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4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1장 역사적인 그리고 지성적인 맥락

 

맥스 펜스키(Max Pensky)

하버마스의 역사적이고도 지적인 영향들

 

하버마스의 철학적 저작들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하는 것은 철학자의 작업에 대한 위의 수정된 관점을 바탕으로 삼아 이루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반세기를 거쳐 온 하버마스의 철학적 작업은 위에서 내가 논한 두 번째 유형, 즉 현실 참여적 범형의 완벽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에게 맥락 초월적 진리 혹은 주장과 규범의 보편적 정당화 가능성과 그러한 주장과 규범들이 제공되고 수용되는 사회적 세계의 맥락 내재성 간의 변증법적 관계는 사실 그가 생각하는 철학자의 임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버마스가 의식적으로 모으고 개조했던 수많은 다양한 지적 영향과 원천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리해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가 다음과 같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그는 현대에 요구되는 철학함의 적절한 역할과 범위는 철학자가 속한 시대, 지적 분야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요구에 대한 포괄적인(overarching) 전망-누군가는 이것을 형이상학적 전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으로부터 생성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몇몇 이론의 여지는 있겠지만, 하버마스가 현대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다양한 영향을 미친 철학자라는 점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이 점은 그가 저술한 철학적 저작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저작에서 활용하는 자료들이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사실에서 그러하다. 어떤이들은 그가 동원하는 자료들과 영향력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다양하다는 불평을 늘어놓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철학자가 속한 시대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철학자의 중심적 업무-철학적 활동의 부산물로서가 아니라-로 삼는 게 하버마스의 철학적 의도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광범위한 작용력은 납득할 만한 것이다.

하버마스의 전기는 독일이 0년(“Stunde null”)에 머무르던 시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시기는 1945년 종전 후 독일 문화와 사회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폐허의 상태에 있게 된 때였다. 하버마스는 1929년 국가 사회주의의 “일상”이 뿌리내린 굼머스바흐라는 작은 지방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히틀러 청소년단에 입회를 당하여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몇 달 간 잠시 방공포병대에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나던 16살 때 하버마스는 홀로코스트의 본성과 규모 그리고 그가 따르던 나치 지도 체제의 도덕적 타락을 폭로한 뉘른베르크 재판 라디오 방송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1929년이라는 출생년도는 하버마스로 하여금 전후 독일 문화와 정치에서 독특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매우 특별한 세대의 구성원이 되게끔 하였다. 한 편으로, 하버마스와 동세대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기억을 갖거나 국가 사회주의 체제가 초래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질만큼의 일을 벌이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그들은 독일 사회의 끔찍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붕괴에 대한, 총력전이라는 최후 단계에 참여했던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산산조각 난 사회를 재건하는 거대 과업을 직접 보았던 노골적이고도 개인적인 경험들을 겪을 만큼의 충분한 나이는 먹고 있었다.

이 세대에게 독일의 정치적 미래, 더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 미래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독일은 파시즘의 폐허에서 벗어나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민주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돌무더기 속에서 간직할만한 가치가 있는 독일 문화의 핵심 요소들 -정치적이고도 도덕적인 근대성의 핵심 요소들, 무엇보다도 칸트와 괴테, 쉴러와 바흐와 같은 계몽의 전통 –을 골라 내 새로운 사회 질서의 기틀로 포함시킬 수 있을까? 사회 재건과 재발명이라는 거대 과업을 스스로의 도전적 과제로 자기 의식적으로 인식했던 세대는 현대에서는 거의 찾기 어렵다. 하지만 독일은 철학적 활동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했으며, 자기네 철학 전통을 집단 정체성과 자기 이해의 주요 원천으로 받아들이던 문화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대들이 자기네 철학 유산의 집단적 재정향을 사회적 재탄생의 과업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50년대 초 마르틴 하이데거에 깊은 감화를 받은 채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철학과 대학원생이었던 하버마스는 독일 철학의 고유한 유산을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그려보는 세대적 과업이 사실상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대신에 그가 당시에 대해 매섭게 기록했듯이 전후 독일 학계의 뿌리 깊은 보수주의는 머리를 모래에 처박은 채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하고자 하는 문화를 후원하고 있었다. 이 문화는 독일이 자행했던 직전의 과거사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하기보다는 그것을 억누르고 침묵시키려 하는 전후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다. 국가 사회주의와 제휴했던 과거를 간직한 채 하버마스를 가르쳤던 몇몇 교수들을 비롯해 저명한 교수들은 과거사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폭로하지도 않았다.

독일적 재난에 응하면서 철학은 변화해야 한다는 발상은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전후 독일의 현실에서 철학은 기존에 해 왔던 대로 자기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그리고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고려대상에서 간단히 제외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실망과 좌절을 느낀 이는 하버마스가 유일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 철학은 칸트와 헤겔뿐만 아니라 (부분적이긴 하지만 확실히) 마르크스에 의해서도 만들어진 것이었다. 독일 철학의 전통은 보수학계만으로 이루어진 협량한 전통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내적 비판을 가하는 전통도 포함한다. 게다가 계몽의 유산은 철학적 통찰과 내가 앞에서 논했던 진보적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 사이의 변증법 속에 핵심을 두고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저자일 뿐만 아니라 “물음에 대한 답변: 계몽이란 무엇인가?”(1996: 11~22)라는 글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글은 공적 논증, 탐구 그리고 관용 개념-칸트 철학은 이것을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닌 인지 능력이라고 보았다-이 사회 일반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독일연방공화국 초기 하버마스 및 그와 뜻을 같이 하던 철학적 동료들이 직면했던 문제는 18세기의 지적 정치적 계몽의 전통이 유례없는 손상을 당한 사회의 요구에 어떻게 적절히 봉사할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이었다. 세속주의, 합리성, 관용, 대의적 공화정, 보편적이고도 평등한 도덕 및 법적 권리들 그리고 광범위한 사회적 포용력 등과 같은 인간적 가치들에 헌신하던 계몽주의가 어떻게 당대의 요구와 공명하면서 재전유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무척 복잡하기는 하지만 다음의 세 가지 연관된 주장들로 알맞게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계몽주의적 근대성의 가치를 만회하고 전후 세계에 적합하게 촉진시켜야 한다는 요구는 기존 철학이 담당하던 역할, 즉 선험적이고도 토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것에 특화되어 학문적 받침돌의 역할을 하던 것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그만두고, 좀 더 겸손하게, 그렇지만 좀 더 사회적으로 중대한, 세속적이고 “탈형이상학적”이며 민주적인 사회의 가치와 도전들에 특히 잘 들어맞는 역할을 담당하라고 주문한다. 둘째,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철학, 무엇보다도 독일 대학에서 발전해 왔던 편협하기로 악명높은 철학이 전통적으로 멀리하던 새로운 인접 학문들과 생산적이고도 호혜적인 대화에 실질적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하버마스는 이미 초기 저작에서부터 이런 종류의 협력 관계를 위한 주요 후보를 지목하고 있었다. 사회과학, 특히 정치적 사회학을 구성하고 있는 분야들이 그것이었다. 훗날 그는 이것을 “재구성적” 과학이라는 용어로 불렀다. 그에 따르면 재구성적 과학은 보편적이라고 추정될만한 주장을 담지한 인간 상호작용의 측면들이 무엇인지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셋째, 하버마스는 전후 독일(혹은 더 적절하기로는 유럽) 철학이 이와 병존하던 철학 전통들, 특히 철학과 민주주의 간의 생산적 관계를 가장 기본적 문제로 취급했던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의 영향에 열려있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버마스는 유럽 철학이 너무도 철저히 다루어 고갈시켜 버린 이론적 모델들-즉 철학적 분석의 “기본 단위”로서의 고독하고도 자율적인 자아 그리고 이러한 자아가 자기자신 및 외적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의식 철학적 모델-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안과 문제들을 보게 되었다.

이후부터 나는 우선 하버마스가 새롭고 겸손하며 상호작용적인 철학 모델에 어떻게 천착했는지에 대해 몇 가지 간략한 설명을 제공하겠다. 그리고 철학과 재구성적인 비판 사회 과학들 간의 열린 대화라는 하버마스의 기획에 대해 좀 더 길게 논하겠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초기 하버마스가 전후 프랑크푸르트 비판 이론 학파의 그 대표자들인 막스 호르크하이머 및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협력했다는 점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나는 주체 철학과 의식 철학 모두와 확실히 절연해야 한다는 철학적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버마스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전개했던 언어적 능력 및 의사소통 합리성에 관한 이론적 작업으로 선회할 것이다.

 

사장님 나빠요 [내가 읽는 『자본론』]

사장님 나빠요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자본」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은 ‘노동가치설’을 토대로 형성된다. ‘노동가치설’이란 경제적 가치 창조의 근원이 ‘인간노동’임을 전제하는 경제학적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그에 앞선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사유를 학술적으로 체계화해왔으며, ‘노동가치설’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등장으로 그 방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세상에 내놓은 경제학 고전서 「자본」은 자본주의 구조를 지탱하는 경제학적 메커니즘과 현상적 모습 이면의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속 (가치)착취의 원리를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분석하고 있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본」 속 노동가치설을 통해 (경제학적 이론뿐만 아니라) 자신의 학문적 사유 전반을 담아냈다. 마르크스 철학의 근간이 되는 인간애의 사유를 비롯해, 사회학자로서의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구조와 그 필연성 역시 그의 저술 「자본」 속에 녹아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치경제학 비판 서적’ 「자본」의 내용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속 계급적 대립 양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내의 계급적 모순의 필연적 양태는 익히 아는 것처럼 자본가 계급(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대립으로 구성된다. 이때 (마르크스의 사상 전반에서 악역을 도맡는) 부르주아지들이 바로 착취를 자행하는 자본의 인격적 화신이 된다.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들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이 되는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피착취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를 굉장히 거칠게 풀어내 요약한 이 같은 서술을 처음 접한 이들이라면 이처럼 파격적이고 대립적, 갈등적 분석에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테다. 먼저, 본인의 경우엔 자본가 계급이 과연 절대적 악역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또, 경제적 가치가 오로지 노동자의 손에서만 탄생하는지 되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도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자본가에 대한 맹목적 적개심에 의문을 품을 수 있으며, 자본가 역시도 가치를 만들어 내지 않느냐고 따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필자는 오늘 이러한 의구심과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볼 작정이다.

필자의 절친한 친구 김 모 군은 현재 술집에서 야간 알바를 하고 있다. 김군은 종종 본인에게 자신이 알바를 하는 도중에 겪은 에피소드를 들려주곤 한다. 그 여러 에피소드에 압도적인 출연 비율을 보이는 이가 있고, 그는 바로 김 군의 고용주인 술집 사장님이다. 친구 김 군은 사장님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종종 전하곤 하는데, 보통은 그 맥락이 “사장님 나빠요”하는 식의 뉘앙스인 경향이 많다. 사장님은 은퇴 후 현재의 매장을 오픈하셨으며, 편의점 점장도 맡으시는 등 다방면의 사업에 뛰어든 중년의 남성으로 보인다. 인간적으로는 참 좋은 분이라는 친구의 담담한 말투 뒤에는 종종 푸념이 따라오곤 한다. 사장님이 너무나도 예민하고 엄격하셔서 잔소리와 업무 간섭이 심하시다는 것이다. 친구는 일하는 건 알바생인데 사장님은 일도 안하면서 너무한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또 사실 가게 자체가 사장님의 소유에 있으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라며, 사장님이 입버릇처럼 하신다는 말씀을 내게 들려준다. “너네 테이블 닦는 것보다, 관리하고 총괄 감독하는 책임자의 업무가 훨씬 힘든 거야, 알어? 건너편 고기집 사장도 주말 지나면 몸져눕고, 회사들도 사장이 애 안 쓰면 안 굴러가. 이재용이 봐 얼마나 고생하는데” 필자는 이 말을 듣자 확인해보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사장님의 말대로 자본의 인격적 화신인 세계의 사장님들이 고된 노동에 내몰린 상황인 것인지, 또 이를 정말로 행하고 계시는지 실로 궁금해진 것이다.

사회적으로 유용성을 띠는 노동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가정을 두었을 때, 사장님들의 관리 감독의 업무 또한 가치를 창조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노동 지출의 형태는 다소 독특하지만, 어찌되었든 사회적 유용노동을 지출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 관리와 감독의 업무를 담당하는 정서적 노동이 단순 육체노동보다 버거운 것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나 기타의 노동가치설에서도 복잡한 정신적 노동으로 창조된 가치에 [질적으로 상이한 여타 노동들과의 (노동)강도 비교를 통한] 양적 가감을 부여하는 등 정신적 노동 강도에 대한 고려 역시 빼놓지 않는다. 더욱이 대규모 자본을 굴리시는 사장님들이 아닌 이상 (소규모 자영업 사업장을 운영하는 사장님들은) 실제로 노동 현장에 참여하는 정도가 더욱 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 군의 고용주가 습관적으로 내뱉는 발언이 크게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허나, 필자가 궁금해 하는 문제는, 해당 발언의 절대적 옳고 그름이나 적절성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의 논의에서 좀 더 명확히 밝히고픈 부분은 과연 우리 사회에서 소위 자본가로 칭해지는 이들이 관리, 감독 등의 업무를 통해 노동자들의 노동에 버금가는 근로를 실제로 행하고 있는가 하는 의심과 맞닿아있다. 김 군의 고용주뿐만 아니라, 모든 고용주들이 그토록 고된 관리, 감독의 노동을 도맡고 있음을 일반화 할 수 있는지에 관해 의문이 생긴다. 다시 말해, 자본가들 역시도 우리 사회내의 경제적-가치를 직접 창조해내고 있는지 거시적 경제학 담론의 차원에서 함께 면밀히 관찰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유의하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 정도가 있다. 첫 번째로, 우리는 관리, 감독 등의 정서적 노동이 육체적 노동의 강도보다 더욱 고된 것인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현실 속, 질적으로 상이한 형태의 노동들 사이의 강도 비교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정서적 차원의 관리, 감독의 노동이 여타의 육체적 노동들 보다 더욱 힘들고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그보다 궁금한 것은, 세계 곳곳의 사장님과 회장님들께서 그러한 노동들을 실제로 수행하고 계시는지에 관한 문제다.

매우 중요한 두 번째 유의점은, 우리의 논의가 미시적 사례들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특정한 사례에서 특정한 자본가는 그 어떤 노동자보다 많은 노동을 수행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고찰에선 그것이 사회의 평균적 수준으로 일반화 될 수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아야만 한다. “자본가도 고된 노동을 수행하는가” 하는 식의 의문은 파편적인 낱개 사례들의 종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가 품은 의문은 “우리 사회 내에서 자본가 계급 또한 노동자계급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통해) 가치를 창조하고 있는가”라는 식으로 전개될 것이며, 그 의문의 차원은 거시적 영역으로 넓혀져야 한다.

필자가 진지하게 탐구하고자하는 모든 의문은, 자본가, 즉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배제하고는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자본가로 규정하는 이들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규정되는 지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한다. 그저 돈이 많다고 자본가인가? 개인 사업장을 차리면 모두 자본가인가? 노동자를 탄압하는 사장님은 모두 부르주아지인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명확히 답할 수 있어야할 것이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생산수단! 다름 아닌 ‘생산수단’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모든 의문들에 대한 구체적 해명을 내놓을 수 있으리라.

‘생산수단’이란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합하여 통칭하는 개념이다. 노동자의 노동과정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요소가 요구되는데, 첫 번째가 인간의 합목적적 노동 활동이요, 두 번째와 세 번째가 각각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다. 인간노동은 자연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합목적적 활동(노동)을 실현해내게 되는데, 이때 인간노동의 대상이 되는 천연적 존재들이 노동대상이다. 또 인간노동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 중 이미 인간노동이 투여되어있는 존재들은 원료로 칭해지는데, 이들 또한 노동대상이 된다.

한편 노동수단은 노동자가 자신의 활동(노동)을 행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노동대상 사이에 끼워 넣어 매개체로 사용하는 도구적 존재를 의미한다. 예컨대, 김 모군 이 술집 테이블을 닦기 위해 사용한 행주부터 시작하여, 바구니, 항아리, 통, 각종 기계, 관, 돌도끼, 칼, 망치, 혹은 토지 그 자체 등 인간노동의 실현 과정에서 도구로 작용하는 (상이한 발전 정도의) 모든 존재들은 노동수단이 된다. 칼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 「자본」 Ⅰ 상 제3편 제7장에서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 ‘생산수단’으로 나타남을 밝혔다. 즉,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 생산수단으로 되는 셈이다.

‘생산수단’ 개념은 어떻게 자본가 계급에 대한 여러 의문들을 해소해줄 수 있을까? 우선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구조를 면밀히 살펴보면 이 ‘생산수단’ 개념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이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나뉘게 됨을 주장했는데, 이때 이들을 계급적으로 구분하는 사회적 기제로서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가 그 기준이 된다. 다시 말해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이며, 반대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무산자’ 계급은 노동자 계급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속 자본가 계급은 (경제적으로 초상위계층에 속한) 극소수의 부르주아지들로 이루어져있으며, 이들은 필연적으로 상당한 양의 물질적 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을 규정하는 핵심적 기준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다. 대부분의 자본가들이 많은 돈(자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돈이 많다고해서 전부 다 자본가 계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자본가 계급은 자신이 직접 가치를 창조하는 행위에 착수하지 않으며, 자신이 소유한 생산수단과 자신이 구매한 (노동자들의) 노동력의 결합을 도모한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만남을 통한 물질대사의 작용 결과로 자본가는 잉여가치를 손에 쥐게 된다. 이 잉여가치들의 축적을 통해 자본가들은 가만히 앉은 채로 자신의 자본을 눈덩이처럼 불린다. 반면 노동자 계급은 무산계급으로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피지배 (피억압) 계급이자, 대다수의 대중들로 이뤄진 민중의 계급이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유일한 상품인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노동 계급의 인민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 역시, 본디 로마제국 시대에 군에 입대시킬 자신들의 아들(proles – 라틴어) 외엔 어떠한 부도 갖지 못한 무산계급을 조롱하는 의미를 지닌 단어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개인 사업장을 차리고 독자적 사업을 운영하는 모든 사장님들은 전부 다 자본가 계급에 속하는가? 자신의 사업장을 직접 운영하는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진) 사장님들 중에는 재벌가 대기업 회장님들도 있지만, 동네에서 자그마한 식당을 직접 운영하는 자영업자분들도 있다. 우리는 이들을 분리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기업의 회장님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생산수단을 토대로 자신의 자본을 축적 내지는 확장시켜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소규모 자본(소규모의 생산수단)을 바탕으로 작은 사업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은 대기업 회장님들과 유사한 형태의 방법으로 부를 쌓고는 있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직접 가치 창조의 현장에 뛰어든다.

자영업자들이 직접 노동에 참여한다고 해서 해당 작업장의 피고용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착취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고용주(자본가)가 노동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여 (피고용 노동자들과 함께) 인간노동을 투여함으로써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우리가 기존에 상정한 자본가 계급의 근본적 특질과는 동떨어져있는 현실이다. 또한 생산수단의 주인인 고용주가 노동계급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과정에 직접 투여한다는 점에서 자본가 계급 일반의 인격적 전형인 대기업 회장님들과의 괴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노동력을 구매하고 이를 자신의 생산수단과 결합시킴으로써 가치를 창출해낸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자본가들과 유사하지만, 자신들도 그 노동과정에 직접 참여한다는 점, 운영하는 자본의 규모가 비교적 작다는 점에서 기존의 일반적 자본가들과는 구별된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분석과 이론을 사상적으로 구체화해나가던 시기 전후에도 이러한 소(小)부르주아지들은 존재했다. 이에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러한 독특한 계급적 집단을 ‘쁘띠 부르주아’로 칭했다. 이들은 노동자 계급과는 분명하게 배치되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만 대자본가들을 비롯한 [자본가 일반]과도 계급적 이해의 불일치를 보이게 된다. 생산구조의 기본적 구성 원리상 쁘띠 부르주아 역시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대자본가들에 의한 억압에 놓인다. 예컨대, 소규모 자영업자(쁘띠 부르주아)들은 독점적 대자본(대기업)에 의해 시장에서 배제되거나 흡수되며, 소규모의 중소자본들이 독립적으로 살아남는 경우에도 하청제도나 대기업의 원료 독점, 불합리한 세금/금리 부담 등을 말미암아 이윤의 일정부분을 대기업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선 노동자 계급이 쁘띠 부르주아 계급과 연대해야함을 주장하는 견해가 등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사회가 불안정하고 시장이 침체된 요즘 같은 시기에 발생하는 자본가 계급의 경제적 피해 역시 대부분 쁘띠 부르주아지들이 짊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자영업자들이 더욱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찾자면, 우선 MP3 플레이어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의 일을 들 수 있다.

세계최초의 MP3 MPman ‘F10’ 사진출처: https://it.donga.com/3476/

대한민국의 중소기업 ‘디지털 캐스트’는 1996년 MP3를 처음 개발해낸 심영철씨와 황정하 사장을 필두로 MP3플레이어의 세계 최초 발명과 특허 등록까지 완료했었다. 이때 삼성 계열사인 새한미디어에서 생산과 마케팅을 도와주겠다며 접근해 특허권의 공동 소유를 요구했고, 국제적 마케팅과 대량 생산을 위해 디지털 캐스트측은 이를 수용했었다. 하지만 새한미디어는 특허권이 공동 소유가 되자마자 디지털캐스트를 배신하고 MP3 플레이어를 자체 생산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캐스트는 직원들의 급여조차 주지 못하는 상황까지 무너졌고, 결국 황정하 사장은 특허권을 미국 회사인 다이아몬드사에 매각하여, 미국인들이 세계 최초라고 알고 있는 다이아몬드 사의 MP3플레이어가 탄생하게 된다. 새한미디어 역시 특허무효소송을 걸었지만 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채 결국 남은 특허권 지분까지도 미국의 아이리버사로 매각된다. 결국 MP3플레이어의 특허권은 전부 미국의 대기업으로 흡수된 셈이다. 이뿐만 아니라 납품가 후려치기, 계약금 미지급, 결제 미루기 등으로 유망 중소기업이었던 정산산업을 부도로 이끈 현대자동차(현대모비스)의 사례나, 28년간 성실히 냉장고 부품을 생산해 납품한 하청업체의 중국 투자를 강요하였다 발주물량을 줄여 해당 업체를 위기로 내몰고 이후 헐값에 인수를 시도한 삼성전자의 사례 또한 별반 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횡포의 유형은 다르지만, LG생명과학은 중소기업 비타민하우스의 유망한 인재들을 단기간에 대거 빼오는 식으로, 현대중공업은 중소기업 테크마레에서 개발해 특허 낸 선박 구성품을 무단으로 복제해 사용하는 식으로 중소기업을 짓밟았으며,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 대기업과 대자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소위 갑질을 일삼고 있다.

이처럼 대기업이나 대자본들은 쁘띠 부르주아 계급이 일차적으로 타격을 흡수함에 따라 위기에도 덜 흔들리게 되고, 기반이 불안정한 소규모 자영업자(쁘띠 부르주아)들은 사업 전반에 걸쳐 고스란히 그 심각한 위기를 직면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쁘띠 부르주아들은 그 스스로 부르주아지적 사고와 자본가적 계급의식을 지니고 있다. 쁘띠 부르주아지들 또한 생산의 기본적 메커니즘 상 노동자 계급과 근본적으로 갈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이들은 대기업과 대자본으로 대표되는 자본가 계급 일반의 이해관계와도 일정부분 대립함으로써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특수한 중간 계급으로 취급된다. 초기의 의문처럼 우리 주위의 사장님들 역시 가치를 창조하는지, 또 현대 사회에서 자본가의 감독 역할과 관리 업무를 노동의 일환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분석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와 쁘띠 부르주아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기존 관념 속 부르주아 계급(대기업을 바탕으로 한 자본가 계급 일반)과 현대 사회에서 그 출현이 더욱 두드러진 쁘띠 부르주아 계급을 분리해서 사유할 수 있어야만 2020년 현재의 자본가 계급의 역할을 ‘노동’ 혹은 ‘가치 창조’의 관점에서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단계가 격상되자 당분간은 가게 형편이 어려우니 알바 출근하지 말라는 고기집 사장님과 스마트폰 및 가전제품을 생산해내는 모 회사 회장님의 이해관계는 분명히 다를 테니 말이다.

자본가 계급 일반과 쁘띠 부르주아 계급의 미묘한 차이를 포착했으니, 이제 이 구분을 우리의 의문에도 적용해보자. 이전에는 대충 얼버무려 점철되어있던 부르주아지와 쁘띠-부르주아지 사이의 간극을 비로소 파악해낸 지금, 다시 “자본가 계급도 노동으로 가치를 창조하는가”하는 질문을 마주해보겠다. 이제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부르주아지의 경우와 쁘띠-부르주아지의 경우를 나누어 설명하는 편이 합당할 것이다. 먼저 쁘띠 부르주아 계급의 경우엔 쁘띠 부르주아지가 직접 노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의 특수한 사업장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고용주 쁘띠 부르주아지는 저마다 다른 강도로 노동과정에 직접 개입한다. 우리 주위의 평범한 자영업자들 혹은 중소자본가들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 경우에 쁘띠 부르주아지들은 자신의 사업장에서 펼쳐지는 가치 창조의 과정에 직접적으로 가담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쁘띠 부르주아지들은 가치를 일정 부분 직접 창조해낸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생산수단을 소유했으며 이를 활용하여 잉여가치의 창출을 도모하기에 자본가 계급으로 분류되는 동시에, 노동자 계급과 마찬가지로 직접 노동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자본가 계급 일반]과는 차별성을 띤다. 한마디로 현대의 일반적인 쁘띠 부르주아는 ‘인간노동일반’의 지출을 통해 직접 가치를 만들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경우에 따라 중소기업의 사장님, 식당 주인, 식료품 도매업체 대표 혹은 (김 모 군의 사장님처럼) 술집 주인 등을 맡고 있으며 서로 다른 위치에서 상이한 강도와 다양한 질적 형태로 구성된 각자의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자본가 계급 일반의 전형인 대자본가들, 대기업을 생산수단으로 소유한 사장님과 회장님들을 어떠실까. 이들은 기존의 일반적 관념 속 자본가 계급의 보편적 상 그 자체이자 자본의 인격적 화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자본가들과 대기업을 소유한 자본가들은 직접적으로 노동과정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매우 자명하고도 당연한 사실이다. 삼X전자의 이모 회장님께서 전자 제품 생산과정에 직접적으로 가담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어딘가 어색하지 않은가? 지시, 지휘의 업무, 감독의 업무, 관리의 업무 등 그 어떤 형태의 노동도 대자본가들의 몫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지닌 자본으로 지시, 지휘, 감독, 관리 따위의 업무를 대신 도맡을 노동력을 구매한다. 단순 노동자들을 고용함과 동시에 관리나 감시의 역할을 수행할 노동자들을 별도로 고용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자본가들과 같은 편으로 보이는 감시, 감독의 노동자들, 이를테면 대기업 임원진 및 전문 경영인 등은 특수한 형태의 노동을 수행할 뿐 똑같은 노동자다. 물론 이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는 분명히 단순 노동자들과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의 강도나 임금의 수준, 착취의 정도 등 여러 부분에서 단순한 형태의 노동자들보다는 양질의 대우를 받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이들 역시도 대자본가 회장님들의 감시, 감독을 대신 행하기 위해 고용된 노동자들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쁘띠 부르주아로 분류되는 소자본가들은 자신의 노동으로 가치를 만들기도 한다. 김 군의 사장님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 일반을 이루는 대자본가들과 대기업 회장님들은 자신의 생산수단과 (노동자의) 노동력 사이의 물질대사를 멀리서 지켜볼 뿐 이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논의의 결론을 맺기 전에, 처음으로 돌아가 김 군의 일터에 계시는 사장님의 말씀을 다시 곱씹어보겠다. 사장님들이 행하는 노동의 버거움을 시사했던 김 군의 고용주, 사장님의 말씀은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한 동시에 그렇지 않은 부분도 포함하고 있다. 일단 (힘듦의 정도는 객관화가 어렵지만) 사장님들이 실제로 노동하고 계신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나 김 군의 고용주와 유사한 형태의 사업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및 소자본가(쁘띠 부르주아)들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했다. 하지만 이처럼 사장이 애를 쓰지 않고는 그 어느 사업장의 (가치)생산과정도 원활히 굴러갈 수 없다는 말씀은 현대 사회의 모든 사장님들께 일반화시키기에 부적절했다.

앞선 논의에서 우리가 고찰했듯, 부르주아 계급은 일반적 양태와 (소자본가들로 구성된) 쁘띠 부르주아로 나뉘었다. 김 군의 사장님과 이해관계가 유사한 쁘띠 부르주아지 집단 내에서는 김 군의 사장님 말씀이 일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분 또한 자신의 경험적 한계에 근거해 이러한 발언을 하셨으리라. 하지만 이모 회장과 같은 대기업의 대자본가들에게는 이 같은 주장이 절대로 적용될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은 노동 일선에 결코 참여하지 않으며, 나아가 자본가 계급 일반이 노동 과정에 참여한다는 발상은 실제적 양상과는 괴리가 컸다. 자본가 계급 일반의 부르주아지들은 절대로 직접 노동하지 않으며, 그들의 관리, 감독이 없어도 분명히 누군가(노동자) 이를 대신함으로써 생산과정을 원활히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자본가의 노동으로 사업장이 돌아감을 시사했던 김 군 고용주의 발언이 (쁘띠 부르주아의 경우와는) 반대로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김 군의 사장님은 쁘띠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가 계급 일반간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셨고, 이 때문에 무언가 오해를 하신 게 아닐까 싶다. 쁘띠 부르주아는 분명히 직접 가치를 만들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 내의 자본가들 모두가 가치 창조 과정(=노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기업의 운영구조를 대중이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따라서 필자가 알지 못하는 과정에 대기업 대자본가들의 노동이 투여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은폐된 과정이 존재한다한들, 대자본가들의 노동은 쁘띠 부르주아지들의 직접적 노동과는 질적으로 상이한 형태일 것이다. 더욱이 강도의 측면에서도 결코 비교할만한 수준이 아니리라 확신한다. 결론을 짓자면, 우리 사회 내 많은 사장님들이 직접 노동을 하고 계신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사회 모든 자본가(혹은 고용주, 혹은 사장님)들의 표준적인 계급적 표본이 아니었으며, 그저 쁘띠 부르주아였을 뿐이다. 자본가 계급 일반의 경우엔 직접 노동에 참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실질적 노동과정에 대기업 사장님들이 개입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 같은 결론에 이르기 위한 사유의 과정 속에 우린 부르주아 계급 형성의 기저에 깔려있던 ‘생산수단’의 개념을 포착해냈고, 이를 바탕으로 쁘띠 부르주아와 부르주아 일반을 분리해냈다. 부르주아와 쁘띠 부르주아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사회적 경향성 속에 우리는 오늘의 논의를 통해 좀 더 세밀한 관찰을 이어갈 수 있었다. 더불어 노동과정 전반을 자본가의 관점에서 사유해봄으로써, 우리의 근로 과정에 사장님들이 어떻게 개입하고 계셨는지 심도 있게 분석해볼 수도 있었다.

일상적 사례를 통한 자본주의적 구조&생산관계의 명료화 과정을 가능케 해주었던 김 군을 떠올려본다. 글을 마무리하는 대로 김 군에게 연락을 취해 필자에게 들려준 에피소드를 글에 담았음을 밝히고 이를 게재해도 좋을지 물어볼 참이다. 소재를 제공해주었음에 감사인사를 전함과 동시에 우스운 질문도 하나 덧붙여야겠다. “ 너네 사장님보다 더 나쁜 사장님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을래?”

스물두 번째 시간, 충고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두 번째 시간, 충고

 

마리횬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어느덧 9월 중순이 되었고, 하늘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요즘이죠. 가을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시를 통해 듣는 충고의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정호승 시인의 시를 읽고 부러진 나뭇가지를 통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었는데요, 오늘은 길가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들고 있는 박노해 시인을 만나봅니다.

 

 

도토리 두 알

                             박노해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박노해 시인의 시 <도토리 두 알> 들어보았습니다. 뭔가 뒤에 더 할 말이 있는데 여운을 남기며 시가 끝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처럼 내가 겪었던 작은 사건을 가지고 그 사건 자체에서 끝나지 않고 그것을 통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들이 참 좋습니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보고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면서도 부럽죠. 오늘 주제를 ‘충고’라 하고 이 시를 들려 드렸는데, 여러분은 이 시에서 어떤 충고를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궁금하네요.

시 텍스트를 보면, 시의 시행들이 이어지다가 중간에 한 줄이 툭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라는 시행이 툭 놓이죠. 그러면 그 순간, 시를 읽는 템포가 살짝 늦춰집니다. 그리고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라는 시행 후에 또 다시 시행이 구분되면서, 다시 한 번 약간의 공백이 생기게 되고 그 틈에 독자로 하여금 도토리의 모양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줍니다. 혹은 도토리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약간 벌어주는 효과가 있죠.

요즘 공원이나 산길을 (마스크를 쓰고) 산책하면서 보니, 도토리가 적지 않게 떨어지기 시작하더라구요. 그 모양을 보면 각기 다양합니다. 시인이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는 도토리 두 알처럼 말입니다. 시인은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 한 알, 그리고 크고 윤나는 도토리 한 알을 주워 들면서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크고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중요한가

 

‘도토리 키 재기’ 라는 속담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누가 더 크고 더 빛이 나는지를 아무리 따지고 아무리 경쟁을 해도 사실 모두 작은 도토리일 뿐이죠. 누가 더 잘났는지 경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시인이 던지는 질문이 의미심장합니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라는 물음에는 우리도 그러한 존재라는 것, 우리 인간이야말로 사실은 필사적으로 경쟁하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요?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느냐”라고 물어보면서,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도토리는 다람쥐와 같은 동물들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먹는 맛있는 도토리묵의 재료로도 사용되지만, 그런 것들은 동물이나 인간에게나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정작 도토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라나서 거대한 도토리나무가 되는 것, 이 시의 표현을 빌리면 ‘참나무’가 되는 걸 겁니다. 그것이 도토리의 사명이겠죠. (‘사명’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요?)

참나무가 되려면 도토리는 땅에 묻혀서 썩어져야 합니다. 썩어야 뿌리가 나고, 뿌리를 내리고 자라야 떡잎을 낼 수 있어요. 그런데 땅에 묻혀서 썩어질 도토리에게 ‘크기’가 중요할까요? 땅에 묻혀서 썩어져서 뿌리를 내리는데 도토리의 ‘윤기’가 중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참나무가 되는 과정에서 크기나 윤기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보기에 크기가 작고 윤기가 없더라도, 결국은 도토리보다 몇 백 배는 더 큰 나무가 될 테니, 지금 당장의 도토리의 크기나 윤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죠. 시인은 도토리에게 던진 물음을 우리에게도 던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정 무엇이 중요한가?

 

이 물음이 우리에게도 동일하다면, ‘너는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라고 묻는 물음에 답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지금 당장의 겉모습이나 내가 가진 조건을 내세우기보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내 삶에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사명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그것에 합당한 ‘훨씬 더 중요한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는 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차례입니다.

시인은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던져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도토리의 심정을 표현하면서 ‘울지 마라’라고 하죠. 어쩌면 ‘먼 곳으로’ ‘빈숲으로’ ‘홀로’ 던져지는 도토리의 심정은 참담하고 속상하고 슬플지도 모릅니다.

비옥한 땅에서 참나무가 되라고 멀리 던져준 것인데, 지금 당장은 홀로 빈숲에 떨어진 상황이니, 게다가 내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던져졌다고 생각하면 어쩌면 정말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도토리는 멀리 빈숲으로 던져졌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 다니는 청설모나 다른 짐승들에게 먹히지 않고 결국 참나무로 자라게 될 겁니다. 지금 당장은 깨닫지 못하지만, 외로움과 힘듦의 시기를 견디면 뿌리가 내려오고 싹이 나고, 점점 나무로 자라게 될 겁니다. 시인은 그걸 보고 있죠.

혹시 여러분 중에, ‘아… 나는 너무 작고 보잘것없는 것 아닐까..’ 라고 스스로를 작게 여기면서 참나무가 될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혹은 다른 사람들이 내놓은 기준과 다수가 말하는 가치관에 자신을 비교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면, 이 시가 주는 충고를 마음에 새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정 무엇이 중요한가… 도토리에게 중요한 것이 결국 ‘얼마나 큰가’ 하는 ‘크기’나 ‘얼마나 반짝이느냐’ 하는 ‘윤기’가 아니라, 결국 ‘참나무가 되는 것’이라면, 지금 나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나는 그 중요한 것을 따라 살고 있는가 한 번 짚어 보고 돌이켜 봐야 하겠죠.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샘 옥(Sam Ock)의 <Meet me>라는 곡을 가져왔습니다.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나는 한 명의 어린 아이에 불과하지, 몇 백만 명의 어린 아이 중 그저 한 명일 뿐. 내가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무리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그 노래가 높은 곳의 당신에게 들릴 수나 있을까?”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멀리 던져진 작은 도토리와 같은 마음의 가사이죠. 하지만 이 노래는 ‘네가 굳이 높은 곳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괜찮아. 비록 여전히 어둡고 낮은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 너의 노래를 듣는 이가 있어. 그리고 너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 할거야’라고 이어집니다. 숲 속에 던져진 작은 도토리 같은 시기를 겪고 계신 분들, 참나무가 될 인내의 시기를 겪고 계신 분들께 이 노래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져와 보았습니다.

오늘 시가 필요한 시간은 여기까지입니다. 가을의 청명한 하늘을 마음껏 즐기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며, 시가 필요한 시간 이만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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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옥(Sam Ock) – meet me 주소 – https://youtu.be/Rii2mrgIn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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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3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주제의 개관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이상에서 서술한 관심사와 강조점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의 이론 작업에서의 체계성과 일관성이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사실이다. 어떤 주제들은 하버마스의 저작을 통해 울려 퍼지게 되었고 연이어 이 책을 통해서도 되풀이해 이야기되고 있다. 그가 공들여 발전시킨 많은 주제들은 결국 첫 번째 주요 저작인 『공영역의 구조변동』에 이미 담겨있던 것이다. 이 주제들 중 으뜸가는 것은 공영역이라는 관심사다. 이 주제는 하버마스로 하여금 자기 사상의 주요 특징인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을 강조하도록 몰고 갔다. 사람들이 사회적 행위자인 것은 그들이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규범들이 존재하고 그것이 근거를 통해 뒷받침될 수 있다면, 사람들이 준수하는 규범은 규범적 구속력을 지닌다. 하지만 [규범적 구속력을 지닐 수 있는 규범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지에 관한] 그러한 논의가 발생할 수 있는 건강한 공영역은 다른 사회 구조적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이미 제시된 것이지만,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인간적 행위의 본성은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며, 그러한 행위를 만들어 내어 참여하도록 하는 사회적 구조들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하버마스의 사상에 있어서 주요한 특징이지만 이후의 저작에 대한 비평에서 자주 간과되거나 망각되는 사항이다. 구조변동이라는 개념은 『의사소통행위론』에서 다루는 근대성 및 합리화에 대한 하버마스적 이해 방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지구화-하버마스는 이것을 근대화의 한 과정으로 여기고 있다-에 대한 그의 최근 저작에서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하버마스의 중심 주제는 칸트적 프래그머티즘이다. 그의 기획은 칸트, 다윈 그리고 마르크스의 화해로 묘사될 수 있다(TJ: 9를 참고할 것). 그의 담론 윤리학, 범세계주의 그리고 의사소통적 이성 개념은 몹시 분명하게도 철저히 칸트적이다. 그는 진리나 도덕성에 관한 상대주의적 입장에 굴복하려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에도 무릎 꿇지 않으려고 한다. 그에게 철학이란 규범적 기획(enterprise)이다. 결국 비판이론의 이상은 시대에 대한 비판적 진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상황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규범적 기준이 눈에 잡히도록 진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근대성에 관한 규범적 자기 이해의 탈근대적 ‘극복’”(PNC: 130)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강한”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자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 대신에 그는 『진리와 정당화』와 『자연주의와 종교 사이』에서 명확히 설명하고 있듯이 “부드러운” 혹은 “약한” 자연주의를 옹호한다. 그는 무릇 보편주의적이고 규범적인 이성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맥락초월적이고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주장들을 내세워야 하며, 그러한 주장들이 합의를 지향하는 가운데 [보편규범적] 이성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같은 이유로 그의 칸트주의는 고전 프래그머티즘에 영향을 받으면서 “탈초월화(detranscendentalized)”되었다. 예를 들어 조화로운 세계에 관한 칸트의 “범세계주의적 이상”은 객관 세계에 관한 프래그머티즘적 가정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실천이성의 자명한 전제로서의 “자유의 이념”은 책임 능력이 있는 행위자들의 합리성이라는 프래그머티즘적 가정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리고 “관념의 역량”으로서의 이성은 언어적으로 구체화되고 역사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 담론적 이성으로 대체되었다(TJ: 87). 다윈, 마르크스 그리고 퍼스를 따라서, 하버마스는 우리의 관습(practices)이 진화하며 역사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오늘의 우리를 존재하게 한 진화의 역사-생물학적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진화 모두의 의미에서의-를 핵심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하버마스의 원숙한 개념 틀의 토대는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모여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대부분의 글들은 『의사소통행위이론』과 그 이후의 저작을 다루고 있다. 1장에서 맥스 펜스키(Max Pensky)는 하버마스의 저작을 사회 역사적 맥락 속에,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과 연관된 사회 역사적 맥락 속에 자리하게 함으로써 하버마스에 관한 좀 더 상세한 지적 생애를 제공하고 있다. 2장~5장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합리성 개념에 관련된 쟁점들을 다루면서 의사소통행위 이론의 기본 개념들에 관한 윤곽을 그려내고 있다. 2장에서 멜리사 예이츠(Melissa Yates)는 하버마스의 형이상학 비판과 사회과학에 대한 평가를 설명하면서 하버마스의 “부드러운” 자연주의와 약한 혹은 “유사” 초월주의에 관하여 상술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하버마스의 합리적 재구성과 탈형이상학적 사유라는 용어에 내포된 것에 관한 방법론적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예이츠가 해명한 것처럼, 형식 화용론은 탈초월화 된 이성 개념에 있어 핵심적인 것이다. 나는 3장에서 이에 관해 다룬다. 3장은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행위자들의 상호행위 과정 속에서 가능해야만 하는 필요조건에 대해 뚜렷한 설명을 제공한다. 하버마스의 표식인 의사소통 행위 개념은 상호 이해 지향적인 사회적 행위자들의 언어적으로 매개된 상호행위를 주목하도록 하고 있다. 타당성 및 상호주체성이라는 개념들은 그것의 설명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하버마스는 서로 다른 이들의 발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발언들이 [입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수용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말할 때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으로 제기한 주장들이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는 근거들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합리성은 이렇게 언어적 의사소통 속에서 구체화 된다. 3장에서는 또한 하버마스의 사유가 “대륙의” 해석학적 언어철학과 영미권에서 이론화된 “분석적” 언어철학의 경계선을 어떻게 넘어서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하버마스 사회이론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의사소통행위와 전략적 행위 간의 구분은 3장에서 소개되고 있으며, 4장에서 다시 조 히스(Joe Heath)가 이 문제를 다루게 된다. 물론 의사소통행위는 행위 조정의 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는 [의사소통행위에 의해 행위가 조정되는 생활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전략적 행위에 의해 행위가 조정되는] 체계적 구조들에 의해서도 조직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측면을 발전시키기 위해 탈코트 파슨스의 기능주의 이론을 끌어와 베버와 뒤르켐의 고전적 사회이론들을 알맞게 수정한다. 히스는 하버마스적 기능주의에 존재하는 장점과 한계에 대해 개략적으로 다루면서 체계와 생활세계의 구분을 설명한다. 기능주의적 사회이론들에 대한 반대 견해는 이 이론들이 행위자 및 개인적 자율성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함으로써 너른 지지를 받고 있다. 하버마스적 2단계 사회 모델의 목표 중 하나는 사실 기능적으로 조직된 사회 구조들이라는 배경에 맞서 어떻게 하면 자율적 행위자의 개념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조엘 앤더슨(Joel Anderson)은 5장에서 자율성, 정체성 그리고 자아에 관한 상호주관적 개념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책임능력을 지닌 행위자와 진정성을 지닌 자아정체성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도덕적, 개인적 자율성 역시 구분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주의적 설명에 따르면, 주체들인 우리는 사회문화적, 역사적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 자율성은 따라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라면서 만들어지고 성숙하게 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성숙한 주체들은 이러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등장하는 것인데, 그러한 주체가 되는 것은 담론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해 진다.

3장에서는 의사소통행위의 가능성 조건들에 대해 매우 기본적인 개관을 제공한다. 다양한 담론 유형들은 저마다 고유한 가능성 조건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다음 장에서는 하버마스의 도덕담론, 민주주의 담론, 법담론에 대해 다룬다. 이 세 가지 담론들은 “[논의되고 있는 규범에 의해] 영향 받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합리적 담론들의 참여자로서 동의할 수 있을 규범만이 타당한 규범”이라고 명문화 된 “담론 원칙”(BFN: 107; 이 책의 6장 p. 120를 볼 것)을 적용한 것이거나,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용”(BFN: 103)한 것이다. 내가 이미 지적했듯이, 하버마스는 초월적 진리나 도덕성과 같은 생각을 거부한다. 그는 도덕적으로 옳거나(right) 정치적으로 온당하거나(correct) 법적으로 정당한(legitimate) 것은 담론적으로, 말하자면 합리적 논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지지하고 있다. 윌리엄 레그(William Rehg)는 6장에서 하버마스의 도덕이론인 “담론 윤리학”에 대해 설명한다. 하버마스는 도덕적 주장들은 보편적이면서 상호주관적인 타당성을 담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도덕적 정당화를 수행하는 칸트적 절차주의 모델을 옹호한다. 규범이나 도덕적 규칙은 “그것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규범들의 타당성에 관한 담론 [과정]은 그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이해관계와 가치들을 불편부당한 관점에서 고려함으로써 수행되는 것이다. 레그는 도덕성과 인륜성이 어떻게 구분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하버마스는 인륜성을 좋은 삶과 행복이라는 개념과 관계된 것이라고 규정한다. 특히 현대 다원주의 사회에서 사실 우리는 좋은 삶과 행복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이 보장되기를 기대하고 [이러한 관점들 간의] 합당한 불일치를 관용한다. 또한 동시에 도덕적 영역에 있어서는 보편적 합의를 목표로 삼기도 한다. 7장에서는 케빈 올슨(Kevin Olson)이 동일한 절차주의적 개념들을 사용하여 하버마스의 토의 민주주의론의 개요를 설명한다. 보편화 원칙에 의해 규제되는 도덕성과 달리, 정치는 정당한 입법 원칙을 세우는 데에 봉사하는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규제된다(혹은 규제되어야 한다). 도덕담론은 규범과 가치를 지향하면서 모든 인격들(persons)의 합리적 합의를 목표로 삼는다. 반면에 정치담론은 법의 정당성을 지향하면서 모든 시민들이 “법적으로 구성된” 정치적 공동체에 관해 합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원칙은 “[정치적] 자기 결정의 실천에 연관된 수행적 의미”(BFN: 110)를 담아내고 있다고 하겠다. 올슨은 모든 시민들의 동등한 정치적 참여를 보장해주는 권리들[혹은 법]의 체계를 통해 어떻게 합리적이고도 정치적인 의지 형성이 제도화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는 5장에 소개되었던 정치적 자율성 개념과 평등, 호혜성 그리고 포용의 이상이 어떻게 권리로 제도화되는지에 관해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 정당성은 궁극적으로 의사소통적 권력으로부터 도출되며, 결국 그것은 공적 담론을 통해 발생한다. 그리하여 올슨은 공영역에 관한 논의로 자기가 맡은 장을 마무리 짓는다.

의사소통행위의 주체들은 도덕담론에서의 [도덕적] 인격들이나 정치담론에서의 시민들이 하는 상호작용에 있어서 합리적으로 책임질 능력이 있는 주체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는 정당한 민주적 절차들의 제도화를 요구한다면 정치담론은 법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는 법 이론을 필요로 하게 된다. 8장에서 크리스 저언(Chris Zurn)은 사회학, 철학 그리고 법적 판결에 연관된 관점들을 가지고 조직된 하버마스의 법 담론이론을 제시한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하버마스는 법을 체계와 생활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전송 벨트(transmission belt)”로 생각한다. 이 전송 벨트는 (유대, 화폐, 권력[의 매개체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의사소통적 형식과 기능적 형식을 연결한다. 법은 잠재적 해방 메커니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덕적 규범들과 사회적 가치들(societal values)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법은 전문화된 경제용어와 행정용어로도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로비단체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될 수도 있다. 철학적으로 볼 때, 하버마스는 법 실증주의와 자연법 이론 간의 구분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법과 도덕이 독립적인 동시에 모두 동등하게 근원적인(equiprimordial) 담론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판결[문제에 대한 하버마스의] 담론 이론은 법 적용 논리에 관해서 그리고 판사들과 법학자들이 법적 공영역에서 특정 판결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법 자체에 적용되는 법의 정당성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세 글은 하버마스의 이론적 작업이 당대의 사회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문제들에 대해 개입하던 하버마스의 활동 속에서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다른 저자들에 비해 좀 더 많이 설명하고 있다. 키스 해이섬(Keith Haysome)은 9장에서 공영역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하버마스의 시민사회 개념, 복지국가의 위기에 대한 분석 그리고 196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던 사회운동에 대한 하버마스의 논법을 고찰하면서 그가 사회적 병리에 대해 어떤 처방을 내리는지에 대한 진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해이섬은 하버마스가 그의 후기 저작에서 공영역과 시민사회 [개념]을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생각하던 부르주아적 형식에서가 아니라 자발적 풀뿌리 시민조직의 형식 속에서 “재발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키어런 크로닌(Ciaran Cronin)은 10장에서 “후기국민국가적” 정치 질서가 어떤 것이 될 것인지에 관한 하버마스의 고도로 복잡한 모델을 제시하면서 해이섬이 빠트린 부분을 여러 측면에서 정리하고 있다. 하버마스가 옹호하는 범세계주의적 민주주의 모델은 경제적 지구화,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 이라크전을 뒤이은 미국 주도의 군사개입 뿐만 아니라 발칸 전쟁에 관해 그가 수행했던 성찰의 결과물이다. 11장에서 에두아르도 멘디타(Eduardo Mendieta)는 하버마스의 최근 관심사, 즉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을 다루고 있다. 해이섬이 사회운동 [개념]을 활용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게, 멘디타는 하버마스적 사회 진화 개념을 고찰하면서 세속화 [개념]를 다루고 있다. 그는 하버마스가 근대화란 오랜 세월에 걸친 합리화의 형식이라고 했던 자신의 테제를 재고하면서 세속화 개념을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멘디타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하버마스의 사유를 추적한다. 하버마스는 종교가 초기에는 합리화의 촉매제 역할을 하다가 사회질서의 한 원천(이 기능은 이후 근대에서 법이 담당하게 된다)으로 기능하고, 이제는 철학이 대체할 수 없는 담론과 사회적 실천의 독립적 영역으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결국 행위 동기 및 가치의 한 원천으로서 함께 생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그럴 경우 철학이 사실 의존해야 할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마지막 단계에서 종교는 다시 매개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무리 장은 하버마스의 저작이 통합적 본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에 관한 그의 저술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에, 하버마스의 차기 거작을 기대하게 되는 일종의 가늠자가 되며 그것은 여심의 여지없이 영향력 있는 묵직한 저작이 될 것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상화의 비극: 노동, 여성, 그리고 자연(자본론 에세이-4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내가 읽는 『자본론』]

대상화의 비극: 노동, 여성, 그리고 자연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작년 여름에 한 선배랑 대화를 나누던 중, 선배가 난데없이 뱃사람과 듀공의 이야기를 해줬다. 항해를 떠나 오랫동안 여자에 굶주린 뱃사람들은 듀공을 잡아다 강간하고 나서 그 고기를 먹고, 남은 잔해는 도로 바다로 던지곤 했다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듀공이 느꼈을 감정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는 뱃사람들을 비난했고 선배는 “성욕은 있고, 여자는 없는데 그럼 어떡해. 나는 뱃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데?”라고 말했다. 그 다음에 선배가 나를 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듀공을 좀 닮은 것 같네?” 이 일로 나는 일주일을 울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제일 똑똑한 사람이었고, 주변 사람들의 동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불쾌하기보다는 실감이 안 났다. 자기가 내뱉은 말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아픈 말인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런 말들을 하다니. 그때 처음 깨달았다. 평생 뱃사람으로 살아온 사람은 절대 듀공의 입장에 설 수 없는 것이구나. 평생 고기를 잡아다 팔고, 먹곤 했던 뱃사람에게는 듀공 역시 그냥 자신이 낚은 수천 마리의 고기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이 이야기를 서두에 넣은 이유는 ‘대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자본론 제7장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이 대상화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어떻게 가치가 증식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분석도 있다. 나는 이중 가장 핵심은 ‘노동의 대상화’라고 판단하였다. 노동이 대상화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번 에세이에서는 노동만이 아닌 자연과 여성의 대상화를 함께 다루고, 그런 대상화를 가능케 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자본론 7장을 시작하며 마르크스는 먼저 대상화되기 이전의 노동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한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만들기 위해 자기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이 구간을 그냥 읽으면, 마치 노동 그 자체가 자연을 착취하는 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른 동물들을 떠올렸을 때 위와 같은 노동에 대한 설명은 생태계의 모든 생물에게 해당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연을 소재로 스스로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꽃가루를 채취하는 꿀벌이나, 지렁이를 파먹고 나뭇가지로 둥지를 트는 새도 마찬가지다. 이때 이루어지는 노동에서 자연과 인간의 생존은 직결된다. 인간은 자연의 것을 가져가되 결코 파괴할 수는 없다. 자연이 파괴되면 생존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임금노동 이전의 노동이란 자기의 몸과 자연을 대등하게 보살피는 것이었다. 다만,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인간과 동물의 노동 간의 차이점은 동물은 노동을 본능적으로 하지만, 인간은 노동 행위 이전에 일종의 구상을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를 그 목적에 복종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 기관들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

 

위의 말을 정리하면, 노동자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노동 방식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으며, 또 그 목적에 맞게 자연을 변화시킨다는 이야기다. 또 노동자는 목적에 맞게 자기 자신을 통제하기도 한다. 목적을 갖고, 이를 추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탁월한 성질이지만, 그 성질 때문에 대상화가 발생하기 쉽다. 노동의 목적이 ‘자연에서 난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난 것’을 가공하여 받는 임금이 목적이 될 때, 자연은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자연의 안위는 더 이상 나의 생존과 직결되지 않으며 오로지 자연을 최대한 착취해서 임금을 많이 받는 것만이 내 생존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대상화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자기의 주관 안에 있는 것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구체화하여 밖에 있는 것으로 다룸’ 대상화를 영어로 한 ‘objectification’의 한국어 뜻풀이는 ‘(사람에 대한) 객관화[대상화], (사람을) 물건 취급함’으로 나와 있다. 대상화는 ‘타자화’, ‘사물화’라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대상화를 다음과 같이 얘기 했다:

 

“노동자가 자기 노동을 상품에 대상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노동을 사용가치[어떤 종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물건]에 대상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노동이 특정 사물의 가치로 등치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상화가 다른 존재에 나의 주관을 객관화하여 씌우는 것을 의미할 때, 대상화된 존재는 본연으로서의 의미와 맥락이 전부 사라지고 오로지 나의 주관을 객관화한 실체로만 유의미하다. 노동의 대상화는 그래서 사실상 살아있는 노동을 죽여서 사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화폐가 등장하고,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오직 임금노동만이 생존의 거의 유일한 방법이 됨에 따라 인간의 노동이 대상화되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자연도 대상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이 담당했던 가사노동의 경우는 타인에게 판매될 수 있는 노동이 아니었다. 가사노동은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적인 노동이기 때문이다. 임금을 받을 수 있었던 당시 남성의 노동에 자연스럽게 우위가 발생했고, 가사노동은 폄하의 대상이었다. 생존을 위해서 여성은 전적으로 남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는데, 유일하게 여성이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은 여성의 성이었다.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자본주의적 특성에 따라, 여성의 신체 역시 대상화되었다.

이렇게 노동, 자연, 그리고 여성. 이 세 영역의 대상화는 노동자는 기계라는, 자연은 먹어도 먹어도 계속 나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라는, 여성은 인격체 없는 남성의 자위기구라는 환상을 우리 사회에 심어놨고, 그 결과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주검과 코로나19, 최근에 겪은 이례적인 장마와 전 세계 곳곳의 이상기후, 그리고 ‘곤란한’ 페미니즘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감당하기 힘든 사건들이 터지고 사람들은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이후, 나는 우리 사회가 드디어 반성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보면 아직 우리 사회에서 본질적인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어, 정부에서 이번에 내놓은 뉴딜 정책의 경우, 여전히 성장주의가 그 핵심에 있고, 디지털화가 유일한 대안으로 보인다. 디지털화를 통해 대면 상호작용과 이동을 최소화하고 비교적 친환경적인 전기를 사용함으로써 이 사태에 대응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결코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로 첫 번째는 다른 에너지를 줄이고 전기사용을 확대하거나 친환경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 환경문제로부터 우리를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기 자동차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사실상 전기자동차의 보급화는 환경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만 덜어주는 역할을 할 뿐, 오히려 주행거리와 운행 빈도는 더 늘어났다고 한다. 또 우리는 자동차만 친환경으로 바꾸면 되는 줄 아는데, 자동차 산업과 자동차가 차지하는 도시 인프라 자체에서 발생하는 탄소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친환경 연료는 지금까지 우리가 누려온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친환경 에너지 자체도 고민해볼 지점이 많다. 우리나라 태양열 에너지의 경우, 땅이 좁아서 산을 깎아내는 식으로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있다는데, 에너지 확보를 위해 산을 깎는 것이 최선은 아니지 않는가.

디지털화가 대안이 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대면의 비대면화가 초래할 디스토피아적 인간상 때문이다. 누군가와 대면하여 대화를 한다는 것은 납작한 청각과 시각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요소들이 개입을 하는 상호작용이다. 우리는 상대와 나를 둘러싼 공기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특정 순간에 흘렀던 음악을 머릿속에 평생 저장해두어 추억이라는 것을 만들기도 한다. 상대가 다리를 떠는지, 팔짱을 끼는지를 봄으로써 불편함을 포착하기도 하고, 눈과 입의 미세한 떨림, 움직임으로 인해 상대의 감정을 추측해보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으로 인해 인간은 공감능력을 형성하고, 타인과 유대를 맺어왔다. 하지만 모든 상호작용이 비대면화 되면 우리는 상대와 나 사이에 화면이라는 벽을 놓게 되는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TV 속 광고와 인스타그램에 속아왔듯이, 우리는 화면으로 보이는 것에 우리의 상상만 덧입히게 되지, 실제로 상대를 온전히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N번방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가해자들은 화면 속에서 고통을 느끼는 피해자들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 그들이 화면이라는 평평한 창을 통해 접해왔던 수많은 과장되고 허구적인 상(像)들 때문일 것이다. 화면 앞에서 질주하는 그들의 욕망을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건너편에 누가 앉아있든 화면은 지극히도 개인적이고 평평한 것이기에.

 

학교 수업이 비대면으로 대체되어도 된다는 생각은 교육 역시 입시경쟁에 의해 대상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은 단순히 지식 전달의 장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일. 더불어 사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안전한 대면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안전한 대면이 가능한 환경은 예컨대 소규모 학급을 운영하고, 더 넓은 교실과 더 많은 교사를 확보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효율 논리에 따르면 이런 방안들이 논의될 리 없다. 디지털화, 비대면화가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곳곳에서 이토록 빠르게 적용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값싸고 효율적이기 때문이지, 옳고 이성적이어서는 결코 아니다.

 

진정한 최선은, 우리가 지금까지 누려왔던 풍요를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성장 중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벗어 던져야 한다. 지금 같은 시대에 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성장 자체에 착취가 내포되어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땅이든, 자본은 무언가를 갉아 먹어야만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더 이상 갉아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재선으로 당선된 프랑스 파리시의 시장(市長)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시장 ‘안 이달고’는 ‘파리를 위한 선언’으로 도시개혁 계획을 발표했다. 파리를 위한 선언의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핵심적인 것들만 나열해 보겠다.

 

⓵ 파리 전역 운행속도 30km/h 제한

② 주차장 면적 절반 축소, 도시 전체를 정원으로

③ 디지털 광고판 퇴출

④ 에어비앤비 주택 사들여 저렴한 공공임대

⑤ 파리시민의 식량주권 확보 (높은 식량 자급률 달성, 대안적 가축 사육 지원 정책 마련)

 

이달고 시장의 철학은 도시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한, 그리고 사람과 호흡하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달고 시장은 파리를 자동차가 다니기 힘든 도시로 만들어 자연과 사람이 숨 쉬는 도시로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달고 시장의 이러한 정책 취지에 파리 시민이 공감을 하여 당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파리시장 Anne Hidalgo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nne_Hidalgo_(3).JPG © Remi Jouan / CC BY-SA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반(反)성장의 삶은 개개인이 혼자서는 달성하기 힘들다.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 개개인은 시스템의 이탈자가 되는 힘겨운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달고 시장이 했듯이 시스템과 제도가 같이 바뀌어야 한다. 이어 국가적 차원에서 전반적으로 변화가 있어야만 다른 삶이 가능하다.

 

결론이다. 앞서 살펴봤듯, 임금노동에서 시작해 우리 삶의 모든 측면들이 경제적 파편들로 잘게 잘게 쪼개졌다. 그리하여 노동과 여성과 자연은 이윤이라는 명목으로 사회로부터 죽임을 당해왔다. 사회는 노동에 대해, 남성은 여성에 대해, 인간은 자연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착취자인 뱃사람의 입장에 서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19와 각종 자연재해를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피해자들의 눈을 응시할 수 있었다. 우리는 상황이 급박한 만큼, 당장의 방역과 안전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들의 눈은, 앞으로 우리가 듀공의 입장이 되어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더 멀리, 그리고 본질적으로 봐야 한다. 죽은 듯 보였던 것들은 사실 전부 살아있기에. 내려오자. 대상화의 단상에서 생(生)이 있는 대지로.

2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2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1. 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에서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1971~1982)

『인식과 관심』 이후 하버마스는 체계이론(루만), 발달 심리학(피아제, 콜버그), 사회 이론(베버, 뒤르켐, 파슨스, 미드 등)을 끌어와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변형시키는 작업으로 전환하였다. 『후기자본주의의 정당성 문제』(1971[1973]), 프린스턴대학에서 행한 가우스 강의록(『사회적 상호작용의 화용론에 대하여』라는 책에 수록(1984[2001]), 『의사소통과 사회진화』(1976[1979])에 실린 글들이 이 시기에 속한 결과물이다. 가우스 강의록은 하버마스 사상에 있어서의 의미심장한 변화를 나타내는 저작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이론적 구상에 있어 적절한 개념틀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강의에서 하버마스는 사회이론이 “언어적 전회”를 단행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인간 행위와 상호이해가 언어적 구조에 의해 충실하게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이론의 토대를 다시 만들고자 했던 이러한 예비적 시도는 1976년에 발표된 중추적 논문인 「보편화용론이란 무엇인가?」(CES: 1~94; OPC: 21~103)라는 결실을 거두게 한다. 이 글에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능력에 관한 이론의 토대를 다졌다.

이 시기에 가장 드높은 성과는 말할 것도 없이 『의사소통행위이론』이다. 하버마스는 이 두 권짜리 책의 목적을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이성이 인지도구적으로 축소되는 것에 저항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념이다. 나는 이 합리성 개념이 회의적 고찰을 너끈히 견딜 수 있도록 전개하였다. 둘째, 생활세계와 체계의 패러다임을 결합하는 2단계 사회 개념이다. 두 패러다임은 단순히 수사적 방식으로 결합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점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병리 유형들에 대한 설명이다. 나는 그러한 사회병리의 유형들을 의사소통적 구조를 갖는 삶의 영역들이 형식적으로 조직된 자립화된 행위체계들의 명령 아래 놓이게 되면서 발생하게 되었다는 가정 아래 설명한다. 그러니까 의사소통행위이론은 근대의 역설들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적 삶의 연관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의사소통행위이론 1』 20쪽)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도입된 이론적 모델의 핵심에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합리성 개념[에 대한 고찰] 그리고 생활세계와 체계 간의 이항대립이 자리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진화(social evolution)를 사회적 학습(societal learning) 형식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학습은 사회 체계 안에 침전되어 있다고 한다. 사회 체계는 점점 복잡하게 분화되는 가운데 고유한 자체 논리를 획득하면서 개인이나 사회적 행위 집단의 통제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다. 반면에 사회화와 개인화 과정은 생활세계-훗설에게서 가져온 이 개념을 하버마스는 형식화용론적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에서 이루어진다.

 

  1. 탈형이상학적 사유: 합리성, 도덕성 그리고 민주주의(1982~2000)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출판 이후, 하버마스는 합리성 및 근대성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는 동시에 그것의 개념적 토대를 강화하는 노력을 계속해서 기울인다. 그는 탈근대주의, 회의주의, 역사화된 상대주의(historicizing relativism) 그리고 교조적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다. 『진리와 정당화(1999 [2003])』에서 그는 진리에 대한 기존 설명을 고치면서 “약한 자연주의”[적 입장](이후 내용을 참고할 것)을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의사소통행위이론』의 개념적 뼈대는 모든 종류의 인간 행위에 적용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윤리학과 사회 정치 철학으로 전환하면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이론의 개념적 뼈대를 이용해 담론윤리학적 형식의 도덕이론, 토의민주주의론 그리고 법에 대한 담론이론을 전개한다. 이 세 영역을 탐구함에 있어서, 그는 각 영역들의 담론 및 합리성 형식들과 연관된 규범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그러한 영역들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능력들을 갖춘 주체들을 배출할 수 있는 사회구조들의 종류에 대한 분석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저작은 『도덕의식과 의사소통행위(1983 [1990])』, 『근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 [1987])』, 『탈형이상학적 사유(1988 [1992])』, 『담론윤리의 해명(1991 [1993]), 『이질성의 포용(1996 [1998]) 그리고 정치이론 및 법이론에 관한 기념비적 저작인 『사실성과 타당성(1992 [1996])』이다.

 

  1. 후기세속주의적(postsecular) 사유와 후기국민국가적(postnational) 사유(2001~ )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하버마스는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면서 철학적 인간학으로 다소 회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특히 담론 윤리학에 대한 토론은 동기화의 문제를 자주 불러일으켰다. 이를테면 합리적으로 행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고,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가와 같은 문제 말이다. 하버마스는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이며 보편주의적인 칸트적 인식 및 행위 주체관에 대해 줄곧 비판해왔다. 그러나 지난 십 년간의 저작에서 그는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로 인한 취약성에 대해 주목하는 경향을 뚜렷이 보여줬다. 이러한 전개는 2001년 독일서적상협회평화상의 수락 연설인 “신앙과 지식”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2001 [2003b])』에 수록된 <인류의 윤리적 자기이해에 관한 논쟁>이라는 긴 논문과 더불어 선보여졌다. 여기서 그는 인간복제와 착상 전에 이루어지는 유전자 검사에 반대하고 있다. 우리 인류는 도덕적 인격이라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그리고 도덕성은 그러한 인격 속에 구현된 것이라는 어떤 윤리적 자기이해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버마스는 피험자의 동의 없이 생물학적인 조작이 이루어지면 그러한 일은 우리가-동시에 이 피험자가- 자율적 행위자라는 생각을 위협하고 자유로운 행위자로 살아온 우리의 경험을 훼손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개략적으로 제시한다. 하버마스는 생명윤리학적 논쟁에 이바지하면서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와 그가 “후기세속주의적”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지칭한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에 대해 썼다. 여기서 그는 “근대성에 대한 철학적으로 계몽된 자기이해와 주요 세계종교에 대한 신학적 자기이해-이것은 과거에서 생성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요소로서 작금의 현대에 튀어나온 것이다- 사이의 기이한 변증법”(하버마스 2010: 영문 번역본 16페이지. 번역은 수정)으로 묘사한 문제를 다루었다. 하버마스는 도덕성, 민주주의 그리고 법에 대한 담론 이론적 절차주의뿐만 아니라 탈형이상학적인 철학에 전념해 왔는데 이런 그의 입장은 『자연주의와 종교 사이에서(2005 [2008]』라는 책에서 언급한 근대사회에 대한 후기세속주의적 자기 이해로 여겼던 것과 정확히 수렴한다.

후기세속주의적 사회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시도하고 종교 문제에 참여하게 된 까닭은 담론 윤리학에 내재하고 있었던 쟁점들(위에서 언급했던 동기화의 문제 같은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 정치 상황에 대한 고찰로 인한 것이었다. 독일을 비롯해 여타 유럽 지역에서는 늘어나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문제들로 얼룩지고 있었다.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 이후 팽창한 유럽연합은 조화로운 유럽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부담으로 다가왔다. 지구적 타원에서 보면, 종교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9. 11 테러 그리고 이라크 전쟁의 분명한 요인이었다. 1999년 코소보 사태에 대해 하버마스는 나토의 군사 개입과 폭격을 지지한 반면에, 2003년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이는 정당한 근거를 필요로 하였고 하버마스로 하여금 국제법과 그것의 규범적 강제력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지지 및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 탐구하도록 만들었다. 요컨대 하버마스는 사회 민주주의가 국민국가의 한계를 넘어 확장될 수 있는지 그리고 지구적 정치 질서 안에서의 범세계적(cosmopolitan) 민주주의란 어떤 것일 수 있는지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최근 저작들에서 분명히 철학적 인간학으로 회귀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규범적 비판이론을 좀 더 명확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4-1.[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이상하(한철연 회원)

 부끄럽게도, 벤야민과 덴마를 읽으며 폐허와 낙원, 행복과 도피에 대해 과거에서 오는 희망을 노래하는 글을 쓰는 와중에도 현실의 나는 또다시 삶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한때는 나의 내면 밑바닥을 박박 긁어모아 살짝 드러낸 자작시로, 한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가 손으로 닿는 것을 좋아해주고 나의 못난 마음을 치유해주는 카페의 고양이 언니에게로. 그리고 난 그 사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바다를 두 번 아니지 서해 을왕리까지 조용히 세 번이나 다녀왔다. 그것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순례와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에서 어린시절 마을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쫓겨나서 여름 방학내내 매일 죽는 것만을 생각하다가 자기 치유를 위해 떠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를 그려냈듯이. 그리고 동해의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으며 일출을 보면서 다시 한번, 미워도 다시 한번 나를 다독이고 수정하고 써보기로 했다… 반복과 폐허와 낙원에 대해서.

 

 

출처-직접 찍은 정동진 해변 일출

 

 

 태양의 일출은 분명 50억 년째 매일 변함없이 반복되는 자연 현상이지만, 인간의 삐딱해지기 쉽고 비틀어지기 쉬운 이 시각과 관점은 이 반복되는 일출 속에서도 새로운 구도를 매번 포착할 수 있는 무언가, 상수가 아닌 변수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결코 간단하거나 쉽지는 않다. 촬영 버튼 한 번만 누르면 같은 대상을 0.01초마다 반복해서 찍어도 매번 아주 조금씩 다른 사진이 나오는 이 현대기술의 총집체 스마트폰 카메라라고 해도, 결국 그 진정한 차이를 가져오는 프레임을 결정하는 것은 떨리는 사람의 손이다. 그래서 벤야민도 사진의 작은 역사 같은 에세이에서 이 새로운 사진 기술에 대한 작지 않은 희망감을 내비쳤으리라.

 

 

출처-직접 찍은 정동진 해변 일출2

 

 

 이제 본론인 덴마의 지로와 벤야민으로 돌아와보자. 여기 하나의 밑바닥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도 사람이 산다. 마치 태양이 뜨고 지듯이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feat.세익스피어)의 일상이 반복되지만, 아무도 안전한 오늘이라던가 더 나은 미래라는 것을 결코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제8우주 행성 모압의 한 슬럼가. 여기에 사람이 있다. 여기에도 사회가, 공동체가 있다. 이 밑바닥 슬럼가 여기에도 사람’들’이 산다. 고대 시절부터 존재 자체로 경멸받기도 하고 공포 또는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한, 벤야민의 사상을 이어받은 또 한명의 철학자 아감벤의 말을 빌리자면 호모 사케르Homo sacer, 저주받고 신성한 뒤틀린 모순된 존재들이 사는 빈민가. 오늘 누군가 죽어도 아무도 신경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의식의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사회에서 존재한다고 여겨지지 않는 존재들.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3&weekday=tue

 

 덴마 웹툰 전체의 주인공 덴마는 오늘도 실버퀵의 택배를 신속 안전 배송하기 위해 치안이 불안하다고 여겨지는 행성 모압의 슬럼가로 꼬마의 몸으로 홀로 들어서다가 자기도 슬럼가 출신이라며 이상한 편견 가지지 말라고 하다가 택배를 강탈당한다. 그리고 이 밑바닥 슬럼가 안에서도 최악의 쓰레기 취급을 받는 한 사람. 덴마의 제8우주 세계관에서 물리적 오류로 인해 공간 도약과 사물의 기억 읽기라는 희귀한 초능력을 가진 퀑. 그러나 그저 마약 중독자 약쟁이로 하루하루 연명할 뿐인, 쓰레기 퀑 지로가 슬럼가의 가장 밑바닥에서 마약을 빨면서 숨쉬고 있다. 이 지로에 대해서 수많은 관점의 카메라를 현미경처럼 들이댈 수 있겠지만, 일단은 현상학에서 말하는 에포케Epoke 판단중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저 이성의 판단이나 선입견이 아닌, 지로의 삶을 찬찬히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기…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3&weekday=tue

 

 지로는 아무 능력도 재주도 없는 보통 인간이라면 누구든 부러워할 만한 탐나는 초능력을 두 개나 가진 퀑이지만, 하루라도 마약을 하지 않으면 삶 자체를 유지할 수가 없기에 그저 그 능력은 도둑질에 이용될 뿐이다. 이전 식스틴 에피소드에서 나온 지로와 같은 신체 공간도약 능력을 가졌지만 그 권투 챔피언이자 경호대 대장으로 살고 있는 막스와 너무나도 대조되는 삶.  그리고 이렇게 도둑질로 기껏 생긴 돈으로는 마약에 전재산을 탕진할 뿐만 아니라 자기 동생마저도 약물 중독에 빠뜨린, 가족에게마저도 경멸받아 마땅한 존재. 지로는 이 세상에 어떠한 특별한 희망도 기대도 욕망도 없다. 그저 오늘 하루만 살아갈 뿐이다. 오늘 하루 어떻게 약을 빨고서 그냥 누워있을까 하는 욕망만이. 

 

 물론 이것은 단순히 지로같은 마약쟁이에게만 해당되는 욕망일리는 없지 않던가? 20세기말 IMF위기 이후 모두 부자되세요를 외치던 이 한국 사회에서, 다들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어 노동없이 수익을 받는 건물주가 되기를 대놓고 욕망하는 21세기 현대 한국인들은, 사실상 장래희망이 이렇게 아무 노력도 노동도 없이 그저 편하게 쾌락만을 탐닉하는 마약쟁이를 자신도 잘 모르는, 숨겨진 욕망을 건물주라는 합법화되고 사회화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은 한때 로또의 꿈이었다가, 주식대박의 꿈이었다가, 비트코인의 꿈이었다가 조물주 아래 건물주라는 다른 형태로 표현될 뿐,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노동없는 이윤을 원한다는 본질은 수백년쨰 어쩌면 수천년째 동일하지 않은가.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7&weekday=tue

 

 지로의 이런 쓰레기같은 행태를 보고 어떤 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경멸의 눈빛과 언행을 마다않을 것이고, 어떤 이는 섬뜩해하며 그저 멀리서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타인의 불행을 감상하리라. 물론 이것 외에도 이런 마약에 찌든 인간을 동정하거나 그저 웃음거리로 삼고 내가 힘들지만 그래도 저정도 쓰레기같은 삶은 아니지 하며 나의 심리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방법도 존재한다. 이 중 어떤 방식이든, 그 누구도 지로처럼 이렇게 자신이 그저 약물중독된 폐인으로 살아가길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로도 힘든 슬럼가 생활에서 그저 당장의 위안, 지금의 쾌락을 쫓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약쟁이가 되었을 뿐. 물론 오해하실 필요는 없다. 이는 결코 타인에게 온갖 민폐를 끼치는 약쟁이 지로의 삶 자체에 대한 정당화가 아니라, 지로 또한 이 슬럼가 사회의 구조적 피해자라는 관점을 슬쩍 드러내고 싶었을 뿐이니. 이에 대해선 이 나이트 에피소드 연재글의 마지막에서 좀 더 다루게 될 것이다.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9&weekday=tue

 

 

 지로의 이러한 불행과 가족들과의 갈등을 독일 부르주아 집안의 소년이던 벤야민의 유년시절과 겹쳐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벤야민이 베를린의 유년시절 에세이집에서 부모의 손을 잡고 선물사러 나간 크리스마스 날 구걸을 하거나 장사를 하는 거리의 빈민층 아이들을 보며 느낀 거리감과는 좀 다르게, 우리는 그저 이 시대에 지로의 사례같은 타인의 불행을 충분한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그저 은근슬쩍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는 불행 포르노 또는 고통 포르노를 만끽중인 것은 아닐까. 지금 시대에 이런 행태가 가장 적나라한 곳은 유튜브와 인터넷 개인방송들이리라. 가짜사X이 같은 영상을 보고 사람들은 열광하며 이X 대위에 환호하고 찬양하지만 사실은… 다들 말하고 싶진 않지만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한때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던 것처럼 사실 못난 공혁X, 4번 훈련생, 자기만 아는 자기 고통밖에 모르는 개인주의자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벤야민이라면, 그 진흙탕같은 지옥의 시공간 속에서도 메시아적 중지의 시간을, 구원의 계기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이 가고싶고 닮고싶은 방향도 그러하다.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53&weekday=tue

 

 

 범행을 저지르려다가도 약기운이 떨어지면 오로지 마약을 하기 위해 남의 신발도 핥고 불구덩이 속에 자신의 맨살도 집어넣는 쓰레기 약쟁이 지로. 더이상 돈없이 오면 거래를 끊겠다고, 약을 주지 않겠다고 마약 거래상이 엄포를 놓자 지로는 급기야 몽둥이를 들고 막무가내로 폭력을 휘둘러서라도 마약을 손에 넣는다. 누구 맘대로 약을 끊냐고, 너희는 끊어도 나는 절대 못 끊는다고.

 이를 보면서 양영순의 수많은 충성독자인 덴경대들이 댓글에서 지각연재가 일상인 양영순을 향한 자신의 애증을 표현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다른 웹툰들은 다 11시에 칼같이 올라오는데도 그저 덴마가 자신에게 재미있다는 이유로 몇시에 올라오든 심지어 다음 날에 올라와도 그저 오매불망 기다리고 욕하면서도 반드시 양영순을 찾아오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덴마의 팬아트를 만들고 연재 등록을 알려주는 덴경대 어플을 만들어낸 이 덴경대 독자들. 그렇기에 이 연재글의 초반에 말했듯이 완결없는 완결에 대한 그들의 배신감은 더욱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지각이 일상인 현실과 마약이라는 비정상이 정상처럼 굴러가는 가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반복되는 이 비현실적인 일상을 중지시키는 초월적인 무언가를 우리는 외부로부터 기대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 안에 이미 그런 초월적 힘이 잠재되어 있을까?

 

 아마도 그 대답은… 후에 지로가 만나는 인생의 은인 중 하나인 퀑 딜러 주완의 말처럼 자신의 밑바닥에 정말 진심으로 물어봐야만 하는 게 아닐까?

 

당신은 정말 진심으로, 지금의 이 상황에서 벗어나길 원합니까?

 

계속…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65&weekday=tue

스물한 번째 시간, 나를 돌아보다 [시가 필요한 시간]

스물한 번째 시간, 나를 돌아보다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한차례 긴 장마가 끝나고 막바지 여름의 무더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낮의 더위도 더위지만, 잠잠해질 것이라 기대했던 코로나19가 다시 악화되고 있는 상황은… 정말 참기 어렵고, 관련된 뉴스를 들을 때마다 기운이 쭉 빠집니다. 이제 학생들은 개학을 해야 하는데, 이 시점에서 또다시 대유행이라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네요. 어떤 크고 강력한 조치도 필요하겠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작은 영역에서의 방역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시가 필요한 시간, 여러분과 함께 나눌 주제는 ‘나를 돌아보다’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어떻게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니까? 잠들기 전 그 날 하루를 되짚어보면서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을 떠올려 볼 수도 있고, 오늘 했어야 했는데 미처 하지 못한 어떤 계획들을 점검하면서 내일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또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실수나 다른 사람이 저지른 어떤 행동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하는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가끔은 나와 진짜 똑 같은 사람을 만날 때도 있죠. 말투와 행동, 욱 하는 성격, 화를 참지 못하는 마지노선마저 너무 똑같은 누군가를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아 다른 사람이 보는 내 모습이 저렇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될 수 있죠.

그렇다면 시인들은 어떻게 자신을 돌아볼까요? 오늘 소개해드릴 시에서 시인은 부러진 나뭇가지,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나뭇가지를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읽을 시는 정호승 시인의 <부러짐에 대하여>입니다.

 

부러짐에 대하여

                                     정호승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은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거리에
유난히 작고 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뒹구는 것은
새들로 하여금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작고 가늘게 부러지지 않고
마냥 크고 굵게만 부러진다면
어찌 어린 새들이 부리로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하늘 높이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

 

네, 정호승 시인의 시 ‘부러짐에 대하여’ 들어 봤습니다. 요즘 비도 많이 오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인지 길을 걷다 보면 바닥에 나뭇잎과 나뭇가지들이 많이 떨어져 있죠. 이 시를 읽으면 바람 따라 이리저리 굴러가는 그 나뭇가지들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시인은 얇고 작고 가벼운 나뭇가지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금새 툭 꺾여져서 땅에 떨어지고 마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고, 지저분해서 얼른 빗자루로 깨끗이 쓸어버려야만 하는 쓰레기에 불과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 나뭇가지들이 새가 둥지를 짓는데 필요한 귀중한 재료가 된다는 사실. 그 사실을 시인은 발견해냅니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은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저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약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죠. 누가 나를 조금이라도 얕잡아볼 까봐 과한 자존심과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어요. 늘 ‘갑’의 위치에 있어야만 하고, 조금만 낮고 작은 자리에 내려오면 마치 ‘을’이 된 양, 굉장히 패배자가 된 것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를 읽고 나면, ‘때로는 부러질 필요도 있다’. ‘때로는 조금 꺾일 필요도 있다’ 라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시인은 바닥에 나뒹구는 작고 가늘게 부숴진 나뭇가지들을 보면서, 저렇게 ‘작고 가늘게 부숴져’ ‘바닥에 떨어져야’만 어린 새들이 물고 높이 올라가 집을 지을 수 있지 않겠냐는 사소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굵고 큰 가지는 어린 새들이 물 수도, 가지고 올라갈 수도, 집을 지을 수도 없으니까요.

우리도 마찬가지. 시인은 사람이 누군가의 곁에서 인간의 집을 지을 만한 도움이 되려면 작고 가늘게 그리고 때로는 낮은 자리로 내려올 줄도 알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너무 강하기만 한 상대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열 수가 없죠. 아무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고,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줄 수 없습니다.

크고 굵은 가지를 뻗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어야 할 때가 있고, 작고 가늘게 부러져 나뒹굴며 어린 새들에게 집이 되어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나요? 나는 오늘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알맞게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샘 옥(Sam Ock)의 <Small>이라는 노래 가져왔습니다. 혹여 현재의 내 모습이 이 시의 나뭇가지처럼 너무 밑바닥에 놓여있는 것 같고, 작고 가늘어 보인다고 좌절하고 있는 분이 계신가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누군가에게 정말 필요한 도움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이구요, 보다 더 중요한 건 나의 본래 모습이 그 작은 가지가 아니라, 크고 굵게 뻗은 큰 나무라는 사실이니까요. 샘 옥은 자신의 노래에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가 필요한 시간은 여기까지 입니다. 오늘 하루도 힘내시고, 시와 노래로 나 자신을 돌아보는 하루를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파이팅! 건강 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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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옥(Sam Ock) – ‘small’ : https://youtu.be/6YRFSmY_n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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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노동력(Arbeitskraft)과 능력(Vermögen) 그리고 에고이스트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노동력(Arbeitskraft)능력(Vermögen) 그리고 에고이스트

 

박종성(한철연 회원)

 

화폐에 대한 갈망을 추구했던 탐욕스러운 사람은

모든 양심의 독촉, 모든 명예심, 모든 관대와 모든 동정(Mitleid)1을 부인한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모든 배려를 고려하지 않는다. 탐욕이 그를 쓸어간다.(64)

 

맑스는 1844년부터 국민경제학을 공부했는데,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한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다. 1857-1858년에 쓴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에서 자본가가 지불해서 얻은 상품은 노동자의 능력(Vermögen)이며, 일종의 잠재성 내지 재능이라고 했다.2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은 자본의 착취의 비밀을 밝히는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증식의 비밀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에 있기 때문이다. 『자본』 (1869)에 이르러서야 노동능력(Arbeitsvermögen) 대신 노동력(Arbeitskraft)이란 말을 사용한다. 능력(vermögen)과 힘(kraft)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mögen은 잠재성을 가진 힘이고 kraft는 잠재성이 없고 특정한 방향으로 행사되는 일정한 양의 힘이다. 니체는 kraft(force)와 구분해서 애용한 힘(Macht)도 mögen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mögen은 그리스어 뒤나미스(dynamis)나 라틴어 포텐차(potentia)와 통한다.3

그렇다면 맑스가 가혹하게 비판했던 슈티르너는 이 단어들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그러나 내 능력(Vermögen)은 단순히 내 노동에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내 노동능력(Arbeitsvermögen)으로 애써 조달하는 얼마 안 되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304]

 

그러나 나는 노동하는 것을 “당신의 능력(Vermögen)을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부르지 않는다.[305]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먼저 능력이 노동능력보다 더 다면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능력 중에 일부가 노동능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주 명확하지는 않지만 슈티르너는 노동력과 능력을 구분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화폐가치’를 인간의 ‘능력’(Vermöge)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화폐가치는 노동능력의 가치에 못 미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능력과 구분하여 “노동력”이란 용어를 사용한다.(293) 그런데 그는 노동력의 사용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노동력을 능력과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동력의 사용만이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그에게 ‘능력’이란 무엇인가?

 

“네가 할 수 있는(vermagst)것이 너의 능력이다!”(294),

“내가 소유할 능력이 있는(vermag) 것, 그것이 내 능력이다.”(294)

“우리는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물건들을 사용한다.”(377)

 

한마디로 말하면 그에게 능력은 네가 할 수 있고 소유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가능성과 현실성을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가능성과 현실성(Möglichkeit[Possibility] und Wirklichkeit[reality])은 항상 함께 일어난다.”(369)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가능성=현실성=능력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능력이 아닌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어야만 그것이 능력이다.

가능태와 현실태의 고전적 구별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데, 한편으로 현실다운 것은 물질에 대립되는 형상을 뜻하며(모양을 갖춘 대리석), 다른 한편 가능태나 잠재태에 대립되는 활동성 자체를 뜻한다(말할 수 있음과 실제 말하고 있음). 이와 달리 가능성과 현실성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슈티르너에게 가능성, 예를 들어 말할 수 있음이 곧 실제 말하고 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mögen은 그리스어 뒤나미스(dynamis)와 통한다고 했는데, 슈티르너는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 개인들이 소유할 ‘지배’(Herrschaft)를 ‘뒤나미스’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151)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의미에서 dynamis는 현실태와 대립되는 가능태란 어떤 형상으로 결정되지 않은 경향, 단순한 잠재성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현대에 이르러 잠재력을 뜻하게 되었으면, 능동적 에너지 곧 어떤 현실적 결과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힘을 뜻하게 되었다. 슈티르너가 지배와 뒤나미스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지배, 곧 현실태는 잠재태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슈티르너의 능력 개념은 단순한 잠재성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서 결과를 생산할 수 있는 현실적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가능성과 현실성을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는 슈티르너는 힘(Macht)과 능력(Vermögen)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면서 노동력과 구분한다.

 

[350]당신은 연합(Verein)으로 너의 모든 힘(Macht), 너의 능력(Vermögen)을 가져와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든다. 그러나 사회에서 당신은 당신의 노동력(Arbeitskraft)을 사용한다.

 

정리하면 슈티르너에게 능력은 가능성=현실성=힘=뒤나미스이다. 그리고 연합 속에서는 힘, 능력이 발휘되지만 사회에서 사용되는 것은 노동력이다. 그는 사회보다는 연합체를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게 노동력의 사용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자신의 능력, 그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만드는 잠재적 힘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연합이 에고이스트의 삶이다. 맑스도 노동능력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곧 온갖 사물(정신적인 것을 포함해서)을 생산하는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다.4 그렇다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노동력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노동력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유용성을 인정받은 인간의 행위능력, 다시 말해 가치증식에 기여하는 인간의 생산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증식에 기여하는 인간의 생산능력은 “인간의 전반적 노동능력의 희생을 대가로 일면화 된 전문성”5이 된다. 다면적인 잠재능력 중 특정 재능만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달인의 경지’는 다면적인 잠재능력이 아니다. 슈티르너가 노동력과 능력을 구분한 것도 이러한 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전면적인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은 사회가 아니라 연합이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인간이, 더 정확히 말하면 유일자, 에고이스트가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노동의 현실은 어떠한가? “거의, 아니면 전혀 자신의(eigene) 노동이 아니라, 자본의 노동(Arbeit des Kapitals)과 공순한(untertänig) 노동자의 노동”[125]일 뿐이다. 결국 자본을 위한 노동이지 나를 위한 노동이 아니다. 또한 자본을 위한 노동자의 태도 또한 공순(恭順)한 것인데, 이는 노동자라는 주체를 공손하고 온순한 노동자로 형성하고자 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노동 가치설에 따르면 노동력은 노동자의 소유이다. 그러나 소유는 “돈과 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 즉 자본가6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 노동자는 향유를 위해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척도에 맞추어 자신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verwerten)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이런 노동자에게는 교양 있는(gebildet) 정신의 향유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조잡한 오락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양(Bildung)이라는 것은 봉쇄되어 있다.”(131) 여기서도 인간의 다면적 잠재능력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금 현실에서의 노동을 살펴보자. “그는 다른 어떤 사람의 손아귀에서만 노동하게 되고, 그러한 사람이 그를 이용한다(착취한다exploitiert).” “노동이 낮게 지불되고 있는 것이다!”(126) 노동력을 소유한 사람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함으로써 노동력의 사용권, 이용권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가의 것이 된다. 바로 자본가의 노동력의 사용, 이용은 착취이다. 맑스의 언어로 말하면, 잉여가치는 착취와 같은 말이다. 잉여가치의 비밀은 노동력이다. 이러한 상황을 전복시키고자 슈티르너는 노동자의 엄청난 힘을 믿고 있다. 그가 보기에 노동자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파업이다.

 

노동자는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언젠가 그들이 자신의 힘을 제대로 소유하게 되었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어떤 것도 그들에 저항할 수 없다. 이를테면 그들은 아마 동맹 파업을 하기만 하면 될 것이고, 노동의 산물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향유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곳곳에서 발발하는 노동자 소요(Arbeiterunruhen)의 의미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127)

 

에고이즘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단념하는 탐욕스러운 사람(Geizige)”은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다.7 이 구절은 탐욕(Geiz)이라는 점에서 맑스가 자본가를 설명하는 것과 유사하다. 슈티르너가 보이기에 여러 가지 욕망 중에 “하나의 것(Eins), 곧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의지, 하나의 열정 등등에 다른 모든 것을 거는 그런 사람”8, 곧 “화폐에 대한 갈망(Gelddurst)을 추구했던 탐욕스러운 사람”은 “탐욕이 그를 쓸어간다.”9 이는 자신이 욕망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에고이즘은 자율주의인데, 이는 탐욕이 주체가 되어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화폐욕망’(Geldgier)은 ‘병적욕망’이고 ‘자기극복’10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앞서 슈티르너가 화폐에 대해 갈망하는 사람을 희생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예로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단념하는 ‘탐욕스러운 사람’을 언급하였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물론 탐욕스러운 사람의 행위는 명확히 자기 이해관계, 자기중심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부유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행위는 에고이즘이라 할 수 있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 사람의 행위는 슈티르너가 거부하는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이다. 그들의 모든 행위와 행동은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이 열려 있지 않은,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bornierter Egoismus)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에고이즘과 구분하여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신들린 상태”(Besessenheit)이다.11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은 하나의 목적에 모든 것이 종속되어 있고, 이 하나의 목적은 우리를 고취시키고, 열광시키며, 공상에 빠지게 하므로 그것은 “우리의 –지배자가 된다.” 에고이즘은 ‘나’다움이고 자율성이며 자기지배로 볼 수 있다. 자신을 희생하는 에고이즘, 곧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은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다움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자기 지배는 외적이고 내적인 영역이다. 에고이스트, 곧 유일자는 스스로가 타자에 종속되는 것에서 벗어나길 요구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욕구나 목적에 복종시키는 것을 피하길 원한다. ‘관념’에 대한 그의 입장을 들어보자. 어떤 관념이 “내 마음 속에서 점점 더 굳어져 가고 있고(sich etwas in Mir festsetzt) 그것이 용해될 수 없게 된다면”, 그때 나는 “관념의 포로이고 노예, 예컨대 어떤 신들린 사람이 될 것이다.”12 마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신의 도구로 존재하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는 것처럼 도덕적 사람은 “자신을 선이라는 관념의 도구(Werkzeuge der Idee)”로 만든다.13

이러한 관념에 대한 비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에고이스트가 더 이상 관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에고이스트는 자신을 “생각의 실현을 위한 도구”14로, “관념의 어떤 도구”15로 만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관념과 이념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에고이스트가 실행하는 힘은 “세계의 무리한 요구와 무법행위”를 능가하는 것이고16, “내 본성을 능가하는 ”을 실행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에고이스트는 “내 욕구의 노예”17로 존재하는 것을 벗어나야만 한다. 이것이 나다움을 위해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이 변형할 수 있다. 자본가는 가치증식의 실현을 위한 도구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화폐에 대한 갈망의 도구이다. 그래서 그들은 관념의 포로이고 노예이며 신들린 사람이다.

나는 어떤가? 당신은 어떤가? 우리는 어떤가?


  1. 경건함을 뜻하는 라틴어 pietas가 어원인데, 타인의 불행한 모습이 불러일으키는 공감, 전통적으로 철학은 동정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으나, 루소에게 동정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문명화된 인간이 간직하고 있는 원초적 본성이다.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겪는 고통에 대한 연민은 이기주의와 이해관계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유대의 가능성을 확립한다, 지배의 욕망을 누를 수 있는 것도 동정이다. 이후 쇼펜하우어가 중요하게 다룬 주제이다.

  2. 칼 맑스 지음, 김호균 옮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그린비, 2007, 266쪽.

  3. 고병권, 『성부와 성자 자본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천년의상상, 2019, 166쪽.

  4. 고병권, 『성부와 성자 자본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천년의상상, 2019, 167쪽.

  5. 카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자본Ⅰ-1」, 길, 2008, 483쪽.

  6. 자본가에 대한 느슨한 정의인데, 맑스의 개념과 비교 가능하다. “화폐소유자는 이 운동[가치의 증식; 옮긴이]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담당자(Träger)로서 자본가가 된다. 그의 몸 또는 그의 주머니가 화폐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그리고 그 유통의 객관적 내용, 곧 가치의 증식이 그의 주관적 목적(subjektiver Zweck)이다. 자신의 모든 행동의 동기를 단지 추상적 부를 더 많이 벌어들이는 데 두는 한 그는 자본가(Kapitalist)로 기능하는 것이며 또한 인격화된 자본으로, 곧 의지와 의식을 부여받은 자본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사용가치는 결코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개별적 이익 또한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이 아니며, 오히려 이익을 얻기 위한 쉬지 않는 운동만이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이다.”(167f., 강조는 M. H.) 하인리히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1) 이용할 수 있는 화폐의 소유자(Eigentümer) 역시 자본가인데, 그는 오직 이용할 수 있는 화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어야만verfügen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7. 맑스는 『자본』에서 자본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금욕(Entsagung)의 복음(Evangelium)을 성실하게 준수한다…. 그러므로 근면(Arbeitsamkeit)과 절약(Sparsamkeit) 그리고 탐욕(Geiz)이 그의 주요한 덕목이 되었고, 많이 판매하고 적게 구매하는 것이 그의 정치경제학의 전부가 되었던 것이다.”(147)

  8. 같은 책, 81.

  9. 같은 책, 64.

  10. 같은 책, 379.

  11. Stirner, Max: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82.

  12. 같은 책, 157.

  13. 같은 책, 362.

  14. 같은 책, 385.

  15. 같은 책, 411.

  16. 같은 책, 373.

  17. 같은 책, 374.

손님이 왕? [내가 읽는 『자본론』]

손님이 왕?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엄청난 생산력과 유통망을 가졌다. 이러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능력은 서울 한복판 대로변에서부터 두메산골 잡화점까지 뻗친다. 어딜 가나 쇼윈도에 전시된 수많은 상품들은 잠재적 소비자인 행인들의 시선을 끌며, 그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의 지갑을 열기 위한 노력에 맞서기는 참으로 어렵다. 결국 지름신이 강림하고 어느새 지갑 안에 갇혀있던 신용카드가 계산원의 손에 쥐어진다. 우리는 생산할 때보다 소비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고, 소비를 통해 이 사회의 모두가 평등하다고 되뇐다. 자본주의의 물신숭배는 항상 속삭인다. ‘소비하는 행위를 통해 너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법이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왕으로 만든다. ‘손님은 왕이다!’ 모두가 소비자인 자본주의 사회는 모두가 왕이 될 수 있는 세상,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세상이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 스스로가 필요로 하는 사용가치를 얻는다. 배가 고프면 뜨끈하고 든든한 국밥 한 그릇을 사먹고, 몇 주에 한 번 머리카락을 다듬을 때가 되면 미용실을 방문해 머리카락을 손질한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자신이 원하는 걸 얻는 과정이 소비이고, 거기서 얻는 만족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다음 봉급일만을 바라보며 일한다. 돈을 쓸 때 우리는 왕이니까.

 

소비는 짜릿하고 기분 좋은 행위이다. 원하는 사용가치를 얻은 우리는 행복하다. 또 원하는 사용가치를 찾아가는 그 순간 자체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소비 과정에서 주인의식을 느낀다. 애X스토어에 방문하여 최신 아X폰을 둘러볼 때 점원들에게 받는 대접은 문자 그대로 우리를 왕이라도 된 것 마냥 만들어준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격언이 잘 실현될 때 소비자로서 우리는 주인의식을 느끼며 만족한다.

 

우리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즉 소비를 통해 왕이 되려고 노력하며 돈을 버는 과정을 마르크스는 ‘C-M-C’로 정식화한다. C는 상품(앞의 C와 뒤의 C는 다른 상품), M은 화폐이다. 상품을 팔아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시 내가 필요로 하는 상품을 구한다. 여기서 C는 사용가치로 존재한다. M은 교환과정을 간략하게 만든다는 화폐 본래의 속성에 충실한 화폐, 화폐로서의 화폐이다.

 

원래 ‘C-M-C’는 물물교환의 연속인 ‘C1-C2-…-Cn’에서 비롯되었다. 나에게 필요 없는 사용가치를 다른 사용가치들과 계속해서 교환하면서 나에게 필요한 사용가치를 구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물물교환의 불편함이 화폐를 불러왔고, 화폐가 물물교환의 과정을 없애거나 대폭 축소시켜 ‘C-M-C’라는 사슬이 완성되었다. 그렇기에 ‘C-M-C’는 사용가치가 목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자본의 목적은 사용가치가 아닌 자본의 증식, 즉 가치증식이다. 화폐가 목적인 것이다. 자본의 정의부터가 그러하다. 아무리 많은 돈이 쌓여있더라도 그 돈들이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데에 쓰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본이 아니다. 또한 누군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돈을 더욱 크게 불리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구두쇠’일 뿐 자본가가 아니다.

 

그렇기에 자본이 커지는 과정은 아까 논의한 C-M-C로 설명할 수 없다. 자본이 커지는 과정은 자본으로 시작하여 자본으로 끝난다. 그런데 처음의 자본보다 나중의 자본이 줄어들어 있으면 이 과정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자본의 증식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M-C-M′(M′=M+ΔM)’ 자본은 상품을 만들어내고 그 상품을 다시 팔아 자신의 몸집을 더욱 크게 불린다. 끝의 M′은 원래의 자본에 자본의 증가량이 더해진 것을 의미한다. 물론 고리대와 같이 M-M′으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해보자. ‘쌀을 팔다.’ 어떤 의미의 말일까? 물론 이 문장은 쌀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다른 용법이 있다. 돈을 주고 쌀을 살 때에도 쌀을 ‘판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쌀을 산다’는 것은 쌀을 팔고 돈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용례의 기원에 대한 여러 설들 중, 과거 화폐경제가 성립되기 시작할 무렵, 그 이전 시대 상거래의 핵심적인 수단이 되었던 쌀과 화폐를 교환하는 과정을 쌀 중심적으로 바라보아 그런 용례가 성립되었다는 설이 있다.

 

마찬가지로 돈을 불려야 하는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자본은 화폐를 팔아 상품을 사고, 다시 상품을 팔아 화폐를 사는 게 아닌가? 이를 C-M-C와 엮으면 우리는 돈이라는 물건을 팔아 사용가치를 대가로 받는 판매자인 건 아닐까? 즉 우리는 자본이 만든 물건을 사는 데에 집중하여 우리를 소비자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우리가 돈을 팔고, 자본이 돈을 사는 건 아닐까?

 

자본이 스스로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것도 아니다. 자본은 우리에게서 ‘돈’을 사옴으로써 몸집을 불려야 하는데, 그 돈을 사기 위해서는 상품을 팔아야 한다. 그 상품을 사올 때 팔았던 돈의 가격 그대로 되파는 건 자본에게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다. 돈을 팔아 상품을 사는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런데 그 노동자들은 곧 자본가가 아닌 우리들이다. 결국 우리는 상품을 팔아 사는 돈보다, 상품을 살 때 파는 돈을 더 많이 쓰게 된다. 자본이 몸집을 불리는 건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 과정에서 노동력이 가치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M-C-M′ 중에서 상품을 만드는 C과정에 투입되는 노동력이 가치를 생산하고, 그 가치를 자본이 가져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왕이 아니다. 자본이 손님(=소비자)이고 우리가 판매자이기 때문에 자본이 왕이 된다. 또 우리는 자본에게 사기를 당하고 있었다. 우리가 생산한 가치를 자본이 가져가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든 몫을 남에게 빼앗기는 사람은 왕이나 주인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은 노예에 가깝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없는 사람들은 주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언명에 현혹되어 스스로가 주인이라는 허위의식에 덮였다. 하지만 실상 우리가 우리를 왕으로 생각하던 소비의 과정에서도 최후의 승자는 자본이었다. 자본주의는 모두가 노력하면 그만큼 성공할 수 있을 정도로 과정이 공정하고 평등하다고, 모두가 소비자, ‘손님’이기에 평등하다고 강조했지만 그것은 사기였다. 자본은 그저 우리에게서 싼 값으로 돈을 사오기 위해 ‘손님은 왕이다’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래야 자신들의 몸집을 키우고 다른 자본과 싸워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소비자임에 동시에 어디서는 계산원으로, 어디서는 경비원으로, 어디서는 미화원으로 존재한다. ‘손님은 왕’이라는 말은 우리가 손님이 아닐 때에는 왕보다 못한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평등은 속 빈 강정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주인이라고 선전하지만, 사실 그 평등은 자본을 갖지 못한 사람들끼리의 평등이거나 비슷한 자본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평등이다. 조지 오웰은 동구권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동물농장에서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욱 평등하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러한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하던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 역시 그 격언을 피해갈 수 없어 보인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어떤 인간은 더욱 평등하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멋진 말 뒤에는 사실 우리에게서 우리의 몫을 빼앗아가는 고약한 자본주의의 작동원리가 숨어있던 것이다. 손님이 왕인 세상보다, 그냥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더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손님일 때에만 왕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멀쩡한 세상인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왕으로 살고 싶지도 않고, 노예로도 살고 싶지 않다. 그저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소박한 이 바람이 실현되기까지 요원하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