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6)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6)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최초의 민주주의 그 의의와 한계(2)

 

 

두 차례에 걸친 그리스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격노한 다레이오스 1세는 다시 원정을 준비했으나 끝내 숨을 거두고 이후 기원전 480년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30만의 병력과 1000척에 가까운 군함을 이끌고 다시 그리스를 쳐들어 왔다. 이것이 3차 페르시아 전쟁이다. 그리스 북방의 마케도니아로부터 남하해 온 페르시아군을 맞아 그리스 연합군은 테르모필라이(Thermopylai)에서 첫 방위전을 펼쳤다. 그러나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 7000명 모두가 마지막 한명까지 목숨을 바쳐 용감하게 싸웠음에도 페르시아 대군의 위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테르모필라이의 방위전을 돌파한 페르시아군은 이후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마침내 아테네까지 함락되면서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전체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 아테네를 구한 사람이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s)이다. 페르시아군은 남쪽 해안 루트를 통해 해군력을 총동원해 아테네를 굴복시키기 위한 마지막 총공세를 펼쳤는데 데미스토클레스가 지휘한 아테네 해군이 페르시아의 대함대를 살라미스만으로 유인해 페르시아 해군력이 거의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대파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기원전 480년에 있었던 유명한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다. 그런데 살라미스에서 아테네 해군의 대승은 단지 아테네 해군의 전술능력과 용맹성으로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치밀한 사전 준비와 행운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1차 침공이후 해군력의 증강이 요구되었을 때 다행스럽게도 라우리온(Laurion) 광산에서 엄청난 양의 은광이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얻어진 재화 모두를 군함건조에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테네에서는 고대 이래 나라건 개인이건 큰 부가 생길 경우 최대한 시민들에게 분배하는 게 오래된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부유한 자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과도하게 요구되어 사회 문제가 된 공적 기부제(leitourgia) 또한 원래는 그러한 전통적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적 분배 대신 군함 건조에 자금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테미스토클레스의 탁월한 설득과 그에 대한 시민들의 지혜로운 동의가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테미스토클레스는 군함의 건조를 계획하면서 특별히 해상에서 기동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아테네 해군 고유의 삼단노 군선(tri?r?s)의 기능을 더욱 강화시켰다. 당시 해전에서는 상대 함정을 수직으로 부딪쳐 파괴하는 것이 최상의 전술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크기가 크면서도 기동력이 빠른 배가 필요했다. 적은 수의 군함으로 많은 적함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도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새로 건조되는 삼단노 군선은 당시로선 아주 큰 규모인 길이 40미터, 폭 4~5미터의 거대군함으로 만들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최대한 노(櫓)의 숫자를 늘리고, 노수(櫓手)들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배의 하부를 3단으로 설계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해군이 주로 전투원으로 구성된 750척의 배를 구비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아테네 해군은 380척에 불과했지만 승조원의 절반이 노수들이었다고 하니 가히 군선의 기동력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 페르시아 해군은 살라미스에서 200여척의 배를 잃고 크게 패전한 후 크세르크세스 1세의 뒤를 쫓아 퇴각했고 그리스 본토에 아직 머물러 있던 나머지 병력도 아테네·스파르타 연합군에 의해 기원전 479년 프라타이아에서 최종 격퇴되면서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데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5-459)

고대 아테네의 주력 군함 삼단노 군선(tri?r?s)

 

그런데 페르시안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계기가 된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대승은 흥미롭게도 차츰 아테네 정치지형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작용하였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아테네에서 정치적 발언권과 시민으로서의 긍지는 전쟁 기여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한 시민의 수만 해도 4만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전쟁이 끝난 후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스스로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고양되어 있었을까 짐작이 가고 남는다. 게다가 승조원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노수들은 무구를 갖출 재력도 없어 그 동안 전쟁에 참전할 능력도 없었고 그에 따라 어떠한 시민적 명예도 누릴 수 없었던 무산 시민들이었으니 그들의 자부심은 가히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감격적이었을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러한 고양된 시민의식은 그대로 아테네의 정치 및 권력지형에 반영되어 마침내 아테네 시민이면 귀족이건 무산 시민이건 간에 어떠한 차별이나 제한 없이 모두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발언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의 힘은 날로 커져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최고의 영웅으로 최고의 권력에 오른 테미스토클레스마저도 도편추방투표를 통해 국외로 추방할 정도로 그 위세를 발휘하였다. 물론 테미스토클레스의 탄핵이 정치적 음해가 개입되어 이루어진 누명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어쨌거나 정치적 사안과 관련한 결정과정에서 정치적 주체로 떠오른 시민의 힘은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아테네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원전 461년 급진적인 민주정을 펴다 암살당한 에피알테스(Ephialt?s)에 이어 아테네 민주정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 페리클레스(Perikl?s)이다. 페리클레스는 이후 30년 가까이 오랫동안 아테네의 지도자로서 군림하면서 아테네의 민주정이 확고하게 제도적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가 오랫동안 도편추방 당하지 않고 권력을 유지하며 그런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인격과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장군직에 선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플라톤은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의 정체를, 사람들은 민주정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민중의 찬성이 수반된 귀족정이라고 평하고 있다.([메넥세노스] 238c,d)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치세는 아테네로서는 최고의 번성기였을지는 몰라도 그리스 전체역사의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의 몰락을 앞당긴 시대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 종전 이 후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인접 폴리스들을 끌어들여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여 맹주로 자처하고 군자금을 거둬 비축해왔으나, 그 비용을 아테네의 신전 건축과 정치수당을 지급하는데 유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반발하는 폴리스들을 군사력으로 제압하여 그리스 사회를 아테네 중심으로 제국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상징으로 꼽히는 파르테논 신전 등 화려한 건축물도, 인류의 빛나는 유산으로 평가되는 여러 문학적·철학적 성취도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을 실질적으로 유지시키고 있었던 시민들의 여유와 경제적 번영도 실제로는 모두 다른 폴리스의 희생은 물론 시민들을 대신하여 아테네 경제를 떠받들고 있던 노예들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민중최고재판소 재판관을 추첨하는데 쓰였던 도구들

 

페리클레스에 의해 주도된 이러한 패권적 제국주의의 경향은 결국 페리클레스 사후 스파르타의 반발을 야기하여 장기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휩쓸리게 함으로써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사회 전체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게다가 아테네의 민주정 또한 내전을 겪으면서 선동정치가의 득세 등 퇴행을 거듭하여 일시적으로 과거 정체로의 복귀를 꿈꾸는 과두주의자들의 반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내전이 끝난 직후에는 30인 참주들에 의한 비극적인 폭압정치가 자행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 참주정은 민주정으로 곧바로 복귀되었지만 아테네 시민들의 민주정에 대한 신념과 자부심은 이미 전성기를 이루었던 페리클레스 치세에 비해 현격하게 저하되어 있었다. 역사를 통해 부르크하르트 등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아테네 민주정의 치명적 과오로서 지적되고 있는 뮈틸레네인들에 대한 처벌을 둘러싼 민회의 결정, 아루기누사이 해전 장군들에 대한 처형사례, 니키아스의 주저가 빚어낸 시켈리아 해전의 참극,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처형 사례는 모두 아테네 민주정의 전성기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또는 그 직후에 일어난 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서 조차 아테네 민중들이 선동정치가(D?mag?gos)들에 의해 휘둘려 비합리적이고도 어리석은 판단과 광분으로만 일관했다고 여기는 것은 그릇된 판단이다. 앞에서의 사례들에 대한 일부 학자들의 평가 또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이른바 선동정치가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수공업자·상인 등 평민 출신으로 처음 등장하여서는 원래 이름 그대로 민중(d?mos)의 의견을 대신 앞서서 표현하고 선도하는(ag?gos) 긍정적인 역할도 하였고, 민회의 결정과 관련해서도 민회가 일년에 40차례이상 수십 년에 걸쳐 수천 건 이상을 다루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위에서 알려진 몇 가지 사례들은 오히려 예외적인 소수의 오류들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 민중들이 보여주었던 민회에서의 열정과 전장에서의 헌신적인 용감성은 모두 맥동치는 국가성원으로서의 움직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 그 기간 동안 시민대중들 또한 의연하게 절제와 지혜를 발휘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 특히 30인 참주들을 축출 직후 극심한 갈등국면에서 아테네 시민 전체의 평화를 위해 아테네 민중들의 화해 조치와 처신은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되고 발전되어온 아테네 시민의 성숙된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처형과 관련해서도 당시의 아테네 민중의 정서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정황상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없지 않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이라는 장기간의 비극적인 내전을 치르면서 아테네 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종전 직후 들어선 30인 참주정은 아테네 민중의 비극적이고도 음울한 정서를 치유하기는커녕 폭정과 정적에 대한 대학살을 통해 민중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과 상처를 안겨 주었다. 복구된 민주정의 지도자들에게는 이러한 정황을 전환시켜줄만한 어떤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희생양으로 소크라테스만큼 호재가 될 만한 인물도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30인 참주들의 측근이었고 민주정의 이데올로그들인 소피스트들에게는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그가 말하는 다이몬(Daimon)이라는 신령은 아테네인들의 일상적 종교생활에서 이교(異敎)신이라 여겨질 만큼 아주 낯선 것이기도 했다. 결국 민주정의 지도자들의 기대와 의도대로 민중들은 이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자신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취할 수 있는 희생 제물로서 암묵적인 교감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황이 시대의 현인 소크라테스까지 처형한 아테네 민중과 민주정의 처사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재판 등 일부 부정적인 사례들을 빌미로 아테네 민중들이 오랜 기간 이룩해온 정치적 이념 즉 ‘정치적 결정 및 재판에 대한 민중의, 민중에 의한 지배’까지 일거에 매도해버리는 처사 또한 부당하다. 플라톤의 [변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은 일단 절차상으로 보면 이른바 민주정이 이룩해온 전통적인 법적 절차에 의거해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피고인 소크라테스에게도 변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허용되었다. 아마도 [변명]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재판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발언을 기록하였다고 하면 우리는 인류역사를 통해 고·중세 시기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고대 아테네 민주정 고유의 공개적이고도 민주적인 재판과정의 전모를 알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아테네 말기의 정치적 정황이 아테네 민주정과 재판에 대한 신뢰를 크게 무너뜨리기 했지만 사실 아테네 민주정이 오랫동안 지향하고 견지해온 재판의 이념 자체는 고대 세계의 재판 그 어떤 사례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공정성을 수반하고 있었다. 민중 최고 재판소(heliaia)의 경우 기본적으로 재판관을 당일 추첨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재판의 전 과정에서 원고의 논고는 물론 피고가 의견과 이의를 제의할 수 있는 기회가 최대한 허용되었고 재판관들 또한 재판과정 내내 이의의 추가적인 존재 여부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면서 재판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우리는 소크라테스 재판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아테네 민주정이 발전시켜온 또 하나의 민주적 이념과 정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상 우리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유래된 민주주의의 이념적 지표로서 다수 대중들에 의한 다수결의 원리를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꼽는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정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초에는 다수결의 원리에 앞서 본질적으로 다수 의결과 관련한 일체의 사안들에 대한 정보의 공유 그리고 그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토론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대 아테네 민주정의 뿌리에는 다수결과 더불어 합리적이고도 공개적인 토론의 정신이 핵심적인 지배원리이자 이념으로서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정하에서 죽임을 당했고 플라톤은 그 민주정을 비난하였지만 그들 사상의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는 치열한 토론 정신은 다름 아닌 백가쟁명의 민주정 아테네의 토양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의 이념의 측면에서도 그와 같은 정보의 공유와 토론의 정신은 다수결의 원리의 정당성을 담보해주는 필수적이고도 핵심적인 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아테네 민주정의 이념은 거대 이익집단의 정보조작에 의해 민중의 진정한 뜻이 왜곡되기 일쑤인 현대 민주주의에도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준다. 진실은 다수결의 지지를 받지 않아도 궁극적으로는 인류에게 선과 덕을 가져다주지만 왜곡된 정보와 거짓에 기초한 다수결은 그 자체로건 결과적으로건 그 결의에 지배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민주정이 고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기 힘든 그와 같은 빛나는 이념과 지향을 가지고 있었을 지라도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비교해 보면 근본적으로 아주 많은 상이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간과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한계 또한 내포하고 있다. 우선 가장 큰 차이는 현대의 민주정이 대의제에 기초한 간접 민주정을 취하고 있는데 비해서(물론 일부 국가에서 직접 민주정의 요소를 이용하고 있고 또 오늘날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직접민주정의 시도 또한 논의되고 있지만) 아테네의 민주정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직접 민주정 체제였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아테네의 최고 결정 기관인 민회의 경우 18세 이상의 성년 남자 시민이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었으며 누구든 제한 없이 평등하고도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다. 표결은 오늘날과 달리 비밀 투표가 아닌 거수로 정해졌지만 도편추방여부 등 일부의 경우는 비밀투표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민회는 1년에 40회 정도 열렸고 국가 중요사안 일체가 심의되었다. 아무리 직접민주정이라고는 해도 열흘에 한번 정도 열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아테네 민주정이 정치 기능에 있어 정책의 적극적 수립보다는 사법적(司法的) 성격에 크게 치중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민회는 워낙 많은 사람들의 참석을 요하고 도심에서만 열려 처음에는 정족수를 채우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페리클레스가 민회 참석자들에게 일상인들의 하루 수입에 준하는 정치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이후 도심에 살든 시골에 살든 생업까지 접고 회의에 참석하는 등 참석률이 크게 높아지기 시작했고 시민의식은 물론 정치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관심 또한 그 만큼 높아졌다.

그러나 여성이나 거류외인 그리고 노예에게는 여전히 참정권이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인구분포로 보면 인구의 40%정도에 달하는 노예를 포함하여 이들의 수가 전체인구의 70-80 %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엄격한 의미에서 민주정이라고 보기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무엇보다도 아테네의 민주정은 사회경제적으로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노예들의 희생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시민들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인 아테네 경제활동의 대부분을 노예들이 떠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수당 또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상당부분 델로스 동맹 기금에서 유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애초부터 정당성을 결여하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아테네 민주정은 인접 폴리스의 희생은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다수의 기층 민중에 대한 착취를 기초로 성립한 특권화된 과두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예제가 아테네뿐만 아니라 고대세계 전반에 유포된 제도였다는 점에서 그것이 곧 아테네 민주정의 본질적 한계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에서는 대부분의 관직이 추첨으로 이루어져 정치참여 또는 권력행사에 철저히 특권화가 배제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주요 행정직의 경우는 미리 기본적인 자질을 심사(dokimasia)했으며 특히 가장 중요한 군사직책 즉 장군(strat?gos)이나 재정업무에는 고도의 전문성을 인정하여 선거를 통해 선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임도 가능하였다. 페리클레스가 장기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장군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최고 사법 기관으로서 민중 최고 재판소에서 판결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배심원(전문적인 재판관이 따로 없었으므로 이들이 곧 재판관(dikast?s))은 일관되게 그 재판 당일 즉석에서 추첨에 의해 선발하여 누구도 사전에 뇌물수수나 모의가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소크라테스(기원전 436-338)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정치 수당의 지급도 중지되고 아테네의 경제상황 또한 날로 악화되어갔다. 앞장의 논의들에서 살펴보았듯이, 특히 가장 큰 타격을 받은 테테스 층의 귀족들에 대한 공공연한 기부요구, 상습적인 무고(誣告)를 통한 이권수수가 횡행하면서 점차 아테네의 공동체 정신도 사라져갔고 인접 폴리스와의 잦은 전쟁과 정책에 대한 대립과 분열로 민주정의 기본골조도 붕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북쪽 변방국가에 불과했던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의 새로운 강자로 부각되면서부터 아테네는 친(親)마케도니아파와 반(反)마케도니아파로 분열되어 끊임없이 정쟁만을 일삼다 기원전 350년쯤에는 제국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진해졌다. 그 싸움의 중심에는 마케도니아와 평화를 유지하면서 아테네의 재건을 도모하려는 이소크라테스(Isokrat?s)와,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의 자유를 위협하는 정복자로 간주하고 그와 싸울 것을 주장하는 데모스테네스(D?mosthen?s)가 있었다. 끝내는 데모스테네스의 주장에 따라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에서 필리포스(Philippos)왕과 전쟁을 벌이지만 처절한 패배를 맞이함으로써 해상왕국에로의 복귀를 꿈꾸던 아테네는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한 채 마침내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

고전기 그리스는 아테네의 패권적 제국주의가 빚어낸 내분으로 결국 몰락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것은 적대국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군사적 팽창주의로 이어졌다. 도시국가의 철학 또한 오랜 전란기를 통해 안심입명의 개인주의로 해체된 이래 헬레니즘과 코스모폴리타니즘으로 표징되는 또 다른 세계주의로 재편되었다. 때마침 근동 지방에서도 유대교의 민족주의적 폐쇄성을 넘어 보편주의를 기치로 종교적 세계주의가 등장하였다. 우연찮게도 기원전후에 등장한 이러한 세계주의적 경향들은 마침내 하나의 세계사적인 흐름으로 통합되면서 제국주의 거대 로마로 흘러 들어갔다.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끝-)

 

2013년 1학기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 시민대학] 참가자 모집

2013년 1학기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 시민대학] 참가자 모집

 

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 : 새로운 세계를 디자인하기 위해 당신이 알아야 할 키워드 100가지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이 거대한 시련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에 대해 함께 고민해 봅니다.

 

?현대 사회주의의 몰락 ? 미국식 금융 자본의 붕괴 ? 9?11 사태 이후 체제에 대한 관심을 이제 우리 주변으로 돌려, 우리 공동체의 나아갈 비전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해 보기 위해 우리 시대의 가치 ? 자본 ? 노동의 의미를? 다시 세워보고 우리 일상과 주거, 우리 마을과 공동체, 우리 지역 사회와 도시에서 ‘같이’하는 것의 ‘가치’를 키워드 100가지로 새롭게 인식해 보고자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함께 디자인할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운영기간 : 2013년 4월 4일(목) ~ 7월 18일(목) (총 15강)?????? 매주 목요일 19:30~21:30
?????| 장?? 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1층 이야기방
?????| 대?? 상 : 성인, 50명
?????| 주?? 최 : 광진정보도서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건국대학교
?????| 주?? 관 : 문화체육관광부 도서관정보정책기획단
?????| 후?? 원 : 알렙출판사
?????| 신청방법
???????- 신청기간 : 213년 3월 23일(토) ~ 마감 시
???????- 신청방법 : 선착순 방문 접수 및 전화접수
???????- 신청장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2층 종합안내
??????? 수강자에게 수료증 발급
??????? 보증금 : 30,000원(주관부서 지침 사항, 개강일 납부, 종강 시 환불)
?

???????※ 기타문의 : 02-3437-5092(내선 4107번) / http://www.gwangjinlib.seoul.kr

 

 

○ 커리큘럼 안내

강의일자 주제 주요내용 강사
4월? 4일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

?- 세계경제의 역사적인 특징과 근대적인

???세계체계론

김성우 교수
4월 11일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 1 ?- 근대, 노동의 의미란?

?- 소비와 생산이란 무엇인가?

박영균 교수

(건국대 HK교수)

4월 18일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 2 ?- 물질노동과 비물질 노동이란?

?- 현재, 우리의 노동은 어떻게 열정이

???될 수 있는가?

4월 25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1 ?- 가치 vs 교환가치 vs 잉여가치 김우철 교수

(호서대 외래교수)

5월? 2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2 ?- 상품-화폐의 등장과 근대적 ‘개인’

?- 현대에서 가치 개념의 변화

5월? 9일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보자 1 ?- 노동의 가치와 소외, 가치와 가격 이재유 교수

(건국대 외래교수)

5월 16일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보자 2 ?- 노동의 종말인가 소유의 야만인가

?- 현대적 노동가치의 재구성

5월 23일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1 ?- 화폐, 자본, 이윤을 발견하자

?- 권력이 자본주의를 만났을 때

이순웅 교수

(한철연 연구협력위원장)

5월 30일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2 ?- 생산-화폐-권력의 결합체, 자본주의

?- 현대에서 자본주의 아닌 것(대안)은?

6월 13일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

니스를 생각한다 1

?- 당신에게 지속가능성이란 무엇인가?

?- 당신에게 돈이란 무엇인가?

박민미 교수

(동국대 외래교수)

6월 20일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

니스를 생각한다 2

?- 주식회사 vs 조합회사(노동조합)

?- 공동체 자본, 지역화폐 등등

6월 27일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재구성 ?- 세계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

?- 삶-정치의 대안들 : 네트워크 정치, 이웃

???과의 연계, 인권주장하기 등

이정은 교수

(연세대

외래교수)

7월? 4일 여성 주의적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 도시를 생각 한다 ?- 비자본주의적 경제들의 유령 불러오기

?- 여성의 관점에서 본 대안도시는?

이현재 교수(서울시립대

HK 교수)

7월 11일 지역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1 ?- 생활 속에서 ‘협동’이란 무엇인가

?- 한국형 협동조합의 본산지인 원주 사례

???분석

최종덕 교수

(상지대 교수)

7월 18일 지역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12 ?- 육아와 여성

?- 협동성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2013년 1학기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 시민대학] 참가자 모집

2013년 1학기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 시민대학] 참가자 모집

 

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 : 새로운 세계를 디자인하기 위해 당신이 알아야 할 키워드 100가지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이 거대한 시련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에 대해 함께 고민해 봅니다.

현대 사회주의의 몰락 ? 미국식 금융 자본의 붕괴 ? 9?11 사태 이후 체제에 대한 관심을 이제 우리 주변으로 돌려, 우리 공동체의 나아갈 비전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해 보기 위해 우리 시대의 가치 ? 자본 ? 노동의 의미를? 다시 세워보고 우리 일상과 주거, 우리 마을과 공동체, 우리 지역 사회와 도시에서 ‘같이’하는 것의 ‘가치’를 키워드 100가지로 새롭게 인식해 보고자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함께 디자인할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운영기간 : 2013년 4월 4일(목) ~ 7월 18일(목) (총 15강)?????? 매주 목요일 19:30~21:30

| 장?? 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1층 이야기방

| 대?? 상 : 성인, 50명

| 주?? 최 : 광진정보도서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건국대학교

| 주?? 관 : 문화체육관광부 도서관정보정책기획단

| 후?? 원 : 알렙출판사

 

?????| 신청방법
???????- 신청기간 : 213년 3월 23일(토) ~ 마감 시
???????- 신청방법 : 선착순 방문 접수 및 전화접수
???????- 신청장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2층 종합안내
??????? 수강자에게 수료증 발급
??????? 보증금 : 30,000원(주관부서 지침 사항, 개강일 납부, 종강 시 환불)

 

※ 기타문의 : 02-3437-5092(내선 4107번) / http://www.gwangjinlib.seoul.kr

 

 

○ 커리큘럼 안내

강의일자 주제 주요내용 강사
4월? 4일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 ?- 세계경제의 역사적인 특징과 근대적인???세계체계론 김성우 교수
4월 11일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 1 ?- 근대, 노동의 의미란??- 소비와 생산이란 무엇인가? 박영균 교수(건국대 HK교수)
4월 18일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 2 ?- 물질노동과 비물질 노동이란??- 현재, 우리의 노동은 어떻게 열정이???될 수 있는가?
4월 25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1 ?- 가치 vs 교환가치 vs 잉여가치 김우철 교수(호서대 외래교수)
5월? 2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2 ?- 상품-화폐의 등장과 근대적 ‘개인’?- 현대에서 가치 개념의 변화
5월? 9일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보자 1 ?- 노동의 가치와 소외, 가치와 가격 이재유 교수(건국대 외래교수)
5월 16일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보자 2 ?- 노동의 종말인가 소유의 야만인가?- 현대적 노동가치의 재구성
5월 23일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1 ?- 화폐, 자본, 이윤을 발견하자?- 권력이 자본주의를 만났을 때 이순웅 교수(한철연 연구협력위원장)
5월 30일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2 ?- 생산-화폐-권력의 결합체, 자본주의?- 현대에서 자본주의 아닌 것(대안)은?
6월 13일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1 ?- 당신에게 지속가능성이란 무엇인가??- 당신에게 돈이란 무엇인가? 박민미 교수(동국대 외래교수)
6월 20일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2 ?- 주식회사 vs 조합회사(노동조합)?- 공동체 자본, 지역화폐 등등
6월 27일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재구성 ?- 세계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 삶-정치의 대안들 : 네트워크 정치, 이웃???과의 연계, 인권주장하기 등 이정은 교수(연세대외래교수)
7월? 4일 여성 주의적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 도시를 생각 한다 ?- 비자본주의적 경제들의 유령 불러오기?- 여성의 관점에서 본 대안도시는? 이현재 교수(서울시립대HK 교수)
7월 11일 지역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1 ?- 생활 속에서 ‘협동’이란 무엇인가?- 한국형 협동조합의 본산지인 원주 사례???분석 최종덕 교수(상지대 교수)
7월 18일 지역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12 ?- 육아와 여성?- 협동성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 그렇다면???어떻게 살 것인가?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5)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5)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최초의 민주주의 그 의의와 한계(1)

 

 

부르크하르트가 전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말로는 자못 우울하고 냉소적이다. 아테네 민주정의 몰락과 그리스의 몰락이 함께 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그의 시선을 더욱 그럴듯하게 해준다. 사실 부르크하르트는 그리스 문화 전반에 대한 독보적인 수준의 풍성하고도 세세한 데이터와 통찰력 깊은 해석을 후세에 전하고 있지만, 유독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 지배자 또는 기득권자들의 입장에 서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역사과정에서 정치적 강자, 사회 기득권자들에 의해 자행된 폭력적 억압과 그 피폐상에 누구보다도 비판적인 역사학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역사 과정에서 가끔 눈에 띄는 민중권력에 의한 집단적 폭력과 그에 따른 혼란상에도 지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요컨대 그는 어떤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서든 반지성적 행태와 그로 인해 빚어지는 집단적·정치적 폭력 일체를 혐오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학에서 인류의 역사적 가치의 형성 토대를 정치사와 경제사가 아닌 지성사와 예술사를 통해 다시 구축하고자 하는 역사학의 새로운 지평 이른바 문화사(Kulturgeschichte)의 영역을 최초로 확립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그의 정치적 입장은 보수주의라기보다는 지성주의라는 말이 어울리지만 고중세사에서는 지성이 오직 귀족들의 역량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큰 틀에서는 여전히 보수적 엘리트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주의의 관점에서도 아테네의 민중이, 보통 생각하듯 그저 어리석은 민중에 불과했다는 생각은 매우 섣부른 판단이다. 아마도 그러한 평가는 주로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이 끼친 지대한 영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단 다수 민중이 정치적 주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적이 2000년 이상의 고·중세를 통해 아테네 민주정을 제외하면 언제 있었던가를 생각하면 이미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은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인류 정치사의 위대한 성취이자 기층 민중들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준 매우 소중한 역사적 유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실제로 아테네의 민주정의 초기 성립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비록 겉으로는 왕과 귀족 등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나긴 정치체제의 역사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 이면에는 그 틈바구니에서 민중 스스로 자신들의 욕구와 권리를 사회적으로 관철해내고자 하는 끊임없는 몸부림이 있어왔고 아테네 민주정은 그 결과로서 등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도 그 일단을 살펴왔지만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하면서 특히 그 점에 주목해서 아테네 민주정의 역사를 다시 한 번 간략하게 갈무리 해보기로 하자. 우선 아테네는 고대 폴리스 성립 이래 다른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한 명의 왕이 지배하는 왕정(basileia)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동 지방의 왕들처럼 절대적인 권력은 가지지 않았고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 중 한 사람이 대표로서 왕의 지위를 가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호메로스의 작품에는 직접 물레를 돌리거나 농사를 거드는 왕의 모습도 보인다. 그 때문에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이르면 왕정은 귀족들의 집단 정치체제 이른바 귀족정(aristokratia)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전시공동체로서 고대국가의 성격상, 정치적 발언권은 나라를 방어하는 전투 능력 및 기여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 시기는 전투행태 상 중갑 기병(騎兵, hippikos)이 전투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전투를 하기 위한 기마 및 개인 무장 또한 자비부담에 의존하고 있었던 터라 자연적으로 전장에서도 귀족들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고 정치적 발언권 또한 그들에게 독점되어 있었다. 귀족들만이 비싼 가격의 말(馬)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츰 식민도시가 증가하고 그에 따른 교역량도 늘어나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부유한 평민이 나타났고 생산량의 증가에 따라 무기의 가격도 싸져서 평민 중에서도 무기를 스스로 조달하여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군의 핵심 전투력 또한 점차 평민을 중심으로 하는 중갑 보병(hoplit?s), 사각밀집대형(phalanx) 전술로 재편되었다. 이후 그들은 당연한 권리로서 귀족에게 참정권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참정권을 둘러싸고 귀족과 평민이 충돌하는 일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평민계층의 약화는 그대로 나라의 방어력 약화를 의미했고 나라의 위기는 귀족들의 위기와도 직결되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평민의 불만을 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원전 621년에 제정된 ‘드라콘(Drakon)의 입법’은 귀족들의 자발적인 정치개혁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간의 평민의 정치적 성장이 가져다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이 법률의 핵심은 관습법을 성문화 했다는 데에 있다. 즉 나랏일과 관련한 중요사와 그 결정 과정을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대한 진전이었다. 그 때까지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결정 일체를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길 경우 그들이 행한 행태가 폭로되고 실정에 대한 변명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귀족이 결정한 정치적 사안과 법률의 내용이 기록으로 알려짐으로써 평민들도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귀족들도 더 이상 제멋대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평민에게까지 아직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거기서 양자의 조정자로서 등장한 인물이 솔론(Solon)이다. 시민들의 합의로 솔론은 계층 간 이해 조정을 위한 전권을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594년에 실시된 것이 솔론의 개혁이다. 솔론 개혁안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귀족·평민을 포함한 시민 전체를 재산과 토지의 소유수준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누어 각각의 의무와 권리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중갑 기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귀족을 최상급의 시민으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아르콘 등의 최고 관직의 임용을 보장해주었다. 그리고 중갑 보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부유한 평민을 두 번째 등급의 시민으로 규정하여 그 다음 등급의 관직에 오를 수 있을 권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최소 수준의 무장인 경보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세 번째 등급의 시민은 민회나 재판에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아예 어떠한 무장도 갖출 수 없었던 네 번째 등급의 시민들은 아무런 권리도 인정받지 못했다. 무기의 가격이 싸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차 마련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무산 시민(th?tes)으로 불리어 졌다. 이와 같이 솔론의 개혁은 토지·재산에 의해서 관직을 정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평민들도 부를 쌓을 경우 최고 관직에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이 곧 금권정(timokratia)의 등장이다. 금권정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재산이 좌지우지하는 정치라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아테네 정치발전사의 측면에서 보면 마치 근세 시민사회의 성립이 그렇듯이 귀족들에 의해 독점된 정치 영역에 제한적이나마 평민계층의 참여가 제도적으로 확립된 개혁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솔론 개혁안의 두 번째 핵심은 채무의 소멸과 채무 노예의 방지를 실시한 점에 있다. 솔론은 가난한 평민들의 빚을 탕감해줌으로써 평민이 빚 때문에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또한 평민이 주력이 된 전투력을 보전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처럼 화폐 경제의 발전에 의해서 평민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향상되었다. 그러나 그 만큼 몰락하는 평민 또한 늘어나 종국에는 토지를 상실하고 노예로 팔리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다. 일단 빚을 지게 되는 지경에 이르면 토지가 채권자에게 압류되어 수확물의 6분의 1을 채권자에게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조차 체납되어 종국에 빚을 갚을 수 없게 되면 노예로 팔리는 것이 당시의 관습법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말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채무 노예가 나중 빚을 갚게 되면 인간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빚을 탕감해주는 정책이 평민의 채무노예로의 전락을 막아 국방력을 보전하는 좋은 방책일 수는 있었어도 그 자체로 부유한 귀족들에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불만은 날로 켜져 갔고, 다른 한편에선 채무의 소멸 후에 토지를 재분배 받기를 원했던 평민들까지 나름 자신들의 기대에 못 미쳐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난한 평민의 입장에서 보면 같은 평민임에도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참정권에 차별을 두는 것 또한 불만이었고, 급기야는 신체를 저당으로 돈을 빌리는 법마저 금지하는 바람에 당장의 생활이 어려운 무산자들에게도 원성을 사게 되었다. 이처럼 솔론의 개혁안은 점차 귀족과 평민 양쪽으로부터 모두 원성과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 후 30년간 아테네는 귀족과 평민 간에, 부자와 가난한 자들 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이 혼란한 정세를 이용하여 귀족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stos)라는 인물이 나타나 대다수의 가난한 평민들을 등에 업고 기원전 560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권력을 차지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곧 금권정에 종말을 가하고 나타난 참주정(tyrannik?)이다.

참주(tyrannos)란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이용하여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치권력을 차지하고 독재를 일삼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참주이긴 해도 온화한 인품과 노련한 정치술로 솔론의 개혁안을 유연하게 실행으로 옮겨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되 구테타를 피해 망명한 귀족이나 부패한 귀족들의 토지만을 몰수 하였고 그것을 평민들에게 분배하여 수공업의 발전을 꾀했고 해상 무역을 진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 참주가 된 장남 히피아스는 사리사욕에 빠진데다가 폭정까지 일삼아 아테네를 큰 혼란에 빠트렸고 결국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s)에 의해 국외로 추방됨으로써 반세기만에 아테네 참주정은 종말을 고하고 만다. 당시 참주 히피아스의 동생 히파르코스를 살해하고 순교한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은 이후 아테네인들에게 참주정의 폭압성과 자유의 이념을 일깨어주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기원전 570-507)

 

클레이스테네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해외로 도피했다가 히피아스를 타도하는데 앞장선 망명귀족으로서 기원전 508년 이른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통해 아테네 민주정의 발전에 획기적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다. 그런데 클레이스테네스는 원래 처음부터 민주정을 지지하거나 민중의 이익을 앞세웠던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반대파 귀족을 누르고 히피아스를 타도한 후 귀족정체로의 복귀를 꿈꾸었고 다만 그 과정에서 민중의 힘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혁명과정에서 증폭된 민중의 욕구는 이미 그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고 그는 영악하게도 그 욕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새로운 정권의 수립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표징 되는 아테네 민주정의 빛나는 성취 그 이면에는 이렇듯 아테네 민중들의 정치적 자각과 그에 기초한 압력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훗날 아테네의 급진적 민주정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는데 그 개혁의 급진성은 무엇보다도 도편추방제(ostrakismos)의 도입과 부족제의 혁명적 재편에서 잘 드러나 있다. 도편 추방제는 참주의 출현을 미리 막기 위해서 그럴만한 우려가 있는 인물을 미리 뽑아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였다. 당시에는 아직 종이가 없었던 터라 기와 등 도기 조각에 이름을 써서 투표했는데 6000개 이상의 도편 가운데 가장 많은 표가 나온 인물의 경우 10년 간 추방명령이 내려졌다. 실제로 이 도편추방제에 의해 기원전 462년에는 키몬이, 444년에는 투퀴디데스가, 418년에는 클레온의 후계자이자 민중파 선동정치가였던 휘페르볼로스(Hyperbolos)가 추방당했고 제도수립이래 아테네에서는 한 사람의 참주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정적을 합법적으로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유능한 정치가가 추방되는 부작용도 야기 시켜 휘페르볼로스 추방 이후 폐지되고 만다.

클레이스테네스의 또 하나의 급진적이고도 혁명적인 개혁은 종래의 귀족의 권력 기반이 되고 있던 낡은 혈연적인 4부족제를 혁파하고 순전히 기계적으로 지역을 열 군데로 갈라 10 부족제로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귀족 원로중심의 아레오파고스회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무산시민을 제외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는 최고 의결기관으로서 민회(ekkl?sia)를 구성하고, 민회에 올리는 의안을 미리 토의하기 위해 지역 마다 50명씩, 재임할 수 없는 임기 1년의 위원을 추첨으로 뽑아 500인 평의회(boul?)를 구성하였다. 특히 민회와 평의회 위원은 물론 장군직과 일부 재정관 이외의 아르콘을 포함한 고위 관직까지 추첨으로 선발하였다는 것은 정치가 더 이상 엘리트 귀족들만의 독점영역이 아님을 상징하는 일종의 혁명 선언이었다. 이와 같은 추첨제가 가능했던 것은 아테네의 시민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테네인들 스스로가 정치적인 문제를 어떻게 그리고 왜 처리하는지를 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민의 지혜와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아테네가 시민을 정치 활동에 참여시킬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에 임할 능력을 갖추지 않은 무산 시민은 여전히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무산 시민까지도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기회가 도래하였다. 그것이 곧 기원전 492년에 시작된 페르시아 전쟁이다.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 때 크게 발흥하여 소아시아 서해안까지 진출하여 그리스 식민도시를 지배하에 두었는데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가, 페르시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식민도시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한데서 비롯되었다. 발칸반도까지 진출을 꿈꾸고 있었던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 1세는 그것을 빌미로 아테네에 진군을 명령했던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는 그리스로 향하는 도중 급작스럽게 밀어닥친 폭풍우 때문에 300척의 군함만 잃고 제 발로 물러났다가 그로부터 2년 후인 기원전 490년, 국외로 추방된 히피아스의 안내로 군사를 이끌고 바닷길로 다시 아테네를 쳐들어왔다. 이것이 2차 페르시아전쟁이다. 이 때 벌어진 전투가 유명한 마라톤 평야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는 1만명의 중갑 보병의 활약으로 3만명의 페르시아 대군을 대파함으로써 페르시아의 침략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전투가 끝난 후 한 명의 전령이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려와 승전보를 전하고 바로 숨을 거두었는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가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침략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0년 후 세 번째 침략이 이루어졌고 그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한 것을 계기로 그리스 역사는 물론 아테네 정치사의 새롭고도 중차대한 전기가 찾아왔다.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그 의의와 한계(2) 다음에 계속)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출간 기념 특강

기묘한 미술로 삐딱한 철학 하기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출간 기념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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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개요

 

인공의 눈을 벗어버린 “진짜 눈”으로 명화를 다시 보다

그 철학적 정체와, 외침의 감각을!

우리는 미술에서 무엇을 철학할 수 있는가?

고흐의 ?구두 한 켤레?를 두고 존재론을 사유한 하이데거,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에 내재된 남성적 시선을 파헤치는 여성 철학자, ?세한도?에 담긴 불굴의 정신을 읽으려는 시도….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은 철학을 낳은 미술 작품들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책입니다. 하지만, 미술 작품의 신비스러운 비밀을 드러내기보다는 그림의 감각적 충격과 느낌에 언어를 부여해서 그림이 스스로 말하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철학자의 말을 거친 미술 작품은 화랑의 고고한 자리에서 나와 일상의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합니다.

나를 찾고 세계를 치유하려는 철학자의 삶과 고전 사상을 다채로운 미술 작품을 통해 성찰하면서 여러분도 행복으로 가는 문을 여는 열쇠를 발견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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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자 : 서영화(한신대 외래교수), 전호근(경희대 교수), 이현재(서울시립대 교수)
주관 및 진행 : 정독도서관
후원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프레시안, 알렙 출판사
기간 : 2013년 4월 8일 – 2013년 4월 22일(매주 월), 총 3회
시간 : 오후 7시 – 9시(1시간 30분 강의, 30분 질의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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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리큘럼
1강 4월 8일 철학이 말하는 구두, 예술이 말하는 구두
고흐의 구두와 하이데거-서영화(한신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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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4월 15일 ?세한도?를 읽는다는 것!
김정희와 사마천 그리고 공자-전호근(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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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4월 22일 그래도 정복은 불가능하다!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과 여성의 몸-이현재(서울시립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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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시대정신을 통찰하고 현실 모순을 변혁하는 철학자 지식공동체입니다. 나아가 한국적 실천철학의 모형을 구현하며 더불어 철학의 대중화 사업을 위해 시대와 소통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프레시안은 독립?중도?심층의 모토 아래 ‘관점 있는 뉴스’, ‘깊이 있는 분석’ 기사를 만들어내는 시민지향적 독립 언론입니다.?

알렙출판사

알렙은 ‘언제나 시작’이란 뜻을 갖고서, 나눔과 느낌이 있는 인문 사회 교양 서적을 만들어 나가는 출판사입니다. 펴낸 책으로는 <철학자의 서재 1, 2>, <청춘의 고전>, <언지록> 등이 있습니다.?

정독도서관

정독도서관은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북촌에 위치하며, 사계절 아름다운 넓은 정원에 풍부한 장서와 다양한 인문학 강좌로 언제나 나를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는 시민 모두의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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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월례발표회-윤구병선생님 출간강연회[ⓔ시대와철학알림]

3월 월례발표회-윤구병선생님 출간강연회[ⓔ시대와철학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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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학술1부입니다.?

3월 월례발표회는 윤구병 선생님 <철학을 다시 쓴다> 출간 강연회입니다.

<철학을 다시 쓴다>는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좋은 세상을 앞당기기 위한 농부철학자 윤구병 선생님의 철학 강의입니다.

강연회를 통해 ‘있음과 없음’의 존재론으로부터 ‘함과 됨’의 실천론을, 어떻게 쉬운 우리 말로 철학 할 것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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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는 윤구병 선생님의 강연과 질의-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책은 당일 20% 할인 된 가격에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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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철학을 다시 쓴다-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보리)

발표: 윤구병

사회: 김성민(건국대)

일시: 3월 8일 금요일 오후 6시 태복빌딩 202 강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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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게 좋은 거고, 없을 것이 있거나, 있을 것이 없으면 나쁜 게 아닌가요?’ 이렇게 참과 거짓이 쉽게 가려지고, 좋음과 나쁨이 뚜렷이 드러나면, 우리는 그때 비로소 ‘참 세상’과 ‘좋은 앞날’을 꿈꿀 수 있습니다. 이 거짓 세상을 바꾸어 좋은 세상 만들 수 있습니다. ‘억압’ ‘착취’ ‘탐욕’, ‘전쟁’ ‘증오’ ‘이기심’은 모두 있는 놈들이 더 많이 가지려고 ‘힘센 나라’에서 들여 온 몹쓸 것, 몹쓸 짓, 없을 것들이고, 없애야 할 것들입니다.

이른바 ‘지배계급’은 ‘언어의 폭력’을 ‘제도화’해서 ‘이데올로기적인 국가 기구’를 만들어 내는데, 이 일에 부림을 받는 이들은 ‘인문학’을 앞세우는 ‘지식인’들이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식민지 지식인’들이라고 부르는데, 이이들은 열에 아홉이 ‘폭력적인 국가 기구’의 앞잡이들입니다. 말로는 ‘민주화’를 부르짖어도, 이이들이 입 밖에 내는 말들을 들으면 ‘아니올시다’. 세 살배기, 다섯 살배기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참과 거짓, 좋음과 나쁨을 가려낼 수 없는 이들이 어떻게 바른 생각을 일깨울 수 있고, 거짓에 맞서 좋은 앞날을 가꿀 올곧은 뜻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책머리에서>)

<철학자의 서재>가 강연으로 다시 태어납니다[ⓔ시대와철학알림]

?<철학자의 서재>가 강연으로 다시 태어납니다[ⓔ시대와철학알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는 강남논현도서관과 함께, 매월 한 권의 고전을 같이 읽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2월과 3월의 책과 주제를 공지합니다. 책으로만 만나는 <철학자의 서재>에서 강연으로 만나는 <철학자의 서재>를 기대합니다.

일상에 지친 당신을 위한 책 천국 <철학자의 서재>

1강 2/26 (화)
주제 :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도서 : 헤겔의 ”역사 속의 이성”
강연 : 김성우 교수

2강 3/19 (화)
주제 : 착한 시민이 괴물이 되는 악의 평범함
도서 :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강연 : 한길석 교수

– 날짜 : 1강-2/26(화), 2강-3/19(화)
– 시간 : 저녁 7시~9시
– 대상 : 관심있는 분 누구나 30명
– 장소 : 논현정보도서관 3층 강의실 (학동역 6번출구)
– 문의 : 02-515-1178

* 매월 찰학자와 함께 한권의 책을 읽습니다. 읽어 오시지 않더라고 수강 가능합니다.

 

 

<아람누리도서관> 청춘의 고전 1 : 예술과 인문학이 만났을 때 [ⓔ시대와철학알림]

?<아람누리도서관> 청춘의 고전 1 : 예술과 인문학이 만났을 때 [ⓔ시대와철학알림]

 

경기도 고양시 아람누리 도서관에서 <청춘의 고전>시즌1편 중 몇 편을 선정해 다시 강연을 합니다.

경기도 고양시 아람누리 도서관은 <예술 특성화 도서관>이라고?하며 <예술>과 <인문학>의 만남을 시도한 <청춘의 고전> 강연을?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나날이 유명해져가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강연 시리즈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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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 <한국현대철학사론> 출간 좌담회[ⓔ시대와철학알림]

이규성 <한국현대철학사론> 출간 좌담회[ⓔ시대와철학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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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학술1부입니다.?

2월 월례발표회는 이규성 선생님의 <한국현대철학사론> 출간 좌담회로 이루어집니다.

<한국현대철학사론>은 한국철학사의 공백기로 인식된 19세기 말 이후의 사상 흐름을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을 부제로 서술한 책입니다.

좌담회를 통해 한국현대철학을, 그리고 우리의 ‘지적 수동성’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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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이규성 선생님의 짧은 강연을 듣고, 사회자와 참석자들이 자유롭게 질문하고 토론합니다.

내용은 책의 ‘서문-성실성과 충실성’, ‘결론-운명과 이름’을 중심으로 합니다.

(미리 읽고 참여하고 싶으신 분들은 ympiao89@hanmail.net으로 연락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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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한국현대철학사론-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이화여대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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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이규성(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사회: 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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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월 15일 오후 5시 태복빌딩 202호 강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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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룬 한국 현대철학은 세계의 변화가 주는 생명의 위기, 그리고 착취와 억압이 주는 고난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위기와 고난은 이전의 친숙한 세계의 상실감으로 집약되며, 세계상실은 상실한 사람의 인격도 분열시켰다. 세계상실의 경험은 세계의 회복과 인격의 고결성을 사상의 핵심으로 정립하게 했다. 세계가 인간화되지 않는다면 세계는 나의 것이 아니다. 세태의 힘에 의해 분열된 인격은 나의 통일된 고결성이 아니라 둔감한 속물성이 되거나 불행한 의식이 된다. 고결성은 세계 극복과 함께 도덕적 실천을 요구했다. 동시에 이 실천은 사회적 실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문제 상황이 주는 고통과 소외는 그들로 하여금 진실로 체득된 주체적인 진리를 진리로 이해하게 했다. 그 진리는 고통의 심화에서 얻게 된 인류애와 대도(大道)로 표현된 우주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했으며, 그 진리는 행동을 통해 표현되어야 했다. 진리의 근거는 현대에서 의심받게 된 수학적 확실성을 확보하는 것에 있기보다는 주체적 진실성에 있었다. 현대 한국철학을 통해 우리는 고뇌하는 인생이 도달한 자유의 높이와 구체적 실천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들어가는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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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진 홈 하단에 이규성 교수님이 2012년 11월 26일에 이화학술원에서 책을 설명하신 동영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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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웹진 편집주간 강지은입니다. 길고 지난한 웹진의 리뉴얼이 얼추 끝나갑니다. 진작 끝냈어야 했지만 악성코드 등의 문제로 정상화까지 시간이 많이 지연되었음을 사과드립니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은 리뉴얼 과정에서 비밀번호를 그대로 옮겨오지 못했습니다. 기술적인 문제인듯 합니다.

현재 모든 사용자의 비밀번호가 1234로 셋팅되어있습니다. 본인의 아이디와 앞의 비번으로 로그인하시면 간단하게 비밀번호를 새로 교체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도 잘 안될 경우 예전 페이지보다 훨씬 쉽게 회원가입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일반적인 덧글은 소셜로그인을 해서도 가능하고 로그인 없이 그냥도 가능합니다. 다만 글투고의 경우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그 이외에 홈페이지 환경을 개선해서 메일 서비스를 진행할 예정인데 거기에서도 회원로그인이 중요합니다.

여러번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참 목소리를 담아내는 멋진 웹진??[ⓔ시대와철학]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