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침묵하는 시대 [시대와 철학]

2017년 정유년 새해를 맞이하여 각오를 다짐하는 한철연의 신년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두 편의 시평을 연달아 게재합니다.  이 두 편의 글은  모두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학술지 [시대와 철학] 27권 4호에도 동시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신년회에 참석하시기 전 미리 한번 읽어오시면, 함께 토론하며 한철연의 앞길을 의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신이 침묵하는 시대

 

이병창(동아대학교 명예교수)

 

1) 이행의 시기
최근 이 나라에서 미증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의 길거리에 무려 200백만 명의 시민이 모여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얼마 전에는 미국에서 트럼프가 정권을 거머쥐고 말았다. 그는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이단파 출신이라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연합을 파괴하는 그렉시트, 브렉시트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전자는 불발로, 후자는 작은 미동에 그쳤다.
이 모든 사건들이 지진의 고리처럼 연이어 발생하니, 그 밑에 거대한 지진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자아낸다. 아직은 예진에 그치지만, 이것이 앞으로 얼마나 큰 지진으로 발전하게 될지 사람들은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한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탄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황혼과 여명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는 것일까? 지나가는 시대라면 신자유주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 그럴 것 같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신자유주의가 비틀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시대는 설렘보다는 당혹감이, 기쁨의 노래보다는 오히려 절망의 비명이 더 크게 들리고 있다.
도대체 이런 대지진 끝에 어떤 세계가 도래할 것인가, 예측은 어렵지만, 추측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헤겔은 역사가 ‘규정적인 부정(die bestimmte Negation)’에 의해 지나간다고 한다. 그것은 앞의 시대가 총체적으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앞의 시대를 지배했던 핵심 규정이 부정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앞의 시대가 지닌 지배적인 규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다가오는 시대가 어떤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2) 신자유주의 경제적 위기
그렇다면 우선 신자유주의 시대부터 검토해보자. 대체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가?
1986년 수립된 WTO체제는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을 알리는 징표가 된다. 흔히 WTO체제는 자유무역 체제라 간주되며, 전 세계가 자유무역을 통해 하나로 통합된다고 찬양되고 있다. 소위 국가를 넘어선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아름다운 환상이 신자유주의를 미화해 왔다.
자유무역 체제라는 측면만 본다면 WTO체제가 굳이 그 이전의 국제통상체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굳이 신자유주의 시대로 새롭게 규정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특별하게 규정한다면 그 이유는 WTO체제가 가진 다른 고유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 특성은 무엇인가? 바로 금융자본의 재갈이 풀렸다는 것이다. WTO체제는 개별 국가가 자본의 출입에 대해 가하는 모든 규제를 철폐하도록 했다. 특히 국제 금융자본은 주로 개도국에게 강력한 금융개방을 요구했으니, 개도국의 자본시장 즉 증권과 채권시장이 국제금융자본의 새로운 먹이가 되었다.
그 후 세계는 글로벌리제이션, 세계화라는 환상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동안 은밀하게 활동을 전개하던 금융자본이 자신의 전모를 폭로하게 된 것은 그 뒤 20년이 지난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였다. 이 사건을 통해 폭로된 금융자본의 행태를 보면 한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금융사기라고 말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금융자본은 대중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채권을 미리 할인해서 다시 자본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 자본으로 다시 돈을 빌려주고, 이런 식으로 되풀이 하여 가공자본을 늘렸다. 이런 가운데 악성채권이 우후죽순 생겨났으며, 이런 악성채권을 양성채권 속에 끼워 넣어 패키지로 팔아먹었다. 그 결과 엄청난 가공자본을 창출했으니, 모든 것의 목적은 엄청난 금융수입이었다. 이 금융수입은 제조업이 사라진 미영 금융제국의 부를 증식시켰다.
이 간단한 금융사기 뒤에는 여러 가지 부대조건이 있었다. 우선 금융자본으로부터 돈을 빌린 채무자는 누구인가? 미영 금융자본은 이미 가진 자본으로 자국 내에서 부동산 투자에 나섰다. 자국 내에서 은행이 투자할 만한 성장가능성 있는 기업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이 부동산 투자에 나서게 되자 부동산의 가격이 상승되었다. 미영의 일반 대중들도 덩달아서 여유의 돈을 여기에 투자했고 나중에 가서는 금융자본으로부터 빚을 내서 부동산에 투자하게 되었다. 부동산 가격의 폭등 때문에 대중은 자신의 투자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은행 역시 자신이 획득한 채권이 얼마나 악성인지 알지 못했다.
한편으로 금융자본은 대규모 이익을 얻었고 이를 통해 소위 금융자본에 종사하는 노동자 역시 혜택을 보았다. 그러나 금융자본이 부동산에 투자되고, 자국의 제조업을 기피하는 동안 국제 금융제국의 국내 제조업이 몰락했다. 남은 국내용 기업의 일자리도 상대적으로 열악하기 짝이 없었으니, 자국의 노동자를 스스로 기피했다. 그 자리를 찾아 이주노동자가 급증했다.
그럼, 미영 금융제국이 획득한 가공자본은 어디에 투자되었는가? 미영 금융자본은 자국에 투자를 기피하면서 개도국에 투자했다. 이런 투자는 제국주의 시대처럼 개도국에 직접 공장을 건설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투자는 주로 개도국의 증권 및 채권 시장이라는 자본시장에 투자되었다.
개도국으로서는 부족한 자본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국제 금융자본의 자본이 저절로 굴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개도국 자본은 쉽게 대자본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수출산업을 육성했다. 수출산업 종사 노동자들은 성장하는 수출산업 덕분에 생활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국제 금융자본이 이윤율이 높은 수출 산업에 투자되는 동안 국내의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하청기업화하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중소기업 제품은 또 다른 개도국에서 쏟아져들어 오는 값싼 제품들과 경쟁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으니, 금융제국과 유사한 결과가 나타났다. 여기서도 중소기업은 몰락하면서 중소기업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도국 자본이 일정 정도 성장하면 이윤율이 떨어지게 되어 있고 그러면 자동적으로 금융자본이 빠져나가면서 다른 이웃 개도국에 투자되기 시작한다. 이제 개도국은 이중으로 위기에 빠진다. 한편으로 자본이 빠져나가며 다른 한편으로 이웃 개도국과 경쟁이 격화되면서 기존의 수출 산업조차 무너지고 총체적 경제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3) 신자유주의 정치적 위기
결국 이 국제 금융사기는 언젠가 터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이 2008년 미국 금융위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어느새 8년이 지났지만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미국 국민이 세금으로 금융자본의 손해를 보충함으로써 일단 봉합될 수 있었으나 이제 위기는 국가로부터 착취당한 대중으로 전가되고, 경제적 장을 넘어서 정치적인 장으로 확산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브렉시트이고 미국의 트럼프 당선이다. 이런 정치적 사건들이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위기와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정치적 영역에서 전개된 특이한 계급 대립구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대립을 일반화하자면 미국이나 영국이나, 전통적으로 대립의 축을 이루던 보수와 진보라는 틀이 깨졌다는 것이다.
보수는 두 파로 나누어졌다. 보수의 주류는 국제 금융자본을 옹호하는 세력이다. 이에 대항하여 보수의 이단파가 등장했다. 이 파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 자국 제조업의 보호, 이주노동 반대 등을 외친다. 이 이단파의 주요 지지 기반은 자국의 제조업의 부활을 꿈꾸는 몰락한 제조업 자본가 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보 역시 두 파로 나누어졌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진보의 주류는 이미 영국의 토니 블레어나 미국의 빌 클린턴 등으로 대표되는 세력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옹호하면서 주로 금융산업에 종사하는 고급전문 노동자층에 기반을 둔다. 이에 대립해서 진보 좌파가 부활했다. 진보좌파는 몰락한 전통 제조업을 그리워하는 실직자, 남아 있는 국내용 기업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층을 바탕으로 하면서 주로 복지 담론을 중심으로 재규합된 세력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과거 계급연합은 프랑스 혁명 이래 혁명적 공화파와 노동계급의 연합이며 흔히 인민전선 또는 민주진보 연합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 연합세력이 독점부르주아 세력과 대항하는 것이 전통적인 계급대립 구도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이 연합이 깨졌다. 이제 새로운 계급적인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보수 주류와 진보 주류가 금융자본과 신자유주의 옹호라는 입장에서 서로 가까워졌다. 반면 보수의 이단파와 진보좌파 세력이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입장에서 서로 가까워졌다.
더구나 이런 새로운 계급 대립구도에서는 진보좌파의 세력도 쉽게 보수 이단파의 주장에 협력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트럼프가 당선된 배경에는 아마 샌더스를 지지했던 세력이 트럼프를 지지한 결과도 한몫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영국의 브렉시트가 가결된 배경에도 노동당 좌파 즉 코빈 지지 세력이 노동당 주류인 블레어 세력에 대립해서 오히려 브렉시트를 암암리에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계급 대립의 현상을 보자면, 그 바탕에 신자유주의가 일으킨 변동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의 본산인 영국과 미국을 금융자본 중심으로 재편시켰다. 그 결과 국내 전통 제조업은 몰락했으며, 해외로 이전했다. 금융자본 종사자에게는 초과이윤이 배분되었고 그들은 금융자본의 존속에 사활을 걸었다. 반면 전통 제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는 몰락하면서 이들은 차라리 인종적 색채가 다분하지만 자국의 제조업을 보호하자는 보수 이단파에 협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4)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위기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몰락하면서 문화 이데올로기적인 지형도 변화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등극했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과거 근대 자유주의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자유의 개념에 기초한다. 즉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자유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근대적 자유주의가 일정한 정도 사회현실의 법칙적 제약을 인정하는 반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자유에 대한 어떤 제한도 인정하지 않고 무제한적인 자유를 긍정한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은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적 현실을 전제로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사회는 파편화되면서 한 사회의 차원에서 어떤 법칙적 제약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니, 무제한적 자유가 긍정된 것이다.
철학적으로 본다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를 정당화하는 여러 철학적 이론이 그 사이에 발전되었다. 대표적이 논리가 바로 푸코나 데리다가 중심이 된 후기 구조주의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적 인식을 강조하면서 이 구조가 사회문화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더구나 하나의 텍스트에는 다양한 구조가 중첩되어 있어서 서로 알레고리적인 관련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이런 후기 구조주의에 이르게 되면 객관적 진리나 가치도 사라질 뿐만 아니라 전기 구조주의에 남아 있던 칸트적 보편과학조차도 사라지고 만다.
이런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이론에는 독일의 하버마스나 미국의 존 롤스가 미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즉 인권에 기초하여 재구성하려 하였다. 사회적 제도는 모두 합의에 기초하는 것이어야 하며 다만 이런 합의가 공정하고 또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이론을 전개하고 롤스는 공정한 합의의 조건으로서 무지의 베일을 제시했다. 이미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위기가 폭로되기 전에,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무엇보다도 자유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다. 자유라는 개념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자유이다. 하지만 이런 자유선택은 다만 머릿속에서 그치는 자유가 아닐까? 정말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 의문이다. 왜냐하면 욕망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변덕스러운 힘이다. 욕망은 자연발생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배하면서 그가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한다. 욕망의 힘은 의지를 통해 실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속 사유 자체도 지배하고 만다. 즉 욕망의 힘은 마치 그것이 마음속으로 자유롭게 원한 것이라는 자기기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사실은 변덕스러운 자연의 힘에 의해 강제된 것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는 환상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자유 개념이 가지고 있는 이런 한계는 자유가 무제한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에 이르면 더욱 노골화된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유행하는 가운데 오히려 파시즘적인 폭력과 외적인 침략이 난무했다는 것은 미국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라크 침략이 미국이 욕망이었으며, 백인 경관의 흑인 살해가 또 미국의 욕망이었다.

5) 박근혜 정권의 몰락
브렉시트나 트럼프 당선이란 신자유주의 경제적 붕괴를 알리는 경고이다. 이 경고는 신자유주의의 축이라할 금융제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한국과 같은 개도국에서도 출현했으니, 그것이 곧 박근혜 정권이 몰락하게 된 근본 원인일 것이다.
그동안 금융자본의 지배 아래 한국은 소위 수출 산업 중심으로 또한 10대 산업(전자, 자동차, 조선 등)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수출 산업은 국제 금융자본이 요구하는 이윤율을 달성하기 힘들어졌다. 이미 국제금융자본은 한국의 증권, 채권 시장을 버리고 중국으로 이동하면서 한국은 성장하는 중국산업과의 경쟁에 밀려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 조선산업과 해운산업에 밀어닥친 구조조정, 해고의 바람이 바로 그 증상이라 하겠다.
이런 수출산업의 위기는 노동자의 대량실업을 가져왔으니, 이것이 정치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차적 현상이 지난 총선에서 영남수출산업 벨트에서 새누리당의 몰락이었다. 영남의 대체세력인 민주당은 수출산업을 옹호하는 노동자층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리고 수출산업 중심 발전에서 배제된 중소기업과 농민 역시 한미 FTA 이후 지속적으로 분노감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국민의 당이 부상한 기반이다. 이 두 세력은 모두 재벌 중심 새누리당 세력에 반발했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지지와 반대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상호 대립적이니 분열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지진은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또 하나 거대한 지진이 폭발했으니, 그게 바로 이번 박근혜 정권의 몰락이라 하겠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은 최순실의 국정농단이라는 엽기적인 사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분노를 부채질한 감정적 원인에 속할 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재벌과 권력의 유착관계이다. 사태의 본질은 재벌이 생존을 위해 권력의 보호를 요청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그만큼 재벌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더구나 박근혜 정권이 벌린 그 이상한 문화산업이란 것도 사실은 10대 수출산업의 몰락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호도하기 위한 권력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이제 한계에 처한 수출산업은 이미 획득한 부를 달리 사용할 데가 없었다. 이 부는 거의 대부분 부동산으로 투자되었다. 박근혜 정권 시대 부동산 거품은 생활비용을 앙등시켰으니, 이미 대중은 여름에 전기값조차 지불하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대중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대적 박탈감에 더욱 시달려야 했다. 이런 여러 원인들이 겹겹이 충첩된 가운데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국민의 이런 분노를 폭발시켰던 것이라 하겠다.
차라리 박근혜 개인의 실정이나 최순실의 국정농단 때문에 박근혜가 몰락했다면 이는 일시적이고 정권의 교체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위기가 근본적으로 한국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단순한 정권교체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6) 철학의 시대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이후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아무도 새로운 시대가 어떤 시대가 될지 알지 못한다. 다만 더 이상 금융자본의 국제적 지배라는 체제는 사라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금융자본의 지배가 사라진 이후, 과연 브렉시트나 트럼프가 원하듯이 국제 금융제국은 자국의 산업, 제조업을 회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렉시트를 포기하고 국제 금융자본의 지배체제 아래서 재생하기 위해 노력하는 남유럽 국가들을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그리스, 포르투갈, 이태리는 과연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그 어느 것도 불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한때는 복지담론으로 우르르 달려갔다가, 또 한때는 안철수 식 공정성장이 각광을 받다가 또 한때는 다시 박정희 식 경제개발이라 해서 이명박, 박근혜를 향해 달려갔다. 그 어느 것도 희망을 보여주는 것은 없으니, 국민의 절망은 더욱 깊어졌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이 시대는 과거 20세기 초 반복되는 경제공황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던 시대와 마찬가지 시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했고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런 시대는 바로 묵시록에 예고된 신이 침묵하는 시대이다. 이 침묵 그리고 그 앞에서의 절망감은 항상 파시즘의 온상이 된다. 이미 브렉시트나 트럼프를 보면 파시즘적인 인종주의가 상당히 위협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이미 박근혜 정부 초기에 국민들에게 종북몰이라는 현상으로 이런 절망감이 표출된 바가 있다.
다행히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진 것만은 틀림없다. 이 기회는 보수가 정권을 잡은 브렉시트나 트럼프와 달리, 민중이 주도가 된 혁명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남유럽 국가들처럼 다시 신자유주의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때야말로 다가오는 존재의 소리를 경청하는 철학자와 시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 곁에서 빛나는 별 2화 [정순야의 청춘웹툰]

(e)시대와 철학의 웹툰 시리즈 제 2화. 정순야의 [청춘웹툰]  ‘우리 곁에서 빛나는 별’ ~ 우리 시대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선과 시선이 전 정말 좋네요. 앞으로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참고로 본 웹툰의 저작권은 전적으로 작가 본인에게 있으니, 함부로 허락없이 무단 전재하시면 안됩니다.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서울 시민청 강좌]-2

강의 2 :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강지은 (건국대 강사)

소비없는 세상은 상상불가능하다. 소비를 주도하는 유행의 본질에 대한 분석과 쇼핑을 통해 얻는 자유와 구속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해본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의 <편지13>, <편지16>, <편지17>, 참조

<참고>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3> 신용카드로 얻은 자유
<편지16> 유행에 관하여
<편지17> 쇼핑하라!

<차례>
1. 옷장에 옷은 가득한데 왜 항상 입을 옷이 없을까요?
2. 쇼핑하세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3.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고 ‘더 열심히 일해라’

1. 옷장에 옷은 가득한데 왜 항상 입을 옷이 없을까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입니다. 입을 옷이 없습니다. 진짜 옷이 옷장이나 서랍에 없는 게 아닌데 입을 옷이 없습니다. 도대체 이건 뭔가요.
아마도 그 이유는 유행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딱히 유행에 민감하지 않아도 저런 생각을 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다니는데 나 혼자 나팔바지를 입고 지하철을 탔다고 생각해보세요.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죠. 아마 그 날 하루는 굉장히 마음이 불편할 겁니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하지만 돌아오는 지점이 정확하게 같지는 않습니다. 살짝 변형이 되어 돌아오죠. 예전에 유행했던 나팔바지가 다시 유행한다고 예전 바지를 꺼내 입고는 못돌아다닙니다. 색상이든 바지폭이든 무언가 변형되어 돌아왔기 때문이죠.
저는 진짜 유행이란 걸 쫒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철마다 돈써야죠, 신경써야죠. 가뜩이나 팍팍한 삶에 유행이란 건 도대체 무엇이길래 우리를 괴롭게 할까요.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행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하여 재미있게도 물리학에서 꿈꾸어왔지만 포기했던 기계장치인 ‘페르페투움 모빌레 Perpetuum mobile’를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페르페투움 모빌레란 스스로 유지되서 영원히 움직이는 기계장치인데요. 물리법칙에서는 불가능한 기계장치죠. 기계장치란 저항을 만나면 추가적으로 외부에서 동력을 제공해주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 기계장치의 원리가 사회학으로 넘어오면 실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영역이 바로 ‘유행’이라는 것입니다. 유행은 영원할 것이라는 거죠.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게오르그 짐멜은 인간의 너무도 강력한 인간의 두 가지 욕구나 열망들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처럼 문제가 되는 두 가지 인간의 욕구나 열망들이란 바로 ‘보다 큰 전체의 부분이고자 하는 열망’과 동시에 ‘개성이나 독특성을 추구하려는 욕구’, 이 두 가지를 의미한다. 무언가에 소속되어 일체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꿈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꿈, 또한 사회적인 지원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자율성에 대한 강한 욕망, 모방하려는 충동과 동시에 구분되려 애쓰는 충동말이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그 안전에 대한 욕구뿐 아니라 그 맞잡은 손을 다시 놓아 버리려는 자유에 대한 욕구도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짐멜이 말한 대로 “유행이란 사회적인 평준화를 추구하는 경향과 개인적인 톡특성을 추구하는 경향 사이에서 타협을 보장하는 독특한 삶의 형태이다.”….. 사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타협은 ‘안정된 상태’일 수 없다. …….그 타협은 절대 그대로 가만히 유지될 수 없기에 반드시 영구히 재협상되어야 한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6> 142쪽.
짐멜이 말하고자 하는 유행의 본질은 어찌보면 모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너무나 핵심을 짚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을 입든 절대 남들보다 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늘 염색을 하지만 튀는 색을 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백화점에서 예쁜옷을 골라서 사입었지만 그 옷을 나만 샀을리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하철을 탔을 때 건너편에 앉은 사람과 똑같은 옷을 입은 나를 발견하면 굉장히 기분이 안 좋습니다. 개성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유행이란 그 사이에 존재합니다.

“더는 그 무언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계율도 바로 “항상 새롭고 가장 최근에 인기를 끄는 그 무언가에 머물러야 한다!”라는 계율만큼이나 반드시 꼼꼼하게 살피고 열심히 지켜야만 한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6> 142쪽.

바로 이것입니다. 작년에 사입은 옷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새로 산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2. 쇼핑하세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많이 들어본 멘트이시지요?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저는 마음이 급해집니다. 주로 TV홈쇼핑에서 쇼호스트들이 하는 방송멘트인데 아주 높은 톤으로 외쳐댑니다. 화면의 방송마감 시계는 몇 분 안 남았습니다. 카드를 꺼내서 결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제가 햄릿이 된 듯한 기분입니다. 삶의 고뇌가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때로는 몇 분 남았는데 완판! 글자가 화면 가득 뜹니다. 아차, 안타까운 순간입니다. 쇼호스트들은 시청자들에게 영원히 만날 기회가 없음을 섭섭해하며 다음 상품 방송으로 몇 분 일찍 넘깁니다. 몇 번 이런 경험을 한 TV홈쇼퍼들은 중독구매 혹은 강박구매 증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TV홈쇼핑 같은 경우 텔레비전을 보면서 물건을 구경하고 감정이입하고 상상하는 시간이 시청자로 하여금 굉장한 만족감을 줍니다. 사실 직접 물건을 만질 수도 없고 고를 수도 없는데 그보다 더한 선택의 기회를 받은 듯한 착각을 하게 되죠. 쇼핑의 만족감은 어디까지일까요. 결재를 하는 순간 끝입니다.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는 계속 홈쇼핑을 시청하고 계속 결재를 해야 하는 중독증상을 보이게 되는 것이죠. 백화점의 명품 쇼핑이라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성들의 선망인 명품가방의 만족감은 얼마나갈까요. 구경하고 고르고 결재하고 집에 들고 가서 한 일주일 정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상품의 만족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쇼핑을 하는 상품들이 과연 치약이나 비누 쌀처럼 사용가치가 있는 것들 뿐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는 명품가방, 예쁜 그릇처럼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기호가치를 충족시켜주는 것들을 더 많이 소비하면서 살아갑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입니다. 소비지상주의사회입니다. 9.11테러 이후 미국이 부시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보낸 첫 메시지는 “다시 평상시처럼 쇼핑하는 일로 되돌아가라”였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가라는 요청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좀 더 분석적으로 생각해보면

쇼핑이 모든 고통이나 불행을 치유하고 그 어떤 위협도 물리치고 밀쳐내며, 그 모든 기능 불량 상태도 수리하는 방법, 곧 아마도 유일무이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분명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아마도 쇼핑몰을 정기적으로 돌아다니는 일이야말로 이러한 모든 근심거리들에 대한 해결책일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7> 150쪽.

현대인에게 쇼핑몰이든 시장이든 백화점이든 쇼핑하러 돌아다니는 일은 일상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면 TV나 스마트폰이 우리의 쇼핑을 도와줍니다. 게다가 요즘은 쇼핑할 때 내가 돈을 쓴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 세상이 왔습니다. 마트나 백화점에서 쇼핑할 땐 직원에게 신용카드를 건네주고 단말기에 카드를 긁는 모습이나마 보기라도 하지요. 스마트폰 결제시스템은 그저 등록해놓은 카드의 비밀번호만 누르면 일사천리로 결제가 이루어집니다. 복잡하게 일일이 카드 고유 넘버나 카드 뒷면의 세 자리 숫자 따위를 누를 필요조차 없습니다.
카드 결제를 마치는 순간 쌓여있던 근심걱정도 눈 녹듯 사라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스트레스 날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에 따라올 또다른 스트레스는 애써 외면합니다. 모두 무엇인지 아시죠? 바로 카드 결제일입니다.

3.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고 ‘더 열심히 일해라’

예전에 신용카드가 우리의 지갑을 채우기 이전을 기억하시지요? 물건을 구입하려면 현금을 꺼내서 대금을 지불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돈쓰는 재미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돈 버는 재미도 있었지요. 월급을 봉투에 받던 시절을 지낸 분도 있으실겁 니다. 두툼한 월급봉투의 맛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를겁니다. 그 땐 무엇을 구입하든 쉽게 턱턱 구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갑을 열어서 현금을 꺼내야했기 때문이었죠. 또 지갑에 현금이 없으면 무엇을 구입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후반 신용카드가 등장한 이후 소비의 패턴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지갑에서 현금이 사라지고 당장 현금이 없어도 물건을 구입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공식적으로 전 국민이 빚지고 사는 세상이 된 것이죠. 카드광고가 텔레비전을 도배하다시피 했는데 그중에서 인상깊었던 광고멘트가 바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였습니다. 기억나시죠? 카드 광고들을 보면 사람들이 스포츠와 레저를 즐기고 멋진 식당에서 식사를 합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여유있는 시간도 보내죠. 사랑하는 사람에게 깜짝 파티도 해주더군요. 그것이 모두 카드 덕분이라네요. 그렇다면 카드로 미리 선결제하고 나중에 지불했을 텐데요. 만약에 통장에 잔고가 없다면 다른 카드에서 돈을 빌려 갚는 돌려막기라도 해야 합니다. 수입은 한정되어 있는데 무리한 지출을 한 모양입니다. 이번 달은 대리운전이라도 해서 결제하지 못한 부분을 메꿔야하겠네요. 돌려막기할 카드가 없는 사람은 카드를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지갑엔 보통 서너 장 이상의 카드가 꽂혀 있지요.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카드로 즐긴 당신은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되어 사회생활이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비패턴이 언제부터 시작될까요. 신용카드를 처음 발급받은 때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아이들도 비슷한 전처를 밟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신용카드로 우리는 자유를 얻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만 결코 자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에는 빚지고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모두가 빚지고 사는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시기에 단지 ‘살기 위해 대출 받는 사람들’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일까? 바로 사람들이 가장 취약한 시기, 다시 말해 유년기에서 성인으로 탈바꿈하는 시기야말로 이러한 일이 벌어지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이다. …… 바로 이러한 시기야말로 대출회사가 이들의 약한 정곡을 노려 공략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이다. 아직은 성숙하지 않은 젊은이의 머릿속에 심어져 있던 이 세상의 지도에서 부모들이 차지하던 자리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부업자들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부모 자리를 대신해서 슬며시 그 젊은이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다.
…….
게다가 이런 젊은이들이 대출회사의 공략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하는 다음과 같은 상황도 한 몫을 한다. 점점 더 많은 나라에서 대출회사가 각 나라 정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 이에 따라 각 나라 정부들은 학생들이 그 어떤 학과나 학부를 선택하든지 간에 모든 단과대학이나 종합대학에서 ‘신용거래와 관련된 생활기술’을 이론과정 뿐 아니라 실습과정으로도 배울 수 있게끔 필수 교과과정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더구나 이제는 어느 정도 공부를 하려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어느 정도는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지만 말이다. 그런 식의 학자금 대출은 받기 쉽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분명 잘못될 여지가 많으며 더구나 되갚기 쉬운 듯이 매력적으로 유혹하지만 결국에는 기만적인 속임수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보통 평균적인 학생이라면 여학생이든 남학생이든 간에 엄청난 빚을 떠안은 채 학업을 끝마치게 되며, 조만간 그 누구라도 다른 수많은 대학 졸업자들과 마찬가지로 빚이 쌓여 도저히 되갚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깨닫게 될 거시이다. 더구나 떠안게 된 그 빚이란 것도 실상 대출 받은 돈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더 많은 빚을 져야만 할 것이라는 사실만을 의미할 뿐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3> 114~116쪽.

현대사회는 소비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존재할 수 없는 사회입니다. 오죽하면 일부 사회운동가들이 ‘Not Buy Day’운동을 외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면 소비하지 않고 살기는 그저 공허한 외침일 뿐입니다.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궁리를 여기저기서 하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농사도 짓고 벌도 키우는 실험도 하더군요. 세상은 소비의 천국, 선택의 자유가 있는 자본주의 사회인 것은 맞지만 내손에 쥔 돈이 없을 때 이곳은 지옥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텅빈 지갑 때문에 힘겹습니다. 이제 다른 시스템을 궁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발췌번역)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6 [내게는 이름이 없다]

5. 칼리가리(Caligari)

<칼리가리박사의 밀실 Das Cabinet des Dr. Caligari>을 지은 두 작가 중 한 명인 체코인 한스 야노비츠(Hans Janowitz)는 프라하-현실이 꿈과 뒤섞이고 꿈이 공포의 영상으로 변해버리는 바로 그 도시에서 자랐다. 1913년 10월의 어느 오후 이 젊은 시인은 자기를 매혹시킬만한 훌륭한 미모와 예절을 갖춘 소녀를 찾아다니며 함부르크의 어느 축제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축제마당의 텐트가 레퍼반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그 곳은 선원들에게 세계 최고의 쾌락을 선사하는 장소 중 하나로 이름난 곳이었다. 레더러(Lederer)의 거대한 비스마르크 동상이 홀스텐발 거리 근처에서 항구에 들어선 배들의 보초를 서고 있었다. 예의 그 소녀를 찾아다니는 와중에, 야노비츠는 희미한 웃음소리를 따라 홀스텐발 거리에 인접한 어두컴컴한 공원으로 들어갔다. 젊은 남자를 유혹하는 데에는 확실한 효과를 내던 이 웃음소리는 관목숲 어느 즈음에서 사라져버렸다. 이 젊은이가 자리를 뜨자, 조금 있다가 덤불 어딘가에 그때까지 숨어있던 또 다른 그림자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예의 그 웃음소리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스쳐가는 이 기이한 그림자를 야노비츠는 언뜻 보았다. 그는 보통의 부르주아처럼 보였다. 어둠이 그를 다시 삼켜버렸고, 더 이상은 보기 힘들었다. 다음날 지역 신문의 커다란 머리기사에 다음과 같이 났다. “호스텐발가의 무시무시한 성범죄! 소녀 게르트루드… 살해당해.” 게르트루드라는 소녀는 축제마당의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느낌에 사로잡힌 야노비츠는 이 희생자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한다고 느꼈다. 추도식에서 그는 갑자기 그때까지 체포되지 않은 그 살인자를 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의심하고 있던 사내 역시 그를 알아본 듯했다. 그 사내는 덤불 속의 그림자, 바로 그 부르주아였다.

<칼리가리>의 공동 저자 칼 마이어(Carl Mayer)는 오스트리아의 지방 도시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과학적’ 도박꾼이 되고자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부유한 사업가가 되었을 것이다. 한창 때의 그는 틀림없는 ‘시스템’으로 무장한 채 자기 재산을 팔아치우고서는 몬테카를로로 떠났다. 몇 달 후 그는 파산한 채로 그라츠에 다시 나타났다. 이 편집광적인 아버지는 열여섯 살의 칼과 세 살 아래 동생 앞에 파산의 스트레스를 부여안고 나타났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소년에 불과했던 칼 마이어는 세 아이들을 책임져야 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기압계를 팔고 합창단에서 노래도 부르다가 야외극장의 단역 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점점 무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떠돌이 생활 동안 그가 찾아다니지 않은 무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온갖 경험으로 가득했던 이 시기는 훗날 영화 시인으로서의 그의 경력에서 큰 쓸모를 발휘하였다. 1차 대전이 시작되자, 청소년이었던 그는 뮌헨의 한 카페에서 힌덴부르크의 얼굴을 담은 엽서를 그리면서 생활을 꾸려갔다. 야노비츠의 기록에 따르면, 전쟁 이후 그는 자기의 정신 상태를 반복적으로 검사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마이어는 자기를 담당하던 군대 내 고위 정신과 의사에 대해 격심한 분노를 품고 있었던 듯하다.

전쟁이 끝났다. 갑작스러운 전쟁 발발로 인해 보병 연대의 장교로 근무하고 있던 야노비츠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당국에 대한 증오로 인해 투철한 평화주의자로 돌아왔다. 그는 절대적 권위는 그 자체만으로 나쁘다고 느꼈다. 베를린에 정착한 그는 칼 마이어를 만났고, 이제까지 글이라고는 한 줄이라도 써 본 적 없는 이 별난 젊은이가 자기와 혁명적 기질과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챘다. 이런 기질과 관점을 영화에 표현하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베게너의 영화에 심취했던 야노비츠는 이 새로운 매체가 강력한 시적 계시를 빌려줄 수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청년의 의지로 이 두 친구들은 마이어가 정신과 의사와 벌인 정신적 투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야노비츠가 홀스텐발가를 어슬렁거리며 경험한 모험에 대해 끝없이 토론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이야기들은 서로의 기억과 이미지를 북돋워주거나 보완해주었다. 이 짝궁은 이런 토론을 하다가 휘황찬란하고 떠들썩한 칸트 거리의 축제 마당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느껴 밤거리를 거닐곤 했다. 그곳은 번쩍이는 정글이었고 천국이라기보다는 지옥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두려움을 결핍에 대한 공포로 바꿔버렸던 사람들에게는 천국이었다. 어느 날 저녁, 마이어는 야노비츠를 자기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소극에 끌고 갔다. ‘인간인가 기계인가’라는 제목의 소극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기적같은 용력을 얻은 사내를 출연시켰다. 그는 마치 최면이 걸려있는 듯이 행동하였다. 가장 이상한 일은 그가 불길한 예감에 빠지도록 관객의 넋을 빼앗는 말을 해가며 묘기를 부린다는 사실이었다.

무릇 창조적인 일들은 모든 요소들을 전체적인 하나로 통합하는데 필요한 단 하나의 경험이 덧붙이는 순간에 이르게 만든다. 그러한 경험을 제공했던 것은 이 장사의 신비로운 풍모였다. 이 쇼를 본 날 밤에 두 친구는 <칼리가리>의 원안을 처음으로 마음속에 그려보게 되었다. 그들은 이후 6주 동안 시나리오를 썼다. 야노비츠는 각자 맡을 부분을 나누면서 자신은 “씨앗을 뿌린 아버지로, 마이어는 그것을 품어 키워낸 어머니”로 칭하였다. 막판에 작은 문제 하나가 발생하였다. 이 작가들은 마이어가 전쟁 동안 만났던 일생일대의 적수를 원형으로 삼아 만든 주인공의 이름을 무엇으로 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스탕달의 알려지지 않은 편지』라는 희귀 도서가 해결책을 제공하였다. 야노비츠가 이 책을 훑어보는 동안 그는 스탕달이 전쟁터에서 복귀하자마자 밀라노의 라스칼라 극장에서 칼리가리라는 이름의 장교를 만났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 이름을 보자 두 작가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들의 이야기는 네덜란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부 독일의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의미심장하게도 홀스텐발이다. 어느 날 회전목마와 소극으로 이루어진 박람회가 이 마을로 찾아든다. 그 중에는 이 소극을 공연하는 안경 쓴 괴이한 남자 칼리가리박사와 그것을 광고하는 세자르가 있다. 칼리가리는 공연 허가를 위해 시청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박사는 거만한 관리에게 험한 대접을 받는다. 다음날 아침 이 관리는 자기 방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박람회의 즐거움을 즐기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의사의 딸 제인과 사랑에 빠진 두 대학생 프란시스와 알란은 수많은 구경꾼들을 따라 칼리가리 박사의 천막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똑바로 세워진 관에서 걸어나오는 세자르를 구경한다. 칼리가리는 오싹해하는 관객들에게 이 몽유병자가 앞일에 대한 물음에 답할 것이라고 말한다. 흥분한 상태에서 알란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살 것 같은지 묻는다. 세자르는 입을 연다. 그는 무시무시한 최면력을 내뿜는 주인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답한다. “새벽까지.” 새벽녘에 프란시스는 자기 친구가 예의 관리와 똑같은 방법으로 칼에 찔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칼리가리를 의심하던 이 대학생은 그의 수사를 도와주십사고 제인의 아버지를 설득한다. 수색영장을 지닌 두 사람은 칼리가리의 마차에 강제로 밀고 들어가 최면술을 그만두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들은 한 여인을 살해하여 체포된 범죄자에 대한 조사에 참석해 달라는 요구로 경찰서에 소환된다. 그는 연쇄 살인마의 혐의에 대해 미친 듯이 부인하는 중이다.

프란시스는 계속해서 칼리가리를 염탐하고, 해가 저물자 창문을 통해 마차 안을 몰래 들여다본다. 그러나 세자르가 관 속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있다고 그가 잘못 생각하는 동안, 세자르는 제인의 침실에 침입하여 잠든 그녀를 칼로 찌르려다가 가만히 그녀를 보고서는 단검을 내던진다. 비명을 질러대는 제인을 팔에 안고 그는 지붕을 넘어 길거리로 도주한다. 그녀의 아버지의 추격을 받은 그가 제인을 땅에 떨어뜨리자, 그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반면에 이 고독한 납치범은 기진맥진해있다. 프란시스는 자기가 본 것과 전혀 다른 사실을 주장하는 제인으로 인해 수수께끼를 풀고자 칼리가리를 두 번째로 찾아간다. 그와 동행한 두 경찰관이 관과 같이 생긴 상자를 압수하자 프란시스는 거기서 예의 몽유병자와 똑같이 생긴 인형을 끄집어낸다. 경찰이 방심한 틈을 타서 칼리가리는 도망치는 데에 그럭저럭 성공한다. 그는 정신병원으로 안전하게 피신하였다. 그를 뒤쫓던 프란시스는 도망자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며 병원장을 부르다가 겁에 질려 소스라치게 놀란다. 병원장이 칼리가리였던 것이다.

다음날 밤 병원장이 잠든 사이에 프란시스는 이 사건에 새로 입문한 병원의 세 직원들과 함께 병원장의 사무실을 수색하다가 정신질환을 다루는 이 시설의 과오를 완벽하게 입증하는 물증을 발견한다. 그들은 책 더미 속에서 칼리가리라는 이름의 흥행사에 관한 오래된 책을 발견한다. 그는 18세기 이탈리아 북부를 돌아다니며 최면에 걸린 세자르로 하여금 온갖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세자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는 밀랍 인형으로 그를 대신함으로써 경찰을 속였다. 가장 중요한 증거물은 원장의 의료 기록이다. 이 기록물들은 원장이 칼리가리의 최면 능력을 실증하는 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였음을 입증하였다. 그는 몽유병자가 병원에 맡겨졌을 때 칼리가리가 했던 가공할 게임을 재연하고자하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칼리가리의 정체성을 제 것으로 삼았다. 원장이 범죄를 인정하도록 만들기 위해, 프란시스는 원장의 도구였던 몽유병자의 시체를 원장에게 들이댄다. 세자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 괴물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수행원들은 그런 그에게 능숙하게 구속복을 입힌다.

https://www.youtube.com/watch?v=zrsDCP22lQE

섦 – 거꾸로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3

 거꾸로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가야 할 곳에 가지 않고
죽음이 두려워 회피하는 삶은
절망과 좌절 속의 희미한 빛조차 삼켜버린다.
나는 절망과 좌절을 두려워 하고
두려움을 용기삼고
피하는 용기의 무기를 덛쓰고
퇴행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것이 두려워 두려움을 꼭 껴안고
민낯을 보려하지 않고
거짓을 진실삼아 진실을 왜곡하여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살아있다.
반성을 생각하는 사유만이 철창을 부수고
자유를 허락하여 맑은 공기를 마시는 기쁨을 얻을 수 있고
한 겨울의 눈도 비가 되는 변화를 볼수 있고
거꾸로 가는 왜곡의 거울을 깨트릴 수 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2016-12-31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거꾸로의 현상은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하고
거꾸로 된 사물을 바라보는 것 자체도 우리의 인식을 불편하게 합니다.
이번 한 해 우리 사회 전체에 거짓으로 포장된 거짓이 난무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후퇴하여 몇 십년 전의 독재정권을 다시 보는 듯 하다고 했습니다.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의 부재, 역사 의식의 부재, 왜곡된 역사가 진실로 포장되어
국민들을 기만하였고 소수 개인의 이권을 위한 대통령과 비선실세,정경유착에 의한
온갖 거짓으로 점철된 부정이 나라를 뒤덮었습니다.
정치인과 재벌가들의 소수의 경제 나눠먹기식 통치와 유지가 지금까지 가능했으며
이들 소수를 배불리기 위한 경제 논리가 여전히 통했고 권력과 경제는 정경계가
나눠먹기 하며 나라의 재정이 어렵다고 경제적 부담은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안겨줬습니다.
가난은 일반 시민들의 몫이고 가난의 이유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댓가라고
자기 타협적인 결과로 귀결하게 하는 소수의 지배자들의 지배 이념을 국민들에게 주입시켜
개인은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하거나 자신을 토닥이는 좌절의 구렁텅이로 집어넣었으며
우리 삶이 다 그런거야라고 희망이없는 지배체제에서 그들은 배부르게 호의호식하며
대다수 국민들에게 고통과 희망이 없는 절망을 주었고 이것이 지난 수십년 간의 행해져 온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시장의 논리에 약자는 자기 결정권, 선택권, 기회가 없습니다.
분배의 결정권은 소수의 독점적 형태로 유지되어 왔고 힘없는 시민은 이끌려가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현실을 저항하는 자는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을 선택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전기세,가스요금이 없어 자살을 선택하는 세상이고 부정을 씌어 자살을 하게 만드는
소수의 정치체제이며 부정한 자들은 잘살고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은 가난이 당연한 사회입니다.
부패비리로 얼룩진 자들이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사회입니다.
배가 터져 죽을지언정 부정과 비리의 온상인 그들에게 그 욕심을 채우는 삶은 너무도 당연하고 정상적인 삶입니다.
‘이게 나라냐”고 할 정도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은 소수의 비정상적인 정상화는
후퇴하는 민주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많은 국민들이 얼룩진 사회를 청산하기 위해 광화문에서 한 목소리로
거짓에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모든 국민이 보다 깨끗한 사회에서
행복하고 조금 더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많은 시간 동안 진실을 보고 거짓을 진실처럼 믿으며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진실을 보려하지 않고 스스로의 안위를 걱정하며 두려움을 밟고, 두려움을 넘지 못하고
회피하는 삶을 지금까지 살아온 건 아닌지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대한민국헌법 제1조가 우리 사회의 국민 개개인에게 깊이 뿌리 내리길 소망합니다.
새해에는 희망이 현실로 이뤄지길 바랍니다.
행복한 새해, 소망이 이뤄지는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

이름 없는 영웅들에게 바치는 헌사 [나인당케의 단상들]

<로그원:스타워즈 스토리>는 여지껏 본 스타워즈 시리즈중 가장 덜 스타워즈 같은 느낌이었다. 단적으로, 엔딩크레딧이 흐를 때 눈물이 찔끔 났던 경험을 다른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겪어본 적이 있었던가. 아군은 단 한 차례도 광선검을 사용하지 않고, 죽은 자들은 피를 흘리며 최후를 맞는다.

가장 어둡고 무겁고 또 비장한 스타워즈. 과격파 반군은 마치 무자헤딘 류의 과격파 이슬람 반군을 연상시키고, 제다 시티에서의 시가전은 바그다드나 팔루자에서 미군과 현지 저항군의 전투를 보는듯 했다. 국가연합인 저항군의 보수성과 관료성의 민낯을 보여주고, 이에 불복종해 독단적으로 적진으로 뛰어드는 전사들은 게릴라 빨치산의 느낌으로 전투를 수행한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어른이 된’, 그리하여 더 이상 세상이 스타워즈가 그리는 선과 악의 단순 이분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유년시절의 스타워즈 팬들에게 헌정된 것 같은 느낌이다(때마침 같이본 사람들은 나와 20대를 같이 보낸 과후배들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결말이 떠올랐다. 종말, 폐허 그리고 구원. 이윽고 컴퓨터그래픽의 힘을 빌려 나타난 그녀. 무참한 대량살육을 견뎌내고 지켜낸 희망이라는 단 한마디.

<로그원: 스타워즈 스토리>는 영웅들의 모험담이 아니라, 거대 악에 맞서기 위해 싸우다 이름없이 쓰러져간 전사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발터 벤야민이 말하지 않았던가. 역사는 이름 없이 쓰러져간 자들의 것이라고. 옛날옛적 은하계 영웅들의 모험을 다루던 스타워즈는 이렇게 현실을 향해 진화한다.

(발췌번역)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5 [내게는 이름이 없다]

심리적 불안의 조짐을 보여주는 여명기 작품들 중 네 번째 영화는 위의 세 판타지에 대한 사실주의적 대항물인 <타자 Der Andere>이다. 이 영화는 파울 린다우(Paul Lindau)의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삼아 1913년에 개봉된 작품이다. 린다우의 희곡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상황을 부르주아의 고루한 분위기 속으로 들여와 극화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지킬박사가 베를린의 계몽된 변호사 할러박사로 바뀌는데, 그는 하우스 파티에서 분열된 인격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에 대해 냉소한다. 그는 그 같은 일은 자기에게 일어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할러는 과로로 인해 말에서 떨어지게 되고 그 결과 [무의식 속의] ‘타자’가 등장해 [의식적 자아가] 강제적 잠의 희생물이 되는 일이 점점 늘어난다. 불한당인 이 다른 자아는 강도가 되어 자기 집에 침입한다. 경찰의 개입으로 이 두 자아는 체포된다. 경찰이 조사하는 동안 그는 잠이 들고 할러가 깨어난다. 할러는 자기가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기가 강도의 짝패임을 깨닫게 되자 그는 쓰러진다.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할러는 건강을 회복해 결혼한다. 심리적 교란에 영향 받지 않는 시민의 전형인 것이다.

할러의 모험담은 누구라도 볼드윈과 같은 정신분열의 먹이로 전락할 수 있으며, 그 결과 호문쿨루스처럼 추방자가 될 수 있다고 암시해준다. 이제 할러는 독일 중간 계급으로 뚜렷하게 규정되었다. 이들 모두를 중간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여기는 것은 더더욱 정당하게 보인다. 위의 여타 영화들의 판타지적 등장인물과 그 사이의 정신적 근친성이 그 이유다. <타자>는 이러한 근친성을 정교하게 다듬는 대신에 그것을 잠깐 다루고 넘어간다. 할러의 [정신적] 분열은 치유가능한 질병인 듯 다루어지고, 비극적 엔딩과 동떨어져서, 그는 정상적 삶의 고요한 안식처로 복귀한다. 이러한 차이는 틀림없이 관점의 변화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위의 판타지 영화들은 분열의 태도에 집단적 불안에 관한 징후를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있지만, <타자>는 중간 계급의 진부한 낙관주의를 가지고 분열의 태도에 접근한다. 이러한 낙관주의가 이끌고 있는 까닭에, 이 이야기는 현존하는 불안을 축소한다. 그 결과 불안은 안정은 영원할 것이라는 확신을 무효화시킬 수 없는 일시적인 사건으로 상징화된다.

Ⅱ: 전후의 시기(1918-1924)

자유의 충격

1918년 11월의 사건을 혁명이라고 일컫는 것은 [혁명이라는] 이 말을 남용하는 것이리라. 그 당시 독일에 혁명이란 없었다. 실제 발생했던 일은 지휘 체계의 와해였다. 그것은 무력한 군사 정세와 전쟁에 신물이 나던 사람들로 인해 기세를 얻었던 수병들의 반란이 초래한 일이었다. 정권을 획득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혁명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애초부터 그들은 독일 공화국을 건립할 생각조차 없었다. 공화국 선포는 즉흥적인 것이었다. 레닌이 희망하던 것을 꿈꾸던 이들 지도자들은 대지주들, 기업가들, 장군들, 법률가들을 제거하는 일에 무능하다는 점을 입증하였다. 그들은 인민의 군대를 창설하는 대신 민주적인 의용군의 편성에 의존함으로써 스파르타쿠스단을 궤멸시켰다. 1919년 1월 15일, 의용군 간부들이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칼 립크네히트(Karl Libknecht)를 살해하였다. 이후 악명 높은 페메 살인자들(Feme-murders)의 범죄가 잇따랐지만 이런 일을 저질렀던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새 공화국이 출범한 첫 주 이후 구지배 계급들은 기세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몇몇 사회 개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유산된 혁명을 동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적 격동의 급속한 발달은 옛 위계질서에 속한 가치와 전통의 붕괴를 감당해내는 독일이 재앙에 휩싸여있음을 폭로하였다. 일시적으로 독일 정신은 세습적 관습을 극복하여 그것을 완전히 재구성할 수 있는 좀처럼 없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독일 정신은 선택의 자유를 향유하였으며, 그것을 내적 태도로 재편성하고자 하는 수많은 교설들이 가득한 분위기가 되었다.

공적 삶의 영역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배고픔, 무질서, 실업 그리고 인플레이션의 첫 징조에 시달리고 있었다. 길거리 싸움이 매일같이 벌어졌다. 혁명적 해결은 이제 멀리 있어 보이는 동시에 목전에 있는 듯 했다. 분노에 사무친 계급투쟁은 공포와 희망으로 이글거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eJ919AY6FHI

꼰대가 꼰대인 이유, 그리고 신나는 새해를 위하여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 7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7

 

오늘의 책 : 심의용 지음, <마흔의 단어들>, 도서출판 동녁, 2016 에 대한 서평

 

이 서평은 서평 없는 서평이다. 그냥 저자가 말하는 책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싶어서 정리된 표와 그림으로 만들었다. 독자께서도 알아서 이해해 주실 것으로 생각한다. (글씨가 잘 안 보이면 손가락으로 주욱 늘려 크게 보시기를 권유합니다.)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표와 그림들을 나열했는데, 글쓰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나의 속내를 보이기 싫어서 이렇게 만들었다. 그래도 두 세 마디 추가로 붙여보고 싶은 꼰대의 충동이 있다. 그 하나는 만약 이 책의 부제를 내 맘대로 다시 붙일 수 있다면 <외로움을 이기려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그냥 안고 가기> 로 하고 싶다. 두 번째로 마흔의 의미가 좀 넓어졌다는 점이다. 요즘 기대수명이 벌써 80이 훌쩍 넘었는데, 그 뜻을 다시 풀어본다면 공자맹자 시대의 60이 요즘 90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자기 나이에서 2/3 비례로 줄인 숫자로 살아가도 좋을 듯하다. 예를 들어 보자. 같은 마흔(40살)이라도 결혼을 못해 결혼을 애절히 원하는 노총각은 스스로 2/3로 축소된 27살로 생각하면 좀 더 느긋해 질 수 있다.(계산법: 40*2/3=27). 쉰 고개에 접어든 49세의 당신이 더 젊었을 때 못해보고 지나온 시절을 안타까워한다면, 그런 당신도 32살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 느긋해 질 수 있다.(계산법: 49*2/3=32). 계산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 심의용은 책의 본문에선 언급한 적이 없지만 유독 책날개에서 강조한 말이 나에게 의미있게 다가왔다. 즉 “심입천출”深入淺出이라는 말이다. 나도 이 말을 평생 안고 사는데, 나는 이 말을 ‘깊이 공부를 하지만 공부한 것을 드러낼 때는 쉽게 하라’는 뜻으로 새기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공부가 깊음을 직감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쓰기는 쉬우면서도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포스를 갖고 있다.

이 책 <마흔의 단어들>, ‘섹스’, ‘우월감’, ‘진실’, ‘자기기만’, ‘정직함’, ‘죽음’, ‘음흉함’, ‘무관심’, ‘자책감’, ‘냉소’, ‘사랑’, ‘즐거움’, ‘나르시시즘’, ‘행복’, ‘미각’, ‘무감각’, ‘균형감’, ‘애증’, ‘싸움’, ‘몰락’이라는 단어 하나하나가 실은 단어가 아니라 저자의 신체기관 하나하나였다. 그의 신체기관마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근접거리에서 나는 이 세상의 존재살이를 좀 더 다가갈 수 있었다. 폼나는 위선의 권위를 끝까지 부여안고 살려는 이들은 이 책을 읽을 필요 없다. 그 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강력 추천한다. 또한 이 책은 박근혜 재앙의 동물행동학적 원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부수효과를 제공한다. (e)시철의 독자와 함께 신나는 2017년을 한번 누려보자. <끝>

고독할 시간을 잃어버린 서울, 서울시민들 [서울 시민청 강좌] -1

필자의 허락을 얻어 [서울시 시민청]에서 올 여름 진행된 강의의 강의록을 총 5회에 걸쳐 연재 합니다. 흔쾌히 원고를 넘겨주신 필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강의 1 : 고독할 시간을 잃어버린 서울, 서울시민들

강지은(건국대 강사)

우리는 왜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에 대해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분석을 시도한다. 더불어 스마트폰을 통해 매일 접하는 SNS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에 관한 반성도 함께 모색해 본다.

<참고>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5> 트위터, 혹은 새들처럼

<차례>
1. 왜 우리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
2. SNS는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3. 왜 사람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만족감을 느낄까?
4. 고독을 잃어버린 서울 사람들

1. 왜 우리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

우리에게 스마트폰이 일상생활이 된 지 얼마쯤 되었을까요. 이젠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스마트폰이라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기는 합니다만 제 기억엔 5년 남짓 된 듯 싶습니다. 제가 스마트폰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정말 가물가물 기억이 나지 않지만 스마트폰과 관련해서 아이와 기억나는 큰 사건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처음 사준 스마트폰이 2011년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아직 어린 줄만 알았던 아이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소설을 15권이나 엄마 몰래 읽은 것이었어요. 이미 또래들에게 인소(인터넷소설) 읽기가 유행처럼 번졌던 건데 저는 몰랐던 거죠. 지금 중년 분들은 예전에 읽었던 하이틴로맨스라는 얇은 로맨스소설이 인소의 원조쯤 되겠죠. 예전에 저희들은 고교생 때나 되어 읽던 걸 저희 딸은 스마트폰 덕분에 초등학교 때 접한 거죠. 처음엔 아이가 당장 타락이나 한 것 마냥 속상하고 그랬는데, 세상이 그러니 차라리 저도 한 번 인소를 읽어 보자 싶더군요. 그리고는 아이와 대화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제가 상상하는 타락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후 5년이 지난 2016년 현재 스마트폰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진화를 거듭한 듯 보입니다. 당시에는 없던 소셜네트워크가 전 세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고 또한 새로운 시장을 형성가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저희 아이는 그 때부터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살았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물건인데 손에서 놓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당시에도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인소가 유행하고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소소한 게임들이 유행했었던 듯합니다. 당시엔 조잡했던 게임이었겠지만 지금은 모바일 게임 시장이 pc게임 시장과 맞먹을 정도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아야하겠죠. 지하철을 타면 스마트폰 게임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전 세계적으로 단연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임은 ‘포켓몬고’겠죠. 포켓몬고는 새로운 증강현실(AR)을 바탕으로 하는 게임입니다. 저는 해본적은 없지만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가봅니다. 우리나라는 정식으로 출시도 되지 않았는데 속초에서 어찌 어찌 된다고 하니 유저들이 몰려가는 대소동까지 있었다죠. 아무튼 스마트폰의 진화는 무한대인 듯합니다. 아무튼 당시 인소의 유행이 지난 후엔 카카오톡이 주도하는 SNS가 아이들을 사로잡더군요. 이제 아이의 스마트폰은 단톡방의 알림이 울리고 아이는 수시로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답을 달기를 반복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문화가 되어 아이들에게 기쁨도 주었지만 상처도 주었습니다. 카카오톡의 상태메시지는 은근히 타인을 욕하거나 따돌리는 메시지창이 되기도 하고, 오프라인의 왕따는 온라인에서도 역시 왕따가 되어 단톡방에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은 재미와 연대 두 가지를 제공하는 신기한 상자임에 틀림없는 모양입니다.
아이들의 스마트폰 풍속도가 이러하다면 어른들의 스마트폰 풍속도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물론 아직 2G폰을 가지고 계신 어르신도 계시긴 합니다. 저희 친정어머니도 그런 분들 중의 한분이십니다. 폴더폰 기억나시지요? 그걸 아직도 가지고 계신데 저희어머니 말고 많은 어르신들이 스마트폰으로 자식과 카카오톡으로 사진도 주고받고 친구분들과 소통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휴대전화의 역사는 스마트폰의 변천사보다 조금더 앞섭니다. 언제부터 휴대폰이 소위 공짜폰으로 전면 보급되었는지 기억나십니까? 제 기억으로는 97년이었습니다. 제가 결혼하던 해인데 남편만 휴대폰을 한 대 장만했습니다. 당시 만해도 남편만 장만하면 됐지 뭐 저까지 덩달아 사겠다고 나서기가 좀 거시기 한 그런 때였습니다. 아직 대학원생이라 금전적 여유도 없었구요. 처음 우리집에 온 남편의 휴대폰은 크기는 손 크기 만해서 작을 뿐만 아니라 창도 작은 그런 폰이었죠. 그러던 것이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 순간 창의 크기가 커지다가 컬러가 등장하고 창을 손가락으로 터치할 수 있는 터치폰이라는 것이 등장했습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습니다. 버튼이 아니라 화면을 터치해서 조작을 하는 기술은 스마트폰의 기술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터치폰의 기술을 기반으로 해서 곧 애플은 아이폰을 출시하고 전 세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처음엔 도대체 애플리케이션, 앱이 뭐야? 핸드폰을 쓰면서 왜 요금말고 또 돈을 결재해? 궁금한 것도 많았죠. 하지만 곧 익숙해졌고 세계는 스마트폰 천국이 되었습니다.

2. SNS는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익숙해진 스마트폰 안에는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등의 SNS 즉 소셜네트워크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한번 함께 보면서 노철학자가 어느 부분에서 현대인들의 모습에 놀라고 걱정을 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미국 고등교육신문의 웹사이트(chronicle.com)에서 한 달에 무려 3000여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10대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문자메시지를 많이 보냈다는 것은 그 소녀가 하루 평균 100여건의 메시지를 보냈거나 깨어 있는 동안 매10분마다 거의 한 번꼴로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침이든 대낮이든 한밤중이든, 주중이든, 주말이든, 수업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숙제시간이든, 심지어 양치질하는 시간이든’ 가리지 않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결국 그 소녀는 10분 이상은 계속 누군가와 이야기한 셈이고, 이는 그 소녀가 혼자서만 지내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생각과 꿈, 걱정, 희망 같은 것들을 고민하면서 홀로 있어 본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소녀는 이제 다른 친구들이 없을 때, 과연 사람들이 자기 혼자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혼자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며 웃거나 울어야 하는지 거의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소녀는 혼자서 지낼 수 있는 기술을 배워볼 만한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셈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24~25쪽.

어떠십니까? 누가 생각나십니까? 물론 자녀분들이 많이 생각나시지요? 본인 스스로가 생각나시기도 하구요. 저는 식당갔을 때 보았던 남의 집 유아들이 더 생각납니다. 부모님들은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영상이 뽀로로이기 때문에 아이에게 큰 해가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문제는 영상이 아니라 손에 쥔 것 자체가 스마트폰이라는 것이죠. 스마트폰에 길들여지면 잠시도 심심한 것을 참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잠시도 심심한 것을 못참는 현대인은 수시로 SNS에 접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올린 포스팅에 누가 좋아요를 눌렀나 확인하러, 좋아요가 몇 회나 올라갔나 확인하러, 또 그냥 다른 포스팅 둘러보러 등등의 이유로 들락날락 거리는 시간이 생각해보면 하루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꼭 페이스북, 트위터에만 접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날씨가 도대체 왜 이렇게 덥지? 궁금하면 그것도 무엇이 해결해주나요.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의 인터넷에 접속하면 네이버에 날씨가 나옵니다. 메인화면엔 그날그날의 탑뉴스들이 뜨죠. 내가 원하는 연예기사나 다이어트, 음식 뉴스들이 줄을 잇습니다. 그러면 또 그것들을 읽느라 시간이 흘러갑니다. 스마트폰은 누군가와 접속하게도 해주지만 그저 온라인과 내가 접속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바로 오늘 서울 시민의 현주소가 아닐까 합니다.

3. 왜 사람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만족감을 느낄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는 SNS를 하시는 분도 있으실 것이고 하고 있지 않으신 분들도 있으실텐데요. SNS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빠른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트위터의 앰블램은 참새같은 새모양이지요? 시도 때도 없이 짹짹거리며 지저귀는 새처럼 아무 때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을 때 포스팅을 하는 곳이 트위터입니다. 남이 댓글을 달든 말든 그건 나중 문제입니다. 하지만 SNS의 속성상 댓글 없는 포스팅은 공허합니다. 내가 포스팅을 하자마자 누군가가 재빠르게 댓글을 달아주고 리트윗을 해주면 그야말로 짜릿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올린 포스팅은 순식간에 전 세계(친구가 전세계에 퍼져있다면) 혹은 전국으로 퍼질 수도 있지요. 페이스북도 속성은 비슷합니다. 트위터는 짧은 글을 간단하게 포스팅한다면 페이스북은 사진과 함께 좀 더 긴 글도 올릴 수 있다는 점이 다르죠. 페이스북에선 좋아요가 몇이나 올라가는지가 관심사인 것 같아요. 페이스북 개인페이지 말고 회사나 상업성을 띤 페이지들은 그 페이지들의 좋아요나 공유만을 관리해주는 업체도 있습니다. 페이스북의 좋아요는 그야말로 ‘인정’이라는 내면적 속성의 숫자화 또는 외면화입니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예전만큼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인정이 숫자로 표시되는 장소가 바로 페이스북 등의 소셜네트워크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데 인정받기 위해서는 칭찬받을 만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물론 세상엔 착한 사람도 많고 훌륭한 사람도 많습니다. 문제는 나만 빼고 그런 것 같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럼 뭘 포스팅해야 할까요? 도대체 나를 스스로 생각해보면 내세울게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하는 일도 변변히 잘 돌아가는 게 없습니다. 거울을 보아도 영 마음에 드는 얼굴이 아닙니다. 아…….인정은 받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내가 가진 최고만 보여주는 것입니다. 식당도 제일 비싼 곳에 갈 때만 사진을 찍어 포스팅을 합니다. 변변치 않은 식당에 가면 사진찍기는 없습니다. 셀카도 오늘 화장발이 잘 받은 날만 찍습니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상 받아온 날은 페이스북에 포스팅하는 날입니다. 나는 최고의 것을 포스팅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그것은 나의 일상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남들은 나를 부러워하면서 좋아요를 선물하겠죠. 나 역시 마찬가지로 남들이 최고의 모습을 포스팅 한 곳에 부러워하면서 좋아요를 선물합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 상처를 받습니다. 사실 남들에 비하면 내 모습은 참 별볼일 없으니까요.
다시 좀더 인정에 대해서 생각해볼까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를 대체로 많이 받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당연히 유명인 또는 연예인들이겠죠. 그만큼 노출이 많이 된 사람들이니까요. 나와 그들이 친구는 아니지만 언젠가 유명인들의 SNS에 들어가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 많은 좋아요와 댓글들.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SNS 포스팅을 하면서 그런 연예인들과 같은 주목을 받고 싶은 심리가 생기는 것이죠. 지그문트 바우만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인간 존재증명이 이제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에 밀려 쫒겨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5> 51쪽)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보면 볼수록, 즉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선택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주는 증명처럼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SNS를 자주 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점점 더 나를 많이 방문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유명인들처럼 잘 알려진 사람들과 비슷한 부류가 될 기회를 갖는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철학자의 생각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정신적 영향력을 증가시키는 한 가지 방식’이 바로 소셜네트워크 활동인 셈이지요.
그러나 SNS가 진짜 자신의 정신적 영향력을 증대시켜줄까요? 철학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유명인의 흉내내기에서 그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확장해보면 사회의 영역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결국 실제 권력을 쥐고 있는 부류 즉 보여지는 부류(유명인, 연예인)와 권력이 없는 부류 즉 보는 부류(일반인, 소외계층)의 삶은 어디에서도 뒤바뀌지 않는다는 진리 말입니다. 거기에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페이스북의 친구 1000명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따지고 든다면 또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친구같은 너” 바로 페이스북 등의 SNS 친구이지요.

4. 고독을 잃어버린 서울 사람들

어쨌거나 SNS 이전과 이후는 고독의 측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SNS 이후에 연락 않던 친구들과 연락을 하게 된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만이죠. 한 번 연락하고나니 딱히 보고 싶은 생각도 없는 친구들이 또 많기도 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그냥 조금 친한 친구들도 있고요. 한동안 동창들끼리 네이버 밴드 많이들 하셨죠. 카카오톡 단체톡도 하시고요. 이런 온라인 모임들이나 개인적인 접속들은 직접 만나지 않으면서도 근황을 알 수도 있고 대화도 할 수 있고 내가 귀찮으면 접속을 중단할 수도 있고, 어찌 보면 현대인에게 안성맞춤인 참 편리하고 깔끔한 만남입니다. 그러다보니 또 내 손안의 핸드폰이 채팅창의 알림을 울려주면 안들어가 볼 수가 없지요.
그런데 이러한 만남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의 인간관계가 풍부해졌다고 느끼거나 나의 정신세계가 확장되었다고 느껴지기보다는 공허감을 느낄 때가 훨씬 많지 않으십니까? 지그문트 바우만이 걱정하는 내용을 함께 들어볼까요.

당신은 즐겁게 독서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창밖을 응시하면서 당신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상상해보는 일을 점점 덜하게 되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과 아주 가까운 주변에 있는 진짜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일도 점점 덜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멀리 있는 친구들이 접속하려고 버튼을 클릭해올 때, 과연 누가 정작 가족과 이야기하기를 원하겠는가?……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 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31쪽.

오늘부터 시간을 정해 스마트폰은 가방에 넣어두고 창밖을 바라보거나 책 읽는 시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재벌의 돈을 제한하라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6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6

 

오늘의 책 – 아래 두 문헌에 대한 리뷰: 초과된 부를 제한하는 ‘제한주의’ 프로젝트

  • Ingrid Robeyns, “Having Too Much”, in Knight and Schwarzberg(eds.), Nomos LVI: Wealth, Yearbook of the American Society for Political and Legal Philosophy, New York University Press, 2016
  •  Ingrid Robeyns (ed.), Measuring Justice, Cambridge, 2010

벨기에 우트레흐트 대학 철학과 윤리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잉그리드 로빈스 교수는 유럽 인문학 연구펀드인 ERC 연합장학회로부터 200백만 유로(25억원)의 연구자금을 받는다.(2016년12월12일) 앞으로 5년간(2017-2022) 이어질 그(주1)의 연구주제는 “제한주의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경제자산과 생태자원의 분배에서 부자들에게 공정한 제한을 두자는 것에 대한 철학적 분석” 이다. 현대 분배정의론은 미국의 롤스 이론에서부터 유럽의 기초소득이론에 이르기까지 주로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복지인간학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번 유럽연합 프로젝트를 받은 로빈스의 주제는 빈곤층이 아닌 부유층에 초점을 두어 초과된 부를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제한하자는 데 있어서 매우 색다르고 그 실현가능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 서평은 책 한권에 대한 서평이 아니다. 로빈스 교수가 수행하게 될 프로젝트는 한국사회에서 진정으로 실천되어야 할 주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로빈스의 연구주제를 조명하려는 것이 이번 서평의 목적이다.

주1) 로빈스 교수는 여성이지만 그의 페미니즘 정신에 따라 국어와 같이 성별없는 인칭대명사 꼴의 언어에서는 ‘그녀’가 아닌 ‘그’로 표현한다.

현대 분배정의 이론은 정의규칙과 분배규칙의 매트릭스를 설명한다. 매트릭스란 물적 자산이 그 규준으로 될 수 있지만 건강이나 능력 그리고 복지와 지리적 자원이나 타고난 지리정치학적 지위도 될 수 있다. 기존의 분배규칙은 재화가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 그 분배원칙은 다음과 같다. 우선순위의 원리principle of priority, 빈곤층에게 충분한 재원을 보장해야 한다는 충족성의 원리sufficiency, 결과치의 평등equality of outcomes, 기회평등opportunity, 기초소득 이론, (롤즈의) 차이원리 difference principle 등이다. 이런 원칙들은 대체로 경제적 약자에게 초점을 두고 그들에게 사회적 자원을 공유하고 평등분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데 있다. 반면 로빈스 교수가 그동안 주장해 온 기본 방법론은 빈곤층 대상 분배가 아니라 부유층 대상으로 부유층의 소유를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데 있다. 로빈스 교수는 이를 “제한주의”Limitarianism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분배정의가 빈곤층 중심 분배이론으로 되어있는데 반해, 제한주의는 부유층 대상 분배정의 이론이다. 로빈스는 부유층에 대한 규범적 규제가 필요한 철학적 이론을 제시한다.

제한주의는 부유층을 겨냥하여 공정한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약간 도발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크게 도발적이지 않으니 안심해도 된다. 로빈스의 제한주의는 삶의 질을 넘어선 지나친 자산을 제한하자는 것이지, 삶의 물질적 행복을 하향시키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해외여행을 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돈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용수술을 하는 데 드는 돈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빈스 연구의 특징은 정의규칙과 분배규칙의 매트릭스를 규정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분배의 매트릭스 사례로서 복지나, 기초재화 그리고 개인마다의 장점도 분배 매트릭스에 해당한다. 이는 정의로운 방식으로 분배가 가능한 재화를 말한다.

제한주의는 본래적intrinsic 제한주의와 비본래적non-intrinsic 제한주의로 나뉜다. 비본래적 제한주의는 바람직한 재화 분배에서 특정 한계치를 초과한 소유가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부에 대한 도덕적 제한이며, 이는 여분의 자산을 소유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좋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제한주의에서 본래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를 구분하는 것은 제한주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로빈스는 말한다. 부는 본래적으로 나쁘다는 입장이 바로 본래적 가치로서의 제한주의이다. 비본래적 제한주의란 부 자체보다는 부가 가져오는 사회적/심리적 부산물의 폐해 때문에 초과된 부는 도덕적으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로빈스는 비본래적 제한주의를 중시한다. 비본래적 제한주의는 부가 곧 정치적으로 오도된 권력을 낳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부유층은 자신의 재력을 정치적 권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을 부수적으로 갖게 된다. 여기서 로빈스는 정치에서 돈의 힘을 강조한 토마스 크리스티아노의 논문(Money in Politics, 2012)을 자세히 분석했다. 부유층은 빈곤층과 달리 기본생계비 지출에 영향 받지 않고 정치관련 비용을 지출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정치적 로비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유층의 잉여자산은 정치적 영향력이나 권력획득에 돈을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크리스티아노는 재력이 정치권력에 미치는 4가지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첫째 부유층은 정당인에게 더 많이 후원하며, 이는 선거에 영향력을 주게 된다. 선거자금의 특성상 그런 특별후원자는 특별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빈곤층과 부유층 사이의 정치적 평등성은 붕괴된다. 둘째 부유층의 돈은 집단적 의사결정구조의 아젠다를 형성하는 데 사용되어, 그들의 권력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이는 기회불균형을 가져온다. 셋째 돈이 대중매체 오피니언 형성에 사용된다. 부유층은 대중매체를 장악할 수 있어서 정보와 공공 논점을 통제하게 된다. 현대 민주정치에서 대중매체는 매우 중요한 권력요소이다. 그래서 부유층의 매체 장악은 대중들의 이념적 풍토ideological climate까지 변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만의 이념은 그들이 자산을 확장하는 시도를 마치 건전한 행위로 보이게끔 노력한다. 이는 인지불균형을 가져온다. 넷째 부유층은 그들의 부를 기업에 집중하고 공공정책까지도 왜곡하여 정당화함으로써 결국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적 정책결정의 실현기회가 축소된다. 예를 들어 시민들이 자국의 온실가스 감축안을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정부가 그 규제를 실행할 경우, 어떤 기업들은 탄소배출 규제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외국으로 자신들의 공장을 이전한다. 이는 시민사회와 기업자본 간의 정책불일치를 가져온다.

부유층의 재력이 정치권력에 미치는 4가지 메커니즘(Christiano 2012)
             
정치적 불평등   기회불균형   인지불균형   정책불일치

여기서 로빈스는 부유층이 정치적 평등성을 붕괴시키는 본래적 인과성을 지니고 있다고 논증한다. 부유층의 정치적 선점은 도덕성을 위배하는 부의 본래성이며, 사회적 평등성을 위배하는 부의 비본래성을 수반한다. 그래서 로빈스는 부의 본래적 속성인 반도덕성을 도덕성으로 전환시켜야 하며 부의 비본래적 속성인 불평등성을 평등하게 바꾸는 정치적 노력을 요청한다. 이는 제한주의의 실천적 조건이다. 예를 들어 빈곤층의 존재는 정치권력의 무능력과 부패권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래서 정치권력의 개선을 통해, 그리고 정부주도형 개선정책을 통해 빈곤을 퇴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빈스의 제한주의는 다음의 원칙을 갖는다.

1. 싱거의 분배원칙보다 제어적 요청의 필요가 적다.
2. 잉여재화 관련 도덕적 의무에 관한 주장이다.
3. 생활의 여유를 갖기 위한 돈 즉 휴가를 가거나 피아노교습을 하려는 돈까지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싱거의 분배원칙은 그런 돈까지 자선단체에 기부해야 한다는 강한 의무원칙이다.
4. 로빈스의 원칙은 라디칼하지 않다. 지나친 소비에 대한 도덕적 부담을 가져 지나친 부를 피하자는 포용적 정의론이다.

스스로 조절하는 부를 진정한 부라고 로빈스는 정의한다. 부유함과 빈곤함을 나누는 기분은 상대적이어서, 빈곤도 상대적이며 따라서 부의 상대성을 조절하면 자동적으로 빈곤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분배의 상대치distribution relative measures는 부와 빈곤을 분배평균치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로 정의하는 방식이다. 그 중의하나가 문맥적 상대치이다. 문맥적 상대치context relative measures는 그 사회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부의 기준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새 차가 결코 부의 기준으로 될 수 없지만, 아직도 많은 빈곤층 국가에서는 좋아 보이는 자동차의 소유가 곧 부의 지표로 되고 있다. 이 경우 부와 빈곤은 상대치의 결과이다. 유럽연합에서 빈곤은 국가 내 평균수입의 60% 미만의 생활상태로 정의된다. 예를 들어 인도인의 빈곤층과 영국인의 빈곤층에는 상대적 차이가 상당히 클 것이다. 그래서 빈곤층 대상으로 한 기존의 분배정의 이론들은 그 자체로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제한주의는 그렇지 않다. 부유층에 대한 도덕적 부의 제한과 정치적 부의 제한정책은 국가 내적 빈곤층과 전지구적 극빈층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제한주의를 반대하는 주장들도 많다. 이런 반대주장은 실제로 제한주의에만 반대하는 주장이 아니라 분배론 일반에 대한 반대주장일 수 있다. 그 반대주장은 크게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제한주의 이론이 부자가 되려는 개인의 기회를 뺏어간다는 것이다unequal opportunities objection. 실제로는 개인의 기회창출이 줄어들지 않는다. 기업가는 여전히 기업을 번성시킬 수 있으며, 예를 들어 글로벌 기업의 CEO는 오히려 더 늘 수 있음을 자세히 논증한다. 그리고 기회는 특정 개인에게만 해당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로빈스의 생각이다. 제한주의는 오히려 취약계층에 더 많은 기회를 주게 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제한주의가 동기부여를 훼손한다고 한다incentive objection. 동기는 돈을 구하려는 욕망에서만 창출되지 않으며 다른 것을 구하려는 생각에서도 더 많은 동기부여가 생길 수 있다. 그 다른 것이란 문화적 자존심, 공동체의 합의를 손상하지 않으려는 공동체의식이나 개인의 합리적 인식을 늘리고 쌓아가려는 지식에의 희망, 사회적 공감대 존중 등을 포함한다. 초과된 돈 이상으로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들에게 진정한 새로운 기회를 찾게 해주고 더 큰 동기부여를 갖게 해준다.

도덕적 제한주의는 강제 사항을 갖고 있지 않다. 정치적 제한주의의 정책사례로서 세금으로 부를 제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정당성은 반드시 도덕적 제한주의가 충분히 논의되어야 가능하다. 도덕적 제한주의가 우선되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정치적 제한주의가 중요하다는 것이 로빈스의 입장이다. 결론적으로 제한주의는 첫째 문화적 자존심을 방해하지 않는다. 둘째 물질적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 셋째 도덕적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 넷째 공동체(국가) 전체의 자산을 증가시킬 수 있다.

한국의 부유층과 빈곤층의 격차는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고착되고 있다. 중간층(중산층)이 없는 양단의 사회는 최악의 현실을 낳는다. 불행히도 우리 한국사회는 중간 없는 양단의 흑색사회로 회귀하고 있다. 재벌의 돈이 우리 한국사회를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지금의 박근혜 재앙을 보면서 알 수 있다. 재벌의 돈과 정치인의 권력이 결합되어 중산층은 없어지고 민주화는 퇴보하고 실업은 끝이 없고, 비굴함이 느니 억울함도 커지고, 정신 나간 사람이 대통령으로 뽑힌 현실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초과된 돈, 욕망의 돈, 순실의 돈, 삼성의 돈을 우리 철학자들이 그냥 지키고만 볼 것인가? 로빈스도 그런 고민과 갈등을 거친 철학을 내놓았고, 그런 시대의 철학과 실천적 변화는 한국 땅에서 당장 시급한대도 유럽 땅에서 먼저 사회적 실현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