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과 국민 사이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청춘의 서재]

박민철(건국대학교 강사)

개인적으로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재일조선인 3세와 몇 일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재일조선인을 나와는 조금 다른 삶을 사는 ‘같은 민족의 동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러 이야기 끝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렸을 적에 일본인 학생들과 많이 싸웠겠네요?” 서경식의 책을 통해 이 질문이 무지했음을, 아니 참으로 무례했음을 깨달았다.

“옛날에 탄광의 갱부들은 갱내 일산화탄소 농도를 알기 위해서 카나리아 새장을 들고 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카나리아는 사람보다 먼저 고통을 느끼고 죽음으로써 위험을 알린다. 식민지배의 역사 때문에 일본 사회에 태어난 재일조선인은 말하자면 ‘탄광의 카나리아’와도 같다.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역사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비유컨대 나의 저술은 질식해가는 카나리아의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 -서문에서-

서경식의 『난민과 국민 사이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은 그의 소개를 빌리자면 재일조선인론, 일본의 역사인식문제, 국가와 민족론 등에 대한, 한국인들이 읽었으면 싶은 평론 형식의 글을 모은 책이다. 서경식은 1951년 일본 쿄토시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라온, 자신의 규정대로 하면 ‘재일조선인 2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입장을 카나리아에 비유하며 재일조선인의 체험적 고통과 일본사회의 우경화에 대한 경고의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경고는 공격적이거나 선동적이지 않다. 오히려 타자에 대한 동정과 공감, 성실한 내부 성찰과 자기비판을 뿌리로 삼아 진지하고 담담한 언어로 표현한다. 그래서 따뜻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카나리아의 비명처럼 애절하다. 그의 글에서 느껴진 깊은 아픔과 좌절에 비하면 당시의 내 질문은 진정 무례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그 중 두 편의 짤막한 글을 소개하면서,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재일조선인인 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 ‘난민으로서의 재일조선인’

이 책에서는 ‘재일조선인’이 경험한 민족적 차별, 생생한 억압과 핍박, 처참한 아픔 등이 ‘이야기’되고 있다. 담담하게 고백하듯 서술된 서경식의 글은, 말과 글로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읽는 이로 하여금 가지게 만든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재일조선인이 겪었던 아픔과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과 더불어, 그들의 아픔을 잊고 있었다는 반성을 생겨나게 만든다. 어쩌면 그도 동일하게 재일조선인의 아픔을 철저하게 겪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조선에서는 19세기 말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역사, 이어서 남북의 분단과 대립, 그리고 냉전의 와중에 디아스포라가 생겨났고 식민지배의 직접적 산물로서 재일조선인이 ‘반난민’의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서경식은 재일조선인을 ‘일제 식민지배의 역사적 결과로 구종주국인 일본에 거주하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이라 규정한다. 하지만 뒤이어 그는 이 단순한 몇 마디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재일조선인의 규정을 개인적인 가족사를 통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일본의 패망 후 외국인등록령(조선인을 외국인으로 간주)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조선인의 일본국적 상실) 등과 함께 ‘조선’의 국적을 가지게 된 재일조선인의 국적취득 과정이 있었다. 당시 스스로를 국민으로서 귀속시킬 국가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들은 ‘조선’이라는 민족적 태생을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귀속될 수 있는 국가, 즉 조선이 존재하지 않았던 재일조선인은 곧 ‘국가로부터 쫓겨난 경험이 있고 여전히 국가로부터 내몰릴 위협에 시달리는’ 난민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난민으로서 재일조선인’들은 취업과 같은 사회 여러 부문에서 차별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 여러 설문조사를 통해 재일조선인의 일반적인 경향은 모국, 조국에 대한에 대한 애착이 희박해지고 일본 사회에 대한 애착이 널리 공유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서경식은 피차별자가 피차별의 체험을 표명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피차별자에게는 자기방어로 차별의 기억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반문한다. 나아가 누구나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 입에 맞는 음식, 친근한 벗에 대한 애착이 있기에 과연 이와 같은 것들이 ‘정말로’ 일본에 대한 애착일 수 있는지 묻는다.

그가 던진 질문, ‘난민으로서의 재일조선인’과 ‘일본 사회에 대한 애착’은 어쩌면 전자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후자는 우리가 편하게 믿고 싶었던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재일조선인’은 단순히 ‘민단계 재일조선인’과 ‘총련계 재일조선인’이라는 남과 북의 구분선에서만 존재했던 것 같다. 아니 ‘우리’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특히 ‘나’에게는 그러했다.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규정에 따라 ‘재일조선인’을 ‘남한 쪽의 민단계’와 ‘북한 쪽의 총련계’로 구분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형식적 구분이 얼마나 우둔했으며 무례한 것이었던지를 서경식은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배를 통해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식민’이라 분류된 재일조선인을, 패망 후 일본은 재차 외국인으로 분류했다.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주었던 억압과 고통을 ‘외국인’이라는 규정과 함께 부정해버렸다. 이것에 대해선 굳이 더 얘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 역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을 단순히 남과 북으로 분류했으며, 그것과 함께 재일조선인의 아픔을 의식적으로 잊고자 했다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이 생생하게 경험한 일제 식민지의 고통과 일본에서의 억압과 차별을 국가라는 형식적이고 단순한 틀 속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일본이 재일조선인의 차별과 고통을 ‘외국인’이라는 규정으로 부정했다면, 우리 역시 ‘남한’과 ‘북한’이라는 구분 속에서 부정해버렸다. 설령 의식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러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재일조선인의 아픔은 단순히 탄광노동자, 징집병, 위안부 등과 같은 특수화된 이미지로밖에 남아있지 않다. 현실의 아픔은 없어지고 고통의 이미지만 남았다.

현재 재일조선인은 연평균 5,500여명에 이르는 귀화로 꾸준히 그 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식민지배 역사 그리고 남북의 분단과 대립이라는 역사적 과정과 함께 생겨난 재일조선인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들은 단순한 ‘국가’라는 범주로 구분할 수 없는 생생한 역사적 존재이다. 특히나 역사 속에서 그들은 국가로부터 쫓겨난 경험이 있고, 여전히 국가가 보장하는 책임과 권리에서 차별과 외면을 당할 위협이 있는 존재인 셈이다. 재일조선인은 ‘난민으로서 재일조선인’이다.

그렇다면 ‘난민으로서 재일조선인’이 돌아갈 조국은 어떤 곳일까? ‘국민화’라는 구분 속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았던 이들에게 돌아갈 ‘국가’를 다시금 묻는 다는 것이 어쩌면 가당치않은 질문이라고 할지라도, 무례를 무릅쓰고 묻고 싶은 질문이다. 서경식은 “‘조국’이란 어떤 영역, 토지, 혈통, 혹은 고유의 문화나 전통이라기보다 오히려 모든 정치적 조건들 아래서 선택되는, 미래를 향한 태도의 결정”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즉 조선반도라는 토지, 혈통, 문화, 전통과 분리된 존재인 재일조선인에게 ‘조국’은, 과거 고통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선 안 되는 곳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조국은 ‘한국’, ‘북한’, ‘일본’, ‘기타’와 같이 현재적인 의미에서 어떤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미래 지향적인 조국의 모습으로 규정된다. 이건 어쩌면 재일조선인이 필연적으로 도착할 수밖에 없었던 조국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우리는 재일조선인의 조국을 어떻게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었을까? 혹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들 마음대로 조국을 그들에게 부여하지 않았던가? 재일조선인들에게 국가라는 범주적 도식 속에서 조국을 부여하고, 어떤 억압적인 족쇄를 생각없이 채웠던 것은 아닐까? 잔인하게 반성하자면 ‘국민화’라는 또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말이다. 이젠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을 현재 존재하고 있는 국가로의 범주화된 도식으로 내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미래의 모습으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

–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라’

제 1부 어느 편에 나오는 송신도 할머니는 1993년 일본에 거주하는 前 위안부로서는 처음으로 도쿄 지방법원에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송신도 할머니와 저자의 어머니는 동향同鄕에다가 동갑이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또한 식민지배의 억압과 핍박 그리고 전후 일본에서의 민족차별과 성차별을 공통적으로 경험했다. 서경식은 송신도 할머니를 통해 자신의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그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고통을 가슴 시리게 보여준다. 활자를 뛰어넘어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으로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저자에게 송신도 할머니는 또 다른 어머니이다.

이 부분의 글을 읽으면 나도 모르는 눈물이 비쳐 나온다. 한편으론 그들이 겪었을 참혹한 고통에 대한 동정과 공감, 다른 한편으론 그동안 위안부의 존재를 머리로만 알고 넘어갔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죄스러움 때문이다. 그녀들이 당한 행위에 대한 저자의 분노, 회한, 슬픔, 미안함 등은 그의 글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그녀들의 고통과 아픔을 비슷하게 경험한 재일조선인이기에, 서경식의 글은 그녀들의 감정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루 70여명을 상대해야만 했던 열 여섯의 송신도 할머니에게 가해진 처참한 폭력과, 일본인 가정의 허드렛일을 맡아 하면서 여덟 살의 저자의 어머니에게 가해진 민족적 차별과 억압에 대한 서경식의 글은 단순히 ‘가슴아프다’라는 단편적 동정심을 넘어서게 해준다. 처참한 고통은 커다란 보편성,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 동질감을 부여해준다. 같은 핏줄이어서, 같은 문화라서, 같은 언어를 씀으로서 갖는 동질감이 아니다. 아마도 극심한 고통에 대한 반발로서, 즉 고통받았던 이들에 대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게 될 보편적 연대감과 같은 말일 것이다. 같은 민족이란 “고통과 고뇌를 공유하면서 그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지향함으로써 서로 연대하는 집단”을 의미한다는 서경식의 말은 따라서, 송신도 할머니는 이 글을 쓰는 지금 나의 또 다른 어머니임을 자각하게 해준다.

우리가 쉽게 사용한 재일조선인이란 말을 일본인들은 가장 차별적으로 사용해왔다. 모욕당하고, 버림받고,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 외면당해왔던 사람들을 ‘재일조선인’이란 공식적 명칭 속에서 은폐시켜버렸다. 아니 고통과 고뇌를 공유하기는커녕, 불편한 진실처럼 그리고 남의 일인 양 쉽사리 외면해왔다. 비단 일본의 우경화를 여기서 다시금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 역시 가장 차별적인 그 단어를 ‘같은 동포’라는 무감각적 언어와 등치시켰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그들로서 박제화시켜버렸다. 어쩌면 우리들은 차별적 언어를 사용한 그들의 논리에 나도 모르게 포섭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서 얘기한 “어렸을 적에 일본인 학생들과 많이 싸웠겠네요?”라는 질문은 정말 무례한 질문이었다. 특히 나 스스로에게 절대적으로 그러했다.

“어머니를 향해 던져진 돌멩이를 이 몸으로 받으면서 ‘공식적 역사’가 묵살하고 은폐해온 어머니들의 역사를 위해, 어머니들과 함께 또 어머니들을 대신해, 자식인 내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자식인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카나리아의 비명을 질러야 한다. 이 책 3부의 제목처럼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리고 동시에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려는 스스로의 반성’이 필요하다. 서경식의 이 책은 나에게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3)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1.

마침내 다산초당 입구에 이르렀다. 자거라투스트라는 90년대 초에 학생들과 함께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돈이 없어 감히 관광버스를 빌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시골버스를 타고 포장도 안 된 시골길을 툴툴거리며 돌아다녔다. 학생들은 ‘철학기행’이라는 티셔츠를 만들어 입고 등 뒤에다가는 “실학사상을 찾아서”라는 구호를 적었다. 그때 버스를 기다리던 동네 사람들이 참 신기하다는 듯이 아니면 먹고 사는 게 빠듯한데 저런 놈들도 다 있네 하는 식으로 바라보던 것이 기억난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잠시 그때의 추억에 빠졌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학생들과 막걸리를 먹던 생각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학생들은 정말 노래를 많이 불렀다. 어디에서나, 어느 틈에서나 시간만 나면 학생들은 노래를 불렀다. 무슨 바위 덩어리나 돌멩이처럼 살자 라는 노래 말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지금도 의문이다. 왜 그때 학생들은 그렇게 노래를 불렀을까? 2000년대 들어 어느 덧 운동권 학생들이라는 개념이 사라질 무렵부터 이상하게도 학생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노래를 불렀지만 항상 노래방에서 다른 사람 앞에 나서서 그러나 혼자서 불렀을 뿐이지 길거리에서 합창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다산초당 입구에 내려 산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다산초당이 나왔다고 기억했다. 그래서 선배님에게 점심 먹기 전에 먼저 잠시 둘러보고 가자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산초당 입구에서 걸어 올라가는데 아무리 올라가도 다산초당은 보이지 않는다. 다산초당은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 산을 4분의 3정도 올라가서야 나타났다. 그때는 금방 올라갔는데…그게 벌써 이십년 전 자거라투스트라가 아직 젊었을 때의 일이니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씁쓸해 한다.

다산은 왜 이곳에 초당을 지었을까? 자거라투스트라는 그런 의문을 풀어보려고 다산초당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유배되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강진읍 내에 있었다 하니까 굳이 이 외진 구석, 이름 없는 산 중턱까지 와야 했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물론 산에서 흐르는 물이 찻물로 좋기도 하겠지만 어디 좋은 물이 여기뿐이었을까? 다산초당을 오른 쪽으로 조금 돌아가면, 다산이 아마도 강진만의 푸른 들판과 은빛 갯벌을 동시에 바라보았을 장소가 있어 지금 거기에 누각을 하나 만들어 놓았으니 다산은 강진만을 보기 위해 여기 머물렀을까? 아니면 다산에게 다도를 가르쳤다는 초의선사가 다산초당이 있는 산 오른 쪽 중턱에 있는 작은 절(백련사)의 주지로 잠시 있었다니 서로 교유하기 위해 여기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산의 부인의 친정이 해남(해남윤씨)에 있었으니 그쪽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땅이 거기 있어서 그리 갔지 않았을까?

자거라투스트라가 그런 물음을 선배님에게 묻자, 선배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거야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유흥준 교수가 고민할 문제라는 것이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고민하지 말라 했는데, 남이 고민해 줄 문제를 우리 철학자가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거라투스트라는 언젠가 가까이 지내던 어느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분의 주장은 굳이 스스로 공부할 필요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과 술친구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가 알면 나도 아는 것이니 말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국민관광지’ 다산 초당을 휑하니 둘러보고 시끄러움을 피해 다산이 강진만을 바라보았던 곳에 가서 강진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유배라는 형벌이 제법 괜찮은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오늘에 되살리면 어떨까? 그래서 주로 학자나 예술가들에게 특별 형으로 부과하면, 좋지 않을까? 물론 국가가 밥과 잠자리는 제공해야 하겠지. 그러면 전국의 많은 시간강사들이 유배 형을 받기 위해 이를 악물고 시대의 금기에 도전할 것이니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하겠는가? 은빛으로 빛나는 강진만의 갯벌을 바라보다가 자거라투스트라는 잠시 몽롱한 오수에 빠졌다.
다산 초당에서 본 강진만의 모습, 비가 오려 흐려 은빛으로 빛나는 강진만의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2

다산 초당을 둘러본지 두 시간째 어느새 오후 세시나 되었다. 이제 점심 겸 저녁을 먹을 차례인데, 기대해왔던 꼬막은 어디서 파는지, 바닷가를 차로 실실 돌아도 눈에 띠지 않았다. 그럼 강진 시내에 들어가면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무작정 강진시내로 들어갔다. 그런데 갯벌이 있다고 다 꼬막이 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강진 시내에서도 꼬막집을 발견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꽃게탕을 한다는 집에 들어 배를 채웠다.

그런데 강진 시내를 돌아다니는 중 시인 김영랑이 살았던 집이라는 표시가 있어 밥을 먹고 바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새로운 발견을 한다는데, 김영랑이 여기 살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영랑의 집을 지나칠 수는 없지 않는가?

찾아가보니 영랑의 집도 국민관광지가 된 것이 틀림없다. 다 똑같이 만들어진 한옥이 이제 너무 식상하다. 국민관광지의 한 가지 특징이 있는 것 같다. 한옥에 두 종류가 있는데, 초가3간이 있고 기와3간이 있다. 약간 엘리트적인 느낌이 드는 인물은 기와 3칸으로 반면 약간 비엘리트적인 느낌이 드는 인물은 초가 3간이 배정된다. 중요도에 따라서 3칸 4칸 5간정도 크기가 조절된다. 나철 선생은 초가3간이다. 반면 영랑은 초가 5간이다. 실제 시인이었던 김영랑의 집이 5간이나 되는 너른 집(현대식으로는 약 40평정도)이었을까 의심스럽다. 이것을 통해 국민들이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영랑의 집구석에 감나무가 있고 그 밑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실제 영랑의 시대부터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조경임에는 틀림없다. 아직 가을이 아니라 유감스럽게 장독대에 떨어지는 단풍잎을 볼 수 없었다. 세상에는 친화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화학적 친화성과 같이 이미지의 친화성도 있지 않을까? 얼음에는 팥을 쳐야지 콩가루를 칠 수야 없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감나무 잎이 단풍이 된다면, 그게 마루에 떨어질 수도 없고, 부엌에 떨어질 수도 없으니, 오직 장독대 외에는 다른 곳이 없지 않을까? 이런 장독대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누이라는 이미지로 이어지지 않을까? 영랑이 “오매 단풍들겠네” 라고 탄식할 때, 아마 그의 누이가 그 장독대를 닦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기에 저 산의 골짜기에서 시작한 단풍의 붉은 빛(골불)이 감나무를 거쳐서 마침내 장독대에서 일하던 누이의 발그랗게 상기된 얼굴에까지 번졌을 것이다.
모란과 감나무, 장독대가 어우러진 영랑의 생가의 마당

영랑의 집 앞에 비석처럼 생긴 바위에 그의 대표적인 시 ‘모란이 피기까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마당에는 모란이 심어져 있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이 시를 민족주의적인 시로 해석하는 것을 기억했다. 차라리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설명했더라면 더 아름다웠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장미과에 속하는 모든 꽃들은 꽃이 떨어질 때 마치 목이 벤 듯 통째로 떨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장미도 무궁화도 그리고 동백도 꽃이 떨어질 때는 그처럼 목이 벤 듯이 떨어져 후드득 떨어진 꽃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처참하여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다. 그 점을 기억하면 모란이 피기까지에서 영랑이 이렇게 읊었던 이미지가 눈에 떠오를 것이다.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인터넷으로 확인해 본 해학 이기의 생가, 국민관광양식 초가 4간이다. 나철 선생 생가-초가 3칸-보다 한 등급 높다.

3.

식사를 하고, 영랑의 집까지 구경하니 벌써 다섯 시이다.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다. 서울까지 가려면 여기서 대 여섯 시간은 가야 하니까 말이다. 드디어 자거라투스트라는 차를 돌려 서울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차 안에서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에게 물었다. 오늘 아침 해학 이기의 절명시를 선배님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속도로 운전은 단조롭고 지루하기 때문에 감기는 눈을 깨워야 하기 때문이다.

형, 해학 이기의 고향은 어디에요.

글쎄 전라도 김제 어디라고 듣기는 했는데, 정확히는 몰라.

그러면 가는 길인데, 김제에 들렀다 갈까요? 근데 김제 어딘지 알아요?

몰라. 또 거기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시간이 되나?

 

글쎄요. 빨리 가면 해 지기 전에 김제까지 가지 않을까요? 형, 나철 선생과 해학 이기는 서로 친했어요?

매천 황현이나 홍암 나철은 모두 왕석보의 제자이고 낮은 벼슬이나마 중앙의 무대에 출사를 했으니 서로 가까웠을 것으로 짐작돼. 그런데 해학 이기는 김제에서 공부하다가 28세 되는 때 과거 시험을 포기하지. 게다가 상처도 하고 부친도 돌아가시고, 집안에 먹을 것도 없어 전국을 유리걸식하거든. 물론 선비니까 이 집 저 집 사랑방에 떠돌았겠지. 이때 그는 기왕의 유교와 선비라는 제도적인 틀을 벗어던지게 되지.

그래서요?

그때 대구에도 갔다가 천주교 신부하고 논쟁하면서 ?천주6변?이라는 글을 작성하기도 했지. 그때가 44세 즉 1891년이야. 그런 가운데 나름대로 개혁사상을 정립하는데, 1892년 45세 때 순창에 머무르면서 ?질제고?라는 책을 쓰지. 질제란 그의 호야. 그 다음 해 46세 1893년에 황현을 만나. 황현이 그를 구례로 초청한 거지. 아마 그때 왕석보의 제자들 틈에 끼어 있었으니, 나철도 만나지 않았을까 짐작되는데, 그때만 해도 세상에 절망해서 은둔해 버릴 요량으로 호를 남악거사라고 바꾸어 버렸어. 남악이란 곧 지리산이 아닐까 해.

형, 그의 개혁사상의 핵심은 무엇이에요?

그게 참 재미있어. 이어지는 해 1894년에 알다시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잖아. 이기는 이 혁명 앞에서 은둔해 버리려던 결심을 깨고 거꾸로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가담해서 처음 단순히 부패청산을 목표로 한 이 혁명을 그야말로 진정한 제도적인 혁명으로 바꾸기를 기도했지. 그래서 전주에 입성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을 만나러 전주에 간 거야. 그래서 자기의 개혁사상을 토로했지. 그 핵심은 바로 토지개혁이야. 토지를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주자는 주장이야. 그 방식은 공전제라고 하는데, 요새 말로 한다면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주장이지.

와 그때 그런 주장을 했단 말이에요? 대단한데…

그의 토지개혁론은 그가 실학 사상가 정약용의 여전제나 유형원의 한전론 등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기 나름대로 제시한 이론이지. 실제로 그 후 60년 뒤에 이승만 시대 토지개혁이 유상몰수 유상분배였으니,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섰던 가를 짐작하지. 그는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을 몰랐지만 토지개혁이 부르주아 혁명의 핵심이라면 그가 바로 부르주아 혁명가이지. 그는 동학농민혁명의 힘으로 그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하려 했던 거지.

어마어마한데요. 소위 갑신정변도 꿈꾸지 못했던 혁명이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해학 이기를 다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전봉준이 만약 또 다른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김개남이 동의한다면 자기는 이기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김개남을 만나러 남원에 가는데, 이상하게도 더욱 혁명적이라고 알려진 김개남이 이기를 만나주지도 않고 체포하려 하지. 그래서 그는 간신히 탈출해서 도망하고 동학농민혁명 운동에 대해 실망하게 되었어.

김개남이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에요?

그건 몰라. 연구를 좀 더 해야 하는데… 하여튼 그러고 나서 동학혁명 실패 후 일본군의 강압에 의한 정부 개혁에서 무언가 기대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쳐보려 했지만, 한계를 깨닫고 3년 후 1898년 구례로 다시 내려와. 이때 그는 다시 황현 등과 어울리지. 1902년에는 ?급무8제의?라는 글을 써서 요긴한 개혁의 핵심을 고종에 건의하지만 동시에 시를 통해 고종의 무능과 대신의 비행을 비판했다가 수난을 당하지. 이때가 말하자면 재야 비판가로서의 활동이지.

그래서요?

그는 개혁운동에 점차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거든. 1904년2월 일제가 약간의 차관을 대가로 해서 항무지 개간권을 달라고 했어. 그때 황무지가 국토의 4분의 1정도니 엄청난 국토가 일제에 넘겨지는 거지. 이때 그가 나철과 더불어 보안회를 조직해서 반대하면서 일대 군중운동을 일으켰어. 그러자 정부는 이 보안회를 강제해산시키기도 했는데 어떻든 군중운동의 힘으로 일제의 간계를 막아냈어. 이 보안회가 나중에 대한자강회, 그리고 신민회의 핵심세력이 되고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니까 그의 역할이 짐작되지?

사상적으로 그는 입각점이 어디에 있어요? 여전히 유학자였나요? 실학 아니면 양명학?

그는 유학에서 잠시 묵자 쪽을 기웃거렸다가, 바로 양계초의 신민사상 쪽으로 넘어간 것 같아. 그 점에서 당시 개혁주의자들의 대세를 따른 셈이지.

 

4.

형 그러면 대종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어요?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데, 이 보안회 이후부터 그는 나철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활동하기 시작해. 1905년 을사조약 전에는 일본에 건너가 언론을 통해 비판운동을 하기도 하지만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1907년에는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조직 즉 자신회를 만들었어. 하지만 거사가 실패해서 주모자로서 그는 7년 형을 받았지만 고종이 감동받았던지 7개월 만에 풀려났어.

그런데요.

1908년 그는 ?일부벽파론?을 발표했지. 도끼를 들고 제도개혁을 주장한 거야. 그 도끼는 물론 내가 잘못이면 내 목을 도끼로 베라는 그런 의미이지.

정말 단호하군요.

그래 단호한 개혁사상가로서 그는 나철 선생 이상이야. 그러다가 1909년 나철과 더불어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창립하지. 그런데 1910년 나철 선생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자 그는 단학회를 발기하고 그 경전이 되는 ?진교 태백경?을 완성해. 그러고 나서 1909년 7월 1일 10 여 일간의 폐문절식으로 자진하고 말았다 해.

그게 좀 이상하네요. 왜 태백경을 지은 거죠?

글쎄 그건 좀 이상한데, 사상적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하거든. 최근 『환단고기』라는 책이 있잖아. 그건 고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에 가까운 것인데, 환인, 환웅, 단군의 시대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주장이지. 그 책이 최근에 발간되는 데는 복잡한 연원이 있는데 결국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책의 주요 내용은 해학 이기가 지었던 것으로 보여. 그렇게 본다면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화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면 이기는 단군을 역사적 영웅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해. 둘 다 민족애를 고취시키려는 시도였지만 종교와 역사라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지. 사상가 해학 이기로서는 종교에 부담을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야.

이렇게 선배님의 강의를 듣는 동안 어둠은 깊어갔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 도저히 김제에서 해학 이기 선생의 생가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바로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10시, 피곤이 온 몸을 급습한다. 종교와 역사, 머릿속에는 이런 개념들이 마치 헬리콥터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소리치면서 맴돈다.

혼란의 시간 속에서 [치유시학]

?

김성리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다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인식함을 의미한다. 현실의 시간은 순차적으로 지나가지만, 과거의 시간은 오히려 거꾸로 돌아온다. 되돌아 온 과거의 시간과 기억은 현재의 나를 성찰하게 하고, 그 성찰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행복했던 시간과 기억이 현재의 나에게 슬픔을 주더라도 비극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할머니는 자신이 결코 과거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를 회피하거나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정기적으로 만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의 이러한 태도는 나에게 혼란을 주었다. 너무나 담담하게 전하는 과거의 이야기들에 어느 순간 의혹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엄청 난 고통의 시간을 지나왔고, 현재도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인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진실 되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요시코와 마쓰시타와의 이야기도 사춘기 때의 상상이나 드라마를 보면서 지어낸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왜 숙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걸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할머니로부터 처음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김선생이가? 나가 마이 아푸다. 이번 주는 오지 마래이.” 전화선을 통해 힘없는 할머니의 소리가 들려 왔다. 뭐라도 물어볼 틈도 없이 전화는 끊겼다. 나는 급하게 할머니 집을 찾아 갔다. 마을은 여전히 고요했고, 이제 낯이 익었는지 동네 개들은 짖는 대신 꼬리를 흔들었다.

마을 가장 안쪽, 마을 입구에서 보면 지붕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낮게 자리 잡은 할머니의 집은 마을보다 더 고요했다. 대문도 없는 할머니의 집 마당에 들어서자 일찍 핀 코스모스 두 송이가 눈에 띄었다. 주인이 없는 방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잘 정리된 방을 생경하게 보다가 길을 사이에 두고 있는 앞집 아주머니께 갔다.

“큰일 날 뻔 했제. 어데로 간다고 혼자 휠체어를 탔을꼬. 중심을 못 잡아서 휠체어하고 같이 요 밑으로 굴렀다 아이가. 이장이 병원 차 불러서 싣고 갔다. 그래도 김선생 헛걸음 한다고 전화하대. 참 두 사람 얄궂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 몸에 힘이 빠져서 겨우 걸음을 떼어 할머니 방 앞에 있는 작은 툇마루에 앉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어둠이 내려앉는 마당에서

천천히 걸어도 마을 한 바퀴를 도는 데 30분이 걸리지 않는다. 그 마을 내에서 이동할 때에도 할머니는 전동 휠체어를 타야 한다. 할머니의 뭉툭한 발로는 중심을 잡고 걸을 수 없다. 할머니의 발은 언제나 붕대가 감겨 있었다. 방안에서도 할머니는 서지 않는다. 엉덩이로 움직인다.

마을 입구에 있는 교회에 갈 때나, 병원에 갈 때를 제외하면 거의 방안에서 생활한다. 교회에 갈 때에도 전동 휠체어를 타야 한다. 그래도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잠시라도 서서 움직여야 할 텐데 그때 미끄러지면 어쩌나 싶어서 발바닥에 미끄럼 방지 돌기가 있는 꽃무늬 양말을 몇 켤레 사 드린 적이 있다.

내 손으로 신겨 드리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한사코 싫다고 했다. 방바닥 한 쪽에 그때 사드렸던 양말 중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 양말을 신고 어디로 갈려고 했던 것일까? 지난 번에 왔을 때, “조금씩 운동을 하는 게 어떨까요?”했던 내 말이 너무 방정맞았던 것일까? 그 손으로 양말을 제대로 신기나 했을까?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나는 그저 그렇게 앉아 있었다.

마당은 어둑해지고, 나는 조금씩 밀려오는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네 살 때였던가.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어머니는 골목 입구에 있던 어떤 집에 들어가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 호기심으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골목길은 신기했다.

그때 어느 집에서 개가 짖었고, 나는 겁에 질려 소리 지르며 뛰다가 엎어졌다. 금방이라도 큰 개가 나를 덮칠 것 같은 공포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아이가 뛰어와서 돌멩이를 던져 개를 쫓아내고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무릎에 난 피를 닦아 주고 있을 때, 그 애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오더니 나를 알아보았다.

그 애는 내 손을 꼭 잡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돌아서 우리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집에서는 이미 난리가 나 있었고, 대문 앞에 퍼질러 앉아 있던 할머니 손에 끌려 그 애는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양 손에 두 꼬마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집에 가서 고마움을 전했고, 그 애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같은 나이였지만, 그 애는 나에게 언제나 든든한 보호막이었다. 그 애와 함께 있으면 두렵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가 전학을 가기 전까지 우리는 매일 아침에 만나서 저녁에 헤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14년 후, 남포동 골목길에서 “리야”를 큰 소리로 반복해서 부르고 있는 그 애를 만났다.

나를 부둥켜안고 팔짝거리는 그 애와 달리 나는 뭔가 어색했다. 그 날, 그 옛날처럼 그 애의 손에 이끌려 그 애의 집으로 갔을 때, 온 식구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 둘이 만났을 때의 이야기가 꽃을 피웠지만, 정작 나는 즐겁지도 않았고 유쾌하지도 않았다. 또 반갑지도 않았다.

다만, 부끄러웠다. 같은 나이의 친구에게 보호를 받아야했던 나약했던 유년의 그 기억이 부끄러웠다. 바보같이 다 아는 동네의 길도 모르고, 나보다 훨씬 작은 개에게 놀라 겁쟁이처럼 엎어져서 일어설 줄도 모른 채 울기만 했던 내 유년의 시간을 누군가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고, 현재의 내 모습을 신기해하는 그 분들이 좋게 다가오지 않았다.

할머니의 마당에 내려앉는 어둠을 보면서, 왜 할머니가 숙자와 연관된 기억을 말하려 하지 않는지, 요시코에만 머물러 있으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기억이 있다. 내가 어린 시절의 단짝과 함께 했던 시간이 부끄러워 감추고 싶듯이 할머니에게는 숙자가 감추고 싶은 기억인 것이다.

마주 보고 앉아서 함께 숙자의 시간으로 돌아가기에는 할머니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기억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할머니와 내가 나란히 앉아 함께 바라볼 수 없는 강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요시코와 마쓰시타의 이야기만이 할머니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인 게다.

 

할머니를 다시 보다

할머니가 처음 구술한 시가 생각났다.

 

고요한 이 밤

풀에 벌레들

아름다운 멜로디로

내 심장을 울리네.

 

현해탄의 사랑이여

옛 추억의 첫사랑

– 내 전부를 바친 임이여

그리워 그리워서

하염없는 눈물에

내 옷깃이 젖었네.

 

소리쳐 통곡할 때

초승달도 울고 있네.

 

이 밤도 뒹구르며

몸부림칠 때

눈물이 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네.

<여름밤 > 전문

 

마쓰시타는 할머니의 ‘전부를 바친 임’이다. 평생을 홀로 그리워하던 사람이고, 그 그리움 때문에 죄스러움을 떨칠 수 없었다. 고요한 밤이 되면 풀벌레 소리에도 생각나고, 초승달만 보아도 보고 싶어서 눈물 흐르게 하는 사람이 마쓰시타이다. 그에 대한 그리움은 마쓰시타를 만난 19살부터 80세를 넘기는 현재까지 할머니의 영혼을 기억 속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부림 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할머니에게 왜 ‘숙자는 말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할머니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 곳곳에서 기쁨보다 슬픔을 먼저 느끼며 살고 있다. 나는 할머니의 슬픔을 나의 관점에서 보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할머니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여러 번 본 방인데도 다르게 느껴졌다. 낡고 오래된 가구가 지키고 있는 방은 정갈했다. 새삼스럽게 할머니가 자기 주변을 매우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엌에도 처음으로 들어갔다. 역시 깔끔하고 허투르게 놓인 그릇 하나 없었다. 보일러실 겸 세탁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사용하는 사람 없이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하다못해 벗어 던져 놓은 옷가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 드린 양말만 한 구석에 없는 듯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옷차림도 유난히 정갈했다. 여름에도 그 작은 방에서는 시골 방에서 흔히 나는 냄새조차 없었다. 그것들이 할머니가 품위를 지키고 자존심을 잃지 않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나의 어리석음이여!

지금까지 할머니는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나, 나는 텅 빈 공간에서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할머니가 다쳤다는 말에 예상하지 못했던 나의 반응들, 온 몸으로 느꼈던 허탈함과 정신적인 공허감은 지금껏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할머니와의 이별 예감을 몸으로 느낀 것이다.

할머니는 이제 자신의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고, 이별의 시간을 위하여 주변을 정리하는 것일 게다. 풀벌레의 울음을 아름다운 멜로디라고 말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멜로디에서 심장을 울리는 슬픔을 느끼는 할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마쓰시타가 옛 ‘추억의 첫사랑’임을 알면서 시를 통해 현재의 시간 속에 나타내는 것도 정리의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과거 시간 속의 자신과 현재의 자기를 비교할 수 있다. 숙자와 현재의 할머니를 비교할 때 숙자는 행복과 슬픔의 경계선에 있는 인물이다. 한센 병이 찾아 온 이후 어머니와 잠시 함께 했던 시간 외의 그 많은 시간을 할머니는 홀로 현실을 버텨냈다. 남편이 옆에 있었지만, 내밀한 속내를 털어 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정신은 언제나 갇혀 있었다.

천형이라는 표현 외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병을 평생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몸과 마음의 상처를 혼자 다스려야 하는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할머니의 세상 바깥에서 오빠와 언니들이 애타게 찾았던 동생은 숙자였다. 현재의 할머니는 아니었던 것이다. 회상만으로도 따뜻하고 포근해야 할 기억이 현실과 연결되지 못할 때 그 기억은 슬픔이 된다.

내가 어린 시절 친구와의 기억을 누구와 공유하고 싶지 않듯이 할머니에게는 숙자가 공유하고 싶지 않은 기억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숙자에 대한 호기심을 내 마음 속에서 지워야 하지 않을까. 숙자를 의식하지 않아야 할머니의 마음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할머니도 삶의 짐을 조금은 가볍게 내 앞에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

#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과학, 그 불완전한 확실성 8-② [色 다른 책읽기]

손산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강사)

 

사례 1.

사건 번호: 04cv2688.

키츠밀러 대 도버 교육청(Kitzmiller vs Dover Area School District)

담당 법원 및 판사: 펜실베니아 중부 지방 법원, 존스(John E. Jones III) 판사

사건 개요:

2004년 11월 19일, 도버 교육청(피고)은 고등학교 과정 ‘생물’ 교과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보도 자료를 배포하고, 이를 이듬해 1월부터 시행하기로 한다. 간략하게 추려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윈의 이론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며, 따라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될 때마다 그 진위를 판단해야 한다. 다윈의 이론은 사실(fact)이 아니다. 다윈의 이론에 있는 틈새들은 그에 합당한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기에 존재한다. 이론은 광범위한 관찰들을 통합하는, 잘-다듬어진(well-tested) 설명으로 정의된다. 지적 설계론은 다윈의 견해와는 다르게 생명의 기원을 설명한다. …… 학생들은 어떠한 이론이던지 간에 열린 마음으로 대할 것이 권장된다.’ 따라서, 도버 교육청은 2005년부터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다윈의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을 동등한 지위에서 가르치도록 결정한다. 도버 교육청의 이러한 결정에 반발하여 키츠밀러를 위시한 학부모들(원고)은 교육청의 결정은 미국 수정 헌법 1조(미연방은 국교를 수립할 수 없다) 및 14조(법률에 따른 평등한 보호)를 위배하고 있기에, 그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를 제기한다.

판결 및 그 이유: 존스 판사는 139쪽에 이르는 판결문을 통해, ‘지적 설계론’을 교과 과정에 넣은 교육청의 행위는 레몬 대 쿠르츠만(Lemon vs Kurtzman 403 U.S. 602 (1971)) 판결이 제시한 일련의 기준 (레몬 테스트라 알려져 있다: 정부의 행위는 세속적인secular 입법 목적을 가져야 하며, 종교를 장려하거나 방해하지 않아야 하며, 종교와 ‘과도하게 얽혀있지’ 않아야 한다)을 통과하지 못했기에 미국 수정 헌법 1조 및 14조를 위배하고 있다고 판시한다.

사례 2.

1975년 어느 가을, 183명의 과학자들(18명의 노벨상 수상자 포함)이 바트 복(Bart Bok 천문학자), 로렌스 제롬(Lawrence Jerome 과학 작가), 그리고 폴 쿠르츠(Paul Kurtz 철학자)가 작성한 성명서에 서명을 한다. 이 성명서를 통해 이들은 ‘점증하는 점성학(astrology)의 영향력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점성학은 ‘신비적 세계관’의 산물로, 별들의 힘이 우리에게 미치기에는 ‘우리와 별들과의 거리가 너무 멀고’, 그 영향력은 ‘극히 미미하기에,’ 별들이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중 상당수는 사례 1과 2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과학’에 대한 생각을 아마도 재확인하지 않았나 한다. ‘그래,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은 이런 거야!’ 하는 안도감과 함께. 러셀의 종교와 과학을 읽고 난 사람들의 감상도 아마도 마찬가지이지 싶다. 선명하게 대비시켜 배열된 종교와 과학 사이의 ‘투쟁사’는 깔끔한 그의 문장처럼 아주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우리는 그렇게 ‘계몽’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사례 1과 2를 이용해, 러셀이 주장하는 종교와 과학 사이의 ‘투쟁’을 조금 더 깊숙이 파고 들어보자.

 

과학이란 무엇인가?

러셀은 과학을 ‘관찰과 그것에 기반을 둔 추론을 통해 우선은 세계에 관한 특정한 사실을, 그 다음은 그런 사실들을 상호 연결해주고 (운이 좋으면) 미래의 현상들까지 예측 가능하게 해주는 법칙들을 발견’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9쪽).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과학에 대한 정의’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의 정의가 사례 1과 2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사례 1에서 등장하는 ‘지적 설계론’은 우리가 ‘관찰할 수 없는 순간 (생명의 기원)’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에,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지적 설계론을 과학으로부터 추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의 대상을 ‘관찰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한정할 수 있는가? 사례 2의 경우는 ‘별들’과 ‘인간들’을 그 관찰의 대상으로 삼기에 일단 과학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점성학은 별들과 인간을 이어주는 ‘경험적 법칙’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며, 이를 토대로 미래를 예측하고자 한다. 때에 따라 점성학자의 예측은 성공하기도 하지만 ‘운이 없어’ 실패하기도 한다. 앞의 성명서에서 언급된 점성학의 ‘신비적 기원’ 또한 문제시 되지 않는다. 만일 그 기원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연금술에 기원을 둔 화학 또한 그 과학의 지위를 박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점성학을 과학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나아가 ‘관찰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과학자들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실 앞에서 (예를 들어 이론 물리학자들), 우리는 그들에게 교황이 호킹(S. Hawking)에게 했던, ‘빅뱅 이후의 우주의 진화를 연구하는 것은 괜찮지만, 빅뱅 그 자체 및 그 넘어는 연구하지 말라’는 충고를 되풀이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러셀을 따라, ‘정확한 실험적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철학적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98쪽)라고 선언해야 하는 것일까?

 

세속의 탄생: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시 사례 1로 되돌아가 보자. 필자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재판의 결과보다도, 미국의 입법가들이 그리고 존스 판사가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던 간에 사용하고 있는 ‘세속적이어야’ 한다는 문장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속적’이라는 표현은 ‘성스럽다(holy)’라는 표현과 대비되어 사용된다. 하지만 이 낱말들의 어원이 ‘전체로 완전함‘을 뜻하는 15세기 독일말 heil과 ’나이 먹음‘을 뜻하는 라틴말 saeculum에서 왔다는 것을 기억해낸다면 우리는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 낼 수 있다.

우리 기억 속의 인간들은 그들이 이 땅에서 보낸 시간의 양 만큼 그들을 둘러 싼 세상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했다. 종교 또한 이러한 인간의 열망 속에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으며, 그리고 성장한다. 역사 속에서 ‘종교’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이 땅에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믿음의 체계’로 자신을 발전시켜 나아왔다. 종교의 ‘영성 체험,’ 또한 ‘약물’을 사용하던 ‘세계 종교(world religion)’에서 약물 사용이 필요 없는 종교로 통합 발전해 왔다. 이러한 발전 과정의 연장선 위에서 우리는 ’종교의 세계 이해‘를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누는 (레위기 11장, 신명기 14장) 구분은 메리 더글라스(M. Douglas)의 지적처럼 ’완전한 것을 따라서 성스러운 것을 추구하던‘ 고대 유대인들이 ‘그들의 생물 구분법’의 경계선상에 있는 동물들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더글라스는 고대 유대인들이 비늘 없는 물고기를 ‘완전한’ 물고기로, 날지 못하는 새를 ‘완전한’ 새로 볼 수 없었을 것이라 지적하며, 만일 중동에 펭귄이 살고 있었으면 틀림없이 펭귄 또한 부정한 짐승의 목록에 들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러한 종교의 이해가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종교에서, ‘완전한’ 그들의 신관(神觀)과 ‘공존하는 그들의 세계 이해’를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성스러운 것으로부터 나이를 먹는, 따라서 변화하는, 덕분에 ‘세속적인’ 우리의 세계 이해를 구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과학: 경험 속의 완전함의 추구에서 불완전한 확실성의 추구로

‘실체substance는 통사론에서 나온 개념이며, 통사론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구조를 결정한 원시 종족들의 다소 무의식적인 형이상학에서 나왔다. 문장은 주어와 술어로 나뉘는데, 어떤 단어들은 주어 혹은 술어로서 존재하는 반면, 오직 주어로만 (매우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존재하는 단어들도 있는 것 같았다. 바로 이런 단어들 – 고유 명사가 가장 좋은 예인데 – 이 ’실체‘를 의미한다. 동일한 개념을 표현하는 일상적인 단어는 ’물체thing’ –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인격체person’ – 이다. 실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은 어떤 물체나 인격체가 의미하는 바에 정확성을 부여하기 위한 시도일 뿐이다’ (102쪽). 이제 우리는, 다소 두서없이 등장한 러셀의 이러한 지적을 그의 ‘종교와 과학’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갈등의 예들과 ‘함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을 ‘경험 속의 완전함의 추구 (성과 속의 일치)’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으로부터 속을 분리해 냄으로써 갈등의 해소 또한 간단하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함이 인간 지식의 역사라고, ‘불완전한 확실성’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세속적인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무리 있는 표현은 아닐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사실 오류라는 영원한 희극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103쪽)라는 러셀의 표현은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부언:

참고로 미국 수정 헌법 1조 (국교 수립의 금지)와 관련된 판례들 중, 멕레안 판례(McLean vs Arkansas Board of Education 1982)가 처음으로 ‘과학’에 대한 전문가 증언을 ‘비’ 과학자인 마이클 루스(Michael Ruse)로 부터 구했다 (그는 과학 철학자이다). 점성학과 마찬가지로 과학자들 사이에서 과학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 미국 ‘초능력 협회’ 또한 미국 과학 진흥 협회(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협회는 황우석 사건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SCIENCE’라는 학술지를 펴내고 있다)의 준회원 기구로 아직까지(2011년 현재) 남아 있다.

참고 문헌

메리 더글라스 (1997 [1966]) 순수와 위험. 유제분, 이훈상 옮김. 서울: 현대미학사.

버트런드 러셀 (2011 [1935]). 종교와 과학. 김 이선 옮김. 파주: 동녘.

Bok, Bart J., Jerome, Lawrence E., and Kurtz, Paul (1975). “Objections to Astrology”. The Humanist. (September) 4-6. available at http://psychicinvestigator.com/demo/AstroSkc2.htm

Tammy Kitzmiller, et al vs Dover Area School District (400 F. Supp. 2d 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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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여덟 번째 책은 버트란드 러셀의 <종교와 과학>(김이선 옮김, 동녘 펴냄)으로, 이한오(성공회 신부), 손산(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강사), 오상현(상지대 강사)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

 

종교가 종교답고 과학이 과학다운 세상을 그리며 8-③ [色 다른 책읽기]

오상현 (상지대 강사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우리 집 종교의 역사는 좀 화려한 편이다. 아버지는 결혼 전에 한동안 남묘호랑게교(SGI)에 심취하셨고, 어머니도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흔치 않은 종교인이셨단다. 그런 두 분이 만나 결혼을 하셨고 그리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종교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를 얻으셨다. 얼마 전까지도 이모 한 분의 종교는 대순진리교였고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작은아버지의 가족들은 원불교도시다. 다양한 종교인을 친인척으로 두었던 과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포부도 당당했던 철학과 신입생 시절에 내 관심은 온통 ‘종교철학’에 있었다.

 

종교와 과학, 그 진부한(?) 이야기

아직도 서점에 가보면 ‘종교와 과학’에 관한 신간들이 종종 눈에 띈다. 대개 종교와 과학을 대립적 구도로 나누고,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 승리를 안겨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 대부분이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진화론’ 연구도 상당히 ‘진화’했다. 이에 응전하기 위해 종교도 ‘창조론’에서 ‘지적 설계론’ 등의 대항마를 만들어 전쟁을 치렀지만 대부분의 승리는 과학의 몫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과학적 성향은 신중하고 잠정적이고 점진적이다. 자기가 획득한 최고의 지식조차도 전적으로 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이론은 머지않아 수정되어야 하며, 이 필연적인 수정 과정에는 연구와 토론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219p.)

‘종교’와 ‘과학’은 사실 서구 사회를 이룬 두 가지 핵심 축이라 할 수 있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헤브라이즘’은 신 중심적이고 초월적인 기독교 사상을 말하고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에 기원을 둔 인간 중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를 일컫는다. 러셀도 이런 관점에 동의하고 있다. <종교와 과학>에서 그는 ‘종교’를 기독교에 한정하고 있으며 ‘과학’을 합리적 토론과 자유로운 연구를 통해 언제든 수정 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요컨대, 종교와 헤브라이즘, 과학과 헬레니즘은 치환이 가능한 것이다.

길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중국인과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일본인이 대화의 두 주인공이다. 만약 이들이 특정한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하고 있노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쉽게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의미 있는 논쟁이 오고가기 위해서는 먼저 말이 통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의 논쟁이 진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삶은 늘 ‘판단’의 연속이다. “지난 주 ‘나는 가수다’의 1위는 박정현이야.”라는 식의 판단은 ‘다시 보기’를 통해 참이냐 거짓이냐를 가려낼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이것을 ‘사실판단’이라고 한다. 반면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예쁜 여배우는 송혜교야.”라는 판단은 그야말로 자기 주관적 호불호(好不好)에 의해 내려지는 판단으로 우리는 이것을 ‘가치판단’이라고 한다.

‘가치’의 문제는 과학의 영역을 넘어 전적으로 지식의 영역 밖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이것 혹은 저것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 개인적인 감정에 상관없이 언제나 참인 어떤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204p.)

러셀의 주장대로 ‘가치’의 영역은 과학이 추구하는 ‘사실’의 영역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앞서 종교와 과학의 논쟁을 진부하다고 혹평한 까닭은 두 주장이 실은 전혀 다른 영역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하려 애쓰는 모습이 마치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으면서 합의점을 찾으려는 우격다짐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논쟁이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주장을 말이나 글로 펼치면서 다투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논쟁의 당사자는 상대의 합리적 이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래야만 ‘논쟁’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논쟁’은 합리적이어야 하며 러셀의 표현처럼 ‘과학적 성향’이 필요한 영역이다. 종교가 늘 과학과의 논쟁에서 지는 까닭은 싸움의 규칙 자체가 과학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 무장한 근대 이후의 사람들에게 ‘가치판단’의 문제를 설득하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무모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러셀이 이 책을 쓴 진짜 이유

서양 근대의 합리주의는 데카르트에서 비롯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명제로 유명한 그는 『방법서설』에서 “학문에서 어떤 확고부동한 것을 이룩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견해를 벗어나 아주 기초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지금껏 믿어왔던 경험적 사실들을 모두 부정하고 명석하고 판명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라는 것이다.

과학적인 방법을 제외하고는 진리에 도달하는 어떤 다른 방법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감정의 영역에서 종교의 근원을 이루는 경험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경험은 잘못된 믿음과 결함하여 선뿐만 아니라 많은 악을 낳았다. 그런 결함에서 풀려난다면, 바라건대 오직 선만이 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166p)

러셀은 종교와 과학의 논쟁이 단지 무의미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물론 그가 데카르트의 전통 위에 서 있는 인물이었고 그로 인하여 <종교와 과학>의 대부분에서 과학의 손을 들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종교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만 종교가 잘못된 믿음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많은 악에 대한 우려가 있었을 뿐.

러셀은 초기에는 수학이나 논리학, 과학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이와 관련한 많은 책들을 집필했다. 또한 철학사가로서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고 있는 <서양철학사>를 남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윤리학이나 정치?사회?교육 등의 분야에도 전문서적을 펴냈으며 급기야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셀이 오늘날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것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거나 학문에 대한 욕심과 노력이 남달랐음에 있지 않다. 그의 삶이 던지는 묵직한 메아리는 그가 단지 배우고 익히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실천으로 옮기려한 지식인이었다는 것에 있다.

<종교와 과학>이 의미 있는 까닭은 러셀이 단순히 종교와 과학의 다툼을 나열하고 과학의 승리를 언명하고자 함에 목적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에는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가 담겨있다. 핵무장을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던 평화주의자였고 옳지 못한 국가권력에 맞서 ‘불복종운동’을 주장하기도 했던 그의 실천적 행위는 그 내면에 자리했던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필연적이고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이다.

오늘날의 위협은 정부로부터의 위협이다. 혼돈과 무질서라는 현대적 위험 요소 때문에, 오늘날 정부는 이전에는 교회의 권위에 부여됐던 신성불가침의 특성을 이어받았다. 그러므로 낡은 형태의 박해가 사라졌다는 것에 만족하며 자축하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박해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자를 비롯하여 과학적 지식을 가치 있게 여기는 모든 이들의 명백한 의무라고 할 수 있다. (223p.)

새로운 진리는 종종 불편하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이 그렇다. 그러나 새로운 진리야말로 잔인함과 편협함으로 얼룩진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총명하면서도 방종한 우리 인류가 이루어낸 가장 중요한 성과물이다. (224p.)

러셀은 ‘신성불가침의 특성을 이어받은 새 권력들’을 ‘신흥종교’라고 불렀다. 러셀이 비유한 ‘신흥종교’는 오늘날 ‘국가 권력’이나 ‘자본 권력’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러셀은 이런 ‘신흥종교’가 자행하는 수많은 악행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합리적 이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과제라고 생각했다.

자기계발서가 넘쳐나고 있는 요즘 누군가 말했다. “누가 이 좋은 말들을 몰라서 이러냐? 실천하기 어려워서 그러지.”라고. ‘앎’이 진정한 ‘앎’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 간단하면서도 울림이 강한 진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현자(賢者)들에 의해 회자되었다. 그러나 실천은 늘 어려운 법?!

 

반성이 없다면 미래도 없다.

공자님 말씀을 들어보자.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政)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답하길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논어』, 「안연」)

위에서 공자가 강조한 것은 ‘자기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각자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때에 비로소 정치가 바르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이른바 공자의 ‘정명(正名)’이다. 나는 종교와 과학의 미래도 ‘정명하는 것’에 그 운명이 달려 있다고 본다.

예수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그것도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종교를 이유로 자행된 전쟁들과 그로 인해 희생된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역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당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잘못된 ‘이웃사랑’을 펼쳤던 그들을 칭찬하실 수 있을까? ‘종교’란 삶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안식을 주며 권력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잊지 않고 따스한 온정을 베푸는 사회의 정화장치가 아니던가?

과학은 인간의 수고를 덜기 위해 발전해왔다. 그것도 선택받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해 준 것도 과학의 힘이고, 짧은 시간에 멀리 데려다주는 것도 과학의 힘이다. 그러나 대량살상무기도 과학의 힘이고 방사능물질 오염도 또한 과학의 힘이다. 오늘날 과학은 이처럼 인간을 위하던 초심을 잃고 자본이나 권력의 노예로 전락하기도 했다.

종교가 신성하고 고귀한 겉옷을 벗고 낮은 데에 임하는 것, 다툼이 있는 곳에 사랑을 전하고 아픔이 있는 곳에 위로를 건네는 것, 그것이 종교다운 것이며 종교가 지향해야 하는 길이다. 과학도 이제 권력과 자본의 노예에서 벗어나 ‘돈 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선택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인류 모두’를 위해서 말이다.

종교건 과학이건 무턱대고 믿는다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까닭이 ‘사유함’에 있다면 자기가 믿는 바―그것이 종교건 과학이건―가 혹 저지를지도 모르는 잘못을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종교가 종교답고 과학이 과학다운 세상은 아직도 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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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여덟 번째 책은 버트란드 러셀의 <종교와 과학>(김이선 옮김, 동녘 펴냄)으로, 이한오(성공회 신부), 손산(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강사), 오상현(상지대 강사)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

기억 속의 이름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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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유년의 이름, 그 따뜻함

내가 배우처럼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을 놀이터로 여기고 즐길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때 이름은 묘한 힘을 지닌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름에 쓰이는 문자의 뜻에 의해 삶의 방향이 결정되기도 하고,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에 의해 이름이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믿음을 은연 중에 가지고 있다. 더러는 이름을 바꾸면 미래가 변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내가 어릴 적에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리야”라고 불렀다. 정말 나는 내 이름이 ‘리야’라고 믿었으므로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에서 선생님께서 “김성리”를 부를 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꿋꿋하게 내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출석부가 접히고 ‘탁’ 소리를 내며 교탁 위에 내려지는 순간, 놀랍게도 한 남자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리야 이름 안 불렀는데예”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특이한 병 치례와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나는 꽤 알려진 아이였기 때문에 처음 만난 선생님과 많은 아이들은 남자 아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거의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에 나는 당황했고, 내가 호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키가 크고 마른 몸집을 하셨던 선생님께서는 천천히 나에게로 와서 “네 이름은 김성리다. 잘 기억해라”하시며 머리를 만져 주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아이들은 비실비실 웃었고, 용감했던 그 남자 아이는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 헝클어져 있었고, 대문 앞에서 할머니가 “리야”라고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게 되었다.

그날 오후에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거제도 내의 다른 지역에 계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생을 데리고 오셨다. 나는 심각하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지만, 모든 가족들은 큰 소리로 웃기만 하고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은 그 자리에 내가 없는 것 같은 착각에 내 머릿속은 더 어지러웠다.

어둑해지는 데도 불구하고 나는 뒷마당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슬프고 외롭고 뭔가 분하고 억울했다. 아버지가 내 앞에 앉아 막대기를 집어 흙 위에 글자 세 개를 적어서 내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큰 소리로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 가며 읽었다. “김, 성, 리, 네 이름이다. 리야는 우리가 너를 이뻐해서 부르는 이름이고”

그날 이후 지금까지 “리야”라는 이름은 나에게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한 기억이 되었다. 나를 “리야”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나의 성격이 어떠했으며 어떤 병을 앓았는지 안다. 심지어 내가 한글을 언제 읽고 쓰게 되었는지까지 안다. ‘리야’라는 이름 속에는 내 유년의 시간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놓아버릴 수 없는 유년의 기억

‘이숙자’라는 이름에는 할머니의 유년이 들어 있다. 할머니에게는 언니가 두 명, 오빠가 한 명 있었다. 오빠와 언니들은 할머니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이미 타지에서 학교에 다니거나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고향에 남겨졌던 여동생을 수소문하여 연락이 닿았음을 볼 때, 할머니는 부모형제의 사랑을 받은 막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빠와 언니들은 일본에서 살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일본에서의 터전을 미처 정리하지 못해 귀국을 미루는 사이 국교는 단절되어 어린 동생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현실적으로 형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잊다시피 살았지만, 오빠와 언니들은 막내를 포기하지 않고 할머니를 찾았다.

“오빠는 안 만날라쿠데. 언니가….둘이 나한테 편지가 왔데….”

“오빠가 실망이 컸다 아이가. 언니도 실망하고….”

“실망 안 하겄나. 실망했제. 마이 실망했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오빠는 병든 여동생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때로는 끼니 잇기가 힘에 겨운 생활이었기에 오빠가 정기적으로 보내 주는 돈은 유용했다. 언니들은 간헐적인 도움을 주는 대신 잦은 전화로 동생의 안부를 챙겼다. 오빠는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까지 여동생을 내버려둔 세월과 고향 사람들과 세상을 용서하지 않았다.

“몇 해 전에 올케라는 사람이 왔다갔다. 오빠가 죽었다카더라. 일본 여자데. 오빠가 너무 마음 아파했다고….보고 싶어 했다고….”

“그래서 자기가 왔다고 하더라. 올케가 오빠 대신 나 보고 가서 말해 주겠다고. 흐응…. 내가 어찌 살고 있는지, 내가 어떤 모습인지 말해 주몬 죽은 오빠가 아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마치 고요한 마당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주위의 사람이 죽어서 가마니에 둘둘 싸여 갈 때도 할머니는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빠의 죽음은 다르게 다가왔다. 자기의 유년의 한 켠에 구멍이 뚫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쁘고 어리게만 여겼던 막내 여동생의 고단한 삶은 뒤늦게 오빠의 한이 되었고, 그런 오빠에게서 할머니는 보이지 않는 사랑을 느꼈다. 끝까지 여동생을 만나지 않은 것은 오빠의 가슴 아픈 배려가 아니었을까. 매달 오던 돈은 오빠 사후에도 한 동안 보내져 왔다. 올케의 말에 의하면 오빠의 부탁이 있었다고 한다.

“인자 돈이 안 온다. 올케도 죽었는지 아니면 어디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있는지. 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돈 보낸다고 하데. 오빠가 죽기 전에 신신당부하고 부탁했다 카데.”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 자체가 에너지가 되어 현재까지 지속된다.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유년기의 행?불행을 떠나 언제나 부모님의 사랑과 형제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내가 ‘리야’라는 이름만으로도 외롭지 않듯이 ‘숙자’라는 이름에는 이제는 할머니만이 알 수 있는 관심의 시간들이 살아 있는 것이다.

 

내려놓을 수 없기에 고통이 되어버린 과거의 이름

숙자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동안 집에서 놀았다. 조신하게 살림살이를 배우고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나누는 생활에 싫증이 나면서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마침 집안에 서울에 가서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여고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은 더 간절했다. 일찍 객지에 나가 자기 앞가림을 하는 오빠와 언니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집안이 좀 괜찮았다. 그래도 울산에는 학교가 없는 기라.”

집안 살림살이가 괜찮은 덕에 숙자의 여고 진학은 쉽게 결정이 났고, 숙자는 시험을 쳐서 부산공여에 진학했다. 부산에 하숙집을 정해 놓고 토요일이 되면 울산 집에서 지내다 일요일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되었지만, 숙자의 자긍심은 나날이 높아갔다. 일제 강점기에 여고를 다니는 여성이 많지 않았기에 교복을 입고 기차를 타면 한복을 입은 또래 여성들의 부러운 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숙자는 할머니의 기억 속에 교복 입은 여고생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1940년대의 여고생, 단발머리를 하고 책가방을 든 얌전한 여고생의 이미지는 어쩌면 할머니의 영혼에 남아있는 또 다른 상처일지 모른다. 할머니는 ‘단발머리’를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했다.

“그때는 전부 단발이라. 단발머리하고 있으모 공여생인기라.”

“하모. 단발머리하고 교복입고 기차 타 봐라.”

한 때는 단발머리가 억압과 획일화된 교육의 실체로 지목되어 지탄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 현실적인 시간 속에서도 할머니 기억 속의 단발머리는 꿈 많던 공여생인 숙자와 동일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숙자는 이제는 절대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기억 너머의 지층 깊숙한 곳에 홀로 남겨져 있다.

숙자로부터 60년도 더 되는 시간이 흘러갔고 많은 사건들이 지나갔다. 한 여인의 곁으로 셀 수 없는 바람과 흙이 마치 먼지처럼 날아갔다.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고 지고 또 피었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도 태어나고 죽기를 수없이 반복했던가. 그러한 시간 동안 숙자는 할머니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적으로 회피하고 부정하는 것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할머니가 숙자를 기억 속에 묻어 놓고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것은 유년의 기억이 현재는 고통으로 재현되기 때문이다. 숙자가 꾸었던 그 많던 꿈들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소멸되었고, 숙자는 바로 할머니의 유년기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숙자는 할머니의 타자였던 것이다.

 

저 푸른 하늘 밑에는

내 고향 내 살던 집이 있겠지.

 

집옆에서는 올해에도 살구나무에

활짝 핀 살구꽃이 피었겠지

마당 뒤에 있는 감나무에서

감꽃이 떨어지면

바가지로 주워담아

실로 꿰어서 목에 걸던

그 어린 시절이 그립구나

– <고향> 부분 –

숙자가 살던 집에는 큰 감나무가 있었다. 숙자는 하얀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었다. 어린 적 우리 집 뒷마당에도 감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크지 않아 감꽃이 많이 열리지 않아서 나는 이웃집 마당에 떨어져 있는 하얀 감꽃을 주워 목걸이로 만들었다. 감꽃은 금방 시들었지만, 그 향기는 오랫동안 코끝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병든 몸으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에 돌고 도니/ 부평 같은 신세가 되어/ 어언간 60여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빨라 유수와 같으니/ 내 청춘은 흘러흘러/ 머리에는 벌써 백발이 휘날리(<고향>)”고 있다. 병은 숙자와 할머니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렸고, 숙자는 기억 속에 묻히게 된 것이다.

 

과거를 말해주는 흔적, ‘숙자’.

숙자라는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으나 할머니는 숙자로 살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대신 풀어 나갔다.

 

삽짝거리로 나와서

돌다리를 건너

사랑하는 모교에 가고 싶구나

칠계단을 올라가면

우편에는 벚꽃나무와

좌편에도 벚꽃나무가

엉겨 붙어서 봄이 되면

벚꽃이 장관이더라.

(……)

친구들과 사진 찍던

그 추억이 떠오르며

선생님과 기념촬영도 했건만

모교가 잊혀지지 않고

사무치도록, 꿈속에서도 그리워지네.

 

언제나 가보리

언제나 보고 싶어

먼 산만 바라보네.

– <고향> 부분 –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숙자는 결코 지워진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리웠고 언제나 돌아가고 싶었지만, ‘내가 숙자’라고 말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먼 산만 바라보’듯이 그렇게 숙자를 가슴 깊이 묻었던 것이다. 한 사람에게는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그 과거의 과거가 함께 있지만, 누군가는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기억 깊숙이 묻어버리기도 한다.

??????????????????????????

#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청춘의 서재]

김 범 수(한국철학사상 연구회 회원)

 

며칠 전 머리를 하러 갔다. 동네 미용실이란 원래 아줌마들의 수다 공간이다. 나는 남자인 관계로 그 수다에 끼지 않는다. 단지 구경만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네 미용실을 갈 때면 사람이 없는 시간에 주로 간다. 그런데 이날은 이미 손님으로 두 명의 아줌마가 있었다.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구석에 앉아 있었다. 무려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책을 보는 척하면서 귀는 아줌마들 수다에 향해 있었다. 그렇지만 별로 유익한 정보는 없었다. 드라마 얘기. 학원 선생님 얘기. 아이 잘 키우기 위한 수다도 있었지만 드라마에서 잘 생긴 사람 얘기는 왜 저렇게 하는지… 수다를 듣느니 차라리 여성 잡지를 보는 것이 나을 것도 같았지만, 뭐 자리가 자리인지라 여성 잡지 보기도 민망한 상태였다. 그저 가지고 다니는 책의 책장만 넘기고 있었다. 아줌마들이 가고 내 차례가 되자 미용사는 나 역시 수다의 대열에 합류시키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수다에 끼고 싶지가 않았다. 가오가 안서지 않는가? 아저씨가 아줌마 수다에 동참하다니… 눈치를 살피던 미용사는 친근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책 많이 읽으시는 것 같은데 가실 때 제가 읽을 수 있는 책 좀 추천해 주세요.”

에고. 또 골치 아프게 됐군. 책 추천을 안 하자니 그렇고 하자니 그렇고. 참 거시기한 상황이다. 내가 아는 책은 어려운 책인데 그런 책을 추천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안 하면 매우 불친절한 사람처럼 보이고. 그 여자는 분명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교 언어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형식적인 얘기를 넘어서 진정성마저 느껴지는 그 한 마디가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무슨 책을 추천해야 하지? ‘차라리 영화를 추천하라고 하지. 왜 하필 책이야?’ 속으로 뇌까렸다.

영화 <방가방가>가 생각이 낫다. 왜일까? 그리고 조금 오래 된 영화지만 <바리케이트>라는 영화도. 두 영화 모두 외국인 노동자가 출현한다. 그 외에 공통점은 없는 듯하다. 오히려 선명하게 차이점이 부각된다. 이런 저러한 생각을 하다가 정작 미용사의 요구에는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여자랑 수다를 떨어줘야 예의일 것 같다는 생각만 했다. 그렇지만 책 얘기는 싫었다. 이럴 때 화제 전환이 최고다. ‘밥 먹었어요?’

아! 그런데 여기에 책을 소개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화제 전환도 되지 않는다. 그냥 노골적으로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젊은이가 젊은이에게 책을 소개한다. 괜히 낯간지러운 짓하는 것 같다. 그래서 두 편의 영화와도 관련되면서 불쑥 떠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요즘은 할 수 없지만 하릴없을 때 흔히 하는 놀이가 있다. 먼저 tv 앞에 앉는다. 리모컨으로 tv를 켠다.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린다. 한 바퀴, 두 바퀴. 이렇게 놀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어느 날인가 여느 때와 같이 TV를 켰다. 채널 돌리기 놀이를 하다가 채널을 고정한 곳은 다큐멘터리.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일상을 소개하고 있다. 최소한의 가릴 곳도 제대로 가리지 않은 그들의 일상이 재밌게 다가왔다. 늘어진 여성의 가슴도 여과 없이 들어왔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아니 공중파에서 여성의 가슴이 노출되어도 되는 거야?’ 만일 저 모습이 서양 여성이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난리 났을 법도 하다. 여성에 대한 시각만 그럴까?

몇 해 전부터 한국계 외국인, 정확하게 보자면 서양인의 피와 섞은 남자 배우들이 인기가 좋다. 다니엘 헤니, 데니스 오, 줄리엔 강 등. 키도 크고 잘 생겼다. 여성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하다. 이들이 혹시 적당히 벗고 나와 준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드라마에서 이들의 샤워 신이라도 있다면, 완전 계 탄 날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왜 원주민은 안 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백인과 유색인에 대한 상상적 이미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우리의 심층 속에 자리잡고 있다. 너무도 당연하게 느끼는 것을 보니.

이런 얘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 있다.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그것이다. 이 책은 흔히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이라고 한다. 말이 어렵다. 탈식민지주의라고 말해야 할까? 그런데 이 말도 어렵다. 우리가 식민지가 아니기에 무슨 해괴한 소리인지.

먼저 프란츠 파농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프란츠 파농은 서인도 제도의 한 섬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이후 알제리로 이동해서 여기서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면서 알제리 독립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파농은 알제리가 독립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알다시피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를 받아왔다. 전세계에서 프랑스만큼 자유를 추구하는 나라가 얼마나 있을까? 그럼에도 프랑스의 지식인들도 알제리의 독립에 대해서는 반대하거나 침묵했다.

파농의 입장에서 보자면 알제리 독립에 침묵하던 프랑스 지식인들의 모습이 싫었을 것도 같다. 그렇지만 정작 그가 더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흑인들의 사고방식이다. 일종의 식민주의 심리학이 팽배해 있었던 때문이다. 피부색과 관련한 열등 콤플렉스가 집단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너무도 심각해서 하나의 신화가 된 상황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현상을 분석하고 내면화하는 것이리라.

언젠가 빈민운동은 빈민과 싸워야 하고, 여성운동은 여성과 싸워야 한다는 말을 들을 적이 있다. 빈민이 갖고 있는 패배의식, 도저히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좌절감. 이런 의식으로 팽배해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도 사치에 불과할지 모른다. 가난이란 경쟁 자본주의에서 어쩔 수 없는 장식일지도 모른다. 그 의식을 꺾지 못하면 어떤 노력도 허망할 수밖에 없다. 파농도 식민지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일차적인 상대는 프랑스가 아니라 검은 피부의 인간들이었을 것이다. 흑인도 열등감에서 벗어나서 백인들(프랑스인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고 싶어도 뼛속까지 침투해 있는 콤플렉스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파농이 느꼈던 이런 감정은 한류 열풍의 중심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 한류의 열풍으로 자긍심을 갖고 있는 것과 상관없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콤플렉스를 치유할 수 있는 자긍심이 있다고 해도 소용 없다. 의식 깊숙한 곳에는 상상과 실재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콤플렉스가 있다. 경제적 잣대로 사람마저도 나누는, 그래서 백인에 대한 호감을 넘어서 성적 지향성마저도 편중되는 현상. 외모에 대한 기준마저도 서구로 변해버린 세상.

영화에서도 비슷한 감정이 느껴진다.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인과 동등한 위치에 놓일 수 없다. 심지어는 다문화 정책에 대한 비판도 서슴없이 나오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취업이 늘면서 정작 내국인의 취업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외국인 노동자의 범죄 사실을 통해서 그들을 추방시켜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노동력이 아니라 자본을 갈취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투자라는 미명 하에 국내 자본을 잠식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왜 같은 피해를 입히는데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좋아하는 것인가?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읽으면 우리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콤플렉스, 어렵게 말하면 옥시덴탈리즘의 가면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의 문제를 우리 의식의 문제로 확대해서 읽어본다면 상상 속에서 날조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짊어진 어머니 이소선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강 지 은(건국대학교 강사)

 

“엄마 배고파”

열 두 살 우리 딸이 학교에 다녀와서 제일 먼저 나에게 하는 말이다. 일 때문에 나가야 할 땐, 아이가 하교하는 시간이 되면 듣지 않아도 들리는 듯 귓가에 맴도는 소리이기도 하다. 가끔 바쁘거나 온 몸이 귀차니즘으로 가득한 마흔 한 살의 엄마는 천 원 짜리 한 두 장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런데 왜 맨날 나보고 배고프다고 하지? 그건 말하나 마나 내가 엄마이기 때문이다.
영화 ‘어머니’ 포스터“엄마 배고프다 …” 이소선은 아들의 마지막 말을 듣고 기도 차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이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던지 이소선은 정신을 잃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아들 전태일이 열악한 노동현실을 바꿔야한다 외치며 불꽃으로 산화한 그 날, 병원에서 이소선은 배고픈 아들을 그렇게 보냈다. 마흔 한 살에 아들을 보내고, 마흔 한 해를 아들의 부탁과 함께 살아온 이소선은 2011년 9월 3일 영면하였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시다들이 배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좀 더 가면 전부 결핵 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되요. 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캄캄한데 뜷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오도엽 씀, 후마니타스, 83-84) 그토록 자상한 아들, 그토록 어여쁜 아들이 불타 익어 숨이 넘어가면서 한 부탁을 이루어내려고 어머니는 평생 뒤도 안 돌아보고 살았다.

열 서너 살 시다들이 종일 굶고 일하는 것이 안타까워 버스비로 풀빵을 사먹이던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마흔 한 해 동안 세상의 어머니이기를 자처했다. 중앙정보부와 평화시장 사업주들이 돈다발을 들이밀었어도 거절한 건 아들 때문이었다. 내 식구 배부르게 할 수는 있지만 그건 아들이 바라는 세상은 아니었다. 모든 회유책에서 끈질기게 벗어난 이소선은 근로기준법 적용 범위를 16인 이상 고용업체까지 확대할 것이며, 근로기준법을 위반할 때 내리는 벌칙도 강화하겠다는 약속과 전태일이 항거하며 요구한 사항을 들어주겠다는 합의서를 받고 아들의 장례식을 치렀다.

 

배고픈 노동자들의 어머니

배고픈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되기를 자처한 이소선은 시내에 빌딩을 살 수 있는 돈 대신 노동조합을 선택한다. 전태일이 분신 항거한 지 2주일 만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은 만들어졌지만 얼마 못가 사업주와 정부의 탄압에 온몸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형사들과 몸싸움도 해야했고 수없이 유치장 신세를 졌으며 징역을 살았다. 독재정권과 경찰들에겐 ‘빨갱이 년’이었다. 도대체 이 땅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길을 어머니는 걸었다. 이소선은 헌옷 장사를 했다. 전태일이 죽기 전에는 전태일을 위해서, 아들이 죽고 나서는 새로 생긴 아들들을 위해서 헌옷을 모아 팔았다. 다른 이들은 재수 없다며 거들떠보지도 않는 죽은 사람 옷도 영안실에서 구해왔다. 이렇게 돈이 생기면 이소선은 조합으로 달려가 끼니 거른 조합 간부들에게 줄 라면을 끓였다. 평화시장 옥상에다 큰 들통을 걸어 놓고 나무를 지폈다. 새벽 두시부터 국숫집에 가 줄을 서서 싸게 사온 ‘파지 국수’로 만든 우거지 죽으로 조합원들의 끼니를 챙겼다.

철거반이 부술 때마다 전태일이 다시 짓곤 했던 블록집 쌍문동 208번지에서 어머니와 함께 전태일을 닮은 청년들이 전태일의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땅에 민주주의가 뿌리 내려야 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는 결코 노동조합을 성장하게 두지 않았다. 박정희가 79년 10월 26일 죽고 새날이 올 줄 알았던 사람들은 얼굴만 바뀐 군사 독재에 또 다시 부딪혀야 했다. 전두환 정권 역시 노동조합을 수없이 탄압했다. 독재자들에 대한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던 시절을 이소선은 온몸으로 부딪혀 싸웠다. 때로는 수배자들을 보호했으며, 때로는 자신이 수배자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던 청계노동조합은 1984년 3월에 청계피복노동조합복구위원회의 이름을 다시 걸었다. 이는 다시금 노동조합과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 후로도 숫한 파업의 현장과 집회를 누비며 노동자들의 단결을 외쳤던 이소선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에 분신항거하는 또 다른 전태일들을 가슴으로 묻었다. 1986년 3월 17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한 신흥정밀 박영진의 마지막 유언을 받으며, 1987년 8월 22일 경찰이 쏜 최루탄에 심장을 맞아 죽은 이석규의 시신을 지키며 이 땅에서 힘없고 배고픈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받아냈다.

 

억울한 죽음은 다시 없게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숱한 이들이 죽음으로 항거했지만 이들의 죽음이 제대로 밝혀지지는 못했다. 유족들은 자식들이 왜 죽었는지도 모른 채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평범한 시민이 권력에 홀로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유가족들은 이소선을 찾아왔다. 노동조합의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이소선은 전태일과 같은 죽음을 막기 위해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를 출범시키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배운 것 없어 회장같은 일은 나서서 하지 않은 이소선이지만 전두환 정권에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거친 길을 떠안았다. 이소선은 쇠사슬에 묶인 노동자의 어머니이자 민주주의의 어머니가 되었다. “독재의 똥개들아! 나도 잡아서 죽여라. 나도 방패로 찍어 죽여라!”(『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245) 서슬퍼런 군사 정권에 목숨걸고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이는 자식을 지키고자 하는 어머니 뿐이다. 어머니의 외침에 유가협 부모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이 글의 자료는 전적으로 오도엽이 꼬박 5백일 동안 이소선과 나눈 이야기를 담은 책『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2008년 12월에 출판된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도엽은 이소선에게 마지막으로 이리저리 하고 싶은 말을 묻는다. 『전태일 평전』의 인세를 고스란히 이소선의 활동에 쓰라고 준 조영래 변호사, 군홧발 무섭던 1980년 남산에 잡혀갔을 때 동상 걸린 발에 약을 사다 발라주던 젊은이, 수배당해 도망다니며 얻은 결핵을 제대로 치료도 못할 때 자기 집에 숨겨주고 주사 놔주었던 간호사, 자기보다 나이 어린 이소선에게 어머니라 부르며 존경하고 도왔던 문익환 목사님, 전쟁 끝나고 오갈 데 없는 이소선의 식구들에게 처마밑을 내 주었던 집주인, 청계 조합원들… 그 모든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했다. 그리고 아들의 원을 풀어야 했기 때문에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자식들, 독재 때보다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미안함을 전했다.

 

어머니는 가셨지만…

척박한 이 땅에 전태일이 노동조합의 씨를 뿌렸다면 이소선 어머니는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았다.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꿈을 따라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민주노총이 건설되었다. 어머니는 민주노총이 만들어질 때 제일 기뻤고 다음으로 기쁜 게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만든 것이라 했다. “잘난 척하지 말고 소외받은 사람 곁으로 내려가서, 고통받는 노동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차별 없는 세상 만드는 데 힘써야지. 욕심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국민 지지받아 국회도 많이 가고, 그래서 나중에는 대통령도 하면 좋지 않겠냐”『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283). 이론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마흔 한 해 아들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가면서 터득한 진리이다. 이런 어머니를 위한 훈장 추서가 기각되었다. 민주인사들에게 수여하는 이 훈장이 기각된 이유는 다른 민주인사들과 비교 검토할 수가 없어서란다. 지금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예처럼 사는 현실을 두고 어머니는 국가가 주는 훈장을 가슴에 달지 않을 것 같다. 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명예도 아니고 돈도 아니지 않았던가.

 

속. 상. 해. 하. 지. 마.

고령과 지병으로 더 이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어머니를 담으려고 했던 영화가 올해 말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의 개봉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실 줄은 아마 제작진도 몰랐을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없다. 한국의 아픈 근대사와 싸우고 보듬었던 시대의 어머니는 마흔 한 살에 아들을 보내고 마흔 한 해를 살다가 지난 달 잠들었다. 어머니의 영화도 참 힘든 길을 가고 있다. 상업영화가 아니니 후원도 필요하다(http://sosun.tistory.com/). 어머니의 길을 오롯이 남기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그를 기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속.상.해.하.지.마. 어머니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처럼 돌아가시면서 우리에게 남기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 같다. 속상해 하지 않으련다. 대신 꿈꿀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머니를 기리며 어머니의 꿈을 함께 그리는 것이 아닐까.

 

사족 한 마디

이제 곧 대한민국은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시작으로 총선, 대선을 치러야 한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도 여성 후보들이 등장했지만 앞으로 다가올 선거들에서도 여성 정치인의 약진이 펼쳐질 것이다. 정말 한 마디만 하자. 함부로 어머니의 마음가짐으로 정치에 나왔다는 말을 하지 말자. 채 한 줌도 안 되는 일부 고위층을 위하여 출마하는 여성정치인은 정말 어머니, 엄마를 입에 담지 말자. 우리에게 필요한 어머니, 엄마는 이 땅의 아픈 손가락들을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 앞에서 하는 말과 뒤로 챙기는 욕심이 따로 있어서는 안 된다. 정말 한 마디만 더 하자. 이소선 어머니의 마음으로 정치할 수 있는 여성 정치인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우리가 손을 보태자.

구보씨 뱀파이어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철학)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죄냐?”

 

이건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2009)에 나오는 대사다. 뱀파이어가 된 태주(김옥빈 분)가 자신을 책망하는 상현(송강호 분)에게 내뱉는 말이다. 상현도 뱀파이어다. 그는 가톨릭 신부였는데, 수혈을 받고 뜻하지 않게 뱀파이어가 되었다.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처지지만,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식물인간이 된 환자의 피나 자살하는 사람의 피를 받아먹는다.

반면, 태주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당당하다. 그녀는 신선한 피를 위해 거리낌 없이 인간을 죽인다. 그녀는 뱀파이어고, 뱀파이어는 “인간을 잡아먹는” 존재다. 그렇다면 그녀가 인간을 죽이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태주는 상현의 어정쩡한 태도를 비웃는다.

“너는 남의 피로 연명하면서 네 피 한 방울 나눠주는 건 그렇게 아깝냐?”

이것도 <박쥐>에 나오는 대사다. 눈 먼 노(老)신부(박인환 분)가 자길 뱀파이어로 만들어주길 거부하는 상현에게 하는 말이다. 그는 뱀파이어가 되어서라도 다시 이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

“그렇게도 보고 싶으세요? 이 캄캄한 세상이?” 상현은 그러한 욕망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피를 탐하는 노신부를 찔러 죽인다. “가서 쉬세요.” 그러면서 상현은 그가 죽인 노신부의 심장에서 솟아나는 피를 빨아먹는다.

상현은 스스로의 욕망을 쉽게 저버리지 못하면서도 그런 욕망의 탐닉을 막으려 든다. 그는 뱀파이어지만, 윤리적이고자 하는 뱀파이어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정녕 윤리적일 수 있는가? 상현의 말과 행동이 블랙 코미디가 되는 바탕은 여기에 있다. 그는 비닐 팩에 피를 담아 냉장고에 두고 마시며, 이렇게 말한다. “조금 빨아먹다 버리는 건 일종의 인명경시가 아닐까?”

그런데 이런 블랙 코미디의 무대는 영화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뱀파이어 세상이라고 말하는 건 틀림없는 과장이겠지만, 돈을 탐하며 돈의 순환에 생명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은 확실히 뱀파이어와 닮았다.

게다가 돈은 뱀파이어와 같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물질적 지배와 안락만이 아니라 깨끗한 피부와 성형의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낸다. 돈의 위력을 가진 이들은 이제 인간 세상의 한 부류로 자리 잡는다. <트와일라이트> 시리즈의 뱀파이어가 어둠과 경계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인간 사회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닭을 잡아먹는 여우가 동네에 내려와 닭들과 동거하며 닭들을 관리하기에 이른 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닭이 아닌 여우가 되고자 한다. 기왕이면 멋지고 매력적인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 한다. “뱀파이어면 어때?” 사람들은 피를 탐하는 <박쥐>의 노신부처럼 되뇐다.
영화 ‘박쥐’의 한 장면구보씨가 DVD로 영화를 여기저기 돌려보아 가며 여기까지 얼기설기 썼을 때다. 어느 틈엔가 옆에 와 있던 Y가 끼어든다.

“구보야, 너는 어떻게 영화를 봐도 그렇게 기괴한 영화만 보니? 그 박쥔지 생쥔지 하는 영화는 벌써 몇 번째 틀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참 취미도 괴상하다, 너.”

“어, 미안. 시끄럽다면 헤드폰 끼고 볼께. 난 곧 이 영화로 강의도 하고 글도 써야 하거든. 이제 겨우 한 페이지 썼어. 강의 노트는 아직 시작도 못했고… 근데, 그게 아니더라도 이 영화 진짜 볼 만한 영화야. 박찬욱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좋다구.”

“글쎄, 난 박찬욱 좋은지 모르겠더라. 그 사람 영환 어딘지 좀 구겨진 것 같애.”

“하하…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근데, 어딘가 구겨진 마음이 없다면 영화건 문학이건 불가능하지 않겠어? 구겨진 주름에 세상이 이렇게 또 저렇게 담기고, 그걸 풀어내는 데서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치, 그럼, 주름 많은 사람은 다 예술가겠네? 박찬욱은 그것도 아니고 이제 쉰이 다 된 얼굴이 뺀질 통통하던데?”

“유심히도 봤다. Y, 너 은근히 박찬욱 좋아하는 건 아냐?”

“아니라니까. 난 잔인하고 기괴한 장면들 싫어해. 그런 걸 왜 우리가 영화에서도 봐야 하니?”

“외면한다고 그런 면이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그런 걸 극적으로 제시해서 우릴 자극하고 정화(淨化)하는 게 필요한지도 몰라. 거기서 새로운 아름다움이 탄생하는 것이고 말이야.”

“기껏 뱀파이어가 그런 거야? 덜떨어진 서양 귀신이 피 빨아먹는 게?”

“Y야, 그게 꼭 그렇진 않다구. 뱀파이어를 이 시대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어. 흡혈하는 기생적 존재, 어둡지만 창백한 힘과 매력을 지닌 존재. 이런 걸 자본으로 볼 수도, 자연에 대한 인간 자체로 볼 수도 있잖아. 게다가 원래 뱀파이어는 경계적 존재였어. 이런 존재에게는 정상적 존재에게선 찾기 힘든 갈등과 문제가 있다구. 생각해 봐. 뱀파이어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라구 할 순 없어. 그렇다구 신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네 말대로 귀신인 것도 아냐. 분명히 몸뚱이를 가진 생명체라구. 그러나 짐승이라고 할 수도 없어. 말하자면 일종의 괴물인 거지. 경계적 괴물. 그래서 이걸 어디에서부터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흥미로운 얘기들이 나올 수 있는 거야. 박쥐라는 동물도 원래 경계적 존재잖아. 그런 점에서 이 영환 우리말 제목이 영어 제목보다 나아.”

“영어 제목은 뭔데?”

“Thirst. 갈증… 너무 평면적이지. 하긴 뭐, 저주스런 갈증, 그런 정도의 뜻이고 이미지겠지만.”

“저주스런 갈증? 거기 저주는 왜 붙어?”

“Y야, 이거 뱀파이어 영화라구. 뱀파이어는 피를 마셔야 살잖아. Y 네가 뱀파이어가 됐다고 생각해 봐. 피를 빨아먹는 게 기꺼운 일이겠어? 근데 이걸 욕망 일반으로 해석할 수 있거든. 욕망이라는 게 대부분 희소성이 있는 대상을 향하는 거고, 그래서 누군가를 밀쳐내야 충족될 수 있으니까. 때론 억압하고 착취하고 해서 말이지. 그거 일종의 피 빨아 먹는 거라고 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고 또 만일 그렇게밖에 살 수 없다면 저주스런 거지. 저주스런 욕망, 저주스런 갈증.”

“구보야, 그건 정말 난센스고 오버센스야. 네 말은 우리 모두가 일종의 뱀파이어란 말이잖아. 그게 말이 돼?”

“내 참, Y야, 그건 내가 좀 전에도 했던 말이야. 넌 대체 내 말을 듣고 있기나 한 거니? 내가 그랬잖아, 뱀파이어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봐. 우리가 다른 생물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꼭 사슴피를 받아먹고 곰의 쓸개즙을 빼내먹는 인간들만 뱀파이어가 아니라구.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고 도살해 먹어치우는 방식은 정말 잔인한 거야. 뱀파이어가 차라리 고상할 정도지. 입가에 피 안 묻히고 점잖은 척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한다고 해서 잔인하지 않은 건 아니야. 당하는 동물 입장에서는 더 기가 막힐 노릇 아닐까. 사람들이 사는 부근엔 사육당하는 동물 이외엔 대형 동물들이 남아나질 않아. 특히 육식 동물들은 거의 멸종이야. 경쟁자가 없는 뱀파이어가 인간인 거지. 그뿐만 아니라구. 인간은 인간도 사육하고 착취하잖아.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말이지. 서로가 서로 피를 빨아먹는 거야. 그렇게 볼 수도 있잖아? 아닌 게 아니라, 이 박쥐라는 영화에는 서로 피를 빨아먹는 장면이 있어. 상현이 제 피를 태주에게 먹이면서 태주의 피를 빨아먹는 장면 말이야. 실은, 박찬욱이 이 영화를 처음 구상할 때 머리 속에 그려뒀던 장면이 바로 그거라는 거야. 그걸 중심으로 해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거지. 재밌잖아?”

“재밌다구? 구보야, 넌 정말 이상해. 잔인하다고 하더니 재밌다는 건 또 뭐니? 잔인한 게 재밌다는 거잖아. 도대체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 할 소리야? 박찬욱이나 너나 괜한 과장을 해서 잔인한 면을 만들어내고는 그걸 재밌다고 즐기는 거 아냐? 그건 가학 취미라구. 니들이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거구,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고 여기는 거야. 니들이야말로 뱀파이어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도 뒤집어씌우는 거 아니겠어? 안 그런 척 하는 너희들도 다 뱀파이어다, 이렇게 세상에 대구 외치는 거잖아. 그거 꼬리 잘린 여우 심정인 거야.”

“아니, Y야, 난 가학적인 걸 즐기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런 욕망의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거야. 박찬욱은 그런 걸 영화로 표현해 보는 거고… 박쥐의 상현을 봐. 그는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구. 어쩔 수 없이 욕망의 수렁에 말려들어가면서도 거기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 하지. 그가 악을 행하는 건 다른 악을 막기 위해서야. 가령 뱀파이어가 되려는 신부를 죽인다든가, 태주를 학대한다고 생각하고 강우를 죽인다든가 하는 일이 그래. 그리고 그런 게 더 큰 악을, 파국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자 태주와 함께 목숨을 버리는 쪽을 택하지. 물론 내 얘긴 그런 결말이 좋다거나 필연적이라는 건 아냐. 중요한 건 그렇게 벗어나려는 자세와 시도가 있다는 거지. 그게 일종의 희망 아닐까. 저주받은 갈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 같은 거…”

“구보야, 내가 보기엔 욕망을 적대시하는 네 생각이 애초부터 잘못된 거야. 구원은 무슨 구원이니? 그건 병주고 약주는 것일 뿐야. 옛날부터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작자들이 해 온 짓이라구. 욕망이 있으면 잘 충족시킬 길을 찾아야지, 억지로 억누르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면 그게 없어지니? 사실은 그렇게 해놓고 뒷구멍으로 지들만 즐기는 놈들이 따로 있잖아. 구보, 너 같이 정신 못 차리는 철학자나 괜히 구원이니 뭐니 하며 헛물켜는 종교인들이 거기 들러리를 서고 말이야. 그러니까 결국 사람이 구겨지는 거야. 박찬욱도 철학과 출신이지? 그것도 가톨릭 계통 학교를 다녔잖아. 그래서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것 아닐까?”

“어, Y야, 그거 인신공격이야. 그리고 근거 없는 얘기라구. 박찬욱이 철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철학과를 나와서 영화에 조금이라도 더 깊이가 있는 걸 거야. 박찬욱 영화는 생각보다 치밀하고 섬세하다구. 예를 들어 여기 이 장면도 봐. 장면 배치나 소도구 하나까지도 예사롭지 않아. 동양과 서양, 근대와 현대 따위를 섞어놓으려고 애를 많이 썼다구. 인간의 본성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까지 경계적인 면을 찾아 표현하려 한 거야. 한 오분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어. 자, 이걸 좀 볼래…”

“됐거든. 구보야, 나 바쁘거든. 그리고 그 영화엔 볼만한 남자 배우 하나 없이 다 구보 너처럼 칙칙한 애들만 나와서 관심 없거든. 그러니 너나 열심히 보셔.”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2)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1.

자거라투스트라는 난감한 가운데서도 요즈음은 각 시, 군에서 자기 고장 관광지도를 만들어 배포하니까 혹시 거기에 표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우선 휴게소를 찾아야 하는데, 보통 거기에서 관광지도를 배포하니까.

차는 순천 시내를 지나 금방 벌교의 벌판에 이른다. 광활한 논에는 파랗게 자란 벼들이 바람에 일렁거렸다. 바람은 순천만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듯하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는 순천만의 갈대 숲 사이로 흐르는 은빛 강물을 그려보고, 혀로는 오늘 점심으로 먹을 예정인 순천만 꼬막 맛을 느끼며, 눈으로는 도로 옆의 휴게소를 찾는데 여념이 없었다. 손과 발은 스스로 움직이면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었으니, 모든 감각이 각기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기묘한 환각상태에 빠져들었다. 들뢰즈가 말했다는 파편화된 감각이란 것이 이런 상태를 의미하지 않을까? 이 상태가 어쩐지 환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는 마치 꿈속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피카소의 몽타주 그림이 떠올랐다. 옆자리의 선배님은 깊은 침묵 속에서 아마도 나철 선생의 사상을 의미하는 것 같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교감한다. 공감각에 의한 공동의 세계가 차안에 넘치고 있었다.

드디어 벌교읍에 들어가기 직전 도로 옆에서 자동차 휴게소를 발견했다. 마침 벌교읍 관광지도가 마침 한 장 남아있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급히 지도를 펼쳐 눈으로 나철 선생의 생가를 찾는다. 야호! 정말로 나철 선생의 생가가 표시되어 있었다. 게다가 지도에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가 친절하게 표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이건 예상치도 않던 횡재이었다. 벌교에 오면서도 벌교가 바로 태백산맥의 무대였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니! 『태백산맥』을 생각하면 광활한 벌교의 벌판을 다시 보니, 이렇게 넓은 들판이라면 얼마나 많은 소작인들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그 순간 관광지도에 대해 느꼈던 고마움 때문에 관광지도에 드리워져 있는 절망의 그림자를 예감하지 못했다.

관광지도란 것은 한 장 속에 모든 관광지를 표시해야 하니까, 실제 지형을 상당히 왜곡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거라투스트라는 그 순간 이 평범한 진리를 잊어버렸다. 벌교를 찾아오는 거의 전부는 『태백산맥』의 흔적을 찾는다. 이 흔적은 시내 한 가운데 있는 부용산의 오른편에 위치한다. 거기에는 김범우의 집이며, 소화의 집, 그리고 읍내홍교가 표시되어 있다. 관광객들을 위해 이 부분은 확대되어 그려졌다. 반면 나철 선생의 생가는 부용산 왼편에 위치한다. 그런데 지도는 이 부분을 축소시켜서 나철 선생의 생가가 마치 읍내의 왼편 부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아 걸어 다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안 것이지만 시내 가운데 그려진 부용산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이다. 실제 나철 선생의 부용산 왼편에 있지만 무려 15키로 정도 떨어져 있다.

이 관광지도 때문에 자거라투스트라와 선배님은 부용산 자락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면서 여러 번 돌아다녔지만, 생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면 혹시 부용산 산허리 어디에 있을까 하여 부용산을 걸어 올라 갔다. 부용산은 정말 이름 그대로 무척이나 예쁜 산이다. 『태백산맥』에서는 이 산에서 봉화가 오르는데, 그러면 정말 꽃봉오리처럼 보일 것 같다. 높이는 한 400미터 정도이다. 그런데 이 부용산을 거의 다 올라가도 유적지라는 것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은 나철 선생에 대해 전혀 모른다. 혹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실상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부정확한 정보 때문에 10분이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나철 선생의 생가를 찾는데 무려 두 시간이 걸렸다. 자거라투스트라는 포기하려고 할 무렵, 마지막으로 지도상에 표시된 나철 선생 생가 가까이 있는 벌교 소방서를 GPS 기계에 넣어보았다. 나철 선생에 관해서는 일자무식이던 GPS는 벌교 소방서는 단숨에 알아보았다. 소방서를 찾으면 바로 거기에서 나철선생 생가를 찾을 수 있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리하여 다시 기계에 몸을 맡기고 소방서를 찾아가보니 부용산 자락을 왼쪽으로 돌아서 무려 15 키로 이상을 돌아가서야 나철 선생의 생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두 시간 동안 헤매는 동안, 자거라투스트라는 어떤 깊은 절망감에 사로 잡혔다. 프랑스의 어떤 늙은 여배우는 혼자서 살다가, 접시를 깨뜨리자 절망감 때문에 자살했다고 한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그때 여배우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될 것 같았다.

 

2.

동네에 들어가자, 나철 선생의 유적지 표시가 보인다. 무슨 유적지인가 했더니 나철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나철 선생의 생가는 동네 한 가운데 있다. 이제 비로소 나철 선생의 이름이 알려진 듯 생가는 새로 조성 중에 있었다.
나철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1990년 3월 1일에 세웠다고 한다. 사진을 확대하면 대개 어떤 말인지 짐작될 것이다.전국 어디서나 위인들의 생가는 다 똑같다. 삼간 기와집, 나철 선생의 생가도 꼭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위인 생가의 기본 설계도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철 생가는 새로 지은 기와집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미처 공사가 마무리 안 된 듯 땅 바닥에는 아직도 시뻘건 황토가 내팽겨져 있었다. 물론 안내인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마을 개들이 낯선 사람을 보고도 짖지 않으니 아마도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후일을 위해 사진을 찍어 두고 선배님은 방에 모셔져 있는 나철 선생의 영정에 절을 한다. 짱구가 튀어나온 나철 선생의 인상은 단호하기가 겨울날의 얼음처럼 느껴진다.
선배님의 나철 선생에 대한 존경심은 지극하다.결국 찾아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에게 점심 먹으러 가자고 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읍내에 들어가서 『태백산맥』의 무대를 밟아보고 다시 순천만 쪽으로 가서 꼬막 맛도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배님이 거기서 강진 다산초당이 얼마나 먼지를 물어본다. 어림대중으로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을 거라 하니, 그러면 그리 가자고 한다. 이까지 왔으니 다산초당은 꼭 보고 가고 싶다는 것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우리나라에서 화엄사와 다산초당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며 그 소수에 선배님이 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아침을 늦게 먹었으니 점심 겸 저녁을 거기 가서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순천만의 꼬막만 꼬막일까, 강진만의 꼬막도 꼬막이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보성을 지나 강진만을 향해 출발했다. 길은 사차선 자동차 전용 국도, 호남지방의 도로가 다 그렇듯이 여기도 텅 비어 있다. 차를 몰면서 자거라투스트라는 물었다.

형, 대종교는 요새도 신도가 있어요?

그저 단군할아버지를 조상신으로 모시고 있는 종교, 민족주의적인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종교, 고조선 시대가 실재한다고 믿는 종교, 그러나 실상은 조상숭배의 일종인 종교, 그것이 자거라투스트라가 알고 있는 대종교이다. 요새 누가 이런 구닥다리 종교를 믿겠는가?

대종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의 가장 주요한 단체를 이끌었지. 청산리 대첩을 이끌어낸 북로군정서가 바로 그건데, 알지? 그런데 이런 독립운동 때문에 오히려 대종교의 종교성이 사상적으로 간과되고 그저 국조 숭배운동으로만 격하되고 말았어.

그러면 대종교의 종교성은 어디에 있어요?

글쎄 나도 깊이 연구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흥미로운 특징이 있어. 대종교는 3분법을 중요시해. 대개 모든 사상은 이분법이잖아. 유교가 그렇거든. 태극, 무극, 음양, 4괘 등. 서구 구조주의도 이항 대립을 기본 골격으로 삼는다 하더라. 그런데 여기는 3분법이야. 대종교의 가장 주요 저서가 『삼일신고』인데, 셋이 하나이라는 주장이 그 핵심이라서 책 제목이 ‘삼일신고’이거든.

셋이 하나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삼신(三神)일체라는 뜻이지. 한배검(신)은 곧 환임(인), 환웅, 환검(단군)이라는 거야. 이 신들은 역사적으로 등장한 순서에 따라 나열된 신들의 계보가 아니야. 이 신들은 하나의 신 즉 한배검의 세 가지 위격이지. 환임은 조화의 신이고, 환웅은 교화의 신, 한검은 치화의 신이지.

뭐, 기독교의 삼위일체설하고 비슷하네요. 성령과 성신과 성자.

그러게 말이야.

기독교의 영향이라 보아야 하나요?

글쎄, 대종교 자신은 상고 시대의 종교의 부활이라 하지만, 사실은 20세기 초에 발생한 종교로 보이는데, 그러니 기독교 영향을 배제할 수가 없겠지. 마치 동학처럼 말이야. 그런데 왜 굳이 삼위일체설을 빌려 올 생각을 했을까? 그게 멋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형도 아시겠지만,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은 그리스도가 인간이면서 신이라는 이중성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리이잖아요. 삼위일체설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신적인 지배 질서를 보존할 수 있었죠. 결국 기독교는 종교이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유일한 종교가 된 거예요. 헤겔은 그래서 기독교가 중세에 인간의 자유라는 개념을 사상적으로 보존해 왔다고 주장하죠. 이렇게 자유의지와 신의 질서를 종합하면, 세계의 타락과 신의 정의도 통일될 수 있죠. 전자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한 타락이고, 후자는 신적인 질서의 관철이죠.

교주가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많지 않나? 하지만 그런 종교가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는데…..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과 인간이면서 신인 그리스도라는 개념과는 좀 다르지 않아요? 신의 아들이란 자신의 신성을 가정하는데, 그것은 인간 속에 있지만 인성과는 독립된 본성이죠. 이 인성은 언젠가는 신성에 의해 사라져야 할 것이죠. 예를 들어 중세 기독교에 영향을 많이 끼친 배화교가 그렇지요. 그런데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에서는 인성이 그 자체가 신성이라는 주장이 됩니다. 이것은 엄청난 혁명적인 주장이죠. 예를 들어 육체적 욕망이 그 자체로서 신의 뜻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건 잘 모르겠는걸. 그런 주장은 불교에서 평상심이 곧 도심이라는 주장과도 비슷하네. 동학이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 주장도 그렇고. 그런데 삼위일체설에 대한 그런 해석은 기독교를 너무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글쎄요. 사실 기독교는 신성과 인성의 분리와 통일, 배화교와 삼위일체설 사이를 오가죠. 그 사이 어느 지점에 기독교의 제 분파들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신교는 신성의 분리 쪽으로 더 다가가고, 반면 구교는 신성과 인성의 통일 쪽으로 더 다가가죠.

그렇구나. 하여튼 대종교에서 이런 삼분법이 마치 만화경 속에서처럼 계속 확대재생산 되거든. 인간을 설명할 때가 특히 그래. 인간은 3眞과 3忘과 3途를 가지고 있어. 3진이란, 다시 셋으로 나누어지는데, 곧 성, 명, 정으로 이루어지지. 그것들은 자체 내에 어떤 대립을 가지지 않는 것들이야. 이 각각이 내부에서 구별을 가지면, 이제 3망이 되지. 그래서 성이 선, 악으로 나누어지면 心이야. 명이 청, 탁으로 나누어지면 그게 기이고, 다시 정이 厚, 薄으로 나누어지면 그게 身이야. 이 3망이 도착적으로 되면, 그게 感, 息, 觸인데 그 각각은 모두 6가지로 이루어져 있어. 그 외에도 모든 교리에 3이 기본 단위가 되어서 항상 그 배수로 진행되거든. 마치 3이라는 숫자가 대종교에서 자기 증식을 하는 것 같아.

그거 참 신기하네요.

예를 들어 성이란 선도 악도 아니야. 이것은 본질태이지. 그런데 이 성의 현상태가 마음이야. 그런데 이 마음은 선, 악으로 나누어지거든, 그러면 깨달음의 논리가 이렇게 전개되지. 우선 우리는 수련을 통해 악한 마음에서 선한 마음으로 나아가야지. 그런데 그것만으로 부족해. 선하다, 악하다는 것조차 넘어서야만 비로소 그 마음의 본성에 도달하지. 이런 설명은 불교의 공론에서 주장한 것과 같다. 유에서 무로, 그리고 유도 무도 아닌 것으로 나아가는 논리가 공론이잖아.

그것 참 흥미롭군요. 어떻게 수행하는지 아세요?

몰라. 주요한 것은 대종교 속에 인간을 설명하는 어떤 새로움이 있다는 거지. 아직까지 아무도 연구해 보지 않았는데, 나도 지금 연구 중이야.

김지하 선생은 한국의 사상의 특징이 3박자라고 해요. 서양음악의 기초는 2박인데, 한국음악의 기초는 3박이라는 거죠. 이런 3박에 맞추어 한국사상도 전개되었다 해요. 그런 3박의 개념이 대종교에도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글쎄, 하여튼 대종교가 특이하기는 해.
대종교의 주요 경전인 천부경이 새겨져 있는데, 자거라투스트라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차 안에서 토론 하는 사이, 차는 마침내 강진만에 도착했다. 다산초당 앞에 펼쳐진 강진만은 푸른 들판과 어울려서 싱싱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