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례발표회 참관기] 조영준 선생의 논문 ?주체로서의 자연?에 관하여
?[2011년 8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 주체로서의 자연 -셸링 자연철학의 생태학적 함의
발표자: 조영준(경북대)
조영준 선생의 논문 ?주체로서의 자연?에 관하여
후기: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1.
한국에서 철학자 셸링은 영 찬밥이다. 발표자 조영준 선생이 아마도 한국에서 유일한 셸링 연구자가 아닐까 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독일 고전철학자 가운데 칸트와 헤겔만이 주로 언급되어 왔다. 이것은 일본에서 셸링이 주로 언급되는 것과 비교해 보면 무척 흥미롭다. 하여튼 그러다 보니 독일 고전철학은 한국에서 무척 심심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독일고전철학의 핵심적인 문제가 그저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독일 고전철학의 역사는 셸링이 끼어들면서 극적으로 반전된다. 여기에 비극적인 시인 횔덜린의 삶까지 엮어놓으면 이제 사람들은 독일고전철학이 수 세기에 걸쳐서 철학자들 심성을 왜 그렇게 자극했는지 이해할 것이다.
칸트와 자유, 튀빙엔 신학대학에서의 자유의 나무, 천재 셸링, 사랑에 빠진 셸링의 도피와 은거,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의 분노, 횔덜린의 혁명 음모와 체포, 학생운동의 발상지 예나대학, 나폴레옹의 침략과 독일낭만주의의 변절, 프러시아의 개혁, 헤겔과 베를린 대학, 시인 횔덜린의 비극 적 파멸, 베를린 대학에 등장한 말년의 셸링 등등. 이 많은 사건들은 독일 고전철학의 역사가 한 민족의 운명과 직결된 드라마였음을 드러내 보인다. 여기에 헤겔 이후 헤겔좌파의 역사까지 보태면, 1793년 칸트의 『한갓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로부터 시작하여 1847년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 이르는 거의 50년에 걸친 철학의 역사는 세계사적인 획기를 이루어낸 엄청난 드라마였다.
필자는 『헤겔 정신현상학』 ?서론?을 주석(『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묻다』)하면서 이 세기의 드라마를 풀어보려 하였으나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필자가 독일 고전철학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 철학의 역사가 오늘날 한국에서 다시 한 번 변주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국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포스트모더니즘, 라캉과 들뢰즈, 그리고 한국좌파 운동에서의 분열을 셸링과 헤겔의 대결이라는 모델 속에서 이해한다.
다행이 셸링 연구자가 한국에 출현했으니 이를 계기로 다시 한 번 독일 고전철학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그러니 필자로서는 이번 발표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래 존경해마지 않는 선배님을 모시고 술을 먹다가 뛰쳐나와 발표회장에 이르렀다. 이 자리를 빌려 필자의 건방짐에 대해 선배님께 용서를 빈다.
2.
조 선생의 발표를 듣다가 필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 또 한 사람 철학에 미친 사람이 있구나 하고 말이다. 다행히 교사로 근무한다니 먹고는 사는 것 같다. 하지만 발표하는 그의 목소리에 넘치는 힘은 언제라도 철학이라는 모험의 바다에 뛰어들기 위해 그 자신의 삶을 벗어던지고 말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선배 한 분이 생각난다. 우면동 산 속 비닐하우스에서 기거했던 분, 끝까지 철학을 사랑하여 철학을 시로 승화시킨 분, 결국 벌레가 척수에 기어들어와 쓰러지기까지 자기를 돌보지 않았던 분.
우리 한국의 철학계에는 이런 분들이 많다. 철학을 마치 종교적인 구도의 길을 가는 듯이 연구하는 분들이다. 그들은 먹고사는 삶에 조금도 연연하는 법이 없이 지금도 구도로서 철학의 길을 걷고 있다.
조 선생을 보면 이런 구도자로서의 철학자라는 삶의 모습을 다시 엿볼 수 있어 너무 기쁘다.
3.
조영준 선생의 논문 제목은 ?주체로서의 자연?이다. 부제는 ‘생태학적인 함의’이다. 제목은 금방 이 논문의 내용을 보지 않고서도 거의 짐작하게 만들어 준다.
우선 간단하게나마 조 선생의 논문의 요지를 들어보자. 논문의 의도는 생태학적인 위기에 처해서, 단순히 인간의 자연에 대한 윤리적 태도만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되지 않겠는가? 조 선생은 이렇게 질문하면서 이런 자연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단서를 셸링의 자연철학에서 찾으려는 것 같다.
자연에 대한 이해의 전환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조 선생은 오늘날 생태철학의 입장과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보겠다. 이런 의도에는 어떻게 보면 반세기 전 하이데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이데거 역시 현대의 과학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존재론적인 전환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전환은 이미 김지하 선생이 생명철학에서 시도하여 왔다. 아마도 조영준 선생의 의도가 제대로 실현된다면 이런 생태철학의 흐름이 더욱 풍부한 근거를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4.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그렇다면 셸링이 이해하는 자연이란 어떤 것인가? 조 선생은 셸링의 자연철학을 3기로 나누어, 초기 피히테의 절대적 자아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절과 중기 그의 독자적인 자연철학이 제시된 시기(1798-1800), 그리고 180-1806 사이의 동일철학의 시기로 나눈다.
그런데 조 선생이 논문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바로 중기의 입장이다. 특히 조 선생은 이 시기에 셸링이 제시한 생산성 개념을 강조한다. 이 생산성 개념은 거슬러 올라가면 스피노자의 자연 개념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곧 자연의 역능, 잠재성의 개념이다. 조 선생의 역점은 스피노자의 사후 잊혔던 생산성 개념을 다시 부활한 사람이 바로 셸링이라는 데 있다.
조 선생은 여기서 관념론적인 자연 설명과 실재론적인 설명을 구분한다. 피히테에서처럼 자아가 정립하는 것으로서 자연 개념은 관념론적이다. 반면 역능 개념은 실재론적인데, 조 선생은 이렇게 구분함으로써 독일 고전철학 속에서 셸링의 철학의 위치를 분명하게 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조 선생은 자연 개념의 이런 실재론적인 성격 때문에 셸링의 철학은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유물론의 선구가 된다고 본다.
그런데 조 선생의 논문에는 왜 이것이 실재론적인가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서 유감이었다. 또 무엇을 실재론적이라고 하는가도 설명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발표 이후 이 문제에 대한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이 점에 관해 사실 조 선생은 ‘역동적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관해 필자가 약간 부연 설명을 하자면, POTENZ 즉 역능 잠재성 개념은 수학에서 미분의 힘에서 연상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미분함수의 전개는 발생론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생산적이라고도 한다. 조 선생은 바로 이런 발생론적 생산적인 과정을 일컬어 실재론적인 자연 설명이라고 본 것이 아닐까 한다.
5.
조 선생은 논문의 4절에 이르러 ‘주체로서의 자연’ 개념을 제시한다. 아마 이것이 논문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사실 이 부분은 좀 애매하다. 왜냐하면 철학에서 주체라고 한다면 항상 데카르트 이래로 자기를 대상으로 정립하는 사유의 활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그런 활동은 관념론적인 것이라고 해서 셸링이 비판했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만일 자연을 주체로서 파악한다면, 이것은 피히테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조 선생의 논문에 대해 많은 토론자들은 이렇게 질문했다.
조 선생의 답변은 논문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조 선생은 여기서 두 가지 주체 개념이 존재한다고 본다. 둘 다 자기를 대상으로 정립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하나는 그 활동의 산물인 대상과 자아가 대립되는 것이다. 반면 다른 하나는 오히려 활동의 산물인 대상과 자아가 일치하는 경우이다. 전자가 피히테적인 주체라면 후자가 바로 셸링적인 주체이라고 조 선생은 말한다.
조 선생은 이 구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전자의 자아는 ‘경험’적이고 후자의 자아는 ‘선험적’이라고 말한다. 이런 구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 차이에 대하여 조 선생이 충분하게 설명하지 않으므로 필자가 나름대로 덧붙여 설명하자면 이렇다. 즉 예를 들어서 자아가 주관적인 목적을 대상으로 정립하면 그것은 결국 객관적인 실재의 반격에 부딪힌다. 그러나 자아가 자연의 진정한 내재적인 목적을 정립한다면, 그 대상은 객관적 실재와 일치하게 된다.
결국 셸링의 ‘주체로서의 자연’ 개념은 주관이 자의적인 원리가 아니라, 자연의 내재하는 원리를 인식하여 그것을 자아의 활동성을 통하여 대상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방점은 자연의 내재적 원리에 대한 인식에 주어진다. 셸링에 있어서 자연의 내재적 원리는 곧 자연을 발생시키는 생산성이다.
그렇다면 굳이 주체의 활동성을 말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아니다. 셸링의 경우 활동성은 피히테적인 주체의 활동성과도 구분된다. 여기서 주체의 활동성이란 자연에 원리를 부여하는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원리를 드러내는 활동이다. 이런 생각은 마치 미켈란젤로가 조각가란 돌 속에 내재하는 형상을 쪼아내어 드러내는 자라고 말한 것과 서로 통한다.
약간의 사변을 덧붙이자면, 어쩌면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드러내도록 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반성하는 매개자가 아닐까?
당연히 셸링의 철학이 윤리학적인 칸트, 피히테의 성격과 구분되어서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성격을 지니는 이유가 여기서 이해된다. 자연에 관한 이런 미학적인 개념이 자연에 대한 생태학적인 개념과 직결된다.
조 선생이 논문의 결론에서 설명한 바, 주체로서 자연이라는 셸링적인 개념을 생태학적인 함의는 그렇다면 무엇이 될까?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인간의 활동은 자연의 내재하는 생명을 드러내는 활동이어야 한다고. 이런 생각은 김지하가 인간의 삶이 신명을 드러내는 활동이라고 규정한 것과 맥락이 통하지 않을까?
6.
헤겔은 셸링의 철학을 비판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의 내재적 원리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헤겔의 물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직관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자의와 어떻게 구분되는 것인가? 자신의 자의를 직관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닐까?
당시 낭만주의자들은 중세의 기사제에서 개인의 자유와 전체와의 조화가 일치하는 삶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세 신성로마제국에서 독일통일의 환상을 보았다. 헤겔의 분노는 이런 낭만주의자들이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환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헤겔은 자연의 내재하는 원리를 인식해야 한다는 셸링의 정당한 입장은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렇다면 그 원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그 물음을 수행한 자가 바로 철학자 헤겔이다. 그런데 셸링의 관점에 서 있는 조 선생은 헤겔의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다.
7.
알려진 바에 따르면 셸링은 베르그송에게 영향을 주었고, 베르그송은 다시 들뢰즈에게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오늘날 들뢰즈의 많은 생각들, 특히 자연과 역사를 역능 개념을 통해 체계화하려는 들뢰즈의 시도는 셸링에게서 유래한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셸링의 철학에 대해서는 이미 헤겔 이후 많은 비판이 주어져 왔다. 어떻게 본다면 헤겔의 철학은 셸링에 대한 비판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 철학이 지니는 한계를 헤겔의 철학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사실 이것이 필자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던 문제이고, 앞으로 많은 논의가 있기를 바라는 주제이기도 하다.
끝으로 철학의 정열을 잃지 않는 조 선생에게 다시 한 번 뜨거운 연대를 느낀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고독한 철학자들, 그러나 민족의 운명을 철학으로 개척하고자 하는 성스러운 철학자들의 연대에 있는 모든 동지들 곧 한철연의 이름으로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