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철학자의 서재]

<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철학자의 서재]

박지용(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예수님, 석가님, 공자님, 그리고 소크라테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철학자들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철학자들의 목록을 작성한다면 단연 1순위 후보에 오를 인물은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생존 당시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플라톤의 저작에서 주요 논객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연역 삼단논법에서도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남아 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철학자 하면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하면 철학자를 연상한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대변하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

 

(프리드리히 로렌츠 지음, 박철규 옮김, 도원미디어 펴냄). ⓒ도원미디어

<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프리드리히 로렌츠 지음, 박철규 옮김, 도원미디어 펴냄). ⓒ도원미디어

?그런데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그 이름에 걸맞게 그토록 빛나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테면 플라톤 하면 이데아, 헤겔 하면 변증법, 마르크스 하면 역사유물론, 칸트 하면 비판철학, 대강 이런 굵직굵직한 주제어들이 철학자들의 이름과 결부되어 왜 그 철학자가 유명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빛나는 이름과 함께 알려진 것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과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언 정도다. 이 두 가지 명언도 소크라테스 본인이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는 의혹이 있다. 우선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남겨진 낙서(?)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을 통해서 확인된 바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니 그리 큰 반론의 여지는 없다. 설령 소크라테스가 그 말을 했다 치더라도 그 말의 유래는 소크라테스가 아닌 것이다.

 

또 혹자들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도 정확하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데, 그 의혹의 대강은 이렇다. 시민들로 하여금 무조건적인 준법정신을 강제하려는 의도를 가진 이데올로그들이 소크라테스의 명성을 빌려 시민들의 비판정신과 저항적 실천을 약화시키고 독재자의 논리를 강화시킬 목적으로 그 말을 날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한 구실로 삼은 모종의 정치세력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명성은 소크라테스가 주장했다고 알려진 명제들과의 관계에서 보자면 허구에 기초한 것이 되어버린다. 쉽게 말하자면, ‘어?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 안 했대?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가 유명한 거지?’라는 황당한 상황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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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크라테스에게 남는 건 무엇인가? 예수와 석가는 인류 구원이라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맡으셨고, 공자도 유교라는 유사종교의 신격화된 숭배 대상인 점을 감안해 볼 때, 소크라테스가 성인의 반열에 속하기에는 뭔가 임팩트가 떨어져 보인다. 인류 전체를 통틀어 네 명의 성인을 선발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소크라테스에 대한 평가는 과장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불거질 수 있다. 예수의 위대함을 부정할 경우에는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겠지만, 소크라테스를 4대 성인의 반열에서 격하시키자는 목소리는 그리 충격적인 문제제기는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둘러싼 두 가지 상반된 시선

 

역사적인 실존 인물인 소크라테스를 조망하기 위한 기본 자료는 재판에 대한 기록이다. 그 기록은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배심원들의 법적인 판결을 통해 사형을 받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각각 그 기록을 남겼고 이 기록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인물로 승화되게 된다. 이 재판과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형 선고는 이후 역사적인 사건으로 비화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었다. 즉 무지한 대중이 죄 없는 뛰어난 현자 소크라테스를 죽게 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사건을 기화로 민주주의의 적대자가 되고 이상국가론, 철인정치를 펼치게 된다.

또 하나의 관점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법적 심판을 플라톤의 기록에만 의존하지 않고 당시 역사적인 배경, 정황, 사건들을 통해서 민주주의자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방식이며, 소크라테스가 일방적으로 희생당한 것은 아니라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당대의 정치적인 역관계 속에서 소크라테스를 조망하는 것이므로 다양한 맥락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충분한 혐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법적 판결에 있어서도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 후자의 관점들은 주로 현대에 들어서 제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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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 중 어느 관점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양자택일적으로 대립된 관점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전자의 관점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민주정치의 오류가 지적되고, 또 후자의 관점에서는 피할 수 있었던 사형을 의도적으로 피하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잘못이 지적된다. 여기서 드러나는 대립적 관점은 ‘역사적인 실존 인물 소크라테스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한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문제시될 수 있는 철학적인 현실비판의 의미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의 법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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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생각해보기만 해도, 그 자체로는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는 현실적인 논리들이 있다. 유대인을 학살할 때 사람들은 그 현실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분단 이후 반공 집회에 동원되는 사람들도 그것을 당연하다고 믿었다. 이처럼 현실에서 나타나는 인간과 사회의 야만성을 당연한 현실로 인정할 것을 강요하고, 또 철학과 철학자로 하여금 하나의 당파를 강요하는 논리는 언제나 현실 논리에 기초해서 작용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철학의 보편성은 민주정치냐 과두정치냐의 양자택일적 상황 자체를 거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은 잘못된 현실 자체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법정은 철학적인 사유의 합법적인 권리 주장의 법정으로 볼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에 칸트는 ‘이성의 법정’에서 인간의 이성은 여러 현실적인 사안들을 검토하여 현실에 대해 어떤 주장을 펼칠 수 있고, 그러한 권리는 당연히 현실적으로도 보장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칸트는 당시 금기시되었던 종교적인 주제마저도 철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이성의 공적 사용 권리를 과감하게 주장하였지만, 너그러운 계몽군주마저도 그러한 주장은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고 금지시켰다. 철학은 권력의 검열 앞에서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철학적인 사유에서는 금기와 경계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철학이 짊어진 사회적인 역할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문제에 대해 계속 문제제기하고 공개적으로 간섭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자신을 일컬어 쇠파리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무뎌진 의식을 일깨우는 존재라는 뜻이다.?

잘못된 대립구도에서 강요된 선택의 문제를 지적하려면 그 대립구도 자체가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아도르노가 ‘잘못된 사회에서 올바른 삶이란 없다’고 지적한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철학은 잘못된 선택을 강요받는 삶을 조장하는 사회를 비판해야 한다. 민주냐 독재냐의 양자택일적 상황이 갖는 위험성을 잘 알고 있던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삶의 방식은 철학적인 물음을 끝없이 던지는 것이었다. 당시 아테네가 좀 더 여유로운 상황이었더라면 소크라테스를 애써 법정에 내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며, 소크라테스를 희생시켜 아테네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물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비판의식이 마비된 극단화된 사회에서 철학적인 물음 제기는 위험한 행위로 오인될 수 있다는 내적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생각함에 있어서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의 잘못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음흉한 의도를 경계해야 함과 동시에,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철학적인 문제로 다룰 경우에는, 그러한 잘못이 인간적인 삶의 가치와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소로서 여전히 잔존해 있다는 현실 비판이 결부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사생활 속으로, 악처 크산티페

 

대학 시절 나는 학과에서 새로운 소크라테스 해석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것은 작고하신 권창은 교수의 강의였다. 그분은 소크라테스의 논쟁자들이었던 소피스트들의 민주주의적 가치에 주목하셨고, 소크라테스-플라톤 연계로 이어지는 보편실재론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피력하셨다. 당대의 정치적인 권력관계 속에서 민주정치와 철학의 현실적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가 왜 죽었어야만 했는가라는 의문은 내 생각 속에서 말끔하게 정리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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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은 그의 철학적인 기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소크라테스의 기행은 그 개인의 기행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학문의 고유한 것이고 본래적인 기행이었다. 그가 보인 기이한 행동의 목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자기 일이 아님에도 시시콜콜 참견을 하고, 대화 상대자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기분을 상하게 하고, 홀로 생각할 때는 너무 골똘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정신이 나간 것으로 알고,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데몬이라는 분열된 자아와 대화를 나누는 그런 행동 방식이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기 내면에서 명령하는 데몬이 법정에서 단호히 나서라고 말했다고 변론인들에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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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전날 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삶과 죽음을 결정지을 법정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를 골똘히 생각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영혼(데몬)은 소크라테스에게 죽으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 상황은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할 수 있으면, 잔을 물러달라’고 호소했다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하고 자신에게 부과된 운명적인 짐을 진 예수의 고뇌와도 비견된다. 이 비교 자체는 매우 위험한 것인데, 인간 소크라테스를 성자 예수와 동급에서 비교하는 데에서가 아니라 유다와 바리새인들의 역할이 아니토스와 민주주의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자기 자신과의 대화 행위이다. 그것도 대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죽음 일반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적인 죽음, 죽은 자신과 나눈 대화의 경지는 그야말로 철학적이다. 그 철학적인 깊이는 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자기사유의 정점이 아니겠는가. 사유는 일종의 자기분열 행위이며, 이 분열은 때에 따라서 다중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철학자들은 분열증이라는 직업병을 겪지 않는데, 대화하는 의식이 집에서 나갔다가 항상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영혼인 데몬과의 대화에서 죽은 소크라테스에서 삶을 얻게 된 것이다. 육체적인 삶을 이끄는 소크라테스의 영혼은 이제 그 삶을 버리고 영혼 속에서 안주하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삶이자 철학적인 죽음의 아이콘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자신의 영혼에 대한 철학적인 자기 구제인 것이다.

socrates지금까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을 평가함에 있어서 조명되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인물이 그의 아내 크산티페가 아닐까 한다. 철학자는 저작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선대 철학자들도 저작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구전된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낮 시간 아고라에서 나눈 수많은 대화들로 전승된다. 하루 종일 철학 토론을 한 소크라테스의 삶의 방식이 철학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면 그의 아내 크산티페도 소크라테스 철학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 모두가 떠나 캄캄해진 아고라의 밤, 소크라테스는 유일한 대화 상대자 크산티페가 있는 집으로 가야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크산티페가 묘사된 유일한 곳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날을 서술한 <파이돈>이다. 독배를 마셔야 할 시간이 되어 소크라테스가 크산티페와 소크라테스의 어린 아들을 집으로 먼저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따름이다.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라는 무능하고 비현실적인 철학자와 어떻게 평생을 살 수 있었을까?

법정에서도 밝혀졌듯이, 소크라테스의 철학 토론 수업은 전체 무료강좌였다. 당시 소크라테스가 누렸을 유명세를 생각한다면 요즘 대치동 스타강사 정도는 되었을 수도 있었는데, 유독 소크라테스는 무료강좌 원칙을 정했다. 다른 소피스트들은 소규모 사설학당을 차려 많은 수업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라는 저작에서는 재산가 크리티아스가 자기 자식들을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프로타고라스를 가정교사로 초빙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경제적인 위기 상태였지만, 소크라테스는 돈벌이를 하지 않아 크산티페가 겪었을 생활고는 불을 보듯 뻔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남루한 옷을 입고 심지어 신발도 없이 맨발로 다녔다고 한다. 일생 연봉 무일푼인 그가 그래도 70세까지도 짱짱한 건강을 유지했다는 건 철학적인 사유가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것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그의 주된 사유 대상은 절제, 용기와 같은 도덕적인 덕목들이었다.

고대 아테네라고 해서 가정생활을 꾸리는 재테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크세노폰이 남긴 소크라테스의 대화록 <경영론>에서 소크라테스는 구체적이고 상세할 뿐만 아니라 최선의 재산축적 방법을 가르친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집안 살림에는 나 몰라라 했으니 크산티페는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러니 크산티페를 대놓고 악처라고 폄하하는 것은 공정치 못한 처사인 것이다.

소설 <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는 역사적인 배경 묘사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 사상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다소 빈약한 감이 들게 하지만 아내 크산티페의 관점에서 비친 소크라테스를 조망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보인다. 소설이므로 저자는 상당 부분 문학적인 상상력으로 묘사하고 있음에도, 현실감 있는 언어로 소크라테스의 부부관계를 잘 전달하고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크산티페의 최초의 구타를 소크라테스가 도덕적인 덕목으로 이겨냈다는 점이다. 경제적인 능력과 활동을 희생한 대가로 소크라테스는 상습적인 구타를 얻게 되어 고통을 즐기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크산티페는 평생을 불평하고 소크라테스를 개조시키려 노력했지만, 결국 그의 철학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용서하게 된다. 철학의 지속을 위해서는 아내의 용서를 구해야 하고 때때로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

 

 

 

 

도시의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2

도시의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한편으로는 시간 축을 따라서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 지혜의 함수인 사회가 있고,?공간 축을 따라서 경험을 확장하는 것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서로 다른 원초적인 사회를 살펴보았습니다.?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라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원형 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 일은 없는데요.?어쨌든 주어진 시간과 공간,?삶의 형태가 다름에 따라서 사람들의 의식이 어떻게 바뀌게 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고요.?이 두 공동체에서는 한 개인이 무엇을 할까,?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농경공동체에서는 마을 어르신들이,?유목공동체에서는 그 마을을 이끄는 수장들이 고민하고 결정을 내립니다.?그런데 도시사회에서는 지혜의 함수가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도 아니고,?시간적인 경험의 축적도 아닙니다.?개개인이 얼마나 똑똑하고 셈이 빠른지가 지혜의 함수가 되는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나는데,?그것이 바로 도시사회입니다.?전제행정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잠깐 빼고,?해안도시사회부터 이야기하지요.?원초적인 도시사회는 이오니아 식민지였던 지중해 연안의 바닷가에 여기저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지중해를 중심으로 배를 띄워서 무역을 하고,?사막으로 낙타를 타고 중국까지 장삿길을 연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오니아 식민지 가운데서도 서양철학이 가장 먼저 발생했다는 밀레토스라는 도시사회를 잠깐 머릿속에서 그려 봅시다.?이 도시사회는 이미 몇 천 년 전에 사라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정보나 유물,?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오로지 우리 상상력을 통해서 이 도시사회를 재구성해야 합니다.?그러니까 거짓말일 수 있다는 거 아시겠죠??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시는 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한 개인이 유목사회나 농경사회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특히 농경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큰 범죄를 저질러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거나 먹고 살길이 없어서 뿔뿔이 흩어지거나 마을 공동체가 규범으로 강제하는 관습을 지키지 않아 그 사회에서 추방되거나,?삶에 큰 변화가 생겨 집단으로 떠도는 그런 경우가 아니면 벗어나기 힘들지요.?대대로 뿌리내린 공동체에서 뿌리 뽑힌다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농사짓던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면 무엇을 해서 먹고 삽니까??이웃마을로 자리를 옮길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습니다.?왜 살던 마을에서 벗어났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거든요.?그러니까 마을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사형신고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유목사회도 마찬가지로 함부로 떠날 수가 없습니다.?수장을 따라 목초지에서 목초지로 옮겨 다니던 사람들이 거기를 떠나서 독립적인 삶을 개척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두 가지 경우죠,?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범죄 행위를 저질러서 야반도주를 하거나,?아니면 주민 전체가 뿔뿔이 흩어져서 여기저기 흘러 다닌다거나.?쫓겨나거나 굶주려서 거렁뱅이 노릇을 하지 않으면 남의 것을 훔칠 수밖에 없지요.?개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이 뜨내기들에 대한 대비책이 아니었을까요?

야밤을 틈타서 누군가가 와서 물건을 훔쳐가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칼 들고 와서 강도짓을 하고,?저항하면 죽이고 그럴까봐 인기척이 들리면 멍멍거리라고 개를 키우는 거거든요.?농경민들이 개를 기르는 것은 유목민들이 양 떼를 모는 데 쓰려고 개를 기르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경우죠.?다른 가축들에 견주어 개를 기르는 것은 식용으로는 대단히 비효율적입니다.?개는 엄청나게 식량을 축내는 짐승이거든요.?어쨌든 불량배가 되서 떠돌다가 강도나 절도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해코지하거나 먹이를 훔쳐가는 사람이 생겨나면서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사람보다 밥을 더 많이 먹는 개를 길러야 하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해안도시에 몰려든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굶주려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흘러든 사람들이거나 대체로 농경공동체나 유목공동체에서 미움받던 삐딱한 사람들입니다.?삐딱한 사람들이 누구냐면 어른 말 안 듣고 지도자 말 안 듣는 사람들이거든요.?대부분의 삐딱이들을 보면 머리가 잘 돌아갑니다.?우직한 사람은 삐딱이가 안 됩니다.?이 삐딱이들이 해안 도시사회에서 장사로 먹고 삽니다.?이 사람들은 살판났지요.?바보 같은 어른도 어른이라고 꾸벅꾸벅 죽어지내야 하는 일도 없고,?너 씩씩하고 용감하게 죽어!?하고 어거지로 전쟁터에 앞장세우는 사람도 없고.?대체로 머리 좋은 사람들 중에는 몸 쓰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없습니다.?몸 놀려서 살 수가 없으니까 머리를 굴려서 사는 겁니다.

여기에서 일어난 사회 변화가 얼마나 급격했으리란 건 상상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이집트에서 온 사람이 태양신을 상징하는 새를 믿는데,?그 새는 나에게 일주일에 두 번 쉬지 않으면 죄라 하고,?그래서 상점 문을 닫고 있는데,그날 문을 닫으면?‘너하고는 다시 거래를 안 해.’?하고 중요한 거래처에서 을러대면 어떻게 해야겠어요??또는?‘나는 아침시간엔 조용히 명상에 잠겨야 하는 종교적인 전통에서 자라왔는데,?니가 아침부터 찾아와서 거래를 하자고 하다니.?말이 돼??어림없는 수작이지.’?이렇게 저마다 자신이 태어난 문화적,?사회적,?종교적인 배경을 들이대면서 서로 가게 문을 닫거나 상거래에 지장을 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살길이 없죠??그래서 시골에서 땅을 파다가 왔든,?풀밭에서 짐승을 몰고 다니다 왔든,?인도에서 왔든,?이집트에서 왔든,?자기가 살았던 지역의 모든 관습과 전통을 버려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익힌 제 고장 말을 고집해서도 안 됩니다.?그리스 사람들이 야만인을 가리킬 때 바르바로이(barbaroi)라고 하였는데,?그것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그러니까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을 하고,?공동체를 이뤄 살고,?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지키려고 드는 사람은 죄다 이상한 사람들이고,?야만인이라 여기고 깔보게 되죠.?그런데 도시 공동체에서 인도 말을 하면 야만인이다,?혹은 페니키아 말을 하는 사람은 야만인이다 하면서 서로 상대를 하지 않으면,?좁은 지역에 모여살고 거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발붙일 곳이 없어집니다.(설상가상으로 해안 도시사회는 내부에 생산지가 없습니다.)

어쨌든 외부에서 먹고 살 것을 끌어들여야 살아갈 수 있는데,?이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지 않으면 주변의 유목공동체나 농경공동체에 가서 돈 될 만한 상품을 끌어올 수가 없습니다.?이런저런 이유로 해안 도시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주 삶의 형태가 다양하고 자기 정체성을 상황에 맞추어 그때그때 잘 바꾸어냈습니다.?그러니까 바다에서 장사를 하다가 갑자기 해적으로 바뀐다든지,?낙타를 타고 먼 길을 오가면서 정직한 장사꾼 흉내를 내다가 어느 순간에 도둑 떼로 돌변해서 마을을 습격해 물건을 약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이 사람들은 먼 길을 다니면서 중국에서 대진국인 로마까지 가기도 하고 또 거꾸로 지중해에서 비단길을 따라 중국까지 가서 중국에서 비단 같은 것을 수입해서 몸에 걸치고 살 수 있었습니다.?싣고 다니는 것 가운데 의식주에 필요한 유기물들,?밥이나 반찬을 해 먹을 수 있는 것은 도시 근처에 있는 농경공동체나 유목공동체에서 가지고 와야 합니다.?먼 길에서 가지고 오게 되면,?비를 맞아서 썩어 버리거나,?채소는 비를 맞지 않아도 하루 이틀 지나면 다 썩어 버리기 때문에 주변에 생산 공동체들이 널려 있어야 합니다.?다시 말해서 주변 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를 식민화해서 안정적인 식량 공급처로 만들어야 합니다.?먹고 사는 문제는 이렇게 해결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예를 들어 도시사회인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벼농사 짓는 곳이 어디입니까??김포평야,?여주 이천이죠.?김포평야에서 서울시민이 쌀을 가져다 먹는데 어느 해에 흉년이 들어 식량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고스란히 그곳에만 기대고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되죠.?그러니까 여주 이천에도 빨대를 대고 더 멀리는 호남평야까지도 빨대를 대야겠죠.?그래서 이곳에서 생산 교란이 일어나면 저쪽에서 끌어오고 저쪽에서 일어나면 이쪽에서 끌어와야겠죠??그러니까 도시는 자기 내부에 생산지를 갖추고 있지 못해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제국주의적인 확장정책을 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제국주의적인 확장정책을 펴는 데 필요한 일차적인 것은 무엇입니까??조직이죠.?그리고 잘 조직된 약탈자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창과 칼 같은 무기죠??무기 생산은 도시인들에게 목숨이 걸린 일이 됩니다.농사꾼은 낫과 호미,?괭이 같은 농사 도구가 필요해서 대장간을 찾아갑니다.?그러나 도시사람들이 대장간을 찾아가는 목적은 창과 활,?칼,?이런 것을 벼리기 위해서입니다.?농경민이나 유목민의 경우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잘 조절하면 살길이 열립니다.?이 사람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나 연장으로서 낫이나 칼,?이런 것을 벼리는 겁니다.

그런데 도시인의 경우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뒷전입니다.?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도시인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느냐 못하느냐의 관건이 됩니다.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각축하고 때로는 서로 맞서야 하는데,?칼과 창이라는 것이 뭡니까??인간 문제를 가장 빨리 해결하는 도구 가운데 하나입니다.설득을 해서 안 되고,?세뇌를 해서 안 되면 죽여야죠.?전쟁의 기원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닙니다.?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길,?그것이 전쟁입니다.

그런데 해안 도시사회 내부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습니까??공멸이죠.그리고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해도 엄청나게 큰 장애가 생기게 됩니다.어느 날 종교적인 천재가 나타나서 우리 이런 종교를 만들자 하더라도 모두가 약삭빠른 삐딱이들인데 누가 그걸 받아들이겠습니까??안 된단 말이죠.이 사람들을 묶을 길이 없어요. ‘사는 게 먼저고 철학하는 게 그 다음이다.’(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 ‘우선 살고 볼 일이다.’?모두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그러니까 도시민들은,?특히 장사꾼들이 모여 사는 해안도시 사람들은 이해관계로 뭉치는 수밖에 없다는 거죠.?이해관계를 따지다 보면 머리가 비상해져야 하고 계약을 어기면 안 되니까 규칙들이 생겨나야 하죠.?거기에서 자기 나름대로 인위적인 규범들과 약속들이 생겨나고,?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서 일치하는 점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제부터 말과 글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죠.?말이라는 게 어떻죠?우리 기억에도 한계가 있고,?말로 한 약속은 다음 순간 뒤집어 버리면 그만입니다.?이집트나 중국 같은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행정 중심 도시에서 상형문자가 생겨나고 그것을 써서 이런저런 통치에 필요한 일들을 하는데,?그것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특권층의 행적을 기록하는 것들과 연관되어 상형문자가 생겼는데,?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능의 하나가 피지배자들의 감성과 의식을 획일화하는 것이었습니다.?사상과 감정,?모든 것을 획일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문자다.?그래서 이 사람들이 문자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전제군주가 만들어낸 획일화의 도구로서 부여받은 기능과는 또 다른 기능이 글에 있다는 것을 밝혀낸 사람들은 장사꾼들이었습니다.?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에서 발명된 쐐기글자를 보면 점토판에 적힌 글이라는 것이 돼지 몇 마리,?소 몇 마리,?밀 몇 자루 죄다 이런 것들 투성이입니다.?그러니까 거래하는 사람들이 서로?‘돼지 열 마리 보냈으니 곡식 열 말 가져다 다오’?이런 식으로 쐐기글자를 만들어 쓴 겁니다.?이 문자의 발생과 연관해서 보면 재미있는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시골 장터에서 술집을 연 할머니가 막걸리를 외상으로 먹은 사람들을 벽에 적어놓는데,?박 서방을 나타내는 브이(V)?자를 그어 놓고 한 잔 외상으로 먹었다고 일(/)자를 그어 놓고,?홍 서방을 나타내는 동그라미(ㅇ)?그려 놓고 일자(/)?그어 놓고 하다보니,?벽이 다 차게 생겨서 다섯 잔째 마실 때는?/////?이렇게 그어 놓고 하는 것들을 문자 발생의 초기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종교도 버려야 한다.?가치관도 버려야 한다,?장사하는 사람들이 버려야 할 것은 정말 많습니다.?이해관계를 서로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소통을 잘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버려야 할 것이 아주 많습니다.?불평등 거래는 장사꾼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불평등 거래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상대편이 알아차리면 어떻게 됩니까??그러면 거래가 안 되겠죠.?그러니까 상대편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 하죠??돼지 키우는 마을에 가서 싼 값으로 돼지를 사오려면 파는 사람들을 그럴 듯하게 속여야 하고 그러려면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배워야겠죠??그 사람들의 정서,?사고방식을 익혀야겠죠.그 전에 농사를 짓거나 짐승을 키우고 살 때는 제 고장 말만 알아도 살 수 있었으니까 저마다 독특한 온갖 토템과 터부를 마련하고 섬기면서 자기들만의 세계에서,?몽상과 상상력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 고유한 신화와 신앙의 체계를 만들어 그 안에 안주할 수 있었는데 이제 실증적인 조사와 탐구가 필요하게 됩니다.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그러죠??헤로도토스는 장사꾼들을 따라 여기저기 탐사 여행을 합니다.?리디아 같은 곳에 가 보니까 아이들이 공기놀이를 하고 있어요.?이 놀이를 보면서 이렇게 유추합니다. ‘아이들이 굶주림을 잊어버리려고 공기놀이를 만들어 냈다.’?그러니까 현대식으로 말하면 종족학,?각 민족의 민속이라든지 풍습 같은 여러 가지 보고 들은 것을 기록에 남기고 조사 연구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해안도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낼 필요가 생깁니다.?농경사회나 유목사회는 모든 자산이 유기물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여기서는 증서,?약속어음 같은 것들이 양 백 마리와 바뀌기도 하고,?배 한 척과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가증권 같은 것들이 자산의 중요한 목록으로 편입됩니다.

유기물과는 달리 무기물로 이루어진 자산은 썩을 염려가 없어 무한축적이 가능해지니까,?부의 거대한 축적들이 이루어지면서,?변화들이 생겨납니다.그리고 지혜의 함수는 이미 시간적인 경험의 축적이나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아닌,?얼마만큼 셈이 빠르고,?속셈이 멀쩡하냐에 따르는 계산력이 됩니다.?누가 너 속셈이 뭐냐??할 때 네가 속으로 뭘 헤아리고 있느냐를 묻는 것이죠??상대방의 속셈을 알아내고 자기의 속셈을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불평등 거래를 하는데 주무기가 되니까 머리를 써도 자꾸 그 쪽으로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거죠.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인간이 단순한 마을 공동체와 유목공동체에서 벗어나 도시에 모여 살면서,?사고방식이나 감성에 거의 혁명적인 변화가 생겨나죠.?그래서 우리의 상상력과 몽상 같은 것들이 우리를 꿈의 세계에 머물게 만드는 신화공간이 아주 엄혹한 현실공간으로 바뀌게 되면서 누구 마음도 다치지 않고 어떤 종교나 신념체계도 침해하지 않으면서 이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그 길을 찾다보니까 하늘의 신(우라노스)과 땅의 여신(가이아)이 이 세상의 만물을 끌어안던 세계 해석이‘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식으로 우주의 근원에 대한 아주 밋밋하고 메마른 새로운 해석으로 탈바꿈하는 낯선 세계관이 싹트는 겁니다.

 

손석춘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학자의 서재]

손석춘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학자의 서재]

박민철(동남보건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진보에게 묻는다. ‘그대, 지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고 3에 진입한 1997년 봄쯤이었다. 칼럼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아주 잠깐 꾼 적이 있었다. 입시 관련 책보다는 다른 책을 보고자 동네 구립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던 그때, 손에 잡아든 책이 <신문 읽기의 혁명>(손석춘 지음, 개마고원 펴냄)이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보잘것없던 내 서재에서 가장 중앙에 꽂아둔 책이었다. 하지만 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 내 삶의 전환기를 함께 했던 그 책은 수백 권의 전공 책과 원서에 밀려 책장 맨 끝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나는 그 옛날 나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주었던 저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철수와영희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철수와영희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뭐라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던 마음 속 불만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기뻤다. 제목만 보고 이 책이 나의 사소한 고민을 덜어주길 바랐다. 솔직하게 말해 <여보게, 저승 갈 때 무얼 가지고 가지?>(석용산 지음, 고려원 펴냄)식의 통속적인 수양서 내지 에세이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국 사회로의 적응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나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산이었다. <신문 읽기의 혁명>의 저자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가 신문 논설문과 칼럼으로 잔뼈가 굵은, 한국 언론 운동을 이끌어 온 ‘손석춘’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 책은 어떤 특정한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제안을 담고 있는 냉철한 논설문이다. 짧은 책이지만 여기에 담긴 질문의 무게감은 꽤나 묵직하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진보적 운동 그리고 이를 이끌고 있는 진보 세력에 대해 ‘돌직구’를 던진다.

‘국격’이 높아지고 ‘세계 7대강국’에 진입했다는 찬가가 울려 퍼지던 2012년 6월 어느 날, 달동네 월셋방에서 15만 900원의 노인 수당으로 살아왔던 노부부가 생활고로 자살했다. 노부부가 남긴 유서의 첫 문장은 ‘그동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였다. 자신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는 참으로 어려웠고 그래서 단호했다. 삶을 부정하는 후회는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할 만큼 힘이 크다. 문제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후회들이 크게 번지고 있다는, 특히 ‘진보’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젊은 날의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꾸던 진보들은 일상 속에 매몰되어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져있다. 저자는 현실에 무력감과 회의를 느끼는 진보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대, 지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16쪽)

 

진보를 후회와 패배감으로 옭아매는 몇 가지 프레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보의 스펙트럼을 규정하는 저자의 시선이다. 저자가 규정한 진보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다. ‘4월 혁명, 5월 항쟁,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8월 연세대항쟁에 몸으로 참여했거나 마음으로 지지한 모든 사람’을 진보라 정의한다. 이렇게 보면 나도 ‘진보’다. 저자의 폭넓은 규정 덕분에, 실천력이 부족했다는 과거 선배들의 비판에 조금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저자가 진보를 생각보다 광범위한 범주로 규정한 이유는 단순히 자신이 자조적으로 말하는 ‘대동단결론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진보의 ‘가치’를 폭넓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진보는, 보다 구체적으로 진보 세력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분단체제에 고통 받는 민중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유·평등·자주·평화·복지·생태·인권·소수자 권리 등 다양한 진보적 가치에 대해 공감하거나 이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한국 사회만큼 진보적 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져온 사회는 드물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진보 운동이 활발하던 그때는 ‘별이 빛나는 시대’였다. 루카치의 저 유명한 문장,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처럼, 별이 빛나는 시대는 암울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별이 빛나는 시대는 이미 과거완료형이다. 구체적인 증거는 진보가 집권할 객관적 조건이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이다. 저자가 지적하듯 진보 세력의 집권에 필요한 1200만 표라는 기준은 비정규직 850만 명과 농민 300만 명, 청년실업자 100만 명, 정규직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2000만 명의 유권자로 이미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아직도 변화되지 않았다.

 

이렇듯 폭넓은 진보의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별이 없는 시대’가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내놓은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 권력의 프레임은 현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비틀어왔으며, 결과적으로 진보 세력이 대다수의 민중과 결합하지 못하게 만들었음이 첫 번째 이유이다. 현실 권력에 대한 아집 때문에 2010년 ‘진보 대통합’이 분열로 나아갔으며, 결과적으로 진보 세력의 제도 정치권으로의 진입이 무산된 것이 두 번째이다. 2000년 이후 우리 민중의 삶은 더욱 고달프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 세 번째 이유이다. 여기서 첫 번째 이유는 언론 권력의 작동과 연관되며, 두 번째 이유는 정치 권력, 세 번째 이유는 경제 권력의 교묘한 술책과 연관된다. 이른바, ‘철의 3각 동맹’인 정치 권력·경제 권력·언론 권력이 만들어내고 조종하는 각종 권력 프레임이 진보의 후퇴를, 진보의 멀어짐을, 진보의 패배감을 불러왔다.

일상에 매몰된 진보들에 묻는 또 다른 질문, ‘그 깨끗한 꿈, 무덤까지 가져갈 셈인가?’

 

별이 저물어버린 시대는 별이 빛나는 시대를 살았던 진보 세력 자신들에게 삶에 대한 후회를 가져온다. 저자의 진단처럼 진보의 위기를 지나 진보에 대한 조롱어린 사망 선고가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진보 세력은 깊은 패배감에서 벗어나올 줄 모른다. 별을 잃어버린 그들은 어떠한 목적도 없이 단순히 억척스러운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4월을, 5월을, 6월을, 7~8월을, 8월을 감동과 보람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도 더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다며 자신의 경제생활에 몰입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진보는 대안이 없다며 정치 현실 또는 정치 생활에서 눈 돌리고 경제생활에만 억척스럽게 매몰되어도 좋은가.”(103쪽)

 

이는 젊은 날의 깨끗한 꿈에 대한 자조적인 자포자기이거나, 몰감성적인 외면이다. 저자는 진보의 패배감이 커질수록 더 큰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진보의 꿈이 포기되는 순간, 나를 포함한 민중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진보는 마침내 막다른 길에 내몰린 노동자, 농민, 빈민이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 된다.

 

“4월에서 8월까지 모든 진보가 자신의 꿈을 무덤까지 가져갈 듯이 지레 자포자기하고 있는 것은 민중과의 소통에 실패했고 더 원천적으로는 자신과의 소통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맞아 죽거나 분신자살한 노동자와 농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빈민을 떠올리면, 오늘 진보정치 세력은 고통 받는 민중 앞에 도덕적 나태를 넘어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다. 그런데 과연 ‘나태한 공범’이라는 비판의 과녁은 진보정치 세력만일까? 혹시 모든 진보가 성찰해야 마땅한 자기 가슴의 ‘화살’이 아닐까.” (30~31쪽)

 

그렇다. 저자의 인식은 옳다. 자기 가슴으로 날아온 화살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아프다. 분명 나 그리고 우리는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라는 ‘사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1970년의 ‘전태일’은 2000년대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차이는 분명하다. 1970년의 ‘전태일’이 1980년대의 진보를 살아있게 만들었다면, 2000년대의 진보는 ‘전태일’에 무감각하다. 저자가 가슴 시리게 기억하는 고(故) 허세욱·박영재 동지는 2000년대의 ‘전태일’이다. 이렇듯 진보의 무력감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적 감수성을 잃게 만들었다. 여전히 신자유주의 체제와 분단 체제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의 삶에 고통을 증가시키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진보는 별을 찾는 마음으로 이 둘 체제에 저항하기 보다는, 자신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에게 보이는 진보에 대한 애정은 분명하다. 그러한 애정에 나는 감사한다. 저자는 젊은 날의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무덤까지 가져가지 않으려면 개인적 무력감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시작은 객관적인 현실 파악과 그에 기반을 둔 냉철한 자기반성이다. 그러한 자기반성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어느 순간 진보 세력이 잊고 있었던 문제, 다름 아닌 냉철한 현실 인식에 따른 ‘대중적인 소통’이다. 그렇다고 소통을 수구-기득권 세력 또는 집권 세력이 쓰는 그것과 혼동하지 말자. 우리들의 소통은 그네들과는 다르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무엇보다 진보가 할 일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97쪽)

 

우리는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저자가 말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은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아니 이것은 저자의 두 가지 질문에 호응하는 우리 자신들의 자문(自問)이다. 우리는 무덤에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이 젊은 날의 그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패배감과 우울감을 가져갈 것인가?

 

(손석춘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신문 읽기의 혁명>(손석춘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더러는 세월의 이끼 탓에 정의롭고 깨끗했던 꿈에 곰팡이가 피거나 아예 잊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체념에 잠기거나 우울할 일은 결코 아니다. 정반대다.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잊었기에 우울했던 나날에서 벗어나 체념의 곰팡이를 툴툴 털어내고 일상의 정치경제생활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옳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138쪽)

그렇다. 우리의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진보의 만장(輓章)이 한국사회 전반에 나부낀다고 해도 우리는 그 상여행렬을 조용히 따라갈 수만은 없다. 나, 나의 어머니, 내 아들의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분단 체제가 우리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꿈을 꾸지 않는 한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소박한 꿈을 꾸어본다. 내 아들이 사는 세상은 내가 살고 있는 지금보다 좀 더 ‘사람다운’ 냄새가 나는 세상이 되기를. 이제 귓가에 울리는 듯한 저자의 마지막 외침을 딱딱한 글로 전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로 학습하라, 대안사회를 토론하라, 국민과 소통하라.” 이 땅의 모든 진보들에게 전한다. 그들의 꿈을 이루기 위한 또 다른 출발점을.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밝혀야 할 사항이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진보 위기론에 대한 저자의 논리적 응답과 진보의 내적 성찰을 위한 냉철한 제안을 의도적으로 소개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지표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 및 정책들을 제외했다. 그것이 정의로운 꿈을 꾸었던 모든 사람들과 가슴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라는 저자의 저술 의도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와 더불어 한편에 밀어놨던 <신문 읽기의 혁명>을 책장 가운데로 가져왔다. 다시금 꿈을 꿀 때다.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2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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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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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1분에 100단어를 말하거나 들을 수 있는데 생각은 400단어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 외에 300단어에 해당하는 만큼 생각을 더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300단어에는 자칫하면 거짓말이 섞여 들어간다. ‘세상은 너를 원하지 않아, 그 사람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는 너무 못나서 아무도 너를 원하지 않아, 너의 실체를 알면 너를 조롱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걸.’ 이런 식의 거짓말이 너무나 많이 섞여 들어간다.

꾸미기_ST830089불교에서는 이러한 자기만의 소설을 ‘망집’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인생과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식의 허상을 덧씌워서 보기 때문에 망집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식의 허상을 덧씌우는지를 자꾸 살피게 되면 인식의 편향성을 느끼게 된다. 아니 자신의 인식의 편향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자신이 어떤 허상을 덧씌우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무의식 때문에 이러저러한 허상을 덧씌우게 된다고 설명한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자신의 소망하는 바에 영향을 받아서 객관을 객관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편파적으로 인식하면서 허상을 덧씌우게 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생각은 이러저러한 소망으로 덧칠되어 있기 때문이다. 증시에 진입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주식이 대박이 나기를 바라다 못해 대박이 날 것이라고 믿는다. 객관적으로는 깡통계좌를 차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아도 자신만은 그 대열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 근거 없이 믿고 만다. 이러한 인식의 편파성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데도 적용된다.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편향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고양적 편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자기고양적 편향이 너무 없으면 자기 자신을 너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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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성향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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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주 ‘딱 나일 수밖에 없음’에 절망하곤 한다.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될까?’ 하는 생각이 괴로움을 일으킨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성향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성향이 있다. 그 성향이 그 사람을 특징짓는다. 그런데 사실 성향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성향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밖에 없다. 성향은 성향일 뿐이다. 다만 그 성향이 좋게 발휘되기도 하고, 나쁘게 발휘되기도 할 뿐이다. 무슨 소리냐고?

생각해보자. ‘신중하다’와 ‘우유부단하다’는 것은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신중하다’와 ‘우유부단하다’는 모두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생각을 많이 하는데 결정해야 할 시점을 놓치지 않고 결정을 하면 ‘신중하다’고 하고, 결정해야 할 시점을 넘어서까지 생각하면 ‘우유부단하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이 좋게 발휘되면 ‘신중하다’고 평가받는 것이고,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면 ‘우유부단하다’고 평가받는 것이다.

나쁜 성향이란 없다. 성향 자체는 어떠한 경향성일 뿐이기 때문에 ‘나쁘다, 좋다’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다만 성향이 나쁘게 발휘될 때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나쁜 특성을 없애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특성 자체가 나의 존재에 속해 있는 것이라서 그 특성이 나쁘게 발휘되는 것을 완전히 통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그리스어: γν?θι σεαυτ?ν 그노티 세아우톤)

너 자신을 알라(그리스어:γν?θι σεαυτ?ν그노티 세아우톤)

그러니까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성향을 안다는 것이고, 자신의 성향을 안다는 것은 그 성향이 좋게 발휘될 때뿐만 아니라 나쁘게 발휘될 때도 파악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꾸고 싶다’는 것을 흔히 ‘성향을 바꾸고 싶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정확히는 ‘성향을 바꾼다’가 아니라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는 것을 조절한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어떤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성향 자체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나다’라고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나의 성향은 나의 존재방식과 연관되는데 갑자기 그 성향만 딱 빼서 버린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마치 ‘너의 지방만을 빼서 버려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요구이다. 지방이 나의 몸 전반에 걸쳐 있는데 그 부분만을 분리해서 버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다만 우리는 내 몸에서 지방의 비중을 줄이기 위해 지방이 잘 분해되는 음식을 먹고 지방 음식의 섭취를 줄이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지방이 과다하게 되지 않도록 조절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실제로 다이어트를 하는 경우 지방만을 빼지는 못하기 때문에 근육이나 칼슘 등 몸에 꼭 필요한 부분까지 같이 빠져서 문제가 될 때가 많다. 아무리 특별한 다이어트 방법이라 해도 지방만 추출해서 빼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하나의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고, 성향 자체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좋게 발휘될 때와 나쁘게 발휘될 때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러한 성향을 가진 나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나는 나의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통제하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은 나 자체가 문제여서가 아니라 나의 성향을 적절히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 성향이 어떨 때 좋게 발휘되고 어떨 때 나쁘게 발휘되는지를 잘 파악하고,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떤 것에 주의해야 하는지를 알아내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성향을 나쁘다고 규정해버리면 자신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 되어 버려서 자기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성향을 가진 나에게 실망하게 되면 그 성향을 조절하는 것도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성향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성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니 그 성향이 발휘되는 방식만 조절하면 되는 것이다.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주의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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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경향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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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 발현을 통제하려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면 ‘나는 잘난 인간이어야 하는데’와 같은 전제에 매여서는 안 된다. 지금도 이 말을 들으며 ‘그래, 나는 이런 전제에 매여 있는 것 같아.’ 하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대하다 ‘내가 만만해보이나?’ 하는 생각을 하며 기분 나빴던 적이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자주 이런 생각을 하는가?

어떤 사람은 자주 ‘내가 만만해 보이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어떤 사람은 ‘만만해보이나?’ 하는 질문을 전혀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내가 만만해 보이나?’ 하면서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은 사실 ‘내가 만만해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만만해보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런 질문은 애초부터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자꾸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전제하고 있는 것들을 잘 검토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마음의 결을 느끼게 된다. 철학적 객관적 인식을 방해하는 것은 사실 ‘우리 각자가 원하는 바’이다. ‘내가 잘난 인간이어야 한다’는 인간이면 누구나 매이게 되는 전제이다. 그래서 이 전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전제에 고착되어 있는 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도 ‘내가 원하는 바’에 고착되어 있으면, 상대방의 말보다는 ‘내가 원하는 바’에 더 생각이 매이게 된다. 그러면 객관적 인식과는 멀어진다.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말을 하는가, 원하지 않는 말을 하는가에만 주의를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다.

꾸미기_회전_사진 152인식을 객관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면 세상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소설을 쓰면서도 자신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바’에 매이지 않으면서 인식의 편향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할 때 자신의 마음의 결을 느끼게 된다. 내가 나를 배워야 한다는 말은 내가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하고 저럴 때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 사람인지를 알아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인식의 편향성의 특징을 느껴가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자신의 경향성을 알고 조절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오죽하면 “성격이 팔자”라고까지 하겠는가. 역술에서는 ‘팔자(八字)’로 사람의 경향성을 말하고, 인도에서는 ‘구나(guna, 공덕 또는 덕)’라는 말로 사람의 경향성을 지칭한다. 인도에서는 바로 이 ‘구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결국은 구나에 의해 좌우되지 말아야 마음의 평정이 온다는 소리이다.

자신의 경향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자신의 경향성이 나쁘게 발현되는 것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자신을 배우고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향성을 나쁘다고 규정하지 말고 경향성이 나쁘게 발현되는 것을 막자는 쪽으로 생각을 돌리자. 자신의 경향성을 알아야 자신을 가누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나 자체로 좋다. 나의 성향은 문제가 아니다. 나의 성향은 장점으로도 발휘될 수도 있고 단점으로 발휘될 수도 있다. 성향 자체를 문제시하지 말고 성향이 발현되는 방식을 조절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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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절 화폐(2)[자본론강독]-12

제 3절 화폐(2)

정리 : 나태영

 

 

제2편 :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제4장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제1절 자본의 일반적 정식

 

‘상품유통은 자본의 출발점이다. 상품 생산과 발달된 상품유통〔즉 상업〕은 자본이 설립하기 위한 역사적 전제이다.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됨으로써 자본의 근대적 생활사는 시작된다.

상품유통의 소재적 내용이나 다양한 사용가치들 사이의 교환은 무시한 채 이 과정이 만들어내는 경제적 형태만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이 과정의 최종 산물로 화폐를 발견하게 된다. 이 상품유통의 최종 산물은 자본의 최초의 현상형태이다.

역사적으로 자본은 어느 곳에서나 처음에는 일단 화폐의 형태로〔즉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이라는 화폐자산의 형태로〕 토지소유와 대립한다.’(225쪽)

‘화폐로서의 화폐와 자본으로서의 화폐는 무엇보다도 단지 양자의 유통형태의 차이에 따라 구별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형태 외에 그것과 구별되는 제2의 독자적 형태인 G-W-G라는 형태, 즉 화폐의 상품으로의 전화와 상품의 화폐로의 재전화, 또는 판매를 위한 구매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 운동을 통해 후자의 유통을 담당하는 화폐는 전화되어 자본이 되는 것이며, 이미 그 성격상 자본인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사라지고 남는 결과는 화폐와 화폐의 교환, G-G이다. 내가 100파운드스털링으로 2,000파운드의 목화를 사고 그 2,000파운드의 목화를 110파운드스털링에 팔았다면 결국 나는 100파운드스털링을 110파운드스털링과, 즉 화폐를 화폐와 교환한 셈이다.’(226쪽)

‘이와 반대의 형태인 G-W-G에서는 구매자가 화폐를 지출하는 것이 판매자로서의 화폐를 취득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상품을 구매하면서 화폐를 유통에 투입하지만, 그것은 그 상품을 팔아서 다시 유통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그가 화폐를 내놓는 것은 단지 그것을 다시 손에 넣으려는 숨겨진 의도에서일 뿐이다. 그러므로 화폐는 단지 선대(先貸)된(vorgeschossen) 것일 뿐이다.’(228쪽)

‘유통 W-G-W에서는 화폐의 지출이 화폐의 환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반면 G-W-G에서는 화폐의 환류가 화폐의 지출방식 자체에 따라서 결정된다.’

‘반면 순환 G-W-G는 화폐에서 출발하여 결국 똑같은 화폐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이 순환의 동기와 목적은 교환가치 그 자체이다.’(229쪽)

‘100파운드스털링을 주고 구매한 면화가 100+10파운드스털링〔즉 110파운드스털링〕으로 다시 판매된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더욱 정확한 형태는 G-W-G′이고, G′〓G+?G, 즉 ‘처음 투하된 화폐액+일정 증가분’이 된다. 이 증가분〔또는 처음의 가치 이상의 초과분〕을 나는 잉여가치(Mehrwert)라고 부른다.’

‘이 운동은 이 가치를 자본으로 전화시킨다.’(230, 231쪽)

‘물론 처음 투하된 가치 100파운드스털링은 유통을 통해서 부가된 10파운드스털링의 잉여가치와 일시적으로는 구별되지만 이 구별은 곧 없어져버린다. 과정의 끝부분에서는 원래의 가치 100파운드스털링과 잉여가치 10파운드스털링이 각기 따로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110파운드스털링이라는 하나의 가치이며, 이것은 시작부분에 있는 100파운드스털링과 마찬가지로 가치증식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바로 그 형태이다. 화폐는 운동의 끝부분에서 다시 운동의 시작부분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판매를 위한 구매가 행해지는 순환 각각의 끝부분은 자연히 새로운 각 순환의 첫 부분을 이루게 된다.

 

단순 상품유통-구매를 위한 판매-은 사용가치의 취득〔또는 욕망의 충족〕이라는 유통 외부의 최종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반면 자본으로서의 화폐유통은 그 자체가 목적(Selbstzweck)인데, 왜냐하면 가치의 증식이 끊임없이 갱신되는 이 운동 내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운동은 무한히 계속된다.’(232쪽)

‘화폐소유자는 이 운동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담당자로서 자본가가 된다.’“이재학에서는 유통이 부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재학은 화폐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화폐야말로 이러한 종류의 교환에서 시작부분이자 끝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재학이 추구하는 부에는 한계가 없다. 즉 목적을 위한 수단만을 추구하는 지식은 목적 그 자체가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에 무한한 것이 될 수 없지만, 목표가 수단이 아니라 궁극적인 최종 목적인 지식은 끊임없이 그 목적에 접근하려 하기 때문에 그 추구에는 한계가 없다….경제학은 이재학과 달리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다…. 전자는 화폐 그 자체와는 다른 것을 목적으로 삼으며 후자는 화폐의 증식을 목적으로 삼는다….”(아리스토텔레스, 앞의 책, 제1권, 제8장과 제9장)(233쪽)

‘화폐축장자는 화폐를 유통에서 구출해냄으로써 가치의 쉴 새 없는 증식을 추구하지만, 좀 더 영리한 자본가는 끊임없이 반복하여 화폐를 유통에 투입함으로써 가치의 끊임없는 증식을 달성한다.’‘스스로 증식하는 가치가 생명활동의 순환과정에서 번갈아 취하는 각각의 현상상태를 고정시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장을 얻을 수 있다. 자본은 화폐이다. 그리고 자본은 상품이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서는 가치가 전체 과정의 주체이며 가치는 이 과정을 통해 화폐와 상품으로 번갈아 형태를 바꾸면서 자신의 크기를 변화시키고 또한 자신의 본래 가치로부터 잉여가치를 만들어냄으로써 스스로를 증식시킨다. 왜냐하면 가치가 잉여가치를 부가하는 운동은 가치 자신의 운동이며 가치의 증식이고 따라서 자기증식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그것이 가치이기 때문에 가치를 낳는다는 신비한 성질이 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자식을 낳든가 아니면 적어도 황금의 알을 낳는다.’

‘화폐는 모든 가치증식 과정에서 항상 출발점과 종점을 이룬다.’

‘상품형태를 취하지 않고서는 화폐는 자본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화폐는 여기에서 화폐축장의 경우처럼 상품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자본가는 모든 상품이-비록 그것이 아무리 초라해 보이고 악취가 난다 해도-맹세코 진실에서는 화폐이며 내면적으로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고 나아가 화폐를 더 많은 화폐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는 수단임을 알고 있다.’

‘이제 가치는 상품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자기 자신에 대한 사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본원적 가치로서의 자신과 잉여가치로서의 자신을 서로 구별 짓는다.’(234, 235쪽)

‘사실상 G-W-G′는 유통영역에서 직접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의 자본의 일반적 정식이다.’(236쪽)

 

민간인 집단살해 유해발굴 현장기록-파주이야기[지미갤러리]

민간인 집단살해 유해발굴 현장기록-파주이야기[지미갤러리]

 

 

글/사진 윤지미(한철연 회원)

 

민간인 집단살해 유해발굴 현장기록 (2월24일~3월4일)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지_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 인근, 민간단체 공동조사단의 발굴과정 >

발굴단은 3월 3일 현장보고회에서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 발굴된 유해를 발굴 규정에 의해 최소 단위로 발표하였다. 최소 35구.

그러나 그날 오후 안경과 함께 3구가 더 발굴되었다. 공식적인 보고서에는 38구가 발표될 예정이다.

유품은 나중에 발굴된 안경을 제외한 버클과 고무줄, 여름옷의 흰색단추, 탄피와 탄두, 옷핀 등 82점으로 발표되었다.

학살당한 유해의 발굴은 곧 역사의 발굴이라고 한다.

발굴된 유해를 통해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 전후의 혼돈기에 많은 민간인이 군과 경찰에게 집단 살해를 당했다.

1950년 7월,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할 겨를도 없이 군경에 의해 확인 사살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2014년 2월 25일 오전, 습기 많은 산성토양에서 부스러지고 조각난 유골들이 나타났다. 나무뿌리가 뼛속에 스며들도록 60여 년의 시간을 갇혀있던 유해가 드디어 비통하고 참혹했던 죽음의 순간을 생생하게 증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증언이 끝나고도 같은 민족이 겨눈 칼빈 총구 앞에서 급하게 떠올랐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살아서도 단순히 갑, 을, 병 등으로만 분류되었던 ‘보도연맹 사건’의 민간인들,?혹은 혼돈의 시기에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진주형무소에서 갇혀있던 민간인들이 2014년 3월 4일?으깨진 두개골과 부서진 허벅지 뼈와 정강이뼈, 팔뼈, 치아, 그리고 잡뼈 등으로 분류되어 회색 컨테이너 속에 다시 갇혔다. ‘1950년 7월,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 인근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 살해가 있었다’고 증언한 목격자도 살아있는데……..

진주시 유족회 개토제

진주시 유족회 개토제

2014년 2월 28일

2014년 2월 28일

유해 첫 발굴

유해 첫 발굴

유골

유골

유해 발굴 진행

유해 발굴 진행

유품

유품

발굴

발굴

신화 해석의 중요성: 우리 사회의 지식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1

신화 해석의 중요성:?우리 사회의 지식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오늘은 바다를 끼고 지중해 해안가에 세워진 그리스 이오니아 식민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여러분들 밀레토스라는 지역을 아시죠??밀레토스가 어떤 곳입니까??철학개론 배우신 분들 손들어 보세요.?탈레스라는 이름은 압니까??서양에서 최초의 철학자라 알려진 탈레스가 밀레토스 출신입니다.?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말한 거로 유명한 사람이죠.?여러 방면에 다양한 재질을 가지고 있어서 천문학에도 일가견이 있었고,?늘 하늘만 쳐다보고 다니다가 웅덩이에 빠진 적도 있어서 가까운 것은 못보고 먼 것만 보고 다닌다고 사람들이 비웃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죠.?실제로 만물의 근원이 뭐냐 하는 물음은 오랫동안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중요한 주제였습니다.?종교에서도 이 우주,이 세상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를 써 왔고,?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하나가 무엇이고,?그것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가에 대한 끝없는 탐구가 현대 입자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가장 큰 하나인 우주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느냐,누가 이 큰 우주를 만들어 냈느냐,?혹은 저절로 이 큰 우주가 생겨났느냐 하는 화제에 대해서도 굉장히 관심이 크죠.

이야기가 좀 재미있어야 하니까 우리 쪽으로 눈길을 돌려봅시다.?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천지창조 신화가 없었던 걸로 생각을 해요.?이 잘못된 생각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됐냐면,?단군신화를 엉터리로 해석해 온 이른바 신화학자들이나 역사가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데서 생긴 고정관념에 매달린 탓이 커요. ‘웅녀’설화를 예로 들면 토템사상을 끌어들여 웅녀는 곰 부족을 상징하고 환웅은 호랑이 부족을 상징한다,?이 부족국가들이 결합해서 고조선이라는 민족국가를 형성한 것이다,?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단 말이죠.?이 엉터리 없는 이야기를 맨 처음에 퍼뜨린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았더니 육당 최남선이 나옵디다. ‘불함문화론’에 나오는 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신화학자 김열규 선생이 확산시킵니다.?너무 그럴싸한 이야기여서 많은 학자들이 거기에 넘어가 우리나라에는?‘토템’과?‘샤만’?이런 것들은 있었지만,천지 창조신화는 없다,?이런 식으로 규정을 짓는데,?아무리 조그만 부족도 천지창조의 신화가 없는 부족은 없습니다.?전부 나름대로 가장 큰 것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에 대해서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설명해 내려고 애씁니다.?물론 설명 체계는 짜임새가 정교한 것도 있고,?느슨하거나 엉성한 것도 있지만,?없는 곳은 없습니다.?우리 나라 사람들만 별종이어서 천지창조 신화가 없는 거냐 아니면 유실된 거냐??이런 생각 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제가 한 삼십 년 전부터 단군신화는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신화학에 문외한인 사람이 떠벌리는 말이라고 권위를 인정해 주질 않아요.?이제부터 제가 제대로 해석을 할 테니까 여러분들 들어 보세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설화를 보면?‘환인’의 아들?‘환웅’이 아버지에게 아래로 내려가 중생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주겠다고 해서, ‘신단수’?아래로,?바람,?비,?구름,?번개,?우레 같은?‘손’(사)을 데리고 내려옵니다.?그런데 환히 빛나는 멋있는 수컷?‘환웅’(해)에게 반한 암컷 둘이 찾아옵니다.?이른바‘곰’과?‘범’이지요.?환웅이 쑥과 마늘을 먹고?‘100일’을 견디면 짝으로 삼겠다고 말하자, ‘호랑이’는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달아나고?‘웅녀’는 견디고 참아서 환웅의 짝이 되어?‘단군왕검’을 낳았다.?이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죠.

‘호랑이’는 우리말로?‘범’이죠.?언어학자들은 어원을 추적할 때 모음은 제껴 놓는 일이 많습니다.?그 만큼 모음은 시간과 지역에 따라 자주 바뀌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입니다. ‘범’은?‘밤’으로도 발음되고,?그렇게 기록된 예도 있습니다.?그리고?‘곰’은?‘검’도 되고, ‘굼’도 되고, ‘감’으로도 바뀝니다.?처음 낱말을 가르칠 때 한 낱말을 비슷한 다른 말로 바꿔서 그 말의 뜻을 일러주는 것이 일반적인데,?이것을?‘사전적 정의’(lexical definition)라고 합니다.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가르치는 천자문을 보면 뭐라고 되어있어요??하늘천,?따지,?감을현,?누르황.?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면,?한 낱말을 뜻이 같은 다른 낱말로 바꾸어서 하늘은?‘검’이요,?땅은?‘누리’다,?이렇게 한 낱말의 뜻이 다른 낱말과 같다는 것을 밝혀주지요.?왜 하늘을?‘검’이라고 할까요??나중에?‘감’, ‘곰’, ‘구무’, ‘가마’, ‘개마’,?임금 할 때?‘금’,?이런 것들이 모두?‘거무(검)’에서 파생된 말인데,?우리 옛 분들은 빛의 간섭이 없는 밤하늘 빛깔이 본디 하늘빛이라고 봤습니다. ‘하늘은?‘검’이다.?그리고 땅은?‘누리’다.’?이렇게 옛날에?‘하늘’이라는 이름도 있었지만,?그것을?‘검’(거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개마’고원을 왜 그렇게 부르느냐 하면 하늘에 닿아 있는 봉우리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입니다.?개마,?고마,?구마,?다 같은 말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입니다.?이렇게 따지면 실마리가 잡힙니다.?밤도 깜깜하고 하늘도 깜깜합니다.?깜깜하다는 점에서는?‘밤’(범)과?‘검’(곰)은 다르지 않습니다.

‘백일’이라는 말도 달리 해석해야 해요.?해가 나는 동안, ‘온(백)날’, ‘온날’은 해가 비추는 동안,?온종일이라는 소리죠.?해가 비치는 동안에 자기와 함께 견딜 수 있는 것을 자기 짝으로 삼겠고 했는데,?해가 비추자마자 범(밤)은 달아나고 곰(검)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죠. ‘하늘’과?‘해’가, ‘웅녀’와?‘환웅’이 짝을 맺게 되어,?하늘이 해의 아낙이 되었다,?이것이 단군설화에서 나타나는 우리식 천지창조 신화입니다.

“우리 신화에서는 하늘이 여성이고 태양이 남성입니다.?이게 그리스 신화 책엔 거꾸로 되는 거죠.?저쪽에서는?‘우라노스’, ‘천공’이 남성이고, ‘가이야’, ‘땅’은 여성으로 상징되지요.?하늘과 해가 짝을 지어서 낳은 게 무엇이냐……. ‘다’, ‘따’, ‘다알’(달,?딸),?땅.?이 지구도 그렇게 생겨났고,?달도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그럴 듯한 말이죠??아무도 이것을 학설로 봐주지 않으니까?‘거짓말’로 여겨져?30년 동안 여기저기 귀에서 귀로 흘러 다니다가 사라져 버렸어요.?어때요,?그럴 듯해요?”

“네.”

그럴 듯하면 하나 더. ‘오행사상’?있죠??오행에서 기본색으로 다섯 가지 색이 나옵니다.?중국에서는 목,?화,?토,?금,?수가?‘오행’이죠??목은 동쪽과 풀,화는 남쪽과 불,?토는 중앙,?계절적으로 보면 여름과 가을 사이고,?금은 가을.?수는 겨울입니다.?말하자면 오행의 자리는 동,?남,?중,?서,?북인데 빛깔로 나타내면 목은 푸른색으로 나타나고,?화는 붉은색,?토는 누른색,?금(金)은 흰색,?수는 검은색으로 나타납니다.?목화토금수로 나타나는 오행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대로 가져다 쓰기 어렵다는 것을 곧 알 겁니다.?유럽이나 러시아,?그 밖에 다른 지역을 가보면 부엽토가 뒤섞이고 썩어서 물이 검습니다.그러나 우리나라 물은 맑아서 투명합니다.?색깔이 없습니다.?우리나라는 산구비가 가파르고,?나무가 많기 때문에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이 검지 않아요.?중국에서 만들어진 오행설을 보면 갑자기 하얀 해 대신에 숫돌에 하얗게 간?‘쇠’가 끼어듭니다. ‘금’(金)이?‘쇠’지요.?중국에선 오행이 색깔로 보면 푸른색,?붉은색,?누런색,?흰색,?검은색으로 되는데, ‘쇠’를 흰색으로?‘물’을 검은색으로 나타냅니다.?우리말 형용사?‘푸르다’는?‘풀’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붉다’는?‘불’에서 나오고, ‘누르다’는?‘누리’에서,?다시 말해 황토 땅에서 나온 것이고, ‘희다’는?‘해’에서 나왔고, ‘검다’는?‘검’?곧?‘하늘’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예부터 우리 나름으로 오행설이 있었고 그에 따라서 빛깔이 지정됐다면 우리나라 기본 색채가 훨씬 더 원초적이고,?전부 자연물로 됐다, ‘쇠’?대신?‘해’가 들어가고,?물 대신 하늘이 들어갑니다.?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장 삶에 밀접한 자연물에서 우리의 색채를 끌어내었다.?이게 민족주의적인 발언입니까??아니죠?

잘 들어 보십시오.?우리나라에서는?‘물은 맑고’, ‘불은 밝고’, ‘바람은 부는’것입니다.?이름씨(명사)와 움직씨(동사),?그림씨(형용사)가 같은 소리,?하나의 말에서 흘러나옵니다.?우리민족은 이런 점에서 아주 좋은 언어를 물려받았고,?이런 말을 부려서 쓸 수 있었던 우리 조상들이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그런데 여러분들은 우리 조상들이 시원찮아 보이니까 있다/없다,?이런 말을 시시하게 여기고?‘존재’와?‘무’(無)하면 대단하게 보고 그렇지요?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철학자의 서재]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철학자의 서재]

오지석 (루터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곳”?!

 

1983년 한 가수가 부른 건전가요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의 노랫말을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 있고 계층 이동이 열려있다는 사회라고 선언한다. 흡사 미국을 향해 이민 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아메리카 드림’을 패러디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노래는 1970년대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에 이어 제5공화국 시절 우리들을 집단 최면으로 이끌었다.

 

<불평등한 어린 시절>(아네트 라루 지음, 박상은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에코리브르

그렇다보니 아네트 라루가 <불평등한 어린 시절>(박상은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은 “자신의 삶 속에서 사회 계층이라는 요인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 “어떤 개인이건 열심히 일하고 충분히 노력한다면 그리고 재능이 있다면 사회에서 더 높은 위치로 올라설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인생에서 주어지는 기회의 차이는 개인의 열정과 재능, 그리고 노력의 차이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해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자녀들을 ‘스펙 쌓기’,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원까지 ‘귀족 인맥 쌓기’에 내모는 것이 우리 시대의 맨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녀들의 삶의 경험과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의 사회적 지위”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보니 부와 지위의 불평등이 사회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의 삶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책임은 모두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사는 이유, 다음 세대에게 갖고 있는 것을 물려주는 것이지!

 

인터넷 검색 엔진에 ‘세습’ 또는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넣어보면 한국 사회가 북쪽 권력의 3대 세습에 대해 강력한 어조로 비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사회 속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세습 또는 대물림에 대해서는 일부러 눈을 감거나 관대하다. 심지어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 하는 일은 ‘핏줄’을 통한 전수라고 온갖 매스미디어를 통해 주장하며, 자식의 경쟁자들에게 이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대물림에 대해 우리 사회는 각기 다른 말로 표현한다. 전통 사회에서 세습이라는 말 자체는, ‘왕권 세습’에서 보듯이 정치적, 법률적 용어에 한정하여 사용되었다. 재산 세습은 특별히 ‘상속’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학문이나 기예의 세습은 ‘사사’라는 용어가 널리 쓰였다. 세습은 혈연, 지연, 학연 각각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또는 그 같은 방식들이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것은 역시 핏줄에 의한 세습, 대물림이다. 우리말에서 ‘대물림’, ‘세습’, ‘상속’, ‘전수’, ‘사사’, ‘물려주다’의 용례를 살펴보다보면 ‘~을 에게’, 혹은 ‘~에(에게) ~을’이라고 나온다.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가? 그것이 삶의 목적 또는 삶의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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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트 라루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이론을 바탕으로 미국 사회를, 특히 교육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사회적 계층 및 불평등의 대물림 문제를 들여다본다. 부르디외는 사회 구조를 이끄는 지배 및 불평등의 패턴에 주목한다. 또한 개인이 자신과 자녀들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 혹은 향상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사회에서나 이러한 특권의 세습은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그 사회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나 특권은 자신의 지능이나 재능 또는 노력 같은 역량을 통해 자신 스스로 획득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여기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과연 개인의 사회적 위치는 자신의 노력이나 재능의 결과물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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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루는 이 책에서 교육을 ‘집중 양육과 자연적 성장을 통한 성취’라는 방식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의 활동, 언어 사용, 가정생활과 공공기관이라는 분류에 따라 아홉 사례를 소개한다. 각각 등장하는 사례를 읽다보면 우리 사회의 맨얼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책은 학교 또는 교육기관의 정보에 항상 노출되어 있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중산층과 그렇지 못한 노동자 및 빈곤층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 자녀의 스케줄에 자신의 스케줄을 맞출 수 있는 중산층 부모들, 이와 반대로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마련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자녀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게 익숙한 노동자·빈곤층 부모들을 마주하다보면 유럽과 같은 자녀 양육 수당이라든지 무상교육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또한 이런 생각을 하면 조선시대부터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탄압하거나 자신의 정적을 제거할 때 쉽게 사용했던 패턴을 통해 ‘자기검열’ 하게 하는 무서운 사회에 살고 있음을 직시하게 된다. 그러면서 세습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져 가는 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말을 사용하는 동물이다!

 

사람은 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말을 통해 사회관계를 유지하고 생활에 필요를 요구하고 공급받기도 한다. 아네트 라루는 자녀들이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사회생활을 하게 하는 매개체로서 언어에 주목한다. 자녀와의 언어생활을 보면 계층별로 차이가 나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가령 중산층은 자녀들에게 다양한 언어적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가정에서 제공한다. 그래서 이들이 사회적 관계를 맺어나갈 준비를 갖출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조정하여, 원하는 것을 최대한 얻어내는 도구로 사용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거나 협상하는 법을 숙지해나간다.

 

이에 비해 노동자 및 빈곤층의 언어생활은 짧은 문장과 쉬운 단어를 사용하기에 제한적이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의견을 타협하는 일도 거의 없다. 이들 가족의 삶에서 언어란 논리적 대화 기술이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학습 수단이 아니라 실용적인 의사 전달 수단의 역할만 하고 있다. 중산층의 언어생활과 노동자 및 빈곤 계층의 언어생활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 간극을 채우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의 계층, 계급 갈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평등한 어린 시절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 사회는 상생, 공존이라는 단어보다는 ‘경쟁’이라는 말이 익숙하고 그것이 현실을 지배한다. 우리 사회는 이미 사회 계층 사이의 이동이 상당히 얼어붙은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앞 세대(70세 이상)가 아직도 믿고 있는 ‘개천에서 용 나기’가 단지 드문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우리 사회는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실력’이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그 실력은 어떻게 배양되는가? 이런 물음에 한국 사회는 ‘교육’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그래서 오늘도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앞에 그리고 학원 앞에 차량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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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보다 한국 사회는 ‘교육’에 몰입한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자신의 수입 대부분을 여기에 쏟아 붓는다. 자녀들이 자신들의 ‘스펙을 쌓는다’고 하면 부모들은 자녀가 ‘사회적 이동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경제력을 집중한다. 하지만 이것도 부모 자신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회적 계층이 노동자, 빈곤층일 경우 누구라도 ‘불평등한 어린 시절’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이것은 대물림의 현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는 누군가에게만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사회를 지양하고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없을까? 이런 물음을 남기고 아네트 라루의 말로 글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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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출신 가족이 처해 있는 사회적 위치는 그 개인이 인생에서 겪게 될 일이나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는 불평등은 보이지도 않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회 계층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이를 재조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에 득이 되는 방향인지도 모른다.”

 

 

 

 

배우고 읽히기에 맞춤한 책[보고듣고생각하기]

배우고 읽히기에 맞춤한 책:『다시 쓰는 맑스주의사상사』

 

나태영(한철연 회원)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콩쯔

보통 사람들이 이 책을 한 번 읽으면 머리가 아프다,?한 번 읽기도 힘들다.?세 번 읽으면 이 땅 모든 전문가들한테 휘둘리지 않는다.?일곱 번 읽으면 맑스주의 사상사 전문가 된다.이 땅에서 이 책 일곱 번 읽는 사람 아예 없을 것이다.?조선시대 선비 중에는 이런 책 일곱 번 이상 읽은 사람 여럿 있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없다.?그만큼?21세기 대한민국 문화수준 낮다.?그저 돈만 많이 벌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그러니 이명박 괴물과 박근혜 괴물이 태어났지.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랴?’

이 책 모든 꼭지에서 칼 맑스 이름이 나온다.?칼 맑스는 예수보다 뛰어난 사람이다.?예수가 한 말은 쉽다.?칼 맑스가 한 말은 너무 어렵다.?김성민이 말했다.?칼 맑스가 쓴?『자본론』?잘 이해 못하는 게 정상이다.?어려운 게 정상이다.?『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책쓴이들은 어려운 맑스주의 사상사를 조분 조분 이해하기 쉽게 썼다.?그래도 다루는 내용 자체가 어려워서 이 책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최소한 세 번 이상은 읽어야 이 책 내용을 오롯이 이해할 것이다.

진보당 이정희대표가 이 책에서?<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마오쩌둥>, <그람시> <지젝>?다섯 꼭지라도 세 번 이상 반복해서 읽으면?20대 대통령 되리라고 확신한다.

 

다시 쓴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오월의봄 펴냄). ⓒ오월의봄다시 쓴다는 것은 고쳐 쓴다는 것이다.?더 많이 생각해서 다시 쓴다는 것이다.?더 많은 자료를 바탕삼아 다시 쓴다는 말이다.?성공과 좌절을 겪은 뒤에 다시 쓴다는 말이다. 21세기 한국 상황에 쓰일 수 있게 다시 쓴다는 말이다.?칼 맑스 제자들은 칼을 들어야 한다.?그 칼로 한미 서민패죽이기협정문을 베어야 한다.

예수한테는?12제자가 있었다.

이 책은 칼 맑스,?엥겔스와 칼 맑스 수십 명 제자들 사상을 담은 책이다.?제자들 강점과 한계를 다룬 책이다. 21세기에 그들 정신을 살리는 길을 모색하는 책이다.?이 책쓴이들은 묻는다.?맑스가,?엥겔스가,?레닌이,?그람시가,?로자 룩셈부르크가?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면 어찌할까??묻는다.?단호하게 묻는다.?진보당 대표 이정희한테 묻는다.?민주당과 정의당 인간들한테는 아예 묻지도 않는다.

나는 답한다.?저들이?21세기 대한민국 땅에서 숨 쉬고 있다면 한미 서민패죽이기협정(에프티에이)?날치기 통과 되지 않았을 것이다.?박근혜와 새누리당과 삼성제국 이건희가 환태평양 서민씨말리기협정(티피피)?밀어붙일 생각을 아예 못했을 것이다.?저들이 지금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다면 한미 서민패죽이기협정과 환태평양서민씨말리기협정은 뼈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다.

 

칼 맑스는 저수지이다(서유석)!

산 골짜기 물이 저수지로 모여든다.?저수지는 고인물이다.고인 물은 썩는다.?알튀세르는 맑스 사상 자체에 문제 있음을 지적했다.?저수지 물이 썩지 않으려면 비가 많이 와야 한다.?맑스주의 사상가가 많이 나와야 한다.?칼 맑스는 아담 스미스가 쓴?<국부론>을?수백 번 읽었다.?저수지에서는 물이 찔끔 찔끔 흘러 내려간다.?왜??농사 짓는데 물을 써야 되기 때문이다.?큰 일 할 때 물을 써야 되기 때문이다.?큰 비가 내리면 저수지 물은 넘쳐서 넘쳐서 흘러 내린다.?온누리에 물을 보낸다.?온누리가 살아난다.?온누리가 저수지 물을 마시고 살아난다.?정치란 살림이다.

서유석은 말한다.?칼 맑스가 미친 영향력이 다윈이 미친 영향력 보다 크다.

칼 맑스는

첫째,?사회발전 법칙을 발견했다.

둘째,?자본주의 사회운동(경제발전)법칙을 발견했다.

셋째,?칼 맑스는 혁명가였다.

칼 맑스 비판자,?신자유주의 추종자 하이에크마저도 칼 맑스를 이리 칭찬했다.?이 세상이 자연(the natural)과 인간이 만든 것(the artificial)?이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고 많은 철학자들이 말할 때 칼 맑스는 인간이 만든 시장,?자본주의가 인간을 억압한다는 모순을 밝혀내고 해결책 찾으려고 노력했다.맑스는 공상적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자본주의 강점과 그 자본주의가 일으킨 폐혜를 정확히,?냉정하게 짚어냈다.

 

칼 맑스가 보지 못한 점이 있다.

칼 맑스는 억압받는 자들이 또는 노동자들이 인간 억압 푸는 선두주자로 나설 것이다.?진리의 편에 설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1차 대전 후 독일인 다수가 고난에 빠졌다.?하지만 그들이 히틀러를 투표로 뽑았다.?이 땅에서 노동자 절반이 박근혜 찍었다.?달동네 주민,?시골 사람들,?자영업자 다수가 박근혜 찍었다.?왜??저들은 강력한 지도자가 나와서 문제 풀어주길 고대했기 때문이다.?현대자동차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갈등 크다.?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연대에 대해서는 시늉만 하고 임금이나 수당 올리는 데 치중할 뿐이다.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들은 조합주의 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50년 전 칼 맑스 사상 반복은 어리석다.?칼 맑스 사상을 지금 상황에 맞춰야 한다.?칼 맑스가 지금 살아있다면 어찌했을까 고민해야 한다.?『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가 그래서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프랑스?68혁명 때 마르쿠제가 말했다.?미국 노동자들한테 기대 접는다.?노숙자 같은 룸펜이나 학생들이 전위부대이다.

‘마르크스의 폭넓은 관심 영영에서 항상 중심에 있었던 임금 노동자 계급은?’시민이면서도 시민이 아닌 자,?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자’였다.?그들은?’소외‘된 인간이었다.?소외는 젊은 시절 마르크스 저술의 배경 화면과도 같았다.?마르크스는 소외를 인간적 현상이 아니라 정치적 현상으로 파악했다.’

‘자본주의를 분석할 때 마르크스는 오히려 해부학자에 더 가깝다.?죽은 신체가 아니라,?자본주의라는 살아 있는 유기체를 취급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20세기 사상 지도』, 27-28쪽)

 

레닌은 스피노자가 극찬한 마키아벨리 제자이다.

마키아벨리는 인민의 권력의지 만들려고 애썼다.?인민이 정치력 행사하는 세상 만들려고 애썼다.?그람시는 레닌 제자이다.?그람시는 헤게모니론(인민이 스스로 권력자)을 평생 다듬었다.?독일 사회민주당이 제국주의 전쟁 지지함으로써 제2?인터네셔널이 무너졌다.?레닌이 제국주의에 대한 대항세력 형성해서 제3?인터네셔널 만들었다.?레닌은 사회주의국가인 소비에트연방을 만들었다.?레닌은 파괴,?건설.?실패의 길을 걸었다.?레닌이 건설한 것 중시해야 한다.?레닌이 왜?실패했는지 보아야 한다.?맑스는 파리 코뮨 실패 예상하고 봉기 반대했다.?하지만 파리 코뮨 실패 후 왜?파리 코뮨이 실패했는지 연구했다.?『프랑스 혁명?3부작』을 썼다.?맑스는 파리 코뮨을 통해서 프로레타리아 독재 알게 되었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막으려고 소련이 전쟁하러 나가지 못 하게 자기 나라 군대를 힘 빠지게 했다.?중국 사상가 묵자가 전쟁 막으려고 두 나라 왔다 갔다 하면서 왕들한테 부탁했다.?하지만 레닌은 화끈하게 자기 나라 군대를 약화시켰다.?레닌이 하는 생각과 행동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이를 박영균은 레닌의?‘극한적 사유’라고 말한다.

박영균은 말한다.?현대차 노조의?30년 근로자가 자식 취직 특혜 받으려고 협상할 게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 주장해야 한다고 말한다.?일자리 나누기 주장해야 한다고 말한다.?현실은 만만하지 않다.?현대차 노동자들은 노동 시간 단축을 반대한다.?임금 적어질 것을 두려워해서 반대한다.?사회가 지탱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다.?맑스는 자본주의를 찬양했다.?자동화,?정보화 때문에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줄어들 수 있기에 자본주의를 찬양했다.?과거에?1천명이 할 일을 지금은?500명이 해낼 수 있다.?노동시간을 하루?8시간에서?4시간으로 줄일 수 있다. 21세기 대한민국 땅에서 하루 노동 시간을?6시간으로 하는 일터가 있다.윤구병이 이끄는 보리출판사이다.?다른 기업에서도 보리출판사 본받길 기도한다.?맑스는 줄어든 노동 시간을 향유하는 삶을 살 것을 권유한다.?하지만 자본은 노동시간 줄이지 않고 잉여인간 만들어 낸다.?노동자도 임금 깎이는 것 두려워해서 노동시간 줄이는 데 반대한다.

레닌이 지금 대한민국 땅에서 살고 있다면 노동시간을?4시간으로 화끈하게 줄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그만큼 레닌은 화끈하게 살았다.?고독한 자리를 고수하며 살았다.

‘사람들에게 현재적 삶의 양식은?‘익숙한 것’?또는?‘자연스러운 것’이다.?또한 현재의 사회 체제에서 이득을 얻는 자들에게 변화는 기득권의 상실을 의미한다.?따라서 그들에게 레닌이라는 혁명가가 바꾸고자 하는 것,?행위 자체가 무시무시한 공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레닌은 이 점에 대해 누구보다도 단호했다’(52쪽)

레닌 사상 가운데?‘외부로부터의 도입’이란 개념이 어렵다.이 개념을 옳게 이해하려면?‘외부는 노동자에 대한 외부로서 지식 엘리트가 아니다.?오히려 그것은 노동자 자신의 내부에 있는?’외부‘이다.’(58쪽)?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헤매게 된다.?김성민은?‘외부로부터의 도입’을?‘노동자 자신이 스스로 바뀌어 나가는 것’이라고 풀이했다.?나는 강연에서 김성민이 한 이 말을 듣고 이 책?58쪽에 실린?‘외부로부터의 도입’?설명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외부로부터의 도입’을 기독교처럼?‘거듭남’?유교 식으로?‘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나날이 더욱 새로워짐)이라 표현했으면 보통 사람들이 더 쉽게 받아들였을 거라 생각한다.?맑스주의 사상가들이 깊이 생각해주길 바란다.?그러고 보니 윤구병이 한글로 철학을 한다.?쉬운 한글로 풀이해주는 철학을 한다.?멋진 모습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노동자 자신의?’내부‘이고?’외부‘인가?’(58쪽)?노동조합적 계급의식이 내부‘이고 사회민주주의적 계급의식이?’외부‘이다.?곧?‘외부로부터의 도입’이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적 계급의식에서 벗어나 사회민주주의적 계급의식을 품는다는 말이다.‘내부’인 노동조합적 계급의식이 드러나는 경우는 이렇다.?현대차 노조의?30년 근로자가 자식 취직 특혜 받으려고 사장과 협상한다.?자신들이 받는 임금 높이려고 협상한다.

‘외부’인 사회민주주의적 계급의식이 드러나는 보기는 이렇다.?현대차 노조가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하는 것이다.?일자리 나누기 주장하는 것이다.?현실은 만만하지 않다.?현대차 노동자들은 노동 시간 단축을 반대한다.?현대차 노동자 부인들은 더 반대한다.?김진숙한테 들은 말이다.?임금 적어질 것을 두려워해서 반대한다.?그래서?‘외부로부터의 도입’이 실현되기 어렵다.?하지만 꿈을 꾸어야 꿈을 이룰 수 있다.?꿈도 꿀 수 없는 삶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공산주의 사회를 꿈꾸는 지젝 멋지다.

 

그람시는 노심초사했다

자본주의가 칼 맑스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지속될 것 같아서 노심초사했다.?미국 포드 자동차 회사가 노동자들한테 포드 자동차 살 수 있게 임금을 많이 올려주는 것 보고 노심초사했다. 2012년에 서유석한테 강연에서 들은 이야기이다.?서유석이 말한 대로 복지정책은 자본주의를 지속 시키는 정책이다.?하지만 이 나라에서 복지정책이라도 제대로 펼치면 좋겠다.?‘지도로 가장된 지배,?지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지도’ ‘오늘날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지배/피지배,?지도/피지도 관계’보다?‘이 관계를 가장 잊기 쉽다는 것’에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다.?그만큼 지배가 세련되었기 때문이다.다시 말하면 지배가 지도로 가장假裝될 뿐만 아니라 피지배자로 하여금 자신이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지배하더라도 동의를 얻으면서 지배하기 때문이다.결국 지배와 지도는 잘 구별되지 않는다.’(169쪽)

박근혜는 시민들로부터 동의도 얻지 않는다.?대통령 선거 전에는 동의 얻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전태일 열사 동상 찾아간 것이 하나의 보기이다.?전태일 열사 동상만 찾아갔지 전태일 정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수동혁명이란 혁명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혁명을 더디게 하는 것이다.?바로 지금21세기 대한민국 땅에서 혁명을 더디게 하는 걸림돌이 무엇인가.?질문을 던진다.

 

마오쩌둥은 좀 거시기했다

레닌은 국제전을 내전으로 바꿨다.?제국주의 전쟁을 막으려고 소련군이 전쟁하러 나가지 못 하게 자기 나라 군대 힘 빠지게 했다.?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에 비해서 수가 적었다.?돈도 적었다.?미국은 장개석 국민당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마오쩌둥 공산당은 망하기 직전까지도 갔다.?그런데도 고난을 겪은 마오쩌둥 공산당이 중국이라는 나라를 세우자마자 외국 티벳을 침략했다.?나는 마오쩌둥이 레닌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레닌이 국제전을 내전으로 바꾼 사상을 마오쩌둥이 배웠어야 했다.

마오쩌둥이 주장하는 행과 앎이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다.자기 나라 안에서만 통하는 행과 앎에 문제가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티벳이 중국을 침략하지도 않았는데 중국이 티벳을 침략할 명분이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역사를 중시한다는 중국,?명분을 중시한다는 중국은 한계가 많은 나라이다.?마오쩌둥은 중국 고전을 열심히 읽었다.?칼 맑스 책과 레닌 책도 열심히 읽었다.?이 땅 진보당 사람들도 마오쩌둥처럼 고전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진보당 사람들 수가 적으니 일당 백 역할 하려면 진보정당 사람들 실력을 키워야 한다.?진보당이 정권을 잡으려면 진보당 당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실력을 키워야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얼굴이 밉다

키도 작다.?장애도 앓았다.?로자 삶은 선생님들이 성공 모델로 학생들에게 권할 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특히 외모에 열등감을 갖고 있는 학생들과 장애를 앓고 있는 학생들에게 선생님들이 권할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로자는 호연지기 대명사이다.?다음 글은 로자가 레닌을비판하는 대목이다. 귀 기울여 들을만한 대목이다.

‘당이나 조직된 노동대중이 없었던 러시아와는 달리,?독일에는 노동자 계급 출신의 관료가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었다.그래서 로자는 레닌이나 트로츠키보다 일찍 그리고 명확하게 노동 관료들의 부정적인 역할을 알고 있었다.?따라서 로자는 노동계급이?‘중앙위원회의 도구’가 되는 것에 반대했고 레닌주의적?‘?초중앙주의’를 비판했다.?로자는 스파르타쿠스 강령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본질은 노동대중이 더 이상 지배당하는 대중이 아니라 스스로 지배하는 대중이어야 한다고 말했다.?왜냐하면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분리될 수 없으며,?타인의 억압을 담보로 한 자유는 자유의 특권화일 뿐 진정한 자유는 아니기 때문이었다.?맑스의 사회주의가?‘진정한 휴머니즘’,?즉?‘모든 개인이 완전하고 자유로운 발전을 지배적 원칙으로 하는 사회’라면 로자는 이를 실천하는 인도주의적 정열의 화신이었다.‘(104쪽)

중국에 맹자가 있었다면 폴란드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있었다.?한국에는 남명 조식 선생이 계셨다.?레닌은 남명 조식 선생처럼 화끈했다.?남명 조식 선생과 레닌 선생이 만나 술 한 잔 한다면 두 분이 형님 아우님 사이 되었을 것이다.

 

<浴川>
남명 조식

全身四十年前累

千斛淸淵洗盡休

塵土?能生五內

直今?腹付歸流

<냇가에서 목욕하며>

사십 년 동안 쌓인 온 몸의 허물을

맑은 못의 천 섬 물로 다 씻어버리리

혹시나 오장에 티끌이 생긴다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물에 흘려보내리라

『몸은 곤궁하나 시는 썩지 않네』(송재소,?한길사, 2003년, 115쪽)

로자는 뜨겁게 살았다.?독일군 병사 개머리 판에 맞아 죽었다.?붉은 피를 흘리면서 죽었다.?그 뜨거운 붉은 피가 언젠가는?99프로를 위해서 쓰일 날이 있을 것이다.

서유석은 칼 맑스 사상을 제대로 알려면 우선 칼 맑스를 사랑해야 된다고 말한다.?공감한다.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1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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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 65년 4월)는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 65년 4월)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평생 동안 우리는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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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 있거나 잘나고 싶은 마음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결여를 보고 내심 좋아한다. ‘그래, 저 사람은 저런 결여가 있어. 나보다 못하지.’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못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서 타인의 단점과 결여를 찾아내는 데 너무나도 유능해진다. 그래서 또 남들과의 관계가 엉켜버리지만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타자의 결여 한 가지를 보고서는 안심을 하고 있다가, 그 사람이 자기보다 잘났다는 증명을 만나면(즉 어느 한 부분에서 자기보다 성취를 이룰 때) 굉장히 당혹해한다. ‘저 사람에게 저런 면이 있었는데 내가 몰랐구나! 내가 정신없이 사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앞서가는구나.’ 하는 느낌에 괴로워한다. 여하간 이런 사람들의 경우 십중팔구는 과거에 어떤 결정적인(그 사람으로서는 결정적인) 실패를 맛본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어릴 때 신동 소리 좀 들었고 집안에서는 당연히 대학은 서울대쯤은 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했다든가 하는 사람들말이다. ?’나는 ΟΟ한 면은 좀 잘 하는 편이고, ΔΔ한 면은 좀 못하는 편이야. 그렇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사랑 받을만해’라는 확신이 없으면 참 인생이 괴로워진다. 타인의 시선에 그렇게 좌우되려니 얼마나 인생이 피곤해질 것인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피곤하게 사는지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게 피곤하다는 걸 알아야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는데, 이를 감지하지 못하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과 의사도 어쩌지 못한다고 한다. 오히려 “아무래도 정신분석을 좀 받아봐야 할까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정신분석은 무슨 개뿔, 그건 밥 먹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복에 겨워서 하는 짓이지.” 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사실은 정신적 문제가 심각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신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한다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 정신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문제가 많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들이 옆 사람을 정신병원에 보내놓고는 자신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병원까지 찾게 만든 원인임을 전혀 모르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의사들은 정말 치료 받아야 할 사람은 병원에 오지 않고 그 옆 사람이 환자로 온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의 정신 문제를 자각하고, ‘나는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조절할 수 있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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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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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자기가 자기를 알기 어렵다. 인간은 거울이라는 매개가 있어야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매일 남을 쳐다보고 ‘저 인간은 이래서 문제이네 저래서 문제이네.’ 말하면서도 자신의 문제를 보지는 못한다. 그 눈으로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보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자기 자신을 성찰해내고 반성해내기 바쁜 사람은 타인에 대해 말할 여유가 없다. 자기반성 하느라고 바빠서 남들이 무슨 잘못을 하는지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남의 잘못이 눈에 잘 뜨인다면 그것 자체가 내가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왜 그리도 나는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고 싶어하는가?’를 말이다. 내가 A보다 못났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 깊은 곳의 불안이 없는 사람은 A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그리 골몰하지 않는다. A의 잘못을 누가 말해도 그리 관심두지 않는다. A에 대한 험담에 가담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 나는 A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봐 두려워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기 잘못을 보면 볼수록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대해지게 된다. ‘나도 그런 잘못을 하는데 뭐’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열중한다. 자기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잘못에 대해 마음 놓고 욕한다.

사실 이렇게 욕하게 되는 데는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심리가 관련되어 있다. 그런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타인의 잘못을 보면서 확인하게 되는 우월감이라는 쾌감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남들이 열띠게 험담을 해도 그 험담의 대열에 가담하지 않게 된다. 남의 잘못을 말하게 되는 것은 ‘잘못을 하는 그 사람’보다 내가 잘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확인에의 욕구가 없는 사람은 타인의 잘못에 집중하지 않는다. 남의 잘못을 말하고 생각해봐야 나에게 남는 것이 없으므로 그 ‘남의 잘못’에 관심가지지 않는다. 그 ‘남의 잘못’에서 내가 배워야 할 것만 배워내자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보는 사람일수록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남의 잘못을 말하면서 쾌감을 얻는 데 집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대신에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쪽으로 생각을 가져가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보게 되면 예전에 자신이 얼마나 예리한 비판력으로 남의 잘못을 들추어냈는지, 그 때 자신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관대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에 남의 잘못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게 된다.

꾸미기_유럽2013.01 478당신은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가,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가?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에 지나치게 유능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더 유능하다. 인간 인식의 특성으로 인해 남에게는 예리한 칼날을 들이대도 자신에게는 아주 뭉툭한 칼날만 들이대거나 아예 칼날을 들이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한 번 물어보자. 당신은 당신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을 옆에 두고 싶은가? 우리 모두는 나의 단점은 덮어주고 나의 장점을 칭찬해주는 사람을 옆에 두고 싶어 한다. 어느 누구도 나의 단점을 들추어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은 자꾸만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고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우월함을 알아주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빠져 살게 된다. 그 예리한 비판력으로 자신의 잘못을 본다면 인간관계가 좋아질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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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 대해서 가장 잘 모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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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얼마쯤은 부당하고 얼마쯤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부당함은 잘 보면서도 자신의 부당함은 잘 보지 못한다. 그래서 역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측면을 돌아볼 줄 아는 반성능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비합리적인 측면, 부당한 측면을 보고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타인의 비합리적인 측면, 부당한 측면을 보고 수용할 수 있고 그래서 대체로 관대한 태도를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폭탄은 타인의 비합리적인 측면이나 부당한 측면은 아주 잘 찾아내고 혐오하면서도, 자신의 비합리적인 측면이나 부당한 측면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균형은 언제든 우리를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철학적 성찰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철학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 타인의 장점과 단점을 균형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객관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식의 자연적인 경향성은 자신이 잘한 일과 타인이 못한 일을 보는 데 유능한데, 철학에서는 자신이 잘한 일과 못한 일, 타인이 잘한 일과 못한 일을 균형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하니 철학적 성찰을 하려면 머리가 아파진다. 그렇지만 철학적 성찰로 논리적으로 따지다보면 인간 인식의 자연적 경향성, 즉 심리가 더 잘 드러난다.

생각해보자. 나에게는 부당한 측면, 이상한 측면이 없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 이상한 측면이 있고 그 사람에게도 이상한 측면이 있을 뿐인데, 왜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에 그리도 골몰하는가? 물론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이 나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이상한 측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다시 물어보자. 그 사람은 자신의 이상한 측면이 나에게 어떤 불편을 끼치는지를 아는가? 대부분 모른다. 그러니까 계속 그 행동 패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바꿔서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특별한 싸이코가 아니라면 그에게도 자기 반성력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스스로 반성하면서도 그 행동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당신은 그 사람이 스스로를 얼마나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합리적인 사람인가? “나만큼만 합리적이라고 해!”, “그래도 나는 합리적인 편이기야 하지.” 등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합리적이라고 느끼는 나 자신 역시 어떤 이상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나의 그 이상한 측면이 옆 사람을 나도 모르게 힘들게 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충분한 자기 반성력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 모두는 얼마쯤 이상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그의 이상한 부분이, 그에게는 나의 이상한 부분이 문제될 뿐이다. 나에게 그의 이상한 부분만 보이고 나의 이상한 부분이 파악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에게만 이상한 부분이 있고 나에게는 이상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혹시 옆 사람이 아무리 봐도 싸이코라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할 말 없지만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싸이코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싸이코라고 몰아붙이는 인식의 편향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또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실제로 이상하다고 치자.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에 대해 쑥덕거리면 그 사람이 그 이상한 측면을 고치는가? 나와 동료의 쑥덕거림은 그 사람으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를 잘 따져 생각해보면 ‘나 자신의 이상한 측면을 조절해내기도 바쁜데, 뭣하러 굳이 남의 부당한 측면에 그렇게도 관심을 기울이는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험담에 골몰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은 부당해. 내가 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야!’라고 하고 싶은 무의식 때문이다. 이러한 무의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역으로 내가 열등감을 느끼고 있거나 열등하다는 것이 확인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크기변환_꾸미기_DSCN0697“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가장 잘 모를 수 있다. (당신이 불편해하는 그 사람도 대체로 꽤 괜찮은 사람이지만 그 부분에서만큼은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내가 ‘나’이지만 나 자신에 대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대상화해서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거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남의 얼굴만 쳐다볼 수 있는 우리는 남의 문제를 찾아내는 데 너무나 유능하지만, 거울 없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는 특성 그대로 자신의 문제를 남의 문제처럼 보아내지는 못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 인식을?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둑을 둘 때 훈수 두는 사람이?3배를 본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일 때는 객관적 인식에 비해 1/3 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 사람인지, 누군가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인지를 잘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마음에 끄달려가면서 마음에 따라 반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잘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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