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편하게 살자, 유창복의 『우린 마을에서 논다』/나태영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속 편하게 살자

유창복이 쓴 『우린 마을에서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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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나태영(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21세기 대한민국 자살률이 세계 3위이다. 리투아니아, 크로아티아 다음이다. 박노자한테서 들은 이야기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비율 세계 1위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900만이 넘는다. 그 분이 3인 가족 가장이시면 2700만이나 되는 분이 하루 하루를 힘겹게 사신다.

부자감세가 이루어진다. 반대로 간접세는 올라서 서민증세가 이루어진다. 남북긴장 은 심화되고 있다. 죽음(死)강 사업으로 환경과 농지가 파괴되고 홍수증가가 예상된다. 큰 건설회사만 신났다. 4대강 사업으로 지어진 시설들을 없애고 4대강을 자연 상태로 되돌리는데 드는 돈이 4대강 사업에 쓴 돈보다 세 배 더 든다고 한다. 큰 건설회사만 또 신났다. 이명박 정권은 한미매국협정(한미에프티에이)졸속 재협상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다. 도무지 신나는 일이 없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같은 신나는 일이 벌어져야 이 나라 서민이 즐거울 텐데, 올해 이 나라에서 월드컵이 개최되지 않는다. 답답하다. 숨이 막힌다.

그나마 이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풀어줄만한 참말로 신나는 일이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 마을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같이 광적으로 신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해줄만한 일이 성미산 마을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농촌 인심을 21세기 대한민국 거대도시 서울에서 일상적으로 맛볼 수 있다. 티비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성미산 마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 부부는 지금 맞벌이 부부이다. 그래서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 둘레 아주머니에게 우리 아이를 맡기면 된다. 임산부가 병원에서 애를 낳아야하는데, 남편이 옆에서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럼 네 살박이 큰 애를 옆집에서 재워 준다. 우리집에 갑자기 손님이 왔는데 밥이 없다. 그럼 둘레 집에서 밥을 얻어올 수 있다. 서로 품앗이가 이루어진다.
『우린 마을에서 논다』, 유창복 지음, 또 하나의 문화, 2010.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했다. 부자는 높은 수준 문화예술을 향유한다. 반면에 빈자는 그러지 못한다. 이로써 부자와 빈자 간에 구별짓기가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성미산 마을에서는 그러한 구별짓기를 막을 수 있는 활동이 이미 이루어졌다. 바로 이 책 글쓴이 짱가 유창복씨가 주축이 되어 주민과 함께 성미산 마을극장을 만들었다. 짱가가 극장장이다. 이 극장 규모와 시설은 서울시 대학로에 있는 일반 극장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뛰어나다. 이 정도 수준 마을극장은 대한민국 최초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 극장에서는 일반 극장과 달리 전문 예술가들이 출연하기도 하지만 마을 주민이, 마을 어린이가, 마을 노인이 주인공으로 공연에 참여하기도 한다. 입장료는 대학로 연극 공연비의 약 30 – 40프로 수준이다. 무료 프로그램도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노숙자일지라도 뜻만 있다면 성미산 마을극장에 들어가 고급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다. 티비 광고에도 쓰인 적이 있는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라는 동요가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성미산 마을이다.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배우와 관리자로 일하시는 단비 아빠가 했던 말이 내 뇌리에 남아있다. “삶이 곧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활 속에서 예술을 즐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死)강 사업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있다. 제초제, 농약,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현대 농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들 먹을거리가 우리 몸을 괴롭히고 있다. 우리 몸의 질병을 키우고 있다. 우리 성격을 거칠게 만들고 있다. 우리 꿈나무를 병들게 한다. 후손에게 물려줄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이를 예방하는 일을 톡톡히 하는 단체가 성미산 마을에 있다. 바로 마포두레생협이다. 마포두레생협은 소비자에게는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해주고 생산자에게는 꾸준한 수입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이를 통해서 도시와 농촌이 하나가 되도록 만들고 있다.

독자 여러분은 이순신장군 한산도대첩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세계 4대 해전 맨 앞을 차지하는 한산도대첩을 말이다. 성미산 마을에는 3.13대첩이 있다. 생협은 주도적으로 성미산을 지켰다. 2003년에 서울시가 마을에 있는 성미산에 배수지를 지어 성미산을 파괴하려할 때 울끈 불끈 힘내어 성미산을 지켰다. 물론 많은 수의 마을주민들과 함께 말이다. 지하철에서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을 상대해서 성미산을 막아냈다. 자세한 내용은 『우린 마을에서 논다』 이 책에 나와 있다. 여러분이 책을 사서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지금 성미산은 또 한 번 위험에 맞서고 있다. 홍익대학교가 성미산에 홍익초중고를 지으려 한다. 산의 약 30프로를 파괴하고서 말이다. 홍익대학교는 더 이상 대학이 아니다. 부동산회사에 불과할 뿐이다. 성미산 마을 사람들은 과거에 성미산을 지킨 긍지와 자부심으로 저들과 싸우고 있다. 문화활동을 통해서 저들과 싸우고 있다. 즐기면서 저들과 싸우고 있다. 성미산 마을 사람들이 홍익대학교를 상대로 해서 싸우는 것을 보면 나는 기분이 좋다. 신이 난다. 백범 김구선생이 그리도 바라시던 일이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마을에서 펼쳐지고 있다. 문화의 큰 힘을 성미산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유연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이 왜 옳은지 나는 옴 몸으로 깨닫는다. 주민들이 성미산을 꼭 지켜내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슬프게도 홍익대학교가 성미산에 홍익 초중고를 지었다. 아뿔싸!!!!

이 외에도 많은 단체가 이 책에 등장한다. 글쓴이 유창복씨는 성미산 마을 역사를 소설처럼 재미있고도 쉽게 썼다. 달콤 쌉싸름한 이야기가 이 책에 많이 나온다. 성미산 마을에서 벌어지는 갈등도 나온다.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고쳐서 이루어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진솔하게 글을 쓴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글쓴이 둘레에서 여러분이 글쓴이를 도와주었다.

전국에서 올바른 삶을 추구하는 분들이 혹은 단체가 성미산 마을을 보고 배우려고 견학을 오신다. 그러려면 차비며 음식값이며 비용이 많이 든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게 되면 그런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당신 방에서 편하게 성미산 마을에 대해 배울 수 있다. 내용은 충실하다. 성미산 마을로 견학 오실 분들은 오시기 전에 이 책을 읽고 견학을 준비하시면 견학이 더 뜻있는 견학이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오죽 흡족하셨으면 조한혜정 교수가 이 책 뒷표지에 극찬의 말을 남겼겠는가? 오죽 흡족하셨으면 박원순 서울 시장이 책 뒷표지에 극찬의 말을 남겼겠는가? 성미산마을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이다. 성미산 마을은 지금도 기적을 만들고 있다. 울끈 불끈 힘내서 말이다. 키득 키득 쪼개면서 말이다. 독자 여러분 기대하시라. 개봉바악두—

 

 

한철연 엠티 갑니다! 모두 모두 놀러오세요[공지사항]

한철연 총무부에서 사전답사도 완벽하게 다녀왔습니다. 시원한 물가와 예쁜 숙소에서 좋은 추억을 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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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티 장소는 경기도 양평에 있는 ‘숭실대학교 수련원’입니다.

http://www.soongguri.com 수련원 고객센터(서울) : 02) 820-0898

? 숙소 상태(냉방, 화장실, 취사 등) 매우 양호.

? 숙소 옆 개천에서 고기잡이와 물놀이 가능.

? 석쇠 바비큐 가능. 식품?생필품 마트 근거리

 

 

이번 엠티 첫날에는 최종덕 선생님의 특강이 있습니다. 주제는 “공부를 잘하자-말과 글의 힘”입니다.

오래 전부터 준비하신 강의라고 하니 한철연 회원 분들에게 아주 긴요한 강의가 될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여름 엠티에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바랍니다.

특히 개인차량을 가져오면서 3인 이상 탑승한 차량의 차량소유자에게는 주유비 3만원을 지원하니

부담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이번 여름엠티를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 아래는 엠티와 관련한 제반사항 안내입니다.

○ 일시 및 장소 : 2012년 7월 19일(목) ~ 20일(금), 양평 숭실대학교 수련원

○ 출발 시간/장소 : 19일(목) 오전 11시에 한철연에서 정시 출발

○ 참가 회비 : 전임 5만원, 비전임 3만원, 대학원생/대학생 2만원

※3인 이상 탑승차량 회원에게는 주유비 3만원 지원.

○ 식사 : 출발 당일 점심은 각자 해결, 19일 석식과 20일 조식은 숙소에서 취사

 

19일(목)

오전 11시
출발

오후 12시
점심식사(차량별 해결)

오후 1시 30분 ~ 2시
숭실대 수련원 도착, 체크인

오후 2시 ~ 4시
저녁안주 확보 겸 고기잡이 및 물놀이

오후 4시 ~ 6시
청운레포츠공원에서 구기게임 및 야외활동

오후 6시 ~ 7시
저녁식사

오후 7시 ~ 8시 30분
최종덕 선생님 강연

오후 8시 30분 ~
뒤풀이

20일(금)

오전 9시
기상, 아침식사 준비

오전 10시
아침식사

오전 11시
체크아웃, 용문산 관광단지로 출발

오후 1시
점심식사(용문사 근처), 서울 출발

오후 4시
서울 도착

 

○ 오시는 방법

? 개인차량 이용 시 안내

? 내비게이션 이용 시 주소 : 양평군 청운면 여물리 116번지

 

? 올림픽대로 이용

팔당대교 → 양수리(양평방향국도) → 홍천/횡성 방향 6번국도 → 용문산 국립공원 → 용두리 → (용두시외버스터미널 앞 청운레포츠공원 이정표 방향) → 여물교 → (다리 건너면서 좌회전 후 길 따라 직진) → 청운레포츠공원 → 숭실대학교 수련원

 

? 강변북로 이용

구리 → 양평방향 → 팔당터널 → 양수리(양평방향국도) → 홍천/횡성 방향 6번국도 → 용문산 국립공원 → 단월면 → 용두리 → (용두시외버스터미널 앞 청운레포츠공원 이정표 방향) → 여물교 → (다리 건너면서 좌회전 후 길 따라 직진) → 청운레포츠공원 → 숭실대학교 수련원

 

? 대중교통 이용

? 전철 중앙선 이용 (약 2시간 소요)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 열차에 탑승 → 용문역하차 1번 출구 → 용문역, 용문 시외버스터미널 근처 ‘응동할인마트’ 앞에서 용두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는 직행버스 탑승(첫차7시10분 막차10시15분, 배차간격 40분) or 근처 노선버스 2-8 탑승 → 용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 → 터미널 등지고 좌측에 청운 레포츠공원 이정표를 보고 그 방향으로 10여분 도보 이동 → 숭실대학교 수련원

 

? 버스 이용

※ 동서울 용문행: 첫차 6시15분 막차 9시30분, 배차간격 30~40분, 1시간 소요, 6100원

① (약 2시간 소요)

강변 동서울터미널에서 용문행 버스 탑승 → 용문 시외버스터미널 → (나머지 경로는 앞 설명과 동일) → 숭실대학교 수련원

② (약 3시간 50분 소요, 비추천)

강변역 4번 출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100m 전방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2000-1 일반버스 탑승 → 양평군민회관 정류장에서 하차 → 2-8번 버스 환승 → 용두리 터미널 정류장에서 하차 → (나머지 경로는 앞 설명과 동일) → 숭실대 수련원

 

○ 문의사항 및 비상 연락처

총무간사 진보성 019-630-0306

총무간사 김정철 010-2723-7910

슬라보예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슬라보예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사 : 이병창(동아대학교 명예교수)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지젝과 정신분석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했던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좌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본 사상가는 지난 6월말에 한국을 다녀갔던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1949~)이었다. 이날 강사로 나선 이병창 동아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강좌 수료식으로 인해 더욱 짧아진 강의시간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이라는 옷을 입은 지젝이 어떻게 레닌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간명하게 설명하려고 했다. 라캉, 헤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이 시대가 앓고 있는 ‘환상’과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종횡무진 들추어내고 분쇄하는 지젝은,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이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다시 레닌을 호명한다. 그는 의식과 가치관마저 규격화된 이 세계에서 회복할 수 없는 ‘파국’을 피하기 위해, 과감하게 다르게 사유하고 행동하자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점에서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들을 자격이 있는가.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이병창 교수는 먼저 지젝이 즐겨 사용하는 정신분석학의 기초적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라캉과 프로이트의 차이를 강조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자아’를 강조하거나 ‘치료’를 중시하는 병리적 관점보다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자기이해를 목적으로 삼아 개인의 활동성을 확장하는데 정신분석의 주안점을 둔다. 또한 라캉은 욕망이란 사실 나 자신으로부터 연유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며, 그 결핍으로서의 욕망이 자연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원인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론을 개진했다. 또한 고통과 쾌락이 동일한 근원을 갖는다는 ‘욕망의 이중성’을 강조한 것도 라캉의 강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젝이 라캉에게서 주목하는 것은 상징계에서 욕망을 충족하는 신경증 환자가 자유연상을 통해 늘 도착하게 되는 어떤 지점, 바로 의식과 무의식을 매개하는 ‘매듭점’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환자는 그것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며 고통을 느끼고 심지어 그것에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바로 그곳이 그 사람의 내적 질서가 무너지는 곳이며, 동시에 그것은 이 세계의 한계선과 어떤 틈, 균열, 갈등을 드러낸다. 또한 그 지점은 이 세계가 어떤 상징적 가치들로 이루어진 곳인지 보여주는 곳이자 자아가 욕망으로 드나드는 출입구이며,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넘어가는 ‘구멍’이기도 하다. 즉,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욕망이 분출되는 곳이 그곳이라면, 언어가 분리되거나 신체가 마비되거나 노이로제에 걸리는 환자의 모든 증상은 이런 욕망의 분출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라캉은 보았던 것이다. 한편 환자는 이런 ‘증상’을 즐기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이 지점은 환자의 모든 현실적인 삶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병창 교수는 이렇게 질문했다. “그 분열된 틈을 봉합하기 위해, 우리는 이 현실을 겪어 내고 일상을 영위하고 있으며 삶의 성취를 쌓아온 것은 아닐까요?”

 

‘환상’과 이데올로기 비판

지젝은 이러한 라캉의 이론을 이데올로기 비판에 적용했다. 기존의 이데올로기론은 법철학을 비판(마르크스)하고, 물신론(루카치), 시민사회의 헤게모니(그람시), 호명이론(알튀세르)을 분석하는 것이거나, 자연적인 기호(바르트)로서 이데올로기를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젝은 앞서 설명한 ‘틈과 균열’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매끄럽게 만드는 허위의식과 ‘환상’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부르며 그것이 작동되는 방식을 비판했다. 곧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자본과 노동의 대립, 가족 내부에서 사랑과 계약의 대립 같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정신병적인 환상이자 그 틈이 도드라지지 않도록 메우는 장치”라는 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나치가 스스로 증폭시켰던 유대인에 관한 음모론과 피해의식,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생산한 알카에다나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음모론은 결국 내부의 균열을 외부의 침입으로 해소시키고 이것을 적대적인 공격성으로 전도시키기 위한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이렇게 체제가 가진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에서 이 틈을 메우기 위한 전도현상은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했던 것이다. 지젝은 파시즘 또한 “자본주의에 내재된 증상”으로서 이는 “우연한 일탈이 아니라 억압된 것의 복귀로 드러나며 그 진리로 들어가는 열쇠”라고 말한다. 이병창 교수는 이렇게 한 사회의 균열된 지점을 “은폐하기 위해 이 환상은 주로 외부 적의 침입이나 음모론을 퍼뜨리는 양상을 취한다”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결국 지젝이 시도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그 사회에서 “억압된 과잉을 드러내는 것이며, (체제) 전체에 그 허위성을 고발하는 보충물을 덧붙이는 것”이 된다.

 

레닌주의의 계승

지젝은 오늘날의 세계상이 ‘사회적 꿈의 종말’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실질적 사상의 자유는 현재 지배적인 자유민주주의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할 자유를 의미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다른 사회정치적 질서를 상상하려는 모든 시도를 미리 배제하고 있는 사회는 생각을 금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세상은 모든 가치들과 정보가 드러나고 있는 것 같지만, 또한 모든 실험이 가능한 것 같은 자비로운 세계처럼 보이지만, 작금의 현실은 “새로운 굴라크(강제수용소)”를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 레닌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연구나 레닌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판단은 새로운 세계에 대해 꿈꿀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병창 교수는 지젝이 레닌에게서 3가지 개념에 주목했다고 말하며, 그것을 ‘진리의 권리’, ‘당파적인 진리(경험적 유물론의 진리)’, ‘해방적 폭력’으로 요약했다. 먼저 진리로 나아갈 권리로 부를 수 있는 첫 번째 입장에 대해 살펴보자. 지젝은 레닌을 통해 “결과적으로 ……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이다. …… 우리는 진리 주장 자체를 감추어진 권력 구조의 표현으로 치부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로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다원주의, 탈식민주의, 다문화주의인데, 지젝은 이러한 경향들이 일견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존중하는 것 같지만 사실 신(新)보수 세력의 폭력적인 근본주의와 짝을 이루어 작동되는 것들이라고 비판한다. 상대주의가 극단에 이르면 다시 근본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우리는 미국 부시 정권의 근본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을 통해 이미 경험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또한 이병창 교수는 오늘날 각광 받는 ‘가상현실’이란 것도 비활성적인 것을 통해 물질적 실체를 박탈당한 현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 뿐이며,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관용’이란 것도 타자가 근본주의적이지 않을 때에만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짜 타자, 향락의 실체 있는 무게를 지닌 타자에게는 절대 불관용”적인 것이 오늘날의 포스트모던적 경향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화연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작업들도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진짜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일 뿐이며, “계속 무엇인가가 변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결국 현존하는 세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지젝은 성과 인종의 차별, 제3세계의 착취 등 ‘정치적으로 올바른 열정’을 통해 ‘급진주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소수자 운동들도 그 “급진적 변화의 필요성(만)을 가능한 한 많이 이야기하여 실제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도록” 하는데 기여한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보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를 거부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레닌주의는 사회를 가르는 분열과 모순을 정확히 이해하는 진리의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다. “탈근대 다문화주의적인 서사의 권리에 대한 레닌주의의 응답은 부끄러움 없이 진리로 나아갈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 우리는 정치가 사람들을 갈라놓는다든가 사회 조직에 분열을 가져온다는 상투적인 말에 대항하여 유일하게 실제적인 보편성은 정치적 보편성일 뿐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진리 과정의 보편성은 오직 사회조직의 한 가운데를 그렇게 가르는 모습, 근본적으로 나누어버리는 모습으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진리와 폭력

이병창 교수는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레닌의 ‘경험적 유물론’은 ‘의식 외부의 실재’가 아니라, ‘실재 외부의 의식’에 관한 강조라고 설명했다. 완전하게 구성된 세계가 비물질적인 의식을 예외로 하여 나타난다면, “세계 밖에서 모든 것을 포괄해서 인식하는 초월적 존재[神]”가 바로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레닌의 유물론은 객관적 실재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가 이미 내부에서 균열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의 존재가 세계의 존재론적 일관성을 보장하는 외적인 한계라면, “진정한 무신론은 신의 부재가 아니라 세계가 내적으로 균열되어 있음 즉, 세계의 부재”를 인식하는 것이 된다. 지젝은 이렇게 ‘정신적 외상을 입히는 외적인 만남에서 진리가 출현한다’고 말한다. 욕망의 근원인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경험하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경험적 유물론의 입장은 “내적인 균열을 통해 외부의 경험”을 만나는 것에 대한 ‘징후적 전치’라는 것이다.

레닌주의를 이렇게 독해한 지젝에게 ‘진리’란 이미 당파적인 것이다. 진리는 당파적 욕망으로부터 만날 수 있으며, 그것은 균열 속에서 외적인 마주침으로부터 떠오른다. 보편적 진리와 당파성이 상호배타적이지 않고 서로의 조건이 된다면 당은 계급의식의 대변자가 될 수 있다. “구체적 상황의 보편적 진리는 오직 철저하게 당파적인 입장에서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는 그 정의상에서부터, 어느 한 편에 치우진 것이다.

또한 그 진리의 인식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지젝은 형식은 내용에 대하여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를 구체화하는 원리 자체라고 말한다. 그래서 집단적 주체로서의 ‘당’은 이 형식의 한 예가 될 수 있으며, 여기서 당은 진리의 내용이나 실증적 지식의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형식에 의한 권위만을 가지고 있다. 이병창 교수는 지젝에게 있어 이 형식은 일종의 “해방적 잠재력이 분출되는 ‘리듬’이며, 진리는 이 형식으로부터 풀어져 나온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당’이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나 자신을 우리 안에 두겠다’는 동의 즉, ‘집단적 주체성’의 형식 자체에서 나온다. “레닌은 당을 역사적 개입의 정치적 형식으로 규정하고 마르크스를 형식화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형식화하고, 라캉이 프로이트를 형식화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끝으로 이병창 교수는 지젝이 레닌에게서 주목한 ‘해방적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 ‘자기 구타’라는 개념을 가져왔다. 그것은 “팔을 뻗어 진짜 타자와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타자의 고난과 고통에 눈을 가린 상태를 부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부수는 것이기에 폭력적이며, 내면에 있는 종속과 집착에 대한 거리두기이며 동시에 그것을 “두들겨 드러내는 것”이다. “권력 기제에 대한 종속 자체가 잉여 향유를 만들어낸다면, 종속에 대한 진정한 자각은 바로 우리가 거기에서 끌어내는 외설적인 과잉 쾌락을” 인식하는 것이다. 상징적 법의 세계 너머에 있는 외설적인 아버지처럼 국가나 민족, 자본이 포함하고 있는 과잉 쾌락은 해방적 잠재력을 풀어놓는 일련의 정치적 행위들에 의해 폭로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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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을 끝으로 16회에 걸친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의 모든 강의가 끝이 났습니다. 무엇보다 피곤한 저녁시간에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주시던 시민 수강생님들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로 묶일 수 있는 많은 사상가들의 번뇌와 이론을 쉽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셨던 강사 선생님들의 노고에도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그 명강의를 제대로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이 강좌 후기를 읽어주시는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골방에서 홀로 타오르다 금방 꺼지고 말 등불의 철학이 아니라, 막막한 이 시대를 멀리 밝힐 들불 같은 생각의 나눔을 지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 강좌에 많은 참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한철연 교육강좌 수료식이 진행되었습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한철연 교육강좌 수료식이 진행되었습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강 지 은(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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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주최한 교육강좌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연구자와 시민을 아우르는 강좌를 기획한 이번 강좌는 이론과 실천을 한데 어우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3월 25일 이성백 교수의 ‘들뢰즈의 행복론’을 시작으로 6월 17일 서유석 교수의 ‘연대의 철학을 위하여’까지 진행된 교육강좌에는 13명의 강사진과 30여명의 수강생이 열정을 가지고 참여한 덕분에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마지막 강연일에는 수료식이 진행되었으며 한철연 김성민 회장의 격려사와 이순웅 연구협력위원장의 감사의 인사가 있었다. 이날 교육강좌에 참여한 강좌생들에게는 수료증과 부상이 주어졌다.

이후에 한철연 교육부는 교육강좌를 이어나갈 후속강좌를 진행할 예정이다.

세상보기 메뉴에 [Q 선생의 閑談]이 신설되었습니다[공지사항]

〔ⓔ 시대와 철학〕은 세상보기 메뉴에 [Q 선생의 閑談]이라는 개인 칼럼을 신설했습니다. 본 칼럼은 본지의 이규성 편집위원장이

고정 집필할 계획입니다. 저희 편집진은 [Q 선생의 閑談]이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는 또 하나의 창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진보의 위기,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Q 선생의 閑談]

[Q 선생의 閑談]

진보의 위기,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유미의 급진 민주주의론 ? 진보의 위기와 연관하여

글: 이규성(편집위원장, 이화여대 교수)

최근 참신한 석사학위 논문이 숭실대 철학과에서 나왔다. 논문 제목은 『무페와 라클라우의 급진민주주의론』(한유미, 2011, 지도교수 김선욱)이다. 이 논문은 계급의식이 희석되고 다양한 시민운동들이 출현한 상황 속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을 오늘의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신자유주의적 경제국가가 주는 고통)과 연관하여 논하고 있다. 이 급진 민주주의론은 계급분석에 의거한 근대적 계급동맹론으로는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창조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반영한다.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 일상세계를 장악하고 있으며, 초특급 부자는 뒤집어진 마르크스주의자처럼 계급의식이 분명한데 서민들의 계급의식은 희석되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국가나 소비문화에서 찾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만인의 평등한 자유를 부정하는 보수여당의 자유 민주주의가 인격의 평등과 자율지배라는 민주주의(급진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기본 조건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한유미의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한유미는 특정 이론가의 학설을 소개하는 태도를 넘어 민주주의 정신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하여 현실을 극복하는 방향에서 무폐와 라클라우의 제안을 시험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뒤흔듦’, ‘전복’ 등과 같은 개념들을 자주 구사하는 것에서도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한유미의 급진 민주주의는 우리 진보정치의 위기와 연관하여 다시 음미해 볼 만한 개념들을 제시하고 있다. 급진 민주주의가 사라진다는 것은 보수당의 정치?문화적 패권(헤게모니)이 상대적으로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한국에서 그 패권은 보수당의 저급한 교양에서 나오는 정치공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자기 이익을 민생으로 포장하고 반대파를 내몰기 위해 사상검증을 요구하는 광기의 종교재판, 불화와 궤변에 능한 정치인이 애국을 요청하는 것, 이에 동조하여 반종북을 고백하는 인사들의 형식적 민주주의론 등은 결국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석으로 내몰 것이다. 만일 민주주의 근본 공리(公理)를 부인하는 이 모든 행태들이 노회한 독재의 후예들의 패권 장악으로 귀결된다면, 해방 공간에서의 한국 진보정치의 실패를 다른 형태로 반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이러한 상황에서 급진 민주주의는 당연한 관심사가 되며, 이 관심이 어떻게 정치?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성해나가는 실천으로 될 것인가라는 물음도 나오게 된다.

급진 민주주의론에 자극받은 한유미는 민주주의라는 기호(기표)가 정치적 편의에 따라 규정되어 왔듯 ‘텅 비어 있는 것’으로 보면서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임을 전제한다. 자유와 평등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즉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이념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관철되어야 한다. 그것은 근대 마르크스-레닌주의 ‘계급동맹론’이 자유를 자유주의적 개념으로만 치부해오던 관습을 극복하는 동시에 평등을 제거하려는 자유주의의 폐습을 넘어서는 방향성을 갖는다. 자유와 평등을 함께 추구하는 급진 민주주의는 기존의 좌우 정치사상의 관행을 뒤흔들어 이른바 초심을 회복하게 하는 한편, 신자유주의의 만행의 산물인 비정규화된 인생(비정규직 근로자, 유랑 이민자, 실업, 여성 노동자, 어린이 노동자 등)을 중심으로 반자본, 반국가적인 ‘헤게모니’를 ‘구성’하려 한다.

헤게모니는 그람시로부터 온 개념인데, 구식 계급동맹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에 의해 정당화되지 못하는 모든 피억압자, 예외자, 이른바 타자를 정치적으로 구성하여, 국가와 자본의 영역인 내부와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사회에 이러한 타자가 있기에 정치가 있는 것이며, 이정치는 헤게모니 구성의 활동이기에 타자는 ‘구성적 타자’가 된다. 이러한 헤게모니 구성 활동이 ‘정치의 사회화’이다. 이것은 국가 내부로부터 배제된 외부자를 정치화하는 장외 활동이므로 여러 형태의 차이들을 갖는 시민운동과 그 밖의 반체제적 정치활동을 포괄한다. 정치의 사회화는 외부를 정치화하여 내부를 뒤흔들고 그에 침투하여 보편적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효력을 갖는다. 그것은 내부의 특권을 전복하려 한다. 이러한 활동으로서의 민주주의는《정치의 사회화》 이외에도 부차적으로 ‘정치의 국가화’도 필요로 한다. 《정치의 국가화》는 의회와 같은 기구에 들어가 제도내적 활동을 통해 민주화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정치의 국가화는 정치의 사회화가 지역성에 갇히는 위험성이 있는 것처럼, 진보인사들이 국가권력에 사로잡히거나 지나치게 우경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갖는다. 그러나 정치의 국가화가 급진 민주주의 정신을 상실하지 않는 한 민주적 절차를 통해 국가를 변형하는 것에 기여할 수 있다.

한유미가 주장하는 급진 민주주의 전략은 ‘두 개의 공간’ 즉 ‘국민국가 안과 밖에서’ 쟁투하여, 근대적 확실성이 사라진 사회의 ‘불확실성(결정불가능성)’ 속에서, 배제된 외부자와 내부자의 경계를 타파하는 부단한 과정적 민주화의 쟁투에 진입하는 것이다. 역사의 미래를 단시일에 결정하는 결정적 계급과 이 계급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확실성은 사라졌다. 사실 레닌도 언급했듯 자본주의와 의회제가 정착된 사회는 혁명을 말하기 어려운 또 다른 상황을 보여 준다. 성질 급한 사람은 결정적 미래가 도래하지 않는 과정적 급진론에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봉건제의 붕괴와 세계대전이 혁명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시대와는 달리 ‘극소전자혁명’과 ‘생명공학 산업’이 자본증식의 논리에 잡혀 있고, 계급문제로만 환원되지 않는 여러 사회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급진 민주주의론은 주목할 만한 대안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의 투쟁이 진보적이지만 않고’, 각종 차이들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시민 단체들이 있는 한, 노동과 차이의 정치학을 연결하여 반민주세력에 적대하는 헤게모니를 구성하려는 급진 정치학은 중요한 대안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도 정치의 사회화와 정치의 국가화에 이미 접근하고 있다. 한유미의 급진 민주주의론처럼 ‘경계의 무력화’는 이미 진보진영의 전략이 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제도권에 진입한다는 정치의 국가화는 한유미의 지적처럼 국가권력에 오염되어 방향을 상실할 수도 있다. 권세가들의 비리는 법을 멋대로 휘두르는 망나니들에 맡겨지고, 동강난 전함에 대한 엄밀한 화학적 조사 요구를 종북으로 위협하며, 비정규 노동자의 절규는 그 원인 제공자나 판사에게 맡겨지고, 대학생들의 생존 위기와 교육의 파탄은 교육 산업가들에 맡겨지며, 여성노동자들의 비참이 국가 여성주의에 맡겨져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는 민주적 가치에 입각한 헤게모니 구성에 민주주의가 실패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정치의 사회화가 불평등한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면, 민주진영이 이 핵심을 버리고 정치의 국가화에 몰입하여 내부 분란으로 치닫는 것은 국가화가 갖는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그 함정에 빠진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급진 민주주의론은 오늘의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하는 계기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 보건대 진보적 활동은 온갖 어려움에 봉착하고 허약한 인간성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현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되어 양쪽이 모두 민주적 가치와 덕을 훼손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은 자유와 평등을 모순관계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양자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유 없는 평등이 평등을 부정하게 되어 인간의 평등이 아니게 되며, 평등 없는 자유가 자유를 부정하는 부자유로 귀결된다는 역설을 직시한다면 한유미의 급진 민주주의론은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의 사회화와 평등한 연대를 통한 헤게모니 구성이 근본적으로 폐쇄성을 극복하는 개방성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이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인성론적이고 윤리적인 토대가 무엇인지가 더 분명해지면 급진 민주주의론은 그 철학적 기초를 획득하여 오늘의 난국을 헤어날 수 있는 가치관을 수립하는 것이 될 것이다. 계급사회가 있고, 이를 극복하고 자신을 실현하려는 인간성이 있는 한 정치는 존속할 것이다.

미 공화당을 모방하여 빨간 옷을 뒤집어 쓴 보수당은 타도의 대상이었던 독재의 망령을 불러와 다시 응용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민생이라는 반민주적 구호로 그들이 통합하려는 세상은 둘로 분열될 것이다. 특권과 민주로 갈라서게 되는 것은 인간위에 인간 없고 인간아래 인간 없다는 초등학생도 아는 평등 원리 때문이다. 급진 민주주의는 이 인간 선언위에서 다양한 운동들이 연대했던 3 ? 1 운동의 원리를 새로이 계승하여 시민적 헤게모니를 확장해 나아갈 것이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1)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1)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1:?고대 그리스인의 사랑’에 이어 예고한 대로?19세기 저명한 문화사가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의 대작?[그리스 문화사](Griechische Kulturgeschichte)를 토대로 그리스 문화 전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부르크하르트의?[그리스 문화사]는 고대 그리스 문화 전반에 대한 독보적인 수준이라 할 정도의 풍부하고도 세세한 정보와 탁월한 해석을 담고 있는 책으로서 오늘날까지도 그리스 문화 연구자라면 반드시 딛고 넘어가야할 걸출한 연구 성과이자 토론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그러나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고 난삽하여 이곳에서는 중요 주제를 골라 웹진 연재물로서 적합한 분량만큼 발췌 축약해가면서 그 내용을 토론하고 음미하는 방식으로 소개하고자 한다.?우리가 다룰 첫째 주제는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이다.?텍스트는 ‘Die Demokratie und ihre Ausgestaltung in Athen’,?Griechische Kulturgeschichte, Erste Band. Seite 202-239)?Jacob Burckhardt Gesammelte Werke, Band V. Darmstadt 1956

주제?2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1. 정치적 반성의 귀결로서 민주정

폴리스 체제 내부에서 반성이 지배하게 되면 머지않아 아주 넓은 범위에 걸쳐 시민들은 평등에 대한 욕구에 강하게 이끌린다. 이러한 평등 욕구가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어떤 연관을 가지고 얼마나 퍼져 나갈 지는 주변 사정에 달려 있다. 비교적 초기의 폴리스 정체들 중에서 고대 왕정과 귀족정은 원천적으로 정복과 자명한 권위를 기반으로 구축되고 참주정은 사실상의 찬탈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이러한 정체들 속에는 이미 소수계층에 대항하여 만인의 이익을 옹호해야한다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의 폴리스로서 그 출발부터 이미 위와 같은 반성이 작용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반성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사례가 있다.

그것이 곧 그리스인들이 세운 식민지였다. 식민지에서 비로소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천성에 따른 여러 가지 요소와 힘을 고려하고 의식적으로 폴리스를 새롭게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조직적인 능력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인 힘이나 단순한 폭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식민지 건설에 필요한 아주 다양한 형태의 구성요소는 법률상의 배려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곳이 곧 “입법자(Gesetzgeber)”의 직무가 새로운 의미를 갖는 지점이다. 테세우스나?뤼쿠르고스(Lykourgos)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 신화적인 인물이었지만,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마그나 그라에키아의 주민들(Groβgriechen) 사이에서 카론다스(Charondas)와 잘레우코스(Zaleukos)가 나타난 것처럼 자신들의 폴리스로부터 그 일을 위탁받은 국제와 법률의 편찬자가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입법(nomothesia)은 그때마다 하나의 자유로운 행위이며 – 물론 외국에서 올바르다고 인정되고 있는 것을 자발적으로 채용하는 것도 있었을 것이지만 – 어딘가 다른 곳의 양식을 단지 그대로 베껴 놓은 것은 아니다. 고대 아테네인들의 입법을 위한 그와 같은 시도들은 모두 매우 주목할 만한, 강력한 의지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그 때 아테네인들이 식민지 건설의 기초로서 내건 기치가 곧 “정의(to dikaion)” 내지 “정의의 지배(dikaiarchia)”였다.

<그리스문화사> 5판본 표지 (1898-1902)

그런데 본토에서도 이 같은 힘과 의욕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개혁의 의미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고, 이러한 힘과 의욕은 불가피하게도 귀족정(aristokratia)과 참주정(tyrannis)에 대한 거역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경계선 위에 아테네가 솔론(Solon)과 함께 서있다. 솔론은 전체 민중(Volk, Demos)을 위해서 평의원을 위한 선거권을 확보하였고, 대부분 귀족들인 토지 소유자에게는 독점적 피선거권을 부여하였다.(기원전 594년 이래). 그 대신 동산의 소유에 대해서는 당분간 평등의 권리로부터 제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안에 대한 최고의 결정권을 어디까지나 민회에 부여하였다. 과도기의 아테네의 명예는 이와 같은 솔론의 등장과 그에 대한 신뢰와 복종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는 어떤 것을 전제로 했을 경우에만 설명할 수 있다. 즉 그와 같은 일들이 고대 아테네의 세습 귀족의 틈바구니 속에서 새로 등장한 문벌 계층(Eupatriden)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은 분명 고대 아테네인들의 내면적 성숙(die innerliche Ausreifung)을 보여준다. 물론 솔론에 이어서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와 그의 아들(히피아스와 히파르코스)들에 의해 참주정이 등장하긴 했지만(기원전 561년 이후) 그 후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 이래 일련의 급속한 개혁이 진행되면서 마침내 아테네는 완전한 민주정에 이르게 된다.

솔론(Solon 기원전 638경-558경)

무엇보다도 아테네의 민주정에서 최초로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시민 대중(die Masse der B?rger)을 폴리스의 지배자로 선언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시민 대중이 실제로 개입할 생각이 있든 없든 국사를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점에 대한 명확한 통찰이다. 시민 사이에서의 당파 싸움이 있을 때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은 시민권 박탈의 제재를 각오해야 한다고 하는 솔론의 법률은 쓸데없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건 간에 후기위정자들은 시민 대중들로 하여금 최대한 정치활동을 강화하도록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매년 500명의 평의원(그 때의 10의 부족으로부터 각 50명씩을)과 5000명(아리스토텔레스 24장에서는 6000명으로 나타나 있다)으로 이루어진 민중 법정의 심판원을 선출해야 했다. 그리고 시민들 모두는 어떤 일이든 이 법정에 소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500명의 평의원들은 50명씩 돌아가며 35일간 집무했다. 이와 동시에 거류외인(metoikos)을 포함하여 시민의 수도 증가하고 또 에우보이아(Euboia)섬 정복으로 새로운 영토가 획득되어 토지 전체를 4000개의 구획으로 나누어 시민에게 분배할 수 있었다. 클레이스테네스와 그 후계자들이 이런 일을 수행하면서 어느 정도까지 적극적이었는지 혹은 한 번 자각된 아테네의 정신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일을 수행했던 것인지는 일단 논외로 하기로 하자. 어쨌거나 아테네 사람이 명실공히 실제로 아테네 시민인 한, 그 시민은 누구라도 어떠한 관공서의 업무에도 적합한 자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견해에 입각해서 특히 500명의 평의원을 선출할 때 선거가 아닌 추첨(Los, kl?ros)의 방법이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인력의 안전성이나 실무상의 특수한 전통의 형성은 완전히 단절되었고 그로부터 생길 수 있는 모든 장점과 단점도 함께 제거되었다. 그러나 벌써 외국인이나 거류외인들이 현저하게 시민으로 유입되어 있었던 터라 결국 필요한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식이 아마 작동했는지, 추첨된 사람들은 물론 선거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절충적인 조정책으로서 자격 심사(dokimasia)가 실시되었다. 추첨 혹은 선거에 의해서 직무에 종사하게 된 사람들 모두는 이미 자격 심사에 합격한 평의원들 앞에서 한 사람 한 사람 품행이나 성격, 가족이나 타인들에 대한 태도, 전투 경험의 유무, 재판상 소송을 당했는지 여부 등등에 대해 질문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지식이나 특수 능력은 전혀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만약 만족스런 대답을 얻지 못했거나 혹은 누군가 불평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평의회는 바로 재판소에 판정을 회부하였고 그러한 경우를 빼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을 내렸다.

추방대상 이름이 적힌 도자기 조각(陶片)

투퀴디데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피난처를 위해서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을 제어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이 민주정이라고 말한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시민적 평등은 결코 정치적 불평등과 결부될 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불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투표에 참가하였고 또 재판관이자 시 당국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폴리스는 모든 사람들의 생존과 관련한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극히 비천한 사람이라도 모두 이러한 일에 관여하는 것을 그 만큼 더 절실하게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이전에는 왕이나 귀족 혹은 참주들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권력이 시민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훨씬 넓은 범위에서 특정 개인의 심신을 훨씬 강하게 압박하는 일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시민 대중은 지배권을 잡았을 경우 불안과 질투의 감정을 한층 더 강하게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아테네 민주정에서 시민대중은 무엇보다도 우선 재능이 풍부한 특정 개인의 영향력을 압박하기 위한 대책을 찾아냈다. 그것이 곧 최고 지휘관을 선택할 때의 절차와 도편 추방(陶片追放 ostrakismos)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도 특정 개인의 힘이 우세해지지 않도록 아테네인들은 매년 열 명의 장군을 뽑아 그들 각각이 자신의 부족의 부대를 지휘하게 하였고, 그 모두를 지휘하는 최고의 지휘권 또한 장군들끼리 돌아가며 맡게 하였다. 운 좋게도 마라톤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밀티아데스(Miltiades) 한 명에게만 최고 지휘권을 부여하여 승리를 얻었지만 그 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기원전 405년 아에고스 포타모이(Aegos Potamoi) 전투에서는 “스파르타는 한 명의 지휘 하에 있는데”라는 알키비아데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테네는 패배하고 말았다. 게다가 아테네 민주정은 참주정을 영원히 저지하기 위해서라는 구실 아래 도편 추방제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매년 겨울 평의회가 민중에게 특정 개인을 대상으로 그를 추방해야 할 이유가 있는 지 없는지를 묻는 제도였다. 6000표 이상이 추방에 찬성할 경우 그 사람은 10년간, 적어도 5년간, 국외 추방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출신 도시 이외의 지역에 체재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었으므로 추방은 당시 사형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기원전 5세기 남보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개인들은 모두 한 번은 이러한 도편추방의 위협에 휩싸였다. 개중에는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가까이에서 압박해오고 있는 이러한 형벌을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실로 저 페리클레스마저도 아주 오랜 시간 겁쟁이로 만들 정도로 당대 실력자들에게는 걱정거리로 여겨졌다. 여기에는 영원한 미움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층민(P?bel)의 미움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야심가(Groβstreber)의 경우 대중(die Volksmasse)은 인위적으로 선동되지 않는 한, 오히려 그를 자기편으로 생각하거나 그에게 공감 내지 호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탁월하고 능력 있는 소수의 야심가들에 대한 무능하면서 그저 허세를 좇는 자들(Eitelkeiten)의 미움인 것이다. 즉 도편 추방은 군소 야심가들이 고안해낸 것이다. 당시 아테네 대중들은 아주 어리석게도(t?richt) 이런 군소 무리들의 선동이 낳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뒤 짚어 쓰게 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이 제도를 추켜세워 이것은 실력 있는 야심가들에 대한 질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실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그것은 이 제도에 너무 지나치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가 존재하고 나서 평범한 무리(die Mediokrit?t)들이 그와 같이 빼어난 착상을 가진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이 무리들은 문자 그대로 민중의 감정(Volksgef?hl)을 요새로 삼아 그 배후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인물에게 공공연하게 신뢰가 집중되기 시작하면 곧바로 도편 추방이 행해졌다. 특정 인물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신뢰는 아테네에서 조직적으로 배제되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시민들은 선동 정치가들의 손에 이 방법을 맹목적으로 맡기는 뼈아픈 경험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민중들은 (마라톤 전투의) 승리에 우쭐대 자기들이 그 누구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의 수준을 넘어선 명예와 명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화를 냈다. 도편 추방은 악행을 범했던 것에 대한 징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단지 기고만장함과 중요한 영향력을 지나치게 가진 것에 대한 처벌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다분히 아전인수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에 의해 선동된 ‘아리스티데스에 대한 도편 추방은 사실상 배려를 구실로 대중의 질투심을 가라앉히는 것이었다.’는 플루타르코스의 말은 매우 지당한 말이다. 이처럼 도편추방제는 미움을 받은 사람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거나, 특정 개인들에 대한 폴리스의 실제적 보복의 수단으로 또는 신속하게 어느 시민을 쫓아버리기 위한 수단으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시민들 사이에서 이 제도가 정쟁의 도구화로 전락하고 있다는 자각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기원전 487년에 시작된 이 권력의 도구는 마침내 그 세기 이후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48)은 아테네 민주정의 측면에서 보면 그 등장과 발전을 위한 아주 절묘한 배경을 제공해주었다. 마라톤에서 중장보병이, 살라미스에서 해군이 페르시아군에 승리를 거둠에 따라, 게다가 이 승리 이후 다른 폴리스들에 대한 패권이 확보되기에 이르렀을 때, 아테네 민주정은 그 위력을 드러내면서 영원불멸의 존엄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특히 해상 세력은 민주정과 실질적으로 자매와 같이 밀접하게 결부된 것처럼 보였다. 특히 항구 페이라이에우스 사람들은 도시지역에서보다 한층 더 시민 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헤로도토스 역시 (historiai)에서 “시민의 평등이라고 하는 것은 실로 위력이 있는 것이다”라고 전하면서 “아테네 사람들이 참주의 지배하에 있었을 때는 근처 어느 나라보다도 전력상 뛰어날 게 없었지만, 참주들로부터 벗어나자마자, 그들은 단연 다른 나라들을 눌러 제일인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5권 78)

그렇지만 스스로의 힘을 자랑하는 훌륭한 감정을 손에 넣은 것은 시민만이 아니었다. 아테네인의 풍부한 천성과 이 비정상인 시대는 중상모략을 가능케 하는 모든 제도에도 불구하고 세력 있는 개인을 대두 하게 했다.

“민주제 공화국은 과두제 공화국에 못지않게 우두머리(Oberhaupt)를 필요로 하지만, 마찬가지로 또 우두머리를 감내하지도 못한다.”(Ranke, Weltgeschichte I. s.251)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적이었던 밀티아데스는 옥사 했다. 테미스토클레스 역시 오늘날 그의 역사를 읽는 사람들에게 현기증을 일으킬 것 같은 연극을 아테네인을 상대로 상연한 후, 마침내 도편추방되어 페르시아 대왕의 손님으로서 생애를 마감했다. 하지만 패권의 확장과 강화, 페르시아에 반항한 이집트에까지 향한 대담무쌍한, 수차에 걸친 함대 원정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모든 사업은 2만명 내지 기껏해야 3만명 정도의 시민들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지만, 그들은 더욱 더 공공 생활에 헌신할 수 있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노동은 (30만 내지는 40만명의) 거류외인과 노예들의 의무로 여겨졌다. 전시 수당제도는 이 때문에 생겼다. 왜냐하면 어쨌든 육군과 해군은 단지 패권하의 폴리스들(이들은 자신의 할당액수를 금으로 지불하고 있었다)를 원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강국으로서의 아테네를 어느 곳에서든 어떤 경우에든 대표해야 했기 때문이다. 법정 수당제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즉 대중들은 부유한 자들이 재판관으로 나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또 아테네는 동맹 폴리스들의 법률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법정도 겸하고 있었으므로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시민들은 며칠에 걸쳐 법정에 출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회 수당도 마찬가지였다. 즉 이 강대 폴리스의 모든 내정 활동 및 대외 정책은 공적 심의에 종사하는 민중이 완수해야 할 책무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철면피에 가까운 수당은 관람 수당이었다.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

이 수당 중 일부는 축전이나 경기를 축하하기 위해서, 일부는 극장 입장료로, 일부는 제사용 제물이나 공적 회식을 위해서 시민들에게 지급되었다. 이러한 낭비는 호사가 극에 달한 궁정의 그것과 비교해서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자금 경색 때문에 이길 수 있는 전쟁도 패배한 경우 또한 부지기수였다. 왜냐하면 이(모든 수당이라고 하는) 성역은 절대 침범해서는 안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테네 민중은 일종의 참주이며, 관람 수당 금고는 민중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항상 가득 차 있지 않으면 안 되는 민중의 사적 재산이었다. 그 밖에 수천의 아테네 시민을 위해서(혹은 패권 하에 있는 다른 폴리스의 시민을 위해서) 새로운 토지 배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에우보이아섬에서, 지금은 그 외의 다수의 클레루키아(Klerukia), 즉 아테네에 지배 권력을 위탁한 외곽 전진기지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게다가 아테네는 대규모 업무의 중심지로서 극히 화려한 건축물과 예술 작품으로 치장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일의 대부분의 책임을 걸머지고 있는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최초의 희생자들에게 바친 그 세계적으로 유명한 추도연설에서 아테네의 현재의 모습을 서술하고, 아테네의 권력과 삶의 아름다움을 꽃과 같이 스스로 자란 것인 양,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가사적 인간들에게 고난을 지우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인 양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낙천주의는 특히 200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 보면 페리클레스가 현명하고 분별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 이상의 훨씬 더 정도가 심한 기만(T?uschung)이다. 수십년에 걸친 아테네의 충실한 영광의 시간들은 그 이후의 세상의 모든 시대를 위해서 아무래도 한 번은 체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가장 고귀한 것이 이 시기에 창조될 필요가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이것에 가세하여, 그리스적인 정신을 가지고 완수할 수 있는 것의 대략의 기준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태가 더 훨씬 긴 동안 존속하면 좋았을 것이라는 뒤늦은 소원은 완전히 허무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일반적 상황은 어쩔 도리가 없는 곳까지 이르렀고 어떻게 바뀌어도 귀착점은 여전히 멸망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테네의 사람들은 극히 현실적인 성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못된 정열(b?sen Leidenschaften)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페리클레스는 그 나름의 교육을 하는 한편 그들의 끝없는 탐욕을 – 가라앉히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향락을 제공함으로써 어떻게든 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가 키몬(Kimon)과 같은 부자였다면, 자신의 재산을 사용했을 테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공적 자금을 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에 가세해 아테네 사람들의 무서울 만큼 높아진 명예심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교사들 자신에게도 반항하게 만들어 교사들을 앞지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페리클레스 자신 그 말년에는 사방팔방으로부터 공격받았고, 급기야 그리스 전체에 걸쳐 전쟁이 터지는 편이 차라리 바람직할 정도로 여겨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우쭐해하던 기분을 끌어내리고 그들의 겸양을 고양시키는 것이 가능한”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민들은 밑도 끝도 없이 열리는 민회나 법정 집회(ekkl?siazein kai diakazein)때문에 분명히 신경질적이 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상의 노동에서 얻을 수 있었던 ‘마음을 완화시키는 힘’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부족 해 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케르퀴라(Kerkyra)와 코린토스의 사절들이 아테네 시민 앞에 나타났을 때) 케르퀴라 사람의 이익을 앞세워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려 결국 전쟁을 피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든 민회의 결의는 조정이 훨씬 용이하고 그것이야말로 영광일 수 있었던 순간에 그 초조함이 빚어낸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아테네가 민주정을 표방하면서 다른 폴리스들을 패권적으로 지배하려고 한 것은 일종의 모순이었으나, 자칫 거역했다가는 항상 보복을 당하기 일쑤였다. 폴리스들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스스로가 예속되고 착취 받는다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아테네가 자기들의 돈으로 강대해지는 것을 감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테네가 화려한 모습으로 가장하여 질릴 정도로 소란을 피우고 있어도 다른 폴리스들은 그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페리클레스 자신의 다음과 같은 연설에 잘 드러나 있다. “실로 우리들은 일찍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기획한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로부터 기피당하고 있다. 그러나 위대한 목표를 위해서는 사람들로부터 시기당하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의 지배체제는 사실상 참주정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배체제를 취하는 것이 부정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해도 이제 와서 절대로 이것을 마음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 여러분들은 반드시 보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어떻게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는지를 아테네에 관한 저작들은 몸서리칠 정도로 분명하게 보고하고 있다. 그의 연설은 패권의 문제에 대해서도 아테네의 활동 전체에서 드러나는 것과 완전히 궤를 같이 하면서 일체의 것을 허락하고 있다. 게다가 아테네 대중들은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도록 교육되었다. 그리하여 아테네인들은 마침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지에 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패권적 지배하에 있는 폴리스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를 생각하면 페리클레스의 범그리스적 구상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평화와 협력을 목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모든 그리스 폴리스들이 아테네에서 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은 듣기에도 좋고, 그러한 사태를 그려내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을 테지만 이 회의가 헛된 바람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초의 예상대로 스파르타가 이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