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계절”(another year): 우리가 가족일 수 있을까?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세상의 모든 계절”(another year): 우리가 가족일 수 있을까?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현남숙 (가톨릭대학교 초빙교수)

 

another year, 가족의 미래?

이번 겨울 아주 추운 어느날 아무 사전 정보 없이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다. 스크린에 올라오는 제목은 “세상의 모든 계절”(another year)이었다. “another year”? 제목만 보아서는 신년에 잘 아울리는 영화 같았지만 아니었다. 첫 장면부터 불면증 환자가 등장한다. 불면증 치료를 받으러 온 중년 여성은 약만 원할 뿐 의사나 상담사와 대화를 거부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무엇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다른 삶”이라고 답하면서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음으로는 다른 삶을 원하지만 머리로는 삶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영화<세상의 모든 계절>

“another year”는 변화를 바라지만 변화가 쉽지 않음을 아는, 인생을 좀 살아본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변화에는 소통, 환대, 행복 등 여러 항이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 난 가족이란 코드가 자꾸 들어왔다. 어떤 단위로,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 것인가에 관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 인식은 어제와 같을 수도 있고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another year”는 어쩌면 아직 기록되지 않은 가족의 시간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족인 자와 아닌 자가 함께 보낸 사계절

제도적으로 혈연 중심의 가족은 가족 구성원 이외의 자들에게 문턱이 높은 폐쇄적 관계이다. 하지만 심리적 존재들인 우리에게 꼭 그렇지 많은 않다. 멀리 사는 가족, 마음이 상한 가족, 서로를 통제하는 가족보다 가까운 친구나 이웃과 더 가깝게 지내기도 한다. 이 영화는 한 혈연 가족과 그들의 친구들이 보내는 사계절로 유비되는 인생의 이야기다.

#봄. 톰과 제리 부부 그리고 제리의 직장동료이자 친구인 메리의 삶이 대화 속에 교차되어 그려진다. 제리는 심리치료사이고 남편 톰은 지질학자로 둘 다 타인을 잘 배려하는 인물이다. 부부는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친절하며 성공보다는 행복을 가꾸며 산다. 한편 이들의 주변을 맴도는 메리는 겉으로는 쾌활하지만 내면은 우울한 여성이다. 젊은 날 유부남과의 사랑에 상처받았고 지금도 자신이 아름답다고 믿지만 좁은 집에 월세를 내며 사는 가난한 중년의 독신 여성이다. 메리는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가족과 집과 대화가 있는 이들 부부에게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여름. 톰과 제리의 아들 변호사인 조가 등장하지만 이 집의 문턱은 아직 친구들에게 열려있다. 한편 톰의 오랜 친구 켄도 등장한다. 켄 역시 메리처럼 독신이다. 젊어서는 직장 동료들간의 유대와 클럽에서의 여가로 고독할 새도 없었지만 이제는 동료들도 하나둘 떠나고 클럽에서도 반기지 않아 어디에도 갈 곳 없는 외로운 신세다. 고독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켄은 메리에게 수작을 걸어 보지만 메리는 늙고 뚱뚱한 켄에게 관심이 없다. 대신 톰과 제리의 아들인 조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표현한다. 메리는 이들의 진짜 가족이 되기를 꿈꾼다.

#가을. 톰과 제리 부부의 ‘정상’ 가족은 견고해지고 메리는 결국 그 문턱을 넘지 못한다. 인생의 수확기인 가을, 조가 아주 오랜만에 새로운 여자친구를 데려온다. ‘정상’ 가족의 결실을 맺으려는 수순을 밟는 것이다. 하필 이날 메리가 방문한다. 메리는 조의 여자 친구에게 질투를 느낀다. 이러한 상황을 들켜버리자 메리는 더 이상 넒은 의미에서의 가족도 될 수 없게 된다. ‘정상’ 가족을 방해한다는 의미에서 ‘가족의 타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제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실망스러웠다”고 언급하고 톰은 메리를 다시 초대할 수 없으리라는 암시를 한다.

#겨울. 톰과 제리의 집에 출입을 암묵적으로 금지당했던 메리가 다시 찾아온다. 가을까지만 해도 생기가 있었던 메리는 아끼던 차도 견인당하고 불면증으로 잠을 자지 못한 최악의 날, 늙고 초췌하고 무엇보다 절박한 모습으로 이 집의 문을 두드린다. 부부는 부재중이고 최근 부인을 잃은 톰의 형이 메리를 맞는다. 메리는 안타깝게도 톰의 형에게조차 자신이 그를 보살펴주겠다고 말한다. 메리는 다시 이들의 진짜 가족이 되고 싶은 것이다. 메리에겐 사랑의 감정보다 정서, 대화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더 크다. 농장에서 돌아온 부부는 메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직장에서 왜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느냐는 메리의 질문에 “여긴 내 가정이야”라고 말로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였음을 표현한다. 제리는 메리에게 전문적 상담을 받을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메리는 “단지 너와 이야기 나누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메리는 식탁에 앉았지만 더 이상 그들의 시선을 받지도, 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한다. 행복한 톰과 제리 가족의 대화를 배경으로 카메라는 환대받지 못한 메리의 불안한 시선을 쫒는다.

 

가족의 역사를 갖지 못한 자들

톰과 제리 부부는 대체로 타인을 환대하는 좋은 이웃이다. 하지만 그들이 메리를 맞는 방식의 근저에는 혈연중심, 성별분업 중심의 전통적 가족 가치가 놓여있다. 톰과 제리처럼 가족을 가진 자와 메리와 켄처럼 가족을 갖지 못한 자의 관계에서 관계의 주도권은 대개 톰과 제리처럼 가족을 가진 자가 잡는다. 감독은 이러한 관계를 카메라의 중심 공간을 톰과 제리의 집에 맞추고 초인종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선별하는 것으로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 방식이나 감정으로도 드러낸다.

메리의 말은 늘 초점없고 삶에 필요한 정보에 취약하며 무엇보다 자신의 한계나 상처를 노출시킨다. 이에 반해 부부의 말은 어딘가 정리되어 있으며 관습적이며 교훈적이다. 제리는 메리에게 “성인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말의 스타일만이 아니라 대화의 방향도 일방적이다. 메리는 제리에게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어, 나도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게”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제리는 “나는 괜찮아”라며 메리의 대화 상대가 되기를 거부한다. 늘 메리만 자신의 결핍을 말한다.

톰과 제리의 ‘정상’ 가족의 규범은 메리에 대한 감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제리는 처음에는 메리에 대해 자신만 행복한 것 같아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메리가 아들 조에게 사심을 품은 것을 안 이후로는 급격히 변한다. 실망감으로 바뀌다 급기야는 심리치료를 요하는 비정상적인 것에 대한 염려로 바뀐다. 죄책감, 실망감, 병리적 염려는 대등한 관계에서의 배려나 공감이 아니다. 뭔가 도덕적으로 더 규범에 가까운 자가 갖는 우월한 감정인 것이다.

무엇이 톰과 제리 부부와 메리의 관계를 비대칭적으로 만들었는가? 영화의 한 대사가 자꾸 떠오른다. 제리가 메리의 상태를 걱정하던 어느 날, 톰은 난데없이 역사 이야기를 꺼낸다. “나이가 들수록 역사가 더 의미있어 지는 것 같아“라고. 이에 제리는 “우리도 역사의 일부가 될테지”라고 응수한다. 이 대목은 가족에 관한 오래된 서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들린다. 톰과 제리의 시간은 표준적 가족 서사에서 생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아들 조를 낳았고 삶의 중심적 서사에 부합하는 이야기들에 맞게 인생의 사계절을 보냈다.

하지만 결혼하지 못한/않은 메리와 켄의 삶의 서사는 근대 이후의 전통적 가족 서사에 엮여들지 못한다. 독신들의 삶은 결혼과 출산으로 노동과 세대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표준적 가족의 공식적인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메리와 켄도 그들 나름대로 의미있고 행복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행복했던 시간을 드러내지 않는다. 메리와 켄의 시간은 이 사회에서 역사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가족에 관한 프로파간다의 이면

톰과 제리의 가족은 비교적 개방적이지만 이들 역시 전통적 가족, 기능적 가족, 혈연중심의 제도화된 가족 중심의 가치에 따라 산다. ‘이모’처럼 간주되던 메리가 조에게 관심을 갖는 ‘해프닝’을 겪자 이들은 일시에 가족의 문턱을 높인다. 톰과 제리의 가족은 타자에게 열려있고 환대하지만 그 개방성과 환대는 어디까지나 조건부이다. 결정적인 순간 ‘정상’ 가족의 가치로 돌아간다. 내 가족의 역사성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너에게 가족의 문턱을 낮춰줄게, 너를 넓은 의미의 가족으로 환대할게!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러한 ‘정상’ 가족의 견고함은 페미니즘이 상상하듯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메리칸 뷰티>, <바람난 가족>, <후라이드 그린 포테이토>, <안토니아스 라인>, <퀼트>, <메종드 히미코> 그리고 <가족의 재탄생>까지. 영화로만 보자면 가족은 이미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정상’ 가족과 그 타자들의 출입의 문턱도 낮아졌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혼, 재혼, 노년 등의 이유로 다른 방식으로 가족을 꾸리거나, 평생 독신으로 정상 가족의 주변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의 방식은 가족 중심의 통합 서사에 작은 자리나마 엮여들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세상의 모든 계절”은 매우 솔직하다. 감독은 보수적인 정상가족의 가치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고 페미니즘의 다양한 가족(families)의 가치를 설득하지도 않는다. 어느 것이든 어떤 면에서는 현실의 갈등이나 상처를 봉합하는 프로파간다인 것이다. 대신 현재의 가족, 결혼, 삶의 양태의 상황에서 통합되지 못하고 서로 충돌하는 불편한 지점들을 노출시킨다. 가치나 이념으로 봉합되지 않은 실존하는 존재들의 삶의 모서리에서 드러나는 진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인간은 앞으로도 대체로 ‘정상’ 가족의 형태로 살아갈 것이다. ‘정상’이 갖는 미덕이나 편안함 등 이점도 많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정상 가족으로 살아가지 못하는/않는 ‘정상’ 가족의 타자들의 삶의 방식도 그들이 ‘타자의 타자들’의 삶을 위협하지 않는 한 인정되어야 한다. 가족의 타자에 대한 형식적 인정은 쉬울 수 있다. 하지만 각자 섬을 쌓고 사는 분리주의적 인정은 인정이 아니다. 상호 문턱을 넘나들며 가족에 관한 큰 서사와 작은 서사가 엮여 함께 삶의 역사를 만들어갈 때 서로의 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