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기 싫은’ 10대들, 그 이유를 듣고 보니… [철학자의 서재]

‘영화 보기 싫은’ 10대들, 그 이유를 듣고 보니… [철학자의 서재]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한유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사례 1. 추석 연휴 귀성길에 어떤 묘한 가족을 목격했다. 미취학 아동으로 보이는 아이와부부가 티셔츠까지 맞춰 입고 터미널로 향하는 지하철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지하철이 터미널에 도착하는 내내 각자의 핸드폰에만 몰두해 있었다. 아이는 게임을 했고, 엄마는 인터넷을 했고, 아빠는 카카오톡을 했다. 셋은 지하철에서 내릴 때조차도 안내 방송을 듣고 각자 짐을 들고 내릴 뿐,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나는 그 셋이 왜 티셔츠까지 맞춰 입었는지 궁금했다.
#사례 2. 10대들을 상대로 ‘당신이 영화를 보지 않는다면,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를 물었다. 1위는 ‘핸드폰을 꺼놓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한다.

 

프라이버시 요새에 자발적으로 갇히다

나는 아직 2G 핸드폰을 사용한다. 굳이 스마트폰을 사용할 이유가 없어서 그냥 쓰던 것을 쓸 뿐이다. 그런데 내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아직까지 사용하다니, 대단하다”고 말한다. ‘유행’을 따르지 않는 뚝심이 있다고도 말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지금 우리는 왜 고장 나지도 않은 기존의 것을 버리면서까지 ‘신상‘을 사는 것일까? 대체 왜 ‘신상’에 둔감하지 못한 것인가? 왜 소비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못하는가? 바로 그것이 세련되고, 혁신적이고, 시대에 충실한 것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상’들이 나를 외롭지도 심심하지도 않게 해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례 2의 설문 조사에서 영화관에서의 단 두 시간도 핸드폰을 꺼놓기 싫다는 대답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핸드폰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핸드폰을 꺼놓는 것을 세상과의 단절, 고립으로 느끼는 듯하다. 핸드폰이 곧 세계와의 연결 고리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바로 옆의, ‘여기’에 존재하는 사람과의 연결보다는 ‘저기’ 멀리의 어떤 사람과의 연결을 원한다.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인내와 타협과 소통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접속’과 ‘차단‘이 번복 가능한 아주 가벼운 선택의 문제가 된 것이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례 1의 가족처럼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마치 “각자 자신의 보호막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사례 1의 가족은 티셔츠까지 맞춰 입고 가족의 화목함을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유대는 핸드폰이라는 프라이버시 요새 안에서 무전으로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 얼굴을 맞대고 직접 대화를 통해 귀찮고 더디고 힘겨운 인간관계를 맺을 필요 없이 말이다.
물론 그럼으로써 더 이상 인간관계에 영속성은 수반되지 않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다. 피상적이라 해도 그들에게는 수많은 친구들이 있다. 인간관계도 이제 질보다 양이 우선시된다. 이렇듯 그들은 협소한 프라이버시 요새에 자발적으로 갇혀버렸고, 또 다시 광장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펴냄)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현실을 직시하자! 사실상 점차 변화해온 인간의 의사소통 기술이 가져온 효과는 마치 은행 주도로 이루어지는 업적들과 마찬가지로 그 손실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데 반해서 그 이득은 사유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양쪽 경우 모두에서 발생하는 ‘이차적인 피해‘도 정말 드물게 생기는 이점들에 비해서 오히려 한쪽에만 보다 더 광범위하고 심각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는 것 같다.” (51쪽)
고독의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펴냄). ⓒ동녘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책에서 이토록 편리해진 세계의 불안한 이면을 꼬집는다. 이제 세계는 실체 대 실체가 아닌, 그래서 어떤 위험성도 어떤 고통도 없이 섬세하고 가벼운 클릭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가상의 네트워크가 즐비하다.
‘워크맨’의 최초 판매자들은 “당신은 결코 다시는 혼자 있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인터넷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고독할 필요가 없다. 수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그 관계가 불편함과 불쾌함을 유발하게 되면 언제든 ‘삭제’ 버튼 하나로 상황을 해결할 수도 있다. 우리는 현실의 인간관계에서처럼 “이제 혼자라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지나친 요구에 노출되어서 위협당할 필요도 없다. 희생하라거나 타협하라는 요구에 위협당할 필요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것을 해야만 한다는 식의 요구에 응할 필요도 없다.”(29쪽)
하지만 바우만은 결국 워크맨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의존하는 것은 동료들이 사라져버린 자리에 남겨진 공허감을 더욱 깊게 느끼게 할 뿐이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워크맨이라는 작은 친구는 얻었지만, 정작 동료들의 진짜 목소리를 잃은 것이다. 인터넷은 어떤가? 바우만은 우리가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고독을 누릴 기회마저 놓쳐버렸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고독할 시간도, 필요도 잃어버린 것이다.
그토록 도망치려고만, 기피하려고만 애쓰던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사랑도 우정도 미움도 분노도 예술도 철학도 모두 고독안에서 태동한다.

 

유동하는 세계는 잔인하다

’유동하는 근대 세계(Liquid Modern World)’는 바우만의 개념이다. 그는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액체처럼 유동적인 근대를 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도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이다. 그는 마흔네 편의 편지를 통해 지금은 막스 베버가 말한 “강철 외투”가 아닌 “가벼운 외투”의 시대임을 천명한다. 유동하는 근대에서는 어떤 선택이든 가벼운 외투를 걸치듯 간단하게 이루어지고 또 언제든 벗어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인스턴트식 인간관계가 바로 이러한 시대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유동한다는 것, 액체성이라는 것은 일견,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 어떻게 나를 집어삼킬지 모르는 잔인함을 뜻한다.
“유동하는 근대의 문화는 ‘함양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갖고 있지 않다. 그 대신에 유혹해야만 하는 고객들을 갖고 있다.” (162쪽)
속눈썹 감모증이라는 이름을 붙여 성형 수술을 판매하고, 그저 약간의 수줍음도 사회 불안 장애라는 이름을 붙여 의료 소비를 권장하는 사회이다. 쇼핑하지 않는, 혹은 소비하지 못하는 자들은 도태된 인간으로 분류해 버린다.
“철학자 다니 로베르 뒤푸르가 말했던 것처럼, 자본주의는 지구의 한계점까지 자기 영토를 밀고 나가서 지구 표면에 있는 모든 대상들을 모두 상품으로 채우려 할 뿐 아니라, 아래로도 깊이 파고들어가 이전에는 사적인 일들에 불과했던 것을 상업적으로 수익성 있게 활용할 수 있도록 그 영토를 확장하려 한다. 물에 대한 권리나 인간 게놈 유전자에 대한 권리, 살아남은 생물종이나 아기, 인체 조직들에 대한 권리에 이르기까지 지구 표면에 있는 모든 대상들을 다 상품으로 만들려 하고, 예전에는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몫이었던 주체성이나 섹슈얼리티 같은 것들도 상품처럼 판매할 수 있는 대상으로 재활용하려 한다.” (206쪽) 하지만 자본주의의 파도가 넘실대는 근대는 이렇듯 집요하고 잔혹한 모습을 은폐하려 애쓴다. 예고 없이 일방적으로 단행되는 해고와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비정규직, 예비 노동자의 어두운 삶 또한 노동의 유동성, 유연성이라는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이름에 가려져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이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바다 위에서 단순한 표류 이상의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해 힘겹게 자맥질한다.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사이에서

이러한 유동하는 근대에 맞서는 가장 유효한 방법은 무엇일까? 바우만의 제안은 책의 마지막 편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는 ‘편지 44.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에서 카뮈의 유산에 대해 언급한다. 카뮈는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인간의 운명과 그 전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로메테우스는 ‘부조리한 인간 조건’에 대한 해결책으로 타인들을 위한 삶, 즉 타인들의 비참한 고통에 맞서 반항하는 삶을 택한다. 반면 시시포스는 자기 자신의 그 비참한 고통에 압도당해 그 인간적 곤경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에 끌리게 된다. 카뮈는 이 둘을 병치시키며 “나는 반항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라고 결론 내렸다.
왜냐하면 시시포스의 곤경에는 프로메테우스가 발을 들여놓아도 될 만큼 충분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시시포스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그 노동들이 무의미했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비극적인 것이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가 그 안에 개입하는 순간, 시시포스는 노예와 같은 상태가 아니라 실천가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바우만은 카뮈가 “그 어떤 운명도 경멸(상황을 무시하는 태도)을 통해서는 극복될 수 없는 법이다”고 말했다면서, 그는 체념과 싸우며, 무관심을 찌르며,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하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카뮈는 우리에게 반란과 혁명, 자유를 향한 노력들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에 필연적인 측면들이며, 우리가 이러한 존경할 만한 추구들이 폭정으로 끝나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러한 추구들에 한계를 설정하고 항상 주시해야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즉, 바우만은 카뮈를 통해 ‘나’만이 아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반항하는 프로메테우스가 시시포스의 형벌과 노역의 세계로 들어가 시시포스를 변화시키듯, 힘을 합쳐 이 자본주의와 유동성의 근대에 반하면 원자화된 개인들의 가짜 보호막을 걷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후 우리는 다시 친밀감과 영속적인 관계를 위한 그 지난한 좌절과 상처의 시간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더 이상 답답하고 지루한 위협의 시간, 믹소포비아(Mixophobia, 이질 공포증)의 시간이 아니라, 즐거운 비참의 시간, 아름다운 상흔의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귀찮고, 두려워했던 그 인간관계의 좌절과 상처가 장애물이 아니라 사실은 견고하고 영속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하나의 필수요소인 것을 깨닫게 되면 말이다.
우리는 조금의 상처도 주고받지 않는 산뜻한 관계를 꿈꾸지만, 그것은 어쩌면 그만큼 서로에게 무관심한 관계, 언제든 처분되고 또 손쉽게 포기할 수 있는 관계, 즉 아무것도 아닌 관계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충분히 상처받고, 좌절하며, 번뇌하고, 인내하며, 분노하고, 반항하며 살아갈 가치가 있다. 그 소중한 인생의 기회를 스스로 버리지 말자. 고독할 기회조차 잃은 자는 진정으로 고립된 세계를 살아가는 자일 것이다.

이재원 단편소설 – 배추이파리

이재원 단편소설 – 배추이파리

두세 달 간 대웅전을 짓는 일을 하는 동안 덕암사 주지는 틈만 나면 사진기를 들고 와 일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가 찍은 내 사진만도 한 봉투나 되었다. 그는 절 지은 기념으로 그 사진들을 보관하겠다고 했다. 그 사진들 속에서 나는 일하고 있었다. 가장 활기 있던 나의 생의 한 시절이 그 사진 속에 들어 있었다.

절 지붕을 올리는 중인가 보다. 나는 용마루 위에 서 있다. 작업하다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 옆에 장씨가 몸을 구부린 채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 장씨는 항상 등산화를 신고 일했다.

장씨가 특별히 게으름 피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등산화를 신고 일하는 탓에 장씨는 항상 몸이 굼떠 보였다. 하 사장은 그런 장씨를 항상 못마땅해했다. 하 사장은 장씨에게 일 시킨 것을 후회하곤 했다. 장씨는 우리와 함께 일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덕암사 일을 시작하기 전, 안영사에서 종각 짓기를 마치자 함께 일하던 일꾼 두 사람이 빠져나갔다. 그러자 덕암사에 와 일할 사람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하 사장이 찾아낸 것이 장씨였다.두세 달 간 대웅전을 짓는 일을 하는 동안 덕암사 주지는 틈만 나면 사진기를 들고 와 일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가 찍은 내 사진만도 한 봉투나 되었다. 그는 절 지은 기념으로 그 사진들을 보관하겠다고 했다. 그 사진들 속에서 나는 일하고 있었다. 가장 활기 있던 나의 생의 한 시절이 그 사진 속에 들어 있었다.

절 지붕을 올리는 중인가 보다. 나는 용마루 위에 서 있다. 작업하다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 옆에 장씨가 몸을 구부린 채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 장씨는 항상 등산화를 신고 일했다.

장씨가 특별히 게으름 피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등산화를 신고 일하는 탓에 장씨는 항상 몸이 굼떠 보였다. 하 사장은 그런 장씨를 항상 못마땅해했다. 하 사장은 장씨에게 일 시킨 것을 후회하곤 했다. 장씨는 우리와 함께 일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덕암사 일을 시작하기 전, 안영사에서 종각 짓기를 마치자 함께 일하던 일꾼 두 사람이 빠져나갔다. 그러자 덕암사에 와 일할 사람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하 사장이 찾아낸 것이 장씨였다.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청춘의 서재]

, 에드워드 사이드, 김석희 역, 살림 2001.

김운하 / 소설가. 건국대 몸문화 연구소 연구원

인생을 다룬 소설이나 전기를 읽는 것은 타인의 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생이라는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기서 기쁨과 슬픔, 실패와 방황과 좌절, 꿈과 현실의 마찰과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고뇌들, 예측 불가능한 행운과 불운들을 읽으며 인간적인 공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는 굳센 의지와 신념, 치열하거나 심오한 사유가 드러내 주는 인간성의 고귀한 높이에 찬탄하며 경외심을 품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 온다.

돌이켜 보면, 나는 젊은 시절에 전기류를 더 많이 읽지 않았던 것에 대해 크게 후회스럽다. 대학에 다니던 80년대, 그 암울하고 잔인한 시대를 살아가며, 오직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바깥의 문제에만 온통 몰두한 나머지 정작 한 개인으로서 ‘나는 무엇인가?’ 이라는 실존의 문제에 관해선 사실상 거의 도외시해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자아 정체성의 문제라고 불러도 좋다. 혹은 삶의 정체성 문제라고 해도 상관 없다. 나는 마치 무조건 물에 뛰어들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기만 하면 그것이 수영인줄로만 아는 사람처럼, 세상이라는 바다에 겁 없이 몸을 던져 넣었다. 그런 이유로 내 청춘의 방황은 남들보다 더 길어졌고, 더 힘들었고, 더 우스꽝스런 한 편의 연극 같은 것이 되고 말았던 것 같다. 만일 내 청춘기에 타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기록들을 거울삼아 더 깊이 좀 더 자주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어쩌면 그토록 무모하고 어리석게 좌충우돌 하지는 않았을까?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커튼 Le Rideau』이라는 책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쓰고 있다. 그는 특히 젊은 사람들의 특징을 방황이라고 보는데, 방황 가운데서도 특별한 방황이라고 쓰고 있다. 청춘의 방황이 하필 왜 특별하단 말인가? 그 이유는 청춘은 방황하면서도 방황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방황하기 때문이다. 또 이중적인 의미에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첫째 청춘은 인생을 산 경험이 너무 짧기 때문에 아직 삶과 세상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둘째 아직 삶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내 경험에 비추어 거기에 딱 한 가지만 더 덧붙이고 싶다. 가엾게도 청춘은 자신이 이중적인 무지에 빠져 있다는 그 사실조차 모른다. 쿤데라는 청춘의 방황을 방황 자체로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오직 청춘이라는 터널을 통과한 후에 거리를 두고 뒤를 돌아보게 될 때다.

나 역시도 그랬던 것 같다. 길을 잃고 헤매는 방황과 표류의 긴 시간의 끝에서야 겨우 그런 모든 경험들이 갖는 의미를 뼈아프게 이해하게 되었으니. 내가 처음『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원제 Out of place)』을 읽으며, 무엇보다 그 책의 마지막 문장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그런 이유였으리라.

“이따금 나 자신이 한 줄기 흐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고체처럼 충일하고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라는 개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정체성보다는 한 줄기 흐름이 나는 더 좋다….나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보다 거기서 엉뚱하게 벗어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된 것은 그만큼 내 인생에 불협화음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

어쩌면 이 한 문장에 에드워드 사이드가 자서전에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 모두 함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이드의 자서전은 독특하게도, 어린시절부터 삼십대 초반 청춘의 나이에서 끝난다. 그는 백혈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던 중인 94년에 이 책을 쓰기 시작하여 5년만인 99년도에 가서야 힘겹게 책을 끝낼 수 있었다. 이 책은 그가 쓸 수 있는 마지막 책이 되었다. 2003년 9월, 백혈병이 끝내 그의 삶을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다. 68년 동안의 한 생이 그렇게 마감되었다. 치명적인 병과 싸우는 와중에도 2000년에는 이스라엘의 무력사용에 항의하기 하기 위해 레바논으로 달려가 레바논 국경의 이스라엘군 초소에 돌을 던지며 시위를 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걸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그는 이 회고록을 쓴 가장 중요한 이유로 “현재의 생활과 당시의 생활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과 공간의 간격에 다리를 놓고 싶은 욕구였다.” 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간격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따지고 가치평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초연하고 객관적으로, 오직 명백한 사실들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이 책을 쓰면서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다고 쓰고 있다. “영원히 지나가버린 역사와 상황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지만 추억이나 대화를 통해 이따금 되살아날 뿐 기본적으로 회상되거나 기록되지 않은 역사와 상황은 또 얼마나 허약하고 덧없는 것인가를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시간과 이야기의 관계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한 시간조차도 기억과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에 불과하다는 것, 따라서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남긴다는 것. 인간의 삶은 비록 시간 속에서 허망하고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이지만, 이야기를 통해 망각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 삶은 절대적인 소멸이 아닌 어떤 지속성을 얻게 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시간과 죽음을 의식하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고 근원적인 욕망인지도 모른다.

사이드는 고통스런 병상 위에서 이 책을 기록해 나갔지만, 지나온 먼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망각의 위험에 처한 기억의 간격들에 글쓰기라는 수단으로 연약한 구름다리를 놓으면서 삶이 가져다 주는 여러 곤란들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삶을 사랑했는가를 다시 깨달았다고 썼다.

사실 에드워드 사이드란 이름은 무엇보다 그가 1978년에 발표한 책『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Western Conceptions of the Orient)』이라는 저서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 책에서 그는 동양은 서양보다 열등하다는 사고방식의 유럽-서구 중심적 음모와 편견의 역사적 기원을 밝혀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그 책 이후 서구에서나 한국 같은 비서구 사회에서도 역사와 세계를 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졌다. 나 역시 그의 책을 읽고 나 자신의 무의식 속에 깊이 틀어박혀 있는 오리엔탈리즘을 새삼스레 다시 깨닫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이후 서구 문화와 제도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서구인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을 자신도 모르게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 양 내면화 해왔던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그가 맞서 투쟁하고자 했던 오리엔탈리즘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 시대를 움직이는 책’ 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그의 책『오리엔탈리즘』은 사실 끊임없이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 자신의 삶의 편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책이기도 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더 흥미롭게 읽었던 이유도 그런 인간적인 면들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1935년 영국 치하의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인으로 출생했다. 1947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가족들은 모두 이집트로 이주했고, 1950년대 말에그는 혼자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의 가족은 아랍인이지만 무슬림이 아닌 기독교를 믿는 집안이었다. 이집트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아버지 덕에 윤택하게 살았고, 프린스턴과 하버드대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받았으며, 대학의 교수로,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명성을 얻게 되지만,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인이자 카톨릭 세례를 받은 미국 국적을 가진 그의 삶은 늘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이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며, 경계인일 뿐이라는 불안은 젊은 시절 내내 그를 사로잡았다. 그에게 팔레스타인은 평생 이중적인 감정을 안겨주게 되는데, 어린 시절부터 “해결되지 않는 슬픔과 이해할 수 없는 분노의 근원” 이었던 그 문제는 회고록을 쓰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그에게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분열된 감정, “비통한 느낌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슬픔을 자아” 내는 원천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자아가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혼란스런 균열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묘하게도 영국의 한 왕자 이름에서 딴 에드워드라는 이름과 사이드라는 아랍식 성이 조합된 그 이름에서조차 그가 평생 살게 되는 그런 ‘경계인’ 적인 삶의 정체성이 마치 운명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는 자신을 경계인으로 생각했고, 또 끝까지 한 명의 경계인으로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조화를 이루는 민주주의 국가를 꿈꾸면서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쳐 투쟁했다. 억압과 배제가 없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들이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꿈꾸며 온몸을 던져 그 꿈을 위해 싸웠다. 제국주의나 서구 중심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했지만, 삶과 인간성을 억압하는 어떤 권위나 권력, 경계 짓기에도 순응하길 거부하는 비타협적인 삶을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자서전에서 고체처럼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나 정체성이란 개념을 거부하고 대신에 한 줄기 흐름, 끊임없이 경계를 벗어나 바깥에 머무르려는 도저한 흐름의 연속으로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한 것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다.

나 자신도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어떤 통일된 단일한 정체성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정체성이란 것을 현재 주어져 있는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 혹은 창조를 통해 형성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낯선 미지의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난 시절의 모든 방황과 표류를 수락하고 긍정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방황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형성하고 실패와 오류를 통해 끊임없이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탐색하고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인용했던 12세기 철학자 생 빅토르 후고의 한 문장을 기억한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경계인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결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런 삶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끝까지 당겨진 활처럼 팽팽한 긴장감, 집중력, 위험의 감수, 이 모든 것을 견뎌낼 의지와 신념이 필요하다. 내가 사이드의 자서전에서 새삼 발견한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세상 뿐 아니라 자기에게조차 이방인이 되길 거부하지 않았던 한 정신의 편력.

[공지사항]10월 26일 이준모 선생님 강연- 생태위기와 체계철학의 변증법적 지양

이준모 선생님의 강연을 10월 26일에 개최합니다[공지사항]

 

안녕하세요, 학술1부입니다.
한결 서늘해진 바람결이 가을이 깊어가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10월에는 월례발표회 대신 8월 예정이었던 이준모 선생님의 초청강연을 개최합니다.
강연주제는 으로 이준모 선생님의 오랜 문제의식과 연구성과가 강연에 담아질 것입니다.
많이 참석하셔서 배우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래에서 강연개요와 이준모 선생님의 약력& 저서를 안내합니다.
그리고 강연 당일 현장에서 최근 출간된를 할인된 가격에 판매합니다.

?강연일시: 10월 26일 금요일 오후 5시 30분
?강연장소: 태복빌딩 2층 강의실(한철연 연구실 건물 2층)
?강연주제 : 생태위기와 체계철학의 변증법적 지양 ? 동학의 방법적 지평에서
?강연개요 : 오늘날 생태적 종말의 위기는 농성 노동의 논리가 상공성 노동의 논리로 전이된 역사와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생명체들이 살아가려면 자연의 주체성을 회복시키는 철학사적 반성과 전환이 필요하다. 이 강연은 자연과 인간의 생태적 상응성을 드러내는 생태노동의 관점에서 헤겔 철학의 지배적 주체성의 논리를 자연의 주체성의 논리로 지양하고, 성리학의 노동의 논리를 반성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지양과 반성은 동학의 방법적 지평에서 조명된 것이다.

?이준모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튀빙겐 대학 및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신학, 철학, 교육학을 연구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교육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0년 8월까지 한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교수로 재직했다. 1989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자문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저술 소개
? 〈Zwischen Tradition und Universalit?t(전통과 보편 사이에서)〉 (1985, 프랑크푸르트)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시대의 철학체계는 그 시대 자연과 인간의 관계, 곧 인간이 자연에 가한 노동의 양식에 의해 규정된다는 필자의 가설을 동양철학 특히 성리학을 중심으로 논증한 저술이다.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출판.

? (한신대출판부, 1990)
필자의 위의 가설을 서양 근대철학에 비판적으로 적용하여, 루소, 칸트, 셸링, 헤겔의 철학에서 노동의 논리와 교육의 논리의 동일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교육철학 방법을 모색하였다.

? (한국신학연구소, 1994)
자연과 생태계의 파괴는 인간의 노동이 자연의 노동(밀알노동)으로부터 소외된 데서 기인한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독일 근대철학, 서구 신과학 운동, 그리고 동학사상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밀알노동의 변증법을 동서 철학사에 적용함으로써 생태학적 민중교육학의 방법과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 (시대와 민중, 1996)
헤겔 철학, 특히특히 『정신현상학』의 총체적 사유체계가 지닌 원환적(圓環的) 폐쇄성과 그 논리를 비판한 블로흐와 아도르노의 문제의식을 헤겔 철학에 적용하여 열린 총체성(한울)과 개체 존엄성으로 되살려냄으로써 개체가 총체적 개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교육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 (다산글방, 2000)
1990년대에 쓴 11편의 글을 엮은 논문집으로, 생태적 위기가 재생의 전환점이 되려면 서구의 이성이 도달한 두 계기, 곧 지배주의적이며 자기집중적인 자기의식과 첨단 과학기술이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자기집중적 자기의식은 나―자기성―자연의 분산적 자기의식으로 변화하고, 첨단의 기술은 동양의 농사 철학이 간직해 온 자연의 생명노동 범주와 만나야 한다는 것을 철학?교육학?종교학?노동의 측면에서 피력하고 있다. 동서고금의 인문학 자료를 토대로 생태노동의 논리가 반성되고 있다.

? (문사철, 2012)
이상에서 소개한 저자의 저술을 부분적으로 수정?보완하고 새롭게 편집하여 주제별로 재출간하는 시리즈이다. 2012년 7월 현재, 제1권 『생태철학』, 제2권 『종교생태학』, 제3권 『생태교육철학』, 제4권 『생태노동』이 출간되었다. 추후 제5권 『생태노동과 우주진화』, 제6권 『생태교육학』, 제7권 『노동의 철학과 인간교육』, 제8권 『무엇을 할 것인가』(가제)가 출간될 예정이다.

[한철연 강좌]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11월 6일 개강)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11월 6일 개강

 
니체, 푸코, 들뢰즈 등 12명의 현대철학자

 
“나는 너무 일찍 왔다. 아직 나의 때가 오지 않았다. 우리가 신을 죽인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방황 중이다. 이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니체는 탄식했다. 19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그는 1900년, 20세기의 문이 열리기 직전에 세상을 떴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일찍 온 21세기의 철학자였다.

20세기 초반,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로 이성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했던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파시즘을 쓰라리게 겪었다. 이 잔혹한 경험으로 인해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확신이 흔들렸다. 이 믿음은 이제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 믿음에는 본래부터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니체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그의 때가 온 것일까?

생철학, 실존철학, 현상학, 윤리학, 해체론, 후기구조주의 등으로 불린 이질적인 사조들이 니체라는 샘에서 물을 길어 올렸다. 니체가 ‘내 말은 귀를 갖지 못했구나!’라고 탄식했지만 20세기에 그가 한 말의 ‘귀’들이 수도 없이 출현했다. 우리는 니체의 말과 그 ‘귀’들을 새로이 읽으며 서양 현대 철학사를 다시 쓰고자 한다.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팍팍한 우리 사회는 사람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자유와 삶의 근거를 갈망하며 새로운 소리를 손으로 더듬거리고만 있다.

그런 사람들의 손을 잡고자 니체 계열의 사상가 열두 명의 향연을 마련하고자 한다. 니체를 비롯해서 쇼펜하우어, 베르그송,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화이트헤드,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데리다, 레비나스, 푸코, 들뢰즈까지 열두 명의 철학자들이 들려주는 삶의 노래에 여러분을 초대하니 이 노래를 가슴으로 듣기를 희망한다.

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진행하는 의 3번째 강좌가 오는 11월 6일 시작됩니다. 지난해 시작된 이 강좌 시리즈는 지금까지 2차례의 서양근대철학사 강좌(10강 및 8강)와 마르크스주의사상사 강좌(16강)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니체를 비롯한 현대 철학자 12명의 사상을 통해 현재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관심 있는 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강좌 : 우리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일시 : 2012년 11월 6일 ~ 12월 18일 까지(11월 27일 휴강) , 2013년 1월 8일 ~ 2월 12일 까지 (매주 화요일, 12강)
-시간 : 오후 7시30분-10시
-장소 : 서울 마포구 서교동 민족의학연구원 2층 강당(약도 참조)
-수강료 : 24만원(커플 수강료: 36만원, 두 분이 함께 신청하실 경우) 개별 강의 수강료는 3만원
-수강 신청: 수강료를 계좌로 입금 하신후 이메일 혹은 전화연락을 주시면 등록이 가능 합니다. (계좌 : 국민은행, 292501-01-121940, 예금주 프레시안)
-강의 문의 및 수강신청 연락 : admin@pressian.com(문의 02-722-8546 민정훈)으로 부탁드립니다.

-강의실 약도

 

◆ 강의실 찾아오는 방법 : 지하철 2호선 합정역 2번출구로 나와 뒤돌아보면 빵집과 옆으로 샛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10분정도 걸어오면 왕복 4차선 도로가 나옵니다. 거기서 편의점이 있는 오른 쪽으로 30M 지점에 태복빌딩(민족의학연구원)이 있습니다. 그 건물 2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강의 일정
1강 : 11월 6일 쇼펜하우어: 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박은미, 건국대 교양학부 강의교수)

2강 : 11월 13일 니체: 중심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가치 창조의 철학자 (연효숙, 연세대 외래교수)

3강 : 11월 20일 베르그송: 직관, 즉 내재적이고 심층적 의식의 생성과 변전으로서 권능 – 신비주의자, 권능의 구현자 (류종렬, 창원대 외래교수)

4강 : 12월 4일 하이데거: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을 다시 묻다 – 니힐리즘의 극복시도, 그리고 나치즘 (서영화,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5강 : 12월 11일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 언어와 삶 (김성우,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6강 : 12월 18일 화이트헤드: 존재의 계보 – 화이트헤드의 발생학적 생성 (최종덕, 상지대 교수)

7강 : 2013년 1월 8일 사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존재와 무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

8강 : 1월 15일 메를로퐁티: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화가의 시선과 몸 (조광제, (사)철학아카데미 운영위원)

9강 : 1월 22일 데리다: 해체란 무엇인가 – 글쓰기와 차이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

10강 : 1월 29일 레비나스: 타자의 얼굴과 환대의 윤리 (문성원, 부산대 교수)

11강 : 2월 5일 푸코: 근대 이성의 본질을 폭로하다 – 광기, 권력, 폭력 (박민미, 대진대 외래교수)

12강 : 2월 12일 들뢰즈 : 들뢰즈의 반복과 영원회귀 (김범수,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다음은 강사 선생님들이 미리 밝히는 강의 요지입니다

1. 쇼펜하우어: 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로 분류되지만 정작 자신은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았던 철학자이다. 니체는 허무주의자로 이해되기는 하지만 운명애를 말하는 철학자이다. 쇼펜하우어와 니체, 닮은 듯 다른 두 철학자는 모두 삶을 부정하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삶을 긍정해낼 방법으로 각각 동고(同苦, 고통을 함께 함)와 운명애를 주장한다. 두 사람 모두 이성이 아닌 의지에 주목했는데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부정을. 니체는 의지의 긍정을 주장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관조하는 자’가 될 것을, 니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초극해가는 ‘초인’이 될 것을 주장한다. 현대철학의 중요한 개념인 ‘의지’에 대한 두 철학자의 다른 접근은 현대철학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꼭 넘어야 할 산이다. 자신의 이성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지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감지해내는 현대인들에게 의지의 관조, 동고나 초극은 궁금한 그 무엇일 것이다.

2. 니체: 중심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가치 창조의 철학자

흔히 망치

인간이 ‘짐승’ 아닌 ‘사람’이기 위한 조건은?[철학자의 서재]

인간이 ‘짐승’ 아닌 ‘사람’이기 위한 조건은?[철학자의 서재]

?한나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
강지은(건국대학교 강사)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2012년 12월 19일, 대선이 불과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5년 만에 치르는 대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누구에게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 또 누구는 절대 안 되는지 또 어떤 정당은 국민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또 무엇을 줄 수 없는지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은 정국이다.

물론 선거에서 정당이나 정치인이 아무리 좋은 약속을 한다 하더라도 모두 지켜진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우리도 그것을 안다. 그렇다면 선거란 거짓말쟁이들의 잔치이고 우리는 그것을 외면해야 하며, 그 외면 자체가 정치적 표현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사실 되돌아보면 우리는 별 의미 없이 진행되었던 선거의 역사를 숱하게 많이 경험했다.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투표장에 가서 도장을 찍지만 늘 결과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같은 색 정당 깃발로 뒤덮였다.

수십 년을 같은 색깔 표시로 뒤덮인 한반도의 지도는 언제나 절망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무현 정부의 탄생을 지켜보며 그렇게 단단해 보이던 지형도가 깨질 수도 있음을 이미 확인한 전례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망보다는 희망이다.

공포의 사회, 전체주의 정치

한나 아렌트(1906~1975년)는 독일 출신의 정치 이론가이다.(1951년),(1958년),(1961년) 등을 통해 격동의 20세기를 날카롭게 비판한 아렌트는 제1, 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흑인 인권 운동, 1968년 학생 운동 등 세계사적 사건을 두루 겪으며 20세기를 사상적으로 성찰하였다.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전체주의의 필수 요소로 공포(terror)와 이데올로기를 지목한 부분이다(역자 서문, 8쪽). 전체주의는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성과 건전한 상식에 의존하여 판단하지 못하도록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수용소나 집단 수용소와 같은 시설을 마련한다. 이렇게 대중화된 사람들에게 체계적이고 논리적이지만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사고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 전체주의의 본질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리며 산다는 것은 지금의 정치가 전체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폭력의 공포가 전국을 뒤덮고 있는 사회에서 여성은 어릴 적부터 움츠리고 조심하며 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시간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저씨와 엘리베이터를 타서도 안 된다. ‘묻지 마 살인’과 흉악한 범죄들 때문에 거리는 감시 카메라 속에 가두어졌다.

2012년 9월 12일 오후 1시 21분 현재 ‘네이버’에서 검색되는 ‘성폭행’ 키워드 기사는 8만1602건에 달한다. 같은 키워드의 기사가 2007년 한 해 동안 5167건, 2008년에는 7627건 검색된 것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보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2011년 범죄 백서에 따르면, 강간(성폭력범 포함) 범죄 발생 건수는 2007년 1만3634건, 2008년 1만5094건, 2010년에는 1만9939건이었다.

범죄 발생 비율보다 보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9월 6일자 인터뷰에서 여성학자 권인숙은 “성범죄 보도의 증가가 ‘공안 통치’를 향한 위정자의 욕망 그리고 언론의 상업주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정권은 성폭력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명분으로 경찰의 불심 검문을 부활시키겠다고까지 하는 실정이다.

이는 이명박 정권의 전체주의적 정치 기조가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뒤를 잇겠다고 나선 박근혜 후보는 사형제가 필요하다고 하고 있으니 현 정권과 크게 정치색이 달라질 여지는 없어 보인다. 아렌트가 살아있다면 21세기 한국이 전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할 것이다.

칸트의 미학은 정치학

?아렌트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김선욱 옮김, 푸른숲펴냄)에서 칸트의 판단을 차용해 자신의 정치철학을 정교화한다. 이 책은 아렌트의 강의를 그의 제자 베이너가 모아 출간한 것이다. 완결된 형태의 정치 이론서가 아닌 까닭에 이 책의 구성은 열세 개의 강의와 이에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푸른숲 펴냄) ⓒ푸른숲

대한 각주를 겸하는 베이너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렌트 강의의 대부분은 칸트의?<판단력 비판>에 대한 재구성과 해설로 이루어져 있지만 칸트의 인간학 역사철학 등에서 보이는 정치사상을 고루 잘 소개하고 있다. 칸트가 미적 판단 대상을 예술작품, 자연과 같은 ‘사물’들로 한정시키는 것과 다르게 아렌트의 미적 판단 대상은 ‘정치 행위’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미 칸트의?<판단력 비판>에는 사회적인 것과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이 내재해있다고 보았다(첫 번째 강의).

아렌트는 자신의 관심사는 “복수의 인간(men)이며 진정한 목표는 사교성”(네 번째 강의)이라고 명확히 밝힌다. 이 복수의 인간에 관하여 칸트가?<판단력 비판>에서 다루었다는 것은 칸트의 미학이 단순히 철학의 한 분야로서 미학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적 목표를 향해있음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복수의 인간을 아렌트는 다음처럼 정리한다.

“지상의 존재,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음, 상식과 공통감(sensus communis)과 공동체 감각을 가지고 있음 ; 자율적이지 않음, 심지어 사유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동반을 필요로 함 =??<판단력 비판>제1부의 미적 판단.” (67쪽)

칸트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단수의 인간을<순수 이성 비판>과 <실천 이성 비판>에서 다룬다. 칸트의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비판하고 도덕법칙을 가지고 있는 원자적 인간이다. 그러나 아렌트가 보기에 <판단력 비판>의 인간은 이미 앞선 두 비판서의 대상인 원자적 인간이 아닌 복수의 인간이다.

아렌트는 만약 칸트에게 왜 단수의 사람(Man)이 아니라 복수의 사람(men)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칸트는 그들이 서로 말할 수 있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일곱 번째 강의)이라고 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미를 향유하는 인간은 결코 자기 금고에 예술 작품을 가둬놓고 혼자서 음미하는 인간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 앞에서 사람들은 감탄하며 그 가슴 벅찬 감동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내가 아름다움을 느낀 대상에서 타인도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서로 소통하는 순간 예술 작품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며 인간은 복수의 인간이 된다.

일곱 번째 강의에서 아렌트는 칸트가 이미 정확하게 생각하려면 타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했음을 밝히고 있다.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나’는 불완전한 자아일 뿐이다. 아렌트는 아래와 같은 칸트의 글을 인용하면서 비판적 사고를 위해 공공성이 필수임을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정확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에게서 자신의 생각을 공적으로 소통할 자유를 박탈하는 외부 권력에 대해 생각하는 자유 또한 박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90쪽)
그렇다면 인간에게 필수적인 공적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렌트는 칸트 철학을 가져와 인간 정신의 확장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정신의 확장은 “우리의 판단을 타인의 실제적 판단이 아닌 가상적 판단과 비교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놓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이 상상력이다. 칸트에게 정신의 확장은 미적 공감을 위하여 필요하지만 아렌트에게 정신의 확장은 정치적 사안을 공감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확장된 정신은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도 바로 이 확장된 정신을 통한 공적 소통에 의해 가능했던 우리의 정치적 경험이었다.

사적 이해관계를 떠난 관심만이 정치를 살린다

칸트 미학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 핵심 사항 중의 하나는 ‘무사심적 관심(disinterested concern)’이다. 흔히 ‘무관심적 관심’으로 번역되는 칸트의 이 용어는 사적 이해관계를 떠난 관심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질 때는 나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때이다. 내가 갖고 싶은 신상품에 자꾸 눈길이 가거나 땅장사가 전국의 땅을 찾아 헤매는 경우가 그것이다.

아름다움은 사적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면 결코 다가올 수 없다. 그래서 칸트는 무사심적 관심을 미적 경험을 하는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로 꼽은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작가의 그림이라 하더라도 내가 재테크의 수단으로 거실에 걸어 놓는다면 나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내가 그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나중에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우리가 모나리자에게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모든 사적 이익이 개입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도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아렌트는 칸트가 사심 없는 마음으로 미적 대상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과 함께 느끼는 일련의 미적 태도를 관찰자적 삶의 방식이라고 설명한다(112쪽). 관찰자만이 사태를 목격할 수 있고 통찰할 수 있다. 사건의 한 가운데에 있는 행위자는 결코 자신의 사적 이익을 떠나서 전체를 통찰할 수 없다. 마치 고대철학자들이 철학은 노동하지 않는 귀족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사유하는 삶, 관찰하는 삶, 관조하는 삶만이 전체를 볼 수 있다.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적 중요성을 가진 공적 사건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갈채를 보내는 관중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122쪽).

관찰자 앞에서 광경은 전체로서의 역사이며, 이 광경의 참된 주체는 어떤 “무한”을 향해 “진행하는 일련의 세대들” 가운데 있는 인류이다. 이 과정은 끝이 없다. “인류의 목적지는 영원한 진보이다.” (118쪽)
칸트의 역사철학의 중심에는 인간 종, 즉 인류의 영원한 진보가 그려져 있다. 비록 개별 인간은 후퇴하기도 하고 진보하지 못하는 듯도 보이지만 종으로서 인류는 진보한다는 믿음이 칸트에게 있으며 아렌트가 그것을 보았다. 그 종착지는 ‘누구도 자신의 동료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는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와 인류의 통일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국가들 간의 평화’이다. 관찰자는 이러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미래를 준비하는 자이다.

어떤 정치가 필요한가

칸트는 사람들이 미적 대상을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공통감(sensus communis)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렌트가 보기에 관찰자는 오직 복수로만 존재하며 관찰자는 행위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항상 동료 관찰자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공통감이 있기 때문이다. 공통감을 잃어버린 인간은 칸트에게는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공통감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갖는 것이며 초감각적인 세계의 구성원들이 갖지 않는다. 본래 공통감은 소통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소통하지 않고서는 공통감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는 공통감을 소통할 수 있는 정치이다. 나에게 다가 오지 않는 경제 발전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정치는 버려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는 경제의 문제이지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흔히들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만사가 형통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역사 어디에서도 경제가 좋아졌다고 해서 민중의 살림이 나아진 적은 없었다.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는 정치가 바뀌어야 먹고사는 것도 바뀔 수 있다는 데에 공감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이명박에게 표를 던진 표심은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국가들은 모두 경제를 정치 문제의 핵심으로 꼽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살리는 경제란 자본가들의 경제일 뿐이다.

아렌트는 공통감을 공동체 감각이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 여기에서의 감각이란 몸으로 부딪히는 행위자가 느끼는 감각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한 반성에서 나오는 반성의 결과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건설하고 싶은 비전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반성하여 함께 소통하는 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공동체 감각이다.

한반도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군 감축을 주장하는 것, 해군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것, 교육은 사회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는 것, 그래서 대학 등록금은 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인간답게 살려면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비정규직을 대폭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이는 나라의 기둥이기 때문에 나라가 돈을 들여 키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소통할 공동체 감각이다. 관찰자로서 반성해서 얻을 수 있는 이러한 감각들을 함께 소통하고 공유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이며 아렌트가 칸트에게서 얻은 교훈이다

 

9월 월례발표회에 많은 참석부탁드립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9월 월례발표회에 많은 참석부탁드립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안녕하세요, 학술1부입니다.

더운 여름을 보내고 날씨가 한결 선선해졌습니다. 새학기의 시작으로 모두 바쁘시지요.

9월 월례발표회는 신입회원의 박사학위논문 발표입니다.

발표자 윤지영 선생님은 프랑스 팡테옹 소르본느(파리 제 1대학)에서 <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현재 ‘여성과 철학’ 분과와 ‘라캉’ 분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번에 발표 주제 역시 <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재미있는 발표와 토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그동안 발표 논문을 미리 읽을 수 없느냐는 문의가 많았습니다. 앞으로는 발표자들의 의사를 존중해서 발표 논문을 전체 공개 또는 부분 공개하고, 이를 공지하겠습니다.

이번 발표는 발표 논문을 전체 공개합니다. 발표 논문은 완성되는 대로 홈페이지 공지문에 추가로 첨부하겠습니다.

출력해서 월례발표회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발표자: 윤지영(서울시립대)

논평자: 한길석(군산대)

주제: <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

일시: 9월 21일 (금) 5시 30분 한철연 제1세미나실

“이 논문은 서구 전통 형이상학의 이분법적 논리가 어떻게 존재론적 일원론과 연계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며 위계적 양극화 논리의 폭력성을 날카로이 비판할 것이다. 나아가 프로이트와 라깡의 정신분석학 내에서 남근 중심주의(phallocentrisme)가 어떻게 주체를 구성하는 메커니즘의 축이 되는지를 드러내며 리비도를 남성적인 것으로 보는 욕망의 경제학의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여성성이라는 신화-모성 신화와 처녀성에 대한 신화와 터부 등의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읽어내며 총체화되고 단일화된 여성성에 대한 단선적 정의를 파기함으로써 유희하는 몸과 하이브리드성이라는 새로운 주체화 과정에 주목할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철학의 유언]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철학의 유언]

지미정( 2012교육강좌 수료)

 

얼마 전 가끔 소식을 전하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받았다고·····. 이유는 물론 외로워서이기도 하겠지만, 270만원 때문에 목을 맸다면서 자기 속이 까맣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구가 물었다. “그 선배가 철학적이었다면 살아있을까?” 나는 철학을 했어도, 또 죽음의 원인이 100만원이었어도 자살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친구에게 “철학을 했어도..”라는 말을 쉽게 내뱉었지만 ‘어쩌면 철학을 했으면 조금은 다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 돈의 액수를 들었을 때, 나는 죽음의 원인이 단순히 돈의 액수로 환원되는 것 같은 느낌에 거부감이 들었다. 물론 친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왜 돈 때문에 사람이 죽어가야 하는지를 나와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을 안다. 아마도 뒤늦게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용을 쓰는 친구이기에 어떤 말인가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에게 철학을 했다면 다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철학을 공부했을 때, 어떤 면에서는 현실을 바라보는 고통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을 공부했을 때 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 다를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을 비관하기도 하지만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도 생기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친구 질문의 의도를 그 선배가 철학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힘을 가졌다면 돈의 고통과 외로움을 죽음으로 끝내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로 이해한다.

삶과 철학

내가 생각하는 철학 공부의 의의는 우리 사회가 가진 여러 가지 모순에 눈을 떠 현실을 비판하는 이성을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또 철학의 힘은 개인의 행복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음으로써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노력을 가능하게 만든다. 인간 삶의 모습과 사유 방식을 통해 좀 더 깊이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일도 결국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의 물음에 답을 얻는 일이다. 철학은 지혜를 주는 학문이다. 어떤 사람은 종교에서 위로를 받지만 나는 철학 공부에서 위로를 얻었다. 나는 씨알 함석헌 선생을 통해 철학에 눈뜨고 비교 종교학 책을 몇 권 보던 중, 비트겐슈타인을 만났다. 그렇게 내 철학사랑은 시작했다. 비트겐슈타인은 현대 영미 분석철학자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졌지만, 나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철학자로 다가왔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우리는 삶에 공허를 느끼면서 행복할 수 없다. 나는 대학 3학년 때 만난 지금의 남편과 3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의미도 모른 채 어린 나이에 시작한 결혼 생활이 나름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원하는 삶이 이게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까지 나는 내 꿈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고 내 꿈이 무언지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삶은 늘 공허했고 불만족스러웠다. 주부로 살면서 아이들의 교육에 내 에너지 대부분을 소진했지만 얼마 안 가 그것도 나를 만족시키진 못했다. 나는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오기 시작했다. 그 시기가 아마 내 존재에 대한 물음이 시작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에 아이들의 논술 지도를 위해 시작한 공부는 어느새 배움의 열망으로 변했고 아이들의 교육비를 대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학부 편입을 했다. 공학을 공부한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인문학 공부가 필요했다. 뒤늦게 찾은 철학 공부의 즐거움은 그 어느 즐거움에 비할 수가 없었고 가족을 집에 두고 새해 첫날에도 도서관을 찾을 정도였다. 나의 철학에 대한 애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석사와 박사 과정을 꿈꾸게 했다.

자아실현의 삶

요즘엔 ‘자아실현’을 위해 무언가를 감수한다고 하면 조롱거리가 되는 듯하다. 돈 앞에서 자아실현에 대한 욕망은 초라해졌지만 인간에게 ‘자아실현’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심리학자 매슬로(Maslow, Abraham H)는 인간의 욕구 단계 가운데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장 상위에 두었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인간의 생리, 안전, 사랑, 존경의 욕구가 충족된 후에 생기는 욕구라고 한다. 우리는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꿈을 접고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보면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 못해 처자식을 고생시키거나 자기 길만을 가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작년 초, 한 시나리오 작가의 아사 소식은 우리 사회 곳곳의 부조리함을 일깨운 사건이자 내겐 인간의 자아실현 욕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우리에게 그녀의 창작에 대한 고통에 비해 최저 생계비로만 살 수밖에 없는 문화예술계 구조 문제를 일깨워 주었다. 더 나아가 나는 그녀가 자신이 선택한 그 일을 좀 더 일찍 그만두거나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하지 못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그냥 추측해본다.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삶은 단지 생계비 마련을 위한 일이 아니라 창작의 고통을 감내할 만큼의 희열을 주는 일이었으리라. 그녀가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하지 못한 것은 그녀가 생을 만만하게 보아서도 아니고 현실과 타협하기 싫어서도 아닌, 다른 일과 병행하면서는 마음먹은 작품을 도저히 써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에게 창작은 자아실현 욕구와 관련한 것으로, 생의 위협 앞에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일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흥행을 위해 그녀 작품을 상업적으로 만들었다면 어쩌면 궁핍한 예술가로 살다 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물론 그녀의 작품이 내 추측과는 달리 작품성이 떨어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혹자는 나의 이런 추측을 비판할 수 있다. 어쨌든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매슬로의 이론이 그녀에게는 예외적이라는 것이다. 매슬로가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생리 욕구가 해결되지 않고는 상위의 욕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우리 주변에는 배고픈 예술가들이 많다. 또 만인의 존경을 받는 명예가 없어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아실현의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여기서 그들 모두는 생리적 욕구와 다른 욕구를 뛰어 넘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강한 자들이었음이 드러난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기

나는 30대 초반에서야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고민했다.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그 때 깨달았다. 현재 내가 추구하는 삶은 부조리한 사회 구조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물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삶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며 어쩌면 유토피아로, 우리 사회에서 공감을 얻기 어려운 삶일 수 있다. 내 삶은 주인이 된다는 것은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때만이 가능하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물질과 지위와 권력의 소유에 집착하는 삶과 “존재 양식”으로서의 삶을 말한다. 프롬이 말하는 “존재 양식”의 삶은 “소유하지 않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해 세계와 하나가 되는 삶”을 말한다. 프롬이 말하는 “생산적”이라는 말은 창조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것으로 활동의 산물보다 활동의 질에 있다. 즉 “스스로를 깊이 의식하는 사람, 자연을 그냥 지나쳐서 보지 않고 진정으로 투시하는 사람, 한 편의 시를 읽고 시인의 표현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창조와 연결되지 않아도 생산적”이라고 말한다. 철학을 공부한 후에 나의 삶에도 변화가 생겼다. 나의 존재 가치를 외부에서 찾으려 했던 내 20대와는 다르게 지금 나는 의·식·주를 위한 최소한의 물질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가끔은 그들을 위해 내 재능을 나누며 살고 싶다.

이 글을 친구와의 전화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는 우리가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존재를 의식하기 위한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우리는 우리의 자존감을 위해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우리의 자존감은 상처입고 절망에 빠진다. 최근에는 지역마다 평생 교육차원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설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철학은 돈이 안 되는 학문이라는 이유로 외면 받아왔다. 대학의 교육도 실용적인 학과만을 남기고 통폐합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이런 교육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삶의 방향을 잃고 소유하는 삶을 지향하게 만든다. 소유가 존재라 믿는 현대인의 병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소유지향의 태도는 타인을 배제하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는 일 외에는 자신을 위한 다른 노력을 하지 않게 만든다. 지식의 소유도 마찬가지다. 지식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한 반박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기의 이론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노력만 한다. 그러나 타인의 이견을 열린 자세로 대하는 사람은 지식의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질이든 지식이든 소유를 지향하지 않는 삶의 태도는 공부를 해야 얻을 수 있다. 나는 공부가 부족해서인지 아직 지식을 갈망한다. 지금 내가 알게 된 것을 과거에는 몰랐고,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던 내가 알게 되는 기쁨을 맛보는 것이 내 공부의 즐거움이다. 나에게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은 행운이다. 남들보다 많이 늦었지만 나는 내 북장단에 발맞추려 한다.

또 다시 찾아 온 이별[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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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딸을 보내다

세월은 빨리 가라고 재촉하지 않아도 잰 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시 오기를 몇 번 되풀이하자 험하고 삭막하기만 하던 산이 사람들을 품어 주었다. 그들이 사는 산속 마을에도 햇살이 찾아와 주었고 바람도 놀러 와 주었다. 다람쥐들은 도토리를 나누어 주었고, 새들은 음악을 들려주었다.

폭풍 같은 시간들이 지나고 생활이 안정되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사람이 사는 곳에 문제가 없을 리 없겠지만, 할머니에게 다가온 문제는 깊이 묻어 두었던 상처를 꺼내는 것이기도 했다. 죽음의 길을 가는 엄마를 끝없는 울음소리로 돌려 세웠던 그 딸을 이제는 할머니 스스로 떠나보내야 했다.

살리기 위해 아들을 떠나보냈는데, 이제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딸을 보내야 했다. 딸이 자라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걱정은 시작되었다. 딸은 소위 말하는 ‘미감아’였다. 예쁘고 영리했지만 아이를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자라면서 말이 없어지고 침울해지는 아이를 보면서 할머니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밤이 오면 마당을 나와 밤이 새도록 서성거렸다. 달빛에 마음이 아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까닭모를 설움이 올라왔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기도 했다. 그때마다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이지만, 그 희망을 모질게 끊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울산에 있는 저거 큰 아부지한테 보내기로 했다. 큰 엄마도 보내라 카대. 데리고 있으모 안 된다고…” 딸아이는 큰 아버지 집으로 간다는 말에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알았던 게지. 지가 여기 있으모 어떤 소리를 듣는지.” 단순하게 거주지를 옮기고 학교를 옮긴다고 ‘미감아’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몇날 며칠을 서로 말없이 얼굴을 외면했다.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아이를 영원히 보내야 한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또 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곧 4학년이 될 것이다.

2. 그림자로 남은 엄마의 자리

“4학년 올라가기 직전에 갔다.” 할머니는 창밖을 바라보며 마치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툭 내던지듯이 말했다. 아이는 울지도 않고 큰 아버지 손을 잡고 갔다. “호적도 파 줬다.” 딸은 그날 이후 법적으로는 할머니의 딸이 아니라 조카가 되었다. 아이를 보내고 난 후 할머니는 덧나는 상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한센병이 찾아 온 이후로 할머니는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았지만, 자식을 보내야 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이제는 만나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승팔이에 대한 그리움과 먹고 살 수 있는데도 보내야 하는 딸에 대한 애잔함이 할머니를 깊은 절망의 늪으로 끌고 갔다.

분명히 나의 일인데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할머니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우짤기고. 내가 뭐를 할 수 있겄노. 그냥 숨만 쉬었제.” 그런 할머니를 할아버지는 위로하고 따뜻하게 품어 주었다. 가까이 있으니 만날 수 있다고, 여기서 사는 것보다 훨씬 잘 되었다고, 그렇게 도닥거려 주었다.

할머니도 이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깊이 묻어 둔 그리움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립다 말이라도 하면 좀 나아지겠지만, 그 말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골목길을 뛰어 나올 때 등 뒤에 들리던 승팔이의 울음소리만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 울음소리를 떨쳐내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했다. 닭모이를 주고 똥을 널어 말리고, 계란을 모았다. 돼지우리를 밤낮 없이 치우고 또 치웠다. 잠시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면 새파랗게 날이 선 서러움이 밀려와 눈물이 흘렀다. 그 옛날처럼 말도 못하고 우는 게 아니라 아이가 보고 싶어 운다고 말할 수 있어서 울고 또 울었다.

딸은 방학이 되면 엄마를 찾아와 주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뜸해졌지만, 엄마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끈을 놓은 적은 없었다.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할 때, 이제는 딸이 울었다. 딸의 부모는 더 이상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었다. 딸이 엄마의 품을 떠나던 초등학교 4학년부터 지금까지 할머니는 그림자가 된 엄마였다.

딸이 떠난 빈자리를 채워준 것은 작은 딸이었다. 우연히 마을에 들어온 작은 여자 아이가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할머니는 작은 딸로 받아들였다. 작은 딸은 할머니 곁에서 성장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작은 사위와 함께 수시로 찾아와 할머니를 돌보아 드린다. 가슴으로 낳은 딸이기에 때로는 더 측은하고 애틋하다.

작은 딸과 달리 마음대로 올 수 없는 딸은 전화로 자주 안부를 묻는다. “거의 매일 전화가 온다. 엄마 밥은 묵었나, 몸은 어떻노. 맨날 묻는다.” 딸은 오더라도 머물지 못하고 오전에 왔다가 오후에 돌아가지만,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홀로 계신 할머니를 틈틈이 돌보고 있었다. “우리 큰 사위는 나 모른다. 알모 안 되제.” 손자와 손녀가 장성하자 딸은 자신의 어머니를 알렸다. 성인이 되어 비로소 알게 된 외할머니를 손자 손녀는 방학 때마다 찾아와 주었다. 그리고 옆에서 자고 가기도 한다.

3. 가을을 앞에 두고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크고 무거운 삶의 고통일지라도 시간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할머니 곁에서 손을 잡아주던 할아버지도 떠나고 없다. 나란히 붙어서 문으로 연결되는 작은 방 두 개와 부엌, 그리고 옆으로 연결해 만든 목욕탕이 할머니의 공간이다. 마당 끝에 서 있는 간이용 화장실을 볼 때마다 할머니의 외로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이 없는 집의 마당 끝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마당에 서면 많은 차들이 고속도로 위를 끝없이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그 어디쯤에서 할머니는 닭과 돼지를 길렀다. “저 고속도로가 난다고 팔아라 하는데, 팔아야지. 그때 다 보상을 잘 받았다.” 땅을 보상받고 국가에 내어준 뒤 처음으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이 여름을 지나고 가을을 지나 겨울로 다가가고 있었다. 무성한 풀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 쓴 시에 “풀에 벌레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픔을 토로했었다. 방문을 열어 놓으니 제법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지만, 할머니와 나는 이불 밑에 몸을 반쯤 숨기고 저 멀리에서 달리는 차를 바라보았다.

“차가 많제?” “네, 참 많이 다니네요. 밤에 안 시끄러우세요?” “왜~~~, 아이고 큰 차가 지나가모 멀리서도 시끄럽제. 차가 저리 마이 다닐 끼라고 누가 알았겄노.” “하늘이 맑제? 파랗나?” “네, 진짜 가을이네요. 나가보실래요?” 백내장으로 흐릿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할머니는 처음으로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 대해 말해 주었다.
소록도의 풍경/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threagi74가을 하늘은 푸르고 맑기만 하더라.

산천초목에는 붉은 물 든 단풍들이

장관이더라.

한 고개 내려와 보니

은행나무 잎에는

노리고도 노란 색깔 위에

황금빛을 나타내며,

흐르는 잎마다 주워서 책 속에 넣던

옛 추억이 떠오르네.

뒤돌아보니 금수화꽃은

우리 한반도 지도처럼

차분하게도 피어 있더라.

온 들에서는 코스모스가 피었고

길에도 피어 색색가지로

자기를 나타내며

뽐을 내고 웃고 있는 그 모습이

교만해 보이더라.

뒷동산에 올라가서 보니

고목나무에서는 주먹만한 밤송이가

이 구석에서 쿵 저 구석에서 쿵

떨어지는 알밤이

우리 맘의 욕심을 나타내더라.

시골길을 내려오니

돌담 사이사이마다

감나무 나란히 서서 가을 햇빛에

무르익은 붉은 색을 나타내고

감홍시 주렁주렁 매달려

보는 이로 하여금

탐스럽기도 하고 먹음직하기도 하고

우리의 맘을 끌고 있네.

고적지 담장 위로 돌아오니

벌써 시간은 황혼이었고

해는 서산으로 기울이며

오동나무에서는 오동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져서 뒹굴 때마다

내 마음이 슬퍼지고 외로워져

옛 추억이 떠오르네.

눈에 고인 눈물이 볼 위에

주렁주렁 흐르면

이것이 가을의 계절인가

으악새도 슬피 울고 있네.

-전문-

4. 고통의 강을 건너

기억 속의 가을은 풍성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고향은 어디를 가도 꽃이 피어 있었고, 가을이 되면 밤송이가 툭툭 떨어지고 감이 붉게 익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곳이었다. 마쓰시타를 만나고 한센병이 찾아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곳도 고향이었다. 승팔이를 낳아 떠나보내고 돌아왔던 곳도, 어머니를 한스럽게 묻었던 곳도 고향이었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있으면, 그 많은 시간의 강을 건너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도 고향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러나 이제 그 고향은 더 이상 가슴 아프고 참담하던 곳이 아니다. 시을 한 행 한 행 들려주는 할머니의 얼굴은 평화롭고 따뜻했다. 생각에 잠긴 채 엷은 미소를 띠고 천천히 들려주었다.

“니도 감꽃 갖고 목걸이 만든 적 있나?” “그럼요. 제가 그 목걸이를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하얗고 향기도 좋고, 혼자 만들어서 목에 걸고 다녔죠.” “나도 그랬다. 바늘에 실 꿰갖고 꽃잎을 연결한다. 그렇제? 하고 나모 손끝에서 감꽃 향기가 안 없어진다. 니도 그렇더나?” 할머니와 나는 시공을 뛰어 넘어 어린 시절의 공통된 기억을 찾아냈다.

그것은 감꽃 목걸이다. 여름을 앞둔 어느 날, 할머니와 나는 커다란 감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감꽃을 줍거나, 장독대 위를 하얗게 덮고 있는 감꽃을 한 손 가득 쥐고 와서 그늘에 앉아 감꽃 목걸이를 만들었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느 사이엔가 할머니의 기억은 고통의 강을 건너 유년의 행복으로 흐르고 있었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3)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3)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3. 아테네 민중과 민회 그 빛과 그늘

30인 참주의 지배는 원칙에 있어서나 경과에 있어 폭압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들이 실각한 뒤 아테네인들의 생활 방식은 금방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참주들이 살아남아 이 광경을 보았다면 뤼시아스가 그랬듯이 누구나 다 이렇게 항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생활방식이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인데 그런 것이 다시 되살아나다니!”. 하기는 아테네 민중들의 부유층에 대한 탈취에 가까울 정도의 공적 기부의 강요는 민주정 회복 이후에도 크게 제제되는 일이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아테네는 더 이상 기부를 강요할 대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가난해져 판아테나이아(Panath?naia) 축제마저도 아주 간소하게 치룰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나라경제는 거류외인들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고 있었다. 시민들이 이러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 이유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민주정 회복 이후 아테네 민중들은 노동을 통한 견실한 삶보다는 오랫동안 민회나 소송사건에 매달려 생계를 영위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마치 게으른 사람들이 먹는 일만 생각하고 있듯이 완전히 상궤를 벗어난 터무니없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클레온(Kleon)이 배심원의 급여를 3배로 올린 이래, 한층 더 열심히 민중 최고재판소(heliaia) 일에 전념하면서 재물을 손에 넣는 일이라면 위증이나 술수는 물론 세금을 부정한 방식으로 회피하거나 타인에게 전가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귀뚜라미는 나뭇가지 위에서 1, 2개월 노래할 뿐이지만, 아테네인들은 일생 동안 소송으로 노래하며 먹고 살고 있었다.

 

아고라 유적지 복원 가상도. 아크로폴리스 오른쪽 밑에 평의회 건물과 평의회 행정청 톨로스 그리고 선거로 뽑힌 배심원으로 구성된 민중 최고재판소가 나란히 위치해있다.

 

아크로폴리스 오른쪽 밑에 평의회 건물과 평의회 행정청 톨로스 그리고 선거로 뽑힌 배심원으로 구성된 민중 최고재판소가 나란히 위치해있다.이러한 정황은 여러 종류의 고대 자료를 인용할 것도 없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 등장하는 필로클레온의 말만으로도 충분히 드러난다.([벌(蜂)] 548f) 이 남자는 자신이 배심원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얼마나 좋은 지를 아주 신이 나서 떠벌리고 있다. 이 작품의 정경들 중 어떤 장면을 취해도 모두 현실 그대로의 행태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아테네에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 사람들은 피고인이나 그 가족들이 자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곤경에 빠져 신음하는 이러한 사람들이 재판정에서 그에게 아첨하며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잘된 연극을 흥겹게 구경하듯,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자신의 위세와 무분별한 방종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 최고재판소에서는 자신이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고 해서 반드시 승소하는 것도 아니었다. 종종 배심원들의 분노라든지 동정심이 판정의 주요 요인이 되기도 하였고 혹은 피고인 자신이나 어떤 당파에 속한 자들의 웅변조 연설에 의해 판정이 뒤집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변호 연설의 초안을 작성해 주는 관습 덕분이었다. 특히, 경탄할만한 천재성을 가지고 연설 의뢰인과 마치 한 몸 한 마음이나 된 듯 연설문을 써주고 큰돈을 벌었던 뤼시아스는 이러한 재판의 모든 과정이 얼마나 사람들의 정신을 소진시키고 피폐하게 만드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앗티카의 정의심은 고갈되어 갔고, 진리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으며 다만 수사술(rh?t?rik?)을 통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그럴듯하게 설득할 것인가(to pithanon)가 재판에서 이기기 위한 전부였다. 이런 까닭에 어떤 피고인 가족들은 비탄에 빠진 나머지 영향력 있는 당파와 잘 통하는 사람을 내세워 재판관을 찾아가서 선처를 청원하기도 했다. 크세노폰(Xenophon)이 전하는 헤르모게네스의 말은 간결하지만 당시의 정황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테네의 재판관들은 연설에 의해 설복되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수없이 처형했고 또 많은 수의 범죄자들을 무죄로 판결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 회상록] VI, 8,5) 사실 고전기 내내 어쩌면 최고의 인재는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의 뛰어난 사람들은 변론술의 수련을 통해 법정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길러졌다. 실제 이 기술은 시칠리아에서는 소송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고전기 어느 때 어느 곳에서건 끊임없이 발견되는 이 법정 변론술의 번성과 활약상에 비하면, 사실 정치적 변론술은 오히려 몇 가지 측면에서만 현저한 효과를 발휘했을 뿐이다.

민회가 열리던 아테네 프뉙스 언덕 연설단

아테네의 경우 정치적 변론술의 무대는 그 유명한 민회(ekkl?sia)였다. 민회는 모든 민주정에서 보여지듯이 원천적으로 500명으로 구성된 평의회(Boul?)가 가지고 있었던 직무를 빼앗을 정도로 고도의 통치기관으로서 자리 잡았다. 이 민회는 때로는 현실 국면에 대한 대단한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했고 또 민중을 선동하는 동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민회는 더 이상 기존의 다른 협의기구와 제대로 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데모스테네스(Demosthnes)는 곧바로 민회를 설득해 필립포스 2세와 단교하고 테바이와 연합하여 무모하게도 카이로네이아 전쟁(기원전 338년)을 일으켜 아테네를 멸망의 위기에 빠트리기도 했다. 민회에 대한 판단은 넓은 의미에서는 동시에 아테네 역사에 대한 판단이기도 하다. 사실 당시의 아테네는 다른 폴리스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는 유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민회는 30인 참주정이 실각한 후 민주정이 부활하고 나서도, 비록 끝없이 변덕스럽기는 했지만 여전히 국가 조직으로서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해온 기관이었다. 여러 폴리스들에서 아주 피비린내 나는 갈등과 위기가 반복해서 일어났지만, 아테네는 어떤 사태를 맞이했건 간에 이 ‘민회를 통한 협의와 결의’라고 하는 길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없었다. 아테네 역사에 대한 평균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그리스 정신의 말기 상황을 파우사니아스(Pausnias)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민주정이 아테네인 이외의 사람들을 번영시켰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년)

 

아테네 사람들은 타고난 지적 능력에 있어서 다른 그리스 사람들보다 우수하고, 게다가 현존하는 법률에 불복종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스 안내기] IV, 35,3) 이 단합된 시민은 마치 하나의 생물과도 같아서 조형예술의 손에 의해 빚어지듯 이상적인 형태로까지 성장했다 물론 희극 작가들은 작품 속에서 이 시민을 정중하게 다루지도 않았고, 플라톤은 시민을 “크고 힘센 짐승(thremmatos megalou kai ischyrou)”으로 여겨 그 시민들의 기분과 욕망을 숙지하는 것이 국가를 다스리는 지혜로 간주하였다.([국가] 493b) 한편 플루타르코스는 옛날부터 알려져 있는 아테네 시민들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욱하고 화를 내기도 하지만, 또 측은해하며 마음을 확 바꾸기도 한다. 시민은 차분히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예리하게 따지는 쪽을 좋아한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겸손한 사람들을 후원하기도 하고 또 유머는 물론 웃음을 동반하는 연설도 좋아한다. 자신을 칭찬해 주는 사람들을 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조소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화를 내지도 않는다. 시민은 그 통치자에게는 무서운 존재이지만, 자신의 적들에 대해서조차 아량이 넓다.”(플루타르코스 [정치론 모음] ‘계율들’(rei p. ger. praecepta) 3)

 

참주 히파르코스를 살해하는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

 

집회에서 결정에 임하는 아테네인들의 모습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은 집회에서 무엇보다도 아주 엄숙하게 처신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체 사안들에 관한 최고의 처분권과, 무엇이든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을 경우 그것을 이룰 권리를 가지는 우리 아테네 시민!“ 이라는 표현 또한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평의회의 건물에는 평의회 위원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제우스와 아테네의 신전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그곳에 들러 엄숙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정의 안녕을 위해 기원을 드리면서 정성을 다해 제물을 바치기도 했다. 신전에서의 맹세가 상습화되어 있었던 대중들도 그 효과 또한 상투적인 것 이상으로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아테네인이라면 누구라도 디오뉘소스 축제를 앞두고는 정례적으로 아주 진지하게 민주정의 적(敵)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맹세(psephisma: 인민결의)를 올리곤 했다.(안도키데스(Andokides) [비의에 관하여(de myst.)] 97) 이를테면 민주정을 반대하는 자는 처단하고야 말겠다는 것, 특히 비민주정 체제하에서 높은 지위를 누린 자들, 참주와 그 부역자들 모두는 반드시 처단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처단한 자들은 무죄라는 것, 척결당한 자들의 재산을 처분하고 그 재산의 반을 그들을 처단한 자들이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사랑하는 상대를 탐한 참주를 함께 처단한 커플)의 자손처럼, 척결을 실천한 사람의 자손들에게는 급여를 주어야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때마다 성실하게 신들에게 이러한 맹세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늘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해주었고, 거짓맹세를 일삼는 자들에게는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파멸이 닥치길 기원하였다. 그리고 폴리스는 시민 모두가 증오하고 폴리스를 위해 척결해야 마땅한 자를 누가 처단했을 경우, 그가 어떤 사람, 어떤 신분이었던 간에 상관없이 그 사람에게 격정넘치는 칭찬과 함께 화관을 하사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일을 위해 거짓으로 작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 유명한 헤르메스상 훼손사건(기원전 415년) 때에 디오클레이데스(Diokleides)는 이 사건은 시민들의 파멸을 도모하기 위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즉각 주장하고 알키비아데스를 범인으로 지목하였고 그 결과 알키비아데스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출정 중 스파르타로 망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국가를 구한 자로서 화관을 하사받고 마차에 태워져 회당으로 가서 향응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그것은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했다.(안도키데스 [비의에 관하여] 36.45.65f)

그런데 아테네가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하면서 여러 가지 목적상 민회를 통한 방법 외에 다양한 다른 방법을 취했다면,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일을 분명 보다 용이하게 달성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 민회에서 대외 정책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선전해야 했던 것은 대단히 희극적이다. 데모스테네스는 민회에서 당시의 정치적 관심사와 관련하여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국가에 유익한 것은 테바이 사람들과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강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테바이 사람들이 포키스(Phokis) 사람들을, 그리고 또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다시 포키스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이 최강자로서 안심하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크라테스 논박(adv. Aristokratem)] 654) 게다가 그는 무심코 입을 잘못 놀려 아테네인은 그 어떤 다른 사람들의 죽음보다 오히려 필립포스 2세(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싶다고까지 말해 마케도니아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정체는 어쨌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생활방식이고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어 정열적인 전체 의지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집단의 목적 또한 생겨났고 또 전체의지를 통해 그 목적이 강하게 의식되어질 수 있었다. 게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만 해도 민주정은 상당히 오래 전 부터 깊이 뿌리를 내려왔던 정치체제였으므로 현실에서 생동하는 모든 기억들은 이미 이 민주정체하의 인간이나 사물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토록 민주정은 실천적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후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압박에도 존속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쁜 경험들이 민주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민주정을 악용한 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가상도(기원전 431-404년)그런데 아테네 사람들의 소질, 의지 그리고 운명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임에도 후세사람들은 끊임없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싶은 유혹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아테네라는 국가는 지나치게 격정에 휩쓸려 국가에 극히 유해한 어리석은 행동과 폭거를 결의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유능하고도 자질이 훌륭한 사람들을 급속히 소진해버렸고 게다가 그들을 협박하여 외국으로 추방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아테네에 있다면, 그것은 국가로서의 아테네가 아니라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적 잠재력(Kulturpotenz)을 갖춘, 정신의 원천(Quelle des Geistes)으로서의 아테네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예를 들어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인들이 보여주었던 민회에서의 열정과 전장에서의 헌신적인 용감성은 모두 맥동치는 국가성원으로서의 움직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그 기간 동안 시민대중들 또한 의연하게 절제와 지혜를 발휘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엄청난 재앙으로 번졌을지도 모를 수많은 난관들이 고결한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미연에 저지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원전 406년 참혹했던 아르기누사이(Arginusai)의 해전에서 돌아온 장군들을 재판하면서 그들의 처형이 부당함을 외친 소크라테스 등 소수의 사람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광기에 찬 군중들은 이렇게 외쳤다. “시민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음해, 아테네는 마침내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스파르타에게 완패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최종적 패배자로서 치욕스런 예속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30인 참주정 실각 후 민주정이 회복한 뒤에도 이전에 그랬듯이 하루가 멀다않고 민회 결의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방식으로, 5백명으로 구성된 평의회의 예비 협의마저 무시하고 모든 결정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이끌고 갔다. 인민(d?mos)이 결의한다는 것은 실로 인간임을 표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닭이나 다른 동물이 인간과 다른 점은 그것들은 민회에서 결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아리스토파네스 [구름] 1428)이었다. 그러나 영속적인 가치와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순간이나 그 때의 기분에 따라 이루어지는 이러한 처사를 감내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잊고 있었다.

이제 이 민주정이라는 공적인 제도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실제로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고 어떤 영향을 받고 있었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야만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그리고 30인 참주정이 실각하기 전까지는 과두정주의자들이 민심을 부추겨 악의적인 일을 저지르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민주정으로 회복이 된 후에는 거꾸로 오로지 민주정 지지자들만이 민회 및 민중 최고재판소를 지배하려 들었다. 그 대표적인 두 부류가 변론술로 무장한 선동정치가(d?mag?g?s)들과 중상모략가(syk?phant?s)들이다. 물론 이 양자를 하나의 인물이 겸비하기도 했다. 그들은 민회건 법정에서건 그들이 원하는 결의를 얻어내기 위해 온갖 수사술을 다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들을 선동 또는 매수하여 박수를 치거나 야유를 날리거나 위증을 하게 하는 등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어떤 행위도 서슴치않았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