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리 네히어라 – 개념의 사중주

우리 사회는 좌파와 우파라는 이상한 놀이 규칙에 빠져 있다. 한 쪽은 법 없이도 착하게 살 수밖에 없고, 다른 쪽은 법대로 하자면서 ‘차카게 살자’라고 강제하고 명령한다. 어떤 이는 서로가 공감하며 정직하게 살 수밖에 없고, 어떤 이는 순위와 차별이 있는 세상을 인정하며 ‘정직하게 살자’고 주장한다. 정직하지 않은 어떤 재벌은 ‘정직했으면 좋겠다’고 하여 자신들은 정직하니 다른 이들도 정직하라는 유머(의미)를 전달하면서 은근슬쩍 그 자신들도 정직한 부류에 끼워 넣는다.

예전에는 ‘민주공화’라고 이름을 쓰는 이들이 군사독재를 하였고, ‘민주정의’라고 부르짖는 이들이 장충체육관 독재를 실행하였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이어질까? 좌파와 우파, 생명질서와 기하질서, 빨갱이와 파랭이, 표면을 기준으로 심층(深層 profondeur)과 상층(上層 hauteur), 하부의 구체적 노동과 상부의 이데올로기 등으로 알려진 이런 개념들은 일상에서 많이 쓰이고 있음에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해와 적용, 그리고 사용과 의미 소통이 잘 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시절까지, 즉 성인의 문턱까지는 세상이 그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반복하여 노력하며 공부한다. 이들은 순박하고 착하다. 이들은 마치 수학의 몇몇 개념이 ‘선천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믿고 있듯이 우리에게 태어나면서 지니는 개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와 직선이 그러하다. 그러나 조금 더 반성을 해보면 개도 소도 하나라는 것을 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개나 소도 주인에게 달려올 때 갔던 길을 거꾸로 이리저리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로 똑바로 직선으로 되돌아온다.

사람이 개를 대할 때 개는 그 사람의 얼굴빛이나 행동에서만 그 사람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개는 그 사람의 몸 상태, 감정, 깊은 곳(심층)에서 우러나는 애정에 따른다. 동물에게도 현상의 형태에서 오는 일시적 판단과 심층에서 나오는 경향에는 차이가 있다. 미성년에서 성인이 되면, 표면의 일상 현상을 형상화한 상층의 논리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표면을 만들려고 욕망하는 심층의 경향으로 공감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표면으로부터 제기되는 이중성은 철학에서 관점의 ‘차이’이지, 세상살이에서의 ‘차별’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차이라는 이름의 이중성은 수리와 생명 사이에서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말하는 추억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내용에도 이중화 현상이 있다. 이 이중화는 모순 대립을 주장하는 이원화가 아니다. 인간은 현실에서 살며, 과거의 소중한 기억을 여전히 작동시키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기억 중의 일부는 현실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스스로 억제된다. 즉 현실에 맞는 기억을 작동시키고 잘 맞지 않는 기억을 잠재워 둔다.

회사라는 곳의 대화에서 상사가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말한 직원은 아마도 의 김용철처럼 쫓겨날 것이다.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요령이 없는가, 그 자리에서 해서 될 말이 있고 해서 안 될 말이 있지”라고. 말해서 안 될 것이 있는 것처럼, 삶에서도 기억에서 나오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 자기 검열이 있다.

자기 검열이 잘 된 이들은 기억들이 마치 서랍 속에 정돈된 물건들처럼 즉 기념물처럼 잘 정리되어 있다고 여긴다. 그 사람은 서랍 밖에 자기가 있듯이 기억도 자기 바깥에 있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자신이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 밖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그 착각은 자의적이다. 자신이 밖에서 세상을 조작할 수 있은 것처럼 여기는 착각은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그 세상 속에서 살면서 행하는 것이지, 자신만이 바깥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함께 하는 세상(공동체) 속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지난하다. 서랍 속에 든 기록들을 잘 정리하면서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배제되고 은폐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지 사람들은 배제된 것을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제되고 소외되고 있는지를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어떤 이들은 추억의 일부를 지워버리듯이 사람들을 없애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은 빨갱이 또는 좌파의 딱지를 붙이면서 상대를 적대시하고 멸시하고 또한 지워버리듯이 없애고자 한다. 배제 없는 삶을 위해서 우리는 진정한 성찰, 반성, 비판을 필요로 한다. 배제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미 잘 정돈되었다고 여기는 개념들과 새로운 관계들 속에서 사용하려는 개념들 사이에서 비판과 반성, 나아가 새로운 개념 이해를 필요로 한다.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개념들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누군가 세계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그 세계가 그 사람이 살아온 지역인지, 우리들이 사는 지구라는 땅덩이인지, 사람이 살 수 없는 이상한 곳까지 포함하는 것인지, 달을 넘어서 어두운 공간까지 총칭하는 것인지를 알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개념의 범위와 사용의 영역을 세심하게 검토해야 한다.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좌파는 어떻게 사용되며 언제부터 생긴 개념이며, 형이상학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정치경제학적으로 어떻게 쓰이는가? 또는 좌파라는 개념을 한나라당 원내 대표 안상수처럼 군대를 갖다 오지 않은 자가 군대를 갖다 온 봉은사 명진 스님에게 붙일 수 있는가? 그보다 속 깊은 다른 의미가 있는가? 이런 검토로부터 좌파라는 개념이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방식으로 보자. 여기서 한 가지 예를 제시해보자. 단순히 좌우라는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는 입장에서 보면 왼손잡이는 좌파라고, 오른손잡이는 우파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에 양자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이들은 새의 날개는 둘이며, 좌우가 함께 움직여야 잘 난다고 한다.

또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 보자. 물질이 입자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경우, 긴 막대 자석을 N(파란색, 파랭이)과 S(빨간색, 빨갱이)로 표시하여 둘로 분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빨갛게 색칠한 부분을 잘라내 보라. 그러면 남은 부분들이 모두 파랭이로 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 잘라낸 파랭이 속에서 절반은 남극으로 빨갱이다. 이런 현상에서 좌우는 무엇일까? 이러한 성찰에서 물리학적으로 입자론의 관점과 파장론의 관점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이런 반성을 정치경제학적으로 확장하여보면, 상층의 입장에서 표면의 현실을 상층 원리의 모방이라고 여기는 것과 심층의 입장에서 표면 현실을 심층 변화의 생성이라 하는 것에는 입자론과 파장론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 여기서 한쪽을 맞다고 여기면서 다른 쪽을 틀린 것으로 여기는 대립과 적대의 사유가 무엇을 만들었고, 그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한다. 그런데 심층으로부터의 생성이 구체적 현실이라는 좌파와 상층으로부터 본뜬 모방물들을 현실에서 무시하여도 괜찮다고 여기는 우파, 이 양자 사이에는 어떤 품행의 차이가 있는지는 그 사람의 인생관에 달려 있다.

자신의 삶의 태도에 대한 성찰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삶의 태도에 대한 이해에는 철학적 개념의 함의, 내포, 강도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적 개념에 대한 성찰과 이해를 위해 50여 개의 개념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러한 제안은 프랑스에서 고교 마지막 학년(고등학교 4학년)에서 청소년의 나이에 철학을 필수적으로 배우고 있다는 점을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철학에 대한 관심은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할 것이다.

나는 이천년 역사상 세상에 가장 위대한 개인은 예수라고 생각한다. 그는 당시의 제국, 즉 로마제국에 저항했고 또한 백성을 얽매었던 그들의 종교에 대해 항거했다. 그는 실패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몸주로 남아서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자 노력한다. 그를 초월적 신으로 만든 상층주의의 사유는 기만이며 착각이라 본다.

그리고 내가 주목하는 다른 하나의 사건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이다. 프랑스 대혁명 전야의 회의에서 왕을 중심으로 하여 귀족들이 오른쪽에 자리 잡고 제 3신분으로서 인민 편인 자들이 왼쪽에 자리 잡은 이후에 우파와 좌파라는 용어가 형성된다. 프랑스 대혁명은 제국의 권력과 닮은 구체제에 봉기하여 왕을 제거하고 승리했으며, 또한 그 시대의 종교에 저항하여 카톨릭 주교 등을 단두대의 이슬로 보내면서 인민의 자유, 평등, 인류애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혁명은 햇수로 4년이나 지속했으나, 그 반동은 역으로 거세었다. 그 반동의 과정에서 급진 자꼬방을 이어가려는 평등당의 이념을 세운 것이 붉은 좌파의 기원이다. 그리고 200여년이 지난 프랑스는 아직도 좌파와 우파가 거의 반반으로 존속하는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몸주는 더 이상 없으며,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빈 상층, 빈 권력, 빈 중심, 유머로서 상층, 빈 구조 등으로 표현한 것은 인류사의 기념비적 사건의 귀결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 이상한 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고교 4학년 전학생들에게 일 년간 철학을 가르친다. 이 철학 교육을 받고 난 인민들은 인권과 자유를 무시하는 어떤 권력이 들어와도 항거하고 저항할 수 있다고 한다. 한때 우리나라 대학에서 철학이 필수였지만 선택으로 바뀌고, 그리고 논술이라는 이름 아래 글쓰기와 자기 소개서 쓰기에 밀려 철학교육이 사라지려는 현실과 그 결과로 인민들의 저항력이 쇠퇴해 가는 교육 현실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왜 철학 교육을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로마 제국도 카톨릭 절대왕정도 없는 이 시대에서 유일하게 분단의 아픔을 아직도 쓰라리게 느끼고 있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예수의 저항, 프랑스 인민의 봉기에 이어,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세상의 공동체를 생성할 시점에 있다고 본다. 그 노력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서로가 이해 가능하게 개념들을 공부해보자. 그리고 시대의 벽을 부수거나 넘어서려 했던 철학자들을 다시 공부하자. 그 공부가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 공동체는 땅의 노동에서, 기계의 노동에서, 기술과 과학의 노동에서, 예술의 노동에서, 제반 학문의 노동에서 공동의 작업을 통해서 이룰 수 있다.

이 공동체(꼬뮤노떼)의 공동이란 영역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꼬뮤니스트들이다. 꼬뮤니스트로서, 빨갱이로서 그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세상살이를 여기-지금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참조**
프랑스 문교부 시행안(1970)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편으로 철학개념(42항목)을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 철학자(34명)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교육부의 검정필 교재는 없으며, 교수는 성인이 될 이들에게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개념들을 좌우를 아우르며 다양하게 가르치고 있다.

철학의 개념

인간과 세계 : 의식, 무의식, 욕망, 정념, 환상, 타자, 공간, 지각, 기억, 시간, 죽음, 현존, 자연과 문화, 역사. (14)

의식과 이성 : 언어, 상상, 판단, 관념, 과학적 개념의 형성, 이론과 경험, 논리와 수학, 생명의 인식, 인간의식의 구성, 비합리적인 것, 의미, 진리. (12)

실천과 목적 : 노동, 교환, 기술, 예술, 종교, 사회, 국가, 권력, 폭력, 권리, 정의, 의무, 의지, 인격, 행복, 자유. (16)

인간학, 형이상학, 철학.

철학자들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 에피쿠로스 – 루크레티우스 – 에픽테투스* – 아우렐리우스 – 아우구스티누스 – 토마스 아퀴나스- 마키아벨리 – 몽테뉴 – 홉스 – 데카르트* – 파스칼 – 스피노자* – 말브랑쉬 – 라이프니쯔 – 몽테스키외 – 흄 – 룻소* – 칸트* – 헤겔* – 꽁트* – 꾸르노 – 키에르케고르 – 맑스 – 니이체 – 프로이트 – 훗설* – 베르그송* – 알랑 – 바슐라르 – 메를로퐁티 – 하이덱거 – 사르트르 – [들뢰즈, 푸꼬, 하버마스: 필자의 첨가이다.]

이 표시(*)가 된 것은 모든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다루어야 할 철학자들이다. 내가 프랑스 있을 당시 고교에서 인문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철학수업 시간은 연간 일주일에 10-12시간이며, 순수과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에게는 8-10시간이다. 예능과 체육을 하더라고 위의 표시(*)를 꼭 다루어야 하며, 기술적인 예능의 경우 2-4시간 정도 철학수업을 한다. 한마디 보태면 프랑스에서 1년간 10시간은 우리나라에서 대학으로 환산하면 전후 학기 20학점에 해당한다. 그리고 대학입학자격고사(바깔로레아)에서 4시간 시험을 치고, 그리고 질의응답시험(오랄테스트)도 치른다.

이 나라가 권력과 권위에 대한 저항과 봉기를 인민의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철학이 그들의 삶에 깊숙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나라가 지배하러 와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속에 동화될 뿐이라고. 그것은 문화의 힘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철학이 그 심층에서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심층, 생명질서, 좌파, 빨갱이가 잘 작동하고 있는 것은 고교철학 덕분임을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admin@admin.com

꽃보다 철학[철학의 유언]

꽃보다 철학[철학의 유언]

강지은(건국대학교 강사)

 

우리집은 아파트인데도 남들 선호하는 로얄층이 아니라 2층이다. 얼마전 딸아이 친구가 놀러 와서는 “하나는 왜 낮은 곳에 살아요?”하지 않겠는가. 이 동네는 아파트 단지이다. 비싸고 살기 좋은 로얄층은 10층 이상임을 아는 나는 당황스러웠다. “응…종은아 베란다 창을 봐. 나무들이 보이지? 사람은 자연과 가까이 살아야 하는 거야.” 아파트 창밖으로 시원한 하늘과 까마득히 멀리 지나가는 성냥갑만한 자동차를 보는 게 전부였던 그 아이에게 나의 답이 과연 설득력을 가졌을지는 모르겠다. 요즘 아이들도 알 건 다 알고 있기에.

어쨌든 2층이라고 답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누리기 어려운 계단 보행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바쁜 시간대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고 시간 허비하는 일 없어 좋다. 그런데 이사 오자마자 발견한 1층과 2층 사이 계단 벽에 있는 낙서가 재밌다. “구준표♡금잔디 / 첫 날 밤”라는 공중파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이다. 어른이 써 놓지는 않았을 것 같고, 고등학생들은 유치하다 할 것 같고, 아마 중학생이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써 놓았을 법한 낙서엔 사춘기 인간의 설레임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사춘기 인간. 소년, 소녀도 아니고 꼬마도 아닌 인간. 우리가 쉽게 지나쳐버리는 어린 인간에 대해 잠깐 생각한다. 그는 인간이라서 가질 수 있는 권리, 책임 등이 뒤엉켜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질풍노도의 인간이다. 질풍노도(Sturm und Drang). 1770년에서 1780년에 걸쳐 독일에서 일어난 문학운동에서 유래한 이 말은 F.클링거의 희곡 『질풍노도』(1776)에서 유래한다. 당시 여러 문학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그 중 단연 으뜸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참을 수 없는 열정과 고뇌.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는 로테를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끝내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믿거나 말거나 이 작품을 읽고 베르테르의 자살을 모방하여 유명을 달리한 사람은 지금까지 전 세계 2000여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무엇이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일까? 목숨마저 버리게 할 만큼의 힘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칸트에게 있다. ‘보편적 인간 이성에 대한 이념’을 전제하고 있는 칸트는 계몽주의자이지만 주관을 통해 대상을 구성한다는 측면에서는 낭만주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에게 종속되어있는 수동적인 존재인 인간을 능동적인 존재로 규정한 칸트는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음을 만천하에 고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칸트의 대표작을 흔히 3비판서라 부른다.『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의 인식과 한계에 대하여 밝힌다. 또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의지의 규정과 의지의 자유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마지막 『판단력비판』은 미학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칸트는 미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판단력비판』에서 인식의 세계인 자연의 세계와 의지의 세계인 자유세계의 결합가능성에 관해 논한다.

칸트가 보기에 인간이 태어나서 맞닥뜨리는 세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자연세계, 다른 하나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정신의 세계. 그런데 이 정신의 세계라는 것은 무한해서 도저히 인간의 지성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세계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펼쳐진 두 세계는 영원히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아포리아가 될 수밖에 없다. 뭐든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고 싶은 욕심이 철학자들에게는 있다. 물론 포스트모던한 철학자들은 하나의 원리가 일종의 편견이라고 비난하지만 여전히 나는 명쾌한 해답이 있었으면 하고 희망한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칸트는 판단력이라고 하였다. 수학과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와 무한히 자유로운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인간의 능력이 판단력이다. 판단력은 미적 대상을 만날 때 인간 안에서 작동한다. 장미꽃은 일정한 형태와 향기를 갖춘 대상이고 우리는 앞에 놓인 꽃을 인식한다. 아직은 아름답다는 판단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은 무한의 상상력을 잡아다 장미꽃과 연결시킨다. 인간은 장미꽃의 형태를 넘어 그로부터 연상되는 우주의 조화로움, 사랑, 그리움 등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꽃을 찬미한다. ‘알 흠 답 다!’ 어느 배우의 발성을 흉내내서 적어본 것이지만 아름답다를 멋지게 소리내어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일순간 정지하는 호흡과 내면이 우주로 확장되는 듯 소름 돋는 느낌. 어떤 예술작품을 보더라도 혹은 듣더라도 아마 그로부터 받는 느낌은 비슷할 것 같다. 칸트는 이러한 미적 판단은 반드시 개인의 사적 이익과는 무관한 공평무사한 마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았다. 사실 사적인 마음이 개입되어 있을 때 아름다움은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어렵다. 모나리자가 아름다운 이유는 내가 그림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내 것 네 것을 따질 때는 이미 사라져버린다.

칸트는 이렇게 자연과 자유가 만나는 지점에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미적 심미안을 탄생시켰다. 칸트에게서 아름다움은 현실 대상의 균형과 조화가 아니다. 또 관념에만 존재하는 영적 대상의 신비로움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아마 ‘우주와 인간이 만나는 신비로운 체험’일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예술관은 독일낭만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문학에서는 괴테, 철학에서는 셸링을 출현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는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다. 여기에서 문득 나에게 천국은 과연 무엇일까하고 곱씹어본다. 사실 최근에는 늘 사는 게 지옥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나도 천국같은 세상이 오길 바란다. 로또 1등, 논문 완성, 백점맞는 아이 엄마, 베토벤 합창교향곡 음악회에서 듣기 …. 어쨌든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할 때 천국을 경험하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러나 로테를 떠날 수밖에 없음을 감지하고는 모든 게 불행이고 지옥이었다. 천국과 지옥이 물질의 많고 적음과 삶의 비루함에서 오지 않고 마음에서 왔던 것이다.

괴테부터 예술의 척도는 고전주의가 지향했던 규범과 모방이 아니라 창조적 주관성이다. 창조적 주관성은 언제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베르테르의 사랑과 고뇌를 읽는 이들은 모두 이전의 문학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무한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느꼈다. 그 무한한 정신세계는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손익계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 진정성, 인간행위의 동기만이 주인인 세상이다. 현실 세계에서 아무리 이들을 외쳐 보아도 돌아오는 반응은 “진정한 사랑? 그게 밥 먹여주냐?” 그러나 베르테르는 밥도 안 먹여주는 진정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다 죽었고, 그런 베르테르를 읽은 독자는 이 세상에서 죽음을 택했다.

다시 글 앞에서 물었던 ‘왜 사람들은 베르테르를 따라 자살했을까?’ 나는 그 답이 칸트에게 있다고 했다. 베르테르가 죽은 이유, 베르테르를 따라 사람들이 죽은 이유. 그것은 칸트가 미학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소통 가능성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보고 들으며 나눌 수 있는 소통을 잃어버린 인간은 삶의 모든 의미를 잃는다.

나이를 먹으면서 가끔은 잊는다. 눈에 콩깍지 씌웠다고 욕먹으면서도 죽도록 누군가를 사랑해 본 경험을. 그리고 그 경험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그 심정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편지글 형식으로 쓰인 작품이다.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자신의 정신세계를 편지로 전하는 글이다. 사람들은 로또에 당첨되면 누구에게도 말하려 하지 않지만 진리 혹은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 누구든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은 법이다. 베르테르는 자신의 환희를 친구에게 말하고 싶었다. 물론 가장 그 사실을 함께 말하고 싶었던 이는 로테였겠지만 이미 다른 남자와 정혼한 여인. 진정한 사랑 혹은 진리는 그 자체 아름다운 것이지만 더 아름다운 것은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함께 나눌 그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아름다움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아름다움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인간과 인간의 소통이었다. 서구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발달과 주권의 확립으로 구성된 인간 주체는 오롯이 그 자체 완결된 인간이었다. 이렇게 원자화된 인간은 오직 자기 이익만 챙길 줄 아는 소통불가능한 존재처럼 보였다. 그 속에서 칸트가 희망했던 것은 인간과 인간이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였다. 서로 이해하는 척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어 진실을 말하건대 진실로 이해하는 관계는 흔하지 않다. 그런데 칸트가 생각하기에 아름다움 앞에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누구든 자신이 발견한 아름다움을 누군가에게는 꼭 말하고 싶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긴 여운을 남겼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는 것은 그도 나의 생각에 동조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바로 여기에 타인에 대한 고려가 전제된다. 타인에 대한 고려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능력을 칸트는 ‘공통감’이라고 했다. 이제 칸트의 미학은 소통의 정치학을 꿈꾼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판단하듯 나의 사적 이익과 관계없는 인간의 일을 놓고 서로 소통하고자 한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사적 이익과 관계없는 인간의 일이란 바로 정치적인 것들이다. 정의, 도덕, 평등, 공동체 등등.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이들에 대해 소통하는 장은 아름다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정치, 함께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는 정치라면 그리고 그러한 것을 꿈꾸는 것이 철학이라면 나에게 철학은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

 

철학자에게 천리마란…[철학의 유언]

동양에서 철학이란 미지 세계에 대한 탐험이 아니다. 이미 축적된 가치와 세계에 대한 확인이며 체득이다. 그런데 이것을 확인하고 체득하는 방법을 몰라 방황하기도 한다. 스승이 필요한 이유다. 동양에서 사승관계를 중시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도통론(道統論)도 나왔다. 인생의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때론 어떠한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좋은 스승 찾아 수 십리 수 백리 길을 찾아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교육여건 따라 아파트 가격 형성이 천차만별인 것은 요즘 불거진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다.

처음 사학(私學)을 개창했다고 하는 공자의 제자가 3천명이라 하기도 하고 72명이란 소리도 있다. 기준을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니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 다만 수제자 그룹에 속하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72명이라 말한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인자(仁者)도 있고, 현자(賢者)도 있고, 오합지졸(烏合之卒)도 있다. 거렁뱅이도 있고, 깡패도 있고, 재력가도 있다. 말재주 좋은 재변가도 있고 어눌한 답답이도 있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위정자가 본 제자와 스승 공자가 본 제자,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본 제자의 모습은 같지 않다. 당대 위정자들과 일반 사람들이 현명하고 능력 있는 제자라고 평했어도, 공자가 보기에는 무능하고 똑똑하지 못한 제자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자공(子貢)이다. 자공은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다. 정치적 수완도 뛰어났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했다. 주변에서는 공자보다 낫다는 얘기도 자주 했다. 그때마다 자공은 부담스러워하며 더욱 겸손했고 더 노력했다. 이쯤 되면 스승으로부터 인정받을 만도 했지만, 공자가 본 자공은 늘 부족한 사람이었다.

반면 안연(顔淵)은 누가 뭐라 해도 부족한 사람이다. 위정자나 일반 사람 눈엔 그랬을 것이다.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한 나약한 제자였다. 늘 스승의 말씀에 “Yes!”란 말만했지, 감히 “No!”라고 대꾸한번 못했다. 거기다가 본인은 물론 처자식의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무능자중의 무능자였다. 그래서 그는 위정자들이 인정하는 재능 있는 사람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본 안연은 최고로 능력 있고, 최고로 똑똑한 제자였다. 어디를 가도 안연을 제일 먼저 챙겼고, 스승보다 먼저 저세상 사람이 되었어도 공자는 그의 이름을 달고 살았다. 권력자들에게 추천권을 행사할 때도 으레 죽은 안연을 추천했다.

사마천(司馬遷)은

연대의 공동체 운동[철학의 유언]

연대의 공동체 운동[철학의 유언]

유언을 위한 시대의 통찰, 그리고 소명-
서유석(호원대교수)

 

정작 지역(local)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광역이든 기초든 단체장과 의회 모두 같은 당 일색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한두 곳 예외가 생겼지만 크게 보면 전국이 비슷하다. 지방권력에 대한 제대로 된 견제가 이루어질 리 없다. 설상가상, 자치단체장과 의원의 눈은 중앙을 향해 있다. 후보 선출의 실질적 권한이 당 중앙과 국회의원에게 있기 때문이다. 중앙 정치에 기대어 지역 문제를 해결하려는 점에서는 지역 주민도 마찬가지다. 지방자치가 민주주의의 꽃이라지만 현실에서는 지방분권도 주민자치도 형식적이다. 그뿐인가. 정작 지역 정치에서는 진보도 없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넘어서는 진보정치의 구현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여야 모두 대기업 본사와 공장, 그리고 외자 유치에 한 목소리고, 전국적으로 반대여론이 높은 4대강 사업이건 새만금 물막이공사건 돈이 풀리는 일이라면 내심 오케이다. 내가 살고 있는 호남만이 아니다. 경상도가 그렇고 충청도와 강원도, 경기도와 서울이 크게 다를 게 없다. 지역정치의 현주소다. 지역의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소위 ‘진보의 집권’은 먼 나라 이야기다.

진보대통합(연합) 논의가 한창이다. 과연 2012년 대선/총선에서 진보가 정권을 잡을 수 있을까.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을까. 그런 야무진 꿈은 버리더라도, 최소한 제2 견제세력으로서의 의석수라도 차지할 수 있을까. 진보 대통합(연합)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지만, 진보 정치 운동에 새로운 생명력이 솟구쳐 대(大)변신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진보의 집권이나 중심적 정치세력으로의 부상은 쉽지 않아 보인다. 2012년 이후에도 그런 날은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다. 사회는 병들어 가는데 ‘그 때’는 과연 언제일까. 아니, 그때까지 우리는 무얼 해야 하나. 좀 더 적극적으로,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로 눈을 돌려 어떤 일을 도모해야 하나.

민주당 중심의 민주대통합은 설득력이 없다. 대책 없이 신자유주의와 한미FTA를 수용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 정리가 선행되지 않는 한,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줄 세력이 못된다. 그러면 진보정치세력은 어떤가. 사회적 양극화, 공공영역 파괴, 복지 후퇴 등 진보적 대응이 절실한 필요한 사회적 난제는 쌓여 가는데 막상 이를 주도적으로 해결해 가야 할 진보 정치세력은 날로 왜소해지고 있다. 통합과 연합을 거론하지만 일종의 편집증과 조급증에 걸려 지척거릴 뿐이다. 우선 자기 세력이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는 편집증에 빠져 있다. 여기에 상처뿐인 구연(舊緣)과 정치적 이해관계 갈등이 더해져 좀처럼 논의에 진전이 없다. 또 한 가지, 진보 정치권 전체가 중앙 정치 진출에 목을 매고 있다. 일종의 조급증이다. 겉으론 아니라고 하지만 내심 2012년 중앙 정치 진출이 최대 과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안 되면 또다시 4년 후에 목을 맬 태세다. 집권은 중요하다. 정치세력이라면 당연히 꿈꾸는 일이다. 중앙 정치 진출도 마찬가지다. 법과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권자의 적극적 동의와 지지를 받아낼 만한 사회적 비전과 정책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기 십상이다.

진보 정치의 실현이 계속 지연되고, 변혁의 그날이 무한히 연기되는 그 사이에 보수의 물결은 장강을 이루고 끊임없이 넘쳐댄다. 전(全)세계적 현상이다.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 논리가 차곡차곡 사회의 공적 부문을 잠식해가고 있다. 개방과 규제완화, 민영화와 노동유연성 확대의 미명 아래, 사회는 점점 더 양극화의 심연으로 빠지고 있다.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꿈꾸는 ‘연대’의 삶은 문화에서도 일상의 삶에서도 경쟁과 서열, 우승열패의 강력한 기제 앞에 사라지고 있다. 지역 이기주의, 사회적 무임승차 심리마저 확산되고 있다. 시민의식의 상실, 유권자의 보수화마저 더해지고 있는 것이다.

중앙정치와는 거리가 먼, 지역의 작은 공동체 운동들이 있다. 마포 성미산의 대안 공동체 운동, 대안학교 운동, 생협운동, 지역과 농촌이 함께 하는 학교 급식운동, 지역 농산물 소비운동(local food), 동네 환경을 함께 고민하는 운동, 비정규직과 노숙자의 자활공동체 운동 등, 다양한 주민참여형 연대 공동체 운동들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 거대한 사회문제에 비해 미미한 운동이고 성향도 각색이다. 때로는 중산층 중심의 운동이라는 한계, 때로는 지역 이기주의에서 출발한 운동이라는 한계, 경우에 따라서는 시장논리에 잠식될 우려가 있다는 한계 등이 있다. 하지만 정치와 민주주의의 본질이 주민이 참여하여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에 있는 한, 이 운동들은 매우 중요한 운동이요 희망의 싹이다. 참여하는 주민을 ‘시민’이라 부를 수 있다. ‘참여자치시민연대’, 지역 시민단체의 이름이지만 어찌 보면 민주주의와 진보의 키워드들로 이루어진 이름이다.

지역의 주민참여운동, 연대 공동체 운동은 크게 보면 아나키즘 운동의 후예다. 아나키즘, 특히 공산적 아나키즘의 특징이 바로 중앙권력의 거부(de-centralization), 연대적 삶(공동체적 삶)의 구현, 그리고 이 공동체들의 느슨한 연합(federation)에 있기 때문이다. 68운동, 소수자운동, 친환경공동체 운동 모두 마찬가지다. 진보 주류는 이런 운동을 백안시해왔다. 반(反)자본의 아나키즘조차도 변혁 운동의 방해물, 심지어 척결 대상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운동의 초점(혁명, 노동자당)을 흐리게 하고 중앙정치를 거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진보정치는 점점 삶의 현장으로부터 분리되었고 결국 유럽 공산당도 일본 공산당도 몰락하고 말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우리의 진보정치운동이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 생활 현장, 노동의 현장, 지역의 삶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중앙권력의 논리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진보세력은 ‘작아 보이는’ 지역의 자치공동체 운동, 현장의 운동으로 내려가야 한다. 편집과 조급증을 털어버리고, 아래로부터 다시 힘을 모아야 한다. 이 운동은 비록 작지만, 시장만능을 거부하는 운동, 신자유주의를 틀을 넘고자 애쓰는 운동이다. 변혁의 그날이 무한히 지연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연대적 삶을 실험하고 구현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또 처음에는 주민의 이해관계, 지역과 집단의 작은 이해관계에서 시작되더라도 주민의 참여와 조직적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공적 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운동이고 이미 그런 사례들이 많다. 일본 전공투 세대의 운동가들이 생활 현장으로 들어가 주민참여의 공동체 운동을 구현하는 노익장을 보이고 있다. 중앙정치의 미련을 버린 공산당이 지역에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지역정치, 생활정치가 일본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흔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발상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중앙으로부터가 아니라 지역과 바닥에서 시작하여 점차 중앙을 포위해 가는 전략 말이다. 우리의 진보정치세력, 그리고 운동권 세대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지역운동, 공동체운동의 한계로 변혁 전략의 부재를 든다. 하지만 장기적 소강국면에서는 다양한 진지전이 우선이고, 이들이 연대를 이루어내면 변혁의 주요 동력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이제는 이 길뿐이다. 소강국면의 장기화는 시민의식의 왜곡도 초래한다. 박정희 신드롬, 보수와 단견(myopia)의 만연된 무임승차 심리가 그것이다. 진보의 집권이 난망이지만, 설령 집권한다 해도 이 문제, 그리고 지역 민주주의의 부재, 지역 진보의 부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주민참여의 공동체 운동은 허위의식이 참여와 토론을 통해 극복되는 민주주의의 유일한 훈련장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지역은 중앙에 비해 진보적 삶에 대한 논의가 미미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교육감 선거는 훌륭한 경험이었다. 공교육 정상화를 목표로 다양한 조직과 세력, 크고 작은 연대체들이 참여하여 토론하고 힘을 모았던 것이다. 생활 현장, 지역의 현장에서는 중앙정치의 발목을 잡고 있는 소위 민노당/진보신당 간의 악연(惡緣)이나 정치적 이해관계 갈등도 미미하고, 당면 연대 노력의 방해물이 되지 못 했다. 이런 가능성에 불을 지펴, 지역의 진보 운동과 현장의 목소리가 중앙 정치의 조급증과 편집을 깨 나가야 한다.

「철학의 유언」에 웬 정치 이야긴가. 쓰고 보니까 좀 그렇다. 하지만 이런 운동의 저변을 흐르는 사상이 있지 않은가. 그 동안 ‘자유주의’의 그늘에 가려 아무도 거들어 보지 않았던 ‘연대’(solidarity) 사상의 역사가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 도킨스(R. Dorkins)에 가려진 굴드(S. Gould)가 있고, 제도권 학계에서 배제되어 온 북친(M. Bookchin) 같은 이의 코뮨 사상이 있다. 마르쿠제(H. Marcuse)를 비롯한 소수자/아웃사이더 사상의 후예가 있고 소수자 운동의 사상적 뒷받침이 될 ‘인정’(recognition) 논의가 있다. 무엇보다 아나키즘의 사상사에 대한 재조명도 필요하다. 거대 담론과 주류 담론에 치우쳐 온 철학이 이제 눈을 돌려 잘 살펴보고 공부해 발전시켜야 할 사상들이다. 「철학의 유언」을 하기엔 아직 철학적 내공도 부족하고 나이도 젊다. 그래서 앞으로 함께 이런 공부, 진보 사상의 큰 그림 속에 빈 부분, 하지만 중요한 부분들에 대해서 공부 좀 해봐야겠다.

 

 

사는 게 철학이지 뭐[철학의 유언]

사는 게 철학이지 뭐[철학의 유언]

이관형(서울대)

 

고등학교 때다. 철학과를 간다니까 친구들이 ‘괴짜’ 취급을 했다. 제법 맘이 통하던 녀석까지 ‘사는 게 철학인데 뭘 전공까지 하려 드느냐’고 했다.(근데 이 친구 나중에 철학과 갔다.) 이게 시작이었고 이후로도 간단없이 들은 말이다. ‘사는 게 철학 아니냐?’고.

난 다소간의 오기와 오만으로 이에 답하거나 무시해왔다. 그런데 막상 지금 와서 생각하니 ‘사는 게 철학 아니냐’는 질문(혹은 주장?)이 무슨 뜻인가를 헤아리기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아마 이런 뜻이리라. 인생은 누구에게나 녹록치 않다. 그러므로 이런 저런 일을 겪는다. 거기서 얻어지는 희로애락이 바로 철학이다. (꿈보다 내 해몽이 더 좋은가?) 아무튼 좀 더 줄여 보면 철학을 ‘인생을 살아가면서 얻는 지혜’로 보는 듯하다. 또 하나 이런 뜻도 담겨 있으리라. 누구나 인생을 산다. 그러니 철학은 누구나 얻는 것이다. 그거면 됐지 그 밖에 뭐가 더 있나?

오호라, 이런 거였어? ‘사는 게 철학이지 뭐’가? 가뜩이나 인문학으로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데, 공납금 내고 시간 바쳐서 공부했더니 아예 전문성도 무시해? “아, 이건 나를 두 번 죽이는 거예요.”(정준하)

철학이 인생의 지혜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주지하듯 ‘철학’은 본래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철학을 할 수는 없었다. 다른 요인은 차치하자. 누구나 지혜를 사랑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철학이 탄생한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은 자유민만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혜에 대해 궁리할 ‘여가(schole)’가 있는 이들만 할 수 있었다. -오늘날 ‘학교, 학파’를 의미하는 ‘school’이 ‘여가’를 뜻하는 ‘schole’에서 왔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깨닫는 것은 누구라도, 심지어 노예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모두 철학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깨달음은 깨달은 자의 의견(doxa, 도그마)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견(도그마)은 철학이 추구하는 참된 앎(episteme)과는 관계없는, 나아가 배격해야 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서양철학은 그 출발점을 보통 이오니아학파로 잡는다. 이오니아학파는 우주세계에 관해 의문을 던졌다. 즉 서양철학은 우주론(존재론)적 물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반면 동양철학, 아니 중국철학의 출발이라 할 선진유가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른 것 같다. 서양식 학제에 따라 뭉뚱그려 철학이라고 하지만 선진유학은 서양철학의 출발이라 할 이오니아학파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선진유학 역시 생산계급이 생산해 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선진유학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서 안정된 세상을 만들 것인가가 주된 물음이었다. ‘사는 게 철학’이라는 말을 굳이 갖다 붙인다면 이오니아학파 보다는 선진유가에 붙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철학이 직업이 된 효시는 칸트다. 근대는 분업(경제), 분권(정치)의 시대였다. 철학도 칸트에 의해 진·선·미가 각기 다루어졌다. 그리고 칸트 자신이 분업의 시대에 걸맞게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철학자가 되었다. 분업이 그 효율성 면에서 얼마나 탁월한 것인지는 이후 진행된 근대 자체가 잘 보여주었다. 철학도 근대 들어 직업화함으로써 더욱 전문 영역화한다.

칸트에 이어 등장한 헤겔은 구두를 만드는 데도 숙련을 요하는데 그보다 훨씬 도야를 요하는 철학에 대해서만 아무런 수고 없이 접근할 수 있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하였다. ‘사는 게 철학 아니냐’는 말에 대해 직격탄을 쏜 것이다. 실제로 철학은 매우 어렵다. 말 그대로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가 되었다. 물론 철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떤 학문분야이건 고도의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게 된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헤겔이 비록 일침을 놓았지만 다른 학문의 전문성은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해명했는데도) 철학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오해가 일상인의 무지 때문이라고 하면 되는 것일까?

칸트는 진리를 사유와 대상의, 판단과 사유법칙의 합치로 파악하고 그 적용범위를 과학적 지식으로 국한하였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진리·비진리를 판단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물음들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하였다. 만약 칸트의 말이 옳다면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상인들이 철학에 대해 오해하는 이유의 일단이 드러난다.

사람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왜 이 세상은 없지 않고 있을까’, ‘세상에서 옳은 것은 무엇인가’, ‘신은 있는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물음을 (꼭 이와 같이 정리된 방식으로는 아닐지언정) 물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게다가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았건 아니건, 확고하건 아니건) 생각이나 입장이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나 입장이 ‘개똥철학’이라고 불릴지언정 말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사는 게 철학 아니냐’는 일상인들의 오해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닐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거기서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이었다는 자신의 믿음을 내비치면서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로마는 철학이 발달하지 않았다. 그(로마인)들은 오로지 현실을 직시했다. 철학은 오히려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철학 전공자들 중 많은 이가 시오노 나나미의 말에 쉽게 동의하기 힘들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근거가 있을 것이나 하나를 꼽자면 이런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철학’의 내포와 외연은 깊고도 넓다. 다시 말해 시오노 나나미의 입장 자체가 하나의 철학적 입장일 수 있다.

만약 시오노 나나미의 언급이 철학과 현실의 괴리를 지적하는 것이라면 철학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반성은 있어 왔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망각’이라는 말로 이를 표현하였다. 그의 영향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아렌트(Hannah Arendt)도 이렇게 말한다. “과학자나 철학자는 일상생활에서 탈피하였을 때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생활을 결코 변화시키거나 퇴색시키지는 못하는데, 이것이 일상생활의 위력이다.”

결정적으로 그 이전에 맑스는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해석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바 있다.

나는 독일관념론을 전공한다. 진리가 고작 참인 사태의 다발, 혹은 참인 명제의 다발이라는 데 대해 실망해서다. 그래서 진리는 그보다는 차원이 높은 곳에 있다는 관념론, 특히 헤겔의 관념론에 마음이 갔다. 반대로 영국 경험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영국 경험론은 진리를 경험의 차원에서 다룬다. 그 논리적 귀결로 학적 진리의 보편타당성 내지 필연성을 부정하는 회의주의에 이른다. 고작 회의에 이르기 위해서 철학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요즘 그 생각이 뿌리서부터 흔들린다. 흔히 칸트의 철학은 앞서 언급한대로 학적 진리의 논리적 근거, 학적 진리의 보편타당성과 필연성을 정초했다고들 한다. 그리고 인간이 운명적으로 제기할 수밖에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이 이율배반을 낳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나는 학적 진리마저도 안티노미를 낳는다는 생각을 한다. 대체 어떤 진리가 보편타당하고 반드시 그러한 것인가?

20대에는 우리를 밝혀주고 우리가 따라야 할 별(루카치)이 있다고 믿었다. 역사를 믿었으며,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고 주체라고 믿었다. 언젠가는 평등의 이념이 현실에 구현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믿었으며 그 길을 같이 걷는 동료들을 믿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외화하여 그 말씀의 진리됨을 입증하는 전 과정을 보여준 철학(헤겔)도 말씀(관념)을 떼어내고 ‘나름 현명하게(?)’ 받아 들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루카치의 별이 남긴 잔영이 사라지기도 전에, 재빨리 지혜(?)를 터득한 우리는 ‘언젠가는’을 ‘지금 당장’으로, ‘평등’을 신분상승의 막차를 타기위한 ‘경쟁의 평등’으로 받아 들였다. 소위 386은 고시를 봐서 그를 터전삼아 어린(?) 나이에 선량이 되거나 벤처회사를 차려 대박이건 쪽박이건을 찼다. ‘현명한 유물론자들’은 이념이 ‘밥 먹여 주지 않음’을 간파했다. 최영미가 극구 오해라고 말하는 ‘서른 잔치의 끝남’을, 그(최영미)의 말이 옳다면 386은 ‘창조적 오독’을 통해 실현한다.

반응이 더뎠던 이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이들은 세상이 주는 비판을 좀 더 경험했을 따름이다. 세상살이의 녹록치 않음을 경험하던 차에 불어 닥친 IMF는 아노미(anomie)나 반성을 읊조릴 틈을 주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늦었든 빨랐든 386, 아니 우리 모두는 ‘정신을 바짝’ 차린다.
‘인생 뭐 있어’가 유행어가 된다. 이 말의 핵심은 차마 말로 하지 못하는 이심전심의 공통감(?)에 있다. 이념 웃기고 있네, 역사법칙 웃기고 있네, 윤리·도덕 웃기고 있네. 민중? 좋아하네. 인생 뭐 있어 한 세상 잘 즐기다 가면 되지. 인생 뭐 있어 결국 돈이지!

이런 시대정신(?) 앞에서 모든 이념은 존립의 근거를 잃는다. 남은 이념이 있다면 그건 물신(物神)의 이념뿐이다. 교회에 가도, 절에 가도, 직장에 가도, 동창회에 가도 물질의 소유는 축복이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 구멍통과하기 보다 어렵다는 구절은, 왕좌를 물리치고 보리수 아래서 행한 고행은 더 이상 설교·설법의 주제가 아니다. 완전한 세상의 실현으로 여겨지던 성과 속의 일치가, 종교 간의 화해(?)가 ‘물신’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목도한다.

우리는 청춘기의 이념(철학)을 잃고 물신을 얻었다. 왜 전경에게 두들겨 맡고 철창을 드나들었던가? 이후로도 오랫동안 쫓기는 꿈에 가위눌려야 했던가? 출세가도를 달리는 우리도 있지만 왜 적잖은 우리는 연락을 끊고 숨어버렸던가? 왜 사회 부적응자가 되었던가? 왜 조국을 떠나 이민을 택했던가? 왜 같이 활동한 선·후배·동료들과 서로 상종 못할 ‘웬수’처럼 되었던가? 이러려고?

나는 386과 나의 이야기를 통해 좋았던 과거와 나쁜 현재를 대비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과거가 좋았냐고? 난 대학생활이 터널 같았다. 지금이 좋냐고? 아직도 터널 속이다. 그러나 반대로 과거에는 별(루카치)이 있어서 좋았고 지금은 별이 없어서 좋다.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좋았고 필연과 당위에 눌리지 않아서 좋다.

‘사는 게 철학이지 뭐’의 요즘 버전은 ‘인생 뭐 있어’다. ‘사는 게 철학이지 뭐’에는 물음의 의미가 다소나마 들어있다. 그러나 ‘인생 뭐 있어’는 대답이지 물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신’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혹여 총애를 받았다 해도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생 뭐 있어’는 ‘인생에서 가치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절박한 물음이기도 하다.

그런데 철학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다. 철학은 본래의 의미인 ‘지혜 사랑’을 잃어 버렸다. 지혜는 인간(人間)에, 즉 ‘사람 사이’에 있는 것 아니던가? 철학이 편애해 온 존재론에, 인식론에 일상의 삶과 지혜가 있는가? 아렌트의 말대로 이미 과학이 가져가 버린 ‘진리’에 사로잡혀 정작 자신에게 남은 ‘의미’는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사는 게 철학이지 뭐’는 옳다. 오히려 삶을 배제한 철학, 삶의 의미에 대해 답하지 못하는 철학은 ‘유언’으로만, 철학사적 관심으로만 남을 것이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영원한 것은 푸른 생명의 소나무라고 말해 주었는데 나는 회색을 쫓았구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는데 내가 만난 부처를 움켜잡았구나. 사는 게 철학 아니냐고 물을 때 난 독사와 에피스테메를 나누고만 있었구나.”

 

친구! 닭 한마리 대신 갚아주게나! [철학의 유언]

친구! 닭 한마리 대신 갚아주게나! [철학의 유언]

이순웅(숭실대 강사)

 

‘철학의 유언’이라니. ‘철학자의 유언’이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다만 여전히 마음은 무겁다. 아마도 ‘유언’이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유언이라면 죽음과 떼어놓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니지 않는가.

얼마 전 김재현 선생님은 [미디어스]에 기고한 글에서 법정 스님을 철학자로, 본인을 철학교수로 규정하였다. 철학을 가르치는 자로서 철학자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나름 겸손한 규정이리라.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럼 난 뭐지?’였다. 선생님의 내공을 따라가려면 아직 먼 나로서는 그저 ‘아직 멀었다’고 할 수밖에.

하이데거의 권고와는 다르게 사실 난 죽음을 멀리하고 산다. 어쩌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막걸리 두 잔 먹고 죽음에 대해 잠깐 생각할 때도 있지만 일명 ‘비(非)본래적인 삶’, 이게 내 삶의 대부분이다. 여기에다 냉소주의와 허무주의를 얹으면 훨씬 더 내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강의 시간에는 내가 아는 이론이나 지식을 들먹이며 “죽음과 정면 승부하라”고 하이데거가 말했다면서 고상한 척도 했지만 실은 나조차도 자신 없는 ‘거짓말’이다.

어쨌든 나에게 ‘철학자의 유언’이란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철학자는 아니다.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적당히 폼이나 잡는 사람이라고 하면 지나친 겸손일까. 몇 년 전, 친척 중 한 사람이 내 생년월일을 묻더니 컴퓨터 점을 쳐준 적이 있다. 고지식하다, 공무원이 어울린다 등등 하나같이 ‘정답’이었는데, 공부를 한다면 겉멋으로 한다는 말도 이어졌다. 나는 곧바로 ‘엉터리’라고 응수했지만 어찌나 뜨끔하던지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있다.

‘철학의 유언’이라면 젊은 시절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천국행 티켓을 얻기 위해 신에게 고백을 했듯이 내 삶의 일부를 고백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자기 삶을 한번쯤은 반성해 봐야 죽음 이후에 대한 평가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 철학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지만 ‘난 자신이 없다’는 고백, 일단 이것이 나의 ‘철학의 유언’이다.

인생을 가치 있게 산 사람들

어떤 사람이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는 그가 죽었을 때 더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난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는데 어느 날 옆 마을 어떤 부잣집 아저씨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문상을 다녀온 사람 말이, 문상객이 별로 없더란다. 돌아가신 그 아저씨는 대지주였고 우리 마을 사람 대부분은 그의 땅을 부쳐 먹던 소작농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인심을 잃을 대로 잃은 뒤라 그런 쓸쓸한 장례식을 맞이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가 정년퇴임을 했을 때 아버지의 ‘작은 죽음’을 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공허함, 쓸쓸함을 모를 것이다. 물론 정년퇴임이란 게 없는 나로서는 죽을 때까지도 아버지의 심정을 모를 것이다. 다만 안타까웠던 것은 왜 실무를 그만 두면 저렇게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날개 없는 천사처럼 무기력해져야 하는가. 권력은 사라졌어도 권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교장에서 할아버지로 전락한 아버지는 ‘옛날에 교장이었음’이라는 이름표라도 달고 싶은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죽을 때까지 존경을 받으면서 주변 사람, 나아가서는 사회 구성원에게 이런저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산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존경을 받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잘 살기가 그만큼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것이 기독교도라면, 잘 살았던 그 소수의 사람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의무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근대 사회에 들어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산 사람들은 누구일까. 나는 감히 동학농민군, 빨치산, 그리고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끝까지 총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을 꼽고 싶다.

연속극이네 뮤지컬이네, 지금 우리 사회는 명성황후 영웅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일제의 자객에 의해 도륙당한 그이 뒤에는 일본군의 총칼에 스러져간 수만 동학농민군이 가려져 있지 않은가. 그들이야말로 그 시대의 영웅이다. 진리가 시대적인 것이고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첨단 화력 앞에 죽창 들고 맞선 그들, 이길 수 없는 전쟁, 그렇지만 꺾을 수 없는 확신, 새 세상을 향한 그들의 열정은 죽음도 두렵지 않게 했다.

해방 이후 남북한의 권력 수립과정에서는 북쪽이 남쪽보다 권력의 정통성을 훨씬 더 많이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퇴로가 차단된 빨치산의 외로운 투쟁 역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소설이기는 하지만, 난 『태백산맥』의 김범우보다는 염상진과 함께 자폭한 빨치산의 삶이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기는커녕 염상진에게 ‘덕분에 사람답게 살다 죽는다’며 고마워했다. 유엔군과 토벌군에게 졌지만 정의가 이긴 자 편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 빨치산이 비전향 장기수로 가는 길은 너무나 당연한 길이었으리라.

주로 ‘먹물’로 이루어진 지도부가 투항을 결정했을 때, 끝까지 도청을 지켰던 ‘5월의 시민군’은 계엄군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저항한 거 아닐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들의 판단 잣대는 오직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처럼 살 수 있는가 – 부끄러운 자화상

전두환 씨가 대통령을 할 때 난 학생운동에 몸담았었고 당시에는 교과서적으로 정해진 코스인 노동 현장에도 들어가 봤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산 것 같다. 산다는 것에도 자신이 있었다. 그때 같이 움직였던 사람들과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지금도 여전히 피를 나눈 형제와도 같은 우정이 있다. 그리고 한때는 그 옛 기억을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나 이런 사람이었다’며 그때 일을 주위 사람들한테 은근히 얘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 과거를 거의 말하지 않는다. 특히 참여정부가 들어서고부터는 입을 닫은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운동권이 권력을 잡은 게 아닌데, 주위 사람들은 “운동권이 권력을 잡았지만 별 볼일 없다”고 했다. 참여정부를 이끌어가는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진 무리로 취급 받는 게 싫었다. 노무현 탄핵 반대는 탄핵을 한 국회(의원)에 대한 반발이었지 노무현 살리기는 아니었다. ‘니들이 뭔데 탄핵질이야!’

그런데 내가 입을 닫은 또 다른 이유는 운동권에도 있다. 90년대 초반쯤으로 기억된다. 노동현장을 나와 방황하다가 대학원에 들어가고 한철연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정파적 특성이 강한 어떤 ‘꼴통’ 운동권의 주변인으로 잠깐 활동한 적이 있다. 나의 견해가 자신들의 정파적 입장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즉시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나를 퇴출시킨 것까지는 그래도 이해하겠다. 하지만 그 이후 ‘재정이 부족하니 돈을 내라’며 나를 찾아왔던 것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이미 냈던 수십만 원도 돌려달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말이다.

난 상식조차도 없는 그들의 행태를 보면서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큰일 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제발 당신 같은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면 안 된다며, 만일 나에게 힘이 있다면 아예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말리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아나키즘이 왜 주목을 받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군사 정부가 끝나고 조금씩 ‘좋은 세상’이 오니 그에 비례해서 ‘자격 없는’ 운동권도 그만큼 늘어갔던 것일까.

하지만 여기까지는 마치 고고한 학처럼, ‘까마귀 노니는 곳에 나는 가지 않았노라’라고 하는 결벽증 섞인 오만함이 배어있다. 거창하게도 동학농민군이네 빨치산이네 5월의 시민군이네 했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자신 없다’는 것이 내 대답이다.

학생운동 시절, 유인물 뭉치를 가지고 가다가 불심검문에 걸린 적이 있다. 경찰은 내 허리띠를 빼고 바지 뒤쪽을 움켜쥐더니 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런데 우연히 후배가 그 장면을 보는 바람에 연행 사실이 알려졌고 내 동료는 내가 ‘조직’을 발설할 것에 대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소위 ‘이빨을 맞추러’ 열심히 뛰어다녔다. 우리 과(科)도 아니면서 우리 과 엠티에, 그 먼 곳까지 택시 타고 와서는 ‘조치’를 취할 정도였다. 그런데 재수가 좋게도 나를 조사하던 형사의 형이 우리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의 옆 학교 교장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바람에 나는 ‘훈방’되었다. “니네 아버지 땜에 살았는 줄 알아, 짜샤!”

풀려난 나는 너무나 당연한 조치를 취했던 동료에게 섭섭하다 말했다. 설마 내가 발설을 하겠느냐, 나를 못 믿었던 거냐, 너의 행동은 불필요한 것이었다는 따위의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런 말이 그야말로 오만함의 극치였다는 것이 드러나는 데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타 대학 학생들과 연합 거리 시위를 주도하다가 잡혀 조사를 받던 중 ‘견딜 수 있을 만큼’ 맞았을 때, 동료에게 했던 말과 정신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경찰관이 ‘조직을 불라’고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을 뿐, 만일 그런 요구를 했더라면 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발설했을 것이다.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길 원한다 했지만 조직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내가 혐오하던 ‘입만 살아있는 사람’에서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은 지금까지도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다.

난 고문을 받은 적은 없지만 폭력을 경험했고 그 앞에 무력하게 무너졌다. 그런 내가 죽음과 정면 승부한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다. 내 청춘을 다 바쳤던, 그래서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시절, 막상 닥치고 보니 죽음은커녕 잠깐 동안의 폭력에도 저항하지 못하는 나약한 나를 보았다.

남은 인생은 어떻게

거창하게 역사적인 삶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미래는 지금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은가. 내 죽음 이후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는 내 삶이 결정할 것이다. 그런데 철학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헤딩할 자신이 없는 나. 철학은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할 수 없는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안 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다는 것. 이제 남은 것은 희망사항뿐이다. 그저 다음과 같은 2인칭 죽음을 꿈꿀 뿐.

장켈레비치(Vladimir Jankelevitch, 1903~1985)는 죽음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먼저 1인칭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서 경험할 수 없는 죽음, 수수께끼 같은 죽음이다. 3인칭 죽음은 ‘그의 죽음’으로서 그가 맡았던 기능이나 역할을 곧 다른 사람이 대신한다. 2인칭 죽음은 ‘너의 죽음’으로서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는 죽음이다. 2인칭 죽음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죽음이지만, 한쪽 팔이 잘려나간 듯이 아파하거나 망연자실해버릴 수 있는 죽음이다. 바로 이 2인칭 죽음을 겪을 때 죽음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슬픔 속에서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참모습을 통감할 수 있다.

철학자도 아니고 철학교수라고 하기에도 많이 부족한 나로서는 그저 ‘철학하는 삶’을 희망할 뿐이다. 나는 공자를 잘 모른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책에서 공자에 관해 언급한 것을 보니 역시 공자는 철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가 지나가고 나자 뒤따르던 제자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단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요?” “공자입니다.” “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 말이지요.”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2인칭 죽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잘 산 것일 게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는 내 삶이 어떻게 평가되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죽음을 연습해야겠다. ‘작은 죽음’ 말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기도 하기에 선택 전에는 언제나 끝맺음이 있기 마련이다. 끝맺음을 잘해나가면 생물학적 죽음 이후의 나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1958년, 본사 건물 1층 레스토랑에 그림을 그려주는 대가로 3만5천 달러, 현재의 한화 가치로 따지면 약 28억을 주겠다는 씨그램 회사의 청을 거절한다. 이유는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밥을 먹는 사람들에게 내 그림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 1970년, “가장 상업적인 것은 가장 예술적인 것이고 가장 예술적인 것은 가장 상업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며 예술과 상업성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앤디 워홀 등의 팝아트가 유행하던 시절, 그는 갑작스럽게 자살한다. 그의 회상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우리에겐 잃을 게 없었고 꿈만 있었다.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내 젊은 시절은 내 인생의 황금기였고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 ‘해야 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던 때. 그런데 그 시절이 이제는 더 이상 자랑이 아닌 때가 왔다. 그리고 결말이 불확실한 긴 여행을 떠나는 자유인이기에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보여 불안하다. 그렇지만 추억에서 벗어나, 꿈을 향한 발걸음을 좀 더 힘차게 내딛으려면 꿈만 있는 지금을 행복한 때로 여겨야 할 것 같다.

유언이란 뭔가 미흡한 것이 있을 때 하는 거 아닌가. 닭 한 마리 빌린 거 갚아달라고 말하며 죽음의 길로 간 소크라테스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지 않았을까. 유언이 필요 없는 죽음, 그게 내가 맞이하고 싶은 죽음이다.

 

후려쳐라,죽음을 선호하는 철학자를[철학의 유언]

후려쳐라,죽음을 선호하는 철학자를[철학의 유언]

이정은(연세대외래교수)

 

*이 글은 필자가 노년이 되었다고 가정하여 유언장 형식으로 쓴 것입니다. (편집자)

정신이 자꾸 흐려진다. 몸을 가누기도 힘들다. 빨리 죽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지금까지 삶을 성찰하는 철학자로 살았으니 조용히 정리하면서 죽음을 기다려보자. 그런데 삶에 대한 정리가 지극히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으니 부담스러운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죽음 자체 때문에 이러는 것은 아니다.

젊었을 적부터 일찍이 철학적 삶을 동경했기 때문에, 유언도 철학자의 면모에 걸맞게 하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다. 철학자로서 품격과 사명을 고수하느라 힘들었는데, 유언장을 쓰는 이 마당에도 철학이 나를 힘들게 하는구나. 그래도 내가 철학에서 평생 무엇을 추구했는지,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 글을 접하는 후손들에게라도 삶의 현장에서 철학적 끈을 가늠하고 철학적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때, 내 삶이 무가치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으니 말이다.

나도 여느 철학자처럼 위인들이 추구하는 ‘진리’를 찾으려고 별의별 노력을 다하면서 무척이나 방황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나는 왜 진리를 찾는가?”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여기에서 생기는 공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철학을 전공하게 된 초발심이 무엇인가로 거슬러가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삶은 고통과 갈등의 연속이었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유년기의 잠깐 시절이었다. 학교에 가는 것도 즐겁지가 않았기에 고통스런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 성찰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삶에 대해 구체적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해주리라는 기대에서 철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철학을 배우면서 알게 된 것은 철학자는 진리 찾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나도 진리를 찾게 되면 고통과 갈등이 눈 녹듯이 사라지리라 기대했지만, 진리를 가르쳐주는 철학사는 쉽게 접근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었다. 진리는 어마어마한 것이고, 쉽게 찾아지지 않는 신비로운 것이라는 선입견을 한때는 갖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위대한 철학자들의 삶은 진리 체계의 위대함과는 달리 엄청난 박해와 고통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경우가 많았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 진리 체계는 고통스런 삶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고, 박해의 고단함은 진리를 찾는 에너지로 반전되었던 것이다. 철학자가 속한 세계의 모습은 철학적 문제의식과 체계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나도 나를 둘러싼 현실에 대한 고민을 철학적 문제의식으로 승화시켜 나가기로 했다. 내가 속한 공동체, 그 속에 나타나는 사회적 정치적 현상들, 이것을 통해 진리와 현실, 진리와 사회, 진리와 정치의 관계를 조명하는 철학의 방향타를 만들어 나갔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 사회와 철학의 관계, 정치와 철학의 관계에 대한 도움을 받기 위해 들여다보게 된 사상들은 나와 동일한 관심사에서 출발하는데도, 그 관심사를 넘어서서 형이상학, 인식론, 방법론의 문제로 진입하곤 했다. 그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은 형이상학과 사회 철학의 긴밀한 관계, 방법론과 정치 철학의 긴밀한 관계이다. 그래서 나는 학위논문을 헤겔
논리학으로 쓰게 되었고, 학위를 받은 다음에는 사회 철학, 정치 철학 연구로 손쉽게 궤도 전환을 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사회-정치철학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철학자가 철학과 정치의 관계를 고민하기는 쉬워도, 관계를 풀어내기는 지독히 어렵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위대한 철학자들도 분명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에서 성찰을 시작해도, 결국은 인간에게 부여된 삶의 상황과 조건을 무시하는 체계를 만들거나 그 상황을 떠나려는 경향을 강하게 지니기 때문이다.

가령 플라톤을 보자. 그는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철학자가 정치를 하는 철인왕’ 제도를 고안해낸다. 그렇다면 철학과 정치가, 철학자와 정치가가 일치하는 진리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플라톤은 정치를 위해 필요한 철학자의 행보가 정치인의 행보와 다르다는 점, 정치에 필요한 철학적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 철인왕은 정치에서 벗어나서 정치로부터 한가한 상태(schole)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궁극적으로 주장한다.

삶의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삶의 현장에서 벗어나서 다른 세계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동굴에서 벗어나서 동굴 밖으로 나가야 하고, 감각계에서 벗어나서 이데아계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데아계는 감각계에 속해 있는 우리의 현상세계를 벗어나서 사유를 통해 도달하는 곳이며, 이성보다도 더 우위에 있는 정신(nous)의 힘을 필요로 하는 곳이다. 이때 정신의 힘은 아무나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능력을 지닌 철학자가, 그래서 왕이 될 가능성을 지니는 철학자가 발휘한다. 철인왕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철인왕을 통해 설명되는 플라톤의 진리 체계는 철학사에서 고유한 사유 전통을 만들어낸다. 달리 말하면 경험적, 정치적 삶의 세계보다는 지적 직관에 의해 도달하는 관조의 세계를 최고로 간주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태도로 곧바로 전이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 시민으로서 탁월한 덕을 발휘하여 실현되는 정의’와, ‘그 덕도 초월하는 철학자의 관조’를 구분하면서, 시민은 전자의 정치적 삶에서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정치적 삶보다는 후자의 관조적 삶이 더 고귀하다고 주장한다.

철학사에서 탁월한 진리 체계를 형성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로운 국가, 좋은 인간과 좋은 시민이 합일되는 정치학 등을 고안해냈어도, 결국 철학과 정치가 분리되는 이론, 정치는 철학으로부터 소외되고, 삶의 구체적 문맥은 철학적 진리로부터 괴리되는 이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나는 이런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철학사에 빠져들었고, 진리가 무엇인지, 진리가 내 삶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사회 철학 내지 정치 철학은 형이상학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채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삶의 현장은 진리가 존재하지도, 진리가 실현될 수도 없는 공간이 되어버린 줄도 모르고서.

그렇다면 진리는 언제, 어디에서 제대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서 ‘부정의한 감각계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라거나 ‘진리를 찾기 위해 동굴을 떠나야 한다면, 결국 진리를 찾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 ‘철학의 진리 찾기는 죽음에 대한 연습, 죽음을 위한 연습’이라는 발상들을 드러낸다.

플라톤의 이런 주장은 후대 철학자들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선호, 죽음을 향하는 철학자의 사명, 삶보다는 죽음이 더 위대하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삶과 사회-정치 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위해 삶과 정치 철학을 유보하고 희생시키라는 식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사회 철학, 정치 철학을 하겠다고 자처한 나는 정치적 활동 공간에서 도대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사회 철학자, 정치 철학자로서 철학적 삶을 표방하는 나 또한 철학자이기에 정치적 행위공간에서 삶이 아니라 죽음을 선호하는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진리를 찾기 위해 죽어야 한다면, 플라톤처럼 죽음이 대안이라면, 철학자는 살아도 제대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 죽지 않았는데도 이미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이다. 유언장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죽음을 향하는 삶이고, 이미 죽어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에게는, 즉 철학자로서 나에게는 유언장이 필요 없다. 그냥 죽으면 되는 것이지, 부질없는 이 세계에 통찰력을 남긴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저 “후손들이여! 빨리 죽어라!”라고 외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철학자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가 철학자의 말을 기꺼이 경청해야 한다”(『미와 숭고에 관한 고찰들』)라고 주장하면서 플라톤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관조적 삶을 위해 정치적 삶을 폄하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겨냥하여 정치와 철학의 위계질서를 비판적으로 조명한 칸트를 만나게 된다. 칸트의 주장은 철학적 진리를 이론에서 실천으로 반전시키는 맑스의 유물론, 관념론과 이원론에 대한 맑스의 비판보다도 더한 상상력과 가능성을 나에게 주고 있다.

유물론인가, 관념론인가, 일원론인가 이원론인가라는 싸움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철학적 진리와 철학적 실천의 문제를 동시에 담아내면서 삶의 현장에서 철학을 녹여내고, 철학과 정치의 관계, 형이상학과 정치 철학의 관계를 다르게 조명하는 방식, 즉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철학적 소외, 철학에서 정치가 배제되는 이론, 삶보다는 죽음이 더 진리에 가깝다는 이론 때문에 죽음을 선호하는 방식 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정신이 자꾸 몽롱해지는 이 늙은 나이에 와서야 나는 그동안 천착했던 철학적 진리들에 대해 거리를 두고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거리가 도출해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 시점에, 나의 정신이 혼미해져서 죽음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위대한 철학자들과 똑같이 범하고 싶지는 않다. 진리를 찾는다는 설렘에 현혹되어 기꺼이 죽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철학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늦기는 했지만, 철학과 정치가 분리되었던 철학사의 전통을 이제 깨달았으니, 철학자들이 선호하는 죽음 때문에 가로막혔던 삶의 역동성을 적극적으로 들여와서, 이 삶을 정치 철학적 차원에서 해석하고, 변화시키고, 풍요롭게 만들기 전에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직 죽을 수 없다. 죽음이 나를 후려쳐서 더 이상 나의 이런 강고함을 내버려두지 않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면서 철학적 진리를 정치 철학적 삶과 유기적으로 연결해야겠다.

죽음이 나를 후려쳐서 내가 쓰러진다면, 부디 후손들에게 그 뒤를 당부한다. 나의 사후에도 여전히 죽음을 선호하는 철학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기꺼이 후려쳐라. 삶을 선호하는 철학을 견지하지 못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언제든지 그들을 기꺼이 후려쳐라.

 

철학 덕분에 이혼하지 않은 여자[철학의 유언]

철학 덕분에 이혼하지 않은 여자[철학의 유언]

박은미(건국대교수)

 

웃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이다. 나는 정말 철학 덕분에 이혼하지 못했다. 철학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철학이 뭐냐. 한 마디로 체계적으로 따지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끝까지 따지는 것이다. 제대로 따지면 인식의 편파성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법이라 ‘나만의 옳음’에 빠지지 않게 된다.

싸움을 한 사람들이 싸움의 과정을 설명하다보면 그 설명 자체가 편파적이라며 다시 싸움을 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이 사람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버리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당신이 ~~~ 하니까 내가 —한 거 아니야? 자기 잘못은 쏙 빼놓고 나만 이상한 사람을 만들어!”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철학은 보편적 인식을 하자고 나서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이 어렵다.

세상을 좀 살아본 사람들은 질문을 가지게 된다. ‘도대체 상식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보기엔 이게 상식인데 다른 사람은 저게 상식이란다. 나에게 상식인 것이 그에게는 상식이 아니라니 정말 답답할 노릇이다. 그래서 속이 탈대로 탄 사람들은 말한다. ‘다 제 멋대로 사는 거지 뭐.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어?’ 어차피 인생에 정답은 없다. 그런데도 철학은 따지겠단다. 어차피 답 안 나오는 것을 왜 그리 따지려 드는지.

철학자들은 말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지가 배를 안 곯아봐서 그렇지, 사흘만 배곯아봐! 그런 소리가 나오나!’ 내가 아는 어떤 철학교수님은 늘 말씀하신다. 철학은 철이 안 나서 철나려고 하는 거라고 말이다. 묘하게 진실이 배어있는 말씀이다.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편파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의 숙명적인 한계일진대 이놈의 철학은 주제를 모르고 따지겠단다. 그것도 ‘전체’를 ‘체계적으로’ 따지겠단다. 이 답 안나오는 싸움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철학연구자들이다.

나는 철학하는 남자랑 산다. 철학하는 남자와 철학하는 여자가 부부싸움을 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들 하시지 않은가? 여하간 그 스토리를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철학을 하든 뭘 하든 인간 인식의 한계는 너무나 분명하다는 것이 나의 소회이다.

철학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철학을 하는 사람의 인식의 폭이 조금 더 넓을지는 몰라도 남이 틀리고 내가 옳아 보이는 인간 인식의 한계에 부딪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뭐 좀 안다고 설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은 인식하지 못한 채 타인의 잘못을 파악하는 데에만 더 골몰하는 경우가 많다. 즉, 자신의 잘못을 파악하는 데에 보다는 타인의 잘못을 파악하는 데에 훨씬 더 유능하다!

나는 보편, 너는 편파?

지식인에게 환멸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사실 분명하다. 지식인이라 해도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보다 현격하게 잘 하지는 못한다. 자기 외부의 것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의 서너배에 해당하는 분석력과 성찰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력과 성찰력은 일반인들의 1.2배 혹은 1.3배 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지식인들의 경우 자신에 대한 성찰력과 타자에 대한 성찰력의 차이가 일반인들보다 훨씬 많이 난다는 것이다. 철학이 아니라 철학 할아버지를 해도 자신에 대한 성찰력을 현격하게 많이 가지기는 힘들다. 그러니 우리 부부의 부부싸움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처음엔 남편의 상식과 나의 상식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상당히 놀랐다. 나는 분명히 싸이코와 결혼하지 않았는데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은 저렇게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수없이 생각했다. 나는 철학을 ‘어떤 의견을 접하든지 그 의견이 타당할 가능성의 근거와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의 근거를 균형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전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나는 남편의 생각이 타당할 가능성과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을 균형적으로 고려하려고 노력했다.

그랬더니 자꾸만 ’남편이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에 너무 치우쳐 생각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타당하고 남편이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연상이 이루어지는데 ’내가 타당하지 않고 남편이 타당할 가능성‘은 머리를 쥐어 짜내도 생각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균형을 잡기 위해 ‘내가 타당하지 않고 남편이 타당할 가능성’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완전한 균형은 잡기 어려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타당하고 남편이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연상되는 것이 70%, ‘내가 타당하지 않고 남편이 타당할 가능성’을 쥐어 짜 생각하는 것이 30% 정도나 될까.

그런데 그 파워는 놀라웠다. 점점 남편의 생각과 행동의 패턴이 보이게 된 것이다. 남편의 생각의 패턴에 나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생각의 패턴이 보이기는 했다. 그래서 저런 구조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러이러하게 말해야 나의 본뜻을 알아듣겠구나 하는 판단이 섰다.

철학은 보편적 인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물론 완전히 보편적인 인식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인식이 보편적인 인식이라는 것을 보증해줄 제 3의 존재자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철학은 타당할 가능성과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을 50:50으로 균형적으로 고려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50:50으로 생각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의 목표는 51:49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타당할 가능성을 51% 생각하고 상대방이 타당할 가능성을 49%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리라!

그리하여 우리 부부를 지탱해준 힘은 철학이다. 철학을 한다는 사람이 남만 비판하고 자기는 비판하지 않으면 웃긴다고 생각해서 스스로에게 창피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덕에 이혼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리도 싸우던 5년여의 시간을 넘겨 이제 15년에 육박하고 있으니 이제는 귀찮아서라도 이혼을 못할 판이다.

철학, 편파적 인식을 극복하려는 지속적인 노력

철학은 전체를 체계적으로 따져서 가장 보편적인 인식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철학을 하다보면 자신의 인식의 한계,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늘 의식해야 한다는 요구에 봉착하게 된다. 딱딱하게 말해서, 자신의 생각을 상대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나는 내가 어떻게 남을 배려했는가는 알기 쉽지만 내가 어떻게 배려받았는가는 모르기 쉽다. 그런 경험들 있지 않은가? 내가 배려해줬는데 상대방은 내가 배려했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 내가 생색을 내기 전에는 상대방이 나에 의해 배려받았음을 모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남편이 나에게 말하지 않고 해준 배려는 의식하지 못하고 내가 한 배려만 의식하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내가 말하지 않고 배려하는 것이 있듯이 남편도 말하지 않고 배려하는 것이 있을 터이다. 그래서 다음의 생각에 이르렀다.

내가 어떻게 남편을 배려했는가, 그리고 남편은 어떻게 나를 배려하지 않았는가를 기억하느라 세월을 낭비하는 것은 정말 아깝다는 생각! 철학을 한 덕에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잊지 않으려 노력할 수 있었고 그 덕에 서로에 대해 과도한 감정소비를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편파적인 인식을 한다. 이러한 인간들이 모여 철학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보편적 인식을 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진리가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체계적으로잘 따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생각 각각을 두고 타당할 가능성과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을 균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 작업을 하다보면 A라는 (편파적) 인식은 B라는 (편파적) 인식에 의해 그 편파성이 드러나고 B라는 (편파적) 인식은 C라는 (편파적) 인식에 의해 그 편파성이 드러나며 C라는 인식은 A라는 인식에 의해 그 편파성이 드러나는 식으로 각각의 인식의 편파성이 잘 드러나게 된다.

철학의 힘은 여기에 있다. 지속적으로 끝까지 따지면서 개별적 인식의 편파성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가장 편파적이지 않은 인식이 무엇인지 찾아간다. 물론 완전히 편파적이지 않은 인식은 세상에 없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인식을 찾으려는 노력이 우리를 그나마 덜 편파적이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철학은 누군가의 말대로 ‘다양한 관점들의 공존가능성을 극대화해주는 보편적 틀을 찾아나가는 작업’이 된다.

보편적 틀을 찾아나가려다 보면 ‘넘어서’ 생각해야 한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을 넘어서 생각해야 하고, 현실을 넘어서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넘어서’ 생각하는 것을 상위(메타)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조감도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땅위에 있는 건물을 완전히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조감도를 만든다. 철학은 세상과 삶에 대한 조감도를 그리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과 삶에 대한 조감도를 그리려면 세상과 삶에 너무 밀착되어서는 안 된다. 밀착되면 부분만 보게 되지 전체를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을 볼 때는 그것과 거리를 취해야 그것이 제대로 보이는 법이다. 그리하여 철학 자체가 객관적으로 보편적 틀을 찾아나가려다 보니 철학이 자꾸 세상과 그리고 삶과 멀어지는 일이 벌어진다.

삶 전체를 보려니 삶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거리를 두다 보니 삶과 유리되기 쉬워진다. 이것이 지금 철학의 현주소다. 삶에 거리를 취하려 노력하다 보면 삶과 유리되기 쉽고 삶과 유리되지 않으려 하다보면 삶에 거리를 취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남은 볼 수 있으나 나는 볼 수 없는 게 인간의 운명일진대 삶 안에서 삶과 거리를 취해야 하는 철학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은 여러모로 철학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속담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자신이 우물 안에 있을 때는 우물 안에 들어있는지를 모른다. 우물 밖으로 나와 봐야만 자신이 그동안 우물 안에 있었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인식은 항상 뒷북치는 형국에 있다. 사태가 벌어지고 있을 때는 사태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없게 된다. 사태를 ‘넘어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야 그것이 어떠어떠한 사태였는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우물 밖으로 나오는 것, 즉 상위차원으로 올라가는 것 그리고 사태가 벌어진 시간이 지나는 것, 이 두 가지가 이 보편적 인식의 기초적 조건이 된다.

이 시대에 철학을 한다는 것은 싸운다는 것이다.

현실을 넘어서 생각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현실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해서는 현실을 넘어서서 생각할 수 없다.

철학은 모든 것에 대해 체계적으로 따져묻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바람직하지 않은가를 따진다. 그러느라 현실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갖추기 어려워진다. 현실을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모저모 따지기만 하니 생기는 것은 없고 머리만 아프게 된다. 그래서 도무지 현실에서 편하게 살 수가 없다. 현실에 일어나는 일 하나 하나 따지느라 바쁘니 말이다.

그리하여 철학을 한다는 것은 현실과 싸운다는 의미가 된다. 현실의 문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바로 현실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현실을 비판하는 것은 괴롭고 힘든 일이다. 철학자 역시 그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 살아야 하는 한 명의 자연인이기 때문이다.

학교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면서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하고 사회가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를 알면서도 그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문제를 얘기해야 현실의 문제가 조금씩이나마 극복되어간다는 것을 철학자들은 믿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발언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살아간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말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절망을 머리에 잔뜩 이고서 말이다.

인생은 어느 하나의 요소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요즘에는 모든 것이 돈으로 환원되고 있지만 말이다. 이 시대에 철학자들은 ‘돈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돈만으로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 ‘살아가는 과정이 곧 죽어가는 과정’이라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철학자들은 보이는 것 뒤에 이면이 있음을 자꾸 드러내려 한다. 그래서 보이는 면과 이면을 모두 전체적으로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철학자들은 이런 진실들을 통해 사람들이 각자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사상이라는 그물로 엮는 철학자는 행복하다.” 이 말은 헤르만 헤세의 말인데 내가 철학을 선택한 이유를 잘 표현해준다. 나는 내 인생에서 이러한 행복을 얻고 싶은 것 같다. 내가 아는 지인은 철학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철학도 사랑이라고 믿는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 머리 아픈 철학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는 철학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지 않는다. 철학이 현실과 유리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전적으로 철학자의 잘못이다. 현실과 유리되는 철학은 철학자가 자기만족을 위한 철학을 했다는 혐의를 가지게 한다.

그리하여 나는 삶에 닿아있는 철학을 하고 싶다. 이혼도 막아주고 타인을 보다 더 잘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그런 철학을 하고 싶다. 그리하여…나 자신이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을 늘 의식하면서 그 한계를 끊임없이 넘으려 노력하여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덜 편파적인 인식에 도달하고 싶다.

 

사람 보라고 건네는, 개 이야기들[아이들과 책보며 두런두런]

한참 전부터 박기범의 그림책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특히 그가 쓴 개 이야기들 – <새끼개>, <어미개>, <미친개>는 읽는 동안은 물론이고 읽은 뒤에도 여운이 오래 남아서, 말이 되든 안 되든 그 느낌을 나누고 싶었다. 박기범은 <새끼개>, <어미개>를 같이 냈고 몇 년 뒤 <미친개>를 썼다. 아이들과 이 책들을 볼 때는 꽤 시간을 들여 찬찬히 내가 읽어 주었다.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좋았다. 아이들에게도 나와 비슷한 여운이 남는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같이 볼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보따리를 풀려고 하니 쉬 나오질 않는다. 요즘 자꾸 떠오르는 건 <미친개>다. 하지만 박기범이 책을 내놓은 순서대로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

네 마음을 알 수 있을까?

– 새끼개(박기범 글, 유동훈 그림, 낮은 산 펴냄, 2003년) ·어미개(박기범 글, 신민재 그림, 낮은 산 펴냄, 2003년)

 

[새끼개, 어미개 표지]

나는 형제가 다섯이다. 우리 어릴 때야 형제가 여럿인 집이 드물지 않기도 했지만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모두 형제가 없이 자란 터라 “딸, 아들 상관없다. 많이만 낳아라.”하시는 시어머니 말씀을 기분 좋게 따르다 보니 다섯까지 낳게 됐다고 어머니는 곧잘 이야기하신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신 자식들만으론 성이 차지 않았나 보다. 어릴 적, 개를 자주 키웠던 걸로 기억한다. 게다가 작지 않은 어항에는 물고기들이 늘 뻐끔거리고 있었고 마당에 걸린 새장에선 새들이 종알댔다. 집 안팎으로 화초도 넘쳐났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언제나 꽤 많은 사람들과 동식물이 오글거리는 배경이 함께 있다.

한데 참 이상한 일이다. 지금 나는 어떤 동물도 기를 엄두를 못 낸다. 어쩌다 선물로 받은 작은 화초도 무럭무럭 크도록 길러보질 못했다. 다른 형제들은 어린 시절의 배경을 지금까지도 자연스럽게 이어와서는, 결혼하고 아이들 낳고 화초에 재미를 붙이거나 개를 기르기도 하는데 나는 같이 사는 사람도 동물도 화초도 없다.

일곱 살 때던가, 집에서 기르던 개가 없어졌다. 동네를 헤매며 개를 찾다가 자전거 뒷자리에 우리 개를 싣고 가는 아저씨를 봤다. “어, 아저씨! 그 개······” 어린 내가 웅얼웅얼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아저씨는 뒤를 힐끗 돌아보더니만 무심히도 휘리릭 내달아 가버렸다. 사람들이 개를 품에 안고 가는 걸 보면 이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새끼개> 책표지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읽기도 전에 이미 슬펐다. 책을 읽다가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자전거 뒷자리에 실려 끌려가던 어릴 적 우리 개 기억이 되살아났던 것 같다.

새끼개는 엄마 젖을 뗄 무렵, 개 파는 가게로 팔려갔다가 아이가 둘 있는 집으로 가게 됐다. 아이들은 새끼개를 무척 좋아했다. 서로 개를 안겠다고 달려들었고, 비행기를 태운다고 높이 들고 윙윙거리며 맴돌거나, 여름날이면 시원한 물을 욕조 가득 채워서는 목욕을 시켜주기도 했다. 그런데 새끼개는 아이들이 건네는 손길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행기를 태워주면 어지러웠고 목욕물은 몸서리나도록 차갑기만 했다. 새끼개는 ‘순돌이’라는 자기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점점 사납게 짖어댔다. 하지만 아이들은 겁먹은 개의 눈망울을 착한 눈빛으로 받아들였고 새끼개가 힘들어 그르릉거리면 장난을 거는 줄로만 알았다.

 

[<새끼개> 중에서]

새끼개는 답답하고 무섭고 힘들었다. 그는 자기를 가만 놔두라고 간절히 호소하느라 짖는데 사람들은 개가 왜 이리 거칠어지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 어머니는 자꾸 병이 나고 사나워지는 새끼개를 결국 개 파는 집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가게는 온갖 개들이 각자의 이유로 울어대는 소리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쿠워어엉, 커어헝. 커헝” 낯설고 불안한 새끼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른 개들과 마찬가지로 목청을 돋우어 짖는 것뿐이었다.

하늘이 파랗게 좋은 어느 날, 가게 주인이 개장을 청소하는 틈을 타, 새끼개는 주인의 팔뚝을 물고는 급기야 탈출을 했다. 앞으로 내달리며 새끼개는 자유의 기쁨을 맛보지만 그것도 잠시, 떠돌이 생활은 쉽지 않았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몇 날 밤을 보내다가 새끼개는 저도 모르게 옛 주인이 살던 아파트 쪽을 향한다. 마침 먼발치서 두 아이 목소리가 들린다. 두 아이는 새끼개 대신 새로 사온 개와 즐거이 노는 중이었다. 그리움과 반가움이 솟구친 새끼개는 두 아이를 향해 달려가다가 그만 차에 치이고 만다. 온 몸이 길바닥 위로 납작 뭉개진 새끼개. 파노라마처럼 지난 시간들이 스쳐간다. 반가운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새끼 개의 꼬리가 살랑 움직였지만 그뿐이다.

박기범은 <새끼개>를 쓰고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책에 나오는 아이들이 자꾸 자기 자신인 것만 같았다고 작가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그는 아름다운 세상과 평화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때는 인간방패 반전평화단이 되어 이라크로 달려갔다. 전쟁에 반대하는 우리나라 아이들의 편지와 이라크 아이들의 답장을 직접 전해주는, 위험하고도 아름다운 우편배달부 일을 기꺼이 했다.

박기범은 그가 겪고 느끼는 현실을 빼거나 보태는 것 없이 담담하게 풀어가는 편인데 놀랍게도 그의 책을 읽고 나면 늘 마음에 물이 가득 고이는 느낌이다. <새끼개>는 박기범이 개의 눈을 빌어서 쓴 아주 섬세한 현실 고발이다. 아니, ‘고발’이란 말은 너무 세고 거칠다. 그의 문장은 결이 더없이 섬세하니까. ‘안타깝고 슬픈 현실 보고서’ 정도가 낫겠다. 어쨌거나 박기범은 현실 보고에 그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연이어 쓴 개 이야기, 박기범이 꿈꾸는 화해의 이야기가 <어미개>다.

 

[<어미개> 중에서]

신문지나 종이 상자를 거두어 근근이 생활하는 할머니는 동물 병원 앞에 묶여 있던 떠돌이 개 ‘감자’를 데려와 같이 살고 있다. 언젠가 ‘어른의 흔적’을 보인 뒤로 감자는 수시로 새끼를 배고 낳는다. 그때마다 새끼들이 젖을 뗄 무렵이면 할머니는 새끼개들을 개장수에게 넘긴다.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전쟁으로 어머니도 잃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된 남편과도 헤어진 할머니. 이젠 자식들마저 멀리 떨어져 산다. 이런 할머니가 이별의 아픔을 왜 모를까마는 어려운 형편에다 좁은 집에서 감자가 낳는 새끼들까지 다 거둘 수는 없다. “감자야, 괜찮다. 언제 떼도 새끼는 떼는 게야. 때가 되면 다 어미 품을 떠나는 게지.”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어른이 되고 새끼를 낳고 또 얼결에 이별의 인생을 배우면서 감자가 새끼를 배고, 낳고, 떼어내기를 일고여덟 차례. 그러면서 감자와 할머니는 같이 늙어간다. 사람보다 빨리 나이 들어가는 감자는 할머니와 친구가 될 만큼 늙은 ‘할망구 개’가 됐다. “할머니랑 살아서 좋아요.” “그래, 나도 너하고 사니까 이렇게 좋네.” 이제 둘은 눈빛만 보아도 마음을 안다. 감자는 나중에 죽으면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도 좋으니 할머니와 헤어지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몇 해를 더 살다가 어느 날 할머니는 잠든 채 깨어나질 않는다. 그리고 죽은 할머니 곁을 이틀 꼬박 지키던 감자도 숨을 놓는다. 지금 할머니와 감자는 나무로 다시 태어나, 같이 살자던 소원대로 서로를 향해 가지를 마주 뻗으며 살고 있다.

<어미개>가 나중에 쓴 작품이라지만 사건의 시점은 <어미개>가 <새끼개>에 앞서 있는 듯 보인다. 두 책을 읽다 보면 순돌이는 감자가 낳아 팔려간 새끼들 가운데 하나일 것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박기범은 <새끼개>에 담을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현실을 <어미개>를 쓰며 조금이나마 뛰어넘고 싶었으리라. 그런데 나를 오래도록 뒤흔든 책은 아무래도 <새끼개>다. 뭐랄까, ‘비뚠 사랑’이나 ‘엇나간 소통’ 같은 말들이 떠오른다. 자기 의도와는 상관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거나 이해하기 힘든 슬픈 관계 같은.

어릴 적 잃어버린 개는 내 첫 ‘상실의 기억’이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 중에도 개나 다른 동물, 곤충을 기르는 아이가 제법 된다. 생명의 소중함이라든가 보살핌과 배려 같은, 긍정적 가치관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말도 맞다. 그런데 내 경우를 보면 개와 같이 뛰놀던 즐거운 추억이나 그들을 보살피던 아름다운 기억은 온데간데없고, 웅크린 채 끌려가던 개, 어느 날 아침에 어항을 들여다보니 아프다는 언질도 없이 물 위에 둥둥 뜬 채 죽어버린 물고기 – 이런 기억만 깊고 흉한 상처로 마음 깊은 곳에 각인돼 있다.

요즘은 ‘애완동물’을 넘어서서 ‘반려동물’이란 말을 쓴다. 인간의 세상으로 그들을 데려와서는 먹이를 가공하고, 인간 생활에 맞춰 그들의 생리와 모양새까지 가공하면서 도대체 진정한 반려가 가능한 건지 나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녀석들이 행복할까. 녀석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물고기, 새, 개와 함께 ‘반려’를 기대하며 자라던 내 경험에서는 좋은 과정이 사라진 채, 녀석들 속을 몰라 답답하다가 결국은 하나같이 떠나버리는 마침표만 살아 있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많이 무겁고 당황스런 결말이다. 생각보다도 더 나는 겁이 많고 약한 사람일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새끼개>를 읽고 쓴 글]

그러면서도 나는 사람들과 지내는 어떤 동물에게든 무척 친근하게 굴었다. 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마음을 들킨 적이 있는데 ‘똘똘이’때문이다. 똘똘이는 내가 시골에서 지낼 때 만났던 개다. 똘똘이네 집은 내가 오가던 길목에 있어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쳤다. 만날 때마다 나는 늘 인사를 건넸다. “똘똘아, 잘 잤어? 나는 아침에 된장국 먹었는데 너는?” “나 밭에 갔다 올게. 넌 이제 뭐할 거야?” “나 막걸리 한 잔 했다~. 밤이 깊은데 왜 여태 안 자?” “똘똘아, 곧 비가 올 것 같다. 난 비오는 날 좋아해.” 이런 식으로. 내가 주책없는 수다쟁이라면 똘똘이는 무척 담백한 녀석이었다. 내가 뭐라고 주절대든 녀석은 거의 짖지도 않고 눈만 껌뻑이며 가만 앞을 응시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났을까, 그날도 나는 똘똘이에게 말을 걸었다. “똘똘아, 오늘 꽤 덥네. 점심 먹었어?” 녀석 앞에 쭈그려 앉으며 인사를 하는 참인데 똘똘이가 갑자기 내 얼굴로 바짝 다가서며 고개를 쑥 내미는 게 아닌가. 언제나 똘똘이의 다정한 응답을 기다리긴 했지만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악!! 아니아니, 난 아직 너랑 뽀뽀할 생각은 없어!” 뒷걸음치며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만날 때마다 간이랑 쓸개랑 다 빼줄 것처럼 살살 녹는 목소리로 온갖 애교를 떤 건 나였다. 이제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다가서려는 똘똘이를 나는 순식간에 치한으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내 고함소리에 우뚝 멈춰선 똘똘이는 천천히, 정말이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외면했다. 다시는 나를 보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몸짓이었다. 그 장면은 마치 운동 경기 중계나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을 천천히 돌리는 것하고 똑같았다. 똘똘이만큼 나도 나한테 놀랐다. 내 겉과 속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뭔가 사태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아니 똘똘아, 그러니까 내 말은······” 똘똘이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외면한 얼굴을 절대 되돌리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날마다 똘똘이에게 빌었다. “똘똘아, 제발 화 풀어. 이리로 고개 좀 돌려 봐, 응?” “똘똘아, 나를 조금만 이해해 주면 안 될까? 사실, 뽀뽀는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똘똘아, 제발 용서해 다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별별 사과를 다 해도 똘똘이는 내가 곁을 지날 때마다 꼭 외면했다. 빌고 또 빌기를 보름은 족히 된 걸로 기억한다.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똘똘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봐 주었다. 어찌나 좋던지, 고맙다고 인사하는 내 목소리마저 떨렸다. 그 뒤로는 똘똘이 앞에서 절대로 촐싹대지 않게 됐다.

사실 나는 ‘소통의 참맛’을 누구보다 많이 누리는 사람이다 생각한다. 아이들과 만나면서 나는 말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마음을 나누는 기쁨을 맛본다. 아이들이 무척 예민한 존재라는 것도 새록새록 배운다. 기분이 좋아서 내 눈과 입이 동그래지기 시작하기만 해도 아이는 금방 기쁜 표정으로 빛난다. 어떨 땐 아무 말 않고 곁에 앉은 아이 손에 내 손을 얹는데 백 마디 말이 필요 없다는 걸 느낀다. 내 슬픔이, 기쁨이, 때로 안타까움이 아이 손에서 팔로 스르륵 달려가서는 순식간에 아이 마음으로 들어앉는 게 ‘보인다’.

하지만 아이 행동이나 표정에서 뜻을 찾지 못할 때도 많다. 좋은 선생님이 되려면 아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하는지 잘 아는 게 먼저일 텐데 도무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다. 뭐든 그렇지만 특히 아이에 관한 한, 성급히 단정하기보다는 모른다고 유보하는 게 낫다는 생각도 한편 있다. 아이는 모든 가능성을 품은 존재니까.

지금은 중학생인 동우가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처음 동우와 만났을 땐 자기 나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애기 같은 목소리를 내서 조금 놀랐다. 같이 시를 짓는 시간, 동우 시에는 별과 언덕과 고통이란 단어가 곳곳에 등장하며 무척 성숙한 느낌을 주는 시를 써서 나는 또 놀랐다. 동우는 말투를 쉬 고칠 수 없어서 스스로도 스트레스를 제법 받았을 게다. 그래서 우리와 만나며 위로를 많이 받은 것도 같다. 글을 같이 쓴 뒤로 친구들은 동우를 달리 보는 듯했다.

노래를 잘 부른다는 소문도 자자했는데 사람들 앞에서 잘 부르려고 하질 않았다. 아주 나중에야 어렵사리 한번 듣게 됐는데 동우는 글로만 노래를 잘 하는 게 아니었다. 어디서 그렇게 놀라운 고음과 미성이 나오는지, 친구들 노래에 허밍을 넣는데 정말 일품이었다. 동우는 글노래, 입노래로 우리를 감동시켰다. 동우네 모둠 이름은 ‘웃음바다’였는데 우리는 이래저래 웃을 일이 참 많았다.

‘웃음바다’ 친구들과 같이 음악을 듣겠다고 삐걱거리는 CD재생기를 들고 간 적이 있다. 기계가 고물이라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미리 걱정까지 털어놓고는 음악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중간에 기계가 헛돌기 시작했다. 어쩌지, 난감해 하는 순간 동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달려가더니만 발로 거세게 CD재생기를 걷어찼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아니, 동우야! 기계는 때린다고 말을 듣진 않아!!” 평소 내 목소리에 비하면 강도가 제법 세서 심하게 나무라는 모양새가 됐다. 갑자기 뚝 멈춰 선 동우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 그때 나는 동우 행동이, 눈빛이 무얼 의미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리로 돌아가 앉은 동우는 그 전과는 달리 우리와 함께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아무래도 잘못은 동우가 아니라 내가 한 것만 같은 불안감.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날 수업을 되짚다가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드러난 동우 행동은 거칠었을지 몰라도 사실은 그게 동우의 사랑 아니었을까? ‘너 왜 우리 선생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우리 친구들이 음악을 들으며 행복해 하는 게 안 보여?’ 이런 마음으로 기계를 걷어찬 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아까 상황은 완전히 다른 빛깔을 띤다. 그리도 소심하던 동우가 하면 안 될 거친 행동을 한 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 느낌이 맞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내 기분도 덩달아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나무라듯 말했을 때 동우가 짓던 표정은 자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실망과 항변을 같이 담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그 다음 수업 때 “동우야, 내가 네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아. 선생님 좀 도와줄래?” 조심스레 물었지만 동우는 끝내 아무 대답도 안 해줬다.

김호경(어린이 철학선생님) /

정말이지 이럴 순 없어![아이들과 책보며 두런두런]

「이럴 수 있는 거야??!」(페터 쉐소우 글·그림, 한미희 옮김, 비룡소, 2007년)

들지도 못할 커다란 가방을 질질 끌며, 그러느라 뒤에 한가득 먼지까지 거느리고 한 소녀가 공원에 나타난다. 표정이 심상치 않다. 소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키지 않고는 첫 장을 넘길 수 없다는 듯, 제목도 “이럴 수 있는 거야??!”다. 그리고 첫 장을 넘기면 공원에서 소녀를 바라봤을 누군가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처음에 우리는 무슨 일인지 몰랐어요. 갑자기 그 여자 애가 나타났거든요.

할머니들이 잘 들고 다님 직한 새빨간 가죽 가방을 끌고 소녀는 그렇게 공원에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는 화가 잔뜩 나서 씩씩대며 소리친다. “이럴 수 있는 거야??!”

몇 걸음 걷다가는 또 도무지 참을 수 없다는 듯“이럴 수 있는 거야??!”를 되풀이한다. 풀밭에서 한가로이 쉬고 있던 사람들, 간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 뱃놀이를 하던 사람들 – 공원에 있던 누구나 놀란 건 물론이고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마침내 한 사람이 용기를 내서 묻는다.

 

“너 왜 그러니?”

작은 여자 애는 악을 쓰듯 소리쳤어요. “엘비스가 죽었어!”

아, 사람들은 소녀가 보인 모든 태도가 이해간다. 그리고 다들 엘비스를 추억하며 소녀를 위로한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못하는 게 없었던 엘비스! 나도 엘비스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런데 소녀의 표정은 풀리질 않는다.

“가수 엘비스가 아니야. 내 엘비스라니까!”

소녀는 엉엉 울며 가방을 열어 보인다. 그 안에는 노란 새 한 마리가 죽어 누워 있다. ‘소녀의 엘비스’다.

 

소녀 곁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마음 아파하며 인사를 건넨다. “안됐다, 정말 안됐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심지어 개까지 “멍멍.” 그때 한 친구가 불쑥 말한다, “엘비스를 묻어 주자.”

이제 공원에선 경건한 장례식이 벌어진다. 촛불을 들고, 꽃을 들고, 향을 피운 장례 행렬. 엘비스를 묻은 무덤가에서 사람들은 소녀가 들려주는 추억을 듣는다. 가수 엘비스만큼이나 아름답게 노래했을 엘비스의 노랫소리도 소녀를 통해 듣는다. 모두들 조금 울고, 서로 꼭 끌어안는다.

아이들과 세상살이를 생각하며 만나다 보니 ‘삶과 죽음’이란 주제로도 가끔 이야기를 나눈다. 자연 재해나 전쟁으로 세계 어디선가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기사를 보기도 하고 대통령의 죽음을 놓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이런 이야깃거리가 아이들의 흥미를 잠시 돋우는 데 그치거나 심지어 지루한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느낌이 들 때 무척 씁쓸하다. 아이들에겐 전쟁으로 죽어가는 또래 친구들 이야기보다 친구 집 강아지가 죽은 게 더 큰 사건이다.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이는 할아버지의 죽음보다 우리가 못 만나는 게 더 속상하다. 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시골로 내려가시려는데 아이는 전화해서 떼를 쓴다. “우리 수업 그냥 하면 안 돼요?” 하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느끼니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의미 있고 소중한 것이 추상적이거나 먼 데 있지 않다는 걸 아이들에게서 배운다. 아이들이 ‘나’에서 벗어나 ‘우리’와 ‘그들’을 보는 눈을 뜨는 게 ‘아름다운 성장’이라면 그 길이 만만치만은 않음을 곳곳에서 느낀다.

어쨌거나 출발은 ‘나’다. 그러나 조금씩 ‘우리’와 ‘그들’로 건너가는 일, 그리고 그 안에 나도 있음을 발견하는 일. 아이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그 길을 찾고 싶다. 틈나는 대로 아이들과 가까운 공원에라도 나가는 편이다. 나는 아이들과 수업하면서 많이 생각하는 쪽보다는 많이 느끼는 쪽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가르칠 수 있는 생각은 한계가 뻔하지 않을까. 반면 자연이 주는 느낌은 내 생각보다는 더 크고 깊을 터. 내가 설명하고 보여주지 않아도 아이들 스스로 보고 느낄 테니까. 아이들도 밖으로 나가면 굳이 많은 얘길 나누지 않아도 좋아한다. 표정과 온몸으로 뿌듯한 수업을 했다는 확인 도장을 늘 찍어 준다.

예쁜 꽃을 보면 일단 꺾으려는 아이, 곤충을 발견하면 죽이려 드는 아이들이 있다. 꽤 오래 전 일이다. 그날도 아이들과 공원엘 갔다. 막 공원에 들어서는데 이미 들떠 있던 두 아이가 개미를 발견하고는 마구 짓밟는다. 그 순간, 아이는 정말 신나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안 돼!” 숨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개미네 동네에 놀러 와서는 개미들을 그렇게 죽이니 우리가 밖으로 나온 게 잘못이구나!” 별 생각 없이 장난 좀 치려 했을 뿐일 아이들은 금방 풀이 죽는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다음 수업을 할 때다. 수업하는 방에 파리가 들어왔는데 아이들은 피하려고 호들갑이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나는 ‘어른답게’ 적당한 도구를 써서 파리를 잡았다. 파리를 탁 내려치는 순간 한 아이가 소리친다. “안 돼요, 그것도 생명이잖아요!!” 또 다른 아이, “파리가 뭘 어쨌다고 그렇게 잔인하게 죽여요?!” 어이쿠, 이를 어쩌나. 파리님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지난주의 교훈을 금방 삶으로 실천하는 아이들.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엄청난 죄인이 되어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면서 아이들이 제안한다. 파리 장례식을 해 주자! 아이들은 종이를 돌돌 말아 ‘파리관’을 만들고 파리에게 상황 보고서와 사과문을 썼다. 우리는 양지바른 곳을 찾아 편지와 함께 파리를 묻어주고 숙연하게 묵념까지 드렸다. 그 뒤로 아이들은 수업하다가도 종종 파리를 생각하고 그의 안녕을 기원하곤 했다.

또 생각나는 일. 아이들과 미술관에 갔다. 숲에 둘러싸인 미술관이어서 그랬을까, 미술관 밖은 말할 것도 없고 전시실 안까지 남생이무당벌레가 무척 많이 들어와 있었다. 이미 관람객에게 밟혀 죽은 놈들도 꽤 됐다. “얘들아, 바닥에 무당벌레가 엄청 많다. 조심해야겠어.” 우리는 결국 미술관에서 ‘딴짓’만 했다. 벌레를 밟을 새라, 발끝으로 걸으며 무당벌레 구경에 정신이 팔렸으니까.

그러다가 한 아이가 다급하게 나를 부른다. “선생님, 벌레가 넘어져서 일어나질 못해요!” 뒤로 나자빠져 바동거리는 무당벌레를 발견한 거다. 얼른 벌레를 바로 놓아주고 나는 아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기특한 녀석! 그 뒤로 아이들은 너도나도 넘어진 벌레찾기에 빠졌다. “여기도요, 선생님!” 아이들이 부르는 대로 이리저리 겅중거리며 무당벌레를 바로 놓아주느라 얼마나 바쁘고도 신났던지.

그런데 이건 웬 일, 한번은 아이가 부르는 데로 가보니 이번에 바동거리는 놈은 무당벌레가 아니라 바퀴벌레다. 흠! 잠시 멈칫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바퀴벌레도 얼른 바로 눕혀 주었다. 휘리릭 달려가는 바퀴벌레를 보며 즐거워하는 아이.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아이들은 달라진다. 콘크리트 바닥에서 말라비틀어진 도토리를 발견하고는 묻어주는 아이. 아스팔트 틈을 비집고 피어난 민들레를 들여다본다고 오래 쭈그려 앉아 있는 아이.

황당하고 유치한 동화 같기도 하다. 나와 만나면서 아이들이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바보가 되는 건 아닐까? 감상주의자가 되는 건? 그런데 나는 아이들 그런 모습이 참 좋다.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를 다분히 조장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 모기 한 마리도 죽이지 않는 ‘착한 선생님’이다. 아이들 믿음대로 살아야 할 것 같아서 실제로 파리, 모기도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꿈틀대는 벌레를 사랑하기는 나도 힘들다. 집에 나타나면 녀석들이 빨리 제 갈 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살짝 들어서 밖으로 내놓거나, 영 징그러우면 한동안 못 본 척하며 나가길 기다린다. 아주 커다랗고 시커먼 거미가 목욕탕에 나타났을 때는 차마 집어 내놓을 수가 없어서 녀석과 꽤 오래 동거하느라 불편을 겪기도 했다.

지난 여름, 이사를 했다. 집으로 올라오는 언덕길에서부터 집 담장까지, 담쟁이덩굴이 푸르게 덮여 있어서 무척 좋아했다. 베란다 앞으로 나뭇가지가 무성히 뻗어 있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이사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어느 날, 집 목욕탕에서 지네를 발견했다. 처음 나타났을 때만 해도 여느 때처럼 녀석이 알아서 나가주길 바라며 그저 조심조심 지냈다. 혹시 방심할까 봐 목욕탕 문에 ‘벌레!’라고 써 놓는 정도의 조치는 취했지만.

며칠 뒤, 이번엔 내 잠자리에서 지네가 나타났다. 어렴풋이 잠이 들다가 어깨가 근질거려 툭 치고 보니 지네였다. 나는 순식간에 공포영화 속 여주인공이 되었다. 꽤 깊은 밤이었는데 마루로 뛰쳐나가며 소리를 지르고 지르고 또 질렀다. 그날 밤 나는 온몸을 최대한 오그리고 소파에서 잤다. 녀석은 녀석대로 놀랐을 터, 급하게 내 어깨를 한방 물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는 숨바꼭질 하듯 며칠을 내리 이불과 옷에서 나타났다.

집은 더 이상 편안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들어올 수도 안 들어올 수도 없었다. 가족과 친구들이 지네에 관한 정보를 속속 보내왔다. 지네는 높은 데를 잘 오르지 못한다기에 침대를 장만했다. 지네는 부드럽고 따뜻한 섬유를 좋아한단다. 밤마다 이부자락이 절대 밑으로 늘어지지 못하도록 돌돌 말고 자느라 잠을 깊이 자지 못했다. 지네는 밝은 데를 싫어한다 해서 한 달이 넘도록 밤에도 불을 못 껐다. 어두운 구석 어디선가 녀석이 숨 쉬고 있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고 그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지네가 축축한 담쟁이덩굴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아, 이놈의 아름다운 자연이 문제였던 거다. 그리도 좋아 보이던 담쟁이덩굴, 정원의 나무들, 자연이 어쩌고, 생명이 저쩌고, 존경하는 소로우와 니어링 부부 – 모두가 거추장스러웠다. 지네는 금슬이 좋아서 보통은 쌍으로 다닌다는 얘기를 들은 뒤로는 이 집에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우글거리고 있을 거란 공포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장마가 끝날 무렵(딱 내가 이사한 즈음이다!)부터 10월까지 지네는 무럭무럭 자란다나, 이런! 찬바람 부는 11월로 들어설 때까지 나는 사색이 돼서 지냈다.

지네와 맞닥뜨린 뒤 무척 많이 배우고 느꼈다.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관념적이었는지. 내 ‘생명 사랑’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두 달 넘게 내 생활과 마음은 터무니없이 헝클어져갔다. 한편으론 지네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죽음 앞에서 “이럴 수 있는 거야?!” 외치던 내가, 지네를 만난 뒤부터는 스스로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럴 순 없어!!”

나는 경험에서 지혜를 배우길 바란다. 그러나 경험주의자의 오류에 빠지고 싶진 않다. 「이럴 수 있는 거야??!」를 읽고 한 아이가 소녀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네가 사랑하는 새가 죽었으면 슬퍼해야지, 왜 화를 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 나 또한 어떤 사태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거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는 법을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고백성사를 하듯 아이들에게 지금 내 상황을 들려줬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평소 선생님한테 배운 대로 해법을 말해 준다. 지네에게 친절하게 편지를 써서 주자고!

 

우리 아이들이 당나라 때 한유(韓愈)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한유가 지방 관리로 부임했을 때 그 지역에 악어가 나타났다고 한다. 악어가 가축을 잡아먹고 농산물에 해를 입히자 농민들 시름이 깊었다. 악어를 쫓아내기 위해 한유는 어떻게 했을까? 글쎄, ‘악어문’을 써서 악어에게 줬다나.

내 이제 악어에게 약속하노니, 사흘 후까지 무리를 거느리고 남쪽 바다로 옮겨가서 천자께서 임명한 나를 피하라. 사흘에 불가능하거든 닷새까지, 그것도 안 되면 이레까지 할 것이다. 그때까지 옮겨가지 못한다면 이는 끝내 옮기려 하지 않는 것이다. 천자께서 임명한 관리를 무시하여 옮겨 피하지 않거나, 어둡고 완악하여 백성과 물건에게 폐해를 입히는 것은 모두 죽일 만하니, 나는 재주와 기예가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강한 활과 독화살을 잡고서 악어와 싸워 반드시 죽이고야 말 것이다. 악어는 후회하지 말라.

한유는 양, 돼지 한 마리와 함께 ‘악어문’을 물에 던졌는데 놀랍게도 그 뒤로 정말 악어가 사라졌다고 한다. 나는 지금도 아이들이 써 준 ‘지네문’을 책상 위에 고이 펼쳐 놓고 있다.

김호경(어린이철학 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