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이라는 정치적 질병[썩은 뿌리 자르기]

“한 마리의 죽음은 대수롭지 않았지만 100만 마리의 죽음은 비극”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우리는 너무도 많은 시간을 써버렸다. 300만이 넘는 생명을 빼앗은 지금에서야 인간이라는 어리석은 동물은 다시금 반성의 동물인 양 살처분이 구제역의 대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아니 최소한 매몰이라는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인간의 얄팍한 속성 때문일까? 우리는 구제역에 걸린 소를 먹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말과 함께 흘러나오는 대량 살처분이 의심스러우면서도 그들이 흘린 피가 땅에서 솟아오르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무시무시한 구제역 이야기를 들으며 살처분이 정당화되는 사회구조 속에서 도대체 “구제역이 어떤 질병이기에 그토록 많은 생명을 빼앗은 것일까?”라는 물음과 함께 “살처분은 어떻게 구제역을 통제하는 명약이 되어버렸을까?”라는 물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이 글은 부족하지만 본인이 찾아 본 그에 대한 간략한 답변이다.

구제역(Foot and Mouth Disease)

구제역 증상에 대한 기술은 1514년 이탈리아의 수도승 프라카스토리우스(H. Fracastorius)가 베로나(Verona)에서 유행한 소전염병에 대한 것이 최초다. 그 후 1897년에 독일의 뢰플러(F. L?ffler)와 프로시(P. Frosch)에 의하여 병인체가 최초로 증명되었다. 우리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의 우역(牛疫)에 관한 기록들과 허균의 『한정록』에서 그 증상을 찾을 수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일제강점기 1911년과 1934년 구제역에 관한 기록들이 있다. 사실 여기서 언급된 소전염병, 우역, 구제역은 모두 같은 질병은 아니다. 현대적인 분류에 따르면 우역(rinderpest)은 폐사율이 100%에 달하는 질병으로 구제역과 구분되지만 당시의 과학적 수준을 생각할 때 이러한 기록들 속에 구제역도 포함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제역은 과연 어떤 질병인가? 말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제역은 ‘발과 입에 걸리는 질병’이다. 정확하게 말해 소와 돼지, 양 등 발굽이 둘로 갈라진 우제류(偶蹄類)에게 발굽이나 혀에 수포 또는 괴사병변이 일어나는 질병이다. 폐사율은 성체의 경우 1~3%이고, 어린 동물의 경우 최대 55% 정도로 알려져 있다. 미생물 분류학적으로 구제역 바이러스(FMDV)는 피코르나바이러스과(Picornaviridae) 아프토바이러스속(Aphthovirus)에 속하는 아주 작은 RNA 바이러스이다. 또한 구제역 바이러스의 혈청형(血淸型)에는 A, O, C, SAT-1, SAT-2, SAT-3, Asia-1 등 7가지의 기본형과 53~80여 가지의 아형(亞型)이 있다. 사람에게도 실험적으로 감염된 예가 있지만 그다지 큰 증상과 병소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인수(人獸) 공통 전염병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간단하게 말해 구제역은 그렇게 심각한 질병이 아니라는 얘기다. 어린 동물이 치사율이 높은 이유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구제역의 진원지는 중동이나 인도 정도로 추정을 하고 있지만 사실 구제역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질병이다. 전라도 사투리로 ‘아구창’이라고 불리는 이 질병은 치료만 잘하면 나을 수 있는 질병이다. 서양 사람들은 병이 돌기 시작하면 농장 입구에 죽은 양이나 소의 머리를 매달아 가축 상인이나 방문객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런 다음 나머지 소들에게 따듯한 쇠죽과 부드러운 건초를 먹이고 깔짚을 갈아주었다. 병든 짐승들이 쓰라린 상처를 핥지 않도록 발굽에 타르를 발라주고 타마린드, 칠리고추, 혹은 물에 불린 인도 머구슬나무 잎사귀로 수포를 치료했다. 허균의 『한정록』양우(養牛)편에는 “우역은 훈김[熏蒸]에 서로 전염되는 수가 많으니 다른 소가 있는 곳에 데려가지 말고 나쁜 기운을 제거하면서 약을 쓰면 살릴 수도 있다”고 썼다. 다시 말해 예전부터 잘 보살피면 나을 수 있는 병으로 취급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제역이 심각한 질병으로 취급을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구제역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가 감염 동물이나 오염된 가축 또는 축산물, 해외여행자의 신발, 의복, 지참물을 통해서 감염이 이루어 질뿐만 아니라 공기로도 전염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사안은 치료약이 없다는데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자연치유가 가능한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대량 확산과 치료약이 없다는 이유가 대량 살처분을 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잠시만 판단을 유보하고 살처분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살처분 정책(Stamping Out)

살처분의 역사는 조금 더 흥미롭다. ‘란치시 칙령(Lancisi’s Recommandation)’이라고도 불리는 살처분은 18세기 유럽 로마 부근에서 전염병으로 소들이 떼죽음을 당하자 교황 클레멘트 11세(Papa Clemente XI)가 주치의에게 해결책을 찾아보라고 지시한 것에서 유래한다. 당시 주치의였던 란치시(G. M. Lancisi)는 병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교역을 제한하고, 정기적으로 육류 검역을 실시하고, 병든 가축은 석회를 뿌려 매장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아울러 통제된 방식의 살처분을 통해 병이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시 이 통제된 방식의 살처분이란 병든 가축을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방법이었다. 또한 소상인이 이 규칙을 어기면 목을 매달고, 내장을 꺼낸 다음 사지를 찢어 죽였다. 신부나 승려가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노예선으로 보내버렸다.

이런 방법을 통해 당시에 비교적 빠르게 전염병을 막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란치시의 칙령’은 잔인하고 살벌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가축 전염병을 통제하는데 근간이 되는 방법으로 인정받고 있고, 우리는 현재 그것을 살처분 정책(Stamping Out)이라고 부른다.

란치시의 칙령이 현대의 살처분 정책과는 다르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내용을 비교해 볼까 한다. 살처분 대상 가축을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일은 분명 현대에는 없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살처분 조치로 총으로 쏘거나 천자(Pithing-칼로 척수를 자르는 행위)를 시행했다. 우리의 경우 안락사 약제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생매장을 했다(생매장이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것보다 좋은 점이 있다면 누군가 나에게 설명해 주길 바란다). 살처분을 거부하는 농부에 대한 능지처참은 분명히 사라졌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형벌이 기다린다. “살처분 명령 위반농가는 가축전염병예방법 규정에 의거 3년 이하의 징역 및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으며, 살처분 보상금 삭감(최소 20%이상) 등 불이익을 받게 된다.”우리의 농가가 대부분 영세농이라고 가정하면 이러한 형벌은 사형에 가까운 처사이거나 강제로 명령을 이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또한 살처분에 동원된 공무원들은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 과로사까지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 자연 치유가 가능한 구제역이라는 질병을 살처분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헛소리(Foot in Mouth Disease)

구제역과 살처분이 환상의 짝꿍이 된 또 다른 이유에는 영국의 종축업자들이 있다. 의회 의원 겸 영국왕립농업학회 회원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던 종축업자들은 구제역에 특히 순혈종의 소들이 큰 피해를 입은 반면, 일반적으로 우유와 고기를 생산하는 품종은 피해가 덜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영국의 종축업자들은 구제역 때문에 사료 소비가 늘고 우유생산량이 줄어들고 유전적으로 균질적인 순혈종 가축의 성장 기간이 길어진다는 이유에서 영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고, 영국 정부는 1871년 이 병을 신고의무 질병으로 지정했다. 이 후 영국은 스스로 만든 ‘구제역 청정국’의 지위를 이용해 무역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구제역 청정국’지위란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해 ‘구제역 청정국’지위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육류 무역업자들을 위한 것이다. ‘구제역 청정국’은 간단한 절차에 의해 육류 무역을 할 수 있는 반면 오염국의 경우 절차가 까다롭다. 또한 오염이 되고 나면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청정국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고, 오염국이 되고 나면 다른 오염국의 축산물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니면 제소를 당할 수도 있다. 백신이 개발되었지만 백신 사용을 꺼리는 이유도 이 청정국 지위와 관련된다. 살처분 매몰 방식은 마지막 구제역 발생 이후 3개월 동안 구제역 발병이 없으면 청정국의 지위가 회복되는 반면 백신접종은 고비용일 뿐만 아니라 100% 확실한 예방법도 아니고 또한 접종 중단 뒤 1년 후에 청정국 지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이유도 포함된다.

이러한 헛소리를 바탕으로 구제역과 살처분 정책은 지금도 병행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면 구제역이라는 정치적 질병이 가진 허구성이 들어난다. 먼저 구제역은 자연 치유가 가능한 질병이다. 소의 면역력만 충분하다면 구제역은 자연 치유된다. 둘째, ‘구제역 청정국’지위가 없어도 국내에서는 육류 판매가 가능하다. 먹어도 건강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도 그 이유다. 셋째, 돼지를 출하하는데 최소 1년, 소를 출하하는데 최소 3년이 걸린다고 일반적으로 가정하면 청정국의 지위를 상실하더라도 3개월에서 1년이면 회복할 수 있는 ‘구제역 청정국’지위는 그야 말로 헛소리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의 경우 육류 수출량이 아주 미비한 수준이다.

사실 구제역은 조류독감이나 기타 여러 가축 전염병과는 달리 식품 안전이나 인간의 건강을 전혀 위협하지 않는다. 또한 구제역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치명적인 형태로 진화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비록 구제역 바이러스가 강력한 살생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가축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고열이 나고 동물의 발톱과 입에 수많은 수포가 생긴다. 이 병에 걸린 가축은 발과 입이 몹시 아파 먹지도 못하고 발을 절뚝거린다. 새끼를 밴 짐승의 경우 유산을 하고 젖이 마른다. 원래 몸이 약하거나 나이 어린 짐승은 열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하지만 치사율은 약 1%정도이고 합병증이 있는 경우 최대 55%가 될 수 있다. 그 밖의 짐승들은 면역력이 약해진 탓에 수포가 박테리아에 감염되지 않는다면 보름 안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구제역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고기와 우유 생산량이 15~20% 정도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생산성이 감소한다.

결국 문제는 산업 논리이자 정치 논리였던 것이다. 구제역을 정치적 질병(political disease) 또는 경제적 질병(economic disease)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픈 짐승을 잘 보살피는 데에는 그 만한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백신 값은 비싸고 효율성도 떨어진다. 백신을 투약해도 소는 대략 85%의 항체가 생기지만 돼지는 40%미만이다. 게다가 지속적이지도 못하다. 결국 값싼 원료와 값싼 고기만을 생산하려는 공장식 축산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방식인 것이다. 생산성은 줄어드는데 비용을 들일 수는 없다는 반복되는 자본의 논리 속에서는 더 이상 대안이 없다.

그러나 2010년 11월 구제역 발생 이후 기르던 가축을 매몰해야만 하는 농민 그 누구도 자신의 소와 돼지를 땅에 묻으며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매몰 작업에 내몰린 공무원들도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에 불과하다”는 스탈린의 말을 생각해 본다. 이제 우리에게 300만은 더 이상 통계가 아니다.

강경표(중앙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죽음을 부르는 죽음 – 살처분은 답이 아니다[썩은 뿌리 자르기]

“피할 수도 있었을 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면, 그것은 죄를 지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서둘러 중요한 일을 하려다가 무심결에 벌레 한 마리를 밟아 죽였다면, 그것은 죄를 지은 것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1918년 11월 18일

300만 마리의 동물들이 죽었다. 구제역 때문이다. 그중 상당수는 구제역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피해 예방 차원에서 도살당했다. 예산도, 인력도 없어서 생매장한 돼지들도 있다. 이 모든 게 구제역 때문이다.

동물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것이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널렸는데 동물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건 단지 죽어간 동물들의 고통 때문만이 아니다. 죽어간 동물들을 보면서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첫째로 300만 마리의 동물들을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 우리 인간의 폭력성이 안타깝고, 둘째로 2차 환경재앙을 비롯해 그들의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미칠 악영향에 두렵고, 마지막으로 구제역 파동을 불러온 축산시스템과 자본주의 경제의 근원적인 상관관계에 수치심이 들어서다.

집단적 죽음이 주는 정서적 효과, 그 치명적 트라우마

자식처럼 키우던 소와 돼지를, 그것도 병에 걸리지도 않은 동물들을 행정기관의 살처분에 내맡겨야 하는 시골 축산농가 주민들은 울분을 토한다. 그들은 사실상 정신적 공황상태를 겪고 있다. 살처분에 동원되는 수의사들도 마찬가지다. 동물을 사랑해서, 동물을 살리고 싶어서 수의사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동물 집단 살처분에 동원된 뒤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는 인터뷰를 우리는 신문에서 보았다.

살처분은 물론 구제역을 막기 위한 대책의 일환이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방법일까? 심지어 구제역에 걸리지 않은 동물들까지 예방적 차원에서 살상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까? 물론 아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소와 돼지를 살처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망각하게 된다. 살처분이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살처분은 적어도 단기적인 차원에서는 가장 ‘실용적인’해결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살처분은 ‘실용정부’MB정권의 관점에서는 유일한 해결책인 셈이다. ‘실용성’을 위해서는 광우병에 노출된 쇠고기를 수입하고, ‘실용성’을 위해서는 4대강에 인위적으로 공사를 해서 자연생태계를 해치고, ‘실용성’을 위해서는 노인복지예산을 삭감해버리는 이 정권의 관점에서는 죽임으로써 구제역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실용적’인 해결책인 셈이다.

그러나 실용성을 위해 300만 마리의 동물을 죽이는 행위가 인간의 정서와 가치관에 미칠 해악적인 영향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본 사람이 있을까? 단지 실용적이라는 이유로,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생명을 대량살상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 논리를 확장했을 때 장애인 아이들을 안락사하고 나병환자들을 강제로 불임수술을 시키는 것도 허용하지 말란 법은 없다. 장애인이나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것을 ‘사회적 비용’의 차원에서 계산해보면, 그것은 위정자들의 ‘실용적’인 계산에서는 ‘낭비’로 취급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명박은 대통령 후보시절, 장애인들은 낙태를 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낸 일이 있다(2007년 5월 12일인터뷰). ‘실용성’을 기준으로 생명을 취급하며, 생명 그 자체를 소중하게 취급하지 않는 사고방식은 궁극적으로는 인간 생명 역시 ‘실용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살처분정책의 문제는 이렇게 생명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고방식이 사회에 만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데 있다. ‘실용성’을 근거로 생명을 죽여도 좋다는 사고방식이 암암리에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처음 겪는 일은 놀랍게 느껴지지만 자주 반복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처음에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벌레 한 마리에 연민을 느끼던 사람도, 수백만 마리의 동물들이 죽었다는 뉴스에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소와 돼지의 죽음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느끼는 무감각함. 사회 전체적으로 생명에 대한 정서가 메말라갈 때, 그것이 특정한 사회적 위기의 순간에는 어떤 종류의 광기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이미 시작된 재앙

환경부는 2월 7일, 낙동강 상류지역의 구제역 매몰지 89곳을 정밀조사 한 결과 61곳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 매몰지 89곳의 절반을 넘는 45개 매몰지에서 침출수 유출이나 비가 많이 올 경우에 사면 붕괴 등의 위험이 있었으며, 16곳에서 침출수 유출 오염이 우려됐고, 23곳은 경사가 심한 곳에 위치해 붕괴나 유실가능성이 있었으며, 이 두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곳이 6곳이었다. 집중호우 때 문제가 될 수 있어 빗물 배수 시설이 필요한 곳도 16개로 나타났다.(, 2월 8일, “구제역 매몰지, 3월이면 다 썩는다.”)

재앙은 이미 시작됐다. 이미 매몰지에서는 침출수가 유출되고 있고, 결국 지역당국은 분뇨차를 동원해 침출수를 퍼다가 하수처리장이나 분뇨처리장으로 이송하고 있다고 한다. 날이 풀리는 3월이 되면 피해는 본격화할 것이다. 병에 걸린 동물들의 사체에서 나온 피와 물이 토양을 오염시키고 강물로 흘러들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생태계를 파괴시킬 때 그 피해는 결국 인간 스스로 지게 된다. 이것이 생태계의 부메랑 효과다. 인간이 자연생태계의 전과정을 합리적 이성으로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믿음이 사실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에서 밝힌 바 있다. 문제는 무지한 인간의 오만이 인간 자신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살포한 고엽제에 노출된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그 후유증을 겪고 있음을 상기해 보자. 자연생태계를 훼손한 대가는 결국 인간 자신이 지게 되어 있다(그것도 가난한 하층계급이 지게 되어 있다).

구제역 예방을 목적으로 과도하게 살충제를 살포하는 행위 역시 인간과 환경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얀 가루가 자동차에 묻어 전국으로 유포되고 있는데 이 약성분이 아이들의 눈이나 입으로 들어갈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해서 정부는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고 있다. 또 살충제와 함께 뿌리는 항생제 때문에 대기중에 있는 불특정 미생물의 내성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결국 새로운 슈퍼박테리아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정부 집권자의 머리 속에는 오직 구제역이라는 보기 싫은 질병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살처분과 살충제 대량살포 이후에 벌어질 문제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국민들이 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근본적인 축산 시스템의 문제는 잊혀지고 있는 것이다.

먹거리의 상품화와 생태위기

현대인은 너무 많은 고기를 먹는다. 너무나 많은 동물들이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사육된다. 그 결과 대규모 축산업이 성행하게 됐고 이 때문에 지구 환경은 재앙을 맞고 있다. 사람이 하루에 마시는 물은 평균 5리터 가량이며, 생활용수를 포함해 하루 150리터 정도를 사용한다. 1kg의 쌀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2,000~5,000리터 정도의 물이 쓰인다. 그런데 소를 키워 쇠고기 1kg을 얻기 위해 들어가는 물의 양은 24,000리터다. 육식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채식을 하는 것보다 최소한 5배의 물을 사용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인간은 이렇게 물을 많이 소비하는 소를 대규모로 사육하고 있다. 전 세계에 고기를 전달하고 맥도날드와 같은 대규모 패스트푸드 체인점에 햄버거 페티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지구의 건조화로 인해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많은 물을 소 사육에 쓰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소 사육을 위해 수풀과 삼림을 개간하여 거대한 방목지를 만드는 행위 역시 지구 사막화에 동조한다. 중남미 대륙에는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열대 우림 지역이 이미 소 방목용 목초지로 개간 중이며 이 때문에 사하라 이남과 미국, 호주 남부 목장지대에서는 대규모로 사막화가 진행 중이다. 사육장에서 흘러나오는 축산폐기물도 심각한 문제다. 소 1만 마리를 사육하는 사육장에서 배출되는 유기폐기물은 11만 인구의 도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양과 맞먹는다고 한다. 강으로 배출되는 오물이 일으키는 문제, 소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가 대기오염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볼 때, 이처럼 대규모로 소를 사육하는 것은 생태계에 치명적이다.

우리나라에 구제역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것 역시 과도한 축산밀도의 원인이 크다. 소와 돼지를 좁은 우리에 가둬놓고 사육하다보니 동물들이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되기 쉽다. 거기에 동물들의 운동량이 적어 면역력 역시 떨어진 상태다. 이렇게 좁은 축산밀도로 많은 수의 동물들을 사육하는 현재의 축산시스템이 구제역 사태의 진정한 원인이다.

만일 고기를 비롯한 먹거리가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둔갑하지 않았더라면, 소, 닭, 돼지가 교환을 통한 이윤축적을 위해 대량으로 생산되는 사회가 아니라면 과연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까? 문제는 육식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육식은 도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나친 육류 공급과 과도한 육식에 있으며, 이러한 과도한 육류의 소비와 공급을 야기한 것은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시스템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먹거리 문화를 바꾸는 운동이 요구된다. 생태계에 좋은 것은 인간에게도 좋은 것이다. 인간 역시 생태계의 일원으로 지구의 생태적 순환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환경적인 먹거리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축산정책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한 나라의 정책개선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친환경적으로 축산시스템을 바꾼다고 해도, 대규모 방목을 통해 값싸게 공급되는 외국산 육류와 경쟁이 되겠는가? 소비자들은 당연히 값싼 외국산 육류를 찾을 것이고 국내 축산업계는 망할 것이다. 따라서 전지구적으로 자본주의적 먹거리문화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현재의 과도한 육류소비문화를 개선하는 일이 시급하다. 3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를 살처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모든 사실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상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인간의 무한욕심이 결국 인간을 공격한다[썩은 뿌리 자르기]

구제역, 위기의 대한민국

작년 11월 안동에서 시작된 구제역이라는 가축전염병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여전히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문제는 구제역 자체보다 가축을 생매장한 이후의 일이 더욱 심각하다. 열악하고 지저분한 축사에서 나와 찰나의 상쾌함을 느꼈을 돼지들이 황당하게 죽어나간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작업에 동원된 공무원과 수의사들이 가축들의 비명소리에 환청과 불면으로 정신과치료를 받아야 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것은 비단 축산업계의 상업적 손실과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매몰로 농림수산식품부가 배포한 구제역 긴급행동지침이 지켜질리 만무하다. 같은 장소에 너무 많은 양의 가축들을 산채로 매장하였고 생매장당하는 가축들의 발버둥으로 오염방지용 비닐이 파손되면서 매몰지에는 가축들의 핏물이 땅위로 솟아오르거나 지하수에 섞여 나왔다. 이 뿐만 아니라 매몰가축을 들짐승들이 뜯어먹어 제2차전파의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도 있다. 환경학자들은 이러한 환경오염이 앞으로 20년 정도 지속될 것으로 내다본다.

중요한 것은 벌써 100여만 마리가 살처분 당한 지금의 상황이 천재(天災)라기 보다는 인재(人災)라는 점이다. 인간의 과도한 이욕(利慾)이 낳은 참사다. 가축(家畜, livestock)이라는 의미 자체가 인간 삶의 복지를 위해 야생동물의 생태를 개량하여 인간의 영역 안에 붙잡아둔 것이다. 따라서 가축의 생명활동에 지장이 있다면 사육자인 인간이 1차적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책임처리에 있어 많은 잘못이 발생했다. 불가피하게 가축을 도살해야 할 경우 안락사 시키는 것이 원칙이지만 살처분 약품의 부족으로 집단 생매장했다. 유럽연합 등에선 동물을 도축한 뒤 소각하는 게 원칙이고 일본도 마취제를 놓은 뒤 독극물을 주사해 살처분 하고 있다.

또 그 이전에 대한민국이 ‘구제역 청정국’임을 입증하여 육류의 수출?입 거래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알량한 욕심’으로 구제역 백신 접종을 소홀히 한 문제가 크다.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육류소비가 증가하면서 육류를 공급할 축산농장이 대규모로 공장화되었지만 그 설비는 양적 규모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사육시설이 가축 전염병에 취약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구제역이 본격적인 가축 전염병으로 자리 잡은 것은 2000년 이후 축산시설이 대형화된 시점과 일치한다. 농림수산식품부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2000년 이후 구제역을 비롯한 각종 가축 전염병으로 살처분한 소?돼지?닭 등은 1,980만6,972마리에 육박한다.

자연과 인간을 쪼개버리니 더 커져버린 이욕과 만물일체의 자연관

2008년 MB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이후 드러난 미국의 축산업 현실은 대규모로 기업화된 축산농장이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지 여실히 드러내었다. 미국 네브라스카주 한 농장은 8만5천 마리의 소를 한꺼번에 사육하고 있는데 축사의 위생문제는 물론이고 동물성 사료의 비율도 높아 소들이 광우병이나 구제역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다. 이것은 동물학대에 가깝다. 지금 인류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고기를 소비하고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가축의 대량생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방목으로는 이것을 충족하지 못하므로 가축들은 대규모 공장식 농장에서 사육된다. 게다가 연한고기를 얻기 위해 우리를 더욱 협소하게 하여 엄청난 고밀도 축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경우 인간의 이익이 동물의 이익보다 더 크다면 인간을 위한 동물의 희생이 정당화되지만 인간의 아주 작은 사소한 이익을 위해 동물들이 희생된다면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육식은 과거 인류가 생존을 위해 야생동물을 사냥하던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고 단순히 기호의 한 단면일 뿐이다. 맛을 위한 행위는 생존을 위한 행위보다 더 클 수 없다. 물론 싱어의 이런 주장이 모든 육식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극지에 살고 있는 주민이나 아프리카나 남미의 오지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 영양공급원을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 공동체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으로 적극적인 육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국가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 인류의 엄청난 육류소비는 극?오지의 상황과는 달라서 인간의 미각적 즐거움을 위한 사치에 가깝다. 사치행위를 위해 대규모 공장식 사육시설이 창궐하고 있는 것이다. 사치행위는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욕심을 불러오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 구도로 나누는데서 출발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미국이 서부 개척시대 때 서부라고 하는 자연대상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은 것처럼 현재의 전지구적 생태위기는 근대과학의 태동 이후 산업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자연을 생명이 없는 인간역량의 실현 대상으로 파악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인간중심의 도구적 자연관은 자연을 인간의 욕망충족과 복지확충의 도구로 판단한다.

이와 관련하여 비토리오 회슬레(V. Hoesle)는 「생태계 위기의 정신사적인 기반」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자연’과 ‘인간’이라는 단어사이의 접속어 ‘과’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 예를 들면 ‘식물과 동물’의 ‘과’는 양자를 서로 대립시키는 기능을 하지만 ‘심장과 신체’의 ‘과’는 인간 내부의 장기와 그것을 포괄하는 인간 신체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 두 예시의 유형이 바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유형이라고 말한다. 인간중심관점에서 자연계와 인간을 대립적으로 나누어보는 입장이 있다면, 자연과 인간을 하나의 유기체적인 형태로 보는 입장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데카르트의 자연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자연과학에 근거하고 후자는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에 근거한다.

이런 비유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논리를 중국 명대의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이 제출한 적이 있다. 『전습록(傳習錄)』에서 어떤 사람이 왕양명에게 묻기를 “회암 선생(주희:朱憙)이 ‘사람이 학문하는 까닭은 마음(心)과 이치(理)에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어떻습니까?”(晦庵先生曰 人之所以爲學者, 心與理而已. 此語如何)라고 하자, 양명은 주희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마음이 곧 본성(性)이며, 본성이 곧 이치이다. ‘마음과 이치’의 중간에 ‘과(與)’라는 한 글자는 마음, 이치를 두 가지로 삼음을 아마도 면할 수 없을 것이다.”(心卽性, 性卽理, 下一與字, 恐未免爲二)라고 했다. 왕양명의 견해는 주희의 이원화 관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주희는 사물에 정해진 이치가 있다고 하여 대상 사물 속의 이치를 구하려는 입장이다. 이는 결국 마음과 이치를 둘로 가르게 하고 인식 주체와 대상 객체를 분리한다. 그러나 왕양명은 인간에게는 본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양지(良知)가 있어서 마음에 있는 양지를 사물에 이르게 하여 사물이 모두 그 이치를 얻는 방법을 취한다. 왕양명은 천지만물과 사람은 본래 한 몸이어서 해와 달, 별, 비, 바람, 산, 강을 비롯하여 금수(禽獸)와 초목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자연계가 총체적인 우주를 구성하며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자연관으로 자연과 인간이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생태임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 위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북송의 철학자 주돈이(周敦?)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오직 인간은 그 빼어난 기운을 얻어 가장 영특하다(惟人也得其秀而最靈)”고 했지만 이 명제를 해석하는 주희와 왕양명의 태도는 차이가 있다. 주희의 관점이 자연을 주관(主觀)한다면 왕양명의 경우 자연과 인간이 일체이고 그 속에서 가장 정묘한 것이 인간이므로 인간을 천지의 마음으로 본다. 따라서 인간은 총체적 자연계에서 주체(主體)적인 입장에 있고 자연계의 모든 사물을 보살피고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왕양명의 관점에서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가축에 대한 책임문제는 철저히 인간 자신에게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왕양명이 말한 자연적(저절로 그러한)인 양지가 굳어버렸고 인간과 자연사물의 감응통로인 양지를 상실하면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감통(感通) 자체가 사라진다.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중심적 합리주의가 인간 이외의 것에 있어야할 생생한 ‘생명성’을 함몰시켜 버린 것이다. 중국 당대 이감(李甘)의 글 「찬리설(竄利說)」중 한 구절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생명에 대한 감응과 그 감응을 상쇄하는 인간의 이욕을 자세히 꼬집어 설명한다. 다음은 그 한 구절이다.

“지금 탐욕 부리는 사람은 본디 인자한 마음이 없지만, 항상 잔인한 마음이 있는 것은 이욕의 침해 때문이다. 땅강아지나 지렁이가 사슴보다 크다면 인정하겠는가? 그 대답을 인정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땅강아지나 지렁이를 보면 발을 피해 밟아서 살려줄 것이고 실수로 땅강아지나 지렁이를 밟아 죽인다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가슴 아파할 것이다 그런데 다시 사슴을 본다면 활을 잡고 쫓아서 사슴을 맞추면 외마디 탄성을 지르며 기뻐하는 법이니 큰 것에 잔인하고 작은 것에 인자하게 함은 무엇 때문인가? 사슴은 입과 배에 이롭고 땅강아지나 지렁이는 이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모할 만한 이익이 있다면 비록 큰 사슴이라도 잔인하게 하고 도모할 만한 이익이 없다면 땅강아지나 지렁이라도 잔인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今是頑人, 曾無不忍之心, 然常獨有忍心者, 由害於利也. 且謂??大於?鹿, 則許之乎. 聲不許也. 然人顧而遭??則迂足而活之, 過而傷??則失聲而痛之, 顧而見?鹿 則援弓而逐之, 幸而中?鹿則失聲而喜之, 忍於大者, 不忍於小者, 何歟. ?鹿利於口腹也, ??不利也. 故居於利則雖?鹿忍也, 不居於利則??不忍也)

자연을 대상화하면 동물도 대상화된다. 가축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자연을 철저히 대상화시킨다 하더라도 인간이 이익에 대한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무너지는 자연생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회피할 겨를도 없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구제역과 관련한 문제뿐 아니라 4대강 사업이라든지 골프장건설에 의한 산림파괴, 지구온난화 문제 등이 그렇다. 이런 문제에 가장 1차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것은 국가정부에 있다. 구제역의 경우 지금 한국의 축산업계가 적절한 설비 없이 우후죽순으로 방대해진 원인은 국가이익을 극대화 하려한 정부정책에 있고 구제역의 예방과 발생한 이후의 안일한 대처도 정부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차적 책임소재의 문제를 떠나, 예를 들면 지금 논의하는 구제역과 같은 가축 질병의 원인을 대규모 공장화한 사육시설의 소유주에게 전적으로 떠넘기는 것도 옳은 시각은 아닌 것 같다. 소비자들도 공동의 책임이 있지 않을까. 개인이 대규모 사육이나 도축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점잖게 식당에서 고기만 구워먹었다고 해서 자신이 구제역이라는 결과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 역시 갈라지고 나누어져 양지를 상실한 사회시스템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맹자(孟子)의 ‘존심양성(存心養性)’은 아마 이런 개개인에 쓰여야 할 말이 아닐까?

불인지심(不忍之心)

구제역 파동이 연일 TV화면에 보도되면서 안타깝게 죽어나간 동물들의 처참한 모습도 볼 수 있지만 유독 눈길을 끄는 장면은 농촌의 돼지농장 주인들이 가슴아파하며 돼지들을 목 놓아 부르는 모습이다. 아마 누구라도 그 모습을 보면 자신이 기르던 가축에 대한 농민의 애정이 어떠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농민들의 그 모습이 경제적 이익의 문제 때문인지 인간적 정감의 발동인지는 확실히 구별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모습이 적어도 『맹자』에서 전국시대 제선왕(齊宣王)이 흔종(?鐘:제사)에 사용될 소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양으로 바꾸어 쓰라고 했던 모습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소를 양으로 대체하라는 발상은 우습지만 그래도 맹자는 다른 제후국들의 왕에 비해 그런 제선왕의 마음을 두고 족히 왕 노릇 할 수 있다고 격려하지 않았던가. 그 농민들의 마음이야 말로 ‘불인지심(不忍之心)’의 발로에 가깝다. 하지만 구제역에 대응하고 처리하는 정부와 관계기관의 모습을 보면 사람으로서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 차마 하지 못할 일을 버젓이 하고 있다. 이제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야할 문제다.

진보성(대진대 강사) /

자살공화국인가 살인공화국인가[썩은 뿌리 자르기]

대한민국은 살인공화국이다

‘자살(自殺)’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이다.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도덕적 원칙에 비추어보면 자살은 비록 타인에게 해를 가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생명을 단절시켰다는 점에서 존엄성의 원칙에 어긋나는 부도덕한 행위가 된다. 심지어 서양의 근대에서는 위법한 행위로 규정되어 자살한 자의 시체에 대해 처벌을 가하거나 그 사람의 재산이 몰수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삶이 죽음보다 소중하다는 것은 매우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이 계기가 되어 소극적 안락사에 해당하는 존엄사 논쟁이 벌어졌다. 존엄사란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 대해 무의미한 연명조치에 해당하는 의료행위(생명연장을 위한 기계장치)를 중단해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면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게 하는 조치를 뜻한다. 이러한 존엄사라는 명칭이 부담스러운 의학계에서는 ‘연명치료중지’라는 말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아직 연명 가능한 환자를 더 이상 치료하지 않음으로써 일찍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자살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의료행위 중단은 당사자의 자발적 선택에 따른 후속 조치이기 때문이다.

존엄사를 찬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양적인 측면에서 삶을 연장한다면 그 질적인 의미와 가치가 무시되어 인격 자체의 존엄성을 크게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존엄사와 다른 자살의 유형이 한국에서 번지고 있다. 지난해 대한민국은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했다. 1만2270명이 자살을 하였으므로 하루에 약 34명이 자살을 하는 셈이고 약 40분에 한 사람씩이 우리 곁에서 자살로 사라지고 있으며, 20대의 자살률이 심지어 12.8%이다.

2008년 10월 2일 유명한 국민여배우인 최진실은 악성루머와 우울증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동생 최진영도 1년 3개월 후에 자살했다. 계속해서 여러 연예인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런데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더 큰 사건이 일어났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거목이 운명이라고 유언을 남기고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리며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누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가? 본인 탓으로는 사업실패나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하거나 우울증을 심하게 앓다가 자살하거나, 유명인이 자살하는 것을 모방해서 자살하거나, 자신의 주변사람들에게 후환이 갈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하거나, 모두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자살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세계 1등을 너무 좋아하는 우리 대한민국이 자살률 1등을 한 것에 자부심을 느껴야 하는가? 일차적으로 우리 권력지식층의 의식과 행동 그리고 그들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이런 상황이 벌어진 데 커다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 아니라 자살을 유도한 살인공화국인 셈이다.

우리는 자살을 찬미하는 민족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생명을 중시한 민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이 쉽게 일어나는 까닭은 그 삶이 죽음보다 못하거나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살자를 자살로 몰아가는 사회적 요인과 이를 정책적으로 추진하고 구조화한 세력이 있다. 이런 이유로 자살은 개인 심리학적으로 고찰할 것이 아니라 사회 심리학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자살의 심리적 충동을 야기한 사회적 요인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자살은 자살로 몰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선 자살이 아닌 살인이라는 논의의 앞서 서양과 동양의 죽음관의 특징부터 살펴보자.

서양의 죽음관과 이원론

서양은 전통적으로 “육신을 경멸하고 영혼의 찬란한 해방을 광신”(김지하 시인)하는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라는 종교가 삶보다 죽음을 더 가치 있게 여긴 문명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의 하나인

자살은 질병이 아니다! [썩은 뿌리 자르기]

자살은 질병인가?

자살을 질병으로 규정하고자 했던 노력은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에스퀴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자살은 정신병의 모든 특징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은 미쳤을 때만 자살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에도 사회학?정신의학?심리학 등 소위 공공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학문들은 자살을 질병 다루듯 취급한다. 그들은 우울증?조울증?자살 관련 유전자 등, 의학과 과학의 힘을 빌려 자살이 질병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고자 노력한다.

질병이 원인인 자살은 분명히 있다. 우울증?조울증과 같은 증상은 충분히 자살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질병의 고통 때문에 자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자살이 질병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질병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먼저 자살은 전염성이 강하다. ‘베르테르 효과’라고 불리는 자살의 전염이 그것이다. 최진실씨가 죽었던 달에는 자살자가 전달에 비해 66% 증가했다.

부모가 자살을 하면 그 자손도 결국엔 자살을 한다는 속설은 자살이 유전 질환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라는 것도 자살을 질병화 하고픈 이유일지도 모른다.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자살률이 유독 높다는 것은 국가 체면과 관련된다. 지금도 수많은 종교와 윤리에서 자살에 대해 열띤 논쟁을 하지만 자살이 질병이 아닌 시대도 있었다. 그 때 자살은 종교적 구원의 문제이자 철학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이제 자살은 의학의 문제이며 과학의 문제다. 자살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만이 자살을 질병화 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그러나 자살을 직접적인 질병이라 보기에는 무언가 논리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말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자살은 사회적 질병이다.”, “우울증 유발 유전자”, “자살의 진화생물학”, “동물도 자살을 하는가?”등 자살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얘기들이 기사화된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자살을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살은 그들이 과학적인 설명에 포함하고 싶었던 윤리?도덕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이다. “동물도 자살을 할까?”라는 물음에 “예”라는 대답은 자살은 인간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아폽토시스(apoptosis)’라는 세포 자살 현상은 도덕과 무관한 생명현상일 뿐이다.

아직은 과학이 자살을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과학적으로 질병화 하는 이면에는 단 하나의 장점만이 존재한다. 자살을 일으키는 또 다른 원인인 경제적인 문제를 개인의 질병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을 조금만 바꾸면 된다. “경제적 빈곤의 문제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당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를 보세요. 그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행복한 느낌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우울증에 빠진 것입니다. 혹시 조상 중에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이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이타적 자살, 영웅 만들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질병이 아닌 자살도 있다. 뒤르켐에 의하면 이것은 ‘이타적 자살’이라고 불린다. 이타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에 통합 정도가 지나치게 높을 때 발생한다고 하지만, 사회를 강력하게 통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유일하게 질병화되지 않은 자살은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추앙받으며 영웅 만들기로 이어진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있었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제국주의는 제국주의 체제를 위한 영웅을 필요로 했고, 식민지 국가들을 독립을 위한 영웅을 필요로 했다. 그들이 조국과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침략이든 테러든 자신을 희생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런 희생도 학문적으로는 ‘이타적인 자살’일 뿐이고, 여기서 다시금 문제가 발생한다. 좋은 자살과 나쁜 자살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기적 자살은 나쁜 것이고 이타적 자살은 좋은 것인가? 자살이라는 질병이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면 이타적 자살도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이타적 자살도 사회를 병들게 만들 수 있다. 가미가제를 생각하면 된다. 젊은이들이 비행기를 몰고 적에게 돌진하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병폐의 한 단면일 뿐이다. 21세기에는 한국에도 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국형 영웅 관리 모델 수립’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그들은 영웅을 만들지 못하는 사회는 위대한 성취를 만들어 낼 수 없다고 한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교과서다. 교과서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인간형을 영웅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강재구 소령의 이야기도 한주호 준위의 이야기도 가슴 속에 기억할 만한 이야기이지만 교과서가 아닌 다른 글에서 만나야만 한다. 아니면 서정주의 「오장 마쓰이 송가」와 다를 바가 없다. 그것도 아니면 백선엽 장군처럼 만주군 간도 특설대에서 친일을 하다가도 전쟁에 나가서 잘 싸우면 당신도 오성장군이 될 수 있고, 영웅이 되어 나중에는 국립묘지에 갈 수도 있다고 교과서에 실어 주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죽은 영웅보다 살아있는 영웅이 더욱더 모범이 되지 않겠는가! 독일의 시인이자 극자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말한다. “영웅이 필요 없는 나라는 행복하다.”지금 우리에게는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업에 종사하면서 빈곤 때문에 자살을 하지 않는, 그래서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빈곤도 질병이 아니다

그러나 빈곤층의 자살이 자꾸만 증가한다. 범죄도 증가하고 있다. 빈곤층의 자살을 질병으로 파악하려는 사람들은 이렇게 진단한다.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의해 우울증에 빠진 빈곤층 중에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약물 치료를 받으며,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상담을 받고, 교육을 받으면 된다. 슬그머니 우울증이 유전 요인 때문이라는 말도 한다.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부탄”이라는 기사와 함께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정작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의 대상인 우리의 부자들은 제외된다.

그러나 우리는 OECD 국가 중 자살률만이 1위가 아니라 저임금 근로자 비중도 1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경제적인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예전에 빈곤을 사회생물학적인 견지에서 설명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실패로 끝났다. 과학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도 빈곤을 질병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가난하면 질병에 걸릴 수 있다. 가난하면 질병을 치료받지 못해 죽을 수도 있다. 가난하면 질병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난 자체는 질병이 아니다. 또한 빈곤에 의한 자살도 질병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과 의학의 힘으로 자살이라는 질병의 치료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찾아야만 한다. 경제적 분배 정의를 실천하는 것, 저임금 근로자를 줄이는 것,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바로 이것이 빈곤에 의한 자살을 줄일 수 있는 방법들이다.

과학과 의학이 해야 할 일은 자살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치료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은 경제적 분배 정의를 실천해서 가난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을 막는 것이지 ‘이타적 자살’을 미화해서 정치 의도에 맞는 영웅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국가가 나서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동물의 자살 사례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 중 동물학자 제인 구달이 관찰한 ‘플루’와 ‘플린트’이야기가 있다. ‘플린트’는 어미인 ‘플루’가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주검을 지키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야생 동물의 세계에서 독립하기 전 새끼가 어미 곁에 붙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어미의 부재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미가 없는 동물은 먹이를 얻어먹을 수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빈곤층일수록 가족동반자살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진정한 경제적 분배 정의를 다시금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적당한 가난은 ‘검소하다’라는 말로 위로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끼니가 없어 비관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자살이라는 질병에 걸렸다”는 말이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만 남을 뿐이다.

강경표(중앙대학교 철학 박사수료) /

“나와 그것(I-It)”의 관계가 압도하는 사회의 끝 – 자살[썩은 뿌리 자르기]

최근에 소개된 임상심리학자 토마스 조이너의 “자살에 대한 오만과 편견”에 따르면, 자신이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과 아무데도 속해있지 않는다는 ‘소속감 부재’의 두 심리상태가 장기간 지속될 때 자살에 대한 생각이 강해진다고 한다. 특히나 핵가족화 및 개인주의화가 강화되는 시대가 됨에 따라 물질적인 문제보다는 관계성과 정체성의 위기로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보고가 있다. 내가 ‘짐스런 존재’라는 것은 자신이 중심으로 들어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이란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면 항상 주인공으로만 살 수는 없다. 살면서 맺는 수많은 관계에서 자신이 중심이 될 수도 있고 엑스트라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외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회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는 이런 상황이 감정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붕괴시켜 극단적인 결말에 치닫게 한다는 것이다.

유태인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그의 저서 『나와 너』(I and Thou)에서 인간을 관계 속에 있는 존재로 보고, 살아가면서 맺는 관계의 형태를 크게 “나와 너”(I and Thou) vs. “나와 그것(I-It)”의 두 가지로 분류했다. 전자인 ”나와 너“는 한마디로 인격과 인격이 만나 서로 진정한 소통과 나눔을 통해 한 인격이 성장하고 성숙되도록 돕는 이상적인 관계다. 이러한 관계와 관계가 모여 한 인간의 삶을 견고하게 지탱시켜주기 때문에 삶의 위기가 와도 뿌리째 뽑히지 않고 오히려 ”비 온 뒤 땅 굳어진다“는 속담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반면 ”나와 그것”은 말 그대로 상대는 철저히 도구격이 됨으로써 그 상대 앞에 있는 “나“는 피상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은 수단이 되고, 효용가치로 스캐닝(scanning)이 되어 점수가 매겨지며, 어떤 필요에 의해 만남이 일시적으로 이뤄지는 관계기에 수명도 짧은 경향이 있다. 일명 안 보면 그만인 관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나-그것”의 관계, 다시 말해 도구적이고 외형적인 관계만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현대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데 있다.

“나”의 실체와는 상관없는 외형적인 세상에서 사는 데 보다 익숙해져있기에 지속적으로 힘들고 우울할 때 관계 속에서 도움을 받기보다는 그렇게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를 “짐스런 존재”가 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하고 혼자서 파괴적인 외로움을 겪다가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결국 “나와 그것”의 관계가 나와 나의 생명 사이의 관계까지를 지배하는 것이다. 나는 사회의 그것이고, 생명은 나의 그것이다. 사회가 짐이 되는 나를 떼어 놓듯이, 나도 짐이 되는 나의 생명을 떼어 놓게 된다.

산업사회를 지나 풍요와 풍족을 누리는 사회로 진입한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역설적이게도 더 이상 자살뉴스는 특별한 뉴스가 아니다. 최근 유명 연예인들의 연이은 자살뉴스로 다시 자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뜨겁게 달궈졌었다. 대부분의 자살자들이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신경안정제에 의존하다시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장기간 약물복용에 따른 역치현상 혹은 부작용으로 또 다른 의존을 낳아 본질적 치료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속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자살을 한 인간이 속한 관계, 그 관계의 나뭇가지들의 본류인 사회적 맥락을 간과하고, 생물학적인 관점에 치중하여 접근해 버리는 바람에 ‘약물만능주의’로 빠진 경우라 할 수 있다(물론 여기서 약물치료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복용기간이 장기화가 될 경우의 치료계획은 다각적이고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별도의 치료계획 없이 약물치료에만 의존하는 이들을 보면 결국 관계적인 맥락을 통한 완쾌가 제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 치료가 비교적 보편화되어 있는 미국 등의 선진국에서도 심리치료는 약물과 인지행동치료 같은 여러 치료방법들이 병행되어 이뤄진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마음을 터놓는 치료과정이 쉽사리 생략되고,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배식 받듯이 약을 받는 경우가 빈번히 이뤄진다. 더욱 당혹스러운 문제는 이러한 방식의 치료과정이 정작 자살 시도나 자살 이후 이를 유일하게 설명하는 근거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당초 그를 자살로 몰고 간 실질적 동인(動因)과 망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보다는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기계적 설명만이 그의 삶의 마침표가 되어 버린다.

마틴 부버가 『나와 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관계를 떠나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모든 인간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세밀하게 연결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라틴어는 ‘inter hominem esse’로 ’사람들 사이에 있음‘을 뜻한다. 반면. ‘죽다’라는 표현은 ’inter hominem esse desinere’로서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다’라는 의미이다. 건강한 유기체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자기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한다. 그러나 병든 유기체는 그 연결고리가 단절되어 있거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단절된 유기체는 결국 죽음을 뜻한다. 그 유기체에 속한 모든 것이 죽는 것이지 개중의 우월(?)한 세포나 근육질은 살고 그렇지 못한 것만 선별적으로 죽는 게 아니란 말이다. 썩은 유기체 안에서 모든 세포는 어쩌면 이미 죽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실재를 지탱해주는 일차적 자양분은 개인과 긴밀히 연결된 다양한 “나와 너”의 관계를 통해서 얻어진다.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 상황에 대한 재해석을 건강하게 수행하는 과정을 통한 근본적인 치료가 막혀버린 자의 자살선택은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실패로만 치부하여 해석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다. 이것은 마틴 부버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철저히 대치한다. 다시 말해, 오로지 ”나와 그것“의 관점만으로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이뤄질 수는 없다.

“내 끝 속에 내 시작이 있다” – T.S Eliot

박진영(서일리노이대 심리학과 졸업) /

학벌사회 다시보기[썩은 뿌리 자르기]

‘대학’이라 쓰고 ‘학벌’혹은 ‘낙인’이라 읽는다

한국사회에서 학벌 문제와 부동산 문제를 속 시원히 말하기 어려운 것은 집권자들과 시민 모두 자본의 이해관계를 내면화하여, 주로 그것을 자신들의 안녕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간주하고 이용하면서도, 그 욕망구조가 까발려지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그것은 국가의 교육과 주택에 관한 역할과 정책이 그 문제들을 완화하는데 거의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문제의 현상은 신자유주의 속에서 어떻게 하든 홀로 살아남기, 자본주의가 가르쳐 준 원리를 습득해서 보다 더 경쟁적이고 탐욕적인 사람이 되기로 드러난다.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에 관한 문제가 서열화, 사교육, 학벌의 문제로, 사람이 살아가고 서로 어울리는 주택과 토지의 문제가 과도한 대출, 투기, ‘먹튀’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 말이다.

그런데 학벌이라는 사회적 자본과 부동산-불로소득이라는 경제적 자본을 통해 무엇인가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든, 그것들에 대해서 기대할 것도 잃을 것도 없으면서 ‘나도 언젠가, 혹은 나의 자식들은 언젠가…’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든, 모두 그 문제에 연루되어 있고 그 병폐를 공고화하는 공범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가진 것이 많기에 잃어버릴 것이 불안한 자의 두려움과, 가진 것이 없기에 끊임없이 탐하고 불안한 자의 두려움은 그 근원이 같을까, 다를까. 학벌사회와 부동산사회 때문에 고통 받으면서도 그것을 여전히 작동시키는 원인을 제공하는 인민들의 욕망구조는 대학을 학벌 혹은 낙인이라 부르게 만들고, 육아와 교육과 주거와 노후복지를 모두 ‘경제문제’라고 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굴레에 갇혀 악다구니하는 한 이 지루한 논쟁과 입시지옥이라는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사람을 도구로 여기며 이윤만 추구하도록 강요하는 자본의 논리가 계속 강고해지고 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존재양식은 변함이 없는데, 혁신적인 제도 개선과 의식 개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서울대가 기초학문 연구중심의 대학원 체제로 재편되고 평준화된 국립대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 대학서열화가 사라질까. 대학서열화 문제가 완화되더라도, 높은 사교육비를 감당할 만큼 부모가 경제력이 있고 비교적 똑똑하고 성실하지만, 사회의 지배원리에 대한 의심은 희박한 아이들이 모이는 ‘유사서울대’가 다시 만들어지지 않을까. 얼마나 ‘경쟁력 있는’재단이냐에 따라, 즉 얼마나 대학교와 고등학교가 기업화되느냐에 따라 더 세분화된 서열이 매겨지지 않을까. 이렇듯 학벌 문제는 한국의 뒤틀린 경제성장 속에서 ‘괴물’이 된 입시교육이라는 암 덩어리의 대표적인 증상일 뿐이다. 그래서 학벌 문제는 교육 문제이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결코 교육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과 같은 대학 중심의 패러다임으로는 세부 교육정책이 아무리 바뀌더라도 부모들은 한숨 쉬고 아이들은 더 피곤해질 뿐이며, 사교육산업 자본과 거기에 기생하는 스타강사만 덩달아 미친 춤판을 옮길 뿐이다. 교육 시장을 지배하는 이러한 원리가 우리를 훈육하고 규율하는 한 학벌에 의한 사회의 보수화,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과 입시교육열에 의한 개인적?가정적?국가적 ‘자해 쇼’는 계속 될 것 같다.

국가와 학벌

과연 한국사회의 강고한 기득권 세력은 땅값과 집값이 떨어지고 대학서열화가 약화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까. 서울시장은 학교의 무상급식은 퍼퓰리즘 정치일 뿐이고,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무차별적’복지이기 때문에 뭔가 두려운 것인가 보다. 그렇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격차와 차별, 불평등과 경쟁이 이 땅의 지배원리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화법은 무척 단순해서 자신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말하기위해 늘 국가의 존립과 자유민주주의 정체성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가져다 쓴다. ‘그들’이 그렇게 목 놓아 외치는 국익에 대한 심대한 위협이라는 것이 단지 그들의 지배체제와 이익구조에 대한 위협을 말하는 것임을 마치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듯이.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학벌은 ‘국가’에 의해 형성되고 강화되어 왔다. 물론 현재의 학벌체제는 봉건시대의 엘리트를 규정지었던 족벌과 문벌의 근대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일제가 이식한 제국주의와 국가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국가를 위해 헌신할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고 국가권력에 종속된 엘리트에 의한 지배체제와 그것을 확대재생산할 교육체제의 마련을 위해, 그 피라미드 체제의 정점에 거의 무한대의 상징가치를 부여하는 것. 물론 이러한 원리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교육‘인적자원’부 시절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국가가 보증하는 학벌로서의 서울대는 오늘날 다른 대학에 비해 압도적인 수로 고등고시 합격자를 배출하는 것만 봐도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경성제국대학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으며, 동시에 가장 창의적이지는 않지만 필기시험에 가장 능한 인재들을 배출하는 최고의 학벌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학벌투쟁은 계급쟁투인가

부모의 재산 정도에 따라 대학이 달라질 경향이 크고, 졸업한 대학에 따라 소득의 격차가 여전히, 아니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면 이미 현재의 ‘학벌투쟁’은 개인과 가족의 사회적 자본을 쟁취하고 계급적 수준을 결정할 중대한 사명을 띤 계급쟁투의 현장이며, 더할 나위 없이 정치적인 사안이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불공정한 게임에 참여하고 있더라도 그 게임의 룰을 벗어나는 것이 곧 그 세계에서의 회복불능을 뜻하거나, 게임의 진행방식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는 것이 곧 지독한 패배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냥 그 불공정한 게임의 법칙을 용인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의 선택이 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형식적 민주화를 견인했던 386, 이제는 486이 된 ‘그들’도 대부분 그러했다. 그들은 좋은 학벌도 대기업 취업에 바로 써먹히지는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 20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그들은 양화된 격차에 따라 차등적으로 한정된 사회적 자본을 미리 배분받아 버리고 자신의 등급을 스스로 낙인찍게 만드는 이 불합리한 게임에 대리인으로 임하며, 그들의 자녀들이 (80년대의 그들처럼) 이의제기를 하기보다는 기꺼이 그 게임의 승자가 되어주기를 원했다. 물론 이 학벌 따기 게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 게임에서 승자가 될 확률이 높은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 게임을 벗어나 또 다른 ‘게토’에 소속되더라도 대학졸업장을 요구하는 사회의 요구에 뒤늦게 그 게임 판에 한 발을 넣을 수밖에 없는 곳이거나 외국 대학을 준비하는 비싼 게토이다. 그런데 교육과 대학입시 문제, 나아가 취업을 위한 그 다음의 쟁투를 ‘제로섬 게임’과 ‘죄수의 딜레마’로 바라보는 이 모든 관점 자체가 우리의 지적?실천적 탈출구를 닫아버리고 있다.

입시교육의 상처와 신화를 응시하기

자의반 타의반 진보적인 지식인이라는 교수님들도 어느 순간에 경기고와 경북고를 따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입시전쟁의 ‘승자’로서의 우월감은 그들의 도덕적 삶과 학문적 업적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리고 필자가 고교시절 경험했던 우열반과 보통반의 극심한 차별은 필자의 의식 깊은 곳에 어떤 열패감을 남겨 놓았을까. 일류 대학을 나온 부모들은 그 사회적 특혜를 잘 알기 때문에,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은 그 차별과 서러움을 알기 때문에 흔히 어느 집이나 ‘잘 키운 자녀’는 ‘좋은 대학에 들어간 자녀’가 된다. 학벌투쟁은 온갖 부당거래와 비리가 관행이 된 기업 중심의 사회체제를 혁신하는 동시에, 85%가 대학에 진학하면서도 학벌의 권능에 벌벌 떨어야 하는 우리 내면의 욕망과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문제여서 접근하기가 아주 어렵다. 가수 타블로의 학력 위조 문제를 제기했던 ‘타진요 사건’같은 해프닝을 검경?언론이 진지하게 다루고 뒤쫓을 만큼 우리에게 학벌 (혹은 누군가의 특권) 문제는, 우리 사회의 배후와 우리 내면에 깊은 생채기를 가져왔다. 저마다의 내면이 응시되고 조금씩 말과 행동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국가의 정책과 제도도, 학교와 교육도, 아이들과 우리 모두의 미래도 바뀌지 않는다.

자녀의 교육 문제를 자녀가 앞으로 살아갈 생존수단이자 혹시 모를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입시문제로 축소?환원시켜버리고 그 게임에서 충실한 플레이어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욕망을 먼저 성찰할 때 어린 세대들의 폭력적이고 불안정한 내면을 들여다보고 매만질 수 있지 않을까. 자율성과 다양성이 존중받는 학교, 창의성이 피어나는 교실은 그 다음에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10대들의 삶을 저당잡고 그들에게 이것은 인생을 건 멋진 한 판 싸움이라고 사기 치는 건 이제 그만하자. 그들에게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비정규직의 실상과 그들이 장차 ‘교수님’이라고 부를 대학 시간강사들의 현실에 대해 알아가고 고민하고 토론할 시간 같은 것을 주면 10년 후 세계는 어떻게 변할까. 바보야, 문제는 사람이야!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대학서열화 폐지를 위한 물음은 우문우답(愚問愚答)인가? [썩은 뿌리 자르기]

질문놀이

나이가 들면서 혼자 망상(妄想)하는 습관이 생겼다. 망상놀이의 즐거움은 엉뚱한 질문과 대답이다. 단순한 예로, 쥐가 낙동강을 헤엄쳐 건널 수 있을까? 오리발로 헤엄쳐서? 전용보트를 만들어서? 아! 보로 건널 수 있겠구나! 이 놀이의 시작은 질문이며, 조금씩 변형시켜 계속 질문한다. 윤리적 규범을 생각하면 우문현답(愚問賢答)을 해야겠지만, ‘혼자만의 산책’이기에 ‘우문우답(愚問愚答)’으로 끝난다. 사춘기에 끝냈어야 할 놀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나의 경우 건망증뿐만 아니라, 이러한 유치함이 더 큰 문제다.

한국사회에서 학벌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잘못된 질문일까 아니면 풀 수 없는 질문일까? 만약 풀 수 있고, 사회적 의제의 중요도에 따라 순서를 정한다면 몇 번째에 해당할까? 한국사회는 학벌사회일까? 이에 대해 몇 %나 반대할까? 한국의 학벌사회가 공정하다는 주장에 대해 몇 %나 찬성할까? 만약 불공정하다면 그것을 극복할 의지를 가진 사람은 몇 % 정도일까? 만약 그 의지가 있다면 전국의 모든 대학을 없앨 수 있을까? 모두 없애지 못한다면 그 대학들을 평준화할 수 있을까? 평준화를 할 수 없다면 대학입시만이라도 없앨 수 있을까? 대학입시를 없앨 수 없다면 선발방식이 아니라 추첨방식은 안될까?

이 질문들을 보고 화가 나신 분들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분들이고, 오히려 재미있다고 생각하신 분들은 우문우답(愚問愚答)의 동호회원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대답은 질문 속에 있고, 인간은 자신이 풀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기 마련인데, 질문의 연쇄가 현실적으로 공감을 얻어내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학벌사회에서 부모님과 나는 전우(戰友)

‘학벌사회’문제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교육문제이면서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은 한국사회의 커다란 욕망거울이었고, 국가와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꿔왔다. 그리고 그 정책의 지렛대는 언제나 대학과 그 입시의 변화로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매년 반복되는 대학입시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입시전형이 다양화되면서 소위 ‘수능’에 대한 관심은 과거 ‘학력고사’에 대한 관심보다 줄었다. 그러나 과거 고사장 앞에서 엿을 붙이고 기도했던 부모님의 모습보다 각 대학 입시설명회장을 뛰어다니는 부모님의 모습이 더 강조될 뿐이다. 형태는 바뀌어도 ‘병목현상’처럼 대학입시에 집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우리의 교육현실은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오늘날 졸업생의 85%가 넘게 대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양적으로 보면 대학입시와 관련된 경쟁이 없어진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최근 모 일간지에서 학벌사회에 관련된 대안을 모색하고자 기획보도를 마련하였다. 기사 내용 가운데 2006년 대학졸업자 월평균 소득을 소개했다. 1-5위권 대졸자 227.5만원, 6-10위권 대졸자 205.4만원, 11-30위권 대졸자 193.9만원, 그 외 4년제 대졸자 169.0만원, 전문대졸자 158.0만원. 이를 기계적 방식으로 분석하면, 대학이 등수로 매겨져 있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소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대학의 서열화와 소득의 등급이 연동할 뿐만 아니라 대학의 등급이 소득의 등급을 결정한다. (기사원문)

예시가 소득 차이만을 제시해 단편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자신의 경험이든 가공된 공포 혹은 불신의 이야기든 학력과 소득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현상이다. 물론 이것이 반례(反例)적 개인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러한 구조와 믿음 속에서 대학 서열의 정점에 오르려는 이 전쟁에서 내 부모, 나 그리고 내 자식은 쉽게 ‘전우(戰友)’가 된다.

학벌사회 속에 강화되는 불공정한 경쟁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전장(戰場)’은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비판을 받는다. 보수진영의 경우 교육정책의 ‘개혁’의 외양은 기회와 선택의 다양성이다. 단순한 학력고사에 따른 단순한 서열화보다 다양한 전형을 통한 기회와 선택의 다양성을 제공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에 부합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진보진영의 경우도 학력고사에 따른 서열화의 문제점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정부가 추진해 온 다양화가 기회와 선택의 다양성보다는 사교육을 매개로 사회적 양극화의 재생산이라는 점을 비판한다.

지난 달 30일 전국 모든 초·중·고교의 학교별 2010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소위 ‘일제고사’의 결과가 공개되었다. 그 결과를 보도한 신문의 내용을 인용하면, “서울지역 초등학교에선 사립학교가, 중학교에선 강남3구(강남·서초·송파)가, 고등학교에선 특수목적고(외국어고·과학고·국제고)가 성적 상위 20위권을 휩쓴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하위 20위권에는 경제 여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의 학교가 다수를 차지해, 지역에 따른 학력 양극화가 극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사원문)

물론 이 속에서도 ‘개천의 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작년 11월에 내놓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외고 교육 실태’보고서를 인용한 모 주간지의 보도를 보자. “외국어고 학생 가운데 가구 소득이 500만원을 넘는 비율은 49.4%지만, 일반고에서는 그 비율이 절반 이상 떨어진다(23.8%). 사교육 참여도도 달랐다. 외국어고 학생 10명 가운데 9명꼴(88.7%)로 사교육을 받지만, 일반고에서는 65.3%만이 사교육을 받았다. 월평균 사교육비도 외국어고 학생이 45만3천원으로 일반고 학생(22만원)의 두 배를 넘었다.” (기사원문)

인용문을 끌어들인 것은 현재 초·중등 교육과정이 출발점부터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제도는 ‘학력고사’에 의한 전국적 서열화를 개혁한 것이 아니라, 기회와 선택의 다양성이란 가면을 쓴 부모들의 돈 잔치의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불공정한 정글 속에서 경쟁은 오히려 강화된다. 그 속에서 대학의 서열화뿐만 아니라 이제 특수목적고를 매개로 한 초·중등 교육기관의 서열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대학서열화의 극복 없이 학벌사회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럼 대안은? 그 동안 많은 교육학자와 정당 및 시민단체들이 대안들을 제시해왔다. 많은 논의과정은 학벌사회의 극복이란 총론적 방향에 동의하지만, 그 실현의 구체적 정책 수단에 대해서는 다양함을 보여준다. 진보정당의 경우 ‘국공립대의 통합네트워크’내지 ‘통합단과대 체제’를 통해 최소한 국공립대부터 서열화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제시한다.(기사원문)

그러나 이러한 진보진영의 대안 제시는 현실의 벽 앞에서 항상 외면을 당한다. ‘누더기 법’같은 교육 정책의 변화는 교육 정책에 강한 불신과 공포가 자리 잡게 만들었다. 따라서 교육 정책이 어떻게 변하든 사교육을 통한 내 자식 밖에 믿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전장(戰場)’에서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된다.

따라서 학벌사회의 극복을 위한 대안 제시는 어려우며, 먼 길이다. 그러나 모든 교육과정에 대한 합의가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대학의 서열화를 폐지 내지 축소해가기 위한 계기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학벌사회를 해결하기 위한 작은 출발임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초·중등 교육과정을 정상화하더라도, 대학의 서열화가 존재하는 한 사교육에 대한 열망과 공교육 과정의 파행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대학서열화에 근거한 프리미엄의 유혹과 공포를 우리가 벗어나지 않는 한 학벌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첫걸음 내딛기 어렵기 때문이다.

축구에 대해서 많은 남자들이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특히 ‘군대스리가’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축구대표의 경기력이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포털의 토론장은 벌집이 된다. 교육문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교육의 경우 대부분 부모님이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육정책의 방향을 크게 전환할 경우 벌집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대학서열화 방지를 위한 고등교육제도의 변화와 그 입시제도의 근본적 변화 없이 학벌사회의 변화가 있을 수 없다면, 그 벌집을 우리는 건드릴 수밖에 없다. 현실적-정책적 어려움 속에서도 교육 자체의 목적과 규범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벌집 건드리기 놀이가 고통스럽지만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놀이과정에서 질문은 100년을 내다보는 큰 물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비록 우문우답(愚問愚答)이더라도.

김광호 (서울시립대 석사과정) /

‘네 등급을 알라!’는 사회, 그러나 ‘네 자신을 알라’[썩은 뿌리 자르기]

나를 보는 나가 아닌 대상으로 알려지는 나

얼마 전 보았던 영화『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첫 장면에 John Betjeman의 자서전 『종소리에 눈을 뜨고』의 구절인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Childhood is measured out by sounds and smells and sights, before the dark hour of reason grows(유년시절은 이성의 어두운 시간이 자라기전에 소리와 냄새 그리고 시각에 의해 평가된다).” 우리는 여기서 영화의 상세한 줄거리를 얘기하기보다는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오는 “the dark hour of reason”은 무엇을 의미할까? 라는 의문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잣대로 세계와 만나고 있는가? 영화 속에서 독일 소년 브루노는 슈무엘이라는 유대인 소년을 이성이라는 잣대로 만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유대인 소년과 이성의 어두운 시간보다는 감성의 창문을 통해 만나고 있다.

아마도 영화 속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이성의 어두운 시간”이란 모든 세계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 개체의 질적 측면보다는 양적 측면만을 자신의 판단 기준으로 간주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소위 합리성이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이러한 시각은 결국 인류의 참혹한 사건을 만들어낸 도구적 이성으로 귀결되며 인류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양화시키려는 이성은 생텍쥐베리의『어린왕자』본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가는 숫자로 세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어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물어보는 적이 없다.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앤 어떤 놀이를 좋아하니? 나비를 수집하니?”라는 말을 그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 앤 몇 살이니? 형제는 몇이고? 몸무게는?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하고 그들은 묻는다. 그제야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장밋빛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어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야 근사하겠구나!”하고 소리친다. …
…어른들은 다 그렇다. 그들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을 항상 너그럽게 대해야만 한다. 하지만 인생을 이해하는 우리는 숫자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학벌사회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이 글에서 영화, 소설 이야기가 현상적으로는 다소 주제와 벗어난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와 맞물려 강력하게 사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수량화 문제는 ‘나’를 내가 주체가 되어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과 연결된다. 나의 내면이 아니라 나를 외부의 그 무엇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이 점이 바로 학벌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를테면 주체로서 ‘자아the self를 알아듣는 나the I’가 아니라 ‘대상으로서 알려지는 나 the me’에 무게 중심을 맞추어 살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바로 그 핵심에 있다. 학벌 사회를 조장하고 추구하는 생활양식이 공고화된 사회에서는 대상으로 알려지는 ‘나’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바로 이 알려지는 대상화에

병역비리의 그림자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병역비리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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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태양 (건국대 석사수료)

* 본인은 본 글에서 ‘병역비리’의 이면을 고민하고자 했다.? 허나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너는 잘났냐는 어린 백성들의 본체없는 손가락들로부터 본인을 지키기 위해, 밝혀둔다. ?본인은 신체검사 1등급, 현역 육군병장 만기제대 예비역이다.

연예인과 정치인, 병역 비리자들을 대표해 뭇매를 맞는 그들

수 년 전 병역의무를 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국에 들어올 수 없게 된 연예인이 있다. 외모와 실력을 겸비해 많은 촉망을 받았던 그이기에 어쩌면 국민들의 분노는 더 활활 타올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들어서도 한창 주가를 올리던 연예인 한 명이 병역비리라는 지뢰를 밟은 것 같은데, 적어도 그 지뢰는 그의 발목을 잘라먹긴 할 것 같다. 연예인이라는, 공인이라는 이름아래 그들의 병역비리문제는 호사가들의 입에만 오르내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병역비리는 사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스무살 남짓한 대한의 남아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삼겹살과 함께 얹어지는 얘기들은 여자 아니면 군대. 군대를 가게 된 친구들은 세상이 끝나는 양 사회의 전우들의 이별주를 받으며 미꾸라지 같은 친구들에게 부러움 반 비아냥 반으로 술잔을 넘긴다. 가기 전엔 가지 않은 친구들을 그렇게 부러워하다가도 막상 갔다 오면 그네들을 비웃게 되는, 군대가 대체 무엇인가.

병역비리라는 말 자체의 비리

비리라는 말이 붙었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병역을 피하는 일이 그 자체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정직하게 느끼게 해준다. 고리타분해보이지만 국어사전을 보면, 비리(非理)는 ‘올바른 이치나 도리에서 어그러짐’이다. 이걸 빌미로 거꾸로 되짚어보면 병역을 행하는 것은 올바른 이치나 도리에 맞는 것이다. 이른바 ‘신성한 국방의 의무’. 우리는 이미 병역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직도, 병역을 신성한 국방의 의무로 생각하도록’ 훈육당하고 있는 것 같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는 근대국가의 태동과 함께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지워진 그리고 이른바 보수주의자들의 깃발에 쓰이는 대표적인 문구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 ‘국방의 의무’라는 말 앞에 ‘신성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때, 우리가 그를 오른편에 세우곤 하는 것은 그 문구 자체가 가진 근대적이고 보수적인 측면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냥 근대적인 것이 모두 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쁠 것이다. 보수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그를 ‘꽉 막힌 꼴통’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오히려 또 다른 보수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나 판단’이 묶이지 않고 ‘그것 자체’를 봐야만 하지 않을까. 비록 ‘신성한’이라는 단어가 우리 앞을 가로막아 서지만 사뿐히 즈려 밟아주고 국방의 의무의 당위성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냐는 말이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 썩히는 시간?

대한민국 헌법은 교육, 납세, 근로, 국방의 4가지 기본의무를 국민에게 부여하고 있다. 대한민국 병역법은 ‘대한민국 국민인 18세 이상의 남자’에 대해 제 1국민역에 편입시키고 19세에 징병검사를 받게 하며, 1급에서 7급까지 등급에 따라 병역을 지게 한다. 법에 따르면 병역의 의무는 모든 국민 – 정정하자 – 국민 중 모든 18세 이상 남자에게 지워진다. 그런데 신체검사 후 등급에 따라 구분되는 병역을 배분하는데 문제는 현역판정을 받을 수 있는 남자들이 이런저런 지혜를 짜내 현역 등급에서 벗어나는데 있다. (물론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서 남성성을 찾지 못하여 고민인 분들의 문제는 또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네들에 대해서는 병역의 의무보다도 주민번호 뒷자리의 결정문제가 더 시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른바 종교적인 혹은 비종교적인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는 친구들에 대해서는 요점이 다른 두 가지 판단; 양심의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판단과 양심의 자유라는 가면 뒤에 숨은 비겁한 거짓말쟁이들이라는 판단 사이에서 각각의 케이스가 구분되겠지만 어찌되었든 전자로 판단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다루는 범위 밖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2년이라는 시간을 헐값에 팔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하루 일당도 안 되는 돈을 월급으로 받아가며 평소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XX파이에 침을 흘려야 하는가. 사실 이 문제는 근대국가와 국민의 관계설정에 있어서 상호에 교환의 관계를 설정하면서부터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교환은 근대로 넘어서면서 국민에게 자유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국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어떤 것들에 대해, 국민에게 의무로 부과하면서 그럴 듯한 이유를 갖다 대야 할 것 같은데 어떤 것도 적절하지 않아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는 꽤나 그럴 듯 해 보인다. 교환은 아주 익숙한 관계이고, 국가가 당신에게 딱히 해준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당신이 적어도 그 국가 속에서 살아가며 유익을 얻었다면 당신도 국가에게 무언가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해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잠깐. 당신이 만약 ‘어, 그런가.’ 했다면 당신은 방금 무언가를 놓쳤다. 교환은 어디까지나 공통된 기준을 가지고 상호가 비슷한 정도의 가치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땅에서 농사지어 이만큼 벌었으니 요만큼은 나에게 주라.’는 말은 그나마 낫다. ‘내 땅에서 농사지었으니 이만큼은 나에게 주라.’는 말은, 더구나 ‘내 땅에서 농사지었으니 이만큼은 세금, 이만큼은 보너스로 주라.’는 말은 글쎄, ‘내 구역에서 장사하면 보호세를 내야 할 것 아니야!’라는 동네 건달패의 대사의 유려한 표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의 가능성을 이른바 측정불가능의 무궁함으로 둔다면, 그리고 세상의 것들이 전부 돈으로 환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손 친다면 우리의 2년은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알 수도 없다. 우리의 2년은 대한민국에서 살아오고 살아갈 값의 부가세인가. 그보다, 우리는 그 교환을 꼭 해야만 하는가.

상대적 박탈감

이른바 병역비리자들에 대한 분노의 표출에 있어서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자들에게 그 분노의 권리조차 분배되지 않는 것을 보면 이는 확실히 상대적 박탈감인 듯하다. ‘나는 갔다 왔는데 너는 안 갔냐!’라는 말에는 이미 ‘가기 싫은 곳’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가기 싫은 곳이라는 말에는 또 ‘가야하는 곳’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가야하는 곳’이라는 말에는 ‘모두’라는 말이 숨어있다. 곧 제대로 말하자면, ‘모두 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18세 이상 성인 남자) 가야하는, 그렇지만 가기 싫은 그 곳에 나는 갔는데 너는 안 갔다.’가 되지 않을까. 사실 이렇게 보면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가긴 가야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위에서 말한 것, 곧 군대를 가야하냐 갈 필요 없냐의 문제는 이미 병역비리에서는 얘기가 끝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병역비리의 그림자가 언뜻 보인다. ‘저 녀석 군대 안 가려고 버둥거렸어. 나쁜 놈.’이라는 분노 뒤에 ‘군대 말이야, 꼭 가야 하는 거, 너도 알잖아.’를 숨긴 것이다.

죄다 언론이 뒤집어 쓸 죄목은 아닐 것이다. 언론도 목적이 있을 것이고, 사실 그것은 언론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목적일 것이다. 이른바 ‘영감’님들이 그 중심에 있을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분’들의 입맛에 병역은 (그 자신은 해당되고 싶지 않을지 모르지만) 빠져선 안 될 소스일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병역비리’라는 떡밥이 어느새 굉장히 쫄깃쫄깃한 이슈거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언제,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느새 ‘병역’은 그 사람의, 특히 공인인 경우엔 더더욱, 도덕성을 판단하는 잣대로까지 그 위상을 드높이게 되어버린 것이다. 병역비리 혹은 병역비리의혹이라는 낙인은 당시의 손가락질을 한 곳으로 모으는 과녁 같다. 마치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마냥 이젠 누가 굴렸는지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이 일단 걸리면 그 대상은 아마존에 던져진 고깃덩이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국민의 분노’가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그 정당성문제는 이미 한 쪽 구석으로 치워진 느낌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며

예전에 대학에 막 들어갔을 때,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을 읽으면서 끝에 책을 덮을 때마다 헛웃음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이건 뭐지, 자기주장이 없어.’라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파괴자’로 생각하며 살짝 미워했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의 위상을 올려다보기에도 허리가 휘는 나는 감히 그런 입장이나 위치를 자처할 수 없다. 다만 지금에 와서 보니 소크라테스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 글에서 문제를 삼고자 한 것은 ‘병역의 당위성’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병역의 당위성에 관한 입장들 중 심정적으로 쏠리는 입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고한 무적의 논리로 반드시 그러하다는 명쾌한 답을 스스로 도출해 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난, 부끄럽지만, 소심하게도 그에 대한 판단을 일단 유보해 둔 상태다. 하지만 뉴스에 간간히 그런 기사들을, 그리고 댓글들을 볼 때마다 생각했던 것이 있다. 돌멩이를 던질 때 던지더라도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던져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던지라고 부추기는 이 사람들은 누군지.

언젠가 영화 을 다시 보면서, 사자왕 무파사를 죽게 만든 것이 대중의 알 수 없는 공포라는 것을 보고 그 섬뜩한 표현에 몸이 떨렸던 적이 있다. 디즈니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 장면은 나를 잠깐이나마 돌아보게 만들어주었다. 설사 같이 깔려버리게 되더라도 (실제로 그렇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누군가 잠깐이라도 멈추었다면 그런 참사는 멈출 수 있지 않았을까. 그가 무파사이든 스카이든 간에 어쨌든 그런 식으로 남는 건 참혹한 시체뿐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