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티르너의 『유일한 사람과 그의 소유』를 읽기 전에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슈티르너의 유일한 사람과 그의 소유를 읽기 전에

 

박종성(한철연 회원)

 

아직은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한글본이 나오는 날을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 슈티르너의 글을 읽을 때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인 ‘der Mensch’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글 속에서 저 단어는 고정된 하나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슈티르너는 ‘der Mensch’를 이중적 의미로 사용하고 이러한 이중적 의미에서 대립의 지점을 포착하고 그로부터 자기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그 대립을 역전시키고 있다. 전형적 변증법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단어는 중요하다. 그가 청년을 비유로 들어 관념론의 시기를 다루는 글을 보자.

 

순수한 생각을 밝히는 것, 혹은 순수한 생각을 신봉하는 것, 그것은 청년의 즐거움을 의미한다. 그뿐 아니라 진리, 자유, 인류, 인간(der Mensch) 등과 같은 생각의 세계에 있는 모든 빛나는 자태는 청년의 영혼을 계몽하고 열광케 한다. (12쪽)

 

먼저 관념론의 시기를 다루는 저 구절에서 ‘der Mensch’는 어떤 뜻일까? 함께 쓰인 단어들을 보자. 그것은 ‘진리, 자유, 인류, 등과 같은 생각의 세계’, ‘순수한 생각’이다. 그러니까 ‘der Mensch’는 현실이 아니라 이상이고, 구체가 아니라 추상이고, 개별이 아니라 보편이며, 존재가 아니라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슈티르너가 원문에서 사용하는 단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슈티르너가 ‘der Mensch’의 정관사를 강조하면서 쓸 때, 그때 인간은 추상적, 이상적 인간을 의미한다. 원문에서 ‘der Mensch’는 정신, 이상, 인간 일반, ‘인간이란 본질’, 인간의 본질, 유령 같은 나, 참된 인간, 더 높은 본질, 유령, 허깨비, 신성한 것, 고정관념, 유적 존재와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대립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재밌게도 같은 단어이다.

 

-자유롭게 된 것은 저마다 다른 인간이 아니라,(오로지 저마다 다른 인간은 인간(der Mensch)이다.(121쪽)

 

위 문장에서는 같은 단어 ‘der Mensch’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슈티르너는 대체로 ‘인간’(Der Mensch)을 추상적 인간을 의미할 때 사용한다. 그때 ‘인간’이라고 옮길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정관사를 강조하면서 쓴 ‘ 인간’(Der Mensch)은 구체적 인간을 의미하고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der Mensch’는 개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개인이라는 것은 저마다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저마다 다른 사람이 ‘der Mensch’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der Mensch’는 앞서 인용했던 추상적 인간과는 대립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제, ‘der Mensch’라는 말은 거꾸로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고, 추상이 아니라 구체이고, 보편이 아니라 개별이며, 본질이 아니라 존재이다. 원문에서 구체적 인간을 의미하는 것은 개인, 개별, 어떤 인간, 나, 사람, 인간들 등으로 쓰고 있다.

위의 내용을 기억하면서 정리해 보자.

 

테제: 인간은 인간이다.

안티테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나다.

 

위와 같은 내용, 곧 모순, 대립의 지점을 아래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인간(der Mensch)이 인간들(die Menschen)에 맞서고, 또는 그 인간들이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Unmenschen)에 맞선다.(152쪽)

 

지금까지 ‘der Mensch’를 대체로 인간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의미는 앞서 설명하였듯이 추상적 인간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der Mensch’가 인간과 대립되고 모순되는 내용을 이 단어가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슈티르너는 이 지점을 인간에 대립하는 명제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 인용문에서 정관사를 그대로 두고 번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슈티르너는 단수와 복수의 대조를 통해 추상적 인간과 구체적 인간을 대립시키고 있으므로 정관사를 그대로 두고 옮기는 것이 더 명확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 인간’은 ‘ 인간들’과 대립적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 인간’은 추상적 인간이고 ‘ 인간들’은 구체적 인간이다. 인간은 인간들이 아니고, 인간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조금 더 ‘테제’와 ‘안티테제’의 내용을 추가해 보자.

 

테제: 인간은 인간이다.=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다.

안티테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나이다.=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

 

이제 ‘진테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자 이제, 그러한 발견의 결과로 얻은 이익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인간을(den Menschen) 기독교 역사와 인류의 종교적 혹은 이상적 노력이 마침내 발견했던 성과로 생각하도록 하자. 자, 인간은 누구인가? 이노라! 인간은 기독교의 결말이자 결과이다. 나로서의 인간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자 이용하는 재료이고, 자기희생의 역사 이후의 향유의 역사이며, [198]인간의 역사 혹은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역사이다. 인간이 보편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나와 자기다운 사람이 정말로 보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최고로 중요한 자기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테제와 안티테제를 추가해 보자.

 

테제: 인간은 인간이다.=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다.=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이다.=인간은 나이다.=인간은 보편이다.=나는 인간다운 인간이다.

안티테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나이다.=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나는 나로서의 인간이다.=나는 보편이다.

진테제: 인간은 나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나로서의 인간이다.=나로서의 인간이 보편이다.=나는 인간다운 인간이면서 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오로지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현실의 인간이다.

 

슈티르너는 진테제의 근거를 ‘나로서의 인간이 보편’인 이유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최고로 중요한 자기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현실에서 그럴까? ‘나로서의 인간’은 자기다운 사람(Egoist)이다. 자기다운 사람은 개인이고 저마다 다른 사람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면서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은 “오로지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현실의 인간”으로 해소된다. 이상으로서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 저마다 다른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슈티르너가 ‘der Mensch’라는 단어를 통해 모순, 대립을 설정하고 다시 그 대립으로부터 종합하는 사유방식을 통해 기존에 지배적이던 사유 틀을 깨부수려는 그의 의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대립은 인간으로서의 인간과 나로서의 인간이다. 전자를 강조하면 보편, 추상, 본질, 동일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우위에 두는 것이고 후자를 강조하면 개별, 구체, 존재, 차이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우위에 두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der Mensch’라는 말을 통해,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말장난을 통해, ‘der Mensch’로 익살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익살, 조롱, 비웃음은 권위주의와 대항하는 힘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책 전체에 퍼져 있다. 슈티르너는 자신의 시대를 지배하는 권위주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 비웃음, 조롱, 익살로 저항한다.

 

내가 나의 참된 행복(Heil)을 어떤 것, -곧 ‘신성한 것’(Heiliges)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38쪽)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다. 무엇이 어이가 없는가? 유사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이가 없는가? 다른 어처구니없는 것은 없는가? 행복(Heil)을 ‘신성한 것’(Heiliges)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어처구니없게 만들기 위하여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것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지배적 담론을 유사한 단어를 통해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것이 돋보이고 있다. ‘신성한 것’은 보편, 추상, 본질, 동일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범주를 대표하는 것이 민족, 국가이다. 오래전 보았던 영화 <타인의 삶>이 떠오른다. 국가, 민족을 위해 살아온 그가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점원이 책을 누구에게 선물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주인공 ‘비즐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은 나를 위한 것이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0월 월례발표회 영상 “‘K-철학’은 가능한가?”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0월 월례발표회

이번 월례발표는 상지대학교 교양대학 김시천 선생님이 『東洋哲學』 제55집(2021. 7.)에 게재한 논문 「’K-철학’은 가능한가?」의 내용을 중심으로 진행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0월 월례발표회

주제 : ‘K-철학’은 가능한가?
발표 : 김시천(상지대학교)
토론 : 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시 : 2021년 10월 20일(수) 오후 4시 ~ 6시
장소 : 온라인 줌 회의실

 

♦ 발표 논문 다운로드 : 2021.10.20 김시천[동양철학]_제55집_2021_K-철학은가능한가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znByiBE7O8k

한국

 

여름성경캠프 / 나의 투명한 자매님들에게 [유운의 전개도 접기]

여름성경캠프

 

이유운

 

어느 날 해가 거꾸로 솟았다 어젯밤 우리 중 누군가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깍지를 끼고 마주 잡은 손 위로

불투명한 천을 덮었다

 

천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어둠을 먹고

 

소원의 주동자를 색출할 때

한 명이 나서는 대신 모두가 뒤로 물러서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용서한다는 일의 기괴함

 

사이좋게 멸망하길 바라는 마음이 왜 상냥하다고 할 수는 없는 걸까

 

거짓말을 한 죄로 성역에서 분리된 우리는 서양호랑가시나무를 주워다 오두막을 짓고 분필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 곳으로 추방당해 오는 자 모두 구원받으리”

 

쉽게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방법

이런 편리한 구원을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죄를 용서하는 신은 없어도 좋았겠다고 속삭였다

 

어둠을 잘라 만든 미사보

그 아래에 무릎을 대고 앉은 나와 너

 

고해하는 목소리 고백하는 얼굴

지옥을 가르치는 말투 사랑을 배우는 표정

 

유난히 날카롭게 발음되는 보호와 구원이라는 단어

 

너는 일어선다

그리고 난파된 유람선을 보듯 나의 무릎을 보고

 

『돌아가자』

 

너는 왜 그런 말을 선언처럼 하는지

너와 나를 우리라고 말하는 걸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지

 

『도망가자』

 

너를 흉내내 고백하는 나

나는 너를 보지 않고 신발끈을 묶는다

 

우리의 캠프는 익사하기 좋은 숲에서 끝난다

 

캠프가 매해 여름마다 열리는 건, 우리가 만든 성역의 오두막은 오트밀을 먹으러 오라는 종소리와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지

 

네 귓바퀴 모양을 닮은 조개를 줍고

살갗같은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다 아마포처럼 두르고

 

오두막 바깥으로 너의 녹색 트렁크가 멀어져 가는 걸 본다

 

영원한 아침이 오고

천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나의 투명한 자매님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

― 베드로의 첫째 서간, 4장 8절.

 

사랑에 있어서, 나는 그간 제법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우리는 배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떤 사랑이 그것이 사랑인지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 아닌 것도 사랑이라고 쉽게 착각했기 때문에, 아주 흐릿한 사랑의 징후들도 사랑이라고 잡아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여름성경캠프.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첫사랑의 자국을 떠올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동그랗게 모여 앉아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거나 ‘38색 크레파스’가 적힌 종이 쪽지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기억 사이에서 사랑의 징후를 찾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체구가 작았고 혼자 이상한 상상에 빠져 있는 좀, 음침한 어린이였다. 그런 나에게도 언니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오곤 했다. 성당에서는 미사보를 쓰고 있어 옆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던 그들이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묶고 드러낸 건강한 빛깔의 귓바퀴를 보는 것이 좋았다. 그들은 나에게 운동화의 벨크로를 단단하게 누르며 낮은 나무를 오르거나 풀을 뜯어다 반지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봉숭아 물을 들이는 법, 그리고 첫눈이 올 때까지 그것이 사라지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한 마법 같은 이야기들도.

― 첫사랑이 이루어지는 거야.

― 그게 뭔데?

―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를 좋아하는 거.

그러면 나는 이걸 할 필요가 없지 않나? 나는 내 손에 봉숭아 물을 들여주는 언니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언니들을 좋아하고 언니들은 나를 귀여워했으므로. 지금 이미 이뤄진 일을 위해서 첫눈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건 이상하게 들렸다. 그해 겨울에 첫눈이 내릴 때까지 내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 있었는지 아닌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발생한 사건의 진실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일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 캠프가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둘러앉은 둥근 얼굴들이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너무나도 위대한 일이라서 고작 봉숭아물이 사라지지 않는 걸로는 이뤄지지 않았다.

종교는 나의 가장 오래된 습관이다. 집 한 켠에는 언제나 마리아 상과 ‘가정을 위한 기도’ 팻말이 놓여 있었고, 일요일 오전에는 어린이 미사를 갔고 나이에 맞추어 여러 가지 세례를 받았다. 나는 매주 신에게 고해할 나의 죄악을 마련해갔다. 나의 양육자는 내가 잘 되기를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나는 그 기도가 내가 받은 사랑 중에 가장 모욕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고등학교 입시 시험을 잘 치르기를. 수능을 잘 보기를. 내가 대학을 잘 가기를. 내 석사논문이 무사히 통과하기를. 지금은 그가 나를 위하여 무슨 기도를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정상적으로 사랑하기를’?

이 에세이를 발표한다는 건 사실 아주 모험적인 일이다. 이 에세이를 쓰고 삼켜두고 일기장으로 복사 붙여넣기를 한 다음 다시 이 페이지를 비우고, 텅 빈 화면을 바라보고, 다른 글을 쓰다가 그걸 다시 지우고, 제목을 바꿔보고, 다른 시를 뒤적여봤다.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몇 번이나 망설였다.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꼭 ‘나’가 앞으로 나올 필요는 없다. 이것은 비겁한 방법이 아니며 누군가를 설득하려고 할 때 당사자성은 필수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기분과 태도가 아주 달라진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은 남성적이고 폐쇄적인 언어로 말을 한다. 대부분 내가 철학의 테두리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주 멋지고 유연한 사람들이었지만 철학의 이름을 달고 있는 매체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위험한 일일수도 있다. 나는 한 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찬성한다. 모든 사람은 최소한의 삶을 존중받아야 한다. 누구라도 타인의 삶을 규정할 수 없다. 모든 형태의 사랑은 위대하고(Love wins!) 물론 사랑이 중요하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하며, 누구의 젠더라도 존중해야 한다그리고 나는 이 말에 찬성한다.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일은 조금, 아니 어쩌면 많이, 이상하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인데 어떤 말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선을 밟고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작년과 올해, 정말로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아는 사람들도, 친한 사람들도, 멀어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SNS에 쓴 글들이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게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슬픔이 가시면 화가 났다. 치사하기 그지 없다. 선은 처음에 누가 그었나? 우리 모두 분필을 쥐고 원하는 선을 그어보는 경험이 있었나? 없었다. 선을 긋는 분필이 있는지도 몰랐다. 태어나니까 그런 선이 있었다. 그 선에 운동화 앞코로 모래를 뿌리고 뛰어놀다 보니 좀 흐릿해졌다. 네 앞에 선이 있는데, 넘어가도 돼? 누군가 묻는다. 나는 그 선을 그린 적도 없고, 나에게 의미도 없는 선이니까 괜찮다고 말한다. 함께 놀 때는 공간이 넓은 게 좋으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나를 죄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괴이하고 비논리적인 일이다. 이걸 누가 그었는데요? 아무도 모른다. 모르면서 우선 잘못이라고 한다. 우리는 걸을 수 있으니까 걸었고 뛰고 싶어서 뛰었을 뿐인데 그래서 우리의 존재가 잘못이 되었다.

나는 나를 부정하거나 규정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에게 ‘나는 이해하고 존중해’ 라는 말도 할 필요조차 없다. 당신이 뭔데 나를 이해하지? 나는 타인이 내 존재를 이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지? 길을 잘 가다가, 당신을 지나치는 고양이나 노신사를 갑자기 붙들고 ‘나는 네 존재를 이해한다’ 라고 말해보는 걸 상상해보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다. 그걸 왜 ‘특별하고 편견에 맞서는 분들’ 에게는 하지 못하는지,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와 거리를 두고, 내가 그런 사람인 것을 지나치면 된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보통 이런 이야기에 대한 반응은,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 수는 없니?”라는 괴상한 말이다. 평범이라는 게 뭔지부터 말해봐야겠다. 소위 말하는 ‘정상’? 그럼 세상의 어떤 사람도 태어나서 한 번도 평범한 적 없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나는 언제나 특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힘껏 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보다는 백 번 나은 말 같긴 한데, 그래도 즐거운 말은 아니다.

이 괴이한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그리고 때마침 운좋게 나는 시인이다. 할 수 있는 건 계속해서 말하고 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이라는 건 이런 말을 하기에 퍽 편리한 도구다. 그래서 이 에세이를 발표하기로 했다. 별 얘기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많은 이야기를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선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땅따먹기를 하고 있을 것이고 나와 내 친구들은 새로운 평범을 위하여 선이 없는 세상으로 갈 것이다.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은 당신의 자유지만…… 낙오자가 되는 건 아무래도 멋진 일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 영원한 벗,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해 용감했던 HY를 기억하며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②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글: 행길이(한철연 회원)

 

고대의 양극화

 

에피쿠로스가 쾌락주의자가 된 까닭은 그의 시대와 삶이 고통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307년~261년까지 아테네는 46년 간 전쟁과 폭동으로 점철되었다. 아테네는 알렉산더 왕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폴리스 체제에서 유지되었던 민주적 연대의 정신은 점차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칼과 강간의 시대였으며, 살육과 방화, 살해와 약탈이 일상화되던 폭력의 시대였다.

아테네의 위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점령이었다. 그리스 세계에 존재하던 폴리스적 삶의 문화를 붕괴시킨 마케도니아는 노예제 폐지 금지 정책을 관철시켰다. 이는 그리스 민족이 처한 재앙적 위기를 타개할 마지막 탈출구마저 봉쇄해버린 조치였다. 알렉산더의 원정에서의 승리는 노예를 대량으로 공급해주었다. 기득권층은 늘어난 노예를 가지고 거대농장을 운영했으며 경쟁력을 잃은 소규모 토지 소유자들은 몰락을 거듭했다. 전쟁은 중산층의 삶을 무너뜨렸고 양극화는 극심해졌다. 수많은 노예를 거느린 이들의 거대한 생산력에 경쟁할 수 있는 중산 시민이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시민이 중산층에서 날품팔이 노동을 하는 계층으로 전락하는 경우는 늘어나기만 했다. 이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무료 노동을 하는 노예가 흔한데 굳이 노임을 지급하면서 자유시민에게 노동을 시킬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아무 일도 얻지 못한 채 떠도는 빈민이 늘어나기만 했다. 한때 폴리스는 빈곤한 자유시민들의 생계를 위해 식량과 임금을 보전해주었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은 곧 고갈되었다. 아테네는 인구 압박을 해결하기 위해 늘어나는 빈민들을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기민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이민을 강요받은 이들 중 일부는 할 수 없이 무장 조직을 만들어 노략질을 일삼는 해적이 되기도 했다.

폴리스의 붕괴와 함께 그들의 인생을 지탱해주던 모든 가치와 삶의 문화들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전쟁과 폭력, 기아와 기근을 막아주던 폴리스라는 보호처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공적 시민으로서의 연대적 삶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제는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안정적 삶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공적 시민으로서의 연대 의식은 사적 개인의 각자도생 의식으로 대체되었다.

 

양극화 시대의 미몽

 

폴리스 체제의 멸망과 경제 위기로 인해 발생한 모든 불행 앞에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불확실한 것으로 여겨졌다. 모든 것은 인간의 판단과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넘어선 우연의 손에 좌우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신에 대한 맹목적 숭배와 두려움이 기승을 부렸으며, 우연의 여신인 튀케(tyche)를 숭앙하는 풍조가 일반화되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연과 사회를 움직이는 법칙을 인간의 이성을 통해 이해하고자 했는데, 이제 인간들은 그러한 태도를 버리고 세계와 인간의 삶을 신적 힘과 우연에 기대 해명하고자 했다. 삶의 안전판이 결여되자 불안의 고통에 휩싸인 사람들은 종교적 미망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되었고 어리석음은 세상을 뒤덮게 된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고통의 시대를 건너기 위한 처방으로 사회 개혁 보다는 개인적 구원을 제시했다. 이것은 그의 시대에 대한 냉정한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미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너무도 참혹한 처지에 있어 사회적 진보나 정의의 회복이라는 구조적 접근으로는 좀처럼 만족되기 어려운 급박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사회적 개혁과 정의를 외쳐도 힘써 호응해줄 여유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없었고, 제도적 투쟁을 전개하게끔 자극하는 공동체적 가치도 소멸한 지 오래였다. 사회적 변동의 압력에 직면한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어 나 아닌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고, 공동체적 삶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인식할 수도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저마다의 극심한 고통과 비참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너 죽고 나 살자’의 사회에서 꿈꿀 수 있는 해방이란 고통을 멀리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농담의 세계 / 곪아버린 것들의 신 [유운의 전개도 접기]

농담의 세계1

 

이유운

 

포자의 상태로 나누는 입맞춤

언니는 전보다 나를 사랑하는 얼굴을 하고 있지

 

나는 하얗게 빛나는 나의 연인 앞에서 꿈을 꾼다

 

꿈 속에서

우리는 우리이거나

아주 먼 곳에서 상상된 타자이거나

 

나는 발뒤꿈치로 걷고 있으며

언니는 턱을 괸 채로 나의 망가진 걸음걸이를 본다

 

이 세계에서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들 뿐

 

우리가 똑같이 없어진 세계에서

우리, 건강하게 잘 지내자

 

언니가 나를 보지 않고 신발끈을 묶으며 말했으므로

나는 이 장면이 원망인지 희망인지 알지 못했다

 

미지근한 초콜릿을 입에 머금고

언니와 나 사이의 시차를 본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드라마가 되겠네

혹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가 되거나

 

내가 닮은 건 언니의 뒷모습

나는 꿈에서 거슬러 받은 나를 추슬러서 돌아온다

 

이토록 지겨운 세계에서

이제 나는, 꿈을 꾼 나날들을 가늠하지 않고……

 

 

곪아버린 것들의 신2

 

련도, 난연[爛然] 곪아버린 것들의 신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면, 종종 이 세계가 내가 알던 세계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이상한 감각이 든다. 가위를 눌리면 손가락을 뒤로 꺾어보면 된다고 한다. 꿈 속에선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가 잠든 사이에 세계가 온통 바뀌어 있다면, 그건 무슨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고통의 감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나는 세계를 감각할 수 있을까? 꿈이 선명하게 기억날수록 이런 의심은 강해진다.

    꿈 속에서 주로 나는 신과 대면하곤 한다. 내가 믿는 신일 때도 있고, 내가 존재조차 몰랐던 신일 때도 있다. 주로 그 신들은 화가 나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만들어냈는데, 너는 왜 그렇게 나를 모욕했느냐고 화를 낸다. 그들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그들이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 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그 신들의 얼굴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의 얼굴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종종,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고 또 실제에는 없는 실재의 인물들의 얼굴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영화나 소설, 그리고 그림에서 내가 상상으로 얽어낸 얼굴들이다.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지만 그들 자신을 위해 종교와 신을 만들어낸 멋진 종족이다. 나는 그 종족의 일원으로써 이 멋진 발명품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나는 신화와 종교가 좋다. 그들이 죽음과 고통을 대하는 엄청난 자세가 좋다. 취향에 따라 종교와 신을 선택하는 일은 어쩐지 불경하게 느껴지지만…… 특히 좋아하는 건 질투하는 신들이다. 그런 신들은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경배와, 손으로 꼽을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선사한다.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신과 악마가 잘 구분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런 신을 믿으면서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건가? 인간에게 바람을 불어 넣어 전쟁을 하게 만드는 신, 메뚜기와 전갈을 보내 사람을 갉아먹도록 하게 하는 신, 인간의 가죽을 벗겨내는 것으로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신. 그런 신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한 걸까? 그들의 공포를 기반으로 한 믿음은 어딘가 서슬이 퍼렇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낸 신화는 조금 색깔이 다르다. 련도 작가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이 새롭고도 아주 멋진 새로운 신화에 매혹되었다. 영원의 신,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영원불변의 곧은 신은 언제나 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의 손은 언제나 신성한 손으로 쥐고 있는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한다. 하지만 련도 작가의 신화에서 새로이 태어난 신들은 그간 신의 것이 아니었던 특성들을 전유한다. 곪거나 썩은 것들. 무한보다는 영원에 가까운 순간의 신들. 이 신들은 슬프거나 질투하거나 무서워 보이지 않다. 그는 내 꿈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왜 나를 모욕했느냐고 화를 낼 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살이 썩어 있으니 그것을 만지면 저항없이 내 손가락 사이로 허물어질 지도 모른다. 신화와 꿈 사이의 금을 밟고 서 있는 그들은 가끔 나에게 그런 살갗과 얼굴을 보여준다. 정말로 연약하고 매혹적인 신들이다.

    그 중에서도 《곪아버린 것들의 신》을 봤을 때, 그가 그려낸 신의 팔과 얼굴에 돋은 이끼와 버섯을 보며 이유리 소설가의 「버섯의 나라에서」를 떠올렸다. 우리는 사랑과 신을 쉽게 등치시킨다. 그 둘은 모두 완전무결하고 성스럽고 깨끗하며 그 흔적들은 여기저기 낭자하지만 그것의 실제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전설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신과 사랑을 모욕하는 건 비슷하게 힘이 들고 또, 꼭 그만큼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버섯의 나라에서」에서 ‘강희’는 “레즈비언 윤강희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버섯 윤강희가 되겠다” 하고 유서 아닌 유서를 남긴다. 그런 그가 마지막 편지에 연인에게 건강하길 바라는 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같다.

    강희가 버섯이 된 방 안에서, ‘언니는 여전히 잘 있다’ 라고 말을 시작하는 ‘수민’처럼, 나도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서 지금 내게 벌어지고 있는 신화 없는 전쟁의 삶을 받아들인다.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 연약한 신과, 내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작고 하얀 연인이 있는 삶을 받아들인다. 그런 삶에서는 나도 무언가를 태어나게 하고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으로 걷는 시간을 소망한다. 아마도 그 시간이 흐르는 세계는 푹신푹신한 땅이 없어서 나는 발뒤꿈치로 걷고 있으며 자주 넘어져서 무릎과 발뒤꿈치가 죄다 까져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가짜로 만들어진 쿠션을 걸어 무릎의 연골과 근육이 퇴화되는 것보다는 자주 다치고 구르며 아주 멀리서 태어나는 내가 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슬픈 이야기와 연약한 신을 태어나게 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에 포자처럼 달라붙어서, 나는 딱딱한 길 저 멀리까지 가고 싶다.

 

 

 

이유리 소설가는 2020년 경향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빨간 열매」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onyuthegreatestcat@gmail.com

련도 작가는 신화와 종교를 기반으로 주로 평면 작업을 하고 있다. ryundoyoon@gmail.com

 

 

  •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동 시대 작가들과 동료들을 소개하는 연재를 마치고 2주 후에 유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으로 찾아오겠습니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1. 본 시는 이유리 소설가의 「버섯의 나라에서」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이유리, 「버섯의 나라에서」, 『레인보우 다이빙』, 아미가 출판사, 2020.

  2. 련도 작가의 동일 제목의 작품에서 따왔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9월 월례발표회 영상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9월 월례 발표회

최근 출간(2021년 3월 5일)된 서영화 선생님의 번역서 『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를 중심으로 서영화 선생님의 발표를 진행하고 박지용 선생님의 토론이 이어집니다.

주제 :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발표자 : 서영화(『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의 번역자, 서울대학교)
토론자 : 박지용(경희대학교)
일시 : 2021년 10월 1일(금) 오후 4시~6시(2시간 25분 분량)
장소 : 온라인 줌 회의실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xYtx7qN_R84

 

프리저 브레이크Freezer Break / 얼어붙은 빛덩이들에게 [유운의 전개도 접기]

 

프리저 브레이크
Freezer Break

이유운

 

 

어디서 왔어?

네가 포장지 없는 나의 살갗을 바라보며 물었으므로

나는 공원에서 왔다고 답했다

 

너와 마주한

아일랜드 식탁

 

나의 곁으로 먼지가 빛처럼 내려앉기도 하고

거대한 손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끌어안기도 했다

 

사이좋게 둘러앉아서

 

사실은 난

돌아갈 곳이 있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모두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식탁에선 어울리는 주제가 아니었다

내가 뭐라고

 

내가 볼품없이 망가지고 나면

그러니까 이 식사가 끝나고 나면

 

모두가 둘러앉아 우리의 원인을 고백했으면 좋겠다 나는 너의 빠진 속눈썹으로부터 너는 나의 빛나는 어깨로부터, 그리고 나면 내가 등을 돌리겠지

너는 내 등 옆에서 이전에는 나의 일부였던 눈과 빛덩이를 움켜쥐고서

 

나는 네가 나의 바깥이 되는 일이,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도 믿었다

 

너에게 물을 부으면

반듯하고 가지런한 사랑이 나온다

 

우리 모두 이 만들어진 사랑에 박수를 치자

 

나는 네 단단한 침묵을 견딜 것이다 내가 녹는 방식으로

 

 

본 시는 김지우 극작가의 「프리저 브레이크」를 인용하거나 변용하였다.

김지우, 「프리저 브레이크Freezer Break」, 웹진 연극인 197호 수록(2021. 03. 25)

 

 

 

얼어붙은 빛덩이들에게

 

 

어렸을 때, 나의 양육자는 내가 멋진 예술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건, 예민하고 성질이 나쁜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라면 한 번씩은 하는 착각일 것이다. 나의 양육자 또한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고, 그는 매번 주말마다 대중교통을 몇 번씩이고 갈아타고 예술의 전당이나 서울시립미술관에 데려가곤 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언제나 《어린이를 위한 호두까기 인형》 발레 공연을 보았고, 평양에서 신윤복의 「소나무와 매」가 왔을 때는 줄을 길게 서서 보고 오기도 했으며, 조금 머리가 커지고 나서는 명동예술극장에서 《밤으로의 긴 여로》를 보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나는 양육자가 기대한 만큼 멋진 예술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어렸을 적 의무처럼 겪었던 예술 경험 덕분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예술 향유자 정도는 된 것 같다.

그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예술 분야는 연극이다. 곧은 눈동자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만으로 사랑과 슬픔과 그 너머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그 예술을 동경한다. 처음으로 내 의지로 본 극은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기억의 체온》 낭독극과, 와즈디 무아와드의 작품을 번역한 《그을린 사랑(원제:Incendies)》이다.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픈 형편없는 붉은색 의자 위에서 나를 보는 듯, 나를 보지 않고 죽음과 사랑을 번갈아 이야기하는 그 순간이, 그 몰입의 순간이 너무나도 좋았다. 좋았다라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자연스럽게 옷을 입고 벗는 것처럼 타인의 인생을 덮고 내려놓는 배우들에 나는 매료되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onme habentes nihil possidentes)”을 수 있는 유일의 자들처럼 보였다. 나는 아마도 그들을, 그로토프스키의 말마따나 성스런 배우(holy actor)처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매번 다르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배우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희곡을 읽고 쓰는 일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옛 작가들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시대를 살며 희곡을 쓰고 극을 사랑하는 자들의 극도 읽기 시작했다.

젊은 극작가들은 자유로운데, 그들은 “아우라의 쇠퇴나 상실(Verfall der Aura / Verlust der Aura)”의 가능성을 고려하거나, 그들의 작이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이 될지도 모른다는 책임감 혹은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고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자유롭다(혹은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비단 극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젊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감정과 정신의 골격, 행위에 앞서는 감정을 작품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예술의 새로운 형태이자 역할이 된 것 같다. 신화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자 하지 않는 예술이 얼마나 투명하고 빛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의 작품에는 더 이상 동상이 세워지지 않는다. 대신 탈출을 위해 철조망을 넘는 난민, 사랑을 기계적으로 출력하는 AI, 이 모든 세상에서 배회하는 내가 있다. 이런 변화는 경쾌하다.

김지우 극작가의 데뷔작 『길』을 보면, 주인공인 미노와 이르는 그들을 허구의 이상을 위한 목적으로 쓰는 것을 거부한다. 미노는 “이름이 그대로라서 다행이라고”, 말하며 터널과 청자를 향해 자신의 이름을 외친다. 그들이 상실할까 두려워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다. 이 얼마나 슬프고 처절한 근대적 인간인지! 미노와 이르는 상상으로 현실을 만들고, 현실로 상상을 만든다. 그들은 교차되는 호명으로 그들의 존재 가능성을 증명한다. 우리는 늑대도, 코요테도, 미노도, 이르도 될 수 있다. 서로 미노와 이르가 있다는 전제 하에.

지난 8월, 전시공간 불나방에서 평면 기반의 작업을 하는 네오내오 팀의 《네 개의 틈》 전(展)에 간 적 있다. 그 전시에서 나는 밧지 작가의 여러 작품을 보며 상상으로 무언가가 될 수 있는 예술의, 우리의 가능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김지우 극작가의 작품들을 몇 마디 끼워 맞추기도 했다. 예를 들면 《유토피아Utopia》 라는 작품에는 미노와 이르가 노을이 내려앉은 기차 위에서 늑대를 상상하는 모습을 넣어보았고,

 

밧지, Utopia, oil on canvas, 30×30

 

 

밧지, Harmony, oil on canvas board

 

《하모니(Harmony)》라는 작품에서는 “오리 (머뭇거리다) 있지, 내가 빨리 녹으면 날씨가 그만큼 따뜻해졌다는 뜻이잖아.” 라는 대사를 떠올리기도 했다.

꽉 채워진 여러 색깔이 그리는 빛이 가득한 그림은 경쾌했지만 어딘가 슬프고 묵직했다. 밧지 작가는 조금 수줍은 표정으로 나와서 이 그림들이 경유한 과정들을 설명해줬다. 스위스에 있을 때, 어딘가를 걸을 때, 마주쳤던 빛과 순간들……. 사실 그 모든 말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와 그의 세상에 몰입하는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 자신이 겪는 감정, 자신이 확신하는 감각, 자신의 주변에 충실한 그림. 물감이 뭉쳐 있는 양감과 붓이 지나간 질감을 보면서 나는 그런 것들을 상상했다. 자신을 충실하게 그려낼 수 있는 그림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더라도 투명하다고.

투명한 작가들이 계속해서 더 많이, 더 크게, 더 반짝거리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손을 잡으러 와도 좋다고 그들이 그들의 작품에서 마음껏 말했으면 좋겠다.

 

 

김지우 극작가는 2020년 서울신문 희곡 부문에 『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iamalexakim@gmail.com)

밧지 작가는 평면 작업을 위주로 하고 있다. (dig05061@gmail.com)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먹어봐야 맛을 알고 알아야 먹는다 -이종란이 번역한 박은식의 『왕양명실기』를 읽고- [최종덕의 책과 리뷰]

먹어봐야 맛을 알고 알아야 먹는다

-이종란이 번역한 박은식의 『왕양명실기』를 읽고-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1. 박은식의 활동과 책

 

이 서평은 동양철학자 이종란이 번역한 박은식의 『왕양명실기』(한길사 2010)를 읽고 썼다. 이 『왕양명실기』는 동양학총서 제4집으로 박은식 전서 중권(1975년 영인발행)으로 발간된 책이다. 이 책 안에 양명학을 처음 세운 왕수인과 그의 전기와 철학을 실기라는 이름으로 쓴 박은식, 그리고 한글로 옮긴 이종란이라는 세 학자의 학풍이 섞여있다. 서평자는 처음에 양명학을 알아보려고 이 책에 손댔는데, 점점 박은식의 고뇌를 알게 되었고, 나중에는 이종란의 해석력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알게 되었다’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앎에 대한 내용인데, 흔히 말하는 지행합일의 문턱 넘는 길을 잘 보여주어서 앎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으면서도 함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개혁 이전까지 6년간 능참봉이 관직의 전부였던 박은식(1859-1925)은 성리학 공부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에게 공부는 현실의 실천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의 표현이었고, 그런 소명의식은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면서부터 더 확고해졌다.

 

1907년 4월 양기탁 · 안창호(安昌浩) · 전덕기(全德基) · 이동녕(李東寧) · 이동휘(李東輝) · 이회영(李會榮) · 이갑(李甲) · 유동열(柳東說) 등을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박은식은 신민회에 가입하여 교육과 대중매체에 관심을 기울였다. 연이어 박은식은 대동교를 창립했는데, 거꾸로 친일파 신기선(申箕善) 주도로 세워진 대동학회(大東學會)는 유림계의 친일화를 노골화했다. 이런 정치세력에 맞서서 장지연 · 이범규(李範圭) · 원영의(元泳儀) · 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대동교를 창립한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은식 편)

이후 만주로 옮긴 박은식은 만주에서 나중에 대종교 3대 주교로 된 윤세복과 만난다(1911년). 윤세복 집에서 머물면서 그가 바라는 양명학의 쌍이 대종교가 원하는 세상과 연결됨을 깨달았다. 그리고 대동고대사론 등 많은 역사 저술을 했다. 고대사로서 만주 땅과 연관된 고대사였다. 이런 과정에서 박은식은 기존의 성리학에 보태어 양명학의 실천철학 필요성을 실감했다. 박은식은 대동교의 대동사상(大同思想)과 양명학(陽明學)을 연대하여 기존 유교를 개혁하여 국권회복의 운동철학을 세우려고 진력했다. 자강의 원칙과 양명학을 통해서 유교를 구신(求新)해야 한다는 박은식의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이 그것이다. 그런 운동 차원에서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가 쓰여졌다. 이러한 운동철학에는 ‘국혼’과 ‘국백(國魄)’을 나누어 일제에게 빼앗긴 것은 ‘국백’뿐이니 ‘국혼’을 잘 유지하고, 이제는 기존의 제왕론이 아니라 새로운 민본론으로 우리 정신을 강화하여 완전 독립을 쟁취하는 원칙이 담겨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은식 편). 당연히 일제는 박은식이 관여했던 『황성신문(皇城新聞)』,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등 관련 매체를 폐쇄했고, 박은식의 저술까지도 ‘금서(禁書)’로 막았다.(이종란 2003)

 

박은식의 행동정신에는 (1)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 두루 펼치는 일에 행동하기 (2)오래되면 썩어지니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구신론이다. 박은식은 이러한 정신을 왕양명의 철학에서 찾는다. 왕양명에 대하여 쓴 내용을 알기 전에 양명학이 기존 주자학과 달리 도교나 불교와 어떤 관계인지 살피는 일은 양명학 이해에 중요하다.

 

  1. 왕양명, 도교/불교의 영향

 

왕수인(1472-1528)은 명나라 중기 송명 이학인 주자학에 덧붙여 심학(心學)을 창시한 철학자이다. 양명을 따서 붙인 이름 왕양명은 초년에 도교와 불교에 빠진 정도가 아주 심했다고 박은식은 쓴다.(61쪽) 그러나 거기에 빠진 것이 아니라 주자학과의 종합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통로를 마련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왕수인은 불교와 도교의 허황함을 비판했다. 그 비판의 핵심은 불교나 도교가 도덕의 문제를 거창한 우주론의 문제로 바꿔 말한다는 데 있었다. 불교나 도교는 ‘무’나 ‘허’의 개념을 자칫 우주의 최고 존재라는 형이상학으로 오해되게끔 한다고 왕양명은 비판했다. 여기서 역자 이종란은 이 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역자는 역주(66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양명의 불교와 도교의 비판은 ‘무’나 ‘허’가 우주의 최고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수양하는 방법인데, 불교와 도교는 그것을 우주적 근본 존재로 잘못 설정했다는 것이다.”(171쪽) 양명학에서 말하는 무나 허는 그런 우주존재론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자신을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수양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이며 일상의 도덕적 태도임을 깨달은 박은식은 왕양명의 종합학이 무엇인지 눈뜨게 되었다.

 

유불선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하여 왕양명 생각은 이랬다. 선가(도교)는 허(虛)를 말하니 성인이 어찌 ‘허’ 위에 터럭만한 실(實)을 보탤 수 있겠는가? 불교는 무(無)를 말하니 성인이 어찌 무위에 터럭만한 유(有)를 보탤 수 있겠는가? 단지 선가에서 허를 말한 것은 양생(養生)하는 가운데서 나온 것이고, 불교가 무를 말한 것은 생사와 고해를 떠난다는 입장에서 나온 말이다.(171쪽)

 

  1. 양명학의 키워드: 양지, 지행합일, 치양지

 

양명학은 왕양명 당시만이 아니라 후대에서도 이단으로 몰렸다. 양명학의 천하만물 평등사상 자체가 중앙집중형 권력체계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명학이 생겨난 중국은 물론이고 조선에서도 양명학은 배척되었다. 왕수인 당시에도 그런 모양이었나 보다. 왕수인이 죽은 후 시기심이 많은 예부상서 계악이 왕수인의 학문이 거짓된 것이라고 조서를 내려 금하려 했다. 이에 첨사 황관이 상소를 올려 왕수인의 억울함을 대신 호소했다. 그 호소문 안에 양명학의 키워드가 그대로 들어 있을 알 수 있다. 황관의 호소문에 양명의 학문이 위대한 이유 3가지를 말하는 부분이 있다. 아래와 같다.(340쪽)

 

첫째 양지를 발휘하고 확충하는 치양지입니다. 앎에 이르는 치지는 공자에서 나온 말이고 양지는 맹자에서 나온 말인데 어찌 이단이겠습니까?

둘째 친민이니, 백성과 친하라는 말은 맹자의 여민동락이고 혈구지도가 친민의 원리인데, 혈구지도는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논어의 恕와 같습니다.

셋째 지행합일은 주역의 “이를 곳을 알아 이르고 끝날 곳을 알아 끝내는 것”입니다. 왕수인은 이런 점을 찾아내어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헛된 말을 일삼지 못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왕수인의 학문이 바로 공맹의 학을 잇고 있으니 어찌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이 안에 양명학의 키워드가 다 들어 있으니, 그것은 양지요, 지행합일이며 치양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교과서에서 말하는 심즉리설(양지설), 치양지설, 지행합일설이라는 양명학의 본체를 대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양지>

 

양지(良知)는 맹자에서 양능(良能)과 함께 등장한다.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는 간단히 말해서 외부에서 얻는 지식이 아니라 본심(本心)에서 나오는 지식[本心之知]을 말한다. 그리고 양지를 찾아내어 치양지에 이르고자 하는데, 실천을 통해서 양지를 확충하는 과정을 치양지라고 한다. 결국, 치양지는 대학에서 나오는 치지 대신 치양지를 대입한 말로서 치지를 완성한다는 뜻이다.

 

주자학이 외부 사물에서 이치를 찾는 그런 공부의 방법을 격치라 했다면, 양명학은 인간 내면의 본심에서 이치를 찾을 수 있으며 그런 이치를 본심[本心之知] 혹은 양지라고 했다.(86쪽) 양지를 천하만물의 존재론으로 보는 측면도 있지만 도덕의 원리로 보는 측면이 중요하다. 즉 양지는 도덕의 토대인 것이다. 도덕의 토대는 외부에서 온 것도 아니고 신이 하사한 것도 아니라 내 마음속 깊이 원래부터 있던 것이다. 박은식은 『맹자』 「공손추상」편을 인용하여 도덕의 원리로서 양지를 설명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든 얘기이다.(278쪽)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면 반드시 측은히 여기는 이치가 생길 것이니, 측은하게 여기는 이치가 과연 어린아이의 몸에 있는가 아니면 내 마음의 양지에 존재하는가? 우물에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 옳지 않은가? 아니면 손으로 아이를 잡아당기는 것이 옳은가? 이는 모두 이른바 이치이니 이 이치가 과연 어린아이의 몸에 있는가 아니면 내 양지에서 나온 것인가” 이런 예로 보아 만물의 이치는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이로써 마음과 이치를 둘로 갈라보는 것이 그릇됨을 알겠다.”

 

본심의 양지를 도덕원리에서 더 확충하여 만물이 한 몸인 것(만물일체)을 깨달은 박은식의 이해는 왕양명의 양지가 『전습록(傳習錄)』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주석을 통해 알려준다.(94쪽) 나아가 박은식은 양지를 아래처럼 설명한다. “양지는 내심이지만 우주 만물에 닿아있고, 양지는 만물에 대한 앎이지만 양지 자체는 태허(太虛)와 같다고 했다. 양지란 그러한 만물의 본체라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다. 양지의 허는 하늘의 태허요, 양지의 무는 태허의 형체가 없는 것이다. 해와 달과 바람과 우레와 산과 시내와 백성과 사물에 있는 형태와 색깔은 모두 태허의 형태가 없는 것에서 생긴 것이다. 생겨서 드러나 유행하는 데 하늘의 장애 받은 적이 없다. 성인이 다만 양지가 발동하여 사용하는 가운데 있으니, 어찌 양지를 초월한 바깥에 하나의 사물이 있어서 장애를 일으키겠는가?”(171쪽) 다시 말해서 양지는 비어있으나 신령스럽고 밝게 깨닫는 것[虛靈明覺]이다.(278) 그리고 양지가 뜻을 일구어 그 뜻이 사물에 응대하는 것이 앞으로 이야기할 지행합일이다.

 

<지행합일>

 

세상에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 완전히 무지한 사람은 없다는 지행합일에 대한 박은식의 해석은 매우 흥미롭다.(95쪽) 예를 들어 우리는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음식(맛)을 알게 되고, 길을 떠나면서 길이 험하거나 편한지를 안다. 앎과 행동에 관한 공부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276쪽) 행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앎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지행합일이 있어야 비로소 양지의 본체가 더욱 밝아진다고 했다.(279쪽)

 

친구 사이에도 겸손을 말하고, 부모의 효심에도 규범과 법칙 대신에 지행합일의 공부가 중요함을 말한다. 예를 들어 박은식은 양명을 공부하면 친구 간에도 서로에게 겸손함이 중요함을 알게 된다고 한다. 친구를 사귈 때 “나를 낮추면 보탬이 되고 나를 높이면 손해 본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겸손이니, 겸손은 순전히 길한 것이므로 천지와 귀신이라도 복을 주거늘 하물며 동류인 사람이랴?”라고 썼다.(275쪽) 겸손은 평등함의 또 다른 행동이다.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도 평등하다는 생각과 그렇게 행동한다면 바로 그런 행동이야말로 천지만물의 양지를 얻는 지표인 셈이다. 천지만물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성인의 마음은 천지만물을 한 몸으로 삼으시니 천하 사람을 보는 것이 안과 밖, 가깝고 먼 차별이 없고, 혈기, 즉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형제와 자식처럼 본다”는 뜻이다.(280쪽; 『전습록』, 권중 예기, 예운편)

 

그래서 주자학에서 말하는 오륜은 하늘이 내려준 규범이기 이전에 원래 있던 천성의 발현일 뿐이라고 했다. 효도하고 공손하며 친구를 믿는 것은 원래 천지만물과 하나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이 몸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마음은 본성의 한 부분으로 본래 갖고 있는 것이어서, 외부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니, 누구나 이런 마음을 실행할 수 있다고 한다.(317쪽) 알기는 해도 누구나 아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도록 게을리하지 않고 자기를 관찰하는 것이 바로 양명학의 공부법이다.

 

지행합일은 경험지식과 대비되는 관념지식으로 구분하는 것에 벗어나 경험지식과 관념지식의 합체를 말한다. 그런 지행합일의 앎이 양지라는 것이다.(279쪽) 그런 양지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 공부이다.

 

  1. 공부에 대하여

 

왕양명의 제자가 물었다. “마음의 도적을 물리치려면 어떻게 하나요?” 왕양명은 대답했다. “산중의 도적은 물리치기 쉬우나, 마음 가운데의 도적은 물리치기 어렵다.” 제자는 되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시 답했다. “자기를 되돌아 살펴보고 자신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쉴 때가 없어야 한다.” 마음의 공부는 그만큼 어렵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한다고 아무도 없는 토굴에서 공부하는 것은 자칫 허무함에 빠질 수 있음을 박은식은 주의한다.(151쪽)

 

수양은 산골 골방에서 세상과 분리된 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하고 세상살이를 해가며 하는 것이라고 박은식은 강조한다. 박은식은 양명의 이야기를 다시 말하는 데, “공부를 처음 할 때 마음이 원숭이 같고 뜻이 말과 같아 이리저리 날뛰어 일정치 않아서, 한가한 생각과 잡념이 가슴 속에 엉킨다. 그러므로 정좌하여 잡된 생각을 하지 않는 방법을 사용해야 그 마음을 맑게 안정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정좌만 치우쳐 몰두하면, 점차 조용한 것만 좋아하고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는 폐단이 생길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병폐가 잠복해 있다가 일할 때 이전처럼 생긴다”고 박은식은 강조한다. 즉 생활 속에서 공부를 하면서 그 속에서 지식과 행동을 하나로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뜻이다.(324쪽)

 

다시 왕양명 선생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예전에 종남산에 거처한 중이 30년 동안 수행하여 선정에 들었다. 하루는 다른 중이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정좌에 익숙한지 오래되었으니 같이 유곽에 한번 다녀 오자꾸나” 하고 길을 같이 나섰다. 그가 유곽 거리에 도착하자마자 아리땁고 화려하며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르고 눈썹을 예쁘게 칠한 여자를 보자 그만 마음이 흔들렸다. 하루아침에 30년 쌓은 공부가 허물어진 것이다.

 

배우는 사람 또한 고요한 토방이 아니라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닫는 세파 가운데서 한 노력이 비로소 안정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이 언젠가 말했다. “단지 정좌하는 수양만 알고 극기 공부를 모르면, 일을 할 때 잘못에 치우칠 수 있다. 모름지기 ‘일을 할 때는 세상 가운데 연마’해야 자립하여 살 수 있고 고요할 때도 안정감이 있으며, 움직일 때도 안정감이 있다.”(325쪽)

 

또한 공부 방법론에 대하여 다음처럼 말한다. “학문을 닦은 공부는 간단하고 쉬우며 참되고 절실하니[簡易眞切], 참되고 절실할수록 간단하고 쉬우며, 간단하고 쉬울수록 참되고 절실하다.”(326쪽) “양지의 이치는 간단하고 명백하거늘 수백 년 동안 한결같이 묻혀 있었다.”(239쪽) 양지를 얻는 길로서 공부는 간단하고 절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양지는 지행합일 조건을 채워야 한다. 공부는 생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세상의 사물을 관찰하고 우주의 마음을 성찰하는 양면의 공부법을 합쳐야 지행합일이 되고 비로소 치양지에 이른다는 뜻이다.

 

  1. 주자학, 그리고 번역자

 

주자학과 양명학은 서로 배척이 아니라 상보 관계다. 주자와 양명학의 같고 다름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주자는 여러 사람의 이치를 궁구하여 얻는 것을 앎의 지극함으로 여기고, 왕양명은 본심의 양지를 이루어 얻는 것을 앎의 지극함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주자의 앎을 이루는 것은 후천적인 앎이요, 왕양명의 앎을 이루는 것은 선천적인 앎이니, 선천과 후천이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주자가 언제 본심의 앎을 버렸으며 왕양명이 언제 물리에 대한 앎을 버렸는가? 다만 그 입각한 곳에 멀고 곧바른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박은식은 결론 내린다.(347쪽)

 

『왕양명실기』를 완역한 이종란은 한국철학을 전공한 중견학자로, 『주희의 철학』, 『왕부지 대학을 논하다』 등을 번역하고 『최한기의 철학과 사상』, 『이야기 속의 논리와 철학』 등을 저술했다. 양명의 일본판 『연보』, 명말청초의 『명유학안』, 『덕육감』, 다카세 다케지로의 『왕양명상전』을 구해 일일이 대조하는 등 작업을 거쳐 번역을 마음먹은 지 10여 년 만에 책을 완성했다고 역자는 후기에 적고 있다. 이 책은 본문 밑에 1천8십 개의 주(注)를 붙여 일반인의 이해를 도왔고 전공자들을 위해 백암이 저술에 참고한 책의 내용과 원문을 비교해 역주에 표기하고 책 말미에 한문으로 발표한 원저도 정서체(인쇄체)로 고쳐 수록했다.

 

서론에서 한번 말했지만, 서평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왕양명과 박은식 그리고 이종란의 사상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3인의 철학자가 동원하여 합작한 책으로 여겨질 정도다. 고전 읽기에 소홀해진 우리에게 재미 삼아서라도 한번 읽어보기를 스스로 추천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8월 월례발표회 영상 “『논어(論語)』에서 드러나는 ‘즐거움’의 생명적 구조와 성격 해석” [월례발표회·세미나]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1부입니다.

2021년 하반기 8-11월까지 한철연 월례발표회를 진행합니다. 하반기 월례발표회의 시작은 이찬희 선생님과 윤태양 선생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8월 월례발표회

주제 : 『논어(論語)』에서 드러나는 ‘즐거움’의 생명적 구조와 성격 해석
–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존재론의 방법론적 적용과 비교
발표자 : 이찬희(성균관대학교)
토론자 : 윤태양(성균관대학교)
일시 : 2021년 8월 30일(월) 오후 4시 ? 6시
장소: 온라인 줌 회의실

동영상 링크: https://youtu.be/dAQLAmA9ukM

우리는 아무도 울지 않고 / 아무도 우리를 울리지 않고 / 이유운과 류휘석 [유운의 전개도 접기]

우리는 아무도 울지 않고

 

이유운

 

갑자기 모든 개가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다들 아프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손을 바꾸어 잡아가며 걷고 있었다

 

영원히 내리는 비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우리는 사이좋게 사랑에 빠지고

 

네 옆얼굴에 빗물이

그림자처럼 흐르고 있었다

 

보도블럭의 금을 피해 밟으며

너는 노래처럼

“너와 있으면 이상한 규칙들이 너무 많아져.”

 

나는 네 제국이 되는 나를 상상한다

 

거꾸로 말하지 않아도 아비를 저주할 수 있는 마법의 세계가 있을지도 몰라

우리는 그 세계에서도 적당한 인사말을 배우려고 애쓰고들 있겠지

 

우리는 축일을 생각하며 타로카드를 던지기도 하고

죽은 비둘기를 보고도 고기를 먹었냐는 질문을 하기도 하면서 자랐으므로

선언하지 않고 안부를 묻는 법을 잘 모르지 않니

 

왜 우리는 침묵하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까

 

귀를 막으려고 잡은 손을 풀면

너의 얼굴에 자라는 슬프고 무서운 표정

 

비에 젖은 횡단보도와 우리가

각자의 소음에 골몰하고 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울리지 않고

                                               

류휘석

 

앞서 걷던 네가 뒤돌아

“벌써 끝인가 봐. 개가 돌아오고 있어.”

말하면서 규칙은 시작된다

 

“가는 길에 비 피할 곳이 있을까요?”

지친 개를 안아든 주인이

흘러넘친 얼굴을 닦으며 말을 걸자

 

너는 개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나는 네 손을 꼭 잡고

 

“글쎄요. 저희는 방금 막 시작해서요.”

 

목줄이 길게 바닥을 긁으며 저녁을 죄다 끌고 가는 동안

그 틈으로 모인 짙고 어두운 빗물이 우리들의 발목을 세게 말아 쥐는 동안에도

너는 개가 사라진 곳을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를 울리지 않았는데

공원은 넘치려하고

 

나는 가만히 네 손바닥을 어루만졌다

단단하게 직조된

가늘고 의미 없는 인간의 형상 같은 것을

 

“괜찮아?”

 

움켜쥔 사랑을 마구 휘두르면서

우리를 우리라고 함부로 부르는 것을

 

“미안. 잠깐 다른 생각했어.”

 

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여기가 끝이에요?”

 

나는 손가락을 뻗어

공원의 안전표지판을 가리켰다

 

 

 

이유운과 류휘석

 

이유운과 류휘석은 놀랍게도 어떤 자음도, 어떤 모음도 공유하지 않는다. 동그란 이유운과 각진 류휘석. 나는 이름만큼이나 그와 다른 사람이다. 그도 이름만큼이나 나와 다른 사람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우리는 시가 아니었으면 절대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아주 ‘극적’으로 만났다. 작년, 나는 집 옥상에서 ‘옥상낭독회’를 개최했다. 나는 갓 데뷔한 시인이어서 아는 사람도 없었고 그리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면서 무슨 배짱이었는지 SNS에 옥상낭독회를 할 거니까 아무나 오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온, 이상한 아무나 중에 류휘석 시인이 있었다. 우리는 그때 처음 만났다. 류휘석 시인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부끄러운 일들과 사랑의 불가능을 말하고 시를 읽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나는 그가 아무렇지 않게, 조금 더 뜯어보면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하는 표정으로 시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서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도 나를 보면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서로 이상한 우리는 그 후로 꽤 시간이 흐르고 여름의 초입에 만나서 술을 마시며 친해졌다. 어른이 되고 좋은 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타인과 친해질 때 아무렇지 않게 제정신이 아닐 수 있도록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

시인들은 정말로 술을 마시면 시 얘기만 하는군요. 류휘석 시인과 술을 마시며 내가 웃었는데, 그 ‘정말로 시 얘기만 하는 시인들’ 무리에 나도 있었다. 시인 이상형 월드컵이나 데뷔작 밸런스 게임 같은, 어디 나가면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할 이야기들이 통용되는 사람들을 만나서 좋았다. 그래도 우리가 가장 많이 한 건 욕이다. 이 문학‘판’이 정말 별로라고, 다들 꼰대같다, 전부 쓰레기같다, 라고 말하면서 결국엔 무슨 시를 쓰고 싶은지 말하는 게 웃겼다. 시에 진심인 것 같으면서도 시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하고 인생의 전부가 시를 쓰는 것처럼 굴고선 바로 시를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것처럼 툴툴 털어내고 일어나는 것이 뭐랄까, 그는 나와 정말로 다른 부류였다.

그는 자신에게 확신이 있다가도 없었고, 물렁물렁하고, 슬퍼 보이면서도 경쾌했고, 외로워 보이면서도 친구가 많았다. 그런 그가 나나 다른 사람에게 끊임없이 확신을 가지는 것이 퍽 신기했다. 그는 나를 신뢰한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진심으로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나의 모든 면을 신뢰한다는 것인지 나는 자주 고민했다. 나는 거의 모든 순간 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래도 그가 신뢰할 수 있는 나의 면을 고를 수 있다면 나는 시를 제외한 생활의 면모였으면 좋겠다.

나는 그에게 종종 내 시의 초고를 보여준다. 신기하게도 그는 내가 자신없이 얼버무린 부분이나 외면한 부분들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나와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나의 가장 나 같지 않은 부분과 나의 가장 나 같은 부분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을 모른다. 잘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탁월하게 질투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으나 그들을 잘 알 수 있는 꾸준함, 다정함, 세심한 시선 같은 능력은 없다.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나를 신뢰한다고 하면, 나는 신뢰받을 만한 생활을 꾸릴 책임감을 갖게 된다. 나의 책임감은 나를 보는 수많은 사람의 얼굴에 빚지고 있으며 류휘석 시인은 핑크 팬더 비니를 쓰고 그 얼굴들 중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다.

 

 

이유운 작가의 말

가을 동안은 제 벗들을, 예술적 동료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다들 저와 다르게 기쁘고 비슷하게 슬픈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소개한 류휘석 시인은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랜덤박스」로 데뷔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