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철학자의 서재]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철학자의 서재]

오지석 (루터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곳”?!

 

1983년 한 가수가 부른 건전가요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의 노랫말을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 있고 계층 이동이 열려있다는 사회라고 선언한다. 흡사 미국을 향해 이민 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아메리카 드림’을 패러디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노래는 1970년대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에 이어 제5공화국 시절 우리들을 집단 최면으로 이끌었다.

 

<불평등한 어린 시절>(아네트 라루 지음, 박상은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에코리브르

그렇다보니 아네트 라루가 <불평등한 어린 시절>(박상은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은 “자신의 삶 속에서 사회 계층이라는 요인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 “어떤 개인이건 열심히 일하고 충분히 노력한다면 그리고 재능이 있다면 사회에서 더 높은 위치로 올라설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인생에서 주어지는 기회의 차이는 개인의 열정과 재능, 그리고 노력의 차이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해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자녀들을 ‘스펙 쌓기’,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원까지 ‘귀족 인맥 쌓기’에 내모는 것이 우리 시대의 맨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녀들의 삶의 경험과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의 사회적 지위”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보니 부와 지위의 불평등이 사회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의 삶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책임은 모두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사는 이유, 다음 세대에게 갖고 있는 것을 물려주는 것이지!

 

인터넷 검색 엔진에 ‘세습’ 또는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넣어보면 한국 사회가 북쪽 권력의 3대 세습에 대해 강력한 어조로 비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사회 속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세습 또는 대물림에 대해서는 일부러 눈을 감거나 관대하다. 심지어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 하는 일은 ‘핏줄’을 통한 전수라고 온갖 매스미디어를 통해 주장하며, 자식의 경쟁자들에게 이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대물림에 대해 우리 사회는 각기 다른 말로 표현한다. 전통 사회에서 세습이라는 말 자체는, ‘왕권 세습’에서 보듯이 정치적, 법률적 용어에 한정하여 사용되었다. 재산 세습은 특별히 ‘상속’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학문이나 기예의 세습은 ‘사사’라는 용어가 널리 쓰였다. 세습은 혈연, 지연, 학연 각각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또는 그 같은 방식들이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것은 역시 핏줄에 의한 세습, 대물림이다. 우리말에서 ‘대물림’, ‘세습’, ‘상속’, ‘전수’, ‘사사’, ‘물려주다’의 용례를 살펴보다보면 ‘~을 에게’, 혹은 ‘~에(에게) ~을’이라고 나온다.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가? 그것이 삶의 목적 또는 삶의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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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트 라루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이론을 바탕으로 미국 사회를, 특히 교육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사회적 계층 및 불평등의 대물림 문제를 들여다본다. 부르디외는 사회 구조를 이끄는 지배 및 불평등의 패턴에 주목한다. 또한 개인이 자신과 자녀들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 혹은 향상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사회에서나 이러한 특권의 세습은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그 사회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나 특권은 자신의 지능이나 재능 또는 노력 같은 역량을 통해 자신 스스로 획득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여기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과연 개인의 사회적 위치는 자신의 노력이나 재능의 결과물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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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루는 이 책에서 교육을 ‘집중 양육과 자연적 성장을 통한 성취’라는 방식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의 활동, 언어 사용, 가정생활과 공공기관이라는 분류에 따라 아홉 사례를 소개한다. 각각 등장하는 사례를 읽다보면 우리 사회의 맨얼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책은 학교 또는 교육기관의 정보에 항상 노출되어 있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중산층과 그렇지 못한 노동자 및 빈곤층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 자녀의 스케줄에 자신의 스케줄을 맞출 수 있는 중산층 부모들, 이와 반대로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마련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자녀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게 익숙한 노동자·빈곤층 부모들을 마주하다보면 유럽과 같은 자녀 양육 수당이라든지 무상교육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또한 이런 생각을 하면 조선시대부터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탄압하거나 자신의 정적을 제거할 때 쉽게 사용했던 패턴을 통해 ‘자기검열’ 하게 하는 무서운 사회에 살고 있음을 직시하게 된다. 그러면서 세습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져 가는 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말을 사용하는 동물이다!

 

사람은 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말을 통해 사회관계를 유지하고 생활에 필요를 요구하고 공급받기도 한다. 아네트 라루는 자녀들이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사회생활을 하게 하는 매개체로서 언어에 주목한다. 자녀와의 언어생활을 보면 계층별로 차이가 나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가령 중산층은 자녀들에게 다양한 언어적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가정에서 제공한다. 그래서 이들이 사회적 관계를 맺어나갈 준비를 갖출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조정하여, 원하는 것을 최대한 얻어내는 도구로 사용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거나 협상하는 법을 숙지해나간다.

 

이에 비해 노동자 및 빈곤층의 언어생활은 짧은 문장과 쉬운 단어를 사용하기에 제한적이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의견을 타협하는 일도 거의 없다. 이들 가족의 삶에서 언어란 논리적 대화 기술이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학습 수단이 아니라 실용적인 의사 전달 수단의 역할만 하고 있다. 중산층의 언어생활과 노동자 및 빈곤 계층의 언어생활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 간극을 채우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의 계층, 계급 갈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평등한 어린 시절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 사회는 상생, 공존이라는 단어보다는 ‘경쟁’이라는 말이 익숙하고 그것이 현실을 지배한다. 우리 사회는 이미 사회 계층 사이의 이동이 상당히 얼어붙은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앞 세대(70세 이상)가 아직도 믿고 있는 ‘개천에서 용 나기’가 단지 드문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우리 사회는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실력’이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그 실력은 어떻게 배양되는가? 이런 물음에 한국 사회는 ‘교육’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그래서 오늘도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앞에 그리고 학원 앞에 차량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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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보다 한국 사회는 ‘교육’에 몰입한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자신의 수입 대부분을 여기에 쏟아 붓는다. 자녀들이 자신들의 ‘스펙을 쌓는다’고 하면 부모들은 자녀가 ‘사회적 이동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경제력을 집중한다. 하지만 이것도 부모 자신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회적 계층이 노동자, 빈곤층일 경우 누구라도 ‘불평등한 어린 시절’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이것은 대물림의 현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는 누군가에게만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사회를 지양하고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없을까? 이런 물음을 남기고 아네트 라루의 말로 글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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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출신 가족이 처해 있는 사회적 위치는 그 개인이 인생에서 겪게 될 일이나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는 불평등은 보이지도 않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회 계층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이를 재조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에 득이 되는 방향인지도 모른다.”

 

 

 

 

배우고 읽히기에 맞춤한 책[보고듣고생각하기]

배우고 읽히기에 맞춤한 책:『다시 쓰는 맑스주의사상사』

 

나태영(한철연 회원)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콩쯔

보통 사람들이 이 책을 한 번 읽으면 머리가 아프다,?한 번 읽기도 힘들다.?세 번 읽으면 이 땅 모든 전문가들한테 휘둘리지 않는다.?일곱 번 읽으면 맑스주의 사상사 전문가 된다.이 땅에서 이 책 일곱 번 읽는 사람 아예 없을 것이다.?조선시대 선비 중에는 이런 책 일곱 번 이상 읽은 사람 여럿 있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없다.?그만큼?21세기 대한민국 문화수준 낮다.?그저 돈만 많이 벌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그러니 이명박 괴물과 박근혜 괴물이 태어났지.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랴?’

이 책 모든 꼭지에서 칼 맑스 이름이 나온다.?칼 맑스는 예수보다 뛰어난 사람이다.?예수가 한 말은 쉽다.?칼 맑스가 한 말은 너무 어렵다.?김성민이 말했다.?칼 맑스가 쓴?『자본론』?잘 이해 못하는 게 정상이다.?어려운 게 정상이다.?『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책쓴이들은 어려운 맑스주의 사상사를 조분 조분 이해하기 쉽게 썼다.?그래도 다루는 내용 자체가 어려워서 이 책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최소한 세 번 이상은 읽어야 이 책 내용을 오롯이 이해할 것이다.

진보당 이정희대표가 이 책에서?<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마오쩌둥>, <그람시> <지젝>?다섯 꼭지라도 세 번 이상 반복해서 읽으면?20대 대통령 되리라고 확신한다.

 

다시 쓴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오월의봄 펴냄). ⓒ오월의봄다시 쓴다는 것은 고쳐 쓴다는 것이다.?더 많이 생각해서 다시 쓴다는 것이다.?더 많은 자료를 바탕삼아 다시 쓴다는 말이다.?성공과 좌절을 겪은 뒤에 다시 쓴다는 말이다. 21세기 한국 상황에 쓰일 수 있게 다시 쓴다는 말이다.?칼 맑스 제자들은 칼을 들어야 한다.?그 칼로 한미 서민패죽이기협정문을 베어야 한다.

예수한테는?12제자가 있었다.

이 책은 칼 맑스,?엥겔스와 칼 맑스 수십 명 제자들 사상을 담은 책이다.?제자들 강점과 한계를 다룬 책이다. 21세기에 그들 정신을 살리는 길을 모색하는 책이다.?이 책쓴이들은 묻는다.?맑스가,?엥겔스가,?레닌이,?그람시가,?로자 룩셈부르크가?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면 어찌할까??묻는다.?단호하게 묻는다.?진보당 대표 이정희한테 묻는다.?민주당과 정의당 인간들한테는 아예 묻지도 않는다.

나는 답한다.?저들이?21세기 대한민국 땅에서 숨 쉬고 있다면 한미 서민패죽이기협정(에프티에이)?날치기 통과 되지 않았을 것이다.?박근혜와 새누리당과 삼성제국 이건희가 환태평양 서민씨말리기협정(티피피)?밀어붙일 생각을 아예 못했을 것이다.?저들이 지금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다면 한미 서민패죽이기협정과 환태평양서민씨말리기협정은 뼈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다.

 

칼 맑스는 저수지이다(서유석)!

산 골짜기 물이 저수지로 모여든다.?저수지는 고인물이다.고인 물은 썩는다.?알튀세르는 맑스 사상 자체에 문제 있음을 지적했다.?저수지 물이 썩지 않으려면 비가 많이 와야 한다.?맑스주의 사상가가 많이 나와야 한다.?칼 맑스는 아담 스미스가 쓴?<국부론>을?수백 번 읽었다.?저수지에서는 물이 찔끔 찔끔 흘러 내려간다.?왜??농사 짓는데 물을 써야 되기 때문이다.?큰 일 할 때 물을 써야 되기 때문이다.?큰 비가 내리면 저수지 물은 넘쳐서 넘쳐서 흘러 내린다.?온누리에 물을 보낸다.?온누리가 살아난다.?온누리가 저수지 물을 마시고 살아난다.?정치란 살림이다.

서유석은 말한다.?칼 맑스가 미친 영향력이 다윈이 미친 영향력 보다 크다.

칼 맑스는

첫째,?사회발전 법칙을 발견했다.

둘째,?자본주의 사회운동(경제발전)법칙을 발견했다.

셋째,?칼 맑스는 혁명가였다.

칼 맑스 비판자,?신자유주의 추종자 하이에크마저도 칼 맑스를 이리 칭찬했다.?이 세상이 자연(the natural)과 인간이 만든 것(the artificial)?이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고 많은 철학자들이 말할 때 칼 맑스는 인간이 만든 시장,?자본주의가 인간을 억압한다는 모순을 밝혀내고 해결책 찾으려고 노력했다.맑스는 공상적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자본주의 강점과 그 자본주의가 일으킨 폐혜를 정확히,?냉정하게 짚어냈다.

 

칼 맑스가 보지 못한 점이 있다.

칼 맑스는 억압받는 자들이 또는 노동자들이 인간 억압 푸는 선두주자로 나설 것이다.?진리의 편에 설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1차 대전 후 독일인 다수가 고난에 빠졌다.?하지만 그들이 히틀러를 투표로 뽑았다.?이 땅에서 노동자 절반이 박근혜 찍었다.?달동네 주민,?시골 사람들,?자영업자 다수가 박근혜 찍었다.?왜??저들은 강력한 지도자가 나와서 문제 풀어주길 고대했기 때문이다.?현대자동차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갈등 크다.?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연대에 대해서는 시늉만 하고 임금이나 수당 올리는 데 치중할 뿐이다.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들은 조합주의 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50년 전 칼 맑스 사상 반복은 어리석다.?칼 맑스 사상을 지금 상황에 맞춰야 한다.?칼 맑스가 지금 살아있다면 어찌했을까 고민해야 한다.?『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가 그래서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프랑스?68혁명 때 마르쿠제가 말했다.?미국 노동자들한테 기대 접는다.?노숙자 같은 룸펜이나 학생들이 전위부대이다.

‘마르크스의 폭넓은 관심 영영에서 항상 중심에 있었던 임금 노동자 계급은?’시민이면서도 시민이 아닌 자,?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자’였다.?그들은?’소외‘된 인간이었다.?소외는 젊은 시절 마르크스 저술의 배경 화면과도 같았다.?마르크스는 소외를 인간적 현상이 아니라 정치적 현상으로 파악했다.’

‘자본주의를 분석할 때 마르크스는 오히려 해부학자에 더 가깝다.?죽은 신체가 아니라,?자본주의라는 살아 있는 유기체를 취급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20세기 사상 지도』, 27-28쪽)

 

레닌은 스피노자가 극찬한 마키아벨리 제자이다.

마키아벨리는 인민의 권력의지 만들려고 애썼다.?인민이 정치력 행사하는 세상 만들려고 애썼다.?그람시는 레닌 제자이다.?그람시는 헤게모니론(인민이 스스로 권력자)을 평생 다듬었다.?독일 사회민주당이 제국주의 전쟁 지지함으로써 제2?인터네셔널이 무너졌다.?레닌이 제국주의에 대한 대항세력 형성해서 제3?인터네셔널 만들었다.?레닌은 사회주의국가인 소비에트연방을 만들었다.?레닌은 파괴,?건설.?실패의 길을 걸었다.?레닌이 건설한 것 중시해야 한다.?레닌이 왜?실패했는지 보아야 한다.?맑스는 파리 코뮨 실패 예상하고 봉기 반대했다.?하지만 파리 코뮨 실패 후 왜?파리 코뮨이 실패했는지 연구했다.?『프랑스 혁명?3부작』을 썼다.?맑스는 파리 코뮨을 통해서 프로레타리아 독재 알게 되었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막으려고 소련이 전쟁하러 나가지 못 하게 자기 나라 군대를 힘 빠지게 했다.?중국 사상가 묵자가 전쟁 막으려고 두 나라 왔다 갔다 하면서 왕들한테 부탁했다.?하지만 레닌은 화끈하게 자기 나라 군대를 약화시켰다.?레닌이 하는 생각과 행동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이를 박영균은 레닌의?‘극한적 사유’라고 말한다.

박영균은 말한다.?현대차 노조의?30년 근로자가 자식 취직 특혜 받으려고 협상할 게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 주장해야 한다고 말한다.?일자리 나누기 주장해야 한다고 말한다.?현실은 만만하지 않다.?현대차 노동자들은 노동 시간 단축을 반대한다.?임금 적어질 것을 두려워해서 반대한다.?사회가 지탱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다.?맑스는 자본주의를 찬양했다.?자동화,?정보화 때문에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줄어들 수 있기에 자본주의를 찬양했다.?과거에?1천명이 할 일을 지금은?500명이 해낼 수 있다.?노동시간을 하루?8시간에서?4시간으로 줄일 수 있다. 21세기 대한민국 땅에서 하루 노동 시간을?6시간으로 하는 일터가 있다.윤구병이 이끄는 보리출판사이다.?다른 기업에서도 보리출판사 본받길 기도한다.?맑스는 줄어든 노동 시간을 향유하는 삶을 살 것을 권유한다.?하지만 자본은 노동시간 줄이지 않고 잉여인간 만들어 낸다.?노동자도 임금 깎이는 것 두려워해서 노동시간 줄이는 데 반대한다.

레닌이 지금 대한민국 땅에서 살고 있다면 노동시간을?4시간으로 화끈하게 줄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그만큼 레닌은 화끈하게 살았다.?고독한 자리를 고수하며 살았다.

‘사람들에게 현재적 삶의 양식은?‘익숙한 것’?또는?‘자연스러운 것’이다.?또한 현재의 사회 체제에서 이득을 얻는 자들에게 변화는 기득권의 상실을 의미한다.?따라서 그들에게 레닌이라는 혁명가가 바꾸고자 하는 것,?행위 자체가 무시무시한 공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레닌은 이 점에 대해 누구보다도 단호했다’(52쪽)

레닌 사상 가운데?‘외부로부터의 도입’이란 개념이 어렵다.이 개념을 옳게 이해하려면?‘외부는 노동자에 대한 외부로서 지식 엘리트가 아니다.?오히려 그것은 노동자 자신의 내부에 있는?’외부‘이다.’(58쪽)?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헤매게 된다.?김성민은?‘외부로부터의 도입’을?‘노동자 자신이 스스로 바뀌어 나가는 것’이라고 풀이했다.?나는 강연에서 김성민이 한 이 말을 듣고 이 책?58쪽에 실린?‘외부로부터의 도입’?설명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외부로부터의 도입’을 기독교처럼?‘거듭남’?유교 식으로?‘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나날이 더욱 새로워짐)이라 표현했으면 보통 사람들이 더 쉽게 받아들였을 거라 생각한다.?맑스주의 사상가들이 깊이 생각해주길 바란다.?그러고 보니 윤구병이 한글로 철학을 한다.?쉬운 한글로 풀이해주는 철학을 한다.?멋진 모습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노동자 자신의?’내부‘이고?’외부‘인가?’(58쪽)?노동조합적 계급의식이 내부‘이고 사회민주주의적 계급의식이?’외부‘이다.?곧?‘외부로부터의 도입’이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적 계급의식에서 벗어나 사회민주주의적 계급의식을 품는다는 말이다.‘내부’인 노동조합적 계급의식이 드러나는 경우는 이렇다.?현대차 노조의?30년 근로자가 자식 취직 특혜 받으려고 사장과 협상한다.?자신들이 받는 임금 높이려고 협상한다.

‘외부’인 사회민주주의적 계급의식이 드러나는 보기는 이렇다.?현대차 노조가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하는 것이다.?일자리 나누기 주장하는 것이다.?현실은 만만하지 않다.?현대차 노동자들은 노동 시간 단축을 반대한다.?현대차 노동자 부인들은 더 반대한다.?김진숙한테 들은 말이다.?임금 적어질 것을 두려워해서 반대한다.?그래서?‘외부로부터의 도입’이 실현되기 어렵다.?하지만 꿈을 꾸어야 꿈을 이룰 수 있다.?꿈도 꿀 수 없는 삶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공산주의 사회를 꿈꾸는 지젝 멋지다.

 

그람시는 노심초사했다

자본주의가 칼 맑스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지속될 것 같아서 노심초사했다.?미국 포드 자동차 회사가 노동자들한테 포드 자동차 살 수 있게 임금을 많이 올려주는 것 보고 노심초사했다. 2012년에 서유석한테 강연에서 들은 이야기이다.?서유석이 말한 대로 복지정책은 자본주의를 지속 시키는 정책이다.?하지만 이 나라에서 복지정책이라도 제대로 펼치면 좋겠다.?‘지도로 가장된 지배,?지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지도’ ‘오늘날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지배/피지배,?지도/피지도 관계’보다?‘이 관계를 가장 잊기 쉽다는 것’에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다.?그만큼 지배가 세련되었기 때문이다.다시 말하면 지배가 지도로 가장假裝될 뿐만 아니라 피지배자로 하여금 자신이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지배하더라도 동의를 얻으면서 지배하기 때문이다.결국 지배와 지도는 잘 구별되지 않는다.’(169쪽)

박근혜는 시민들로부터 동의도 얻지 않는다.?대통령 선거 전에는 동의 얻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전태일 열사 동상 찾아간 것이 하나의 보기이다.?전태일 열사 동상만 찾아갔지 전태일 정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수동혁명이란 혁명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혁명을 더디게 하는 것이다.?바로 지금21세기 대한민국 땅에서 혁명을 더디게 하는 걸림돌이 무엇인가.?질문을 던진다.

 

마오쩌둥은 좀 거시기했다

레닌은 국제전을 내전으로 바꿨다.?제국주의 전쟁을 막으려고 소련군이 전쟁하러 나가지 못 하게 자기 나라 군대 힘 빠지게 했다.?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에 비해서 수가 적었다.?돈도 적었다.?미국은 장개석 국민당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마오쩌둥 공산당은 망하기 직전까지도 갔다.?그런데도 고난을 겪은 마오쩌둥 공산당이 중국이라는 나라를 세우자마자 외국 티벳을 침략했다.?나는 마오쩌둥이 레닌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레닌이 국제전을 내전으로 바꾼 사상을 마오쩌둥이 배웠어야 했다.

마오쩌둥이 주장하는 행과 앎이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다.자기 나라 안에서만 통하는 행과 앎에 문제가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티벳이 중국을 침략하지도 않았는데 중국이 티벳을 침략할 명분이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역사를 중시한다는 중국,?명분을 중시한다는 중국은 한계가 많은 나라이다.?마오쩌둥은 중국 고전을 열심히 읽었다.?칼 맑스 책과 레닌 책도 열심히 읽었다.?이 땅 진보당 사람들도 마오쩌둥처럼 고전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진보당 사람들 수가 적으니 일당 백 역할 하려면 진보정당 사람들 실력을 키워야 한다.?진보당이 정권을 잡으려면 진보당 당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실력을 키워야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얼굴이 밉다

키도 작다.?장애도 앓았다.?로자 삶은 선생님들이 성공 모델로 학생들에게 권할 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특히 외모에 열등감을 갖고 있는 학생들과 장애를 앓고 있는 학생들에게 선생님들이 권할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로자는 호연지기 대명사이다.?다음 글은 로자가 레닌을비판하는 대목이다. 귀 기울여 들을만한 대목이다.

‘당이나 조직된 노동대중이 없었던 러시아와는 달리,?독일에는 노동자 계급 출신의 관료가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었다.그래서 로자는 레닌이나 트로츠키보다 일찍 그리고 명확하게 노동 관료들의 부정적인 역할을 알고 있었다.?따라서 로자는 노동계급이?‘중앙위원회의 도구’가 되는 것에 반대했고 레닌주의적?‘?초중앙주의’를 비판했다.?로자는 스파르타쿠스 강령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본질은 노동대중이 더 이상 지배당하는 대중이 아니라 스스로 지배하는 대중이어야 한다고 말했다.?왜냐하면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분리될 수 없으며,?타인의 억압을 담보로 한 자유는 자유의 특권화일 뿐 진정한 자유는 아니기 때문이었다.?맑스의 사회주의가?‘진정한 휴머니즘’,?즉?‘모든 개인이 완전하고 자유로운 발전을 지배적 원칙으로 하는 사회’라면 로자는 이를 실천하는 인도주의적 정열의 화신이었다.‘(104쪽)

중국에 맹자가 있었다면 폴란드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있었다.?한국에는 남명 조식 선생이 계셨다.?레닌은 남명 조식 선생처럼 화끈했다.?남명 조식 선생과 레닌 선생이 만나 술 한 잔 한다면 두 분이 형님 아우님 사이 되었을 것이다.

 

<浴川>
남명 조식

全身四十年前累

千斛淸淵洗盡休

塵土?能生五內

直今?腹付歸流

<냇가에서 목욕하며>

사십 년 동안 쌓인 온 몸의 허물을

맑은 못의 천 섬 물로 다 씻어버리리

혹시나 오장에 티끌이 생긴다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물에 흘려보내리라

『몸은 곤궁하나 시는 썩지 않네』(송재소,?한길사, 2003년, 115쪽)

로자는 뜨겁게 살았다.?독일군 병사 개머리 판에 맞아 죽었다.?붉은 피를 흘리면서 죽었다.?그 뜨거운 붉은 피가 언젠가는?99프로를 위해서 쓰일 날이 있을 것이다.

서유석은 칼 맑스 사상을 제대로 알려면 우선 칼 맑스를 사랑해야 된다고 말한다.?공감한다.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1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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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 65년 4월)는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 65년 4월)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평생 동안 우리는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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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 있거나 잘나고 싶은 마음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결여를 보고 내심 좋아한다. ‘그래, 저 사람은 저런 결여가 있어. 나보다 못하지.’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못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서 타인의 단점과 결여를 찾아내는 데 너무나도 유능해진다. 그래서 또 남들과의 관계가 엉켜버리지만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타자의 결여 한 가지를 보고서는 안심을 하고 있다가, 그 사람이 자기보다 잘났다는 증명을 만나면(즉 어느 한 부분에서 자기보다 성취를 이룰 때) 굉장히 당혹해한다. ‘저 사람에게 저런 면이 있었는데 내가 몰랐구나! 내가 정신없이 사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앞서가는구나.’ 하는 느낌에 괴로워한다. 여하간 이런 사람들의 경우 십중팔구는 과거에 어떤 결정적인(그 사람으로서는 결정적인) 실패를 맛본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어릴 때 신동 소리 좀 들었고 집안에서는 당연히 대학은 서울대쯤은 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했다든가 하는 사람들말이다. ?’나는 ΟΟ한 면은 좀 잘 하는 편이고, ΔΔ한 면은 좀 못하는 편이야. 그렇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사랑 받을만해’라는 확신이 없으면 참 인생이 괴로워진다. 타인의 시선에 그렇게 좌우되려니 얼마나 인생이 피곤해질 것인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피곤하게 사는지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게 피곤하다는 걸 알아야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는데, 이를 감지하지 못하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과 의사도 어쩌지 못한다고 한다. 오히려 “아무래도 정신분석을 좀 받아봐야 할까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정신분석은 무슨 개뿔, 그건 밥 먹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복에 겨워서 하는 짓이지.” 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사실은 정신적 문제가 심각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신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한다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 정신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문제가 많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들이 옆 사람을 정신병원에 보내놓고는 자신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병원까지 찾게 만든 원인임을 전혀 모르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의사들은 정말 치료 받아야 할 사람은 병원에 오지 않고 그 옆 사람이 환자로 온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의 정신 문제를 자각하고, ‘나는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조절할 수 있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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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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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자기가 자기를 알기 어렵다. 인간은 거울이라는 매개가 있어야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매일 남을 쳐다보고 ‘저 인간은 이래서 문제이네 저래서 문제이네.’ 말하면서도 자신의 문제를 보지는 못한다. 그 눈으로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보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자기 자신을 성찰해내고 반성해내기 바쁜 사람은 타인에 대해 말할 여유가 없다. 자기반성 하느라고 바빠서 남들이 무슨 잘못을 하는지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남의 잘못이 눈에 잘 뜨인다면 그것 자체가 내가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왜 그리도 나는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고 싶어하는가?’를 말이다. 내가 A보다 못났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 깊은 곳의 불안이 없는 사람은 A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그리 골몰하지 않는다. A의 잘못을 누가 말해도 그리 관심두지 않는다. A에 대한 험담에 가담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 나는 A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봐 두려워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기 잘못을 보면 볼수록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대해지게 된다. ‘나도 그런 잘못을 하는데 뭐’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열중한다. 자기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잘못에 대해 마음 놓고 욕한다.

사실 이렇게 욕하게 되는 데는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심리가 관련되어 있다. 그런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타인의 잘못을 보면서 확인하게 되는 우월감이라는 쾌감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남들이 열띠게 험담을 해도 그 험담의 대열에 가담하지 않게 된다. 남의 잘못을 말하게 되는 것은 ‘잘못을 하는 그 사람’보다 내가 잘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확인에의 욕구가 없는 사람은 타인의 잘못에 집중하지 않는다. 남의 잘못을 말하고 생각해봐야 나에게 남는 것이 없으므로 그 ‘남의 잘못’에 관심가지지 않는다. 그 ‘남의 잘못’에서 내가 배워야 할 것만 배워내자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보는 사람일수록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남의 잘못을 말하면서 쾌감을 얻는 데 집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대신에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쪽으로 생각을 가져가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보게 되면 예전에 자신이 얼마나 예리한 비판력으로 남의 잘못을 들추어냈는지, 그 때 자신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관대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에 남의 잘못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게 된다.

꾸미기_유럽2013.01 478당신은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가,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가?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에 지나치게 유능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더 유능하다. 인간 인식의 특성으로 인해 남에게는 예리한 칼날을 들이대도 자신에게는 아주 뭉툭한 칼날만 들이대거나 아예 칼날을 들이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한 번 물어보자. 당신은 당신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을 옆에 두고 싶은가? 우리 모두는 나의 단점은 덮어주고 나의 장점을 칭찬해주는 사람을 옆에 두고 싶어 한다. 어느 누구도 나의 단점을 들추어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은 자꾸만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고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우월함을 알아주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빠져 살게 된다. 그 예리한 비판력으로 자신의 잘못을 본다면 인간관계가 좋아질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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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 대해서 가장 잘 모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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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얼마쯤은 부당하고 얼마쯤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부당함은 잘 보면서도 자신의 부당함은 잘 보지 못한다. 그래서 역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측면을 돌아볼 줄 아는 반성능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비합리적인 측면, 부당한 측면을 보고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타인의 비합리적인 측면, 부당한 측면을 보고 수용할 수 있고 그래서 대체로 관대한 태도를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폭탄은 타인의 비합리적인 측면이나 부당한 측면은 아주 잘 찾아내고 혐오하면서도, 자신의 비합리적인 측면이나 부당한 측면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균형은 언제든 우리를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철학적 성찰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철학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 타인의 장점과 단점을 균형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객관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식의 자연적인 경향성은 자신이 잘한 일과 타인이 못한 일을 보는 데 유능한데, 철학에서는 자신이 잘한 일과 못한 일, 타인이 잘한 일과 못한 일을 균형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하니 철학적 성찰을 하려면 머리가 아파진다. 그렇지만 철학적 성찰로 논리적으로 따지다보면 인간 인식의 자연적 경향성, 즉 심리가 더 잘 드러난다.

생각해보자. 나에게는 부당한 측면, 이상한 측면이 없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 이상한 측면이 있고 그 사람에게도 이상한 측면이 있을 뿐인데, 왜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에 그리도 골몰하는가? 물론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이 나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이상한 측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다시 물어보자. 그 사람은 자신의 이상한 측면이 나에게 어떤 불편을 끼치는지를 아는가? 대부분 모른다. 그러니까 계속 그 행동 패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바꿔서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특별한 싸이코가 아니라면 그에게도 자기 반성력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스스로 반성하면서도 그 행동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당신은 그 사람이 스스로를 얼마나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합리적인 사람인가? “나만큼만 합리적이라고 해!”, “그래도 나는 합리적인 편이기야 하지.” 등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합리적이라고 느끼는 나 자신 역시 어떤 이상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나의 그 이상한 측면이 옆 사람을 나도 모르게 힘들게 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충분한 자기 반성력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 모두는 얼마쯤 이상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그의 이상한 부분이, 그에게는 나의 이상한 부분이 문제될 뿐이다. 나에게 그의 이상한 부분만 보이고 나의 이상한 부분이 파악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에게만 이상한 부분이 있고 나에게는 이상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혹시 옆 사람이 아무리 봐도 싸이코라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할 말 없지만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싸이코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싸이코라고 몰아붙이는 인식의 편향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또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실제로 이상하다고 치자.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에 대해 쑥덕거리면 그 사람이 그 이상한 측면을 고치는가? 나와 동료의 쑥덕거림은 그 사람으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를 잘 따져 생각해보면 ‘나 자신의 이상한 측면을 조절해내기도 바쁜데, 뭣하러 굳이 남의 부당한 측면에 그렇게도 관심을 기울이는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험담에 골몰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은 부당해. 내가 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야!’라고 하고 싶은 무의식 때문이다. 이러한 무의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역으로 내가 열등감을 느끼고 있거나 열등하다는 것이 확인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크기변환_꾸미기_DSCN0697“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가장 잘 모를 수 있다. (당신이 불편해하는 그 사람도 대체로 꽤 괜찮은 사람이지만 그 부분에서만큼은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내가 ‘나’이지만 나 자신에 대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대상화해서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거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남의 얼굴만 쳐다볼 수 있는 우리는 남의 문제를 찾아내는 데 너무나 유능하지만, 거울 없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는 특성 그대로 자신의 문제를 남의 문제처럼 보아내지는 못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 인식을?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둑을 둘 때 훈수 두는 사람이?3배를 본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일 때는 객관적 인식에 비해 1/3 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 사람인지, 누군가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인지를 잘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마음에 끄달려가면서 마음에 따라 반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잘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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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의 비교[철학을다시 쓴다]-20

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의 비교[철학을다시 쓴다]-20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남과 북으로 흩어져 살게 되면서 유목공동체와 농경공동체가 어떻게 갈라졌는지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성서의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는 가운데 제가 성서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강의를 마치고나서 어느 분께서?‘창세기를 보면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는 두 그루였다고 기억이 된다.?하나는 지혜의 나무고,?하나는 생명의 나무였다고 기억된다.’?이렇게 말씀을 하셔서 그러냐고, ‘하와가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따 먹은 열매는 생명의 나무 열매가 아니라 지혜의 나무 열매였고,?천사를 시켜서 하느님이 생명의 나무를 지키게 만들었다.’라고 합니다.?그래서 제가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음 시간에 그 문제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그래서 그 이야기를 제가 다른 분한테 여쭤봤더니 그 분도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해요.

“혹시 여기 성서학에 밝은 분,?계십니까??창세기 에덴동산에 대해서 좀 정확하게 증언을 해주실 분 있으면 이야기해 주세요.”

“구약 성서는 히브리사람들이 행한 신앙이고 우주관이거든요.?그래서 처음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그것은 하나의 사유이고,?구체적으로 현대인의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거죠.?그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그거는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구약성서 읽어 보신 분 있으면 말씀해보세요.?저는 에덴동산 한복판에 서 있는 게 생명의 나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그게 생명의 나무가 아니고,?지혜의 나무였다라는 증언이 나오고 또 다른 교회도 다니는 분한테 물어봤더니 그 분도 모른다고 하시고…….(대답 없음.)?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신다면 될 거 같습니다.?제가 자료에 따르는 엄중한 고증에는 자신이 없습니다.?오죽하면 객관성보다도 당파성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겠습니까??정말 완전히 비과학적이거든요.?있는 것보다도 있어야 할 것이 더 중요하고 없는 것보다도 없어야 할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으니까 이런저런 제 믿음의 소산이라고 생각하고…….?어쨌든 에덴동산 이야기는 재미있었습니까?”

“예!”

“그러니까 거짓말을 하면 사람들이 더 재미있다고 합니다.”(일동 웃음.)

계속해서 그런 거짓말을 이어 보도록 하죠.?제가 거짓말의 존재론적인 근거를 이야기하는 첫 시간에는 사람들이 꽤 많아서 이 분들이 내 말에 감격을 했구나,?했는데,?그 다음에?1/3로 수강자가 줄어들었어요.?오늘은 지난 시간보다는 많이 오신 거 같은데 거짓말을 해도 통 크게 하니까 좀 많이 오는 거 같습니다.(일동 웃음.)?지난 시간에는 에덴동산에서 빙하기 때 적도 부근에 모여서 살던 사람들이 간빙기가 되어 적도 지역에 사람이 살기 어려운 열대우림 지역으로 바뀌고,?언제든지 조개를 잡아먹을 수 있었던 갯가가 물이 차올라 실제로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이 전개되었고,?적도 지역에는 밤낮 온도 차이가 없고 사계절이 없는 철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도 머리 쓸 필요가 조금도 없어서 아담과 이브의 두뇌를 측정했으면 아마?‘새대가리’, ‘아이큐 영’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손만 내밀면 먹을 것이 있고,?머리 안 써도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는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결국은 아담과 이브는 머리 쓸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다,?이?<수유너머>처럼 골머리 아프게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아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그런 이야기를 했고요.

그 다음에 갑자기 간빙기가 되면서 온대지방까지 잡혀 있던 얼음이 천천히 남극과 북극으로 밀려나면서 남쪽과 북쪽으로 초원과 나무들이 자랄 수 있는 땅이 열리게 됨에 따라서 그쪽으로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들도 전부 흩어져 살게 됐는데,?여기에는 지구축이 기울어서 자전을 하는 바람에 결국에 사계절이 뚜렷하게 구별이 되고 가을철을 중심으로 먹을 것이 한꺼번에 많이 나는 철이 있고,?겨울같이 먹을 것이 아예 나지 않는 철이 있기 때문에,?사람들이나 다른 생명체들이 사계절을 나면서 철이 나기도 하고,?봄,?여름,?가을,?겨울철에 접어들기도 하면서 미리 삶에 대해서 예측도 해야 하고 대비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됐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자손 가운데 카인과 아벨이 생겨났는데,?아담과 이브가 남과 북으로 정처 없이 떠나게 되는 배경이 있었고,?여기에서 카인은 농경민으로 정착을 하게 되고,?아벨은 유목민으로 떠돌게 되는 신세가 됐는데,?실제로 세계관이라든지 가치관,?이런 것들이 유목민들하고도 다르고 오늘 이야기하게 될 해안도시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던 도시민들하고도 조금 달랐다는 이야기와 농경민의 경우,?좁은 마을 공동체에서 태어나고,?자라고,?늙어서 죽으면 뒷동산에 묻히는 마을 공동체가 농경민들의 우주였고,옆 마을에 가봐야 똑같은 방법으로 농사짓는 사람들만 있었기 때문에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지 못하고 시간적인 경험의 축적이 지혜의 함수가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하였죠.

그리고 농경민은 오래 살수록 지혜로운 사람이고 자연히 장로들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고,?어른들을 공경하는 의식이 역사관에도 투영이 돼서 상고주의 정신,?우리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가 슬기롭고 할아버지보다는 그 할아버지가 더 슬기로웠을 것이다,?그렇게 요순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슬기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때는 황금시대였고,?점점 아래로 내려올수록 은의 시대,?동의 시대,?철의 시대라고 하고,?불교식으로 하면 정법시대에서 상법시대,?말법시대로 점점 더 인간의 삶의 조건도 어려워지고,?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이 더 멍청해진다,?그런 세계관이 농경민들의 의식에 자리 잡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노인네들이 하는 말은 무조건 옳아’?하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가치관도 대단히 규범적이고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보다는 어른들이 하는 대로 순응해서 살면 살길이 열린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싸가지 없는 젊은 것들이라고 생각해서 마을 공동체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제가 한 듯싶습니다.

그리고 유목공동체는 짐승들에게 먹일 수 있는 목초가 있는 곳을 찾아서 위도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인위적으로 한 철을 만들었어야 했기 때문에,?농경민 사이에서 자연의 시간이 지배적이었다면,?유목민들은 인간이 자연의 시간의 일부를 통제할 수 있는 길들을 열어가는 측면이 있습니다.실제로 목초지라는 것이 풀밭인데 기후가 조금만 바뀌게 되면,?그 풀이 곧 메말라서 사막이 생기기 쉬운 조건이고,?사막이 생기게 되면 유목민들 사이에 먹고 살 수 있는 초원을 사이에 두고 싸움이 일어나고,?그 과정 속에서 전체 부족이 죽느냐 사느냐가 달려 있기 때문에 결국은 거기에서 어린 시절부터 목초지를 지키기 위해서 전사들을 길러낼 필요가 있었다,?그래서 농경사회에서는 상사(喪事)와 제사(祭祀),?사람이 죽고 거기에 죽은 사람을 모시는 의식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견주어서 유목사회에서는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튼튼한 그런 젊은이들이어야만 전쟁에서 이겨낼 수 있으니까 그런 젊은이들을 길러내기 위한 성인식이 아주 가혹하고 가장 중요시되었다는 이야기를 곁들여서 말씀드렸습니다.

또 이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서 목초지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서,?여러 공간을 다니면서 목초지를 찾아야 했기 때문에,?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였고,?그렇게 공간적인 경험을 제대로 하려면,?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나 낙타를 길들여서 이리저리 풀이 자라는 곳을 찾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정신적,?육체적인 힘이 강한 청장년층으로 권력의 중심이 옮겨온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그리고 이 사람들의 경우에는 과거에 찾았던 목축지에 다시 가 보아도 누가 이미 차지하고 있거나,?가뭄이 들어서 없어졌을 수가 있으니까 노인들의 말을 무턱대고 따르는 대신에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나서야 했고,?어른들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는 버릇이 생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듯 농경민들의 윤리가 규범윤리라 하면 유목민들의 윤리는 상황윤리다,?어떤 것을 고집하지 않고,?그때그때 바뀌는 사고의 유연성이 생겼다는 이야기였죠.?이렇게 해서 농경민들의 문화형태와 유목민들의 문화형태가 상당히 큰 차이를 보이는데,?거기에 대해서 제가 깊이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여러분들한테 농경민의 문화와 유목민의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나머지 부분을 숙제로 남겨두겠습니다.?농경민으로부터 처음으로?‘부동산’의 개념이 생겨났고,?유목민으로부터?‘동산’의 개념이 생겼다는 것만 알아두시면 되겠습니다.?가축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동산이죠?농경민들은 자연의 시간에 많은 제약을 받았고,?인간의 시간이라는 것은 크게 가치가 없었다,?왜냐하면 삶을 꾸려가는 데 자연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고,?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에 순응하는 지혜를 익힌 노인의 말씀과 자연이 순환하는 질서를 그대로 따르면 삶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따로 생명의 시간 일부를 재조직해서 인간만의 시간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유목민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자연의 시간에 순응해서만은 살아남을 길이 없어서 시간을 공간화하고 등질화시킬 필요가 유목민들 사이에서 나타난다,그러나 유목민의 삶도 실제로 자연의 시간과 긴밀하게 연결됐다는 의미에서 생명의 시간 가운데서 자연의 시간과 완전히 분리되는 인간의 시간을 만든다는 것은 유목민 삶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들뢰즈의 행동학(?thologie)과 되기(devenir) 개념의 실천적 의미[2월 월례발표회]

?[2014년 2월 월례발표회]

 

들뢰즈의 행동학(?thologie)과 되기(devenir) 개념의 실천적 의미

 

발표: 김은주(동덕여대)
후기: 김범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4년 2월 26일. 한철연에서는 <들뢰즈의 행동학과 되기 개념의 실천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김은주 선생의 논문 발표회가 진행되었다. 많은 인원이 참석하지 못해서 아쉽기도 한 자리였다. 그렇지만 이 주제는 지금 시대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되기 코스프레는 매우 훌륭하다.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은 약자를 보듬고 배려하는 상징처럼 간주된다. 이 코스프레와 함께 코드화된 폭력만 잘 활용하면 대통령도 될 수 있다. 물론 취임 1년 후에도 안정적인 지지율 50%도 가능하다.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 참으로 여성-되기 코스프레는 위대하다. 또한 이런 사건도 기억해 볼 수 있다. 어떤 여성은 어머니의 심정(엄마 코스프레?)으로 회사의 노동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바로 여성의 힘이다! 이런 시대에 여성되기는 오히려 구조적 파시즘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런 코스프레가, 이런 어머니가 여성-되기일까? 여성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여성-되기라는 개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 들뢰즈의 행동학, 특히 되기의 문제는 비판과 동시에 지지라는 양가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마음가짐과 문제의식으로 들뢰즈의 행동학을 해석하면서 여성되기의 가능성을 연구한 성과를 정리하는 김은주 선생님의 2월 발표는 무척이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배치부터 심상치 않았다. 2시간을 훌쩍 넘는 발표와 토론이었지만, 여기에는 모종의 지지와 비판이라는 이중주가 넘실거릴 수 있는 배치였다. 프랑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성적 태도로 철학을 접근하는 사람들과 늘 대립각에 서야만 한다. 그리고 늘 한편에서 조용하게 혼잣말을 한다. ‘문제제기부터 잘못됐어!’ 발표자인 김은주 선생님(이하 발표자로 명한다.) 오른쪽에는 가따리 전공자가, 반대편 왼쪽에는 여성철학이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공부한 분이 앉았다. 이런 배치는 오묘한 이중주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임과 동시에 프랑스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긴장의 강도를 가늠하게 해준다.

발표자는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 설정부터 설명한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윤리적 작업은 규범을 따르는 의무의 논리에서 벗어나, 힘을 실행하고 존재하는 방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는 윤리적 논의를 ‘~해야만 하는 바’라는 형식적 보편타당성을 따르는 자율적 의무의 입각점에서가 아니라 존재 방식들을 새롭게 정의하고 가치의 문제를 새롭게 발견하는 비판과 구축의 작업으로 접근한다. 그의 입장은 도덕을 비판하는 니체를 계승하고, 존재의 역량(puissance)으로 설명하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새롭게 해석하고 보다 구체화시킨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인간 중심주의에 의해 재단된 삶에 저항하며 새로운 존재론적 조건을 생성해내는 행동학의 정치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다.”

ⓒ 서영화

ⓒ 서영화

문제 설정부터 많은 설명을 요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발표에서는 니체의 선악비판보다는 스피노자의 윤리학, 특히 신체의 역량에 관한 문제에 집중해서 행동학의 의미를 접근했다. 발표 후 토론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신체의 의미부터 보충설명하고 싶다. 신체란 구체적으로 인간의 신체, 동물의 신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모두 신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들뢰즈의 제자인 일본 철학자 우노 구니이치는 corps(신체)라는 말이 한자 문화권에서 쓰는 體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근대에서는 신체에 대해서 심과 신의 이원론적 대립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스피노자나 니체의 경우에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무의식이나 심층적 의식의 지위를 신체 개념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나아가 신체는 변이의 힘을 갖고 있는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발표자의 경우에는 이를 신체의 역량을 변용과 변용능력이라는 두 축에 따라 정의하면서 역량 강화의 윤리적 측면을 정리하였다. 이로부터 생성하는 되기의 개념을 힘들(초기 존재론에서는 강도로 설명한다)의 관계를 통해서 정립되고 설명되는 지평으로 나아간다.

발표자는 이런 정리를 한다. “신체를 규정하는 지점에서 보자면, 경도는 신체들 간의 관계를 제시하며 신체들의 결합과 합성을 의미하는 변용(affection)이다. 위도는 한 신체에 있어서 역량의 증가와 감소라는 강도적인 변화 상태와 그 정도를 보여주는 정동(affect)이다.” 그리고 이 정동은 새로운 신체를 구성하는 개체성, 즉 이것임(hecc?it?)으로 나타난다. 이것임은 원래 둔스 스코투스 학파가 존재들의 개체화를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한 haecceitas에서 유래한다. 들뢰즈의 경우 이 개념을 사건과 관련해서 사용하는데, 사건은 인칭적인 자아를 구성하지 않는 개체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임은 정동을 통해서 신체를 조성하는 생산하는 되기 개념과 만나게 된다.

발표자는 되기(devenir)의 의미에서 신체 결합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석한다. 즉 되기의 블록(bloc de devenir)으로서 둘 사이의 관계성으로 발전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는 개체화가 가능한 심층적인 접힘과 펼쳐짐을 해석할 수 있다. 발표자는 공진화(co-evolution)를 설명할 수 있는 이중 포획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되기 개념이 실재의 변화 ‘과정’이며 ‘상호 변용’의 결합으로 명쾌하게 정리했다. 이런 해석 안에는 신체의 역량 강화라는 일차적인 의미와 함께, 여기서 비롯되는 의지적 주체의 도덕을 비판하는 함의가 깔려 있었다.

이 설명 안에는 주체도 목적도 없는 되기가 마치 상대주의, 심지어는 허무주의적 색채로 가득하다는 비판의 날이 설 수 있다. 특히 되기가 어떤 당파성을 견지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 들뢰즈의 되기가 막연하게 신체적 역량 강화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어쩔 수 없이 파시즘적 역량 강화의 측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던질 수 있는 비판의 내용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밝히기 위해서 발표자는 되기의 구체적 실천의미를 정리했다. 되기는 인간 중심주의에 의해 벗어나서 그 구분의 경계를 횡단하고, 다수의 권력 지점이라는 중심으로부터도 벗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수적인 것의 되기는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존재 방식에서는 자아 중심적 사고, 인간중심적 사고를 해체하고 도처에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익명적 ‘아무개’로서 윤리 정치적 존재론의 의미를 형성할 수 있다.

이런 정치존재론은 자유로운 인간들의 합의체(합의라는 신체)로서 새로운 형태의 존재 조건들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로부터 이미 주어진 수동적인 역량, 혹은 이미 주어진 절대적 권력 앞에서 복종 대신에 도주와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는 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되기의 과정이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하는 여성되기에 해당한다.

이윤추구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생산활동 [노동이야기]-12

이윤추구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생산활동

?[노동이야기]-12

 

이 재 원(한철연 회원)

?1.?주인과 노예

겨울의 막바지,?봄이 오고 있다. P건설현장이다. H?인력회사에서 열 명 정도 함께 갔다.

아침 조회가 끝난 후 조별 모임을 했다.?나는 헬멧과 안전벨트는 이곳 하청화사에서 받았으나 각반을 준비하지 못했다.?나는 반장에게 딱 걸렸다. “당신은 돌아가.”?라고 반장이 말했다.?나는, “알겠습니다.?좀 여쭙겠습니다”라고 운을 떼었다.?반장이 말해보라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생존할 권리가 있지요?”?다시 반장이 수긍했다.?나는 거칠게, “돌아가라 하면 나는 무었을 먹고 살지?”라고 말했다.

내 딴에는 인권과 정의에 대해 말 한 것이었다.?인권 차원에서 모든 이는 생존권이 있다는 것,?이에 따라서 노동할 권리를 빼앗는 것이 정의롭지 않다는 의미였다.?그리고 사람을 기계의 부속품쯤으로 대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하기야 어떤 이들에게는 노예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더 이상 노예가 필요 없을 것이다.

그 날은 어찌 어찌 일했다.?함께 일하러 간 노인으로부터 들었다.?전에도 한번 모두 쫓겨 온 적이 있었다 한다.?그 와중에도 내 편을 들어 준 사람이 있었단다.?그러자 반장이, “모두 돌아가고 싶으냐”라고 했단다.?노인은 그 소리를 듣고,?또다시 쫓겨 가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단다.?그 날은 분위기 썰렁해서인지,?모두들 쉬지도 않고 일했다.

나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좋다.?노동은 인간 구원의 수단이자 해방의 도구로서,?노동을 통한 자기실현 과정에 있는 인간의 자기표현을 보여주는 낭만적인 글이요,?노동이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면서도 인간을 고양시키는지 말해주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싸워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노예가 된다.?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처럼 비취진다.?주인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노예는 주인에게 봉사한다.?그러나 어느 순간 변증법적 역전이 이루어진다.?노예는 노동하면서 물질 법칙을 알게 되고 자연을 이용할 줄 알게 되면서?“일종의 ?자유(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게 이러한 변증법적 전환에 의해서 노예의 노동은 노예에게 자유를 되찾아 준다.?그러나 주인은 물질시계의 혹독함을 알지 못한다.?왜냐하면 그는 자신과 세계의 중간에 노예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노예는 노동을 통하여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된다.?그러나 주인은 노예 없이는 살 수 없는,?노예의 노예가 된다.

며칠간의 아파트 천정공사 무임노동과 일주일간의 저임금 노동도 이 변증법을 믿기에 시작한 것이었다.

외국인?L과 둘이서 지방이서 일하는 천정 시공 작업 팀에 합류하기로 했다.그러나 우리를 일 시켜주기로 한 팀장?Y의 제안을 듣고,?현명한?L은 즉시 자기는 일을 포기하겠다,?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팀장은 처음 며칠간은 무임금 노동으로 일을 배우라고 했다.?그것도 우리가 목수이므로,?일을 이해하기 때문이라는 전제였다.?일을 배운 다음에는 때려먹기ㅡ일 한 만큼 공임을 받으라고 했다.

그러나?L이 돌아가자 상황이 변했다.?나는 졸지에 팀장?Y의 시혜대상이 되고 말았다.?나는?Y가 주는 대로 임금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2.?제골치기,?일명 때려먹기의 역사

농촌의 작업은 예전에는 모두 협동 작업이었다.?논의 김을 맨다 하자.?어렸을 때 본 광경이 눈에 선하다.?어디에서 그처럼 모여 들었는지 마을 앞 논들에 사람들이 가득,?일렬로 늘어서 이 논 저 논 할 것 없이 한꺼번에 김을 매어 나갔다.?그리고 내가 노동할 나이가 되어서는 모를 심거나 벼를 벨 때,?물결치듯 작업해 나가는 것을 배웠다.?앞 물결이 나아가면 뒤 물결이 밀려오듯,작업속도가 늦은 사람을 옆 사람이 조금씩 도와주다 보면 작업 대형이 비슷해진다.

고향 농민들 중에는 객지로 품을 팔러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이 배워온 작업방법이?<제 골 치기>이다.?누군가가?“제골 치기 해보자”고 제안 한다면 작업하는 사람들은 밭두둑 하나씩 맡아 오직 자기가 맡은 작업만 해 나간다.?다행히 이런 작업 방식은 그저 장난에 그쳤다.

사진-이재원

사진-이재원

제골치기는 지주들이나 마름들이 작업농민 등골 빼 먹기 위해 개발한,?농민 노동의 작업능률을 올리기 위한 방식이다.?지금도 남아있는 소작농 계약서에서 추측할 수 있다.?남쪽 지방의 지주들이 소작농과 맺은 계약에 지주는 소득의?7할을,?소작농은?3할씩 나누게 되어 있다.

풍성한 대지의 소작도 정작 당시의 농민들에게는 혜택이 아니라 저주였다.그토록 민란이 자주 일어난 것도 이유가 있다.?그리고 떨거지,?떼거지의 역사도 이런 소작 방식 때문이었다.?풍년 들면 소득의?3할로 근근이 연명하지만 흉년 들면 농민들은 먹을 것이 없다.?굶어 죽으나 난리를 일으켜 죽으나 죽는 것은 매 한가지 아닌가??또는 저항 대신 흉년 들지 않은 동네로 줄지어 얻어먹으러 고향을 떠나간다.?그리고 해를 넘겨 다시 농사지을 철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온다.?지주 일가의 신화 뒤에는 이처럼 농민들의 등골을 빼 낸 역사가 있다.

제골치기가 건축 작업 현장에 들어온 지는 정확치 않지만 오래 된 모양이다.일본인들이 말했다는,?노동판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놈들 우께(도급노동)?주면 죽을까봐 겁난다.”

어쨌든 때려먹기는 인간개인의 능력과 구성원들의 합의와 협동을 고려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건축 현장에서는 원청에서 하청으로,?하청에서 각 노동자에게?<때려먹기>식 노동 계약이 이루어진다.?벽돌공의 도급 노동은 한 장당?150원,?미장은 한 석방 얼마,?목수 내장 공사 한 세대당 얼마,?이런 식의 때려먹기가 현장의 현재 모습이다.?그 분야에서 기능이 떨어지는 사람은 자신의 밥 값 치르기에도 바쁜 구조가 때려먹기이다.

 

3.?천정 시공

천정 시공은 시간 가는 줄 모른다.?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무척 복잡하지만 방 천정 공사 작업 순서를 간단히 요약해 보련다.

우선 각재와 석고보드 등,?작업 재료를 작업 장소에 옮겨놓는다.

시공 레벨(높이)?지접에 먹금을 놓는다.

방의 커튼 박스를 짜,?먹선에 맞춰 창틀 위에 고정시킨다.

먹선을 따라 벽체에?3cm?각재로 반자 돌림을 고정시킨다.

반자틀을 기준으로 해서 우물 정자 형 반자틀을 만들어준다.

천정에 콘크리트에 못 밖는 타카를 사용하여 달대를 달아,?반자틀을 고정시킨다.

반자틀에 석고보드를 붙인다.

거실 천정 작업은 방 천정 작업보다 한 공정이 더 있다.?등받이 틀을 추가해야 한다.

도급작업은 대개 한 세대에 한사람이 들어가서,?혼자서 작업한다.

20년 전에는 이와는 다른 작업 방식이었다.?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눈빛으로 의견을 주고 밭으며 작업했다.

때려먹기 식의 노동에는 동료도 없다.?마치 월터 하프당크의 판화?“선차”(旋車?:Tretmuuhle)1)의 노예처럼,?소외되고 고독한 인간이 반자틀에 끼어있을 뿐이다.

그림출처 도로테 죌레, 사랑과노동,박재순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7

1) 그림출처
도로테 죌레, 사랑과노동,박재순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7

그것이 문제였다.?혼자 작업하는 경우,?작업자들의 이야기는,?답답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외톨이 작업 과정 때문일까,?작업이 끝나면 그들은?“저렇게 먹어도 사람이 살 수 있는가”,?생각이 들 정도로 소주를 마셔 댓다.

내가 효자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적어도 술 먹는 방식은 술 배울 때 선친이 당부한 것을 평생 따랐다.

<소주와 양주는 마시지 말아라.?맥주와 막걸리는 마셔라.>

왜 이렇게 나를 가르쳤는지 모르는 채 이 당부를 지켰다.?소주는 안 마셨다.한 잔에 기절한다.?선물 들어온 양주는 좋아하는 사람을 주었다(이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늙어서야 그 의미를 알았다.?소주,?독한 술일수록 중독이 빨리 된다는 것,?그리고 양주는 가짜가 많아 몸을 해친다는 의미이다.?고독하지 않다면 노동자들이 그토록 몸을 해치도록 술을 마시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4.?정의에 대한 동의를 구하기 어려운 시대,?그리고 봉사노동

나는 우께,?때려먹기 천정 공사에 적응하지 못했다.?내가 기능이 떨어지고 작업 속도가 늦은 것이 큰 이유였다.?또한?6시 반에 시작해서 늦도록 작업하는 탓에 체력과 관절이 견디지를 못했다.?강도 높은 노동에 비해 내가 차지할 돈이 작았다.?능력대로 돈을 받는 사회라면 나는 때려먹기 노동자 축에 끼지도 못하는 셈이었다.?따라서 나는 노동하지만 노동자는 아닌,?이상한 존재일 것이다.

노동자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기고 죽음으로 이 사회의 부당 노동 정책에 저항했다. “부의 불균형과 노동에 대한 비정당한 대가….?이건 자본주의가 아니야.?부의 균형,?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게 자본주의,?민주사회인데.”(고 이남종씨 메모-한겨레신문)

인간 권리,?존엄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든 인간은 생존이 보장되어야 한다.?이것은 민주주의에 해당하는 언사이다.?이에 비해?“능력에 따라서”?분배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입장이 될 것이다.?그러나 도급 노동,?때려먹기는 외향적으로는 능력에 따라서 임금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능력급도 아니고 인권의 입장에서 분배하는 것도 아니다.?그 출발점에서 원청,?하청,?재하청의 원환구조 끝에 자리 잡은 착취 구조가 있다.?애저녁에 공평한 분배 구조가 아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회 구성원들 간에 정의에 대한 동의 구하기가 참으로 어렵다.?출발이 공평하지 못한데,?계약 자체가 불평등을 가진 채 출발하는데 누가 이러한 노동 계약을 정의롭다고 할 것인가?

나는 극악한 시대에 있었던 노동 운동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대 공황기 미국에서 있었던 사례이다.?캄보디아 한국 회사에서 저임금 노동자에게 총을 쏘았듯이,?굶주린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고용한 총잡이들이 총알 밥을 먹이던 시대(포드 자동차)에, <노동 나눔 운동>이 있었다.?이 구성원들은 노동이 필요한 사람에게 무상으로 일을 해 주었고,자발적으로 녹색혁명을 이루는 노동에 참여했다.?봉사 노동이었지만,?이 노동이 사람들을 구했다.?뉴딜 정책은 이처럼 일하려는 사람들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었지,?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봉사노동의 분야는 지금도 무궁무진하다.?병든 사람,?늙은 사람 등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돌봄 노동도 있다.?또는?<아름다운 가계>에서 보듯이,?소외된 이들을 돕기 위한 봉사노동도 있다.?문제는 봉사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생활비를 누가 제공할 것이냐의 여부이다.?간신히 이 문제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정신을 나누는 노동이 있다면 자기의 소유를 나누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마르크스의?<발췌>에서 보듯,?이윤추구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활동은 우리를 삶의 표현으로,?인간적인 욕구 충족으로,?인간 공동 본질 실현으로 인도한다.?이는 변증법적 구조를 갖는 논리이다.

이윤추구로서의 노동이 아니라면,?각 사람은 노동을 통해 자신과 타자를 상호 인정하게 된다.?왜냐하면 노동하는 사람은 노동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것이고,?이처럼 자기 표현으로서의 노동은 그에게 창조하는 기쁨을 맞볼 것이다.

상대방은 이 사람의 노동의 생산물을 향유하며,?기쁨을 느낀다.?모든 창조하는 이는 바로 이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생산물을 기꺼워하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이것이 노동하거나 창조하는 자의 진정한 욕구이다.

따라서 노동하여 창조한 사람이나,?이 생산물을 향유하는 사람은 상호간의 존재를 보충해 주는 사람이 된다.?서로서로 각 사람의 사유,?사랑 안에서 상호 승인한 셈이다.

제 3절 화폐[자본론강독]-11

제 3절 화폐

정리 : 나태영

 

 

‘가치척도로 기능하고, 따라서 스스로 또는 대리인을 통해 유통수단으로도 기능하는 상품이 화폐이다.’(202쪽)

가. 화폐축장 ‘상품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형태를 화폐형태로 바꾸기 위해서 상품은 판매된다.’ ‘이리하여 화폐는 축장화폐로 화석화하고 상품판매자는 화폐 축장자가 된다.’

‘상품유통이 처음 시작될 때는 사용가치 가운데 잉여부분만이 화폐로 전화한다.’(203쪽)

‘상품생산이 점차 발전하면 모든 상품생산자는 만물의 근원〔즉 ‘사회적 담보물’〕인 화폐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판매하지 않고도 구매할 수 있으려면 그는 그보다 앞서 판매만 하고 구매를 하지 않아야만 한다. 이러한 행태가 만약 사회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모순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상품유통이 확대됨에 따라 화폐의 힘, 즉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절대적으로 사회적 형태의〕부의 힘이 증대한다.’(204쪽)‘금은 영물이다! 금을 가진 자는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의 주인이다. 금이라면 영혼을 천국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콜럼버스,『자메이카에서 보낸 편지』, 1503년)

 

콜럼버스, 출처:www.emersonkent.com

콜럼버스, 출처:www.emersonkent.com

 

‘화폐 덕분에 모든 물건은 매매가 가능해진다.’ ‘화폐는 본래 상품〔즉 외형적인 물체〕으로서 누군가의 사유재산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사회적인 힘이 개인의 사적인 힘이 된다.’“세상에서 행세하는 것 중에 황금처럼 고약한 것도 없다. 폭리로 돈을 벌게 해주고 국가를 뒤집어 폐허로 만들며사람들을 파산하게 하며:

나쁜 물로 교화시켜 도덕을 등지게 만들며올바른 사람을 유혹하여 죄의 수렁에 빠지게 하며……죽을 운명의 그 육체에서 사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며저주받을 일을 하도록 만든다.”

(소포클레스〔Sophokles〕, 『안티고네』)(205, 206쪽)

‘화폐축장의 충동은 본래 무제한적이다. 화폐는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될 수 있으므로 질적으로나 형태적으로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의 화폐액은 모두 양적으로 제한되어있고 따라서 효력이 제한되어 있는 구매수단 일 뿐이다. 화폐의 양적인 제한과 질적인 무제한 사이의 이런 모순은 화폐 축장자를 끊임없는 축적이라는 시시포스의 노동으로 몰아넣는다.’ ‘근면과 절약 그리고 탐욕이 그의 주요한 덕목이 되었고, 많이 판매하고 적게 구매하는 것이 그의 경제학의 전부가 되었던 것이다.’(207쪽)

‘어떤 때에는 화폐가 주화로서 흡수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주화가 화폐로서 배척되기도 해야만 한다.’

“은제 장식품은 이자율이 상승하면 실려 나가 화폐로 주조되고 이자율이 하락하면 다시 은제 장식품으로 돌아간다.”(존 스튜어트 밀, 은행법 특별위원회 보고서, 1857, 제2084호와 제 2101호).(208쪽)

‘상품의 유통이 발전함에 따라 상품의 양도를 상품가격의 실현에서 시간적으로 분리시키는 조건들이 발전한다.’

‘채권자 또는 채무자라는 역할이 여기서는 단순 상품유통으로부터 발생한다. 이 상품유통의 형태변화가 판매자와 구매자에게 그런 새로운 역할을 부여해준다. 따라서 우선 판매자와 구매자라는 역할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역할이며, 또한 동일한 유통 당사자들에 의해 교대로 수행되는 역할이다. 그러나 이제 이 대립은 근본적으로 그다지 즐겁지도 않고 그대로 고착화할 가능성도 훨씬 크다.’

‘이제 화폐는 일차적으로 판매되는 상품의 가격 결정에서 가치척도로서의 기능을 한다. 계약에 따라 확정된 상품의 가격은 구매자의 채무, 다시 말해서 정해진 기한에 그가 지불해야 할 화폐액을 표시한다. 화폐는 둘째로 관념적인 구매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화폐는 단지 구매자의 지불 약속을 통해서 존재할 뿐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상품의 소유자를 바꾸는 작용을 한다.’(209, 210쪽)

‘구매자는 상품을 화폐로 전화시키기 전에 먼저 화폐를 상품으로 재전화시킨다. 즉 상품의 제1형태변화에 앞서 제2형태변화를 수행한다.’

‘유통과정의 일정기간 내에 지불기한이 도래한 채무는 언제나 그 채무를 발생시킨〔판매를 통해서〕 상품들의 가격 총액을 나타낸다. 이 가격 총액의 실현에 필요한 화폐량은 첫째로 지불수단의 유통속도에 따라 정해진다.’(211쪽)

‘많은 판매가 동시에 병행하여 수행됨에 따라 유통속도에 의한 주화량의 대체는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것은 지불수단을 절약하는 새로운 지렛대가 된다. 여러 차례의 지불이 동일한 장소에 집중됨에 따라 그 지불의 결제를 위한 별도의 기관과 방법이 자연히 발달한다.’

‘여러 지불이 서로 상쇄되는 경우 화폐는 그저 관념적인 형태로 계산상의 화폐로만 또는 가치척도로만 기능할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불이 이루어지는 경우 화폐는 이제 유통수단으로 등장한다.’

이 책에서 모든 일반적 생산?상업공황의 특별한 단계로 규정하고 있는 화폐공황은, 똑같이 화폐공황이라고 부르지만 독립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즉 산업과 상업에 대해서는 오직 간접적으로만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특수한 종류의〕 공황(금융공황)과는 당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화폐공황은 그 운동의 중심이 화폐자본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 직접적인 영역도 은행?증권?재정이다(엥겔스가 제3판에 실은 마르크스의 필사본 주〔註〕

‘화폐공황은 여러 지불의 연쇄와 그것의 결제를 위한 인위적인 체제가 충분히 발달한 경우에만 일어난다. 이 메커니즘에 전반적인 교란이 발생하면 그 교란의 원인과는 상관없이 화폐는 계산상의 화폐라는 단지 관념적인 모습으로부터 갑자기 그리고 아무런 매개도 없이 경화(硬貨)로 돌변한다.’“여기에 60만 파운드스털링이 있는데 이것은 통화 긴축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넣어둔 것이지만 오늘 3시 이후에는 전부 시중에 풀려나갈 것이라네.”(로이, 『교환론: 1844년의 은행특별법』, 런던, 1864, 81쪽)….(212, 213쪽)

‘지불수단으로 기능하는 이런 화폐(신용화폐)는 독특한 존재형태를 취하고 주로 거액의 상거래 영역에서 사용되는데, 이에 반해 금화나 은화는 주로 소액 거래의 영역으로 밀려나게 된다.상품생산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은 상품유통의 영역을 넘어서게 된다. 화폐는 계약상의 일반적인 상품이 된다. 지대나 조세 등은 현물납부에서 화폐로 납부하는 금납제로 바뀐다.’(214, 215쪽)

‘유럽에 의해 강요당한 대외무역 때문에 일본이 현물지대에서 화폐지대로 전환하게 된다면 일본의 전형적인 농업은 종말을 고할 것이다. 즉 이 농업이 의존해 있던 협소한 경제적 존재조건들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다. 세계화폐‘세계시장에서 비로소 화폐는 완전한 범위에 걸쳐 상품으로 기능한다. 즉 자신의 현물형태가 곧바로 추상적 인간노동의 직접적인 사회적 실현형태가 되는 그런 상품으로 기능한다.’

‘국내 유통영역에서는 하나의 상품만이 가치척도로서〔즉 화폐로서〕 사용될 수 있다. 세계시장에서는 두 개의 가치척도, 즉 금과 은이 지배한다.’(216, 217쪽)

‘금?은이 국제적인 구매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주로 국가들 사이의 물질대사가 기존의 균형에서 돌연 교란을 보일 때이다. 끝으로, 금과 은이 부의 절대적인 사회적 물상으로 기능하는 것은 구매나 지불이 이루어질 때가 아니라,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부가 이전되는 경우이며, 특히 이 이전이 상품시장의 경기 변동이나 어떤 의도된 목적 때문에 상품형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이다.’

‘축장화폐의 기능 가운데 일부는 국내의 유통수단 및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에서 생겨나고, 또 다른 일부는 세계화폐로서의 화폐의 기능에서 생겨난다. 이 후자의 역할을 위해서는 언제나 실제의 화폐상품〔즉 실물의 금?은〕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임스 스튜어트는 금?은을 단지 일정한 조건 아래서만 금?은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들과 구별하여 명확히 세계화폐(money of the world)라고 부르고 있다.’

‘또 다른 일면 금?은은 여러 나라의 유통영역 사이를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이것은 외환시세의 쉴 새 없는 변동이 불러일으키는 운동이다.’‘몇 몇 예외는 있지만, 축장화폐의 저수지가 평균수준을 넘어 현저하게 과잉상태가 되면 그것은 상품유통의 정체나 상품의 형태변화가 중단된다는 뜻이다.’(218-220)

도대체 나만 왜 이런 거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①

대체 나만 왜 이런 거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①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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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대 생각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다. – 에픽테토스

 

Epictetus

에픽테토스(55년경~135년경)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도대체가 “내 인생은 살만해요.”, “내 인생은 유쾌상쾌통쾌해요.” 하는 사람이 없다. 남들은 다들 잘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매일 나만 이 모양인 것 같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 남들은 다들 어려움도 없을 것 같고 인생이 나처럼 구질구질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서로를 부러워하며 살지만 나의 부러움을 받는 그 사람은 또 자기 속을 몰라서 그런다고, 자신의 인생을 소설로 쓰면 10권도 넘을 것이라고 하소연을 한다. 잘만 살고 있는 것 같았던 그 사람도 세세한 사정을 들어보면 사연이 만만치 않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상대방의 하소연을 들을 새도 없을 만큼 바쁘게 살면서 나만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다고 괴로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두 각자의 사연을 들어보면 다들 기구절창하다. 차마 그런 사연들을 일일이 얘기하기 싫고 꺼내 보이기 싫어서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사연이 있지 않은가? 남들이 알면 “그런 사정이 있었어?” 할 그런 사연이 있지 않은가?

남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에게는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살면 살수록 인간이라는 존재가 불쌍하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동화작가 정채봉이 “날자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했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들은 그 구절을 읽으며 위로받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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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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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어려운 삶을 살아냈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 어려움이라고는 겪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학생이 자신의 삶에 대해 쓴 글을 보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경우도 많다. 나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매학기 평균 150명의 학생의 인생을 만난다. 그렇게 만난 우리 학생들의 인생은 그야말로 드라마였다.

자신의 인생이 별 문제가 없다고 하는 학생은 150여 명 중에 한두 명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내가 가르치는 과목의 성격상 어떤 편향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이 문제가 없는 유쾌상쾌통쾌한 삶이라고 하는 사람은 2%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10여년 동안 2천여 명의 이 시대 대학생들의 삶을 만난 나의 결론이다.

우리 모두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아 그렇지 우리 각자의 사연은 모두 소설로 10권이 넘는다. 어떤 사람은 객관적으로는 별 일 아닌데도 본인이 너무 꼬아 생각해서 어려움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정말로 어떻게 그런 어려움을 겪어낼 수 있었을까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어려움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견뎌내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문제가 전혀 없을 것 같다고 착각하는 연예인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특출난 외모와 재능을 자랑하는 연예인들도 생각 외로 어려운 일을 겪어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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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다. 인생이 유쾌상쾌통쾌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만 같은데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어떤 때는 차라리 그런 사람을 보아야 기운이라도 날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그런 사람을 보면 오히려 배가 아플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모양 이 꼴인데 저 인간은 뭐가 잘나서 저런 거야?’ 하는 생각이 불쑥 올라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야말로 미스테리다. 잘 살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때로는 “당신도 그래요?”라고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고 싶어지기도 한다. “당신도 당신의 삶이 힘드세요?” 혹은 “이 어려운 세상을 어떻게들 살아내고 계세요?”라고 소리 질러 물어보고 싶은 심정, 대부분의 사람이 한 번 쯤은 겪어본 그런 심정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 이랬으면 좋겠는데 저렇고, 저랬으면 좋겠는데 이렇다.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학점이 좋았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승진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힘들다. 어느 정도는 되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항상 그에 못 미친다. 그 ‘어느 정도’가 사실 그렇게 욕심 부리는 수준도 아닌 것 같은데 내 인생은 그 정도도 되어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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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겪게 되는 일 중 내가 원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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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만큼 노력했는데도 원하는 게 얻어지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것을 얻어낼 만큼 노력하지 않고서도 결과는 좋기를 바라는 것인가?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한다. 이 말이 그렇게도 회자되는 이유는 이 말이 ‘거두지 않았다면 그것은 곧 심지 않았다는 것’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지금의 결과가 다소 억울하더라도 혹시 네가 충분히 원인을 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온 것 아닌가 살펴보라는 의미로 우리에게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인생이 풀려가지 않기 때문에 억울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되어가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자신의 인생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풀려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일들만 계속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내가 오늘 겪게 되는 일 중 내가 원하는 것은 첫 번째 일의 경우에는 5가지의 가능한 결과 중 하나이고, 두 번째 일의 경우에는 2가지의 가능한 결과 중 하나이고, 세 번째 일의 경우에는 3가지 가능한 결과 중의 하나이고, 네 번째 일의 경우에는 4가지 중의 하나라고 하자. 그러면 연이어 내가 원하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1/5X1/2X1/3X1/4’, 즉 1/120이다.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내가 원하는 일들로만 나의 하루가 채워지는 것은 상당히 낮은 확률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굵고 짧게 살아.”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굵고 길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굵고 길게 살고 싶지만,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게 굵으려면 짧을 수밖에 없고 길려면 가늘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알았던 것이다. 양손에 떡을 쥐고 싶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것은 확률상 너무 낮은 일이다. 이 문제는 인간의 인식의 조건과도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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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나쁜 일’의 규정은 너무나 주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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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방송이나 일기예보 방송을 하는 리포터들은 끝인사로 “좋은 일만 가득한 하루 되세요.”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좋은 일만 가득하다’라는 사태기술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앞에서 말한 확률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의 인식의 조건 상 ‘좋은 일만 가득하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좋은 일’이라는 규정이 자꾸 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4천만 원의 연봉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3천만 원을 받던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고 5천만 원을 받던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다. 그러니까 항상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 전에 일어난 일보다 좋아야 우리는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즉 어떤 일을 객관적으로 좋은 일로 규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상대적으로 좋아야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스파게티를 먹어도 처음에는 7천 원짜리 스파게티를 맛있게 느끼지만 7천 원짜리 스파게티에 익숙해지면 더 이상 맛이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되면서 1만3천 원 정도 하는 스파게티여야 맛있다고 느끼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비싼 스파게티를 먹어야 맛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연수입이 수십억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비싼 외제 자동차도 몇 대씩 가지고 있고 집도 몇 채이고 도대체가 현실적으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얼굴에는 늘 불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 불만의 요체는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해도 입에 맞는 식사를 할 수 없고 마음에 맞는 상품을 구매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차는 이 측면은 마음에 드는데 저 측면은 마음에 안 들고, 이 집도 이 부분은 마음에 드는데 저 부분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돈은 얼마든지 지불할 테니 제발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 그 사람의 주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그 사람에게 완벽한 만족감을 줄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쾌락의 역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일화이다. 쾌락의 역설이란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오히려 불만족이 커진다.’는 역설을 말한다. 쾌락을 추구하는데 결과는 불만족이기 때문에 역설이라 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따지자면 현실에서 쾌락을 얻어내는 속도보다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에 이러한 역설이 생길 수밖에 없다. 37평 아파트를 얻기 위해 돈을 버는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 42평 아파트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속도는 아주 빠른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이 차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으니 쾌락의 역설이 일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바다는 메워도 인간의 욕심은 메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바다는 한정이 있기 때문에 메우려 들면 메울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욕심은 한정이 없기 때문에 메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한정 없음을 충격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대학생들이 핸드폰을 자주 바꾸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한 번 물은 적이 있다. “핸드폰을 바꾸면 그 만족감이 얼마나 가요?” 나는 그래도 “한 달”이라는 답은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어떤 학생이 대답했다. “사흘이요!” 세상에나! 겨우 사흘을 만족시키자고 그 돈을 들인단 말인가!

그래서 쾌락의 역설에 주목한 철학자들은 불만족을 줄이려면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를 줄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현실에서 욕망을 충족시키는 속도보다는 새로운 욕망이 생겨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불만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히려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쾌락주의인데 실제의 내용상으로는 금욕주의에 해당하는 그러한 쾌락주의가 있는 것이다.

여하간 이 일화를 듣고 더 좋은 물건을 가지고 싶으면 ‘그래, 돈 열심히 벌어 저거 사자!’ 할 수 있는 서민이 더 행복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앞에 말한 사람처럼 더 이상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여 있는 것보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 있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일은 그냥 일어나는데 인간의 인식 구조로는 그 일이 반드시 그 이전에 일어난 일보다는 좋아야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느낄 때 ‘좋다’고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일이 순차적으로 이전보다 좋은 일로만 연결되는 것이 확률상 아주 낮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좋은 일/나쁜 일’의 규정은 너무나 주관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인간은 나쁜 일이 있어야 좋은 일을 ‘좋은 일’로 인식할 수 있다. 병에 걸려야 건강이 좋은 일인지 알게 된다. 병에 걸리기 전에는 건강은 기본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뇌졸중에 걸리기 전에는 스스로 화장실에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뇌졸중에 걸리고 나면 자기 발로 화장실에 가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고 좋은 일이다.

우리 아이에게 일어난 일도 이러한 문제를 잘 드러내준다. 처음에 자가용 자동차를 구입했을 때 아이는 비록 그것이 이미 18만 킬로미터를 뛴 중고차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동차를 타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처음에는 “아빠가 차로 데려다줄게.” 하면 “우와! 차 타고 간다.” 하면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런데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이제는 아빠가 자동차로 데려다주지 않는 것을 불행해했다. 자동차로 편히 갈 수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동차로 갈 수 없는 것을 불편해하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이 바뀌는 데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인간은 그렇게도 적응이 빠르다. 좋은 것에 적응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런데 나쁜 것엔 노력해도 잘 적응하지 못한다. 사태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아빠가 시간이 될 때는 데려다주고 시간이 되지 않을 때는 데려다주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데려다주는 경우에 행복을 느끼더니 얼마되지 않아 데려다주지 않는 것에 불행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인간의 인식 조건에서는 “행복한 일만, 좋은 일만 가득하세요.”는 무척 공허한 말인 것이다. 아무리 행복한 일들이 쌓여도 인간은 거기서 더 행복한 일과 덜 행복한 일을 나누고는 덜 행복한 일을 ‘불행한 일’이라고 규정할 것이다. 그래서 조상님네들이 아래를 보고 살라고 한지도 모르겠다. 아래를 보고 살라는 속담은 ‘덜 행복한 일’을 곧 ‘불행한 일’로 등치시켜버리는 인간의 인식의 편향성을 교정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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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서 그렇지, 너만 그런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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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Schopenhauer)

인간은 불평거리를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일만 많은 것 같은데도 그 중에 덜 좋은 일을 두고 불평을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러한 우매한 짓을 하지 않으려면 늘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인간이 고도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다. 강아지는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만 자의식을 가진 인간은 그러한 고통을 느낀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불행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문제가 없이 사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겪는 일 중 가장 덜 좋은 일을 불행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은 불행을 느낀다. 그런 측면에서는 신이 공평하다고 할 수 있겠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문제에 시달리든 주관적으로 문제를 만들어내서 문제에 시달리든 여하간 문제에 시달린다는 측면에서는 똑같으니 말이다.

재벌은 재벌대로, 유명인은 유명인대로, 인기 있는 연예인은 연예인대로 그 나름의 어려움을 겪어내며 살아내고 있다. 누구나 ‘누가 내 속을 알까?’ 하면서 한숨 쉬며 살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재벌은 돈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민하는 돈의 단위가 다를 뿐이지 돈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 수준에서 고민을 한다면 재벌은 몇 천억 원대로 고민을 할 뿐이다.

게다가 돈이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잘해주고 친절해도 자기에게 친절한 건지 자기 돈에게 친절한 건지 알지 못해 괴로워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살아간다. 우리가 자주 보듯이 형제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돈 앞에서 엄청난 불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살아간다.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관계가 주는 만족감을 통해서인데 돈 때문에 관계로 인한 행복을 놓치게 된다는 것은 상당한 불행이다.

물론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큰 문제없는 평범한 인생도 있다. 이들 중에는 불행의 능력을 상당히 줄인 사람도 있기야 하지만 대체로는 인생에서 각자가 겪어내는 고통의 수위는 그렇게 차이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 사람들은 또 자신이 인생이 너무 밋밋하다고 힘들어한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내는 모습을 살펴보면 인생 자체는 그리 굴곡지지 않았어도 본인의 마음이 볶아쳐서 그런 굴곡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인생이 정말 굴곡져서 누가 봐도 입벌어지게 힘든 상황인데도 당사자는 잘 견뎌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경우 모두 주관적으로 각자 각자가 느끼는 고통의 수위는 그리 다르지 않다.

모두에게 인생이 힘겹다는 것, 그 점만큼은 정말이지 공평한 것 같다. 남의 인생, 모른다고 해서 그 인생이 가벼울 것이라고 함부로 생각해버리면 곤란하다. 남의 인생이 부럽다면 질문해보자. ‘그 사람의 인생의 문제를 내가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인생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문제를 겪고 있다. 다만 잘 겪어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힘들게 겪어내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갈 수 있겠다. “몰라서 그렇지, 너만 그런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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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철학>에 3년여에 걸쳐 연재한 [꽃보다 붉은 울음] 저자 김성리 인터뷰

<ⓔ시대와철학>에 3년여에 걸쳐 연재한 [꽃보다 붉은 울음] 저자 김성리 인터뷰

 

한센인 할머니의 시, 삶을 치유하다

마주 보고 이야기 나누면, 고통도 나의 것이다 『꽃보다 붉은 울음』 저자 김성리

 

『꽃보다 붉은 울음』은 한 한센인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와 시를 기록한 글이다. 제목에서 할머니의 고통이 전이돼 오는 듯하다. 질병, 질병으로 인한 가난, 사랑하는 이들과의 생이별, 죄의식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는 한스러움 등으로 할머니의 생애를 몇 줄로 요약할 수 있겠지만, 할머니의 마음의 고통은 결코 요약될 수 없을 것이다.

한 한센인이 60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삶의 이야기를 시 11편에 담아 담담히 구술하는 동안,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시 글로 옮기면서 김성리 저자는 가슴 먹먹함과 눈물 아른거림을 어떻게 견뎠을까? 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것도 오랜 고통의 시간 속에 꽁꽁 묻혀 있었던 상처투성이 마음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가?

 

“할머니의 자작시들, 그리고 저자가 적재적소에 인용하는 아름다운 시(詩)들은 한센병이라는 단단한 갑옷 뒤에 숨겨진 한 여인의 해맑은 영혼을 비춰주는 투명한 거울이 되어준다. 한하운과 김춘수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들이 노래한 ‘타인의 아픔’은 할머니의 말 못할 아픔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주기도 하고, 할머니의 아픔과 우리의 아픔을 함께 어루만지는 따스한 엄마의 손길이 되어주기도 한다.”(정여울, 문학평론가)

 

저자의 담담한 글로도 담기지 못한 할머니의 정서와 필자의 마음을 더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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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동안 어떤 심정이었나요.

 

저를 만난 할머니는 당신의 삶을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을 떠나기 전에 마음 한구석까지 비우려 했었던 것 같아요. 60년 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내는 마음이 어땠을까요? 할머니는 이야기 도중이나 시를 읊을 때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특히 밤에 혼자 누워 “지난날을 생각하며 시를 지으면 머리가 아프고 기운이 없어서 다음에는 안 한다 해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또 생각하게 된다고 했죠. 할머니는 기를 소진하여 두통이 올 정도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칡넝쿨처럼 헝클어진 자신의 생을 정리하여 반듯하게 뉘어 놓고 가시고자 했던 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아팠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글을 쓰다가 여러 번 멈추고 멍하니 앉아서 할머니를 생각했습니다. 한 줄 써놓고 밖으로 나가서 그냥 걸어 다녔던 적도 여러 번입니다. 심지어 한 편의 글을 쓰는 데 한 달 가까이 걸린 적도 있습니다. 만약, 내가 할머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만났더라도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드러내게 도와드리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아직 살아 계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들과 마쓰시타(연인이자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가 그 모진 삶을 이어온 동앗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왜 진작 이것을 몰랐을까요? 할머니가 저에게 당신의 삶을 내려놓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할머니를 만나는 내내 아팠던 것은, 할머니의 고통이 저에게 옮겨 와서였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는, 그런 차원의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몰랐다는 자책에서 오는 아픔이었죠. 그리고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죄의식에서 아마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할머니는 저에게 눈물입니다.

 

이 책을 쓴 계기가 할머니의 말씀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자신의 생애 이야기와 시를 남기시려고 한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요?

 

할머니는 한센병이 발병하던 19세 무렵에 이미 연인 마쓰시타(당시 대학생)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해방 후에 마쓰시타가 일본으로 귀국하자, 미혼모로 아이를 낳았죠. 젖먹이였던 아이를 도저히 혼자 키울 수 없어서 입양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할머니는 한국이 아닌 일본으로 아이를 보낸 거죠. 아들이 장성하면 병든 어미는 말고 일본에서 친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이 아들을 평생 동안 그리워했습니다. 당장이라도 할머니는 알아볼 수 있다고 했죠. 할머니는 아들에게 당신은 “너를 버리지 않았다. 잊지도 않았고, 너를 살리려고 입양 보냈다”, 이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에게 당신의 일을 소설로 쓰고, 그 소설이 일본에서도 출판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또 만일 아들이나 마쓰시타가 책을 통해 당신을 찾아오게 되면, 병든 몸으로는 만날 수?없으니, 당신이 죽은 후에 출판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가난과 병환으로 오랫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없었던 사람이 시를 쓴다,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할머니의 시는 어땠나요.

 

할머니는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았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 할머니는 자의식이 강하고 자존심도 대단한 분이었죠. 그래서 그분의 삶은 더 처절했습니다. 할머니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 어느 것도 할머니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3번에 걸쳐 생을 마감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은인들의 손길에 구조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저를 만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시를 쓴 것은, 발병 이후 당신의 의지로 행한 첫 사건이었습니다. 저와의 만남 자체, 그리고 저와 함께한 시간들은 할머니에게는 사건이었죠.

 

『꽃보다 붉은 울음』이라는 제목에는 할머니의 슬픔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가장 화려하고 예쁘게 남아 있는 10대는 꽃처럼 살고 싶어 하던 소녀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넉넉한 살림이어서 당시(일제 강점기) 부산고녀에 다녔었죠. 일본인 대학생이 1년 넘게 구애하며 쫓아다닐 정도로 고왔고 순수했습니다. 그 10대가 끝날 무렵부터, 할머니의 삶은 질병으로 인해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할머니의 감정인 슬픔, 고통, 비애, 분노, 절망, 회한 등을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죠. 그런데 할머니는 시에서 당신의 삶을 “핏자죽이 어린 길”이라 했습니다. 핏자죽 어린 길을 걸어가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요?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말할 때 “피를 토한다”라고 하지요. 할머니의 울음은, 피를 토하다 못해 붉게 물들었을 울음입니다. 그 울음은 60년의 시간을 지나서 시로 재현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시에는 60년의 시간과 60년의 슬픔과 60년의 눈물이 담겨 있죠. 할머니의 시는 할머니의 삶입니다. 저에게 할머니의 삶과 시는 꽃보다 아름답고 꽃보다 더 붉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목을 “핏자죽이 어린 길”로 하고 싶었는데, 제목이 너무 선명하여 『꽃보다 붉은 울음』으로 했습니다.

편집자는 저에게?『꽃보다 붉은 울음』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은 미당 서정주의 시 「문둥이」에서 직접 표현된 것이라서 많이 망설였습니다만, 할머니의 삶을 그보다 더 잘 나타내는 것은 없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문디’라는 표현은 경상도 지역에서 흔히 하는 말이지만, 결코 (한센인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 중의 하나가 ‘문디’입니다. 그런 시에 나온 표현이기 때문에 할머니의 삶에 더 적합한 표현으로 고쳐서 제목으로 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의 생애를 말로써, 시로써 풀어놓고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과연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까요?

 

할머니가 처음에 구술한 시에서 당신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손톱만한 벌레만도 못한’ 사람으로 비하했습니다. 그렇지만 만남이 지속되는 동안, 온몸의 기를 소진하여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저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시를 생각하는 그 과정 자체가 스스로 자기 삶의 매듭을 푸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입니다. 저에게 시를 읊어주고 그 시를 다시 저의 목소리로 들으면서 할머니는 과거를 정리하고,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했던 그 과거의 시간들을 서서히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할머니 이야기는 잠시 두고, 본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간호학과를 나와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다시 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 꿈이 두 개였습니다. 시인과 간호사. 중학생 때 스스로 꿈을 정리했습니다. 시를 쓰는 간호사가 되기로. 근데 간호사는 되었는데 시인은 되지 못했네요. 시를 공부하고 시의 치유력을 발견하면서 가장 먼저 한센인을 떠올린 건 아마도 간호사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거라고 봅니다.

종합병원에 근무할 때 정형외과 병동에 5년 정도 있었습니다. 그때 치료는 끝났으나 온전한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더 큰 충격은 퇴원을 하신 분 가족의 초대로 그 분 댁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오랜 병상생활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아내와 어린 딸을 사랑했던 환자가 거의 폭군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병원의 아빠 병상 옆에서 돌을 지내고 간호사실을 들락거리며 귀여운 말썽을 일으키던 아이는 겁에 질려 아빠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아내는 죽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환자분은 내내 침대에 누워 스스로는 휠체어에 탈 수도 없고 대소변도 자유의지로 처리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무서운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족과 휠체어에 의지해 퇴원하던 6살의 진아, 치료 후의 삶이 더 고통스러웠던 많은 환자분들은 저에게 지금도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그 분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었을까요? 그럼에도 할머니를 찾아간 것은 그 분들과 달리 한센인들은 추방과 격리, 그리고 감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답이 좀 길어졌네요. 제가 알고 있는 의학적인 지식과 인문학적인 시선에서 볼 때 한센인들만큼 고통스러운 삶은 없을 겁니다.

 

독자가 이 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이 책은 한센병을 앓았던 한 여인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온전한 삶을 살고 싶어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느 삶과 같이, 할머니의 삶을 존중하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이를 품에 안고 키우면서 살고자 합니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당연한 일이죠. 이 평범한 일상을 누리기는커녕, 평생 가슴에 묻어야 하는 비밀로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삶입니다.

어머니로 살았지만 어머니로 살 수 없었고, 아내로 살았지만 여자일 수 없었던 분입니다. 배우처럼 자신의 삶을 낯설게 살다가 생애 마지막 나날에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분입니다. 시 쓰기라는 도구를 통해서였지만, 그것은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진짜 내면을 들려주고자 한다면, 자연히 소통의 언어는 따라올 것입니다. 할머니에게는 그것이 시였고, 삶이었습니다.

 

가장 딱딱한 질문이라 가장 끝에 물어보네요. 지금 연구 주제로 삼은 “치유 시학”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아뇨, 딱딱한 질문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죠.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삶의 문제를 시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치유 시학”입니다. 시를 읽거나 시를 쓰거나 또는 서로 시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의 문제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고통의 기억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고 위로를 받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하게 살아나지요. 하지만 그 기억이 현재 나의 삶을 흔들지 않으면 그 고통은 치유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완전한 치유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고통의 기억을 안고 사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치유의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제가 시를 공부하니 시가 치유의 길을 인도하는 하나의 별이 되는 것이지요. 만약 춤을 잘 춘다면 춤으로, 노래를 잘 부르면 노래로 치유의 방법을 찾았을 겁니다. 숲길을 걷기만 해도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집니까. 시만 우리들의 삶을 치유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치유되지 않는 고통도 없습니다. 어떤 기억이, 어떤 경험이 계속 괴로움을 준다면, 그것들을 피하지 마세요. 모른 척하시지도 말구요. 마주 보고 이야기 나누면 고통도 나의 것이 됩니다. 하지만 맨 얼굴로 나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으니까 그때 시를 읽어도 좋구요, 노래를 들어도 좋습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이 글의 출처는 http://cafe.naver.com/gozone?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