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꼬의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철학자의 서재]
푸꼬의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철학자의 서재]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철학자의서재]가 “이시대와 철학”에서 새롭게 연재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성(sex)에 관한한 의학(생물학)적으로 지식이 지배하고 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을지라도 성관심(sexualit?, 애정관심)은 지식과 권력에 연관 속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포함된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애정관심은 남녀만의 것도 아니고, 한 생명체와 다른 생명체(나나니 벌과 난초, 도착자들) 사람과 사물 사이에도 있다. 푸꼬의 철학적 여정을 보면 애정관심의 문제거리는 지식과 권력과는 다른 차원임을 알 수 있다. 왜 성관심은 지식과 권력이 아닐까하는 문제거리를 나는 막대자석에 비유한다. 근세철학이 맘과 몸,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두 시계처럼 서로 다르지만 같이 갈 수 있는 것으로, 학문적 표현으로 평행론이라거나 번역가능성이거나 한쪽으로 환원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또는 그보다 더 높은 하나로 치환가능한 것쯤으로 여긴다. 좌석은 남극과 북극이 둘 다 같은 힘(역량)을 표현하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연관을 맺는다. 두 방식은 방향만이 반대일까? 간단히 막대자석을 반으로 잘라보라, 그러면 두 개의 성(sex)처럼 따로 남성과 여성처럼 남극과 북극이 따라 현존할까? 잘라진 반토막은 또 다시 두 개의 극을 갖는다. 하나의 관심을 잘라낸다고 다른 하나로서만 존속할 것이라고 사유될 수 없고, 상대적인 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생성한다. 다른 표현으로 기의(한 극)가 활동하는 순간, 기표(다른 극)는 만들어진다, 즉 생성한다. 부정성을 거쳐서 지양이라기보다 부정성도 실재성이며 단지 배제된 관심으로 무시되었을 뿐이며, 이는 여성, 소수자, 이석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에 평행도 번역도 환원도 아닌 방식으로 생성한다는 가정은 인간의 사유를 모독하는 것일까?
우리가 푸꼬에게 다시 물어볼 수 없지만, 그의 학문적 여정을 다시 보면 심각한 고민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들뢰즈을 빌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로서는 지식의 고고학을 탐구 해 나가면서 보니, 지식이 권력의 행사와 같은 보조를 맞추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푸꼬는 과거를 탐색하는 고문헌학자에서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지도제작자를 이행하였는데, 당시의 주변 학자들이 그에게서 ‘신의 죽음’보다 더한 ‘주체의 상실’을 보았다고 할 때, 푸꼬는 자신의 의도와 관계 없이, 왜 다른 사람들이 주체의 부재로 읽었을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권력의 행사에서 피권력자(배제자)는 주체가 아니게 되고, 지식이 개별자의 것이 아니면 인간조차도 배제자(소외자)가 된다. 은연중에 지식의 총체로서 상층이라는 기표를 인정하게 되면, 당연히 거기에 대응하는 기표로서 개인 또는 인민은 기표의 권능을 지닐 것이라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대응도 평행도 아니고, 그의 비판자들 말대로 개인은 피지배자로 놓이게 되어 아니러니에 빠진다.
푸꼬는 지식과 권력처럼 성관심에서도 같은 관계가 성립하는지에 대해 그의 3부작의 첫 작품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La volont? de savoir, 1976)>에서 고민하면서 시작한다. 억압 기제로서 권력을 성관심에 관한한 그 작동(기술방식)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연히 지배 기술(techn?)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여긴 것에서 문제거리를 보았다. 그런데 성에 관해서만은 그 억압이 구체적으로 실행된 것은 과거 서양에서는 고백문화가 전부가 아닌가 한다. 성관심은, 성을 다루듯 기계적 장치로만으로도, 생물학적으로 둘 사이의 상대적 연관을 맺는 매체로서도, 그리고 정치적 쟁점으로서 규제와 규율의 강화에서도 인구조절의 정책에서도 설명될 수 없는 다른 것이 있다. 역사의 구체적 고문헌을 파고 들어가 보면 통제와 규율보다 더 많은 성관심을, 권력의 그물에 잡히지 않은 더 많은 애정관심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한다. 애정 관심은 자기의 목표 추구처럼 일정한 완성에 이르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확장의 추구, 즉 회오리 같은 추구로서 자기완성의 길로 가는 과정이라는 소크라테스적 욕망과 더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푸꼬는 첫 권을 쓰고서(1976년) 그 자신이 6가지 주제를 다룰 것이라고 예고했다. 1. 앎의 의지 2. 살과 신체, 3. 어린이들의 십자군, 4. 여성, 어머니, 히스테리, 5. 도착자들, 6. 인구와 종족 이다. 이러한 방향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고, 긴 시간(8년)을 고민하여 두 권(제2권과 제3권, 1984년 그가 죽기 직전에)을 내면서 스스로 방향을 수정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지식의 진보라는 방향, 권력의 표출이라는 방향과 달리 셋째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즉 “자기와 관계가 어떤 형태와 양태들을 취하는 지”를 탐구하는 “주체”의 문제로 전환이다. 들뢰즈가 푸꼬를 존경하여 쓴 <푸꼬(1986)>의 제2부 ?위상학?에서 “다르게 사유하기”라는 용어를 부각시켰듯이, 푸꼬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에, 어떻게 그리고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를 알려고 하는 것”(제2권 번23쪽)에서 주체의 진솔한 위상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았다. 우리가 보기에는 애정관심에서는 ‘다르게 생각하는’ 번역가능하지 않는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푸꼬는 이 상대를 제3권에서 ?자신과 타인?이라는 소제목에서 타인들의 범주들로 다룬다. 우리는 그의 저술의 순서에 따라서 타인과 관계 이전에 제2권에서 자기의 설정을 먼저 다룬 이유를 짐작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지식은 바깥의 대상이다. 인간이라는 상대도 바깥으로 두었을 때 지식을 통한 지식에 의한 지배는 가능하다. 우리는 이런 철학을 주지주의철학이라 부른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에 대한 지배 또는 배려에서도 대상으로 위상을 설정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다이몬,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에서 기억, 베르그송의 지속은 같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인격에 관한한 대상화(기표)이전에 자기 현존(인격성, 기의)이 먼저이고, 게다가 이 현존을 타자처럼 대상화로 다루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묻기를 하다 보니 아이러니로, 다른 사람은 고민을 하다고 오류가 있더라고 믿자 하며 넘어가고, 또 한 사람은 운동하고 있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기나긴)? 과정 전체를 “하나”로 위상을 정하자고 한다. 이 하나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으며, 하나가 자기 삶의 선택을 다른 하나(분신, 아바타, 기표)로 표출한다. 이런 생각은 주지주의에 대립되는 본성주의(le Naturalisme, 자연주의)라 하자. 푸꼬는 우선 그러한 방식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볼 것이고, 자기 위상의 설정으로 주체화의 양식의 길 즉 자기완성의 길에 주목하였다. 그다음으로 다루어야 할 것으로 크리스트교 안에서 자기완성의 길일진 데 애석하게도 다음 차례로 남겨 놓고 죽었다.
자기완성을 애정관심에서 보면 네 가지 개념을 다룰 수 있다고 한다. “우선 아프로디지아, 쾌락의 개념. 그것을 통해 우리는 성적 행동에서 무엇이 ‘윤리적 실체’로 인식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다음으로 크레시스, ‘활용’의 개념. 이 개념을 통해 우리는 쾌락의 실천이 도덕적 가치를 부여 받기 위해 따라야 했던 복종의 유형을 파악할 수 있다. 엔크라테이아, ‘제어’의 개념. 이 개념은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세우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져야만 하는 태도를 정의해준다. 마지막으로 소프로쉬네, ’절제’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수행 중에 있는 도덕적 주체를 특징짓는 것이다.”(2권 51쪽) 여기서 성관심의 쾌락, 극기, 절제에 관한한 조화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고대 철학의 주제인 듯하지만, 제2권의 주제인 “쾌락의 활용”에는 다른 의미가 들어있다. “때에 맺게”(카이로이스) 이용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얼핏 때에 어긋나게 라는 니체의 ‘반시대’를 떠올일 수 있다. 반시대도 부정성이 아니라 실재성이므로,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은 48%의 부정성이, 51.6%만큼이나 시대의 적절함이며 때에 맞음이기도 하다. 여기서 언급은 카이로이스가 자기 배려에 중요한 계기이다.
그는 고문헌학자답게 성관심과 자기 배려를 다룰 세 가지 기술(techn? 조절 방식)을 다룬다. 스스로를 자신의 육체에 대한 적절한 결합과 배려의 기술로서 양생술, 자기 관리를 잘하는 것만큼이나 가축과 노예처럼 여성에 대해서도 통제와 지배의 기술로서 가정관리술, 대리자로서 자유로운 활동을 예비하는 소년을 스스로 지혜를 갖추어가는 기술과 훈련으로서 연애술, 세 부분을 학문적으로 다룬다. 이런 내용을 검토하고 나서, 주체의 진정한 활동은 사랑행위로부터 사랑의 본질로, 명예의 문제로부터 진리의 사랑으로 가듯이, 타인과 관계에서도 불균형으로부터 일치로 나간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자유인들이 중요시한 연애술 중에서 소년애도 덕목의 발현으로부터 지혜로 이행을 여러모로 검토한다. 그 성관심에는 즐거움을 활용하고 그것에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는 자기 극복의 노력이 필요하며 또한 그 훈련이 중요하다. 소년은 장차 자유시민이 되기 부족하여 종속되거나 넘쳐서 독재적이 되어서 안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언제나 절제(소프로쉬네) 또는 조화(아르모니아)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성관심의 문제가 플라톤의 소클라테스의 연애술(사랑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은 것으로, 사랑의 권장은 문제에 답을 찾는 것이라기보다 문제거리의 꺼풀을 벗기는 과정이다. 욕망의 실현은 자기의 꺼풀을 벗는 것으로 자기에 대한 자기 스스로를 파악하는 것이다. 답을 모른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찾아가는 소크라테스의 여정일이지 모른다.
“자기 속에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의 방식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서처럼 지속하는 기억의 총체가 무매개적으로 실재함을 다루는 것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처럼 꿈을 분석하여 무의식을 실재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도 또 다른 한 방식일 것이다. 현상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긍정성으로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부정성의 실재성으로 전환. 푸꼬는 이 여정을 고대의 아르테미도로스의 <꿈 해몽>을 통해 방법을 들여다본다. 꿈은 질서를 주체에 맞는 상태로 표현하기보다, 어쩌면 떠돌이 거지(부족한 자)의 일시적 표현같이 우의적이고 신탁적인 경우가 더 많다 점이다. 푸꼬는 이 책을 빗대어, 꿈의 해석이 윤리적 형식을 갖추게하는 측면이 있다기보다, 고대 꿈의 해석을 통해 성관심을 인식하고 평가하는 방식을 본다. 그 속에는 애정 관심들이 지속성을 지니고 상관성을 정리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관심”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보기에, 어둠에 있는 아페이론이 자기 생성으로서 시뮬라크르로 등장하는 실재성이 “자기 관심”이 아닐까? 우리가 보기에 푸꼬에서 애정관심에 관한 자기 설정, 자기의 역할과 훈련, 그리고 자기극복 등을 제2권에 다루었던 것도, 자기에 대한 관심 즉 “자기 배려”(제3권의 제목이다)때문일 것이다.
푸꼬의 관점을 맘과 몸 연관에서 보면, 몸은 외적 표현(표시, 시뮬라크르)이라면, 맘은 내면의 본성(자연)으로서, 자연 속에서 자기 배려라는 ‘달리 사유’는 푸꼬를 깊이로(심층으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보기에, 그 내면의 본성이 물질적(유물론)이고 자연적(자연주의)이며, 이것의 외화된 표현(껍질)이 물체로서 형식(형상론)이며 표상적(주지주의)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유물론과 형상론은 전도된 것으로 나타난다. 소위 말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관심은 ‘자기에 대한 관심’은 개인 하나에 대해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연관있는 모든 것에 대한 전념을 말하는 것으로, 사유(맘)와 실천(몸)은 분리되지 않은 밀접한 관계로서 다룬다. 이 주제들 잘 들여다보면, 사실은 소크라테스의 욕망의 탐구와 사회적 실천의 양면성(이원성이 아닌 이중성)을 함께 하는 바로 자기의 배려이다. 즉 소크라테스의 앎과 함(지행합일)을 구체적 실천의 지표로 삼은 것은 스토아학파일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오이케이오시스(O?k?iosis ο?κε?ωσι?, 헌신)는 살아있는 존재가 자기에 속하는 것. 즉 자기 존재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소개된 번역어는 헌신이지만, 푸꼬의 번역의 “자기 배려”가 더 적당할 것 같고 나아가 “자기 치유”도 같은 의미이다. 소크라테스가 당대에 지식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 배운 것도 자기의 배려이며, 그들을 찾아가서 논쟁 끝에 피상적 지식을 넘어서 지정한 지식(총체적 배려, 인민들 삶의 절제, 도시 전체의 정의 등)에 추구는 ‘자기 치유’의 방식이다. 성관심도 개별적으로 답을 얻듯이 쾌락을 얻는 것도 아니고, 타인과 논쟁에서 이기듯이 성적관계도 이기는 것도 아니고, 수사학이나 논변술로서 자기 자랑과 허풍이 아니라 자기 극복이자 지식 추구이듯이, 성관심도 얻거나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훈련으로 자신의 극복에 있으며, 도시와 개인의 조화로운 절제 이듯이 성관심은 상대의 자유와 완성하려는 인격의 배려에 있다. 이 점에서 푸꼬는 고대의 소년애에 대해 잘 다루고 있다. 여성과 노예는 가정관리의 대상이니 제외하고, 자유 시민으로 자라 도시를 담당할 소년에게는 자신처럼 소년(타인)을 배려하여, 그도 자기의 인격완성의 노력과 지혜를 소년(타인)에게 전하는 사랑과 배려가 필요하다. 즉 소년애의 사랑은 타인의 자유와 지혜 추구의 길이 된다. 푸꼬는 제3권을 쓰고 다음 4권에서 크리스트교 사랑을 쓴다고 했지만, 여기서 어느 정도 만족했으리라. 즉 주체의 탐구는 주체의 자기 배려, 자기 훈련과 자기 극복, 그리고 회오리처럼 점점 커져가는 방식으로 자기 탐구의 확장은 성관심의 문제거리들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지식과 지혜들의 추구욕망과도 같은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푸꼬는 “주체”를 다루면서, 은연중에, 진솔한 지식의 탐구로서 “철학”을 밝히게 되었다. 주체의 주체화 과정이 “철학”이며 욕망의 추구이며 애정관심을 포함한 진정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누구나를 배려하는 “자유”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푸꼬는 역사적 고문헌을 통해 새로운 지도그리기가 이쯤에서 자유를 향한 주체의 위상을 그려 놓지 않았을까?
띠리(Bruno Thiry)는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에서 “윤리적 요청에 따라서 그 자체로 ‘사유 속에서 자기의 훈련’을 만족 시키며, 한 사상가는 자기가 [현재] 있는 것과 다른 것이 되면서도 자기에 충실하게 남는다. [자아의 이중화 현상을 이어가는] 푸꼬는 이런 것을 그의 고유한 이름으로, 철학, 이라 부른다.”고 평했다. 나로서는, 맘과 몸의 이중화의 부조화를 끊임없이 조화롭게 만들기(생성)하는 노력과 훈련 그리고 배려가 삶이며, 그 표면의 시뮬라크르 등장이 ‘철학’이라 본다. 푸꼬는 말년에 인격의 이중화 작업을 깨닫고서 철학의 진정한 아이러니를, 소크라테스처럼, 맛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