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 일지(3)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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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철학 일지(3)

1)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 내가 어떤 논문을 쓴 것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가지고 석사 논문을 엮어 나가려 했지만, 그 당시 도대체 이빨조차 들어가지 않는 돌덩어리를 그냥 삼키듯이 쓴 것 같다. 부끄러워서인지 그 후 다시 석사 논문을 뒤져 본 적이 없다.

나는 1년 석사를 마치고 결혼도 하고, 다행히 경남대에 자리를 얻어갔다. 그 뒤 2년 반 동안 경남대 있었으나, 박사 과정 수업 때문에 마산에서 서울까지 매번 고속버스를 타고 오르내렸다. 무엇을 가르쳤는지, 무엇을 공부했는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그때 나는 아무리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일단 접어두고 그에 앞서 헤겔의 논리 자체를 이해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턱대고 헤겔의 (대)논리학을 읽어나가기로 했다. 강의와 박사 과정 수업 사이 혼자서, 조금씩 공부해 나갔으나, 이건 정신현상학보다 더 어려워 별 진척은 없었다.

헤겔의 논리학을 읽다가, 헤겔이 미적분학에 관해서 논한 부분을 발견했다. 약 100페이지에 걸친 상당히 긴 부분인데, 펠릭스 마이어 출판사사에서 헤겔 전집을 새로 발간하면서 이 부분은 제거해 버렸다. 다만 논리학 뒷부분에 일종의 이본에 해당하는 것으로 실어 놓았으니, 펠릭스 마이너 사에서는 이 부분의 진위를 약간 의심한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당시 라슨 판 논리학을 읽었는데 여기서는 이 부분이 본문 다음의 추가[Zusatz] 부분에 실려 있어, 일단 이 부분이 헤겔의 논리학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것은 인정하였다. 당시에는 펠릭스 마이어 판본이 없었으므로 나는 이 부분이 헤겔의 말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이 부분에 굉장한 흥미를 느꼈다.

나는 이때 헤겔의 미적분학을 연구해서 논문으로 발표했다. 나로서는 이 논문을 쓰기 위해 아마 생애 처음으로 진지하게 철학 공부에 몰두했다. 헤겔은 미적분을 다루면서 하나의 문제를 화두로 던졌다. 미적분 계산이 엄밀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계산 자체는 엄밀하지 않는데도 미적분학이 자연을 해석하면서 얻어낸 결과는 성공적인데, 헤겔은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히려 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이해하자면 미적분학을 이해해야 했고, 나아가서 헤겔의 수 개념 자체를 이해해야 했다. 헤겔의 수 개념을 이해하자니, 러셀의 수 개념이 생각났고 헤겔의 수 개념과 러셀의 수 개념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밝혀야 했다. 더구나 이런 수 개념을 통해서 어떻게 미적분학이 출현하며 마지막으로 헤겔의 제기했던 물음 대로, 왜 미적분학의 계산이 엄밀하지도 않으면서 실제로 자연 해석에 무리가 없는지를 알아야 했다.

나로서는 굉장히 힘들게 공부하고, 굉장히 장황한 논문을 작성했다. 아마 지금 이런 논문을 썼다면 어디에도 실리지 못했으리라. 나는 아직도 헤겔의 결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언젠가 이 부분을 다시 읽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다시 읽지 못했다. 다만 헤겔의 사유에서 미적분학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만 어렴풋하게 느낀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이 셸링을 통해 헤겔로 전해지면서 미적분학은 헤겔 논리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논문으로서는 실패했지만, 헤겔의 변증법을 이해하는 단서를 얻은 것으로 나는 만족했다.

2)

이 글을 쓰면서 과거에 내가 남긴 흔적을 찾아보려 했다. 당시 나는 우리나라 처음 나온 삼보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문서를 작성했다. 나중에 이 문서들은 따로 보관했던 것 같다. 아마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그 속에 집어넣었던 것 같다. 지금도 데이터베이스는 남아 있는데, 그것을 띄울 수는 없다. 그때 사용했던 프로그램이 폭스프로라는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인데, 지금은 이 프로그램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386 시대 프로그램이니 혹시 구하더라도 현재 컴퓨터에 구동되지 않을 것이다. 무슨 방안이 나서기까지는 당분간 기억에 의존해서 이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나는 박사 과정 수업을 들으러 마산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왔다. 그 사이 대학원에는 새로운 세대가 출현했다. 이 세대는 이미 학부 시절에 마르크스주의를 상당히 학습하고 올라온 세대였다.

당시 차인석 교수님이 사회철학을 강의하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을 소개했다. 주로 하버마스의 철학에 대해 강의하시고 대학원에서도 하버마스의 책 인식과 관심 등을 제자들과 함께 읽었던 것 같다. 새로 대학원에 입학한 후배 세대는 차인석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삼아 사회철학을 주로 연구했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철학을 헤겔에서 찾으려 하기보다 마르크스 자신의 고유한 철학을 찾아내려 했다. 나는 이들과 약간 생각이 달랐다. 마르크스에게 철학은 헤겔의 변증법이었다. 반면 이 후배 세대들에게 마르크스의 철학 즉 유물론이었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관심 또한 시대와 사회에 관한 관심이 철학적으로 우리를 서로 가깝게 했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후배 세대들이 중심이 되어 마르크스의 철학 책 가운데 대표적인 저서인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직접 읽어보자는 선동이 등장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누구도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원전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런 책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후배가 차인석 교수님의 댁에 그 책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때부터 차인석 교수님이 대학원에서 독일 이데올로기를 강독하도록 만들려는 유혹이 시작되었다. 어느 해 연말인지 새해 초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차인석 교수님의 댁을 방문해서 자리를 펼쳤다. 우리는 교수님에게 올해는 이 책을 강독하시는 게 좋지 않겠냐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강박 아닌 압박을 가했으니, 교수님이 알고 넘어 가주신 것인지, 아니면 교수님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그해 봄부터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기로 했다. 덕분에 그해 봄 우리는 차인석 교수님이 가진 독일 이데올로기 원전을 복사본으로 한 권씩 얻게 되었다. 교수님은 이 복사본이 다른 곳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각 복사본에 번호를 매겨 우리에게 주었다. 내가 받은 복사본은 4번이고, 현재도 그 4번 복사본을 가지고 있다. 내가 독일 이데올로기를 번역했을 때 대본으로 삼았던 책이 바로 이 4번 복사본이다.

이제 대학원에서 우리의 관심은 더 풍부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헤겔 변증법, 하버마스와 같은 사회철학, 마르크스의 유물론 철학 등이 풍성하게 논의되었다. 지금도 이 후배들 모습이 선하다. 그들은 헤겔은 지독하게도 싫어했으나, 선배로서 나에게는 무척이나 잘 대해주었다. 그렇다고 내가 헤겔을 버릴 수도 없었다.

3)

수업을 들으러 서울에 도착하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학교의 게시판과 벽 등 곳곳에 붙어 있는 대자보를 읽는 것이었다. 그 대자보를 읽는 것은 시대적 현실을 아는 통로였다. 좀더 관심을 가지면 소위 문건이라는 것을 구해 볼 수 있었다.

여러 흥미로운 문건이 있었고 이런 문건을 통해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토론과 더불어 새로운 운동 단체가 출현했으니, 이런 토론과 단체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변화를 보았고 거기에 희망을 보았다. 그때 출현한 문건이나 대자본 내용을 여기에 옮기는 것은 굳이 불필요하리라.

84년도 말경으로 기억한다. 특이한 문건을 하나 발견했다. 거기에는 독특한 철학적 개념이 들어 있었다. 그게 바로 품성 또는 심성이라는 개념이었다. 이 품성, 심성이라는 개념은 유물론적인 연원을 가진 개념이라기보다 낭만주의적 철학의 전통을 잇는 개념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실존철학의 세대였고 이 시대 철학이란 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것보다 인간을 심정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불안이라는 심정을, 사르트르는 구토라는 심정을 철학에 끌어들였다. 나는 대학 시절 빠져들었던 심정의 철학과 새로이 등장하는 심성, 품성의 철학이 친연성을 지닌 개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심성과 품성 개념은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개념은 우선 그 유래가 낭만주의적 철학에서 있는 것 같았으며 더욱이 심성과 품성은 매우 영웅주의적으로 해석되었다. 그것은 유물론적으로 당파성의 개념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현실주의적 측면과 충돌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비록 이 개념이 낭만주의적 철학의 전통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에서 인간 자신의 혁명이라는 개념이 있는 만큼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인간 혁명의 개념은 당파성 개념과 달리 계급적인 개념이라기보다, 인간의 심정적 실천적 의지의 측면과 관계된다고 보았다. 또한, 이 개념은 결코 영웅주의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개념이 등장하면서 대학과 지식인 사이에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니, 앞에서 83-4년도의 사회구성체 논쟁과 더불어 철학 논쟁으로 발전했다.

나는 이런 철학적 논쟁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무언가 커다란 역사적 전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헤겔이 말했듯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질 때 날게 되니, 올빼미가 날았다면, 이미 황혼 즉 여명이 다가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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