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과 종교(1)[대안도덕교과서]-13
인간의 삶과 종교(1)[대안도덕교과서]-13
진보성(방송대)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세계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1. 삶과 죽음, ‘나’와 ‘신’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자연의 변화 현상이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예를 들어볼 수 있겠지만 단적인 예로 낮과 밤의 변화를 들 수 있을 겁니다. 하루의 구성은 크게 보면 낮과 밤의 시간으로 나누어져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낮과 밤의 구분을 정확히 나눌 수 있는 잣대가 있을까요? 물론 기준을 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계절에 따라서도 차이가 납니다. 낮과 밤의 나뉨에 엄밀한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대략 오후 2시를 ‘낮’이라고 할 때 1시간 후인 오후 3시는 오후 2시와 같은 낮이지만 오후 2시에 비하면 조금 더 ‘밤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낮’입니다. 또 밤 12시는 명백하게 ‘밤’이지만 새벽을 지나 아침을 맞으면 낮을 밝힐 태양이 떠오릅니다. 이것도 ‘낮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밤’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의 섭리와 운행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면서 삶을 맞이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동시에 죽음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삶’과 ‘죽음’이란 서로 분리되어 나누어져 분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커다란 구성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인간은 서로 분리된 채 개인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의 인간 개체는 다른 인간 개체와는 다른 자기만의 독특한 개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개체들이 모이면 인간 군집이 되고 더 나아가 하나의 사회를 구성합니다. 한편, 이 사회를 구성하는 개체들이 가지는 각각의 개인성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간 고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개성이기도 하구요. 이런 것을 통틀어 우리는 개체성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이 독립된 개체성에 의존해 삶과 죽음을 판단합니다. 인류, 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의 태어남과 사라짐을 자연적인 우주의 운행이라고 했을 때 이 커다란 구성의 관점을 떠나서 삶과 죽음이라는 것을 ‘나’라는 외로운 한 인간이 맞닥뜨린 해결할 수 없는 숙명적인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독립된 ‘나’가 고립된 ‘나’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나’만의 문제가 되면 그 문제에는 ‘나’의 감정이 개입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삶’이라는 단어를 듣는 다면 어떤 감정이 느껴지나요? 환희, 생동감, 기쁨, 밝음 따위의 감정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슬픔, 우울, 불안, 어두움과 같은 감정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 삶과 죽음에 대한 감정적 대립은 ‘존재(being)’로써의 ‘삶’과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Non-being)’로써 ‘죽음’에 대한 각각의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감정의 대입양상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추상적 이미지 보다 삶에 대한 추상적 이미지가 인간에게 더 긍정적으로 다가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 대해 무한한 추구와 동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은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인지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현실에서 목도하는 죽음이라는 것을 곧 인간의 한계로 받아들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는 유한한 세계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유한한 인간은 곧 죽음을 앞둔 인간입니다. 언젠가는 소멸해버리는 나약함에 서있는 인간이기에 불안합니다. 이 유한한 세계를 뛰어넘기 위해 인간은 신(神;God)을 만들었습니다. 이 신 존재의 중요성 때문에 중세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지요. 신은 인간이 유한한 세계를 벗어나 현실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우주의 주재자(主宰者)입니다. 신의 세계는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무한한 세계이며 또한 끊임없이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세계입니다. 보통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의 ‘천국’이 여기에 해당하는 세계입니다.
2. 종교와 선·악의 개념
신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에는 천국과 지옥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물론 이 두 세계를 설정한 기원은 주로 서양의 유일신론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신론과 다르게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신념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유래합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에서 보는 신과 인간의 차이가 그렇습니다. 신은 무한하며 완전하고 성스럽고 초자연적인 존재이지만 이에 반대되는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속된 존재로써 일상의 자연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 구도에서 신의 영역은 선에 포함되고 인간의 영역은 악에 포함됩니다. 이렇게 종교에서 선과 악을 양분하여 구분하는 것을 선악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물론 다신론의 이란종교에서도 선한 신과 악한 신을 나누어 선과 악을 철저히 구분합니다. 반대로 인도종교에서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의 구분이 없는 선악 일원론이 발견되기도 하지요. 또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선과 악을 모두 가진 모호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엄밀히 볼 때 선악을 둘로 나누어보는 관점과 하나로 보는 관점은 서양과 동양에 모두 나타나고 있었고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차적으로 그 정도의 차이에 기인하여 선악 이원론을 서양종교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규정하는 것이고, 전 세계적으로 파급된 서양기독교의 영향력에 의해 이분법적 선악 이원론의 전통이 서양종교에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서양종교가 강한 이분법적 전통을 가진다고 전제했을 때 선과 악을 둘로 나누는 특징을 동양, 좀 더 정확히 말해 동아시아 전통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종교 교단의 종지(宗旨)에 입각해 보았을 때 도교의 ‘도(道)’·불교의 ‘불성(佛性)’등 동아시아의 종교형태에서 말하는 만물의 운행 원리는 이미 모든 사물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주재하는 절대적인 유일신을 상정하기는 힘들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절대자적 유일신이 있지 않다고 해서 선악 이원론을 동아시아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현 세상을 물리치고 새로운 선한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대승불교의 미륵사상이나 선천이 가고 후천의 세계가 도래한다는 민중적 혁명사상은 선과 악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종말론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선과 악을 나누는 이분법적 기준이 서양에서 유래했다고 하여 서양만 선·악을 논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선과 악에 대한 설정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동아시아는 정교일치(政敎一致)체제 안에서 강력한 신념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가 종교적 역할을 일부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유교에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말로써 자기의 ‘사욕(私慾)’을 이겨 보편타당한 ‘예(禮)’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일면 건전하기 그지없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극복해야 할 대상 ‘자기(己)’는 곧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극기’라는 개념은 사적 이기심과 사사로운 욕망의 발단이 되는 현실의 인간을 부정적인 대상으로 볼 수밖에 없는 한계를 만들어냅니다. 이 때 ‘극기’하여 일반 인간 대상을 넘어 이상적 경지로 옮겨가는 자는 선한 행위를 하는 자가 됩니다.
이상적 경지를 설정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BC427~BC347)이 현실이 모방하고 있는 이상적인 세계 이데아(Idea)를 설정한 것과 비교적 유사한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자(孔子, BC551~BC479)는 하늘과 같은 이상의 경지에 있는 추상적 선함을 말하기도 했지만 한편, 그것을 땅으로 끌어내려 현실에서 선한 행위를 구현하는 자를 ‘어진 사람[仁者]’이라고 했습니다. 어진 사람만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알아 볼 줄 압니다. 이 때 말하는 ‘나쁨[惡]’이란 어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어질지 않은 사람에 대한 미움입니다. 선함을 추구하는 어진 사람이 나쁜 행실을 보이는 악한 사람을 좋은 사람이 되도록 교화하려는 미움인 것이지요.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보면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선과 악에 대한 개념규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유교의 예를 들어 보았을 때 동아시아의 선악관은 서양의 이분법적 절대 신의 존재에서 파생된 종교의 선악관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종교적인 개념에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서양 중심의 종교개념 전파로 동서양의 전통적 차이가 현저하게 사라진 현대 종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상적 세계의 주재자인 신의 영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선이 되고 그 반대는 악이 됩니다. 악의 발원지가 되는 현실 세계에서 악이라 규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은 우리 삶에서 고통을 수반하는 외부의 영향이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의 시작이며 삶을 고통으로 보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는 회귀적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은 힌두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체적으로 과거부터 인간을 위협하던 자연재해, 질병, 전쟁과 같이 고통스러운 일들은 유한하고 한계적인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이것은 곧 현실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요소들이었습니다.
이 고통의 현실을 만드는 것에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의 전횡도 한 몫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과 민중들이 비참한 현실에서 죽지 못해 살아갔던 것이었죠. 종교는 선과 악을 구분하고 동시에 현실에서 선을 행하는 대리자들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도 있는 가톨릭의 교황, 왕권신수설로 만들어진 국왕, 중국의 천자(天子)라는 명칭들은 신 또는 주재적(主宰的) 자연의 섭리를 대신한다고 자부하던 자들이 이름입니다. 이 이름들은 무겁습니다. 무거운 이름은 권위를 가진 이름입니다. 무거운 권위는 가벼움을 상쇄하고 짓눌러 버립니다. 과거의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생동하는 인간의 상상력과 자유를 억압했지요. 중세의 가톨릭이 신의 이름으로 과학과 예술을 장악한 것이 그렇습니다. 1632년 ‘하늘의 원리가 지상에도 있다’고 발언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를 재판정에 세운 것도 종교였고, 예술은 종교와 권력 있는 절대자를 향한 찬미의 예술이 되었습니다.
그 이전 1600년에는 로마 교황청 광장에서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라는 르네상스시기 자연철학자가 자연의 무한성을 얘기한 이유로 화형 당한 비극적인 일도 있었습니다. 무한 존재인 신의 섭리가 모든 자연물에 그 자체로 생성되어 있다는 주장은 무한세계 절대자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던 겁니다. 이미 인간과 신을 나눈 종교는 선과 악을 나누고 현실의 사회정치에서 계급을 통해 인간 스스로를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분류된 인간들을 선별해 선과 악의 가치를 평가하고 소수의 힘 있는 자와 다수의 약자들을 나누어 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경계를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신의 이름으로 선한 위치를 선점한 힘 있는 권력자들은 다수의 약자를 악의 영역에 두고 이들을 지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