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내 계급과 등록금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박선정(한신대 일반대학원 사회과학 통합과정)

올 초부터 시작된 등록금 투쟁이 장마가 시작된 지금까지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3월에 시작해서 5월이 오기전에 끝난다고 해서 개나리 투쟁이라고 부리던 대학 등록금 투쟁이 이렇게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다. 또한 이번 투쟁은 그동안 각 학교안에서 투쟁을 벌이던 형식에서 벗어나, 학생당사자와 등록금 문제를 동의 하는 대중들이 거리로 나와 범국민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앞서 말한 이 두가지 현상은 모두 등록금문제가 더 이상 한가정이나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전사회적인 문제라는 라는 것을 말해준다.

역사적으로 대학이라는 공간이 사회적으로 모두 똑같은 기능과 구성원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국 사회의 대학은 필수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관문이 되었다. 그러나 대학에 대한 접근성은 필수적으로 졸업을 해야 하는 상황과 달리 경제적 조건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현재 고졸자 10명 중 8명 정도가 대학에 입학을 한다. 이것은 대학 교과과정이 더 이상 소수의 몇몇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공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학 교과과정이 일반적이고 보편화된 상황에 반해 등록금은 연간 천만원이라는, 소위 ‘미친 등록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게다가 2010년 334개교의 대학들 중 국·공립대는 14%의 낮은 비율을 보이고 있는 반면, 학생들에 대한 등록금 의존율이 국립대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사립대학은 86%라는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국립대 서울대는 현재 법인화 문제를 겪으며 대학이라는 공간이 결코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대학은 필수로 나와야 하지만 누구나 대학을 쉽게 갈수 없는 사회. 대학은 넘쳐나지만 국? 공립대는 전체대학 중 14%에 불가한 현실 이처럼 대학 등록금 문제는 우리사회가 필수적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등록금 문제는 단순히 등록금을 내리거나 지원해주는 형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이는 사회안에서 대학 졸업의 자격 조건이 강화되는 것과 사립대학의 비정상적인 증가, 이를 둘러싼 대학등록금 인상이, 모두 자본주의 사회안에서의 교육 상품화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도래는 교육마저 상품화 시켰다. 수업은 화폐와 교환되어지고, 이는 대학졸업과 함께 특정한 자격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리고 대학의 서열을 통해 그 자격들은 사회 경쟁체제에서 힘으로 작용된다. 이는 대학이 단순한 교육기관이아닌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생산하고 이윤을 만들어 내는 기업으로 변모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등록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시대에서 대학이 어떤 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그 안에 어떠한 구성원들이 있고, 그 구성원들이 각각 어떤 계급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고, 대학의 근본적인 구조를 바꿔내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학이라는 공간은 공장처럼 생산수단의 소유를 통한 계급관계의 대립이 극명하지 않다. 하지만 대학 이전의 교육과정(물론, 초?중?고 안에도 노동관계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존재한다.)과는 차이를 보이는 학내의 구성단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학내 구성단위들은 학내에서 서로 조금씩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다. 이는 계급적으로 대립될 수도 있고 노동의 종류와 위치는 다르지만 같은 계급적 이해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

맑스의 노동자 계급 개념을 보았을 때 학내노동자(교수, 교직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임금을 받고 노동을 하는 임금 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는다. 맑스는 ‘생산적 노동’이라는 정의를 “임금으로 주어지는 생활 수단의 전체가치를 자기자신을 위해 생산할 뿐 아니라 부르주아를 위해 이윤을 함께 생산하는 노동자.”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자만이 생산적인 노동”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비생산적 노동’은 “자본과 교화되지 않는 노동이며 자본이 아니라 수입과 교환되는 노동”이라고 정의한다. 이때 수입이란 임금 또는 이윤을 의미하고 여기에는 이자 및 지대 같이 부르주아의 이윤으로서 취득되는 다양한 범주를 포함 한다. 이런 ‘비생산적 노동’을 하는 ‘비생산적 노동자 계급’에는 공무원, 학교 교직원 등이 포함 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노동자 계급이란, ‘생산 관계에서 생산 수단을 갖지 못하는 자’, ‘노동력을 팔아 임금으로 생활하는 자’라는 결론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이처럼 학교 안에서 교수와 교직원은 노동자의 계급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학교의 이러한 학내 노동자(교수, 교직원)들이 만들어낸 이윤을 착취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등록금과 같은 사안을 놓고 투쟁을 벌일 때 흔히 벌어 질 수 있는 논쟁이고 학내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책임이 전가되어지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는 곧 우리가 누구를 대상으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직결된다. 이는 앞서 이글의 서두에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교육이 상품화 되고 이윤을 창출해 내기는 하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자본주의의 생산방식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리고 대학이 국립과 같이 공적공간의 성격이 강한 것부터 시작해서, 법인, 완전한 개인소유까지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국립을 제외한다면 학교를 소유하는 재단이 학교의 이윤을 착취하는 가장 일반적이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심화되고 교육 상품화의 성격이 명확해 질수록 재단의 기업적 형태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학교운영(정책)의 주체이다. 학교는 일반적으로 재단이 소유하지만 교수들 또한 학교의 운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교수는 학내에서 이윤 생산의 주체임과 동시에 학교운영의 결정권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노동자로만 규정할 수 없는 교수집단의 성격이다. 중간 관리적 성격을 가진 교수 집단은 학교를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고 이윤을 착취하지는 않지만 운영과정에서 대학을 상품화 시키는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 등록금 인상 또한 중간 관리를 담당하는 교수진의 동의를 통해 이루어 진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싸워야 하는 학교당국이라는 의미에는 이러한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집단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대학이라는 공간은 학내노동자를 통한 잉여의 착취보다는 등록금을 내는 당사자(학생)에게 높은 등록금을 부과하는 형식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교육을 상품화 시키고 등록금을 올리는 논리는 필연적으로 교수와 교직원의 노동환경 변화를 수반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등록금 인상은 단순히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문제는 대학 내 노동 또한 예외가 아니다.(이미 대학 내 시간제 강사들에 노동권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공론화 되었다.) 이러한 노동 억압적 요소들은 더 이상 대학을 민주적인 공간으로 존재할 수 없게 한다. 실제 교수사회에서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를 거쳐 중간관리자까지 가지위해서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고, 이런 과정들은 점점 더 권력화 되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학위를 이수한 교육노동들이 이러한 교수사회에 편입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로 인해 교수집단이 학내에서 한편으로는 권력을 가진 중간관리자로 다른 한편으로는 빠른 속도로 프롤레타리아화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학내의 노동유연화는 이윤 생산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교수집단 보다 교직원집단에서 더욱 빠르게 일어난다. 청소나 경비와 같은 행정주변부의 간접고용을 시작으로 행정 중심부의 노동유연화 또한 가속화 되고 있다. 이윤추구 중심의 대학운영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업무들을 만들낸다. 흔히 학내에서 등록금 투쟁의 주체는 학생들인 경우가 많다. 등록금을 직접 부담해야 하는 당사자이기 때문에 물론 당연하다. 하지만 임금을 학교로부터 받기 때문에 교수와 교직원이 당연히 등록금 투쟁과 거리가 멀다는 인식은 다시 한번 재고해 보아야 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등록금 인상의 원인인 신자유주의는 학내 노동자의 노동권과도 분명연관 이 있기 때문이다.

등록금 해결을 위한 정책들의 실효성에 대한 찬반이 뜨겁다. 반값등록금을 외치고는 있지만 실현될지, 혹은 실현 가능한지에 대한 논란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등록금 문제를 제외하고 대학을 둘러싼 문제들이 매우 많고, 그와 과련 된 교내의 여러 계급들이 존재 하는데도 부과하고 여전히 학교밖에서 학생들의 힘으로만 싸움이 진행되는 것 또한 아쉽다. 등록금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현재 대학이라는 공간이 어떤 의미이고 그 안에서 어떤 구조와 계급들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대학이라는 공간을 지켜내기 위해 비단 학생 뿐만이 아니 그안에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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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금을 통해 축적된 이윤을 학교와 임노관계인 교수가 직접적으로 착취하는 형태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권력과 힘으로 연결되는 지에 관한 논쟁은 학교를 계급적으로 분석함에 있어 더 이야기 해볼만 한 여기가 매우 높다.

자거라투스트라 박헌영을 만나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박헌영 선생님, 무고하신지요? 거기 계신 곳이 천당인가요?

글쎄요. 자거라투스트라씨, 여기가 천당인지 지옥인지 잘 모르겠소. 하느님은 ‘저 세상’에서 누구나 그의 소망을 실현시켜 주시지요. 그러니 여기가 천당이 맞을 거요. 예를 들어 살아있을 때 술을 좋아했던 사람은 죽어서 영원히 술을 먹도록 해 주시지요. 그런데 생각해보시오. 영원히 술만 먹으라 하면, 그게 지옥이지, 뭐가 아니겠소. 하느님의 자비는 곧 하느님의 심술일 거요.

그러면 소망을 바꾸면 되지 않아요?

자거라투스트라씨, 아직 안 죽어서 모르시는 모양이군,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소망을 바꾸지 못해요. 그게 죽는다는 것이요.

그러면 박헌영 선생님은 거기서 무얼 하세요?

하느님은 나에게 저 세상의 정권을 잡도록 해 주셨소. 그래서 내가 지금은 ‘저 세상’ 한반도 통일국가 주석이요.

드디어 소원을 이루셨군요.

글쎄. 방금 말했잖소. 소원은 이루었지만 그게 소원의 성취가 맞는지는 모르겠소. 왜냐하면 여기 ‘저 세상’에서는 권력은 무의미하기 때문이요. 하느님께서 이미 모든 사람의 소망을 실현시켜 주셨으니까요.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어요. 찾아오는 사람도 없죠. 게다가 여기는 죽는 사람도 없소. 이미 모두 죽었으니까. 따라서 겁박당하는 사람도 없소. 그러니 권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여기는 사람들이 왕이 왕인지를 모르고 지내요.

그러면 박헌영 선생님, 거기서 이 지상 세계의 소식은 듣나요?

그럼. 항상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나 보고, 듣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어라도 들을 수 있소. 하지만 굳이 내려다 볼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못하오. 나만 그런 게 아니요. 여기서는 다들 그래요. 제상을 차려 놓으면 뭐 먹을 게 있나 가볼까 하다가도, 가 봐야 어느 집안이나 신세타령만 잔뜩 보고 들으니 요새는 여기 ‘저 세상’ 사람들은 다들 제상 보기를 돌보듯 하오.

그러면 요새 박헌영 선생님에 대해 재평가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도 모르시겠네요?

역사가들이 밥 벌어 먹고 살려고 때로 이렇게 평가했다가 때로 저렇게 평가하는데, 내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 것들을 일일이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소? 근데 자거라투스트라씨는 웬 일로 나를 찾아 왔소? 벌써 죽으려고 미리 준비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박헌영 선생님, 저야 아직 죽을 생각은 없어요. 제가 이대 출판사하고 계약을 맺어서, 박헌영 선생님의 사상에 관한 책을 쓰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요즈음 이런 저런 자료 수집을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새로운 평가들이 많이 눈에 띄더군요. 그래서 정작 선생님은 그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한번 알고 싶었어요.

어디 어떤 평가인지 들어나 봅시다.

제가 요즈음 발견한 건데, 여러 가지 평가가 달라졌더군요. 그 중 한가지만 말하고 싶어요. 종파투쟁이라는 것이죠. 일제시대 ‘조선공산당’이라하면 종파투쟁 때문에 망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평가되어 왔었죠. 심지어 종파주의 때문에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해체된 이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중에서도 종파투쟁이 그치지 않았다고 하죠. 나중에 해방이후 남로당이 세워질 때 박헌영 선생님은 아예 일개 종파인 ‘경성콩그룹’ 빼고는 모두 배제시켰고 결과적으로 박헌영 선생님도 종파주의의 책임을 지고 숙청되신 걸로 아는데요?

저런 무식하기는, ‘경성콩그룹’은 종파가 아니고 정통이요. 종파와 정통을 그렇게도 구분 못해요? 실례지만 자거라투스트라씨, 그 머리로 무슨 철학을 하겠소?

죄송합니다. 박헌영 선생님, 하여튼 화내지 마세요. 제가 박헌영 선생님에게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그런 견해가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지요. 최근 성균관대 임경석 교수가 초기 사회주의를 연구하면서, 이런 종파주의의 책임이 조선 공산주의자한테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어요. 조선 공산주의를 지도하는 지도선 자체가 사실은 혼란스러웠다고 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연해주 지역에 있던 소련 극동공화국 고려국에서는 상해파를 지지하고, 반면 코민테른 동양부에서는 이르크츠크파를 지원했다고 해요. 박헌영 선생님은 이르크츠크파이셨지요?

물론 나야 코민테른의 지시를 금과옥조로 여겼지요. 코민테른이야말로 정통 아니요. 소련 극동공화국 정부는 나중에 이단으로 해산된 정부인 줄 모르시오?

아 저도 임경석 교수의 책을 읽고 비로소 알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코민테른 동양부로 지시를 일원화 시켰지만 이번에는 코민테른 내부에서 혼란이 생겼다 하지요. 스탈린파와 비스탈린파 사이에 갈등이 생겼죠. 그래서 지시가 엇갈려서 어느 지시를 따를 지 혼란스러웠다고 해요.

하여튼 나 박헌영은 그 중에서도 항상 정통만 골라서 따랐소.

박헌영 선생님, 임경석 교수는 이런 혼란이 결국 민족주의의 문제였다고 합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는 반민족주의이었지요.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족주의하면 2차 코민테른의 제국주의 전쟁 참여, 나치즘과 파시즘 생각부터 나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레닌이 1922년 코민테른 2차 대회이후 민족주의를 받아들여, 서구 사회주의와 아시아 민족주의 사이의 국제적 동맹을 추구하면서부터 마르크스주의 내부에 혼란이 발생했다고 해요.

맞았소. 그 결과 중국에서 1924년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소. 그런데 1927년 4월 장개석의 상해쿠데타로 공산주의자들이 숙청되자, 분위기가 바뀌었소. 여기서 스탈린파와 비스탈린파 사이에 갈등이 생긴 거요. 스탈린은 민족주의를 긍정하고, 비스탈린파는 민족주의를 부정했다 해요. 그때만 해도 코민테른에는 비스탈린파가 우위에 있었고. 코민테른은 1928년 6차 대회 이후 민족주의가 위험하다는 생각했소. 그때 코민테른의 지시는 민족주의를 폭로하라는 것이었소. 대중들을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떼어놓으라는 것이요. 그런 지침을 가장 충실히 따른 게 우리요. 그게 바로 이르크츠크파이고, 조선의 화요회파이고, 나중에 ‘경성콩그룹’파이요. 그래서 우리가 정통이라는 거요. 이젠 아시겠소?

그럼 박헌영 선생님,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지미트로프가 새로운 테제를 제시했던 거는 아세요? 그때 그 테제는 서구에서는 인민전선을, 아시아에서는 민족통일전선을 하라는 거였어요.

물론 내가 왜 모르겠소. 코민테른이 바뀌면 그걸 따라야 하는 거는 당연하지 않겠소. 그게 정통노선이거든.

그런데 박헌영 선생님, ‘경성콩그룹’이 중심이 되고, 선생님이 지도한 해방이후 남로당은 결코 그런 노선이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요? 바타협적인 투쟁 노선, 혁명적 대중노선이라고 하면서,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은 거부하고, 내부에서도 콩그룹 일색으로 꾸려가지 않았어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내가 발표한 8월 테제를 보시오. 민족통일전선을 강조한 거 아니요? 다만 이론과 달리 실제에서 우리나라에서는 해방이후 합작할 만한 부르주아가 없었어요. 우리나라 부르주아들은 대개 일제에 투항했소. 비타협적인 투쟁을 견지했던 민족주의자들은 얼마 안 되고, 그들은 정견이 고루하기 짝이 없었고, 더구나 우리를 적대해서 합작할 수 없었을 뿐이요. 게다가 경성콩그룹을 빼고는 일제시대 다 전향하지 않았소? 그런 쓰레기 같은 사람들과 당을 같이 하란 말이요?

박헌영 선생님, 노여워하지 마세요. 제가 최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문제를 바라보다 보니, 그 옛날 종파투쟁이 아직도 전개되는 것 같아서, 그래요. 임경석 교수는 조선공산당의 종파투쟁을 이론적인 차이에로 귀결시키려 했는데, 표면적으로 보면 결국 이번에도 민족주의가 문제더군요. 민족주의의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는 북한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고, 이어서 민주당과 같은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관계의 문제이죠. 내부적으로는 민족주의자들과 연대하려는 자와 단절하려는 자 사이의 갈등이구요. 일파만파이죠.

그렇다면 자거라투스트라씨, 단호한 이론적 투쟁이 필요해요. 그래서 순결한 원칙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하지요. 그것만이 종파를 없애는 유일한 방식이요. 그때는 오직 정통만이 남아있죠. 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항상 정통이요. 이 세상은 정통만이 정통이요.

원칙적인 통합, 그게 바로 선생님의 주장이죠. 하기는 지금 민노당과 진보신당 사이의 통합 논쟁도 항상 그런 쪽으로 흘러가더라고요. 통합에 원칙이 없다는 거죠. 그러니 언젠가 깨어질지 모른다는 거고, 그래서 통합이 안 된다는 주장이에요. 절대 통합하지 않겠다는 거죠.

자거라투스트라씨, 역시 순결한 원칙을 따르고자 하는 순전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없는 게 아니군. 나야 항상 그런 대중들을 대변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박헌영 선생님, 저는 임경석 교수가 틀렸다고 보아요. 역사적인 운동이 무슨 자연과학적 운동이 아니라면, 거기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판가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겠죠? 운동이란 때로는 이게 옳은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저게 옳은 것처럼 보이니, 당연히 역사적 운동에는 이런 저런 분파, 이런 저런 종파들이 혼재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 종파투쟁이란 역사의 불가결한 과정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는 것이 역사적 승리를 위한 필연적인 요구이구요. 하지만 여기서 순수한 원칙적 통일이란 좋은 말이지만 역사적 운동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자거라투스트라씨, 세상에 쉬운 것이 어디 있겠소. 하여튼 당신도 항상 정통을 따르도록 해요. 그러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소.

박헌영 선생님, 이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통합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이론이 틀린 사람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잘못된 이론 때문에 나까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감이 들 때조차, 그래도 서로 협력하면서 함께 일을 할 수 있어야 종파라는 것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웬 궤변이요. 이론이 틀린데 어떻게 함께 해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도 몰라요?

하지만 박헌영 선생님, 이 세상에 이론이 같아서 함께 하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함께 가는 묘안을 짜내는 것은 오직 마음만이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요? 바로 열려진 마음. 서로에게 기회를 주면서 파국을 피하고, 진실이 드러날 때가지 위험을 무릎 쓰고 참고 견디고,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추구해 왔던 일들이 상생의 효과를 이루도록 만드는 것.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오직 마음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 분열이 있었다면, 일단 무조건적으로 통합하고 모든 것을 상대편에게 넘겨준 다음,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게 옳지 않아요?

자거라투스트라씨, 마음이 아니요. 이론이요. 철두철미 정통만을 따르고자하는 마음, 그게 바로 우리 혁명가의 마음이요.

박헌영 선생님, 마오의 경우를 보시죠?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위와 코민테른의 극좌적 투쟁방침 때문에 그는 정권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탈당하지 않았고, 수년간 절에 거의 유폐되면서도 당이 위기에 빠졌을 때 기꺼이 협조했지요. 그리고 마침내 만리장정 가운데 비로소 지도권을 회복했었죠. 보리 출판사에서 나온 ‘대장정’이란 소설을 읽어보세요.

거 뭐 시답지 않는 소리요. 자거라투스트라씨, 그냥 잠이나 자시오. 나는 이 ‘저 세상’에서도 항상 정통만을 따르는 사람이요. 그래서 나의 공화국에 아예 이름도 이렇게 붙였소. 한반도 통일 정통 공화국이요.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6)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6)

글: 이정호 교수(방송통신대)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3. 고대 그리스인의 동성애 – 소년 사랑(2)

부상을 당한 파트로클로스(수염이 난 사람)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는 아킬레우스. 여기서는 플라톤의「향연」에서 파이드로스가 지적한 것처럼 파트로클로스가 에라스테스로 그려지고 있다.(트로이아 지방에서 발굴된 도기 그림)

기묘하게도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소년사랑을 암시하는 내용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일리아스」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우정이 소년사랑으로 비쳐지는 것도 후대 작가들이 그렇게 다시 그렸기 때문이다. 호메로스 작품에 소년사랑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만든다. 호메로스 시대에는 소년사랑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럴 경우 우리는 소년사랑이 호메로스 이후에 아주 폭발적으로 발달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당시의 생활상을 다 그리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표현기법의 측면에서도 두리 뭉실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그 최종적인 형태를 드러낸 것이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인 것을 고려한다면 소년사랑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플라톤의 「향연」(182D)을 보면 연설에 참여한 파우사니아스가 엘리스 지방과 보이오티아 지방에서는 소년사랑에 대해 너그럽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이오니아 지방에서는 그것을 추한 일로 받아들여졌다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제도상으로는 스파르타가 지배하고 있었던 펠로폰네소스의 도리스 지방에서 소년사랑이 유래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게이톤과 하르모디오스의 조각상(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소장)

한편, 소년사랑으로 고양된 뜨거운 열정이 참주를 타도하는 영웅적인 기개로 나타난 경우도 있었다. 「사랑에 관해서(Erotikos)」라는 책을 쓴 폰토스의 헤라클레이데스(Herakleides ; 기원전 4세기의 플라톤-피타고라스학파 철학자)는 그러한 경우에 속하는 가장 유명한 사람들로서,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가문 출신 참주 힙파르코스(Hippparchos)를 살해한 하르모디오스(Harmodios)와 아리스토게이톤(Aristogeiton)을 들고 있다.(헤로도토스「역사(Historiae)」5·55 이하를 참조). 그래서 아테네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기념해 조각상도 만들었고 향연이 베풀어질 때면 종종 그들의 행위가 정치적 해방을 가져다 준 영웅적 행위로 찬미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투퀴디데스 -그는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의 통치에 대해 일부 호의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는 그것을 순전히 사사로운 연애사건으로만(dia er?tik?n xyntychian) 적고 있다. 아리스토게이톤은 연하의 하르모디오스의 에라스테스 즉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참주 힙파르코스가 하르모디오스를 열렬히 쫓아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리스토게이톤은 결국 그가 권세를 이용해 자기의 애인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여겨 힙파르코스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6·54)

또, 헤라클레이데스는 앞서 말한 책에서 위와 같은 영웅적인 태도의 예를 하나 더 들고 있다. 카리톤(Chariton)은 참주 팔라리스(Phalaris)가 자신이 사랑하는 소년 멜라닙포스(Melanippos)에게 가한 모욕에 분노하여 보복을 시도 한다. 그러나 보복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그러나 카리톤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의연하게 연인 멜라닙포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는다. 하지만 멜라닙포스는 카리톤을 구하려고, 자발적으로 자신이 그의 에로메노스임을 털어놓는다. 참주는 이러한 멜라닙포스의 행동에 크게 감동하여 두 사람 모두를 사면해준다. 에로스에 의해 고양된 사랑과 우정의 연대감이 얼마나 크고 견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은 이 밖에도 부지기수이다. 그야말로 어느 시대이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amor vincit omnia).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의 계보를 더듬어 가면, 영웅적인 것뿐만 아니라 슬프고 애절한 이야기도 적지 않다. 「그리스 안내기(Peri?g?sis t?s Hellados)」를 쓴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의 입구에 세워진 에로스의 제단 비석글 하나를 전해주고 있다.(1·30·1). 아테네의 거류외인(metoikos)이었던 티마고라스(Timagoras)는 멜레스(Meles)라는 소년을 너무 사랑했지만, 티마고라스는 멜레스에게 사랑을 얻지 못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가파른 절벽 위에 서 있었을 때, 멜레스는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이 절벽에 뛰어내릴 수도 있어요?”라고 물었다. 티마고라스는 그 말을 듣고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멜레스는 그것에 몹시 충격을 받아 몸져 누워 있다가 얼마 후 자신도 그 절벽으로 가 몸을 던졌다.

물론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양태들 속에는 부드러운 울림도 있다. 우선 기원전 5세기경에 앗티카 지방에서는 디오뉘소스 축제의 행렬에서 미소년들에게 바쳐질 상아로 된 하프가 되고 싶다고 하는 어떤 한 남자의 노래가 향연자리에서 많이 불려 졌다고 한다. 물론 이 노래의 둘째 절에서는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여인이 몸에 걸치는 순금의 액세서리가 되고 싶다는 내용도 이어지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팔라틴 선집(Athologia Phalatina)」에는 플라톤의 시 몇 편이 들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거의 위작임이 분명하고, 다만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3, 29-32)가 아리스팁포스(Aristippos)의 저작에서 인용하고 있는 8편의 시는 진위여부를 두고 문헌학자들의 관심거리가 되어 왔다. 그 가운데에는 플라톤이 친구 디온(Dion)을 추억하며 “아, 나의 마음을 사랑으로 미치게 만든(ekm?nas) 디온이여”라고 노래한 구절이 들어 있다. 물론 플라톤이 동성애를 비난하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디온의 관계를 억측할 필요는 없겠지만 당시 유명 인물들을 비방하기로 이름 난 아리스팁포스(철학자 아리스팁포스는 아니다)로서는 아마 우리의 생각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인용한 시들 가운데에는 노골적으로 에로틱한 내용을 담은 6편이 포함되어 있고 그곳에는 소크라테스 주변 사람들의 이름도 눈에 띤다. 이 시들은 많은 논쟁 끝에 문헌학적인 측면에서 발터 루드비히(Walther Ludwig)의 주장이 제기된 이후 위작 쪽으로 기울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연구 결과 때문에 그 시들을 읽는 기쁨까지 손상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에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상냥함과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다

 

별을 쳐다보는 너야말로 나의 별

아, 넓은 밤하늘이라도

되고 싶구나. 그 수많은 눈으로

너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앞에서 말한 「팔라틴 선집」에 실린 이른바 플라톤의 시들에도 비록 여인을 향해 경박하게 쓰인 것이긴 하지만 위와 비슷한 구도를 담은 시가 실려 있다.(5·83과 84)

 

아, 산들바람이라도 되었으면.

그대가 햇살을 받으며 걸을 때

그대는 바람이 되어 날리는 나를

부드럽게 가슴에 맞아 줄 테니까

아, 진홍색 장미라도 되었으면.

그대의 손이 나를 꺾어

그대의 눈 같은 젖가슴에

소중한 보석처럼 끼어 놓을 테니까

 

또, 장난스런 사랑을 노래하는 「아나크레온풍 시선집(Anacreonteen)」 가운데에는 사랑하는 여인이 끊임없이 자기에게 눈길을 주도록 그녀의 거울이 되고 싶다고 노래하는 한 남자의 시도 실려 있다.(22·5).

에라스테스와 에로메노스(도기 그림)

지금까지 우리는 소년사랑에 대해 소년사랑이 드러내는 다양한 양태들 중에서 다소 대비적인 것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수많은 양태를 가진 소년사랑들 각각에 대해 도덕적 가치를 논한다거나 어디까지가 육체적인 탐닉이고 어디까지가 정신적인 사랑인지를 구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 군사 공동체 내에서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헌신과 교육의 측면은 그 구별 자체를 더욱 애매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에서 크레타섬은 소년사랑의 풍속의 발상지로서의 명성을 엘리스 지방과 분담하고 있었는데 스트라본(Strabon)은 다음과 같은 기묘한 크레타의 풍습을 전하고 있다(「지리지(Geographica)」10·483). 사랑하는 사람, 즉 에라스테스는 주변 사람들의 승인을 얻어 젊은 소년 에로메노스를 유괴한 다음 서로 2개월간의 집단생활을 보낸 후, 소년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갑옷 한 벌을 주었다는 것이다. 소년 사랑이 주로 군사교육의 수단이었음을 명시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스파르타와는 달리 크레타의 소년사랑에 관해서는 별 증거가 없어 추측에 불과한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풍속의 기원이 군사·전쟁 지향의 사회에서 있었던 것임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한때 크레타 섬에서 동성애가 인구과잉 억제책으로 법제화된 적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정치학」2·1272a). 에라스테스와 에로메노스들 끼리 긴밀하게 묶여진 이른바 “테바이의 신성 부대”(hieros Lochos t?n Th?b?n)는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이 점을 증언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무장한 한 쌍의 테바이 신성부대 병사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에서 스파르타가 마케도니아에게 운명적인 패배를 당했을 때도, 펠로피다스(Pelopidas)가 인솔하는 이 “신성 부대”가 전투의 최전선에 서 있었고, 338년 그리스가 존망을 걸고 싸운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도 그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사력을 다해 싸웠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전투가 끝난 다음에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 2세가 전장을 시찰하면서 신성부대 150쌍의 병사 300명 모두가 서로 꼭 안고 죽어 있는 것을 보고 감격해 하는 장면을 전하고 있다. (「펠로피다스」183) 마케도니아왕은 그들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과 소년들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을 했다거나 혹은 당했다고 잘못 추측하는 자들은 반드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플루타르코스는 이들에 대한 보고를 통해 테바이 신성부대의 순결성을 부각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생존 중에도 아무런 수치스러운 일 없이 순결한 사랑만을 나누었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이외의 고대의 저작가들이 보이오티아 지방에 도착해서 전하고 있는 다른 증언들을 보면 그들의 관계에서도 여전히 관능적 쾌락이 넘실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이 동성애 부대에 붙여진 “신성한(hieros)”이라는 형용사는 그 자체로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애매하고도 복잡한 특성을 보여주는 매우 함축적인 표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사이에 어떠한 성적인 색조도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후대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관계를 육체적 사랑까지 수반하는 연인 사이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랑 역시 신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아이스퀼로스가 쓴 「뮈르미돈 사람(Myrmidones)」에서는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열렬한 에라스테스로 등장한다. 플라톤의 「향연」(180A)에서 파이드로스는 아이스퀼로스가 그들의 진짜 관계 (즉, 파트로클로스가 에라스테스, 아킬레우스가 소년 에로메노스)를 뒤바꾸어 놓았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아이스퀼로스는 그 작품 가운데 한 장면에서 아킬레우스가 쓰러진 파트로클로스를 끌어안고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한탄하는 모습을 아래와 같이 그리고 잇다.(135 f. N. 228 f. M.)

 

그대는 허벅지의 맑고 깨끗한 성역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구나.

수천 번 입맞춤을 했거늘 아무런 은혜도 모르는 너.

 

또,

여기서 함께 숙영한 것이랑

나와 하나가 된 그 경건한 허벅지를

 

보다시피 아이스퀼로스는 호메로스와 달리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사랑을 아주 농밀하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아이스퀼로스는 흥미롭게도 그 농밀한 사랑을 표현하는 문맥에서 마치 훗날 신성부대에 붙여질 수식어를 미리 준비라도 해주듯이 매우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어휘를 끌어 들이고 있다. 이를테면 우선 첫 번째 인용 단편에서는 허벅지를 설명하는 sebas hagnon이 눈에 띤다. sebas는 외경의 대상을 가리키지만, 이 명사는 자주 종교적인 영역에서 hieros와 함께 바야흐로 “외경스러움”, “신성함“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순수한, 맑고 깨끗한, 성스러운“을 의미하는 hagnon이라는 형용사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동시대의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힙폴뤼토스(Hippolytos)」(1003)에서도 그런 용례가 나온다. 그곳에서 힙폴뤼토스는 더럽혀지지 않은 자신의 몸(demas)을 사랑(관능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난 hagnon한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또, 둘째 단편에서도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허벅지와 하나된 것(homilia)을 경건하다(eusebes)고 표현하고 있다. 이때 eusebes라는 말의 의미는 sebas라는 명사와 친족 관계에 있는 말로서 신성한 것에 대한 외경심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면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456)나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4-406)는 왜 육체적 관계를 동반하는 동성 사이의 사랑을 표현하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그 해답을 바로 그들의 뒷시대를 살았던 플라톤(기원전 428-348)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향연」을 읽다보면 초반에는 소년 사랑을 중심으로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이내 에로스가 성적 열망을 넘어서 마치 사다리를 타고 오르듯 점차 진리를 추구하는 고양된 정신으로 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스퀼로스는 당대의 소년 사랑을 노래하면서 이미 소년사랑 속에 들어 있는 그러한 정신적 요소를 강조하려고 한 것일까 아니면 한편으로 그것을 훨씬 넘어선 플라톤적인 에로스에로의 승화를 꿈꾸었던 것일까? 아무려나 우리는 이렇게 해서 이제 플라톤의 에로스론, 이른바 “플라토닉 러브”에 다가서게 된다.

(다음에 “4. 플라톤의 에로스” 계속)

[월례발표회 참관기] 김원열 선생의 ‘진보대통합에 대한 성찰과 대안’ 에 관하여

?[2011년 6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 진보대통합에 대한 성찰과 대안
발표자: 김원열

 

김원열 선생의 ‘진보대통합에 대한 성찰과 대안’ 에 관하여

후기: 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

 

 

1.

한철연이 단체로서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한국사회의 운동에 많이 기여해 왔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더구나 다양한 분파들의 활동에 각기 연계되면서도, 한철연 속에 심각한 분파적 갈등이 없이 서로 친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남들은 이것이 너무 혼란스럽지 않겠나 하고 생각하겠지만 필자는 오히려 거꾸로 생각한다. 그런 분파적인 개입들 때문에 한철연이라고 내부 갈등이 없을 수 있었겠나? 하지만 그런 갈등을 잠재우면서 내부적인 통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철연 회원들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무엇이 바로 한철연의 철학이 아닐까?

한철연은 단순히 사회운동의 분파들의 통합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상이다. 사회철학 전공자들이 주축이 되어 출발했으나 한철연은 철학의 통일전선을 이룬 것은 이미 초창기에서부터이었다. 다양한 철학이 한철연 속에 함께 어울려 풍요함을 마련해 주고 있다. 고대철학, 실존철학, 동양철학,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최근의 탈포스트주의(라캉, 지젝) 등. 더구나 한국철학계의 고질 중의 하나이었던 지연과 학연의 한계도 그동안 과감하게 떨쳐버릴 수 있었다. 사람들이 한철연의 성과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필자는 거침없이 대답하고 싶다.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차이를 넘어선다는 것, 그게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철학이라면 한철연이 바로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차이를 모른다면, 그것은 아직 잠들어 있는 무규정적인 동일성이다. 차이를 상대적인 차이로서만 인정한다면, 그것은 무기력한 무차별성이다. 한철연의 철학은 차이가 차이로서 조화를 이루는 통합이 아닐까? 마치 다리가 없는 사람과 눈이 없는 사람이 함께 가듯이 말이다.

2.

최근 이런 한철연의 철학이 후퇴하는 조짐을 보여 필자는 안타깝다. 사회 운동의 분파적 갈등이 한철연 내부에 서서히 축적되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가 서로 대화를 단절시키고, 서로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듯하다. 비웃음처럼 보이는 엷은 미소들이 떠돈다. 한철연과 더불어 활동해 오던 많은 철학도(비사회철학전공자)들이 어느새 멀리서 한철연의 활동을 관망하는 듯하다. 그런 둔중한 움직임의 반면에서 한철연 내부에는 특정한 경직된 목소리가 강하게 들려온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아직 충분히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우선 생각나는 것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사람들이 심적으로 강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들고 싶다. 원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쪽이 목소리를 높이면 다른 쪽은 슬금슬금 기어들어가게 마련이다. 그 결과 한철연의 움직임이 둔중해 진 것이 아닐까? 이제 이명박 정권 초기의 충격을 사람들이 많이 극복한 듯하다. 멀지 않아 경직된 듯한 목소리가 줄어들 것이고 다시금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고 활기 있게 만나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필자는 이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이런 점에서 한철연이 다시금 다양한 분파, 다양한 철학들 사이에 활발한 대화의 장을 마련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침 한철연의 월례발표회에서 분열된 진보세력의 통합을 위한 움직임과 관련해 발표회를 마련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철연 운영위에서 갑자기(?) 필자를 이 자리의 사회로 임명했다. 무조건적인 통합론자 중의 하나인 필자에게 기꺼이 사회를 맡긴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선택이 아닐 수 없어 필자는 며칠이고 고민해 왔다. 사회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저 하늘에 맡기고 사회에 임하기로 했다.

3.

필자의 기대와 달리 한철연 내부에서 이런 토론에 대해 냉담한 분위기였던 것 같다. 참여인원이 기대와 달리 소수였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필자는 짐작할 수 있다. 통합을 거부하는 마음은 통합에 대한 토론도 거부하려 하겠지. 이런 짐작은 필자의 선입견일까?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이 서로 상했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 철학도들이 남의 얘기를 들어줄 생각도 못할 만큼 편협해졌단 말인가? 앞으로 가야할 길이 너무 아득하다는 느낌 때문에 필자는 암담해졌다.

발표자 김원열 선생은 ‘진보 통합 시민회의’의 공동대표이라서 그런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통합의 움직임을 일어난 그대로 정리하여 주었다. 발표문의 내용은 그런 진행과정에 대한 보고서에 가까웠다. 그런 가운데 김원열 선생은 통합의 필요성과 방식에 관한 시민회의의 입장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설명해 주었다. 김원열 선생의 발표에 따르자면 통합의 필요성은 바로 선거승리라는 목표와 직결되어 있었다. 선거에 참여한다는 것은 합법적인 진보정당의 불가피한 요구이고, 여기서 최대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권에 대항하는 단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에 즈음해서 이루어지는 선거연합은 불안정하여 최대한의 효과를 이룰 수 없다. 따라서 보다 안정적인 단합이 필요한데, 이 과정을 발표자는 두 단계로 상정했다. 하나는 바로 진보대통합이다. 이것은 아마도 계급(또는 민중)적인 단결을 목표로 하는 통합이다. 여기서 핵심은 곧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이다. 물론 이 통합은 양자를 넘어서는 모든 진보주의자의 대통합을 목표로 한다. 이런 통합을 전제로 하여, 장차 일종의 ‘인민전선’(정치적 공동책임 즉 정책연대와 공동정부)을 형성하는 것이 다음 단계의 과정으로 상정되어 있는 듯하다.

인민전선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부르주아 민주 세력(민주당)이 자신의 헤게모니에 한계를 느낀다는 말이 된다. 거꾸로 그만큼 민중세력이 정치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멀지 않아서 민중세력이 부르주아 민주 세력을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역사적으로 서구는 이미 20세기 초에 이런 헤게모니의 이동을 겪었는데, 이제 한국사회도 이런 이동의 기점에 서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진보세력의 대통합은 헤게모니의 이동을 촉진시킬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긴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4.

김원열 선생의 발표의 중점은 이 두 과정 가운데 우선적인 과정인 진보대통합에 있고, 이 모든 과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재결합에 있다. 재결합에서 논의의 중점은 널리 알려진 대로 두 가지라 한다. 하나는 북한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소위 패권주의의 문제이다. 김원열 선생은 이런 문제에 관한 충분한 통의가 이루어졌고 일정한 합의가 가능했으며, 남은 문제는 충분히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잘되어 갈 거라는 예상이다.

결론적으로 김원열 선생은 앞으로 진보통합의 관점을 세 가지로 제안했다. 하나는 단순하게 분열된 두 집단의 통합을 넘어서 모든 진보세력이 통합되는 대통합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장기적인 전망 하에서 통합이 이루어져야 공고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상층 지식인이 아니라 대중 자신이 이런 통합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김원열 선생의 발표에 대해 토론자로 나선 이순응 선생의 논점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순응 선생은 통합이 선거승리라는 어쩌면 진보주의자들의 전체 목표에서 부차적인 과정에 불과한 것에 집착할 필요가 있는가를 의심한다. 설혹 이를 받아들이더라도, 선거승리를 위해 진보세력이 대중들로부터 정권을 위임받을만한 신뢰와 현실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는가 묻는다. 다시 말하자면 진보세력이 단독으로 승리할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원칙과 이론의 차이를 가진 진보의 두 세력 사이의 통합은 가능하겠는가 묻는다. 원칙이 없는 선거승리를 위한 통합이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이순응 선생의 논점은 다양하지만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문제는 어쩌면 단순하다. 이미 진보의 승리를 위한 혁명적인 코스에 대한 논의나, 단독적인 선거 승리의 가능성에 관한 논의는 오래 전에 정리(해결이 아니라, 일단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순응 선생 자신도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문제는 거래를 통한 통합이 원칙이 없는 통합이라서 불안정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김원열 선생이 이미 통합의 장기적인 전망이라는 개념으로 암시했다. 다만 김원열 선생은 이런 장기적인 전망이란 현재로서는 오직 통합 이후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오히려 당면한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통합의 필요성이 통합을 더욱 현실적으로 할 것이라 본다.

결국 논점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겠다. 이론적인 차이를 가진 세력들끼리 통합이 가능한가하는 문제이다.

5.

필자는 사회자로서 이번 토론에서 그런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원칙 없는 통일이 가능한가하는 문제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필자가 제기했던 문제를 말해 보자. 먼저 전제할 것은 필자도 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손에 잡힌다면 답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하늘은 답이 없는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 것이니까.

사실 민중운동이 출현한 이래로, 민중세력의 두 집단이 부딪혀 왔다. 노동자와 농민,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부르주아지의 대립이다. 이런 대립은 한편으로는 식민지에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이며, 합법적인 현실주의와 혁명주의의 대립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당 내 엘리트층인 지식인층과 조직적인 대중의 대립이다. 이는 또 조직적으로 민주주의와 집중주의의 대립이기도 한다.

민중운동의 역사를 보면 이런 대립이 모든 역사에서 점철되었는데, 두 집단 사이에 대립이 없다면 그것도 무기력한 정당이 되며,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된다면 그 후유증은 파국적인 된다. 레닌 시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마오 시대 소비에트노선과 인민민주주의노선의 대립도 그런 일환이다. 유감스럽게도 일제 시대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역사는 이런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 채 분열되어 결국은 종파주의 전락하고 말았다.

필자는 어떻게 본다면 지금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과의 대립도 이런 오랜 역사적 분열을 이어받는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이런 분열이 각각의 집단 속의 구성원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 운동 자체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문제는 원칙적으로 분열은 불가피한데 그것을 극복하여 통합을 이루지 않고서는 민중운동은 한 발자국도 더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가피한 원칙적 분열 앞에서 어떻게 통일을 이룰 수 있는가? 이런 자가당착적인 모순적인 문제가 우리 앞에서 심각한 철학적인 문제로 나서게 된다. 일제시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 필자 역시 고민스러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6.

다행하게도 토론은 심각한 상처 없이 그저 문제를 자각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문제를 문제로 안다는 것만 해도 소크라테스가 늘 철학의 제 일보로 여기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이미 철학에서의 제일보는 디디게 되었다. 철학이 움직인다는 것은 이미 그 전에 역사가 움직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까?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지면 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앞으로의 통합에 대해 낙관적이다.

마지막으로 제안을 하나 하고 싶다. 민중운동의 통합이지 진보의 통합인가? 민주노동당의 경우는 민중의 개념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그런데 진보신당이 나오면서 갑자기 민중 개념이 사라지고 진보라는 개념이 이를 대체해 왔다. 그런데 진보란 이념의 차원이 아닌가? 역사는 계급의 역사라는 관점을 지킨다면, 필자는 진보라는 말 대신 다시 민중이라는 말로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그런 경우 비로소 민중계급의 다양한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이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평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청춘 [청춘의 서재]

김민수(건국대학교 강사)

장맛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오후, 내 초라한 서재의 맨 위 칸에 있는 오래 묵은 시집을 꺼내들었다. 오월의 철쭉이 작열하는 태양에 녹아 꽃대마다 축 늘어진 그 시절에 내 마음 속에 톱밥난로를 지펴주던 한편의 시, 대구의 어느 산자락의 병동에서 만난 전라도의 어느 문과대학을 다니던 국문학도가 암송하며 읊어주던 ‘沙平驛에서’(곽재구, 창작과비평사, 1983)라는 시를 펼쳐본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내리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가 본 시인은 참으로 따뜻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의 시에는 철과 철이 맞부딪쳐 쨍쨍 거리는 험한 세상 속에서도 한 송이 꽃, 한 포기 풀과 같은 생명이 살아 있으며, 온갖 거짓 구호가 난무하는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울림이 있었다. 시인은 어두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며 잊혀져간 사람들 – 동명동 청소부 박득세, 권투선수 김득구, 스무살 첫사랑 영자, 대인동 창녀들, 엄경희, 조경남, 그리고 어머니 – 등을 하나 둘 씩 호명하며 그들을 기억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시인은 이 땅에 하찮게 널려 있는 들쑥 꽃, 칡 꽃, 달맞이 꽃 등과 돌각담, 소고기국, 개똥벌레 등을 그의 시에 담으며 그것들의 살아 있는 생명력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뼈아픈 이 땅의 역사를 가슴에 품으며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시인은 절망의 강기슭에 배를 띄우며, “이 땅의 어둠 위에 닻을 내린 / 많고 많은 풀포기와 별빛이고자”(절망을 위하여) 했으며, 사람이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날을 기다리며,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 물먹은 풀꽃 한 송이”(바닥에서도 아름답게)이고자 했던 참으로 맑은 시인이었다.

빨리 가고자 하면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낯설은 간이역 대합실에서 톱밥난로에 의지해 추위를 녹이는 사람들이 막차를 기다리는 풍경은 지금은 잊혀진 추억이 되었다. 완행열차가 사라지고 쾌속으로 달리는 고속열차가 생겨난 지금은 밤낮 없이 바쁘게 사람들을 이리저리 실어 나르고 있다. 정거장도 없이 직행으로 달리는 고속열차 안에서 보는 차창 밖의 풍경은 사물을 정지시켜 볼 수 있는 우리 눈보다 더 빨리 지나간다. 빨리 지나가는 풍경에 익숙해진 우리 눈은 우리 곁의 사람들과 사물들도 무심코 지나친다. 보다 깊게, 보다 자세히 보고자 하지 않으며, 지나가는 것은 숫제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은 우리의 생활에서 불필요하다는 것을 빨리 잊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아마 우리의 시대가 떨쳐 버렸으면 하는 아픔과 고통이 아닐까 생각한다.

청춘이 시대의 아픔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때라면, 시인은 그 아픔을 언어로 옮기는 사람이다. 청춘이었던 시인은 시대의 아픔을 체험하며 그것을 따뜻한 언어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막차를 기다리는 간이역 대합실에서 시인은 송이눈이 내린 창밖 풍경을 보며, 톱밥난로에 의지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모습을 본다. 고단한 삶에 지친 꾸벅꾸벅 조는 사람과 쿨럭쿨럭 기침앓이를 하는 사람들을 본다. 모두들 사연이 많은 사람들이라 내면 깊숙이 할 말은 가득해도, 난로에 의지해 시린 손을 녹이며 침묵하고 있다. 세파에 시달려 침묵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말없는 표정과 몸짓을 시인은 그의 언어 속에 담으며 내면에 담긴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한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청춘의 시절은 저마다의 익숙한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자기를 발견하고자 여행하는 시기이다. 고향을 떠나온 청춘이 낯선 환경에서 느끼는 삶의 애환은, 산다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때론 술에 취한 듯 살아가며, 가끔은 하루의 노동을 바꿔 마련한 봇짐 하나 들고 떠나왔던 곳을 찾아 간다. 나를 기억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통해 살아가는 의미를 다시 확인한다. 여행을 떠나는 청춘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의 모든 곳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고향일 것이다. 억압하는 것이 없는 세상 속에서 청춘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희망으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이 만만하지 않고, 세상이 녹녹하지 않기에 뜨거운 가슴을 안고 사는 청춘은 세상을 향해 외치며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한다. 청춘이라면 마땅히 침묵보다는 세상을 향해 소리쳐 외치는 것이 어울리지만, 고단하고 긴 여행에 지친 청춘들은 희망보다는 체념을 먼저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청춘들을 향한 세상의 숱한 교훈들은 그것이 인생이라고 가르친다.

고향을 떠나 타지의 변방을 돌고 있는 나는 조그만 간이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청춘이다. 지나간 상처의 흔적이 아물어 아픔과 고통이 가슴에서 머리로 올라갈 즈음에 나의 청춘의 여행도 서서히 끝날 것이다. 시를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아마도 가슴 치는 아픔과 고통이 머리 위로 올라가기 전까지 일 것이다. 그 때 즈음이면 내면의 할 말은 가득해도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나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슴의 아픔과 고통이 머리 위로 옮겨 가면서 청춘은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지만, 때때로 찾아오게 될 두통은 나의 아픈 청춘이 잊지 말고 자신을 기억하라고 보내는 메시지일 것이다. 언젠가는 햇볕이 밝게 드리우는 고향의 언덕으로 창을 내고 맑은 냇물을 떠서 차를 다리고 즐겁게 손님을 맞이할 것이라는 약속을 잊지 말라는 청춘의 메시지. 그 약속을 지킬 때 즈음이면 아마도 지금 빠지고 있는 나의 머리칼도 다시 날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때가 되면 언젠가 단오 날에 창포물에 머리를 감듯이 나는 나의 아픈 청춘을 흐르는 시냇물에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청색의 화려한 줄무늬를 달고 고속열차는 어디로 급히 가는지. 오늘도 차장들은 고단함에 지쳐 힘겨운 청춘들을 불러 줄 세우고 한 가득 열차에 담아 기적 소리도 없이 달린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고속열차는 어디쯤에 저 청춘들을 내려놓고 마지막 숨 가쁜 기적을 울릴지 나는 알지 못한다. 장맛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오후, 내 서재가 있는 창밖으로는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짙은 색으로 뒤 덥힌 급류를 유영하는,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 수 없는 나뭇가지와 풀들을 본다. 이 글을 쓰고 나면, 아직 다하지 못한 나의 청춘과 이별해야 할 것 같은 나는 대합실이 사라진 간이역을 생각하며 아직 오지 않은 막차를 기다린다. 시인이 톱밥난로 속으로 던진 한줌의 눈물의 의미를 기억하며.

2011년 여름, 로맨스 드라마에서 여성이 ‘구원’(?)받는 법[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김은주(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박사 수료)

신문을 보다가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했다. 20-30대 미혼여성 60%. 조건 맞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응답. 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여성은 비정규직이었지만, 자신보다 나은 조건을 갖춘 안정적인 정규직 남성과 결혼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독신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는 의견을 밝혔다. 혹자는 이 기사를 보며, ‘여자들은 원래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해. 속물!’ 이라고 단정 짓고 끝낼지 모르겠다.

결혼이 행복한 로맨스의 결말이라는 공식은 무너진 지 오래다. 그렇지만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이제 낭만적 사랑인 로맨스와 결혼은 완전히 분리되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결혼은 이제 점점 더 경제적 안정성의 담보물이자 계급 상승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확실하지 않다면, 미혼 여성에게 결혼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현실에서 결혼과 로맨스는 결코 닿을 수 없는 평행선처럼 점점 더 무관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사에도 불구하고, 소위 ‘로코’라고 불리는 로맨스 코메디와 일일 연속극의 여주인공은 여전히 로맨스에 몰입하며 결혼에 분투하면서, 답답한 일상과 현실의 시련으로부터 ‘구원’받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2011년 멜로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앤서니 기든스에 따르면, 연예소설로서의 로맨스는 대중이 읽은 최초의 문학 장르이다. 특히 19세기에 혼인 관계를 경제적 가치와 분리하기 시작하면서, ‘로맨싱(romancing)’은 구애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러한 로맨스 개념은 부르주아 집단에서 주로 지속되었던 낭만적 사랑의 개념이 사회에 확산되면서, 사랑의 이상으로 자리 잡는다. 또한 혼인 관계가 보다 폭 넓은 친족 관계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로맨스는 결혼으로 귀결되면서 더욱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낭만적 사랑인 로맨스에서 성공한 남편과 아내는 아이와 상관없이 부부 관계에 헌신하는 일종의 정서적 공동체를 성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형적인 로맨스와 결혼의 관계는 현재의 트랜디 드라마에서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지는 않다. 하나의 변수를 더 넣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미혼인 여주인공의 직업과 경제 사정이다.

요즘 ‘로코’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집안의 경제 사정이 안정적이며 전문직인 여성, 경제 사정이 좋지 않지만 전문직 여성이 될 수 있는 여성, 별 볼일 없는 집안에 스펙조차 없는 여성. 첫 번째 부류가 무용과 졸업생이나 기생이 된 “신기생뎐”의 단사란, 두 번째는 재벌남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5급 행시를 패스한 공무원인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공아정, 세 번째는 스펙 자체가 없어 ‘식모’를 직업으로 택한 “로맨스 타운”의 노순금이다.

아직 종영을 하지 않은 로맨스 타운을 제외하고는 두 부류의 여주인공 모두 결국 결혼에 성공하는 해피엔딩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완전히 성공한 결혼으로 골인하는 전형적 로맨스는 첫 번째 여주인공에게 일어난다. “신기생뎐”의 단사란은 재능과 미모, 자존심도 있지만, 돈에 눈이 먼 계모의 강요로 결국 기생이 된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재력 있는 남성과 결혼하여 구원받는다. 드라마의 주요한 내용은 결혼에 어떻게 이르는지를 보여주는 사건과, 결혼 생활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이다. 이 드라마의 핵심은 가장 바닥의 상황에서 시련을 겪는 품위 있는 여주인공이 가부장제의 처가 되는 결혼에 성공하여 행복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두 번째 분류인 공아정은 행시를 패스한 엘리트 여성이지만 ‘결혼’을 해보고 싶어서 거짓결혼을 하는 활극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거짓 결혼 상대자인 재벌 남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여주인공이 원했던 것이 낭만적 연애였음이 밝혀진다. 두 주인공 모두 경제적인 시련은 겪지 않는다. 그녀의 시련은 사랑으로 인해 직업을 잃을 뻔 하는 사건에 있다. 일이냐 사랑이냐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일을 인정해주는 재벌남과 그의 배려를 사랑으로 이해하는 여주인공의 결혼 승낙을 통해, 드라마는 해피엔딩에 이른다. 이 드라마의 주요한 축을 이루는 로맨스는 경제적 현실을 고민하는 않은 주인공들에게 분명하게 보장된다. 문제는 결혼에 있다. 드라마의 엔딩은 프로포즈를 받아들이는 사랑의 확인으로 끝난다. 결혼을 상징하는 웨딩드레스 장면은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일과 사랑 모두를 붙잡는 것, 그것이 그녀의 행복이다. 두 번째 부류의 여성에 있어서, 로맨스는 결혼과 무관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일과 사랑의 공존이지 구체적으로 결혼은 아니다.

위의 두 부류의 드라마에 비해, “로맨스 타운”은 로맨스와 결혼에 대해 냉소적이다. 여고 동창인 두 여성은 어떤 남자를 만나는가에 따라 식모가 되고 사모님(미모의 여성이 성공한 남성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사모님은 트로피 사모님이라고 불린다.)이 된다. 드라마는 오히려 결혼이 계급을 구축하는 도구라는 사실만을 명료하게 보여줄 뿐이다. “로맨스 타운”은 점점 로맨스와 무관해진 채, 로또에 당첨된 식모들의 추리 복수극으로 나아간다. 스펙도 내세울 집안도 없는 여성에게 있어 로맨스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여주인공은 정서적 위로와 다정한 친밀감을 로맨스 상대에서가 아니라 식모들의 공동체에서 찾는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그녀, 노순금에게 있어서 사실상의 구원은 로맨스의 대상인 남자가 아니라 로또이다.

드라마에서 더 이상 로맨스와 결혼은 짝을 이루지 않으며, 여주인공들에게 구원은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결혼은 더 이상 로맨스에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돈 없는 남자와의 로맨스 역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로맨스에 가장 몰입하고 있는 여주인공은 누구인가? 위 세 부류에 해당하지 않은 번외편이자, 가장 적극적인 시청률을 자랑하는 저녁 8시 매일 연속극의 여주인공이다. 주인공인 아줌마는 더 이상 남편의 불륜에 목매거나 이로 인해 망가지지 않는다. 바람난 남편에게 버림 받은 여주인공 아줌마는 캐리어 우먼이 되어 성공하고, 자신에게 목숨 거는 애교덩어리 식스팩 말 근육 총각과 사랑에 빠진다. 이제는 매일 연속극의 단골 소재가 되어버린 ‘줌마렐라’의 탄생! 아줌마는 결혼에 실패했지만, 로맨스에 성공한다.

여기서 로맨스가 결혼으로 다시 이어지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로맨스만이 중요하다. 아줌마는 로맨스를 겪으면서 성적인 매력을 지닌 여성이자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으며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줌마렐라 소재가 인기를 끄는 것은 줌마렐라야 말로 낭만적 사랑, 다시 말해, 가족이나 계급, 돈과 상관없이 인격과 인격의 만남으로 정서적 친밀감에 이르는 데이트와 구애의 과정인 로맨스를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불굴의 며느리”에서 아줌마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직후 비정규직인 콜센터 직원인 오영심(신애라 분),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대상은 하버드 졸업하고 월 스트리트서 펀드 매니저로 일하던 재벌 2세.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것은 오영심 역을 맡은 신애라가 1994년에 방영된 “사랑을 그대 품안에”라는 성공한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사실에 있다. 신애라가 맡은 여주인공은 집안도 별 볼일 없고 심지어 백수 오빠까지 딸린 백화점 비정규직 직원이었지만 재벌 2세와 극적인 로맨스 끝에 결혼에 성공한다. 실제로 신애라는 이 드라마 후 남자 주인공인 차인표와 결혼하여 드라마의 실사의 주인공으로 이목을 끌은 바 있다.

성공한 로맨스 신화의 주인공인 신애라가 십 오년 후, 줌마렐라라는 새로운 로맨스 장르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2011년 여성이 어떻게 구원받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여성은 결혼으로 구원받지 않고 로맨스로 구원받는다. 그런데 시청자 모두가 알고 있듯, ‘줌마렐라’의 로맨스는 환상이다. 구원은 그래서 거짓이다. 그래, 구원은 없다. 잔혹한가?

인사드립니다

사이트 구성이 색달라서 영 어색합니다만

암튼 인사는 해야 될 거 같아서 용기를 내었습니다.

오늘 신규가입 한 김옥렬(남,58세,경기 안성)입니다.

남 얘기 같던 철학이라는 단어를 정식으로 사용하는 사이트에 오기는 처음 입니다.

언감생심 이 나이에 무슨 철학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겁을 상실한 채 귀만 가지고 왔습니다.

좋은 말씀은 새겨 듣고,

다양한 생각들에 대해 지혜로운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듣고, 배우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위키리크스! 너는 누구냐?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원진호 (책 익는 마을 회원 / 원진호내과원장)

같지만 다른 책

나는 우연한 기회에 다루는 대상이 같은 두 가지 책을 읽게 되었다. 그것은 최근 전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비밀정보자료 공개사이트인 위키리크스이다. 한 책은 지식갤러리에서 나온 『위키리크스, 마침내 드러나는 위험한 진실』이라는 제목이고, 다른 한 권은 21세기북스에서 나온 『위키리크스,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앞 책의 저자는 다니엘 돔샤이트-베르크이다. 그는 위키리크스 창시자인 줄리언 어산지와 함께 초창기부터 활동했고 다니엘 슈미트라는 가명을 쓰면서 주로 독일지역을 담당하고 대변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 책은 그가 어산지와 불화를 겪고 조직을 탈퇴하며 쓴 것이다. 그래서 책 제목에서 풍기는 바와 같이 그 간 비밀에 쌓인 위키리크스 사람들과 그들의 활동을 자세히 밝히는 한편 어산지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편 또 다른 책의 저자는 마르셀 로젠바흐와 홀거 슈타르크인데 이들은 독일의 슈피겔 기자들이다. 그들은 위키리크스의 활동을 지켜보고 혹은 작업에 참여하면서 폭로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와 반응까지 저널리스트답게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니엘의 책은 조직의 내면을, 슈피겔기자들의 책은 조직의 외연을 보여준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두 책을 동시에 읽어 가면서 저자들의 주장을 쉽게 자기화하는 오류를 피해 갈 수 있었고, 위키리크스가 갖는 정치, 사회적 의미를 풍부하게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핵티비스트들의 존재

먼저, 위키리크스를 통해 나는 핵티비스트(hactivist = hacker + activist)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보통 해커는 남의 컴퓨터에 무단으로 들어가 정보를 빼앗는 범죄적인 사람들로 인식되어 있다. 액티비스트는 ‘정치운동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권력에 대항하여 민주와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해커가 자신의 기술을 진보적인 정치활동에 쓰면 핵티비스트가 되는 것이다. 우리말로 ‘디지털 정치 활동가’쯤 되는 이들은 ‘의사 표현의 자유와 투명성은 민주사회의 기본’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정보의 공유와 투명성을 통한 견제와 균형을 위해 기밀문서의 대량유출을 통한 열린 통치의 실현’을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말한다. 줄리언 어산지도 처음에는 해커로 활동하다가 호주 법원에서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십대 때에 ‘국제전복자들’이라는 해커집단을 만들어 유인 우주선에 핵물질을 탑재하는 프로젝트에 반대하여 NASA의 전산망을 공격하는 디지털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들의 정신적 지주인 원조 해커 스티븐 레비의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이라는 책에는 ‘해커선언문’이라는 것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컴퓨터를 위시하여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모든 것에 대한 접근은 무제한적이고 완전해야 한다. 둘째, 모든 정보는 자유로워야 한다. 셋째, 해커는 권위를 불신하고 권력분산을 촉구해야 한다. 넷째, 다른 해커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그 활동에 의거해야 하며 외모, 연령, 인종, 성, 사회적 지위에 따라 평가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컴퓨터를 이용하여 예술과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유명한 해커인 홀란드는 타인의 데이터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것과 공적인 데이터는 최대한 활용하되 개인 데이터는 보호하라는 것을 덧 붙였다고 한다.

어산지나 다니엘도 핵티비스트로 성장하면서 이 선언문을 강령처럼 받아들였을 거라 추측된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핵티비스트가 되려고 했을까? 그들 정도의 능력이라면 편하고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어산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누구나 단 한 번밖에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을 무언가 의미 있고 만족스러운 일에 써야 해요. 위키리크스는 제게 바로 그런 일입니다.”라 했다. 다니엘 슈미트도 책에서 위키리크스를 만나기 전에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한마디로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화려하고 넉넉했지만 뭔가 빠진 것처럼 허전한 삶이었다. 삶의 의미, 모든 걸 다 버려도 좋을 만큼 내가 열정을 갖고 풀어갈 과제가 없었다.”

또한 그들은 책을 많이 읽었다. 특히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서들을 좋아했던 거 같다. 핵티비스트들의 정신세계가 어떠한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대목이었다.

 

위키리크스와 유엔 인권헌장 제 19조

위키리크스의 활동이 민주주의의 새로운 요구에 부합한다는 면에서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실 절차와 과정으로서의 형식 민주주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언제든지 이용 당하고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또 다른 민주주의의 가치인 견제와 균형을 실현하기 위해 분권과 감시가 일상화되어야 한다. 최근에 나온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은 가장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여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사악하거나 거짓말을 잘 하거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지극히 무능하거나 또는 그 모든 결점을 지닌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이며 강점이다.”

2001년 9.11테러이후 서방 국가 특히 미국은 국민에 대한 감시와 정치, 외교, 안보정책 분야에서의 비밀화를 조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견제를 해야 할 메이저 언론들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하에 효과적으로 정부와 권력자들을 견제하지 못하고 있고, 이런 시점에 위키리크스의 출현과 행동은 민주주의 추를 균형 있게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되었다. 주류 언론과 의회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한국의 정치에서도 한국판 위키리크스는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위키리크스의 공개정책이 반미적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니다. 미국 정부가 비밀외교로 그들의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자료를 공개하는 것뿐이다. 모든 국가의 비밀, 억압적 정권에 대한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이 그들의 기본 입장이다. 책에서는 “이것은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이 정치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 고객들의 명단을 공개하거나 제약회사의 리베이트를 폭로하기도 한다. 독일정부가 기업체에 수백만 유로를 지원한다는 내용의 비밀 문건을, 그리고 사이비종교집단에 대한 자료를 폭로하기도 한다.

그들의 활동이 위대한 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유엔인권헌장 제19조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모든 인간은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 이 권리는 간섭받지 않고 의견을 가질 자유와 모든 매체를 통해서 국경과 무관하게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받고 전달할 자유를 포함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정보는 공개해야 된다. 위키리크스가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시스템이냐? 사람이냐?

어산지는 06년 10월 위키리크스 도메인을 등록하고 네 명의 친구들과 활동에 들어갔다. 그들은 ‘내부의 기밀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원들을 통해 권력의 비밀을 까발리는 전 세계적 활동’을 꿈꾸었다. 위키리크스는 천재적인 프로그래밍 기술로 정보원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그들은 서로 한 장소에 모이지 않고 컴퓨터를 사용한 메일 교환과 채팅을 통해서 작업을 한다. 그들은 집단지성을 통해 자료를 분석하고 인터넷에 올리고 언론에 유포한다. 어산지는 무서운 집중력과 헌신성으로 그 활동의 중심이 되어 간다. 초창기 활동에는 사람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책임도 일의 진행도 그래야 뭐가 되어도 된다.

다니엘은 07년 09월에 합류하고 어산지가 손 못 대는 조직내부의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는 08년, 09년에 걸쳐 서버를 관리하고 조직과 재정을 정비한다. 언론을 상대하고 후원금을 받아낸다. 언론자유무역항 아이디어를 아이슬란드 정치권에 제안하기도 한다. 다니엘은 조직적인 사고로 위키리크스의 시스템을 세워 나간다. 그래야 커가는 조직을 지탱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언제까지 사람으로 갈 수 없다는 말은 진리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 불화가 싹트기 시작한다. 불화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사소한 일상의 태도와 말투다. 다니엘은 회의 때마다 늦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는 어산지가 싫었다. 항상 진지하고 깔끔한 다니엘에게는 개인위생이 불량한 어산지가 신경 쓰였을 것이다. 어산지도 항상 툴툴거리고 자기가 위키리크스의 주인인양 -물론 본인은 그랬다고 하지는 않지만- 행세하는 다니엘이 미웠을 것이다. 사람이 미워지면 사소한 것 까지도 미운 법이다.

불화의 두 번째 이유는 조직운영에 대한 입장차이었다. 어산지는 적어도 위키리크스는 자신의 것이며 모든 결정은 자신이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후원자, 지원자. 부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니엘은 모든 정책은 조직내부에서 끝장토론을 통해 결정을 해야 하고 그것이 안 될 때는 가위바위보라도 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어산지의 대표성은 부정 안하지만 자신은 옆에 서 있는 2인자이지 뒤에 서 있는 2인자가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이 둘은 어산지의 성폭행사건이후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된다. 다니엘은 위키리크스에서 10년 09월에 탈퇴하고 오픈리크스를 만든다. 결국 시스템과 사람의 문제가 둘을 갈라놓았다고 나는 본다. 다니엘은 시스템으로, 어산지는 사람으로 가려 했다.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조직생활을 하고 있다. 사람과 시스템의 문제는 항상 우리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위키리크스라고 해서 벗어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갈등의 불씨

사실 위키리크스는 시작부터 갈등의 불씨가 내재되어 있었다. 조직이 커지고 외압이 강해지고 책임성을 요구하는 시점이 되면 드러나는 모순들이 있다. 그들의 공개 활동 원칙은 모든 자료를 검열 없이 올라오는 순서대로 공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라온 자료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문제가 있다. 위키리크스가 유명해지면 역정보를 흘려 교란을 시키거나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이용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료를 분석하기 위해 손을 대게 되고 어떤 자료를 취합할건지에 대해서 선택이라는 권력이 작동할 우려가 있다. 그렇게 되면 고발자의 요구를 충분히 고려하여 자료에 대한 오염을 배제한다는 위키리크스의 입장에 위배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또한 자료 공개 시 발생할 수 있는 사생활 보호문제가 있다. 실제로 케냐 경찰의 청부살인을 폭로한 인권활동가들이 살해당하는 일도 있었고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일지의 폭로에는 정보원들이 노출되어 생명에 위협을 받을 수 있기도 했다.

또한 처음에는 자료의 검토와 공개를 전 세계 자원봉사자들의 집단지성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는데 그게 사실 양질의 결과가 나오지 않음을 알고 언론들과 제휴를 맺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언론과 제휴를 맺을 것인가로 도마 위에 오르게 되고 어산지의 독단으로 다른 조직원들과의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 독단으로 하다 보니 뒷거래에 대한 의심도 동반하게 되었다.

 

“ 가장 진실을 잘 알고 있는 국민이 가장 국가를 위할 줄 안다.”

지금까지 위키리크스의 정체성은 아직 명확하다고 볼 수 없다. 단순한 문서보관소 일수도 있고 또 하나의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곳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키리크스가 이전의 다른 폭로단체보다 우월한 지위를 갖는 것은 ‘민주적 공공성과 최선의 제보자 보호를 위한 인터넷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향후 진화하는 위키리크스의 모습과 오픈리크스처럼 비슷한 형태의 폭로단체들과의 관계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명심해야할 말이 있다. 그 말대로만 된다면야 위키리크스는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리 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에 나오는 글귀다.

‘가장 진실을 잘 알고 있는 국민이 가장 국가를 위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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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다니엘 돔샤이트-베르크의 『위키리크스, 마침내 드러나는 위험한 진실』(지식갤러리)와 마르셀 로젠바흐, 홀거 슈타르크의 『위키리크스,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21세기북스)를 함께 다룬 글입니다.

나는 백성이 아니옵니다. 노비이옵니다 5-① [色 다른 책읽기]

이재민 (너머북스 대표)

 

조선의 백성이길 거부한 노비의 법정 투쟁기

1586년 나주 관아의 노비소송을 서사 구조로 하는 『나는 노비로소이다』(임상혁 지음, 너머북스 펴냄)를 따라가 보면, 조선시대의 사법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이 절차를 통해 당시 체제가 빚어내는 반목의 양태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윽고 불화의 핵심에 선 조선시대 ‘노비제’를 만난다. 흔히 조선전기는 ‘노비송(奴婢訟)’, 후기는 ‘산송(山訟)’이라는 표현처럼 조선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노비제의 질곡이 주요한 내적 모순으로 존재하였다. 조선시대 송사를 매우 역동적으로 다룬 이 책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조선시대 노비의 실체를 찾는데 있다.

다물사리와 구지, 허관손 등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신의 자손을 사노비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벌이는 법정투쟁기는 조선시대의 노비제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혹독한 질곡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조선시대 노비의 수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3분의 2에 이른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도 과연 오늘날 자기 조상이 노비였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노비의 역사적 실체를 찾는 것은 나의 최근 역사책 기획의 관심 중 하나이다.

해남의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생부와 양부로부터 660구가 넘는 노비를 상속받았으며, 유명한 어부사시사의 고향인 보길도 부용동의 원림을 조성하는데 노비 700여명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상층이 아닌 소박한 생활을 영위한 양반이라 하더라도 노비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양반에게 있어 ‘봉제사’는 일상의 일부라고 하나, 이것이 집안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일년내내 선산을 관리하고 수시로 벌초하며, 묘사 준비와 실제 제사를 지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조상을 모시는 일에 노비가 동원되었다. 생업인 파종에서 추수까지 농사일은 기본이고 험한 땅을 개간하거나 묵은 논밭을 갈아엎기도 하는 등 농지도 일구었다. 노비는 상전의 수행원이었고 심부름꾼이었으며 통신수단이기도 했다.

무반 노상추의 68년 동안 쓴 일기를 통해 조선후기 가족의 실체를 다루어 주목받은 바 있는 『68년의 나날들, 조선의 일상사』(문숙자 지음, 너머북스 펴냄)에는 가족과 재물의 경계에 선 노비의 모습이 생생이 묘사되어 있다. 노비 점발이 도망한 1726년 2월 12일 노상추는 일기에 ‘그의 죄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썼다. 6개월 뒤 점발을 찾아내 벌을 준 뒤 그는 점발을 ‘죽을 만큼’ 때렸다고 기록했다. 일기에서 스스로 ‘죽을 만큼’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응징의 정도가 어땠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기의 또 다른 기록이다. 비부(婢夫) 한선이 노씨가의 계집종인 아내 손단을 데리도 도주한 것은 1779년 2월 7일이었다.

노상추는 단호하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부부는 길바닥에서 굶어죽는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을 듯하다”고 했다. 나에게 의지해 살던 노비 부부가 나를 떠나서, 그리고 전국에 깔려 있는 나와 내 지인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벗어나 살아갈 방법은 도저히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노비들은 모든 양반의 지배를 받는 존재였다. 거주지를 벗어나 멀리 도망간다 하더라도 양반의 광범위한 네트워크 안에 있었고, 양반들의 연망(聯網)은 노비의 관리에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다시 『나는 노비로소이다』로 들어가 보자. 이 책의 2장에 소개하는 “또 다른 노비소송, 나는 양인이로소이다”에서는 노비제 고수에 강한 집착을 보였던 양반과 그들의 모순에 찬 면모를 볼 수 있다. 이 소송은 허관손이란 인물의 제소로 시작된다. 그는 지방의 아전이었으나 그의 장모의 아버지가 ‘사노’였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 모두 노비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는 장모의 아버지가 보충대에 입속하였으므로 양인의 신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 서출자녀인 경우 보충대 입속을 통해 양인이 되는 길이 있었다. –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송의 상대는 『미암일기』의 저자로 잘 알려진 상층 양반 미암 유희춘이었다.

1544년 강진현에서 유희춘의 어머니, 최씨가 승소한다. 1551년에는 반대로 허관손이 승소하고, 1564년 최씨 사후 미암의 누나가 다시 제소하여 승소한다. 1566년 허관손이 사헌부에 상소했으나 패소한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고위관료 유희춘을 상대로 한 아전 허관손의 30여년이 넘은 투쟁은, 결국 1568년 3월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 엎어지며 억울함을 호소하며 – 이를 ‘상언’이라 한다 – 해결하려 했지만 현직 관리의 영향력을 넘지 못하고 패소하고 만다.

이 책이 밝히는 흥미로운 사실은 허관손이 양인이라 증명하려 했던 방식대로 유희춘은 자신의 얼녀 네 명을 양인으로 속량시켰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유희춘이 허관손에게 승소한 그 시점인 1568년부터 자신의 서출자녀들을 보충대에 입속시키고 대가를 지불하여 노비의 신분에서 풀려나게 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미암은 8년에 걸쳐 천첩 자식들을 모두 속량한 뒤 외친다. “얼녀 네 명이 모두 몸을 씻어 양인이 되었다. 어찌 이리 기쁜지!”(미암일기초 5권 230쪽) 내적 갈등이나 모순적 의식조차 보이지 않는다. 유희춘과 허관손의 쟁송 사례에는 당시 최고 지식인이 가진 의식의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얼녀들에 대해서는 속신을 시키려 그처럼 안타까워하면서도 허관손의 후손에 대해서는 면천의 기회를 박탈하고 만 셈이다.

이 글의 앞머리에서 노비 몇 ‘구’라 했다. 조선시대에 노비를 생구(生口)라 부르고 수효를 셀 때도 한 구 두 구 식으로 세었던 것은 그들을 가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노비제도가 전근대적인 노예제였다는 것은 노비 매매가 일상적이었다는 점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노비 매매는 국가적으로 공인되었는데 <경국대전>에서는 노비의 값을 말 한 필과 비슷하게 매겨놓고 있다. 농지의 확대로 노비 수요가 많아진 조선 중엽에는 말 한 마리가 포목 2필일 때 노비 1구의 가격이 포목 6.5필로 급등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양인은 먹고 살기 어려워지면 스스로를 팔아 노비가 되기도 하였다. 하층민의 경우 흉년이 들거나 하여 먹고살기 어려워지면 당장에 굶어죽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기를 원했고, 양반들은 손쉽게 노동력 또는 재화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양자간의 거래가 빈번했던 것이다. 잠깐 눈을 감고 상상해 보자. 노비도 다른 신분처럼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는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 그리고 그 자식이 각각 서로 다른 주인에게 소속되어 있다면 그 가계가 안정될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상전이 각각의 노비를 내다팔기라도 하면 그 가족은 어떻게 될까? 그들의 가족은 안정성이 없고, 가계가 자식에게 이어지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가계를 잇는 일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나는 노비로소이다』의 핵심 모티브가 되는 이지도 대 다물사리 노비소송은 시작부터 특이했다. 원고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양인이라 하고, 피고 다물사리는 자신이 노비라고 반박한다. 당시 노비의 신분을 다투는 소송에서는 자기는 노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보통인데,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그 연유는 극적인 반전 속에 드러난다. 책을 보시면 이내 알게 되지만 양인 신분인 다물사리가 성균관에 관비로 투탁한 것이었다.

독자들은 소송 당시 다물사리의 나이가 여든 살이었는데, 그처럼 노쇠한 여인이 대담하게도 성균관에 투탁하여 신분을 숨기고 상대편의 소송에 맞서려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다물사리의 뒤에는 그의 사위인 구지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 또한 사노비로서 자기 자식들을 어떻게든 사노비의 사슬에서 끌어내 관노비로 만들어 조금이라도 나은 처우를 받게끔 하려 했다. 그리하여 이지도의 집안의 허술한 틈(저자 임상혁은 이지도의 아버지가 이유겸임이라고 추정하는데 당시 이유겸은 살인 혐의로 숨어 지내는 중이었다)을 노려 자기 장모로 하여금 투탁하도록 하는 꾀를 내고 지방 관아의 노비빗리와 공모하여 문서를 조작하기도 했던 것이다.

다물사리와 구지의 기구한 사연은 조선시대 노비제도가 얼마나 혹독한 질곡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시대 절반의 사람은 노비 또는 그와 비슷한 처지의 존재였다. 노비제는 양반제의 필수도구였던 것이다. 양반의 또 다른 이면이자 상충되는 존재였던 노비, 그 역사적 실체 찾기는 『나는 노비로소이다』가 던진 새로운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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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다섯 번째 책은, 임상혁의 <나는 노비로소이다-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사회>(너머북스 펴냄)으로 허정화(자유평론가), 이재민(너머북스 대표)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

 

한 편의 추리소설 같은 연구서 5-② [色 다른 책읽기]

허정화 (자유평론가)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짜진 연구서

‘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사회’-『나는 노비로소이다』앞의 소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다면 조선시대 노비의 이야기인가?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자신을 규정하는 것. 예를 들어, 나는 여인입니다. 나는 변호사입니다. 나는 시민입니다. 등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짓는 문장은 무엇인가 강력한 메시지가 있을 것 같은 호기심을 준다. 그런 점에서 제목은 독자로 하여금 책장으로부터 책을 뽑아 들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소제목에서 보여주듯이 이 책은 노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 당대 소송에 관한 연구서다. 책은 1584년 선조 19년 나주 관아의 이지도(원고)와 다물사리(피고)의 소송으로 시작된다. 임상혁은 머리말에서 “소설처럼 읽히기를 바랐지만 픽션은 아니기에 모든 글월과 낱말이 세부적인 역사의 사실과 부합하는지 재삼 검토 해가며 진행했다.”(14)고 한다. 그러한 작가의 의도는 일반적인 노비 소송, 즉 노비이기를 부정하고 양인이기를 주장하는 사건이 아닌 자신이 노비임을 증명하고자 소송을 제기한 다물사리 사건으로 글 문을 열면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소설처럼 읽히기를 원하는 작가는 또한 추리소설에서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만 보여주다가 잔득 독자로 하여금 사건의 실마리도 못 찾고 좌불안석하게 만들어 놓은 다음 사건의 전모를 밝히듯이 다물사리가 노비이기를 주장하게 된 배경과 소송의 결론을 책의 마무리에 배치한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소설로 시작해서 연구서를 읽다가 다시 소설을 한 권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특히나 법과 거리가 먼 전공과 생활을 하다 보니 그렇게 만만히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소송으로 보는 언어 변천사

문학서를 편식하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어려운 법률 용어들보다는 일상화 된 언어들에 관심이 더 가고, 그 언어의 질감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관심을 갖고 읽은 부분은 파생어와 이두에 대한 정보들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척(隻)이란 피고를 가리키는 말이다’(52)로부터 ‘척지지 말라’는 말이 나왔고 ‘다짐결송’에서 지금의 ‘다짐’의 의미가 생겼다는 정보는 재미있는 공부였다. “이두의 글자상 의미는 서리들이 쓰는 표기법”(110)이며 “각종 공문서와 거래서에 이두가 쓰였다.”(111)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두식 표현들이 우리말을 한자로 옮기는 데 있는 한계를 극복한 선조들의 지혜였으며 역시 그 중심은 귀족 양반들이 아니라 하층 관리(아전)들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고을 사족의 향청에 서리들의 조직은 질청이라 할 수 있다. 作(작)을 질로 읽는 것도 이두식이라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질청은 아전들의 집무처인 건물이다.”(116)라고 하며 “질은 요즈음 삽질, 걸레질처럼 행위나 행동을 뜻하고, 나아가 훈장질과 같이 업무나 일의 의미까지 갖는다.”(205)고 말한다. 여기에 좀 덧붙이면 접미사 ‘질’은 행위나 직업을 하찮다는 의미로 전달하고 싶을 때 주로 쓰이고 있다. 이는 과거에 쓰였던 순 우리말이 긍정적이 어감보다는 부정적인 어감으로 변화된 하나의 증거인데 접미사 ‘살이’ 또한 그렇다. 다물사리가 담+울+살이(152)에서 변화되었다고 추정되는 데 ‘살이’는 ‘살림살이’처럼 ‘살다’의 명사형이지만 ‘시집살이’라는 단어에서 보여주듯이(시집살이라는 표현은 여자들이 결혼해서 사는 형편이 좋을 때보다 힘들 때 주로 쓰인다)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의미에 더 많이 쓴다. 이는 순우리말보다 한자를 고급어로 인식하는 사대주의적인 사고에서 온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일제를 거쳐 일상으로 사용되었던 우리말들이 점점 협소화되어 접두사나 접미사, 조사로서의 기능이 주라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계속되는 용어 해석 – 읽기의 고단함

이 책이 소송으로 보는 조선 사회이다 보니 수많은 그 시대의 소송과 관련된 용어들이 나온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다. “소지라는 것은 관청에 내는 신청서이다. 다라서 여러 종류의 신청이 있을 수 있으며, 그 가운데 판결을 구하는 소지를 제출하게 되면 그것이 소장이 되는 셈이다. 소지를 제출하는 행위, 곳 소를 제기하는 것을 고장이라 한다. 소지는 발괄이라고도 하며, 여러 사람이 연명하여 올리는 경우를 등장, 수령의 판결에 불복하여 감사나 어사에게 올리는 소지를 의송이라 한다. 소지를 접수한 관청은 그에 대한 처분을 내리게 되는데, 대개 소지의 여백에다 직접 써 주었다. 이를 제김 또는 제사라 한다.”(102) 이런 문장들을 읽고 있으려면 건너 뛰어 읽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진다. “『사송유추』의 편제는 소송이론적으로 앞서간 모습을 보인다. 곡 소송요건과 실체법규를 구별하는 편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흠결되었을 때는 원칙적으로 본안 심리에 들어갈 것도 없이 소를 각하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법관에 관계된 사항인 1)상피, 소 각하 사유를 중심으로 2)단송, 소송 수리에 관한 3) 청송은 소송요건에 관계되어 보안 심리 전에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므로 앞쪽에 배열되었다.”(126)는 애써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실제로 건너 뛰어 읽듯이 했다. 사실 법률 용어가 일상어와 너무 괴리감이 커서 법제도에 대한 이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공포감이나 두려움(법이 신격화되는)을 가지게 하는 것이 크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했다.

 

소송으로 보는 사회 : 현대와 비교

분쟁이 있어야 법이 생기는 것이다.(198) 조선 시대에 노비와 관련된 소송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노비 제도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드러내며 신분제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면 지금 시대에 가장 많은 소송은 무엇일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법원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요즘 민사 소송 중에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물었다. 전세 보증금 반환 청구 소송, 임금 지급 청구 소송, 대여금 반환 청구 소송, 이라고 한다. 보니 민사 소송은 거의 재산 분쟁이다. 맞다. 현대는 재산이 모든 것을 규정하는 자본주의 사회다. 또한 서민들에게 있는 것은 전세금이 전부고, 일해서 받는 임금이 전부인데 그것을 잃었을 때 생계가 위태로워지니 소송을 할 수 밖에 없다.

다물사리의 사건은 결국 사노비가 앙역의 부담이 없는 공노비를 해볼 양으로 벌인 소송이었다. 가난한 양인은 부유한 노비보다 사는 게 못하기도 했고, 사노비보다는 공노비의 일이 힘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요즘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고용이 불안정한 기업에 취직하기 보다는 비교적 기업보다 안정적이고 경쟁이 심하지 않은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상이랑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글쓰기의 고단함

특이하게도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곳은 머리말이었다. 글쓴이 임상혁이 책을 쓴 계기와 쓰기까지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는데 어찌나 솔직한지 그 심정이 절로 마음에 다가왔다. “제 버릇 개 주지 못해, 세월이 해가 바뀌어도 책은 나오지 못했습니다. 사장님은 더 독촉할 기운도 없을 지경이었지요.”(13) 라고 말하는 지점에선 석사 논문을 너무 심사숙고하다 결국 마무리를 짓지 못한 내 모습이 생각나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모든 글은 자신의 경험에서만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지금 쓰는 글이 그것의 정형이다) 글이라는 것이 그렇다. 어떻게 생각하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 있으면 뚝딱 나올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텍스트가 주는 가치에 대한 고민, 쓰고자 하는 내용의 자료 준비에서 정리와 배치, 읽는 독자에 대한 배려, 문장을 짓는 기술, 그리고 제일 중요한 실제 자판을 두드리는 노동력. 등이 없으면 한 줄의 문장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투적일 수 있지만 일반인들이 크게 흥미를 가지기 힘든 소송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조선이라는 사회를 한층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재미있게 쓰고자 한 작가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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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다섯 번째 책은, 임상혁의 <나는 노비로소이다-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사회>(너머북스 펴냄)으로 허정화(자유평론가), 이재민(너머북스 대표)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