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 강좌]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11월 6일 개강)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11월 6일 개강

 
니체, 푸코, 들뢰즈 등 12명의 현대철학자

 
“나는 너무 일찍 왔다. 아직 나의 때가 오지 않았다. 우리가 신을 죽인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방황 중이다. 이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니체는 탄식했다. 19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그는 1900년, 20세기의 문이 열리기 직전에 세상을 떴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일찍 온 21세기의 철학자였다.

20세기 초반,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로 이성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했던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파시즘을 쓰라리게 겪었다. 이 잔혹한 경험으로 인해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확신이 흔들렸다. 이 믿음은 이제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 믿음에는 본래부터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니체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그의 때가 온 것일까?

생철학, 실존철학, 현상학, 윤리학, 해체론, 후기구조주의 등으로 불린 이질적인 사조들이 니체라는 샘에서 물을 길어 올렸다. 니체가 ‘내 말은 귀를 갖지 못했구나!’라고 탄식했지만 20세기에 그가 한 말의 ‘귀’들이 수도 없이 출현했다. 우리는 니체의 말과 그 ‘귀’들을 새로이 읽으며 서양 현대 철학사를 다시 쓰고자 한다.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팍팍한 우리 사회는 사람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자유와 삶의 근거를 갈망하며 새로운 소리를 손으로 더듬거리고만 있다.

그런 사람들의 손을 잡고자 니체 계열의 사상가 열두 명의 향연을 마련하고자 한다. 니체를 비롯해서 쇼펜하우어, 베르그송,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화이트헤드,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데리다, 레비나스, 푸코, 들뢰즈까지 열두 명의 철학자들이 들려주는 삶의 노래에 여러분을 초대하니 이 노래를 가슴으로 듣기를 희망한다.

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진행하는 의 3번째 강좌가 오는 11월 6일 시작됩니다. 지난해 시작된 이 강좌 시리즈는 지금까지 2차례의 서양근대철학사 강좌(10강 및 8강)와 마르크스주의사상사 강좌(16강)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니체를 비롯한 현대 철학자 12명의 사상을 통해 현재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관심 있는 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강좌 : 우리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일시 : 2012년 11월 6일 ~ 12월 18일 까지(11월 27일 휴강) , 2013년 1월 8일 ~ 2월 12일 까지 (매주 화요일, 12강)
-시간 : 오후 7시30분-10시
-장소 : 서울 마포구 서교동 민족의학연구원 2층 강당(약도 참조)
-수강료 : 24만원(커플 수강료: 36만원, 두 분이 함께 신청하실 경우) 개별 강의 수강료는 3만원
-수강 신청: 수강료를 계좌로 입금 하신후 이메일 혹은 전화연락을 주시면 등록이 가능 합니다. (계좌 : 국민은행, 292501-01-121940, 예금주 프레시안)
-강의 문의 및 수강신청 연락 : admin@pressian.com(문의 02-722-8546 민정훈)으로 부탁드립니다.

-강의실 약도

 

◆ 강의실 찾아오는 방법 : 지하철 2호선 합정역 2번출구로 나와 뒤돌아보면 빵집과 옆으로 샛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10분정도 걸어오면 왕복 4차선 도로가 나옵니다. 거기서 편의점이 있는 오른 쪽으로 30M 지점에 태복빌딩(민족의학연구원)이 있습니다. 그 건물 2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강의 일정
1강 : 11월 6일 쇼펜하우어: 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박은미, 건국대 교양학부 강의교수)

2강 : 11월 13일 니체: 중심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가치 창조의 철학자 (연효숙, 연세대 외래교수)

3강 : 11월 20일 베르그송: 직관, 즉 내재적이고 심층적 의식의 생성과 변전으로서 권능 – 신비주의자, 권능의 구현자 (류종렬, 창원대 외래교수)

4강 : 12월 4일 하이데거: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을 다시 묻다 – 니힐리즘의 극복시도, 그리고 나치즘 (서영화,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5강 : 12월 11일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 언어와 삶 (김성우,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6강 : 12월 18일 화이트헤드: 존재의 계보 – 화이트헤드의 발생학적 생성 (최종덕, 상지대 교수)

7강 : 2013년 1월 8일 사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존재와 무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

8강 : 1월 15일 메를로퐁티: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화가의 시선과 몸 (조광제, (사)철학아카데미 운영위원)

9강 : 1월 22일 데리다: 해체란 무엇인가 – 글쓰기와 차이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

10강 : 1월 29일 레비나스: 타자의 얼굴과 환대의 윤리 (문성원, 부산대 교수)

11강 : 2월 5일 푸코: 근대 이성의 본질을 폭로하다 – 광기, 권력, 폭력 (박민미, 대진대 외래교수)

12강 : 2월 12일 들뢰즈 : 들뢰즈의 반복과 영원회귀 (김범수,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다음은 강사 선생님들이 미리 밝히는 강의 요지입니다

1. 쇼펜하우어: 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로 분류되지만 정작 자신은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았던 철학자이다. 니체는 허무주의자로 이해되기는 하지만 운명애를 말하는 철학자이다. 쇼펜하우어와 니체, 닮은 듯 다른 두 철학자는 모두 삶을 부정하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삶을 긍정해낼 방법으로 각각 동고(同苦, 고통을 함께 함)와 운명애를 주장한다. 두 사람 모두 이성이 아닌 의지에 주목했는데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부정을. 니체는 의지의 긍정을 주장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관조하는 자’가 될 것을, 니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초극해가는 ‘초인’이 될 것을 주장한다. 현대철학의 중요한 개념인 ‘의지’에 대한 두 철학자의 다른 접근은 현대철학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꼭 넘어야 할 산이다. 자신의 이성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지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감지해내는 현대인들에게 의지의 관조, 동고나 초극은 궁금한 그 무엇일 것이다.

2. 니체: 중심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가치 창조의 철학자

흔히 망치

9월 월례발표회에 많은 참석부탁드립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9월 월례발표회에 많은 참석부탁드립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안녕하세요, 학술1부입니다.

더운 여름을 보내고 날씨가 한결 선선해졌습니다. 새학기의 시작으로 모두 바쁘시지요.

9월 월례발표회는 신입회원의 박사학위논문 발표입니다.

발표자 윤지영 선생님은 프랑스 팡테옹 소르본느(파리 제 1대학)에서 <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현재 ‘여성과 철학’ 분과와 ‘라캉’ 분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번에 발표 주제 역시 <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재미있는 발표와 토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그동안 발표 논문을 미리 읽을 수 없느냐는 문의가 많았습니다. 앞으로는 발표자들의 의사를 존중해서 발표 논문을 전체 공개 또는 부분 공개하고, 이를 공지하겠습니다.

이번 발표는 발표 논문을 전체 공개합니다. 발표 논문은 완성되는 대로 홈페이지 공지문에 추가로 첨부하겠습니다.

출력해서 월례발표회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발표자: 윤지영(서울시립대)

논평자: 한길석(군산대)

주제: <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

일시: 9월 21일 (금) 5시 30분 한철연 제1세미나실

“이 논문은 서구 전통 형이상학의 이분법적 논리가 어떻게 존재론적 일원론과 연계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며 위계적 양극화 논리의 폭력성을 날카로이 비판할 것이다. 나아가 프로이트와 라깡의 정신분석학 내에서 남근 중심주의(phallocentrisme)가 어떻게 주체를 구성하는 메커니즘의 축이 되는지를 드러내며 리비도를 남성적인 것으로 보는 욕망의 경제학의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여성성이라는 신화-모성 신화와 처녀성에 대한 신화와 터부 등의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읽어내며 총체화되고 단일화된 여성성에 대한 단선적 정의를 파기함으로써 유희하는 몸과 하이브리드성이라는 새로운 주체화 과정에 주목할 것이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3)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3)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3. 아테네 민중과 민회 그 빛과 그늘

30인 참주의 지배는 원칙에 있어서나 경과에 있어 폭압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들이 실각한 뒤 아테네인들의 생활 방식은 금방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참주들이 살아남아 이 광경을 보았다면 뤼시아스가 그랬듯이 누구나 다 이렇게 항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생활방식이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인데 그런 것이 다시 되살아나다니!”. 하기는 아테네 민중들의 부유층에 대한 탈취에 가까울 정도의 공적 기부의 강요는 민주정 회복 이후에도 크게 제제되는 일이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아테네는 더 이상 기부를 강요할 대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가난해져 판아테나이아(Panath?naia) 축제마저도 아주 간소하게 치룰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나라경제는 거류외인들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고 있었다. 시민들이 이러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 이유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민주정 회복 이후 아테네 민중들은 노동을 통한 견실한 삶보다는 오랫동안 민회나 소송사건에 매달려 생계를 영위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마치 게으른 사람들이 먹는 일만 생각하고 있듯이 완전히 상궤를 벗어난 터무니없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클레온(Kleon)이 배심원의 급여를 3배로 올린 이래, 한층 더 열심히 민중 최고재판소(heliaia) 일에 전념하면서 재물을 손에 넣는 일이라면 위증이나 술수는 물론 세금을 부정한 방식으로 회피하거나 타인에게 전가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귀뚜라미는 나뭇가지 위에서 1, 2개월 노래할 뿐이지만, 아테네인들은 일생 동안 소송으로 노래하며 먹고 살고 있었다.

 

아고라 유적지 복원 가상도. 아크로폴리스 오른쪽 밑에 평의회 건물과 평의회 행정청 톨로스 그리고 선거로 뽑힌 배심원으로 구성된 민중 최고재판소가 나란히 위치해있다.

 

아크로폴리스 오른쪽 밑에 평의회 건물과 평의회 행정청 톨로스 그리고 선거로 뽑힌 배심원으로 구성된 민중 최고재판소가 나란히 위치해있다.이러한 정황은 여러 종류의 고대 자료를 인용할 것도 없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 등장하는 필로클레온의 말만으로도 충분히 드러난다.([벌(蜂)] 548f) 이 남자는 자신이 배심원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얼마나 좋은 지를 아주 신이 나서 떠벌리고 있다. 이 작품의 정경들 중 어떤 장면을 취해도 모두 현실 그대로의 행태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아테네에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 사람들은 피고인이나 그 가족들이 자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곤경에 빠져 신음하는 이러한 사람들이 재판정에서 그에게 아첨하며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잘된 연극을 흥겹게 구경하듯,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자신의 위세와 무분별한 방종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 최고재판소에서는 자신이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고 해서 반드시 승소하는 것도 아니었다. 종종 배심원들의 분노라든지 동정심이 판정의 주요 요인이 되기도 하였고 혹은 피고인 자신이나 어떤 당파에 속한 자들의 웅변조 연설에 의해 판정이 뒤집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변호 연설의 초안을 작성해 주는 관습 덕분이었다. 특히, 경탄할만한 천재성을 가지고 연설 의뢰인과 마치 한 몸 한 마음이나 된 듯 연설문을 써주고 큰돈을 벌었던 뤼시아스는 이러한 재판의 모든 과정이 얼마나 사람들의 정신을 소진시키고 피폐하게 만드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앗티카의 정의심은 고갈되어 갔고, 진리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으며 다만 수사술(rh?t?rik?)을 통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그럴듯하게 설득할 것인가(to pithanon)가 재판에서 이기기 위한 전부였다. 이런 까닭에 어떤 피고인 가족들은 비탄에 빠진 나머지 영향력 있는 당파와 잘 통하는 사람을 내세워 재판관을 찾아가서 선처를 청원하기도 했다. 크세노폰(Xenophon)이 전하는 헤르모게네스의 말은 간결하지만 당시의 정황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테네의 재판관들은 연설에 의해 설복되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수없이 처형했고 또 많은 수의 범죄자들을 무죄로 판결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 회상록] VI, 8,5) 사실 고전기 내내 어쩌면 최고의 인재는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의 뛰어난 사람들은 변론술의 수련을 통해 법정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길러졌다. 실제 이 기술은 시칠리아에서는 소송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고전기 어느 때 어느 곳에서건 끊임없이 발견되는 이 법정 변론술의 번성과 활약상에 비하면, 사실 정치적 변론술은 오히려 몇 가지 측면에서만 현저한 효과를 발휘했을 뿐이다.

민회가 열리던 아테네 프뉙스 언덕 연설단

아테네의 경우 정치적 변론술의 무대는 그 유명한 민회(ekkl?sia)였다. 민회는 모든 민주정에서 보여지듯이 원천적으로 500명으로 구성된 평의회(Boul?)가 가지고 있었던 직무를 빼앗을 정도로 고도의 통치기관으로서 자리 잡았다. 이 민회는 때로는 현실 국면에 대한 대단한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했고 또 민중을 선동하는 동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민회는 더 이상 기존의 다른 협의기구와 제대로 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데모스테네스(Demosthnes)는 곧바로 민회를 설득해 필립포스 2세와 단교하고 테바이와 연합하여 무모하게도 카이로네이아 전쟁(기원전 338년)을 일으켜 아테네를 멸망의 위기에 빠트리기도 했다. 민회에 대한 판단은 넓은 의미에서는 동시에 아테네 역사에 대한 판단이기도 하다. 사실 당시의 아테네는 다른 폴리스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는 유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민회는 30인 참주정이 실각한 후 민주정이 부활하고 나서도, 비록 끝없이 변덕스럽기는 했지만 여전히 국가 조직으로서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해온 기관이었다. 여러 폴리스들에서 아주 피비린내 나는 갈등과 위기가 반복해서 일어났지만, 아테네는 어떤 사태를 맞이했건 간에 이 ‘민회를 통한 협의와 결의’라고 하는 길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없었다. 아테네 역사에 대한 평균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그리스 정신의 말기 상황을 파우사니아스(Pausnias)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민주정이 아테네인 이외의 사람들을 번영시켰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년)

 

아테네 사람들은 타고난 지적 능력에 있어서 다른 그리스 사람들보다 우수하고, 게다가 현존하는 법률에 불복종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스 안내기] IV, 35,3) 이 단합된 시민은 마치 하나의 생물과도 같아서 조형예술의 손에 의해 빚어지듯 이상적인 형태로까지 성장했다 물론 희극 작가들은 작품 속에서 이 시민을 정중하게 다루지도 않았고, 플라톤은 시민을 “크고 힘센 짐승(thremmatos megalou kai ischyrou)”으로 여겨 그 시민들의 기분과 욕망을 숙지하는 것이 국가를 다스리는 지혜로 간주하였다.([국가] 493b) 한편 플루타르코스는 옛날부터 알려져 있는 아테네 시민들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욱하고 화를 내기도 하지만, 또 측은해하며 마음을 확 바꾸기도 한다. 시민은 차분히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예리하게 따지는 쪽을 좋아한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겸손한 사람들을 후원하기도 하고 또 유머는 물론 웃음을 동반하는 연설도 좋아한다. 자신을 칭찬해 주는 사람들을 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조소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화를 내지도 않는다. 시민은 그 통치자에게는 무서운 존재이지만, 자신의 적들에 대해서조차 아량이 넓다.”(플루타르코스 [정치론 모음] ‘계율들’(rei p. ger. praecepta) 3)

 

참주 히파르코스를 살해하는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

 

집회에서 결정에 임하는 아테네인들의 모습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은 집회에서 무엇보다도 아주 엄숙하게 처신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체 사안들에 관한 최고의 처분권과, 무엇이든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을 경우 그것을 이룰 권리를 가지는 우리 아테네 시민!“ 이라는 표현 또한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평의회의 건물에는 평의회 위원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제우스와 아테네의 신전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그곳에 들러 엄숙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정의 안녕을 위해 기원을 드리면서 정성을 다해 제물을 바치기도 했다. 신전에서의 맹세가 상습화되어 있었던 대중들도 그 효과 또한 상투적인 것 이상으로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아테네인이라면 누구라도 디오뉘소스 축제를 앞두고는 정례적으로 아주 진지하게 민주정의 적(敵)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맹세(psephisma: 인민결의)를 올리곤 했다.(안도키데스(Andokides) [비의에 관하여(de myst.)] 97) 이를테면 민주정을 반대하는 자는 처단하고야 말겠다는 것, 특히 비민주정 체제하에서 높은 지위를 누린 자들, 참주와 그 부역자들 모두는 반드시 처단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처단한 자들은 무죄라는 것, 척결당한 자들의 재산을 처분하고 그 재산의 반을 그들을 처단한 자들이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사랑하는 상대를 탐한 참주를 함께 처단한 커플)의 자손처럼, 척결을 실천한 사람의 자손들에게는 급여를 주어야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때마다 성실하게 신들에게 이러한 맹세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늘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해주었고, 거짓맹세를 일삼는 자들에게는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파멸이 닥치길 기원하였다. 그리고 폴리스는 시민 모두가 증오하고 폴리스를 위해 척결해야 마땅한 자를 누가 처단했을 경우, 그가 어떤 사람, 어떤 신분이었던 간에 상관없이 그 사람에게 격정넘치는 칭찬과 함께 화관을 하사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일을 위해 거짓으로 작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 유명한 헤르메스상 훼손사건(기원전 415년) 때에 디오클레이데스(Diokleides)는 이 사건은 시민들의 파멸을 도모하기 위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즉각 주장하고 알키비아데스를 범인으로 지목하였고 그 결과 알키비아데스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출정 중 스파르타로 망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국가를 구한 자로서 화관을 하사받고 마차에 태워져 회당으로 가서 향응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그것은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했다.(안도키데스 [비의에 관하여] 36.45.65f)

그런데 아테네가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하면서 여러 가지 목적상 민회를 통한 방법 외에 다양한 다른 방법을 취했다면,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일을 분명 보다 용이하게 달성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 민회에서 대외 정책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선전해야 했던 것은 대단히 희극적이다. 데모스테네스는 민회에서 당시의 정치적 관심사와 관련하여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국가에 유익한 것은 테바이 사람들과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강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테바이 사람들이 포키스(Phokis) 사람들을, 그리고 또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다시 포키스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이 최강자로서 안심하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크라테스 논박(adv. Aristokratem)] 654) 게다가 그는 무심코 입을 잘못 놀려 아테네인은 그 어떤 다른 사람들의 죽음보다 오히려 필립포스 2세(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싶다고까지 말해 마케도니아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정체는 어쨌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생활방식이고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어 정열적인 전체 의지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집단의 목적 또한 생겨났고 또 전체의지를 통해 그 목적이 강하게 의식되어질 수 있었다. 게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만 해도 민주정은 상당히 오래 전 부터 깊이 뿌리를 내려왔던 정치체제였으므로 현실에서 생동하는 모든 기억들은 이미 이 민주정체하의 인간이나 사물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토록 민주정은 실천적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후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압박에도 존속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쁜 경험들이 민주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민주정을 악용한 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가상도(기원전 431-404년)그런데 아테네 사람들의 소질, 의지 그리고 운명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임에도 후세사람들은 끊임없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싶은 유혹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아테네라는 국가는 지나치게 격정에 휩쓸려 국가에 극히 유해한 어리석은 행동과 폭거를 결의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유능하고도 자질이 훌륭한 사람들을 급속히 소진해버렸고 게다가 그들을 협박하여 외국으로 추방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아테네에 있다면, 그것은 국가로서의 아테네가 아니라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적 잠재력(Kulturpotenz)을 갖춘, 정신의 원천(Quelle des Geistes)으로서의 아테네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예를 들어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인들이 보여주었던 민회에서의 열정과 전장에서의 헌신적인 용감성은 모두 맥동치는 국가성원으로서의 움직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그 기간 동안 시민대중들 또한 의연하게 절제와 지혜를 발휘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엄청난 재앙으로 번졌을지도 모를 수많은 난관들이 고결한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미연에 저지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원전 406년 참혹했던 아르기누사이(Arginusai)의 해전에서 돌아온 장군들을 재판하면서 그들의 처형이 부당함을 외친 소크라테스 등 소수의 사람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광기에 찬 군중들은 이렇게 외쳤다. “시민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음해, 아테네는 마침내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스파르타에게 완패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최종적 패배자로서 치욕스런 예속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30인 참주정 실각 후 민주정이 회복한 뒤에도 이전에 그랬듯이 하루가 멀다않고 민회 결의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방식으로, 5백명으로 구성된 평의회의 예비 협의마저 무시하고 모든 결정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이끌고 갔다. 인민(d?mos)이 결의한다는 것은 실로 인간임을 표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닭이나 다른 동물이 인간과 다른 점은 그것들은 민회에서 결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아리스토파네스 [구름] 1428)이었다. 그러나 영속적인 가치와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순간이나 그 때의 기분에 따라 이루어지는 이러한 처사를 감내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잊고 있었다.

이제 이 민주정이라는 공적인 제도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실제로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고 어떤 영향을 받고 있었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야만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그리고 30인 참주정이 실각하기 전까지는 과두정주의자들이 민심을 부추겨 악의적인 일을 저지르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민주정으로 회복이 된 후에는 거꾸로 오로지 민주정 지지자들만이 민회 및 민중 최고재판소를 지배하려 들었다. 그 대표적인 두 부류가 변론술로 무장한 선동정치가(d?mag?g?s)들과 중상모략가(syk?phant?s)들이다. 물론 이 양자를 하나의 인물이 겸비하기도 했다. 그들은 민회건 법정에서건 그들이 원하는 결의를 얻어내기 위해 온갖 수사술을 다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들을 선동 또는 매수하여 박수를 치거나 야유를 날리거나 위증을 하게 하는 등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어떤 행위도 서슴치않았다. (다음에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2)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2)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2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2. 30인 참주정 전후의 아테네의 정치·사회상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는 재정을 있는 대로 다 쏟아 부었지만, 단지 자금만이 아니라 유능하고 헌신적인 그리고 용감한 사람들까지 다 소진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두말할 나위 없이 개개의 사람들 모두 자신들의 정열을 아낌없이 내던져 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열을 다해 싸운 다음, 아테네는 자신들의 지배자로 선동 정치가(d?mag?gos)들을 선출하고 만다. 예를 들어 클레온(Kleon 기원전 ? -420년)이 그렇다. 클레온은 법정 수당을 세배로까지 증액하여 궁핍한 민중이 그것으로 생활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듦과 동시에 자신도 극심한 채무로부터 벗어낫고 나아가 50탈란톤(talanton)을 축재하기까지 했다. 아테네는 뛰어난 심미안을 가졌지만 이제 이런 자들의 벼락출세를 분별해내는 것조차 힘들게 돼 버렸다. 이 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니키아스 평화조약(기원전 421년)으로 일시 멎었던 시절, 책략과 사리(私利)에 능란했던 시대의 풍운아 알키비아데스에게 아테네가 매료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테네인 민족 내부에 잠복해있던 열망이 섬광처럼 떠오른 알키비아데스와 그가 주장한 시칠리아 원정(기원전 417년)을 통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긴 하지만, 아테네인들의 그러한 태도는 병리학상(pathologisch) 세계사 전체에서 눈여겨볼 만한 구경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 후 재개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끝내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패배하여 기원전 404년 크리티아스(Kritias)를 비롯한 30인의 참주들의 가혹한 공포정치에 직면하게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개개의 여러 폴리스들의 움직임을 보면 민주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기존의 권세가들(dynatoi) 즉 귀족내지는 부자들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아테네에서도 그 최종적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기원전 528-462?) 시대 이래 모든 당파에는 물론 모든 우두머리들 주변에 일종의 정치 클럽 즉 헤타이레이아(hetaireia)가 결성되어 있었다. 페리클레스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시대에는 이러한 클럽은 소멸한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 그것들은 다시 소생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불사하였다. 이윽고 이른바 과두정(oligarchia)파의 형태로 나타난 그러한 결사에는 무엇보다도 빈곤과 착취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있었던 사람들과, 권세를 상실하여 지금은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결집해 있었다. 그 일부는 이전에 귀족이었던 자들이었고 일부는 그저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조금은 더 태생적으로 능력이나 소질이 있었던 사람들은 원초적인 혈통에 대한 믿음은 물론 국가에 다시 중용 되고 싶어 하는 열망에 불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에 함께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소피스트의 사상은 고작해야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들에 어떤 형식적 명분을 제공한 것에 불과했다. 실제로 한 명의 소피스트도 스파르타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던 스파르타 권세가들의 태도는, 그들에 대해 극히 악의적인 아테네 시민들 이상으로 박대했다.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민중들의 친구인 양 처신했던 것도, 자신들의 신상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고 나아가 민중들로 하여금 과격한 제안을 하게 하여 민주정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반민주정 클럽의 전체 연합은 이미 기원전 411년에 몹시 난폭한 수단을 사용해서, 본질적 성격상 과두정적인 체제를 실시하는 것에 성공하긴 했지만, 이것은 고작 수개월밖에 존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후 몇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아테네의 과두정 지지자들이 완전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극단적인 결의와 행동을 마다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클레이스테네스 이래 민주정은 아테네에서 자명한 것인 양 받아들여져 모든 것이 그의 구상대로 개혁되고 있었을 때조차, 그것의 반대자들 역시 그리스인이었다고 하는 것, 즉 반대자들도 이와 같이 아무런 거침없이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민주정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테네를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정은 그들 국외 이주를 바라는 사람들에 대해서, 프랑스 혁명 당시 정치 망명자에 대해 그랬던 것과도 같은 공분(公憤)을 안고 있었다. 민주정은 이 체제가 자기 쪽 당파의 유능한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당파의 유능한 사람들까지 절대적인 내적 자주성(absoluten inneren Unabh?ngigkeit)을 갖도록 길러냈다는 것을 아테네를 배반한 알키비아데스를 보고서야 비로소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사실 주의해서 보면, 아주 많은 수의 과두정 지지자들이 뤼산드로스에 대한 최후의 저항을 진압하는데 손을 빌려 줌으로써 전력을 다해 자신들의 조국인 아테네가 패배하는 것을 앞당기는데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05년) 그것은 그 저항군들이 이기면 결국 시민(d?mos)이 이기게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과두정 지지자들은 아테네를 비산업적이고, 동산(動産)에 의존하지 않는, 바다에 등을 돌린 사회로 만들려는 과제에 매우 정통해 있었다. 그들은 아테네 성곽 문을 연 후, 뤼산드로스의 후견 하에 정권을 빼앗아 이른바 30명 참주들이 주도하는 공포정치를 시작했다.(기원전 404년) 30인 참주들은 1500명을 처형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재산 이동도 감행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자들 아래에서 금방 기강이 세워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미 앞 시대에서 각자의 성질들을 서로가 다 너무나 정통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이제 와서 완전하게 하나가 된 듯 행동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테라메네스(Th?ramen?s)는 한걸음 양보하여 그 타개책을 강구했다. 그러나 그는 말 그대로 완전한 의미에서 막무가내인 자를(den Unbedingten) 만나게 된다. 그 자가 곧 그를 실각시킨 후 살해까지 한 크리티아스이다.

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연설을 통해 우리는 다시한번 그들이 그리스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지배권력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목적을 바라는 사람은 수단 또한 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크리티아스에게 이 수단이 무엇이었는지는 이미 오싹하리만큼 분명한 것이었다. 언젠가 참주들 휘하의 중장보병들에게 행한 그의 연설 즉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것을 바라고 또 같은 것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은 그리스의 모든 당파가 새겨들어야 할 모토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정치는 결국 트라쉬불로스(Thrasyboulos 기원전 440-388년) 등 민주정파에 의해 얼마가지 않아 타도되고 만다.(기원전 403년) 과두정이 무너지고 민주정이 부활한 후에도, 아테네에는 분명 여전히 과두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과두정파로서 대두될 만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주정 이후 시민들의 공격은 본질상 그러한 세력으로 여겨진 부유층들에게 향해졌던 것이다.

아테네 국가에 있어서의 외관상의 생활은, 이 위기 이후에도 대부분의 측면에서 이전과 같은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생활상을 관찰한다한들 그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큰 차이점은 오히려 이 시기의 전과 나중에 위치시킬 수 있는 아테네 사람들의 내면적 성질과 외면적 위상에 있다.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완전하게 패배했다고 하는 것은, 이 전쟁이 초래한 시민들 간의 커다란 균열을 막는데 동원된 기본 방책들이 대단히 조잡한 것이었던 것에 비하면 아직 사소한 재앙인 것처럼 생각된다. 말하자면 전적인 헤게모니를 가지고 지배권을 행사하던 이전의 시민들에게 딱 맞았던 왕자의 외투를, 살이 빠져 말라깽이가 된 지금의 시민들도 여전히 헐렁한 채로 걸쳐 입고 있었던 것이다. 패전 후 동맹국의 소송 사건들에 대한 재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돼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재판을 하던 습관이 붙어 있었던 데다 패배자의 일상으로서 의심 또한 몹시 많아져서 시민들은 지금도 그 때 못지않게 아주 많은 아테네인들을 재판에 붙였다. 그 최초의 희생자 중 한 명이 소크라테스(S?krat?s 기원전 469-399년)였던 것이다.

민주정 하에서의 앗티카 지방의 개개의 시설이나 관공서에 대해서는 여기에서는 생략해도 괜찮을 것이다. 사람들은 한가로움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임시 직무이든 영속적인 직무이든, 직원이든 위원회 위원이든 일을 맡기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인이나 포이니케 사람들이 이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잘 그리고 정확하게 직무를 수행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이 모든 결정을 한도 없이 독점함에 따라 업무가 엄청나게 늘어나 혼란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관공서의 끊임없는 교체 또는 추첨에 의해 근무부서를 임명받은 직원들 이외에, 늘 상임으로 근무하는 한명의 숙련된 직원, 즉 서기(grammateus, hypogrammateus)가 실무상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서기는 신분상 국유 노예에 지나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다. 지난 날 베네치아에서조차 이 정도로까지 자신의 서기에 의존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물론 아테네인은 잘못 시작한 일일지라도 나중에 수정을 잘 할 수 있도록 많은 훈련을 쌓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일과 관련해서 하나의 금지령을 공표했다. 즉, 앞으로는 동일한 개인이 2년간 계속해서 동일한 관공서 내에 서기로 근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에는 어떤 법률이 실제로 어떻게 실행에 옮겨졌는지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것은 특정 감독관이 운영하지 않는 업무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고, 하물며 음모와 책략을 일삼는 자들에 의해서 업무 일체가 지연되는 등, 업무 전반에 걸쳐 믿기 어려울 정도의 방만함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법률에 대해서는 그 효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솔론의 법률을 비롯해 그 이후에 공포된 엄청난 분량의 법률 편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보람 있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5세기경 고대 그리스 화폐. 1탈란톤은 6000 드라크마. 당시 일꾼의 하루 품삯이 1드라크마 정도였다고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테네에는 찬탄을 자아내며 인용되고 있는 현명한 고래의 옛법률(nomos: 관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법률 가운데 다름 아닌 다음의 두 개의 법률들은 아테네의 역사에서 종종 위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어떠한 법률도 만약 그것이 동시에 모든 아테네인에 대해서 유효하지 않은 경우 한 개인에 대해서 공포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지 결의로만 표명된 것은 평의회의 것이건 민회의 것이건 하나의 법률보다 우위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률들은 제정 순으로 차례차례 신전 기둥 가운데에 혹은 돌기둥에 새겨지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법률에 대해 종종 그것들이 새겨진 소재를 핑계로 별로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페이스테타이로스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새」(Ornithes :기원전 414년) 가운데에서(1054행) 이러한 돌기둥에다 매우 괘씸한 일을 저질렀다고 하여 근대의 어떤 편집자는, “하층민은 자주 이런 짓을 했다“라고 덧붙이고 있지만, 이것은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페이스테타이로스는 훌륭한 아테네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법률은 신들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것도 계속 입버릇처럼 말해지고 있었다. 확실히 기원적으로는 법규 내지 법률은 종교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결부되어 있었다. 게다가 개개의 법 원리도 분명 태고 시대로부터 유래하고 있었다. 또한 법률은 신적인 기원을 가지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불변의 것이라고 여겨지기 조차 했다. 안티폰(Antiphon)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법률은 극히 오래 되었고, 동일한 일에 대해서는 항상 동일한 법률이 있다. 이것이 탁월한 상태의 법률이 지니고 있는 주요 표징이다. 왜냐하면 보통 시간과 경험(Zeit und Erfahrung)은 무엇이 부적당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관습의 형태로 전해진 법률들은 폐지되지 않은 채 재래의 법률에 새로운 법률들이 하나 둘 덧붙여지면서 이 후 아테네 법률들은 서로 모순을 안은 채로 방치되어 왔다. 그리하여 법정에서는 완전히 모순되는 법률들이 판을 쳐 마침내 그 폐해가 심해져 결국 성문법적인 법전의 편찬이 아무래도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다름 아닌 이 매우 중요한 일이 위원회를 차례차례로 돌다가 결국 그 숙련된 실무자 한 사람 즉 노예 출신이었던 니코마코스(Nikomachos)에게 맡겨졌다.(기원전 411년). 이 남자는 이 일을 그저 한해두해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효한 법률까지 삭제하여 법률을 허위로 날조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은 돈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책임을 추궁도 하기도 전에 아에고스 포타모이(Aegos Potamoi) 해전(기원전 405년 스파르타에게 대패했다)과 함께 아테네에 불운이 닥쳤다. 그리하여 해전이 끝난 후 폴리스를 재건하면서 다시 이전보다도 더 큰 합의 기관과 위원회가 법전 편찬을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니코마코스의 강력한 보호자들에 의해서 다시 또 모든 일이 근본적으로 그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는 또다시 4년간 이 사안을 진척시키지 않은 채 만지작거리다, 그의 전문 분야인 제사 안건으로 새로운 사치스런 희생 제물에 관한 법률을 생각해 내서 그것으로 인기를 얻으려 했다. 그 결과 나중에는 그를 고발한 사람들이 반대로 니코마코스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뒤집어쓰지 않을까 크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발자는 다음과 같이 고발장을 마무리 하고 있다. “국가에 대한 절도를 기획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 소송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 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은 누구도 적이 될 수 없는 매우 대담한 자들이 될 것이다.” 물론 이 판결은 보고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든 지금까지 말해 온 니코마코스의 사례만 가지고도 아테네에서 법률적 사안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플라톤이 왜 법률편찬자의 양성을 아카데메이아의 주요 교육목표로 삼았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런 사정에 처해 있었던 만큼 민주정 아테네에서는 특정의 시민, 즉 부유층 혹은 부유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요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개인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가지면서, 단단하게 결성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적 폴리스의 이념에 대해서는 결코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을 비난한다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또 그리스인의 본성에 대해서 너무 심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될 것이다. 적어도 이 인간 종족은 야만 상태로부터 벗어나자마자 국가 기구와 공적 생활 외에 한층 더 특별한 생존방식과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가정생활 그리고 특정 사상이나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영역을 구축해왔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지배자 계층에 속하는 인간들만을 정치적인 존재로 위상지우는 일에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스파르타 이외의 다른 곳, 특히 아테네 사람들은 반대로 폴리스가 개인들을 고무하고 동시에 개성적인 것의 발전을 아주 강렬하게 촉구하며, 사유재산의 획득과 그에 따라 야기된 사고방식을 모든 방법을 통해 촉진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실로 다양한 종류의 공적 기부제(leitourgia : 부유층이 자비로 일반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아테네의 공동체적 성격을 드러내는 독특한 제도)를 통해 폴리스로부터 주어진 부의 은혜에 적극 보답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무렵까지는 이 공적 기부제는 한편으로는 폴리스에 대한 실제적인 헌신의 문제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씀씀이가 크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야심의 문제였다. 키몬(Kimon)은 자신의 부를 모든 방법을 동원해 모두 내놓았다. 알키비아데스의 아버지인 클레이니아스(Kleinias)는 아르테미시온 해전 당시 자신의 배에 자비를 들여 200명의 병사를 탑승시켜 싸웠다. 그러나 시대가 점점 더 나쁜 방향으로 흐르게 되면서 부는 문자 그대로 먹이감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많은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아테네 부유층 사이에서도 바야흐로 공적 기부제가 부의 수탈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부를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폴리스를 떠날 수는 없었고 게다가 설사 도망간다고 해도 외지에서도 같은 위험, 아니 더 큰 위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적 기부제가 단지 국가의 요구뿐이었다고 하면 고대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특별하게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는 문제였다. 사실 아주 고액 수준의 세금을 제외하면 국가가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공적 기부제 내지 봉사는 트리에라르키아(trierarchia) 뿐이었다.(이것은 시대에 따라 매우 차이가 나는 전투함정(3단노 군선 tri?r?s)의 장비 장착에 관한 의무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이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공적 기부제로서는 전시에 비교적 궁핍한 시민들의 무장을 도와준다거나 그들의 딸들의 결혼 비용을 부담한다거나, 매장비용 등을 부담하는 자선 행위 또는 완전히 민중들의 오락을 위해 기부하는 행위 같은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특히 코레기아(choregia : 합창대 비용부담), 즉 연극 합창대 및 제사와 축제를 위한 서정시 합창대의 무용가나 피리 부는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부담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른바 김나시아르키아(gymnasirchia : 체육행사부담)와 그러한 것들 중에서 가장 비용이 드는 종류인 람파다르키아(Lampadarchia : 일종의 경주행사 부담)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경쟁을 수반하는 경기(ag?n)를 위해서도 돈을 내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신전에서 제전이 벌어질 때 사절을 파견하는 비용도 부담하였다. 마지막으로 부족(phyle) 혹은 그것과 관련된 지역(d?mos)의 여러 동년배들을 위한 향응도 떠맡았다. 이 경우 누가 부담할지는 자발성이나 추첨에 의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10개 부족이 그것을 떠맡을 동료 시민을 선출하여 그 사람들이 정해진 순서대로 매년 반복되는 공적 기부제는 물론 가끔 임시로 열리는 봉사활동을 떠맡았던 것이다. 분명 이런 관습을 중지시키는 것은 사람들에게 유리한 계책은 아니었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일부 부유층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이 봉 취급당하는 것을 거절했을 때 자기 신상에 불어 닥칠 증오를 지레 두려워해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니키아스(Nikias)가 시칠리아 원정 계획에 반대했을 때, 그는 결국 찬동자를 얻지 못했고 찬동자 중에는 유력한 사람들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동조할 경우 자신들이 공적 기부제와 3단노 군선의 장착비용을 면하려는 것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신들의 신념에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소한 3탈란톤의 자산을 가지는 사람들만이 이것을 부담하게 되어 있었다. 또 자산은 연평균 12퍼센트의 이자를 낳았기 때문에 1탈란톤의 자산이 있으면 어떻게든 생활은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합창대 비용 부담은 부유한 남자 한 명에게 매년 1200 드라크마 정도를 부담지우는 정도여서 대체로 15탈란톤의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로 여겨졌다.

이렇게 해 보면, 이러한 부담은 몇 가지가 크게 중첩되는 일이 없으면 곧바로 재산상의 파탄을 초래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어떤 사람에게 부당한 방식으로 그것을 부담지울 경우 그 사람은 파탄을 면치 못하였다. 이와 함께 이러한 부담을 떠맡는 것은 명예로운 것이라는 전래의 생각 또한 아주 오랜 동안 계속 되었고, 이런 일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 또한 적어도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저 쓸데없는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능력 이상으로 자신의 씀씀이가 좋은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과 같이) 합창대 비용을 부담할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플라톤은 명문가 출신이지만 부유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을 면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유한 친구로부터 그것을 위한 자금을 조달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복하여 합창대 비용 부담을 떠맡은 사람은 상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세발달린 솥(tripodon)을 걸어두기 위해 훌륭한 신전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어떤 시대, 어떤 민족이건 간에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짜고짜로 희생을 지불하게 되는 처사들 중에는 고역스런 일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당사자들이 자기의 사적인 자금으로 이러한 공적 기부제를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 돈은 결국 스스로의 사적인 환락 생활을 위해서 낭비 되어 버렸을 텐데 그것이 대부분 민중 전체의 고상한 예술적 향유를 위해 지출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아테네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명예로운 것이라고. 그러나 강제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일로부터 존엄성을 빼앗아 버렸다. 아테네 국가는 개개의 부유층이나 생업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국가가 그 사람에게 부여한(어쨌든 극히 제약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안전과 교환한다는 명분으로 마음대로 과세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국가는 매우 변덕스럽고 또 탐욕스런 시민들의 수중에 떨어져 버려서, 시민은 이윽고 보다 높은 액수의 세금을 사정없이 요구했고, 그렇게 거둬들인 돈을 민중에게 직접 분배하는 것을 매우 민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당시 오락을 위한 낭비에 있어서는 어찌 되었든 국가가 선두에 서 있었다. 그리고 에우불로스(Euboulos) 시대에는(대체로 기원전 353년부터 기원전 339년까지) 축제비용이 모든 예산의 주요 항목이 되어, 누군가 이것을 전쟁 목적으로 전용할 것을 제안하는 경우, 그것을 처음 입에 담은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고 위협함으로써 그 항목 자체의 보존이 담보되고 있었다. 아테네에 있어서 조차 이 경우, 대중의 관심사는 이러한 고상한 예술 형식을 즐기는데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일정한 정도 호사를 누리는 것에 있었을 것이다.

“불쌍한 부자들”로 일컬어지고 있는 그들의 재난을 상세하게 알려면, 크리토불로스(Kritobulos)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짓궂은 동정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토불로스가 감내하고 있는 일들을 모두 열거한 후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공적 기부가 충분히 행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만으로도, 아테네의 사람들은 마치 네가 자기들의 재산을 도둑질이라도 한 것인 양 너를 처벌하려 들 거야.” 크세노폰의 「향연」(symposion : 제4권 29절 이하)에 나오는 카르미데스의 말은 오히려 가난해졌기 때문에 자유롭고 행복하게 된 한 남자의 실로 유쾌한 유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전체의 극히 중대한 측면이 법정 변론가들을 통해 비로소 처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재판의 배후에는 모든 재산을 몰수해버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으므로 그러한 재산은 일부는 국가에, 일부는 고발자등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것으로써 그 돈은 이미 일체의 권리와는 관계없이 바람직한 공적 수입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 알키비아데스(Alkibiad?s 기원전 450?-404): 그는 정치·군사적 재능과 준수한 외모를 타고난데다가 페리클레스의 조카로서 젊은 나이에 벼락출세를 한 후, 서방으로의 세력확장을 바라는 민중의 열망에 편승하여 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하지만 헤르메스상(像)을 파괴한 용의자로 소환령이 내려지자 아테네를 배반하고 스파르타로 망명한다. 그러나 스파르타 왕비와의 스캔들로 다시 페르시아로 망명한 후 아테네의 과두정파에 빌붙었다가 뜻을 못 이루자, 다시 민주정에 충실한 사모스 해군과 손을 잡고 스파르타군을 격파하여 기원전 408년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아테네로 돌아온다. 정조 없이 야심과 사리에 가득 찼던 그의 삶은 결국 스파르타가 보낸 자객의 손에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 소크라테스와의 각별한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학술 3부 근대 철학사 세미나 강의계획서- 담당 선생님: 이병창 동아대 철학과 명예교수

근대철학사 강의계획서

담당 선생님 : 이병창

1)강의의 목표와 의의

근대철학사라면 상당히 포괄적이라서 12주 정도의 작은 시간 안에 다 다룰 수가 없다. 그래서 이번 강의는 근대철학사의 백미라고 할 칸트와 헤겔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직관주의와 칸트주의 그리고 헤겔주의는 삼각관계를 이룬다. 이 삼각관계는 최근에도 반복되고 있다. 들뢰즈의 철학이 직관주의의 전통을 잇는 것이라면 현대 구조주의가 칸트주의의 맥을 잇고 있다. 반면 헤겔주의는 라캉, 지젝 등의 정신분석학적인 흐름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러므로 칸트와 헤겔의 동일성과 차이를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근대철학을 넘어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의 요점을 장악하는 것이며, 지금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철학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디딤돌을 제공한다고 하겠다.

 

2)강의의 방법

이 강의는 아무래도 전문 연구자들의 강의이니만큼 개론적인 설명보다는 원전을 접하면서 이를 해독하는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 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원전해독의 능력을 키우는 것에만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선철들의 고민 자체를 세부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다양하게 이해하며 나아가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과 미래 철학의 단서를 발견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중심 텍스트

칸트: 순수이성 비판

헤겔: 정신현상학

(판본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한글번역, 영어번역, 독일어 원전 모두 가능)

 

* 강의 시간: 매주 토요일 2시-5시. 8월 11일 시작해서 12주 연강.

4)강의의 주별 내용
주별
강의 주제
세부 내용
강의방식

1
칸트 순수이성비판

초판 들어가는 말
칸트는 무엇을 하고 싶었는가? 선험철학의 이념
요약발제

2
선험적 감성론
시간, 공간이 직관의 형식인 이유

오성의 개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3
분석론 2장,

개념의 연역
개념이 어떻게 직관에 적용될 수 있는가?

4
원칙론 2장 3절

종합적 원칙
선험적 통각의 기능

5
선험적 변증론 1편

순수이성의 개념들
선험적 변증론과 순수이성의 의미

6

칸트 순수이성 비판의 의의

7
헤겔 정신현상학 서문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무엇을 하려 했는가?

셸링과 헤겔
강독

8
서문
체계가 진리인가?

9
서문
역사적 서술은 왜 필요한가?

10
서문
의식의 변증법적인 전개

11
서문
형식주의 비판

12

헤겔 정신현상학의 의의

한철연 교육강좌 수료식이 진행되었습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한철연 교육강좌 수료식이 진행되었습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강 지 은(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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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주최한 교육강좌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연구자와 시민을 아우르는 강좌를 기획한 이번 강좌는 이론과 실천을 한데 어우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3월 25일 이성백 교수의 ‘들뢰즈의 행복론’을 시작으로 6월 17일 서유석 교수의 ‘연대의 철학을 위하여’까지 진행된 교육강좌에는 13명의 강사진과 30여명의 수강생이 열정을 가지고 참여한 덕분에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마지막 강연일에는 수료식이 진행되었으며 한철연 김성민 회장의 격려사와 이순웅 연구협력위원장의 감사의 인사가 있었다. 이날 교육강좌에 참여한 강좌생들에게는 수료증과 부상이 주어졌다.

이후에 한철연 교육부는 교육강좌를 이어나갈 후속강좌를 진행할 예정이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1)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1)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1:?고대 그리스인의 사랑’에 이어 예고한 대로?19세기 저명한 문화사가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의 대작?[그리스 문화사](Griechische Kulturgeschichte)를 토대로 그리스 문화 전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부르크하르트의?[그리스 문화사]는 고대 그리스 문화 전반에 대한 독보적인 수준이라 할 정도의 풍부하고도 세세한 정보와 탁월한 해석을 담고 있는 책으로서 오늘날까지도 그리스 문화 연구자라면 반드시 딛고 넘어가야할 걸출한 연구 성과이자 토론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그러나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고 난삽하여 이곳에서는 중요 주제를 골라 웹진 연재물로서 적합한 분량만큼 발췌 축약해가면서 그 내용을 토론하고 음미하는 방식으로 소개하고자 한다.?우리가 다룰 첫째 주제는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이다.?텍스트는 ‘Die Demokratie und ihre Ausgestaltung in Athen’,?Griechische Kulturgeschichte, Erste Band. Seite 202-239)?Jacob Burckhardt Gesammelte Werke, Band V. Darmstadt 1956

주제?2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1. 정치적 반성의 귀결로서 민주정

폴리스 체제 내부에서 반성이 지배하게 되면 머지않아 아주 넓은 범위에 걸쳐 시민들은 평등에 대한 욕구에 강하게 이끌린다. 이러한 평등 욕구가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어떤 연관을 가지고 얼마나 퍼져 나갈 지는 주변 사정에 달려 있다. 비교적 초기의 폴리스 정체들 중에서 고대 왕정과 귀족정은 원천적으로 정복과 자명한 권위를 기반으로 구축되고 참주정은 사실상의 찬탈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이러한 정체들 속에는 이미 소수계층에 대항하여 만인의 이익을 옹호해야한다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의 폴리스로서 그 출발부터 이미 위와 같은 반성이 작용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반성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사례가 있다.

그것이 곧 그리스인들이 세운 식민지였다. 식민지에서 비로소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천성에 따른 여러 가지 요소와 힘을 고려하고 의식적으로 폴리스를 새롭게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조직적인 능력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인 힘이나 단순한 폭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식민지 건설에 필요한 아주 다양한 형태의 구성요소는 법률상의 배려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곳이 곧 “입법자(Gesetzgeber)”의 직무가 새로운 의미를 갖는 지점이다. 테세우스나?뤼쿠르고스(Lykourgos)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 신화적인 인물이었지만,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마그나 그라에키아의 주민들(Groβgriechen) 사이에서 카론다스(Charondas)와 잘레우코스(Zaleukos)가 나타난 것처럼 자신들의 폴리스로부터 그 일을 위탁받은 국제와 법률의 편찬자가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입법(nomothesia)은 그때마다 하나의 자유로운 행위이며 – 물론 외국에서 올바르다고 인정되고 있는 것을 자발적으로 채용하는 것도 있었을 것이지만 – 어딘가 다른 곳의 양식을 단지 그대로 베껴 놓은 것은 아니다. 고대 아테네인들의 입법을 위한 그와 같은 시도들은 모두 매우 주목할 만한, 강력한 의지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그 때 아테네인들이 식민지 건설의 기초로서 내건 기치가 곧 “정의(to dikaion)” 내지 “정의의 지배(dikaiarchia)”였다.

<그리스문화사> 5판본 표지 (1898-1902)

그런데 본토에서도 이 같은 힘과 의욕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개혁의 의미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고, 이러한 힘과 의욕은 불가피하게도 귀족정(aristokratia)과 참주정(tyrannis)에 대한 거역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경계선 위에 아테네가 솔론(Solon)과 함께 서있다. 솔론은 전체 민중(Volk, Demos)을 위해서 평의원을 위한 선거권을 확보하였고, 대부분 귀족들인 토지 소유자에게는 독점적 피선거권을 부여하였다.(기원전 594년 이래). 그 대신 동산의 소유에 대해서는 당분간 평등의 권리로부터 제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안에 대한 최고의 결정권을 어디까지나 민회에 부여하였다. 과도기의 아테네의 명예는 이와 같은 솔론의 등장과 그에 대한 신뢰와 복종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는 어떤 것을 전제로 했을 경우에만 설명할 수 있다. 즉 그와 같은 일들이 고대 아테네의 세습 귀족의 틈바구니 속에서 새로 등장한 문벌 계층(Eupatriden)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은 분명 고대 아테네인들의 내면적 성숙(die innerliche Ausreifung)을 보여준다. 물론 솔론에 이어서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와 그의 아들(히피아스와 히파르코스)들에 의해 참주정이 등장하긴 했지만(기원전 561년 이후) 그 후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 이래 일련의 급속한 개혁이 진행되면서 마침내 아테네는 완전한 민주정에 이르게 된다.

솔론(Solon 기원전 638경-558경)

무엇보다도 아테네의 민주정에서 최초로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시민 대중(die Masse der B?rger)을 폴리스의 지배자로 선언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시민 대중이 실제로 개입할 생각이 있든 없든 국사를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점에 대한 명확한 통찰이다. 시민 사이에서의 당파 싸움이 있을 때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은 시민권 박탈의 제재를 각오해야 한다고 하는 솔론의 법률은 쓸데없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건 간에 후기위정자들은 시민 대중들로 하여금 최대한 정치활동을 강화하도록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매년 500명의 평의원(그 때의 10의 부족으로부터 각 50명씩을)과 5000명(아리스토텔레스 24장에서는 6000명으로 나타나 있다)으로 이루어진 민중 법정의 심판원을 선출해야 했다. 그리고 시민들 모두는 어떤 일이든 이 법정에 소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500명의 평의원들은 50명씩 돌아가며 35일간 집무했다. 이와 동시에 거류외인(metoikos)을 포함하여 시민의 수도 증가하고 또 에우보이아(Euboia)섬 정복으로 새로운 영토가 획득되어 토지 전체를 4000개의 구획으로 나누어 시민에게 분배할 수 있었다. 클레이스테네스와 그 후계자들이 이런 일을 수행하면서 어느 정도까지 적극적이었는지 혹은 한 번 자각된 아테네의 정신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일을 수행했던 것인지는 일단 논외로 하기로 하자. 어쨌거나 아테네 사람이 명실공히 실제로 아테네 시민인 한, 그 시민은 누구라도 어떠한 관공서의 업무에도 적합한 자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견해에 입각해서 특히 500명의 평의원을 선출할 때 선거가 아닌 추첨(Los, kl?ros)의 방법이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인력의 안전성이나 실무상의 특수한 전통의 형성은 완전히 단절되었고 그로부터 생길 수 있는 모든 장점과 단점도 함께 제거되었다. 그러나 벌써 외국인이나 거류외인들이 현저하게 시민으로 유입되어 있었던 터라 결국 필요한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식이 아마 작동했는지, 추첨된 사람들은 물론 선거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절충적인 조정책으로서 자격 심사(dokimasia)가 실시되었다. 추첨 혹은 선거에 의해서 직무에 종사하게 된 사람들 모두는 이미 자격 심사에 합격한 평의원들 앞에서 한 사람 한 사람 품행이나 성격, 가족이나 타인들에 대한 태도, 전투 경험의 유무, 재판상 소송을 당했는지 여부 등등에 대해 질문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지식이나 특수 능력은 전혀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만약 만족스런 대답을 얻지 못했거나 혹은 누군가 불평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평의회는 바로 재판소에 판정을 회부하였고 그러한 경우를 빼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을 내렸다.

추방대상 이름이 적힌 도자기 조각(陶片)

투퀴디데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피난처를 위해서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을 제어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이 민주정이라고 말한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시민적 평등은 결코 정치적 불평등과 결부될 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불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투표에 참가하였고 또 재판관이자 시 당국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폴리스는 모든 사람들의 생존과 관련한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극히 비천한 사람이라도 모두 이러한 일에 관여하는 것을 그 만큼 더 절실하게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이전에는 왕이나 귀족 혹은 참주들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권력이 시민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훨씬 넓은 범위에서 특정 개인의 심신을 훨씬 강하게 압박하는 일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시민 대중은 지배권을 잡았을 경우 불안과 질투의 감정을 한층 더 강하게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아테네 민주정에서 시민대중은 무엇보다도 우선 재능이 풍부한 특정 개인의 영향력을 압박하기 위한 대책을 찾아냈다. 그것이 곧 최고 지휘관을 선택할 때의 절차와 도편 추방(陶片追放 ostrakismos)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도 특정 개인의 힘이 우세해지지 않도록 아테네인들은 매년 열 명의 장군을 뽑아 그들 각각이 자신의 부족의 부대를 지휘하게 하였고, 그 모두를 지휘하는 최고의 지휘권 또한 장군들끼리 돌아가며 맡게 하였다. 운 좋게도 마라톤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밀티아데스(Miltiades) 한 명에게만 최고 지휘권을 부여하여 승리를 얻었지만 그 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기원전 405년 아에고스 포타모이(Aegos Potamoi) 전투에서는 “스파르타는 한 명의 지휘 하에 있는데”라는 알키비아데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테네는 패배하고 말았다. 게다가 아테네 민주정은 참주정을 영원히 저지하기 위해서라는 구실 아래 도편 추방제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매년 겨울 평의회가 민중에게 특정 개인을 대상으로 그를 추방해야 할 이유가 있는 지 없는지를 묻는 제도였다. 6000표 이상이 추방에 찬성할 경우 그 사람은 10년간, 적어도 5년간, 국외 추방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출신 도시 이외의 지역에 체재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었으므로 추방은 당시 사형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기원전 5세기 남보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개인들은 모두 한 번은 이러한 도편추방의 위협에 휩싸였다. 개중에는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가까이에서 압박해오고 있는 이러한 형벌을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실로 저 페리클레스마저도 아주 오랜 시간 겁쟁이로 만들 정도로 당대 실력자들에게는 걱정거리로 여겨졌다. 여기에는 영원한 미움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층민(P?bel)의 미움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야심가(Groβstreber)의 경우 대중(die Volksmasse)은 인위적으로 선동되지 않는 한, 오히려 그를 자기편으로 생각하거나 그에게 공감 내지 호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탁월하고 능력 있는 소수의 야심가들에 대한 무능하면서 그저 허세를 좇는 자들(Eitelkeiten)의 미움인 것이다. 즉 도편 추방은 군소 야심가들이 고안해낸 것이다. 당시 아테네 대중들은 아주 어리석게도(t?richt) 이런 군소 무리들의 선동이 낳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뒤 짚어 쓰게 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이 제도를 추켜세워 이것은 실력 있는 야심가들에 대한 질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실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그것은 이 제도에 너무 지나치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가 존재하고 나서 평범한 무리(die Mediokrit?t)들이 그와 같이 빼어난 착상을 가진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이 무리들은 문자 그대로 민중의 감정(Volksgef?hl)을 요새로 삼아 그 배후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인물에게 공공연하게 신뢰가 집중되기 시작하면 곧바로 도편 추방이 행해졌다. 특정 인물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신뢰는 아테네에서 조직적으로 배제되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시민들은 선동 정치가들의 손에 이 방법을 맹목적으로 맡기는 뼈아픈 경험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민중들은 (마라톤 전투의) 승리에 우쭐대 자기들이 그 누구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의 수준을 넘어선 명예와 명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화를 냈다. 도편 추방은 악행을 범했던 것에 대한 징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단지 기고만장함과 중요한 영향력을 지나치게 가진 것에 대한 처벌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다분히 아전인수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에 의해 선동된 ‘아리스티데스에 대한 도편 추방은 사실상 배려를 구실로 대중의 질투심을 가라앉히는 것이었다.’는 플루타르코스의 말은 매우 지당한 말이다. 이처럼 도편추방제는 미움을 받은 사람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거나, 특정 개인들에 대한 폴리스의 실제적 보복의 수단으로 또는 신속하게 어느 시민을 쫓아버리기 위한 수단으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시민들 사이에서 이 제도가 정쟁의 도구화로 전락하고 있다는 자각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기원전 487년에 시작된 이 권력의 도구는 마침내 그 세기 이후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48)은 아테네 민주정의 측면에서 보면 그 등장과 발전을 위한 아주 절묘한 배경을 제공해주었다. 마라톤에서 중장보병이, 살라미스에서 해군이 페르시아군에 승리를 거둠에 따라, 게다가 이 승리 이후 다른 폴리스들에 대한 패권이 확보되기에 이르렀을 때, 아테네 민주정은 그 위력을 드러내면서 영원불멸의 존엄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특히 해상 세력은 민주정과 실질적으로 자매와 같이 밀접하게 결부된 것처럼 보였다. 특히 항구 페이라이에우스 사람들은 도시지역에서보다 한층 더 시민 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헤로도토스 역시 (historiai)에서 “시민의 평등이라고 하는 것은 실로 위력이 있는 것이다”라고 전하면서 “아테네 사람들이 참주의 지배하에 있었을 때는 근처 어느 나라보다도 전력상 뛰어날 게 없었지만, 참주들로부터 벗어나자마자, 그들은 단연 다른 나라들을 눌러 제일인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5권 78)

그렇지만 스스로의 힘을 자랑하는 훌륭한 감정을 손에 넣은 것은 시민만이 아니었다. 아테네인의 풍부한 천성과 이 비정상인 시대는 중상모략을 가능케 하는 모든 제도에도 불구하고 세력 있는 개인을 대두 하게 했다.

“민주제 공화국은 과두제 공화국에 못지않게 우두머리(Oberhaupt)를 필요로 하지만, 마찬가지로 또 우두머리를 감내하지도 못한다.”(Ranke, Weltgeschichte I. s.251)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적이었던 밀티아데스는 옥사 했다. 테미스토클레스 역시 오늘날 그의 역사를 읽는 사람들에게 현기증을 일으킬 것 같은 연극을 아테네인을 상대로 상연한 후, 마침내 도편추방되어 페르시아 대왕의 손님으로서 생애를 마감했다. 하지만 패권의 확장과 강화, 페르시아에 반항한 이집트에까지 향한 대담무쌍한, 수차에 걸친 함대 원정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모든 사업은 2만명 내지 기껏해야 3만명 정도의 시민들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지만, 그들은 더욱 더 공공 생활에 헌신할 수 있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노동은 (30만 내지는 40만명의) 거류외인과 노예들의 의무로 여겨졌다. 전시 수당제도는 이 때문에 생겼다. 왜냐하면 어쨌든 육군과 해군은 단지 패권하의 폴리스들(이들은 자신의 할당액수를 금으로 지불하고 있었다)를 원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강국으로서의 아테네를 어느 곳에서든 어떤 경우에든 대표해야 했기 때문이다. 법정 수당제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즉 대중들은 부유한 자들이 재판관으로 나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또 아테네는 동맹 폴리스들의 법률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법정도 겸하고 있었으므로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시민들은 며칠에 걸쳐 법정에 출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회 수당도 마찬가지였다. 즉 이 강대 폴리스의 모든 내정 활동 및 대외 정책은 공적 심의에 종사하는 민중이 완수해야 할 책무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철면피에 가까운 수당은 관람 수당이었다.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

이 수당 중 일부는 축전이나 경기를 축하하기 위해서, 일부는 극장 입장료로, 일부는 제사용 제물이나 공적 회식을 위해서 시민들에게 지급되었다. 이러한 낭비는 호사가 극에 달한 궁정의 그것과 비교해서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자금 경색 때문에 이길 수 있는 전쟁도 패배한 경우 또한 부지기수였다. 왜냐하면 이(모든 수당이라고 하는) 성역은 절대 침범해서는 안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테네 민중은 일종의 참주이며, 관람 수당 금고는 민중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항상 가득 차 있지 않으면 안 되는 민중의 사적 재산이었다. 그 밖에 수천의 아테네 시민을 위해서(혹은 패권 하에 있는 다른 폴리스의 시민을 위해서) 새로운 토지 배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에우보이아섬에서, 지금은 그 외의 다수의 클레루키아(Klerukia), 즉 아테네에 지배 권력을 위탁한 외곽 전진기지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게다가 아테네는 대규모 업무의 중심지로서 극히 화려한 건축물과 예술 작품으로 치장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일의 대부분의 책임을 걸머지고 있는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최초의 희생자들에게 바친 그 세계적으로 유명한 추도연설에서 아테네의 현재의 모습을 서술하고, 아테네의 권력과 삶의 아름다움을 꽃과 같이 스스로 자란 것인 양,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가사적 인간들에게 고난을 지우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인 양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낙천주의는 특히 200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 보면 페리클레스가 현명하고 분별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 이상의 훨씬 더 정도가 심한 기만(T?uschung)이다. 수십년에 걸친 아테네의 충실한 영광의 시간들은 그 이후의 세상의 모든 시대를 위해서 아무래도 한 번은 체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가장 고귀한 것이 이 시기에 창조될 필요가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이것에 가세하여, 그리스적인 정신을 가지고 완수할 수 있는 것의 대략의 기준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태가 더 훨씬 긴 동안 존속하면 좋았을 것이라는 뒤늦은 소원은 완전히 허무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일반적 상황은 어쩔 도리가 없는 곳까지 이르렀고 어떻게 바뀌어도 귀착점은 여전히 멸망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테네의 사람들은 극히 현실적인 성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못된 정열(b?sen Leidenschaften)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페리클레스는 그 나름의 교육을 하는 한편 그들의 끝없는 탐욕을 – 가라앉히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향락을 제공함으로써 어떻게든 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가 키몬(Kimon)과 같은 부자였다면, 자신의 재산을 사용했을 테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공적 자금을 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에 가세해 아테네 사람들의 무서울 만큼 높아진 명예심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교사들 자신에게도 반항하게 만들어 교사들을 앞지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페리클레스 자신 그 말년에는 사방팔방으로부터 공격받았고, 급기야 그리스 전체에 걸쳐 전쟁이 터지는 편이 차라리 바람직할 정도로 여겨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우쭐해하던 기분을 끌어내리고 그들의 겸양을 고양시키는 것이 가능한”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민들은 밑도 끝도 없이 열리는 민회나 법정 집회(ekkl?siazein kai diakazein)때문에 분명히 신경질적이 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상의 노동에서 얻을 수 있었던 ‘마음을 완화시키는 힘’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부족 해 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케르퀴라(Kerkyra)와 코린토스의 사절들이 아테네 시민 앞에 나타났을 때) 케르퀴라 사람의 이익을 앞세워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려 결국 전쟁을 피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든 민회의 결의는 조정이 훨씬 용이하고 그것이야말로 영광일 수 있었던 순간에 그 초조함이 빚어낸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아테네가 민주정을 표방하면서 다른 폴리스들을 패권적으로 지배하려고 한 것은 일종의 모순이었으나, 자칫 거역했다가는 항상 보복을 당하기 일쑤였다. 폴리스들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스스로가 예속되고 착취 받는다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아테네가 자기들의 돈으로 강대해지는 것을 감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테네가 화려한 모습으로 가장하여 질릴 정도로 소란을 피우고 있어도 다른 폴리스들은 그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페리클레스 자신의 다음과 같은 연설에 잘 드러나 있다. “실로 우리들은 일찍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기획한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로부터 기피당하고 있다. 그러나 위대한 목표를 위해서는 사람들로부터 시기당하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의 지배체제는 사실상 참주정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배체제를 취하는 것이 부정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해도 이제 와서 절대로 이것을 마음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 여러분들은 반드시 보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어떻게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는지를 아테네에 관한 저작들은 몸서리칠 정도로 분명하게 보고하고 있다. 그의 연설은 패권의 문제에 대해서도 아테네의 활동 전체에서 드러나는 것과 완전히 궤를 같이 하면서 일체의 것을 허락하고 있다. 게다가 아테네 대중들은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도록 교육되었다. 그리하여 아테네인들은 마침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지에 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패권적 지배하에 있는 폴리스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를 생각하면 페리클레스의 범그리스적 구상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평화와 협력을 목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모든 그리스 폴리스들이 아테네에서 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은 듣기에도 좋고, 그러한 사태를 그려내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을 테지만 이 회의가 헛된 바람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초의 예상대로 스파르타가 이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

[희랍철학 고전읽기] 플라톤 국가 543a~555b

[희랍철학 고전읽기] 플라톤 『국가』 2012.06.02

발제: 8권 543a~555b (명예지상정체, 과두정체) 추 은 혜

* 네 가지 정체(政體) _ 성격들이 개인들보다는 정체들에서 한결 더 뚜렷하게 드러남

[크레테 및 라코니케식 정체(명예지상정체/명예지배정체)/ 과두정체/ 민주정체/ 참주정체]

“그 하나는 많은 사람한테서 칭찬을 받고 있는 것으로서, 크레테 및 라코니케식 정체가 이것일세. 그리고 둘째 것이며, 역시 버금가는 것으로서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은 과두 정체라 불리는 것으로, 많은 나쁜 것으로 가득 찬 정체일세. 이것과는 화합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그 다음에 생기는 것은 민주 정체이네. 그리고 그야말로 특출한 참주 정체는 이 모든 것과도 판이한 것으로서, 나라의 넷째 것이며 말기적인 질병일세.” (544b)

“그렇다면 정체의 종류가 여럿 있듯, 인간들의 기질(tropos)의 종류도 그만큼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자네는 알고 있는가? … 즉 라코니케(스파르타) 식 정체에 따라 생기게 된 사람으로서 ‘승리(이기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고선 과두 정체적인(과두 정체를 닮은) 사람과 민주정체적인(민주정체를 닮은) 사람 그리고 참주 정체적인(참주정체를 닮은) 사람을 언급하는 순으로 말일세. 그렇게 해서 가장 올바르지 못한 자를 본 다음에, 이 사람을 우리가 가장 올바른 사람과 맞서게 하자는 것이지. 따라서, 순수하게 ‘올바른 상태’와 순수하게 ‘올바르지 못한 상태’가 그걸 지닌 사람의 행복 및 불행과 관련해서 도대체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고찰도 완벽해졌으면 해서지.” (545a-545b)

? (1) 크레테 및 라코니케식 정체 (명예지상정체/명예지배정체)

– 발생배경: (최선자들의 정체 ? 명예지상정체)

“일단 내분이 생기게 되면, 통치자들 중에서 철과 청동의 성분을 갖는 두 부류는 [정체를] 각기 돈벌이와 토지, 가옥, 금은의 소유 쪽으로 끌어당기나, 이와는 달리 황금 및 은의 성분을 갖는 두 부류는 본성상 가난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부유해서, [사람의] ‘훌륭함’(덕)과 옛날의 체제 쪽으로 이끄네. 그러나 이들은 서로 격렬하게 다투며 항거하다가는, 중간선에서 합의를 보게 되네. 그래서 그들은 땅과 집을 분배하여 사유화하는 한편으로, 이전에는 자유로운 친구들로서 그리고 그들의 생계를 돌보아주던 사람들로서 그들의 수호를 받아오던 사람들을 노예들로 만들어, 예속인들로 그리고 가노(家奴)들로 갖고서는, 그들 자신이 이들을 상대로 한 전쟁과 이들에 대한 수호에 골몰하게 되네.” (547b-547c)

 

– 경영방식: (최선자 정체와 과두 정체의 중간)

? 최선자 정체와 유사점: “그렇다면 이 정체는 통치자들을 존중하고 또한 이 나라의 전사 집단으로 하여금 농사와 수공예 및 그 밖의 돈벌이를 멀리하게 하는 한편으로, 공동식사가 마련되고 체육과 전쟁훈련에 마음을 쓰는 등” (547d)

? 과두 정체와 유사점: “그렇지만 이 정체는 지혜로운 사람들(hoi sophoi)을 관직에 앉히길 두려워하는데, 이는 이 정체가 보유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더 이상 단순하지도 열심이지도 않고 혼합되어 있어서일세. 그리고 격정적이며 한결 더 단순한 사람들 쪽으로, 성향상 평화보다는 전쟁 취향인 사람들 쪽으로 기울며, 전쟁과 관련되는 계략과 전술들을 존중하고, 전쟁을 하는 가운데 온 세월을 보내는 등, 이런 유의 많은 것을 이 정체는 그 자체의 특유한 것들로 또한 갖게 되겠지?”

“또한 그런 사람들은, 과두 정체의 사람들이 그러듯, 재물에 대해 욕심을 내는 사람들로 될 것이며, 비밀히 금과 은을 끔찍이 우러러 모시는데, 그들이 금고와 사사로운 창고를 갖고 있어서, 이곳에다 이것들을 보관하여 숨겨둘 수 있기 때문일세. 게다가 또 집들에 담을 둘러쌓고서, 영락없는 자기만의 보금자리로 갖고서는, 그 안에서 여인들한테 그리고 자기들이 원하는 그 밖의 사람들한테 낭비를 하며 많은 지출을 할 수 있을 걸세.” (548a-548b)

* 나쁜 것과 좋은 것이 혼합된 정체

“ 그러나 격정적인 것이 우세한 탓에, 이 정체에서는 한 가지 것만이, 즉 승리에 대한 사랑과 명예에 대한 사랑만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네.” (548c)

 

– 명예지상정체에 일치하는 사람: 경쟁심(승리에 대한 사랑: philonokia)을 가진 이

(아데이만토스가 정체에 일치하는 사람으로서 글라우콘을 내세우자 소크라테스는 그가 성향상 일치하는 것 같지 않다고 대답한다. 글라우콘은 최선의 수호자가 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훌륭함과 관련해서 순수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반기게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cf. 최선의 수호자: “시가(詩歌)와 혼화된 이성(이성적 사고: logos)을 갖춘 자일세. 이것이 생김으로써만이, 이를 지닌 자에게 일생을 통해서 훌륭함(덕)의 보존자가 깃들일 걸세.” (549b)]

: 잘 다스려지지 않는 나라에 살고 있는 훌륭한 아버지의 어린 아들

“그의 아버지는 그의 혼에 있어서 헤아리는(이성적인) 부분을 조장하며 키우나, 다른 사람들은 욕구적인 부분과 격정적인 부분을 조장하며 키우네. 그는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남들과 나쁜 교제를 가짐으로써, 이들 양쪽에 끌리어서 그 중간에 오게 되어, 자신에 있어서 주도권을(혼의) 중간부분, 즉 이기기를 좋아하며 격정적인 부분에 넘겨 주어서는, 도도하고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네.” (550b)

 

? (2) 과두정체 (평가재산에 근거한 정체, 부자들이 통치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통치에 관여 못함)

– 발생배경: (명예지상정체 ? 과두정체)

“황금으로 가득한 각자의 그 금고가 그런 정체를 무너뜨리지. 먼저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걸 소비할 길을 찾는데, 이를 위해 법률을 왜곡하네. 그래서 자신들도 그들의 아내들도 법률을 따르지 않게 되네. … 다음으로 저마다 다른 사람이 그러는 것을 목격하고서, 서로들 경쟁을 하게 되어, 자기들끼리 그런 무리를 이루게 되네. … 그들은 돈벌이를 점점 더 진전시켜 가고, 그들이 이를 더 귀히 여길수록, 그만큼 (사람의) 훌륭함(덕)은 덜 귀히 여길 것이네. 혹시 훌륭함(덕)과 부는 아주 상반되는 것이어서, 마치 저울의 양쪽 저울대에 놓인 것들처럼, 늘 반대편으로 쏠리지 않는가?… 그리하여 그들은 승리를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서 마침내 돈벌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 부자에 대해서 찬양하며 찬탄하여, 그를 관직에 앉히지만, 가난한 사람은 멸시하네” (550e-551a)

“따라서 이들은 그때 자산액을 산정하여 과두적인 정체의 기준을 법으로 정하게 되는데, 과두 정체의 성격이 더한 곳에서는 그 액수가 더 많으나, 그 성격이 덜한 곳에서는 그 액수가 더 적네. 자산이 정한 평가액에 미달하는 사람에겐 관직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선언한 다음, 이를 무력에 의해 관철하거나, 또는 그러기에 앞서, 공포감을 조성하여 그런 정체를 수립하네.” (551b)

 

– 과두정체의 특성(결함) (551c-552a)

(1) 평가 재산을 근거로 삼음에 따라 능력 있는 가난한 사람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음 (ex.조타수)

(2) 필연적으로 하나가 아닌 두 나라; 가난한 사람들의 나라와 부유한 사람들의 나라이므로 같은 곳에 거주하면서 언제나 서로에 대해서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의 나라

(3) 어떠한 전쟁도 할 수 없다는 것(무장한 대중을 이용함으로써 적보다 대중을 더 두려워하고, 결국 자신들이 소수자임이 드러나게 됨/ 재물을 좋아하므로 돈을 기부하지도 않음)

(4) 참견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동시에 농사짓는 사람들이며 돈벌이 하는 사람들이고 전쟁하는 사람들 “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팔고, 다른 사람은 이 사람 것을 사서 갖는 것이 허용되는 것, 그리고 이를 다 판 사람이, 이 나라의 어떤 구성원도 아니면서, 즉 돈벌이를 하는 사람이나 장인으로도, 기병이나 중무장 보병으로도 불리지 못하고, 가난뱅이로 그리고 빈털터리로 불릴 뿐인 자이면서도, 이 나라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 말일세.” (552a)

 

“그러니까 자네가 거지들을 볼 수 있는 나라에서는 그곳 어딘가에 도둑들과 소매치기들 그리고 신전 절도범과 이런 유의 온갖 나쁜 짓을 하는 자들이 숨어 있는 것이 분명하이.” (552d)

“그렇다면 이런 나라들에는 침을 가진 못된 자들이 또한 많이 있어서, 이들을 통치자들이 조심스레 힘으로 제압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와 같은 사람들이 거기에 생기게 되는 것은 교육부족과 나쁜 양육 그리고 나쁜 정치체제로 인하여서라고 우리는 말하지 않겠는가?” (552e)

 

– 과두정체에 일치하는 사람: (재물을 가장 귀히 여김, 인색하며 부지런히 일함, 무엇에나 이윤을 남겨 창고에 쌓아둠으로써 대중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 아버지가 무고를 당해 사형 또는 재산을 몰수 당하는 일 등을 보고 겪은 아들

“여보게나, 아들은 이런 일들을 보고 겪은 데다 재산마저 잃게 되자, 겁을 먹고서, 명예에 대한 사랑과 저 격정적(기개적)인 부분을 자신의 혼에 있는 그 옥좌에서 잽싸게 몰아내 버릴 것이라 나는 생각하네. 또한 그는 가난으로 비천해진 나머지, 탐욕스레 돈벌이로 전향하여, 조금씩 절약하며 일을 하여, 재물을 모으게 되네.” (553c)

“그는 헤아리는(이성적인) 부분과 격정적인 부분을 욕구적인 부분 아래 땅바닥 양쪽에 쪼그리고 앉게 하여, 노예 노릇을 하게 하면서, 앞엣 것에 대해서는 어떤 수로 더 적은 재물에서 더 많은 재물이 생기게 되겠는지를 셈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 나는 생각하네. 그런가 하면, 뒤엣것으로 하여금 부와 부자들 이외에는 아무것에 대해서도 감탄하며 존중하지 못하도록 하며, 또한 재물의 획득이나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자랑거리로 여기지 못하도록 할 걸세.” (553d)

“즉 그런 사람은, 자신이 올바른 것으로 여겨져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그런 여느 계약 관계들에 있어서는 자신 안에 있는 여느 나쁜 욕망들을 자신의 어떤 적절한 부분에 의해서 힘으로 제압한다는 것을 말일세. 그러나 그가 이러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걸 설득해서도 아니며, 말로써 고분고분하도록 만든 것도 아니고, 강제와 공포감에 의해서요, 자신의 다른 재산에 대해 두려워해서라는 것을 말일세.” (554d)

“따라서 이런 사람은 내면적으로 분쟁 없는 상태에 있지도 못하며, 한 사람 아닌 이중적 인간일 것이네. 비록 대개는 더 좋은 욕망들이 더 나쁜 욕망들을 억제하겠지만 말일세.” (554e)

“더 나아가, 이 인색한 사람은 어떤 승리나 훌륭한 것들에 대한 그 나라에서의 여느 경쟁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보잘것없는 경쟁자이네. 그는 명성을 위해서나 그와 같은 경쟁을 위해서는 재물을 쓰려고 하지 않으며, 낭비적인 욕구들을 불러일으켜 이것들의 동맹과 승리욕을 위해 이것들을 불러 모으는 걸 두려워하여, 과두 정치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소수 병력을 갖고 싸움으로써 대개는 패배하면서도 부자로 지내네.” (555a)

[502d~521c] 좋음의 이데아,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정리

2.1. 좋음의 이데아

 

[502d] 남아있는 논의 : 정체의 보존자들이 어떻게 생기게 되는지, ①방법 ②교과(학문) ③활동 ④어떤 연령의 사람들이 그 각각에 관여할 때 생기는지

[502d~503d] 이 부분에서는 소크라테스는 앞서 건드리기 어려워 주저하고 있었던 문제에 관해 논한다. 처음 논의는 통치자 아내들의 소유에 관한 문제이다. 소크라테스 자신도 아내들의 소유에 관한 문제가 반드시 추구되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반감을 살 것이고 실현되기도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것은 처음부터 추구하듯, 추구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들의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서도 다시금 강조한다. 첫째로 통치자는 괴로운 일?즐거운 일을 겪더라도 나라를 사랑해야한다. 둘째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끝으로 이러한 원칙을 잘 지킨 통치자에 대해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예와 상을 주어야하고 살아서는 위의 원칙을 따르는 사람을 통치자로 옹립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위의 기본적 자세를 가진 자들을 옹립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즉, 철학자들이 ‘엄밀한 의미의 수호자’로 임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선 철학자에 대한 성향(자질)들을 다시 한 번 언급하고 그 성향을 모두 가진 이(철학자)가 드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언급한다. 우선 철학자의 기본성향은 ①쉽게 배우고 ②기억력이 좋고 ③재치 있고 ④민첩하고 ⑤여타의 다른 성향들도 활기차고 당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의 민첩한 성향은 그것에 의해 다른 성향들이 활기차게 하고 당당하게 한다. 혹여 그와 반대되는 ①조용함 ②안정됨 ③절도 있게 살아감 같은 성향들은 철학자에게는 유지될 수 없다. 그것은 민첩함이라는 성향이 그들을 스스로 이끌어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철학자의 성향이 소수만 가지게 되는 이유는 그 성향(자질)이 천성으로 결합된 상태에서 자라기는 힘들고 그 각각의 성향들마저도 대부분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들- ‘엄밀한 의미의 수호자들’이 소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503d] 앞서 설명한 철학자의 성향과 반대되는 ①조용함 ②안정됨 ③절도 있게 살아감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안정되고 변하지 않는 성격들이기에 그들은 믿음직한 진술들로 쉽게 이용되게 된다. 그들은 설령 전쟁에 대해서도 믿음직한 진술들에 의해 설득 당하게 되어 좀처럼 동요하지는 않지만, 배움에 임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인다. 즉, 그들은 배움에 대해서 철학자들이 느끼는 경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향이라고 해서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가 배제할 것이 아니라 양쪽 성향을 훌륭히 겸비해야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교육/명예/통치 그 어떤 것에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말한다. 아마도, 교육/명예/통치 와 같은 부분은 통치자가 관여해야할 부분이기에 진정한 통치자는 양쪽 성향을 모두 가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503e]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통치자가 될 인물들이 가장 중요한(최고의) 학문들을 감당가능한지 시험하고 살펴보기 위해 그들에게 노고, 두려움, 쾌락 등을 시험해야하고 많은 교과 들을 통해서도 단련을 받아야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양쪽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기인하는 것이다.

[504a~505a] 이 부분부터 ‘중요한(최고의) 학문’들은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본격적인 선에 이데아에 관한개념이 등장한다. 우선 최고의 학문이란 것은 좋음의 이데아를 지칭한다. 구체적으로 이 부분은 [503e]에서 소개한 최고의 학문을 감당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서 왜 노고, 두려움, 쾌락을 시험받고 많은 교과들로 단련 받아야하는지 이유에 대해 말한다. 본질적으로 혼의 3요소인 절제, 용기, 지혜와 같은 것들을 훌륭하게 더 잘 알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더 멀고, 다르며, 피해 돌아가야 하는 즉, 더 어려운 길을 거쳐야한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길을 돌아옴으로써 척도(metron)가 실재에 미치게 하고자 함이다. 풀어 설명하자면 개인이 가진 여러 가지 기준들(척도)이 좋음의 이데아(실재)에 다가가게 하기 위하여 어려운 방법으로 훈련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국가와 법률의 수호자(통치자)는 다양한 교과를 공부하는 것처럼 어려운 방법으로 시험받지 않는 다면 그들이 가지는 척도(metron)는 좋음의 이데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신체단련 못지않게 공부하는 데 있어서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504e~505d] 우선 [504e~505a]에서는 좋음의 이데아가 ‘가장 큰(중요한) 배움’이자 이것 덕분에 올바른 것들과 그 밖의 다른 것들이 유용하고 유익한 것들도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것의 궁극적 원리(arche)라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혹시 자네는 소유가, 정작 좋은 것이 아닐지라도, 모두 이득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가? 혹은 ‘좋음’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도, 정작 아름다운 것이나 좋은 것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다도 그렇겠는가?”(국가, 429)

 

라는 질문을 글라우콘에게 던진다. 아마도 이 질문은 ‘좋음’이라는 것이 반드시 철인에게만 가지고 있는 관념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지혜를 좋다고 생각하는 세련된 사람들이 그들도 지혜를 모르기 때문에 좋음에 대한 지혜라고 말하는 점이나, 쾌락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다중들이 쾌락에는 나쁜 쾌락도 있음을 동의하는 데에서 보건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매우 부분적이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구체적인 좋음에 대한 정의(쾌락이나 지혜와 같은 정의)를 논할 때 달리하게 되고 단순히 좋음에 대한 것이라고 정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여겨지는(판단되는) 것들’(doxa의 것들)을 행하고, 소유하고, 택하겠지만 실제로 ‘좋은 것’들은 ‘doxa의 것들’에 만족하지 않고 ‘사실로 그런 것들’(ta onta)을 추구하기에 즉, ‘좋은 것’들은 실재의 세계(이데아계)의 것들을 추구하기에 의견(판단: doxa)를 경멸하게 된다.

[505e~506b]여기에서는 앞서 제시 미약한 정의들을 바탕으로 보았을 때, 공통된 ‘좋음’에 관한 속성을 종합하여 좋음의 이데아에 대해 정의를 도출한다. 좋음의 이데아라는 것은 모든 혼이 추구하는 바로 그것,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행하게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좋음의 이데아가 있는지 혼은 예감은 하면서도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당혹해한다. 또한 그것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확고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 이렇게 확고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원인 때문에 혼은 다른 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중요한 좋음의 이데아를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즉, 지도자들이 그런 것들을 몰라서는 안 되며, 지도자들이 그것을 모를 경우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를 대단치 못하다고 생각하기에 따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수호자가 이것을 제대로 아는 상태에서 정체(국가)를 다스린다면 그 정체(국가)는 완벽하게 다스려질 것이다.

[506b~506e]글라우콘은 이때까지의 논의를 진행해오면서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신념 즉, 다른 사람들의 의견(doxa)을 논의에서 다뤄 왔지만 정작 자신의 신념(dogma)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의견(doxa)를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인식(앎: episteme)가 결여된 의견(판단:doxa)는 설령 그것이 가장 인식에 가까웠을 지라도 창피스런 것이라 말한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는 눈은 멀었어도 길을 바로 가는 사람들의 비유를 통해 글라우콘의 생각을 한 번 더 지적한다. 또한 ‘밝고 아름다운 것들을 남들한테서 들을 수 있으면서도, 창피스럽고 맹목적이며 일그러진 것들을 보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서 그는 인간의 참된 것을 아는 인식(episteme)의 능력의 가능성을 언급함과 동시에 의견(판단:doxa)의 것들로 빠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아마도 이러한 언급은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무지의 언명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어지는 글라우콘의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구체적인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자신 또한 좋음 자체를 말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일이기에 불가능하다고 말하나 좋음의 소산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할 때 그것 자체를 설명해주기 보다 그와 가장 비슷하게 여겨지는 태양을 통해서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한다. 그리고 글라우콘은 진정한 ‘좋음’에 대해 설명 받지 못한 것을 아버지는 나중에 받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헬라어에서 소산이라는 말이 이자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를 빗대어 원금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소크라테스가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좋음에 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그가 가진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무지의 언명에 따른 겸손에서 비롯된 것이라 파악해야한다.

 

2.2. 태양의 비유

 

[506e~509c]부분에서 본격적으로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한 태양의 비유가 언급된다. ‘감각에 의해 지각될 수 있는 것들’(ta aistheta)은 각각 다른 감각(aisthesis)들로써 지각한다. 만일 보는 것의 경우에는 눈에 보이게 될 물체들과 눈이 가지는 능력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시각과 물체 사이에는 제 3의 것이 필요하게 된다. 즉, 우리가 눈으로 물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인 시각과 물체가 보이게끔 하는 힘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시각과 물체(보이는 것) 사이에는 왜 빛이란 것이 필요할까? 그것은 빛이 없을 때의 가정을 들어보면 적당하다. 예를 들어 빛이 없는 상황에서는 눈은 시각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어둠이 가득하기 때문에 볼 수 없으며, 사물은 색을 가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도 어둠에 의해 즉, 빛이 없기 때문에 색을 가질 수 없다. 이와 같이 빛은 능동적인 인지자로 하여금 최대한 잘 보게끔 해주며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즉 사물에 대해서는 최대한 잘 보이게끔 만들어준다. 그리고 빛 중에서도 가장 그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태양이다. 이에 따라 이 비유를 태양의 비유라 일컫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각각의 기관은 그 고유의 능력만을 담당한다. 예를 들어 눈은 시각을 귀는 청각을 코는 후각을 담당하는 것을 들어볼 수 있다. 그래서 각각의 기관들 중에서도 태양과 가장 닮아 있는 기관은 시각을 담당하는 기관인 눈일 것이다. 하지만 눈도 그것의 능력인 시각도 태양 그 자체는 아니다. 다만 다른 감각기관들에 비해서 가장 많이 닮아 있기에 눈은 그 힘인 시각을 태양으로부터 받게 된다. 따라서 태양은 시각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각의 원인이다. 그렇기에 태양 또한 시각에 의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양과 눈, 시각 그리고 각기 다른 물체들의 관계는 좋음의 이데아와 혼, 지성(정신:nous) 그리고 지성에 알려지는 것들(ta nooumena)과 그 관계가 대응될 수 있다. 단, ‘좋음’이란 것은 ‘지성에 의해서[라야]알 수 있는 영역’에 있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고 각각의 것들은 이데아를 상정한다. 이에 반해 앞의 것들은 ‘눈에 보이기는 하나 지성에 의해 알려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전자의 것들과 후자의 것들은 각각의 영역을 달리하는 것이다.

위의 비유를 적극적으로 대응하자면 혼은 진리와 실재가 비추는 곳에 갈 때에는 지성에 의해 그것을 알고 인식하게 되며 결국은 지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만일 ‘어둠과 섞인 것’에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에 다르게 말하면 현상계에 혼이 가게 될 경우 ‘의견’(판단:doxa)를 갖게 되고 의견을 바꾸어 가지면서 혼은 더욱 침침한 상태로 빠지게 된다. 이렇게 침침한 상태의 혼은 지성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는 태양과 마찬가지로 “인식되는 것들에는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을 제공한다. 하지만 태양과는 다르게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착오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식과 진리 그리고 좋음의 이데아는 같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인식과 진리는 ‘좋음’과 닮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만 어느 것 하나가 곧 ‘옳음’이라고 해서도 안 되며 그 훌륭함에 있어서도 더 월등하기에 ‘좋음’ 그 자체의 상태에 관해서 온전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 말고도 좋음의 이데아는 그 자체는 생성되는 것(genesis)은 아니지만 생성과 성장에 영향을 준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물체가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물체가 존재하게 되고 그 ‘본질’(실재성:ousia)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즉 그 것은 지위와 힘이 ‘존재’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다.

 

2.3. 선분의 비유

 

[509b-511e]

508a 인식과 진리가 이데아를 구분, 이데아는 그것들 보다 훌륭한 것이다. 이데아를 태양으로 비유하지만 태양으로 믿는 것이 옳지 않듯, 좋음이라 말하는 것을 그 자체로 간주하는 것은 바르지 않음. 이데아는 그것보다 더 귀중한 것임. 이데아 그 자체는 인식과 진리를 제공하지만 그것 자체는 아름다움을 뛰어 넘어선다.

509b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태양이 생성과 성장 그리고 영양을 제공해준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태양 그 자체는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전제한다. 이데아도 마찬가지이다. 인식대상물들이 인식가능하게 되는 것은 좋음으로 인해서일 뿐아니라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 본질(실재성 : ousia)을 갖는 것도 그것에 의해서이다. 따러서 좋음이란 것은 그 지위와 힘이 존재를 초월해서 있는 것이다.

509c~e 여기서 플라톤은 가시적인 것과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것을 구분했다는 앞선 논의의 결론을 재조명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두 부류를 같은 비율로 나누고 각각이 상대적인 명확성과 불명확성이 드러난다. 즉 명확성의 부류에 의해서 그림자나 매끄러운 표면에 비춰진 상들과 같은 불명확한 것들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510a 그리고 나서 우리주변의 동식물 및 인공적인 물건들을 그림자와 같은 부류(영상 : eikon)로 간주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의견의 대상인 것(to doxaston)과 ‘인식 가능한 것(인식 대상 : to gnoston)’의 관계처럼 닮은 것과 닮음의 대상으로 된 것이 같은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510b소크라테스는 이제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것(to noeton)의 부분을 어떻게 분할 할 것인지 고찰한다. 그는 그 구분을 위해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혼이 영상들을 이용하여 결론으로 나아가는 방식의 탐구이고 즉, 연역적인 탐구와 다른 하나는 무가정 원리 즉, 영상들이 없이 형상들 자체를 이용하여 나아가는 탐구이다. -선분의 비유는 인식의 분할에 관해 논하는 것이다.

510c~e 이 부분에서는 위에 제시된 두 가지 탐구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고 있다. 그것들은 수학이나 기하학의 탐구원리와 같다. 홀수와 짝수 도형, 세 종류의 각과 같은 것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서 가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들이 명백한 것으로 설명이 필요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들을 고찰하여 나오게 된 결론은 일관성이 있다.(즉, 모순이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추론적 사고에 의하지 않고서는 얻어낼 수 없는 것들이다.

511a 소크라테스는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noeton) 것이라 말한 종류의 탐구들은 어쩔 수 없이 가정을 이용하게되고 원리(근원)으로는 나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가정을 벗어나서 탐구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정들은 아래의 것들 즉, 가시적이거나 감각적인 것들에 비해서 명백한 것으로 판단되고 존중되기 때문에 그것을 모상으로 이용한다.

511b 다음으로 소크라테스는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종류의 또 다른 한 부분으로 ‘이성 자체가 변증술적 논변의 힘(능력)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을 제시한다. 이 때의 가정들은 앞서와 같이 원리로서가 아니라 무가정의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근원(좋음의 이데아)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 발판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탐구도 형상들 자체만을 이용하여 형상들을 통해서 탐구에 들어가며 또한 끝을 맺는다.

511c~e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가 암시하는 변증술적 논변의 학문과 기하학이나 그와 비슷한 학문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것에 긍정하며 다음과 같이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정리한다.

 

 

 

 

-다음의 표는 509d~511e에 걸친 인식론적 업급을 도표로 만든 주석(책 441페이지)을 인용한 것이다.
가시적인 것들(ta horata)

감각 대상들(ta aistheta)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들

(ta noeta)

대상들
상(영상, 모상), 그림자
실물들(동식물들 및 일체의 인공물들)
수학적인 것들(도형들 홀수, 짝수 등)
이데아 또는 형상들

주관의 상태들
상상,짐작

(eikasia)
믿음, 확신

(pistis)
추론적 사고

(dianoia)
지성에 의한 앎, 인식

(noesis, episteme)

의견, 판단(doxa)
지성에 의한 앎 (이해) (noesis)

2.4. 동굴의 비유

 

[514a~521b]동굴의 비유는 교육(paideia) 및 교육 부족(apaideusia)과 연관되는 성향을 나타낸 것이다. 동굴의 비유에 등장하는 동굴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강한 빛에 노출된 입구를 지닌 지하 동굴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있다. 이들은 사지가 결박당하고 목과 얼굴은 동굴의 안쪽 벽면에만 고정되어 그곳만을 응시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 죄수들의 행렬 뒤로는 담장이 세워져 있고 그 위로는 인형들을 올려 죄수들에게 그림자 인형극을 보여준다. 그리고 죄수들은 그 그림자로 비춰진 상들만을 바라보며 서로가 서로를 보지도, 혹은 뒤를 돌아보지도 못한다. 이렇게 그림자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죄수들은 벽면에 있는 그림자들만이 실재들(ta onta)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듣는 목소리는 오로지 벽면에서 울리는 메아리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죄수들은 그림자와 메아리에 익숙해져 감정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것만을 진실 된 것이라 믿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러한 죄수들 중 어느 하나가 결박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되어, 불빛을 쳐다보는 것을 강요받고 바깥에 있는 빛의 세계로 끌려나온다면 어떠할까? 설령 그 과정이 눈에 광휘로 가득차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굴 밖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이전의 과정은 고통스럽고 짜증이 났겠지만 차차 빛의 세계에 익숙하게 되면서 그는 그 태양에 관해 자신들이 보았던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것’(aitios)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그는 동굴 안에 있었던 동료들에 대한 연민으로 인해 그들을 구해내기 위하여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광휘의 세계에 있었던 탓에 그는 어둠의 세계에 익숙하지 않아 앞을 분간할 수 없는데 더군다나 그가 이끌어 가려고 했던 동료 죄수들은 그의 능력에 관해 경합을 요구한다면, 조롱과 야유를 받기도 하고 자칫하면 죽임까지도 당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등장하는 ‘오름’(anabasis) 즉, 동굴 밖으로 나옴이,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세계를 넘어서서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영역’으로 향하는 혼의 등정과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어려운 등정 끝에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좋음의 이데아’가 되는 것이다. 앞서 태양의 비유의 결론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이 이데아는 가시적 영역에서의 것들이 원인이 되는 것이다. 비유에서는 그림자의 원인이 되는 것이 동굴 밖의 광원인 것과 같이 이 이데아는 현실세계의 원인되는 그 무엇에 해당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동굴의 비유는 교육에 관한 것들을 암시하고 있다. 즉,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교육이란 동굴 속에서 어둠으로만 향해있던 몸의 방향을 빛의 세계로 돌리듯, 혼 전체를 생성계(현상계)에서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보는 능력자체는 지니고 있지만 그 방향성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진정한 앎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 혼의 능력중 하나인, 똑똑함의 ‘훌륭함’(덕:arete)들 유용하고 유익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무용하고 해로운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못된 사람들이 그것을 ‘나쁨’에 이용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며 혼에 대해서 여러 가지 쾌락들이 그 눈길을 아래로 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성향(자질)을 지닌 자들에게 좋음의 이데아가 무엇인지 아는 배움에 이르도록 강제해야한다. 하지만 그렇게 훌륭한 성향을 지닌 자들이 그 좋음의 이데아를 보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 그들이 그것만을 보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즉, 동굴의 비유에서 한 죄수가 연민을 느끼고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 다른 죄수동료들을 구출해내려 하듯 그러한 능력을 지닌 자들도 올바르지 못한 방향을 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도와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들은 법(nomos)에 의해서 강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법은 나라에 있어서 한 부류만이 잘 살게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좋음의 이데아가 실현되도록 관심을 갖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아는 자들이 단지 앎 그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자들에 대한 앎의 재분배를 강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국가는 안정되고 단합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