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㊼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㊼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3 수호자들의 임무(419a- 427c)

 

4권 [419b-421c]

* 소크라테스가 사유재산 금지를 비롯한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과 관련한 언급을 마치자 아데이만토스가 끼어들어 누군가가 그런 생활 방식이 수호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뭐라고 변론할ἀπολογήσῃ 것인가를 묻는다. 그들은 나라가 자신의 것인데 이 나라 덕택에 누리는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처럼 땅과 집, 살림살이, 금화 은화도 소유하지 못하고 신들에게 제물도 못 드리고 손님 대접도 못해 마치 용병으로 고용된 보조자들ἐπίκουροι μισθωτοὶ같다는 것이다.(419a)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한술 더 떠 수호자들은 끼니 정도만 제공되고 여행도 못하며 애첩ἑταίραa들에게 선물도 못 주며 돈도 제대로 못 쓴다고 말하면서 그런 고발 거리로 말하자면 그밖에도 허다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τὸν αὐτὸν οἶμον πορευόμενοι 위의 의구심들과 달리 수호자들이 가장 행복하다εὐδαιμονέστατοι해도 전혀 놀랄θαυμαστός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라 말하면서 우리가 나라를 세우는 취지가 우리 안의 어떤 한 집단ἔθνος이 특별히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나라 전체 ὅλη ἡ πόλις가 최대한 행복해지는 데 있음을 환기 시킨다.(420a-b)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 정의가 가장 잘 발견될 수 있고 가장 나쁘게 세워진 나라에서는 부정의가 가장 잘 발견될 수 있으므로 그러한 고찰을 통해 우리가 오랫동안 탐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판정을 내릴 수 있음이 재확인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지금은 소수가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빚어내는 중이고 그 반대되는 나라도 이어서 살펴볼 것이라 말한다.(420c)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앞에서와 같은 고발 거리는 마치 생명체ζῷον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눈ὀφθαλμός을 검정으로 칠했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면서 각 부분에 적합한 것들τὰ προσήκοντα을 배당해서 전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운다. 요컨대 그런 비난들은 수호자에게 부적합한 행복εὐδαιμονία을 수호자들에게 부여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420c-d) 우리도 농부γεωργός들에게 금장식을 두르고 즐거움 삼아 땅을 갈게 하거나 도공κεραμεύς들로 하여금 술을 마시며 진수성찬을 즐기면서 만들고 싶은 만큼만 도자기를 만들 줄 알지만(420d) 그러한 경우 농부는 농부가 아니고 도공은 도공이 아니듯 나라 구성원들 그 누구도 제 역할σχῆμα을 못한다.(420e)

* 다른 사람들 이를테면 구두 수선공이 아니면서 그런 체하는 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지만, 수호자들인 체하는 사람들의 경우라면 그들은 나라 전체를 철저히 파괴한다. 나라를 잘 경영οἰκεῖν하고 행복하게 할 기회 역시 수호자들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421a)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지금 나라에 해를 가장 안 끼치는 진정한 수호자들φύλακας ὡς ἀληθῶς을 만들고 있음에도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나라가 아닌 다른 걸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수호자들을 임명할 때는 수호자들 사이가 아니라 나라 전체에 행복이 생길지를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로 하여 자신들의 일에 대해 가능한 한 최고의 장인δημιουργός들일 수 있도록 강제하고ἀναγκαστέον 설득해야πειστέον 한다.(421b) 다른 모든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라가 모두 다 함께 성장하고 훌륭하게 기반이 잡히면 그때 가서 각 집단이 자연적 성향 ἡ φύσις에 맞는 행복에 참여하도록 우리가 놔두어도 될지 살펴봐야 한다.(42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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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테파누스 쪽수가 419a에서 420a로 건너뛴 것은 스테파누스 플라톤 전집 원본 체제로 419쪽 b-e부분은 4권과 관련한 주석 등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고 본문은 다음 쪽에서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쪽수의 건너뜀은 권이 달라질 때마다 나타난다.

* 애첩ἑταίραa(420a) : 뷔데판 불어 역본에서는 ἑταίρα를 여행 동반자로 번역하고 주석에다 부유한 아테네인들이 여행 중에 애첩을 동반했다고 기술해 놓았다.

* 419a에서 ‘다른 사람들’οἱ ἄλλοι이 가리키는 대상을 이상 국가 내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권력자들로 해석하는 주석가들이 있다.(J. Adam 등) 물론 이상국가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테이만토스가 그냥 당대 아테네 부유층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다. 제1권에서 아테네 거류 외인이자 부유층 노인 케팔로스는 손님도 대접하고 집안에 제단도 갖추고 제물도 바칠 정도로 풍족하다.

*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τὸν αὐτὸν οἶμον πορευόμενοι(420a)에서 같은 노선이란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노선 또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노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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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권은 사유재산 금지를 비롯한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대한 의구심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제5권에서도 4권 말미에 제기된 소크라테스의 과격한 제안들에 대한 의구심으로 시작된다. 제4권 말미에 제기된 제안들이 남녀평등 및 처자 공유 등 훨씬 과격한 제안들임을 고려하면 제4권의 서두 역시 제5권 서두에서 본격적으로 제시될 의구심과 반론들에 대한 예비적 서론의 성격을 갖는다.

* 아데이만토스의 의구심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 의구심들과 달리 수호자들이 가장 행복하다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며 나라를 세우는 취지는 어떤 한 집단이 아닌 나라 전체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의구심에 대한 변론 대신 그와 정반대의 결론부터 내놓는다. 다만 변론의 단서가 하나 있다.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 노선이 다름 아니라 애초 논의의 출발점이 그랬듯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은 부정의한 나라와 개인과 달리 모두가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노선임을 환기시킨다. 그에 따라 부정의한 나라에 대한 고찰도 이어질 것이라고 예고한다.(420c) 실제로 플라톤은 제8권에 가서 가장 부정의하고 불행한 나라와 개인들의 경우를 끌어들여 실제 현실에서 우리들이 부딪치는 현실적 정의와 행복의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분석 검토하고 그것을 토대로 최종적인 판정을 내린다.

* 수호자들이 남들 보기에 가혹한 생활 여건 속에서도 왜 행복한 사람들인지 그리고 수호자들은 왜 나라를 지키는 힘든 임무들을 기꺼이 감당해야 하고 또 감당하는지는 <국가>의 중요한 주제를 형성하면서 앞으로 보다 자세하게 논의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예비적 서론의 성격을 갖는 이 부분에서도 비유를 통해서나마 그 기본 원칙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즉 인간은 생명체로서 여러 신체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존재이다. 그리고 그 신체 기관들은 각기 고유하고도 다른 기능들을 가진다. 각기 고유하고도 다른 기능들이 있다 함은 각기 자신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걸맞은 고유한 특색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 고유성과 무관한 어떤 것을 그저 남들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에 획일적으로 적용할 경우 오히려 그 고유성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나라라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개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개인들은 태어날 때 각기 서로 다른 천성과 소질을 갖고 태어나므로 사람들 모두 각기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정의롭고 좋은 나라가 되려면 구성원들 모두가 행복해야 하므로 각기 자신의 천성과 소질에 맞는 역할이 부여되어야 하고 그 역할을 보다 잘 해낼 수 있도록 나라는 그들에게 그에 걸맞은 교육과 양육을 끊임없이 베풀어야 하고 그러한 역할의 부여와 교육과 양육의 과정들이 과연 적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천성 또한 가능성이지 필연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 요컨대 이상 국가의 구성원들은 태생적인 요인과 그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교육의 영향으로 기본적으로 욕망의 구조가 서로 상이하다. 어떤 이들은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어떤 이들은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나라 지키는 일을 좋아하고 어떤 이들은 농사를 짓거나 뭔가를 만들기를 좋아하며 어떤 이들은 장사를 좋아한다. 사실 이러한 플라톤의 본성론은 사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 그리 낯선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태생적인 측면만 고려하면 오늘날 획일적인 인간관이 훨씬 낯설고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린이들은 성장하면서 자신의 적성과 소질보다는 부와 출세 욕망에 기울도록 순치되면서 오늘날 인간의 욕망은 이기적인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되어 마치 그것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인 양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한 시대의 사회적 변화가 초래한 획일화된 욕망을 마치 태생적인 본성인 양 고착시킨 근대인들과 다르게 아테네의 물질적 이기주의를 다만 당대의 사회적 격변이 초래한 자연적 본성의 왜곡과 타락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전복하는 사회적 변혁과 일관된 교육을 통해 인간 본래의 자연적 본성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획일적인 물질적 욕망에 시달리며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고 갈등하는 사회적 현실에 저항하며 그와 전혀 다른 우주적 자연에 걸맞은 정치 사회적 변혁 즉 태생적으로 서로 다른 욕망들의 조화와 공존이 관철되는 사회적 변혁을 꿈꾸었고 그에 따른 기본 원칙과 실천적 전략으로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 그러나 어쨌거나 정의와 행복이 일치하는 나라를 보다 완전하게 뒷받침하려는 소크라테스의 논의 노선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런데 미리 유념해두어야 할 것은 종국에 가서 정의와 행복이 일치하는 나라와 개인이 확립되고 논증되었다고 하더라고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다만 본(本, paradeigma)으로서 확립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472c-d) 즉 그러한 정의로운 나라의 구현이 수호자들의 목표로 설정되어도 본이 반드시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구현 능력으로서 영혼의 수준이 늘 변수로 개입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도 완벽한 수준의 교육이 담보되지 않는 한, 수호자들이 실제 현실에서 자기들의 책무를 지속적이고도 일관되게 수행하기를 힘들어하고 언제든지 그것을 거부하고 나쁜 방향으로 갈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플라톤이 수호자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단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로 하여 자신들의 일에 대해 가능한 한 최고의 장인(dēmiourgos)들일 수 있도록 강제하고 설득해야 한다.’(421c)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제와 설득은 자발성의 한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되 그 자체로는 대립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두 가지가 함께 섞여 있다. 교육과 훈련이 최상의 단계로 이루어져 최고의 장인이 되면 거의 자발적인 수준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늘 교육과 훈련의 방향과 반대로 될 가능성이 늘 함께 있다. 강제는 나쁘게 될 가능성에 대한 대처 방안이고 설득은 더 좋게 될 가능성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는 함께 공존한다. 이렇듯 플라톤에게 나라와 개인에 있어 지적 훈련은 존재론적으로 늘 가변적인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그 자체로 긴장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나라가 모두 다 함께 성장하고 훌륭하게 기반이 잡혀도 각 집단이 과연 자연적 성향에 맞는 행복에 참여하는지 늘 지켜보아야 한다.(421c) 이점에서도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존재론 그리고 교육론은 하나로 만난다.

 

[421c-423d]

*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문제 제기에 답한 후 그 문제와 형제가 되는 문제를 이야기하겠다고 말한 후 다른 장인들을 망치고 나쁘게 만드는 것들로서 부πλοῦτος와 가난πενία을 제시한다.(421d) 왜냐하면 부는 장인들로 하여 기술에 관심을 덜 기울이게 하여 게으르고 나태하게 만들고, 가난은 기술에 필요한 장비나 다른 어떤 것을 갖출 수가 없게 하여 일도 더 형편없게πονηρός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들이나 그가 가르치는 다른 사람들을 더 나쁜 장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421e) 즉 가난과 부는 기술의 결과물τά ἔργα은 물론 그 자신도 더 나빠지게χείρων 만든다. 결국 수호자들 몰래 나라로 기어서 들어가지 않도록 어떻게든 지켜야 할 것들 즉 부와 가난이 찾아진 셈이다. 부는 사치τρυφή와 게으름ἀργία과 변혁νεωτερισμός을 불러일으키고 가난은 변혁은 물론 옹졸함ἀνελευθερία과 기량저하κακουργία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422a)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나라가 재물χρήματα을 갖지 않고 크고 부유한 나라를 상대로 어떻게 전쟁을 치를 수 있는지를 묻는다.(422b)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런 나라 하나를 상대로는 더 어렵지만, 두 나라를 상대로는 더 쉬울 것이라고 말하고 아데이만토스는 다시 그 말의 의미를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은 전쟁의 선수ἀθλητής로서 가장 훌륭하게 훈련된 한 명의 권투선수πύκτης가 권투를 모르는 부유하고 살찐 두 명을 이길 수 있듯이 아무리 수가 더 많다고 하더라고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말한다.(422c) 게다가 설사 부자들이 권투기술에 대한 앎ἐπιστήμῃ과 경험ἐμπειρία에서 수호자들보다 더 많이 갖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전투 기술은 갖고 있지 못하므로 수호자들은 자신들보다 두세 배 많은 사람과도 쉽게 싸울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422c-d)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두 나라 가운데 한 나라에 사절단을 보내 이 나라에서는 소유가 금지되어 소용이 없는 금화와 은화를 주는 조건으로 연합 전쟁을 제안할 경우 그 나라는 다부지고 날렵한 개들과 싸우기보다 개들과 한편이 되어 허약한 양떼와 싸우기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한다.(422d)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렇게 해서 만약 다른 나라들의 재물이 한 나라에 집결된다면 그로 인해 부유하지 않은 나라가 위험에 처하게 되진 않을까 재차 의문을 표한다.(422d)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런 나라도 나라라고 부를 만하다 여기니 속 편한 사람이라고 힐난하고 그런 나라들은 놀이를 하는 사람들 말처럼 각기 ‘수많은 나라들’πάμπολλαι이지 ‘나라’πόλις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나라들은 어떤 경우이든 서로 적대적인 두 개의 나라 즉 가난한 자들의 나라와 부유한 자들의 나라를 가지고 있고(423e) 이 두 나라 각각 안에도 아주 많은 나라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나라들을 하나μία로 보지 말고 여럿으로 보고 대응하여 한쪽 편에 다른 편의 재물과 권력을 주거나 그 사람들 자체까지 주면 언제나 동맹군은 많이, 적은 적게 갖게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식으로 절제 있게 나라가 운영될 경우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들οἱ προπολεμοῦντες이 천χίλιο명만 있더라도 그 나라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큰 나라이자 하나인 나라이며(423a) 이런 나라는 그리스 사람Ἕλλην들 사이에서도 이민족βάρβαρος들 사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규모와 크기 그리고 영토와 관련한 가장 훌륭한 기준ὅρος을 제시한다. 즉 나라를 키우더라도 하나일 수 있는 선까지만 키워야 하며 이에 따라 수호자들에게도(423b) 어떻게 해서든 나라가 작은 나라 또는 큰 나라로 여겨지지도 않고 다만 하나이면서도 충분한 나라게 되게끔 수호하라고 임무πρόσταγμα를 부여해야 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임무는 그들에게 쉬운 임무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쉽기로 말하면 앞서 말한 임무 즉 수호자들의 태생과 계층 이동과 관련한 임무(415b)가 그보다 훨씬 쉬운φαῦλος ἴσως 임무라고 말한 후 그 말의 취지가 다른 시민들도 ‘각자가 저마다 자신이 타고난 본성에 맞게 한 가지 일을 맡아야 한다.’πρὸς ὅ τις πέφυκεν, πρὸς τοῦτο ἕνα πρὸς ἓν ἕκαστον ἔργον δεῖ κομίζειν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다시 또 환기한다. 즉 시민들이 자기의 일 하나에 전념함으로써ἐπιτηδεύων 각자가 여럿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되도록,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해서 온 나라가 여럿이 아니라 한 나라ἡ πόλις μία로 자라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423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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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혁νεωτερισμός(422a)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한 급진적 변혁의 시도(to attempt anything new, make a violent change) 즉 혁명에 준하는 일종의 정치·사회적 변혁을 의미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부와 가난은 나라와 기술의 결과물은 물론 자기 자신도 나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 말은 부와 가난은 개인 차원에서도 영혼의 변화 그것도 변혁에 가까운 급격한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시쳇말로 적도(適度) 이상의 부와 가난은 사람을 돌게 만든다.

* 옹졸함ἀνελευθερία(422a)은 자유ελευθερία라는 말에 부정어 ἀν이 붙은 것으로 말 그대로 자유민답지 못함, 노예근성, 옹색함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 권투의 비유(422c)는 이중적이다. 선수의 비유는 전문성과 비전문성을 대립시킨 것이고 기술의 비유는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기술과 여러 사람의 통솔과 관련된 기술을 대립시킨 것이다.

*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들οἱ προπολεμοῦντες이 천χίλιο명만 있더라도’(423a) 이 구절은 수사적 표현일 수도 있으나 이상국가에서 수호자 집단의 머릿수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적정 규모의 인구를 <법률>의 신생 국가 마그네시아의 인구( 총5040세대 즉 가족이나 노예를 포함해서 약 최소 3-4만명 정도)로 추산해도 수호자들의 수는 전체 인구에서 4%를 넘지 않는다. 참고로 당대 아테네의 인구는 25-3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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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은 <국가>에서 수호자들의 임무를 단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어 주고 있는 부분이다. 수호자의 임무는 말 그대로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수호는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막는 것과 내부에서 생기는 내분이나 내란을 막는 것으로 나뉜다. 그런데 플라톤에게 이 두 가지 임무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이 임무들을 수행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은 단 하나 즉 나라의 분열을 막는 것이다. 그러니까 후자의 임무 즉 내분을 막으면 자연스럽게 외부로부터의 침입도 막을 수 있다. 분열은 나라를 수호하는 데 가장 나쁜 요인이다. 이것은 적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적군을 분열시키고 동맹군을 만드는 것이 나라 수호의 최선의 전략이 된다. 요컨대 나라를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 수호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그런데 나라를 하나로 만드는 것에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가 다름 아닌 부와 가난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평화 시에 수호자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임무는 전술과 전략의 개발과 전투력의 증강 이전에 나라 안에서 부의 편중과 그로 인하여 생기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적대적 대립을 막는 것 즉 부와 가난의 양극화를 막는 것이다.

* 수호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분열을 막는 것이고 그 분열의 근본 원인이 부와 가난이라 함은 뒤집어 말해 플라톤 역시 그의 경험과 인식 속에서 나라의 존망을 해치는 가장 큰 위험 요인이 다름 아닌 경제적 모순이라는 사실을 이미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통찰을 통해 생산 관계의 모순을 사회 변동의 근본 원인으로 파악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생각과 일정 부분 닿아 있다. 다만 플라톤은 그 모순을 미리 해소하려는 입장이고 마르크스는 그 모순을 역사 과정의 필연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변혁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러나 정치체제 변동과 관련하여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경제적 모순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두 사람 간에 차이가 없다. 그만큼 플라톤에게도 경제적 문제는 정치의 지상과제였다.

* 다른 나라의 재물이 한 나라에 집결하였을 경우 그 부유한 나라를 적국으로 두었을 때 대처 방안도 결국 부와 가난의 문제가 답변의 관건을 구성한다. 한 마디로 플라톤은 다른 나라의 재물을 가져다 부유해진 나라는 ‘한 나라’(mia polis)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나라와 부유한 자들의 나라 또는 그 이상의 나라들로 분열된 ‘수많은 나라들’(panpollai)이므로 그 나라 역시 분열책에 의해 제압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오히려 절제 있게 운영되는 나라야 말로 비록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들이 천명만 있을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큰 나라이자 하나인 나라이다.(423a)

* 여기서 다른 나라의 재물을 갖다가 부유해진 나라는 다름 아닌 당대 제국주의 아테네를 가리킬 것이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단합하여 부유한 나라 페르시아를 물리쳤지만, 그 후 아테네 동맹이란 이름으로 다른 폴리스들의 재물을 모아 강대한 제국으로서 부를 누렸다. 그러나 아테네는 같은 그리스 민족인 스파르타와 분열하여 오랜 기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빈부의 양극화가 초래한 내분에 시달리면서 결국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 다른 나라를 상대로 싸울 때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대비책은 일종의 두 나라 사이를 분열시키는 대책으로 한 나라를 금과 은으로 유인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복잡한 국제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한 나라의 안보 관련 전략치고는 너무 단순하고 순진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나라의 안보를 담보하는 가장 큰 방책의 하나가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고 그 동맹 여부를 결정하는 큰 요소가 경제적 이익임을 고려하면 최소한 전략의 대원칙에서는 크게 다를 것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상 국가에서 동맹을 위한 경제적 유인책으로서 금과 은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금과 은이 이상 국가에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수호라는 가장 중요한 목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만큼 중요한 소용 가치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상 국가에서 통치자나 개인 모두 금과 은의 소유가 금지될지언정 이상 국가 또한 국유재산으로서 금과 은의 축적을 중시하는 나라 즉 국부까지 소홀히 하지는 않는 나라라 할 것이다.

* 그러함에도 강대하고 부유한 나라들에 대한 플라톤의 시선은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일단 강대하고 부유한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한 나라가 아니라 부자의 나라와 가난한 나라로 나뉘어 있고 그 두 개의 나라는 또 더 많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부유하면서도 분열되지 않은 나라는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기본 관점이다. 그러나 과연 그의 생각은 오늘날 우리들의 경험 속에서도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이를테면 오늘날 북구 유럽 등 복지 국가들은 부유하면서도 나름 안정적인 통합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플라톤이 왜 그런 견해를 갖게 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한 플라톤 견해의 배경에는 인간 본성과 욕망구조의 변화와 관련한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입장이 자리하고 있다. 플라톤의 인간 본성론은 수차 언급했지만, 태생적으로 다르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소질과 욕망 또한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이상 국가의 목표는 구성원들로 하여 그 다양한 소질과 욕망에 따라 역할을 수행케 하고 그에 따른 자신만의 고유한 성취와 행복감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은 제8권에서 그러한 본래의 자연적 욕망구조가 현실 국가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타락되는지도 함께 보여준다. 그 타락의 과정을 쉽게 요약하자면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어 이기적 물질적 욕망에 물 들은 권력자들이 권력을 부의 축적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부의 부당한 착취와 편중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애초 다양한 소질과 욕망을 갖고 서로 공존하던 사람들마저 각자도생하게 되고 결국 모든 사람의 욕망이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왜곡되고 획일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욕망으로 서로 다른 가치를 성취하며 각기 고유한 행복감을 누리던 사람들이 이기적 욕망으로 변질하면서 권력자들에 대한 의심은 물론 이웃들까지 부의 획득을 위한 경쟁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에 따라 결국 서로 다른 것들끼리의 조화와 공존 대신 구성원들 모두에 대한 구성원들 모두의 경쟁적 싸움과 배타적 의심의 체제로서 민주정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민주정 하에서 이기적 경쟁과 불신 그로 인한 누명과 소송이 일상화되면서 결국 유전무죄, 무전유죄, 부익부 빈익빈이 초래되고, 그에 따른 민중들의 변혁 욕구와 선동정치가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참혹한 참주정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물론 플라톤의 이러한 분석의 배경에는 그가 겪은 당대 아테네 제국주의의 폐해가 자리 잡고 있지만 프롬(E. Fromm)도 시사하고 있듯이 오늘날 현대 파시즘의 등장 배경과 관련해서도 탁월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 오늘날의 세계사적 현실 또한 신자유주의와 형식 민주주의가 찰떡같이 결탁하여 견고하게 똬리를 튼 이래 나라와 개인들 모두 부의 축적을 지상의 가치인 양 목매고 있고 그 결과 나라들 사이는 물론, 한 나라 안에서도 극단적인 수준의 빈부 양극화가 이미 고착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북구의 복지국가마저 강대국들의 위협에 둘러싸여 분배보다는 총량적 성장을 위한 정책으로 돌아서고 있고 효율 지상주의와 거대 자본이 결합한 정보 산업의 급속한 발달은 그에 비례하여 기존의 국가 간 개인 간 양극화의 골을 가히 불가해의 수준으로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부유한 나라는 있어도 분열되지 않은 나라는 없다는 플라톤의 견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성을 갖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면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를 수호하는 데 결정적인 관건이 되는 빈부 양극화 문제를 플라톤은 어떻게 해결하려 했을까? 다시 말해 이상 국가의 수호자들은 자신들의 핵심 임무인 부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어떤 구체적인 임무들을 수행해야 할까? 우선 소크라테스는 분열되지 않은 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나라의 규모와 크기 그리고 영토와 관련하여 매우 절제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나라를 키우더라도 하나일 수 있는 선까지만 키워야 하고 이에 따라 수호자들에게도 어떻게 해서든 나라가 작은 나라 또는 큰 나라로 여겨지지도 않고 다만 하나이면서도 충분한 나라가 되도록 수호하라고 임무를 부여해야 한다.(423b) 요컨대 아테네 제국이 수행했던 패권주의적 침략 전쟁을 중지하고 부국강병의 책무는 나라의 방어와 시민의 안정적 삶에 충분할 정도만 목표로 삼아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나라를 어찌 나치 제국과 연관시킬 수 있을까?) 아무려나 플라톤의 이러한 제안 역시 오늘날 패권주의가 판치는 현실에서 보면 순진할 수밖에 없으나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이 그렇듯이 그것이 갖는 정치철학적 함의는 꺼지지 않는 불길이 되어 앞으로 정치적 변혁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추동하는 정치적 대의로 시대의 어둠을 밝히게 될 것이다.

* 참고로 빈부 격차의 해결 방안과 관련하여 <국가>가 이러한 대원칙을 표방했다면 <법률>은 빈부의 격차를 막기 위한 이보다 훨씬 더 세부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크레테 원주민과 이주민으로 세워지는 새 나라는 기존에 소유하고 있었던 재산 때문에 재산들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 시민들은 재산에 따라 4개 등급으로 구분되지만 최초 집과 토지는 공평하게 분배되며 재산의 경우 또한 비록 최하위 등급일지라도 최소한 가난함의 한계로 설정된 기준 이상의 기본 재산이 할당된다. 물론 이 등급은 재산의 변화에 따라 바뀌지만 아무리 부를 늘리거나 이미 최상위 등급으로 있다 해도 최하위 등급에게 부여된 기본 할당 재산의 4배를 넘게 소유해서는 안 된다. 만약 어떤 행운에 의해 그 이상의 초과분을 획득했을 경우 초과분의 절반은 세금으로 나라에 바쳐야 하고 기타 세금은 모두 공적 장부에 등록된 소유 재산의 기준에 따라 다르게 부과된다.(<법률> 744c-745a)

* 이렇듯 오늘날 우연적 행운에 의해 발생한 이익 중 일부를 중과세 제도를 통해 우연적 불운에 의해 초래된 손실에 벌충해 주는 복지 제도 또한 플라톤에서 기원한 것이다. 오늘날 정례 수익이나 연봉에서 최하 등급과 최고 등급의 차이가 10배 정도도 아니고 100배를 넘는 경우도 허다하고 상류층 5%의 재산 총액이 나머지 계층 95% 사람들의 재산 총액과 맞먹는다는 것을 만약 플라톤이 안다면 크게 충격을 받을 것이고 게다가 그러함에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 기절까지도 했을 것이다. 사람의 능력과 가치를 재산으로 환산하는 반인권적 작태가 이미 일상화된 오늘날이기는 하지만 특수한 경우의 상여도 아니고 평균적인 급여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100배가 넘는다는 것은 한 인간이 평균적인 능력에서 100배 이상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그 또한 인권 침해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이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기득권적 권력과 자본의 억압구조 또한 무서울 정도로 견고하다.

* 나라의 규모와 영토 관련 임무보다는 비교적 쉬운 임무이지만 그래도 수호자들이 수행할 가장 중대한 임무는 앞서 말한 대로 구성원들 각자에게 자신의 고유한 소질과 적성에 맞게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맡아 일하게 하여 구성원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사상은 공리주의와도 크게 다르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토대로 다다익선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소수자의 희생과 불행을 불가피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누구도 예외 없이 자기 욕망을 구현하고 구현한 만큼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 이곳 플라톤의 말 그대로 ‘시민들이 자기 일 하나에 전념함으로써 각자가 여럿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되도록,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해서 온 나라가 여럿이 아니라 한 나라로 자라도록 만들어야 한다.’(423c-d) 지장보살이 지옥에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극락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면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이 결코 한 사람이라도 있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1261a17~1261b15에서 소크라테스가 여기에서 언급한 내용 즉 ‘나라의 하나 됨’에 주목하여 플라톤이 나라가 갖는 개별적 다수성(plēthos) 내지 다양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총화단결을 외치는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으로는 타당하지만, 내부적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욕망과 소질을 가진 구성원들의 조화와 공존을 바탕으로 하나의 나라를 구축하려는 플라톤에 대한 비판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경험적으로 드러난 개별적 사회 현상들과 제도 및 체제에 크게 주목한다. 그러한 까닭에 그의 해석들은 개인 영혼에 대한 형이상학적 분석을 토대로 나라 구성원 전체의 조화를 해명하려는 플라톤의 영혼의 정치학을 이해하는 데 일정 부분 한계가 있다.  -끝- (1-3-3 수호자들의 임무(423e- 427c) 계속)


 

박선 지음, 『카메라 소메티카』(갈무리, 2023) 서평 – 박소연 [철학자의 서재]

신체를 경유해 감각하는 영화 이미지의 시대 – 『카메라 소메티카』 (갈무리, 2023) 서평

 

박소연(영화연구자, 수원대/성신여대 강사)

 

영화가 회화의 세계에 접속하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카메라 소메티카』의 분석 대상인 영화가 회화를 참조하는 방식은 조금 특별하다. 이 책은 분명 회화, 화가, 미술관 내/외부, 관람객을 소재로 한 영화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다루고 있지만, 회화 작품이나 미술관을 단지 소재주의적 차원에서 주목하는 데서 그치거나, 영화와 회화의 상호 매체적 관계를 관습적인 방식으로 분석한 책이 아니다. 저자가 세심하게 선별한 영화는 하나의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회화 작품이나 이를 구성하는 회화 담론을 매개함으로써, 회화와 영화가 공존하는 접경지대에서 발생하는 감정적이고 정동적인 화학작용을 감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화학작용이란 영화 속의 관람객, 그리고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 주체의 인지적 경험을 말한다. 말하자면, 『카메라 소메티카』는 미술(관)의 관람성과 영화의 관객성을 중첩시킨 영화를 인지주의적인 차원으로 접근하여 해석하고 분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저자는 오늘날의 포스트 시네마 관객성이 완전히 새로운 무엇이 아님을 강조한다. 뉴미디어 시대의 수용자가 신체와 감각을 통해 체험하고 전유하는 정동은 과거에 카메라 옵스큐라의 사진 이미지가 담고 있는 정서적 잔여물과 일맥상통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관객의 신체를 경유해 감각하는, 이른바 “복제 이미지의 신체화로서 카메라 소메티카”(17)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저자의 이러한 개념은 동시대 맥락에 적용되거나 재고된, 바쟁, 벤야민, 바르트의 개념이나 논의를 포괄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카메라 소메티카』의 구성을 살펴보자.

 

회화를 생동하게 하는 영화의 활인화

1장과 2장에서 다루는 <풍차의 십자가>(2011)와 <셜리에 관한 모든 것>(2013)은 회화가 생산하는 고정된 의미를 해체하고 확장하는 영화 매체의 활인화 사례로서 등장한다. 브뤼헐의 <갈보리 가는 길>을 활인화 한 영화 <풍차의 십자가>는 회화 속 탈중심화된 인물들을 영화적 몽타주 형식으로 소개함으로써, 폭정의 희생양이 된 플랑드르 사람들의 역사적 현실을 드러내고, 관객이 일방적인 해석이 아닌 개인적인 해석을 가능케 만든다. 저자는 <풍차의 십자가>가 취한 형식적 시도가 회화 작품의 고정성과 폐쇄성을 해체하는 작업이며 이는 바쟁이 제기했던 “재현의 탈인본성(58)”을 구현하고, 나아가서는 완전 영화를 추구하는 사례임을 주장한다.

또 다른 활인화의 사례인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호퍼의 회화 속 여성 인물들에 셜리라는 이름과 일관된 정서를 부여하고, 회화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의 배경에 배치하여 관객을 디제시스 세계로 초대한다. 이 같은 방식은 셜리의 내적 정서를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과 연동시키고, 개인과 역사의 교직 속에서 호퍼 그림을 지배하는 고독감을 궁극적으로 에로스적 생명력으로 재탄생시켜 관객과의 교감을 꾀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재매개를 통해 경험을 추체험하기

3장과 4장에서 다루는 <잊혀진 꿈의 동굴>(2013)과 <유메지>(1991)는 각각 동굴 벽화를 남긴 구석기 인류와 화가 유메지의 경험을 영화의 재매개를 통해 추체험하게 하는 영화다. 저자는 유물로서 쇼베 동굴 벽화를 포착한 베르너 헤어조크의 다큐멘터리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2013)을 분석하면서 이 영화가 기존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구별되는 지점은 “동굴벽화를 재현하는 방식과 그 재현 방식의 인지적 효과”(124)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가 구석기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재매개하는 방식은 동굴을 찾아온 사람들로 하여금 구석기 인류와 현대 인류의 유사성을 인지하게 하고, 나아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인 숭고까지 경험하도록 만든다. 이때, 관객은 영화가 재매개하는 벽화동굴 방문자의 이중 숭고 체험을 통해 쇼베 동굴 벽화를 수용하게 된다.

<유메지>(1991)는 화가 유메지가 자신의 창작활동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모습을 줄곧 담는다는 점에서 화가의 전기를 담는 관습적인 화가영화와 구별된다. 더욱 특기할 점은 스즈키 세이준은 유메지가 겪는 창작 불능의 고통을 “현재와 과거, 현실과 몽상, 회화와 영화의 이종적 이미지를 공존”(167)시킴으로써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 간극의 공존 속에서 관객은 분산적으로 유메지의 상태를 지각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근대 일본이 봉건 이데올로기와 서구 지향적 모방 의식 사이(166)”에서 방향성을 잃고 창작 불능에 빠진 예술가로서 유메지가 드러나게 된다.

 

초국적 공간에서 다변화된 관객의 시선

5장과 6장은 미술관과 박물관의 새로운 관객성을 포착한 영화를 분석한다. <뮤지엄 아워스>는 관광지와 미술사 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를 통해 지구화 시대의 근대성을 성찰하는 영화다. 특히 저자는 지구화를 근대성의 연장선으로 간주하고 벤야민이 근대성의 핵심으로 본 소요객의 이중적 정체성을 주인공 요한에게서 발견한다. 영화는 소요객이자 노동계급 도시인으로서의 요한을 통해 19세기 예술가 지식인과 구별되는, 근대성에 대한 시선과 자의식을 발견해낸다. 이는 “아우라가 대상에 귀속된 성질이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인간 정서”(234)로 보는 탈근대적 관점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

6장은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과 영국 내셔널 갤러리를 무대로 삼은 두 편의 다큐멘터리 <프랑코포니아>와 <내셔널 갤러리>가 “미술관과 예술 담론의 다층성”(249)과 “초국적 공간에서 다변화된 관객의 시선”(281)을 드러내는 방식을 주목한다. <프랑코포니아>가 루브르 박물관을 구성하고 있는 창작자, 권력자, 민중의 관계망을 영화적인 중첩 서사로 가시화한다면,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관 속 예술작품이 독자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기보다 “현재적이고 관계적인 양상 속에서 끊임없이 그 의미가 재구성”(270)되는 풍경을 관찰하고, 제도로서 미술관이 예술성과 대중성 그 사이 어딘가를 지향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저자는 두 영화가 각각 미술관의 안과 밖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동시대의 관람객에 대한 해석은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동시대의 루브르 박물관은 예술품과 관람객의 거리감이 자아내는 아우라가 아니라 예술품과 관람객 사이 내밀한 접촉과 의식을 만나는 공간임을,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관의 규율이 설명하지 못하는 관객의 “감각적이고 인지적인 교감”(275)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임을 강조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처럼 『카메라 소메티카』는 영화가 회화를 활인화하거나 재매개하는 관계 속에서 수용자와 내밀한 관계성을 추구하는 영화 매체의 이미지를 깊이있게 탐구한다. 시차와 논의의 층위가 조금씩 다르긴 하나, 저자의 시도는 전통적인 영화 양식 내에서 인지주의적 접근을 통해 분산적이고 주관적이며 정동적인 포스트-시네마의 관객성에 대한 사유를 이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이는 상대적으로 인지주의적 영화 연구가 미진한 국내의 상황으로 보건대 절대 작지 않은 성취다. 나아가, 영화 매체뿐만이 아니라 동시대 영상 매체를 향유하는 관객성을 사유하고 연구하는 데도 좋은 아이디어나 영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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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3월 월례발표회 “페미니즘의 탈자연화와 에코 페미니즘의 신유물론적 전환”(발표:황주영) [월례발표회·세미나]

2023년 한철연 월례발표회의 중점연구주제 기획은 1. 정치사회철학, 2. 여성철학, 3. 한국근현대철학, 4. 생태철학, 5. 대중교양철학입니다.
2023년 3월 월례발표회는 여성철학을 주제로 진행합니다.

이번 3월 월례발표회에는 발표자 1인, 토론자 2인이 참여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3월 월례발표회

주 제 : 페미니즘의 탈자연화와 에코 페미니즘의 신유물론적 전환
발표자 : 황주영(서울시립대학교)
토론자 : 이승준(동국대학교), 주현(건국대학교)
일 시 : 2023년 3월 27일 오후 4시 – 6시
방 식: zoom 온라인 회의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Jn8OIcJwJBE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2월 월례발표회 “지성과 공동체: 민주주의와 시민적 집단지성의 가능성”(발표: 한상원) [월례발표회·세미나]

2023년 한철연 월례발표회의 기획은 2022년 9월에 실시한 한철연 회원연구분야 설문조사의 결과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회원들이 제안해주셨던 한철연 중점연구주제(1. 정치사회철학, 2. 여성철학, 3. 한국근현대철학, 4. 생태철학, 5. 대중교양철학)를 중심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2023년 월례발표회의 시작은 정치사회철학입니다.

이번 2월 월례발표회에는 발표자 1인, 토론자 2인이 참여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2월 월례발표회

주 제 : 지성과 공동체: 민주주의와 시민적 집단지성의 가능성
발표자 : 한상원(충북대학교)
토론자 : 김종곤(건국대학교), 한길석(중부대학교)
일 시 : 2023년 2월 27일 오후 7시 – 9시
방 식 : zoom 온라인 회의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qtznR3uYrJw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㊻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㊻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2 수호자들의 생활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17b)

 

[415d-416b]

* 소크라테스는 건국 신화에 대한 언급을 마무리한 후 그곳에서 거론된 수호자들이 통치자들의 지도하에ἡγουμένων 어떤 곳에 진을 치고στρατοπεδεύσασθα 어떤 방식으로 생활해야 하는지를 간략히 언급한다. 우선 수호자들이 진을 쳐야 할 곳은 법에 복종하려 하지 않는 내부자들을 최대한 통제하고κατέχω 외부 적들의 침입을 가장 잘 막아낼 수 있는ἀπαμύνω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은 돈벌이 하는χρηματιστικός 사람들이 아닌 군인στρατιωτικός들에게 적합한 숙소οἴκησις로서 혹한과 혹서에 충분히 버틸만해야 한다.(415d-e)

* 돈벌이하는 사람들과 군인들은 다르다. 양치기ποιμήν들에게는 양 떼의 보조자인 개κύων들이 제멋대로이거나ἀκολασία 배고픔 또는 다른 나쁜 습성으로 인해 개들이 가축πρόβατον들에게 못된 짓을 하려 드는 것은 늑대λύκος를 닮은 개를 키우는 것으로 무엇보다도 끔찍하고δεινός 부끄러운αἰσχρός 일이다. 보조자들ἐπίκουρος이 시민πολίτης들보다 강하다고 해서 우호적인 동맹군σύμμαχος들을 닮기는커녕 사나운 주인δεσπότης을 닮아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다해 감시해야 하고φυλακτέον 정말로 훌륭하게 교육을 받아 스스로도 최대의 경계심εὐλάβει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416a-b)

* 이에 글라우콘은 ‘수호자들이 그렇게 교육을 받은 것 아닌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교육을 받은 수호자들이 꼭 그렇다는 것은 단언할 수διισχυρίζεσθαι 없지만, 수호자들이 자신들끼리는 물론 자신들이 수호하는 사람들에게 온순해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을 갖추려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올바른 교육ὀρθῆ παιδεία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단언할 수 있다고 말한다.(416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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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바른 교육ὀρθῆ παιδεία(416c)은 단순한 앎을 넘어서 실천을 수반하는 능력의 함양까지 포함하는 교육이다. 플라톤에게 앎은 우리말 ‘운전을 할 줄 안다’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그냥 머릿속에서만 간직하는 그런 수준의 앎을 위한 교육은 아직 제대로 된 올바른 교육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올바른 교육의 구체적 내용은 나중 7권에서 다루어진다. 그 점에서도 글라우콘이 말하는 교육은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의 교육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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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 기술되고 있는 생활 방식은 통치자의 지도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통치자 자신들을 포함한 수호자들 전체의 생활방식이다. 여기서 기술되고 있는 여러 가지 생활방식 역시 나라의 수립단계에서 대략의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서 5권 이후에 가서 보다 자세하게 언급된다. 우선 수호자들은 모두 공동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 그들이 공동생활하게 될 거처의 요건부터 언급된다. 진을 쳐야 한다는 말이 시사하고 있듯이 그들의 거처는 말 그대로 병영이자 군사 요새이다. 안으로는 내부자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들의 거처가 이러한 까닭은 이들이 돈벌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힘을 가진 군인들이기 때문이다. 군인들의 본분은 양치기를 보조하는 개의 역할과 같다. 여기서 통치자들은 양치기들로, 수호자들 즉 군인들은 개로 비유되고 양떼와 가축들은 시민들로 늑대는 참주로 비유된다. 무엇보다도 개들은 무절제나 굶주림 또는 기타 나쁜 습성으로 양 떼들 즉 시민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시민들보다 강하다고 해서 우호적인 동맹군들 즉 통치자들을 닮기는커녕 사나운 주인 즉 참주 같은 자를 닮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수호자들이 참주 같은 자들을 닮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다해 감시해야 하고 스스로도 경계심을 갖도록 정말로 훌륭한 교육을 해야 한다.

*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우선 수호자들이 머물 거처의 요건 으로서 법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내부자들에 대한 통제가 언급되고 있고 둘째로 나쁜 습성들로 시민들을 해치지 않도록 수호자들에 대한 다각적인 감시가 언급되어 있으며 셋째로 수호자들끼리는 물론 시민들에게 온순하게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교육이 필수 조건임은 단언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까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언급들은 수호자들이 천성적으로 훌륭하게 태어났고 그 후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받고 스스로에 대한 경계심을 보전하더라도 언제든지 다른 길로 비껴나 나쁜 습성을 가질 수 있고 극단적으로는 내란을 일으켜 참주 같은 사람까지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내부자들이 법에 복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언급은 그러한 내란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게다가 일부 수호자들은 무절제나 굶주림, 나쁜 습성이 생겨 공동생활에서 이탈할 수도 있으므로 처음부터 공동생활의 거처 또한 외부의 적에 대한 고려는 물론 그러한 내부자들에 대한 통제의 적합성까지도 함께 고려되었던 것이다.

* 이 점은 플라톤 역시 인간의 본성을 신뢰하지 않았거나 처음부터 이기적으로 여겼음을 보여주는 증거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수호자들이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이기적 본성을 드러냈다는 데에 방점이 있지 않고 인간이 나쁜 영향을 받으면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데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 플라톤에게 인간의 본성은 건국신화에도 보이듯이 여전히 태어날 때부터 각기 다르며 그에 따라 소질과 욕망 또한 서로 달라 천성적으로 지식을 좋아하는 사람,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 돈을 좋아하거나 뭔가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크게 나뉜다. 다만 건국신화가 동시에 보여주고 있듯이 이러한 나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어서 선대와 다른 천성을 갖고 태어날 수도 있고 후천적인 교육에 따라 다른 소질과 욕망으로 변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특히 이기적인 사람들의 소질과 욕망들은 매우 공격적이어서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은 물론 이미 교육을 받은 어른들까지도 스스로의 천성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플라톤은 천성이 훌륭한 사람들조차 어느 순간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변질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의 영혼이 아무리 순수해도 신체를 갖고 태어나는 한, 본성이 훼손되는 위기에 늘 둘러싸여 있다. 이에 따라 극단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후천적인 영향에 휩쓸려 영혼의 가장 저급한 물질적 욕구 부분의 지배를 받게 될 경우, 본래의 본성을 상실한 채 결과적으로 모두가 물질적 욕망을 가진 이기적인 인간으로 획일화될 수도 있다. 굳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본성을 사회관계의 외화로서 규정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실제로 플라톤은 제8권에서 다양한 소질과 본성들이 공존하고 있는 이상국가가 타락하여 인간 모두가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되면 그때는 다다익선이 최선이 되어 정치체제 또한 다수결에 따른 민주정이 도래하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민주정은 생존의 위기에 몰리면 분별력을 상실한 채 선동정치가들에 이용되면서 결국에는 참주정을 초래하는 근본 바탕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분별 있는 인간이라면 모두 끊임없이 치열하게 올바른 배움을 통해 개인과 국가에서 이성적 영혼의 지배력을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성의 지배가 확립될수록 그에 비례하여 인간은 거꾸로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회복하면서 궁극에는 모두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본래의 이상적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다. 이곳에서 플라톤의 국가 수립 자체가 그러한 거대한 프로젝트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는 내적으로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잃지 않도록 이성적 영혼의 힘을 더욱 강화 발전시키는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되 외적으로도 인간의 본래의 천성과 자연적 소질의 다양성을 변질시키는 위협들에 대한 대처 수단도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거처의 요건들은 그러한 외적인 위협으로부터 적절한 방어책으로 제시된 것이고 올바른 교육은 자신의 천성적인 소질과 고유한 욕망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본성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성장 발전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제시된 것이다.

* 물론 글라우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단언διισχυρίζεσθαι이 시사하고 있듯이 교육이 이러한 성장과 발전을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다. 인간 삶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내외 가릴 것 없이 끊임없이 상존하고 인간의 본성에도 그것의 영향을 받는 측면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수호자의 부정적 양태들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의 발로라고 보는 관점들은 그러한 부차적인 측면을 마치 인간 본성의 본질적 측면인 양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부차적인 측면에 대한 분별력 있는 이해도 포함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고유한 천성과 욕망을 어떻게든 해체되지 않도록 최대한 버텨내려는 인간 영혼의 본질적 측면, 즉 인간 영혼의 이성적 부분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에게 수호자들은 비록 부정적인 영향을 겪을 수는 있을 지라도 여전히 근본적으로 지성과 명예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로서 자신의 천성과 욕망을 배움을 통해 끊임없이 배양하고 보전하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수호자들은 통치를 통해 여타의 욕망을 가진 다른 계층 사람들과 조화를 도모하면서 이상적인 국가를 이끌어가기를 욕망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시민들을 온순하게 대할 수 있도록 배움을 통해 늘 지적인 긴장 상태에서 최대한 경계심을 유지함과 동시에 올바른 교육과 실천을 통해 영혼의 이성 부분을 지속해서 배양하고 보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 이와 같은 플라톤의 생각은 플라톤의 존재론과도 연결된다. 존재론의 기저에는 절대적 모순으로서 존재와 무가 자리한다. 존재는 자체적 존재로서 무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에 따라 타자성을 갖고 있지 않다. 플라톤의 존재 세계는 자체적 존재로서 각기 일자의 속성을 갖는 이데아들의 세계이다. 이데아들은 무에 둘러싸여 있어 각기 일자이자 자체 존재로서 변화를 겪지도 운동도 하지 않는 영원불변 부동의 존재 세계이다. 우주는 그러한 이데아들이 우주 영혼의 상태로 관여되어 있어 영혼의 운동으로서 끊임없이 원운동을 하면서 여럿의 조화와 공존이 완벽하게 구현하는 생명체이자 결코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세계이다. 이에 비해 인간은 우주의 일부로서 우주와 같이 영혼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순수성이 우주 영혼과 달라 영혼에 있어 일정 부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되 타자성도 함께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타자와 관계 맺음을 겪으며 변화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결국 신체는 사멸을 면치 못한다. 그리고 현실 세계의 존재자들 또한 인간의 사고가 갖는 모순율에 의해 인간의 개념적 사고 속에서만 형식적 자기 동일성을 가질 뿐 실제로는 물질적 무규정성(apeiron)에 따라 끊임없이 관계 맺음을 겪으며 생성 소멸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물질적 무규정성에 연원하는 해체와 소멸의 위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데아에 관여된 영혼의 힘으로 그 해체와 소멸을 거슬러 우주와 같은 조화와 공존의 삶을 갈망한다. 플라톤에게 우주는 서로 다른 인간들의 조화와 공존을 위한 원초적 모델이자 현실 구제론의 이론적 토대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우주 영혼과 달리 물질적 무규정성을 완벽히 지배할 수 없기에 각기 영혼의 자기 고양 능력에 따라 일정 정도 우주적 삶에 다가갈 수도 있고 반대로 내적 조화를 상실하여 짐승 같은 이기적인 삶에서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에게 인간의 삶은 가능성의 영역에 놓여 있을 뿐 신체의 죽음 이외에 운명적이거나 필연적으로 결정된 것이 없다. 목적론이나 운명론 내지 결정론은 플라톤과 거리가 멀다. 다만 인간은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우주적 삶을 향한 적극적인 가능성으로서 영혼의 자기 고양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 삶의 훌륭함을 가르는 기준은 각 개인에 있어 특히 수호자들에 있어 영혼의 자기 고양의 능력(dynamis)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능력을 중시하는 능력주의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말하는 능력은 서로 다른 여럿 들 간의 조화와 공존을 파괴하고 경쟁에서 이겨 자기만이 우뚝 서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능력이고, 반대로 플라톤이 강조하는 능력은 자기다움을 최대한 발휘하되 자기와 다른 타자들과 조화와 공존을 능히 관철하는 공동체적 삶의 능력으로서 포용적이고 이타적인 능력이다.

[416C-417B]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지각 있는 사람τις νοῦν이라면 이 교육에 더해 가능한 한 가장 뛰어난 수호자들이 되는 데 지장도 주지도 않고 다른 시민들에게 못된 짓도 유발하지 않을 여건으로서 숙소 및 다른 재산οὐσία들도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할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수호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거주하며 생활해야 할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416c-d)

* 1) 수호자들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닌 한, ‘사적인 재산’ἴδιος οὐσία을 소유해서는κτάομαι 안 된다. 2) 누구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어떠한 숙소나 곳간ταμιεῖον도 있어서는 안 된다. 3) 전사들한테 필요한 만큼의 적합한 것ἐπιτήδειος들은 수호에 대한 보수μισθός로서 일 년간 쓰기에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를 다른 시민들한테서 받는다. 4) 수호자들은 숙영하는 사람들처럼 공동식사συσσιτία를 일상으로 하며 공동으로 살아야 한다.(416d-e)

* 이런 연후에 소크라테스는 특히 수호자들은 금화나 은화를 소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손에 쥐거나 손대는 것, 한 지붕 아래에 두는 것, 그것들로 된 것을 몸에 두르거나 그것들로 된 것으로 마시는 것까지 모두 금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호자들은 이미 영혼 안에 신들로부터 받은 금화χρυσός를 언제나 갖고 있어서 별도로 인간적인ἀνθρώπειος 금화와 은화가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한 신적인θεῖος 금화의 소유κτῆσις를 사멸하는 불경한 금화의 소유와 섞어서 오염시키는 것은 전혀 경건하지 못하다ἀνόσιο.(416e-417a)

* 그럼에도 만약 수호자들이 땅과 집과 화폐를 소유한다면 그들은 수호자가 아니라 가정관리자와 농부가 될 것이고, 다른 시민들에 대해 동맹군이 아니라 적대적인 주인이 되어 미워하기도 하고 미움받기도 하며, 계략을 꾸미기도 하고 계략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평생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외부의ἔξωθεν 적들보다도 내부의ἔνδον 적을 오히려 두려워할 것이며, 그때는 이미 그들 자신도 나라도 파멸ὄλεθρος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417a-b)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숙소와 생활 방식에 대한 이러한 언급을 마무리하면서 그러한 사항들이 법으로 정해져야 한다고 말한다.(41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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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식사συσσιτία(416e)는 스파르타의 상위 계급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ai)의 생활방식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제도는 스파르타인들의 내적 결속과 공동체 정신을 위해 기원전 8세기 뤼쿠르고스 체제에서 확립된 이래 기원전 5세기 멸망기까지 지속했다. 스파르티아타이에 속하는 남성들은 만 7세 이후 우리가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이라 부르는 일종의 집단적 군사 교육으로서 아고게(agōgē)를 받아야 했다.

* 수호자들은 시민들로부터 생활필수품 정도만 보급을 받았다. 그것을 수호에 대한 ‘보수’μισθός라고 일컫는 것은 이상 국가에서 수호자의 활동이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고 나름의 역할에 합당한 대우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상 국가에서 각 계층의 욕구 대상은 서로 다르지만 나름의 소질에 기초한 인정 욕구는 동일하며 그러한 소질을 잘 성취하여 얻게 되는 행복감 또한 동일하다. 수호자들은 비록 재산에서는 생활필수품 정도만 소유하지만, 그들은 다른 계층과 달리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 명예라는 특전을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공평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수호자들의 공동생활과 사유 재산의 금지는 매우 과격해 보이지만 실제 동서양 역사 전체를 보면 오늘날까지도 가톨릭과 불교 수도자 전통에서 그와 비슷한 생활방식이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방식으로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고, 하물며 중동 이슬람 사회에서는 정교일치 차원에까지 급진화 되어 종교 수도자들이 정치 지도자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른바 정치 수도자 집단을 구성하려는 플라톤의 구상이 정치 권력의 편중과 관련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내용 그대로 논의되기는 매우 힘들겠지만, 그 구상의 대원칙만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단순 매도할 수도 없어 보인다. 실제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정치 권력자들과 재력의 결탁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려는 플라톤의 구상은 시대 현실에 부합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채택되면서 여전히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 여기서는 수호자들의 계층이동에 있어 하향 이동만 언급되어 있어나 상향 이동도 함께 열려 있다.(415c)

* 권력자들인 수호자들의 거처와 생활 방식에 대한 내용이 모두 법률로 정해져야 한다는 언급 또한 플라톤의 이상 국가가 단지 인치에만 의존하는 정치체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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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수호자들을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거처의 요건을 언급한 후에 곧바로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으로서 가히 과격하다고 할 정도로 사유 재산의 금지를 선언한다. 수호자들에게는 땅과 집, 화폐의 소유는 물론 사적 공간도 금지되며 금화나 은화들을 손에 쥐거나 손대는 것, 한 지붕 아래에 두는 것, 그것들로 된 것을 몸에 두르거나 그것들로 된 것으로 마시는 것까지 모두 금지된다. 이에 글라우콘도 크게 놀라 그러한 정도의 사적 소유의 금지가 과연 수호자들을 행복하게 할 것인지 의심을 표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도 시민 모두의 행복을 지향하는 원칙의 차원에서 제시된다. 그러나 나중에 5권에 가서 이러한 의심에 더해 처자 공유와 가족 해체에 대한 추가적인 의심들이 더해지면서 소크라테스는 더 힘들고 복잡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그에 따라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해명과 논쟁이 펼쳐진다. 이런 점에서도 이 부분 역시 그 구체적 난관들에 대한 예비적 서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유 재산의 금지와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일단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사유 재산의 금지 선언에 대한 오늘날 정치철학자들의 몇 가지 평가들에 대해서만 간략히 다뤄보고자 한다.

* 우선 오늘날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수호자들에 대한 사유 재산의 금지 는 앞서 수호자들에 대한 감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설적으로 인간의 근원적 이기성을 인정하는 근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나쁜 영향으로부터 수호자들의 타고난 이타적 본성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다. 재산의 사적 소유는 외부의 나쁜 영향들 가운데에서 가장 심대하고 심각한 위험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은 나라가 맞이하는 가장 큰 위해로서 외적의 침입 이상으로 내부의 분열을 꼽고 있다. 특히 나라의 권력층과 부유층들의 사적 소유에 대한 욕망이 그 분열과 내란을 초래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사적 소유가 인정되면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을 더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는 언급도 그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417b) 그리고 내부의 분열은 나라는 물론 개인의 파멸도 포함하고 있다.(417b) 그래서 나라의 수호자들은 ‘이 사람은 이것을, 저 사람은 저것을 내 것이라고 부르면서 나라를 분열시키는 일이 없는’(464c) 사람들이어야 하고 ‘자신의 몸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을 공유’(464d) 해야만 한다.

* 사유재산권의 금지에 관한 플라톤의 주장은 20세기 공산주의의 등장과 함께 그의 이상 국가를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공산주의의 선구적 모델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특히 사유재산을 보편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자연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근대 자유주의자들에게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가장 경계해야 할 정치체제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데는 최소한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결정적으로는 사유재산의 금지가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계층 가운데 수호자 계층에만 한정되어 있을 뿐 정작 생산자 계층에게는 사유 재산이 인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수호자 계층은 계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수가 가장 작은 최소 집단에 불과하지만(428e), 이상 국가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집단은 나머지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인구수가 가장 많은 생산자 계층이다. 덧붙여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도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생산 및 제작, 유통과 관련한 경제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사적인 계약은 물론 과세의 규칙과 항만의 조례 등 시장 상거래의 세칙 또한 존재한다.(425c-d) 나아가 토지와 생산 시설 및 수익, 경영의 권리를 포함한 생산 수단 역시 사적 소유가 가능하고 노예조차 부분적으로 사유 재산을 축적할 수도 있다. 물론 경제 정책은 일종의 통치와 관련한 업무로서 수호자 계층에 의해 결정되지만, 플라톤이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경제 정책은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해 빈부의 격차를 조정하는 것이 거의 유일하다. 수호자들의 주요 임무는 말 그대로 나라의 수호를 위한 활동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 빈부 격차의 조정은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정부의 주요 업무로 인식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경제 민주화 정책의 일환으로 헌법(제 119조 2항)에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가져다 준 적도(適度) 이상의 국부의 창출 및 영토의 확장은 반대하고 있지만 <국가>에서 강대한 나라가 되기 위한 국부의 창출 자체를 제한하는 조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423a-c 참고) 플라톤 역시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대규모의 함선 제작이 은광의 발견과 그것의 수출을 통한 국부의 증대에 있었음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수호자들에 대한 사적 소유의 금지가 미치는 경제적 영향은 생각만큼 큰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사적 소유의 금지 대상이 이상 국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수호자라는 최소 집단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수호자 집단이 이상 국가 전체 인구 비중에서 구체적으로 얼마만큼을 차지하는지는 정확히 추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상 국가에서는 ‘비록 나라의 방위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수가 천 명뿐일지라도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언급(423a)과 플라톤이 살았던 아테네 당대의 인구가 최소 21만 명에서 30만 명(V. Ehrenberg)이었음을 고려하면 수호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0.5%에서 1% 정도에 불과하다.(참고로 아테네 전체 인구 중 30-35%가 노예였고 아테네 경제가 기본적으로 노예 노동에 의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상 국가에도 노예가 있다. 플라톤 역시 노예 노동이 일상화된 시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그러나 이상 국가에서는 아테네와 달리 노예를 최대한 이방인 전쟁 포로들에 한정하려 했다.(469c)) 그리고 아테네에서 귀족이나 부유층으로 구성된 중갑 보병(hoplites)의 수가 3만 명의 전체 병사들(이 가운데는 경보병 및 함대 노수병들은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 3000명 정도이고(A. Andrews) 그들만이 공적 목록에 전사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을 근거 삼아 그들을 수호자 계층의 수로 추정한다 해도 그 비중 또한 1.5%에서 3%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이 수치들은 순전히 추정에 불과하지만, 최소한 수호자 계층의 사적 소유의 금지가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근거로 사용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20세기 소련 공산주의를 비롯한 전체주의 및 독재 국가들 대부분이 결국에는 권력층의 사리사욕 때문에 멸망했음을 고려하면 권력층의 사적 소유를 법적으로 아예 봉쇄하고 있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그러한 나라들과 연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접근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는 권력이 수호자들에게 독점되어 있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수호자들의 권력의 합목적성이 시민이 이익에 한정되어 있고 복수의 철학자들이 돌아가며 통치하는 데다[<법률>에서는 권력을 견제하는 사정관들이 최상위 권력자들의 하나로 위치하고 최고 통치기구인 야간위원회에 위원으로 포함되어 있다.(945e947c. 961a)] 수호자들에게는 명예 이외에 어떠한 사적 소유나 이익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절대 권력을 철저히 사적 소유의 수단으로 삼은 현대의 전체주의 독재자들과도 원천적으로 구별된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굳이 말한다면 계급 차이 자체를 배격하는 공산주의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역할 간의 조화와 공존을 통해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꿈꾸는 공동체주의의 선구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

* 그런데 사적 소유가 분열의 원인이 된다면 이상 국가에서 사적 소유가 가능한 생산자 계층은 내적으로 분열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의 내란 대부분은 생산자 계층 내부의 분열에 기인하기보다는 권력자들이 부유층과 결탁하여 시민의 부를 착취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권력과 부를 함께 가지려는 권력자들의 욕구 때문에 내분이 생겼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에게 이러한 내란의 여지는 평생 올바른 교육으로 단련된 철인 통치자들의 이성적 조화 능력을 통해 사전에 해소될 수 있다고 여겨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경험적 사실을 아는 현대인에게 플라톤의 구상은 여전히 현실성 없는 시대착오적 공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주목해야 할 것은 플라톤 역시 현대를 사는 우리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절대 권력의 피폐상을 경험했으며 대화편 곳곳에서 그 절망감을 토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켈리아에서 참주정의 적나라한 실체를 몸소 경험한 것을 비롯해 아테네에서도 오죽하면 30인 참주정을 겪으며 차라리 민주정이 황금 같은 정치체제로까지 보인다고 고백했을까.(<편지들> 324d) 이점에서도 권력과 재력의 분리는 이상 국가의 정치체제를 기초 지우는 대원칙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의 실현 가능성이 오로지 정치와 지성의 결합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플라톤은 어떠한 이론적 실천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철인 통치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정치체제를 지고의 목표이자 이상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멸망해 가는 아테네를 바라보며 현실 정치 참여 대신 골방에 처박혀 거의 집착이라 할 정도의 이상을 향한 그의 집요함은 아마도 그 자신이 겪은 정치적 참혹상에 대한 세계사적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마치 그가 미래를 내다보기나 한 것처럼 그의 원대한 이상은 서구 정치철학사를 관통하여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참혹한 정치적 절망을 겪은 사람들에게 결코 꺼질 수 없는 횃불로 되살아나 결코 꺾일 수 없는 희망의 푯대로 우리들의 열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그 실천을 추동하고 있다. 정치적 이상주의는 이미 그 자체로 변혁을 이끄는 힘이 될 수 있다.

[제3권 끝, 이어서 제4권 1-3-3 수호자들의 임무(419a-427c) 계속]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②

1. 캐롤 페이트만의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을 읽고
하편. ‘시민의 자유와 예속관계는 교환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유가연(여성과철학 분과)

 

캐롤 페이트만(Carole Pateman, 1940~)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계약을 남성과 그에 예속되는 여성과의 관계, 여성과 그녀로 인해 자유에 대한 판타지를 가진 남성과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남녀 간의 자유와 예속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치적인 성차를 토대로 살펴보았다. 성차의 정치적 특성은 혼인계약, 고용계약이나 노예계약에서와 같이 시민법에 의거해 시민 개개인의 행동이 국가로 인해 제한된다는 조건 아래 맺는 사회계약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남녀 간의 자유와 예속의 관계는 정치적으로 시민의 자유와 지배가 예속되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시민은 국가로부터의 보호를 보상으로 되돌려 받는다는 점에서 이 관계는 교환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든다. 과연 시민의 자유와 예속의 교환관계가 제대로 성립되느냐는 것이다. 캐롤 페이트만에 따르면, “자유와 교환가능한 예속이 착취라는 개념에 포함될 수 있다는 사회주의자들”1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호교환할 수 있는 이원 항은 일단 등가물로서 동등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데, 자유와 착취 간의 관계는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20세기 초반만 해도 자유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제대로 규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사실상 20세기 중반 영국 런던 출신의 정치가이자 작가이면서 경제학자, 신학자 및 역사학자였던 죠지 콜(George Cole, 1889~1959)은 노동당에 소속되어 있었고, 길드사회주의를 주장했다. 페이트만은 콜의 급진적인 정치이론이나 활동은 일단 논외로 두고, 콜이 언급한 노동자들의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콜에 의하면, 정작 우리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가 가진 잘못된 생산 시스템을 비판하거나 지적하지 못했다.”2는 점에 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 환경이나 조건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조차 깨닫거나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잘못된 사회계약의 노예제와 같은 속성이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노동계약은 그저 추상적이고 막연한 가난이고 불공평한 것이었다. 페이트만이 지적한 사회계약의 어두운 면은 20세기 초반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시민의 몰이해와 편견, 불식, 무지 등으로 인해 폐허로 남아 있다.

캐롤 페이트만은 성과 부부와 관련한 사적인 생활을 비정치적 범주로 묶어 부성의 권력 아래 완전히 감추고 망각시킨 사회계약을 비판하는 반면,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는 강요된 비정치적 자연 및 권리를 종교와 민속학 및 인류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크리스테바는 『여성과 성스러움』에서 가톨릭 미사의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발작증세를 보인 흑인여성에 대해 알린 바 있다. 이 증세에 대한 정확한 명칭은 없었다. 미사 시간에 쓰러져 울부짖은 여성은 “신들림, 미친 여자, 히스테리, 투밥(서구화된 아프리카인 여성), 애니미즘, 미국식 외침 요법, 묘기, 영매 등”3으로 명명되었다. 같은 여성이지만, 엄격한 수도회 교육을 받은 아프리카인 수녀들이나 엘리트층 여성들은 발작 증세를 일으키지 않았다. 대개 하층민 여성들에게 일어난 히스테리는 유럽으로부터 강제 이식된 가톨릭교에 짓눌려 있던 토속종교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신분석학자이면서 기호학자, 철학자, 작가이고, 파리 디드로 대학의 명예교수인 크리스테바는 흑인 여성의 이러한 증세를 “성스러운 착란증”, “가톨릭교의 성스러움과 다른 새로운 성스러움”4이라고 불렀다. 아프리카인들이 노래와 춤을 즐기면서 자신만의 리듬을 만드는 “감응적 기질”5이 성스러움에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녀는 페이트만과 같이 사회계약의 토대를 이루는 성적 계약을 인간이 태어나 최초로 욕망하는 대상으로 만나는 모성, 즉 가부장제로 인해 은폐되고 왜곡된 모성으로 정의하였다. 인간은 태어나 주관적인 입장을 관철하면서 성장하여 모성을 배척하고 거부하는 단계에 들어선다. 인간은 모성을 부정하는 동시에 모성을 부정하는 것에 집착하고 억압받는다. 페이트만은 시민의 자유와 예속의 관계를 성적 계약으로 밝힌 바와 같이,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를 통해 주체의 모성 배척 행위와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강박증적 억압의 상태를 제시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자유와 예속의 교환관계에서 보상되어 얻는 국가로부터의 보호권을 대신하여, 인간 주체가 내재적으로 드러내는 신경증적 징후를 제시하였다. 인간이 자연을 부인하고 분리하려고 할수록, 그는 무의식의 보상 및 억압 기제로 인해 자연에 더 집착하기를 욕망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회계약을 어머니와 맺는 인간 최초의 애착 관계로 보았다. 어머니와의 욕망과 억압 관계는 성인이 되어서도 불안과 공포의 감정으로 표출되면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무의식을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자아와 지각의 대상을 분리하고, 자아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면서 겪는 근심과 불안감은 안과 밖의 경계성에서 의미를 무수히 창출한다. 이것이 크리스테바가 제시한 문화비평 용어인 “아브젝시옹”6이다. 아브젝트는 공포증이나 자아분열증과 같이 어느 대상을 부인하거나 동일시하는 행위가 뒤섞이는 이념을 말한다. 아브젝트는 사회계약론으로 규정된 성적 계약의 가장 순수하고 강렬한 실재이다.

Carole Pateman in Brazil 2015, 출처: 위키피디아 / <Agência Brasil> https://agenciabrasil.ebc.com.br/

캐롤 페이트만은 원초적 사회계약이 가부장제가 폭로되는 남녀 간의 성적 계약이라고 비판한다. 그녀는 “사회계약론에 나타난 개인은 실체도 정체성도 없이”7 추상적인 자아만을 가지고 있어 행동 발달 과정에서도 구체화되지 못하고 추상적인 단계에 머무른다고 지적한다. 남성의 행동은 보편적이고, 여성의 행동은 개별적이라고 보는 사회계약론은 결코 성차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반면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는 미국 버클리 도시에 위치한 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이면서 정치철학, 윤리학, 여성주의, 퀴어 이론, 문화 이론 분야의 전문가로서, 개인의 구체적인 정체성을 담고 있는 것은 ‘나’라는 인칭대명사나 이름이 아니라 언어의 독특한 수행성을 띠는 동사라고 주장한다. 수행언어를 통해 젠더 문제를 논한 그녀는 페미니즘 분야에서 대표적인 젠더이론가이자 퀴어학자, 철학자이다. 버틀러는 프로이트가 제시한 욕망의 억압 기제에서 더 나아가, 자유와 예속의 보상물로서 잃어버린 모성을 향한 애착을 “우울증”8으로 제시하고, 이것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의 대표 저서인 『젠더 트러블』에서는 젠더의 우울증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한 버틀러의 초기 의도가 후반부에서는 나타나지 않거나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그녀에 따르면, 우울증은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예측할 수 없고 불확실한 젠더의 정치적 특성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 증세는 젠더 문제가 규범적이거나 미리 규정된 형식을 갖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다는 고유한 수행적 특성으로부터 발생한다. 버틀러는 젠더를 지배하는 규범들을 파괴하고 해체하고자 하는 “수행”9적 언어를 믿지 않는다. 젠더가 담지하는 사회적 수행성은 자신을 ‘나’일 수 있도록 만드는 조건으로서 투명하지 않을뿐더러 사회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정확히 규명되어있지 않다. 즉, 나를 나이게끔 하는 것은 ‘나’라는 인칭을 나타내는 언어에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나의 이름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버틀러에 의하면, ‘나’는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와 사회 간의 예속관계에 있다. 우리는 이미 언어가 지시하는 행동을 수행하는 맥락에서, 동사 언어는 “계약한다”의 뜻을 지닌 사회계약론을 이미 담지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수행언어가 아닌 진술을 목적으로 하는 명사는 사회계약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버틀러는 사회계약론을 동사의 수행적 정체성이 지니는 지시작용, 현시작용, 의미작용으로 대표되는 기호학적 구조로 정의한다.

캐롤 페이트만이 사회계약의 근간으로 간주되어 온 남녀 간의 성적 계약을 비판했다면,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 1930~)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왜곡된 모성과 관련한 계약을 비판한다. 남성은 모성을 모체와 관련한 사회적 관계, 이성과 권력, 언어 등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물질, 사회에서는 능력 없는 자연으로 여기고, 이것들을 교환할 수 없고, 보상받을 수 없는 가치로 분류하면서, 모성을 단절해버린다(뤼스 이리가레, 『반사경: 타자인 여성에 대하여』, 심하은‧황주영 역, 꿈꾼문고, 2021, 62-65쪽). 이리가레에 따르면, 모성을 현전하는 남성은 특유한 부채 의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남성성에서 벗어난 채로 중성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인 것처럼 가장한다. 끊임없이 사회가 가치 판단을 강요하는 남성성에 대해 자신은 방관하는 척, 무관심 및 무책임한 척, 그것을 가장 보편적인 이성으로 논리정연하며, 도덕적인 질서로 포장한다. 남성성도 여성성도 없는 어느 이의 중성성이 남기고 간 존재의 “빈 공백”(뤼스 이리가레, 위의 책, 2021, 67쪽)은 남성성에 예속된 여성들에게는 하염없이 나약하고 지지부진하며, 어설픈 어느 가치를 다시 만회하고 채워야 하는 것처럼 밑도 끝도 없는 의무감으로 다가온다. 이와 같은 맥락 없는 무책임과 막연한 의무감 사이에 생겨나는 무의식적 억압 기제는 선험적이고 합리적인 인식론의 모습을 한 채 철학사에서 발전되어 왔다. 이 논의와 관련하여, 이리가레는 모성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억압적인 분화과정과 차이 개념이 폭로된다고 본다. 이러한 분화와 차이 관계가 자연에 대한 몰이해나 편견을 없애고, 철학사 속 합리적 이성과 같은 물질을 역설적인 진화 과정에서 살펴보고, 모체와 남성, 여성 간의 관계를 재조명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에게 이리가레가 내세우는 남성과 여성 간의 성적 차이는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이라서 고정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본질이나 실체이다. 즉, 그녀에게는 이리가레가 헤겔의 자연과 정신의 지양 구도를 급진적인 관점에서 분리 구도로 재해석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정신의 관계에서 더 이상적이고 높은 단계에 다다르기 위해 무엇을 멀리하거나 배격하는 관계 양상을 모성에 억압된 남성성과 그것을 계속 회복하려고 하는 여성성의 집착증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이리가레에게 헤겔의 자연과 정신의 지양성은 정신분석학에서 살펴보는 무의식 기제의 핵심적인 원동력이 되므로, 이는 캐롤 페이트만이 사회계약론으로서 남녀 간의 억압된 성적 계약을 비판한 만큼의 분명한 안티테제를 제시할 수 없었다. 이리가레에게 정신과 자연의 분리 구도는 실재가 아니라 단지 상징적 언어에 불과했다. 또한, 그녀는 남성이 얼마나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서의 자연으로 배제하고 타자화하는지를 오롯이 비추는 거울(반사경)은 어떻게 여성에게 자신만의 관점과 세계를 구축하게 하고, 자신을 재현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서, 헤겔의 이상적인 변증법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에게서 여성의 자유와 권력은 단지 상징적 언어에 귀속된 상상계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리가레는 여성학자로서 문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을 전공함으로써 여성의 인권과 자유의 문제를 정신병리학적 관점에서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필자는 캐롤 페이트만이 제시한 페미니즘적 사회계약론을 읽고, 저작의 핵심 개념어를 선정하여 이를 중심으로 그녀와 다른 관점을 보이는 여러 여성학자들의 입장을 비교 분석하여 보았다. 페이트만이 논하였듯이, 남성중심주의적인 철학사에서 벗어나 여성과 남성 간의 감추어진 사회계약론을 비판하는 입장은 오늘날 미래 인류의 위기, 우리가 사는 지구가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는 점을 경고하는 에코페미니즘으로까지 논의를 확장할 수 있다. 인본주의, 형이상학, 인식론, 관념론, 존재론, 유물론, 윤리학, 실재론 등 이제까지 철학사를 구성한 주요한 논의들은 모두 미래에는 상상되지도 기억되지도 못할 수 있다. 필자는 글을 끝마치기 전에,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쓰레기와 퇴비와 같은 어두움에 숨겨져 왔거나 감춰왔던 순수 물질, 즉 “방문하기, 일하기, 놀기의 방식과 방향을 결정하는 동물 공생자들”(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역, 마농지, 2021, 191쪽.)을 배치해 본다. 과연 몇 백년이나 몇 천년 후의 세대로 포함할 비-인간은 앞으로 인간과 어떠한 사회계약을 맺으며 살아갈 것인지를 자문해본다.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 분과에서 2023년 4월부터 11월까지 예정으로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를 기획·연재합니다. 지난 2018년 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블로그분과진에 연재되었고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에 이어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코너를 연재합니다. 본격 연재 전 자세한 소개는 「연재의 변」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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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상)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①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상)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 분과에서 2023년 4월부터 11월까지 예정으로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를 기획·연재합니다. 지난 2018년 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블로그분과진에 연재되었고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에 이어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코너를 연재합니다. 본격 연재 전 자세한 소개는 「연재의 변」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캐롤 페이트만의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을 읽고
상편. ‘더 이상 우애 정신은 없다 – 포스트 코로나 시기를 앞두고 우애적 가부장제에 대항하여’

 

유가연(여성과철학 분과)

 

캐롤 페이트만(Carole Pateman, 1940~)은 1940년 영국에서 출생한 정치학자이자 여성학자이다. 1963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972년 시드니대학 정치이론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부터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캘리포니아대학 정치과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부터 현재까지 페이트만은 이 대학의 명예교수로 재직해 있다. 그녀는 민주주의와 관련한 여성이론과 정치이론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이자 교수이며, 자유주의보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입장에 서 있다.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은 1988년에 출간한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로서, 페이트만이 시드니대학 정치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했을 때 나온 책이다. 이 책이 출간된 후인 1990년대 초중반에 그녀는 최초로 국제정치학회에서 여성 학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책의 영문 제목은 The sexual contract로, 한국어로 번역한 제목보다 더 간략하다. 이 책의 내용은 페이트만이 미국과 호주에서 열었던 여러 강연과 토론을 바탕으로 하고, 참고 자료들은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스탠포드대학 행동과학연구소에서 수집하였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프린스턴대학 사회과학연구소에서는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본격적인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1

이 책은 홉스, 칸트, 로크, 루소 등의 근대철학 텍스트들에서 쉽게 간과하거나 가볍게 다룬 부분들을 골라 남성과 여성의 정치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여 기존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페이트만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여러 가지 계약들에 관한 논의들이 정치이론에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에 나타난 여성에 관한 논의를 폄하하거나 과도하게 비난하는 입장을 피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전통적 정치이론과 현대적 정치이론의 역사적, 시대적, 상황적 차이를 전제하고 있다. 페이트만이 여성이론 분야에서,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를 정치이론 텍스트로 연구하고 논의하는 이유는 역사의 균열 속에서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가진 지속성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성들이 역사의 굴곡에서조차 없앨 수 없었던 삶과 존재에 대한 열망은 아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넓게 조망하고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내속적이고 존속적인 시간에 담긴 것이었다.

Carole Pateman(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Political Science, Distinguished Professor)  https://ucla.academia.edu/CarolePateman

페이트만에 따르면, 너무 잘 알려진 토머스 홉스, 존 로크나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는 정작 여성들이 배제되어 있다. 정치철학 및 정치이론 분야에서 페미니즘 논의들이 배제되었던 1970~80년대만 해도 여성의 정치적 의무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바라본 입장은 급진적 성향을 띠는 것으로 보였다. 정치학이나 정치이론 분야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를 제기한 것도 낯설었지만,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사회계약설에 대항하는 입장을 내세우는 시도는 더욱 낯설었기 때문이다. 홉스는 여성이 시민사회에서 혼인계약을 할 수 있는 동시에 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무를 내세우지만, 여성이 시민의 자유를 획득하는 사회계약에 참여하지 않고 참여할 수 없는 신민(臣民)이라고 간주하는 실질적인 계약과 시대 및 사회적 한계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2 홉스의 시민 계약론도 남성중심주의를 이상적으로 규정한 점에서 볼 때, 기존의 근대 철학자들의 입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시민들이 스스로 국가와 시민법에 예속되고, 자신들의 보호를 위해 예속이 교환된다는 논리에 근거해 있다. 루소는 시민을 자발적으로 지배하고 예속하는 사회계약설을 제시하는데, 시민의 지배 및 예속권이 가지는 자발성은 결국 사회계약을 교의적으로 만들어버렸고, 실질적이고 자유로이 실천가능한 모델로 간주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시민의 권리 문제는 루소의 사회계약설로 인해 진부한 논의로 치부되거나 더 나아가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주제로 전락해 버렸다.3 로크는 가정 내 아버지의 권력과 사회적 권력을 구분하고, 계약을 통해 사회적 관계에서 권력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페이트만은 로크의 사회계약설은 성적 계약이나 혼인계약을 배제하였다고 비판한다. 혼인계약은 매춘계약이나 고용계약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을 예속하는 수단이었고, 사회계약은 결국 인류사와 함께 지속되어온 성 계약을 토대로 하고 있다. 성적 계약은 가내 아버지의 정치적 권력이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라진 후에 새로이 등장한 형제계약에 속한 가부장제에 기반해 있다. 가부장제는 더 이상 아버지의 권력이 중심되는 가족구조가 아니라 시민사회와 시민의 자유에도 영향을 주는 형제계약이다. 따라서, 형제계약에 속하는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사회에 예속되는 개인의 신분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가부장제 계약은 항상 국가, 자본과 노동 간의 협상에서 수많은 논쟁과 갈등을 야기하였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숱하게 문제를 일으키는 임금에 의한 노예계약과 시장사회주의에서 수많은 페미니즘운동을 일으킨 신체상의 소유권 등이 그 예이다. 사회계약에 대한 노동자나 시민의 예속과 복종의 관계는 언제나 가부장제를 토대로 한다. 사회계약의 전반에 걸쳐 계약이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은 가부장제에 있다. 그렇지만, 푸코가 제시한 바와 같이 사회계약이 사법제도나 교육상의 훈육, 통제사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책의 제목과 같이 페이트만은 남녀 관계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다루고 다양한 법적 계약 관계를 주제로 삼지만, 특정한 계약법을 다루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계약과 성 계약은 각각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계약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상호대립관계에서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를 갖고 평등한 상태로 태어나고, 존엄성과 권리를 가진 모든 인간을 토대로 사회계약은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자연에 가까운 원초적 계약의 상태는 남성과 여성 간에 커다란 차이가 남겨져 있다. 은연중이든 의식적이든, 편협적이든 포용적이든, 상징적이든 실재적이든 간에, 사회계약에서 자유를 자연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남성으로 상징하고, 예속을 자연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여성으로 대표하는 질서라는 것을 해체하기란 쉽지 않다. 남성과 여성의 성차는 인간의 원초적 계약상태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관계 차이인 것이다.

17~18세기 국가와 시민, 정부 간의 사회계약에 대해서 많은 연구와 발전이 있었으나 성적 계약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괄시하거나 논의하지 않았다. 성인은 시민이 되고 결혼함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또한, 아버지의 지배에서 벗어나 시민사회로 접어들면서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성인이 획득하는 자유에 여성을 소유하는 것도 해당해 있다. 페이트만이 내세우는 여성과 관련한 핵심적인 논의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사회계약도 성적 계약에 기초해 있고, 시민이 얻는 자유도 이러한 성적 계약으로 인한 가부장제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은 사회에서 성과 관련한 여러 가지 계약 형태를 고려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논의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남성에게는 사회계약뿐만 아니라 성적 계약까지도 원시적 자연이자 자유라는 의견이 오래된 편견으로 남아 있고,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민주주의를 만든 법에도 남성중심주의가 지닌 오래된 파행이 사라지지 않는다. 시민사회는 왜 가부장제를 문제시 여기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아버지의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구분하지 못한 데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는 가정 내 아버지의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는 아버지의 권력을 형제애로 탈바꿈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것은 남성의 성에 대한 권리가 근대적 사회계약을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프랑스어에는 애인이나 연인을 가리킬 때에 사랑(amour)에서 비롯되는 연인(amant)의 표현 외에 우정(amitie)에서 비롯되는 ‘한 명의 사랑스러운 친구’를 뜻하고, 엉(윈) 쁘띠(뜨) 아미로 발음하는 표현인 ‘un(e) petit(e) ami(e)’가 있다. 한 명의 친구를 프랑스어로 표현하면, un(e) ami(e)인데, 이 어휘에서 ‘petit(e)’와 같은 형용사가 들어가는 이유는 petit(e)가 ‘작다’는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사랑스럽고 귀여우며 정답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다’는 의미를 가진 어휘에 ‘친밀한 감정’의 의미가 함께 포함된 이유는 주니어(junior)와 같은 ‘막내 형제’가 함축되어있기 때문이다. 나의 애인을 가리키는 ‘쁘띠(뜨) 아미’는 마치 맏형이 막내동생을 대하는 태도나 시선 등에서 연유한다. 즉, 성적 계약에 기초한 애인을 표현하는 어휘는 가족애적인 가부장제가 우애적인 가부장제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어휘임을 알 수 있다. 18~19세기 혁명기의 사회계약설에 기반한 새로운 가부장제에서 비롯한 ‘나의 연인’과 같은 어휘에는 혈연관계를 뜻하는 형제애의 맥락과 의미가 비어있는 채 잔여물로 남아 있다. 근대 형제애는 여성이 남성에 종속된다는 뜻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형제계약은 고용계약, 매춘계약을 포함한 성적 계약으로 간주되어서 사회계약에 속한 결혼 계약과 구분된다.

페미니즘에서 연구한 가부장제에 관한 모호하거나 불명확한 특성으로 인해, 페이트만은 사회적 결사를 위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개인이 신체를 자유로이 소유한다는 의미에서의 재산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사회적 결사란, “시민들끼리의 개인적 우애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대를 도모하는 집단으로서의 복수 형태인 우애‘들’을 의미한다.”4 이 용어는 남성 중심적인 비밀결사단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모든 계약은 재산이나 권리의 상호교환과 이에 따른 평등이 전제해 있다. 그러나 한쪽이 “잠재적인 재산이 되면 불평등하게 된다.”5 재산은 기본적으로 물질에 기반하므로, 잠재성을 전제로 한다면, 반드시 현실화되는 실재가 동반한다. 이것은 물질에 이미 담겨 있는 가치상에서의 평등이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상상적인 신체로만 여기고, 실재적 신체를 가상화하는 관계에 제한한다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더 이상 합법적이거나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여기에서 잠재성은 어느 행위가 현실화되는 가능성(계기나 준원인 등)을 의미하는 한에서의 가상성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실재하는 신체를 가진 남편이 현실에서 실재적인 아내의 신체를 특정한 가상 세계의 도구로 삼거나 특정한 성적 행위를 포함한 행위를 일삼는 경우, 혹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을 만큼 아바타나 메타버스, 인터넷게임 등으로 가상화되어 있는 경우에 가상 남편이 가상 세계에서 연장된 현실의 실재적 아내에게 실질적 행위를 하는 경우 등, 전혀 현실화되지 않는 상태에서 전적인 가상 세계에 의해 선택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언어와 행위의 실질적인 영향력 등의 경우에 남녀의 성적 차이는 가상과 실재 간의 관계에 기인하는 것이지 자연적 성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남녀 간의 성차가 순수한 자연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가상과 실재의 차이에서 비롯된 다양한 법적 지위와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소유하는 권리를 가상과 실재의 불평등한 관계로 인해 박탈당하는 경우는 여성의 인권뿐만 아니라 성적 정체성을 박탈당하는 경우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민의 자발적인 신체 소유권 문제는 남성과 여성 간에 형제애를 토대로 한 형제계약에서 비롯된다. 이 계약이 가능하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 이어온 자본경제의 역사와 관련된다. 자본경제는 남녀 간의 형제애를 이상적인 모델로 규정하여 현실과 신화 간의 간격을 모호하게 만들며, 그 틈에서 용암이 분출하듯이 남성에게는 오이디푸스의 신화가 끊임없이 솟구치고, 여성에게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뿜어져 나온다. 근대 정치사상으로부터 탄생한 민주주의와 공화국 이념은 언제나 신화적 특성을 배제할 수 없다.

프랑스혁명의 정신이자 보편적인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 중 박애는 프랑스어로 fraternite라고 하며, 우애 혹은 형제애라는 의미도 가진다. 프랑스 공화국의 기본이념인 박애 정신은 근대 시민사회 시민들끼리 강하게 유대하도록 이끌어 오늘날에는 관용 정신(똘레랑스)으로 불린다. 박애 이념은 사회를 전체적으로 통합하는 기능을 맡아왔다. 그러나, 현대 프랑스 사회에서 관용 정신은 본래의 기능을 벗어나 사회적인 문제와 갈등을 심각하게 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애나 형제애 정신으로 대변되는 다양한 사회계약, 특히 성적 계약이나 혼인계약, 매춘계약, 고용계약, 노예계약 등은 여러 유형의 가정폭력과 성범죄, 각종 중범죄, 빈부격차, 인종차별, 성차별, 난민수용의 문제 등을 초래하였다. 오늘날의 관용 정신이든 근대사회의 기반을 마련하고 공화국 및 민주주의를 형성한 주요 정치이념마저도 가부장제의 어두운 면을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를 민주주의 공화국을 향한 혁명의 길로 이끌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시민들이 민중이 되어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끈 정치이념은 더 이상 사회통합의 계기가 아니라 사회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근대 사회계약의 토대를 이루는 성적 계약에 대해 살펴보았다. 페이트만은 이 책에서 사회계약론을 살펴보려면 우선 성적 계약을 논해야 한다는 페미니즘적 이념을 내세웠다. 그녀는 다양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이념을 연구하면서, 가부장제에 대한 심층적이고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여성운동이 일어난 지 약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가부장제에 대한 개념과 범위 규정,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살펴보는 역사적 고찰, 사회적 권력의 구조화 문제, 사회의 보편성인지 특수성인지의 여부, 자본주의와의 관련성, 여성성과 관련한 식민제국주의의 역사적 고찰 등과 같은 연구 과제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긴 시간 동안 지속되고 있는 페미니즘 연구는 현대 여성들의 사법 판결권을 개혁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자 작업이다. 4년 전 현 인류에게 느닷없이 닥친 코로나19 팬데믹은 또 다른 현대적 우애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전 세계 통계상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사망한 자가 약 670만 명이 넘고,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노동자들은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었으며, 시민들의 경제 및 사회활동이 줄어들자 자영업자들의 소득이 크게 감소하여, 많은 점포들이 문을 닫아 길거리 문화가 사라질 위기가 처해 있다. 또한, 20~30대 청년들은 사회의 양극화 구조가 심각해지고, 기존의 산업 패러다임이 해체된 가운데 일자리를 얻거나 정식적인 학교 교육을 받는 데 어려움이 늘고 있다. 2023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17세기 근대정치사상으로부터 탄생한 민주주의 공화국의 이념과 시민의식, 인권사상, 자본주의 경제사회 등이 300년 넘게 이어온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계약의 지배와 예속관계를 새로이 깨닫는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시민사회는 또 다른 정치적 의무이자 권리, 자유를 실천하고, 논의를 확장 및 발전시키는 과제를 미래에 남겨두고 있다. 오늘날까지 은연중에 교의적으로 수용되었던 시민의 자유와 권리의 문제는 이제 허물을 벗었다. 우리는 신종바이러스의 발견과 감염경로, 방역 대책, 예방진료,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 통계 및 이와 관련한 신기술들을 경험하면서, 진부하고 하찮게만 여겨졌던 근대 사회계약설을 재고찰하게 되었다. 끝내 사회계약은 시민들에게 진실을 은폐하고 기만한 성적 계약의 진면모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성적 계약은 시민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제3의 성이든 간에 어떠한 성(性)이라도 띠며 살고 있음을 폭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페이트만이 이 책에서 강조한 형제애적 가부장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꼭 고려해야 할 논의이다.

—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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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②

‘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여성과철학 분과

 

지난 2019년에 발행된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의 작업을 잇는 연속 작업으로, 이번 기획은 페미니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조명할 수 있는 확장된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우리의 이전 기획 이후 지난 3년간 출판된 여러 편의 페미니즘의 고전을 비롯해, 페미니즘을 혁신하거나 다양화시키는 여러 텍스트들이 번역‧출판되었으며, 우리는 페미니즘 사상의 발전을 위해서 이들의 추상적 개념, 전개되는 논리,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기존의 질서 및 이데올로기와의 전투, 마르크스주의-생태주의-아나키즘-자유주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정신분석학 등과의 우호적이거나 적대적 마주침, 철학-법학-사회학-생물학-인류학-문학-언어학-공학-자연과학의 분과학문적 틀 안에서 혹은 그것과 투쟁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모험 등을 쉽고 익숙한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오늘날 여성학이라는 분과학문의 형태로 정규화되고 규범화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사유의 궤적과 흐름을 추적 및 구성하면서 현재의 사회지형 안에서 페미니즘의 다양한 철학적 면모를 드러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기획은 한편으로는 이론의 관점에서는 이론적‧분석적‧논리적‧비판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실천의 형태에서는 실천적‧대중(지향)적‧구성적‧상상적인 성격을 띤다. 즉 자유롭게 상상함으로써 페미니즘의 외연과 의미를 더 넓게 확장시킬 수 있는 연구를 하면서도, 그것의 서술과 전개과정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며, 실천적 활동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자 한다.

이것은 지난 2016-2018년을 경과하며 미투 운동으로 상승했던 페미니즘 운동이 최근 하강/침체기에 접어든 상황에서 운동에서의 다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이론적 계기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이 기획은 이전의 운동이 가진 단조로움이나 협소함을 넘어서 다양성과 깊이, 그리고 더 넓은 연대의 가능성을 마련하기 위한 이론적 포용성을 넓히는 것에 초점이 두어진다. 또한 이 기획은 “한철연” 내에서 ‘여성과철학’ 분과의 지난 활동들의 결과물을 모으는 것이기도 하며, 그래서 활동을 강화하고 신규회원을 모집하는 계기도 지니고 있다.

이 기획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 분과”가 진행하는 것으로, 먼저 웹진 <e-시대와 철학> ‘블로그 분과진’에 글을 업로드하고, 모든 글이 최종 마무리 제출된 이후에는 글들을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펴낼 생각이다.

 

집필자 : 김세서리아, 김은주, 연효숙, 유가연, 이승준, 이지영, 정유진, 주현


  • 연재 글의 저자와 주제

[1] 전반기

  • 유가연 : 남과 여, 은폐된 성적계약(캐롤 페이트먼)
  • 이승준 :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샌드라 하딩)
  • 연효숙 : 『2의 성』(시몬 드 보부아르),
  • 주현 : 『스트레이트 마인드』(모니크 위티그)
  • 이지영 : 『몸 페미니즘을 향해』(엘리자베스 그로스)
  • 정유진 : 『캘리번과 마녀』 / 『혁명의 영점』(실비아 페데리치)
  • 주현 : 『섹스할 권리』(아미아 스리니바산)
  • 김은주 : 『변신』 / 『포스트휴먼』(로지 브라이도티)

[2] 후반기

  • 연효숙 : 『시적언어의 혁명』(줄리아 크리스테바),
  • 이승준 : 『여성 인종 계급』(앤절라 데이비스)
  • 김은주 :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캐서린 헤일스)
  • 김세서리아 :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프리드리히 엥겔스)
  • 유가연 : 『반사경』(뤼스 이리가레)
  • 김세서리아 : 『권력의 정신적 삶』(주디스 버틀러)
  • 이지영 :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트러블과 함께하기』(도나 해러웨이)
  • 정유진 : 『대항성 선언』(폴 프레시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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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상)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①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②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유재민 지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초빙교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는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69-399), 플라톤(Platon, 기원전 429?-347)과 함께 고전기 그리스 철학, 나아가 서양 사상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그리스 북동부 칼키디케 반도의 스파케이로스로 그리스 변방 출신이다. 기원전 367년, 17세에 그는 당대 문화의 중심이었던 아테네로 유학을 가서, 플라톤이 교장으로 있었던 아카데미아에서 20년 동안 공부한다. 학생 시절 그를 가리키는 몇 가지 별명은 “학원의 지성”, “부지런한 독서가”였다. 그는 20년 후 아카데미아를 떠나 자신의 독자적 학파를 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사상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저술 활동을 한 철학자이다. 그는 ‘만학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서양 사상사 거의 전 분야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서양 최초로 학문을 분류한 사람이다. 그의 저술은 크게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적 저술로 분류된다. 그리고 ‘실천적 학문’에 윤리학과 정치학적 저술들이 포함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정치학과 함께 실천적 학문에 속한다. 그중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대표하는 저술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윤리학적 저술에 『에우데모스 윤리』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포함되는데, 이 책의 제목은 에우데모스[아폴론 뤼케이오스(아폴론 신의 별칭) 신전 근체에 세운 학교인 뤼케이온 학원 구성원 중 한 명]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인 니코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록을 편집해서 붙인 것이다.

유재민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부제를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로 붙였다.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은 제1장의 첫 소제목인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이다. 그리고 유재민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다음 소제목을 “행복에서 시작하여 덕으로 나아가다”, “행복, 윤리의 사다리”, “객관적 행복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으로 정했다.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재민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어를 ‘행복’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전공자인 그는 제2장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행복이란 무엇인가”, “덕과 중용”, “정의와 우정”, “공동체의 행복”이라는 주제어를 중심으로 읽기 시작한다. 마지막 제3장에서는 “철학의 이정표”라는 제목으로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테오프라스토의 『성격의 유형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 에피쿠로스의 『세 통의 편지』, 윌리엄 프라이어의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을 소개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와 함께 읽어야 할 책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만들기 위한 책이지,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책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돌진하는 군인은 ‘착한’ 군인이 아니라, ‘훌륭한’ 군인이다. ‘윤리’는 그리스어 ‘에티코스’(êthikos)를 번역한 말이다. ‘에티코스’의 어원은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이다. 사람이 습관을 들여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것은 ‘윤리’가 아니라 ‘성격’ 혹은 ‘성품’이다. 따라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성격에 관한 책’ 혹은 ‘성품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 행위자의 본성적이고 본질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어떤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도덕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인간의 행복에 관한 설명을 통해 제시된다. 또한 이 원리는 좋은 사람을 만들어주고 행복한 사람을 살게 해주는 여러 덕목들에 관한 설명을 통해 제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행복, 덕과 중용, 정의와 우정, 공동체의 행복이라는 덕목들을 개인 안에 구체화하는 것이 바로 국가이다.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우리는 어떤 국가에 살고 있는가?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 최근(2023)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하여 출간했다.

‘나와 한철연’ – 한길석 편 [나와 한철연] ②

나와 한철연

 

한길석(중부대)

 

내가 한철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9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나는 인문대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선배가 일러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송종서 선배였다. 당시 종서형은 한철연 교육부장이었다. 내 전화를 받고 다소 의아했다고 한다. 대뜸 전화해서 입회(?)를 신청한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던가? 어쨌든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내게 세상은 종말적 분위기로 가득했다. 구제금융 시대에 접어든 터라 오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캐쥬얼하게 전화해서 쿨하게 받아들여 준 유일한 곳이 한철연이었다(라고 말하면 한철연이 너무 쉽게 보일까?).

쉽게 들어왔지만, 정식 회원이 되려면 거쳐야 할 과정이 있었다. 근 한 학기 동안 매주 토요일 교육부 강좌를 이수하고 회비를 납부해야 정식 회원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매주 토요일 홍대역 산울림 소극장 부근의 사무실에 들락날락하면서 강의도 듣고, 소금구이도 먹으며 한철연과 조금씩 가까워졌다.

현재(2022년) 산울림 소극장 일대 모습, 출처: 네이버지도

교육부 과정을 마친 후 한철연 쪽으로의 발길은 뜸해졌다. 석사 논문 때문에 이래저래 바쁘기도 했다. 논문을 마무리하고 나서 한숨 돌리고 있는데 여전히 오라는 곳은 없었다. 9.11 테러로 무역센터가 무너졌다. 내 맘도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 가을쯤 조은평 선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힘든 자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라며 간사를 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21세기가 되도록 여전히 갈 곳 없는 자의 신세를 면치 못했던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한철연의 품속에 안겼다.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는 비밀이다.

간사 생활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에 비하면 업무 부담 값은 ‘0’에 수렴했다. 오히려 어려웠던 것은 무료함 뒤의 불안감이었다고 할까? 2002년 월드컵이 끝나자 나의 한철연 간사 생활도 끝났다. 혼란스럽고 불안한 시기여서 그때 무엇을 하고 돌아다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학 준비를 하다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포기하니 또 갈 곳이 막막했다. 그리고 또 전화벨이 울렸다. 벌써 세 번째다. 이쯤 되면 ‘갈 곳 없는 자에게는 늘 한철연 전화벨이 울린다’라는 귀납원칙이 성립한다. 이번에는 이정호 선생님이셨다. 방송대에서 튜터로 일해보라는 제안이었다(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홈페이지 공고를 보고 지원한 것인지 이정호 선생님의 귀띔 전화 때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귀띔 전화 쪽이 더 흐뭇하니 그렇게 기억하기로 하자).

이정호 선생님 덕에 안정을 찾은 나는 박사 과정에 진학하면서 한참이나 미뤄뒀던 공부를 헤겔 분과원들과 함께 시작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헤겔 분과는 일관되게 헤겔을 읽지 않는다. 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헤겔 분과원의 공부를 도와주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공공성과 정치적 공영역에 관한 논의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제안한 텍스트가 아렌트의 저작들이었다. 헤겔 분과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꽤 오랫동안 참을성 있게 아렌트를 읽어 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헤겔 분과원들과 보낸 시간은 내 삶에서 가장 따뜻한 한때 중 하나였다.

끔찍하게도 나는 오십 줄에 들어섰다. 한철연에는 이십 대에 들어왔으니 나와 한철연의 인연은 이십 년을 훌쩍 넘었다. 그사이 많은 일이 있었고 이러저러한 일을 맡아 이런저런 일을 해보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한철연은 내게 늘 곁을 내주던 곳이었다. 응달진 곳에서 떨고 있으면, 한 조각 양달이라도 내준 곳이 아니었나 싶다. 그 속에서 몸과 맘을 덥히며 못되고 못난 학자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한철연이 많이 어려워 보인다. 예전만 못하게 찾는 이도 적고 점점 기성 학회와 다를 바 없어지는 구석도 많아지고 있는 듯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패기 있고 젊은 학자들이 한철연을 찾지 않는 데 있다. 학교나 기관에 몸을 담지 못하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독립 연구자들의 발길이 끊어진 데 있다. 갈 곳 없어 헤매던 나를 한철연이 보듬어 주었듯이 앞으로도 계속 고군분투하며 학문의 길을 가고 있는 청년 연구자들이 쉬기도 하고 공부도 하는 둥지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 건승을 빈다.

한철연이 입주하고 있는 태복빌딩의 현재 모습(2022년), 출처: 네이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