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슐로서의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철학자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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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슐로서의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철학자의 서재]

선우현 (청주교육대학교 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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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 가격에 양껏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세상, 정녕 좋아진 걸까?

예전만 해도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선, 명절이나 잔칫날에나 겨우 맛볼 수 있었던 ‘귀한’ 먹거리가 바로 ‘고기(육류)’였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한우 정도면 모를까 수입산을 포함하면, 비교적 부담 없는 가격으로 온 가족이 양껏 먹을 수 있는 것이 소고기 등심구이다. 돼지갈비와 삼겹살도 직장 회식이나 친구들 간의 모임에서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흔한 먹거리가 된지 오래다. 치킨 또한 전화 한 통이면 콜라와 함께 맛나게 먹을 수 있는 대표적 야식 메뉴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오늘의 풍요로운 현실에 대해, 그 옛날 보릿고개를 겪으며 배고픔의 설움을 경험했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거참, 세상 좋아졌다!”고 연신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사회, 즉 신자유주의로 새로이 포장된 자본주의 사회는 이전에 비해 더 나은 세상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는가?

햄버거무서운이야기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에릭 슐로서?찰스 윌슨 지음, 노순옥 옮김, 모멘토 펴냄). ⓒ모멘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싸고 맛있는 ‘먹거리’가 넘쳐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행복증적 현상’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일들에 대해, 핵심적인 내용을 온전히 전달하면서도 쉽고 재미있게 서술된 에릭 슐로서(Eric Schlosser)의 귀중한 책 하나를 만나게 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던 <패스트푸드의 제국>(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을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재구성한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Chew on this)>(노순옥 옮김, 모멘토 펴냄)이다. 책의 ‘머리말’에서 슐로서는, “우리는 패스트푸드점의 반짝거리고 행복해 보이는 표면 아래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아야 한다. 참깨가 박힌 빵 사이에 끼워져 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9쪽)고 역설한다. 여기서 우리는 저널리스트가 아닌 예리한 통찰력의 소유자인 철학자로서의 슐로서를 엿보게 된다. 왜? ‘철학(함)’이란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아닌, 현상 배후에 있는 ‘실체적 본질’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언제든지 부담 없이 맛나게 먹을 수 있는 고기며 햄버거며 풍족한 먹거리가 넘쳐나는 이 ‘행복한’ 세상의 배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슐로서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푸른 초원 대신 ‘똥 무더기’ 위에서 사육되는 가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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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먹거리 가운데 하나는 단연 햄버거다. 물론 어른들이 먹기에도 꽤나 맛있다. 게다가 언제든지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싼 가격에 간편하게 한 끼를, 그것도 맛있게 때울 수 있는 편리성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잠시 입을 호사하도록 해주는 햄버거 속에 들어 있는 고기는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금의 상태로 주어진 것일까? 아니 이 패티 뿐 아니라 주변에서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고기들은 대체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의 식탁에 오른 걸까?

그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기를 제공해 주는 가축들이 어떻게 사육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가축하면 우리는 흔히 ‘푸른 초원에서 소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목장’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적어도 미국과 같이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상상은 단번에 산산조각이 난다. 실제로 소나 돼지 등의 가축들은, 오직 더 많은 고기 생산을 위해 운동을 제한당한 채 특수 사료를 먹여 단기간에 살이 찌도록 의도된, 목장이 아닌 엄청난 규모의 ‘비육장(肥育場)’에서 판매용 고기 상품으로 제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들은 초원을 어슬렁거리며 신선한 풀을 뜯는 게 아니다. 도살되기 전 3개월 동안 소들은 (…) 특수곡물을 먹는다. 피부 아래 미리 이식한 성장호르몬의 도움을 받아 소를 빠르게 살찌우도록 설계된 곡물이다.”(151~152쪽). 온갖 오물과 배설물, 죽은 소들의 사체까지 있는 비육장에서 소들은 오직 먹기만 한다. 운동은 커녕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똥 무더기 속에서”(177쪽).

?치킨용 닭들의 삶 역시 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좁은 공간에 엄청난 수의 닭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먼지와 깃털, 병균으로 득실대는 환경 속에서, 오직 식용으로 적합한 크기로 살찌우게끔 먹고 또 먹는 삶이 지속될 뿐이다. 그것도 “첫날과 마지막 날을 빼고 한 번도 바깥에 나가지”(160쪽) 못하는 겨우 40일 동안의 삶이다. 어쩌면 그렇게 짧은 생이 나을지도 모른다. 오직 살찌우기 위해 먹는 삶으로 인해 “다리는 체중 때문에 구부러지고 체액이 가득 차 있”는 상태로 “끊임없는 고통 속에 살기”(161쪽) 때문이다.

그러나 가축들의 고통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사육장이나 비육장을 떠나 도축되는 과정에서도 그것은 계속된다. 가령 닭들을 도살 처리하는 도계장(屠鷄場) 내 모습은 공포 그 자체다. “닭들은 거대한 도계장에서 도살되는데, 빠르게 움직이며 수천마리의 닭을 운반하는 컨베이어 체인에 다리가 묶여 거꾸로 매달린다. 부품을 끼워 맞추는 자동차 공장의 조립라인과 달리 현대식 도축장의 생산라인은 해체라인이다. 죽이고 재빨리 분해한다.”(162쪽)

하지만 이처럼 무시무시한 도계 시설에서 도살되는 것은 그나마 고통이 덜한 편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잔혹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슐로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닭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일꾼들이 닭의 다리를 일일이 잡을 시간이 없다. 그러면 머리 위 체인에 매다는 대신 일꾼들은 남은 닭을 벽에다 집어던진다. (…) 여전히 꽥꽥대며 퍼덕이는 것도 있다. (…) 짜증 난 일꾼이 닭 위에서 뛰며 짓밟거나 잡아서 벽에 다시 던진다.”(164쪽)

ⓒ 오마이뉴스, 최병렬

ⓒ 오마이뉴스, 최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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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적 살처분’이란 미명하에 자행되는 ‘가축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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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사람들에게 싸고 영양가 높은 맛난 고기를 제공하는, 고마운 존재인 사육 동물들이 겪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공포, 괴로움은 제대로 포착되기가 어려웠다.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사육장이나 도축장의 실태는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는, 가축들이 겪는 야만적인 학대의 실상을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세히 목격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구제역이나 조류 독감으로 인해 수백만 마리의 돼지와 소, 닭과 오리가 살아 있는 상태로 생매장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소위 ‘살처분’을 들 수 있다. 가축 학살 동영상을 통해 드러난, 구덩이 속에 내던져져 울부짖는 채 생매장 당하는 돼지들의 참상은 그야말로 가축 판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한데 얼마 안 되어 이번에는 조류독감으로 인해 전국에서 닭과 오리가 또 다시 살처분 당하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비(非)생명윤리적인’ 만행이 재현되고 있다. 그 수가 무려 380여 만 마리! 정녕 이래도 되는 걸까? 그것들은 엄연히 살아 있는 ‘생명체’ 아닌가? 과연 그러한 가축들을 한갓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먹거리 상품’으로 간주하여, 경제적 손실을 줄인다는 이유로 그처럼 임의로 살처분할 권리가 우리 인간에게 주어져 있기나 한 걸까? 설령 도축이나 살처분을 당하는 경우에도, 동물의 입장을 고려해 고통과 두려움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도리 아니겠는가?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들은, 마치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고 사용하다 쓸모없거나 경제적 손실이 된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전자제품처럼, 대규모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생산되어 소비되는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될 뿐이다. 동물들이 지닌 생명이나 그것들이 느낄 공포나 두려움, 아픔이나 고통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인간도 그것들과 똑같이 느끼고 의식하는 ‘동물’인데도 말이다.

여전히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도축장 내 노동자 세상

도축장은 사육 동물들에게도 무섭고 고통스럽지만, 작업하는 인간들에게도 끔직하고 위험하기 이를 데 없다. ‘정글’처럼 야만적인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판치는 도축장 내 노동자들이 처한 실상은 이미 100여 년 전 작가 겸 저널리스트인 업튼 싱클레어에 의해 적나라하게 폭로된 바 있다. 그 일부에는 “일꾼 하나가 사고로 큰 통에 빠져 라드, 즉 돼지기름이 되어버린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얘기도 있다.”(166쪽)

?문제는 지금도 도축장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이윤 추구에서 비롯된 비윤리적인 정글의 세계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정육회사들이 패스트푸드 업계의 필요에 맞추느라 대형화하면서 임금을 깎기 시작했다. (…) 그리고 생산라인의 속도를 올렸다.”(168쪽) 소를 해체해 진공 포장육으로 만드는 생산 라인의 속도는 도축장을 두려움과 공포, 고통의 소굴로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럼 왜 라인은 그처럼 빠르게 움직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속도가 빠를수록 회사의 수익은 커진다.”(171쪽) 분당 7마리 정도의 큰 소가 생산라인으로 보내지면 일꾼들은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을 자르고 저며 낸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심하게 다치거나 생명을 잃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를 담당하는 미국 정부의 ‘직업안전위생관리국’이 작성한 보고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고기 가는 기계에 팔이 끼여 죽고, 컨베이어에 머리가 부서져 죽기도 한다. 암모니아 유출로 한 명이 죽고 여덟 명이 다치기도 했으며, 가축을 기절시키는 스턴총에 죽은 사람도 있다.”(169쪽)

하지만 노동자들은 부상이나 죽을 수 있는 위험 사태에 대해 제대로 항의조차 못한다. 정육회사들은 그들을 “경고 없이 아무 때든, 무슨 이유로든 해고할 수 있다.”(172쪽) 멕시코 등에서 갓 이민 온 ‘불법 체류자’가 작업장 인부의 다수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부양할 가족이 있는 그들의 처지에서 불평이란 곧 “모든 것을 잃을”(172쪽)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좀 알겠는가? 우리가 식탁에서 맛나게 먹는 고기는, 도축 작업장 내 인부들의 목숨 혹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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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광우병과 ‘O-157: H7’ 대장균: 가축의 역습 혹은 복수?

이제껏 아무 생각 없이 맛나게 먹었던 고기가, 가축들뿐 아니라 사육하고 도축하는 사람들의 희생과 아픔의 대가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리 맛있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과 희생은, 고기를 먹는 우리들에게 또 다시 전이된다. 이름 하여 ‘사육 동물의 복수’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맛난 고기로 인해 인간의 생명이 위협받는 대표적인 예로는 ‘인간 광우병’을 들 수 있다. “값이 싸게 치이는 단백질”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은 소’, 즉 “도축장에서 나온 부스러기 쇠고기와 피를 소에게 먹였던”(218쪽) 탓에 새로이 등장한 치명적인 불치의 병인 인간 광우병은, 한 순간의 고기 맛을 보기 위해 ‘인간의 생명’을 담보해야 하는 극도의 위험성과 두려움을 우리 인간들에게 고스란히 안겨 주었다.

?그러나 전 세계인들을 ‘멘붕’ 상태로 몰아넣은 광우병보다 ‘현실적으로’ 한층 더 위험한 것은 치명적인 ‘장출혈’을 일으키는 새로운 대장균 “E. 콜리 O-157: H7″(174쪽)이다. 실제로 이 병원균에 의해 희생된 사망자 수만 해도 인간 광우병의 그것보다 월등히 많다. 미국 ‘질병통제센터’에 의하면, 해마다 자국 내에서 대장균 O-157: H7에 감염되는 사람은 대략 7만 3000여 명이며 그 중 61명이 사망한다. 사망자 대부분은 어린이와 노인이다. 특히 어린 아이들의 경우, 적지 않은 수가 제대로 익히지 않은 햄버거 속 고기 패티에 들어 있던 대장균으로 인해, 피가 섞인 설사를 하며 내장 기관에 수많은 구멍이 뚫리는 고통을 당하면서 죽음에 이르렀다. 로렌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로렌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병원에 입원해 엄청난 고통과 세 번의 심장발작을 겪은 후 1992년 12월 28일 엄마의 품에서 죽었다. 겨우 6살이었다.”(174쪽)

그런데 이처럼 그 정체를 파악키 어려운 치명적인 병원균의 출현과 확산이 이루어지게 된 근본 원인은, 대규모 축사와 거대 도축시설을 갖춘 기업화된 ‘공장식 축육(畜肉) 생산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대장균 O-157: H7만 해도 그 병원균의 서식지는 ‘소의 위장’임이 밝혀졌다. 이는 근본적으로 가축의 대량 사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소는 반추동물로서 위가 4개이며 ‘풀’을 주식으로 삼고 있는 초식 동물이다. 방목하는 소들은 기계적인 되새김질과 위 속 세균의 작용으로 풀의 섬유소를 완전 소화하여 흡수한다. 그러나 대규모로 생산된 ‘옥수수’의 80% 이상을 가축 사료용으로 전용하고 있는, 기업화한 대규모 공장식 축산방식은, 소들이 수천 년 동안 먹어 본적이 없던 새로운 사료, 즉 ‘죽은 소’ 사체의 육골분을 섞어 단백질을 보충한 옥수수 사료를 제공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인간 광우병의 출현을 촉발시키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채 소장에 남아 있던 옥수수가 발효하여 장내 미생물을 ‘악산성의 걸쭉한 액체’로 변질시켜 대장균 O-157: H7이 증식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그 결과 도축된 고기나 배설물 등을 통해 해마다 미국 내에서만 수만 명의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그 중 수십 명을 사망케 하는 무시무시한 사태를?초래했던 것이다.

이처럼 지방질 많은 맛있는 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마음껏 즐기기 위해, 우리 인간은 풀과 건초로 사육해야 할 초식동물인 소에게 비육을 위해 과도한 옥수수 곡물을 제공하고, 초식동물에 맞지 않는 동물성 사료를 공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처참했다.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거스른 대가로, 미쳐 날뛰는 ‘식우종(食牛種)’을 출현시켜 생태계 질서의 붕괴를 자초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간 광우병’의 등장과 가공할 대장균의 출현 및 무차별적 확산에 따라 인간 종(種) 자체의 보존이 위협을 받게 되는 새로운 유형의 ‘위험 사회’의 등장을 우리 인류는 현재 맞이하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주말이나 휴일이면 동네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있다. 어린 아이들이 아빠 엄마와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햄버거 세트를 맛나게 먹으며 행복해 하는 모습! 그리고 그 아이들이 미소 짓는 모습에 다시 또 행복해 하는 부모들의 모습! 참으로 보기 좋고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고마운 것 아닌가? 단 돈 몇 천원에 맛난 한 끼 혹은 간식으로 그처럼 아이들이 행복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처럼 웃음꽃 가득한 정경의 이면에는 무수히 많은 사육 동물들과 사람들의 희생과 아픔, 고통과 좌절 그리고 너무나 슬픈 ‘이별’이 자리하고 있다. 고통 없이 사육되고 도축될 최소한의 ‘동물 권리’마저 허용되지 않는 야만적인 거대한 공장식 육류 생산 시스템, 생명체가 아닌 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한갓 ‘상품’으로 취급되는 사육 동물들의 비애, 철저히 ‘돈의 논리’에 의거해 멀쩡히 살아 있는 가축들이 수백만 마리씩 생매장 당하는 반(反)생명윤리적인 비극적 참상, 살처분 작업에 참여한 관련 공무원들이 겪는 끔직한 정신적 트라우마와 후유증,?소수 대기업이 독점한 기업형 고기 생산 방식으로 인한 수많은 축산농가의 몰락과 좌절, 도축장 내 노동자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횡포와 수탈 그리고 희생, “노조를 모르는”(84쪽) 햄버거 매장에서 거의 착취 수준으로 부림을 당하는 10대 청소년 종업원들의 환멸과 좌절, 끝으로 순간의 맛과 미소, 행복 뒤에 닥칠지 모를 치명적 질병으로 인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이 겪게 되는 엄청난 고통과 아픔, 그리고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

이러한 실체적 진실에 접하여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슐로서에 의하면, 정부나 의회는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패스트푸드 회사와 그들의 공급업자들이 지닌 정치적 힘은 의회가 할 일에 대한 논의를 대부분 무의미하게 만들기”(229쪽)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요구를 지닌 더욱 막강한 집단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 “소비자들이다.”(229쪽) 그런 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극복 방안을 모색함에 있어서, 그 일차적 실천 주체는 바로 우리들이며 그 주도권 역시 ‘궁극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 이 점을 슐로서는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진정한 변화를 향한 첫 걸음은 아주 쉽게 내디딜 수 있다. 사 먹지 않는 것이다. 패스트푸드 회사들이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에게 돈을 쓰지 않으면 된다. 음식 값으로 쓰는 한 푼 한 푼은 투표할 때의 한 표와 같다. 어떤 회사의 제품을 사는 것은 그 회사의 정책과 행동에 지지표를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다.”(2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