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반복과 영원회귀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12> 들뢰즈

 

들뢰즈의 반복과 영원회귀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들뢰즈

 

강사 :김범수(숭실대 외래교수)
후기 :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80년대 마르크스 수용에서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의 변화와 현대 철학

마르크스의 『자본』은 혁명의 시대였던 80년대 중반에 한국에 들어온다. 당시 대학생들은 마르크스와 레닌을 읽었고 그 실천을 모색했었다. 그런데 동구권의 몰락이 시작된 89년 이후 90년대 초반에 이런 분위기는 깨진다. 동구권의 몰락은 당시 사회주의적 기조의 지식인은 물론 지성사 전반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르크스를 대체할 사람을 찾기 시작한다. 그 대안이 처음에 하버마스와 푸코, 알튀세르 등이었다. 이어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일어났고 현재는 프랑스 철학이 현대철학을 대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90년대 알튀세르와 푸코가 등장하면서부터 사람들은 혼란스러워졌다. 이른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데, 과거 이데올로기와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모습을 보여준다. 학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이 불지만 한국 사회현상은 이걸 못 쫓아갔다. 그래서 한국의 학자들은 첨단 현대철학의 본령이라 부르는 프랑스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포스토모더니즘이라는 말은 프랑스에서는 1930~40년대에 사용된 말이었다. 당시 한국은 서양의 첨단 학문을 미국을 통해서 들여오다 보니 미국에서 쓰는 말 그대로를 들여왔던 거다.

▲ gilles deleuze

그럼 우리의 이상적인 모습을 담은 이른바 미래학자는 누가 있을까? 찾아봐도 없었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는 지금도 헤어 나오지 못한다.

2000년대 들어와서 라캉 이후에 학계 전반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유행하게 된다. 우리의 지성사에서 우리는 프랑스 철학자들을 보면서 도대체 주체가 누군가라는 것을 따지곤 한다. 이 주체는 독일적 관점에서는 선험적 자아로서의 주체로 볼 수도 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사회변혁의 주체이다. 프랑스에서도 따지는 부분이 이거다. 그런데 들뢰즈는 주체가 없다. 그럼 우리는 들뢰즈를 어떻게 봐야할까?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의 마지막 강좌 열두 번째 시간에는 들뢰즈의 철학을 만났다. 특히 이번 강의에서는 니체와 관련된 들뢰즈를 보기로 했다.
 
들뢰즈의 철학사

들뢰즈는 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했다. 당시는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던 시기였는데 어린 들뢰즈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던 그의 형이 포로수용소로 가는 길에 불행하게도 총살당한 것이다. 이 사건은 그의 삶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총살 사건이 있던 곳에서는 프랑스에서 유명한 수리철학자들이 있었는데, 카바이예스와 로트망과 같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 그는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나중에 소르본느에서 철학을 공부한다. 이 역시 매우 특이한 이력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거의 유일하게 고등사범학교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1948년에는 철학 교수자격시험 아그레가시옹을 통과하게 된다. 이후 들뢰즈는 1956년도에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에 관한 논문을 쓴다. 그리고 60년대 중반까지 철학사를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한다.

들뢰즈의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철학자는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스피노자(Spinoza, 1632~1677),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을 들 수 있다. 들뢰즈가 보기에는 이 세 사람은 공통점이 있었고 이 공통점이 들뢰즈 사상의 핵심이 된다. 여기서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의 철학에 기반한 철학사의 구분은 1930년대와 그 대척점에서 1960년대 이후의 두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고 한다.

김범수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1930년대는 문화적인 충격과 과도기의 상황을 가진 시대였다. 이 시대에 프랑스 철학계에서는 어떤 일이 생겼는가? 프랑스 철학계는 1930년대부터 60년까지 ‘3H’의 시대로 요약된다. ‘3H’란 헤겔(Hegel), 후설(Husserl), 하이데거(Heidegger)를 말한다. 이 시기는 나치가 집권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왜 헤겔인가? 프랑스 내에서 이때까지 헤겔 번역이 안 되었다. 20년대와 30년대는 헤겔 번역본이 없었다. 프랑스는 1930년대까지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번역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실존철학과 함께 헤겔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행사되었던 시기이다. 이때 코제브(Alexandre Kojeve, 1902~1968)의 강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제브는 헤겔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중심으로 소개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게 했다.”

반면 60년대에는 실존주의 현상학과 대립되는 방향으로 니체와 노골적으로 변형된 마르크스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60년대 이후는 프랑스에서는 프로이트, 마르크스 등을 새롭게 해석하는 견해가 형성되면서 구조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대표적인 학자는 라캉과 알튀세르 등이 있다. 그리고 ‘3H’의 대척점에 있는 철학자로 메를로-퐁티와 사르트르를 들 수 있다.

들뢰즈에 영향을 준 철학자들 : 니체, 스피노자, 베르그송

30~60년대 : 헤겔, 후설, 하이데거 ↔ 60년대 이후 : 미를로-퐁티, 사르트르

들뢰즈에 영향을 준 철학자 : 니체, 스피노자, 베르그송

들뢰즈는 스스로 베르그송주의자임을 밝힌다.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초월성 비판이다. 아울러 니체, 스피노자, 베르그송 이 세 사람은 초월성에 대해 비판하는데, 초월은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고 ‘이념(이데아)’을 넘어선 것이다. 이들은 도덕적 ‘선(善)’의 개념을 넘어서고 비판했다.

서양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점은 확실한 무엇인가를 찾다 보니까 결국 신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헤겔은 ‘절대정신의 자기전개’를 얘기했는데 절대정신은 결국 신으로 귀결된다. 여기에 선한 개념을 더 붙여서 ‘세계정신’, ‘신의 정신’이 발현된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을 향해 가는 것이 바로 헤겔 철학의 일면이다. 여기에 대해 비판한 사람이 니체, 스피노자, 베르그송이다.

니체는 대놓고 ‘비극의 가치’에 대해서 얘기한다. 기존의 가치의 기원을 따져서 ‘가치를 전복’시킨다. 그리고 신을 죽여 버린다.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실체개념’이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실체’는 바탕과 기저에 깔려있는 것으로 이것이 근대에 와서는 ‘자존적인 존재’로 바뀐다. 다른 것에 원인 받지 않고 존재한다는 개념을 두고 보면 인간은 자존적 존재는 아니다. 그럼 자존적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자체일 것이고 실체는 곧 ‘자연자체’이다. 이 실체는 중세 철학에서는 신이었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신적 자연’이라는 말을 한다. 스피노자가 말한 자연에는 초월적인 신이 개입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스피노자는 네덜란드 유태인 공동체에서 퇴출된다.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를 얘기한다. 생명 자체는 가지고 있는 어떤 목적도 없다는 것인데, 이 얘기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을 붕괴시킬 수 있는 요소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쟁에서 헤겔, 후설, 하이데거는 ‘이성’으로 문제의 해결을 도모한다.

그 해결의 종착점은 ‘초월성’이고, 곧 ‘신’이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광인들을 격리시켰고. 제도권으로 폭력을 통해 감금시켰음을 폭로했다. 이것이 이성의 폭력이었고 광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의 시각이다. 이것은 바깥으로부터의 사유이다. 이 바깥으로부터의 사유를 하는 사람들을 포스트구조주의자라고 얘기한다.

김범수 교수는 이렇게 보면 프랑스 철학의 계보는 엄밀히 얘기하면 30년대부터의 이성적 전통의 부류와 반대편에 있는 부류가 섞여있는 셈이라고 한다. 실제로 프랑스 철학은 강단철학과 대중철학으로 양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대중철학에는 들뢰즈와 푸코가 자리하고 존재론과 이성적 탐구를 하는 강단철학은 헤겔, 후설, 하이데거가 포함된다고 한다. 이어서 김범수 교수는 “하버마스는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하이데거, 아도르노, 푸코, 데리다와 같은 학자들을 니체를 계승한 탈근대 철학자들로 규정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규정은 프랑스 철학의 진영에서 보자면 반가운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헤겔과 반(反)헤겔의 규정으로 나누는 것을 선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김범수 교수

베르그송주의와 들뢰즈

데꽁브((Vincent Descombes, 1943년 출생)의 경우 현대철학의 과제를 헤겔 비판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는 하이데거노선에 따르면서 실존주의, 현상학, 해석학 등으로 연결되는 노선과 후기구조주의 노선으로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들뢰즈는 후자의 노선에 서 있는 학자이다. 이 시기 들뢰즈는 「구조주의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를 통해 구조주의를 특징을 밝히면서 자신과의 차이를 정리했다.

들뢰즈는 68혁명 목도 후 국가박사가 되는데 이후 가타리(Felix Guattari, 1930~1992)를 만난다. 들뢰즈는 가타리와 조우하여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공저로 『반-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이 있다. 이후 들뢰즈는 혼자서 몇 권의 책을 출간한다. 문학과 예술에 관한 책이 주류를 이루는데, 마지막 글은 「내재성 : 하나의 생명」이라는 짧은 논문인데, 이 논문은 자신의 존재론을 정리하는 아주 중요한 글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자신의 지적 스승은 니체, 스피노자, 베르그송임을 밝히고 그 중에서도 베르그송주의를 드러낸다. 들뢰즈는 이 글을 끝으로 1995년 자신이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투신한다.

베르그송은 수학에 천재성이 있었지만 수학과 물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과학사에서 뉴턴에서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지는 실증주의는 ‘양화(量化, 이성)’를 통해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물리적 양화로 설명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베르그송은 시간이라는 것도 양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자연과학에 대한 비판에는 생물학을 이용했다.

그런데 들뢰즈는 구조주의자이기는 하지만 라캉의 노선과 다른 구조주의자로서, 들뢰즈는 변화율을 다루는 미분방정식을 통해 베르그송과는 다른 수학에서 나온 개념을 도입한다. 이를테면 ‘특이점’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특이점’은 다른 것과 교환될 수 없는 독특한 점이다. 김범수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예를 들면 야구를 소재로 한 3D 애니메이션 영화의 모션 캡쳐 촬영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타자의 운동을 모션 캡쳐 한다고 할 때 이 때 센서들은 타자의 방망이나 팔과 다리 등 운동성이 보이는 곳에 부착될 것이다. 이곳에 부착된 센서들은 배우의 머리에 붙여져 있는 센서와 서로 교환될 수 없는 특이한 성격을 가진다. ‘특이점’은 이런 비유와 같다. 들뢰즈는 이것을 가지고 ‘역동적인 생성의 체계’를 설명하려 했다.”

베르그송의 원뿔 도식과 들뢰즈 경우에의 변용

베르그송은 유명한 ‘원뿔 도식’을 통해 ‘지속’을 눈덩이에 비유했다. 우리의 기억은 몸속에 계속 복합적으로 쌓여간다는 것이다. 기억의 만들어짐과 이것이 어떻게 현재화 되었는지를 말한 것이 『물질과 기억』이다. 그런데 김범수 교수는 베르그송의 그림은 반만 그린 그림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들뢰즈의 철학에서 본다면 마치 거울에 비추어져 있는 원뿔의 모습과 같이 변형시킬 수 있다고 한다.

위 그림을 보면, 과거의 시간대 부분이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가 될 것이다. 들뢰즈는 ‘이념(Id?e)’을 무의식의 세계에 가져다 놓는다. 들뢰즈가 여기서 말하는 이념은 무의식 세계에서 말하는 ‘욕구’들을 말하고 이것은 끊임없이 문제를 발생시키는 존재이다.

들뢰즈는 후기에 가면 이념이라는 말 대신에 ‘욕망’이라는 말을 직접 쓴다. 이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인간은 ‘욕망하는 기계’가 된다. 이 욕망하는 기계가 제도를 깨부수는 것이 ‘탈영토화’이다. 탈영토화는 정해져 있는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탈영토화는 한 번의 ‘역량’으로 만들어진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구조적으로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나누었다. 이 때 충동대로 움직이려는 것은 이드이고 초자아는 나를 억압하는 기제이다. 초자아의 억압이 사회적으로 나타나면 법_제도가 된다. 사회문화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를 반영하지만 법과 시회적인 제도는 초자아가 양심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

이런 제도적인 가치가 있으면 사회적인 금기가 강해진다. 그런데 이 금기는 깨부수어야 할 것이다. 무정부주의자는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이것을 관통해서 나오는 인간형이 ‘스키조(Schizo)’라는 인간형이다. 일종의 정신 분열자라고 할까. 여기서 말하는 정신 분열자는 임상에서 말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bermensch)’이 이것이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같은 인간이다.

김범수 교수는 니체의 초인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기존의 인식이 너무 잘못되어 있다고 한다. “니체의 초인이 단순히 인간을 넘어서는 뭔가가 아니다. 초인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평범한 인간과 같다. 변화를 통해 늘 ‘생성’하려고 했던 존재가 바로 초인이다. 슈퍼맨이 아니다. 스키조도 방향 없이 제도적인 억압을 뚫고 지나려는 사람들이다.”

위의 그림에서 생성되는 원리는 ‘반복’이다. 그런데 우측 원뿔(상에 비친 부분)에서도 반복이 일어난다. 이 경우는 ‘동일성에 의한 반복’이고 좌측 원뿔인 과거는 영역은 ‘차이나는 것들에 의한 반복’이다. 그리고 ‘강도’라는 것은 터지려고 꿈틀거리는 것을 말한다. ‘강도’라는 말은 그 자체로 힘이 들어가 있다. 이 힘들이 응축되어 늘 터져 나오려고 한다. 그리고 현재를 상징하는 가운데의 꼭지점과 비대칭으로 이루어져 늘 ‘생성’되려고 한다. 강도의 차이는 고도차로 인한 기압의 차로 인해 공기가 순환되는 구조에 있을 때 강도의 차이다. 이것은 빅뱅이라는 비유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이념’과 ‘차이’가 밖으로 터져나오려하면 ‘생성’이 되고, 분명 사회적으로 억압하는 기제들이 있는데 그것은 ‘초월성’이 된다. 사회적인 것은 또한 인간의 무의식적인 것을 반영하는 것이 된다.

위의 그림은 들뢰즈가 설명하려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참고로 김범수 교수는 리처드 도킨스가 유전자는 생존기계라고 말했다는 것을 거론하면서 들뢰즈의 철학에 의거한다면 유전자를 생존기계라고 표현한 것은 탁월한 용어 선택이었다고 한다. 들뢰즈는 ‘초월성의 체계’, ‘재현체계’, ‘표상체계’를 싫어한다. 특히 들뢰즈는 인간에 대해 ‘유기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기계’라는 말을 쓴다. 이는 가타리도 마찬가지다. 가타리는 인간을 ‘욕망하는 기계’라고 표현했다.

들뢰즈가 말하는 이념(Id?e)의 의미와 몇 가지 용어들

프랑스어 ‘Id?e’에서 대문자 ‘I’를 쓰는 것은 서양철학의 이데아를 의미한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을 칸트의 철학체계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그대로 대문자를 쓴다. 대신 그 내용과 용어는 완전히 뒤집어서 쓴다.

‘이념(Id?e)’의 구성요소는 ‘강도’와 ‘미분’이다. 강도는 고도차, 위도차, 압력차처럼 힘으로 가득한 것들이고 이것을 설명해주는 역동적인 수학체계로서 미분이 있다. 미분에는 ‘차이를 담고 있는 요소’란 의미가 있다. 또 ‘생물학적 분화의 요소’가 포함되고, ‘나의 창조적 행위’도 포함된다.

이 강도와 미분은 힘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가만있지 못하고 터져 나오려는 상태에 있다. 개체인 인간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나도 모르게 어떤 행동을 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것은 ‘억압’ 때문이다. 그 행동은 일종의 ‘반복 강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과거의 무의식 영역이 현재로 터져 나오려고 하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반복’이라고 한다. 반복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과거의 ‘경험과 습관에 의한 반복’이 있고(옷 입은 반복), ‘새로 생겨난 반복’의 경우가 있다.(헐벗은 반복) ‘옷 입은 반복’이란 풍성하다는 의미이고 ‘헐벗은 반복’은 빈약하다는 의미인데 이 때 한 개체가 가지는 ‘욕망’은 ‘자발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비자발적인 면’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를 만들어가는 또 다른 형태로서의 ‘개체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들뢰즈의 후기저작으로 가면 ‘강도는 잔존’하지만 ‘미분과 이념’에 대한 얘기는 빠진다. 빠진 그 자리를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라는 말로 대신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가타리의 개념이다. 이것을 뚫고 나가는 힘을 ‘스키조’라고 하고 들뢰즈는 지구 전체를 ‘알’로 표현한다. ‘생명이 분화’되기 때문이다. 생명은 ‘분화’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지구를 ‘기관 없는 신체’에 비유하기도 한다. 들뢰즈는 이런 새로운 개념들이 만들어지면서, 이를 일컬어 ‘새로운 사유의 인지’라고 했다. 또 그것이 구성되는 속성에 대해서는 ‘내재성의 평면’이라고 했다. 우리 ‘경험세계의 응축성’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반대의 지점에는 ‘표상체계’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재현’과 같고 이것은 ‘억압하는 것’이다. 정해져 있는 ‘체계’가 있고 그 체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표상’이다. 어떤 목적이 정해져 있고 그 ‘합목적성’에 의해 맞춰서 형성되는 것, 즉 ‘주체’에 대해서 들뢰즈는 비판하는데 여기서 ‘주체’는 ‘초월’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이것은 ‘이념(Id?e)’의 정 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그림에서 보이는 점선의 영역 미래는 ‘영원회귀’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예전에는 자연의 주기에 맞추는 ‘동일성의 반복’이라고 보았지만 들뢰즈는 세계에는 같은 것이 없고 생성만이 이루어지고 ‘생성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개념으로 썼다. 영원히 돌아오는 것은 ‘생성’이다. 동일한 내가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영원회귀’를 ‘원형의 반복’이라고 보는 관점은 들뢰즈가 보던 관점 이전의 것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사태에 의해 80년에 죽은 누군가와 90년대 죽은 누군가는 원형의 반복이다. 이것은 종교적 제례의 의식이나 역사적 사건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반복하는 대상이 ‘동일’하다.

그림의 꼭지점 부분 현재는 습관적인 체계에서 과거를 끄집어낸다. 그런데 ‘비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되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생성’이다. 미래를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젊었을 때 여행을 간다고 가정해보자. 자유롭다. 자유로운 이유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관습적인 체계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새로운 뭔가를 시도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내게 된다. 미래의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재성의 존재론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의 서양철학의 탄생과 그 처음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미토스(mythos)에서 로고스(logos)로. 이 말은 서양철학의 탄생과 발전을 압축적으로 담은 문구이다. 다시 말해 서양철학은 ‘확실성’을 추구했고, 이것은 철학의 출발이다. 존재를 연구하는 기본 전제는 변화나 생성이 아니라 ‘정지’였다. 이것임과 저것임이 동시에 주장되는 것은 존재의 규정으로 말할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추방을 선택하지 않고 독배를 선택했던 이유는 결국 확실성에서 비롯된다. 이것과 저것이 공존하는 세계가 아닌 확실성으로, 존재로 충만한 저 세계에 대한 동경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으면 죽음을 선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불변’은 ‘선한 가치’를 담고 있다. 서구 지식인들의 의식에는 불변과 선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봤고, 이를 추구하는 의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세상은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로 가득하고,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이것이 들뢰즈 철학의 문제의식이다. 기존 철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는 가장 확실한 것이었다. 가장 잘 규정 할 수 있는 것. 불변의 것, 정지해 있는 것이 가장 선한 것이고 확실한 것이라고 믿었다. 서양철학은 가장 실체적이라는 정지에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도덕적 의미에서 선(善)이라는 개념이 들어간다.

이 ‘선의 기원’을 따져보자는 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내재성의 원리’이다. 이것은 니체의 계보학에서 왔다. ‘가치의 기원’을 따져보자는 것이다. 들뢰즈는 내재성의 철학에서 첫 번째로 얘기하는 것이 ‘사유란 어떻게 만들어지는 가’이다. 어떤 장소에 몇 명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식’의 영역이다. 이것은 사유가 아니다. ‘사유’는 충격이 오고, 하나의 사건이 만들어지고, 무언가 생성이 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변화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대해 생각해 내는 창조적 과정이 사유’이다. 기존의 관습체계가 아니란 말이다. 만약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지를 기반으로 말한다면 실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할 수 없다. 그 사유체계는 들뢰즈에게 있어서 일종의 나쁜 것이다. 이것을 니체는 ‘독단적 사유의 이미지’라고 했다. 사유는 사건의 조건과 환경을 따져서 해야 한다. 이것이 푸코가 말한 ‘바깥으로의 사유’이고 들뢰즈는 바깥으로 나가 사유의 전제조건을 봤던 것이다. 들뢰즈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또는 확실성의 확보를 모두 제거하고 이것 없이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우리의 경험으로 응축된 새로운 사유를 하고 적극적 생성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들뢰즈의 ‘내재성’이다.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철학자의 서재]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철학자의 서재]

 

현남숙 (가톨릭대 초빙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상처받은 삶, 철학으로 치유하기

삶은 원래 상처를 포함하지만 그 상처는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외적으로 삶은 풍요로워지고 개인의 권리도 그 어느 시기보다 커졌지만 내실은 어떠한가? 신자유주의의 경쟁과 시장원리는 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내면을 그 어느 때보다 동요시킨다.

경쟁에서 도태하면 가차 없이 모욕을 주는 이 낯선 문화에서 힐링 산업이 호황을 맞고 있다. 하지만 자신과의 근본적 대면 없이는 근본적 치유도 불가능하다. 나는 누구이고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한, 힐링은 일시적 효과에 그치고 만다.

자신과의 근본적 대면은 철학, 특히 실존철학의 근본 주제였다.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박은미 지음, 소울메이트 펴냄)은 각종 힐링 산업의 시대에 철학의 정공법으로 자기치유의 방법을 제시한다. 실존철학을 전공하고 철학 카운슬링을 연구한 저자가 철학 상담의 목적과 방법을 염두에 두고 이 에세이를 썼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에피소드들을 저자 자신의 경험과 철학으로 풀어낸다. 공감할만한 이야기들과 함께 왜 우리는 ‘진짜 나’로 살지 못하는지, 그것이 어떤 고통을 주는지, ‘진짜 나’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내해 준다.

박은미,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 소울메이트, 2013


 

누구에게나 삶은 억울한 것

책의 소제목 중에 “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는 대목이 있다. 한겨울에 꽁꽁 언 음식물 수거함을 뒤지는 고양이에게도, 등록금을 위해 시험기간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에게도, 불철주야 고생했지만 어느 날 조기퇴직당한 직장인에게도, 삶은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기초적인 분배부터 인정욕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억울함을 느낄 수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 이랬으면 좋겠는데 저렇고, 저랬으면 좋겠는데 이렇다. (…)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힘들다. 어느 정도는 되어주었으면 좋겠는데 항상 기대치에 못 미친다. 그 ‘어느 정도’가 사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내 인생은 그 정도도 되어주지 않는다.” (32쪽)

저자는 세상에 문제없이 사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은 자신이 겪는 일 중에서 가장 덜 좋은 일을 불행으로 규정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누구라도 불행을 느낀다는 것이다. 욕망의 상대성 때문에 행/불행을 느끼는 것은 공평하다는 저자의 통찰에 수긍이 간다.

저자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졌지만 그럼에도 내 의지로 나를,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각자가 처한 한계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좀 더 행복한 삶을 살려면 있는 힘을 다해 그 상황을 수용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태클 없는 인생은 없다. 누구나 태클 없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비합리적 전제다. 남들은 다 겪는 태클을 나만은 겪지 않기를 바라다니! 그러나 태클 자체가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에게는 그 태클을 어떤 방식으로 대결해내서 나의 삶을 진짜 나의 삶으로, 정말 내가 주인이 되는 진짜 나의 삶으로 살 것인가의 문제만 남는다.” (228쪽)

태클을 끌어안고 나아가라는 저자의 이 말은 니체의 운명애를 연상시킨다. 저자 자신도 니체를 인용하면서 자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긍정하는 인간을 강한 인간으로 보고, 그 운명을 자신의 발전의 기회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핑계는 가장 쉬운 해결책이므로, 운명에 대면하여 초월이나 포기가 아닌 변화를 유도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내 삶의 방향키를 남의 손이 아닌 내 손에 두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진짜 나’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

하지만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그 안에서 변화를 꾀해 보려 해도, 왜 우리는 ‘진짜 나’로 사는 것에 자주 실패하는가? 왜 우리는 살던 대로 사는 것에 익숙하여 자신의 경향성도 세상의 문제들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가? 저자는 이처럼 우리를 고통에 머물게 하는 삶의 차원을 여러 각도로 분석하는데, 그 중 자신의 편향적 시선과 세상의 일률적 시선에 대한 통찰에 대해 알아보자.

편향적 시각이란 사태를 특정한 각도에서만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만사를 자신에게 익숙한 한 가지 각도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를 편향적으로 인식하면 심리적, 지성적 노력이 덜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편향적 시각은 궁극적으로 자기를 왜곡할뿐더러 자신과 연관된 타인과의 관계도 왜곡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자기의 문제는 모자람으로 보면서 타인의 문제는 나쁨으로 보는 우를 범하고는 한다. 하지만 거꾸로 자신의 문제는 나쁨의 문제로 보면서 반성하고, 타인의 문제는 모자람의 문제로 보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노력하지 않으면 타인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기 쉽다. 누군가를 호의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많은 심리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170쪽)

또한 일률적 시선이란 세계를 세상 사람들이 정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부, 성공, 권력 등이 좋은 것의 지표가 된다. 부, 성공, 권력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부과한 기준에 맹목적으로 나를 맞추려 하면, 자신을 왜곡할뿐더러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사회도 병들게 한다고 본다.

“우리가 공허에 시달리는 이유인 즉, 남들의 기준이나 사회적 기준을 받아들이고 그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애쓰게 되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으로 살면 타인의 시선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데, 자신이 충분히 자신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인정을 획득하는 데 지나치게 종속되는 것이다. 내가 나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충분히 발현하면서 살면, 즉 자아실현을 하면 타인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 (264쪽)

저자의 말처럼 ‘진짜 나’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내 안에도, 밖에도 있다. 우리 자신이 만든 편향적 시선이든, 세상이 만들어놓은 고정된 시선이든, 그런 것들에 매달려 있으면 자기다운 삶을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따라서 이것들을 넘어서서 ‘진짜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나아간다.
 
 
‘진짜 나’로 사는가의 판별기준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 날 묶어왔던, 사슬을 벗어 던진다, 지금 내겐 확신만 있을 뿐”

한 뮤지컬의 삽입곡을 들으면서 그런 순간을 살고 있는지 질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진짜 나’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진짜 나’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또한 그 상황에서의 내가 ‘진짜 나’인지 어떻게 확신한다는 말인가?

저자는 ‘진짜 나’는 어떤 고정된 자아는 아니라 과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진짜 나’는 그때그때 나 자신으로 살려는 노력 속에서 순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진짜 나’로 존재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시한다.

“이것이 진짜 나다운 일인가, 지금 나의 삶이 진짜 삶인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내일 죽어도 이 일을 하고 싶은가? 내일 죽어도 오늘처럼 살고 싶은가? 입니다.” (332쪽)

자신이 죽을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 왜 자기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가? 저자는 하이데거를 따라 시간의 유한성이라는 한계상황을 자기다움을 가장 잘 성찰하게 하는 존재론적 조건으로 간주한다. 지금이 삶의 마지막 순간이어도 그러하겠는가라는 실존의 물음은 삶의 방향을 ‘진짜 나’로 향하도록 바꾸어준다는 것이다. 즉, ‘진짜 나’로 사는 것을 미루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진짜 나’로 살기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나’로 살기로 작정했다고 해서 온전히 ‘진짜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리 ‘진짜 나’로 살아가려 해도 가까운 사람이 이해해 주지 않거나, 그 반대 상황이면 이러한 과정을 지속하기 힘들지 않은가? 가족이나 연인이 그런 삶을 반대해도 ‘진짜 나’를 쫒아 살아갈 수 있을까? 또한 가족이나 연인의 ‘진짜 나’에는 무심하면서 나만 그렇게 살아도 될까?

저자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진짜 나’로 살려면 나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존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와 네가 서로 ‘진짜 나’의 너, ‘진짜 너’의 나가 되도록 그러한 삶을 인정하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본다. 저자는 야스퍼스의 철학에 근거해 일방적 ‘희생’이나 자신의 편향성에 치우친 ‘투쟁’이 아닌 두 주체간의 ‘사랑하면서의 투쟁’을 역설한다.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사랑의 과정은 우리 각자를 ‘진짜 나’가 되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 그래서 충분히 네가 아닌데 너와 소통하는 내가 충분히 나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사랑하면서의 투쟁 속에서 동시적으로만 나와 네가 함께 실존이 될 수 있다.” (315~316쪽)

실제로 부부나 연인이 서로 자신의 삶을 인정해 달라고 하면 갈등이 생기고 다투게 될 것이다. 나를 포기하고 너를 사랑하면 ‘진짜 나’를 희생하게 되고, 너를 포기해서라도 나를 사랑하겠다고 하면 ‘진짜 너’를 희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 관계는 적어도 관계의 측면에서는 행복한 삶이 되지 못한다. ‘진짜 나’로 살기위해서는 타자도 그러한 본래적 삶을 사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진짜 나’로 사는 것은 유아론을 넘어 사회적 차원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기

누구에게나 자기 마음 하나 챙기기 어려운 날이 있다. 오늘 하루의 삶이 나답지 못했다는 기분이 들거나 달라질 것 같지 않아 내일 아침이 기대되지 않을 때가 있다. 자기 마음 하나 가누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겠냐고들 하지만, 당사자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방치하면 자신을 상처내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저자는 “나는 나를 들고 다녔구나”라는 황지우 시인의 시구를 인용하면서 나를 들고 다니지 말고 놓아주라고 말한다. 나 자신의 편향적 인식이나 세상의 인식에 맞추어진 ‘가짜 나’는 놓아주고, ‘진짜 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와의 화해 속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행복한 삶을 살려면 자신의 마음을 가눌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행복해지려면 자기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것은 한 번에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마음을 가누는 법을 배우는 것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야 할 과제라 말한다.

마음에 관한 연구나 산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가 보다. 하지만 내 마음 하나 챙기자고 열 일 제치고 템플스테이로, 상담소로 달려가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서로 ‘철학 카운슬링’을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적절한 상황에서 읽는 책은 가뭄의 단비처럼 마음을 평화롭고 쾌청하게 해 준다. 손에 가까이 두고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들춰보면 좋을 책이다.

한국고대사 문제는 한국현대사 문제이다: 김 상태가 쓴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보고 듣고 생각하기]

한국고대사 문제는 한국현대사 문제이다: 김 상태가 쓴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나태영(한철연 회원)

 

 

한국고대사 문제는 한국현대사 문제이다?

한국고대사는 말 그대로 한국고대사를 다루는 학문이다. 하지만 한국고대사를 다루는 사람은 현대인이다.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현대인들이 한국고대사를 주로 다룬다. 이 책 글쓴이 김상태는 그래서 지금 한국고대사를 다루는 한국 사학자들 연구 방법을 냉혹하게 평가한다.?

김상태,, 책보세, 2012


김상태는 실명 비판을 한다.?

김상태는 강준만, 김갑수처럼 실명 비판 한다. 실명 비판 한다는 것은 나를 던지는 것이다. 용기가 없으면 실명 비판할 수 없다. 실명으로 칭찬하기는 쉽지만 실명으로 비판하기는 어렵다. 잘못하면 비판받은 사람한테서 고소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왕따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상태는 훌륭하다.?

강준만, 김갑수, 김상태가 실명 비판하는 까닭은 공정한 평가를 하기 위해서 이다. 우리 역사에서 90점 받아야 할 사람이 40점 받는 경우가 많다. 신채호 선생이 그렇다. 20점 받아야 할 사람이 90점 받는 경우가 많다. 안창호가 그렇다.?

김상태는 대고조선을 주장하는 학자 신채호, 리지린, 윤내현, 복기대, 이덕일, 이희진, 성삼제가 90점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고조선을 주장하는 이완용 양아들 이병도, 이병도 제자 이기백, 노태돈, 송호정, 오강원, 김정배, 이기동, 박노자가 마이너스 90점 받아야 된다고 주장한다. 박노자는 한국고대사 이야기 그만하면 좋겠다. 한국고대사 글 계속 쓰면 진보적인 글 쓰고 받은 점수 다 까먹는다. 진심으로 박노자한테 부탁한다.?

그래도 이병도는 죽기 전에 정신 차렸다. 최태영 선생 덕에 정신 차렸다. 정신 차리고 대고조선을 주장하는 책을 최태영 선생과 함께 썼다. 그런데도 이병도 제자들은 아직도 얼이 빠져 있다. 너무 게으르다. 솔직하게 자신들 실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력 있는 사람들을 무시한다. 그들은 문헌사학을 포기했다. 오히려 문헌사학 대가 윤내현을 비난한다.?

저들은 고조선 관련 자료가 적다고만 한탄한다. 하지만 고조선 관련 자료는 많다. 윤내현은 저들이 게으름 피울 때 다음과 같은 책에 흩어져 있는 고조선 관련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일을 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꽤어야 보배다윤내현은 서말이 안 되는 구슬을 꽤어 걸작품을 만들었다. 신채호 선생, 리지린한테 배우고 두 분을 뛰어넘는 일을 해냈다. 그런데도 저들은 윤내현이 이룬 것을 시기하고 질투만 한다. 윤내현을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매장하려고 한다. 나는 저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이 진정 학자인가??

한국사료:삼국사,삼국사기, 제왕운기, 고려사, 제왕운기, 고려사, 응제시주, 세종실록』〈지리지, 동국통감, 성호사설, 동국통감등등 ?… .중국사료: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 통전, 만주원류고(서평자 주: 청나라 정사, 신채호 선생이 인정하는 책, 책 나온 지 300년 만에 공무원이 번역), 요사, 대명일통지, 관자, 산해경, 수경주, 여씨춘추, 염철론, 전국책, 실원등등 ?… .(171)?


이기백은 비겁했다.?

이기백은 한국사 신론 에서 자신이 식민사관 없애려고 애썼다고 말한다. 거짓이다. 이기백이 한국사가 식민사관 벗어나게 한 것 별로 없다. 한국사 시민강좌편집장 이기백은 한국사 시민강좌서영수, 이기동이 잘못을 지질러도 침묵했다. 이완용 양아들 이병도 제자답다. 이기백은 똑똑한 인간이다. 일본이 저지른 식민사관 한계를 알 것이다. 그런데도 못난 스승 이론을 고치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기백은 한국사 시민강좌2집의 편집인이면서도 서영수의 거짓과 이기동의 빨갱이 때려잡기를 교정하거나 만류하지 않고 그대로 용인했다. 아니 편집인으로서 그들을 옹호하고 조장했다는 쪽이 더 맞아 보인다. 이기백 자신이 이미 윤내현 때려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316)고상한 선비차림으로 행세해 온 이기백에 대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317)?


윤내현한테 몹쓸 짓한 이형구

‘1981년 필자가 귀국한 후 단국대학교 사학과 모 강사가 필자의 석사논문(45)을 빌려간 다음 이를 윤내현에게 전달하였다고 했는데 아직까지도 반환되지 않았다. 윤내현의 글(<기자신고>, 1983)에는 필자의 석사논문과 일치하는 견해도 있으나 어디에도 전거가 보이지 않는다.’(486, 이형구)결국 이형구의 석사논문의 결론은 기자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이론으로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 이론의 방계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이것은 기자가 만주와 한반도에 온 적이 없다는 윤내현의 <기자신고>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형구는 지금까지도 이 이론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견해가 윤내현과 일치했다는 말인가?그럼에도 이형구가 저런 주장을 떠들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인용한 자료 가운데 일부와 그에 대한 해석의 일부가 같다고 우기는 것이다.’(488)


이이화는 한국고대사 공부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이이화는 기초적인 내용도 모른다. 성실성도 부족하다. 성삼제가 쓴 고조선 사라진 역사만 봤어도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다. 사마천은 사기란 책에서 사기 쳤다. 고조선 한나라 전쟁에서 고조선이 이겼는데도 한나라가 이겼다고 사기를 쳤다.?

한나라는 조선을 침략하여 승리하고 나서 한사군을 세웠기 때문에 굳이 왕검성을 버리고 요동에 낙랑군을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이이화, 이야기 한국사1, 266(이 책 93쪽에서 다시 인용)고조선과 한과의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데 한의 장군들이 작전 실패의 책임 등을 물어 연이어 처형당하고 있는 것이다.‘위산의 군대는 황제 직할의 정예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위산은 패수를 건너보지도 못하고 회군한다. 그러자 한 무제는 위산도 처형한다.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한 위산에 이어 한무제는 제남 태수 공손수를 파병한다. 고조선을 침공하라고 추가 파병된 공손수는 도리어 아군 장수인 누선장군을 체포한다. 보고를 받은 한 무제는 제나 태수 공손수도 처형한다.‘(고조선 사라진 역사, 성삼제, 121)?

독자 여러분한테 묻는다. 당신들이 한 무제이다. 한나라가 고조선한테 이겼다면 당신들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들 목을 치겠는가??독자 여러분은 이 책에서 이 부분만 읽어도 이 책 산 보람을 느낄 것이다.?


소고조선의 뼈대와 삼국사기불신론

송호정은 자신의 주저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36쪽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 형성 과정을 중심 주제로 설정한 것은 고조선이 국가 형성과 동시에 곧바로 멸망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송호정이나 주류 고대사학계가 자신들의 입장을 이런 식으로 명확하게 밝히는 일은 거의 없다. 사실 이 문장도 상세히 읽어보지 않으면 여간해서는 찾아내기 어려운, 구석에 숨어 있는 문장이다.’?절반은 실수이고 절반은 이 책의 원본인 자기 박사논문의 지도교수가 노태돈이기 때문으로 보인다.’(189)? ?

어쨌든 고조선이 국가 형성과 동시에 망해버렸다는 것은 과거 고조선이란 조그만 부락이 위만조선이 등장하는 서기전 2세기 무렵에야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 수준으로 발전했다가 곧바로 한나라에 망해버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서기전 2400년경에 건국되어 반만년 민족사를 이루어왔다는 고조선의 역사는 틀렸다는 얘기다. 이것은 소고조선론의 핵심 논리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 하나만 덧붙이면’ ‘바로 한사군 이야기다.’?

‘1. 고조선은 서기전 2세기 무렵 국가가 되었다가 곧바로 망해버린 나라다. 최소한 서기전 1500년 이전부터 국가를 이루었던 중국의 은()나라나 그 뒤를 이은 주나라 및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에 비추면 고조선은 그 기간 동안 줄곧 후진적인 부락 집단에 불과했다.?

2. 그 작은 나라를 한나라가 정복하여 한사군을 설치했고 이 가운데 낙랑군은 고조선 지역에 오래 남아 400년간 지속되며 이후 한반도 국가와 사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한사군 이야기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인데 이것도 꼭 기억해두어야 한다.?

주류 고대사학계가 가진 모든 이론적 논증구조의 핵심은 한사군이다. 이것은 일제시대 일본인 관변사학자들이 만든 전통으로서 그 일본 식민사학과 이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의 철의 법칙이다.?

이들은 고대사 어느 시대를 말하든 일단 한사군, 특히 낙랑군의 위치와 그 낙랑군이 존재하던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 한사군의 위치를 기준으로 고조선, 부여, 고구려, 옥저 등의 위치를 비정하고 한사군이 존재하던 시기를 기준으로 고조선, 부여, 고구려, 옥저등의 시기를 배정한다. 고조선이 미개한 부락집단으로 전락한 이유도 근본적으로 여기에 있다. 나아가 이들의 위치를 기준으로 만리장성의 위치를 설정하고 심지어 이들의 위치와 연대를 기준으로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까지 마음대로 뜯어 고친다.’?

둘째, 만일 한사군이 한반도 내부에 있었다는 이론이 무너지면 일단 고구려사를 연구한 송호정의 사부 노태돈의 평생 업적부터 휴지 조각이 된다. 한사군이 한반도 내부에 있었다고 보는 노태돈은 고구려 성립 시기부터 그 위치, 영역, 군사적, 정치적 활동 전체를 한반도 내부에 있는 한사군과의 관계를 통해 배치하고 정리하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일이 이쯤 되면 한반도 내부의 한사군을 전제로 한 기존의 신라사, 백제사, 가야사, 전체도 모두 무너진다. 다시 말해 이병도, 이기백, 김정배, 노태돈, 송호정으로 이어지는 해방 이후 70년간의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의 고대사 이론 전체가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들이 윤내현 등장 이전에는 별로 신경도 안 쓰던 고조선사에 목숨 걸고 달려드는 실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디 이론만 무너지겠는가. 이론이 무너진 순간 그들의 수십 년간 나태와 권위주의와 학문적 무능력과 매국적 식민사학도 다 드러나게 된다. 국사 교과서에 이들의 수십 년 학문 내용의 오류와 본질이 기록되고 우리의 자녀와 후손들이 이 기록을 배운다고 생각해 보라. 이렇게 되면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 전체는 밤잠을 못 이룰 것이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윤내현을 왕따시키며 심지어 역사학자로 역사 문헌을 포기하면서까지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192)?

인간의 행동 양태와 습관[철학을다시 쓴다]-⑫

인간의 행동 양태와 습관[철학을다시 쓴다]-⑫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보통 때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묻지 않죠? 상황이 바뀔 때, 또는 긴급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때,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고 현재까지 대응해왔던 방식으로 미래의 사태에 대비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농촌의 한 마을 공동체가 우주 전체가 돼서, 거기서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 죽어 뒷산에 묻히는, 시간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삶 속에서는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슬기롭게 살아오면서 가뭄도 겪고 큰물도 겪고 관혼상제 등 여러 다양한 삶의 경험을 통해서 어떤 일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를 아는 어른들이 살길을 일러주고, 구태여 젊은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묻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시간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농경공동체에서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경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유목사회에서도 떼 지어 다니면서 목축을 하거나 부족한 목축지를 두고 각축전을 벌이게 될 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강인한 사람이 앞장서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에 여기서도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질문이 나오는 곳은 도시사회인데, 특히 개개인이 자기 삶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부딪힌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나옵니다.

도시사회라 하더라도 상황과 체제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독재에 의해 강제된 상황이든 민주적인 합의에 의해서 서로 용인하는 그런 상황에서든 그 상황이 안정되어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나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강당 안을 걷는데, 이 강당 바닥은 평탄하기 때문에 왼팔과 오른팔의 움직이는 각도가 어떤지, 보폭이 어떤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평탄한 길에서 제 동작은 자동화됩니다. 보폭과 팔이 움직이는 각도가 가장 편하고 효율적인 상태로 조정이 됩니다. 우리 신체 동작의 자동화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걸을 때 머리로 어깨 각과 왼팔의 움직이는 각을 몇 도로 하지? 왼손은 이런데 오른손은 몇 도로 하지? 이렇게 계속해서 거기에 집착하면, 강박관념 때문에 우리 두뇌는 아무 구실도 하지 못하기 쉽습니다. 때문에 동작을 자동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깜깜한 밤길을 걷는다든지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산에 오르게 될 때는 보폭 하나하나, 손동작 하나하나에 일일이 신경을 쓰게 됩니다. ‘주의’(attention)가 이렇게 집중되는데, 이렇게 새로운 사태에 직면해 있을 때만, 우리 몸동작을 어떻게 해야 이 새로운 상황에 제대로 대처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숙고를 하게 되고, 그 때문에 그때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자기 내면에서 솟아오르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의식은 잠들고, 자동화 상태에서 우리의 신체 동작은 기계화됩니다. 외적인 강제가 엄청나게 심해서 도무지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될 때나, 그런 체제에 있을 때도 우리 의식은 짓눌리고 동작은 최소한으로 바뀌면서 자동화가 됩니다. 이 때 자동화되는 의식의 반응과 행동이 가장 무섭습니다. 비극적인 상황이죠. 동작에서 자동화는 개인의 행동에서 습관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삶에 길들여진다는 말이죠. 상황이나 체제가 완고하게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때, 사고라든지 우리의 행동양태가 그것에 길들어서 습관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집단화된 습관은 ‘관습’으로 고착됩니다.

그렇지 않을 때도 있죠. 모든 것이 외부적인 요인으로 해결이 될 때도 거기에 젖어서 길들여지고 우리의 습관이 거기서 형성됩니다. 사회적으로 더 큰 범위에서 보면 관습이 형성되죠. 그리고 그 관습은 윤리나 도덕으로 나타납니다. 법의 형태로도 나타나죠. 그런데 법은 강제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관습이나 윤리 도덕보다도 가변성이 더 큽니다. 잘못된 체제에서 우리가 그 체제를 뒷받침하는 도덕률을 익히고 윤리적인 규범을 내면화하는 것이 가장 큰 비극적 상황입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 드렸죠?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고,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는 세상이 나쁜 세상이다. 우리가 없을 것이 있는 세상, 그러니까 억압, 불평등, 증오, 전쟁, 이기심, 탐욕들이 만연된 세상에서 ‘세상은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니까, 여기에 적응해서 내 살 길을 찾자.’ 이렇게 길들여지고 그 상황이나 체제에서 자기 자신을 순응시켜 행동을 굳혀가서 행동 패턴이라든지 사유방식을 특권화시키고 그것이 한 사회 전체를 지배해 증오와 이기심, 탐욕이 들끓는 사회의 모든 제도와 체제를 받아들이게 될 때, 희망이 없는 거죠? 나쁜 세상에 물든다는 것은 우리의 비판적인 성찰을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대단히 절망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없을 것, 없어야 할 것, 있을 것, 있어야 할 것은 현재의 시제가 아니라 미래의 시제로 표현됩니다. 있는 것을 있다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참말’이고 정직한 증언이지만, 미래의 삶과 연결되는, ‘당위’라고 하는 것, ‘윤리 규범’,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의 삶에 대한 전망이 바로 서지 않으면 족쇄나 올가미가 되기 십상입니다. 과거의 굳어진 가치관을 기초로 해 그 과거와 현실이 바뀌지 않고 미래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판단 아래에서 없을 것이 분명히 있는데도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마비된 의식이 우리의 행동을 마비시키고, 없어야 할 것이 가득 찬 이 세상에 주저앉히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우리 행동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어떤 식으로 길들여지는가, 그것이 장기적으로 어떤 습관을 형성하게 되고 한 사회에서 관습으로 굳어지는가에 대해서 깊이 성찰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농경사회에서 어른들이 자연과 관계 속에서 경험을 얻고 그것을 내면화해서 하나의 관습으로, 윤리관이나 가치관, 도덕률로 굳히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유목사회에서도 그 위험은 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도시사회는 어떻게 보면 흡혈귀들이 대낮에도 설치는 ‘식인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델리카트슨>이라는 영화 본 적 있습니까? 식량을 돈으로 쓰고, 사람고기를 먹죠.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을 뿐이지 모든 도시사회는 ‘식인사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사는 사회입니다. 여기에 대한 아무런 근본적인 성찰이 없이 자기가 처한 상황과, 어떤 체제 속에 사느냐에 따라서 자기 정체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지요? 그러죠? 일종의 변형, 변환(Metamorphosis)인데 자동화나, 습관, 윤리, 도덕의 형성 과정을 잘 꿰뚫어보려면 고도의 비판의식과 창조적인 지성이 필요합니다. 비판의식이 왜 필요하냐면, 없어야 할 것이 있을 때, ‘이건 없어야 할 것인데, 없애야 하는데’ 하는 처방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판의식은 행동으로 나타날 때는 파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거나 기존 도덕률, 기존 가치관을 거부하기도 하고, 현실적인 파괴 활동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출처: rororo.net

9.11테러가 일어난 게 언제였죠? 군산복합체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 건물, 미국 국방성 건물을 테러리스트들이 공격했죠. 세계에서 제일 센 나라가 어디지요? 제가 우리 학생들한테 물어봤더니 미국이 제일 세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쳐요. 그래서 제가 ‘이 바보들아, 미국이 왜 젤 세냐? 아프가니스탄이 제일 세지’라고 말한 뒤에 아프가니스탄이 제일 센 이유를 말했죠. 세계에서 가장 국민소득이 낮은데다가 어찌나 외교 역량이 부족한지 파키스탄 하나와만 국교를 맺고 있고, 미국이 무서워서 나머지 나라들은 모두 국교를 단절한 나라인 아프가니스탄에, 군사가 오만 명 정도밖에 안 되는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미국이 혼자 쳐들어가기 무서워서 예순 여섯 나라를 줄 세워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아프가니스탄은 그 전에 강력한 소련군이 와서 탈레반을 소탕하려고 쑥대밭을 만들었는데도 버텨냈어요. 그렇다고 외교 역량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어서, 한때 미국 돈 받아 소련하고 맞장 떠서 살아남았죠. 그런데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미국을 비롯한 힘센 연합군들이 곤경에 빠져 있지요? 그러니 아프가니스탄이 최고로 센 나라 아닙니까?

제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삼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고 어디에 썼는데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세계 삼차대전은 진행 중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죠? 일차 세계대전과 이차 세계대전이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식민지를 뺏으려고 싸운 전쟁이라는 고정관념이 그대로 우리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에 삼차대전도 국가들 사이에서 땅뺏기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WTO 체제도 세계대전의 한 형태인데, 이제는 완성된 금융독점자본에게 국경은 의미가 없습니다. 미국은 아직까지 오사마 빈라덴 같은 테러리스트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돌리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엔 제삼차대전의 형태는 내란입니다. 저는 전쟁이 내란 형태로 전개되는 것이 인류를 위해서 큰 다행이라고 봅니다. 왜 그러냐면 옛날처럼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편갈라서 싸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인류를 몇 천 번 몰살시키고도 남을 만한 핵무기가 가동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 안에서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핵무기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됩니다. 적과 아군이 뒤섞여 있으니까 자기나라 안에서 핵무기를 터뜨릴 수는 없죠. 그래서 이제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가 국가라는 단위를 중심에 놓고 ‘애국심’을 내세워 서로 결탁해 다른 나라의 자기 형제들에게 총을 겨누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다고 보면 됩니다. 세계 이차대전이 벌어지게 될 때 사해동포주의를 부르짖고 국제 연대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결국엔 ‘애국심’에 불타서 동료들의 가슴에다 총을 겨누었죠. 이제는 적어도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국내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를 노예화시키고 착취해야 살 수 있는 계급이 누구고 자기가 연대해야 할 계급이 누구냐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선을 넓혀갈 수 있습니다.

그 모범을 9.11테러가 보여줬는데 이 사람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맞장뜨자고 하는데, 그건 뻔하죠. 석유욕심 때문에 그러는 거죠.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곧 잡혀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⑤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⑤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신기해 하는 나루에게 할아버지는 그림자를 팔면
가장 빛나고 힘쎈 왕이 되게 해준다고 했어.
그리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모두 줄 수 있다고 했어.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제3장 화폐 또는 상품 유통[자본론강독]-10

제3장 화폐 또는 상품 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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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참석 : 김선이, 김성심, 나태영, 옥철, 신재경

정리 : 옥철

제2절 유통수단(p.133~158)

화폐, 즉 금은 모든 상품들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공통적인 가치 척도로서의 기능을 가지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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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상품의 변태

어떤 한 상품의 형태변환 또는 변태는 언제나 두 종류의 상품[즉, 보통상품과 화폐 상품]의 교환에서 이루어진다(상품의 유통). 이러한 교환과정은 상품을 상품과 화폐라는 두 개의 요소로 분화시키는데, 이 두 개의 요소는 상품에 내재하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대립을 표현하는 외적 대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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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립에서 사용가치로서의 상품들이 교환가치로서의 화폐와 대립한다. 다른 한편, 이 대립의 어느 쪽도 상품이며 따라서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체다. 상품의 교환과정은 대립적이면서 동시에 상호보완적인 두 개의 변태-상품의 화폐로의 전환과, 화페로부터 상품으로의 재전환-에 의해 수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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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변태의 두 계기는 직포자의 상이한 거래 행위[즉, 상품을 화폐와 교환하는 판매와 화폐를 상품과 교환하는 구매]임과 동시에 두 행위의 통일[구매를 위한 판매]이다. 상품의 교환과정은 다음과 같은 형태변환을 하면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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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C) -화폐(M) – 상품(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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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자는 자기의 상품을 금과 바꾸며 구매자는 자기의 금을 상품과 바꾼다. 상품은 무엇과 교환되는가? 그 자신의 가치가 취하는 일반적 모습과 교환된다. 그리고 금은 무엇과 교환되는가? 그 자신의 사용가치의 하나의 특수한 모습과 교환된다. 어째서 금은 아마포에 대해 화폐로 대립하는가? 2원이라는 아마포의 가격, 즉 아마포의 화폐 명칭이 벌서 화폐로서의 금에 대한 아마포의 관계를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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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이 그 본래의 상품형태를 벗어버리는 것은 상품의 판매에 의해 완수된다. 다시 말해, 그 상품의 사용가치가 [그 상품의 가격에 오직 상상적으로만 표현되어 있는] 금을 현실적으로 자기 측에 끌어오는 그 순간에 완수된다. 그러므로 상품 가격의 실현[즉, 상품의 단순한 관념적인 가치형태의 실현]은 동시에 역으로 화폐의 단순한 관념적인 사용가치의 실현이며 상품의 화폐로의 전환은 동시에 화폐의 상품으로의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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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나의 과정은 이면적(二面的)인 과정으로서, 상품 소유자의 측에서는 판매이고 반대의 극이 화폐소유자의 측에서는 구매이다. 바꾸어 말해 판매는 구매이며, C-M은 동시에 M-C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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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상품의 변태계열이 그리는 순환은 다른 상품들의 여러 순환과 뗄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있다. 이러한 과정 전체가 상품유통을 구성한다. 상품유통은 형태에서뿐 아니라 본질에서도 직접적 생산물교환과는 구별된다. 상품유통에서 우리들은 한편으로는 상품교환이 어떻게 직접적인 생산물교환의 개인적 및 지방적 한계를 타파하고 인간노동의 물질대사를 발전시키는가를 보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교환이 어떻게 완전히 당사자들의 통제밖에 있는 자연발생적인 사회적 연결망을 발전시키는가를 보게 된다.(J.S.밀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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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과정은 직접적 생산물교환과 같이 사용가치의 장소나 소유자를 바꾸는 것에 의해 소멸하지 않는다. 화폐는 한 상품의 변태계열로부터 마지막으로 탈락한다고 하더라도 소멸하지는 않는다. 화폐는 언제나 상품들이 비워준 장소에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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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와 구매는 대극적으로 대립 하고 있는 두 인물, 즉 상품소유자와 화폐소유자 사이의 교환관계로서는 하나의 동일한 행위이다. 그러나 판매와 구매는 동일한 인물의 행동으로서는 대극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행위다. 그러므로 판매와 구매의 동일성은 만약 상품이 유통이라는 연금술사의 증류기 속에 투입된 뒤 화폐의 모습으로 다시 빠져나오지 않는다면 [즉, 상품소유자에 의해 판매되지 못하며 따라서 화폐소유자에 의해 구매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상품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동일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즉, 만약 이 과정(C-M)이 완성된다면 그 상품은 더 이상의 변태를 중단하고 장단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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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은 물물교환에 존재하는 [자기 생산물의 양도와 타인 생산물의 취득 사이의] 직접적 동일성을 판매와 구매라는 대립적 행위로 분열시킴으로써 물물교환의 시간적, 장소적, 개인적 한계를 타파한다. 서로 독립적이고 대립적인 과정들이 하나의 내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또한 그 과정들의 내적 통일이 외적 대립을 통해 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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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과정은 서로 보완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두 과정의 외적 독립화가 일정한 점에 도달하면 그 내적 통일은 공황이라는 형태를 통해 폭력적으로 관철된다. 상품에는 다음과 같은 대립과 모순이 내재한다. 사용가치와 가치의 대립, 사적 노동이 동시에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모순, 특수한 구체적 노동이 동시에 추상적 일반적 노동으로서만 계산된다는 모순, 물건의 인격화와 인격의 물건화 사이의 대립, 상품에 내재하는 이러한 대립과 모순이 한 상품의 변태의 대립적인 국면들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의 운동형태를 전개한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들은 공황의 가능성을, 그러나 오직 가능성만을 암시하고 있다.(고전파 경제학자인 세이는 “공급이 수요를 창조한다.”고 하면서 공황의 불가능성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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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화폐의 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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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유통이 화폐에 직접 부여하는 운동형태는 화폐가 출발점으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져간다는 것. 화폐가 어떤 상품소유자의 수중으로부터 다른 상품소유자의 수중으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이 과정이 화폐의 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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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운동의 일면성과 연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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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운동의 일면성이란 “화폐는 구매수단으로서 언제나 구매자 측에 있다.”를 의미하고 화폐의 연속성이란 상품이 “유통과정에서 탈락되어 소비로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화폐는 유통수단으로서는 언제나 유통분야에 머물러 있고 언제나 그 속에서 돌아다니고”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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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유통에 필요한 화폐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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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연속성으로 말미암아 “유통영역이 얼마만큼의 화폐를 흡수하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상품유통에 필요한 화폐량은 “이미 상품들의 가격총액에 의하여 규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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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화폐는 상품들의 가격총액으로 이미 관념상 표현되어 있는 금 총액을 현실적으로 나타내는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개의 총액이 동일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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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가격총액이 필요한 화폐량이 된다. 그러나 이는 모든 상품이 “동시에 상이한 장소에서 판매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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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밀, 아마포, 성경책, 위스키가 “동시에 상이한 장소에서 판매된다.”고 할 때 모든 상품가격이 2원이라고 가정한다면 필요한 화폐량은 8원이 된다. 그러나 “순차적으로” 상품을 유통시키게 될 경우는 2원이면 된다. 이는 2원이 4회 유통된 것으로 이 “유통횟수에 의하여 화폐총량은 상품의 가격총액과 화폐의 유통속도에 의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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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수량설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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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수량설이란 “상품가격은 유통수단의 양에 의하여 규정되며 유통수단의 양은 또한 한 나라에 존재하는 귀금속의 양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생각하는 환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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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수량설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상품은 가격을 가지지 않고 유통과정에 들어가며 또 화폐는 가격을 가지지 않고 유통과정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잡다한 상품집단의 일정한 부분이 귀금속 더미의 일정한 부부노가 교환된다.” 이를 맑스가 “엉터리 가설”이라고 한 것은 상품의 가격은 화폐로 표현되는데 화폐의 가격은 상품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순환론에 빠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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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수단의 양의 변동은…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척도로서의 화폐의 기능에 기인하는 것이다.” “화폐가 가치척도로서 기능하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것이 가격을 결정하기 위하여 사용될 때에는 화폐의 가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즉, “금(또는 은, 요컨대 화폐 재료)이 일정한 가치를 가지는 상품으로 유통영역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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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7세기 유럽의 상품가격 폭등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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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수량설은 상품가격의 폭등은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다량의 금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하면서 “유통수단의 양이 가격을 규정한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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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맑스는 이러한 주장의 “소박성”을 비판한다. “이 세가지 요인, 즉 가격의 운동, 유통상품의 양, 그리고 끝으로 화폐의 유통속도는 각각 다른 방향으로, 다른 비율로 변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현되어야 할 가격총액과 따라서 이것에 의하여 제약되는 유통수단의 양도 역시 이 세 개 요인의 수많은 조합의 결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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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폭등에 대한 맑스의 설명은 먼저 귀금속 광산의 대량 발견으로 귀금속 생산의 사회적 노동가치가 떨어져 상품가격이 상대적으로 올랐다는 것이고 둘째로 “화폐조각은 말하자면 다른 화폐조각을 위하여 연대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으로 “유통분야는 오직 금의 일정한 양만을 흡수할 수 있을 뿐”으로 유통 횟수가 증가하거나 유통량이 늘어나면 “다른 화폐조각은 유통부문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만다.” 즉, 귀금속의 유입량이 그대로 유통량을 증가시키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상품가격 상승의 원인은 귀금속 가치의 하락이지 귀금속의 증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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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주화, 가격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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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주화형태는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으로부터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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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과정에서 주화의 옷을 입은 금은 마모의 과정을 거쳐 “명목적 무게와 실질적 무게가 점차 서로 분리되는 과정이 시작된다.” 이러한 마모는 “소규모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된다. 결국은 “주화기능은 사실상 그것들의 중량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된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물건, 예컨대 지폐가 금을 대신하여 주화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지폐는 아무런 가치를 갖지 않고 단지 가치의 상징으로만 기능한다. “지폐는 금 또는 화폐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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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의 과잉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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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의 발행은 실제로 유통되었을 금량(또는 은량)을 지폐가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범위로 제한되어야 한다.” “지폐가 자기의 한도(곧, 실제로 유통하였을 같은 명칭의 금주화의 량)을 초과한다면 지폐의 신용이 일반적으로 손상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지폐는 상품유통의 내재적 법칙에 의하여 규정되는 금량만을 대표하게 될 것이다.” 즉, 지폐가 적정수준보다 2배로 늘어난다면 이전에 1원의 가격표시는 동일한 가치가 2원의 가격으로 표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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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철학>에 연재되었던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전격 출간[ⓔ시대와철학 알림]

?〈ⓔ시대와철학〉에 연재되었던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이 드디어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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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원 선생님(부산대) 특유의 기지와 재치로 〈ⓔ시대와철학〉에 연재되었던 철학적 세상읽기는?꾸준히?많은 조회수를 기록하였다. 2년 여에 걸쳐 연재된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인간 세상 전반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이해하기 쉬운 대화형식의 문체로 이어나갔다. 때로는 세상을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바라보는 반성의 자세를 보여주기도 한 구보씨는 어찌보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같기도하고 선생님 같기도 하지만 늘 세상을 바로보는 방법을 보여주려 노력하였다.

 

 

근대 이성의 본질을 폭로하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11> 푸코

 

근대 이성의 본질을 폭로하다-광기, 권력, 폭력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푸코⑪

 

강사 :박민미(동국대 외래교수)
후기 :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누구인가?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한발 물러서고 그 대안을 찾아 헤맬 때 미셸 푸코의 철학은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대안으로서 현대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폭로하는 사상적 기준으로 다가왔고 철학적 전개의 중심을 제시했던 인물이다.

푸코가 콜레즈 드 프랑스(Coll?ge de France)에 교수로 있을 때 ‘사상사(The History of Systems of Thought)’를 가르쳤던 사실은 그의 사유가 철학적 쟁점에 대한 논쟁을 동반한 논증에 점철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점이다. 그는 사회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사상가였으며 자신의 철학을 연장으로 사용하는 실천의 철학자였다. 마찬가지로 그의 글은 인문학, 사회과학의 많은 영역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열한 번째 시간에는 “나는 내 책이 메스나 폭약, 아니면 지뢰를 파묻는 갱도 같은 것이 되어서 조명탄의 불꽃처럼 한 번 사용된 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과감히 선언했던 푸코의 철학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소수자로서 푸코와 그의 운동 : 미시권력을 파악하기까지

 

박민미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푸코의 학창시절 외로웠다고 한다. 성적 소수자로서 사회가 용인하지 않는 것을 내면으로 가지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일종의 악이라고 지시되면서 교정의 대상이 되는 성향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 푸코는 자신을 기준으로 하는 실존의 문제가 절실했다. 그래서 학창시절에는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병리학처럼 다른 사람의 심리분석을 통해 대상에 병리적 접근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심리적으로 다른 형태의 대안으로서 심리학을 했다.

푸코는 공산당에 입당한 경험이 있었고, 68혁명 당시에는 프랑스에 없었고 아프리카 튀니지의 튀니스에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큰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유럽 외부의 소외되고 배제된 타자이자 주변으로 밀려난 곳에 실제로 있으면서 정치적 변화의 물결을 겪었다. 오히려 프랑스보다 제3세계에서 운동을 지켜보면서 68혁명을 또 다른 입장에서 더 넓고 포괄적으로 억압과 착취, 지배에 저항하는 현실을 보게 된다. 푸코는 68혁명 이후 전 세계의 이슈가 있는 곳에 항상 갔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사르트르, 들뢰즈, 이브몽땅(공산당원), 시몬느 시뇨레 등 투사 동지들이 항상 함께 했다.

그러다가 1968년 말에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얼마 후, 1971년 ‘감옥정보 그룹’ 발간을 추진한다. 당시 유럽사회 처벌의 공간이었던 감옥이 어떠한 논리로 사람을 가두는가, 얼마나 처참한 모습으로 배재된 인간들을 주조해내는가를 관찰했다. 감옥에 들어온 사람 중 동성애자로 쫓기다가 감옥에 들어온 후 자살하는 사례, 장발장처럼 생활고에 배고픔에 저지른 범죄에 의해 평생 낙인찍히며 그 사람의 신병을 사회체제가 보장해 주지 않다보니 결국 또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상황에 대해 푸코는 관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 지에 대해 자기 스스로 그것을 진술하고 수기를 기록하고 직접 출간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공유하게 하는 적극적인 방식을 취한다. 푸코는 ‘왜 사람들의 영혼이 끊임없이 추적되고 감시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푸코는 자신이 이 사회에 존재하는 것들 중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열거했다. 그것으로 재판소, 경찰, 병원, 요양소, 학교, 군대, 신문, 텔레비전, 국가를 든다. 이 사회의 기존 질서를 옹호하고 수립 권력에 직접 지배당하는 것으로 보이는 기관과 단체를 용납할 수 없다고 한다. 권력기관에 대한 이런 파악은 푸코로 하여금 국가와 정부 사법기관 등이 우리를 장악하고 우리를 부자연스럽게 하는 이유는 직접적 체제나 기관이라기보다는 더 미세한 것들이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했다. 내 신체 정신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의 미세한 원인을 푸코는 ‘미시권력’이라고 한다.
 

미셸 푸코(1926~1984)


 
이런 국가권력현상(power)에서 권력은 거시적 차원은 ‘state’에 해당하지만, 미시적 차원은 ‘body’에 해당한다. 우리 몸에 샅샅이 작용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차원의 권력을 폭로하는 것이 푸코의 의도이다. 곧 ‘억압’을 얘기하는 것. 그런데 푸코는 억압만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권력을 얘기한다. 인간의 지식, 앎이라는 영역과 긴밀히 얽혀서 억압당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억압이 아니어서 억압당하는 줄 모르게 만드는 상태의 ‘미시적 권력’이 항상 작동하고 있다는 것. 푸코는 이것을 폭로한다.

– 우리의 삶에 모세관처럼 샅샅이 퍼져있는 권력, 곧 현대 권력 –

푸코에게는 시기적으로 학문적 관심도에 따라 고고학기?계보학기?윤리학기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969년 『지식의 고고학』을 썼을 당시까지가 푸코에게 있어서 고고학기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의 문제에 대해 역사학적 관점과 인식의 틀의 입장에서 연구. 푸코 초기의 연구경향을 보인다.

1972년 『담론의 질서』에서 1975년 『감시와 처벌:감옥의 역사』, 『성의 역사 1:앎의 의지』 이런 책까지, 권력에 집중했던 계보학 시절인데 권력을 폭로하는 활발한 운동 시절이다.

그 이후 1982년 『주체의 해석학』이후 주체에 대해 집중하던 시기로 『성의 역사 2, 3』을 집필하기도 한다. 주체의 양식을 모색하던 시기로 윤리학기라고 할 수 있다.

 

푸코에게 철학의 의미와 사유 여정, 그리고 계보학

 

푸코는 철학은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철학은 곧 철학적 활동”이라고 인식한다. 그리고 1984년 죽기 전 『성의 역사 2』에서 철학은 “사고에 대한 사고의 비판 작업”이라고 하기도 한다. “진실의 작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호기심” 등 푸코가 얘기한 철학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실질적으로 푸코 자신의 철학에 해당되면서 푸코 철학의 진면목을 대변하는 말은 “연장통”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세계를 변형시키는 도구로써의 철학이라고 했다. “나는 내 책이 메스나 폭약, 아니면 지뢰를 파묻는 갱도 같은 것이 되어서 조명탄의 불꽃처럼 한 번 사용된 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는 말이 바로 연장통을 의미한다. 세계를 변혁하고 폭발시키는 연장으로 철학을 사용하겠다는 선언이다.

푸코의 신조로써 철학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호기심이기도 하다. 변형은 자기가 다르게 되는 것이고 곧 생성을 뜻할 것이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가 다르다는 것이 내가 다르게 된다는 말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다른 나로 변한다는 실존적 문제이기 보다는 내가 내 테두리 바깥으로 나가서 타자의 영역으로 간다는 것이다. 변형은 곧 배재되고 소외되었던 타자로 가는 길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규정을 푸코는 ‘에토스(ethos ; ethics:윤리학)’라고 한다.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변형시킬 수 있는 우리 삶의 태도이다. 다른 사람에게 규칙처럼 다가가는 윤리적인 틀로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의 활성화로 변형이 가능해진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다. 니체가 신을 왜 죽였을까? 인간을 자기의 행위와 가치에 대해 판단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가둔 신을 죽였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초인(?bermensch)’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초인은 현대인의 모습이어야 하고 그 핵심은 기존의 관습 관행 습관적 사고들에 대해 칼날대고 저항하는 모습이다. 니체는 이런 형태의 삶을 지지했다.

이런 니체 의식의 직접적 계승자는 푸코다. 푸코는 먼저 하이데거를 접하고 하이데거에 의해 해석된 니체를 접하면서 누구나 알고 있다는 보편적 인식 틀을 거부한다. 고고학기의 작업이 그렇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니, 고대, 근대, 현대의 인식 틀인 ‘에피스테메(episteme)’가 다르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에피스테메는 주어진 한 시기에 인식론적 제 형상, 과학, 형식화된 체계를 발생시키는 담론적 실천의 총체로써 주어진 시대의 제 과학을 담론적 규칙성의 수준에서 분석할 때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관계의 총체를 말한다. 푸코가 고고학기 얻었던 중요한 면모이다.

『광기의 역사』에서 광기의 개념을 살피며 얻은 고고학시기 결론은 르네상스시기에는 광기를 인간의 중요한 능력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고전주의시기에는 광인으로 몰고 배제의 대상으로 악과 결부시켰고, 근대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 정신병리학으로 치부했다. 이 때 푸코는 니체의 생각 이어받아서 인간의 광기에 대한 체험으로 질서정연함을 강조하는 아폴론적 사고가 아닌, 인간의 본성을 더욱 강조할 수 있는 디오니소스적 사고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사람들은 광기를 배제하면서 아폴론적 인간의 이성능력만 발전시켜 형이상학적 철학으로 타락해 갔다는 점에 동조한다. 광기가 중세 때 까지는 인간의 신적인 능력, 신의 계시를 받는 독자적 능력이라 여겨졌는데 이후 ‘정신착란(d?raison;탈 이성상태)’이라고 불려지게 된다. 이성 중심적 사고로 광기를 배제하는 모습이다. 푸코는 광기를 배제하는 이성중심주의가 그들이 말하는 광기에 더 가깝다고 본 것이다.

‘계보학(genealogy)’은 니체가 제시했다. 니체는 계보학을 색상에 비유하면 회색이라고 했다. 같은 사태에 대한 여러 해석의 덧 씌워짐은 회색과 같다. 자명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겹겹의 해석이 깔려있는 것이다. 고로 자명한 사태와 해석은 없다. 계보학은 회색빛의 머리카락을 한 모습이다. 그것은 매사에 꼼꼼하고 끈질기게 자료를 섭렵한다. 그것은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확립된 사실과 일치하는 작은 진실을 축적한다. 계보학은 관념적인 의미현상이나 불확실한 목적론들로 된 메타역사학적 전개와 대립된다. 또 그것은 ‘기원(Ursprung)’의 추구와 대립된다.

푸코는 사람들의 겹겹해석을 살피고 기존문헌을 살피면서 문헌 안의 개념 현상, 사물의 본질을 탐색하는데 보편적 본질을 찾지는 않는다. 계보학은 어떤 분류로 갈라져 나왔는가를 살피는 것뿐이다. 기존의 철학자들은 역사학자들이 연구한 것을 차용했지만 푸코 자신은 1차 문헌의 ‘날 것’을 스스로 탐구하는 것을 지향했다. 기존의 덧씌워진 해석과 개념을 벗겨내려 한 것이다. 대표적 저서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가 계보학 시기에 만들어진 결과물들이다.

‘파레지아(parrhesia, 진실을 말하기)’라는 말이 있다. 윤리학기에는 푸코가 한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처럼 완성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였던 시기였다. 시대에 종속된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자아로 살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인은 자신을 아는 일에 몰두(인식중심)하지만 고대인은 자신을 만드는 일에 몰두(창조중심)한다. 기존 니체의 문제의식이었던 작은 진실을 발견하고 구축해나가는 방향을 추구하면서 우리 삶의 소소한 문제로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것에 대해서 역사를 써보겠다는 것이 푸코의 계보학적 특성이다.
 

박민미 동국대 외래교수

 
고고학기에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을 확실히 했다고 한다면 계보학기에는 ‘장치 dispositif’=‘장치(apparatus)’라는 개념에 매진했다고 할 수 있다. 영어로 혹은 ‘배치(arrangement)’라고 번역된다. 이 장치는 우리 사회의 여러 것과 연관하여 마치 기계처럼 이루어져 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으로 계속 우리에게 사물처럼 작용한다. 권력과 함께 같이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섹슈얼리티도 장치이고 감옥과 같은 것도 장치이다.

 

『감시와 처벌』과 규율권력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장치를 ‘규율권력(disciplinary power)’이라고 칭한다. 규율권력은 전체 우리 사회에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작동한다. 여기에 대한 폭로가 『감시와 처벌』의 주 내용이다. 푸코의 저작에는 아주 미세한 지식들이 텍스트에 촘촘히 들어가 있다. 딱 떨어지게 정리하여 규정하기 보다는 애매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읽는 사람이 알아서 가져다가 해석하라는 태도이다. 저자를 지우는 글쓰기 방식이다.

푸코는 일부 소수의 사람들만 가는 장소로 인식되는 감옥이라는 것을 기재로 자신의 폭로를 이어나간다. 『감시와 처벌』의 첫 장면은 다음과 같다. 첫 장면은 다미앵의 처형 장면으로 “사형수를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단지를 드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쇠집게로 지닌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버린다.”

그리고 푸코는 판옵티콘을 설명한다. ‘Panopticon(pan여기저기 다 있다+optic시각+on~하는 존재) 이것은 중앙 감시망 탑으로 중앙 감시탑에 모든 수감자의 그림자(실루엣)가 다 비쳐서 확인되지만, 중앙의 탑에는 누가 있는지 수감자들이 있는 방에서는 알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비유이며 규율권력(체계) 안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감시와 처벌』의 내용

1부 신체형

1. 수형자의 신체 2. 신체형의 호화로움

신체의 가해지는 고문의 형태로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지만 좀 더 규칙적이고 법칙적, 유순해진 처벌로 변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체형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자유주의사회가 되면서 인간의 가치와 권리에 대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인간화의 결과가 신체형의 소멸을 가져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신체형의 소멸의 이유는 형벌의 대상과 목표가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시와 처벌의 첫 번째 가설이다. 변형된 양상을 설명하자면 작동하는 권력의 작용 방식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은 결국 미시적으로 작동하는데 우리의 부자유를 낳는 것은 감옥이라는 장치의 영향이다. 그렇다면 권력은 어떻게 살펴봐야 하는가? 권력의 미시 물리학을 분석하는 체계는 다음과 같다. (1) 권력에 대해서는 폭력과 관념의 대립, 소유권에 대한 비유적 표현, 계약이나 정복의 모형을 버려야 하고, (2) 지식에 대해서는 ‘이해관계가 있는’ 것과 ‘이해관계가 없는’ 것 간의 대립, 인식의 모형과 주체의 우월성을 버려야 한다.

푸코가 이미 감시와 처벌에서 중요하게 보는 시각은 기존의 권력관, 즉 권력을 소유로 보는(혹은 양도 가능한) 사회계약설의 입장이 아니다. 푸코가 보기에 권력은 양도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현상 속에 미세한 망의 장치처럼 작동하는 권력현상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에 대해 법률로써 규칙적으로 작동하는 국가라는 안정된 기관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2부 처벌

1. 일반화한 처벌 2. 유순해진 처벌

사람들을 일정한 척도와 기준에 부합하는 과정으로 처벌을 생각한다. 18세기에 관찰되던 현상 중 하나는 형벌의 완화이다. 이렇듯 형벌이 완화되는 것에 대해 푸코는 규율권력은 별도의 메카니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의 흐름과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가 권력의 변화를 추구하는 큰 배경 중 하나였다는 것을 말한다.

부르주아 계급의 전략은 두 가지가 있다. 한편으로는 군주권의 자의성에 제한을 가하고(사법개혁과정에서 관철),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이 재산권에 도전하는 것을 제어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사람들에게 처벌의 효과를 분명히 만들어내면서 자신들의 군주에 대한 저항을 가능케 하는 두 가지 사안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처벌이 유순해지는 과정에는 부르주아 계급이 반드시 개입되어 있었다.

처벌의 본보기라는 기능은 항상 고려되었다. 신체형 중심의 처벌 제도에서의 본보기는 범죄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이중적 표현 방법으로서, 범죄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것을 제압하는 군주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후 고전주의시기로 넘어오면서 본보기의 징벌이란 이제 과시적인 의식이 아니고, 범죄를 방지하는 데 뜻을 둔 기호가 되었다.
신체적 형벌에서 유순해진 형벌로의 이행은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라는 측면과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범죄의 방지를 목표로 하는 전략이 짜여 진 것이었다.

처벌의 방법은 기술적이고 공학적으로 작동한다. 몇 가지를 얘기하면 (1) 가능한 한 자의적이 아닐 것. 법은 사필귀정인 것처럼 보여야 하고, 권력은 부드러운 자연의 힘처럼 자신이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채 작용해야 한다.(법 집행의 필연성) (2) 형벌과 그것의 불이익이라는 표상이 범죄와 범죄에 따르는 쾌락에 관한 표상에 비해서 훨씬 더 선명하도록 해야 한다. (3) 결국 형벌의 시간적 조정과 배분의 효용성이 문제된다. 장기간에 걸친 일련의 권리 박탈 상태는 일시적인 고통의 형벌보다 훨씬 더 죄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4) 징벌은 특히 다른 사람들을, 즉 죄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삼는다.

이런 과정은 모두 사회 관련된 사람들에게 응당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감옥에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5) 그런 점에서 교묘한 경제적 광고 효과가 생겨난다. 범죄가 행해지면 지체 없이 처벌이 따르게 되고, 형벌이 집행되는 현장에 아이들이 찾아올 수 있어야 하고, 그곳에서 시민 교육의 학습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그것이야말로 ‘법의 정원’, 치안 박물관에서의 산교육인 것이다. (6) 그렇게 되면 사회에서 범죄에 관한 전통적인 담론은 전도될 수 있을 것이다. 범죄자를 영웅시하는 찬양 대신에, 가시적 형벌이자, 수다스러운 형벌로서, 모든 것을 입에 올려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설득한다. 즉, 모든 징벌은 바로 교훈담이다.

<표1>

감금 모형 원형: 암스테르담의 ‘라스푸이’

1596년 개설. 원칙 1. 형기를 수감자의 행위 여하에 따라 일정 범위내 변용 가능. 원칙 2. 노동이 의무적이고 공동 작업이며 수당 지급. 원칙 3. 일과 시간, 의무 조항, 감시, 격려, 종교적 독서 등 선으로 이끌려는 일련의 조치로 일상 규제.

모형 강 형무소 영국의 모형 필라델피아 모형
형태 노동 중심 독방 중심 강의 원칙 승계
특징 범죄자가 주로 무위도식자이므로, 이들에 대해 보편적 노동 교육을 전담. 잡거는 공모 가능성을 높이므로, 독방에서 자기 반성, 선의 목소리 재발견. 수형자가 생산 노동에 종사. 출소 때에 자금 마련.
평가 장점: 범죄 수사 건수 감소. 부랑자로부터 침해받는 삼림 소유자의 세금 감면 불필요. 임금 하락. 극빈자는 자선 혜택 효과. 신교적인 영국에서 경제적 인간과 동시에 종교적 양심 재건 수단. 법과 도덕으로의 복귀. 잃어버린 신하가 국가로 되돌아올 개인적 변화 장소. 신체와 습관 개조. 정신적 배려 통한 정신과 의지 개조 과정. 품행 통제 속에서 개개인에 대한 지식 축적. 상설 감시 시설. 지식의 도구.
일치점 교정 시설은 범죄의 소멸이 아니라 재발 방지 장치. 징벌은 교정 기술을 포함해야 한다. 형벌을 개별화해, 징벌의 기간, 성격, 경중, 방법 등을 다른 사람에게 위험을 주는 정도에 따라 조정되어야 한다.
차이점
  개혁자 교정 중심 형벌 기구
개인에 대한 접근법 기호 체계와 표상. 표상이 아니라 신체 자체. 일상의 습관, 행동, 정신.
압력을 주는 방식 표상. 법전의 기호 체계 재활성화. 법 주체로서의 개인의 재규정화. 강제권의 형식. 훈련. 시간표, 일과 할당표, 공동 작업, 좋은 습관 등.
개조의 도구 사회 계약 속 권리 주체.

법적 주체의 재구성.

복종의 주체. 명령에 복종하는 개인. 복종의 주체 형성.

 

3부 규율

1. 순종적인 신체로 만들고 2. 효과적인 훈육 방법을 쓰면서 3. 일망감시 방법(판옵티시즘)

고전주의 시대의 신체는 권력의 대상이자 표적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이 발견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면서 규율이 지배의 일반적 양식이 되었다. 신체의 활동에 대한 면밀한 통제를 가능케 하고, 체력의 지속적인 복종을 확보하며, 체력에 순종-효용의 관계를 강제하는 이러한 방법을 바로 ‘규율(discipline)’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 규율은 개인을 제조한다. 규율, 훈련의 위계 질서화 된 감시를 통해 권력은 하나의 물건으로서 소유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소유물로서 양도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계장치처럼 작용한다. 더욱더 교묘하게 ‘물리적’으로 될수록 표면적으로는 한층 덜 ‘신체 중심적’으로 되는 그러한 권력인 것이다. – 규율권력 –

규율 중심적인 장치가 만들어 짐으로써 보이지 않는 곳에 가두어 놓으면서 가두어 놓아진 사람들이 새로운 신체로 변모되는 이른바 ‘규율적 신체’가 된다.

권력 경제학이라는 말이 있다. 권력이 아주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말이다.

권력 경제학은 처벌에서 이전에는 본보기, 전시와 교육 효과를 노렸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 가두는 ‘감옥 장치’(사법기관 및 법률집행 원리와 결부)는 위법자의 고통을 줄이거나 위법자의 인간성을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위법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고통 및 인간성을 돌보는 효과를 낳으며 ‘인간’이라는 척도, 인간 과학을 작동시킨다. 그러면서도 장시간 동안 위법자의 인체에 영향을 끼치며 강도 높은 규율 권력을 작동시킨다. 그리고 이 ‘감옥 장치’를 둘러싸고 ‘행형 장치’(경찰과 같은 관할 영역에 포함)가 있다. 감옥 장치가 위법자를 대상으로 한다면 ‘행형 장치’는 위법행위를 할 가능성이 높은 비행자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관찰하고 추적한다. 이 ‘행형 장치’를 작동시킴으로써 비행자의 정신과 인체에 작동하는 권력 기술을 드리운다. 이 둘은 항상 같이 작용하는 구조에 있다. 그래서 감옥은 단지 감옥에 갇힐 대상인 범법자만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분이 감시와 처벌에서 규율 권력과 관련하여 폭로하는 내용의 핵심이다.

4부 감옥

1. 완전하고 준엄한 제도 2. 위법행위와 비행 3. 감옥체계

감옥이라는 것은 처벌이 교훈의 효과에 쓰기보다는 오히려 죄인을 꼭꼭 숨겨둔다. 이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 푸코이다. 이렇게 해서 작동한, 만들어진 효과는 무엇일까?

이 규율 권력의 핵심적인 모델은 바로 ‘판옵티콘’이다. 이 권력 기술은 수감자가 스스로 권력의 전달자가 되는 것이다. 물리적 충돌 없이 권력이 영원히 승리하는 모델이다. 이 세계에서 가장 큰 재판 위원회인 전체화 메커니즘 속에서 생산을 증대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교육의 기회를 넓히고, 공중도덕의 수준을 높인다. 이 장치는 감옥장치이면서 행형장치이고 넓게는 예를 들어 군대, 학교, 회사(마치 대기업 삼성과 같은) 등을 포함한다.
여기서 작동하는 ‘규범(정상, normal)’이라는 척도는 ‘권력-지식’을 가동시키며 ‘인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정상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려 한다. 그리고 앎을 생산하는 권력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은 자발적으로 권력에 예속화되고,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피지배자 일반에 대한 규범이 법을 대체하여 사람들의 삶 속에서 샅샅이 작동하게 된다. 이것이 규율권력의 사회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규율권력이 항상 사회에서 작동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건, 어디에 있든 간에 이 작동의 방식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규율권력은 특정방식으로 행위 하도록 우리의 신체를 제조하고 있지만 부자연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저항의 방법을 찾지 못한다. 미시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미시 물리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지만 그 이후 어떻게 해야 하는 지의 문제에 대해 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테제를 제시한다.

푸코의 실천적 방식은 감옥을 관찰하고 폭로하며 위법자라고 지칭된 사람들이 끊임없이 말하게 하고 이것을 팸플릿으로 옮긴다. 그리고 감옥의 역사라는 책을 썼다. 모든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실천을 한다기보다는 배제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 모습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계보학적으로 증명해 나갔다. 인간을 배제하는 메카니즘에 대해서 드러내고 폭로하는 지식인의 실천을 푸코 스스로 ‘특수 지식인’이라고 지칭한다. 사르트르가 모든 민중을 대변하는 보편적 지식인의 상을 제시했다고 한다면, 푸코는 자신이 알고 있는 특별한 앎을 총 가동하여 삶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에 저항하게끔 하는 지식인이다. 그 과정은 그의 저술에 집약되어있다.

 

푸코의 신자유주의 비판

 

사람들은 자신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메카니즘에 살고 있으면서 거기에 젖어 수동적으로 살게 된다. 예속된 삶이다. 스스로 판옵티콘에 갇혀있으면서 갇힘을 모른다. 규율권력은 개인과 개인을 개인화라는 형태로 미세하게 갈라놓고 있다. 비정규직노동자라고 할 때 이 노동자에 대해 관찰하는 세부적인 리스트가 우리를 규제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테스트, 시험, 규정을 들이댄다. 사람들을 서열화하고 있다.

푸코는 사람들을 세밀화하고 쪼개고 분류하면서 갈라 놓이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차이를 주목한다. 개인화의 면모로 규율권력은 한편 사람을 개인화시킨다. 그러면서 동시에 규율권력은 사람들을 전체화하는 권력이다. 하나의 특정한 규준으로서의 이상으로 사람들을 몰아간다. 그래서 저항 조직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냥 이대로 흘러간다.

이런 사회모습을 『감시와 처벌』에서는 규율권력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이 이후의 저서들에서는 최근 번역된 『안전 영토 인구』 이후에는 규율권력만을 폭로하는데 그치지 않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논리가 펼쳐진다. 신자유주의에서는 1%를 위한 사회나 질서를 지칭하면서 경제나 금융의 문제로만 몰아가는 경향이 있었으나 푸코는 규율권력이라는 모판을 신자유주의 질서에도 적용을 한다. 사람들을 인구차원에서 안전을 내세우며 국가의 통치를 좋은 행위로 포장하고 있고, 그 이면에서는 이 사회의 모든 결과물의 책임을 각각의 당사자 자신에게로 돌린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안에 있는 통치자는 아무런 잘못과 책임이 없다.

이 때 중심되는 비판의 포인트는 ‘경쟁이 강조되는 사회’에 있다. 자유주의 초기 시대에는 평등과 법의 이념을 강조했다면 신자유주의에서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견제하는 상황으로 내 몬다.

<표2> John Protevi 정리 도표 번역 “푸코 사회 권력 도표”

전성기 1650-1789 1780-1820 1820-1968 1850-현재 1980-현재
권력 양식 주권 권력 사회 권력 규율 권력 생명 권력 통제 권력
권력 이론 법률 이론 이데올로기 미시물리학 통치성 신자유주의적 이론
일차적 행위자 법률가 전문가 주체 자기 기업가
일차 타깃 신체들 영혼들/권리들 생산적-정치적 능력들 삶들: 개체/인구 자기(개인) 자본
타깃에 접근하는 일차적 방법 고통 기호들 훈련 연구/고백 진단/시장 조사
목표 달성 위한 일차적 실천 의식(예식) 표상 연습/시험 규범화/위험 관리 치료/투자
최강 형식 신체형 극적 처벌 판옵티콘 약리유전학
희망 산출물 복종 공동체 유순함 자동-통제 투자에 대한 최적 대가
지식 형식 법전 철학에세이 서류더미 통계 매뉴얼 가격 그래프
특권적 과학 법률학 철학적 심리학 인간 과학들 정치 경제 미시경제학
통제의 경제적 형식 선취(단순세금) 공공 작업 벌금/보상 복지/보험 빚(공적/가계)

 

신자유주의의 핵심 메카니즘인 ‘경쟁의 질서’ 안에서 사람들은 또 하나의 차이가 구획된다. 이전에는 규율사회에서는 한 개인이 정상적 인간에 대해 측정되고 비교되었다면 신자유주의는 타인이라는 관계 속에서 우위의 위치를 가지기 위해 가치 측정되는 형태로 속성이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존 권력모델이라 할 수 있는 한 사회 안에 작동하는 권력이 평등하게 법치아래에서 잘 작동하여 우리 사회가 잘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푸코의 가장 큰 폭로이고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불평등, 차이를 구획하는 권력은 작동하고 있다. 이 때 권력은 비가시적이지만 끝없이 작동하는 장치로서 우리 삶을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에 저항하는 길은 무엇인가? 푸코는 ‘대항 품행’을 든다. 그리고 대항 품행의 실천의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 ‘파레지아’, 즉 ‘진리 말하기’이다.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하기다. 사회적 위계, 서열 등의 차이를 무릅쓰고 솔직하게 말하기.

박민미 교수는 장치처럼 작동하는 방식에 저항하는 방법이 혁명이었고, 혹은 제어하는 것이 기존 부르주아 사회, 사회주의 사회까지의 저항의 신념이었다면 현 시대에 저항적 실천의 방식을 물었을 때, 규율권력에서는 현실에 대해 폭로하고 진단하는 특수지식인의 실천이 되겠고, 현실 질서 속에서 사람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전체적인 질서를 자본주의로 집약했다고 할 때 그 저항의 방식은 기존과는 다른 삶을 계획하는 것이다. 이 때 다른 사람과의 차이는 규율권력이 만들어내는 다른 사람과의 차이와 다르다. 규율권력이 만들어내는 차이는 배재를 위한 차이이고 다른 삶을 계획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평균적인 삶과는 다른 차이를 생성해내는 지평이다.

이 사회가 경쟁 일변도로 가고 인권에 대해 몰이해가 사회에 만연해 있을 때, 서로 연합이라는 것을 조직하면서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주체적 삶을 만들어가는 실천이 중요하다.

강의 말미에 박민미 교수는 푸코의 평생의 문제의식을 잘 요약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을 거론하면서(『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 정일준 역, 새물결, 1999) 푸코는 사회계약설의 입장에서 우리에게 권리체계가 있다는 것에 의문을 품었던 것이고, 우리사회가 과연 민주적인 사회인지, 감옥이 신체형에서 과연 유순해 졌는지, 이런 질문들을 계속 하면서 현실에서 우리를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규칙과 질서와 보이지 않는 힘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폭로하는 태도가 푸코 평생의 연구의 핵심적 태도라고 설명했다. 그 실천의 일환으로 오늘의 강연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처럼, 사회에서의 하루 일과가 끝나고 습관적으로 소주잔을 기울이는 대중의 모습과 달리, 철학 강좌를 듣거나 사회의 문제에 대해 공론의 장을 펼치는 이런 모습들도 소소하지만 푸코가 생각했던 자유로워지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있음과 없음’의 시간과 공간[철학을다시 쓴다]-⑪

‘있음과 없음’의 시간과 공간[철학을다시 쓴다]-⑪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대체로 마르크스 이래로 서구 스콜라철학을 형이상학으로 보아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 유행하는데, 형이상학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존재론과 우주 삼라만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것까지 일관해서 꿰뚫어보려고 하는 노력에서부터 원인학(aitiology), 왜 왜 하고 끊임없이 물어보는 학문의 전통이 생기는데 이것도 형이상학의 한 갈래입니다.

제가 전에 ‘테트락티스’(tetraktys)라고 해서 10을 완전수라고 보았던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했죠? 피타고라스 전통에 따르면 한계가 하나인 것을 점이라고 보고 한계가 둘이 있는 것을 선이라고 봤죠. 그리고 한계가 세 개가 있는 것을 면이라고 그러고. 가장 작은 수의 한계선을 가지고 구현할 수 있는 면이 삼각형이죠, 그 다음에 네 개가 있는 것은 입체, 정사면체, 이렇게 1+2+3+4=10인데, 우주 삼라만상은 한계가 하나가 있거나, 둘이 있거나, 셋이 있거나, 넷이 있거나 한 것으로 전부 구성이 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피타고라스학파들이 했죠.

“여기서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있는 것은 한계가 몇 개입니까?”

“…….”

“하나입니다. 끝이 하나인 것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여요.”

“보여요? 보이는 것은 면 아니면 안 보입니다. 선도 안 보입니다. 안 보이죠? 가장 큰 하나도 안 보이고 가장 작은 하나도 안 보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있음’은 안 보인다. 왜냐? 한계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러면 없음은 어떻습니까? 한계가 없으니까 안 보입니다. 한계가 하나인 것도 안 보이고, 한계가 없는 것도 안 보입니다.

그래서 헤겔은 <대논리학> 같은 책에서 ‘있음’(임석진이 ‘순수유’로 번역한 das reine Sein을 우리말로 하면 그냥 ‘있음’입니다.)과 ‘없음’(이것도 임석진이 ‘순수무’로 옮긴 das reine Nichts의 우리말 표현이지요.)은 개념으로만 있지, 가시적이지 않고 정의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점에서 똑같은 것이다, 차이가 없다라고 이야기했는데, 바로 이런 특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라, 그러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있는 것’과 ‘없는 것’인데 그것은 개별화된 존재, 개별화된 무, 이런 것들, 여럿으로 흩어져 있는 ‘존재’와 여럿으로 흩어져 있는 ‘무’를 ‘있는 것’/ ‘없는 것’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있는 것도 있음의 성격에 참여하는 한, 하나로 있게 되고, 따라서 그것은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없는 것은 없음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한, 끝이, 한계가 없기 때문에 규정할 수 없는 측면을 지니게 된다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보고 만지고 귀로 듣고 오감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이 세계는 가시적인, 볼 수 있는 세계인데, 시각정보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삶의 정보 가운데 8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죠? 그런데 우리가 입체를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성 수준에서는 입체를 인지하고요, 감각 수준에서는 입체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렇죠, 그것입니다. 우리 시각은 감각 기관이니까, 통각의 능력은 따로 빼고 우리 시각은 평면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겉만. 한계, 갓, 끝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에서 최소 한계는 셋이다, 끝이 세 개인 경우, 삼각형으로 이 우주를 모두 구성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것이 인식의 영역 속에 들어올 수 있다는 가설이 생기는 겁니다.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된다, 모든 걸 알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우주 삼라만상에 대한 측정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학파한테 큰 재난이 무엇이었습니까? 루트2(√)의 발견이었죠? 피타고라스학파에서 이것은 무규정성이 드러나는 측면인데, 무규정성은 피타고라스학파에서 가장 큰 재난이어서 극구 추방해야 할 것이고, 우주 삼라만상이 수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전부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은 기본을 이루고 있는 세계관을 허물어뜨리는 사태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비밀로 감추려고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동그라미는 제가 엊그제 봤던 달입니다. 요즘 달이 큰데, 이것을 가시적인 원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가시적인 원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원을 볼 수 있습니까? 못 보죠? 원 비슷한 특수한 형태는 시각화해서 볼 수 있지만 원 그 자체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을 어떻게 해서 알 수 있을까요? 한 점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서로 무한하게 이어져 있는 점들을 원이라고 합니다. 현대 수학자들이 원주율을 계산을 하는데 몇 조 단위까지 계산을 해냈다, 나는 암산으로 해냈다, 나는 슈퍼컴퓨터로 해냈다, 하는 이런 수치 모음을 책으로 내면 숫자만 계속해서 기록한 책이 수천, 수만 권이 될 것입니다. 왜 이 짓을 하고 있죠?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서로 유명한 수학자라고 뽐내고 그러죠? 미분/적분을 대수학 영역이라 그럽니까? 해석학! 뉴턴이 무한의 영역을 수학적으로 극복하겠다고 나서서 미분/적분을 개발했죠. 그런데 미분/적분은 어떻습니까? 전부 한정된 수치의 영역으로 무한의 영역을 수렴해낼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었죠. 그런데 정작 수렴이 되나요? 수렴이 안 된다는 게 ‘파이(π)’ 계산에서 나타나죠?

실제로 유한의 영역과 무한의 영역은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공존을 하고 있는데, 무한의 영역을 그대로 방치하다 보면 수리체계에서부터 재는 것과 연관되는, 말하자면 ‘매트릭스’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한정되고, 그에 따라 우리의 인지 영역은 그만큼 좁아집니다. (여러분 매트릭스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시죠? 잰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좌, 우, 아래, 위로 행렬지어지는 것, 재는 거죠?) 우리는 지금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죠? 그런데 운동은 디지털 세계에서가 아니고, 아날로그 세계에서 일어납니다. 무규정성이 전제되어야 운동이 제대로 이해됩니다. 아까 제가 두 당구알을 가지고 이야기했는데 두 당구알이 접촉을 할 때, 그 사이에 접촉면을 매개하고 있는 점이라는 것은 빨간 당구알에도 속해 있지 않고, 하얀 당구알에도 속해 있지 않고, 늘 왔다갔다 요동치고, 진동한다, 이 ‘바이브레이션’(vibration)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베르그송에서도 중요한 개념이고 들뢰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앙리 베르그송(1859~1941)


 

우선 플라톤 이야기를 다시 합시다. 플라톤에서는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가 셋입니다. demiourgos라고 하는 우주를 빚어내는 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를 폐쇄된 공간으로 만들 때 본떠야 하는 이데아(idea), ‘형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기그노메논’(gignomenon),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휠레’(hyle), ‘질료’라고 그럽니다만, 이 기그노메논이라는 말은 ‘된다’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재해석을 한다면 데미우르고스는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은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순수 형상’이라 하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kinoun akineton), ‘원동자’(原動者), 그렇게 재정리가 됩니다만, ‘휠레’는 그리스에서 목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배도 만들고, 집도 만들려고 켜놓은 나무라는 뜻에서 나왔는데 이것을 우리나라 철학책에서 ‘질료’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끔직한 번역이죠.)

이제 우리가 보고 있는 삼라만상은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표면에 나타난 형상이라는데, 플라톤에 따르면 형상은 우리가 가시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형상의 세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허무로 둘러싸인 다른 곳에 가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부 형상을 본뜬 가상들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삼각형 그 자체는 볼 수가 없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특수하게 그려진 몇 센티미터, 둔각이라든지 예각이라든지 등변 삼각형이라든지 이런 삼각형의 특수형태인 것과 마찬가지로 형상 그 자체는 볼 수 없고, 형상이 투영된 것들만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데미우르고스가 이 우주를 만들 때 삼각형으로 만듭니다.

근대물리학자나 현대 물리학자들이 계속해서 쪼개고 쪼개서 면으로 나타나는 ‘끝’을 늘리고, 우주 자체를 삼각형으로 분할하여 입체를 평면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우주 삼라만상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서 끝없는 환원작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 끊임없는 ‘분석’과 ‘분해’를 하도록 부추긴 사람이 바로 플라톤입니다. 평면으로 우주를 구성했으니까, 해체하면 다시 평면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이렇게 점점 원에 가깝게……. 뉴턴에 따르면 미적분을 통해 조그만 삼각형들을 계속해서 무한히 더해감으로써 원주율 계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한 원동력이 바로 플라톤주의 전통에서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 종류의 환원론이 나오는데 데미우르고스가 맡은 역할이 무엇이냐면, 삼각형을 수학적으로, ‘산술중항’과, ‘조화중항’이라는 것을, 어떤 띠는 산술중항을 중심으로 만들고, 어떤 띠는 조화중항을 중심으로 만들어서 밖에는 정지의 띠를 두르고, 안에는 운동하는 띠를 둘러서 이 우주를 구성해 낸다, 우주의 겉은 정지의 띠를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안에는 끊임없이 운동이 이루어지는 천체가 있다, 거기에는 항성이 있고, 행성이 있고, 우주의 바깥 띠에서 가장 먼 중심에는 지구가 있다고 플라톤은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지구는 불변하는 띠에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주 중심에 있다는 것은 불변하는 ‘형상’과 불변하는 띠에서 가장 먼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세계 이해와는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지구는 플라톤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의 힘이 가장 적게 미치는 곳이다, 그리고 형상의 세계에서부터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불완전한 곳이다, 가장 변화가 다양하고, 가장 불완전한 천체다라는 가정을 깔고 나갑니다. 인간을 예로 들 때 인간의 신체부위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 뭡니까? 옛날부터 인도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원을 완전한 세계의 시각적인 표현이라고 보았습니다. 입체로 보면 구(球)가 가장 완전한 것이고, 사람에게 구와 가장 닮은 곳이 있다면 머리다, 사람에게 머리만 있으면 그나마 완전한 세계를 더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고, 훨씬 더 좋겠죠. 요즘에도 신체의 다른 부위는 다 절단해 버리고 머리만 남겨서 세계를 지배하는 인물이 영화에 나오고 하죠.

실제로 플라톤은 참 재미있는 예를 듭니다. 머리가 굴러다니면서 운동을 하게 되면 가장 완벽한 운동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머리만 있지 않고 손과 발, 몸 같은 것이 생겨나는가? 플라톤은 이 지구가 불완전하게 생겨먹은 것이어서 완전한 구가 아니고 더러운 구덩이도 있기 때문에, 굴러다니다가 구덩이에 빠지면 다시 나올 길이 없다, 그래서 손발을 달아서 기어 나오도록 만들었는데 이것이 완전한 운동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니까 육체노동, 몸을 움직여서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이 우화 비슷한 형태로 드러나는 겁니다. 피타고라스학파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어쨌든 이렇게 해서 세 개의 요소가 다 있는데 ‘기그노메논’(됨)에 Demiourgos가 숫자들을 부여해서 질서를 줍니다. 질서를 부여하는데 스스로 질서를 주는 게 아니라 ‘이데아’들을 보고, 그 ‘이데아’를 본떠서 ‘됨’의 운동이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되지 않도록 이끌어 삼라만상을 구성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해서 완전히 폐쇄된 세계가 나타납니다. 우주 자체는 ‘하나’이고 불변하는 것인데, 우주 내부에서만 변화들이 있게 되는 세계로 상정하고 맨 위에는 전체로서 ‘하나’로 가장 큰 ‘있음’이 있고, ‘있음’의 중심에는 ‘없음’에 가장 가까운 혼란스럽고 변화무쌍한 지구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플라톤의 세계관은 대체로 보아 비관적인 세계관입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거대이론’이 근대 물리학을 거쳐 현대 물리학으로 오게 되면서, 여러 가지 위장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통일된 우주가 빅뱅에 의해 터지면 무한 공간으로 흩어져나갈 건데 그러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로 블랙홀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천체의 순환이 반복되듯이 펑 터지고, 다시 수렴되고 하는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전부 가설이지요. 그리고 이 가설체계는 인간 정신의 산물입니다. 인간이 모든 우주 삼라만상의 변화를 두뇌 속에서 단순한 운동, 등질적인 공간운동과 시간운동으로 환원시키면서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서로 닮는다고 그랬죠? 인간의 두뇌가 이론적으로 그럴 듯한 가설들을 판박이 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우주를 그럴 듯하게 머리 속에서 빚어내면 다른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여겨 그 가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대전제로 깔고 나가느냐, 아니면 리만 기하학을 대전제로 깔고 나가느냐, 그 밖의 여러 경우에 따라 인간의 두뇌가 그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등질적인 공간, 등질적인 시간이 실재하는 공간이고 실재하는 시간이냐? 풀잎한테 물어보고 지렁이에게 물어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니네 그렇게 어리석니? 사람은 머리가 좋아서 이렇게 모든 것을 등질적인 시공간으로 환원해서 해석하는데 너희들 눈에는 안 보이고 너희들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니네들은 지렁이고 니네들은 풀잎이지?’
이렇게 물으면 지렁이나 풀잎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나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