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 일지(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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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철학 일지(1)

1)

나는 최근 정신현상학을 전체적으로 소개하는 책을 냈다. EBS에서 주간하는 시리즈, 고전 해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정신현상학을 소개하는 책이다. 청년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자면, 전체를 꿰뚫는 줄기를 잡아서 내용을 단순화하여야 했다. 그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대체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이 어떤 잭인가?

정신현상학은 정체를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절대정신이 자기를 드러내는 역사적 과정이라고 알려져 있다. 헤겔 자신이 정신현상학의 서문에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대정신이 무엇인가? 대체 이 문제에 부딪히면 종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정신현상학의 전개과정은 헤겔 자신의 세계사의 과정과 그렇게 쉽게 상응하지 않으니, 과연 정신현상학이 역사적 과정일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혼란은 절망감을 낳는다. 대체 내가 머리가 나빠서 헤겔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헤겔이 미친 철학자인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점차, 대체 내가 왜 정신현상학을 놓지 못하고 대학원 시절인 19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무려 40년간이나 붙잡고 있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헤겔을 공부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철학자의 비난을 한몸에 뒤집어쓰는 것과 같다. 거슬러 올라가면 마르크스도 헤겔을 비난한다. 그는 스스로 변증법에 관해서는 헤겔을 계승했으나 이런 변증법을 헤겔의 관념론으로부터는 구출해야 한다고 믿었다. 현대에 이르면 헤겔은 이른바 동일성의 철학자로 비난된다. 그런 말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인 아도르노와 베르그송이나 들뢰즈와 같은 프랑스 철학자가 헤겔을 비판한다. 현대 분석철학에 이르면 헤겔은 언어의 마술에 사로잡힌 둔중한 철학자일 뿐이다.

나는 헤겔을 하면서 주변에 이런저런 철학을 하는 사람을 만나, 이런 비난을 듣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헤겔을 놓지 않았다. 물론 나는 40년간 헤겔만 공부한 것은 아니다. 나는 헤겔의 이해에서 절망감이 들 때마다, 헤겔을 내던지고, 다른 철학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연구한 대표적인 철학자만 해도 마르크스, 프로이드와 라캉, 영화 철학 등 상당하다. 그런데 그때마다 다시 헤겔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나는 남들이 누구나 인정하고 거의 비난 조 또는 한심하다는 투로 말하는 헤겔주의자인데, 대체 나를 헤겔로 끊임없이 되돌아가게 만든 그 힘이 대체 헤겔 그리고 정신현상학 어디에서 있단 말인가?

이런 고민을 밝히기 위해 나는 내가 헤겔을 왜 공부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헤겔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하는 일지를 작성해 보려 한다. 나의 철학의 일지가 되겠으나, 여기에 무슨 인생의 모험과 같은 인생샷은 없고 그저 머리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때로는 한심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번민만 나열될 뿐이니 흥미는 없을 것이지만, 후일 헤겔을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니, 번잡한 얘기라도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2)

헤겔주의자로서 내가 탄생한 것은 1980년 봄이었다. 나는 당시 대학원에 처음 입학학 신입생이고 한참이나 어린 후배들과 더불어 대학원에서 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 교정은 박정희 사후 전두환이 군부 권력을 틀어쥐고 국가 권력 장악을 위해 음모를 꾸밀 때였다. 그때 대학 교정에서는 전두환의 음모를 깨닫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막을 힘은 없었다. 학생들이나 재야 지식인들은 전두환의 음모를 막기 위해 거리로 나섰으나, 그것은 전두환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그해 4월이 되자 학생들의 저항 움직임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면서 저항의 시위는 가속화되었다.

대학원에 들어갈 때, 나는 현상학이라는 철학적 방법론을 공부하려 했다. 나는 대학 시절 학부 졸업을 후셀의 현상학의 이념이라는 책을 읽고 썼으며,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현상학을 가르치시던 윤명노 교수님을 인격적으로 존경하였기에 그분의 밑에서 현상학을 공부하려 하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시 대학원에서는 윤명노 교수님을 대신하여, 한전숙 교수님이 현상학 강좌를 개설했기에 한전숙 교수의 문하생이 되었다.

현상학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진리를 직접 인식할 수 있다는 본질 직관이라는 개념에 있었다. 현상학은 이런 본질 직관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언어 의미론으로 들어가서 의미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가르쳤는데, 당시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이 딱 거기에 들어 있었다.

내가 이처럼 현상학적 방법론을 연구하기로 결심한 것은 대학 시절부터 실존철학에 깊이 빠져들어 갔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니체의 책을 발췌하여 만든 ‘초인의 철리’라는 책)을 읽었고 대학 시절에는 조가경 선생의 실존철학을 옆에 끼고(당시 나의 영문과 친구는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옆구리에 끼고 있어서 나도 흉내 내려 했던 것 같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아름다운 말에 심취했다. 내 마음속에서 저런 언어가 막힌 것 없이 술술 자유롭게 흘러나오기를 기대했다.

또 나는 문학자로서 사르트르를 흠모했으며 사르트르처럼 살아보려고 밤 새벽까지 술을 먹고, 오전 늦게까지 자기를(당연히 모든 아침 수업은 땡땡이다) 반복했다. 유감스럽게도 사르트르처럼 호텔에서 살 수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나는 사르트르가 ‘현대’라는 비평지에 발표한 철학도 아니고 문학도 아닌 중간 상태의 글을 좋아했다. 그가 쓴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은 나의 성서이었고 ‘존재와 무’라는 그 두꺼운, 엉터리 번역 책(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책이다)을 이해하려고 고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 끝에 역시 실존철학의 기본적 방법론은 현상학이니 현상학을 이해하기만 하면 모든 게임은 끝이라는 생각으로 현상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3)

그런데 그해 4월 교정이 시위로 흔들리면서 우리 철학과 대학원생들은 점심 때면 교정을 산책하면서 다양한 대자보를 읽었고 저녁이면 술자리를 가지면서 시국과 철학에 대해 이런저런 논쟁을 거듭했다. 그런 가운데 이미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저항의 방법론으로 받아들인 후배들과 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선배 층은 후배 층의 너무 세속적인 말투에 충격을 받았고 반면 그 후배 층으로부터 낭만주의자라는 비난을 뒤집어썼다.

그때 어떤 논쟁이 있었는지를 지금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후배 층이 나에게 낭만주의라는 비난을 했다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남겼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 즈음해서 낭만주의의 한계를 점차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배 층의 비판은 이런 나의 자각이 마음의 표면으로 솟아오르게 한 역할을 했고, 지금도 나는 나를 그렇게 비판한 후배 층에게 속으로 무척이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70년대 초반 학번이다. 우리 학번은 내가 대학 4학년 시절 75년 김상진 열사의 의거를 기리는 저항의 봉화를 올렸으나 당시 박정희 정권에 의해 무참하게 유린되고 말았다. 나의 대부분 친구들음 감옥에 끌려갔고 나는 다행히 그런 군홧발을 피해 살아남았다. 그리고 1년 뒤 나는 졸업했고 군에 들어갔다. 그 일년 동안 나의 마음은 비참함으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독재 정권에 대한 무기력감에서 나는 한편으로 절망감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그때 나는 술주정뱅이로 전락했다. 거의 매일 아침에서 저녁까지 나는 술집에 앉아 있었다. 수업은 전폐했고 생활을 위해 대학 4년 내내 끊을 수 없었던 아르바이트는 심지어 술을 먹고 가기도 했으니, 매번 쫓겨나다시피 했고, 다행히 다시 또 얻었다.

나는 지금도 대학 졸업식이 생각난다. 나는 부모님은 졸업식에 참석하고 싶었던 것 같으나 나는 매정하게 졸업식 날짜와 장소를 알려드리지 않았다. 그때 졸업식에 박정희가 참석한다고 해서 보이코트 운동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침부터 술에 취해 졸업식장에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졸업식에 참석한 학생들은 행복했다. 꽃다발을 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당시 대학 졸업생의 취업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옆에는 많은 가족과 애인을 데리고 있었다. 나의 세상에 대한 절망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그날 벤치에 앉아서 졸업식을 하는 학생을 보면서 나는 내가 졌다고 생각했고 나는 무엇을 더하기도 싫었고 이 세상에 남아 있기도 싫었다. 나는 76년 대학을 졸업하자 군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79년 5월 다시 세상에 나왔다.

그때까지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의 논리는 사르트르나 실존철학의 참여 개념에서 나왔다. 그 관성에서 현상학을 공부하기로 했지만, 참여 개념에 기초한 낭만주의적 저항은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참여에 기초한 저항 개념과 다른 논리를 깨달을 수는 없었다. 그때 형은 낭만주의자요 하는 비판은 얼어붙은 내 마음의 빙판을 깨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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