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고전2가 시작됩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시대와 철학 알림>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 청춘의 고전 시리즈가 KT&G 상상마당에서 개최된다. 3월 24일부터 9월 8일까지 매월 둘째 주 넷째 주 토요일에 개최되는 청춘의 고전2 시리즈는 총 12강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청춘의 고전 시리즈는 일반에게 많이 알려진 그림을 통해 철학적인 문제의식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어 예술과 철학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줄 것이다. 강사진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과 만나던 틀을 깨고 자유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수강생들과 만날 예정이다. 앞으로 강의의 현장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시대와 철학>과 프레시안이 함께 전달할 것이다.

“너는 홍대 앞에서 클럽 가지? 난 홍대 앞에서 철학한다”라는 말로 젊은 세대와 만나는 청춘의 고전 시리즈는 가벼움과 진지함이 어우러진 젊음의 장소로 이미 2011년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아왔다. 각 회별로 수강할 수도 있고 전체 수강도 가능하다. 전체 수강을 할 경우 수강료가 할인된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0)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0)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4)

플라톤의 에로스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하면서 몇 가지 궁금한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른바 ‘플라토닉 러브’를 이해할 때에 늘 따라다니는 의문들이다. 가장 먼저 플라톤의 에로스와 몸의 아름다움과의 관계이다. 앞에서 살폈듯이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흥미롭게도 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을 정신적인 것으로 올라가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플라톤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의 또 한사람의 제자 스펫토스(Sphettos) 출신 아이스키네스(Aischines)도 <아스파시아(Aspasia)>라는 대화편에서 플라톤에 앞서 그런 말을 했다. 그래서 기곤(Olof Gigon)은 “플라톤이 아이스키네스의 아스파시아를 넘는 대항 인물로 디오티마를 구상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에게 아름다운 몸에 대한 황홀한 응시로부터 이데아의 관조에 이르기까지의 단계적 행로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것의 배경에는 일정부분 몸과 영혼의 유사성이 깔려 있다. 왜냐하면 에로스의 진정한 본질을 계시 하는 부분(206B)에서 디오티마는 에로스는 “몸에 있어서 그리고 영혼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 안에서 출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발은 그렇게 했을 지라도 에로스의 오름길에서 몸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바로 자리를 내준다. 그리고 최고 관조 단계에서 디오티마는 “아름다움(kalon)”과 “좋음(agath?n)”을 하나로 일치시키고 있는데 이 경우 좋음과 일치하는 아름다움 또한 영혼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디오티마가 오름길의 출발선에 몸의 아름다움을 두고 있는 것에 대해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것은 없지만, <향연>의 그 부분만으로도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모두 몸의 아름다움에 대해 결벽스러울 정도의 거부감을 가졌다는 일반의 오해를 풀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몸의 아름다움은 비록 영혼의 아름다움보다는 하위의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과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것이자 좋은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아름다움과 좋음을 동일시하는 부분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이러한 동일시는 아름다움과 좋음을 하나로 묶은 kalokagathia라는 개념으로 그리스인들의 사유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피치노(Marsilo Ficino)는 <에로스에 대해서 혹은 플라톤의 향연>이라는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름다운 몸에서 반사되는 신성(Gottheit)의 빛! 그 빛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들은 사랑하는 대상을 신의 모습인양 찬미하고 외경심을 가득 품은 채 숭배하지 않을 수 없다“. 뫼리케(M?rike)의 말도 여기에서 빠뜨릴 수 없다.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다“. 그러나 몸의 아름다움이건 영혼의 아름다움이건 플라톤적인 에로스와 아름다움의 결합, 아름다움과 좋음의 결합이 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키케로(「투스쿨룸 대화」4.70)는, “우애로 위장을 한 그런 사랑(소년사랑을 말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iste amor amicitate)”라고 불쾌한 듯 되묻는다. 그것은 보기 흉한 젊음이나 아름다운 늙음이 좋은 조합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 후에도 취급하게 되지만 로마 제정기의 작가 루키아노스(Lukianos)의 <사랑에 대해(Erotes)>(23,33)라는 책에서도 저자는 에로스와 좋음, 아름다움과 도덕적인 가치를 동일시하는 것을 웃음거리로 삼고 있다.

키케로(기원전 106-43)

사실 플라톤이 아름다움과 좋음을 동일시한다는 것은 최고의 단계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여전히 연속적이고도 경계가 불분명한 무규정적인 현실의 위계에서는, 설령 가장 뛰어난 몸의 아름다움을 가졌다 해도 미미하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일 수 없다. <향연> 210b의 언급은 그 결정적인 부분이다. 그곳에서 디오티마는 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로부터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고 가는 길을 화제로 삼으면서 설사 누군가 몸의 아름다움을 아주 미미하게만 가지고 있어도(smikron anthos) 영혼이 아름다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은 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영혼의 아름다움의 절대적 우위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플라톤은 <향연> 끝부분에서도 일상의 생각을 독특한 방식으로 역전시켜 빛나도록 아름다운 알키비아데스로 하여금 실레노스와 같이 보기 흉한 소크라테스에게 숨 막힐 정도의 사랑의 고백을 토해내게 함으로써 그 우위성을 뒷받침한다. 우리는 <파이드로스>의 결론 부분도 상기해야할 것이다. 그곳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땅의 신들에게 내적인 아름다움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플라톤적인 에로스가 어디까지나 남성의 아름다움에만 주목하는 남성중심의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그의 에로스론은 어쩌면 원천적인 한계를 갖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디오티마가 비의의 단계적 오름길에서 가장 낮은 단계를 묘사할 때마다 무차별적으로 그저 아름다운 몸(soma)을 내세운다는 것은 그 몸이 소년사랑의 당사자들인 남성들의 몸을 가리키는 것임을 감안한다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플라톤 스스로 이미 여성의 몸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아예 논외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혐오나 기피의 대상까지는 아니긴 하지만 플라톤이 이성에 대해 무관심했음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빌라모비츠(Wilamowitz)도 그의 플라톤에 관한 책을 통해 “여러 측면에서 플라톤이라는 인물에게 있어서 여성은 전 생애동안 어색한 존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가장 중대한 결함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향연>에서 가장 최고의 인식단계로 이끄는 사람이 물론 예언가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한 명의 여성이라는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리고 <국가>에서 보듯이 여성을 이상국가의 수호자 그룹에 포함시킨 것은 그리스 로마 사상가를 통틀어 플라톤 밖에 없었을 만큼 매우 특별한 점이라 할 것이다. 하기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한 여성이 오랫동안 제자로 생활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다가 남장을 하고 몰래 들어와 있었던 것이라 하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려나 플라톤의 에로스론에서 몸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고려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흥미로운 관심사이긴 하지만, 에로스의 해석과 관련한 그리스 논쟁사의 핵심은 플라톤에 와서야 비로소 에로스가 육체적인 아름다움의 영역으로부터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대한 관조와 헌신의 영역으로 고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오름길의 단계에서 일상의 활동(epit?deumata)속에서 일상인의 눈에 비치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적인 인식을 그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에로스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살아 숨 쉬는 에로스이되, 종국에 가서는 그 일상을 뛰어넘어 다시 일상을 고양된 정신적 가치와 의미로 승화, 견인해내는 에로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법에 걸려 죽어가던 프쉬케를 에로스(=큐피드)가 구출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The Abduction of Psyche, 1895 / Bouguereau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플라톤 자신도 몸의 관능적 아름다움을 출발점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에로스가 포함하는 필요 불가결한 부분으로서 그의 단계적 오름길에 집어넣었을 것이다. 플라톤이 대체로 성적인 것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시대 특히 지식인 사회에서 유행했던 소년사랑과 그 관능적인 측면에 대한 그의 혐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전의 논의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정신에 대한 플라톤의 경도가 몸에 대한 무조건적이고도 엄숙주의적 혐오와 거부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플라토닉 러브’는 정신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데 방점이 있는 것이지 몸에 대한 사랑을 거부하는 데 있지 않다. 고대의 저작가 중 유독 부부간의 사랑에 새로운 광채를 부여했던 플루타르코스(Plutarchos)가 다름 아닌 아주 열렬한 플라톤주의자였다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도 단순히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향연>을 통해 드러나는 플라톤의 에로스론은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 에로스는 인간을 어떤 종류의 불멸에로 인도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소크라테스를 그런 에로스의 구현체로 보여줌과 동시에 알키비아데스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진면모를 드러냄으로써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두말할 나위 없이 그 배경에는 어떠한 삶이 살만한 삶인가하는 문제와 삶과 앎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플라톤 철학의 근본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에로스론은 ‘지혜사랑 즉 철학(philosophia)으로 이끌기 위한 권유(protr?ptikos)’에 그 근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 고통에 찬 인간상 – 작가 미상

어쨌거나 고대 그리스의 에로스는 플라톤에 이르러 관능의 옷을 벗고 정신적인 가치로 고양된다. 플라톤이 이룩한 이 에로스의 정신에로의 고양은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이룩한 “성의 해방”에 역행하는 고루하고도 반동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서양지성사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른바 끊임없는 전쟁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헬레니즘 시대의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몸은 이미 자기의 것이 아니었다. 전란의 시대에 몸이 부딪친 이러한 극한의 고통과 절망은 영육 분리의 사상을 더욱 심화시켰고, 파괴될 대로 파괴된 공동체에서 파편화된 개인은 부지불식간에 영혼과 정신에서나마 자기를 보존하거나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될 초월의 시대, 종교의 시대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인의 사랑은 헬레니즘 로마시대의 에로스를 거쳐 은총으로서의 사랑과 그 구원의 은총을 베푼 기독교적 초월신에 대한 사랑으로 넘어간다.

라게르보르크(Lagerborg)가 플라토닉 러브에 관한 그의 저작 서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요엘(Karl Joel)의 말을 끝으로 플라톤의 에로스에 관한 우리의 논의를 마무리하기로 하자. “플라톤은 하나의 힘, 영혼을 견인하는 힘이자 하나의 방향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유의 방향일 뿐만 아니라, 심정의 방향(Gem?tsrichtung)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도저히 뿌리 뽑을 수 없는, 늘 새롭게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끝)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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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3)

횔더린의 디오티마 슈세테 곤타르트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연설 사이에는 아가톤의 연설이 놓여 있다. 아가톤은 고르기아스의 수사학적 기법을 이용하여 에로스를 신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선한 신으로, 게다가 정의와 절도, 용기와 지혜까지 겸비한 신으로 찬양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비아냥조의 몇 마디 형식적인 칭찬을 던진 후 곧바로 그의 연설을 논파해버린다. 아가톤이 향연을 주관한 당사자이고 향연 또한 그를 축하하기 위해 열린 것을 감안하면 아가톤의 연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무시에 가까운 비판은 매우 도발적이다. 실재와 상관없이 미사여구로만 가득한 아가톤의 찬양은 이미 그 자체로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의 방식이 바로 아가톤이 그토록 따랐던 소피스트들의 방법이었다는 점은 그 모멸을 더욱 극대화한다. 이제 소크라테스가 연설할 차례이다. 그런데 여기서 약간 당혹스런 장면이 벌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연설하는 형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 그것도 디오티마(Diotima)라는 어떤 이방인 여성의 발언을 보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티네이아의 디오티마가 역사상의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완전히 플라톤의 창작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디오티마는 이미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19세기 초 독일의 유명한 서정시인 횔더린( Friedrich H?lderlin)은 자신의 애인 슈세테 곤타르트(Susette Gontardt)를 디오티마라고 부르고 휘페리온(같은 이름의 소설의 주인공)의 애인에게도 같은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지금 에로스에 대한 지고의 비밀을 알고 있는 한 명의 여성이 남성들만의 향연에 그것도 좌장격인 소크라테스를 이끄는 사람으로 등장한다는 기묘함에 직면해있다.

디오티마 상 Victor Wager 작

보통은 소크라테스가 대화 상대의 무지를 일깨워가며 대화를 이끌지만, 이곳에서는 소크라테스가 경외에 찬 눈으로 그녀의 가르침에 따라 참된 인식에로 이끌린다. 소크라테스가 아가톤의 주장을 비판한 것과 똑같이 디오티마는 에로스가 아름다움을 욕구하는 이상 결코 그 자체 아름다운 것일 수 없으며, 나아가 에로스는 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신과 달리 완전함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오티마는 에로스를 신적인 것과 가사적인 것 사이의 중간적 존재, 즉 위대한 신령으로 말한다. 초기 그리스어에서 신(theos)과 신령(Daim?n)을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지만 플라톤은 디오티마의 입을 통해 다이몬을 신과 인간들 사이를 이어주는 힘이자 서로 대립하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힘으로서 아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차츰 밝혀지겠지만 디오티마가 말하는 에로스는 중간에서 결핍에 시달리며 어정쩡하게 고민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마치 연어가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강을 차고 오르듯이 무지의 저항을 뚫고 아름다움과 좋은 것을 향해 치열하게 스스로의 본질을 구현하는 역동적인 힘이다. 존재론적으로 표현하자면 에로스는 존재와 무(無) 사이의 무규정적(apeiron) 현실에서 무로부터 연원하는 궤멸과 허무를 부정하고 끝없이 존재로 치닫는 치열한 자기보존적 운동성 즉 생명력인 것이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정지의 형이상학으로 단순하게 환원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에로스의 이러한 중간자적 성격은 <향연>에서 신화적인 우화로 표현된다. 신들이 아프로디테의 생일잔치에 모였을 때 그곳에는 늘 풍족함에 이르게 하는 계책을 가진 메티스의 아들 포로스(Poros:방도)도 있었다. 그런데 페니아(Penia:곤궁)가 그 잔치에 구걸을 하러 왔다가 넥타르를 많이 마셔 취해 있는 포로스를 발견하고, 아무런 대책 없이 살아가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포로스의 아이를 가지려고 그를 유혹하여 동침한다. 이 어울리지 않는 커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에로스이다. 자식의 됨됨이는 부모의 됨됨이를 닮는다. 곤궁의 자식인 에로스는 늘 가난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섬섬하고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피부도 거칠고 맨발에 집도 없고 늘 땅바닥에서 문가와 길섶에서 하늘을 지붕 삼아 잠을 잔다. 그러나 이 에로스는 또 아버지를 닮아서 늘 계책을 가지고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추구하는 담차고 맹렬한 자이고 늘 뭔가 수를 짜내는 능란한 사냥꾼이자, 사리분별을 욕망하고 전 생애에 걸쳐 지혜를 사랑하는 마법사요 주술사요 소피스트(여기서는 말뜻 그대로 ‘지혜로운 자’의 뜻)이다.(203d) 이러한 에로스의 묘사에서 우리는 금방 아테네의 거친 현실에서 치열하게 구도자적인 삶을 산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떠올린다.

플라톤은 이제 앎을 향한 에로스의 마지막 오름길에 앞서 중간 단계를 두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그리스인의 전통적 행복관이 생식의 비유를 통해 제시된다. 행복이란 좋은 것이 잠시가 아니라 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로스는 이와 같이 좋은 것들이 늘 자신에게 있기를 욕망한다. 그러나 가사적인 인간에게 좋은 것이 늘 함께 있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에로스는 생식(genesis)을 통해 자신과 같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불사적인 것이 되기를 욕망한다. 출산이야말로 가사자인 생물 안에 들어있는 불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늘 아름답고 좋은 것을 출산하려고 하는 한, 생식은 아름다운 것들, 좋은 것들 사이에서의 생식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러한 육체적인 생식은 인간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생식보다 훨씬 열등한 것이다. 아름다움을 자신 속에 갖추고 있는 사람은 아름다운 자와 접촉하여 그와 사귐으로써 자기가 오랫동안 임신(남녀 불문 좋은 생각을 품은 것을 임신으로 표현하고 있다)해 온 것들을 낳아(전수 또는 교육을 의미) 그의 영혼 가운데 아름다운 생각이 잉태하게 만든다. 이러한 임신(ky?sis)과 출산(tokos)의 지고의 성취는 바로 영적인 정신적인 에로스로부터 생긴다. 예술 영역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뤼쿠르고스와 솔론은 불후의 이름을 남길 정도의 위대한 출산의 산 증인들이다.

이런 연후 디오티마는 엘레우시스의 종교적 입문과 상승을 연상시키는 비의적(秘儀的) 표현을 빌려 에로스가 추구하는 최고 목표(telos)에 이르는 단계적인 행로를 이야기한다.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듯 입문(myein)에서 최고비의(epoptika)에 이르는 이러한 에로스의 단계적 상승은 종종 <국가> 제7권의 동굴의 비유에서 혼의 등정(anodos)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단계적인 상승은 흥미롭게도 한 개인이 어떤 하나의 몸(soma)에 속한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내 그는 그처럼 개인적으로 파악된 아름다움이 모든 몸들에 속한 아름다움과 하나이자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모든 아름다운 몸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하나의 몸에 대한 열정을 넘어서는 단계에 이른다. 이에 따라 그는 몸에 있는 아름다움보다 영혼들에 있는 아름다움이 더 귀중하다고 여기게 되어 누군가 미미한 아름다움의 꽃을 갖고 있더라도 영혼이 훌륭하다면 그러한 젊은이들을 사랑하게 되고 나아가 몸보다는 사람들의 행실과 법들에 있는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되며 다음으로 앎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오름길은 아름다움의 큰 바다로 향하게 되고 그것을 관조함으로써 아낌없이 지혜를 사랑하는 가운데 많은 아름답고 웅장한 이야기들과 사유들을 산출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서 힘을 얻고 자라나서 에로스 관련 일들에 대해 끝점에 도달하게 되면 갑자기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을 직관하게 된다. 그것이 곧 앞서의 모든 노고들의 최종 목표로서 단일한 앎(epist?m?)이자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이다. 바로 이어지는 단일한 앎에 대한 플라톤의 부연설명은 플라톤의 대화편 중 이데아에 대한 가장 간명한 설명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그것은 “늘 있는 것이고, 생성되지도 소멸하지도 않고,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면에서 아름다운데 다른 면에서 추한 것도 아니고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는 아름다운 것인데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는 추한 것도 아니며, 어떤 자들에게는 아름다운데 다른 자들에게는 추한 것이어서 여기서는 아름다운데 저기서는 추한, 그런 것도 아니다. 또한 그 아름다운 것은 그에게 어떤 얼굴이나 손이나 그 밖에 몸이 관여하는 그 어떤 것과 비슷한 것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어떤 이야기나 어떤 앎으로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며, 어디엔가 어떤 다른 것 안에, 이를테면 동물 안에 혹은 땅에 혹은 하늘에 혹은 다른 어떤 것 안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그것 자체가 그것 자체로 그것 자체만으로 늘 단일 형상으로 있는 것(monoeides aei on)이며, 다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다음과 같은 어떤 방식 즉 다른 것들이 생성하거나 소멸할 때 바로 저것은 조금도 많아지거나 적어지지 않으며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방식으로 바로 저것에 관여한다.”(211a-b) 이로써 우리는 마침내 이른바 플라톤이 말하는 그 절대적인 영역 이데아의 세계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끊임없는 생동력으로 무지와 타성의 저항을 뚫고 목표를 인지하고 그곳을 향해 무시무시한 힘으로 돌진해가는 에로스가 그 길을 이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에게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 곧 철학은 모름지기 에로스일 수밖에 없다. 에로스는 무지를 뚫고 모든 사물과 사태에 대한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앎을 향해 스스로를 고양시켜 삶의 진정한 가치를 완성하는 가장 치열하고도 진지한 열정이자 모색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잠간 에로스에 대한 추가적인 이해를 위해 에로스에 관한 플라톤의 또 다른 대화편 <파이드로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층구조로 이루어진 이 대화편의 상당 부분은 올바른 수사법에 관한 논의에 할애되어 있지만 그곳에는 비록 모티브는 상이하면서도 <향연>과 같이 에로스를 다루고 있는 우화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그곳에서는 에로스가 무엇인가 신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어 <향연>에서의 언급과 차이가 있긴 하지만 플라톤 자신 신화의 전승을 자유자재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그곳에는 두 개의 모티브가 그 우화를 결정하고 있다. 즉, 그 두 개의 모티브란 하나는 종류가 다른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이며 또 하나는 날개이다. 영혼은 이전에는 어떤 신을 수행하여 천체를 왕래하면서 이 천구 주위를 영원히 돌아가는 천체의 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몸에 영혼이 들어섰음은 이미 영혼의 전락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오르페우스교 사상과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영혼이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어떤 길을 취하느냐에 따라 윤회 전생하는 영혼의 운명이 결정된다. <파이드로스>에서 영혼의 형태를 비유한 마차를 이끄는 두 마리 말은 이른바 ‘욕망(epithymia)’과 ‘튀모스’(thymos)이다. 튀모스는 여기서 “의지, 노력”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충동적 욕망으로서 에피튀미아는 큰 동력이지만 혼자 내버려두면 스스로나 모두에게 위험이자 장해이다. 이 난폭하게 구는 말을 길들여 궤도를 걷게 하고 마차가 이 말에 이끌려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마부의 사명이다.(마부와 두 말은 <국가>편에서 그려지고 있는 영혼의 세부분 즉 이성(to logistikon), 기개(to thymoeides), 욕구(to epithymetikon)에 각각 상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에 따라 마부가 영원의 것에 대한 관조(the?rein)에 이르는 정도가 결정된다. 그런데 높은 곳으로 부양시키는 날개를 생겨나게 하고 그 힘을 좌우하는 것이 곧 에로스이고 그러한 에로스의 본질이 theia mania 즉 ‘신적인 광기’이다. ( <파이드로스> 256b)인간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이 신적인 광기의 형태는 다종다양하다. 예언가나 비의적인 정화의식의 집행자도, 뮤즈 여신들의 총애를 받는 시인이나 가수도 이 신적인 광기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신적인 광기 중에서도 최고의 광기는 그 무엇보다도 영혼을 신적인 것에 대한 관조로 이끄는 힘, 영혼에 날개를 생겨나게 하는 광기 바로 에로스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크세노폰도 한편의 <향연(symposion)>을 썼고 그 역시 소크라테스에게 에로스에 관한 연설을 하게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향연>은 플라톤의 <향연>보다 훨씬 뒤에 쓰여 졌음이 거의 확실하다. 소크라테스와 관련한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견해 차이는 끊임없이 반복 되는 학문적 논쟁거리 중 하나이지만, 일반적으로 플라톤에 비해 크세노폰의 견해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런데 하르트무트 에릅세(Hartmut Erbse)가 발표한 연구는 우리가 그처럼 경솔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크세노폰의 <향연>에 나타나는 소크라테스는 결연히 남성끼리의 육체관계를 비난하면서 에로스의 시종들(thias?tai) 중에서,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니케라토스(Nikeratos)의 삶을 행복한 삶으로 칭송하고 있다. 이 책의 끝부분의 이야기는 더욱 시사적이다. 크세노폰은 어떤 향연에서 판토마임의 배우가 디오뉘소스와 아리아드네의 사랑을 매우 매력적이고도 선정적으로 연기하자 그 향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향연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공연에 자극받아 기혼자는 조금이라도 빨리 아내를 안고 싶어 했고 미혼의 젊은이들도 결혼하고픈 욕망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모두 동성 간의 소년사랑을 중심으로 정신적인 에로스가 강조되고 있는 플라톤의 <향연>이나 <파이드로스>와 매우 동떨어진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를 소시민의 수준으로 까지 격하시켜 그를 소년사랑의 열광적인 비판자로 내세워 그로 하여금 부부사이 또는 이성간의 사랑을 칭송하게 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위의 두 대화편이 담고 있는 ‘영혼을 이데아로 이끄는 에로스’는 플라톤이라는 대철학자의 완전히 독자적인 창조물일 뿐이고 크세노폰이 <향연>에서 그리는 소크라테스상이야말로 오히려 역사적 사실에 가깝고, 따라서 에릅세가 추측하듯이 크세노폰이 “플라톤에 의해서 왜곡된 스승 소크라테스의 상을 여기서 수정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해야 할 것 인가? 이러한 물음에 확실하게 답을 하기는 매우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에릅세의 견해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을 둘러싼 두 개의 대화편에서 정신적으로 고양된 에로스를 곧바로 소크라테스의 견해로 생각하는 것이나, 플라톤을 마치 소크라테스의 분신 같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만 묘사하는 단순 전달자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나 모두 무리가 따른다. 물론 기계적인 소거법(Subtraktionsverfahren)으로 모든 것이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플라톤적인 에로스를 모두 플라톤에게 돌린다고 하면 에릅세가 추정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상도 반드시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이건 간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모두 비록 이성애와 동성애에 상관없이 정신적 사랑을 침이 마를 정도로 강조한 것은 진실이지만, 그렇다고 이성간의 육체적 사랑까지 기피했거나 혐오했다는 증거 또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스파시아 집에서 알키비아데스를 끌어내는 소크라테스 Jean-L?on G?r?me 작 (1861)

우리는 앞서 고대 그리스의 소년사랑을 논의하면서 서로 모순되는 양극의 견해까지 확대하여 살핀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플라톤이 견지한 소년사랑에 대한 태도를 최대한 균형 있게 살펴 평가해보기로 하자. 관건이 되는 사항은 플라톤이 동성간의 정신적인 성격의 에로스로부터 관능적이고 육체적인 것에로의 일탈을 어느 정도 관용을 가지고 보았는가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노년의 플라톤은 <법률>(636c. 835c, 842a)에서 동성 간의 성행위를 자연에 반하는 음란한 행위로 아주 명백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 <향연>에서는 비록 그 자신이 아닌 소크라테스와 관련한 언급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특히 마지막 부분에 가면 어느 정도 플라톤 나름의 견해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향연>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술에 취한 알키비아데스가 향연 자리에 나타난다. 처음에 그는 소크라테스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소크라테스와 아가톤의 사이에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이내 소크라테스를 발견하고 움츠려 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알키비아데스가 사랑하고 있는 동시에 영원한 스승이자 마음속의 가시처럼 두려워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연설에서는 그에 대한 사랑과 경탄이 가득 뿜어져 나온다. 이 연설은 에로스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설에 이어지는 것으로 스승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적 특징을 드러냄으로써 작품 전체의 클라이맥스를 형성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보기 흉한 실레노스 조각상과의 놀랄만한 비교 – 실레노스 조각상의 겉은 볼품없지만 그 안쪽에는 황금 신상이 들어 있다-가 나타나 있는 곳도 이곳이다. 게다가 그곳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그에게 온몸으로 육체적인 사랑을 구했음에도 소크라테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말하길 그 밤에 이 “참으로 신령스럽고 놀라운 이분에게 두 팔을 둘렀고 그렇게 온밤을 누워 있었네….그런데 이분은 내 꽃다운 청춘을 그토록 능가했고 무시했고 비웃었으며, 그것에 관한 한은 내가 뭔가나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것에 대해서조차 이분은 방자함을 부렸네…신들에게 맹세코 여신들에게 맹세코 나는 아버지나 형과 함께 잤던 때에 비해 전혀 별스럽지 않은 밤을 소크라테스 선생님과 더불어 보낸 상태에서 아침에 일어나게 되었다네”(219c,d) 이것은 크세노폰의 <향연>에서 남자끼리의 육체적인 사랑을 단호히 비난한 그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결코 다른 모습이 아니다. 이와 같은 알키비아데스의 연설은 플라톤적인 에로스의 영적 정신적인 성격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가 있다. 물론 플라톤은 소년사랑과 관련하여 비록 전체 대화편을 통해 노년기의 작품 <법률>에서 보이는 정도까지의 엄격함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파이드로스> 가운데 한 부분(256b,c)을 보면 소년사랑의 관능적 측면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여전히 역사적 소크라테스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즉 그곳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절도를 지켜 육체적 욕망을 이겨내는 것이 올림피아 레슬링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 이상의 훌륭한 승리로 칭송하고 있다. 이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눈에는 사회적으로 육체적 관계가 용인된 소년사랑에서 조차도 사랑하는 남자(erast?s)와 사랑받는 소년(er?menos)의 순수한 정신적인 관계만이 철학에 의해서 규정되는 생활에 어울리는 것이다.

라파엘이 그린부분화 .군복을 한 사람(왼쪽) 또는 소크라테스(오른쪽) 옆에 있는 젊은이(가운데)가 알키비아데스라고 하지만 이설도 많다.

 

(플라톤의 에로스(4) 다음에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8)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8)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2)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45-385?) 상

플라톤이 「향연」에서 그리고 있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한마디로 인간의 근원적 고통을 치유(iasis)하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치유 받아야 할 근원적 고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된 신들의 심판과 그에 따른 본래 모습의 상실이다. 에로스는 그 상실의 고통을 치유하는 신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펼쳐지는 인류의 본래 모습에 관한 우화적 기원을 들여다보면 내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일단 아리스토파네스 특유의 희화적인 파토스(페이소스, pathos)가 – 비록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창작인지 불확실하더라도 – 흘러넘친다. 그 우화의 개요는 이렇다.

“인간들은 원래 성(性)이 셋이었다. 지금처럼 남성과 여성만 있는 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함께 가진 셋째 성이 더 있었다. 형태 또한 지금과 달리 등과 옆구리가 원형을 이룬 구형의 몸체에다 위로는 얼굴이 양쪽에 붙은 원통형 머리가, 옆으로는 두 쌍의 팔이, 아래로는 두 쌍의 다리가 달려 있었다. 마치 지금의 모습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 꼭 안고 하나의 몸이 된 것 같은 모습이되, 얼굴과 팔다리가 각각 반대쪽을 향해 있고 생식기가 엉덩이 쪽에 붙은 형상이었다. 이 태초의 인간들은 행동도 민첩하여 어느 쪽으로든 원하는 대로 움직였고 힘이나 활력 또한 엄청나 늘 자신들을 대단하게 생각하였고(phron?mata megala) 급기야 그 오만함이 도를 넘어 신들에게까지 대들게 되었다. 이에 신들이 노하여 이들을 없애 버리려고 하였으나 신들 또한 이들로부터 숭배와 제사가 필요한 만큼 아주 없앨 수도 없어, 결국 제우스의 제안에 따라 그들을 모두 반쪽으로 잘라 힘을 약하게 만들어 방종치 못하게 하되, 숫자는 늘려 신들에게 더 쓸모 있게 만들기로 하였다. 그래서 신들은 이들을 각기 둘로 나누고 자른 면을 마치 돈주머니를 졸라매듯 배 한가운데로 묶어 배꼽을 만들고 서로의 자른 면들을 보면서 더 질서 있는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의미에서 얼굴을 비틀어 돌려놓았고 팔다리도 반대쪽을 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잘라진 이 반쪽 인간들은 나머지 반쪽을 그리워해 서로 부둥켜안고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은 채 아무 것도 하려 들지 않아 급기야 굶어 죽는 일도 생기면서 서서히 멸망해갔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우화 속 인간의 본래 모습

그러자 제우스는 이를 가엾이 여겨 그들의 생식기를 안쪽으로 옮겨놓아 남성과 여성이 만나 한데 뒤엉킴이 일어 날 때 임신을 하게 하여 그 종족이 계속 생겨나게 하였고, 동시에 남성이 같은 남성을 만날 때도 어쨌거나 함께 함에서 오는 포만감을 느끼게 하여 막간에 한숨을 돌리고 다시 일로 돌아가 여타의 삶을 돌보게 만들었다. 이때 반쪽으로 잘라지기 이전의 남성은 해의 자손이고 여성은 땅의 자손, 두 가지 성을 모두 가진 사람은 달의 자손인 까닭에, 순수 남성반쪽이 다른 순수 남성반쪽을 그리워하는 사랑이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사랑이자 그들이야말로 나중에 국가의 일에 종사할 만한 사람들로 여겨졌다(189d-192b)”

인간의 본래 모습과 지금의 인간들이 생겨난 근원에 대한 이와 같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는 지금의 인간자체가 상실과 결핍의 존재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상실과 결핍이 가져다 준 가장 심대한 고통은 자신이 반쪽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다른 나머지 반쪽과 하나로 함께 있지 못하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그래서 지금의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큰 소망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 온전함을 회복하는 것이 고통에 대한 궁극적인 치유이자 가장 큰 행복이다.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있어서 에로스란 바로 이와 같은 상실과 결핍을 치유하는 능력이자 그 태생의 온전함을 추구하는 욕망 그 자체이다. 그래서 에로스는 인간이 신들에게 경건함을 보여 줄 때 인간을 옛 본성으로 되돌려 주고 치유하여 복 받고 행복한 자들로 만들어 주는 희망이 된다.(193a, d)

다소 우스꽝스러운 우화로 시작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은 내용으로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겉으로 드러난 희화적인 측면과 달리 인간 실존에 대한 비참성과 심각성은 물론 에로스를 통해 그것을 이겨내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사실 이야기 서두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로스를 인간에게 가장 우호적인 신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 이후의 이야기 어디에서도 에로스가 신처럼 여겨지거나 신으로 표현되는 문맥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에로스는 신들의 편에 서 있기 보다는 인간의 실존 한 가운데 자리하면서 인간의 본래 모습을 회복시키는 힘이자 능력으로서 실질적으로는 인간의 내적 욕망자체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본래적인 것에로의 회복은 맹목적이다. 물론 반쪽의 인간은 원래 모습으로 회복하기를 원하고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원래의 상태는 앞에서 보았듯이 신에게 대들 정도의 오만의 상태이고 자기 보존의 효율만 있을 뿐 그 어떤 가치지향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나머지 반쪽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은 그들 모두에게 실재하는 욕망이고 제한적이고 일시적이지만 행복하게 해주는 유일한 단초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영위되는 사회공동체 생활 속에서 그들은 늘 서로의 보존을 위해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려할 것이고 그들의 그러한 열망은 사회공동체 자체의 보존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특히 해의 자손이 남성 반쪽들의 다른 반쪽 남성에 대한 열망은 서로가 하나가 되려는 열망 중에서 가장 강한 열망이어서 사회공동체의 측면에서 가장 바람직하고 권장할 만한 사랑으로 여겨진다. 남성반쪽과 여성반쪽의 사랑 또한 본래적인 모습을 향한 열망이기는 하나 상대적으로 저급한 사랑이며 다만 그러한 사랑의 가치는 출산을 통한 자손의 번식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반쪽끼리 결합하는 경우의 수는 여성반쪽과 다른 여성반쪽의 경우도 있으므로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에는 남성 동성애와 이성애는 물론 여성들 간의 동성애도 인간의 본래적인 욕망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고대 문헌에서 여성 동성애의 본래성을 인정하는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요컨대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본래 상태에서 훼손된 자신의 반쪽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pothein)이다. 밤이고 낮이고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최대한 함께 같은 곳에 있으려는 열망이자 욕망(epithymia)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파네스는 헤파이스토스가 그 둘을 융합 용접시켜준다면 누구도 그것들 원하지 않을 자가 없다고 말한다. 즉 자기가 사랑하는 자와 한데 모여 융합되어 하나가 되는 것이 인간 삶의 최대 목표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러한 모습이 온전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그 온전함에 대한 욕망과 추구에 붙여진 이름(tou holou oun t? epithymia kai di?ksei er?s onoma)”이다.(193a)

그러나 헤파이스토스가 그 둘을 융합 용접시킨다 해도 이미 신이 갈라놓은 그 반쪽의 상태가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심판은 있지만 다시 하나가 되는 구원의 길은 없다. 굳이 구원이 있다면 에로스의 능력을 통해 둘이 부둥켜안고 하나가 된 것 같은 감정을 가지고 서로를 위로하고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로스는 완전한 회복의 능력이 아니라 일시적인 치유의 능력일 뿐이다. 완전하게 회복시켜줄 수 있는 능력은 그들을 갈라놓은 신들에게만 있다.

물론 신들에게 경건한 자들의 경우 에로스의 능력을 통해 온전한 옛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이 실현되는 이야기는 그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인간은 희망은커녕 신들에게 잘못 보일 경우 다시 또 반쪽의 반쪽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두려움(phobos)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에로스는 다만 그러한 숙명적인 제약 속에서 그들 스스로가 안고 있는 원초적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고, 그러한 에로스를 통한 치유가 인간이 누려야 할 최고의 만족감이자 행복이다. 그것도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을 잘 받들고 섬기는 소수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누구나 다 소년 사랑을 누릴 수 없는 까닭도 그러한 이유에서 이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 역시 일정하게 고대 그리스인 특유의 비장한 운명애(amor fati)를 포함하고 있다. 심판은 있지만 구원의 길은 두절되어 있고 오히려 인간은 상존하는 공포 속에서 다만 끝없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운명적인 몸부림 그 자체를 행복으로 간주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은 이전의 사람들의 에로스에 대한 견해와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우선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에뤽시마코스나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의 에로스처럼 우주에 편만해 있지도 않고 인간성 바깥에 초월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에로스는 오로지 원래 하나였던 나머지 반쪽에 대한 사랑이자 인간성 내부에 자리한 본원적인 열망이다. 이러한 사랑은 우주에 대한 사랑도 인간일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한 인간, 구체적인 나머지 반쪽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원천적으로 덕과 윤리와 무관하다. 파이드로스가 말하는 좋은 것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리고 파우사니아스나 에뤽시마코스의 에로스처럼 좋은 에로스와 나쁜 에로스로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오로지 그것이 잘났건 못났건, 성품이 좋건 나쁘건, 소양을 갖추었건 갖추지 않았건 자신의 나머지 반쪽에 대한 열렬한 그리움이다.

고대 아테네 향연의 한 장면 1

이렇듯 에로스는 동성애이건 이성애이건 모든 형태의 반쪽에 대한 열렬한 사랑 모두에 관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에서 이성애건 동성애건 간에 성적 결합 또는 성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부차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저 남성반쪽과 여성반쪽이 하나가 되려는 욕망에 한데 뒤엉키면서 부차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생식이고 성적 결합이다. 그 조차도 부둥켜안고 떨어져 있지 않아 종의 보존이 어렵게 되자 신들이 생식기를 안쪽으로 돌려놓아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적 결합자체는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오히려 신들의 필요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남성 동성애 즉 소년 사랑의 우월성을 염두에 두고 나온 것일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관계가 반드시 성적 열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견해는 소년 사랑이 가지고 있는 교육적 동성애로서의 성격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어떠한 가치지향과도 상관없이 무조건 처음의 온전한 본성에 따라 끊임없이 함께 같이 있으려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파이드로스나 파우사니아스처럼 에로스가 덕과 좋은 것의 원인이어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에 대한 열망 때문에 다른 반쪽을 찾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온전한 본성을 찾는 것이자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과 차이를 예고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이 좋은 이유는 본래의 자기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본래의 자기상태가 나쁜 것이라면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나쁜 것이라고 여긴다. 본래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비판에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끝난 후 뭔가를 말하려고 하지만 알키비아데스가 들어오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211c) 아마도 아리스토파네스는 본래의 자기이기 때문에 돌아갈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온전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점에 대해서도 이미 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좋다고 말한 그 온전한 상태란 반쪽이 되기 이전의 상태로서 이미 앞에서도 살폈듯이 신에 대해 오만함을 가지고 있는, 온전하지도 좋은 상태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 역시 결코 행복한 상태일 수 없다. 그것은 또다시 반쪽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 애초 상태로의 복귀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은 가치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과거 회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예전의 반쪽을 찾아서 같은 자리에 머물려는 열망, 다시 말해 본래의 태생적 상태로 돌아가려는 생물학적 본능일 뿐이다. 이에 비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에로스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감각적 충동을 이겨내고 궁극적인 아름다움과 “늘 단일형상인 것”(monoeides aei on, 211b) 그 자체를 향해 끊임없이 상승하려는 열망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가 에로스를 목표를 향한 격렬한 욕구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소크라테스와 일맥상통한다. 사실 파우사니아스와 파이드로스, 에뤽시마코스의 에로스에는 격렬함 보다는 덕과 조화가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비록 처음에는 신으로 나오지만, 인간적 욕구의 형태로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고 본래적인 온전함에로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부여하려는 열망이라는 점에서 실제적으로는 신과 인간의 중간자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이런 점 역시 에로스를 신과 인간의 중간자로서 ‘신령’(daimon, 202e)으로 상정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에는 앞에서 연설한 사람들의 에로스에 대한 견해가 비판적으로 일정부분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대 아테네 향연의 한 장면 2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와 비교해서는 결정적으로 그 격렬한 욕구가 지향하는 목표가 정반대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러한 유사점은 그들의 에로스론이 전적으로 대립되어 있음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대칭축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마치 거울상이 언뜻 실상과 모든 면에서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대칭면을 통해 모든 것이 정반대인 것과 같다.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은 비록 로고스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는 질서와 조화, 신에 대한 경건함, 단일형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아폴론(Apoll?n)적이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은 오로지 본래적인 모습을 향한 본능적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몸부림이 덕과 진리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만의 고유하고도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다른 반쪽을 향한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디오뉘소스(Dionysos)적인 성격을 갖는다. 고대 그리스 고전학에 밝았던 니체(F. Nietzsche)가 「향연」을 탐독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니체 또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을 음미하면서 분명 인간의 태생적인 운명애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에로스는 마치 유전자처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살아있다. 불같은 욕정에 휩싸인 청춘기의 관능적 사랑에서부터 따사로운 동반의 정을 나누는 노년기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공통으로 흐르고 있는 에로스는 여전히 “할 수 있는 한 많이 서로와 같은 곳에 있기”(192d)를 바라거나 그러한 짝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다. 마치 그것이 최선의 구원이자 행복인 양 여기면서.

(다음에 “플라톤의 에로스(3)” 계속)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6

김남우 (정암학당)

 

애초 연재를 시작하며 출판사 <열린책들>과 맺은 약정에 따라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우신예찬의 연재를 마친다. 연재를 진행하며 우신예찬의 번역을 마무리하였으며, 출간을 며칠 앞두고 있다. 성원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출간될 책에 대하여 따끔한 지적과 비판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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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년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에 화답하는 1516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지혜에 대한 칭송이라 하겠다. 매우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에라스무스와 토머스 모어는 인문주의 운동에 앞장 선 인물들로서, 이들은 <우신예찬>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유토피아>를 통해 대안을 제시하였다.]

오늘날 교황들은 수고가 가는 것들은 베드로와 바오로에게 맡겨 두고 자신들은 넘쳐 나는 여가를 즐기며, 빛나고 즐거운 일은 자신들이 맡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나 우신 덕분에 인간 종족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 여유롭게 살아가며 근심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다만 신비적인 흡사 무대 의상을 걸치고 예배를 거행하며 복된 자, 존경스러운 자, 신성한 자라는 칭호를 휘두르며 축복과 저주로 파수꾼의 일을 수행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충족시킬 것이라 믿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낡고 진부하며 오늘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며, 대중을 교화시키는 것은 힘든 일이며, 성서를 해석하는 일은 학교에서나 할 일이며, 기도를 올리는 일은 한가한 일이며, 눈물을 흘리는 일은 미욱한 여인들의 일이며, 가난을 실천하는 것은 역겨운 일이며,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위대한 왕들에게조차 지복의 발바닥에 입 맞추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자신들로서는 치욕스럽고 가당치 않은 일이며, 죽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만부당한 치욕이라 교황들은 생각합니다.

이들의 유일한 무기는 바오로가 경계하였던바 달콤하고 비위에 맞는 말이며 또한 이들이 후하기 이를 데 없이 베푸는 성무 면직, 성무 집행 정지, 제 1차 제명 및 제 2차 제명, 파문, 사람들의 영혼을 고갯짓 한번으로 지옥에 보내 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벼락같은 파문자들의 초상 전시 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성스러운 사제들과 대리자들이 할 본분은 악마에게 충동받아 베드로의 유산을 들어먹고 탕진하는 자들을 무엇보다 매섭게 나무라는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복음에 따르면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하였거늘, 교황들은 이와 달리 토지와 도시와 세금과 통행료와 권력을 베드로의 유산이라 부릅니다. 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불태우며 교황들은 칼과 불로써 기독교인들의 엄청난 유혈사태를 불사하면서까지, 이렇게 하는 것이 사도들이 하였던 것처럼 용감하게 소위 타락한 적들을 척결하여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된 교회를 지키는 것이라 믿으며, 이것들을 지켜 냅니다. 하지만 사실 교회의 가장 무섭고 지독한 적은, 침묵으로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잊히도록 방치하며, 장사치의 법률로 그리스도를 결박하며, 억지 해석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하며, 역병 같은 삶으로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불경한 교황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으며, 그 피로 굳건해졌으며, 그 피로 성장하였으나, 이렇게 자신의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였던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마치 칼을 들어야 할 것처럼 교황들은 전쟁을 불사합니다. 전쟁은 끔찍하기가 짐승이 아닌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며, 시인들이 말하는바 복수의 여신들이 보낸 것이라 할 만큼 미친 짓이며, 세상을 한꺼번에 휩쓸어 가는 역병처럼 치명적이며, 흉악무도한 날강도들이 제일 잘 수행하곤 하는 무법한 일이며, 그리스도와는 무관하여 다만 불경한 일인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들은 다른 것들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다만 오로지 전쟁을 수행합니다. 이 가운데 여러분은 백발이 성성한 교황들조차 청춘의 열정과 힘을 과시하는 것을, 엄청난 비용에 괘념치 않는 것을, 역경과 고난에 지치지 않는 것을, 국법과 종교와 평화와 인간 만사가 모조리 뒤죽박죽 엉망이 되는 것에도 굴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 옆에서 학식을 갖춘 아첨꾼들은 명백한 광기를 열정과 경건과 용기라고 부르며, 어떤 사람이 치명적인 칼을 뽑아 형제의 복부를 찌르면서도 그리스도의 크나큰 사랑과 기독교인이 따라야 할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에 있어 게르마니아의 주교들이 선례를 제공한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는 차라리 그들도 선례를 따른 것인지 아직까지 나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게르마니아의 주교들은 공공연히, 관복을 벗어 놓고 심지어 축도는 물론이고 그런 모든 종류의 예배 의식까지 생략한 채, 페르시아의 태수 노릇을 하는바, 이들은 전쟁터의 최전방 이외의 장소에서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에게 바치는 것은 비겁함이며 주교의 직분에 어울리지 않는 태도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사제들의 무리도 자신들이 주교들의 성덕에 뒤처지는 것을 불경한 일이라 여겨, 십일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병사처럼 칼을 들고, 창을 잡고, 돌을 던지며 온갖 무기들로 참전합니다. 또한 게 중 눈 밝은 자들은 옛 문서를 뒤져 백성들을 위협하여 십일조 이상을 쟁취하기 위한 문구를 찾아냅니다. 반면 그 외에 여기저기서 발견되는바 그들이 백성들에게 제시해야만 하는 많은 다른 의무들은 그들의 안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깔끔하게 밀어 낸 머리카락도 이들에게, 모름지기 사제란 이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려야 하며 오로지 천국의 일만을 명상해야 할 존재임을 알려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냥 즐거운 이 인간들은 박약한 기도를 중얼거리기는 것으로 스스로 해야 할 의무를 정당하게 다했노라 믿습니다. 그들의 귀에 대고 크게 소리쳐도 스스로도 알아듣거나 이해하지 못할 그런 기도를, 나 우신조차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바 어느 신도 듣거나 혹은 알아들을 수 없을 그런 기도를 말입니다.

사제들과 세속인들과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수익을 올리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와 관련된 법률에 정통하다는 것입니다. 또 커다란 부담을 져야 할 경우 이를, 마치 공을 다른 사람에게 받아서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처럼 영리하게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세속 군주들은 흔히 국가를 다스릴 과업을 비서들에게 떠맡기고, 다시 비서들은 비서의 비서들에게 하청을 주는 것처럼, 긍휼의 과업을 사양지심(辭讓之心)을 발휘하여 모두 백성들에게 양보합니다. 그럼 백성들은 이를 다시, 자신들이 교회와 무관하고 세례 서언을 행하지 않은 듯 자신들과 구별하여 ‘교회 식구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맡깁니다. 교회 식구들 가운데,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속에 헌신하기로 맹세나 한 듯 자신들을 ‘재속 사제’라고 부르는 자들은 다시 이를 ‘수도회 사제’들에게 굴려 보냅니다. 수도회 사제들은 이를 다시 수도승들에게, 다시 유연 수도승은 강직 수도승에게, 다시 모두는 탁발 수도승에게, 다시 탁발 수도승은 이를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은수자들에게 맡깁니다. 하여 오로지 카르투시오 수도회 은수자들에게서 긍휼은 은밀히 간직되어 있는바, 어찌나 잘 감추어져 있는지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황들은 예배를 통해 금전을 부지런히 모으는 데 바빠 사도의 막중한 과업은 주교들에게 이양하며, 주교들은 사제들에게 이양하고, 사제들은 부사제들에게, 부사제들은 탁발하는 형제들에게 이양합니다. 그럼 탁발 수도승들은 이를 다시 양털을 깎는 목자들에게 전가합니다.

이상 내 연설의 목적은 칭송이라면 모를까, 교황들과 사제들의 삶을 들추어내어 풍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훌륭한 군주들을 욕보이거나 악한 군주들을 칭송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나 우신을 받아들이고 나 우신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인간들 가운데 누구도 행복하게 살 수 없을 밝혀내기 위해 이를 약간 살펴보았을 따름입니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7)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7)

글: 이정호 교수(방송통신대)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1)

플라톤고대 그리스에서 소년 사랑이 교육적 동성애로서의 성격을 가졌다는 것은 에로스가 개인들의 사적 영역을 넘어서 정치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소년 사랑은 분명 전사 공동체로서의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엘리트 그룹들의 내적 연대와 자기 도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공동체의 보존에 기여해왔다. 그러나 소년 사랑을 구성하는 관능적 요소들과 정신적인 요소들 사이의 긴장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 귀족사회가 붕괴되면서 서서히 와해되었고 아테네 민주정하에서 더욱 통속화되었다.

플라톤(기원전 429-347)

플라톤의 「향연(Symposion)」은 이러한 시대적 국면에서 소년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에로스의 관능적 측면을 비판하고 에로스를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 즉 철학으로 승화시키려는 플라톤의 고뇌어린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늘 그러하듯이 자기 생각을 처음부터 드러내지 않고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에로스에 대한 논의들을 먼저 제시하게 한 후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펼치는 형식으로 논의를 이끌어간다. 다만 「향연」은 형식면에서는 다소 특이한 도입부를 가지고 있다. 보통의 경우에는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여 약간의 도입부 대화를 거쳐 바로 해당 주제에 대해 다른 대화 참석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유독 이 대화편에서는 옛날에 대화를 들었던 사람이 훗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이 다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다소 복잡한 이야기 전달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오늘날 영화에서 창틀을 끼어 과거 시점을 현재와 병존시키는 기법과 유사한데, 플라톤이 도입부를 왜 그와 같이 복잡하게 설정해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학자들은 「향연」에서 종국적으로 플라톤이 드러내고자 하는 에로스의 비의적(秘儀的)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포석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죽은 후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와의 관계에 대해 세간에 퍼져있는 오해를 알키비아데스를 등장시켜 그의 입을 통해 불식시키고,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진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작품 구성상의 기법이라고도 해석한다.

플라톤의 「향연」파퓌로스 필사본 일부

「향연」은 플라톤의 첫 번째 시켈리아 여행(기원전 390년)과 두 번째 여행(기원전 366년경)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향연」의 작품상 설정 연대는 그 보다 훨씬 이전이다.「향연」은 비극 경연에서 우승한 아가톤(Agath?n)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와 참석자들이 벌인 에로스에 관한 연설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경연이 있었던 레나이아(l?naia) 축제가 기록상 기원전 416년에 열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향연 즉 심포지온은 우리나라 옛날 양반들이 모여 술을 나누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귀족남성들이 모여 경연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펼치며 놀았던 일종의 특권층의 오락모임이자 술자리였다. 그런데 이날은 모두가 전날의 축제에서 이미 통음을 하였던 까닭에 술자리 보다는 주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하자고 모두 동의하고 통상 자리를 같이 하던 피리 부는 소녀들과 여인들까지 물리친다. 이처럼 「향연」에서의 향연(symposion : ‘drinking together’의 의미)은 처음부터 ‘술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말(logos)을 나누는 자리’로 규정되고 각자가 펼칠 연설의 주제 또한 에뤽시마코스(Eryximachos)의 제안에 따라 에로스에 대한 찬미로 정해지고, 연설의 순서 또한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른쪽 순으로 펼치기로 합의된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은 에로스에 관한 일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을 한다.(177d) 이 부분도 의견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知)’를 늘 강조해 왔는데 이 부분에서는 에로스에 대해서만은 잘 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도입부에서 소크라테스가 에로스에 관한 이야기의 최종 청취자로서 일반대중을 상정하였듯이, 사랑에 대해서 누구나 다 안다고 생각하는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서 함께 논의를 시작하기 위한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소크라테스의 에로스가 어떤 지식 내지 결론적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열망자체’라는 점에서 그렇게 발언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고대 아테네 향연의 한 장면(도기 그림)

이렇게 해서 에로스에 대한 찬미 연설이 시작되고 파이드로스(Phaidros)가 그 첫 번째 주자로 나선다. 그는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탄생(Theogonia)」을 인용하여 에로스를 태초의 신들에 속하는 가장 오래된 신으로 내세우면서, 에로스가 가장 좋은 것들의 원인이므로 찬양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파이드로스가 말하는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소년 사랑이다. 그러면 소년사랑이 가장 좋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소년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추한 것을 멀리하고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치심에 대한 민감함과 명예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없이는 국가든 개인이든 크고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없다. 요컨대 소년 사랑은 추한 일을 멀리하게 하고 덕과 명예를 추구하게 하여 나라를 위해 전투에 나가서도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우게 만든다. 파이드로스는 여기서 소년 사랑이 결국 나라를 잘 운영하는 방법 및 전투수행능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178e)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파이드로스는 이 부분에서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를 인용하고 있지만 우리로서는 앞에서 살핀 테바이 신성부대가 먼저 생각날 것이다. 실제로 테바이 신성부대의 창설은 이 향연의 내용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파이드로스의 에로스에 대한 연설은 전사 공동체 사회에서 소년 사랑에 대해 기존에 확립된 교육적 동성애의 전통을 그대로 대변한다.

그러나 파이드로스의 연설은 다소 상투적이고 소년 사랑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사례들도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남편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한 알케스티스(Aik?stis)의 경우는 이성애 관계이고, 아킬레우스의 경우(아이스퀼로스에서는 아킬레우스가 에라스테스로 나온다)도 에로메노스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비록 신이 마음에 들어 할 정도로 더 소중한 것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에로스를 품는 자, 즉 에라스테스의 경우는 아니다. 오르페우스의 경우도 일반적인 견해와 동떨어져 있다. 이처럼 파이드로스의 에로스론은 기성의 상식을 대변하지만 대부분의 상식이 그러하듯 근거가 논리정연하지 못하고 늘 자기에게 유리한 이야기만 무턱대고 끌어들인다.

그 다음 연설자로 나오는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소년 사랑의 이중성을 간과한 채 기성의 관점에서 단순히 찬사만 늘어놓는 파이드로스의 연설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에로스에는 범속의 에로스(pand?mos eros)와 천상의 에로스(ouranios eros)가 있는데 이 중 전자는 찬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고 영혼(psych?)보다 몸(s?ma)을 사랑하며 그저 ‘일을 치러내는 것'(exergazesthai : 이 문맥(181b)에서는 성행위를 뜻함)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출생이 제우스와 디오네(Di?n?)의 딸인지라 저급한 이성애도 추구하기 때문이다.

파우사니아스는 소년 사랑이 종래의 교육적 동성애로서의 전통에서 벗어나 성적 충동이 이끄는 대로 이성애건 동성애건 닥치는 대로 애정행각을 벌이는 타락한 현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 역시 교육적 동성애로서 소년 사랑에 대한 연민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천상의 에로스란 단순히 소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nous)을 갖기 시작할 때의 소년을 사랑하며 늘 덕(aret?)으로 이끄는 사랑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천상의 에로스를 추구하는 에라스테스에게 소년이 살갑게 대하는 것은 너무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에라스테스가 아름다운 소년 애인을 취하려고 벌이는 그 어떤 행위도 그것이 설령 노예노릇처럼 비쳐질지라도 결코 추한 것이 아니며, 소년이 최대한 훌륭한 에라스테스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끌며 그들을 시험하고 경쟁시키는 것 역시 지극히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오히려 무능한 나라 또는 참주정(tyrannis) 치하에 있는 나라일수록 이러한 일들을 추한 것으로 여기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년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사랑을 나눔으로써 생기게 될 대단한 생각(pronemata megala : 높은 사리분별력)과 강력한 친애 및 연대감을 참주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파우사니아스는 이곳에서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아리스토게이톤과 하르모디오스의 사례를 인용한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는 이러한 천상의 에로스가 아닌 범속의 에로스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돈이나 권력으로 소년 사랑을 구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소년들의 부모들도 아이들을 감독할 보호자를 두어 어른들과의 대화를 허용하지 않게 되었고 급기야 소년 사랑이 공공연히 추한 일로 비난받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고 한탄한다. 그러므로 소년 사랑의 전통이 제자리를 잡아 소년 애인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살갑게 대하는 일이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지게 하려면 이제 소년 사랑에 관한 법(nomos)과 지혜 사랑(phiosophia) 및 다른 덕에 관한 법이 같은 곳에서 함께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다.(184d) 그렇게 될 때에만 에라스테스는 에로메노스를 위해 사리분별 및 기타의 덕을 가르칠 수가 있고, 에로메노스는 에라스테스로부터 올바른 교육을 통해 지혜를 습득할 수 있으며 동시에 에로메노스가 에라스테스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charizesthai : 신체적 애무를 포함하여 기쁨을 주는 것)이 비로소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파우사니아스의 연설에는 파이드로스가 간과하고 있는 아테네 사회에서의 소년 사랑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천상의 에로스에 대한 찬미를 통해 소년 사랑의 정신적 측면을 현실적으로 되살려 보려는 각고의 노력이 담겨 있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 역시 파이드로스와 마찬가지로 소년 사랑에 수반하는 육체적 관계를 폄하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육체적으로 살갑게 대하는 것은 이상적인 여러 가지 동기들과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으로 찬양하고 있다.

세 번째 연설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s) 차례지만 그가 딸꾹질을 하는 바람에 에뤽시마코스가 대신 나선다. 에뤽시마코스 역시 파우사니아스처럼 에로스를 둘로 구분한다. 그러나 앞의 연설자들처럼 에로스가 사람들의 영혼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에로스는 모든 동물과 땅에서 자라는 것들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다 있는 것이다.(186a) 이처럼 에뤽시마코스는 에로스를 우주적 에로스로 확장시킨다. 인간이건 우주 자연이건 어디에나 좋은 에로스와 나쁜 에로스가 있으며, 그에 따라 좋은 에로스가 사랑하는 것과 나쁜 에로스가 사랑하는 것이 따로 있다. 좋은 에로스가 하는 일은 적대적인 것들을 조화시키는 것이고 나쁜 에로스는 그것들을 부조화시켜 더욱 적대적으로 만든다. 좋은 에로스가 하는 일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마치 활(toxon:현악기를 켜는 활)과 뤼라가 서로 부딪치면서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의술은 몸의 조화를 이끄는 에로스에 대한 앎(epist?m?)이고, 시가술(mousik?)은 음의 조화와 리듬을 이끄는 에로스에 대한 앎이고 천문학은 계절의 조화를 이끄는 에로스에 대한 앎이다. 그리고 예언술(mantik?)은 신들과 인간들의 친애를 만들어 내는 에로스에 대한 앎이다.(186c-188d) 이처럼 에뤽시마코스에게서 에로스는 우주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내적인 조화를 관장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기술(techn?)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추구하고 습득해야할 자연학적 원리의 성격을 갖는 에로스이다. 에뤽시마코스는 이러한 에로스야 말로 ‘절제와 정의’(앞뒤 문맥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 생뚱맞게 인용되어 있다)로써 일을 이루어내는 에로스이고 우리에게 신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일체의 행복을 마련해주는 에로스라고 주장한다. (188d)

파이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의 에로스가 사랑하는 사람과 소년 사이에 강한 친애(philia)와 연대(koinonia)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그들을 명예(tim?)와 덕에로 이끄는 정서적 성격의 힘이라고 한다면, 에뤽시마코스의 에로스는 마치 동양 유가의 도(道)와 성(誠)을 연상시키듯 우주 자연으로까지 확장된 우주론적 에로스로서 대립된 힘들로 구성된 일체의 것들을 질서(taxis)와 조화(harmonia)로 이끄는 원리적 성격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들 모두의 주장은 향연의 전체내용을 이끌고 가는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창작된 것으로서, 당대 지식인들의 에로스론에 대한 플라톤 나름의 평가를 반영하면서 장차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통해 표명될 플라톤의 에로스론을 구성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상의 세 사람의 연설이 끝난 후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이 이어진다. 그런데 플라톤이 아리스토파네스를 「향연」의 등장인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그는 기원전 423년에 상연된 「구름(nephel?)」이라는 희극에서 소크라테스를 우스꽝스러운 사기꾼으로 조롱했던 사람이다.(218-226) 그래서 플라톤은「변명(Apologia)」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그의 그러한 짓이야말로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밝히고 있다.(19c) 그럼에도 플라톤은 왜 아리스토파네스를 「향연」의 연설자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일까. 일단 겉으로 보면 플라톤은 마치 역사적 아리스토파네스를 그대로 옮겨 놓기라도 하듯이 우화를 인용하며 이끌어가는 아리스토파네스 고유의 익살과 페이소스를 실감나게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으로 들어가면 그의 연설은 에로스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반드시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몇 가지 안티테제들을 포함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아마도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을 비판의 표적이자 반동의 디딤판으로 삼아「향연」의 절정인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연설을 통해, 다시는 스승 소크라테스를 넘보거나 능멸하지 못할 정도로, 에로스를 저 빛나는 정신의 세계로 하늘 높이 도약시키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에로스란 무엇이었을까?

(다음에 “플라톤의 에로스(2)” 계속)

영화로 사유하기 (4) : 영화적 시점

글: 이지영(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시각예술인 영화의 가장 큰 특수성은 일단 ‘보여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어져 나오는 물음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동일한 대상이나 사태라 하더라도 ‘누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보여지는 ‘무엇’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무엇’은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가시적인 ‘누가’와 ‘어떻게’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릴적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을 떠올려보자. 어른이 된 지금 그곳을 가면 기억 속의 그곳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어린 나의 눈에는 그토록 넓었던 운동장은 사실 아담한 크기의 운동장일 뿐이다. 운동장이라는 대상의 크기는 동일한데도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는지 혹은 어른의 눈으로 보는지에 따라 다른 크기의 대상으로 나타나고, 단지 대상의 크기만이 아니라 그 의미까지도 다르게 나타난다. 만일 어른 눈에는 아담하지만, 아이에게는 거대한 어떤 장소를 영화가 보여주려고 한다면 어떻게 표현할까. 아마도 아이의 눈높이 혹은 그보다 더 낮은 앵글을 선택할 것이고, 광각렌즈처럼 공간의 깊이감을 강조하는 렌즈를 사용하여 실제 장소보다 더 넓어보이게 촬영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대상이 완전히 동일한 크기와 앵글로 보이더라도 의미는 달라질 수도 있다. 영화 처음에 누군가의 시점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바다를 보여주고, 이야기가 진행된 이후에 동일한 이미지가 다시 등장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더이상 동일한 의미를 지닌 이미지는 아니다. 결국 영화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엇’은 언제나 누군가가 특정한 방식으로 바라본 무엇이다. 따라서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는 누군가의 특정한 시점과 관점을 전제하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영화의 시점 문제는 지각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그렇다면 영화적 시점-지각 문제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사람들은 흔히 영화에서의 시점을 (누군가의 시점으로 귀속되는) 주관적 쇼트와 (누구의 시점으로도 귀속되지 않는) 객관적 쇼트로 구분한다. 예를 들어, 영화의 초반에 사건이 일어나게 될 뉴욕 도심의 빌딩숲을 보여주는 설정쇼트 (사건이 일어날 배경 장소를 먼저 보여주는 ‘소위’ 객관적인 배경 제시 쇼트) 를 생각해보자. 일단 이는 누구의 시점으로도 귀속되는 장면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쇼트를 흔히 객관적 쇼트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어지는 쇼트에서 건물의 옥상에 있는 누군가가 그 빌딩숲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면, 앞의 객관적 쇼트는 주관적 시점 쇼트로 순식간에 위상이 변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한 인물이 어떤 건물을 바라보는 쇼트에 이어, 건물을 빙 둘러가며 보여주는 쇼트가 이어진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건물을 보여주는 쇼트를 앞 쇼트의 인물에게 귀속된 주관적 시점 쇼트라고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건물을 보여주는 쇼트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화면 안으로 앞 쇼트의 인물이 들어오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기존의 구분법에 의하면 이 쇼트는 주관적이었다가 객관적인 쇼트로 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보여주는 자를 보여준다고 이 쇼트가 그리 객관적이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술에 취해 혼자 걸어가는 남자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마치 카메라가 술취한 남자의 시점인 듯 비틀거리며 술취한 남자 본인을 보여줄 때, 이 경우는 주관적 시점 쇼트와 객관적 쇼트가 압축(contraction)되어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경우 1인칭과 3인칭 시점은 문법적으로도 명확히 구분되며 그 위치를 쉽사리 변경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객관적 쇼트와 주관적 쇼트의 구분을 확정짓는 것이 곤란한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만일 이런 일이 예외적인 예술영화에만 등장한다면 상황은 좀 다를 수 있겠지만, 이런 상황은 일반적인 서사 영화는 물론 심지어 관습적인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빈번히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화적 지각의 성격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주관과 객관을 계속해서 오고간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영화적 지각을 ‘반-주관적 이미지(image mi-subjective)’라고 부른 장 미트리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카메라는 인물 속으로 완전히 동화되지도(주관적 시점), 그렇다고 인물과 완전히 구분되는 바깥에 있는 것(객관적 시점)도 아닌 영화와 함께 있는 공존재(Mitsein)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객관적으로 보이는 쇼트라 하더라도 실은 (주관적인)카메라가 그것을 보여주며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아주 주관적으로 보이는 쇼트라 하더라도 그 인물의 시점으로 온전히 종속될 수 없기 때문에 객관적인 성격을 일정 정도 담보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공존재로서의 반주관적 성격이 영화적 지각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영화 ‘히든’의 인트로영화적 지각의 반주관적 특성을 통해 영화의 긴장감과 주제를 아주 극명히 드러내주는 사례로 미하엘 하네케(Michael Haneke)의 <히든 Hidden>(2005)이라는 영화를 들고 싶다. 고정 카메라로 조용한 중산층 주택가 골목을 비추는 영상 위로 오프닝 타이틀이 뜬다. 카메라의 움직임도, 사건도 등장하지 않고 오래도록 같은 장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 오프닝 장면을 설정쇼트 정도로 생각하게 된다. 즉 누군가의 시점에 의한 장면이 아니라 그저 객관적으로 주택가 골목을 비춰주는 장면으로 말이다. 영상의 변화조차 없이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있을 때, 외화면 사운드로 남자와 여자의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때까지도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없다. 잠시 후 화면 중간에 가로줄의 노이즈가 발생한다. (컴퓨터 모니터로 다운받은 영화 파일을 보고 있던 필자로서는 ‘다운받은 파일이 잘못 되었나?’하는 의아한 시선으로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객들은 다운받은 파일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감시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주인공 부부에게 보냈으며, 가로줄 노이즈가 만들어진 영상 속의 골목길 풍경은 감시카메라의 시선이자 주인공 부부가 보고 있는 화면을 리와인드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객관적인 설정쇼트라고 의심없이 믿고 있던 관객들이 뒷통수를 크게 한대 얻어맞는 순간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히든>의 시점은 마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Las Meninas>에서 화가의 시선과 왕과 왕비의 시선 그리고 관람객의 시선이 그림 바깥의 한 점, 즉 그림 외부의 관람객의 공간으로 연장된 그림 내부의 소실점과 등장인물들의 시선이 교차하는 점에서 중첩되고 교환되는 것과 유사한 구조를 형성한다.(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미쉘 푸코(Michel Foucault)의 <말과 사물> 1장을 참고하라. 내용도 길지 않으며 재미있는 분석이다.) 벨라스케스의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 내부의 공간(가시적 공간)을 그림 바깥의 공간(비가시적 공간)으로 연장하여 그 안에서 교환되는 시선의 작용과 소실점의 의미 등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처럼, 하네케의 <히든> 역시 영화 내부의 디제시스 공간(영화의 서사로 형성된 이야기 공간)만으로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숨겨진(hidden) 의미들을 파악할 수 없다. 결국 비가시적으로 숨겨진 의미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관객의 시선까지 연루시키는 영화적 시선의 교호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파악해야만 한다.

오프닝 장면 이후, 이와 유사한 장면이 또 등장한다. 이번엔 아니겠지 하는 순간 이 기대 역시 여지없이 배반당한다. 이런 식의 시선의 장난에 몇번을 속은 관객들은 이제 그냥 보여주는 ‘소위’ 객관적인 쇼트가 나와도 불안해진다. 매 장면마다 이것이 누구의 시선인지를 긴장하며 살피게 된다. 결국 조마 조마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도 관객들은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끝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영화 ‘히든’의 한 장면 사실 영화의 엔딩크레딧까지 유심히 보는 관객은 매우 극소수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하네케의 이러한 장치 또한 의미심장하다. 이를테면 영화 속 디제시스 공간이 이 영화가 제시하는 전체 공간이 아니며, 엔딩크레딧과 함께 영화는 끝나도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진짜 사건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스크린을 뛰쳐나와 자신을 둘러싼 현실과 긴밀한 연관 속에 놓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보여준다. (일반적인 장르 영화나 오락 영화의 경우,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영화가 끝나면 영화 속 사건이나 인물의 삶도 끝난다. 우리는 더 이상 그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저 두어시간 즐거웠으면 그뿐이다.) 하네케의 <히든>은 영화와 그것을 둘러싼 현실 사이의 명확했던 경계선을 뭉개버린다. <히든>에서는 주관적 쇼트/객관적 쇼트, 가해자/피해자, 영화/현실, 상상적인 것/실제적인 것의 모든 식별가능했던 경계들을 넘나들며, 각각의 이질적인 목소리들이 서로의 차이를 무화시키지 않은 채 함께 웅성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매우 불편한 마음으로! 바로 이러한 사태를 들뢰즈는 자유간접화법(discours indirect libre)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들뢰즈는 이 자유간접화법이 앞서 설명했던 영화적 지각의 반주관적 성격의 대응물이라는 파졸리니(P. P. Pasolini)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히든>이라는 차갑고, 불편한 영화의 우회로를 돌아, 다시 영화적 지각의 반주관적 성격으로 되돌아왔다. 파졸리니는 언어학자 바흐찐(M. Bakhtin)의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논의를 받아들여, 이것이야말로 자연적 대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영화적 지각의 반주관적 성격의 대응물이라고 주장한다. 이질적인 주체들의 차별화, 이질적 목소리들의 혼재 등으로 설명되는 자유간접화법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먼저 직접화법과 간접화법부터 살펴보자. 아마도 중학교 영어시간에 배웠으리라 짐작되는 매우 쉬운 문법이다. 예를 들어, 직접화법은 He said, “I will go to the beach tomorrow”.와 같은 방식으로 두 개의 분명히 구분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문장을 간접화법으로 바꿔보자. He said that he would go to the beach the next day.로 바뀐다. 문장부호를 없애주면서 관계대명사 that으로 연결하고, 주절과 종속절의 주어와 시제를 일치시키면, “내일 해변에 가겠다”고 외치던 생생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보고자의 목소리라는 하나의 체계로 목소리들은 균질화된다. 바로 이 간접화법에서 주절을 생략하면, 자유간접화법이 된다. He would go to the beach the next day. 이 자유간접화법에서는 보고자의 뚜렷한 위치가 생략되고, 보고되는 자의 목소리가 간접화법에 비해 두드러진다. 하지만 직접화법에서 나타났던 생생한 보고되는 자의 목소리와는 다르다. 자유간접화법에서는 두 언술행위의 주체들 간의 단순한 뒤섞임이나 균등함은 존재하지 않고, 이질적이면서 상관적인 두 주체 간의 차별화만이 존재한다. 목소리들이 동질적이거나 균형을 이루는 것과는 거리가 먼 다성적인(polyphonic) 관계라 할 수 있다.

영어 문법에서 다시 영화로 되돌아오자. 이 이질적인 다성적 목소리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명확히 식별해낼 수 없는 주관적 시점/객관적 시점의 문제가 되며, 이 모든 시점과 더불어 존재하는 카메라의 시점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자유간접화법이 드러나는 방식은 다양해진다. 주관과 객관이 식별불가능하게 혼재된 영화적 지각 자체도 자유간접적이고, 카메라의 존재를 관객에게 느끼게 하는 방식 역시 자유간접적이다. 카메라의 존재를 느끼게 만드는 방식은 안토니오니(M. Antonioni)나 고다르(J. L. Godard)처럼 카메라가 인물과 서사를 따라가지 않고 마치 자신도 하나의 등장인물인양 강박적인(obsessive) 방식으로 버티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관객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파졸리니가 많이 보여줬던 방식으로 서사의 구성에서 주절과 삽입절의 위계질서를 페기하는 방식들을 들 수도 있다. 우리는 서사에서 주절과 삽입절에 해당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이야기의 경우, 세라자데 공주가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밤마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주절에 해당되고, 공주가 이야기하는 ‘이야기들’이 삽입절에 해당된다. 그런데 파졸리니의 영화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세라자데 공주가 아예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주절의 확고한 위치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며, 이야기되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야기….등으로 이어지면서, 중심과 주변의 위계질서는 더이상 유지되지 않고 여러 이질적인 이야기들이 불균등한 방식으로 혼재된다. 카메라의 움직임, 서사의 구성 뿐만 아니라, 영화의 자유간접화법은 영화와 현실의 관계로까지 확장된다. 허구와 실제의 구분이 유지되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의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도 영화작가는 이제 더이상 창조자라기보다는 이 이질적인 목소리들을 배치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담지자로 역할이 변경된다. (이 새로운 이야기의 형식에 대해서는 이후 연재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므로 이번 호에서는 이쯤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결국 영화에서 시점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영화가 누구의 목소리에 중심적인 지위를 주는지를 파악해보는 일이고, 더불어 카메라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영화가 중심적 지위를 부여하는 인물이 세계와 다른 인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살피는 것은 영화가 무엇을 중심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사유하는 것이 된다. 또한 카메라가 자신을 숨기며 말을 하는지 혹은 자신을 드러내며 말을 하는지 역시 영화가 영화속 세계에 어떤 방식으로 관여하고 있는지를 드러내준다.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예로, 카메라가 자신의 존재를 가능한 숨기려고 노력하는 경우 영화는 마치 자신이 객관적이고 투명한 보고자처럼 시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반대의 경우로 브레히트가 말하는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의 영화적 버전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영화가 주장하는 바를 거칠게 말한다면, 영화는 누군가의 시선에서 해석되고 만들어진, 절대 투명하거나 객관적이지 않은 것임을 카메라가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는 (가시적인) 영화가 (비가시적인) 현실과 맺고 있는 관계를 사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그것이 투명성을 주장하든 아니든간에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직접적으로 현실에 대해 발언을 해야지만 영화와 현실이 관계맺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관계없는 척한다 하더라도 영화는 현실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왜곡되었든 간에 관계를 맺고 있을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사유하게 해주는 것이 영화적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5

김남우(정암학당)

[에라스무스는 군주들과 귀족들과, 이어 교황들과 추기경들과 주교들을 비판한다. 그들은 주어진 본연의 과업을 남들에게 맡겨두고 자신들은 어리석은 행동만을 일삼는다.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연재에서는 교황들과 추기경들과 주교들에 대한 비판을 이어갈 예정이다.]
우신 Stultitia이렇게 여러분은 내 생각에 어느 정도 나 우신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수사들의 부류들에 관하여, 이들이 예배에 있어서 웃지 못 할 여러 가지 것들과 고함소리를 가지고 일종의 독재 권력을 사람들 사이에서 행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바오로와 안토니오라고 믿습니다. 이제 나는 이렇게 내가 베푼 은공을 모른 체하는 배은망덕한 배우 나부랭이, 경건함을 가장하는 불경한 위선자들에 관해서는 그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제는 군주들과 궁정 귀족들에 관해 몇 가지 언급하겠습니다. 이들은 타고난 혈통에 어울린다 싶게 탁 터놓고 솔직 담백하게 나 우신을 숭배합니다. 콩알 반쪽만큼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들의 삶을 무엇보다 시답지 못한 것으로 기피할 것입니다. 군주의 자리에 앉는 것으로 인해 어깨에 엄청나게 커다란 짐을 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배신과 부친 살해를 저지르면서까지 권력을 얻으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군주의 자리란 곧 사적인 것이 아닌 공적인 업무를 수행함이며, 국가의 공익 이외에는 어느 것도 생각하지 않음이며, 법률의 제정자이며 승인자로서 법률에서 손톱만치도 벗어나지 않음이며, 모든 공직자들과 행정관들이 청렴결백하게끔 이끌어 감이며, 행운별처럼 도덕적 탁월함으로 인민에게 커다란 안녕을 가져다줄 수도 있고 불운의 행성처럼 심각한 불행을 가져다줄 수 있는 자로서 만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자리이며, 필부의 과오처럼 그의 잘못을 장차 아무도 모르게 깊이 숨길 수 없는 자리이며, 아주 조금이나마 정직함을 잃으면 그 결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회복 불가능한 역병을 초래하는 자리이며, 군주의 운명에 동반하는 많은 것이 그를 정의로부터 끌어내릴 것이기 때문에 설령 속임수에 의해서라도 쾌락과 방종과 아첨과 사치 등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고 더욱 염려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마지막으로 반역과 원한과 전쟁과 폭력은 말고라도 제 아무리 사소한 잘못일지라도 죗값을 치르게 하시며 행사한 권력만큼 이를 더욱 엄중히 따져 물으실 왕 중 왕에게 두려움을 가져야 할 자리가 군주의 자리입니다. 내 말하노니, 이런 것들과 이런 종류의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면, 물론 이를 생각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하다면 말이지만, 결코 군주 된 자는 잠과 식사를 즐겁고 유쾌하게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군주들은 나 우신의 도움을 받아 모든 근심걱정을 신들에게 맡겨 두고 염려와 고민을 치워 둔 채, 영혼에 불쾌감이 들지 않도록 듣기 좋은 말만을 하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이들은 열심히 사냥하고, 명마를 사육하고, 행정과 군인 요직을 판매하고,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 자신의 금고를 채울 새로운 방법을 매일매일 고안하고, 제 아무리 불공정한 일이지라도 명목을 바꾸어 공정하게 포장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군주의 본분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고 믿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백성들의 마음을 제 편으로 얻기 위해 백성들에게 아첨하는데도 힘을 기울입니다. 여러분은 그려 보기 바랍니다. 법률적 지식은 전무하고,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흡사 적대자이고, 개인적인 유익만을 추구하고, 쾌락에 흠뻑 젖어 학문과 자유와 진리를 혐오하고, 국가의 안녕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오로지 모든 것을 자신의 욕망과 편리에 따라 측량하는 인간들을 말입니다. 더불어 이들이, 관련된 모든 덕목을 하나로 묶어 상징하는 황금 목걸이를 걸고 있으며, 모든 영웅적 용기에 있어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음을 뜻하는 진귀한 보석 왕관을 쓰고 있으며, 정의와 어느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공정을 상징하는 왕홀을 쥐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국가에 대한 어떤 극진한 헌신을 뜻하는 자줏빛 용포를 입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오늘날 군주들이 이런 장식물들에 비추어 자신들의 삶을 돌아본다면, 내 생각에 이들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행여 익살스러운 해설자가 나타나 이런 모든 비극적 의복을 조롱하지 않을까 염려할 것입니다.

그럼 궁정 귀족들은 어떻습니까? 이들 대부분은 더할 수 없을 만큼 알랑거리며 비굴하고 어리석고 천박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이 모든 일에 있어 제일 앞서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만 한 가지 겸손을 보이며 양보하는 것이 있는바, 금붙이며 보석들이며 자줏빛 관복 등 덕과 지혜를 상징하는 장신구들로 몸을 휘감은 반면 정작 덕과 지혜의 연마 자체는 남들에게 양보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군주를 ‘주인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위가 주었음에, 군주에게 몇 마디 인사를 건넬 수 있음에, 군주를 부르며 ‘근엄하시고 존엄하시고 위대하신’ 등의 굉장한 호칭을 줄줄이 엮어 넣을 줄 앎에, 이런 낯간지러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함에, 이런 아부를 멋들어지게 해냄에 즐거워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궁정 귀족 된 자들이 갖추어야 할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의 삶을 좀 더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본다면, 여러분은 이들이 진정한 파이아케스 사람들 혹은 페넬로페의 청혼자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나보다 메아리의 여신이 더 잘 전달해 줄 것입니다. 이들은 벌건 대낮까지 잠을 자는데, 사제들을 고용하여 침대 옆에 대기시켜 놓았다가 침대에 누운 채로 재빠르게 예배를 마치고 나서 곧 조반을 먹는데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 점심 식사가 이어집니다. 그리고는 주사위 놀이, 장기 놀이, 점치기, 어릿광대, 익살꾼, 매춘부, 색정 희롱, 음담패설 등이 이어집니다. 그 사이 한두 번의 간식이 있습니다. 다시 이어 저녁 식사, 그리고 술잔치가 유피테르에게 맹세코 한 판 이상 벌어집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이런 삶에 물리지도 않는지 몇 시간, 며칠, 몇 달, 몇 년, 몇 백 년이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나 우신조차도 때로 이들이 허풍 허세를 칠 때면 역겨움을 느낄 정도인바, 귀족 여인들은 하나같이 모두 치맛자락을 남들보다 길게 늘어뜨릴수록 더욱 신적으로 보인다고 믿는가 하면, 귀족 사내들은 그들의 유피테르와 남들보다 가까운 사이로 보일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을 팔꿈치로 밀쳐 내며,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가 남들보다 무거울수록 더욱 스스로 대견해합니다. 그래 봐야 결국 돈 자랑에 힘자랑하는 것밖에 안 되는데도 말입니다.

왕정 귀족들의 모습에 열심으로 도전하는 혹은 거의 능가하는 자들로 교황들과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외관을 가까이 자세히 살펴볼 것 같으면 이렇습니다. 줄무늬 장식이 있고 눈처럼 흰 것이 인상적인 복장은 한 점의 과오가 없는 삶을 의미하며, 쌍으로 모자뿔을 세우고 그 꼭지에 매듭 하나를 매어 둔 주교관은 이를 테면 구약과 신약에 대한 공히 절대적인 지식을 상징하며, 손을 두루 감싸고 있는 주교 장갑은 인간 세속 어떤 일에도 손대지 않으며 오로지 성사만을 주관하는 정결함을 나타내며, 지팡이는 그들에게 맡겨진 양 떼를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며 깨어 있음을 가리키며, 앞에 내세운 십자가는 분명코 모든 인간적 욕망을 이겨 냈음을 웅변합니다. 만약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자신의 복장과 기구가 갖는 이런 의미들을 음미해 보았다면, 내 말하노니, 그의 삶은 온통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들은 스스로의 만족에만 매달려 매사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나머지 모든 과업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혹은 거느린 수사들에게나 혹은 소위 보좌 사제들에게 맡겨 둔 상태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호칭 가운데 ‘주교’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식하지 못하며, 주교란 수고하고 돌보고 간수하는 자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긁어모으는 일에 관하여 그들은 ‘주교직’을 아주 정확히 수행하는바, ‘눈먼 파수를 보지’ 않습니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6)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6)

글: 이정호 교수(방송통신대)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3. 고대 그리스인의 동성애 – 소년 사랑(2)

부상을 당한 파트로클로스(수염이 난 사람)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는 아킬레우스. 여기서는 플라톤의「향연」에서 파이드로스가 지적한 것처럼 파트로클로스가 에라스테스로 그려지고 있다.(트로이아 지방에서 발굴된 도기 그림)

기묘하게도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소년사랑을 암시하는 내용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일리아스」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우정이 소년사랑으로 비쳐지는 것도 후대 작가들이 그렇게 다시 그렸기 때문이다. 호메로스 작품에 소년사랑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만든다. 호메로스 시대에는 소년사랑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럴 경우 우리는 소년사랑이 호메로스 이후에 아주 폭발적으로 발달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당시의 생활상을 다 그리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표현기법의 측면에서도 두리 뭉실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그 최종적인 형태를 드러낸 것이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인 것을 고려한다면 소년사랑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플라톤의 「향연」(182D)을 보면 연설에 참여한 파우사니아스가 엘리스 지방과 보이오티아 지방에서는 소년사랑에 대해 너그럽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이오니아 지방에서는 그것을 추한 일로 받아들여졌다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제도상으로는 스파르타가 지배하고 있었던 펠로폰네소스의 도리스 지방에서 소년사랑이 유래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게이톤과 하르모디오스의 조각상(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소장)

한편, 소년사랑으로 고양된 뜨거운 열정이 참주를 타도하는 영웅적인 기개로 나타난 경우도 있었다. 「사랑에 관해서(Erotikos)」라는 책을 쓴 폰토스의 헤라클레이데스(Herakleides ; 기원전 4세기의 플라톤-피타고라스학파 철학자)는 그러한 경우에 속하는 가장 유명한 사람들로서,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가문 출신 참주 힙파르코스(Hippparchos)를 살해한 하르모디오스(Harmodios)와 아리스토게이톤(Aristogeiton)을 들고 있다.(헤로도토스「역사(Historiae)」5·55 이하를 참조). 그래서 아테네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기념해 조각상도 만들었고 향연이 베풀어질 때면 종종 그들의 행위가 정치적 해방을 가져다 준 영웅적 행위로 찬미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투퀴디데스 -그는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의 통치에 대해 일부 호의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는 그것을 순전히 사사로운 연애사건으로만(dia er?tik?n xyntychian) 적고 있다. 아리스토게이톤은 연하의 하르모디오스의 에라스테스 즉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참주 힙파르코스가 하르모디오스를 열렬히 쫓아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리스토게이톤은 결국 그가 권세를 이용해 자기의 애인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여겨 힙파르코스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6·54)

또, 헤라클레이데스는 앞서 말한 책에서 위와 같은 영웅적인 태도의 예를 하나 더 들고 있다. 카리톤(Chariton)은 참주 팔라리스(Phalaris)가 자신이 사랑하는 소년 멜라닙포스(Melanippos)에게 가한 모욕에 분노하여 보복을 시도 한다. 그러나 보복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그러나 카리톤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의연하게 연인 멜라닙포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는다. 하지만 멜라닙포스는 카리톤을 구하려고, 자발적으로 자신이 그의 에로메노스임을 털어놓는다. 참주는 이러한 멜라닙포스의 행동에 크게 감동하여 두 사람 모두를 사면해준다. 에로스에 의해 고양된 사랑과 우정의 연대감이 얼마나 크고 견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은 이 밖에도 부지기수이다. 그야말로 어느 시대이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amor vincit omnia).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의 계보를 더듬어 가면, 영웅적인 것뿐만 아니라 슬프고 애절한 이야기도 적지 않다. 「그리스 안내기(Peri?g?sis t?s Hellados)」를 쓴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의 입구에 세워진 에로스의 제단 비석글 하나를 전해주고 있다.(1·30·1). 아테네의 거류외인(metoikos)이었던 티마고라스(Timagoras)는 멜레스(Meles)라는 소년을 너무 사랑했지만, 티마고라스는 멜레스에게 사랑을 얻지 못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가파른 절벽 위에 서 있었을 때, 멜레스는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이 절벽에 뛰어내릴 수도 있어요?”라고 물었다. 티마고라스는 그 말을 듣고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멜레스는 그것에 몹시 충격을 받아 몸져 누워 있다가 얼마 후 자신도 그 절벽으로 가 몸을 던졌다.

물론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양태들 속에는 부드러운 울림도 있다. 우선 기원전 5세기경에 앗티카 지방에서는 디오뉘소스 축제의 행렬에서 미소년들에게 바쳐질 상아로 된 하프가 되고 싶다고 하는 어떤 한 남자의 노래가 향연자리에서 많이 불려 졌다고 한다. 물론 이 노래의 둘째 절에서는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여인이 몸에 걸치는 순금의 액세서리가 되고 싶다는 내용도 이어지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팔라틴 선집(Athologia Phalatina)」에는 플라톤의 시 몇 편이 들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거의 위작임이 분명하고, 다만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3, 29-32)가 아리스팁포스(Aristippos)의 저작에서 인용하고 있는 8편의 시는 진위여부를 두고 문헌학자들의 관심거리가 되어 왔다. 그 가운데에는 플라톤이 친구 디온(Dion)을 추억하며 “아, 나의 마음을 사랑으로 미치게 만든(ekm?nas) 디온이여”라고 노래한 구절이 들어 있다. 물론 플라톤이 동성애를 비난하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디온의 관계를 억측할 필요는 없겠지만 당시 유명 인물들을 비방하기로 이름 난 아리스팁포스(철학자 아리스팁포스는 아니다)로서는 아마 우리의 생각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인용한 시들 가운데에는 노골적으로 에로틱한 내용을 담은 6편이 포함되어 있고 그곳에는 소크라테스 주변 사람들의 이름도 눈에 띤다. 이 시들은 많은 논쟁 끝에 문헌학적인 측면에서 발터 루드비히(Walther Ludwig)의 주장이 제기된 이후 위작 쪽으로 기울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연구 결과 때문에 그 시들을 읽는 기쁨까지 손상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에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상냥함과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다

 

별을 쳐다보는 너야말로 나의 별

아, 넓은 밤하늘이라도

되고 싶구나. 그 수많은 눈으로

너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앞에서 말한 「팔라틴 선집」에 실린 이른바 플라톤의 시들에도 비록 여인을 향해 경박하게 쓰인 것이긴 하지만 위와 비슷한 구도를 담은 시가 실려 있다.(5·83과 84)

 

아, 산들바람이라도 되었으면.

그대가 햇살을 받으며 걸을 때

그대는 바람이 되어 날리는 나를

부드럽게 가슴에 맞아 줄 테니까

아, 진홍색 장미라도 되었으면.

그대의 손이 나를 꺾어

그대의 눈 같은 젖가슴에

소중한 보석처럼 끼어 놓을 테니까

 

또, 장난스런 사랑을 노래하는 「아나크레온풍 시선집(Anacreonteen)」 가운데에는 사랑하는 여인이 끊임없이 자기에게 눈길을 주도록 그녀의 거울이 되고 싶다고 노래하는 한 남자의 시도 실려 있다.(22·5).

에라스테스와 에로메노스(도기 그림)

지금까지 우리는 소년사랑에 대해 소년사랑이 드러내는 다양한 양태들 중에서 다소 대비적인 것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수많은 양태를 가진 소년사랑들 각각에 대해 도덕적 가치를 논한다거나 어디까지가 육체적인 탐닉이고 어디까지가 정신적인 사랑인지를 구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 군사 공동체 내에서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헌신과 교육의 측면은 그 구별 자체를 더욱 애매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에서 크레타섬은 소년사랑의 풍속의 발상지로서의 명성을 엘리스 지방과 분담하고 있었는데 스트라본(Strabon)은 다음과 같은 기묘한 크레타의 풍습을 전하고 있다(「지리지(Geographica)」10·483). 사랑하는 사람, 즉 에라스테스는 주변 사람들의 승인을 얻어 젊은 소년 에로메노스를 유괴한 다음 서로 2개월간의 집단생활을 보낸 후, 소년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갑옷 한 벌을 주었다는 것이다. 소년 사랑이 주로 군사교육의 수단이었음을 명시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스파르타와는 달리 크레타의 소년사랑에 관해서는 별 증거가 없어 추측에 불과한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풍속의 기원이 군사·전쟁 지향의 사회에서 있었던 것임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한때 크레타 섬에서 동성애가 인구과잉 억제책으로 법제화된 적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정치학」2·1272a). 에라스테스와 에로메노스들 끼리 긴밀하게 묶여진 이른바 “테바이의 신성 부대”(hieros Lochos t?n Th?b?n)는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이 점을 증언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무장한 한 쌍의 테바이 신성부대 병사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에서 스파르타가 마케도니아에게 운명적인 패배를 당했을 때도, 펠로피다스(Pelopidas)가 인솔하는 이 “신성 부대”가 전투의 최전선에 서 있었고, 338년 그리스가 존망을 걸고 싸운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도 그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사력을 다해 싸웠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전투가 끝난 다음에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 2세가 전장을 시찰하면서 신성부대 150쌍의 병사 300명 모두가 서로 꼭 안고 죽어 있는 것을 보고 감격해 하는 장면을 전하고 있다. (「펠로피다스」183) 마케도니아왕은 그들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과 소년들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을 했다거나 혹은 당했다고 잘못 추측하는 자들은 반드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플루타르코스는 이들에 대한 보고를 통해 테바이 신성부대의 순결성을 부각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생존 중에도 아무런 수치스러운 일 없이 순결한 사랑만을 나누었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이외의 고대의 저작가들이 보이오티아 지방에 도착해서 전하고 있는 다른 증언들을 보면 그들의 관계에서도 여전히 관능적 쾌락이 넘실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이 동성애 부대에 붙여진 “신성한(hieros)”이라는 형용사는 그 자체로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애매하고도 복잡한 특성을 보여주는 매우 함축적인 표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사이에 어떠한 성적인 색조도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후대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관계를 육체적 사랑까지 수반하는 연인 사이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랑 역시 신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아이스퀼로스가 쓴 「뮈르미돈 사람(Myrmidones)」에서는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열렬한 에라스테스로 등장한다. 플라톤의 「향연」(180A)에서 파이드로스는 아이스퀼로스가 그들의 진짜 관계 (즉, 파트로클로스가 에라스테스, 아킬레우스가 소년 에로메노스)를 뒤바꾸어 놓았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아이스퀼로스는 그 작품 가운데 한 장면에서 아킬레우스가 쓰러진 파트로클로스를 끌어안고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한탄하는 모습을 아래와 같이 그리고 잇다.(135 f. N. 228 f. M.)

 

그대는 허벅지의 맑고 깨끗한 성역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구나.

수천 번 입맞춤을 했거늘 아무런 은혜도 모르는 너.

 

또,

여기서 함께 숙영한 것이랑

나와 하나가 된 그 경건한 허벅지를

 

보다시피 아이스퀼로스는 호메로스와 달리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사랑을 아주 농밀하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아이스퀼로스는 흥미롭게도 그 농밀한 사랑을 표현하는 문맥에서 마치 훗날 신성부대에 붙여질 수식어를 미리 준비라도 해주듯이 매우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어휘를 끌어 들이고 있다. 이를테면 우선 첫 번째 인용 단편에서는 허벅지를 설명하는 sebas hagnon이 눈에 띤다. sebas는 외경의 대상을 가리키지만, 이 명사는 자주 종교적인 영역에서 hieros와 함께 바야흐로 “외경스러움”, “신성함“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순수한, 맑고 깨끗한, 성스러운“을 의미하는 hagnon이라는 형용사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동시대의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힙폴뤼토스(Hippolytos)」(1003)에서도 그런 용례가 나온다. 그곳에서 힙폴뤼토스는 더럽혀지지 않은 자신의 몸(demas)을 사랑(관능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난 hagnon한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또, 둘째 단편에서도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허벅지와 하나된 것(homilia)을 경건하다(eusebes)고 표현하고 있다. 이때 eusebes라는 말의 의미는 sebas라는 명사와 친족 관계에 있는 말로서 신성한 것에 대한 외경심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면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456)나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4-406)는 왜 육체적 관계를 동반하는 동성 사이의 사랑을 표현하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그 해답을 바로 그들의 뒷시대를 살았던 플라톤(기원전 428-348)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향연」을 읽다보면 초반에는 소년 사랑을 중심으로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이내 에로스가 성적 열망을 넘어서 마치 사다리를 타고 오르듯 점차 진리를 추구하는 고양된 정신으로 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스퀼로스는 당대의 소년 사랑을 노래하면서 이미 소년사랑 속에 들어 있는 그러한 정신적 요소를 강조하려고 한 것일까 아니면 한편으로 그것을 훨씬 넘어선 플라톤적인 에로스에로의 승화를 꿈꾸었던 것일까? 아무려나 우리는 이렇게 해서 이제 플라톤의 에로스론, 이른바 “플라토닉 러브”에 다가서게 된다.

(다음에 “4. 플라톤의 에로스” 계속)

인사드립니다

사이트 구성이 색달라서 영 어색합니다만

암튼 인사는 해야 될 거 같아서 용기를 내었습니다.

오늘 신규가입 한 김옥렬(남,58세,경기 안성)입니다.

남 얘기 같던 철학이라는 단어를 정식으로 사용하는 사이트에 오기는 처음 입니다.

언감생심 이 나이에 무슨 철학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겁을 상실한 채 귀만 가지고 왔습니다.

좋은 말씀은 새겨 듣고,

다양한 생각들에 대해 지혜로운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듣고, 배우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