 보이는 아버지가 갖고 있는 것, 바로 남근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아이의 눈에는 그것 말고 엄마에게 없는 것은 없으니까.

여기서 유의할 점은 프로이트나 라캉이 말하는 ‘남근’은 어른들이 이해하는 ‘남자의 성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는 ‘성’이 뭔지, ‘성교’나 ‘성기’라는 것이 뭔지 아무 개념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의 남근이 아니라 ‘엄마가 욕망하는 가치 있는 것’이라는 심리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페니스’와 구별되는 ‘팔루스’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팔루스는 아이의 눈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보물과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아버지의 남근은 엄마와 아이의 최초의 결합을 분리, 해체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아이는 처음에는 엄마가 원하는 남근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믿고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엄마의 결여를 자신의 남근으로 메우려고, 그래서 아무것도 결여되지 않은 예전의 일체감을 회복하려고 시도한다(근친상간 욕망). 그러나 이런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거니와 그리 오래 가지도 못한다. ‘엄마에게서 당장 떨어지라!’ 하는 아버지의 금지 명령이 추상같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금지 명령은 비단 아버지의 입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대리자 격인 엄마나 다른 어른들의 입을 통해 반복해서 떨어진다. 더구나 그 명령은 거세(castration) 위협까지 동반한다. ‘고추를 떼버리겠다’는 위협은 엄마에게서 거세의 표식을 이미 확인한 아이로서는 심각한 위협과 공포로 다가오게 된다.

결국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금지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어머니와의 합일 그리고 그 합일이 안겨주던 만족감을 영원히 단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거세라는 상징적 과정이다. 아이는 거세 과정을 거쳐 마침내 정신적으로 엄마와 완전히 분리되고, 하나의 ‘욕망하는’ 주체로 자리잡게 된다. 아울러 인간의 세계 곧 도덕과 법의 세계의 구성원으로 진입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 맨처음 경험한, 그러나 영원히 상실하여 되찾을 수 없는, 그렇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엄마와의 행복한 일체감이다. 욕망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그 일체감을 부분적으로라도 구현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찾아 평생 헤맨다. 그러나 그 욕망을 충족시켜 줄 대상은 없다. 그것은 영원히 상실된 것이기 때문이다.
6. 인간의 성

이제 마지막으로 앞에서 제기한 몇 가지 남은 문제에 대해 개괄적으로 답변해 보자. 먼저 인간의 성적 쾌감의 문제이다. 인간의 경우 성욕 만족에서 오는 쾌감은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식욕이나 갈증 같은 자연적 욕구의 해소에서 오는 단순한 쾌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친상간 금지’라는 도덕/법에 의해 강력하게 억압된 상태에서의 성충동의 만족이기에 (라캉이 주이상스, 곧 ‘고통 속의 쾌락(pleasure in pain)’이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듯이) 비할 바 없이 자극적이고 외설적이라는 특징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 금기를 위반하는 데서 오는 쾌락은 그렇지 않은 쾌락에 비해 훨씬 더 증폭된다.

성감대의 편재성(遍在性)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생식기 말고도 신체 전반에서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유아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는 과정에서 느꼈던 사랑의 손길이 오이디푸스적 억압을 당한 뒤에도 신체 곳곳에 무의식적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감대는 영원히 상실한 어머니와의 일체감의 기억과 소망이 잠들어 있는 신체 부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성(性)이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정신적 현상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인간의 성은 기본적으로 본능적,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정신적 현상이다.

그러면 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하는 성 정체성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되풀이하지만 성 정체성은 아이가 자기 생식기를 내려다보면서 스스로 깨닫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앞서 오이디푸스 및 거세 과정을 남아 중심으로 설명했지만, ‘정상적인’ 남자아이라면 거세 이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팔루스를 소유한 아버지에 대한 존경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여자에 대한 사랑을 먼훗날로 기약하게 된다. 즉 남자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더불어 여자에 대한 이성애적 지향성을 확립하게 된다.

반면에 여자아이가 여자가 되는 길은 훨씬 더 복잡한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와 달리 생물학적으로 같은 성인 어머니가 최초의 사랑 대상이다. [* 이런 차이 때문에 정신분석학에서는 여자에게 동성애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보며, 남자 동성애를 도착증으로 보는 반면 여자 동성애는 특수한 병리 현상으로 보지 않다. 심리학적 여성의 심리구조에는 동성애적 요소가 강하게든 약하게든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다고 본다.] 그러다가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결여를 인지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니까 여자아이는 이미 거세를 경험한 상태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친다는 점에서 남자아이와 경로가 다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여자아이는 이 시기에 자신에게 없는 남근을 선망하게 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남근 대신 아기를 소망하게 된다. ‘정상적인’ 여자아이라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근친상간 금지법을 수용하고 나서 (즉 최종적 거세가 일어나고 나면) 아버지 대신 아기를 제공해 줄 남자를 기다리게 된다. 즉 여자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더불어 남자에 대한 이성애적 지향성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지 않고 이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여 좌절이나 분노를 겪게 되면 (예컨대 이 시기에 엄마가 아기를 낳음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이 자기 아닌 엄마에게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이 여자아이는 동성애자가 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아이는 이제 스스로를 아버지보다 더 남자다운 남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사랑의 대상을 이전의 어머니에게서 찾기 때문이다. 즉 성적 정체성은 아버지와 동일화하여 남자가 되지만, 성적 지향성은 여자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자의 성과 여자의 성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간략히 설명했다. 정신분석학이 성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소개하는 것이 초점이었므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성적 정체성이 어떤 과정을 거쳐 확립되는지를 이해했다면, 성적 소수자들의 다양한 성적 지향성, 나아가 갖가지 정신병리적 증상들[* 신경증(히스테리, 강박증, 공포증), 도착증(새디즘, 매조키즘, 관음증, 노출증, 페티시즘 등) 그리고 정신증(편집증, 분열증)]이 모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형성과 해소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대략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이 인간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정확히 그 역도 똑같이 성립한다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의 핵심 테제이다.

[시민대학강좌] 퇴계의 『자성록』과 일상의 마음공부

퇴계의 『자성록』과 일상의 마음공부

 

 

김정철(한국학중앙연구원)

유학에서 이해하는 마음

유학에서 마음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이번 시간에는 유학의 마음공부 경敬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경敬은 이미 『논어』 「헌문」편에서 군자의 덕목으로 언급됩니다.

 

자로(子路)가 군자(君子)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군자는 자신을 닦기를 경(敬)으로써 한다.” 자로(子路)가 물었다. “이와 같을 뿐입니까?” “자신을 닦음으로써 남을 편안하게 한다.” “이와 같을 뿐입니까?” “자기를 닦음으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하니, 자기를 닦음으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요순(堯舜)께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셨다.”

子路問君子, 子曰修己以敬. 曰如斯而已乎? 曰修己以安人 曰如斯而已乎? 曰修己以安百姓, 修己以安百姓, 堯舜其猶病諸.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 육이효六二爻에 공자가 말씀하기를 “군자가 경敬하여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워 밖을 방정하게 한다. 그리하여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德이 외롭지 않다.”

易坤之六二曰, 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

 

경敬은 유학의 마음 수양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학에서 마음을 중시하는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용』의 첫머리는 스케일이 크면서도 인간이 가야할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성性을 따르라는 말인데, 성을 따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잘 보존하고 함양해야 한다고 성리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하늘이 시키는 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中庸』 1장

 

유학자들은 마음을 매우 위태로운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위태로운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근거를 도덕적인 마음(道心)에서 찾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도덕적인 마음을 타고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마음은 위태롭고 도덕적인 마음은 미약하기 때문에 오직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기준을 가지고 중을 잡으라.”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書經』 「虞書 大禹謨」

 

– 심학도心學圖(자료 참고)

 

그냥 보면 상당히 낯설지만, 자세히 보면 유학이 왜 마음에 주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한 몸을 주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은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에도 수록되어 있는 심학도心學圖입니다. 이 그림은 이황이 직접 그린 것은 아닙니다. 심학도는 원나라 때 학자 정복심(程復心)이라는 사람이 유학의 경전에서 마음과 관련된 구절들을 정리하여 그림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정복심은 그림에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는 요점은 모두 경敬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 마음은 한 몸의 주재이고, 경은 한 마음의 주재이다. 배우는 자들은 ①주일무적主一無適의 설과 ②정제엄숙整齊嚴肅의 설, 마음을 수렴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③기심수렴-④상성성其心收斂-常惺惺의 설을 익숙하게 연구하면 공부함을 다하여 넉넉히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用工之要, 俱不離乎敬. 蓋心者, 一身之主宰, 而敬又一心之主宰也. 學者熟究於主一無適之說, 整齊嚴肅之說, 與夫其心收斂, 常惺惺之說, 則其爲工夫也盡, 而優入於聖域, 亦不難矣.

 

이 글에서 정복심은 유학에서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단 일상의 공부가 敬과 떨어져 있지 않음을 강조하고, 그 방법을 4가지로 나누어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그림 자체는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조선시대에 『심경부주』라는 책과 함께  언급되면서 선비들의 기본적인 마음 수행 교본이 됩니다. 특히 이황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경 공부를 중시했지요.

 

2. 『심경부주心經附註』와 『근사록近思錄』

경敬은 주자학의 전형적인 마음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敬을 중심으로 유학의 마음공부를 정리한 책은 앞서 보았던 『심경부주心經附註』입니다. 본래 『심경』은 중국 송나라 때 진덕수(眞德秀, 1178~1235)가 유교 경전에서 마음가짐 관련 구절들을 모아서 편집한 책입니다. 여기에 명나라 때 정민정(程敏政, 1445~1499)이 관련된 주석을 덧붙여 『심경부주』를 완성한 것입니다. 사실 주자(朱熹, 1130~1200)는 이 책을 전혀 몰랐다고 할 수 있지요. 오히려 주자가 직접 편집한 책은 『근사록近思錄』입니다. 근사近思라는 말은 『논어』 「자장」편에 나옵니다.

 

子夏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되 뜻을 독실하게 갖고, 간절하게 묻되 가까운 것부터 생각해 나간다면 인仁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子夏曰,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

 

이 구절은 공부하는 법을 말하고 있지만, 간절한 물음과 가까운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간절함은 직접적이고 가까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정말 눈앞에 보일 듯이 절실할 때 비로소 질문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가까운 생각은 바로 우리의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려보라는 것입니다. 배움이란 따로 장소가 있지 않으며,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곳에서 진행된다는 뜻입니다. 근사近思는 바로 유학의 일상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사록』은 주자가 친구인 여조겸과 함께 약 1년 동안 함께 편찬한 책입니다. 이 책을 지은 이유에 대해 주자는 서문에 “초학자들이 들어갈 곳을 모르게 될까 걱정이 되어, 학문의 대체와 관련되어 있으면서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을 선택하여 편찬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책은 주자가 직접 편찬한 유학의 기초 매뉴얼인 셈입니다.

 

3.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경敬공부

 

– 살아있는 마음, 달아나는 마음

마음은 반드시 몸속에 있어야 한다. 밖에 조금의 틈만 있어도 달아나버린다.

心要在腔子裏. 只外面有些隙罅, 便走了.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끝없이 두루 움직여 한 모퉁이에 막히지 않는다.

人心常要活. 則周流無窮, 而不滯於一隅.

 

-경敬공부의 실제

①주일무적主一無適

어떤 사람이 물었다. “경은 어떻게 공부해야 합니까?” 답했다.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좋다.” 계명이 물었다. “저는 마음의 생각이 전일하지 못한 것을 근심한 적이 있습니다. 때로 한 가지 생각을 아직 끝내기도 전에 다른 생각이 어지럽게 일어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했다. “좋지 않다. 이것은 성실하지 못함의 근원이 된다. 반드시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익숙해져서 전일하게 될 때 좋아진다. 생각할 때나 일에 대응할 때를 막론하고 모두 마음을 전일하도록 해야 한다.”1)

②정제엄숙整齊嚴肅

“엄격하고 위엄스럽고 근엄하고 삼가는 것은 敬의 道가 아니나 다만 敬을 지극히 함을 모름지기 이것(嚴威儼恪)으로부터 들어가야 한다.”2)

③상성성常惺惺

상채사씨(사량좌謝良佐)가 말하였다.“경敬은 항상 성성惺惺(마음이 깨어 있음)하게 하는 법이다.”3)

 

주자가 말했다. “성성惺惺은 바로 마음이 어둡지 않음을 이르니, 다만 이것이 곧 경敬이다. 지금 사람들은 경을 정제엄숙整齊嚴肅이라고 말하니, 참으로 옳으나 마음이 만약 어두워 이치를 봄이 밝지 못하면 비록 억지로 마음을 잡은들 어찌 경이라 할 수 있겠는가.”

朱子曰, 惺惺乃心不昏昧之謂, 只此便是敬. 今人, 說敬以整齊嚴肅言之, 固是, 然心若昏昧, 燭理不明,  雖强把捉, 豈得爲敬.                        『心經附註』 「敬以直內」장

 

4. 퇴계 이황의 일상과 경敬

–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

이황은 조선에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걸출한 학자입니다. 당시 조선은 유학 곧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출발했으나, 이때는 토착화하기 전이었지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士林들은 개혁을 시도했으나 이황의 나이 19세(1519년) 때 발생한 기묘사화로 개혁세력은 완전히 제거됩니다. 이황은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에 힘써 최고의 성리학자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학문에 대한 독실한 태도가 뒷받침되었습니다. 그는 나이에 상관없이 학문을 논하고 의견을 수정해나갔는데, 고봉 기대승과의 논쟁이 이러한 이황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또 이황은 사상적인 업적 뿐 아니라 제자 양성에도 매우 충실했던 교육자였다. 다음 시는 교육자로서의 자부심과 과거공부 위주로 돌아가던 당시의 풍경을 잘 보여줍니다.

 

늙도록 경서 연구하여 도를 듣지 못했으나 / 白首窮經道未聞

다행히 여러 서원 사문을 창도하였네 / 幸深諸院倡斯文

어찌 과거의 물결 온 바다를 뒤흔들어 / 如何科目波飜海

쓸데없는 나의 시름 구름처럼 부풀리나 / 使我閒愁劇似雲

 

-이황의 일상과 마음공부

① 이황이 말하는 일상- 끝없는 일들의 연속

이른바 널리 행해지는 일상생활이란 천 가닥 만 가지 갈래이어서 진실로 끝이 없습니다. 어버이를 섬기는 일로부터 만사 만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단하니, 이렇게 끝없이 다단한 것을 일일이 흡족하게 하는 것은 궁리와 거경의 지극한 공력이 없으면 끝내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의 학문하는 것을 보면 비록 밤낮으로 조심하고 노력하여 한 순간의 틈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4)

② 마음의 주인 되기의 중요성

마음은 사물이 이르기 전에 맞이해서도 안 되고, 사물이 사라진 뒤에 따라가서도 안 된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집주인이 항상 집에 머물며 주관이 되어서 집안일을 맡는다고 하자. 우연히 손님이 바깥에서 왔을 때 자신이 문정門庭에서 맞이하고, 떠날 때도 문정에서 전송한다면, 날마다 손님을 맞이하고 전송하더라도 집안일에 어떤 방해가 있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동서남북에서 손님이 어지럽게 올 때마다 직접 자신이 문정을 떠나서 멀리서 영접하고 가까이서 접대함을 쉬지 않고 분주하게 하며, 떠날 때 전송도 이렇게 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기 집은 도리어 주관할 사람이 없게 되어, 도적들이 들끓어 부서지고 황폐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딱한 일이겠는가?5)

③ 자연을 벗 삼아 즐기고 노래하는 일상

강산江山과 풍월風月은 천지 사이에 있는 공적인 것이다. 보고도 감상할 줄 모르는 자가 많다. 때로는 경치 좋은 곳을 차지하여 자기의 사유물로 아는 자가 있는데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6)

 

말을 타고 길을 갈 때 정서와 경치가 여기에 있다고 하자. 입으로 사물을 읊조리는 것은 이 몸과 마음이 사물을 응접하는 일이다. 경敬을 주로 하는 방법과 어찌 모순됨이 있겠는가? 독서할 때는 마음이 독서에 있고, 옷을 입을 때는 옷을 입는 일에 마음이 있는 것과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7)

<주석>

1) 或曰敬何以用功, 曰莫若主一. 季明曰昞嘗患思慮不定, 或思一事未了, 他事如麻又生, 如何. 曰不可. 此不誠之本也, 須是習, 習能專一時便好. 不拘思慮與應事, 皆要求一. 『近思錄』 「存養」

2) 曰 “嚴威儼恪, 非敬之道, 但致敬, 須從此入.” 『心經附註』 「敬以直內」장

3) 上蔡謝氏曰, “敬是常惺惺法.”

4) “但所云流行日用者, 千條萬緖, 儘無窮, 自事親以及萬事萬物, 儘多端, 以無窮處多端, 一一恰好, 非窮理居敬之極功, 卒難致之. 故觀古人爲學, 雖乾乾惕厲, 靡容一息之間斷.”

5) 來不迎, 去不追, 比如一家主人翁, 鎭常在家裏, 做主幹當家事, 遇客從外來, 自家只在門庭迎待了, 去則又不離門庭, 以主送客, 如是, 雖日有迎送, 何害於家計? 不然, 東西南北, 客至紛然, 自家輒離出門庭, 遠迎近接, 奔走不息, 去而追送, 亦復如是, 自家屋舍, 卻無人主管, 被寇賊縱橫打破蕪沒, 終身不肯回頭來, 豈不爲大哀也耶?     『退溪先生文集』, 卷28

6) 江山風月, 天地間公物, 遇之而不知賞者滔滔. 其或占勝, 而認爲一己之私者, 亦癡矣. 『退溪先生文集』, 卷23

7) 乘馬行路, 情境在此, 口占詠物, 卽此身心所接之事, 何疑於主敬之法乎? 此與讀書時在讀書, 著衣時在著衣者, 不見其有異也.  『退溪先生文集』, 卷28

 

 

[도봉도서관 강의]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1)

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1)

 

김우철(호원대 외래교수)

 

1. 자연의 성과 인간의 성

모든 생명체에게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 본능적 욕구가 있다. 하나는 식욕이고 다른 하나는 성욕이다. 식욕이 자신의 생명을 잘 유지하기 위한 욕구라면 성욕은 자신이 언젠가 죽더라도 그 전에 자신의 분신(유전자)을 남겨놓으려는 욕구이다. 그러므로 식욕이 개체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생존’ 욕구라면, 성욕은 개체의 생명을 증식하려는 ‘생식’ 욕구이다.

두 욕구는 생명체의 기본적인 욕구이므로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 말할 수 없다. 둘 다 생명 그 자체의 본성이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배불리 먹고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과 짝을 찾아 가족을 이루는 문제는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요소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의 두 측면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에게는 금세 한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식욕은 별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성욕 또는 성이다. 우리는 왜 ‘성’ 또는 ‘성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 자신도 모르게 불편해지고 민망해지는 것일까? 종족을 번식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기는커녕 모든 생명체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고, 나아가 매우 중요한 과제인데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성기’, ‘성교’, ‘성감대’ 같은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을 불편해 하는 것일까?

사실 성욕이 모든 동물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성욕만큼은 다른 동물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대단히 특이한 점을 많이 갖고 있다. 첫 번째 꼽을 수 있는 점이 바로 ‘생식’ 이외의 목적으로, 즉 쾌락(즐거움) 자체를 위해 성욕이 일고 성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생식’을 위한 욕구나 행위가 ‘생식’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셈이다. 그래서 인간은 피임도구를 사용하여 성행위를 하고, 특별한 발정기 없이 1년 열두 달 성행위를 하며, 신체 전부가, 그러니까 성기 말고도 입, 젖가슴, 항문, 귀, 목, 발 등의 다른 용도의 신체기관까지 모두 성적 쾌락을 위한 성감대로 바뀌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동물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흔히들 보통 사람들과 다른 특이한 성적 취향과 행위를 보이는 사람을 ‘변태’라고 부르지만, 자연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 자체가, 인간 전체가 ‘변태’인 셈이다.
 

2. 본능과 문화 사이에서

프로이트(S. Freud)로부터 라캉(J. Lacan)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의 흐름에서는 인간의 성을 순수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 본능적 요소가 모종의 정신 문화적 과정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변형된 결과라고 본다. 그러므로 ‘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라는 성적 정체성(sexual identity)의 문제와 ‘누구를 사랑(욕망)할 것인가?’라는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의 문제는 그 변형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경우 성적 주체와 성적 대상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신생아는 신체적으로는 남자 아니면 여자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신체의 차이가 마음의 차이를 저절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동물의 경우는 개체의 성장 이전이나 이후를 본능이 일관되게 지배하므로 신체적 성구분과 성적 지향성 사이에 간극이나 괴리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심리적’ 성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인간의 성을 이해하려면 이 점부터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성은 본능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다.

출처/ www.critical-theory.com

출처/ www.critical-theory.com

개인의 성적 특징, 곧 성적 정체성(: 주체)과 성적 지향성(: 대상)은 이른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발생과 해소라고 부르는 과정(일종의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결정된다. 인간이 태어났다고 해서 바로 ‘인간’이 되는 게 아니다. 몸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더라도 정신은 아직 사회 속에서 살아갈 문화적 소양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화적 능력은 기본적으로 언어 능력과 도덕/법 능력이다. 우선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떠받치는 토대이기에 언어를 모르고는 과학적 사고나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현재 우리가 지각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를 지각할 수조차 없다. 언어는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지표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할 뿐 아니라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언어가 있기에 도덕과, 법, 종교, 예술, 과학이 모두 가능해진다.

도덕/법 역시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결정적 지표이다. 단순히 ‘이롭다’와 ‘해롭다’의 구별이 아닌 ‘옳다’와 ‘그르다’, ‘선’과 ‘악’의 구별은 인간에게만 있는 현상이다. 인간은 본능만으로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도덕과 법, 윤리와 가치를 내면화하고 준수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언어 능력과 도덕/법 능력이 본능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아기의 신체와 두뇌 속에 생물학적으로 저절로 유전되고 전승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개인은 태어나면 이 두 가지 능력을 학습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아기의 부모는 그들이 속해 있는 보편적 문화의 대리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부모들과 생각과 행동이 다른 특수한 부모들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 성의 모든 비밀이 바로 이러한 특정한 부모 밑에서 특정한 아기가 언어와 도덕/법을 교육받는 과정 속에서 결정된다고 본다. 아기의 성(性)은 이 과정에서 과연 어떤 일을 겪는 것일까?

 
3. 정신적 미분리

아기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엄마다. 아기는 아빠의 정자와 엄마의 난자의 결합인 수정란으로 태어나지만,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수정란은 어디까지나 엄마 몸의 일부로만 존재할 수 있다. 엄마 몸 속에서 엄마 몸의 일부로 9개월여를 지내고 나야 비로소 엄마 몸으로부터 신체적으로 분리된다.

그런데 아이가 탯줄을 끊고 바깥세상으로 나왔다고 해서 엄마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아기는 눈도 못 뜨고 목도 가누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무능하기 때문에 엄마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아기의 생존을 돌봐야 한다. 먹여 줘야 하고 따뜻하게 해 줘야 하고 배설을 잘 하도록 보살펴야 한다. 아이는 엄마와 몸이 분리되어 있긴 하지만, 어떤 면에선 여전히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정신적인 면에서 그렇다.

이제부터 우리는 말도 못하고 생각할 줄도 모르는 아기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지 아기의 마음 속으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아이는 눈도 뜨지 못하고 목도 가누지 못할 뿐 아니라,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엄마인지도 모른다. 이 같은 자기 의식과 대상 의식은 언어를 어느 정도 습득하고 나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고차적 인식 능력이다. 아이의 정신은 맨처음에는 백지와도 같아서 아무것도 구별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이 하나로 뒤엉켜있는 ‘혼돈’으로부터 시작한다.

아이는 정신적으로는 백지 상태이지만, 물론 신체적으로는 최소한의 기능을 갖고 있다. 아이는 배가 고프면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지르고 목청껏 운다. 그러면 엄마의 젖가슴이 바로 입 속으로 들어오고 세상에 둘도 없는 달콤한 먹거리가 제공된다. 아이가 눈을 뜰라치면 앞에는 늘 다정한 두 눈빛이 빛나고 있고, 또 부드러운 목소리가 끊임없이 아이의 귓전을 맴돈다. 그뿐이 아니다. 엄마는 아이를 꼭 껴안고 입맞춰 주며, 기저귀를 갈거나 목욕을 시키면서 아이의 온몸을 끊임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준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이런 경험 속에서 (엄마의) 젖가슴, 시선, 목소리, 입술, 손길 등을 자기 자신과 구별하지 못한 채 그저 ‘하나의’ 일체로 느낀다는 점이다. 즉 엄마와 자신을 구별할 능력이 없기에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엄마로부터 분리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의 정신은 언제, 어떻게 엄마로부터 분리되는 것일까?

[시민대학강좌] 정도전의 『불씨잡변』과 유학

정도전의 『불씨잡변』과  유학

 

김정철(한국학중앙연구원)

 

1. 정도전의 불교비판 배경

– 시대배경

불교는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1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반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다양한 변신을 거듭하며 토착화되어 있었지요.

어떤 나라든, 망할 무렵이 되면 각종 폐단이 드러납니다. 고려 말기에 나타난 불교의 폐단은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본래의 정신에서 벗어나 토지를 겸병하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불교는 더 이상 제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신진사대부들은 이런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대안으로 유학, 정확하게 말하면 성리학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위진남북조와 수-당대를 거친 뒤 송나라 때 성리학이 성립하던 배경과도 유사합니다. 성리학 역시 불교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지만, 성리학자들은 강력하게 불교를 배척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주자의 학문은 이러한 노력의 종합적인 결실이었던 것이지요. 특히 남송 시대에 주자는 당시 정신적인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군사적으로 거란과 여진에게 밀려 송나라가 남쪽으로 쫓겨나고, 사상적으로는 불교의 위협을 받고 있었지요.

그럼에도 정작 성리학은 송나라 때에는 크게 유행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거짓학문으로 몰려 위기에 처할 정도였으니까요. 성리학은 송나라를 지나 원나라 때 전체적으로 정리되면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고려의 신진사대부들이 본격적으로 접한 성리학은 바로 원나라 때 정리되었던 성리학이었죠.

주자를 비롯한 학자들이 불교를 강력하게 비판했던 이유는 단순히 이단을 배척하고자 했던 의지 뿐 아니라, 실제로 당시 사회 전반에 불교가 유행하고 있었고 폐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폐단을 눈앞에서 봐야만 했던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이 이런 배경을 지닌 성리학에 주목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2. 『불씨잡변』 읽기

① 불씨잡변?

부처의 잡소리? 부처의 여러 주장에 대한 비판!

– 1398년 정도전이 죽기 몇 달 전에 저술한 마지막 작품.

유학자 정도전의 면모를 이론적으로 살펴볼 수 있음.

②윤회론 비판

– 유학의 입장을 대변하다

“사람과 만물이 생겨나고 또 생겨나 그치지 않는 것은 바로 천지의 조화가 운행하여 그침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태극에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어서 음양이 생겨났고, 음양이 변하고 합함에 따라 오행이 갖추어졌다. 무극과 태극의 참됨과 음양오행의 정수가 묘하게 합하여 엉기면서 사람과 만물이 계속 생겨나고 생겨난다. 이렇게 이미 생겨난 것은 가서 지나가버리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와서 계속 이어지니, 이 가는 것과 오는 것 사이에 한순간의 정지도 용납되지 않는다… 하늘과 땅 사이는 거대한 용광로와 같아서 만물을 낳기도 하지만, 만물이 모두 녹아 없어지기도 한다. 어떻게 이미 흩어진 것이 다시 합하여지며, 이미 간 것이 다시 올 수 있겠는가?”1)

– 정도전의 윤회설 비판

부처는 “사람은 죽어도 그 정신은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다시 몸을 얻어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윤회설이 흥기했다…불교의 윤회설에서 보면 혈기가 있는 모든 것은 스스로 정해진 수가 있어 오고 또 가고, 가고 또 가도 그 총합은 다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이 창생하는 것이 도리어 농부가 이익을 내는 것보다 못하게 된다. 또 혈기를 가진 생물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조수 어별 곤충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수에 일정함이 있다면 이것이 늘어나면 저것은 반드시 줄어들고 이것이 줄어들면 저것은 반드시 늘어날 것이며, 일시에 다 줄어들 수도 없고 늘어날 수도 없을 것이다.2)

– 불교의 입장

불교에 따르면 인간은 흙, 물, 불, 바람(地水火風) 4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또 육체를 지니면서 감정을 느끼고 생각을 하며,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식별해낸다. 이것을 ‘오온(五蘊)’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죽으면 그 정신은 없어진다. 다만 오온만이 남아 이것이 이전 생에 지은 업(業)의 힘에 따라 다음 생에 전달될 뿐이다. 불교는 유교와 세계관이 다르다. 이 세상에만 생물들이 있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세계는 훨씬 넓기 때문이다.

③ 불교의 인과론-업보(業報) 비판

– 어떤 이의 질문

“그런데 사람 중에는 지혜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어질지 않고, 가난하고 부유하고, 고귀하고 비천하고, 장수하고 요절하는 차이가 있네… 하늘이 만물을 낳음에 하나하나에 명을 부여함이 어찌 이렇게 치우쳐서 고르지 못할까? 이로써 보면, 살아있을 때 지은 선악의 업에 보응이 있다고 한 부처의 말에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3)

– 정도전의 반박

“불교의 주장처럼 화복과 질병이 음양오행과 관계없으며 모두 인과적 응보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우리 유가의 음양오행 이론을 버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설로 사람의 화복을 예측하고 치료하는 사람이 어째서 한 사람도 없는가? 불교의 주장이 황당하고 오류투성이어서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아직도 미혹되어 있는가?”4)

– 유학에 다시 질문하기

유학에서 음양오행에 따라 설명하는 방식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겪는 불평등과 모순을 음양오행의 순환에 따른 우연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유학에는 이러한 불균형을 맞출 수 있는 자기수양을 강조하는 것이다. 똑같이 선한 본성을 타고났지만, 기질의 차이로 각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유학자들은 본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기질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④ 불교의 자비를 비판하다.

– 유학의 입장을 대변하다

“인(仁)의 마음은 육친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람과 사물에까지 순차적으로 베풀어진다. 이는 흐르는 물이 첫 번째 웅덩이에 가득 찬 후에야 둘째, 셋째 웅덩이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그 근본이 깊으면 그 미치는 바도 심원하다. 나의 인애가 미치지 않는 천하의 사물은 없다.”5)

– 불교를 비판하다

“하지만 불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동물에 대해서는 승냥이나 호랑이 같은 맹수나 모기 같은 미물에 자기 몸을 뜯어 먹혀가면서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가리지 않고, 배고픈 자에게는 밥을 먹이려 들고, 추위에 떠는 자에게는 옷을 입히려 드니, 이른바 보시(布施)이다. 그런데 부모 자식 같은 지극히 가까운 관계나, 군신같이 지극히 공경하여야 할 관계에 대해서는 반드시 끊어버리려 하니, 과연 이것이 합당한가?… 자기 부모형제 보기를 길 가는 모르는 사람 보듯이 하고, 공경해야 할 바를 쓸모없는 것 대하듯이 하니, 이미 그 근본을 잃어버린 것이다.” 6)

⑤ 불교가 인륜을 훼손하는 것에 대해 논변함.

명도선생이 말씀하셨다. “도 밖에 사물이 없고 사물 밖에 도가 없다. 하늘과 땅 사이 어디를 가도 도가 없는 곳이 없다. 부자(父子) 간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친함에 도가 있고, 군신(君臣) 간에는 군주와 신하의 구별이 엄격함에 도가 있다. 부부와 장유와 붕우 간에도 각각의 도가 있으니, 도는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불도가 인륜을 훼손하고 사대(四大-불교에서 말하는 수상행식受想行識)를 버리니, 도에서 떨어져 멀어졌다고 하겠다.” 또 “그들의 말과 행위가 두루 미치지 못함이 없지만, 실제로는 윤리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하였으니, 선생의 지적이 지극히 옳다.7)

– 정도전의 입장에서 보다

이 글은 정도전이 확고한 주자학자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배의 글을 인용하여 자신의 설에 힘을 보태는 것은 유학자의 오래된 전통이기도 합니다. 불교가 인륜을 무너뜨린다는 비판은 유학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했습니다. 유학자에게는 지금 보이는 현실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당연히 깨달음을 얻고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를 해야 하는 불교의 모습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3. 『불씨잡변』의 의미와 한계

『불씨잡변』은 당시에 불교를 가장 체계적으로 비판했던 책이었지만, 완벽한 이론비판서는 아니었습니다. 불교가 생겨나게 된 역사적인 맥락을 무시하거나 이론적인 비판에는 무리한 부분이 있었죠. 그렇다고 해서 정도전의 비판과 개혁정신을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씨잡변』은 현실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와 열정이 낳은 결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정도전은 불교에 정통한 사상가가 아니라, 철저한 유학자이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분투했던 사람이었죠. 그가 지적했던 불교의 문제점들은 모두 현실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전개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1) 人物之生生而無窮, 乃天地之化, 運行而不已者也. 原夫太極有動靜而陰陽生, 陰陽有變合而五行具. 於是無極太極之眞, 陰陽五行之精, 妙合而凝, 人物生生焉. 其已生者往而過, 未生者來而續, 其間不容一息之停也…天地間如烘爐, 雖生物, 皆銷鑠已盡, 安有已散者復合, 而已往者復來乎.

2) “佛之言曰, 人死精神不滅, 隨復受形, 於是輪廻之說興焉…今以佛氏輪廻之說觀之, 凡有血氣者, 自有定數, 來來去去, 無復增損, 然則天地之造物, 反不如農夫之生利也. 且血氣之屬, 不爲人類則爲鳥獸魚鼈昆蟲, 其數有定, 此蕃則彼必耗矣, 此耗則彼必蕃矣. 不應一時俱蕃, 一時俱耗矣.”

3) “或曰, 子言人物皆得陰陽五行之氣以生, 今夫人則有智愚賢不肖, 貧富貴賤壽夭之不同…天之生物, 一賦一與, 何其僞而不均如是耶.  以此而言釋氏所謂生時所作善惡, 皆有報應者, 不其然乎.”

4) “信如佛氏之說, 則人之禍福疾病, 無與於陰陽五行, 而皆出於因果之報應, 何無一人捨吾儒所謂陰陽五行, 而以佛氏所說因果報應, 定人禍福, 診人疾病歟? 其說荒唐謬誤無足取信如此, 子尙惑其說歟.”

5) “仁心之所施, 自親而人而物, 如水之流盈於第一坎而後達於第二第三之坎, 其本深, 故其及者遠. 擧天下之物, 無一不在吾仁愛之中.”

6) “佛氏則不然, 其於物也, 毒如豺虎, 微如蚊蝱, 尙欲以其身餧之而不辭, 其於人也, 越人有飢者, 思欲推食而食之, 秦人有寒者, 思欲推衣而衣之, 所謂布施者也. 若夫至親如父子, 至敬如君臣, 必欲絶而去之, 果何意歟?…視至親如路人, 視至敬如弁髦, 其本源先失.”

7) “明道先生曰, 道之外無物, 物之外無道, 是天地之間, 無適而非道也. 卽父子而父子在所親, 卽君臣而君臣在所嚴, 以至爲夫婦爲長幼爲朋友, 無所爲而非道,  所以不可須臾離也. 然則毀人倫去四大, 按四大受想行識, 其分於道遠矣. 又曰, 言爲無不周徧, 而實則外於倫理, 先生之辨盡矣.”

 

 

[시민대학강좌] 공자의 『논어』와 일상

공자의 『논어』와 일상

 

김정철(한국학중앙연구원)

 

1. 일상 언저리의 사상, 유학

한 번이라도 『논어論語』를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합니다. 경전이라고 알고 읽었는데, 별로 경전답지 못하다는 반응도 있고, 주로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다면서 시시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논어』는 왜 경전이 되었을까요? 바로 유학에서 성인(聖人)으로 높이는 공자의 행동과 가르침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선비들은 『논어』를 읽으면서 성인의 가르침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논어』에서는 공자가 제자들과 예禮, 정치, 경제부터 음악과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해 묻고 답하고 있습니다. ‘논어論語’라는 제목 자체가 묻고 답하는 형식의 어록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간단히 공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공자는 약 기원전 6세기 춘추시대 말기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거의 2500년 전에 살았던 셈이지요. 노魯나라 곡부 창평향昌平鄕 추읍鄹邑에서 태어난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 위나라 등을 떠돌다가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아버지 숙량흘은 지역의 낮은 관리였고, 어머니 안顔씨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고 전해집니다. 좋은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란 사람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공자는 키가 9척 장신에 머리모양이 울퉁불퉁했다고 합니다. 공자의 이름이 구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자는 중니仲尼로 그가 둘째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는 재정을 담당하는 벼슬(委吏) 등을 지내기도 했지만 공자는 무엇보다 배우고 익혀서 다양한 제자들을 길러내는 역할에 충실했던 좋은 선생님이었습니다. 논어의 처음도 배움에 대한 예찬으로 시작됩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또 공자는 스스로 자신의 일생을 몇 마디 말로 요약하기도 합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學問)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스스로 섰고(自立), 마흔 살에 의혹(疑惑)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天命)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고, 일흔 살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法度)를 넘지 않았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

이 부분은 얼핏 나이가 듦에 따른 깨달음의 과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성인으로 불리었던 사람이었지요. 아마 누구나 이렇게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지요. 이미 성인의 경지에 있었던 공자가 굳이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이야기한 이유는 제자들에게 나아갈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일상과 일생에 비추어 생각해봐도 이 구절은 쉽게 지나칠 부분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목표를 정하고 꿋꿋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며 살고 있는지 반성해 볼 기회를 주고 있지요. 천명을 안다는 말이나 귀가 순해진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에는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능력은 아닙니다.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각각의 성격과 상황에 맞는 가르침을 주었던 이유는 일상 속에서의 배움과 노력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2.  <논어>속의 일상 직접 읽어보기

– 도道는 일상 속에 있다.

중궁이 인仁에 대해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집 문을 나가서는 큰 손님을 대하듯 하고,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하고,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야 한다. 나라에 있어서도 원망이 없고 집에 있어서도 원망이 없어야 한다.” 중궁이 대답하였다. “제가 비록 명민하지 못하지만, 이 말씀을 실천해보겠습니다.”

仲弓問仁, 子曰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 仲弓曰雍雖不敏, 請事斯語矣.

인仁은 공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인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잘 모르겠다는 말도 하지요. 대신 구체적인 예를 통해 인이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바로 위 인용문이 대표적입니다. 집 문을 나서고, 백성을 다스리며,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은 모두 선비의 일상에 해당합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집 밖으로 나가 각자 일을 하고, 사람들과 만나 어울리는 일이 모두 일상에 해당하겠지요. 공자는 이러한 일상 곳곳에서 인仁을 실천하라고 가르칩니다.

큰 손님 대하듯이 한다는 말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함을 나타내고, 제사를 받드는 태도는 엄숙하고 신중해야 하죠.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은 논어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입니다. 역지사지의 태도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일상의 모든 공간이 인仁의 실천 무대인 셈이지요. 공자는 인仁의 경지를 특별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도 계승됩니다. 하지만 제자들 사이에도 생각의 차이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차이는 다음 인용문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자유가 말하였다. “자하의 문인 젊은이들은 물 뿌리고 쓸며 대답하고 답변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을 담당하면 잘 한다. 그러나 지엽枝葉(사소한 일)이니, 근본을 보면 볼만한 것이 없다. 어찌할꼬?”

子游曰, 子夏之門人小子, 當灑掃應對進退, 則可矣. 抑末也, 本之則無, 如之何?

자하가 이를 듣고 말하기를, “아, 자유가 지나치구나! 군자의 도가 무엇을 우선하여 전할 것이며, 무엇을 나중으로 미루어 게을리 하겠는가? 초목에 비유하면, 구획을 그어 구별하는 것과 같으니, 군자의 도가 어찌 속임이 있겠는가? 처음도 있고 끝도 있는 사람은 아마 성인이시겠지.”

子夏聞之曰, 噫. 言游過矣. 君子之道, 孰先傳焉, 孰後倦焉? 譬諸草木區以別矣, 君子之道焉可誣也? 有始有卒者, 其惟聖人乎.

‘물 뿌리고 쓸며 대답하고 답변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은 유학자들의 매우 기초적인 행동수칙입니다. 주로 처음 학문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교육하는 내용이었지요. 자하는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을 실천을 강조했지만, 자유는 자하의 제자들이 시시하고 사소한 일에 얽매여 근본에 다가서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학에서는 일상의 사소한 일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자하는 자유의 지적을 정면으로 받아칩니다. 일상의 사소한 일과 근본(道/仁)의 체현은 선후를 나눌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런 공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길을 넓히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子曰, 人能弘道, 非道弘人.

도(道)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일상과는 거리가 먼 근본적인 원리 혹은 진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도의 실천은 오직 사람을 포함한 사물들을 통해야만 가능합니다. 공자의 말은 바로 실천의 주체인 사람을 강조한 것이죠. 일상의 실천을 벗어나지 않는 공자의 가르침은 유학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중국의 풍우란(풍우란)이라는 학자는 다음과 같은 『중용』의 구절을 인용하여 유학의 핵심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군자(君子)는 덕성(德性)을 높이고 학문(學問)으로 말미암으니, 광대(廣大)함을 지극히 하고 정미(精微)함을 다하며, 고명(高明)을 다하고 중용(中庸)을 따르며, 옛 것을 잊지 않고 새로운 것을 알며, 후(厚)함을 돈독히 하고 예(禮)를 높이는 것이다.

君子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 敦厚以崇禮.

이 문장에는 일종의 대구가 있습니다. ①덕성(德性)을 높이고 학문(學問)으로 말미암으니, ②광대(廣大)함을 지극히 하고 정미(精微)함을 다하며, ③고명(高明)을 다하고 중용(中庸)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덕성은 하늘이 부여해준 선한 본성을 뜻합니다. 학문은 배우고 익히는 학습의 과정이지요. 유학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②와 ③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무엇이 광대하고 정미하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길(道)을 뜻합니다. 이 길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야할 길이고, 끝없이 펼쳐져 있기에 광대합니다. 하지만 직접 이 길을 걷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한발씩 내딛는 순간순간의 노력이 필요하겠죠. 이것을 정미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③도 비슷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풍우란은 불교, 도교와 비교하면서 일상을 떠나지 않으면서 근본적인 원리(道)를 추구하는 것이 유학의 특징이라고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유학은 일상의 철학이며 사상인 셈입니다.

 

 

제9장 잉여가치율[자본론강독]-19

제9장 잉여가치율[자본론강독]-19

정리 : 신준하

제3절 시니어의 ‘최후의 한 시간’

 

◯ 시니어의 주장 – 노동시간 단축 투쟁에 대한 반대 논리 개발이 목적

1일 노동시간= 11시간=시간

시간 : 단순히 자본을 보존, 시간 : 공장과 기계설비 마멸분 보상

시간 : 순이윤 생산, 마지막 1시간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비로소 이윤이 생산된다.

따라서 작업시간을 시간 늘리면 순이윤은 2배이상 늘어나고, 작업시간을 1시간만큼 줄이면 총이윤이 사라져버린다.

전체 노동시간

단순 자본(공장, 기계 등) 보존시간 순이윤 생산시간

 

노동시간을 늘려 순이윤 생산시간을 늘리면 이익이 늘어나고,

노동시간을 줄여 순이윤 생산시간이 줄어들면 이익이 없어진다.

◯ 마르크스의 반론

1)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고정자본 투입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재생산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 에 손해 보는 만큼 이익이다.

2) 노동자는 전체 노동시간을 통해 가치를 생산한다.

∵잉여가치율이 100%라면, 5시간동안 임금생산, 5시간동안 이윤 생산,

(5시간은 11시간의 절반), 시니어에 의하면 2시간동안 임금과 순이윤 생산,

그러나 1시간 만에 5시간 만큼의 임금 및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는 없다.

즉, 단순한 자본의 재생산 시간도 결코 낭비가 아니다. 노동이 아니면 면화는 면사로 전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보는 현상은 마지막 2시간에 임금과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지만, 본질은 11시간 전체가 마지막 2시간에 체현되어 있을 뿐이다.

3) 노동시간이 증가하면 증가한 만큼 이윤율이 배로 증가하지는 않는다.

11시간에서 13시간으로 증가, 증가분 1시간이 모두 잉여노동에 합쳐진다고 해도(모두 합쳐질 수는 없다, 늘어난 노동시간만큼 고정자본도 소모되므로) 잉여가치율이 100%에서 200%로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126%로 늘어날 뿐

4) 노동시간이 줄어든다고 해서 총이윤이 사라지진 않는다. – 3)의 경우와 같음

 

제4절 잉여생산물

잉여생산물 : 생산물 중 잉여가치를 대표하는 부분

잉여가치율≠잉여생산물/총생산물, 잉여가치/자본총액 , = 잉여가치/가변자본

잉여생산물의 상대적 크기 ≠ 잉여생산물/총생산물 , = 잉여생산물/필요노동을 표시하는 생산물

자본주의의 목적은 잉여가치의 생산, 따라서 부의 크기는 총생산물이 아니라 잉여생산물의 상대적 크기에 의해 측정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