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거라투스트라, 삼성 미술관 리움에 가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MEGA 공동대표)

니체 아부지, 삼성 미술관 리움에 가보셨어요?

나야, 독일 촌구석에 사는데, 어찌 그런 데를 다 가보겠냐? 니는 천방지축으로 쏘다니니 그런 데를 다 갔다 온 모양이구나.

예, 아부지. 이번이 두 번째예요.

자거라투스트라야, 니도 삼성 국물을 좀 마시려고? 아서라, 니 차례까지 오겠냐?

아니 아부지, 그래도 제가 아부지 얼굴에 먹칠하겠어요. 처음에는 건축 공부하러 갔었어요. 그때 한참 건축 공부하고 있을 때인데, 글쎄 삼성 미술관에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작품이 집결되어 있다 하더 라고요. 이게 웬 떡인가 싶어서 직접 가보기로 했죠. 그런데 그때에는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어요. 미리 예약하고 와야 한 대요. 그래서 아이고, 내 팔자에 재벌 미술관에 들어가 보겠냐 하고선 돌아섰지요.

그럼 이번에는 안으로 들어갔더냐?

예, 신통하게도 이젠 예약 없이 들어갈 수 있대요. 김용철 변호사가 무언가를 폭로한 이후 삼성한테 유일하게 변한 게 그거라고 하더 라고요. 재벌 미술관이 서민에게 개방된 거죠. 정말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갔어요. 솔직히 좀 떨렸어요. 제가 입성이 형편없으니, 혹 그 때문에 입장을 거부당할까 봐서 말이요. 다행히 집어넣어 주더 라고요.

그래? 그 안이 어떻더니?

정말 깜짝 놀랐어요. 밖에서 보면 세 개 건축이 있거든요. 그게 안으로는 이어져 있어요. 아부지도 들어서 아시겠지만 전부 세계적인 건축가예요. 이런 사람들을 이어놓은 것은 삼성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하겠죠. 우선 이태리의 포스트모던 건축가 마리오 보타, 들어보셨어요?

야, 인마, 자거라투스트라야, 아비는 건축에 관심이 없다. 아비는 음악을 좋아하지. 그런데 음악에 비하면 건축이 어디 예술이냐? 그건 그저 물질 덩어리에 불과해. 그래서 헤겔도 건축을 예술 중에 제일 천박한 예술로 꼽지 않았니?

역시 아부지는 아직 19세기이군요. 요즈음 건축이 얼마나 찬란한데요? 건축을 영화에 비교하는 글도 있어요?

예끼, 이 놈, 지가 써놓고 슬쩍 자랑하다니. 그런데 포스트모던 건축이라는 게 무어냐?

니체 아버지, 그건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마리오보타만 가지고 말한다면, 주변이나 역사, 문화의 맥락을 고려한 건축이라는 거죠. 모더니즘은 이런 것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든요. 모더니즘 건축은 자기완결성을 추구했었지요.

그러면 마리오 보타가 삼성 미술관에서 고려한 맥락은 무어지?

글쎄요. 아부지, 그게 아리송해요. 좀 억지로 연결시키자면 미술관이 위치한 남산의 성곽의 형태를 건물의 지붕 선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실제로 보이는 것은 성곽이 아니라 거대한 하이야트 건물이죠. 시꺼먼, 흉측한, 남산을 파괴하는, 박정희 시대 특혜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건물이죠. 더구나 미술관 지붕 선에서 발견하는 것은 꼭 한국적인 성곽이라 할 수는 없고, 로마적인 성곽처럼 보여서, 전체적으로 마리오 보타가 이태리에서 지은 건축을 그대로 하나 수입한 것처럼 보입니다.

쯧쯧, 뭐 이렇게 생각하려무나. 차용을 통해 패러디한 거라고.

뭐, 어쨌거나, 겉모습은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니, 한 가운데 로톤다라고 있어요. 뒤집어진 원추형 로톤다인데, 그 주위로 계단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창문으로 아래쪽이나 위쪽을 쳐다보는데 그런 체험이 운동감을 주었어요. 건축이 시각이 아닌 감각을 보여 줄 수 있다는 증거지요.

원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하여튼 아부지, 그 외에도 해체주의 건축가 렘 쿨하스의 건축도 있어요. 그는 네덜란드 사람이죠. 삼성 미술관에서 가장 앞에 있는 건축물이 그가 지은 거죠. 밖에서만 보면 저건 나도 짓겠다 싶었는데, 그래서 별 감동을 못 받었죠. 그런데 이번에 안에 들어가 보니 아, 역시 해체주의자구나 하고 감탄했어요.

궁금하구나, 그게 뭐지?

건물 안에 또 건물이 있는데, 그 속에 있는 건물은 잘 보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요. 부양하는 돌덩어리, 어때요? 멋있죠? 물론 착각을 이용한 거죠.

거 참 재미있구나.

그래요. 건축이란 게 원래 무게의 예술인데, 그걸 전복시킨 거죠. 하지만 솔직히 기분 나쁜 게 렘 쿨하스가 지은 서울대 미술관 건축(관악 캠퍼스)하고 이 건축이 너무 닮았거든요. 두 건축이 연대도 비슷하게 지어졌어요. 건축의 다양성과 깊이는 서울대 미술관 건물이 더 탁월하죠. 그래서 서울대 미술관 짓다 남은 아이디어로 삼성 리움 건축을 지은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렘 쿨하스나 삼성 미술관 관계자가 들으면 팔짝 뛸 이야기죠.

얘야, 자거라투스트라야, 확인할 수 없는 비난은 삼가 거라.

예, 죄송해요. 실제로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다만 그런 인상을 받는다는 거죠.

하여튼 조심하래도.

예, 알겠어요. 그리고 니체 아부지, 장 누벨의 작품도 있어요. 장 누벨의 이름이 나오면 건축을 아는 사람들의 가슴이 황홀해지죠.

장 누벨이라? 그는 어떤 스타일로 짓는데?

그의 건물은 전체적으로는 모더니즘의 본래적인 입장으로 돌아간 듯해요. 원래 모더니즘 건축이 처음 출발할 때(1920년대)는 과학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인상적인 표현을 추구했거든요. 나중에(1940년대) 모더니즘은 기능주의로 타락하고 말았죠. 특히 장 누벨은 건축물의 입면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운동성을 추구했어요. 그런 점에서 초기 모더니스트들이 운동성을 추구했던 것과 비슷해요. 그래서 예를 들어 파리에 있는 아랍 문화원 건물의 입면에는 수많은 카메라 조리개가 모여서 한편으로는 아랍식 전통 건물의 타일의 형태를 만들죠. 또 다른 한편에는 이 카메라 조리개가 빛의 양에 따라서 조였다가 풀어지면서 건물 안에 찬란한 빛의 예술을 전개하죠.

그러면 삼성 미술관 건물에는 장 누벨이라는 사람이 어떤 건물을 지었지?

마리오보타의 건물 옆에 있는 철판이 녹슨 건물처럼 보이는 건축을 그가 지었어요. 밖의 모습은 기둥을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사각형 입방체로 만들어 인상적이기는 하죠. 그런데 이 비슷한 건축을 그는 어디 딴 데 또 한 번 지어 놓았더 라고요. 어느 게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외면적인 모습은 너무 비슷해요.

음, 좀 실망스러운데..

세월이 지나면 녹슨 것이 진행되니까 입면이 바뀌죠. 그런 점에서 운동성을 추구한다는 장 누벨의 태도가 잘 표현되었다고도 하겠어요.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면 놀라운 정경이 하나 있어요. 건축의 모서리가 유리 창문으로 되어 있어서 다가가 보았죠. 그랬더니 놀랍게도 맞은 편 옹벽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더 라고요. 녹슨 철근으로 상자를 만들어 옹벽을 따라 축조해 놓았어요. 거칠고 황량한 느낌을 주죠. 그런데 그 앞에 살아있는 대나무를 심어 놓았어요. 그 대비가 동양의 선적인 경지를 보여주는 듯해요.

오호, 자거라투스트라, 니는 행복했겠네? 그런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체험했으니 말이야.

그런데 말이에요. 아부지, 개별 건물들은 틀림없이 세계적인 작가의 탁월한 작품인데, 문제는 그것들이 모여 있으니 뭔가 답답한 거죠.

자거라투스트라야, 무슨 말이니?

그래서 제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답답함의 정체를 풀기 위해 고민해 보았죠. 그리고 이런 결론에 이르렀어요. 이건 너무 교과서적이잖아. 자 보자, 모더니스트 장 누벨, 포스트모더니스트 마리오 보타, 해체주의자 렘 쿨하스. 그러면 교과서에 나오는 순서 그대로이네. 한 가지가 빠졌는데 그게 뭐지? 아, 초현실주의가 빠졌군. 이렇게 생각하면서 밖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초현실주의적인 조각 작품이 하나 거기 버티고 있더 라고요.

그게 뭐지?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 ‘마망(엄마)’인데, 거대한 거미이죠. 이건 설명 안 해도 정신분석학적인 차원에서 성적인 상징이라는 것을 잘 알겠죠. 그러니 완벽하죠. 삼성미술관이란 건축사의 교과서예요. 아주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이 좋아하는 교과서 그대로이죠. 니체 아부지, 단정하고 바르게 살아가지만 답답하고 고루한 모범생들 말이에요. 삼성 리움 미술관은 그런 학생이예요. 그런 학생들은 모든 것을 잘 알지만 다만 느낌은 없죠.

자거라투스트라야, 그걸 ‘삼성’이라 한단다. 너도 KS마크라면서, 그러니 ‘삼성’ 아니냐?

 

구보씨 계속 소통을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철학)

자연은 정녕 불인(不仁)한가. 천지불인(天地不仁)의 글귀를 되새겨보게 하는 요즘이다. 하기야 인(仁)이건 불인(不仁)이건, 인간사의 문제고 인간의 생각이지, 자연이야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렇더라도 우리는 알아서 자연을 섬겨야 할 처지다. 그 품에 깃들여 사는 건 우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방적 소통관계라 할 만하다. 어쩌면 소통이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소통이란 서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주체가 있을 때라야 성립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그런 의도적 주체로 여길 수 없다면, 자연과의 소통이란 소통이라는 말의 비유적 확장에 불과할 것이다.

자연은 인간을 추구(芻狗)로도 여기지 않는다. 지푸라기 개 운운하는 것 역시 우리를 보살피지 않는 자연에 대한 섭섭함이 배인 인간의 반응일 뿐이다. 물론 이런 반응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존 그레이(John Gray)라는 유럽의 학자는 Straw Dogs라는 책을 지어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비판했다(이 책은『하찮은 인간, 호모라피엔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지푸라기 개, 추구(芻狗)의 함의는 무엇보다 이렇게 인간의 겸손함을 깨우치는 데 있는 것 같다.

(일본 대지진의 참상)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연과의 소통을 자연을 매개로 한 인간의 소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법하다. 자연을 통한 인간들 사이의 소통이거나 인간 자신과의 소통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자연이 인간에 대해 무관심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자연을 염두에 두고 삶의 태도를 다져야 한다. 우리의 하찮음을 자각한 위에서 문명의 위세를 뽐내더라도 뽐내야 하지 않겠는가. 지진은 막을 길이 없더라도, 지진의 위험을 염두에 두고 건물도 짓고 산업시설도 만들어야 한다. 예상을 뛰어넘는 위험이 발생했다면, 거기에 맞추어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런 대책마저 뛰어넘는 재앙이 닥쳐온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거야 할 수 없는 일이다. 페름기에 있었다는 엄청난 기후변화나 백악기말에 있었다는 유성 충돌과 같은 사태가 닥쳐온다면, 현재의 인간 능력으로서는 속수무책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태를 지레 우려하여 미리 손을 묶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겸손을 넘어서는 짓이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다시 짚어볼 만한 것은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라는 식의 발상이 갖는 한계다. 맑스가 젊은 시절부터 내세웠던 이 명제는, 윤구병 선생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만드는 문명’의 소산이다. 워낙 만든다는 것은 일단의 완결성을 추구하는 활동이기에, 이런 모델에 따르는 사고방식은 자칫 폐쇄성과 전체성을 띠기 쉽다.

‘자연의 인간화’가 만듦의 능동성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자연화’는 자연에 의한 인간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이고 열린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연이란 인간에 의해 변형된 자연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교호작용은 결국 인간이 주도권을 쥔 활동과 환경의 상호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한 한, ‘인간의 자연화’는 인간이 환경을 매개로 스스로의 본성을 변화시켜 나간다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크게 보면, 인간이 세계를 만들고 그렇게 만든 세계를 스스로 의식한다는 서양 근대 문명의 틀, 이른바 자기제작과 자기의식의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구보씨는 아직도 맑스의 『경제학 철학수고』며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을 처음 읽었을 때의 흥분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 나이에 그 내용은 충격이고 매혹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이제 막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맑스의 테제들은 우리가 이르지 못한 합리적 사회의 이상(理想)과 거기에 이르는 과정을 가리키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렇다고 구보씨가 이제 와서 보니 맑스가 틀렸다거나 과거 맑스를 받아들인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사상이 있는 법이며, 그런 점에서 맑스의 사상은 나름의 역할을 한 셈이다. 어떠한 사상도 자기 시대를 넘어설 수 없다면, 맑스의 사상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만드는 문명’이 한창이지만, 그 한계에 대한 지적은 이미 진부해졌다. 현대 철학의 주요한 흐름이 이 만드는 문명의 자기폐쇄성을 공격해온 지도 오래다. 목적을 설정하고 설계도를 만들고 수단을 마련하고 공정을 시작하여 제품을 완성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큰 성과를 낳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 모델을 일반화하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근본적인 면에서 자연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더 따지고 보면, 사회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그러나 제작 또는 생산이 모델로 자리 잡은 상황에선,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이 모델에 따라 해석되고 처리된다.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나 이데올로기, 지식도 생산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재료에 생산수단을 가해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구체적 과정은 각 영역마다 다르겠지만, 그 기본 형식은 비슷하다. 사람도 교육을 통해, 훈련을 통해, 일정한 형태로 생산되는 생산물로 취급된다.

물론 모두가 균일하지는 않다. 공산품에도 여러 규격과 품질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여러 종류와 등급이 있기 마련이다. 때로 불량품이 나오는 것처럼 일탈적인 사람들도 나타난다. 그런 불량품을 처리하는 곳도 있다. 감옥이나 병원 따위가 그런 곳이다. 여기에도 나름의 생산과정이 작동한다.

이런 식의 ‘만드는 문명’에서는 역사도 인간의 생산물로 취급된다. 그 생산을 계획하는 것이 꼭 인간의 개별적 의식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개개의 인간이 쉽게 포착하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손’이나 ‘일반의지’일 수도 있고, ‘시대정신’이나 ‘이념’일 수도 있으며, ‘역사법칙’일 수도 있다. 어떻든 이 생산의 틀이 작동하는 것은 인간 집단에 의해서다. 그러니, 이 구조를 잘 파악만 한다면, 결과를 예상할 수도 있고 그 과정을 앞당길 수도 있다. 역사가 정말 일종의 만들기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사실, 근대 이후의 세계에는 이런 모델이 실제로 적용되어 온 셈이다. ‘만드는 문명’은 ‘기르는 문명’을 압도하고 잡아먹었다. 이제는 농작물도 가축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 되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통은 이 생산 과정에 종속되어, 그 수단의 일부로 취급받는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이런 모델을 잘 따르는 모범적인 사례다. 만드는 공정, 그것도 급속한 만들기의 훈련 속에서 만들어진 CEO 대통령을 내세워, 만들기로 온 땅과 물을 덮는 데 여념이 없다. 소통은 이런 만들기의 효율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유의미한 것으로 대접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생산이 놓이는 곳에는 언제나 그 생산에 영향을 미치고 그 생산을 조건 짓는 바깥이 있다는 데 있다. 우리가 아무리 이 바깥을 차단하거나 무시하고 싶어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생산의 모델이 설정한 폐쇄성은 결국 깨지기 마련이다.

현대 철학은 이런 생산의 모델이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모든 폐쇄적 체계는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애를 써왔다. 물론, 그 실질적 동기는 현실에서 드러난 생산 모델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환경 문제가 그렇고, 공장식 사회주의의 실패가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환경 문제를 단순히 관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잘못일 것이다. 그런 생각은 결국 자연을 우리의 통제 안에 놓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환경 문제가 생산의 단위를 좁게 설정하고 그 생산과정이 환경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못한 탓에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럴 경우, 이제는 그 단위의 범위를 넓혀 하나의 공장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 더 나아가 하나의 지구에 이르기까지 생산이 작용하는 영역을 확장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맞는 생각일까?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지반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다시 고려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네 말은 우리가 ‘기르는 문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야?”

Y가 못 참고 마침내 끼어든다. 그만하면 오래 참았다. 구보씨는 이런 상황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지 않는가.

“아니, 꼭 그런 뜻은 아니야. 다만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는 거지. 사실 그건 기르는 문명의 장점이기도 해. 사람들이 곡식을 재배하는 데 힘을 쏟으면서도, 그 곡식을 내가 만든 것이라고 여기진 않았잖아. 자연의 생장에 조금 힘을 보태고 이용할 뿐이라고, 그래서 결국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자연이라고 보았거든. 생각해 보면, 그게 옳은 태도 아닐까?”

“하지만, 구보야, 먹여 살리는 것만이 아니라 죽이기도 하는 게 자연이었지.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굶어죽고 휩쓸려 죽고 했던 것 아냐? 거기에 비하면 지금 형편이 훨씬 낫다는 건 분명해. 지진과 같은 재앙이야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거구. 아니, 어떻게든 지진 피해를 줄이고 있다는 면에서도 오늘이 낫잖아.”

“근데, Y야, 당장 원자력 발전소 문제를 생각해 봐. 나는 이게 단순한 관리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고 보는 거야. 사람들은 흔히 원전 사고가 관리나 설비의 문제라고들 하지. 이를테면 미국의 드리마일 원전은 사고로 핵연료봉이 녹아내렸는데도 격납장치 덕택에 방사능 피해가 없었지만, 소련의 체르노빌은 그렇지 못했다는 거야. 그러나 지금 일본의 상황을 봐. 우리가 예상하고 대비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거든. 그러니까 어떤 장치도 관리만 잘 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이 위험하다는 거지. 이건 결국 철학의 문제고, 현실적으로는, 원전과 같은 생산물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라구.”

“나도 원전은 너 못지않게 반대해. 그런데, 그건 위험한 면이 있는 줄 알면서도 경제적 이유 때문에, 그것도 일부 사람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건설하니까 반대하는 거야. 정말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면 원자력 발전소건 핵융합 발전소건 그런 걸 만드는 게 왜 문제가 되겠어? 근데, 구보 네 얘기는 좀 다른 것 같아. 그건 마치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자연을 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처럼 들려.”

“섬긴다구? 글쎄,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 또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라는 거야.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연에 의존해 산다는 점을 잊지 말자는 거지. 말하자면, 자연과 우리 문명의 비대칭성을, 자연의 우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거야. 그게 자연과 소통하는 방식이고, 정확히 말하면 자연에 대하여 우리가 우리의 태도를 가다듬는 소통방식이라는 얘기지.”

“자연의 우위? 겸손? 그런 게 과연 문제를 해결해 줄까? 그거 사실은 일종의 도피거나 무책임한 태도 아냐? 차라리 더 안전한 발전장치를 개발하려고 노력하거나 지진을 예측할 수 있는 연구에 진력하는 게 현실적이고 제대로 된 태도일 것 같은데… 구보야, 미안한 말이지만, 내겐 여전히 너네들 철학자 얘기가 좀 공허하게 들려. 이것도 소통 부족이나 소통의 잘못 탓이니?”

“…..”

“엥, 구보야, 또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일단은 내 얘기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지. 그게 네가 곧잘 말하는 대로 타자를 대하는 기본적 태도가 아니겠어? ㅎㅎ…”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삼우반, 2003[청춘의 서재]

윤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오웰이 이 책을 쓰기까지

영국인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1903.6.25~1950.1.21)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한겨레, 2010. 이하 『위건 부두』)에서 자신이 ‘상류 중산층 가운데 하급’, ‘특권 계급 출신이지만 돈은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론상으로는 상류층의 에티켓과 관습, 문화를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삶을 영위할 경제적 능력이 없는 부류로서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살아야 하는’ ‘피곤한 신분’이었다. 또 자신을 ‘부르주아의 완충재 같은 계급’이라고도 표현했다.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스쿨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서 입학했다.

에릭이 이튼스쿨을 다니던 때는 1917년부터 1921년까지이다.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에릭에 따르면 영국에서도 유례없이 혁명적인 분위기가 만연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위험한 진보 작가의 책이라 분류되었던 것들을 모두 읽고 자신을 막연히 사회주의자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정말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했고 노동계급이 인간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며 책을 통해서나 그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할 뿐이었지 실제로 그들 가까이 갈 때는 여전히 그들을 혐오하고 경멸했다고 고백한다. “돌이켜보건대 그 시절 나는 시간의 절반은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하는 데 쓰고 그 나머지는 버스 차장의 무례함에 분을 터뜨리느라 허비한 것 같다”(『위건 부두』, 191쪽)

이튼을 졸업했지만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할 성적이 되지 않았던 그는 1922년 미얀마(구(舊) 버마)로 건너가 5년 동안 ‘인도 제국 경찰의 일원’으로 일했다. 스무 살이 채 안 된 나이였다. 이튼 시절, 젊은이들에게 1차 대전 참여를 부추기기만 한 기성세대의 비겁함과 또 전쟁을 무능하게 지휘했던 노년층에 코웃음을 치며 기성세대가 내세우는 정통성과 권위에 반항을 했다지만 이튼에서 전수받은 대영제국의 국민이라는 교육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진 못했나 보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도 식민지의 관료였다. 그러나 에릭은 – 수입이 많고 안정된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권층 노릇하기 쉬운 – 식민지의 경찰직을 선택하고 나서야 제국주의의 실상과 마주친다.

1927년, 휴가를 받고 영국에 도착한 에릭은 제국의 경찰 노릇을 그만하겠다고 결정한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찰직을 떨쳐낸 에릭은 희망했던 작가가 되기 위해 1928년 친척이 살고 있는 파리로 옮겨와 습작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미얀마에서 보냈던 시간들로 인해 괴로웠다.

“나는 5년 동안 압제의 일원으로 복무했고 그만큼 양심의 가책이 컸다. 잊히지 않는 숱한 얼굴들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법정에 선 피고들, 사형수 감방에서 최후를 기다리는 죄수들, 나에게 윽박질당하던 부하와 냉대당하던 늙은 농부들……내가 느낀 죄책감은 너무 엄청나서 속죄를 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과장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을 5년 동안이나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번민 끝에 결국 얻은 결론은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단순한 이론이었다.”(『위건 부두』, 200쪽)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압제에 맞서고 싶어졌다……당시에는 실패만이 유일한 미덕처럼 보였다.”(『위건 부두』, 201쪽)

“그렇지만 나는 노동 계급의 처지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실업에 관한 통계를 본 적은 있었으나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부끄러울 것 없는’ 빈곤도 최악의 수모를 당한다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위건 부두』, 202쪽)

“그들은 ‘하류 중에서도 최하류’였으며 그런 그들이야말로 내가 접촉하고 싶었던 부류였다. 그때 내가 진심으로 원한 것은 번듯한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길을 찾는 것이었다…… 일단 그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나는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일 테고 그러면 죄책감을 얼마간 떨쳐버릴 수 있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이 불합리한 생각인 줄은 당시에도 알았다.”(『위건 부두』, 203쪽)

파리의 접시닦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하 『밑바닥 생활』)은 바로 그 속죄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는 파리와 런던에서 경험했던 밑바닥 생활을 가족과 친지들이 알고 당황할까봐 필명을 만들어 1933년 1월 9일 책으로 엮어낸다. 전체주의를 철저히 거부했던 ‘조지 오웰’이란 이름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옮긴이에 따르면 “유럽의 두 도시의 하층민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르포르타주 작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은……작품의 전반부는 1929년 늦가을의 파리 생활을 주로 반영했고 후반부 영국생활은 1928년 겨울에서 1931년 여름 사이에 그가 직접 체험하거나 간접적으로 취재한 내용을 재구성했다.”(『밑바닥 생활』, 286쪽)고 한다. 오웰도 이렇게 말한다. “거기 적은 일들은 재구성되긴 했어도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위건 부두』, 205쪽)

1929년 10월 뉴욕 증권 시장의 폭락 여파가 유럽에도 번져나갔다. 1931년, 영국에서도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4명 중 1명이 실직자로 전락한다. 약 300만 명 정도가 실직했으며 실업수당으로 겨우 기아와 노숙을 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더불어 기아와 노숙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빈곤은 이웃의 일로 번져갔다. 암울하고 불안정한 시기였다.

오웰은 ‘하류 중에서도 최하류’의 생활을 파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아침부터 욕설이 들리는 여관에 거처하면서 밑바닥 사람들의 언어와 일상들을 빠짐없이 체험한다. 겨우 연명할 일거리인 영어 교습이 끊기고 난 뒤부터는 그야말로 진짜 밑바닥이 되었다. 그러던 중 그곳에서 사귄 친구(보리스)의 도움으로 호텔의 접시닦이가 된다. ‘노예의 노예’라는 접시닦이 일은 부르주아의 완충재 역할을 하는 ‘하급 상류중산층’ 오웰의 계급적 이중성을 무너뜨렸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끊임없이 서두르고, 장시간 노동과 탁한 공기를 견디는 것이다. 그들은 이 생활을 탈출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급료로는 한 푼도 모을 수 없고, 일주일에 60시간에서 100시간의 노동이 다른 일에 훈련할 시간을 남겨주지 않기 때문이다.”(『밑바닥 생활』, 102쪽) “그들의 생활이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 놓는다.”(『밑바닥 생활』, 152쪽)

오웰은 밑바닥 현실과 밀착되어 있는 살아있는 글들로 20세기 초반의 빈민층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하급 상류층으로 살았던 그가 최하류층을 겪으며 쏟아내는 빈민층의 생활과 노동 강도에 대한 비유들도 당시 노동 현장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그런데 오웰의 글은 무겁게 흐르다가도 번뜩이는 재치를 보인다. 오웰의 묘사에 흠뻑 빠져들어 마치 내가 호텔 지하 일터에 있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껄껄 웃게 하는 풍자와 해학들을 만나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그것들이 과장스럽거나 요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해학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다가도 어느새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이것이 오웰 글의 묘미인 것 같다. 노동자들의 고단한 생활과 환경이 곧 나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그 진실들을 외면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소‘썰’>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와 같은 수준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내 이웃에 있기 때문이다. 생계를 꾸려가야 할 노동자이든,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 대학생이든 아직도 궂은일을 하러 가는 사람들이 ‘건너기 힘든 계급의 강’을 넘어서기 위해 첫차를 타고 막차를 기다린다. ‘언젠가는 나도 돈을 모으면……’

런던의 부랑인

파리에서 생활하면서 런던에 있는 친구에게 직장을 부탁했던 오웰은 선천성 정신박약자를 돌보는 일이 생겼다는 친구의 편지를 받고 프랑스를 떠나지만 런던에 도착해서야 그 일이 어그러진 것을 알게 된다. 만일 지금처럼 그때도 휴대폰이 있었다면 부랑인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위건 부두』에 따르면 오웰은 이미 부랑인 생활에 뛰어들기 위한 준비 기간을 거쳤다.

오웰은 부랑인들과 일상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방치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기에 앞서 부랑인들과 섞이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묘사한다. 오웰은 자신의 상류층 언어 습관에 신경을 쓰면서 첫눈에 신분이 들통이 나 염탐자로 오해 받고 부랑인들에게 거부당할까봐 긴장했지만 그저 그들과 같은 차림새 하나만으로도 부랑인의 무리에 낄 수 있었다고 한다. “옷은 즉시 나를 새로운 세상에 들여놓았다.”(『밑바닥 생활』, 168쪽)

그렇게 즉시 부랑인이 된 오웰은 그들을 따라 구세군 구호소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최악의 구호소는 있지만 완전한 구호소는 어느 곳에도 없을 뿐더러 최소한을 갖춘 구호소도 없다는 사실을 영국민에게 알린다. 외부와 단절된 구호소 안의 참담한 환경들이, 일다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부랑인들의 허기진 현실이, 그에 따른 무기력함이 오웰의 ‘기록’을 통해 밝혀진다.

부랑인들은 부랑하도록 법률로 강제되어 있다. 구호소에는 하루밖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부랑인은 당시의 법률 상황에서는 부랑하든지 굶어죽든지 해야 하므로 부랑인이 된다. 오웰은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악폐들뿐만 아니라 해결책도 제시한다. 런던에서 사용하는 속어와 욕설들을 따로 정리한 장도 있다. 또한 당시 파리와 런던의 물가까지도 잘 기록해 놓았다.

영국 사회의 한 면을 기록한 오웰의 이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구호소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에도 일조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오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웰의 선택

지금 우리 사회는 창의성을 강조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창의성을 발휘해야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과 현실의 상황을 직시하지 않은 채 떠올린 상상력과 창의력은 허술할 뿐이다. 편견과 획일성이라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만일 오웰이 밑바닥 생활에 관해 글을 쓸 때 귀동냥에만 의지했다면 그렇게 생동감 있는 표현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현장 체험은 상상력과 글재주를 더욱 빛나게 했다. 호텔 작업장과 구호소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 이유도 오웰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리스’를 친구로 사귀지 못했다면 속죄 행위의 하나로 여긴 접시닦이 일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오웰이 속죄만 하고 그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허울뿐인 공리주의(최대다수의 최대행복)를 낳은 나라의 극빈자 상황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기록 혹은 보고 문학이라고 하는 ‘르포르타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사실과 진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통로이다. 오웰은 ‘하류 중에서도 최하류’란 주제를 선택하였고 노동환경과 노동자 의식의 관계, 상류층과 하류층의 의식 등을 관찰하고 비교하면서 당시의 사건과 사실들을 충실히 묘사한다. 오웰의 밑바닥 생활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자신의 빈곤한 상황에만 집중하지 않고 최하류층의 열악한 상황과 그들의 환경에서 비롯되는 비열함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를 견디게 하는 최소한의 경비들도 꼼꼼히 적고 있다.

르포계에서는 ‘취재력이 곧 표현력’이란 말을 한다. 이것은 현실의 모습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심층적으로 포착해야 한다는 것으로, 상상력만으로는 창의성을 키울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열정이다. 언제나 그릇된 압제자에 저항하고, 언제나 옳은 피압제자와 연대하려는 열정. 그 열정은 르포를 완성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마치 그것은 열정이 준비한 선물과도 같다.

오웰은‘실패만이 미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성공과는 거리가 먼 밑바닥으로 간다. 그러나 끼니를 며칠씩 거르고, 접시를 닦고, 부랑인과 함께 떠돌면서도 상류층의 징표인 ‘h’발음을 없애지는 못한다. 하지만 노동계급과 최하층민에 대한 편견은 오웰에게서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하류층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열심히 일하지만 늘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삶의 질곡을 이해하게 된다.

진정한 르포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를 변화하게 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두 번 다시 모든 부랑인이 불량배 주정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고, 내가 1페니를 주면 걸인이 고마워하리라 기대하지 않겠으며, 실직한 사람들이 기력이 없다고 해도 놀라지 않겠고, 구세군에는 기부하지 않을 것이며, 옷가지를 전당 잡히지도 않겠으며, 광고 전단지를 거절하지도 않겠고, 고급 음식점의 식사를 즐기지도 않으련다. 이것이 시작이다.”(『밑바닥 생활』, 284쪽)

나는 오웰이 이후의 다른 작품 속에서도 파리와 런던에서 있었던 최하류의 생활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읽게 되면 속죄로 시작했던 그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런데 혹시 “왜 최하류층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 사회, 한 국가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의 의식주 상태를 보면 그 사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남장을 한 여자와 페미니즘적 주체[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황 주 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조선 후기에는 남장을 한 여자가 주인공인 여성 영웅소설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방한림전』이나 『옥주호연』등의 소설은 당시의 답답한 가부장제적 현실을 벗어나려고 했던 여성들의 열망과 상상력을 보여준다. 21세기에도 남장 여자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커피프린스 1호점>(2007)을 시작으로, <바람의 화원>(2008), <선덕여왕>(2009), <미남이시네요> (2009), <성균관 스캔들>(2010) 등의 드라마는 남자 행세를 하는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방영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여성 상위 시대, 알파 걸, 역차별 등의 단어들이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을 공격하는 시대에 쏟아져 나온 남장 여자를 다루는 드라마를 우리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라오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야기의 한 축인 러브스토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주인공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남장을 하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한다. 이런저런 사건 사고 끝에 서로 호감을 갖게 된 남녀 주인공. (<선덕여왕>을 제외하면)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여주인공에게 마음을 고백하면, 여주인공은 사실은 자신이 여자였노라고 털어놓고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많은 경우 영화나 드라마 속 여성들은 성녀와 창녀, 캔디같이 착한 여자와 이라이자 같은 나쁜 여자 중 하나였다. 최근 들어 다양해진 여성 캐릭터들도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를 조금씩 변주한 것에 그쳤다. 씩씩하거나 좀 남자 같은 데가 있는 여성은 꼭 한번 정도는 연약하고 순진한 면을 보이고, 혹은 진정한 사랑을 하면서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이 그랬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고은찬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남자 행세를 한다. 그녀는 일부러 남장을 한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줄곧 소위 여성스러운 면보다는 남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던 터라 남자행세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자주인공과 서로의 애정을 확인 한 후, 본격적으로 바리스타 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로 떠난 고은찬은 달라진 모습으로 귀국한다. 변화의 폭이 크지는 않았지만 파마도 하고 화장도 해서 훨씬 더 여성스러워진 것이다. <미남이시네요>의 고미녀는 소위 4차원의 민폐형 캐릭터라서 전형적으로 얌전하고 착한 인물은 아니지만, 사고를 치면 뒷수습을 해줄 남자가 필요한 약하고 순진한 여자다.

두 여자 모두 결말에 이르러 남자 주인공의 품에 덥석 안기는 대신 각자의 삶의 계획에 따라 멀리 떠난다. 『방한림전』이나 『옥주호연』에서 여성 영웅들이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내와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과 달리, 남장을 한 여성 캐릭터들은 사랑이나 결혼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 이런 점에서 고은찬과 고미녀가 기존의 여성 캐릭터를 뛰어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체현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거나, 이런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이 드라마들이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연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갔기 때문에 갖는 자연스러운 한계일 것이다. 현대를 사는 두 주인공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서 혹은 목숨처럼 소중한 꿈을 위해서 남장을 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달달하고 설레는 사랑 이야기에 무겁고 심각한 고민 따위는 안 어울리지 않는가.

진화하는 남장 여자

하지만 남장 여자가 살아가는 무대를 먼 과거로 옮기면 오히려 여성 캐릭터는 조금 더 진화한다.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다른 한 축은 여자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이다. 조선 후기 여성영웅 소설에서처럼 천부적인 재능과 능력으로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역경 속에서 자신의 꿈과 욕망을 찾게 되거나 이루게 된다. 앞의 두 드라마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사극인 <바람의 화원>, <선덕여왕>, 그리고 <성균관 스캔들>은 여자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극복하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는 페미니즘적 여성 주체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은 소위 여성적인 리더십을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남성적인 정치 질서에 대해서 비판적 태도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바람의 화원>의 윤복도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만 역시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반면 윤희는 이 두 인물의 한계를 넘어, 가부장적 질서를 비판하고 그에 도전하는 인물이다.

윤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남동생은 병약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지금으로 치면 십대 여성 가장인 셈이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던 데다 스스로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쓰는 데 관심이 많았던 윤희는 남장을 하고 글을 팔아 돈을 벌었다. 과장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임금의 명을 받아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 윤희는 세 명의 꽃미남들과 동고동락 하게 된다. 물론 생계유지와 어명이라는 이유도 주요했지만, 윤희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이렇게 윤희가 생계와 꿈을 위해 남자의 모습으로 성균관에 들어간 상황은 여성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질서를 따라야만 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윤희는 남성적 특성을 체현함으로써 남성적 질서를 수용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남성중심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비판하며 그 질서를 이겨내는 인물이다. 윤희는 여자도 남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성균관에서 벌어지는 체육활동에서도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려는 것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여자인 윤희가 남자와 똑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권위는 가부장제에 있으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개혁과 개방을 주장했던 정약용조차도 여자인 윤희가 학문을 탐하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윤희는 그런 스승에게 ‘남자와 동등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애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스승의 허를 찌르는 질문과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안 된다는 말로는 절 단념시키실 수 없습니다. 계집의 몸으로 글을 알고자 한 그날부터 지금껏 전 단 한 번도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학문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계집은 백성이 아닙니까?”

“계집에겐 관원의 자격이 없다 하셨습니다. 헌데 스승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나라 조선은 왜 이 모양일까요? 관원의 자격을 지닌 사내들이 쭉 만들어왔는데 말입니다.”

윤희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공적인 영역에 참여할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상황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다. 그녀는 사회 질서가 추구하는 보편성과 공명정대한 원칙이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모순을 예리하게 파악한다. 즉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과 별개로 남성중심의 질서를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는 것이다. 윤희는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면서도 남성과 똑같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는 성적 차이를 강조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제시하는 여성 주체와 닮아있다.

남자의 탈을 쓴 여자들

조선 후기의 윤희와 이 천 년대의 여성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윤희에게는 없는 권리가 현대의 여성들에게는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제 여성들은 남성과 똑같이 교v b 육받을 수 있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적어도 법적으로는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활동을 할 기회를 동등하게 갖고 있다.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윤희가 갖지 못했던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평등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만족했던 평등한 참정권, 교육, 동일임금은 사실상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것이다.

이 평등한 권리들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자와 똑같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여성들은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똑같이 야근을 할 수 있고, 결혼 후에도 아이를 낳아도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며, 부족함 없는 이성적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여성들은 남성이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특성들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들과 가치들, 그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는 의문에 부쳐지지 않았다. 여성철학자 뤼스 이리가레는 이러한 문제점을 간파하고, “누구에 대한 평등인가?”라고 묻는다. 이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아지는 것이 과연 진정한 여성해방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사회문화에서 남성이 수립한 언어를 사용하고 법과 질서를 따라야 하는 한, 남성의 타자일 뿐 진정한 여성 주체가 아니다. 남성과 인간이 동의어인 세계에서 여성은 남성처럼 되어야만 인간으로 또는 시민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뭔가 덜 가진 존재로 여겨진다. 또한 여성이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역시 여성 주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오히려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여성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남성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리가레는 여성이 남성처럼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남성이 ‘인간’ 개념을 구성하는 기준이 되는 상황 자체를 문제 삼고, 여성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 가면서 진정한 여성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여자답게’ 변하면서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는 고은찬(커피 프린스)은 겉모습만 변했을 뿐 여전히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여성 이미지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이는 한 발 나아가, 남성과 똑같은 힘과 권리를 가진 여성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평등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바랐던 여성의 모습이다. 이런 덕만은 성 주류화 정책에 힘입어 고위관직에 진출하고 기업의 CEO가 된 우리 시대의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이런 여성들이 가부장제적 관점을 철저히 내면화한 ‘명예남성’으로서 오히려 반여성적인 언행을 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그렇다면 윤희는 진정한 여성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한 여성 주체란 무엇일까?

페미니즘적 주체

이리가레와 같은 차이의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하는 진정한 여성 주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런 여성이 될 수 있는지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진정한 여성’의 내용을 못 박아 두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가부장제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체계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계속해서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적 주체성을 구성해 가는 여성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희는 전통적인 여성성을 고수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명예남성이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과 장점을 권력을 가진 남성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남성 권력의 모순을 드러내고 도전한다. 즉 윤희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하면서도 그 중심 자체를 뒤흔드는 여성인 것이다. 그리고 윤희가 이렇게 할 수 있게 된 동력 중 하나는 그녀 자신의 욕망이다. 이런 모습은 이리가레가 말하는 여성 주체와 많이 닮아있을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여성들의 일상적 모습과도 비슷하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은 모두 남자의 탈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은 이 질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특성을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어느 정도는 남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남자의 탈을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한다. 주체가 되고자 하는 여성에게 남성중심적 사회 질서에 적응하고 그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그 질서가 여성을 방해하고 괴롭힌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핵을 깨뜨리는 것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와 소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여성들이 처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은연중에 사회적으로 공유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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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沖繩) 평화여행[시대와 철학]

오키나와(沖繩) 평화여행[시대와 철학]

김재현(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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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1월 중순 내가 활동하고 있는 시민단체인 ‘마산 YMCA 시민사업위원회’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3박4일의 짧은 오키나와 여행을 다녀왔다. 평화답사 여행이라는 테마로 오키나와의 역사와 현실을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일본 도쿄외국어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2004년 8월에 오키나나와의 국제(國際)대학 교내에 미군 헬리콥터가 추락한 사건이 일어나고 마을 안에 기지가 있어 위험하니 기지를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한참일 즈음에, 한중일 국제세미나가 있어 오키나와에 갔던 적이 있었다. 이 때 세미나에서 오키나와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들었고 당시 참가한 일행들과 함께 기지 이전 계획 장소인 오키나와의 헤노코(?野古)에 가서 잠시 미군기지 이전 반대농성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의 여행은 오키나와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첫날 오후 나하(那覇)에 도착하여 수리성을 관람하면서 류큐왕국의 문화와 역사를 살펴보았고 이튿날 오전에는 츄라미 수족관을 구경한 후 오후에는 사키마(佐喜眞) 미술관 방문이 있었다. 사키마 미술관은 오키나와 전쟁의 참혹함과 비참함을 그림을 통해 전달하는 역사와 평화교육의 현장이다. 서경식 교수는 “역사와 평화를 성찰하는 이런 연수여행에도 반드시 예술감상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오키나와에 갈 기회가 있다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사키마 미술관을 찾아가 마루키(丸木) 부부의 대작 <오키나와 전도(戰圖)>를 관람하기”(2010. 10월 29일 한겨레신문)를 권한다.사키마 미술관에서 루오의 여러 그림들을 보았고, 마루키 부부의 대작 <오키나와 전도>(1984)를 미술관 직원의 전문적인 해설을 들으면서 관람했다. 이 작품은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에 따른 일본 주민의 집단자결(자살) 사건을 묘사한 기록화인데, 여러 곳에서 일어난 전쟁의 비극과 집단자결의 과정에서 처참하게 죽이고 또 죽어가는 인물들의 모습, 눈을 부릅뜬 사체들의 모습이 처절하고 참혹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루키 부부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오키나와전쟁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생존자들과 같이 통한(痛恨)의 현장에서 증언을 들었으므로 “저 그림은 오키나와전을 체험한 오키나와 사람들과 우리의 공동제작”이라고 말한다. 미술관 직원은 “전쟁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쟁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후세들의 교육을 위해 자신들이 맡아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확신에 찬 모습으로 설명해 주었는데 ‘불의에 순응하지 않는 미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미술관 옥상에서 후텐마 기지를 직접 보고, 미술관의 배려로 수장고에 있던 케테 콜비츠(독일, 1867-1945)의 판화도 볼 수 있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키나와의 일본 기지를 폭격하는 미국 전투기. ⓒwikipedia.org

2. 이어서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2000),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녹색평론사, 2010)의 저자이자 환경운동, 평화운동가로 알려진 더글라스 러미스의 강의가 같은 장소에서 있었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강의하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최근일본지도]라는 책에 있는 한 장의 지도를 보여주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의 강의내용을 간단히 요약한다.

‘이것은 소화3년(1928년)의 지도인데 류쿠(琉球, 오키나와), 대만, 조선은 이미 일본제국의 영토이고, 만주도 앞으로 일본 영토화하려는 의도가 나타나 있는 지도이다. 그리고 일본 제국의 식민지 정복은 대만, 조선, 만주에서는 결국 실패하고 오키나와에서는 성공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계속해서 오키나와는 일본에 의해 지배된 식민지라는 사실과 일본국가의 동등한 한 지역이라는 생각이 혼재하면서, 오늘날 오키나와 사람들이 일본인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이 갈리고 있다.

오키나와인이 본토인과 다른 중요한 점은 본토에서는 ‘아사히(朝日)’, ‘마이니치(每日)’, ‘요미우리(讀賣)’신문 중 최소한 하나를 보는데 오키나와 사람들은 본토의 중앙지를 읽지 않고 ‘오키나와 타임즈’나 ‘류큐소보’를 본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오키나와인들이 일본 본토의 사람들(야마토인, 大和人)과는 분명히 다름을 보여준다.

명치유신을 통해 근대국가의 틀을 잡아가던 일본은 1879년에 류큐왕국의 국왕과 왕세자를 도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키는 소위 ‘류큐처분’을 단행한다. 이는 근대국가 일본의 최초의 식민지화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기점으로 일본제국의 확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류큐사람들은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이곳에 군대기지는 만들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왜냐하면 군대기지가 있으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 본토의 매스컴에서는 중국, 북한의 미사일 때문에 미군기지가 오키나와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 영토의 0.6%에 지나지 않는데 미군기지의 75%가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군사력 집중은 군사전략 상으로도 이해하기 어렵다. 미군기지가 전 세계적으로 700여 군데 있지만 이렇게 군사력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오키나와가 유일하다고 한다. 미군기지는 곧 미합중국의 일부이며 미제국주의의 기지이기도 하다. 이 미군기지에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 노숙자(Homeless)가 없고 노인들이 없으며, 생산노동이 없다. 군대는 전쟁을 위해 존재하므로 어떤 바람직한 것도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특별한 점은 미군 안에서의 오키나와인에 대한 인식 특히 미 해병대의 1/3이 오키나와에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또 이들의 언어 속에 있는 오키나와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미 해병은 오키나와를 점령하였으므로 이들은 오키나와를 전리품으로 생각하여 오키나와 지배는 매우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1972년에 오키나와의 본토 반환이 이루어졌지만 미군기지는 그대로 있었으므로 미군기지에 있는 해병의 입장에서 보면 오키나와에서 나가고 싶지도 않고 바뀐 것도 없다.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도 평화헌법 9조를 지키면서도 미군이 오키나와에 주둔하여 안보를 보장해 주는 것이 일본 본토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 생각은 모순적이지만 일본 국민은 이 모순을 별로 자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오키나와 사람들처럼 미군기지의 폐해와 이로 인한 전쟁의 위협을 늘 느끼며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전 총리였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는 후텐마(普天間)기지를 현외(오키나와현 바깥)로 옮긴다는 선거 공약을 하여 당선되었지만 미국과의 협상에서 결국 이를 실현시키지 못해 총리를 사임하게 된다. 일본에서 주민운동이 총리를 그만 두게 한 것은 두 번이었는데, 첫 번째는 1960년 미일안보조약 때 기시노부스케(岸信介)의 사임이고 두 번째는 2010년 하토야마의 사임이다. 두 번 다 오키나와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하토야마 총리가 그만 둘 당시 ‘일미안보조약이 동아시아 안전에 공헌하는가?’라는 여론조사에서 본토에서는60% 이상이 그렇다고 답한데 반해 오키나와 사람들은 7% 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또한 지난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서 후텐마기지의 헤노코 이전에 반대하는 지사 후보들이 합쳐서 97%의 지지를 받았다. 일본 정부와 도쿄에서는 헤노코에로의 이전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고 중앙 일간지나 뉴스에서도 그렇게 보도하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현장인 헤노코를 중심으로 끊임없는 반대투쟁을 2000일 이상 계속하고 있다. 오키나와인들은 일본 정부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차별’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쓰고 있다. 오키나와 기지 이전 문제는 일본 국내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이자 오키나와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이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오키나와 주민들을 위해서 미군기지는 철수되어야 한다.’

3. 셋째 날, 우리는 카데나(嘉手納) 기지를 방문하여 그 규모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3층 학습실에 전시되어있는 내용들을 통해서 이 미군기지가 갖는 일본 본토에서의 위상과 오키나와에서의 위상이 매우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오키나와 요미탄(讀谷)촌에 있는 ‘치비치리’라는 동굴을 방문했다. 산호섬인 오키나와에는 수많은 자연동굴(일본말로 ‘가마’라고 한다)이 있는데 입구가 좁고 안쪽이 넓은 가마는 전쟁 때 주민들이 피난하였다가 ‘영미귀축(英美鬼畜)’으로 불리던 미군에게 굴욕적으로 살해당하기 전에 충성스러운 황민으로서 천황폐하를 위해 가족, 이웃, 전우끼리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한 집단자결의 장소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집단자결이 이루어졌던 이 현장에서 지역가이드연구회의 멤버인 히가료우코(比嘉?子)씨의 실감나는 설명을 들으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에 대해서 온 몸으로 느끼며 전율하는 체험을 했다. 특히 마지막에 “평화라는 것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에게도 한국에 돌아가 이러한 평화운동에 앞서달라는 부탁을 진지하게 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1945년 3월 26일에 미군이 오키나와 본도(本島) 남서쪽에 있는 게라마(慶良間) 제도에 상륙할 때 자마미(佐間味) 섬에서 ‘집단자결’이 발생했고 곧 이어 4월 1일에는 미군이 오키나와 중부 요미탄촌, 차탄(北谷) 촌을 점령한다. 이 때 요미탄 촌 치비치리 가마에서 집단자결이 일어나 140여명 중 82명이 죽었는데 그 가운데 47명이 12세 이하의 어린이였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들은 주민들을 지키지 않았으며,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의 황민화교육을 통해 미군에게 처참한 꼴을 당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 부모가 아이를, 남편이 아내를, 젊은이가 노인을 낫이나 면도칼로 죽이고, 또 수류탄으로 함께 죽는 아비규환이 벌어진 것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집단자살을 하였지만 사실은 이것은 일본군에 의한 강제학살이라는 측면이 있다. 동굴견학을 한 후 우리는 오키나와 남단에 있는 히메유리 탑과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들렀다. 평화기념공원 전시관 앞에는 오키나와에서 죽은 식민지 조선의 군인, 종군위안부, 노역자를 포함한 약 만 명의 한국인 위령탑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다같이 어둡고 슬픈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오키나와 전쟁에서 일본인 약 19만명, 미국 군인 1만 2천여명, 조선인 약 1만명이 죽었다. 일본인 중에는 일본 본토에서 온 6만5천명의 군인들, 오키나와 출신의 군인 약 3만 명과 민간인 약 9만 5천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오키나와의 인구는 50만이 안 되었다고 한다.

4. 오키나와(현청지는 나하)의 위치는 동아시아의 군사거점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필리핀의 마닐라, 대만의 타이페이, 대한민국의 서울과 일본의 도쿄를 연결하면 삼각형이 생기는데 오키나와는 그 밑변의 중점에 해당한다. 이것은 곧 오키나와가 세 개의 삼각형(도쿄-서울 -오키나와, 오키나와-서울- 타이페이, 오키나와 – 타이페이-마닐라)을 결합하거나 분단하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도미노이론에서는 오키나와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공산주의 침투를 막는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난 후부터 미군의 점령 하에 있었던 오키나와는 ‘기지의 섬’으로서 대일 감시기지, 미·소가 대립하는 냉전 중에는 ‘태평양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고 일본에 복귀된 현재에도 변함없이 미일안보의 거점 역할을 한다. 오키나와는 특히 미국의 세계전략, 특히 동아시아 전략을 반영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이용되어 왔으므로 동아시아의 국제정치 질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키나와에서는 동시에 이러한 국제정치적 군사적 지배, 일본 국가의 전략적 지배에 의한 ‘구조적 차별’에 저항하는 다양한 운동이 계속되어 왔다. 군대의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여성의 인권, 환경보호, 동아시아의 역사경험, 선주민(先住民)의 권리 같은 우회로를 통해 이 운동은 국경을 넘어 넓어지고 있다. 오키나와와 한국의 관계에서는 미군기지를 둘러싼 경험이 접점이 되어 최근에 비판적 지식인 사이에 서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교류도 확대되고 있다.

5. 2009년 8월 총선에서 집권한 일본 민주당의 ‘동아시아 공동체구상’이 최근에는 일본 외교정책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강조하면서 ‘미-일 동맹’의 심화를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작년 6월에 취임한 칸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취임 직후 국회연설에서 “아시아를 중심으로 이웃 국가와 다양한 분야에서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장래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지만 2011년 1월 20일 도쿄에서 열린 연설회에서 “정권이 바뀌었어도 미-일 동맹은 유지 ·강화되어야 할 일본 외교의 기축”이라며 이의 ‘재발견’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과) 경제, 인재 교류를 심화시켜 올 봄 방미 때 오바마 대통령과 21세기 미-일 동맹의 비전을 내보이겠다”고 말했다.

칸 총리의 외교정책 기조 변화는 우선 오키나와의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다 낙마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지난 해 9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우다오)에서 중국 어선과 일본 해양순시선의 충돌사건 이후 일본에서 커진 ‘중국위협론’도 칸 총리의 미국 중시 노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탈아입구(脫亞入歐)’가 아닌 ‘친미입아(親美入亞)’를 내세웠던 하토야마 전 총리 중심의 민주당 외교노선에서 크게 이탈하는 칸 총리의 일방적 외교정책 노선은 당내 갈등의 또 다른 불씨가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이명박정부의 대북한정책과 일방적 대일, 대미 외교노선으로 남북관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의 이상은 더욱 멀어져 가고 있으며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의 반전, 평화운동을 생각할 때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러미스씨는 칸 총리도 오키나와 문제로 낙마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견한다. 과연 그럴까? 중국의 부상을 고려함과 동시에 미-일 사이에서의 오키나와 문제를 주목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정치 질서를 이해하고, 이와 함께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의 평화, 우호, 연대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덧붙임) 이 글의 사진자료로는 사키마 미술관의 <오키나와 전도>, 치비치리 동굴, 후텐마 미군기지 활주로 등 여러 사진들이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여행을 같이 갔다온 마산YMCA의 이윤기 부장의 블로그와 허은미선생의 블로그를 찾으시면 이번 여행과 관련된 글과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성명서]홍익학원은 홍영두 선생에 대한 명예훼손 고소를 즉각 취하하라.

성 명 서

홍익학원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홍영두 선생(건국대학교 학술연구교수)에 대한 명예훼손 고소를 즉각 취하하라.

지난 10월 5일 홍익대학, 홍익대학 부속 중고등학교, 홍익대학 부속 초등학교(이하 ‘홍익학원’으로 표기)는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을 통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e 시대와 철학”2010년 6월 17일자 기사 ‘성미산과 홍익학원의 이해 상충과 공생의 길’이 홍익학원에 대한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이유로 글쓴이 홍영두 선생을 고소한 바 있다. 이에 대해, “e 시대와 철학”편집진 및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소속 연구자 일동은 홍익학원의 고소 행위가 지극히 비교육적인 행위임과 비도덕적 처사임을 밝히고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

당회 소속 연구자 홍영두 선생은 철학을 전공한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전적으로 공익적 목적을 위해 기사를 작성하였고, 해당 사안과 관련하여 이해관계의 당사자가 단연코 아니다. ‘성미산과 홍익학원의 이해 상충과 공생의 길’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e 시대와 철학” 편집진이 홍영두 선생에게 지역문제 및 환경문제와 관련된 원고를 청탁함으로써 작성된 글로서 비합리적인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비판적으로 논의함으로써 좀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게끔 하려는 교육적 실천의 일환이다. 따라서 이 글의 내용과 글쓴이의 의도는 결코 사익을 위해 특정 대상을 근거없이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악감정을 표출하는 명예훼손 행위에 해당될 수 없다.

홍익학원의 성미산 개발과 관련하여 이미 다각적인 사회적 비판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리고 각계 인사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한겨레신문기사들(기사원문1, 기사원문2), 미디어오늘(기사원문), 경향신문(기사원문), 한라일보(2010.9.15. 한라칼럼 ‘지역공동체를 지키고, 지역의 자연을 지키는 일’)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는 홍익학원의 성미산 개발과 관련된 비판이 특정 집단 및 개인에 의해 악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익적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에 의해 객관적으로 이루지는 것임을 반증한다(기타 관련기사목록은 첨부 참조). ‘성미산과 홍익학원의 이해 상충과 공생의 길’ 역시 그러한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1) 소중한 도심의 자연숲을 갖춘 성미산의 무분별한 개발에 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2) 이해가 상충하는 집단들, 특히 개발주체인 홍익학원 측의 성실한 대화 및 타협 노력을 강조하며, 3) 학원 측이 점차 기업논리에 물들면서 ‘공익’, ‘정의’등 비영리 교육법인 본연의 가치를 망각해 가고 있음을 비판하고, 4) 그 해결을 위해 관련 기관의 각성과 노력을 촉구하고 있다.

온라인 회원 70 여명의 웹진 “e 시대와 철학”에 실린 한 연구자의 글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으로 고발하여 교육법인으로서 교육자에게 막대한 개인적 피해를 주면서도 유사한 논지의 언론기사들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고 있는 홍익학원의 대응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며, 아울러 성미산을 둘러싼 사회적 물의의 장본인으로서 성실하고 진지한 문제 해결의 노력보다 감정적이고 자의적인 행태로 일관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소속 연구자 및 “e 시대와 철학” 편집진 일동은 홍익학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구하는 바이다.

1. 홍영두 선생에 대한 비상식적·비교육적·비도덕적인 명예훼손 고소행위를 즉각 철회하고 사과하라.

2. 관련된 모든 언론기사들에서 지적하였듯이 ‘홍익인간’의 가치 실현을 위해 주민들과 성실하게 대화하고 생태환경파괴행위를 중단하라.

2010년 12월 26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e 시대와 철학” 편집진 및 연구자 일동

# 첨부:관련기사목록

[기고]성미산마을을지켜주세요/조한혜정 한겨레 20100907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38599.html

고갯마루 넘다보니 동네 생겼네/올리브 한겨레 20100907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life20/438487.html

[수도권]홍대, 부속 초중고 성미산 이전 마포구청과 마찰 동아일보 20100901 http://news.donga.com/3/all/20100901/30879754/1

공동체라기엔 느슨한, 그러나 살가운 한겨레 20100831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life20/437416.html

봉우리가 어딘지는 몰라도 이웃의 정은알고 삽니다 조선일보 20100829 http://travel.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5/2010082501334.html

석달새 168억…성미산 학교터 ‘수상한 뻥튀기’ 한겨레 20100827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36936.html

성미산개발분쟁다자간협의추진 서울신문 20100823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823012006

교육개선 vs “자연보전” 평행선 대치 세계일보 20100819 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100818004019&subctg1=&subctg2=

성미산주민대책위 “공사취소” 행정소송 국민일보 20100818

http://news2.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023269&cp=nv

성미산 사업취소 소송 한겨레 20100818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35443.html

성미산대책위, 홍익재단 학교이전 승인취소 행정소소 경향신문 2010081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8172213225&code=940100

성미산 “한밤의 나무 훼손” 경향신문 2010081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8101907262&code=210100

성미산 하청직원 ‘진거톱 난동’ 한겨레 20100816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35139.html

사설/’성미산 지키기’에 담긴 의미 한겨레 20100809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434070.html

마포 유일 자연숲 성미산 산 이상의 산 개발과 저항 국민일보 20100805

http://news2.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984451&cp=nv

환경파괴 논란 ‘성미산 개발’제동 세계일보 20100804

http://www.segye.com/Articles/NEWS/WHOLECOUNTRY/Article.asp?aid=20100803004433&subctg1=01&subctg2

마포구, 도로점용 허가 결정 유보 한국일보 20100804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008/h2010080318193121950.htm

성미산지키기’인디음악회 한겨레 20100803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433221.html

홍익초중고 이전사업 법정분쟁 비화 한국일보 20100803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008/h2010080217562021950.htm

성미산 마을’ 주민 생활터전 잃나 세계일보 20100802

http://www.segye.com/Articles/NEWS/WHOLECOUNTRY/Article.asp?aid=20100801002715&subctg1=01&subctg2=

야간집회 허용 한 달 ‘불법폭력시위; 한건도 없었다 경향신문 201007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291822445&code=940702

홍익대 직원들, 성미산 농성천막 ‘기습 철거’ 경향신문 20100730

http://www.paoin.com/paoweb/paper/article2.aspx?CNo=79219357&SCT=AA001&exec=viewsearch&stat=paoin

성미산 막무가내 공사 ‘사람 잡을뻔’ 한겨레 20100730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432741.html

우리의 숲, 성미산 지키자 온몸 저항 한국일보 20100722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007/h2010072202330421950.htm

홍익재단 공사강행 ‘성미산의 수난’ 경향신문 2010071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170003195&code=940701

고품질 일자리 확충이 복지 서울신문 20100708 http://client.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708005005&spage=1

광화문 강남서 첫 합법적 야간집회 경향신문 2010070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020324175&code=940100

이곳만은 지키자’ 발랄한 인증샷 경향신문 20100701

http://photo.media.daum.net/photogallery/society/societyothers/view.html?photoid=2831&newsid=20100701035708135&p=khan

“e 시대와 철학” 편집진 /

내가 속한 이야기가 싫다![시대와 철학]

내가 속한 이야기가 싫다![시대와 철학]

김범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잘못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자기정당화(self-justification)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자기정당화 과정에서 나와 남, 나의 편과 남의 편을 만들어내고, 서로의 이야기에서 누군가를 배제하게 된다. 이 자기정당화와 배제를 통해서 우리는 삶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삶의 의미를 붙들고 다시 자기를 정당화하고 편을 갈라 남을 배제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고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속한 이런 이야기가 싫다.

잃어버린 10년!”도덕적 개인주의자는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초래한 의무만을 떠맡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빚이 있거나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은 동의, 말하자면 나의 선택이나 약속의 결과이다. 따라서 나의 책임은 내가 떠맡은 일, 내가 선택하고 동의한 일에 한정된다. 이런 생각의 논리적 귀결은 참으로 단순하고 명쾌하다. “나는 김대중, 노무현을 찍지 않았다. 나는 그 정부에 동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정부는 나와 무관하고, 그래서 그 정부가 집권한 기간은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이다.”집권당인 한나라당 대표는 문자 그대로 집권당의 대표답다. 그는 “좌파정권 10년 동안에 나라의 여러 가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온갖 대못을 박고 또 망쳐놓았다. 이명박 정권 2주년은 좌파정권 10년 동안의 비정상적인 국정을 정상적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한 2년”이라고 자평했다. 여기서 나는 어느 편에 있는가?

# 장면 1 : 2008년 4월22일
“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습니다. 그동안 저로부터 비롯된 특검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면서 이에 따른 법적 도의적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2년 반 전에 차명계좌 불법자금과 삼성그룹 불법적 지배권 승계 특검 문제로 사퇴했던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2010년 3월24일 “앞으로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말과 함께 삼성 회장직에 복귀했다. 사실 여기서 ‘복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복귀(復歸)는 본래 자리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데, 이건희 회장의 복귀가 본래 자기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건 그가 잠시 사라졌던 2년 반 동안에도 그 자리는 그의 것이었고 언제나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건희 회장은 “내가 스스로 떠났으니, 돌아오는 것도 내가 결정한다.”는 도덕적 개인주의를 정당화의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다. 더 인간적으로 보자면, “진심으로 사과했고, 법적 도덕적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도덕적 개인주의자 이건희 회장의 재취임, 왕의 귀환에 일제히 복귀환영이라는 깃발을 내거는 주류는 자연스레 다른 편을 만들어내었다. 그저 잠시 걱정을 끼쳐드렸던 국민 여러분이라는 다른 편을. 그는 이전처럼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기 자리에 다시 앉았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우리는 그가 갈라낸 저편으로 분리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는 그의 짧은 재취임의 말과 함께.

# 장면 2 : 2010년 12월1일
기자 : “재벌그룹 총수신데 유독 자주 수사기관 조사를 받으신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승연 : “내가 팔자가 센 거 아닙니까?”

부당거래를 통한 비자금 조성, 부실계열사 지원, 차명계좌 운용, 주식 차명보유, 조세포탈 혐의를 받고 있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검찰 조사에 앞서 기자와 주고받은 말이다. 한 인간의 삶의 흐름이 자신의 의지나 선택이 아니라 생년월일시의 팔자(八字)로 정해지는 것이라면 김승연 회장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 그의 말은 마치 봉건적 군왕이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를 두고서 ‘과인의 부덕의 소치’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김승연 회장 역시 이건희 회장과 다르지 않은 도덕적 개인주의자이다.

“내가 자주 수사를 받는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선택하거나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수사를 받게 된 것은 팔자 때문이다.”김승연 회장은 이른바 인지부조화가 싫다. 왜냐하면 자기 판단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김승연은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나를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건 부당하고 옳지 않다. 그렇다면 이건 팔자야!”이제 고통은 사라지고 고난 받는 순결한 인간이 남게 된다. 그리고 그 한 편에 운명처럼 달라붙어 그를 괴롭히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도 그냥 이렇게 저편으로 분리되고 만다.

# 장면 3 : 2010년 12월2일
“이천만원 주셨으면 때려도 된다고 생각하셨어요?”
“아니 그것보다도요, 저 때문에 이렇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져서 사회적으로 시끄럽게 돼서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 질문한 기자는 논점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는 기자를 폭력행위 처벌법(집단, 흉기 등 상해) 위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으러 온 최철원 M&M 전 대표가 가르친다. 그는 “어이, 기자 양반. 문제는 때린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시끄럽게 됐다는 것이지.”라고 진심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철원 전 대표 주변에서는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다! 이전에도 있었던 일인데, 왜 하필 지금 문제가 될까? 그는 이런 부조리, 부조화를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걸 바로잡아야 한다.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이게 사회적으로 시끄러워졌기 때문이야. 이건 나의 폭력적이고 반인간적인 성향이 만들어내는 악순환이 아니야.”

물론 우리도 이 같은 아주 긍정적인 자기 개념을 가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일관적이지도 뻔뻔하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최철원 전 대표는 계속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남보다 더 똑똑하고 유능하고 도덕적이며 인간적이다. 이런 나를 흔들어 놓는 무엇이 있다면, 그래서 내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더 나아가 인간적으로 흔들려서 몹쓸 짓을 했다면, 그건 정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사업을 방해했다. 나는 잘 해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와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 나는 차마 사람을 그냥 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돈을 주기로 했다. 한 대 맞아주고 돈을 버는 아르바이트도 있지 않은가? 그것도 큰돈을 주었다. 나는 자존감을 지켰고, 그는 돈을 벌었다.”이런 그의 상상 속에서 우리는 또 어느 편으로 나눠지는가?

# 장면 4 : 까마득한 옛날이자 가까운 어제
예수께서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자공(子貢)이 물었다. “한 마디 말로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己所不欲勿施於人).”

예수가 긍정의 형식으로, 공자가 부정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는 이 내용은 모두 나와 남을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는 평등한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M. J. Sandel)이라면 아마도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들의 호혜(互惠 reciprocity)나 공동선(共同善 common good)이라는 말을 더 좋아할 것이다. 그는 개인적 자유의 원심력이 사회적 공동체의 구심력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꿈꾸는 공동체주의자이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러한 공동선이 갖는 가치를 서로 다른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법한 가상적 이야기로 비아냥거린다. “내가 원하는 것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말하자면 “연쇄살인자와 마주친 극단적인 상황에서 당신은 그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허락하겠는가?”그런데 이런 물음은 예수나 공자가 말하는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므로 논증은커녕 서툰 주장에도 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나 공자 그리고 샌델의 말은 일상의 작은 선택에서 비롯되는 사건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관통할 수 있는 삶의 원칙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의 선택을 통해서 내가 되기로 한 개인적 존재다. 하지만 그 개인은 동시에 선택하지 않은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 구속된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문제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수동적 조건과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자 하는 능동적 나 사이의 관계 형성, 정체성의 확인이다. 나의 자부심과 수치심은 이런 관계 속에서 자라고 드러나는 사회적 속성이다.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소속된 나와, 내 인생을 나의 선택으로 꾸려나가고자 하는 나. 사회구성원이라는 구속된 나와, 내 삶을 나의 가치로 살아가고자 하는 나.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나라는 현실조건이 만들어내는 고민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가 바로 우리의 실존적 딜레마이다. 이런 딜레마를 예수나 공자, 샌델은 ‘기꺼이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를 통해 해소하고자 한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 MacIntyre)는 이런 실존적 딜레마에 ‘이야기하는 자아(narrative self)’를 가지고서 설득력 있게 접근한다. 그는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이렇다고 말한다.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누군가는 자신을 이야기하면서 할아버지를 끌어들이는가 하면, 누군가는 부모마저 싹둑 잘라내고 시작한다. 어떤 부모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자식 하나를 빼고서 자신을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에서는 잘려나가거나 빠져나가는 사람의 아픔은 자기정당화의 그늘에 가려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이전 세대, 이전 사회의 다양한 빚과 의무를 물려받는다. 운 좋은 몇몇 사람일지라도 유산과 기대만을 물려받는 것은 아니다. 2010년 한국 사회라는 내가 속한 이야기가 더불어 사는 사회구성원이라는 큰 이름과 함께 나의 이야기 속에 당연히 자리 잡아야 한다. 그 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같이 겪으면서 시대의 지혜를 함께 배워야 한다. 아버지의 이름, 어머니의 이름은 자식이 자랑스럽게 입에 올리든 부끄럽게 올리든 간에 자식의 이야기에 등장해야 한다. 자식의 이야기에서 빠져나가는 부모의 이름은 사실 나의 이름을 부정하여 나만의 나를 정당화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장면 1, 2, 3에서 느끼는 수치심과 분노는 한국 사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그리고 우리가 장면 4에서 느끼는 자부심과 공감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치심과 분노, 자부심과 공감은 가족과 시민처럼 ‘묶여 있는’존재가 느끼는 집단적 책임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선택과는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어떤 집단에 한데 묶여 있으며, 또 우리는 수치심과 자부심을 가진 도덕적 행위자로 만드는 거대한 서사(敍事)에 연관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 삶의 이야기는 나의 정체성이 형성되고 굳건해지는 공동체의 이야기에서 분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단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만 책임을 지는 자유로운 존재를 넘어 기꺼이 ‘부담을 감수하는’존재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존재이고, 우리 정체성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장면들은 이런 이야기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큰 이야기와 분리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그래서 각자의 이야기는 다양해지고 개인의 원심력은 커졌지만, 그 다양성과 원심력은 편을 가르면서 다른 편을 겨냥하는 칼끝에 모아지고 있을 뿐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남의 삶의 이야기와 맞물려 있다. 우리는 과거의 빚과 유산과 기대와 의무를 안고 태어나고, 그걸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이야기하는 자아’이다. 그 이야기에는 당연히 남의 이야기를 위한 몫과 자리가 있고, 그 몫과 자리는 내가 남의 이야기에서 가지고 싶은 것이고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이다. 도덕적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의 잘못과 분리하고, 또 나를 현재의 잘못과 분리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내가 얽혀 있는 과거와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자 미래의 관계까지 내 입맛에 맞게 미리 짜놓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재취임에는 그의 이야기, 삼성의 위기 이야기는 있지만, 다른 한 편에 서 있는 남, 즉 국민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김승연 회장의 팔자(八字) 이야기에는 그의 모든 잘못이 빠져 있고, 그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무시되고 있다. 최철원 전 대표의 변명에는 피해 당사자의 이야기며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자신의 이야기 속에 누군가를 넣고 빼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다. 그런데 만약 이 말이 정당하다면, 언젠가 우리의 이야기에서 그들이 빠지게 되더라도, 솔직히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에서 그들을 빼버리더라도, 그건 우리의 선택일 뿐이다. 물론 예수와 공자, 샌델은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 사람들이 아니다.

마이클 샌델(M. J. Sandel)은 삶에서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을 걱정하는 중요한 이유가 공동체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공감과 연대의식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불평등이 깊어질수록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삶은 점점 더 분리된다. 불공정한 사회일수록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이야기가 따로 놀게 된다. 서로의 이야기에서 서로가 사라지고, 그 사라진 자리가 증오와 분노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날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날이겠지만, 아마도 그리 행복한 날은 아닐 것이다.

단군의 자손이라는 까마득한 이야기까지 나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십년 동안 있었던 일을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래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자기정당화의 이야기는 없어져야 한다. 식민지 지배나 억압의 당사자가 아니고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닐지라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할머니와 어머니의 아픈 기억을 나의 이야기에 담아야 한다. 우리의 이야기에는 해방의 기쁨, 분단의 아픔, 새마을 운동, 폭압정권, 경제성장, 민주화운동, “잃어버린 10년”에도 나눠주는 몫과 자리가 있어야 한다.

부자가 된 가난했던 사람의 이야기며, 가난해진 부자의 이야기와 가난하게 태어나 더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우리의 이야기여야 한다. 그리고 자기정당화를 향하는 도덕적 개인주의자의 뻔뻔한 변명과 배제의 이야기를, 남의 불편하고 비참하고 서러운 이야기를 기꺼이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풀어내고자 하는 공동체의 이야기로 넘어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빠져도 그만인 ‘나머지’가 아니라, 누구나 “기업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무엇이 도덕적 잘못인지, 사람은 어떻게 존중받아야 하는지” 잘 아는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