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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고난 속의 작은 행복
미군들의 도움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주거 공간과 배고픔은 나아졌고, 무엇보다 건강 상태가 좋아졌다. 그러나 또 다른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군들이 자주 왔다가고 집단적인 거주지가 형성되자 인근의 주민들이 한센인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몰려와 위협하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을 밤에 그 곳에 내려놓고 간 공무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입을 딱 벌리대. 누구 허락받고 예서 사느냐고 난리였다.” 지금까지 애써 억제해 오던 할머니의 감정에 작은 파문이 생기고 있었다. 여태껏 볼 수 없었던 결연한 표정은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위엄을 뿜고 있었다. 그 위엄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라 여겨졌다.
수십 년 전,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던 사람들,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했던 사람들의 분노가 할머니를 휘감고 있는 듯 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쉴 때마다 가슴은 눈에 띠게 오르락내리락 했고, 꼭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 두 번의 백내장 수술로 흐려진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를 보았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의지였다.
60여 년 전에는 죽음만을 생각했지만, 이제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삶에 대한 의지였다. “입이 있어도 말 못한다. 그 고통을 어찌 다 말로 하노. 사는 기 지옥인데.” 지옥과 다를 바 없는 삶은 연약한 한 여인을 강인한 여성으로 변모시키고, 끝없이 이어져 오는 고통은 오히려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게 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지만, 한센인들은 순간 순간 온 정성을 다해 숨을 쉬었다. 새벽이면 일어나 하루 종일 온 몸으로 거친 땅을 일구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지극했다. “나는 일을 별로 안 했다. 못하게 하대. 아를 업고 가모 집에 가 있으라고 난리도 아닌 기라.” 자신은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해도 아내는 힘든 일을 하면 안 된다는 마음, 그것은 남편의 사랑이었다.
항상 불안하고 고된 날들이 이어졌지만, 행복도 있었다. 아이는 천진하게 잘 자라 주었다. 가진 것이 없어 잘 입히고 잘 먹이지 못했지만, 아이는 엄마를 따랐다. 비록 다정한 말 한 마디 없는 아내였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귀하게 여기고 아껴 주는 남편이 있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가슴에 품고 사는 아들, 승팔이도 있었다.
2. 한 뼘의 땅
이웃 주민들의 반대는 인근 지역을 넘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들은 미군들이 오지 않는 날이나, 떠나고 난 후에 집단으로 나타났다. 마치 인근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한센인들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해야 했다. “어두워지모 겁나제. 갑자기 덮치모 어짤끼고.” 깊이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늘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은 커졌다. 미군들의 지원이 뜸해지던 때부터 마을 주변을 서성대는 사람들의 수는 눈에 띠게 불어났다. 인근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멀리에 있는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몰려왔다. 심지어 부산의 구포 지역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요구는 오직 한 가지였다. 자신들이 사는 지역 부근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멀리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센인들도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산에 버려져서 성하지 않은 손으로 나무 뿌리를 뽑고 돌을 치우고 만든 그들의 집이었기에, 한센인들은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비록 나무에 군용천막과 비닐을 덮은 집이었지만, 그 곳은 한센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온 손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지켜낸 보금자리였다.
어린 아이들은 매일 반복되는 위협으로 겁에 질려 있었다. 밤이 되면 남자들은 조를 짜서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지켰다. 넒은 하늘 밑 그 어디에도 한센인들이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 곳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거지가 되어 돌팔매질을 당하며 동냥질을 하든가 어느 후미진 곳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가든가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날, 맨날 불안했지만, 아이고 참 힘든 날들이제. 누가 막 부르는 기라. 한센인들 중에도 여기를 소문 듣고 나중에 온 사람도 있었는 기라. 그 사람들 중에 누가 외지에 사는 친척이 있었거든. 그 친척이 하얗게 질려 갖고 안 왔나” 외지에 사는 친척이 다녀간 후 마을은 정적에 쌓였다.
“여게 상동 인근이랑 부산 사람까지 우리 모두 쥑인다고 모인다고 안 하나. 그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어찌 감당하겄노. 우리는 인자 꼼짝 없이 여게서 죽는 갑다 했제.” 인근 주민들의 요구대로 옮겨간다고 해도 갈 곳이 없을뿐더러 어디를 가도 도망 다니는 건 마찬가지였다. “누가 그러대. 여기서 죽자고.”
할머니의 얼굴 근육이 떨리고 있었다. 나지막한 코끝에 앉은 안경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센인과는 이웃해서 살 수 없다는 그들의 논리에는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었고, 그들에게 타인의 존재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한센인들이 떠나가더라도 비탈진 그 곳은 성한 이들의 땅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성한 이들은 자신들이 병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한센인들의 터전을 빼앗으려고 했다.
ⓒ에이블뉴스한센인들의 죄명은 “문둥이”이다. 시인 한하운은 자신의 시에서 “죄명은 문둥이…../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올시다.(”라고 노래한 바 있다. 한센병은 어처구니없는 죄명이며 이해할 수 없는 벌이기에 변호할 길이 없음을 한탄했다. 어처구니없는 죄명을 인정하고, 그냥 그 산속에서 살게 해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돌아오는 건 살기뿐이었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죽는 길 밖에 없으께 싸우자고 누가 그러대.”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웅성거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함성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가서 낫이나 호미를 들고 나왔다. 누가 어떻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고, 합의를 한 것도 아니었건만 들 수 있는 무기는 모두 들고 모였다.
“밤이라 캤다. 그날 밤, 그 사람들이 몰려 오모 우리는 꼼짝없이 죽는 기라. 문둥이 죽는 거 한두 번 봤나. 누가 울어주기라도 하나. 문둥이 시체는 제대로 거다(거두어) 주지도 않는다.” 죽어서도 서러운 사람들, 주검마저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들,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그들만의 죽음을 지나온 사람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가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들이 몰려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가야한다고 했다. 어린 아이가 딸린 아녀자만 빼고 남녀노소 모두 손에 낫과 호미를 들고 산속에서 나왔다. 누더기를 걸치고 손과 발에는 진물이 배인 천을 감고 성치 못한 발로 그들은 걸었다.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이겼다.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한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한센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다가가면 그들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했다. 그러다가 잠시 틈을 주면 공격해 왔다. “그냥 휘둘렀다. 죽는 거 밖에 더 있나. 우리는 죽을라꼬 덤비고 그 사람들은 살라꼬 덤빘제.” 죽기를 각오한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3. 새로운 고향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담보로 지금의 터전을 지켰다. 그렇게 서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웃이 되었다. “모내기 철이 되모 서로 일손이 부족한 기라. 우리 중에서 병이 덜한 사람들이 가서 마이 도왔다. 처음에는 싫어해도 나중에는 와서 도와 달라고 하는 기라.” 때로는 이웃 마을의 사람이 와서 성하지 않은 손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돕기도 했다.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주로 닭과 돼지를 키웠다. “닭은 알도 팔고 똥도 팔았다.” 닭똥을 모아서 밭 여기저기에 널어서 말린 뒤, 자루에 넣어 보관했다가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팔았다. 이익금은 일한 만큼 나누어 받았다. 일은 중노동이었다. 성한 사람보다 몇 시간은 먼저 일어나야 했고, 몇 시간 후에 자야 했다. 그렇게 해도 살아가기에는 힘든 나날들이었다.
성한 사람들이 서너 시간이면 끝날 일을 그들은 하루 종일 했다. “아이고 말도 못한다. 아침에 자고 나면 닭 밥 주고, 또 한 이틀마다 똥 치운다. 똥 치우는 날이 그 중 고되다.” 일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또 언제든지 쫓겨 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그들은 백방으로 다니며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험한 산을 일구어 밭으로 만들고, 밭도 만들 수 없는 곳에서는 돼지와 닭을 키우며 살고 있는 그 땅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임을 알아달라고 관청을 셀 수 없이 드나들었다. 관계기관에 갈 때마다 차를 탈 수 없어 걷고 또 걸어서 갔다. 간간이 다니는 버스는 텅 빈 채 가도 그들을 태워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수레도 얻어 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가야했다. 가서 그들의 절박한 사정을 알리고, 아이들을 키우고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의 하소연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와서는 안 될 사람들이 왔다는 내색을 노골적으로 했다. 돌아서기도 전에 소금을 먼저 가져와서 그들의 뒤에 뿌렸다. 성한 사람들에게 한센인들은 소금을 뿌려야 하는 액(厄)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한센병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치료약도 없이 온 몸이 종기로 뒤덮이고, 얼굴이 변하는 병이었지만, 병에 걸린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센인들은 마치 죄인마냥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현듯 잊고 있었던 사람이 생각났다.
그 사람은 이름이 없었다. 언제나 검은 색 옷을 입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저녁 무렵에 나타났다. 말없이 우리 집으로 들어와 마당을 가로질러 뒤뜰에서 장작을 패 주었다. 키가 크고 마른 몸이었는데, 그 아저씨는 손에 때 묻은 흰색 천을 감고 있었다. 장작을 다 패고 나면 할머니나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 마당 한쪽 구석에 앉아 먹었다. 그리고는 기운 자국이 있는 바가지에 밥과 반찬을 담아 갔다. 그러다 어느 날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찾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6?25가 끝난 후, 홀연히 우리 동네에 들어와 산 밑 움막에서 혼자 기거하는 아저씨였다. 가족이 있었지만 헤어졌고, 한센병에 걸려 동네에 들어와 살 수 없었다는 것이 내가 아는 사실의 전부였다. 어렸을 적, 막연하게 그 아저씨는 참 좋은 사람이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아저씨는 절대로 공짜 밥을 먹지 않는다고,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장작을 패거나 하다못해 마당이라도 쓸어 주고 간다고 어머니는 혀를 차셨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의 그 아저씨가 생각난 이유는 무엇일까? 낯선 섬에까지 와서 10여년을 넘게 살면서도 자신의 땅 한 뼘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삶의 내력을 밝히지 않으며, 얻어먹고 살지언정 자존감을 잃지 않았던 그 아저씨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아픔이 되는 건 무슨 연유일까? 이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고향을 떠나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들에게 목숨을 걸고 일구는 땅은 고향 이상이었다.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자신들의 이름으로 된 땅을 가지고 싶은 이유가 살고 있는 그 곳이 바로 고향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센병을 천형(天刑)이라고 한다. 하늘도 버린 사람들이라는 인식은 오히려 한센인들이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늘마저 버렸기에 그들은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부평초처럼 떠돌지 않도록 두 발을 붙이고 있을 고향이 필요했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에 돌고 도니
부평 같은 신세가 되어
어언간 60여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빨라 유수와 같으니
내 청춘은 흘러흘러
머리에는 벌써 백발이 휘날리네.
중에서
할머니의 머리칼은 백발이 되어 있었다. 뽀글뽀글 파머를 한 사이사이로 백발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금을 바가지 채로 뒤집어쓰며, 산길을 걷고 또 걸어 탄원을 했지만, 자신들의 땅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기적이 왔다. 마치 소리 없이 나무그림자가 땡볕을 막아주듯이 그렇게 기적이 왔다.
“대통령이 특별조치법을 내린 기라. 박정희 대통령이 그랬제. 그때 우리 한센인들이 사는 땅을 우리 거로 해주라는 특별 명령이 있었는 기라. 윤두관 원장 힘이 컸대이. 윤원장이 있어서 육여사가 소록도에도 가고, 우리 손도 잡아주고, 그라께 대통령도 우리를 알고 특별조치법에 우리를 넣었다 아이가.” 그래서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 고향에서 나는 할머니를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