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크네의 계단[카메라 옵스큐라]

어느 날 회현동 좁은 골목을 지나다 2층 창가에서 들려오는 드르륵 하는 재봉틀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창틀 끝에 처연히 매달린 계단. 누구라도 상승을 꿈꾸며 달려들었다가는 필시 깊은 상처를 입고 말 날카로운 쇠창살, 그리고 당장에 거 보란 듯이 이미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는 실 뭉치. 거기서 나는 아라크네가 꿈꾸었을 법한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보았다.

그리스 신화의 아라크네는 신과 인간을 통틀어 최고의 자수(刺繡)실력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수만 잘 놓으면 신들의 영역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경쟁은 공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수의 여신 아테나와 솜씨를 겨루면서 신들의 ‘더러운’ 모습을 ‘아름답게’ 수놓아 아테나를 이기지만 그로 인해 죽음을 당하고 만다. 아라크네는 아테나로부터 용서를 구할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테나가 그녀를 불쌍히 여겨 죽이지 않고 거미로 만들어 계속 실을 뽑아내게 했다지만 그건 일종의 진통제요 마취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죽었다. 처음 그녀는 실력만 뛰어나면 천국의 계단을 올라 저들처럼 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오를 수 없는 추락의 계단이었다.

라면과 커피를 파는 구멍가게, 벌겋게 녹슨 에어컨 실외기, 좁은 골목 빼꼭하게 들어찬 손수레와 짐자전거, 비탈에 서서 도심으로 흘러들고 싶은 듯, 그러나 곧 무너질 듯 위태롭게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건물, 시커멓다 못해 허옇게 타버린 모습으로 죽어있는 고사목. 이런 풍경이 익숙한 곳이 회현동이다.

‘어진 사람이 모인 곳’이라는 회현동(會賢洞)은 남대문시장 뒤편 가파른 남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한때 ‘회현동 계단’은 나의 사진 주제였다. 회현동의 계단은 그만큼 특이하다. 층계가 길 전체를 채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듯하지도 않다. 층계는 오르막 한 가운데 한 사람 겨우 올라갈 정도로만 비틀거리듯 앉아 있고, 층계 양쪽엔 경사로를 그대로 두고 있다. 계단이 이렇게 된 건 손수레와 자전거, 오토바이 따위가 쉽게 오르내릴 수 있어야 하는, 회현동만이 가진 특이한 사회경제사적 배경 때문이다.

주로 남대문시장에 의류를 공급하는 배후기지 역할을 해 온 회현동에는 곳곳에 “재봉사, 재단사, 객공미싱사 구함”, “○○자수” 등의 광고지가 어지럽게 뒹굴거나 벽에 붙어 있고, 담벼락 위의 철조망에는 색색의 실이 휘감겨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주로 남대문에서 벌어먹으며 싼값에 방을 얻어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자수, 단추 꿰매기, 지퍼홀치기, 양복주머니 달기, 종이심지 만들기 같은 일을 하는 가내 하청업소가 많다. 그래서 골목 어귀마다 커다란 쓰레기봉투가 널려있고 그 안에는 각종 천 조각이나 버려진 지퍼 따위가 가득 묶여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다. 간간이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덜덜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의 귀를 창 안으로 이끈다. 이곳이 한창이던 때에는 좁디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밤늦도록 불 밝혀진 창이 많았다고 하며 지금도 간혹 그런 곳이 보인다.

이제 회현동은 서서히 퇴락해 가고 있다. 마을 어귀에서 가내공장을 운영하는 유○○씨는 최근 의류하청물량의 대부분이 중국으로 넘어가 문 닫은 공장이 많이 생기고 비어 있는 집들도 꽤 늘어났다고 귀띔한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노동자들이었는데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요즘은 노래방 도우미로 전업한 사람이 많단다. 이제 회현동에선 계단을 오를 수 있다는 ‘헛된’ 희망마저 사라져버렸다. 어디 가서 어진 사람들을 찾을 것인가.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

대중옥 이야기[카메라 옵스큐라]

건장한 아지매들의 어깨 사이 저 야윈 영감님은 50년 전통의 해장국집 ‘대중옥’ 사장님이시다. 실제론 더 구부정하고 왜소해서 할배티가 확연한데, 문턱을 넘는 모든 이에게 한결같이 ‘어서옵~쇼’를 외친다. 인터넷사이트 회원 가입시 약관 동의절차만큼이나 일방적이고 예외없는 인사이건만 불쾌하긴커녕 묘한 따뜻함을 준다.

가끔은 몸 가누시기도 힘들어 뵐 때가 있는데 그래도 손님이 들면 ‘어서옵쇼’하는 소리를 반사적으로 앓듯이 내뱉으실 정도니 그 지극한 습관 앞에 말문이 닫힌다. 지난 겨울이던가 아무튼 마지막으로 들렀을 무렵부터 유고한 것인지 더 이상 예의 환영을 받을 수 없어 무척 섭섭했다.

‘어서옵쇼’ 하는 외침을 해장국집 ‘대중옥’에서 들을 때면 구어(口語)에서 사라진 말의 한시적 부활이 애틋한 느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 그 외침이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상화된 것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최근에 ‘라멘’ 등 이른바 정통 일본식임을 자랑하는 식당에 들어설 때 가끔 듣게 되는 ‘이랏샤이마세’ 하는 말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어서옵~쇼’와 ‘이랏샤이마~세’는 의미도 같지만 특히 끝에서 두 번째 음절을 강하고 길게 빼는 특유의 가락도 유사하다. 또 식당 등 가게에서 손님을 맞을 때만 사용하는 말이라는 점도 같다. 집에서 손님을 맞을 때 우리가 ‘어서옵~쇼’ 하지 않듯이 일본에서도 집에 오는 손님에게 ‘이랏샤이마세’ 하지 않는다 한다.

하기야 노인들이 추억하는 평양물냉면 맛에 ‘아지노모도’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건 ‘어서옵~쇼’가 번역된 ‘이랏샤이마~세’이면 뭐 어떠랴? 묽은 국물에 조미료로 맛을 내 배를 채우고, 어서옵쇼를 외치며 조아려 생계를 꾸리고, 뽕짝에 시름을 달래는 일은 자유로운 임노동자로 전락해간 이들이 의지할 동도(東道)의 생활양식이란 애당초 없었던 데서 비롯되니 말이다.

대중옥의 대표 음식은 역시나 해장국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린네(Linne)를 흉내
내 학구적으로 분류하자면 탕類-우거지국目-선지국科에 속한다. 특징은 꽤나 기름지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범한 입맛엔 주문할 때 ‘기름빼고’ 라는 마이너스 옵션이 필수다. 지금이야 마이너스 옵션이 더 일반적일 수 있겠지만 옵션은 옵션일 뿐 여전히 표준은 기름진 해장국이다.

사실 대중옥 주변은 소규모 공업사 등이 밀집해 있던 지역으로 이른바 기름밥을 먹는 이들의 오랜 터전이었다. 금속이나 기계를 주로 다루었던 이들은 미신처럼 소기름이나 돼지비계가 몸속에 쌓인 불순물을 씻어주는 일종의 정화작용을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토록 기름진 고칼로리 해장국을 표준적인 메뉴로 자리하게 한 것은 그런 믿음보다 그들의 고되디 고된 노동이 요구하는 열량이었다.

해장국 외에 대중옥은 인상적인 메뉴를 몇 가지 더 갖고 있다. 추탕, 설렁탕, 간천엽, 머리 고기, 갈비찜 등 평범한 음식도 있고, 등골, 곁간처럼 약간 특이한 메뉴도 있다. 하지만 송치, 우랑 등의 메뉴는 범상치 않은 수준이어서 사람에 따라 몬도가네 풍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송치는 배냇송아지를 일컫는 것으로 엽기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머나먼 이국 고대종교의 신성한 제사용 희생(犧牲)같은 느낌도 주는데, 대중옥에선 그냥 고기안주다. 우랑은 수소의 성기로 복용(?) 후에 손오공의 의형인 우마왕, 혹은 라비린토스(Labyrinthos)에 갇힌 미노타우로스 같은 힘이 샘솟을 듯한데, 역시나 그냥 고기안주다.

대중옥은 지역적으로 마장동과 가깝다. 이 특이한 메뉴들은 과거 인근의 도축장에서 공수된 값싼 부산물들을 재료로 삼아 ‘대중’적 음식으로 만든 것일 뿐 기괴한 취향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대중옥은 청계천 바로 옆 왕십리 뉴타운 재개발지에 있다. 전국의 희귀한 담수생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마법의 어항 청계천 남쪽으로, 철거가 거의 완료되어 이 식당을 드나들던 이들과 그 터전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대중옥은 섬처럼 남아 옛동네의 임종을 하고 있다.

철거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는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그들이 마침내 제 몸뚱이를 허물 때까지 그렇게 민초들의 형단영척(形單影隻), 딱 그 형상으로 말이다.

이병태(춘천교대 강사) /

늦가을의 이야기〔카메라 옵스큐라〕

지난번에는 빛이 보여주는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그림자 이야기를 해 보자. 그렇다, 2005년 꽤 늦은 가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림자가 건네는 이야기에 붙들려 이 사진을 찍었다.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는지? 웬 사내와 여자가 마주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정도? 마주 선 여인이 꽃이라도 들고 있는 듯 보이니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은 아닐까? 그런데 사내는 손에 틀림없이 휴대 전화로 보이는 걸 들고 있다. ‘작업’을 거는 중일지도 모른다. 작업의 진도가 무난하게 흘러가 이제 막 여자 전화번호라도 얻게 된 건 아닐까.

그러나 사실 그림자의 주인은 두 사람 모두 여자였다. 게다가 둘은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저 제 할 일 하며 제 갈 길을 가던 낯선 타인들이었다. 서로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거의 나란히 걸어가다가 우연히 한 프레임 속에 들어왔을 뿐이다.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긴장이나 여러 가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상상은 비스듬히 비치는 오후 햇살이 그린 그림자를 핑계로 우리가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사진이 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의 반영일 뿐이다. 심지어 그 반영조차도 왜곡되고 굴절되기 십상이다. 때로는 빛이 굴절하고 때로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감상자의 주관적 소망이나 편견에 의해 제멋대로 곡해되기도 한다. 사진을 재현으로만 보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사진이 보여주는 반영은 때로 허망한 것이니까.

일찍이 장자는 그림자 이야기로 우리가 집착하는 현실의 삶 또한 허망한 것일지 모른다고 암시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아까는 걸어가다가 지금은 멈추고, 아까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서는군요. 어쩌면 그렇게도 지조가 없소?”
그림자가 대답했다.
“난들 그러고 싶어서 그럴까? 내가 의지하는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림자는 허망한 존재다. 실체가 아니기 떄문이다. 그런데 그림자의 그림자인 망양(罔兩)은 허망〔罔〕이 두 번〔兩〕 겹쳐 있는 존재니, ‘허망하고 또 허망한〔罔而又罔〕’ 존재다. 그림자가 실체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망양은 그림자가 움직이면 따라 움직이는 존재일 뿐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지 못한다. 망양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림자는 실체이다. 그런데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림자도 더 이상 실체가 아니라 허망한 존재다. 장자는 그림자의 그림자를 통해서 그림자는 물론이고 실체 또한 허망한 것임을 밝힌다. 꿈속의 꿈을 통해 꿈의 허망함을 각성시키고 다시 대각(大覺)을 통해 현실조차도 사실은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태연히 한 장자였으니.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왜 사진을 찍는 걸까?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철학) /

오늘은 나, 내일은 너[카메라 옵스큐라]

골목은 침울하다. 일상조차 변변히 흐르지 못할 만치 생동의 기운이 점점 쇠해가는 탓이다. 그러니 작은 화초나 아이들, 햇볕 한뼘처럼 사소한 생기의 편린들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달리 보일 수밖에. 사진을 시작한 후로 몇 차례나 옛 동네의 임종을 했건만 그 쇠락의 면면은 항상 처연한 기시감(旣視感)을 몰고 온다. 병증의 악화 정도만 다를 뿐 소멸의 압박은 늙은 골목 어디에서나 감지되기에, 그 이미지들에 감도는 불길함도 하릴없다.

기억하기에, ‘마카브르(Macabre)’라 불리던 중세 유럽의 회화작품들에도 비슷한 불길함이 흘렀다. 해골이나 시체처럼 칙칙한 오브제를 포함하는 그림들은 모든 인간의 숙명적 종국을 은유하면서 ‘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가르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매개로 피안에 대한 염원을 일깨우고,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믿음과 복종을 강화하려던 것이다. 지극히 중세다운 그림인 셈인데, 그 훈계가 페스트의 참혹한 기억 등을 염두에 둘 때 생각보다 효과적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우아하게 빛나는 신성을 위해 고해(苦海)의 현세가 가벼이 부정됨은 마뜩찮지만, 사신(死神)의 흔적들이 어쨌거나 삶(영생)을 향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래서, 마카브르는 죽음이 삶에 닿는 역설이다.

골목의 이미지 또한 유사한 역설이지만, 구질구질한 골목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그 자리에 들어설 ‘이 편한 세상’ 따위를 찬양하려는 게 아니다. 그 역설은 온통 스러지는 것들의 이미지가 생존에 관해 절절한 이야기를 하는 데 있다.

재개발은 그 주체인 자본과 국가 권력의 측면에서 때려 부수는 일(타나토스)과 새로 짓는 일(에로스)이 하나됨이다. 부수거나 짓거나 어차피 거시적인 자본 증식의 일환일 뿐이고 양자의 유기적 결합이야말로 그 증식에 더욱 효과적이다. 아울러 그 과정 전체는 권력이 의도하는 도시재개발의 실천이다. 그러나 그 맞은편에서 양자는 철저히 분리된다. 타나토스의 저주와 에로스의 축복은 서로 다른 이들의 몫이어서 철거의 대상과 건축의 수혜자는 다르다. 어떤 이는 새집에 깃드는 행복이나 투기의 성취를 누리지만, 주거와 생활의 공간 전체를 송두리째 없애버리는 잔혹한 흑마술은 오로지 가장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집중된다.

이들은 대개 노인으로 그 낡은 담벼락이나 지붕들처럼 수십년을 그곳에 머물러 왔다. 공간의 소멸은 그토록 익숙한 삶의 터전과 이웃들, 그 속에서 형성된 인간 관계, 생활의 습관, 일상의 전개 방식 등이 일거에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는 삶의 기반과 양식의 소멸이며, 정체성의 파괴다. 골목과 옛동네의 무도한 궤멸이 철거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직접적인 폭력성을 넘어 소리없는 홀로코스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치 창출보다는 투기로 성장해 온 건설 자본들의 비루한 연명, 마치 염습(殮襲) 같은 도시의 미화가 저 학살을 댓가로 치를 가치가 있는가?

철거가 시작된 동네에서 옛집 근처를 배회하는 이들은 자기 육신의 주변을 서성이는 살아 있는 영혼이 되지만, 이들의 안식은 또 다른 늙은 동네에서만 허락된다. 사라진 골목들은 남은 골목들에게 가장 비관적인 뉘앙스로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이병태 /

오후의 표지(標識) [카메라 옵스큐라]

텅 빈 골목길은 때로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빈 방이 생각날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텅 빈 골목을 찍은 사진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런 사진을 본 사람들이 말한다. “도대체 뭘 찍은 거야?”

오후의 표지(標識), 2007, 통의동의 막다른 곳, Contax G1
이 사진은 경복궁 서쪽 통의동의 어느 골목길 막다른 곳을 찍은 것이다. 당신 눈길이 하늘을 향해 잔가지를 뻗은 나무에 먼저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주 피사체는 텅 빈 벽에 비친 오후 햇살이다. 앙상한 겨울나무가 배경에 있지만 카메라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없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아주 맑은 겨울날이었기에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선명한데다 이단으로 된 벽 때문에 굵다란 화살표가 땅을 향해 단숨에 내리꽂히는 듯한 그림이 생겼다. 그래서 사진 제목을 ‘오후의 표지’라 했다.

같은 곳을 여러 차례 지나다녔지만 사진을 찍던 저 순간처럼 빛이 비치지 않을 때, 통의동 이 막다른 골목은 눈길을 끌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텅 빈 벽뿐이었다. 같은 장소지만 빛이 없는 빈 벽은 참으로 초라했다. 저 순간은 그래서 ‘빛나는’ 순간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기에 이제는 돌아가야 하는구나 하고 체념하는 골목길, 막다른 공간에서 저런 장면을 만나는 일은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사진을 찍으면서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참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게 많다는 걸 어떻게 알까?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사진기를 들고 여러 해를 어슬렁거리면서 나는 숨바꼭질을 하는 술래 같다는 생각도 했다. 두리번거리다 보면 숨죽여 꼭꼭 숨어 있던 사물이 혹은 어떤 공간이 내 앞에 불쑥 튀어나와서는 말을 거는 순간이 있다. 아쉽게도 대체로 그 순간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짧다. 하지만 말을 거는 그 순간, 피사체는 놀랍게도 아주 커다랗게 도드라져 내 앞에 우뚝 선다. 그래, 찰칵! 숨어 있던 친구를 발견한 술래가 “찾았다!” 외치는 소리하고 똑같다.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철학) /

뭘 찍어요? [카메라 옵스큐라]

사진기 들고 뒷골목 헤매길 만 6년, 햇수로 8년째 접어듭니다. 비슷하게 영혼이 고장난 동행이 있어 긴 방랑에 지치기는커녕 더욱 기꺼이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목적을 갖고 골목을 헤맨 것은 분명 아닙니다만 어쨌든 허튼짓의 흔적들과 이야기가 남아 이렇게 ‘카메라 옵스큐라’에 담습니다.

사진 찍는 ‘철학도’들의 수다라서 주로 사진과 피사체, 촬영과 감상, 혹은 사진 너머에 대한 철학적 수상들이며, 당연히 그간 얻은 이미지도 함께 합니다.

프롤로그 ; “뭘 찍어요?”

대개는 재개발 예정이거나 진행 중인 옛 동네 골목들을 돌면서 사진을 찍는데, 이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뭘 찍어요?”다. 사실 이 물음의 함축은 맥락에 따라서 꽤나 복합적이다. 주변의 지인들이 그렇게 묻는다면 가벼운 호기심 때문인지라 대답 또한 가볍다. 너무 가벼워서 그때그때 뭐라 대답했는지 사실 기억도 나질 않는다.

부담스러운 경우는 촬영 중 골목의 주인들(엄밀히 말하자면 그곳에 있어야 할 생존의 이유가 있는 이들)이 그렇게 물어 올 때다. 호기심, 의심, 경계, 적대, 심지어 기대와 욕망 등 복잡한 정서적 반응이 때론 강하게 감지되기도 하거니와 어쨌거나 그 시공간의 이방인으로서 위축될 수밖에 없어서 늘 곤혹스럽다.

그나마 마음 편히 대답할 수 있는 경우는 사람들이 별반 경계심 없이, 때론 미소와 함께 조용히 물어 올 때다. 이 허름한 골목에 애써 뭐 찍을 게 있냐며. 왠지 고마운 마음에 공손히 답하긴 하지만, 대개 “꽃이 예뻐서요.”처럼 어정쩡한 것이 되고 만다. 장황하게 설명하기도 그렇고, 침묵할 수도 없어서다. 그렇다고 고스란히 거짓말은 아닌 게 딱히 꽃이 아니더라도 분명 눈을 끄는 피사체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 전에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의 골목은 언뜻 뒤숭숭하고 침침해 보이지만 몇 번을 되풀이해서 다녀도 늘 새롭다. 길의 너비며 방향, 이어짐과 막다름, 담벼락의 빛깔과 재질, 집과 계단의 모양새, 텃밭과 화분, 그리고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정경은 또 날씨와 계절, 아침과 오후, 사람들의 필요와 취향 등 수없이 많은 변항들의 함수다. 그렇기에 매순간 어떻게 다른 광경으로 다가올지 그 어떤 예단도 용납하지 않는다. 몇 년을 곱씹어도 버릇처럼 골목에 다시 접어드는 것은 이 공간이 피사체로서 또 성찰의 단초로서 항상 새롭고 묵직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동네 골목이 갖는 이 경탄할 만한 면모는 기실 피맺힌 그 탄생과 소멸의 역사가 낳은 부산물이다. 이 골목들은 처음부터 권력의 통제와 기획 하에 형성되지 않았다. 이른바 저임금 노동력으로서 도시에 유입된 사람들이 일제시대의 토막촌, 전후의 판자촌을 중심으로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며, 서툴고 거친 합의와 치열한 삶이 창조한 미증유의 자율적 건축공간이다.

집이 들어설 자리를 비켜 길이 났으니 곧을 리 없고 또 그 길을 비켜 다른 집이 들어섰기에 집모양새가 반듯할 리 없다. 몇 번의 대선과 총선이 지나가면서 언발에 오줌 누는 권력의 생색내기를 제외하곤, 어떤 지원과 배려도 없이 수백 수천만 그 주인들이 자신들의 생존만큼이나 힘겹게 수십년간 고치고 가꿔온 것이다.

이름도 취지도 쌍스러운 서울의 르네‘쌍’스 따위가 아니더라도 골목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학살되고 있었다. 그 주인들과 함께. 몇 년간의 출사가 어쩌면 골목들에 대한 조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겨울엔 기어이 그 주인들의 진짜 장례식에 다녀오고 말았다.

내일 또 나는 골목에 간다. 그 임종을 위해. 또 혹시 모를 심폐소생을 위해.

이병태 / admin@admin.com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2002년 개봉한 영화에는 175센티미터의 늘씬한 키에 군살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예쁜 여주인공 기네스 펠트로가 등장한다. 뭐 이렇게 예쁘고 날씬한 배우들이 헐리웃에만 있나? 우리나라에도 널렸다. 내 주위를 둘러보면? 한국 여성의 유전적 특성상 175센티미터의 키를 자랑하는 이는 거의 없다. 대신 날씬한 여성들은 많은 편이다. 특히 학회 분과에서 같이 공부하는 후배들은 뭘 먹고 사는지 하늘하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세미나를 하고 나면 왠지 모를 우울감에 시달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밖으로 돌리면 나와 비슷한 40대의 넉넉한 체형도 얼마든지 널렸다. 아이 한 둘 낳고 운동량 부족한 주부들에게 운동이 왠말인가? 남편 직장보내고, 집안 살림에 재테크에 아이 학원 챙겨 보내기까지. 핑계같지만 정말 시간이 없다. 티비에 나오는 유명한 의사들의 말씀. 체중감량을 원한다면 적게 먹고 많이 운동하라. 그걸 누가 모르나? 그래서 나를 비롯한 전세계의 주부들은 다이어트 식품에 주목한다. 이쯤에서 이야기의 대상폭을 문명화된 사회에 사는 현대인으로 넓히는 것이 좋겠다. 사실 다이어트니 살빼기니 하는 것들은 문명화된 삶의 고질적인 현대병 아닌가.에 나오는 조에족이 다이어트 식품 찾는다는 말은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현대인은 바쁘다. 학생은 학생대로 바쁘고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바쁘고 주부는 주부대로 바쁘다. 황혼을 느긋하게 즐겨야 하는 노인들도 요즘은 생계를 위해서 바쁘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늘씬하고 예쁜 여성을 이 영화에서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남자 주인공 잭 블랙에게만 그렇게 보인다는 설정이다. 영화에서 실제 여주인공의 모습은 136킬로그램의 여성이다. 그런데 잭 블랙에게는 그 여성이 완벽한 여신의 모습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최고의 몸매를 가진 여자와만 데이트를 하려는 잭 블랙은 번번이 연애에 실패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고장난 엘리베이터에서 자기의욕고취 전문가를 만나 최면에 걸리고 만다. 전문가는 잭 블랙에게 여성의 외모가 아닌 내면만을 보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만난 여성이 너무나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기네스 펠트로였던 것이다. 그는 애인이 앉는 의자가 박살이 나고 속옷 가게에서 고른 팬티가 낙하산만 해도 개의치 않았다. 눈 앞의 애인이 너무나도 날씬하고 예쁜데 뭐 그런 사소한 일들이 대수이겠는가.

뚱뚱한 = 못생긴

그런데 사랑에 위기가 닥친다. 잭 블랙이 최면에서 깨어나 버린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남성 여러분은 어찌하시겠는가?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장담 못할 것들이 영화에서의 해피엔딩이다. 특히나 여성에게 현실은 더더욱 암울하다. 2006년 개봉한 한국영화에서 주인공 김아중은 암울한 현실의 상징 그 자체이다. 믿었던 애인에게 사기 당하고 결국 자살의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주인공은 성형을 선택한다. 그녀가 여러 번의 연애에 실패한 이유는 단 하나 뚱뚱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뚱뚱하다’와 ‘못생겼다’는 결코 동의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의 동급의 가치로 둘을 연관지어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이목구비가 남들에 비해 좀 뚜렷하지 못하고 비율이 안 맞아 못생겼을지라도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 타고 난 걸 어쩌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요즘은 곱게 바라보아 주지 않는다. 돈만 주면 성형외과에서 어느 정도는 잡아주니. 하지만 뚱뚱한건 도대체 동정받을 만하지도 않고 오히려 지탄의 대상일 뿐이다. 게다가 못생겼다는 덤까지 받는다.

미디어에 비치는 뚱뚱한 여성 혹은 남성을 떠올려보자. 뭔가 성격이나 직업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고 결코 주인공은 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프로그램들이 최근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살빼기 프로젝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부들의 시청이 많은 아침 방송에서 단편적으로 편성하던 프로그램들이었는데 최근엔 케이블 티비를 필두로 살빼기 프로젝트 그 자체가 목적인 프로그램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물론 외국 케이블 채널에선 이미 몇 년 전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그램들이었고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었다.

초고도 비만인들을 선정해서 운동 과정과 살이 빠지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은 눈물이 나는 감동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얼마 전 우연히 케이블 티비에서 본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초고도 비만일 때의 실물크기 사진을 세워놓고 쉽게 사람 모습이 떨어져 나가게 설치해 놓았다. 20킬로그램을 뺀 비만 여성이 그 사진을 뚫고 지나가는 장면이었다. 모두 환호의 박수를 보냈다. 그 옆에는 빨래비누를 20킬로그램만큼 쌓아 놓고 그 만큼이 여성의 몸에서 빠져나간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

그 빨래비누만큼의 부피, 지금의 몸보다 컸던 과거의 사진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당연히 몸에서 불필요했던 부분들이 빠져나간 것이다. 다시 말해 내 것이 아닌 것들이 나에게서 나갔다.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인류는 모두 내 것이 아닌 것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구분했다. 인간의 정신은 신체와 분리되어 순수한 영혼이 되었다. 이러한 영혼은 불멸성을 가지며 분리불가능하고 파괴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는 이 세상 어떤 자연 만물과도 다르지 않는 성질을 지닌 것으로 설명된다.

근대의 자연학에서 보면 신체는 수학적으로 양화될 수 있으며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데카르트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은 기계적 운동이며, 이 운동은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고 보았다. 이러한 기계론적 자연관에서 생명체와 비생명체, 유기체와 무기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인간의 신체든 자연사물이든 자연법칙에 따르는 기계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 이후 근대 세계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육체와 육체의 분리

그러나 현대 또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데카르트의 인간에 대한 설명에 역사적인 획을 긋는다. 데카르트의 영혼과 신체는 다시 결합한다.에서 기계족들이 매트릭스라는 가상공간을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육체만 살려 놓고 인간을 사육하니 오래 살지를 못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든 가상공간이 매트릭스이고 거기에서 인간은 정신활동을 하며 통 속에 있는 육체를 지속시킨다. 결국 인간이라는 특별한 존재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서는 결코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육체와 육체가 분리되는 경험을 우리는 하고 있다. 긴장은 하지 마시라. 피와 살이 튀는 하드고어 영화에서 보는 육체의 분리는 아니니.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쯤이라도 해본 사람, 뱃살 대신 초콜릿 복근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 모두 육체의 분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내 안에 있는 지방은 전적으로 질이 나쁘고 결코 나와 화해할 수 없는 내 안의 나이다. 내 안에 너는 있을지 몰라도 내 안에 있는 지방은 존재하지만 존재할 자리가 없다.

내게서 분리되어야 하는 나는 자본주의와 대단히 친숙하다. 자본주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드는데도 무척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사라지게 하는데도 훌륭한 도움을 주고 있다. 스마트폰 앱은 전국의 맛집을 친절하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깔끔한 시설에 가격마저 저렴한 피트니스 클럽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나보다는 내안의 나를 더 사랑한다. 이제 미디어는 눈부신 배우들만 영상에 담지 않는다. 자기 몸을 부담스러워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담아낸다.

미디어는 거식증에 걸린 해골같은 모델들도 담아내고 어린나이에 뱃살공주가 된 초등학생도 담아내며 20~30킬로그램씩 눈에 띄게 살을 제거할 수 있는 초고도비만의 사람들도 담는다. 왜냐하면 모두 훌륭한 시청률과 광고료를 보장하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들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몸무게를 밝히며 카메라 앞에 나선다. 나 역시 오늘도 내 안의 나를 내보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휴먼다큐를 찍는다. 물론 감독은 자본주의 선생이다.

강지은(건국대 강사) /

당신은 친절하신가요?[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1. 당신은 은행원입니다. 주 업무는 대출상담이지요. 그런데 오늘은 대출 조건에 맞지 않는 할머니 한 분이 당신을 곤란하게 하고 있네요. 수입, 담보 등 대출 규정을 말씀드려도 막무가내로 대출을 해 달라고 조르고 있어요. 상황이 어려운 건 알겠지만, 규정에 맞지 않는데 저라고 도리가 있겠어요? 그러니까요 할머니, 제발 다른데 가서 알아보시라고요!!!

#2. 당신은 운전 중입니다. 마침 신호 대기 중이라서 차도 한 가운데에 서 있지요. 그런데 맞은편 인도가 좀 소란스러운 것 같아요. 한 여자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지 도와 줄 사람을 찾고 있는 듯해요. 아니나 다를까, 뒤따라 온 한 무리의 남자들―서넛은 되는 것 같아요―이 여자를 잡아 마구 때리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그냥 가던 길을 가고 싶어요. 생판 모르는 다른 사람의 일에 연루되는 건 귀찮기만 할 뿐이잖아요? 그런데 이놈의 신호가 참 기네요. 또다시 도망친 여자가 이번에는 당신 쪽으로 달려오는 것 같아요. 당신은 차 문이 잠기었는지 다시 확인을 합니다. 아, 마침 신호가 바뀌었어요. 재빨리 여기를 벗어나야겠어요.

#3.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아침부터 누군가 당신의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지난 번 운전 중에 보았던 그 여자가 결국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군요. 경찰들은 당신이 유일한 목격자이니, 증인 출석을 해 달라고 하고 있어요. 용의자는 있는데 물증이 없다나요? 다른 목격자들도 있을 텐데, 경찰은 왜 하필 당신을 찾아왔을까요. 당신은 이 모든 상황이 그저 귀찮고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아, 마침 어린 시절 친구가 고향에 한 번 내려오라고 전부터 전화며 편지며 해대던 게 생각났어요. 그래요,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서 며칠 푹 쉬다 오는 것도 괜찮겠어요.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위의 상황에 처한 인물은 해원. 위의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해원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신경 쓸 생각도 없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그런 인물이다. 이런 저런 상황이 복잡하던 차에 거의 해고 통보와도 다름없는 휴가를 받게 된 해원은 고향에 잠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마침 친구 복남이 오래 전부터 고향에 한 번 내려오라며 전화며 편지며 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원은 고향 무도에 가게 되고, 친구 복남의 현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타인의 외면으로 질서가 유지되는 섬, 무도

복남, 복남의 딸, 복남의 남편(만종), 복남의 시동생, 복남의 시고모, 그 외에 친인척 관계로 여겨지는 할머니들 세 분, 치매에 걸려 하루 종일 이름 모를 풀만 씹어대시는 할아버지 한 분, 이렇게 아홉 명이 무도에 남아 있는 사람들 전부이다. 이 섬에서 해원이 목격하는 것은 시동생의 성적 학대와 남편 만종의 폭력, 그리고 마을의 모든 중노동을 견디며 살고 있는 복남의 삶이다. 사실 복남이 해원에게 그토록 고향에 한 번 내려오라고 사정했던 이유도, 복남에게 있어 해원은 섬을 떠날 수 있게 해줄 유일한 외부의 끈이었기 때문이다. 복남은 중노동과 학대, 폭력, 멸시 등 모든 억압을 참고 살아왔지만, 자신의 딸이 만종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되자 딸을 위해 섬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실제로 딸이 성폭행을 당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딸이 유난히 아빠에게 집착을 하고, “가슴이 커야 남자한테 사랑받는다”는 식의 말을 하는 등, 복남이 의심 할 만 한 정황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해원은 복남의 의심에 대해 “너 미쳤니?”라고 말하며 사실을 확인해보려 하지 않고, 도시로 데려다 달라는 복남의 부탁에 대해 ‘도시에서의 삶도 여기랑 별반 다르지 않으며, 떠나는 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식으로 대응한다. 복남을 억압, 착취, 이용하는 마을의 질서가 해원의 방관으로 유지되는 순간이다.

무도에서는 법도 효력이 없다. 복남은 해원의 도움 없이 마을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복남의 계획은 이내 발각이 되고, 복남은 섬을 떠나기도 전에 만종에게 붙잡히고 만다. 바닷가에서 마을까지 질질 끌려오면서 복남은 만종에게 계속 구타를 당하고, 누구 하나 이를 말리는 사람은 없다. 보다 못한 딸이 아빠에게 매달리지만 폭력은 멈추지 않고, 그러던 중 내던져진 딸은 돌에 머리를 부딪혀 죽고 만다. 사건을 조사하러 경찰이 왔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이가 놀다 넘어진 것이라고 둘러대며 오히려 복남이 돈을 훔쳐 달아나려 했다고 고발한다.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 본 해원도 자신은 그 시간에 자고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아서 하겠다며 경찰을 돌려보낸다. 무도에서는 법도 무용지물, 부정의로부터 복남을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복남은 태양을 노려보다 복수의 ‘낫’을 든다.

방관도 죄다

무도에서 복남에 대한 폭력 및 모든 학대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그것을 정당화하는 마을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안엔 남자가 있어야 한다.”, “여자는 남자의 그늘에서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것이다.”, 등등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마을의 할머니들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마을의 유일한 남자인 만종 형제를 떠받들면서 복남을 억압?착취한다. 어떻게 보면, 마을에서 만종 형제는 일종의 신이요, 할머니들은 신을 모시면서 권력을 행사하는 지배집단이고, 복남은 그 피해자인 것이다. 복남은 해원을 통해 그 억압구조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해원의 방관과 무시로 그것은 좌절되었다. 딸의 죽음은 복남에게 자신을 보호해 줄 사회적 장치 또한 없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딸이 죽은 후 여느 때처럼, 아니 여느 때보다 더 일을 많이 하던 복남이 감자를 캐던 손을 멈추고 한동안 태양을 노려보다가, “너무 참으면 병난다”고 태양이 그랬다면서 자신에게 “가해자”였던 마을 사람들에게 낫을 휘두르는 건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복남의 살인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억압을 당해오던 한 사람이, 자신에게 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달리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믿었던 사람은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심지어 어떤 사회적?법적 장치도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즉 복남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과연 칼을 빼들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만일 해원이 복남의 말을 들어주었더라면, 만일 해원이 경찰에게 딸의 죽음에 대해 목격한 그대로 말해주었더라면, 복남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인 복남은 이제 해원을 쫓는다. 난 이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난 잘못한 것도 없고 그저 보고 있었을 뿐인데 왜 나까지 죽이려 하는 거냐고 원망하는 해원의 물음에 복남은 대답한다. “넌 너무 불친절해.”

넌 너무 불친절해.

무도에는 가해자인 마을 주민들이 있었고, 피해자인 복남이 있었다. 타지에서 온 해원은 그 구도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복남을 외면하는 순간 그녀 역시 가해자가 되었다. 어떤 부정의가 저질러지고 있을 때, 그것을 방관하는 것은 그 부정의가 지속될 수 있도록 일조하는 것이다. 부정의를 방관하는 것, 그것은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만큼이나 나쁘다. 그 구도 속에 나는 없다고, 나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믿고 싶겠지만, 부정의의 피해는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부정의를 방관하는 순간, 나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이다.

서울로 돌아온 해원은 경찰서를 찾아가 용의자를 지목한다. 영화 초반 폭행 치사 사건의 범인을 밝혀낼 수 있도록 증언을 해 준 것이다. 누군가의 삶에 끼어드는 것도, 누군가가 내 삶에 끼어드는 것도 싫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삶에 끼어들고 연루되는 것은 싫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버섯처럼 툭 튀어나온 홀로 떨어진 섬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이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의 삶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나와 상관없는 일,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도에서 살아남은 해원이 깨달은 것은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조주영(서울시립대 박사과정) /

미용 성형, 외모지상주의? 자기 배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현대 사회에서 몸은 문화를 전달하는 하나의 매체로 활용된다. 먹는 것, 입는 것, 사회적 의사소통 장치로서의 제스처, 보디랭귀지를 표현하는 것 등의 일상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신체 튜닝’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미용성형은 외모지상주의의 산물”이라는 여성주의 비판은 아직도 유효한 것일까?

압구정동에 가본 일이 있는가? “성형은 압구정으로!”이라는 광고 문구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늘어선 성형외과들은 이 시대 성형에 대한 우리의 행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쌍꺼풀 수술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이슈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분위기가 대세였던 것 같다. 그 시절, 우리 모두는 성형은 자연성에 위배되는 인위성이고 비정상성이라고 그래서 어느 정도 부정적으로 이해되었다. 때문에 혹 성형을 하더라도 드러내놓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보톡스, 턱 깎는 수술, 눈 트임 수술, 코 높이기, 가슴 성형 등의 단어가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비만 치료, 피부 관리, 날씬한 몸, 다이어트, 거식증, 폭식증 등의 단어 역시도 익숙하며, 이들은 오히려 현대 문화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개념인 것처럼 이해된다. 얼굴을, 몸을 고치는 데 얼마가 들었다는 이야기부터 앞으로 어디를 어떻게 더 고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흉이 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내 애인이 성형을 한다면 혹은 하였다면, 내 기분이 어떠한가?”는 질문이 심심치 않게 T.V. 버라이어티 쇼에 등장하였지만, 이제 이런 질문들은 식상하다. 성형을 하는 것은 이미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고,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로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몸은 이제 더 이상 주어진 대로 그저 보존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술을 이용하여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 흡입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여대생의 이야기, 쌍꺼풀 수술 이후 부작용으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했다는 어느 여자 승무원의 이야기도 심각한 수준에서 논의되지 않고 그저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자기 배려로서의 미용 성형

한 두 해 전, 몸짱 열풍을 일으킨 아줌마가 있었다. 주인공은 결혼 10년 차이며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삼십대 후반의 여성이다. 그 나이 대에 유지하기 어려운 신체적 조건인 162센티의 키에 50킬로그램의 몸무게, 게다가 탄탄한 근육을 지닌 몸매는 그 여성을 ‘봄날 아줌마’‘몸짱 아줌마’로 호칭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중년에도 20대의 몸매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로 지어졌다는 ‘봄날 아줌마’의 호칭은 한 때 전국을 강타한 화제의 이름으로 떠올랐다.

잘 관리된 몸짱 아줌마의 몸매는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감탄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 사회에 몸매 관리 열풍을 일으키며 지방 흡입 수술, 유방 확대 수술 같은 몸매 관리 열풍을 부추기는 한 요인이 되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서 자기 관리를 잘한 주체적인 여성의 전형으로도 이해되었다. 젊음을 유지하거나 회복함으로써 단지 노화된 얼굴에 대한 거부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재기획하는 주체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처럼 얼굴 가꾸기, 외모 만들기 등이 하나의 트랜드가 되어 버린 지금, 성형을 단지 아름다운 외모를 가꾸기 위한 욕망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미용 성형의 문제는 단지 외모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꽤나 설득력 있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의 사람들은 성형을 여성들이 자아와 맺는 관계성과 관련된 실천이라는 것에 입각한다. 미용 성형을 예뻐지기 위함으로만 이해하면서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실제로 성형을 하는 여성들의 삶과 몸의 서사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거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성형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기쁨과 설레임을 맛볼 수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단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내 몸을 혹사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날 위해 무언가를 투자하는 것이며 나만을 위해 계획하고 돈을 쓰는 것이라는 주체적 의식이 담겨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미용 성형을 자기 주체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미용 성형을 하는 여성들이 구사해내는 다양한 서사에 주목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이들은 몸을 자신이 배려해야 하는 일차적인 대상으로 이해하는 소비문화의 담론 안에서 성형을 통해서 자기를 사랑하며 주체적으로 인식할 줄 아는 여성들이며, 이들이야말로 당당한 자기 배려를 하는 여성이라는 것이다.

신체 변형 행위 자체를 무조건 혐오하던 전통적 시선은 점차 사라지고 미용 성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담론이 보편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속에서 성형을 하는 여성들의 선택과 결정을 이해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은 모습으로 재현하기 위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하는 하나의 새로운 긍정적인 담론 구성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순응의 몸짓인 미용성형

미용 성형이 그것을 선택하는 자아에게 자신감과 주체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고 보고 미용 성형을 선택하는 여성들의 구체적인 경험과 서사에 주목해보는 것은 미용 성형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통찰 지점을 준다. 하지만 이 같은 입장은 몸을 주체 스스로가 온전히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논쟁적이다. 미용 성형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이유와 수술 선택이 과연 전적으로 개인 내면에서 나오는 것인지, 미용성형이 진정한 주체성의 발현인지 등의 문제는 좀 더 꼼꼼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성형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외모는 어디에서 오는가? 외모의 기준 역시도 스스로의 내면에서 산출되는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아무리 그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외부적 압력의 또 다른 방식일 뿐이며, 그것에 저항하거나 대항하는 몸짓이 아니다. 수잔 보르도는 미용 성형에 대한 자기 배려 담론이 여전히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외모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지적한다. 사실 많은 여성들이 못생겼다고 간주되는 외모로부터 벗어나고 늙어서 도태되었다고 여겨지는 외모로부터 벗어나 아름다운 외모를 성취함으로써 자신감, 자기 배려의 느낌 같은 것을 받으며 심리적 쾌락을 갖는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미용 성형을 통해 얻게 된다는 허구적이고 불안정한 자기 주체성일 뿐이다.

잘 생긴 외모, 못생긴 외모의 구분은 누가 마련하는 것인가? 키가 작은 사람은 루저라는 의식, 뚱뚱함과 날씬함의 상반된 가치, 이들은 누구의 권력과 연결되어 있는가? 왜 많은 사람들이 못생김, 작은 키, 뚱뚱함을 열등감으로 느끼는가? 왜 외모가 항상 우리의 자신감과 연결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어디로부터 부여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채로 아름다운 외모를 찾는 것을 자기를 위한 투자라고 간주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를 지닌다.

왜냐하면 성형 미용을 통해 획득된 외모는 일시적인 자신감일 수는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여성을 몸으로 환원하는 것이며, 성별 권력 관계를 재생산하는 가부장적 권력을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미용 성형을 선택하는 많은 여성들이 느끼는 자신감, 자기 배려라는 효과는 진정한 자기 사랑, 자기 배려가 아니라 가부장 사회가 부여하는 단일한 아름다움의 기준을 향해 끝없이 질주해야만 하는 불안정한 심리일 뿐은 아닌가? 또한 그것은 가부장제 의해 통제되는 억압적 쾌락이며 거짓 주체성일 뿐인 것은 아닌가?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

키스방, 성 서비스의 경계를 협상하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하이-테크 서비스/하이-터치 서비스

지구화와 함께 도시의 노동은 생산자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강남 테헤란로의 주요 건물들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법률, 금융, 광고, 컨설팅, 의료, 회계와 같은 서비스업의 간판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생산자 서비스업에 초점을 맞추는 이러한 관점은 성별에 따라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는 서비스업의 또 다른 측면들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여성들은 노인 돌보미, 베이비시터, 가사 도우미, 마사지사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상당수의 여성들은 성 서비스업이라는 고도의 신체적 접촉이 요구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맥다웰은 여성들의 서비스 노동이 갖는 특징을 부각시키기 위해 하이-테크 서비스(high-tech service)와 하이-터치 서비스(high-touch service)개념을 구분하였다. 전자가 생산 서비스와 관련된 전문 기술, 지식 노동의 특징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육체적, 정서적 접촉이 이루어지는 소비자 서비스 노동의 특징을 보여준다. 즉 하이-터치 서비스는 오늘날 여성의 노동에서 여성의 몸 뿐 아니라 몸 위에 작용하고 있는 친밀 감정, 성적 판타지, 사회적 욕망까지도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하이-터치 서비스”의 부상과 함께 사람들은 육체적, 감정적, 성적 친밀성이 시장에서 거래될 수 없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국가나 자치 기구에 의해 주도되었던 사회복지 사업은 가사 혹은 돌봄을 시장에서 거래되는 서비스 노동으로 만들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마사지 업종의 출현은 긴밀한 신체적 혹은 성적 접촉을 전제로 하는 서비스가 시장에서 거래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왔다. 그러나 과연 어디까지의 접촉이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성 서비스업 특히 직접적인 성기 접촉을 포함하는 매춘은 거래되어도 좋은 것인가? 키스방은 매춘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키스방과 성적 욕망의 경계 협상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필자는 최근 확대되고 있는 키스방 서비스에 주목하고자 한다. 키스방에 대한 분석은 성적 욕망이 경제, 법률, 도덕이 정해놓은 성 서비스의 경계를 어떻게 협상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유흥가 및 대학가 주변 어디든 키스방 전단지가 난무한다. 잘 아시다시피 노래방이 노래를 할 수 있는 룸과 시설을 대여하는 업종이라면, 키스방은 주로 남성 고객이 젊은 여성 매니저와 제한된 성적 접촉 특히 키스를 즐길 수 있도록 주선하고 이를 위한 룸과 시설을 제공하는 업종이다.

우선 키스방의 등장은 사람들이 국가적 혹은 사회적 제도에 의해 규정된 성 서비스의 경계를 어떻게 피해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시행과 함께 한국의 법은 직접적인 성교 및 유사 성행위를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 노동이 불법적인 것임을 다시 한 번 천명했다. 그러나 성 서비스의 거래는 종식되지 않았다. 오히려 업주들은 법망을 피하면서 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는데 이중에 하나가 바로 키스방이다. 업주들은 법의 단속을 피해가기 위해서라도 직접적인 성교가 금지되어 있음을 고객에게 공식적으로 분명히 알리고 있다.

둘째로 키스방 서비스는 경제위기 이후 업주들과 구매자들이 성적 욕망의 실현방식을 어떻게 협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업주들은 키스방 확대가 저렴한 이용료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매춘이나 대딸방이 한 타임에 7-8만원, 안마시술소가 16-18만원임을 감안할 때 4만원하는 키스방은 저렴하다는 것이다.

셋째로 키스방의 확장은 남성 고객의 성적인 욕망이 반드시 성교라는 하드코어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가벼운 신체 접촉, 연애감정 등 점차 다양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터넷 포털 웹사이트 Daum의 “지식”코너에서 “왜 키스방을 선호하는가”를 묻는 한 네티즌의 질문에 닉네임 Amati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달고 있다. “남성 또는 여성의 욕구가 오르가즘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님말 그대로 해당업소를 찾으면 되지만, 사람마다 개개인의 취향은 모두 다릅니다. 성인물의 장르도, 새도-매저키즘(SM), 페티시, 갱배앵(Gang-Bang) 등 다양하죠.”

마지막으로 키스방의 등장은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여성들의 생활고 및 소비 욕망이 순결주의와 어떤 방식으로 타협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생활고로 인해 혹은 값비싼 소비재를 사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든 여성들은 매춘과 달리 키스방 서비스가 남성의 성기를 만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 성관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순결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을 덜어준다고 말한다. 한 인터뷰에서 매니저 박양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여자들 치고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키스로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 규범의 잣대만을 들이댈 것인가?

그렇다면 성적 친밀성을 사고 파는 하이-터치 서비스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오랫동안 사회이론가들은 성 서비스뿐 아니라 친밀성 자체가 상품화되는 것을 가차 없이 비판하였다. 이들은 전통적 도덕의 관점에 따라 친밀성과 경제적 거래를 서로 대립적인 영역으로 구분하고 서로 다른 원리가 작동하는 두 영역이 상호 교차될 때 무질서, 혼란 그리고 도덕적 타락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19세기 경제 전문가들은 “가정”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면서 시장의 팽창이 친밀한 사적 관계를 냉혹하게 손상시켰다고 비판하였으며, 최근 비판이론가 레미 리프킨은 “‘초자본주의(hypercapitalism)’의 세계는 돈과 정보의 즉각적인 전달과 함께 본래의 인간적 관계를 위한 시장거래의 대용을 악화시키고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매춘을 비판하는 반-매춘 페미니스트들 역시 이러한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왜 특히 성 서비스가 상품화되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이유 역시 명확하게 제시한다. 이들은 여성들이 매춘과 같은 하이-터치 서비스에서 일방적인 쇼핑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친절함이나 우정과 같은 친밀성과 달리 성적인 친밀성의 거래는 특히 경제적, 문화적 권력을 갖지 못한 여성에게 강요되고 있으며 특히 매춘은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과 착취의 극단적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결혼 중개업에서 룸살롱, 와인 바 혹은 키스방에 이르는 다양한 성적 거래들이 매춘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조건 하에서 특정 성 거래가 도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허용되었는지, 역사적으로 성적 욕망의 거래가 어떻게 협상되어왔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이 관점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성교가 있든 없든 모든 성적 친밀성의 거래가 비난되고 불법화되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의 인터뷰에서 한 여성단체 관계자는 “성기에 직접 자극을 주지 않는다는 법의 맹점을 이용해 윤락업소가 자극 아이템만 바꿔 늘어 가는 실정에서 돈을 내고 여성에게 육체적 향응을 받는 모든 행위가 처벌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계 협상의 방식과 전략들

그러나 문제는 성적 욕망이 혹은 현실적으로 협상되고 있다는 데 있다. 성 서비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역사적으로 변해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어떻게 성적 욕망의 경계가 어떻게 협상되는지, 키스방의 등장과 함께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젤라이저의 참신한 제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에 따르면 다양한 친밀성의 경계는 어떤 관계에서 어떤 매개물에 의해 무엇이 거래되는가에 따라 부단히 구분되고 협상되어왔다. 즉 사적 관계에서든 시장적 관계에서든 친밀성은 항상 거래의 논리와 함께 했지만 사람들은 관계, 매개, 거래의 매치에 따라 친밀성 관계의 다양한 종류를 구분하는 데 몰두해 왔으며 그 구분법에 따라 특정한 친밀성의 거래를 인정하거나 비난해 왔다.

예를 들어 미국의 법은 성 서비스가 결혼 관계 내에서 이루어질 때 혹은 혼외 관계라도 그것이 다이아몬드 반지와 같이 돈과는 다른 상징적 매개물을 통해 교환될 때는 허용하였다. 상업적 관계 역시 세부적으로 구분되었다. 20세기 초에 있었던 “향응(treating)”이란 노동계급의 여성이 애인 뿐 아니라 초면인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성적 행위에 대한 댓가로 재정적인 보조와 증여를 받는 것이었다. 젤라이저에 따르면 향응 역시 결혼 관계 밖에서 진행되는 친밀성의 거래형태이지만 사람들은 이들이 받는 대가가 돈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점에 주목했고 이를 통해 허용적인 향응과 불법적인 매춘을 구분했다고 한다.

키스방이 제기하는 협상의 문제는?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키스방은 상업적 관계에서 선물이 아닌 돈을 매개로 성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키스방은 성교가 아니라 키스와 같은 가벼운 육체적 접촉과 연애관계에서의 친근감 같은 것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춘과 구분될 수 있다. 키스방의 서비스는 대딸방의 서비스와도 구분된다. 대딸방이 손을 통한 성기접촉을 제공한다면 키스방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이러한 유사 성행위도 금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키스방의 등장과 함께 협상되어야 할 핵심적인 문제로 떠오른 것은 매춘이나 대딸방과는 구분되는 키스방에서의 성서비스를 사회적으로 허용할 것인가이다.

물론 키스방의 협상 전략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키스방의 법적 허용을 반대하는 법조계, 언론계, 여성계의 담론은 키스방이 매춘이나 대딸방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키스방 서비스가 결국 성교와 다름없는 행위임을 강조하기 위해 키스방에서 성교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키스방을 매춘과 구분하고자 하는 업주들과 고객들은 키스방은 매춘과 다른 “건전한” 거래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이들의 협상 전략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이 문제에 대답하기보다는 키스방이 성 서비스의 경계를 협상하는 과정에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유교적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지구화가 교차하고 있는 도시공간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형태의 다양한 성적 친밀성 거래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이를 허용할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관습적 한계 내에서 친밀성의 거래방식, 매개물, 관계의 매칭을 새롭게 협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이현재(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