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절 화폐[자본론강독]-11

제 3절 화폐

정리 : 나태영

 

 

‘가치척도로 기능하고, 따라서 스스로 또는 대리인을 통해 유통수단으로도 기능하는 상품이 화폐이다.’(202쪽)

가. 화폐축장 ‘상품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형태를 화폐형태로 바꾸기 위해서 상품은 판매된다.’ ‘이리하여 화폐는 축장화폐로 화석화하고 상품판매자는 화폐 축장자가 된다.’

‘상품유통이 처음 시작될 때는 사용가치 가운데 잉여부분만이 화폐로 전화한다.’(203쪽)

‘상품생산이 점차 발전하면 모든 상품생산자는 만물의 근원〔즉 ‘사회적 담보물’〕인 화폐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판매하지 않고도 구매할 수 있으려면 그는 그보다 앞서 판매만 하고 구매를 하지 않아야만 한다. 이러한 행태가 만약 사회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모순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상품유통이 확대됨에 따라 화폐의 힘, 즉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절대적으로 사회적 형태의〕부의 힘이 증대한다.’(204쪽)‘금은 영물이다! 금을 가진 자는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의 주인이다. 금이라면 영혼을 천국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콜럼버스,『자메이카에서 보낸 편지』, 1503년)

 

콜럼버스, 출처:www.emersonkent.com

콜럼버스, 출처:www.emersonkent.com

 

‘화폐 덕분에 모든 물건은 매매가 가능해진다.’ ‘화폐는 본래 상품〔즉 외형적인 물체〕으로서 누군가의 사유재산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사회적인 힘이 개인의 사적인 힘이 된다.’“세상에서 행세하는 것 중에 황금처럼 고약한 것도 없다. 폭리로 돈을 벌게 해주고 국가를 뒤집어 폐허로 만들며사람들을 파산하게 하며:

나쁜 물로 교화시켜 도덕을 등지게 만들며올바른 사람을 유혹하여 죄의 수렁에 빠지게 하며……죽을 운명의 그 육체에서 사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며저주받을 일을 하도록 만든다.”

(소포클레스〔Sophokles〕, 『안티고네』)(205, 206쪽)

‘화폐축장의 충동은 본래 무제한적이다. 화폐는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될 수 있으므로 질적으로나 형태적으로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의 화폐액은 모두 양적으로 제한되어있고 따라서 효력이 제한되어 있는 구매수단 일 뿐이다. 화폐의 양적인 제한과 질적인 무제한 사이의 이런 모순은 화폐 축장자를 끊임없는 축적이라는 시시포스의 노동으로 몰아넣는다.’ ‘근면과 절약 그리고 탐욕이 그의 주요한 덕목이 되었고, 많이 판매하고 적게 구매하는 것이 그의 경제학의 전부가 되었던 것이다.’(207쪽)

‘어떤 때에는 화폐가 주화로서 흡수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주화가 화폐로서 배척되기도 해야만 한다.’

“은제 장식품은 이자율이 상승하면 실려 나가 화폐로 주조되고 이자율이 하락하면 다시 은제 장식품으로 돌아간다.”(존 스튜어트 밀, 은행법 특별위원회 보고서, 1857, 제2084호와 제 2101호).(208쪽)

‘상품의 유통이 발전함에 따라 상품의 양도를 상품가격의 실현에서 시간적으로 분리시키는 조건들이 발전한다.’

‘채권자 또는 채무자라는 역할이 여기서는 단순 상품유통으로부터 발생한다. 이 상품유통의 형태변화가 판매자와 구매자에게 그런 새로운 역할을 부여해준다. 따라서 우선 판매자와 구매자라는 역할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역할이며, 또한 동일한 유통 당사자들에 의해 교대로 수행되는 역할이다. 그러나 이제 이 대립은 근본적으로 그다지 즐겁지도 않고 그대로 고착화할 가능성도 훨씬 크다.’

‘이제 화폐는 일차적으로 판매되는 상품의 가격 결정에서 가치척도로서의 기능을 한다. 계약에 따라 확정된 상품의 가격은 구매자의 채무, 다시 말해서 정해진 기한에 그가 지불해야 할 화폐액을 표시한다. 화폐는 둘째로 관념적인 구매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화폐는 단지 구매자의 지불 약속을 통해서 존재할 뿐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상품의 소유자를 바꾸는 작용을 한다.’(209, 210쪽)

‘구매자는 상품을 화폐로 전화시키기 전에 먼저 화폐를 상품으로 재전화시킨다. 즉 상품의 제1형태변화에 앞서 제2형태변화를 수행한다.’

‘유통과정의 일정기간 내에 지불기한이 도래한 채무는 언제나 그 채무를 발생시킨〔판매를 통해서〕 상품들의 가격 총액을 나타낸다. 이 가격 총액의 실현에 필요한 화폐량은 첫째로 지불수단의 유통속도에 따라 정해진다.’(211쪽)

‘많은 판매가 동시에 병행하여 수행됨에 따라 유통속도에 의한 주화량의 대체는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것은 지불수단을 절약하는 새로운 지렛대가 된다. 여러 차례의 지불이 동일한 장소에 집중됨에 따라 그 지불의 결제를 위한 별도의 기관과 방법이 자연히 발달한다.’

‘여러 지불이 서로 상쇄되는 경우 화폐는 그저 관념적인 형태로 계산상의 화폐로만 또는 가치척도로만 기능할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불이 이루어지는 경우 화폐는 이제 유통수단으로 등장한다.’

이 책에서 모든 일반적 생산?상업공황의 특별한 단계로 규정하고 있는 화폐공황은, 똑같이 화폐공황이라고 부르지만 독립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즉 산업과 상업에 대해서는 오직 간접적으로만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특수한 종류의〕 공황(금융공황)과는 당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화폐공황은 그 운동의 중심이 화폐자본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 직접적인 영역도 은행?증권?재정이다(엥겔스가 제3판에 실은 마르크스의 필사본 주〔註〕

‘화폐공황은 여러 지불의 연쇄와 그것의 결제를 위한 인위적인 체제가 충분히 발달한 경우에만 일어난다. 이 메커니즘에 전반적인 교란이 발생하면 그 교란의 원인과는 상관없이 화폐는 계산상의 화폐라는 단지 관념적인 모습으로부터 갑자기 그리고 아무런 매개도 없이 경화(硬貨)로 돌변한다.’“여기에 60만 파운드스털링이 있는데 이것은 통화 긴축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넣어둔 것이지만 오늘 3시 이후에는 전부 시중에 풀려나갈 것이라네.”(로이, 『교환론: 1844년의 은행특별법』, 런던, 1864, 81쪽)….(212, 213쪽)

‘지불수단으로 기능하는 이런 화폐(신용화폐)는 독특한 존재형태를 취하고 주로 거액의 상거래 영역에서 사용되는데, 이에 반해 금화나 은화는 주로 소액 거래의 영역으로 밀려나게 된다.상품생산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은 상품유통의 영역을 넘어서게 된다. 화폐는 계약상의 일반적인 상품이 된다. 지대나 조세 등은 현물납부에서 화폐로 납부하는 금납제로 바뀐다.’(214, 215쪽)

‘유럽에 의해 강요당한 대외무역 때문에 일본이 현물지대에서 화폐지대로 전환하게 된다면 일본의 전형적인 농업은 종말을 고할 것이다. 즉 이 농업이 의존해 있던 협소한 경제적 존재조건들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다. 세계화폐‘세계시장에서 비로소 화폐는 완전한 범위에 걸쳐 상품으로 기능한다. 즉 자신의 현물형태가 곧바로 추상적 인간노동의 직접적인 사회적 실현형태가 되는 그런 상품으로 기능한다.’

‘국내 유통영역에서는 하나의 상품만이 가치척도로서〔즉 화폐로서〕 사용될 수 있다. 세계시장에서는 두 개의 가치척도, 즉 금과 은이 지배한다.’(216, 217쪽)

‘금?은이 국제적인 구매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주로 국가들 사이의 물질대사가 기존의 균형에서 돌연 교란을 보일 때이다. 끝으로, 금과 은이 부의 절대적인 사회적 물상으로 기능하는 것은 구매나 지불이 이루어질 때가 아니라,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부가 이전되는 경우이며, 특히 이 이전이 상품시장의 경기 변동이나 어떤 의도된 목적 때문에 상품형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이다.’

‘축장화폐의 기능 가운데 일부는 국내의 유통수단 및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에서 생겨나고, 또 다른 일부는 세계화폐로서의 화폐의 기능에서 생겨난다. 이 후자의 역할을 위해서는 언제나 실제의 화폐상품〔즉 실물의 금?은〕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임스 스튜어트는 금?은을 단지 일정한 조건 아래서만 금?은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들과 구별하여 명확히 세계화폐(money of the world)라고 부르고 있다.’

‘또 다른 일면 금?은은 여러 나라의 유통영역 사이를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이것은 외환시세의 쉴 새 없는 변동이 불러일으키는 운동이다.’‘몇 몇 예외는 있지만, 축장화폐의 저수지가 평균수준을 넘어 현저하게 과잉상태가 되면 그것은 상품유통의 정체나 상품의 형태변화가 중단된다는 뜻이다.’(218-220)

<ⓔ시대와철학>에 3년여에 걸쳐 연재한 [꽃보다 붉은 울음] 저자 김성리 인터뷰

<ⓔ시대와철학>에 3년여에 걸쳐 연재한 [꽃보다 붉은 울음] 저자 김성리 인터뷰

 

한센인 할머니의 시, 삶을 치유하다

마주 보고 이야기 나누면, 고통도 나의 것이다 『꽃보다 붉은 울음』 저자 김성리

 

『꽃보다 붉은 울음』은 한 한센인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와 시를 기록한 글이다. 제목에서 할머니의 고통이 전이돼 오는 듯하다. 질병, 질병으로 인한 가난, 사랑하는 이들과의 생이별, 죄의식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는 한스러움 등으로 할머니의 생애를 몇 줄로 요약할 수 있겠지만, 할머니의 마음의 고통은 결코 요약될 수 없을 것이다.

한 한센인이 60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삶의 이야기를 시 11편에 담아 담담히 구술하는 동안,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시 글로 옮기면서 김성리 저자는 가슴 먹먹함과 눈물 아른거림을 어떻게 견뎠을까? 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것도 오랜 고통의 시간 속에 꽁꽁 묻혀 있었던 상처투성이 마음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가?

 

“할머니의 자작시들, 그리고 저자가 적재적소에 인용하는 아름다운 시(詩)들은 한센병이라는 단단한 갑옷 뒤에 숨겨진 한 여인의 해맑은 영혼을 비춰주는 투명한 거울이 되어준다. 한하운과 김춘수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들이 노래한 ‘타인의 아픔’은 할머니의 말 못할 아픔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주기도 하고, 할머니의 아픔과 우리의 아픔을 함께 어루만지는 따스한 엄마의 손길이 되어주기도 한다.”(정여울, 문학평론가)

 

저자의 담담한 글로도 담기지 못한 할머니의 정서와 필자의 마음을 더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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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동안 어떤 심정이었나요.

 

저를 만난 할머니는 당신의 삶을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을 떠나기 전에 마음 한구석까지 비우려 했었던 것 같아요. 60년 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내는 마음이 어땠을까요? 할머니는 이야기 도중이나 시를 읊을 때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특히 밤에 혼자 누워 “지난날을 생각하며 시를 지으면 머리가 아프고 기운이 없어서 다음에는 안 한다 해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또 생각하게 된다고 했죠. 할머니는 기를 소진하여 두통이 올 정도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칡넝쿨처럼 헝클어진 자신의 생을 정리하여 반듯하게 뉘어 놓고 가시고자 했던 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아팠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글을 쓰다가 여러 번 멈추고 멍하니 앉아서 할머니를 생각했습니다. 한 줄 써놓고 밖으로 나가서 그냥 걸어 다녔던 적도 여러 번입니다. 심지어 한 편의 글을 쓰는 데 한 달 가까이 걸린 적도 있습니다. 만약, 내가 할머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만났더라도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드러내게 도와드리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아직 살아 계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들과 마쓰시타(연인이자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가 그 모진 삶을 이어온 동앗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왜 진작 이것을 몰랐을까요? 할머니가 저에게 당신의 삶을 내려놓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할머니를 만나는 내내 아팠던 것은, 할머니의 고통이 저에게 옮겨 와서였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는, 그런 차원의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몰랐다는 자책에서 오는 아픔이었죠. 그리고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죄의식에서 아마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할머니는 저에게 눈물입니다.

 

이 책을 쓴 계기가 할머니의 말씀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자신의 생애 이야기와 시를 남기시려고 한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요?

 

할머니는 한센병이 발병하던 19세 무렵에 이미 연인 마쓰시타(당시 대학생)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해방 후에 마쓰시타가 일본으로 귀국하자, 미혼모로 아이를 낳았죠. 젖먹이였던 아이를 도저히 혼자 키울 수 없어서 입양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할머니는 한국이 아닌 일본으로 아이를 보낸 거죠. 아들이 장성하면 병든 어미는 말고 일본에서 친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이 아들을 평생 동안 그리워했습니다. 당장이라도 할머니는 알아볼 수 있다고 했죠. 할머니는 아들에게 당신은 “너를 버리지 않았다. 잊지도 않았고, 너를 살리려고 입양 보냈다”, 이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에게 당신의 일을 소설로 쓰고, 그 소설이 일본에서도 출판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또 만일 아들이나 마쓰시타가 책을 통해 당신을 찾아오게 되면, 병든 몸으로는 만날 수?없으니, 당신이 죽은 후에 출판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가난과 병환으로 오랫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없었던 사람이 시를 쓴다,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할머니의 시는 어땠나요.

 

할머니는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았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 할머니는 자의식이 강하고 자존심도 대단한 분이었죠. 그래서 그분의 삶은 더 처절했습니다. 할머니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 어느 것도 할머니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3번에 걸쳐 생을 마감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은인들의 손길에 구조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저를 만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시를 쓴 것은, 발병 이후 당신의 의지로 행한 첫 사건이었습니다. 저와의 만남 자체, 그리고 저와 함께한 시간들은 할머니에게는 사건이었죠.

 

『꽃보다 붉은 울음』이라는 제목에는 할머니의 슬픔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가장 화려하고 예쁘게 남아 있는 10대는 꽃처럼 살고 싶어 하던 소녀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넉넉한 살림이어서 당시(일제 강점기) 부산고녀에 다녔었죠. 일본인 대학생이 1년 넘게 구애하며 쫓아다닐 정도로 고왔고 순수했습니다. 그 10대가 끝날 무렵부터, 할머니의 삶은 질병으로 인해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할머니의 감정인 슬픔, 고통, 비애, 분노, 절망, 회한 등을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죠. 그런데 할머니는 시에서 당신의 삶을 “핏자죽이 어린 길”이라 했습니다. 핏자죽 어린 길을 걸어가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요?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말할 때 “피를 토한다”라고 하지요. 할머니의 울음은, 피를 토하다 못해 붉게 물들었을 울음입니다. 그 울음은 60년의 시간을 지나서 시로 재현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시에는 60년의 시간과 60년의 슬픔과 60년의 눈물이 담겨 있죠. 할머니의 시는 할머니의 삶입니다. 저에게 할머니의 삶과 시는 꽃보다 아름답고 꽃보다 더 붉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목을 “핏자죽이 어린 길”로 하고 싶었는데, 제목이 너무 선명하여 『꽃보다 붉은 울음』으로 했습니다.

편집자는 저에게?『꽃보다 붉은 울음』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은 미당 서정주의 시 「문둥이」에서 직접 표현된 것이라서 많이 망설였습니다만, 할머니의 삶을 그보다 더 잘 나타내는 것은 없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문디’라는 표현은 경상도 지역에서 흔히 하는 말이지만, 결코 (한센인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 중의 하나가 ‘문디’입니다. 그런 시에 나온 표현이기 때문에 할머니의 삶에 더 적합한 표현으로 고쳐서 제목으로 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의 생애를 말로써, 시로써 풀어놓고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과연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까요?

 

할머니가 처음에 구술한 시에서 당신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손톱만한 벌레만도 못한’ 사람으로 비하했습니다. 그렇지만 만남이 지속되는 동안, 온몸의 기를 소진하여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저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시를 생각하는 그 과정 자체가 스스로 자기 삶의 매듭을 푸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입니다. 저에게 시를 읊어주고 그 시를 다시 저의 목소리로 들으면서 할머니는 과거를 정리하고,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했던 그 과거의 시간들을 서서히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할머니 이야기는 잠시 두고, 본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간호학과를 나와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다시 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 꿈이 두 개였습니다. 시인과 간호사. 중학생 때 스스로 꿈을 정리했습니다. 시를 쓰는 간호사가 되기로. 근데 간호사는 되었는데 시인은 되지 못했네요. 시를 공부하고 시의 치유력을 발견하면서 가장 먼저 한센인을 떠올린 건 아마도 간호사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거라고 봅니다.

종합병원에 근무할 때 정형외과 병동에 5년 정도 있었습니다. 그때 치료는 끝났으나 온전한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더 큰 충격은 퇴원을 하신 분 가족의 초대로 그 분 댁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오랜 병상생활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아내와 어린 딸을 사랑했던 환자가 거의 폭군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병원의 아빠 병상 옆에서 돌을 지내고 간호사실을 들락거리며 귀여운 말썽을 일으키던 아이는 겁에 질려 아빠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아내는 죽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환자분은 내내 침대에 누워 스스로는 휠체어에 탈 수도 없고 대소변도 자유의지로 처리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무서운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족과 휠체어에 의지해 퇴원하던 6살의 진아, 치료 후의 삶이 더 고통스러웠던 많은 환자분들은 저에게 지금도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그 분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었을까요? 그럼에도 할머니를 찾아간 것은 그 분들과 달리 한센인들은 추방과 격리, 그리고 감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답이 좀 길어졌네요. 제가 알고 있는 의학적인 지식과 인문학적인 시선에서 볼 때 한센인들만큼 고통스러운 삶은 없을 겁니다.

 

독자가 이 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이 책은 한센병을 앓았던 한 여인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온전한 삶을 살고 싶어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느 삶과 같이, 할머니의 삶을 존중하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이를 품에 안고 키우면서 살고자 합니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당연한 일이죠. 이 평범한 일상을 누리기는커녕, 평생 가슴에 묻어야 하는 비밀로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삶입니다.

어머니로 살았지만 어머니로 살 수 없었고, 아내로 살았지만 여자일 수 없었던 분입니다. 배우처럼 자신의 삶을 낯설게 살다가 생애 마지막 나날에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분입니다. 시 쓰기라는 도구를 통해서였지만, 그것은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진짜 내면을 들려주고자 한다면, 자연히 소통의 언어는 따라올 것입니다. 할머니에게는 그것이 시였고, 삶이었습니다.

 

가장 딱딱한 질문이라 가장 끝에 물어보네요. 지금 연구 주제로 삼은 “치유 시학”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아뇨, 딱딱한 질문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죠.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삶의 문제를 시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치유 시학”입니다. 시를 읽거나 시를 쓰거나 또는 서로 시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의 문제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고통의 기억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고 위로를 받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하게 살아나지요. 하지만 그 기억이 현재 나의 삶을 흔들지 않으면 그 고통은 치유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완전한 치유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고통의 기억을 안고 사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치유의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제가 시를 공부하니 시가 치유의 길을 인도하는 하나의 별이 되는 것이지요. 만약 춤을 잘 춘다면 춤으로, 노래를 잘 부르면 노래로 치유의 방법을 찾았을 겁니다. 숲길을 걷기만 해도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집니까. 시만 우리들의 삶을 치유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치유되지 않는 고통도 없습니다. 어떤 기억이, 어떤 경험이 계속 괴로움을 준다면, 그것들을 피하지 마세요. 모른 척하시지도 말구요. 마주 보고 이야기 나누면 고통도 나의 것이 됩니다. 하지만 맨 얼굴로 나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으니까 그때 시를 읽어도 좋구요, 노래를 들어도 좋습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이 글의 출처는 http://cafe.naver.com/gozone?임을 밝힙니다.

 

 

유목공동체 지혜의 함수: 공간[철학을다시 쓴다]-19

유목공동체 지혜의 함수: 공간[철학을다시 쓴다]-19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유목공동체 지혜의 함수: 공간

농경공동체에 특유한 관혼상제에서부터 가치관, 역사관, 그리고 사물을 해석하는 여러 가지 틀, 이런 거 하나하나 짚어보면 재미있는 점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틀어서 농경문화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문화’를 영어로는 ‘컬춰’(culture)라고 하죠. 이 말은 라틴어 cultus에서 나왔습니다. 독일어나 불어나 영어나 어원은 같습니다. cultus는 라틴어 colo라는 동사의 과거분사입니다. colo라는 말에는 논이나 밭을 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물론 파생적인 여러 가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만 농사를 지으면서 농경민들 사이에서 최초로 문화가 나타났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되겠습니다.

기독교 창세기에 바탕을 두고 우리가 상상력을 펼쳐 보자면, 이브 계열은 카인을 거쳐 정착민이 되어 공동체를 이루며 농사를 짓고, 아담 계열은 아벨을 본보기 삼아 유목민으로 집단을 이루어서 독특한 삶의 길을 걷게 되는데, 처음부터 유목민은 아니었던 걸로 여겨집니다. 유목민들이 주로 활약했던 공간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조상들도 유목민이라고 그러죠. 태어날 때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찍혀 있는 것으로 봐서 몽고인들이 우리 먼 조상이고, 거기서부터 한반도로 말 타고 이주해 왔다, 이런 식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몽고, 아라비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같은 고대문명, 히타이트 문명이 있었던 곳들, 이런 곳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지질학적인 공통점?”

“사막이요.”

“그렇지, 사막. 그 사막이 처음부터 사막이었을까요? 처음부터 사막이었다면 들어가서 살지 못했겠죠? 초원에서 사막으로 점점 바뀌었겠죠.”

초원은 사실 목축을 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기후 변화가 일어나면서 어느 순간 목초지가 점점 사막으로 바뀌는, 비가 내리지 않고 풀이 메마르고 하면서 사막으로 바뀌는 기간들이 지속되어 왔겠죠. 유목민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을 하죠? 공간 이동을 통해서 늘 푸른 철을 계속해서 인위적으로 조성하죠. 그렇죠? 그러니까 위도에 따라서 풀이 자라는 철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면 짐승들 풀을 뜯기다가, 이를테면 말이나 소를 기르는 제주도 한라산 주민들이 그러듯이 풀이 먼저 자라는 차례에 따라 위쪽으로 위쪽으로 올라갔다가 가을이 와서 점점 풀이 말라가고 먹을 것이 없어지면 다시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게 하고, 그 다음 해에 또 위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고 이렇게 해서 위도를 오르내리면서 목축을 합니다. 짐승들에게 가장 알맞은 먹이가 제공되는 지역을 찾아서 공간 이동을 하는데 목초지가 줄어든다면 어떻게 되죠? 생존권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목초지를 찾아다니고 짐승들을 빠른 시간에 움직이게 해서 남들보다 먼저 목초지를 차지해야 되니까,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짧은 시간에 먼 거리를 누비는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죠. 그게 뭐로 나타납니까? 말이나 낙타를 길들이는 걸로 나타나죠. 그런데 말이나 낙타는 여자들이 길들이기 힘든 짐승들입니다. 일정한 체력이 뒷받침돼야 길들일 수 있는 짐승이지요. 소나 돼지나 개 같은 경우에는 쉽사리 길들일 수 있지만 말이나 낙타 같은 것은 아무나 쉽사리 길들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어서 수컷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공간 이동이 빨라지는 거죠. 빨라진 발로 발 빠른 짐승들을 몰고 다니면서 삶의 길을 찾는데, 농경공동체가 여성이 권력의 중심에 있는 ‘불평등 사회(?)’였다면 이 유목사회는 남성 위주의 불평등 사회로 전환됩니다. 짐승을 길들이는 과정에서만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목초지가 줄어들고 서로 알맞은 목초지를 차지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다른 유목민이 먼저 목초지를 차지하고 있다고 물러설 수가 없잖아요. 그 많은 짐승 떼를 몰고 겨우 찾아갔는데 다른 데로 가는 중간에 짐승들 대다수를 잃어버릴 수가 있고, 실제로 굶주려 죽을 수도 있으니까 한판 붙을 수밖에 없잖아요. 한판 붙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싸우는 기술을 어렸을 때부터 익혀야 강인한 체력, 정신력을 갖출 수 있죠.

농경민은 우리 나이로 열여섯이면 관례를 행하게 되고, 어른으로 인정받아 시집 장가를 가게 되는데, 농경민의 ‘관례’라는 것은 유목민에 견주어 단순합니다. 이를테면 마을 나무 밑에 들돌이 있어서 누가 그것을 쉽사리 번쩍 들어 올리느냐에 따라 그 사람 힘세다, 소 잘 몰겠다, 일 잘하겠다, 이렇게 관대하게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 유목민들은 전쟁터에 내보내야 하고 거기서 강인한 체력을 발휘해야 하고 적에게 붙들려도 굴복하지 말아야 하니까 관례가 굉장히 엄격합니다. 부족에 따라서는 자갈들을 불에 달궈 놓고 거길 지나가게 하기도 하고, 가슴에 꼬챙이를 꽂아서 24시간이나 48시간을 견디게 하기도 하고, 맨손으로 눈 덮인 높은 산에 올라가 며칠 동안 견디고 오라고 시키기도 해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젊은이가 되도록 혹독한 훈련을 시킵니다. 농경민 사회에서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지 못하고 시간을 통한 경험의 축적이 지혜의 함수가 된다고 했는데, 유목민의 경우에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나 정신력으로나 강인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사방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녀 본 사람이나, 맞닥뜨리는 적을 이겨내고 살아남는 자들이 가장 지혜로운 인간이 된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권력이 집중이 된다고 할 수 있겠죠. 북유럽 신화를 보면 여기 살던 사람들은 바다를 목축지로 삼아서 헤매고 다니는 약탈자 무리로 유명합니다. 오딘 신화 같은 경우를 살펴보면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자기 눈 하나를 자기가 뽑아서 신에게 바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실제로는 싸우다가 눈알이 빠진 거겠죠.(일동 웃음.) 그걸 신화화하니까 눈알을 바치고 지혜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갖추고 있는 청장년을 중심으로 사회 구조가 바뀌게 됩니다.

여기서 노인들이나 여자나 애들은 어떤 대접을 받습니까? 고려장은 워낙 농경민들의 풍습이 아니고 유목민들의 풍습입니다. 체력이 바닥나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없어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늘 빨리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유목공동체에서 짐이 될 뿐이죠. 그래서 버리고 가요. 여러분들, ‘바렌’(The baren world)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에스키모(이누이트) 부족 사람들도 유목민입니다. 이 영화에서 나이 많은 할머니를 아들이 버리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할머니는 저 멀리서 흰 곰이 나타나는 걸 보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이런 상상을 하죠. 저 흰곰이 곧 와서 나를 잡아먹을 텐데 그러면 내 영혼은 흰곰 속에 들어가 있다가 내 자식이나 손자가 저 흰곰을 잡아서 먹게 될 때 다시 내 핏줄과 한 몸이 된다는 그런 꿈을 꾸죠. 그래서 죽음을 아주 평온한 기분으로 맞이하죠. 버리고 가는 사람은 비정해 보이고 버림받은 사람은 비참해 보이지만 그 사람들 삶에서는 이것이 가장 슬기로운 선택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이죠.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윤리가 규범적이겠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꼭 이렇게 하고 저런 경우에서는 꼭 저렇게 해야 한다고 조상 대대로 물려온 윤리관에 따라서 이 사람들이 행동을 할까요?”

“아니요.”

아니죠. 부딪히는 상황마다 유동적인데 그래서 이때는 이렇게 하고 저때는 저렇게 하라는 상황윤리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강자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들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보다도 강한 자들을 우러러보아야 한다고 느끼게 되죠. 재물을 분배하는 데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농경공동체에서는 생산되는 것이 전부 유기물이고 일 년 이상 묵혀 놓으면 다 썩게 되고, 해마다 새로 씨를 뿌려야 거기서 싹이 트고 남새나 낟알이 자라게 됩니다. 씨앗을 2년만 묵혀도 싹이 잘 트지 않기 때문에 해마다 뿌릴 씨앗을 남겨두고는 모두 고루 나눕니다. 떡을 해 먹기도 하고 거지나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 주기도 하고……. 어쨌든 다 나누죠.

유목민의 경우에도 나눔이 있습니다. 유목민들이 굉장히 너그러운데, 그 너그러움은 생존 조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삶터를 옮길 때는 많은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하니까요. 양이라든지 기르는 짐승들은 전부 유동자산이죠. 농경민들은 집이나 논밭이나 전부 고정 자산인데, 이건 유동자산입니다.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는 고정자산은 가치가 없습니다.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고정자산에 관한 관념이 희박하니까 마구 나줘 줘버리고 대부분이 떼 지어 가서, 도중에 만나는 농경공동체나 유목공동체에 조그만 약점이라도 보이면 때려 부수고 물건이나 짐승, 여자를 약탈해서 나눕니다. 농경민들은 하루 세끼 먹을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두루 나눕니다. 더 먹어봐야 배탈만 나죠. 유목민들은 탈취해 온 것들 가운데 비교적 오래 보존할 수 있는 것들만 가지고 와서 분배를 하는데 고루 나누진 않죠. 약탈하는 데 앞장선 사람 중심으로 분배가 이루어지겠죠. 계속해서 목초지는 줄어들고 생존경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야 되니까 죽느냐 죽이느냐 밖에 길이 없는 경우도 생겨납니다.

문화를 보는 관점도 굉장히 다르죠. 농경 사회는 붙박이 사회이기 때문에 문화들이 다양하게 발달을 하죠. 벽에 걸어놓고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도 필요해서 시골사람들도 집안에 민화를 걸어놓고 낙화나 가구 같은 여러 가지 손재주 부린 것들을 여기저기 남기게 되고, 청승맞은 시집살이 노래에서부터 일할 때 부르는 노래, 풍물치고 놀 때 부르는 노래 같은 여러 가지 노래들이 생겨나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어린 손자들을 무릎에 앉히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문화유산들이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유목민들도 문화가 없진 않지만 기억 속에 간직되고 입에서 입으로, 몸에서 몸으로 전승되는 것밖에 따로 간직해야 하는 문화는 많지 않고 지극히 한정되어 있죠. 유목민들이 악기를 만든다고 할 때 어떤 악기를 만들겠습니까? 전쟁을 부추기는 심장소리와 비슷한 타악기나 뿔피리 같은 것이 고작이고, 거문고나 가야금 같은 악기는 뒷전이겠죠. 이렇게 유목생활 하는 사람들의 가치관, 문화관, 역사관,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사회적인 모든 규범들이 농경민들하고는 상당히 다르게 됩니다.

사막화가 차츰차츰 진행되면서 목초지를 여기저기 찾아 해매고 다니는 과정 속에서 일부는 먹을 것을 구하러 여기저기 다니다가 모래사막을 가로질러서 서로 부족한 물건을 바꾸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나타나고 점점 머리를 쓸 일들이 늘어나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번갈아 드는 온대지방에 살면 사람도 짐승도 머리가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다못해 식물들도 머리가 좋아지죠. 식물들도 겨울에 겨울눈을 마련해서 봄에는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완전히 벌거벗어야 살아남는구나 하는 것들을 배우고, 다람쥐나 개미, 이런 온대지방에서 옮아온 동물들이 겨울잠을 자거나 도토리 같은 먹이를 모아서 저장해 놓고 사는 삶의 양식을 새로 배운다든가……. 사람들도 가을철에 집중적으로 먹을 것이 나니까 그것을 어떻게 저장하느냐에 신경을 쓰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릇을 빚게 되고 먹을 물을 담거나 낟알을 간직하는 항아리나 단지 같은 것을 만드는 기술들을 생각해내면서 머리가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유목민들도 농경민들만큼 머리 쓰는 일이 많을까요? 농경민들은 저마다 한 철 한 철 접어들면서 철이 들어야 하고, 한마을 공동체에서 자급자족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철이 바뀌는 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 변산공동체의 경우를 보면 농사짓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도시에서 와서 처음으로 농사짓는 법을 익히게 되는데 한 십여 년 지나면 살아남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백여 가지 정도 익힙니다. 우선 콩만 해도 스무 종류 가까운 것들을 언제 심고 언제 거두어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 담는 것, 집짓는 것, 하우스 놓는 것, 지게 만드는 것, 등등 삶에 필요한 기술을 백여 가지 이상 익히게 되지요. 이와는 달리 유목민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대단히 강인한 사람들이 앞장서서 ‘가자!’ 하면 ‘예, 따르겠습니다.’ 하면 되기 때문에 단순하게 살아도 됩니다. 어떻게 보면 농경 공동체가 굉장히 단순하고 인간이 자연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 소박하고 크게 머리를 안 써도 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쨌든 사회가 단순화되고 한 사람의 행동양식이나 판단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 사회구조에 불평등이 자리잡게 됩니다. 저는 유목사회에서 최초로 사람과 사람사이에 불평등한 관계가 나타났다고 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누구나 빠짐없이 나이가 들면 어른대접을 받게 되기 때문에 통시적으로 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성이 확보가 되는데 유목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아까 말씀 드렸듯이, 관혼상제에서 관례가 유목사회에서는 가장 중요시되고 농경사회에서는 제사가 중요시됐다, 이것은 성인식이 유목사회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나이가 많으냐 적으냐에 상관없이 누가 우리 부족들을 곤경에서 빠져 나와 잘 살 수 있게 만드는 데 앞장서느냐가 중요하니까, 그에 따라서 그 부족의 운명이 그 사람에게 맡겨지죠. 이런 과정 속에서 생활양식이 달라짐에 따라 사고방식도 덩달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여기서 제 이야기는 끝내고 질문을 받겠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도시 공동체가 이야기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인데 기르는 문화와 만드는 문화, 지속과 변화의 변증법, 이것도 곁들여서 설명하겠습니다.

질문 받겠습니다.

“농경사회에서도 불평등은 생기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측면에서 그렇다는 거죠?”

“지주와 소작 같은 것은 옛날부터 있었으니까요.”

“제가 이야기한 것은 어려운 서양 학술 용어로 ‘아키티푸스’(archtypus)라는 것인데 ‘원형’을 이야기하는 거고, 실제로 계급사회가 나타나면서 원시 공동체에서부터 고대 노예제사회, 중세 봉건제사회, 그리고 근현대사회로 바뀌어 오는 동안에 평등과 불평등을 가리는 단순한 기준을 찾기 힘듭니다. 복합적인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원초적인 형태, 아키티푸스라는 거죠. 계급관계의 얽힘에 대해서는 뒤에 이야기할 것이 꽤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시간이 매우 중요한데 윤리적으로 고정윤리다, 그리고 유목사회는 어떻게 보면 이동하는 것보다는 악착같이 매달린다는 느낌이 들고 그것을 윤리적으로 상황윤리라고 보고 굉장히 유동적이라던가……. 그래서 고정윤리를 끌어내는 논리를 따지면 맞는데, 고정윤리까지 가면 다시 느낌이 안정화되고 안착화되고 거꾸로 상황윤리 속에서는 권력자가 안정화가 안 되고 다음 힘센 놈이 올라서니까 어찌 보면 계급사회는 잘 안 맞아 보여서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다 맞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계급사회도 그렇고 시간적으로 보면 약간 충돌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예, 좋은 질문입니다. 실제로 제가 그 이야기를 여기서 하려고 하다가 뒤로 좀 돌렸는데 우리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야기하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든 살아 있는 생명체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하고, 전체로 큰 틀에서 보면 생명의 시간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진행이 되는데, 이 생명의 시간이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면서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으로 나뉘거든요. 자연의 시간이란 것은 대체로 달과 별 같은 천체의 순환에 따라서 계절이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농경민처럼 거기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의 시간 속에 매몰됐다고 해야 할까? 순응한다고 해야 할까? 물론 농경민들도, 유목민도 자연의 시간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측면이 있어요. 끊임없이 인간의 시간, 인간의 삶을 위해서 자연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항구적인 봄철이나 여름철을 나름대로 만들려고 애쓰고, 공간을 이동하는 속도를 조절하는 측면이 있어서 인간의 시간이 실제로 확보되는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자연에 대한 통제력이 그만큼 커지기도 해요. 자연의 시간 속에서 농경민들은 자연의 시간에 순응하는 측면이 크고, 이 측면에서 보는 시간과 공간 문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에 속합니다. 좋은 질문인데 여기에서 다 토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여러분들은 유목민들이 드디어 철이 들거나 철이 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철들지 않고, 철나지 않고도 살 수 있는가 하는 길을 찾는 데에 앞장선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자연 원형으로서 농경공동체에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이후에 인간의 시간으로서 역사와는 다소 대비되는 역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농경민을 지배하고 있는 역사적인 관점은 순환사관입니다. 우리가 멋을 부려 니체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영원회귀, 이런 것들이 실제로는 농경민의 의식 속에 꽉 들어차 있지요.”

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철학을다시 쓴다]-18

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철학을다시 쓴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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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소설 쓰고 있고, 허튼 수작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제부터 사람과 이웃사촌인 오랑우탄을 예로 들어서 왜 최초의 공동체가 모계사회일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를 하지요.

오랑우탄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는 비루테 갈디카스라는 여자입니다. 비루테 갈디카스는 평생 동안 오랑우탄의 생태를 연구해서 뛰어난 학문적인 성과를 쌓아 왔습니다. 오랑우탄도 암컷들이 공동체를 이룹니다.

“오랑우탄 암컷이 일생 동안 새끼를 몇이나 낳는 거 같아요?”

“10마리요, 50마리.”

“여러분들 머릿속에는 많이 낳을수록 더 원시적이라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편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보다 오랑우탄이 좀 더 원시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이 낳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많이 낳는 오랑우탄 암컷이 일생동안 낳는 새끼는 많아야 세 마리쯤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몇 년을 사는데요?”

“대개 40년에서 50년 정도쯤 삽니다. 오랑우탄 새끼가 태어나면 그 새끼한테 나무꼭대기에다 집 짓는 법,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는 법을 포함해서 먹이를 찾고, 나무 타고 오르내리는 법, 그리고 새끼한테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가르치는 데 칠 년이 걸립니다. 400가지 정도의 먹을 것을 자연에서 얻는 법을 새끼에게 가르쳐줘서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게 만듭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먹을 것 백 가지쯤 제대로 가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만만치 않죠? 모든 생명체가 생명체인 한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습니다. 그 힘을 길러주는 데 오랑우탄은 칠 년이 걸리는 겁니다. 그 기간 동안에 애를 혼자서 키우기 힘들고 해서 암컷끼리 연대를 해서 공동체를 이루어 삽니다.”

공동체 가운데서 농경공동체는 두 뒷발로 몸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느릿느릿 돌아다니면서 먹고살 것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이루어 낸 공동체입니다. 여자로 태어나면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아서 애를 낳아야 하고 갓난애를 길러야 하고……. 활동할 수 있는 좁은 공간을 중심으로 해서 삶의 영역이 개척되었고,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생산지가 만들어져 왔고……. 그런데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잖아요. 애를 낳을 때나 갓난애를 안고 젖을 먹일 때는 속수무책이잖아요. 도움이 필요한 수컷은 사냥하러 간다 하고 가 버리고, 그러면 이웃여자에게 같이 도와서 살자고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해서 초기 공동체는 여성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그 공동체는 유목공동체가 아니라 농경공동체였다, 여러분들은 유목공동체가 먼저 생겨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믿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또 농경공동체는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이 권위를 더 갖게 되고 늦게 태어난 사람은 꼼짝 못하게 되는 위계질서가 서열화된 사회라고 보기 쉽습니다. 굉장히 엄격한 위계질서에 따라 나이 어린 사람은 아무리 좋은 생각, 바른 판단을 가지고 있어도 어른들의 억지에 꼼짝 못하는 불평등한 사회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농경공동체는 그 나름으로 엄격하게 평등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 사회입니다. 다만 공시적인 측면에서 평등성 확보를 생각하느냐, 통시적인 측면에서 평등성을 보느냐에 따라서 조금 다를 뿐이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사회라는 것은 어느 연령대 이상이 되면 모두 투표권을 가지고 있어서, 바보가 되었든 미친 사람이 되었든 한 장의 표를 행사하고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농경공동체는 불평등하기 짝이 없는 공동체입니다.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꽥! 하면 모두 죽여 주십시오, 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 생각을 해보십시오. 옛날에 한 마을이 농경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우주였습니다. 그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서, 죽고, 뒷산에 묻힙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백 년 전까지도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다만 여자는 한번 거주지를 옮기죠. 옛날에는 남자가 장가를 들어서 거주지를 옮겼는데 지금은 여자가 시집을 가서 거주지를 한번 옮깁니다. 그런데 여자도 거의 마찬가지로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게 되죠. 농경공동체에서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마을로 가봐야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농기구 이용해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배울 게 없습니다. 어디를 가 보니 다른 삶의 형태가 꾸려져 있고 거기에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되는 게 있더라 하는 일깨움을 얻을 수 없어요. 다시 말하면 농경공동체에서 지혜는 시간의 함수입니다. 오래오래 한마을에 살면서 많은 일을 겪은 사람, 가뭄이 되었든 큰물이 되었든 그 밖의 여러 가지 농작물 정보에 가장 밝은 사람은 오래오래 걸쳐서 경험을 쌓은 노인들입니다. 하다못해 늙으면 관절에 중풍 비슷한 게 있어서 비가 오려면 쑤셔요. 일기예보보다 더 정확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노인네들에게 의논을 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찾아가서 이런 일이 있고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물으면 대체로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가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권력이 노인들에게 집중이 됩니다.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더 슬기로워지지 않습니까? 지혜가 시간의 함수가 되는 마을 공동체 안에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슬기로워지니까 규범 윤리가 확립되죠. 웃어른이 하신 말씀 틀리는 게 없다, 그리고 이건 어른들이 오랜 경험들을 통해서 확립해 놓은 윤리관이니까 이걸 벗어나면 안 된다, 다 삶의 경험이 응축돼서 이렇게 우리 잘되라고, 잘 살라고 윤리 도덕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거다, 그것을 어기면 안 된다 해서 규범 윤리가 거기서 확립이 되고, 역사적으로 보면 상고주의적인 역사관이 자리잡지요.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문명화되고 더 개명된 좋은 세상이 온다고 생각을 하죠.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농경 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옛날이 훨씬 더 살기 좋았다고 생각해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고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마다 옳았던 ‘정법시대’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임기응변이 생겨난 ‘상법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말법시대’라고 하죠. 도대체 혼란하기 그지없는 세계라고 봅니다. 유교에서도 과거 요순시대가 제일 좋았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서양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황금시대(golden age)가 있었고 그다음에 은의 시대(silber age), 동의 시대(copper age)를 거쳐서 지금은 철의 시대(steel age), 인간 가운데 말종들만 살고 있는 그런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단 말이죠. 이것은 농경민의 독특한 사유방식입니다. 옛날이 좋았다, 노인네들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다, 우리 아버지가 나보다도 더 슬기롭고 아버지보다도 할아버지가 더 슬기로운데,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얼마나 더 슬기로웠을까? 그렇게 자꾸 유추해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아주 슬기로운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상적인 공동체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점점 종말로 다가서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농경민들의 사유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뜻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고 제사, 죽은 분들을 추모하는 제사가 관혼상제 가운데서 으뜸이고, 그 다음에 장례, 그다음에 혼례, 그다음에 관례, 이렇게 차례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규범윤리가 지배를 하고,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는 상고주의가, 그리고 계절이 순환하듯이 모든 것이 순환한다는 순환사관이 자리 잡습니다. 한 해가 가면 또 계절이 되풀이되듯이, 달이 차면 기울 듯이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 해와 달같이 한 해를 주기로, 한 달을 주기로 순환하는 것들이 시간을 규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농민들이 가지고 있는 평등의식은 현대인들의 평등의식과는 아주 다릅니다. 농경사회가 어떻게 해서 평등한 사회라고 볼 수 있느냐 하면, 노인네들 죽잖아요. 그러면 뒤이어 젊은 사람이 장년이 되고 또 노인이 되잖아요. 그리고 노인네들은 예외 없이 존경받잖아요. 그러니까 농경사회는 공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평등한 사회 구조지만 통시적으로 순환하는 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지는, 그 나름으로 엄격한 평등 사회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17

공동체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17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공동체 형성 과정

 

공동체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라고 할 때 큰 틀의 공동체를 가리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농경사회, 유목사회, 도시사회. 여기서 도시사회도 특성에 따라 두 가지로 갈라질 수 있죠. 서구 마르크시스트들이 따로 구별하는 ‘아시아적인 전제’가 이루어지는 도시사회와 지중해 연안에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해안도시 사회. 성격이 다르죠. 농경사회와 유목사회는 어디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고 비슷한 측면이 드러납니다. 저번 시간에 제가 최초 공동체를 형성하고 산 사람들은 여자들이었다고 말씀드린 적 있나요? 충분히 설명을 안 했나요?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듣는 것은 전혀 객관적인 근거도 없고 누가 책으로 쓴 바도 없는, 저의 상상과 몽상, 때로는 망상까지 곁들여진 이야기라고 여기고, 열심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기 바랍니다. 어쩌다가 머릿속에 남는 것이 있으면 담아두셔도 되고요.

저희 집안 이야기이기도 한데, (제 아들에 따르면 저는 사람보다 오랑우탄에 더 가깝다고 하니까.) 저희 집안사정과 곁들여서 이야기를 풀어 볼까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구의 기후변화는 단속적으로 혹은 일정한 주기를 두고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왔습니다. 지금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최근의 빙하기가 지나고 나서 간빙기에 해당합니다. 몇만 년 전에 천천히 날씨가 풀리기 시작해서 간빙기가 시작했다고 그랬나요? 고생물학자나 지질학자 같은 사람들 증언을 들으셨을 텐데, 저나 여러분들이나 숫자에 약하기는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 한 이만 년 전 정도 됐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으니 꼭 믿지는 마십시오. 독일 사람들은 이런 말을 싫어하죠. 정밀과학, 엄밀 과학 바탕 위에서 실증적인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론에 대해서는 질색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쨌든 그건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고, 간빙기가 시작된 게 이만 년 전 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긴 세월 동안에 빙하기와 간빙기가 지구를 번갈아가면서 덮쳤는데, 빙하기가 오게 되면 인류들은 어디에 주로 모여 살았을까요?”

“동굴 속.”

“동굴 속? 뭐, 그렇죠. 그런데 적도 부근에 살았겠죠? 다른 데는 북극에서부터 지금의 한대지방, 온대지방까지 전부 얼음으로 뒤덮이게 되고 오직 적도부근만 말하자면 따뜻한 곳이었을 테니까.”

빙하기 때의 적도 부근을 상상 속에 그려 봅시다. 빙하기 때 적도 부근은 어떤 기온상태고, 어떤 동물과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을까요? 지금은 적도가 열대우림지역이 되어 있어서 사람이 살기에 상당히 거북한 곳이고, 지나치게 많은 비와 따가운 햇살이 내리 쬐이고 있지요? 간빙기가 오면서 점점 날씨가 풀림에 따라서 적도 지역에서 생활 조건이 악화되면서 식물들 가운데 꽃피고 열매 맺는 나무들도 점점 온대 지방으로 퍼져 가고,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풀들도 온대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사람도 적도를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옮아 살게 되었겠죠? 실제로 빙하기에는 적도 지방에 과일나무도 많이 있었고, 짐승들이 풀 뜯어먹고 살기 좋은 초원 상태고 넝쿨식물이 우거지지 않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봅니다. 게다가 적도 지역은 어떻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나누어지나요? 아니죠? 정말 철없는 곳이었겠죠. 그래서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나 풀이나 나무 같은 것도 철없이 살 수 있었고, 철없이 살 수 있는 곳이 낙원이죠. 낙원에서는 먹이를 얻으려고 머리를 쓸 필요가 없죠. 손만 뻗으면 먹을 것이 있고,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없으니까 따로 입고 벗고 할 필요도 없고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에덴동산은 아마 빙하기 때의 적도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 에덴동산에다가 지혜의 열매가 달린 생명의 나무를 하나 두고 그 생명수 아래서 배꼽 없는 아담과 이브가 살도록 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도 경악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수에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생명수라는 것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나무이기 때문에 생명수이죠. 그런데 그 생명수에 열매가 달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실제로 그 생명수는 언젠가 죽고 그 열매가 간직하고 있는 씨앗이 떨어져서 재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것은 하나님의 처지에서 살피면 엄청나게 큰 재난이죠. 아담과 이브에게 생명수를 보고 날마다 그 그늘에서 절하고 영생을 누리라고 했는데 갑자기 열매가 맺히니까 (제가 지금 소설을 쓰는 겁니다, 소설을 쓰는 건데…….), 아무튼 열매가 달리니까 하나님이 깜짝 놀라서 절대로 그 열매에 손대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어디선가 뱀이 나타나서 저 열매를 먹는 게 좋다고 이브를 꼬시죠. 실제로는 하나님도 너희 목숨 영원토록 보장 못하니까 저 열매 먹어라, 이런 식으로 꼬였겠죠. 결국 그 꼬임에 넘어가 아담과 이브는 지혜의 열매를 나누어 먹습니다. 하나님이 이 꼴을 보고 노여워해서 니네들은 이제 이 에덴에선 살 수가 없다 하여 아담과 이브가 쫓겨나죠.

그런데 이 시점이 간빙기하고 겹쳤다고 생각해 봅시다. 간빙기와 겹쳐서 실제로 기온이 높아지니까 그 동안 그렇게 살기 좋았던 적도 부분이 열대우림지역으로 바뀌면서 초원에서 넝쿨이 우거진 밀림지대가 되고 바닷물 수위가 점점 높아져서 전에는 가까이에 있는 바닷가에 가면 늘 조개를 주워 마음껏 배불리 먹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개펄이 죄다 물속에 잠겨 버리고 점점 살기 어려워집니다. 갖가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던 나무들도 남과 북으로 흩어져서, 아까 이야기한 대로, 나무도 그렇고, 낟알이 달린 풀도 그렇고 거기에 따라서 짐승들도 전부 먹이를 찾아서 남과 북으로 퍼져나가고 사람도 그 운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칩시다. 온대 지방이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철 있는 곳이죠. 봄, 여름, 가을, 겨울. 한철 한철이 들고 나는 곳, 그래서 온대지방으로 옮겨간 사람들은 한 철 한 철 나면서 철이 나고 한 철 한 철 접어들면서 철이 들어야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뀌는 것이죠. 그 전까지는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보장해줘서 영원히 살 수 있었으니까 서로 부둥켜안고 뒹굴고 살아도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몸에 옷을 걸칠 필요도 없었겠죠. 그럴 필요가 뭐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생명의 동산인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났으니까 우리가 때맞추어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를 맞춰서 배꼽 달린 아이들인 카인과 아벨을 낳았다고 그러죠.

카인과 아벨/ 출처: www.allaboutthebible.net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카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목축을 하죠. 유목사회와 농경사회가 여기에서 갈라지는 계기가 되죠. 그렇죠? 말하자면 카인은 농사짓기에 알맞은 땅을 찾아내서 씨 뿌리고 짐승 길들이고 하면서 주저앉아 사는데, 아벨은 짐승들을 데리고 초원을 찾아서 멀리멀리 떠나는 운명에 놓인 것이죠. 그런데 성서를 보면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농경 공동체가 유목 공동체보다도 더 지배적인 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어요. 원시 공동체는 아프리카에서부터 소단위로 이루어진, 농경 공동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포유류 가운데 제법 기특한 게 인간 수컷입니다. 왜 그러냐면 유인원까지 포함해서 포유류 가운데서 암컷에게 씨만 뿌려놓고 달아나지 않는 수컷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 수컷은 암컷이 둘러놓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니까 사람 암컷들이 얼마나 영악하냐 하면 수컷들을 가두어 놓고 부릴 수 있는 힘을 지녔어요. 여자는 온전한데 남자들은 그에 못 미쳐서 바보라는 뜻으로 ‘반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왜 반편이냐고요? 생물학적으로도 증거가 있습니다. 사람이 더불어 살려면 언어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사람 수컷의 두뇌는 말을 주고받을 때 왼쪽 뇌만 작용을 합니다. 그쪽에만 불이 들어와요. 암컷은 왼 뇌 오른 뇌 두 쪽 다에 언어중추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여자가 온전한 인간이라 하면 남자는 반편이라는 말이 맞아요. 그래서 반편인 남자를 길들이기가 참 쉽기는 쉬웠겠어요.

사정은 이렇습니다. 말하자면 그 동안에는 수컷이 게을러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적도 부근에서만 살았다면 손만 뻗으면 늘 먹을 것이 주렁주렁 달려 있으니까 일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얼음이 풀리면서 적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있는 온대 지방으로 옮겨 살면서 널리 풀밭이 펼쳐져 있고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곳, 지금 아프리카 나이로비 국립공원같이 온갖 야생동물들이 뛰어다니는 그런 비슷한 곳이 사방에 널려 있으니까 수컷들은 사냥하러 간다 하고 떼 지어서 몰려나갑니다. 요즘 아주 정밀한 조준 망원경이 있는 사냥총 가지고도 짐승사냥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런데 꼬챙이 하나 들고 거기에다가 돌멩이 둘둘 감아가지고 무슨 사냥이 되었겠습니까? 그냥 가사노동에서부터 벗어나는 구실로 우르르 떼 지어서 다니는데, 그러다보니 쫄쫄 굶고, 가을이나 겨울이 오면 먹고 살길이 어디 있어요? 동굴에 불 피워 놓고 덜덜덜 떨다가 굶어죽기 직전에 나와서 옛날에 씨만 뿌리고 달아난 암컷들에게 간단 말이죠. 짐승이나 사람이나 애를 배고 갓난애가 생기면 속수무책일 경우가 많습니다. 어디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좁은 지역에 모여 살면서 가까이 있는 풀이나 낟알 같은 것들을 입에 넣고 씹어보면서 먹을 만하다 싶으면 캐다가 주변에 심고, 씨 뿌리고 해서 농작물들을 기르기 시작하고 짐승 새끼가 우연히 발견되면 주워다가 우리 속에 가둬서 기르기 시작하죠. 수컷들이 돌아와 보니까 그동안 다 굶어 죽었을 줄 알았던 암컷들이 살아남았고, 곡식도 저장해 놓고 짐승도 길들이고 해서 겨울날 채비를 다해 놓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도 같이 살자고 궁둥이를 슬그머니 들이민 거죠. 그래서 모계사회가 시작된 거죠. 주권의 출처는 경제권에 있는데 공동체를 형성하고 경제활동을 해서 생산을 하고 재생산을 하는 기초를 닦아놓은 게 여자들이고, 남자들은 여자들이 이루어놓은 공동체에 빌붙어 산 거죠. 여자공동체에. 남자들은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실제로 모계 사회가 수십만 년 지속된 데에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한철연4기 연구협력위원회 첫 회의를 잘 마쳤습니다[ⓔ시대와철학 알림]

한철연4기 연구협력위원회 첫 회의를 잘 마쳤습니다[ⓔ시대와철학 알림]

 

사진 : 윤지미(한철연 회원)

정리 : 강지은(편집주간)

 

한철연 제4기 연구협력위원회가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더욱 발전하는 한철연을 기대합니다.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철학자의 서재3>출간 안내[ⓔ시대와철학 알림]

신간소개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부제 <철학자의 서재 3: 일상에 지친 당신을 위한 책 천국>

 

 

 

우리 시대의 명저, 숨어 있는 책, 저주받은 걸작들을 통해 쏟아내는
철학자들의 쓴 소리 / 흰소리
책읽기, 글쓰기, 철학적 사유에 관한 통합적인 안내서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의 세 번째 권이 출간되었다. 5년 동안의 연재, 206명의 필자, 217편에 달하는 서평들이 세 권의 책에 오롯이 담겼다.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3권에서 철학자들은 현실과 일상, 정치와 경제, 안과 밖에 대해 사유하고, 글쓰기와 책읽기와 사유하기에 관한 통합적 안내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는 63편의 “철학자들의 쓴 소리/흰소리”가 담겨 있다. 모두 책을 소개하는 글들이다. 실용적 독자들로서는 이 책만 대충 읽어도 63권의 책을 읽은 효과를 얻을 것이다. 이른바 “읽은 척 매뉴얼”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알려주기로는 최적이다. 또, 철학자들은 어떤 책을 주로 읽는지 알 수 있는, “훔쳐 읽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 책의 운명이 ‘실용적 차원’에 머물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저자들은 여기에 소개하는 책들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의 현재적 삶의 운명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운명에 대한 상상을 해보라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인 철학자들이 우리 시대의 명저나, 숨어 있는 책,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 동서양 고전들을 선정하여 서평을 쓴 것을 모은 책으로, 지난 5년간(2008년 9월~2014년 현재)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연재되었던 칼럼들이다. 서평이기도 하며, 철학 칼럼이기도 하며, 에세이이기도 한 이 코너는, “서평 문화의 장”의 한 획을 그었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오고 있다. <철학자의 서재>는 서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문제의 단초를 일상의 삶에서도 찾고자 하는 적극적인 시도들이다. 이론과 활자들의 말잔치가 아니라, 책읽기, 글쓰기, 철학적 사유에 관한 통합적인 안내서이다. 그래서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는 방대한 양의 서평 모음집에 그치지 않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철학자의 서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공맹의 사상 등에서 시작하여 조르주 아감벤, 지그문트 바우만 등 2500년 지성사를 한눈에 훑어볼 수 있다. 무려 200여 권에 달하는 책들 중에 우리 시대 지성들이 읽어야 할 교양이 망라돼 있는 것이다.

또, <철학자의 서재>는 책의 선정과 집필을 최소 한 달 이전에 시작하기 때문에, 사유하고 글을 쓰는 데에 충분한 시간과 분량이 주어진다. 그럼으로써, 글의 완성도와 주제의 선명성이 높게 나타난다.

<철학자의 서재>는 대안적 상상력, 내일을 지시하려는 몸짓과 울림을 강조한다. 학문은 현실의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 서적에만 국한하지 않고, 정치/사회/경제/문화/예술/대중문화 등 거의 전 분야를 다룬다. 철학적 사고는 대안적 상상력이 뒷받침되어야 깊어진다는 점이다. 철학 본연의 텍스트가 아닌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출판사 보도자료 중 일부

 

한국철학사상연구회·프레시안 시민강좌[ⓔ시대와철학 알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프레시안 시민강좌
?<큰 것을 생각하라 2014>
세속의 철학자, 경제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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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유토피어니즘을 디자인하기 위한 공존의 경제를 찾아서-
?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이 거대한 시련의 근원은 무엇인가?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하는 것은, 새로운 유토피어니즘을 기획하는 것이다.
미국식 금융 자본의 붕괴 이후,
그리고 9·11 이후 체제에 대한 진지한 사유의 방향을
이제 우리 주변으로 돌려, 공동체의 나아갈 비전을 찾아보고자 한다.
일상과 주거에서, 마을과 공동체에서,
지역 사회와 도시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의 의미를 재구성해보자.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해 보기 위해
우리 시대의 가치, 자본, 노동의 의미를 다시 세워보도록 하자.
?

● 강의 커리큘럼

2월 13일 1강 :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

????????????????????? –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2월 20일 2강 : 노동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 박영균(건국대 HK교수)
2월 27일 3강 :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1 – 한길석(한신대 외래교수)
3월?? 6일 4강 :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2 – 박민미(대진대 외래교수)
3월 13일 5강 :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 이순웅(숭실대 외래교수)
3월 20일 6강 :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재구성 –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3월 27일 7강 :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 도시를 생각한다
??????????????????????- 이현재(서울시립대 HK교수)
4월?? 3일 8강 : homo cooperatus 협동성 경제의 실현 – 최종덕(상지대 교수)
?

● 일???????시 : 2014년 2월 13일~4월 3일(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9시 30분 총 8강)

● 장?????? 소 : 서울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302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 신청문의 : 02) 332-4301 /?kophil@daum.net?(주로 메일을 이용해 주세요.)

● 수?강?료 :

① 전 강좌 15만원
② 각 강좌당 2만원
③ 한철연 회원(정회원, 준회원, 후원 회원 등) 무료
마감 인원 : 35명

좋음과 나쁨[철학을다시 쓴다]-16

좋음과 나쁨[철학을다시 쓴다]-16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번 주부터는 1부와 2부를 순차적으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좋음과 나쁨

 

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

“이게 라틴어죠. 무슨 말입니까? 혹시라도 배운 분?”

“프리뭄 비베레, 데인데 필로소파리.”

“예, 무슨 뜻이죠?”

“생이 먼저고, 철학은 나중이다.”

“그렇죠! 우선 살고 볼 일이고 철학을 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일동 웃음.)

뭘 해야 살지, 우리 한번 골 싸매고 덤벼봅시다. 저도 혼자는 못 사니까 살려고 지금 이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혼자 잘 살 수 없는 세상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벌이나 개미처럼 여럿이 힘을 합해야 제 앞가림도 할 수 있게 태어난 생명체이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 이것을 뭐라고 부르죠?”

“사회요. 그렇죠. 사회! 더 흔한 말로 시골 노인들은 ‘세상’이라 그러죠. 조금 교육받은 분들, 초등학교 문턱이라도 가본 사람은 사회라고 그러고, 그것도 안 배운 분들은 다 세상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우선 살고 보아야 하는데 제대로 살 수 있으려면, 좋은 세상에서 태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팔뚝에다가 문신 새겨서 ‘착하게 살자’고 결심해도 소용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요즘에는 또 ‘바르게 살자’는 말도 나옵디다. 우리가 매사에 참되고 정직해라 이런 얘기를 듣게 되는데 참되고 정직해서 뭐해요? 여러분들 안데르센의읽으셨죠? 그 동화에서 임금이 옷을 벗고 나다니는데, ‘정말 옷 멋있습니다.’ 하고 어른들이 거짓말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살아남으려고 하는 거죠. 임금한테 잘못 보이면 당장 가는 목숨이니까, 살아남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좋은 세상은 거짓이 발붙이기 힘든 세상,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 그래도 살 수 있는 세상,에 나오는 국민들처럼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권력자에게 옷이 멋있다고 이야기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 그게 좋은 세상이겠죠. 실천하고 연관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또 여러분들에게 한마디 여쭈어 보겠습니다. 어떤 때 우리는 좋다고 그러고 어떤 때 나쁘다고 합니까?”

“건강, 생명 등에 부합하면 쾌로 느껴지고 그것이 좋은 것인 거 같고요. 죽음, 질병 등에 부합하면 불쾌이고 자기 생명이 단축되는 거니까 불쾌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결론적으로 나쁨이 되는…….”

“좋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편이 있는데, 바로 거기에서 대화에 참여한 분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의사 선생님이 한 대답과 비슷한 대답을 합니다. 그 옆에 계시는 남자 분, 어떤 때 우리는 좋다고 하고, 어떤 때 우리는 나쁘다고 그러죠?”

“내 마음에 들면 좋고, 마음에 안 들면 나쁘고…….”

“그렇죠? 주관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 말도 맞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벙거지 쓰신 분, 어떤 때 좋다 그러고 어떤 때 나쁘다고 합니까? 본인의 개인감정을 객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솔직하게 느끼는 것을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좋으면 좋고 나쁘면 나쁘고.”

아, 인간이 왜 이렇게 퇴화하는지 모르겠어요. 점점 머리가 나빠지는 게 무슨 법칙인 거 같아. 우리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적어도 그렇게 대답은 안 합니다. 제가 연모하는 연상의 여인이 있습니다. 저보다 9살밖에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칠십대 중반이신데 그 풍천 아주머니한테 제가 묻습니다. “아짐, 어떤 때 우린 좋다 그러고 어떤 때 우린 나쁘다고 그래요?” 하면 그 풍천 아주머니는 저한테 “철학 교수까지 했다는 게 그것도 몰라? 에이,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으면 좋은 것이고, 없을 것이 있고 있을 것이 없으면 나쁜 것이제.” 하고 딱 부러지게 대답합니다. 이 말 맞아요? 이제 구체적으로 질병을 예로 들었으니까 이야기할게요.

“우리 몸이 건강하려면 질병은 있을 거예요 없을 거예요?”

“없을 거요.”

“‘없을 것’이죠? 있으면 나쁜 것이죠? 그죠? 지금 제가 배가 고픈데 그릇에 밥이 하나도 없다, 텅 비어 있다 그럴 때는 어때요? 나쁘죠? 있을 것이 없어서 그런 거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 평등, 평화, 우애, 관용, 이런 것들은 있어야 할 것입니까 없어야 할 것입니까?”

“있어야 해요.”

“그렇죠? 이런 것들이 고루 있어야 좋은 세상이죠? 그 다음에 억압, 착취, 전쟁, 이기심, 탐욕,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없어야 할 것이요.”

“없어야 할 것이죠? 있으면 나쁜 세상이죠. 우리가 좋은 세상을 앞당기려면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고 없어야 할 것을 없게 하고 그래야겠죠? 여기에서 말의 생김새를 눈여겨봅시다. 우리 민족은 대단히 예민한 민족이고 철학하는 데 선천적으로 좋은 머리를 타고 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일상생활에서는 그 좋은 머리로 이야기를 잘 하는데 갑자기 쉬운 질문을 하면 얼어붙어가지고 온갖 어려운 낱말 다 꾸며내서 대답을 어렵게 합니다. 자기 확신도 없으면서.(일동 웃음.)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다 → 좋다.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다 → 나쁘다.

동의하십니까?”

“예.”

“여러분들 전부 나중에 속았다고 투덜대지 마세요. 이 강의 내용은 전부 여러분들의 동의를 얻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다’는 좋다는 말이고,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다’는 ‘나쁘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세요. 참말과 거짓말을 가리는 말에서 딱 한마디가 달라지니까 좋고 나쁜 것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습니다. 뭐가 달라졌습니까?”

“을.”

“‘는’에서 ‘을’로 바뀌었다. 그러면 ‘을’은 뭡니까?”

“당위.”

“왜 당위가 미래의 시제로 표현이 될까요? 독일어로는 졸렌(sollen) 이라고 그러죠. 왜 이 ‘당위’가, ‘해야 할 일’이 미래시제로 표현이 될까요? 과거시제나 현재시제로 표현이 되지 않고 왜 미래시제로 표현이 되겠습니까? 미래는 아직 없는 건데 우리는 왜 미래를 두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왈가왈부해야 하죠? 현재에 충실하면 되지. 과거는 이미 없는 거고 미래는 아직 없는 건데.”

“곧 올 거니까.”

“올지 안 올지 어떻게 알아요?”(일동 웃음.)

“현재가 나빠서…….”

“나쁘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나쁜 것도 질적으로 여러 가지가 있고요, 그러니까 함부로 말해선 안 되고. ‘당위가 미래시제로 표현되는 까닭을 200자 원고지로 100매로 써내시오.’ 이러면 이 수강 신청한 분들 가운데서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냥 농담입니다.”(일동 웃음.)

 

앙리 베르그송/ 출처: www.artnstudy.com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대한 시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도 번역이 돼 있고요. 거기에서 나온 말을 들뢰즈가 인용합니다. 우리의 기억(기억, 몽상, 회상, 추억 다 연결이 되는 말이죠.)과 그리고 응집, 삶의 에너지가 응집되는 문제, 시간 속에서 우리의 기억, 상상, 추억 이런 것들이 어떻게 이어지는가. 공간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가, 그리고 그것이 응집되어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모든 과거가 하나로, 현재로 모여 미래로 집중되는가를 검토합니다. 들뢰즈가 예를 들면서 한 말 가운데서 이런 게 있습니다.

원뿔을 거꾸로 세워놓는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한 면 한 면은 확산이 되면 어디에서는 몽상이 펼쳐지고 어디에서는 추억, 어디에서는 기억, 이렇게 전개되는 단면들이 주루룩 나오는데, 현실에서 부딪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이렇게, 저렇게 펼쳐졌던 그 모든 역사성들이 모두 어떻게 하나로 응집이 되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제가 간단히 여러분 사고 시험을 또 한 번 하겠습니다. 원뿔이 땅에 바로 서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원뿔을 횡단면으로 나란히 자른다고 칩시다.

“수학 선생님! 이 도형은 눈에 익으시죠? 이 도형의 단면을 가로로 잘랐을 때 위쪽과 아래쪽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달라요.”

“횡단면을 잘랐으니까 연속된 걸 잘랐는데 아래쪽과 위쪽이 크기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아요.”

“그러면 아래와 위가 같은 것들이 연속이 되면 주욱 자라서 원기둥이 되는데요?”

“맞아요.”

“그런데 이게 원뿔이잖아요.”

“미분 정도의 차이가 있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말고요, ‘미분’, ‘적분’ 하지 말고요. 다 얼버무리는 소리거든요.”

“차이가 있어야 맞는데요. 거의 없어지는…….”

“차이가 없으면 원기둥이 될 것이오. 차이가 있으면 계단이 될 것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우둘투둘 할 것 아닙니까? 아래 것이 크고 위에 것이 작으면 우둘투둘 계단식이 될 거 아닙니까? 무한을 둘러싸고 토막 내서 답을 찾자는 게 미분/ 적분이잖아요. 무한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면, 무한이 뭐예요? 셀 수 없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헤아릴 수 없는 게 무한이죠. 누가 니 속셈이 뭐냐, 하고 물어봤을 때 우리가 머리 굴려가지고 딱히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것도 무한의 한 속성입니다. 규정할 수 없는 것, ‘무규정성’ 이것도 ‘무한’이라고 하니까요. 한정지을 수 없다는 뜻이니까요. 수학 선생님, 아까 이야기했던 것 빼놓고, 무한에는 수학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무한 어떤 무한이 있습니까?”

“수렴, 발산.”

“수렴이란 말도 사실은 이상한 말이기는 합니다. 발산도 수렴도 다 우스운 말인데, 어쨌든 내적 무한, 수렴을 내적인 무한이라고 그러고, 발산을 외적인 무한이라고 그러죠. 그렇죠? 이것을 베르그송은 거꾸로 뒤집어엎습니다. 공간 축에 놓지 않고 시간 축으로 봅니다. 베르그송에 의지해서 들뢰즈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온갖 개념들을 그럴싸하게 쫘악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도형을 놓고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같은 문제를 제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꼭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단면을 자르게 될 때 그것이 같다고 하면 원기둥이 될 것이고 다르다고 하면 울퉁불퉁한 계단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단면으로 자른 원뿔의 윗면하고 아랫면은 어떻다고 해야 돼요?”

“미세하게 다르다.”

“다르다고 하면 미세하게 다르거나 정밀하게 다르거나 다 계단이 되어버린다니까.”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지 바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다면 뭐 이지도 않고 아니지도 않고, 이것을 한 단계 더 추상하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그랬죠?”

귤은 사과와 다르다. 왜? 귤은 사과가 아니니까. 왜? 귤에 있는 어떤 것이 사과에는 없고 귤에 없는 어떤 것이 사과에는 있으니까. 그렇게 전부 ‘있다/ 없다’로 수렴이 되죠. 그래서 말하자면 원뿔을 단면으로 잘라놨을 때 우리 눈앞에 드러나는 원은, 동그라미는 크기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말은 크기로 볼 때 아래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에 있는 것이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실제로 그렇게 아니라고만 볼 수 없다. 그러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 ‘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무규정성이라고 그랬죠. 이렇게 말해도 틀리고 저렇게 말해도 틀린다, 말하자면 불교에서는 용수, 나가르주나의. ‘아닐 비’(非)자를 무한히 읊조리는 그런 이상한 이론이 나타납니다.

‘뭘 할까’ 하는 데서 우리가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지점. 그게 실제로 우리의 존재 조건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해요? 똑같은 거리에 건초더미 두 개가 있고 반대쪽에 굶주린 당나귀가 있다고 칩시다. 건초더미가 색깔도 같고 모양도 같고 다 똑같은데, 이 당나귀가 어떤 것을 고를 것이냐……. 이것은 유명한 딜레마 문제 중 하나인데, 안 좋은 결말이 있습니다. 끝이 안 좋은 이야기. ‘굶어죽었다.’(일동 웃음.)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눈만 굴리다가 죽었다.”

“설마요.”

“그럼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아무거나 고르죠.”

“그렇지! 일단 저지르고 본다. 그렇죠? 머리 굴리지 않고 저지르고 본다.”

도시 사람들은 서로 늘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이 비슷해지죠. 그리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 떼거리를 짓죠. 생각이 다르면 실제로 같은 형제라도 천리만리 거리가 느껴지고 등을 돌리면 딱 돌아보지도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보면 이 사람 어떤 사람이다라고 판단하게 되는데, 촌사람들은 뭐가 닮는지 아세요? 손이 닮습니다. 시골에서는 거짓말 안 통하거든요. 24시간 늘 한마을에서 같이 살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달라져버리면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같아야 합니다. 도시에서는 어때요? 말로 살죠. 이런 문제를 내는 부류의 인간들이 전부 말로 먹고 사는 인간들이에요. 손은 무언가 하는 연장이죠. 손은 도구죠.

“제가 하고 있는 게 뭡니까? 놀리는 거죠? 손을 놀리는 거죠? 손발을 놀린다. 손, 발을 열심히 놀게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부지런히 일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일과 놀이가 둘이 아니에요. 우리가 실천적인 삶에서는 일과 놀이가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머리는 어떻게 해요?”

“굴려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상한 사이비 교주라든지 조직운동가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도시에서 우글우글 많이 생겨납니다. 왜 그러냐면 도시라는 삶의 공간 자체가 사람으로만 이루어졌고, 사람끼리 모이면 머리 굴려가지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설득당하고 그러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니까.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머리 굴리는 것보다 빨리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먹이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그러는데 주먹이 더 반사적이고 더 파괴적이어서 폭력을 쓰는데, 그 형태는 뭐죠? 칼을 든다, 총을 든다……. 우리가 나중에 무엇을 하려면 맨몸으로만 하기 힘드니까 연장을 써서 하게 되죠. 그런데 연장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연장이 있고, 사람과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연장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장은 칼이고 총이고 대포고 원자탄이고, 이런 것들입니다. 그 연장으로 빨리 효율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낫이나 호미나 괭이 같은 것은 사람과 자연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연장입니다. 그러니까 대장간에 가서 같은 ‘연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것을 벼리더라도 농사꾼이 대장간에서 찾는 거하고 장군이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을 지닌 통치자가 대장간을 찾는 거 하고는 다릅니다. 실제로 그리스 사회에서 대장간은 굉장히 큰 역할을 합니다. 대장간이 큰 역할을 한다는 건 무엇이냐면, 전쟁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역사 시대를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 이렇게 나누는 것은 사실 사람과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의 발달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기의 역사입니다. 무기 재료로 역사 시대를 가르는 겁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다양한 양식이 나타나는데, 그 양식이 나타나는 사회 경제적인 배경과 사회 경제적인 배경을 이루는 저마다 다른 공동체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습니다.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의 기원과 의미-한철연 신년회 기념 강연회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의 기원과 의미-한철연 신년회 기념 강연회

강연 : 이정호(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정리 : 강지은(ⓔ시대와철학 편집주간)

 

 

1월 9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정식 신년회 행사에 앞서 우리 학회 이정호 선생님의 강연이 진행되었다. 2시간여 걸쳐 진행된 이날 강연은 새로 단장한 학회의 강연장에서 개최되었으며 3시 시작부터 강연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열기가 신년회의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이정호 선생님의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의 핵심은 ‘다의 공존과 조화의 추구’이다. 정치를 바라보는 이러한 입장은 놀랍게도 현대의 정치철학이 추구하는 이상과 일치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철학은 생명력 있는 모습으로 더욱 우리에게 다가온다. 강연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를 통해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자연을 비롯한 환경적 조건에 대한 그리스인의 운명의식이다. 신들조차 이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바다(水)는 포세이돈의 것이고 하데스에게는 그가 주재하는 사자(使者)들이 일몰지를 넘어가서 서쪽의 어두움 속에 거주하느냐 또는 지하에 거주하느냐에 따라 ‘안개 짙은 어둠’ 즉 대기(風)나 대지(地)가 배당된다. 이 모든 것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자 그들 자신의 몫이다. 이와 같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건 신이건 모든 개체의 능력과 실존을 한계 짓는 운명에 대한 심원한 믿음을 발견한다.

 

사진 : 강지은
새단장한 한철연 강연장에서

신화와 철학에서 발견되는 고대 그리스인의 정치사상적 단초

 

이와 같은 우주 탄생과 관련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는 단순히 우주생성의 비밀 이상의 사회적 역사적 삶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의 대응 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대응의식은 기원전 6세기 무렵에 이르러 점차 정교하게 되면서 마침내 신화적 단계를 넘어서 우주, 자연의 근본 구조를 그 자체로서 탐구하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정호 선생님은 신화적 세계관에 나타난 고대 그리스인들의 근본 의식은 철학사가들에 의해 최초의 철학자로서 재평가되고 있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을 통해 놀라울 정도로 계승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주생성의 근원으로서 무한정자(apeiron)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따뜻함과 차가움, 메마름과 습함(온냉건습)이라는 대립적인 원시 질료적 요소들이 생겨나고 그 요소들의 대립적 성질로 인한 상호침식과 운동 및 변화에 의해 가시적 세계만물이 생성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주생성에 관한 신화적 서술을 철저히 질료적 힘에 의한 우주론적 논의로 치환하고 있을 뿐,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전통 그리스의 정신은 온전한 모습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에 나타난 자연철학적 세계관 역시 신화적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 인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운명의식과 연관되면서 자연학적 탐구의 윤리학적, 사회적 연관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두 말할 나위 없이 그 운명의식이란 신화에서 운명의 신 모이라가 각 신에게 할당된 고유의 영역, 경계, 지위, 역할 및 권한의 분배를 표상하듯이, 사회공동체적인 측면에서도 분할, 영역, 할당된 몫의 불가침적 보존 내지 질서에 대한 의식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의 독특한 ‘운명’의식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할당된 몫이란 오늘날 개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 간의 이해관계에서 성립하는 배타적 소유 내지 권리라기보다는 환경세계 속에서 구성원들의 공동체적 삶의 보존을 위한 역할과 능력의 분담과 그 분담된 다양한 역할의 상호존중과 수행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해석하자면 그것은 고대적 삶의 기초로서 농업생산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협동적 질서(taxis)와 절제(sophrosyn?)의 구현 다시 말해 공동체에서 자신의 능력과 소질에 맞추어 할당된 역할의 적극적인 실현과 그것을 통한 공동체적 자치와 자기 보존 구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폴리스적 시민이 권리이자 의무로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명예와 자유의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자유는 근대가 지향하는 소극적 자유와 거리가 멀다. 이정호 선생님은 이런 관점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운명의식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종교적 또는 역사적, 시간적 좌표 상에서 필연으로 묶여진 운명론적 개념이 아닌 가능성의 영역에서 능력을 다해 지켜야할 한계를 표시하고 당위를 견인하는 공간적 개념이자 윤리학적, 정치철학적 개념이라고 정리한다.

 

대규모 농업생산과 순수한 사유의 관계

 

사진 : 강지은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으로 대표되는 엘레아학파는 우리가 그동안 상식적으로 당연시되어온 운동과 여럿을 부정하고 자연세계를 그 자체로 정지된 하나로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자연세계를 운동과 변화과정의 총체로 여기던 기존의 자연관을 송두리째 뒤엎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의 기초에는 순수한 사유에 의한 논리주의가 자리잡고 있었고 기존의 자연학과 자연철학적 성과는 논리주의 앞에서 모두 부정되었다.

이미 질료에서 분리된 순수사유는 오직 공간적 성격만 갖는 것이어서 시간성과 결합된 일체의 질료적 운동성과 변화는 그 자체로 순수 사유로 해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사유로 해명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의 설명방식에 입각해 있는 한 토끼가 거북이를 따라잡거나, 화살이 날아가는 현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즉 ‘사유가 곧 존재’인 순수사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플라톤에 의해 운동이 공간적 사유로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질 때까지 이러한 논리주의의 위세는 상식적으로 경험적인 자연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지적 열등감과 무력감을 안겨주면서 그리스의 지적 풍토를 한 동안 지배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추상적 사유의 배경은 농업생산에 있다. 엘레아학파가 태동한 크로톤 지방은 그리스 본토와는 달리 대평원지역에다 지중해 교통의 요지여서 대규모 관계농업이 발달했다. 이러한 농업생산량의 확대는 관리계층 및 상업계층을 발달시켰고 그 핵심에 속한 엘리트들은 소규모 농업생산사회의 엘리트보다 훨씬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유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토끼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적 사유

 

기원전 5세기에 들어서자 아테네 지식인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엘레아학파에 의해 파기된 질료적 자연 사물들과 그것들이 운동변화에 대한 해명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에서 대두된 대표적인 고전기 아테네 사상이 곧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주창된 원자론이다. 원자론자들의 기본적인 관심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엘레아의 비판에 의해 운동도 변화도 없이 정지해버린 세계를 끊임없이 운동하면서도 없어지지 않는 현실로 구제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단 엘레아적 논박을 피하기 위해 엘레아학파가 주장한 일자의 성격과 똑같은 분할자체가 불가능한 원자를 우선 상정하되, 동시에 엘레아학파들에 의해 파기된 다자성과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원자의 수를 무한하게 상정하고 그것들이 움직일 허공(kenon)을 상정하였다. 그리고 그 허공마저 비존재라는 논박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주저 없이 엘레아 기준으로 이른바 ‘없는 것(to m? on)’인 허공 또한 물체 못지 않게 모두 실제로 있는 것(ousia)이라고 선언하였다.

요컨대 운동과 질적 변화의 현실적 실재를 부정할 수 없었던 그들은 원자와 허공의 존재를 통해 다와 운동을 구제하였고 이미 엘레아 근본주의 앞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버린 성질의 실재성은 포기하되 그 성질을 원자들의 부대현상으로 대체하였다. 그리고 운동의 원인을 해명하기보다는, 허공의 도입을 통해 운동을 설명이 필요없는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던 전통적 확신을 복원하였던 것이다.

 

일자성과 다자성, 조화와 공존의 문제

 

신화적 세계관에서 플라톤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의 자연적인 것(physis)과 인위적인 것(nomos) 내지 자연학적 관심과 윤리학적 관심을 정치철학적으로 추적해 볼 때 거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우선 자연학적 논의의 측면에서 보면 자연의 본질에 관한 형이상학적 물음으로서 일관되게 일자성과 다자성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사회 윤리학적 정치철학적 시각에서 보면 그리스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도시국가들 간의 공존과 질서 또는 하나의 도시국가 내에서 각기 다른 계층 내지 사람들 간의 조화와 공존에 관한 문제라고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형이상학과 존재론은 ‘생존의 존재론’이고 본질적으로 정치철학적 윤리학적 성격을 갖는다. 일과 다의 문제, 정지와 운동의 문제는 우주론과 자연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이미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상이한 세력들 간의 갈등과 조화, 분열과 통일이라는 정치 사회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고, 자연학과 윤리학을 통일하는 하나의 원리로서 제시된 다의 공존과 조화의 원리 또한 두말할 나위 없이 기원전 5세기 지중해 연안에 흩어져 살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이상적 삶의 원리이자 사회적 관계형성의 근본 원리였던 것이다.

강연이 끝난 후 40여분간 진행된 질문과 응답 시간이 이어졌으며 예정된 시간을 넘겨서도 마치지 못하여 아쉬움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