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누구의 구두입니까? [청춘의 고전 시즌2]-⑪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⑪

?? 일시: 2012. 8. 25.?(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이것은 누구의 구두입니까?

– 반 고흐의 <구두>와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
?
강연: 서영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철학’과 ‘예술’ 이 두 영역은 인간이 역사 행위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장 ‘문화화’된 창조성의 산물이다. 이 두 영역의 활동을 통해 세상은 드러나고 해석되며 지속된다. 그렇다면 철학과 예술은 서로 어떤 관계이고 철학은 예술을 어떻게 보는가? 보이고 감각하는 이 세계의 것들을 예술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예술적 감성과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해석해내고 설명하려는 이성적 사유는 언뜻 보면 닮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아주 달라 보인다. 이 차이가 이 둘 사이의 얘깃거리가 된다.

열한 번째 시간에는 ‘철학자가 이해하고 생각한 예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철학자들이 이해했던 예술에 대한 여러 개념을 기반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선대 철학에 대한 물음과 극복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양 철학사에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극복 양상과 하이데거의 예술론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강의를 맡은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를 소개하면서 하이데거가 실존주의자, 나치 부역자, 신비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전적으로 맞거나 부분적으로 맞는 말일 수 있음을 주지하게 하면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서양철학사가 서구 형이상학과의 대결의 역사였다는 단서를 전제해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하이데거는 철학사 전체의 핵심 근거에 대해 문제시하고, 그러한 근거 자체를 ‘근거 없는(grundlos) 것’으로 만드는 사상가”라고 하면서 이제까지 자명한 것을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리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핵심에는 ‘철학의 종말’을 선언했고 대안으로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얘기한 하이데거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철학과 예술의 대결 : ’철학의 종말’과 대안으로서의 예술

하이데거가 말한 ‘철학의 종말’은 철학 일반의 종말이 아니다. ‘형이상학의 종말’을 말한다.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의 특징에 대해 “서구 형이상학의 사유 전통을 해체했다는 것이 다른 철학자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이데거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니체와 헤겔까지의 철학을 한 주름으로 꿰어버리고 이것이 서양의 전통적 틀이라고 규정하면서 하이데거 자신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고 한다.

고대부터 철학자들은 ‘철학’과 ‘예술’이라는 두 영역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는데 서영화 교수는 기본적으로 플라톤-니체-헤겔-하이데거의 순으로 큰 축을 설정한다. 단적으로 설명하면 플라톤은으로 보았고, 니체는을 역설했다. 그러나 헤겔에 가서는 다시으로 규정된다. 이후 하이데거는 다시 철학의 종말을 주장하고 철학의 자리에 예술을 등장시킨다.

플라톤에게 있어 예술은 하나의 가상을 만드는 것이고, 철학은 이론적 지식을 통해 참된 것에 대한 앎에 도달하게 만들어 준다. 철학은 참된 ‘이데아(idea)’를 이끌어주는 것으로 수학-기하학은 이데아의 앎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플라톤의 경우 이데아는 생성-소멸의 과정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고 감각적 경험세계의 생성-소멸에는 참된 것이 없다. 플라톤에게 예술이란 이데아에 대한 2차적인 모방이며 ‘오디세이아(odysseia)’와 ‘일리아드(Iliad)’처럼 광폭하고 음란한 신들에 대한 묘사와 현실 속의 인간을 운명에 대해 비탄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플라톤은 교육에 있어 ‘철학과 예술 간의 대결’을 선언하면서 기존 공동체 내에서 교육을 담당했던 예술을 대신해 철학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반해 니체는 플라톤적 진리관은 인간 생의 보전을 위한 가치로써 삶의 지지대나 의지처로 파악한다. 니체는 생동하는 현실세계를 중심으로 1차적 관계를 맺는 것이 진리이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본다. 니체의 예술론은 세계를 지배해 오던 형이상학적 가치가 전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인식될 때(심연 속으로 몰락;니힐리즘의 도래) 비로소 인간에게 새로운 의지가 발현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존재자를 존재자이도록 하는 것은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will to power)’이고 예술은 이것을 가장 투명하게 드러내어 변화무쌍한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는 최고의 인식형태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니체 또한 형이상학자로 이해한다. 니체의 진리관은 분명 플라톤의 개념을 전도한 것이지만 니체에게는 ‘힘에의 의지’의 강화가 모든 생명체들의 본질이 된다. 이것을 하이데거가 볼 때는 플라톤의 이데아 성격과 같다는 것. 서영화 교수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 바깥의 무시간적이고 불변적인 것을 이해해야만 인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니체도 형이상학자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예술작품도 ‘영원히 정지한 시간성’과 ‘불변성’의 방식을 가지고 만들어졌다면 이것은 형이상학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전통적으로 존재자를 ‘형상+질료’의 조합으로 규정하는 것은 개별사물을 이분법으로 설명하는 태도라고 비판한다. 이 때 전통적 규정에서 중세까지 형상의 자리를 차지하던 것은 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철학의 근본 물음인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라는 존재자의 원인과 본질의 탐구 끝에는 결국 신을 설정할 수밖에 없던 사실이 존재하고 이를 참으로써 보증하는 것이 논리학의 역할이었다. 이 역할을 논리학적 방식 보다 예술의 방식을 통해 더 잘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입장이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의 필요성은 형이상학적 틀과 논리학의 만남으로서 서구 형이상학 전체를 지배해온 철학이 종말을 고해야할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

1) 사물과 도구, 그리고 예술작품

▲ 샘(Fountain), 1917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위 그림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변기라고 불리는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이라는 작품이다. 1917년 뉴욕의 전시회에서 전시되었지만 전시회장 밖에서 전시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프랑스 퐁피두센터 현대미술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으며, 37억 달러를 호가하는 예술작품이 되었다. 여기서 생기는 질문: 기성품을 예술가가 일상적 환경이나 장소에서 빼내와 예술작품이라 선언하면, 예술작품이 되는가? 무엇이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라 규정할 수 있도록 하는가? 과연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런 의문들을 정리해보면 아마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예술가에게 있고 예술가의 본질은 작품에 있으며 작품의 본질은 다시 예술에 있다’라는 문구처럼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순환에 빠진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문제 삼는다.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작품은 예술가 자신이 활동한 결과이다. 그러나 예술가가 예술가일 수 있는 것은 예술작품을 통해서다. 형이상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물이 사물이도록 하는 본질에 대한 물음과 규정에 있다. 하이데거의 경우 ‘사물’을 다른 말로 하면 ‘존재자’라고 할 수 있는데 존재자의 본질을 형이상학적 사유 전통에서 찾기 거부하는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물음을 실제 예술작품으로부터 묻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물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무(無)가 아닌 존재자 일반이 사물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사유 전통 내에서 사물에 대한 해석은 다르다.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가 이해한 사물에 대한 조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형이상학 전체를 지배하는 ‘형상+질료’의 결합 틀이 예술이론과 미학의 개념 도식이 되고 이 개념 도식이 근대 이후 형상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오면서 형성된 형이상학적 ‘주체-개체’의 도식과 만나 서구 사회에서 사물을 설명하는 절대적인 ‘개념역학’이 된다”는 것. 이에 의해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존재하는 것을 도구로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형상+질료’ 결합 틀의 근원은 사물의 본질이 ‘도구적 용도성’에 있다는 견해이다. 이 지배하에 있는, 예를 들면 항아리ㆍ망치ㆍ신발과 같은 존재자는 어떤 것을 위해 제작된 산물로서 사물과 작품 간의 고유한 중간 위치에 있다.

문제는 서구 사회가 이 도구 존재자에 대한 이해 틀을 모든 존재자를 이해하기 위한 근본 틀로 간주하고 있다는데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것 자체(사물)를 도구로 이해하는 것을 ‘사물에 대한 습격’이라 명명했고 이 ‘도구적 용도성’을 벗겨낸 것을 ‘사물’이라고 한다. 도구는 유용한 것으로 친숙하고 사물은 낯선 것이 되면서 ‘폐쇄성’을 가지고 ‘은폐’된다.

2) 고흐의 신발 도구와 용도성의 본질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분석하는 “고흐의 신발(ein Paar Bauernschuhe von Gogh)”은 사물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도구에 대한 분석이다. 하이데거의 전략은 형이상학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형이상학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물=도구’라는 인식 틀에 대해 사물이 진정 무엇인지 알려주겠다는 의도이다.

▲ 신발(A Pair of Shoes), 1886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 작품에서 도구 존재가 참으로 무엇인지가 드러난다고 한다. 작품 ‘신발’에 대한 하이데거의 감상은 축약하면 이렇다.

“신어서 틀어지고 헤어진 신발 안쪽의 어둡게 열려진 틈 속에서 노동의 고단함이 보이고 신발 도구 속에서 거친 바람이 부는 들녘의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완고함이 보인다”ㆍ”신발을 통해 생계를 해결해야하는 농부의 근심과 들녘에 나가 편하게 일할 수 있다는 안도감, 혹은 출산과 죽음 앞에서 나타나는 초조와 전율이 보인다”

신발 도구 속에서 대지와 농부의 세계가 함께 보인다는 것인데, 하이데거는 이 때 재현의 대상인 신발은 어느 특정한 누구의 신발이 아니고 도구 연관 전체로서 ‘농부의 세계’를 드러내준다고 한다. 세계를 보는 농부의 시선과 삶의 지향성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것은 농부가 신발을 신는 일상 행위에서도 나타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 때 도구가 갖는 용도성의 본질은 ‘신뢰성’에 있다. 누군가 신발을 신었는데 그야말로 아주 편해서 신발이 신발 역할을 잘 할 때가 가장 신발다운 때이고 이렇게 되면 신발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다른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신발을 신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신발이 사라져버리는 그 지점에서 ‘신뢰성’을 발견할 수 있다.

서영화 교수는 “망치도 더 이상 망치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가 망치가 가장 망치다울 때이다. 회화작품을 그리는 도구도 마찬가지인데 하이데거는 도구를 하나의 관찰대상으로 삼게 되면 도구답지 않게 된다고 한다. 그 때는 ①도구가 고장 났을 때, ②도구를 과학적 관찰대상으로 삼을 때”이다. 하이데거의 말로 이어나가보면 “도구가 갖는 용도성의 본질은 1차적으로 신뢰성에 있고 신뢰성의 특징은 평소에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신뢰성이 드러나는 순간은 찰나의 순간이다. 플라톤적 진리처럼 신발의 본질은 신발의 이데아계에 있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절대 불변하는 객관적인 ‘참’인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참이 아닐 수도 있다. 예술작품은 ‘존재자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준다. 고흐의 그림에서 신발은 일상적으로 보았던 곳과는 다른 곳에 위치한다. 즉 작품 안에서 작품 존재로 있게 되는데 이 때 우리가 평소에는 인식할 수 없던 용도성의 본질인 신뢰성을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도구 존재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한 것이다. 본질을 은폐하려는 사물의 성향을 풀어헤쳐서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고 예술작품 속에서 진리가 생성된다고 본다.

작품과 진리

하이데거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세계와 대지의 투쟁을 일으키는 것(선동, 사주)”이고 예술가는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가 투쟁하는 것을 격돌시키는 역할을 하며 그 자리에 촉매처럼 위치해 있다. ‘투쟁’이란 세계와 대지를 긴밀하게 공속(共屬)시키는 친밀한 통일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와 ‘대지’의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란 고흐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농부의 세계처럼 삶이 결정되는 순간 그 자리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곳이 된다. ‘대지’는 말하자면 인간이 체류하는 고향과 같은 거처로서 하이데거는 대지를 질료와 같은 개념으로 쓴다. 이른바 ‘스스로 그러한(自然)’ 질료적 성격을 보유하고 있는 사물 고유의 성향이다. 이것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태도에서는 사라진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대지의 성격, 질료를 사라지게 하지 않고 비로소 그것을 최초로 솟아나게 한다. 고흐의 회화작품에서 ‘농부의 세계’와 ‘대지’는 ‘개방’되면서 하나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세계가 대지 위에 근거하는 것임을 드러내 보인다.

작품 안에서 농부의 세계와 농부가 딛고 살아가는 땅-대지가 신발 안에서 투쟁하게 만드는 것이 고흐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진리는 무시간적이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생겨나게 하는 것은 예술가의 몫이 아니다. 예술가는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를 서로 격돌하게 만들뿐이고 그것의 결과가 진리의 생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의 내밀한 통일과 투쟁의 격돌 속에서 진리가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다.

서영화 교수는 세계와 대지의 투쟁의 격돌로서 이해할 수 있는 예술작품의 사례로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을 든다. “일제강점기 석굴암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 이후 지금까지 최초에 조성되었던 당시의 본 모습을 잃어버렸다. 현재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결로(結露)현상인데 애초에는 본존불이 앉은 바위 밑으로 감로수라는 샘물이 흘러 자연적으로 결로현상을 막을 수가 있었다. 과거에는 석굴암이 감로수를 차단하지 않고, 화강암이라는 질료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예술작품이었던 것이다. 인간과 절대자가 만나는 장인 석굴암은 통일신라시대 당시 신(神)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세계에 대한 이해와 석굴이라는 대지가 투쟁의 격돌로서 드러나는 예술작품이었다”

진리와 예술

하이데거는 보이는 대상 A자체가 참으로 드러나야지만 보는 주체 B도 A를 참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개념화해서 말하면, 참된 인식은 이성적인 표상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사물 자체가 스스로 발산하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물의 ‘개방력’이다. 사물이 그 자체로 드러나 있어야 예술작품에서도 드러난다는 것. 사물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작품 안에서 ‘사물의 세계’와 ‘사물이 속하는 대지’가 충돌한 결과가 ‘참으로 그렇게 있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사물 자체가 ‘개방력’을 가지고 있고 이 개방성이 열릴 때 우리는 존재자를 그 존재자 자체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세계와 대지의 투쟁이 내적인 통일 속에서 석굴암의 본존불상처럼 형태로 확립되어 있을 때 감상자는 “그것이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 앞에 선다. 즉 존재자의 개방성이라는 적막한 충격 앞에 세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이제까지 습관적으로 익숙해 있던 것으로 부터 벗어나게 된다.

고흐의 신발 그림을 봤을 때 감상자는 여기에 ‘신발이 없지 않고 있다’라는 그 사실을 느끼게 되고 하이데거는 이것이 매우 적막한 충격으로 감상자에게 다가온다고 한다. 서영화 교수는 ‘없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태도는 하이데거적 언어로 말하면 존재자가 참으로 개방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습관적으로 익숙해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감상자가 예술작품을 볼 때 사물을 도구적인 것으로 보는 익숙함에서 벗어나 비은폐화되어 드러난 존재자의 본질을 자각하게 되면 작품 감상자는 작품의 보존자가 되어 작품을 비로소 현실적이고 예술작품답게 만드는 전환을 이루어낸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가 일상의 기성품에서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의 예술작품으로 변환된 사실이 이 사례이다. 그렇다면 작품 안의 작품존재 속에서 진리가 생성된다는 존재자의 ‘개시성(開示性)’이야 말로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도록 하는 최종 근거가 된다.

서영화 교수는 마지막으로 앞의 얘기들을 정리하면서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얘기를 덧붙였다.

“현재 우리는 인간을 인적자원, 자연을 자연자원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유익하고 유용한 것은 ‘있는 것’으로 치부하고 자신에게 유용하지 않은 것은 ‘있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태도인 것 같다. 이런 태도는 평소에는 매우 친숙하다. 하지만 일상적인 대상 사물이 작품 안으로 옮겨가게 되면 친숙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게 된다. 하이데거의 경우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내 앞에 있는 그 무엇을 나에게 유용한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된다. 대상에 대한 자각 이전과 이후의 태도가 전혀 다르게 된다. 확대해보면 내가 자연을 대하는 방식자체가 전혀 달라진다. 결로현상 때문에 석굴암에 에어컨디셔너를 달았다는 사실이 일상의 감상자에게는 처음에 매우 신선하게 느껴지지만 과거에는 이런 장치가 필요 없어도 석굴암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연물을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의 태도도 전혀 달라지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곧 통상적인 행위와 평가에 대해 조심스러워지고, 자신의 지식과 시야를 함부로 적용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철학과 대결한 이유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이다”

후기: 진보성 (한철연 회원)

이재원 단편소설 – 배추이파리 [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 단편소설 – 배추이파리 [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두세 달 간 대웅전을 짓는 일을 하는 동안 덕암사 주지는 틈만 나면 사진기를 들고 와 일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가 찍은 내 사진만도 한 봉투나 되었다. 그는 절 지은 기념으로 그 사진들을 보관하겠다고 했다. 그 사진들 속에서 나는 일하고 있었다. 가장 활기 있던 나의 생의 한 시절이 그 사진 속에 들어 있었다.

절 지붕을 올리는 중인가 보다. 나는 용마루 위에 서 있다. 작업하다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 옆에 장씨가 몸을 구부린 채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 장씨는 항상 등산화를 신고 일했다.

장씨가 특별히 게으름 피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등산화를 신고 일하는 탓에 장씨는 항상 몸이 굼떠 보였다. 하 사장은 그런 장씨를 항상 못마땅해했다. 하 사장은 장씨에게 일 시킨 것을 후회하곤 했다. 장씨는 우리와 함께 일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덕암사 일을 시작하기 전, 안영사에서 종각 짓기를 마치자 함께 일하던 일꾼 두 사람이 빠져나갔다. 그러자 덕암사에 와 일할 사람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하 사장이 찾아낸 것이 장씨였다.

장씨는 토목공사 패거리를 따라 덕암사에 왔다. 덕암사 기단 공사랑 주변 축대 공사를 마치자 장씨는 혼자 덕암사에 남아 공사 잔거지를 하고 있었다. 하 사장은 그런 장씨를 뒷일꾼으로 썼다.

장씨는 마흔이 갓 넘었다. 그러나 미혼이었다. 막일로 몸이 굳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요, 특별히 다른 기술도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평소에 무엇으로 소일했느냐, 누구와 사느냐고 물을라치면 그는, “머,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에요. 갈 곳 없으면 형님 집에……” 라고 얼버무리곤 했다.

식사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앉아 식사하고 있다. 양씨가 내 옆에 있고, 진옥 씨가 사람들 옆에 서 있다.

그녀는 다리를 절었다. 어떤 사람은 주지의 부모가 그녀가 어렸을 때 수양딸로 데려다 키웠다고 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우리보다 오래 덕암사에 있었던 탓에 장씨는 절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장씨는 그녀가 공장을 다니다가 몸이 나빠져서 휴양차 이곳에 와 있다고 했다. 그녀가 딱히 절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공양주 보살을 도와 식사 준비도 같이 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전적으로 식사를 책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지 다음으로 절에서 중요한 일들을 관장하고 있었다. 요사채 겨울나기를 주도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장씨를 시켜 요사채 주변 헛간에 비닐로 문을 해 달기도 한다.

장씨는 그녀 말이라면 껌뻑 죽는 시늉이다. 말끝마다 “진옥씨가 불러서……”라고 한다. 진옥 씨가 자기에게 일시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은 태도이다.

원래 식사는 대웅전 공사 현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요사채에서 했다. 그러나 하 사장이 공양주 보살에게 현장까지 점심을 날라다 줄 것을 부탁했다. 겨울이라 날이 짧아 그렇지 않아도 일할 시간이 적은데 점심 먹으러 오르락내리락 하니 일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추운 데서 식사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로 그런 불만을 나타내는 이는 양씨 뿐이었다. 하 사장이 없는 곳에서 양씨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밥 먹는 시간이 을매나 된다구 밖에서 식은밥을 먹게 하누? 에이, 이번 일 끝나면 나는 일 그만할 께다.”

양씨는 50이 넘었다. 하 사장이 일을 들볶을 때 가장 괴로워하는 이가 양씨이다. 포를 조각하거나 끌 구멍 파는 데는 이력이 났지만 연목이나 인방 감을 메어 나르는 일에는 몹시 힘들어 한다. 무릎뼈를 다쳐 찬바람이 불면 시리다고 했다. 하사장이 일을 채근하는 눈빛을 보내거나 일을 채근하는 소리를 지를라 치면 양씨는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다고 하 사장이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세화 김씨는 일꾼들 돈 떼어먹은 적 없고, 품값 주는 날 하루도 넘겨본 적이 없다는 면에서 하 사장이 성실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곤 했다. 물론 세화 김씨도 하 사장이 닦달하는 대상에서 비켜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만 머뭇거리면 하 사장이 세화 김씨의 연장을 빼앗아서, 김씨 말대로라면 미친년 널뛰듯 지랄한다는 것이다.

사장이라고 하지만 하 사장도 함께 일하는 목수이다. 절 공사를 도급 맡아 일하므로 사장이라고 불린다. 하 사장은 입버릇처럼 퇴직금 이야기를 하곤 했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야 퇴직금이나 있지. 우리네야 퇴직금이 있나, 절 지어 돈 남으면 퇴직금 쪼로 작은 건물이라도 하나 마련해야 할 텐데, 이것 참 날은 춥지, 일 능률은 안 오르지, 이것 참.”

하사장의 말을 잡고 늘어지는 장씨와 그에 대한 하사장의 대거리는 우습지만은 않다.

“그래, 건물 살 만큼 돈을 거의 모았에요?”

“건물 살 돈 있으면 이 겨울에, 가족을 떠나서 이렇게 고생하겠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일해서 조금 모아 보려는 거지.”

하 사장은 장씨를 향해 눈을 치뜨고는 쏘아댄다.

“오늘 먹을 것만 있으문 돼요. 배추이파리는 낼모레 썩으니까.”

“돈이 썩는다면 사람들이 일하겠소? 너도나도 오늘 먹을 만큼만 일한다면 겨울엔 어쩔 거요? 굶어죽을 것 아뇨? 벌어놓은 것 없으니.”

“목수가 하루 일 하면 열흘은 먹는데 굶기야 하겠에요? 목수가 일 안 하면 아쉬운 건 사장들이겠지.”

“거 쓸데없는 말 그만 합시다.” 하고 하 사장은 대꾸를 피한다. 배추이파리 공화국(이것은 내가 장씨가 말하는 내용에 붙인 제목이다)을 이야기할 때의 장씨는 이 문제를 대단히 오랫동안, 그리고 열심히 생각해 본 사람과도 같다. 특히 화투판이 벌어질라치면 장씨는 배추이파리 공화국을 실현하려는 사람 같다.

저녁 식사 후 대개는 일찌감치 이불을 펴고 누워들 있다. 잠은 안 잘지라도 지친 몸을 쉬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화투판이 벌어진다. 대개 세화 김씨, 장씨, 나, 그리고 하 사장이 함께 한다. 하 사장은 내일 일을 설칠까봐 일꾼들이 밤늦게 자는 것도 꺼려하였다. 아니면 매일 화투판이 벌어졌을 것이다.

장씨는 화투판에서도 말끝마다 ‘배추이파리’이다. “배추이파리는 썩으세요. 웬만큼만 긁어가세요.”라거나, “배추이파리는 꼭 필요할 때만 좋은 것이세요.” 라는 식이다.

장씨가 돈을 따는 날이면 색다른 일이 벌어졌다. 하 사장은 일꾼들이 술을 먹는 것도 꺼렸다. 역시 내일 일을 설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씨는 하 사장의 그런 눈치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화투판이 끝나고 돈을 세어 보고는 장씨는 기세 있게 말한다.

“내가 이만큼 땄에요. 배추이파리 석장. 이걸 나 혼자 집어넣으면 배추 이파리가 썩어요. 술을 사오겠에요.”

그런 다음 예의 그 등산화를 신고는 산을 내려간다. 장씨는 술과 안주 등속을 사되, 과일이나 음료수, 과자 등속을 넣은 다른 꾸러미 하나를 더 만들어 온다. 그러고는 그것을 공양주 보살과 진옥 씨가 있는 방 안에 밀어넣어주곤 한다. 장씨와 진옥씨가 하는 이야기가 우리들이 자는 방까지 들려온다.

“공양주 보살은 잠들었어요. 저두 먹기 싫어요. 갖다 잡수세요.”

장씨는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모양이다.

“우리는 술과 안주가 있에요. 두었다가……”

장씨는 우리 방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장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숨 잠들어 있던 사람들까지 술 소리에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녁 식사 후 시간도 적당히 지난 후라 술 한 잔은 그야말로 몸을 녹아나게 한다. 장씨가 돈을 따기를 바라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새삼스레 장씨의 배추이파리공화국을 되뇌며 잠드는 것이다. “배추이파리는 꼭 필요할 때에만 가치가 있에요.”

신정이 다가와 우리는 일을 며칠 쉬기로 했다. 우리가 쉬겠다고 한 것이기보다는 하 사장이 결정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나이 많은 축들은, 명절이란 구정이니 신정에는 일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 사장은 역시 일 능률을 먼저 생각한다.

“일이 안 돼요, 남들 쉴 때 일하면.”

일을 쉬기로 했다면 의당 일하던 사람들은 집으로 간다. 그러나 장씨는 마땅히 갈 데가 없는 눈치였다. 장씨를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두어 달 만에 집에 가는 것이요, 한꺼번에 받은 임금봉투도 두툼해 사람들은 흥에 겨워했다. 홀로 남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라서 그런지, 장씨가 조금 쓸쓸해 보여 나는 말을 걸어본다.

“돈 받으니까 모두 기분들 좋아하네요. 이게 배추이파리라 한다면 사람들 기쁨이 줄어들지도 모르겠네.”

적어도 배추이파리를 화폐로 쓰자는 발상에 관해서만은 장씨 대답은 경탄스러울 정도이다.

“그 반대일지도 모르잖겠에요?. 배추이파리 한 보따리씩 갖구 가지만, 도중에 썩어버릴 테니까 나한테 한 주먹씩 나눠줄 것 아뇨, 술두 먹구, 진옥 씨 허구 맛있는 것 사먹으라구. 주는 사람 즐겁지, 받는 사람 기쁘지, 이형 생각과 같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에요?”

나는 웃으며 또 농쳐본다.

“그럼 진옥 씨 하고는 잘 되어가는 중이란 말예요? 아이구, 고목나무 꽃 필 일 생기네.”

장씨는 황망히 손 저으며 부정한다. 마치 나에게 달려들 기세이다.

“그런 게 아니라, 진옥 씨도 지금은 돈을 못 버는 처지이니 나누어 쓸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진옥 씨와 잘 되어갈 수 있겠에요?”

며칠 집에서 쉬고 다시 덕암사로 왔을 때 장씨만이 덩그런 요사채를 지키고 있었다. 인기척이 있자, 진옥씨가 어디선가 나타나 잠깐 얼굴을 보이곤, 다시 어디론가 박혀버린 듯,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밤늦게 도착할 것이다. 장씨가 절에 남아 있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하다못해 극장이라도 가거나 술 한잔 하러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무료히 요사채에 머물러 있을까.

저녁 준비를 할 때에야 무엇인가 느낌이 왔다. 일꾼들이 집에 가자 공양주 보살도 멀리 나들이한 터여서 식사 준비를 할 사람은 진옥 씨뿐이었던 것이다. 진옥 씨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기척이 있자 장씨가 아주 익숙한 듯이 주방으로 갔다. 상을 내려 수저 등속을 준비하고 밥통을 열어 밥을 푼다. 진옥 씨가 한 일이란 국이며 찌개를 만든 것뿐이다. 마치 신혼부부가 다정스레 저녁을 준비하는 것 같은 정경이었다.

식사 후 장씨는 술 한잔 하자며 나를 이끌었다. 산길을 내려가면서 장씨가 말했다.

“이형이 하 사장과 일 한지는 얼마 안 되었다면서요?”

아마도 하 사장이 말을 한 모양이다.

일하겠다고 찾아온 내게 하 사장은 나의 목수 경력을 물었다. 목수들은 대개 함께 일하러 다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목수가 일하겠다고 혼자 현장에 찾아오는 법은 드물다. 하 사장은 마땅히 물어볼 만하다.

나는 하 사장에게 사정을 말했다. 목수일 하기를 몇 년 쉬었다. 쉬는 동안 장사를 했다. 그러나 장사도 잘 안되어 다른 밥벌이를 찾아야 했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목수 일이었다. 함께 목수 일을 하던 옛 동패들을 찾아보니 모두 흩어져 있었다. 할 수 없이 나 홀로 떨어져 일거리를 찾아다니고 있다. 그러니 내게 일을 시켜다오.

나는 장씨에게 말했다.

“이럭 저럭 하 사장과 함께 일한 지 일년이네요.”

시내에 이르자 장씨는 앞장서 술집으로 들어갔다. 여러 종류의 술을 파는 집이었다. 장씨는 국산 양주를 시켰다. 나는 생맥주를 마시는 편이지만 장씨 주문을 막고 싶지도 않았다. 양주도 그 독특한 맛이 있지 않은가. 나는 계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간조했다는 말이지요, 비싼 양주를 산다는 게? 좋아요, 홀가분한 총각이 한번 써 보시오. 나는 다음에 생맥주를 사겠소.”

그는 소리나게 양주 한 잔을 마시고 말했다. 아니, 빨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원래 나는 양주를 마십니다. 공사판 슬슬 따라다녀도 양주 마실 만큼 벌지 않겠에요? 머, 이렇게 사는 거지요.”

나는 그가 돈이 생기면 들로 산으로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내고는 말했다.

“양주 마시면 산에는 언제 갑니까? 돈 모아야 산에 가서 몇 달 살 것 아닙니까?”

“갈 형편이 되면 가지요. 산이나 들도 따뜻한 때라야지 지금 같은 겨울이야 어디 적당하겠에요? 지금은 들이나 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형과 술 한 잔 하자고 했에요.”

“어떤 이야기입니까?”

“이형 중매 해 봤에요?”

“아니요.”

“중매 한 번 해 보겠에요?”

“누구와 누구를?”

“나와 진옥 씨.”

“네?”

나는 비록 다리를 절지만 자태가 빼어난 진옥 씨를 떠올려 보았다. 답이 금방 나왔다. 속으로 조용히 머리를 흔들고는 술을 들이켰다.

“당사자끼리 부딪쳐 봐야 해결날 일 아닐까요? 데이트하자고 이야기해 보시지, 진옥 씨한테?”

“그렇잖아도 식사하러 나가자고 이야기 했더랬에요. 그런데……”

“진옥 씨가 거절합디까?”

장씨는 대답을 피했다. 그러고는 딴 말을 한다.

“진옥 씨가 이형을 좋게 생각하는 눈치였에요. 진옥씨가 그럽디다. 이형은 일 잘하는 목수라고. 또 노가다 티 내지 않고 젊잖은 사람이라고.”

“나를 좋아한다면 비참한 일이 생기지. 나는 결혼했는데. 이건 농담이고, 그래서 내가 말하면 진옥 씨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할 거란 말이군요?”

나는 좀더 장씨의 개인사를 알고 싶어졌다. 묻고 들은 결과는 짐작했던 대로였다. 재산도 없다. 조실부모한 후로 형님 밑에서 컸다. 지금도 형님 집에서 얹혀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형님이 부자도 아니다. 독립해 볼 생각은 여태 하지 않고 살았다. 따라서 방 한 칸 얻을 돈도 없다.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다. 내가 장씨에게 말했다.

“장성한 조카들이 각자 제 밥벌이하는데 장씨 혼자 벌어 혼자 쓰기도 바쁘다면 형님이나 형수 눈총 받을 텐데?”

“내 이래 봬도 국수 뽑는 기술자였에요. 형님이 오랬동안 물국수 공장을 했었거든요. 형님댁에서 내가 쓸모 없는 인간은 아니었에요. 눈총 받을 일 없었에요.”

“그러나 지금은 결혼할 준비도 안 되었다는 게 문제지요. 공장을 했으면 형님이 장씨 월급도 챙겨 놓았어야 할 것 아니오?”

“월급을 따로 챙길 만한 공장이 아니었에요. 여러 식구 굶지 않고 먹고 사는 것으로 족했에요.”

“그러니까 형님 가족들을 위해 일했다? 좋아요, 장형이 배추이파리를 돈으로 쓰는 나라에서 사는 사람답게 살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지금 가정을 꾸릴 만 한 준비가 안되었으니, 진옥 씨 문제를 이야기할 처지는 아닌 것 같아요. 결혼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장형이 진옥 씨에게 직접 의중을 떠봐도 전혀 이상할 리 없죠. 그러나 지금 장형이 할 일은 청혼이 아닌 것 같네요. 하 사장 몇 년 착실히 따라다니면서 돈을 모으는 일 갖네요.”

장씨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더이상 진옥 씨를 화제로 올리지 않고 술만 마셨다.

덕암사는 조금씩 형체를 갖추어 갔다. 양씨는 여전히 힘이 부쳐 보이되 견디어 나갔다. 장씨는 특별히 요령을 피우는 것은 아니지만 그 등산화가 항상 그를 방해했다. 하 사장은 장비를 쓰지 않고 순전히 사람 힘으로 절 구조를 짜 맞추어 나갔다. 대웅전 중심에 크고 긴 촉대를 세우고 도르래를 매달아 대들보와 서까래 등속을 끌어올려 지붕을 짜맞추는 식이다. 양씨는 하 사장이 없을라치면 항상 한마디 한다.

“크레인 불러 (대들보) 들어올리면 얼마나 편해? 몇 푼 아끼려고 사람을 이리 잡누? 에이, 이번 일 끝나면 나는 집으루 갈란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양씨를 비롯해 누구 하나 하 사장 앞에서는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덕암사 일을 마치면 북악사 종각을 짓기로 되어 있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각은 대웅전 짓는 것보다는 사람이 덜 필요하다. 목이 잘리지 않고 하 사장과 함께 일하려면 열심히, 말없이 일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덕암사 일을 마무리하면서 하 사장과 세화 김씨 둘만 소근거리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북악사에 가서 종각 지을 일을 계획하는 것이다. 누구누구를 데리고 갈 것인가를 의논할 것이다. 그들 둘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일일이 확인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화 김씨가 이야기했다.

“북악사 옹벽 거푸집 짤 때에도 이씨 혼자는 어려울 거라. 그러니까 장씨도 한몫 쓸 만할 거라요.”

하 사장이 나를 돌아다보며 말한다.

“이씨, 옹벽 거푸집쯤이야 혼자 할 수 있죠? 안영사 기단 거푸집도 이씨 혼자 잤는데, 뭘.”

내가 혼자 못 한다고 해서 장씨를 데리고 갈 하 사장이 아니다. 나는 그저 머리를 주억거릴 뿐이다. 그러자 하 사장은 김씨를 돌아보며 말한다.

“장씨를 데리고 간다 해도 옹벽 거푸집 짤 때만 필요할 뿐이잖소. 그러니까 장씨는 뺍시다.”

결국 장씨가 북악사 일에서 제외되었다. 장씨는 대단히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래서였을까, 장씨는 하나터면 사고날 뻔 했다. 밤새 서리가 내린 아침이었다. 장씨와 나는 대웅전 지붕에 올라갔다. 지붕 상판을 덮던 어제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장씨가 상판을 덮고 남은 재료를 밟고 미끄러졌다. 장씨는 미끄러지면서 허둥대다가 연목 끝에 박아놓은 발비를 잡고 나서야 간신히 미끄러지기를 멈추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장씨를 끌어 올렸다. 장씨는 간신히 지붕 위로 올라왔다. 장씨가 손이 거북스러운 듯한 몸짓을 했다. 나는 장씨의 장갑을 벗겨보았다. 장씨의 한 손가락 손톱이 벗겨져 있었다. 나는 그 손톱을 바로 펴고는 헝겊으로 싸매었다. 장씨는 내게 말했다.

“누구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맙시다. 말 나면 하사장 귀에 들어가고, 안전사고로 하 사장을 걱정시키면 들볶이는 것은 일꾼들이니.”

상량식날 밤에도 장씨는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그것은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덕암사 세면장은 작았다. 두 사람 간신히 씻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일을 마치고 얼굴과 손 발을 씻을라 치면 북새통이었다. 나는 혼잡을 피해서 저녁을 먹고 나서 세면장에 씻으러 가곤 했다. 그날도 느긋하게 혼자 씻고 있었다. 세면장에 들어와 작업복을 벗던 장씨의 주머니에서 무엇인가가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장씨가 갑자기 허둥대며 그것을 주어들고 안절 부절 못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내가 안 것은 잠깐 후의 일이었다. 금반지였다!

상량식 하는 날 신도들은 대개 불전과 함께 몸에 지니고 있던 패물들을 단 앞에 꺼내 놓곤 했다. 패물들은 따로 추려서 대들보 한 쪽 홈에 넣어 봉해졌다. 나는 장씨를 뜨아 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장씨가 말했다.

“이형, 죄송합니다. 모른 척 해 주세요.”

이윽고 덕암사 일을 마치는 날 일하던 사람 모두 시내에서 회식을 했다. 절로 돌아오기 전에 나는 장씨를 술집으로 이끌었다. 생맥주를 마시면서 장씨는 하 사장에 대한 불만을 자제했으나 쓸쓸함을 숨기지 않았다.

“덕암사에 같이 왔던 토목공사 패거리를 따라가지 않았던 것은 물론 공사 뒷마무리 작업과 요사채 일 때문이기도 했에요. 그러나 내 의중은 토목공사를 배우는 것보다는 절 일을 배우는 것이 좀더 품격이 있어 보였에요. 그런데 북악사 공사에는 데리고 가지 않겠다니 조금 챙피하네요.”

나는 할말이 없었다. 양씨는 세화 김씨와 처남 매부지간이다. 따라서 사람이 많다 해도 양씨를 집으로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또 목수들은 대개 하 사장과 오래 일한 사이이다. 따라서 장씨가 밀려나지 않았다면 내가 밀려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밀려나는 것이 일할 곳이 없다거나 돈 때문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목수라고 간판 걸고 다니다가 일터에서 쫓겨난다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연장가방을 메고 다니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생각해 온 터에 일 못해서 집으로 돌아간다면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만약 하 사장이 나를 자른다면 나는 가만히 잘리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데리고 간다 해도 당신 손해 안 끼친다. 내 품값 내가 벌어먹을 수 있다. 사람 하나가 더 있으면 다른 사람들 일도 줄어들고 공사 기간도 그만큼 빨라질 것이 아니냐. 그러니 나도 데리고 가라.’ 그러나 내 코가 석자인 터에 장씨를 돌보아 줄 만한 여력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장씨에게 앞으로의 거취를 물었다.

“스님이나 진옥 씨 모두 (내가)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절에 머물러도 된다고 하세요. 절 살림도 크니까 일할 사람 하나쯤은 필요하다고. 그러나 머, 내가 절에 있을 사람은 아니고……”

“여기 덕암사에서 겨울을 나는 것도 좋겠네요. 봄이 되면 어디 가서든 일 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웃으면서 장씨에게 말했다.

“그동안 진옥 씨하고 잘해 보세요.”

장씨는 헤벌쭉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지금의 장씨 상황에서 진옥 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장씨에게는 희망이요 기쁜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북악사 공사 현장은 자동찻길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자동찻길에서부터 지게로 일일이 연장이며 나무를 현장까지 져 날랐다. 그리고 기둥과 대들보 등은 목도를 해 날랐다. 좀처럼 불평을 하지 않는 세화 김씨가 지게를 지고 가다가 쉬면서 한마디 한다.

“장씨를 데리고 왔으면 얼마나 좋누? 이렇게 힘쓸 일이 많은데 꼭 필요한 사람만 데리고 와서는 사람 들볶는다니까. 저만 퇴직금 없나? 저만 빌딩 가져야 하나? 사람을 좀더 써서 우리 일을 덜어주면 어디가 덧나나?”

나는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 김씨에게 물었다.

“덕암사 상량할 때 주지가 돈 좀 안 놓았어요?”

“놓았겠지요.”

“누가 보관하고 있나요?”

“하 사장이 가졌겠지요.”

“그 돈 언제 나눠줄까?”

양씨가 내달아 말 했다.

“하 사장은 돈 안 나눠줘. 상량해 보아야 여태 맥주 한 잔 없었어.”

“상량 돈은 대개 나누 갖잖아요? 기와쟁이들 몫까지 나눠주는 법인데?”

김씨가 거들었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그거라요. 도대체 자기 뱃속만 생각하니, 이거 해 먹겠느냐고.”

북악사 일이 한창일 무렵 장씨 소식을 들었다. 북악사 주지가 모임을 갔다 와서 장씨 이야기를 했다. 덕암사 주지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절 공사 후 뒷일이 많기도 하고 마땅히 갈 곳도 없어 보여 장씨를 덕암사에 있으라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지 며칠을 술에 취해 들어왔다. 그러더니 며칠 전 새벽녘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취해 쓰러져 장독처럼 몸이 굳어 있는 장씨를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으니 와 보라.

의사에 의하면, 온 몸에 동상을 입어 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장씨를 병원에 옮긴 경찰이 덧붙이기를, 죽으려고 작정했는지 누워 있던 자리에 소주병이 여러 개 있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얹혀 살던 주제에 사고 쳤으니 절에서도 쫓겨나겠네. 이제 어디로 가누?”

“배추이파리만 찾더니 배추이파리도 필요 없는 나라에 갈 뻔했군.”

그러나 나를 비롯해서 우리 중 누구 하나 장씨를 문병 갈 만한 사람은 없었다. 공사판에서 만난 사람은 현장 일이 끝나면 인간 관계도 동시에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덕암사 사진을 볼 때마다 장씨에게서 들은 배추이파리 이야기는 생각해 볼수록 항상 새로운 느낌을 준다. 나는 만 원 짜리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뇌어 보았다.

“이것이 배추 이파리로 만들어졌다 하자…”

4.11 선거 이후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서[시대와 철학]

4.11 선거 이후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서[시대와 철학]

이 순 웅(숭실대 강사)

 

1. 집단주의의 뿌리

 

1980년대 초반에는 ‘NL(national liberation)’이니 ‘PD(people democracy)’니 하는 게 없었다. 있었다 하더라도 표면화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의 피를 먹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 그 정권을 감싸고도는 미국, 그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바빴다. 북한에 관해서는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친일세력을 청산했고 거지가 없을 거라는 정도라고나 할까.

1982년쯤일 것이다. ‘야비’(야학 비판)라는 문건이 돌고, 학생운동의 위상에 관한 논쟁이 조금씩 일었다. 그건 한국 사회에 관한 진단의 문제였고 변혁 방법론에 관한 문제였다.

정확히 몇 년도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198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가 ‘외채 4강’에 들기도 했다. 한 번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4개 국가가 국제 축구 대회를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4개 국가는 외채가 많은 순으로 1~4위였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 ⓒ연합뉴스

당시의 변혁 노선은 크게 2가지였다. 하나는 ‘자본주의 파국론’에 입각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학생 운동보다는 노동운동에 기대를 일종의 ‘준비론’이었다. 자본주의 파국론에 따르면 학생운동은 일종의 기동전 같은 것으로서 도시 봉기의 기폭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1980년 광주, 강절도 사건이 전무했던 것으로 알려진 해방구 광주에서는 시민들이 시민군 편이었고 ‘완벽한’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본주의 파국론에는 광주에서의 봉기가 확산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 내지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봉기가 가능하리란 진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이 외채 비율이 높은 것은 일종의 경제 파국의 징표처럼 보였다. 경제 파국은 민중의 불만을 유발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러시아식 혁명이 가능하리라는 판단이 변혁 노선의 한 축을 형성했던 것이다.

한편 준비론은 광주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보다 근본적인 변혁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전두환 정권은 봉기를 진압했고, 각종 언론 등을 동원한 이미지 조작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계급에 기반을 둔 투쟁, 보다 근본적인 계급, 노동자 계급에게 기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은 일종의 특권 신분으로서 언제든지 변절할 가능성이 있는 나약한 존재이기도 했다. 일종의 사상적 무장이 강조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사례도 있다. 광주 항쟁이 일어나기 전, 서울역에 모였던 대학생들은 만일의 경우 다시 거리로 나서겠다고 하면서 철수해버렸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작전 실패’였던 것이다. 군부 정권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서울의 학생운동은 군부 세력의 폭력적 각개격파에 무너졌으며 광주에서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광주 항쟁에서도 인텔리들은 투항을 결정한다. 주로 인텔리로 구성된 지도부는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하자는 결정을 내렸으며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은 대개 못 배우고 가난한 민중들이었다.

비록 오래 전 얘기이긴 하지만 두 노선은 모두 나름의 근거가 있는 방법론이었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어떤 노선이 옳은지를 판단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노선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유다. 각각의 노선이 가진 논리적 정합성이나 현실 타당성이 아니라 내 선배가 어떤 노선을 선택했느냐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어떤 노선을 선택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선배들이 둘로 갈라졌다. 선배들의 판단은 무오류성을 지닌다고 생각했던 당시로서는 혼란이 적지 않았다. 어쨌든 나 역시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사실 그때의 내 기준은 좀 더 좋아하는 선배 편에 서는 것이었다. 어쩌면 논리보다는 인간관계를 우선시했기 때문에 선택이 좀 더 쉬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중에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만, 당시에는 일종의 현장 준비론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무서운 게 있다. 꽤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당시에 이런 저런 노선상의 이유로 갈라졌던 이들이 ‘영원히 안 보는 관계’로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논리를 선택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선배가 까라면 깠던 시절, 선배의 말은 다 옳은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 파국론이나 준비론이나 둘 다 옳은 것처럼 여겨졌고 따지고 보면 어떤 노선이 옳은지 검증하기도 어려운 시절에, 일종의 혈맹 관계처럼 맺어졌던 그 인간관계를 누가 감히 깰 수 있었을까.

1980년대 후반의 학생 운동은 정파 간의 균형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던 노동 현장 운동과는 달리 통일운동 일변도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NL파가 득세했다. 북한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북한을 주력군 내지 동맹군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던 것 같다. 수령론이 어떻고, 북한 방송을 듣고 세미나를 한다는 등의 얘기를 간간이 들은 적이 있는데, 나로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일들이었다. 북한이 그 정도였어?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제법 길다. 박정희 정권 시절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40년이 넘는다. 봉건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민주화를 경험하지 못한 특수한 운동 환경은 민주적 의사소통보다는 가부장제나 권위에 의존하는 형태의 운동을 만들어냈다. 거기에다 학연, 지연 등의 요소는 같은 노선을 가진 운동권끼리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하는 측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말은 노선이 다르면 원수처럼 지내기도 했다는 뜻도 된다.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의 내홍이 점입가경이다.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갈등이라 묘사되는 현 상황이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일종의 호재로 작용할 것이다. 민통당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까. 2012년 5월 13일 현재, 이른바 당권파는 폭력적 상황까지 연출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기존의 제도권 정치를 통해서 보고 배운 것이기도 하기에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그리고 통진당이 한국의 진보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니 크게 기대할 것도 크게 실망할 일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당 이름 치고 안 좋은 이름이 어디 있는가.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 한나라당, 민주당, 새누리당 등 모두 좋은 이름들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름에 걸맞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기에, 진보라는 이름을 쓴다고 해서 곧 진보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태극기 머리에 두른 사람 중에서 제대로 된 애국자는 거의 없지 않은가. 어쨌든 현재의 통진당 사태를 볼 때 다음과 같은 판단은 가능해보인다.

아마도 비당권파는 이번 기회에 당권파의 (흔히 패권주의라 부르는) 집단주의를 일소하고 실질적인 헤게모니를 잡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일사불란한 전열을 갖춘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NL은 대중사업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대중 사업은 정치(精緻)한 논리적 토론이나 합의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교분과 감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때로는 이러한 문화가 일사불란하게 어떤 대응을 할 필요가 있을 때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지난번 선거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다분히 ‘성공적’인 결과를 낳은 이유 역시 오랜 대중 사업의 결과다.

반면에 PD는 견결한 계급성을 강조하지만 ‘영 아니다’ 싶은 대상과는 아예 상대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성공적인 대중 사업과 거리가 멀다. 선거판에서 PD나 좌파가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다. 얼마 전 좌파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진보 전략 회의’에서는 이번 선거 결과에 관한 토론회를 열었다. 좌파의 총체적 실패를 두고 ‘반성하자’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나는 그 평가가 ‘우리도 NL처럼’으로 들렸다. 기왕에 선거판에 끼어들 것이라면 NL을 비판하기 전에 NL처럼 하지 못한 것에 관해 반성부터 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비당권파는 일사불란한 전열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 NL적 성향의 당권파와 달리,다소 어중간한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어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실정에 있다. 더욱이 민심을 배반했다고 평가받는 유시민 그룹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은 좌파로부터의 심정적 지지를 얻는 데도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3.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

 

진보 운동 진영이 선거에 뛰어드는 것은 부르주아 제도들을 활용하면서 부르주아가 중심이 되는 사회를 극복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선거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활용과 관련해서는 이미 부르주아 지배 계급이 고수다. 선거판은 일종의 포커 게임이기도 하다.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면서도 자기 패를 모두 보여 주지는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진보 좌파는 패를 너무 많이 보여준다. 자금도 딸리고 경험도 없기 때문인지 속을 다 드러낸다. 그만큼 진보 좌파가 선거판에서 기득권 세력을 이기기는 힘들다는 얘기다.

국민들이 진보적 좌파에게 표를 주는 이유는 수권(受權) 능력 때문이 아니다. 보수 여당이나 야당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순수할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순수함이 훼손된다면 씻을 수 없는 부작용이 생긴다. 불순함으로 본다면야 보수 여당이나 보수 야당이 훨씬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간인 사찰 사건은 그야말로 탄핵을 해야 마땅한 사항 아닌가. 보수 여당의 정책을 일정 부분 계승한 보수 야당도 정권을 잡았던 적이 있다. 국민들이 그들의 부도덕함이나 반(反)민주성을 유야무야 대충 넘기는 이유는 그래도 그들은 권력을 잡고 무언가를 할 능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능력이 있든 없든 어쨌든 그들은 국민들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보수 야당과 선거 제휴할 때도 이른바 ‘당선 가능성’이라는 것이 늘 화두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제 통진당은 기존 정치권에서 보여줬던 행태를 그만 보여줬으면 한다. 이제 그만 주목받았으면 한다. 그리고 비당권파는 자신의 현실적 한계를 일단 인식해야 할 것이다. 당권파는 결코 만만한 조직이 아니다. 정치에서는 논리가 힘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집단적 연대가 힘이다. 전두환 대통령도 자기 부하들을 절대 충성파로 만드는 데 능했다. 누가 뭐래도 ‘존경하옵는 각하’다. 한편 그 시절에는 언론 통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는 사람은 다 알 수 있는 시대다. ‘모두가 정치가요, 모두가 정치 평론가다.’ 현재의 상황이 계속되는 것은 통진당에게 이롭지 않다.

당권파에게는 비당권파의 모습이 ‘조직적 기반도 없으면서 날로 먹으려는 태도’로 보일 것이다. 어떻게 이룬 결과인데 이렇게 줄 순 없다고 볼 것이다. 나아가서는, 당권을 준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당권을 가질 수도 없을 거라는 판단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례대표 선거과정에 오해가 있다고 하니 좀 더 조사를 해보는 것도 이미지 연출과 관련해서는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것이다. 투표 부정은 관례대로 한 것이거나 과장된 것일 수 있다. 문제는 그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것인데, 불분명하면 불분명한 대로 그때 가서 국민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보여줄지 고민했으면 한다. 그래서 통진당이 아니라 통진당의 일부를 포함한 ‘실질적인 진보적 좌파’가 정치에서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거나 장관 정도라도 만들고자 하는 단기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으면 한다. 아마도 이 길은 보수 여당이나 보수 야당 모두에게 실망한 이들의 마음을 얻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고, 진보라는 말이 누더기처럼 보이지 않을 때 좀 더 활짝 열릴 것이다.

 

21세기 『자본론』, 월간 〈작은책〉/ 나태영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21세기 『자본론』

– 월간 〈작은책〉-
?

글: 나태영(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참 언론은 약한 사람 눈, 귀, 입이 되어야 한다. 이 땅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99프로가 아니라 1프로를 위하는 언론기관들이 많다. 언론이라고 말하기조차 구차스러운 수구 언론들이 판을 친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힘이 약해져야 이 땅 서민들이 속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김진숙이 노동자를 해직시킨 한진중공업에 맞서서 높은 크레인에 올라갔다. 1년 넘는 기간 동안 올라갔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김진숙을 구하기 위하여 희망버스를 타고서 김진숙을 만나러 갔다. 제 정신이 박힌 진보언론에서는 김진숙과 희망버스를 크게 다뤘다. 조선일보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한미매국협정(한미FTA)이 시작되었다. 10년, 20년, 30년 후에 한미매국협정으로 비롯된 피해는 끔찍스러울 것이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한미매국협정에 반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중동은 한미매국협정에 찬성한다. 조중동은 한미매국협정에 찬성하는 여론을 만든다. 왜? 한미매국협정은 한국의 1프로와 미국 1프로에게 이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1프로로부터 많은 광고를 받으려는 꼼수 때문이다. 저들에게 광고주가 되지 못하는 99프로는 항상 눈 밖에 나있다. 조중동도 99프로를 위한 기사를 쓴다고 반론을 펴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저들의 그런 행동은 자신들이 내는 신문이 괜찮은 신문이라고 물타기 하려는 수작일 뿐이다. 이 땅 99프로에게 고통을 주는 한미매국협정에 찬성하는 여론 만들면서 99프로를 위하는 기사 쓰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일뿐이다. 전경련 회장 허창수가 “경제민주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허창수가 무식하고 염치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조중동이 뒷 배경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갑갑한 것은 저들의 수작에 넘어가는 99프로가 많다는 사실이다. 1프로의 종노릇하는 조중동은 과연 언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오죽하면 민주시민이 촛불집회 열 때마다 ‘조중동 OUT’ 이라는 팻말을 들고 있겠는가.

조중동의 그림자가 짙을수록 진보월간지 〈작은책〉이 내는 빛은 더 더욱 환하다. 우리는〈작은책〉에서 이 땅 99프로가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프로로부터 퇴직당해서 싸우는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1프로에 맞서서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왜 한미매국협정이 폐기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가부장제에 눌려서 힘들게 살면서도 가부장제의 한계를 조목조목 지적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북한에서 오신 분들이 이 땅에서 겪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지구를 지켜주는 생태교육도 받을 수 있다. 어린이학교 학생들의 재기발랄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8천년 민족사 최고 문장가 박지원선생이 칭찬하는 보통 사람들이 〈작은책〉작은책에많이 나온다.

〈작은책〉을 읽게 되면 국회의원들이 몸싸움하는 것을 피상적으로 비판하지 않게 된다. 저들이 무엇 때문에 싸우는 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저들 가운데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 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파업하는 철도 노동자들을 비판하지 않게 된다. 파업하는 철도 노동자들에게 마음을 함께해 줄 생각을 하게 된다. 프랑스 민주시민들처럼 말이다.
월간나는 개인적으로 〈작은책〉에 아쉬움이 있었다. 〈작은책〉에서 농촌 이야기를 다룰 때 그랬다. 〈작은책〉이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2012년 9월호를 보면서 나는 내 아쉬움을 달래게 되었다.
“독자님들, 저는 지금 전북 변산에 내려와 있습니다. 내년에는 〈작은책〉사무실을 일부 변산으로 옮길 예정이지요. 〈작은책〉이 노동자들의 현장뿐만 아니라 농민과 농촌의 실태를 가까이에서 보고 알리면서 독자님들과 함께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작은책〉2012년 9월호 10쪽)

한미매국협정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 땅 농민이다. 농민이 피해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너무도 많다. 일본에서는 다른 나라와 무역 협정 맺을 때 농민을 확실히 보호하는 쪽으로 협정을 맺는 것을 보면 우리도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부디 〈작은책〉이 이 땅 농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잘 알려주기를 바란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한미매국협정을 폐기하는 데에 〈작은책〉이 큰 역할을 해 주기를 기도한다. 〈작은책〉이라면 그리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작은책〉에 나왔던 분이 6개월, 1년 뒤에 한겨레신문이나 프레시안에서 다뤄지는 경우를 가끔 본다. 〈작은책〉정기 구독자이기에 느끼는 기쁨이다. 공유정옥씨가 하나의 보기가 될 것이다.(삼성반도체에서 일하시다가 백혈병을 얻어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반올림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공유정옥씨이다). 〈작은책〉이 진보적인 언론 가운데서도 맨 앞에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은책〉17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백두산과 만난다. 이오덕이라는 백두산 말이다. 민주주의 고갱이는 투표이다. 하지만 투표를 했다고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먹물들은 말한다. 민주주의 핵심은 대의제라고 말이다. 거짓말이다. 민중이, 백성이, 일꾼이, 노동자가, 가난한 사람이, 시민이 주인이 되어야 진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야 백두산 이오덕 선생 뜻을 알 것 같다. 이제야, 이제야 말이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한다.” “어린이(초등)학교 학생도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라고 말씀하신 뜻을 이제야 깨닫는다.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듯이 말이다. 맞다. 참말로 민주주의는 일하는 사람이 권력을 쥐는 것이다. 나는 안다. 이오덕 선생이 이 말을 하려고 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먹물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 일하는 사람이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작은책〉은 일하는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 준다. 그래서 나는 〈작은책〉이 좋다. 이오덕 선생은 좋으시겠다. 작은책이 울끈 불끈 힘차게 나아가니 말이다. 〈작은책〉이 벌써 17주년(2012년 5월 1일 노동절)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칼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이 다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렇다. 『자본론』 대가 김수행 교수와 강신준 교수가 언론에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자본론』은 노동자의 성서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론』 이라는 책은 너무 어렵다. 실력 있는 사람과 어울려 여럿이서 읽어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것도 1년에서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공을 들여야 읽어낼 수 있는 어려운 책이다. 보통 사람이 혼자 읽기는 쉽지 않은 책이다.

『자본론』을 읽고 싶지만 어려워서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진보월간지〈작은책〉을 권한다. 한 달 보는데 3천원이다. 2010년에 작은책 강연 뒷풀이 때 한 분이 작은책 한 달 보는 값을 올리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당시 작은책 일꾼 최규화 씨가 말했다. “한 달에 3천원 해도 부담 되서 못 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작은책〉 정신이다. “한 달에 3천원 해도 부담 되서 못 보시는 분들이 많은” 이런 상황이 바로 21세기 대한민국 현실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작은책〉 꼭 정기구독 해주십사 부탁드린다. 〈작은책〉을 정기구독하는 순간 여러분은 지성인이 된다. 한 달에 3천원도 부담 되서 〈작은책〉 보지 못하는 분을 위해서 〈작은책〉 후원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삼성일반인노조, 구속노동자후원회 같은 단체나 해고노동자 등이 여러분의 후원으로 〈작은책〉을 받아보실 수 있다.

 

 

들뢰즈, 베이컨의 외침을 감각하다 [청춘의 고전 시즌2]-⑩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⑩

?? 일시: 2012. 8. 11.?(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들뢰즈, 베이컨의 외침을 감각하다

?- 베이컨의 와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

?
강연: 김범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일그러진 얼굴의 초상화

▲ Three Studies of George Dyer, 1966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이 그림은 베이컨(Francis Bacon, 1909~ 1992)이 그린 인물의 초상화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초상화와 많이 다르다. 일그러지고 뒤틀려있어 원래 누구의 얼굴을 그린 것인지 짐작하기 힘들다. 흡사 피카소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정지 상태와 운동 상태가 뒤섞인듯하고 대상을 왜곡시키며 순간을 포착한 듯 보이는 이런 화법은 베이컨 그림의 특징이다.

청춘의 고전 열 번째 강의에서 만나볼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초상화를 그리며 얼굴을 ‘해체’시켰듯이 항상 자신의 그림에서 ‘형상을 해체’시킨다. 이 해체를 두고 김범수 교수는 “이것은 가장 감각적인 상태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베이컨의 그림에서 “왜 얼굴이 일그러지는가?”라고 다시 묻는다. 여기에 답하려면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철학에서 힌트를 얻어야 한다.

이번 강의에서 들뢰즈의 철학을 안내해줄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가 “감각은 심층에서 방출 된다”고 말한 점을 강조하면서 베이컨은 “새로운 감각을 구현하는 것”으로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자화상의 경우 그 밑바탕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찌그러진 모습으로 형상화 했다고 설명한다. 이 부분이 베이컨의 그림과 들뢰즈의 철학이 만나는 지점이다.

김범수 교수는 “사실 들뢰즈는 이미 『감각의 논리』란 책에서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비평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바가 있다”고 한다. 들뢰즈는 당시 철학자로서는 파격적인 외도를 많이 했는데 문학, 미술, 영화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들뢰즈는 이런 독특한 철학관을 통해 베이컨과 관계를 맺고 그의 그림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의 ‘독특한’ 철학체계는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1930~1992)와 함께 쓴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에 대한 정의를 ‘개념창조’라고 한데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개념창조란 말은 들뢰즈가 자주 쓰는 내재성의 철학ㆍ유목의 철학이란 말과 일맥상통한다. 내재성이란 초월성(신, 이념, 자유의지)과는 반대의 개념이고 경험의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 자연 전체의 얘기이고 경험하는 세계는 『장자(莊子)』에서 말하는 혼돈상태와 같다. 이 때 혼돈은 규정되지 않은 상태를 지칭한다. 규정되지 않은 이 애매모호함을 해결하기 위해 철학은 신을 찾았고 자유의지를 찾았다. 또 정치에서 이념은 신을 대신하기도 했다”

들뢰즈는 이런 통념을 바꾸려고 한 철학자다. 그런데 철학을 하면서 ‘규정’이라는 것은 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고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미 주어진 것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들뢰즈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새롭게 개념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들뢰즈는 ‘개념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것이 들뢰즈 철학의 핵심이다.

 

베이컨의 ‘외침’ : 재현체계의 거부

같은 맥락에서 들뢰즈는 “예술은 감각-정서의 구현”이라고 정의한다. 예술은 감각의 구현을 통해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다. 김범수 교수는 “이것은 ‘내재성의 사유’와 다를 바 없고 들뢰즈는 결국 예술과 철학이 모두 ‘내재성의 사유’와 관련한다고 말한 것”이라고 하면서 베이컨의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을 따른 연구>에 주목한다. 이 그림은 원래 벨라스케스의 원본 그림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리메이크한 그림이다.

▲ 좌측 :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 1650 ⓒDiego Vel?zquez(디에고 벨라스케스) / 우측 :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을 따른 연구, 1953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입을 벌리고 무언가를 외치는 듯 보이는 얼굴의 묘사는 괴기스럽고 보는 이로 하여금 다분히 공포감을 준다. 얼굴은 마치 빛의 간섭현상처럼 바탕과 중첩되면서 해체되는데 이를 들뢰즈의 용어로 ‘아플라(aplat)’라고 한다. 아플라가 존재하고 형상은 지워지며 윤곽이 그려지면서 기존의 구상미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이 되었다. 김범수 교수는 베이컨이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다시 그린 이유로 관람자들이 교황의 그림이라는 선입관으로 그림에서 기존의 서술적 이야기를 끌어내는 점을 문제 제기하면서 동시에 엄숙한 원본 그림과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인식이 선행되기 이전에 감각을 일깨우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김범수 교수는 이어서 베이컨과 들뢰즈의 공통점을 ‘재현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베이컨은 전통적인 구상미술의 재현을 거부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은 전통적인 재현체계를 갖춘 구상미술의 전형이다. 그림 안의 수많은 철학자들은 이미 기존의 것과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고 화가는 이것을 풀어내는 이야기꾼에 불과하다. 기존 통념으로 주어진 것 위에서 다시 재현하는 이런 체계는 감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아테네 학당, 1510~1511 ⓒRaffaello Sanzio(라파엘로 산치오)

들뢰즈의 철학 역시 표상ㆍ재현체계를 거부한다. 김범수 교수에 의하면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정신분석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특히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는 기준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미 존재하는 틀거리(근거)에 특정 사안을 외삽(外揷)해 버리는 태도라고 비판한다. 기존의 주어진 것에 그냥 덧붙여서 추정되는 결론을 맞는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습관에 의한 사유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은 내재성이 될 수 없고 창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김범수 교수는 “베이컨이 재현의 체계를 거부했다는 것이 들뢰즈에게는 큰 매력으로 느껴졌을 것이고 이것이 들뢰즈가 베이컨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이유였을 것”이라고 한다.

 

‘기관 없는 신체’와 ‘고기-되기’

들뢰즈는 당시 ‘잔혹(殘酷) 연극’이론으로 무대 위에서 대사뿐 아니라 조명?음향?배우의 몸짓 등을 통해 훗날 전위극(前衛劇)이라는 새로운 감각의 연극 장르를 개척한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에게서 빌려온 개념 ‘기관 없는 신체’가 베이컨의 작품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말했다.

베이컨은 항상 “나는 공포보다 오히려 외침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고 더 나아가 “나는 결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미소를 그리려고 했다”고 말했다. 공포는 외침을 통해 완화되고 입은 벌려진 채로, 얼굴은 주변의 배경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얼굴이 변형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신체 기능이 사라지면서 그 ‘기능’은 새롭게 재편된다. 베이컨은에서 이른바 ‘고기-되기’ㆍ’동물-되기’ 라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되기’라는 개념은 감각과 힘을 다시 배치한다는 의미이다.

▲ Painting, 1946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김범수 교수는 ‘되기’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예를 들어 축구선수가 야구선수가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축구선수의 근육과 운동 및 환경이 야구를 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바로 이 새로운 배치가 ‘생성’의 의미이고 ‘되기’의 의미라고 한다. 우리는 골키퍼가 절묘하게 공을 막아낼 때 ‘동물적 감각’으로 골을 막았다는 표현을 한다. 이 표현은 골키퍼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감각과 힘을 동물과 같은 상태로 배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가장 감각적인 순간이며 가장 감각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인 동물적인 것은 고기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신체의 ‘기능’은 중요하지 않고 ‘감각의 다발’의 ‘배치’가 중요하다.

여기서 ‘기관’과 ‘신체’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면 ‘기관’이란 “기능에 국한된 하나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것으로 그 목적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고 ‘신체’는 이와는 반대이다. 들뢰즈는 “신체는 물질덩어리로 ‘강도 0’의 상태, 즉 양 힘이 팽팽하게 맞붙어 움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김범수 교수는 “내 가슴 앞에서 양 주먹을 맞붙여 동시에 가운데로 힘을 가하는 상태가 바로 이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두 주먹의 배치가 달라지면 균형의 상태가 달라지듯이 ‘신체’는 힘들로 가득해서 역량들이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생성이 이루어지는 상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강도로 가득하고 감각과 정서가 집약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기관 없는 신체’에 해당한다.

‘Painting’에서 베이컨은 고기를 ‘감각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사용했다. 그림 안에서 잔혹해보이지만 끊임없이 생성하는 원초적인 힘들을 구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베이컨은 여전히 형상을 지운다. 그림 속의 우산은 얼굴 없는 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서든 차단하려는 용도이며 바탕에서부터 대상의 이야기가 다시 배치되게끔 그림을 그려냈다. 이런 감각의 배치 때문에 베이컨이 그린 초상화 속의 얼굴은 항상 일그러져 있고 변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겉모습이라 함은 오직 한 순간에만 고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잠깐 눈을 깜박이거나 고개를 약간 돌렸다가 다시 보면 그 겉모습은 이미 달라져 있다. 내 말은, 겉모습이란 계속적으로 ‘떠다니는 것[부유(浮遊)]’과 같다는 의미이다” – 프란시스 베이컨 –

김범수 교수는 베이컨에게 있어 ‘얼굴의 왜곡’이란 “사물의 겉모습 너머에 있는 존재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며 “가장 감각적인 상태를 구현”함으로써 “저 심층에서부터 감각을 방출시켜 안정 상태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충동’을 반영하고 있다”고 정리한다. 김범수 교수는 여기에 덧붙여 이 상태는 프로이트가 말한 ‘흥분을 적당히 방출하는 것이 평온의 상태며 쾌락의 상태’라는 프로이트의 쾌락원칙을 넘어서 있는 것으로 베이컨의 그림은 변화하고 생성하는 상태를 얘기하고 싶은 것이며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에서 그 의도를 찾아낸 것이라고 한다.

▲ 자화상, 1971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들뢰즈의 존재론과 베이컨의 그림

베이컨이 많은 작품들에서 보여준 시도들은 들뢰즈의 철학에 그대로 적용된다. 특히 들뢰즈의 존재론과 관계하는데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의 존재론은 전통적인 ‘be’ 동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can’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들뢰즈의 존재론적 ‘can’의 의미는 단순히 무엇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량으로, 생성으로, 창조로 자신의 존재론을 구축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있음’에 대한 이야기는 전통적 존재론이다. 김범수 교수에 의하면 고대 철학의 이데아론, 범주론 등은 모두 ‘be’ 동사의 얘기로 ‘be’는 ‘존재’를 의미하는데 이때 확실한 규정이 생긴다. 그러나 들뢰즈의 존재는 주체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 없이 ‘can’-‘pouvoir’-‘puissance(힘, 역량)’으로 얘기할 수 있다고 한다. 들뢰즈는 변화하는 존재의 양태를 ‘be’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주체는 ‘애벌레 주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김범수 교수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 : Cogito ergo sum)” 명제를 예로 들면서 완벽한 인간의 이성적 사유와 주체성의 존재를 증명하는 듯 보이는 이 명제도 결국 최종 확인을 위해서는 수많은 ‘나’가 있어야 하고 그 수많은 ‘나’ 중에 또 주체가 필요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경우에는 ‘나’라는 주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작동시켜주는 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다.

내 안에 여러 ‘나’가 꿈틀대고 있는데 이 여러 ‘나’들의 힘들이 작동되는 관계가 있고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이 관계가 작동된다. 들뢰즈에게 ‘있다’라고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생성하는 ‘나’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자리에 지금 존재하는 ‘내’가 있지만 내 안에 많은 ‘나’들이 분화하여 새로운 관계들을 이 안에서 맺고 있다는 것이다.

김범수 교수는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의 예를 들어 다시 들뢰즈의 존재론 설명을 이어간다. “스피노자의 경우 제일 중요한 개념은 ‘실체’이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자연전체’이며 실체가 자족적으로 관계들에 의해 변화한다. 내부에서는 변화들이 우글거리는데 ‘기관 없는 신체’는 바로 그 상태를 말한다. 들뢰즈는 지구를 ‘기관 없는 신체’라고 하는데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실체개념이고 역량으로서의 존재이다”

이 존재론이 베이컨에 와서 새로운 감각을 구현하는 것으로서 회화의 방식이 되었다. 그리고 밑바탕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형상화 했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 자체가 자신의 존재론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생성을 얘기하고 기존의 습관적이고 재현적인 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이 저 밑바탕에서부터 배경과 함께 다시 배치되는 모습, 이것은 끊임없이 생성하는 원초적인 힘이며 이 자체가 ‘기관 없는 신체’이다. 같은 맥락에서 베이컨이 구상화의 틀을 버리고 서술에서 벗어났을 때, 저 밑바탕에서 찾은 새로운 것은 고기, 동물, 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에 해당한다.

후기: 진보성 (한철연 회원)

들라크루아와 쿠르베,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청춘의 고전 시즌2] – ⑨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⑨

?? 일시: 2012. 7. 21.?(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들라크루아와 쿠르베,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 ?낭만주의적 시선과 사실주의적 시선의 차이 –

 

강연 : 조은평(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혁명에 대한 이미지와 정서

‘프랑스 혁명’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혁명’이란 이름만으로 쉽게 떠올리고 공감할 수 있는 예술작품의 이미지가 있다. 자유ㆍ평등ㆍ박애의 정신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들고 수많은 군중의 선두에서 혁명의 깃발을 들어 올리는 여신의 이미지. 1830년 7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외젠 들라크루아(Eug?ne Delacroix, 1798~1863)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다.

‘1830년 7월 28일’이란 부제가 붙어있는 이 그림은 프랑스 혁명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한 때 프랑스 화폐의 배경 그림으로 쓰였고 최근까지 수많은 패러디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이 그림의 표상을 인식하는 만큼 실제 혁명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이 그림을 “세상 모든 혁명의 면모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것”으로까지 여기는 듯하다. 아마도 이 숨길 수 없는 막연함으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민중을 이끄는 자유, 1830 ⓒEug?ne Delacroix(외젠 들라크루아)

청춘의 고전 아홉 번째 시간, 이번 강의를 맡은 조은평 교수는 이 강의를 구상한 의도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아주 간단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두 가지 ‘혁명’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것은 ‘상징화된 혁명’의 이미지와 표상의 의미로 ‘상식화된 혁명’의 모습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실제 ‘혁명’에 대한 기억은 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은평 교수에 의하면 이 문제의식은 들라크루아가 그린 ‘7월 혁명’의 진짜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면서 1871년 ‘파리코뮌’의 혁명성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상징화된 그림 속의 혁명과 실제 혁명 사이의 간극은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이어지는 화풍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 ‘파리코뮌(Commune de Paris)’은 1871년 3월 18일부터 같은 해 5월 28일 사이에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 72일간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를 말한다.

사실 들라크루아가 그린 7월 혁명의 내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대단하지만은 않다. “단 3일에 걸쳐 샤를 10세의 복고왕정을 몰아내고 ‘루이 필리프’라는 새로운 국왕을 내세워 입헌군주정이라는 또 다른 왕정을 이뤄낸 부르주아 혁명의 한 단계”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잊혀지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프랑스 왕정을 종식시킨 공화정의 상징이 되었다. 반대로 파리코뮌의 혁명은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코뮌 당시의 조치와 내용들이 사람들에게 더 많이 기억돼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민주주의는 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상대적으로 사라지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봉합’되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의문으로부터 이 강좌는 시작되었다.

낭만주의 시선과 사실주의 시선의 차이

“진정한 예술가란 격정과 열정을 증폭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 주제다. 주제는 너 자신이다. 주제는 자연 앞에서 받는 녀의 인상, 너의 감정이다” – 파트리시아 프리드카라사 저, 『회화의 거장들』 중에서 들라크루아의 말 –

조은평 교수에 의하면 실제로 들라크루아는 “예술은 바로 ‘순수한 환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었고 스스로도 인정하는 낭만주의 회화의 대가였다. 조은평 교수는 “사실 이러한 순간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낭만주의 회화의 전략인 것 같다”고 부연한다.

19세기 초에 발생하여 신고전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낭만주의는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작가 자신의 느낌과 감성을 표현해낸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현실에서 직접 겪은 사건을 그림에 나타내지 않고 자기의 주관적인 감정을 화폭에 담는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도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풍의 그림으로 실제로 들라크루아 자신이 직접 혁명에 참여하여 목도한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 전해들은 혁명 얘기에 감동 받아 3~4일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또 다른 들라크루아의 작품으로 고대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의 몰락을 주제로 자신의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완성한 작품인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나 제리코(G?ricault, 1791~1824)가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의 난파사건을 모티브 삼아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은 낭만주의 그림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들은 작가의 개성과 감수성, 상상력을 잘 드러내고 인상적인 주제를 대담한 색채와 강렬한 붓 터치로 표현하여 화가의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들은 당시의 실제 현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경우 “들라크루아는 정치적 의미에는 관심 없고 단지 정말 역동적으로 작품 속 대상을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

▲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7 ⓒEug?ne Delacroix(외젠 들라크루아)

▲메두사호의 뗏목, 1819 ⓒG?ricault(제리코)

이에 비해 낭만주의적 전통을 거부하면서 나온 사실주의 회화는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주변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낸다. “기억의 낭만은 기억 속에서는 아름답지만 반대로 사실은 잔인하고 불편할 수 있지 않은가?” 조은평 교수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준다면 천사를 그리겠다”고 한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발언을 두고 보면 이전 낭만주의 화풍과 비교하여 사실주의 화풍의 차별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화풍의 차이뿐만 아니라 사회현실을 보는 시선 또한 매우 달랐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했던 쿠르베는 1848년 혁명에 가담했고 1871년 파리코뮌에도 적극 가담한다.

쿠르베는 살롱에 제출한 <오르낭의 매장>이 퇴출당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개인전을 열게 되었고 최초로 ‘사실주의(realism)’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실주의는 이상에 대한 부정이다”, “사실주의는 민주적인 예술이다” 쿠르베는 사실주의라는 용어로 “일상생활의 주제를 역사화의 반영으로까지 끌어올리는 회화 스타일”을 지칭한다. 조은평 교수는 “과거에는 역사가 이상화된 이미지였지만 쿠르베는 일상생활의 주변 얘기들을 역사화의 주변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평한다. <오르낭의 매장>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슷한 시기 도미에(Daumier, 1808~1879)가 그린 <삼등 열차> 역시 같은 맥락의 그림이다.

▲ 오르낭의 매장, 1849~1850 ⓒCourbet(쿠르베)

▲ 삼등 열차, 1862년경 ⓒDaumier(도미에)

<화가의 작업실: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에서 쿠르베는 화가인 자신이 중심에 있고 한쪽에는 괴로운 생활에 찌든 평민의 모습을 그려 넣고 반면에 다른 쪽에는 자신이 그리는 풍경화를 보고 여유롭게 감상하고 있는 귀족들을 그려 넣어 양쪽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구도를 구현했는데 그림에서 자신의 위치와 대상들의 강조를 통해 사실주의의 시선으로 현실에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임과 동시에 모순적인 현실을 고발하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 화가의 작업실: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 1854~1855 ⓒCourbet(쿠르베)

낭만과 사실의 간극 : 1830년 혁명과 1871년 ‘파리코뮌’

조은평 교수는 “들라크루아와 쿠르베는 비슷한 시기를 살았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너무 컸었고 추구하는 화풍의 차이로 인해 두 그림 사이의 간극은 환상과 현실의 간극과 같다”고 하면서 문제는 “역설적으로 들라크루아의 현실에 대한 유일한 그림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가 대중적인 혁명의 이미지로 기억된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낭만적인 혁명의 이미지가 자꾸 대두되면서 혹시 이런 낭만주의적 혁명의 이미지를 통해 당시 혁명의 진실 뿐 아니라 혁명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저 흘려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마치 민주주의는 다 저런 피를 먹고 이룩되었다는 식의 생각으로 점철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자답했다.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고 민주는 실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기만 속에서 낭만의 추억으로 혁명을 떠올리면서 지금을 잊고 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곧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대의제 민주주의, 세계화된 자본제 등)을 낭만주의적으로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의 이념 속에서 공화국이 완성된 것만 기억하고 이것이 공화정의 완성이라고 기억하게 하는 것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이미지”라고 하면서 “더 극단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하려 했던 것들이 억압되고 참혹하게 진압된 역사적 사실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사이에 프랑스 혁명의 종착점인 ‘파리코뮌’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감춰지고 만다.

혁명의 모습들은 결국에는 혁명 내부의 여러 갈등 요소와 존재들을 봉합하는 차원에서 ‘종결됐다’고 사람들에게 강요되었으며 이런 과정의 결과물이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라는 것이다. 삼색기는 결국 균열을 봉합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더 급진적인 민주주의로 발전시키는 길이 있었음에도 봉합을 통해 그 길이 차단된 것이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아벨 로르동의 <1830년 7월 혁명의 3일간의 이야기>와 앙리 펠릭스 엠마뉘엘 필리포토의 <1848년 2월 25일 시청에서 혁명의 붉은 깃발을 물리치는 라마르틴>에서 보이는 단색기와 삼색기의 대립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 1830년 7월 혁명의 3일간의 이야기, 19세기경 ⓒ아벨 로르동

▲ 1848년 2월 25일 시청에서 혁명의 붉은 깃발을 물리치는 라마르틴, 19세기경 ⓒHenri-Felix-Emmanuel Philippoteaux(앙리 펠릭스 엠마뉘엘 필리포토)

모든 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혁명에 참여했었지만 자본주의 세력의 안정화, 산업자본가ㆍ금융가 등 세력이 성장하면서 결국은 부르주아 혁명의 확립으로 귀결되어 그 이상의 급진적 혁명은 계속해서 봉쇄된 역사였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848년 ‘2월 혁명’ 이후 ‘6월 봉기'(1848년 6월 23일~26일 파리에서 발생한 사회주의자ㆍ노동자의 반란)가 진압된 당시 현실이다. 이를 두고 맑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는『신(新)라인 신문 Neue Rheinische Zeitung』에서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박애는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와 혁명가들의 이해관계가 상통할 때만 지속됐다. 1789년 이후 수많은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들 중 질서에 대항하려는 시도는 한 번도 없었다. 지배와 예속의 정치적 형태가 숱하게 변화했음에도 모든 혁명은 계급지배와 노동자들의 예속, 부르주아 질서를 존속하게 내버려두었다. 6월은 이 질서를 건드렸다.”

조은평 교수는 “1830년 7월 혁명은 성공하여 입헌왕정을 확립하고 공화정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던 반면, 파리코뮌은 지나치게 혁명을 극단화한 결과, 공화정을 넘어 극단적인 민주주의 길로 나아가려 했기에 진압 당한 과격한 이상주의자들의 결과물로 치부되는지도 모른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파리코뮌’을 담은 그림은 별로 없다. 파리코뮌은 멋진 그림으로 등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 1871년 3월 19일 바리케이드, 1871 ⓒ장 밥티스트 프랑수아 아르노 뒤르벡

파리코뮌의 기억과 현대 민주주의

조은평 교수는 파리코뮌의 의미가 “실질적 민주주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맑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파리코뮌의 의미를 평가했는데 내용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 상비군의 폐지와 무장 인민의 대체, ? 행정과 입법을 겸하는 행동기구, ? 경찰의 폐지와 코뮌의 관료에 대한 상시적 해임 가능(소환권), ? 공직은 노동자의 임금으로 수행, ? 교회의 해산과 교회 재산 몰수, ? 억압이 아닌 확장적인 정치형태를 구현 등을 들 수 있다. 인민들이 스스로 자신들 운명의 주인이 되었고 노동자 계급이 단순히 기성의 국가 기구를 접수하여 자기 자신들의 목적으로 그것을 행사할 수 없음을 확실히 했다.

이 당시 파리의 상황은 도둑이나 절도와 같은 범죄가 거의 없었고 1848년 2월 이래 파리는 안전을 되찾았는데 경찰과 같은 국가의 질서유지 방법이 동원되지 않은 상태에서였다. 쿠르베도 1871년 4월 15일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파리는 참으로 낙원입니다. 경찰도 없고, 비행도 없으며, 어떠한 방식의 부당한 행위도 없습니다. … 파리가 언제나 이처럼 있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프랑스 내전』中)

맑스는 파리코뮌을 두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했다”고 평가했는데 사실상 “99% 민중의 독재”라는 말은 “인민의 통치”를 의미하고 “민주통치가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상태”라고 조은평 교수는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 본뜻인 ‘인민(demos)의 통치(지배kratos)’로 이해할 수 있다. 파리코뮌은 역사상 가장 인민의 통치(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일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ofㆍbyㆍfor the people)’라는 구호는 시혜적 느낌이 강하다. 이것을 파리코뮌의 기억과 연결한다면 그 간극은 더 크다. 조은평 교수는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의 한 문장을 인용하여 “민주주의라는 말은 누구나,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기의가 불명확한 텅 빈 기표”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지금의 민주적 제도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금의 것과 다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인민의 역량에 족쇄를 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삶을 관여하는 정치와 경제시스템에 참여하는 시간은 아주 잠깐이다. 이런 무능력한 현실을 인식하며 사실주의적인 시선을 통해 얻는 비관적 전망은 정치에 대한 냉소를 초래한다고 본다. 마치 “세계에 대한 욕망을 견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가 자신을 욕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리비돌로지』中)인 우울증자들과 같다는 것.

혁명에 대한 단상도 이와 같아서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환상”과 “사회주의 국가 몰락에 의한 사회주의에 대한 냉소”가 맞물려 우리 현실에서 구체적인 혁명의 전망은 상실한 듯하다.

“정권교체라는 낭만적 정치혁명”이 있을 뿐이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가 그랬던 것처럼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 같은 혁명의 이미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전락한다. 조은평 교수는 오늘날의 이런 망각 상황에 대해 ‘파리코뮌’은 바로 “우리 시대의 실재가 유령처럼 튀어 오르게 해주는 망각된 혁명의 기억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와 해방의 길

조은평 교수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들어 이데올로기 동굴 속에 있는 현대인을 가정한다. 그리고 파리코뮌의 노동자들은 “플라톤의 ‘동굴’에 묶여 있는 ‘죄수’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힘으로 동굴을 빠져나가 햇빛은 본 해방된 노동자들”이라고 비유한다. 한편 지젝(Slavoj zizek, 1949~)의 지적처럼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주목해서 결국 기존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의 형태, 삶의 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 속에서도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예를 들면 한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서 어떤 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 세상이 확 바뀌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도 파리코뮌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전문적 식견을 가진 사람이 관리가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아닌 누구나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파리코뮌의 의의이다.

“인민은 자기 의무를 다한 수임자(受任人)들에게 감사해선 안 된다. … 왜냐하면 인민의 대표자들은 의무를 다한 것이지 도움을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리코뮌 당시 클럽 기관지였던 『프롤레타리아』에 실린 말이다. 조은평 교수에 의하면 이것은 ‘평등의식’을 말하는 것이고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가 『무지한 스승』에서 규명한 모든 사람은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파리코뮌에서 보여준 철저한 평등의 시각과 실천이 파리코뮌이라는 역사적 현장을 있게 만든 힘이었고 랑시에르가 규명한 지적평등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어서 이를 현실에서 입증해 나간다면 현실은 다시 파리코뮌과 같은 급진적인 사고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은평 교수는 “랑시에르의 말처럼 해방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우리 스스로가 먼저 해방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중요하다”고 말한다. “해방하는 인간”과 “해방되는 인간”을 만들어 내면 이들이 모여 “해방된 사회”를 만들어 낸다.

체 게바라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말했다. 조은평 교수는 “낭만주의적 시선에 문제를 제기하고 사실주의로 가자”고 하면서 낭만주의로 혁명을 보지 않고 우리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리얼리스트가 되는 것이 파리코뮌과 혁명의 의미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거꾸로 그런 리얼리스트의 시선 속에서 불가능한 꿈은 다시 낭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망각하기 위한 낭만이 아니라 열정이나 열망으로 불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그람시가 얘기한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를 겸비해야 한다. 그래야 사실주의적 시선으로 지성을 들이댈 때 사람들이 우울증이나 비관주의의 함정으로 빠지는 실수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기: 진보성 (한철연 회원)

핵 패권주의 확인의 장, 핵안보정상회의[시대와 철학]

핵 패권주의 확인의 장, 핵안보정상회의[시대와 철학]

강지은(ⓔ시대와철학 편집주간)

 

 

7~8만명이 8월 6일 사망, 그 해 말까지 9~14만명 서서히 사망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이후 히로시마의 이야기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집계 : 직접 피폭 사망자 56명, 최고 4000명 암으로 사망 예상
그린피스 집계 : 20만 명 사망 추정, 9만3000명 암으로 사망 예상
핵전쟁 방지를 위한 의사회 집계 : 54만 명 불구자, 최소 5만 명 사망 예상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3분 이후 체르노빌의 이야기이다. 히로시마 원폭 500배 규모의 방사능이 유출된 그곳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과 방사능 유출로 아직 집계조차 되지 않는 피해가 지금도 발생하고 있다.
2011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지금 대한민국은 53개국의 정상이 참여하는 핵안보정상회의(26, 27일)로 들썩이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명박 정부가 들썩이고 있고, 차량2부제 시행으로 서울시민들이 들썩이고 있다. 핵안보정상회의의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09년 4월 미국의 핵정책에 관한 프라하 특별연설에서 궁극적으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지향해 나가되, 우선적으로 향후 4년 내 전 세계의 취약 핵물질을 안전하게 보호(secure)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적 노력을 추진할 계획임을 천명한 데에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2010년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회의가 궁극적으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하여 세계정상들이 모이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회의의 의제를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회의의 주요 의제들은 핵물질 통제 강화 및 최소화, 시설보안 강화, IAEA와 유엔1540위원회 등 국제 핵안보 체제간의 협력·조정 강화, 불법거래와 밀수 방지 및 국경통제 강화, 핵안보와 원자력 안전간 시너지, 방사성 테러방지를 위한 방사성 물질 안보 등이다. 여기 제시된 어느 의제에서도 핵무기 보유국의 구체적인 핵무기 감축 계획은 들어있지 않다.

대신 언론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각국 정상들과 200여차례(24~29일)의 양자 회담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홍보하는 데에 열을

▲ 이명박 대통령이 27일 폐막된 핵안보정상회의에서 각 국 정상들과 함께 하고 있다. ⓒ뉴시스

올리고 있다. 특히 언론들은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오바마 미국 대통령,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등 6자회담 당사국 정상들이 북한의 최근 장거리 로켓 발사 의지에 관하여 논의할 것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이번 핵안보정상회의는 세계의 패권을 쥔 나라들이 동북아의 긴장에 긴밀하게 연관되고자 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야야 한다. 더군다나 언론은 핵안보정상회의의 정식 의제는 아니지만 ‘북한의 로켓 발사 계획’과 관련하여 북핵문제가 거론될 것임을 흘리고 있다. 여기에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핵안보정상회의는 핵테러, 핵전쟁 없는 평화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노골적으로 세계의 패권을 확인하는 자리처럼 보인다. 핵안보정상회의 공식 의제는 ‘비국가행위자에 의한 핵물질과 방사성물질 탈취 또는 관련 시설에 대한 공격 등을 예방하고 대응하는 핵안보(nuclear security)’ 문제다. 그러나 도대체 그 비국가행위자는 어디에 있는가? 세계 53개국 정상이 모여서 의논하면 비국가행위자가 적발이 될까? 오바마는 9.11을 상기하라고 한다. 9.11은 끔찍한 기억이다. 9.11이 의문 한 점 없이 정확하게 밝혀졌다고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전세계의 시민들은 실체 없는 비국가행위자를 향해 핵무기를 겨누는 정상들을 용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자국의 핵무기 감축과 핵발전 중지에 목소리를 모아야 하며, 핵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평화를 우리 모두 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들어진 신화 사무라이정신, 장성훈의 『사무라이정신은 거짓이다!』/나태영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만들어진 신화 사무라이정신

장성훈의『사무라이정신은 거짓이다!』

글: 나태영(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현재를 다스리는 사람이 과거를 다스리고, 과거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래를 다스린다.’
고대 이집트 사상이 고대 그리스 사상보다 더 뛰어나다.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이 이집트에 공부하러 갔다고 자주 자랑한 것을 보면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이정호 교수 한테서 들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일반인은 드물다. 한국고대사가 중국고대사보다 더 뛰어나다. 이형구 교수, 우실하 교수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이 땅 다수 역사학자들이 게으르고 무능해서 그런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들은 화이사관, 식민사관에 물들어서 그렇다. 그들은 이완용 양아들인 이병도의 자식들이다.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죽기 전에 참회하고 단군신화가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 자식들은 그 애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착잡한 일이다. 그들은 신채호 선생만한 역사관도 지니지 못했다. ‘현재를 다스리는 사람이 과거를 다스리고, 과거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래를 다스린다.’ 중국이 동북공정, 하상주단대공정(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시기를 밝히는 공정)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중국 어용 역사학자들은 단군왕검, 광개토태왕, 을지문덕장군도 중국인 조상으로 둔갑시키려고 한다. ‘가늠할 수 없는 꿈의 크기’ 대조영도 저들은 중국인 조상으로 둔갑시키려고 한다. 징기스칸을 중국인 조상으로 생각하는 중국인들 많다. 무섭고도, 무서운 현실이다. 두 눈 부릅뜨고 우리는 우리 고대사 공부해야 한다.

일본인은 거짓을 참인 것처럼 만드는데 도통한 인간들이다. 없었던 왕을 있었다고 끊임없이 우긴다. 일본 고고학자는 일본에 구석기 시대가 있었다는 역사를 만들려고 가짜 구석기 유물을 땅 속에 묻었다. 거짓이 항상 참을 이길 수는 없다. 언론을 통해서 그 학자 거짓이 드러났다. 보통사람 장성훈이 쓴『사무라이정신은 거짓이다!』라는 이 책이 일본인들이 거짓말한 사실을 잘 드러내준다. 이런 책을 역사학자가 쓰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청나라 정사인『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라는 책도 이 땅 역사학자들은 번역하지 않았다. 우리 고대사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도 그랬다. 저들은 뼛속까지 화이사관, 식민사관에 물든 인간들이다. 최초로 번역한 사람은 공무원 장진근이다. 세상에 나온 지 232년 만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되었다. 이 땅 역사는 힘 있는 사람들보다 뜻을 지닌 보통사람들이 가꾼 역사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 현대사에서 대통령들은 작것질을 했다. 독도에 대해서 말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이 그리했다. 보통사람들이 독도를 지켰다. 장성훈도 중요한 일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무라이정신은 거짓이다!』, 장성훈 지음, 북마크 펴냄, 2011년

사무라이정신은 근대에 만들어진 이름이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이긴 일본은 자신감을 되찾으며, 서양 열강과 맺은 굴욕적인 통상조약을 개정하는 데 성공한다. 그동안 서양 열강에 갖고 있던 열등감으로부터 자신감도 회복한다. 그러면서 서양의 사상보다는 일본의 ‘고유한 가치관’을 갖자는 기류가 사회 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BUSHIDO-The Soul of Japan』이라는 책이 미국에서 영어로 발간된 것도 이때1898년였다.’

‘그 이전의 어떤 문헌에도 ‘무사도’라는 단어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무사도라는 말 자체를 이 책의 저자가 창안하여 만든 글이라고 책에서 밝히고 있다.’(55쪽)

‘그가 유럽의 교수로부터 “일본은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학생들에게 도덕적 규범을 가르치며 일본의 도덕적 가치관은 무엇인가?”하는 당혹스런 질문을 받는다.

궁색한 답변에 자존심이 상한 저자는 며칠을 생각한 끝에 그것은 ‘무사도’라는 것을 겨우 생각하게 됐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학교에서 특별히 도덕적 규범에 대하여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자신의 관념 속에 내재되어있던 도덕적 관념은 그가 어려서 듣던 무사들의 무용담 얘기 속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56쪽)
영화 7인의 사무라이(1954)

그가 유럽의 교수로부터 “일본은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학생들에게 도덕적 규범을 가르치며 일본의 도덕적 가치관은 무엇인가?”하는 당혹스런 질문을 받는다.
궁색한 답변에 자존심이 상한 저자는 며칠을 생각한 끝에 그것은 ‘무사도’라는 것을 겨우 생각하게 됐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학교에서 특별히 도덕적 규범에 대하여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자신의 관념 속에 내재되어있던 도덕적 관념은 그가 어려서 듣던 무사들의 무용담 얘기 속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56쪽)

‘꼬리가 길면 밟힌다.’ 거짓은 언제든 드러난다. 일본학자가 없던 사무라이정신을 근대에 억지로 만들었으니 그 한계가 일본 역사에서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가미가제 특공대원’들은 숭고한 애국심으로 국가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았다. 얼빠진 정치인들과 얼빠진 일본 역사학자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다.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같은 신세였을 뿐이다. 이 책 『사무라이정신은 거짓이다!』에서 요미우리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요 회장이 말했다. 가미가제 특공대가 실제로 미 함정에 돌진한 숫자가 6프로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그 한계를 알 수 있다.

피로 물든 시대, 전국시대는 일본에도 있었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일본역사에 있어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한 나라가 무려 50 ∼70여 개의 작은 독립된 세력으로 나뉘어져, 130여 년간 서로가 서로를 침략하고 침략당하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는 시기였다.’(39쪽)

‘전쟁이 있을 때는 전쟁에 피해를 보고, 전쟁이 없을 때는 전쟁 준비로 또 다른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겨울이면 바람막이조차 되지 못하는 움막에서 얼어 죽지 않으려고 웅크리고 자고, 춘궁기면 굶어 죽지 않으려고 주린 배를 움켜잡고 살아야 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지배계급이었던 사무라이들조차도, 상위 30%만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고, 나머지 70%는 절대적 빈곤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40쪽)

?현대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처럼 속마음을 화통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를 알만한 내용이 이 책에 나온다. 경제대국 일본인들 참 불쌍하다.

‘모반과 하극상이 어찌나 심했던지, 영주 및 사무라이들은 동료나 부하는 물론 부모도, 형제도, 심지어 자식도 믿을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 되었다. 식사를 할 때나, 잠을 잘 때나, 항상 칼을 소지하고 다니게 되었다.’

‘오늘은 살아 있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아침에 일어나 숨을 쉬어야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그런 시기였다.’(21쪽)

도조 히데키는 절대로 김홍집이 될 수 없다.
도조 히데키는 나쁜 짓은 크게 하고 책임지는 일을 해야 할 때는 쥐새끼처럼 쥐구멍으로 숨었다. 참으로 구차하게 살다간 인간이다. 도조 히데키를 보면서 그릇이 작은 인간은 큰 일 맡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도 똑같이 맞춤하는 사실이다.

‘이름 앞에 애국자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친일파가 한 사람 있다.’ ‘일본의 선진 문물을 보고서 그는 불과 한 달 만에 친일로 기울어 있었다.’ (정운현의『친일파는 살아있다』, 169쪽)

‘하루아침에 친러파 세상이 되어버리자 친일파 역적으로 지목된 그는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사인교를 타고 고종이 머물고 있던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일본군이 그의 사인교를 가로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대감! 지금 군중들이 대감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얼른 이곳을 피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김홍집은 비통한 표정을 짓더니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국의 총리로서 동족의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오. 구차하게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으로 살아남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가 탄 사인교는 군중들의 몽둥이가 기다리는 광화문 쪽으로 향했고, 그는 결국 길바닥에서 맞아죽었다. 그의 시체는 새끼줄에 묶여 개 끌리듯 종로로 끌려가서 발길질과 팔매질에 온갖 수모를 겪었다.’(정운현의 『친일파는 살아있다』, 171쪽)

 

‘육군 대신으로 그 당시 내각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도조 히데키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삼국동맹을 주도하고, 영국, 미국 등이 지배하고 있던 동남아시아를 침범케 함으로써, 기존의 전쟁을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확대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72쪽)

‘한마디로 도조 히데키는 겁쟁이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비굴할 정도로???.

사무라이답게 할복할 용기가 없어서, 그 고통을 감내할 자신이 없어서 총으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결국엔 총을 머리에 제대로 쏠 용기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겁쟁이 도조 히데키는 자신이 내린 ‘전진훈前進訓’과는 반대로 명예롭게 죽지도 못하고 수치스럽게 포로로 잡혀 재판장에 섰으며, 자신이 부하들에게 권유한 ‘와전옥쇄瓦全玉碎’도 지키지 못한 채 부끄럽게 교수형에 처해진 것이다.’(76, 77쪽)

 

불교는 살생을 금하는 종교이다. 원광법사가 세속오계를 통해서 말했다. “산 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하라.” 하지만 원광법사의 말씀을 거스르는 말을 일본 승려는 너무 쉽게 했다.

‘당시 일본인들의 신망을 받던 ‘야스타니 하쿠운Yasutani Hakuun은 “당연히 우리는 죽여야 하며, 가능하면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자국민들에게 어용설법을 하였다.’(51쪽)

야스타니 하쿠운이 과연 일본인들의 신망을 받을만한 승려였는지 의문이 생긴다. 옳곧게 살기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몇몇 기독교 목사들이 상식에 어긋나는 말을 한다. 동족인 북한을 도와줘야함에도 불구하고 북한과는 상대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한다. 남북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해야할 종교인들이 남북긴장을 더 악화시키는 일을 해대고 있다. 남북이 독일과 다르게 천천히 30년에 걸쳐서 통일을 이루면 대한민국은 백범 김구선생이 꿈꾸시던 멋진 문화대국이 될 것이다. 경제대국이 될 것이다. 세계 최대 금융그룹 골드만 삭스가 한 말이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 많다. 왜 독도가 엄연히 한국 땅인데도 저들은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지, 왜 일본이 위안부 여성을 동원하고서도 계속 궤변을 일삼는지, 왜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척 하는지, 왜 많은 일본인들이 세뇌되어 자살을 하게 되었는지, 왜 일본 총리가 염치없이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경제대국이라고 자랑하는 일본이 전후 독일처럼 상식이 통하는 나라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열도부여)은 이 땅 삼국시대 때 백제(반도부여)와 범부여 국가를 이룬 나라였다. 백촌강 전투 때 일본(열도부여)이 수백 척 배를 백제로 보낸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김운회교수가 쓴 『대쥬신을 찾아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 일본이 이 땅에 큰 죄를 지었다. 그 첫째는 임진조일전(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둘째는 1910년에 조선을 강제병합한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죄는 이 땅에 식민사관을 심은 것이다. 이 땅 정기를 없애려고 삼천리 금수강산에 말뚝을 박은 것이다. 조선시대 왕궁을 더럽힌 것이다.

김택민 교수는 이 땅 역사가 ‘한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 역사가 ‘한의 역사’임을 정확히 밝혔다. 장성훈이 좀 더 공을 들여서 김택민 교수처럼 훌륭한 역사책을 써주길 부탁한다. 『일본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라는 책을 써주길 부탁한다.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지금도 이 땅 곳곳에서 힘을 발휘하는 식민사관을 없애주는데 큰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우리 역사가 ‘한의 역사’가 아니라, 일본 역사가 ‘한의 역사’였음을 확실하게 밝혀주길 기대한다.

‘난세는 길고 치세는 짧다

최초의 1천 년, 난세 870년 치세 130년

중간의 8백 년, 난세 670년 치세 130년

마지막 1천 년, 난세 700년 치세 300년’

(김택민의『중국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12쪽, 개정판 책 제목이 『3000년 중국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로 바뀜)

 

 

기억의 재배치가 필요한 시간 [청춘의 고전 시즌2]-⑧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⑧

?? 일시: 2012. 7. 14.?(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기억의 재배치가 필요한 시간

– 코로의 <모르트퐁텐의 추억>과 베르그송의 예술 감정 –

강연:? 류종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예술적 감정과 베르그송의 사상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을 두고 흔히 ‘지속’의 철학자라고 한다. 베르그송의 사상에서 새로운 중요한 발견이 ‘지속’이라는 개념이다. 지속은 ‘변화’?’생성’?’흐름’을 뜻하고 이 지속은 ‘실재성’을 띈다. 그리고 이 실재성은 ‘기억’을 이루면서 지속과 기억은 “깊이에서 변화하고 운동을 겪는 ‘심층(深層)'”을 이룬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른바 ‘심층의 철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청춘의 고전 8번째 강의에서 베르그송 철학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류종렬 교수는 강의 첫머리에 “오늘 강의에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베르그송 사상과 더불어 그의 예술론 중에서 미적 감정과 회화에 관한 관점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조금은 복잡할 수도 있는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을 조금 확대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정리해서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속(변화ㆍ생성ㆍ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움직이며 존재한다. 이런 지속은 크게 보면 변화하고 운동하는 자연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아, 세계, 세상은 지속하면서 변화하는 과정 중에 있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철학을 ‘생성의 철학’이라고도 한다. 생명에서의 진화처럼, 인격도 변화과정 중에 있고 또한 자연, 즉 본성도 변화하는 중에 있다. 이 변화 속에서 변화를 공감하며, 인식하는 ‘지각’이 있다. 이것은 감각기관의 오관(五官)만이 아닌 몸 자체로 내재적 인식능력이 작동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이런 내부의 인식을 잘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다. 베르그송이 다른 화가보다 자연에 대한 변화(움직임)를 잘 포착하는 작가들을 높이 평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예술이라고 불렀던 것, 혹은 미술적 표현에 있어 19세기 말 베르그송이 구상하던 사상체계와는 다른 시기의 예술의 형태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같이 변화해 간 미술을 우리는 또 어떤 시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류종렬 교수는 오늘 강연의 주제를 언급하면서 18~19세기 프랑스 혁명을 통한 사회적 변화의 내용을 이해하고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서양의 철학사를 다시 들추어 그 배치관계를 규명해 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라고 한다.

철학사를 다시 보자

본격적으로 예술작품을 감상하기에 앞서 서양의 철학사를 다시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류종렬 교수는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철학사를 다음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상층(上層)의 철학’ ― ‘평면(平面)의 철학’ ― ‘심층(深層)의 철학’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세 단계의 철학의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 번째 단계 ‘상층의 철학’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Plato)에서 르네상스에 이르는 시기의 철학이다. 우리가 흔히 이른바 형이상학이라고 이해하는 철학이다. 보이지 않는 천상의 변화하지 않는 궁극적인 진리가 있어 인간은 이 진리를 항상 모방하는 위치에 있었고 이런 의식을 중심으로 인간의 삶을 해석했다. 주인과 노예, 지배와 피지배의 이항논리를 구성하여 현실과 이상은 철저히 구분되었다. 이상은 ‘진리’이며 현실은 아류였다. 이 있지도 않은 천상의 철학을 하던 1500~2000여 년 동안 형이상학적 철학은 인간의 노동력과 피를 담보로 그 사유체계를 유지했다. 이와 같은 ‘진리'(‘진실’이 아니다)의 학문은 수학, 논리학과 관계한다.

두 번째 단계는 공중에 붕 떠 있던 ‘상층의 철학’을 땅으로 끌어내린 표면의 시기이다. 이때의 철학을 ‘평면의 철학’이라고 한다. 고대에는 천상의 변화하지 않는 것이 진리이고 지상에서 변화하고 움직이고 생성하는 것은 다 거짓이었다. 그러나 1632년 갈릴레오(Galileo)가 “하늘의 원리가 지상에도 동일하게 있다”고 언급하면서 관성의 법칙을 끄집어냈다. 이것을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가 철학적으로 정리한다.

데카르트는 물체에도 실체가 있다고 말한다. 즉 “물리학(physics)적 실체의 긍정”이다. 물리학적 실체를 얘기하니 실체의 주체와 객체가 구분된다. 그리하여 일원론적 사고에서 이원론적 사고로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주체를 얘기했고 칸트는 객체를 얘기하면서 근대 서양철학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이런 ‘평면의 철학’은 물리학과 관계한다.

이제 세 번째 단계는 표면 아래 ‘심층의 철학’이다. 평면의 철학이 현상과 실재를 논쟁 삼았다면 심층 철학의 시대에는 자연내재를 탐구한다. 변화하고 움직이고 생동하는 자연의 참 의미를 찾기 위해 자연의 진짜 역사, 생명의 진짜 역사를 얘기한다. ‘심층의 철학’은 생물학(진화론, 분자생물학)과 가깝다. 생명은 신이 “있어라” 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1807년 라마르크(Lamarck, 1744~1829)가 생명의 진짜 역사에 대해 얘기했고 이미 프랑스에서는 1789년 혁명을 통해 가톨릭 성경의 천지창조의 기만과 전제군주의 학정(虐政)을 인민(人民)의 힘으로 전복시켰다.

이 역동적인 힘은 사회의 분위기를 바꿨고 인간은 스스로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혁명 이후 인간은 능동적이 되었고 인간 ‘내부’의 ‘심층’에 있는 ‘파토스(pathos)’를 드러낼 준비를 했다. 루소(Rousseau, 1712~1778)가 말했던 ‘연민(la piti?)’이라는 ‘공감’의 자발적 감정은 신을 바라보지 않고 인간을 향한다. 낭만주의적 사랑은 하늘이 하는 사랑이 아닌 인간이 인간에 대해 하는 사랑이다. 여기서 예술이 나오고 미적 감정이 나온다. 예술이란 인간의 내재적인 내면의 것을 표면으로 끄집어내서(드러내어) ‘실재화’ 시키는 것이다.

조금 장황할 수도 있는 설명이지만 류종렬 교수는 철학사를 다시 봄으로써 미술사에 있어 일련의 변화 과정이 매우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째서 베르그송이 유일하게 코로와 터너의 미술 작품을 인정하고 자신의 철학을 대입하려 했는지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미술이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프랑스 혁명이란 사회적 변화와 함께 철학적 관점의 변동을 거치며 자연주의 또는 사실주의의 표현에 더 많은 관심을 드러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추상적 관념의 미술에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로의 변화 – ‘코로’와 ‘터너’

류종렬 교수는 코로와 터너 작품의 특징이 자연주의적 표현과 함께 실재성의 표현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전의 미술을 상층을 모방해서 그리는 복사의 ‘시뮬라크르(형상모방=부족한 형상)’라고 한다면 코로와 터너의 작품은 심층의 두께를 밖으로 표현하는 ‘시뮬라크르(자연모방=창조적 형상)’라고 할 수 있다. “원본을 똑같이 찍어내는 것은 복사본이다. 들뢰즈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성의 두께로부터 자연을, 사물을, 인격을 모방해내는 ‘시뮬라크르’가 진짜 미술이라고 했다”

류종렬 교수는 코로와 터너의 작품을 보기 전에 몇 가지 그림 작품을 소개하면서 추상적인 관념의 미술과 그 단계를 벗어나고 있는 미술의 차이를 확인시켜 주었다. 다비드(Jacques Louis David)의는 추상적인 관념의 미술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작위적으로 표현된 여인들의 슬픔과 아버지의 권위를 상징하는 저 그림의 대상들은 누군가에가 뭔가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그림이다. 전형적인 유럽의 그리스 베끼기라고 할 수 있다”

▲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 1784 ⓒJacques Louis David(자크 루이 다비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린 들라크루아(Delacroix)는 그림은 눈으로 보기 즐거워야 한다고 말했다. 류종렬 교수는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눈으로 보는 감각을 중심으로 그렸고 아직까지 감성에 대한 것을 애기하지는 못했다.”고 하면서 앵그르(Ingres)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거론한다. “이 그림은 살롱에서 퇴출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전형적인 그림의 구도에서 벗어난다. 형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은 형식적인 틀이 있다는 것이고 시각적인 틀에 맞는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형상적 그림의 형식을 벗어나면서 ‘파토스’를 유발한다”고 설명한다. 이어서 “예술가들의 대단한 점은 여러 관점(장면)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빛나고 밝게 솟아오르는 시점을 포착해서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점”이라고 한다.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Delacroix(들라크루아)

▲ 그랑드 오달리스크, 1819 ⓒIngres(앵그르)

이제 예술가들은 형상적인 그림을 요구하는 귀족들의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신들의 그림 속에서 서서히 ‘파토스’와 ‘실재’가 드러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은 현실의 변화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현실에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류종렬 교수에 의하면 화가들은 변화하는 현실을 알아챘고 1830년 프랑스 혁명(7월 혁명) 이후 토지귀족이 몰락하고 쁘띠 부르주아들과 어울리면서 진정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원히 불멸할 듯이 보이는 추상적 관념의 그림에서 변화하는 생명과 자연에 대한 그림을 그린 이가 코로와 터너이다. 먼저 터너의 그림을 보자. 사실 베르그송의 철학과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작가는 터너이다. 터너의 작품들은 별 다른 설명이 없어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동적인 바다와 산악 등 자연의 변화하는 모습과 주변 풍경들을 생생하게 화폭에 그려내면서 자연의 ‘역동성’을 강조했다. 터너가 평생 여행을 좋아했다는 사실도 그의 그림 성향을 이루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또 <국회의사당 화재>와 같은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림으로 남길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어떠한 곳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화폭에 담았다. 이런 점은 그가 그림에 목숨을 걸었다는 말을 믿게 만든다.

▲ 바다어부, 1796 ⓒTurner(터너)

▲ 베수비오 화산폭발, 1817 ⓒTurner(터너)

▲ 국회의사당의 화재, 1835 ⓒTurner(터너)

터너는 물론 역사적인 그림도 그렸지만 서사적인 역사성을 통해 교훈적인 메시지를 인간에게 새기려하지 않았다. 자연과 풍경을 그린 그 자체만으로 인간에게 감동을 느끼게 하는 살아있는 그림을 그렸다. 이와 관련하여 류종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 한다. “바스키아(Basquiat)는 자신이 화가가 된 동기가 어릴 적 게르니카(Guernica)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받은 인상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쟁의 고통, 슬픔을 보고 ‘공감’을 느끼게 하는 이런 그림이 진짜 그림이다”

코로의 그림은 터너의 그림에 비해 역동성이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자연풍경의 아름다움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코로의 풍경화는 자연이 가장 빛나게 솟아나는 시점을 예술가의 관점으로 잡아낸다. <모르트퐁텐의 추억>을 그린 프랑스 ‘모르트퐁텐’ 지역의 자연환경은 예술가들의 감수성을 자극하였고 많은 화가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작품 활동을 하였다.

▲ 모르트퐁텐의 추억, 1864 ⓒCorot(코로)

사실 코로의 그림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그림은 <퐁텐블로의 숲>이다. ‘퐁텐블로’는 당시 살롱에 가서 미술하기를 거부하던 자연주의 화가들이 1830년부터 작품 활동을 위해 모이는 장소였다. 류종렬 교수는 “화가들의 이런 경향은 맑스(Marx, 1818~1883)가 1846년 프랑스에 와서 인민이 성립했다고(프롤레타리아트가 성립했다는 것) 말한 후 1848년 「공산당 선언」을 쓰던 시기와 겹친다.”고 설명한다. 1840년대 이후 사회질서가 바뀌고 서민 계층이 사회의 주축으로 등장하면서 자연주적 태도의 예술가 중 밀레(Miele)처럼 인민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도시에서 귀족이나 부자들의 입맛에 맞는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 퐁텐블로의 숲, 1820~1875 ⓒCorot(코로)

당시 이러한 변화는 밀레와 쿠르베(Courbet)의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에서 농부의 손에 한 줌 움켜쥐어 있는 씨앗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씨앗이다. 바로 프롤레타리아들이 성립하는 시기에 이 그림이 나왔다”, “일반적으로 밀레의 <만종>과 <이삭줍기>를 두고 농촌의 목가적인 평화로움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런 해석은 다 사기다! 이 그림들에서 표현하는 것은 실제 인민들의 고통과 슬픔이다”

▲ 씨 뿌리는 사람, 1850 ⓒMiele(밀레)

류종렬 교수는 이어 “쿠르베의 그림은 ‘특정한 위대한 인간’이 아닌 자연 속에 있는 ‘인민’ 그 자체를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쿠르베는 프루동(Proudhon, 1809~1865)과 친교가 있었고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기도 한 인물이다. 특히 그의 작품 <오르낭의 매장>에서 이전까지 전형적인 매장을 그린 작품에 보이는 엄숙한 귀족?성직자들의 얼굴을 모두 자기 동네의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이 “인민 의식”이다. 바로 이런 그림이 시대정신을 기만하지 않고 “시대를 바꾼 그림들”이었다.

▲ 돌 깨는 사람들, 1849 ⓒCourbet(쿠르베)

▲ 오르낭의 매장, 1849~1850 ⓒCourbet(쿠르베)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철학과 예술을 위해
류종렬 교수는 코로?터너와 같은 자연주의ㆍ사실주의 화가들의 미술 경향과 이와 연결되는 베르그송의 철학을 두고 “‘자연에 의한’, ‘자연을 위한’, ‘자연 속에서’의 철학”이라고 하면서 이름을 붙인다면 “범자연내재주의”라고 부를 있다고 한다. 이는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이나 영미(英美)의 실험심리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인식을 잘 드러내고 이러한 내재적 ‘지각’의 방식이 사람들끼리 상호 소통되어 ‘공감’을 이루어 낼 때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상층의 철학’, ‘천상의 철학’을 전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혁명’ 과제이기도 하다. 류종렬 교수는 이 강의에서 베르그송의 사상과 사실주의적 회화의 경향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에는 이것을 우리의 삶과 연계시켜 우리 사회의 모순을 깨뜨리고 개개 인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토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사회는 일제 강점기와 친미주의 시기를 겪으면서 일?미 ‘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상층의 철학’만 가르쳤고 결국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능력을 발양시키지도 못하고 “신비주의와 동일성의 논리 아래 ‘착각’의 역사를 살아왔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상층의 철학’을 ‘착각’이라고 한 철학자이다. 베르그송?코로?터너와 같은 사람들은 자연과 더불어 자연 속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던 자들이다. 류종렬 교수는 “링컨(Abraham Lincoln)이 단지 ‘ofㆍbyㆍfor the people’만 말하고 ‘민중(인민) 속으로’를 빠뜨린 것은 ‘리버럴리스트(liberalist)’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위마니떼르(humanitaire)’를 중심으로 ‘위마니떼(humanit?)’라고 하는 인생의 자유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의 말미에 류종렬 교수가 강조하던 ‘위마니떼’의 삶은 말하자면 현대 시장자유주의에 함몰되지 않은 ‘인도주의적 이성주의자’의 삶이라고 하겠다. 이런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자연 속에서 자기에 의한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마치 자기 방식으로 자기를 내보여 자기가 드러나는 작품을 그리면서 살았던 코로와 터너의 삶처럼 말이다.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과 ‘생성’의 철학을 우리 삶에 실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류종렬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이번 강의를 끝맺었다.

“헉명의 시대를 구현하는 자질은 우리 안에 가려져 있다. 이 자질과 능력은 자연주의적 태도, 사실주의적 태도에 대한 긍정이 있어야 튀어나오고 바로 그래야만 사회의 이상성이 무너진다. 이제는 우리의 삶에 있어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이고 자연적인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후기: 진보성 (한철연 회원)

르네상스 화가들은 왜 원근법을 발명했을까? [청춘의 고전 시즌2]-⑦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⑦

? 일시: 2012. 6. 23.?(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르네상스 화가들은 왜 원근법을 발명했을까?

-?푸코가 바라본 ‘수태고지’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

?
강연: 이지영(홍익대 강사)

 

르네상스는 재탄생이라는 의미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인문주의의 부활을 말한다. 인간의 가치가 새롭게 부활하면서 중세의 신적 가치질서가 지배하던 세상의 중심으로 인간이 들어가 중심 가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은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5세기 까지 여전히 신의 힘은 강했고 세상은 그대로인 듯 했지만 예술가들은 새로운 변화의 에너지를 감지하고 그것을 그림에서 드러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강의를 맡은 이지영 교수는 강좌 주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테마를 제시한다. ‘왜 르네상스 화가들은 그 당시 그렇게 많이 수태고지를 그려야 했는가?’, ‘근대철학의 이성적이고 통일적인 주체가 아니었던 인간의 모습과 위치가 르네상스 그림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되었나?’, ’15~17세기 그림에서 운동과 시간의 문제가 어떻게 변화하는가?’ 그리고 이것들과 연결하여 결국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의문이 이 강좌를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문제이다.

앞서 얘기를 이어가 보자. 15세기 르네상스 시기는 철학자들처럼 말과 이론을 통해 이성적 가치와 신적 가치의 변화를 판별하고 규정할 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다. 이 때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예술가들은 변화하게 될 것들을 미리 자신 앞으로 끌어당겨서 자기의 작품 속에서 그 역동적 에너지를 표현하려한 사람들이다. 세상의 변화를 좀 더 빠르게 느껴 그것을 철학이나 과학에서 이루어내기 이전에 예술의 영역에서 먼저 성취한 사람들이다. 르네상스 시기 예술가들은 그것을 원근법으로 표현한다. 당시 원근법은 단순히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원근법이라는 구성방식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들도 그랬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원근법을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와 연결시키고 근대 과학의 공간관과 시간관에 연결시키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과정이 생각보다 체계적이지는 않았고 역사적으로 수백 년간 서서히 이루어졌다. 중요한 것은 그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것들이 그림 속에 서서히 점층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성적 활동으로서의 원근법 : 공간의 통일성

르네상스 이후 인간이 신 대신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면서 데카르트의 세계관이나 17세기 이후의 근대 과학에서 말하는 공간과 시간의 물질적 개념이 등장하였다. 즉 무한히 펼쳐진 동질적이고 측정가능하며 어디서도 지적 차이가 없는 공간, 인간이 계산하여 정복할 수 있는 무한한 물질세계가 존재하며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원근법적 질서이다.

15세기의 원근법은 ‘코멘수라티오’라고 불리웠다. 코멘수라티오는 ‘측정할 수 있는’ 또는 ‘같은 단위로 잴 수 있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세계를 보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이제 세계는 인간에 의해 측정되는 것으로 다가왔고 신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 유한했던 인간존재는 이제 무한한 물질세계 위에서 도구로 세계를 측정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른 것이다. 혁명적 변화다. 『서양 미술사의 재발견』에서 저자 다니엘 아라스는 원근법이 우리에게 가장 감동적이고 가슴 뭉클한 발견을 해낸 부분은 공간과 시간을 기하학화 해낸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세상과 독대해서 자신의 잣대로 재고 바라보는 독자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림을 볼 때에도 거리감이라는 기능을 통해 재현된 대상의 조화로운 비례구조를 관람자가 어떤 위치와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림의 의미가 달라지듯이 말이다.

15세기 화가들은를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려냈다.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는 아기예수가 인간의 몸이 되는 순간이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을 의미한다. 수태고지의 많은 그림에서 성육신은 원기둥으로 현현되고 그것은 수태고지의 핵심 그 자체이지만 감히 쉽게 재현될 대상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 화가들은 수태고지 그림 안에 구체적인 물질 공간을 담기 시작했다.

▲ 수태고지 ⓒFra Angelico(프라 안젤리코)

만약 캔버스가 없다면 그림의 소실점은 캔버스를 뚫고 나가 무한한 공간을 지향한다. 원근법은 바로 무한함을 담고 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15세기 사람들이 무한(신의 영역)을 그림 안에 표현한다는 것은 두렵고 쉽지 않은 방법이었다. 당시 무한은 상식이 아니었다. 척도로 잴 수 없는 신의 영역인 ‘무한’과 척도로 잴 수 있는 인간의 영역인 ‘유한’의 관계가 결국 수태고지에서 성육신의 회화적 수수께끼와 관련하는 지점이다. 능력자인 신이 구체적인 존재로 현현하는 그 포인트가 성육신이며 수태고지의 핵심이다. 이 순간 원근법이 그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이 수태고지 그림들은 그림 하나하나의 대상과 요소들이 수많은 상징과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에는 그림이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하나의 텍스트로서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모난 창을 통해 그 프레임으로부터 그림의 구도를 관조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단순한 그림의 틀이 아니라 지성 활동으로서의 프레임(생각의 틀)이 되는 것이다.

이지영 교수는 수태고지의 그림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정지해 있는 영원한 시간성’이라고 말했다. 천사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오고가면서 찰나에 성육신이 일어나는 신비의 순간을 담고 있지만 이것은 다 구약의 얘기이다. 이 모든 것은 성서적 사건의 해석이자 그 의미를 영원불멸하게 고정시키려 하는 것으로 보이며 스쳐지나가는 순간의 포착이 아닌 영원한 신적 질서가 느껴지는 그림인 것이다.

?17세기 바로크 시대 : 공간의 통일성에서 시간의 통일성으로

바로크 시대에는 종교개혁과 신대륙 발견, 과학의 발달, 기아와 전염병으로 인해 혼란이 연속되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점점 우주만물의 변화무쌍함과 덧없음을 깨닫기 시작했고 인간의 관습과 이성, 감각, 종교-신 그 무엇도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특히 이 시기 바니타스(Vanitas)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그림은 해골이나 먹다 남은 음식, 찰나의 빛을 이용해 죽음과 소멸이라는, 결국은 허무할 수밖에 없는 대상의 한계를 표현하고 있다.

카라바조(Caravaggio)의 그림들은 15세기 수태고지의 그림과 비교할 때 인간세상의 느낌과 죽음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세의 허무함을 운동성을 통해 드러낸다. 그런데 운동은 시간의 문제이다. 찰나적 운동의 순간을 보여줌으로써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순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시간은 텅 비어있는 곳으로, 죽음으로, 無로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하인리히 뵐플린은 『미술사의 기초개념』에서 16세기는 평평하고, 정적이고, 부동하며, 선(線)을 강조하지만 17세기는 운동을 강조한다고 했다. 그러니 17세기의 그림은 구도자체가 이전과는 달라진다. 수태고지의 그림들은 일렬로 배치되어 평평하고 운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그림은 인물들의 위치가 매우 다양하게 배치된다. 17세기 그림들을 관통하는 운동성은 운동의 한 지점으로서 찰나의 순간을 통해 ‘시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99 ⓒCaravaggio(카라바조)

17세기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의 <시녀들>은 그림 속 대상들의 위치와 시선, 전체적인 구도, 빛의 효과적 사용을 통해 캔버스 앞 실제 공간의 관람자를 그림 쪽으로 끌어들이고 그림의 대상을 실제공간으로 끌어낸다. 그리고 이 그림의 미묘한 시선처리와 오묘한 대상의 배치는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상호교환을 끊임없이 일어나게 한다. 그래서 항상 보이는 자와 보는 자가 누구인지 헛갈리게 만든다. 푸코의 말에 따르면 <시녀들> 화면 밖의 실제 자리는 관람자와 모델과 화가의 역할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자리라고 말한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2차원의 평면공간과 3차원의 실제공간이 시점 문제로 끊임없이 연루되고 서로 공모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벨라스케스의 이 그림에는 고전주의 시대의 표현법에 대한 ‘재현’과 그 재현이 우리에게 열어놓은 공간의 정의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시녀들>에서의 재현은 재현의 모든 요소들, 즉 재현의 이미지들, 재현이 향하는 시선들, 재현을 통해 보이는 얼굴들, 재현을 낳게 한 몸짓들과 더불어 스스로를 재현하려 한다.” – 강의록 중에서 –
<시녀들>은 벨라스케스가 다시 재현한 것이지만 그 재현을 가능하게 한 주체의 출발점은 근대인들이 얘기하는 주체와는 달리 끊임없이 헛갈리는 자리여서 하나의 확고하고 통일된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이 들어갈 자리는 아직 아니라는 것이다. 재현을 이루어 낸 것의 시작점은 르네상스의 인간과는 다르지만 근대적인 주체와도 다르다. 이 그림은 당시 명확하게 확립되지 않았던 이른바 인간의 주체성과 같은 것을 고전주의적인 재현으로 보여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99 ⓒCaravaggio(카라바조)

푸코는 <시녀들>의 분석을 통해, 그림 안에서는 무관심적으로 드러나지만 실제 그림 속에는 생략되어 있는 국왕부부의 대상적 소멸을 통해 고전적 재현 방식(수태고지의 방식처럼)의 재현이라는 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Epist?m?,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된 인식의 테두리) 안에서는 아직 주체가 탄생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인간이란 그저 재현을 이루는 한 요소에 불과할 뿐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통일적 근거도, 주체도 아니라는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선험적 주체’라는 것은 고전주의 시대 이후, 근대라는 특정 에피스테메의 틀 안에서 탄생된 역사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지영 교수는 이 강의를 준비하며 발견한 것 중 하나가 바니타스화(Vanitas와 Memento mori의 그림처럼 인생의 덧없음과 무상함을 미술에 표현한 것)와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던 ‘빛의 허무함’이라고 말했다. 끊임없이 나누어지고 확정되지 않아서 뺏길 수 있고 교환될 수밖에 없는 자리가 결국 ‘인간의 자리’라는 것을 그 당시 사람들은 알았다는 것이다. 재현에 속해 있고 재현을 가능하게 하지만 모든 재현의 중심점이라고 할 수 없는 주체이다. 이 그림들은 여전히 신적 질서 안에서 평화로이 살 수 있는 인간도 아니고, 중세적 관념을 모두 버리고 과학을 믿으며 이성을 통해 강력한 이성적 주체인 인간 자신을 믿으면서 살 수 있는 인간도 아닌, 그 중간에서 한계를 목도하고 끊임없이 고뇌하며 한계에 시달리는 인간의 위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정리하자면, 르네상스에서 16세기까지는 운동이 잘 표현되지 않고 17세기에 운동이 드러나는 여러 구조상의 차이들이 등장한다. 결국 이 변화의 차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태도의 차이이며 한계를 직시하는 인간존재의 모습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후기: 진보성(한철연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