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논의에서 라캉의 ‘구조’와 가타리의 ‘기계’의 차이점/신승철 [1월 월례발표회]

?[2013년 1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 욕망 논의에서 라캉의 ‘구조’와 가타리의 ‘기계’의 차이점
발표자: 신승철 (동국대)

 

생각의 빈칸

후기: 윤지영( 명지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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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해에서 신년으로 넘어가는 시간적 단절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비약과 도약의 에너지를 퍼 올리게 한다. 13개월이라는 연속성이 아니라 새로운 해의 1월 앞에서 우리는 생각의 빈칸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빈칸 앞에서 라캉의 구조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의 대결 구도는 그 논쟁점의 풍요로움만으로도 매혹적이었다.

신년 모임과 함께 진행된 1월 월례 발표회는 평소보다 더 많은 인원의 참석 하에서 토론과 논의의 장이 펼쳐졌다. 2013년이란 새로운 해에 어떻게 현실 좌표축을 재구성하고 재의미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가타리의 욕망하는 기계 개념의 이론 틀 안에서 모색될 수 있었다.

신승철 선생님의 이 논문은 라캉의 욕망 개념의 보수성을 날카로이 비판하고 있다. 라캉의 욕망 개념이 여전히 거세의 법에 종속되어 있음으로써 엄마-아빠-아이라는 삼자적 가족 관계의 이데올로기성에서 벗어나 있지 못함을 드러낸다. 정상화의 메커니즘으로서 무엇을 병리화하는가에 주목하고 있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논의는 여전히 욕망의 생산성과 생성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은 물론 이를 억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신승철 선생님은 라캉의 욕망은 예속 집단을 양산하지만 가타리의 욕망하는 기계는 주체 집단을 생산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속성과 자발성의 포지션이 명확하게 이분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권력과 저항은 분리된 두 포지션으로 고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 작용과 유동성으로 접점과 모순항을 양가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지대이기 때문이다.

ⓒ박영미

프랑스 철학계에서 제대로 된 사상적 엄밀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가타리의 개념들을 재평가할 수 있는 논문이라 할 수 있다. 기호-흐름이라는 개념을 통해 라캉의 의미론-팔루스라는 전제적 기표를 축으로 한 협착적 기호화 과정을 비판할 수 있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왜냐하면 본인역시 라캉이 규정하고 있는 남근 이성 중심적 언어 질서에서 어떻게 벗어나 새로운 언어 형식을 모색하는가란 문제의식을 심화 발전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안에서 가타리의 비기표적 기호론은 퍼스의 우연성의 경제학과 알튀세르의 만남의 위상학과 더불어 새로운 언어 형식-의미의 열린 양태와 부유, 표류라는-을 구상하는 데에 커다란 영감을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논평을 통해 본인은 가타리의 개념들이 포스트 휴먼적 사상 지류와도 이어질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타리가 생태계라는 표현을 통해 더 이상 인간 질서로서의 상징계에 포박당하지 않는 탈 인간주의적- 인간이란 거대 서사의 폭력성과 한계를 드러내는 트랜스 휴먼적, 포스트 휴먼적 사유와 실천 양식 등을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영미

신선생님의 발표와 본인의 논평은 미리 주어진 각본대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피드백과 질문의 질문들에 의해 비예측적으로 논의가 확장되기도 심화되기도 한 점이 흥미로웠다. 라캉이 제시한 쥬이상스 (jouissance)가 여전히 협착적 쾌락인가 아니면 팔루스란 고정점, 누빔점을 파기해 버리는 분리적, 저항적, 혁명적 지점인가에 대한 논의는 합의점에 도달하지 않은 채 갈등과 긴장성이란 생동적 힘을 품고, 열린 논의의 장으로 미끄러져 갈 수 있었다. 이러한 팽팽하면서도 상호 교류적인 토론의 장을 통해 혁명적 상상력과 지적 호기심, 나아가 앞으로 후속 연구를 통해 항해할 사유의 모험과 궤적들이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철학이 끊임없는 생성과 창조의 과정이 되기 위해선 생각의 빈칸들을 남겨둬야 하는 비움의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그 생각의 빈칸에서 예측치 못한 영감이 솟구치고 앎의 견고한 단선체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균열과 파열의 힘을 가타리는 접속과 배치라는 용어를 통해 드러내며 나아가 욕망이란 복합적 다면체들의 스펙트럼을 펼쳐내길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48%의 좌절, 51%의 승리?;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 -①[시대와 철학]

48%의 좌절, 51%의 승리? ;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①[시대와 철학]

 

한길석(한철연 교육부장)

 

이 글은 2012년 10월 19일에 열린 학술단체협의회 연합 심포지움 “2012년 오늘, 유신을 말하다”에서의 발표문을 수정한 것이다. 원래 이 글은 박정희 신드롬에 열광하는 대중의 망탈리테를 파악해보려는 의도에서 서술되었으나 대선이 끝난 지금에서는 그 반대편에 선 이들의 마음 상태도 가늠해봐야 할 것 같아서 조금 고쳐 써보았다. 채 익지 않은 생각의 파편들을 그러모은 것이라서 여러 곳에서 삐걱댈 듯하다. 눈 밝은 이들의 고언을 바란다.

 

(1) 고제(苦諦): 모두가 앓고 있다.

 

미신(?)에 홀린 대중

 

‘도대체 왜 대중은 박정희를 그리워하는가?’ ‘왜 51%는 박근혜를 선택했단 말인가?’ 이것은 단순한 의문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탄식과 ‘장군의 당집을 드나드는 대중’에 대한 지탄이 담겨 있다. 하지만 지식인들의 지탄에 아랑곳없이 대중은 갈 길을 갔고 아직도 가고 있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병리학적 명칭을 부여하면서 치료를 시도했다. 그들은 ‘박정희 신드롬’이 주로 언론에 의해 왜곡된 역사 서술로 인한 것으로 보았다. 동원된 치료법은 역사적 실증에 의한 인지적 교정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효험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실정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실을 들이댈수록 ‘박정희 신드롬’은 격화될 뿐이었다. 치료 효과가 없다는 것은 그 질환의 원인과 작용 기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박정희 신드롬’은 단순히 잘못된 역사 인식에서만 비롯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의외로 인지적 의식 밑바닥에 단단히 뿌리내린 무의식적 심층에서 작동하는 질환일지도 모른다.

 

왼쪽으로 가는 의사, 오른쪽으로 가는 환자

 

무의식적 심층에 자리한 정신적 병리 증상을 치유하는 데에는 치료자의 태도가 무척 중요하다. 치료자는 환자를 도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치료에 나선 지식인들은 ‘박정희 신드롬’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린 채 계몽에 임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박정희와 영애’에 대한 대중의 애정은 끔찍한 불륜으로 보인다.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당신들이 독재자를 그리워한단 말인가?!’ 치료자가 환자의 잘못된 믿음을 도덕적으로 책망하면 환자는 치료를 거부한다. ‘당신들이 뭘 모르나 본데, 잘 봐라 박정희의 시대는 이랬어.’ 힐난조의 비판과 계몽은 대중을 토라지게 했다. 급기야 그들은 병원을 박차고 무당(?)에게 가버렸다.

 

있을 수 있는 일이 일어났을 뿐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일어났을 뿐이다. 지식인들이 그리고 48%가 ‘박정희적인 것의 복권’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는 것은 당위적 기대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대체로 당위를 배반한다. 배반된 당위를 붙잡고 원망의 눈물을 뿌려봐야 현실에는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일단 필요한 것은 당위적 비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는 태도다. 사람들은 박정희를 그리워한다. 그것도 ‘어머니화한 박정희’를 그리워한다.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적나라한 사실이다. 일단 이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자. 당위적 판단은 그 다음 문제다. 사람들이 착오 상태에 빠질 수 있으며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박정희 신드롬에 빠졌는가? 박정희 신드롬 혹은 어머니 박정희로서의 박근혜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망딸리떼는 과연 무엇에서 기인한 것일까?

 

이상한 고해성사

 

‘박정희 신드롬’이 대중적 현상으로 자리하게 된 계기는 15대 대선 무렵 부터였다. 구제금융 사태 등의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당시 문민정부의 지지도는 최악이었고, 이것은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한국은 IMF의 구제 금융에 목을 매고 있었다. 한보, 한라, 기아 등 대표적 기업들이 쓰러지거나 인수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부족한 소득은 빚으로 돌려막으며 연명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몇 해 전만 해도 자동차를 사고, 해외여행을 다니며, 소비문화를 즐기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뭐가 잘못됐는지 워크아웃과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라는 낯선 말들이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이제야 비로소 지긋지긋한 빈곤의 굴레로부터 헤어 나와 살만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대한민국은 부도가 나있었다. 빈곤의 재림이라는 불길한 소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제 회복을 지상 과제로 모시게끔 했다. ‘기업이 있어야 일자리도 있다’는 말이 슬그머니 ‘재벌 체제는 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국민의 세금은 재벌 생존 자금으로 사라졌다. 세금으로 살린 재벌 기업의 임자는 여전히 그들이었다. 재벌 개혁은 물 건너갔다. 정부 규제는 점점 약화되더니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때마침 15대와 16대 대선에서 연이어 패배한 수구 세력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세력과 개혁 정책을 약화시키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부의 약한 고리는 경제 위기였고 ‘빨갱이 대통령’이라는 이미지였다. 이 이미지를 극대화 시키려면 대항 캐릭터가 필요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안성맞춤이었다. 수구 언론에서 그는 반공투사이자 경제 성장의 아이콘으로만 부각되었다. 독재자 전력은 감추거나 경제 성장을 위한 불가피론으로 비껴갔다. 이상이 사람들이 지적했던, 박정희 신드롬이 수구 언론에 의해 가공되고 전파된 사정이다. ‘좌파 대통령’ 정부가 시도하려던 경제 정책은 무조건 좌경으로 몰렸다.

다급해진 국민의 정부는 과거 세력을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이들로 추켜세움으로써 ‘빨갱이 대통령’의 이미지를 상쇄시키려 했다. 사실 국민의 정부는 박정희 체제를 함께했던 세력과의 공조를 통해 집권한 덕에 구세력에게 면죄부를 발부해야 하는 악성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독재자 박정희의 자취를 없애고 ‘경제 건설자 박정희’로 이미지를 세탁하던 수구 언론의 작업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 지원 약속이 상징적 사례였다.

수구 언론과 정치 세력에게는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 신드롬에 의해 가공된 역사가 마침내 국민의 정부에 의해 승인된 셈이니 말이다. 죄의 고백 없이 이루어진 이상한 고해성사는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토탈 리콜’의 한국적 적용, 즉 국민적 수준에서의 기억의 세척과 선택적 기억을 이루어냈다. 놀랍게도 ‘토탈 리콜’은 대중뿐만 아니라 박정희 체제에 대한 비판자들에게도 해당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서 현재까지 ‘경제에서는 좋았지만, 역시 정치에서는 나빴다’라든가, ‘쿠데타와 독선적 정국 운영은 경제발전을 위해서 감행한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라는 평가가 진보적 지식인들의 입에서도 발설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른바 생계와 살림살이의 신화를 내세우는 ‘어머니화된 박정희’가 한국인 모두의 마음을 사기 시작한 때였다.

 

ⓒ오마이뉴스

모의재판의 추억

 

필자가 박정희 신드롬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인 1998년 무렵이었다. 수구세력이 주도한 박정희 복권의 노력은 ‘영애’의 국회 입성이라는 결실을 봤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필자는 학회원들과 함께 박정희 모의재판을 진행했다. 재판은 독재자 박정희의 행적을 강조하는 검사와 경제적 업적을 강조하는 변호사의 대결로 이루어졌다. 재판을 통해 박정희 옹호론의 허구성을 실증적으로 폭로하려는 생각으로 진행했는데, 다소 높았던 관심에 비해 반응은 의외로 냉랭했다. 당시 나는 그 이유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에서 찾았다. 참주의 폭압적 지배를 인식하지 못한 학우들의 어리석음이 학습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민주적 가치보다는 경제적 여유를 희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직과 부도를 맞은 집안은 부지기수였고, 취업 설명회는 어디에서도 열리지 않았다. 당장에 등록금과 생활비, 청년실업의 수난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민주적 가치를 유린한 박정희보다는 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박정희의 이야기가 귀에 착착 감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이러한 사정은 한국의 시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실업과 부도, 얄팍한 소득과 과중한 채무에 시달리고 있는 시민들에게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장땡이었다. 대중의 속마음을 짐작하지 못하던 박정희의 비판자들은 예의 이분법 논리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진행하였다. 이는 의도와는 다르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호감을 더욱 자극했다. 궁한 사정에서는 독재자로서의 박정희 이야기보다는 경제 건설자로서의 박정희 이야기가 훨씬 더 눈에 잘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중은 학문적 논거의 타당성과 질에는 무관심했다. 그들은 이성적 청취자가 아니라 경제적 낙오의 공포감에 떠는 이들이었다. 논쟁이 심화될수록 경제 영웅으로서의 박정희 신드롬은 강화됐고, ‘어머니 박정희 앓이’는 이명박 신드롬으로 이어졌다. 17대 대선과 함께 박정희 신드롬은 이명박 후보의 불도저 이미지와 합체하면서 CEO 대통령이라는 기업형 완전체로 진화하였다. 대중에게 박정희는 이명박이고, 이명박은 박정희였다. 토건을 통한 성장은 둘의 합체를 가능하게 만든 매개체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뚫은 것처럼 이명박 대통령도 운하를 뚫어 우리 사회를 널리 풍요롭게 하리라.’ 마침내 사람들은 이명박이라는 검은 고양이를 선택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든 말든 그저 돈만 잔뜩 벌어다 준다면 과거의 잘못은 용서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잊은 게 하나 있었다. 맡긴 건 생선 가게였다.

(다음에 계속)

 

구보씨, 계속 크기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계속 크기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교수)

 

중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어찌 구보씨뿐이겠는가. 많은 이들이 중국을 주목한다. 구보씨 친구 중에는 M과 조금 다른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보는 이도 있다. C는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 자칭 정치평론가다. 정치를 업으로 한다는 친구가 사람 만나는 건 즐겨하지 않아 이름만 걸어놓은 작은 출판사 사무실에 틀어박혀 지낸다. 여하튼 그도 중국에 관심이 많다.

 

“M 그 친군 노무현 때부터 중국에 들락거리더니, 여태 그러고 있군.”

 

“지 말로는 장사꾼들 딱까리 한다던데?”

 

“그게 그거지. 장사하려면, 특히 중국에서 필요한 게 뭐겠어.”

 

“요즘 보시라이 건도 그렇고 중국도 복잡한 거 같아.”

 

“글쎄, 이전 같을 수야 없겠지. 어차피 변화는 불가피할 테니까.”
▲시진핑(習近平)과 펑리위안(彭麗媛)
“지난 번에 M은 시진핑 얘기 많이 하더군. 시진핑이 차기 주석으로 낙점되기까지의 뒷이야기들… 펑리위안인가 하는 시진핑 마누라, 그 여자가 중국에선 유명한 가순데, 장쩌민에게 시진핑이 점수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나…어떻든 내부에 갈등이야 있겠지만 지도부는 그래도 연속성이 있는 것 아닌가?”

 

“하…그새 M은 장쩌민이나 시진핑하고 어울리나 보지? 그렇더라도 성장 패턴도 바뀌고 장쩌민 시대랑은 이미 다르겠지. 그 와중에 사람도 바뀌고, 대외관계도 조정이 될 테고…”

 

“그런 거, 원래 M이 잘 하잖아, 세태에 따라 움직이는 거.”

 

“… 잘 하겠지.”

 

“M은 중국이 북한을 놓아줄 리 없다고 그러던데. 남한도 경제적으로 이미 중국 영향권 안에 말려들어갔고…”

 

“뭐, 놓여날 힘도 없잖아. 그리고 중국한테는 북한이 있는 게 중요하니까.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역사라면?”

 

“이를테면 6.25를 생각해 봐. 중국에게는 북한이 대만을 포기하고 지켜야 할 정도로 중요했다고. 사실 6.25가 그 때 일어난 것도 중국하고 무관하지 않지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당시 중국공산당으로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니었지. 모택동은 계속 반대했어. 전쟁 발발을 막으려 했다구. 중국 본토를 장악한 직후였으니까, 사실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거라고도 할 수 있어. 6.25가 1950년에 일어난 건 중국공산당이 1949년에 본토를 통일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지.”

 

“허, 그거 말이 돼?”

 

“소련이나 미국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만하잖아. 소련도 불안한 면이 있었다구. 바로 턱 밑에 중공이라는 대국이 형성되었으니 말이야. 스탈린은 중국과 붙어 있는 한반도에서 변화를 꾀할 만 했을 거야. 그래서 스탈린은 김일성을 부추겼지만, 전쟁에 직접 개입은 하지 않았지. 미국과 맞부딪히는 게 싫기도 했겠지만 북한이 미국에 넘어갔을 때 위험한 건 소련보다는 중국이었으니까. 중국으로선 결국 대만을 목표로 배치했던 군대를 돌려서 압록강 너머로 투입할 수밖에 없었어. 이 결정을 둘러싸고 중국 공산당에선 며칠간 격론이 벌어졌지. 그러나 다른 선택은 어려웠을 거야. 북한을 내준다면 대만인들 쉽겠어?”

 

“하긴… 소련과 중국은 그 이후에도 계속 삐꺽거렸지. 그러고 보면 이념이라는 게 참 무색한 면이 있어.”

 

“지금은 또 러시아랑 군사훈련을 하잖아. 러시아 군함이 중국을 들락거리고. 미국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북한도 다른 길이 없으니 중국에 붙는 거지. 그러니 김정일도 죽기 전에 중국을 조심하라는 말을 남겼고…”

 

“그랬나?”

 

“그랬지. 뭐,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잖아.”

 

“음…그런데 말이야, 세상엔 왜 큰 나라가 있고 또 작은 나라가 있는 걸까?”

 

“뭐?”

 

“이상하지 않아? 세상엔 200개 넘는 국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큰 나라는 몇 개 안 된다구. 왜 어떤 나라는 크고 어떤 나라는 작냐 이 말이야.”

 

“허, 그건 세상엔 왜 호랑이도 있고 고양이도 있느냐랑 비슷한 문제 아냐? 그런 건 구보 너처럼 태평한 철학자들이나 따져볼 문제 같은데…”

 

“아냐, 이거 중요한 문제라구. 역사적으로 봐도 말이지, 중국이라고 항상 큰 나라였던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큰 나라도 항상 그 시초는 작은 데서부터 출발하거든. 주변을 정복하거나 병합하거나 해서 일단 큰 나라가 생겨나면 주변 나라들은 먹히거나 피해를 보거나 최소한 눈치를 봐야 한다는 거야…그런데 국가는 또 한없이 커질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커지는 데는 한계가 있어. 그렇다면 도대체 국가의 규모는 어떻게 정해지는 거지?”

 

“….”

 

C는 심드렁했다. 뭐, 그런 뻔한 것을 묻느냐는 표정이다. 하긴 이런 일이 새삼스러울 건 없다. 요즘 들어 구보씨가 늘상 당하는 일이니까.

 

“내 말은 왜 국가가 그렇게 커야 하느냐는 거야. 그 국가의 크기가 기여하는 바는 뭐지? 다른 국가를 제압하고 통제하고 이용하고 착취하기 위해서? 근데 그게 누구한테 좋지? 큰 나라의 일부가 되느니 독립하겠다는 지역들도 많잖아. 세상에는 그래서 수백 개나 되는 나라가 있는 거고. 큰 게 좋다면 이들은 왜 서로 합치질 않는 거야?”

 

“쯧… 구보야, 국가에는 정해진 크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되는 한 팽창하려는 경향이 있는 거겠지. 또 그 팽창은 최소한의 동질성이 확보되는 한, 유지되는 거고. 그것이 강제에 의해서든 이익의 분배에 의해서든 말이야. 그러니까 큰 규모의 국가는 그 규모의 힘을 이용해 외부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한 계속 팽창을 시도할 수 있겠지. 그게 바로 제국(帝國)의 형태일 테고. 하지만 그 팽창의 이익이 임계점에 도달하면?그게 외부의 저항에 의해서건, 내부의 동질성 유지 비용에 의해서건? 팽창을 멈출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건 대답이 안 돼. 그렇담 무수한 작은 나라들은 뭐야? 걔들도 팽창을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서 못하고 있다는 거야?”

 

“그렇지 않을까. 당장 우리도 봐. 천오백년 전 고구려 이야기가 아직까지 매력적인 이유가 뭐겠어?”

 

“그러니까 네 말은 모든 국가가 서로 팽창하려 하는데, 그게 다 자기중심적인 팽창이라서 서로가 외적인 제약 조건이 된다는 거겠네. 그렇담,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그래서 침략의 이득이 그로 인한 위험부담이나 손해보다 커지면, 언제든 제국주의적 팽창은 일어난다는 거잖아.”

 

“에이,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지. 옛날엔 그랬을지 몰라도 오늘날엔 국제 질서가 명시적으론 그런 걸 허용하지 않으니깐. 하지만, 실질적으론 그런 면이 있잖아.”

 

“그건 결국 큰 게 좋다는 얘기네.”

 

“글쎄, 아무래도 규모가 힘이니까… 이를테면 미국은 그 덩치에서 나오는 힘으로 세계 곳곳의 자원과 요로(要路)를 장악하고 패권을 유지해서 굉장한 이익을 보고 있잖아. 적어도 그 이익의 일부는 자국의 동질성을 유지하는 데 쓰인다구. 그런데 만일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해 봐. 그러면 이제 군사력은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할 테고, 조만간 미국은 그 규모를 유지하기 힘들어질 거야. 다민족이지만 독특하게 유지해왔던 미국적 애국심도 훼손될 테고. 그런 사태가 계속되면 미국이라는 나라도 쪼글어 들게 되겠지.”

 

“그 말도 결국 유지할 수 있는 한 큰 게 좋다는 얘기고…”

 

“허, 뭐, 꼭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면야…그럼, 구보 넌 큰 게 나쁘다는 거야?”

 

“반드시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부담스럽다는 거지. 적어도 우리는 크지도 않고 또 충분히 크기도 어렵잖아. 그런 처지에서 크기에 집착하다간 자칫 사대(事大)에 빠질 위험이 있다구.”

 

“사대? 사대주의 말이야?”

 

“그래. 난 중국을 생각할라치면 맹자 양혜왕(梁惠王)편의 한 구절이 자꾸 떠올라. 지혜롭다는 것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는 것이다(惟智者 爲能以小事大),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以小事大者 畏天者)… 중국엔 옛부터 사대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기가 준비되어 있었다구.”

 

“구보야, 나도 중국의 영향이 걱정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좀 오버센스 같은데…”

 

“글쎄 말이야, 내 생각에도 내가 좀 과민한 것 같긴 해. 얼마 전엔 <카운트다운>이라는 영화를 보면서도 사대주의 생각을 했다니까.”

 

“카운트다운?”

 

“그래, 거기선 전도연이 사기꾼 여자로 나오거든. 이 여자가 술집에 앉아서 미리 찍어둔 남자를 꼬시는 거야. 술 한 잔 같이 하자고 나름 교태를 부리고 나선 이렇게 묻지. 당신 건 큰 편이에요? 난 좀 큰 게 좋아요.”
▲영화 《카운트 다운》중에서
“허허…”

 

“근데, 이 남자 당황해하면서 말하는 거야. 네, 동양인치고는 큰 편입니다.”

 

“쩝…”

 

“그 친군 그래서 결국 신세 조진다구. 사대주의의 슬픈 종말인 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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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연 교육강좌]-⑥

‘간지 쩌는’ 푸코; 자기의 테크놀로지와 정치적 실천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한 길 석(한철연 교육분과장)

 

 

화창한 봄날 햇살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강좌는 쉼 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번 강좌는 김성우 회원의 푸코 강의였다. 20세기의 가장 통찰력있는 철학자 중 하나인 푸코의 철학을 소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흔적을 감추는 데에 능란한 ‘여우’를 별명으로 삼고 있는 푸코는 이해하기가 여간 수월찮은 철학자이다.

푸코의 철학이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는 서양 철학의 기나긴 역사와의 대결 속에서 그의 철학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푸코는 체계적 거대 서사를 거부한다. 서양 철학에서 거대적 체계를 제시한 대표자는 역시 헤겔이다. 그런 면에서 푸코의 철학은 헤겔 철학과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고상한 정신의 역사를 철학적으로 전개한 헤겔 역사 철학에 대항해서 정신의 어두운 역사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헤겔의 역사 철학이 이성 승리의 역사였다면, 푸코의 역사 철학은 승리한 이성의 건너편에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던 정신의 이면을 드러낸 계보학이었다.

김성우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은 근대 철학이 구축한 주체 철학의 주체 중심주의에 반발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했다. 푸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젊은 시절의 그는 스웨덴 도서관 등에서 접한 고문서를 가지고 자기의 철학을 펼쳐갔다. 사람들이 간과했던 부속적 행정 서류, 보고서, 일기 등으로 이루어진 고문서를 통해 그는 근대 역사의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합리적이지 않은 근대인들의 모습을 폭로함으로써 그가 노린 효과는 계몽적 이성에 대한 성찰이었다.

현대 사회는 이성이 발굴한 진리를 통해 구축된 합리적 체계라고 여겨지고 있다. 과학은 이러한 체계를 구축하는 데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래서 과학은 진리로 가는 유일한 길로 간주된다. 과학 아닌 것은 단순히 감정의 산물이거나 상상력의 판타지에 불과하다. 비과학이라는 딱지는 적을 공격하는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과학은 현대인에게 구원의 문이 되었다. 이러한 과학주의 분위기 속에서 철학도 과학을 닮고 싶어 한다. 유럽의 형식주의와 구조주의는 모두 과학적 객관성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구조는 사건과 사물들의 현상적 변화를 일어나게 하는 심층적 장이다. 이런 구조는 역사의 영향에서 거리를 두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인 듯이 간주된다. 그러나 구조는 역사의 차원을 무시하기에 선험적이고도 불변적인 감옥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푸코는 구조의 역사적 변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현대 사회의 지식 담론을 형성하게 한 원천을 고고학적 연구 방법을 통해 드러낸다. 그에게 담론이란 어떤 지식인들이 그것을 발언하도록 만든 축적된 지식의 지층들이다. 이 지식의 지층 구조를 드러내고 발굴하는 작업이 ‘지식의 고고학’이다. 이런 시도들을 함으로써 푸코는 구조주의적 언어로 구조주의를 넘어선다. 후기구조주의자로서의 푸코의 모습이다. 그런데 푸코가 구조주의적 언어를 사용한 것은 주관주의적인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그의 고고학이란 이러한 과학적 객관성의 문턱을 넘지 못한 지식들에 관한 학문들을 탐구하기 위한 방법론에 붙인 이름이다.

‘지식의 고고학’ 제2기는 이 지식의 지층들을 가능케 한 근원 인자에 대한 탐구였다. 그는 이 근원 인자를 ‘권력’으로 보았다. 이것이 계보학의 시기이다. 특정 지식 지층을 진리의 반열로 올린 것은 ‘권력’이었다. 물론 그것은 정치 권력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다양한 모습에 대한 탐구는 『성의 역사』 1권에서 다루어졌다.

이후 그는 근대 주체와는 다른 주체들에 대한 탐구를 전개한다. 그리스적 주체에 대한 연구는 이런 맥락에서 진행된다. 주체에 대한 탐구는 근대적 사회 이후의 모습을 전망하기 위한 대안적 이론의 제시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푸코의 윤리학이다. 만약 내가 어떤 주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주체의 모습이 뭔지 먼저 탐색해봐야 한다. 이 윤리적 주체의 역사가 『성의 역사』 2권과 3권이다. 푸코의 후기 작업은 어떤 주체가 올바른 주체이며, 앞으로의 세계에서 어떤 주체를 지향해 봐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였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푸코는 그것을 쓰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는 그 윤곽을 인터뷰, 강연, 단편 등을 근거로 하여 대략 그려볼 수는 있다.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이 새로운 주체로 도달하기 위한 주체 수양에 관한 탐구였다. 푸코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기”를 지향했다.

그가 근대적 주체로부터 벗어날 것을 권유했다고 해서 그의 철학이 근대성 자체를 제거하는 방식의 극복을 주장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보다 그는 근대성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이를 ‘견디며 치유(Verw?ndung)’하고자 했다. 이 실천적인 비판을 통해서 “구체적 자유의 공간”을 넓히려 했던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적절한 저항은 자신이 처한 구체적 삶의 영역을 버리며 떠나는 식의 지사적 열정에 휩싸인 싸움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의 영역 속에 있으면서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와중에 그것을 변화시키면서 동시에 자신도 변화시키는 싸움이 적절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이 규칙을 설립하거나 해결책을 제안하거나 혹은 이런저런 예언을 하는 데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식인은 권력이 특정한 상황(내가 보기엔, 비판받아야 마땅한 상황)에서 작동하는 데 도움을 줄 뿐입니다.” 푸코는 자신의 역할을 “문제들을 효과적이고 현실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성, 광기, 범죄 등은 복잡한 문제여서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그 문제들을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풀뿌리 수준에서 해결하기 위해 발언과 정치적 상상의 권리를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강좌 후기

푸코 철학의 가치.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푸코 철학 어렵다. 서양 철학 어렵다.
계보학: 자기 자신의 분야에서 자기 분야의 역사를 쓸 필요가 있다.
장자의 언어가 푸코의 언어일 수도 있다 과학의 언어이면서도 시의 언어일 수 있다.

철학자가 문학하는 작가에 대해 강의할 때 ‘단독성’을 강조했던 것이 떠오른다. 현대의 지식인이 자신 또한 지배당하고 도구화 되고 있는 지배 체제 혹은 시대의 담론 체계에서 스스로의 ‘단독성’(구체성)을 확보하려면 어떤 투쟁을 구체화해야 하는가의 고민이 더 깊어졌다. 사소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되고 지나치는 개인의 경험과 사유가 각각 힘을 지니고 그것들이 생동하는 질서 속에서 진리 탐구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푸코’와 그의 저작들을 용기 있게 만나야겠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헤엄칠 때 서로의 존재를 잊고 자유로워진다고 한 장자의 통찰에 다시 한 번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우리도 우리의 철학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무능해서 실업자? 넌 유능해서 사장이니?[철학자의 서재]

[철학자의 서재]도미니크 슈나페르·필리프 프티의 <노동의 종말에 반하여>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사회에 대한 다양한 관심들이 있다. 그리고 그 관심은 자기의 이익과 관계가 있다. 경제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다. 가깝게는 생존의 문제 때문이고, 형편이 좋은 사람은 치부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고, 대다수 소상인은 경제가 잘 되어야 자기 수입도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정치, 경제 엘리트를 제외하고 일반 시민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직업, 일자리이다. 일자리가 있는 사람만 사람이고, 사람처럼 행세할 수 있다. 일종의 예언서(!)인 제러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영호 옮김, 민음사 펴냄)은 서구 서점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리프킨에 따르면 미래 세계에서는 노동이 없어지고 전자 통신 서비스가 종래의 노동을 담당하니, 그곳에서 일자리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종말이라는 개념은 ‘노동의 유연성’, 즉 노동자의 안정된 생활을 저해하는 해고, 비정규직 문제를 방기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의 종말에 반하여>(도미니크 슈나페르·필리프 프티 지음, 김교신 옮김, 동문선 펴냄)의 저자들은 노동의 종말이라는 개념에 반대하면서, 공화국(프랑스)의 가치가 노동하는 인간에 의해 그 토대를 놓았으니, 새로운 시대의 구상도 여전히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들을 위해 준비하기를 호소하고 있다.

▲(도미니크 슈나페르·필리프 프티 지음, 김교신 옮김, 동문선 펴냄). ⓒ동문선

?저자들에게 자유주의 국가나 복지 국가 간의 단절이나 불연속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노동의 사회를 재고하고 시민의 유대를 다시 세워야 한다면 적어도 ‘노동의 종말’의 형식이 아니다. 죽은 것은 노동이 아니다. 다만 산업이 만들어준 일자리가 기술 혁명에 저항할 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공화국은 지속적인 창조 속에서 노동의 구체적인 형태와 조건들을 갱신해야 한다. 노동을 재조직하고 노동 시간을 줄이고 대인 서비스 분야를 개발함으로써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 노동의 배척에 맞서 생각해야 할 것은 다시 노동이다.

노동 문제 해결이 공화국의 가치에 근거할 때, 저자들의 주장은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과도 연관된다. 그들의 이야기가 현실성이 떨어진다거나 우리의 상황과 다르다고, 또는 저자들이 책을 만들면서 대담 형식을 취함으로써 주제가 집중되지 못했다 해서 관심을 멈추지는 말자.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이들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면, 더 나은 사회를 계획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노동할 권리

인간 노동은 자본주의 시민 사회를 열었다는 점에서 오늘의 문제에서 다시 해답의 기초가 된다. 근대적 노동의 탄생과 함께 시민 사회가 탄생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시민 사회, 자유 부르주아 사회는 노동의 발달과 함께 탄생하였다. 따라서 사회는 노동에 빚지고 있거나 노동의 자식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노동 문제 역시 노동의 전사와 시민 사회의 전사를 염두에 두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이때 분배와 복지의 문제의 경우, 성공한 경제 엘리트들의 비뚤어진 주장을 극복해야 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노동의 종말이라는 표현은 터무니없다. 그것이 더 이상 노동하지 않는 의미라거나, 일하기를 원치 않는다거나, 일하지 않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라면, 현실은 그 반대임을 입증한다. 상징적으로 보면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출간 그리고 미국의 독립과 더불어 탄생한 근대 사회는 개인으로서의 시민과 생산자라는 이중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노동의 지위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면 생산적인 노동과 시민권의 관계를 무시하면 안 된다. 근대 시민은 노동을 함으로써 그 존엄성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와 서비스의 생산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에 속해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는 우리의 생활 방식, 사회적 지위와 부부구성하는 개인들 또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등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관계를 던져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해보려는 노력을 기피하게 만든다.

종말을 기술 혁명의 덕분으로 보면서 노동의 종말을 찬양하는 자들은 확인된 사실과 규범을 혼동한다. 확실히 오늘날에는 전보다 적은 시간을 일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실로부터 노동이 더 이상 규범이 아니라거나 가치를 잃었다거나 공동생활을 조직하는 기능을 잃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다.

노동은 여전히 노동하는 이들에게나 직장을 잃은 이들에게나 똑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노동은 물질생활을 보장하고, 우리를 사회라는 시간과 공간에 연결시키면서 조직해 주는 수단이다. 직업과 관계된 노동 시간은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그 의미를 부여해 준다. 한 세기마다 발생하는 노동 시간의 감소가 규범의 약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일할 준비가 된 젊은이들 또한 일자리, 무엇보다도 진정한 일자리를 원한다.

오늘날 일자리가 줄어든 것은 기술 발전의 영향이 크다. 그리고 기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법과 목적의 변증법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기술은 인간을 해방시켰지만, 인간을 소외시키기도 한다. 기술은 수단으로 남아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술은 인간의 능력을 발전시키며 인간은 기술을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기술이 강제 수용소를 만들 수도 있다. 기계 그 자체는 현실에 적용된 지능의 고도의 집약을 의미하므로,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목적 그 자체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기계의 상용은 정치와 도덕의 감독 하에 있어야 한다.

저자들은 복지 국가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유에 대한 권리와 신뢰에 대한 권리를 보증할 것을 모색한다. 과거에 복지 국가는 경제 발전, 완전 고용 그리고 시민들의 존엄성의 원천을 구성해 온 임금 제도의 확산과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재정의 위기는 사회적 위기를 초래한다. 적자나 실업으로 인해 분담금을 내는 사람들의 수가 감소하고 경제적으로 보상 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울타리 안에 존재하면서 사회적으로 소외될 위기에 처해 있다. 막대한 금액이 들어가는 사회 보장 제도는 모든 구성원에게 이롭도록 구성해야 하고 자금 역시 효과적으로 지출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공동 세상에 대한 소속감으로 이해되는 공민 정신의 재건 없이는 연대적이고 구세주적인 정부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민적 차원에 호소할 때, 공통의 가치관에 의거할 때에만 복지 국가의 존재와 그 가치관이 약자들에 대한 권리 양도를 정당화하게 된다.

엘리트와 시민 사이의 대립, 또는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척의 문제는 공화국, 즉 사회의 가치에 근거하여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무능력하기 때문에 무직자가 된다고 하면 성공한 엘리트들이 약자들을 이용하는 셈이 된다. 이는 부정적 개인주의 사회를 이미지화한다는 점에서 두렵다.

배척되는 현상의 뿌리들은 기술 변화와 관련이 깊다. 사회는 기술 변화가 직업의 구조를 바꿀 때 재조직된다. 경제적 발전은 일자리에 많은 이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산업 사회가 변하고 있다 해도 노동의 직종별 분류로 불평등을 분석하기에 충분하다. 일자리 없는 이들의 지위는 사회적 보호와의 관계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경제적 질서 내에서 볼 때, 한 사람이 가지면 다른 사람은 빼앗기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생산하는 사람들이 활동이 없는 사람들에게 양도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가치관을 공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들의 특권 문제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일이다.

시민들의 사회는 모든 사람들의 지위가 평등하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불평등은 합법성의 토대, 모든 시민들의 지위의 평등을 재검토하게 만든다. 고용주가 다섯 배, 여섯 배 벌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이라면 문제가 된다. 서로의 월급이나 세금의 양을 보자면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들은 일종의 카스트(특권)를 형성하고 있다.

카스트 개념은 민주 사회의 기준과 맞지 않는다. 뇌물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정직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도덕적으로는 책임이 있지만, 죄인이 아닌’ 지도층에 속한 구성원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규범 하에 있지 않다는 것, 중대한 과실을 저지르고도 죄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대기업 경영자가 엄청난 소득을 올리면서 소득을 줄여 세금을 낸다면 그는 시민들과는 다른 생활 방식과 금전 평가를 지닌 특권 계급이다. 이는 사회를 약화시키는 일이다.

엘리트와 약자 시민 사이의 대립이 드러났다면, 그 해소책은 강자의 정서 변화와 관련이 깊다. 경제에서 이중의 잣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자. 시민 사회의 이상은 기회의 균등이지 결과의 균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회의 균등이라는 이상은 현실적인 효과를 낳는다. 정치가들에게 방향을 제시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시민들에게 사회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을 일깨워줌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는 참여 열정을 높인다. 그리고 이 경우 약자 보호 원칙이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자.

노동에 부여된 가치, 물건을 만들면서 자연을 통제하고 과학적 지식의 결과들을 거기에 적용하려는 인간의 오랜 계획을 상기하자. 이 계획은 칼 마르크스가 <경제학 철학 수고>(강유원 옮김, 이론과실천 펴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노동에 부여된 가치가 우리의 특징이다.

“인간은 물건을 만들면서 현실적으로 하나의 종(種)으로서의 존재로 드러난다. 생산하는 것, 그것은 창조적인 종으로서 인간의 삶이다.”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

모든 이는 ‘사회적 지위’를 가져야 한다. 즉 ‘한 개인은 그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을 가져야 하며, 다른 이들도 ‘그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이를 해치는 것이 특히 실업, 배척과 관련되어 겪은 체험들이다. 물론 가장 높은 지위를 보장해 준 사회에서는 정규직이 다수를 차지했다. 노동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사회적 지위는 더 낮다.

퇴직자들은 예외이다. 퇴직자의 존엄성은 실업자의 경우와 다르다. 직장을 가져야만 사회적 규범에서 시민이기 때문이다. 굴욕감을 느끼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휴가 중이거나 여가를 갖는 것과 다르다. 일해야만 감각을 조정해 주는 시간까지도 그에게는 파괴적이다. 퇴직자는 노동했으므로 퇴직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나 실업자는 이런 느낌조차 갖고 있지 않다. 모욕을 겪을 뿐이다.

저자들은 노동조합의 역할을 명료히 한다. 노조는 공무원들이나 준 공무원들을 대변하지만 실업자와 젊은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방향으로 간다면 노조가 파시스트로 불리게 될 것이다. 실업자의 모욕, 일상의 권태, 절대 고독으로 귀착하는 사회적 교환의 둔화는 안타깝다.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결국 통합이라는 주제로 귀결된다. 노동이 없다면 통합도 없다. 완전 고용을 체험하지 못하는 임금 노동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 사회의 허약성을 의미한다. 사회를 (프랑스) 공화국 체제로 회복하는 것, 즉 시민의 유대를 재건하는 취지의 정치적 결정-노동을 위한 결정-이 필요하다. 유급 노동은 개인의 총체적 안정에 필요한 하나의 조건이되 일자리와 연결된 자기주장, 독립, 사회적 교류의 장인 동시공동체의 유대 방법이다. 여기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드러난다.

기업은 경제학적 기관만이 아니다. 합리적인 경영에 의해 인간과 기계를 모으고 통합하는 장소로서 사회의 중심을 구성한다.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로서, 학교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따라서 기술 덕에 기업이 발전했다면 마땅히 기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기술은 일정부분 사람들의 일자리를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기술 발전으로 인하여 노동 시간을 단축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보 과학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공동생활의 분야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욕구, 진정한 욕구에 주목해 보자. 유아, 청소년이나 노인뿐만 아니라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성인들을 도와주는 일자리의 광맥은 무한하다. 예를 들어 문제아는 과밀 학급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한 반에 열 명만 앉혀 놓는다면 이 문제는 사라지는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다른 나라, 기업과의 생산 경쟁이라는 문제만 해결된다면 교육, 사회 보장, 문화 분야에서 무한정 필요로 하는 그 일자리들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공유해야 할 가치들

경쟁(력)이라는 말은 기업은 물론이고 정부 시책에서 경제적 합리성을 강조하는 맨 앞자리에 있다. 이들은 자기들이 특권을 가지고 있다거나 권력과 결탁한 기업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는 희생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기업-외국 기업-간의 경쟁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새로운 사회경제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경쟁이라는 개념을 극복해야 한다.

저자들은 리프킨의 저서 <노동의 종말>에 대한 요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우리는 산업 사회의 최후를 목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회를 넘어선 하나의 사회를 생각하고 3차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 발전은 사회의 자본에 근거한다.” (81~82쪽)

이에 대하여 저자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산업 사회의 종말’이라고 이야기할 때, 리프킨이 대인 서비스 분야, 즉 사람들을 보살피는 행위를 발전시키려면 물건을 생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동시에 만족스런 임금은 자국 물건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경쟁력은 어떻게 가능한가? 물론 기술 발전과 노동을 통하여서 가능한 것이지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부를 창조하는 연금술은 없다. 오늘 우리가 경쟁력이 있다 해서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똑똑하다. 따라서 희생양으로만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경쟁력은 기술 발전과 노동에서 나온다.

경쟁력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일해야 하고, 일을 하기 위해 저자들이 제안하는 것이 노동을 위한 기업 연결망, 일종의 사회적 통신망이다. 그런데 이 같은 역할을 우리 사회에서는 일용 용역 회사가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끄럽고 약한 사회이다. 그러나 저자들의 제안은 우리의 용역 회사의 역할과 다르다. 임금 노동자는 생산이 요구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이 망의 기업들은 각기 새로운 형태의 고용을 보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임금 노동자들의 사회보장 요구와 생산조직의 유연성에 대처할 수 있다.

저자들은 마지막으로 ‘사회적 경제’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리프킨은 사회 보장 자본의 출자에 대해 질문하자 ‘기술적 재산에 대한 세금’을 제안했다. 저자들은 이에 동의한다. 보충하여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자본주의 시민 사회는 노동의 사회와 함께 출발했다.
– 모든 기술은 이전 시대의 노동으로부터 발전해 왔다.
– 오늘 자본주의 사회의 기술은 노동의 결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자본도 마찬가지이다. 이 유산들은 사회를 위해 써야 한다. 보완하자면 신기술은 개인이나 기업의 것이되, 기술자를 교육시켜 키워 준 사회의 것이요, 기업을 키워준 사회의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합의에 의해 사회적 자본, 즉 기술 발전 세금은 가능하다.

공화국의 기초를 놓은 이들의 사상은 계몽적 이성에 대한 신뢰와 모럴의 힘에 대한 신뢰였다. 역설적이게도 정치, 경제인들의 윤리적 둔감성은 공화국에 대한 합리적 경영을 표방한다. 외적으로는 개발과 경쟁이라는 합리성을 강조하면서 내적으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권력과 자본을 사용했다.

친구들이여, 딸들과 아들들아, 선거의 승리를 전쟁의 승리나 왕조반정의 성공 정도로 보면서 공화국의 부를 약탈하고 논공행상하듯 국가의 부를 먹어치우는 자들에게 분노하면서 알코올 중독에 빠지지는 말자. 우리 사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들을 해결하자. 억울한 가난과 생존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자.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노동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 한 사회의 체제는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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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 크기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크기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교수)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Y에게서 소식이 왔다. 벌써 오래 전에 구보씨가 보냈던 이-메일에 대한 답이다. 여행 중이어서 확인이 늦었다고 했다. 여긴 중국인데 말이야, 바쁘게 이동하다 보니 도무지 경황이 없지 뭐니. 게다가 인터넷 사정도 안 좋고… 중국은 아직 대도시와 시골이 천지 차이야. 그러나저러나 중국이 넓긴 넓더구나. 재밌고 신기한 일도 많고… 이제 여름이니 구보 너도 어디 여행이나 떠나 보면 어때? 더운 날씨에 괜히 인상 쓰고 있지 말고… 그럼, 이만… 짜이젠.

 

구보씨는 입맛이 썼다. Y가 누구와 같이 있을지 짐작이 가는 까닭이다. Y가 몸담고 있는 시민단체에 알아보니 말로는 취재 여행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휴가 비슷한 형태지 싶었다. 그녀 자신이 계획을 입안하여 형식적인 허락을 받았고, 경비는 비행기삯 정도로 최소한만 지급했다 한다. 그렇담, 먼저 베이징으로 갔을 거다. 아니, 어디에 기착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상하이면 어떻고 충칭이면 어떤가. 어차피 조만간 M을 만났을 것 아닌가.

 

M은 중국에 자주 머문다. 업무상 그렇다고 했다. 벌써 몇 년째다. 그래선지 얼굴도 몸도 더 둥글둥글해지는 게 제법 중국인을 닮아가는 것 같다. 이제 우리한테 중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야. 미국하고 일본에 대한 교역량을 다 합쳐도 중국에 한참 못 미친다구. 실질적으론 남한 정부가 중국의 비위를 거스르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지. 지난봄에 만났을 때, M은 큼지막하고 퉁퉁한 손아귀에 작은 빼갈 잔을 쥐었다 놨다 하며 열변을 토했다.

 

체…언제는 우리가 중국 눈치 안 본 적이 있었나. 유사 이래 중국의 영향력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압도적이었다. 이제 다시 우리에게 중국이 부각된다고 해서 새로울 것은 뭐고 반가울 것은 뭔가. 오히려 경계의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게 아닌가. 벌써부터 미국과 중국이 사사건건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이니, 가뜩이나 허리까지 묶인 우리네 신세가 자칫 등 터지고 배 터지는 새우 꼴이 되지 않을까 걱정인 판이다.

 

“하하…근데, 그게 옛날과는 달라. 너 중국이 쥐고 있는 외환이 얼만지 아니? 자그마치 3조 달러가 넘어. 미국 국채만 1조 달라가 넘고. 작년에 미국은 중국 물건을 3000억 달라 가까이 사들였다구. 불황인데도 말이야. 이렇게 얽혀 있으니, 서로 충돌하긴 어려워. 물론 세(勢) 싸움이야 하겠지. 하지만 자칫하면 둘 다 구렁텅이로 빠진다구. 이제 세계는 누가 지고 이기고가 분명하게 갈릴 수 있는 상태가 아냐. 특히나 중국처럼 대국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구.”

 

“대국(大國)? 대국이라…그래, 그렇더라도 흥하고 망하는 데 크고 작은 게 결정적인 건 아닐 거야. 알잖아, 역사상 대국이니 제국(帝國)이니 하는 것들의 운명을… 중국도 다를 바 없지. 망하고 흥하고 한 게 그 동안 몇 번이야.”

 

“나라나 왕조야 그렇지. 하지만 문명은 다르잖아. 중국 문명권이 망한 적이 있냐? 서양의 침략을 받았지만, 그래서 아편전쟁 후에 일시적인 굴욕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백년 만에 다시 결집해서 백 오십년 만에 당당하게 다시 섰잖아. 이제 이백년이 되는 2040년경에는 아마 전세계의 패권을 쥐게 될 거야. 다시 명실상부한 중국(中國)이 되는 거지.”

 

“M 너, 완전히 중국파가 다 됐구나. 말하는 품새도 아연 중국인 같은데… 일단 단위부터가 말이야.”

 

“하하, 그래? 하긴 나 같이 이제 장사꾼 뒷바라지 하는 놈보다는 구보 너 같은 철학자가 스케일 크게 놀아야 하는 거잖아. 중국이라고 뭐 별 거 있겠어? 철학적으로 보면 사람 사는 덴 다 비슷하지. 근데, 스케일은 좀 달라. 얘들은 인구가 워낙 많으니까, 경제적으로 부유층이 기껏 10%가 안 되는데도 그 숫자가 1억이 넘는다구. 그러니 걔들만 해도 시장이 엄청난 거지. 중국의 소득 분포는 말하자면 호리병 형상이야. 못사는 애들은 또 엄청 많은데, 걔네들이 값싼 노동력의 원천이지. 그래서 얼마 전만 해도 중국에선 사업하기가 엄청 쉬웠어. 싼 노동력으로 생산해서 돈 있는 애들에게 팔면 되거든. 요즘은 좀 달라졌어. 중국도 이제 임금도 오르고 수지타산 맞추기가 쉽지만은 않아.”

 

“임금이 오른다는 건 좋은 거 아냐?”

 

“하하, 좋은 일이지. 하지만 일방적으로 좋은 게 어딨냐. 좋은 면이 있으면 나쁜 면도 있고, 세상이 그런 거지. 걔들 편에서도 형편이 나아지는 건 좋지만 그게 또 요구도 많아지고, 그러면 갈등도 더 생기고 시끄러워지고, 그 와중에 얌체도 생기고 희생도 생기고, 언제나 그렇듯 못된 놈들이 더 해 처먹고, 그런 게 조직화되고… 암튼 일 풀어나가는 건 자꾸 어려워진다구. 어떻든 너 중국 오면 연락해라. 베이징엔 와 봤지?”

 

“한 10년 전쯤? 그때하고 많이 달라졌겠네?”

 

“그럼. 그새 올림픽도 치르고 그랬잖아. 꼭 베이징이 아니더라도 연락해. 나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이 많으니까. 장사꾼 딱까리 노릇도 힘들어. 하하…”
▲ 중국의 항공모함사실, M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인상에, 화통한 면이 있는 친구다. 학생 시절에 Y와는 한때 잘 지내던 사이였는데, 서로 엇갈리게 감방에 들락거리는 바람에 멀어졌지 싶다. 하긴 서로 무슨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니, 특별히 헤어지고 말고 할 게 없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그저 학생운동 시절의 친구 사이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M 이야기를 했더니, Y는 걔, 요즘 엄청 쪘던데 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그런데, Y가 중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구보씨는 반사적으로 M을 떠올렸다. 그 둥글둥글한 얼굴과 웃음을. 뿐만 아니다. 신문에서건 인터넷에서건 중국 이야기만 나오면 Y와 M이 겹쳐서 떠오른다. 뭐, 중국 이야기에 중국에 있을 두 친구가 연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그러나 문제는, 왜, 하필이면, 두 친구가 한꺼번에, 겹쳐서 떠오르냐는 거다. 겹쳐서 말이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구보씨는 중국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전이면 무심코 지나쳤을 사안들도 관심을 갖고 들춰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정말 중국에 한번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크기의 문제가 구보씨를 사로잡았다. 중국이라는 나라의 크기, 한반도의 크기, M의 몸집의 크기, Y가 구보씨에게서 차지하는 비중의 크기, 또 구보씨 자신의 마음의 크기…

 

사실, 중국은 가깝고 큰 나라다. 면적은 남한 땅의 100배나 되고 한반도 전체로 쳐도 40배가량 된다. 인구도 말이 14억이지, 정확한 수는 누구도 모른다. 산아제한 정책 탓에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인구가 많은 탓이다. GDP는 일본을 추월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수치상으로 그 규모는 전 세계 GDP의 10%고 미국의 절반 정도지만, 경제적 영향력은 이제 미국에 못지않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첨단기술이나 군사력 면에서는 아직 미국의 상대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글쎄 그런 상태가 얼마나 갈까.

 

미국이 중국 항공모함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회만 되면 일본 기지의 항모를 우리 서해안까지 끌고 와 해상훈련을 빙자한 무력시위를 하는 것을 보면, 중국의 진출에 대해 여간 경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제주도 강정에 기를 쓰고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도 미국의 대중국 견제책의 일환임은 분명하다. 북한이 중국에 더욱 의존적이 되고 북한의 미사일이 평택이나 오산의 미군 기지를 위협할 수 있게 된 마당에, 미국으로서야 중국 본토를 사정권에 넣을 수 있는 보다 안전한 기지가 절실하지 않겠는가.

 

이런 사정이니 중국을, 또 중국과 미국의 관계를 고려에 넣지 않고 한반도에서 맘 편하게 지내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얼마나 잘 균형을 잡고 얼마나 잘 대처해야 허리 졸린 채 등 터지는 새우 꼴을 면할 수 있을까. 미국은 중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묵과했거나 사실상 도와주었다고 비난하면서 남한에 전술핵무기를 재배치하겠다고 나섰다. 그럼에도 남이나 북이나 이런 판국을 조정할 능력이나 여유는 거의 없어 보인다. 북한은 고립된 처지에서 중국 외에는 기댈 곳이 없다. 대중 무역이 전체 무역의 90%를 상회한다. 출구가 극도로 제한된 이런 봉쇄 상태에서 북한은 핵무기를 절대 포기할 수 없을 것이고, 중국으로서야 핵을 가진 북한을 이제 자신의 24번째 성(省)쯤으로 이용하려 할 것이다. 미국은 북한을 트집삼아 대중국 견제선을 분명하게 그으려 하고 있다. 그런데 남한은 미국과 중국의 전략에 놀아나는 것 이외에 어떤 노력을 해 왔는가?

 

“통일? 너무 걱정하지 마. 그거 가능할 거야.”

 

지난봄의 술자리에서 M은 망설이거나 근심하는 빛 없이 이렇게 단언했다.

 

“허, 어떻게?”

 

“당장은 안 되지. 무엇보다 중국이 놓아주지 않을 거니까. 북한을 붕괴시켜 통일한다는 건 중국이 먼저 혼란에 빠질 때나 있을 법한 일이라구. 그런 통일론이야 남한 내부용이지, 이제 그걸 진지하게 믿는 또라이가 어디 있겠냐. 북한 정권이 바뀐들 중국에 대신 줄 게 없거든. 남한은 물론이고 미국도 말이지. 이쪽에서야 북한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테고…그러니 당분간 그대로 가는 거야. 뭐, 이 상태로 서로 긴장을 풀면서 장사나 하는 거지.”

 

“또 장사야? M, 너 정말 짱깨(掌?)가 다 됐구나.”

 

“하하, 구보야, 서로 안 싸울 수 있는 길은 싸우면 같이 손해 보는 관계를 만드는 게 최고야. 장사란 게 별거냐, 나만 이익을 보자는 게 아니라 서로 이득이 되게 얽는 거라구.”

 

“장사로 얽으면 통일이 돼?”

 

“그럼. 언젠가는 된다구. 초조하게 굴다가 바보짓만 안 하면 말이지. 유럽을 봐. 허구한 날 서로 치고받고 싸우던 애들이 이제 같이 놀려구 하잖아.”

 

“얼씨구, EU가 깨지느니 마느니 하는 판인데…”

 

“하하, 그것두 단견이야. 조금 길게 보면 이런 게 다 과정의 일부라구. 지금이야 국지적으루 이해가 엇갈리니까 그런 거지만, 이제 쪼개지면 결국 서로 손해거든. 다 잘 될 거야. 적어도 2, 30년은 봐야 한다구.”

 

“하, 2, 30년? 통일도?”

 

“당근이지. 내 생각엔 2040년쯤이면 우리도 통일이 되지 싶어.”

 

“어디랑? 중국이랑?”

 

“하하, 그건 아니지.”

 

M이 통이 큰 건지, 구보씨가 속이 좁은 건지, 구보씨는 중국을 생각하면 대개 마음이 편치 않다. Y와 M이 서로 알고 지낸 것도 2, 30년의 세월이 아닌가. 통 큰 M과 Y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얽혀 있을까. 알량한 속의 구보씨는 자기도 모르게 상을 찌푸렸다.

 

 

요가하는 노장; 폼 나는 생태적 삶을 넘어서[한철연 교육강좌]-⑤

[한철연 교육강좌]-⑤

요가하는 노장; 폼 나는 생태적 삶을 넘어서

 

강사 : 송종서 (전 민족의학연구원 상임연구원)
후기 : 한길석(한철연 교육분과장)

 

 

 

4월 22일 태복빌딩 2층에서 송종서 회원의 강의가 있었다. 이번 강의는 동양 철학적 관점에서 생태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강의는 부드럽고도 진중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에서 생태 문제가 적극적으로 제기된 시기는 1990년대 부터이다. 환경 위기가 우리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죽음의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생태적 각성이 시작됐다. 북반구 선진국 주민들은 오늘날의 풍요를 지속하면서 동시에 생태적 부담을 증가시키지 않으려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도 그러한 삶에 대한 욕구가 퍼져 나가고 있다. 그러나 저 ‘지속 가능한’ 생태적 삶이라는 꿈은 오늘날의 생태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 ‘죽음의 시간’을 잠시 늦출 뿐이다. 진정한 생태학은 죽음에 직면한 자들의 처절한 성찰을 요구한다. 처절한 성찰의 와중에 목격하게 되는 진실은 우리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되리라는 희망적 전망을 선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절망적 현실에 대한 직시를 명령한다. 그래서 진정한 생태학은 희망의 학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노자의 철학을 자연과 합일하여 소요유를 즐기는 반문명적 우주론에 기초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다. 오히려 노자 철학은 철저히 실용적인 관점에서 입각해서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고자 하는 ‘고도의 철학적 처세술’에 가깝다. 이러한 사고가 전개된 이유는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변화에 대한 배경적 이해가 필요하다.

송종서 전 민족의학연구원 상임연구원/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춘추시대의 제후국들이 패업의 야망을 품을 수 있게 된 계기에는 생산성의 발전이라는 경제적 배경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는 춘추시대가 이미 기술을 가지고 자연을 이용하는 시대에 돌입했으며, 당대인들에게는 그것이 놀라운 성취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국시대에는 자연 지배에 대한 의식이 강화되어 만물 현상의 원인을 추구하는(求其故) 작업이 활발했다. 이 작업을 주도한 학파는 묵가였다. 묵가는 전국시대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학파였는데, 그 구성원들은 장인과 기술 노동자 집단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기구를 만들기 위한 연구 작업을 진행하면서 자연에 대한 이론과 그러한 이론의 방법론으로서의 논리학을 발전시켰다. 묵가에서는 인간이 자연에게서 해방되고, 노동자 등이 지배자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기술임을 강조했다. 장자의 도가와 맹자의 유가 등은 이러한 묵가의 견해에 대한 안티 테제로서 자신의 이론을 성립시켰다.

학파들 간의 논쟁을 통해 이론을 성숙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제나라에 설치된 ‘직하학궁(稷下學宮)’의 역할이 컸다. 이것은 국가가 세운 일종의 학술원이었다. 이곳에서 당대의 학파들이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파악하고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게 된다. 순자는 좨주(祭酒)를 세 번 역임하면서 이 기관을 대표한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하나였다. 순자의 학문은 당대의 학문적 성과를 종합하면서 자신의 이론적 체계를 세웠다는 점에서 잡가적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그의 이론에는 도가의 영향이 보인다. 이런 이유로 그는 인간을 윤리적 관점에서만 이해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선하다’든가 ‘인간이 만물의 중심’이라는 관점을 거부한다. 당대의 윤리학은 ‘자연은 신비로운 존재이며 이 신비로운 자연에 대해 인간 스스로가 행실을 삼가야 하고 그 속에서 윤리가 등장한다’는 이해 방식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순자는 이러한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인간을 자연 지배의 군주로 보지도 않고, 자연을 지존의 위치로 격상시키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인간과 자연에 일정한 거리두기를 취하면서 이해하려 했다. 한 편으로는 도가적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묵가적이기도 한, 그러면서 인간의 윤리적 삶을 고찰했다는 면에서 유가적이기도 한 이같은 면모가 그를 당대 학문의 종합자로 파악하게 만든다.

최근의 학설에 의하면 『노자』는 진(秦)나라 말기에 서술된 책이라 한다. 이 시대의 정신은 생존이었다. 서민(소인)에게는 자기 보존이 문제였으며, 주류 계급(군자)에게는 세력 유지가 관심사였다. 『노자』는 이 실용적 시대정신에 호응해 안정적 생존을 가능케 하는 방도를 제시해 준 철학적 체세술이었다. 『노자』 철학에서 생존이란 자연의 전개 법칙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인식하고 활용하려는 모든 의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노자 철학의 생태주의는 우주론적 각성에서라기보다는 생존의 요구에 충실하려는 인간적 욕구에서 발생한 것이 된다. 왕필에 의해 해석된 『노자』는 우주론적 관점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백서본(帛書本) 『노자』는 벌어진 상황에 가장 적절하게 처신함으로써 자기 보존을 연장하는 처세술로 해석된다. 이러한 이유로 『노자』가 제왕학, 즉 정치술의 경전으로 활용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황로학은 이렇게 설명된다. 정리해보면 노자류의 도가는 고급 처세술에서 시작해서 왕필에 이르러 생태학적 우주론으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천하를 일통하고 그것을 안정적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처신해야 할 방략을 제시하는 가운데 가장 통 큰 처세의 이론으로서 도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연구 성과를 수용하게 되면 장자가 노자를 시대적으로 앞서게 된다. 내용상으로 파악해 봐도 노자의 정신과 장자의 정신은 다르다. 장자는 무정부주의적 정신을 강조하면서 개념화와 문명화에 대한 부정을 제시한다. 노자는 제왕학적 경향성을 지니면서 세상의 변화와 흐름에 적응해 갈 것을 권유한다. 이렇게 볼 때 노장사상을 하나로 합친다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장자와 노자 사이의 질적 상이성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기술 지배 시대에 대한 장자의 근본주의적 비판은 『장자』 「천지」, 「대종사」 등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맹자도 기술 지배적 풍조에 비판적이었지만 장자만큼 급진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묵자와 장자를 변증적으로 지양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는 『맹자』의 「고자」 상편에서 이 길을 우 임금의 치수에서 찾아내 ‘行其所無事’로 정식화했다. 한편으로는 스스로 생장하는 싹의 힘을 믿고 그 힘에 기대는 동시에 천지의 도움이 잘 이루어지도록 인간의 노동력을 투여하지 않는 계기, 즉 無事의 계기가 있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자를 심고, 잡초를 뽑으며, 물을 대고, 퇴비를 주며, 보리를 거둬들이는 인위적 行의 계기가 필요하다. 이 무사와 행의 두 계기가 적절히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맹자는 이 생태적 농사의 원칙을 인성 수양의 원칙으로 삼았다. 『맹자』의 「공손추」 상편의 어리석은 송나라 농부의 이야기는 이런 관점에서 해석된다.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강의 후기

문명의 편리함에 익숙해져서 환경 파괴적 삶을 살아오던 차에 동양의 도가사상을 통해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생태적 삶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기존에 알고 있던 도가를 바라보던 시선과는 다른 시선을 접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 그런데 장자의 철학은 회의주의적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나?

멋진 강의였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께 불교 철학 강의를 한 번 추가로 부탁 드리고 싶네요.

여러 사상의 연관성 이야기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맹자 사상 중에 농업철학이 있었다는 것을 새롭게 배워서 좋았습니다. 이준모 선생님을 알게 된 것도 큰 기쁨입니다.

생태적 삶을 넘기는커녕 생태적으로 살기도 어렵지 않을까?

삶에 대한 정의를 ‘생태적’이라 한다는 논제 자체가 비생태적일 수 있다는 것을 오늘 강의를 통해 느끼게 되었습니다. 멀게만 느껴지던 동양의 고전들에 조금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3년 신년회를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3년 신년회를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강 지 은(편집주간)

 

지난 주 목요일 1월 10일 한철연 건물 2층 강당에서 60여명의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2013 한철연 신년회가 열렸다.

3시부터 시작된 신년회 행사의 1부 순서로 1월 월례발표회가 진행되었으며 발표엔 신승철 회원, 논평엔 윤지영 회원,? 토론사회를 이병창 회원이 맡았다. [욕망 논의에서 라캉의 ‘구조’와 가타리 ‘기계’의 차이점]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월례발표회는 들뢰즈의 ‘욕망’ 개념에 대해서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틀뢰즈의 욕망을?생산적 시각에서 바라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 4시 반부터 진행된 총회에서는 이정호 한철연 이사장과 송상용 고문의 격려사가 있었으며 회장과 연구협력위원장은?회원들에게 올 한해 사업비전과 다짐을 보여주었다. 이어?각부의 보고와 2013년 계획이 발표되었으며?한철연 지난 1년의 살림살이에 대한 감사 보고가 진행되었다. 총회 후 진행된 문화행사에서는 윤주영 감독의 다큐멘타리 “죽은 자들의 도시”가 상영되었으며 이현재 회원의 사회로 감독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영화는 감독이 이집트 여행 중에 만나게 된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지막 친교시간은 밤늦게까지 이어졌으며 한 해동안 쌓아왔던 이야기들을 마음껏 푸는 장이었다.

?* 월례발표회와 영화리뷰는 조만간 웹진에 자세히 업데이트 될 예정

 

안산의 공맹; 친친(親親)의 역설을 통한 이방인과의 소통, 이해, 그리고 연대[한철연 교육강좌]-④

[한철연 교육강좌]-④

안산의 공맹; 친친(親親)의 역설을 통한 이방인과의 소통, 이해, 그리고 연대

 

강사 : 김세서리아(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수석연구원)
후기 :한길석(한철연 교육분과장)

 

 

지난 4월 15일 한철연의 네 번째 교육부 강좌가 김세서리아 회원의 강의와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강의는 제 3강과 동일한 주제를 다루었다. 기획자의 의도는 상호문화적 상황에 대해 서양과 동양의 윤리학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는 다문화 가정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문화 간 혼인에서 태어난 아이는 매년 4천명에 달하고, 2010년에는 내국인과 외국인 결혼이 10.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이한 점은 1991년에서 2005년 사이에 한국 여성과 외국 남성 간의 결혼이 3배 증가한데 비해, 한국 남성과 외국 여성의 결혼 건수는 50배 증가했다는 데에 있다. 후자의 경우 한국 남성의 결혼 이유는 순종적이고 부모를 잘 모실 것 같은 여성이어서였다고 한다. 이는 문화 간 결혼이 상호문화적 이해와 인정에 의거하기 보다는 종족 보존과 가부장적 가정의 유지라는 유교적 윤리 의식에서 기인함을 반영한다. 전통 유교적 가족 관계에서 혼인은 생물학적 번식과 남녀 분업을 통한 생활 자료의 생산이라는 세속적 필요성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풀이된다. 또한 유가에서는 자손 생산을 통해 개별 생명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무한한 삶을 추구했다. 영혼 불멸이라는 초월적 관념 장치가 결여되었던 유가 철학에서 이러한 사고는 세속적 형태의 초월성 추구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개체의 존재는 개인에게 온전히 속하는 것이 될 수 없다. 나의 실존적 의미는 조상 및 후손과의 연관 관계 속에서만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친족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윤리적 태도로 이어진다.

김세서리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수석연구원/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유교적 윤리 의식은 친친(親親)의 원리에 의거하고 있다. 자신과 친한 이들에게 보다 친밀한 대우를 권고하는 이 의식은 육친을 우선시하는 윤리적 행위를 낳았다. 이는 사회적 정의와 가족적 우애가 갈등을 빚을 때 후자를 우선하게 만드는 일을 초래한다. 양을 훔친 아비를 고발한 아들을 윤리적이지 않다고 책망했던 예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정직’이라는 의미에 대한 해석차를 고려해야 한다. 공자와 섭공의 논박을 살펴보자. 섭공에게 정직이란 ‘사실을 객관적으로 고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공자에게는 ‘제 마음에 진실하게 임하는 것’을 뜻한다. 객관적 참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지 않는 한 정직의 의미가 온전히 발휘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친친(親親)의 원리가 사회 윤리보다는 가족 윤리에 기울어 사회적 정의의 확산을 가로막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친친(親親)의 원리는 혈연에 의해 친밀하게 이어진 관계에 대해서는 동화를, 그렇지 않은 관계에 대해서는 배척과 분리로 이어지게 하는 경향성을 갖는다. 친족 내의 이질성을 제거하고 남성 가장의 문화를 중심으로 혈연적 동화를 추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친(親親)의 원리가 반드시 가족 이기주의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이 강조하는 바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윤리적 행위가 진실하다는 점에 있다. 유가 윤리는 ‘인(仁)’의 구현을 강조한다. ‘인(仁)’이란 ‘충서(忠恕)’, 즉 온 마음을 가운데에 모아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같게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는 추기급인(推己及人)과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의미한다. 『논어』 「옹야」 편에서는 인(仁)을 ’내가 서고자 하는 곳에 남을 세우고,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남을 도달케 한다‘는 것으로 풀이해준다. 타인과의 낯선 관계에서 이런 마음이 자주 나타날 리는 없다. 충서(忠恕)의 마음이 가장 잘 우러나오는 관계는 가족 관계에서일 것이다. 가족 관계 속에서 이런 마음을 익숙하게 체화하여 온 공동체로 넓히게 하는 것이 유가적 윤리관의 본래 의도라고 짐작된다.

현대 사회의 가족은 이미 유교적 사회의 그것과는 상이하고도 다양한 형태로 조형되고 있다. 혈연을 중심 고리로 묶이지 않은 가족도 등장하고 있으며, 이질적 문화와 종교 및 가치관을 그대로 지키고자 하는 가족 구성원들도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친친(親親)의 원리도 이에 걸맞게 해석되어야 한다. 과거에 그것은 육친과 혈연적 관계에 방점을 두고 적용되었다면, 현재에 그것은 ‘인(仁)’의 본래 정신을 구현하는 형태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타인의 마음을 섣불리 평가하지 않고 내 마음과 같이 생각해보려고 노력함으로써 이해와 화해를 도모하는 ‘인(仁’)의 정신은 문화 간 갈등 상황에 봉착하고 있는 현대사회에 일정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4강 후기

한국 사회의 다문화 현상을 친친의 확장 개념을 통해 재해석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상호문화주의에 대한 강의를 연속으로 듣게 되었다. 주제가 최근 한국 현실에 부합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직접 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깊게 생각해 보지 못한 주제였다. 앞으로 상황이 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비단 이주자 문제 뿐 아니라 현재 동료들과도 상호 이해, 차이의 공감 등에 대한 이론적 기반이 될 수 있도록 개념을 좀 더 확장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저번 주의 강의와 이번 주 강의를 들으며 상호문화주의, 차이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 같다. 일방적인 동화 또는 이해로 포용하는 것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고 또다른 것을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은 주제였지만, 앞으로 내 생활에 차지하는 면이 클 수 있는 주제에 대해 한번씩 생각해 볼 수 있는 듯 하다.

이번 강의의 주제가 일상에서 부딪치는 구체적 문제를 다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두 번의 다문화 관련 강의에서는 직접 경험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고 대부분 피상적 문제만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강의를 듣고 있다. 혹시 앞으로의 강의에서도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는데 가능하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미리 일주일 전에 문제 제기를 해주시면 더욱 고맙겠다.

다문화주의를 고민하게 된 그 배경에 대해 궁금합니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고민은 전세계적 이슈로 봐야 하지만 먼저 이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금융 제국주의의 문제를 먼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전제 하에 논의되는 이 모든 문제들이 실제로는 경제 제국주의와 아주 밀접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상적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경제의 획일화가 문화 획일화를 가져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한다.

친친의 유의미성에 대한 부분이 이민자, 외국인, 다문화를 수용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지 않아 아쉽다. 유교의 친친의 확장은 결국 나로부터 혈연, 지연, 학연 순으로 나아가는데 그 한계와 부정적 측면이 더 많을 듯 하다.

친친의 편파성과 그것의 도덕적 유의미성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부자 증세가 확실히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친친의 원리에 입각한 나라가 있을까?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미 다문화적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의 인식은 이방인과의 소통과 연대 의식이 부족한 것 같다. 친친의 원리를 극복하기 위한 열린 마음을 가지자.

‘우리’의 범위를 확장하자. ‘다름’은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같음’을 공감하고 연대하면서.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청춘의 서재]

, 에드워드 사이드, 김석희 역, 살림 2001.

김운하 / 소설가. 건국대 몸문화 연구소 연구원

인생을 다룬 소설이나 전기를 읽는 것은 타인의 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생이라는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기서 기쁨과 슬픔, 실패와 방황과 좌절, 꿈과 현실의 마찰과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고뇌들, 예측 불가능한 행운과 불운들을 읽으며 인간적인 공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는 굳센 의지와 신념, 치열하거나 심오한 사유가 드러내 주는 인간성의 고귀한 높이에 찬탄하며 경외심을 품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 온다.

돌이켜 보면, 나는 젊은 시절에 전기류를 더 많이 읽지 않았던 것에 대해 크게 후회스럽다. 대학에 다니던 80년대, 그 암울하고 잔인한 시대를 살아가며, 오직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바깥의 문제에만 온통 몰두한 나머지 정작 한 개인으로서 ‘나는 무엇인가?’ 이라는 실존의 문제에 관해선 사실상 거의 도외시해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자아 정체성의 문제라고 불러도 좋다. 혹은 삶의 정체성 문제라고 해도 상관 없다. 나는 마치 무조건 물에 뛰어들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기만 하면 그것이 수영인줄로만 아는 사람처럼, 세상이라는 바다에 겁 없이 몸을 던져 넣었다. 그런 이유로 내 청춘의 방황은 남들보다 더 길어졌고, 더 힘들었고, 더 우스꽝스런 한 편의 연극 같은 것이 되고 말았던 것 같다. 만일 내 청춘기에 타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기록들을 거울삼아 더 깊이 좀 더 자주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어쩌면 그토록 무모하고 어리석게 좌충우돌 하지는 않았을까?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커튼 Le Rideau』이라는 책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쓰고 있다. 그는 특히 젊은 사람들의 특징을 방황이라고 보는데, 방황 가운데서도 특별한 방황이라고 쓰고 있다. 청춘의 방황이 하필 왜 특별하단 말인가? 그 이유는 청춘은 방황하면서도 방황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방황하기 때문이다. 또 이중적인 의미에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첫째 청춘은 인생을 산 경험이 너무 짧기 때문에 아직 삶과 세상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둘째 아직 삶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내 경험에 비추어 거기에 딱 한 가지만 더 덧붙이고 싶다. 가엾게도 청춘은 자신이 이중적인 무지에 빠져 있다는 그 사실조차 모른다. 쿤데라는 청춘의 방황을 방황 자체로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오직 청춘이라는 터널을 통과한 후에 거리를 두고 뒤를 돌아보게 될 때다.

나 역시도 그랬던 것 같다. 길을 잃고 헤매는 방황과 표류의 긴 시간의 끝에서야 겨우 그런 모든 경험들이 갖는 의미를 뼈아프게 이해하게 되었으니. 내가 처음『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원제 Out of place)』을 읽으며, 무엇보다 그 책의 마지막 문장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그런 이유였으리라.

“이따금 나 자신이 한 줄기 흐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고체처럼 충일하고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라는 개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정체성보다는 한 줄기 흐름이 나는 더 좋다….나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보다 거기서 엉뚱하게 벗어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된 것은 그만큼 내 인생에 불협화음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

어쩌면 이 한 문장에 에드워드 사이드가 자서전에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 모두 함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이드의 자서전은 독특하게도, 어린시절부터 삼십대 초반 청춘의 나이에서 끝난다. 그는 백혈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던 중인 94년에 이 책을 쓰기 시작하여 5년만인 99년도에 가서야 힘겹게 책을 끝낼 수 있었다. 이 책은 그가 쓸 수 있는 마지막 책이 되었다. 2003년 9월, 백혈병이 끝내 그의 삶을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다. 68년 동안의 한 생이 그렇게 마감되었다. 치명적인 병과 싸우는 와중에도 2000년에는 이스라엘의 무력사용에 항의하기 하기 위해 레바논으로 달려가 레바논 국경의 이스라엘군 초소에 돌을 던지며 시위를 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걸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그는 이 회고록을 쓴 가장 중요한 이유로 “현재의 생활과 당시의 생활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과 공간의 간격에 다리를 놓고 싶은 욕구였다.” 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간격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따지고 가치평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초연하고 객관적으로, 오직 명백한 사실들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이 책을 쓰면서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다고 쓰고 있다. “영원히 지나가버린 역사와 상황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지만 추억이나 대화를 통해 이따금 되살아날 뿐 기본적으로 회상되거나 기록되지 않은 역사와 상황은 또 얼마나 허약하고 덧없는 것인가를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시간과 이야기의 관계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한 시간조차도 기억과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에 불과하다는 것, 따라서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남긴다는 것. 인간의 삶은 비록 시간 속에서 허망하고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이지만, 이야기를 통해 망각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 삶은 절대적인 소멸이 아닌 어떤 지속성을 얻게 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시간과 죽음을 의식하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고 근원적인 욕망인지도 모른다.

사이드는 고통스런 병상 위에서 이 책을 기록해 나갔지만, 지나온 먼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망각의 위험에 처한 기억의 간격들에 글쓰기라는 수단으로 연약한 구름다리를 놓으면서 삶이 가져다 주는 여러 곤란들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삶을 사랑했는가를 다시 깨달았다고 썼다.

사실 에드워드 사이드란 이름은 무엇보다 그가 1978년에 발표한 책『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Western Conceptions of the Orient)』이라는 저서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 책에서 그는 동양은 서양보다 열등하다는 사고방식의 유럽-서구 중심적 음모와 편견의 역사적 기원을 밝혀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그 책 이후 서구에서나 한국 같은 비서구 사회에서도 역사와 세계를 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졌다. 나 역시 그의 책을 읽고 나 자신의 무의식 속에 깊이 틀어박혀 있는 오리엔탈리즘을 새삼스레 다시 깨닫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이후 서구 문화와 제도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서구인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을 자신도 모르게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 양 내면화 해왔던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그가 맞서 투쟁하고자 했던 오리엔탈리즘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 시대를 움직이는 책’ 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그의 책『오리엔탈리즘』은 사실 끊임없이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 자신의 삶의 편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책이기도 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더 흥미롭게 읽었던 이유도 그런 인간적인 면들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1935년 영국 치하의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인으로 출생했다. 1947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가족들은 모두 이집트로 이주했고, 1950년대 말에그는 혼자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의 가족은 아랍인이지만 무슬림이 아닌 기독교를 믿는 집안이었다. 이집트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아버지 덕에 윤택하게 살았고, 프린스턴과 하버드대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받았으며, 대학의 교수로,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명성을 얻게 되지만,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인이자 카톨릭 세례를 받은 미국 국적을 가진 그의 삶은 늘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이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며, 경계인일 뿐이라는 불안은 젊은 시절 내내 그를 사로잡았다. 그에게 팔레스타인은 평생 이중적인 감정을 안겨주게 되는데, 어린 시절부터 “해결되지 않는 슬픔과 이해할 수 없는 분노의 근원” 이었던 그 문제는 회고록을 쓰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그에게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분열된 감정, “비통한 느낌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슬픔을 자아” 내는 원천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자아가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혼란스런 균열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묘하게도 영국의 한 왕자 이름에서 딴 에드워드라는 이름과 사이드라는 아랍식 성이 조합된 그 이름에서조차 그가 평생 살게 되는 그런 ‘경계인’ 적인 삶의 정체성이 마치 운명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는 자신을 경계인으로 생각했고, 또 끝까지 한 명의 경계인으로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조화를 이루는 민주주의 국가를 꿈꾸면서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쳐 투쟁했다. 억압과 배제가 없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들이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꿈꾸며 온몸을 던져 그 꿈을 위해 싸웠다. 제국주의나 서구 중심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했지만, 삶과 인간성을 억압하는 어떤 권위나 권력, 경계 짓기에도 순응하길 거부하는 비타협적인 삶을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자서전에서 고체처럼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나 정체성이란 개념을 거부하고 대신에 한 줄기 흐름, 끊임없이 경계를 벗어나 바깥에 머무르려는 도저한 흐름의 연속으로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한 것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다.

나 자신도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어떤 통일된 단일한 정체성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정체성이란 것을 현재 주어져 있는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 혹은 창조를 통해 형성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낯선 미지의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난 시절의 모든 방황과 표류를 수락하고 긍정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방황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형성하고 실패와 오류를 통해 끊임없이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탐색하고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인용했던 12세기 철학자 생 빅토르 후고의 한 문장을 기억한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경계인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결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런 삶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끝까지 당겨진 활처럼 팽팽한 긴장감, 집중력, 위험의 감수, 이 모든 것을 견뎌낼 의지와 신념이 필요하다. 내가 사이드의 자서전에서 새삼 발견한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세상 뿐 아니라 자기에게조차 이방인이 되길 거부하지 않았던 한 정신의 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