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 8월 월례발표회가 열립니다[ⓔ시대와철학 알림]

8월 월례발표회-조광제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강연회

 

 

안녕하세요, 학술1부입니다.
8월 월례발표회를 알려드립니다.

8월 월례발표회는 조광제 선생님의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출간 강연회입니다.
『존재와 무』보다 더 방대한 총 1456쪽으로 구성된 이 책은
오랫동안 국내 철학계에 빈 공간으로 남아있는 샤르트르 철학의 핵심 저서를 소상하게 소개합니다.
무더운 여름 새로 단장된 한철연 강의실에서 ‘현존철학’에 관한 강연과 토론을 함께해주시기 바랍니다. (강연원고는 당일 배부합니다.)

주제: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장 폴 샤르트르? 『존재와 무』 강해> (그린비)
발표: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사회: 박은미 (건국대)
일시: 8월 8일 목요일 오후 4시 태복빌딩 3층 한철연 강의실

“인간 존재는 결핍입니다. 결핍을 메우기 위해 결핍된 것을 향해 초월하는 것이 인간 존재이고, 거기에서 욕망이 성립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욕망은 대자와 즉자의 통일인 총체성에 대한 것이 됩니다.
이를 사르트르는 ‘존재 욕망’(d?sir d’?tre)이라 부릅니다.”(1권, 256쪽)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근본적으로 존재의 결핍을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 욕망에 대한 연구이다.
인간이 의식을 갖는 것은 나의 외부, 나의 타자를 갖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사르트르의 물음의 출발점으로 강조하는 곳은 바로 이 의식의 존재 조건 자체를 문제 삼는 지점이다.
나의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 스스로’ 혹은 타자 없이 ‘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현상학에서는 흔히 ‘즉자’(卽自)라 칭한다.
이것은 나의 외부를 모르는 완전히 자기완결적인 존재방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의식은 나의 외부에 대한 자각을 통해 나 자신을 스스로가 인식하면서만 생겨날 수 있는데,
이를 ‘자기 자신에 대해 존재한다’는 뜻의 ‘대자’(對自)라는 개념으로 명명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존재는 근본적으로 즉자적인 상태에서 대자가 생겨나면서 자기 분열을 겪게 된다.
나 혼자만의 완결적인 만족감이 붕괴되면서 타인의 세계를 마주하게 되는 이 충격으로부터 비로소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존재론적 문제들은 바로 이러한 조건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출판사 책소개 중에서)

구보씨 여름을 즐기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여름을 즐기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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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는 바다를 좋아한다. 산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바다가 더 좋다. 흐르는 강물도 괜찮지만 철썩이는 바다가 더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 느낌이 시원하지 않은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폐포(肺胞)가 씻기는 듯, 답답한 기분이 잦아든다. 바다는 언제나 하늘을 비추고 그 하늘을 눌러 담은 빛으로 출렁인다. 바다의 색깔은 하늘보다 더 짙고 다양하다. 하늘 아래 세간의 기운마저 비추어 담기 때문일까.

밤바다도 매력적이다. 때로, 달빛을 받아 일렁이는 바다와 마주해 있노라면, 세상의 온갖 걱정들이 다 그 물결에 반사되고 부서지는 것 같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한 친구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참 맛을 알려면 밤바다에 들어가 봐야 한다고 했다.

“우주가 온 몸을 휘감는다는 느낌이 들 거야.”

정말 그랬다. 구보씨는 어둠의 촉감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어둠이란 어떤 결여가 아니라 빛으로 희석되기 전 세상의 본 모습이 아닐까. 바닷물의 감촉과 사위의 어둠이 한꺼번에 다가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긴 별빛의 존재감마저 유별났다. 공기 중에 산란되는 대낮의 빛이 증폭된 음향과 닮았다면, 어둠 속의 별빛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련한 노랫가락 같았다. 밤바다의 출렁임 가운데 머리만 내놓고 잠시 떠있을 때면, 껴안는 듯한 막막함이 두려움이나 충만함에 앞서 와 닿았다.

비 오는 날 바다에 들어가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곧장 바다의 일부가 된다. 하늘과 빗줄기로 이어지는 바다 가운데서 작은 점처럼 고개를 들면 얼굴에 부딪히는 빗방울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는 표현은 원래 헤밍웨이의 것이라고 했던가. 바다 위에 내리는 빗방울들은 한껏 입을 벌려 담아내고 싶은 아득한 곳의 인삿장 같다.

출처: http://bluei333.egloos.com

금년에도 구보씨는 자주 바다를 찾았다. 그러나 한적한 바닷가에서 밤수영을 즐기거나 빗줄기로 샤워를 대신하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다. 대신, 해수욕장의 번잡함을 피해 아침을 이용하곤 했다. 남들이 헬스장을 향하는 이른 시간에 바다에 몸을 담구는 것이다. 아침나절이면 바닷가 인근의 주차장도 한산하다. 한 시간 정도 호젓하게 바다를 즐기다가 젖은 몸을 수건 한 장으로 대충 닦고 목욕탕으로 향하면 그만이다.

“그럴 바에야 헬스장이 낫지 않아? 그 시간대에는 비키니 입은 여자애들도 없을 거 아냐?”

구보씨가 간단히 해수욕 하는 비법(!)을 알려주자 제법 명민한 척하는 동료 하나가 한 쪽 입 꼬리를 치켜 올리며 하는 말이다. 글쎄, 그렇긴 하다. 하지만 구보씨는 요새 ‘비키니’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헬스장의 손바닥만 한 수영장에 가고 싶은 마음도 안 든다. 갇혀 있는 느낌이 들어서다. 바다에 들어가는 것에는 수영을 한다는 의미만 있지 않다. 그것은 일종의 즐김이기도 한 까닭이다.

즐기는 것은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도구는 목적에 의해 갇혀 있기 마련이어서, 도구적 이용에는 즐김이 없거나 있다 해도 억압되기 십상이다. 건강을 위해, 또는 몸매를 만들기 위해 수영을 한다면, 거기서 우세한 것은 목적성이지 즐김이 아니다. 목적에는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규제와 한정이 따른다. 반면에 즐김에는 놂이, 놀이가 있다. 여기엔 정해진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이 수반된다. 사실, 즐김의 즐거움이란 이런 벗어남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벗어남 자체가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급한 오해다. 물론 그렇게 볼 만한 여지가 있긴 하다. 억압에 대한 탈출과 해방이 쾌감을 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쾌감과 즐거움 또는 즐김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즐거움은 단순한 쾌감과 달리 주관 내부의 즉물적 유착에서 벗어나 객관으로 한 발 더 다가간 폭넓은 느낌이다. 더구나 즐김은 느낌에 국한되는 않는 행위의 사태다. 그리고 즐거움은 즐기는 행위에서 온다.

즐김과 즐거움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과 관련된 대상이나 사태가 어떤 의도나 목적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산과 바다를 즐기고, 청명한 날씨를 즐기며, 친구와 교제를 즐기고, 삶 자체를 즐긴다. 이 가운데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는가? 즐김의 한쪽은 우리가 붙잡고 있지만, 다른 한 쪽은, 더 넓고 더 멀리 뻗쳐 있는 다른 한쪽은 우리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 탓에 즐김은 항상적이지 않고, 그런 까닭에 즐김은 비로소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즐김은 양면적이다. 바다를 생각해 보자. 바다를 바라보거나 바다에 몸을 담금으로써 우리는 바다를 즐긴다. 그러나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는 풍랑에 사나워지기도 하고 엄청난 크기로 우리를 위협하기도 한다. 바다가 우리를 감싸고 우리에게 스스로를 열어주는 때는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는 기껏 여름 한 철 동안 바다에, 그것도 해변의 한 귀퉁이에 다가갈 수 있을 따름이다. 바다를 즐길 수 있을 경우는 바다 자체의 존재에 비해, 그 넓이에 비해 너무나도 좁다. 바다가 우리와 어울린다고 느껴지는 때, 그리고 바다의 가없음이 그 어울림과 잠시 이어져 있을 때, 그래서 바다가 우리에게 즐김을 허용할 때, 우리는 바다를 즐긴다. 이런 것이 즐김의 특성이다. 즐거움은 이 즐김에 수반되며 또 우리를 이 즐김으로 인도한다. 즐거움은 즐김으로 난 길에 기꺼움으로 쓰인 표식이다.

요즘 프랑스 철학 용어로 자주 거론되는 주이쌍스(jouissance)는 이 즐거움에 대한 이름이라 보아 좋다. 주이쌍스는 우리가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쾌락이 아니다.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주이쌍스는 일단 성적(性的) 향락(享樂)이라는 뜻으로 새겨지지만, 이 향락이야말로 제어되지 않는 심연에 닿아 있지 않은가. 거기서 열리는 틈바구니는 우리에게 정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실재(實在)로 이어진다. 향락을, 주이쌍스를 우리는 소유할 수 없다.

즐거움이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이 비롯하는 즐김이 우리보다 큰 터전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즐김과 함께할 수 있을 뿐이다.

“즐… 구보야, 넌 어쩜 끝까지 그 모양이니? 난 도무지 네 말이 이해가 안 돼. 즐기는 거야 그냥 즐기면 되는 거지, 너처럼 이상하게 꼬아 생각해서야 어떻게 즐거울 수가 있겠어? 내 눈엔 네가 제대로 즐길 줄을 모르니까 괜한 얘길 늘어놓는 걸루 밖엔 안 보여.”

“허, Y야, 무슨 소리야. 넌 아까도 내가 바다에서 노는 걸 봤잖아. 즐길 줄 모른다는 건 정말 나하곤 거리가 먼 얘기라구.”

“피, 그게 뭐 노는 거고 즐기는 거야. 아침나절에 잠깐 바닷가에서 어슬렁거려 놓고…”

“어어, Y 너도 그때 기분 좋다고 했잖아? 그렇게 날이 더워지기 전에 바람 쏘이는 게 따가운 여름을 현명하게 즐기는 길이라구. 공자님이 봤으면 증점(曾點)의 지혜라고 칭찬했을 거야.”

“누구? 증점?”

“그래, 봄날에 사람들이랑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고 싶다던…”

“관 둬, 됐거든. 철학자라고 다 너처럼 고리타분하진 않을 텐데, 참 걱정이다, 얘.”

“아니, 이거 고리타분한 거 아니야. 즐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구. 오늘날이라고 해서 편리함 속에 모든 걸 가둘 순 없거든. 그리고 즐긴다는 건 그렇게 가두어진 틀 밖으로 나가야 가능한 거야. 어려움과 위험의 틈새에 놓인 안락함과 여유로움이 아니라면, 즐김의 진짜 매력은 사라져 버리는 거지. 그러니까 즐김은 모든 문제의 해결이 아니야. 쾌락의 충만은 더더욱 아니고 말이지. 증점이나 공자가 즐김을 어떤 유토피아적 상태에서 찾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구. 실제로 공자와 증점은 다른 제자들이 자리를 뜨고 나자 그 제자들이 논의했던 정치 얘기를 계속하거든. 즐김은 어디까지나 세상 가운데에, 또 세상의 틈새에 놓이는 거야.”

“구보야, 즐긴다는 건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 아닐까. 그거면 충분한 거지, 너처럼 괜한 토를 달기 시작하면 즐겁던 일도 정나미가 떨어질 것 같애.”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은 똑같은 게 아니거든. 다시 공자 얘길 해서 안 됐지만, 공자도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과 같지 않다(好之者 不如樂之者)고 하잖아. 즐긴다는 건 좋아한다는 것보다 더 이루기 어려운 어떤 걸 거야. 좋아한다고 해서 다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지. 즐긴다는 건, 뭐랄까, 내가 아닌 어떤 흐름 속에 있어야 하는 거라구. 거기에 더불어 있는 것, 그러나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않는 방식으로 있는 것, 이를테면 어떤 흐름을 타고 같이 흘러야 하는 거야. 그건 마치 파도타기와도 같지. 파도를 즐길 때 우리는 파도를 거스르는 것도 파도에 완전히 파묻히는 것도 아니야. 파도와 함께 하는 것이긴 하지만.”

“구보야, 나 파도타기 안 좋아해. 안 좋아하는 건 즐길 수 없는 거 아냐?”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거기엔 묘한 면이 있어. 가령 산을 타는 사람들을 생각해 봐. 이 한 여름에도 아찔하게 높은 히말라야같이 험준한 설산(雪山)을 오르는 사람들. 그들이 산을 좋아하는 건 사실일 거야. 그러나 그건 단순한 좋음일까? 거기에는 좋음 말고도 두려움과 불안과 기대와 동경 같은 것들, 몇 마디로 줄여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들어 있어.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걸 즐기는 것이 아닐까. 달리 말하면, 그렇게 펼쳐지는 즐김의 장에 뛰어드는 것 아닐까.”

“에구, 구보야. 난 히말라야에 오를 생각 없어. 난 그딴 거 안 좋아한다구.”

“쩝… 그럼, 이렇게 생각해 봐. 나는 어때? Y야, 너는 이 구보를 좋아만 하는 건 아니지? 차라리 넌 이 구보와의 관계를 즐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관계가 우리 두 사람의 뜻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우리는 각자 이 관계의 한 쪽 끝을 쥐고 있을 뿐이야. 그 끝을 잡고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흔들리는 관계의 물결을 타고 가는 것이지. 거기에는 때로 열락(悅樂)도 깃들고 회한(悔恨)도 깃들지만, 그것 자체로 우리는 이 관계를, 이 삶을 즐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구보야, 착각하지 마. 뭐? 열락? 회한? 미안하지만 구보야, 넌 지루함 자체라구. 거기에 즐길 게 어딨니?”

“엥? 그럼, 왜 여지껏 날 계속 만나는데?”

“그거야…네가 그래도 한철연 회원이니까 그렇지. 그걸 여태 몰랐어?”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⑥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⑥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제가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학생 하나가 다시 질문을 하더군요.

“선생님, 용어에 관한 문제인데, ‘있을 것이 있을 것이다.’나 ‘없을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표현에서 주어에 나오는 있을 것과 술어에 나오는 있을 것은 성격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 문장들은 ‘있을 것이 있으리라.’ ‘없을 것이 없으리라.’고 표현해서 두 말의 성격이 다름을 분명히 밝혀 주는 게 좋을 듯한데요.”

“좋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엎어치나 메치나 마찬가지’라는 속담이 있지요? ‘있으리라’, ‘없으리라’는 표현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 말이 ‘있을 이라’, ‘없을 이라’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젊은 이’나 ‘젊은 것’이라는 말이 어감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대상은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있을 것’, ‘없을 것’이나 ‘있을 이’, ‘없을 이’도 어감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 문장들에서 기본 형식은 꼭 같이 ‘ㄱ은 ㄴ이다.’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말을 바꾸어도 상관없겠지요.”

뒤이어 저는 서둘러 나머지 문장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메마른 문장 분석은 저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지겨울 뿐만 아니라 이 문장 분석은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 자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문장들은 아직 없는 것의 내부 관계입니다.

ㄷ-1 ‘있을 것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은 동어 반복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있어야 할 것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기대한다, 추측한다.’라는 말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ㄷ-2 ‘있을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남을 것이 없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고 ‘있어야 할 것이 없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ㄷ-3 ‘없을 것이 있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빠질 것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는 뜻도 있고 ‘없어야 할 것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는 뜻도 있지요.

ㄷ-4 ‘없을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은 ‘앞으로 다 있으리라 예상한다, 기대한다, 추측한다.’는 뜻으로도, 또 ‘없어야 할 것이 없으리라 예상한다, 기대한다, 추측한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아직 없는 것,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무엇이라고, 어떻다고 규정할 수 없는 것 사이의 내부 관계, 다시 말해서 미래의 세계에는 예상과 기대와 추측뿐만 아니라 어떠해야 한다는 규범까지도 포함한 복잡한 판단들이 잠재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판단 형식의 메마른 분석은 큰 뜻이 없습니다. 판단과 사태가 늘 일치하지는 않으니까요. 긍정 판단(이다)에 부정 사태(아닌 일)가 대응할 수도 있고 부정 판단(아니다)에 긍정 사태(인 일)가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또 동일성(저됨)을 드러내는 듯이 보이는 문장이 실제로는 차별성(남됨)을 내포하기도 하고 차별성(남됨)을 부각시키는 듯이 보이는 문장이 동일성(저됨)을 드러내기도 하지요.

다만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서른여섯 개의 판단 형식이 모두 있음과 없음에 연관된 이른바 존재 판단인데, 여기에는 사실 판단도 있고, 가치 판단도 있고, 헤겔이 말하는 긍정(임)과 부정(아님), 칸트가 이야기하는 여러 판단 형식들이 빠짐없이 대응한다는 것만 눈여겨보면 되겠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까지 과거─과거, 과거─현재, 과거─미래, 현재─과거, 현재─현재, 현재─미래, 미래─과거, 미래─현재, 미래─미래라는 세 가닥으로 꼬인 세 개의 밧줄이 다시 하나로 꼬여 역동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지속과 변화의 흐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어서, 현재에서 과거로, 현재에서 미래로, 또 과거에서 현재로, 과거에서 미래로, 그뿐만 아니라 미래에서 과거로, 미래에서 현재로 넘나드는 통로로 안내되는 길목에 서 있음을 이 서른여섯 개의 판단 형식을 통해서 살펴보았던 셈입니다.”

제 말이 여기에 이르자 이번에는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부질없는 현학이 과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회의가 일면서 이 존재론 강의와 주체 현실의 관계 고리가 점점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앞으로 강의가 진행되면서 지금까지 엉클어진 생각의 가닥이 조금씩 잡혀 가겠지 하는 기대 때문에 이렇게 아직까지 듣고는 있습니다만.”

“그래요? 아마 내가 칠판에 적어 놓은 서른여섯 개의 판단과 그 판단들에 대한 틀에 박힌 설명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았겠지요. 그러나 이 판단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우리가 앞으로 다루게 될 의식에 주어진 것과 감각에 주어진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직관에 주어진 것까지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요긴한 길잡이가 되리라 여기고, 시간 나는 대로 들여다보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이 판단 형식들의 상호 관계를 전체로 이해하기는 어렵겠지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출처: http://simmye.tistory.com/131

우리가 지속과 변화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현상계의 법칙과 의식의 법칙을 문제삼는 것은 그러한 문제들이 모두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와 잇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개념의 틀 안에서 이 문제들이 어떻게 구체 상황들과 연관을 맺는지 힘이 닿는 대로 밝혀 나가도록 합시다.”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칠판에 적힌 판단 형식들 가운데서 미래가 주어의 자리에 있는 세 계열의 문장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지웠습니다. 칠판에 남아 있는 문장들을 다시 눈여겨보시지요. 눈여겨보는 순서는 관심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미래─현재, 미래─미래, 미래─과거 차례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겠습니다. 문장 앞에 있는 표시 기호는 일부러 지웠습니다. 여기에서는 그 기호들이 도리어 방해가 되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미래─현재
있을 것이 있다.
있을 것이 없다.
없을 것이 있다.
없을 것이 없다.

“자, 이 문장들을 다시 한 번 눈여겨보기로 할까요? 꽤 오래 전에 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떨 때 좋다고 하고, 어떨 때 나쁘다고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좋음의 형상을 모든 형상들 가운데 가장 윗자리에 둔 플라톤의 형상 이론을 구태여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가치 판단은 맨 나중에 좋다, 나쁘다로 모아집니다. 따라서 플라톤의 말투를 따르자면 좋음의 형상(나쁨의 형상)을 바로 보는 눈이 필요한데,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직관하는 눈이 열려 있지 않으니, 추상 공간의 마지막 계단에서 정의〔definition〕를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노력합시다. 앞 강의에서 나는 좋음과 나쁨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좋음 :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음

나쁨 : 있을 것이 없고(거나) 없을 것이 있음

그리고 보기를 들어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좋은 사회냐 나쁜 사회냐를 판가름하려면 있을 것과 없을 것의 관점에서 현재 우리 사회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느냐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에 억압, 착취, 부정, 부패, 탐욕, 이기심, 분열, 전쟁의 공포, 국토의 분단……들이 있는데 이 현상들이 있을 것(있어야 할 것)이냐, 없을 것(없어야 할 것)이냐, 또 우리 사회에 자유, 평등, 평화, 우애, 협동, 관용, 정의, 공과 사의 분명한 구별……들이 없는데 이 현상들이 없을 것(없어야 할 것)이냐, 아니냐를 따질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있을 것이 다 있고 없을 것이 하나도 없으면 그 사회는 온전한 뜻에서 좋은 사회다, 있을 것이 하나도 없고 없을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회는 온전한 뜻에서 나쁜 사회다, 있을 것이 많이 있고 없을 것이 많이 없으면 그 정도에 따라 더 좋은 사회, 덜 좋은 사회로 등급이 매겨지고, 있을 것이 많이 없고, 없을 것이 많이 있으면, 그 정도에 따라 더 나쁜 사회, 덜 나쁜 사회로 평가된다.─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사회는 그대로 온전히 지속되어야 합니다. 어떤 변화도 마다하는 극단의 보수주의가 이런 사회에서는 가장 바른 노선입니다. 있을 것이 많이 있고 없을 것이 많이 없는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속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지속이 주요 변수라면 변화는 종속 변수가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다양한 편차가 있고 없는 정도에 따라 생기겠지만 보수주의(이른바 우파)의 득세가 정당화됩니다. 그러나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사회는 전체가 변화해야 합니다. 어떤 기존 질서나 가치의 지속도 거부하는 극단의 진보주의가 이런 사회에서는 가장 바른 노선입니다. 없을 것이 많이 있고, 있을 것이 많이 없는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변화에 더 힘써야 합니다.(변화가 주요 변수가 되고 지속은 종속 변수가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있고 없는 정도에 따라 다양한 편차가 나타나겠지만 진보주의(이른바 좌파)의 득세가 당연시됩니다.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있을 것이 무엇이고, 없을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 얼마나 있고, 없으면 얼마나 없느냐를 꼼꼼히 살피지 않고 보수주의가 좋으니 진보주의가 좋으니, 수구니, 개량이니, 혁신이니, 혁명이니 하고 말로만 내세우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지요.”

제가 잠시 말을 멈추자 그 틈을 타고 학생 하나가 저에게 이렇게 묻습디다.

“선생님 말씀은 책상머리에서 듣고 있으면 그럴싸한데요. 그렇지만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분명히 없을 것이 많이 있고, 있을 것이 많이 없는 그런 사회가 줄곧 변화 없이 지속되어 온 측면이 두드러지거든요.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요?”
제 이야기의 흐름이 또 한 차례 끊긴다고 느꼈지만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실제 상황이야 어떻든 보수주의자들이 쓴 안경에 비치는 현실은 늘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좋은 세상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요. 더러 ‘있을 것이 없다.’ ‘없을 것이 있다.’는 현실 상황이 그 안경을 통해 눈에 들어올 때도 있지만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손을 대면 ‘긁어 부스럼’이라는 두려움이 보수주의자들의 의식에 완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변화되면 더 나빠진다는 거지요. 보수주의의 기본 성격인 현실 긍정은 보수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기득권과 연관해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이런 설명만으로는 보수주의의 특징이 모두 해명되지 않습니다.

보수주의는 지속을 고집하는데, 지속은 안정과 동의어입니다. 무엇이든지(비록 그것이 나쁜 관습, 나쁜 제도, 나쁜 체제라 할지라도) 오래 지속되면 안정이 이루어집니다. 안정 상태에서는 긴장의 이완이 옵니다. 긴장은 힘의 소모를 가져옵니다. 생명체의 경우에는 그것은 생명력의 낭비로 나타납니다. 판판한 길, 잘 닦인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우리의 발걸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일정한 보폭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습관이지요, 습관이 형성되면 우리의 걸음걸이는 자동화합니다. 자동화는 우리가 생체 에너지(생명력)를 최소로 소모하면서 걷는 방식입니다. 자동화, 긴장의 이완은 행동이나 기능의 반복을 가능하게 하고, 이 반복에서 행동 양식이나 기능의 동일화가 확보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동일한 형상, 동일한 의식으로 굳어집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나요? 자연 상태에서 나무나 풀은 왜 종마다, 또 개체마다 같은 잎, 같은 꽃을 반복해서 피워 낼까? 한 그루의 나무, 이를테면 떡갈나무 가지에 온갖 형태의 잎이 다 달려 있는 것이 떡갈나무가 살아가는 데 더 좋지 않을까?

떡갈나무가 꼭 같은 형태의 잎을 자동 기계처럼 찍어 내는 데는 떡갈나무 나름의 삶의 경제가 작용합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할 자리가 있겠지만 미리 귀띔해 두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군요. 만일에 떡갈나무가 같은 잎만 지속?반복해서 찍어 내지 않고 순간순간 다른 형태의 잎을 피워 낸다고 칩시다.(여기에서 내가 같은이라는 말과 다른이라는 말을 강조한 데에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즈음 우리 경제계에서 유행하는 이른바 ‘다품종 소량화 정책’에 해당할 텐데, 왜 이런 일이 한 개체나 한 종의 단위에서 생존 전략으로 채택되지 않느냐 하는 데는 큰 까닭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나중에 우리가 흔히 양, 질, 척도라고 부르는 같음과 다름, 저됨(동일성)과 남됨(차별성), 이어짐과 끊어짐, 크기와 모습 들을 포괄해서 다룰 때 밝히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보수성이 모든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생명력을 배분하는 방식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중요한 특질이라는 것만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인간의 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보수성도 정치 경제학의 틀 속에서 간단히 해명될 특질이 아니고 물질과 생명의 관계, 생명체 상호 관계까지 포함한 더 큰 틀 속에서만 제대로 밝혀질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엄친아가 아닌가” 수치심 키우다가는 결국…[철학자의 서재]

? 브레네 브라운의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송인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1. 자책 속에서 배회하다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바라던 결과도 얻지 못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의욕을 갖고 링에 올랐지만 연타를 얻어맞고 주먹을 날려보지만 매 번 헛방만 날리는 복싱 선수의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지난날에 대한 회한과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보내는 시간도 많아진다.

기분도 전환할 겸 서점으로 향한다. 볼 만한 책이 무엇이 있을까 둘러본다. 늘 보는 전공서적들은 눈으로 훑고 지나가기만 한다. 오늘의 목적은 다른 데 있으므로. 대신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은 무엇일까 이리저리 둘러본다. 한참을 지나도 별 소득이 없어 그만 나가서 한의원에서 침이나 맞자고 생각하던 그 때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브레네 브라운 지음, 서현정 옮김, 북하이브 펴냄). ‘내가 내 편이 아니라고?’ 이런 생각과 함께 시선은 그 책에 멈추었고 어느새 책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브레네 브라운 지음, 서현정 옮김, 북하이브 펴냄). ⓒ북하이브

자신을 책망하는 횟수가 전보다 잦아지던 차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제목만 보고 책의 내용을 예상해본다. 나의 이익, 혹은 의지와 다르게 생각하게 되는 사례들을 다룬 것일까? 과거에 한 행동을 후회하고 돌아보는 내용일까? 아니면 분열적 자아정체성을 말한 것일까?

책을 펼쳐보니 내 예상은 빗나갔다. 이 책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외로움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받으며 어떻게 하면 그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내 예상이 빗나갔어도 좋다. ‘자신에게 엄격한 것’이 미덕이고 그것이 자기발전의 덕목인 줄 알던 내게 냉정한 자아비판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냉정하고 이성적이려고 해도 스스로를 질책하면서 고통이 따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행히 고통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았으니 본격적으로 저자의 말을 들어보기로 결정한다.

알고 보니 이 책은 이미 상당히 유명했다 저자 브레네 브라운의 TED 강연은 조회수가 900만을 넘었고 이 책은 아마존에서도 심리 분야 최장기 베스트 1위였다. 한국에서는 최근 유행하는 힐링 코드로도 읽히고 있다. 알기 쉽고 재미있는 강연으로 청중들에게 환영을 받아 TED 담당자로부터 ‘스토리텔러’로 소개해도 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단다.

그런 매력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회복지학 연구자로서 수년간 수백 명을 만나 그들과 대화하고 공감하면서 얻은 결과를 애정을 가지고 풀어냈기에 가능했다. 그만큼 학술적 노력도 많이 기울여진 책이다. 더 놀라운 것은 강연 주제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꺼려하는 ‘수치심’이라는 점이다. ‘수치심’은 이 책의 주제이자 브레네 브라운의 평생 연구 주제다. 저자는 이 ‘수치심’을 나의 가장 큰 적이 나 자신이 되는 이유로 지목한다. 따라서 왜,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관련 사례 제시와 분석을 통해 밝히고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분석을 바탕으로 해결 방안을 내놓는다.

책을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수치심’은 연구자인 저자만 흥미를 갖는 단순한 연구 주제가 아니다. 심리적 고통이 심해 치료사나 상담사를 찾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야기, 서로 관계 맺고 사는 우리의 이야기, 그리고 누구나 겪었을 법한 모두의 이야기다. 이제 왜 그런지 살펴보겠다.
 
 

2. 수치심은 무엇이고 어디서 오는가

브레네 브라운은 수치심을 이렇게 정의한다. “나에게 결점이 있어서 사랑이나 소속감을 누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극심한 고통”(36쪽) 이 정의에서 눈에 띄는 말은 ‘소속감’, ‘가치’다. 수치심은 어딘가로 숨고 싶은 일시적인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결점이 있어서 어딘가에 소속될 수 없다고 느끼는 고립감과 연결되며 이 고립감 역시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이것이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연결되면서 근원적이고 장기적인 더 나아가 항구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수치심은 나의 ‘존재’ 자체와도 연결되는 감정, 스스로의 결점 때문에 나의 ‘존재’도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감정이다.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수치심은 그 결점 때문에 존재의 가치조차 깎아내리는 감정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도 자기 스스로가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수치심을 죄책감과 구분한다. 죄책감은 ‘행동’에 국한된 것인데 반해 수치심은 ‘존재’로 확대된다. 이를 테면 시험에서 부정 행위를 한 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죄책감이고, ‘나는 거짓말쟁이고 사기꾼이야, 난 바보 같고 나쁜 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수치심이다.(43쪽)

잠시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책의 풍경을 떠올려보자.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바보’, ‘머저리’, ‘못된 놈’ 따위의 비하적인 말을 쏟아 내며 머리를 쥐어박거나 스스로를 때리는 행위를 동반하는 행위가 쉽게 떠오를 것이다. 또한 자기반성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통념 속에 이끌려 행위 자체를 넘어서 나는 과연 정상적인 사람, 좋은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쉽게 하게 된다. 물론 반성 없는 삶은 잘못된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없고 더 큰 잘못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 행위에 대한 반성을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가치 판단까지 해버리는 것도 큰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어떤 잘못을 했다고 수치심까지 느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요인은 내 마음 속이 아닌 외부의 환경에 더 많이 도사리고 있다. 떠올려보자. 우리는 교육을 목적으로 혹은 상대방의 행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 수치심을 자극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교육적 목적을 위한’ 선의를 내세우지만 수치심을 이용한 교육은 그 효과가 지속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역효과만 나기 십상이다. 학습 열등생이든 실적이 떨어지는 회사원이든 오랫동안 가사만 돌보던 전업주부든 누구에게도 성적이나 실적을 향상하라고 사회로 나아가 자아를 찾으라고 한답시고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그 사람의 존재를 비하는 발언을 한다면 오히려 결과는 그 의도와는 반대로 흘러가게 된다는 말이다. 오히려 수치심을 느낀 사람은 그 충격으로 마음을 닫고 위축되거나 비뚤어진 방향으로 그 고통을 발산할 수 있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보다 근본적인 계기는 개개인의 내면이나 개별적인 상호접촉을 넘어서는 더 큰 차원에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속한 사회의 문화'(25쪽)다. 그렇다면 수치심을 유발하는 문화는 어떤 문화일까? 우리는 ‘사람이란 자고로 ~~~해야 한다’, ‘~~~이 좋은 것이다’라는 유의 말을 많이 들어왔다. 은연 중 이런 말들은 우리 삶의 잣대가 된다. 문제는 그 잣대가 과도하고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거나 지나치게 완벽한 것을 추구할 때 발생한다.

매체에서나 볼 수 있는 모델, 언제 어디서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슈퍼맨, 일과 가사 모두를 척척 해내는 슈퍼우먼, 언제나 화목하고 평화로운 가정,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심성도 착한 모범생 등등. 이런 것들은 상업적 욕망에 의해 가공되었거나 주변의 지나친 기대에서 나온 이미지들이다. 수치심은 내가 이런 기준에 미달하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그런 자신을 남에게 보여주기를 꺼려할 때 생겨난다. 완벽해 보이는 혹은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어 힘겨울 때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 하지 않았을 때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끼게 되면 수치심은 점점 자라난다.
 
 

3. 공감과 유대로 수치심을 떨쳐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수치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여기서 다시 수치심의 정의 중 한 단어에 주목해본다. 그것은 ‘소속감’이다. 수치심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내가 세상 어디에도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고립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 고립감은 수치심을 느끼는 자신에도 해를 주는 동시에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한다.

저자는 강연에서 미국의 심각한 사회 문제인 비만, 중독, 약물남용 등이 수치심에서 비롯된 잘못된 결과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타인에 폭력을 휘두르는 행동도 마찬가지로 고립감을 동반한 수치심에서 비롯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자신의 좋지 않은 감정을 타인과의 정상적인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만 있다면 왜 공연히 폭식과 약물로 자신의 몸을 그르치며 타인을 해치기까지 할까? 그래서 저자는 ‘공감’을 수치심의 강력한 해독제로 제시한다.

이것은 사람은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네트워크 안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어디에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수치심은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가 되므로 위험한 것이다. 나의 상태, 나의 마음에 대한 타인과의 공감은 그래서 당연히 수치심의 해결책이 된다. 공감을 위해선 말하는 사람의 용기와 듣는 사람의 자비가 중요하다. 용기 있게 말하고 자신의 상황을 공유함으로써 수치심을 느꼈던 사람은 회복의 실마리를 찾는다. 시야를 더 넓혀서 본다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어’라고 생각하게 되어 단절과 고립감도 해소할 수 있다. 듣는 이는 ‘나도 그럴 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공감을 해야 한다. 자칫, ‘비평자’의 태도로 상황을 해설하거나 평가하려 들거나 심지어 심한 말로 자존감을 허무는 언사를 한다면 수치심을 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당장은 말한 사람은 그 자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단절과 고립감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한때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탈주범이 회고록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너 착한 놈이다’라는 말만 들었어도 범죄자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도리어 선생님은 돈을 안 가져왔다고 욕설을 하며 ‘빨리 꺼지라’ 했고 그 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고 한다. 물론 변명이 섞여 있음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이 상황에서 학생의 존재 가치를 훼손하는 선생님의 말은 듣는 이의 마음에 ‘악마’를 자라게 했고 결국 그 학생은 스스로를 고립시켜 범죄자가 되었다. 이 경우는 개인적 경험에서 오는 수치심이 개인의 심리적 고통을 넘어서서 사회 문제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말을 보여준다. 반면 비슷한 유년시절을 보낸 한 유명 프로파일러는 관심을 갖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비슷한 환경에서도 정반대의 길을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수치심을 느끼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을 버려두어서도 그것에 빠져들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상태를 차분히 돌아보아 그 원인을 찾아내서 감정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평소 자신의 경험을 분석적으로 파악하고 마음을 회복하는 방법을 찾아두었다가 만약 수치심이 유발되는 상황이 도래하면 빨리 빠져나오도록 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졌는데 저 혼자만 이겼다고 웃는 아큐의 자기기만적 ‘정신승리’도 옳은 방법이 아니다. 그것도 주변으로부터 벽을 쌓는 길이다. 용기 있기 자신의 상황을 말하고 타인과의 공감을 형성해서 유대의 끈을 유지하는 것이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중요한 방법일 것이다.

문화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완벽주의도 나를 수치심에 빠뜨리는 덫이다. 앞에서 말한 모델, 슈퍼맨, 슈퍼우먼, 다재다능한 모범생은 현실 속에 존재하기 매우 어려운 모습이다. 당연히 누구나 될 수 없다. 누구나 결핍이 있다.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것은 성장의 계기이기도 하다. 또한 결핍만을 보아서는 안 되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를 알아야 하며 강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도구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271쪽) 실제로 저자는 현장에서 학생들에게도 강점을 찾는 연습을 시키고 있다.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엄격한 태도, 완벽을 강요하는 풍토 속에서 수치심을 방지하고 자존감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럴 때 ‘사랑받고 소속되어 있다는 행복을 느낄 자격이 있다’고 느끼게 되어 수치심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4. 나를 괴롭히는 익숙함에서 벗어나라

이 책의 논조는 균형적이고 포괄적이다. 우선 연구서이면서 교양서이고 심리서이면서 사회문화서이다. 내가 느끼는 나의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되지만 매몰되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죄책감과 수치심을 구별하면서 과도한 문제의식에 빠지는 원인을 지적해서 과한 자기반성이 자기붕괴로 나가는 것을 경계한다. 사람들이 불행하게 느끼는 문제를 다루면서 그 원인을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찾아낸다. 개별적인 대화나 마음 다잡기가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동시에 유대감이 인간의 본원적 욕망이며 누구나 소속감 속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동시에 특정한 출신, 종교, 국적, 혈연 등 집단정체성에 기대어 형성되는 ‘전형화’는 개인에게 덧씌운다면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지적한다. 그 대신 공감을 매개로 공동의 노력과 개인의 심리회복 노력을 병행할 것을 제안한다. 나도 스스로 수치심을 가져서는 안 되고 누군가가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는 수치심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완벽주의 문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문화비평적 시야에서 지적하는 데 그치거나 저항하자고 선동하는 대신 완벽주의 문화에 휘둘리지 않는 길을 일러준다.

감정을 느끼고 타인과 대화하고 매체를 접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해서 능숙하거나 유익한 것은 아니다. 미덕이라고만 간주되었던 엄격한 자아비판, 의도가 좋다는 핑계로 묵인되거나 권장되기까지 한 수치심을 이용한 교육과 훈육 등도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유익하지는 않다. 붕괴될 것 같은 정신을 추스르는 일,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대화하는 일에 우리는 여전히 서투르고, 모두를 해치는 삶의 방식들도 방치되어 있다. 그 후과는 고스란히 부메랑처럼 크고 작은 개인적·사회적 문제가 되어 돌아온다. 이제 나조차 내 편이 아니게 만드는 익숙한 것들이 있다면 버려야 하지 않을까.

제1편 상품과 화폐, 제2장 교환 과정[자본론강독]-⑧

제1편 상품과 화폐, 제2장 교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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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참석 : 이재유, 김선이, 김성심, 신재길, 신준하, 옥철

정리 : 김선이(2012.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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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략 요약(p.108~119)

? 실제 상품의 교환은 상품 소유자에 의해 이루어지며 상품 소유자와 상품의 관계를 밝힌다.

? 상품에 내포되어 있는 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이 여러 상품의 전면적 교환에 있어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분석하여 특정한 한 상품이 화폐로 전환하는 것을 밝힌다.

? 원시공동에서 처음 발생한 두 가지 상품 교환에서부터 상품들의 전면적 교환의 발전과정을 분석하여 상품 교환과정의 모순이 어떻게 화폐를 탄생시키고 해결되었는지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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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발제(p.108~119)

1. 상품 소유자와 상품의 관계

? 상품

– 다른 모든 상품체를 오직 자기 자신의 가치의 현상형태로 간주하며 항상 교환할 용의를 가지고 있다.

– 상품은 스스로 다른 상품체의 구체적 속성을 파악하지 못하며 상품소유자가 상품의 속성을 보충해 준다.

– 상품은 자신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다른 상품에 대해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다.

– 상품은 스스로 시장을 찾아가 자신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소유자에 의해 교환된다.

– 물건들이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품 소유자끼리, 즉 쌍방이 동의하는 하나의 의지행위를 매개로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고 타인의 상품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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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소유자

– 상품소유자에게 상품은 교환가치의 담지자란 점에서만 직접적 사용가치를 가진다.

– 그러므로 상품소유자는 사용가치를 가진 다른 상품을 얻기 위해 자기상품을 양도하려고 한다.

– 모든 상품은 소유자에게는 비사용 가치, 비소유자에게는 사용가치

– 상품 소유자들이 상품을 서로 교환하기 위해서는 서로 상대방을 사적 소유자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품의 교환이 아니다.

– 법적 관계는 각자가 동의하는 의지행위를 매개로 경제적 관계를 반영하며 계약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람들은 상품의 소유자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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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과 상품소유자의 차이

– 모든 상품은 가치로서는 같은 성격의 것이고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물건이다. 상품들의 교환에서 사용가치는 사상되고 있다. 상품소유자에게는 많은 상품 중 어느 특정한 상품이 사용가치로서 필요하며 다른 상품은 필요치 않다. 따라서 모든 상품소유자들은 자기에게는 사용가치가 아닌 상품을 내놓고 자기에게 사용가치인 ‘특정한’ 다른 상품을 교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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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품의 전면적 교환에 담겨진 모순

? 상품의 교환

– 상품의 소유자를 바꾸는 일

– 상품은 사용가치로 실현되기 전에 먼저 가치로 실현되어야 하며 상품은 가치로 실현될 수 있기 전에 자신이 사용가치라는 것을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 상품에 지출된 인간노동은 타인에게 유용한 형태로 지출된 경우에만 유효하게 계산된다.

– 노동이 유용한지에 대한 여부는 물건이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지의 여부에 대한 상품의 교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 상품 소유자는 다른 상품과의 교환을 통해 자기 상품을 양도하려고 하는데 이때 교환은 개인적인 과정일 따름이다.

– 상품은 자기의 상품을 동일한 가치의 다른 상품으로 실현하고자 하는데 교환은 일반적 사회적 과정이다.

– 다른 모든 상품은 자기 상품의 특수한 등가(물)로 간주되며 자기 자신의 상품은 다른 모든 상품의 일반적 등가(물)로 간주된다. 이 사실은 모든 상품소유자에게 타당하기 때문에 어떤 상품도 일반적 등가물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일반적 상대적 가치형태를 가지지 못하며 생산물 또는 사용가치로서만 상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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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폐의 등장

– 상품소유자들은 상품 본성 법칙에 따라 상품을 일반적 등가물인 다른 하나의 상품과 대비시킴으로써만 가치 즉 상품으로 관계 맺었다.

– 특수한 상품을 분리해 내어 선발된 상품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등가형태, 즉 사회적 과정을 통해 일반적 등가(물)는 이 선발된 상품의 독자적인 사회적 기능으로 되는데, 이 상품이 화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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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환의 역사적 발전과 화폐의 형성에 의한 모순의 해결

? 화폐는 교환과정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교환현상의 역사적 확대와 심화는 사용가치와 가치사이의 대립을 발달시킨다. 화폐의 독립적인 가치형태를 만들려는 충동은 하나의 독립적 가치형태를 얻을 때까지 지속되어 특정상품이 화폐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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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산물의 직접교환은 단순한 가치표현의 형태, 즉 X량의 상품 A=Y량의 상품 B이다.

– 이 경우 A와 B라는 물건은 교환에 의해 비로소 상품으로 된다.

– 유용한 물건이 교환가치로 될 가능성을 획득하는 최초의 방식은 그 유용한 물건이 비사용가치로 존재한다.

– 물건은 외적인 것으로 양도할 수 있고 양도가 상호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사적 소유자들끼리의 암묵적 동의가 있으면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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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순은 화폐의 형성에 의해 해결된다.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 ⑧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 ⑧

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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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사람을 다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평택 항 수입물류 공장 공사현장이다. 바닷바람은 육지보다 체감기온 5-6도정도 낮다. 산소가 많은 바닷가 공기 덕분에 일해도 힘든 줄 모르겠다. 목수 2인 1조로 일해서 더욱 좋다.

며칠 간 J와 손을 맞춰 일했다. 일도 잘 할 뿐 사람이 젊잖다. 고향도 같다. 목수 두 사람이 모이면 그중에 실력이 나은 사람이 있다. 힘으로나 실력으로나 J가 나보다 났다. 따라서 일머리를 J가 이끌었다. 나는 육체 뿐 아니라 머리까지 편했다.

일 끝난 후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혼자서는 주문 받지 않는 물 회(회 국수)가 가장 럭셔리한 메뉴이고, 국수나 국밥 등을 함께 먹었다. 그의 개인사는 듣지 않아도 알 듯 했다.

눈이 가는 곳에 마음이 있다. 처음 J와 손을 맞춰 지하에서 바라시(해체)하는데, 그가 담배를 피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담배를 내밀자, 그는 3일간 담배를 못 피웠다고 했다. 그는 한 달을 방구석에서 헤매다가 돈이 떨어지자 무작정 H인력을 찾아왔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는 스크린 경마장을 즐긴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말은 달린다’는 명언을 했다. 얼마를 넣고 가도 한 순간에 없어진다고 했다. 지름 신이 임하는 순간 뭉칫돈을 거는 탓이다.

바라시를 끝내고 가와바리, 즉 공중에 걸쳐놓은 속고 위에 폼을 붙이는 작업도 둘이 함께 했다. 나는 조기, 폼에 적절한 치수를 재어 못 두 개를 밖아 J에게 건네준다. J는 내가 밖아 놓은 못 두 개를 지지 삼아 패널을 속고에 고정되도록 못을 박았다. 우리는 혼자 하는 사람들보다 두 배 이상 작업을 했다. J는 계산도 빠르고, 작업도 차분하게 했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함께 작업하니까, 작업 지시하는 반장이 아예 우리 둘을 항상 함께 작업에 배치했다.

ⓒ 이재원

J와 손 맞추어 일 하던 중, 나는 평택 항 현장의 최고참, 돼지띠 노인에게 간택 당했다. 그는 어제까지 외국인과 손을 맞춰 일했는데, 두 사람은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요, 외국인이 노인에게 불평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다리를 보여주는데, 퉁퉁 부어있었다. 노인은 나에게 재료는 물론 소모품도 모두 갖다 달라고 했다. 몇 일간 노인과 함께 일하는 동안, 내 별명은 졸지에 <데모도>가 되었다. 노인의 주문에 따라 움직이는 내 편을 들어준 별명이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벽체를 보강하는 일종의 보, 통칭 ‘눈썹’을 ‘되 나우시’, 즉 부적격 작업을 고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노인은 아래에 있고, 나는 보위로 올라갔다. 폼을 뜯어내는데 벽체가 바람에 몹시 흔들렸다. 기분 나쁜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간신히 뜯어내고, 다시 정확한 치수대로 눈썹을 이어냈다.

점심 직전에 비가 내린 날이다. 한 30분을 비 맞으면서 일했다. 땀에 젓은 옷이 비에 젖어 무척 짜증이 났다. 작업을 중단하고 용역회사에 돌아와 돈을 받은 J가 총총히 사라졌다. 그는 좀 전에 넌지시 내게 물었었다.

“이제부터는 무엇을?…”

나는, ‘상명대 도서관에…’라고 응답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그의 발걸음으로 봐서 늦은 경마장 행이라고 짐작했다.

몇 년 전에 만난 노동자는 <바다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한 달에 두어 번, 돈을 모아서 도박장에 간다. 어느 경우에는 차비도 없어, 주변 사람에게 ‘차비 좀 달라’하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평택 항 일이 없는 날, J와 학교 신축 공사 현장에 팔려나갔다. 학교 건축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건축회사 수석 목수로서 내 전문 분야였다. 따라서 현장이 고향 같았다. 예전 식으로 슬래브 작업을 했다. 횡 800센티, 종 360 센티 슬래브 여섯 칸 작업이다. 하리, 기둥 형틀을 세웠고 하스라, 즉 보 형틀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우선 J와 시다 목을 준비했다. 슬래브 종대 치수보다 40-60 센티 정도 짧게 오비끼를 자른 후, 여기에 삿보도를 끼워 받치기 위해 3인치 항 대못을 네 개 박아둔다.

슬래브 하스라 위에서 다른 두 사람이 각목을 횡으로 길게 매달아, 시다 목을 받을 준비를 한다. 준비가 되자, J는 시다 목을 슬래브 위 사람에게 올려주고, 나와 다른 한 사람이 삿보도를 받쳤다. 구름 속에 있던 햇빛이 드러나자, 갑자기 숨이 ‘컥’ 막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다음 시다 위에 네다 재료를 배열한다. 두께 5센티 각 파이프를 30센티 간격으로 깔고, 이음매 부위에 각재를 깔아, 시다와 못으로 고정시킨다. 그리고 그 위에 수지 알판이나 베니야 알판을 못으로 고정시킨다.

알판 슬래브 작업은 십 몇 년 만에 처음이다. 오직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슬래브 깔아갈 때는 물결 흐르듯이 작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 쪽부터 한 사람이 한 칸씩 깔아 가면, 그 다음 사람이 하리 통 치수를 맞추면서 다음 칸 슬래브 작업을 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 작업을 도와주다가, 간신히 작업 방식을 파악하고는 J의 조언을 참고로 맨 마지막 슬라브를 깔아나갔다.

J는 하루 쉬고 경마장에 가겠단다. 도박, 광신과 세뇌를 클리닉 하는 방식에 대해 ‘줏어들은(口耳之學)’ 적이 있다. 나는 J가 경마장 간다고 한 날 새벽에 메시지를 했다. “경마장 가지 말고 강릉 가서 물 회나 먹고 오자.” 잠시 후 그가 전화로, ‘오늘은 경마장, 강릉은 다음에 가자’고 했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 있다가, 시장으로 갔다. 오리 한 마리, 낙지 두 마리, 전복 세 마리를 샀다. J가 TV에서 보았다며, 이것들을 함께 끓인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는 말을 기억했던 것이다. 다시 전화했다. J가 당장 오겠다고 했다.

그는 ‘난생 처음 이토록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다’고 했다. 옥에 티는, 그가 오리 뼈를 덕수가 십여 년 전 수학여행에서 사다 준 은도금 재떨이에 버렸다는 것이다. 식사 후 그는 총총히 경마장으로 갔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너(나)여, 모든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가?’

대학원 시절, 유학 간 약혼녀로부터 파혼을 선고받은 친구가 빠친꼬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 그를 따라 빠친꼬장에 가 보았다. 그는 크게 돈 욕심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처를 잊으려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노동자들이 도박에 빠지는 것은 자기 고뇌에 대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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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性愛)과 경제, 그리고 두목노동자

인간 내면에 대해서는 항상 더러운 이야기만 하게 된다. 전에 가본 적이 있는 H인력에서 멧세지가 왔다. ‘목수 일 많습니다. 일 나오세요.’ H인력은 하루에 100명 정도의 목수를 현장에 보내고 있었다. 나는 평택 항에 고정으로 일 나가기 전까지 땜빵용, 그러니까 고정으로 한 현장에서 일하던 목수들이 안 나올 때 그 현장에 투입되는 인력으로, 이곳저곳 현장을 돌아다녔다. 원룸 현장에서 외국인 Y와 함께 일했다. 나는 그를 <따거>라 불렀다. 키가 크고 힘이 좋은 이를 지칭하기 좋은 이름 아닌가. 그가 서투른 한국 말로 내게, ‘내일 비 와. 애인(자기에게 소개시켜 줄 여성)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없어’라고 말했다. 그가 재차, ‘애인 줘’라고 말했다.

이튿날 비가 왔다. Y와 점심때 국밥집에서 만났다. 그는 머리고기와 소주 두 병을 해 치웠다. 잘 통하지 않는 대화로 애먹고 있을 때, 한국말을 잘 하는 Y의 친구가 왔다. 친구로부터 시원하게 Y의 심중을 들을 수 있었다. Y는 곧 고국으로 돌아갈 참이다. 고민이 있으니, 방금 한국에 온 친구 때문이다. 친구는 목수 일은 되지만, 한국말을 못해서 어디현장에서 일을 시켜줄 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자기 친구를 데리고 일 다녀 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대답을 못 했다.

두 사람이 모국어로 한 참을 이야기했다. 나는 무료해,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이것이 실례되지 않을 듯 했다. 그만큼 그들은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들이 나가자고 했다. 어슬렁거리며 따라가자, 콜라텍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J의 친구가 말했다.

“내내 일 하면서 고생하다가, 이런 곳에 와서 기분을 풀지요. 언니들 바글바글 해요.”

플로어에는 할머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들의 옷차림은 전문 댄서와 같았다.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적나라하다. 눈치를 보아 하니, 파고다 할머니들이 많은 듯 했다. 노동할 수 없는 여성들은 경제력 있는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파고다 할머니들에 비하면 일용 노동자조차도 아주 높은 계급이다.

나는 다시 책을 꺼내 읽었다. Y의 친구가 ‘책은 집에 가서 읽어요, 여기에서는 그냥 놀아요’라고 했다. 다시 둘러보니, 외국어를 하는 젊은 여성들도 많았다.

술 취한 Y가 집요한 내면을 드러내었다. 말끝마다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고, <애인>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마도 hook-up body만 중요한 곳에서 ‘아름다운(젓가슴, 사랑, 육체)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플로어의자에서 사람들이 끈적거리는 눈으로 다른 사람들의 뒤를 쫓았다.

60대의 O목수는 좋은 차를 몰고 다닌다. 우람한 몸에 성질도 장기(長氣)해서,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호인이다. 그 역시 <땜빵>이라서 나는 그의 차를 타고 몇 군데 현장에 일하러 갔다. 그 역시 말끝마다 <여자친구>였다. 외국인 여자 친구와 아라비아 지역 까지 여행을 다녔다. 여자 친구는 몇 년간 출국 했다가, 이제 며칠 후면 한국에 들어온다고 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노동자들에게 감정과 성,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는 답이 없다. ‘손 맞인 즉 땡기는 맛이 없어 유흥업소 여성은 사양’하고 자기만의 창녀를 갖기 위해, 입에 담기에도 꺼려지는 인간 종들이 <장자연>을 만드는 세계에서 경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빼았기는) 것이 현실이다. 더 얻은 사람이 있다면 빼앗기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경제적 형편 대문에 사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소설이 아니다. 이런 저런 사정, 특히 경제적 형편 때문에 남편을 버리고 돈 벌러 나왔다는 이야기는 항용 듣지 않는가. ‘생식 능력만 있는 이’(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미이다)가 성적 상대를 빼앗긴다는 것은 그에게 행복 추구권리, 사랑을 통한 감정 충족 까지도 박탈당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다.

노동자들은 반장에게 비 호감적이다. 단지 반장이 우리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는 것에 대한 질투만은 아니다.

반장 급은 일을 시키고, 목수들이 일하는 것을 감시한다. 일반 목수들이 자주 쉬어야 하지만, 반장들은 한 달 내내 일 할 수 있다. 일당도 더 많이 받는다. 책임이 큰 만큼 돈 많이 버는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 태도를 바꾼다면 그것은 <변절>이다. 그러나 반장이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도 아니니 그가 노동자 편이 아니라 사용자 편이라고 해서 변절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의도를 해석하자면, 반장들이 미운 이유는 ‘한 사람의 노예 상태를 다른 사람의 완전한 인간적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평택 항 현장에는 반장이 두 사람이다. 월급 받는 총 반장은 모든 데마, 철근, 콘크리트, 형틀을 총괄한다. 목수 반장에게 작업지시를 하는 것도 총 반장이다. 그리고 일당 노동자 목수 반장이 있다. 반장들이 정확히 일하면 ‘되 나우시’는 없다.

지금도 항용 그렇지만, 옛날이라야 몇 십 년 전만 해도 거짓말처럼 돈 잘 버는 오야지들은 애인이 있었다. 대충 서너 사람이 기억난다. 잡철 오야지의 여성은 아기를 안고 현장에 함께 왔다. 현장에서 그녀가 하는 것은 아이를 어르는 일이다. 어느 목수 오야지는 젊은 여성에게서 얻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은퇴할 나이가 훨씬 넘도록 일했다. 둘 이상의 여성을 거느린 미장 오야지는 오통으로 항상 허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애인인 여성들로부터 두목 노동자의 ‘카리스마에 반했다’는 이야기를 우회해서 듣곤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느 여성의 결정을 이끌어주는 남성다움에 반했다는 것인 즉, 그 여성이 일종의 매저키스트적이거나 자기 독립적(자기중심적이 아니라)이지 못한 여성들일 것이다. 그러한 결합이 바람직할 리 없다. 다만, 그 여성들이 경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그러니까 파고다 할머니들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타인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여성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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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국인 노동자와 내국인의 임금

목수들이 아주 흔히 화제를 삼는 것이 외국인 노동자와 내국인 인건비에 관한 것이다. 80년대부터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O씨가 말했다.

“90년대만 해도 2000년 도에는 목수 품값이 일본이나 미국 수준이 되리라고 예상했다. 당시에는 젊은 사람들이 목수 일을 배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점점 임금이 올라가는 추세였다. 그런데 갑자기 IMF터지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면서 품값이 오히려 떨어졌다. 여행 비자든 방문비자든 개의치 않고 현장에 와서 일하는 통에 완전히 망했다.”

87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건축노동자들의 품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공공연히, ‘노태우가 우리 형편을 좋게 해 주었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5,1.6프로의 보수층이 있지만, 권력 지지 기반이 없던 당시로서는 정치가들이 기층노동자들에게 어느 정도 잘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보다 정보도 많고 똑똑하다. 중소기업 협회 등에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 인건비가 싼 나라를 만들려고 불철주야 노력한다.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인건비가 비싸지면 값 싼 노동력을 외국에서 끌어들여온 역사는 길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당대의 노동자들이 처한 절실한 문제였다. 노동 시간이 짧아지고 인건비가 오를 만하면 자본가들이 가난한 나라의 값 싼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통에 노동자들이 국제적으로 단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값 싼 노동력이 만들어 내는 것은 생 떽쥐베리가 분노하듯이 <살해된 모차르트>들, 짐짝처럼 실려 있는 폴란드 노동자들이 탄 기차의 교육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만이 아니다. 자국과 타국 노동자들의 빈곤의 공평화도 만들어낸다.

제 1 장 제 3 절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자본론강독]-⑦-1

제 1 장 제 3 절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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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참석 : 김선이,김성심,나태영,박종호,신재길,신준하,옥철,윤지미

발제자 : 신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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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상품의 이중성과 그에 대응하는 노동의 이중성을 보았다.

상품의 이중성은 사용가치와 가치의 모순이고, 노동의 이중성은 구체노동과 추상노동의 모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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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나의 상품에 서로 다른 성격이 공존하는 모순이 현실에선 어떻게 나타나며, 이 모순이 어떻게 해소되고, 또 더욱 심화되는지를 가치형태의 검토를 통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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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은 사용가치에 대응하는 현물형태와 가치에 대응하는 가치형태를 갖는다.

“상품은 철, 아마포, 밀 등과 같은 사용가치의 형태, 곧 상품체의 형태로 세상에 나타난다. 이것이 상품의 평범한 현물형태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상품으로 되는 것은 그것들의 이중적인 성격. 곧 사용의 대상인 동시에 가치의 담당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오직 이 이중적 형태, 곧 현물형태와 가치형태를 가지는 경우에만 상품으로 나타나는 것이다.”(자본론1상 59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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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가치는 상품의 물질적 속성이기 때문에 그 형태가 자연적인 물건인 현물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에는 상품의 감각적이고 거친 외형과는 정반대로 단 한 분자의 물질도 들어 있지 않다.”(60p) 상품의 가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사회적인 것“(60p)이다. 사회적이란 인간관계를 말한다. 상품의 가치는 “인간노동이라는 동일한 사회적 실체의 표현”(60p)이기 때문에 가치는 그자체로 물질적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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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품들은 그 사용가치의 잡다한 현물형태와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의 공통적인 가치형태, 곧 화폐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 다 알고 있다.”(60p) 우리는 상품의 가치를 화폐를 통해 가격으로 나타낸다. 즉 화폐가 상품의 가치를 나타내는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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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이 가치형태의 절에서 “화폐의 신비”를 “화폐형태의 발생기원”(60p)을 통해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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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할 것은 이 가치형태의 절에서 맑스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가치란 대체 어떻게 하여 탄생했을까?”(자본을 넘어선 자본, 64p, 이진경)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맑스가 가치관계의 형태를 연구하여 해명한 것은 “가치가 어떻게 탄생하였는가?”라는 점이 아니라 일개 상품에 불과한 금, 은 등과 같은 귀금속이 어떻게 화폐로 되어 가치를 대표하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진경이 화폐의 탄생과정을 가치의 탄생과정으로 잘못 본 것은 “가치형태를 가치 자체와 혼동했기 때문”(자본론1상 63p 주17, 김수행)이다. 이러한 잘못은 온도계의 발명을 온도의 탄생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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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단순한, 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B 또는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B와 가치가 같다.

20미터의 아마포 = 1 개의 저고리, 또는

20미터의 아마포는 1개의 저고리와 가치가 같다.“(61p)

이것이 모든 가치형태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단순한 가치형태인데 다음의 도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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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A=y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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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치표현의 양극 :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

“종류가 다른 두 상품 A와 B(우리의 예에서는 아마포와 저고리)는 여기서 분명히 두 개의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아마포는 자기의 가치를 저고리로 표현하며, 저고리는 이러한 가치표현의 재료가 된다. 제1의 상품은 능동적 역할을 하며, 제2의 상품은 수동적 역할을 한다. 제1의 상품의 가치는 자기의 가치를 상대적 가치로 표현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 상품은 상대적 가치형태로 있다. 제2의 상품은 등가물로서 기능한다. 다시 말해, 그 상품은 등가형태로 있다.”(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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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호로 연결되어 있는 두 상품 A 와 B 에서 좌변의 A상품은 상대적 가치형태이고 우변의 B는 등가형태이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상대적 가치형태는 자신의 가치를 다른 상품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즉 상품A는 상품B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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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등가라는 말은 가치가 같다거나 또는 가치에 대응한다는 의미이다. 즉 등가형태로서의 상품B는 상대적 가치형태인 상품A의 가치와 같은 가치를 갖거나 그에 대응한다는 말이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비대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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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의 관계는 상품소유자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상품A(아마포)를 소유한 사람은 아마포를 사용가치로서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상품A(아마포)를 사용가치로 소유한다면 그 상품을 소비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상품A의 소유자는 상품A를 교환가치로서 소유하고 있게 된다. 즉 자신이 필요로 하는 다른 상품과 교환할 수 있는 가치로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 가치형태로서의 상품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상품이 교환가치가 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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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 “아마포의 가치를 아마포로 표현할 수는 없다.”(61p) 그래서 상품A(아마포)의 소유자는 아마포의 가치를 다른 상품(저고리)를 통해서 표현하게 된다. 즉 아마포 20미터는 저고리 1개의 가치와 같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이때 저고리는 아마포의 “가치표현에 재료를 제공하고 있을 뿐”(62p)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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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A가 능동적이란 의미는 상품A가 자기의 가치를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이고 상품B가 수동적이란 의미는 상품A의 가치를 나타내는 재료로 쓰인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역할의 차이는 ‘단순한 가치형태’의 도식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상품이 도식의 좌변에 위치하면 상대적 가치형태로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요, 도식의 우변에 위치하게 되면 상대적 가치형태의 가치를 나타내는 재료의 역할만을 수동적으로 수행할 뿐인 등가형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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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등호는 좌변과 우변의 역할의 같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도식에서 역할만을 표식한다면 xA –> yB 의 형태가 더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맑스는 이렇게 화살표로 가치형태를 표식하지 않고 등호로서 표식하고 있다. 이는 도식의 양변에 위치한 상품들의 역할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두 상품의 가치량이 같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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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대적 가치형태

(a) 상대적 가치형태의 내용

맑스는 “가치관계를 우선 그 양적 측면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63p)고 한다.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이든, 20미터의 아마포=20개의 저고리이든, 또는 20미터의 아마포=X개의 저고리든, 다시 말하면, 일정한 양의 아마포가 다수의 저고리와 가치가 같든 소수의 저고리와 가치가 같든, 그러한 비율의 존재 자체는 가치량으로서는 아마포와 저고리가 동일한 단위의 표현들이며, 동일한 성질을 가진 물건들이라는 것을 항상 전제하고 있다. 아마포=저고리라는 것이 이 등식의 기초이다.“(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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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A = B 가 된다. 이 도식은 가치관계에서 양적 측면을 배제한 것을 나타낸다. 영희는 철수와 같다고 할 때, 즉 영희 = 철수라고 할 때 무엇이 같은가? 학교성적일 수도 있고, 몸무게 일 수도 있고, 나이 일수 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동일한 성질”임을 전제로 한다. 영희의 성적과 철수의 몸무게가 같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상품간의 관계에서는 이러한 “동일한 성질”이 가치이다. 즉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고물”이다. 이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고물“인 가치가 ”상대적 가치형태의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치로서의 상품은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고물이라고 말할 때, 우리의 분석은 상품을 추상적 가치의 차원으로 환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현물형태와는 다른 가치형태를 상품에게 주는 것은 아니다.”(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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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상품의 “추상적 가치”는 “어떻게 표현되는가?”(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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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의 가치성격은 다른 상품과의 관계에서 표면에 나타난다.“(자본론1상 63p, 김수행 초역판)

“예컨대 우리는 가치물로서의 저고리를 아마포와 등치시킴으로써 저고리에 들어 있는 노동을 아마포에 들어 있는 노동과 등치시킨다. 저고리를 만드는 재봉과 아마포를 만드는 직포는 그 종류가 다른 구체적 노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재봉을 직포에 등치시키는 것은 사실상 재봉을 두 가지 노동에서 진실로 똑같은 것[즉, 인간노동이라는 양쪽에 공통된 성격]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직포도 또한[가치를 짜는 한] 재봉과 구별되지 않으며 따라서 추상적 인간노동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우회적 방식이다.”(자본론1상 64p, 김수행 제2개역판 이하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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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저울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어떤 한 물건의 무게를 알고자 할 때 저울의 한 쪽에 그 물건을 올여 놓고 저울 반대쪽에 쇠덩어리인 추를 달아 잰다. 무게란 그 자체로 만지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물건(쇠덩어리)의 무게를 통해 나타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대적 가치형태인 아마포의 가치를 알아내기 위해서 다른 가치물인 저고리를 비교하여 등치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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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상대적 가치형태의 양적 규정성

위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의 내용 즉 인간노동의 응결인 가치를 살펴보았다. 이제 양적 측면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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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형태는 가치일반뿐 아니라 양적으로 규정된 가치[즉, 가치량]도 표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상품 A의 상품 B에 대한 가치관계, 아마포의 저고리에 대한 가치관계에서는 저고리라는 상품 종류가 가치체 일반으로 아마포에 질적으로 등치될 뿐 아니라. 일정한 양의 가치체 또는 등가(물)[예컨대 1개의 저고리]이 일정한 양의 아마포[예컨대 20미터의 아마포]에 등치된다.”(68p)

그러나 가치량은 생산성이 변동함에 따라 변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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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아마포의 가치는 변동하는데 저고리의 가치는 불변인 경우

“상품 B의 가치는 불변이더라도 상품A의 상대적 가치[즉, 상품 B로 표현하는 상품 A의 가치]는 상품 A의 가치에 정비례해 상승 또는 하락한다.”(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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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아마포의 가치는 불변인데 저고리의 가치가 변동하는 경우

“상품 A의 가치는 불변이라도 상품 B로 표현하는 상품A의 상대적 가치는 상품 B의 가치변동에 반비례해 하락 또는 상승한다.”(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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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아마포와 저고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이 동시에 동일한 방향으로 그리고 동일한 비유로 변동하는 경우

“이 경우 이 상품들의 가치가 아무리 변동하더라도 여전히 20미터의 아마포= 1개의 저고리다. 이 상품들의 가치변동은 이 상품들을 [가치가 변하지 않은] 제3의 상품과 비교할 때에만 드러난다.”(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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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아마포와 저고리 각각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즉, 그것들의 가치]이 동시에 동일한 방향이면서 서로 상이한 정도로, 또는 반대방향으로 변동하는 경우

“이와 같은 각종 조합이 한 상품의 상대적 가치에 주는 영향은 I, ii, iii의 경우를 적용해 간단히 알 수 있다.”(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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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을 풀어나가는 자기실현의 길[치유시학]

매듭을 풀어나가는 자기실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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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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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실현의 길?

자신의 비밀을 평생 동안 혼자 간직하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 뒤에는 온전한 자유를 향한 염원이 있다. 온전한 자유, 진정한 자유는 세계와 교류하여 나와 세계가 서로 영향을 줄 때 실현가능한 것이다. 삶의 빛은 현실적인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7개월 동안의 만남에서 보여준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 개인의 고유성과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아왔기에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고 지금은 없는 기억 속의 이웃들에게 분노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지난 삶을 정리하는 모습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 지난한 삶에 맺혔던 매듭을 말로써 하나씩 풀어나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내 할머니와 어머니의 다림질 모습이 떠오른다. 우물에서 퍼 올린 물로 긴 광목천을 발로 밟아 빨아서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널어놓으면 마치 햇살이 내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에 펄럭이던 광목천 사이를 뛰어노는 사이 광목천은 바싹 마르고, 어머니는 그 천을 하나씩 걷어서 풀을 먹였다.

커다란 대야에 마른 광목천을 넣고 어머니가 풀주머니를 주물럭거리면 하얀 풀물들이 나와 광목천을 촉촉하게 적셨다. 광목천을 손으로 주물러 풀물이 골고루 천에 스며들면 다시 빨랫줄에 널어 말렸다. 풀을 먹인 광목천은 햇빛 아래에서 더 하얗게 표백되어 갔다. 빳빳하게 마른 천을 걷어 들인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서 입으로 물을 뿜어 천을 다시 촉촉하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물을 뿜는 소리에 비례해서 어머니의 콧등에는 땀이 맺혔다.

촉촉하게 젖은 광목을 직사각형으로 개켜 보자기로 싸서 발로 밟았다. 어머니의 발 아래에서 광목은 물기가 골고루 퍼지면서 동시에 구김살도 펴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밟기가 끝나면, 광목은 다듬잇돌 위에서 다듬이 방망이에 의해 부드럽게 다듬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양손에 방망이를 들고 일정한 속도로 다듬잇돌 위에 있는 광목을 두드렸다.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는 그 어떤 음악소리보다 어린 내 가슴 속을 휘젓고 다녔다. 마당의 평상 끝에 앉아 다듬이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어머니가 광목천과 하나가 되는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다듬이질이 끝나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마주 앉아 광목천의 끝자락을 잡고 팽팽하게 밀고당기다가 다리미질을 시작했다. 동그란 쇠 다리미에는 타고 남은 숯이 들어 있었고, 광목천은 다리미가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잔주름 하나 없이 평평해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 옆에서 사악거리는 다리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할머니가 자신의 삶과 가슴에 맺힌 한을 말로 풀어나가는 그 모습이 마치 누런 광목을 하얀 천으로 만들어가는 어머니의 손길 같았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원망도 미움도 안타까움도 사랑의 아픔도 하나씩 벗어던지는 모습이 지난한 시간을 거쳐 하얗게 탈색되어 햇살 아래 빛나던 광목천과 같았다. 그것은 자기 의지에 의해 자기 본연으로 돌아가는 것, 곧 자기실현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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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크면 자신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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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을 때, 할머니는 자신의 고통을 정확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떠나보낸 아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마쓰시타에 대한 회한, 먼저 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함께 살지 못하는 딸에 대한 아쉬움 등이 서로 뒤엉켜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한은 할머니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하나씩 보태지는 고통은 매듭과 같다. 이 매듭은 삶을 얽매는 질곡이자 현실을 어두움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나의 고통에 함몰되면 내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자신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홀로 내던져진 것 같은 막막함만 남는다.

할머니의 초기 시를 보면 “나는 왜 이렇게 고통이 많고/ 내 앞에는 여러 가지 시련이 닥치나/ 절망에 싸였다.(시 [내 인생길] 중)”고 고백한다. “약한 자는 아무리 말을 하여도/ 소귀에 경 읽기더라.(시 [내 인생길] 중)”는 표현으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울분을 토해 놓았다. 그러나 시를 읊고 그 시를 내 목소리를 통해 다시 들으며, 시로 못다한 이야기들은 말로 하면서 맺혀 있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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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시 왈가닥한 성격에
참지 못해 그 사이로 뛰어들어
발로 얼음을 타며 돌아다니다가
결국 엉덩이로 얼음에
방아를 찧고 말았네.
내 죽는다고 뒹구르니
길가는 나그네 아저씨가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네
너무도 감사하여 맘으로 답례하였네.
– 시 [임진강에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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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allsonline.org/beautiful-winter-river/

할머니는 구술한 마지막 시인 [임진강]에서 처음으로 세계와 교류하고 소통하는 표현을 했다. 할머니는 이 시에서 “많은 인파들이 아이 어른 분별없이/ 팽대를 치며 썰매를 타고/ 옆에서는 스키를 타며/ 즐겁게 놀고 있는” 사이에 뛰어들어 얼음을 지치며 놀다가 넘어졌는데, 알지 못하는 나그네 아저씨가 도움을 주어서 고마웠다고 회상했다.

“임진강에는 언제 가보셨어요?” 나의 질문에 할머니는 “어데, 가 본적 없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에게 들었다. 꼭 한번은 가보고 싶대. 그래서 한번 생각해봤다.”라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김선생, 어떻노? 얼음이 얼모 팽이도 돌리고 얼음썰매도 탄다. 임진강은 저 우에 있으니 얼음이 더 얼었을 끼다.” 할머니는 눈을 지긋이 감고 혼자만의 생각에 젖어 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편안해 보여서 말없이 옆에 앉아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실만 시로 읊거나 말을 하다가 상상으로 시를 읊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시 속에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많은 인파”)이 등장하고, 스스로 그 인파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함께 놀았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우물물조차 마시지 못하게 하는 이웃사람들에 대한 원망에서 벗어나 넘어진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나그네에게 마음으로 답례를 하는 것은 어떤 변화일까?

어쩌면 고달픈 현실의 삶에서 희망을 찾고 꿈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할머니의 팔을 잡았다. “으응?”하며 나를 보는 할머니의 눈빛은 잔잔했다. 얼굴에는 밝은 빛이 서려 있었다. 며칠 계속된 감기로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할머니는 어두웠던 과거에서 빛을 찾아내어 어둠을 밝음으로 바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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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있어 기쁨은 빛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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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시와 이야기를 통하여 찾아낸 빛은 어린 시절 책에서 읽고 동경했던 임진강에 대한 기억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갈 수 없었기에 마음 깊은 곳에 꽁꽁 묶어놓았던 임진강으로 떠나서 해보고 싶었던 얼음지치기를 하며 노는 자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할머니에게 그 어떤 자유가 찾아 온 것은 아닐까.

온전한 자유란 혼자만의 세계를 떠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행해지는 실천이다. 비록 상상의 세계이지만, 많은 인파들 사이에 스스로 뛰어 들어가 놀다가 넘어지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그 행위야말로 할머니가 원하던 자유였다. 할머니와는 물 한 모금도 나누어 마시지 않으려 하던 과거의 이웃은 넘어진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이웃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늘 과거의 낡은 생각과 결별해야 하는 의식이 따른다. 생각은 생각을 낳고 분노는 어리석음을 낳고, 어리석음은 눈과 귀를 가리고 미혹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이 미혹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자각이 있어야 하는데, 자각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지나온 삶을 때로는 시로 나타내고 때로는 말을 하는 경험으로부터 할머니의 자각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각은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할머니를 이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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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아무런 소식도 없이
회오리바람이 불어
온 스키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모자와 목수건이 날아가며
그 나그네 아저씨의 모자가
하늘로 뱅뱅 돌더니
임진강 흐르는 강가에 떨어져서
돌고 있는데 철새 한 마리가
날개 죽지가 부러져서
퍼득퍼득 뛰며
그 모자 속으로 들어가서
갑자기 사공이 되어 노를 젓고
끝이 없이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네.
이 일을 보고 있는 나그네 아저씨는
고요한 말로
‘허, 참, 이상하다’ 하더니
뒤돌아서네.
나는 곁에서 눈이 땅에 흐리도록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신기하다고 느꼈네.
– 시[임진강에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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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던 나그네의 모자는 날개 죽지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새의 피난처가 되어 어딘가로 흘러간다. 그것을 눈이 흐려질 정도로 보면서 할머니의 마음은 신기함으로 가득 차 있다. 상처 입은 새와 함께 할머니의 지난 삶은 어딘가로 흘러가고, 이제 할머니는 사람 사이에서 신나게 놀기도 하고, 타인의 손을 잡고 일어서기도 하는 활달한 소녀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강물은 스스로 흘러 바다로 간다. 나와 너, 자연과 인간이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도 강물처럼 가야할 곳으로 간다. 그러나 삶의 질곡은 우리를 세계와 단절시키고,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닫고 어둠 깊숙한 곳으로 자신을 유폐시킨다. 유폐의 길고 어두운 시간을 지나 할머니는 닫혔던 삶의 문을 열고 새로운 희망의 공간으로 발을 떼기 시작했다.

내 고통의 실체를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진정한 삶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함께 볼 수 있다. 할머니는 자신의 고통을 ‘날개 죽지가 부러진 철새 한 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철새에게 모자를 양보한 나그네도 함께 놀던 많은 인파도 사라지고 할머니는 혼자서 멀리 사라져가는 철새를 보고 있다.

60년의 시간을 지나, 지금 여기에 있는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60년의 시간 동안 자신을 할퀴고 간 수많은 고통의 순간들을 할머니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병에 걸린 자신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던 지나간 시간, 병 때문에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아들, 어머니, 마쓰시타에 대한 기억도 철새 한 마리와 함께 강물에 흘려보낼 순간이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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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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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를 읊은 후에도 우리들의 만남은 한 달 정도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봄이 오고 있는데도 그날은 몹시 추웠다. 방바닥은 냉기만 면하고 있었고, 전기장판 위에서 우리는 이불을 무릎에 덮고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담담하게 앞을 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인자 오지 마라.” “내 할 말 다 했다.” “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 짧게 이어지는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스스로 드러낸 할머니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할머니가 시를 들려주면서 나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전에는 밤에 누우면, 무신 생각이 그리 많은지 잠이 안 온다. 잠은 안 오고 생각은 자꾸 나고. 눈물은 왜 그리 나오던지. 그런데 요새는 시 생각한다고 다른 생각이 안 난다. 뭐라고 할꼬. 우찌하면 잘 표현이 될꼬. 하룻밤에도 수십 번은 시를 썼다고 허물었다가 안 하나. 어떤 때는 머리가 아파서 에이 하지 말자 하다가도 또 생각하는 기라. 그라다보모 머리도 안 아프고 잠이 든다.”

“보래이, 김선생. 내 살아온 이런 이야기도 시가 되나? 참 우습제. 내 다시는 말 못할 줄 알았다. 하모, 누한테 말하겄노. 시를 생각하다보모 내가 나한테 말을 하는 기라. 그때는 그랬다. 아이다. 이랬다. 혼자 그라다보모 날이 샌다. 허허허. 참 우습제?” 그렇게 마음으로 쓰고 기억한 시를 구술하고 내가 받아 적은 후 다시 읽고 있노라면, 더러는 “아이가, 그기 아이다.” 하며 수정하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시로 나타내기 위하여 온 정신을 다하여 집중하는 동안, 할머니는 자신을 얽매고 있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지혜를 터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지혜는 자신의 삶을 시로 만드는 성찰과 집중의 과정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시와 이야기로 들려주며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마음의 파도를 잔잔하게 다스릴 수 있었던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할머니는 스스로 삶의 매듭을 풀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라는 말은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 준 나에게 한 말이자 할머니 자신에게 해주는 위안의 말이었으리라. 또한 구술을 할 때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치게 해 준 말이었다.

우리들의 마지막 만남이 있었던 15개월 후, 할머니의 전화번호로는 더 이상 신호가 가지 않았다. 지난 6월 5일은 할머니가 시간과 공간, 무수한 인연들로부터 자유로워졌던 날이다. 날개 죽지 부러진 한 마리 철새는 임진강물을 따라 바다로 흘러가서 현해탄을 건너 아들을 만났을까. 마쓰시타를 만나 아들의 존재를 알렸을까. 그리고 할아버지를 만나 내 옆에 있어주어 고마웠다고 두 손 마주 잡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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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기술자 못남을 드러내는 책: 강준만이 쓴 『인물과 사상 1권-33권』[보고듣고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지식기술자 못남을 드러내는 책

강준만이 쓴 『인물과 사상 1권-33권』

글:?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나는 왜 『인물과 사상 1권-33권』을 다시 읽는가! 나는 서민이다. 나는 99프로이다.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한미자유무역협정)이 폐기 되어야만 내 생활이 편해진다. 내 노후가 편해진다. 내 자손들이 편히 산다. 이 땅 서민 삶이 편해진다. 그런데도 이 땅 지식기술자들은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를 외치지 않는다. 저들은 그저 1프로가 만들어 놓은 놀이터에서 적당히 하는 척만 한다. 그저 경제민주화, 복지정책만 줄기차게 외친다. 나는 말한다.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하지 않고서 두 가지 절대로 이룰 수 없다. 나는 지식기술자가 못나서 이 땅에서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열 두 글자가 한데서 고생한다고 생각한다. 이 땅 지식기술자 못남을 철저히 드러내는 책이 강준만이 쓴 『인물과 사상 1권-33권』이다. 우선 이 땅 지식기술자 못남을 철저히 알고 싶다. 그래야 이 땅에서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촛불집회를 이룰 수 있다. 우선은 저들 못남을 처절하게 알아야 겠다. 더불어 내 못남도 알아내야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사서 모았다. 읽는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열 받으면서. 읽는다. 이 땅 99프로는 1프로가 만든 놀이터 안에서만 놀고 있다. 벗어날 생각을 아예 못한다. 벗어날 상상도 못한다. 이정희, 홍세화, 박은지 이 세 사람이 바로 그렇다. 저들은 해야만 할 일 을 제대로 못한다. 김대중은 북조선과 남한 3단계 통일론을 약 40년에 걸쳐서 외쳤다. 세 사람은 김대중 한태 배워야 한다. 지금은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하라 외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모든 일에 때가 있다고 멋있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 땅 서민들은 아무 때나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피해를 본다. 10년, 30년 지나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30년 정도 지나면 피해가 커져 이 땅 서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짓말이다. 바로 지금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면 30년 뒤에도 들고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살률 거의 세계 1위, 출산률 거의 세계 꼴찌, 비정규직 노동자가 절반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다. 이런데도 99프로가 지금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 30년 뒤에도 지금과 똑 같을 것이다.

강준만/ 출처: http://jtlee.khan.kr/163


‘이름을 다스리는 사람이 세상을 다스린다.’
이 땅에서 영어 알파벳이 점령군처럼 들어와 있다. 이 땅 기지촌 지식인들이 열심히 영어 알파벳을 쓰고 있다.

‘또 고려대학교 철학과에서 나온 한 제목이 『Hegel의 實體觀』이며 그 안에 소제목이 “Hegel과 Platon의 idealism”으로 시작하고 모든 고유명사가 직접 들어와 있다. 나는 도대체 이따위 무질서한 언어전통이 어디서 그 족보를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서양철학을 하시는 분들은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보고 한문을 풀어쓰지 않을 뿐 아니라 고루하다고 투덜댄다. 그러면서 그들은 프라톤이나 칸트, 헤겔 정도의 보편화된 우리말을 버리고 알파벳을 쓰시며 위대한 철학을 하고 계시다.’(『도올논문집』, 102쪽)

얼숲(페이스북)에서 당신 이름을 영어 알파벳으로 쓰시는 분들이 계시다.
그분들이 이야기 나누는 상대 다수가 한국인들이다. 그런데도 자신 이름을 영어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좀 거시기하다. 나태영을 영어로 쓸 때 Tae-young Na 가 아니라 Na Tae-young이 되어야 한다. 외국에서도 그리 써야 한다. 그래야 외국인들이 “그래 한국에서는 성이 앞에 나오지. 우리랑 거꾸로 하네! 거 참 신기하네!” 말할 것이다. 미국인이 한국에 오면 “How mush is it?, Could you show me the way to city hall!”이 아니라 ” “이거 얼마예요?, 시청 가는 길 알려주세요.“ 정도는 말할 줄 알아야 한다.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이 ‘한미FTA’로 많이 쓰인다. ‘한미FTA’하면 일반인들은 그 뜻이 금방 와 닿지 않는다. 그 무시무시한 것이 내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한국과 미국 1프로는 집요하게 사기를 쳐서 자신들 욕심을 채운다.

한겨레신문에서는 간혹 ‘한미자유무역협정’ 이라는 이름을 쓰는 기자가 있다. 나는 이 이름이 ‘한미FTA’라는 이름보다는 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름도 사기치는 짓을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라는 두 글자가 너무도 좋은 뜻을 지니고 있다. 그 두 글자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응! 두 나라가 무역을 자유롭게 한다구! 좋지!” 그러는 사이에 한국과 미국 1프로는 집요하게 사기를 쳐서 자신들 욕심을 채운다.

2003년쯤에 민주노동당이 ‘한미매국협정’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잊어먹었다. 나는 이 이름을 자주 써먹었다. 하지만 이 이름도 딱 들어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 1프로가 두 나라 99프로, 특히 한국 99프로 서민한테서 챙길 것을 최대한 챙기려고 한다. 돼지 똥구멍에 낀 콩나물까지도 빼먹으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이 이름이 맞춤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보통 사람들이 그러겠지!

“아니! 죽일 놈들이 우리를 패죽인다구!
내 가만 있을 수 없지!
어디, 너 죽고 나죽자!”

언론인과 학자가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이 열 글자를 드러내놓고 쓴다면 이 무시무시한 협정이 대선에서 쟁점도 되지 못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을 다스리는 사람이 세상을 다스린다.’

강준만과 김동민이 펼치는 조선일보 제 자리 찾아주기 운동 조선일보는 반노동자 신문이다. 그런데도 민주노총 68만 회원 다수가 조선일보 본다. 억장이 무너진다. 진보정의당 노회찬이 조선일보에 아부한다. 한 두 번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반호남신문이다. 그런데도 호남 사람 다수가 조선일보 본다. 조선일보는 반통일 신문이다. 그런데도 북조선을 떠난 분들이 열심히 조선일보를 본다. 억장이 무너진다. 조선일보를 비판하기 위해서 조선일보 본다는 사람들도 많다. 답답하다. 강준만은 책을 통해서 조선일보 반대운동을 했다. 김동민도 그리했다. 현장에서도 조선일보 반대 운동을 했다. 그래서 강준만이 김동민을 높이 산다. 강준만은 중용을 이룬 사람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blogId=bloodlee

중용은 가운데를 뜻하지 않는다. 중용은 중립을 뜻하지 않는다. 제 때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중용이다. 중용을 잘 이루는 보기는 우리 몸이다. 날씨가 더워지면 우리 몸은 땀을 흘려서 체온을 유지한다. 그래서 중용을 이룬다. 날씨가 추워지면 우리 몸은 몸을 떨어서 체온을 유지한다. 강준만은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을 비판한다. 저들이 수구세력처럼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하기에 그런다. 조선일보처럼 김대중을 비판해서 그런다. 조선일보나 수구세력에게 당하는 김대중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김대중을 비판해서 강준만은 진보적인 학자들을 비판한다. 저들이 거대담론만 중시하고 이 땅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을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저들이 진보를 외치면서도 반진보적인 신문 조선일보 월급쟁이들과 인터뷰하는 것을 허물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강준만은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을 비판한다. 말을 고친다. 조선일보는 신문이 아니다. 강준만은 편견을과 통념을 깨부수는 사람이다. 『인물과 사상 1권-33권』 이 책들을 통해서 나는 내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김용옥은 김대중을 비판한다. 김대중이 대통령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 해놓고 그 말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나도 김용옥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다.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준만 책을 읽고 나서 내 생각이 바뀌었다. 총각이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결혼하겠다고 생각을 바꾸면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축하해 줄 것이다. 정치가가 대통령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다시 대통령 출마하겠다고 말해서 심하게 비판 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김대중을 비판한다.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비판한다. 진보적인 학자들도 거든다. 나는 알게 되었다. 강준만은 더 이상 다른 주장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용케도 다른 주장을 펼친다. 그리고 그의 그런 주장이 꽤 설득력 있다. 강준만 글을 읽고 있노라면 강준만 얼굴과 맹자 얼굴이 겹쳐진다.

강준만은 바로 우리 이야기를, 바로 우리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김용옥은 우리나라 국문학 동네가 우리나라 철학 동네보다 더 뛰어나다고 부러워 한다. 박사학위 딴 석학들이 자신보다 학력이 떨어지는 고졸, 학부 출신 작가들 작품을 비평해서 국문학 동네가 뛰어나다고 부러워한다. 우리나라 철학동네 사람들은 서구 철학자들이 쓴 글을 열심히 읽고 인용하지만 우리나라 철학자들이 쓴 글을 인용하면 자신 수준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 등 선비들 글에는 사람들 이름이 자주 나온다고 한다. 서로 이름을 걸고 서로를 비판한다고 김용옥은 말한다. 수많은 나와 너가 나온다고 김용옥은 말한다. 우리나라 철학 수준을 높이려면 우리 철학자가 쓴 글을 열심히 읽고 비판해야 된다고 김용옥은 주장한다. 김용옥이 바른 말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강준만은 우리 땅에서 글 쓰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 사람 이름을 드러내며 그 사람을 비판한다. 비판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 나쁘겠지만 김용옥의 주장을 생각해 보면 강준만이 우리나라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나아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영원한 무림고수는 없나보다. 맹자같이 냉철하고 논리적인 강준만이 2012년 대선에서 안철수를 옹호하는 활동을 펼쳤다. 좀 거시기 했다. 나도 한 때는 안철수를 좋게 평가했다. 나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은 푸근한 인상, 지지율이 자신보다 한참 못 미치는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양보한 의연한 자세를 보고 나는 한 때 안철수를 좋게 평가했다. 하지만 안철수가 2012년 4.12 총선 바로 며칠 전에 ‘당보다 인물을 보고 표를 주라.’는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안철수에 대해 가졌던 좋은 평가를 접었다. 과연 이 사람이 상식 있는 사람인가 의아해했다. 이런 안철수를 강준만이 옹호하는 모습을 보고 강준만이 왜 이러지 생각했다. 영원한 무림고수는 없나보다. 강준만을 넘어서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지금 자신이 1프로이고, 1프로 대변자인 박근혜가 대통령이다.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⑤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⑤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부터 파르메니데스가 이미 없는 것으로 규정했던 과거와 아직 없는 것으로 규정했던 미래와 있는 것으로 규정한 현재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몇 개의 문장으로 나타내 볼까요?

1-1. 있었던 것이 있었다.
1-2. 있었던 것이 없었다.
1-3. 없었던 것이 있었다.
1-4. 없었던 것이 없었다.

2-1. 있는 것이 있었다.
2-2. 있는 것이 없었다.
2-3. 없는 것이 있었다.
2-4. 없는 것이 없었다.

3-1. 있을 것이 있었다.
3-2. 있을 것이 없었다.
3-3. 없을 것이 있었다.
3-4. 없을 것이 없었다.

위에 적은 열두 개의 문장은 모두 이미 없는 것의 관점에서 본 과거─과거, 현재─과거, 미래─과거의 관계들을 나타냅니다. 여기에서,

1-1은 과거의 실재를 단순히 확인하는 문장으로 볼 수도 있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그보다 앞선 과거가 지속되어 왔음을 가리키는 문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2는 하나도 없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 그보다 앞선 과거에는 있었던 것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보니 없어졌음을 나타내는 문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3은 빠진 것이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거나 그보다 앞선 과거에는 없었던 것이 과거 어느 시점에서 있게 됨을 나타낸 문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4는 다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또 그보다 먼 과거에도 없었던 것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문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사태를 가리키지 않고 여럿(둘 이상)의 사태를 가리키는 까닭(다시 말해서 언어의 모호성)은 사태의 무규정성을 반영합니다. 우리가 이미 없는 것, 지나간 것, 끝난 것으로 파악하는 과거에도 여전히 규정되지 않는 것, 유동적인 것, 바뀔 수 있는 것, 변화의 계기가 들어 있고, 바로 이 과거에, 이미 없는 것으로 규정된 것에 남아 있는 변화와 운동의 숨은 힘이 어떤 계기에 현재와 미래를 바꾸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파르메니데스(Παρμεν?δη?, 기원전 510년경 – 기원전 450년경) /출처: athenakanenas.blogspot.com

1-1에서 1-4까지 살펴본 문장이 이미 없는 것 사이의 내부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2-1에서 2-4까지는 지금 있는 것(지금 없는 것)과 이미 없는 것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1은 실재하는 것이 지난날에도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지금 있는 것이 지난날에도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2-2는 하나도 없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고, 지금은 있는 것이 지난날에는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2-3은 빠진 것이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고, 지금은 없는 것이 지난날에는 있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2-4는 다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고, 지금 없는 것이 지난날에도 없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얼핏 보면 2-1과 2-4 문장은 현재까지 이어져 온 과거의 사태를 가리키고, 2-2와 2-3 문장은 변화된 사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2-2, 2-3, 2-4 문장이 단순히 과거의 관점에서 본 현재와 과거의 지속이냐, 변화냐를 나타내지 않고, 이미 없는 것 자리에서 하나와 빠진 것과 여럿(다는 여럿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을 문제삼고 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이미 없는 것에 지금 있는 것(지금 없는 것)이 문제 상황으로 이미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뜻은 다르지만 1-1에서 2-4까지 여덟 개의 문장은 전체로 보아 모두 과거의 관점에서 내린 사실 판단의 틀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볼 3-1에서 3-4까지 문장은 사실 판단의 틀을 벗어납니다. 물론 이 문장들이 지닌 뜻의 일부는 사실 판단의 틀 속에 가둘 수도 있지요. 그러나 사실 판단의 틀을 아무리 넓혀 놓아도 여전히 그 밖에 서 있는 의미의 계열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3-1은 앞으로 있으리라 예상되는 사태가 지난날에도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의 틀 안에서 보면 이 문장은 사실 판단의 한 갈래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또 있어야 할 것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앞으로 있게 될 것이 아니라 지난날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 있었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는 거지요. 3-2, 3-3, 3-4 문장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 사이에 사실 판단뿐만 아니라 가치 판단까지 내릴 수 있는 관계가 성립한다는 게 기묘하지 않습니까?

판단 주체의 문제로 돌아가자고요? 그 주체가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인간의 의식인가요? 아니면 초월의식인가요? 혹시 개미나 선인장은 그 주체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나머지 문장들을 분석해 보고 논의를 진행시키기로 하지요.

아래에 다른 열두 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이 문장들은 지금 있는 것의 관점에서 본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과 있는 것의 관계를 드러내는 문장들입니다.

가-1. 있었던 것이 있다.
가-2. 있었던 것이 없다.
가-3. 없었던 것이 있다.
가-4. 없었던 것이 없다.

나-1. 있는 것이 있다.
나-2. 있는 것이 없다.
나-3. 없는 것이 있다.
나-4. 없는 것이 없다.

다-1. 있을 것이 있다.
다-2. 있을 것이 없다.
다-3. 없을 것이 있다.
다-4. 없을 것이 없다.

여기에서, 문장 가-1은 ‘지난날에 있는 것이 지금도 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또 ‘지난날에는 하나도 없었단 말이냐?’라는 질문에 ‘아니다. 지난날에도 무엇인가 있었다.’는 답변의 뜻으로 이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문장 가-2는 ‘지난날에 있는 것이 지금은 없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또 ‘하나도 없었다.’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뜻풀이에서 없다는 현재가 없었다는 과거로 때 매김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십시오.

문장 가-3은 ‘지난날에 없는 것이 지금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 ‘빠진 것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에서 과거로 시점 전환이 또 한 번 더 이루어졌습니다.

문장 가-4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장이 지닌 뜻 하나는 ‘지난날 없는 것이 지금도 없다.’이지만 다른 뜻은 ‘다 있었다.’입니다. 여기서도 지금 있는 것(지금 없는 것)이 의미 전환을 통하여 이미 없는 것으로 때매김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과거와 미래,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 미래와 과거, 미래와 현재를 이어 주는 비밀의 통로가 없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 가상의 통로일 뿐이라고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나머지 문장들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문장 나-1에서 나-4까지는 이 강의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제까지, 또 앞으로도 두고두고 되풀이되는 분석의 대상이므로 여기에서는 빼기로 합니다.

문장 다-1에서 다-4까지는 모두 가치 판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눈에 보일 것입니다. 물론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1을 ‘앞으로 있게 될 것이 지금 있다.’는 뜻으로, 다-2를 ‘앞으로 있게 될 것이 지금 없다.’는 뜻으로, 다-3을 ‘앞으로 없게 될 것이 지금 있다.’는 뜻으로 또 다-4를 ‘앞으로 없게 될 것이 지금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자면 못 할 것도 없지요. 그러나 이 문장들을 그런 사실 판단의 틀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데는 무리가 따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왜 과거와 현재의 상관관계에서는 사실 판단만 성립하는데 미래가 끼어들면, 다시 말해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미래와 과거, 미래와 현재가 관계를 맺을 때는, 그리고 미래가 주체가 될 때(미래를 나타내는 말이 주어의 자리에 올 때)는 가치 판단이 성립할까?’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은 나머지 문장들을 살펴보고 난 뒤로 돌리기로 하지요.

이제 아직 없는 것의 관점에서 본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 ‘있는 것과 아직 없는 것’, ‘아직 없는 것’ 들 상호 관계를 드러내는 열두 개의 문장을 적겠습니다.

ㄱ-1. 있었던 것이 있을 것이다.
ㄱ-2. 있었던 것이 없을 것이다.
ㄱ-3. 없었던 것이 있을 것이다.
ㄱ-4. 없었던 것이 없을 것이다.

ㄴ-1.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ㄴ-2.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ㄴ-3.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ㄴ-4.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다.

ㄷ-1. 있을 것이 있을 것이다.
ㄷ-2. 있을 것이 없을 것이다.
ㄷ-3. 없을 것이 있을 것이다.
ㄷ-4. 없을 것이 없을 것이다.

ㄱ-1에서 ㄱ-4까지 이미 없는 것이 주어가 되고 아직 없는 것이 술어가 되는 과거와 미래의 관계에서 있을 것, 없을 것이라는 판단은 있어야 할 것이나 없어야 할 것이라는 당위나, 있으리라 또는 없으리라는 예상이 아니라 추측의 성격을 띱니다. 칸트의 분류에 따르면 이른바 개연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ㄱ-1을 ‘지난날 있는 것이 앞으로 있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무엇인가 있었을 것이다.’ ㄱ-2를 ‘지난날 있는 것이 앞으로 없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지난날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ㄱ-3을 ‘지난날 없는 것이 앞으로 있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지난날 빠진 것이 있었을 것이다.’ ㄱ-4를 ‘지난날 없는 것이 앞으로 없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지난날 다 있었을 것이다.’로 뜻풀이하자면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생략 어법에 따라 현재라는 관계 고리가 빠져도 이해되는 그런 상황에서가 아니라면 이 문장들을 보고 예상이나 예측이 강조되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무엇인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빠진 것이 있었을 것이다.’ ‘다 있었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각각의 문장에 함축되어 있어서 술어에서 아직 없는 것이 이미 없는 것으로 시점 전환이 일어납니다. 말하자면 과거의 미래가 현재의 과거로 바뀌는 상황인데 이러한 변화는 나중에 변화와 운동을 통틀어 다룰 때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ㄴ-1에서 ㄴ-4까지 문장도 예상, 예측의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ㄱ-1에서 ㄱ-4까지 문장과 마찬가지로 이 문장들에서도 추측의 측면이 두드러집니다.

ㄴ-1은 ‘무엇인가 있으리라 추측한다.’

ㄴ-2는 ‘하나도 없으리라 추측한다.’

ㄴ-3은 ‘빠진 것이 있으리라 추측한다.’

ㄴ-4는 ‘다 있으리라 추측한다.’

의 뜻으로 자연스럽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