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월례발표회에 많은 참석부탁드립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9월 월례발표회에 많은 참석부탁드립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안녕하세요, 학술1부입니다.

더운 여름을 보내고 날씨가 한결 선선해졌습니다. 새학기의 시작으로 모두 바쁘시지요.

9월 월례발표회는 신입회원의 박사학위논문 발표입니다.

발표자 윤지영 선생님은 프랑스 팡테옹 소르본느(파리 제 1대학)에서 <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현재 ‘여성과 철학’ 분과와 ‘라캉’ 분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번에 발표 주제 역시 <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재미있는 발표와 토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그동안 발표 논문을 미리 읽을 수 없느냐는 문의가 많았습니다. 앞으로는 발표자들의 의사를 존중해서 발표 논문을 전체 공개 또는 부분 공개하고, 이를 공지하겠습니다.

이번 발표는 발표 논문을 전체 공개합니다. 발표 논문은 완성되는 대로 홈페이지 공지문에 추가로 첨부하겠습니다.

출력해서 월례발표회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발표자: 윤지영(서울시립대)

논평자: 한길석(군산대)

주제: <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

일시: 9월 21일 (금) 5시 30분 한철연 제1세미나실

“이 논문은 서구 전통 형이상학의 이분법적 논리가 어떻게 존재론적 일원론과 연계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며 위계적 양극화 논리의 폭력성을 날카로이 비판할 것이다. 나아가 프로이트와 라깡의 정신분석학 내에서 남근 중심주의(phallocentrisme)가 어떻게 주체를 구성하는 메커니즘의 축이 되는지를 드러내며 리비도를 남성적인 것으로 보는 욕망의 경제학의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여성성이라는 신화-모성 신화와 처녀성에 대한 신화와 터부 등의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읽어내며 총체화되고 단일화된 여성성에 대한 단선적 정의를 파기함으로써 유희하는 몸과 하이브리드성이라는 새로운 주체화 과정에 주목할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철학의 유언]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철학의 유언]

지미정( 2012교육강좌 수료)

 

얼마 전 가끔 소식을 전하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받았다고·····. 이유는 물론 외로워서이기도 하겠지만, 270만원 때문에 목을 맸다면서 자기 속이 까맣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구가 물었다. “그 선배가 철학적이었다면 살아있을까?” 나는 철학을 했어도, 또 죽음의 원인이 100만원이었어도 자살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친구에게 “철학을 했어도..”라는 말을 쉽게 내뱉었지만 ‘어쩌면 철학을 했으면 조금은 다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 돈의 액수를 들었을 때, 나는 죽음의 원인이 단순히 돈의 액수로 환원되는 것 같은 느낌에 거부감이 들었다. 물론 친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왜 돈 때문에 사람이 죽어가야 하는지를 나와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을 안다. 아마도 뒤늦게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용을 쓰는 친구이기에 어떤 말인가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에게 철학을 했다면 다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철학을 공부했을 때, 어떤 면에서는 현실을 바라보는 고통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을 공부했을 때 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 다를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을 비관하기도 하지만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도 생기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친구 질문의 의도를 그 선배가 철학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힘을 가졌다면 돈의 고통과 외로움을 죽음으로 끝내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로 이해한다.

삶과 철학

내가 생각하는 철학 공부의 의의는 우리 사회가 가진 여러 가지 모순에 눈을 떠 현실을 비판하는 이성을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또 철학의 힘은 개인의 행복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음으로써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노력을 가능하게 만든다. 인간 삶의 모습과 사유 방식을 통해 좀 더 깊이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일도 결국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의 물음에 답을 얻는 일이다. 철학은 지혜를 주는 학문이다. 어떤 사람은 종교에서 위로를 받지만 나는 철학 공부에서 위로를 얻었다. 나는 씨알 함석헌 선생을 통해 철학에 눈뜨고 비교 종교학 책을 몇 권 보던 중, 비트겐슈타인을 만났다. 그렇게 내 철학사랑은 시작했다. 비트겐슈타인은 현대 영미 분석철학자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졌지만, 나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철학자로 다가왔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우리는 삶에 공허를 느끼면서 행복할 수 없다. 나는 대학 3학년 때 만난 지금의 남편과 3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의미도 모른 채 어린 나이에 시작한 결혼 생활이 나름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원하는 삶이 이게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까지 나는 내 꿈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고 내 꿈이 무언지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삶은 늘 공허했고 불만족스러웠다. 주부로 살면서 아이들의 교육에 내 에너지 대부분을 소진했지만 얼마 안 가 그것도 나를 만족시키진 못했다. 나는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오기 시작했다. 그 시기가 아마 내 존재에 대한 물음이 시작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에 아이들의 논술 지도를 위해 시작한 공부는 어느새 배움의 열망으로 변했고 아이들의 교육비를 대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학부 편입을 했다. 공학을 공부한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인문학 공부가 필요했다. 뒤늦게 찾은 철학 공부의 즐거움은 그 어느 즐거움에 비할 수가 없었고 가족을 집에 두고 새해 첫날에도 도서관을 찾을 정도였다. 나의 철학에 대한 애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석사와 박사 과정을 꿈꾸게 했다.

자아실현의 삶

요즘엔 ‘자아실현’을 위해 무언가를 감수한다고 하면 조롱거리가 되는 듯하다. 돈 앞에서 자아실현에 대한 욕망은 초라해졌지만 인간에게 ‘자아실현’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심리학자 매슬로(Maslow, Abraham H)는 인간의 욕구 단계 가운데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장 상위에 두었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인간의 생리, 안전, 사랑, 존경의 욕구가 충족된 후에 생기는 욕구라고 한다. 우리는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꿈을 접고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보면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 못해 처자식을 고생시키거나 자기 길만을 가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작년 초, 한 시나리오 작가의 아사 소식은 우리 사회 곳곳의 부조리함을 일깨운 사건이자 내겐 인간의 자아실현 욕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우리에게 그녀의 창작에 대한 고통에 비해 최저 생계비로만 살 수밖에 없는 문화예술계 구조 문제를 일깨워 주었다. 더 나아가 나는 그녀가 자신이 선택한 그 일을 좀 더 일찍 그만두거나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하지 못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그냥 추측해본다.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삶은 단지 생계비 마련을 위한 일이 아니라 창작의 고통을 감내할 만큼의 희열을 주는 일이었으리라. 그녀가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하지 못한 것은 그녀가 생을 만만하게 보아서도 아니고 현실과 타협하기 싫어서도 아닌, 다른 일과 병행하면서는 마음먹은 작품을 도저히 써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에게 창작은 자아실현 욕구와 관련한 것으로, 생의 위협 앞에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일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흥행을 위해 그녀 작품을 상업적으로 만들었다면 어쩌면 궁핍한 예술가로 살다 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물론 그녀의 작품이 내 추측과는 달리 작품성이 떨어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혹자는 나의 이런 추측을 비판할 수 있다. 어쨌든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매슬로의 이론이 그녀에게는 예외적이라는 것이다. 매슬로가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생리 욕구가 해결되지 않고는 상위의 욕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우리 주변에는 배고픈 예술가들이 많다. 또 만인의 존경을 받는 명예가 없어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아실현의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여기서 그들 모두는 생리적 욕구와 다른 욕구를 뛰어 넘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강한 자들이었음이 드러난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기

나는 30대 초반에서야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고민했다.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그 때 깨달았다. 현재 내가 추구하는 삶은 부조리한 사회 구조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물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삶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며 어쩌면 유토피아로, 우리 사회에서 공감을 얻기 어려운 삶일 수 있다. 내 삶은 주인이 된다는 것은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때만이 가능하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물질과 지위와 권력의 소유에 집착하는 삶과 “존재 양식”으로서의 삶을 말한다. 프롬이 말하는 “존재 양식”의 삶은 “소유하지 않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해 세계와 하나가 되는 삶”을 말한다. 프롬이 말하는 “생산적”이라는 말은 창조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것으로 활동의 산물보다 활동의 질에 있다. 즉 “스스로를 깊이 의식하는 사람, 자연을 그냥 지나쳐서 보지 않고 진정으로 투시하는 사람, 한 편의 시를 읽고 시인의 표현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창조와 연결되지 않아도 생산적”이라고 말한다. 철학을 공부한 후에 나의 삶에도 변화가 생겼다. 나의 존재 가치를 외부에서 찾으려 했던 내 20대와는 다르게 지금 나는 의·식·주를 위한 최소한의 물질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가끔은 그들을 위해 내 재능을 나누며 살고 싶다.

이 글을 친구와의 전화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는 우리가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존재를 의식하기 위한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우리는 우리의 자존감을 위해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우리의 자존감은 상처입고 절망에 빠진다. 최근에는 지역마다 평생 교육차원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설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철학은 돈이 안 되는 학문이라는 이유로 외면 받아왔다. 대학의 교육도 실용적인 학과만을 남기고 통폐합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이런 교육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삶의 방향을 잃고 소유하는 삶을 지향하게 만든다. 소유가 존재라 믿는 현대인의 병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소유지향의 태도는 타인을 배제하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는 일 외에는 자신을 위한 다른 노력을 하지 않게 만든다. 지식의 소유도 마찬가지다. 지식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한 반박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기의 이론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노력만 한다. 그러나 타인의 이견을 열린 자세로 대하는 사람은 지식의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질이든 지식이든 소유를 지향하지 않는 삶의 태도는 공부를 해야 얻을 수 있다. 나는 공부가 부족해서인지 아직 지식을 갈망한다. 지금 내가 알게 된 것을 과거에는 몰랐고,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던 내가 알게 되는 기쁨을 맛보는 것이 내 공부의 즐거움이다. 나에게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은 행운이다. 남들보다 많이 늦었지만 나는 내 북장단에 발맞추려 한다.

또 다시 찾아 온 이별[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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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딸을 보내다

세월은 빨리 가라고 재촉하지 않아도 잰 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시 오기를 몇 번 되풀이하자 험하고 삭막하기만 하던 산이 사람들을 품어 주었다. 그들이 사는 산속 마을에도 햇살이 찾아와 주었고 바람도 놀러 와 주었다. 다람쥐들은 도토리를 나누어 주었고, 새들은 음악을 들려주었다.

폭풍 같은 시간들이 지나고 생활이 안정되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사람이 사는 곳에 문제가 없을 리 없겠지만, 할머니에게 다가온 문제는 깊이 묻어 두었던 상처를 꺼내는 것이기도 했다. 죽음의 길을 가는 엄마를 끝없는 울음소리로 돌려 세웠던 그 딸을 이제는 할머니 스스로 떠나보내야 했다.

살리기 위해 아들을 떠나보냈는데, 이제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딸을 보내야 했다. 딸이 자라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걱정은 시작되었다. 딸은 소위 말하는 ‘미감아’였다. 예쁘고 영리했지만 아이를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자라면서 말이 없어지고 침울해지는 아이를 보면서 할머니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밤이 오면 마당을 나와 밤이 새도록 서성거렸다. 달빛에 마음이 아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까닭모를 설움이 올라왔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기도 했다. 그때마다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이지만, 그 희망을 모질게 끊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울산에 있는 저거 큰 아부지한테 보내기로 했다. 큰 엄마도 보내라 카대. 데리고 있으모 안 된다고…” 딸아이는 큰 아버지 집으로 간다는 말에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알았던 게지. 지가 여기 있으모 어떤 소리를 듣는지.” 단순하게 거주지를 옮기고 학교를 옮긴다고 ‘미감아’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몇날 며칠을 서로 말없이 얼굴을 외면했다.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아이를 영원히 보내야 한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또 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곧 4학년이 될 것이다.

2. 그림자로 남은 엄마의 자리

“4학년 올라가기 직전에 갔다.” 할머니는 창밖을 바라보며 마치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툭 내던지듯이 말했다. 아이는 울지도 않고 큰 아버지 손을 잡고 갔다. “호적도 파 줬다.” 딸은 그날 이후 법적으로는 할머니의 딸이 아니라 조카가 되었다. 아이를 보내고 난 후 할머니는 덧나는 상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한센병이 찾아 온 이후로 할머니는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았지만, 자식을 보내야 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이제는 만나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승팔이에 대한 그리움과 먹고 살 수 있는데도 보내야 하는 딸에 대한 애잔함이 할머니를 깊은 절망의 늪으로 끌고 갔다.

분명히 나의 일인데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할머니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우짤기고. 내가 뭐를 할 수 있겄노. 그냥 숨만 쉬었제.” 그런 할머니를 할아버지는 위로하고 따뜻하게 품어 주었다. 가까이 있으니 만날 수 있다고, 여기서 사는 것보다 훨씬 잘 되었다고, 그렇게 도닥거려 주었다.

할머니도 이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깊이 묻어 둔 그리움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립다 말이라도 하면 좀 나아지겠지만, 그 말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골목길을 뛰어 나올 때 등 뒤에 들리던 승팔이의 울음소리만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 울음소리를 떨쳐내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했다. 닭모이를 주고 똥을 널어 말리고, 계란을 모았다. 돼지우리를 밤낮 없이 치우고 또 치웠다. 잠시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면 새파랗게 날이 선 서러움이 밀려와 눈물이 흘렀다. 그 옛날처럼 말도 못하고 우는 게 아니라 아이가 보고 싶어 운다고 말할 수 있어서 울고 또 울었다.

딸은 방학이 되면 엄마를 찾아와 주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뜸해졌지만, 엄마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끈을 놓은 적은 없었다.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할 때, 이제는 딸이 울었다. 딸의 부모는 더 이상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었다. 딸이 엄마의 품을 떠나던 초등학교 4학년부터 지금까지 할머니는 그림자가 된 엄마였다.

딸이 떠난 빈자리를 채워준 것은 작은 딸이었다. 우연히 마을에 들어온 작은 여자 아이가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할머니는 작은 딸로 받아들였다. 작은 딸은 할머니 곁에서 성장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작은 사위와 함께 수시로 찾아와 할머니를 돌보아 드린다. 가슴으로 낳은 딸이기에 때로는 더 측은하고 애틋하다.

작은 딸과 달리 마음대로 올 수 없는 딸은 전화로 자주 안부를 묻는다. “거의 매일 전화가 온다. 엄마 밥은 묵었나, 몸은 어떻노. 맨날 묻는다.” 딸은 오더라도 머물지 못하고 오전에 왔다가 오후에 돌아가지만,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홀로 계신 할머니를 틈틈이 돌보고 있었다. “우리 큰 사위는 나 모른다. 알모 안 되제.” 손자와 손녀가 장성하자 딸은 자신의 어머니를 알렸다. 성인이 되어 비로소 알게 된 외할머니를 손자 손녀는 방학 때마다 찾아와 주었다. 그리고 옆에서 자고 가기도 한다.

3. 가을을 앞에 두고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크고 무거운 삶의 고통일지라도 시간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할머니 곁에서 손을 잡아주던 할아버지도 떠나고 없다. 나란히 붙어서 문으로 연결되는 작은 방 두 개와 부엌, 그리고 옆으로 연결해 만든 목욕탕이 할머니의 공간이다. 마당 끝에 서 있는 간이용 화장실을 볼 때마다 할머니의 외로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이 없는 집의 마당 끝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마당에 서면 많은 차들이 고속도로 위를 끝없이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그 어디쯤에서 할머니는 닭과 돼지를 길렀다. “저 고속도로가 난다고 팔아라 하는데, 팔아야지. 그때 다 보상을 잘 받았다.” 땅을 보상받고 국가에 내어준 뒤 처음으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이 여름을 지나고 가을을 지나 겨울로 다가가고 있었다. 무성한 풀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 쓴 시에 “풀에 벌레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픔을 토로했었다. 방문을 열어 놓으니 제법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지만, 할머니와 나는 이불 밑에 몸을 반쯤 숨기고 저 멀리에서 달리는 차를 바라보았다.

“차가 많제?” “네, 참 많이 다니네요. 밤에 안 시끄러우세요?” “왜~~~, 아이고 큰 차가 지나가모 멀리서도 시끄럽제. 차가 저리 마이 다닐 끼라고 누가 알았겄노.” “하늘이 맑제? 파랗나?” “네, 진짜 가을이네요. 나가보실래요?” 백내장으로 흐릿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할머니는 처음으로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 대해 말해 주었다.
소록도의 풍경/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threagi74가을 하늘은 푸르고 맑기만 하더라.

산천초목에는 붉은 물 든 단풍들이

장관이더라.

한 고개 내려와 보니

은행나무 잎에는

노리고도 노란 색깔 위에

황금빛을 나타내며,

흐르는 잎마다 주워서 책 속에 넣던

옛 추억이 떠오르네.

뒤돌아보니 금수화꽃은

우리 한반도 지도처럼

차분하게도 피어 있더라.

온 들에서는 코스모스가 피었고

길에도 피어 색색가지로

자기를 나타내며

뽐을 내고 웃고 있는 그 모습이

교만해 보이더라.

뒷동산에 올라가서 보니

고목나무에서는 주먹만한 밤송이가

이 구석에서 쿵 저 구석에서 쿵

떨어지는 알밤이

우리 맘의 욕심을 나타내더라.

시골길을 내려오니

돌담 사이사이마다

감나무 나란히 서서 가을 햇빛에

무르익은 붉은 색을 나타내고

감홍시 주렁주렁 매달려

보는 이로 하여금

탐스럽기도 하고 먹음직하기도 하고

우리의 맘을 끌고 있네.

고적지 담장 위로 돌아오니

벌써 시간은 황혼이었고

해는 서산으로 기울이며

오동나무에서는 오동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져서 뒹굴 때마다

내 마음이 슬퍼지고 외로워져

옛 추억이 떠오르네.

눈에 고인 눈물이 볼 위에

주렁주렁 흐르면

이것이 가을의 계절인가

으악새도 슬피 울고 있네.

-전문-

4. 고통의 강을 건너

기억 속의 가을은 풍성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고향은 어디를 가도 꽃이 피어 있었고, 가을이 되면 밤송이가 툭툭 떨어지고 감이 붉게 익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곳이었다. 마쓰시타를 만나고 한센병이 찾아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곳도 고향이었다. 승팔이를 낳아 떠나보내고 돌아왔던 곳도, 어머니를 한스럽게 묻었던 곳도 고향이었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있으면, 그 많은 시간의 강을 건너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도 고향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러나 이제 그 고향은 더 이상 가슴 아프고 참담하던 곳이 아니다. 시을 한 행 한 행 들려주는 할머니의 얼굴은 평화롭고 따뜻했다. 생각에 잠긴 채 엷은 미소를 띠고 천천히 들려주었다.

“니도 감꽃 갖고 목걸이 만든 적 있나?” “그럼요. 제가 그 목걸이를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하얗고 향기도 좋고, 혼자 만들어서 목에 걸고 다녔죠.” “나도 그랬다. 바늘에 실 꿰갖고 꽃잎을 연결한다. 그렇제? 하고 나모 손끝에서 감꽃 향기가 안 없어진다. 니도 그렇더나?” 할머니와 나는 시공을 뛰어 넘어 어린 시절의 공통된 기억을 찾아냈다.

그것은 감꽃 목걸이다. 여름을 앞둔 어느 날, 할머니와 나는 커다란 감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감꽃을 줍거나, 장독대 위를 하얗게 덮고 있는 감꽃을 한 손 가득 쥐고 와서 그늘에 앉아 감꽃 목걸이를 만들었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느 사이엔가 할머니의 기억은 고통의 강을 건너 유년의 행복으로 흐르고 있었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3)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3)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3. 아테네 민중과 민회 그 빛과 그늘

30인 참주의 지배는 원칙에 있어서나 경과에 있어 폭압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들이 실각한 뒤 아테네인들의 생활 방식은 금방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참주들이 살아남아 이 광경을 보았다면 뤼시아스가 그랬듯이 누구나 다 이렇게 항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생활방식이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인데 그런 것이 다시 되살아나다니!”. 하기는 아테네 민중들의 부유층에 대한 탈취에 가까울 정도의 공적 기부의 강요는 민주정 회복 이후에도 크게 제제되는 일이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아테네는 더 이상 기부를 강요할 대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가난해져 판아테나이아(Panath?naia) 축제마저도 아주 간소하게 치룰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나라경제는 거류외인들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고 있었다. 시민들이 이러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 이유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민주정 회복 이후 아테네 민중들은 노동을 통한 견실한 삶보다는 오랫동안 민회나 소송사건에 매달려 생계를 영위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마치 게으른 사람들이 먹는 일만 생각하고 있듯이 완전히 상궤를 벗어난 터무니없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클레온(Kleon)이 배심원의 급여를 3배로 올린 이래, 한층 더 열심히 민중 최고재판소(heliaia) 일에 전념하면서 재물을 손에 넣는 일이라면 위증이나 술수는 물론 세금을 부정한 방식으로 회피하거나 타인에게 전가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귀뚜라미는 나뭇가지 위에서 1, 2개월 노래할 뿐이지만, 아테네인들은 일생 동안 소송으로 노래하며 먹고 살고 있었다.

 

아고라 유적지 복원 가상도. 아크로폴리스 오른쪽 밑에 평의회 건물과 평의회 행정청 톨로스 그리고 선거로 뽑힌 배심원으로 구성된 민중 최고재판소가 나란히 위치해있다.

 

아크로폴리스 오른쪽 밑에 평의회 건물과 평의회 행정청 톨로스 그리고 선거로 뽑힌 배심원으로 구성된 민중 최고재판소가 나란히 위치해있다.이러한 정황은 여러 종류의 고대 자료를 인용할 것도 없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 등장하는 필로클레온의 말만으로도 충분히 드러난다.([벌(蜂)] 548f) 이 남자는 자신이 배심원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얼마나 좋은 지를 아주 신이 나서 떠벌리고 있다. 이 작품의 정경들 중 어떤 장면을 취해도 모두 현실 그대로의 행태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아테네에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 사람들은 피고인이나 그 가족들이 자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곤경에 빠져 신음하는 이러한 사람들이 재판정에서 그에게 아첨하며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잘된 연극을 흥겹게 구경하듯,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자신의 위세와 무분별한 방종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 최고재판소에서는 자신이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고 해서 반드시 승소하는 것도 아니었다. 종종 배심원들의 분노라든지 동정심이 판정의 주요 요인이 되기도 하였고 혹은 피고인 자신이나 어떤 당파에 속한 자들의 웅변조 연설에 의해 판정이 뒤집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변호 연설의 초안을 작성해 주는 관습 덕분이었다. 특히, 경탄할만한 천재성을 가지고 연설 의뢰인과 마치 한 몸 한 마음이나 된 듯 연설문을 써주고 큰돈을 벌었던 뤼시아스는 이러한 재판의 모든 과정이 얼마나 사람들의 정신을 소진시키고 피폐하게 만드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앗티카의 정의심은 고갈되어 갔고, 진리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으며 다만 수사술(rh?t?rik?)을 통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그럴듯하게 설득할 것인가(to pithanon)가 재판에서 이기기 위한 전부였다. 이런 까닭에 어떤 피고인 가족들은 비탄에 빠진 나머지 영향력 있는 당파와 잘 통하는 사람을 내세워 재판관을 찾아가서 선처를 청원하기도 했다. 크세노폰(Xenophon)이 전하는 헤르모게네스의 말은 간결하지만 당시의 정황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테네의 재판관들은 연설에 의해 설복되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수없이 처형했고 또 많은 수의 범죄자들을 무죄로 판결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 회상록] VI, 8,5) 사실 고전기 내내 어쩌면 최고의 인재는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의 뛰어난 사람들은 변론술의 수련을 통해 법정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길러졌다. 실제 이 기술은 시칠리아에서는 소송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고전기 어느 때 어느 곳에서건 끊임없이 발견되는 이 법정 변론술의 번성과 활약상에 비하면, 사실 정치적 변론술은 오히려 몇 가지 측면에서만 현저한 효과를 발휘했을 뿐이다.

민회가 열리던 아테네 프뉙스 언덕 연설단

아테네의 경우 정치적 변론술의 무대는 그 유명한 민회(ekkl?sia)였다. 민회는 모든 민주정에서 보여지듯이 원천적으로 500명으로 구성된 평의회(Boul?)가 가지고 있었던 직무를 빼앗을 정도로 고도의 통치기관으로서 자리 잡았다. 이 민회는 때로는 현실 국면에 대한 대단한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했고 또 민중을 선동하는 동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민회는 더 이상 기존의 다른 협의기구와 제대로 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데모스테네스(Demosthnes)는 곧바로 민회를 설득해 필립포스 2세와 단교하고 테바이와 연합하여 무모하게도 카이로네이아 전쟁(기원전 338년)을 일으켜 아테네를 멸망의 위기에 빠트리기도 했다. 민회에 대한 판단은 넓은 의미에서는 동시에 아테네 역사에 대한 판단이기도 하다. 사실 당시의 아테네는 다른 폴리스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는 유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민회는 30인 참주정이 실각한 후 민주정이 부활하고 나서도, 비록 끝없이 변덕스럽기는 했지만 여전히 국가 조직으로서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해온 기관이었다. 여러 폴리스들에서 아주 피비린내 나는 갈등과 위기가 반복해서 일어났지만, 아테네는 어떤 사태를 맞이했건 간에 이 ‘민회를 통한 협의와 결의’라고 하는 길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없었다. 아테네 역사에 대한 평균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그리스 정신의 말기 상황을 파우사니아스(Pausnias)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민주정이 아테네인 이외의 사람들을 번영시켰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년)

 

아테네 사람들은 타고난 지적 능력에 있어서 다른 그리스 사람들보다 우수하고, 게다가 현존하는 법률에 불복종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스 안내기] IV, 35,3) 이 단합된 시민은 마치 하나의 생물과도 같아서 조형예술의 손에 의해 빚어지듯 이상적인 형태로까지 성장했다 물론 희극 작가들은 작품 속에서 이 시민을 정중하게 다루지도 않았고, 플라톤은 시민을 “크고 힘센 짐승(thremmatos megalou kai ischyrou)”으로 여겨 그 시민들의 기분과 욕망을 숙지하는 것이 국가를 다스리는 지혜로 간주하였다.([국가] 493b) 한편 플루타르코스는 옛날부터 알려져 있는 아테네 시민들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욱하고 화를 내기도 하지만, 또 측은해하며 마음을 확 바꾸기도 한다. 시민은 차분히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예리하게 따지는 쪽을 좋아한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겸손한 사람들을 후원하기도 하고 또 유머는 물론 웃음을 동반하는 연설도 좋아한다. 자신을 칭찬해 주는 사람들을 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조소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화를 내지도 않는다. 시민은 그 통치자에게는 무서운 존재이지만, 자신의 적들에 대해서조차 아량이 넓다.”(플루타르코스 [정치론 모음] ‘계율들’(rei p. ger. praecepta) 3)

 

참주 히파르코스를 살해하는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

 

집회에서 결정에 임하는 아테네인들의 모습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은 집회에서 무엇보다도 아주 엄숙하게 처신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체 사안들에 관한 최고의 처분권과, 무엇이든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을 경우 그것을 이룰 권리를 가지는 우리 아테네 시민!“ 이라는 표현 또한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평의회의 건물에는 평의회 위원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제우스와 아테네의 신전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그곳에 들러 엄숙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정의 안녕을 위해 기원을 드리면서 정성을 다해 제물을 바치기도 했다. 신전에서의 맹세가 상습화되어 있었던 대중들도 그 효과 또한 상투적인 것 이상으로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아테네인이라면 누구라도 디오뉘소스 축제를 앞두고는 정례적으로 아주 진지하게 민주정의 적(敵)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맹세(psephisma: 인민결의)를 올리곤 했다.(안도키데스(Andokides) [비의에 관하여(de myst.)] 97) 이를테면 민주정을 반대하는 자는 처단하고야 말겠다는 것, 특히 비민주정 체제하에서 높은 지위를 누린 자들, 참주와 그 부역자들 모두는 반드시 처단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처단한 자들은 무죄라는 것, 척결당한 자들의 재산을 처분하고 그 재산의 반을 그들을 처단한 자들이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사랑하는 상대를 탐한 참주를 함께 처단한 커플)의 자손처럼, 척결을 실천한 사람의 자손들에게는 급여를 주어야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때마다 성실하게 신들에게 이러한 맹세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늘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해주었고, 거짓맹세를 일삼는 자들에게는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파멸이 닥치길 기원하였다. 그리고 폴리스는 시민 모두가 증오하고 폴리스를 위해 척결해야 마땅한 자를 누가 처단했을 경우, 그가 어떤 사람, 어떤 신분이었던 간에 상관없이 그 사람에게 격정넘치는 칭찬과 함께 화관을 하사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일을 위해 거짓으로 작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 유명한 헤르메스상 훼손사건(기원전 415년) 때에 디오클레이데스(Diokleides)는 이 사건은 시민들의 파멸을 도모하기 위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즉각 주장하고 알키비아데스를 범인으로 지목하였고 그 결과 알키비아데스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출정 중 스파르타로 망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국가를 구한 자로서 화관을 하사받고 마차에 태워져 회당으로 가서 향응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그것은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했다.(안도키데스 [비의에 관하여] 36.45.65f)

그런데 아테네가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하면서 여러 가지 목적상 민회를 통한 방법 외에 다양한 다른 방법을 취했다면,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일을 분명 보다 용이하게 달성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 민회에서 대외 정책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선전해야 했던 것은 대단히 희극적이다. 데모스테네스는 민회에서 당시의 정치적 관심사와 관련하여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국가에 유익한 것은 테바이 사람들과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강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테바이 사람들이 포키스(Phokis) 사람들을, 그리고 또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다시 포키스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이 최강자로서 안심하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크라테스 논박(adv. Aristokratem)] 654) 게다가 그는 무심코 입을 잘못 놀려 아테네인은 그 어떤 다른 사람들의 죽음보다 오히려 필립포스 2세(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싶다고까지 말해 마케도니아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정체는 어쨌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생활방식이고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어 정열적인 전체 의지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집단의 목적 또한 생겨났고 또 전체의지를 통해 그 목적이 강하게 의식되어질 수 있었다. 게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만 해도 민주정은 상당히 오래 전 부터 깊이 뿌리를 내려왔던 정치체제였으므로 현실에서 생동하는 모든 기억들은 이미 이 민주정체하의 인간이나 사물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토록 민주정은 실천적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후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압박에도 존속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쁜 경험들이 민주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민주정을 악용한 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가상도(기원전 431-404년)그런데 아테네 사람들의 소질, 의지 그리고 운명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임에도 후세사람들은 끊임없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싶은 유혹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아테네라는 국가는 지나치게 격정에 휩쓸려 국가에 극히 유해한 어리석은 행동과 폭거를 결의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유능하고도 자질이 훌륭한 사람들을 급속히 소진해버렸고 게다가 그들을 협박하여 외국으로 추방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아테네에 있다면, 그것은 국가로서의 아테네가 아니라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적 잠재력(Kulturpotenz)을 갖춘, 정신의 원천(Quelle des Geistes)으로서의 아테네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예를 들어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인들이 보여주었던 민회에서의 열정과 전장에서의 헌신적인 용감성은 모두 맥동치는 국가성원으로서의 움직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그 기간 동안 시민대중들 또한 의연하게 절제와 지혜를 발휘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엄청난 재앙으로 번졌을지도 모를 수많은 난관들이 고결한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미연에 저지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원전 406년 참혹했던 아르기누사이(Arginusai)의 해전에서 돌아온 장군들을 재판하면서 그들의 처형이 부당함을 외친 소크라테스 등 소수의 사람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광기에 찬 군중들은 이렇게 외쳤다. “시민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음해, 아테네는 마침내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스파르타에게 완패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최종적 패배자로서 치욕스런 예속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30인 참주정 실각 후 민주정이 회복한 뒤에도 이전에 그랬듯이 하루가 멀다않고 민회 결의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방식으로, 5백명으로 구성된 평의회의 예비 협의마저 무시하고 모든 결정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이끌고 갔다. 인민(d?mos)이 결의한다는 것은 실로 인간임을 표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닭이나 다른 동물이 인간과 다른 점은 그것들은 민회에서 결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아리스토파네스 [구름] 1428)이었다. 그러나 영속적인 가치와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순간이나 그 때의 기분에 따라 이루어지는 이러한 처사를 감내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잊고 있었다.

이제 이 민주정이라는 공적인 제도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실제로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고 어떤 영향을 받고 있었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야만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그리고 30인 참주정이 실각하기 전까지는 과두정주의자들이 민심을 부추겨 악의적인 일을 저지르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민주정으로 회복이 된 후에는 거꾸로 오로지 민주정 지지자들만이 민회 및 민중 최고재판소를 지배하려 들었다. 그 대표적인 두 부류가 변론술로 무장한 선동정치가(d?mag?g?s)들과 중상모략가(syk?phant?s)들이다. 물론 이 양자를 하나의 인물이 겸비하기도 했다. 그들은 민회건 법정에서건 그들이 원하는 결의를 얻어내기 위해 온갖 수사술을 다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들을 선동 또는 매수하여 박수를 치거나 야유를 날리거나 위증을 하게 하는 등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어떤 행위도 서슴치않았다. (다음에 계속)

 

박정희가 그립다고? 홉스에게 물어봐![청춘의 서재]

박정희가 그립다고? 홉스에게 물어봐![청춘의 서재]

안광복(중동고등학교 교사·철학 박사)

* 본 기사는 8월 10일자 [프레시안 books] 를 재게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철학자 칸트는 ‘도덕적 정치가’와 ‘정치적 도덕가’를 나눈다. ‘도덕적 정치가’란 ‘정치꾼’이다. 한마디로, 도덕을 허울 삼아 자기 잇속만 좇는 치들이다. 반면, ‘정치적 도덕가’는 참된 정치인이다. 그들은 원칙과 명분에 따라 비전을 펼친다. 사람들의 미움을 사 벼랑 끝까지 몰리더라도, 그들은 해야 할 말을 한다.

도덕적 정치가와 정치적 도덕가, 사람들은 어느 쪽에 더 끌릴까? 언뜻 보면 정치적 도덕가일 듯싶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파트값, 땅값 올려주겠다는 공약으로 표를 긁어모은 정치인이 얼마나 많던가. 어느 시대나 평등과 배려를 앞세우는 자들은 늘 ‘마이너리티’였다. 시민들은 이익을 채워주겠다는 정치가들에 혹하기 쉽다. 하지만 이들이 권력을 잡으면 어떻게 될까? 대한민국은, 세상은 더 살기 좋고 바람직하게 바뀔까?

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기란 쉽지 않다. 지난 세월, 살림살이 피게 해주겠다며 큰 소리쳤던 권력자들을 많이 겪어봤던 탓이다. 물론, 정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타협을 이끄는 작업이다. 그러나 윤리와 비전을 좇지 않는 정치는 발전이 없다. 늘 ‘이익 나눠 먹기’ 수준에 머무르는 정치는 결국 주저앉고 만다. 칸트가 늘 도덕과 원칙을 강조했던 이유다.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오월의봄 펴냄)는 이런 식으로 울림을 준다. 책의 딸림 제목은 ‘우리의 눈으로 본 철학사’이다. 말 그대로, 책은 서양 철학자들의 이론을 우리 현실에 비추어 풀어낸다. 그만큼 설명은 절절하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2010년, 유로존은 가입 국가들에게서 7000유로를 끌어 모으려 했다. 그리스의 국가 파산을 막기 위해서였다. 모금 계획은 점점 커져서, 지금은 무려 1조 유로를 마련하려 한단다. 왜 유로존은 그리스를 애써 도우려 할까? 그리스 국민들을 위해서?

책의 ‘로크’ 편을 쓴 박영균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구제 금융의 목적은 그리스의 국채에 투자한 은행들을 보호하는 데 방점이 있단다. 프랑스 3대 은행은 그리스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 미국의 은행들은 여기에 빚보증을 섰다. 그리스가 무너지면, 손해는 고스란히 힘센 나라들에 돌아갈 테다.

이런 모습이 철학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자본주의의 뿌리에는 로크의 ‘사회 계약설’이 깔려있다. 이에 따르면, 국가는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세워졌다. 사람들이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권력자를 세우고 복종하기로 약속했다는 뜻이다.

만약 국가가 내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지 못할 때는 어떨까? 나아가 내 재산을 빼앗으려 든다면? 로크는 당연히 국가에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저항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생명만큼이나 중요하다. 내 돈을 가로채려는 국가는 내 목숨을 위협하는 강도일 뿐이다.

로크의 저항권은 신자유주의와도 맥이 닿는다. 국가는 경제 활동에 주재 넘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규제와 통제는 경제를 죽일 뿐이다. 국가는 범죄를 막는 역할만 하면 된다. 능력껏 알아서 자유롭게 이익을 좇을 때, 살림살이는 가장 피어나게 되어 있다.

이 논리에 따라 지금의 ‘유럽 구제 금융 사태’를 바라보자. 거대 은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세금을 쏟아 붓는 일이 정당할까? 세금도 결국 시민들의 ‘재산’이다. 힘 센 몇몇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의 돈을 함부로 써도 될까? 시민들은 지금 현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내 돈도 담겨 있을 공적 자금을 쏟아 붓는 국가에 ‘저항’해야 할까, 협력해야 할까? 로크의 ‘저항권’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행동은 달라질 테다.

로크는 시민들의 건전한 정신을 믿었다. 로크에 따르면, 시민들은 ‘공적(公的) 이성’을 갖추고 있다. 자기 이익을 챙기면서도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해 양보와 타협을 할 줄 안다는 뜻이다. 민주주의는 이런 믿음 위에서 굴러간다.

하지만 지은이는 “로크는 더 이상 미국 독립 선언서’를 만들어냈던 혁명의 시간에 속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신자유주의에 따라 국가의 간섭과 통제에서 풀려난 경제는 어떻게 되었던가? 과연 ‘공적 이성’에 따라 사회는 조화롭게 흘러갔던가? 오히려 고삐 풀린 탐욕이 세계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았을 뿐이다. 지금의 현실을 이겨내려면, 자본주의의 재산권,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뿌리가 되는 로크의 사상부터 제대로 짚어보아야 한다.
▲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오월의봄 펴냄). ⓒ오월의봄이렇듯,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는 서양의 철학자들을 지금의 현실로 불러들인다. 책장을 넘길수록 더 많이 알고 싶은 욕구가 피어나는 이유다. 책에는 2012년의 우리 현실을 빗대어 말하는 부분이 많다. 서양 근대는 절대 왕정이 끝나고 민주주의가 싹트던 시기였다. 우리 역시, 오랜 군부 독재 끝에 민주주의가 피어나는 시기를 살고 있다. 게다가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 서양 근대 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은 우리 현실과 절실하게 겹친다.

홉스를 예로 들어보자. 홉스는 사회 혼란을 두려워했다. 그는 사람들이 무질서와 폭력을 막기 위해 지도자를 세웠다고 상상한다. 이 지도자는 <성경> 속 괴물, ‘리바이어던’과 같다. 감히 맞서려 했다간, 누구라도 목숨을 잃을 만큼 무시무시하고 힘세다는 뜻이다. 이처럼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옥죌 때 질서는 잡힌다.

홉스가 꿈꿨던 지도자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과거 개발 독재 시대 권력자들이 이렇지 않았던가. 그들은 사회 안정과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면 폭력도 필요하다는 논리를 펼쳤다. 인권과 민주주의는 뒷전으로 밀려나곤 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시민들이 독재에 지지를 보냈다. 홉스는 시민들의 강력한 독재자는 시민들의 ‘합의’에 따라 세워진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물론, 그에게서 독재자란 ‘왕’이었다.) 홉스의 주장은 개발 독재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일 수 있겠다.

하지만 ‘홉스’ 편을 집필한 한길석은 이는 ‘도착적 민주주의’일 뿐이라며 헛웃음을 짓는다. 홉스의 주장이 맞다고 해보자. 그래도 문제는 심각하다. 시민들은 독재자에게 따르겠다고 합의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자기 보존(conatus), 즉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사회는 모래알처럼 되어 버린다. 국가는 나의 목숨과 재산을 지켜줄 때만 가치가 있다. 국가와 나의 관계는, 보안 회사와 개인 간의 계약과 비슷한 모습이다. 당연히 절절한 애국심이 자라날 까닭이 없다. 사람들은 다른 시민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아도 애써 무관심하려 할 테다. 사회를 꾸리는 목적은 ‘나의 이익’을 위해서일 뿐이다. 그런데 왜 내가 남을 위해 희생해야 한단 말인가?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독재 국가에서 이기적인 시민이 늘어나고 부패가 판을 치는 까닭이 분명하게 다가온다.

서양의 근대는 과학과 민주주의가 싹트던 때였다. 과학은 종교와 맞서며 ‘합리적인 생각’을 널리 퍼뜨렸다. 민주주의는 절대 왕정과 힘을 겨루며 자유와 평등을 소리 높여 외쳤다.

지배가 흔들리는 곳에는 혼란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서양 근대의 철학자들은 질서를 잡아줄 ‘새로운 정치 원리’를 찾는 데 오롯이 매달렸다. 과학이 펼치는 합리적인 사고는 철학자들이 비전과 가치를 새로이 다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는 서양의 근대 철학자들의 문제의식과 성과를 생생하게 살려내었다.

우리 사회에서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고 부르짖던 시절이 있었다. 잘 살아보기 위해 강력한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가 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풍요가 곧 행복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안다. 우리에게는 사회를 이끌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책의 ‘루소’ 편을 집필한 김광호의 말은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사회를 이끄는 원리는) 주권자의 자의(恣意)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비전에서 나온다.”

우리 사회에는 과연 가슴 부풀게 하는 공통의 비전과 가치가 있을까? 이상(理想)이 없는 삶은 생존 논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다. 돈과 이익만 좇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절대 빈곤에서 벗어난 순간, 더 이상 행복은 곳간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사회와 내 삶을 행복으로 이끌 가치와 이상을 고민하고 있다면,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를 꼼꼼하게 읽어볼 일이다.

 

 

신사만 품격 있는 드라마[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신사만 품격 있는 드라마[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한유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많은 자취생들이 그러하듯 나도 TV없이 PC로 방송을 다운받아 본다. 그러다보니 비교적 신중한 선택과정을 통해 드라마를 시청하는 편이다. 나름 사전 정보를 얻어 볼만한 것들을 추려낸 후 다운받는 것이다. 더군다나 근래엔 PC의 건강(?)을 위해 유료다운로드를 선호하고 있기에 이러한 선택과정이 보다 까다로워졌다. 이러한 와중에 재밌다는 평이 압도적인 드라마. ‘파리의 연인’부터 ‘시크릿 가든’까지 호흡을 맞춰온 김은숙 작가와 신우철 PD의 신작인 ‘신사의 품격’은 소위 중박 이상은 기대할 수 있는 안전빵으로 보였다. 물론 김은숙 작가 드라마라 기대 반 염려 반이긴 했다.

김은숙 작가는 그동안 캔디의 변형인 평범녀가 테리우스의 변형인 차도남의 뻔뻔하기까지 한 솔직한 대시에 의해 마음을 열고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려왔다. 다만 캔디와 테리우스가 30, 40대라는 것은 특이한 점이다. 아마 김은숙 작가 자신의 나이대를 반영했기 때문이리라. 하여튼 김은숙 작가가 그리는 평범녀는 예쁜데다 개념인에 자기 일에 적극적인 실력파지만 대부분 가난하다. 그리고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봤다. 재벌남은 잘생긴데다 학벌도 좋다. 청산유수의 말솜씨와 풍부한 독서량, 그리고 훌륭한 작업멘트까지 겸비했기에 만나는 여자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여주인공인 평범녀의 ‘평범함’에 반하고 만다. 그런데 이 재벌남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그 풍부한 재력으로도 절대 고치지 못한 희귀병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내면의 상처 때문에 생긴 병이다. 이 상처를 평범녀가 사랑의 힘을 통해 감싸주고 따라서 병도 낫게 된다. 10년쯤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이야기는 꽤 흥미진진했다. 아니 더 솔직히 인정하자면 ‘시크릿 가든’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선 확실히 먹어주는(?) 이야기였다.
SBS 드라마 ‘신사의 품격’/ 사진출처: SBS‘신사의 품격’은 그간 그려온 김은숙의 미중년 테리우스에 대한 판타지를 극대화시킨 드라마다. 무려 4명의 개성강한 미중년들이 등장해서 매력발산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도 왜 ‘시크릿 가든’처럼 뜨지를 못하는 것일까? 우선, 이번엔 작가가 그간 지적받아온 자신의 약점을 가리려고 꽤 노력했다. 매번 등장했던 재벌남 대신 그저 부유한 남자들이 나오고, 대신 재벌에 준하는 재력을 가진 여성캐릭터가 등장한다. 그리고 아주 가난하던 여주인공이 아니라 정규직 공무원 여주인공이 나온다. 살고 있는 집도 세 들어 살고 있긴 하지만 멋지다. 하지만 이러한 장치는 그 수가 너무 얕아서 문제다. 상황이 다른데도 곧 재벌남과 평범녀의 그 불균등한 연애관계를 연상시키는 관계에 돌입한다. 즉, 여주인공의 굴욕적 상황이 이어지다 연애가 시작되면서 그 관계가 역전된다. 그런데 여주인공에게 굴욕적이던 상황을 남주인공이 재연하면 그것은 애교가 되고, 멋진 장면이 되는 것이 지금까지의 김은숙 드라마였다. ‘신사의 품격’도 이 패턴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런데도 ‘시크릿 가든’처럼 ‘욕하면서도 계속 보는 맛’, 즉 ‘중독성’이 ‘신사의 품격’에는 없다. 작가 특유의 톡톡 쏘는 대사도 몇 년째 계속 듣다보니 이젠 김빠진 콜라처럼 밍밍해졌고, 별 지향 없고, 내용 없는, 그저 그런 연애담도 지겹다. 무려 장동건, 김하늘이 주인공인 로코(로맨틱 코미디물)인데, 전혀 설레지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문제점을 짚자면, 제목에 나타났듯 이 드라마에선 신사들만 품격을 갖출 수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남자들은 일도 운동도 열심히 하고 멋지게 연애도 하지만 우정을 최우선으로 둔다. 그런데 여자들은 우정은커녕 서로 시기하고, 경계하고, 질투하느라 바쁘시다. 품격과는 거리가 먼 삶이다. 우리 이 불쌍한 여자들에 대해 좀 살펴보도록 하자.

쿨한 언니도 남편에겐 의부증 아내일뿐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등장하는 주요 여성 캐릭터는 4명이다. 우선, 짝사랑 전문가이자 아마추어 야구 심판이자 고등학교 윤리선생인 서이수(김하늘 役). 서이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거인인 실력보다 미모가 부각된 프로골퍼 홍세라(윤세아 役), 88사이즈에서 44사이즈로 변신한 뒤 무조건 최윤(김민종 役)만 쫓아다니는 임메아리(윤진이 役), 소유한 빌딩 일일이 세는 게 귀찮아서 블록으로 세는 청담마녀 박민숙(김정난 役).

이 중에서 가장 ‘쿨’한 캐릭터는 박민숙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가장 돈이 많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하자면 김은숙 드라마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쿨할 수 있는 조건’, 즉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재력, 그 재력으로 꾸준히 관리하는 미모와 좋은 학벌과 지성까지 갖추고 있다.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그녀는 인간관계에서도 항상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쿨한 언니’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게 통할 정도다. 다만 이 언니! 쿨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그게 바로 결혼생활이다. 민숙의 친구들은 다들 연하의 뽀송한 남편을 가진 민숙을 질투해서 민숙의 이혼을 바란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민숙은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속이 상하면서도 친구들 앞에서는 남편과 닭살커플을 연기한다. 그리고 은근슬쩍 남편을 다시 용서하면서 “이 세상에서 제일 꼬시기 어려운 사람이 내 남편”이라는 비참한 대사까지 남긴다. 그녀는 전형적인 ‘트로피 허스번드’에 불과할 것이라 예상했던 이정록(이종혁 役)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정록의 바람기를 넘길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붙일 아이가 없어서 남편의 바람기가 더 심한 것 같다는 민숙의 혼잣말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불임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위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항상 당당하고 똑똑한 언니인데 남편에게는 그저 의부증 말기 부인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여자하고는 밥 안 먹어요

서이수는 김은숙 작가가 변형을 시도한 또 다른 캔디이다. 그녀는 귀여운 주책을 부리고, 다른 여자들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는 올바른 캐릭터이다. 심지어 눈치 없는 동료 선생님이 속을 긁어놔도 그녀는 맞받아치지도 않고 웃으며 넘긴다. 그래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동성들과 사이가 좋은 여성으로 등장한다(그녀가 유일하게 적대적으로 대하는 여성은 자신을 버리고 재혼한 엄마이다). 말하자면 곰 스타일의 여성만이 여우 스타일의 여성들에게 배척받지 않는다는 낡아빠진 관계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서이수를 제외한 다른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여자의 적은 여자’ 모드 안에 매몰되어 서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댄다. 그 관계는 밥이나 먹겠느냐는 홍세라에게 “여자하고는 밥 안 먹어요.”라고 임메아리가 대답하는 것으로 대표된다. 물론 임메아리는 박민숙과 친밀한 관계이지만, 이는 두 여자가 연애문제와 돈 문제로 결코 충돌할리 없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러한 충돌의 여지가 있는 여자들끼리는 작가 특유의 대사빨로 팽팽한 접전을 선사한다. 박민숙과 홍세라 사이의 신경전과 대화, 홍세라와 후배 사이의 대화와 몸싸움 등이 그러한 장면들이다. 별다른 갈등의 원인이 없는데도 서로 앙숙이라도 된 듯 대하는 태도가 드라마 안에서 그저 여자들 사이의 흔한 일처럼 다뤄져 정작 현실의 여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꿈보다는 사랑이 급하다?

임메아리는 부잣집 막둥이로 태어나 부모님과 오빠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다만 학창시절 통통했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고, 또 그걸 그렇게 놀려대던 오빠의 친구 최윤을 짝사랑만 하는 게 괴로움이라면 괴로움이다. 최윤은 메아리에게 묻는다. 24살이면 네 주변 친구들은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할텐데, 너는 왜 그렇지 못하고 자신만 쫓아다니냐고. 그러자 메아리는 울면서 자신도 꿈이 있지만 사랑이 너무 급하니까 그것부터 쫓느라 그렇다고 대답한다. 물론 내가 메아리 또래는 아니지만, 나 또한 그 시절을 얼마 전에(?) 겪은 사람으로서 정말 공감대 0%의 대사였다. 가방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면서 디자인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도 없고, 관련된 일을 알아보려 하지도 않는 그녀가 이해되는 20대가 몇이나 될까? 그녀가 그렇게 카페 알바나 하면서 최윤바라기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부족하지 않은 경제적 지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용돈은 벌어야 하는 처지라고 말하지만 우선, 으리으리한 집이 있고, 미국으로 유학도 부담 없이 다녀왔고, 비싼 옷과 가방, 구두가 즐비하다. 결국 그녀는 인생에 별로 급한 게 없기 때문에 그나마 가장 급한 게 최윤을 쫓아다니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최윤에게만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최윤 주변의 여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사랑을 관철시키려 한다. 드라마에서 누구보다도 귀엽고 예쁘게 그려지지만 그녀는 그저 조금 더 착한 ‘빵꾸똥꾸’이다.
SBS 드라마 ‘신사의 품격’/ 사진출처: SBS홍세라는 어떤가? 그녀는 결혼이 싫다. 자신은 아직 골프선수로서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더 많다. 미모로만 부각된 자신의 진짜 실력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결혼해서 안주하게 되고, 그 꿈을 묻어버리게 될까봐 두렵다. 남자친구는 그런 그녀의 의견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헤어졌다. 그 후에도 자신의 꿈을 위해 연습도 하고, 좋은 스텝도 꾸리려 한다. 하지만 스텝은 일을 거절하고, 빚 문제도 생긴다. 드라마에서 홍세라가 거절당하는 이유는 그녀의 화려한 이미지와 언론 노출 때문이고, 경제적인 문제는 그녀의 씀씀이가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난 그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나마 자신의 꿈을 위해 가장 열심인 여자는 왜 꼭 싸가지가 없는 듯 그려지고, 왜 꼭 돈은 밝히지만 경제관념이 없어서 궁지에 몰려야 하는가?

임메아리는 결혼이 하고 싶어서 안달인데다 최윤의 아이가 있어도 키우겠다고 하는 ‘착한’ 여자이기 때문에 예쁘게 그려진다. 홍세라는 결혼도 아이도 싫고, 화려한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는 ‘나쁜’ 여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으로 빚도 못 갚고, 헤어진 남자친구가 대신 갚아주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비참함을 겪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 과정에서 쿨하게 돈을 빌려줬던 박민숙은 자신과 홍세라의 관계보다 남편의 친구인 임태산과의 관계가 더 긴밀하다는 말을 남겨서 홍세라에게 상처를 준다. 쿨했던 민숙 언니가 다시금 남편에게 묶여버리는 장면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남자친구 임태산(김수로 役)은 헤어졌는데도 멋지게 돈을 갚아주는 의리 있는 신사로 남는다.

이 드라마의 네 여자를 다시 정리해보자. 서이수는 답답한 곰 스타일 캔디, 홍세라는 자존심을 뺐기고 길들여지고 있는 여우, 임메아리는 인생에 급한 게 사랑밖에 없는 공주님, 박민숙은 의부증에 묶여버린 언니. 신사들은 점차 성장해가며 품격을 갖춰가는 반면, 숙녀들은 계속해서 퇴보해가고 있다. 김은숙 작가가 재벌남을 빼고 등장시킨 그저 부유한 정도의 신사들은 사실 그 재벌남의 매력을 쪼개서 만든 것에 지나지 않고, 경제적으로 급을 올려준 평범녀서이수는 그래봤자 캔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번 작품에서 조금 특이하게 등장시킨 부유한 여성캐릭터 박민숙도 불임임이 밝혀지면서 전통적 성역할의 덫에 걸려버린다.

언제쯤에야 욕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김은숙 작가 드라마를 볼 수 있을까? 내 생각엔 앞으로 그녀의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 듯하다.

고향이 없는 사람들[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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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고난 속의 작은 행복

 

미군들의 도움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주거 공간과 배고픔은 나아졌고, 무엇보다 건강 상태가 좋아졌다. 그러나 또 다른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군들이 자주 왔다가고 집단적인 거주지가 형성되자 인근의 주민들이 한센인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몰려와 위협하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을 밤에 그 곳에 내려놓고 간 공무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입을 딱 벌리대. 누구 허락받고 예서 사느냐고 난리였다.” 지금까지 애써 억제해 오던 할머니의 감정에 작은 파문이 생기고 있었다. 여태껏 볼 수 없었던 결연한 표정은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위엄을 뿜고 있었다. 그 위엄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라 여겨졌다.

수십 년 전,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던 사람들,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했던 사람들의 분노가 할머니를 휘감고 있는 듯 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쉴 때마다 가슴은 눈에 띠게 오르락내리락 했고, 꼭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 두 번의 백내장 수술로 흐려진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를 보았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의지였다.

60여 년 전에는 죽음만을 생각했지만, 이제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삶에 대한 의지였다. “입이 있어도 말 못한다. 그 고통을 어찌 다 말로 하노. 사는 기 지옥인데.” 지옥과 다를 바 없는 삶은 연약한 한 여인을 강인한 여성으로 변모시키고, 끝없이 이어져 오는 고통은 오히려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게 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지만, 한센인들은 순간 순간 온 정성을 다해 숨을 쉬었다. 새벽이면 일어나 하루 종일 온 몸으로 거친 땅을 일구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지극했다. “나는 일을 별로 안 했다. 못하게 하대. 아를 업고 가모 집에 가 있으라고 난리도 아닌 기라.” 자신은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해도 아내는 힘든 일을 하면 안 된다는 마음, 그것은 남편의 사랑이었다.
항상 불안하고 고된 날들이 이어졌지만, 행복도 있었다. 아이는 천진하게 잘 자라 주었다. 가진 것이 없어 잘 입히고 잘 먹이지 못했지만, 아이는 엄마를 따랐다. 비록 다정한 말 한 마디 없는 아내였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귀하게 여기고 아껴 주는 남편이 있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가슴에 품고 사는 아들, 승팔이도 있었다.

 

 

2. 한 뼘의 땅

 

이웃 주민들의 반대는 인근 지역을 넘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들은 미군들이 오지 않는 날이나, 떠나고 난 후에 집단으로 나타났다. 마치 인근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한센인들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해야 했다. “어두워지모 겁나제. 갑자기 덮치모 어짤끼고.” 깊이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늘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은 커졌다. 미군들의 지원이 뜸해지던 때부터 마을 주변을 서성대는 사람들의 수는 눈에 띠게 불어났다. 인근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멀리에 있는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몰려왔다. 심지어 부산의 구포 지역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요구는 오직 한 가지였다. 자신들이 사는 지역 부근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멀리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센인들도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산에 버려져서 성하지 않은 손으로 나무 뿌리를 뽑고 돌을 치우고 만든 그들의 집이었기에, 한센인들은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비록 나무에 군용천막과 비닐을 덮은 집이었지만, 그 곳은 한센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온 손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지켜낸 보금자리였다.

어린 아이들은 매일 반복되는 위협으로 겁에 질려 있었다. 밤이 되면 남자들은 조를 짜서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지켰다. 넒은 하늘 밑 그 어디에도 한센인들이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 곳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거지가 되어 돌팔매질을 당하며 동냥질을 하든가 어느 후미진 곳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가든가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날, 맨날 불안했지만, 아이고 참 힘든 날들이제. 누가 막 부르는 기라. 한센인들 중에도 여기를 소문 듣고 나중에 온 사람도 있었는 기라. 그 사람들 중에 누가 외지에 사는 친척이 있었거든. 그 친척이 하얗게 질려 갖고 안 왔나” 외지에 사는 친척이 다녀간 후 마을은 정적에 쌓였다.

“여게 상동 인근이랑 부산 사람까지 우리 모두 쥑인다고 모인다고 안 하나. 그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어찌 감당하겄노. 우리는 인자 꼼짝 없이 여게서 죽는 갑다 했제.” 인근 주민들의 요구대로 옮겨간다고 해도 갈 곳이 없을뿐더러 어디를 가도 도망 다니는 건 마찬가지였다. “누가 그러대. 여기서 죽자고.”

할머니의 얼굴 근육이 떨리고 있었다. 나지막한 코끝에 앉은 안경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센인과는 이웃해서 살 수 없다는 그들의 논리에는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었고, 그들에게 타인의 존재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한센인들이 떠나가더라도 비탈진 그 곳은 성한 이들의 땅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성한 이들은 자신들이 병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한센인들의 터전을 빼앗으려고 했다.
ⓒ에이블뉴스한센인들의 죄명은 “문둥이”이다. 시인 한하운은 자신의 시에서 “죄명은 문둥이…../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올시다.(”라고 노래한 바 있다. 한센병은 어처구니없는 죄명이며 이해할 수 없는 벌이기에 변호할 길이 없음을 한탄했다. 어처구니없는 죄명을 인정하고, 그냥 그 산속에서 살게 해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돌아오는 건 살기뿐이었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죽는 길 밖에 없으께 싸우자고 누가 그러대.”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웅성거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함성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가서 낫이나 호미를 들고 나왔다. 누가 어떻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고, 합의를 한 것도 아니었건만 들 수 있는 무기는 모두 들고 모였다.

“밤이라 캤다. 그날 밤, 그 사람들이 몰려 오모 우리는 꼼짝없이 죽는 기라. 문둥이 죽는 거 한두 번 봤나. 누가 울어주기라도 하나. 문둥이 시체는 제대로 거다(거두어) 주지도 않는다.” 죽어서도 서러운 사람들, 주검마저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들,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그들만의 죽음을 지나온 사람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가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들이 몰려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가야한다고 했다. 어린 아이가 딸린 아녀자만 빼고 남녀노소 모두 손에 낫과 호미를 들고 산속에서 나왔다. 누더기를 걸치고 손과 발에는 진물이 배인 천을 감고 성치 못한 발로 그들은 걸었다.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이겼다.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한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한센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다가가면 그들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했다. 그러다가 잠시 틈을 주면 공격해 왔다. “그냥 휘둘렀다. 죽는 거 밖에 더 있나. 우리는 죽을라꼬 덤비고 그 사람들은 살라꼬 덤빘제.” 죽기를 각오한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3. 새로운 고향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담보로 지금의 터전을 지켰다. 그렇게 서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웃이 되었다. “모내기 철이 되모 서로 일손이 부족한 기라. 우리 중에서 병이 덜한 사람들이 가서 마이 도왔다. 처음에는 싫어해도 나중에는 와서 도와 달라고 하는 기라.” 때로는 이웃 마을의 사람이 와서 성하지 않은 손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돕기도 했다.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주로 닭과 돼지를 키웠다. “닭은 알도 팔고 똥도 팔았다.” 닭똥을 모아서 밭 여기저기에 널어서 말린 뒤, 자루에 넣어 보관했다가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팔았다. 이익금은 일한 만큼 나누어 받았다. 일은 중노동이었다. 성한 사람보다 몇 시간은 먼저 일어나야 했고, 몇 시간 후에 자야 했다. 그렇게 해도 살아가기에는 힘든 나날들이었다.

성한 사람들이 서너 시간이면 끝날 일을 그들은 하루 종일 했다. “아이고 말도 못한다. 아침에 자고 나면 닭 밥 주고, 또 한 이틀마다 똥 치운다. 똥 치우는 날이 그 중 고되다.” 일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또 언제든지 쫓겨 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그들은 백방으로 다니며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험한 산을 일구어 밭으로 만들고, 밭도 만들 수 없는 곳에서는 돼지와 닭을 키우며 살고 있는 그 땅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임을 알아달라고 관청을 셀 수 없이 드나들었다. 관계기관에 갈 때마다 차를 탈 수 없어 걷고 또 걸어서 갔다. 간간이 다니는 버스는 텅 빈 채 가도 그들을 태워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수레도 얻어 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가야했다. 가서 그들의 절박한 사정을 알리고, 아이들을 키우고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의 하소연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와서는 안 될 사람들이 왔다는 내색을 노골적으로 했다. 돌아서기도 전에 소금을 먼저 가져와서 그들의 뒤에 뿌렸다. 성한 사람들에게 한센인들은 소금을 뿌려야 하는 액(厄)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한센병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치료약도 없이 온 몸이 종기로 뒤덮이고, 얼굴이 변하는 병이었지만, 병에 걸린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센인들은 마치 죄인마냥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현듯 잊고 있었던 사람이 생각났다.

그 사람은 이름이 없었다. 언제나 검은 색 옷을 입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저녁 무렵에 나타났다. 말없이 우리 집으로 들어와 마당을 가로질러 뒤뜰에서 장작을 패 주었다. 키가 크고 마른 몸이었는데, 그 아저씨는 손에 때 묻은 흰색 천을 감고 있었다. 장작을 다 패고 나면 할머니나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 마당 한쪽 구석에 앉아 먹었다. 그리고는 기운 자국이 있는 바가지에 밥과 반찬을 담아 갔다. 그러다 어느 날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찾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6?25가 끝난 후, 홀연히 우리 동네에 들어와 산 밑 움막에서 혼자 기거하는 아저씨였다. 가족이 있었지만 헤어졌고, 한센병에 걸려 동네에 들어와 살 수 없었다는 것이 내가 아는 사실의 전부였다. 어렸을 적, 막연하게 그 아저씨는 참 좋은 사람이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아저씨는 절대로 공짜 밥을 먹지 않는다고,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장작을 패거나 하다못해 마당이라도 쓸어 주고 간다고 어머니는 혀를 차셨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의 그 아저씨가 생각난 이유는 무엇일까? 낯선 섬에까지 와서 10여년을 넘게 살면서도 자신의 땅 한 뼘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삶의 내력을 밝히지 않으며, 얻어먹고 살지언정 자존감을 잃지 않았던 그 아저씨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아픔이 되는 건 무슨 연유일까? 이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고향을 떠나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들에게 목숨을 걸고 일구는 땅은 고향 이상이었다.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자신들의 이름으로 된 땅을 가지고 싶은 이유가 살고 있는 그 곳이 바로 고향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센병을 천형(天刑)이라고 한다. 하늘도 버린 사람들이라는 인식은 오히려 한센인들이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늘마저 버렸기에 그들은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부평초처럼 떠돌지 않도록 두 발을 붙이고 있을 고향이 필요했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에 돌고 도니

부평 같은 신세가 되어

어언간 60여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빨라 유수와 같으니

내 청춘은 흘러흘러

머리에는 벌써 백발이 휘날리네.

 

중에서

 

할머니의 머리칼은 백발이 되어 있었다. 뽀글뽀글 파머를 한 사이사이로 백발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금을 바가지 채로 뒤집어쓰며, 산길을 걷고 또 걸어 탄원을 했지만, 자신들의 땅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기적이 왔다. 마치 소리 없이 나무그림자가 땡볕을 막아주듯이 그렇게 기적이 왔다.

“대통령이 특별조치법을 내린 기라. 박정희 대통령이 그랬제. 그때 우리 한센인들이 사는 땅을 우리 거로 해주라는 특별 명령이 있었는 기라. 윤두관 원장 힘이 컸대이. 윤원장이 있어서 육여사가 소록도에도 가고, 우리 손도 잡아주고, 그라께 대통령도 우리를 알고 특별조치법에 우리를 넣었다 아이가.” 그래서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 고향에서 나는 할머니를 만나고 있다.

이준모 선생님의 강연을 10월26에 개최합니다[공지사항]

이준모 선생님의 강연을 10월 26일에 개최합니다[공지사항]

 

이준모 선생님의 강연을 10월 26일에 개최합니다.

4대강에 녹조가 넘쳐흐르는 지금 우리에게 주옥같은 말씀을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강연일 : 10월 26일 금요일 5시 30분

장 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서울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201호)

 

이준모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튀빙겐 대학 및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신학, 철학, 교육학을 연구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교육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0년 8월까지 한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교수로 재직했다. 1989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자문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저술 소개

? 《Zwischen Tradition und Universalit?t(전통과 보편 사이에서)》(1985, 프랑크푸르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시대의 철학체계는 그 시대 자연과 인간의 관계, 곧 인간이 자연에 가한 노동의 양식에 의해 규정된다는 필자의 가설을 동양철학 특히 성리학을 중심으로 논증한 저술이다.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출판.

? 《노동의 철학과 인간교육》(한신대출판부, 1990)은 필자의 위의 가설을 서양 근대철학에 비판적으로 적용하여, 루소, 칸트, 셸링, 헤겔의 철학에서 노동의 논리와 교육의 논리의 동일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교육철학 방법을 모색하였다.

? 〈밀알의 노동과 공진화(共進化)의 교육〉(한국신학연구소, 1994)은, 자연과 생태계의 파괴는 인간의 노동이 자연의 노동(밀알노동)으로부터 소외된 데에서 기인한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독일 근대철학, 서구의 신과학 운동, 동학사상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밀알노동의 변증법을 동서철학사에 적용함으로써 생태학적 민중교육학의 방법과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 〈생태학적 교육학〉(시대와 민중, 1996)은 헤겔 철학 특히 《정신현상학》의 총체적 사유체계가 지닌 원환적(圓環的) 폐쇄성과 그 논리를 비판한 블로흐와 아도르노의 문제의식을 헤겔 철학에 적용하여 열린 총체성(한울)과 개체 존엄성으로 되살려냄으로써 개체가 총체적 개체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교육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 〈생태적 인간〉(다산글방, 2000)은 필자가 1990년대에 쓴 11편의 글을 엮은 논문집으로, 생태적 위기가 재생의 전환점이 되려면 서구 이성이 도달한 두 계기, 곧 지배주의적이며 자기집중적인 자기의식과 첨단과학기술이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자기집중적 자기의식은 나―자기성―자연의 분산적 자기의식으로 변화하고, 첨단의 기술은 동양의 농사 철학이 간직해 온 자연의 생명노동 범주와 만나야 한다는 것을 철학?교육학?종교학?노동의 측면에서 피력하고 있다. 동서고금의 인문학 자료가 망라되고, 이를 통해 생태노동의 논리가 반성되고 있다.

? 〈이준모 생태학 총서〉(문사철, 2012)는 이상에서 소개한 저자의 저술을 부분적으로 수정?보완하고 새롭게 편집하여 주제별로 재출간하는 시리즈이다. 2012년 7월 현재, 제1권 〈생태철학〉, 제2권 〈종교생태학〉, 제3권 〈생태교육철학〉, 제4권 〈생태노동〉이 출간되었다. 추후 제5권 〈생태노동과 우주진화〉, 제6권 〈생태교육학〉, 제7권 〈노동의 철학과 인간교육〉, 제8권 〈무엇을 할 것인가〉(가제)가 출간될 예정이다.
<생태철학>, 이준모 지음, 문사철, 2012

강연주제 : 지배의 주체성에서 자연의 주체성으로 ? 칸트?헤겔 철학의 비판적 전환

강의개요 : 오늘날 생태적 종말의 위기는 농성 노동의 논리가 상공성 노동의 논리로 전이된 역사와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자연의 생명체들이 살아가려면 각자의 주체성을 회복시키는 철학사적 반성과 전환이 필요하다. 이 강의는 자연과 인간의 생태적 상응성을 드러내는 생태노동의 관점에서, 칸트?헤겔 철학의 지배적 주체성의 논리를 자연의 주체성의 논리로 전환하고, 동서 철학사에서 노동의 논리를 반성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2)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2)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2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2. 30인 참주정 전후의 아테네의 정치·사회상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는 재정을 있는 대로 다 쏟아 부었지만, 단지 자금만이 아니라 유능하고 헌신적인 그리고 용감한 사람들까지 다 소진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두말할 나위 없이 개개의 사람들 모두 자신들의 정열을 아낌없이 내던져 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열을 다해 싸운 다음, 아테네는 자신들의 지배자로 선동 정치가(d?mag?gos)들을 선출하고 만다. 예를 들어 클레온(Kleon 기원전 ? -420년)이 그렇다. 클레온은 법정 수당을 세배로까지 증액하여 궁핍한 민중이 그것으로 생활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듦과 동시에 자신도 극심한 채무로부터 벗어낫고 나아가 50탈란톤(talanton)을 축재하기까지 했다. 아테네는 뛰어난 심미안을 가졌지만 이제 이런 자들의 벼락출세를 분별해내는 것조차 힘들게 돼 버렸다. 이 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니키아스 평화조약(기원전 421년)으로 일시 멎었던 시절, 책략과 사리(私利)에 능란했던 시대의 풍운아 알키비아데스에게 아테네가 매료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테네인 민족 내부에 잠복해있던 열망이 섬광처럼 떠오른 알키비아데스와 그가 주장한 시칠리아 원정(기원전 417년)을 통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긴 하지만, 아테네인들의 그러한 태도는 병리학상(pathologisch) 세계사 전체에서 눈여겨볼 만한 구경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 후 재개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끝내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패배하여 기원전 404년 크리티아스(Kritias)를 비롯한 30인의 참주들의 가혹한 공포정치에 직면하게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개개의 여러 폴리스들의 움직임을 보면 민주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기존의 권세가들(dynatoi) 즉 귀족내지는 부자들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아테네에서도 그 최종적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기원전 528-462?) 시대 이래 모든 당파에는 물론 모든 우두머리들 주변에 일종의 정치 클럽 즉 헤타이레이아(hetaireia)가 결성되어 있었다. 페리클레스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시대에는 이러한 클럽은 소멸한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 그것들은 다시 소생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불사하였다. 이윽고 이른바 과두정(oligarchia)파의 형태로 나타난 그러한 결사에는 무엇보다도 빈곤과 착취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있었던 사람들과, 권세를 상실하여 지금은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결집해 있었다. 그 일부는 이전에 귀족이었던 자들이었고 일부는 그저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조금은 더 태생적으로 능력이나 소질이 있었던 사람들은 원초적인 혈통에 대한 믿음은 물론 국가에 다시 중용 되고 싶어 하는 열망에 불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에 함께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소피스트의 사상은 고작해야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들에 어떤 형식적 명분을 제공한 것에 불과했다. 실제로 한 명의 소피스트도 스파르타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던 스파르타 권세가들의 태도는, 그들에 대해 극히 악의적인 아테네 시민들 이상으로 박대했다.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민중들의 친구인 양 처신했던 것도, 자신들의 신상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고 나아가 민중들로 하여금 과격한 제안을 하게 하여 민주정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반민주정 클럽의 전체 연합은 이미 기원전 411년에 몹시 난폭한 수단을 사용해서, 본질적 성격상 과두정적인 체제를 실시하는 것에 성공하긴 했지만, 이것은 고작 수개월밖에 존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후 몇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아테네의 과두정 지지자들이 완전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극단적인 결의와 행동을 마다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클레이스테네스 이래 민주정은 아테네에서 자명한 것인 양 받아들여져 모든 것이 그의 구상대로 개혁되고 있었을 때조차, 그것의 반대자들 역시 그리스인이었다고 하는 것, 즉 반대자들도 이와 같이 아무런 거침없이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민주정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테네를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정은 그들 국외 이주를 바라는 사람들에 대해서, 프랑스 혁명 당시 정치 망명자에 대해 그랬던 것과도 같은 공분(公憤)을 안고 있었다. 민주정은 이 체제가 자기 쪽 당파의 유능한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당파의 유능한 사람들까지 절대적인 내적 자주성(absoluten inneren Unabh?ngigkeit)을 갖도록 길러냈다는 것을 아테네를 배반한 알키비아데스를 보고서야 비로소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사실 주의해서 보면, 아주 많은 수의 과두정 지지자들이 뤼산드로스에 대한 최후의 저항을 진압하는데 손을 빌려 줌으로써 전력을 다해 자신들의 조국인 아테네가 패배하는 것을 앞당기는데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05년) 그것은 그 저항군들이 이기면 결국 시민(d?mos)이 이기게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과두정 지지자들은 아테네를 비산업적이고, 동산(動産)에 의존하지 않는, 바다에 등을 돌린 사회로 만들려는 과제에 매우 정통해 있었다. 그들은 아테네 성곽 문을 연 후, 뤼산드로스의 후견 하에 정권을 빼앗아 이른바 30명 참주들이 주도하는 공포정치를 시작했다.(기원전 404년) 30인 참주들은 1500명을 처형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재산 이동도 감행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자들 아래에서 금방 기강이 세워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미 앞 시대에서 각자의 성질들을 서로가 다 너무나 정통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이제 와서 완전하게 하나가 된 듯 행동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테라메네스(Th?ramen?s)는 한걸음 양보하여 그 타개책을 강구했다. 그러나 그는 말 그대로 완전한 의미에서 막무가내인 자를(den Unbedingten) 만나게 된다. 그 자가 곧 그를 실각시킨 후 살해까지 한 크리티아스이다.

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연설을 통해 우리는 다시한번 그들이 그리스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지배권력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목적을 바라는 사람은 수단 또한 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크리티아스에게 이 수단이 무엇이었는지는 이미 오싹하리만큼 분명한 것이었다. 언젠가 참주들 휘하의 중장보병들에게 행한 그의 연설 즉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것을 바라고 또 같은 것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은 그리스의 모든 당파가 새겨들어야 할 모토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정치는 결국 트라쉬불로스(Thrasyboulos 기원전 440-388년) 등 민주정파에 의해 얼마가지 않아 타도되고 만다.(기원전 403년) 과두정이 무너지고 민주정이 부활한 후에도, 아테네에는 분명 여전히 과두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과두정파로서 대두될 만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주정 이후 시민들의 공격은 본질상 그러한 세력으로 여겨진 부유층들에게 향해졌던 것이다.

아테네 국가에 있어서의 외관상의 생활은, 이 위기 이후에도 대부분의 측면에서 이전과 같은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생활상을 관찰한다한들 그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큰 차이점은 오히려 이 시기의 전과 나중에 위치시킬 수 있는 아테네 사람들의 내면적 성질과 외면적 위상에 있다.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완전하게 패배했다고 하는 것은, 이 전쟁이 초래한 시민들 간의 커다란 균열을 막는데 동원된 기본 방책들이 대단히 조잡한 것이었던 것에 비하면 아직 사소한 재앙인 것처럼 생각된다. 말하자면 전적인 헤게모니를 가지고 지배권을 행사하던 이전의 시민들에게 딱 맞았던 왕자의 외투를, 살이 빠져 말라깽이가 된 지금의 시민들도 여전히 헐렁한 채로 걸쳐 입고 있었던 것이다. 패전 후 동맹국의 소송 사건들에 대한 재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돼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재판을 하던 습관이 붙어 있었던 데다 패배자의 일상으로서 의심 또한 몹시 많아져서 시민들은 지금도 그 때 못지않게 아주 많은 아테네인들을 재판에 붙였다. 그 최초의 희생자 중 한 명이 소크라테스(S?krat?s 기원전 469-399년)였던 것이다.

민주정 하에서의 앗티카 지방의 개개의 시설이나 관공서에 대해서는 여기에서는 생략해도 괜찮을 것이다. 사람들은 한가로움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임시 직무이든 영속적인 직무이든, 직원이든 위원회 위원이든 일을 맡기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인이나 포이니케 사람들이 이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잘 그리고 정확하게 직무를 수행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이 모든 결정을 한도 없이 독점함에 따라 업무가 엄청나게 늘어나 혼란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관공서의 끊임없는 교체 또는 추첨에 의해 근무부서를 임명받은 직원들 이외에, 늘 상임으로 근무하는 한명의 숙련된 직원, 즉 서기(grammateus, hypogrammateus)가 실무상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서기는 신분상 국유 노예에 지나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다. 지난 날 베네치아에서조차 이 정도로까지 자신의 서기에 의존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물론 아테네인은 잘못 시작한 일일지라도 나중에 수정을 잘 할 수 있도록 많은 훈련을 쌓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일과 관련해서 하나의 금지령을 공표했다. 즉, 앞으로는 동일한 개인이 2년간 계속해서 동일한 관공서 내에 서기로 근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에는 어떤 법률이 실제로 어떻게 실행에 옮겨졌는지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것은 특정 감독관이 운영하지 않는 업무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고, 하물며 음모와 책략을 일삼는 자들에 의해서 업무 일체가 지연되는 등, 업무 전반에 걸쳐 믿기 어려울 정도의 방만함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법률에 대해서는 그 효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솔론의 법률을 비롯해 그 이후에 공포된 엄청난 분량의 법률 편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보람 있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5세기경 고대 그리스 화폐. 1탈란톤은 6000 드라크마. 당시 일꾼의 하루 품삯이 1드라크마 정도였다고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테네에는 찬탄을 자아내며 인용되고 있는 현명한 고래의 옛법률(nomos: 관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법률 가운데 다름 아닌 다음의 두 개의 법률들은 아테네의 역사에서 종종 위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어떠한 법률도 만약 그것이 동시에 모든 아테네인에 대해서 유효하지 않은 경우 한 개인에 대해서 공포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지 결의로만 표명된 것은 평의회의 것이건 민회의 것이건 하나의 법률보다 우위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률들은 제정 순으로 차례차례 신전 기둥 가운데에 혹은 돌기둥에 새겨지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법률에 대해 종종 그것들이 새겨진 소재를 핑계로 별로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페이스테타이로스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새」(Ornithes :기원전 414년) 가운데에서(1054행) 이러한 돌기둥에다 매우 괘씸한 일을 저질렀다고 하여 근대의 어떤 편집자는, “하층민은 자주 이런 짓을 했다“라고 덧붙이고 있지만, 이것은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페이스테타이로스는 훌륭한 아테네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법률은 신들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것도 계속 입버릇처럼 말해지고 있었다. 확실히 기원적으로는 법규 내지 법률은 종교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결부되어 있었다. 게다가 개개의 법 원리도 분명 태고 시대로부터 유래하고 있었다. 또한 법률은 신적인 기원을 가지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불변의 것이라고 여겨지기 조차 했다. 안티폰(Antiphon)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법률은 극히 오래 되었고, 동일한 일에 대해서는 항상 동일한 법률이 있다. 이것이 탁월한 상태의 법률이 지니고 있는 주요 표징이다. 왜냐하면 보통 시간과 경험(Zeit und Erfahrung)은 무엇이 부적당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관습의 형태로 전해진 법률들은 폐지되지 않은 채 재래의 법률에 새로운 법률들이 하나 둘 덧붙여지면서 이 후 아테네 법률들은 서로 모순을 안은 채로 방치되어 왔다. 그리하여 법정에서는 완전히 모순되는 법률들이 판을 쳐 마침내 그 폐해가 심해져 결국 성문법적인 법전의 편찬이 아무래도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다름 아닌 이 매우 중요한 일이 위원회를 차례차례로 돌다가 결국 그 숙련된 실무자 한 사람 즉 노예 출신이었던 니코마코스(Nikomachos)에게 맡겨졌다.(기원전 411년). 이 남자는 이 일을 그저 한해두해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효한 법률까지 삭제하여 법률을 허위로 날조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은 돈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책임을 추궁도 하기도 전에 아에고스 포타모이(Aegos Potamoi) 해전(기원전 405년 스파르타에게 대패했다)과 함께 아테네에 불운이 닥쳤다. 그리하여 해전이 끝난 후 폴리스를 재건하면서 다시 이전보다도 더 큰 합의 기관과 위원회가 법전 편찬을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니코마코스의 강력한 보호자들에 의해서 다시 또 모든 일이 근본적으로 그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는 또다시 4년간 이 사안을 진척시키지 않은 채 만지작거리다, 그의 전문 분야인 제사 안건으로 새로운 사치스런 희생 제물에 관한 법률을 생각해 내서 그것으로 인기를 얻으려 했다. 그 결과 나중에는 그를 고발한 사람들이 반대로 니코마코스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뒤집어쓰지 않을까 크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발자는 다음과 같이 고발장을 마무리 하고 있다. “국가에 대한 절도를 기획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 소송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 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은 누구도 적이 될 수 없는 매우 대담한 자들이 될 것이다.” 물론 이 판결은 보고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든 지금까지 말해 온 니코마코스의 사례만 가지고도 아테네에서 법률적 사안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플라톤이 왜 법률편찬자의 양성을 아카데메이아의 주요 교육목표로 삼았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런 사정에 처해 있었던 만큼 민주정 아테네에서는 특정의 시민, 즉 부유층 혹은 부유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요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개인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가지면서, 단단하게 결성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적 폴리스의 이념에 대해서는 결코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을 비난한다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또 그리스인의 본성에 대해서 너무 심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될 것이다. 적어도 이 인간 종족은 야만 상태로부터 벗어나자마자 국가 기구와 공적 생활 외에 한층 더 특별한 생존방식과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가정생활 그리고 특정 사상이나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영역을 구축해왔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지배자 계층에 속하는 인간들만을 정치적인 존재로 위상지우는 일에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스파르타 이외의 다른 곳, 특히 아테네 사람들은 반대로 폴리스가 개인들을 고무하고 동시에 개성적인 것의 발전을 아주 강렬하게 촉구하며, 사유재산의 획득과 그에 따라 야기된 사고방식을 모든 방법을 통해 촉진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실로 다양한 종류의 공적 기부제(leitourgia : 부유층이 자비로 일반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아테네의 공동체적 성격을 드러내는 독특한 제도)를 통해 폴리스로부터 주어진 부의 은혜에 적극 보답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무렵까지는 이 공적 기부제는 한편으로는 폴리스에 대한 실제적인 헌신의 문제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씀씀이가 크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야심의 문제였다. 키몬(Kimon)은 자신의 부를 모든 방법을 동원해 모두 내놓았다. 알키비아데스의 아버지인 클레이니아스(Kleinias)는 아르테미시온 해전 당시 자신의 배에 자비를 들여 200명의 병사를 탑승시켜 싸웠다. 그러나 시대가 점점 더 나쁜 방향으로 흐르게 되면서 부는 문자 그대로 먹이감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많은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아테네 부유층 사이에서도 바야흐로 공적 기부제가 부의 수탈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부를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폴리스를 떠날 수는 없었고 게다가 설사 도망간다고 해도 외지에서도 같은 위험, 아니 더 큰 위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적 기부제가 단지 국가의 요구뿐이었다고 하면 고대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특별하게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는 문제였다. 사실 아주 고액 수준의 세금을 제외하면 국가가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공적 기부제 내지 봉사는 트리에라르키아(trierarchia) 뿐이었다.(이것은 시대에 따라 매우 차이가 나는 전투함정(3단노 군선 tri?r?s)의 장비 장착에 관한 의무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이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공적 기부제로서는 전시에 비교적 궁핍한 시민들의 무장을 도와준다거나 그들의 딸들의 결혼 비용을 부담한다거나, 매장비용 등을 부담하는 자선 행위 또는 완전히 민중들의 오락을 위해 기부하는 행위 같은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특히 코레기아(choregia : 합창대 비용부담), 즉 연극 합창대 및 제사와 축제를 위한 서정시 합창대의 무용가나 피리 부는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부담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른바 김나시아르키아(gymnasirchia : 체육행사부담)와 그러한 것들 중에서 가장 비용이 드는 종류인 람파다르키아(Lampadarchia : 일종의 경주행사 부담)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경쟁을 수반하는 경기(ag?n)를 위해서도 돈을 내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신전에서 제전이 벌어질 때 사절을 파견하는 비용도 부담하였다. 마지막으로 부족(phyle) 혹은 그것과 관련된 지역(d?mos)의 여러 동년배들을 위한 향응도 떠맡았다. 이 경우 누가 부담할지는 자발성이나 추첨에 의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10개 부족이 그것을 떠맡을 동료 시민을 선출하여 그 사람들이 정해진 순서대로 매년 반복되는 공적 기부제는 물론 가끔 임시로 열리는 봉사활동을 떠맡았던 것이다. 분명 이런 관습을 중지시키는 것은 사람들에게 유리한 계책은 아니었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일부 부유층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이 봉 취급당하는 것을 거절했을 때 자기 신상에 불어 닥칠 증오를 지레 두려워해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니키아스(Nikias)가 시칠리아 원정 계획에 반대했을 때, 그는 결국 찬동자를 얻지 못했고 찬동자 중에는 유력한 사람들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동조할 경우 자신들이 공적 기부제와 3단노 군선의 장착비용을 면하려는 것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신들의 신념에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소한 3탈란톤의 자산을 가지는 사람들만이 이것을 부담하게 되어 있었다. 또 자산은 연평균 12퍼센트의 이자를 낳았기 때문에 1탈란톤의 자산이 있으면 어떻게든 생활은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합창대 비용 부담은 부유한 남자 한 명에게 매년 1200 드라크마 정도를 부담지우는 정도여서 대체로 15탈란톤의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로 여겨졌다.

이렇게 해 보면, 이러한 부담은 몇 가지가 크게 중첩되는 일이 없으면 곧바로 재산상의 파탄을 초래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어떤 사람에게 부당한 방식으로 그것을 부담지울 경우 그 사람은 파탄을 면치 못하였다. 이와 함께 이러한 부담을 떠맡는 것은 명예로운 것이라는 전래의 생각 또한 아주 오랜 동안 계속 되었고, 이런 일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 또한 적어도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저 쓸데없는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능력 이상으로 자신의 씀씀이가 좋은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과 같이) 합창대 비용을 부담할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플라톤은 명문가 출신이지만 부유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을 면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유한 친구로부터 그것을 위한 자금을 조달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복하여 합창대 비용 부담을 떠맡은 사람은 상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세발달린 솥(tripodon)을 걸어두기 위해 훌륭한 신전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어떤 시대, 어떤 민족이건 간에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짜고짜로 희생을 지불하게 되는 처사들 중에는 고역스런 일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당사자들이 자기의 사적인 자금으로 이러한 공적 기부제를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 돈은 결국 스스로의 사적인 환락 생활을 위해서 낭비 되어 버렸을 텐데 그것이 대부분 민중 전체의 고상한 예술적 향유를 위해 지출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아테네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명예로운 것이라고. 그러나 강제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일로부터 존엄성을 빼앗아 버렸다. 아테네 국가는 개개의 부유층이나 생업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국가가 그 사람에게 부여한(어쨌든 극히 제약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안전과 교환한다는 명분으로 마음대로 과세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국가는 매우 변덕스럽고 또 탐욕스런 시민들의 수중에 떨어져 버려서, 시민은 이윽고 보다 높은 액수의 세금을 사정없이 요구했고, 그렇게 거둬들인 돈을 민중에게 직접 분배하는 것을 매우 민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당시 오락을 위한 낭비에 있어서는 어찌 되었든 국가가 선두에 서 있었다. 그리고 에우불로스(Euboulos) 시대에는(대체로 기원전 353년부터 기원전 339년까지) 축제비용이 모든 예산의 주요 항목이 되어, 누군가 이것을 전쟁 목적으로 전용할 것을 제안하는 경우, 그것을 처음 입에 담은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고 위협함으로써 그 항목 자체의 보존이 담보되고 있었다. 아테네에 있어서 조차 이 경우, 대중의 관심사는 이러한 고상한 예술 형식을 즐기는데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일정한 정도 호사를 누리는 것에 있었을 것이다.

“불쌍한 부자들”로 일컬어지고 있는 그들의 재난을 상세하게 알려면, 크리토불로스(Kritobulos)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짓궂은 동정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토불로스가 감내하고 있는 일들을 모두 열거한 후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공적 기부가 충분히 행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만으로도, 아테네의 사람들은 마치 네가 자기들의 재산을 도둑질이라도 한 것인 양 너를 처벌하려 들 거야.” 크세노폰의 「향연」(symposion : 제4권 29절 이하)에 나오는 카르미데스의 말은 오히려 가난해졌기 때문에 자유롭고 행복하게 된 한 남자의 실로 유쾌한 유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전체의 극히 중대한 측면이 법정 변론가들을 통해 비로소 처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재판의 배후에는 모든 재산을 몰수해버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으므로 그러한 재산은 일부는 국가에, 일부는 고발자등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것으로써 그 돈은 이미 일체의 권리와는 관계없이 바람직한 공적 수입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 알키비아데스(Alkibiad?s 기원전 450?-404): 그는 정치·군사적 재능과 준수한 외모를 타고난데다가 페리클레스의 조카로서 젊은 나이에 벼락출세를 한 후, 서방으로의 세력확장을 바라는 민중의 열망에 편승하여 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하지만 헤르메스상(像)을 파괴한 용의자로 소환령이 내려지자 아테네를 배반하고 스파르타로 망명한다. 그러나 스파르타 왕비와의 스캔들로 다시 페르시아로 망명한 후 아테네의 과두정파에 빌붙었다가 뜻을 못 이루자, 다시 민주정에 충실한 사모스 해군과 손을 잡고 스파르타군을 격파하여 기원전 408년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아테네로 돌아온다. 정조 없이 야심과 사리에 가득 찼던 그의 삶은 결국 스파르타가 보낸 자객의 손에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 소크라테스와의 각별한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학술 3부 근대 철학사 세미나 강의계획서- 담당 선생님: 이병창 동아대 철학과 명예교수

근대철학사 강의계획서

담당 선생님 : 이병창

1)강의의 목표와 의의

근대철학사라면 상당히 포괄적이라서 12주 정도의 작은 시간 안에 다 다룰 수가 없다. 그래서 이번 강의는 근대철학사의 백미라고 할 칸트와 헤겔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직관주의와 칸트주의 그리고 헤겔주의는 삼각관계를 이룬다. 이 삼각관계는 최근에도 반복되고 있다. 들뢰즈의 철학이 직관주의의 전통을 잇는 것이라면 현대 구조주의가 칸트주의의 맥을 잇고 있다. 반면 헤겔주의는 라캉, 지젝 등의 정신분석학적인 흐름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러므로 칸트와 헤겔의 동일성과 차이를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근대철학을 넘어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의 요점을 장악하는 것이며, 지금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철학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디딤돌을 제공한다고 하겠다.

 

2)강의의 방법

이 강의는 아무래도 전문 연구자들의 강의이니만큼 개론적인 설명보다는 원전을 접하면서 이를 해독하는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 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원전해독의 능력을 키우는 것에만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선철들의 고민 자체를 세부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다양하게 이해하며 나아가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과 미래 철학의 단서를 발견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중심 텍스트

칸트: 순수이성 비판

헤겔: 정신현상학

(판본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한글번역, 영어번역, 독일어 원전 모두 가능)

 

* 강의 시간: 매주 토요일 2시-5시. 8월 11일 시작해서 12주 연강.

4)강의의 주별 내용
주별
강의 주제
세부 내용
강의방식

1
칸트 순수이성비판

초판 들어가는 말
칸트는 무엇을 하고 싶었는가? 선험철학의 이념
요약발제

2
선험적 감성론
시간, 공간이 직관의 형식인 이유

오성의 개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3
분석론 2장,

개념의 연역
개념이 어떻게 직관에 적용될 수 있는가?

4
원칙론 2장 3절

종합적 원칙
선험적 통각의 기능

5
선험적 변증론 1편

순수이성의 개념들
선험적 변증론과 순수이성의 의미

6

칸트 순수이성 비판의 의의

7
헤겔 정신현상학 서문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무엇을 하려 했는가?

셸링과 헤겔
강독

8
서문
체계가 진리인가?

9
서문
역사적 서술은 왜 필요한가?

10
서문
의식의 변증법적인 전개

11
서문
형식주의 비판

12

헤겔 정신현상학의 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