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하는 사물’은 또 다른 세계를 태동시킬 수 있을까?- 스티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갈무리, 2021) 서평 [철학자의 서재]

‘감응하는 사물’은 또 다른 세계를 태동시킬 수 있을까?

– 스티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갈무리, 2021) 서평

 

주요섭(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

 

아마도 ‘사물들의 우주’ 이전에는 ‘인간들의 우주’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다. ‘인간들의 우주’ 이전에도 ‘사물들의 우주’는 엄존했을 것이다. 그렇게 ‘사변’된다. 다시, 아니다. 인간들의 우주 역시 사실은 사물들의 우주였을 것이다. 사물들의 우주는 문득 ‘인간이라는 사물’을 출현시켰고, 인간들의 우주라는 착시가 있긴 하지만, 인간이라는 사물도 다른 사물들이 그렇듯이 문득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티븐 샤비로의 사고실험, 혹은 철학적 SF는 결이 조금 다르다.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샤비로는 사변적 실재론의 허무주의적 편향에 대응해 ‘또 다른’ 사변적 실재론을 탐색한다.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짧지 않지만, 결론은 명쾌하다. 그 이름은 ‘사변적 미학’이다(279). 세계는 인간의 인식과 관계없이 ‘비-상관적으로’ 실재하되, 그것은 단지 무정(無情)한 물리적 실체가 아니다. 유정(有情)한, 마음이 있는 사물들의 그물망이다.

 

감응하는 우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 1982년, 장일순과 김지하를 비롯한 원주캠프는 ‘생명의 세계관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을 제안하는 이른바 ‘생명운동에 관한 원주보고서’를 세상에 내어놓았다. 그리고 인간 중심 세상에서 생명 중심 세상으로의 대전환과 생명운동으로의 사회운동의 대전환을 선언한다. 생명운동의 관점에서 이제 세계는 ‘생명들의 세계’다. 이를테면, ‘생명들의 우주’다. 물론 이때 생명이란 인간이나 고양이와 같은 유기체만이 아니다. 풀 한 포기와 돌멩이도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나에게 ‘사물들의 우주’라는 책은 무엇보다 ‘감응하는 우주’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물의 ‘내적 경험’이라는 표현에서 감이 왔고, 범심론(pan-psychism)에 대한 긴 소개에서 나름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때 감응(感應)은 흔히 정동(情動)으로 옮겨지는 affect의 번역어이기도 하지만,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된 ‘기(氣)의 감응’, 혹은 천인감응(天人感應)의 그 감응이다. 또한 19세기 말 동학에서의 ‘내 마음이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한울님과의 감응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또한 생명운동의 관점에서는 생명세계의 소통형식으로서의 감응이기도 하다.

샤비로는 화이트헤드를 빌려 감응하는 사물의 사밀성, 즉 ‘사물의 숨겨진 내면적 삶’(77)을 강조한다. 사물들은 인간과 관계없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물들은 서로 교감하며 스스로 진화한다. 넷플릭스 영화 ‘문어이야기’가 떠오른다. 문어이야기의 화자는 “문어와의 경계가 사라졌을 때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렇다. 감응의 아름다움이다. 감응은 인간과 문어와의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어를 둘러싼 바닷속 생태계가 곧 또 하나의 감응하는 우주다.

데카르트식으로 말하면,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응’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도 ‘너’도 ‘그’도 감응함으로써 살아있다. 햇볕과 바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이전에 햇볕을 쬐고 공기를 마시는 덕분에 살아있다. 감응은 비-의식적이다. 여성들의 월경이 그렇듯이 달을 의식하지 않아도 신체는 달과 감응한다. “달에 대한 나의 파악은 표상이 아니라 원격접촉이다”(216). 서로의 내적 삶을 몰라도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자신의 내적 경험에 접근할 수 없다. ‘나’도 ‘나’를 알 수 없다. 인식 이전에, 신체와 신체 사이 신체와 사물들 사이에서 비-의식적인 감응이 계속되고 있지만, 나는 알아차릴 수 없다. “나는 내가 원리상 알 수 없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178) 저자가 화이트헤드를 빌려 말하고 있듯이, “의식이 경험을 전제하는 것이지, 경험이 의식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150).

 

범심론: 사물에도 내적 경험이 있다

 

그렇다.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란, 다시 말하면 ‘감응하는’ 사물들의 우주다. 그리고, 그것은 사물들의 내적 경험과 내적 변화를 의미한다. 인간은 사물들의 내적 경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실재는 경험적이다(155). 키워드는 ‘경험’이다. 감응하는 사물을 샤비로의 언어로 말하면, ‘경험’하는 사물인 셈이다. 저자는 화이트헤드를 빌려, 그리고 윌리엄 제임스를 인용해 단언한다. 프로토타입은 ‘경험’이다. “모든 존재는 내재적으로 무언가를 경험한다. 존재는 곧 경험이다.”(150)

그러나 이때 경험은 물질적이다. 에너지적이다. 저자는 스트로슨(2006)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모든 물리적 소재는 그게 어떠한 형태라도 에너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에너지는 현상을-포함하는-경험이다.”(189) (그런데, 신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도 자신의 주저 『인간현상』에서 사물의 내부를 이야기한다. “사물은 내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범심론으로 이어진다. 샤비르에게 범심론은 “현상적인 경험을 실체화하거나 근절시키지 않고 그 자명함을 존중하는 데에 뒤따르는 필연적 귀결이다.”(189. 강조는 저자.) 범신론(Pan-psychism)의 ‘범’(Pan)이란 접두사가 그렇듯이 사밀성과 관계성을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사물에 적용하는 것이다.

생명의 감각으로도, 생명운동의 관점에서도 범심론은 자연스럽다. 생명사상을 정초한 시인 김지하는 생명의 핵심적 특징을 (다양성, 순환성, 관계성과 함께) 영성이라고 꼭 집어 말한다. 이때 영성은 인지적 마음, 감성적 마음과 구별되는 생명의 보편적 마음이다. 우주의 마음이다. 이때 마음은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느끼는 마음’이다(화이트헤드).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을 아우르는 ‘감응하는 마음’이다.

2012년 어느 강연에서 시인 김지하가 생태학과 녹색당의 한계를 언급한 바 있다. 요점은 생태학과 녹색당에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객관적 관찰만 있을 뿐 존재의 내적 경험에 대한 사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물들의 우주’의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모든 존재가 외면과 내면을, 일인칭 경험과 관찰가능한 삼인칭 성질을 가지고 있다”(193)고 말할 수 있는데 말이다. 생태와 녹색의 사유는 오늘날 기후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보여지듯이, 내적 경험의 세계가 아니라 외적 관찰의 결과로만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기후위기 대응의 한계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전환의 시대, 범심론적 사변은 역설적으로 대전환의 키워드가 될지도 모른다. 스티븐 샤비로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두 개의 탈출구 중에서 허무주의를 야기하는 ‘가차 없는’ 객체적 실재론이 아닌, 사물들의 가치경험을 통해 존재의 평등성이 인정되는 범심론적 실재론을 제안한다. 샤비로의 표현을 빌자면, 카나리아, 미생물, 원자 등의 사태와 같은 지평 위에 인간의식을 위치시켜야 하는 것이다.

 

사변적 실재론은 또 다른 세계를 태동시킬 수 있을까?

 

오늘날 인류는 명실상부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직면해있다. 팬데믹과 기후변화 때문만이 아니다. SF영화들은 포스트 휴먼와 트랜스 휴먼의 세계, 혹은 ‘인간-외계인들의 우주’를 도래할 현재로 보여준다.

최근 나의 키워드는 파국과 태동이다. 오늘날 팬데믹-기후위기의 경험에서 볼 때, 파국적 이행(Catastrophic transition)은 불가피하고,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또 다른 세계들이 태동하고 있다는 기대 혹은 예감이다. 그리고 그 태동을 촉진하는 것을 정동적 서사들이다. 새로운 세계관 설정이다. 나에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도 또 하나의 서사 혹은 세계관이다. 그 스스로도 그의 사변이 과학소설에 가깝다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의 ‘사변’은 파국적 현실 속에서 새로운 세계들을 태동시키는 촉매가 될 수 있을까?

사변적 실재론은 언어적 전회를 경과한 사유이다. 구성주의를 통해 인식론적 장애물을 넘었기에 존재론적 백가쟁명을 가능하다는 말이다. 앞으로도 수많은 존재론적 사변들과 사고실험들과 환상적 이야기들이 제출될 것이다. 아직은 알 수 없다. 저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사변적 미학’ 혹은 미학적 실재론이 또 다른 세계의 태동을 격발시킬 수 있을까? 토끼와 호랑이와 인간과 천지만물이 함께 춤추는 오랜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그런데 현실은 훨씬 치열하고 절박하다. 또 다른 세계의 태동은 매우 실존적인 과제이다. 그러므로 묻지 않을 수 없다. 범심론적 실재론이 생물 종들의 속절없는 소멸을 완화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까? 불평등을 넘어서 극단적으로 이원화된 인간사회 내부의 소멸과 격리와 파괴를 전환시킬 수 있을까? 사물들의 민주주의를 발명해낼 수 있을까?

그렇다. 실재론적 사상기획의 사회적 효능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선판의 한국사회, 사상기획들의 존재 여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 〈사물들의우주〉-보도자료 ‘클릭’

중국을 보는 하나의 창 – 『차이나 붐』 서평 (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중국을 보는 하나의 창 – 『차이나 붐』 서평 (1)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요즈음은 좀 뜸해졌는데, 작년 년 말에 언론은 중국 부동산 기업 헝다의 파산 위기를 연속해 보도했고 세계의 이목이 일시에 헝다 사태로 집중했다. 일개 기업의 부채 규모가 자그마치 약 3000억 달러라니, 놀랄 만하다. 이 정도는 중국 총 경제 규모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다고 하지만, 어디 이게 헝다에만 한정된 일일까?

2012년 경인가 중국 동북 지방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도시마다 엄청난 규모로 아파트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는데 그 많은 아파트 대부분이 비어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속으로 의아했지만, 중국은 큰 나라니 무한 세계 앞에서 유한 세계에 적용되는 법칙이 무력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웃었다. 헝다 사태를 보니 중국 역시 무한한 나라는 아닌 것 같다.

헝다 사태를 계기로 중국 사회 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찾았다. 이때 우연히 눈에 뜨인 책이 ‘차이나 붐’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저자 훙호펑의 2015년 저서이다. 부제 ‘왜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라는 제목에 이끌려 구입해 읽었다.

훙호펑은 1980-90년대 후기 식민 시대의 홍콩에서 성장했으며 외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친중국적이었으나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비판적 입장으로 전환했다. 그는 그 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에 유학하였으며, 현재는 존스 홉킨스 대학 사회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지금까지 두 가지 연구 프로젝트에 종사했다고 말한다. 하나는 중국의 정치적 근대성의 기원과 특수성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 산물로 ‘중국 특색의 저항’(2011) 책을 저술했다. 다른 하나는 중국 경제 부흥의 기원과 핵심 동학을 규명하는 것이며, 그 결과가 이 책이다.

2)

이 책은 서문과 결론에서 보듯이 두 가지 논제에 도전한다. 하나는 등소평 이후 중국의 경제 성장은 오직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된 결과이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이에 반대하며 사회주의적 유산이 중국 자본주의가 라틴 아메리카식으로 몰락하지 않은 주요 지주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중국이 성장하면서 자본주의 헤게모니가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에 반해서 저자는 중국은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편입되어서 상호 의존적으로 되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중국과 미국에 상호 이익을 줌으로써 세계 경제를 지탱하고 있으니, 그는 미국의 몰락은 중국의 몰락이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전체적 관점은 월러스틴의 세계 체제라는 개념으로 보인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세계 체제 속에 공생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저자가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보는 관점도 그와 유사하다.

3)

이 책 전체는 1부와 2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주로 중국에서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1부에서 그는 명, 청 시대 이미 상업과 무역이 발달했음에도 자본주의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를 탐구하고, 이어서 사회주의 시대 자본의 축적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서술한다. 이 부분은 역사적 서술로 흥미롭기는 하지만 당장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아니므로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사회주의 시대 이루어진 경제적 유산이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자본주의화를 성공시켰다는 그의 주장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런 유산으로 축적된 자본[국유 기업과 시설]과 우수하고 훈련된 노동력 그리고 자율적 정부를 들고 있다. 이런 유산 때문에 중국은 라틴 아메리카의 저주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4)

1부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중국의 개혁 개방이다. 그는 이런 중국의 개혁 개방을 두 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의 입장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단계는 1978년부터 1989년까지다. 이 시기에 중국은 일부 화교 자본을 끌어들이기는 했지만 주로 지방에 있었던 기존의 사회주의적 국유 기업(또는 집체 기업)이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전환하면서 중국의 자본주의화가 시작했다.

사회주의 시대 농촌에 저장되어 있었던 과잉 인구가 노동자로 제공되었으며, 인플레이션 아래서 기업은 시장 가격과 국정 가격이라는 ‘쌍궤제’를 통해 국정 가격으로 물자를 공급 받아 시장 가격으로 판매하면서 이윤을 축적했다.

사회주의 시대 노동자를 보호해 왔던 사회 보장 제도가 이 시기 폐지되면서 노동자는 저임금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관료와 기업의 유착 관계가 발전하면서 부패가 증가했다.

저자는 이 때문에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천안문 사태의 두 축이었던 학생과 노동자가 분열했다 한다. 학생은 정치적 민주화를 통해 관료의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노동자는 정부의 저임금 정책에 반대하면서 사회주의적 사회보장 정책을 회복하기를 요구했다. 그는 양자의 분열 때문에 천안문 사태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5)

저자는 1992년 등소평의 남순 이후 2003년 장택민이 물러나기까지가 개혁 개방의 두 번째 단계라 한다. 오늘날 중국의 사회 경제를 지배하는 기본 틀이 마련한 것이 바로 이 시기다. 이때 중국은 미국 금융회사의 조언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➀ 국유 기업을 개혁하여 수출 기업화 했으며 ➁ 해외 자본을 끌어들여, 사영 기업이 출현했다. ➂ 호구제를 폐지하여 싼값으로 무제한 노동자를 공급했으며 복지 체계를 완전히 해체했다. ➃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저가 농산물 정책을 실행했다. ➄ 국유 은행의 저금리 대출, 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값싼 상품을 해외에 수출했다. ➅ 정치적으로 대학 졸업자, 기업가를 당으로 흡수했으며, 수출 기업이 존재하는 연안 지역 출신이 당을 지배했다.

이상의 정책을 본다면 경제적으로는 대체로 한국의 군부 독재 시대 수출 산업화 정책과 무척 닮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주로 차관의 형태로 외국 자본을 끌어들였으나 중국의 경우 외국 자본의 직접 투자에 의존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중국은 이상과 같은 개혁으로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체제로 편입했다. 중국은 해외 금융 자본과 국내 과소 소비[저임금, 값싼 농산물]에 기초하여 저가 상품을 생산하여 미국과 서구로 수출했으며 여기서 쌓인 막대한 수출 이윤을 다시 미국의 국채에 투자했다. 미국은 부채에 기반을 두고 낮은 인플레이션과 저금리를 통하여 과잉 소비 체제를 형성했으며, 그 결과가 미국 부동산 투자였다. 부채를 통해 형성된 미국 금융 자본은 다시 중국의 수출 기업에 투자되어 미국 금융 자본에 높은 이윤을 주었다.

6) 여기까지가 1부의 주요 내용이다. 지금까지 서술된 주요 내용은 개혁 개방 정책이 전개된 역사적 과정이다. 이에 대해 필자로서는 충실하게 소개할 뿐 옳고 그름에 대해 평가하기 어렵다. 다만 헝다 사태에서 보듯이 중국의 주요 기업이 지고 있는 막대한 부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저자의 설명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부채에 기반한 성장이란 신흥 개발도상국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부족한 자본을 마련하는 길은 곧 부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부채는 성장을 통해 갚아나가야 한다. 남미의 경우는 외자 도입을 통해 개발 정책을 펼쳤으나 결국 부채 위기로 파산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중국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저자는 이 문제를 2부에서 다루고 있다. 2부의 주요 내용은 다음에 다루기로 하자.


독후감 : 2022 대선에 끼어든 생체 부적 – 트리버스(Robert Trivers),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다시 읽고 – [최종덕의 책과 리뷰]

독후감 : 2022 대선에 끼어든 생체 부적

– 트리버스(Robert Trivers),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다시 읽고 –

 

최종덕(한철연 회원, 독립학자)

 

  1. 자기기만의 습성을 가진 사람들

습관적 기만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전형은 자신의 거짓말 행위의 기만을 기만으로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습관적 기만행위가 가능한 이유는 스스로 자기기만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기억을 조작한다는 뜻이다. 기억을 짜맞추어 자신을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성곽에 갇힌 좁은 세상의 경험을 확대하여 다른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게 된다. 자신이 하는 일상의 기만행위를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고 남들이 기만적이라고 확정 판단한다. 이런 증상은 자기기만의 전형적인 현상이다.(책 232쪽)

광신도적 주술사나 그런 주술에 점입될 준비가 되어 있는 일반 광신도 모두 예외 없이 자기기만 증상의 사례들이다. 자기기만 증상자는 어리숙하게 굴기도하면서 주변 상황파악을 못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에 수치심을 갖지 않고 뻔뻔한 행동을 하는 데 능해진다. 특히 사회적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기기만 증상을 같이 갖고 있을 때 기만의 사회적 악폐는 더 심각해진다. 이런 경우를 권력형 자기기만 현상이라고 부른다.

권력형 자기기만 증상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도그마를 생산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그마를 강력하게 강요하며 그런 도그마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자신의 도그마 권력을 위배하는 사람들 모두를 악마화시킨다. 예를 들어 현재(2022년 2월) 대선후보로 나선 권력형 자기기만 증상자는 현 정권에 대한 적폐 수사를 한다거나 검찰청 앞에 모인 국민을 사법처리하겠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상황을 들 수 있다. 즉 자기기만 증상자는 자신의 거짓 합리화만이 아니라 자신을 비판하는 상대방을 미리 위협하고 강한 공격을 서슴치 않는다. 저자 트리버스는 이런 증상을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이라고 말했다.(책 117쪽)

 

  1. 자기기만의 주술적 성향

자기기만의 병증은 극도로 편향된 주술적 성향으로 전개된다. 자기기만의 주술적 성향이란 자기 개인의 불안정한 내부 심리상태를 우주적 특권으로 대체하는 가상세계에 빠지는 경향을 말한다. 트리버스는 이를 “우주적 의식의 특권화”라고 표현했다.(책 461쪽) 박근혜씨의 ‘우주 기운 운명론’이 그러했고, 윤석열씨의 ‘왕(王)자 그리고 이마 흰털 생체 부적’이 그러하듯이, 그들의 주술성 자기기만 심리상태의 특징은 자기소집단의 서열을 공고히 하며 자기를 정점으로 따르는 소집단 구성원에게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데 있다. 권력집단 기만성이 외부로 탐지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남 탓을 하고 분리주의를 유도하며 결국 자화자찬과 상대비난에 함몰한다는 것을 책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책 463쪽)

트리버스의 이 책은 자기기만의 사회-진화심리학적 배경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기만의 성공여부는 자신의 기만이 들통 나지 않도록 즉 남이 자신의 기만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것에 달렸다. 인간에게서 이러한 기만형질은 인간의 언어 능력보다 더 오래된 진화적 형질이라고 한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상대의 기만을 알아채는 심리적 형질도 따라서 진화되었다고 트리버스는 말한다. 나아가 권력형 기만자의 자기기만 혹은 타자 기만행위에 대하여 기꺼이 속을(기만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우리 인간의 또 다른 심리적 형질이다. 여기에 현실적인 문제가 놓여 있다.

 

  1. 보통 사람들, 도덕성과 경쟁심의 이중트랙을 볼 수 있는 눈

권력형 기만증상자의 기만행위를 기꺼이 수용하는 개인들의 심리상태를 트리버스는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모습은 우리 인간 자신의 또 다른 이면이다. 권력 기만자의 증상이 일반 사람들에게 전염되면서 우리들조차 자기기만의 플라시보 효과를 탐미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기만에 전염된 우리 보통 사람들을 비난만 해서는 문제를 풀어갈 수 없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보통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나 그들이나 똑같은 진화의 호모 사피언스이다.

대한민국 현실 선거 정치와 연관하여 말해 보자. 대선에 나선 민주당 사람들이 말하기를, 윤석열 후보는 기만행위가 많아서 민주당이 결국 선거에 이길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들었다. 그런 말은 호모사피언스의 진화생물학적 현실을 모르는 오판으로 끝날 수 있다. 권력형 기만집단도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만집단의 행위와 그 여파는 우리들 일반 사람들에게 전염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자기기만이라는 플라시보 효과에 기꺼이 그리고 능동적으로 동참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놓치거나 무시하면 아무리 진심어린 이재명 백 명을 가져와도 선거에 이길 수 없다. 도덕과 진리로 볼 때 상대방보다 낫다고 해서 선거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 인성은 두 개의 형질 궤도 위에서 나타난다. 하나의 궤도는 남들과 함께 하는 도덕심이며, 다른 하나는 남을 해치는 약육강식의 경쟁심이라는 궤도이다. 두 개의 궤도로(이중 트랙) 진화된 양면성의 호모 사피언스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냉정한 인식 위에서 만든 응급형 선거정책을 생산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결실이 올 것이 분명하다.

 

  1. 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를 다룬 이 책,

이 책은 기존 임상심리학에서 많이 연구해 온 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의 문제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편향된 정보해석, 편향된 기억, 편향된 판단, 편향된 추측 등의 편향확증의 문제를 자기기만의 상태와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허풍과 기만의 심리를 노출하면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을 공격하게 되는 심리 상태, 우월감에 도취되어 공동체 분열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상태, 권력형 기만증상을 이용하여 확대생산하는 주변정치인들의 동조 양상, 습성대로 행동한 후 반성없이 얼버무리는 기만행위, 너무 잦은 미성숙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을 갖지 못하는 인지부조화의 상태를 자주 보아온 우리들, 이 책에서 서술된 수많은 사례들이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 같아 우리 독자는 씁쓸하다.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4) – 날뛰는 여인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1)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은 여러 단편이 모인 작품이다. 이야기, 논문, 콩트 등이 결합한 이 작품은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낭만 문학의 이념인 보편 문학의 개념에 가장 적절한 예가 될 수 있겠다.

이 작품 속에 포함된 많은 단편 가운데 가장 핵심은 아마도 책의 제목을 따온 것으로 보이는 ‘방랑자들’이라는 단편이다. 이 단편의 주인공은 아누쉬카이다. 그녀는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 그녀가 모스크바 지하철 입구, 케르베로스의 개(즉 지옥의 문을 지키는 개)가 지키는 입구에서 만난 여인이 날뛰는 여인이다.

아누쉬카의 아들은 유전적 질병으로 거동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다. 이 질병은 아누쉬카와 그의 남편이 체르노바에서 방사선을 쏘였기 때문에 얻은 질병이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정신적 고통을 겪는 남편을 돌본다.

그녀의 남편은 감옥에 갔다 온 모양이다. 아들 병의 원인에 대해 입을 잘못 놀렸던 모양이다. 그 뒤 남편 역시 침대에 누워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낸다. 국가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다. 단편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밤이 되면 세상 위로 지옥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밤에는 “형태를 읽어버린 몸뚱이처럼 이전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이런 밤에 아누쉬카는 꿈을 꾼다. “목을 자른다든지, 사랑하는 이의 몸을 핏물에 담근다든지…”하는 꿈이다. 아누쉬카에게 이것이 세상의 진면목이다.

작가의 관심은 아들이나 남편, 사회에 있지 않지만, 사회적 문제가 이 단편 전체에 절망적인 분위기로 깔려있다. 작가는 오직 아누쉬카의 내면에만 주목한다.

2)

아누쉬카는 일주일에 하루는 휴가를 얻는다. 그 하루는 그녀의 시어머니가 자기의 아들과 손자를 돌본다. 아누쉬카는 그 하루에 약국에 들르거나 음식물을 사거나 하는데, 그날 그녀가 어기지 않고 하는 한 가지 일이 있다. 그것은 마음껏 우는 일이다.

그녀는 대개 대성당에 가서 기도하면서 운다. 그녀는 꼭 아버지같이 인자한 모습을 지닌 성상 앞에서 운다. 그녀가 울기 위해서는 주변이 고즈넉해야 하지만 성상의 눈이 그녀를 반드시 지켜보아야 한다.

그날도 휴가를 얻어 평소 가던 대성당에 갔지만, 그날따라 관광객이 많아서 아누쉬카는 울음을 터뜨릴 기회를 잡지 못했다. 아누쉬카는 도시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는 작은 성당으로 갔다. 이번에는 성상의 모습이 “물에 빠진 사람의 얼굴” 같았기에 도대체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아누쉬카는 이렇게 생각한다. “신이 약하며 패배자라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성상을 올려보던 아누쉬카는 성상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성상의 시선이 그녀의 정수리에 꽂히면서 그녀의 먼 곳의 천둥소리를 듣는다. “마치 뭔가를 체험한 듯했고, 무언가 그녀를 관통하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충격이었지만 어두운 절망적 느낌이 아니었다. 이 느낌을 작가는 “몸에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어떤 맑은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고” 서술한다. 아누쉬카에게 어떤 근본적 전회가 일어난 것이다.

끝내 울음을 울지 못한 아누쉬카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서 집 앞에 도착했지만 돌연 멈추어 선다. 다시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또 앞으로 걸어간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 그녀는 이윽고 발걸음을 돌려 지하철로 돌아간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그녀는 울음을 울지 못한 상태에 시달리며 마침내 현실을 떠난다. 그녀는 그때부터 지하철의 지하 세계에 산다. 매일 이런저런 지하철 노선을 갈아타면서 끝없이 움직인다. 아누쉬카는 노숙자, 아니 방랑자가 된 것이다.

3)

물에 빠진 자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공포로 악을 쓰는 파랗게 질린 얼굴이 아닐까? 성상의 얼굴이 아누쉬카에게 왜 그런 모습으로 비추어졌을까?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성철 스님이 10년 면벽 수도 끝에 깨달았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피투성이의 세계였다고 한다. 아누시카 역시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이 세계 속에서 그녀는 행복했다. 아무런 “생각도, 근심도, 기대도, 희망도 없었기에, 그것은 안락한 느낌이었다.”

아누쉬카가 지하철 노숙자의 세계에서 만난 여인이 날뛰는 여인이다. 그녀는 덕지덕지 옷을 껴입고 있다. 머리는 수건과 모자로 둘러싸고 지하철역 앞에서 8자를 맴돌면서 입으로는 욕을 쏟아낸다. 누구도 듣지 않지만 아누쉬카는 날뛰는 여인에게 다가가 밤이면 함께 머무른다.

그리고 어느 날(몇 달이 지났는지를 작가는 말하지 않는다) 지하철역에 청년들이 모이고 그 가운데는 말을 몰고 온 처녀도 있다. 이 청년들을 보면서 아누쉬카는 마침내 울음을 터트리게 된다. 그들이 그의 아들 피에티아[‘피에타’와 같은 말로 보인다)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바위처럼 무겁고 고통스럽다. 그녀의 안에서 피에티아가 부풀어 오르고 점점 자라났다. 아마 다시 그를 출산해야 할 것 같았다. … 피에티아가 어느 틈에 그녀의 폐에 달라붙고 목구멍까지 솟았다. 흐니느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를 꺼낼 수 없을 것이다.”

아누쉬카가 지켜보던 중, 무리 속의 한 처녀가 말이 도망치려 하자, 채찍으로 등을 내리친다. 그것을 보고 아누쉬카와 날뛰는 여인이 달려간다. 그리고 짓눌린 목구멍을 짜내어 소리친다. “(말을) 내버려 두라고!!”

이것은 니체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니체는 토리노 시장에서 채찍을 얻어맞는 나귀를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니체는 정신적 어둠 속에 살았다고 한다.

4)

청년들과 싸움을 벌인 덕분에 경찰서에 끌려갔으나 곧 방면된 아누쉬카는 마침내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그치지만 이어지는 단편에서 날뛰는 여인이 무슨 욕을 했는지가 나온다. 날뛰는 여인의 말이다.

“몸을 흔들어, 움직여, 움직이라고, 그래야만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에겐 움직임을 지배할 능력은 없어. 우리의 몸은 움직일 때 비로소 신성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어. 움직여야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세상의 지배자와 싸우는 힘은 움직임에 있다. 작가가 소설 방랑자에서 말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말을 통해 아누쉬카가 집과 아들과 남편을 모두 떠나 지하의 세계로 간 이유가 설명된다. 밤의 세계, 지옥의 지배자, 케르베로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아누쉬카로 하여금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말에게 채찍질하는 것과 울음의 터뜨리는 것 사이의 연관이 무엇일까? 주인공에게 마침내 때가 다가온 것인가? 때 즉 카이로스 말이다.

올가 토르카추크의 신비한 철학이 시종 나의 뇌리에 떠나지 않는다. 아뉘시카는 울음을 터뜨릴 때를 얻었지만 나는 철학의 때를 얻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신년회 특강 영상: 최종덕 – “면역학의 철학과 코비드-19 이후” (2021년 1월 13일)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신년회 특강

 

주제: 면역학의 철학과 코비드-19 이후

발표: 최종덕(한철연 회원, 상지대 교양학부 명예교수, 독립학자)

일시: 2021년 1월 13일 오후 7시~

장소: ZOOM 온라인 회의

 

2021년도 발표입니다. 당시 사정으로 게재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게재합니다.

여전히 지속되는 2022년 코로나 시국에 시의적절한 내용으로 구성된 강연입니다.

 

출처: 한철연 유튜브 채널 https://youtu.be/E0cmXdcS-H4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3) – 블라우 박사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3) – 블라우 박사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의 핵심 키워드는 ‘방랑’이다. 작품 속에는 이 방랑의 문제와 연관된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쿠니츠키, 블라우 박사, 날뛰는 여인 등이다.

왜 집을 떠나는가? 앞의 글에서 소개한 쿠니츠키라는 인물은 방랑자가 영원히 방랑하게 된 동기를 설명해 준다.

쿠니츠키가 여행 중 들렀던 어느 섬에서 아내와 아이가 사라진다. 그는 아내의 흔적을 찾아 뒤지던 중 아내의 핸드백에서 카이로스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그다음부터 그에게 세계는 카이로스를 가리키는 편집증적 신호이다. 그는 이 카이로스를 찾아 떠난다. 아니 거꾸로 카이로스가 그를 끝없는 방랑의 한 가운데로 불러냈다.

이번에는 블라우 박사라는 두 번째 인물을 보자.

2)

올카 토카르추크의 이 소설에는 생체를 고정하는 기술에 대한 호기심이 이상하리 만큼 집요하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밀납인형이라든가 미이라, 포르말린 용기에 담긴 동물이나 인간의 신체 부분, 분더카세(Wunderkasse: 기이한 물건의 수집해 놓은 방), 미니아처, 신체를 순간적으로 영원히 얼리는 플라시티네이션(Placitination: 특수 고형화 기술), 사진술 등이다.

이런 호기심은 처음엔 독자들에게 마치 컬트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심지어 그 끔찍한 아름다움 때문에 어떤 섹슈얼한 느낌조차도 발생한다. 아래 인용문을 읽어보라.

“마치 피 묻은 커다란 입술처럼 간이 위를 에워싸고 있다. 자궁의 위쪽으로 연결된 콩팥과 수뇨관도 보인다. 그것들은 맨드레이크의 뿌리를 연상시킨다. 자궁은 눈으로 감상하기에 즐거운 근육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이런 기술들은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다. 그것은 그에게 철학적 의미가 있다. 그것은 카이로스, 방랑이라는 개념과 연관된다. 방랑은 모든 고정된 것, 법칙적인 것, 기계적인 것을 파괴하면서 카이로스를 즉 흐름이고 우연적 만남이며 개별적인 것을 찾아 떠나게 만드는 힘이다.

이런 방랑의 힘에 대립하는 것이 생체를 고정하려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모든 개별적이고 우연하고 흘러가는 것을 다시 영원히 얼어붙게 만든다.

3)

작가는 마침내 움직이는 것을 영원히 고정하고자 하는 인간의 광기를 형상화한다. 블라우 박사가 그런 인물이다. 작가는 2개의 단편에 나누어서 블라우 박사를 서술한다.

블라우 박사는 플라시티네이션 전문 학자이다. 박사는 플라시티네이션 분야에서 지금 최고의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의대를 나와 의학 박물관에 들어가 유리병에 보관된 신체 장기를 연구한다. 그의 관심은 의학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 장기를 어떤 방식으로 보존했는가에 있다.

그의 목표는 인간의 육체를 완전하게 보관하는 것이다. 고대의 미이라는 인간의 표면만 남기는 것이니 오히려 온전한 육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현대의 플라시티네이션 기술의 발전은 그의 희망을 실현하게 해 주었다.

그의 취미는 사진을 찍는 것이다. 사진 역시 순간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관계 한 여성의 질을 사진으로 찍어 보존한다. 그의 희망은 실제의 질을 수집해 유리병에 보존하는 것이다.

“신체의 모든 부위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모든 인간의 몸은 보존해야 마땅하다. … 만약 블라우박사에게 세상을 창조하도록 했다면 우리에게 별 필요도 없는 영혼은 필멸로 만들고 아마도 육체에 불멸을 허용했을 것이다.”

단편 1은 블라우 박사가 플라시티네이션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과정을 서술한다. 단편 2에서는 블라우 박사가 몰 교수 부인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으로 찾아가면서 전개된다. 몰 교수는 이 분야에서 블라우 박사를 능가하는 인물이다. 몰 교수의 기법은 같은 동료 학자들에게 비밀이었다.

4)

몰 교수는 사고로 죽었지만 블라우 박사는 그가 남긴 보존 기법을 통해 무언가 배우고자 한다. 몰 교수의 집은 바닷가에 있고 그를 맞이한 부인은 바다에서 수영하다 물에 젖은 몸으로 그를 맞이한다.

하지만 블라우 박사는 그녀의 몸에 무관심하다. 그의 관심은 온통 몰 교수의 집에 있다. 그는 몰 교수의 서재와 실험실을 방문하면서 그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몰래 기록한다.

블라우박사는 몰 교수가 남긴 고양이 플라시티네이션 작품을 보게 된다. 이 고양이는 마치 살아 있을 때와 똑 같이 부드러운 털을 갖고 가볍고 따뜻하다. 마치 살아 있는 고양이가 그렇게 하듯 건드리면 온몸을 웅크리고 펼치고 한다.

몰 교수 부인은 그를 성적으로 유혹하지만, 그는 그런 부인의 유혹이 오히려 불편하다. 부인이 그에게 바다에서 수영하자고 하자 그는 달갑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함께 나체로 수영한다. 이야기 마지막에 저녁에 식사 후 와인을 마시며 부인이 그의 손을 잡아 끌자 그는 이를 거부하고 부인의 집을 나간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서 꿈틀대는 늙고 뜨끈뜨끈한 몸뚱이에 자신의 신체 일부를 쑤셔 넣어 가며 따분한 짓을 견뎌야 한단 말인가?”

5)

작가가 창조한 블라우 박사라는 인물은 흥미롭다. 이 인물은 살바도르 달리가 만든 서랍이 달린 비너스라는 조각품을 연상시킨다. 또는 오늘날 자신의 신체를 완벽한 칼날처럼 가다듬는 선남선녀와도 닮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살아 있는 육체와의 접촉이 아니라 죽어 있는 신체의 영원한 보존에 관심 가지게 된 것일까? 에리히 프롬이라면 이런 인물을 저장형 성격이라고 하면서 자본가의 성격으로 파악했을 법하다.

작가는 주인공 블라우 박사가 몰 교수 부인의 집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떠올렸던 생각을 소개한다. 혹 이 생각과 블라우 박사의 성격이 연관된 것이 아닐까?

“그의 손은 여성의 몸을 통해 수천 번이나 확인한 끝에 그 안에서 어떤 균열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 어쩌면 인체의 내부는 전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할지도 모른다. ….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여행자도 자신의 짐 가방을 이처럼 [우리 몸 안의 장기처럼] 완벽하게 정리하여 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블라우 박사는 비행기 안에서 잠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신체에 균열이 없다는 사실이 블라우 박사에게 편안함과 행복감일 주었다는 것이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 (2) – 구멍 뚫린 사내 쿠니츠키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을 읽고 (2) – 구멍 뚫린 사내 쿠니츠키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 속에는 여러 인물이 나온다. 지하철을 통해 끊임없이 이동하는 노숙자, 인간의 육체를 영원히 보존하려는 집념을 지닌 권력자, 오래전의 첫사랑을 안락사 해 주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인 등.

그 가운데 쿠니츠키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방랑자가 방랑을 떠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 인물은 소설의 앞 부분에 연속된 두 편의 단편에 걸쳐 등장하고 한참을 뛰어넘어 소설 끝날 무렵 한 편의 단편에 다시 등장한다. 앞의 두 단편의 제목은 <쿠니츠키-물1, 2>이고 마지막 단편의 제목은 <쿠니츠키-대지>이다.

물과 대지라는 대비가 흥미롭다. 물의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첫 번째 단편에서 쿠니츠키는 아내와 세 살 아이와 함께 크로티아를 가로질러 비스섬으로 여행을 갔다. 거기서 아내와 아이가 함께 사라진다. 그는 사흘을 작은 섬에 머무르며 아내와 아이를 찾지만 찾지 못한다.

아내와 아이가 실종된 곳이 섬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섬이란 물, 바다에 갇혀 위태롭게 떠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 섬이라면 언제라도 실종이 일어날 수 있다. 그곳은 세상에 구멍이 뚫리는 약한 곳이다.

두 번째 단편은 아내와 아이를 찾는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는 그 흔적을 찾는다. 그는 아내가 남긴 소지품을 뒤진다. 그리고 핸드백 속에 우연히 남아 있는 ‘카이로스’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이 글자는 그에게 갑작스러운 빛을 비추어준다.

이 글자를 발견한 이후 그는 아내의 소지품을 뒤지면서 마구 내 던진 물품들이 어떤 형상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때 그는 “역겨운 공포의 냄새”를 맡는다.

알 수 없는 존재가 그에게 보내는 신호, 그 신호를 통해 드러나는 시꺼먼 허무의 세계, 세계는 이제 무너졌다. 그 앞에서 그는 공포에 떤다. 이 공포가 역겨운 냄새로 표현된 것이 독특하다.

3)

세 번째 단편에서 밝혀지는 일이지만 그는 편집증 환자로 환상을 보고 있다. 아내와 아이를 잃고 돌아온 다음 어느 날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아파트 벽은 흥건하게 물이 젖는다.

“그는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을 걸어서 자동차로 다가갔다. 차를 타고 좀 더 높은 지역에 있는 이웃 마을로 도망쳐 보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알고 보니 그곳 역시 물의 덫에 갇혀 버렸다.”(504쪽)

물이란 이미지가 이렇게 섬뜩하게 그려진 소설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물이 자주 자살자를 끌어당기는 이유를 알겠다.

그의 환상 속에서 아내와 아이는 돌아와 그에게 그 섬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에 대해 감춘다. 처음에 이게 사실인 것처럼 독자는 속는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이것이 그의 환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4)

환상 속에서, 그는 아내에게 실종이 일어난 다음의 일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지만, 아내는 그의 말을 무시한다. 그럴수록 그의 의심은 더 강해진다. 그는 아이를 정신분석학자에게 데려가 무의식을 탐구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정신분석학자의 음모(?) 때문에 실패한다.

그는 도서관에 들러 사전을 뒤지고 인터넷에 물어 아내의 소지품에서 발견한 ‘카이로스’라는 말의 의미를 탐구한다. 여기에 무슨 단서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카이로스, 이 말은 그에게 만물에는 보이지 않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가 탐구할수록 그의 만물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무언가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보내는 신호가 된다.

“표시 너머에 다른 표시를 가리키는 표시가 있고 다른 표시에서 야기된 표시들이 있었다. 표시의 음모, 표시의 네트워크, 그의 등 뒤에서 표시들끼리 서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게 다 중요했다. 전부 끊임없이 이어지는 커다란 퍼즐이었다.”(515쪽)

5)

아내를 미행했다가 들켜서 아내와 함께 돌아와 집에 들어오는 순간, 현관을 열면서 갑자기 그의 환상이 중단된다. 그의 집에는 아내도, 아이도 없다. 오직 아내가 남겨놓은 옷가지, 아이의 장난감만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는 그 흔적 사이를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그는 “스스로 벽을 통과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방랑을 떠난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보내는 그 의미, 그때를 찾아서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9시쯤 그가 진하게 커피를 탄다. 그리고 나서 욕실에 있던 면도용품 일부와 옷장 안에 있던 셔츠 몇 벌, 그리고 바지를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 그는 체코와의 국경을 향해 화살처럼 똑바로 꼿꼿하게 남쪽으로 향했다.”(539쪽)

그저 간단한 여행을 떠나는 듯 그는 떠났다. 체코를 지나야 비스섬으로 갈 수 있다. 세계가 구멍 뚫린, 그 섬 말이다.

6)

여기서 우리는 갑자기 혼란에 빠진다. 마지막 단편 끝에서 그가 비스섬으로 떠난다는 사건은 어쩌면 처음 단편에서 그가 처음 아내와 아이와 함께 비스섬에 도착했다는 사실과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아내와 아이를 심문하는 것이 환상이듯이 비스섬에서 아내와 아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도 환상이 아닐까?

갑자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에서 환상인지 모호해진다. 이런 모호성 때문에 그에게 역겨운 냄새가 등장한 것이 아닐까? 하이데거라면 이를 불안이라 했을 것이고 사르트르라면 이를 구토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역겨운 냄새를 맡는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이데거나 사르트르에서 새로운 세계는 진리의 세계이다. 하지만 쿠니츠키 앞에 역겨운 공포의 냄새로 떠오른 세계는 그저 알 수 없는 세계다. 이전의 세계와 새로운 세계 가운데 어느 세계가 현실이고 어느 세계가 환상인지도 알 수 없다.

불안과 구토에서 사람은 구원의 세계로 들어간다. 하지만 역겨운 냄새가 풍기는 모호한 세계에서 그는 방향이 없이 다만 방랑할 뿐이다.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노숙자 되고,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설이 끝나는 곳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이제부터 소설은 방랑하는 인물, 물과 같은 존재와 그런 방랑을 고정하려 드는 존재, 대지와 같은 존재를 탐구하는 서사시가 될 것이다.

이 소설에서 끔찍한 이미지는 흘러가는 존재를 고정하려는 자의 집요한 노력이다. 그는 이를 인체를 투명하게 보존하려는 자의 노력 속에서 발견한다. 다음엔 이 이야기를 들어보자.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 (1) – 카이로스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을 읽고 (1) – 카이로스

 

이병창(한철연 회원)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을 읽었다. 이 소설은 2019년에 노벨상을 받은 작품이다. 그는 폴란드 태생의 작가라는 것밖에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이 소설은 내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

소설은 낭만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그의 철학 단편에서 이상으로 삼았던 문학 형식인 ‘보편 문학’의 원리에 따른다. 이 소설은 수많은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 한 인물을 다루는 이야기조차 소설의 여러 부분에 흩어져 있다. 이 소설에 포함된 단편은 그 형식도 갖가지이니, 본래의 소설 즉 이야기도 있고 심리학적 연구나 철학적 단상도 있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중심이 보이지 않으니 슐레겔이 ‘중심이 무한한 소설’이라고 말한 것에 적합하다.

억지로 하나의 중심을 찾으라 하면 아마도 카이로스[kairos]라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카이로스는 그리스어로 ‘때’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개념과 다른 또 하나의 시간 개념이다. 예수가 “아직 내 때가 되지 아니 하였나이다”라고 말할 경우 또는 시인 릴케가 ‘가을의 시’에서 “주여 때가 왔습니다”라고 기도할 경우 사용되는 개념이다. 한자어로는 기회라고 번역될 수 있겠다.

이 ‘때’라는 개념은 그리스에서 신격화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쯤에 작가는 그리스 연구자인 한 교수를 등장시킨다. 그는 은퇴한 후 그리스 유적지를 오가는 유람선에서 그리스에 대해 강의하면서 이 카이로스라는 신을 소개한다. 교수는 실제 모델이 되는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 소장된 리시포스의 부조를 소개하면서 그 부조와 연관된 포세이디포스의 시를 소개한다. 그 시는 이렇다.

 

“모든 것을 길들이는 카이로스

왜 항상 발돋움을 하고 있는가?

쉼 없이 세상을 뛰어다니고 있으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의 두 발에는 날개가 달렸는가?

바람과 함께 날아다니기 때문이지.

당신의 오른 손은 무엇 때문에 면도칼을 들었는가?

세상의 모든 날카로운 것보다 더 날카롭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한 표시지.

머리카락은 왜 눈을 가렸는가?

나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사람이 내 앞머리를 붙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지.

세상에, 당신의 뒷머리는 왜 하나도 없는가?

한번 지나치면 날개 달린 발로 빠르게 달아나 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원해도 그 누구도 날 뒤에서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지.”

 

소설에서 교수는 이 시를 읊고 나서 마침내 그의 때를 얻었다. 그는 발작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렀다.

이 시는 때, 기회라는 개념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 하겠다. 눈앞에 보고도 놓친 수많은 기회, 이미 떠나가면 아무리 한탄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기회를 생각하면 이해될 것이다.

때라는 개념이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그 개념이 방랑자 개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위의 시에도 카이로스 신은 쉼 없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마찬가지로 이 카이로스를 만나기 위해서는 온 세상을 돌아다녀야 하지 않을까? 아마 잠들 수도 없을 것이다. 그가 잠든 사이에 신부가 왔다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젊은 시절, 방황했던 적이 있다.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그리하여 때를 얻기 위해 잠들지 못하고 늘 거리를 서성거렸다. 지금은 이미 포기했고 병든 삶에 안주한다. 이런 나 앞에서 소설은 그만큼 정신적 충격이었다.

이 작품에서 카이로스가 등장하는 것은 이 작품 중에 세 군데 걸쳐 나누어져 등장한 한 쿠니츠키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다. 이제 쿠니츠키 이야기를 해 보자.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④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④

 

글: 행길이(한철연 회원)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김훈의 『강산무진』에는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무기력함이 끔찍할 정도로 냉정하게 조탁되어있다. 죽음의 두려움이 주는 고통은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인 경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죽음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기쁜 인생을 살기 위해 태어났다. 그런데 인간은 두려움 때문에 기쁜 인생을 향유하지 못한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은 자기 삶의 최종적 파멸로서의 죽음이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란 살아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작용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은 감각에 의존하는데, 죽으면 이러한 감각을 잃게 된다.” 즉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쁘게 되지도 않고,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게 된다. 우리가 죽게 되면 죽음으로 인해 느껴지는 고통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죽음에 대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고통이란 죽음을 경험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에 대한 고통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닥쳤을 때라도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기에 죽음이 두려운지 조차도 느낄 수 없다. 그러니 죽음이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한순간도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니 죽음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동요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유령과 같은 허상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의 공포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다.

 

신에 대한 두려움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죽음 다음가는 공포는 신에 대한 공포다. 모두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불행해진 이유가 신이 불경한 자기 행동에 분노하여 징벌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제사장들에게 재물을 제공하면서 신의 전조를 읽어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엄청난 비합리성이 판을 치는 불의한 사회가 되어버린다. 종교적 권고는 심지어 자기 자식을 신에게 공양하는 범죄를 신성한 의례로 여기게 하는 미혹을 유포시키기도 했다. 루크레티우스의 말처럼 “종교로 인해 우리가 이르게 되는 악의 심연(Tantum religio potuit suadere malorum)”은 인간의 삶을 고통에 휩싸이게 만든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신이 인간의 행위에 분노하거나 기뻐하는 등의 감정을 함부로 남발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신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신은 불멸의 축복을 받은 존재다. 따라서 그의 불멸성과 축복에 어울리지 않는 속성들, 즉 걱정, 근심, 분노 등을 신에게 갖다 붙이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신은 인간과 같이 근심하거나 걱정에 휩싸이고 분노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자기에게 악한 자들은 신의 징벌을 통해 불행해지고, 자기에게 선한 자들은 신의 축복에 의해 행복해진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고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려는 인간이나 하는 것이지 지성적 존재인 신이 취하는 것일 수 없다. 따라서 신은 우리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지 아무런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며, 아무런 징벌도 상도 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즐거움의 항구

 

나이를 먹을수록 활력과 정열은 예전 같지 않다. 의욕은 있으되 청년의 정력적 활동을 따라가기란 역부족이다. 주변에서는 활력을 갖고 젊게 살기 위한 노력을 주문하면서 젊은이들 못지않게 열심히 활동하는 노년들을 보여준다. 이른바 청년 시절의 삶을 노년에서도 반복하기를 권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청년 같이 사는 삶이 과연 행복한 노년의 삶이랄 수 있을까?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젊은 사람을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노인을 행복하다고 해야 한다. 젊은이는 혈기왕성해서 운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하지만 노인은 항구에 정박하듯 제 나이에 닻을 내린다. 하여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을 즐거운 일이라 감사히 여기며 [그 경험을] 안전한 곳에 가져다 둔다.”

 

에피쿠로스가 보기에 청년보다는 노인이 더 행복할 수 있다. 청년은 언제나 자기 운수의 행로가 좋은 결과를 가져올만한 방향으로 가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행복을 판별한다. 하지만 노인은 좀처럼 운수의 향방에 따라 자기 인생의 복됨을 결정하지 않는다. 노인은 항구에 굳건히 정박한 배처럼 운수가 어떤 변덕을 부리든 상관하지 않고 굳건히 자신의 경험을 관조하면서 그 속에서 얻은 기쁨을 발견하는 즐거움에 행복감을 느낀다. 비록 새벽잠이 없어서 매번 외로운 아침을 맞이하지만 그로 인해 하루가 시작되는 신비로움을 고요히 응시할 수 있고, 두뇌 활동이 예전 같지 않아 빠른 독서는 하지 못해도 느릿한 독서는 구절마다 배인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만든다. 젊은 시절 성급하게 놓쳐버린 경험의 다양성은 노년이 주는 완상의 기회 덕분에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좋은 일들을 잊고서 그는 오늘 이미 노인이 되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과거의 즐거움을 기억하는 사람은 젊음을 유지할 수 있지만 새로운 쾌락만 추구하려는 사람은 금세 늙는다는 말이다. 에피쿠로스에게 쾌락이란 대체로 완상과 관조의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을 청춘의 즐거움 속에서 살게끔 만든다. 고통의 제거란 생의 경험 속에 내재된 기쁨의 요소를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관조를 통해 자신이 겪은 경험 속에 내재한 좋은 일들을 간수하지 못하고 망각하게 되면 그는 고통의 심연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청년이어도 노년의 고통을 겪는다. 반면에 경험 속에 내재한 좋을 일을 고통의 순간 속에서도 관조할 줄 알면 노인이어도 청년을 살게 된다.

에피쿠로스에게 나이가 듦에도 젊게 사는 인생이란 청년의 삶을 모방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노인답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첫 걸음은 나이를 먹으면서 변화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경험을 완상하며 즐거움의 계기를 발견하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 나갈 때 젊은이의 그것과는 다른 삶의 활기를 얻게 될 것이다. 항구에 닻을 놓고 생의 즐거움을 완상하는 것. 이것이 청춘을 사는 노년의 방법이다.

 


 

연재를 마치며 [유운의 전개도 접기]

연재를 마치며

 

이유운

 

저는 지금껏, 이런 연재를 마치는 마지막 글로 ‘연재를 마치며’ 라는 제목을 다는 게 참 멋없고 촌스럽고 성의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마지막 글을 쓰게 되니까, 이 제목만큼 담담하고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제목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재를 편지 형식으로 대신한다는 것도요. 뻔한 결말이 되어서 아쉽습니다만, 뻔한 게 아니라 구관이 명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편지라는 건 정말 내밀한 형식의 글이죠. 편지가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바로 유일의 독자. 물론 저도 카프카나 생로랑이 친구들, 연인들, 사랑과 주고받은 편지가 책으로 나왔을 때 환호했지만, 그 글들은 유일의 수신자가 아니라 제게 읽혔다는 점에서 이미 편지가 아니게 된 셈입니다. 편지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다른 글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제가 쓰는 편지도, 제가 수신자를 모르고 있으며 그 수신자가 유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편지가 아니게 되는 셈이지요. 이런 구구절절한 변명을 모두 대면서도 편지로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 방법이 저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간의 거리를 좁히고, 또 아주 친한 벗인 척 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하고도 빠른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지막 편지로는 이런 말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사랑시를 자주 씁니다. 제 「전개도 접기」라는 연재를 꾸준히 보아준 성실하고 다정한 독자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시가 대부분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숨겨진 비유 같은 건 아닙니다. 필름을 덮지 않은 새 휴대폰 화면에 덕지덕지 묻은 지문처럼 그대로 드러나 있으니까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데뷔하고 나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사랑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글쎄요, 그건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저는 엉망이 된 세계에서 자꾸 허물어지고 다시 자신을 세우는 인류가 좋습니다. 제가 그런 특성을 가진 종의 한 일원이라고 생각하면 퍽 즐거워집니다. 생물에는 종마다의 특성이 있지 않습니까? 인류의 종적 특성은 허물어지고 다시 서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는 그 허물어지는 이유도, 세우는 힘도 모두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사랑을 선택한 인류, 전 그런 걸 좋아합니다. (물론 그런 인류 중 한 개체가 저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건 좀, 별개의 일입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정말정말 좋아요. 술을 마시면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자주 합니다. 얇고 흑심이 여기저기 묻은 더러운 손을 흔들며 담배를 피우는 오래 전의 사람을 기억하기도 하고, 저를 연필로만 덧그리는 사람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다른 결의 생각들이 모두 제 안에서 시작된다는 건, 논리적인 사고로는 아무래도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 논리 바깥에 있는(뛰어넘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뭉글뭉글한 것, 시각보단 촉각에 가까운 것, 아폴론보다는 디오니소스에 가까운 그 무언가를 사랑이라고 지칭합니다. 연애로 축소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디까지 포괄할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상상하는 건 퍽 즐겁지 않습니까? 적어도 저는 그래서 시를 쓴답니다.

신기한 건, 전 아무에게도 이 질문을 되돌려 준 적은 없어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 질문을 했을 때 사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대답할까봐 두렵기도 했고, 그가 한 대답이 저를 실망시키게 되면, 제가 또 뭐라고 그에게 실망했다는 점 때문에 슬퍼질 것 같기도 했고,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궁금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사랑을 뭐라고 정의하는 게 대체 저랑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사랑과 다정이라는 건 아주 다른 결입니다. 그렇지요?) 아마 저와 같은 정의로 사랑을 공유하는 사람은 없을테고 바로 그런 점이 재미있는 건데요. 그래서 사실 전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치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답하는 저는 아주 많은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렇다고 그간 한 많은 인터뷰들을 싫어했다는 건 아닙니다. 치사하다는 건 못된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치사하다’는 어감도 귀엽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건 다른 이야긴데, 저는 가끔 ‘내 맘도 몰라주고 정말 치사해.’ 라고 제게 누군가 써준 쪽지를 읽어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짝꿍을 같이 하지 않은 어떤 친구에게 받은 쪽지인데요, 옆에는 야무지게 악마도 그려뒀습니다. 왼손잡이였는지 옆으로 죄다 글씨가 번져 있어요. 이렇게 솔직하면서도 하나도 해롭지 않은 애정이 필요할 때 가끔 이 쪽지를 읽어봅니다. 귀엽지요. 사족이 길었습니다. 아무튼, 그래도 가끔,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면, 내가 지금 사랑이 궁금한 게 맞나? 내가 누군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어요. 사랑과 저를 혼동한다는 건 슬픈 일이니까, 아무래도 질문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저께 벗과 한철연에서 연재한 시 중에 가장 최근의 시, 「서울극장-인디아 송-」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실 이것은 제가 퍽 공을 들이고 있는 『서울극장』 연작시 시리즈 중에 하나인데요, 서울극장은 제가 상경해서 처음으로 마음을 붙인 장소입니다. 사람이 별로 없는, 3시간이 넘는 영화를 보면 허리가 아픈, 단차가 높은 극장에서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멀리서 관찰하면 제가 겪고 있는 일들은 가짜가 되었거든요. 그 순간이 소중했어요. 그래서 누구는 영화 감독을 꿈꿀 때, 저는 ‘돈을 많이 벌어서 서울극장을 인수해야겠다’ 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적당한 돈을 모으기도 전에 문을 닫았네요. 애석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서울극장에 관련된 시들을 많이 썼습니다. 팝콘 기름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면 손이 반질거리던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언제나 로맨스 영화만 고르던 사람은 어떤 결말을 원해서 자꾸 그런 영화들만 골랐을까, 사실 그 결말에 내가 없는 걸 원했기 때문에 쉼없이 그런 영화들을 골랐던 게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 길거리에 돌아다니던 술에 취한 늙은 남자들의 얼굴은 어디서 연원했을까, 서울극장이 허물어지고 나면 내가 자주 앉던 의자는 어디에서 소각될까, 이런 질문들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면 슬퍼지니까요, 오래 슬퍼하지 않기 위해서 시를 썼습니다. 시를 쓰고 나면 둥그렇게 헐어버린 마음이 남습니다. 슬픔은 잠시 없어지고요. 저를 슬픔이라는 감정에 한해서 소강 상태로 만들어주는 건, 서울극장 다음으로는 시를 쓰는 순간이 있겠네요.

최근에 자주 꾸는 꿈이 있습니다. 제가 시에서 만들어낸 생명들이 태어나 저를 공격하는 꿈입니다. 보통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시들은 저의 편에 서고, 제가 증오하는 마음으로 쓴 시들은 저를 죽이고 잡아먹으려 들어요. 그 시들이 서로 싸우고 피가 발목까지 고일 정도로 끔찍한 전쟁에서 저는 좀 못되게도, 그걸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은 실제로 아무것도 찢지 않으니까요. 그 꿈을 꾸고 나면 항상 생각합니다. 사랑은 정말 증오보다 강한 걸까? 대부분 사랑시들이 지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허물어진 마음을 세워서 다시 시를 쓰게 하는 건 아무튼 사랑의 일이지만…….

아무튼 제가 여기저기서 허물어지는 과정과 다시 세우는 일들을 시로 썼습니다. 이런 시들을 올리며 저는 꽤 행복했던 것 같은데요, 작가와 독자의 마음은 분리되어야 하니까요. 제가 행복했다는 사실이, 당신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 거잖습니까? 그래도 즐거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는 이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다음 계절, 책이라는 물성을 가지고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당신의 얼굴을 모르지만, 당신은 나의 얼굴을 알게 될 겁니다. 저는 당신의 글을 모르지만, 당신은 제 목소리도 알게 될 겁니다. 저는 아주 멀리도 있고 바로 곁에도 있습니다. 참 멋진 일이지요. ■

 

지금까지 이유운 작가의 코너 [유운의 전개도 접기]를 애독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글들을 또 다른 곳에서 만나보길 고대합니다. 너무 멀리 있지는 말기로~   – 편집주간 –

 


지난 작가 소개 글: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