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21-낭만적 종교 예술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21-낭만적 종교 예술

 

1)

낭만주의 미학은 중세 종교적 구원에서 출발하여 기사도 정신을 거쳐, 근대 세속적 성격 예술로 나간다. 이런 분류는 예술 작품이 다루는 주제를 중심으로 분류한 것인데, 이는 헤겔이 이 시대 시간적 흐름을 고려한 것이기는 하지만, 시간적 흐름과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흔히 이 시대 예술을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계몽주의 등과 같이 시간적으로 분류하는 것과 대비된다.

헤겔은 그 출발점에 해당하는 종교 구원을 다루는 예술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첫 번째가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사에 관한 형상화이며, 두 번째가 기독교적 정신인 종교적 사랑을 표현하는 작품이다. 세 번째는 교회의 정신을 다룬다.

종교 예술에 관한 헤겔의 설명은 여러모로 고딕 예술을 중점을 다룬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헤겔은 종교 예술은 고딕 이전 로마네스크나 그 이후 르네상스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예술을 포함하고 있다. 헤겔은 종교 예술이 각 시대마다 보여주는 양식상 차이에 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으며 오히려 여러 시대에 걸쳐 등장하는 기독교 종교 예술이 지닌 공통성에 주목한다.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 종교 예술을 주로 고딕 예술과 관련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2)

흔히 고딕의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는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시대를 말한다. 이 시대 유럽 사회는 전반적으로 변화했는데, 새로운 경작 기술을 바탕으로, 부역 노동은 생산물 지대로 전환했다. 잉여가 축적되면서 수공업이 분리되며 상업적 교역이 발전하고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귀족의 사치품을 매개하는 원격지 무역이 부활했다. 영주권이 집중되면서 그 가운데 왕과 대영주의 권리가 신장되었다.

왕은 웅장한 교회를 세우는 등 교회를 물질적으로 지원하고 교회는 왕과 대 영주를 위해 이데올로기적인 지원과 관료층을 제공했다. 이를 위해 수도원 학교와 대학이 세워졌다. 이 시기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과의 접촉을 통해 그리스 고전 학문이 유럽으로 들어와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켰다. 이런 역사적 정신적 변화를 바탕으로 여러 예술작품이 형성되었는데 이 시대 예술 작품을 통칭하여 고딕 예술이라 일컫는다.

이 시기 등장한 고딕 예술은 종교적 내용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 예술형식이나 고전적 예술형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하지만 헤겔은 여기서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하는데, 그 이전 시대 예술은 영원하며 부동하는 신 자신의 모습을 정지된 상태에서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고딕 예술은 신이 일으키는 역사를 그 운동하는 과정 가운데서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성모, 사도, 신도들이 겪는 수난과 참회 그리고 영광의 삶이 펼쳐진다.

 

3)

기독교적 종교 예술 대표적으로 고딕 예술이 보여주는 가장 근본적 특징을 헤겔은 특칭성[Partikularitaet]이라는 개념에서 찾고 있다. 즉 그 모습이 과거 신의 모습에서 보여졌던 숭고하거나 이상화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그리스도를 그리던 신도를 그리던 간에 그 모습이 우연하며 개별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 어느 작품이나 사실성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연하고 개별적인 모습 자체가 신의 모습은 아니다. 특칭적인 모습 가운데서 신적인 면모가 출현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겪는 삶 속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 삶은 곧 수난과 참회, 영광을 보여주는 것인데, 대체로 긍정적인 최종 결과보다는 그 과정에 등장하는 부정적 요소가 강조된다.

또한 이런 삶의 운동하는 장면은 제단화에서 보듯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거나 하나의 장면 속에 응축되거나 몽타쥬되어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런 특성은 고딕 시대 대표적 화가 시모네 마르티니의 작품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1]

부정적 장면 그리고 응축 등 기법이 사용되는 가운데 처음에 사실적인 모습은 파괴되면서 기이하게 일그러지고 심지어 조악하며 야만적으로 보이니 그 때문에 이 시대 예술은 고딕적이라고 불리어지게 된다. 하지만 세부적으로만 본다면, 그런 가운데서도 사실성을 잃지 않으니, 이 두 가지 대립된 속성 때문에 자주 이 시대 종교 예술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실성에 주목한 사람들은 이런 종교 예술 속에 그리스 고전 문화의 영향을 찾게 되며, 로마네스크니 르네상스니 하는 이름이 붙여진다. 반면 왜곡된 형상의 측면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 예술을 고딕[또는 게르만적]이니 바로크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2]

 

4)

실제로 로마네스크 조각과 고딕 조각을 비교해 보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부조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대변하는 스페인 산티아고 폼포스텔라 성당의 현관 부조이다. 후자는 고딕을 대표하는 프랑스 파리의 사르트르 성당의 현관 부조이다.

건축적으로 본다면, 로마네스크와 고딕은 판연하게 구분된다. 하지만 조각을 놓고 보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데, 양자 모두 한편으로는 사실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양식화되어 있어, 약간의 정도 차이만 보여줄 뿐이다.

이런 이중성을 헤겔이 어떻게 지적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현재 우리의 국면에서는 형상이 일상적인 것이자 주지의 것으로 머물며, 그 형식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무차별적인 특징적인 것, 즉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그리고 이 면에서 대단히 자유롭게 취급될 수 있는 것이다.”[3]

 

“왜냐하면 개체적 주관성과 신의 화해는 직접 등장하는 조화가 아니라, 무한한 고통, 헌신, 희생으로부터 그리고 유한하며 감각적이며 주관적인 것의 절멸로부터 비로소 등장하는 조화이기 때문이다.”[4]

 

3)

이런 수난과 참회를 통해 다시 복귀한 신성이 곧 성령이니, 신이 전개하는 역사로서 예술은 마침내 성령의 표현으로서 예술로 발전하게 된다. 기독교적 성령의 본성은 무한한 사랑의 감정이다. 헤겔은 이 사랑을 개념적으로 규정하면서 “타자의 자기 속에 자기를 망각하는 동시에 이런 망각 속에서 비로서 자신을 소유하는 것”[5]이라고 규정한다.

기독교적 사랑은 한 개인의 다른 개인에 대한 인간적 사랑은 아니다. 이 사랑은 곧 절대자 즉 신 자신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내면적으로 집약된 무한한 심정 즉 “그 무궁무진함을 직접 심정의 단순한 심연으로 끌어 모으는” 내밀한 사랑이다. 또한 이 사랑은 모든 개인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 즉 “그 내용의 일반성에 의해 고양되고 담지되는” 사랑[6]이다.

헤겔은 무한한 일반적 사랑을 표현하는 예술의 어려움을 말한다. 고전적 예술이라면 이런 심정을 이상화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신성은 우연하고 개별적인 인간 속에 머무르니, 특칭적인 인간의 모습 속에 무한한 사랑, 순수한 심정을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인류에 대한 사랑보다는 성모 마리아의 아기 예수나 죽은 예수에 대한 사랑이 더 자주 표현되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아기 예수나 죽은 아들에 대한 사랑은 모성애라는 자연적인 감각적 형상을 갖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성애의 자연적인 내밀성은 철저히 정신화되어 신적인 것을 본래의 내용으로 삼지만, 그 정신적 내용은 그윽하면서도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는다.”[7]

라파엘의 마돈나 상이다. 마돈나의 눈은 헤겔이 말하는 그윽하고 무한한 모성애를 잘 표현한다.

 

4)

종교 예술은 그리스도의 수난사나 내밀한 사랑의 정신의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 종교 예술은 사도나 신도의 삶으로까지 확장된다. 순교의 고통, 참회와 개종, 신도에게 펼쳐진 기적 등이 예술적 표현 대상이 되는데, 헤겔은 이런 유형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유형 대상 중의 하나가 곧 마리아 막달레나[8]라고 말한다.

페르지노의 십자가 1480, 예수의 발 아래 기도하는 사람이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1] 시모네 마르티니(1284-1344)는 고딕 후기에 이탈리아 시에나에 살았던 대표적 고딕 화가이다. 그의 작품 십자가에서 내림(1315)은 성경의 이야기를 파노라마 식으로 전개하면서 하나의 그림 속에 중첩해서 표현하고 있어 운동감이 느껴진다.

[2] 예를 들어 아놀드 하우저의 주장을 들어보자.

[3] 미학강의 2권, 181쪽

[4] 미학강의 2권, 182쪽

[5] 미학강의 2권, 165쪽

[6] 미학강의 2권, 164쪽

[7] 미학강의 2권, 168쪽

[8] 헤겔은 그 중 가장 탁월한 것은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이라 하는데 어떤 그림을 지칭하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헤겔 당시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름다움의 이미지와 죄의 이미지가 겹쳐 있었다. 그 때문에 헤겔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아름다운 죄인’이라 말한다. 헤겔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육체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정신적인 아름다움 즉 무한히 사랑하는 마음을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그녀의 음란의 죄가 그녀의 육체적 아름다움 때문에 나오는 것으로 본다. 그 죄는 자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일 뿐이다. 오히려 그녀는 머리칼로 예수를 씻는 정신적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으니 그 마음에 비추어 볼 때 그녀의 죄는 진정한 죄가 아니며, 그녀는 죄를 짓는 가운데서도 양심을 지키고 있으며 그나마 지은 죄조차 이미 고해하고 예수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그녀에 내재하는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용서를 받은 것이다. “감동적인 것은 사랑하는 가운데서도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며, 영혼의 감각적으로 풍부한 아름다움 속에서 고통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그녀의 잘못은 그녀가 수많이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믿었는데 이 사실이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오류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감각적으로 풍부한 아름다움 자체를 본다면 그녀가 사랑 속에서도 고상하며 깊은 심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밖에는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미학강의 2권, 178쪽)

헤겔미학산책20-낭만주의적 예술 형상으로서 가상[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20-낭만주의적 예술 형상으로서 가상

 

1) 가상

앞에서 근대가 시장 관계가 일반화된 사회라 했다. 이 시대 정신을 절대적 주관성의 정신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것을 표현하는 종교적 형식 즉 내재하면서 초월하는 신과 이 시대 인간의 파토스와 죽음에 관한 생각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 시대 정신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형식인 낭만주의 예술 형식을 살펴보기로 하자. 

 

근대에 들어와 소외된 정신이 등장하면서 예술 형식도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헤겔에서 예술은 정신을 표현하는 기호이다. 상징주의 시대 예술 기호는 그 의미를 수수께끼처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고전주의 시대 예술 기호는 그 의미를 이중화하여 보여주는 기호 즉 닮은 꼴, 현상이었다. 헤겔에 따르면 이제 소외된 정신의 시대 등장하는 예술 기호는 가상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가상[Schein]은 본질이 자기를 비추는 거울에 비추어진 그림자, 영상을 말한다. 그 거울 속에 본질의 영상이 맺히지만, 그것은 이제 자신이 다른 것의 영상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못한다. 그 점에서 가상은 현상과 구분된다. 현상 역시 본질이 비친 영상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마치 자립적인 실재처럼 또는 진실된 것처럼 나타난다.

 

현상은 사실 거짓 영상이면서도 자신이 진실된 실재라고 믿는 것이며 반면 가상은 자신이 거짓 영상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면서, 오히려 진실된 실재 본질 자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현상과 가상의 이런 관계는 자신을 실재처럼 보이게 만드는 무대 장면과 다양한 소원화 장치를 통해 그런 환상을 깨는 무대 장면의 관계에 비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눈동자

낭만적 예술 형상인 가상은 그것이 어떤 형상인 한에서 구체적인 자연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지만, 어떤 형상이 이미 자기 부정성을 지닌다는 것은 구체적인 형상이 더 이상 자연 그대로 머무르지 못하고 이미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 정신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현존재는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적인 것을 비감각적인 것으로, 즉 정신적인 주관성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진리는 단순히 상상에 의해 산출된 이상이 아니라, 스스로 유한한 즉 외면적이고 우연한 현존재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그 속에서 자신을 신성한 주관성으로 자각한다. 즉 자신 안에 무한히 머물며 또한 이런 무한한 자신을 자기에 대해 존재하게 한다는 사실을 자각한다.”[1]

 

절대적 주관성 즉 신은 예술적 형상 속에 내밀하게 존재하므로 이런 내밀성은 자주 영혼을 들여다보는 눈으로 표현된다. 고전적 신상은 눈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신은 자기를 외부로 전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안으로 들여다 보일 내면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징적 신상에서는 눈을 가지지만 그 눈은 신의 눈으로 세계를 조명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낭만적 신상에서 그 신은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으면서 그 눈을 통해 그 속에 감추어진 내밀한 신적 존재를 암시한다. 여기서 눈은 내면을 들여다 보는 통로다. 라파엘로 시스티나 마돈나 상에서 표현된 성 모자의 눈동자를 보라.

3) 시간성

고전주의 예술 형식인 현상에서 내용(의미)은 그 형상(기호)과 닮은 꼴로 합치한다. 내용은 형상 속에 남김없이 드러나며, 형상은 내용을 드러내면서 자기를 이상화한다. 반면 낭만주의적 가상에서 내용과 그 형상 사이에 다시 분리가 일어나니, 이때 형상은 더 이상 이상화된 형상이 아니고 다만 실제 그대로 유한한 형상에 불과하다. 반면 내용은 이런 유한한 형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절대적 무한성이다.

 

여기서 표면적으로 보면 내용과 형상이 분리되는 상징적 예술 형식이 다시 부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상징과 가상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상징은 그것을 지시하는 내용에 대해 다만 외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의 관계는 수수께끼적인 관계이다.

 

반면 낭만적 가상은 형상에 속에 이미 자기 부정성이 들어 있으니 이를 통해 내용이 자기를 비추어준다. 이런 자기 부정성은 개별적 현상으로 충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자기 부정성은 개별적 현상의 연속적인 운동을 통해 드러날 뿐이다. 낭만적 가상은 내용이 자기를 타자화하고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 과정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낭만적 예술의 근본적 특징인 시간성이 드러난다. 상징적 예술이나 고전적 예술은 시간성을 결여한다. 그것은 정신이 드러나는 영원한 한 순간일 뿐이다. 그러나 낭만적 예술은 고정된 순간이 아니라 시간적 운동 속에 자기를 표현한다. 미술이 음악을 지향하고 음악이 문학적 서술을 지향하는 것도 낭만적 예술에 필수적인 시간성 때문이다.

 

4) 일상성

헤겔에 따르면 낭만적 예술 형식은 더 이상 신을 주제로 삼지 않는다. 과거 상징주의 예술이나 고전주의 예술은 시대 정신은 신을 직접인 주제로 삼는다. 이런 예술 형식에서 예술은 신을 상징하거나 신을 드러내는데 목표를 둔다.

 

그러나 낭만주의 예술 형식에서는 신은 항상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출현할 뿐이며, 여기서 예술이 소재로 삼는 것은 유한하고 우연한 세속적인 현상일 뿐이다. 신은 이런 유한하고 우연한 현상에 내재하거나 이런 현상이 부정되는 운동을 통해서만 드러날 뿐이다.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의 죽음이거나, 인간이 세계 속에서 겪는 세속적 운명이 예술의 주제로 될 뿐, 신은 그 어디에서도 직접 드러나는 법은 없다. 

 

상징적 예술형식에서나 고전적 예술형식에서, 신을 표현하는 감각적 형상은 지극히 제한되었고 예술적 소재는 한정적이다. 반면 낭만적 예술 형식에서는 현실의 모든 것이 예술적 소재로 다루어진다. 왜냐하면 그 어느 것이나 자기 부정성을 통해 신적인 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정신은 근대에 들어와 그 이전 시대에 비해 비할 바 없이 깊어졌고 거꾸로 이런 정신을 표현하는 감각적 형상의 범위는 무한정 넓어졌다고 한다.

 

일체의 유한하고 규정된 것이 낭만주의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으므로, 그런 소재는 일상적인 현실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과거에 간과된 소재도 이제는 훌륭한 예술적 소재가 될 수 있으니 예술가는 어떤 일상적 현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정신의 원칙이 내적으로 깊어질수록 그만큼 더 관심, 목적, 그리고 감각의 범위는 무진장한 것이 되며 그리하여 정신은 무한히 증가된 내용을 갖는 내적, 외적 충돌과 분열들, 여러 단계의 열정들, 그리고 극히 다양한 국면의 만족들로 전개된다.”[2]

 

낭만주의 예술은 가장 철저한 리얼리즘 예술이다. 낭만적 예술은 현실의 자기 부정성을 추구한다. 이런 부정성은 외적인 부정성이 아니라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부정성이니, 그런 점에서 자기 부정성이다. 작가가 자기 마음대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성이 현실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것이려면, 작가는 현실에 대해 철저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 세부에서까지 찾아 들어가고 그 유한성과 규정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현실을 파악해야만 그 속에서 부정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낭만주의 예술은 ‘초상화적인 것[Portrartig]’이라고 한다. 또는 ‘일상적인 것 속에서 고향을 두고 있다[Heimatlichkeit im Gewoehnlichkeit]’고 말한다. 헤겔은 낭만주의 예술이 리얼리즘적인 경향성을 지니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낭만적 예술의 무한한 주관성, 절대성은 그 현상 속으로 침잠하지 않고 자신 안에 머물며 바로 이로 인해 그 외면성을 고립적으로[fuer sich] 갖지 않고 타자에 대해 관계하는 것으로서[fuer Andres] 즉 자유롭게 방임되어서 어떤 것에 희생되기도 하는 외면으로서 갖는다. 나아가서 이런 외적 요소는 일상성과 경험적 인간의 형상을 반드시 띠어야 하는바 까닭인즉 여기서는 … 신 자신이 유한한 시간적 현존재로 내려오기 때문이다.”[3]

 

5) 비미적인 것과 숭고

낭만주의 예술에서 예술의 소재가 되는 외적인 현존은 자립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자기 부정성을 지닌 것이니, 그것은 유한성과 규정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고전주의에서 예술적 현존은 이상화되면서 자립성을 지닌 것이 된다. 그것은 균형과 조화를 지니고 고요하게 머무른다. 반면 낭만주의에서 예술은 이런 유한성과 규정성 때문에 고전주의적 미학에 비추어 본다면 균형과 조화를 결여한 비-미적인 것[Unschoen], 즉 추한 것을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낭만주의 예술에서 이런 비-미적인 소재는 진정한 낭만적 예술의 이념을 드러내는 계기에 불과하다. 이런 비미적인 것은 곧 이행하고 마는 우연한 것이니, 이러한 비-미적 예술 소재는 절대적 주관성의 정신을 드러내려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고전주의 예술은 외적 형상에서 미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균형과 조화를 지니면서 이상화된 형상이다. 그러나 낭만적 예술은 외적 형상에서는 비미적인 것이지만, 절대적 주관성을 드러내면서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여기서 정신적 아름다움이란 정신이 조화와 균형을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신적 아름다움은 곧 자신이 절대적 주관성인 신적 존재라는 의미이니, 이 아름다움은 숭고한 아름다움에 속한다고 하겠다.

 

여기서 상징주의 시대 등장한 숭고성이 다시 출현하는데, 상징주의 시대 숭고성은 마법적인 방식으로 신과 합치에 이르는 것이라면, 낭만주의 시대 숭고는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는 데서 존재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숭고는 무상의 죽음을 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성과 같은 숭고이다.

 

6) 음악성

그러므로 헤겔은 낭만주의 예술은 두 세계를 갖는다고 한다.  그 하나는 절대적 주관성의 내적인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인 것의 영역이다. 헤겔은 이 두 세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낭만적 예술은 외면성이 이제 다시 독자적으로 활보하게 만들며, 이런 점에서 … 각양각색의 소재들이 자연적 우연성을 갖는 현존재 그대로 거침없이 표현되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동시에 단순히 외적인 소재로서는 무차별적이고 저급한 것이며, 오직 그 속에 심정이 집어넣어지고 … 내면의 내밀성[Innigkeit]을 언표할 때만 본래의 가치를 지닌다는 규정을 지닌다.”[4]

 

이처럼 외적인 현존의 부정을 통해 떠오르는 절대적 주관성을 헤겔은 마치 음악과 같은 것에 비교하고 있다.  

 

“이런 관계 속에서 내면은 정점에서 표출되면서 외면성 없이 외화된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채 흡사 자기만을 듣는 듯하며 대상성도 형상도 띠지 않은 음조 자체이고, 물위를 떠도는 것이며 세계 위에 울려 퍼지는 울림이니, 세계는 자신의 현상 속에서 그것도 이질적 현상 속에서 다만 영혼의 내적 존재를 비추는 그림자만을 받아들이고 또 이런 내적 존재를 반영할 뿐이다.”[5]

 

“그러므로 낭만적인 것의 기본 음조는 음악적이며 특정한 표상 내용을 갖는다는 점에서 서정적인 것이다.”[6]

 

헤겔은 이런 점에서 낭만적 예술은 한편으로 무한히 다양한 소재를 받아들이는 보편성과 다른 한편으로 모든 외적 현존이 지양되는 순수한 내적 심정의 심연이 공존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7) 낭만적 예술과 종교

 낭만주의에서 내용은 예술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고전적 예술 형식에서 예술은 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신은 자신을 외적으로 현현하므로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자각되며, 예술 없이는 자각되지 않는다. 예술이 부차적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 예술은 상징적 예술과 같은 위치에 있지만 그럼에도 양자에 차이가 있다. 

 

상징적 예술에서 신적 존재는 먼저 종교를 통해 표상[환상]으로 주어지지만, 이런 표상은 소수의 사제에게서나 가능한 것이며 대중에게서는 불가능하다. 대중은 상징적 예술을 통해 신적 존재에 접근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상징주의 시대에는 종교에 봉사하는 데 이런 봉사는 부차적이면서도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낭만적 예술에서 절대적 주관성의 정신은 자기 매개적인 존재이다. 이런 자기 매개 속에서 외적인 존재는 그 자체에서 자기 부정성을 지닌 것이기에, 우연하며 잠정적인 것으로 주어지므로, 이것은 예술의 소재가 되기는 하지만, 이런 예술을 통하지 않고서 절대적 주관성은 자기 매개를 통해 즉 사유를 통해 자기를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사유는 일반 대중에게도 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대중에게 예술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이로써 예술은 낭만주의 시대 말기 즉 근대에 이르러 일반 대중에게서도 잊혀지면서 예술의 종말이 다가온다.

 

[1] 미학강의 2, 140-141쪽

[2] 미학강의 2, 148쪽

[3] 미학강의 2, 156쪽

[4] 미학강의 2, 150쪽

[5] 미학강의 2, 150쪽

[6] 미학강의 2, 151쪽

헤겔미학산책19-근대인과 파토스[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9-근대인과 파토스

 

1) 근대인

근대는 시장 또는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를 받는다. 헤겔은 이런 관계를 ‘정신의 소외’라는 개념으로 서술했다.

소외된 정신 속에서 신과 인간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신은 개인들 사이의 상호 작용 즉 개인의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를 나타낸다. 앞에서 이를 내재적 초월이라는 기독교 신의 모습을 통해 설명하였다.

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반대로 반영하는 것이 곧 근대인의 모습이다. 한편으로 근대인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자기를 긍정하리라 믿는다. 그는 자기에 대한 오만에 빠지며, 무한정한 열정으로 자기를 추구한다. 이것이 근대인의 파토스다. 다른 한편으로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언제든지 그를 파멸시킬 수 있으니, 그는 운명에 대한 예감 가운데 죄의식을 느끼며 그 앞에서 불안하다.

헤겔은 무한한 파토스 속에서 오만하면서도 닥쳐오는 운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헤겔은 이런 점을 근대인의 파토스와 죽음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이 두 개념은 고대에서도 출현하는데, 헤겔은 고대적 개념과 근대적 개념의 차이를 정신적 토대의 차이에서 규정하려 한다.

 

2) 고대의 파토스

고대인의 파토스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라는 작품이다. 여기서 두 주인공 엘렉트라와 클레온은 파토스에 따라 행동한다. 역시 그들의 파토스는 그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실체적 힘 예를 들어 가족의 윤리나 국가의 윤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자기 자신이 명백하게 정당하다고 믿고 이를 주저 없이 단호하게 행동으로 실천한다.  

그들은 행위의 결과 몰락하지만, 그의 몰락은 그가 자기의 실체와는 대립하는 다른 실체적 힘을 해치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 다른 실체적 힘에 의해 보복 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에 대립하는 실체적 힘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부당하게 보복 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안티고네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오빠를 장사 지내고 클레온 앞에서 끌려와서 자신이 택한 원리가 하늘의 법이라고 주장한다.

 

“전 글로 쓰인 것은 아니지만, 확고한 하늘의 법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임금님의 법령이 인간의 몸으로서 강한 힘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법은 어제오늘 생긴 것이 아니고 불멸의 것이며 그 시작은 아무도 모릅니다.”[1]

 

 반면 클레온[안테고네의 외삼촌이다]은 국가의 원리를 대변한다. 국가적으로 본다면 싸움을 벌인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조국을 방어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조국을 배반한 자다. 당연히 전자는 경배 되어야 하고 후자는 처벌되어야 했다. 클레온은 등장하자마자 코러스 앞에서 자신의 임무를 고백한다. 그는 국가를 최우선의 원리로 삼는다.

 

“시민에게 안전이 아니라 파멸이 닥쳐오는 것을 보고서는 나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작정이며, 또한 국가에 적대하는 인간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외다. 그것은 즉 우리나라가 우리의 안전을 지켜 주는 배이며, 그 배가 편히 항해할 때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

 

안티고네든 클레온이든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실체적 힘과 다른 실체적 힘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그는 무지에 의해 범법을 실행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안티고네는 자신의 무죄를 끝까지 주장한다. 

 

“저는 이렇게 친구들의 버림을 받고 불행한 이 몸은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죽음의 동굴로 갑니다. 나는 하늘의 무슨 법을 어겼습니까? 경건한 일을 하다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들었건만 어째서 불쌍한 이 몸은 신들께 의지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런 일로 신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면 내 운명을 다 겪고 난 다음에는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판결을 내린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한 부당한 것과 똑같은 화를 그들도 겪게 되기를 바랍니다.”[3]

 

그럼에도 그들은 마침내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되는데, 그런 자각은 자신이 다른 실체적 힘으로부터 보복 당하면서 비로소 생겨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정당성이란 주관적이거나 추상적인 당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는 실체적 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파멸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된다. 아래 클레온의 고백을 들어보자.

 

아, 이 죄는 도저히 다른 사람한테 전가할 수 없는 것이구나! 내가, 그렇다, 내가 죽였다. 불쌍한 이 몸!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얘들아, 어서 나를 데려가거라.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나를 빨리 데려가거라!”[4]

 

3) 근대의 파토스

근대인의 파토스는 이런 실체적 힘과는 무관하다. 여기서 파토스란 자신의 목적을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추구하면서도 이런 추구가 단순히 자신의 주관적 선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적인 힘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그는 아직 신적인 강요를 명백하게 자각하지 못하며 그것은 다만 느낌으로 다가오기에 그는 자신의 목적을 자기를 넘어선 욕망 즉 무한한 욕망 즉 열정이라는 방식으로 느낀다. 

하지만 이런 자의적인 추구는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파멸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토스적 인간은 처음에 그에게 다가오는 파멸을 어떤 알 수 없는 외적인 힘에 의해 지배되는 운명으로 파악한다. 그는 이런 운명을 무의식적으로 예감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끝없는 죄의식과 불안 속에 있다.

근대인의 파토스는 예를 들어 절대주의 시대 대표적인 예술가인 라신느의 희곡 페드라[5]에서 나타나는 페드라의 모습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페드라는 자신이 이폴리투스를 고발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유모! 질투의 불길에 휩싸인 이 몸의 심정을 보살펴 주오. 아리시아를 그냥 둘 수는 없소. 그 가증스런 혈통에 항거하는 내 낭군의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하오! 그녀의 죄는 그의 오빠들의 죄에 능가하는 것이니 가벼운 벌로 그치지 않도록 내 질투에 겨운 분노에 힘입어 내 낭군 테세우스에게 간청하려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내 지각이 갈피를 잃고 질투에 눈이 멀어 테세우스왕에게 애원하는 것에 의지하다니. 내 낭군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 시련으로 몸을 불사르다니!” [6]

 

위의 글의 앞부분은 질투, 뒷부분은 죄의식을 드러낸다.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한없는 질투, 그것이 곧 근대인의 파토스이다. 그런데 이런 파토스 속에 이미 그는 자신의 잘못, 죄를 자각하고 있다. 그의 질투에는 죄의식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파멸을 예감하고 있다. 그에게 마침내 파멸이 다가온 순간 그는 그것이 그 자신에게 적절한 자신의 정의라는 것을 인정한다. 자신의 죄를 자각한 페드라는 모든 것을 고백하고 죽기로 결심한다.

 

“지금 이 몸은 촌각이 소중하오. 테세우스왕이시여! 제발 내 말에 귀를 기우려주오. 순결하고 존엄한 왕자에게 불륜의 추파를 던진 것은 이 몸이요 비너스신의 화살이 이 가슴에 정념의 불길을 타오르게 했으며, 그 밖에 모든 일들은 하녀 에노느가 서둘러 저질은 짓이옵니다. 그러나 이젠 그도 자기 죄를 깨닫고 바다 속에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이 몸은 당신 앞에 나아와 내 한 맺힌 탄식을 털어놓고 한발 늦게 죽음의 나라로 내려가려 합니다.”[7]

 

4) 죽음에 관해

헤겔에 따르면, 고대인과 근대인은 죽음에 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고대인에게 삶은 정당한 실체적 힘을 추구하는 것이니, 그에게 죽음이란 자연이 그에게 부과한 몫이 그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체적 힘을 추구하는 일은 이제 그의 사후에 새로운 인간에 의해 이어져가니, 그의 죽음은 우연적인 개인적 삶의 소멸에 불과할 뿐이며 그의 삶이 추구하는 본질은 계속적으로 이어 간다. 따라서 고대인은 이미 스스로 불멸하며, 불멸에 대해 진지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 앞에서 담담하며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래는 죽음 앞에 선 안티고네의 고백이다.

 

“(안티고네) 저는 이렇게 친구들의 버림을 받고 불행한 이 몸은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죽음의 동굴로 갑니다. 나는 하늘의 무슨 법을 어겼습니까? 경건한 일을 하다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들었건만 어째서 불쌍한 이 몸은 신들께 의지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런 일로 신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면 내 운명을 다 겪고 난 다음에는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판결을 내린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한 부당한 것과 똑같은 화를 그들도 겪게 되기를 바랍니다.” [8]

 

반면 근대인에게 죽음이란 두려운 일이다. 그것은 거꾸로 근대인에게서 죽음이란 자신에게 아주 소중한 삶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인은 자신의 주관적 욕망이 무한히 중요한 것이므로, 죽음이 두려운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근대인은 불멸에 대한 진지하고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근대인에게서 죽음은 오히려 신적인 정의의 실현이 된다. 사실 무한한 욕망으로 추구되던 개인적인 목적은 자의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이런 자의적인 목적이 제거되는 것만이 진정으로 중요한 객관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니, 죽음은 신적 정의를 회복하여 신적인 것으로 복귀하는 과정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근개인에게서 죽음은 곧 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즉 개인의 죽음은 신이 자기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근대인의 죽음 개념의 앞에서 언급한 페드라에서도 나타난다. <페드라>에서 운명의 힘은 마지막 장면에서 폭로된다. 이 마지막 순간 페드라의 태도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라신느는 온몸에 독이 퍼져서 죽어가는 페드라의 고백을 통해서 이를 밝히고 있다.

 

“죽음은 내 눈에서 빛을 빼앗아 이 눈이 더럽힌 이 세상의 모든 빛을 정결케 하려는 것이요.”[9]

 

페드라는 자기의 죽음을 긍정한다. 그 때문에 페드라는 마지막 순간 더는 자책도 사라지고 고귀한 고요 속에서 죽음을 겪게 된다. 이런 몰락의 극을 통해 라신느가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세상을 영원히 지배하는 신의 힘, 신의 영광이다.


[1]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현암사, 1969. 이 가운데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조우현이 번역했다.

[2]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3]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4]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5] 라신느는 루이 14세 시절 즉 바로크 시대 궁정 작가이다. 그는 같은 비극작가 코르네이유와 희극 작가 몰리에르와 대결하면서 여러 비극을 작성했는데, <페드르와 이폴리투스>는 그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페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원래 에우리피데스가 만든 비극 <이폴리투스>가 있지만 작가 라신느가 이를 개작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비교적 단순한 비극이지만 라신느의 비극은 그의 시대 바로크 시대의 분위기에 맞는 화려한 비극이다. 라신느는 개신교의 예정조화론을 믿는 장세니즘의 신봉자였다.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적인 운명 개념 대신 근대 기독교적 운명 개념을 비극 <페드라>를 이끌고 가는 기본적인 동력으로 삼았다. 대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의 아내인 왕비 페드라는 전 왕비의 아들인 이폴리투스를 사랑하지만 감히 고백하지 못하고 야위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출정 중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이폴리투스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폴리투스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반면 이폴리투스는 테세우스가 무너뜨린 아테네 전 왕조의 딸 아리시아를 사랑한다. 테세우스가 죽었다는 소문에 이폴리투스는 아리시아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한다. 아리시아 역시 이폴리투스를 연모해왔던 터라,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맺어지게 된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살아서 돌아온다. 그러자 페드라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혹시 이폴리투스가 자신을 왕에게 고발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페드라는 먼저 왕에게 무릎을 꿇고 이폴리투스를 고발한다. 이폴리투스가 오히려 왕이 없는 사이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면서 이폴리투스에게서 훔쳐온 그의 단검을 증거로 내보인다. 테세우스는 이폴리투스를 추방하고, 분노 때문에 바다의 신 넵튠(포세이돈)에게 추방당한 이폴리투스를 죽여 달라고 요청한다. 페드라는 이를 알자 후회하지만 이번에는 아리시아에 대한 질투감 때문에 자신의 거짓을 밀고 나간다. 이폴리투스는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사랑하는 아리시아에게 먼 나라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떠나지만 그가 타고 가던 마차를 넵툰이 보낸 괴물이 덮쳐 그는 죽게 된다. 그의 죽음을 알게 되자 죄의식으로 고통 받던 페드라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페드라는 스스로 독을 마신 채 왕에게 나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죽는다.

[6]  라신느, Phaedra, 이연자 역(극단 성좌 77년 공연 대본), 2막 5장

[7]  라신느, Phaedra, 위의 책

[8]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9]  라신느, Phaedra, 위의 책

헤겔미학산책18- 소외된 정신과 기독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8- 소외된 정신과 기독교

 

1) 전면적인 시장화

낭만적 예술 형식은 근대 정신을 반영하는 예술 형식이다. 헤겔은 근대 정신을 절대적 주관성으로 규정했는데, 어떤 의미일까? 거슬러 올라가 먼저 헤겔에서 근대 정신이 출현한 역사적 토대부터 이해해야 한다.

우선 통상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지만 헤겔에서 중세와 근대는 단절된 시대가 아니라 연속된 시대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헤겔에서는 인륜성의 시대이다]가 해체되면서 개인적 인격의 발전이 일어난다. 이제 인격 즉 형식적인 자유로운 결정권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부여된다. 여기서 추상적인 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등장한다.

인격은 아직 실질적 정의의 원리를 결여하므로 자유의 실질적 내용을 둘러싸고 인격 사이의 무한한 투쟁이 벌어진다. 이런 투쟁은 후일 홉스가 주장한 만인의 만인의 투쟁에서와 같이 끝내 황제가 자의적으로 법을 결정하는 세계[로마 제국 시기 이후]로 된다. 황제는 절대권을 지니지만 그 역시 하나의 인격이므로 그의 결정은 전적으로 자의적이니 이 시대는 모두가 형식적으로는 자유롭지만 내용적으로는 황제가 자의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다.

황제가 자의적으로 제정한 국가[로마 제국]가 만인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오성 국가로 발전하기까지가 헤겔에서 근대 정신이 출현하는 시기이다. 그 토대가 되는 것은 이 시대 사회적 상호관계의 발전인데[1] 이는 시장의 출현을 매개로 한다. [2]

이런 시장이 사회 전체에 일반적으로 펼쳐지게 되면서 마침내 근대 사회가 출현한다. 헤겔에서 근대사회란 곧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다.[3]

시장의 기본적 관계는 자유로운 인격 사이의 법적 계약관계이다. 이런 계약적 관계는 비단 경제적 시장에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계약적 관계는 그 동안 존재했던 모든 사회적 관계 속으로 침투하면서 전체 사회를 보편적 계약 관계로 전환시킨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단체는 물론이며, 국가조차도 마침내 계약 관계로 되며, 심지어 가족 관계조차 이런 시장적인 계약관계가 파고들어간다.

중세와 근대의 차이는 다만 시장 즉 사회적 상호관계가 발전하면서 사회 전체가 이런 시장 관계로 전환하는 정도에서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니, 헤겔은 통상적으로 구분되는 중세 사회와 근대 사회를 이런 시장의 계약관계가 발전하는 연속적 단계로 파악한다.

 

2)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

헤겔은 이 시기를 정신적으로 보면 근대 정신[그 산물이 곧 오성 국가이다]이 발전하는 시기라 규정하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 사회 전체에 일반화되는 시장 관계에서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분석해 보자. 시장 관계에 대한 헤겔의 설명을 보면, 그가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장 속에서 표면적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한다. 하지만 개인의 목적은 타인을 통해 실현되며, 거꾸로 타자의 목적은 개인 자신의 활동을 통해 실현된다. 여기서 개인은 타인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그 자신을 타자의 수단으로 만든다. 개인과 타인은 이제 보편적 상호 의존관계 속에 놓여지게 된다.

개인은 자신의 산물에 주관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 산물이 지닌 객관적 가치는 시장을 통해 실현된 가치이니, 그의 활동은 전적으로 시장의 지배를 받는다. 두 가치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부여한 주관적 가치는 시장에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의 산물은 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가치를 실현할 수도 있으니, 그의 자유란 오직 시장에 의해 제약된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은 생산하는 활동 중에서는 자기가 생산한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심지어 그 가치가 실현될 수 있을지조차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생산한다. 그는 생산을 마치고 시장에 나가 그 생산물을 교환 속에 집어넣는 때 비로소 뒤늦게야 자기가 생산한 것의 가치를 알게 된다.

사회 전체로 본다면 표면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은 항상 어긋난다. 그 때문에 단기적으로 시장 관계는 공황과 붐이라는 끝없는 요동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시장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은 조절된다. 사회는 이런 시장에 의한 조절을 통해 안정적으로 발전한다. 시장을 지배하는 이 힘은 현상 속에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현상 속에서 자기를 관철하니, 아담 스미스는 이런 시장의 힘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 하였다.

헤겔은 시장에서 일어나는 개인과 타인의 상호 작용 관계를 일반화한다. 사회 전반에 전개되는 법적 계약관계는 이런 시장 관계를 원형으로 삼는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사회적 상호 관계 속에서 개인은 주관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하지만 그의 활동은 맹목적일 뿐이다. 그 너머에 사회적 실체가 그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 헤겔은 사회 전반에 일반화된 시장 관계를 통해 자기를 관철하는 객관적 가치를 사회적 정의[Sache Selbst] 또는 실체로 규정한다. 이런 실체의 힘 즉 보이지 않는 시장의 힘을 헤겔은 소외된 정신이라 규정했다. 이를 굳이 소외라고 규정한 까닭은 그 힘은 한편으로는 현상 너머에 초월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상 속에 자기를 관철하고 있으니, 내재하면서도 초월적이라는 의미에서 이를 소외[4]라고 규정한 것이다.

황제의 국가에서 오성 국가 즉 근대 국가로 형태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신의 발전이다. 그 정신은 소외된 정신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이 소외된 정신을 자각하면서 자각된 정신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 시장 관계 속에 전개된 개인적이고 형식적인 자유의지가 마침내 개인이 실체적 목적을 자기 의지의 목적으로 삼는 루소적 일반적 자유의지가 출현하는 데로 발전한다.

물론 근대 국가인 오성 국가에서는 아직 정신의 발전은 완성되지 못했다. 헤겔은 루소의 일반의지 단계를 넘어서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자유의지로 발전하며 이 과정을 통해 이상적 국가의 형태가 출현한다. 하지만 이 마지막 과정은 헤겔이 상정한 미래의 역사이지 현실의 역사는 아니다.

 

3) 절대적 주관성과 무한한 내면성

중세부터 서서히 발전해 온 근대 사회의 정신은 곧 소외된 정신이니 이 소외된 정신은 근대 정신을 표현하는 종교와 예술, 철학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먼저 이런 시장 사회를 토대로 하는 종교의 모습부터 확인해 보자.

헤겔은 바로 이와 같은 소외된 정신을 통해 개신교의 근본적인 특징이 도출된다고 본다. 개신교의 신은 헤겔에서 마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것인데, 그것은 개인에게 내재하면서도 초월해 있는 신이다.

신이 세계를 너머 초월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와 단절된 피안에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은 이 세계 속에서 개인의 상호 활동을 통해 자기를 관철하지만 다만 그 관철하는 활동이 개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초월적이다.

개인에게 내재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범신론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즉 개인 자체가 신의 현현은 아니다. 신은 시장 속에서처럼 개인들의 활동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있다는 의미이다. 이 상호 작용은 곧 개인이 서로를 부정하는 관계이니, 개인들의 상호 부정적인 관계 속에 신이 현현한다.

개인은 이런 상호작용적 관계 속에 신이 출현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런 개인에게 신의 활동은 곧 외적인 강제, 맹목적 필연 즉 운명의 힘이다. 그러나 개인이 객관적으로 관철되는 실체의 힘을 알게 되면,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의 본질에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니 자유로운 의지가 된다. 여기서 신과 나는 합일에 이른다.

이런 자각은 근대를 넘어서야[칸트 자유의지에서 비로소 이런 자각이 시작된다고 한다] 가능하며 개인은 아직 이런 자각에 이르지는 못한다. 하지만 개인은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이런 합일을 내적으로 느끼고 있으니, 신과 나의 합일이 이런 느낌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것이 곧 신에 대한 믿음이다.

개인의 측면에서 신과 나와의 합일은 스스로 자기를 넘어서 신에 이르는 고양의 과정이다. 이 고양의 과정은 개인의 자기 부정성 즉 무한한 규정성으로 규정된다. 신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합일은 신 자신이 나를 매개로 해서 자기 인식에 이르는 과정이니, 이 과정이 곧 절대적 주관성이다.

 

“낭만주의 예술에서 무한한 주관성은 그리스 신과 달리 홀로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와 타자와의 관계 속으로 발을 들이나 이 타자는 주관성 자신의 타자로서 그 안에서 주관성은 자신을 재발견하며 또한 자신에 머무르는 존재[Bei Sich Sein]로서 그것과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5] 

 

느낌을 통해 다가오는 믿음의 상태를 헤겔은 ‛내밀함[Innigkeit]’으로 규정한다. 이런 믿음의 단계에서 신은 한편으로 개인에게 알 수 없는 소원한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개인에게 그의 본질인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니, 개인은 이 신에 대해 두려움과 친밀함을 동시에 느낀다.[6]

여기서 기독교적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두 개념 즉 ‘절대적 주관성’과 ‘내밀함’ 사의의 연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개인이 주관 속에서 이미 내적으로 신과의 합일을 느끼고 있을 때 그것이 곧 내밀함이며, 이런 내적 합일은 자기 부정적인 행위를 통해서 마침내 실현되면서 절대적 주관성이 된다. 내적 내밀함 속에 절대적 주관성이 예감되며, 내밀함의 외적인 실현이 곧 절대적 주관성이다.

 

4) 역사 속의 신

이런 신은 한편으로 상징주의 시대 주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인 추상적 신과 구분되며 다른 한편으로 각 민족의 자연적 개별성을 담지 하는 그리스 시대 개별적인 정신과도 구분된다. 절대적 주관성으로서 신은 가장 추상적인 유일 신이 가장 구체적인 인간[그리스도]으로 출현하니 이 신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를 인간에게 직접 계시해 주는 신이다.

예수는 성령이 곧 사랑이라고 선포했다. 헤겔로 볼 때 이는 곧 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신이 소외된 정신이고 이 정신은 실체적 정의를 자발적으로 실현하는 의지이니 이는 공동체적 정신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신의 본질, 성령이 곧 사랑이므로 기독교 신은 인격신이다.

헤겔은 본래 기독교 정신은 신과 인간 사이의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믿음의 관계이지만, 이런 내밀한 믿음의 관계는 봉건제 시대에서 거룩한 빵과 성 유물 숭배 신앙[7]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이는 사물 속에 신이 강림한다는 신앙이니 곧 상징주의 단계의 신앙에 불과하다. 봉건제 말기에 이런 신앙은 다시 성상 신앙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고전주의 단계의 예술적 종교[8]이다. 마침내 종교 개혁을 통해 다시 원래의 내밀한 믿음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진정한 기독교의 관계가 출현했다.

따라서 기독교적 신의 모습은 고전적 신의 모습과 구분된다. 헤겔은 이 두 신의 모습은 모두 인간의 형태를 통해 나타나므로 어떻게 보면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나, 헤겔은 두 신의 모습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지적한다.

우선 고전적 신은 예술 즉 감각적 형상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며 이 감각적 형상은 영웅을 닮은 이상화된 모습이다. 그 감각적 형상은 불멸의 영원한 모습으로 시간을 초월해 존재한다.

반면 기독교 신은 감각적 형상이 아니라 시간적인 역사 속에서 자기를 드러낸다. 기독교 신은 살과 피를 지닌 구체적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모습 자체가 신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며, 그런 구체적 인간이 스스로 전개해나가는 역사적 운동 가운데서 자기를 드러낸다. 이 역사적 운동은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운동이다.

이런 개인의 상호작용 운동은 개인이 자신을 부정하는 운동이니 이를 통해 개인은 육체가 아닌 정신적 존재로 복귀한다. 이런 정신적 존재 속에서 신이 출현한다. 고전적 신은 아름다운 육체 속에 출현하지만 기독교 신은 육체가 아닌 자기 복귀적인 아름다운 정신 속에서 출현한다. 이 자기 복귀적인 정신이 곧 무한한 내면성이고 절대적 주관성이다.

기독교 신의 조각이 고전적 신상에 대해 지니는 차이의 핵심에 눈이 있다. 헤겔에 따르면 고전적 신의 형상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눈동자는 곧 영혼을 드러내는 것인데, 고전적 신은 무한한 내면성인 영혼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독교 신은 현상을 너머 자기 내로 복귀하는 무한한 존재이므로 기독교 신의 모습 속에는 영혼을 표현하기 위해 눈동자를 지닌다.

신상에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결함은 조각 형상들이 단순한 영혼의 표현 즉 눈빛을 갖지 않는 점에서 외적으로 드러난다. 아름다운 조각의 걸작들은 시선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들의 내면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정신적 집중을 갖는 –이것은 눈을 통해 알려진다-자기인식적 내면성으로서 비치지 않는다.”[9]

 

“그러나 낭만적 예술의 신은 시선을 지니는 것으로, 자신을 의식하는 것으로, 내면화된 주관성으로,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내면에 열어 보여주는 것으로 현상한다. 왜냐하면 무한한 부정성, 즉 정신적인 것의 내면으로의 회귀는 육체성으로 주조된 상태를 지양하며, 또한 주관성은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정신의 빛이기 때문이다.”[10]


[1] 헤겔은 국가 형태의 발전은 정신현상학 정신 장에서 다루고 이런 정신 발전의 토대가 되는 사회적 상호관계의 발전은 이성 장에서 다룬다.

[2]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이미 11세기에서 13세기에 시장이 발전하면서 중세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헤겔에 따르면 이 시기 도시는 해상무역을 매개하면서 여기서 상공업을 통해 사유재산이 발전했다. 도시는 이를 바탕으로 영주와 대결하면서 자치권을 획득해 나갔다. 도시는 이 과정에서 탑을 세우고, 시민 군을 결성하며, 시 자치체를 구성했고 마침내 재판권까지 획득하였다. 도시는 영주와 대결하는 가운데 왕의 보호를 받고 왕을 지지하면서 왕권 성장을 낳았다.

[3]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시장이 전면화되는 것은 노동력이 시장에서 판매되는 임금 노동이 출현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헤겔은 시장이 전면화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원인이 임금노동의 출현이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튼 전면적인 시장화가 근대 사회라고 보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와 일치한다.

[4]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런 소외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 정신을 규정한다. 후일 마르크스는 이런 소외를 자본주의 사회를 규정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5] 미학강의 2권, 156쪽

[6] 헤겔은 기독교적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신앙이란 일반적으로 눈 앞에 없는 과거의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신의 진리를 주체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루터 파에서 진리는 완성된 대상이 아니다. 주체는 흔들림 없는 진리 앞에 자아의 특수한 내용을 버리고 이 진리를 자기의 것으로 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주체가 되는 것이다.”(역사철학강의, 400-401쪽)

[7] 헤겔은 중세 기독교의 타락이 이런 거룩한 빵, 성 유물 신앙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것이 기적이 나 그리스도의 친견, 그리스도의 무덤을 회복하려는 십자군 원정, 사제와 평신도의 계급적 구분, 눈에 보이는 행동을 통한 구원, 진리가 밖에서부터 주어진다는 생각, 사제 서품, 고해와 순례여행과 순결 빈곤 복종의 행동, 등의 타락된 모습 등의 원천이다.

[8]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거룩한 빵과 같은 물체…인가, 그렇지 않으면 혼과 혼, 정신과 정신이 교감하는 정기로 가득 찬 그림이나 아름다운 조각 작품인가는 결정적 차이이다….후자의 경우 감각적인 것이 아름답게 완성되어 정신의 형식 그 자체가 진실된 것으로서 감각적인 것에 혼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다만 진실된 것이 여기에서는 감각적 형태를 취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역사철학강의, 394쪽)

[9] 미학강의 2, 142쪽

[10] 미학강의 2, 142쪽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가을 제65회 정기학술대회 ‘포스트휴먼과 신유물론: 물질, 몸, 도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연합학술대회 영상 20231209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가을 제65회 정기학술대회 ‘포스트휴먼과 신유물론: 물질, 몸, 도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연합학술대회 20231209

◎ 주제: ‘포스트휴면과 신유물론: 물질, 몸, 도시’
●일시: 2023년 12월 9일(토) 11:00~18:00
●장소: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 308호(31308)
●주최: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숙명인문학연구소 HK+사업단,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주관: 성균관대학교 교양기초교육연구소

영상 목록(특정 발표 영상만 공개)
☞ 개회사 사회: 현남숙(성균관대)
☞ 개회사: 김종갑(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회장·건국대)
☞ 축사: 박정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성균관대)
1부 신유물론과 물질에 대한 논쟁 – 좌장: 김재희(을지대)
☞ 2발표(11:40): ‘신유물론의 물질 개념과 들뢰즈의 존재론’ – 박준영(수유너머 104)
2부 기조발제 – 사회: 하인혜(인천대)
☞ 1발표(13:30): ‘얽힘과 접촉’ – 최종덕(독립연구자)
☞ 2발표(14:10): ‘위기인가 기회인가: 포스트휴머니즘의 곤경과 신유물론 정치의 가능성’ – 박인찬(숙명여대)
3부 신유물론과 물질과 몸 – 좌장: 이승준(생태적지혜연구소)
☞ 1발표(15:00): ‘물질과 시간의 미결정성, 그리고 애도의 윤리’ – 서영화(서울대)
☞ 2발표(15:30): ‘몸의 물질화와 수행성’ – 정유진(서강대)
☞ 3부 질문 및 토론(16:00~16:20)
4부 신유물론과 디지털도시화 – 좌장: 이지영(이화여대)
☞ 2발표(17:00): ‘디지털 도시화와 탈/재물질화’ – 이현재(서울시립대)

전체 일정표 참고 링크
http://ephilosophy.kr/han/category/e-academy/e-academy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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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사, 1부 – 2발표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vA0Hp8-IHhk?si=004ZEyIC_Wv382Ny

2부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C54pkAUt-7E?si=JLqkWLaZwyrobw_M

3부 발표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TUdBTLFLPGc?si=4VkkM-JcRDZwxMYQ

4부 – 2발표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dlGdQU2quDc?si=lu3dIOLZ0HV9VZH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봄(8월) 제64회 정기 학술대회 ‘한국 사회의 길을 철학에 묻다’ -사회와철학연구회 /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합 심포지엄 [제1부] 영상 PART 1, 2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봄(8월) 제64회 정기 학술대회 영상
사회와철학연구회 /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합 심포지엄
◎ 주제: 한국 사회의 길을 철학에 묻다

● 일시: 2023년 8월 19일(토) 오후 1~6시
● 장소: 서울대학교 83동(인문사회계열멀티미디어 강의동) 305호

영상 (PART 1) 제1부: 발표 13:20∼15:20 / 사회: 조은평(건국대)

[1발표] 배기호(중원대) – ‘한국 사회는 진짜가 없는 사회다’
[2발표] 서민규(건양대) – ‘한국 사회는 없는 것이 없는 사회다: 21세기 철학적 실재론과 반인간주의’
[3발표] 유가연(서강대) – ‘한국 사회는 자신을 표현할 길이 없는 사회다’
[4발표] 박준웅(중앙대) – ‘한국 사회는 관용이 없는 사회다’

영상 (PART 2) 제1부: 발표 13:2015:20 / 사회: 조은평(건국대)

[5발표] 유민석(서울시립대) – ‘한국 사회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사회다’
[6발표] 정대훈(부산대) – ‘한국 사회는 매개가 없는 사회다’
[7발표] 김범수(청주대) – ‘한국 사회는 지리 철학이 없는 사회다: 한반도에 필요한 지리 철학’
[8발표] 이재복(한양대) – ‘한국 사회는 애도(哀悼)가 없는 사회다’

(PART 1)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ENHDtKldfyU?si=4MMT3Ph_KGJ0xDKv

(PART 2)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NDtAEAmxnsQ?si=V11BrxNyArNFnU1K

플라톤의 <국가> 강해(58)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8)

 

  1.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2.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 제5권 끝 480a)

 

1) 형상(이데아)론(474c-476d)

 

* 이데아론을 다루기에 앞서 살핀 이상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요약하면 결국 “제2권 369a에서 제4권 427c까지 ‘말로 세워진 나라’(gignomenē polis logō) 이른바 로고폴리스(logopolis)는 그 자체 본(paradeigma)으로서 현실구현이 불가능하지만, 철학자를 그 나라의 통치자로 임명할 경우 최대한 그 본에 가깝게는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제5권 502c부터 제7권 540e까지 철학자의 자질과 교육과정 등 그 본에 최대한 닮은 나라 즉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구체적으로 다룬 다음 그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비로소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라고 명명한다.(527c). 사실 <국가>에는 이상국가라는 말 자체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플라톤 <국가>의 주제를 나눌 때 일반적으로 제2권 369a에서 제4권 427c까지의 내용을 ‘이상국가의 수립’으로 불러 구분하고 그 후 철인 통치자와 교육과정까지를 포함해 <국가> 내용 전체를 통틀어 ‘이상국가론’이라 부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른바 말로 세운 로고폴리스도 플라톤의 이상국가이고 제7권에서 명명된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 또한 그의 이상국가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전자의 논의가 후자의 논의를 위한 토대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자에 철학자 통치론이 추가된 후자의 나라야말로 플라톤이 생각한 최종적인 의미에서의 실질적인 이상국가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요컨대 <국가>에서 이상국가의 실현 가능성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지닌 입장을 정리하자면 전자의 이상국가는 본으로서 현실 불가능하지만, 후자의 이상국가는 최대한 그 본을 닮은 나라로서 최대한 가까운 한도까지 실현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그 실현 가능성이 어떤 단일한 조건에서 어떤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아니라, 복잡한 구조와 제도를 갖춘 나라의 경영 상태를 어떻게 최선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와 관련한 가능성이라는 점이다. 이점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과 관련한 실질적인 물음은 단지 가능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가능하되 어떻게 얼마나 더 본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가의 문제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필수적인 가능 조건으로서 철학자 왕의 문제는 결국 철학자 왕의 수준, 즉 바람직한 철학자 왕의 자질과 능력이 무엇이고 그 능력의 최고치는 어떻게 담보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세 가지 파도와 관련한 논의를 모두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철학자 통치론을 다루되 철학자가 어떤 자질과 능력을 지닌 사람이기에 나라의 통치자로서 적합한지부터 본격적으로 논의한다. 여기서 철학자가 좋아하는 진리로서 형상이 제시되고 드디어 이데아론이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474c-476d]

* 소크라테스는 이제 어떤 사람들이 철학에 발을 들이고ἅπτεσθαι 나라를 인도하는 것ἡγεμονεύειν이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지προσήκει φύσει부터 아래와 같이 해명한다.

* 누군가가 뭔가를 사랑한다φιλεῖν고 주장할 때 그 주장이 옳으려면, 그가 사랑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소년을 좋아하는 사랑꾼φιλόπαιδα은 한창때의 아이들 모두에 매료되어 관심을 가지고 누구도 내치지 않다. 포도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명예를 사랑하는φιλότιμος 사람들 또한 어떤 포도주이건 어떤 지위이건 가리지 않고 욕구한다.ἐπιθυμηταί 이렇듯 뭔가를 욕구하는ἐπιθυμητικός 사람은 그것의 모든 종류를 욕구하는 사람이다.(474a-475b)

*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φιλόσοφος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지혜σοφία는 욕구하고 어떤 지혜는 욕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혜를 욕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배울 거리τὰ μαθήματα에 대해서도 그 모든 것을 선뜻 맛보기를 원하고 기꺼이 배우려 하며 그래도 늘 부족해 하는ἄπληστος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475c)

* 이에 글라우콘이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οἵ φιλοθεάμονες, 듣기를 사랑하는φιλήκοος 사람들도 구경거리, 들을 거리가 있으면 어디든지 빠짐없이 찾아 돌아다니며 그 비슷한 것들이나 잡기술τεχνύδριον을 배우려 드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도 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들은 그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과 닮은 사람들일 뿐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고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ἀληθείας φιλοθεάμονας이라고 말한다.(475d-e)

* 그러자 글라우콘은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그 설명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우선 아래와 같이 ‘그 자체로 하나인 형상’과 그것들이 온갖 곳에 나타나서 ‘여럿으로 보이는 것’을 구분한다. “아름다움καλός과 추함αἰσχρός, 정의로움δίκαιος과 부정의함ἄδικος, 좋음ἀγαθός과 나쁨κακός 등 모든 형상εἶδος 각각이 그 자체로 하나’αὐτὸ ἓν ἕκαστον인데, 그 형상들이 행위πρᾶξις들이나 물체σῶμα들과 어울림κοινωνία으로써, 그리고 자신들끼리 서로ἀλλήλων 어울림으로써 온갖 곳에 나타나서 각각이 여럿πολλὰ으로 보이는 것φαίνεσθαι이다.”(476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기초로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전자)과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후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요컨대 전자의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된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로움과 부정의함 등 ‘그 자체로 하나인 형상’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로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φιλόσοφος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유일한μόνος 사람들이다. 그리고 후자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리φωνή나 색깔χροάζω, 모양σχῆμα, 그리고 이런 것들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반길 뿐, 그들의 지적 상태διάνοια로는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ὸν의 본성은 볼 수도ἰδεῖν 없고 반길 수도ἀσπάσασθαι 없는 사람들이다. (476b)

* 아름다움 자체에 다가가서 그것을 그 자체로서καθ᾽ αὑτὸ 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σπάνιος.(476b) 누군가가 후자의 사람들 즉 ‘아름다운 것들ὁ καλὰ πράγματα은 믿으면서νομίζων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κάλλος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앎γνῶσις으로 이끌고 갈지라도 그를 따라갈 수조차 없는 사람은 꿈ὄναρ을 꾸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전자의 사람들 즉 아름다움 자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아름다움 자체와 그것을 나누어 가진 것들τὰ μετέχοντα을 모두 볼 수 있으며, ‘그것을 나누어 가진 것’이 ‘그것 자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 자체’가 ‘그것을 나누어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은 깨어 있는 상태ὕπαρ로 살고 있는 것이다.(476c-d).

* 전자의 사람들 지적 상태διάνοια는 아는 사람의 것으로ὡς γιγνώσκοντος 앎γνώμη이라고 부르고, 후자의 사람들 지적 상태는 믿음을 갖는 사람의 것으로ὡς δοξάζοντος 믿음δόξα이라고 불러야 옳다.(47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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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c ‘어떤 사람들이 철학에 발을 들이고 나라를 인도하는 것hēgemoneuein이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지’ : 자연적 성향에 적합하다는 것은 그 성향에 맞는 것을 자기 일로 삼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말한다. 이상국가의 분업 원리도 모두 그 원칙에 입각해 있다. 여기서 철학자는 자연적 성향에서 무엇보다 철학에 적합하지만, 나라를 인도하는 것 즉 통치에도 적합하다고 언급된다. 즉 철학자는 철학을 좋아하지만, 자신의 자연적 성향 그대로 통치하기도 좋아하고 또 그것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국가> 다른 곳에서는 그 반대로 철학자는 ‘통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521b)이고 ‘정치적 관직을 깔보는 삶’(521b)을 사는 사람들이어서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통치하게 하려면 강제가 요구되는 사람들(521b)로 나온다. 그렇다면 이러한 플라톤의 말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철학자가 통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관직을 깔본다는 내용은 통치를 시민의 이익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 정치 권력을 쟁취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즉 철학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는 통치행위는 당연히 싫어하고 그러한 권력 지상주의자들이 탐하는 관직을 깔본다. 그러한 통치는 동족 간 내란을 일으켜 모두를 불행에 빠뜨리기 때문이다.(521a) 그러나 바람직한 통치자는 한 집단의 행복이 아니라 시민 전체의 행복을 도모하고(420b) 시민과 함께 즐거움과 고통을 공유하는 사람(462b), 또 성향상 철학자가 그러한 통치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므로 통치 권력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는 정치 생활 보다는 철학 생활하기를 더 좋아하므로 누구라도 선뜻 먼저 나서기보다 서로에게 떠맡길 수 있어 일종의 자율적 강제의 형식으로 통치의 수고를 돌아가며 떠맡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제는 싫어하는 것을 강제로 강요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꺼이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선뜻 나서지는 않는 사람들에 대한 자율적인 내부 규제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 하겠다. 요컨대 철학자에게 강제는 없다. ‘강제’라는 표현은 철학자들이 통치 적합자임에도 자칫 이기적 권력을 탐하는 자들로 비칠 수 있음을 변명하기 위한 일종의 레토릭(rhetoric)의 성격이 강하지만 어쩌면 철학과 정치 참여 사이에서 평생을 고민해온 플라톤 자신의 내적 심리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 475d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 : 요컨대 철학자는 진리를 좋아하고 사랑하여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사랑한다’거나 ‘추구한다’는 것은 모종의 성취 결과를 이룬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음’, ‘추구하고 있음’이라는 과정 그 자체 현재 진행형의 성격을 갖고 있다. 사랑을 쟁취했다는 말도 쓰지만, 사랑을 쟁취한 사람이 진정 원하고 목표로 하는 것은 쟁취 그 시점이 아니라 그 사랑을 현재 진행형으로 일관되게 유지하고 키워 나가는 것이다.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면 철학 역시 어떤 목표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현재 진행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고 설사 진리라는 확신이 있더라도 그에 머물지 않고 늘 되물어 보고 되돌아보면서 보다 진일보한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지적인 긴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그 자체가 우리 모두의 철학함의 진정한 목표라 할 것이다.

* 476d 지적 상태(dianoia) : dianoia는 추론적 사고(思考)(thinking), 사고 내용(notion, thought expressed), 사고 과정(process of thinking), 이해(understanding), 사고 기능(thinking faculty), 지적 능력(intellectual capacity)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지적 이해의 상태 내지 내용’을 의미한다. 나중 선분의 비유(509c-513e)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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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차 언급했듯이 <국가>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은 이데아론, 철인 통치론, 좋음의 이데아, 선분·태양·동굴의 비유, 변증술과 철학자 교육과정 등 플라톤 철학의 정수라고 불릴만한 핵심적인 주제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 <국가> 관련 연구서들은 물론이고 서양철학사 관련 책들이라면 모두 플라톤 철학을 소개하면서 거의 빠짐없이 이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만큼 이 주제와 관련한 논의들은 개요 수준에서부터 전문적인 연구 수준에 이르기까지 자료들이 매우 풍부하다. 이 점을 고려하면 다행하게도 최소한 이 주제들과 관련하여 우리 강해에서 기울여야 할 노력은 그만큼 덜어낼 수 있다. 그래서 이데아론을 비롯하여 제5권에서 제7권까지 우리가 다룰 플라톤 철학의 주요 주제들에 대해 우리 강해는 앞으로 아래와 같은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하려고 한다. 우선 지금까지 해왔듯이 기본적으로 <국가> 텍스트의 해당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방식으로 소개하되, 위 주제들과 관련하여 철학사를 통해 많이 알려진 일반적인 설명은 줄이는 대신 주요 논쟁점과 더불어 플라톤 철학 전체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간과되어온 몇 가지 점들을 중점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 그럼 텍스트 순서대로 <국가>에서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플라톤의 이데아(idea)론’ 또는 ‘형상(eidos)론’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플라톤의 형상은 철학자가 어떤 사람이기에 통치자로서 적합한가에 대한 아래와 같은 도입부의 대화를 통해 제기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철학자 즉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모든 배울 거리를 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글라우콘이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온갖 것을 기웃거리며 배우기를 좋아한다면 그들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는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답하고 그런 연후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아래와 같이 대비해가면서 그 둘 간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그 과정에서 철학자가 사랑하는 진리를 담지하는 대상으로서 형상이라는 것이 처음 소개된다.

* 물론 플라톤의 형상이 <국가>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국가>에서 형상은 이곳에서 처음 다루어지기 시작하여 선분·태양·동굴의 비유, 좋음의 이데아, 변증술로 이어지면 깊이를 더해 가지만 그 주제가 플라톤 철학의 중심 주제인 만큼 <파이돈>,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테스>, <티마이오스> 등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에서도 두루 다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들을 바탕으로 플라톤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통일적으로 이해하기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대화편 자체가 체계적인 논의가 아닌 데다가 대화편마다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언급들 자체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불분명한 구석 또한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 말이 ‘플라톤 이데아론’이지 그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고 그 해석 또한 학자마다 천차만별이다. 특히나 오늘날 분석철학과 언어철학의 발달에 따라 관련 텍스트에 대한 미시적 언어 및 논리 분석이 크게 증대되고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대두되면서 현대철학에서는 아예 플라톤의 원초적인 의도와 관점이 아예 공중 분해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텍스트를 직접 접하거나 전문 연구서를 보기보다는 서양철학사 등 플라톤 이데아론을 다룬 개괄서들을 통해 일반적인 개요 수준에서 그 내용을 접하고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과연 <국가> 텍스트에서 플라톤의 형상은 어떤 관점에서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

* 우선 형상(eidos : 形相)이라는 말은 ‘보이는 것’, ‘외모’, ‘형태’, ‘종류’, ‘개념’ 등 여러 가지 뜻을 지니는 일상어로서 앞에서도 여러 번 사용된 말이다.(402c-d, 434d, 435b 참고) 그러나 약간의 논란이 있는 402c eidē의 경우를 제외하면(강해 40참고) <국가>에서 플라톤이 eidos를 본격적으로 ‘형상’(形相)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한 곳은 이곳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리고 ‘이데아’(idea)라는 말은 eidos라는 말과 함께 eidō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서 eidos와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그 형상을 언급하면서 ‘그 자체로’(kath’ hauto, kata auto), ‘자체’(auto)라는 말을 여러 번에 걸쳐 사용하고 있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auto를 형용사에 정관사 to를 붙여 명사화한 것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데 점차 밝혀지겠지만 이 말들은 소크라테스가 거의 공식이라 할 정도로 형상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 아름다움 자체(auto to kalon), 정의 자체(auto to dikaion) 등)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형상을 ‘각각 그 자체로 하나’(auto hen hekaston)이자 ‘각각의 있는 것 자체’(auto hekaston to on)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들은 우선 플라톤의 형상이 파르메니데스적인 일자성(一者性)을 갖고 있다는 것 즉 형상이 어떤 타자와도 무관하게 독립적이고 그 자체로 실재하며 늘 한결같고 불변하는 하나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하나가 각각 하나라고 함은 그 형상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달리 ‘여럿’(polla)임을 나타낸다. 즉 플라톤의 형상은 다(多)의 진상으로서 각각 일자성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 자체로 독존적으로 실재하는 ‘있는 것’(to on)이다.

* 형상의 실재성을 표현하는 그리스어 on은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einai의 중성 분사형으로 being의 뜻을 갖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어에서 ‘있음’을 나타내는 einai동사는 영어의 be동사가 그러하듯 ‘있음’이라는 존재를 나태는 용례만이 아니라 ‘~임’이라는 술어적 용례로도 쓰이고 나아가 ‘다름 아닌 정말 그것 맞음’이라는 진위적 용례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플라톤이 형상을 ‘to on’으로 언급하고 있음은 형상이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자 ‘~인 것’이며 동시에 ‘정말 ~인 것으로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플라톤이 이 세 가지 용례 중 어떤 용례로서 to on을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 온갖 경우를 들어 세세하게 분석하고 있지만, 그리스어 자체가 그 세 가지 용례를 모두 포함하는 데다가 플라톤이 그 말을 사용하면서 용례의 특수성을 따로 설명하지 않는 한, 그러한 분석이 별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플라톤을 이해하려면 그가 사용한 용례의 허점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왜 그 모든 용례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 플라톤은 그 형상들의 실례로 이곳에서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로움’과 ‘부정의함’을 들고 있다. 그런데 형상들이 존재하는 곳이 믿음(doxa)이 대상으로 하는 현상계가 아니라 진정한 앎epistēmē이 대상으로 하는 예지계라는 점에서 과연 ‘추함’ 이나 ‘부정의함’도 형상인가 그것은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의 ‘결핍에 불과한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특히 to on의 진위적 용례가 to on의 참됨을 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곳 바로 뒤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오류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분명 이 점은 논란거리이긴 하다. 다만 이곳의 언급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추함’과 ‘부정의함’ 또한 ‘정말 다른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 자체로 추한 것, 부정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오류 불가능성 또한 ‘정말 추한 것, 부정의한 것에 틀림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 그런데 이렇듯 플라톤이 예로 들은 형상의 실례를 통해 형상이 무엇인가를 접근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른다. 왜냐하면, 이곳 <국가>에서도 ‘아름다움’, ‘추함’, ‘정의’, ‘부정의함’ 등 뭔가 윤리적이거나 미적인 것 이외에 감각계 인공적 사물인 ‘침상’의 형상(597c)도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있음’, ‘없음’, ‘운동’, ‘정지’ 등 범주적인 것들(<파르메니데스 129d-e, 139b, <소피스테스> 254b-255e, <티마이오스> 35a 등)을 비롯해 ‘하나’, ‘둘’, ‘홀수’, ‘짝수’, ‘원’, ‘직선’, ‘도형’, 다름’, ‘같음’ 등 수학적이거나 논리적인 것들(<대히피아스 300d-302b, <파이드로스> 104a-c, 104e, <에우튀프론> 12d, <메논> 74b, 74d-e 등) 그리고 ‘눈’, ‘불’, ‘벌’, ‘흙’, ‘공기’, ‘물’, ‘불’ 등 자연물들(<파이드로스> 103c-105d, <메논> 72b-c, <티마이오스> 51b 등)도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침상의 예처럼 형상의 그림자인 것들로 인간이 만든 인공물의 형상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것이어서 침상의 경우 그냥 비유로만 사용된 것이라 이해한다 해도 플라톤이 언급한 위와 같은 형상들의 다양한 예들은 과연 플라톤이 생각하는 형상이 무엇인가에 대해 실로 많은 논란과 의문을 수반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위와 같은 예들 대부분이 무언가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이러저러한 구체적인 사례들로 정의하는 것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예시된 것임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형상은 모든 경우에서 늘 필연적으로 변화가 수반될 수밖에 없는 감각적인 성질을 갖고 있지 않은 것, 즉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aei kata tauta hosautōs onta)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우리의 일상의 경험에서도 가까운 예로 일정한 음의 수적 비례 등 수와 논리, 자연의 법칙을 구성하는 수많은 이론적 원리들이 수많은 아름다운 악곡들 배후에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그리고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형상들과 행위들 또는 물체들과 어울림(koinonia)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장차 또 자세히 다루어지겠지만 이른바 감각적 물질세계에 대한 형상의 관여(metechein)로 설명되면서 실상의 세계, 예지계로서 형상계와 그 그림자의 세계로서 현상계의 내적 관계를 규정하는 토대가 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형상들) 자신들끼리 서로 어울려’라는 부분은 예지계 형상들끼리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별도의 추가적인 설명도 없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과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형상들이 어울린다고 하면 형상들에게 어울리는 측면이 있어야 가능한데 형상들 각각은 어떤 것들과도 관계 맺지 않는 자체적이고 독립적이며 불변의 것으로서 관점이나 측면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플라톤은 이곳에서 형상들의 결합과 관련하여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는 대신에 이후에 저술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소피스테스>에서 그 문제를 독립적인 주제로 삼고 있어 우리는 <소피스테스>(250a-259d)를 통해 그 의문의 실마리를 부분적으로나마 풀 수 있다. 그곳에서 플라톤은 존재(ousia)와 운동(kinesis) 그리고 정지(stasis), 같음(tauton)과 다름(thateron)을 형상의 예로 들면서 운동과 정지 모두 일단은 있는 것으로서 존재성을 갖는 한, 존재에 의해 포괄된다고 말한다. 즉 운동도 정지도 존재와 일정하게 결합(koinonia)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는 그러면서도 이들 각각의 것과 다른 어떤 것이므로 이들 각각은 또 서로 다른 것으로 ‘다름’과 결합해 있을 뿐만 아니라 각기 그 자체로 자기 동일적이므로 ‘같음’과도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서 철자의 비유를 통해 형상들의 결합을 설명한다. 즉 자음 모음은 각각 그 자체 하나의 유(類, genos)이자 형상으로서 서로 결합하여 글자를 이루고 글자는 다시 어울려 단어를 이룬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형상이 있다면 그것은 3의 형상과 선분의 형상 등이 일단 어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삼각형의 형상에서 3의 형상과 선분의 형상 각각이 결합했다 해서 그것들 각자의 일자성을 잃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 자체로 자체성을 보전하면서 유와 종의 관계를 갖고 서로 결합한다. 물론 이것들은 무한대의 경우 수로 결합하거나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존재와 정지는 결합할 수 있되 정지와 운동은 결합할 수 없듯이 철자들이 아무런 철자술(grammatikē, 253a) 상의 규칙 없이 아무 자음과 모음들끼리 임의로 결합할 수는 없다. 이른바 최고류에 해당하는 형상은 종차를 이루어가며 가장 위쪽으로 섞이고 모이면서(synagein) 드러나는 형상이고 반대로 그러한 최고류의 형상이 분할(diairesis)되어 더 분할 될 수 없게 되면 그것이 최하종으로서 이를테면 철자에 해당하는 원자적 형상(atomon eidos)이 될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세계에서 이러한 결합과 분할의 내적 관계와 규칙을 훤히 들여다보고 알 수 있는 능력이 곧 철학자가 최종적으로 습득해야 할 변증술(dialēktikē)이다.

* 이러한 형상들의 결합은 말년의 저작 <티마이오스>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우주 제작과정을 그리고 있는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이른바 형상들의 세계를 본(paradeigma)으로 삼아 그것을 보고 실제 자연 세계를 만든다. 이 경우 데미우르고스가 바라보는 형상들 가운데에는 개별 형상들도 있겠지만 ‘여럿이 조화롭게 어울린 자연 세계의 본’으로서 복합적 특성을 갖는 ‘결합된 형상들’ 또한 존재할 것이다.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따로 자신이 본을 구상하지 않고 순전히 그 형상계의 본만을 보고 우주를 제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본으로서 제작 전에 주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제작하는 목표가 ‘좋은 우주’ 즉 ‘여럿들의 조화와 공존’에 있는 한 우주 전체에 섞여 그것을 통일적으로 관철하는 우주 세계의 본으로서 ‘좋음의 형상’ 또한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국가>에서 앞으로 제시될 ‘좋음의 형상’은 형상계의 모든 형상들의 총체적인 결합과 관련한 형상으로서 우주 제작자가 가장 중시해야 할 본이라 할 것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형상론은 그 이후의 철학사를 통해 예지계와 현상계를 가르는 두 세계 이론(Two worlds theory) 즉 이원론적 세계관의 토대로만 주목되면서 플라톤으로 하여금 현실 세계는 그저 가상의 세계에 불과하고 반대로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천상의 세계만을 실상의 세계로 생각하는 철학자로 평가되게 만들었다.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만 봐도 플라톤의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이후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형성된 근대 인문주의 내지 과학주의적 관점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철학사적 전통에서 플라톤 철학이 왜 ‘현상 구제론’ 즉 현실을 구제하기 위한 철학으로 불리고 있는지를 해명하지 못한다. 플라톤의 형상론을 접하는 사람이면 보통의 경우 대부분 앞서 말한 두 세계 이론부터 떠올리지만, 현상 구제의 관점에서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형상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多) 즉 복수의 형상들이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플라톤이 형상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초점은 기본적으로 존재 세계에서 오직 부동의 일자만을 주장하는 종래의 파르메니데스주의를 혁파하고 존재 세계가 본래부터 여럿의 세계이자 운동하는 세계임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 익히 알고 있듯이 플라톤 당대 혼란기 아테네를 지배하고 있었던 철학 사조는 파르메니데스주의를 이어받은 엘레아의 철학이었다. 아테네 철학은 소박한 물활론에서 시작하여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론(panta rhei)을 거쳐 파르메니데스 사상이 큰 영향을 미치면서 급기야 엘레아주의자들의 주도하에 전통적으로 당연시되어온 자연(physis)과 관습(nomos)의 유기적 통일, 여럿과 운동이 철저히 부정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여럿과 운동의 부정은 그 자체로 현실 세계 다양한 존재자들의 존재성과 그것들의 운동과 변화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학적 인식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전란에 허덕이는 당대 아테네 사람들에게 극복의 근거나 방향을 제시하기는커녕 그들을 아예 극단적인 허무주의와 회의주의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서 덕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른바 소피스트들은 엘레아적 논리주의를 이용하여 권력 지향적인 귀족들에게 궤변적 수사술과 처세술을 가르치며 사적인 이익을 취했고 그런 방식으로 귀족들과 신흥 부유층으로 형성된 기득권 세력의 고착화에 기여했다. 물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현실과 지적 풍토를 극복하기 위해 엘레아주의에 대항하여 여럿과 운동의 철학적 기초를 제시하려는 노력들이 없지 않았다. 특히 원자론자들은 엘레아주의자들을 의식하여 파르메니데스적 일자성에 부합하는 이른바 원자(atom)의 존재를 상정함과 동시에 그러한 원자들이 운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원자들을 둘러싼 허공(kenos) 즉 없는 것(無)의 존재도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요컨대 그들은 철학적으로 존재 세계가 여럿이자 운동하는 세계임을 밝히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자론은 그런 방식으로 일정 부분 여럿과 운동을 구제할 수는 있었으나 플라톤이 보기에 그 운동의 기계론적인 성격은 그리스적 세계관의 토대로서 자연과 관습의 유기적 통일을 위한 합목적적 가치 지향을 뒷받침할 수 없는 것이었다.

* 그래서 플라톤은 여럿과 운동의 근거도 확보하고 운동과 변화의 합목적적 가치지향도 가능할 수 있도록 고정치는 고정치대로, 운동치는 운동치대로, 관계치는 관계치대로 각각에 정당한 존재론적 기초를 부여하여 존재 세계에 파르메니데스적 일자들이 여럿이 있음과 동시에 그것들이 운동하는 것임을 밝히고 덧붙여 존재 세계의 총체적인 합목적적 가치의 지향 푯대로서 최고의 유적 형상이자 본으로서 ‘좋음’(to agathon)의 형상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형상론은 자연 세계 여럿의 존재와 인식의 근거로서 파르메니데스적 일자성을 형상들 각각에게 부여하여 여럿이 각각 그 자체로서 실재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일차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형상들의 세계에서는 운동치가 자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그에 이어 운동치는 고대 이래로 그랬던 것처럼 물질적 존재자들의 근본 속성으로 받아들이되 다만 그것들이 형상을 분유(metechein)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물질적 존재자들의 구분과 식별을 위한 최소한의 존재성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즉 플라톤은 고정치는 형상계에, 운동치는 물질적 현상계에 두고 그것들이 존재 세계에서 상호 관여의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존재 세계가 일정하게 여럿을 보전하면서도 상호 섞일 수 있는 관계치의 근거도 함께 마련한 것이다. 이로써 여럿이자 운동하는 현실이 존재론적으로 구제된 것이다. 이제 화살이 정지해있지 않고 날아가는 것이, 토끼가 거북이를 앞질러 달려가는 것 또한 더 이상의 가상이 아니고, 여러 가지 것들의 차이를 식별하고 구분하여 사물과 사태의 다양한 측면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 또한 더 이상의 허튼짓이 아니다.

* 그러나 현상계 존재자들은 형상의 분유치만 갖고 있으므로 한결같이 고정적이지 못하고 물질성의 크기에 비례하여 불완전한 분유치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상계의 존재자들을 대상으로 인식과 학술을 도모할 경우 형상 수준의 진리성 즉 에피스테메까지 이르지 못하고 믿음(doxa)이나 확신(pistis) 수준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요컨대 그것들에 대한 학술적 성격은 본질적으로 ‘그럴듯한 수준의 설명’(eikos logos) 즉 개연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상계에서도 물질성을 최소로 갖고 있거나 물질성이 갖는 연장성만 지니는 존재가 있다. 그것이 곧 수 또는 도형 다시 말해 수학적 기하학적 대상이다. 그러므로 지성(nous)을 통해 형상에 대한 에피스테메를 획득하는 변증술을 제외하고 자연 세계에 대한 학술로서 가장 에피스테메에 근접하는 일반 학술은 오직 수학과 기하학 그리고 수학적 논리학뿐이다. 그러므로 수학과 기하학은 가정(hypothesis, 510c-d)도 수반하고 형상이 갖는 완전한 고정치까지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분유치로서는 최고 수준의 고정치를 인식할 수 있는 학술인 만큼, 자연 세계를 탐구하는 모든 학술의 최선의 방법론적 토대가 된다. 이를테면 건축술, 조타술, 제화술 모두 최대한의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학과 기하학이 반드시 필요하고 오늘날 물리학과 생물학을 비롯한 개별과학 역시 본질적으로 수학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른바 자체성(kath’ hauto)은 변증술을 통해 형상 인식의 진리성을 나타내는 말이고 자기동일성(tauton)은 추론적 사고(dianoia)로서는 최고 단계 즉 최고 수준의 분유치를 지니는 대상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해 수학과 기학학적 인식의 진리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철학자의 교육과정에도 수학과 기하학은 변증술을 익히기 위해 반드시 이수해야 할 전 단계 과목으로 제시된다.

* 가장 완전한 앎으로서 형상에 관한 앎은 변증술 즉 철학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라면, 당대의 일반 학술들(technai)(511b-c)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일반 개별과학 내지 자연과학들에게는 대상의 자기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이 학적 인식의 최고 목표가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자기동일성은 기본적으로 현상계 진리성이므로 진정한 앎이 갖는 자체성에 미치지 못하는 본질적으로 개연적 진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일반 학술로서 오늘날 개별과학 내지 자연과학은 절대지에 이를 수 없고 늘 그 절대지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절대지에 근접하는 지식만 얻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자연학이 갖는 개연성에 만족하지 못해 형상을 자연세계 개체에 끌어들여 자연학의 진리성을 확보하고 이른바 경험과학의 기초를 제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갈릴레오 역학과 그 이후의 이론 물리학의 등장, 그리고 그것의 진리성은 그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만 고려하더라도 2,500년 전 제기된 플라톤의 형상론이 말을 너머 진상에 대한 직관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사상이나 종교는 물론, 오늘날 자연과학 내지 개별과학의 학문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는 것인지는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확인하지만, 플라톤의 형상론은 본질적으로 현상계의 학술적 해명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것, 즉 현상계의 구제를 위해 제시된 이론이다. 그런 점에서, 지적 위계에서 본다면 형상계가 최상이지만 플라톤이 기울인 관심의 위계에서 보면 현상계 즉 현실에 대한 관심이 최우위에 있었던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 실제로 이같이 형상의 인식과 현상계의 인식을 구분하는 위계적 구도를 현상계에서 똑같이 보편-개물의 구도로 적용할 경우. 오늘날 일반 학문의 기본 구도와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학문은 현상계 소여들을 귀납하여 보편적 개념으로 일반화하고 그 보편 개념들의 정합 관계를 통해 사물과 사태에 대한 개념적 인식을 도모하는데, 플라톤의 인식론 또한 보편 실재로서 형상들이 관여의 방식으로 개물들에 결합된 형상적 분유치들(현상계 사물의 공통 속성들을 일반화한 개념들)을 토대로 감각적 개물들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적 인식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그 기본 구도는 서로 비슷하다. 현상계 인공물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보편이 드러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오늘날 학적 인식의 관점에서는 현상계의 사물들에 대한 일반 개념들은 개물들이 갖는 공통적 속성의 귀납적 일반화를 통해 위쪽의 방향으로 모여져서 주어지는 데 비해, 플라톤의 인식론에서는 그 반대로 실재하는 형상(아름다움 자체)이 위에 있고 개체들(아름다운 것들)은 그것들이 아래쪽으로 분유되는 방식으로 존재성을 획득하고 그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이른바 형상이든 개념이든 이른바 보편자를 통해 개별자에 대한 인식과 식별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즉 플라톤의 형상론에서 ‘형상과 현상의 관계’와 현상계 내에서 ‘개념과 개체의 관계’는 마치 하나는 보편-개별 관계의 원상이고 하나는 보편-개별 관계의 모상인 양 구조적으로 닮아 있어, 비록 현상계의 인식이 분유치에 대한 개연적 설명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오늘날 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현상계에서 사물들에 대한 개념적 인식과 그것의 정합적 체계화가 구조적으로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 그러나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비록 형상에 대한 인식이 참된 앎이고 그것에 이르는 학술이 변증술이자 철학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획득된 앎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플라톤 자신 대화편 어느 곳에서도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굳이 그 내용이 있다면 형상들의 실례 정도, 그것도 불분명한 수준 정도의 밖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그 자신을 포함 누군가 그것에 대한 앎을 획득했다는 언급도 없고 그저 철학자가 그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이것은 플라톤 철학에서조차 형상계와 관련해서는 여러 형상들이 있다는 정도 외에 철학자가 아닌 일반적인 학자 수준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측면에서 보면 결국 형상계에 비교하여 비록 낮게 평가되고 있으나 바로 그 현상계가 일반 학술 차원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학적 인식의 실질적인 중심 영역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플라톤 또한 결코 현상계 영역을 허투루 다루고 있지 않다. 사실 이곳 형상론도 정의로운 국가를 논의하기 위한 이상적 푯대이자 토대로 제시된 것이다. 이것은 얼핏 세계를 물자체가 존재하는 예지계와 현상계로 나누고 실질적인 학적 인식을 현상계에 대한 오성(Verstand)의 인식으로 국한한 칸트(I. Kant)의 비판적 인식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칸트의 실천철학에서도 신은 위계상 지고의 존재임에도 현실의 도덕을 성립시키기 위해 요청(Postulat)되는 형식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그에게서 신학은 위계상 최고의 학문임에도 도덕론에 부수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다양하고 흥미로운 논쟁점을 갖고 있는 영역이 또 플라톤의 현상계이다. 바로 그 현상계에 대한 논의가 이곳 형상계에 대한 논의에 이어서 다루어진다. -끝-

다음 주제: 1.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 제5권 끝 480a)

(2) 현상계와 믿음(doxa)(474c-476d)

나라의 이유: 레종 데타(Raison d’État) ① [내게는 이름이 없다]

나라의 이유레종 데타(Raison d’État)

 

행길이(한철연 회원)

 

1

이따금 나라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올바른 나라란 무엇이고정의로운 나라란 어때야 하는지가 궁금했다이에 대해선 여전히 궁금하지만조금 더 알고 싶은 건 나라의 이유다나라가 좀 더 좋아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올바른 나라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묻게 되었지만계속 묻다 보니 굳이 나라가 있어야 할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찾아보니 나라 없이도 잘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의외로 많았다믿었던 나라에 발등 찍히는 일이 많은 요즘나라 없는 이들이 부러워 보이기도 한다그렇긴 해도 나라가 없어 설움받았던 우리와 세계 곳곳을 떠도는 난민들의 고초를 떠올리면 나라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존재 이유를 묻고자 하는 마음은 여전하다근본적 물음은 새로운 길로 이끌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대답의 행로가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도 없고간혹 그 대답이 우리를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할 수도 있을 테지만…….

여기에 끄적이게 될 글들은 나라의 이유를 탐문하는 과정의 기록들이다일단 나라가 생긴 이유를 통해 나라가 있어야 할 이유나 없어도 될 이유를 짐작해 보고자 한다. ‘올바른 국가란 무엇인가라든가 국가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과 같은 거창한 물음에 대한 답은 우선 미뤄두기로 한다그런 얘기라면 이미 빛나는 지혜를 지닌 수많은 사람들이너무도 일찌감치참으로 훌륭하게 풀어 놓았다여기서는 그저 내가 이곳 저곳에서 보고 들었던 나라에 대한 이야기들을 헐렁하게 늘어놓고자 한다누구에게는 전인미답의 이야기들일 수 있지만누군가에게는 뒤늦은 담론일 수도 있다후자라면 비판적 가르침을 부탁드린다.

여기 써 내려 간 모든 이야기는 작은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각 파편들의 이야기는 독립되어 있는 동시에 서로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때로는 사료나 민족지적 자료에서 뽑아낸 이야기를 쓰기도 하겠지만경우에 따라서는 추정과 상상을 길잡이로 삼아 자료의 공백을 채워보기도 할 것이다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얘기가 될 공산이 크다따라서 앞으로의 이야기는 눈동자가 발가락에 붙고머리와 꼬리가 구분되지 않으며상상이 근거를 압도하는 터무니 없고도 어처구니 없는 형세로 전개될 수도 있다.

감히 이 글을 읽는 독자의 태도에 대해 첨언한다면눈썹의 힘은 풀고비스듬히 누운 채곁눈질로 읽는 것이다읽다가 지겨우면 저만치 치워뒀다가 다시 읽어도 무방하며재미 없으면 슬쩍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도 좋다뒤에서부터 읽어도 되고 중간부터 읽어도 상관 없다어차피 모든 이야기는 나라가 있게 된 이유와 없어도 될 이유에 관해서이거나지금은 없으나 어쩌면 있었을지도 몰랐던 나라에 관한 이야기들로 대략 흘러들어갈 것이다흘려 듣다가 문득 비판적 눈길을 던져준다면 더욱 감사하겠다나라 없던 시절족장의 말을 공공연히 흘려들으며 그들의 위세를 견제했던 부족민들처럼(이 얘기가 궁금하면 계속 읽어 주세요ㅎㅎ).

마지막까지 읽어도 나라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이렇다 할 답은 아마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오히려 나라에 관해 늘어 논 여러 가지 이유들로 머리만 복잡해 질지도 모르겠다나라에 살 이유나라에 안 살 이유나라가 생긴 이유나라가 없어진 이유나라가 있어야 할 이유나라를 없애야 할 이유나라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이유나라 안에서 나라 없는 듯이 살아도 될 이유…….

헤겔미학산책 17-신의 비애, 희극과 풍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 17-신의 비애, 희극과 풍자

 

1) 비애감

그리스 도시 국가는 곧 민족 국가였다. 그리스 국가는 국가와 혈연, 국가와 개인 사이에 직접적 결합 또는 상호 균형을 통해 존재했다. 물론 이 균형은 서로 대립된 두 원리 사이에 서로 침범하고 다시 서로를 회복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동적인 균형이었다.

 

그리스 국가가 후기로 가면서 내적으로는 개인의 자각이 발전하면서 내적으로 개인은 국가에 대한 관습적 복종에 의문을 품으면서 국가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이런 모습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선동한 알키비아데스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외적으로는 페르시아 전쟁 시기 이루어졌던 도시 국가 동맹은 해체되고, 펠레폰네소스 전쟁과 같은 분열에 처했다.

 

내적이거나 외적인 분열을 거쳐가면서 고대 국가는 새로운 국가로 발전하고 있었으니, 그 첫 걸음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내디뎠다. 하지만 그가 젊은 나이로 죽음으로써 그가 맡았던 역사적 역할은 로마가 담당하게 되었다. 마침내 로마는 외적으로는 거대한 통일 제국을 형성했고, 내적으로는 만민법을 통해 개인에게 자유로운 법적 인격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는 황제의 자의적인 지배 아래서 이루어진 통일과 자유이었다. 이런 시대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새로운 정신의 출현을 알렸다.  

 

그리스 국가의 분열에서 알렉산더를 거쳐 기독교 공인 이전의 로마 제국에 이르기 전까지의 시대를 흔히 헬레니즘 시대라고 하지만, 헤겔은 이 시대를 고전 시대의 몰락기로 본다. 새로운 사회가 배태되고 있던 로마 공화정 시대와 초기 로마 제국까지 고전 시대의 몰락기에 집어넣는 것은 이상하지만 로마 제국 기독교 공인으로부터 새로운 정신이 출현하는 헤겔의 시대 구분에서는 불가피하다.

 

고전주의 시대가 전성기에서 몰락기로 전환하면서 고전적 예술 형식은 몰락하는데, 헤겔은 이런 몰락의 징조를 신상 즉 조각 입상에 어려 있는 비애감을 통해 발견한다. 조각 입상은 고요하게 머무르는 가운데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위의 작품은 AD 130-138년 경 작품, 로마 하이드라누스 황제의 애인으로 알려진 안토니우스 상이고, 지금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한다. 이 작품에서 헤겔이 말한 비애감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전성기 시대의 작품에서도 고요한 가운데서도 얼핏 이런 비애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이 비애감은 그리스 신이 지닌 개별성 때문이라고 본다. 이 개별성 때문에 신들은 상호 투쟁할 수밖에 없고, 이런 투쟁 속에서 개별적인 신들 자신이 더 높은 최고의 신에 의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이 운명이 조각입상에 어린 비애감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슬픔은 그들의 운명을 형성하니 까닭인즉 그것은 무언가 한층 더 높은 것이 그들 위에 있다는 점, 그리고 특수함으로부터 그들의 보편적 통일로 향하는 이행이 필연적이라는 점을 지시하기 때문이다.”[1]

 

2) 희극

헤겔은 고전 예술의 몰락 과정을 그리스 말기와 로마 시대로 구별하여 서술하는데, 그리스 말기 예술의 전형적 특징은 희극에서 잘 드러난다. 반면 로마 시대의 전형적 예술은 풍자이다. 희극이든 풍자이든 이제 예술의 핵심적 주제가 되는 것은 실체적 신이 아니라 주관적인 개인이다. 이 주관적 개인은 그 이전 시대 관습의 지배 아래 있던 개인도 아니며, 그렇다고 근대의 무한한 주관성으로서 개인도 아니다. 이 개인은 자기 자신에 눈을 뜨고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시작하는 개별적 개인이다.

 

그리스 말기에 등장한 희극은 개인의 주관적 자유가 발전하면서 국가에 대한 관습적 복종이 해체되면서 나타나는 현실을 타락으로 생각한다. 작가는 개인의 주관적 자유가 전개되는 일상적 삶을 자기를 전도하고 자기를 해체하는 아이러니한 것으로 간주한다.

 

예술은 이런 일상적 삶에서 개인의 자기 전도와 자기 해체를 노골적으로 폭로하는데, 작가는 이런 폭로를 통해 자기의 주관적 자유가 자기 부정을 통해 다시 말하자면 이런 일상적 삶의 자기 파괴를 통해서 실체적 정신에 대한 복종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오염을 겪는 어리석은 현실을 밝히는 방식은 현실이 자체 내에서 자기를 파괴하는 식이다. 이는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Richtigkeit]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을 통해서 이런 현실의 반영상[Widerschein]으로부터 진정한 것을 자기에게 확고하고 지속하는 위력으로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며 어리석고 비이성적인 현실의 측면에 자체 내에서 진리에 직접 대립하는 힘을 박탈하기 위한 것이다.”[2] 

 

헤겔은 이것이 아리스토파네스가 희극을 다루었던 방식이라 하는데, 여기서 희극은 여전히 실체적 정신에 대한 복종이 회복되기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그리스 정신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다.

 

3) 풍자

로마 시대 가장 번성한 예술은 풍자이다. 풍자 예술에서 작가는 현실에 대립한다. 현실에서 개인은 이기적 목적과 세속적 욕망을 통해 살아간다. 작가는 고결한 덕성이라는 입각 점에 서서 그에 대립하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폭로하고 비판한다.

 

하지만 작가가 서있는 덕성조차도 사실은 개인적 목적의 일반화로부터 나온 것이니, 세속적 현실과 다를 바 없다. 그런 덕성은 실체적인 정신과 구분되는 주관적 정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런 대립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풍자는]… 주관으로서의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주관이 추상적 지혜 속에서 선과 덕에 대한 인식 및 의지를 갖고 타락한 현재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립하도록 만든다. 이런 대립은 해결 불가능하니, 왜냐하면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경직된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대립으로부터 양 측면의 산문적 관계가 형성된다.”[3]

 

그리스 희극에서는 여전히 도시 국가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들어 있다. 하지만 로마 시대 풍자에 이르게 되면 도시 국가와 같은 실체적인 것은 사라져 버린다. 남아 있는 것은 개인적 주관일 뿐인데, 풍자가 아무리 일반적 선과 덕을 표방하더라도 주관성을 넘어가지 못한다.

 

고전적 예술 형식에서 예술적 형상의 의미는 이념 자체 즉 정신이었다. 이제 풍자에 이르게 되면, 정신적 의미가 사라지고 예술을 통한 현실에 대한 비판은 곧 개인적 덕성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니, 이런 점에서 헤겔은 이런 관계를 산문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상징주의 예술 형식은 원래 의미와 형상의 괴리에서 출발하여 양자의 유사성을 향해 나가며 유사성이 발전하면서 끝내 정신적 의미가 사라지고, 작가가 개인적으로 설정한 의미로 전락하면서 비유라는 예술 형식이 출현했다.

 

반면 고전주의 예술 형식은 의미와 형상의 일치에서 출발하면서 점차 양자의 괴리가 등장하게 된다. 이제 풍자에 이르러 예술적 형상의 의미는 정신적 의미가 사라지고, 주관적 의식 속에 현존하는 의미[즉 덕성]로 대체되니, 여기서 고전적 예술 형식은 해체된다.

 

4) 운명

실체적 정신을 상실한 개인은 상호 대립 속에서(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개념에서 보듯이) 그 스스로 자신을 통일하는 원리를 생성한다. 그것이 곧 “내적으로 추상적이며 비형상적인 것” 즉 “필연성과 운명이다.” 그런 운명은 개별적 인격을 강제하는 것이지만 그 자체로는 “불가해하고 비개념적인 것”[4]이다.

 

알 수 없으나 필연적인 운명의 힘은 “그 자체로는 어떤 형상화나 개성을 갖지 않은 것이다.” 운명은 로마 황제의 절대적인 자의를 배후에서 지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힘을 발휘한다. 로마 황제는 이런 필연적 운명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이제 고전주의 시기 말기에 이르러 세속적 현실과 불가해한 운명이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운명이 지배하는 시대, 이런 운명은 더 이상 자기를 표현할 수 없으니, 마침내 예술은 출현하지 않는다. 헤겔은 로마를 지나가 새로운 신이 출현하면서 다시 예술이 부활하게 된다고 말한다.


[1] 미학강의 2권, 116쪽

[2] 미학강의 2, 127쪽. 번역은 필자가 수정

[3] 미학강의 2, 130쪽. 번역은 필자가 수정

[4] 미학강의 2권, 116쪽

헤겔미학산책16- 고전적 예술 형식[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미학산책16- 고전적 예술 형식

 

1) 자기 관계

상징적 예술 형식에서 설명했듯이 정신이 추상적이고 무규정성 상태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 정신을 표현하는 예술 형식은 수수께끼와 같은 상징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추상적 무규정적 정신은 자각될 수 없는 것이기에 형상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 정신 즉 민족 국가 또는 도시 국가는 자신을 개별적으로 구체화한다. 이런 정신은 자각이 가능하게 된다. 자각은 이제 감각적인 형상으로 표현되니 그것이 곧 정신의 닮은 꼴 또는 정신이 비추어진 영상이다. 헤겔은 이런 영상을 현상적 기호라 부른다.  

 

헤겔은 정신의 감각적 형태 즉 정신의 영상은 인간적 형상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정신이 인간의 집단 의지를 의미하는 한 그런 정신은 인간 자신의 표정과 자세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고전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예술 작품에서 동물적 형상은 사라지거나 아테네 여신의 어깨에 있는 부엉이처럼 점차 부차적인 요소로 전락한다.[1] 

 

정신의 닮은 꼴, 정신이 비추어진 모습 즉 영상 또는 현상이 곧 고전적 예술 형식이다. 여기서 고전적 예술 형식의 근본적인 원리가 밝혀진다. 그것은 곧 형상과 그것이 의미하는 정신의 일치이다. 이런 일치는 다시 말하자면 곧 형상은 정신의 ‘자기 관계’이며, 정신이 ‘자기를 해명하는 것[das sich selbst Deutende]’, 정신이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das sich selbst Bedeutende]’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헤겔은 이런 일치, 자기 관계로부터 고전 예술의 다양한 느낌을 끌어내는데, 이 느낌에 대한 헤겔의 표현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곧 밝음과 명료성, ‘거침없는 자유’ 와 자립성, ‘무한한 확실성과 고요[Sicherheit und Ruhe]’,  ‘근심 없는 지복[Seligkeit]’과 명랑성[Heitrlichkeit]과 같은 느낌이다. 헤겔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한다.

 

“영원한 진지함, 동요 없는 평안이 신들의 이마에 왕관을 올린다.”[2]

 

“정신은 전적으로 외적인 형상 속에 침잠한 채로 나타나며, 또한 동시에 그런 외적인 형상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내에 침잠해 있다. 그것은 마치 가사적인 인간 사이에서 불멸하는 신이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3]

 

2) 이상화와 미

정신과 형태가 일치한다면 이를 통해 형태를 이루는 개별적 요소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유기적인 연관을 맺는다. 흔히 그리스 예술에서 이런 유기적 연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곧 황금 분할의 비율이라 하는데 헤겔은 단순한 수적인 규칙보다는 오히려 이런 비율이 정신적인 것을 표현한다는 점을 주목한다. 예를 들어 헤겔은 그리스 조각 작품의 두상이 지닌 비율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얼굴은 입과 광대뼈가 들어가고 이마가 나옴으로써 정신적 특성을 얻는다. 이를 통해 앞으로 나온 이마는 필연적으로 두개골의 전체 구조를 규정하는 요소가 되는바, … 오히려 이마에서 코를 지나 턱밑까지 하나의 선이 그어지고 이 선은 뒷머리에서 이마의 정점으로 이어지는 두 번째 선과 직각을 혹은 직각에 가까운 각을 형성한다.”[4]

형태가 이처럼 유기적 연관을 맺게 되면서 이런 유기적 연관과 무관한 개별성에 속하는 형태의 측면은 순화되고 그 결과 형태는 이상화된다. 이런 이상화된 인간의 모습은 곧 영웅의 모습이다.

 

“우리는 신들의 구체적 개별성에서 유한자의 갖가지 궁핍으로부터 초연한 정신적 기품과 고결이 드러난다는 것을 본다. 순수한 내면 존재, 각종 규정성으로부터 추상적 해방은 어쩌면 숭고성으로 이끌릴 법도 하지만 …정신의 숭고성마저도 아름다움 속으로 직접 이행한다. … 이 점이 신들의 형상에서 고결의 표현 곧 고전적 의미에서 미적 숭고성의 표현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5]

 

헤겔에서 미는 여기에서 보듯이 조화와 균형, 비례를 의미하니, 예술 가운데 오직 고전적 예술만이 이런 미적인 것을 가지게 된다. 그 외 상징적 예술과 낭만적 예술에서 정신의 표현은 오히려 미적인 것과 충돌하게 된다.

 

3) 총체성의 결여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전 예술은 자기 연관, 유기적 통일성과 미라는 보편성의 측면만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개별성의 측면을 가지니, 이런 개별성은 추상적인 개별성이 아니라(그런 개별성은 이상화하는 가운데 제거된다) 보편성을 표현하는 개별성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아폴론 신은 월계수를 쓰고 리라를 든 모습으로 묘사되거나 아테네 여신은 투구를 쓰고 창과 방패를 들고 나온다. 여기서 월계수나 리라, 그리고 투구와 창 방패는 그 자체로는 개별성이지만 그것이 아폴론이나 아테네 신의 본성을 드러내는 징표로 사용될 때, 헤겔은 이를 특수성이라 한다. 여기서 보편적 신성과 개별성은 매개 없이 직접적인 결합으로 결합되어 있다.

 

개별성과 보편성과 직접 매개 없이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런 특수성이 이루는 전체 집합은 유기적인 통일성을 형성하지 못한다. 이로부터 헤겔은 그리스 신들이 지닌 다양한 한계를 제시한다.  신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은 상당히 혼란스럽고 중첩되며, 불완전하다. 

 

하나의 신도 여러 특수한 징표를 갖는다. 예를 들어 아폴로 신은 리라 외에 활을 들고 나오기도 하고, 아테네 여신은 투구를 쓴 것 외에 어깨에는 올빼미가 앉아 있기도 한다. 동일한 본성을 여러 신들이 대변하니, 군신으로 아레스와 헤파이토스가 분열하며, 빛의 신은 아폴론과 헤르메스로 분열하며 여신은 아르테미스, 아테네, 아프로디테로 분열한다. 또한 여러 신들 사이에는 아직 어떤 통일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우스는 신들의 통일성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개별적인 한 신에 불과하고 그의 명령은 다른 신들을 완전하게 굴복시키지 못한다. 신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불화가 존재하며, 제우스조차 이 불화 속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것이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푸스의 의미이며 신들의 잡다성은 로마에서 만신전의 형태로 여전히 유지된다.  

 

4) 상호 균형

그리스 정신이 보편성과 개별성이 직접적으로 결합된 결과 여기서 그리스 정신은 다시 두 가지 대립된 원리의 결합으로 나타난다. 보편성이 국가의 원리라면, 개별성은 곧 혈연의 원리이니, 그리스 도시 국가는 시민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면서도 여전히 혈연의 원리인 민족성을 버리지 못한다. 즉 민족 국가이다.

 

두 가지 원리가 직접 결합된 결과 두 원리는 상호 균형을 이룬다. 이런 상호 균형은 정적인 방식이 아니며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일어나는 균형이니, 여기서 두 원리가 서로를 침해하고 그 결과 서로의 몰락에 의해 다시 균형이 회복되는 운동이 일어난다.

 

그리스 정신의 특징인 특수성은 앞에서 말한 신의 징표로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특수성은 그리스적 인물이 지니는 특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와 그에 대립하는 클레온은 모두 그리스적 정신이 지니는 특수성을 대변한다. 안티고네는 그 가운데 혈연의 원리를 대변하며, 클레온은 국가의 원리를 대변한다.

 

그들은 자신이 대변하는 특수성을 직접 매개 없이 대변하므로 단호하고 영원히 이를 대변한다. 그 때문에 각자는 자신이 대립하는 원리에 의해 파멸에 이른다. 국법을 어기고 혈연인 오빠를 묻어준 안티고네는 클레온의 명령에 의해 감옥 속에서 죽는다. 조국의 배반자를 처단하려는 클레온은 가족의 원리를 위배하면서 그의 아들과 아내가 죽게 된다. 이런 상호 파멸을 통해 서로 대립된 두 원리는 다시 균형을 회복하게 된다.

 

4) 신과 인간

보편성과 개별성의 직접적 매개 없는 결합은 예술 작품 속에서 보편적 신과 개별적 인간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신 모습 자체가 인간의 모습을 닮았으며 인간적 영웅은 곧 신적인 존재가 된다. 인간과 신은 함께 살아가며 인간의 행위가 신의 행위를 촉발하며, 거꾸로 신의 행위가 인간적 행위를 유발한다. 신은 인간의 삶 속에 들어와 수시로 개입하며 심지어 인간이 신의 세계 속으로 끌려들어가기도 한다.

 

이런 상호 침투와 중첩에도 불구하고 신과 인간이 영원히 구분된다. 신이 인간적인 삶 속에 개입하더라도 그것이 신의 신성을 해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이 신의 개입을 요구하더라도 그 책임은 항상 인간 자신에게 돌아간다.

 

헤겔은 이런 예로서 서사시 일리아드에 나오는 여러 얘기를 소개한다. 그리스 진영에 퍼졌던 흑사병은 아가멤논이 아폴로 신전의 제사장 크리세스의 딸을 포로로 하고 크리세스의 간청에도 풀어주지 않자, 아폴로의 분노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또한 헤겔은 아킬레스의 죽음에 관한 오디세이아의 서술을 소개한다. 

 

“그리스인들은 종일토록 싸웠으며 제우스가 싸우는 자들을 뜯어 말렸을 때 그들은 비로소 고귀한 시신을 배로 옮겼으며 또한 울먹이면서 시신을 씻고 향유를 발랐소. 그러자 바다에서 신의 울부짖음이 일었는데”  “어머니[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가 죽은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불사의 바다 님프들과 함께 바다에서 나왔소”[6]

 

헤겔은 이 인용문 끝에 아킬레우스에게 다가간 것은 인간적인 것 즉 흐느끼는 여인인 어머니이며 또한 이는 그들 자신의 본 모습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행위 자체가 신의 행위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5) 예술과 종교

그리스 예술의 기본 원리는 예술과 종교의 관계에서도 관철된다. 예술과 종교는 동일한 그리스 정신의 원리를 표현하지만 그 표현방식은 다르다. 종교는 마음 속의 환상을 통해 표현하며 예술은 물질적 형상을 통해 표현한다. 마음속의 환상과 물질적 형상은 서로 대응하니, 예술과 종교는 서로 상응한다.

 

우선 예술은 표현을 위한 소재를 종교 속에서 찾는다. 예술이 신과 신화를 표현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념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일 뿐이며 예술이 봉사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곧 그리스 도시 국가이다.

 

민중은 이미 이념에 관한 어떤 환상을 마음 속에 가진다. 하지만 이는 무의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런 환상이 물질적 형상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민중은 자기 마음 속의 환상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종교는 예술을 통해 비로소 자기를 표현할 언어를 발견하니, 예술가는 민중에게 예언자이며 교사가 된다.

 

예술가는 소재를 종교에서 찾으니 이미 종교적으로 전승된 것을 바탕으로 한다. 이런 종교적 전승이 없다면 예술은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술가는 이런 전승된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는 이런 전승된 것을 소재로 이념을 현상화하면서 이를 아름다운 형상으로 만들어내니, 이런 작업은 한편으로 예술가의 독창적인 창조에 속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는 이미 전승된 것을 조탁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스 예술 형식에서 인간과 신이 중첩되어 있듯이 예술과 종교 역시 중첩되어 있다. 그리스 종교는 <정신현상학>에 나오는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곧 예술 종교이다.


[1] 인간적 형태를 취한다고 해서 의인화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지혜가 아테나 여신으로 표현될 때, 아테나 여신은 지혜의 의인화가 된다. 하지만 고전 예술에서 지혜는 아테나 여신이 지닌 여러 속성 중의 하나이며, 아테나 여신은 그 자체가 하나의 주체로서 활동한다. .

[2] 미학강의 2권, 91쪽

[3] 미학강의 2권, 91쪽

[4] 미학강의 2권, 415쪽

[5] 미학강의 2권, 89-91쪽

[6] 미학강의 2권,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