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없는 사람들[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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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고난 속의 작은 행복

 

미군들의 도움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주거 공간과 배고픔은 나아졌고, 무엇보다 건강 상태가 좋아졌다. 그러나 또 다른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군들이 자주 왔다가고 집단적인 거주지가 형성되자 인근의 주민들이 한센인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몰려와 위협하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을 밤에 그 곳에 내려놓고 간 공무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입을 딱 벌리대. 누구 허락받고 예서 사느냐고 난리였다.” 지금까지 애써 억제해 오던 할머니의 감정에 작은 파문이 생기고 있었다. 여태껏 볼 수 없었던 결연한 표정은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위엄을 뿜고 있었다. 그 위엄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라 여겨졌다.

수십 년 전,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던 사람들,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했던 사람들의 분노가 할머니를 휘감고 있는 듯 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쉴 때마다 가슴은 눈에 띠게 오르락내리락 했고, 꼭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 두 번의 백내장 수술로 흐려진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를 보았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의지였다.

60여 년 전에는 죽음만을 생각했지만, 이제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삶에 대한 의지였다. “입이 있어도 말 못한다. 그 고통을 어찌 다 말로 하노. 사는 기 지옥인데.” 지옥과 다를 바 없는 삶은 연약한 한 여인을 강인한 여성으로 변모시키고, 끝없이 이어져 오는 고통은 오히려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게 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지만, 한센인들은 순간 순간 온 정성을 다해 숨을 쉬었다. 새벽이면 일어나 하루 종일 온 몸으로 거친 땅을 일구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지극했다. “나는 일을 별로 안 했다. 못하게 하대. 아를 업고 가모 집에 가 있으라고 난리도 아닌 기라.” 자신은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해도 아내는 힘든 일을 하면 안 된다는 마음, 그것은 남편의 사랑이었다.
항상 불안하고 고된 날들이 이어졌지만, 행복도 있었다. 아이는 천진하게 잘 자라 주었다. 가진 것이 없어 잘 입히고 잘 먹이지 못했지만, 아이는 엄마를 따랐다. 비록 다정한 말 한 마디 없는 아내였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귀하게 여기고 아껴 주는 남편이 있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가슴에 품고 사는 아들, 승팔이도 있었다.

 

 

2. 한 뼘의 땅

 

이웃 주민들의 반대는 인근 지역을 넘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들은 미군들이 오지 않는 날이나, 떠나고 난 후에 집단으로 나타났다. 마치 인근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한센인들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해야 했다. “어두워지모 겁나제. 갑자기 덮치모 어짤끼고.” 깊이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늘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은 커졌다. 미군들의 지원이 뜸해지던 때부터 마을 주변을 서성대는 사람들의 수는 눈에 띠게 불어났다. 인근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멀리에 있는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몰려왔다. 심지어 부산의 구포 지역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요구는 오직 한 가지였다. 자신들이 사는 지역 부근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멀리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센인들도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산에 버려져서 성하지 않은 손으로 나무 뿌리를 뽑고 돌을 치우고 만든 그들의 집이었기에, 한센인들은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비록 나무에 군용천막과 비닐을 덮은 집이었지만, 그 곳은 한센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온 손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지켜낸 보금자리였다.

어린 아이들은 매일 반복되는 위협으로 겁에 질려 있었다. 밤이 되면 남자들은 조를 짜서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지켰다. 넒은 하늘 밑 그 어디에도 한센인들이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 곳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거지가 되어 돌팔매질을 당하며 동냥질을 하든가 어느 후미진 곳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가든가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날, 맨날 불안했지만, 아이고 참 힘든 날들이제. 누가 막 부르는 기라. 한센인들 중에도 여기를 소문 듣고 나중에 온 사람도 있었는 기라. 그 사람들 중에 누가 외지에 사는 친척이 있었거든. 그 친척이 하얗게 질려 갖고 안 왔나” 외지에 사는 친척이 다녀간 후 마을은 정적에 쌓였다.

“여게 상동 인근이랑 부산 사람까지 우리 모두 쥑인다고 모인다고 안 하나. 그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어찌 감당하겄노. 우리는 인자 꼼짝 없이 여게서 죽는 갑다 했제.” 인근 주민들의 요구대로 옮겨간다고 해도 갈 곳이 없을뿐더러 어디를 가도 도망 다니는 건 마찬가지였다. “누가 그러대. 여기서 죽자고.”

할머니의 얼굴 근육이 떨리고 있었다. 나지막한 코끝에 앉은 안경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센인과는 이웃해서 살 수 없다는 그들의 논리에는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었고, 그들에게 타인의 존재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한센인들이 떠나가더라도 비탈진 그 곳은 성한 이들의 땅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성한 이들은 자신들이 병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한센인들의 터전을 빼앗으려고 했다.
ⓒ에이블뉴스한센인들의 죄명은 “문둥이”이다. 시인 한하운은 자신의 시에서 “죄명은 문둥이…../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올시다.(”라고 노래한 바 있다. 한센병은 어처구니없는 죄명이며 이해할 수 없는 벌이기에 변호할 길이 없음을 한탄했다. 어처구니없는 죄명을 인정하고, 그냥 그 산속에서 살게 해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돌아오는 건 살기뿐이었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죽는 길 밖에 없으께 싸우자고 누가 그러대.”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웅성거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함성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가서 낫이나 호미를 들고 나왔다. 누가 어떻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고, 합의를 한 것도 아니었건만 들 수 있는 무기는 모두 들고 모였다.

“밤이라 캤다. 그날 밤, 그 사람들이 몰려 오모 우리는 꼼짝없이 죽는 기라. 문둥이 죽는 거 한두 번 봤나. 누가 울어주기라도 하나. 문둥이 시체는 제대로 거다(거두어) 주지도 않는다.” 죽어서도 서러운 사람들, 주검마저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들,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그들만의 죽음을 지나온 사람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가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들이 몰려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가야한다고 했다. 어린 아이가 딸린 아녀자만 빼고 남녀노소 모두 손에 낫과 호미를 들고 산속에서 나왔다. 누더기를 걸치고 손과 발에는 진물이 배인 천을 감고 성치 못한 발로 그들은 걸었다.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이겼다.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한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한센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다가가면 그들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했다. 그러다가 잠시 틈을 주면 공격해 왔다. “그냥 휘둘렀다. 죽는 거 밖에 더 있나. 우리는 죽을라꼬 덤비고 그 사람들은 살라꼬 덤빘제.” 죽기를 각오한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3. 새로운 고향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담보로 지금의 터전을 지켰다. 그렇게 서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웃이 되었다. “모내기 철이 되모 서로 일손이 부족한 기라. 우리 중에서 병이 덜한 사람들이 가서 마이 도왔다. 처음에는 싫어해도 나중에는 와서 도와 달라고 하는 기라.” 때로는 이웃 마을의 사람이 와서 성하지 않은 손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돕기도 했다.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주로 닭과 돼지를 키웠다. “닭은 알도 팔고 똥도 팔았다.” 닭똥을 모아서 밭 여기저기에 널어서 말린 뒤, 자루에 넣어 보관했다가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팔았다. 이익금은 일한 만큼 나누어 받았다. 일은 중노동이었다. 성한 사람보다 몇 시간은 먼저 일어나야 했고, 몇 시간 후에 자야 했다. 그렇게 해도 살아가기에는 힘든 나날들이었다.

성한 사람들이 서너 시간이면 끝날 일을 그들은 하루 종일 했다. “아이고 말도 못한다. 아침에 자고 나면 닭 밥 주고, 또 한 이틀마다 똥 치운다. 똥 치우는 날이 그 중 고되다.” 일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또 언제든지 쫓겨 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그들은 백방으로 다니며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험한 산을 일구어 밭으로 만들고, 밭도 만들 수 없는 곳에서는 돼지와 닭을 키우며 살고 있는 그 땅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임을 알아달라고 관청을 셀 수 없이 드나들었다. 관계기관에 갈 때마다 차를 탈 수 없어 걷고 또 걸어서 갔다. 간간이 다니는 버스는 텅 빈 채 가도 그들을 태워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수레도 얻어 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가야했다. 가서 그들의 절박한 사정을 알리고, 아이들을 키우고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의 하소연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와서는 안 될 사람들이 왔다는 내색을 노골적으로 했다. 돌아서기도 전에 소금을 먼저 가져와서 그들의 뒤에 뿌렸다. 성한 사람들에게 한센인들은 소금을 뿌려야 하는 액(厄)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한센병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치료약도 없이 온 몸이 종기로 뒤덮이고, 얼굴이 변하는 병이었지만, 병에 걸린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센인들은 마치 죄인마냥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현듯 잊고 있었던 사람이 생각났다.

그 사람은 이름이 없었다. 언제나 검은 색 옷을 입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저녁 무렵에 나타났다. 말없이 우리 집으로 들어와 마당을 가로질러 뒤뜰에서 장작을 패 주었다. 키가 크고 마른 몸이었는데, 그 아저씨는 손에 때 묻은 흰색 천을 감고 있었다. 장작을 다 패고 나면 할머니나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 마당 한쪽 구석에 앉아 먹었다. 그리고는 기운 자국이 있는 바가지에 밥과 반찬을 담아 갔다. 그러다 어느 날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찾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6?25가 끝난 후, 홀연히 우리 동네에 들어와 산 밑 움막에서 혼자 기거하는 아저씨였다. 가족이 있었지만 헤어졌고, 한센병에 걸려 동네에 들어와 살 수 없었다는 것이 내가 아는 사실의 전부였다. 어렸을 적, 막연하게 그 아저씨는 참 좋은 사람이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아저씨는 절대로 공짜 밥을 먹지 않는다고,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장작을 패거나 하다못해 마당이라도 쓸어 주고 간다고 어머니는 혀를 차셨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의 그 아저씨가 생각난 이유는 무엇일까? 낯선 섬에까지 와서 10여년을 넘게 살면서도 자신의 땅 한 뼘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삶의 내력을 밝히지 않으며, 얻어먹고 살지언정 자존감을 잃지 않았던 그 아저씨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아픔이 되는 건 무슨 연유일까? 이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고향을 떠나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들에게 목숨을 걸고 일구는 땅은 고향 이상이었다.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자신들의 이름으로 된 땅을 가지고 싶은 이유가 살고 있는 그 곳이 바로 고향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센병을 천형(天刑)이라고 한다. 하늘도 버린 사람들이라는 인식은 오히려 한센인들이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늘마저 버렸기에 그들은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부평초처럼 떠돌지 않도록 두 발을 붙이고 있을 고향이 필요했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에 돌고 도니

부평 같은 신세가 되어

어언간 60여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빨라 유수와 같으니

내 청춘은 흘러흘러

머리에는 벌써 백발이 휘날리네.

 

중에서

 

할머니의 머리칼은 백발이 되어 있었다. 뽀글뽀글 파머를 한 사이사이로 백발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금을 바가지 채로 뒤집어쓰며, 산길을 걷고 또 걸어 탄원을 했지만, 자신들의 땅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기적이 왔다. 마치 소리 없이 나무그림자가 땡볕을 막아주듯이 그렇게 기적이 왔다.

“대통령이 특별조치법을 내린 기라. 박정희 대통령이 그랬제. 그때 우리 한센인들이 사는 땅을 우리 거로 해주라는 특별 명령이 있었는 기라. 윤두관 원장 힘이 컸대이. 윤원장이 있어서 육여사가 소록도에도 가고, 우리 손도 잡아주고, 그라께 대통령도 우리를 알고 특별조치법에 우리를 넣었다 아이가.” 그래서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 고향에서 나는 할머니를 만나고 있다.

이준모 선생님의 강연을 10월26에 개최합니다[공지사항]

이준모 선생님의 강연을 10월 26일에 개최합니다[공지사항]

 

이준모 선생님의 강연을 10월 26일에 개최합니다.

4대강에 녹조가 넘쳐흐르는 지금 우리에게 주옥같은 말씀을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강연일 : 10월 26일 금요일 5시 30분

장 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서울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201호)

 

이준모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튀빙겐 대학 및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신학, 철학, 교육학을 연구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교육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0년 8월까지 한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교수로 재직했다. 1989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자문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저술 소개

? 《Zwischen Tradition und Universalit?t(전통과 보편 사이에서)》(1985, 프랑크푸르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시대의 철학체계는 그 시대 자연과 인간의 관계, 곧 인간이 자연에 가한 노동의 양식에 의해 규정된다는 필자의 가설을 동양철학 특히 성리학을 중심으로 논증한 저술이다.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출판.

? 《노동의 철학과 인간교육》(한신대출판부, 1990)은 필자의 위의 가설을 서양 근대철학에 비판적으로 적용하여, 루소, 칸트, 셸링, 헤겔의 철학에서 노동의 논리와 교육의 논리의 동일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교육철학 방법을 모색하였다.

? 〈밀알의 노동과 공진화(共進化)의 교육〉(한국신학연구소, 1994)은, 자연과 생태계의 파괴는 인간의 노동이 자연의 노동(밀알노동)으로부터 소외된 데에서 기인한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독일 근대철학, 서구의 신과학 운동, 동학사상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밀알노동의 변증법을 동서철학사에 적용함으로써 생태학적 민중교육학의 방법과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 〈생태학적 교육학〉(시대와 민중, 1996)은 헤겔 철학 특히 《정신현상학》의 총체적 사유체계가 지닌 원환적(圓環的) 폐쇄성과 그 논리를 비판한 블로흐와 아도르노의 문제의식을 헤겔 철학에 적용하여 열린 총체성(한울)과 개체 존엄성으로 되살려냄으로써 개체가 총체적 개체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교육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 〈생태적 인간〉(다산글방, 2000)은 필자가 1990년대에 쓴 11편의 글을 엮은 논문집으로, 생태적 위기가 재생의 전환점이 되려면 서구 이성이 도달한 두 계기, 곧 지배주의적이며 자기집중적인 자기의식과 첨단과학기술이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자기집중적 자기의식은 나―자기성―자연의 분산적 자기의식으로 변화하고, 첨단의 기술은 동양의 농사 철학이 간직해 온 자연의 생명노동 범주와 만나야 한다는 것을 철학?교육학?종교학?노동의 측면에서 피력하고 있다. 동서고금의 인문학 자료가 망라되고, 이를 통해 생태노동의 논리가 반성되고 있다.

? 〈이준모 생태학 총서〉(문사철, 2012)는 이상에서 소개한 저자의 저술을 부분적으로 수정?보완하고 새롭게 편집하여 주제별로 재출간하는 시리즈이다. 2012년 7월 현재, 제1권 〈생태철학〉, 제2권 〈종교생태학〉, 제3권 〈생태교육철학〉, 제4권 〈생태노동〉이 출간되었다. 추후 제5권 〈생태노동과 우주진화〉, 제6권 〈생태교육학〉, 제7권 〈노동의 철학과 인간교육〉, 제8권 〈무엇을 할 것인가〉(가제)가 출간될 예정이다.
<생태철학>, 이준모 지음, 문사철, 2012

강연주제 : 지배의 주체성에서 자연의 주체성으로 ? 칸트?헤겔 철학의 비판적 전환

강의개요 : 오늘날 생태적 종말의 위기는 농성 노동의 논리가 상공성 노동의 논리로 전이된 역사와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자연의 생명체들이 살아가려면 각자의 주체성을 회복시키는 철학사적 반성과 전환이 필요하다. 이 강의는 자연과 인간의 생태적 상응성을 드러내는 생태노동의 관점에서, 칸트?헤겔 철학의 지배적 주체성의 논리를 자연의 주체성의 논리로 전환하고, 동서 철학사에서 노동의 논리를 반성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2)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2)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2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2. 30인 참주정 전후의 아테네의 정치·사회상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는 재정을 있는 대로 다 쏟아 부었지만, 단지 자금만이 아니라 유능하고 헌신적인 그리고 용감한 사람들까지 다 소진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두말할 나위 없이 개개의 사람들 모두 자신들의 정열을 아낌없이 내던져 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열을 다해 싸운 다음, 아테네는 자신들의 지배자로 선동 정치가(d?mag?gos)들을 선출하고 만다. 예를 들어 클레온(Kleon 기원전 ? -420년)이 그렇다. 클레온은 법정 수당을 세배로까지 증액하여 궁핍한 민중이 그것으로 생활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듦과 동시에 자신도 극심한 채무로부터 벗어낫고 나아가 50탈란톤(talanton)을 축재하기까지 했다. 아테네는 뛰어난 심미안을 가졌지만 이제 이런 자들의 벼락출세를 분별해내는 것조차 힘들게 돼 버렸다. 이 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니키아스 평화조약(기원전 421년)으로 일시 멎었던 시절, 책략과 사리(私利)에 능란했던 시대의 풍운아 알키비아데스에게 아테네가 매료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테네인 민족 내부에 잠복해있던 열망이 섬광처럼 떠오른 알키비아데스와 그가 주장한 시칠리아 원정(기원전 417년)을 통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긴 하지만, 아테네인들의 그러한 태도는 병리학상(pathologisch) 세계사 전체에서 눈여겨볼 만한 구경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 후 재개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끝내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패배하여 기원전 404년 크리티아스(Kritias)를 비롯한 30인의 참주들의 가혹한 공포정치에 직면하게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개개의 여러 폴리스들의 움직임을 보면 민주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기존의 권세가들(dynatoi) 즉 귀족내지는 부자들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아테네에서도 그 최종적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기원전 528-462?) 시대 이래 모든 당파에는 물론 모든 우두머리들 주변에 일종의 정치 클럽 즉 헤타이레이아(hetaireia)가 결성되어 있었다. 페리클레스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시대에는 이러한 클럽은 소멸한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 그것들은 다시 소생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불사하였다. 이윽고 이른바 과두정(oligarchia)파의 형태로 나타난 그러한 결사에는 무엇보다도 빈곤과 착취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있었던 사람들과, 권세를 상실하여 지금은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결집해 있었다. 그 일부는 이전에 귀족이었던 자들이었고 일부는 그저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조금은 더 태생적으로 능력이나 소질이 있었던 사람들은 원초적인 혈통에 대한 믿음은 물론 국가에 다시 중용 되고 싶어 하는 열망에 불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에 함께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소피스트의 사상은 고작해야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들에 어떤 형식적 명분을 제공한 것에 불과했다. 실제로 한 명의 소피스트도 스파르타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던 스파르타 권세가들의 태도는, 그들에 대해 극히 악의적인 아테네 시민들 이상으로 박대했다.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민중들의 친구인 양 처신했던 것도, 자신들의 신상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고 나아가 민중들로 하여금 과격한 제안을 하게 하여 민주정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반민주정 클럽의 전체 연합은 이미 기원전 411년에 몹시 난폭한 수단을 사용해서, 본질적 성격상 과두정적인 체제를 실시하는 것에 성공하긴 했지만, 이것은 고작 수개월밖에 존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후 몇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아테네의 과두정 지지자들이 완전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극단적인 결의와 행동을 마다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클레이스테네스 이래 민주정은 아테네에서 자명한 것인 양 받아들여져 모든 것이 그의 구상대로 개혁되고 있었을 때조차, 그것의 반대자들 역시 그리스인이었다고 하는 것, 즉 반대자들도 이와 같이 아무런 거침없이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민주정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테네를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정은 그들 국외 이주를 바라는 사람들에 대해서, 프랑스 혁명 당시 정치 망명자에 대해 그랬던 것과도 같은 공분(公憤)을 안고 있었다. 민주정은 이 체제가 자기 쪽 당파의 유능한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당파의 유능한 사람들까지 절대적인 내적 자주성(absoluten inneren Unabh?ngigkeit)을 갖도록 길러냈다는 것을 아테네를 배반한 알키비아데스를 보고서야 비로소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사실 주의해서 보면, 아주 많은 수의 과두정 지지자들이 뤼산드로스에 대한 최후의 저항을 진압하는데 손을 빌려 줌으로써 전력을 다해 자신들의 조국인 아테네가 패배하는 것을 앞당기는데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05년) 그것은 그 저항군들이 이기면 결국 시민(d?mos)이 이기게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과두정 지지자들은 아테네를 비산업적이고, 동산(動産)에 의존하지 않는, 바다에 등을 돌린 사회로 만들려는 과제에 매우 정통해 있었다. 그들은 아테네 성곽 문을 연 후, 뤼산드로스의 후견 하에 정권을 빼앗아 이른바 30명 참주들이 주도하는 공포정치를 시작했다.(기원전 404년) 30인 참주들은 1500명을 처형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재산 이동도 감행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자들 아래에서 금방 기강이 세워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미 앞 시대에서 각자의 성질들을 서로가 다 너무나 정통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이제 와서 완전하게 하나가 된 듯 행동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테라메네스(Th?ramen?s)는 한걸음 양보하여 그 타개책을 강구했다. 그러나 그는 말 그대로 완전한 의미에서 막무가내인 자를(den Unbedingten) 만나게 된다. 그 자가 곧 그를 실각시킨 후 살해까지 한 크리티아스이다.

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연설을 통해 우리는 다시한번 그들이 그리스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지배권력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목적을 바라는 사람은 수단 또한 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크리티아스에게 이 수단이 무엇이었는지는 이미 오싹하리만큼 분명한 것이었다. 언젠가 참주들 휘하의 중장보병들에게 행한 그의 연설 즉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것을 바라고 또 같은 것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은 그리스의 모든 당파가 새겨들어야 할 모토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정치는 결국 트라쉬불로스(Thrasyboulos 기원전 440-388년) 등 민주정파에 의해 얼마가지 않아 타도되고 만다.(기원전 403년) 과두정이 무너지고 민주정이 부활한 후에도, 아테네에는 분명 여전히 과두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과두정파로서 대두될 만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주정 이후 시민들의 공격은 본질상 그러한 세력으로 여겨진 부유층들에게 향해졌던 것이다.

아테네 국가에 있어서의 외관상의 생활은, 이 위기 이후에도 대부분의 측면에서 이전과 같은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생활상을 관찰한다한들 그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큰 차이점은 오히려 이 시기의 전과 나중에 위치시킬 수 있는 아테네 사람들의 내면적 성질과 외면적 위상에 있다.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완전하게 패배했다고 하는 것은, 이 전쟁이 초래한 시민들 간의 커다란 균열을 막는데 동원된 기본 방책들이 대단히 조잡한 것이었던 것에 비하면 아직 사소한 재앙인 것처럼 생각된다. 말하자면 전적인 헤게모니를 가지고 지배권을 행사하던 이전의 시민들에게 딱 맞았던 왕자의 외투를, 살이 빠져 말라깽이가 된 지금의 시민들도 여전히 헐렁한 채로 걸쳐 입고 있었던 것이다. 패전 후 동맹국의 소송 사건들에 대한 재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돼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재판을 하던 습관이 붙어 있었던 데다 패배자의 일상으로서 의심 또한 몹시 많아져서 시민들은 지금도 그 때 못지않게 아주 많은 아테네인들을 재판에 붙였다. 그 최초의 희생자 중 한 명이 소크라테스(S?krat?s 기원전 469-399년)였던 것이다.

민주정 하에서의 앗티카 지방의 개개의 시설이나 관공서에 대해서는 여기에서는 생략해도 괜찮을 것이다. 사람들은 한가로움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임시 직무이든 영속적인 직무이든, 직원이든 위원회 위원이든 일을 맡기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인이나 포이니케 사람들이 이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잘 그리고 정확하게 직무를 수행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이 모든 결정을 한도 없이 독점함에 따라 업무가 엄청나게 늘어나 혼란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관공서의 끊임없는 교체 또는 추첨에 의해 근무부서를 임명받은 직원들 이외에, 늘 상임으로 근무하는 한명의 숙련된 직원, 즉 서기(grammateus, hypogrammateus)가 실무상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서기는 신분상 국유 노예에 지나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다. 지난 날 베네치아에서조차 이 정도로까지 자신의 서기에 의존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물론 아테네인은 잘못 시작한 일일지라도 나중에 수정을 잘 할 수 있도록 많은 훈련을 쌓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일과 관련해서 하나의 금지령을 공표했다. 즉, 앞으로는 동일한 개인이 2년간 계속해서 동일한 관공서 내에 서기로 근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에는 어떤 법률이 실제로 어떻게 실행에 옮겨졌는지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것은 특정 감독관이 운영하지 않는 업무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고, 하물며 음모와 책략을 일삼는 자들에 의해서 업무 일체가 지연되는 등, 업무 전반에 걸쳐 믿기 어려울 정도의 방만함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법률에 대해서는 그 효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솔론의 법률을 비롯해 그 이후에 공포된 엄청난 분량의 법률 편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보람 있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5세기경 고대 그리스 화폐. 1탈란톤은 6000 드라크마. 당시 일꾼의 하루 품삯이 1드라크마 정도였다고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테네에는 찬탄을 자아내며 인용되고 있는 현명한 고래의 옛법률(nomos: 관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법률 가운데 다름 아닌 다음의 두 개의 법률들은 아테네의 역사에서 종종 위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어떠한 법률도 만약 그것이 동시에 모든 아테네인에 대해서 유효하지 않은 경우 한 개인에 대해서 공포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지 결의로만 표명된 것은 평의회의 것이건 민회의 것이건 하나의 법률보다 우위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률들은 제정 순으로 차례차례 신전 기둥 가운데에 혹은 돌기둥에 새겨지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법률에 대해 종종 그것들이 새겨진 소재를 핑계로 별로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페이스테타이로스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새」(Ornithes :기원전 414년) 가운데에서(1054행) 이러한 돌기둥에다 매우 괘씸한 일을 저질렀다고 하여 근대의 어떤 편집자는, “하층민은 자주 이런 짓을 했다“라고 덧붙이고 있지만, 이것은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페이스테타이로스는 훌륭한 아테네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법률은 신들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것도 계속 입버릇처럼 말해지고 있었다. 확실히 기원적으로는 법규 내지 법률은 종교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결부되어 있었다. 게다가 개개의 법 원리도 분명 태고 시대로부터 유래하고 있었다. 또한 법률은 신적인 기원을 가지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불변의 것이라고 여겨지기 조차 했다. 안티폰(Antiphon)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법률은 극히 오래 되었고, 동일한 일에 대해서는 항상 동일한 법률이 있다. 이것이 탁월한 상태의 법률이 지니고 있는 주요 표징이다. 왜냐하면 보통 시간과 경험(Zeit und Erfahrung)은 무엇이 부적당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관습의 형태로 전해진 법률들은 폐지되지 않은 채 재래의 법률에 새로운 법률들이 하나 둘 덧붙여지면서 이 후 아테네 법률들은 서로 모순을 안은 채로 방치되어 왔다. 그리하여 법정에서는 완전히 모순되는 법률들이 판을 쳐 마침내 그 폐해가 심해져 결국 성문법적인 법전의 편찬이 아무래도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다름 아닌 이 매우 중요한 일이 위원회를 차례차례로 돌다가 결국 그 숙련된 실무자 한 사람 즉 노예 출신이었던 니코마코스(Nikomachos)에게 맡겨졌다.(기원전 411년). 이 남자는 이 일을 그저 한해두해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효한 법률까지 삭제하여 법률을 허위로 날조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은 돈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책임을 추궁도 하기도 전에 아에고스 포타모이(Aegos Potamoi) 해전(기원전 405년 스파르타에게 대패했다)과 함께 아테네에 불운이 닥쳤다. 그리하여 해전이 끝난 후 폴리스를 재건하면서 다시 이전보다도 더 큰 합의 기관과 위원회가 법전 편찬을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니코마코스의 강력한 보호자들에 의해서 다시 또 모든 일이 근본적으로 그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는 또다시 4년간 이 사안을 진척시키지 않은 채 만지작거리다, 그의 전문 분야인 제사 안건으로 새로운 사치스런 희생 제물에 관한 법률을 생각해 내서 그것으로 인기를 얻으려 했다. 그 결과 나중에는 그를 고발한 사람들이 반대로 니코마코스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뒤집어쓰지 않을까 크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발자는 다음과 같이 고발장을 마무리 하고 있다. “국가에 대한 절도를 기획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 소송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 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은 누구도 적이 될 수 없는 매우 대담한 자들이 될 것이다.” 물론 이 판결은 보고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든 지금까지 말해 온 니코마코스의 사례만 가지고도 아테네에서 법률적 사안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플라톤이 왜 법률편찬자의 양성을 아카데메이아의 주요 교육목표로 삼았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런 사정에 처해 있었던 만큼 민주정 아테네에서는 특정의 시민, 즉 부유층 혹은 부유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요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개인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가지면서, 단단하게 결성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적 폴리스의 이념에 대해서는 결코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을 비난한다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또 그리스인의 본성에 대해서 너무 심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될 것이다. 적어도 이 인간 종족은 야만 상태로부터 벗어나자마자 국가 기구와 공적 생활 외에 한층 더 특별한 생존방식과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가정생활 그리고 특정 사상이나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영역을 구축해왔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지배자 계층에 속하는 인간들만을 정치적인 존재로 위상지우는 일에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스파르타 이외의 다른 곳, 특히 아테네 사람들은 반대로 폴리스가 개인들을 고무하고 동시에 개성적인 것의 발전을 아주 강렬하게 촉구하며, 사유재산의 획득과 그에 따라 야기된 사고방식을 모든 방법을 통해 촉진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실로 다양한 종류의 공적 기부제(leitourgia : 부유층이 자비로 일반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아테네의 공동체적 성격을 드러내는 독특한 제도)를 통해 폴리스로부터 주어진 부의 은혜에 적극 보답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무렵까지는 이 공적 기부제는 한편으로는 폴리스에 대한 실제적인 헌신의 문제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씀씀이가 크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야심의 문제였다. 키몬(Kimon)은 자신의 부를 모든 방법을 동원해 모두 내놓았다. 알키비아데스의 아버지인 클레이니아스(Kleinias)는 아르테미시온 해전 당시 자신의 배에 자비를 들여 200명의 병사를 탑승시켜 싸웠다. 그러나 시대가 점점 더 나쁜 방향으로 흐르게 되면서 부는 문자 그대로 먹이감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많은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아테네 부유층 사이에서도 바야흐로 공적 기부제가 부의 수탈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부를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폴리스를 떠날 수는 없었고 게다가 설사 도망간다고 해도 외지에서도 같은 위험, 아니 더 큰 위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적 기부제가 단지 국가의 요구뿐이었다고 하면 고대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특별하게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는 문제였다. 사실 아주 고액 수준의 세금을 제외하면 국가가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공적 기부제 내지 봉사는 트리에라르키아(trierarchia) 뿐이었다.(이것은 시대에 따라 매우 차이가 나는 전투함정(3단노 군선 tri?r?s)의 장비 장착에 관한 의무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이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공적 기부제로서는 전시에 비교적 궁핍한 시민들의 무장을 도와준다거나 그들의 딸들의 결혼 비용을 부담한다거나, 매장비용 등을 부담하는 자선 행위 또는 완전히 민중들의 오락을 위해 기부하는 행위 같은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특히 코레기아(choregia : 합창대 비용부담), 즉 연극 합창대 및 제사와 축제를 위한 서정시 합창대의 무용가나 피리 부는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부담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른바 김나시아르키아(gymnasirchia : 체육행사부담)와 그러한 것들 중에서 가장 비용이 드는 종류인 람파다르키아(Lampadarchia : 일종의 경주행사 부담)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경쟁을 수반하는 경기(ag?n)를 위해서도 돈을 내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신전에서 제전이 벌어질 때 사절을 파견하는 비용도 부담하였다. 마지막으로 부족(phyle) 혹은 그것과 관련된 지역(d?mos)의 여러 동년배들을 위한 향응도 떠맡았다. 이 경우 누가 부담할지는 자발성이나 추첨에 의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10개 부족이 그것을 떠맡을 동료 시민을 선출하여 그 사람들이 정해진 순서대로 매년 반복되는 공적 기부제는 물론 가끔 임시로 열리는 봉사활동을 떠맡았던 것이다. 분명 이런 관습을 중지시키는 것은 사람들에게 유리한 계책은 아니었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일부 부유층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이 봉 취급당하는 것을 거절했을 때 자기 신상에 불어 닥칠 증오를 지레 두려워해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니키아스(Nikias)가 시칠리아 원정 계획에 반대했을 때, 그는 결국 찬동자를 얻지 못했고 찬동자 중에는 유력한 사람들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동조할 경우 자신들이 공적 기부제와 3단노 군선의 장착비용을 면하려는 것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신들의 신념에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소한 3탈란톤의 자산을 가지는 사람들만이 이것을 부담하게 되어 있었다. 또 자산은 연평균 12퍼센트의 이자를 낳았기 때문에 1탈란톤의 자산이 있으면 어떻게든 생활은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합창대 비용 부담은 부유한 남자 한 명에게 매년 1200 드라크마 정도를 부담지우는 정도여서 대체로 15탈란톤의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로 여겨졌다.

이렇게 해 보면, 이러한 부담은 몇 가지가 크게 중첩되는 일이 없으면 곧바로 재산상의 파탄을 초래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어떤 사람에게 부당한 방식으로 그것을 부담지울 경우 그 사람은 파탄을 면치 못하였다. 이와 함께 이러한 부담을 떠맡는 것은 명예로운 것이라는 전래의 생각 또한 아주 오랜 동안 계속 되었고, 이런 일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 또한 적어도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저 쓸데없는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능력 이상으로 자신의 씀씀이가 좋은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과 같이) 합창대 비용을 부담할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플라톤은 명문가 출신이지만 부유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을 면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유한 친구로부터 그것을 위한 자금을 조달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복하여 합창대 비용 부담을 떠맡은 사람은 상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세발달린 솥(tripodon)을 걸어두기 위해 훌륭한 신전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어떤 시대, 어떤 민족이건 간에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짜고짜로 희생을 지불하게 되는 처사들 중에는 고역스런 일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당사자들이 자기의 사적인 자금으로 이러한 공적 기부제를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 돈은 결국 스스로의 사적인 환락 생활을 위해서 낭비 되어 버렸을 텐데 그것이 대부분 민중 전체의 고상한 예술적 향유를 위해 지출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아테네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명예로운 것이라고. 그러나 강제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일로부터 존엄성을 빼앗아 버렸다. 아테네 국가는 개개의 부유층이나 생업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국가가 그 사람에게 부여한(어쨌든 극히 제약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안전과 교환한다는 명분으로 마음대로 과세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국가는 매우 변덕스럽고 또 탐욕스런 시민들의 수중에 떨어져 버려서, 시민은 이윽고 보다 높은 액수의 세금을 사정없이 요구했고, 그렇게 거둬들인 돈을 민중에게 직접 분배하는 것을 매우 민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당시 오락을 위한 낭비에 있어서는 어찌 되었든 국가가 선두에 서 있었다. 그리고 에우불로스(Euboulos) 시대에는(대체로 기원전 353년부터 기원전 339년까지) 축제비용이 모든 예산의 주요 항목이 되어, 누군가 이것을 전쟁 목적으로 전용할 것을 제안하는 경우, 그것을 처음 입에 담은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고 위협함으로써 그 항목 자체의 보존이 담보되고 있었다. 아테네에 있어서 조차 이 경우, 대중의 관심사는 이러한 고상한 예술 형식을 즐기는데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일정한 정도 호사를 누리는 것에 있었을 것이다.

“불쌍한 부자들”로 일컬어지고 있는 그들의 재난을 상세하게 알려면, 크리토불로스(Kritobulos)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짓궂은 동정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토불로스가 감내하고 있는 일들을 모두 열거한 후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공적 기부가 충분히 행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만으로도, 아테네의 사람들은 마치 네가 자기들의 재산을 도둑질이라도 한 것인 양 너를 처벌하려 들 거야.” 크세노폰의 「향연」(symposion : 제4권 29절 이하)에 나오는 카르미데스의 말은 오히려 가난해졌기 때문에 자유롭고 행복하게 된 한 남자의 실로 유쾌한 유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전체의 극히 중대한 측면이 법정 변론가들을 통해 비로소 처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재판의 배후에는 모든 재산을 몰수해버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으므로 그러한 재산은 일부는 국가에, 일부는 고발자등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것으로써 그 돈은 이미 일체의 권리와는 관계없이 바람직한 공적 수입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 알키비아데스(Alkibiad?s 기원전 450?-404): 그는 정치·군사적 재능과 준수한 외모를 타고난데다가 페리클레스의 조카로서 젊은 나이에 벼락출세를 한 후, 서방으로의 세력확장을 바라는 민중의 열망에 편승하여 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하지만 헤르메스상(像)을 파괴한 용의자로 소환령이 내려지자 아테네를 배반하고 스파르타로 망명한다. 그러나 스파르타 왕비와의 스캔들로 다시 페르시아로 망명한 후 아테네의 과두정파에 빌붙었다가 뜻을 못 이루자, 다시 민주정에 충실한 사모스 해군과 손을 잡고 스파르타군을 격파하여 기원전 408년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아테네로 돌아온다. 정조 없이 야심과 사리에 가득 찼던 그의 삶은 결국 스파르타가 보낸 자객의 손에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 소크라테스와의 각별한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학술 3부 근대 철학사 세미나 강의계획서- 담당 선생님: 이병창 동아대 철학과 명예교수

근대철학사 강의계획서

담당 선생님 : 이병창

1)강의의 목표와 의의

근대철학사라면 상당히 포괄적이라서 12주 정도의 작은 시간 안에 다 다룰 수가 없다. 그래서 이번 강의는 근대철학사의 백미라고 할 칸트와 헤겔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직관주의와 칸트주의 그리고 헤겔주의는 삼각관계를 이룬다. 이 삼각관계는 최근에도 반복되고 있다. 들뢰즈의 철학이 직관주의의 전통을 잇는 것이라면 현대 구조주의가 칸트주의의 맥을 잇고 있다. 반면 헤겔주의는 라캉, 지젝 등의 정신분석학적인 흐름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러므로 칸트와 헤겔의 동일성과 차이를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근대철학을 넘어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의 요점을 장악하는 것이며, 지금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철학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디딤돌을 제공한다고 하겠다.

 

2)강의의 방법

이 강의는 아무래도 전문 연구자들의 강의이니만큼 개론적인 설명보다는 원전을 접하면서 이를 해독하는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 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원전해독의 능력을 키우는 것에만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선철들의 고민 자체를 세부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다양하게 이해하며 나아가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과 미래 철학의 단서를 발견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중심 텍스트

칸트: 순수이성 비판

헤겔: 정신현상학

(판본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한글번역, 영어번역, 독일어 원전 모두 가능)

 

* 강의 시간: 매주 토요일 2시-5시. 8월 11일 시작해서 12주 연강.

4)강의의 주별 내용
주별
강의 주제
세부 내용
강의방식

1
칸트 순수이성비판

초판 들어가는 말
칸트는 무엇을 하고 싶었는가? 선험철학의 이념
요약발제

2
선험적 감성론
시간, 공간이 직관의 형식인 이유

오성의 개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3
분석론 2장,

개념의 연역
개념이 어떻게 직관에 적용될 수 있는가?

4
원칙론 2장 3절

종합적 원칙
선험적 통각의 기능

5
선험적 변증론 1편

순수이성의 개념들
선험적 변증론과 순수이성의 의미

6

칸트 순수이성 비판의 의의

7
헤겔 정신현상학 서문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무엇을 하려 했는가?

셸링과 헤겔
강독

8
서문
체계가 진리인가?

9
서문
역사적 서술은 왜 필요한가?

10
서문
의식의 변증법적인 전개

11
서문
형식주의 비판

12

헤겔 정신현상학의 의의

속 편하게 살자, 유창복의 『우린 마을에서 논다』/나태영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속 편하게 살자

유창복이 쓴 『우린 마을에서 논다』

?

글: 나태영(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21세기 대한민국 자살률이 세계 3위이다. 리투아니아, 크로아티아 다음이다. 박노자한테서 들은 이야기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비율 세계 1위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900만이 넘는다. 그 분이 3인 가족 가장이시면 2700만이나 되는 분이 하루 하루를 힘겹게 사신다.

부자감세가 이루어진다. 반대로 간접세는 올라서 서민증세가 이루어진다. 남북긴장 은 심화되고 있다. 죽음(死)강 사업으로 환경과 농지가 파괴되고 홍수증가가 예상된다. 큰 건설회사만 신났다. 4대강 사업으로 지어진 시설들을 없애고 4대강을 자연 상태로 되돌리는데 드는 돈이 4대강 사업에 쓴 돈보다 세 배 더 든다고 한다. 큰 건설회사만 또 신났다. 이명박 정권은 한미매국협정(한미에프티에이)졸속 재협상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다. 도무지 신나는 일이 없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같은 신나는 일이 벌어져야 이 나라 서민이 즐거울 텐데, 올해 이 나라에서 월드컵이 개최되지 않는다. 답답하다. 숨이 막힌다.

그나마 이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풀어줄만한 참말로 신나는 일이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 마을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같이 광적으로 신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해줄만한 일이 성미산 마을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농촌 인심을 21세기 대한민국 거대도시 서울에서 일상적으로 맛볼 수 있다. 티비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성미산 마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 부부는 지금 맞벌이 부부이다. 그래서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 둘레 아주머니에게 우리 아이를 맡기면 된다. 임산부가 병원에서 애를 낳아야하는데, 남편이 옆에서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럼 네 살박이 큰 애를 옆집에서 재워 준다. 우리집에 갑자기 손님이 왔는데 밥이 없다. 그럼 둘레 집에서 밥을 얻어올 수 있다. 서로 품앗이가 이루어진다.
『우린 마을에서 논다』, 유창복 지음, 또 하나의 문화, 2010.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했다. 부자는 높은 수준 문화예술을 향유한다. 반면에 빈자는 그러지 못한다. 이로써 부자와 빈자 간에 구별짓기가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성미산 마을에서는 그러한 구별짓기를 막을 수 있는 활동이 이미 이루어졌다. 바로 이 책 글쓴이 짱가 유창복씨가 주축이 되어 주민과 함께 성미산 마을극장을 만들었다. 짱가가 극장장이다. 이 극장 규모와 시설은 서울시 대학로에 있는 일반 극장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뛰어나다. 이 정도 수준 마을극장은 대한민국 최초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 극장에서는 일반 극장과 달리 전문 예술가들이 출연하기도 하지만 마을 주민이, 마을 어린이가, 마을 노인이 주인공으로 공연에 참여하기도 한다. 입장료는 대학로 연극 공연비의 약 30 – 40프로 수준이다. 무료 프로그램도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노숙자일지라도 뜻만 있다면 성미산 마을극장에 들어가 고급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다. 티비 광고에도 쓰인 적이 있는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라는 동요가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성미산 마을이다.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배우와 관리자로 일하시는 단비 아빠가 했던 말이 내 뇌리에 남아있다. “삶이 곧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활 속에서 예술을 즐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死)강 사업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있다. 제초제, 농약,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현대 농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들 먹을거리가 우리 몸을 괴롭히고 있다. 우리 몸의 질병을 키우고 있다. 우리 성격을 거칠게 만들고 있다. 우리 꿈나무를 병들게 한다. 후손에게 물려줄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이를 예방하는 일을 톡톡히 하는 단체가 성미산 마을에 있다. 바로 마포두레생협이다. 마포두레생협은 소비자에게는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해주고 생산자에게는 꾸준한 수입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이를 통해서 도시와 농촌이 하나가 되도록 만들고 있다.

독자 여러분은 이순신장군 한산도대첩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세계 4대 해전 맨 앞을 차지하는 한산도대첩을 말이다. 성미산 마을에는 3.13대첩이 있다. 생협은 주도적으로 성미산을 지켰다. 2003년에 서울시가 마을에 있는 성미산에 배수지를 지어 성미산을 파괴하려할 때 울끈 불끈 힘내어 성미산을 지켰다. 물론 많은 수의 마을주민들과 함께 말이다. 지하철에서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을 상대해서 성미산을 막아냈다. 자세한 내용은 『우린 마을에서 논다』 이 책에 나와 있다. 여러분이 책을 사서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지금 성미산은 또 한 번 위험에 맞서고 있다. 홍익대학교가 성미산에 홍익초중고를 지으려 한다. 산의 약 30프로를 파괴하고서 말이다. 홍익대학교는 더 이상 대학이 아니다. 부동산회사에 불과할 뿐이다. 성미산 마을 사람들은 과거에 성미산을 지킨 긍지와 자부심으로 저들과 싸우고 있다. 문화활동을 통해서 저들과 싸우고 있다. 즐기면서 저들과 싸우고 있다. 성미산 마을 사람들이 홍익대학교를 상대로 해서 싸우는 것을 보면 나는 기분이 좋다. 신이 난다. 백범 김구선생이 그리도 바라시던 일이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마을에서 펼쳐지고 있다. 문화의 큰 힘을 성미산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유연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이 왜 옳은지 나는 옴 몸으로 깨닫는다. 주민들이 성미산을 꼭 지켜내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슬프게도 홍익대학교가 성미산에 홍익 초중고를 지었다. 아뿔싸!!!!

이 외에도 많은 단체가 이 책에 등장한다. 글쓴이 유창복씨는 성미산 마을 역사를 소설처럼 재미있고도 쉽게 썼다. 달콤 쌉싸름한 이야기가 이 책에 많이 나온다. 성미산 마을에서 벌어지는 갈등도 나온다.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고쳐서 이루어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진솔하게 글을 쓴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글쓴이 둘레에서 여러분이 글쓴이를 도와주었다.

전국에서 올바른 삶을 추구하는 분들이 혹은 단체가 성미산 마을을 보고 배우려고 견학을 오신다. 그러려면 차비며 음식값이며 비용이 많이 든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게 되면 그런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당신 방에서 편하게 성미산 마을에 대해 배울 수 있다. 내용은 충실하다. 성미산 마을로 견학 오실 분들은 오시기 전에 이 책을 읽고 견학을 준비하시면 견학이 더 뜻있는 견학이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오죽 흡족하셨으면 조한혜정 교수가 이 책 뒷표지에 극찬의 말을 남겼겠는가? 오죽 흡족하셨으면 박원순 서울 시장이 책 뒷표지에 극찬의 말을 남겼겠는가? 성미산마을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이다. 성미산 마을은 지금도 기적을 만들고 있다. 울끈 불끈 힘내서 말이다. 키득 키득 쪼개면서 말이다. 독자 여러분 기대하시라. 개봉바악두—

 

 

한철연 엠티 갑니다! 모두 모두 놀러오세요[공지사항]

한철연 총무부에서 사전답사도 완벽하게 다녀왔습니다. 시원한 물가와 예쁜 숙소에서 좋은 추억을 만드세요.

 

[nggallery id=36]

▶ 엠티 장소는 경기도 양평에 있는 ‘숭실대학교 수련원’입니다.

http://www.soongguri.com 수련원 고객센터(서울) : 02) 820-0898

? 숙소 상태(냉방, 화장실, 취사 등) 매우 양호.

? 숙소 옆 개천에서 고기잡이와 물놀이 가능.

? 석쇠 바비큐 가능. 식품?생필품 마트 근거리

 

 

이번 엠티 첫날에는 최종덕 선생님의 특강이 있습니다. 주제는 “공부를 잘하자-말과 글의 힘”입니다.

오래 전부터 준비하신 강의라고 하니 한철연 회원 분들에게 아주 긴요한 강의가 될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여름 엠티에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바랍니다.

특히 개인차량을 가져오면서 3인 이상 탑승한 차량의 차량소유자에게는 주유비 3만원을 지원하니

부담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이번 여름엠티를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 아래는 엠티와 관련한 제반사항 안내입니다.

○ 일시 및 장소 : 2012년 7월 19일(목) ~ 20일(금), 양평 숭실대학교 수련원

○ 출발 시간/장소 : 19일(목) 오전 11시에 한철연에서 정시 출발

○ 참가 회비 : 전임 5만원, 비전임 3만원, 대학원생/대학생 2만원

※3인 이상 탑승차량 회원에게는 주유비 3만원 지원.

○ 식사 : 출발 당일 점심은 각자 해결, 19일 석식과 20일 조식은 숙소에서 취사

 

19일(목)

오전 11시
출발

오후 12시
점심식사(차량별 해결)

오후 1시 30분 ~ 2시
숭실대 수련원 도착, 체크인

오후 2시 ~ 4시
저녁안주 확보 겸 고기잡이 및 물놀이

오후 4시 ~ 6시
청운레포츠공원에서 구기게임 및 야외활동

오후 6시 ~ 7시
저녁식사

오후 7시 ~ 8시 30분
최종덕 선생님 강연

오후 8시 30분 ~
뒤풀이

20일(금)

오전 9시
기상, 아침식사 준비

오전 10시
아침식사

오전 11시
체크아웃, 용문산 관광단지로 출발

오후 1시
점심식사(용문사 근처), 서울 출발

오후 4시
서울 도착

 

○ 오시는 방법

? 개인차량 이용 시 안내

? 내비게이션 이용 시 주소 : 양평군 청운면 여물리 116번지

 

? 올림픽대로 이용

팔당대교 → 양수리(양평방향국도) → 홍천/횡성 방향 6번국도 → 용문산 국립공원 → 용두리 → (용두시외버스터미널 앞 청운레포츠공원 이정표 방향) → 여물교 → (다리 건너면서 좌회전 후 길 따라 직진) → 청운레포츠공원 → 숭실대학교 수련원

 

? 강변북로 이용

구리 → 양평방향 → 팔당터널 → 양수리(양평방향국도) → 홍천/횡성 방향 6번국도 → 용문산 국립공원 → 단월면 → 용두리 → (용두시외버스터미널 앞 청운레포츠공원 이정표 방향) → 여물교 → (다리 건너면서 좌회전 후 길 따라 직진) → 청운레포츠공원 → 숭실대학교 수련원

 

? 대중교통 이용

? 전철 중앙선 이용 (약 2시간 소요)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 열차에 탑승 → 용문역하차 1번 출구 → 용문역, 용문 시외버스터미널 근처 ‘응동할인마트’ 앞에서 용두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는 직행버스 탑승(첫차7시10분 막차10시15분, 배차간격 40분) or 근처 노선버스 2-8 탑승 → 용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 → 터미널 등지고 좌측에 청운 레포츠공원 이정표를 보고 그 방향으로 10여분 도보 이동 → 숭실대학교 수련원

 

? 버스 이용

※ 동서울 용문행: 첫차 6시15분 막차 9시30분, 배차간격 30~40분, 1시간 소요, 6100원

① (약 2시간 소요)

강변 동서울터미널에서 용문행 버스 탑승 → 용문 시외버스터미널 → (나머지 경로는 앞 설명과 동일) → 숭실대학교 수련원

② (약 3시간 50분 소요, 비추천)

강변역 4번 출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100m 전방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2000-1 일반버스 탑승 → 양평군민회관 정류장에서 하차 → 2-8번 버스 환승 → 용두리 터미널 정류장에서 하차 → (나머지 경로는 앞 설명과 동일) → 숭실대 수련원

 

○ 문의사항 및 비상 연락처

총무간사 진보성 019-630-0306

총무간사 김정철 010-2723-7910

슬라보예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슬라보예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사 : 이병창(동아대학교 명예교수)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지젝과 정신분석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했던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좌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본 사상가는 지난 6월말에 한국을 다녀갔던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1949~)이었다. 이날 강사로 나선 이병창 동아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강좌 수료식으로 인해 더욱 짧아진 강의시간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이라는 옷을 입은 지젝이 어떻게 레닌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간명하게 설명하려고 했다. 라캉, 헤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이 시대가 앓고 있는 ‘환상’과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종횡무진 들추어내고 분쇄하는 지젝은,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이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다시 레닌을 호명한다. 그는 의식과 가치관마저 규격화된 이 세계에서 회복할 수 없는 ‘파국’을 피하기 위해, 과감하게 다르게 사유하고 행동하자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점에서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들을 자격이 있는가.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이병창 교수는 먼저 지젝이 즐겨 사용하는 정신분석학의 기초적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라캉과 프로이트의 차이를 강조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자아’를 강조하거나 ‘치료’를 중시하는 병리적 관점보다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자기이해를 목적으로 삼아 개인의 활동성을 확장하는데 정신분석의 주안점을 둔다. 또한 라캉은 욕망이란 사실 나 자신으로부터 연유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며, 그 결핍으로서의 욕망이 자연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원인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론을 개진했다. 또한 고통과 쾌락이 동일한 근원을 갖는다는 ‘욕망의 이중성’을 강조한 것도 라캉의 강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젝이 라캉에게서 주목하는 것은 상징계에서 욕망을 충족하는 신경증 환자가 자유연상을 통해 늘 도착하게 되는 어떤 지점, 바로 의식과 무의식을 매개하는 ‘매듭점’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환자는 그것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며 고통을 느끼고 심지어 그것에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바로 그곳이 그 사람의 내적 질서가 무너지는 곳이며, 동시에 그것은 이 세계의 한계선과 어떤 틈, 균열, 갈등을 드러낸다. 또한 그 지점은 이 세계가 어떤 상징적 가치들로 이루어진 곳인지 보여주는 곳이자 자아가 욕망으로 드나드는 출입구이며,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넘어가는 ‘구멍’이기도 하다. 즉,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욕망이 분출되는 곳이 그곳이라면, 언어가 분리되거나 신체가 마비되거나 노이로제에 걸리는 환자의 모든 증상은 이런 욕망의 분출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라캉은 보았던 것이다. 한편 환자는 이런 ‘증상’을 즐기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이 지점은 환자의 모든 현실적인 삶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병창 교수는 이렇게 질문했다. “그 분열된 틈을 봉합하기 위해, 우리는 이 현실을 겪어 내고 일상을 영위하고 있으며 삶의 성취를 쌓아온 것은 아닐까요?”

 

‘환상’과 이데올로기 비판

지젝은 이러한 라캉의 이론을 이데올로기 비판에 적용했다. 기존의 이데올로기론은 법철학을 비판(마르크스)하고, 물신론(루카치), 시민사회의 헤게모니(그람시), 호명이론(알튀세르)을 분석하는 것이거나, 자연적인 기호(바르트)로서 이데올로기를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젝은 앞서 설명한 ‘틈과 균열’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매끄럽게 만드는 허위의식과 ‘환상’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부르며 그것이 작동되는 방식을 비판했다. 곧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자본과 노동의 대립, 가족 내부에서 사랑과 계약의 대립 같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정신병적인 환상이자 그 틈이 도드라지지 않도록 메우는 장치”라는 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나치가 스스로 증폭시켰던 유대인에 관한 음모론과 피해의식,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생산한 알카에다나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음모론은 결국 내부의 균열을 외부의 침입으로 해소시키고 이것을 적대적인 공격성으로 전도시키기 위한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이렇게 체제가 가진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에서 이 틈을 메우기 위한 전도현상은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했던 것이다. 지젝은 파시즘 또한 “자본주의에 내재된 증상”으로서 이는 “우연한 일탈이 아니라 억압된 것의 복귀로 드러나며 그 진리로 들어가는 열쇠”라고 말한다. 이병창 교수는 이렇게 한 사회의 균열된 지점을 “은폐하기 위해 이 환상은 주로 외부 적의 침입이나 음모론을 퍼뜨리는 양상을 취한다”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결국 지젝이 시도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그 사회에서 “억압된 과잉을 드러내는 것이며, (체제) 전체에 그 허위성을 고발하는 보충물을 덧붙이는 것”이 된다.

 

레닌주의의 계승

지젝은 오늘날의 세계상이 ‘사회적 꿈의 종말’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실질적 사상의 자유는 현재 지배적인 자유민주주의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할 자유를 의미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다른 사회정치적 질서를 상상하려는 모든 시도를 미리 배제하고 있는 사회는 생각을 금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세상은 모든 가치들과 정보가 드러나고 있는 것 같지만, 또한 모든 실험이 가능한 것 같은 자비로운 세계처럼 보이지만, 작금의 현실은 “새로운 굴라크(강제수용소)”를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 레닌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연구나 레닌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판단은 새로운 세계에 대해 꿈꿀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병창 교수는 지젝이 레닌에게서 3가지 개념에 주목했다고 말하며, 그것을 ‘진리의 권리’, ‘당파적인 진리(경험적 유물론의 진리)’, ‘해방적 폭력’으로 요약했다. 먼저 진리로 나아갈 권리로 부를 수 있는 첫 번째 입장에 대해 살펴보자. 지젝은 레닌을 통해 “결과적으로 ……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이다. …… 우리는 진리 주장 자체를 감추어진 권력 구조의 표현으로 치부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로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다원주의, 탈식민주의, 다문화주의인데, 지젝은 이러한 경향들이 일견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존중하는 것 같지만 사실 신(新)보수 세력의 폭력적인 근본주의와 짝을 이루어 작동되는 것들이라고 비판한다. 상대주의가 극단에 이르면 다시 근본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우리는 미국 부시 정권의 근본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을 통해 이미 경험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또한 이병창 교수는 오늘날 각광 받는 ‘가상현실’이란 것도 비활성적인 것을 통해 물질적 실체를 박탈당한 현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 뿐이며,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관용’이란 것도 타자가 근본주의적이지 않을 때에만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짜 타자, 향락의 실체 있는 무게를 지닌 타자에게는 절대 불관용”적인 것이 오늘날의 포스트모던적 경향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화연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작업들도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진짜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일 뿐이며, “계속 무엇인가가 변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결국 현존하는 세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지젝은 성과 인종의 차별, 제3세계의 착취 등 ‘정치적으로 올바른 열정’을 통해 ‘급진주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소수자 운동들도 그 “급진적 변화의 필요성(만)을 가능한 한 많이 이야기하여 실제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도록” 하는데 기여한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보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를 거부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레닌주의는 사회를 가르는 분열과 모순을 정확히 이해하는 진리의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다. “탈근대 다문화주의적인 서사의 권리에 대한 레닌주의의 응답은 부끄러움 없이 진리로 나아갈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 우리는 정치가 사람들을 갈라놓는다든가 사회 조직에 분열을 가져온다는 상투적인 말에 대항하여 유일하게 실제적인 보편성은 정치적 보편성일 뿐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진리 과정의 보편성은 오직 사회조직의 한 가운데를 그렇게 가르는 모습, 근본적으로 나누어버리는 모습으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진리와 폭력

이병창 교수는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레닌의 ‘경험적 유물론’은 ‘의식 외부의 실재’가 아니라, ‘실재 외부의 의식’에 관한 강조라고 설명했다. 완전하게 구성된 세계가 비물질적인 의식을 예외로 하여 나타난다면, “세계 밖에서 모든 것을 포괄해서 인식하는 초월적 존재[神]”가 바로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레닌의 유물론은 객관적 실재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가 이미 내부에서 균열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의 존재가 세계의 존재론적 일관성을 보장하는 외적인 한계라면, “진정한 무신론은 신의 부재가 아니라 세계가 내적으로 균열되어 있음 즉, 세계의 부재”를 인식하는 것이 된다. 지젝은 이렇게 ‘정신적 외상을 입히는 외적인 만남에서 진리가 출현한다’고 말한다. 욕망의 근원인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경험하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경험적 유물론의 입장은 “내적인 균열을 통해 외부의 경험”을 만나는 것에 대한 ‘징후적 전치’라는 것이다.

레닌주의를 이렇게 독해한 지젝에게 ‘진리’란 이미 당파적인 것이다. 진리는 당파적 욕망으로부터 만날 수 있으며, 그것은 균열 속에서 외적인 마주침으로부터 떠오른다. 보편적 진리와 당파성이 상호배타적이지 않고 서로의 조건이 된다면 당은 계급의식의 대변자가 될 수 있다. “구체적 상황의 보편적 진리는 오직 철저하게 당파적인 입장에서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는 그 정의상에서부터, 어느 한 편에 치우진 것이다.

또한 그 진리의 인식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지젝은 형식은 내용에 대하여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를 구체화하는 원리 자체라고 말한다. 그래서 집단적 주체로서의 ‘당’은 이 형식의 한 예가 될 수 있으며, 여기서 당은 진리의 내용이나 실증적 지식의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형식에 의한 권위만을 가지고 있다. 이병창 교수는 지젝에게 있어 이 형식은 일종의 “해방적 잠재력이 분출되는 ‘리듬’이며, 진리는 이 형식으로부터 풀어져 나온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당’이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나 자신을 우리 안에 두겠다’는 동의 즉, ‘집단적 주체성’의 형식 자체에서 나온다. “레닌은 당을 역사적 개입의 정치적 형식으로 규정하고 마르크스를 형식화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형식화하고, 라캉이 프로이트를 형식화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끝으로 이병창 교수는 지젝이 레닌에게서 주목한 ‘해방적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 ‘자기 구타’라는 개념을 가져왔다. 그것은 “팔을 뻗어 진짜 타자와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타자의 고난과 고통에 눈을 가린 상태를 부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부수는 것이기에 폭력적이며, 내면에 있는 종속과 집착에 대한 거리두기이며 동시에 그것을 “두들겨 드러내는 것”이다. “권력 기제에 대한 종속 자체가 잉여 향유를 만들어낸다면, 종속에 대한 진정한 자각은 바로 우리가 거기에서 끌어내는 외설적인 과잉 쾌락을” 인식하는 것이다. 상징적 법의 세계 너머에 있는 외설적인 아버지처럼 국가나 민족, 자본이 포함하고 있는 과잉 쾌락은 해방적 잠재력을 풀어놓는 일련의 정치적 행위들에 의해 폭로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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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을 끝으로 16회에 걸친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의 모든 강의가 끝이 났습니다. 무엇보다 피곤한 저녁시간에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주시던 시민 수강생님들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로 묶일 수 있는 많은 사상가들의 번뇌와 이론을 쉽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셨던 강사 선생님들의 노고에도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그 명강의를 제대로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이 강좌 후기를 읽어주시는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골방에서 홀로 타오르다 금방 꺼지고 말 등불의 철학이 아니라, 막막한 이 시대를 멀리 밝힐 들불 같은 생각의 나눔을 지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 강좌에 많은 참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한철연 교육강좌 수료식이 진행되었습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한철연 교육강좌 수료식이 진행되었습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강 지 은(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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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주최한 교육강좌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연구자와 시민을 아우르는 강좌를 기획한 이번 강좌는 이론과 실천을 한데 어우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3월 25일 이성백 교수의 ‘들뢰즈의 행복론’을 시작으로 6월 17일 서유석 교수의 ‘연대의 철학을 위하여’까지 진행된 교육강좌에는 13명의 강사진과 30여명의 수강생이 열정을 가지고 참여한 덕분에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마지막 강연일에는 수료식이 진행되었으며 한철연 김성민 회장의 격려사와 이순웅 연구협력위원장의 감사의 인사가 있었다. 이날 교육강좌에 참여한 강좌생들에게는 수료증과 부상이 주어졌다.

이후에 한철연 교육부는 교육강좌를 이어나갈 후속강좌를 진행할 예정이다.

세상보기 메뉴에 [Q 선생의 閑談]이 신설되었습니다[공지사항]

〔ⓔ 시대와 철학〕은 세상보기 메뉴에 [Q 선생의 閑談]이라는 개인 칼럼을 신설했습니다. 본 칼럼은 본지의 이규성 편집위원장이

고정 집필할 계획입니다. 저희 편집진은 [Q 선생의 閑談]이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는 또 하나의 창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