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부활을 꿈꾸며, 레닌 재장전![청춘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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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재장전 :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이현우, 이재원 외 옮김, 마티, 2010.)를 청년들에게 소개합니다.(편집자)

청춘의 서재, 그 무기력한 나날들

내 청춘의 날들과 그 서재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어리고 여린 마음에 처음 접하게 된 세상의 현실은 낯설고 두려워서 무언가를 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항상 주변을 배회하며 주저하기만 했다. 현실에 저항하는 투쟁의 현장과 현실에 안주해 승리를 쟁취하려는 성공의 길 사이에서, 그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했다.

그때 내가 선택한 방식은 그 갈림길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일이었다. 데카르트와 후설,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철학자들과의 만남은 그러한 선택의 과정을 유예하고 지연시켜주는 편리한 나름의 방식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지연된 과정은 결국 상처가 되어 항상 나를 괴롭혔다. 철학에 대한 회의, 삶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나를 갉아먹고 있었고, 지금도 역시 ‘왜 철학을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되돌아와 계속해서 어떤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과연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전망의 상실, 진리 해체의 시대

뒤로 물러나 있던 나의 모습과 현실의 모습은 어느덧 점차 비슷해져 갔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열기는 자본주의를 뒤엎는 운동으로까지 연결되지는 못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종말을 외치는 논의들이 이어졌다.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자본주의의 힘 앞에서 다른 세계에 대한 전망은 상실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은 모든 진리에 대한 추구를 ‘전체주의’라는 유령을 앞세워 폐기처분해 버렸다. 진리를 앞세워 세계에 대한 정치적 기획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결국 현실 사회주의처럼 전체주의로 귀결되고 말 것이라는 인식이 이 시대의 일반적인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도 공산주의를 언급하면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라는 수식어를 덧붙이며 여전히 두려움과 공포심을 드러낸다.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는 아름답고 그럴듯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상일 뿐이며, 더구나 독재를 옹호하고 실현시킨 전체주의일 뿐이라는 반응이 되풀이 된다.

맑스를 접하게 되면서 철학과 실천에 대해 고민하게 됐지만, 나도 여전히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언급할 때면 민감해져서 두려움과 주저함이 되살아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마도 맑스를 공부한다고 하면서, 정작 20세기 초반에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을 참조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에 대한 외면이 나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우리는 ‘레닌’을 기억 속에서 지우고, ‘혁명’과 ‘공산주의’라는 말들을 애써 감추며, 현실에 정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제 급진적인 전망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인정한다. 그리고는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역할에 충실한 채, 미래를 위한 준비라는 명목으로 급진성은 잠시 접어둔다. 다시 ‘그럼에도’ 분명 모두 알고 있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라는 선택을 통해 어느새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게 된다는 것을.

왜 다시 레닌인가?

『레닌 재장전 :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마티, 2010)
『레닌 재장전』을 읽으면서 내가 지닌 두려움과 불만족의 실체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우선 현실의 장벽을 돌파하는 데 뒤따를 엄청난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이 두려움으로 표출된 것이다. 또한 철학을 정치와 결합할 수 없었던 나의 무능력이 불만족의 또 다른 원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레닌으로의 복귀’를 논하는 이 책 속에서 철학과 정치가 접합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공동 편저자인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나에게 철학과 정치가 연결되는 새로운 길로 읽혀진다.

“상황에 개입하겠다는 레닌의 결단”, 즉 “필요한 타협을 하고 현실적인 요구에 이론을 맞추려는 실용주의적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모든 기회주의적 타협을 물리치고, 오직 일이관지하는 급진적 입장(이를 통해서만 우리의 개입이 상황의 배치를 바꿀 수 있는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다)을 채택한다는 의미에서”(22-23쪽) 개입한다는 레닌의 결정. 더구나 이러한 정치적 개입은 단지 현실 정치라는 흙탕물 속에 뛰어들겠다는 식의 결정은 아니다. 오히려 ‘진리의 정치’(바디우), 혹은 ‘당파성’(레닌)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전략적 개입이다.

특히 ‘철학에서의 레닌’을 논하는 이 책의 2부는 레닌이 어떻게 철학을 통해 정치에 개입해 들어갔는지를 시사해 준다는 점에서 더 관심이 간다. 헤겔 『논리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전화하는 레닌의 접근방식은 정치에 개입하려는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 “대상의 본질 속에 자리한 모순에 대한 연구”(187쪽)인 변증법을 통해 위기의 시대를 통찰하고 구체적 상황에 개입해 들어가는 레닌의 자세는 여전히 우리가 뒤따라야 하는 길이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레닌의 ‘전위당’ 개념이 지닌 엘리트적 모습에서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권위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는 레닌의 당파성이란 결국에는 이론적 독단을 옹호하려는 장치에 불과하다고 폄하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나치게 순수한 입장을 정치라는 구체적 정세 속에 유지하려는 것은 아닐까? 이글턴의 말대로, “순수한 혁명에 대한 희망 속에서만 사는 사람은 결코 그러한 순수한 혁명을 보지 못할 것”(96쪽)이다.

전위와 엘리트는 다른 개념이다. “엘리트는 자기 영속적인데 반해 전위는 자기 파괴적이다. 전위는 변동이 심한 문화적, 정치적 발전 조건에서 출현한다. 전위는 이질성이 낳은 존재이다. 꼭 우월한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물질적 환경 때문에 일군의 사람들이 아직 일반적으로 명백하지 않은 특정한 현실을 ‘미리’ 포착할 수 있는 상황 또한 전위를 낳는다. 이들은 자신이 지닌 보다 특권적인 문화적 위치 때문에 전위가 될 수도 있지만, 정확히 그 반대의 이유, 곧 억압의 대상이자 그 억압에 맞서는 투사라고 하는 그들만의 경험 때문에 전위가 되기도 한다.”(85쪽)

결국 레닌이 말하는 정치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게 되는 침입”(240쪽)의 과정이며, 그의 “전략적 사유는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든 그러한 사건과의 관련 속에서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250쪽) 따라서 전위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에 대해, 예상치 못한 일에 대해, 일어날 사건에 대해 준비하는”(241쪽) 일을 의미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니 우리는 과연 이러한 정치를 준비하고 있는가? 다니엘 벤사이드의 다음과 같은 훈계는 지금의 우리 상황을 잘 보여준다. “레닌주의를 피상적으로 비방하는 이들은 그들 스스로는 당의 억압적 규율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으로써 그들은 사실 그 모든 타당성들에 대한 논의를 공허하게 만들며 의견토론의 장을 축소시켜 결국 그 어느 누구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공동의 결정도 없이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있은 후에 모든 사람들은 그저 원래대로 남게 될 뿐이며 어떠한 실천도 공유할 수 없기에 생성 중에 있는 반대 입장의 유효성을 검증하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해지는 것이다.”(253쪽)

벤사이드의 말대로, “당(운동, 조직, 연맹, 당 등 주어진 이름이 무엇이건 간에)이 없는 정치란 대부분의 경우 정치 없는 정치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럴 경우 철학은 “미학적이거나 윤리적인 것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결국 정치적인 것을 억압”(253쪽)하는 길로 가게 될 것이다.

레닌을 재장전하는 청춘의 부활을 꿈꾸며

아마 나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저 갈림길에서 주저하고 흔들릴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 내 주저함의 원인을 알게 된 이상, 준비해 나갈 것이다. 이미 청춘은 무기력하게 흘러갔지만, 선택의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그 선택을 오랫동안 지연시켜왔던 만큼 어떤 의미에서 난 제대로 청춘을 살아온 것이 아니기에, 이제야 비로소 새 청춘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침 내가 몸담고 있는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도 21살의 청춘이다. 물론 그 청춘의 선택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청춘이 다 지나가버리기 전에 ‘급진성’의 부활을 꿈꿔보는 것은 어떨까? 레닌 재장전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철학이 정치의 길을 열어주는 방식을 모색해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이야기일까? 아무튼 난 레닌처럼 ‘꿈을 꾸련다. 그리고는 역시 흠칫 놀란다.’

조은평(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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