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 일지(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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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철학 일지(2)

1)

80년 봄은 논쟁으로 무르익었다. 복학생 그룹과 재학생 그룹의 논쟁, 이는 정치적으로는 즉각적인 정치 투쟁이냐, 대중적인 학내 민주화냐 하는 논쟁이었고, 철학적으로 낭만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이었다.

나는 현실주의자의 비판을 내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현실주의는 옳았지만 낭만주의자로서 나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가 결여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때문에 마음이 요동치는 가운데 나는 어느 날 한 선배가 나에게 선물로 준 석사 졸업 논문을 읽었다. 그 논문 제목은 지금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헤겔 정신현상학 앞부분에 나오는 ‘주인과 노예의 투쟁’을 설명한 것이었다.

석사 논문이니 아주 간략한 것이지만, 나는 이 논문의 내용에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헤겔은 이 주노 관계에 대한 서술에서 노예가 어떻게 출현하는가, 그리고 노예가 어떻게 해방되는가를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려냈다.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주인은 자유를 얻었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자 했던 노예는 자유를 잃었다. 향락에 빠진 주인은 거꾸로 노예에 의존하는 존재가 되었고, 거꾸로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역사를 전복시키는 계급투쟁은 알다시피 물질적인 차원에서 힘의 관계이었다. 그런 힘의 관계에서 무언가 결여된 듯한 것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주어졌다. 헤겔에서 주노 관계의 전복은 정신적 투쟁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이런 정신적 투쟁이 마르크스의 물질적 계급투쟁보다 나에게는 더 깊고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독일어 원본인 훗셀의 ‘선험적 현상학의 이념’이라는 책을 옆에 끼고 있었다. 내가 헤겔에 전념하게 된 데에는 그해 광주 이후의 정신적 공황 상태가 있어야 했다.

2)

80년 봄은 짧게 끝났다. 5.17 광주에서 자행된 군부의 폭력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이후로 아무도 다시는 웃음을 웃을 수 없었다. 젊음의 찬란함은 사라졌고 정신적 공황이 지배했다.

학교가 문을 닫은 여름 내내 나는 패배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다시 술에 빠져들었다. 8월이 지나면서 어느날 아침 술에 깨서 나는 더는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이때 나는 다시 선배의 논문에서 읽었던 헤겔의 주노 관계를 떠올리게 되었다. 거기서 정신적인 힘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나도 헤겔을 공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월이 되면서 개학을 하게 되고 다시 대학원 연구실에 선후배들이 되돌아왔다. 당시 학교까지 집이 너무 멀었다. 무려 3시간이 걸렸으니, 나는 어느 선배와 대학원 연구실에 자고 먹고를 반복했다. 급기야 곤로와 담뇨를 가져왔고, 심지어 굴비 한 두름도 창문에 걸어 놓았다. 오직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에서만 학교를 나섰다.

이때 어떤 후배가 헤겔을 읽자고 제안했다. 그 후배가 헤겔을 읽자고 했던 것은 나와는 다른 생각이었다. 그 후배는 어느 날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형님, 레닌이 말했는데, 헤겔의 변증법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헤겔의 논리학 책을 읽자고 했다.

그는 학부에서는 하이데거 역사철학에 관심을 두었으나, 광주 이후 헤겔로 전향했다. 나와 철학적 이력이 비슷하였기에 우리는 죽이 아주 잘 맞았다. 이렇게 해서 대학원 내에서 헤겔을 공부하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당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직접 연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과학이고 그 고유한 철학은 헤겔의 철학이니, 철학도는 마땅히 헤겔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 모임이 유지된 논리였다.

헤겔을 읽는 모임의 수는 많지 않았다. 마침 어느 교수님이 해외 안식년을 떠난 후라, 교수님의 방이 비었다. 헤겔 논리학을 읽자는 후배는 그 교수님이 매우 아끼는 제자였다. 귀국한 교수님은 자신의 연구실이 담배꽁초와 술 냄새로 뒤범벅된 것을 보고 기절초풍하여 후배를 자신의 마음에서 추방하여 버렸다.

헤겔을 공부하면서 지도교수도 바뀌게 되었다. 다행히 역사철학을 하시던 이상철 교수님이 우리를 맡아 주셨다. 지금도 간염 때문에 일찍 돌아가신 이상철 교수님의 온화한 얼굴이 기억난다. 교수님이 좀 더 오래 살아 계셨다면 그 후 우리가 겪었던 많은 혼란을 그래도 덜 겪지 않았을까?

3)

9월 찬바람이 들면서 우리는 더욱 진지해졌다. 오직 헤겔만 안다면 역사를 들어 올릴 지렛대를 찾을 수 있다는 메시아적인 신념으로 우리는 헤겔을 읽었다. 하지만 헤겔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헤겔을 전공하신 교수님도 없었다. 이상철 교수님도 역사철학을 전공하실 뿐, 헤겔을 아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무턱대고 우리끼리 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하루 내내 헤겔을 붙잡고 있었지만, 하루에 한 페이지도 못다 읽을 때가 많았다. 조금만 읽으면 졸려서 책상에 엎드려 잤고, 깨어나서는 우리의 부족한 머리 때문에 역사가 지체되는 것 같은 죄책감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으나 어디서 헤겔을 이해하는 동아줄을 발견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헤겔 원전을 읽다가 도저히 안 되니, 헤겔의 해설서를 찾았다. 당시 많은 학생이 아마도 우리와 유사한 이유에서 헤겔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니 이런저런 헤겔 해설서가 영인되어 판매되었다. 헤겔의 해설서는 주로 서독에서 연구한 업적이었으며, 헤겔의 원전만큼이나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헤겔을 이해하는 데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런 해설서는 헤겔을 관념론자로서 해석하려는 딜타이, 가다머의 전통을 이어받는 것인데 마르크스의 철학을 헤겔에서 발견하려는 우리의 의도와는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이런 점에서 서독에서 흘러나온 헤겔의 해설서를 불신한다. 그러니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이해가 되든 안 되는 헤겔의 원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 씩 읽어 나가는 길 밖에 없었다.

이때 도움을 주신 분이 임석진 교수님이었다. 임석진 교수님의 박사 학위 논문을 번역한 후배가 매개되어, 임석진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교수님은 자신이 겪은 유학 경험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교수님은 마침 자신이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을 번역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를 격려해 주셨다.

우리가 임석진 교수님을 모시고 여러 번 술자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헤겔이 책을 놓고 함께 세미나를 하거나 한 적은 없다. 누구는 이런 모임을 일컬어 일차 헤겔 학회라 하면서 나중에 임석진 교수님을 모시고 헤겔 연구자들이 조직한 헤겔 학회와 구분하는데, 그것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학회라는 이름을 들을 자격이 없으며, 그저 교수님을 모시고 술자리를 하면서 헤겔연구와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나 충고와 격려를 들었을 뿐이다.

4)

헤겔을 연구하는 것은 내적인 어려움만은 아니었다. 외적인 어려움도 있었는데, 우리의 약간 비밀스러운(사실 비밀이라 할 것도 없었으나,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모이거나 공부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헤겔 공부는 곧 외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우선 교수님들이 무척이나 의아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헤겔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당시 운동권은 마르크스주의를 비밀히 학습하곤 했으니, 그런 모임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우리는 학내에서 갑작스럽게 긴장된 시선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철학적 토대를 발견하기 위해 헤겔을 연구한 것은 맞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직접 연구한 것은 아니다. 이런 긴장된 시선에서부터 학내에서 여러 불편한 관계가 출현했으나, 그런 것을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으리라.

철학적으로 더 문제는 당시 철학계를 지배한 아카데미즘이었다. 한국 철학계에서 아카데미즘은 60년대 후반 귀국한 철학 교수, 주로 당시 유럽에 번성하던 언어철학을 공부한 교수로부터 시작된다. 이때 국내에서는 국내 박사 학위 과정이 제도화하면서, 아카데미즘이 출현하였다. 1980년대 대학이 양적으로 팽창하면서(소위 졸정제 때문) 많은 학자가 등장한 것도 이런 아카데미즘의 발전에 기여했을 것이다.

아카데미즘이 강조했던 것은 철학적 언어를 엄격하게 사용하라는 것이었고, 철학적 연구를 논쟁의 방식을 통해 전개해야 한다는 정도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을 연구하던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이런 식의 아카데미즘에 대해 반발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철학에서 역사와 삶을 구원하는 메시아적인 힘을 발견하려 했는데, 이런 관점에서는 언어는 오히려 시적인 무게를 지닌 것이어야 했으며, 철학적 연구는 역사를 들어 올리는 힘을 지닌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수업시간이나 논문 발표 시간에 아카데미즘을 강조하던 철학 교수님들과 우리는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어리석은 짓이었다. 당시 아카데미즘을 강조하는 교수님들도 나름대로 철학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계셨을 것이다. 그들은 선배 세대들이 전개했던 소박한 철학 인생관에 가까운 철학에 반발감을 느껴 철학을 이런 소박함에서 구원해 철저한 학문으로서 철학의 명예를 회복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카데미즘에 경도한 철학교수는 그들의 선배들이 지녔던 인생관적 철학의 소박함을 다시 부활하려는 듯한 우리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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