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민주주의 권리 주체의 대응 매뉴얼’은 존재하는가? [철학자의 서재]

외부 필자가 우리 한철연과 인연이 많은 알렙 출판사에서 나온 새책  [당신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습니까?](김영수 지음, 알렙, 2016)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 권리 주체의 대응 매뉴얼’은 존재하는가? 

송진완(논술개그 실장)

http://cafe.naver.com/nonsulgag/588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말처럼, 나는 20여 년 전에 친구따라 신림동에서 고시공부를 한 적이 있다. 고시원에 자리를 잡고, 용하다는 학원가를 전전하며 각종 고시과목의 족집게 강의를 듣는게 일상이었던 시절이다.

고시과목이 주로 ‘법’과 관련이 있다보니 찾아듣던 학원 강의도 대부분 헌법, 행정법, 민법 등이었다. 그런데 내가 법학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독 ‘헌법’과 ‘행정법’의 특징과 차이점이 기억에 남는다. 헌법 강의 교재인 각종 [헌법학 원론]들은 그 압도적인 두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루는 내용은 매우 추상적이다. 주로 민주주의의 핵심원리와 역사상 헌법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소개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한다. 그에 반해 행정법 책은 두께는 조금 얇아도 그 내용은 매우 방대하고 복잡하고 그러면서도 법체계가 매우 논리정연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고시공부 시절 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는바, ‘행정법은 국가의 것이고, 헌법은 국민(‘인민’이 더 정확한 용어겠지만…)의 것이다’라는 결론이다. 이러한 결론을 조금 더 자세하게 다듬으면 다음과 같다.

국가는 국민을 (합법적으로) 통제하고 착취하기 위해 ‘합법적이고 논리정연한 매뉴얼’ 즉, 행정법 체계가 필요했지만, 국민에게는 ‘두리뭉실하고 관념적인 권리장전’ 즉, 헌법학 원론만을 제공함으로써 권리의 작동체계가 매뉴얼화 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위와 같은 거친 논증의 핵심은 결국, 현실 민주주의는 국가에게만 유독 유리한 지형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현실 공산주의가 붕괴한 이면에도 똑같은 문제가 놓여있지 않은가? ‘당’은 체계적인 착취매뉴얼을 갖고 있지만 ‘인민’에게는 고작 ‘인민의 이름으로’라는 선언뿐이지 않은가. 공산주의라는 말이 경제시스템을 정의하는 차원일 뿐이지 공산주의 국가도 대부분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이상, 권력과 권리의 불균형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균형은 독재왕정이 민주공화정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어쩔수 없이 받아들여야만하는 ‘현상’인가? <당신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습니까?>(알렙출판, 2016)의 저자 김영수 교수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권력의 주체인 국가에게 ‘전가의 보도’인 행정법이 있듯이, 권리의 주체인 국민도 ‘관념적인 선언’ 이상의 ‘체계화된 권리 매뉴얼’을 연구하고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여년 전에 어느 고시생이 발견한 ‘행정법과 헌법 체계 사이의의 불균형 현상’은 정치학자인 김영수 교수에 의해 매우 세련된 진보적 민주주의 이론으로 ‘의식화’된다. 다음을 보자.

“(중략)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민주 국가에 살고 있는가? ‘민주 국가’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단 한번이라도 고민해 보신 적이 있는가? 만약 당신이 이런 질문을 케케묵은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이미 민주화된 국가에서 ‘민주’가 무엇이고, ‘국가’가 무엇인가를 왜 고민하느냐고 되물을 것이다. 되묻는 질문 속에 자기 스스로를 ‘무지의 폭력자’로 만드는데도 말이다. (중략)” <당신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습니까?> 머리말 중에서

권리의 주체인 우리가 ‘헌법학 원론’에서 강제된 좁은 의미의 ‘선언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천적인 민주주의 매뉴얼’을 가져야 한다고 자각하는 순간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국가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자각이 무엇인지 짚어주고 자각 이후의 행동강령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1부. 현상 : 민주주의 배반하는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원초적 자각을 촉구한다. 시민혁명 대신 일제강점기를 맞이하면서 민주주의의 선언적인 본질조차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반드시 자각해야만 하는 현실 현상을 제시한다.

[2부. 허상 : 행복을 짓밟는 국가, 국가를 소유한 가난뱅이]는 구체적 자각을 촉구한다. ‘헌법학 원론’이 가리고 있는 현실 민주주의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3부. 상상 : 민주주의 상상하는 민주주의]는 방안을 제시한다. 권리 주체인 국민이 행정법 체계에 대항할 수 있는 고성능 무기를 고안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지금까지는 진보적 시민단체에게나 어울린다고 치부하고 외면해왔던 생소한 개념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필수적인 실천적 개념으로 전환된다.

우리가 권력 주체로서 착취의 매뉴얼을 꿈꾸지 않는 이상, 우리가 권리 주체로서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민주주의 권리 주체 대응 매뉴얼’은 반드시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 책이 그 꿈의 길잡이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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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알렙 출판사

 

[서평] 해방 후 3년: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해방 70년-분단 70년이 되는 해에 ‘해방 후 3년’을 돌아보는 이유

조한성, 『해방 후 3년: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생각정원, 2015

 

 

조배준(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원)

 

분단과 전쟁으로 귀결된 ‘가능성의 역사’

1945년 이후 육십갑자가 지나고 십년이 더 흘렀다. 당시 한반도 민중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날’은 일제로부터 ‘해방(解放)’되었다는 환희를 느끼기에 충분했지만, 점령군이 된 강대국들 사이에서 민족의 미래를 온전히 우리 손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불안감도 엄습했을 것이다. 식민지 상태를 벗어났더라도 진정한 주권을 확보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까지 예상되는 수많은 난관을 짐작해보면 그들에게 진정한 광복(光復)은 요원했으리라. 그런데 정부는 올 해가 ‘광복 70주년’임을 강조하면서도 그 숫자가 동시에 ‘남북분단의 역사’를 가리킨다는 것은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8.15 해방 이후 정확히 3년이 되는 날에 대한민국이 건국되기까지, 즉 적대적 분단시대가 도래하기까지 한반도의 사람들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이념들의 정글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암울한 식민지 터널의 끝에서 염원하던 해방이 도래했지만, 우리는 왜 분단이라는 또 다른 터널로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처럼 독립의 완결과 분단의 극복은 서로 중첩되고 연결된 역사적 과제로서 우리에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문제로 남아 있다. 친일청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에서 후대 세대에게 민족국가의 진정한 독립을 운운하기가 어렵다면, 진정한 광복 역시 한반도의 분단이 지속되는 한 완수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의 역사를 한국만의 관점에서 거칠게 요약하자면 ‘건국․압축성장․민주화’의 과정이겠지만, 한반도 전체로 보자면 그것은 곧 ‘분단․전쟁․적대적 대립’이 낳은 구조적 산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통일된 민족 국가의 건설로 나아가지 못하고 서로 다른 두 체제로의 분단을 저지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해방 후 3년’은 남북이 각각 성공한 ‘건국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분단으로 귀결되고 만 ‘실패의 역사’이다.

그런데 이 책의 필자(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는 그 실패의 역사에서 ‘가능성의 역사’를 확인하려고 한다. 그는 “해방 후 3년은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꿈꿀 수 있었고,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만들 수 있었”던 시기라고 강조한다. 물론 그 해방공간의 이야기 속에서 미래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안에 일치된 노선이나 어떤 합의점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저마다 신봉하는 가치를 절대시하고 너무나 다른 민주주의‘들’을 말했으면서도 그 실패의 역사에는 새로운 사회 구조를 지향했던 강렬한 열망이 숨어 있다. 그런 점에서 그 혼돈의 과정은 각 민족 지도부의 시행착오와 좌충우돌 또는 점령군의 전횡과 억압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곳곳에서 야만적 폭력이 횡행했지만, 적어도 당시는 개인적 삶과 정치공동체의 혁신을 함께 꿈꿀 수 있을 정도의 희망은 존재하던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조국을 ‘헬(hell) 조선’이라는 말로 요약하는 젊은이들이 태반인 2015년의 한국에서 그 시대가 품었던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을 위한 희망”은 간절하게 그리운 것이다. ‘자살률 세계 최고, 출산율 세계 최저’로 대변되는 오늘날 한국 청년 세대들의 절망적 시대 인식을 극복하기 위한 돌파구는 단지 정권교체로 일어나는 역사적 진보나 퇴행의 수준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 인민들과 정치공동체를 위한 보다 근본적인 미래 전망 속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통합을 말하는 것은 먹고사는 문제에 치여 뜬 구름 잡는 얘기로 간주되고, 국가 시스템은 위급한 상황에서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점을 새삼스레 확인시켜 주고, 정치는 혐오나 냉소의 대상이 되어 가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이른바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찬란한 ‘광복 70년’의 해에 한국현대사의 출발점은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7인의 민족지도자, 그들의 선택과 분열의 한계

필자는 해방 후 정치 지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7명의 민족지도자들, 즉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김일성,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어떤 정치적 열망 혹은 야망을 표출하며 새로운 국가의 건설로 나아가려 했는지를 추적한다. 필자는 이 7명의 언급 순서는 “해방 후 활동을 개시한 순서나 귀국한 순서”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들이 대표하는 각 세력의 제반 조건 및 활동 방향의 배경과 그 결과를 요약하며,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종료 시점까지 즉, 분단으로 가는 폐쇄회로에 갇히기 전까지 그들의 ‘차이’를 강조한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을 미리 준비하며 자주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국내에서 노력했던 여운형, 일제강점기 한국 최고의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던 박헌영, 국내 우파 민족주의 세력을 대표하던 송진우, 항일무장투쟁의 전설적인 지도자로 이름을 떨치던 소련군 장교 출신의 젊은 지도자 김일성, 미군정의 적극적인 후원을 이끌어내며 급부상하고 있었던 이승만, 임시정부를 이끌며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세력을 대표하던 김구, 중도우파 입장을 대표했던 김규식의 존재는 오늘날의 한반도엔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정치적 세력들을 대변한다.

물론 이 책은 서술 과정에서 때로는 논리적 비약이나 압축을 부득이하게 보여줄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제한된 분량의 대중교양서에서 각 인물들의 성취와 한계를 분명히 제시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보다 저자가 더 경계하고 있는 점은 ‘해방 후 3년’은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이 이미 그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다는 시각이다. 냉전의 서막을 알리며 한반도에서 맞붙은 두 강대국 사이의 힘겨루기 속에서 어떻게 분단을 피할 수 있었겠냐는 논리이다. 미소의 분할 점령과 모스크바 3상회의, 미소공동위원회 등 세계 질서 재편의 흐름 속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도 그저 강대국 입장의 대리인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비록 그 ‘세계 체제의 규정력’이 막강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해방 후 3년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미․소가 만든 세계 질서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조금씩 방향을 바꾸고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면서 하나하나 소중하게 만들어간 역사”라고 강조한다.

여러 단체와 조직이 서로 다른 정치적 이상을 지향하며 난립하며 경쟁하던 당시 상황에서 저자는 민족통일국가가 수립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시점으로 정당통일운동과 정부통합이 시도되었던 해방 이후의 4개월여 시간을 꼽는다.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라는 상설 회의기구가 만들어졌던 데에서 보듯이 당시 단일한 정치적 의결기구를 건설하기 위한 열기는 뜨거웠다. 하지만 좌우익으로부터 조정자 역할을 위임 받게 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우익인사로만 채우면서 이 정당통일운동의 성과와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그 후 중경 임시정부와 조선인민공화국의 좌우익 ‘통일합작운동’이 기대를 받기도 했지만, 큰 뜻으로 화합하지 못하고 단기 정략적인 입장만을 내세운 각 세력의 태도로 인해 역시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지 못했다. 또한 신탁통치에 대한 격렬한 입장의 대립 이후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이 참여한 ‘4당 합의’도 우익 정당들의 중도이탈로 수포로 돌아갔다. 여운형과 김규식으로 대변되는 좌우세력이 다시 만났던 ‘좌우합작운동’에서도 박헌영이 주도한 좌익 세력의 비타협적인 입장은 걸림돌이 되었다.

이처럼 통합된 힘을 창출하지 못했던 연속된 분열과, 지리멸렬하게 소멸해 버린 자생적 정치역량의 표출 가능성을 돌아보면서, 저자는 민족의 역량이 결집될 수 있었던 기회의 상실을 탄식한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공전되면서 ‘예정된 미래’로서의 분단이 다가올 때, “우리 민족이 하나로 뭉쳐 합의를 종용했다면 미국과 소련이 자신들의 의견을 고집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각 세력의 합치된 의견이 단일한 정치력으로 승화되었다고 해서 극동지역에서 맞붙은 세계체제의 강고한 규정력을 극복할 수 있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역사적 성과는 이후의 분단 극복 과정과 통일의 전망을 위해서 중요한 자산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념적 대립을 넘어 민족적 합력이 단기간이나마 창출될 수 있었다면, 외세의 영향이나 체제의 통합보다 사람들 사이의 통합이 분단 극복의 과정에서 최우선이라는 민족적 가치가 명징하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반도는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자마자 미소의 동아시아 전략에 종속된 극단적 이념 지향의 미로 속에서 전선의 최전방이 된지 2년도 채 안 되어 잿더미가 되었다.

 

대한민국 탄생 시기의 과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이런 점에서 해방 후 3년은 오늘날 세습 통치와 수령론에 근거한 극단적 폐쇄사회인 북한 체제와, 반세기 넘게 친일친미기득권 세력의 후예들이 건국세력의 적통을 참칭하며 여타의 다른 세력을 ‘좌빨종북’으로 매도하는 한국정치사의 근원적 모순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건전한 보수 민족주의 세력, 열려 있는 사회주의 세력, 중도좌․우 세력 등이 한반도의 정치 지형에서 설 자리를 완전히 잃게 되고, 극단적인 체제경쟁과 적대적 군사대치가 각 통치 세력들에게 활용되기도 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3년간의 정치적 진통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해방공간의 정치 지형이 응축하고 있던 공화의 이념, 민주주의의 다양한 논리들의 스펙트럼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공화’와 ‘민주’의 개념이 아주 제한적이고 편향적인 의미로 축소되어 통용되는 문제의 극복과도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러한 분단의 지속 과정에서 두 체제가 적대성과 이질성을 동시에 키워 온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분단은 우리 삶과 국가의 특징적 ‘변수’로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익숙한 제반 조건으로 간주되기 일쑤이다. 북한을 불가해한 타자로 대상화시켜 ‘통일대박론’의 도구적 가치로서만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간편한 사고방식이며, 분단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는 문제와 통일을 연결시킨다는 생각은 아주 낯선 생각인 것이다.

물론 필자가 다소 민족 개념을 엄밀하지 않게 남용한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이 책만의 아쉬움이 아니라 계속 함께 고민할 화두로 남겨 두어야 할 것이다. 서평을 마무리하며 저자의 서술 의도를 다시 한 번 옮겨 본다. “해방 후 3년의 역사에서 우리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을 찾아내고, 역사의 가능성을 돌이켜보는 것”을 통해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의 가능성’을 확인하자. 그리고 지금, 우리의 선택은 어떤 역사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 대학에 적을 둔 일반 학자들이 연관성 높은 기존의 논문을 아주 포괄적으로 엮어 출간하면서 전문학술서를 표방하는 데 비해, 민족지도자들의 ‘선택’을 비교적 공정한 시각에서 비교하면서도 선명하게 유지된 필자의 문제의식은 광복 70년을 맞이하는 올 해에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국정 역사교과서의 부활이 가시화된 요즘, 머지않아 ‘대한민국의 탄생’이 어떤 역경과 희생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강조하며 그것을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전달하는 것이 ‘객관적이냐’의 문제가 다시 뜨거운 논쟁 속에 휘말릴 것이다. 해방 후 3년, 어렵게 탄생했고 숱한 과제를 안고 있던 당시 신생 대한민국에서도 “새로운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싸움은 독재와 민주주의의 싸움이자 분단과 평화통일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은 민주주의 원리가 작동하는 한, 지지부진하더라도 결국은 국가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신생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앞에 놓인 운명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민주주의의 확산과 발전, 친일세력과 기획주의자들에 대한 과감한 역사적 청산, 봉건적 잔재와 부정부패를 일소한 시민사회의 발전, 부가 독점적으로 세습되지 않는 민주적 경제발전, 한반도 평화의 유지와 민족통일의 달성. 이 과제들은 비극적이게도 70여년 전과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숙제이며, 지속가능한 대한민국 앞에 놓인 문제들이다.

해방 후 3년

[서평] 판문점 체제: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를 위한 지구사적 탐구

판문점 체제: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를 위한 지구사적 탐구 

김학재, 『판문점 체제의 기원: 한국전쟁과 자유주의 평화기획』, 후마니타스, 2015.

 

 

조배준(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원)

 

 

1. 한국전쟁과 한반도 분단을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

오늘날 판문점은 한국전쟁의 기억과 고통을 상기시키는 상징적 장소이자, 어느덧 70년이 된 남북분단과 60년 넘게 지속되는 정전체제의 당위성을 강화시키는 현장으로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다. 한반도의 적대적 분단체제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마음의 장벽’을 더욱 단단하게 쌓아왔는가. 지금까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대부분 ‘전쟁’의 준비와 발발에서 시작되어 ‘정전’ 상태의 지속으로 해명되는 프레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남북의 기득권 세력은 늘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과거의 전쟁을 적대적으로 기억하게 만들고,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을 강압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체제 내부를 단속하고 강화시켜왔다. 그런데 판문점으로 상징화되는 분단체제와 한국전쟁의 성격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 ‘전쟁의 기원’이 아닌 ‘평화의 기원’을 고찰해볼 수는 없을까. 이 책의 저자는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켜나가면서 한국전쟁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결론에 이르러서는 뒤르켐의 생각에서 기초하는 ‘연대로서의 평화’를 제안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현재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 동아시아대학원 박사후 전임연구원인 김학재의 박사논문인 이 책은 이처럼 한국전쟁을 보다 거시적 안목에서 바라보면서 한반도의 분단 지속을 재인식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지구사(Global history)의 관점에서 유엔의 활동 및 국제법, 그리고 근대 자유주의의 기획 안에서 한국전쟁의 추이와 분단 체제의 성격을 추출해내고 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미국이나 유엔은 한국전쟁을 잊고 있지만, 한국전쟁에서 고착화된 한반도의 정전 및 분단체제를 극복해나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주변국을 비롯한 당대의 세계와 소통해야 한다. 물론 저자는 세계와 대화하기 위해 우리는 민족사의 틀을 벗어나 세계의 주요 흐름을 총체적인 맥락 속에서 인식하는 지구사의 위치에서 이 문제를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포착은 한국전쟁 및 정치사연구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 한반도 분단 상황의 극복에도 참신한 시각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나아가 논자는 한국전쟁에 관한 이러한 시각을 한반도 문제의 재인식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한․중일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타개하고 실질적인 협력과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지평으로 활용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고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이처럼 ‘전쟁의 기원’이 아니라 ‘평화의 기원’이라는 기획이 중요한 이유는 논자가 보기에 무엇보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성찰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의 우리 삶의 방식과 체제의 유지를 ‘새롭게’ 인식하는 데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역사 속의 한국전쟁이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현재의 문제이자 평화로운 미래를 희망하기 위한 현실적 과제로 한국전쟁을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 및 결과에 주목했던 1세대의 연구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그 전쟁의 결과가 근대적 자유주의 기획의 영향권 안에서 어떤 지점에 위치해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20세기의 세계사와 한국사의 접점을 새롭게 구상해보기 위해서도 이 연구는 가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초석을 놓았다고 할만하다. 바로 이러한 지점들에 대한 기대와 전망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한 소장 연구자의 이 도전적인 박사논문에 석학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으리라.

 

2. ‘판문점 체제’의 성격과 실천적 과제

저자는 아시아 패러독스의 핵심 기반 중 하나인 ‘한국전쟁 군사 정전 체제’를 뒤집어 인식하여, ‘판문점’으로 표상되는 전쟁의 위협을 오히려 ‘하나의 특수한 평화체제로서 판문점 체제(Panmunjom regime)’라고 부르고 있다. 냉전의 가장 대표적인 유물인 판문점이 갖고 있는 의미를 전복하여 기존의 것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재사유하는 전략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껏 지속된 ‘판문점 체제’는 겉으로는 정전을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서구의 자유주의 진영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서 만들어낸 기이한 평화 기획으로 재사유된다. 그래서 이 개념은 전쟁이 종식된 것이 아니라 잠시 중단된 것으로 간주하면서 “냉전적 적대관계를 60년 넘게 보존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은 역사적으로 희귀한 현상”이라고 지적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담아내기 위해서 도출된 것이자, 민족사의 딜레마가 세계사적 맥락과 연계되기 위한 이론적 발판이 된다. 즉 특수한 역사적 사례를 보편적 세계사 안에 위치시키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이처럼 한국사와 세계사의 접점을 마련하고 한반도의 분단을 지속시키는 한국전쟁과 정전체제를 세계에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일종의 보편적 개념화 전략을 취한다. 외국의 학자들이 백낙청의 ‘분단체제’나 박명림의 ‘53년 체제’란 개념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공통 지반’으로서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한국의 정전체제를 재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래서 ‘제네바 체제(1954)’나 ‘반둥 체제(1955)’와 함께  ‘판문점 체제(1953)’가 비교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적이고 특수한 ‘사례’의 고유명사에서 출발했지만, 그 저변에는 “근대적 자유주의의 변질과 냉전체제의 구축”이라는 세계사적 맥락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내셔널 히스토리’를 ‘글로벌 히스토리’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완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한국전쟁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가’에만 주목하는 것을 벗어나, ‘왜 우리는 아직도 전쟁의 연장선인 정전체제에서 살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가’라는 물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자와 후자가 만나서 공유할 수 있는 이론적 지평의 확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판문점 체제’란 유럽의 역사가 전쟁 과정을 통해 수립했던 ‘베스트팔렌 체제’부터 ‘베르사유․샌프란시스코 체제’처럼 냉전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평화 체제였다는 것이 저자의 인식이다. 저자는 오늘날에도 판문점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배경을 미국이 취하고 있는 국제 전략의 선회 속에서 인식한다. 냉전 초기에 미국은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통해 전쟁을 억제하려는 ‘홉스적 평화 기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면에서 중국에 추월당할 것이 우려되는 오늘날에는 다시 국제법이나 규범들을 강조하는 ‘칸트적 평화 기획’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례로서 저자가 들고 있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기를 수출하거나 보급하고 있는 미국이 주도하여 유엔에서 2013년 4월 ‘재래식 무기’ 수출을 억제하고 공동으로 관리하는 협약에 118개 회원국들이 서명한 사건이다. 과도한 비용이 드는 재래식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 첨단 무인 무기의 개발과 압도적인 정보력의 우위를 통해 국제 질서의 패권을 유지하면서, 칸트적인 수단도 적절히 활용하여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판문점 체제는 “그 협약에 찬성한 미국, 반대한 북한, 기권한 중국”의 태도에 의해 요동치면서도 굳건히 지속된다. 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첨예한 갈등 지대인 한반도는 주변 국민국가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체제는 평화를 지향하는 칸트적 기획과 홉스적 기획 사이의 갈등과 공존이라는 기묘한 관계로 유지된 ‘모순적 체제’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판문점 체제는 처음부터 국제법과 국제기구 및 여러 국가들의 기획과 협상의 산물이며, 당시에 해결되지 못했던 문제들이 현재까지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존속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인식 위에서 저자는 판문점 체제의 성격을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첫째, 6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불안하고 유동적인 임시 군사 정전 체제”이다. 판문점 체제는 국가 사이의 권력이 균형을 이룬 질서도 아닐뿐더러, 당사국 사이의 타협으로 체결된 불완전한 평화 협약 체제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지 주변 강대국들이 기존 질서에서 얻어 온 이해관계의 강박에 의존하며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국제적 보편성이 결여된 협소한 군사 동맹 체제”이다. 판문점 체제는 칸트식 국제 연방이 가지는 권위와 홉스식의 세계국가의 힘에 의존한 질서 구축이 모두 실패한 후, 더 이상의 소모전을 막기 위해 마련된 군사적 동맹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셋째, 자유주의적 제도를 물신화한 “냉전적 반공-자유주의 체제”이다. 판문점 체제는 정치 이념이자 공화국의 운영 원리로서의 자유주의에 의해 마련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우월한 문명론으로 격상시키고 다른 모든 대항․대안 이념들을 문명/야만의 이분법으로 배제하는 극우적 자유주의에 기초한 체제라는 것이다. 넷째, “동아시아 사회의 요구를 회피하고 유예시킨 탈정치적 군사․경제 질서”이다. 판문점 체제에서는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된 이후에 청산할 문제와 전후 처리할 문제 같은 한국전쟁 당시 표출된 다양한 갈등과 모순이 민주적 정치 과정으로 해결되지 못한 채 묵살되었고, 그것들은 단지 군사와 경제라는 특화된 기능에 근거한 양자 관계들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분리된 평화와 특수한 발전주의 기획의 상징”이다. 판문점 체제는 보편적 평화와 정의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양자 군사동맹 체제의 결탁이라는 아주 제한된 평화와 적대적이고 경직된 체제경쟁을 가속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결과물로서 판문점 체제의 이러한 성격은 이 체제가 서구 자유주의 사상에서 두 가지 평화 구축 모델인 칸트의 안정적인 영구 평화 체제도 아니고, 홉스 식의 국가 간 타협에 의한 불완전한 평화 협약 체제도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즉 국제 연방 체제의 ‘권위’에 근거하지도 않고, 패권국가의 ‘힘’이 수립한 체제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판문점 체제’는 유럽의 보편적 국제 질서와는 구별되는 오늘날 동아시아의 특수한 성격, 즉 저자가 ‘동아시아 패러독스’라고 지적했던 “지역 전반에 걸친 불안한 권력 균형 상태”를 확대재생산하는 원형이 된다. 그렇다면 현재의 불안하고 협소한 일시적 평화 상태를 좀 더 완성된 평화 체제로 전환하고,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판문점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목표는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에 대해 아래의 다섯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임시 군사 정전 체제인 판문점 체제는 전투의 부재를 의미하는 부정적 의미를 벗어나, 평화를 지향하고 적대성을 완화하는 긍정적 의미를 통해 적극적 평화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경쟁적 군사 동맹 체제 간 군비경쟁을 억제하기 위해 공동 안보 기구가 수립되어야 한다. 셋째, 탈정치적이고 일방적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 포괄적 합의에 기반한 동아시아 협의 체제가 필요하다. 넷째, 적대적이고 배제적인 냉전 자유주의 체제와 배제적 민족주의는 지양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외주의와 인정 투쟁을 넘어 평화와 정의의 보편성을 고양시켜야 한다.”

 

3. 한반도 분단의 극복과 동아시아의 실질적인 평화를 위해

이러한 인식 위에서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할 새로운 평화의 기준은 기존의 국제법과 국제기구의 권위에 의존하는 칸트적 방식이나, 내전에 대항해 안보를 강조하며 파워게임을 강조하는 홉스적 방식이 아니라고 진단한다. 이제 필요한 평화 전략은 “교류와 접촉을 통해 관계와 사회를 형성하고, 관계의 구조적 불평등을 극복하며 사회정의라는 가치의 달성을 지향하는 사회적 평화”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동안 ‘권위의 부재’를 통해 판문점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자유주의의 기만적 이념을 넘어서, 뒤르켐이 강조했던 ‘연대’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강력한 국가의 건설이나 보편적 국제법의 구축이 아니라, 사회 내부의 분업이 활성화되면서 발전하는 사회적 연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간의 갈등과 평화의 문제로 사태를 인식하는 ‘정치철학적 고려’에서 사회 자체에서 평화의 동력을 구상하는 ‘사회철학적 성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뒤르켐은 개인들을 규합하는 전통적 민족주의 또는 다른 집단의식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개인주의만으로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갈등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서로 연대 의식을 가진 기관들이 충분히 접촉하고 그 소통의 과정을 지속하면서, 공통의 규범을 형성해가면 어디에서도 ‘아노미’ 상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 내부의 연대를 강화하여 자연스럽게 완전한 평화를 요구하는 상태를 상정하는 뒤르켐에서 연유한 이 새로운 평화 전략은 한국전쟁이 초래한 판문점 체제의 ‘평화’가 얼마나 반사회적․반연대적인 것이었는지를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최종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시했던 “자유주의적 평화 추구에서 사회적 연대를 통한 평화 추구로 그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방향은 단지 한국전쟁의 종식과 한반도 분단의 극복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연대 네트워크’의 구축을 지향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뒤르켐을 빌려와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결국 국가 간 연대와 국가 내부의 사회 연대가 동시에 파괴되고 있으며, 국제적인 차원에서 지역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붕괴된 사회적 연대의 현실이 오늘날의 판문점 체제를 영구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만든다. 논자도 저자의 이러한 생각에 공감하며 남북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인식적 지평을 공유한다면, 남북이 그 동안의 이념적․제도적․무의식적 분단을 극복해나가는 진정한 통일에 다가갈 수 있고, 그 모든 통일의 과정이 동아시아 평화 구축과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변화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전망을 해본다.

물론 주지하다시피 유엔은 국제적 참전과 정전협상의 핵심적인 당사자이지만 60년 넘게 이 불안한 체제의 특성을 방치해왔다. 저자가 어느 인터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국인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하고 있지만 동아시아의 평화 구축을 위한 한국의 정전협상에 관한 유엔의 공식적인 해석은커녕, 향후 연구와 국제 활동을 위한 관련 자료의 취합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의 조건이다. 그래서 냉전 이후 끊임없이 지속된 미국의 국제관계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과 앞으로 더욱 첨예해질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을 고려하자면, ‘유엔을 통한 해결 노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과연 한국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는 의문스럽다. 앞으로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동시에 보면서 또 다른 국제관계의 굴레에 다시 종속된 채 한반도 평화 체제의 구축을 기대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보편적 평화와 보편적 정의에 대한 지향의 부족으로 인해 판문점 체제가 내포하고 있던 부정적 유산들이 고착화”되는 것을 우려하지만, 논자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한반도 문제에 관해 지금까지 한국에서 문제가 된 것은 아시아적 가치와 제도에 대한 보편적 차원의 인식이 부족했던 점이 아니라, 냉전시대의 종식 이후에도 한국정치외교사에 관해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재구성하기를 주저했던 주류 학계의 편협함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한쪽에서는 미국 중심적․의존적 시각을 보편적 관점으로 수용하는 입장이오히려 과잉되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과도하게 축적된 민족주의적 입장을 대항 담론으로 구축하게 되었다. 결국 전향적인 역사 인식이 국가의 실천적 지향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에 관한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물론 ‘특수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구적 차원으로 문제를 확장하기 위한 ‘보편성’의 추구가 자칫 또 다른 종속적 시각에 매몰될 우려가 있는 것은 비단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근대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문제 자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경험한 ‘근대’의 비극과 그것에서 연유하여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이 고난의 역사가 단지 우리 민족국가의 불완전함과 정치적 주체의 무능력함에서만 연유한 것이 아니라, 서구적 합리성이 내포하고 있던 역사적 모순들의 비극적인 중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은 한국의 미래 세대가 전 지구적 연대 속에서 추구해나갈 평화를 상상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자극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판문점 체제’라는 창을 통해 광복-분단 70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한반도가 그 동안 각자의 체제 유지를 위해 활용했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이데올로기의 근원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다소 단적으로 말하자면, 남북이 구축해 온 분단체제는 모두 판문점 체제, 즉 근대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실패가 폭로된 이 기이한 국제질서에 편승하고 기생한 결과였다. 서울시 한 가운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보듯이 그 동안 한반도의 두 국가는 평화가 아닌 전쟁을 기념하며, 공포와 증오의 정치, 안보에 대한 의존을 통해서 기존 체제를 존속시켜 온 사회였던 것이다. 평화를 전쟁의 가면쯤으로 여기는 것을 당연시해 온 남북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벗어나, 미래의 남북 지도자와 인민들이 가져야 할 진정한 ‘보편적 전망’의 출발은 한반도의 분단 문제가 단지 ‘통일로 인한 경제적 손익계산서’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평화 구축의 문제임을 자각하는 데 있을 것이다.

 

판문점 체제의 기원1

 

 

<철학, 죽음을 말하다>[철학자의 서재]

<철학, 죽음을 말하다>[철학자의 서재]

 

 

박종성(호원대학교 외래교수)

 

[철학자의서재]가 “이시대와 철학”에서 새롭게 연재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제때에 죽도록 하라!

 

 

죽음이라는 삶의 그림자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는 계절이다. 우리는 그 앙상한 나무를 보며, 떨어진 낙엽을 보며 지나간 시간을 다시금 느끼며 자신의 삶으로 시선을 옮긴다. 생명을 다한 것은 죽음이다. 생명을 다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죽음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시선은 다시금 나의 삶에 대한 성찰로 전환된다. 그런 계절이다. 상황이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일까? 물론 가을이 되고, 겨울이 와야 죽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과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 속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인식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은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올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너무나 가슴이 저미는 세월호 참사,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 개인적으로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일 것이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피할 수도 없는, 모두가 직면하고야 마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다큐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가 역대 독립영화 최고 관객수를 넘어서 300만을 넘었다. EBS <다큐 프라임> ‘데스’에서도 죽음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죽음이란 어떻게 다가오는 것일까? 죽음이란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너무나 많은 참사와 사고가 많았던 한 해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다시금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삶의 태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철학, 죽음을 말하다>(산해, 2012)는 11명의 학자들이 11명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죽음에 대한 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면에서는 11명의 철학자들을 모두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 중 필자의 가슴에 남은 철학자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머지 글들은 독자가 음미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음미한 맛은 모두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철학 죽음을 말하다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필자가 이 책을 통해 소화시킨 철학자들의 죽음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는 현세적 삶을 중시하여 죽음을 무시하거나 내세적인 것에 충실하여 현세적 삶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에게 철학은 무지를 자각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잠자고 있는 자신의 영혼을 일깨우는 것이 철학인 것이다. 무지의 자각은 논박(elenchos)을 통해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당혹스러운 상태(aporia)에 처하게 하여 무지를 자각하는 과정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죽음은 죽을 운명의 인간이 죽음을 대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이다. ‘죽음의 수련’은 결과적으로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시작은 죽음을 사유하는 것이다. 죽음의 사유는 플라톤에게서도 영혼의 돌봄으로 이어진다. 플라톤에게 영혼은 죽지 않은 것이며 생명의 원리인 반면, 육체는 물질적이고 죽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의 본래성은 지성적인 능력이고 육체의 본래성은 감각적인 앎이다. 그런데 영혼의 본래성을 방해하는 것은 성적인 즐거움, 육체적인 즐거움, 소유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처한 삶의 환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감각적이고 소유욕을 증대시키며 체제를 움직이고 있는 현실이 우리의 삶의 환경이다.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은 이렇듯 욕망의 체제로 굴러가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자본주의 체제를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죽음에 대한 사유에서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에게? 인간 행위의 동인은 이기주의(Egoismus), 악의( Bosheit), 그리고 동정( Mitleid)이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인간은 맹목적인 삶의 의지(Wille)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의지, 욕망 때문에 번뇌, 고통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삶의 의지를 물질적 부, 돈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맹목적 의지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맹목적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또 다른 삶의 의지의 긍정인 것이다. 나아가 이 맹목적 삶에의 의지의 부정은 인간애(caritas)이다. 인간애는 ‘그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말고 오히려 네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을 도우라’를 의미한다. 결국 그가 추구하는 인간은 동정(Mitleid)을 가진 자이다. 동정은 타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에 참여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삶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현실이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끊임없는 욕망을 부추기고 무한 경쟁으로 삶을 옥죄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인간애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또 다시 현실의 변혁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맹목적 의지의 부정은 삶의 구원(Erl?sung)이기 때문이다. 또한 맹목적 의지의 소멸은 일상세계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실존의 변화를 실현하여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Erl?sung)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본주의는 검토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제때에 죽도록 하라, 타자의 얼굴과 만나라

니체(Nietzsche)는 인간을 신체(Leib)적 존재로 이해한다. 이것은 이원적 해석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성과 육체, 그리고 힘의 의지(Der Wille zur Macht)가 공존하는 총체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에게 삶의 목적은 초인(Der ?bermensch)인데, 초인은 고정될 수 없는 인간, 현 상태의 유지(erhalten)가 아니라 지속적인 상승(steigen)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이는 힘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초인은 자신을 넘어서고 극복하는(?ber-sich-hinaus-gehen, sich-?berwinden) 자기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sich-schaffen)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다. 이는 인간 개개인이 구현해야 할 실존적 이상이다. 니체는 “제때에 죽도록 하라”,“그러나 결코 제때에 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제때에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다. 제때 삶을 사는 것은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거나 삶의 열등함으로 인해 죽음을 의욕 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야 할 때 살려고 하지 않거나 그냥 죽지 않는 것이며,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긍정하며 사는 것, 이것이 니체가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니다. 이것이 제때에 죽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세월호 참사는 제때 죽지 못하게 만든 사회적인 죽음이다. 제때에 죽지 못한 삶, 다시 말해 제때에 살지 못한 사회적 죽음인 것이다. 이 모든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타자의 죽음은 레비나스(Levinas) 철학에서 중요한 내용이다.

레비나스는 죽음은 인식론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학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존재론은 존재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존재 근거와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것인데, 죽음은 존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 영역을 넘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타자가 철학의 제1원리이다. 타자와 죽음의 철학은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문제의식이며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다. 언제나 타자의 죽음은 나의 죽음을 앞선다. 그가 보기에 존재론적 철학은 ‘타자’를 ‘자아’의 영역으로 환원하여 자아의 지배하에 두는 ‘자아’ 우위의 철학이다.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것처럼 죽음 현재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속하며, 따라서 선취를 통해 앞질러가서 사로잡을 수 있는 그런 ‘현재의 미래’가 아니다. 미래의 죽음을 현존재 안으로 들어온 죽음으로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의 타자성에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은 윤리적 접근이며 이는 타자와의 만남,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이다. 기아 빈곤, 전쟁, 테러, 어린이 여성, 노약자들은 타자의 얼굴이며, 이들의 얼굴은 “제발 저를 죽게 내버려두지 마세요!” “제발 저를 죽이지 마세요! 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월호 참사라는 사회적인 죽음, 송파구 세 모녀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타자의 얼굴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이 남겨진 자들의 과제이자 책무일 것이다. 국가는 이 타자들의 얼굴에 얼마만큼 응답하고 있는가! 지금의 현실에서 그 답은 부정적이다. OECD 34개 국가 중 죽음의 질 지수가 최하위인 현실에서 죽음의 사유는 더 긴요하게 요구된다. 지난 9월에 이미 3명의 노동자가 월성 핵발전소에서 목숨을 잃었고 어제 27일에 노동자 3명이 질식사하였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안전하지 않은 국가에서 제때 죽을 수 없는 것이고 이것은 제때 살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삶의 변혁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생명보다 이윤을 더 큰 가치로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죽음으로 질주하는 타자의 얼굴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즐겨라)이다. 즉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현재를 즐기고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를 즐기고 이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와 국가는 타자의 얼굴에 보다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회와 국가는 변혁되어야 한다. 제때에 죽도록 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의 얼굴과 만나야 한다!

 

 

 

푸꼬의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철학자의 서재]

푸꼬의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철학자의 서재]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철학자의서재]가 “이시대와 철학”에서 새롭게 연재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성의역사1성(sex)에 관한한 의학(생물학)적으로 지식이 지배하고 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을지라도 성관심(sexualit?, 애정관심)은 지식과 권력에 연관 속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포함된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애정관심은 남녀만의 것도 아니고, 한 생명체와 다른 생명체(나나니 벌과 난초, 도착자들) 사람과 사물 사이에도 있다. 푸꼬의 철학적 여정을 보면 애정관심의 문제거리는 지식과 권력과는 다른 차원임을 알 수 있다. 왜 성관심은 지식과 권력이 아닐까하는 문제거리를 나는 막대자석에 비유한다. 근세철학이 맘과 몸,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두 시계처럼 서로 다르지만 같이 갈 수 있는 것으로, 학문적 표현으로 평행론이라거나 번역가능성이거나 한쪽으로 환원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또는 그보다 더 높은 하나로 치환가능한 것쯤으로 여긴다. 좌석은 남극과 북극이 둘 다 같은 힘(역량)을 표현하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연관을 맺는다. 두 방식은 방향만이 반대일까? 간단히 막대자석을 반으로 잘라보라, 그러면 두 개의 성(sex)처럼 따로 남성과 여성처럼 남극과 북극이 따라 현존할까? 잘라진 반토막은 또 다시 두 개의 극을 갖는다. 하나의 관심을 잘라낸다고 다른 하나로서만 존속할 것이라고 사유될 수 없고, 상대적인 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생성한다. 다른 표현으로 기의(한 극)가 활동하는 순간, 기표(다른 극)는 만들어진다, 즉 생성한다. 부정성을 거쳐서 지양이라기보다 부정성도 실재성이며 단지 배제된 관심으로 무시되었을 뿐이며, 이는 여성, 소수자, 이석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에 평행도 번역도 환원도 아닌 방식으로 생성한다는 가정은 인간의 사유를 모독하는 것일까?

우리가 푸꼬에게 다시 물어볼 수 없지만, 그의 학문적 여정을 다시 보면 심각한 고민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들뢰즈을 빌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로서는 지식의 고고학을 탐구 해 나가면서 보니, 지식이 권력의 행사와 같은 보조를 맞추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푸꼬는 과거를 탐색하는 고문헌학자에서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지도제작자를 이행하였는데, 당시의 주변 학자들이 그에게서 ‘신의 죽음’보다 더한 ‘주체의 상실’을 보았다고 할 때, 푸꼬는 자신의 의도와 관계 없이, 왜 다른 사람들이 주체의 부재로 읽었을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권력의 행사에서 피권력자(배제자)는 주체가 아니게 되고, 지식이 개별자의 것이 아니면 인간조차도 배제자(소외자)가 된다. 은연중에 지식의 총체로서 상층이라는 기표를 인정하게 되면, 당연히 거기에 대응하는 기표로서 개인 또는 인민은 기표의 권능을 지닐 것이라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대응도 평행도 아니고, 그의 비판자들 말대로 개인은 피지배자로 놓이게 되어 아니러니에 빠진다.

푸꼬는 지식과 권력처럼 성관심에서도 같은 관계가 성립하는지에 대해 그의 3부작의 첫 작품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La volont? de savoir, 1976)>에서 고민하면서 시작한다. 억압 기제로서 권력을 성관심에 관한한 그 작동(기술방식)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연히 지배 기술(techn?)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여긴 것에서 문제거리를 보았다. 그런데 성에 관해서만은 그 억압이 구체적으로 실행된 것은 과거 서양에서는 고백문화가 전부가 아닌가 한다. 성관심은, 성을 다루듯 기계적 장치로만으로도, 생물학적으로 둘 사이의 상대적 연관을 맺는 매체로서도, 그리고 정치적 쟁점으로서 규제와 규율의 강화에서도 인구조절의 정책에서도 설명될 수 없는 다른 것이 있다. 역사의 구체적 고문헌을 파고 들어가 보면 통제와 규율보다 더 많은 성관심을, 권력의 그물에 잡히지 않은 더 많은 애정관심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한다. 애정 관심은 자기의 목표 추구처럼 일정한 완성에 이르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확장의 추구, 즉 회오리 같은 추구로서 자기완성의 길로 가는 과정이라는 소크라테스적 욕망과 더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푸꼬는 첫 권을 쓰고서(1976년) 그 자신이 6가지 주제를 다룰 것이라고 예고했다. 1. 앎의 의지 2. 살과 신체, 3. 어린이들의 십자군, 4. 여성, 어머니, 히스테리, 5. 도착자들, 6. 인구와 종족 이다. 이러한 방향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고, 긴 시간(8년)을 고민하여 두 권(제2권과 제3권, 1984년 그가 죽기 직전에)을 내면서 스스로 방향을 수정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지식의 진보라는 방향, 권력의 표출이라는 방향과 달리 셋째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즉 “자기와 관계가 어떤 형태와 양태들을 취하는 지”를 탐구하는 “주체”의 문제로 전환이다. 들뢰즈가 푸꼬를 존경하여 쓴 <푸꼬(1986)>의 제2부 ?위상학?에서 “다르게 사유하기”라는 용어를 부각시켰듯이, 푸꼬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에, 어떻게 그리고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를 알려고 하는 것”(제2권 번23쪽)에서 주체의 진솔한 위상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았다. 우리가 보기에는 애정관심에서는 ‘다르게 생각하는’ 번역가능하지 않는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푸꼬는 이 상대를 제3권에서 ?자신과 타인?이라는 소제목에서 타인들의 범주들로 다룬다. 우리는 그의 저술의 순서에 따라서 타인과 관계 이전에 제2권에서 자기의 설정을 먼저 다룬 이유를 짐작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지식은 바깥의 대상이다. 인간이라는 상대도 바깥으로 두었을 때 지식을 통한 지식에 의한 지배는 가능하다. 우리는 이런 철학을 주지주의철학이라 부른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에 대한 지배 또는 배려에서도 대상으로 위상을 설정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다이몬,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에서 기억, 베르그송의 지속은 같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인격에 관한한 대상화(기표)이전에 자기 현존(인격성, 기의)이 먼저이고, 게다가 이 현존을 타자처럼 대상화로 다루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묻기를 하다 보니 아이러니로, 다른 사람은 고민을 하다고 오류가 있더라고 믿자 하며 넘어가고, 또 한 사람은 운동하고 있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기나긴)? 과정 전체를 “하나”로 위상을 정하자고 한다. 이 하나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으며, 하나가 자기 삶의 선택을 다른 하나(분신, 아바타, 기표)로 표출한다. 이런 생각은 주지주의에 대립되는 본성주의(le Naturalisme, 자연주의)라 하자. 푸꼬는 우선 그러한 방식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볼 것이고, 자기 위상의 설정으로 주체화의 양식의 길 즉 자기완성의 길에 주목하였다. 그다음으로 다루어야 할 것으로 크리스트교 안에서 자기완성의 길일진 데 애석하게도 다음 차례로 남겨 놓고 죽었다.

자기완성을 애정관심에서 보면 네 가지 개념을 다룰 수 있다고 한다. “우선 아프로디지아, 쾌락의 개념. 그것을 통해 우리는 성적 행동에서 무엇이 ‘윤리적 실체’로 인식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다음으로 크레시스, ‘활용’의 개념. 이 개념을 통해 우리는 쾌락의 실천이 도덕적 가치를 부여 받기 위해 따라야 했던 복종의 유형을 파악할 수 있다. 엔크라테이아, ‘제어’의 개념. 이 개념은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세우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져야만 하는 태도를 정의해준다. 마지막으로 소프로쉬네, ’절제’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성의역사2 수행 중에 있는 도덕적 주체를 특징짓는 것이다.”(2권 51쪽) 여기서 성관심의 쾌락, 극기, 절제에 관한한 조화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고대 철학의 주제인 듯하지만, 제2권의 주제인 “쾌락의 활용”에는 다른 의미가 들어있다. “때에 맺게”(카이로이스) 이용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얼핏 때에 어긋나게 라는 니체의 ‘반시대’를 떠올일 수 있다. 반시대도 부정성이 아니라 실재성이므로,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은 48%의 부정성이, 51.6%만큼이나 시대의 적절함이며 때에 맞음이기도 하다. 여기서 언급은 카이로이스가 자기 배려에 중요한 계기이다.

그는 고문헌학자답게 성관심과 자기 배려를 다룰 세 가지 기술(techn? 조절 방식)을 다룬다. 스스로를 자신의 육체에 대한 적절한 결합과 배려의 기술로서 양생술, 자기 관리를 잘하는 것만큼이나 가축과 노예처럼 여성에 대해서도 통제와 지배의 기술로서 가정관리술, 대리자로서 자유로운 활동을 예비하는 소년을 스스로 지혜를 갖추어가는 기술과 훈련으로서 연애술, 세 부분을 학문적으로 다룬다. 이런 내용을 검토하고 나서, 주체의 진정한 활동은 사랑행위로부터 사랑의 본질로, 명예의 문제로부터 진리의 사랑으로 가듯이, 타인과 관계에서도 불균형으로부터 일치로 나간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자유인들이 중요시한 연애술 중에서 소년애도 덕목의 발현으로부터 지혜로 이행을 여러모로 검토한다. 그 성관심에는 즐거움을 활용하고 그것에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는 자기 극복의 노력이 필요하며 또한 그 훈련이 중요하다. 소년은 장차 자유시민이 되기 부족하여 종속되거나 넘쳐서 독재적이 되어서 안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언제나 절제(소프로쉬네) 또는 조화(아르모니아)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성관심의 문제가 플라톤의 소클라테스의 연애술(사랑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은 것으로, 사랑의 권장은 문제에 답을 찾는 것이라기보다 문제거리의 꺼풀을 벗기는 과정이다. 욕망의 실현은 자기의 꺼풀을 벗는 것으로 자기에 대한 자기 스스로를 파악하는 것이다. 답을 모른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찾아가는 소크라테스의 여정일이지 모른다.

“자기 속에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의 방식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서처럼 지속하는 기억의 총체가 무매개적으로 실재함을 다루는 것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처럼 꿈을 분석하여 무의식을 실재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도 또 다른 한 방식일 것이다. 현상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긍정성으로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부정성의 실재성으로 전환. 푸꼬는 이 여정을 고대의 아르테미도로스의 <꿈 해몽>을 통해 방법을 들여다본다. 꿈은 질서를 주체에 맞는 상태로 표현하기보다, 어쩌면 떠돌이 거지(부족한 자)의 일시적 표현같이 우의적이고 신탁적인 경우가 더 많다 점이다. 푸꼬는 이 책을 빗대어, 꿈의 해석이 윤리적 형식을 갖추게하는 측면이 있다기보다, 고대 꿈의 해석을 통해 성관심을 인식하고 평가하는 방식을 본다. 그 속에는 애정 관심들이 지속성을 지니고 상관성을 정리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관심”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보기에, 어둠에 있는 아페이론이 자기 생성으로서 시뮬라크르로 등장하는 실재성이 “자기 관심”이 아닐까? 우리가 보기에 푸꼬에서 애정관심에 관한 자기 설정, 자기의 역할과 훈련, 그리고 자기극복 등을 제2권에 다루었던 것도, 자기에 대한 관심 즉 “자기 배려”(제3권의 제목이다)때문일 것이다.

푸꼬의 관점을 맘과 몸 연관에서 보면, 몸은 외적 표현(표시, 시뮬라크르)이라면, 맘은 내면의 본성(자연)으로서, 자연 속에서 자기 배려라는 ‘달리 사유’는 푸꼬를 깊이로(심층으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보기에, 그 내면의 본성이 물질적(유물론)이고 자연적(자연주의)이며, 이것의 외화된 표현(껍질)이 물체로서 형식(형상론)이며 표상적(주지주의)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유물론과 형상론은 전도된 것으로 나타난다. 소위 말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관심은 ‘자기에 대한 관심’은 개인 하나에 대해 전념하는 것이 아니성의역사3라, 자기와 연관있는 모든 것에 대한 전념을 말하는 것으로, 사유(맘)와 실천(몸)은 분리되지 않은 밀접한 관계로서 다룬다. 이 주제들 잘 들여다보면, 사실은 소크라테스의 욕망의 탐구와 사회적 실천의 양면성(이원성이 아닌 이중성)을 함께 하는 바로 자기의 배려이다. 즉 소크라테스의 앎과 함(지행합일)을 구체적 실천의 지표로 삼은 것은 스토아학파일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오이케이오시스(O?k?iosis ο?κε?ωσι?, 헌신)는 살아있는 존재가 자기에 속하는 것. 즉 자기 존재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소개된 번역어는 헌신이지만, 푸꼬의 번역의 “자기 배려”가 더 적당할 것 같고 나아가 “자기 치유”도 같은 의미이다. 소크라테스가 당대에 지식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 배운 것도 자기의 배려이며, 그들을 찾아가서 논쟁 끝에 피상적 지식을 넘어서 지정한 지식(총체적 배려, 인민들 삶의 절제, 도시 전체의 정의 등)에 추구는 ‘자기 치유’의 방식이다. 성관심도 개별적으로 답을 얻듯이 쾌락을 얻는 것도 아니고, 타인과 논쟁에서 이기듯이 성적관계도 이기는 것도 아니고, 수사학이나 논변술로서 자기 자랑과 허풍이 아니라 자기 극복이자 지식 추구이듯이, 성관심도 얻거나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훈련으로 자신의 극복에 있으며, 도시와 개인의 조화로운 절제 이듯이 성관심은 상대의 자유와 완성하려는 인격의 배려에 있다. 이 점에서 푸꼬는 고대의 소년애에 대해 잘 다루고 있다. 여성과 노예는 가정관리의 대상이니 제외하고, 자유 시민으로 자라 도시를 담당할 소년에게는 자신처럼 소년(타인)을 배려하여, 그도 자기의 인격완성의 노력과 지혜를 소년(타인)에게 전하는 사랑과 배려가 필요하다. 즉 소년애의 사랑은 타인의 자유와 지혜 추구의 길이 된다. 푸꼬는 제3권을 쓰고 다음 4권에서 크리스트교 사랑을 쓴다고 했지만, 여기서 어느 정도 만족했으리라. 즉 주체의 탐구는 주체의 자기 배려, 자기 훈련과 자기 극복, 그리고 회오리처럼 점점 커져가는 방식으로 자기 탐구의 확장은 성관심의 문제거리들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지식과 지혜들의 추구욕망과도 같은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푸꼬는 “주체”를 다루면서, 은연중에, 진솔한 지식의 탐구로서 “철학”을 밝히게 되었다. 주체의 주체화 과정이 “철학”이며 욕망의 추구이며 애정관심을 포함한 진정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누구나를 배려하는 “자유”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푸꼬는 역사적 고문헌을 통해 새로운 지도그리기가 이쯤에서 자유를 향한 주체의 위상을 그려 놓지 않았을까?

띠리(Bruno Thiry)는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에서 “윤리적 요청에 따라서 그 자체로 ‘사유 속에서 자기의 훈련’을 만족 시키며, 한 사상가는 자기가 [현재] 있는 것과 다른 것이 되면서도 자기에 충실하게 남는다. [자아의 이중화 현상을 이어가는] 푸꼬는 이런 것을 그의 고유한 이름으로, 철학, 이라 부른다.”고 평했다. 나로서는, 맘과 몸의 이중화의 부조화를 끊임없이 조화롭게 만들기(생성)하는 노력과 훈련 그리고 배려가 삶이며, 그 표면의 시뮬라크르 등장이 ‘철학’이라 본다. 푸꼬는 말년에 인격의 이중화 작업을 깨닫고서 철학의 진정한 아이러니를, 소크라테스처럼, 맛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신기욱의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철학자의 서재]

신기욱의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철학자의 서재]

이병수(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교수)

 

“역사적으로 각인된, 우연한, 경쟁적”이라는 분석틀

 

▲ (신기욱 지음, 이진준 옮김, 창비 펴냄) ⓒ창비

▲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신기욱 지음, 이진준 옮김, 창비 펴냄) ⓒ창비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신기욱 지음, 이진준 옮김, 창비 펴냄)는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는 스탠포드대학교 신기욱 교수의 2006년 저서(『Ethnic Nationalism in Korea: Genealogy, Politics, and Legacy』)를 2009년 창비에서 번역 출간한 책이다.

저자 신기욱은 서문에서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혈연에 기초한 단일민족주의 내지는 의식”이며 “한국인의 단일민족주의를 이해하지 않고는 20세기 한국사회와 정치의 변화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한 저자는 단일한 민족의식이 도대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가를 질문하면서 그 역사적 형성과정을 확인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를 통해 다양한 집합적 정체성들 가운데 어째서 공통의 혈통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로 귀착했느냐를 탐문한다.

요컨대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혈연에 기반을 둔 종족적 민족주의로 보면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형성, 그리고 기능에 대해 총체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1990년대 이래 한국 민족주의의 억압적, 배타적 기능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화되면서 민족주의 논쟁이 전개되었지만 한국 민족주의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실증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드물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서구의 민족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19세기 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근현대사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에 기반을 두고 한국 민족주의를 논하고 있다. 서구의 민족이론에 더불어 한반도 근현대사의 역사적 경험들을 동시에 섭렵함으로써 이론적 고찰과 경험적 자료의 활용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주류 민족이론들의 한반도적 적합성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이는 특히 민족의 기원에 대한 원초주의적 견해와 근대주의적 견해의 한계점들을 극복하려는 저자의 시도에서 잘 드러난다.

 

저자는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국내학자들의 견해를, 첫째 단일한 혈통을 자연적이고 운명적으로 간주하는 원초주의적 견해, 둘째 한민족을 조선왕조 말기에 도입된 근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보는 근대주의적 견해, 셋째 두 입장을 논박하며 서구와는 다른 한민족의 역사적 경험의 특수성(장기간의 중앙집권적 국가 등선재하는 역사적 유산)을 강조하는 견해 세 가지로 정리한다. 그는 세 입장이 모두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면서 새로운 분석틀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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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저자는 무엇을 민족 형성의 “결정적 요소”로 보는가? 저자에 따르면 우연한 민족의 구성에서 결정적 요소는 경쟁적인 정치의 결과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분석틀을 “민족은 특히 대내외의 논쟁적인 정치의 결과, 역사적으로 각인되고 구조적으로 우연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구조의 산물”로 요약한다.

요컨대 저자의 입장은 전근대적 유래를 지닌 종족적 유산의 규정력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역사적 각인) 위의 두 번째 견해와 차이가 나며, 그 규정력을 약화시켜 우연적으로 본다는 측면에서(우연한 상황) 세 번째 견해와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 역사적 각인과 우연한 상황을 정당화하는 민족 형성의 결정적 요소가 “이중적인 경쟁적 논쟁”이다.

그는 민족개념이 처음부터 혈통에 기반을 두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종족적으로 되어가는 역사과정을 이중적 경쟁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민족은 인종, 계급 등 초민족적인 집단 정체성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민족개념에 대한 여러 해석들 가운데 종족적 민족개념이 경쟁에서 이겨 지배적인 것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즉, “20세기에 인종지향적인 한민족 개념이 출현하고 지배하게 된 것은 민족세력과 초민족 세력 사이의 논쟁과 민족 개념에 대한 논쟁이라는 이원적 논쟁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책의 1부와 2부는 민족적인 것과 초민족적인 것의 경쟁, 민족개념 자체를 둘러싼 경쟁이라는 이중적인 경쟁의 틀에 따라 서술되어 있다. 저자의 “역사적으로 각인된, 우연한, 경쟁적”이라는 분석틀은 매력적이지만 그 분석틀의 성공 유무는 일차적으로 이런 이중적 논쟁이 한반도 근현대의 역사적 사실과 합치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역사적 사실과의 합치 여부보다는 이 책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종족적 민족주의”에 대한 규정과 “종족성과 시민성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관점,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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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적 민족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선 저자는 종족적 민족주의를 혈통에 바탕을 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민족개념에 대한 우리의 통념적 이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현재 우리의 종족성이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지는 강한 혈통주의적 특징(더불어 대한민국 중심주의)을 지닌 재외동포재단법에서 찾을 수 있다.

 

“‘재외동포’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외국에 장기체류하거나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이거나 국적에 관계없이 한민족(韓民族)의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서 외국에서 거주, 생활하는 사람”을 말한다.(재외동포재단법, 제2조)

 

▲ 단재 신채호

▲ 단재 신채호

그러나 식민지 시기 민족담론은 아직 혈통적 단일성에로 한정된 민족주의적 지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학자들은 다종족설을 상식으로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다종족 구성, 주종족 주도론’은 일찍이 한말에 신채호가 ‘독사신론’에서 말한 바 있다. 단일한 혈통에 기초한 민족이라는 ‘단일민족론’은 해방 이후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대두된다. 이는 해방 후 국내외적 정세가 민족분단의 가능성을 높이는 가운데 단일민족은 결코 분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혈연을 중심으로 한 단일민족설보다는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같은 종족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종족적 민족주의의 성격이 강하다고 표현할 경우, 그것은 혈연보다는 풍속·습관과 같은 문화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를 뜻하는 방향에서 사용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다음으로, 저자는 종족적 민족주의를 통해 20세기 한반도에서 등장한 다양한 민족주의를 통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종족성의 전일적 지배를 강조하는 저자는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민족주의적 현상을 획일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다양한 형태의 민족주의를 종족적 민족주의와 동일시하는 과도한 환원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백남운, 이광수, 김일성,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혈연에 기반을 둔 종족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등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자기완결적인 논리구조를 갖추지 못한 채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는 이차적 이데올로기이며, 진보성과 아울러 침략성의 양면성을 갖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도 민족주의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특징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해방 후 한반도에는 남북한 각각의 국가에 의해 주도된 두 개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 그에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한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민중이 주체가 된 민중주의적 민족주의 등 다양한 민족담론이 존재한다.

이처럼 종족적 민족개념은 사회주의, 자유주의, 국가주의와 모두 결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종족적 민족개념이 마치 불변적으로 지속되는 것처럼 다루고 있다. 정치적, 이념적 지향성을 무시한 채 혈연적 종족성이라는 유사성을 근거로 20세기 한반도에 등장한 다양한 민족주의를 통시적으로 적용, 평가하는 시각은 역사적 다양성을 배제하는 과도한 환원주의로 여겨진다.

셋째, 저자는 종족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능을 축복이자 저주인 “양날의 칼”로 설명하면서 서구의 주요 민족주의 이론들의 한반도적 적합성 문제를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스 콘 이래 서구의 민족주의 연구자들은 정치적 민족주의를 시민적, 통합적, 건설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종족민족주의를 위험하고,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보는 강한 전통이 있다. 저자는 유럽적 경험에 바탕을 둔 이러한 이분법적인 본질주의 시각이 한국의 종족 민족주의가 지닌 다양하고 복잡한 역할과 기능을 간과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20세기 한반도 역사에서 종족 민족주의는 일제하 반식민주의의 기능을 했고, 남북의 근대화 과정에서 통합적 기능을 수행했으며, 나아가 통일과정의 초기 단계에서 두 체제의 부드러운 통합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축복) 그러나 동시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중요한 정체성들을 억압했고, 자유주의의 빈곤을 초래했으며, 남북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저주)

그러나 “양날의 칼”의 비유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책 곳곳에 되풀이해서 종족 정체성의 부정적인 성격을 부각시키고 시민적 민족정체성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혈통 중심의 민족 개념을 재고해야 한다. 외국인 이주민과 혈통을 떠나 민주국가의 동등한 시민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시민적 민족 정체성’이 필요하다. 통일 이후의 사회통합 논리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논의의 출발점에서 시민 정체성과 종족 정체성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종족 정체성의 양면적인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도처에서 시민적 정체성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을 보면, 과연 저자가 한스 콘 이래의 본질주의적 시각을 제대로 극복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이 문제는 종족성과 시민성이 결합될 수 없다는 그의 관점과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종족성과 시민성의 결합을 위하여

 

‘민족’은 순전히 언어, 역사 등의 문화적 단위로도, 순전히 정치적 단위로도 정의될 수 없으며, 양자가 결합한 범주로 이해될 수 있다. 민족의 역사는 정치공동체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지만, 민족은 정치 공동체로 환원되지 않는 종족적 기반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현실에서 모든 민족은 종족적 특성들과 시민적 특성들을 동시에 갖게 마련이다. 종족성과 시민성은 서구의 민족국가에서도 한 번도 완전히 분리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양자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종족성을 배제하고 시민성을 중심으로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지닌 한계는 분명하다. ‘시민 민족주의’에서와 같이 시민성을 중심으로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전략이 현실적 차원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이유는 종족적인 기반에 의한 동기부여 없이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연합은 추진력을 갖고 실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족적 민족”(ethnic nations)과 “시민적 민족”(civic nations)의 구분 시도는 우리 학계의 민족논의에서 종족적 민족개념이 한국 민족주의의 성격을 강력히 주조(배타성과 획일성)했다는 점만 부각시키는 경향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종족성이 중요한 행위의 원천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 어떤 정치적 행위를 낳는 것은 아니다. 종족성은 당대의 정치적 조건과 불가분하게 엮여 있으며 다른 이데올로기들과 결합할 때에만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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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자는 여러 민족주의의 정치적, 이념적 지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종족적 민족개념이 지배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다루고 있다. 예컨대 지배세력의 공식적 민족 개념과 1980년대의 민중적 민족주의는 “민족의 종족적 토대에는 동의했지만, 민족에 대한 정치적 개념이 전혀 달랐”다. 정치적 민족 개념이 달랐을지라도 종족적 민족성의 토대를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직 정치적 양상만이 논쟁의 대상이었을 뿐, 양자는 동일한 종족적 개념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족성과 정치 공동체가 한 번도 일치해 본적이 없는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는 특정 민족주의 개념의 지배를 위협하는 근본 요인이자 시민적 민족과 종족적 민족의 이분법의 적용불가능성을 보여준다. 20세기 한반도의 종족 정체성은 특정한 정치 경제적 조건 속에서 다양하게 변용되었다. 따라서 남북 그리고 디아스포라는 기존의 민족 정체성 모델에 딱 들어맞게 이해될 수 없다. 문화적 다양성과 민주적 권리를 강조하는 시민적 정체성이나 혈연 언어 전통 등을 강조하는 종족적 정체성은 그 어느 것도 20세기 한반도 역사에서 진행되어온 다양한 국적, 법적 지위, 언어차이, 관습의 현지화 등 민족 정체성의 다양한 변용을 설명하기 어렵다. 한반도의 민족 정체성은 종족적 요소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해당 거주국(남과 북 그리고 해외 디아스포라)의 정치 경제적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남과 북은 과거의 문화전통 가운데에서 각자의 정치 경제적 체제에 맞는 국민적, 인민적 서사들을 교육과 언론매체를 활용한 국가주의적 기획 아래 동원하였다. 분단은 남북 모두 민족 내부의 적대적 타자라는 의미를 상대에게 부여하였고, 민족 서사와 민족 문화의 정체성에 균열을 가져왔다. 북은 사회주의 대가족 제도를 주장하면서 한민족의 혈통을 강조해 김일성에 대한 충효 그리고 김정일로의 권력 승계를 위한 도구로 민족주의를 활용했다. 남 역시 민주화와 경제발전에 힘입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의 국가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대한민국 민족주의’가 강화되어왔다. 해외 디아스포라 역시 해당 거주국의 정치 경제적 조건 속에서 종족 정체성의 상당한 변용을 겪었다. 거주국 정치 경제 체제의 객관적 조건에 제약되면서 디아스포라는 자신의 생존과 적응을 위해 특정 전통을 선별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종족 정체성을 재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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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개인의 자유와 시민적 성장을 억압한다는 이유로 민족 이해에서 종족성을 배제하려는 논리는 한반도와 해외 디아스포라의의 복합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일면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민족을 정치 공동체로만 규정할 경우, 중국 조선족은 중국민족이며, 일본으로 귀화한 재일 조선인은 일본민족이며, 한국 국적을 취득한 필리핀 이주 여성은 한국 민족이며, 북한 주민은 한 때 같은 민족이었지만 정치 공동체가 상이한 이상, 더 이상 한국 민족이 아니게 된다. 이런 논리가 복합적 정체성 때문에 실존적 고민과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는 남과 북의 주민 그리고 디아스포라 당사자들에게 과연 납득될 수 있을까?

▲ 1998년 월드컵 당시 서울 광화문에서 응원 중인 붉은 악마ⓒhttp://blog.gwangju2015.kr/trackback/657

▲ 1998년 월드컵 당시 서울 광화문에서 응원 중인 붉은 악마ⓒhttp://blog.gwangju2015.kr/trackback/657

시민적 민족은 자유와 평등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며, 종족적 민족은 피해의식과 인종주의적 폐쇄성을 지닌다는 이분법적인 접근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교차하고 있는 종족 정체성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정치 경제 공동체를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종족성을 부인하고 시민적 연대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족성과 시민성을 결합하려는 사유이다.

종족적 정체성과 정치적 정체성의 결합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한반도의 종족 정체성이 특정한 정치 경제적 조건 속에서 다양하게 변용된 사실을 우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20세기의 한반도 역사에서 비롯된 종족 정체성의 다양한 변용들을 단일 정체성으로 통합해야 할 정체성의 분열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민족 개념을 사유하는 출발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민족개념을 사유한다는 것은 단일한 민족국가를 추구하는 기존 민족주의의 틀이나 민족국가를 해체하는 탈민족주의의 틀이 아니라, 식민주의적 억압과 남북의 적대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는 자주적 민족국가를 지향하면서도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담은 정치 공동체를 사유하는 사회 철학적 과제와 근본적으로 맞닿아 있다. 달리 말해 이는 남과 북이든 특정 공동체에 의한 민족개념의 일방적 전유가 아니라, 해당 국가의 정치 경제적 틀을 넘어 남과 북 그리고 디아스포라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전망과 관련된다.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철학자의 서재]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철학자의 서재]

신우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사물놀이의 무아지경

 

이제는 오래된 이야기처럼 보인다. 70년대부터 시작해서 90년대 중반까지 대학에서는 민족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각 대학 동아리에는 민요를 부를 수 있는 노래패가 만들어지고 풍물패가 만들어졌다. 이제 대학 축제의 메인 무대는 당연히 아이돌이지만, 그때는 달랐다. 연예인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축제가 열렸던 것이다. 본격적인 공연의 전조는 풍물패가 어김없이 차지했다. 모든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낚시질을 하는 것이지만 어깨춤이 절로 묻어나는 신명나는 한 판 놀이였다. 이제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김덕수사물놀이ⓒJinho.Jung

김덕수사물놀이ⓒJinho.Jung

사물놀이에 대해서 좀 더 말하고 싶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공연이 TV를 통해 방영된 적이 있었다. TV를 통해서 보지만 그 짧은 공연은 사람들의 넋을 빼놓기 안성맞춤이다. 리듬은 변주를 거듭한다. 느리게, 빠르게, 때에 따라서는 휘몰아치는 번개처럼 청중을 압도해 버린다. 그렇게 한참을 넋을 놓고 있으면 어김없이 뒤통수를 치듯 징이 울리며 청중을 흔들어 깨운다. 현장에서 그 공연을 본다면 김덕수를 비롯한 사물놀이 공연단의 모습은 무아(無我)에 빠져 있는 듯할 것이다. 실제로 김덕수는 공연하고 있을 때 자신은 꽹과리에 몸을 빌려줄 뿐,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기가 자신의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모습은 자신은 잊고 다른 사람과 협연하면서 일종의 공명을 일으킨다. 최소한 그 연주동안 모든 성원들은 자신을 잊는다. 그러면서 타자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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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런 공연은 무대에서 펼쳐지지만 원래는 장터를 비롯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어우러지는 대동놀이였다. 대동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신분을 말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화합하면서 어우러진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습은 지워지고 타자와 소통하는 대동의 춤. 블랑쇼의 글을 읽고 있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런 대동놀이다.?

 

▲ (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 <문학의 공간>(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프랑스의 문학자인 모리스 블랑쇼가 사물놀이에서 시작된 대동놀이를 본다면 뭐라고 했을까? 이번에 소개할 책은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이다. 이 책은 무척이나 어렵다는 평판을 듣는다. 이 책 뿐 아니라 블랑쇼의 모든 책이 어렵다. 혹독하게 문장도 길고, 중요하게 다루지 않은 개념을 중심 개념에 놓고 있으니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비록 그는 자신의 이해지평에서 어렵게 사태나 개념을 설명할 수밖에 없지만, 그 내용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 정감이 간다. 만일 그가 우리의 대동놀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면 경탄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서구에서는 무아의 경지라는 말도, 윤회에서 비롯되는 죽음에 대한 인식도 낯설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블랑쇼 역시 이런 개념 자체가 낯선 환경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강강술래와 같은 공동체의 놀이를 경험하고 그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블랑쇼의 얘기가 정겹게 느껴질 것이다.

 

예술가의 고독

 

그가 <문학의 공간>에서 처음으로 제시하고 있는 개념은 고독이다. 고독감은 다른 사람과 떨어져서 홀론 존재한다는 느낌에서 비롯된다. 과연 혼자서 무엇을 할까? 혼자서 하는 놀이가 있어야 시간이 잘 간다. 블랑쇼는 이 부분을 잘 파악했다. 그에게 고독이란 무엇에 대한 몰입으로 나타난다. 문학가의 경우 작품에 몰입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본질적인 고독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거의 모든 예술가들은 고독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창작 활동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몰입으로 완성된 고독을 통해 치유를 시작한다. 말하자면 고독은 더 이상 고립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도 예술가에게는 우울함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우울함은 자신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면서 극대화된다. 그 과정을 통해서 예술가들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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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nny Rollins. ⓒWikipedia

▲ Sonny Rollins. ⓒWikipedia

이와 관련해서 꼭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1930~)라는 재즈 뮤지션이다. 소니 롤린스는 1950년대 데뷔한 미국의 유명한 재즈 색소폰 연주자이다. 그 시대는 춤을 추기 위한 재즈에서 벗어나서 갑자기 어려운 멜로디가 나오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때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별처럼 쏟아졌다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 이유는 약물 때문이다. 재즈 뮤지션들은 마약을 하고 즉흥 연주를 하면서 재즈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다가도 약물 부작용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거의 유일하게 약물에 의존하지 않은 사람이 소니 롤린스이다. 물론 그도 젊은 시절 마약에 손을 댔지만, 보석기간 중 약물 복용 혐의로 강제로 재활원에 갇히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약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다른 뮤지션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활동할 수 있게 됐다.

그의 활동 중에 독특한 이력이 있다. 1950년대 그는 이미 최고의 뮤지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 갑자기 1959년부터 3년 동안 잠적해 버린다. 새로운 동갑내기 라이벌인 오넷 콜먼(Ornette Coleman, 1930~)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잠적기간 동안 롤린스는 요가를 통해 명상하면서 밤이면 인적이 드문 뉴욕의 다리 위에서 색소폰의 매혹에 빠져 연습을 거듭했다. 아마도 그 시간은 그에게 가장 고독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혹독한 고독의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동안 그는 아마도 세상이 자신의 존재마저 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블랑쇼는 이런 말을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의 매혹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 고독의 본질에 다가서고 있다. 시간의 부재란 순전히 부정적인 양상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주도를 할 수 없는, 긍정 이전에 이미 긍정이 되돌아와 있는 그러한 시간이다.”(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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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가 문학에 대해서 말하듯이 음악에 대해서, 혹은 소니 롤린스가 잠적한 사건을 말한다면 위와 같은 맥락에서 말했을 것이다. 롤린스가 잠적한 사건은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롤린스가 부재한 시간을 의미한다. 즉 롤린스는 색소폰의 매혹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는 시간을 보냈다. 철저한 고립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몰입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망각되는 부재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의 시간과는 떨어져 있는 시간은 과거로 기억되는 시간도 아니고 현재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시간에서 한걸음 떨어진 깊이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도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몰입된 시간은 그런 계열화된 시간과는 다르다. 물리적으로 같은 것이 반복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과는 다르게 양으로 표현할 수 없는 질적인 시간도 존재한다. 질적인 시간은 같은 시간이라도 심리적으로 다르게 느껴지는 시간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1시간과 재밌는 영화를 볼 때의 1시간은 물리적으로는 같지만 심리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전자의 시간은 매우 지루하지만, 후자는 매우 빠르게 지나간다. 그런데 후자와 같은 시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을 잊고 무엇엔가 몰입해 있어야 한다. 이처럼 몰입은 시간의 부재를 경험하는 예가 된다. 마찬가지로 소니 롤린스가 몰입한 시간은 계기적으로 주어지는 시간과는 다르게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깊이의 시간이자 나를 잃어버리는 무아의 시간이기도 하다. 또한 블랑쇼가 말하는 현전을 위한 ‘자발적 죽음’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보낸 공백의 시간은 그로 하여금 다시 최고의 작품을 탄생시키게 한다. 물론 예로 든 롤린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이 그런 몰입을 통해서 작품을 만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술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조차, 몰입은 자신 안에 있는 새로운 나를 만드는 작업이다.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에서 말한 고독과 몰입은 시간과 연결되어 작품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임과 동시에 누구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이 더 이상 예술가의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것이 되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죽음 앞에서

 

이렇게 정리하면 특별히 어려울 것도,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처럼 보이지만, 현대 프랑스의 사상계는 블랑쇼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문학의 공간> 뿐 아니라 그의 모든 저작을 관통하고 있는 화두는 ‘바깥’이다. ‘바깥’이란 말은 상식적으로 보면 ‘안’과 대립된다. 그런데 블랑쇼가 말하는 바깥은 이런 의미와는 다르다. 그에게 바깥은 타자와 소통하는 공간이다. 흔히 소통을 한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하지만 블랑쇼에게는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불행과 고통의 연속이다. 가장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은 이 세계에서 고통과 함께 부조리함을 느끼게 해준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은 타자와의 소통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블랑쇼의 생애와 연결해서 살펴보자.

 

블랑쇼의 삶을 살펴보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경험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경험 중 눈에 띄는 두 가지 사건을 제시해 보자. 먼저 2차 대전 중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극적으로 생존했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화가 있다. 1944년,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나치의 퇴각이 이루어지는 시기, 블랑쇼는 자신의 집 앞에서 총살형을 당할 위기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아주 극적으로 레지스탕스가 그 일대를 선제공격하기 시작했다. 블랑쇼는 이 전투 때문에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의 생은 덤으로 생존한다고 간주했다.

 

“당신은 이미 이 년 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므로 앞으로 남은 수명은 모두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죽음의 선고>(고재정 옮김, 그린비 펴냄) 중에서)

 

그리고 그는 저작에서 끊임없이 ‘죽음’의 문제를 분석하고 있다. 물론 이 죽음의 문제는 당시 유행했던 실존주의 철학, 혹은 현상학의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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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른 하나의 특이한 경력은 68 혁명 중 ‘학생-작가 행동위원회’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는 잡지 <위원회>에 익명으로 글을 남기게 된다. 이미 당대의 유명한 문필가였던 그가 자신의 이름조차 버리고 평등한 위치에서, 그것도 자신의 제자밖에 되지 않는 학생들과 동등하게 ‘익명’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68년 5월의 행동위원회와 시위대에서는 친구는 아니지만 나이차도 이전의 명성도 무시한 채 너와 나로 말하는 동지들이 있었다.”(“Pour l’amiti?” 중에서)

 

행동위원회에서 블랑쇼는 익명을 주장했지만, 대다수의 작가들은 익명의 동지 관계를 포기했다. 그렇지만 블랑쇼는 익명성을 마치 문학적 체험으로 느꼈다. 문학적 체험은 작가의 체험이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무한하게 열리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작가는 깊은 사색의 시간을 통해서 작품을 만들지만, 그 작품은 더 이상 작가의 것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작가의 체험을 공유하는 독자의 것이고, 모든 이의 것이 된다. 이런 블랑쇼의 경험은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주체의 익명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두 가지 경험은 그의 주요 테마인 ‘바깥’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로 작동한다. 프랑스 철학에서 ‘바깥’이라는 말은 푸코와 데리다 철학의 주요 테마가 된다. 또한 이 용어는 그대로 들뢰즈에게서 다시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낭시나 아감벤과 같은 당대 철학자에게도 끊임없이 회자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앞서 바깥은 소통의 공간이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 소통의 공간은 완전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고통과 좌절을 경험하는 곳이다. 오히려 완전한 바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아의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테마와 만나야 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상황을 <문학의 공간>에서는 키릴로프의 사례로 분석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 <악령>에서 신의 죽음을 알리는 인물로 키릴로프를 등장시킨다. 키릴로프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공개 자살을 선택한다. 이는 자기의식의 순수한 현전 가능성을 분명하게 밝히는 예에 해당한다. 이로부터 블랑쇼는 죽음 안에 놓여 있는 자아의 분열을 분석한다. 자신 안에 놓여 있는 타자. 이 타자는 소통을 위한 근원적 공간이 된다.

 

이 근원적 공간은 마치 문학 혹은 글쓰기의 시원을 이루는 역할을 한다. 앞서 사례로 제시했던 김덕수나 소니 롤린스의 경우처럼 물리적인 죽음이 아닌 자신의 세계로 빠지는 무아지경은 어쩌면 블랑쇼가 말하는 바깥을 가장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타자와의 근원적 공간은 현전을 위한 죽음이라는 내밀성으로부터 시작해서 타자의 내밀성과 만나는 지점이 바로 소통의 공간이고, 바로 예술의 공간이 된다는 의미이다.

 

 

 

 

안토니오 네그리 외 <탈정치의 정치학>[철학자의 서재]

안토니오 네그리 외 <탈정치의 정치학>[철학자의 서재]

김범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2008년 촛불의 진짜 ‘배후’!

 

자율의 이중성

 

5공화국 시절 중고등학생들에게 ‘자율’이라는 말은 환영과 동시에 엄청난 부담감을 안겨주었다. 전두환 정권의 포퓰리즘은 프로스포츠, 국풍사업뿐 아니라 학생들의 두발 자율화, 교복 자율화를 들고 나왔다. 그 당시 학생들은 그 자율화를 반겼다. 교복은 학생들을 억압해왔던 ‘상징’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 ‘상징’이 무너지는 것은 학생의 인권 신장이라는 막연한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자율화는 학교의 권위, 교사의 권위 앞에서 다른 방식으로 코드화되어 학생들을 억압했다. 아무리 두발 자율화라고 하지만 머리 긴 것은 용납이 안 된다. 그리고 여지없이 ‘바리깡’을 들고 교실을 감시하는 교사. 결국 자율은 또 다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의식을 주입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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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3일 시청앞 광장 촛불 집회ⓒWikipedia

이런 자율의 이중성은 학생들의 두발이나 교복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자율주의’라는 말은 아마도 2008년 촛불집회 때문에 널리 보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해 5월, 6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그 현상은 아직도 우리 사회 변혁을 진단하는 변곡점으로 파악된다. 촛불문화제의 모습은 여느 시위 문화와도 달랐다. 행사를 주도하는 단체도 없고, 모인 주체도 특정한 하나의 집단으로 말할 수도 없는 형태였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줌마, 넥타이를 매고 나온 회사원, 교복 차림으로 나온 고등학생들, 심지어 질서와 안전 지킴이를 자처하고 군복을 입고 나온 예비군까지. 그들은 다양한 정보를 공유했고, 수준 높은 지식으로 소통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다중지성’ 혹은 ‘집단지성’이라 칭했다. 그리고 그 집단지성은 즐겁게 놀면서 싸우고, 자율적으로 움직였다.

제발 해산하자는 말을 듣지 않은 채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과 횡단보도 놀이를 하며 거리를 활보했던 사람들. 이러한 자율은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분화되었다. 쌍용자동차, 기륭전자의 싸움에 화답했고, 밀양 송전탑과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저지 등에도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매체인 팟캐스트를 통해서 소수자들의 목소리, 사회 정의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름도 없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특이한 개체들로 모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집단의 자율은 제도적 폭력 앞에 다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는 공권력이라는 구실로 물리적인 폭력이 행사되었다면, 지금은 재편된 제도를 이용한 경제적인, 혹은 정신적인 폭력이 자율을 억압하고 있다.

 

다중지성과 자율의 이론적 모델?

 

탈정치의정치학

▲ <탈정치의 정치학 : 비판과 전복을 넘어 주체성의 구성으로>(안토니오 네그리 외 지음, 워너 본펠드 엮음, 김의연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여기서 자율주의는 안토니오 네그리가 행했던 ‘아우토노미아(autonom?a)’를 번역한 말이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1968년 이후 70년대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 운동 과정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운동, 특히 네그리가 이론적 중심이 된 모델이 바로 아우토노미아(자율)다.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도 촛불집회 때문에 아우토노미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이 내용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이미 90년대부터였다. 주로 조정환, 윤수종 등이 적극적으로 번역하고 소개했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쓰고 김의연이 번역한 <탈정치의 정치학>(갈무리 펴냄)인데, 그 내용은 아우토노미아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들의 논쟁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여러 이론적 상황들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 명의 저자가 쓴 책이라면 일정한 흐름이 있는데, 불행하게도 이 책에서는 그런 흐름을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의 매력에 빠지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책에 접근하기 위한 기본적인 문제 상황과 이론적 배경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990년대 이른바 ‘한국의 좌파’는 공황상태에 빠져야 했다.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몰락하고, 독립 국가들이 탄생하는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폐해를 말하기 위해 그 반대편에 있었던 집단이 필요했으니 그 집단이 사라진 것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절대적 승리라는 주장에 넋을 놓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분명 자본주의는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자본주의도 완전체가 아니라 투석 치료를 받아야하는 신부전증 환자일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르크스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의 스펙트럼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명하게 되고, 국내 소개하게 되었다.

 

먼저 마르크스의 <자본> 분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있었다. 그래서 알튀세르를 비롯한 프랑스 사회철학자들의 이론이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아예 마르크스주의와 결별을 선언한 그룹도 탄생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계열이 그것이었다. 물론 이런 부류 외에 전통적으로 존재해왔던 스탈린주의를 배격한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레닌조차 배제한 마르크스주의 등의 관점들이 존재한다. 이런 스펙트럼에서 자율주의는 어느 편에 속해 있을까?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

 

이 책을 엮은 본펠드는 자율주의를 ‘이단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의미는 ‘정통’에 대한 지위를 거부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여러 명이고, 그래서 이 저자들 모두가 이런 입장이라고 단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스스로 이단적 마르크스주의라는 멍에를 쓴 이 모든 글에서 공통적인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위기를 인정하지만,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이론을 ‘마르크스를 통해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재확인시켜주는 부분이 이 책의 3장 ‘맑시언의 범주들, 자본의 위기,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적 주체성 구성’이다. 이런 공통적인 흐름은 이 ‘이단’이 단순히 마르크스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마르크스를 넘어서 마르크스로 향한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여전히 자본 안에서, 그리고 자본에 대항하면서 자본을 넘어서는 노동의 역량을 긍정한다. 그리고 이것이 마르크스의 중심적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율주의의 이론적 배경을 좀 더 알아두어야 한다. 이 책의 매력에 빠지기 힘든 것은 바로 배경 지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다. 먼저 노동의 역량에 대한 부분을 보충 설명해 보자.??

 

Baruch Spinoza(1632~1677)ⓒWikipedia

Baruch Spinoza(1632~1677)ⓒWikipedia

스피노자 철학에서 핵심 개념 중 하나로 ‘코나투스(conatus)’가 있다. 이 말은 ‘생을 지속시키려는 힘’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철학사에서 오랫동안 이단으로 취급받던 인물이다. 그런데 프랑스를 중심으로 스피노자를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그중 스피노자의 ‘역량(potentia)’이나 ‘정동(affect)’ 따위의 개념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중요 개념이 된다. 네그리를 비롯한 자율주의 사상가들도 이런 해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물론 네그리가 프랑스 사상가는 아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정치적 박해 때문에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여기서 가타리, 알튀세르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특히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을 특정한 개체에 한정시키지 않고 집단에 활용했다. 그래서 집단적 코나투스에 해당하는 ‘다중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명목상의 권력을 비판하고, 모든 권위에 대한 부정과 저항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자본의 권력과 부도덕한 권력에 대항하여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주체성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집단의 힘은 강할 수는 있지만, 결코 사회 변혁이라는 구도로 배치된다는 보장은 없다. 여기에는 반드시 독특한 주체 개념이 상정되어야 한다.

 

네그리는 <전복의 정치학>(최창석·김낙근 옮김, 인간사랑 펴냄)에서 주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적이면서도 프롤레타리아적이고 다양하면서도 평등에 대한 집단적 요구를 하며 정치적 타협을 하면서도 생존과 투쟁을 위한 윤리적 결단을 추구하는 주체.”

 

비록 포스트모던한 사상가들이라고 하는 인물들 중 일부는 주체에 대해서 개체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거나 주체 중심의 사고를 거부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변화의 중심을 이끌어갈 수 있는 주체는 필요하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이성주의의 그림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개념이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제국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고유한 역량을 탈정치의 윤리적 성격으로 정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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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체들은 노동의 조건 자체가 변화되는 상황과 함께 연구된다. 자율주의에서는 이러한 변화와 연관해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말은 스피노자의 정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도 ‘감정 노동’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업을 비롯해서 정신적 에너지를 소비하는 노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과거에 이런 노동은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지 않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새로운 생산 패러다임을 갖게 만들었으며, 이런 패러다임은 생산의 탈중심화, 탈장소화를 가능케 했다.

 

이런 노동의 양식은 자본의 운동 방식을 재탐색하게 한다. 이 책에서는 1장 ‘태초에 절규가 있었다’와 8장 ‘자본이 운동한다’에서 자본 권력이 아니라 불복종적인 노동의 역량을 다루고 있다. 또한 7장 ‘발전과 재생산’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과 접속의 확장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서 자율 공간의 창출에 공헌하는 주체성에 대한 논의를 분석한다.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탈정치의 정치

 

일상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탈정치인 것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중립적인 태도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율주의에서의 탈정치란 이렇게 정치에 무관심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을 규정하는 말 중에서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가 있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말을 번역한 것인데,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고 비판받고 있다. 적절한 번역 용어는 ‘정치적 동물’이다. 이 말은 인간이 고대 도시 국가인 폴리스에 거주하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혹은 경제적인 것)을 엄밀하게 구별하게 된다. 공적인 것이란 폴리스 전체와 관련된 일이고, 사적인 것이란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적인 것으로 한정된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즉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이 서로 구별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경제 체제인데 어떻게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제외하고 공적인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자율주의에서 탈정치는 엄밀하게 보자면 공통적인 것의 복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공통적인 것에는 사적 소유 관계와 신자유주의적 전략들에 대립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자본은 자신의 소유 관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국가라는 허울을 쓰고 있고, 이 국가들은 다시 자본의 논리에 맞춰 제국주의적 성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먹고사는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의 모든 성원들에게 공통적인 것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탈정치는 역설적으로 매우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런 고민을 10장 ‘정치적 공간의 위기’와 13장 ‘공적 공간의 재전유’ 등에서 만날 수 있다.

 

자율주의의 문제의식과 추이를 조금만 이해한다면, 이 책엔 우리 현실과 비교해서 사색의 깊이를 더할 내용이 많다. 자율에는 반드시 통제가 뒤따라왔다. 그런 의미에서 자율이 통제 사회 안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발전하기 위해서, 집단들의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는 가치의 전유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고민을 통해서 현재 우리 사회에 놓여 있는 통제 사회의 징후를 차단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을 깊게 만들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은 자율주의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지 않다. 이 책을 재미있게?읽기 위해서는 조정환이 쓴 <아우또노미아>(갈무리 펴냄)나 윤수종의 <안토니오 네그리>(살림 펴냄)와 같은 책을 미리 읽어보길 권한다.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철학자의 서재]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철학자의 서재]

?오상현(숭실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나는 스댕 요강과 1986년을 기억한다”

 

우연한 기회에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라는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나타내듯, 사회학자인 저자가 바라본 25년 가난의 기록들을 그림을 그리듯 잘 표현했습니다. 서평을 쓸 생각에 책을 읽다가 계획을 바꿨습니다. 사당동 사람들은 저자의 연구 대상이기 이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한 기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서평은 서평이 아닙니다. 그저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을 기억하는 한 젊은이의 고백입니다.

 

“엄마랑 아빠는 진짜 힘들게 살았다. 너희 두 남매만 집에 남겨두고 일하러 갈 적엔 마음이 정말 …….” 사당동 시절을 떠올리던 엄마는 눈물부터 흘린다. 이제는 아줌마보다 할머니에 가까워진 이 여인의 눈물 앞에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애당초 인터뷰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사당동’은 한숨과 눈물의 다른 이름일 테니까.

 

사당동 더하기 요강

 

▲ (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부모님은 내가 네댓 먹었을 때 서울로 상경했다. 첫 번째 도박이었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살던 시골에서 위로 형과 누이를 셋이나 두었고, 아래로 동생 둘을 두었던 아빠. 여기에 엄마와 자식 둘까지 거두어 먹이려면 농사일만으로는 답이 안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서울행, 원래 잃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 중대한 선택을 쉽게 하는 법이다. 그런 선택이란 사실 강요되는 것이니까.

사당동을 생각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첫 번째 물건은 ‘요강’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요강을 ‘방에 두고 오줌을 누는 그릇’이라고 정의하는데, 실제로는 똥도 눈다. 멀쩡한 화장실을 놔두고 왜 요강을 방에 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소리다. 요강을 방에 두고 쓰는 것은 화장실이 없어서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는 사실. 우리 집은, 아니 우리 방은 (어차피 단칸방이었으니까) 반지하로 주인집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화장실은 그 주인집 마당에 있었다. ‘쾅’하고 대문 여닫는 소리가 주인집을 거슬리게 할까봐 해질녘이면 요강이 등장했다. 마치 해가 지면 나타나는 달과 같았던 은빛 스댕의 요강.

 

‘아이들을 방 안에 둔 채 문을 잠가 두고 일 나가는 경우도 흔했다.'(132쪽) 정말 그랬다. 맞벌이가 아니면 버티는 것조차 까마득하게 먼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시던 엄마가 잘 놀고 있으라고 손을 흔들며 문을 닫으면, 이내 ‘철컥’하고 자물통 잠기는 소리가 났다. 밤이 되어 다시 그 자물통 소리가 날 때까지, 잠긴 방 안에 남겨진 (둘의 나이를 합쳐도 겨우 열 살 남짓이던) 남매가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일은 단 두 가지다. 아직 중천에 이르지도 않은 해가 어서 빨리 서녘으로 지기만을 바라는 일, 그리고 남겨진 밥상을 비우고 텅 빈 요강을 채우는 일이었다. 넘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당동 더하기 산동네

 

아빠는 사당동 대부분의 아저씨들처럼 ‘노가다’를 다녔다. 내게는 ‘목수’라는 전문직에 종사했었다고 포장했지만 사실 건설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였던 셈이다. 여러분이 한 번은 가 보았을 ‘예술의 전당’이나 ‘동작대교’를 짓는 일에 참여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이처럼 사당동 아저씨들의 덕을 한번쯤은 본 셈이다. 나중에는 둔촌동에 있는 시장에서 경비 일을 했다. 경비라는 직업도 사당동 아저씨들이 많이 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아버지의 망치질은 여전히 경이로운 수준이라 환갑이 넘은 지금도 망치질은 손수 한다. 나는 장성한 아들이지만 나서지 않는다. 핀잔 섞인 눈총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작은 효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터 옮기는 일은 이들의 자의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자의처럼 보일 뿐 타의일 때가 더 많다. 이들의 직장은 거의 영세 업체들이어서 수시로 주인이 바뀌거나 부도가 나서 문을 닫는다. 또한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직장이기 때문에 월급이 조금이라도 많거나 노동 조건이 좋은 곳이 나오면 주저 없이 옮긴다.”(153~154쪽)

 

▲ 이 책의 토대가 된 사당동의 한 가정에 대한 긴 관찰을 영상으로 풀어낸 다큐멘터리 (조은, 박경태 감독)의 한 장면. 철거촌의 현장. ⓒhttp://indiespace.kr

▲ 이 책의 토대가 된 사당동의 한 가정에 대한 긴 관찰을 영상으로 풀어낸 다큐멘터리 <사당동 더하기 22>(조은, 박경태 감독)의 한 장면. 철거촌의 현장. ⓒhttp://indiespace.kr

엄마는 사당동 대부분의 아줌마들처럼 다양한 일을 했다. 남성시장 어귀에서 양말 장사도 했었고, 겨울이면 산동네를 돌아다니며 찹쌀떡이나 메밀묵을 팔았다. 당시 엄마의 나이는 20대 후반이다.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며 산동네의 인적 드문 밤길을 홀로 다녔을 엄마다. 떡과 묵이 잔뜩 담긴 나무통의 무게보다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삶의 무게가 더 했을 그때,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나와 동생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이후 엄마는 가발공장엘 나가 미싱사로 일했다. 남성시장에서 아빠랑 같이 포장마차도 했었단다.

 

동작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돼서야 우리 남매는 감금에서 해방되었다.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기에 알아서 문도 잠그고 학교에도 갈 수 있었다. 당시 사당동의 인구밀도는 상상을 초월해서 2부제 수업은 기본이었다. 오후반 수업을 받을 때, 한번은 집에서 놀다가 학교 갈 시간을 놓쳤다. 1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내 울다가 어떤 삼촌이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사실 지각을 한 것인데 사정을 들은 담임선생님이 없던 일로 해주었다. 그 덕에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결석은 물론이거니와 지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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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 더하기 교통사고

 

’86 아시안 게임’이 한창이던 그 때, 사당동의 하늘에도 색색의 애드벌룬이 둥둥 떠 있었다. (<사당동 더하기 25>의 저자가 연구를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다.) 바람에 날리는 그 풍선을 따라가다 나는 생애 최악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뼈가 종아리를 뚫고 삐져나온 상황이었다고 들었다. 사고를 낸 아저씨는 이미 의식을 잃은 나를 안고 가까운 병원으로 뛰었다. 사당동 아이들은 늘 이런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시유지에 아무렇게나 지은 집들이나 축대는 언제 무너질지 아슬아슬했고, 구불구불 좁은 길에는 사각지대가 많아서 차 사고도 빈번했다.

 

가해자 아저씨는 적어도 양심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두 군데 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해야만 한다’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애써 나를 세 번째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 세 번째 병원이 고석주 정형외과다. (자리는 옮겼지만 지금도 이수역 근처에 있다.) 당시 원장선생님은 다른 곳과 달리 일단 수술을 해보겠다고 했단다. 만약 실패를 한다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7살 아이의 다리를 어떻게 쉽게 자르겠냐며. 휴대폰도 없던 시절, 길가에 뿌려진 아들의 핏자국을 따라 정신없이 당도한 병원에서 부모님의 하늘은 무너졌을 것이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20년 뒤에 나는 42.195킬로미터 마라톤 풀코스를 5시간 15분 만에 완주했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컸던 모양이다. 석 달 넘게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내게 아빠는 컬러텔레비전을 선물했다. 그렇게라도 미안함을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생애 첫 텔레비전을 나는 보물처럼 아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우리 살림에 텔레비전이란, 상상도 못할 물건이었다. 그 신통방통한 텔레비전을 통해 ’86 아시안 게임’을 실컷 볼 수 있었는데, 내가 교통사고 당시를 정확하게 1986년으로 기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텔레비전은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 집에 있었다.

 

100일을 넘기고서야 나는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 석 달 열흘 만에 나오는 것은 무리였을 테지만,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시골에 살던 아주 어린 시절, 나는 감기로 오랫동안 앓았던 경험이 있다. 피를 토할 정도였으니 감기보다 더 심한 병이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저 나는 감기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병원비가 모자라 엄마는 하나뿐인 결혼 패물이던 금가락지를 내다 팔았다고 한다. 더 이상 내다팔 물건이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 병원은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텔레비전을 되팔 수는 없었을 테니까.

 

사당동을 떠나다.

 

철거를 앞두고 부모님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대부분의 사당동 사람들이 같은 고민에 놓였다. 또 다른 사당동으로 옮기거나 근처 위성도시로 떠나야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또 철거를 당할 바에야 근처 지방으로 옮기는 게 나을 듯 했다. ‘안양, 시흥 등 서울 근처 위성도시로 빠져나간 경우도 상당했다.'(147쪽) 우리는 안양을 선택했다. 두 번째 도박이었다. 모은 돈을 모두 털어 철물점을 차렸지만 장사가 잘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비록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만 했지만 아빠에겐 ‘내 사업’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작은 방 하나가 딸린 가게로 이사했다. 역시 단칸방이었고 화장실도 밖에 있었지만 적어도 주인집의 눈치를 보지 않고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나는 이 시절을 행복으로 기억한다. 안양 호계동으로 이사한 뒤로는 늘 가게(집)엔 아빠와 엄마가 있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고,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다. 가난은 마치 그림자처럼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뒤로도 엄마는 꽤 오랫동안 하나뿐인 그 방에서 이런 저런 부업을 했다. 미싱을 돌려 가발을 만들기도 했고, 어떤 때는 전자부품을 끼우는 일도 했다. 전자부품 끼우는 일은 나도 참 열심히 했었는데, 파란색 플라스틱 가루가 많이 날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일을 하고나면 꼭 그 고약한 가루들이 밥 위로 올라와서 밥을 먹다가도 몇 번씩은 집어내야 했다. 귀찮아서 그냥 씹어 넘긴 일도 많았지만.

 

4학년이 되던 첫 날, 그러니까 1990년 3월 2일에 호계동으로 이사했는데, 그해 2학기에 나는 부반장으로 당선되었다. 부반장이 되고 얼마 뒤가 내 생일이었는데 나는 무턱대고 우리 반 아이들을 죄다 초대했다. 심지어 담임선생님까지. 네 식구 편히 눕기도 어려웠던 단칸방에 그 많은 아이들과 선생님을 초대할 발상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없는 살림에 무슨 음식으로 생일상을 차리겠는가? 1990년 그 해 생일에 30명이 넘는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왔다. 물론 천사 같았던 담임 홍금숙 선생님도 오셨다. 그날 엄마와 아빠는 열 마리가 넘는 통닭 값을 대야 했지만 나는 그날 받은 생일 선물(주로 노트나 연필)을 중학교 다닐 때까지 썼다.

 

당시 친구들을 적어도 내가 단칸방에 산다는 이유로 놀리지는 않았었다. 생일 초대에 응해준 친구들 중에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와 잘 어울렸다. 찻길 하나만 건너면 논밭이 펼쳐졌기에 개구리도 잡고 흙장난도 많이 했다. 이후 그곳은 수도권 신도시를 대표하는 ‘평촌’이 되었고, 나는 그곳에 새로 들어선 범계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가난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뒤에 ‘부끄럽진 않아도 내세울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라고 고쳐 생각하게 되었다. 으리으리한 68평대의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서 생일파티를 하고 나오면서였다. 단칸방으로 돌아온 그날 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 <사당동 더하기 22>의 한 장면. ⓒmovie.naver.com

▲ <사당동 더하기 22>의 한 장면. ⓒmovie.naver.com

 

다시 사당동으로

 

이듬해, 철물점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은 부모님은 의왕시 변두리에 21평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물론 융자를 많이 끼고 샀으며 오래도록 갚아야 했다. 어쨌든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단칸방을 벗어났다. 그러나 여유도 잠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자본은 밑바닥 경제까지 잠식해나갔다. 철물점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형마트에 밀려 점차 손님이 줄었고 대신 부모님의 한숨이 늘어갔다. 내가 안양시청에서 공익근무요원을 하던 때, 우리는 충남 공주로 내려와 떡방앗간을 시작했다. 세 번째 도박이었다. 또 다시 제로에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다시 또 10년이 넘게 흘렀고, 떡방앗간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목수였던 아빠의 빈틈없는 철저함과 악착같이 살아서 얻은 엄마의 넉넉한 마음이 근원이었다. 공주로 내려올 당시, 집안이 어려워 내놓았지만 팔리지 않았던 탓에 우리의 첫 ‘내 집’은 그대로 남았다. 나는 지금 부모님의 눈물과 피땀으로 얻은 그 집에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가난의 냄새는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그 냄새는 어쩌면 찌든 때처럼 그들 삶 깊숙이 박혀 있어 좀처럼 씻어 내기 힘들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303쪽)

 

그렇다. 가난이란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다. 지금 우리 가족이 이만큼이나 살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세 번의 도박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빠가 (비록 오른쪽 집게손가락 한 마디를 잃었지만) 건설현장에서 크게 다치지 않아서이고, 엄마가 (비록 미싱일 덕에 지금은 양쪽 눈이 성치 못하지만) 집을 나갔다거나 일수놀이에 돈을 떼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며, 우리 남매가 (비록 교통사고의 흉터를 훈장으로 남겼지만) 죽거나 큰 병에 걸리지 않아서이다. 억세게 운이 좋은 경우이기에 예외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예외는 예외일 뿐.

 

어떻게 우리 사회의 빈곤을 끊을 수 있을까?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고 게으른 사람은 가난해 진다’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거짓이라는 것쯤은 이제 부연이 필요 없는 명제가 되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양극화는 가속화되고 있으며, 생활고를 이유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웃들은 늘어만 간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분배보다는 성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공자 이래로 2500년 동안 우리는 늘 분배보다는 성장을 꿈꾸었고, 그래서 늘 부족하다고 여겼으며,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흙에 묻혔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게 (분배)되지 못함을 걱정하며,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치 않을 것을 걱정한다.’고 들었다. 고르게 (분배)되면 가난함이 없어지고, 조화를 이루면 부족함이 없어지고, 편안하게 되면 (마음을) 기울일 일이 없어지는 법이다.”(孔子曰, … 丘也聞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논어>, ‘계씨’)

 

나는 내일도 모교 강의를 하러 가기 위해 사당동을 지날 것이다. 인연은 인연인가보다. 지독한 가난의 냄새도, 은빛 스댕 요강의 기억도 이제는 가물거리는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이웃의 가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때마침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거짓말로 현혹하는 사람들을 걸러낼 시간이다.

 

 

가네코 후미코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철학자의 서재]

가네코 후미코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철학자의 서재]

박종성(호원대학교 외래교수)

 

짧은 삶과 옥중수고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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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가네코 후미코 지음, 정애영 옮김, 이학사 펴냄)ⓒ이학사

이 책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정애영 옮김, 이학사 펴냄)는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에서 쓴 글이다. 그러니까 옥중수고인 셈이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이들이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아나키스트 박열의 동지이자 부인이었다고 한다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박열의 부인이자 동지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의 삶에 공감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으로서 혹은 부모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또는 세상을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녀가 옥중수기를 쓴 목적이기도 하다. 그녀는 23살이라는 짧은 생을 감옥에서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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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그녀의 연보를 보면, 그녀의 삶이 얼마나 처절하고 불행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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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1903년 1월 25일에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는 1903년생이나 실제 나이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그가 6살 무렵 아버지와 이모가 정을 통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아버지가 끝내 이모와 집을 나가자 어머니는 대장장이와 동거를 하였고, 대장장이와 헤어지고 난 뒤엔 항구의 노역꾼과 동거를 한다. 다음해 노역꾼인 고바야시의 고향으로 이주하여 고바야시의 형수의 친정집 오두막에 살기 시작하였고 그 다음 해인 1911년 고바야시와 헤어지고 외갓집으로 이사한다. 어머니는 후미코를 친정에 두고 잡화점을 하는 후루야 쇼헤이와 결혼한다. 그녀는 그때까지 무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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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에 그녀는 외할아버지의 5녀로 입적하여 친할머니가 사는 조선 충청북도 청주군(현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의 고모집으로 가서 살게 된다. 1915~1917년 부강공립심상소학교,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감동하였고 7년에 걸친 식모살이를 벗어나 야마나시의 외갓집으로 돌아온다. 그 다음해에 도쿄에 사는 작은 외할아버지의 집으로 옮겼고, 신문 보급소에서 생활하며 신문을 팔면서 영어 학교와 겐슈학관에 다녔다. 또 그해 연말까지는 도쿄 유시마의 신하나 초에 셋방을 얻어 살면서 가루비누를 팔았고 사탕가게 주인집에서 식모살이를 하였다. 그동안은 학교를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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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경이 조선인을 해치고 있다.

일본 군경이 조선인을 해치고 있다.

1921년 사회주의자 호리 기요토시의 집에서 일하며 기숙하였으나 호리의 생활방식에 염증을 느꼈고, 결국 작은 외할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일을 도우며 학교를 다녔다. 그때 사회주의자들을 알게 되고 사상을 접한다. 1923년 간토대지진이 일어나고 이것이 조선인 때문이라는 유언비어가 돈 것을 계기로 조선인이 6000~8000명이 학살된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대학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불령선인의 비밀 결사 사건’을 발표한다. 이 대중 조직에 박열과 후미코가 있었다.

1925년 후미코는 예심판사가 요구한 전향을 거부한다. 대심원으로 넘어가면 사형을 선고받는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26년 후미코는 박열과 결혼신고서를 구청에 제출하고 그 해 7월 23일, 그녀의 나이 23세에 형무소에서 목매달아 죽는다.?

다른 옥중수고와는 달리 이 저작은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자신의 삶을 모두 지워버리고자 쓴 것이다. 후미코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전 생활의 폭로이며 말살입니다. 저주받은 나 자신의 생활의 마지막 기록이며 이 세상을 하직하는 유품입니다. 아무 재산도 없는 나의 유일한 선물로 이를 택하(宅下, 수형자자 소지품이나 영치물 등을 친족에게 인도하는 것)합니다.” (7쪽)?

 

또한 그녀는 이 옥중수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로서는 누구보다도 이 세상의 부모들이 이것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아니, 부모들뿐만 아니라 사회를 좋게 하고자 하는 교육가, 정치가, 사회사상가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읽어주면 좋겠다.” (18쪽)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읽기를 그녀는 바랐던 것이다. 우리는 누구의 부모이거나 사회를 좋게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수기를 읽기 바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수기를 읽으면서 그녀가 자주 간절히 목 놓아 외치는 단어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과 그 이후에 사회주의 사상가들,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더욱더 자유에 대한 갈증이 확장되고 깊어짐을 느낀다.

그렇다면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 삶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희망했는지, 처참한 삶은 그녀로 하여금 어떤 이념을 자극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녀의 글 속에서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고 자신의 삶 전체를 음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노예의 삶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후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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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옥중수기는 참으로 슬펐다. 이런 사건도 있었다. 후미코는 친할머니 집에 살면서 식모로 일을 했다. 나물을 삶다가 솥을 깨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할머니는 그 솥 값 1엔 20전을 내라고 하였다. 할머니 집에 와서 식모로 일하면서 딱 한 번 10전을 받은 적 밖에 없던 후미코는 그 돈을 낼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그 솥 값은 일본을 떠나올 때 전별금으로 받은 12,3엔의 돈에서 변상하였다. 할머니 젓가락이 부러진 날은 “정초부터 웬일이냐. 후미, 넌 내가 죽어버리기를 비는 모양이구나. 좋아 단단히 기억하고 있으마.”(101쪽)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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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들이 생기면 후미코는 늘 아침에 밥도 먹지 못하고 겨울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벌을 받았다. 그 상황을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겨울 아침의 추위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저녁에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 추위와 피곤으로 얼굴은 나무판처럼 딱딱해지고, 다리는 막대기같이 굳어지고 저렸다. 꼬집어도 감각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배는 고파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103쪽) 그는 이러한 벌을 받은 뒤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이라도 사죄를 해야 했고, 할머니와 고모의 위엄을 위해 ‘앞으로는 절대로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맹세해야 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이러한 경험은 끝이 없었다. 그의 나이 12살 정도였다. 그는 이러한 체험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라. 자기 행동을 남에게 맹세케 하지 말라. 그것은 아이로 하여금 책임감을 빼앗은 일이다. 비겁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음에도 행동에도 겉과 속이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누구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남에게 약속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행위를 감시인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자신의 행위의 주체는 완전히 자기 자신이어야 함을 자각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사람은 누구도 속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진실로 떳떳하고?자율적인 책임감?있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104쪽)

 

그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자율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징벌을 두려워하게 되면서 접시 하나를 깨도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이러한 자율적 인간에 대한 그리움은 그녀를 언제나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늘 불안했고 겁에 질려 있고 차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그녀는 이 수기를 부모들이 읽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렇다. 위의 후미코의 말은 부모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아이를 자율적인 주체로 성장하게 만드는 일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인간이 아닌 자신의 행동에 자신이 책임지는 그러한 인간, 행위의 주체가 되는 인간, 그리하여 어떤 이들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진실로 떳떳한 자율적인 책임감을 지닌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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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미기_유럽2013.01 396그녀의 또 다른 경험도 소개해 볼 필요가 있다. 외할머니와 고모의 집에서 식모로 착취당하며 모든 아이들이 하는 생활을 금지당한 후미코는 어른이 되어 길가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게 된다. 거기서 아이들의 엄마가 달려와 기모노가 더러워지니 놀이를 하지 말하고 야단치는 장면을 본다. 아이는 놀이에 빠져 그만두려 하지 않으려 했고, 엄마는 울부짖는 아이를 억지로 잡아끌고 갔다. 그것을 보고 후미코는 마음 속으로 외친다.

 

“왜 그렇게 무리는 하는 거죠? 당신은 대체 아이가 귀한가요, 기모노가 귀한가요? 아이는 기모노를 위해 있는 게 아니랍니다. 아이를 위해 기모노가 있는 거죠. 그렇게 때 타는 게 무서우면 좋지 않은 허름한 기모노를 입혀놓으면 되잖아요.

어른은 자신의 체면이나 안락을 위해 아이를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어른은, 특히 어머니는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지키고 아이의 재능을 키워주는 게 일입니다. 아이의?자유(강조는 필자)를 빼앗고 아이의 인격을 빼앗는 것은 엄청난 죄악입니다. 아이를 자유롭게 놓아두세요. 자유의 천지에서 뛰어노는 건 자연이 아이에게 준 유일한 특권입니다. 그래야만 아이는 무럭무럭 인간다운 인간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128쪽)

 

그가 바라는 인간의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였다. 그리고 자유는 아이들의 유일한 특권인 것이다. 아이들은 자유를 먹고 자라나는 존재다. 따라서 그녀에게 자유의 억압은 가장 큰 죄악이었다. 이것은 아나키즘의 핵심적 주장과 같다. 물론 아나키즘이 자유방임을 허하는 논리가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의 자유, 그야말로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오히려 인간이 자본으로부터 착취당하는 자유를 옹호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이러한 자유와는 구분하여 그의 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녀는 스스로의 비참한 삶을 통하여 인간이 착취 받고 이웃이 고통 받는 것을 슬퍼하였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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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결코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가 얼마나 아이들의 자유를 질식시키고 있는지 다시금 반성해야 한다. 후미코는 할머니와 고모에 의한 고통과 위엄에 질식당한 자신의 모습 속에서 절절히 자유를 외치고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찾고자 했다. 타인의 노예가 아닌 자기 자신의 삶 말이다. 이러한 그의 말은 우리에게 공명한다. 그것은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보편성에 억압된 자아가 아니라 개별적인 자아에의 희구, 자율적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처절한 삶의 반성과 실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옥중수고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또 다른 것은 그의 문체다. 그는 화려하거나 추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지 않는다. 옮긴이가 인용한 쓰루미 슌스케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수기는 번역서에 떼어낸 추상어로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고 15년의 전쟁을 겪고도 별로 변하지 않았던 오늘의 일본 지식인들의 허를 찌른다.”(365쪽) 이 구절 또한 우리들에게 반성의 계기를 만든다. 우리는 추상적인 말을 통해서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는가? 비단 지식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사물과 사태를 이해하기 쉽게 하는 것은 중요한 글쓰기의 자세일 것이다.

 

이제 최초의 질문에 대한 고민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즉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이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녀는 수기를 마치며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나 스스로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단지 나의 반생의 역사를 여기에 펼쳐놓았으니 다행인 것이다. 마음 있는 독자는 이 기록으로 충분히 알아주리라. 나는 그것을 믿는다.”(353쪽) 그녀가 답을 하지 않은 이 질문에 대한 몫은 우리에게 남는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무엇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그녀의 삶을 둘러싼 시대였으며, 그녀의 삶을 둘러싼 가족이었고 교사였고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였다. 즉 그녀의 삶의 총체적 연관 속에서 그녀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더욱이 그것을 만든 것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이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러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제국주의로 전화하던 시기였다.

더욱이 다이쇼데모크라시로 명명되는 ‘안으로는 입헌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를 표방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3.1운동에 감동한 그녀는 삶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었다. 이렇듯 그녀의 처절하고 짧은 인생, 불꽃처럼 살다간 삶, 지지리 운도 없는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받아 안고 무엇에 공감하고 무엇에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그것은 이 슬픈 옥중수기의 저류에 흐르는 그의 희망이고 행복한 인간의 지향점이다. 그것은 자율적인 인간을 꿈꾼, 가족에 버림받고 가족에 착취당하며 놓고 싶지 않던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자 온전히 자신의 삶을 찾고자 했던 23년의 짧지만 결코 짧지 않은 삶이다. 그녀는 예언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며 수기를 마친다.

 

“머지않아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은 현상으로서는 멸해도 영원의 실재 중에는 존속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 그녀는 현상으로는 죽었지만 사상의 기억, 삶의 치열함과 그녀의 삶 자체는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그녀의 옥중수기를 읽으며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아를 찾아가는 그 고단하고 치열한 삶, 그것은 우리가 그녀의 삶 속에서 보다 따듯한 가슴으로 받아 안아야 할 영원의 실재가 아닌가!

그의 글을 읽다보면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자유’다. 어린 시절 자살을 시도하다가 그녀는 ‘내 안에 살아 있는 생명’, ‘생명의 의욕(意慾)’을 느끼고(150쪽), 이후에 그녀는 자신의 진실한 목적은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나 자신의 생명을 고양’시키는 일이었다고 서술한다.(221쪽)

그녀는 자신이 동정의 마음을 갖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쓴다. “나는 돈 있는 사람에게 혹사당하고, 가혹한 대우를 받고, 괴롭힘에 짓눌리며, 자유를 빼앗기고, 착취당하고, 지배받아왔다.”(304) 인간에 대한 공감을 자신의 비참한 삶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삶을 공감한다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다. 그것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을 통해 타자를 보고, 타자를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타자에 대한 공감은 다시 또 다른 이들의 삶을 공감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베르그송과 헤겔을 알게 되었다. 또 무엇보다 자신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로 슈티르너, 알티바세프, 니체를 들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실제로 그즈음 나는 그것(꼭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희망에 불탔던 나는 고학을 하여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왔다. 하지만 나는 지금 확실히 알았다. 지금 세상에서는 고학 같은 것을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될 턱이 없다는 것을. 아니 그뿐이 아니다. 소위 훌륭한 인간만큼 하찮은 것도 없다는 것을. 남들이 훌륭하다고 하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나는 남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진정한 만족과?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나는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타인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자의 장난감이었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나 자신의 일을 말이다. 그러나 그 나 자신의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알아서 그것을 실행하고 싶다.”(334-335쪽)

 

그녀는 삶의 목적이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며 타인의 노예로 살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녀는 사회주의 사상가, 혹은 아나키스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어린 시절부터 희망하고자 했던 자유의 추구를 더욱 확고하게 삶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진정한 자신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들은 아이들을 부모의 욕망을 관철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고민과 결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하고는 있는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찾고 희망하고 실천하고 있는 그러한 인간을 그녀는 추구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러한 삶의 추구는 타자에 의한 욕망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살면서 마치 그 욕망이 자신의 욕망이듯이 간주하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타인의 노예가 아닌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것, 그것은 더 많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처럼 자문한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녀는 이 물음에 자신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금 다음과 같이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혹은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이러한 물음의 중요성은 나의 행동 당신들의 행동과 말이 타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은 관계성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상호영향을 강하게 미치고 있는 존재이다. 이것을 가슴 깊게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과 타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데 모든 힘을 쏟으며 살아갔던 후미코의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자문해야 한다. 정말로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