섦 -빈집 II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6
/0 Comments/in 문화 & 생각보기,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by 전임 편집주간빈집 II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하얀 눈이 이 세상을 채우고
따뜻한 햇살에 세상이 비워지고
사람의 흔적이 없는 빈집 지붕 위에는
따뜻한 공기가 채워지고
또 다시 빈집은 비워져 있는 공간을
과거의 기억으로, 찬란했던 빛으로 채워 놓고
햇살이 지나간 흔적을 어둠으로 비우고
때로는 혼자만의 어둠으로 상실을 채운다.
나의 곁에 항상 머무를 것 같은 빈집은
채우기 위한 준비를 한다.
어둠의 공기로 닦아내고
먼지로 추억을 닦아내고
무언가 비어있다는 것은 채울 수 있는 것이고
채우지 않아도 여백의 즐거움이 있다.
2017-2-28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봄의 향기가 올 것 같으면서 느리게 겨울을 붙잡던 계절이 가고 새롭게 시작할 게으른 봄의 열정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공간 속에 필요한 물질을, 그리고 필요하다고 여기는 물질들을 채우는 것이 자주 습관적으로 반복됩니다. 겨울의 추위 속에 하얀 눈이 세상을 하얗게 채우고 따뜻한 햇살이 찾아와 하얗게 다시 비우고 북적북적 채워져 있는 집과 집 사이 어느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빈집은 누군가의 추억, 과거의 흔적, 찬란했던 삶을 채웠다가 어둠의 공기로 닦아내고 먼지로 추억을 닦아내고 새로운 희망을 채워 가기 위해 낯선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득 채우지 않아도 비어있는 삶이 즐겁다는 것을 가끔 잊고 살기도 합니다.
Tweet가짜뉴스와 혐오발언의 공통점 [시대와 철학]
/0 Comments/in 세상보기, 시대와 철학 /by 전임 편집주간♦ 아래 글은 [건대신문] 3월호에도 동시 게재되는 칼럼입니다. 칼럼으로 게재할 수 있게 흔쾌히 원고를 보내준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강지은(건국대학교 강사, 전임 편집주간)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들은 혐오스럽다. ‘촛불은 바람불면 꺼진다’ 당시 새누리당의 김진태 의원이 뱉은 막말이다.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박대통령의 이루 셀 수 없는 실정에 분노한 국민들이 광화문에서 뜨겁게 촛불로 마음을 모을 때 도대체 김진태는 무슨 생각으로 막말을 쏟았을까. 막말의 정점은 박대통령 대리인단의 김평우 변호사다. 김평우 변호사는 국민을 기만하는 막말을 마구 쏟아내며 탄핵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몇 가지 김평우의 막말을 되새겨보자.
“탄핵 인용시 시가전이 벌어지고 아스팔트 길이 피와 눈물로 덮일 것”
“요즘 우리나라 언론을 보면 소위 정계 원로, 법조계 원로라는 분들이 전부 무조건 헌재 결정에는 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조건 승복해라, 이게 조선시대입니까? 지금 우리가 양반이 복종하라고 하면 복종하는 노예입니까?”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대통령 그것도 여자대통령에게 뭐했냐고 한다. 이건 웃기는 일”
판사를 지냈다는 법조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또 스물스물 퍼져나가는 가짜뉴스들, 박사모 집회에서는 또 그 뉴스를 확인도 없이 너도나도 마구 쏟아내고 있다. 사실 시대적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막말에든 가짜뉴스에든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팩트와 진실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울 만큼 배운 저 엘리트들이 왜 저런 혐오발언들을 쏟아내며 막말 정치인, 막말 법조인이란 욕을 듣고도 멈추지 않는 것일까. 목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번갈아 두르며 광장에 나오는 박대통령 대리인단의 서석구 변호사, 막말 파문 때문에 부친인 소설가 고 김동리 선생까지 언론에 오르내리는 대리인단의 김평우 변호사는 혐오발언들을 쏟아내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사실 난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서 느낀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소위 엘리트인 그들이 막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가짜뉴스와 혐오발언의 목적이 행동을 생산하는 수행성의 정치이고 그만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발언>>(2016, 알렙, 265쪽)에서 ‘언어는 몸의 행위이며 수행문의 힘은 육체적인 힘과 절대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서장(16쪽)에서 모리슨을 인용해 ‘언어의 폭력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포획하려는 노력, 따라서 그것을 파괴하려는 노력’이라고 쓰고 있다.
막말의 정치인들과 법조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촛불민심에 대한 상처내기와 광장에 모인 박사모들과 숨어있는 박대통령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데에 있다. 사실 이 두 효과 중 막말은 박대통령 지지자들을 더 열광하게 했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나름의 마이크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고 그 마이크에서 쏟아지는 혐오스러운 발언과 스멀스멀 SNS를 통해 퍼지는 가짜뉴스들은 팩트가 어떻든 자신들이 지지하는 권력에 힘을 더해주는 수행성의 정치를 열심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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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지만 자유롭게 살자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 8
/0 Comments/in 블로그진, 최종덕의 책과 리뷰 /by 종덕 최최종덕(한철연, 자연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8
소소하지만 자유롭게 살자 : 마르크스 박사학위논문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1841)를 읽고
오늘의 책 : 칼 마르크스/고병권 옮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맑스 박사 학위 논문, 그린비출판사, 2001
1. 동역학적 원자론
이 책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는 마르크스의 박사학위논문(1841)을 번역한 것이다. 그때 마르크스의 나이는 23살 이었다. 마르크스는 한창 헤겔을 몰두했을 때였지만 헤겔을 통해서는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기초를 찾아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고대 희랍의 원자론자 루크레티우스를 접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소위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를 읽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를 통해서 고전 원자론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는데, 원자론뿐만이 아니라 선험적 형이상학의 허구를 꿰뚫어 보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런 계기는 데모크리토스와의 비교를 통해 드러났다.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했다. 간단히 말해서 데모크리토스를 형이상학적 원자론으로 본다면 에피쿠로스를 실존적이면서도 동역학적인 원자론으로 마르크스는 파악했다. 그런 마르크스의 원자론 공부는 그의 전 철학에 깔리게 되었다.
에피쿠로스의 진짜 의미를 이 책을 읽어가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원자론의 철학사적 의미를 ‘기계론’, ‘환원주의’, ‘결정론’, ‘요소주의’라는 딱딱한 인식론의 존재론적 배경 정도로 알고 있었던 것이 서평자의 평소 수준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한 단계 겨우 넘어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내가 알고 있었던 기존의 원자론과 달랐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데모크리토스의 그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보통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산업혁명 이후 오늘에 이르는 미국 중심의 물질주의 혹은 물질만능주의를 일컫는 상업화된 유물론이 있고, 세계존재의 물질적 기초인 존재론적 유물론도 있을 것이다. 서평자는 이런 유형의 유물론을 꼭 구분하려 한다. 이런 구분은 실은 매우 통속적 분류여서 마르크스 전문가들을 이런 구분을 싫어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전공자 그룹과 다르게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여전히 오해되거나 일부러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어서, 우리들은 그런 통속적 구분을 더 떠들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 전공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것도 실은 존재론적 유물론의 토대 위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물론이라는 말 대신에 원자론이라는 말을 쓸려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토대로서 존재론적 혹은 철학적 원자론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야 한다. 그 토대는 데모크리토스의 존재론적 원자론이 아니라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임을 인지한 것이 마르크스였음을 잘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겉으로나 유물론이지 존재의 내재성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i)운동하지만 운동의 양식은 불변이며 ii)원자 외의 진공상태를 갖지만(원자는 허공을 떠다니지만) 원자 자체는 독립적이며 iii)원자끼리 충돌하지만 여전히 결정론적이며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존재의 겉보기 인식론적 양상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와 플라톤의 이데아가 전혀 다르게 보이지만, 그들 사이의 존재의 존재론적 양상은 질적으로 동등하다고 평가된다.
이런 점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말하는 원자는 물질적이지만, 그 물질성은 경험적 물질성이기보다는 선험적 물질성에 가깝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근대과학 혁명 이후 기계론과 결정론 그리고 환원주의에서 말하는 세계의 기초단위 역할로 고착되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마르크스 전반에 깔려 있는 <변동의 철학>과 어울릴 수 없었다. 다행히 마르크스는 젊은 나이에 일찍 에피쿠로스를 만났다. 에피쿠로스를 통해서 마르크스는 유물론을 유지하면서도 미소의 비감각적 대상에 대한 경험주의와 동력학적 변동성의 철학, 그리고 일탈과 자유의 윤리학을 더 깊이 배울 수 있었다. 마르크스에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기계론적 유물론의 제약을 벗어나 변증법적 유물론을 잉태시킬 수 있었던 철학적 원천이었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비판하는 논거의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변증법적 역사의 종착지를 설정한 목적론의 철학으로서 마르크스의 철학은 서양고전철학의 존재론적 맥과 같이 한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르크스의 에피쿠로스 공부를 접한다면 결코 비판의 정당한 논거로 될 수 없을 것이다. 에피쿠로스를 공부한 초기 마르크스의 철학은 그런 목적론과 정반대의 세계관을 말한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결정론과 기계론 그리고 유토피아론과 목적론을 타파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가 에피쿠로스를 강렬히 독서한 것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2. 에피쿠로스 철학의 구조: 원자론에서 자족적 자유로움으로
에피쿠로스 철학은 크게 인식론과 자연학 그리고 윤리학으로 나뉜다. 에피쿠로스의 인식론은 지각경험과 감각의 인식을 다룬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의 자연학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전혀 다른 관점에서 천체와 사물 존재론을 다루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윤리학은 대중에게 가장 친근한 부문으로 소위 쾌락주의라고 알려진 행복론을 말하고 있다. 에피쿠로스 2천 년 이후 에피쿠로스 행복론 철학의 결합구조를 한 눈에 알아본 철학자가 바로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 원자론과 에피쿠로스 원자론의 차이를 공부하면서 에피쿠로스 자연학이 데모크리토스의 결정론과 선험론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자유론과 행복론으로 연결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이나 원자론을 알려면 이 세 영역이 서로 결합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수학적 위치를 알려주는 점의 존재와 이동거리를 알려주는 선분적 존재를 지시한다. 이런 데모크리토스의 원자 양상은 정역학적 원자로 표현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에서 정적인 원자는 경험으로 인식되는 지각 범위를 초월해 있다. 반면 에피쿠로스의 원자는 동력학적 존재이며, 이는 수학적 위치만 알려주는 점의 존재도 아니고 이동거리만 알려주는 선분적 존재가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는 ‘크기’와 ‘모양’ 외에 ‘무게’를 갖고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원자의 지각적 성질을 관찰할 수 있게 해주는 무엇이다. 에피쿠로스의 인식론to kanonikon은 데모크리토스와 다르게 감각에 기반한 경험주의의 기초이다.
에피쿠로스 원자가 데모크리토스 원자와 다른 핵심적인 양상의 하나가 바로 무게를 갖느냐 아니냐의 차이에 있다. 에피쿠로스에서 원자의 질량성은 원자가 속도를 가질 경우에만 의미를 지닌다. 속도는 변화하는 원자운동, 즉 운동변화량을 통해서만 인식가능하다. 여기서 인식가능하다는 것은 에피쿠로스 인식론의 요지이다. 원자의 지각적 변동은 원자의 정해진 운동궤도를 탈선(clinamen; Deklination) 할 때 생긴다. 데모크리토스와 다른 에피쿠로스 원자론의 핵심은 원자의 일탈성에 있다. 클리나멘clinamen의 일탈성이야말로 데모크리토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에피쿠로스의 원자론 기반 자연학과 경험주의 기반 인식론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한다. 클리나멘의 일탈적 운동성은 에피쿠로스 철학으로 가장 잘 알려진 쾌락주의의 존재론적 토대이다.
에피쿠로스 철학 전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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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 to kanonikon |
자연학 to physikon |
윤리학 to ětik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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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주의
♦ 선험주의 부정 |
♦ 직선에서 일탈한 원자 편위
♦ 결정론과 목적론이 배제된 원자운동 |
♦ 자유의지
♦ 자족함autarkeia이 가장 큰 선이며, 자족의 결과가 자유 |
에피쿠로스에서 원자의 일탈은 데모크리토스 원자의 결정론적 운동방식을 깨는 주요인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에피쿠로스의 핵심을 간파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운동은 그것이 비록 운동성에 놓여있지만 외부의 절대적 존재자에 의해 통제되는 일종의 결정론적 운동성으로 파악되었다. 이 점은 상대적으로 에피쿠로스의 원자운동이 결정론 범주에서 벗어난 것, 즉 자유운동이 개입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일탈성은 절대적 외부존재자의 통제를 벗어난 변동의 운동이다. 그런 일탈의 운동은 외부자의 존재를 설정하지 않고 원자 자체의 자족성autarkeia에 기인한다고 마르크스는 추론하였다.
데모크리토스 | 에피쿠로스 |
필연성의 원자운동은 존재의 외부적 근거를 전제하며 이는 필연성의 세계를 낳으며, 이로부터 윤리적 절대배후를 필요로 한다. | 우연성Zufall은 외부적 근거를 전제하지 않으며, 단지 자기주체성과 내부적 자기동력을 필요로 한다. |
이런 마르크스의 추론결과는 서평자로 하여금 마음 설레게 하였다. 선험성 부정에서 일탈의 자유로, 나아가 신이건 이데아건 간에 관계없이 외부 존재자를 굳이 설정하지 않아도 되는 윤리적 주장으로 이어지는 철학적 논증은 서평자로 하여금 청년 마르크스를 새롭게 조우했다는 뜻이다. 유물론의 자연철학이 행복한 삶의 윤리학을 열어주는 결정적 계기라고 생각들었다. |
행복하기 위하여 신까지 거들먹거릴 필요 없다. 행복하기 위하여 결정적 운명을 숨겨놓을 필요도 없다. 에피쿠로스 윤리학을 쾌락주의로 부르는데, 이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즐거움을 최대로 하자는 최대행복의 원리로서의 근대 공리주의 명제와는 다르다. 에피쿠로스의 행복은 일시적 행복감이나 즐거운 느낌이 아니라 삶의 지속적인 자유로움에 있다. 에피쿠로스에서 이런 지속적 자유의 향유를 통한 행복은 헤도네hedoně로 표현된다.
헤도네는 공허한 선험주의를 벗어나서 구체성의 행복한 삶을 중시한다. 헤도네는 정적인 불변의 세계가 아니라 변화의 원자를 파악하는 변동의 시선으로부터 생겨난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시선을 성찰이라고 말했다. 성찰은 신을 마주하는 신비주의적 체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의 현실을 마주하는 경험주의적 인식으로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헤도네는 무작정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향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쾌락을 구분하는 인식(지혜)을 통해 얻어진다는 뜻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고통과 쾌락을 구분하는 인식을 실천적 지혜, 프로네시시pronesis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이런 프로네시시를 통해 헤도네에 이른다고 한다.
프로네시시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개인능력과는 전혀 다르다. 프로네시시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꾸준히 자기감정을 조절하는 연습과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한다. 가만있으면 우리 생각 안에 망상이 조작되고 기만이 들어차며 당장의 욕망에 허우적거린다. 이런 바닥감정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다. 한편 우리는 이런 바닥감정을 조심하고 조절하려는 수치심도 가지고 있다. 바닥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남에게 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마음이 바로 수치심이다. 바닥감정에서 벗어나 수치심을 공유하는 것이 우리들의 또 다른 잠재성이다. 그런 수치심의 마음을 잃지 않도록 풀어진 쾌락을 수치심이라는 필터를 거쳐 조절해가는 연습을 우리는 할 수 있다. 이런 사유훈련과 연습과정을 에피쿠로스는 nephone logismos라고 한다. 즉 기만적 욕구충족이 아니라, 망상의 공허한 의식을 제거하여 멀쩡한 정신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삶을 말한다. 이렇게 세계는 나를 자극하며 나는 연습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세계를 수정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의 자유이다. 자유는 세계와 자아의 상호성에서 나온다.
마르크스는 세계와 의식이 서로를 반영한다는 방법론을 통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를 보았다. 마르크스는 세계와 자아의 상호성의 창문을 나중에 반성형식Reflexionsform이라고 불렀다. 반성형식에는 의식과 실재간의 상호성, 사유와 존재와의 상호성이 포함된다. |
그러면 우리는 “자유로운 헤도네”를 어떻게 해야 누릴 수 있나? 간단한다. 두 단계를 거치면 된다. 첫번째로 권력과 명예를 개인의 욕망 안에 가두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 된다. 권력과 명예를 무조건 버리라는 말과 다르다. 더 간단히 말해보자.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남에게 의존하는 권력과 명예를 버리고 그 대신 나 자신이 자신에 자족하는 권력과 자신을 존중하는 명예를 찾아가면 된다. 남에게는 소소한 듯 보이지만 나에게 소중한 그런 행복한 삶을 에피쿠로스는 강조한다. 그런 행복을 헤도네라고 했다. 헤도네에 이르는 두 번 째 단계로서 i)주술적 신비주의와 ii)미신적 종교의 그림자, 그리고 iii)결정론적 운명론과 iv)조금만 참으면 다 잘될 것이라는 정치권력의 막연한 유토피아론 나아가 v)현실을 기만하고 사실을 도피하는 사회적 목적론, 이런 류의 개인적 현혹을 냉철한 눈으로 거부하면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르크스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의미를 소중히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 에피쿠로스를 새롭게 조명했던 170년 전의 마르크스의 공부법은 고전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도덕적 몰락과 공공성 파괴를 훨씬 초월하여 기만과 분열, 망상과 집착에 빠진 박근혜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의 행태를 보면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고전에서 끄집어내어 현실에 맞춰 당장 실천해야 할 것이라는 강한 생각이 들었다. 쉬운 책은 아니지만 책 내용 중에 땅기는 부분만이라도 한 번 읽어 보실 것을 강하게 추천한다. <끝>
Tweet섦 – 나무숲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5
/0 Comments/in 문화 & 생각보기,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by 전임 편집주간나무숲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나는 언제나 없고 여기에도 없으면서 있으며
저기에도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나무는 소리 없이 그곳에 있으면서
뿌리를 내려 하얀 눈이 될 때까지 슬픔을 잃지 않는다.
인간이 가장 힘들 때는 그 슬픔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서로는 알지 못한다.
다르지만 같은 무언가를 향해 닮아가고 있다.
2017-2-1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저는 세상의 모든 존재에서 가장 인간을 닮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나무의 뿌리와 가지, 잎, 열매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을 담고 있고 365일 12개월인 1년의 주기로 나눈 우주의 운행의 삶을 나무가 자연스럽게 담고 자연으로 살아가듯 인간은 그 자연의 구성원으로 나무의 4계절을 고스란히 담고 닮아 자연을 그대로 담아 닮아갑니다.
닮아가는 것보다 물질적인 형태는 다르지만 본성이 같은 나무의 삶이 곧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삶의 시기 또한 새싹이 돋아나는 봄을 지나, 푸름과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여름을 만나고, 그 열정이 알록달록 무지개처럼 풍성한 열매 맺는 가을을 만나서 온 열정을 다해 지나온 과정을 혹독한 차가움으로 내면을 단단하게 다지고 끝과 시작을 알리는 겨울을 지나 새롭게 시작하는 나무의 일부가 됩니다.
그 과정 안에서 삶의 모든 관계는 함께 있지만 함께 없기도 하고 내가 이곳에 있지만 없기도 하고 나무와 인간이 서로를 알 수 없듯 닮은 듯 다른 듯 하며 서로를 담고 닮아있습니다.
각각의 나무 한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고 인간의 모습도 모여 사회가 되고 서로를 닮은 듯 다른 듯 살아가고 알 것도 같으면서 모르기도 하고 모를 것 같으면서 알 것 같지만 모르겠는 것, 그것이 나무의 삶과도 닮아 있습니다.
나무를 안다고 하지만 나무가 아닌 저는 나무를 사실 모릅니다. 한 그루의 나무도, 동산을 이루는 나무도 아름다운 것처럼 한 사람의 존재도 치열한 사회속의 사회도 아름답습니다.
Tweet카오스와 코스모스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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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80개의 기초개념들
1강. 철학 개념들의 탄생
오늘 첫 강의에는 고대 철학에서부터 지금까지 힘을 발휘하는 중요 개념들을 살피고자 한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이 있다. 개체 발생은 수정란에서 완전한 태아가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리고 계통 발생은 원시 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진화 과정을 말한다.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고대철학의 개념들로부터 오늘날 철학의 개념들로 발전해 온 것은 계통 발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낮은 수준에서 익힌 개념들로부터 높은 수준에서 익히게 되는 개념으로 발달은 개체 발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고대철학에서부터 오늘날 철학에 이르기까지의 순서에 따라 앞으로 80개의 철학의 기초 개념들을 살피고자 하는데, 오늘이 그 첫 시간이다. 오늘 강의의 큰 제목은 ‘철학 개념들의 탄생’이다.
1.1. 카오스
다들 알다시피, 카오스(chaos)는 코스모스(cosmos)와 대립된다. 그런데 카오스는 코스모스에 비해 신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카오스’는 헤시오도스(Hesiodos, 기원전 8-7세기 활동)의 <신통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카오스는 모든 신들이 태어나는 모태이다. 땅과 하늘, 어둠과 밝음, 낮과 밤 등 올림포스 이전의 시원적인 신들이 카오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카오스가 철학적으로 전이된 것은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기원전 610-546)의 ‘무한자’(apeiron <아페이론>)라 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무한자에서 모든 것들이 생겨난 것으로 본다. ‘apeiron’은 ‘peras’ 즉 한계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한계는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는 근본 요인이다. 카오스를 흔히 ‘혼돈’이라고 하지만, 그 특성은 바로 무정형(無定型, formlessness)이다. 형태가 없다는 것은 아직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인식할 거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형상’(形相, eidos, form)에 대한 설명을 통해 더욱 세밀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카오스가 혼돈된 것이기 때문에 무정형한 것이 아니라, 무정형하기 때문에 혼돈된 것이다.
무정형하다는 것은 그 속에 도대체 통일성을 갖춘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주변의 다른 것들과 구분되면서 그 나름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는 것이다. 카오스에서 통일성을 갖춘 것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카오스에서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에 따른 목적 등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은 인간을 비롯한 상상 가능한 모든 인격적인 존재(예컨대, 신들이나 천사 및 악마 등)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인들이다.
따라서 카오스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에서 빚어지는 모든 인격적인 존재들을 넘어선 ‘그 너머의 존재’를 가리킨다. 인간의 인식과 판단을 전혀 허용치 않는 가장 최초의 근원적인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바탕에 근본적인 것으로 깔려 있는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그래서 카오스는 존재론에서 가장 심층의 깊이를 지닌 심연으로서 작동한다. 인간을 넘어서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을 비롯해 모든 존재들을 안팎으로 관통하고 있는 근본적인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카오스를 생각한다는 것은 존재론의 출발이다. 하지만 카오스를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생각을 넘어선 곳에서 존재론이 출발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은 자신을 형성한 근원적인 바탕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충동을 지니고 있다. 그 충동은 바로 존재론적인 근본 충동이다.
현대에 와서 이 충동은 사회역사적인 코드 체계를 완전히 벗어나 발가벗은 사물 자체 혹은 실재 자체의 영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카오스는 플라톤의 게네시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의 순수 질료,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물 자체,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순수 지속, 사르트르의 순수 즉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살, 레비나스(Immanuel Levinas, 1906〜1995)의 일리야,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실재,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의 기관들 없는 몸 등의 개념으로 이어지면서 그 원형의 역할을 한다. 그런 만큼 카오스는 존재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근본 개념이자,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을 부채질하는 근본 개념이라 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예술에서의 예를 들자면, 1940년대 2차 세계 대전 중에 생겨난 ‘앵포르멜’ 유파를 들 수 있다. ‘앵포르멜’은 ‘inforemel’이라는 프랑스 말을 우리말로 음역한 것이다. 형태 혹은 형식이 없는 예술 양식을 일컫는다. 1950년대 말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크게 융성한 것이 앵포르멜 회화 양식인데, 이는 대체로 물감 자체의 원형적인 질감 자체에 의존해서 우발성에 의존해서 그려내는 그림이다. 회화에서 앵포르멜은 도대체 그 어떤 질서잡힌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느끼는 막연함을 그 자체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 바탕은 카오스가 아닐 수 없다. 카오스를 향한 존재론적인 욕망이 예술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앵포르멜 미술 양식인 것이다.
1.2. 코스모스
우주 발생론에 의하면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생겨난다. 하지만 카오스가 따로 있고 코스모스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변한 것이다.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변한다는 것은 무정형의 상태에서 정형의 상태로 된다는 것이다. 정형의 상태가 된다는 것은 카오스 전체가 그 자체로 단 하나의 정형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무정형의 카오스가 형태를 갖춘 온갖 것들로 된다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코스모스는 일정한 형태를 갖춘 온갖 것들의 전체를 일컫는다 할 수 있다.
일정한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일정한 본성(nature)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돌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돌의 본성을, 식물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식물의 본성을, 동물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동물의 본성을, 인간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본성이라고 번역되는 ‘nature’는 자연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 ‘nature’는 라틴어 ‘natura’(나투라)에서 온 것이고, 라틴어 ‘natura’는 그리스어 ‘physis’(퓌시스)를 번역한 것이다. 퓌시스는 본래 뭔가를 성장시키는 힘을 말한다.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카오스가 퓌시스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것이 ‘nature’ 즉 본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다른 것이 되지 않고 바로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생장시킬 수 있는 힘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면서, 그 속에서 일정한 형태와 본성을 갖춘 각각의 것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그 각각의 것들이 스스로를 유지하고 생장시킬 수 있는 것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각각의 것들이 각기 나름의 퓌시스를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항상 다른 것들과의 작용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가까이 하고, 자신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멀리 함으로써 각기 자신을 유지하고 생장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화와 상극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거대한 조화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상극마저도 크게 보면 조화의 한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를 일체의 것들의 조화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코스모스는 각각의 것들이 어떻게든 조화롭게 다 같이 유지되고 생장할 수 있는 관계들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일정하게 질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카오스의 무정형은 달리 말하면 무질서이다. 코스모스에서의 정형의 조화는 달리 말하면 질서이다. 코스모스 속에서 각기 나름의 본성을 지니고서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이 조화를 이룬다고 했다. 그 모든 본성들 간의 질서 잡힌 관계가 바로 질서의 총체인 코스모스인 것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한편으로 본성들 간의 질서 잡힌 체계라 할 수 있고, 그래서 코스모스는 자연(본성, nature)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코스모스를 이루는 존재의 바탕(原質, arche)은 카오스이다. 꼭 그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카오스는 코스모스의 원질의 내용이고, 코스모스는 카오스를 색다르게 구성하는 형식이다. 말하자면,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다른 것이면서 같은 것이다. 원질의 내용으로 보면 같은 것이고, 그 형식에 있어서만 다른 것이다. 카오스는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고, 코스모스는 형식을 제대로 갖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의 이행이다. 그것은 도대체 코스모스를 이루는 질서, 즉 형태 혹은 본성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플라톤은 형태 혹은 본성이 카오스의 외부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 즉 이데아들이 바로 카오스의 외부로부터 카오스에 주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카오스 자체에서 발휘되었다고 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런 입장을 취한 인물이 바로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다. 그는 그래서 ‘카오스모스’(chaosmos)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카오스모스’는 들뢰즈가 우주론에 있어서 어떻게 반플라톤주의를 정립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되는 과정이 카오스 외부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카오스 자체의 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여기면서 그 중간 과정을 일컬어 카오스모스라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통치자들은 사회적인 코스모스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회적인 카오스이다. 카오스는 도대체 어떻게 접근해서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강력한 사회적 코스모스를 지향하게 되면 자칫 파시즘적인 사태가 벌어진다. 개개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카오스이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사회적 카오스가 바로 혁명이다. 그러고 보면, 자유와 혁명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아 불행한 것은 혁명 이후 혁명의 주동자들이 오히려 강력한 코스모스를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일반 대중들이 혁명에 의한 독재가 아니라, 혁명에 의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적절한 카오스적인 측면을 허용하는 사회적인 코스모스야말로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의 형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Tweet섦 – 시비시비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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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그리 나쁠 것도,
그리 좋을 것도 없다.
있는 그대로 여기에 있다.
같은 해가 뜨고
같은 날이 오고
같은 생각이 와도
같지 않은 해이고
같지 않은 날이고
같지 않은 생각이 있다.
12월의 가득했던 날을 지나
1월의 새로운 날이 왔다.
반짝반짝 이 해를 닦아 보자
2017-1-31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매일의 해는 똑같이 떠오르지만 누군가에게는 천국 같은 삶이,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삶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모든 것에 대해 나쁠 것, 좋을 것이라고 구분하는 선택의 삶은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경계선을 뛰어넘는 생각은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고
무한한 자유의 영역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정된 공간에 머무르는 몸과 무한정한 정신의 생각은 조화를 이루고
시비의 구분과 구별하지 않는 자유를 허락하는 작은 영역의 삶은
매일의 같은 해도 매일 다르게 볼 수 있는 해를 만들 것입니다.
2017년 매일의 해를 반짝반짝 닦아 빛나는 해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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