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자유는 근본적으로-자기해방(Selbstbefreiung)이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모든 자유는 근본적으로자기해방(Selbstbefreiung)이다.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자기해방과 해방(Emanzipation)을 구별하라

 

우리는 앞서 슈티르너가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변주하여 “네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라는 주장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그가 내세우는 ‘유일자’, 곧 ‘나다움’의 철학을 의미하고 다시 ‘자유’의 문제와 연결되면서 자유가 ‘자기해방’임을 드러낸다. 못다 들은 그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자유는 근본적으로-자기해방(Selbstbefreiung)”이다.(184) 이 말은 우선, “내가 나다움(Eigenheit)을 나에게 마련해 주는 만큼 내가 그만큼만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184) 좀 더 ‘자기해방’에 대해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는 슈티르너가 자기해방을 해방(Emanzipation)과 구별하는 지점을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기해방과 구별되는 것은 해방, 자유롭게 방면함(Freisprechung), 자유롭게 놓아줌(Freilassung)이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구별 속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놓아줌’을 갈망하고 외친다.”고 비판한다.(184) 이렇듯 그에게 자기해방과는 다른 의미인 해방은 ‘자유롭게 방면함’, ‘자유롭게 놓아줌’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성년임을 선고하다’(für »mündig erklären)는 것을 ‘해방하다’(emanzipieren)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185) 그런데 동사 ‘에만치파레’(emancipare)는 라틴어에서 우선 타동사로 사용되었고, 또한 체들러가 번역하듯이 ‘팔다’(verkaufen), ‘양도하다’(veräußern)의 뜻이었는데, 특히 경작지를 팔거나 양도하는 것을 일컬었다. 이 동사와 명사형이 서유럽 민족 언어로, 14세기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17세기에는 영국 그리고 그 후 독일로 유입된 이후에 재귀적인 사용이 대두됐는데, 이는 성년이 됨/성숙하게 됨(Mündigwerdung)이 지니는 관습적인 의미에서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이전의 법률 용어에서 배제되었던 자기 전권위임(Selbster-mächtigung)을 지시하게 되었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해방 9, 22쪽.) 우리는 아래의 글을 읽고 난 후에 슈티르너가 ‘자기해방’을 ‘자기 전권위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아래의 글을 음미해 보자.

 

자유롭게 놓아준 사람(Freigegebene)은 바로 어떤 해방된 자, 어떤 (노예에서 해방된: 옮긴이) 자유인(libertinus), 사슬의 조각을 질질 끌고 다니는 어떤 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그는 사자의 탈을 쓴 당나귀(der Esel in der Löwenhaut)처럼 자유의 겉모습 속에 있는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185)

 

  1. 자기해방은 자기 전권위임’(Selbster-mächtigung)이다.

 

이제 슈티르너에게 자유롭게 놓아준 사람은 해방된 자이고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이렇듯 자유롭게 놓아준 사람은 사자의 탈을 쓴 당나귀처럼 약자의 허세, 꾸민 기세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해방보다는 자기해방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은 “만약 내가 힘이 있는(mächtig) 존재일 뿐이라면, 나는 이미 자연히 무엇을 할 권력을 주는(ermächtigt) 존재이고 결코 다른 전권위임(Ermächtigung) 혹은 자격 부여도 필요치 않다.”(230)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ermächtigen’< (무엇의[무엇을 할]) 권력[자격·전권]을 주다>라는 단어를 소유와 연결시켜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소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나의 안에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네! 나는 어떤 소유에 대한 정당한 권리가 있는가? 내가 나에게 –무엇을 할 권력을 주는(ermächtige) 모든 것에 있다. 내가 나에 소유를 취함으로써, 혹은 나에게 소유자의 힘(Macht)을 주고, 전권(Vollmacht)을 주며, 전권위임(Ermächtigung)을 줌으로써 나는 소유의-권리를 나에게 준다.(284)

이렇게 보면, 그에게 자기해방이라는 것은 ‘자기 전권위임’(Selbster-mächtigung: 물론 슈티르너가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진 않는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자기해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 이유는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의 힘으로부터 해방시키지(befreite) 않기 때문”이다.(94) 그리고 표상의 신성함에 대한 존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현대적인 시대는 단지 실존하는 객체, 현실적인 권력자(Gewalthaber) 등등을 표상된 것(vorgestellte)으로 변화시켰는데(verwandelte), 다시 말해 그 이전에 관념(Begriffe) 속에서 오래된 존경을 상실하지 않았을 뿐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래된 존경이 강하게 증가했다.(94)

 

그는 표상을 도덕성과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도덕(Sitte)과의 결별을 선언하지만, ‘도덕성’(Sittlichkeit)이라는 표상(Vorstellung)과 결별을 선언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96) 예를 들어 ‘가족’이 어떤 신성한(heilig) 관념이기 때문에, 개인들은 신성한 관념을 결코 모욕해서는(beleidigen) 안 된다는 것이다.(95) 나아가 “이러한 가족은 어떤 생각, 관념으로 내면화되고 지각할 수 없게 된 가족은 이제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바로 그 신성한 것의 전제정치(Despotie)은 열 배나 더 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신성한 것의 전제정치는 내 양심 안에서 떠들기 때문이다.”(96)

 

 

  1. 신성한 관념이라는 전제정치를 깨부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Nichts)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정치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다시금 유일자의 존재론인 ‘창조적 무’이다. “가령 표상된 가족이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Nichts)으로 될 때, 이러한 폭정은 부서진다.(96) 이러한 폭정을 부수는 것이 다름 아닌 유일자의 나다움을 찾는 것이고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며 자기해방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자유라는 말의 의미이다. 그가 말하는 ‘자아’가 다음과 같음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공허함(Leerheit)의 의미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das Nichts)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적인 아무것도 아님(das schöpferiche Nichts), 곧 아무것도 아님에서 나 자신은 창조자로써 모든 것을 창조한다.(5)

 

‘Nichts’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non ens)이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무(Nichts)의 지위는 슈티르너 철학의 존재론의 핵심을 잘 드러내고 있는 “창조적인 아무것도 아님”을 정립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매순간마다 자신을 그때그때 최초로 정립하거나 창조하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것이다.”(167) 이는 활동적인 자아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자아의 활동성은 유적 본질의 부정으로 나아가고 창조적 무를 긍정하게 만드는 계기(monent)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론은 부정의 활동을 통하여 끊임없이 창조적인 자아로 회귀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자아는 존재할 수 없고, 오히려 끊임없는 부정의 활동으로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Göttliche’, 곧 신적(神的)인 것이라는 말, 다시 말해 ‘거룩한 것’이라는 말은 크고도 성스러워 함부로 했다가는 큰일이 나는 어떤 대상을 수식할 때 쓰는 말이다.(빌헬름 바이셰델, 안인희 옮김, 『철학의 에스프레소』, 프라하, 2012, 30쪽.) 이것에 대해 슈티르너는 비판을 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유일자, 나다움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그보다 더 높은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모든 거룩한 것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그에게 권리, 국가, 사회, 인간, 인간적인 것, 하물며 가족, 이념, 소명 등을 거룩하게 하는 모든 것은 비판의 대상일 뿐이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룩한 것에 대한 비판이고 거룩하게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한 경멸이다.

이러한 거룩한 것, 신성한 것은 일반적인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에게 ‘일반적인 것’(allgemeine) 또한 비판의 대상이고 무관심의 대상이다. 일반적이란 말은 하나의 집합에 속하는 모든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특수, 단일과 대조적인 말이다. 일반적(general)은 유, 기원을 뜻하는 geus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그가 유적존재를 비판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일자는 이러한 일반적인 것에 무관심하며, 오로지 다음과 같은 점을 고수한다.

 

  1. 염려하라, “나에게 있어서 나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에게 있어서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Mir geht nichts über Mich!)(5)

 

위 구절과 유사한 말이 그의 저작에서 몇 번 더 언급된다. 그는 출판물을 예로 들어 소유 문제와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출판물은 나에게 있어서 이미 나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는(Mir nichts mehr über Mich geht) 순간부터 나의 소유이다.”(316) 이와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인류, 이념: 옮긴이)은 나에게 있어서 내 위에 있는 것이다.”(es geht Mir über Mich.”(341) “내 아래에 있는 모든 참들은 내게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내 위에 있는 어떤 참, 곧 내가 나를 참에 맞추었어야만 하는 참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에게 어떤 참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이상인 것은 아무것도 없기(über Mich geht nichts) 때문이다! 나의 본질(Wesen)조차, 내 위에(über Mich)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본질조차 내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정확히 말해서 이 ‘양동이에 있는 물방울’, 이 ‘중요하지 않은 인간’이 내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399)

그런데 “참, 인류 등등과 같은, 모든 더 높은 본질은 우리보다 상위에(über) 있는 어떤 본질(Wesen)이다.”(40)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일자가 염려해야 할 것은 나의 자아, 유일성, 나다움이다. “너의 고유한 자아(Dein eigentliches Ich)를 위해 염려하는(sorgest) 것이 필요하다.”(31) 염려한다(sorgen), 염려(Sorge) 단어는 슈티르너가 자주 쓰는 단어인데, 특히 유일자를 개념화 하는 중요한 단어라고 본다. 유일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염려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나다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신성한 것에 대한 탈신성화의 선포가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자기해방, 곧 자유를 염려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일자를 주장했던 슈티르너가 죽은 뒤 한참 뒤에 하이데거는 ‘염려’를 자신의 존재론적 명칭으로 사용한다.

심려(Sorge, 염려, 마음씀)는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존재 전체를 규정하는 말이다. 하이데거에게 현존재의 존재를 특히 심려(Sorge)라고 이름 짓는다. 이는 순전히 존재론적-실존론적 명칭이다. 심려는 그야말로 세계-내-존재를 전체로서 특징짓는 존재론적-실존론적 명칭이다.(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그렇다면 ‘창조적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존재론에서 유일자가 ‘염려’하는 것은 바로 ‘고유한 자아’이다. 결국 슈티르너의 존재론은 고유한 자아, 나다움, 자기해방, 나아가 자기 전권위임을 염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미 확인했듯이 이것이 자유이다. 그런데 “자기를 벗어난 노력과 염려(Sorgen)는 자기폐지(Selbstauflösung)”이다.(39) 다음호의 글의 주제가 정해졌다. 자신을 염려하지 않는 자는 자기폐지이다. 그의 책에서 끝으로 말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나는 나의 힘(Gewalt)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유일자(Einzigen)로 이해할 때, 나는 나의 힘의 소유자이다. 소유자 자신은 유일자 속에서 자신의 창조적인 무(Nichts)로 되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창조적인 아무것도 아님(Nichts)에서 다시 태어난다. 신이든, 인간이든지 간에 나보다 더 위에 있는 모든 더 높은 존재(Wesen)는 나의 유일성(Einzigkeit)에 대한 느낌을 약화시키고 내가 나의 유일성을 의식할 때(der Sonne dieses Bewusstseins)에만 빛이 바랜다. 만약 내가 나 자신 위에 나의 관심사인 유일자를 세운다면, 그때에 나의 관심사는 무상함(Vergänglichen) 위에, 곧 자기 자신을 소비하는, 그 자신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창조자 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다.

나는 나의 관심사를 무(Nichts) 위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