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1)[대안도덕교과서]-2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1)[대안도덕교과서]-2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행복

“게임을 더 하고 싶은데 엄마가 못하게 해요. 그래서 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하고 그만둔다고 엄마에게 말했지만, 실제로 인터넷 게임을 그만두고 싶지 않는 것이 저의 솔직한 욕심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게임을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하거든요. 게임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은 생각대로 따로 놀고 몸은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단 말이죠.” 이렇게 사람들의 욕망은 욕망을 실현하려는 대로만 움직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욕망을 일으키는 마음과 욕망을 누그러지게 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마음의 갈등이 일어나는데, 그런 갈등이 바로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감정입니다. 게임을 무작정 못하게 막으면 화가 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게임 아이템을 많이 잃어서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한편 댄스 동아리에서 춤을 추면서 희열을 느낄 때도 있으니, 항상 화만 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또래들과 어울려 놀 때 마음이 편해지지만 집에 들어와 부모로부터 간섭과 핀잔을 받게 되면 마음이 불편해 집니다.

편안한 마음이 지속되면 행복해지지만, 불편한 마음이 지속되면 고통에 버금갑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고통보다 행복을 원합니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은 어른들도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행복이 무엇일까요? 더 쉽게 말해서 어떤 감정이 행복을 일으킬까요? 아니면 행복의 실체가 무엇인가요? 불행히도 이런 질문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감정이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이든지 그 감정을 걸러내고 아우르고 다스려서 표현하는 방법 안에 행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행복의 실체를 직접 찾으려는 것도 처음부터 잘못된 시도인 것입니다. 동물원 침팬지에게 바나나를 주면 바나나 껍질을 잘 까서 먹습니다. 영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침팬지에게 양파를 던져주면 껍질을 가서 먹으려고 합니다. 껍질을 깠더니 그 속에 다시 껍질이 있어서 껍질을 또 벗깁니다. 그 안에 껍질을 계속 벗기면서 결국은 나무 것도 먹지를 못하게 됩니다. 침팬지의 영리함은 바나나에 통했지만 양파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모른 것입니다. 행복도 양파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양파의 행복을 모르고, 어떤 감정을 벗겨내어야만 그 안에 진짜 행복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오해를 하는 어른들이 많습니다. 행복이란 감정 저 깊이 숨겨진 부동의 실체가 아닙니다. 겉에 드러난 감정을 풀어가는 표현과 방법 그 자체가 바로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깨달음은 생각이 고정된 어른보다 약간의 착오는 있을지언정 생각이 유연한 청소년에서 더 많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인터넷 게임을 과감하게 멈추고 혼자 힘으로 몇 달 동안 방치되었던 내 책상을 정리한다고 칩시다. 책상 정리를 내 손으로 끝내고 나면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해 대견한 생각이 듭니다. 뿌듯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감정이 바로 행복의 시작점입니다. 물론 그런 감정도 계속 이어가지 않으면 다시 게을러지거나 인터넷게임으로 또 빠질 수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해 보기로 하죠. 인터넷 게임에 빠지게 되더라도 잠시라도 행복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터넷 게임에서 이외의 상황에서 아이템을 획득했을 때, 작년 겨울에 입었다가 보관해 둔 내 잠바 안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이 나왔을 때, 어제 밤 당일치기로 찍어서 공부한 문제들이 오늘 시험문제에 그대로 나왔을 때, 나는 매우 기쁨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행복이 아니라 일시적 즐거움입니다. 일시적으로 즐거운 감정을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감정을 갖게 되는 행동을 꾸준히 연습해야 합니다. 연습하지 않으면 아무리 대단한 성인군자라도 결국 게을러지고 순간 감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청소년이 어른들보다 자기 충동에 빠지게 될 우려가 더 크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언뜻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청소년은 가족, 교사, 또래 등에서부터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매체 등에 이르기까지 주변 환경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현상은 성장과 발달의 자연스런 과정입니다. 그래서 자기충동이라기보다 자기를 변화시키는 힘이 더 크다고 해야 옳은 말입니다. 자기충동이 더 크다는 말을 달리 표현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을 크게 성장시킬 가능성이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 청소년들의 장점은 행복으로 가는 행동을 연습할 시간이 어른들보다 훨씬 많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가능한지 더 말해 봅시다.
 

 

2. 책임과 자유

나의 감정과 욕망 그리고 행복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나의 욕망과 행복은 나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감정이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앞서도 말했지만 행복의 상태가 계속 죽 이어져서 욕망의 감정에 너무 흔들리지 않는 내가 바로 행복한 나입니다.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욕망의 감정은 평생 나와 함께 하며, 욕망의 감정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이기 위하여 본능을 넘어서는 윤리감정이 더없이 중요합니다. 윤리적 감정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를 따지는 이론들이 대학교 윤리학 교재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런 복잡한 이론들을 여기서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간단히 제목만이라도 아는 것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 윤리란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윤리학으로서 서구에서는 근대 나아가 현대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편 윤리의 법칙이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여, 우리는 그것을 쫒으면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이론으로서 그 유명한 칸트의 윤리학입니다. 이런 이론들을 다 나열할 수 없습니다만 기존 윤리학의 공통점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다지는 일이었습니다. 책임을 묻기 위하여 나의 자유의지에 다라서 행동을 했는가를 먼저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갓난아기 내 동생이 밥그릇을 엎어도 혼나지 않는데, 나는 밥알을 조금 흘려도 아빠에게 혼줄이 나는 것입니다. 나는 갓난아기 내 동생보다 책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나는 갓난아기 동생보다 자유의지를 담은 행동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윤리학은 책임과 자유의 문제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갓난아기 내 동생은 나만큼 책임질 일이 없지만 한편 내 동생은 나보다 자유롭지도 못한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내가 아끼는 잠바를 물어뜯어서 나는 속상합니다. 나는 화난 김에 강아지 콧등을 한 대 쥐어박을 수는 있지만 손해배상하라고 강아지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 집 강아지는 그만큼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동물원에서 키우던 호랑이가 사육사를 물어서, 사육사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호랑이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많았습니다. 냉정하게 분석하여 말한다면 호랑이는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살해했다면 당연히 책임을 물어서 법정에 세워야겠지만, 호랑이에게는 그런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호랑이는 자유가 없으며 사람에게는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유를 원합니까 아니면 철망에 갇힌 노예나 동물원의 노리개가 되기를 원합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우스울 정도입니다. 강아지도 목줄을 메어서 줄을 억지로 끌면 깨갱거리면서 싫어합니다. 그런 강아지 목줄을 풀어주면 좋아라하며 신나게 뛰어다닙니다. 하물며 사람은 더 큰 자유를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동시에 그만큼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와 책임의 얽힘이 바로 윤리학의 기본틀입니다. 윤리학의 고전들은 거의 이런 식으로 윤리이론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칸트라는 철학자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칸트의 윤리학을 잘 몰라도 괜찮습니다만, 바로 그 칸트가 자유와 책임을 연결시킨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책임과 자유의 문제를 동기부여라는 관점에서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자유라는 개념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우리는 자유의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복잡하지 않게 그냥 단순히 생각하면 됩니다. 나의 행동이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했다면 그것을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마의 잔소리나 무서운 선생님의 명령에 의해서 혹은 학교 선배의 강압에 의해서 내가 행동을 했다면, 그 행동은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즐겁지도 않고 별 효과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일 때 그 나의 행동은 즐겁고 효과도 크다는 것쯤은 어린아이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청소년이 그렇게 하도록 어른들이 놔두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단순히 청소년 개인의 문제이기보다 한국 교육 전체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육의 문제를 개선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주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자유롭고 즐겁고 큰 효과가 나도록 하는 길을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 안에서 행동의 동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원하는 행동을 남이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서 할 수 있어야만 바로 앞서 말한 나의 행복한 상태를 갖게 되며 비로소 행복해지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자발적인 동기가 중요하다는 말쯤이야 누구나 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구태의연하게 다시 반복하는 것 같아 필자도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어서 말해 봅시다. “타인의 압박과 관습 그리고 명령 때문에 내키지 않는 일,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다면 과감하게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라고 말한다면 과연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나요? 물론 쉽지 않지만 그런 용기를 항상 연습하는 모습이 바로 청소년의 본능입니다.
 

 

3. 긍지와 인정욕구

용기의 감정은 청소년의 특징이며 장점입니다. 어른들은 직장, 동창, 혈연 등 사회적 관계들을 이미 많이 가지고 있어서 자신을 변화시킬 용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 청소년은 아직 사회적 연관관계를 적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래의 변화와 가능성에서 무한합니다. 친구들이나 대중매체의 아이돌 스타로부터 어떤 때는 문학소설이나 영화로부터 간혹 짜릿한 감성적 메시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감성메시지는 나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와 닿는 동기부여가 생기면 우리들은 어서 빨리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라는 말이 있듯이 행동은 신중함이 필요하고 신중하지 않으며 행동의 용기가 자칫 무모함으로 갈 수 있습니다. 자꾸 머뭇거리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친 무모함도 문제가 생깁니다. 머뭇거리는 주저함과 일시적인 자극에 의해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갈등을 합니다. 실은 그런 갈등의 현실은 바로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우리는 갈등이 없는 그런 인간상이 아니라 갈등을 풀어가려는 마음의 과정에서 윤리적 인간을 형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판단을 위하여 중용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중용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중용이라는 뜻은 이것저것을 섞어 놓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용이란 일차적으로 내가 왜 이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과정을 반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그런 나의 반성을 거쳐서 판단과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이 바로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마음이 커가는 징표입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동기부여를 위하여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믿음을 먼저 필요로 합니다. 자기가 갖는 생각을 자기가 믿지 못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절대 옮길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자부심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자기도취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자기도취보다는 자부심이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동기부여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자기도취는 자신이 남과의 관계망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모른 채 행동하는 양상입니다. 자기도취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관계없이 제멋대로 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자기도취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독선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믿음은 반성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런 자기도취에 빠진 생각에서 시작된 행동은 실효성도 없으며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결국 반성이 없는 믿음은 매우 위험스러운 생각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나의 믿음은 남의 믿음과 충돌되는지를 세심하게 둘러봐야 합니다. 반성된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한 생각이 자부심입니다. 자부심을 통해서 이룬 행동은 그만큼 실효성도 높고 남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좋게 해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만족도도 높아집니다. 결국 더 높고 뜻있는은 자부심을 더 쌓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행복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만족을 높이고 타인에게도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자부심을 우리는 긍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긍지를 갖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일상의 연습은 자아를 형성하는 청소년기의 가장 중요한 과정입니다. 자부심이 지나치면 자기도취에 빠질 수 있듯이, 긍지가 너무 지나치게 넘치면 오만이 됩니다. 한편 자부심이 없으면 자기불신이 되듯이, 긍지가 부족하면 비굴함이 됩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비굴함을 느낄 때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에게 비굴함을 갖게 되면 더 큰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 즉 자부심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느낄만한 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서, 자신을 의심하는 청소년이 의외로 많습니다. 학교성적 등과 같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획일적인 기준 때문에 생긴 사회적 문제들입니다. 기성세대 혹은 대중매체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기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 자신을 정말 깊이 있게 되돌아본다면, 나는 내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학교성적은 떨어지지만 만화를 잘 그리는 자부심이 나만의 긍지입니다. 키는 작지만 나의 다부진 성격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도전정신을 남들보다 더 키울 수 있는 나만의 긍지도 있습니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그룹에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게임프로그램 제작에 일찍 발을 들여놓은 나만의 긍지도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자신을 믿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나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를 믿음의 주체성이라고 합니다.

물론 긍지가 넘쳐서 오만해진다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정말 나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나는 오만함도 비굴함도 갖지 않고 적절한 자부심인 긍지를 갖게 될 것입니다. 청소년은 그런 감정의 시소를 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비굴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오만한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지만 그래도 긍지를 찾아가는 변화의 모습이 청소년의 자랑입니다. 비굴함과 오만함의 시소를 타면서 나는 긍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청소년의 본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고나면서 긍지를 갖는 사람, 타고나면서 오만하거나 비굴한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긍지는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과 연관합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사람의 가장 중요한 본성은 바로 남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이를 도덕철학에서는 인정요구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뻔히 속보이고 얄팍한 방식으로 자신을 잘 낫다고 표현합니다. 자신을 남에게 돋보이려고 하는 지나친 태도를 간혹 우리는 접합니다. 그런 지나친 태도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려 합니다. 인정욕구가 지나치면 상대방의 인정요구를 침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정요구는 오만하거나 비굴한 욕망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인정욕구는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내가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으면 먼저 나 자신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야 합니다. 어떤 경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자신에 대한 긍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나 스스로 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남들은 나를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내가 나를 믿지 않는데 그 어느 누가 나를 믿어줄 수 있겠습니까? 긍지와 용기, 믿음과 인정, 이 모두 통일된 인격체로 향한 도덕감정의 기초입니다.
 

 

4. 겸양

청소년은 수줍음이 많습니다. 수줍음이란 원래 미지의 세상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동양식에서 나왔습니다. 청소년의 수줍음은 어른으로 되는 아주 중요한 감정단계입니다. 부모 밑에서만 자라다가 사회로 나가면서 미지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려는 정신적 면역제인 것입니다. 수줍음이란 일종의 사회화 과정입니다. 즉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감정의 단계이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대표적인 감정의 성장입니다. ‘만약 내가 이러 저러하게 행동을 할 경우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우려심이 지속되는 감정형태로 나타납니다. 거꾸로 말해서 수줍음은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되어가는 소중한 감정입니다. 수줍음은 잘못된 일에 대하여 수치심을 갖는 마음의 시작점입니다. 그래서 내가 수줍음을 탄다고 해서 나 자신을 나쁘게 학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수줍음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서 남에게 양보하며 남에게 베푸는 마음을 키우는 겸양의 시작입니다. 2,500년전 고대중국의 철학자 맹자의 사단설을 들어 보셨나요?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마음을 4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4 가지입니다. 측은지심이란 남의 불행을 보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수오지심이란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사양지심이란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입니다. 시비지심이란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줍음이란 결국 수오지심과 사양지심을 다 합친 마음의 씨앗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수줍어하는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수줍음을 전혀 타지 않는다는 말은 타인의 감정이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행동습관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파렴치하다고 부릅니다. 염치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파렴치하거나 염치가 없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정말 힘들게 합니다. 물론 수줍음의 감정 상태가 너무 지나치면 아무 행동도 못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타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고려하여 행동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부작용이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감정이 습관적으로 되면 나의 생각을 내 안에만 가두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나를 이 세상에 표현할 기회를 잃는다는 뜻이다. 그런 기회를 잃었기 때문에 자칫 나 자신을 스스로 자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학에서 벗어나 나의 수줍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생활습관을 들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떻게 하느냐고요? 앞서 말했듯이 자신을 믿고 자부심을 스스로 만들면 우리 모두 수줍음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을 자동적으로(선천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수줍음과 파렴치의 양단에서 겸양의 미덕을 찾을 수 있는 주인은 오로지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의 장점입니다.

제 5 장 자본의 일반 공식의 모순[자본론강독]-13

제 5 장 자본의 일반 공식의 모순

정리 : 김성심

 

 

4장에서는 단순상품유통(C-M-C)이 자본으로서의 화폐유통(M-C-M)으로 전환한 모습을 살핌으로서 자본의 일반 공식을 이끌어냈다.

 

제 5 장 자본의 일반 공식의 모순

 

자본으로서의 화폐유통이 단순상품유통과 구별되는 점은 판매와 구매의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화폐로 상품을 구매해 다시 판매함으로써 화폐를 얻은 자본가는 상품을 A에게서 구매하고 다음에 그것을 B에게 판매하지만, 단순한 상품소유자라면 상품을 B에게 판매하고 다른 상품을 A로부터 구매한다. 따라서 두 경우의 A와 B에게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A. 단순상품유통이 가치의 증식을 허용하는가,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순서를 거꾸로 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단순상품유통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단순상품유통이 [거기에 들어가는] 가치의 증식[따라서 잉여가치의 형성]을 그 성질상 허용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연구해 보아야만 한다.”(203쪽)

우선 단순상품유통을 사용가치의 측면에서 본다면 “교환은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거래다”라고 말할 수 있다.(204쪽) 양쪽은 모두 그들 자신에게 사용가치로서는 쓸모없는 상품을 양도하고, 자기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얻을 뿐만 아니라 각자가 모든 상품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환가치의 측면에서 본다면 교환은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건 아니다. 교환 이전에 이미 상품은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교환을 통해서 증대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상품교환은 그 순수한 형태에서는 등가물끼리의 교환이고, 따라서 가치증식의 수단으로 될 수 없다.”(206쪽)는 것을 알게 된다.

B. 등가로 교환되지 않는 경우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 판매자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특권에 의해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예컨대 100의 가치가 있는 것을 110으로 즉 그 가격을 ‘명목상’ 10% 높여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판매자는 10의 잉여가치의 형성을 가져왔는가? 그렇지 않다. 이유는 그 판매가가 다시 구매자로 되어 110에 구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잉여가치의 형성, 따라서 화폐의 자본으로서의 전환은 판매자가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판매한다는 것으로써도 또 구매자가 상품을 그 가치 이하로 구매한다는 것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다.”(209쪽)

“그러므로 잉여가치가 명목상의 가격인상으로부터 생긴다든가 [상품을 가치보다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는] 판매자의 특권에서 발생한다고 하는 환상을 철저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판매하지 않고 구매만 하는 따라서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계급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계급의 존재는 우리가 지금까지 도달한 입장 즉 단순상품유통의 입장에서는 아직 설명할 수 없다.”(210쪽~211쪽)

“그러므로 우리는 판매자는 동시에 구매자이며, 구매자는 동시에 판매자라는 상품교환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기로 하자.”(211쪽)

“이상의 설명으로부터 왜 우리가 자본의 기본형태[즉 근대사회의 경제조직을 규정하는 자본형태]를 분석하면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옛날로부터의 자본형태인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3권 제4편 참조?”(214쪽)

“지금까지 밝힌 대로 잉여가치는 유통에서 발생할 수 없으므로 그것이 형성되려면 유통 그 자체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유통의 배후에서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215쪽)

C. 자본 일반 공식의 모순은 무엇인가?

 

“자본은 유통(의 내부)에서 발생할 수도 없고, 또 유통의 외부에서 발생할 수도 없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해야 하는 동시에 유통의 외부에서 발생해야 한다.”(216쪽)

“화폐의 자본으로서의 전환은 마땅히 상품교환을 규정하는 법칙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등가물끼리의 교환이 당연히 출발점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애벌레 형태의 자본가에 불과한] 화폐소유자는 상품을 그 가치대로 구매해 그 가치대로 판매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과정의 끝에 가서는 자기가 처음 유통해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유통으로부터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나비로서의 성장[즉, 완전한 자본가로의 발전]은 반드시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며 또 그러면서도 유통영역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조건이다.”(216쪽~217쪽)

에크리[한철연 세미나-라캉분과]

에크리[한철연 세미나-라캉분과]

 

김우철(라캉분과 통신원)

 

1. 분과원: 이병창, 연효숙, 김상현, 신현주, 김형석, 김우철

2. 세미나 진행: 매주 월요일 3시 30분, 2시간 가량 (분과 결성한 지 2~3년 가량 되었음)

3. 세미나 내용: 라캉 텍스트 강독 (<세미나 11권>과 <리비돌로지>를 거쳐 현재 <에크리> 강독 중)

4. <에크리> : 라캉이 쓴 논문들 모음집으로서 라캉 이론의 핵심이 담겨 있는 저작.

라캉분과는 이 저작에서 “거울단계(The Mirror Stage as Formative of the I Function)”, “무의식에서 문자의 심급(The Instance of the Letter in the Unconscious)”을 거쳐 지금은 “모든 정신병 치료에 선행하는 한 가지 문제(On a Question Prior to Any Possible Treatment of Psychosis)”를 영어본으로 읽고 있는 중이다.

“모든 정신병 치료에 선행하는 한 가지 문제”는 라캉이 1955~6년에 진행한 세미나 3권(<정신병(The Psychoses)>)의 핵심 내용을 포함하는 중요한 논문으로서, L 도식과 R 도식에 의한 주체의 설명, 은유의 일반 공식,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아버지 이름(부성적 은유)의 기능, 정신증과 아버지 이름의 폐제(foreclosure)에 대한 설명, 그리고 자신의 망상증 경험을 출간한 정신병 환자 슈레버 판사의 자서전을 임상분석의 사례로 다루고 있다.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발전한 문자[철학을다시 쓴다]-24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발전한 문자[철학을다시 쓴다]-24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난번에 제가 이야기했죠.?지역 탐사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거래를 원만히 성사시켜야 하니까 다른 나라의 언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이렇게 해서 여러 나라 사이의 문화 융합이 일어납니다.?가치관이나 종교형태가 저마다 다르고 기록하는 방식들도 이집트사람이 기록하는 방식과 중국 사람이 기록하는 방식이 다 다른데 각 지역의 특수한 언어를 아우를 수 있는 일반 소통구조,?사람들 의식에 어떤 공통치가 있느냐 하는 것을 연구하다 보니까 언어학에 대한 관심과 일반 문법에 대한 연구들도 생겨나죠.

여러분들 가운데?‘뿌리 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본적이 있습니까??그 잡지를 보면?‘1976년’을 글자로 어떻게 표기했습니까??그냥 우리 한글로?‘천구백칠십육년’이라고 표기했습니다.?사람들이?‘6’을 써놓고 거기에 월을 붙일 때‘유월’이라고 읽어야 하는데, ‘육월’이라고 읽고, ‘3살’이라고 써놓고?‘세살’이라고 읽지 않고?‘삼살’이라고 읽는 일이 있습니다.?아라비아 숫자로 쓰인 글을 보고 하나,?둘,?셋,?넷,?하루,?이틀,?사흘,?나흘 이렇게 읽지 않고 일일,?이일,?삼일,?이런 식으로 읽는다고 개탄하는 분을 봤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답 없음)?사실 아라비아 숫자를 중국식으로 읽는 거죠.?그렇지 않습니까??일,?이,?삼,?사,?오,?육,?칠,?팔…?중국 한자를 우리식으로 발음한 것이죠.?아라비아 사람 탓이 아니죠??그리고 아라비아 숫자를 아라비아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안 읽죠??그러면 그것을 우리 방식으로 읽도록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거나 그렇지 않으면?‘뿌리 깊은 나무’처럼 정직하게 우리식 한자음인 천구백칠십육년으로 써야죠.?그런데 그걸 왜 아라비아 숫자로 쓰지 않았냐고 야단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왜 야단치겠어요??습관이 안 돼서 눈에 안 들어온다는 거지요.?이게 시각을 통해서 정보가 한순간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 건데,?이것은 도시사회에서 청각문화보다 시각문화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도시사회에서 문자가 발명되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정보가 시각화된 형태로 남아야 서로 믿고 의사소통을 원만히 할 수 있다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사람들이 시각 정보를 신뢰하고,?유기체와 함께 생겨나고 함께 사라지는 청각 정보에 대해서는 믿음을 잃었다는 것은 근본적인 사회변화의 출발을 알리는 현상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이집트를 방문한 그리스 사람들에게 이집트 사람들이?‘네오이’(neoi)라고 부릅니다. ‘네오이’라는 말이 뭐냐면?‘풋내기들’, ‘젊은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어린것들’이라는 뜻도 있지요.?문화의 지층을 두고 말하자면 표면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삶과 땅속 깊이 뿌리내린 사람들의 삶의 결이 다르다고 할까요??아마 이런 사실을 두고 한 말일 겁니다.

제가 초기에 그 이야기를 했지요.?생명의 시간,?모든 생명체의 몸을 관통하는?(의식이 있는 생명체는 의식도 관통하겠죠.)?그런 생명의 시간 가운데서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나누어지게 되는데,?농경민의 의식 속에서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하나였습니다.?달과 해의 순환이 자연의 시간을 규정짓는 것들이어서 자연의 시간은 순환하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하루해가 떴다 지면 하루가 지나고,?날마다 해는 동쪽에서 떠올랐다가 서쪽으로 지고,?달이 차오르고 기우는 것이 되풀이되어 한 달이 되고,?이십사절기를 지내서 한 해가 되고,?이렇게 순환하는 시간의 질서에 맞춰서 사람이 살아갔기 때문에 자연의 시간은 농경민에겐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유목 생활을 시작하는 집단이 나타나게 되면서 인간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에서부터 조금씩 갈라서게 된다,?목초지를 찾아다니는 동안 항구적인 계절을 유지해야 가축과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도려내서 그것을 항구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그래서 유목민의 경우엔 인간의 시간이 자연의 시간과 더불어 병행해서 나타나는데 그것이 완전한 독립변수로서 자리 잡지는 못했다,?그런데 해안도시 사회에 들어서면서 자연의 시간은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고 인간의 시간이 독립변수가 된다고요.?이 시간의식의 변화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입니다.?여러분들이 현재 알고 있는 시계로 측정하는 시간,?유클리드기하학적인 공간,?이런 게 전부 인위적인 시공간입니다.?자연에 바탕을 둔 시공간이 아닙니다.?아이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에 나오는 우주공간도 자연적인 공간이 아닌 인위적인 공간입니다.?여러분들은 하도 많은 학자들이 떠들어대서 이런 공간들이 실재하는 걸로 착각하기 쉽지만,?그런 시공간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운동을 규제하는?‘정지하는 것은 정지해 있고 마찰이 없는 한 움직이는 것은 일정한 속도로 수평운동을 한다’(관성의 법칙). ‘무게를 지닌 것은 중력에 의해서 낙하 운동을 한다’(중력의 법칙).?이런 이론들 모두 실재하는 운동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법칙으로 보기 쉽습니다.?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제가 여러분들 귀에 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현대인들이 받아들이는 인위적인 시공간 개념은 실재하는 시공간을 반영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이 이야기는 서양의 과학체계를 뒷받침하는 모든 가정들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저로서도 아주 조심스러운 화제여서 시간이 있으면 나중에 더 자세한 보충설명을 하겠습니다.

 

금지의 윤리학에서 자유의 윤리학으로[대안도덕교과서]-1

금지의 윤리학에서 자유의 윤리학으로[대안도덕교과서]-1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청소년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결핍의 존재가 아니다

청소년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발전적 과정이다. 청소년은 어른이 아니지만 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자기 정체성이라는 말이 어렵지만 쉽게 말한다면 “나로서의 나다움을 갖고 나는 태어났다”는 뜻이다. 성숙함에서 볼 때 청소년은 어른만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다운 정체성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청소년 윤리학도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만약 어른이 청소년을 결핍된 존재로서만 일방적으로 다루려만 한다면, 그에 따르는 청소년 윤리학은 타이르고 훈계하고 지시하거나 못 하게하고 칭찬하거나 벌주는 등의 일방적인 규범윤리학이 될 것이다. 일방적 규범윤리학은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이기보다 어른을 위한 윤리학이 될 수 있다.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은 어른이 청소년을 주체적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은 청소년 스스로 미래를 찾아가도록 하는 범례를 제시하거나 청소년 스스로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게 하는 동반적 생활윤리학이다. 청소년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결핍의 존재인지 아니면 자기정체성을 지닌 존재인지는 어른이 청소년을 보는 관점이며, 이런 관점은 청소년 윤리학의 방향을 잡는 핵심이기도 하다.

 

2. 좋음, 착함, 선함

윤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착한 행동으로 이끄는 삶의 준칙이다. 이것이 윤리를 설명하는 언어적 정의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착하다는 것이 무엇이고 행동을 이끈다는 것에 대해서도 더 설명이 필요하고 그리고 삶의 준칙이라는 용어도 혹시 지나친 강령이 아닌지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행동을 자아내기 위하여 그런 착한 행동은 반드시 좋은 행동이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착하다는 것은 좋다는 것과 같은 뜻에서 나왔다. 영어로 말할 때는 다 같이 ‘굳’good이어서 별 문제없이 보인다. 그런데 우리말로 착한 것과 좋은 것을 말할 때 혹시 그 두 표현이 다른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선과 악이라는 대비된 말을 자주 들어보았을 것이다. 선이라는 표현은 추상적이어서 마치 저 높은 하늘에 존재하여 절대적인 도덕의 완성체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는 선도 역시 ‘굳’의 명사goodness로 쓰인 것이다. 영어로 말하면 다 하나거늘 우리말로 하면 ‘좋은’ ‘착한’ 그리고 ‘선善한’ 것처럼 다른 뜻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그 답을 말하자면 영어에서 ‘굳’은 사물이나 사람에게 같이 적용하여 사용하지만, 우리 국어에서는 ‘착한’이라는 표현은 사람에게만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이라는 수식어는 사람에게나 사물에게나 다 쓰고 있다. 윤리학은 사람의 행동을 문제삼는 것이지 물건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체계가 아니다.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좋음이란 결국 착함이 되어야 한다. 좋은 사람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다. 멋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 공부 잘 하는 사람, 건강한 사람, 인간관계에 능한 사람, 스포츠를 잘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착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여기서 어떤 학생이 질문할 수 있다. 어떤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착취되고 나쁜 일에 늘 이용당한다면, 그 착한 사람을 과연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가능하다. 그러난 이런 질문은 사물에 적용되는 좋음의 기준을 사람에 적용했기 때문에 생긴 의문이다. 이렇게 좋음을 해석한다면 인간을 위한 윤리학이 아니라 사물을 위한 윤리학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인간을 위한 윤리학을 원하며, 여기서는 특히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을 모색한다. 사람을 위한 윤리학에는 좋음이 바람직함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를 평소에 생각해 본 착한 사람은 나쁜 일에 자신을 이용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으로 자신을 이끌어야한다는 점에서 착하거나 좋거나 선이라는 말은 다 같은 뜻이다.

 

3. 바람직함

바람직한 행동은 또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것이 사람들 일반이 바라는 것과 같을 경우 나의 행동은 바람직한 행동이 된다. 여기서 사람들 일반이란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같은 경우 이를 바람직하다고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은 경험적 설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바람직함에는 대부분의 사람들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바라는 그런 바람직함이 있다고 한다. 그런 바람직함은 구체적인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형이상학 세계에 존재한다고 한다. 이런 설명은 형이상학적 설명이라고 한다. 우리는 경험적 설명을 먼저 살펴보려 한다.

경험적 의미에서 바람직하다는 것은 행동을 한 나 자신 말고 행동을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이 나의 행동을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기도 하고 혹은 나의 행동양식을 따라하기도 하는 그런 행동을 말한다. 그래서 바람직함이란 나의 특수한 관점이 아니라 남의 일반적 관점도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바람직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엄마와 갈등이 생겨서 한 동안 대화가 뜸할 때 엄마와의 화해의 표시로 엄마가 좋아할 듯한 행동을 시도한다. 평소 하지 않았던 방청소를 한다든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엄마가 나의 행동을 인정해주고 칭찬하다면 그런 나의 행동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바람직한 행동, 바람직스러움이라는 것은 내가 속한 가족, 학교, 지역, 사회, 국가가 일반적으로 원하는 것에 맞춰져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행동을 했지만 내 가족이나 학교 선생님은 의외로 나의 행동을 싫어할 수 있다. 이 경우 내가 좋아하는 행동유형과 집단이 원하는 바람직한 행동유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당황스러울 것이다. 다행히 우리 사회적인 인간은 성장하면서 사회가 원하는 바람직함에 대하여 자기의 행동유형을 조절해가는 탁월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조절의 연습기간이 바로 청소년기이다.

 

4. 모방하는 사회적 자아

청소년기는 바람직한 행동유형을 찾아가는 시기이다. 결국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라는 뜻이다.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바람직한 과정은 자기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판단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어른이 젖먹이 아이를 키우듯 벌과 상이라는 제도를 통한 일방적인 훈육의 윤리학이라면, 청소년 스스로의 자율적 판단으로 세상을 헤아리는 능력은 만들어지기 쉽지 않다. 아이들은 거울을 통해 어른을 바라보고 따라하면서 성장한다. 이미 교육은 학교 입학 이전부터 거울에 반사된 어른의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거울에 비춰진 모습은 고슴도치인데 토끼처럼 행동하라는 어른들의 강요된 윤리 책이라면 그런 윤리 책이 만 권이 된들, 우리들은 강요된 토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춰진 고슴도치를 자동적으로 따라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거울을 보면서 거울에 비춰진 모습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안다. 동물원에서 어느 정도 훈련된 침팬지 정도라면 모를까, 동물은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보고 자기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울을 향해 흥분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한다. 거울에 나타난 모습이 나임을 안다는 것은 인간다움의 기본이다. 그래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게 된다. 타인에 대한 의식은 윤리학의 출발이다. 왜냐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내가 다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첫째 나는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한다. 둘째 나는 남을 따라하면서 내가 성장한다. 즉 나는 남을 모방하면서 나의 자기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다. 그만큼 남을 모방하는 행위는 아주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아이는 어른을 모방한다. 우리 모두는 타인을 모방하면서 타인과 함께 하려는 의식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특히 우리 청소년은 어린이와 달리 또래와 어울리기를 시작한다. 또래 어울림은 이제 부모의 그늘아래서 벗어나서 스스로 정체성을 시험하는 중요한 성장단계이다. 또래집단의 특징은 내가 또래들의 친구들을 모방하면서 동시에 남의 모방을 서로 받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또래 모임의 출발은 나도 어엿하게 남의 거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데 있다. 나는 이제 남의 거울이 되어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비춰지는 지를 자각하고 그에 따라 나를 잘 가꾸어간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남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것을 나도 따라하게 되는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나의 사회화 과정이며 나의 나다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러나 또래와 어울리는 시간은 시행착오를 포함한다. 사회적 거울을 통해 타인에게 비춰지는 자아을 잘 닦는 시절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거울 자체를 부정하고 거울보기를 거부한다. 거울보기를 거부하는 시기에, 부모가 자기를 남과 비교하면 가장 싫고 가장 힘들어진다. 어찌보면 거울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다. 거울을 통해 자기가 남에게 비교당하는 그런 모습이 싫기 때문에 거울도 싫어진 것이다. 또래와의 시간은 이렇게 거울과 함께 하지만 어떤 때는 거울이 싫어지기도 하는 그런 기간이다. 즉 사회적 자아를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혼자서 만들어가는 나만의 자아를 추구한다. 모방을 통한 사회적 화해를 배우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만의 성곽을 쌓는 개성을 만들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조절과 타협을 배우며 나아가 주체와 개성을 키워가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뜻이다. 개성을 만들어가는 시간은 창의성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화해를 만들어가는 시간은 도덕을 위하여 정말 중요하다. 사회적 자아와 창의적 자아를 결합시키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의 미래이기도 하다. 모방하기와 개성쌓기의 행동양식을 배워가는 통로가 바로 청소년 윤리학이다.

 

5. 규범은 절대적인가

그런데 윤리가 딱딱하면 윤리는 사람 행동을 바꿀 수 없다. 윤리적 규범, 윤리 행동강령이 윤리적 강요로 된다면 너무 무서워 겉으로는 응하겠지만 속으로는 상황을 피할 궁리만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응대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윤리는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이어야 한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 같은 유명한 철학자는 윤리적인 마음이 원래부터 사람 마음속에 구비되어 있어서 자발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동양의 맹자 역시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누구나 다 자동적으로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고 말했다. 강요된 윤리가 아니라 상황을 잘 맞추어준다면 자동적으로 윤리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은 그런 마음이 속에 깊이 감춰져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평소부터 생활 속에서 윤리적 행동규범의 연습이 필요하다. 윤리적인 마음 혹은 측은한 마음이 곧 올바른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측은함을 느끼는 마음이 나의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는 생활의 연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올바름과 선함이 같은 것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올바름 역시 바람직함처럼 나 자신만의 문제이기보다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많은 여러 윤리학자들은 말한다. 철학적으로 반성한다면, 한 특정한 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정치지도자들이 올바른 행동의 규범을 지나치게 많이 가르치려 든다면 그 올바름이란 반드시 좋은 윤리가 아닐 수도 있다. 정말 올바른 행동 혹은 올바름이란 좋음이나 선한 행동에서 자동적으로 유발되기 때문에 억지로 가르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문명인으로서 올바른 행동양식은 상호간 다양한 약속들의 체계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약속을 존중한다는 행동규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길거리 신호등 지키기, 껌밷지 말기에서부터 인터넷 에티켓이나 공공장소에서의 금연, 전철안의 사회적 예절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행동규범은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 십년 전에는 식당에서 흡연이 부정한 것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 공공장소 흡연은 옳지 않은 행동의 표본이다. 시대와 문화의 차이에 따라 올바름의 기준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착함이나 좋음의 기준도 문화적 차이에 따라 바뀌는 것인가? 이에 대한 생각은 윤리학자마다 다를 수 있다. 우리 책 본문에서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6. 즐거운 윤리 : 자유 윤리학

결국 외부에서 강요된 딱딱한 윤리보다 내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윤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외부로부터 강요된 윤리를 종속윤리학이라면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윤리를 자유윤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자유윤리학을 내 삶의 토대로 만들어야 한다. 자유윤리학을 위하여 윤리규범에 따르는 나의 행동은 즐거워야 한다. 규범에 따라서 행동하기는 하지만 나의 행동이 억지스러워 짜증나기만 한다면 그런 윤리는 진정한 윤리행동이 아닐 것이다.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고통일 뿐이며, 이런 종류의 고통을 피하려는 것은 인간의 성향이다. 짜증나지 않는 윤리는 결국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결정한 행동을 하는데서 만들어질 것이다. 짜증나는 윤리보다 즐거운 윤리를 추구하는 것도 역시 사람의 상식적인 성향이다. 즐거운 윤리를 인생에서 구현하는 것이 곧 행복의 열쇠이다.

즐거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즐거운 상태란 고통이 적거나 거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아픔과 즐거움 사이에는 칼로 베듯 선명한 구획이 없다. 즐거움을 갖기 위하여 그 전에 아픔이 동반되는 경우도 있다. 청소년에서 청년에 이르는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갈등과 고민을 한다. 방황과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기정체성을 조금씩 확보해간다. 그런 아픔을 뚫고 새로운 즐거움이 잉태될 수 있다. 현재의 아픔이 아프더라도 미래의 즐거움이 예상되고 이 아픔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이 아픔은 아픔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변신한다. 반면에 혀에 달콤한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충치와 당뇨 그리고 비만의 원인이 된다면 그 달콤함의 즐거움은 고통의 씨앗이 될 것이다. 즉 즐거움과 아픔의 차이는 내가 스스로 선택한 나의 자율적 행동에 달려있다. 다시 말한다면 나의 짜증은 내가 하기 싫은 것은 억지로 하기 때문에 생긴 고통의 감정이지, 그 행동을 유발한 대상에 짜증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종속 윤리학에 따르는 나의 행동은 아무리 선하고 바람직하고 올바르게 보여도 즐겁지 않으며, 결국 나의 미래를 행복하게 설계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이 약간은 힘들고 어렵고 아파도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대로 행동하는 그런 자유윤리학에 수반하는 행동은 결국 즐거움을 자아내게 한다.

무어(G. E. Moore 1873-1958)

무어(G. E. Moore 1873-1958)

올바름과 바람직함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행동규범이라면 좋음과 착함 그리고 즐거움 등은 나의 주체적 자유를 유발하는 심적 동기와 맞닿아있다. 무어(G. E. Moore 1873-1958)라는 20세기 초 유명한 윤리학자가 있었다. 그는 윤리학의 많은 기준들이 자연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좋은 사과라고 말할 때 ‘좋음’이라는 것이 마치 사과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음, 착함, 선함은 곧 자연적인 대상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 안에 있는 심리적 판단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미적인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이란 어디에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실제로 나의 감정이 어떻게 발현되는가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많다. 이런 입장은 상대주의 윤리학의 극단적 경우이다. 이런 상대적 입장도 있지만, 최근에는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대한 대체로 일반적인 기준이 우리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과학적 주장들도 많다. 문화양식이나 역사적 변화에 따라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입장을 상대주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우리 문화나 관습에 관계없이 보편적인 기준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입장을 절대주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이런 기준은 윤리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좋음의 기준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다른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윤리학 이론이 있으며, 인간사회와 무관하게 좋음의 절대적인 윤리법칙이 존재한다는 절대주의 윤리이론도 있다. 좋음이라는 것이 나만의 느낌 혹은 공유된 느낌이라면 그런 좋음의 기준은 주관적이거나 상대적인 나의 마음에 소속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나아가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느낌에 의존한 것이라면 그런 윤리는 간주관적 혹은 공리주의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절대주의 윤리학은 느낌이나 정서 등의 인간의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윤리법칙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며, 형이상학적 윤리학이 여기에 속한다.

윤리학의 이론들은 이렇게 복잡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나 자신의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해주는 실질적인 윤리가 필요하다. 나 자신으로부터 형성된 동기에 의한 행동 준칙이어야 한다. 나로부터의 동기만이 지속적인 자발적 행동을 이끌 수 있다. 그런 행동을 자발적 행동이라고 부른다. 자발성에 의한 행동준칙들이 바로 자유윤리학의 기초이다. 이런 자유윤리학에 기초한 청소년 윤리학은 크게 두 가지 삶의 안내서를 제공한다. 하나는 욕망에 대한 안내서이며 다른 하나는 행동에 대한 안내서이다. 먼저 욕망에 대한 삶의 안내서를 살펴보자.

금지의 윤리학에서는 모든 욕망적 행동을 금지해야 한다는 규범만이 있다. “신발을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 “껌을 씹어서는 안 된다”, “떠들어서는 안 된다”, “10등 안에 들도록 공부를 해야 한다”, 등의 행동제약 규범은 많은데 내가 자율적으로 하는 행동안내는 없다.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윤리학 전체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렇지만 욕망을 스스로 다스리는 일과 욕망을 누구에 의해서 금지되는 일은 다르다. 욕망이 누구에 의해서 금지되는 그런 금지의 윤리학은 권력의 종속된 윤리학일 수 있다. “너는 오늘부터 날마다 매점에서 우유를 사다가 책상위에 놓아야 해” 라는 명령의 윤리학은 명령자의 욕망의 권력을 채우기 위하여 나의 욕망을 금지하는 일과 같다. 욕망은 나쁜 것이어서 제거되어야 할 무엇이라는 식으로 윤리학이 구성되었지만 그런 윤리학은 진정으로 삶의 행복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욕망은 한편으로 문화적 창의성을 생산하는 끊임없는 생명의 힘이기 때문이다. 금지의 윤리학으로 욕망을 금지시킬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 금지된 욕망 속에 창의성을 낳는 욕망도 같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금지의 윤리학이 아닌 자유의 윤리학이 필요하다.

도시사회에서 의사소통 수단의 변화[철학을다시 쓴다]-23

도시사회에서 의사소통 수단의 변화[철학을다시 쓴다]-2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난번에 농경민과 유목민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화,?의식,?관습 이런 것을 이야기했는데,?오늘은 도시사회 중에서도 전제군주가 다스리던 행정도시가 아니라 이오니아 식민지라는 지중해 해안도시에서 성립한 도시사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멈췄습니다.?제가 농경사회에서는 시간을 두고 쌓은 경험이 지혜의 함수가 되고,?유목사회에서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된다고 그랬죠.?그러니까 시간적인 경험의 축적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사회가 있고,?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사회가 있는데,?최초의 서양식 철학자인 탈레스가 태어나고 활동했다는 이오니아 지방의 식민지인 밀레토스,?이런 상업 중심의 도시사회에서는 실제로 두뇌의 회전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사회입니다.?물론 이 사람들은 뱃길을 통해 이곳저곳 많은 곳을 여행하고,?불평등 거래를 평등거래로 위장하는 데 필요해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그 지역 언어를 익히고,?말하는 최초의‘코스모폴리탄’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말하자면?‘세계인’들이죠.

지중해 연안 뱃길로 여러 군데를 다니면서 거래를 해야 하니까,?수시로 바다에 나가 장사를 하면서 자기들이 힘이 세고,?다른 사람들이 힘이 약할 때는 수시로 서로 노략질을 하는 해적으로 바뀌기도 하고,(호머 서사시의 주인공인 오디세우스도 해적선에 붙들려 가서 오랫동안 고생한 적이 있죠.)?때로는 떼강도로 바뀌기도 하고 때로는 장사꾼으로 거래를 하기도 하고 하는데,실제로 사업을 하는 사람이 대체로 도둑놈 기질이 있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혹시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상처되는 말이 아니기를 바랍니다.(하하.)

어쨌든 지난 시간에도 잠깐 이야기했습니다만,?조그만 해안도시에 아시리아인,?바빌로니아인,?리디아인,?페니키아인,?인도인,?이집트인 등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는데,?그 좁은 도시 공간 안에는 생산지가 없어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외부에서 의식주에 필요한 것도 끌어들어야 하고,?그 밖의 살림밑천이 될 만한 물건들도 끌어들여야 하는데,?그러기 위해선 내부 결속력이 생겨야 하고,?그것이 생기기 위해선 일정한 규율에 따라서 위계질서가 성립할 필요가 있습니다.?이?‘하이라키’(hierarchy)를 설립시키는 데 두 가지 계기가 작용할 수 있죠.?물리적인 강제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설득입니다.

‘폭력적인 국가 기구’와?‘이념적인 국가 기구’의 원초적인 형태가 이 도시에서 나타난다는 것,?어차피 도시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식민주의자의 습성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생산지에서 생산의 교란이 일어난다는 것은 도시민으로서는 목숨이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먹을 것이 제 때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도시 사람들은 굶어죽거나 도시를 떠나야 합니다.?생산지를 확보하고 생산물을 장악하는 것은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주변 생산 공동체를 설득해서 고분고분 양식을 내놓게 할 길이 막히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바로 이때가 폭력적인 국가 기구가 작동을 하는 순간입니다.?도시 거주자들은 외교관이나 교사 같은 설득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필요하지만 폭력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군대나 경찰도 그 내부에서 같이 길러 내야합니다.?살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시인들이 주변 생산 공동체를 식민화하는 작업은 불가피한 생존 조건이 됩니다.?한걸음 더 나아가 더 안정된 삶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해외식민지까지 두게 되는데,?델로스 동맹 이후로 아테네 제국주의가 걸었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습니다.(나중에 로마도 같은 길을 밟게 되지요.)

농경공동체에서는 마을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최소 단위였으니까 말로 소통이 가능했고,?유목민들도 소단위로 천막을 치면서 흩어져 다녔기 때문에 의사소통 수단이 말이었습니다.?그런데 지중해 연안의 광범한 지역에 장삿길이 열리고 삶터가 넓어지면서 말만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그 대안으로 글을 통한 의사소통이 요구되지요.?시골에서는 말과 행동이 다르면?24시간도 버텨내기가 힘듭니다.?유목사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나 도시인들의 삶은 대부분이 서로에게 은폐되어 있고,?거리로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말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길이 차츰차츰 막히게 됩니다.?서로 속셈이 달라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더라도 쉽게 가려볼 수가 없습니다.?말로는?‘그쪽에서 소 한 마리 보내면 여기서 곡식 세 말 보낼게’?하다가도 곡식을 구하기 힘들어지면 소 한 마리를 받고도?‘내가 언제 세말 보낸다고 그랬어??여기 흉년이라 한말 보낸다고 그랬지.’?하고 시치미를 떼면 할 말이 없거든요.?그러니까 계약을 글로 맺어야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온 거죠.

이렇게 세계의 온갖 생산물이 도시로 모이게 되면서 삶의 양식은 급속도로 바뀌게 됩니다.?단일 공동체에서는 생산하고 소비하는 양식이 비교적 단순합니다.?자산은 거의 모두 유기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농경사회에서 생산되는 것,?재산가치가 있는 것은 거의 모두 유기물이고,?유목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온갖 물류가 이곳을 거쳐 이동을 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는 도시사회에서는 상황이 바뀝니다.?돈으로 바꿀 수 있는 환전가치가 큰 무기물들이 유기물을 대신해서 도시인들의 자산가치를 무한히 부풀리게 하지요.

유기물이 의식주에 꼭 필요한 것인데도 교역품목에서 뒷전에 밀리고 무기물들이나 사치품들이 더 활발히 거래된 까닭은 어디 있을까요??유기물은 수요가 일정하지 않습니다.?도시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 보았자 곧 썩어버려서 하루아침에 자산가치가 없어져버리기도 하고 가격탄력성이 없어서,?이른바?‘한계효용의 법칙’이라는 기묘한 법칙이 작용해서 조금만 공급이 넘쳐버려도 똥값이 됩니다.?유기물은 도시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만 공급받으면 되고,?떼돈을 벌어 주는 것은 사치품이나 금,?은,?보석,?향신료나 비단 같은 것입니다.?다행히 사치품들은 무게도 적게 나가 짐이 가벼워요.오늘날에도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유럽과 교역을 하는데 흘수선이 잠기도록 과일이나 곡식 같은 것들을 잔뜩 실어 가지만,?내려올 때는 동당동당 기계 하나 달랑 싣고 내려오는 일들이 벌어지죠.?옛날부터 육로를 통해서건,해로를 통해서건,?장사꾼들은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장삿길에 나서야 했는데 위기의 순간에 짐이 가벼워야 빨리 달아날 수 있고,?싸워도 홀가분하게 싸울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된 측면도 있어요.?이런 이야기 웃자고 한 이야기죠?(일동 웃음.)

 

도시의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2

도시의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한편으로는 시간 축을 따라서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 지혜의 함수인 사회가 있고,?공간 축을 따라서 경험을 확장하는 것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서로 다른 원초적인 사회를 살펴보았습니다.?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라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원형 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 일은 없는데요.?어쨌든 주어진 시간과 공간,?삶의 형태가 다름에 따라서 사람들의 의식이 어떻게 바뀌게 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고요.?이 두 공동체에서는 한 개인이 무엇을 할까,?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농경공동체에서는 마을 어르신들이,?유목공동체에서는 그 마을을 이끄는 수장들이 고민하고 결정을 내립니다.?그런데 도시사회에서는 지혜의 함수가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도 아니고,?시간적인 경험의 축적도 아닙니다.?개개인이 얼마나 똑똑하고 셈이 빠른지가 지혜의 함수가 되는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나는데,?그것이 바로 도시사회입니다.?전제행정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잠깐 빼고,?해안도시사회부터 이야기하지요.?원초적인 도시사회는 이오니아 식민지였던 지중해 연안의 바닷가에 여기저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지중해를 중심으로 배를 띄워서 무역을 하고,?사막으로 낙타를 타고 중국까지 장삿길을 연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오니아 식민지 가운데서도 서양철학이 가장 먼저 발생했다는 밀레토스라는 도시사회를 잠깐 머릿속에서 그려 봅시다.?이 도시사회는 이미 몇 천 년 전에 사라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정보나 유물,?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오로지 우리 상상력을 통해서 이 도시사회를 재구성해야 합니다.?그러니까 거짓말일 수 있다는 거 아시겠죠??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시는 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한 개인이 유목사회나 농경사회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특히 농경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큰 범죄를 저질러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거나 먹고 살길이 없어서 뿔뿔이 흩어지거나 마을 공동체가 규범으로 강제하는 관습을 지키지 않아 그 사회에서 추방되거나,?삶에 큰 변화가 생겨 집단으로 떠도는 그런 경우가 아니면 벗어나기 힘들지요.?대대로 뿌리내린 공동체에서 뿌리 뽑힌다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농사짓던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면 무엇을 해서 먹고 삽니까??이웃마을로 자리를 옮길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습니다.?왜 살던 마을에서 벗어났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거든요.?그러니까 마을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사형신고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유목사회도 마찬가지로 함부로 떠날 수가 없습니다.?수장을 따라 목초지에서 목초지로 옮겨 다니던 사람들이 거기를 떠나서 독립적인 삶을 개척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두 가지 경우죠,?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범죄 행위를 저질러서 야반도주를 하거나,?아니면 주민 전체가 뿔뿔이 흩어져서 여기저기 흘러 다닌다거나.?쫓겨나거나 굶주려서 거렁뱅이 노릇을 하지 않으면 남의 것을 훔칠 수밖에 없지요.?개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이 뜨내기들에 대한 대비책이 아니었을까요?

야밤을 틈타서 누군가가 와서 물건을 훔쳐가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칼 들고 와서 강도짓을 하고,?저항하면 죽이고 그럴까봐 인기척이 들리면 멍멍거리라고 개를 키우는 거거든요.?농경민들이 개를 기르는 것은 유목민들이 양 떼를 모는 데 쓰려고 개를 기르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경우죠.?다른 가축들에 견주어 개를 기르는 것은 식용으로는 대단히 비효율적입니다.?개는 엄청나게 식량을 축내는 짐승이거든요.?어쨌든 불량배가 되서 떠돌다가 강도나 절도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해코지하거나 먹이를 훔쳐가는 사람이 생겨나면서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사람보다 밥을 더 많이 먹는 개를 길러야 하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해안도시에 몰려든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굶주려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흘러든 사람들이거나 대체로 농경공동체나 유목공동체에서 미움받던 삐딱한 사람들입니다.?삐딱한 사람들이 누구냐면 어른 말 안 듣고 지도자 말 안 듣는 사람들이거든요.?대부분의 삐딱이들을 보면 머리가 잘 돌아갑니다.?우직한 사람은 삐딱이가 안 됩니다.?이 삐딱이들이 해안 도시사회에서 장사로 먹고 삽니다.?이 사람들은 살판났지요.?바보 같은 어른도 어른이라고 꾸벅꾸벅 죽어지내야 하는 일도 없고,?너 씩씩하고 용감하게 죽어!?하고 어거지로 전쟁터에 앞장세우는 사람도 없고.?대체로 머리 좋은 사람들 중에는 몸 쓰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없습니다.?몸 놀려서 살 수가 없으니까 머리를 굴려서 사는 겁니다.

여기에서 일어난 사회 변화가 얼마나 급격했으리란 건 상상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이집트에서 온 사람이 태양신을 상징하는 새를 믿는데,?그 새는 나에게 일주일에 두 번 쉬지 않으면 죄라 하고,?그래서 상점 문을 닫고 있는데,그날 문을 닫으면?‘너하고는 다시 거래를 안 해.’?하고 중요한 거래처에서 을러대면 어떻게 해야겠어요??또는?‘나는 아침시간엔 조용히 명상에 잠겨야 하는 종교적인 전통에서 자라왔는데,?니가 아침부터 찾아와서 거래를 하자고 하다니.?말이 돼??어림없는 수작이지.’?이렇게 저마다 자신이 태어난 문화적,?사회적,?종교적인 배경을 들이대면서 서로 가게 문을 닫거나 상거래에 지장을 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살길이 없죠??그래서 시골에서 땅을 파다가 왔든,?풀밭에서 짐승을 몰고 다니다 왔든,?인도에서 왔든,?이집트에서 왔든,?자기가 살았던 지역의 모든 관습과 전통을 버려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익힌 제 고장 말을 고집해서도 안 됩니다.?그리스 사람들이 야만인을 가리킬 때 바르바로이(barbaroi)라고 하였는데,?그것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그러니까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을 하고,?공동체를 이뤄 살고,?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지키려고 드는 사람은 죄다 이상한 사람들이고,?야만인이라 여기고 깔보게 되죠.?그런데 도시 공동체에서 인도 말을 하면 야만인이다,?혹은 페니키아 말을 하는 사람은 야만인이다 하면서 서로 상대를 하지 않으면,?좁은 지역에 모여살고 거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발붙일 곳이 없어집니다.(설상가상으로 해안 도시사회는 내부에 생산지가 없습니다.)

어쨌든 외부에서 먹고 살 것을 끌어들여야 살아갈 수 있는데,?이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지 않으면 주변의 유목공동체나 농경공동체에 가서 돈 될 만한 상품을 끌어올 수가 없습니다.?이런저런 이유로 해안 도시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주 삶의 형태가 다양하고 자기 정체성을 상황에 맞추어 그때그때 잘 바꾸어냈습니다.?그러니까 바다에서 장사를 하다가 갑자기 해적으로 바뀐다든지,?낙타를 타고 먼 길을 오가면서 정직한 장사꾼 흉내를 내다가 어느 순간에 도둑 떼로 돌변해서 마을을 습격해 물건을 약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이 사람들은 먼 길을 다니면서 중국에서 대진국인 로마까지 가기도 하고 또 거꾸로 지중해에서 비단길을 따라 중국까지 가서 중국에서 비단 같은 것을 수입해서 몸에 걸치고 살 수 있었습니다.?싣고 다니는 것 가운데 의식주에 필요한 유기물들,?밥이나 반찬을 해 먹을 수 있는 것은 도시 근처에 있는 농경공동체나 유목공동체에서 가지고 와야 합니다.?먼 길에서 가지고 오게 되면,?비를 맞아서 썩어 버리거나,?채소는 비를 맞지 않아도 하루 이틀 지나면 다 썩어 버리기 때문에 주변에 생산 공동체들이 널려 있어야 합니다.?다시 말해서 주변 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를 식민화해서 안정적인 식량 공급처로 만들어야 합니다.?먹고 사는 문제는 이렇게 해결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예를 들어 도시사회인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벼농사 짓는 곳이 어디입니까??김포평야,?여주 이천이죠.?김포평야에서 서울시민이 쌀을 가져다 먹는데 어느 해에 흉년이 들어 식량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고스란히 그곳에만 기대고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되죠.?그러니까 여주 이천에도 빨대를 대고 더 멀리는 호남평야까지도 빨대를 대야겠죠.?그래서 이곳에서 생산 교란이 일어나면 저쪽에서 끌어오고 저쪽에서 일어나면 이쪽에서 끌어와야겠죠??그러니까 도시는 자기 내부에 생산지를 갖추고 있지 못해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제국주의적인 확장정책을 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제국주의적인 확장정책을 펴는 데 필요한 일차적인 것은 무엇입니까??조직이죠.?그리고 잘 조직된 약탈자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창과 칼 같은 무기죠??무기 생산은 도시인들에게 목숨이 걸린 일이 됩니다.농사꾼은 낫과 호미,?괭이 같은 농사 도구가 필요해서 대장간을 찾아갑니다.?그러나 도시사람들이 대장간을 찾아가는 목적은 창과 활,?칼,?이런 것을 벼리기 위해서입니다.?농경민이나 유목민의 경우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잘 조절하면 살길이 열립니다.?이 사람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나 연장으로서 낫이나 칼,?이런 것을 벼리는 겁니다.

그런데 도시인의 경우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뒷전입니다.?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도시인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느냐 못하느냐의 관건이 됩니다.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각축하고 때로는 서로 맞서야 하는데,?칼과 창이라는 것이 뭡니까??인간 문제를 가장 빨리 해결하는 도구 가운데 하나입니다.설득을 해서 안 되고,?세뇌를 해서 안 되면 죽여야죠.?전쟁의 기원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닙니다.?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길,?그것이 전쟁입니다.

그런데 해안 도시사회 내부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습니까??공멸이죠.그리고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해도 엄청나게 큰 장애가 생기게 됩니다.어느 날 종교적인 천재가 나타나서 우리 이런 종교를 만들자 하더라도 모두가 약삭빠른 삐딱이들인데 누가 그걸 받아들이겠습니까??안 된단 말이죠.이 사람들을 묶을 길이 없어요. ‘사는 게 먼저고 철학하는 게 그 다음이다.’(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 ‘우선 살고 볼 일이다.’?모두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그러니까 도시민들은,?특히 장사꾼들이 모여 사는 해안도시 사람들은 이해관계로 뭉치는 수밖에 없다는 거죠.?이해관계를 따지다 보면 머리가 비상해져야 하고 계약을 어기면 안 되니까 규칙들이 생겨나야 하죠.?거기에서 자기 나름대로 인위적인 규범들과 약속들이 생겨나고,?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서 일치하는 점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제부터 말과 글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죠.?말이라는 게 어떻죠?우리 기억에도 한계가 있고,?말로 한 약속은 다음 순간 뒤집어 버리면 그만입니다.?이집트나 중국 같은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행정 중심 도시에서 상형문자가 생겨나고 그것을 써서 이런저런 통치에 필요한 일들을 하는데,?그것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특권층의 행적을 기록하는 것들과 연관되어 상형문자가 생겼는데,?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능의 하나가 피지배자들의 감성과 의식을 획일화하는 것이었습니다.?사상과 감정,?모든 것을 획일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문자다.?그래서 이 사람들이 문자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전제군주가 만들어낸 획일화의 도구로서 부여받은 기능과는 또 다른 기능이 글에 있다는 것을 밝혀낸 사람들은 장사꾼들이었습니다.?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에서 발명된 쐐기글자를 보면 점토판에 적힌 글이라는 것이 돼지 몇 마리,?소 몇 마리,?밀 몇 자루 죄다 이런 것들 투성이입니다.?그러니까 거래하는 사람들이 서로?‘돼지 열 마리 보냈으니 곡식 열 말 가져다 다오’?이런 식으로 쐐기글자를 만들어 쓴 겁니다.?이 문자의 발생과 연관해서 보면 재미있는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시골 장터에서 술집을 연 할머니가 막걸리를 외상으로 먹은 사람들을 벽에 적어놓는데,?박 서방을 나타내는 브이(V)?자를 그어 놓고 한 잔 외상으로 먹었다고 일(/)자를 그어 놓고,?홍 서방을 나타내는 동그라미(ㅇ)?그려 놓고 일자(/)?그어 놓고 하다보니,?벽이 다 차게 생겨서 다섯 잔째 마실 때는?/////?이렇게 그어 놓고 하는 것들을 문자 발생의 초기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종교도 버려야 한다.?가치관도 버려야 한다,?장사하는 사람들이 버려야 할 것은 정말 많습니다.?이해관계를 서로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소통을 잘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버려야 할 것이 아주 많습니다.?불평등 거래는 장사꾼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불평등 거래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상대편이 알아차리면 어떻게 됩니까??그러면 거래가 안 되겠죠.?그러니까 상대편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 하죠??돼지 키우는 마을에 가서 싼 값으로 돼지를 사오려면 파는 사람들을 그럴 듯하게 속여야 하고 그러려면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배워야겠죠??그 사람들의 정서,?사고방식을 익혀야겠죠.그 전에 농사를 짓거나 짐승을 키우고 살 때는 제 고장 말만 알아도 살 수 있었으니까 저마다 독특한 온갖 토템과 터부를 마련하고 섬기면서 자기들만의 세계에서,?몽상과 상상력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 고유한 신화와 신앙의 체계를 만들어 그 안에 안주할 수 있었는데 이제 실증적인 조사와 탐구가 필요하게 됩니다.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그러죠??헤로도토스는 장사꾼들을 따라 여기저기 탐사 여행을 합니다.?리디아 같은 곳에 가 보니까 아이들이 공기놀이를 하고 있어요.?이 놀이를 보면서 이렇게 유추합니다. ‘아이들이 굶주림을 잊어버리려고 공기놀이를 만들어 냈다.’?그러니까 현대식으로 말하면 종족학,?각 민족의 민속이라든지 풍습 같은 여러 가지 보고 들은 것을 기록에 남기고 조사 연구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해안도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낼 필요가 생깁니다.?농경사회나 유목사회는 모든 자산이 유기물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여기서는 증서,?약속어음 같은 것들이 양 백 마리와 바뀌기도 하고,?배 한 척과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가증권 같은 것들이 자산의 중요한 목록으로 편입됩니다.

유기물과는 달리 무기물로 이루어진 자산은 썩을 염려가 없어 무한축적이 가능해지니까,?부의 거대한 축적들이 이루어지면서,?변화들이 생겨납니다.그리고 지혜의 함수는 이미 시간적인 경험의 축적이나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아닌,?얼마만큼 셈이 빠르고,?속셈이 멀쩡하냐에 따르는 계산력이 됩니다.?누가 너 속셈이 뭐냐??할 때 네가 속으로 뭘 헤아리고 있느냐를 묻는 것이죠??상대방의 속셈을 알아내고 자기의 속셈을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불평등 거래를 하는데 주무기가 되니까 머리를 써도 자꾸 그 쪽으로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거죠.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인간이 단순한 마을 공동체와 유목공동체에서 벗어나 도시에 모여 살면서,?사고방식이나 감성에 거의 혁명적인 변화가 생겨나죠.?그래서 우리의 상상력과 몽상 같은 것들이 우리를 꿈의 세계에 머물게 만드는 신화공간이 아주 엄혹한 현실공간으로 바뀌게 되면서 누구 마음도 다치지 않고 어떤 종교나 신념체계도 침해하지 않으면서 이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그 길을 찾다보니까 하늘의 신(우라노스)과 땅의 여신(가이아)이 이 세상의 만물을 끌어안던 세계 해석이‘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식으로 우주의 근원에 대한 아주 밋밋하고 메마른 새로운 해석으로 탈바꿈하는 낯선 세계관이 싹트는 겁니다.

 

제 3절 화폐(2)[자본론강독]-12

제 3절 화폐(2)

정리 : 나태영

 

 

제2편 :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제4장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제1절 자본의 일반적 정식

 

‘상품유통은 자본의 출발점이다. 상품 생산과 발달된 상품유통〔즉 상업〕은 자본이 설립하기 위한 역사적 전제이다.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됨으로써 자본의 근대적 생활사는 시작된다.

상품유통의 소재적 내용이나 다양한 사용가치들 사이의 교환은 무시한 채 이 과정이 만들어내는 경제적 형태만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이 과정의 최종 산물로 화폐를 발견하게 된다. 이 상품유통의 최종 산물은 자본의 최초의 현상형태이다.

역사적으로 자본은 어느 곳에서나 처음에는 일단 화폐의 형태로〔즉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이라는 화폐자산의 형태로〕 토지소유와 대립한다.’(225쪽)

‘화폐로서의 화폐와 자본으로서의 화폐는 무엇보다도 단지 양자의 유통형태의 차이에 따라 구별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형태 외에 그것과 구별되는 제2의 독자적 형태인 G-W-G라는 형태, 즉 화폐의 상품으로의 전화와 상품의 화폐로의 재전화, 또는 판매를 위한 구매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 운동을 통해 후자의 유통을 담당하는 화폐는 전화되어 자본이 되는 것이며, 이미 그 성격상 자본인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사라지고 남는 결과는 화폐와 화폐의 교환, G-G이다. 내가 100파운드스털링으로 2,000파운드의 목화를 사고 그 2,000파운드의 목화를 110파운드스털링에 팔았다면 결국 나는 100파운드스털링을 110파운드스털링과, 즉 화폐를 화폐와 교환한 셈이다.’(226쪽)

‘이와 반대의 형태인 G-W-G에서는 구매자가 화폐를 지출하는 것이 판매자로서의 화폐를 취득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상품을 구매하면서 화폐를 유통에 투입하지만, 그것은 그 상품을 팔아서 다시 유통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그가 화폐를 내놓는 것은 단지 그것을 다시 손에 넣으려는 숨겨진 의도에서일 뿐이다. 그러므로 화폐는 단지 선대(先貸)된(vorgeschossen) 것일 뿐이다.’(228쪽)

‘유통 W-G-W에서는 화폐의 지출이 화폐의 환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반면 G-W-G에서는 화폐의 환류가 화폐의 지출방식 자체에 따라서 결정된다.’

‘반면 순환 G-W-G는 화폐에서 출발하여 결국 똑같은 화폐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이 순환의 동기와 목적은 교환가치 그 자체이다.’(229쪽)

‘100파운드스털링을 주고 구매한 면화가 100+10파운드스털링〔즉 110파운드스털링〕으로 다시 판매된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더욱 정확한 형태는 G-W-G′이고, G′〓G+?G, 즉 ‘처음 투하된 화폐액+일정 증가분’이 된다. 이 증가분〔또는 처음의 가치 이상의 초과분〕을 나는 잉여가치(Mehrwert)라고 부른다.’

‘이 운동은 이 가치를 자본으로 전화시킨다.’(230, 231쪽)

‘물론 처음 투하된 가치 100파운드스털링은 유통을 통해서 부가된 10파운드스털링의 잉여가치와 일시적으로는 구별되지만 이 구별은 곧 없어져버린다. 과정의 끝부분에서는 원래의 가치 100파운드스털링과 잉여가치 10파운드스털링이 각기 따로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110파운드스털링이라는 하나의 가치이며, 이것은 시작부분에 있는 100파운드스털링과 마찬가지로 가치증식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바로 그 형태이다. 화폐는 운동의 끝부분에서 다시 운동의 시작부분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판매를 위한 구매가 행해지는 순환 각각의 끝부분은 자연히 새로운 각 순환의 첫 부분을 이루게 된다.

 

단순 상품유통-구매를 위한 판매-은 사용가치의 취득〔또는 욕망의 충족〕이라는 유통 외부의 최종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반면 자본으로서의 화폐유통은 그 자체가 목적(Selbstzweck)인데, 왜냐하면 가치의 증식이 끊임없이 갱신되는 이 운동 내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운동은 무한히 계속된다.’(232쪽)

‘화폐소유자는 이 운동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담당자로서 자본가가 된다.’“이재학에서는 유통이 부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재학은 화폐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화폐야말로 이러한 종류의 교환에서 시작부분이자 끝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재학이 추구하는 부에는 한계가 없다. 즉 목적을 위한 수단만을 추구하는 지식은 목적 그 자체가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에 무한한 것이 될 수 없지만, 목표가 수단이 아니라 궁극적인 최종 목적인 지식은 끊임없이 그 목적에 접근하려 하기 때문에 그 추구에는 한계가 없다….경제학은 이재학과 달리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다…. 전자는 화폐 그 자체와는 다른 것을 목적으로 삼으며 후자는 화폐의 증식을 목적으로 삼는다….”(아리스토텔레스, 앞의 책, 제1권, 제8장과 제9장)(233쪽)

‘화폐축장자는 화폐를 유통에서 구출해냄으로써 가치의 쉴 새 없는 증식을 추구하지만, 좀 더 영리한 자본가는 끊임없이 반복하여 화폐를 유통에 투입함으로써 가치의 끊임없는 증식을 달성한다.’‘스스로 증식하는 가치가 생명활동의 순환과정에서 번갈아 취하는 각각의 현상상태를 고정시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장을 얻을 수 있다. 자본은 화폐이다. 그리고 자본은 상품이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서는 가치가 전체 과정의 주체이며 가치는 이 과정을 통해 화폐와 상품으로 번갈아 형태를 바꾸면서 자신의 크기를 변화시키고 또한 자신의 본래 가치로부터 잉여가치를 만들어냄으로써 스스로를 증식시킨다. 왜냐하면 가치가 잉여가치를 부가하는 운동은 가치 자신의 운동이며 가치의 증식이고 따라서 자기증식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그것이 가치이기 때문에 가치를 낳는다는 신비한 성질이 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자식을 낳든가 아니면 적어도 황금의 알을 낳는다.’

‘화폐는 모든 가치증식 과정에서 항상 출발점과 종점을 이룬다.’

‘상품형태를 취하지 않고서는 화폐는 자본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화폐는 여기에서 화폐축장의 경우처럼 상품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자본가는 모든 상품이-비록 그것이 아무리 초라해 보이고 악취가 난다 해도-맹세코 진실에서는 화폐이며 내면적으로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고 나아가 화폐를 더 많은 화폐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는 수단임을 알고 있다.’

‘이제 가치는 상품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자기 자신에 대한 사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본원적 가치로서의 자신과 잉여가치로서의 자신을 서로 구별 짓는다.’(234, 235쪽)

‘사실상 G-W-G′는 유통영역에서 직접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의 자본의 일반적 정식이다.’(236쪽)

 

신화 해석의 중요성: 우리 사회의 지식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1

신화 해석의 중요성:?우리 사회의 지식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오늘은 바다를 끼고 지중해 해안가에 세워진 그리스 이오니아 식민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여러분들 밀레토스라는 지역을 아시죠??밀레토스가 어떤 곳입니까??철학개론 배우신 분들 손들어 보세요.?탈레스라는 이름은 압니까??서양에서 최초의 철학자라 알려진 탈레스가 밀레토스 출신입니다.?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말한 거로 유명한 사람이죠.?여러 방면에 다양한 재질을 가지고 있어서 천문학에도 일가견이 있었고,?늘 하늘만 쳐다보고 다니다가 웅덩이에 빠진 적도 있어서 가까운 것은 못보고 먼 것만 보고 다닌다고 사람들이 비웃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죠.?실제로 만물의 근원이 뭐냐 하는 물음은 오랫동안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중요한 주제였습니다.?종교에서도 이 우주,이 세상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를 써 왔고,?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하나가 무엇이고,?그것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가에 대한 끝없는 탐구가 현대 입자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가장 큰 하나인 우주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느냐,누가 이 큰 우주를 만들어 냈느냐,?혹은 저절로 이 큰 우주가 생겨났느냐 하는 화제에 대해서도 굉장히 관심이 크죠.

이야기가 좀 재미있어야 하니까 우리 쪽으로 눈길을 돌려봅시다.?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천지창조 신화가 없었던 걸로 생각을 해요.?이 잘못된 생각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됐냐면,?단군신화를 엉터리로 해석해 온 이른바 신화학자들이나 역사가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데서 생긴 고정관념에 매달린 탓이 커요. ‘웅녀’설화를 예로 들면 토템사상을 끌어들여 웅녀는 곰 부족을 상징하고 환웅은 호랑이 부족을 상징한다,?이 부족국가들이 결합해서 고조선이라는 민족국가를 형성한 것이다,?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단 말이죠.?이 엉터리 없는 이야기를 맨 처음에 퍼뜨린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았더니 육당 최남선이 나옵디다. ‘불함문화론’에 나오는 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신화학자 김열규 선생이 확산시킵니다.?너무 그럴싸한 이야기여서 많은 학자들이 거기에 넘어가 우리나라에는?‘토템’과?‘샤만’?이런 것들은 있었지만,천지 창조신화는 없다,?이런 식으로 규정을 짓는데,?아무리 조그만 부족도 천지창조의 신화가 없는 부족은 없습니다.?전부 나름대로 가장 큰 것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에 대해서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설명해 내려고 애씁니다.?물론 설명 체계는 짜임새가 정교한 것도 있고,?느슨하거나 엉성한 것도 있지만,?없는 곳은 없습니다.?우리 나라 사람들만 별종이어서 천지창조 신화가 없는 거냐 아니면 유실된 거냐??이런 생각 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제가 한 삼십 년 전부터 단군신화는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신화학에 문외한인 사람이 떠벌리는 말이라고 권위를 인정해 주질 않아요.?이제부터 제가 제대로 해석을 할 테니까 여러분들 들어 보세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설화를 보면?‘환인’의 아들?‘환웅’이 아버지에게 아래로 내려가 중생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주겠다고 해서, ‘신단수’?아래로,?바람,?비,?구름,?번개,?우레 같은?‘손’(사)을 데리고 내려옵니다.?그런데 환히 빛나는 멋있는 수컷?‘환웅’(해)에게 반한 암컷 둘이 찾아옵니다.?이른바‘곰’과?‘범’이지요.?환웅이 쑥과 마늘을 먹고?‘100일’을 견디면 짝으로 삼겠다고 말하자, ‘호랑이’는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달아나고?‘웅녀’는 견디고 참아서 환웅의 짝이 되어?‘단군왕검’을 낳았다.?이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죠.

‘호랑이’는 우리말로?‘범’이죠.?언어학자들은 어원을 추적할 때 모음은 제껴 놓는 일이 많습니다.?그 만큼 모음은 시간과 지역에 따라 자주 바뀌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입니다. ‘범’은?‘밤’으로도 발음되고,?그렇게 기록된 예도 있습니다.?그리고?‘곰’은?‘검’도 되고, ‘굼’도 되고, ‘감’으로도 바뀝니다.?처음 낱말을 가르칠 때 한 낱말을 비슷한 다른 말로 바꿔서 그 말의 뜻을 일러주는 것이 일반적인데,?이것을?‘사전적 정의’(lexical definition)라고 합니다.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가르치는 천자문을 보면 뭐라고 되어있어요??하늘천,?따지,?감을현,?누르황.?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면,?한 낱말을 뜻이 같은 다른 낱말로 바꾸어서 하늘은?‘검’이요,?땅은?‘누리’다,?이렇게 한 낱말의 뜻이 다른 낱말과 같다는 것을 밝혀주지요.?왜 하늘을?‘검’이라고 할까요??나중에?‘감’, ‘곰’, ‘구무’, ‘가마’, ‘개마’,?임금 할 때?‘금’,?이런 것들이 모두?‘거무(검)’에서 파생된 말인데,?우리 옛 분들은 빛의 간섭이 없는 밤하늘 빛깔이 본디 하늘빛이라고 봤습니다. ‘하늘은?‘검’이다.?그리고 땅은?‘누리’다.’?이렇게 옛날에?‘하늘’이라는 이름도 있었지만,?그것을?‘검’(거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개마’고원을 왜 그렇게 부르느냐 하면 하늘에 닿아 있는 봉우리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입니다.?개마,?고마,?구마,?다 같은 말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입니다.?이렇게 따지면 실마리가 잡힙니다.?밤도 깜깜하고 하늘도 깜깜합니다.?깜깜하다는 점에서는?‘밤’(범)과?‘검’(곰)은 다르지 않습니다.

‘백일’이라는 말도 달리 해석해야 해요.?해가 나는 동안, ‘온(백)날’, ‘온날’은 해가 비추는 동안,?온종일이라는 소리죠.?해가 비치는 동안에 자기와 함께 견딜 수 있는 것을 자기 짝으로 삼겠고 했는데,?해가 비추자마자 범(밤)은 달아나고 곰(검)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죠. ‘하늘’과?‘해’가, ‘웅녀’와?‘환웅’이 짝을 맺게 되어,?하늘이 해의 아낙이 되었다,?이것이 단군설화에서 나타나는 우리식 천지창조 신화입니다.

“우리 신화에서는 하늘이 여성이고 태양이 남성입니다.?이게 그리스 신화 책엔 거꾸로 되는 거죠.?저쪽에서는?‘우라노스’, ‘천공’이 남성이고, ‘가이야’, ‘땅’은 여성으로 상징되지요.?하늘과 해가 짝을 지어서 낳은 게 무엇이냐……. ‘다’, ‘따’, ‘다알’(달,?딸),?땅.?이 지구도 그렇게 생겨났고,?달도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그럴 듯한 말이죠??아무도 이것을 학설로 봐주지 않으니까?‘거짓말’로 여겨져?30년 동안 여기저기 귀에서 귀로 흘러 다니다가 사라져 버렸어요.?어때요,?그럴 듯해요?”

“네.”

그럴 듯하면 하나 더. ‘오행사상’?있죠??오행에서 기본색으로 다섯 가지 색이 나옵니다.?중국에서는 목,?화,?토,?금,?수가?‘오행’이죠??목은 동쪽과 풀,화는 남쪽과 불,?토는 중앙,?계절적으로 보면 여름과 가을 사이고,?금은 가을.?수는 겨울입니다.?말하자면 오행의 자리는 동,?남,?중,?서,?북인데 빛깔로 나타내면 목은 푸른색으로 나타나고,?화는 붉은색,?토는 누른색,?금(金)은 흰색,?수는 검은색으로 나타납니다.?목화토금수로 나타나는 오행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대로 가져다 쓰기 어렵다는 것을 곧 알 겁니다.?유럽이나 러시아,?그 밖에 다른 지역을 가보면 부엽토가 뒤섞이고 썩어서 물이 검습니다.그러나 우리나라 물은 맑아서 투명합니다.?색깔이 없습니다.?우리나라는 산구비가 가파르고,?나무가 많기 때문에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이 검지 않아요.?중국에서 만들어진 오행설을 보면 갑자기 하얀 해 대신에 숫돌에 하얗게 간?‘쇠’가 끼어듭니다. ‘금’(金)이?‘쇠’지요.?중국에선 오행이 색깔로 보면 푸른색,?붉은색,?누런색,?흰색,?검은색으로 되는데, ‘쇠’를 흰색으로?‘물’을 검은색으로 나타냅니다.?우리말 형용사?‘푸르다’는?‘풀’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붉다’는?‘불’에서 나오고, ‘누르다’는?‘누리’에서,?다시 말해 황토 땅에서 나온 것이고, ‘희다’는?‘해’에서 나왔고, ‘검다’는?‘검’?곧?‘하늘’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예부터 우리 나름으로 오행설이 있었고 그에 따라서 빛깔이 지정됐다면 우리나라 기본 색채가 훨씬 더 원초적이고,?전부 자연물로 됐다, ‘쇠’?대신?‘해’가 들어가고,?물 대신 하늘이 들어갑니다.?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장 삶에 밀접한 자연물에서 우리의 색채를 끌어내었다.?이게 민족주의적인 발언입니까??아니죠?

잘 들어 보십시오.?우리나라에서는?‘물은 맑고’, ‘불은 밝고’, ‘바람은 부는’것입니다.?이름씨(명사)와 움직씨(동사),?그림씨(형용사)가 같은 소리,?하나의 말에서 흘러나옵니다.?우리민족은 이런 점에서 아주 좋은 언어를 물려받았고,?이런 말을 부려서 쓸 수 있었던 우리 조상들이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그런데 여러분들은 우리 조상들이 시원찮아 보이니까 있다/없다,?이런 말을 시시하게 여기고?‘존재’와?‘무’(無)하면 대단하게 보고 그렇지요?

 

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의 비교[철학을다시 쓴다]-20

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의 비교[철학을다시 쓴다]-20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남과 북으로 흩어져 살게 되면서 유목공동체와 농경공동체가 어떻게 갈라졌는지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성서의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는 가운데 제가 성서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강의를 마치고나서 어느 분께서?‘창세기를 보면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는 두 그루였다고 기억이 된다.?하나는 지혜의 나무고,?하나는 생명의 나무였다고 기억된다.’?이렇게 말씀을 하셔서 그러냐고, ‘하와가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따 먹은 열매는 생명의 나무 열매가 아니라 지혜의 나무 열매였고,?천사를 시켜서 하느님이 생명의 나무를 지키게 만들었다.’라고 합니다.?그래서 제가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음 시간에 그 문제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그래서 그 이야기를 제가 다른 분한테 여쭤봤더니 그 분도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해요.

“혹시 여기 성서학에 밝은 분,?계십니까??창세기 에덴동산에 대해서 좀 정확하게 증언을 해주실 분 있으면 이야기해 주세요.”

“구약 성서는 히브리사람들이 행한 신앙이고 우주관이거든요.?그래서 처음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그것은 하나의 사유이고,?구체적으로 현대인의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거죠.?그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그거는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구약성서 읽어 보신 분 있으면 말씀해보세요.?저는 에덴동산 한복판에 서 있는 게 생명의 나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그게 생명의 나무가 아니고,?지혜의 나무였다라는 증언이 나오고 또 다른 교회도 다니는 분한테 물어봤더니 그 분도 모른다고 하시고…….(대답 없음.)?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신다면 될 거 같습니다.?제가 자료에 따르는 엄중한 고증에는 자신이 없습니다.?오죽하면 객관성보다도 당파성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겠습니까??정말 완전히 비과학적이거든요.?있는 것보다도 있어야 할 것이 더 중요하고 없는 것보다도 없어야 할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으니까 이런저런 제 믿음의 소산이라고 생각하고…….?어쨌든 에덴동산 이야기는 재미있었습니까?”

“예!”

“그러니까 거짓말을 하면 사람들이 더 재미있다고 합니다.”(일동 웃음.)

계속해서 그런 거짓말을 이어 보도록 하죠.?제가 거짓말의 존재론적인 근거를 이야기하는 첫 시간에는 사람들이 꽤 많아서 이 분들이 내 말에 감격을 했구나,?했는데,?그 다음에?1/3로 수강자가 줄어들었어요.?오늘은 지난 시간보다는 많이 오신 거 같은데 거짓말을 해도 통 크게 하니까 좀 많이 오는 거 같습니다.(일동 웃음.)?지난 시간에는 에덴동산에서 빙하기 때 적도 부근에 모여서 살던 사람들이 간빙기가 되어 적도 지역에 사람이 살기 어려운 열대우림 지역으로 바뀌고,?언제든지 조개를 잡아먹을 수 있었던 갯가가 물이 차올라 실제로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이 전개되었고,?적도 지역에는 밤낮 온도 차이가 없고 사계절이 없는 철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도 머리 쓸 필요가 조금도 없어서 아담과 이브의 두뇌를 측정했으면 아마?‘새대가리’, ‘아이큐 영’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손만 내밀면 먹을 것이 있고,?머리 안 써도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는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결국은 아담과 이브는 머리 쓸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다,?이?<수유너머>처럼 골머리 아프게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아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그런 이야기를 했고요.

그 다음에 갑자기 간빙기가 되면서 온대지방까지 잡혀 있던 얼음이 천천히 남극과 북극으로 밀려나면서 남쪽과 북쪽으로 초원과 나무들이 자랄 수 있는 땅이 열리게 됨에 따라서 그쪽으로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들도 전부 흩어져 살게 됐는데,?여기에는 지구축이 기울어서 자전을 하는 바람에 결국에 사계절이 뚜렷하게 구별이 되고 가을철을 중심으로 먹을 것이 한꺼번에 많이 나는 철이 있고,?겨울같이 먹을 것이 아예 나지 않는 철이 있기 때문에,?사람들이나 다른 생명체들이 사계절을 나면서 철이 나기도 하고,?봄,?여름,?가을,?겨울철에 접어들기도 하면서 미리 삶에 대해서 예측도 해야 하고 대비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됐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자손 가운데 카인과 아벨이 생겨났는데,?아담과 이브가 남과 북으로 정처 없이 떠나게 되는 배경이 있었고,?여기에서 카인은 농경민으로 정착을 하게 되고,?아벨은 유목민으로 떠돌게 되는 신세가 됐는데,?실제로 세계관이라든지 가치관,?이런 것들이 유목민들하고도 다르고 오늘 이야기하게 될 해안도시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던 도시민들하고도 조금 달랐다는 이야기와 농경민의 경우,?좁은 마을 공동체에서 태어나고,?자라고,?늙어서 죽으면 뒷동산에 묻히는 마을 공동체가 농경민들의 우주였고,옆 마을에 가봐야 똑같은 방법으로 농사짓는 사람들만 있었기 때문에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지 못하고 시간적인 경험의 축적이 지혜의 함수가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하였죠.

그리고 농경민은 오래 살수록 지혜로운 사람이고 자연히 장로들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고,?어른들을 공경하는 의식이 역사관에도 투영이 돼서 상고주의 정신,?우리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가 슬기롭고 할아버지보다는 그 할아버지가 더 슬기로웠을 것이다,?그렇게 요순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슬기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때는 황금시대였고,?점점 아래로 내려올수록 은의 시대,?동의 시대,?철의 시대라고 하고,?불교식으로 하면 정법시대에서 상법시대,?말법시대로 점점 더 인간의 삶의 조건도 어려워지고,?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이 더 멍청해진다,?그런 세계관이 농경민들의 의식에 자리 잡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노인네들이 하는 말은 무조건 옳아’?하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가치관도 대단히 규범적이고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보다는 어른들이 하는 대로 순응해서 살면 살길이 열린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싸가지 없는 젊은 것들이라고 생각해서 마을 공동체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제가 한 듯싶습니다.

그리고 유목공동체는 짐승들에게 먹일 수 있는 목초가 있는 곳을 찾아서 위도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인위적으로 한 철을 만들었어야 했기 때문에,?농경민 사이에서 자연의 시간이 지배적이었다면,?유목민들은 인간이 자연의 시간의 일부를 통제할 수 있는 길들을 열어가는 측면이 있습니다.실제로 목초지라는 것이 풀밭인데 기후가 조금만 바뀌게 되면,?그 풀이 곧 메말라서 사막이 생기기 쉬운 조건이고,?사막이 생기게 되면 유목민들 사이에 먹고 살 수 있는 초원을 사이에 두고 싸움이 일어나고,?그 과정 속에서 전체 부족이 죽느냐 사느냐가 달려 있기 때문에 결국은 거기에서 어린 시절부터 목초지를 지키기 위해서 전사들을 길러낼 필요가 있었다,?그래서 농경사회에서는 상사(喪事)와 제사(祭祀),?사람이 죽고 거기에 죽은 사람을 모시는 의식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견주어서 유목사회에서는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튼튼한 그런 젊은이들이어야만 전쟁에서 이겨낼 수 있으니까 그런 젊은이들을 길러내기 위한 성인식이 아주 가혹하고 가장 중요시되었다는 이야기를 곁들여서 말씀드렸습니다.

또 이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서 목초지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서,?여러 공간을 다니면서 목초지를 찾아야 했기 때문에,?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였고,?그렇게 공간적인 경험을 제대로 하려면,?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나 낙타를 길들여서 이리저리 풀이 자라는 곳을 찾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정신적,?육체적인 힘이 강한 청장년층으로 권력의 중심이 옮겨온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그리고 이 사람들의 경우에는 과거에 찾았던 목축지에 다시 가 보아도 누가 이미 차지하고 있거나,?가뭄이 들어서 없어졌을 수가 있으니까 노인들의 말을 무턱대고 따르는 대신에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나서야 했고,?어른들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는 버릇이 생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듯 농경민들의 윤리가 규범윤리라 하면 유목민들의 윤리는 상황윤리다,?어떤 것을 고집하지 않고,?그때그때 바뀌는 사고의 유연성이 생겼다는 이야기였죠.?이렇게 해서 농경민들의 문화형태와 유목민들의 문화형태가 상당히 큰 차이를 보이는데,?거기에 대해서 제가 깊이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여러분들한테 농경민의 문화와 유목민의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나머지 부분을 숙제로 남겨두겠습니다.?농경민으로부터 처음으로?‘부동산’의 개념이 생겨났고,?유목민으로부터?‘동산’의 개념이 생겼다는 것만 알아두시면 되겠습니다.?가축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동산이죠?농경민들은 자연의 시간에 많은 제약을 받았고,?인간의 시간이라는 것은 크게 가치가 없었다,?왜냐하면 삶을 꾸려가는 데 자연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고,?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에 순응하는 지혜를 익힌 노인의 말씀과 자연이 순환하는 질서를 그대로 따르면 삶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따로 생명의 시간 일부를 재조직해서 인간만의 시간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유목민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자연의 시간에 순응해서만은 살아남을 길이 없어서 시간을 공간화하고 등질화시킬 필요가 유목민들 사이에서 나타난다,그러나 유목민의 삶도 실제로 자연의 시간과 긴밀하게 연결됐다는 의미에서 생명의 시간 가운데서 자연의 시간과 완전히 분리되는 인간의 시간을 만든다는 것은 유목민 삶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