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5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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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강해(54)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A. 난관과 고려 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1. 첫 번째 파도(양성의 평등, 여성의 지위 : 451c-457b)에 대한 해설

 

* 앞서 살폈듯이 여성과 아이들의 공유 문제는 수호자 집단 내에서 벌어질 수호자들의 배우자 공유와 그들 사이에서 생긴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에 관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자와 아이들을 올바로 소유하고 다루는 방법을 이야기하면서 뜬금없이 경비견 사례를 꺼내든다. 처자의 공유가 이상 국가의 목적에 온전히 부합하는 것임을 논증하기 이전에 우선 수호자 집단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비견 사례를 통해 플라톤이 제안하는 양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기존의 전통적인 견해들과 정면으로 대치될 만큼 아주 파격적이다. 어떤 이는 이 경비견 사례를 성 역할과 관련한 오늘날의 동물행태학적 접근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동물 일반의 사례가 아님을 고려하면 경비견 사례는 다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비유라 할 것이다. 어쨌거나 플라톤의 경비견 비유는 일단 그 자체로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 외에 수행하는 사회적 역할에 있어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음을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비유대로라면 여성은 출산과 수유 기능 이외에 처음부터 남성과 어떠한 차이도 없으며 그에 따라 수호자들의 집단생활에서도 남성 수호자와 동일한 환경 여건에서 동등하게 동일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 그러나 비유와 다르게 실제 사람의 사회적 역할은 개의 역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다양성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플라톤의 경비견 이야기를 사람과 동물의 행태 및 역할 상의 차이를 간과한 그릇된 인용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를테면 동물은 가사를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정치학> 1264b4) 그러나 이어서 제기된 대머리와 구두장이 비유 그리고 반대 의견을 포함한 대화와 쟁론에 관한 이론적 논의까지 모두 종합하여 평가해보면, 사회적 역할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내세우는 양성평등론은 단순한 비유 수준을 넘어 견고한 논변의 형식으로 수호의 영역뿐만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사회적 역할 및 기술 영역 전반에 걸쳐 하나로 관철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출산과 양육과 관련한 생물학적 차이를 근거로 양성 간 사회적 역할과 관련한 차이를 논증하는 것은 쟁론가들이 흔히들 저지르듯 표현상 말꼬리만을 붙잡아 서로 다른 논리적 범주들을 하나로 혼동한데서 비롯된 잘못된 추론이다. 남성은 아이를 잉태하게 하고 여성은 임신 출산하고 일정 기간 수유하는 생물학적 기능은 양성이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범주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생물학적 차이들은 사회적 역할 수행에서 양성 간 어떠한 차이도 없음을 반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요컨대 남성과 여성은 인간 종으로서 자연적 본성이 동일한 만큼 각기 감당해야할 사회적 역할에서도 전혀 차이가 없다.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늘날 주류 여성주의자들의 주장과도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앞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아이의 임신과 출산 이외에 최소한 가사를 돌보는 일도 여성의 고유한 일로 여기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주장은 오히려 후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플라톤이 살아 있다면 오늘날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는 군대 징집 대상에서 여성을 제외하는 처사조차 자연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당한 일로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 물론 플라톤은 자연적 본성에서건 사회적 역할에서건 양성 간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일에 따라 남성이 여성보다, 여성이 남성보다 각각 더 잘하는 경우가 분명 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그런 사례들은 우연적인 경우로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자연적 종류(eidos)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여성이 남성보다 요리를 잘한다고들 여기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요리를 잘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요컨대 남성과 여성은 사회적으로 할 수 일에서 어떠한 차이도 없다.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여성도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양성 간 차이를 말하자면 다만 힘과 능력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플라톤은 언급한다. 즉 여성은 힘과 능력에서 남성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비록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남성이 생물학적 근육의 힘에서 여성보다 강하다는 게 일반의 상식임을 고려하면 최소한 힘과 관련한 그의 주장은 일견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차이조차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오래된 관습이 낳은 후천적 결과이며 오히려 소근육과 유연성에서는 여성이 단연 우월하다는 연구도 있다. 문제는 그것 외에 일의 수행 능력에서까지 여성이 남성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보면 비록 플라톤 주장의 혁명성을 충분히 인정할 지라도 그 역시 분명 그 시대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할 것이다.

* 그러나 양성 간 힘의 차이에 대한 그의 부차적 언급을 시대적 한계로 비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에서조차 여성의 지위는 여러 측면에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른바 양성평등과 관련하여 발달 수준이 비교적 높다고 평가되는 서구 선진국에서도 여성의 선거권과 정치참여는 지난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경우만 해도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여성의 사회참여는 물론 자유롭게 집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이슬람 사회에서는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정치적 기본권은 물론 최소한의 교육의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2,500년 전 아테네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은 축제를 제외하고는 집안에만 갇혀 아이들의 양육과 가사 역할만 맡았고 외부에서 생필품을 구하는 것조차 남성 가족 내지 남성 노예들이 대신해야 했다. 그리고 결혼 대상조차 부친이 결정했으며 출산 기계라고 불릴 정도로 결혼에 따른 성생활은 주로 아이 출산을 위한 목적으로만 행해졌고 쾌락을 위한 남성들의 성적 대상은 창녀들이나 동성 소년들이 대신했다. 게다가 상속할 권한이 생겼어도 여성은 그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과 결혼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에게 권한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성차별과 관련한 이러한 뿌리 깊은 사회적 관습과 배경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놀랍게도 여성에게 남성과 마찬가지로 수호자 계급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물론 통치자로서 권력의 수장까지 될 수 있는 동등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고, 장차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어린아이 때부터 남성과 동등한 양육과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그의 주장은 말로 세우는 이상 국가론의 형태로 제시된 것이지만 그가 과거 100년도 아닌 2,500년 전 인물임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이 얼마나 선구적이고 혁명적이었는지 가히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이다. 최소한 이 점만 고려해도 플라톤을 오늘날 최소한 페미니즘의 고대적 선구로 평가하는데 전혀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사실은 앞서 현대 여성주의자들은 물론 플라톤에 대한 현대 비평가들 대부분이 그의 양성평등론을 평가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인색하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20세기 인류가 겪은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스탈리즘의 참혹상을 비판하면서 크로스만(R. Crossman), 포퍼(K. Popper), 아렌트(H. Arendt)를 비롯한 상당수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들이 그 전체주의적 발상의 배후에 플라톤이 있다고 맹렬하게 공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러한 비판과 공격은 오늘날까지도 지식인 사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긴 오늘날 여성의 개인적 권리와 인간적 존엄성을 내세우는 페미니스트라면 어느 누구라도 이른바 전체주의의 사상적 뿌리로 낙인찍힌 플라톤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로 내세운다는 게 쉽게 용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래서였을까? 플라톤 연구자로서 명망이 높은 앤너스(J. Annas)조차 그의 양성평등론이 여성의 권리를 인권의 차원에서 권리 그 자체로 확보해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다만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양성 구분 없이 인력을 총동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평가 절하한다. 플라톤은 여성의 권리에 관심이 없으며 인간 평등함과 존엄성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고, 다만 여성을 단지 거대한 미개척 자원으로 본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곳에서 여성 수호자와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은 분명 여성의 지위에 관한 혁명적인 생각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대상, 즉 수호자로서 자격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나머지 여성들은 그저 당대의 일상적인 열악한 여성의 지위 속에 방치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플라톤의 제안은 그토록 끔찍한 삶을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불행과 굴욕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또 수호자 계급에 여성이 참여하는 일이 과연 자기 의사에 기초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그들은 수호자의 역할이 매우 거칠고 힘든 일임을 고려하면 그러한 수호자의 역할과 지위를 여성들 스스로 원한 것이기보다는 실제적으로는 권력 있는 자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부여된 측면이 강하다고 의심한다. (J. Annas(1981) 181-185쪽 참고)

* 그러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국가나 집단 공동체의 이익이 그 사회의 가장 큰 목표였음에도 그것을 위해 여성 일반을 자원으로 끌어들여 그들에게 장차 왕이 될 수도 있는 수호자 계급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물론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한 경우는 19세기 이전까지 아예 없었다. 게다가 플라톤의 주장이 양성 평등에 관한 기초적인 발상은 물론 성차별을 자연적 삶 자체로 당연시했던 근 2,500년 전에 제기된 것임을 함께 고려하면, 근세 이후에야 간신히 남성 부르주아 시민들을 대상으로 확립된 인권 개념으로 플라톤을 평가하는 시도들 자체가 이미 비판의 적절성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힘들고 거친 일이라고 여성들 모두가 기피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의심 자체가 이미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은 여성을 수호자 계급에 참여시키면서 여성 모두에 대해 그 자격을 열어 두지 않는다. 플라톤은 남성 수호자의 선발 과정이 그러하듯이 이곳에서도 여성 수호자를 선발함에 있어 이른바 수호 역할에 뛰어난 여성들과 그러한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여성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우열을 가린다. 지혜를 사랑하는 여자와 지혜를 싫어하는 여자가 있으며 또, 기개가 있는 여자가 있고 기개가 없는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456a) 그러나 이것은 남성 수호자 선발과정이 그 자체로 남성 차별이 아니듯이 이 또한 여성 차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뛰어남 또한 수호 역할과 관련되어 있을 뿐 모든 측면을 다 포함하지도 않는다. 수호자는 결코 생산 기술에서 생산자 보다 뛰어나지 않다. 오늘날에도 적정 자격을 위한 선발 과정에는 그와 관련한 뛰어남을 기준으로 우열이 비교되고 그것을 토대로 선발하는 것을 정당한 절차로 모두 받아들인다.

* 이밖에도 플라톤의 양성평등론과 관련하여 비평가들이 크게 의심하는 사안이 또 있다. 그것은 경비견의 비유에서 보듯이 플라톤이 여성의 역할 가운데 오로지 수호자의 역할에만 관심이 있고 수호 이외에 여성이 맡을 수 있는 다른 역할에 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거나 아예 무시하거나 차별하고 있다는 의심이다. 경비견의 비유는 개가 주인을 위해 주인에게만 복종하고 봉사하듯이 사람 또한 나라를 위해 나라에만 복종하고 봉사해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의 근거로 비평가들은 여성 수호자에 대한 그의 언급 대부분이 싸움과 운동 훈련에 집중되어 있음을 지적한다.(452a-b, 453a, 458d, 466c-d, 467a, 468d-e) 설사 플라톤의 제안을 양성평등론이라고 해도 그것은 그저 여성의 남성화를 통한 평등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여성 수호자에 관한 논의가 플라톤 스스로 언급하고 있듯이 마치 공연을 재연하는 것처럼 남성 수호자에 관한 논의와 똑같은 과정과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임을 고려하면 그 의심은 사회적 역할 중 수호의 역할에만 초점을 맞추어 다소 과민하게 제시된 비판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남성 수호자를 기준으로 이루어진 앞서 이상국가론에는 단지 수호자 역할만 갖는 사람들만 언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들의 역할 즉 생산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른바 여성 공연으로 표현되는 이곳의 논의가 앞서 이상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전개된 남성 공연에 상응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곳에서도 여성으로서 생산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 또한 당연히 함께 포함되고 고려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 실제로 플라톤은 대화와 쟁론의 차이에 대한 논의를 토대로, 논의 대상을 ‘표현 자체가 아닌 종류에 따라 다만 수행할 일 자체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종류의 차이와 유사성만 염두에 두고 그것들 서로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할 경우’, 시가와 기술, 체육과 전쟁 등 어떤 역할이건 간에 양성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일관되게 논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비유를 언급하면서도 플라톤은 생산자 계급에 속하는 구두장이와 의사, 목수 등의 역할을 인용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여자 의사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454d)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양성의 사회적 역할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일반론적 논증에 기초한 플라톤의 일관된 주장을 굳이 수호자 역할에만 한정해서 좁게 적용하는 것이 오히려 플라톤의 주장을 왜곡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비록 이곳에서는 수호자의 역할이 주제가 되는 한, 양성의 동일한 역할에 대한 논의가 수호의 역할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플라톤의 생각은 양성의 본성과 능력에 대한 일반론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성의 기준에 관한 455b-c의 논의는 양성의 사회적 역할을 논할 때 양성의 생물학적 차이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력한 것인지, 그 기준을 정함에 있어 이치에 따른 논거가 얼마나 핵심을 차지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의 말 그대로 여성의 본성과 남성의 본성은 동일하다. 여성들은 자연적 본성상kata physin 남성들과 동류syngeneus인 것이다.(456b)

* 그런데 오늘날 새롭게 전개되는 양성평등론과 관련한 논쟁들을 들여다보면, 양성 간의 근본 차이가 과연 플라톤의 주장대로 출산과 수유 단계까지의 양육 정도뿐인지 아니면 그 밖에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모종의 본질적인 성차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다양하고도 서로 다른 견해들이 논쟁적으로 제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현대 생물학과 생리심리학에서도 눈에 보이는 양성 간의 신체적 차이 외에 유전자 자체의 차이에서 비롯된 여성성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성징들이 따로 존재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모종의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지 많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 논쟁의 과정에서 플라톤의 주장과 달리 일련의 과학적 성과를 토대로 출산과 양육 기능 이외에 성역할과 관련한 양성의 독특한 특성들과 정체성이 각기 고유하게 존재하며 그에 따라 진정한 양성의 평등은 오히려 양성의 그러한 근본적 차이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주의자들도 생겨났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진정한 의미에서 양성평등론이 아니다. 그들은 플라톤이 성별 간 일방적이고도 무차별적인 평등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 양성 간 고유하게 실재하는 생물학적, 문화적 차이들과 정체성을 원천적으로 무시 또는 제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게다가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양성 간 불일치는 해결할 수 없다는 분리주의의 관점에서 오히려 성, 출산, 육아등과 같은 여성의 신체적 고유 능력을 찬양하면서 그것을 가부장제를 타파하고 여성 고유의 문화 영역을 구축하는 적극적인 토대로 삼기도 한다.

* 그러나 지난 2,500년 동안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인식이 차이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를 통해 성차별을 극복하는 근거로 수용되었던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역사 속 수많은 선구적인 주장들이 운명처럼 겪어 왔듯이 그들 주장 또한 전도가 그리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잘 보여준다. 인류 역사 이래 양성 간 차이는 거의 대부분 남성의 우위를 정당화하고 고착화하는 차별의 근거로만 이용되어 왔고 그 위세 또한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하물며 일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은 양성 간 차이와 정체성에 기초하여 전통적 여성주의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양성 평등을 내세우는 여성주의자들의 주장들을 어처구니없게도 양성 간 차이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근거로 악용하기까지 한다. 일부 보수적인 플라톤 비평가들(L. Strauss 등)이 양성 간 근본 차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끌어들여 플라톤의 접근방식을 오히려 자연 법칙에 반하는 것이며 적용 불가능한 것이라고 적극 비판하는 것도 그러한 경향의 일단을 보여준다. 양성평등을 위한 투쟁은 여전히 지난하고도 먼 가시밭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세계사적 진보는 늘 그 가시밭길을 딛고 헤쳐 가며 이루어졌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다.

* 아무려나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 내지 여성성의 범위가 현대 과학의 성과를 토대로 더 크게 확대되건 아니건 또는 설령 생물학적 차이 말고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양성 간 문화적 차이가 있건 없건 간에,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차이일지라도 양성이 사회적 삶을 영위하면서 감당해야 하는 역할들과 관련하여 그 차이들이 결코 양성간의 차별이나 불평등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양성 간 동일함은 동일함대로 차이는 차이대로 정당하고 균형 있게 받아들여져 그것이 양성의 자유로운 의지와 행위를 저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권리를 고양하고 담보하는 적극적인 근거로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오늘날 페미니즘의 출발 역시 이러한 자각을 토대로 생물학적 차이가 결코 사회적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 명제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미 2,500년 전 제기된 사회적 역할과 관련한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어쨌거나 그 이후 제기된 전통적인 주류 여성주의자들의 그 어떤 주장보다도 그 명제에 가장 충실하게 일치하고 부합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그런데 플라톤의 양성평등론과 관련한 이상의 다각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 사이에서 플라톤 주장이 갖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일관되게 지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양성평등과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이 대화편 전체를 통해 일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곳 <국가>만 보더라도 여자들을 ‘속 좁은 사람’(469d), 또는 아이들이나 여자들을 ‘다수의 미천한 사람들’로(431b-c) 표현하고 있는데다가 다른 대화편들에서도 ‘정해진 삶을 잘 영위하지 못했을 경우 두 번째 탄생에서 여자로 바뀌게 된다.’(<티마이오스> 42b, 90e-91a)거나 ‘남성이 여성보다 사려가 깊다’(<크라튈로스> 392b)는 표현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이 이것을 근거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이중적이며 변덕스럽기 그지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국가>에서 플라톤이 제안한 양성평등론이 그 자신도 조심스러워하고 대화 참여자들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성격을 갖는 것임을 고려한다면 대화편들 전체에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왜 일관성을 갖기 힘들었는지를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다. 즉 플라톤은 여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당대 아테네인들이라면 모두가 반대할 정도로 파격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간의 성찰을 종합하여 마침내 <국가>에서 여러 가지 근거들을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전까지는 굳이 많은 설명이 요구되는 견해를 불쑥 내놓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대화 국면에서는 그냥 소극적으로 일상의 견해들을 따라 언급을 해오다가 비로소 <국가>에 와서 그간의 성찰을 종합하여 비로소 여성에 대한 파격적인 수준의 속생각을 적극적으로 털어놓게 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사실 플라톤의 여성에 대한 <국가>의 견해가 과연 그토록 조심하고 경계했어야할 정도로 파격적인가에 대해서는 당대 아테네 대중은 차치하고 지성을 대표하는 당대 지식인들의 여성관을 들여다보더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를테면 소포클레스는 ‘여자에게는 침묵이 곧 품위kosmos’(<Ajax> 193)라고 말하고 있는가하면 에우리피데스는 ‘여성은 선한 행동을 할 줄 모르며 오히려 모든 악을 고안해내는데 가장 뛰어나다’(<Medea> 406)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플라톤 후대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용감함의 수준에 있어 ‘용감한 여자라고 해 봐야 비겁한 남자’의 수준일 뿐이고 품위의 수준에서도 ‘여자가 남자만큼 품위 있다고 해도 그저 수다스러운 여자’정도라고 말하고 있다.(<정치학> 1277b25) 게다가 아테네 민주정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리클레스조차 과부가 된 전몰자의 아내에게 짧은 충고를 전하면서 ‘덕에 대해서건 결함에 대해서건 남자들 사이에서 소문나는 일이 아주 적다면 그것으로 큰 명예’(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45)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포클레스 등 여타 당대 유명 저작가들의 문헌들 여러 곳에서도 발견된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인습들 자체가 역설적으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대화편 전체에서 왜 일관되게 표출되기 힘들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일정 부분 설명해줌과 동시에 오히려 그것들은 그 인습의 견고함에 반비례해서 <국가>에서 제안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얼마나 파격적이고 혁명적이었는가를 다시금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는 보다 적극적인 근거가 된다.

* 실제로 플라톤은 <국가>의 이상국가론을 토대로 차선의 현실국가론을 펼친 것이라고 평가되는 <법률>을 통해 양성 평등에 관한 <국가>의 주장들을 일정하게 이어 가고 있다. 플라톤은 <법률>에서 아테네인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기본적으로 ‘여자들을 위한 것이 무질서한 상태로 그냥 간과될 경우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그러므로 이 관행을 고치고 바로 잡는 것이, 나아가 모든 관행을 여자와 남자가 공유하도록 조직하는 것이 나라의 행복을 위해 좋다.’(781b)고 말하고 있고, 구체적인 역할과 관련해서도 ‘여자도 관직에 나갈 수 있고 군역도 필요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부과할 수 있되 관직에 진출하는 연령은 남자가 30세 이상, 여자는 40세 이상인 반면에 군역은 여자의 경우 아이를 낳은 후에만 부과하되 50세까지로 제한해야 한다.’(<법률> 785b)고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법률>에서도 양성의 동등한 역할에 있어 전쟁과 관련한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래의 인용을 보면 양성 평등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가 교육 및 사회 분야 전체에 두루 걸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인용하자면 그곳에서 주인공 아테네인은 ‘그리스에서는 모든 남자와 여자가 한 뜻으로 같은 일을 수행하지 못해, 동일한 지출과 수고로 2배까지 성장할 수 있는 일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모든 사람과 아이는 아버지의 반대와 무관하게 모두 교육을 받아야 하며’(804e-805a) ‘전술적 기동과 전투대형 갖추기, 무장 기술 등을 양성 시민 모두가 똑같이 익혀야 한다.’(814a-c)고 주장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의 제안이 실현될 수 있는 한, 여성은 교육과 그 밖의 다른 일에 남성과 함께 최대한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가 지니는 열기가 식는 일은 없을 것’(805c)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가히 2,500년 전에, 여성에 대한 기존의 그릇된 관습을 타파하기 위한 그 자신만의 길고도 힘든 숙고 과정을 거쳐 <국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원칙의 형태로 제안된 이후 <법률>에서 현실에서 적용 가능한 정책적인 대안으로 실질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라 하겠다.

* 소크라테스는 여자와 아이들의 공유 문제에 대한 대화참여자들의 이의 제기에 답변하면서 우선 수호 역할을 중심으로 남성과 여성들의 동일함을 논증한 후, 그것이 자신이 제시할 주장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헤쳐 나가야 했을 하나의 ‘파도’kyma라고 말을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첫 번째 파도를 넘어선 후 그것을 토대로 이제 두 번째 파도로서 처자 공유의 문제를 본격적 다루기 시작한다. <끝>

* 다음 회 : 3. 두 번째 파도 : 처자의 공유, 전쟁에 관한 일(457c-47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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