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시대와 철학]

정의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시대와 철학]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유행이 되어 버린 정의(justice)

 

세상에는 지겨운 것들이 많다. 지겹다고 해서 반드시 나쁘거나 버리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어도 듣고, 듣고 또 들으면 나중에는 지겨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대사를 생각하면 지겹게 느껴지지만, 실상은 좋은 것이면서 실현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민주화, 자유, 평등, 평화, 인권, 통일, 정의 등등.

요즘 전국을 강타하면서 다시 회자되는 지겨운 것 중의 하나가 ‘정의’(justice)이다. 그렇게나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 정의인데, 왜 지겹게 느껴지는가? 지겨운 것이 다시 전국을 강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의가 전국을 강타하게 된 계기는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번역 출판 때문이다.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이 휴가를 갈 때 이 책을 들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더 결정적 이유가 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그렇게나 정의를 부르짖고, 그렇게나 정의를 위해 헌신하면서 무수히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정의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나마 이루어 놓은 사회 정의마저 후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정의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재발하고 있다. 마치 부동산 투기를 잡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오히려 투기를 조장하는 것처럼, 때로는 부정의가 정의로 둔갑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정의가 지겹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휴가 때 샌델의 책을 들고 간 행동에 걸맞게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 국정 지표를 ‘공정한 사회’로 결정했다고 한다. 국민이 정색을 하면서 반겨야 할 결정인데, 왜 이리도 지겹게 느껴진단 말인가?

부정의한 대통령이, 부정의를 은폐하는 대통령이 오히려 정의를 기치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BBK사건에서부터 병역 문제까지 해명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사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사정의 칼을 뽑은 셈이다.

4대강 사업 때문에 농토를 갈아엎어 생긴 배추파동을 해결한답시고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김치를 먹으라고 하니, 그가 어떻게 정의를 내세우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자신이 마치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라고 말한 마리 앙트와네트라고 착각하는가 보다.

정의의 의미가 묘연하다

 

부정의를 정의로 둔갑시키는 논리는 일찍이 소피스트 시절에도 있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의’라는 주제로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전개하고 이를 통해 정의관과 가치관의 차이를 보여준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를 ‘강한 자의 이익’, ‘강한 자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부정의(불의)는 ‘약한 자의 이익’, ‘약한 자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가 범하는 모순을 찾아내고 유도해 간다.

어처구니없는 소피스트 정의관이 대통령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뒤늦게나마 정의를 세우겠다고 마음먹었다니, 박수치면서 환영할 일이기도 한데, 왜 박수는 치지 않고 지겨움만 얘기하는가? 그의 발언 자체가 순수하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공정한 사회를 내세우는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불순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정의관의 내용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의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강하고 가진 자가 약하고 못가진 자를 괴롭히고 그들의 것을 빼앗는 것을 막는 데 활용된다. 정치 권력이든, 경제력이든, 문화 권력이든,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부당하게 다룰 때 작동시켜야 하는 올바름이 정의이다.

그에 비해 한나라당 김희정 대변인은 공정한 사회의 구체적 내용을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회’,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 ‘사회적 책임을 지는 사회’로 규정한다. 이 속에서 모아지는 핵심 쟁점은 무엇인가? 창의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용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끊임없이 강조해온 무한 경쟁의 논리가 함축되어 있다. 어떻게든 열심히 해서 성공하라고 한다. 성공하려면 창의적이어야 하고, 창의적이라는 것은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정의롭게 사는 것은 경쟁력이 있어서 성공하고 그로 인해 부를 거머쥐는 것으로 변질된다.

정의의 꽃은 사전, 사후 분배 정의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정의와 관련하여 논쟁점이 되었던 것은 성공이나 무한 경쟁보다는 ‘분배 정의’였다. 그러나 분배는 경제 활동 이후에 행하는 ‘재분배’처럼 ‘사후 분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재분배만을 분배 정의로 오해하는 것도 오랜 관행이다.

이와 달리 활동 이전에 주어지는 ‘기회의 분배’도 분배 정의에 해당된다. 사전 분배나 사후 분배 모두 분배의 공정성을 내포한다. 그런데 사후 분배만을 분배 정의로 강조하다 보니, 가진 자의 것을 뺏어서 없는 자에게 나눠준다는 식의 재분배만 부각되고, 그래서 마치 재분배는 경쟁력이 없는 자가 경쟁력을 기르기보다는 경쟁력이 있는 자의 정당한 대가를 부당하게 취득하는 폭력이라는 식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자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게 하려면 사전 분배에서부터 공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기회를 가로챌 때도, 가진 자가 없는 자의 결과물을 빼앗아 갈 때도 모두 사전 분배의 불공정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사전 분배가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하고 용이 된다는 말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불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개천이라면 그 뒤로 이어지는 공정성은 이미 불공정에 물들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우리는 재벌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이제 사전 분배의 불공정은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에 부장검사가 청탁 대가로 고급승용차를 받았지만 법조계에서는 무혐의로 처리되었다. 경제뿐만 아니라 법조계에도 분배 부정의가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외교부 고위 공직자 자녀들을 특채한 사례들 때문에 전국이 들썩이고 있다. 사후 분배를 논하기 이전에 사전 분배에서부터 불공정이 작용하고 있다.

분배 정의를 실현하고 싶은데, 출발부터 정의롭지 못한 개천이라면, 그런 개천에서는 아무리 뒹굴어도 높은 경쟁력을 가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무한 경쟁을 한들, 창의력을 아무리 발휘한들, 출발점에서 지니는 낮은 신분 – 재벌이 아니라는, 법조계 인사가 아니라는, 고위 공직자가 아니라는 태초의 원죄 – 이 작동하여 나머지 과정에도 불공정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권리 분배도, 의무 분배도, 기회 분배도, 소득 분배도, 재산 분배도, 공직 분배도, 명예 분배도, 권력 분배도 모두 문제를 야기한다.

기회의 분배 정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서, 무슨 무한 경쟁을, 무슨 경쟁력을, 무슨 성공 시대를 요구하고, 무슨 재분배 부당성을 지적하는가? 이 속에서 낮은 신분이 성공하고 싶다면 누구처럼 ‘강한 자’에게 들러붙어서 강한 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방식을 취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 앞에서 무슨 공정 사회가 가능하겠는가?

공생을 망각하는 정의관은 버려라

 

정의는 본래 혼자 실현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혼자서만 잘 살겠다고 난리를 펴서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다. 정의가 언급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타인과 관계하는 공동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타인과 부딪치고 소통하면서 나아간다.

개천에서 배출되는 용은 혼자서 용이 되지 않는다. 타인과, 공동체 구성원과 상호 작용하면서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을 때 가능하다. 자기 혼자 잘나서가 아니라 공존, 공생 구조를 잘 실현해서 용이 되며, 정의 또한 공존, 공생의 정신을 지닐 때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 사전 분배이든 사후 분배이든 공존 가능성을 배면에 쥐고 있는 것이 정의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무한 경쟁의 개천에서 성공한 자만을 공정성을 실현하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결국 경쟁을 통해 성공하라는 것이고, 성공함으로써 얻게 되는 부를 누리라는 것이다. 분명 여기에는 물질만능주의가 깔려 있고, 물질 만능을 실현하기 위해 실용주의를 견지하라는 강요가 숨어 있다.

현 정부는 약한 자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출발부터 약한 자의 이익과 기회를 가로채는 부정의, ‘분배 부정의’가 만연한 사회를 지향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왜 기회를 주는데도 성공하지 못하는가를 질책한다. 현 정권의 정의관을 바라보면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세상에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못 살 수가 있지! 열심히만 살면 다 부자가 되는데!”

“나를 봐! 열심히 사니까 이렇게 부자가 됐잖아. 이 게으름뱅이들아!”

“열심히 사니까 권력까지 얻었는데, 그 사이에 너희들은 쓸데없는 일에 소일하다가 시간만 낭비했구나!”

그래서인지 청와대 대변인의 정의에는 사회적 약자에 관한 언급은 없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라는 소리가 높아지면, 마치 부지런한 자의 당연한 권리와 정당한 소득을 게으름뱅이들이 빼앗아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들은 분배 정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치부한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온 한국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사전 분배조차 정립되지 않은 한국 사회, 정의관조차 왜곡하는 현 정부를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아마르티아 센 교수가 규정하는 빈곤의 의미를 인용하고 싶다.

“내가 원하는 가치있는 삶을 선택하고 추구할 능력이 현실적으로 없다면 그것이 바로 빈곤이며 자유와 평등이 구현되지 못하는 상태”이다.

이러한 의미의 빈곤은 사회 불의, 사회 부정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정의가 유행이 되어 버린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여전히 빈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지대 사태가 보여주는 우리의 퇴행사회[시대와 철학]

상지대 사태가 보여주는 우리의 퇴행사회[시대와 철학]

최종덕(상지대교수, 철학)

 

요즘 국내 정치적 현안 가운데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것을 들라치면 뭐니 뭐니 해도 막무가내로 강행하는 4대강 개발사업과 억지와 의혹 가득한 천안함 사태 및 부동산 문제이다.

그 다음으로 친다면 매스컴에 부각되고 있지는 않지만 상지대 사태를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상지대 사태는 어느 한 사립 학교의 내부 문제가 아닌 현 정권의 비상식적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퇴행사회의 시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지대학교 정이사 선임과정에서 드러난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온갖 불법 행위는 사학재단의 현주소와, 나아가 대한민국 위정자들의 교육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1. 상지대 사태의 전모

김문기는 상지대학교 설립자가 아니다

상지대학교 사태를 간단히 요약해보자. 1962년 원홍묵 선생은 청암학원의 이름으로 상지대학교 전신을 설립하였다. 그 후 1974년 설립자로부터 학교재단을 인수한 김문기 씨는 학생들의 등록금을 기반으로 온갖 비리를 저지르면서 상지학원을 전횡했다. 김문기 씨와 그 주변세력은 등록금 유용, 교수채용 비리와 부정입학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총학생회 학생들을 불온삐라 제작살포자로 모는 용공조작까지 했을 정도로 교육비리의 백화점이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김문기는 상지학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대학을 자신의 권력 횡포지로 삼았다. 이 사실은 그가 20여 년 가까이 정식 이사회를 개최한 적이 없었다는 점으로 잘 드러났다. 이런 다수의 불법적 행위로 인해 결국 김문기는 1993년 교육부에 의해 이사 자격 원인 무효 판정을 받았다. 대법원은 같은 해 그를 복합적 교육 비리로 무려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 이후 그는 과거 역사를 조작하여 자신이 상지대학교의 설립자라고 우겨왔다. 그나마도 2004년 대법원은 김문기를 상지대학교 설립자가 아닌 것으로 최종 선고했다. 결국 대한민국의 법은 김문기가 상지대학교에 대하여 그 어떤 권리 주장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님을 공표한 것이다.

사분위는 초법적 기구이다

그 후 2007년 사학이 개인의 사적 재산권 영역이 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사학법이 개악되었다. 쉽게 말해서 김문기 씨와 같은 교육비리 전과자들도 사학을 점유할 수 있게 약간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는 뜻이다. 그 준비단계로 종전 국회는 법적 기구인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줄여서 사분위라고 하는데, 사분위 초기에는 요즘 흔히 말하는 공정한 인사로 위원회를 구성하려고 한 흔적도 보였다.

그런데 현 정권들어 제 2기 사분위가 재구성되면서, 사분위는 그나마 있었던 소수의 공정한 인사들을 내몰고 사학의 사적 재산권을 주장하는 편향적 인사들로 채워졌다.

2기 사분위는 2010년 들어 많은 결정을 했다. 소위 분쟁 중인 사학을 정상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사학의 재산권자를 만들어 주기 위해 초법적 권력을 행사했다. 사분위는 원래 사학의 구재단 인사에게 학교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김문기 같은 경우에는 재단 설립자 자격이 없다는 헌재의 판정이 나오자, 사분위는 웬 뚱딴지 같은 ‘종전 이사’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끊임없이 과거 비리 교육집단을 옹호하고 나선다. 이런 방식으로 사분위는 상지대를 비롯하여 조선대, 영남대 등을 비리로 점철되었던 과거로 회귀시켰다. 대구대, 광운대, 덕성여대 등도 진행 중이다.

상지대의 경우 정이사 구성을 최악의 상태로 만들어갔다. 김문기 측 종전이사 추천 4인, 교과부 추천 2인, 정식으로 추천도 하지 않은 상지대 측 추천으로 2인, 그리고 임시이사 1인으로 상지대학교 정이사를 그들 마음대로 결정해 놓았다. 이사회 반수 이상을 종전 이사 측에게 줌으로써 사학 학원법인의 의사결정권을 그들에게 쥐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김문기 씨 아들을 이사로 선임하는 등 북한의 김정일 세습정권과 같은 전형적 악습구조를 공공교육 기관에 뿌려놓았다.

정상화된 상지학원을 김문기에게 고스란히 바치고자 사분위는 초법적 결정을 하였다. 그래서 사분위는 17년 동안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던 많은 대학을 다시 구렁텅이로 빠트려 놓은 분쟁 조장의 원흉이 되었다.

상지대와 시민사회는 끝까지 저항한다

학생, 직원, 교수, 동문 등 모든 상지대학교 구성원은 일치단결하여 김문기 사학비리세력의 학원 복귀를 반대하며 일 년여에 걸쳐 농성을 해왔다. 원주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도 비상대책위를 구성하여 지역사회의 자존심과 명예를 잃지 않기 위하여 공동투쟁하고 있다. 특정 대학교,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시민의식이 고취되면서 전국적으로 ‘비리재단 복귀반대 대학 대책위원회’, ‘비리재단 복귀반대 학생 공동대책위원회’, 및 ‘비리재단 복귀저지와 상지대지키기 긴급행동’ 등의 사회단체가 구성되어, 비리세력 복귀반대 운동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불행히도 그런 목소리를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이 사분위이며, 사분위의 그런 분위기를 선도하는 것이 교과부 및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여당 국회위원들의 참모습이다.

속기록까지 폐기하는 불법이 횡행한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폭거를 진행하면서도 2기 사분위는 그동안 한 차례도 회의록을 공개하지 않았다. 기자들을 위한 요약문만 공지했을 뿐 기록 자체를 공개거부한 사분위는 정말 총리실이나 청와대 회의실에서도 생각하기 어려운 무소불위의 최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중이다. 공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할 수 없기 때문에 숨긴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불법이 자행되고 있었다. 상지대 정이사 선임 관련 최근 속기록 자체를 폐기했다는 교과부의 답변이 있었던 것이다. 최악의 불법적 행위가 백주 대낮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위법 행위가 공공성의 심대한 파괴라는 상식조차 아예 무시하고 있다. 아무리 불법이라도 억지를 쓰면 다 넘어가는 요즘의 정치 현실에 막연한 기대를 하고 그런 위법행위를 행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교과부는 잘못된 상지대 정이사 선임 처분을 즉각 취소하라는 시민사회의 주장을 회피하고 있다. 교과부는 오히려 사분위의 잘못된 결정을 조장하고 있다. 교과부 사분위 담당부서는 9월 8일 민주당 등 야당 교과위원들의 자료 제공 요구에 대해 공문을 보내 “51∼52차 전체회의 속기록은 사분위 결정에 따라 폐기되었다”고 밝혔다.

사분위가 폐기한 것으로 알려진 해당 속기록은 지난 4월 29일 열린 51차 회의와 6월 29일 열린 52차 회의다. 51차 회의에서는 정이사 선임 관련 추천 비율에 대한 결정을 내렸고, 52차 회의에서는 이 결정에 따라 정이사를 추천하라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9월8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사분위와 교과부는 야당 위원들의 당연한 요구를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회의록 공개는 커녕 속기록을 폐기했다는 뻔뻔한 답변이 왔을 뿐이다. 책임자인 사분위 위원장이나 전 교과부 장관 역시 증인출석을 거부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안하무인이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사분위 결정은 무효일 수밖에 없다

 

공공기관으로서 법에 정한 기록물 보존기간을 준수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임의로 회의록을 폐기하는 것은 초법적 권력의 대표적인 위법이다. 속기록 폐기는 국가기록물관리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 형사 처벌감이며 해당 교과부 장관과 담당 간부, 사분위원장, 사분위원 등이 고발대상이지만 그들은 정권의 무한권력에 취한 채 무작정 밀어붙이고 있다.

그들의 막무가내 행정의 결과는 대한민국 교육의 역사적 파행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불행한 사태의 핵심이다. 상지대 회의록 비공개 그리고 속기록 폐기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사분위의 의결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자 대상 요약본이 실제의 회의 내용 결과인지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과위 소속 여당 위원들은 “교육 현안이 무척 많은데, 민주당이 사사건건 상지대 사태를 걸고 넘어져서 회의를 방해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학비리의 온상을 더 키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상지대와 같은 반발의 요소 자체를 싹부터 싹둑 자르거나 혹은 아예 조금도 반발할 수 없을 정도로 현행 사학법마저도 바꾸려 한다. 2007년 개악된 사학법을 더 개악하여 그들이 원하는 공공성이 부재한 사학의 사유화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려는 속셈이다.

 

2. 퇴행사회의 특징

 

상지대 사태는 교육계 기득권자들의 몰상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불행한 사건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교육 마피아들이 학교 운영권을 초법적으로 탈취한 상지대 사태는 상지대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사학의 퇴보와 대한민국 민주화의 퇴행이라는 병증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적 병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상식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회적 상식, 정치적 상식이나, 나아가 윤리적 상식이 모두 무너지고 있는 현장이 상지대이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 정치적 민주화를 정착시키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주변에 횡행하는 불법과 비상식을 눈감고 넘어가는 무임승차 의식을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화가 양화를 축출하는 그런 퇴행사회가 자리잡게 된다.

실은 이미 한국사회는 그런 퇴행적 관행이 자리잡은 불행한 병증을 보이고 있다. 퇴행사회는 다음과 같은 몇몇 전염병적인 공통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퇴행사회는 사회의 민주적 기반을 강제적으로 붕괴하려 한다.

과거 비리집단이 사학을 다시 장악하면서 학생이나 교직원 할 것 없이 종래의 민주적 학교 구성원들을 보복하기 위한 근거없는 고소 사태들이 무수히 벌어지게 될 것이다. 나아가 퇴행에 공조하는 해당기관은 기존 학교에 대해 각종 억지 감사를 무자비하게 실시할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지 과거 민주적 조직에 대해 해코지를 하려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의 설 자리를 확보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민주 집단을 붕괴하기 위한 비리집단의 자기 합리화를 위해 강행할 수순이 될 것이다. 작년 문화체육부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등 관련 부서 인물들을 강제로 교체시킨 일이 그 사례이다. 비상식적 집단에 의해 자행되는 이러한 초법적 사태는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 일종의 정치적 타살에 해당하는 일이 백주대낮에 벌어졌으며 앞으로는 그 이상의 비상식적 일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그것이 그들의 공통된 전염병적 병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화의 가치를 떨어트리기 위해 악화의 분포를 최대화하려 한다. 결국 그들은 양화가 정말 양화가 아닌 양의 껍질을 쓴 최고의 악화라고 가짜선전에 광분하게 된다. 전교조를 빨갱이로 몰고 가고 싶은 그들의 속셈은 전형적인 악화의 광분에 해당한다.

둘째, 퇴행사회는 비상식을 상식화한다.

왕조의 왕권 승계하듯, 김정일의 정권 승계하듯, 기업의 소유권 승계하듯, 사학 역시 자손이 사학재단의 소유권을 승계해야 한다고 버젓이 천명하는 것이 바로 우리 한국사회의 퇴행적 자화상이다. 악화의 주범인 그대들이 좋아하는 미국사회에서 이런 발언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학이 많은 미국사회에서도 사학의 공공성은 제일의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천국인 미국사회는 자본의 권력이 자본증식의 범주 안에서 최대화하려는 자본의 내적 가치에 충실한다. 쉽게 말해서 돈을 벌고 싶다면 기업을 통해서 돈을 벌어야지 학교를 세워 돈을 벌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자본주의의 천국인 미국에서조차 상식화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는 학교를 세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너무 많다. 퇴행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정운찬 전 총리가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있을 때 그는 학생들을 솎아 내는 일이 바로 입시교육이라는 무시무시한 발언을 했었다. 문제는 정 전 총리만이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생각이 많은 기득권자들의 생각과 일치된 결과일 뿐이며, 예를 들어 강남 특구지역 땅부자들의 교육관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비상식이 상식으로 전도되는 퇴행사회의 단면이다.

셋째, 퇴행사회는 이념을 도구화한다.

퇴행사회는 보수와 진보, 좌우의 이념대립과 무관하게 기득권자의 사적 이익의 최대화만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그러한 목표 외에 모든 공적 가치들을 무시하려 한다. 물론 겉으로는 그럴듯한 공공적 표어를 내세우기는 한다. 그러한 수순의 전략적 절차로서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대립관계를 극한적으로 약용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목청 높여 외치지만 주변상황이 그들의 이해관계와 상충될 경우, 기존의 자유 시장질서조차 드러내놓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맞춰 시장이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지대학교를 비롯한 많은 과거(의) 비리 사학재단들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례이다.

비리 사학재단들은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그냥 비리의 집단일 뿐이다. 비리와 부정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건강한 사람들에 대하여 좌파라는 딱지를 붙이거나 심하게는 빨갱이라고 몰거나 혹은 전교조 악마라는 등의 온갖 현혹적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비리를 마치 이념적 대립, 정쟁적 충돌의 부작용으로 비춰지도록 주변 전략을 실행에 옮긴다.

요약한다면 퇴행사회의 중요한 특징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그냥 자기집단적 이익에 눈먼 자들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데 있다.

상지대학교는 이런 단면들을 모조리 안고 가는 불행한 운명에 처해있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만들어진 조작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교육은 억지의 조작이 진실을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있다.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념의 허상, 비상식의 전염이 득세해가는 퇴행사회에서 여전히 마취상태로 살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깨어 일어나 건강하게 살 것인지를 굳이 묻지 않고서도 우리와 후손의 행복을 찾아 당당한 행보를 할 것이다.

 

천박한 시대, 보수에 대항하는 진보의 정치[시대와 철학]

은폐된 진실, 선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문제

1990년대 초?중반 정태춘은 그의 노래 ‘건너간다’에서 우리 시대를 “천박한 시대”라고 규정했다. 한국의 90년대 초?중반은 80년대의 민주화와 컬러 TV의 보급으로 10대가 소비의 핵심적인 주체로 부상하는 등 대중소비사회의 형성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차이와 개성, 쿨함 등 자신의 욕망에 대한 솔직함이 미덕이 된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이 도도한 물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96년 경제위기도, IMF 구제금융 신청도 이것을 막지는 못했다. 바야흐로 소비 욕망은 80년대 대처와 레이건으로 표상되었던 신자유주의적 광풍을 자신의 몸에 내면화했다.

지난 2007년 대선에서 한국의 보수들이 주창했던 ‘잃어버린 10년’은 흔히 도덕과 법으로 상징화되는 보수의 부활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정확히 그것은 근대의 사적 소유에 기반하고 있는 이기주의와 개인적 성공이라는 사적 욕망의 부활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신화’로 변주된다. 마치 이번에 진행된 개각에서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김태호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는 농민의 아들, 소장사의 아들로 태어나 1998년 경남도의원에 당선되었고 2004년 6?5재보선에서 최연소 경남도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명박정권은 이번에 다시 그를 김종필 이후 최연소 총리로 지명함으로써 대선의 신화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공신화에는 항상 감추어진 이면이 있다. 이명박대통령 본인의 BBK에서부터 고소영 내각까지, 그리고 심지어 ‘떡검’, ‘떡찰’에서 시작하여 ‘색검’과 ‘색찰’로까지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그러하다. 강남의 화려한 네온사인에 취해 흥청거리는 사람들의 시선 깊숙이 은폐된 밀실의 공간에서 진행되는 다른 한편의 욕망은 언제나 진실의 다른 한 면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성공한 자들이 누리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결코 드러나지 않는 진실일 뿐이다. 총리로 지명된 김태호 또한 그러하다. 그 또한 이명박대통령처럼 ‘박연차 게이트’의 관련자로서 구설수에 오르내리며 이번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출마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미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공식은 여기에서도 여전히 작동한다. 한편의 성공신화에 이 정도의 구설수가 없겠는가?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능력의 징표라고 말한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은 위반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위반은 필연적이고 항상적이며 중요한 것은 그 위반을 감추는 능력,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래서 자신을 ‘선’으로 가장(假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는 삶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차악을 감추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삶에서 ‘절대선’은 없다. 문제는 삶을 선으로 치장하는 우리의 능력이다. 따라서 문제는 ‘선’이 아니라 ‘욕망’이다. 그것도 우리의 ‘소비욕망’이다.

현대적 보수주의, 외설적인 아버지의 선

오늘날 한국의 보수만이 아니라 미국의 보수도 정확히 이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은 현실의 변화에 진보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며 계산적이다. 그들은 어차피 도덕과 법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무능하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그들은 기존의 도덕이나 법을 지키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오늘날 변화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욕망을 치장하는 법과 도덕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들에게 관념적으로 지켜야 할 전통적인 가치나 법 따위는 없다.

반면 오늘날 무수한 지식인들, 특히 윤리학자를 포함한 철학자들, 흔히 맑스주의자는 아니지만 양심적인 진보적 지식인들은 바로 이 지점을 공격하면서 ‘전체주의’의 공포와 사물화의 즉자성을 환기시키면서 사유와 태도 양식의 변환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변화하고 있는 세계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보수’는 진보보다 더 진보적이며 현실적이다. 왜 그런가? 오늘날 세계상은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현대사회를 지탱해왔던 모든 삶의 양식들을 해체 또는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변화의 차원은 정치-경제-문화-윤리적 양식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방식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근대사회의 정치-경제-문화-윤리적 양식들은 ‘소유권’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의 소유권은 이미 로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자기 자신의 인신적 소유에 근거하고 있는 자기 노동에 따른 것이다. 사적 소유권은 자신의 인신이 투여된 노동에 근거한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상은 이런 소유권을 해체하고 있다. 한편으로 과학기술혁명에 따른 생산의 자동화와 정보화가 죽은 노동에 의한 산 노동의 지배를 전면화하며, 다른 한편으로 물리적인 시?공간의 제약을 넘는 다양한 네트워크들의 전면적인 접속망의 창출은 국경과 지역을 넘으면서 공장이라는 경계를 넘는 생산의 사회화를 전면화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윤리적 가치와 전통적인 삶의 양식들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불확실성과 가변성이 전면화하고 사람들은 ‘불안’을 넘어서 적이 명확하지 않는 ‘공포’, 바우먼이 이야기하는 실체가 모호한 기괴한 대상에 의한 공포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여기서는 불안을 야기하는 대상 자체가 모호하다. 국가도, 지방정부도, 기업들도 모두가 현재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자들은 더 이상 과거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 아니다. 단지 이 상황에서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이미 해체되어 버린 근대적 소유권이다. 그들이 근대적 소유권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특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그들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지배력은 그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그들은 지키고자 한다. 그것은 변화된 현실 속에서 만들어진 죽은 노동에 의한 산 노동의 전면적 지배력을 가지고 생산의 사회화를 사적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법적으로 그것을 확립하고자 한다.

경제적 강제력이 아닌 소유권의 경제외적 강제력의 부활! 이것이 바로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의 법 속으로 돌아온 외설적인 아버지라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무한 복제가 가능한 카피본에 대한 지적 소유권이 그러하며 공적 자금 지원으로 이루어진 연구결과에 대한 사적 소유권 보장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1960년대에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예를 들어 1962년 펜실베이니아대학 연구소는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WI-38이라는 세포주를 유도하고 특허를 출원했다. 그러나 이것을 주도했던 헤이플릭은 연방정부의 재산을 훔친 혐의로 기소되었다.

반면 1980년대 이후 미연방정부는 연방자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발명과 발견들에 대해 특허출원을 허용하는 각종 법안, ‘베이돌법’, ‘스티븐슨 와일더법’, ‘연방기술이전법’ 등을 통과시켰다. 따라서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들은 명백한 당파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의 위기는 그들이 철저하게 당파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가치와 양식들을 고수한다. 관념적인 것은 보수주의자들이 아니라 진보주의자들이며 소위 관념과 가치-문화를 강조하는 관념론자들이 아니라 물질-현실-육체를 강조하는 유물론자들이다.

오늘날의 진보주의자들은 소심한 전통주의자들이며 급진주의자들은 히스테릭한 관념론자들일 뿐이다. 그들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회의하며 기껏해야 ‘소통’, ‘협치’, ‘공정성’ 등등의 추상적인 가치들을 고수하고자 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보수주의자들을 이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정치가 아니라 정치를 가장한 낡은 가치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욕망, 진보주의자의 길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진정한 문제는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이 더 이상 진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진보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진보가 이미 낡은 패러다임 위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세계상은 변화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유주의로는 가능하지 않은 새로운 정치지형을 창출했다.

그러나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은 여전히 월러스틴이 이야기하는 자유주의 헤게모니에 의해 포획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오늘날 대부분의 진보주의적인 정치는 여전히 로크적이거나 루소적인 사회계약론의 모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응하는 좌파의 정치적 양식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으로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제도적인 것들 속에서의 투쟁이, 다른 한편에서는 제도를 벗어난 반제도적인 투쟁이 전개된다. 하지만 그것들 중 어느 것도 현재의 세계상이 보여주는 한계와 틈새들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면서 이를 넘어서고자 하지 않는다. 사유는 초월적인 외재성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내재성 그 자체의 표현력과 자생성에 주목하는 차원에서 멈추고 있을 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현행적인 것(the actual)’ 속에서 재현의 정치를 반복하거나 아니면 ‘잠재적인 것(the virtual)’ 속에서 삶의 정치를 반복할 뿐이다. 민주노동당은 의회-제도 내에서의 좌파적 기득권을 이용하여 ‘통일’을 가장한 ‘패권’을 행사할 뿐이며 ‘자유주의자들’과의 야합을 생산할 뿐이다. 반면 민주노동당에 대응하는 좌파들은 각기 가족적 집단성과 이데올로기적 선명성 경쟁을 할 뿐이다. 그들 중에서 진정으로 짐을 지는 자는 없다.

오히려 오늘날 이 짐을 적극적으로 짊어지고 가는 자들은 보수주의자들뿐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대중의 욕망을 자본의 욕망으로 전환시키는 ‘소비욕망’의 코드 속에서 그들의 욕망과 공포, 불안을 포획하는 정치를 창출하는 데 거침이 없다. 여기에 진실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정치는 ‘진실’을 생산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이것에 대응하여 기껏해야 그것은 ‘거짓이야! 당신은 속고 있는 거야!’라고 소리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 대중의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삶을 사는 대중들에게 욕망은 사회 속에서 자기 가치를 실현하면서 자기 존재의 긍정성과 역동성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그 어떤 비전도, 힘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짐을 지지 않는다. 그 짐은 추호의 흔들림도 죄악이 될 수 있는 결단과 선택을 요구한다. 마키아벨리가 이야기했듯이 정치란 권력의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가 이것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현실적이어야 하며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변화된 세계상과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드러내는 한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본의 한계는 자본이 생존하기 위해서 기댈 수밖에 없으면서도 결코 그 안으로 온전히 포섭할 수 없는 것, 즉 노동과 자연에 있다. 노동력의 재생산은 언제나 노동의 형태로 재생산되며 자본의 에너지원은 자연이다. 이런 점에서 진보주의자들이 새롭게 기획해야 할 정치는 이 양자의 틈새, 간격, 모순을 드러나는 바로 이 지점이다.

오늘날 대중들은 소비욕망에 포획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풍요는 빈곤과 결핍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욕망이 소비욕망으로 전치되는 것은 그들의 욕망이 불순하기 때문이 아니다.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없는 사회, 그래서 소비욕망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사회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이란 다른 무엇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구연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사유의 방식과 마음, 가치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가 이기적이 된다고, 그리고 노조가 실리화된다고 비판함으로써 이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 다른 사회의 가능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요구되는 정치이다.

희망의 정치, 레닌을 반복하기

권력의지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이명박대통령을 비롯한 지배세력들의 정치와 진보주의적 정치는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형식이다. 진보주의적 정치가 대중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공동체적 자치권력을 생산한다면 보수주의적 정치는 대표-재현의 정치를 생산한다. 이 점에서 오늘날 민주노동당이 생산하는 정치는 대표-재현의 정치를 반복할 뿐이다. 반면 반제도적인 대중의 역능에 주목하는 정치는 생활을 정치로 변환시키지만 역으로 권력의지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제도적 정치와 전혀 다른 형식을 가지지만 정작 그 힘을 생산하지 못한다.

이명박의 불통과 아집, 독단은 짐을 짊어짐으로써 대중이 요구하는 불안과 공포를 자신의 권력으로 총화시킨다. 반면 진보주의적 정치는 그런 선택을 거부함으로써 그 스스로 대중들과 멀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지구화는 전통적인 공공적 아버지로서의 국가의 역할을 해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네그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탈국민국가, 탈주권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역이 힘이 작동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더 강력한 권력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존경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자신의 구차한 삶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거대한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전치시키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이 그러하며 이명박대통령의 ‘불도저’가 그러하다.

따라서 오늘날 4대강 사업뿐만 아니라 지속적이고 일관적으로 진행되는 이명박정권의 불통과 아집, 그리고 독단은 그것을 지속적으로 폭로하고 비판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실제적인 희망과 힘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희망의 정치는 더 이상 자본적일 수도 없으며 대표-재현의 정치일 수도 없다. 그것은 그 경계를 넘어서 질적으로 다른 사회-세계를 창출하는 정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나 사유, 행동 양식과의 적절한 타협이 아니라 오히려 레닌처럼 극한적으로 사유하고 극한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세계상은 이미 내재적인 자기 전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당시 맑스주의자들 대부분이 ‘제국주의 전쟁 반대, 평화’를 외칠 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는 성공했고 새로운 정치를 창출했다. 그렇다면 이제, 진보주의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레닌처럼 결단을 하고 짐을 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레닌은 반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레닌이 반복되는 것은 구태의연한 과거의 방식이 아니다. 반복되는 레닌은 과거의 레닌이 아니다. 오늘날 반복되어야 하는 레닌은 새로운 레닌이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정세 속에서 새롭게 사유되어야 하는 레닌이다.

오늘날 진보주의자들 사이에는 논쟁이 사라졌다. 그것은 누구도 이 시대를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도권 좌파나 비제도권 좌파 모두 가릴 것이 없다. 논쟁 대신에 힘이 지배하고 책임 대신에 적절한 야합과 타협, 실리가 지배한다. 그래서 정치는 끊임없이 현행적인 것의 포로가 되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그람시식의 정치는 생산되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은 상상력을 이야기한다. 물론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스스로 그 결단과 책임, 짐을 지지 않는 상상력은 정치가 아니라 관념적인 공상, 또는 행위 없는 개념에 머물 뿐이다. 오늘날 진보주의자가 되려 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 선택과 결단, 책임을 스스로 걸머지려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박영균(건국대 HK교수) /

월드컵, 열정 또는 광기의 줄다리기[시대와 철학]

월드컵, 열정 또는 광기의 줄다리기[시대와 철학]

박민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이 유명한 알레고리를 다시금 떠올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을 듯해서이다. ‘하나의 유령, 붉은 악마라는 유령이 한반도를 떠돌고 있다.’ 붉은색이라면 마치 알레르기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던 나라에서 붉은색이 현 시기를 상징하는 색이 되어버렸다는 점을 볼 때, 이 유령은 19세기 초 유럽을 뒤흔들던 공산주의만큼이나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전자의 알레고리는 그 동안 굉장히 많이 인용되어온 맑스의 말이다. 그는 19세기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전 유럽의 적대적 반응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런데 최근 대한민국의 상황은 이와 좀 다르다. 이 유령에 대한, 즉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열광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 광적인 열광은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지고, 그만큼 위험해 보인다. 거대한 열광의 흐름에 순응하지 못하는 마이너리티의 자괴감인지 아니면 열광적인 응원이 요구하는 강요가 싫어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불편한 감정은 맑스의 목소리가 전달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월드컵에 대한 불순한 생각들

 

박노자는 월드컵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광에서 파시즘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이 불순한 발언들로 인해 그는 큰 곤욕을 치러야만 했지만, 그의 말은 ‘정확하게 얘기해서’ 맞는 얘기다. 역사적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예컨대 무쏠리니는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파시즘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했다. 시간이 지나도 이 고유한 틀은 남아 있다.

월드컵 경기는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총성 없는 전쟁으로 묘사되고, 그 속에서 우리 유령들은 ‘우리나라’인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인 그리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를 밟아주길 고대한다. 이러한 ‘배타적 민족주의와 강한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월드컵’이라는 의견은 월드컵에 대한 불순한 생각들 중 하나이다.

또한 월드컵을 거대자본의 논리에 물든 공허한 행사로 바라보는 불순한 의견도 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수 십 개의 월드컵 공식 후원기업이 있고, 그들의 광고는 월드컵 경기장 안의 광고판에서 뿐만 아니라 띄엄띄엄 주어지는 쉬는 시간에 TV를 통해서도 보여진다. 거대 기업들은 월드컵에 대한 열정 속에 은밀하고 치밀하게 자본의 논리를 집어넣는다. 그 결과, 월드컵에 대한 열정은 자본에 희석되고 마침내 자본을 위해서 열정이 존재하는 전도된 상황에 놓이고야 만다.

기업들은 점점 더 우리의 열정을 조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최신 과학기술의 집합체로 여겨지는 월드컵 공인구가 사실상 제 3세계 어린 아이들의 절실한 바느질로 탄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즉 스포츠는 이제 그 고유한 순수성을 잃고 거대산업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윤을 창출하는 대리체로 전락하고 만다.

이 관점에서는 월드컵에 대한 대한민국의 열광 역시 체제화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으로 코드화된 열광인 것이다. 예컨대, 서울 광장에서의 거리 응원전만 하더라도 월드컵의 후원기업인 현대자동자의 주관과 SK의 참여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이 밖에도 고리타분한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월드컵은 국가권력의 스포츠를 통한 우민화 장치라는 불순한 의견도 있다. 이것 역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천안함 사건, 4대강 사업, 사회적 자본의 민영화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국가적 관심사들은 온갖 미디어가 주야장천 보도하는 월드컵의 내용에 묻혀 잊혀져버렸다. 월드컵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국가권력의 작업 속에서 우리들의 관심은 온통 월드컵에만 쏠려있다. 결과적으로 월드컵에 대한 대한민국의 열광에는 이러한 국가적 관심사에 대한 무관심이 수반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순한 생각들을 통해 규정한 월드컵의 성격을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것일까? 누군가에겐 월드컵이 배타적 민족주의의 선동방법이며 누군가에겐 거대한 자본의 시장이며, 누군가에겐 국가권력의 지배 장치임을 다시금 지적하고 강조하는 건 이제 별 쓸모가 없을 듯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진부하다고 생각하여 개의치 않거나, ‘그래서 어쩌라구?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라는 식의 반응들을 보여줄 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들은 ‘월드컵에 대한 나의 자발적인 참여’ 부분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월드컵을 미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월드컵 행사 자체의 성격에 대한 거시적인 논의보다는, 월드컵에 대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열광을 인정하고 그 열광을 추동하는 우리들의 욕망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필요하다.

일탈의 욕망이 부추기는 강요된 열광

 

월드컵에 대한 미시적 관점은 내가 응원하고 있는 나라가 이기길 바라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미시적 관점은, 예컨대 파시즘에 동조하고 파시즘을 만들어가는 대중의 심리적 과정을 욕망과 관련시켜 분석한 빌헬름 라이히의 방식처럼, 월드컵과 월드컵 응원에 대한 우리들의 열광이 어떻게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공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조금 더 미시적으로 들어가서 월드컵에 대한 열광, 그 열광을 부추기는 우리들의 욕망 자체를 알아보는 것이 더 절실해 보인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에서 월드컵에 대한 열광은, 거리응원을 위해 유아기에 벗어던진 기저귀를 다시 차며 16강 진출의 감격을 한강 투신으로 표현하듯 이제 광적인 상태로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6월 23일 새벽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소리쳐 외치며, 입간판을 발로 차고, 온갖 괴성을 질러댔다. 이것은 마치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려고 하는 개개인의 욕망이 표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도덕, 법, 성별, 나이, 정파, 계급, 신분, 지역 등의 정해진 틀과 그 틀에 의한 구속은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일탈의 욕망이 자라게 한다. 그리고 모든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나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을 추동한다.

다시 말해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응원은 정해진 틀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일탈의 욕망이 현상적으로 가장 농도 짙게 표현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탈의 욕망에서 무엇이 문제가 될 수 있는가? 일탈의 욕망이 추동하여 생긴,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은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일탈의 욕망 그 자체가 갖는 ‘무의미함’과 ‘거짓됨’이며, 둘째는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이 역설적으로 포함하게 되는 ‘강제성’과 ‘유아성’이다.

일탈의 욕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일탈이다. 욕망이 중심에 설정된 것이 아니라 일탈이 중심에 설정되어 있다. 여기서는 일탈이 목적이고 욕망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을 추동하는 욕망은 가타리의 말처럼 ‘탈 영토화되고 탈 영토화하는 유목적 욕망’의 해방적 가능성으로만 그려질 순 없다.

욕망이 중심에 설정되고 그것에 맞는 내용과 특징, 의미 등이 수반될 때에만 욕망 자체가 담보하고 있는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에 주목할 수 있다. 욕망이 중심이 아닌 경우 ‘내’가 있을 공간이 없게 되어 욕망의 표현은 무의미한 반복행위로 전락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인 욕망의 고유한 흐름 역시 고정된 틀에 갇히게 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에 주목했던 우리들은 2002년 이후 그것이 어떠한 자유와 해방의 가능성으로도 표현되지 않았던 사실에 실망하지 않았던가.

또한 욕망이 포함하는 내용, 특징, 의미 등이 수반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유사(類似)욕망, 또는 거짓욕망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것이 욕망의 내용과 특징, 의미 등에 대한 강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욕망이 특정한 시점에 마주하게 되는 내용, 특징, 의미 등을 도외시하고, 욕망을 단순히 일탈에만 고정시킨다면, 생생한 흐름과 역동적인 가능성을 내포하는 욕망은 단순한 일탈의 수단과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월드컵 16강 진출을 축하하기 위해 한강에 뛰어든 사람들처럼, 거짓욕망은 극단적인 욕망 분출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탈의 욕망이 추동하는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은 반대로 ‘자유롭지도 못하고 서로 어울리지도 못하는 열망’으로 변하게 된다.

일탈의 욕망은 일탈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해진 틀과 구속으로부터 탈출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일탈의 욕망은 이내 자본, 국가권력, 미디어가 정해놓은 강요된 공간속으로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을 밀어 넣는다. 즉 일탈의 욕망은 자신의 고유한 자유로움 속에 있지 못하고 다시금 정해진 틀과 구속에 의해 자리 잡혀지게 되면서 역설적이게도 ‘강제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탈의 욕망은 내 의지와 욕망과는 상관없이 월드컵에 열광케 하고, 나아가 그 열광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을 마치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매국노이거나 놀 줄 모르는 숙맥이거나 특이한 돌연변이로 취급한다.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붉은 옷을 걸치고 ‘대~한민국!!’이라는 공허한 구호를 외치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강요된 열광과 함께, 일탈을 욕망하는 주체들은 각 개인들이 보여줄 수 있는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을 잃게 되고, 고립되고 독선적인 주체로 전락하게 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 속에서는 타자의 욕망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다. 거짓욕망의 거대한 장에서 타인의 특수한 욕망은 거짓욕망의 블라인드에 갇히게 되고, 단 하나의 욕망만이 허용될 뿐이다. 여기에는 ‘응원의’, ‘응원에 의한’, ‘응원을 위한’ 욕망만이 허용된다.

이 절대적인 강제성으로 인해 타자의 욕망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어지게 되면서 동시에 타자의 존재성, 타자의 타자성 역시 고려될 공간이 없다. 즉,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응원에는 주위 사람들의 존재를 배려하도록 허용된 공간이 없다. 기간의 과정을 살펴보면, 무의미하고 거짓된 일탈의 욕망은 독선적이고 강압적인 열광을 낳았고, 그것이 우려스럽게도 대한민국의 광적인 응원으로 나타나고 있는 건 아닐까.

일탈의 욕망에서 욕망의 일탈로. 욕망의 상호인정으로서 월드컵

 

월드컵 기간 대한민국에서 나타난 광적인 열광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이 지닌 특수한 조건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이것은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바꾸는 것에서 가능할 것이다. 욕망의 일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일탈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이다. 욕망 그 자체가 목적이고 일탈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욕망의 일탈에는 ‘욕망하는 내’가 중심에 있다.

욕망이 시작되는 최소한의 출발지점으로서 ‘나’는 내 삶을 규정하는 최소한의 내용, 특징, 의미 등을 가지고 있다. 이제 내 삶의 내용과 특징, 의미를 통해 규정된 ‘나’의 욕망은 일탈이라는 과정을 통해 보다 다양한 내용과 의미 등을 담보하게 된다. 예컨대 일탈의 욕망이 광적인 월드컵 응원에서 그 목적을 다하게 된다면, 욕망의 일탈은 단순히 월드컵만을 위한 광적인 응원을 넘어서 일탈이라는 수단을 통해 금지된 다양한 의미와 가치 등을 욕구하게 된다.

또한 욕망의 일탈에는 타인과 타인의 욕망을 향한 배려가 자리 잡을 공간이 있다. 나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대상, 객체, 타자와의 매개를 통해 충족되기 때문이다. 욕망의 충족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타자가 요구된다는 것은 내 욕망이 충족되기 위해선 타인의 욕망도 충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때 타인의 욕망을 인정하면서 나의 욕망도 인정받게 되는 욕망의 상호인정이 가능하다. 욕망의 일탈이 추동하는 욕망의 상호인정 가능성은 일탈의 욕망이 갖지 못한 소통과 해방, 자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들의 강요된 열광을 조직하는 환상적인 틀, 즉 국가, 자본, 미디어로부터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고 이것들의 영향을 제한할 수 있는 토대는 바로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전환했을 때 마련된다. 즉 우리자신들의 욕망이 갖는 특수한 조건들을 인식할 때, 욕망이 갖는 해방의 가능성은 마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바꾸는 것을 통해 월드컵은 ‘우리인 나, 나인 우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필요하다. 내 욕망의 조건들 속에는 타인의 욕망이 전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각성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월드컵에 동참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차원의 공간을 마련해줘야만 한다.

‘붉은 악마’는 더 이상 ‘붉은 악마’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색을 담을 수 있는 ‘회색 악마’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욕망의 일탈이 유지되기 위해선 우리들의 욕망이 갖는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우리들의 순수한 욕망을 지키기 위해선 거대기업과 자본이 유도하는 거리응원도, 국가권력이 정해놓은 서울광장도, 미디어의 온갖 부추김도 단호하게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자본, 국가, 미디어를 향해 이제 그만 사라져 주길 요구해야만 한다.

어쩌면 우리들은 월드컵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그 동안 떨어져있던 타인을 부둥켜안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에서 서로가 소통하고자 하는 몸부림. 극단적인 애정결핍의 또 다른 반작용으로서 타인과 부대끼고 싶어 하는 몸부림. 다시 말해 애초부터 이미 우리들은 월드컵을 통해 욕망의 일탈을 꿈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6.2 지방선거와 지식인의 역할 [시대와 철학]

6.2 지방선거와 지식인의 역할 [시대와 철학]

이성백(시립대 교수)

 

6.2 지방선거의 정치적 의미

 

지방선거가 며칠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이번 지방선거에는 다른 때보다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 선거가 갖는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MB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다. 지난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MB정부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일’을 벌여왔다. MB정부가 보여온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정치적 행태들에 대해서는 이미 국민들 스스로 충분히 겪어왔기 때문에 여기에서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한 가지 언급하자면, 지난 2년간의 MB정부와 한나라당의 모습은 한국의 보수지배세력의 현주소가 어디인지를 확인시켜주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형식적인 수준에서나마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져 오는 동안 보수지배세력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이들은 민주사회의 일원으로 성숙하지 못했고, 군사독재 시절부터 몸에 밴 반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하비투스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잃어버린 10년’ 동안 한국의 보수세력은 지배계급이 갖추어야 할 인격적, 사회적, 문화적 지도력을 하나도 갖추지 않았다. “큰집에서 조인트 깠다”는 K씨의 물의를 빚은 발언은 바로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서구의 부르주아가 기득권을 지키려는 반민주적 보수세력인 귀족계급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주도했다면, 한국의 부르주아는 보수반동적인 반민주적 세력이 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의 MB정부의 정치적 행태들은 단지 MB와 그에 의해 동원된 특정 정치집단들에 의해 빚어진 보수세력 일부의 파행이 아니라, 한국 부르주아의 보수적 반민주성이 전면에 드러난 것이다.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겁한 정치보복, 국민을 국민으로 여기지 않는 용산참사에서의 공권력의 폭력성, KBS와 MBC를 위시한 언론 장악과정의 치졸함,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검찰의 부도덕함, 이런 것들을 보면서 어떻게 한국 지배세력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지방선거에 국민의 관심이 늘어나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의 무상급식이 몰고 온 사회적 파장이다. 교육감 선거도 같이 실시되는 이번 지방선거는 친환경 무상급식이 최대의 정책적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국민들의 선거에 대한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다. 무상급식을 좌파의 정책이라고 비난하던 한나라당마저 선거공약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될 정도로 무상급식이 이번 선거에 몰고 온 사회적 파장은 대단하다.

특히 무상급식은 시장으로부터 복지로 방향을 트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시장과 성장이란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렇다 할 정책적 대안이 없어 고민해왔던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앞으로 추구해야 할 이념적이고 정책적인 방향의 첫 물꼬를 터주었다. 무상급식을 시작으로 하여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를 넘어 21세기의 새로운 물질적 조건에 부합되는 보편적 분배와 복지 체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진보대연합과 좌파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이번 지방선거를 포함하여 최근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정세는 한국의 좌파가 유효한 정치세력의 하나로 발돋움하는 호기가 될 수 있다. MB정부의 정치적 무능과 실정으로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땅에 떨어졌고, 그렇다고 해서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율 하락이 민주당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참여 정부 시절 정치적으로 분열된 중도파는 조직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아직 새로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으로부터의 추락된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보수파와 중도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정치적 흐름 속에서 생겨난 빈 공간은 좌파 진보세력이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될 수 있다.

물론 좌파는 이런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이나 여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 좌파로서의 정치적 차별성을 부각시키지 못한 채 민주당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다 합해도 지지율이 아직 한자리수를 넘지 못하는 소수정파에 불과한 좌파는 조직적으로도 사분오열되어 있다.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진보신당이 떨어져 나왔으며, 그 외 정치 및 운동 조직들은 조직들대로 따로 움직이고 있다.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좌파가 약진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좌파의 내부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다. 그 첫 번째가 흩어지고 분열되어 있는 진보세력의 연대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세력의 연대, 즉 진보대연합은 좌파의 정언명령이다.
이런 필요성이 좌파 내부에서 감지되면서 작년부터 진보대연합을 촉구하는 논의가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진보평론』이 녹?보?적 연대를 40호 특집으로 다루면서 좌파의 연대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어서 한국사회포럼과 학술단체협의회가 좌파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연대 문제를 학술대회의 중심 주제로 삼아 연대에 대한 논의를 공론화시켰다. 연대에 대한 논의가 구체성을 띠면서 좌파 진영의 연대를 구성하기 위해 우선 연구자들부터라도 연대모임을 만들자는 데로 의견이 모아지게 되었고,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진보교연)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진보교연은 이번 지방선거를 위해 만들어진 한시적인 모임이 아니라, 선거 이후에도 계속하여 좌파 진영의 연대를 위해 필요한 활동과 사업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 한다. 진보교연은 앞으로 정치 조직이나 현장 운동 조직들과 같은 실천적 조직들과 나란히 하는 연구자들의 이론적인 모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20세기 서구의 좌파운동이 거대한 대중적 물결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회적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데 실패한 것도 정치적 분열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전반기의 공산주의와 사민주의의 대립이 그러한 것이었고, 후반기 68혁명 시기의 구좌파와 신좌파의 분열이 그러한 것이었다. 80년대 이후 한국의 좌파운동에는 분파주의 의식이 서구보다 더 강하게 작동하였다. 생각과 입장이 다르면 이는 곧 결별로 이어지는 분열 의식이 강하였고, 입장이 다르더라도 서로 차이를 인정하면서 같이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연대 의식이 취약했다. 좌파의 힘의 원천이 강력한 대중적 연대의 구축에 있다는 것이 좌파 정치의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좌파는 연대가 아니라 분열에 골몰하였고, 그 결과로 사분오열의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앞으로 좌파 연구자들이 한국 좌파운동을 위해 해야 할 이론적이고 정책적인 과제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좌파운동의 자기파괴적인 심리적 기제로 작동해 온 분열주의 의식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과 연대 의식을 강화하는 담론의 활성화가 가장 기본적인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진보대연합론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문제가 민주대연합과의 관계이다. 여러 사람들이 MB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심판이 현 상황에서 중요하고 따라서 민주대연합이 우선인데, 왜 진보대연합을 주장하는가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좌파 진영 내에서도 아직도 민주대연합이 우선이고, 이를 위해 진보대연합은 뒤로 미루어도 된다는 민주대연합 우선론이 상당히 힘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민주대연합과 진보대연합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대연합을 하자고 해서 민주대연합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민주대연합에 손상을 입히는 것도 아니다.

좌파는 ‘민주당 2중대’라는 냉소적인 표현에서 보듯이, 그동안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 속에서 민주대연합 우선론에 의해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이루지 못했다. 이제 좌파는 더 이상 민주당에 끌려다닐 수 없다. 좌파는 진보대연합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구축해야 하며, 더 이상 끌려다니는 민주대연합이 아니라, 일정한 독자성을 확보하는 민주대연합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좌파대연합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선결과제이고, 그 다음으로 제대로 된 요건을 갖춘 민주대연합의 구성이 가능하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의 모색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역사의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벌써 미래 저 앞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것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숙과 단계가 바로 그것의 몰락이 시작하는 때이다”라는 헤겔의 말은 역사적인 것의 역사성이 가시적 사건으로 드러나는 순간에 그 빛을 발한다. 얼마 전까지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며 절정을 과시하던 신자유주의가 지구적 경제공황을 통해 체제에 균열이 나는 것을 보면서 다시금 우리는 헤겔의 말을 실감하게 된다.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한창 절정일 때, 감히 어느 누구도 미국이 망할 때가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미국이 휘청이고 있는 현재에도 어떤 이는 “그래도 미국인데?”하면서 이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렇지만 이번 미국의 금융위기는 일시적인 교란이 아니라 그동안 내부적으로 팽창해오던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폭발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는 더 이상 그대로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였고, 이제 다른 새로운 축적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이 새로운 축적체제는 자본주의적 사회체제 내에서의 것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사회체제로의 이행의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좌파도 새로운 전환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그동안의 수세적 상황을 넘어서 탈신자유주의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데에 힘을 모아야 한다. 좌파의 현재 상황은 매우 열악하다. 세력적으로 힘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각 정치와 운동 조직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 미약한 힘마저 제대로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고, 좌파 내지 진보적 이론과 연구 부문의 상황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때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진보적 학술단체들은 연구의욕이 위축되어 있고, 이론적 회의주의에 젖어 있다. 진보적이라고 부를 만한 지식인들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 가장 심각한 것은 진보적 이론 생산을 계승할 후속세대가 거의 단절될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좌파는 매우 힘겨운 시기를 지내왔다. “당신은 나를 꿈꾸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 혼자만은 아니야.”라는 이메진의 가사처럼 나 혼자만이 아니라 그래도 내 옆에 나 말고도 한 사람이라도 더 있다는 생각으로 위로하며 힘겹게 버텨왔던 시기였다.

현실은 현실이다. 이런 열악한 현실을 인정하고,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연구해야 할 이론적인 과제들은 많은데 지식인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분산되어 있는 연구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을 만들어 연구역량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대안 담론의 생산이라는 전체적 전망 속에서 현재 필요한 이론적이고 정책적인 과제를 공동으로 수행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소통시키는 연구 공간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현실에의 실천적 참여 또한 지식인의 역할이기도 하나, 지식인의 일차적인 역할은 이론적 실천에 있다.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에게는 이제 시작되고 있는 역사적 이행기를 맞이하여 ‘이론적 실천’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가야 하는 과제가 부과되고 있다. 무상급식의 예처럼 현실 속에서 대중적인 관심과 참여를 끌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들의 생산에서부터 일반적인 정치경제학이나 사회이론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이론적 생산을 통하여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진보적 사회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그동안 외롭게 미래를 꿈꿔왔다. 이제부터는 미래를 그려 보자. 그리고 바꿔 보자.

 

구제역이라는 정치적 질병[썩은 뿌리 자르기]

“한 마리의 죽음은 대수롭지 않았지만 100만 마리의 죽음은 비극”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우리는 너무도 많은 시간을 써버렸다. 300만이 넘는 생명을 빼앗은 지금에서야 인간이라는 어리석은 동물은 다시금 반성의 동물인 양 살처분이 구제역의 대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아니 최소한 매몰이라는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인간의 얄팍한 속성 때문일까? 우리는 구제역에 걸린 소를 먹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말과 함께 흘러나오는 대량 살처분이 의심스러우면서도 그들이 흘린 피가 땅에서 솟아오르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무시무시한 구제역 이야기를 들으며 살처분이 정당화되는 사회구조 속에서 도대체 “구제역이 어떤 질병이기에 그토록 많은 생명을 빼앗은 것일까?”라는 물음과 함께 “살처분은 어떻게 구제역을 통제하는 명약이 되어버렸을까?”라는 물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이 글은 부족하지만 본인이 찾아 본 그에 대한 간략한 답변이다.

구제역(Foot and Mouth Disease)

구제역 증상에 대한 기술은 1514년 이탈리아의 수도승 프라카스토리우스(H. Fracastorius)가 베로나(Verona)에서 유행한 소전염병에 대한 것이 최초다. 그 후 1897년에 독일의 뢰플러(F. L?ffler)와 프로시(P. Frosch)에 의하여 병인체가 최초로 증명되었다. 우리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의 우역(牛疫)에 관한 기록들과 허균의 『한정록』에서 그 증상을 찾을 수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일제강점기 1911년과 1934년 구제역에 관한 기록들이 있다. 사실 여기서 언급된 소전염병, 우역, 구제역은 모두 같은 질병은 아니다. 현대적인 분류에 따르면 우역(rinderpest)은 폐사율이 100%에 달하는 질병으로 구제역과 구분되지만 당시의 과학적 수준을 생각할 때 이러한 기록들 속에 구제역도 포함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제역은 과연 어떤 질병인가? 말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제역은 ‘발과 입에 걸리는 질병’이다. 정확하게 말해 소와 돼지, 양 등 발굽이 둘로 갈라진 우제류(偶蹄類)에게 발굽이나 혀에 수포 또는 괴사병변이 일어나는 질병이다. 폐사율은 성체의 경우 1~3%이고, 어린 동물의 경우 최대 55% 정도로 알려져 있다. 미생물 분류학적으로 구제역 바이러스(FMDV)는 피코르나바이러스과(Picornaviridae) 아프토바이러스속(Aphthovirus)에 속하는 아주 작은 RNA 바이러스이다. 또한 구제역 바이러스의 혈청형(血淸型)에는 A, O, C, SAT-1, SAT-2, SAT-3, Asia-1 등 7가지의 기본형과 53~80여 가지의 아형(亞型)이 있다. 사람에게도 실험적으로 감염된 예가 있지만 그다지 큰 증상과 병소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인수(人獸) 공통 전염병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간단하게 말해 구제역은 그렇게 심각한 질병이 아니라는 얘기다. 어린 동물이 치사율이 높은 이유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구제역의 진원지는 중동이나 인도 정도로 추정을 하고 있지만 사실 구제역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질병이다. 전라도 사투리로 ‘아구창’이라고 불리는 이 질병은 치료만 잘하면 나을 수 있는 질병이다. 서양 사람들은 병이 돌기 시작하면 농장 입구에 죽은 양이나 소의 머리를 매달아 가축 상인이나 방문객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런 다음 나머지 소들에게 따듯한 쇠죽과 부드러운 건초를 먹이고 깔짚을 갈아주었다. 병든 짐승들이 쓰라린 상처를 핥지 않도록 발굽에 타르를 발라주고 타마린드, 칠리고추, 혹은 물에 불린 인도 머구슬나무 잎사귀로 수포를 치료했다. 허균의 『한정록』양우(養牛)편에는 “우역은 훈김[熏蒸]에 서로 전염되는 수가 많으니 다른 소가 있는 곳에 데려가지 말고 나쁜 기운을 제거하면서 약을 쓰면 살릴 수도 있다”고 썼다. 다시 말해 예전부터 잘 보살피면 나을 수 있는 병으로 취급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제역이 심각한 질병으로 취급을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구제역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가 감염 동물이나 오염된 가축 또는 축산물, 해외여행자의 신발, 의복, 지참물을 통해서 감염이 이루어 질뿐만 아니라 공기로도 전염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사안은 치료약이 없다는데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자연치유가 가능한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대량 확산과 치료약이 없다는 이유가 대량 살처분을 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잠시만 판단을 유보하고 살처분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살처분 정책(Stamping Out)

살처분의 역사는 조금 더 흥미롭다. ‘란치시 칙령(Lancisi’s Recommandation)’이라고도 불리는 살처분은 18세기 유럽 로마 부근에서 전염병으로 소들이 떼죽음을 당하자 교황 클레멘트 11세(Papa Clemente XI)가 주치의에게 해결책을 찾아보라고 지시한 것에서 유래한다. 당시 주치의였던 란치시(G. M. Lancisi)는 병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교역을 제한하고, 정기적으로 육류 검역을 실시하고, 병든 가축은 석회를 뿌려 매장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아울러 통제된 방식의 살처분을 통해 병이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시 이 통제된 방식의 살처분이란 병든 가축을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방법이었다. 또한 소상인이 이 규칙을 어기면 목을 매달고, 내장을 꺼낸 다음 사지를 찢어 죽였다. 신부나 승려가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노예선으로 보내버렸다.

이런 방법을 통해 당시에 비교적 빠르게 전염병을 막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란치시의 칙령’은 잔인하고 살벌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가축 전염병을 통제하는데 근간이 되는 방법으로 인정받고 있고, 우리는 현재 그것을 살처분 정책(Stamping Out)이라고 부른다.

란치시의 칙령이 현대의 살처분 정책과는 다르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내용을 비교해 볼까 한다. 살처분 대상 가축을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일은 분명 현대에는 없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살처분 조치로 총으로 쏘거나 천자(Pithing-칼로 척수를 자르는 행위)를 시행했다. 우리의 경우 안락사 약제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생매장을 했다(생매장이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것보다 좋은 점이 있다면 누군가 나에게 설명해 주길 바란다). 살처분을 거부하는 농부에 대한 능지처참은 분명히 사라졌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형벌이 기다린다. “살처분 명령 위반농가는 가축전염병예방법 규정에 의거 3년 이하의 징역 및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으며, 살처분 보상금 삭감(최소 20%이상) 등 불이익을 받게 된다.”우리의 농가가 대부분 영세농이라고 가정하면 이러한 형벌은 사형에 가까운 처사이거나 강제로 명령을 이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또한 살처분에 동원된 공무원들은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 과로사까지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 자연 치유가 가능한 구제역이라는 질병을 살처분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헛소리(Foot in Mouth Disease)

구제역과 살처분이 환상의 짝꿍이 된 또 다른 이유에는 영국의 종축업자들이 있다. 의회 의원 겸 영국왕립농업학회 회원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던 종축업자들은 구제역에 특히 순혈종의 소들이 큰 피해를 입은 반면, 일반적으로 우유와 고기를 생산하는 품종은 피해가 덜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영국의 종축업자들은 구제역 때문에 사료 소비가 늘고 우유생산량이 줄어들고 유전적으로 균질적인 순혈종 가축의 성장 기간이 길어진다는 이유에서 영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고, 영국 정부는 1871년 이 병을 신고의무 질병으로 지정했다. 이 후 영국은 스스로 만든 ‘구제역 청정국’의 지위를 이용해 무역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구제역 청정국’지위란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해 ‘구제역 청정국’지위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육류 무역업자들을 위한 것이다. ‘구제역 청정국’은 간단한 절차에 의해 육류 무역을 할 수 있는 반면 오염국의 경우 절차가 까다롭다. 또한 오염이 되고 나면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청정국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고, 오염국이 되고 나면 다른 오염국의 축산물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니면 제소를 당할 수도 있다. 백신이 개발되었지만 백신 사용을 꺼리는 이유도 이 청정국 지위와 관련된다. 살처분 매몰 방식은 마지막 구제역 발생 이후 3개월 동안 구제역 발병이 없으면 청정국의 지위가 회복되는 반면 백신접종은 고비용일 뿐만 아니라 100% 확실한 예방법도 아니고 또한 접종 중단 뒤 1년 후에 청정국 지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이유도 포함된다.

이러한 헛소리를 바탕으로 구제역과 살처분 정책은 지금도 병행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면 구제역이라는 정치적 질병이 가진 허구성이 들어난다. 먼저 구제역은 자연 치유가 가능한 질병이다. 소의 면역력만 충분하다면 구제역은 자연 치유된다. 둘째, ‘구제역 청정국’지위가 없어도 국내에서는 육류 판매가 가능하다. 먹어도 건강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도 그 이유다. 셋째, 돼지를 출하하는데 최소 1년, 소를 출하하는데 최소 3년이 걸린다고 일반적으로 가정하면 청정국의 지위를 상실하더라도 3개월에서 1년이면 회복할 수 있는 ‘구제역 청정국’지위는 그야 말로 헛소리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의 경우 육류 수출량이 아주 미비한 수준이다.

사실 구제역은 조류독감이나 기타 여러 가축 전염병과는 달리 식품 안전이나 인간의 건강을 전혀 위협하지 않는다. 또한 구제역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치명적인 형태로 진화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비록 구제역 바이러스가 강력한 살생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가축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고열이 나고 동물의 발톱과 입에 수많은 수포가 생긴다. 이 병에 걸린 가축은 발과 입이 몹시 아파 먹지도 못하고 발을 절뚝거린다. 새끼를 밴 짐승의 경우 유산을 하고 젖이 마른다. 원래 몸이 약하거나 나이 어린 짐승은 열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하지만 치사율은 약 1%정도이고 합병증이 있는 경우 최대 55%가 될 수 있다. 그 밖의 짐승들은 면역력이 약해진 탓에 수포가 박테리아에 감염되지 않는다면 보름 안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구제역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고기와 우유 생산량이 15~20% 정도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생산성이 감소한다.

결국 문제는 산업 논리이자 정치 논리였던 것이다. 구제역을 정치적 질병(political disease) 또는 경제적 질병(economic disease)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픈 짐승을 잘 보살피는 데에는 그 만한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백신 값은 비싸고 효율성도 떨어진다. 백신을 투약해도 소는 대략 85%의 항체가 생기지만 돼지는 40%미만이다. 게다가 지속적이지도 못하다. 결국 값싼 원료와 값싼 고기만을 생산하려는 공장식 축산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방식인 것이다. 생산성은 줄어드는데 비용을 들일 수는 없다는 반복되는 자본의 논리 속에서는 더 이상 대안이 없다.

그러나 2010년 11월 구제역 발생 이후 기르던 가축을 매몰해야만 하는 농민 그 누구도 자신의 소와 돼지를 땅에 묻으며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매몰 작업에 내몰린 공무원들도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에 불과하다”는 스탈린의 말을 생각해 본다. 이제 우리에게 300만은 더 이상 통계가 아니다.

강경표(중앙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죽음을 부르는 죽음 – 살처분은 답이 아니다[썩은 뿌리 자르기]

“피할 수도 있었을 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면, 그것은 죄를 지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서둘러 중요한 일을 하려다가 무심결에 벌레 한 마리를 밟아 죽였다면, 그것은 죄를 지은 것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1918년 11월 18일

300만 마리의 동물들이 죽었다. 구제역 때문이다. 그중 상당수는 구제역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피해 예방 차원에서 도살당했다. 예산도, 인력도 없어서 생매장한 돼지들도 있다. 이 모든 게 구제역 때문이다.

동물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것이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널렸는데 동물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건 단지 죽어간 동물들의 고통 때문만이 아니다. 죽어간 동물들을 보면서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첫째로 300만 마리의 동물들을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 우리 인간의 폭력성이 안타깝고, 둘째로 2차 환경재앙을 비롯해 그들의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미칠 악영향에 두렵고, 마지막으로 구제역 파동을 불러온 축산시스템과 자본주의 경제의 근원적인 상관관계에 수치심이 들어서다.

집단적 죽음이 주는 정서적 효과, 그 치명적 트라우마

자식처럼 키우던 소와 돼지를, 그것도 병에 걸리지도 않은 동물들을 행정기관의 살처분에 내맡겨야 하는 시골 축산농가 주민들은 울분을 토한다. 그들은 사실상 정신적 공황상태를 겪고 있다. 살처분에 동원되는 수의사들도 마찬가지다. 동물을 사랑해서, 동물을 살리고 싶어서 수의사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동물 집단 살처분에 동원된 뒤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는 인터뷰를 우리는 신문에서 보았다.

살처분은 물론 구제역을 막기 위한 대책의 일환이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방법일까? 심지어 구제역에 걸리지 않은 동물들까지 예방적 차원에서 살상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까? 물론 아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소와 돼지를 살처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망각하게 된다. 살처분이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살처분은 적어도 단기적인 차원에서는 가장 ‘실용적인’해결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살처분은 ‘실용정부’MB정권의 관점에서는 유일한 해결책인 셈이다. ‘실용성’을 위해서는 광우병에 노출된 쇠고기를 수입하고, ‘실용성’을 위해서는 4대강에 인위적으로 공사를 해서 자연생태계를 해치고, ‘실용성’을 위해서는 노인복지예산을 삭감해버리는 이 정권의 관점에서는 죽임으로써 구제역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실용적’인 해결책인 셈이다.

그러나 실용성을 위해 300만 마리의 동물을 죽이는 행위가 인간의 정서와 가치관에 미칠 해악적인 영향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본 사람이 있을까? 단지 실용적이라는 이유로,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생명을 대량살상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 논리를 확장했을 때 장애인 아이들을 안락사하고 나병환자들을 강제로 불임수술을 시키는 것도 허용하지 말란 법은 없다. 장애인이나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것을 ‘사회적 비용’의 차원에서 계산해보면, 그것은 위정자들의 ‘실용적’인 계산에서는 ‘낭비’로 취급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명박은 대통령 후보시절, 장애인들은 낙태를 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낸 일이 있다(2007년 5월 12일인터뷰). ‘실용성’을 기준으로 생명을 취급하며, 생명 그 자체를 소중하게 취급하지 않는 사고방식은 궁극적으로는 인간 생명 역시 ‘실용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살처분정책의 문제는 이렇게 생명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고방식이 사회에 만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데 있다. ‘실용성’을 근거로 생명을 죽여도 좋다는 사고방식이 암암리에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처음 겪는 일은 놀랍게 느껴지지만 자주 반복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처음에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벌레 한 마리에 연민을 느끼던 사람도, 수백만 마리의 동물들이 죽었다는 뉴스에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소와 돼지의 죽음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느끼는 무감각함. 사회 전체적으로 생명에 대한 정서가 메말라갈 때, 그것이 특정한 사회적 위기의 순간에는 어떤 종류의 광기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이미 시작된 재앙

환경부는 2월 7일, 낙동강 상류지역의 구제역 매몰지 89곳을 정밀조사 한 결과 61곳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 매몰지 89곳의 절반을 넘는 45개 매몰지에서 침출수 유출이나 비가 많이 올 경우에 사면 붕괴 등의 위험이 있었으며, 16곳에서 침출수 유출 오염이 우려됐고, 23곳은 경사가 심한 곳에 위치해 붕괴나 유실가능성이 있었으며, 이 두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곳이 6곳이었다. 집중호우 때 문제가 될 수 있어 빗물 배수 시설이 필요한 곳도 16개로 나타났다.(, 2월 8일, “구제역 매몰지, 3월이면 다 썩는다.”)

재앙은 이미 시작됐다. 이미 매몰지에서는 침출수가 유출되고 있고, 결국 지역당국은 분뇨차를 동원해 침출수를 퍼다가 하수처리장이나 분뇨처리장으로 이송하고 있다고 한다. 날이 풀리는 3월이 되면 피해는 본격화할 것이다. 병에 걸린 동물들의 사체에서 나온 피와 물이 토양을 오염시키고 강물로 흘러들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생태계를 파괴시킬 때 그 피해는 결국 인간 스스로 지게 된다. 이것이 생태계의 부메랑 효과다. 인간이 자연생태계의 전과정을 합리적 이성으로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믿음이 사실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에서 밝힌 바 있다. 문제는 무지한 인간의 오만이 인간 자신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살포한 고엽제에 노출된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그 후유증을 겪고 있음을 상기해 보자. 자연생태계를 훼손한 대가는 결국 인간 자신이 지게 되어 있다(그것도 가난한 하층계급이 지게 되어 있다).

구제역 예방을 목적으로 과도하게 살충제를 살포하는 행위 역시 인간과 환경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얀 가루가 자동차에 묻어 전국으로 유포되고 있는데 이 약성분이 아이들의 눈이나 입으로 들어갈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해서 정부는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고 있다. 또 살충제와 함께 뿌리는 항생제 때문에 대기중에 있는 불특정 미생물의 내성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결국 새로운 슈퍼박테리아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정부 집권자의 머리 속에는 오직 구제역이라는 보기 싫은 질병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살처분과 살충제 대량살포 이후에 벌어질 문제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국민들이 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근본적인 축산 시스템의 문제는 잊혀지고 있는 것이다.

먹거리의 상품화와 생태위기

현대인은 너무 많은 고기를 먹는다. 너무나 많은 동물들이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사육된다. 그 결과 대규모 축산업이 성행하게 됐고 이 때문에 지구 환경은 재앙을 맞고 있다. 사람이 하루에 마시는 물은 평균 5리터 가량이며, 생활용수를 포함해 하루 150리터 정도를 사용한다. 1kg의 쌀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2,000~5,000리터 정도의 물이 쓰인다. 그런데 소를 키워 쇠고기 1kg을 얻기 위해 들어가는 물의 양은 24,000리터다. 육식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채식을 하는 것보다 최소한 5배의 물을 사용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인간은 이렇게 물을 많이 소비하는 소를 대규모로 사육하고 있다. 전 세계에 고기를 전달하고 맥도날드와 같은 대규모 패스트푸드 체인점에 햄버거 페티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지구의 건조화로 인해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많은 물을 소 사육에 쓰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소 사육을 위해 수풀과 삼림을 개간하여 거대한 방목지를 만드는 행위 역시 지구 사막화에 동조한다. 중남미 대륙에는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열대 우림 지역이 이미 소 방목용 목초지로 개간 중이며 이 때문에 사하라 이남과 미국, 호주 남부 목장지대에서는 대규모로 사막화가 진행 중이다. 사육장에서 흘러나오는 축산폐기물도 심각한 문제다. 소 1만 마리를 사육하는 사육장에서 배출되는 유기폐기물은 11만 인구의 도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양과 맞먹는다고 한다. 강으로 배출되는 오물이 일으키는 문제, 소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가 대기오염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볼 때, 이처럼 대규모로 소를 사육하는 것은 생태계에 치명적이다.

우리나라에 구제역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것 역시 과도한 축산밀도의 원인이 크다. 소와 돼지를 좁은 우리에 가둬놓고 사육하다보니 동물들이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되기 쉽다. 거기에 동물들의 운동량이 적어 면역력 역시 떨어진 상태다. 이렇게 좁은 축산밀도로 많은 수의 동물들을 사육하는 현재의 축산시스템이 구제역 사태의 진정한 원인이다.

만일 고기를 비롯한 먹거리가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둔갑하지 않았더라면, 소, 닭, 돼지가 교환을 통한 이윤축적을 위해 대량으로 생산되는 사회가 아니라면 과연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까? 문제는 육식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육식은 도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나친 육류 공급과 과도한 육식에 있으며, 이러한 과도한 육류의 소비와 공급을 야기한 것은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시스템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먹거리 문화를 바꾸는 운동이 요구된다. 생태계에 좋은 것은 인간에게도 좋은 것이다. 인간 역시 생태계의 일원으로 지구의 생태적 순환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환경적인 먹거리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축산정책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한 나라의 정책개선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친환경적으로 축산시스템을 바꾼다고 해도, 대규모 방목을 통해 값싸게 공급되는 외국산 육류와 경쟁이 되겠는가? 소비자들은 당연히 값싼 외국산 육류를 찾을 것이고 국내 축산업계는 망할 것이다. 따라서 전지구적으로 자본주의적 먹거리문화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현재의 과도한 육류소비문화를 개선하는 일이 시급하다. 3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를 살처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모든 사실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상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인간의 무한욕심이 결국 인간을 공격한다[썩은 뿌리 자르기]

구제역, 위기의 대한민국

작년 11월 안동에서 시작된 구제역이라는 가축전염병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여전히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문제는 구제역 자체보다 가축을 생매장한 이후의 일이 더욱 심각하다. 열악하고 지저분한 축사에서 나와 찰나의 상쾌함을 느꼈을 돼지들이 황당하게 죽어나간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작업에 동원된 공무원과 수의사들이 가축들의 비명소리에 환청과 불면으로 정신과치료를 받아야 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것은 비단 축산업계의 상업적 손실과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매몰로 농림수산식품부가 배포한 구제역 긴급행동지침이 지켜질리 만무하다. 같은 장소에 너무 많은 양의 가축들을 산채로 매장하였고 생매장당하는 가축들의 발버둥으로 오염방지용 비닐이 파손되면서 매몰지에는 가축들의 핏물이 땅위로 솟아오르거나 지하수에 섞여 나왔다. 이 뿐만 아니라 매몰가축을 들짐승들이 뜯어먹어 제2차전파의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도 있다. 환경학자들은 이러한 환경오염이 앞으로 20년 정도 지속될 것으로 내다본다.

중요한 것은 벌써 100여만 마리가 살처분 당한 지금의 상황이 천재(天災)라기 보다는 인재(人災)라는 점이다. 인간의 과도한 이욕(利慾)이 낳은 참사다. 가축(家畜, livestock)이라는 의미 자체가 인간 삶의 복지를 위해 야생동물의 생태를 개량하여 인간의 영역 안에 붙잡아둔 것이다. 따라서 가축의 생명활동에 지장이 있다면 사육자인 인간이 1차적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책임처리에 있어 많은 잘못이 발생했다. 불가피하게 가축을 도살해야 할 경우 안락사 시키는 것이 원칙이지만 살처분 약품의 부족으로 집단 생매장했다. 유럽연합 등에선 동물을 도축한 뒤 소각하는 게 원칙이고 일본도 마취제를 놓은 뒤 독극물을 주사해 살처분 하고 있다.

또 그 이전에 대한민국이 ‘구제역 청정국’임을 입증하여 육류의 수출?입 거래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알량한 욕심’으로 구제역 백신 접종을 소홀히 한 문제가 크다.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육류소비가 증가하면서 육류를 공급할 축산농장이 대규모로 공장화되었지만 그 설비는 양적 규모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사육시설이 가축 전염병에 취약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구제역이 본격적인 가축 전염병으로 자리 잡은 것은 2000년 이후 축산시설이 대형화된 시점과 일치한다. 농림수산식품부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2000년 이후 구제역을 비롯한 각종 가축 전염병으로 살처분한 소?돼지?닭 등은 1,980만6,972마리에 육박한다.

자연과 인간을 쪼개버리니 더 커져버린 이욕과 만물일체의 자연관

2008년 MB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이후 드러난 미국의 축산업 현실은 대규모로 기업화된 축산농장이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지 여실히 드러내었다. 미국 네브라스카주 한 농장은 8만5천 마리의 소를 한꺼번에 사육하고 있는데 축사의 위생문제는 물론이고 동물성 사료의 비율도 높아 소들이 광우병이나 구제역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다. 이것은 동물학대에 가깝다. 지금 인류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고기를 소비하고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가축의 대량생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방목으로는 이것을 충족하지 못하므로 가축들은 대규모 공장식 농장에서 사육된다. 게다가 연한고기를 얻기 위해 우리를 더욱 협소하게 하여 엄청난 고밀도 축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경우 인간의 이익이 동물의 이익보다 더 크다면 인간을 위한 동물의 희생이 정당화되지만 인간의 아주 작은 사소한 이익을 위해 동물들이 희생된다면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육식은 과거 인류가 생존을 위해 야생동물을 사냥하던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고 단순히 기호의 한 단면일 뿐이다. 맛을 위한 행위는 생존을 위한 행위보다 더 클 수 없다. 물론 싱어의 이런 주장이 모든 육식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극지에 살고 있는 주민이나 아프리카나 남미의 오지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 영양공급원을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 공동체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으로 적극적인 육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국가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 인류의 엄청난 육류소비는 극?오지의 상황과는 달라서 인간의 미각적 즐거움을 위한 사치에 가깝다. 사치행위를 위해 대규모 공장식 사육시설이 창궐하고 있는 것이다. 사치행위는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욕심을 불러오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 구도로 나누는데서 출발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미국이 서부 개척시대 때 서부라고 하는 자연대상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은 것처럼 현재의 전지구적 생태위기는 근대과학의 태동 이후 산업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자연을 생명이 없는 인간역량의 실현 대상으로 파악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인간중심의 도구적 자연관은 자연을 인간의 욕망충족과 복지확충의 도구로 판단한다.

이와 관련하여 비토리오 회슬레(V. Hoesle)는 「생태계 위기의 정신사적인 기반」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자연’과 ‘인간’이라는 단어사이의 접속어 ‘과’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 예를 들면 ‘식물과 동물’의 ‘과’는 양자를 서로 대립시키는 기능을 하지만 ‘심장과 신체’의 ‘과’는 인간 내부의 장기와 그것을 포괄하는 인간 신체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 두 예시의 유형이 바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유형이라고 말한다. 인간중심관점에서 자연계와 인간을 대립적으로 나누어보는 입장이 있다면, 자연과 인간을 하나의 유기체적인 형태로 보는 입장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데카르트의 자연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자연과학에 근거하고 후자는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에 근거한다.

이런 비유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논리를 중국 명대의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이 제출한 적이 있다. 『전습록(傳習錄)』에서 어떤 사람이 왕양명에게 묻기를 “회암 선생(주희:朱憙)이 ‘사람이 학문하는 까닭은 마음(心)과 이치(理)에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어떻습니까?”(晦庵先生曰 人之所以爲學者, 心與理而已. 此語如何)라고 하자, 양명은 주희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마음이 곧 본성(性)이며, 본성이 곧 이치이다. ‘마음과 이치’의 중간에 ‘과(與)’라는 한 글자는 마음, 이치를 두 가지로 삼음을 아마도 면할 수 없을 것이다.”(心卽性, 性卽理, 下一與字, 恐未免爲二)라고 했다. 왕양명의 견해는 주희의 이원화 관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주희는 사물에 정해진 이치가 있다고 하여 대상 사물 속의 이치를 구하려는 입장이다. 이는 결국 마음과 이치를 둘로 가르게 하고 인식 주체와 대상 객체를 분리한다. 그러나 왕양명은 인간에게는 본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양지(良知)가 있어서 마음에 있는 양지를 사물에 이르게 하여 사물이 모두 그 이치를 얻는 방법을 취한다. 왕양명은 천지만물과 사람은 본래 한 몸이어서 해와 달, 별, 비, 바람, 산, 강을 비롯하여 금수(禽獸)와 초목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자연계가 총체적인 우주를 구성하며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자연관으로 자연과 인간이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생태임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 위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북송의 철학자 주돈이(周敦?)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오직 인간은 그 빼어난 기운을 얻어 가장 영특하다(惟人也得其秀而最靈)”고 했지만 이 명제를 해석하는 주희와 왕양명의 태도는 차이가 있다. 주희의 관점이 자연을 주관(主觀)한다면 왕양명의 경우 자연과 인간이 일체이고 그 속에서 가장 정묘한 것이 인간이므로 인간을 천지의 마음으로 본다. 따라서 인간은 총체적 자연계에서 주체(主體)적인 입장에 있고 자연계의 모든 사물을 보살피고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왕양명의 관점에서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가축에 대한 책임문제는 철저히 인간 자신에게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왕양명이 말한 자연적(저절로 그러한)인 양지가 굳어버렸고 인간과 자연사물의 감응통로인 양지를 상실하면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감통(感通) 자체가 사라진다.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중심적 합리주의가 인간 이외의 것에 있어야할 생생한 ‘생명성’을 함몰시켜 버린 것이다. 중국 당대 이감(李甘)의 글 「찬리설(竄利說)」중 한 구절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생명에 대한 감응과 그 감응을 상쇄하는 인간의 이욕을 자세히 꼬집어 설명한다. 다음은 그 한 구절이다.

“지금 탐욕 부리는 사람은 본디 인자한 마음이 없지만, 항상 잔인한 마음이 있는 것은 이욕의 침해 때문이다. 땅강아지나 지렁이가 사슴보다 크다면 인정하겠는가? 그 대답을 인정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땅강아지나 지렁이를 보면 발을 피해 밟아서 살려줄 것이고 실수로 땅강아지나 지렁이를 밟아 죽인다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가슴 아파할 것이다 그런데 다시 사슴을 본다면 활을 잡고 쫓아서 사슴을 맞추면 외마디 탄성을 지르며 기뻐하는 법이니 큰 것에 잔인하고 작은 것에 인자하게 함은 무엇 때문인가? 사슴은 입과 배에 이롭고 땅강아지나 지렁이는 이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모할 만한 이익이 있다면 비록 큰 사슴이라도 잔인하게 하고 도모할 만한 이익이 없다면 땅강아지나 지렁이라도 잔인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今是頑人, 曾無不忍之心, 然常獨有忍心者, 由害於利也. 且謂??大於?鹿, 則許之乎. 聲不許也. 然人顧而遭??則迂足而活之, 過而傷??則失聲而痛之, 顧而見?鹿 則援弓而逐之, 幸而中?鹿則失聲而喜之, 忍於大者, 不忍於小者, 何歟. ?鹿利於口腹也, ??不利也. 故居於利則雖?鹿忍也, 不居於利則??不忍也)

자연을 대상화하면 동물도 대상화된다. 가축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자연을 철저히 대상화시킨다 하더라도 인간이 이익에 대한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무너지는 자연생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회피할 겨를도 없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구제역과 관련한 문제뿐 아니라 4대강 사업이라든지 골프장건설에 의한 산림파괴, 지구온난화 문제 등이 그렇다. 이런 문제에 가장 1차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것은 국가정부에 있다. 구제역의 경우 지금 한국의 축산업계가 적절한 설비 없이 우후죽순으로 방대해진 원인은 국가이익을 극대화 하려한 정부정책에 있고 구제역의 예방과 발생한 이후의 안일한 대처도 정부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차적 책임소재의 문제를 떠나, 예를 들면 지금 논의하는 구제역과 같은 가축 질병의 원인을 대규모 공장화한 사육시설의 소유주에게 전적으로 떠넘기는 것도 옳은 시각은 아닌 것 같다. 소비자들도 공동의 책임이 있지 않을까. 개인이 대규모 사육이나 도축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점잖게 식당에서 고기만 구워먹었다고 해서 자신이 구제역이라는 결과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 역시 갈라지고 나누어져 양지를 상실한 사회시스템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맹자(孟子)의 ‘존심양성(存心養性)’은 아마 이런 개개인에 쓰여야 할 말이 아닐까?

불인지심(不忍之心)

구제역 파동이 연일 TV화면에 보도되면서 안타깝게 죽어나간 동물들의 처참한 모습도 볼 수 있지만 유독 눈길을 끄는 장면은 농촌의 돼지농장 주인들이 가슴아파하며 돼지들을 목 놓아 부르는 모습이다. 아마 누구라도 그 모습을 보면 자신이 기르던 가축에 대한 농민의 애정이 어떠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농민들의 그 모습이 경제적 이익의 문제 때문인지 인간적 정감의 발동인지는 확실히 구별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모습이 적어도 『맹자』에서 전국시대 제선왕(齊宣王)이 흔종(?鐘:제사)에 사용될 소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양으로 바꾸어 쓰라고 했던 모습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소를 양으로 대체하라는 발상은 우습지만 그래도 맹자는 다른 제후국들의 왕에 비해 그런 제선왕의 마음을 두고 족히 왕 노릇 할 수 있다고 격려하지 않았던가. 그 농민들의 마음이야 말로 ‘불인지심(不忍之心)’의 발로에 가깝다. 하지만 구제역에 대응하고 처리하는 정부와 관계기관의 모습을 보면 사람으로서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 차마 하지 못할 일을 버젓이 하고 있다. 이제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야할 문제다.

진보성(대진대 강사) /

자살공화국인가 살인공화국인가[썩은 뿌리 자르기]

대한민국은 살인공화국이다

‘자살(自殺)’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이다.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도덕적 원칙에 비추어보면 자살은 비록 타인에게 해를 가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생명을 단절시켰다는 점에서 존엄성의 원칙에 어긋나는 부도덕한 행위가 된다. 심지어 서양의 근대에서는 위법한 행위로 규정되어 자살한 자의 시체에 대해 처벌을 가하거나 그 사람의 재산이 몰수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삶이 죽음보다 소중하다는 것은 매우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이 계기가 되어 소극적 안락사에 해당하는 존엄사 논쟁이 벌어졌다. 존엄사란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 대해 무의미한 연명조치에 해당하는 의료행위(생명연장을 위한 기계장치)를 중단해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면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게 하는 조치를 뜻한다. 이러한 존엄사라는 명칭이 부담스러운 의학계에서는 ‘연명치료중지’라는 말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아직 연명 가능한 환자를 더 이상 치료하지 않음으로써 일찍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자살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의료행위 중단은 당사자의 자발적 선택에 따른 후속 조치이기 때문이다.

존엄사를 찬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양적인 측면에서 삶을 연장한다면 그 질적인 의미와 가치가 무시되어 인격 자체의 존엄성을 크게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존엄사와 다른 자살의 유형이 한국에서 번지고 있다. 지난해 대한민국은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했다. 1만2270명이 자살을 하였으므로 하루에 약 34명이 자살을 하는 셈이고 약 40분에 한 사람씩이 우리 곁에서 자살로 사라지고 있으며, 20대의 자살률이 심지어 12.8%이다.

2008년 10월 2일 유명한 국민여배우인 최진실은 악성루머와 우울증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동생 최진영도 1년 3개월 후에 자살했다. 계속해서 여러 연예인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런데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더 큰 사건이 일어났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거목이 운명이라고 유언을 남기고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리며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누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가? 본인 탓으로는 사업실패나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하거나 우울증을 심하게 앓다가 자살하거나, 유명인이 자살하는 것을 모방해서 자살하거나, 자신의 주변사람들에게 후환이 갈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하거나, 모두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자살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세계 1등을 너무 좋아하는 우리 대한민국이 자살률 1등을 한 것에 자부심을 느껴야 하는가? 일차적으로 우리 권력지식층의 의식과 행동 그리고 그들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이런 상황이 벌어진 데 커다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 아니라 자살을 유도한 살인공화국인 셈이다.

우리는 자살을 찬미하는 민족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생명을 중시한 민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이 쉽게 일어나는 까닭은 그 삶이 죽음보다 못하거나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살자를 자살로 몰아가는 사회적 요인과 이를 정책적으로 추진하고 구조화한 세력이 있다. 이런 이유로 자살은 개인 심리학적으로 고찰할 것이 아니라 사회 심리학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자살의 심리적 충동을 야기한 사회적 요인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자살은 자살로 몰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선 자살이 아닌 살인이라는 논의의 앞서 서양과 동양의 죽음관의 특징부터 살펴보자.

서양의 죽음관과 이원론

서양은 전통적으로 “육신을 경멸하고 영혼의 찬란한 해방을 광신”(김지하 시인)하는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라는 종교가 삶보다 죽음을 더 가치 있게 여긴 문명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의 하나인

자살은 질병이 아니다! [썩은 뿌리 자르기]

자살은 질병인가?

자살을 질병으로 규정하고자 했던 노력은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에스퀴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자살은 정신병의 모든 특징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은 미쳤을 때만 자살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에도 사회학?정신의학?심리학 등 소위 공공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학문들은 자살을 질병 다루듯 취급한다. 그들은 우울증?조울증?자살 관련 유전자 등, 의학과 과학의 힘을 빌려 자살이 질병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고자 노력한다.

질병이 원인인 자살은 분명히 있다. 우울증?조울증과 같은 증상은 충분히 자살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질병의 고통 때문에 자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자살이 질병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질병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먼저 자살은 전염성이 강하다. ‘베르테르 효과’라고 불리는 자살의 전염이 그것이다. 최진실씨가 죽었던 달에는 자살자가 전달에 비해 66% 증가했다.

부모가 자살을 하면 그 자손도 결국엔 자살을 한다는 속설은 자살이 유전 질환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라는 것도 자살을 질병화 하고픈 이유일지도 모른다.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자살률이 유독 높다는 것은 국가 체면과 관련된다. 지금도 수많은 종교와 윤리에서 자살에 대해 열띤 논쟁을 하지만 자살이 질병이 아닌 시대도 있었다. 그 때 자살은 종교적 구원의 문제이자 철학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이제 자살은 의학의 문제이며 과학의 문제다. 자살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만이 자살을 질병화 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그러나 자살을 직접적인 질병이라 보기에는 무언가 논리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말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자살은 사회적 질병이다.”, “우울증 유발 유전자”, “자살의 진화생물학”, “동물도 자살을 하는가?”등 자살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얘기들이 기사화된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자살을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살은 그들이 과학적인 설명에 포함하고 싶었던 윤리?도덕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이다. “동물도 자살을 할까?”라는 물음에 “예”라는 대답은 자살은 인간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아폽토시스(apoptosis)’라는 세포 자살 현상은 도덕과 무관한 생명현상일 뿐이다.

아직은 과학이 자살을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과학적으로 질병화 하는 이면에는 단 하나의 장점만이 존재한다. 자살을 일으키는 또 다른 원인인 경제적인 문제를 개인의 질병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을 조금만 바꾸면 된다. “경제적 빈곤의 문제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당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를 보세요. 그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행복한 느낌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우울증에 빠진 것입니다. 혹시 조상 중에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이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이타적 자살, 영웅 만들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질병이 아닌 자살도 있다. 뒤르켐에 의하면 이것은 ‘이타적 자살’이라고 불린다. 이타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에 통합 정도가 지나치게 높을 때 발생한다고 하지만, 사회를 강력하게 통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유일하게 질병화되지 않은 자살은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추앙받으며 영웅 만들기로 이어진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있었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제국주의는 제국주의 체제를 위한 영웅을 필요로 했고, 식민지 국가들을 독립을 위한 영웅을 필요로 했다. 그들이 조국과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침략이든 테러든 자신을 희생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런 희생도 학문적으로는 ‘이타적인 자살’일 뿐이고, 여기서 다시금 문제가 발생한다. 좋은 자살과 나쁜 자살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기적 자살은 나쁜 것이고 이타적 자살은 좋은 것인가? 자살이라는 질병이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면 이타적 자살도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이타적 자살도 사회를 병들게 만들 수 있다. 가미가제를 생각하면 된다. 젊은이들이 비행기를 몰고 적에게 돌진하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병폐의 한 단면일 뿐이다. 21세기에는 한국에도 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국형 영웅 관리 모델 수립’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그들은 영웅을 만들지 못하는 사회는 위대한 성취를 만들어 낼 수 없다고 한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교과서다. 교과서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인간형을 영웅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강재구 소령의 이야기도 한주호 준위의 이야기도 가슴 속에 기억할 만한 이야기이지만 교과서가 아닌 다른 글에서 만나야만 한다. 아니면 서정주의 「오장 마쓰이 송가」와 다를 바가 없다. 그것도 아니면 백선엽 장군처럼 만주군 간도 특설대에서 친일을 하다가도 전쟁에 나가서 잘 싸우면 당신도 오성장군이 될 수 있고, 영웅이 되어 나중에는 국립묘지에 갈 수도 있다고 교과서에 실어 주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죽은 영웅보다 살아있는 영웅이 더욱더 모범이 되지 않겠는가! 독일의 시인이자 극자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말한다. “영웅이 필요 없는 나라는 행복하다.”지금 우리에게는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업에 종사하면서 빈곤 때문에 자살을 하지 않는, 그래서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빈곤도 질병이 아니다

그러나 빈곤층의 자살이 자꾸만 증가한다. 범죄도 증가하고 있다. 빈곤층의 자살을 질병으로 파악하려는 사람들은 이렇게 진단한다.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의해 우울증에 빠진 빈곤층 중에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약물 치료를 받으며,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상담을 받고, 교육을 받으면 된다. 슬그머니 우울증이 유전 요인 때문이라는 말도 한다.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부탄”이라는 기사와 함께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정작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의 대상인 우리의 부자들은 제외된다.

그러나 우리는 OECD 국가 중 자살률만이 1위가 아니라 저임금 근로자 비중도 1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경제적인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예전에 빈곤을 사회생물학적인 견지에서 설명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실패로 끝났다. 과학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도 빈곤을 질병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가난하면 질병에 걸릴 수 있다. 가난하면 질병을 치료받지 못해 죽을 수도 있다. 가난하면 질병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난 자체는 질병이 아니다. 또한 빈곤에 의한 자살도 질병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과 의학의 힘으로 자살이라는 질병의 치료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찾아야만 한다. 경제적 분배 정의를 실천하는 것, 저임금 근로자를 줄이는 것,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바로 이것이 빈곤에 의한 자살을 줄일 수 있는 방법들이다.

과학과 의학이 해야 할 일은 자살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치료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은 경제적 분배 정의를 실천해서 가난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을 막는 것이지 ‘이타적 자살’을 미화해서 정치 의도에 맞는 영웅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국가가 나서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동물의 자살 사례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 중 동물학자 제인 구달이 관찰한 ‘플루’와 ‘플린트’이야기가 있다. ‘플린트’는 어미인 ‘플루’가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주검을 지키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야생 동물의 세계에서 독립하기 전 새끼가 어미 곁에 붙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어미의 부재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미가 없는 동물은 먹이를 얻어먹을 수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빈곤층일수록 가족동반자살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진정한 경제적 분배 정의를 다시금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적당한 가난은 ‘검소하다’라는 말로 위로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끼니가 없어 비관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자살이라는 질병에 걸렸다”는 말이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만 남을 뿐이다.

강경표(중앙대학교 철학 박사수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