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철학을다시 쓴다]-18

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철학을다시 쓴다]-18

?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소설 쓰고 있고, 허튼 수작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제부터 사람과 이웃사촌인 오랑우탄을 예로 들어서 왜 최초의 공동체가 모계사회일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를 하지요.

오랑우탄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는 비루테 갈디카스라는 여자입니다. 비루테 갈디카스는 평생 동안 오랑우탄의 생태를 연구해서 뛰어난 학문적인 성과를 쌓아 왔습니다. 오랑우탄도 암컷들이 공동체를 이룹니다.

“오랑우탄 암컷이 일생 동안 새끼를 몇이나 낳는 거 같아요?”

“10마리요, 50마리.”

“여러분들 머릿속에는 많이 낳을수록 더 원시적이라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편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보다 오랑우탄이 좀 더 원시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이 낳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많이 낳는 오랑우탄 암컷이 일생동안 낳는 새끼는 많아야 세 마리쯤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몇 년을 사는데요?”

“대개 40년에서 50년 정도쯤 삽니다. 오랑우탄 새끼가 태어나면 그 새끼한테 나무꼭대기에다 집 짓는 법,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는 법을 포함해서 먹이를 찾고, 나무 타고 오르내리는 법, 그리고 새끼한테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가르치는 데 칠 년이 걸립니다. 400가지 정도의 먹을 것을 자연에서 얻는 법을 새끼에게 가르쳐줘서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게 만듭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먹을 것 백 가지쯤 제대로 가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만만치 않죠? 모든 생명체가 생명체인 한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습니다. 그 힘을 길러주는 데 오랑우탄은 칠 년이 걸리는 겁니다. 그 기간 동안에 애를 혼자서 키우기 힘들고 해서 암컷끼리 연대를 해서 공동체를 이루어 삽니다.”

공동체 가운데서 농경공동체는 두 뒷발로 몸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느릿느릿 돌아다니면서 먹고살 것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이루어 낸 공동체입니다. 여자로 태어나면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아서 애를 낳아야 하고 갓난애를 길러야 하고……. 활동할 수 있는 좁은 공간을 중심으로 해서 삶의 영역이 개척되었고,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생산지가 만들어져 왔고……. 그런데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잖아요. 애를 낳을 때나 갓난애를 안고 젖을 먹일 때는 속수무책이잖아요. 도움이 필요한 수컷은 사냥하러 간다 하고 가 버리고, 그러면 이웃여자에게 같이 도와서 살자고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해서 초기 공동체는 여성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그 공동체는 유목공동체가 아니라 농경공동체였다, 여러분들은 유목공동체가 먼저 생겨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믿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또 농경공동체는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이 권위를 더 갖게 되고 늦게 태어난 사람은 꼼짝 못하게 되는 위계질서가 서열화된 사회라고 보기 쉽습니다. 굉장히 엄격한 위계질서에 따라 나이 어린 사람은 아무리 좋은 생각, 바른 판단을 가지고 있어도 어른들의 억지에 꼼짝 못하는 불평등한 사회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농경공동체는 그 나름으로 엄격하게 평등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 사회입니다. 다만 공시적인 측면에서 평등성 확보를 생각하느냐, 통시적인 측면에서 평등성을 보느냐에 따라서 조금 다를 뿐이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사회라는 것은 어느 연령대 이상이 되면 모두 투표권을 가지고 있어서, 바보가 되었든 미친 사람이 되었든 한 장의 표를 행사하고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농경공동체는 불평등하기 짝이 없는 공동체입니다.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꽥! 하면 모두 죽여 주십시오, 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 생각을 해보십시오. 옛날에 한 마을이 농경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우주였습니다. 그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서, 죽고, 뒷산에 묻힙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백 년 전까지도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다만 여자는 한번 거주지를 옮기죠. 옛날에는 남자가 장가를 들어서 거주지를 옮겼는데 지금은 여자가 시집을 가서 거주지를 한번 옮깁니다. 그런데 여자도 거의 마찬가지로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게 되죠. 농경공동체에서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마을로 가봐야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농기구 이용해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배울 게 없습니다. 어디를 가 보니 다른 삶의 형태가 꾸려져 있고 거기에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되는 게 있더라 하는 일깨움을 얻을 수 없어요. 다시 말하면 농경공동체에서 지혜는 시간의 함수입니다. 오래오래 한마을에 살면서 많은 일을 겪은 사람, 가뭄이 되었든 큰물이 되었든 그 밖의 여러 가지 농작물 정보에 가장 밝은 사람은 오래오래 걸쳐서 경험을 쌓은 노인들입니다. 하다못해 늙으면 관절에 중풍 비슷한 게 있어서 비가 오려면 쑤셔요. 일기예보보다 더 정확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노인네들에게 의논을 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찾아가서 이런 일이 있고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물으면 대체로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가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권력이 노인들에게 집중이 됩니다.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더 슬기로워지지 않습니까? 지혜가 시간의 함수가 되는 마을 공동체 안에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슬기로워지니까 규범 윤리가 확립되죠. 웃어른이 하신 말씀 틀리는 게 없다, 그리고 이건 어른들이 오랜 경험들을 통해서 확립해 놓은 윤리관이니까 이걸 벗어나면 안 된다, 다 삶의 경험이 응축돼서 이렇게 우리 잘되라고, 잘 살라고 윤리 도덕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거다, 그것을 어기면 안 된다 해서 규범 윤리가 거기서 확립이 되고, 역사적으로 보면 상고주의적인 역사관이 자리잡지요.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문명화되고 더 개명된 좋은 세상이 온다고 생각을 하죠.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농경 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옛날이 훨씬 더 살기 좋았다고 생각해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고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마다 옳았던 ‘정법시대’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임기응변이 생겨난 ‘상법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말법시대’라고 하죠. 도대체 혼란하기 그지없는 세계라고 봅니다. 유교에서도 과거 요순시대가 제일 좋았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서양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황금시대(golden age)가 있었고 그다음에 은의 시대(silber age), 동의 시대(copper age)를 거쳐서 지금은 철의 시대(steel age), 인간 가운데 말종들만 살고 있는 그런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단 말이죠. 이것은 농경민의 독특한 사유방식입니다. 옛날이 좋았다, 노인네들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다, 우리 아버지가 나보다도 더 슬기롭고 아버지보다도 할아버지가 더 슬기로운데,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얼마나 더 슬기로웠을까? 그렇게 자꾸 유추해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아주 슬기로운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상적인 공동체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점점 종말로 다가서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농경민들의 사유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뜻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고 제사, 죽은 분들을 추모하는 제사가 관혼상제 가운데서 으뜸이고, 그 다음에 장례, 그다음에 혼례, 그다음에 관례, 이렇게 차례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규범윤리가 지배를 하고,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는 상고주의가, 그리고 계절이 순환하듯이 모든 것이 순환한다는 순환사관이 자리 잡습니다. 한 해가 가면 또 계절이 되풀이되듯이, 달이 차면 기울 듯이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 해와 달같이 한 해를 주기로, 한 달을 주기로 순환하는 것들이 시간을 규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농민들이 가지고 있는 평등의식은 현대인들의 평등의식과는 아주 다릅니다. 농경사회가 어떻게 해서 평등한 사회라고 볼 수 있느냐 하면, 노인네들 죽잖아요. 그러면 뒤이어 젊은 사람이 장년이 되고 또 노인이 되잖아요. 그리고 노인네들은 예외 없이 존경받잖아요. 그러니까 농경사회는 공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평등한 사회 구조지만 통시적으로 순환하는 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지는, 그 나름으로 엄격한 평등 사회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문성원의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철학자의 서재]

문성원의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철학자의 서재]

 

김정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구보 씨 또 다시 등장하다

구보 씨라는 이름이 다시 서점에 등장했다. 그런데 제목이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문성원 지음, 알렙 펴냄)이다. 박태원의 구보 씨, 최인훈의 구보 씨에 이어 이번에는 소설가가 아닌 철학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전에 알던 구보 씨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냥 직업만 바뀐 것이 아니라 나이도 중년에 접어든 모습이다.고리타분한 얘기인가 했더니, 이번에는 소설이 아님에도 소설만큼이나 꽤 잘 읽힌다. 물론 구보 씨의 말에 귀 기울이다보면 가끔 말이 늘어져 졸음이 오는 부분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때마다 Y라는 여성이 어김없이 나타나 구보 씨에게 독자의 생각을 속 시원히 전달해주기 때문에 지루할 틈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철학자 구보 씨는 혼자 하고 싶은 말만 실컷 늘어놓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다. 무슨 이야기만 길게 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Y의 돌직구가 날아오기 때문에, 구보 씨는 다른 사람들과 열심히 이야기를 하다가도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는 이런 소심한 구석이 있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다. 아마 독자들은 두 사람이 대화 중에 티격태격하는 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소소한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구보 씨와 Y, 구보 씨와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매우 다양하다. 소통, 뱀파이어, 크기, 사회, 철학 등 그가 일상에서 책이나 영화, 뉴스 등을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다.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다. 당연하다. 일상은 주제 따위는 상관없이 마구 포착되고 또 버려지기도 하면서 흘러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책을 통해 구보 씨의 일상을 따라가며 그의 생각을 엿볼 뿐이다.?
?
?

철학자를 바라보는 시선- Y의 돌직구

(문성원 지음, 알렙 펴냄). ⓒ알렙

세상과 소통하려는 어떤 철학자의 곁에 Y 같은 인물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철학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데다,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움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Y가 정확히 구보 씨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격 없이 친한 사이인 것만은 분명하다.

철학이라는 행위는 항상 어떠한 반론을 전제로 진행된다. 반론은 학자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공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면 반론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런 점에서 가끔은 Y의 참견을 반기기도 하고, Y가 없는 곳에서도 Y가 반론하는 환청을 듣는 철학자 구보 씨는 그야말로 천상 철학자다.

사실 철학자는 본의 아니게 사람들에게 남다른 취급을 받는 경우가 꽤 있다. 구보 씨의 강의를 들은 익명의 강의 평가만 들여다봐도 철학자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비치는지 알 수 있다.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247쪽)

전공자가 듣기에도 정곡을 찔리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구보 씨가 전혀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에 철학은 원래 골치 아픈 거라는 생각이다. 고민은 곧 생각하는 일이다. 생각이 없이는 철학을 할 수 없다. 구보 씨는 철학자들의 사유를 따라 평상시 깊게 따져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들추고 파헤치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야가 열릴지도 모른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Y의 말은 보다 구체적이다.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대개 텍스트에 갇혀 살잖아. 그러다보니 쉽게 할 수 있는 말도 이런저런 개념을 통해서 하려고 하고 그 덕택에 얘기가 쓸데없이 길어지는 거라구. 구보, 네가 좀 심하긴 하지만, 너만 그런 건 아닐 거야.”(251쪽)

한편으로는 정말로 맞는 말이다. 그래서 얘기가 길어지고 졸리는 것이다. 하지만 구보 씨는 꿋꿋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개념을 통한 사유는 보다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고민을 반영한다. 게다가 철학자들은 무조건 텍스트에 갇혀서 헤매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 맞는 적절한 개념들을 찾아내려거나 만들려고 노력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노력이 드러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이 철학자들과의 소통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보통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듯하다.

?

철학자, 소통을 말하다

‘소통’은 그동안 정치권과 언론에서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모자람이 없다. 그만큼 현실의 영역에서 소통이라는 것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구보 씨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문제에 그치지 않고 자연과 인간, 자연과 문명 사이의 소통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구보 씨는 자꾸 소통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우리가 양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단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나눠져 있고, 내가 아닌 것 역시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 내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으로 구분된다.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양분법적 사고를 선호하는 이유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설명해보려 하지만 잘 안 되는 구보 씨에게, Y는 이렇게 일갈한다.

“문제는 자연이냐 문명이냐가 아니라, 또 감정이냐 이성이냐가 아니라 이해관계라구. 그건 마르크스 이래 상식이잖아. 네 얘기를 듣다보면 이렇게 뻔한 사실이 사라지고 지엽적이거나 부수적인 게 중요한 문제처럼 등장해. 그게 바로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수법 아냐? (…) 알량한 논리나 지식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치장해야 너네들의 존립기반이 마련되지 않겠어? (…) 그러니까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거야. 이해관계를 좇는 보통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역시 이해관계를 좇는 지식인 나부랭이들.” (87쪽)

소통이니 어쩌니 말하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결국은 이해관계 영역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지식인 나부랭이’라는 말에 욱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하기도 했던 구보 씨는 이래서 소통이 될 수 없다며 다시 푸념하고 만다.

철학자들의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이나 방법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라고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현실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비춰지고 달리 쓸 곳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과 방법의 쓸모는 결국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Y의 날선 일갈은 바로 이런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이해관계에 따른 행위만 있고, 근본적인 의미의 소통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

진짜 소통과 가짜 소통

 

철학자 구보 씨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열심히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는 일단 만남을 전제로 한다.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듣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비로소 이야기가 성립한다. 구보 씨의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Y나 친구들은 각자의 생각을 말하고 격 없이 상대를 비판한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설득하며 알아가는 일.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의미의 소통이 아닐까?

유학의 고전인 <중용>은 배움의 과정에 대해 “견문을 넓히고(博學), 의심이 없도록 자세히 묻고 따지며(審問), 신중히 생각하고(?思), 확실하게 판단해서(明辯), 독실하게 실천하라(篤行)”고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전통 유학이 다양한 경험과 자세한 질문을 시작 지점으로 삼고 적극 권장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경험은 최소한의 객관성을 확보해 줄 수 있다. 판단과 실천은 그 다음의 일이다. 넓게 보면 이 구절은 일종의 합리적인 실천 지침인 셈이다. 견문을 넓히는 일의 기본은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의심되는 부분을 자세히 묻는 일은 곧 오늘날 말하는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나지 않는 것은 물론,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면서 편을 가르고 독실하게 실천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는 인터넷의 수많은 악성 댓글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댓글의 주인공들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애초에 관심도 없다. 당연히 말을 건넬 필요도 없다. 단지 자기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모두 적으로 규정해버리고는 분노를 표출하고 우월감을 느낀다. 그래서 정이천은 앞에서 말한 <중용>의 5가지 덕목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면 진정한 배움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나 보다.

이제는 더 나아가 명백하게 드러난 과거의 사실을 묻고 따지기만 해도 ‘종북’ 딱지가 붙는 시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인정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아무래도 확실히 판단과 독실한 실천만 할 줄 아는 듯하다. 단순한 만큼 실천하기도 쉽지만, 그건 일방통행일 뿐이다. 일방통행만 있으면 길은 결국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소통(疏通)이란 바로 서로 오갈 수 있도록 막힌 길을 터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길을 통제하면서 흐르는 시간은 과연 누구의 편이 될까?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소통을 말한다. 말뿐인 소통은 아무 의미 없는 가짜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Y의 돌직구를 감상해보자.

“그러니까 구보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소통이 있는 거야. 소통을 떠들지만 진짜 소통에는 관심이 없는, 무지하거나 교활한 가짜 소통과, 소통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감정이나 생각을 나누는 진짜 소통. 고상한 가짜와 투박한 진짜. 구보야, 너는 어느 쪽이니?” (88쪽)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⑨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이등 시민들은 이 모욕을 갚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박민미(동국대 강사)

 

품위 있는 사회를!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주장했다.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를 통해 그 권한 아래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이다.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는 ‘이등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갈릿은 ‘이등 시민’에 대한 비판을 통해, 특권화된 시민과 그에 비해 차별 받는 시민을 만들어내는 사회를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서구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느끼지만 여전한 배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가령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을 비판하기 위한 맥락이다. 만일 한 사회의 시민 부류에서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를 제도적이건 문화적이건 차별적으로 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들을 문화적 차원에일지언정 특정인을 이등 시민으로 강등함으로써, 주류적인 시민이 일등 시민이라는 우월감을 느끼는 현상마저도 특권화라고 비판하는 정교한 자의식이다.

그런데 단 한 명의 특권화된 시민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시민을 이등 시민으로 전락시킨 사태가 2012년, 버젓이 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전체 시민은 이 사건으로 인해 철저하게 모욕당했다.

‘박 대통령은 일찍이 퍼스트레이디 훈련을 받은 덕택에 최고의 품위와 격을 갖춘 정치인’으로서 ‘박 대통령이 역사에 남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와 대화하기에 앞서 민심과 대화해야 하며 순교자주의를 버리고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경향신문, 2013년 8월 25일 오피니언)고 말한 손호철(서강대 교수·정치학) 교수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품위’라는 말이 수사적인 용어가 아니라 ‘이념’의 어휘라는 것을 놓치지 않기 바란다.

선거에서 피선거권자가 누린 특권을 사소하게 취급하는 순간, 이 땅에 사는 모든 시민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며, 동시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헌법 11조 1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다. 헌법 제7조 1항의 규정대로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는 의무를 받아들인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으로 인해 누린 특권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해 ‘이제는’ 늦었지만, ‘답을 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특권을 위해 전체 국민을 이등 시민으로 강등시킨 이 모욕에 값하는 길일 것이다.

헌법과 현실의 괴리, 이제 이등 시민들은 이 모욕을 갚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제4기 연구협력위원회 출범-파주이야기[지미갤러리]

제4기 연구협력위원회 출범-파주이야기[지미갤러리]

 

 

글/사진?: 윤지미(한철연 회원)

2014년, 제 4기 한철연 연구협력위원회가 새롭게 구성되었다.

그리고 2월 8일, 부서별 업무 현황을 파악하고 전체적인 방향을 기획하기 위해 모인 첫 회동.

4기의 꿈은 무엇일까? 3기와 연속성을 띠면서도 4기만이 해낼 수 있는 혁신이 궁금하다.

그러나 먼저, 어려운 일 새롭게 맡은 모든 임원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공동체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17

공동체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17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공동체 형성 과정

 

공동체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라고 할 때 큰 틀의 공동체를 가리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농경사회, 유목사회, 도시사회. 여기서 도시사회도 특성에 따라 두 가지로 갈라질 수 있죠. 서구 마르크시스트들이 따로 구별하는 ‘아시아적인 전제’가 이루어지는 도시사회와 지중해 연안에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해안도시 사회. 성격이 다르죠. 농경사회와 유목사회는 어디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고 비슷한 측면이 드러납니다. 저번 시간에 제가 최초 공동체를 형성하고 산 사람들은 여자들이었다고 말씀드린 적 있나요? 충분히 설명을 안 했나요?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듣는 것은 전혀 객관적인 근거도 없고 누가 책으로 쓴 바도 없는, 저의 상상과 몽상, 때로는 망상까지 곁들여진 이야기라고 여기고, 열심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기 바랍니다. 어쩌다가 머릿속에 남는 것이 있으면 담아두셔도 되고요.

저희 집안 이야기이기도 한데, (제 아들에 따르면 저는 사람보다 오랑우탄에 더 가깝다고 하니까.) 저희 집안사정과 곁들여서 이야기를 풀어 볼까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구의 기후변화는 단속적으로 혹은 일정한 주기를 두고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왔습니다. 지금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최근의 빙하기가 지나고 나서 간빙기에 해당합니다. 몇만 년 전에 천천히 날씨가 풀리기 시작해서 간빙기가 시작했다고 그랬나요? 고생물학자나 지질학자 같은 사람들 증언을 들으셨을 텐데, 저나 여러분들이나 숫자에 약하기는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 한 이만 년 전 정도 됐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으니 꼭 믿지는 마십시오. 독일 사람들은 이런 말을 싫어하죠. 정밀과학, 엄밀 과학 바탕 위에서 실증적인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론에 대해서는 질색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쨌든 그건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고, 간빙기가 시작된 게 이만 년 전 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긴 세월 동안에 빙하기와 간빙기가 지구를 번갈아가면서 덮쳤는데, 빙하기가 오게 되면 인류들은 어디에 주로 모여 살았을까요?”

“동굴 속.”

“동굴 속? 뭐, 그렇죠. 그런데 적도 부근에 살았겠죠? 다른 데는 북극에서부터 지금의 한대지방, 온대지방까지 전부 얼음으로 뒤덮이게 되고 오직 적도부근만 말하자면 따뜻한 곳이었을 테니까.”

빙하기 때의 적도 부근을 상상 속에 그려 봅시다. 빙하기 때 적도 부근은 어떤 기온상태고, 어떤 동물과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을까요? 지금은 적도가 열대우림지역이 되어 있어서 사람이 살기에 상당히 거북한 곳이고, 지나치게 많은 비와 따가운 햇살이 내리 쬐이고 있지요? 간빙기가 오면서 점점 날씨가 풀림에 따라서 적도 지역에서 생활 조건이 악화되면서 식물들 가운데 꽃피고 열매 맺는 나무들도 점점 온대 지방으로 퍼져 가고,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풀들도 온대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사람도 적도를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옮아 살게 되었겠죠? 실제로 빙하기에는 적도 지방에 과일나무도 많이 있었고, 짐승들이 풀 뜯어먹고 살기 좋은 초원 상태고 넝쿨식물이 우거지지 않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봅니다. 게다가 적도 지역은 어떻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나누어지나요? 아니죠? 정말 철없는 곳이었겠죠. 그래서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나 풀이나 나무 같은 것도 철없이 살 수 있었고, 철없이 살 수 있는 곳이 낙원이죠. 낙원에서는 먹이를 얻으려고 머리를 쓸 필요가 없죠. 손만 뻗으면 먹을 것이 있고,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없으니까 따로 입고 벗고 할 필요도 없고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에덴동산은 아마 빙하기 때의 적도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 에덴동산에다가 지혜의 열매가 달린 생명의 나무를 하나 두고 그 생명수 아래서 배꼽 없는 아담과 이브가 살도록 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도 경악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수에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생명수라는 것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나무이기 때문에 생명수이죠. 그런데 그 생명수에 열매가 달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실제로 그 생명수는 언젠가 죽고 그 열매가 간직하고 있는 씨앗이 떨어져서 재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것은 하나님의 처지에서 살피면 엄청나게 큰 재난이죠. 아담과 이브에게 생명수를 보고 날마다 그 그늘에서 절하고 영생을 누리라고 했는데 갑자기 열매가 맺히니까 (제가 지금 소설을 쓰는 겁니다, 소설을 쓰는 건데…….), 아무튼 열매가 달리니까 하나님이 깜짝 놀라서 절대로 그 열매에 손대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어디선가 뱀이 나타나서 저 열매를 먹는 게 좋다고 이브를 꼬시죠. 실제로는 하나님도 너희 목숨 영원토록 보장 못하니까 저 열매 먹어라, 이런 식으로 꼬였겠죠. 결국 그 꼬임에 넘어가 아담과 이브는 지혜의 열매를 나누어 먹습니다. 하나님이 이 꼴을 보고 노여워해서 니네들은 이제 이 에덴에선 살 수가 없다 하여 아담과 이브가 쫓겨나죠.

그런데 이 시점이 간빙기하고 겹쳤다고 생각해 봅시다. 간빙기와 겹쳐서 실제로 기온이 높아지니까 그 동안 그렇게 살기 좋았던 적도 부분이 열대우림지역으로 바뀌면서 초원에서 넝쿨이 우거진 밀림지대가 되고 바닷물 수위가 점점 높아져서 전에는 가까이에 있는 바닷가에 가면 늘 조개를 주워 마음껏 배불리 먹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개펄이 죄다 물속에 잠겨 버리고 점점 살기 어려워집니다. 갖가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던 나무들도 남과 북으로 흩어져서, 아까 이야기한 대로, 나무도 그렇고, 낟알이 달린 풀도 그렇고 거기에 따라서 짐승들도 전부 먹이를 찾아서 남과 북으로 퍼져나가고 사람도 그 운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칩시다. 온대 지방이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철 있는 곳이죠. 봄, 여름, 가을, 겨울. 한철 한철이 들고 나는 곳, 그래서 온대지방으로 옮겨간 사람들은 한 철 한 철 나면서 철이 나고 한 철 한 철 접어들면서 철이 들어야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뀌는 것이죠. 그 전까지는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보장해줘서 영원히 살 수 있었으니까 서로 부둥켜안고 뒹굴고 살아도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몸에 옷을 걸칠 필요도 없었겠죠. 그럴 필요가 뭐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생명의 동산인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났으니까 우리가 때맞추어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를 맞춰서 배꼽 달린 아이들인 카인과 아벨을 낳았다고 그러죠.

카인과 아벨/ 출처: www.allaboutthebible.net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카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목축을 하죠. 유목사회와 농경사회가 여기에서 갈라지는 계기가 되죠. 그렇죠? 말하자면 카인은 농사짓기에 알맞은 땅을 찾아내서 씨 뿌리고 짐승 길들이고 하면서 주저앉아 사는데, 아벨은 짐승들을 데리고 초원을 찾아서 멀리멀리 떠나는 운명에 놓인 것이죠. 그런데 성서를 보면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농경 공동체가 유목 공동체보다도 더 지배적인 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어요. 원시 공동체는 아프리카에서부터 소단위로 이루어진, 농경 공동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포유류 가운데 제법 기특한 게 인간 수컷입니다. 왜 그러냐면 유인원까지 포함해서 포유류 가운데서 암컷에게 씨만 뿌려놓고 달아나지 않는 수컷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 수컷은 암컷이 둘러놓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니까 사람 암컷들이 얼마나 영악하냐 하면 수컷들을 가두어 놓고 부릴 수 있는 힘을 지녔어요. 여자는 온전한데 남자들은 그에 못 미쳐서 바보라는 뜻으로 ‘반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왜 반편이냐고요? 생물학적으로도 증거가 있습니다. 사람이 더불어 살려면 언어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사람 수컷의 두뇌는 말을 주고받을 때 왼쪽 뇌만 작용을 합니다. 그쪽에만 불이 들어와요. 암컷은 왼 뇌 오른 뇌 두 쪽 다에 언어중추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여자가 온전한 인간이라 하면 남자는 반편이라는 말이 맞아요. 그래서 반편인 남자를 길들이기가 참 쉽기는 쉬웠겠어요.

사정은 이렇습니다. 말하자면 그 동안에는 수컷이 게을러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적도 부근에서만 살았다면 손만 뻗으면 늘 먹을 것이 주렁주렁 달려 있으니까 일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얼음이 풀리면서 적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있는 온대 지방으로 옮겨 살면서 널리 풀밭이 펼쳐져 있고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곳, 지금 아프리카 나이로비 국립공원같이 온갖 야생동물들이 뛰어다니는 그런 비슷한 곳이 사방에 널려 있으니까 수컷들은 사냥하러 간다 하고 떼 지어서 몰려나갑니다. 요즘 아주 정밀한 조준 망원경이 있는 사냥총 가지고도 짐승사냥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런데 꼬챙이 하나 들고 거기에다가 돌멩이 둘둘 감아가지고 무슨 사냥이 되었겠습니까? 그냥 가사노동에서부터 벗어나는 구실로 우르르 떼 지어서 다니는데, 그러다보니 쫄쫄 굶고, 가을이나 겨울이 오면 먹고 살길이 어디 있어요? 동굴에 불 피워 놓고 덜덜덜 떨다가 굶어죽기 직전에 나와서 옛날에 씨만 뿌리고 달아난 암컷들에게 간단 말이죠. 짐승이나 사람이나 애를 배고 갓난애가 생기면 속수무책일 경우가 많습니다. 어디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좁은 지역에 모여 살면서 가까이 있는 풀이나 낟알 같은 것들을 입에 넣고 씹어보면서 먹을 만하다 싶으면 캐다가 주변에 심고, 씨 뿌리고 해서 농작물들을 기르기 시작하고 짐승 새끼가 우연히 발견되면 주워다가 우리 속에 가둬서 기르기 시작하죠. 수컷들이 돌아와 보니까 그동안 다 굶어 죽었을 줄 알았던 암컷들이 살아남았고, 곡식도 저장해 놓고 짐승도 길들이고 해서 겨울날 채비를 다해 놓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도 같이 살자고 궁둥이를 슬그머니 들이민 거죠. 그래서 모계사회가 시작된 거죠. 주권의 출처는 경제권에 있는데 공동체를 형성하고 경제활동을 해서 생산을 하고 재생산을 하는 기초를 닦아놓은 게 여자들이고, 남자들은 여자들이 이루어놓은 공동체에 빌붙어 산 거죠. 여자공동체에. 남자들은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실제로 모계 사회가 수십만 년 지속된 데에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⑧“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⑧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구태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개인이나 사회마다 추구하는 목표나 가치가 있다. 이러한 목표나 가치를 개인은 좌우명이라 하고, 학교는 교훈이라 하고, 회사는 사훈이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명문화하거나 구호화하여 붙여두기도 한다. 어떤 이는 어릴 적부터 ‘내 꿈은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붙여놓고 노력한 결과 실제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목표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이 나아가고자 하고, 대한민국에서 최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무엇일까? 입헌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그 목표나 가치는 당연히 [헌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목표는 ‘민주주의’이며, 민주주의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 존재인가? 대통령은 취임 당시에 자신의 목표를 선언문 형식으로 낭독하게 되어 있는데, 이 역시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헌법] 69조) 즉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는, 즉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삼아야 할 존재다. 행정부 수장의 목표가 그러하다면, 대통령 소속이면서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국가정보원법] 제2조) 국정원의 목표 역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국정원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뿌리째 뒤흔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분명히’ 대통령의 뜻에 반하는 행동일 것이며, 따라서 대통령은 마땅히 그 수장과 담당자를 질책해야 한다. 대통령 자신의 임무인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 말이다. 물론 전임 대통령 재임 기간에 일어난 일이기에 현 정권에는 책임이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정원의 만행은 대통령 개인의 목표나 가치가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직분의 목표와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그리고 전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의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 “제가 댓글 때문에 당선됐다는 건가요”라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대통령이 분노해야 할 것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으로 선거가 부정하게 치러졌다는 사실 아닐까. 그러한 선거 부정은 자신의 목표인 민주주의 수호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 적절한 말이나 대응이 없다. 이것은 임무 방기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수호하고 그것을 목표로 나아가야 할 대통령이 그러한 가치와 목표를 짓밟은 행동에 대해서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통령의 수수방관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서 대통령이 방조하지는 않았나 의심을 불러온다.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행정부의 수장이 되고자 한 사람이 자신의 당선을 위해서 자기 직속 기관이 될 조직의 불법행위를 방조했다? 그리고 당선 후에도 그러한 불법행위에 대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대통령으로서 우리 사회의 목표인 ‘민주주의’의 수호와 달성을 위해 노력하리라고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이 심화된다면 대다수의 대한민국 구성원은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이상을 스스로 수호하기 위해서 이러한 구호를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타도! 박근혜 정권!’

 

한철연4기 연구협력위원회 첫 회의를 잘 마쳤습니다[ⓔ시대와철학 알림]

한철연4기 연구협력위원회 첫 회의를 잘 마쳤습니다[ⓔ시대와철학 알림]

 

사진 : 윤지미(한철연 회원)

정리 : 강지은(편집주간)

 

한철연 제4기 연구협력위원회가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더욱 발전하는 한철연을 기대합니다.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철학자의 서재3>출간 안내[ⓔ시대와철학 알림]

신간소개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부제 <철학자의 서재 3: 일상에 지친 당신을 위한 책 천국>

 

 

 

우리 시대의 명저, 숨어 있는 책, 저주받은 걸작들을 통해 쏟아내는
철학자들의 쓴 소리 / 흰소리
책읽기, 글쓰기, 철학적 사유에 관한 통합적인 안내서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의 세 번째 권이 출간되었다. 5년 동안의 연재, 206명의 필자, 217편에 달하는 서평들이 세 권의 책에 오롯이 담겼다.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3권에서 철학자들은 현실과 일상, 정치와 경제, 안과 밖에 대해 사유하고, 글쓰기와 책읽기와 사유하기에 관한 통합적 안내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는 63편의 “철학자들의 쓴 소리/흰소리”가 담겨 있다. 모두 책을 소개하는 글들이다. 실용적 독자들로서는 이 책만 대충 읽어도 63권의 책을 읽은 효과를 얻을 것이다. 이른바 “읽은 척 매뉴얼”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알려주기로는 최적이다. 또, 철학자들은 어떤 책을 주로 읽는지 알 수 있는, “훔쳐 읽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 책의 운명이 ‘실용적 차원’에 머물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저자들은 여기에 소개하는 책들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의 현재적 삶의 운명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운명에 대한 상상을 해보라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인 철학자들이 우리 시대의 명저나, 숨어 있는 책,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 동서양 고전들을 선정하여 서평을 쓴 것을 모은 책으로, 지난 5년간(2008년 9월~2014년 현재)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연재되었던 칼럼들이다. 서평이기도 하며, 철학 칼럼이기도 하며, 에세이이기도 한 이 코너는, “서평 문화의 장”의 한 획을 그었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오고 있다. <철학자의 서재>는 서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문제의 단초를 일상의 삶에서도 찾고자 하는 적극적인 시도들이다. 이론과 활자들의 말잔치가 아니라, 책읽기, 글쓰기, 철학적 사유에 관한 통합적인 안내서이다. 그래서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는 방대한 양의 서평 모음집에 그치지 않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철학자의 서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공맹의 사상 등에서 시작하여 조르주 아감벤, 지그문트 바우만 등 2500년 지성사를 한눈에 훑어볼 수 있다. 무려 200여 권에 달하는 책들 중에 우리 시대 지성들이 읽어야 할 교양이 망라돼 있는 것이다.

또, <철학자의 서재>는 책의 선정과 집필을 최소 한 달 이전에 시작하기 때문에, 사유하고 글을 쓰는 데에 충분한 시간과 분량이 주어진다. 그럼으로써, 글의 완성도와 주제의 선명성이 높게 나타난다.

<철학자의 서재>는 대안적 상상력, 내일을 지시하려는 몸짓과 울림을 강조한다. 학문은 현실의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 서적에만 국한하지 않고, 정치/사회/경제/문화/예술/대중문화 등 거의 전 분야를 다룬다. 철학적 사고는 대안적 상상력이 뒷받침되어야 깊어진다는 점이다. 철학 본연의 텍스트가 아닌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출판사 보도자료 중 일부

 

한국철학사상연구회·프레시안 시민강좌[ⓔ시대와철학 알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프레시안 시민강좌
?<큰 것을 생각하라 2014>
세속의 철학자, 경제를 말하다
?
-새로운 유토피어니즘을 디자인하기 위한 공존의 경제를 찾아서-
?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이 거대한 시련의 근원은 무엇인가?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하는 것은, 새로운 유토피어니즘을 기획하는 것이다.
미국식 금융 자본의 붕괴 이후,
그리고 9·11 이후 체제에 대한 진지한 사유의 방향을
이제 우리 주변으로 돌려, 공동체의 나아갈 비전을 찾아보고자 한다.
일상과 주거에서, 마을과 공동체에서,
지역 사회와 도시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의 의미를 재구성해보자.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해 보기 위해
우리 시대의 가치, 자본, 노동의 의미를 다시 세워보도록 하자.
?

● 강의 커리큘럼

2월 13일 1강 :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

????????????????????? –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2월 20일 2강 : 노동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 박영균(건국대 HK교수)
2월 27일 3강 :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1 – 한길석(한신대 외래교수)
3월?? 6일 4강 :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2 – 박민미(대진대 외래교수)
3월 13일 5강 :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 이순웅(숭실대 외래교수)
3월 20일 6강 :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재구성 –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3월 27일 7강 :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 도시를 생각한다
??????????????????????- 이현재(서울시립대 HK교수)
4월?? 3일 8강 : homo cooperatus 협동성 경제의 실현 – 최종덕(상지대 교수)
?

● 일???????시 : 2014년 2월 13일~4월 3일(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9시 30분 총 8강)

● 장?????? 소 : 서울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302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 신청문의 : 02) 332-4301 /?kophil@daum.net?(주로 메일을 이용해 주세요.)

● 수?강?료 :

① 전 강좌 15만원
② 각 강좌당 2만원
③ 한철연 회원(정회원, 준회원, 후원 회원 등) 무료
마감 인원 : 35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