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 노무현이면 콩쥐, 친 이명박이면 팥쥐?![철학자의 서재]
친 노무현이면 콩쥐, 친 이명박이면 팥쥐?![철학자의 서재]
오항녕의 <조선의 힘>
오상철(한철연 회원)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PC방에서 들킨 대한민국
대선 기간 막바지, PC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문재인은 빨갱이야”, “맞아 맞아, 근데 박근혜는 친일파래”, “히히, 그럼 누구 찍어?” 희희낙락하며 주고받는 이 대경할 대화에 아연실색하여 돌아보니 허탈하게도 초등학생 몇몇 애들이었다.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좋은 놈이야?’
그 아이들은 한 후보를 빨갱이라 하고, 한 후보를 친일파라 말하고 있었다. 주변, 특히 인터넷에서 연일 쏟아지는 책임 불명의 말들이 아이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발음되고 언어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조용히 모니터 화면에 몰두했다. 세상의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결정하는 일이 당장의 온라인 게임보다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흐름이다. 무리에서 소외되지 않게, 회자되는 소재에 대해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 아이들은 각자 사유에 의한 판단이 아닌 직관적인 선택을 했고, 그 둘의 차이는 다행히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어느 무리에 소속되기를 바랐을 뿐이니까. 선택은 나열된 사안 중에 단지 한 가지를 고르는 행위이고, 판단은 특정한 상황에서 사리 분별을 통해 결정하는 행위라고 하자.
PC방 아이들은 손쉽게 ‘선택’했지만 그것은 ‘판단’이 아니다. 그리고 선택도 단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양자택일 구조의 선택이었다. 한쪽이 좋은 사람이면 한쪽은 나쁜 사람이다. 다른 경우는 없다. 내 편은 좋은 사람이고, 내 편이 아닌 사람은 적이고, 적은 나쁜 사람이다. 비단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논리 구조의 문제일까? 선택에는 마땅히 그 선택을 이유로 한 목적이 수반된다. 그런데 그 목적이 단지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요즘 한국에선 특정 당의 정책을 비판하면, 당 그 자체를 비판하는 정치 세력으로 치부된다. 만약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반정부주의자로 둔갑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복지 정책에 비판적인 사람과 정부 정책에 긍정적인 사람이 있다. 전자는 기존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후자는 기존 정책이 유지되길 바란다. 점진적 보완과 수정으로 정책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을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정부의 정책은 다양하고, 그 분야에는 가짓수도 대단히 많다. 그런데 정부의 정책 중 일부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말미암아 그를 반정부주의자로 매도하고, 심지어 비난한다. ‘정책’에 관한 판단을 하지 않은 채, ‘정책’ 선택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꼬고 야유한다.
‘정책의 다름’이 무엇인지, 왜 그런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 대상의 한 부분이라도 누군가가 문제 삼으면 곧바로 선택에 들어간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면 반정부주의자고, 나쁜 사람이다. 이런 바탕에선 정책을 논할 수 없다. 이런 판은 광장이라 할 수 없다. 인터넷 공간을 부유하는 한낱 정체불명의 구호들을 입으로 배설하고 있던 PC방 초등학생들의 수준과 무엇이 다른가?
자기 사유화를 거치지 않은 채 ‘선택’에만 국한한 논의는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고, 타당한 정치적 행위 자체를 불신하게 하는 상태까지 이르게 한다. 결국 선택의 목적이 적에 대한 확신이나 자기 방어가 되어, 스스로 만든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우리 사회는 이미 상당 부분 이런 이분법적 사고 프레임에 잠식되어 있다.
나는 우선 이런 사태의 원인 중에 하나를 일제 식민사관이 만든 조선 역사 왜곡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오항녕의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에선 이 프레임에 대한 한 편의 근거를 제시한다.
콩쥐/팥쥐 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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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의 <조선의 힘>은 조선이 왕조를 500년간 지속할 수 있었던 저력에 관해 말하고 있다. 최고 권력자인 왕에 대한 교육과 견제 작용의 경연(經筵), 역사의 흔적 실록(實錄), 200년간 진행된 대동법(大同法), 오래된 미래 조선 성리학(性理學) 그리고 조선에 대한 여러 오해들을 풀어가면서 조선 시대의 가치를 조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조선이 근대로서 전환 실패에 따른 실패한 체제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근대로의 전환은 시험에 합격, 불합격을 따지듯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일부만 제외하고는, 지구상에 조선을 비롯해 대부분의 문명들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를 자신들의 미래로 생각하지 않았다.” (5쪽)
근대를 척도로 한 역사의식과 서구 역사를 잣대로 한 시대 의식이 조선을 편견으로 바라보게 하진 않았을까? 그리고 우리의 유전인자에 원래 사대주의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식민사관의 세뇌가 우리의 역사적 자부심을 억압하고 있진 않는가?
저자는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폭력적인 프레임을 말한다. 근대를 절대화하여 ‘근대=선’/’조선=전통=악’이란 도식이다. 나아가 ‘사대=나쁜 나라’ 대 ‘주체=좋은 나라’라는 전형적인 ‘콩쥐/팥쥐’ 구도를 형성한다고 한다.
‘콩쥐/팥쥐’ 구도는 판단이 아닌 선택이고, 선택이 아닌 강요이다. 이미 좋은 편, 나쁜 편이 결정되어, 좋은 편은 무엇을 해도 좋은 일이고, 나쁜 편은 무엇을 해도 나쁜 일이 되는 구조, 그리고 내 편이 아니면 다 나쁜 편이고 내 편을 싫어하면 다 나쁜 편이 되는 구조에서 우리의 선택은 ‘과연 선택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돌출시킨다.
조선의 팥쥐 대동법, 성리학, 사대
조선에는 어떤 콩쥐와 팥쥐가 있을까? 먼서 대동법 콩쥐/팥쥐를 살펴보자. 대동법은 공납의 폐해를 개선하고자 백성을 위해 펼쳤던 정책이다. 약 200년이 걸린 이 정책은 조선 사회의 획기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대동법을 정책이 아닌 지주/소작이라는 계급론으로 환원하여, ‘콩쥐/팥쥐’의 구도로 만들어 버렸다. 양반은 지주이자 팥쥐, 백성은 소작이자 콩쥐로 만들었다. 그리고 양반 세력에 맞서 대동법을 실행하고자 했던 왕도 콩쥐가 되었다.
사람들은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나 똑같은 놈들이지, 그놈이 그놈이야” 하면서 정치인들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한다. 정치인들을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자들로 보면서 서민과는 다른 집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대동법은 누가 추진했을까? 백성을 사랑한 왕이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양반들과 싸워서 이긴 결과일까? 아니다. 대동법의 제안도 실행도 모두 양반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관료들이 양반이었고, 지주들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정책을 논의하고 실행할 때 어떤 관료는 정통한 지식을 바탕으로 끈질기게 개혁을 추진하고, 어떤 관료는 사안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며, 어떤 관료는 반대하기도 한다. 방향이 같아도 진단이 다를 수 있고, 그에 따라 급선무를 달리 생각하기도 한다. 재정 안정을 고려할 수도 있고, 군비를 고려할 수도 있으며, 민생을 고려할 수도 있다. 이렇게 다기한 요소를 제도화해 현실에서 운영하는 것이 정책이다.” (127쪽)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환멸은 그들을 정책을 내는 사람이 아닌 계급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팥쥐가 있다. 조선 성리학이다. 사람들은 흔히 조선이 망한 이유를, 현실 감각이 없는 이상주의 성리학자들이 조선을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라의 발전과 백성의 안위는 뒤로 한 채, 예송 논쟁과 형이상학 논쟁(주리(主理)-주기(主氣))에 대한 담론만 일삼았기에 나라가 강해지지 않고, 일본에게 강제 합병되어 조선이 망했다고 한다. 500년간 이어진 왕조에 대해서 너무 가혹한 평가가 아닐까? 이런 논리는 성리학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주기-주리의 개념을 통해 정치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사상사와 정치사의 분리 현상이다. 일제 시대의 다카하시 도오루의 주리-주기 논리를 이어받은 이병도가 여러 유보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단칠정 논쟁과 호락 논쟁을 관념적 독단 정도로 이해하고, 나아가 조선 정치사의 흐름을 식민지 시대 일본 학자들의 당쟁론 정도에서 이해하게 되는 근원적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190쪽)
조직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를 제시한다. 그리고 조직은 지향하는 이념의 이론을 체계화하고 공고히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의 체계화 과정만 싹둑 잘라 놓은 단편만으로 조선 성리학자들을 판단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관념 논쟁에만 빠져있던 성리학자는 팥쥐가 되고, 현실적인 이단자는 콩쥐가 되었다. 그리고 나쁜 성리학자들은 주자학과 다른 경전 해석을 하거나 유학이 아닌 다른 학문을 하는 좋은 이들을 이단이자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조선의 지배층은 자아도취에 빠진 히스테리 환자이자, 소인배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과거 청산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하기 위한 기본 전제이다. 역사 정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당당하기란 퍽 어려운 일이다. 친일파 청산도 같은 선상에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대한민국의 친일파에 대한 처분은 그리 명백하지 못하다. 아니, 아직도 끌려 다니고 있다. 우리가 당당하지 못한 이유는 혹시 팥쥐가 되어버린 조상 때문은 아닐까.
마지막 팥쥐는 ‘사대(事大)’이다. 사대란 약자가 강자를 섬긴다는 뜻이다. 후금이 만주에서 흥기했을 무렵 조선의 왕은 광해군이었다. 동생들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한 패륜아이자, 끝없는 궁궐 공사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 간에 실리 외교로 재조명받는 왕이 되었다. 실리 외교를 펼친 광해군은 콩쥐가 되고, 사대주의 명분론으로 국익을 망친 반정 세력은 팥쥐가 되었다. 명분은 헛된 것이고, 실리는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명분과 실리는, 같이 가면 좋은 것이 아니라, 원래 같이 가는 것이다. 명분 없는 실리는 오래 가지 못하고, 실리 없는 명분은 공허한 것이다. 곧 원칙 없는 정책, 비전 없는 정책이 오래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분과 실리를 나누어 어떤 역사적 사실을 해석했던 우리의 오염된 관점을 이쯤에서 반성해야 한다.” (223쪽)
정책에서 명분만 있는 혹은 실리만 있는 정책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명분과 실리라는 이분법적 구조에서 명분만 따지는 사대주의자들을 비판할 근거가 생겼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외교와 반정 세력의 명분론을 대립시키면서, 이 명분론을 명에 대한 사대주의로 규정했다. 식민사관의 사대주의론은 이렇게 광해군이 부활하면서 완성되었다. 타율성론-사대주의론-실리 외교론은 정교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이다. 사대주의론은 식민지 조선인, 특히 지식인들에게는 치명적인 상처였다. 죽은 자만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망한 나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사대주의-명분론 vs 실리론” (235쪽)
오항녕이 말하는 콩쥐/팥쥐 구조는 완성되었다. 이제 현재 대한민국에서 콩쥐/팥쥐 구조를 맛보기로 하자.
콩쥐/팥쥐 맛보기
현재 한국에서 콩쥐/팥쥐 구도를 살짝 대입해보자. 노무현-친노 세력이라는 팥쥐를 만들었다. 콩쥐는 반노 세력이지만, 그 의미의 폭은 확실하지 않다. 애초에 ‘친노’라는 개념 자체를 일부 언론에서 폭력적 이분법 논리로, 더군다나 그 스펙트럼조차 모호하게 퍼뜨렸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들은 노무현을 팥쥐로 만들고, 노무현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정책이나 정치력과는 상관없이 필요성이 있다면 어떤 관계든 끌어와서-팥쥐로 몰고 한 패거리라고 몰아붙인다.
노무현은 나쁜 사람인가? 대통령 시절의 자질 문제인지, 정치적인 이유인지, 자신의 이익과 관련해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노무현은 실패한 대통령이고, 한국을 망쳤기 때문에 나쁜 놈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정책과 반대하는 여러 사람들을 노무현과 함께 팥쥐로 만들어버렸다. 노무현과 관련된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노무현을 비판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구도를 만들었다. 비판하는 사람 중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그들과 무관하다고 말하거나 꼬리 자르기를 하였다. 이는 프레임을 동등하게 형성하지 않고, 편한 대로 형성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는 논의의 차원을 벗어난 통일성 없는 잣대이다.
오항녕은 이러한 프레임에 대해 “<국화와 칼>이란 책이 출간된 뒤, 마치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이나 21세기 한국 지식인들이 그러하듯이, 일본의 지식인들도 베네딕트가 강제한 ‘표상’에 대응했다. 전형적인 것이 1950년에 글을 발표한 와쓰지 데쓰로처럼 ‘일부 일본인은 그렇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는 식의 대응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그 프레임에 빠진다. 말하자면 해당 명제에 대항한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내면화해버리는 것이다”(237쪽)고 말한다.
중용의 역설 : 진짜 우리의 이름은?
한쪽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적절한 중도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다른 이들을 되도록 자극하지 않고 스스로도 자기 시야에 매몰되지 않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장려하는 중용의 미덕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과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가 주류를 이루는 요즘의 여론 환경에서 사람들은 앞 다퉈 극단을 좇는지도 모른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하나의 극단적인 주장이나 입장이 없으면 주목받지 못한다는, 수많은 정보와 말들의 편린 속에서 묻혀버릴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시나브로 우리의 의식을 점령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예컨대 ‘비겁’과 ‘만용’ 사이의 가운데쯤에서 ‘용기’를 택하듯이 극단(side)과 극단(side)을 피해 가운데를 선택하는 서양 철학에서의 중용 개념과, 동양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중용 개념은 사뭇 다르다. 왼쪽의 모서리(side)와 오른쪽의 모서리(side) 사이의 가운데 어디쯤을 선택한다 한들 그것 역시 결국은 하나의 모서리(side)가 될 수밖에 없다. 동양 철학에서의 중용이란 단지 입장의 양 극단을 피하라는 구호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존에 산재한, 그리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편견과 미혹 없는 마음으로 사물을 평직(平直)하게 바라보는 것.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기 위한 일련의 공부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중용이란 결국 하나의 온당한 모서리(side)를 가지기 위한 치열한 성찰과 연마(硏磨)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완벽한 역사의 진실을 추구하지만, 어쩌면 그것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더 나은 방법론을 개발하고 관점을 공유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거기에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진실은 하늘의 몫이지만, 진실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이라고, 성리학의 발달과 함께 사서의 하나가 된 중용의 저자는 말했다. 세상엔 정말로, 콩쥐도 팥쥐도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이름이 콩쥐이고, 팥쥐일 필요는 없다. 콩쥐와 팥쥐 사이, 진짜 이름을 찾은 사람끼리 있는 힘껏 자기 모서리를 부딪치고 또 조율하는 세상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