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아, 자네 머릿속에서 유령이 출몰하고 있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이 사람아, 자네 머릿속에서 유령이 출몰하고 있네

박종성(한철연 회원)

 

  1. 고정관념은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유령이다.

 

우리는 앞서 신성모독자가 수행하는 신성모독(Entheiligung)과 과소평가(Herabsetzung)는 탈마법화라는 점을 이해하였다. 나아가 신성한 것에 대한 탈마법화는 지금까지의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슈티르너는 새로운 역사의 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한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나의 번영하기 위해서(um 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한다.(282)

이 글에서는 고정관념에 대한 슈티르너의 이야기를 음미해보고자 한다.

 

 

이 사람아, 자네 머릿속에서 유령이 출몰하고 있네(Mensch, es spukt in Deinem Kopfe). 자네는 미쳤네!(Du hast einen Sparren zu viel) 너는 위대한 존재물(Dinge)을 상상한다. 그리고 너는 너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신들의 모든 세계, 네가 어떤 것에 천직인 정신의 왕국, 너에게 손짓하는 이상(Ideal)을 마음에 그린다. 그러므로 당신은 일종의 고정관념(fixe Idee)을 가지고 있다네!(46)

 

그가 ‘고정관념’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을 복종시켰던 하나의 관념(Idee)이다.”이고 “어떠한 비난도 허용되지 않는 미덕(Tugend)이다.”(46) 나아가 “어떤 생각을 불어넣었던(sich in den Kopf gesetzt) 것”을 고정 관념(fixe Idee)이라고 부르고 있다.(80) 그것은 “어떤 경우이든 그들의 머릿속에서 유령으로 출몰한다(spukt). 가장 괴롭히는 유령(Spuk)은 인간(der Mensch)이다.”(80) ‘그 인간’이라는 ‘유령’은 고정관념이고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다. 그리고 슈티르너는 이러한 유령을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헤겔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념(Begriffe)은 도처에서 결정해야만 하고, 삶을 규정하고, 지배한다.”(104) “언어 혹은 ‘말’은 우리를 가장 과격하게 전제적으로 다스린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에 반대하여 고정 관념이라는 어떤 완전한 군대를 세우기 때문이다.”(389) 또한 “고정 관념은 ‘근본명제, 원리, 입장’ 등과 같은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낯선(fremd) 입장이 바로 정신, 이념, 생각, 개념, 본질 등의 세계이다.”(67)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개념규정(Begriffssatzungen)에 따라 살아가도록 강제되었다.”(105)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개념규정을 비판하면서, 개념이 ‘유일자’, ‘에고이스트’를 초라하게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유일자의 소유가 약화되는 곳에서, 그것이 중지하는 곳에서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이 시작되고 어떤 목적은 고정관념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Uneigennützigkeit)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66]바로 어떤 목적이 우리가 소유자(Eigentümer)로서 뜻대로 행동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는 우리의 목적과 우리의 소유(Eigentum)를 중지하는 그 곳에서 시작한다. 그 경우에 어떤 목적은 하나의 고정된 목적이거나 하나의 고정 관념이 된다.

 

슈티르너가 고정관념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삶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들 대부분 신문들의 모든 바보 같은 쓸데없는 말은 도덕, 적법성, 기독교 정신 등등의 고정관념으로부터 고통 받는(leiden) 바보들의 끊임없는 수다가 아닌가?”(47) 슈티르너는 분명히 이러한 고정관념이 우리에게 끼치는 억압성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다. 앞서 슈티르너가 탈신성화를 통해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라고 주장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데리다가 현대의 영혼 상태로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방식이다. 곧 우리가 고통받게 만들고(Leiden-machen), 고통스럽게 놓아두고(Leiden-lassen),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들고(Sich-leiden-machen), 스스로 고통받게 놓아두는(Sich-leiden-lassen)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해결방식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Seelenstnde Psychoanalyse) 슈티르너에게 ‘고정관념’은 고통의 원인이다. “어떤 참된 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은 지배자를 찾으려고 애쓰고 찬양한다.”(397)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 지배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결국 고정관념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므로 우리가 스스로 고통받게 만든 것이고, 이 고정관념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고통받게 놓아두는 것이며,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하늘을 자신들에게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천국의 입장을 확고하게 그리고 영원히 받아들이기 위하여, 인류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칠 줄 모르게 필사적으로 싸웠다.”(67)

 

 

  1. 고정관념에 대해 의심하라

 

이러한 고정관념에 의한 고통으로부터 저항하고 빠져나올 수 있는 태도는 의심하는 것이다. 곧 고정관념이라는 신성한 것에 대해 의심하는 태도가 유일자의 태도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유일자고 선언하는 것은 다른 그 무엇을 자신보다 더 높은 본질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아님’이라고 신성모독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문마다 정치기사로 가득한 것은 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언젠가 비판의 날카로운 칼을 자신들의 고정관념에 놓으려 하지 않고, 노복(奴僕)은 노복 근성(Untertanentum)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덕으로, 자유주의자는 ‘인류’ 등등으로 어렵게 살아간다. 미친 사람의 그릇된 생각처럼 확고한 그들의 생각들은 단단한 토대에 서 있다, 그리고 저 생각들을 의심하는 사람은 –신성한 것을 공격한다! 그렇다, ‘고정관념’, 그것은 참으로 신성한 것이니까!(47)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슈티르너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의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 곧 도시(polis)를 자연적 사실로 보고 도시 안에서의 삶을 정치적 동물로 파악하면서 공동체의 목적성을 함께 존재함의 행복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슈티르너는 기존의 공동체의 삶에 대해 의심한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에고이스트의 연합’을 구성하길 원한다. 그리하여 연합은 교류, 상호성(Gegenseitigkeit)이고 자유의 확대이며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존의 ‘생각들 의심하는 사람’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해 의심하면서 살고 있는가? 과연 이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너무나 뻔한 질문이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당연한 것처럼 보이고 느껴지는 것에 대해 의심하며 살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슈티르너는 고정관념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여 그 신성함에 대해 모독을 하길 원했고, 맑스는 자본주의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했기에 이를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비판과 분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편협 고루한 종교적 견해를 종교적 입장의 또 다른 측면, 곧 도덕적 입장으로 교환한다(eintauschen). 예를 들어 우리는 더 이상 “신은 사랑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은 거룩한(göttlich)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거룩한 것이다”라는 술어의 자리에 동일한 의미인 “신성한 것이다”(heilig)라는 말을 대신한다면, 상황은 모든 낡은 것으로 다시 귀환한다. 그것에 따라서 사랑은 인간에게 선한 것, 선한 것의 거룩함(Göttlichkeit), 인간에게 명예를 만드는 것, 인간의 참된 인간다움(이것은 “그를 비로소 인간(Menschen)으로 만들고”, 비로소 그의 밖에 어떤 인간을 만든다.)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선한 것은 더 정확하게 다음과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인간적인 것이다. 그리고 비인간적 인간(Unmenschliche)은 애정이 없는 에고이스트이다.”(51)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도덕적 입장으로 교환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신은 사랑이다”에서 “사랑은 거룩한(göttlich) 것이다”로, 그리고 다시 “사랑은 신성한(heilig)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인간에게 인간적인 것이다”로 교환된다. 이렇게 되면 슈티르너가 보편적 추상성을 나타내는 ‘인간’과 구분하여 개별성을 강조하고자 사용하는 ‘자아’, ‘유일자’, ‘에고이스트’는 비인간적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맑스와 아도르노에게서도 교환Tausch, 교환가치Tauschwert는 자본주의 사회나 상품의 비밀로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열쇠이다. 이것에 반대 측에는 사용가치, ‘즉자적인 사물이 갖는 질’(質), ‘불가공약적인 것’이다.(계몽의 변증법, 32쪽) 이런 맥락에서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도덕적 입장’으로 교환한 것은 ‘인간다움’이다. 모든 개별자는 ‘인간’ 혹은 ‘인간다움’으로 교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다움 그 반대 측에 있는 사용가치는 ‘나다움’, ‘비인간적 인간’, ‘에고이스트’로 볼 수 있다. 나다움의 주장은 모든 나다움이 ‘인간다움’이라는 교환가치로 교환된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과 교환되는 모든 ‘유일자들’의 비교될 수 없는 질적인 측면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다움’이 ‘인간다움’을 가능하게 하는가? 슈티르너는 ‘나다움’이 ‘인간다움’의 실존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또는 ‘인간다움’이 ‘나다움’을 가능하게 하는가? 헤겔은 후자를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은 좋은 국가의 시민이 되는 데서 비로소 자기의 권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법철학, 153절 보)

또한 위 글에서 논의되는 ‘인간다움’은 계몽과 연관하여 살펴볼 단어이다. 왜냐하면 계몽은 인간다움과 이성성의 원리들을 통해 규정되어 있으며 순수하고 고상하고 인륜적이고 완전하게 만드는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몽가들의 진보 이데올로기에 있어 계몽은 잠재적으로 역사적인 범주, 기획과 목표 개념으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계몽』, 31-32쪽 참조). 계몽이 인간다움을 지향하고 있다면, 슈티르너는 인간다움을 지양하여 나다움(Eigenheit)을 지향하고 있다.

 

 

  1. 창백한 덕(Tugend)을 경멸하라

 

고정관념은 신성한 것이고 이것을 의심하는 것이 나다움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성한 정신은 절대적 관념으로 변신하고 다시 절대적 관념은 인류애, 이성적인 것, 시민의 덕 등등으로 변신한다.

 

가지각색의 변신들(Wandlungen) 가운데 신성한 정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절대적 관념’(absolute Idee)이 되었다. ‘절대적 관념’은 다시 다양한 굴절을 통해 서로 나누어져(auseinander) 인류애, 이성적인 것, 시민의 덕(Bürgertugend) 등등의 다른 종류의 관념을 만든다.(104)

 

슈티르너는 절대적 관념이 변신한 것들 가운데 ‘덕’(Tugend)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다움, 여성다움을 자신의 특성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다움’으로 인하여 고통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많은 고정관념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기 때문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 아니라 ‘나다움’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남자다움(Männlichkeit) 혹은 여자다움(Weiblichkeit)과 같은 어떤 나의 특성((Eigenschaft) 고유성(Eigentum))일 뿐이다. 고대인은 사람들이 완전한 의미에서 남자(Mann)라는 그 점에서 이상(das Ideal)을 생각했다. 다시 말해 남자의 덕(Tugend)은 남성적인 힘(virtus)과 훌륭함(arete), 다시 말해 남성다움(Männlichkeit)이다.…여자는 ‘진정한 여성다움’(echten Weiblichkeit)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199)

독일어 Tugend는 virtus(남성적인 힘), vir(인간)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 사물의 고유한 힘을 의미한다. 그런데 “ 인간(Der Mensch)은 단지 어떤 이상이고, 유는 오로지 어떤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Ein Mensch)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인간(Menschen)이란 이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별자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200) 슈티르너에게 ‘이상’은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존재의 의미이다. 그런데 “종교는 어떤 이상(Ideal)의 고정(Fixierung), 어떤 절대적인 것의 확정으로 존재한다. 완전성은 ‘최고의 선’이고, 선의 끝(finis bonorum)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이상은 완전한 인간, 참된 인간, 자유로운 인간 등등이다.”(269) 우리는 이미 고정관념이 “어떠한 비난도 허용되지 않는 미덕”(46)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우리를 지배하는 고정관념, 곧 “창백한 덕(Tugend)을 경멸하기(verschmähen) 위해” 노력했던 ‘니농’(Ninon)에 대해 언급한다. 먼저 ‘욕하다’, ‘비방하다’(schmähen)와 연관된 단어는 조롱(spott), 무례함, 자만이라는 단어와 함께 모두 탈신성화를 위한 마음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잠시 니농 드 랑클로(1616∼1705)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는 17세기 프랑스 사교계를 주름잡던 여성인데, 직업은 ‘코르티잔(Courtesan, 고급 창부)’으로 알려져 있다. 15세에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하급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고급 창부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현명하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이태리어, 스페인어, 수학과 철학 등에도 매우 뛰어났으며, 유머와 센스를 겸비한데다 우아한 외모도 갖췄다고 한다. 루이14세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조언을 들었고, 볼테르도 그의 살롱에 출입하는 단골 문인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프랑스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불공평함을 극복하기 위해 남성 우월주의가 만든 모범적 삶과 탕녀의 고정관념을 바꿨다. 슈티르너도 이러한 그의 모습을 자유로운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며,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여성으로서는 유례없는 지적 자유를 누렸다.” 니농 드 랑클로는 “군대를 지휘하는 것보다 사랑을 할 때 훨씬 더 많은 재능이 필요하다” “사랑은 굶주림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화불량으로 죽는 경우는 많다.”(코르티잔, 매혹의 여인들, 수잔 그리핀 지음, 노혜숙 번역/해냄출판사)

 

 

  1. 비아(Nicht-Ich)라는 실체에 비굴하게 굴지 말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의심하라, 그래서 나다움의 가치를 끌어올려라

 

“비아(Nicht-Ich)라는 단단한 다이아몬드가 엄청난 가격을 지니고 있는 한, 나의(Meiner) 가치는 높게 평가되지 않을 것이다. 비아는 나에 의해 소비하고 흡수되기에는 여전히 너무 거칠고 억제할 수 없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체를 완전히 먹어 없애지 않으므로, 기생생물이 신체에서 바로 그 신체의 체액으로부터 양분을 배양하듯이, 사람들은 이러한 움직일 수 없는 것(Unbeweglichen)에, 다시 말해 이러한 실체(Substanz) 주변에서 대단히 부지런히 비굴하게 굴뿐이다.”(72)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비아는 신과 같이 파괴되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비아는 국가, 사회로 볼 수 있다. 슈티르너는 또한 사회를 실체로 간주하는 것을 비판한다. “사람들은 사회의 실체(Substanz)를 다치지 않게 해야만 하고 신성하게 유지해야만 한다.”(343) 실체에 대한 잠시 살펴보자. 최초의 존재자를 ‘자기 원인’, 곧 신(theos)이라고 보고, 이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유래하는 존재자’이므로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족체(自足體, autarkeia)’이며, ‘그것은 자신의 본질 상 자기 안에 존재를 포함’하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를 위하여 어떤 다른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데카르트, Principia Phil, 1, 57)이라는 의미에서 ‘실체’(substantia)라고 불리고 모든 존재자를 포괄한다는 뜻에서 ‘최고 완전 존재자’(ens perfectissium), 혹은 모든 존재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질들을 다 갖추고 있다는 의미에서 ‘최고 실질(재) 존재자’(ens realissimun)라고 불리 운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실체의 개념을 ‘자족체’로 이해하기보다는 실천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실체라는 것은 마치 기생생물이 바로 그 신체의 체액으로부터 양분을 배양하듯이, 사람들이 그러한 실체에 대해 비굴하게 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비아’는 소비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한 비아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실체로 보이는 것이다. 신성한 것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 아니다. 신성한 것은 신성한 것이라고 ‘선포’되어야 신성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적인 것’(Wesentliches) 혹은 ‘실체적인 것’(Substantielles)은 아무것도 변화(Veränderung)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72) 독일어 Wesen은 ‘본질’을 뜻하는 라틴어 essentia가 어원이다. 이 말은 ‘존재하는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ousia의 번역어인 라틴어 esse에서 유래한 것이다. 철학에서는 1)부수적인 성질의 반대말로 어떤 존재의 항구적인 본성을 구성하는 것인데, 이 점에서 ‘실체’와 가깝다. 나의 것이 비아의 것이라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국가가 자아(das Ich)로 존재하는 한, 개별적인 자아는 일종의 가난한 악마, 어떤 비-자아(Nicht-Ich)로 남아야만”(280) 한다.

그는 욕망(Begierden)이 ‘고정되어(fix)’서는 안 된다.(67)고 말한다. 그리고 오히려 “나의 소유 스스로가 고착되어 하나의 ‘고정된 이념’ 혹은 하나의 ‘병적 욕망’(Sucht)이 될 수 있기 이전에 그것을”(157) 삼켜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고정관념은 병적 욕망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폐욕망(Geldgier)으로부터 화폐욕망의 노예만을 자유롭게 한다.”(374) 그리고 그는 이러한 고정관념에 의해 ‘노예화된 본성의 한탄(Jammer)을 경청’하라고 한다.(68) 화폐욕망은 맑스가 자본에서 언급하는 것으로, 맑스는 이러한 화폐의 욕망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으로 만들어 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그는 독단론자과 비판가를 구분하는데, “비판가는 항상 사상에서 출발하지만, 그러나 그는 원리적인 생각을 사유과정(Denkprozess)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생각을 고정된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단론자와는 차이가 있다.”(162)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유일자는 비판가인 것이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의심하는 자이다. 나아가 “’경건하지 않음’(»Unehrerbietigkeit)«과 ‘뻔뻔스러움’(Frechheit)”(311)은 유일자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함께 쓰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곧 신성한 것에 맞서는 유일자의 태도인 것이다. 그리고 조롱(Spott), 욕설(Schmähung), 경멸(Verachtung), 의심(Bezweifelung) 등도 유일자의 덕목임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 그래서 그는 “나의 가치, 곧 나다움이라는 가치를”(279) 끌어 올려라! 그런데 “내가 나다움(Eigenheit)을 나에게 마련해 주는 만큼 내가 그만큼만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충분히 인정하지 못한다.”(184)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자기 해방’(Selbstbefreiung)이기 때문이다.

자기해방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