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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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장윤경(애견 훈련사)

 

 

나는 올해 32살의 여성 애견훈련사이다. 개와 고양이, 새나 병아리 심지어는 길에서 주운 쥐를 키우겠다며 집에 들고 와 어머니를 기겁시킨 일도 있었던 것을 보면 어려서부터 나는 동물을 참 좋아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렇게 많은 동물을 키웠다. 그들의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에 웃고 우는 유년기를 보냈으나 중학교 이후 내게 주어진 삶은 동물들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 훈련소에서

 

중학교 진학과 함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따라간 화실의 그림공부는 내 생활의 일부분으로 시작해 점점 내 생활의 전부가 되어갔다. 활동적이지 않은 성격 탓이었겠지만, 그림을 그리느라 대여섯 시간을 줄곧 앉아 있어도 좀이 쑤시지 않았고,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운 좋게도 세차고 드센 비바람 한 번 만나지 않고 고무 튜브에 몸을 맡긴 채 잔잔한 강물을 따라 흘러가듯 흘러가 도착한 곳은 예술 고등학교였다. 딱히 내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해보니 적성에 맞았다. 어쩐 일인지 별 노력 없이도 그림을 잘 그렸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생각 한 번 없이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돌이켜 보면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고 기대도 받으며 살아가는 일이 나쁘지 않았던 듯하다, 아니 분명 꽤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서 전문 화가가 되어야 하겠다든지, 아니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어떤 미래를 가지게 될지 같은 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내 어머니, 당신이 꿈꾸고 계획해 놓은 내 미래의 청사진을 듣는 순간, 웬일인지 그 길이 내 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니의 입에서 ‘교수’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런 것은 결단코 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강렬하게 나를 덮쳐왔던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꿈이었지, 나의 꿈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그 길을 벗어났고, 길을 잃었던 것이 분명하다.

무엇이 될지, 무엇을 할지 방향을 정하지 못하는 혼란과 방황의 대학 시절을 보내다 힘든 시기에 힘이 되어준 지금의 남편과 생을 함께하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첫 번째 반려동물인 개 캐니를 집으로 데려왔다. 라브라도 종인 캐니는 아주 영리한 개였고, 우리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캐니가 너무나 자랑스럽고 예뻤던 나는 둘째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마침 캐니가 다니던 훈련소에서 태어난 쵸콜렛색 라브라도가 디키 주니어라는 이름으로 캐니의 동생이 되었다. 아파트에서 대형견 두 마리를 키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목줄을 매고 나선 산책길에서, 사람이 지나갈 때면 혹여 작은 피해라고 줄까 염려해 목줄을 꼭 부여잡았지만 큰 개를 키운다는 이유만으로 욕을 얻어먹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특히 뉴스에 개에게 물려 목숨을 잃거나 큰 부상을 당한 사람의 사건이 보도되기라도 한 다음 날이면 소중한 맹인 안내견으로 쓰여도 충분할 정도로 순한 개들이었건만 단지 덩치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면전에서 대놓고 참기 힘든 말을 듣기도 했고 그로 인해 행인과 언성을 높이는 일도 일어났다. 몇 년간 지속된 그런 일에 서서히 지쳐갔고, 결국 우리는 두 마리의 우리 가족을 위해 이사를 결심했다.

도시 외곽의 넓은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한 후 우리 부부는 보다 많은 반려견들을 식구로 받아들였다. 예닐곱 마리의 대형견을 능숙하게 통제하며 돌아다니는 젊은 여자는 어딜 가나 눈에 띄었고, 예상치 않은 반려견 훈련부탁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런 부탁을 접하면서 스스로 내 인생의 주체가 되어보기로 결심했다.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훈련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흐르는 강물에 다시금 뛰어들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른 그 누구의 결정이 아닌 바로 나의 뜻과 의지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번 여행에는 믿음직한 남편 또한 함께였다. 사랑스러운 반려견들을 키우면서 손에 잡기 시작했던 애견 훈련에 대한 공부는 이때부터 전문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외국 서적을 주문해 사전을 뒤적이고 밑줄을 치고, 노트를 해나가며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세계적인 훈련사들의 동영상을 찾아보고 그들의 노하우를 배워 나갔다. 그때까지의 실제 대형 반려견들과의 생활 또한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우리 부부는 세계 애견 연맹인 FCI가 공인한 한국애견연맹이 주관하는 훈련사 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프로 훈련사가 된 것이다.

▲ 훈련소의 개들

 

그러나 생전 처음으로 스스로 결정한 나의 일, 애견훈련사가 되는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고 그 어려움은 지금도 이어지는 듯하다. 다른 이에게 이끌려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뛰어든 이 강 위에서 세찬 비바람도 만나고 드센 여울목도 만나는 중이다. 프로 훈련사로서의 초년병 시절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보다도 애견훈련이 천한 직업이라고 여기는 듯 함부로 말하고 나를 대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부모님과 친지들조차 나의 직업을 하찮게 여기는 듯한 말과 태도를 취하곤 했었고 사실 그것은 지금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건 큰 상처였다. 거기다 애견 조련은 나의 첫 직업이었고, 조련사로서의 생활은 학교 졸업 후 난생처음 하는 사회생활이기도 했다. 나는 사람, 특히나 내게 자신들의 개를 맡기거나 그러고 싶어 하는 견주들을 대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다. 견주들을 대하는 일이 어색했고 나는 말재주가 전혀 없었다. 개들을 돌보는 일, 견종에 따라 달라지는 훈련 방식과 그 과정, 그러한 훈련 과정을 통해 달라지는 개들의 상태를 멋지게 설명하지 못했을 뿐더러, 이후 견주들에게 개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물어보는 전화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그들이 프로로서의 나의 능력을 알아주고, 또 평가해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묵묵히 개들을 받고, 돌보고 훈련시키고, 돌려보냈다. 초년병 시절 나는 내가 과연 전문 훈련사로서 유능한지 무능한지 자신이 없었다. 남편이 함께 했지만, 나는 한 사람의 독립적 전문 훈련사이기도 했으므로, 내 능력에 대한 초조함에 휩싸여 몇 번이나 이 길을 들어선 것을 후회했다. 그것은 매우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었다. 그 심적 부담에서 벗어날 방법은 예전에 튜브를 뒤집고 강에서 나와 멀리 도망간 것처럼 도망치는 방법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이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내 삶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두었을 때에는 잘되면 내가 잘나서요, 못되면 네가 못나서라고 책임을 돌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가 결정한 일에서 내가 도망치면 나는 다시는 한 사람의 주체적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사회인으로 재기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일에서 다시 실패한다면 그것은 온전히 나의 책임이며 나의 역량부족인 까닭이라는 사실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겠나. 나는 흔들릴 때마다 마음을 다 잡았고 부족한 부분을 찾아 채우고 다시 도전해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은 적어도 내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 능숙한 애견훈련사가 되었고 우리 부부의 훈련소의 규모도 많이 커졌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움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견주 중에는 애견훈련소에만 보내면 자신의 개가 가진 모든 문제가 사라질 거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자신의 개가 사람의 명령에 절대복종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개들은 리모컨 달린 인형이 아니다. 애견 훈련은 반려견을 기계로 키우는 훈련이 아니다. 애견 훈련사로서의 내 철학은, 내가 맡은 개들이 훈련을 통해 반려견으로서 주인과 어우러져 실생활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한 가정의 가족으로서 생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견훈련이 기계처럼 딱딱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명령어에 무조건 복종하게 하는 훈련보다는 마치 자신의 주인이 사랑하는 개에게 말하고 개가 그 말을 따르는 것처럼 편안한 훈련을 한다. 그것을 추구하기에 새로운 개가 오면 원래 처음부터 우리집 가족이었던 냥 집에서 함께 지내며 서로에게 적응해 나간다.

그러다 보니 내 옷은 심지어 외출용 옷에도 개털이 묻어 있기 일쑤고, 모임을 가지기 전 날 미리 세탁해서 말려둔 옷을 입고 나가도 개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특히 검은색 옷은 금기 의상이다. 양말이며 옷, 이불 등등에 이르기까지 검은색만큼 개의 털을 돋보이게 해주는 색상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의를 표하러 갈 때가 참 곤란하다. 신기하게도 밖에서 검은 옷을 바로 사 입고 가도 어느 사이 옷 여기저기에 털들이 붙어있다. 그러한 사실이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남들보다 가볍고 예의가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나란 사람이 제정신이 박히지 않았다는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내 앞에서 뒤에서 소곤대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다, 참 속상하다. 속상한 마음을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오면 가끔은 화가 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탓을 개에게 돌리고 싶을 때도 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울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 때 녀석들은 꼬리를 흔들며 달려온다. 나도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을 만큼 우울한 날이면 그런 녀석들을 다 물리치고 혼자 우울하게 방문을 닫곤 하지만, 그럼 뭐하나. 그토록 냉정히 저희를 뿌리친 내가 방문만 열고 나와도 또다시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며 사랑을 표현해대는 것을. 난 늘 생각해왔다. 반려동물들은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세상을 살아나갈 수 없다고. 그것이 반려동물을 집으로 데려온 이상 그 생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라고. 나의 매정함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나를 사랑해주는 그들을 보면 나 역시도 그들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이 반려 동물과 인간이 서로 어우러져 사는 이유인 것이며, 우리는 준 사랑과 받은 사랑 모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인 것이다. 견주들이 길에다만 개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훈련소에 개를 버리기도 한다. 연락이 끊어지거나, 때로는 개를 적당한 곳에 버려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이유가 무엇이든 마음이 많이 아프다. 필요할 때만 반려 동물을 취하고 귀찮아지면 매정하게 버리는 사람들은 내게 사랑의 의미와 그 책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개들과의 생활은 나를 보다 더 인간다운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삶의 스승 아닐까. 나는 내가 개들로 인해 행복하고 나로 인해 개들도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개도 그러하기를 그 무엇보다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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