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도서관강의]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2)

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2)

 

김우철(호원대 외래교수)

 

4. 욕구, 요구, 욕망

아기의 울음은 처음에는 배고픔이라는 본능적 욕구(need)를 전달하는 표현수단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울음에 대해 엄마가 보이는 사랑의 응답을 반복해서 경험하다 보면, 아기의 울음은 이제 엄마의 사랑에 대한 요구(demand)로 점차 바뀌어간다. 그러니까 배가 고파서 운다기보다 엄마의 사랑이 그리워서 운다는 뜻이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욕구의 주체는 이리하여 점차로 요구의 주체로 바뀌어 간다. 특히 언어교육이 이루어지고 초보적 수준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짐에 따라 아이와 엄마 사이에는 이런저런 요구들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된다.

아이의 성장과정이 늘 행복한 경험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기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첫 번째 상실의 아픔은 바로 젖떼기(離乳)이다. 태어나서 매일같이 마음껏 빨아오던 젖가슴이 이제 아무리 울고불며 찾아도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이 상실의 아픔을 통해서만 아기는 엄마의 젖가슴과 젖꼭지가 나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게 된다.

젖떼기 시기에 아이가 자지러지듯 울며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욕구의 만족이 아니다. 그것은 엄마와의 일체감 속에서 맛보았던 ‘사랑의 만족감’이다. 곧 엄마 품에 안겨 엄마 목소리와 숨소리를 들으며, 엄마 시선을 마주보며, 젖꼭지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면서 달디단 젖을 먹던 그 행복한 느낌을 되돌려달라는 요구이다. 그러나 아이의 요구는 이제 좌절을 맛보게 된다. 욕구야 앞으로도 이러저러하게 충족되겠지만, 한때 경험했던 완전한 사랑의 만족감은 영원히 상실되고 만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요구가 좌절되는 경험을 통해 아이는 엄마와 자신 사이에 놓인 간극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젖떼기나 배변 훈련을 통해서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양육 과정 속에서 엄마가 아이의 요구를 외면하고 거절하는 일은 더욱 자주 일어난다. 이것은 아이가 보기에 엄마가 더 이상 자신만을 사랑하거나 자신에게서 충분한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아이에게는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엄마는 진짜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내가 이렇게 애타게 부르는데 왜 나타나지 않는 거지? 엄마는 과연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의문에 싸인 아이는 마침내 엄마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즉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고, 그래서 무엇인가 찾고 있고, 그래서 무엇인가 욕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이처럼 엄마의 욕망(desire)을 깨닫게 된 아이는 이제 그 자신이 욕망의 주체로 탈바꿈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이는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를 간절히 욕망하기 때문이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는 아이가 무엇을 욕망할지를 엄마로부터 처음 배울 뿐 아니라, 엄마가 아이 자기 자신을 욕망해 주기를 욕망한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욕망해 주기를 욕망한다. 엄마의 욕망에 눈을 뜨고, 나아가 엄마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아이는 이제 마침내 엄마와 본격적으로 분리되는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아이의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이 단계를 가리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라고 이름 붙였다.

5. 욕망하는 주체의 탄생

‘오이디푸스(Oedipus)’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베의 왕으로서 신탁에 따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비극적 운명을 겪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프로이트는 이 신화가 아이의 정신적 성장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고, 반대 성의 부모와 성적으로 결합하려고 애쓰는 반면 같은 성의 부모를 증오하는 심리상태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남자아이 같으면 엄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증오하는 심리이고, 여자아이 같으면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증오하는 심리를 말한다. 이런 오이디푸스적 삼각관계는 어떻게 해서 아이 마음 속에 자리하게 되는 걸까?

정신분석학에서는 그 원인을 엄마의 욕망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아이가 아버지의 남근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아이는 엄마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던 차에, 엄마에게는 없고 아버지에게는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남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남근이 바로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라고 믿게 된다. 프로이트는 모든 아이(남아와 여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기에 남근이 이처럼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보고 그 시기를 남근기(2세~6세)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시기의 아이는 남녀 성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즉 여자 생식기가 남자 생식기와 달리 몸 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설령 안다 하더라도 아이의 관심은 그런 해부학적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엄마에게 없는 것이 (그래서 엄마가 아이 자신 말고 욕망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결여한 것이 엄마가 늘 사랑과 관심을 보이는 아버지가 갖고 있는 것, 바로 남근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아이의 눈에는 그것 말고 엄마에게 없는 것은 없으니까.

여기서 유의할 점은 프로이트나 라캉이 말하는 ‘남근’은 어른들이 이해하는 ‘남자의 성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는 ‘성’이 뭔지, ‘성교’나 ‘성기’라는 것이 뭔지 아무 개념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의 남근이 아니라 ‘엄마가 욕망하는 가치 있는 것’이라는 심리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페니스’와 구별되는 ‘팔루스’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팔루스는 아이의 눈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보물과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아버지의 남근은 엄마와 아이의 최초의 결합을 분리, 해체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아이는 처음에는 엄마가 원하는 남근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믿고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엄마의 결여를 자신의 남근으로 메우려고, 그래서 아무것도 결여되지 않은 예전의 일체감을 회복하려고 시도한다(근친상간 욕망). 그러나 이런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거니와 그리 오래 가지도 못한다. ‘엄마에게서 당장 떨어지라!’ 하는 아버지의 금지 명령이 추상같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금지 명령은 비단 아버지의 입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대리자 격인 엄마나 다른 어른들의 입을 통해 반복해서 떨어진다. 더구나 그 명령은 거세(castration) 위협까지 동반한다. ‘고추를 떼버리겠다’는 위협은 엄마에게서 거세의 표식을 이미 확인한 아이로서는 심각한 위협과 공포로 다가오게 된다.

결국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금지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어머니와의 합일 그리고 그 합일이 안겨주던 만족감을 영원히 단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거세라는 상징적 과정이다. 아이는 거세 과정을 거쳐 마침내 정신적으로 엄마와 완전히 분리되고, 하나의 ‘욕망하는’ 주체로 자리잡게 된다. 아울러 인간의 세계 곧 도덕과 법의 세계의 구성원으로 진입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 맨처음 경험한, 그러나 영원히 상실하여 되찾을 수 없는, 그렇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엄마와의 행복한 일체감이다. 욕망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그 일체감을 부분적으로라도 구현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찾아 평생 헤맨다. 그러나 그 욕망을 충족시켜 줄 대상은 없다. 그것은 영원히 상실된 것이기 때문이다.
6. 인간의 성

이제 마지막으로 앞에서 제기한 몇 가지 남은 문제에 대해 개괄적으로 답변해 보자. 먼저 인간의 성적 쾌감의 문제이다. 인간의 경우 성욕 만족에서 오는 쾌감은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식욕이나 갈증 같은 자연적 욕구의 해소에서 오는 단순한 쾌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친상간 금지’라는 도덕/법에 의해 강력하게 억압된 상태에서의 성충동의 만족이기에 (라캉이 주이상스, 곧 ‘고통 속의 쾌락(pleasure in pain)’이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듯이) 비할 바 없이 자극적이고 외설적이라는 특징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 금기를 위반하는 데서 오는 쾌락은 그렇지 않은 쾌락에 비해 훨씬 더 증폭된다.

성감대의 편재성(遍在性)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생식기 말고도 신체 전반에서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유아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는 과정에서 느꼈던 사랑의 손길이 오이디푸스적 억압을 당한 뒤에도 신체 곳곳에 무의식적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감대는 영원히 상실한 어머니와의 일체감의 기억과 소망이 잠들어 있는 신체 부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성(性)이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정신적 현상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인간의 성은 기본적으로 본능적,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정신적 현상이다.

그러면 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하는 성 정체성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되풀이하지만 성 정체성은 아이가 자기 생식기를 내려다보면서 스스로 깨닫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앞서 오이디푸스 및 거세 과정을 남아 중심으로 설명했지만, ‘정상적인’ 남자아이라면 거세 이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팔루스를 소유한 아버지에 대한 존경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여자에 대한 사랑을 먼훗날로 기약하게 된다. 즉 남자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더불어 여자에 대한 이성애적 지향성을 확립하게 된다.

반면에 여자아이가 여자가 되는 길은 훨씬 더 복잡한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와 달리 생물학적으로 같은 성인 어머니가 최초의 사랑 대상이다. [* 이런 차이 때문에 정신분석학에서는 여자에게 동성애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보며, 남자 동성애를 도착증으로 보는 반면 여자 동성애는 특수한 병리 현상으로 보지 않다. 심리학적 여성의 심리구조에는 동성애적 요소가 강하게든 약하게든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다고 본다.] 그러다가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결여를 인지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니까 여자아이는 이미 거세를 경험한 상태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친다는 점에서 남자아이와 경로가 다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여자아이는 이 시기에 자신에게 없는 남근을 선망하게 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남근 대신 아기를 소망하게 된다. ‘정상적인’ 여자아이라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근친상간 금지법을 수용하고 나서 (즉 최종적 거세가 일어나고 나면) 아버지 대신 아기를 제공해 줄 남자를 기다리게 된다. 즉 여자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더불어 남자에 대한 이성애적 지향성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지 않고 이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여 좌절이나 분노를 겪게 되면 (예컨대 이 시기에 엄마가 아기를 낳음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이 자기 아닌 엄마에게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이 여자아이는 동성애자가 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아이는 이제 스스로를 아버지보다 더 남자다운 남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사랑의 대상을 이전의 어머니에게서 찾기 때문이다. 즉 성적 정체성은 아버지와 동일화하여 남자가 되지만, 성적 지향성은 여자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자의 성과 여자의 성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간략히 설명했다. 정신분석학이 성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소개하는 것이 초점이었므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성적 정체성이 어떤 과정을 거쳐 확립되는지를 이해했다면, 성적 소수자들의 다양한 성적 지향성, 나아가 갖가지 정신병리적 증상들[* 신경증(히스테리, 강박증, 공포증), 도착증(새디즘, 매조키즘, 관음증, 노출증, 페티시즘 등) 그리고 정신증(편집증, 분열증)]이 모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형성과 해소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대략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이 인간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정확히 그 역도 똑같이 성립한다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의 핵심 테제이다.

[서평] 판문점 체제: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를 위한 지구사적 탐구

판문점 체제: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를 위한 지구사적 탐구 

김학재, 『판문점 체제의 기원: 한국전쟁과 자유주의 평화기획』, 후마니타스, 2015.

 

 

조배준(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원)

 

 

1. 한국전쟁과 한반도 분단을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

오늘날 판문점은 한국전쟁의 기억과 고통을 상기시키는 상징적 장소이자, 어느덧 70년이 된 남북분단과 60년 넘게 지속되는 정전체제의 당위성을 강화시키는 현장으로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다. 한반도의 적대적 분단체제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마음의 장벽’을 더욱 단단하게 쌓아왔는가. 지금까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대부분 ‘전쟁’의 준비와 발발에서 시작되어 ‘정전’ 상태의 지속으로 해명되는 프레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남북의 기득권 세력은 늘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과거의 전쟁을 적대적으로 기억하게 만들고,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을 강압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체제 내부를 단속하고 강화시켜왔다. 그런데 판문점으로 상징화되는 분단체제와 한국전쟁의 성격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 ‘전쟁의 기원’이 아닌 ‘평화의 기원’을 고찰해볼 수는 없을까. 이 책의 저자는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켜나가면서 한국전쟁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결론에 이르러서는 뒤르켐의 생각에서 기초하는 ‘연대로서의 평화’를 제안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현재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 동아시아대학원 박사후 전임연구원인 김학재의 박사논문인 이 책은 이처럼 한국전쟁을 보다 거시적 안목에서 바라보면서 한반도의 분단 지속을 재인식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지구사(Global history)의 관점에서 유엔의 활동 및 국제법, 그리고 근대 자유주의의 기획 안에서 한국전쟁의 추이와 분단 체제의 성격을 추출해내고 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미국이나 유엔은 한국전쟁을 잊고 있지만, 한국전쟁에서 고착화된 한반도의 정전 및 분단체제를 극복해나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주변국을 비롯한 당대의 세계와 소통해야 한다. 물론 저자는 세계와 대화하기 위해 우리는 민족사의 틀을 벗어나 세계의 주요 흐름을 총체적인 맥락 속에서 인식하는 지구사의 위치에서 이 문제를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포착은 한국전쟁 및 정치사연구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 한반도 분단 상황의 극복에도 참신한 시각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나아가 논자는 한국전쟁에 관한 이러한 시각을 한반도 문제의 재인식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한․중일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타개하고 실질적인 협력과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지평으로 활용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고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이처럼 ‘전쟁의 기원’이 아니라 ‘평화의 기원’이라는 기획이 중요한 이유는 논자가 보기에 무엇보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성찰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의 우리 삶의 방식과 체제의 유지를 ‘새롭게’ 인식하는 데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역사 속의 한국전쟁이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현재의 문제이자 평화로운 미래를 희망하기 위한 현실적 과제로 한국전쟁을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 및 결과에 주목했던 1세대의 연구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그 전쟁의 결과가 근대적 자유주의 기획의 영향권 안에서 어떤 지점에 위치해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20세기의 세계사와 한국사의 접점을 새롭게 구상해보기 위해서도 이 연구는 가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초석을 놓았다고 할만하다. 바로 이러한 지점들에 대한 기대와 전망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한 소장 연구자의 이 도전적인 박사논문에 석학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으리라.

 

2. ‘판문점 체제’의 성격과 실천적 과제

저자는 아시아 패러독스의 핵심 기반 중 하나인 ‘한국전쟁 군사 정전 체제’를 뒤집어 인식하여, ‘판문점’으로 표상되는 전쟁의 위협을 오히려 ‘하나의 특수한 평화체제로서 판문점 체제(Panmunjom regime)’라고 부르고 있다. 냉전의 가장 대표적인 유물인 판문점이 갖고 있는 의미를 전복하여 기존의 것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재사유하는 전략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껏 지속된 ‘판문점 체제’는 겉으로는 정전을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서구의 자유주의 진영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서 만들어낸 기이한 평화 기획으로 재사유된다. 그래서 이 개념은 전쟁이 종식된 것이 아니라 잠시 중단된 것으로 간주하면서 “냉전적 적대관계를 60년 넘게 보존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은 역사적으로 희귀한 현상”이라고 지적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담아내기 위해서 도출된 것이자, 민족사의 딜레마가 세계사적 맥락과 연계되기 위한 이론적 발판이 된다. 즉 특수한 역사적 사례를 보편적 세계사 안에 위치시키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이처럼 한국사와 세계사의 접점을 마련하고 한반도의 분단을 지속시키는 한국전쟁과 정전체제를 세계에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일종의 보편적 개념화 전략을 취한다. 외국의 학자들이 백낙청의 ‘분단체제’나 박명림의 ‘53년 체제’란 개념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공통 지반’으로서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한국의 정전체제를 재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래서 ‘제네바 체제(1954)’나 ‘반둥 체제(1955)’와 함께  ‘판문점 체제(1953)’가 비교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적이고 특수한 ‘사례’의 고유명사에서 출발했지만, 그 저변에는 “근대적 자유주의의 변질과 냉전체제의 구축”이라는 세계사적 맥락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내셔널 히스토리’를 ‘글로벌 히스토리’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완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한국전쟁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가’에만 주목하는 것을 벗어나, ‘왜 우리는 아직도 전쟁의 연장선인 정전체제에서 살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가’라는 물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자와 후자가 만나서 공유할 수 있는 이론적 지평의 확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판문점 체제’란 유럽의 역사가 전쟁 과정을 통해 수립했던 ‘베스트팔렌 체제’부터 ‘베르사유․샌프란시스코 체제’처럼 냉전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평화 체제였다는 것이 저자의 인식이다. 저자는 오늘날에도 판문점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배경을 미국이 취하고 있는 국제 전략의 선회 속에서 인식한다. 냉전 초기에 미국은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통해 전쟁을 억제하려는 ‘홉스적 평화 기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면에서 중국에 추월당할 것이 우려되는 오늘날에는 다시 국제법이나 규범들을 강조하는 ‘칸트적 평화 기획’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례로서 저자가 들고 있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기를 수출하거나 보급하고 있는 미국이 주도하여 유엔에서 2013년 4월 ‘재래식 무기’ 수출을 억제하고 공동으로 관리하는 협약에 118개 회원국들이 서명한 사건이다. 과도한 비용이 드는 재래식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 첨단 무인 무기의 개발과 압도적인 정보력의 우위를 통해 국제 질서의 패권을 유지하면서, 칸트적인 수단도 적절히 활용하여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판문점 체제는 “그 협약에 찬성한 미국, 반대한 북한, 기권한 중국”의 태도에 의해 요동치면서도 굳건히 지속된다. 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첨예한 갈등 지대인 한반도는 주변 국민국가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체제는 평화를 지향하는 칸트적 기획과 홉스적 기획 사이의 갈등과 공존이라는 기묘한 관계로 유지된 ‘모순적 체제’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판문점 체제는 처음부터 국제법과 국제기구 및 여러 국가들의 기획과 협상의 산물이며, 당시에 해결되지 못했던 문제들이 현재까지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존속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인식 위에서 저자는 판문점 체제의 성격을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첫째, 6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불안하고 유동적인 임시 군사 정전 체제”이다. 판문점 체제는 국가 사이의 권력이 균형을 이룬 질서도 아닐뿐더러, 당사국 사이의 타협으로 체결된 불완전한 평화 협약 체제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지 주변 강대국들이 기존 질서에서 얻어 온 이해관계의 강박에 의존하며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국제적 보편성이 결여된 협소한 군사 동맹 체제”이다. 판문점 체제는 칸트식 국제 연방이 가지는 권위와 홉스식의 세계국가의 힘에 의존한 질서 구축이 모두 실패한 후, 더 이상의 소모전을 막기 위해 마련된 군사적 동맹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셋째, 자유주의적 제도를 물신화한 “냉전적 반공-자유주의 체제”이다. 판문점 체제는 정치 이념이자 공화국의 운영 원리로서의 자유주의에 의해 마련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우월한 문명론으로 격상시키고 다른 모든 대항․대안 이념들을 문명/야만의 이분법으로 배제하는 극우적 자유주의에 기초한 체제라는 것이다. 넷째, “동아시아 사회의 요구를 회피하고 유예시킨 탈정치적 군사․경제 질서”이다. 판문점 체제에서는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된 이후에 청산할 문제와 전후 처리할 문제 같은 한국전쟁 당시 표출된 다양한 갈등과 모순이 민주적 정치 과정으로 해결되지 못한 채 묵살되었고, 그것들은 단지 군사와 경제라는 특화된 기능에 근거한 양자 관계들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분리된 평화와 특수한 발전주의 기획의 상징”이다. 판문점 체제는 보편적 평화와 정의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양자 군사동맹 체제의 결탁이라는 아주 제한된 평화와 적대적이고 경직된 체제경쟁을 가속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결과물로서 판문점 체제의 이러한 성격은 이 체제가 서구 자유주의 사상에서 두 가지 평화 구축 모델인 칸트의 안정적인 영구 평화 체제도 아니고, 홉스 식의 국가 간 타협에 의한 불완전한 평화 협약 체제도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즉 국제 연방 체제의 ‘권위’에 근거하지도 않고, 패권국가의 ‘힘’이 수립한 체제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판문점 체제’는 유럽의 보편적 국제 질서와는 구별되는 오늘날 동아시아의 특수한 성격, 즉 저자가 ‘동아시아 패러독스’라고 지적했던 “지역 전반에 걸친 불안한 권력 균형 상태”를 확대재생산하는 원형이 된다. 그렇다면 현재의 불안하고 협소한 일시적 평화 상태를 좀 더 완성된 평화 체제로 전환하고,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판문점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목표는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에 대해 아래의 다섯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임시 군사 정전 체제인 판문점 체제는 전투의 부재를 의미하는 부정적 의미를 벗어나, 평화를 지향하고 적대성을 완화하는 긍정적 의미를 통해 적극적 평화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경쟁적 군사 동맹 체제 간 군비경쟁을 억제하기 위해 공동 안보 기구가 수립되어야 한다. 셋째, 탈정치적이고 일방적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 포괄적 합의에 기반한 동아시아 협의 체제가 필요하다. 넷째, 적대적이고 배제적인 냉전 자유주의 체제와 배제적 민족주의는 지양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외주의와 인정 투쟁을 넘어 평화와 정의의 보편성을 고양시켜야 한다.”

 

3. 한반도 분단의 극복과 동아시아의 실질적인 평화를 위해

이러한 인식 위에서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할 새로운 평화의 기준은 기존의 국제법과 국제기구의 권위에 의존하는 칸트적 방식이나, 내전에 대항해 안보를 강조하며 파워게임을 강조하는 홉스적 방식이 아니라고 진단한다. 이제 필요한 평화 전략은 “교류와 접촉을 통해 관계와 사회를 형성하고, 관계의 구조적 불평등을 극복하며 사회정의라는 가치의 달성을 지향하는 사회적 평화”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동안 ‘권위의 부재’를 통해 판문점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자유주의의 기만적 이념을 넘어서, 뒤르켐이 강조했던 ‘연대’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강력한 국가의 건설이나 보편적 국제법의 구축이 아니라, 사회 내부의 분업이 활성화되면서 발전하는 사회적 연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간의 갈등과 평화의 문제로 사태를 인식하는 ‘정치철학적 고려’에서 사회 자체에서 평화의 동력을 구상하는 ‘사회철학적 성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뒤르켐은 개인들을 규합하는 전통적 민족주의 또는 다른 집단의식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개인주의만으로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갈등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서로 연대 의식을 가진 기관들이 충분히 접촉하고 그 소통의 과정을 지속하면서, 공통의 규범을 형성해가면 어디에서도 ‘아노미’ 상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 내부의 연대를 강화하여 자연스럽게 완전한 평화를 요구하는 상태를 상정하는 뒤르켐에서 연유한 이 새로운 평화 전략은 한국전쟁이 초래한 판문점 체제의 ‘평화’가 얼마나 반사회적․반연대적인 것이었는지를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최종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시했던 “자유주의적 평화 추구에서 사회적 연대를 통한 평화 추구로 그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방향은 단지 한국전쟁의 종식과 한반도 분단의 극복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연대 네트워크’의 구축을 지향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뒤르켐을 빌려와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결국 국가 간 연대와 국가 내부의 사회 연대가 동시에 파괴되고 있으며, 국제적인 차원에서 지역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붕괴된 사회적 연대의 현실이 오늘날의 판문점 체제를 영구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만든다. 논자도 저자의 이러한 생각에 공감하며 남북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인식적 지평을 공유한다면, 남북이 그 동안의 이념적․제도적․무의식적 분단을 극복해나가는 진정한 통일에 다가갈 수 있고, 그 모든 통일의 과정이 동아시아 평화 구축과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변화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전망을 해본다.

물론 주지하다시피 유엔은 국제적 참전과 정전협상의 핵심적인 당사자이지만 60년 넘게 이 불안한 체제의 특성을 방치해왔다. 저자가 어느 인터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국인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하고 있지만 동아시아의 평화 구축을 위한 한국의 정전협상에 관한 유엔의 공식적인 해석은커녕, 향후 연구와 국제 활동을 위한 관련 자료의 취합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의 조건이다. 그래서 냉전 이후 끊임없이 지속된 미국의 국제관계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과 앞으로 더욱 첨예해질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을 고려하자면, ‘유엔을 통한 해결 노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과연 한국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는 의문스럽다. 앞으로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동시에 보면서 또 다른 국제관계의 굴레에 다시 종속된 채 한반도 평화 체제의 구축을 기대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보편적 평화와 보편적 정의에 대한 지향의 부족으로 인해 판문점 체제가 내포하고 있던 부정적 유산들이 고착화”되는 것을 우려하지만, 논자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한반도 문제에 관해 지금까지 한국에서 문제가 된 것은 아시아적 가치와 제도에 대한 보편적 차원의 인식이 부족했던 점이 아니라, 냉전시대의 종식 이후에도 한국정치외교사에 관해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재구성하기를 주저했던 주류 학계의 편협함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한쪽에서는 미국 중심적․의존적 시각을 보편적 관점으로 수용하는 입장이오히려 과잉되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과도하게 축적된 민족주의적 입장을 대항 담론으로 구축하게 되었다. 결국 전향적인 역사 인식이 국가의 실천적 지향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에 관한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물론 ‘특수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구적 차원으로 문제를 확장하기 위한 ‘보편성’의 추구가 자칫 또 다른 종속적 시각에 매몰될 우려가 있는 것은 비단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근대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문제 자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경험한 ‘근대’의 비극과 그것에서 연유하여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이 고난의 역사가 단지 우리 민족국가의 불완전함과 정치적 주체의 무능력함에서만 연유한 것이 아니라, 서구적 합리성이 내포하고 있던 역사적 모순들의 비극적인 중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은 한국의 미래 세대가 전 지구적 연대 속에서 추구해나갈 평화를 상상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자극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판문점 체제’라는 창을 통해 광복-분단 70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한반도가 그 동안 각자의 체제 유지를 위해 활용했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이데올로기의 근원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다소 단적으로 말하자면, 남북이 구축해 온 분단체제는 모두 판문점 체제, 즉 근대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실패가 폭로된 이 기이한 국제질서에 편승하고 기생한 결과였다. 서울시 한 가운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보듯이 그 동안 한반도의 두 국가는 평화가 아닌 전쟁을 기념하며, 공포와 증오의 정치, 안보에 대한 의존을 통해서 기존 체제를 존속시켜 온 사회였던 것이다. 평화를 전쟁의 가면쯤으로 여기는 것을 당연시해 온 남북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벗어나, 미래의 남북 지도자와 인민들이 가져야 할 진정한 ‘보편적 전망’의 출발은 한반도의 분단 문제가 단지 ‘통일로 인한 경제적 손익계산서’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평화 구축의 문제임을 자각하는 데 있을 것이다.

 

판문점 체제의 기원1

 

 

[시민대학강좌] 퇴계의 『자성록』과 일상의 마음공부

퇴계의 『자성록』과 일상의 마음공부

 

 

김정철(한국학중앙연구원)

유학에서 이해하는 마음

유학에서 마음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이번 시간에는 유학의 마음공부 경敬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경敬은 이미 『논어』 「헌문」편에서 군자의 덕목으로 언급됩니다.

 

자로(子路)가 군자(君子)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군자는 자신을 닦기를 경(敬)으로써 한다.” 자로(子路)가 물었다. “이와 같을 뿐입니까?” “자신을 닦음으로써 남을 편안하게 한다.” “이와 같을 뿐입니까?” “자기를 닦음으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하니, 자기를 닦음으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요순(堯舜)께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셨다.”

子路問君子, 子曰修己以敬. 曰如斯而已乎? 曰修己以安人 曰如斯而已乎? 曰修己以安百姓, 修己以安百姓, 堯舜其猶病諸.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 육이효六二爻에 공자가 말씀하기를 “군자가 경敬하여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워 밖을 방정하게 한다. 그리하여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德이 외롭지 않다.”

易坤之六二曰, 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

 

경敬은 유학의 마음 수양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학에서 마음을 중시하는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용』의 첫머리는 스케일이 크면서도 인간이 가야할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성性을 따르라는 말인데, 성을 따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잘 보존하고 함양해야 한다고 성리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하늘이 시키는 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中庸』 1장

 

유학자들은 마음을 매우 위태로운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위태로운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근거를 도덕적인 마음(道心)에서 찾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도덕적인 마음을 타고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마음은 위태롭고 도덕적인 마음은 미약하기 때문에 오직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기준을 가지고 중을 잡으라.”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書經』 「虞書 大禹謨」

 

– 심학도心學圖(자료 참고)

 

그냥 보면 상당히 낯설지만, 자세히 보면 유학이 왜 마음에 주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한 몸을 주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은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에도 수록되어 있는 심학도心學圖입니다. 이 그림은 이황이 직접 그린 것은 아닙니다. 심학도는 원나라 때 학자 정복심(程復心)이라는 사람이 유학의 경전에서 마음과 관련된 구절들을 정리하여 그림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정복심은 그림에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는 요점은 모두 경敬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 마음은 한 몸의 주재이고, 경은 한 마음의 주재이다. 배우는 자들은 ①주일무적主一無適의 설과 ②정제엄숙整齊嚴肅의 설, 마음을 수렴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③기심수렴-④상성성其心收斂-常惺惺의 설을 익숙하게 연구하면 공부함을 다하여 넉넉히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用工之要, 俱不離乎敬. 蓋心者, 一身之主宰, 而敬又一心之主宰也. 學者熟究於主一無適之說, 整齊嚴肅之說, 與夫其心收斂, 常惺惺之說, 則其爲工夫也盡, 而優入於聖域, 亦不難矣.

 

이 글에서 정복심은 유학에서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단 일상의 공부가 敬과 떨어져 있지 않음을 강조하고, 그 방법을 4가지로 나누어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그림 자체는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조선시대에 『심경부주』라는 책과 함께  언급되면서 선비들의 기본적인 마음 수행 교본이 됩니다. 특히 이황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경 공부를 중시했지요.

 

2. 『심경부주心經附註』와 『근사록近思錄』

경敬은 주자학의 전형적인 마음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敬을 중심으로 유학의 마음공부를 정리한 책은 앞서 보았던 『심경부주心經附註』입니다. 본래 『심경』은 중국 송나라 때 진덕수(眞德秀, 1178~1235)가 유교 경전에서 마음가짐 관련 구절들을 모아서 편집한 책입니다. 여기에 명나라 때 정민정(程敏政, 1445~1499)이 관련된 주석을 덧붙여 『심경부주』를 완성한 것입니다. 사실 주자(朱熹, 1130~1200)는 이 책을 전혀 몰랐다고 할 수 있지요. 오히려 주자가 직접 편집한 책은 『근사록近思錄』입니다. 근사近思라는 말은 『논어』 「자장」편에 나옵니다.

 

子夏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되 뜻을 독실하게 갖고, 간절하게 묻되 가까운 것부터 생각해 나간다면 인仁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子夏曰,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

 

이 구절은 공부하는 법을 말하고 있지만, 간절한 물음과 가까운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간절함은 직접적이고 가까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정말 눈앞에 보일 듯이 절실할 때 비로소 질문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가까운 생각은 바로 우리의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려보라는 것입니다. 배움이란 따로 장소가 있지 않으며,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곳에서 진행된다는 뜻입니다. 근사近思는 바로 유학의 일상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사록』은 주자가 친구인 여조겸과 함께 약 1년 동안 함께 편찬한 책입니다. 이 책을 지은 이유에 대해 주자는 서문에 “초학자들이 들어갈 곳을 모르게 될까 걱정이 되어, 학문의 대체와 관련되어 있으면서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을 선택하여 편찬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책은 주자가 직접 편찬한 유학의 기초 매뉴얼인 셈입니다.

 

3.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경敬공부

 

– 살아있는 마음, 달아나는 마음

마음은 반드시 몸속에 있어야 한다. 밖에 조금의 틈만 있어도 달아나버린다.

心要在腔子裏. 只外面有些隙罅, 便走了.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끝없이 두루 움직여 한 모퉁이에 막히지 않는다.

人心常要活. 則周流無窮, 而不滯於一隅.

 

-경敬공부의 실제

①주일무적主一無適

어떤 사람이 물었다. “경은 어떻게 공부해야 합니까?” 답했다.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좋다.” 계명이 물었다. “저는 마음의 생각이 전일하지 못한 것을 근심한 적이 있습니다. 때로 한 가지 생각을 아직 끝내기도 전에 다른 생각이 어지럽게 일어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했다. “좋지 않다. 이것은 성실하지 못함의 근원이 된다. 반드시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익숙해져서 전일하게 될 때 좋아진다. 생각할 때나 일에 대응할 때를 막론하고 모두 마음을 전일하도록 해야 한다.”1)

②정제엄숙整齊嚴肅

“엄격하고 위엄스럽고 근엄하고 삼가는 것은 敬의 道가 아니나 다만 敬을 지극히 함을 모름지기 이것(嚴威儼恪)으로부터 들어가야 한다.”2)

③상성성常惺惺

상채사씨(사량좌謝良佐)가 말하였다.“경敬은 항상 성성惺惺(마음이 깨어 있음)하게 하는 법이다.”3)

 

주자가 말했다. “성성惺惺은 바로 마음이 어둡지 않음을 이르니, 다만 이것이 곧 경敬이다. 지금 사람들은 경을 정제엄숙整齊嚴肅이라고 말하니, 참으로 옳으나 마음이 만약 어두워 이치를 봄이 밝지 못하면 비록 억지로 마음을 잡은들 어찌 경이라 할 수 있겠는가.”

朱子曰, 惺惺乃心不昏昧之謂, 只此便是敬. 今人, 說敬以整齊嚴肅言之, 固是, 然心若昏昧, 燭理不明,  雖强把捉, 豈得爲敬.                        『心經附註』 「敬以直內」장

 

4. 퇴계 이황의 일상과 경敬

–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

이황은 조선에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걸출한 학자입니다. 당시 조선은 유학 곧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출발했으나, 이때는 토착화하기 전이었지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士林들은 개혁을 시도했으나 이황의 나이 19세(1519년) 때 발생한 기묘사화로 개혁세력은 완전히 제거됩니다. 이황은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에 힘써 최고의 성리학자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학문에 대한 독실한 태도가 뒷받침되었습니다. 그는 나이에 상관없이 학문을 논하고 의견을 수정해나갔는데, 고봉 기대승과의 논쟁이 이러한 이황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또 이황은 사상적인 업적 뿐 아니라 제자 양성에도 매우 충실했던 교육자였다. 다음 시는 교육자로서의 자부심과 과거공부 위주로 돌아가던 당시의 풍경을 잘 보여줍니다.

 

늙도록 경서 연구하여 도를 듣지 못했으나 / 白首窮經道未聞

다행히 여러 서원 사문을 창도하였네 / 幸深諸院倡斯文

어찌 과거의 물결 온 바다를 뒤흔들어 / 如何科目波飜海

쓸데없는 나의 시름 구름처럼 부풀리나 / 使我閒愁劇似雲

 

-이황의 일상과 마음공부

① 이황이 말하는 일상- 끝없는 일들의 연속

이른바 널리 행해지는 일상생활이란 천 가닥 만 가지 갈래이어서 진실로 끝이 없습니다. 어버이를 섬기는 일로부터 만사 만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단하니, 이렇게 끝없이 다단한 것을 일일이 흡족하게 하는 것은 궁리와 거경의 지극한 공력이 없으면 끝내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의 학문하는 것을 보면 비록 밤낮으로 조심하고 노력하여 한 순간의 틈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4)

② 마음의 주인 되기의 중요성

마음은 사물이 이르기 전에 맞이해서도 안 되고, 사물이 사라진 뒤에 따라가서도 안 된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집주인이 항상 집에 머물며 주관이 되어서 집안일을 맡는다고 하자. 우연히 손님이 바깥에서 왔을 때 자신이 문정門庭에서 맞이하고, 떠날 때도 문정에서 전송한다면, 날마다 손님을 맞이하고 전송하더라도 집안일에 어떤 방해가 있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동서남북에서 손님이 어지럽게 올 때마다 직접 자신이 문정을 떠나서 멀리서 영접하고 가까이서 접대함을 쉬지 않고 분주하게 하며, 떠날 때 전송도 이렇게 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기 집은 도리어 주관할 사람이 없게 되어, 도적들이 들끓어 부서지고 황폐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딱한 일이겠는가?5)

③ 자연을 벗 삼아 즐기고 노래하는 일상

강산江山과 풍월風月은 천지 사이에 있는 공적인 것이다. 보고도 감상할 줄 모르는 자가 많다. 때로는 경치 좋은 곳을 차지하여 자기의 사유물로 아는 자가 있는데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6)

 

말을 타고 길을 갈 때 정서와 경치가 여기에 있다고 하자. 입으로 사물을 읊조리는 것은 이 몸과 마음이 사물을 응접하는 일이다. 경敬을 주로 하는 방법과 어찌 모순됨이 있겠는가? 독서할 때는 마음이 독서에 있고, 옷을 입을 때는 옷을 입는 일에 마음이 있는 것과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7)

<주석>

1) 或曰敬何以用功, 曰莫若主一. 季明曰昞嘗患思慮不定, 或思一事未了, 他事如麻又生, 如何. 曰不可. 此不誠之本也, 須是習, 習能專一時便好. 不拘思慮與應事, 皆要求一. 『近思錄』 「存養」

2) 曰 “嚴威儼恪, 非敬之道, 但致敬, 須從此入.” 『心經附註』 「敬以直內」장

3) 上蔡謝氏曰, “敬是常惺惺法.”

4) “但所云流行日用者, 千條萬緖, 儘無窮, 自事親以及萬事萬物, 儘多端, 以無窮處多端, 一一恰好, 非窮理居敬之極功, 卒難致之. 故觀古人爲學, 雖乾乾惕厲, 靡容一息之間斷.”

5) 來不迎, 去不追, 比如一家主人翁, 鎭常在家裏, 做主幹當家事, 遇客從外來, 自家只在門庭迎待了, 去則又不離門庭, 以主送客, 如是, 雖日有迎送, 何害於家計? 不然, 東西南北, 客至紛然, 自家輒離出門庭, 遠迎近接, 奔走不息, 去而追送, 亦復如是, 自家屋舍, 卻無人主管, 被寇賊縱橫打破蕪沒, 終身不肯回頭來, 豈不爲大哀也耶?     『退溪先生文集』, 卷28

6) 江山風月, 天地間公物, 遇之而不知賞者滔滔. 其或占勝, 而認爲一己之私者, 亦癡矣. 『退溪先生文集』, 卷23

7) 乘馬行路, 情境在此, 口占詠物, 卽此身心所接之事, 何疑於主敬之法乎? 此與讀書時在讀書, 著衣時在著衣者, 不見其有異也.  『退溪先生文集』, 卷28

 

 

[도봉도서관 강의]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1)

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1)

 

김우철(호원대 외래교수)

 

1. 자연의 성과 인간의 성

모든 생명체에게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 본능적 욕구가 있다. 하나는 식욕이고 다른 하나는 성욕이다. 식욕이 자신의 생명을 잘 유지하기 위한 욕구라면 성욕은 자신이 언젠가 죽더라도 그 전에 자신의 분신(유전자)을 남겨놓으려는 욕구이다. 그러므로 식욕이 개체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생존’ 욕구라면, 성욕은 개체의 생명을 증식하려는 ‘생식’ 욕구이다.

두 욕구는 생명체의 기본적인 욕구이므로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 말할 수 없다. 둘 다 생명 그 자체의 본성이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배불리 먹고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과 짝을 찾아 가족을 이루는 문제는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요소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의 두 측면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에게는 금세 한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식욕은 별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성욕 또는 성이다. 우리는 왜 ‘성’ 또는 ‘성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 자신도 모르게 불편해지고 민망해지는 것일까? 종족을 번식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기는커녕 모든 생명체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고, 나아가 매우 중요한 과제인데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성기’, ‘성교’, ‘성감대’ 같은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을 불편해 하는 것일까?

사실 성욕이 모든 동물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성욕만큼은 다른 동물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대단히 특이한 점을 많이 갖고 있다. 첫 번째 꼽을 수 있는 점이 바로 ‘생식’ 이외의 목적으로, 즉 쾌락(즐거움) 자체를 위해 성욕이 일고 성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생식’을 위한 욕구나 행위가 ‘생식’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셈이다. 그래서 인간은 피임도구를 사용하여 성행위를 하고, 특별한 발정기 없이 1년 열두 달 성행위를 하며, 신체 전부가, 그러니까 성기 말고도 입, 젖가슴, 항문, 귀, 목, 발 등의 다른 용도의 신체기관까지 모두 성적 쾌락을 위한 성감대로 바뀌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동물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흔히들 보통 사람들과 다른 특이한 성적 취향과 행위를 보이는 사람을 ‘변태’라고 부르지만, 자연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 자체가, 인간 전체가 ‘변태’인 셈이다.
 

2. 본능과 문화 사이에서

프로이트(S. Freud)로부터 라캉(J. Lacan)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의 흐름에서는 인간의 성을 순수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 본능적 요소가 모종의 정신 문화적 과정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변형된 결과라고 본다. 그러므로 ‘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라는 성적 정체성(sexual identity)의 문제와 ‘누구를 사랑(욕망)할 것인가?’라는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의 문제는 그 변형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경우 성적 주체와 성적 대상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신생아는 신체적으로는 남자 아니면 여자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신체의 차이가 마음의 차이를 저절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동물의 경우는 개체의 성장 이전이나 이후를 본능이 일관되게 지배하므로 신체적 성구분과 성적 지향성 사이에 간극이나 괴리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심리적’ 성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인간의 성을 이해하려면 이 점부터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성은 본능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다.

출처/ www.critical-theory.com

출처/ www.critical-theory.com

개인의 성적 특징, 곧 성적 정체성(: 주체)과 성적 지향성(: 대상)은 이른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발생과 해소라고 부르는 과정(일종의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결정된다. 인간이 태어났다고 해서 바로 ‘인간’이 되는 게 아니다. 몸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더라도 정신은 아직 사회 속에서 살아갈 문화적 소양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화적 능력은 기본적으로 언어 능력과 도덕/법 능력이다. 우선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떠받치는 토대이기에 언어를 모르고는 과학적 사고나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현재 우리가 지각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를 지각할 수조차 없다. 언어는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지표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할 뿐 아니라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언어가 있기에 도덕과, 법, 종교, 예술, 과학이 모두 가능해진다.

도덕/법 역시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결정적 지표이다. 단순히 ‘이롭다’와 ‘해롭다’의 구별이 아닌 ‘옳다’와 ‘그르다’, ‘선’과 ‘악’의 구별은 인간에게만 있는 현상이다. 인간은 본능만으로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도덕과 법, 윤리와 가치를 내면화하고 준수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언어 능력과 도덕/법 능력이 본능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아기의 신체와 두뇌 속에 생물학적으로 저절로 유전되고 전승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개인은 태어나면 이 두 가지 능력을 학습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아기의 부모는 그들이 속해 있는 보편적 문화의 대리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부모들과 생각과 행동이 다른 특수한 부모들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 성의 모든 비밀이 바로 이러한 특정한 부모 밑에서 특정한 아기가 언어와 도덕/법을 교육받는 과정 속에서 결정된다고 본다. 아기의 성(性)은 이 과정에서 과연 어떤 일을 겪는 것일까?

 
3. 정신적 미분리

아기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엄마다. 아기는 아빠의 정자와 엄마의 난자의 결합인 수정란으로 태어나지만,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수정란은 어디까지나 엄마 몸의 일부로만 존재할 수 있다. 엄마 몸 속에서 엄마 몸의 일부로 9개월여를 지내고 나야 비로소 엄마 몸으로부터 신체적으로 분리된다.

그런데 아이가 탯줄을 끊고 바깥세상으로 나왔다고 해서 엄마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아기는 눈도 못 뜨고 목도 가누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무능하기 때문에 엄마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아기의 생존을 돌봐야 한다. 먹여 줘야 하고 따뜻하게 해 줘야 하고 배설을 잘 하도록 보살펴야 한다. 아이는 엄마와 몸이 분리되어 있긴 하지만, 어떤 면에선 여전히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정신적인 면에서 그렇다.

이제부터 우리는 말도 못하고 생각할 줄도 모르는 아기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지 아기의 마음 속으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아이는 눈도 뜨지 못하고 목도 가누지 못할 뿐 아니라,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엄마인지도 모른다. 이 같은 자기 의식과 대상 의식은 언어를 어느 정도 습득하고 나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고차적 인식 능력이다. 아이의 정신은 맨처음에는 백지와도 같아서 아무것도 구별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이 하나로 뒤엉켜있는 ‘혼돈’으로부터 시작한다.

아이는 정신적으로는 백지 상태이지만, 물론 신체적으로는 최소한의 기능을 갖고 있다. 아이는 배가 고프면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지르고 목청껏 운다. 그러면 엄마의 젖가슴이 바로 입 속으로 들어오고 세상에 둘도 없는 달콤한 먹거리가 제공된다. 아이가 눈을 뜰라치면 앞에는 늘 다정한 두 눈빛이 빛나고 있고, 또 부드러운 목소리가 끊임없이 아이의 귓전을 맴돈다. 그뿐이 아니다. 엄마는 아이를 꼭 껴안고 입맞춰 주며, 기저귀를 갈거나 목욕을 시키면서 아이의 온몸을 끊임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준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이런 경험 속에서 (엄마의) 젖가슴, 시선, 목소리, 입술, 손길 등을 자기 자신과 구별하지 못한 채 그저 ‘하나의’ 일체로 느낀다는 점이다. 즉 엄마와 자신을 구별할 능력이 없기에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엄마로부터 분리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의 정신은 언제, 어떻게 엄마로부터 분리되는 것일까?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8

영혼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만질수도 없고 기억할 수도 없는

머나먼 고향의 길을 찾아가는

검은 새의 바람은 향기롭다.

자신이길 거부하는 날개짓은 고요하여

여전히 태양을 향해가는 식지 않은 열정으로

암흑속에 가물가물 춤을 추고 있다.

영원히 지지않는 깃털은

가볍게 흐르는 그의 생명을 불어 넣는다.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시대와철학2015-10

 

[시민대학강좌] 정도전의 『불씨잡변』과 유학

정도전의 『불씨잡변』과  유학

 

김정철(한국학중앙연구원)

 

1. 정도전의 불교비판 배경

– 시대배경

불교는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1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반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다양한 변신을 거듭하며 토착화되어 있었지요.

어떤 나라든, 망할 무렵이 되면 각종 폐단이 드러납니다. 고려 말기에 나타난 불교의 폐단은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본래의 정신에서 벗어나 토지를 겸병하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불교는 더 이상 제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신진사대부들은 이런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대안으로 유학, 정확하게 말하면 성리학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위진남북조와 수-당대를 거친 뒤 송나라 때 성리학이 성립하던 배경과도 유사합니다. 성리학 역시 불교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지만, 성리학자들은 강력하게 불교를 배척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주자의 학문은 이러한 노력의 종합적인 결실이었던 것이지요. 특히 남송 시대에 주자는 당시 정신적인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군사적으로 거란과 여진에게 밀려 송나라가 남쪽으로 쫓겨나고, 사상적으로는 불교의 위협을 받고 있었지요.

그럼에도 정작 성리학은 송나라 때에는 크게 유행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거짓학문으로 몰려 위기에 처할 정도였으니까요. 성리학은 송나라를 지나 원나라 때 전체적으로 정리되면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고려의 신진사대부들이 본격적으로 접한 성리학은 바로 원나라 때 정리되었던 성리학이었죠.

주자를 비롯한 학자들이 불교를 강력하게 비판했던 이유는 단순히 이단을 배척하고자 했던 의지 뿐 아니라, 실제로 당시 사회 전반에 불교가 유행하고 있었고 폐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폐단을 눈앞에서 봐야만 했던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이 이런 배경을 지닌 성리학에 주목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2. 『불씨잡변』 읽기

① 불씨잡변?

부처의 잡소리? 부처의 여러 주장에 대한 비판!

– 1398년 정도전이 죽기 몇 달 전에 저술한 마지막 작품.

유학자 정도전의 면모를 이론적으로 살펴볼 수 있음.

②윤회론 비판

– 유학의 입장을 대변하다

“사람과 만물이 생겨나고 또 생겨나 그치지 않는 것은 바로 천지의 조화가 운행하여 그침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태극에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어서 음양이 생겨났고, 음양이 변하고 합함에 따라 오행이 갖추어졌다. 무극과 태극의 참됨과 음양오행의 정수가 묘하게 합하여 엉기면서 사람과 만물이 계속 생겨나고 생겨난다. 이렇게 이미 생겨난 것은 가서 지나가버리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와서 계속 이어지니, 이 가는 것과 오는 것 사이에 한순간의 정지도 용납되지 않는다… 하늘과 땅 사이는 거대한 용광로와 같아서 만물을 낳기도 하지만, 만물이 모두 녹아 없어지기도 한다. 어떻게 이미 흩어진 것이 다시 합하여지며, 이미 간 것이 다시 올 수 있겠는가?”1)

– 정도전의 윤회설 비판

부처는 “사람은 죽어도 그 정신은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다시 몸을 얻어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윤회설이 흥기했다…불교의 윤회설에서 보면 혈기가 있는 모든 것은 스스로 정해진 수가 있어 오고 또 가고, 가고 또 가도 그 총합은 다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이 창생하는 것이 도리어 농부가 이익을 내는 것보다 못하게 된다. 또 혈기를 가진 생물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조수 어별 곤충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수에 일정함이 있다면 이것이 늘어나면 저것은 반드시 줄어들고 이것이 줄어들면 저것은 반드시 늘어날 것이며, 일시에 다 줄어들 수도 없고 늘어날 수도 없을 것이다.2)

– 불교의 입장

불교에 따르면 인간은 흙, 물, 불, 바람(地水火風) 4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또 육체를 지니면서 감정을 느끼고 생각을 하며,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식별해낸다. 이것을 ‘오온(五蘊)’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죽으면 그 정신은 없어진다. 다만 오온만이 남아 이것이 이전 생에 지은 업(業)의 힘에 따라 다음 생에 전달될 뿐이다. 불교는 유교와 세계관이 다르다. 이 세상에만 생물들이 있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세계는 훨씬 넓기 때문이다.

③ 불교의 인과론-업보(業報) 비판

– 어떤 이의 질문

“그런데 사람 중에는 지혜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어질지 않고, 가난하고 부유하고, 고귀하고 비천하고, 장수하고 요절하는 차이가 있네… 하늘이 만물을 낳음에 하나하나에 명을 부여함이 어찌 이렇게 치우쳐서 고르지 못할까? 이로써 보면, 살아있을 때 지은 선악의 업에 보응이 있다고 한 부처의 말에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3)

– 정도전의 반박

“불교의 주장처럼 화복과 질병이 음양오행과 관계없으며 모두 인과적 응보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우리 유가의 음양오행 이론을 버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설로 사람의 화복을 예측하고 치료하는 사람이 어째서 한 사람도 없는가? 불교의 주장이 황당하고 오류투성이어서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아직도 미혹되어 있는가?”4)

– 유학에 다시 질문하기

유학에서 음양오행에 따라 설명하는 방식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겪는 불평등과 모순을 음양오행의 순환에 따른 우연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유학에는 이러한 불균형을 맞출 수 있는 자기수양을 강조하는 것이다. 똑같이 선한 본성을 타고났지만, 기질의 차이로 각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유학자들은 본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기질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④ 불교의 자비를 비판하다.

– 유학의 입장을 대변하다

“인(仁)의 마음은 육친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람과 사물에까지 순차적으로 베풀어진다. 이는 흐르는 물이 첫 번째 웅덩이에 가득 찬 후에야 둘째, 셋째 웅덩이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그 근본이 깊으면 그 미치는 바도 심원하다. 나의 인애가 미치지 않는 천하의 사물은 없다.”5)

– 불교를 비판하다

“하지만 불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동물에 대해서는 승냥이나 호랑이 같은 맹수나 모기 같은 미물에 자기 몸을 뜯어 먹혀가면서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가리지 않고, 배고픈 자에게는 밥을 먹이려 들고, 추위에 떠는 자에게는 옷을 입히려 드니, 이른바 보시(布施)이다. 그런데 부모 자식 같은 지극히 가까운 관계나, 군신같이 지극히 공경하여야 할 관계에 대해서는 반드시 끊어버리려 하니, 과연 이것이 합당한가?… 자기 부모형제 보기를 길 가는 모르는 사람 보듯이 하고, 공경해야 할 바를 쓸모없는 것 대하듯이 하니, 이미 그 근본을 잃어버린 것이다.” 6)

⑤ 불교가 인륜을 훼손하는 것에 대해 논변함.

명도선생이 말씀하셨다. “도 밖에 사물이 없고 사물 밖에 도가 없다. 하늘과 땅 사이 어디를 가도 도가 없는 곳이 없다. 부자(父子) 간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친함에 도가 있고, 군신(君臣) 간에는 군주와 신하의 구별이 엄격함에 도가 있다. 부부와 장유와 붕우 간에도 각각의 도가 있으니, 도는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불도가 인륜을 훼손하고 사대(四大-불교에서 말하는 수상행식受想行識)를 버리니, 도에서 떨어져 멀어졌다고 하겠다.” 또 “그들의 말과 행위가 두루 미치지 못함이 없지만, 실제로는 윤리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하였으니, 선생의 지적이 지극히 옳다.7)

– 정도전의 입장에서 보다

이 글은 정도전이 확고한 주자학자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배의 글을 인용하여 자신의 설에 힘을 보태는 것은 유학자의 오래된 전통이기도 합니다. 불교가 인륜을 무너뜨린다는 비판은 유학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했습니다. 유학자에게는 지금 보이는 현실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당연히 깨달음을 얻고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를 해야 하는 불교의 모습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3. 『불씨잡변』의 의미와 한계

『불씨잡변』은 당시에 불교를 가장 체계적으로 비판했던 책이었지만, 완벽한 이론비판서는 아니었습니다. 불교가 생겨나게 된 역사적인 맥락을 무시하거나 이론적인 비판에는 무리한 부분이 있었죠. 그렇다고 해서 정도전의 비판과 개혁정신을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씨잡변』은 현실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와 열정이 낳은 결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정도전은 불교에 정통한 사상가가 아니라, 철저한 유학자이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분투했던 사람이었죠. 그가 지적했던 불교의 문제점들은 모두 현실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전개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1) 人物之生生而無窮, 乃天地之化, 運行而不已者也. 原夫太極有動靜而陰陽生, 陰陽有變合而五行具. 於是無極太極之眞, 陰陽五行之精, 妙合而凝, 人物生生焉. 其已生者往而過, 未生者來而續, 其間不容一息之停也…天地間如烘爐, 雖生物, 皆銷鑠已盡, 安有已散者復合, 而已往者復來乎.

2) “佛之言曰, 人死精神不滅, 隨復受形, 於是輪廻之說興焉…今以佛氏輪廻之說觀之, 凡有血氣者, 自有定數, 來來去去, 無復增損, 然則天地之造物, 反不如農夫之生利也. 且血氣之屬, 不爲人類則爲鳥獸魚鼈昆蟲, 其數有定, 此蕃則彼必耗矣, 此耗則彼必蕃矣. 不應一時俱蕃, 一時俱耗矣.”

3) “或曰, 子言人物皆得陰陽五行之氣以生, 今夫人則有智愚賢不肖, 貧富貴賤壽夭之不同…天之生物, 一賦一與, 何其僞而不均如是耶.  以此而言釋氏所謂生時所作善惡, 皆有報應者, 不其然乎.”

4) “信如佛氏之說, 則人之禍福疾病, 無與於陰陽五行, 而皆出於因果之報應, 何無一人捨吾儒所謂陰陽五行, 而以佛氏所說因果報應, 定人禍福, 診人疾病歟? 其說荒唐謬誤無足取信如此, 子尙惑其說歟.”

5) “仁心之所施, 自親而人而物, 如水之流盈於第一坎而後達於第二第三之坎, 其本深, 故其及者遠. 擧天下之物, 無一不在吾仁愛之中.”

6) “佛氏則不然, 其於物也, 毒如豺虎, 微如蚊蝱, 尙欲以其身餧之而不辭, 其於人也, 越人有飢者, 思欲推食而食之, 秦人有寒者, 思欲推衣而衣之, 所謂布施者也. 若夫至親如父子, 至敬如君臣, 必欲絶而去之, 果何意歟?…視至親如路人, 視至敬如弁髦, 其本源先失.”

7) “明道先生曰, 道之外無物, 物之外無道, 是天地之間, 無適而非道也. 卽父子而父子在所親, 卽君臣而君臣在所嚴, 以至爲夫婦爲長幼爲朋友, 無所爲而非道,  所以不可須臾離也. 然則毀人倫去四大, 按四大受想行識, 其分於道遠矣. 又曰, 言爲無不周徧, 而實則外於倫理, 先生之辨盡矣.”

 

 

[서평]고조선 역사가 없으면 한국사도 없다: 윤내현이 쓴 『고조선연구』

‘고조선 역사가 없으면 한국사도 없다.’ – 신채호 선생

:윤내현이 쓴 『고조선연구』

 

나태영(한철연 회원)

 

이 책은 900쪽이 넘는 책이다. 그런데도 현재 고등학교 『한국사』 고조선 부분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다. 『한국사』 고조선 부분은 4쪽에 불과하다. 고조선 관련 참고도서는 통사 몇 권에 불과하다. 왜 이리 되었을까? 바로 지금 주류 강단사학자들이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내현은 원래 중국 상고사 공부를 했다. 공부하다가 고조선 관련 사료를 자주 보게 되었다. 현재 주류 사학자들이 받아 들이는 내용이 크게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류 사학계에 자극을 주려고 『한국고대사 신론』이란 책을 출판했다. 하지만 주류 사학계는 그가 제기한 문제를 귀담아 듣지 않고 그를 미친 놈 취급했다. 이런 까닭으로 중국상고사 전문가 윤내현은 한국상고사 곧 고조선 전문가가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우리나라 역사 책 중에서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이라는 이름이 맨 처음 사용되었다. 일연은 단군조선만을 고조선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혼란을 피하기 위해 고조선은 단군조선에 대한 이름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옳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고조선과 똑같이 보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서쪽 변경지대인 난하 하류 동부유역만을 차지했다.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서쪽 변경지대인 난하에서 대릉하에 이르는 지역만을 차지했다.
 

고조선 나라 수명이 서기전 2333년〜서기전 108년까지라고 말한다. 위만조선이 서기전 108년에 망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옳지 않다. 위만조선이 망할 때도 고조선은 훨씬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며 나라를 유지하고 있었다. 위만조선의 영토는 난하에서 대릉하까지였다. 고조선은 서기전 108년이 아니라 서기전 100년 전후까지 유지된 나라이다. 고조선은 위만조선이 망한 서기전 108년부터 고조선 제후국이었던 부여가 독립국이 된 시기 사이에 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부여가 독립국이 되었던 해는 서기전 59년이다. 따라서 고조선이 망한 시기는 서기전 108년〜서기전 59년으로 봐야 할 것이다.
 

1. 여섯 가지 조선 윤내현 선생님은 중국 역사 기록물에 나오는 조선을 여섯 가지로 나눌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1) 고(단군)조선
(2) 고조선 안에 있는 고조선 직할국(진국: 단군왕검께서 직접 다스린 땅, 지금의 요하부터 청천강 까지, 대조영이 발해 세울 때 진국이라 나라 이름 지은 것은 고조선 직할국 진국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기자조선(난하 동부유역)
(4) 위만조선(난하〜대릉하)
(5) 한사군의 낙랑군 조선현(난하 동부유역: 『한서漢書』 「지리지」 <낙랑군> ‘조선현’조를 보면 조선현에 대해서 동한의 학자 응소가 이리 주석을 달았다.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낙랑군의 조선현에 주 무왕이 기자를 봉했다는 것이다.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한 시기는 서주 초인 서기전 12세기 말 즈음이었고 한사군이 설치된 것은 서기전 108년이었다. 따라서 한사군의 낙랑군 조선현은 기자가 망명했던 곳이라는 뜻이다. 기자조선 영토는 난하 동부유역이었다. 따라서 한사군 낙랑군 조선현은 난하 동부유역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나라 역사 책『진서 晉書』 「지리지」 <낙랑군> ‘조선’조에 ‘(조선현)은 서주가 기자를 봉했던 땅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6) 고조선이 무너진 뒤 단군 일부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후한서』「동이열전」 <고구려전>에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천 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남쪽은 조선,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맞닿아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기록은 동한시대에 고구려 남쪽에 조선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 조선은 고구려와 국경이 맞닿아 있고 그 남쪽에 있었다. 때문에 그 위치나 영토 넓이로 봐서 고조선과 다른 조선임이 확실하다.) 중국 역사 기록물을 읽을 때 조선이 몇 번째 조선인지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 관련 유물/ 출처: www.koreaikultura.hu

고조선 관련 유물/ 출처: www.koreaikultura.hu


 
세 가지 요동(遼東)
 
고대 요동의 위치를 올바르게 알아야 고조선 서쪽 국경선을 올바르게 알 수 있다. 고대인들에게 요동이 어느 곳이었는지 그 이후 요동이 어찌 옮겨졌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 중국 기록물에 나오는 조선을 여섯 가지로 구분해 봐야 하듯이 요동에 대해서도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로 구분해 봐야 한다. 앞으로 한국 상고사 책 읽을 때 요동이라는 땅 이름이 나오면 주의 깊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1) 난하로부터 동쪽 지역
(2) 요하로부터 동쪽지역
(3) 중국 행정구역 요동군

 
(1) 난하로부터 동쪽 지역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난하로부터 동쪽 지역이었다. 지금의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위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대에 요수(지금의 난하)라는 강 이름이 먼저 생기고 그 강 이름을 기준으로 하여 요동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그들 영토의 동쪽 끝을 극동(極東: 동쪽 맨 끝 땅)이라는 뜻으로 요동이라 불렀다. 요(遼)라는 한자를 한자사전에서 찾아보면 첫 번째 뜻이 ‘멀다’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그들 영토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 땅을 요동(遼東)이라 불렀다. 요동은 그 대부분이 중국 영토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2) 요하로부터 동쪽지역
 
오늘날의 요동은 지금의 요하(遼河)로부터 동쪽지역을 말한다. 이것은 요동이라는 땅 이름이 동쪽으로 옮겨갔음을 뜻한다. 요수(遼水)도 두 가지가 있다. 전국(전쟁나라)시대, 진제국시대와 서한 초기까지는 요수가 지금의 난하였다. 동한시대(23년)부터 요수는 지금의 요하(遼河)이다. 따라서 동한시대 이전에 요동은 난하로부터 동쪽지역이었다. 동한시대부터 요동은 지금의 요하로부터 동쪽 지역이다.
 
(3) 중국 행정구역 요동군
 
『후한서』「동이열전」과 진수가 쓴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吏傳)」의 <고구려전>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맞닿아 있었다.’
동한시대 이후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지역에 있었는데 고구려가 요동으로부터 천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이 기록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 기록에서 요동은 중국 행정구역인 요동군을 말하는 것이다. 서한 무제 때에 서한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요수라는 강 이름과 난하로부터 동쪽 지역이었던 요동이 동쪽으로 옮겨갔다. 지금의 요하로부터 오른쪽 지역으로 옮겨간 것이다. 하지만 행정구역인 요동군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지금의 요하로부터 동쪽 지역이었던 요동에 있었지만 중국의 행정구역인 요동군으로부터는 동쪽으로 천리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조선은 고조선 무너진 뒤 고조선 왕족 포함 일부 세력이 살던 나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행정구역이었던 요동군은 난하 하류유역 일부에 불과했다. 『한서(漢書)』 「장진왕주전(傳)」에는 번쾌가 노관의 반란을 평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곡군, 우북평군, 요동군, 어양군을 평정하고 장성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요동군이 장성 안의 중국 영토였음을 말해 준다. 이 장성은 진시황제 때 쌓은 장성이다. 이 장성은 서쪽으로부터 지금의 난하를 가로질러 갈석산에 이르렀다. 따라서 요동군은 장성 안 쪽, 즉 갈석산 서쪽의 난하 유역에 있었다. 위만조선과 국경이 맞닿아 있었다.
 
여섯 가지 조선과 세 가지 요동을 구별할 수 있으면 21세기 한국상고사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시민대학강좌] 공자의 『논어』와 일상

공자의 『논어』와 일상

 

김정철(한국학중앙연구원)

 

1. 일상 언저리의 사상, 유학

한 번이라도 『논어論語』를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합니다. 경전이라고 알고 읽었는데, 별로 경전답지 못하다는 반응도 있고, 주로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다면서 시시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논어』는 왜 경전이 되었을까요? 바로 유학에서 성인(聖人)으로 높이는 공자의 행동과 가르침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선비들은 『논어』를 읽으면서 성인의 가르침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논어』에서는 공자가 제자들과 예禮, 정치, 경제부터 음악과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해 묻고 답하고 있습니다. ‘논어論語’라는 제목 자체가 묻고 답하는 형식의 어록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간단히 공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공자는 약 기원전 6세기 춘추시대 말기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거의 2500년 전에 살았던 셈이지요. 노魯나라 곡부 창평향昌平鄕 추읍鄹邑에서 태어난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 위나라 등을 떠돌다가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아버지 숙량흘은 지역의 낮은 관리였고, 어머니 안顔씨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고 전해집니다. 좋은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란 사람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공자는 키가 9척 장신에 머리모양이 울퉁불퉁했다고 합니다. 공자의 이름이 구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자는 중니仲尼로 그가 둘째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는 재정을 담당하는 벼슬(委吏) 등을 지내기도 했지만 공자는 무엇보다 배우고 익혀서 다양한 제자들을 길러내는 역할에 충실했던 좋은 선생님이었습니다. 논어의 처음도 배움에 대한 예찬으로 시작됩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또 공자는 스스로 자신의 일생을 몇 마디 말로 요약하기도 합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學問)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스스로 섰고(自立), 마흔 살에 의혹(疑惑)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天命)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고, 일흔 살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法度)를 넘지 않았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

이 부분은 얼핏 나이가 듦에 따른 깨달음의 과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성인으로 불리었던 사람이었지요. 아마 누구나 이렇게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지요. 이미 성인의 경지에 있었던 공자가 굳이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이야기한 이유는 제자들에게 나아갈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일상과 일생에 비추어 생각해봐도 이 구절은 쉽게 지나칠 부분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목표를 정하고 꿋꿋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며 살고 있는지 반성해 볼 기회를 주고 있지요. 천명을 안다는 말이나 귀가 순해진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에는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능력은 아닙니다.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각각의 성격과 상황에 맞는 가르침을 주었던 이유는 일상 속에서의 배움과 노력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2.  <논어>속의 일상 직접 읽어보기

– 도道는 일상 속에 있다.

중궁이 인仁에 대해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집 문을 나가서는 큰 손님을 대하듯 하고,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하고,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야 한다. 나라에 있어서도 원망이 없고 집에 있어서도 원망이 없어야 한다.” 중궁이 대답하였다. “제가 비록 명민하지 못하지만, 이 말씀을 실천해보겠습니다.”

仲弓問仁, 子曰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 仲弓曰雍雖不敏, 請事斯語矣.

인仁은 공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인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잘 모르겠다는 말도 하지요. 대신 구체적인 예를 통해 인이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바로 위 인용문이 대표적입니다. 집 문을 나서고, 백성을 다스리며,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은 모두 선비의 일상에 해당합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집 밖으로 나가 각자 일을 하고, 사람들과 만나 어울리는 일이 모두 일상에 해당하겠지요. 공자는 이러한 일상 곳곳에서 인仁을 실천하라고 가르칩니다.

큰 손님 대하듯이 한다는 말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함을 나타내고, 제사를 받드는 태도는 엄숙하고 신중해야 하죠.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은 논어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입니다. 역지사지의 태도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일상의 모든 공간이 인仁의 실천 무대인 셈이지요. 공자는 인仁의 경지를 특별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도 계승됩니다. 하지만 제자들 사이에도 생각의 차이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차이는 다음 인용문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자유가 말하였다. “자하의 문인 젊은이들은 물 뿌리고 쓸며 대답하고 답변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을 담당하면 잘 한다. 그러나 지엽枝葉(사소한 일)이니, 근본을 보면 볼만한 것이 없다. 어찌할꼬?”

子游曰, 子夏之門人小子, 當灑掃應對進退, 則可矣. 抑末也, 本之則無, 如之何?

자하가 이를 듣고 말하기를, “아, 자유가 지나치구나! 군자의 도가 무엇을 우선하여 전할 것이며, 무엇을 나중으로 미루어 게을리 하겠는가? 초목에 비유하면, 구획을 그어 구별하는 것과 같으니, 군자의 도가 어찌 속임이 있겠는가? 처음도 있고 끝도 있는 사람은 아마 성인이시겠지.”

子夏聞之曰, 噫. 言游過矣. 君子之道, 孰先傳焉, 孰後倦焉? 譬諸草木區以別矣, 君子之道焉可誣也? 有始有卒者, 其惟聖人乎.

‘물 뿌리고 쓸며 대답하고 답변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은 유학자들의 매우 기초적인 행동수칙입니다. 주로 처음 학문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교육하는 내용이었지요. 자하는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을 실천을 강조했지만, 자유는 자하의 제자들이 시시하고 사소한 일에 얽매여 근본에 다가서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학에서는 일상의 사소한 일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자하는 자유의 지적을 정면으로 받아칩니다. 일상의 사소한 일과 근본(道/仁)의 체현은 선후를 나눌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런 공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길을 넓히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子曰, 人能弘道, 非道弘人.

도(道)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일상과는 거리가 먼 근본적인 원리 혹은 진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도의 실천은 오직 사람을 포함한 사물들을 통해야만 가능합니다. 공자의 말은 바로 실천의 주체인 사람을 강조한 것이죠. 일상의 실천을 벗어나지 않는 공자의 가르침은 유학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중국의 풍우란(풍우란)이라는 학자는 다음과 같은 『중용』의 구절을 인용하여 유학의 핵심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군자(君子)는 덕성(德性)을 높이고 학문(學問)으로 말미암으니, 광대(廣大)함을 지극히 하고 정미(精微)함을 다하며, 고명(高明)을 다하고 중용(中庸)을 따르며, 옛 것을 잊지 않고 새로운 것을 알며, 후(厚)함을 돈독히 하고 예(禮)를 높이는 것이다.

君子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 敦厚以崇禮.

이 문장에는 일종의 대구가 있습니다. ①덕성(德性)을 높이고 학문(學問)으로 말미암으니, ②광대(廣大)함을 지극히 하고 정미(精微)함을 다하며, ③고명(高明)을 다하고 중용(中庸)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덕성은 하늘이 부여해준 선한 본성을 뜻합니다. 학문은 배우고 익히는 학습의 과정이지요. 유학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②와 ③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무엇이 광대하고 정미하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길(道)을 뜻합니다. 이 길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야할 길이고, 끝없이 펼쳐져 있기에 광대합니다. 하지만 직접 이 길을 걷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한발씩 내딛는 순간순간의 노력이 필요하겠죠. 이것을 정미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③도 비슷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풍우란은 불교, 도교와 비교하면서 일상을 떠나지 않으면서 근본적인 원리(道)를 추구하는 것이 유학의 특징이라고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유학은 일상의 철학이며 사상인 셈입니다.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7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나를 매끄러운 지렁이의 틈사이라 불러도 좋고

나를 볼록해진 손가락이라 불러도 좋고

나를 한켠에 저릿하게 비어있는 이불이라 불러도 좋고

나를 가슴에 비어있는 노래라 불러도 좋다

그래서 텅 빈 나는 다시 채우는 빈 나이다.

 

김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크기변환_이시대와철학2015-8 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