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과의 만남[고전은 숨쉰다]

인생이 복잡하고 힘들다고 느낄 때 가끔 이렇게 생각한다. 복잡한 인생을 간단하게 네 글자로 정리하면 무엇일까. 결국 생노병사 혹은 희노애락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정리를 하면 비록 잠시일지라도 마음이 초연해지면서 편안한 것을 느낀다. 만약 이 네 글자를 두 글자로 더 줄인다면? 결국 생사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생에서 시작해서 죽음으로 가는 도정에 있다. 우리는 무덤으로 가는 도정에서 수 없는 도전과 선택에 직면한다. 그리고 이들과 싸움을 벌여야 한다. 비록 싸움을 전문적으로 하는 군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렇다. 인생은 결국 싸움이다. 정도와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인생에서 자신이 직면한 문제와 싸움을 벌어야 한다.

일찍이 마오쩌둥은 “하늘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무궁하고 땅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무궁하며 인간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더더욱 무궁하다”라고 설파했지만 돌이켜 보면 나는 그렇지 않았다. 늘상 싸움을 회피만 했지 정면으로 부딪혀 싸움을 벌이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고 가끔 반성한다. 또한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었더라도 이겨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터인지 한번 손자병법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이 책을 손에 집어 들고 읽지 못했다. 왠지 출세를 위한 얄팍한 실용서를 읽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 때문이다. 전략이니 전술이니 모략이라는 말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연한 계기로 결국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손자병법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우선 ‘쯔끼다시’ 삼아 손자병법과 마주치게 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한다.

아주 좋아하는 중국의 학자 중에 진커무(金克木)이라는 분이 있는데, 1912년 생으로 십 년 전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책을 서가의 아주 좋은 자리에 모셔 놓고 가끔 꺼내 읽는다. 그분의 글은 남자한테 뿐만이 아니라 여자에게도 참 좋은데 말로는 설명할 수 없고 참 난감하다. 크게 보면 20세기 동서양의 문화와 철학을 주제로 한 다양한 경험과 통찰을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에세이 형식으로 아주 짧게 쓴 것들이다.

그분의 책 중에 연탁춘니(燕啄春泥)라는 정말 작은 책이 있는데 제목이 참 운치가 있다. 제목처럼 제비가 봄 진흙을 쪼듯이, 혹은 제비가 쪼아 놓은 봄 진흙처럼 짧은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봄이 돌아와 그동안 마음에 하나하나 간직해두었을 이야기들이다. 이런 그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읽을 때마다 의외의 소득에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그리고 긴 여운이 남는다. 좋은 차라도 있다면 차를 마시면서 그의 짧은 글을 읽고 있으면 정말 행복하다는 기분이 절로 들었다.

그의 전공은 본래 인도문화인데 북경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이후에도 죽는 순간까지 다양한 글을 쓰다가 88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 70세 이후에 컴퓨터를 배웠다는데 돌아가신 후에 그가 글을 쓸 때 사용한 손녀의 컴퓨터 하드를 조사해보니 여러 권의 책의 구상이 나왔다고 한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지난 세기 30년대에 꽤 유명한 시인이었으며, 여러 대학에서 다섯 개국의 언어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한동안 뽕잎을 먹기만 하던 누에가 어느 순간 실을 토해내듯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하다가 만년에 정력적으로 글을 남긴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의 시나 전공 분야의 글은 내가 문외한인 고로 별로 읽지 못했지만 그분의 수필은 우연한 기회에 읽고 빠져들게 되었다. 한 때 이분의 ‘폐인’이 되어 그의 글이 자주 실리던 잡지에 새롭게 발표되면 만사 제치고 구해 읽고 주변 사람들에게 무작정 그분의 일화를 떠들어 민폐도 많이 끼쳤다. 이 자리에서 한 가지만 소개해보겠다.

젊은 날 그는 지방에서 올라와 지인의 소개로 어렵사리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사서 보조원으로 잠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는 도서관 카운터에 앉아서 책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서고에 가서 책을 찾아 주기도 하고 반납한 책을 받는 단순한 일을 하였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일만을 한 것이 아니라 빌려 준 책이나 반납한 책을 일일이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빈 시간이 나면 그 책을 반드시 찾아 읽었다. 서고 속의 수많은 책 중에서 왜 저 사람은 그 책을 읽었을까 하는 무한한 호기심을 가지고.

하루는 한 문학 전공의 여학생이 오래된 잡지를 빌리러 왔는데 서고에 간 다른 동료가 책 찾는 시간이 길어져 그 여학생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마침 당시에 썼던 졸업 논문 원고를 가지고 와서 카운터에 올려 놓고 있었는데 오래된 잡지는 지도교수의 지적을 받고 참고하기 위해 빌리러 온 것이다. 그가 그 원고에 관심을 가진 눈치를 보이자 최고 학부의 그 여학생은 자신이 있었던지 보라고 건네주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잠시 펼쳐보니 대부분 아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모두 다 아는 내용도 일정한 형식을 갖추면 대학의 졸업 논문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이 이야기를 한 것은 대학도 나오지 않은 자신이 당시에 이미 대학 졸업생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말년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면서 당시 책을 빌리기 위해서 건냈던 책 이름을 적은 쪽지로 자신에게 무언의 수업을 하고 간 수 많은 ‘선생님’들에게 감사하는 한편 호기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언급하면서 한 이야기다. 그는 젊은 시절 도서관에서 일한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 일생 중 가장 공부를 많이 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한 노학자가 풀어놓는 그때 그 시절의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상태가 지나쳐 꿈 속에서 그분을 두 번 만난 일도 있고 급기야 진짜 한번 만나보겠다고 무모하게 중국에 찾아 간 일도 있었다. 결국 만나 뵙지는 못했다.

헌데 중국사상사로 유명한 런지위(任繼愈)라는 학자가 생전에 그를 두고 내린 짧은 인물평에 이런 말이 있었다. “병서에 싸움을 잘 하는 자에게는 가지 않는 길이 있으며 공격하지 않는 성이 있다는 말이 있다. 김공(金公)의 학문을 보면 병서를 잘 읽은 분이다.”

이 말은 원래 손자병법의 「구변」편에 나오는 말이다. 그의 글이나 학문의 어떤 부분이 가지 않은 길이고 공격하지 않은 성이었는지 지금도 잘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내가 좋아하는 인물에 대한 병법을 동원한 이 묘한 인물평이 계기가 되어 손자병법에 대한 흥미가 엉뚱하게 솟았다.

그러고 보니 연암 박지원이 글쓰기와 병법을 연관시켜 서술한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이라는 글이 있다.

“글을 잘 하는 자는 아마도 병법을 잘 알 것이다. 비유컨대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이란 적국이요, 고사(故事)의 인용이란 전장의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요, 글자를 묶어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가 대오를 이뤄 행군하는 것과 같다. 운(韻)에 맞추어 읊고 멋진 표현으로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는 것과 같으며,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를 올리는 것이요, 비유란 기습 공격하는 기병(騎兵)이요, 억양반복이란 맞붙어 싸워 서로 죽이는 것이요, 파제(破題)한 다음 마무리하는 것은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요, 함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운을 남기는 것이란 군대를 정돈하여 개선하는 것이다.”

연암의 말에 비추어볼 때 그분은 확실히 병법에 능한 분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별다른 인 연이 없던 내가 어떻게 그의 글에 사로잡혔겠는가. 그가 글에서 뿐만이 아니라 실제 병법에 능한 분이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깨달았다. 앞서 그분을 만나러 중국에 갔다가 못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전화통화는 나누었다. 미리 준비한 예의바른 말로 뵙기를 청했지만 그분의 완곡한 거절로 결국 만나지 못했다. 팔십 노인의 정중한 거절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나는 결국 성을 공략하지 못했고 그분은 자신의 성을 잘 방어하셨다.

그는 한 책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은 일찍이 명예롭게 강호를 떠나겠다고 ‘금분세수(金盆洗手)’했는데 왜 책을 다시 내서 서문을 쓰고 있느냐 하면 관세음보살을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늙은 자신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고 아무리 거절을 해도 한 출판사의 여성 편집자의 거듭된 요청에 결국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 신세가 되어 결국 책을 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은 수 십년 동안 곧 죽을 것이라고 온갖 핑계를 대고 곧잘 거절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여성 편집자는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아서 결국 책을 출판하게 만든 것이다. 이에 비해 나는 단 한 수에 무너져 결국 그분 살아생전에 만나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준비가 부족했다.

타국에서 불원천리 찾아온 독자를 거절한 그분의 냉정함이 섭섭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입장에서 헤아려보면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현명한 처신을 한 것이다. 말도 잘 통하지 않은 무모한 외국 독자를 만나 무슨 곡진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겠는가. 자신을 좋아하는 외국 독자를 만나 기분이 좋아 인증샷의 요구에 응하고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다음에 헤어지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이분과의 만남이 불발했다고 해서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손자병법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리고 거절을 잘 해야 된다는 것을 배웠다.

물론 손자병법을 읽는다고 병법에 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손자병법을 읽고 나서도 후배의 요구에 단호히 거절하지 못하고 맛도 없는 이 ‘쯔끼다시’ 같은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나중에 정말 맛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아예 ‘회’를 내놓지 않을 작정이다. 왜냐하면 ‘쯔끼다시’가 맛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그래도 견딜 만하지만 ‘회’마저 맛이 없다고 한다면 그 절망에서 어떻게 헤어 나올 수 있겠는가. 그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황희경(영산대 교수) /

강태공은 왜 미끼없이 낚시를 했을까[고전은 숨쉰다]

산이란 산, 새 한 마리 날지 않고(千山鳥飛絶)

길이란 길, 사람 자취마저 끊겼는데(萬徑人?滅)
외로운 배,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孤舟蓑笠翁)
홀로 낚시질, 차디찬 강에 눈만 내리고(獨釣寒江雪)

당나라 시인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강설’(江雪)이다. 이 시의 정경은 수많은 화가들이 묘사했던 화제(畵題)이다. 남송 시대 마원(馬遠, 1160~1225)의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최북(崔北, 1712~1786))의 ‘한강독조도’도 있다.

고전을 두루두루 꿰뚫으신 어른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 기대를 한껏 했지만 어르신은 그저 간단히 코멘트만 하시고 수업을 진행하셨다. 어느 날 수업 중 당시의 백미라던 ‘강설’이 나왔을 때도 난 짐짓 딴청을 피우며 듣고 있었는데 어르신께서 이 시를 볼 때마다 복괘(復卦)가 떠오른다고 단 한마디 하셨다. 순간 엉? 하고서 왜? 했다가 아! 했다.

난 자신의 섹스 경력을 자랑인양 떠벌리는 사람이 느끼는 섹스의 쾌락을 신뢰하지 않는다. 포르노를, 그렇다, 오해하지는 말자, 아주 가끔 본다. 가만히 생각해 본 일이 있다. 어떨 때 난 흥분했고 어떨 때 짜증을 냈던가.

자연스러움이 답이었다. 리얼한 자연스러움, 위선적이지도 위악적이지도 않으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자연스러움. 그 자연스러움을 상대에게 요구하거나 강제하지도 않으면서도 서로 몰입되는 도취의 순간. 나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서(시선을 의식하면서 쾌락의 쇼를 부리는 모습은 얼마나 짜증이 나는가.) 오직 몰려오는 흥분에 도취한 몸의 모든 미세한 떨림을 느낄 때, 나는 그 리얼한 몰입에 함께 도취되는 합일을 잠깐, 그래 오해하지는 말자, 잠깐 느끼고, 아! 했다.

‘강설’의 시에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늙은이의 시선과 나의 시선. 그러나 늙은이는 나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서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산과 사람 자취마저 끊긴 길을 배경으로 한겨울의 한없이 내리는 눈 속 외로운 배 위에서 생명력 퍼덕거리는 물고기를 낚는 즐거움에 몰입해 있다. 입질과 손맛을 즐기는 늙은이의 눈빛이 번득인다.

보이지는 않지만 물속에 있는 물고기란 『장자』의 ‘호수가 다리 위의 물고기’(濠梁之樂)나 『중용』의 ‘물고기는 연못에서 즐겁다’(魚躍于淵)는 『시경』 구절이 상징하듯이 ‘즐거움’을 상징한다. 리얼한 자연스러움이다. 시를 읽고 늙은이의 자연스런 몰입을 몰래 훔쳐보며 나도 모르게, 다시 말하건대 오해하지는 말자, 그 즐거움에 합일되는 순간, 아! 했다.

즐거움과 낚시질

‘강설’을 복괘와 함께 읽을 때 주목해야 할 것은 ‘즐거움’과 ‘낚시질’이다. 복괘는 자연스러움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복괘는 『주역』의 괘 가운데 여러 학자들이 칭송하고 놀라워했던 괘이다. 왜일까. 복괘는 동지(冬至)에 해당한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양(陽)의 기운이 비로소 차가운 땅에서 올라오려는 순간으로 생명이 막 소생하려는 때이다. 생명력의 회복이 복괘다. 복괘의 괘사는 이렇다.

“회복은 형통하니, 나아가고 들어옴에 막힘이 없다. 친구가 와야 허물이 없다.(復, 亨, 出入無疾, 朋來, 無咎.)”

간단하다. ‘출입무질’(出入無疾)과 ‘붕래무구’(朋來無咎). 먼저 ‘출입무질’이란 무슨 말인가. 생명의 힘이 정치권 안으로 들어왔으니 ‘입’이고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니 ‘출’이다. ‘무질’이란 억지로 강제하지 않고 막힘이 없이 자연스럽다는 의미다. ‘붕래무구’란 동지(同志)들이 즐거움을 함께 하려고 모여들어 연대해야 완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본다고 한다.

이 말을 동시에 이해하기 위해 ‘안연’(顔淵)과 ‘강태공’(姜太公)을 함께 겹쳐 보아야 한다. 정이천은 복괘를 안연과 비교한다. 안연은 ‘안빈낙도’(安貧樂道)로 유명하다. 그는 도를 즐거워했다. 진정으로 도를 즐겼던 인물로 삶의 모든 순간을 도의 즐거움으로 채우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이런 말을 보았다. “철학자에게서 검소함은 도덕적 목적이나 수단이 아니라 철학 그 자체의 ‘결과’이다.” 이 말을 패러디 해보자. “철학자에게서 즐거움은 도덕적 목적이나 수단이 아니라 철학함 그 자체의 결과이다.”

‘안빈낙도’란 가난을 칭송하는 말이 아니다. 진정한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다. ‘안빈낙도’를 외치며 자신의 가난함을 정당화하는 것은 위선이다. ‘낙도’하기 위하여 가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은 ‘낙도’의 결과일 뿐이지 가난하다고 ‘낙도’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낙도’하기 위해 가난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도’를 즐겼다고 스스로 의식하면 그것은 도를 즐긴 것이 아니다. 시선이 개입되지 않는 완전한 몰입이 아니기 때문이다. ‘낙도’하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지 않는 몰입이어야 한다. 제자가 정이천에게 안연의 즐거움을 물었을 때 정이천은 “안연으로 하여금 도를 즐기게 한 것은 안연이 아니다.”(使顔子而樂道, 不爲顔子矣)라고 대답했다.

곱씹어 볼 말이다. 안연은 도를 즐겨야 한다고 의지를 발휘하지도 않았고 도를 즐기고 있다고 스스로 의식하지 않고서 단지 수동적으로 몰입 당했을 뿐이다. 포르노에 나온 사람의 리얼한 자연스러움과 동일하다.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연은 단지 스스로의 즐거움에만 몰입하는 쾌락주의자였을까. 복괘에서 “친구가 와야 허물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친구들이 오지 않는다면 그 즐거움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즐거움과 더불어 ‘낚시질’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낚시질이란 말은 흔히 사용된다. 나도 인터넷에서 얄궂은 말에 낚시질을 많이 당했다. 허탈하게 낚인 것이다. 또한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유혹할 때도 낚시질한다고 표현한다. 이 낚시질이란 말에는 분명 족보가 있다.

중국 문화에서 낚시질은 상당히 중요한 상징이다. 낚시질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단연 ‘강태공’이다. ‘강태공’은 바로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로서 무왕(武王)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던 태공망으로 잘 알려진 여상(呂尙)이다. 하루는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는데 인재를 찾던 주나라 문왕이 그를 보고 재상으로 등용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는 무엇을 낚고 있었을까? 군주의 마음을 낚시질했던 것이다.

『귀곡자』에는 재미난 표현이 있다. 『귀곡자』는 유세술(遊說術)과 모략에 관한 책인데 군주에게 유세를 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귀곡자는 상징과 비유를 통해 상대방의 속내와 의도를 떠보는 방식을 ‘사람을 낚는 것’(釣人之網也.)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금 우리도 상대방의 마음을 떠보는 행위를 낚시질로 말하지 않는가.

유세란 그리스 시대의 수사학과 비슷하다.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다. 귀곡자는 “유세는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지만 상대를 기쁘게 해야 한다”(說者, 說之也)고 말한다. ‘유세’(說)는 ‘설(說)명’하고 ‘설(說)득’하여 상대를 기쁘게 ‘열(悅)광’하게 해야 한다. 설(說)이라는 한자는 유세, 설명, 설득, 기쁨의 뜻이 들어있다. 주목해 보자. 공통적으로 들어간 한자가 있다. 바로 태(兌)라는 글자이다.

유혹하지 않는 유혹

『주역』에 바로 ‘태괘(兌卦)’가 있다. 태괘는 연못을 상징하는데 물이 만물을 윤택하게 해서 기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주역』 ?설괘전?에서는 이 태괘가 입(口)를 상징한다고 되어있는데 입이란 말재주를 상징한다. 물이 만물을 윤택하게 하듯이 말로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는 뜻일 것이다. 유세를 통해서 상대를 감동시켜 설득한다는 말이다.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낚을 때 ‘뻐꾸기’, 즉 ‘말빨’이 전부는 아니지만,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말로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다가 아첨과 기만에 빠지기 쉽다. 말이란 진정성이 없다면 허울일 뿐이다. 진정한 뜻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태괘의 ?단전(彖傳)?에서 “속으로는 강직한 뜻을 가지고서 겉으로는 부드럽게 상대를 기쁘게 한다”(剛中而柔外)고 말한다. 정이천은 “마음을 감동시켜서 기쁘게 설복하게 만든다.”고 설명하는데 왕필의 주석이 재미있다.

“상대를 기쁘게만 하고 자신의 강직한 뜻을 어긴다면 아첨이고, 강직한 뜻만 지키려다가 상대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폭력이다.”(說而違剛則諂, 剛而違說則暴)”

상대 기분만 맞춰 아첨하다가는 자신의 뜻을 잃게 되고 자기의 뜻만을 상대에게 강제하는 폭력은 상대를 저항하게 만들어 설득시키기 어렵게 한다. 아첨하지도 않고 폭력적이지도 않게 상대를 설득하는 유세의 방식은 무엇일까.

강태공은 미끼를 쓰지 않고 곧은 바늘로 낚시를 했다고 한다. 세월을 낚기 위해서였을까? 곧은 낚시 바늘이란 미끼를 낄 수가 없다. 미끼란 무엇일까. 낚아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상대를 유혹하려는 속임의 수단이다. 미끼를 던진다는 것은 물고기를 속여서 미끼를 물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일상 언어에서도 미끼를 던진다는 말을 사기 치기 위한 술수를 말한다. 맹자는 미끼 던지는 낚시질을 증오했다.

“선비가 말할 만한 때가 아닌데 말을 하면 이는 말로써 미끼를 던져 낚는 사기술이고 말할 만한 때인데 말하지 않으면 이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미끼를 던져 낚는 사기술이다. 이는 담을 뚫고 넘는 좀도둑질이다.”(士未可以言而言, 是以言?之也, 可以言而不言, 是以不言?之也, 是皆穿踰之類也.)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맹자는 말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말할 만한 때가 아니면 말하지 않고 말할 만한 때 말을 해야만 한다. 낚시질하되 미끼를 던져 사기 치지 말라는 것이다. 강태공도 낚시질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미끼를 쓰지 않고 곧은 바늘로 낚시하며 사람을 낚으려고 했을 뿐이다. 강태공은 『육도(六韜)』라는 병법서를 쓴 유세가였고 전략가였다.

다시 ‘강설’의 장면을 복괘와 함께 생각해보자. 한겨울 새조차 없는 산속 강가 차디찬 얼음 위에서 늙은이는 생명력이 넘쳐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낚으려 한다. 안연처럼 그 즐거움에 몰입되어 있으면서도 강태공처럼 미끼를 던져 사기 치지 않고 미끼 없이 군주의 마음을 설득시켜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세월을 낚는다는 말은 곧 때를 기다린다는 말이기도 하다. 안연과 같은 ‘낙도(樂道)’가 강태공의 낚시질처럼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낚이게 한다.

몰입의 즐거움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변화를 가져온다. 다시 한번 들뢰즈의 말을 패러디해보자. “철학자에게서 타인의 변화는 도덕적 목적이나 수단이 아니라 철학함 그 자체의 결과이다.” 혹은, “철학자에게서 사회의 변혁은 도덕적 목적이나 수단이 아니라 철학함 그 자체의 결과이다.”

상대를 설득하여 변화시키려면 자신이 어떤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진짜 즐거워서 즐겁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은 상태로 몰입해야 한다. 유세란 자신의 즐거움이 발휘하는 감동의 효과이다. 즐거워야 한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다. 그러나 부러워하면 지는 거다, 라고 말하며 어금니 꽉 깨무는 순간, 지고 만 것이다. 말했다는 것은 이미 부러워함을 스스로 인지했다는 증거이므로.

즐거운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공자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그런데도 사계절은 운행되고 만물은 생겨난다.”고 하면서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정말 침묵을 지키겠다는 뜻이었을까. 왜 말을 하지 않으려 했을까. 하늘은 말이 없이도 영향력을 미치고 만물을 복종시킨다. 말없음의 말의 효과이다.

성인(聖人)은 말이 없다. 타인에게 말하려고 한다는 것은 인정과 복종을 구하는 것이다. 성인은 자신의 즐거움을 타인에게 자랑하지 않으며 강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말없음의 즐거움이 상대를 감동시켜 변화를 일으킨다.

결국 성인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쾌락에 도취된 사람, 이 우주 한 가운데 오직 자신만이 홀로 서서 쾌락에 흠뻑 취하는 사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하는 ‘변태’(變態)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쾌락에의 도취는 주변 사람들을 유혹하고 전염시켜 열광을 불러일으킬 때 완성된다. “친구들이 모여들어야 한다.”

타인에게 말하지도 않고 즐거움을 전염시켜야만 하는 모순, 유혹하려 하지 않고 유혹해야 하는 모순을 실천해야만 하는 사람, 이것이 성인의 위대한 기상이다. 그러나 유혹하지 않는 ‘척’하면서 유혹한다면? 사기꾼일까? 오해하지는 말자, 그러나, 문제는? 전략 없음의 정치 전략이다. 전략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 전략적 효과를 내는 이중 전략이다.

심의용(서울예대 강사) /

소크라테스와 시민불복종의 문제[고전은 숨쉰다]

시민불복종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역설.

공자는 “나이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 싶어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논어 위정편 4장)”고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 나이에 사형이라는 극형을 선고 받고 독배를 든다. 과연 그는 그런 극형을 선고받을 만큼 뭔가 심각하게 법도를 어건 것일까? 그의 죄목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 죄목으로 봐서는 그가 윤리적· 종교적인 면에서 심각하게 법도를 어겼다는 혐의를 받은 셈이다.

그러나 이 죄목은 구실이고, 그가 기소된 진짜 이유는 당시 집권을 한 민주정권의 정적들 중 일부를 이들이 젊은 시절에 소크라테스가 교육시킨 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설도 유력하게 제시되곤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죄목이 부당하다고 여겨 법정에서 무죄를 입증하고자 했고, 또한 선고 후에도 크리톤과 대화하는 가운데 배심원들의 판결이 정의롭지 못했다는 생각을 넌지시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크리톤≫ 50c, 54c). 하지만 그는 친구인 크리톤의 탈옥 권유를 물리치고 독배를 든다. 그가 탈옥을 거부한 이유는 ≪크리톤≫에서 접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는 국가와 법의 명령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식의 견해를 제시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악법, 즉 정의롭지 못한 법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철학자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변론≫에서는 악법은 단호히 지키지 않을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접하게 된다. 이를테면 아테네 법이 철학하는 것을 금한다면, 소크라테스는 이에 불복종하고 철학함을 그의 사명으로 부여한 신에게 복종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 준다. 그리하여 그는 시민불복종과 관련해 ‘소크라테스의 역설’이라 해도 좋을 큰 논란거리를 후세에 남겼다.

그가 보여준 일견 모순된 측면들은 그를 완고한 준법정신의 화신으로, 혹은 시민불복종의 선구로 해석되게 했고, 전문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인의 수준에서도 격론을 불러일으켜 왔다. 과연 소크라테스의 실제 입장은 무엇일까? 그는 시민불복종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 그는 악법이나 악한 법적 명령도 지켜야 한다는 보는 것인가, 아닌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사전에 없다

악법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악법도 법인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왜냐하면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악법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명시적으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음을 보여주는 전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더욱이 그는 당시 아테네 법이 악법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크리톤≫ 54c).

그는 자신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법이 아니라 배심원들의 잘못된 판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그건 훗날 누군가가 ≪크리톤≫의 일부 내용을 참작해서 만들어 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가 ‘악법도 법이다’ 혹은 ‘악법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지켜야 한다고 본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크리톤≫과 ≪변론≫은 이런 문제를 검토할 수 있는 일차적인 자료일 뿐 아니라, 우리가 왜 국가와 법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시민불복종의 권리가 있는가 하는 정치철학적 혹은 법철학적 문제 뿐 아니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위의 두 대화편을 악법 즉 정의롭지 못한 법이나 그런 법적 명령에도 복종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초점을 맞춰 살펴볼 것이다.

≪크리톤≫과 ≪변론≫에서 상충되는 측면들

≪크리톤≫과 ≪변론≫에서 시민불복종 문제와 관련해 상충된 것으로 보이는 점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크리톤≫ 자체 내에서 그런 점을 짚어보고, ≪크리톤≫과 ≪변론≫ 사이에서도 그런 점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크리톤≫은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가 등장하는 지점(50a6)을 중심으로 전반부(46b-49e)와 후반부(50a-53a)가 구분된다. 후반부는 특히 복종의 의무를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여기서도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법률과 국가가 시민을 어린이와 노예에 비유하여 연설하는 대목이다(50c-51c). 그 중 일부를 인용해보자.

“조국이 무언가를 겪어내라고 지시하면 두들겨 맞는 것이든 투옥되는 것이든 잠자코 겪어내야 하며, 조국이 당신을 전쟁터로 이끌어 당신이 부상을 당하거나 죽게 되더라도 지시사항을 이행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나라와 조국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행하거나, 아니면 정의로운 것이 본래 어떠한지에 대해 나라를 설득해야 한다”(51b-c).

여기서 ‘…무엇이든 이행하든가 아니면…설득해야 한다’는 구절은 해석하기에 따라 시민불복종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대체로 위 인용문은 국가와 법의 명령에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이렇게 이해되는 게 옳다면 소크라테스는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도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철학자가 된다.

그러나 ≪크리톤≫ 전반부에는 후반부와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있다. 거기서는 정의의 원칙들이 제시되는데 가장 기본적인 정의의 원칙은 “결코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49b)는 것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는 상충되는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변론≫에서도 ≪크리톤≫ 후반부와 다른 논조를 접하게 된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고발자들은 철학하는 일을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을 그만둔다는 조건 아래 배심원들이 자신을 석방해주되 계속 철학을 하다가 붙잡히면 죽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조건으로 자신을 석방하고자 한다면 배심원들보다는 철학함을 자신의 사명으로 부여한 신에게 복종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29c-d).

소크라테스가 해온 철학적 활동은 사람들이 몸이나 돈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혼이 훌륭하게 되도록 혼에 대해서 마음을 쓰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이런 일 말고 “다른 일을 하진 않을 것이며, 설령 몇 번이고 죽는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30a-c)라고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이 예를 통해 우리는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대해선 단호히 복종을 거부할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접하게 된다. 이처럼 목숨보다도 철학을 더 귀하게 여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배심원들이 그를 석방해주되 철학을 금하는 판결을 내렸다고 해보자.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철학을 금하는 법적 명령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불복종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단지 가정적 상황이다. 그리고 아테네의 재판 절차상 현실적으로는 배심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을 금하는 조건으로 석방을 제의할 수도 그런 판결을 내릴 수도 없었다.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이런 점을 주목하여 소크라테스가 시민불복종의 한 사례를 보여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를 편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 금지령의 예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크게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예가 가정적 상황 속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여기서 분명히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현실 속에서 그가 크게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을 받았을 때 그가 단호히 복종을 거부했으리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의지는 ≪변론≫의 또 다른 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과두정의 주요 인물인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를 한때 교육시킨 바 있다고 해서 과두정을 옹호하는 인물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실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30인 과두정권의 명령을 거부한 일도 있었다.

이 정권이 살라미스 사람 레온을 부당하게 사형에 처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포함해 다섯 사람에게 그를 연행해 오도록 지시했을 때, 그는 이 일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보아 연행에 가담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일을 회고하며 배심원들에게 “만약 그 정권이 빨리 무너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는 이 일로 해서 처형되었을 겁니다”라고 말한다(32c-d).

이 예도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시민불복종의 사례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시민불복종이 성립하려면 30인 과두정권이 적법하게 집권하고 적법하게 명령을 내렸다고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정권이 적법하게 집권하거나 적법하게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레온의 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적법성 여부와 상관없이 정의롭지 못한 명령에는 단호하게 복종을 거부했으리라는 것이다. 실상 그는 레온의 연행이 불법적인 일이어서가 아니라 정의롭지 못하고 불경건한 것이어서 명령을 거부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시민불복종과 관련해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모습 찾기

적어도 ≪변론≫의 두 예와 ≪크리톤≫ 전반부에서 나오는 정의의 원칙은 소크라테스가 악법을 지켜선 안 된다는 입장, 즉 시민불복종의 입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크리톤≫ 후반부에 나타난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의 입장 즉 법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식으로 준법을 중시하는 입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크리톤≫ 후반부가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이 부분의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를 소크라테스의 대변자처럼 봄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될 때, 같은 소크라테스의 견해가 대화편의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왜 달라졌는가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점을 피하는 한 가지 방식은 후반부에서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의 견해를 소크라테스의 견해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크라테스는 법률과 국가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웨이스가 이런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녀는 법률과 국가가 등장하는 후반부를 탈옥을 권유하는 크리톤을 설득하기 위한 ‘고상한 거짓말’ 즉 한갓 수사적 연설로 이해한다. 이러한 해석은 크리톤이 이해력이 부족하고 비철학적이어서 소크라테스가 그와 철학적 논의를 하는 것을 포기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크리톤을 철학적 논의가 불가능한 인물로 보는 것이나, 소크라테스가 단지 설득만을 위해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고 보는 것이 과연 옳은지는 의문이다. 소피스트들을 상대로 논쟁하는 때에는 이들의 논리를 역으로 이용해 설득만을 위한 논의를 전개하는 경우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크리톤≫과 같은 플라톤의 초기대화편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웨이스의 해석에서는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단절적으로 보는데 이것도 적절한 이해로 보이지 않는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소크라테스가 전반부에서 정의의 원칙에 관한 논의를 한 후에 후반부에서 그 원칙들에 근거해서 탈옥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관계를 웨이스처럼 단절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연속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런 해석들 사이에도 큰 관점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가 시민불복종의 옹호자로서 일관된 모습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선 소크라테스를 시민불복종을 부정하는 철학자로 보는 해석부터 검토해보기로 한다.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크리톤≫의 전반부에 나오는 정의의 원칙도 ≪변론≫의 두 예도 시민불복종의 예가 아니라고 본다. 그들은 특히 정의의 원칙을 철저한 준법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하기까지 한다. 이런 해석은 일단 수긍이 잘 안 간다. 왜냐하면 “결코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해선 안 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결국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하는 셈이 되니 말이다.

그러나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소크라테스가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정의롭지 못한 짓이 아니라 정의로운 일로 보았다고 해석한다. 법이 정의롭지 못하더라도 준법 자체는 정의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 다 철저한 준법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두 부분 사이에 상충되는 점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준법 자체를 정의로운 것으로 보고, 그래서 정의롭지 못한 법에 복종하는 것까지 정의로운 것으로 보았다는 그들의 해석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변론≫의 두 예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적법하게 내려진 명령이라 하더라도 정의롭지 못한 명령에는 단호히 불복종할 의지를 갖고 있으며 실제로 불복종 행위를 할 철학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 1권의 논의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코스에게 “그러나 그들(통치자들)이 제정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스림을 받는 이들로서는 이행해야만 하고, 또한 이게 정의로운 것이겠군요?”하고 묻는다. 이 물음은 옳게 제정되지 못한 법, 곧 정의롭지 못한 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지를 묻는 것인데, 논의 맥락을 볼 때 소크라테스는 이 물음에 대해 부정적 답을 갖고 있다.

즉 정의롭지 못한 법에 복종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의롭지 않은 것이라면 그로서는 불복종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 된다. 그러니까 ≪변론≫과 ≪국가≫의 예들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면 ≪크리톤≫의 정의의 원칙도 시민불복종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그러면 브릭하우스나 스미스와 달리 소크라테스를 시민불복종의 옹호자로 보고, 웨이스와 달리 ≪크리톤≫의 전후반의 논의에 단절이 없다고 볼 때 이 대화편의 후반부는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크라우트는 ≪크리톤≫의 후반부에서 준법을 가장 강력하게 강조한 부분(50c-51c)이 “나라와 조국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행(복종)하거나, 아니면 정의로운 것이 본래 어떠한지에 대해 나라를 설득해야 한다”(51b-c)는 결론에 이르고 있음을 중시한다. 설득이라는 선택지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법에 대한 불복종의 여지를 남기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전반부에서 언급된 또 하나의 정의의 원칙, 즉 “합의한 것들은 이행해야 한다. 그것들이 정의로운 한에서.”란 원칙도 중시한다. ‘그것들이 정의로운 한에서’라는 단서는 불복종의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다. 크라우트의 견해는 주목할 만한 견해이긴 하나 그와 관련해 많은 논란이 있어서 여기서는 그 논의로 들어가는 것은 생략하고, 그 대신 기존의 해석과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기로 한다.

≪크리톤≫의 후반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가 “신이든 인간이든 더 훌륭한 자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나쁘고 수치스런 것이라는 점을 나는 알고 있다”(≪변론≫ 29b)는 말을 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인용문에서 더 훌륭한 자에는 신과 인간에 더하여 법률이나 국가도 포함될 수 있을 텐데, 이들의 명령들이 서로 상충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분명 소크라테스는 더 상위의 훌륭한 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그는 ≪변론≫에선 재판과정에서 철학할 것을 지시한 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철학을 금하는 법적 명령(배심원들의 명령)에 따를 것인가의 기로에서, 그는 주저 없이 법적 명령에 불복종하고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쪽을 택하고자 했다. 여기서 신의 명령이란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언급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을 위해 법적 명령에 불복하고자 했다기보다, 철학함이라는 보편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을 위해 그렇게 했다.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을 단순히 철학하는 일보다는 비판적 사고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 차원으로 확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크리톤≫에서는 법이나 국가의 명령과 상충되는 신의 명령이 상정되어 있지 않다. 이 대화편의 후반부를 이해할 때 이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는 국가나 법의 명령이 무엇이든 그것에 복종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법의 명령과 신의 명령이 상충되는 경우에도 오직 법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크리톤≫에서는 국가나 법의 명령과 상충되는 신의 명령이 상정될 상황이 아니어서 준법이 강조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크리톤≫에서는 왜 신의 명령이 상정되지 않은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크리톤≫의 상황은 ≪변론≫의 상황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이미 재판에서 그는 국가의 법적 명령에 복종하기보다는 철학하라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했고, 몇 번을 죽게 된다 하더라도 철학을 그만둘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이는 그가 사형에 처해진다 해도 철학을 그만둘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며, 그 결과 그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는 사형 대신 해외 추방형을 택할 수도 있었고, 이는 당시 아테네 사람들도 원했던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거부했다. 추방되어 신의 명령대로 철학하는 일이 더 이상 가능한 상황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변론≫37c-38b).―≪크리톤≫에서는 탈옥해서 다른 나라로 갈 경우 철학하며 지낼 수 없으리라는 이야기가 나온다―그러니 이제 그에게 남은 길은 법정의 사형선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친구인 크리톤이 탈옥을 권유하지만,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혹 탈옥이 신의 뜻이라고 그가 생각했다면 ≪크리톤≫에서도 법의 명령과 상충되는 신의 명령(탈옥하라는 명령)이 상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명령이 상정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탈옥이 신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이 점은 이 대화편의 마지막 구절에서 확인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신께서 이렇게 인도하시니, 그대로 하세나.”라는 말로 탈옥 반대 논변을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시민불복종론에서 본 소크라테스의 탈옥 문제

끝으로 오늘날의 시민불복종론에 입각해보다면,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거부하고 독배를 든 것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롤즈가 시민불복종의 요건으로 거론하는 것을 정리해보면, 불복종은 공개적, 비폭력적, 양심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불복종자는 처벌을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소크라테스는 시민불복종의 요건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롤즈가 말하는 요건들은 당연히 수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요건들은 소크라테스의 행위를 이해하는 데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변론≫에서 보는 재판 상황에서 그가 한 이야기에 따를 경우, 법정이 그를 석방시켜주되 철학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면, 그는 그 명령에 불복종했을 것이다. 우선 그는 불복종행위로서 철학하는 일을 일반범죄자처럼 은밀하게 하지 않고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했을 것이고, 처벌을 피하고자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불복종의 자세는 레온에 대한 부당한 체포 명령과 관련해서 그가 실제로 보여주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변론≫의 두 예를 보면 소크라테스는 시민불복종의 요건들에 맞게 불복종 행위를 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한 철학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옳지 않은 법적 명령에도 복종해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점은 ≪크리톤≫에서 보게 된다. 거기서 그는 사형 판결이 정의롭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50c, 54c), 탈옥을 거부하고 그 판결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탈옥을 거부한 것을 시민불복종의 요건들에 비춰서 검토해 보자. 그 요건들에 비춰볼 때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 감옥에 있던 소크라테스가 법정의 판결에 불복종하고 탈옥을 했다면 그것은 시민불복종이라고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선 그 일은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해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교도관에게 뇌물을 써서 감옥을 나오고 변장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양심적인 것으로 보기도 힘들뿐더러, 그렇게 탈옥하는 그에게는 처벌을 받으려는 의지가 있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탈옥해 해외로 간다는 것은 아테네 법정에서 내리는 일체의 법적 처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탈옥했다면 그는 일반 범죄자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고, 시민불복종자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가 법정의 사형판결에 불복종하여 탈옥을 감행하지 않은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올바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롭지 못한 판결에 복종하여 독배를 들고 탈옥을 거부했다고 해서 그를 시민불복종의 옹호자가 아니라고 본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그는 분명 시민불복종의 선구라 할 수 있다. 다만 롤즈도 그랬듯이 그는 시민불복종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기백(정암학당 연구원) /

항우는 왜 강을 건너지 않았을까[고전은 숨쉰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조선시대 김종직(金宗直)이 세조찬위를 풍자하여 쓴 글이다.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이란 뜻으로 서초패왕 항우(項羽)를 세조에, 의제(義帝)를 노산군(魯山君)에 비유해 세조찬위를 비난한 내용이다. 이 글 때문에 김일손 등 많은 사림들이 죽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되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의 역린(逆鱗)을 잘못 건드리면 지식인은 화를 당하거나 알량한 생계를 잃게 되고 민간인은 불법사찰을 받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싶다.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했던 항우가 해하(垓下)에서 한나라 군사의 포위망에 갇힌다. 이때 한나라 병사들은 초나라 병사들을 항복시키려고 그들 진영을 향해 초나라 민요를 연주한다. 이것이 사면초가(四面楚歌)다. 이에 항우는 홀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포위망을 뚫고 말을 달려간다.

항우가 오강(烏江)에 이르렀을 때 오강의 정장(亭長)은 강동이 비록 작은 땅이지만 오강을 건너가 그곳 왕이 되어 후일을 기약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항우는 하늘이 망하게 하는데 강을 건너가면 무엇 하며 수많은 젊은이를 죽게 했는데 그들의 부모형제를 볼 면목이 있겠느냐며 웃으며 거절한다.

항우는 정장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사랑하는 말 추(?)를 주고 혼자서 한나라 군사 수백 명과 싸우지만 역부족이다. 그는 자신의 시체를 천금만호로 사려는 유방에게 팔라며 시혜를 베풀 듯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다.

영웅인가 고집불통인가

진리는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이란 더욱 그러해서 그 주위만 뱅뱅 맴돌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근거한 진실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항우의 최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오강을 건너가 살 수 있었음에도 건너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것에 대한 평가는 서로 엇갈린다. 영웅으로 칭송하는 이도 있고 안타까워하는 이도 있다. 송나라 여류시인 이청조(李淸照)는 이런 시를 썼다.

살아서도 사람 중에 호걸이더니(生前做人杰)
죽어서도 귀신 중에 영웅이구나(死亦爲鬼雄)
지금까지 항우를 그리워함은(至今思項羽)
강동을 건너가길 마다했기 때문이라네.(不肯過江東)

항우는 명문가 출신으로 자부심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망에 넘쳤던 사람이었다. 진시황의 순행 행렬을 보고 “저것을 빼앗아 대신할 만하다.”라고 외칠 정도였다. 그게 지나쳐 자만으로 흘러 휘하의 인재들을 의심하여 잔혹하고 비정한 짓들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유방(劉邦)은 너그럽고 인재를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모택동은 “항우는 정치가가 아니다. 유방이 고단수의 정치가이다.”고 평했으며, 항우가 사면초가를 당하여 지은 ‘해하가(垓下歌)’ 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내는 다른 의견을 듣지 않는다.” 고집불통이란 말이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이런 고집불통을 못내 안타까워한다.

?제오강정(題烏江亭)?의 마지막 구절이다.

승패는 병가로서도 기약할 수 없으니(勝敗兵家事不期)
수치를 감싸고 견디는 것이 사내인 것을(包羞忍恥是男兒)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江東子弟多才俊)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왔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捲土重來未可知)

두목은 개인적인 수치를 감내하고서 권토중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진정한 남아(男兒)이지 못했던 항우를 탓하고 있다. 무엇이 이청조와 두목, 두 사람의 시선을 갈라놓았을까. 왜 항우는 오강을 건너지 않았을까.

항우가 죽기 전에 우희 앞에서 노래했던 ‘해하가’를 보자.

힘은 산을 뽑고도 남음이 있었고 기백은 천하를 덮었노라!(力拔山兮氣蓋世)
때가 불리한데 오추마마저 달리지 않는구나!(時不利兮?不逝)
오추마야 너마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 수 있겠는가!(?不逝兮可奈何)
우희야, 우희야, 너를 어찌한단 말이냐!(虞兮虞兮奈若何)

항우는 ‘어찌할 수 있겠는가(可奈何)’라고 말한다.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장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마음을 섬기는 자는 눈앞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정의 요동이 없이 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서 운명처럼 편안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최고의 덕이다.”(自事其心者, 哀樂不易施乎前, 知其不可奈何而安之若命, 德之至也.)

장자가 말하는 ‘어찌할 수 없음’(其不可奈何)은 항우의 표현과 동일하며 이 말은 ‘부득이(不得已)’함을 말한다. 이 어찌할 수 없음을 명증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장자는 최고의 덕이라 평한다. 항우가 오강을 건너지 않은 이유를 먼저 이 말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부득이함의 결단

『주역』을 철학적으로 해석한 정이천은 이 문헌을 ‘결의(決疑)’라는 말로 규정한다. ‘의심을 결단한다.’는 뜻이다. “고대인들이 점을 친 것은 의심을 결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지금 점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자기 운명이 잘 될 것인지 못 될 것인지를 헤아리고 자신이 잘 살 것인지 못 살 것인지를 살피려고만 드니, 어찌 미혹된 것이 아니겠는가.” 현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이청조는 왜 항우를 영웅시했을까. 『주역』에는 ‘결단’에 대한 괘가 있다. 쾌(?)괘이다. 쾌괘는 둑이 무너져 물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으로 이미지화된다. 쾌괘 바로 앞의 괘가 익괘(益卦)인데, 가득 찬다는 뜻이다. 물이 둑에 가득 차면 어찌되는가. 둑이 무너져 내린다. 가득 참이 극에 이르면 둑이 무너져 내리듯 결단을 내린 후에 ‘그친다.’ 여기서 쾌(?)와 결(決)과 쾌(快)의 문자적 유사성에 주목하자. 쾌(?)괘란 결(決)단으로 멈추니 마음이 쾌(快)적하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결단을 내린 후에 그친다고 했는데 이 ‘멈춤’에 관한 괘가 간괘(艮卦)다. 간괘란 멈춰야만 할 때 멈추는 모습을 상징한다.

이형기의 ‘낙화’라는 시의 첫구절은 이렇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야할 때를 알고 등을 돌리는 모습, 이것이 간괘가 상징하는 가장 적절한 모습이다. 이청조가 항우를 영웅으로 평가하는 이유를 이 괘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멈춤’을 상징하는 간괘에 달린 괘사(卦辭)는 이렇다.

“그 등에 멈추어 그 몸을 보지 않는다. 정원에 가더라도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허물이 없다.(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

정이천은 ‘등을 지고 몸을 보지 않는 것’을 자기에게 ‘합당한 몫’[分, moira]에 편안한 마음으로 멈추는 것으로 해석한다. ‘순리이합의’(順理而合義)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자연적 필연성에 따라서 이해관계나 개인적인 욕망과 무관하게 자신에게 합당한 몫으로서의 올바름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후회도 분노도 원망도 아쉬움도 없다. 주어진 몫이 해로운 것이든 이로운 것이든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복종한다.

그래서 마음이 ‘안중견실(安重堅實)’하다고 정이천은 해석한다. 마음이 ‘편안(安)’하고 ‘진중(重)’하며 ‘견(堅)고’하고 ‘진실(實)’하다는 말이다. 쾌괘에서 말했던 결(決)단하여 마음이 쾌(快)적하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항우는 마지막 순간에 왜 자살이라는 결단을 했을까. 항우는 마지막 순간 서초패왕이라고 착각했던 어리석음과 오만을 깨닫고서 권력을 향한 자신의 욕망이 자초한 모든 결과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스스로 자초한 결과에 대한 명증한 이해를 통해 그것이 자신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어찌할 수 없음을 자신에게 ‘합당한 몫’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항우는 자살하는 순간에 이 ‘어찌할 수 없음’에 직면했고 부득이한 필연성을 결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단은 이것보다는 차라리 저것을, 나쁜 이것보다는 더 좋은 저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부득이한 필연성에 ‘복종’하는 것이다. 항우는 오강을 건널 수 있었는데도 건너지 않았던 것은 강동으로 갔을 때의 이해(利害) 관계를 따져보고 나서 보다 더 좋은 것을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오직 그것만을 할 수밖에 없는 그 필연성을 따랐을 뿐이다. 이청조가 그리워했던 영웅의 모습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항우의 광기

그러나 항우는 그 순간 마음이 편안하고 쾌적했을까. 두목은 왜 항우를 안타깝게 생각했는가. 『주역』에는 또한 대장(大壯)괘가 있다. 굳센 양(陽)의 힘이 강성하게 성장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항우의 삶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이 괘의 마지막 상육(上六)은 무모한 돌진을 경계하고 있다. 마지막 효(爻)는 이렇게 묘사한다.

“숫양이 울타리를 들이받아 물러날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다. 좋을 것이 없다. 어려움을 알고 신중하면 길하다.(?羊觸藩, 不能退, 不能遂, 无攸利, 艱則吉.)”

진퇴양난이다. 항우가 왕성한 힘을 펼치며 파죽지세로 나가다가 사면초가를 당한 형세와 유사한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대장괘의 ?상전(象傳)?에서는 이런 형국에 이르게 된 원인을 ‘주도면밀하고 신중한 헤아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진퇴양난에 몰렸을 경우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물러서야 한다. 그래서 ‘어려움을 알고 신중하면 길하다’ 했던 것이다.

항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오강을 건너 스스로 자초한 추악한 결과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루고 다시 후일을 신중하게 도모했어야 했던 것이다. 두목의 생각과 유사하다.

그러나 왜 신중하게 헤아리지 못했을까. 정이천은 이렇게 해석한다. “자질이 나약해서 자신을 이기고 의로움을 취할 수가 없기 때문에 물러서지도 못하고, 용감하게 나가려는 욕망에만 차 있지만 나약하기 때문에 결국 좌절하고 위축되어 나가지도 못한다.” 정이천의 해석에 의하면 나약했기 때문이다. ‘수치를 감싸고 견디’며 물러날 수 있는 신중한 용기는 ‘역발산기개세’를 과시하며 수 백 명의 군사와 싸우려는 무모한 광기와는 다르다. 두목은 이런 광기에서 그의 나약함을 보았던 것이다.

스스로 서초패왕이라고 생각했던 항우의 오만은 뜻하지 않았던 어려움에 직면해서 좌절했고 서초패왕이라는 믿음에 의심의 균열이 일어났다. 그렇게 자신의 나약함에 무의식적으로 직면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약한 주체는 자신이 나약하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려는 과장된 행위를 하게 된다. 자신의 시체를 시혜를 베풀 듯이 유방에게 팔라고 소리치며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던 것은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려는 과장된 행위가 아닌가.

스스로를 처벌하듯이 자살하는 것이 항우의 진실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나약함에 직면하여 그것을 부정하려는 광기가 항우의 진실이었을까. 나는 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처벌할 수밖에 없어서 그 부득이함에 따르고야 마는 행위는 자신에 대한 매저키스트적 복종으로서 자기를 학대하는 사디스트적 폭력이며,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나약한 주체가 자신을 버린 하늘에 대해 분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용맹을 세상에 과시하는 사디스트적 광기는 자신의 시체를 시혜 베풀어주듯이 포기하는 메저키스트적 절망이다.

자기 학대와 자기 포기가 곧 자포자기(自暴自棄)다. 결국 사도매저키즘적인 잔혹극이 바로 항우의 마지막이 아닐까.

심의용(서울예대 강사) /

영웅들 간의 경쟁, 어떻게 볼 것인가?[고전은 숨쉰다]

*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대한 두 번째 소개글입니다. 수많은 서양 고전학자들의 이름을 따로 밝히지 않았지만, 그들의 논쟁을 배경으로 접근했습니다.(필자)

우리 시대의 화두, ‘경쟁’

‘경쟁’은 한국 사회의 화두이다. 입시 경쟁, 취업 경쟁, 하다못해 유치원 입학 경쟁까지. 아니 한국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분유를 먹느냐를 가지고 경쟁해야 하며 죽고 나서는 어떤 식의 장례를 치루고 어느 곳에 묻히느냐까지도 경쟁해야 한다. (죽고 나서도 경쟁해야 한다니 이처럼 어이없는 일이 또 있겠는가!) 그리고 이 같은 경쟁문화 속에서 한국인들이 극심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진단이다. 며칠 전 이런 문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씁쓸한 기사가 떴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7월 9일자 아시아판에서 ‘한국인들은 경쟁심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 같은 경쟁심이 한국의 경제 성장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 같은 경쟁심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는 것이 [이코노미스트]의 진단이다. 이 기사는 故 박용하 씨의 자살을 다루고 있는데, 기사 제목은 ‘한국의 자살: 출구 전략’이었다. 이 제목은 삶의 출구 전략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인의 자살율은 OECD 국가 중 최고이다.)

한국 ‘사회’의 자살율이 높다는 것에 대해 흔히 이루어지는 분석은 이렇다. ‘한국은 극심한 생존 경쟁 사회이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로 몰아가게 하고 있다.’ 뭔가 꽤나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는, 가장 안 좋은 형태의 사회학적 설명이다.(실질적으로는 자유로운 개인의 동기가 배제된 ‘추상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요즘 자살하는 한국인들이 생존 경쟁에 졌기 때문에 자살한 것일까? 이런 설명이 타당하려면 자살자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 모두가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가 ‘오로지’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이 물음을 예비적인 실마리로 삼아 『일리아스』와 관련된 논란을 다루어보도록 하자.

제로-섬 게임인가?

알다시피 생존 경쟁 사회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설명 논리 가운데 하나가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다. 게임 참여자들의 이익과 손실은 정확히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누군가가 이익을 보면 다른 누군가는 손실을 볼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꽤 이름 있는 서양 고전학자들이 호메로스 사회를 제로-섬 모델로 설명하려 한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애드킨스(Adkins)이다.

애드킨스의 접근은 좀 더 거시적인 시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호메로스 사회에서는 경쟁적(competitive) 가치가 연합적(co-operative) 가치를 압도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흔히 고대 희랍을 ‘경쟁(ag?n) 문화’로 간주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런 해석은 언뜻 보기에 자연스러워 보인다. 어쨌든 호메로스 영웅들은 명예(tim?)를 두고 경쟁하는데(이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 제로-섬 모델을 적용하면, 자기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경우는 타인을 모욕(불명예)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명예는 공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배타적이다. 이런 점에서 애드킨스가 왜 호메로스 사회를 경쟁적 가치 체계가 지배했다고 보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일리아스』I권에서 아가멤논은 원래 아킬레우스에게 ‘명예의 선물’(geras)로 주어진 어여쁜 색시 브리세이스를 빼앗음으로써 아킬레우스를 모욕한다. 사실 『일리아스』에서 명예에는 대개의 경우 물질적 보상(geras)이 주어진다. 애드킨스는 이 점에 주목해서 호메로스적 영웅들이 추구한 명예가 근본적으로 소유지향적(possessive)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호메로스 사회를 ‘결과 문화’(result-culture)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여기에 제로-섬 모델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은 설명 구도가 된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는 물질적 보상으로 주어지는 명예를 소유하려고 배타적인 경쟁 관계에 서 있다. 그리고 영웅들에게는 행위의 의도와 방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과만이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이런 애드킨스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건 너무도 자연스런 귀결이라 할 것이다. “트라쉬마코스를 긁어라. 그러면 아가멤논 왕을 볼 수 있을 것이다.”(Adkins,A.W.H.,Merit and Responsibility,1960.)

트라쉬마코스라는 인물이 플라톤의『국가』I권에서 이기주의적 결과주의자로 제시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애드킨스도 호메로스 영웅들을 어느 정도 그렇게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호메로스 영웅들은 트라쉬마코스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꽤 복잡하긴 했지만, 애드킨스의 설명을 듣다보면 홉스가 연상되지 않는가? 영웅들 간의 관계는 배타적이다. 그들은 공유할 수 없는 명예를 서로 빼앗아서 자기가 소유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때의 명예에는 ‘언제나’ 물질적 보상이 주어진다. 이에 따르면 호메로스 영웅들은 명예라는 결과를 얻으려고 배타적으로 경쟁하는 이기적 존재이다. (애드킨스가 명시적으로 ‘이기적 존재’라는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때의 명예는 소유되는 물건과 같은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최근에 여러 학자들이 밝혔듯이 『일리아스』는 이런 설명에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우선 호메로스 영웅들에게 명예는 소유되는 물건과 같은 것이 아님에 틀림이 없다. IX권에서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빼앗았던 브리세이스를 포함해 엄청한 보상과 함께 자기 딸까지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아킬레우스는 “모래나 먼지만큼 많은 선물을 준다 해도 마음 아프게 하는 모욕의 대가를 다 치르기 전에는 아가멤논은 결코 내 마음을 설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IX.385-387) 만일 아킬레우스가 소유지향적인 존재였다면 그 많은 보상을 거부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못 이기는 척하면서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아킬레우스가 왜 거부하는가는 역설적으로 아가멤논이 선물을 제시하는 연설 대목을 보면 알 수 있다.(IX.157-161) 그는 자신의 선물 증여를 아킬레우스의 양보 및 굴복과 연관 짓고 있다. 아가멤논은 자신이 선물을 줌으로써 ‘그만큼 더 위대한 왕’이 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아가멤논의 발언을 보면 그 또한 소유지향적 인물이 아니다.

일찍이 모스(Mauss)가 해명했듯이 호메로스 사회는 선물-경제(gift-economy)가 지배하던 사회였다.(마르셀 모스(이상률 옮김),『증여론』,2002) 달리 말하면 소유 사회가 아니라 소비 사회이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선물을 준 사람에게 모종의 부담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선물은 소유의 측면에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선물을 교환함으로써 성립되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아가멤논의 경우는 선물을 줌으로써 왕으로서의 자기 권위를 확립하려 하고, 아킬레우스는 그것을 알기에 선물을 거부한다. 이런 점에서 호메로스 영웅들은 트라쉬마코스와 같은 존재가 결코 아니다.

명예, 그리고 영웅들 간의 경쟁

애드킨스의 다른 견해는 틀렸다 해도 영웅들이 명예를 놓고 경쟁한다는 지적만큼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웅사회의 명예란 도대체 어떤 가치로 봐야 할까? 우선 주목할 만한 건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다툼 속에서 ‘분노, 모욕’ 등의 심리적 용어가 수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킬레우스에게는 물건을 빼앗겼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의 위신이 깎이고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자존심이 손상 받은 것에 대해 상대를 모욕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를테면 개같이 파렴치한 자!)

다른 한편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분노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뒷전에 처져 있는 자나 열심히 싸우는 자나 똑같은 몫을 받고 비겁한 자나 용감한 자나 똑같은 명예를 누리고 있소.”(IX.318-319) 이 대목을 보면 아킬레우스는 명예(tim?)를 소유 차원이 아니라 분배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 같은 분배란 공동체의 터전을 전제하지 않고는 논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과의 다툼을 개인적 다툼으로 환원하지 않고 공동체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건 다음을 통해서 훨씬 더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아무런 명예도 없는 재류외인(在留外人)인 양 아트레우스의 아들[=아가멤논]이 아르고스인들 앞에서 내게 무례하게 대하던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화가 치민다오.”(IX.646-8)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불명예를 안은 것을 재류외인 취급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재류외인은 실질적으로는 공동체 밖의 존재이다. 이것은 역으로 명예가 공동체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 달리 말해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음에도 그에 적합한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했음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메로스 영웅들 간의 다툼은 자기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공동체 속에서 벌이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인 것이다!

경쟁의 파국에 대한 시인의 답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영웅들 간의 경쟁은 배타적인 생존 경쟁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기 위해 투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한 동안 모욕감에 치를 떨며 전쟁터에 아예 안 나간다. 그 결과 희랍연합군은 연전연패하게 된다. 『일리아스』는 왜곡된 인정투쟁이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후대의 희랍에서 클레이스테네스나 알키비아데스 같은 이들은 공동체에서 자신들이 인정을 받지 못하자 조국을 배반하고 적국의 품에 안기기까지 하는데, 이런 사례들은 영웅주의적 가치가 가지는 위험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드러내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리아스』의 시인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까지 답변을 제시해놓고 있는 것 같다. 『일리아스』는 인정투쟁 맥락에서 영웅들 간의 다툼을 드러내며 그것이 분노(m?nis)를 통해 파국을 향해 치닫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결국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라는 계기를 통해 전장으로 돌아와 헥토르를 죽이지만, 다툼의 근원적 문제가 그로써 해결되는 것도 아니며 분노 역시 해소되지 않는다.

XXIII권은 파트로클로스의 추모경기를 다루고 있다. 그를 추모하는 전차 경주를 아킬레우스가 주도한다. 아가멤논은 뒷전으로 물러나 나타나지를 못한다. (세부적인 논란거리는 생략하고 말하자면) 이때의 경기는 배타적인 경쟁이 아니다. 일종의 페어플레이 정신에 의해 주도되는 경쟁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경쟁자들은 상대자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지만, 이것은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이길 수 있는 생존 경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경기는 페어플레이 규칙을 통해 일종의 정의(dik?)의 정신을 실현하고 있다. (자본화된 현대 스포츠는 이 범주 밖에 놓여 있다.) 이 모델은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적 인정 방식을 보여주는 모델이다. 1등, 2등, 3등의 순위는 나뉘지만 서로 피를 튀기며 죽이는 관계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들은 경기가 끝난 뒤 공동체적 우애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플라톤의 경우는 ‘경쟁’(ag?n)을 두 가지로 구별한다. 적대적 경쟁은 ‘mach?’라고 하고 경쟁자들이 공존할 수 있는 경쟁(contest)은 ‘hamilla’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사가 규칙(과 같은 제도)의 차원에서 전부 해결을 볼 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이 사람을 인정하는 관계는 실질적으로는 인격적 관계에 의해 맺어질 때만 구체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소개글에서 이야기했듯이, XXIV권에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와 화해한다. 화해의 근원은 연민(eleos)의 정서이다. 『일리아스』의 시인은 인간의 인격적 관계가 인간에게 근원적인 고통을 보듬을 때 가능하다고 본 것이 아닐까.

되새김해보는 우리의 삶

지금까지의 설명을 고려할 때 서양 고전학자들이 같은 텍스트를 보고도 어떻게 그렇게 달리 볼 수 있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이런 사례를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사태를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가 사태를 밝히느냐 은폐하느냐를 결정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자본주의자들은 생존경쟁의 논리를 가지고 세상을 설명한다. 그런데 역으로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폐해를 지적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비슷한 진단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물론 모두 다 그렇다는 건 결코 아니다.) 한쪽은 경쟁을 무조건 좋게 보고, 한쪽은 경쟁을 무조건 나쁘게 볼 뿐이다. 그렇지만 시장주의적 경쟁 논리가 현실을 지배하는 실질적 메카니즘이라고 본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시각 차이가 없다.

그러나 앞에서 물었듯이 우리 모두는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경쟁하고 있는가? 내 판단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생존에서 도태되었기에 자살했다는 식의 사회학적 설명은 영혼을 가지고 고민하는 개개인을 모욕한다. 겉으로 보면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자살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따지고 보면 복잡한 동기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대개의 경우는 먹고 살 수 없어서가 아니라 더는 살아갈 영혼의 힘을 잃었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다. 세상살이에서 자기를 유지할 힘, 자존의 힘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같은 자존의 힘을 파괴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까닭은 우리네 공동체가 사람의 영혼을 모욕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양상은 시장주의적 경쟁 논리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모욕 사회이다. 국가가 시민을 모욕할 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서로를 너무나 쉽게 모욕하는 경향이 있다. 모욕하는 행위는 자기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부정적으로 발출된 것이다. 그만큼 자기를 지키기 어려운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시장주의는 배타적인 경쟁 관계가 인간의 모든 영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설명한다. 그러나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맞다면 경제주의자들의 시장논리는 허구이다. 시장주의자에 따르면 교환 속에서 궁극적인 기준은 상품이란 물건이다. 그런데 상품이 교환의 기준이라면 교환을 하는 자들은 서로 타산적 관계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에게 타산적 갈등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해 괴로워하고 그래서 때로는 타인을 모욕하기도 한다. 이러한 고통은 인간에게는 근원적인 존재론적 고통이 아닐까. 왜냐하면 나의 영혼은 타인과 대화하고 타인과 사랑하며 또 서로 인정받기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우리는 물건이 아니다. 삶의 그 같은 실질적 차원을 보지 못하게 하고 은폐시키는 것, 그 원인 중의 원인은 시장주의 논리 아닐까.

결국 물건에 종속되는 물화(物化)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상호간의 인격적 인정이 공동체 차원으로 확대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각박한 현실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마 ‘인정’은 제도의 문제와 교차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넘는 영역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정준영(정암학당 연구원) /

시적 상상력으로 읽는『주역』[고전은 숨쉰다]

의리역학자들이 해석하는 『주역』에 대해서 세 번에 걸쳐 소개하려 합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괘들의 내용을 구체적인 현실과 연결해서 이해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필자)

어젯밤 바람에 우물가 복사꽃 피고(昨夜風開露井桃)
미앙궁 위 둥근달은 높기만 하네(未央前殿月輪高)
평양 애첩 춤과 노래로 새로운 총애를 받고(平陽歌舞新承寵)
주렴 밖 봄기운 차갑기만 한데 면포를 하사하시는구나(廉外春寒賜錦袍)

당나라 시인 왕창령(王昌齡, 698~755)의 춘궁곡(春宮曲)이다. 이 시를 궁녀들의 마음을 노래한 궁사(宮詞)나 사랑하는 이에게 이별을 당한 여자의 원한을 노래한 규원(閨怨)으로 흔히들 해석하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왕창령은 어떤 사람인가. 일찍이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지만 소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좌천되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실은 조정의 거짓과 허위에 적응하지 못하고 직언했다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한 인물로서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했다가 그에게 앙심을 품은 자사(刺史)인 여구효(閭丘曉)에게 피살당했다고 한다.

이 시에서 주목할 단어는 마지막 구절 ‘차갑다’는 ‘한’(寒)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 대한 원한과 더불어 춤과 노래로 왕의 총애를 받고 면포까지 하사받는 애첩에 대한 질투가 묻어 있는 서늘한 한기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궁궐 내 궁녀들의 심리만을 표현했을 뿐일까. 궁궐 내부의 최고의 남자란 누구인가. 군주다. 그를 둘러싸고 총애를 얻으려 애쓰는 여인네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신하들과 사대부들이다.

미앙궁 높이 떠 있던 달은 누구를 상징할까. 군주가 양(陽)이라면 신하는 음(陰)이 아니겠는가. 양은 해요 음은 달이다. 해가 사라진 어둠 속에 높이 떠 있는 달이란 지조 높은 신하를 말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궁궐 안 최고의 남자인 군주와 그를 향한 여자들인 신하들의 ‘애정 게임’에 관한 이야기이다.

점역(占易)에서 학역(學易)으로

먼저 『주역』에 나오는 한 구절을 소개한다. 몽괘(蒙卦)에 나온 말이다. “내가 어린아이의 어리석음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의 어리석음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다.(匪我求童蒙, 童蒙求我)” 정이천은 이 구절을 군주가 예의와 공경을 다해 신하를 찾아오는 모습으로 해석한다. 신하의 오만함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애첩을 거느리고 춤과 노래에 빠져 있는 어리석은 군주에게 질투와 원한에 빠져 원망할 필요도 없고 사랑을 구걸할 필요 없다. 아쉬움 없이 뒤돌아서는 것이 좋다. 왜 그런가. 천하를 다스리는 일을 함께 할 군주가 도(道)를 진정으로 즐길 수 없다면 함께 정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궁합이 맞지 않는 것이다. ‘애정 게임’의 첫 번째 원칙은? 사랑은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청춘 남녀들은 궁합을 보러 점(占)집에 간다. 군주와 신하 사이의 궁합은 어떠할까. 궁합(宮合)이란 별자리와 관련된다. 원래 점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별자리와 관련되었다. 점성술(Astrology)은 천체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전제로 하며 현대 과학으로서의 천문학(Astronomy)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어에서 공통적으로 들어간 ‘애스트로우(astro)’라는 말이 바로 별과 관련된 말이다.

우리는 왜 점집을 찾아 나서는 것인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어떤 지향점을 알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어두운 밤길과 바닷길을 가본 자라면 아주 미세한 별빛일지라도 운명의 길잡이가 되기에는 족하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어두운 밤의 뱃길에 별빛은 ‘지향점으로서의 방향’이다.

『주역』도 점과 관련된 문헌이었다. 역학사(易學史)에서 역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된다. 하나는 ‘점역’ 혹은 상수역(象數易)이고, 다른 하나는 ‘학역’ 혹은 의리역(義理易)이다. 점치는 것과 관련된 상수역의 중요한 문제는 ‘우주 운행의 변화’이고, 의리역은 ‘인간과 역사의 변화’이다.

상수역이란 현대적 의미로 말하면 우주적 질서를 객관적으로 체계화하여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는 점에서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관찰과 예측은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관심보다는 국가의 통치 방식과 관련된 문제였고, 동시에 왕권을 견제하는 작용을 했다.

하지만 『주역』의 원리가 제 아무리 신비하다고 할지라도 우주 운행의 원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주역』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점술가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서양의 현대 과학을 공부하는 것이 정확하고 빠른 길이다.

의리역이란 무엇인가. 한대 상수역의 번잡한 독해 방식을 일소한 사람이 바로 의리역의 효시라 칭하는 위진(魏晉) 시대의 왕필(王弼)이다. 왕필의 『주역』 해석 방식은 너무나도 유명한 “삶의 의미를 파악했다면 괘가 나타내는 상징은 잊어버려라[得意忘象].”는 말로 압축된다.

의미로 번역한 ‘의(意)’란 무엇인가. 뜻이다. 뜻에서 우러나오는 맛이 의미(意味)이며 그 의미의 지향이 의향(意向)이며 그 의미를 실현하고자 하는 숨은 전략이 의도(意圖)이며 그 의미를 실현하고자 하는 힘이 의지(意志)이다. 동아시아 문헌 가운데 역사적 경험의 누적 속에서 가장 많은 해석이 쌓여온 『주역』에서 읽어내야 할 것은 바로 그들이 겪었던 삶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왕필은 『주역』에서 우주론적인 체계나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 혹은 재난이나 자연의 이상 현상을 통해 인간의 삶을 예측하는 방법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괘상(卦象)이나 효상(爻象)을 하나의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으로, 괘사(卦辭)나 효사(爻辭)를 괘가 상징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적합한 행위를 할 것인가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읽었다. 그래서 『주역』은 현실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연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있는 문헌일 뿐이다.

이런 해석 방식을 이어받은 송대 의리역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는 실천적 지침서(practical guides)로 독해했다. 이런 해석 방식의 대표적인 인물이 정이천(程伊川)이다. 정이천에게 점이란 결정된 숙명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의미 혹은 의리(義理)를 실현해 내려는 정치 ‘행위(action)’를 위한 지침서였다.

『주역』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왕창령의 시에 나타난 정경을 그려보자. 미앙궁을 중심으로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해는 산 아래로 넘어가고 달만이 높이 떠 어둠을 밝히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어쩌면 왕창령은 소인들의 세력이 왕 주변에 몰려들어 총애를 받고 있음을 한탄하면서 변방 어딘가 주렴 안에서 술 한 잔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정경을 보면 『주역』의 명이괘(明夷卦)가 떠오른다. 지화명이(地火明夷)라고 한다. 땅을 상징하는 곤(坤)괘가 위에 있고 불을 상징하는 이(離)괘가 아래에 놓여 결합된 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이란 태양을 의미하여 곤이란 땅을 상징한다. 태양이 땅 아래 있으니 어둠이다. 명이괘의 괘사는 간단하다. “리간정(利艱貞)” 즉, “어려움을 알아 정치적 신념을 지키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간단한 말이지만 이 말에 대한 주석은 인간의 심리와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

정이천은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애정 게임의 첫 번째 원칙, 어리석은 남자에게 먼저 사랑을 구걸하지 말라. 그러나 그렇다고 냉소하거나 부정하지도 말라. 두 번째 원칙,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직시하라. 그 상황의 어려움을 알아야만 정치적 신념에 대한 ‘사랑’을 지킬 수 있다. 자신의 귀중한 사랑을 지키는 일은 냉소도, 부정도, 무모한 저항도 아니다. 현실적 정황(context)과 그 정황이 이를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현실주의적 태도를 견지할 때 다른 여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사랑을 ‘수비’할 수 있고,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다.

어떻게 수비할까. 괘의 모양에 그에 대한 암시가 있다. 명이괘를 구성하는 곤괘란 부드러움(弱), 이치에 따름(順)을 상징하고 이괘란 문양(文)에 대한 밝음(明)을 상징한다. 부드러운 여유가 좋다. 까칠하고 강직한 태도는 예상치 못한 저항과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문양에 밝다는 것은 현실적인 판세의 지형도에 대해서 잘 안다는 것이다. 이미 드러난 세력의 흐름에 무모하게 거역(逆)하지 말고 순리(順)대로 따르라는 것이다. 이런 순종은 굴종이 아니며 타협도 아니고 기회주의적 태도도 아니다. 정치적 신념을 견지하되, 그런 세력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과 무모하게 저항할 때 가져올 수 있는 예상치 못한 결과들을 신중하게 고려하며 준비하라는 말이다.

또 “그 밝음을 어둡게 감추라(晦其明)”고 하면서 이를 실천한 인물로 기자(箕子)를 들고 있다. 기자는 “자신의 지혜를 감춘” 인물로 주왕이 폭정을 행할 때 미친 척하여 위기를 넘겨 치욕을 감내하면서도 자신을 지킨 사람으로 평가된다. 감추라고 번역한 ‘회’(晦)는 그믐밤을 의미하기도 한다. 달이 너무 높이 떠올라 밝게 빛나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이천은 이 구절을 단지 자신의 안위를 지키라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 밝은 빛은 모든 것을 비춰 드러낸다. 물론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따지고 물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둠이 장악한 때 과도하게 고집을 부릴 경우 각박해진다. 각박해지면 스스로도 분노와 질시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 포용력과 관용이 부족하게 되며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의심과 거부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자신의 지혜로운 밝은 빛이 오히려 반감을 일으켜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정이천은 아무리 좋은 행위일지라도 그것이 가져올 정치적인 결과들에 주목하고 있다. 왕창령은 왜 죽임을 당했을까. 명이괘가 말하는 것은 ‘서늘한 한기’가 아니라, 부드러운 여유를 지니되 명확한 현실 인식을 견지한 냉정함이다.

이렇듯이 의리학자들이 해석한 『주역』의 괘들은 음과 양의 세력들이 길항하는 권력의 장이며 ‘애정 게임’이 벌어지는 무대이다. 무대의 배경은 조야(朝野)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권력의 중심인 조정(朝廷)으로서의 조(朝)와 권력의 변방인 광야(廣野) 혹은 민간(民間)으로서의 야(野)이다. 등장인물은? 군주와 신하 그리고 광야를 떠도는 사대부들과 그들과 함께 하는 백성들이다. 관객이면서 동시에 심판은? 하늘이다.

이들이 하늘 아래 땅에서 벌이는 게임은 권력을 중심으로 한 사랑의 소용돌이며 정치 세력이 흥망성쇠(興亡盛衰)와 굴신왕래(屈伸往來)를 거듭하는 변화의 장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의미를 느끼며 그들이 가진 의향과 의도와 의지를 독해해낼 수 있다.

그림 속의 시, 시 속의 그림

『주역』은 음양이 서로 섞이고 착종된 64개의 괘(卦)와 그에 붙어 있는 설명인 괘사(卦辭)로 구성되어 있다. 64개의 괘는 인간이 처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상징하고 있고, 괘사는 괘가 상징하는 상황에 대한 진단과 치료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각 괘에는 6개의 음양의 효(爻)와 그에 대한 설명인 효사(爻辭)가 달려 있다. 효는 전체 괘에서의 특수 상황을 상징하고 효사는 전체 괘가 상징하는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의 특수한 경우를 설명하고 특수한 충고를 암시한다.

괘사나 효사는 시처럼 모호하고 함축적인 상징과 말로 이루어져있다. 괘는 여섯 개의 효로 이루어져서 6획(劃)으로 구성된다. 획이란 화(畵), 즉 그림과 통한다. 그런 의미에서 6획으로 구성된 괘란 그림이고 그림에는 시(詩)가 담겨 있다. “시 속의 그림이요, 그림 속의 시이다.(詩中畵, 畵中詩)” 시를 읽는 것은 ‘언어 이면에 담긴 의미(言外之意)’를 이해하는 것이다.

괘에 담긴 상징들도 마찬가지다. 『주역』에 대한 철학적 해설서인 ?계사전(繫辭傳)?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문자는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書不盡言,言不盡意.)” 그래서 “성인은 괘효의 상징을 만들어 뜻을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했다.(聖人立象以盡意.)” 시 속의 그림이고 그림 속의 시라면, 문제는? 언어 이면에 담긴 성인이 드러내고자 한 의미이다.

정이천은 『주역』을 ‘결의(決疑)’, 즉 ‘의심의 결단’으로 설명한다. 개인은 항상 어떤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를 빌린다면 ‘괘상-안-존재’이다. 시세의 흐름으로서 어떤 상황에 처한 개인은 그 속에서 불안과 욕망과 유혹과 갈등에 처해 있다. 그럴 때 『주역』이란 자신의 진실과 욕망의 갈등을 파악하고 지향해야 할 방향을 결단하도록 하는 지침서로서 ‘정신분석학적인 윤리서’이다.

또한 정이천은 ‘진퇴존망(進退存亡)의 도리’가 담긴 문헌으로 『주역』을 규정한다. 진퇴란 권력의 중심부에 대한 나아가고 물러남을 의미한다. 존망이란 무엇일까.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자는 살아남고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順天者存 逆天者亡)” 그렇다면 『주역』은 권력이 길항하는 장의 흐름 속에서 정세 판단에 근거하여 하늘의 이치에 따라 자신이 위치해야할 시공간의 좌표를 결정하고 실천적 방향을 지향하는 ‘정치적 전략서’이다. 나는 이런 의리역의 관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주역』은 ‘실천적 지침서’이지만 단지 ‘시뮬레이션 게임’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궁극적으로는 버려져야할 책이다. 모든 ‘시뮬레이션 게임’이 다 그러하듯이 가상공간에서의 연습일 뿐이며 그 곳에서의 생생한 현실감은 주어진 착각일 뿐이다. 전투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용감한 군인일지라도 실제 전투에서는 겁쟁이가 될 수도 있다. 리얼한 현실은 다르다.

그러니, ‘시뮬레이션 게임’일랑 집어치워 버리고 어서 저 생사가 넘나드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애정 게임’에 오직 자신의 진실 하나를 견지하고 몰락하시길. 그곳에 진짜 살 떨리는 역(易)이 있으니.

심의용(서울예대 강사) /

죽음의 향연에서 꽃핀 인간의 위대함[고전은 숨쉰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고전은 숨쉰다]의 첫 번째 고전 비평으로 두 번에 걸쳐 소개합니다. 첫 번째 소개글은 영웅적 삶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두 번째 소개글은 영웅들 간의 경쟁에 관한 현대 연구자들의 논쟁을 소개하면서 『일리아스』가 왜 현대에도 유효한 논쟁의 장(場)이 될 수 있는가를 제시하려 합니다.(필자)

기독교 윤리와 희랍의 윤리

서양 문명의 대표적인 윤리 체계로는 기독교 윤리와 희랍의 덕윤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윤리, 특히 예수의 윤리는 용서를 통해 인간이 행한 일의 업과(ta opheil?mata)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발견한다. (‘ta opheil?mata’는「마태복음」 6장12절(주기도문의 일부) 등에 나오는 표현으로 희랍어 원래의 의미는 ‘빚(진 것)’을 가리킨다.) 바로 그 길이 새로운 인격적 관계인 사랑이다. 그러나 인간이 행한 일의 결과를 신이 떠맡음으로써 사랑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에서 예수의 윤리는 인간 ‘자체’의 탁월성에 주목하는 윤리는 결코 아니다.

반면에 희랍의 덕윤리는 인간 자체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데서 성립된다. 흔히 德으로 옮겨지는 ‘aret?’는 인간적 탁월함(excellence)이나 훌륭함(goodness)을 뜻하는데, 이 같은 인간적 탁월함을 꽃피우는 데서 아름다움(to kalon)을 발견하고 또 그런 가치를 고양하는 인생관에서 희랍 윤리가 자라났다고 할 수 있다. 느슨하게 말하자면 인간적 가치를 발견하고 고양하는 태도 속에 서양 휴머니즘의 원초적 뿌리가 있다고 하겠다.

호메로스, 희랍의 교사

호메로스의 위대함은 그의 작품이 서양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현되고 각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가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발견은 호메로스가 후대 희랍에 미친 영향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아닌 게 아니라 고대 희랍인들은 호메로스의 작품을 암송할 수 있다는 것을 늘 자랑으로 여겼으며, 플라톤의 『이온』(533d-e)에서는 호메로스를 자력(磁力)과 같은 매력을 가진 존재로까지 묘사한다.

호메로스에 대한 고대 희랍인의 평가는 단순히 매력적인 시인이었다는 데 머물지 않는다. 크세노파네스는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호메로스를 따라 배웠다.”(DK21B10)고 하고, 플라톤 또한 호메로스가 희랍을 가르쳤다고 말한다.(『국가』606e.) 그렇다면 도대체 호메로스가 희랍인들에게 가르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능한 영웅?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영웅서사시이다. 따라서 우리가 호메로스의 가르침으로 자연스럽게 연상할 수 있는 것은 영웅들의 영웅적 활동, 즉 승리와 성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상 우리는 영웅하면 무슨 성공신화의 대명사처럼 여기지 않는가. 이런 영웅 개념에 따르면 영웅적 존재는 어떤 난관이든 아무 어려움 없이 수월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전능한 존재이다.

그러나 『일리아스』의 영웅들이 언제나 모든 난관을 쉽게 해쳐나가며 눈부신 행적만을 보이는 건 결코 아니다. 아가멤논은 자신의 권위만 내세우다 결국 수치스러운 꼴을 당하며,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당한 모욕에 화를 내다가 분을 이기지 못해 전쟁터에 나가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부관인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어린아이처럼 줄줄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트로이아의 영웅인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와 벌이게 될 결투에 앞서 두려움에 움츠리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영웅에게서 기대하는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여기에 『일리아스』를 단순한 영웅 무훈시로만 보면 안 되는 까닭이 있다.『일리아스』에서 묘사되는 영웅들은 잘나기만 한 ‘신적인’ 영웅이 아니라 뭔가 빈 데가 있는 ‘인간적인’ 영웅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시

간결하고 압축적인 표현을 하는 호메로스식 문체를 깊게 의식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리아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시인은 곳곳에서 죽음의 전장을 묘사한다. 전사들이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돌이 힘줄과 뼈를 박살내며 창이 관자놀이를 관통하고 창자가 땅 위로 쏟아지는 이야기와 표현들이 텍스트를 뒤덮고 있다. (죽음이 마치 눈앞에서 일어나듯 생생하게 시각화하는 것이 호메로스의 특징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일찍이 라인하르트(Reinhardt)는 『일리아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의 시’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여기에 시인이 드러내려는 핵심이 있다. 인간은 영웅이라고 해도 신이 아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thanatos)이다. 신의 몫이 불멸이라면, 인간의 몫(moira)은 피할 수 없는 죽음(moira)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을 “남자의 영광을 높여주는 싸움터”(XII.324)로 여긴다. 그 곳에서 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리라. 영웅들은 죽음(의 전장)을, 전사의 탁월성이 꽃필 수 있는 터전으로 생각했던 셈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일리아스』는 승리만 이야기하는 무훈가가 아니다. 시인은 승리만큼이나 패배에 대해, 그리고 그 패배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대해 세부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영웅 서사시이면서 어떻게 죽음과 파멸을 노래하는 시일 수 있는 것일까? (통속적인 영웅 개념으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독자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 이를테면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와 벌일 결투를 앞두고, 협상하는 쪽과 맞서 싸우는 쪽 중 어느 쪽을 선택할까 고민한다. 그는 후자를 선택하면서 “영광스럽게 죽는 것(olesthai euklei?s)이 더 나을 것”(XXII.110)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이것은 형용모순이다. 이때의 죽음이란 패배를 뜻하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죽음이란 다름 아니라 ‘명예로운 패배’를 뜻하니 말이다. 패배가 어떻게 명예로울 수 있단 말인가?

또 하나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는 아킬레우스에게서 볼 수 있다. IX권(410-416)에서 그는 자신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 죽는 길과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중 전자의 길, 즉 죽는 길을 택할 경우 자신의 명성(kleos)이 불멸할(aphthiton) 것이라고 말한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성이 죽음을 통해 실현되는 양 말하고 있다. ‘불멸의 명성’이 죽음이란 소멸을 통해 달성된단 말인가? (그렇다!)

아름다운 죽음

역설적으로 보이는 영웅들의 태도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죽음 자체를 삶의 조건 내지 일부로 보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을 줄 알면서도 전사답게 싸우다 쓰러져 죽는 것, 이것을 이상으로 삼은 데 영웅들의 진면목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관은 실패(패배)를 두려워하기보다 죽음이라는 리스크(risk)를 무릅쓰고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려는 태도 속에서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단순한 운명론자도 아니며 수동적인 존재들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20세기 대부분의 서양고전학자들은 호메로스 영웅들에게 의지의 자율성과 자기의식이 없다는 이유로 행위자(agent)의 자격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보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렇게 볼 때 영웅들이 ‘행동하는 능동적 존재’(men of action)였다는 바우라(Bowra)의 통찰은 몇 십 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생생한 울림을 가진다. (바우라(이창대 옮김),『그리스 문화예술의 이해』,철학과 현실사,2006. 참고. 원저는 The Greek Experience라는 제목으로 1957년에 출간되었다.)

영웅들이 죽을 줄 알면서 죽음의 길을 택하는 건, 죽음이란 운명의 몫에 굴하지 않고 인간의 모든 능동성을 펼쳐 보이려는 태도 속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 희랍 영웅주의의 일차적 본질이 있다. 영웅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건 그들이 죽음을 삶의 일부로 내면화했다는 것을 시사하며, 죽음 자체보다는 어떻게 죽느냐가 더 문제였음을 시사한다.

죽음을 내면화한 그들에게 ‘어떻게 죽느냐’는 것은 일종의 삶의 방식을 뜻했다. ‘비겁하게’ 오래 사는 것보다는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것, 그 속에서 탁월성을 꽃피우는 것 그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이것은 행위의 의미를 성공이나 실패라는 결과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고, 행위자 연관적으로 보았음을 암시한다. ‘용감한 방식의(용감하게)’ 행위는 행위자와 연관될 때만 유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용기’와 ‘비겁’은 행위자와 연관 짓지 않고는 ‘실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자긍심’과 ‘품위’(aid?s)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영웅들의 위대함이 있다. 후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겉으로 보면 형용모순으로 보이는 이런 인생관을 압축적으로 멋지게 묘사한다. ‘아름다운 죽음’(kalos thanatos)이라고!(『니코마코스 윤리학』,1115a34.)

고통을 보듬는 연민

전통적으로 『일리아스』의 XXIV권, 그리고 XXIII권까지도 전체 플롯의 구도에서 벗어난 부분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XXII권에서 헥토르가 아킬레우스한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전투 장면은 끝나기 때문이다. 시인은 무슨 할 말이 남은 것일까?

『일리아스』는 죽음의 시일지언정 단순한 전쟁시는 결코 아니다. 구성에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균형감을 잃지 않는 시인은 XXIII권에서 파트로클로스를 추모하는 아카이아인들의 모습을 그리며, XXIV권에서는 헥토르의 아버지인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와 만나 탄원하는 장면과, 헥토르의 죽음으로 비탄에 잠긴 트로이아인들의 장례식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두 권 모두 산 자들이 먼저 간 이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장면으로 되어 있다. 이런 받아들임이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가 만나는 장면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건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운다는 데 있다. 프리아모스는 먼저 간 헥토르를 생각하며 울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파트로클로스를 생각하며 통곡한다. 결국 아킬레우스는 자기 자식(헥토르)의 시신을 내달라는 프리아모스의 탄원을 받아들인다. 아킬레우스가 탄원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자기처럼 프리아모스가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는 데 대한 공감 때문이다. 늘 그렇듯이 울음이 공감을 자아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민(eleos)의 정서이다.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죽음 앞에서 굴하지 않는 당당함을 보이는 한편, 죽음을 끼고 사는 같은 인간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진다. 이 같은 연민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존재론적 통찰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일리아스』는 인간의 보편적인 고통을 내면화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 이 측면에서 비극적이다. 후대의 플라톤은 호메로스를 비극시인으로 부르고 있는데 ‘어떤 점에서’ 이는 적절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후대 희랍에 미친 영향

우리는 앞에서 호메로스가 희랍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이 맞는다면 호메로스를 모르고서는 고대 희랍을 다 알았다고 할 수가 없으리라. 왜 그런가? 지면상 몇 가지 간단한 이야기로 마무리하도록 하자.

우선 고전기 비극이 흔히 옛날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극은 일반적으로 행위자가 수행하는 행위의 ‘의도’와 행위가 끝나고 난 뒤 일어난 ‘결과’ 사이의 단절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이 비극의 hamartia 문제이다!) 비극이 호메로스보다 더 강하게 밀어붙인다는 차이는 있지만 애초에 이런 문제를 제기한 건 호메로스이다.

호메로스는 인간의 삶에서 행위의 의도와 결과의 결속이 깨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런 위험이 죽음과 같은 운명(moira)이란 삶의 조건에 의해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놓여 있음을 통찰한다. 인간 앞에 어쩔 수 없는 필연의 운명이 놓여 있다는 것을 응시하고, 그 운명의 조건을 어떤 식으로 내면화할 것이냐는 문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필연이 결정론적 필연인 건 아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일리아스』는 인간적 삶의 비극성을 노래하는 시라고 할 수 있고, 이렇게 본다면 비극은 다분히 호메로스의 유산을 업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유산이 이것으로 끝나는 건 결코 아니다. 고전기의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추도연설 한 대목을 보도록 하자.
“그들[아테네 사람들]은 맞서 싸우고 감내하는 것이 굴복해서 살아남는 것에 앞서는 일이라고 생각해 수치스런 비난은 기피하고 해야 할 일은 온몸으로 감내해 냈습니다. 그리고 찰나와 같은 운명의 호기를 통해 공포가 아닌 영광의 절정에서 자신을 해방시켰던 것입니다.”(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42.4.(이정호 옮김,『메넥세노스』부록,139 쪽.))

페리클레스는 영웅적 가치관을 아테네 폴리스에 적용하고 있다. 호메로스에게 영웅이 개인이었다면, 페리클레스에게 영웅은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라 ‘폴리스 자체’이다. 이런 점에서 희랍 고전기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호메로스적 영웅주의의 전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는 친숙한(?) 소크라테스에서도 호메로스 전통의 일단을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28c-d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킬레우스가 “죽음과 위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 반면, 못난 사람으로서 사는 것을 (…) 훨씬 더 두려워”한 것으로 묘사하면서 죽음에 맞서는 자신의 선택을 아킬레우스에 빗댄다. 호메로스의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의 경우도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죽느냐는 문제를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죽음에 굴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면모 역시 호메로스가 남긴 유산의 일부로 보는 것도 지나친 해석만은 아닐 것이다.

정준영(정암학당 연구원) /

가라리 네히어라-물체, 그리고 우리 신체

서양철학사를 들여다보면, 철학 용어의 쓰임새가 시대별로 다른 관점을 갖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 중 실재성의 개념이 단연 으뜸일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상층의 대상 즉 이데아를 실재성으로 보았던 시절은 고ㆍ중세 시대일 것이고, 심층의 실재성으로서 기억과 무의식을 실재성이라 주장하는 것은 생물학과 심리학의 도래한 시대이다. 그리고 데카르트 이래로 근대의 실재성은 이원론이라 불리는 두 개의 실체, 영혼과 신체의 관심 속에서도 있다. 그에 따르면 두 개의 실체를 사변적으로 한계에까지 연장해 보면 정신과 물체라는 개념으로 양극화가 된다.

우리는 ‘가라리 네히어라’를 쓰면서 정신과 영혼, 물체와 신체 사이에 개념상 차이가 있음을 은연중에 강조해왔다. 다시 말하면 영혼과 신체의 문제는 표면의 문제로서 상층과 심층과는 다른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상층에서는 정신의 대상인 이데아를, 심층에서는 이데아를 전혀 포함하지 않은 물질을 양극으로 하는 논리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가정하였다. 이제 양극의 중간에 위상적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 영혼과 신체 관계에서, 영혼은 정신과 별개일 것이고 물체는 물질로부터 나왔기에 인식의 다른 대상이라는 가정과 더불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물체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신체가 물체와 다르다는 것을 예시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아주 가끔 신체는 물체와 다르다는 생각을 잊고 산다. 특히 사람들은 슈퍼맨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순간적으로 이동한다거나 빛과 같은 속도로 지구를 도는 영화를 보면서 즐기며 가끔은 그 현상들이 실재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좋아한다. 꼬마들은 그것을 실재로 해보고자 보자기로 망토를 걸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고 한다.

또한 사람들은, 가끔 인간의 신체가 늘여져서 매우 가늘게 되었다가 다시 원래 덩어리로 돌아 올 수 있다면, 아마도 미세한 빈틈이 있는 만리장성과 같은 벽의 미세한 빈틈을 통과한 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곤 한다. 이보다 더하여 전자 매체 속에서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 그리고 상호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나 상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물체가 입자 또는 전자처럼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 미세한 것이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 조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정해 보는 것이다.

그 물체가 신체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다르게 느끼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물체와 신체는 구성체이며 어떤 물질적인 재료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이 양자가 단지 분해와 조합에서 차이가 난다고 하기에는 아직도 해명해야 될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구성방식 즉 조직화에서만 차이가 날까? 이처럼 풀어 가는 것과 다른 방식도 있다.

즉 물체와 신체에 작동하는 양태와 내용이 왜 차이를 갖는가에 관심을 기울이자. 이런 관심은 신체가 영혼에 비하여 덜 중요시되었던 시기를 지나, 19세기 말 이래 생명의 진화에서 생명체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20세기 후반 이래로 환경과 생태계와 더불어 살아야 할 몸이라는 점에서 몸(신체)의 잘 지냄(bien-?tre, well-being)에 대한 관심이 몸철학, 즉 신체에 대한 관심으로 전개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물체 개념 규정들로부터 시작하여, 신체의 양태와 내용에 대해 보기로 하자.

물체도 신체도 프랑스어에서는 꼬르(coprs)라고 하며, 구별 할 경우에, 하나는 그냥 물체(un corps)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신체(notre corps)라고 쓴다. 독일어에서는 신체(Leib)와 물체(K?rper)를 구별하여 쓴다. 이렇게 구별하는 것도 근대 철학에서 물리학적으로 물체가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적 규정으로서 ‘물체’는 자아를 포함하는 ‘우리 신체’의 규정과 같지 않음에도, 소위 몸과 맘, 영혼과 신체라는 과제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유비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몸과 맘이 물질과 정신이라는 것과 유비적으로 연관이 있을까 하는 물음은 일단 젖혀 두기로 하자.

그럼에도 한 가지 차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신의 일부로서 영혼이라는 관점들이 있는데, – 내가보기에 – 고대에서부터 누스(Νου?)와 로고스(λογο?)의 차이가 있었고, 또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플라톤의 예지계와 지성계를 구별을 본 따서 정신(Νου?)과 영혼(ψυχ?, ?me)을 차원 상으로 구별하였다. 이들에게 신체는 철학적으로 문제거리가 아니었다. 왜 그럴까?

고대사에서 신체는 물체와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신체에는 무엇인가 내재해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는 신체의 무덤이지만, 한 인간의 죽음과 그 영혼을 숭배하고, 영혼이 신체와 더불어 이 세상에 다시 올 것을 기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신체의 죽음이 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호메로스 이전 시대에도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신체 일부의 파손으로부터 죽음이라 여기는 것은 아킬레스의 죽음이 그 예일 수 있다. 즉 가장 중요한 부분의 손실 또는 기능 정지도 죽음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서 에스키모 사회에서도, 물개 사냥을 하지 못할 정도로 힘없는 늙은 에스키모인을 죽음이라 칭한다고 한다. 신체 기능의 정지에 대한 개념에서 죽음을 보았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신체에는 물체와 달리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에 의해 전승되는 바에 의하면, 소마(σ?μα, 신체)를 세마(σ?μα, 무덤)라 여기는 것은 영혼(psych?)이 갇혀있는 무덤을 신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 한다. 신체 속에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소크라테스에 이어서 플라톤으로 이어진다.

소크라테스는 현실 생활에서 문제거리가 있으면 다이몬에게 묻는다고 한다. 아테네인들은 그 다이몬을 자신들이 신탁하여 물어보는 신들이 아니라 하여 불경건하다는 이유에서, 소크라테스를 두 가지 죄목(다른 하나는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중에 하나로서 고발하였고,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언도 받고 독배를 마시고 철학적 순교를 했다. 다이몬이 신체에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으리라는 점에서 그는 소마-세마의 도식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들 한다. 즉 플라톤의 『국가』편에서 전하는 설화, 에르(Er)라는 자를 통하여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영혼은 다른 곳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다른 곳이 저 세상의 세계라 말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를 이어 받은 플라톤은 영혼은 육체와 달리 분리되어 다른 곳으로 간다는 이집트 이래로 오랫동안 인류에게 전승되어 온 관념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영혼의 불멸을 표현하고자 한, 또 관념의 실재성을 믿었던 플라톤주의에서, 신체는 철학적 문제거리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크리스트교 성립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학설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삼신 개념(trinit?)의 성립을 일자와 누스와 영혼의 세 양상의 전개 방식으로 본다면, 일자로서의 절대자로부터, 누스로서 초월적 정신과 그의 일부로서 영혼들로 넘쳐나는 과정을 거쳐서, 그 마지막 차원에서 물체 또는 물질이 생겨난다. 그 신체와 물체는 다른 세 가지 실재성들과 별개로서 잘못을 범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관점이 중세 1500년 동안에, 성직자는 백성에게 신체를 비실재성이라 가르치고, 현실의 부정에서 영혼의 상승을 설교하여, 백성에게 예속과 굴종을 강요했다. 현실에서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성직자들이 인민을 현혹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마찬가지이다.

신체가 새롭게 정립된 것은 물체의 실체를 주장하는 르네상스 시기의 과학의 발달 이후이다. 세계는 물체들이라는 실체에 의해 구축되어 있고, 그 세계는 어쩌면 창조주의 현실적 개입이 없이도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물체는 정신이나 영혼과 달리 만질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우리 신체’는 다른 ‘물체’들과 달리, 자기 재량권이 있으며, 어떤 통일성을 지니는 독특한 단위이다.

우리는 여기서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스토아학파에 의하면, 정신도 영혼도 물체(corpus, 코르푸스)라고 칭하며, 인간의 신체와 물체도 코르푸스라 하며, 게다가 모임과 사회라는 정치체(corps politique)라고 하듯이 코르푸스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스토아 학파에게 있어서는 개념적 단위를 형성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코르푸스인 셈이다. 그럼에도 각 코르푸스는 ‘물질적 형성물’들의 다른 여러 양상인 셈이다. 이점에서 유물론이라 한다.

이 사상의 역사적 전개 과정은 불연속적이고 단속적이기에 무엇이라 설명하기 곤란하나, 관념의 세계인 정신의 형성물(관념)도 물질적 형성의 한 측면으로 간주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단어[corpus, corps]의 영향이 있다고 보아, 따라서 근대 물리학은 고ㆍ중세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이 물질적 물체에 실체성을 부여하였고, 그것을 정신과 별개로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혁명적 발상은 새로운 세기를 열었다. 이로부터 데카르트는 우리 신체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우리 신체와 영혼은 속성을 달리하더라도 같은 ‘관념’으로서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발상 속에 데모크리토스 이래로 원자론적 관점이 새롭게 의미를 가진 것으로 여기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원자론적 관점은 우주[현존하는 모든 존재들 일체라는 의미에서]가 빈 것과 원자들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물체들이란 원자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중에서 영혼도 다른 물체들과 마찬가지로 원자들로 되어 있으며 다른 것보다 훨씬 빠르게 운동하는 물체일 뿐이다. 이와 달리 데카르트와 그 후학들은 에피큐로스 학파의 물체와 “부피있는 실체”(substance ?tendue) 사이에 차이를 보았다. 후자는 독립적인 실체이며 관념이다.

영혼과 우리 신체를 구별하였던 데카르트는 한편으로 “사유실체”라는 영혼이 물질과 다른 질적인 것임을 강조하였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부피실체”가 영혼과 별개라는 점에서 “물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길을 열었다고들 한다. 이로부터 물질적 실체를 따로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근대 물리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우리 신체”와 우리 영혼 사이의 특수한 통일성을 보았고, 이 둘의 통일적 관계를 신체 속에서 즉 송과선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고 나서 데카르트는 1643년에 엘리자베스에 보낸 편지에서도 말했듯이, 신체의 느낌이 사유의 방식이 아니라 “감관에 의해 매우 분명하게 인식된다”고 주장했다.

이제, 물리학적 질량(la masse)을 가진 물체(un corps)와 살아있는 생명의 덩어리(la masse)인 우리신체(notre corps) 사이의 차이를 깨닫게 되면서,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제기한 문제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 출발이 영혼은 신체와 분리되어 있다는 고대의 가설에서부터 출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인인 히포크라테스(Hippocrate, 기원전 466-377)가 신체의 질병에는 심리적인 측면도 있다고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고대에서도 있었다. 근대에 와서 이 영혼은 이제 신체와 연관 없이 생각할 수 없는 단위가 되었다. 이런 발상은 영혼이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이 통일된 단위를 물질의 생성과 연관 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였고, 프랑스 18세기 유물론자들의 주제가 되게 하였고, 또 한 세기 지난 이후에는 심층(深層 profond)과 연관 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제서야 의학-생물학의 관점에서도 그 다음에 생물학적 관점에서도 신체 그 자체의 자기 자치성과 완결성이라는 ‘이념’(id?e)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자치성에 이어 재량권을 생명체의 고유한 속성으로 인식하여 생명을 다루듯이, 우리 신체 속에 있는 영혼도 자유롭다는 고유성을 지닌 것으로 다루는 방식이 도래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시대가 고ㆍ중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기였기에, 영혼의 상위로서 “정신”은 순수사유로서 물체와 관계없는 기호와 상징으로서 인식세계를 열어갔던 것이다. 초월적 에고(Ego)에 대한 인간 중심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신의 인식세계를 삶과 관련 있는 영혼과 따로 떼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히 수학적 공리들과 공준들에 관하여 지식의 전개와 확장에서 정신은 영혼과 별개라는 관점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정신은 물체 또는 신체와의 연관보다는 다른 세계에서 통일성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고, 지금도 수학은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우리는 이 정신의 통일성을 가라리 중에서 상층 가라리의 통일성이라 부른다.

우리가 주목했던 것은 데카르트의 시대를 지나면서 영혼은 정신의 일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신체와 더불어 신체 속에서 문제거리로 제기된다는 점이었다. 이 신체는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인격성의 일부로 제기된다. 우리가 보기에, 루소에서는 이기심(l’amour-propre)과 이타심(l’amour de soi)에 대한 구별에서도 이타심은 자연적 배려로서 자기보존의 근거로 하고, 게다가 사회 속에서 타인 없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타인과 관계 속에서 그의 자기보존은 신체를 포함하는 자연주의적 태도이다.

그런데 철학사에서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가 처음으로 『자연권 이론』(1796)에서 자기신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또한 프랑스 철학자 데스뛰 드 트라시(Antoine Louis Destutt de Tracy, 1754-1836)도 자기 신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의식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생산의 변화에서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려는 입장에서, 신체를 통한 노동이 자아의 완성과 자기 인정을 실현할 것이라 보는 견해도 나오게 된다. 이 견해는 현실적으로 사회적 환경에서 중요하게 된 계급의식과 맞물려 신체의 노동을 인간성의 본질로 간주했다. 다른 한편으로, 몸에 밴 습관과 기억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신체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 두 측면을 현실이라는 표면의 이중화(d?doublement)라 본다. 왜냐하면 사회적 자아로서 신체의 노동과 특이성의 자아로서 신체의 기억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기억을 통한 신체의 현실화는 신체의 한 양태로서 구체적 노동 과정에서 실현된다.

기억에 관한 한, 모든 생명체는 각각 생명의 기원으로부터 자기의 과거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신체의 현상적 통일성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이런 신체를 선천적 이념이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통일성을 탐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신체는 살(chair)로 되어 있고, 감각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현실 세계 속에서 구현될 지향적 총체성이다.

“우리 신체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가 세계에 거주한다(habiter). 신체의 진실한 현존은 객관적인 어떤 존재의 현존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신체, 즉 내가 존재하는 신체이며,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신체, 즉 세계에서 나의 존재를 특징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는 불가분 총체성 즉 구현되어야 할 지향점으로서 총체성(totalit?)이다” 라고 한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 ‘신체의 움직임’은 인격을 내포하는 품성(conduite)과 행실(comportement)이라는 점에서 삶의 질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 몸의 운동은 반복하면서도 새롭게 형성되는 과정 중에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몸의 운동은 새로운 반복자이다. 이 반복하는 시뮬라크르의 이해는 삶의 질이라는 점에서 과학적이나 합리적이 아니라 도덕적일 수밖에 없다. 물체를 다루는 것이 과학적 지식과 방법의 한계 속에 정합 또는 합리(rationnel)에 의존하는 반면에, 우리 신체에서는 품행들 사이에 연민과 공감을 지니고 있으며 이성(raisonnable)적이기를 바란다.

이 두 가지 점을 구별한다면 전자에는 세계에 대한 인식론이며, 후자는 세상의 삶에 대한 도덕론이다. 물체가 실험적이고 동일한 반복을 가능하게 한다면, 우리 신체는 일회적 경험이며, 끊임없이 덧붙여진 새로운 반복이다. 우리 신체에 대한 기원과 본성에 대한 이해와 성찰은 진화론이 발달하면서 또한 심리 내적 의식을 밖으로 끌어내면서 20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뚜렷해졌다. 우리 신체는 각각의 개별성을 표출하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욕망 하는 방식에 따라 기호작용, 함축성, 의미 등에서 거의 무한한 다양체를 이룬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신체는 특이성으로서 다양체이다.

게다가 생명으로서 몸의 상태의 지속과 수명이 길어지는 시대에서 신체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도 상당히 달라졌다. 신체의 역량, 즉 스포츠 같은 인간 한계 체험에서 신체는 더 이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등장하였다. 신체의 역량이란 놀이(jeu)일뿐만 아니라 신체의 자기 소질의 개발이다. 게다가 신체의 건강과 감성에 따른 미적 취향 등에서 신체의 주체는 노동을 통한 인격의 완성이라는 측면과 다른 측면이 신체에게 요구되고 있다. 또한 좋은 영양만으로 신체에 좋다고 여길 수 없는 건강, 그리고 자연환경 및 생태계와 신체 조화에 대한 시각은 잘 산다(well-being)에 새로운 시각을 열었다.

신체는 이제 영혼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그를 넘어서 세상과 함께 세상 속에서 거주하는 주체이다. 전체와 떨어질 수 없는 전체 속에서 부분이다. 세상살이에서 신체는 영혼의 안녕과 지속에서 중요한 위상을 점하고 있다. 도덕적으로 신체의 불가양도성은, 물체의 불가침투성을 넘어서, 고유성으로 인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체의 자유가 인정될 때 진정으로 자유가 실현될 것이다.

영혼이 신체와 별개라는 생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영혼의 자유를 인간의 자유로 착각하는 경우이다. 이 착각은 여전히 인간이 구성한 사회 속에서 신체는 부분일 수밖에 없고, 물체처럼 신체가 분해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 기반을 둔다. 자아를 신체와 분리하는 생각은 합리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아무래도 이성적이지 못한 것 같다.

플라톤(Platon)과 같은 철학자도 신체를 “영혼의 폭력”이라고 하면서 신체를 금욕적으로 다루고자 했지만, 그래도 『필레보스』편에서 “신체 없는 영혼도 구원이 되지 않듯이, 영혼 없는 신체도 구원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스피노자(Spinoza) 같은 이는 이 분리를 착각이라 주장하면서 자연의 권능을 지닌 신체 속에서 권능(puissance)을 발현하기를 권하였다. 니체(Nietzsche) 같은 이는 성직자들이 말하는 정신의 신체에 대한 억압에 벗어나기를 권하면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속에서 “너의 지혜가 최상일 때보다 더 많은 것이 너의 신체 속에 있다”고 했다. 생물학적으로도 우리가 신체를 통하여 발현되는 품행은 현실에서 발현되지 않은 것에 비해 거의 하찮은 부분들이라 한다.

20세기 중반에 와서야 신체 속에, 특히 세포 속에 유전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유전자 정보의 지도를 그리면서, 신체의 비밀스런 작동에 대해 기계론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 지도에 그려진 유전자 계열의 거의 1/10정도만이 현실의 사회체(socius) 속에서 개체로서 발현되고 그 나머지는 발현되지 않으면서도 왜 그 긴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를 아직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신체를 통하여 각각의 인격을 표출하고 있고, 그 인격들이 65억 인구 각각에게 고유하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신체의 “양도불가능성”을 주장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인격이라는 측면과 더불어 신체의 존중을 먼저 강조한다. 인간의 사회적 소외에 앞서, 신체의 고유성과 자기보존을 주장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체만으로 인격의 고유성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물체의 해명이 수억 광년의 먼 우주에서 미세 소립자의 해명에까지 폭을 확장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신체, 또는 생명체에 대한 해명은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이 해명이 있어야 사회체도 해명된다고 하는 것은 현실의 삶을 미래로 미루는 것이다. 이렇게 미루는 것은 미래의 소망으로 현실을 개혁하지 않고 습관 속에서 굴종으로 지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해명이 언제 될 값이라도, 현실의 공동체에서 신체의 “양도 불가능성”의 토대 위에서 각 인격의 고유성에 대한 존중을 지금 여기서부터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가라리 네히어라-‘관념’이란?

관념(l’idee ?δ?α), 플라톤의 이데아(Idea), 생각(영 idea)

삽화에서 보듯이 머리 위에 반짝이는 별이, 그리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하는 것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즉 이 아이디어는 생각이다. 관념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몇 가지 이야기를 먼저 하자.

내가 20살쯤이었을 때 관념이란 용어가 철학의 모든 것인 줄 알았다. 어려운 용어는 모두 다 관념이고 그 자체를 알아야 한다고들 하였다. 마치 누군가 ‘부처’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부처’라는 관념은 선사의 선문답처럼 홀려서 들렸듯이. 그때 이해하지 못한 그 관념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었다. 부처, 도(道), 신, 그리고 이데아도 그 자체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탐구하여 밝게 아는 것이 철학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나는 그 자체 있다는 것으로 답하기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느꼈다. 그 자체가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자체에 대해 무엇인가 아직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당시 나는 산에 다니며 놀았다. 암벽 등반을 잘 하는 산 선배 중의 한 분이 밤에 텐트 속에서 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산도 내가 다니는 산(개별)이 아니라, 그 산은 곧 신(관념)과 같은 것이었다.

‘산은 없다. 거기에 사람이 오르기에 있다’ 또는 ‘바위는 마음이다. 마음에 겁이 없으면 잘 오르다가, 아차 마가 끼면 온갖 잡사가 떠올라 한 손톱만한 잡을 것도 보이지 않아 오르지 못한다’ 지금 생각하면 ‘산은 없다’거나 ‘바위는 마음이다’는 어쩌면 영국 근대 철학자 버클리의 경지일지 모른다.

나의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어릴 때, 방학이라 고향에 가면 온갖 이야기를 듣는다. 그 중에 이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이 있다. 누군가 ‘중공군 백만이 백두산에서 오줌을 누면 우리 반도가 떠내려 간다’거나, ‘중국의 인구 5억이 함께 발을 구르면 지구가 흔들거린다’거나, ‘소련의 모스크바 광장에 비둘기가 없다. 평화가 없으니깐’ 등이다.

앞의 두 물음은 고등학교 시절에 물리학을 배우면서 구체적으로 계산을 해보았고,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와 받침점을 계산을 하면서, 그런 지렛대는 실재상으로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수학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위 두 이야기가 뻥(농담)이구나 했었다.

셋째 이야기는 여행도 못하는 시절에 누구도 가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을 검증해 볼 수 없지만, 막연하게 생물학적으로 비둘기는 키우면 되는데, 소련은 평화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비둘기조차 살 수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지어낸 넌센스 또는 유머일 것 같았다.

철학을 공부한답시고 의문이 가시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부처를 믿었고 또한 미륵보살이 모든 사람을 밝은 세상에 살게 하기 위해 이 땅을 떠나지 않고 어디엔가 있다고 믿으셨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도 미륵이야 불교의 설화중의 하나라고 치부하면 되었는데, 세상은 그런 분이 여럿인 모양이다. 내가 ‘세상을 구원하는’ 또는 ‘저 세상에 있는’ 주제자에 대해 관심을 갖은 것은 이야기 속에서였다. 어느 때인가, 저 세상에 사는 이든, 주제자이든, 그런 어떤 누군가가 있기는 있는가?

그래도 극락에는 부처와 보살들이, 천당에는 크리스트와 천사들이, 중국에는 옥황상제와 그 부류들이, 우리 이야기 속에는 환인과 환웅 그리고 나무꾼과 선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누군가가 있다고들 한다. 믿는 양식에 따라 각각은 착하게 살아서 각각이 바라는 그곳에 가고, 착하지 못한 사람은 죄 값을 치르는 곳에 간다고들 한다.

이상한 것은 그 명칭들 중의 하나가 주제를 하면 다른 명칭은 배제되거나 소외되고, 나아가 그 명칭에 신앙을 건 자들은 다른 것에 대해 비하하고 심지어는 악으로 간주한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것을 웃기기 위한 농담의 일부라고 하면, 각각의 신앙자는 농담이라고 하는 자를 미친 사람 취급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기와 다른 자를 미친 사람 취급을 하는 자들이 미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다.

신앙자가 자기를 제외한 사람에 대해 갖는 반대 또는 적대 의식이 무엇인가? 그 바탕에는 하나의 존재에 대한 그것 외에는 모순이라는 논리적 생각을 먼저 하는 경우이거나, 또는 그가 사는 문화에 젖어서 다른 문화에 대한 적대의식이 자신의 이기심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닐까?

자! 생각해보자. 그 곳도, 그 명칭들(환인, 부처, 크리스트, 상제)도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l’id?al)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왜 상징의 이상이 존재가 되고 가치에 개입하는 하는 것일까? 철학을 배우면서 다시 생각하기를, 관념(l’id?e)이라는 용어가 그 기원에 자리하고, 또 그 용어에 어떤 성질 또는 속성을 부여하고, 나아가 그 기능과 역량을 개입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에는 이상도 있고 관념도 있고, 그리고 일상적으로 대화를 위해 일반적 사물을 지칭하며 소통하는 개념들도 있고, 자신도 이해 할 수 없어서 어떻게든 이름을 붙여서 만든 것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이렇게 가라리 네히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본다. 이 중층에는 상징으로 이상, 논리적으로 관념, 경험 일반의 개념, 잘 알 수 없지만 이름을 붙인 이념(유명, 이름 붙이기)이 있다. 사람들은 나에게 왜 관념과 이념을 따로 구별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 답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제 그 이야기, 즉 담론을 시작해보자.

관념은 어원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idea ?δ?α)이다. 이 이데아는 1. 형식, 2. (사물을) 봄(lat. species), 3. 종류, 본성. 4. 에이도스(eidos ε?δο?), 분류, 종류, 류(類) 등으로 쓰였다고 한다. 나는 이데아라는 용어가 피타고라스의 수,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라는 사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간단히 말하면 원리상 수(數)에서 하나(un)는 수들 중에서 일자(l’un)가 아니다. 하나는 모든 것에 기입되지만, 일자(l’un)처럼 자기 스스로 따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존재(Etre)는 모든 사물에 부가 또는 바탕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는 물체 없이 따로 현존(l’existence)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와 존재가 ‘있다’고 할 때, ‘있다’는 ‘없다’고 말할 수 없기에 쓰인 논리적 용어정도, 한계의 용어라고 생각한다. 이 이상의 논의는 전문적으로 들어가야 하기에 여기서 그치고, 우리의 주제 “관념”으로 가보자.

“이데아”를 설정한 플라톤의 이 용어가 “관념”으로 번역된다. 이데아는 영원하고 불변하며, 지적 본질 또는 지적 형식을 나타낸다. 그리고 감각적 사실들은 이 이데아에 참여한다(분유한다)고 한다. 이 “이데아의 세계”는 지상의 세계, 또는 물질적 세계에 대립된다. 또한 이데아 세계는 진실한 세계이며, 지상의 세계는 가상의 세계 또는 현상의 세계라고 한다. 게다가 플라톤은 이 다수의 관념들이 공존하는 세계를 설정하고, 이 관념들이 현세상의 모범이라 한다. 그리고 이 관념들의 최고의 관념은 선의 관념이라 한다.

플라톤의 이런 생각(id?e)은 아름다움(미 美)을 판단하면서,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판단하는데 있어서, 인간들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어서 판단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논쟁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아름다움의 관념은 인간의 인식과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즉 미의 관념은 인간과 별개로 존재한다. 마치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처럼. 그럼에도 인간의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이점에서 어떤 이는 담론은 당시의 시대와 관계있다고 하고, 플라톤이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와 싸움을 위해 이러한 주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플라톤은 소피스트의 상대주의 세계를 전복하기 위하여 진실한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선언한 것이라 한다.

나는 이 전복이 현실적 개념의 기준을 삼기 위한 노력이지만, 심층에서 우러나는 새로운 개념의 생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여긴다. 아름다움의 관념은 기준이 아니라 어쩌면 상징으로서 이상에 대한 인간의 열망과 환희의 외적 표현일 뿐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을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아름다움을 인간과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은 이름(유명 有名)일 뿐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나중에 말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이란 이름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 만을 여기서 말하고자 한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데아가 별개적 존재라는 것을 반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 당대 그리고 중세 이르기까지의 문화 속에서 이상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반박하기에는 인간의 삶의 터전이 너무나 열악했다. 단지 있을 수 있다면 거지처럼 살았던 퀴니코스 학파의 사람들이 있었거나 걸승처럼 떠도는 수도자가 있었을 것이다. 열악한 사회조건에서 터전을 부정하고 미래의 저세상에 희망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던 인민은 현실의 고통과 가난을 부정하고 미래의 삶의 지표로서의 이상을 수용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퀴니코스 학파는 내세와 죽음을 미끼로 담론을 전개하는 것을 사기라고 보았다. 내일의 희망, 미래의 신앙은 현실을 부정하고 개혁하려는 힘일 수도 있지만, 현실의 열악한 조건을 수용하고 묵묵히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아편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르네상스라는 시기 이전에 유명론자들은 관념세계에 대한 비판과 함께 현실세계에도 미래세계와 같은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다. 유명론자들은 관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 소리(flatus vocis)일 뿐이라는 이유에서 현실의 사실에 부합하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와 더불어 과학은 물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는 관점을 제시한다. 갈릴레오는 천상의 운동이 지상의 운동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보았다.

바로 이 시기에 데카르트는 진실한 관념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면서도, 그 독립적 존재에 물체의 관념을 포함시키고 있다. 또 그는 사유와 부피라는 관념들이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다고 하였다. 이런 관점 속에 두 개의 실체의 존재를 주장한 것은 관념의 전복은 아닐지라도 철학사의 전환이었다.

데카르트는 타고난 관념(l’id?e inn?e)이 “명석 판명”한 것으로 여겼다. 이 관념은 영국 경험론자들의 견해처럼 만들어지는 개념도 아니고, 칸트처럼 절대적 공간과 시간 속에서 선천적으로 구성된 개념도 아니며 선험적 변증론에서 성립하는 이상적 이념도 아니다. 경험론자들은 대부분 이데아와 같은 신 관념은 이름일 뿐이라고 여긴 데 비하여, 데카르트는 수학적 명증성의 확신으로 창조자로서 신은 아니지만 절대적 관념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근대 철학은 플라톤 이래로 중세에 이르기까지 절대적 별개 존재로서 관념의 본성에 대한 논의에서 벗어났다. 그 대신에 관념이 어떻게 생겨나느냐에 관심을 가졌다. 데카르트는 이에 대해 세 가지 관념들을 구별했다. (소위 선천적이라고 표현하는) 타고난(inn?es) 관념들, 밖에서 오는 부수적(adeventices 우연적) 관념들, 내가 자의적으로 만드는 인위적(factices) 관념들이다. 표현이 즉 관념이지만, 플라톤의 표현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현대적 번역으로 개념들이다. 물론 데카르트는 타고난 개념(관념)이 신의 절대적 관념에 의해 우리 정신 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경험론자들은, 특히 홉스 같은 이는 타고난 관념이 없다고 보았다. 초월적이고 절대적 신앙을 벗어난 경험론자들은 물질적 세계의 일반성에 주목한다. 개념의 형성은 상식(공통감각)을 통해서 경험 속에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형성이란 인상을 통해 우리의 정신 속에 각인되어 반복의 결과로서 일반성, 즉 개념이 된다.

이런 귀납적 방식은 흄의 인과성의 원리에 대한 회의로 과학적 지식의 확실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즉 과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에 의한 판단들은 개연적 인식으로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지식의 확실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귀결에 이르렀다. 이는 칸트로 하여금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이르게 한다. 칸트에게서 개념은 미리 주어진 2선험적 형식과 12개의 오성의 범주를 가지고 인간이 구축하는 것이다. 이 전환은 데카르트에서 전환이라기보다 플라톤의 관념의 형성에 대한 전환이었다.

플라톤은 관념을 인간이 외재적으로 원래 있는 것으로 믿음으로써 그에 대해 열망하는 (소크라테스적 사랑 필로스의, 심리학적 욕망의) 대상으로 보았다면, 칸트는 관념을 인간이 선천적 능력과 선험적 구성력을 통해 포획하는 것으로 보았다. 공간의 개념을 예로 들면, 플라톤에서는 공간은 ‘하나’와 ‘존재’처럼 부정할 수 없이 실재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비하여, 칸트는 공간이 선천적으로 절대적 형식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여겼다.

데카르트에게 관념(개념)은 형식적이 아니고 실재적이지만, 그 실재성으로서 공간 또는 부피를 이해하는 데에는 생물학적 일반성의 관념이 도래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베르그송은 이에 대해 설명하면서 서양 철학사가 데카르트 이후 400여 년을 인간의 이기심(틀뢰즈 용어로 포획성)으로 인하여 실재성을 상실하는 길로 나갔다고 하면서 한탄한다. 그는 이 버려진 미지의 세계로 길을 돌려놓고 심층으로 탐구해 들어갔다. 그래서 2500년 이래 플라톤주의자들의 전도된 심리학을 바로 세운 것이 베르그송 자신이었다고 한다. 이를 이어 들뢰즈는 그의 철학을 “개념의 생성”이라 부르면서, 생성의 철학은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 했다.]

어쨌거나 인간 지성에 대한 관점이 관념의 원리 또는 본성에서 관념의 형성 또는 생성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칸트에 이르러 관념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올바른 사용을 구축하게 된다. 칸트에서는 플라톤주의자의 관념은 이상에 속하며, 개념과 판단을 통해 과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철학이다. 이에 비해 들뢰즈 철학은 이상을 상징으로 바꾸고 상징은 의미가 여러 가지라고 한다.

나는 이쯤에서 “가라리 네히어라”에 비추어 정리하고자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이상으로서 관념이며 상층이라는 한 ‘가라리’며, 데카르트에서 두 실체는 표면의 이중성이다. 즉 표면의 이 중성으로 두 ‘가라리’다. 경험론자들은 표면의 겉면을 공격하면서도 상층으로 공략하러 올라가다가 자기 회의에 빠졌으며, 칸트는 표면의 겉면을 인정하기 위해 표면의 속면으로서 선험적 형식과 범주를 내세웠지만, 이 두 가지를 다시 표면의 겉면으로 올리고, 속면의 생성에 대해 (생물학과 심리학의 도래를 보지 못하고 죽었기에) 무지했기에, 다시 말하면 물자체를 수동성의 영역의 일부로서만 보고 나머지는 버려버렸기 때문에, 심층으로 들어가는 “진정한 전회” 또는 “2400년 철학사를 전복”하지 못했다. 이 심층이 나머지 ‘가라리’이다. 자, 인간 의식에서 심층으로 들어간다는 것, 보다 정확하게 심층에서 솟아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때가 되었다.

칸트의 개념 구축은 매우 중요하다. 오죽 했으면 들뢰즈가 자신의 생성의 철학이 칸트 위에 서 있다고 했겠는가? 칸트가 죽은 시기(1804) 이후 즉 19세기 이래로 세상은 이전 시대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다 방면에서 빠른 속도로 달라졌다. 프랑스는 이미 대혁명을 겪었다. 모든 인간이 자유, 평등, 박애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물질 문명이 인간의 의식을 변하게 했다. 왜냐하면 사물들을 다루면서 인간에게 이롭게, 유용하게, 실용적으로 만들 수 있는 철학적 학설이 이 세상의 변화에 걸맞게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또한 인간은 스스로 개념을 구축하였듯이, 인간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터전을 열 가능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신의 존재에 의탁하지 않고, 심지어는 신과 같은 창조자로서 세계에 대해 창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르네상스 시대와 엄청난 차이로서 새로운 생산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미래를 당겨서 현실에서 풍요와 안녕을 통한 평등의 터전을 곧 구가하면서 자유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증기기관과 모터의 발달이 생산력을 높였지만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소외는 더욱 심화되고, 빈부의 격차는 어느 시대보다 인민의 삶을 열악하게 만들었다. 인민에 의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관념을 논하는 자들이 아니라, 경제적 기반에 대한 정치학을 말했던 맑스였다. 맑스는 새로운 개념의 구축이 변증법적 역사 속에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언젠가 다가올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칸트가 뉴턴 물리학의 인식적 토대를 주기 위해 개념을 구축한 것에 비해, 새로운 관점으로 개념의 생성을 보여준 것은 프랑스의 유물론자 전통에 선 의학생물학자들 중의 한명인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였다. 그는 역사가 어떤 주제자에 있어서가 아니라 자연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이 생명 생성의 터전을 이념(l’id?e)이라 불렀다. (이것은 어쩌면 자유의식의 상층으로 향하는 과정을 이념이라고 불렀던 헤겔과 대척점에 있다)

심층에서 생성되는 원리를 이념이라 부르게 되면, 소박한 유물론자는 그것을 생기론이라 한다. 이 의학생물학의 유물론은 물자체(심층)로부터 유익한 것만을 물체로 구축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물자체(자연 자체)가 생명을 생성하고 자기 단위 속에서 자치적이고 자기 조절적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 생명이 중동의 전설에 따라 삼천리에서 나온 설화의 영감이 창조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생성되었다고 하면 생명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질 수 없는가? 그는 원리로서 이념을 세우고 생명체 속에 이념이 있다고 주장한다.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이 이를 이어받아 주장하듯이 생명체의 이념은 오랜 생성과정에서 생성한 실재적 일반관념(표면이 상상 또는 개념)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일반관념을 들뢰즈는 개념의 생성이라 부른다. 그런데 서양 철학사적으로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관념이 아니라 경험을 통한 일반 관념(개념)을 형성하였지만 그 체계의 단일성(통일성)에 부딪혀 상층의 관념을 인정했던 것과 달리, 이 의학생물학은 지금까지 오랜 과정에서 변화하는 힘에 의해 새로운 물체가 형성되고 이 형성된 신체(생명체)가 지니는, 또는 타고난 일반 관념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일반 관념(생성된 개념) 중에 데카르트의 부피(l’?tendue)도 이에 속한다. 이것은 경험적으로 실재하는 개념이며 태어나면서 갖는 개념이다. 이것은 베르그송 용어로 생명체 속에 등록된 것이다. 이 개념은 칸트가 말하는 포획하는 개념으로서 신체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생체 속에 오랫동안, 심지어는 생명의 역사 모두를 등록한 일반 개념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회상(r?miniscence)과 달리, 베르그송이 기억(la m?moire pure 순수기억)이라 부르는 이념이다. 베르그송은 관념의 동일성과 다른 의미에서 이 이념에도 동일성이 있다고 한다. 그것을 인격성이라 부르고, 심층자아에서 표면자아에 이르기까지 실재성의 현전을 지속(la dur?e)이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동일성은 기학학적 동일성(l’identit?)과 같은 단어이지만, 지속을 정체성(l’identit?, 생명정체성)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념이라 부를 수 있다고 본다. 이 이념은 상징으로서 상층의 동일자에 대한 이데아와 전혀 다른 대척점에 있다.

물체의 형성에 대해 개념 형성을 소박한 유물론이라 하면, 생체의 생성에 관한 것을 실질적 유물론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실재론은 형상적 형이상학이라 한다면, 데카르트의 이원론이란 표현은 표면의 이중성의 실재성에 대한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고, 르네상스 이래로 400여년을 지난 후 회복한 실재성, 즉 전도된 실재성을 바로 세운 베르그송의 실재론은 질료의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전복의 철학을 제시하면서, 생명 기억의 움직임 또는 이 능동성이자 잠세성을 노마드라 불렀다. 그에게 있어 표면 위의 겉면에 재현하는 칸트 식의 구축개념의 형성은 도구주의의 포획의 일부일 뿐이다. 표면 위에 말달리듯 선을 긋는 것을 노마드라고 부르는 것은 들뢰즈에 대한 곡해이다. 들뢰즈의 노마드란 의식의 흐름, 기억의 능동적 종합, 생명의 자기 발현이 심층에서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표면의 약한 균열을 뚫고 나오는 연기(jouer)이다. 연기의 일반적 또는 공통적 감각을 상식이라 부르고, 그 상식의 일반화를 개념이라 부른다면, 플라톤주의 철학을 이용한 플라톤주의의 전복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재성은 의식의 흐름이며, 기억의 총체이며, 그 총체의 발현에서 자유가 있다. 철학은 오랜 과정 속에서 인격성의 자유 실현에 대해 기대해 왔었다. 그 기대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표면 위에 선긋기하는 철학 즉 규범의 철학은 정태적 철학에 불과하다. 인격성의 운동전개에 따른 동태적 철학의 도래는 이미 있어왔다. 그 실행이 남아있을 뿐이다.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가라리 네히어라-‘물질’이란?

물질: (그리스어)m?t?r, (라틴어)materia, (프랑스어)mati?re (독일어)Materie, (영어)matter,

*대부분의 철학사전에서 라틴어 마테리아(materia)의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잘 쓰여졌다는 동녘에서 나온 『철학대사전』을 펼쳐 보라. 왜 우리는 이런 철학사적 의미의 개념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가? 의심해 볼 필요는 없을까? 그래서 “물질”이라는 의미를 지닌 용어는 아니지만, 플라톤의 플라노메네 아이티아(planomene aitia 방황하는 원인)에서 나온 그리스어로서 어머니를 의미하는 메테르(m?t?r, 어머니)라는 단어가 물질을 설명하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위에 첨가한 것이다. – 다른 한편 플라톤의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라는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의 휠레(hyle)와 관련 되고, 그것이 라틴 철학에서는 물질 개념으로, 즉 시니피에로 연결되어 근대철학에서의 물질 개념 정립으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실천하거나 사유하거나 놀이하거나 간에 인간은 일반적으로 주체와 사물이라는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이 주체와 대상이란 것은 인간이 다른 것과 떨어져 있다는 가정을 한 뒤에 성립한다. 과연 인간은 주객 이원적 철학이라는 것이 있기 전에도 ‘나’와 다른 것이 주객처럼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을까? 우리는 그 먼 과거에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남은 찌꺼기와 상상을 통해 과거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설명을 만들 수 있다.

많은 이들은 손쉽게 그 먼 과거 어느 날 신이라는 영감님이 ‘하늘이 있으라’ 해서 있었던 것처럼 하늘이 있었다고 믿는다. 이 사람들은 마치 만화경에서 처음 이루어진 질서가 무질서 가운데 아름다운 질서를 형성하듯이, 무질서 다음에 그 영감님의 질서가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다른 이들은 이 질서 성립의 이야기를 반박하기에는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아서, 자연이 그 자체로 이루고 있는 중이라고 여기지만, 우선 잘 모른다고 말할 뿐이다.

그 질서 성립의 주체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또 우리가 그 주체의 이름을 붙여본다면, 유명론으로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자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자연이 거의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체로서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경우를 보자. 한편에서는 주체로서 권위를 가지고 행사해 왔던 것으로 여기는 하나님이 있고, 그가 절대성과 보편성을 띠고 있다고 여긴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 시대의 과학이 주체에 관해 해명할 수 없을 때 상식으로 그렇게 말하자는 정도에서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성립한 것으로 여긴다. 주체로서 자연은 무엇인가? 아무도 그 과정을 아직 다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철학사에서 세계가 ‘있으라’ 해서 있는 것인지, 또는 잘 알 수 없지만 어떤 물질이 자기 변화에서 여러 가지로 변형했는지, 이들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후자의 입장에 서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이 세계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를 자문하면서, 그것은 원질(arche)에서 생겨나서 변형되는 것이라 했다.

우리는 혼돈에서 질서라는 어떤 한 방식을 생각했던 부류, 그리고 근원적인 물질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부류 사이에서, 전자는 하나의 질서를 설정하면서 이에 맞지 않은 다른 질서를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후자는 질서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생성하는 가운데 이런 저런 질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러면 탈레스 이후에 이루어지고 있는 자연 또는 물질에 대한 어떤 논의가 있을 수 있는가? 진정으로 플라톤주의자들처럼 이데아는 진상이며 물질은 허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철학사적으로 주류를 이루는 생각이었을까? 내 생각에, 물질이란 이데아(관념)만큼이나 형이상학적인데, 이상하게도 플라톤시대 이래로 물질이 비하되고 관념이 우월하다고 여겨진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래서 ‘물질’ 개념에 대한 상상력을 따라가 보는 것도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유물론(le mat?rialisme), 역사적 유물론(mat?rialisme historique) 등에서 쓰는 ‘물질’이란 개념이 물질의 근원적 문제에 직접적으로 근접해서 나온 것인지를 되물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물질이란 개념은 라틴어 마테리아(materia)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에서 쓰는 물질 개념은 당연히 라틴어를 기준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것을 가볍게 추리할 수 있다.

내가 ?가라리 네히어라?라고 한 것은 사유에서나 세상살이 문제에서 네 가지 생활양식(modus vivendi)이 – 내가 지어낸 개념이지만 그 만큼의 사유양식(modus cogitationis)이 – 은연중에 있어왔음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네 가지 생활양식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일반인들은 각 편의 둘씩을 하나로 모아서 존재와 무처럼 극한적 인 두 사유양식이 있다고 여긴다.

이러한 양극의 둘로 갈라지기 이전에 양극을 얼마간씩 포함하는 중간의 것들, 즉 중간에서 양극의 일부들을 수용하여 형성하는 중간의 둘들은 개별적 사태들의 일부이며, 매우 다양한 사유 양태들인 셈이다. 왜냐하면 양극의 중간에 위치한 혼합적 사실들은 각기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중첩적 현상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중간을 양극과 연관하여 각 극에 관계맺는 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중간도 이중이라고 한다. 이 중간의 이중으로서의 둘은 간단히 말하면 어느 쪽 극단으로 기울어지기 이전의 한 몸의 두 측면, 즉 상상의 두 측면이다. 이 두 측면은 상징으로 형상의 극과 실재로서 물질의 극 사이에서 이중성을 띠고 있다. 이로서 우리는 두 극단의 둘, 그리고 그 극단의 어느 쪽으로 기울어진 중간 양식의 둘, 이 넷을 ‘가라리 네히어라’라고 한다.

이 관점을 적용해 보면, 흥미롭게도 한편으로 탈레스에게서는 생성의 원질이라는 실재가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피타고라스 학파와 파르메니데스 학파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수 또는 하나의 존재가 먼저라는 생각이 있었다. 이 둘만을 보면 가라리 둘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플라톤이 세계의 생성 또는 우주 발생에 대해 그럴듯한 긴 이야기를 쓰면서 가라리 둘이 아니라 여럿이라고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가라리 여럿으로 갈라진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편에서 이데아는 자신의 닮은 모습을 가상이라는 세계에 데미우르고스를 통해서 실현하려(조작하려?) 한다. 그런데 그 가상에도 자기 성질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상부의 권력이 이념을 인민에게 강요하지만 인민은 인민의 의지와 욕망이 있어서, 그 권위의 적용이 잘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플라톤의 그럴듯한 이야기에 상상을 보태보자. 우선 이데아라는 진상의 여럿들이 자족적으로 있다. 이 진상을 가상에 적용하는 데미우르고스를 따로 떼어놓고 있는데, 이 작용을 논외로 하자. 진상과 가상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가상에는 여러 성질이 있어서 이데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도 있고(추종자, 복사물), 그리고 어차피 따라봐야 그들의 욕망이지 인민의 욕망이 아니라며, 이데아와 연관없이 스스로 생산하려는 부분도 있다(생성자). 이 양쪽을 관망하면서 추종자를 모방할 것인지 생성자와 함께 새로운 모방물을 만들어 볼 것인지 하는 부분도 있다(놀이자).

즉 이데아가 한 가지이고, 그와 반대의 생성자가 한 가지이다. 여기에 이데아 쪽을 바라보는 추종자의 가지도 있고 생성자와 협력하며 는 모방자의 가지도 있으니 이들을 보태보면, 가라리 네히로구나. 그런데 이데아를 제외한 세 가지 가상은 이런 여러 성질로서 중첩되고 층위를 지니며 어떤 경우에는 압축된 이름을 지닌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방황하는 원인, 방원) – 들뢰즈의 표현으로 ‘미친생성’, 베르그송의 ‘생명’, 스피노자의 ‘자연’과 연관 있다 – 라 불린다.

‘방원’은 이데아에 대립(대립을 모순이라 하는 자들이 전쟁을 만든다)한다는 점에서 질적 다양성을 지닌 차이들로 되어 있다. 이 방원은 그 자체가 인식적으로 무가치나 비합리도 아니고, 윤리적으로 악도 선도 아니다. 단지 이데아와 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생성의 부분들일 뿐이다. 진화 역사의 긴 과정에서 ‘방원’의 생성 자체가 자신의 내용을 표현하면서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 생성 중에서 어느 것이 이로운 것인지, 또한 생성의 실재성이 무엇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 그 시대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지성이 지닌 한계에 따라 선호도를 가질 뿐이다. 데미우르고스는 이 지성의 한계일 것이다.

이 ‘방원’은 플라톤 자신이 그럴듯한 이야기로 쓰려 해도 해명이 잘 안되었기에, 대부분의 관념론자들의 구구한 이야기를 거치고 난 뒤에 원인으로서의 수용성 정도로 여겨졌다. 특히 방원은 들뢰즈 표현으로 수동적 종합으로서의 원인으로 표현된다. 이것을 플라톤은 상상적으로 ‘공간(ch?ra), 자리(hedra), 보모(Titth?), 어머니(m?t?r)’ 등으로 명명한다. 나는 여기서 마지막 개념, 즉 비유적이고 상상적 개념인 ‘어머니’라는 말에 주목한다.

누군가 서양 철학사에서 적대의식을 남긴 가장 큰 죄를 지은 학설들 중의 하나가 피타고라스의 이분법이라 했다. 그 여러 이분법들 중 하나로서 규정적인 것과 비규정적 것을 1과 2(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음과 양으로)라는 방식 나누고, 초기에는 전자는 남자 후자에 여자를 단순 대비시켰다가, 나중에는 모순이라고 강조하고 의미 확장하여, 전자에 지배, 후자에 피지배를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분법을 단순한 상상력에서 나온 과장이 아니라고 본다. 후기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과 더불어 이런 이분법적 구별에 의해 전자를 선으로 후자를 악으로 나누고, 전자의 선이 지배하고 후자의 악을 전자의 기준에 맞게 교정하는 것을 합리적인 것처럼 착각했다. 이러한 방식은 군주와 백성 사이에서 제국과 피식민 사이로 이어지며, 상부 이데올로기의 합목적과 하부의 수용, 권력의 절대 권위와 인민의 복종 사이에서 모순이라는 이름으로 강압적 지배로 나아갔다. 실제로 이것을 야만의 폭력이라고 고발한 것은 가타리와 들뢰즈라 할 수 있다.

다시 돌아가 그리스어 어머니(m?t?r)라는 용어에서 라틴어로 마테르(mater)로의 변전을 살펴보자. 이 마테르(어머니)라는 단어는 물질이라는 라틴어 단어 마테리아(materia)의 어원이라 한다. 왜 철학사는 물질의 개념을 어머니라는 의미와 함께 했을까? 플라톤에서 공간(ch?ra)의 단순 수용성과 수동적 종합성인 어머니(m?t?r)가 동급의 성질은 아니지만 ‘방원’의 다양한 이질성(차이와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다면, 라틴어 마테르가 수용성이면서도 생성을 지닌 종합성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왜 철학사는 물질 종합성을 제거하고 자기 생성력이 없는 것으로 만들었을까?

여기에서 나는 역사적 상상력으로 그들의 사회가 크리스트교의 지배를 받아서 물질성이 스스로 영혼을 만들면 안 된다는 사유, 이데아를 물질에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방원’과 이데아의 두 극이 있고, 또 이데아의 단순 수용의 겉 부분(겉감 윗표면), 방원의 생성이라는 수동적 종합을 포함하는 부분(안감 안표면)이 있다. 이 ?가라리 네히어라?에서 상상의 부분으로서 겉감과 안감이라는 이중성을 상상해 볼 수 있다고 했다. 겉감이 이데아의 모방물로서 겉모습이라면, 안감은 생성자의 오랜 과정의 귀결로서 내용이다.

이로서 안감은 어머니 물질로서 생성이며, 아버지 없는 생성의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플라톤처럼 이데아를 가정하는 이들의 측면에서 보면, 안감은 미친 생성처럼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안감의 생성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가정하면, 또다시 이데아에 말려드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상상에 빠질 것이다. 이것은 그가 질료 속에 형상이 먼저 들어있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프랑스 18세기 계몽기의 유물론을 첨가해보면, 이 생성의 물질에는 아버지가 없다. 그러면 18세기 계몽기의 유물론에서 생성은 이데아 없이 어떤 모습으로 생겨날 것인가? 그 생성은 그들의 주변을 모방하면서 생성하고 소멸한다. 그 생성은 이데아가 없지만 오랜 과거의 경험과 기억으로, 또는 생명의 의지로, 또는 자연의 자기 원인의 발생으로, 안감을 형성하여 만들어 낸다. 이것을 스피노자는 자연의 표현이라 한다. 결국 생성에는 물질성과 안감이라는 다른 가라리 둘이 있다.

물질의 생성이 우연적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어쨌거나 윗표면과 안감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이 두 표면의 표현을, 나중에도 이야기하겠지만, 엄격하게 구별하여 물체(물질이 아니며, 신체가 더 적절할 것이다)의 이중성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물체의 이중성에 대한 관점에서 윗 표면을 중요시하는 유물론자는 생성의 근원으로서 마테르(마테리아)를 말하기보다 어떤 방식이든지 결과 또는 효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유물론 이전에 이중성에 대해 데카르트는 두 개의 실체라고 했으나, 우리가 보기에는 두 양식을 제기한 것이다. 물론 스피노자는 두 속성이라 불렀다. 하나는 사유이고 다른 하나는 부피라고 부르지만, 나는 사유 실체란 데미우르고스의 변형으로 기하학적 사유이고, 부피 실체는 새로운 자족적 개념으로 유물론의 토대를 마련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본다. 즉 그 사유는 위 표면이며 부피는 안감인 셈이다. 이 안감은 철학사가 전개됨에 따라 물체의 부피 속에다가 에너지와 생명과 기억을 보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물체’(사유실체)의 주체는 부피 바깥(겉표면이나 상층)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자연과도 신체와도 분리되지 않은 방황하는 실체’로서 안감과 그 생성 속에 있다.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길은 멀기만 하다.

이쯤에서 과학이나 지식이론에서 설명하는 물질 개념의 다양성을 살펴보자. 아리스텔레스가 질료-형상론에서 질료라는 개념을 창안해냈다는 것은 장점이다. 그 질료인 물질은 이데아라는 형상에 대립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질료 개념을 이데아(idea)에 대립시켰지만, 그 질료 속에 형상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질료(물질)는 능력(puissance) 즉 잠재성(virtualit?)으로 정의된다.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물질의 요소들이 근본적 실재성이다. 그것들은 불연속적 아톰들로 구성되며, 이들은 다양하게 결합한다. 데카르트에서 물질은 정신과 대비되는 신체로서 실체이다. 그 실체의 속성은 부피(l’?tendue)와 운동이다. 따라서 그 실체는 공간적 도형의 개념들과 기계적 운동으로 설명된다. 디드로에서는 결국 물질이란 역동적 실체이며, 관성적 물질에서 생명과 사유에까지 근본적 형식들로서 연속적 방식으로 변형된다.

소박한 유물론은 갈릴레이와 데카르트 이래로 물질을 수학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가정 위에 있다. 이는 물질 자체보다 물체의 형성(결과)에 관심을 갖는다는 측면에서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사유는 근대과학에 깊은 영향을 주어 물질의 외적 정량을 다루었다. 그러나 결합 방식의 에피쿠로스적 조합으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원자적 결합들의 역량들이 발견되고, 그 내부의 성질을 다루면서 물질 자체의 개념이 새로운 추상 즉 새로운 관념이라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서서히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이 세계의 생성에 대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물질 자체는 기하학적 크기와 물리적 운동들로 다룰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 예외적인 물체가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생명체의 생명과 의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럼에도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회귀의 측면도 있는데, 그 회귀는 동일성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새로운 생성을 한다. 이점에서 수학적이 아닌 다른 유물론자들로서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를 주목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일부 과학적 유물론자들은 인간은 세계 내에 있으면서도 세계에 대해 탐구와 조작을 잘 실행한다고 여긴다. 이들은 또한 과학적 실행에 들어가면 갈수록 인간으로서 행하는 것이라기보다 도구의 도구가 실행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런 확장에 따라 미시물리학과 거시물리학은 물질 자체를 해명이 잘 안 되는 형이상학적인 무엇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래도 이 학문은 인간이 언젠가 모든 물체를 해명하고 곧 인간이라는 물체도 해명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 미래는 아직도 불확정성이다. 그렇다면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본성들은 점점 더 관찰할 수 없게 되며, 또 물질이란 개념은 점점 더 추상화되어 이론적으로 개념화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이 물질이 관념을 통해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한다는 가설은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이데아란, 물질이라는 원질의 생성, 운동성, 방황성, 거친 성질, 공포성 등에 대한 불확실성과 인간의 규정을 넘어서는 비결정성을 한탄하다가 회고적으로 만들어 낸 거푸집이 아닐까? 이것이 인류가 물질을 잘 몰랐던 어린 시절에서 나온 사유의 반영이 아닐까? 아직도 이 사유에 젖어 어느 늙은 불임의 영감님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믿고 있는 유아기적 상상의 반영 아래에 있는 것은 아닐까?

유아적이고 어린 시절의 상상에도 불구하고 생성은 다른 반복을 행하며 지속되고 있다. 성장한 인간은 새로운 생성을 받아들이고, 그 생성의 결과 속에서 공통의 것을 모아보는 노력을 하고 있지나 않은가.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