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네그리 외 <탈정치의 정치학>[철학자의 서재]

안토니오 네그리 외 <탈정치의 정치학>[철학자의 서재]

김범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2008년 촛불의 진짜 ‘배후’!

 

자율의 이중성

 

5공화국 시절 중고등학생들에게 ‘자율’이라는 말은 환영과 동시에 엄청난 부담감을 안겨주었다. 전두환 정권의 포퓰리즘은 프로스포츠, 국풍사업뿐 아니라 학생들의 두발 자율화, 교복 자율화를 들고 나왔다. 그 당시 학생들은 그 자율화를 반겼다. 교복은 학생들을 억압해왔던 ‘상징’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 ‘상징’이 무너지는 것은 학생의 인권 신장이라는 막연한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자율화는 학교의 권위, 교사의 권위 앞에서 다른 방식으로 코드화되어 학생들을 억압했다. 아무리 두발 자율화라고 하지만 머리 긴 것은 용납이 안 된다. 그리고 여지없이 ‘바리깡’을 들고 교실을 감시하는 교사. 결국 자율은 또 다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의식을 주입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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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3일 시청앞 광장 촛불 집회ⓒWikipedia

이런 자율의 이중성은 학생들의 두발이나 교복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자율주의’라는 말은 아마도 2008년 촛불집회 때문에 널리 보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해 5월, 6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그 현상은 아직도 우리 사회 변혁을 진단하는 변곡점으로 파악된다. 촛불문화제의 모습은 여느 시위 문화와도 달랐다. 행사를 주도하는 단체도 없고, 모인 주체도 특정한 하나의 집단으로 말할 수도 없는 형태였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줌마, 넥타이를 매고 나온 회사원, 교복 차림으로 나온 고등학생들, 심지어 질서와 안전 지킴이를 자처하고 군복을 입고 나온 예비군까지. 그들은 다양한 정보를 공유했고, 수준 높은 지식으로 소통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다중지성’ 혹은 ‘집단지성’이라 칭했다. 그리고 그 집단지성은 즐겁게 놀면서 싸우고, 자율적으로 움직였다.

제발 해산하자는 말을 듣지 않은 채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과 횡단보도 놀이를 하며 거리를 활보했던 사람들. 이러한 자율은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분화되었다. 쌍용자동차, 기륭전자의 싸움에 화답했고, 밀양 송전탑과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저지 등에도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매체인 팟캐스트를 통해서 소수자들의 목소리, 사회 정의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름도 없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특이한 개체들로 모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집단의 자율은 제도적 폭력 앞에 다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는 공권력이라는 구실로 물리적인 폭력이 행사되었다면, 지금은 재편된 제도를 이용한 경제적인, 혹은 정신적인 폭력이 자율을 억압하고 있다.

 

다중지성과 자율의 이론적 모델?

 

탈정치의정치학

▲ <탈정치의 정치학 : 비판과 전복을 넘어 주체성의 구성으로>(안토니오 네그리 외 지음, 워너 본펠드 엮음, 김의연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여기서 자율주의는 안토니오 네그리가 행했던 ‘아우토노미아(autonom?a)’를 번역한 말이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1968년 이후 70년대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 운동 과정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운동, 특히 네그리가 이론적 중심이 된 모델이 바로 아우토노미아(자율)다.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도 촛불집회 때문에 아우토노미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이 내용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이미 90년대부터였다. 주로 조정환, 윤수종 등이 적극적으로 번역하고 소개했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쓰고 김의연이 번역한 <탈정치의 정치학>(갈무리 펴냄)인데, 그 내용은 아우토노미아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들의 논쟁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여러 이론적 상황들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 명의 저자가 쓴 책이라면 일정한 흐름이 있는데, 불행하게도 이 책에서는 그런 흐름을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의 매력에 빠지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책에 접근하기 위한 기본적인 문제 상황과 이론적 배경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990년대 이른바 ‘한국의 좌파’는 공황상태에 빠져야 했다.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몰락하고, 독립 국가들이 탄생하는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폐해를 말하기 위해 그 반대편에 있었던 집단이 필요했으니 그 집단이 사라진 것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절대적 승리라는 주장에 넋을 놓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분명 자본주의는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자본주의도 완전체가 아니라 투석 치료를 받아야하는 신부전증 환자일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르크스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의 스펙트럼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명하게 되고, 국내 소개하게 되었다.

 

먼저 마르크스의 <자본> 분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있었다. 그래서 알튀세르를 비롯한 프랑스 사회철학자들의 이론이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아예 마르크스주의와 결별을 선언한 그룹도 탄생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계열이 그것이었다. 물론 이런 부류 외에 전통적으로 존재해왔던 스탈린주의를 배격한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레닌조차 배제한 마르크스주의 등의 관점들이 존재한다. 이런 스펙트럼에서 자율주의는 어느 편에 속해 있을까?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

 

이 책을 엮은 본펠드는 자율주의를 ‘이단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의미는 ‘정통’에 대한 지위를 거부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여러 명이고, 그래서 이 저자들 모두가 이런 입장이라고 단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스스로 이단적 마르크스주의라는 멍에를 쓴 이 모든 글에서 공통적인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위기를 인정하지만,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이론을 ‘마르크스를 통해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재확인시켜주는 부분이 이 책의 3장 ‘맑시언의 범주들, 자본의 위기,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적 주체성 구성’이다. 이런 공통적인 흐름은 이 ‘이단’이 단순히 마르크스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마르크스를 넘어서 마르크스로 향한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여전히 자본 안에서, 그리고 자본에 대항하면서 자본을 넘어서는 노동의 역량을 긍정한다. 그리고 이것이 마르크스의 중심적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율주의의 이론적 배경을 좀 더 알아두어야 한다. 이 책의 매력에 빠지기 힘든 것은 바로 배경 지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다. 먼저 노동의 역량에 대한 부분을 보충 설명해 보자.??

 

Baruch Spinoza(1632~1677)ⓒWikipedia

Baruch Spinoza(1632~1677)ⓒWikipedia

스피노자 철학에서 핵심 개념 중 하나로 ‘코나투스(conatus)’가 있다. 이 말은 ‘생을 지속시키려는 힘’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철학사에서 오랫동안 이단으로 취급받던 인물이다. 그런데 프랑스를 중심으로 스피노자를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그중 스피노자의 ‘역량(potentia)’이나 ‘정동(affect)’ 따위의 개념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중요 개념이 된다. 네그리를 비롯한 자율주의 사상가들도 이런 해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물론 네그리가 프랑스 사상가는 아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정치적 박해 때문에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여기서 가타리, 알튀세르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특히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을 특정한 개체에 한정시키지 않고 집단에 활용했다. 그래서 집단적 코나투스에 해당하는 ‘다중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명목상의 권력을 비판하고, 모든 권위에 대한 부정과 저항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자본의 권력과 부도덕한 권력에 대항하여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주체성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집단의 힘은 강할 수는 있지만, 결코 사회 변혁이라는 구도로 배치된다는 보장은 없다. 여기에는 반드시 독특한 주체 개념이 상정되어야 한다.

 

네그리는 <전복의 정치학>(최창석·김낙근 옮김, 인간사랑 펴냄)에서 주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적이면서도 프롤레타리아적이고 다양하면서도 평등에 대한 집단적 요구를 하며 정치적 타협을 하면서도 생존과 투쟁을 위한 윤리적 결단을 추구하는 주체.”

 

비록 포스트모던한 사상가들이라고 하는 인물들 중 일부는 주체에 대해서 개체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거나 주체 중심의 사고를 거부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변화의 중심을 이끌어갈 수 있는 주체는 필요하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이성주의의 그림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개념이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제국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고유한 역량을 탈정치의 윤리적 성격으로 정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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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체들은 노동의 조건 자체가 변화되는 상황과 함께 연구된다. 자율주의에서는 이러한 변화와 연관해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말은 스피노자의 정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도 ‘감정 노동’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업을 비롯해서 정신적 에너지를 소비하는 노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과거에 이런 노동은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지 않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새로운 생산 패러다임을 갖게 만들었으며, 이런 패러다임은 생산의 탈중심화, 탈장소화를 가능케 했다.

 

이런 노동의 양식은 자본의 운동 방식을 재탐색하게 한다. 이 책에서는 1장 ‘태초에 절규가 있었다’와 8장 ‘자본이 운동한다’에서 자본 권력이 아니라 불복종적인 노동의 역량을 다루고 있다. 또한 7장 ‘발전과 재생산’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과 접속의 확장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서 자율 공간의 창출에 공헌하는 주체성에 대한 논의를 분석한다.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탈정치의 정치

 

일상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탈정치인 것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중립적인 태도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율주의에서의 탈정치란 이렇게 정치에 무관심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을 규정하는 말 중에서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가 있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말을 번역한 것인데,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고 비판받고 있다. 적절한 번역 용어는 ‘정치적 동물’이다. 이 말은 인간이 고대 도시 국가인 폴리스에 거주하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혹은 경제적인 것)을 엄밀하게 구별하게 된다. 공적인 것이란 폴리스 전체와 관련된 일이고, 사적인 것이란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적인 것으로 한정된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즉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이 서로 구별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경제 체제인데 어떻게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제외하고 공적인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자율주의에서 탈정치는 엄밀하게 보자면 공통적인 것의 복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공통적인 것에는 사적 소유 관계와 신자유주의적 전략들에 대립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자본은 자신의 소유 관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국가라는 허울을 쓰고 있고, 이 국가들은 다시 자본의 논리에 맞춰 제국주의적 성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먹고사는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의 모든 성원들에게 공통적인 것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탈정치는 역설적으로 매우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런 고민을 10장 ‘정치적 공간의 위기’와 13장 ‘공적 공간의 재전유’ 등에서 만날 수 있다.

 

자율주의의 문제의식과 추이를 조금만 이해한다면, 이 책엔 우리 현실과 비교해서 사색의 깊이를 더할 내용이 많다. 자율에는 반드시 통제가 뒤따라왔다. 그런 의미에서 자율이 통제 사회 안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발전하기 위해서, 집단들의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는 가치의 전유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고민을 통해서 현재 우리 사회에 놓여 있는 통제 사회의 징후를 차단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을 깊게 만들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은 자율주의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지 않다. 이 책을 재미있게?읽기 위해서는 조정환이 쓴 <아우또노미아>(갈무리 펴냄)나 윤수종의 <안토니오 네그리>(살림 펴냄)와 같은 책을 미리 읽어보길 권한다.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2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집착하지 말고 반성하자

 

?‘틀리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를 잘 검토해보면 그것 자체가 교만임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이 틀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틀렸다는 것 자체에 대해 그리도 분노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 잘못을 계속해서 반복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수용하려다보면 그 잘못을 끊어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이와 같이 잘못을 했을 때 피해야 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가 있다. 하나는 그 잘못으로 인해 너무 화가 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너무 느슨하게 ‘그럴 수도 있지 뭐’로 용인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화를 내면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는 하지만 너무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다른 사람의 실수에도 상당히 경직된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게 어떤 실수에도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면서 용인해버리면 반성이 안 되어 다시 동일한 잘못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양 극단의 태도 사이에서 적정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화내지 않으면서 잘못의 내용만을 깊이 의식해야 한다. 잘못을 했을 때 그것이 잘못임을 깊이 의식하고 다시 이 잘못을 하지 않으려면 어떠한 점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한 후 다시 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좋다. 자책이나 후회를 하지 말고 반성을 하자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어떤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문제와 어떻게 적절하게 관계설정을 할 것인가이다. 문제없는 사람은 없으니 나는 나의 문제와 함께 잘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게 되고 대신에 완전하거나 자족감을 주는 이미지에 자신을 투사하려고 애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게 되기 때문이다.

완전하거나 자족감을 주는 이미지에 자신을 투사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완전하거나 자족감을 주는 이미지를 자신의 마음 안에 심어놓고는 자신이 그 이미지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자꾸만 확인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잘났다’는 전제에 매여 자신의 열등한 부분을 보지 않기 위해 타인의 열등한 부분을 찾아내고 타인을 아래로 쳐다보는 태도를 취하며 안심하려 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슬픈 시도이다. 누구와 비교해보아도 다른 사람에게는 나보다 잘난 부분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약점은 언제나 발견되게 마련이라 이는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이는 결국 자신의 진짜의 모습을 볼 용기가 없어서 자꾸만 허상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으면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게 된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으면 자신이 잘났음을 확인해야만 안심하는 심리구조를 가지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나르시시르적 공상에 매인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열등하게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자신의 진실에 접근할 자신이 없는 사람이 나르시시스적 공상에 지나치게 빠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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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ho and Narcissus-John William Waterhouse

John William Waterhouseⓒko.wikipedia.org

자신의 단점을 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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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단점을 무시하지 않는다.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함께 볼 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단점을 볼 용기가 없어서 스스로에게 나르시시스적 허상을 자꾸만 덧씌우려 하지 않는다.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수용해 장점은 유지하고 단점은 극복하려 노력하지만 그러한 단점을 가진 자기를 혐오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단점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단점을 보지 않으려 너무나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되고 자기가 원하는 자기상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적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게 된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단점을 볼 용기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단점과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람들은 싫어한다. 오히려 자신의 단점과 잘 화해하는 사람을 멋있다고 느낀다. 누군가가 단점을 가지고 놀림거리로 삼아도 “그래! 나 그런 단점 있어! 그게 뭐 어때서? 단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의 당당한 태도를 취하면 그 사람을 멋있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쪽에서는 별 말 없이 던진 말인데도 그 말에 열등감을 느끼고 피해의식을 가진 반응을 보이게 되면 그런 사람을 대하는 것이 불편해지고 힘들어진다. 자신의 단점을 당당하게 수용하는 사람은 멋있게 느끼게 되지만 자신의 단점에 주눅들어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사람이 오히려 더 우스워보이게 된다.

인간이란 존재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점을 줄이고 장점을 확대해나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나르시시트들의 경우는 그럴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된 자기를 만나지 못하고 거짓된 자기상에 매달린다. 그래서 타인이 자신의 문제를 지적하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힘들어하게 된다.

열등감에 시달린다는 것은 내가 우월해야 하는데 우월하지 못해서 화가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잘 하는 부분과 내가 잘 하는 부분은 달라. 그 사람이 잘 하지만 내가 못하는 부분도 있고 그 사람이 못하지만 내가 잘 하는 부분도 있는 거야. 내가 잘 하는 부분이 없다면 지금부터 발전시키면 돼! 걱정한다고 해서 내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는 데에 시간을 쓸 필요는 없어.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는 거야. 완벽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의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만약에 자신이 나르시시스적 공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 문장들을 핸드폰에 저장해놓고 하루 한 번씩(혹은 자신감이 떨어질 때마다) 거울을 보며 자기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현대는 우리에게 나르시시스적 공상을 가질 것을 권유한다. 소중한 나를 위해 물건을 소비하라고 속삭인다. 성공이 전부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성공은 소수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한 실패자로 낙인 찍혀 살아간다. 무한경쟁의 사회에 살아가면서 우리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사회적 인정을 받기는 어렵다. 그래서 원하는 만큼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우리는 사회적 인정을 받는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그 나르시시스적 공상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사생팬이니 이모팬이니 하는 것은 모두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현실의 자기는 너무나 초라하지만 내 대신 내가 받고 싶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주는 그 사람이 있어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기 힘들다. 그 스타와의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대리만족이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이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누구나 어느 측면에서는 못났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잘난 면을 잘 발전시켰을 뿐이다. 그 사람에게 못난 면이 전혀 없다는 착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도 못난 면이 있을 수 있고 타인에게도 못난 면이 있을 수 있다. 존경하고 싶은 사람의 결여에 너무 마음 다칠 필요도 없고 나 자신의 못난 면에 너무 절망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다 어느 만큼은 못났고 어느 만큼은 잘난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을 열등하다고 평가해야만 나 자신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 나의 각각의 유일무이한 존재 가치를 인정해주면 남과 나를 동시에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남과 나는 다르기 때문에 타인의 독특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나의 독특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독특성과 타인의 독특성을 그 자체로 존중해주면서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러면 옆 사람들이 나의 미소를 되받아 주어 행복해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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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 3기를 모집합니다. [ⓔ시대와철학 알림]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3기를 모집합니다.?[ⓔ시대와철학 알림]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3

 

?정치철학과 예술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진보적 철학자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모임입니다.?철학을 기반으로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위한 철학 세미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개설 강좌

 

독일어 원전 강독 연습

강사😕서유석?(호원대 교수)

강독 교재: Max Stirner,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유일자와 그의 소유)

기간: 5월?16일?~ 8월?22일?(12)?매주 금요일 저녁?7– 10?

*?독어 철학텍스트 강독(독일어 초보자도 환영,?문법 강의 함께 진행)

*?대학원생 이상 수강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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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한문 강독 연습

강사😕구태환?(상지대 강사)

강독 교재😕맹자집주(孟子集註)

기간: 5월?22일?~ 8월?21일?(12)?매주 목요일 저녁?7– 10?

*?한문 텍스트 강독(초보자?위주로 진행)

*?학부?3~4학년 및 대학원생 수강 가능

 

분과연합 세미나(공통강좌)??정치철학과 예술철학

기간:??5월?17~8월?2일 매주 토요일?2~5

대상:?학부?3~4학년 및 대학원생 수강 가능

 

1.?정치철학

?맑스 분과

강사:?김종곤?(건국대?연구교수,?맑스분과 회원)

5월?17():?맑스의?<자본론>?상품장 읽기

5월?24():?알튀세르의??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읽기

 

?여성과 철학 분과

강사😕이현재(서울시립대?HK?교수,?여성과 철학분과 회원)

5월?31():?버틀러와 젠더의 해체적 재구성(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6월?7일?():?깁슨그래함과 여성주의 정치경제학(깁슨그래함, <그따위 자본주의>)

 

?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강사😕서영화(서울대,?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회원),

? ? ?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회원)

6월?21():?지젝의?투쟁,?역사성,?의지그리고 무위자연Gelassenheit의 사중주

(Less Than Nothing?4부?13)

6월?28():?지젝의?스피노자,?칸트,?헤겔 그리고?바디우!”

(http://www.lacan.com/zizphilosophy1.htm)

 

2.?예술철학

?헤겔 분과

강사😕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헤겔분과 회원)

이관형(경기개발연구원,?헤겔분과 회원)

7월?5() 😕헤겔미학 강의(1)

7월?19():?헤겔미학 강의(2)

 

?라캉 분과

강사😕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라캉분과 회원)

7월?26():?라캉의 정신분석학(1)

8월?2일?():?라캉의 정신분석학(2)

 

* 6??14, 7월 둘째 주는 한철연 봄 학술대회와 전체 모꼬지 행사 관계로 휴강

대 상😕대학원 재학생 및 수료생,?학부?3~4학년,?한철연 신진회원

(철학을 토대로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

*?독일어 강독의 경우,?철학과 대학원생

*?강좌 수료 이후에는 일정 절차를 통해 정회원으로 가입하여 각 분과에서 활동 할 수 있음.

*?분과연합세미나의 경우,?전 강좌에 참여해야 함.(부분 수강 불가)

수업 방식😕세미나(필요한 경우 강의 방식 병행)

신청 방식😕메일?(pipjc11@naver.com)로 자기소개서를 보내주세요.

(자기소개서 다운로드😕한철연 홈페이지(hanphil.or.kr)?→?공지사항)

수 강 료?😕없음?(과목당 최대 수강 인원?10,?최소 수강인원?2, 2명 미만 시 폐강)

문 의: 02-332-4301, pipjc11@naver.com

기 간: 2014년?5월 중순-7월 말(8월 말)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3)[대안도덕교과서]-4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3)[대안도덕교과서]-4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7. 분노와 절제

 
욕망은 어떤 때는 충동적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습관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욕망의 특성을 충동적 욕망 혹은 중독성 욕망이라고 표현합니다. 절제란 그런 욕망의 마음을 행동으로 쉽게 옮기지 못하도록 하는 행동의 습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절제의 뜻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을 너무 좋아해서, 먹기를 자제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대화할 때 욕설이 습관처럼 배어서 욕이 아니면 대화를 못할 지경에 사람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려는 욕심은 나의 배가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욕을 하는 습관은 나의 혀가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포르노 동영상을 보려는 욕구은 나의 눈이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더 진한 화장을 하려는 욕구는 나의 얼굴이 아니라 나의 마음인 것입니다. 나의 배, 나의 혀, 나의 눈, 나의 얼굴이 요구하는 욕구는 채워질 수 있지만, 나의 마음은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우리는 절제라고 합니다. 절제된 마음에서 비로소 행동 습관이 멈춰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의 무절제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자기감정을 다스리는 절제력이 부족하다고 많이 느낍니다. 느끼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히 분노에 대한 절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분노는 일종의 심리적 고통으로서 몸의 고통이 있으면 이를 진통제 등으로 치료해야 하듯이 심리적 고통인 분노도 치료의 대상입니다. 분노를 치료하는 방법은 분노를 일으킨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이 있지만 현대사회에서 그 원인을 피해가기는 실제로 쉽지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술먹고 들어와 가족들을 못살게 하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 한 번 실수한 것 때문에 일 년 내내 나를 무시하는 담임선생님에 대한 분노, 집에 가는 밤길에 내 돈을 뺐어간 깡패들에게 대한 분노, 나를 왕따시키는 학우들에 대한 분노 등등, 이 모든 분노의 원인들을 헤아릴 수도 없고 적절히 대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분노를 일으키는 나 자신만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를 절제하는 나 자신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침에 학교를 가다가 지나가는 나와 모르는 자전거에 우연히 부딪쳤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지각하고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화를 풀어야 할까요? 이처럼 의도가 없는 행동에 의해 피해를 보고 짜증내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결국 내 마음만 상처받고 풀리지 않은 채 나의 화만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누가 손해일까요? 어느 누구도 나의 화, 나의 짜증냄을 풀어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조차도 겉으로만 위안이 될 뿐 나의 화낸 나의 짜증냄을 풀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절제의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내 마음속에 일어난 분노를 무작정 참는 것만이 문제해결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분노를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표출하는 감정조절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노를 일시에 폭발시킬 경우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분노의 적절한 표출은 매우 중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어떤 때는 화가 나서 혼자서 교실 뒤에 걸린 거울을 부수기도 합니다. 유리에 다쳐서 피가 나는 그런 몸서리쳐지는 뻔한 결과가 예상되지만, 그런 예후를 고려하지 않고 분노를 표출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청소년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한 폭력을 가하기도 하는데, 이런 끔찍한 소식을 우리는 가끔 뉴스에서 접하기도 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이런 마음의 고통으로서 분노를 내 안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절히 화를 풀고 짜증을 내지 않는 마음의 윤리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것은 고통의 감정에 해당합니다. 분노의 마음은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고통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분노는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 대하여 자식, 선생님에 대하여 학생, 기업주에 대하여 고용인, 독재자에 대하여 국민들, 이 모두 사회적 약자입니다. 권력에 대하여 느끼는 분노를 풀 행동의 탈출구가 약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분노가 증폭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노를 적절한 곳 적절한 때에 풀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터트린 분노의 책임은 그 공동체 즉 가족이나 학교 아니면 지역공동체나 국가가 대신 지지 않으며 고스란히 개인에게 되돌아옵니다. 청소년도 사회적 약자입니다. 부모에 대하여 약자이며 학교 선생님에 대하여 사회적 약자입니다. 사회적 약자로서 생긴 분노는 그 공동체에서 책임을 공유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모든 책임은 바로 청소년인 나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이러한 뼈아픈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기 성장의 과정입니다. 결국 분노를 제어하는 방법을 청소년기에 터득해야 합니다. 불행히도 청소년은 그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나쁜 것이니 스스로 잘 통제해야 한다’는 명령적 윤리만 있었고, 왜 내가 분노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찾기 어렵습니다.

나의 분노는 곧 내 마음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절제가 안 되면 방탕이 됩니다. 물질적 방탕이 방탕의 전부가 아닙니다. 정신적 방탕은 우리 청소년에게 다가온 가장 큰 고통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정신적 방탕, 심리적 무절제를 스스로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하여 부모님이나 선생님 혹은 인생의 선배가 형식적으로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무절제함을 절제심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묘수는 없습니다. 단지 꾸준한 일상생활의 연습을 통해 행동습관을 바꾸는 데 있을 뿐입니다. 그 연습의 하나로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데 한 순간씩 늦추는 방법이 있습니다.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표출을 하되 표출방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또한 제삼자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마음의 절제로 찾아가는 뾰족한 정답은 없지만, 자신의 무절제함을 관찰하고 반성하는 일상적인 연습만이 가장 가까운 정답인 것입니다.
 
 

8. 욕망과 주체적 윤리학

 
청소년 시기는 자기존재감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항적 감정을 쉽게 폭발하기도 하고 혹은 나쁜 감정에 휘말리어 평생 눌려서 살 수도 있습니다. 한편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나의 동기를 세워서 끝내는 무엇이든지 이뤄낼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청소년의 징표입니다.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생물학적 보편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안에 욕망의 감정을 직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결단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과정에서 나의 행복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기 위하여 나의 감정을 피해가서는 안 됩니다. 행복에 이르기 위하여 감정들 특히 욕망의 감정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잘 통제해야 한다는 말과 다릅니다.

이제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욕망은 나쁜 것이니만큼 그런 욕망을 싹둑 잘라버려야 한다는 강요된 윤리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게임은 나쁜 것이고 영어공부는 좋은 것이니,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좋은 일만 하라는 식의 획일적인 윤리학은 찐정한 윤리적 실천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윤리학은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소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욕망은 감정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합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고 그리고 밥을 먹으려는 준비행동을 준비합니다. 추우면 옷을 입고 따듯한 방에 들어가고 싶으며 또한 그런 행동을 옮기려 합니다. 이런 행동이 지나쳐서 남의 밥을 훔치고 남의 집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부당한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은 나의 행동을 증진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욕망은 세상을 다른 색깔로 칠하는 예술과 과학을 탄생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정리하여 말해봅시다. 욕망이 감정으로 나타나며 이를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 어떤 적절한 조절이 필요합니다. 감정의 조절입니다. 그런 감정의 조절을 규범화한 것이 바로 기존의 윤리학입니다. 감정의 조절은 개인의 책무이기도 하지만 법이나 문화 같은 사회적 관습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화가 났다고 칩시다. 나의 화를 조절하기 위하여 나의 개인적인 마음의 수양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수양말고도 화를 나게 만든 이 사회의 관습이 과연 옳은 것인지도 관찰해야 합니다. 물론 사회적 윤리가 필요한 만큼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마음의 윤리도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의 윤리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침팬지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당황해 합니다. 15개월 이전의 아이들은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보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울에 비춰진 나의 모습을 보고 빗질도 여드름도 짜며 옷매무새를 잡아봅니다. 거울을 통해 머리모양만 비춰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비춰보는 것, 그것이 바로 반성인 것입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명령받아 억지로 쓰는 반성문의 그런 반성이라는 말을 이제부터 싹 잊도록 합시다. 그런 반성이 아니라 내 마음을 되돌아보는 반성입니다. 어려운 말로는 성찰이라고도 하는데, 자기 성찰이라는 거창한 표현보다는 그저 반성이라는 소박한 말이 더 좋습니다. 반성을 억지로 할 필요 없습니다. 단지 일기를 쓰거나 블로그에 나를 표현하는 글을 올리거나 깊이 숨을 들이 쉬면서 잠시라도 어제 일을 회상하는 등등, 이런 차분한 시간을 갖는 일이 곧 반성의 시간입니다. 그런 반성으로부터 이미 마음의 윤리학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반성을 할 수 있을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에게는 마음의 윤리적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윤리학, 좀 더 쉽게 말해서 감정조절의 윤리학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침팬지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조절이란 뜻은 욕망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입니다. 욕망을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없습니다. 욕망은 오히려 나의 삶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마음의 힘입니다. 기존의 금지의 윤리학에서는 욕망은 무조건 나쁜 것이어서, 욕망은 제거되어야 할 나쁜 감정이었습니다. “이거 해라, 저거는 하면 안 된다”라는 식의 금지의 윤리학에서 욕망의 창조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앞서도 여러 번 말했듯이 청소년의 가장 큰 장점은 미래를 나름대로 설계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비록 그 미래는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이지만 바로 그런 불확실성 때문에 나는 나의 미래를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욕망을 무조건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나의 욕망을 나의 친구삼아 배려하고 귀기울이며 공감하며 협조하면서 공존하는 연습이 소중합니다. 그런 일상생활 속의 연습이 바로 청소년 윤리학의 기초이며 이를 앞에서 자유의 윤리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욕망의 제어를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나의 감정을 연습하는 일이 바로 청소년 윤리학의 조건입니다. 타인의 규제가 작용되는 금지의 윤리학과 달리 자유의 윤리학은 나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윤리적 자율성을 제시합니다. 그런 자율성은 법적이거나 통제적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감정 조절을 학습하는 마음의 원리들입니다. 자율성의 조건은 행동에 대한 결과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먼저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행동습관을 형성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행동습관이 구체적인 마음의 준칙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앞서 말한 긍지의 마음, 겸양의 마음, 정의로운 마음, 관심을 두는 마음, 분노를 조절하는 마음을 키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추게 된다면 우리에게 ‘금지의 윤리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며 ‘주체의 윤리학’ 그리고 ‘자유의 윤리학’이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욕망의 유혹이라는 큰 장벽이 있지만, ‘자유와 주체의 윤리학’을 가능하게 하는 도덕감정은 이미 여러분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스스로 끄집어내면 되는 것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2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2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이 글은 4월 22일?7시에 열린?<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두번째 강연 원고입니다.

 

참혹한 마음에 바치는 서(序)

오호라!?지금 이 순간에도 불행에 빠진 동료시민들이 울부짖고 있습니다.지극히 황당한 인재로 인해 사랑하는 아이와 가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삼가 애도를 표합니다.?이 강연을 마음 상처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받칩니다.

이 참사와 연관된 사람들 중에서 칭찬과 명예를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반면에 비난과 불명예로 시달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20대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을 끝까지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여승무원이나 여선생님의 용기와 희생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반면에 칠순을 바라보는 연륜에도 승객과 배를 버리고 도망간 된 선장과 희생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고위 공직자,?피해자인 어린 학생의 마음에 상처를 주더라도 조난 구조에 방해가 되더라도 취재경쟁에 열을 올리는 기자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관련자들의 용기와 비겁,?칭찬과 비난,?명예와 불명예,?한마디로 미덕과 악덕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다시 말해서 사람됨,?성품이 문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이런 논란은 개인의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우리의 전통에 유교가 있다면 서양의 전통에 덕 윤리가 있습니다.?이러한 덕 윤리를 대표하는 고전이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이 책은 기독교 이전에 서양 시민의 윤리관을 대표하고 있습니다.?그 요지는 신이 없어도 엄격한 도덕법칙이나 이기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지성(정신)과 좋은 습관을 바탕으로 윤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강연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우선 고전 그리스어를 우리말로 훌륭하게 번역한?<니코마코스 윤리학>(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이제이북스, 2006)입니다.?그 시대적 배경과 철학적 분위기를 알고 싶다면?<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이강서 옮김,?효형출판, 2007)을 추천합니다.

김성우 사진2

 

어떻게 살 것인가(소크라테스)

서양 고대의 그리스 문화에서 윤리학의 중심 주제는 행동이 아니라 사람됨이며 더 나아가 삶 자체입니다.?다시 말하면 칸트처럼 도덕률에 합치하는 올바른 행동이나 벤덤처럼 쾌락의 양을 늘리는 행동이 아니라?‘좋은 삶’이 주제입니다.?인간이 산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아버지가 마케도니아 궁전의 시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학과 생물학에 밝았습니다.?동식물에 정통했던 그는 동물적인 생명(zoe)과 인간다운 삶(bios)을 구분했습니다.?그에 따르면?“산다는 것은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공통되는 것으로 보이지만,?우리는?(인간에게만)?고유한 것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그러므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삶은 갈라내야 할 것이다.?다음으로는 감각을 동반하는 삶이 뒤따를 것이지만 이것 또한 분명 말과 소,?모든 동물들에 공통되는 삶이다.”?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성(logos)을 가진 것의 실천적 삶”입니다.

이러한 인간다운 삶과 관련해서 클라우스 헬트는 <지중해 철학 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비오스,?즉 삶의 영위는 일정한 습관에 토대를 둔다.?이 습관은 우리에게 본성으로 부여된 것일 수도 있지만 획득될 수도 있다.?특정한 습관을 갖는 것이 과연 좋으냐를 두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댈 수 있다.?이처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대는 능력을 그리스어로?‘로고스’라고 한다.?인간은 로고스를 지닌 동물,?로고스를 지닌 생명체이다.?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고전적인 인간의 정의로서, 2000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

좋은 삶은 좋은 것에 겨냥합니다.?그런데 가장 좋은 것(최고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릅니다.?이와는 반대의 의견도 있습니다.?칸트의 도덕철학을 현대 민주적 절차주의로 발전시킨 존 롤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정의론>에서 행복보다는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진리가 사상 체계의 제일 덕목인 것처럼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일 덕목이다.?이론이 아무리 정교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기각되거나 교정되어야 하듯이,?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의롭지 못하면 개혁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각 사람은 사회 전체의 행복이라도 능가할 수 없는,?정의에 기초를 둔 침해불가능성을 갖는다.”

통상적으로 행복은 개인적이라면 정의는 사회적인 것입니다.?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주의적 행복을 이야기한 것에 그치고 만 것입니까??아닙니다.?그의 윤리학은 정치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그가 말하는 행복은 폴리스(그리스 도시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 행복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으뜸가는 학문,?가장 총 기획적인 학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그런데 정치학이 바로 그러한 학문인 것 같다.?왜냐하면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정치학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또 정치학은 나머지 실천적인 학문들을 이용하면서,?더 나아가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삼가야만 하는지를 입법하기에 그것의 목적은 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함할 것이며,?따라서 정치학은 목적은?‘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왜냐하면 설령 그 좋음이 한 개인과 한 폴리스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폴리스의 좋음이 취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서 거 크고 더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그 좋음을 취하고 보존하는 일이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있어서도 만족스러운 일이라면,?한 종족과 폴리스에 있어서는 더 고귀하고 한층 더 신적인 일이니까.?따라서 우리의 탐구는 일종의 정치학적인 것으로서 이런 것들 추구하는 것이다.”

이 길게 인용된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자신의 탐구를 윤리학(?thik?)이라고 부릅니다.?에티케는 성품과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즉,?좋은 성품의 사람이 되려면 좋은 행동을 하도록 습관이 길러져야 한다는 뜻이지요.?그렇지만 그의 윤리학은 개인의 행복에 그치지 않습니다.?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그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미덕(탁월함, aret?)을 향한 올바른 지도를 받으려면 올바른 법률에 의해 길러지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좋은 습관을 들어야 하기에 법률이 필요합니다.?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사는 데는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법률이 있어야 합니다.?그에 따르면?“다중은 말에 따르기보다 강제에 따르고,?고귀한 것에 설복되기보다 벌에 설복되기 때문이다.”?폴리스의 입법자들은 시민들의 교육과 종사할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동의 보살핌이 폴리스가 제정한 법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이를 고려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의 목적을?‘인간적인 좋음’(agathon)이라고 한 이유가 명백해집니다.?그래서 그에게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politikon)?동물입니다.?이런 까닭에 그에게 좋은 삶은 국가 안에서의 시민적인 삶이지 국가에서 벗어난 개인의 삶이 아닙니다.?따라서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덕을 갖춘 사람이지 자신만의 안녕과 평온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개인이 아닙니다.?이런 점에서 현대 철학자 중에서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공동체주의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덕의 상실>의 저자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와?<다문화주의>를 주창한 찰스 테일러,?그리고?<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이 있습니다.마이클 샌델이 왜 시민의 미덕을 강조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과 무책임한 고위공무원들은 시민의 미덕,?특히 사회적 리더로서의 의무를 저버렸기에 그토록 지탄과 원망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정치적인 것을 가르친다고 선전하는 소피스트들은,실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학은 수사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이와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학은 목적은 지식(앎)이 아니라 행위입니다.?마찬가지로 윤리적인 덕도 지식이 아니라 활동(ergon)입니다.?이는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 선생님과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플라톤의 대화편인?<프로라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은 앎(인식)이라고 규정했습니다.?다시 말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는 자가 가장 좋은 사람인 것입니다.?그러한 최선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그런 리더를 플라톤은 철인왕이라고 불렀습니다.?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인간적인 좋음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그 좋음이라는 것도 완전한 삶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이런 그에게 아는 것보다 좋은 행동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그래서 그는 지식 중심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에게?“친구와 진리 둘 다 소중하지만,?진리를 더 존중하는 것이 경건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데는 지식보다는 좋은 습관이 요구됩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그렇듯 하루나 짧은 시간이 지극히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덕은 행위의 축적에 의해 즉 습관에 의해 획득됩니다.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만약 폴리스에서 입법자들이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들이게 하면 좋은 시민들이 육성될 것입니다.?이러한 폴리스는 좋은 정치체제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행복한 사람은 잘 행위하는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이다.?행복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따라서 행복은 단순히 외적인 운명이나 우연에 의해 주어지지 않습니다.?이러한 요소들은 인간적 삶에 추가적으로 필요할 뿐이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나 배움과 노력을 통해 인간적인 덕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달리 이러한 행복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일 수 있습니다.?소나 말 등 동물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이런 점에서 아직 어린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아직 그 나이에는 덕에 따른 행동을?‘완전하게’(성숙하게)?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그렇다고 좋은 습관을 쌓지 못한다면 나이가 반드시 성숙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더 처참하게 물욕만 남은 비겁한 늙은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혹시 운이 좋지 않더라도 활동이 결정적이라면?“지극히 복된 사람들 중에서 누구도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그는 결코 가증스러운 일이나 비열한 행위들을 하지 않을 테니까.또 우리는 진정으로 좋고 분별 있는 사람은 모둔 운들을 품위 있게 견뎌 낼 것이라고,?현존하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가장 훌륭한 것들 행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행복과 관련해서 세 가지 종류의 삶을 제시합니다.?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정치적인 성취를 이루는 삶,?지성적인 관조를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짐승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히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입니다.?정치적인 명예나 덕을 추구하는 삶도 역시 불완전할 뿐입니다.?명예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의존할 뿐이며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큰 불행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본질적으로 정치권력과 이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이 외에도 그는 부를 추구하는 삶을 언급하다가 이를 재빨리 취소합니다.?그가 보기에 부를 추구하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일 뿐이며,?부란 다른 것을 위해 수단일 뿐이니 진정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관조적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인 이유는?“무엇보다도 지성이?‘인간’인 한에서,?인간에게 있어서도 지성을 따르는 삶이 가장 좋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그러므로 이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지혜에 대한 사랑,?즉 철학(philosophia)하는 삶이 그런 삶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덕 윤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그의 시민에는 노예와 여자가 제외됩니다.?당연히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야만인도 제외됩니다.?그의 시민이란 좋은 집안에 태어나,?잘 양육을 받고,?행운이 뒷받침되는 남성 어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이런 이유로 오늘날 공동체주의자들은 전통적 공동체주의에서 수직성과 배타성을 제거한 새로운 공동체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논현정보도서관 다음 강의는?5월?20일 배우고 익힘에서 기쁨을 찾다?-?인생을 말하는?『논어』?:?구태환(상지대 강사)입니다. ?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1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른바 서양에서?‘존재론(存在論?: ontology)’이라고 부르는 철학의 한 분야에 대한 것입니다.?이 분야는 전통적으로 존재와 무를 다루는 분야로 알려져 있습니다.?존재(存在)와 무(無)라니!?여기에서 잠깐 제가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한 이야기를 끼워 넣겠습니다.

“여러분,?장 폴 사르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를 잘 아시지요?”

“예,?그분 소설가이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그런데 그분이 비교적 초기에 썼던 유명한 철학책이 있습니다.?그 책 이름을 아는 분 계십니까?”

“예.”

“뭐지요?”

“《존재와 무》?아닙니까?”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존재와 무라??대단히 어렵고 심오한 말인 것 같은데,?여러분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런 말 자주 씁니까?”

“가끔 씁니다.”

“그럼,?여러분들 가운데서 지난 한 주일 동안 날마다 한 차례 이상 존재나 무라는 낱말을 입 밖에 내본 사람이 있으면,?한번 손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난 한 주일 동안 이 낱말들을 한 번도 써 본 기억이 없는 학생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십시오.”

강의실에 앉아 있던 학생들 거의 모두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습니다!?이것은 바로 제 강의를 듣는 철학과 학생들과 저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제 강의실에서나 있었던 특수한 경우일까요??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그러면 사르트르가 붙인 원래 제목을 써 보겠습니다.?《Letre et le Neant》입니다.?이 프랑스 말을 토박이 우리말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L’etre et le neant =?있음과 없음(또는 임과 아님)입니다.?다시 물어 보겠습니다.?여러분 가운데 있다,?없다,?이다,?아니다라는 말을 빼고 단 일 분간이라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자신이 있는 분은 한번 손을 들어 보십시오.”

제?‘존재론’?강의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저는 칠판에 문장 하나를 썼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쓴 글은 우리가 보통 하는 말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이 말을 참과 거짓이 구별되는 문장,?곧 논리학에서 말하는 명제(命題?: proposition.?참 끔찍한 말이기는 합니다만 논리학 책을 보면 이런 낱말이 나옵니다.)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은 개가 아니다.”

학생들이 외쳤습니다.?저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 적었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다. (일상 언어)?→?사람은 개가 아니다. (참말,?논리적 명제)

“그런데 왜 우리는?‘사람은 개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그것을 참말이라고 하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게 생겼잖아요.”

“개는 네 발로 걷고 사람은 두 발로 걷잖아요.”

“개는 냄새를 잘 맡는데 사람은 그렇지 못하잖아요.”

“…….”

강의실이 온통 시끌벅적해졌습니다.

“잠깐,?사람과 개가 서로 다르니까 사람은 개가 아니라는 말은 아까 나왔던 말이고,?이제 한 단계 더 높여서 이른바?‘존재론’답게 말해 봅시다.?다시 말해서?‘있다’, ‘없다’는 말을 써서 사람이 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보자는 거지요.”

여기까지 이르면 학생들은 거의 잠잠해지기 마련입니다.?저는 칠판에 이렇게 썼습니다.

일상 언어의 차원?:?사람은 개와 다르다.

논리 언어의 차원?:?사람은 개가 아니다.

존재 언어의 차원?:?사람에게 있는?(어떤)?것이 개에게는 없고,?사람에게 없는?(어떤)?것이 개에게는 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같다’, ‘다르다’는 말은?‘이다’, ‘아니다’는 말로 바꿀 수 있고,?또 이 말은?‘있다’, ‘없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다시 말하자면,?우리 둘레에 있는 서로 다른 온갖 것들을 가르는 기준이 있음과 없음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저는 네 개의 문장을 칠판에 써 내려갔습니다.

1.?있는 것이 있다.

2.?있는 것이 없다.

3.?없는 것이 있다.

4.?없는 것이 없다.

“자,?이 네 개의 글 가운데 어느 것이 참말이고 어느 것이 거짓말입니까?”

학생들은 문장 네 개를 꼼꼼히 뜯어보고 있더니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구별하기 힘든데요.”

“왜,?왜 그렇지요?”

“글쎄요.?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문장은?‘ㄱ은?ㄴ이다.’나?‘ㄱ은?ㄷ이 아니다.’라는 틀을 가지고 있잖아요.?그러니까?‘사람은 동물이다.’나?‘사람은 개가 아니다.’와 같이?‘이다’, ‘아니다’로 앞에 있는 말과 뒤에 있는 말이 이어져 있어야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있는데,?이 문장들은 그냥 있다,?없다로 끝나잖아요.?그래서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쏭달쏭한데요.”

“맞습니다. ‘저기 사람이 있다.’나?‘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같은 말은 그 말만 보아서는 그것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따라서 이런 말은 일반적으로 논리적인 명제라고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모른다는 말이 참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칠판에 적혀 있는 이 네 마디 말들은 모두 뜻이 있는 말인가요??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이 말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나요?”

“예,?알아들을 수 있겠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우리 그 뜻을 한번 캐 보기로 하지요.”

학생들과 제가 머리를 짜내서 캐낸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있는 것이 있다.?→?달리 이 말을 바꿀 필요가 없다.?이를테면 우리는?‘있는 것은 있고,?없는 것은 없는 거야.’라고 할 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

2.?있는 것이 없다.?→?하나도 없다. (눈여겨볼 낱말?: ‘하나’)

3.?없는 것이 있다.?→?빠진 것이 있다. (눈여겨볼 낱말?: ‘빠진 것’)

4.?없는 것이 없다.?→?다 있다. (눈여겨볼 낱말?: ‘다’)

자,?여기서부터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첫 번째 말이야 그냥 넘어갈 수 있다 치더라도 두 번째부터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하나도 없다.’는 뜻을 지니게 될까??배운 도둑질이라고 저는 서양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생각을 빌려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하나일까요,?여럿일까요?”

제가 이렇게 물었더니,?학생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습니다.?틀림없이?‘저 선생 어떻게 된 거 아냐?’?하고 머릿속으로 내 머리를 향해 손가락을 서너 바퀴쯤 돌렸음직한 표정들이었습니다.

“에이,?선생님도!?있는 것은 당연히 여러 개지요.?저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여기 책상도 있고,?가방도 있잖아요.”

“잠깐,?잠깐만요.?제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제가 조금 설명을 하고 나서 다시 묻지요.?저기 있는 예쁜 여학생,?학생은 여자가 분명하지요?”

와그르르 웃음소리.

“요즈음에는 겉모습만 보아서는 도무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때가 많아서 한 말이니 노엽게 듣지 말아요.?그럼 제가 칠판에 몇 개의 낱말을 적어 볼 테니까 이 낱말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아맞혀 보세요.”

여자―사람―동물―생물―있는 것

학생들은 이 낱말들을 연결시켜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사람이다. (여자 수보다 사람 수가 더 많다.)

사람은 동물이다. (사람 수보다 동물 수가 더 많다.)

동물은 생물이다. (동물 수보다 생물 수가 더 많다.)

생물은 있는 것이다. (생물 수보다 있는 것 수가 더 많다(?))

“어때요,?한 방 먹으셨지요??있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잖아요.?있는 것이 하나뿐이라니 말이나 돼요?”

아이고 골치야.?그야말로 제가 여우처럼 제 꾀에 넘어가고 만 셈이었습니다.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철학자의 서재]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철학자의 서재]

?오상현(숭실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나는 스댕 요강과 1986년을 기억한다”

 

우연한 기회에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라는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나타내듯, 사회학자인 저자가 바라본 25년 가난의 기록들을 그림을 그리듯 잘 표현했습니다. 서평을 쓸 생각에 책을 읽다가 계획을 바꿨습니다. 사당동 사람들은 저자의 연구 대상이기 이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한 기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서평은 서평이 아닙니다. 그저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을 기억하는 한 젊은이의 고백입니다.

 

“엄마랑 아빠는 진짜 힘들게 살았다. 너희 두 남매만 집에 남겨두고 일하러 갈 적엔 마음이 정말 …….” 사당동 시절을 떠올리던 엄마는 눈물부터 흘린다. 이제는 아줌마보다 할머니에 가까워진 이 여인의 눈물 앞에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애당초 인터뷰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사당동’은 한숨과 눈물의 다른 이름일 테니까.

 

사당동 더하기 요강

 

▲ (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부모님은 내가 네댓 먹었을 때 서울로 상경했다. 첫 번째 도박이었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살던 시골에서 위로 형과 누이를 셋이나 두었고, 아래로 동생 둘을 두었던 아빠. 여기에 엄마와 자식 둘까지 거두어 먹이려면 농사일만으로는 답이 안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서울행, 원래 잃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 중대한 선택을 쉽게 하는 법이다. 그런 선택이란 사실 강요되는 것이니까.

사당동을 생각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첫 번째 물건은 ‘요강’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요강을 ‘방에 두고 오줌을 누는 그릇’이라고 정의하는데, 실제로는 똥도 눈다. 멀쩡한 화장실을 놔두고 왜 요강을 방에 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소리다. 요강을 방에 두고 쓰는 것은 화장실이 없어서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는 사실. 우리 집은, 아니 우리 방은 (어차피 단칸방이었으니까) 반지하로 주인집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화장실은 그 주인집 마당에 있었다. ‘쾅’하고 대문 여닫는 소리가 주인집을 거슬리게 할까봐 해질녘이면 요강이 등장했다. 마치 해가 지면 나타나는 달과 같았던 은빛 스댕의 요강.

 

‘아이들을 방 안에 둔 채 문을 잠가 두고 일 나가는 경우도 흔했다.'(132쪽) 정말 그랬다. 맞벌이가 아니면 버티는 것조차 까마득하게 먼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시던 엄마가 잘 놀고 있으라고 손을 흔들며 문을 닫으면, 이내 ‘철컥’하고 자물통 잠기는 소리가 났다. 밤이 되어 다시 그 자물통 소리가 날 때까지, 잠긴 방 안에 남겨진 (둘의 나이를 합쳐도 겨우 열 살 남짓이던) 남매가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일은 단 두 가지다. 아직 중천에 이르지도 않은 해가 어서 빨리 서녘으로 지기만을 바라는 일, 그리고 남겨진 밥상을 비우고 텅 빈 요강을 채우는 일이었다. 넘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당동 더하기 산동네

 

아빠는 사당동 대부분의 아저씨들처럼 ‘노가다’를 다녔다. 내게는 ‘목수’라는 전문직에 종사했었다고 포장했지만 사실 건설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였던 셈이다. 여러분이 한 번은 가 보았을 ‘예술의 전당’이나 ‘동작대교’를 짓는 일에 참여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이처럼 사당동 아저씨들의 덕을 한번쯤은 본 셈이다. 나중에는 둔촌동에 있는 시장에서 경비 일을 했다. 경비라는 직업도 사당동 아저씨들이 많이 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아버지의 망치질은 여전히 경이로운 수준이라 환갑이 넘은 지금도 망치질은 손수 한다. 나는 장성한 아들이지만 나서지 않는다. 핀잔 섞인 눈총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작은 효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터 옮기는 일은 이들의 자의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자의처럼 보일 뿐 타의일 때가 더 많다. 이들의 직장은 거의 영세 업체들이어서 수시로 주인이 바뀌거나 부도가 나서 문을 닫는다. 또한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직장이기 때문에 월급이 조금이라도 많거나 노동 조건이 좋은 곳이 나오면 주저 없이 옮긴다.”(153~154쪽)

 

▲ 이 책의 토대가 된 사당동의 한 가정에 대한 긴 관찰을 영상으로 풀어낸 다큐멘터리 (조은, 박경태 감독)의 한 장면. 철거촌의 현장. ⓒhttp://indiespace.kr

▲ 이 책의 토대가 된 사당동의 한 가정에 대한 긴 관찰을 영상으로 풀어낸 다큐멘터리 <사당동 더하기 22>(조은, 박경태 감독)의 한 장면. 철거촌의 현장. ⓒhttp://indiespace.kr

엄마는 사당동 대부분의 아줌마들처럼 다양한 일을 했다. 남성시장 어귀에서 양말 장사도 했었고, 겨울이면 산동네를 돌아다니며 찹쌀떡이나 메밀묵을 팔았다. 당시 엄마의 나이는 20대 후반이다.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며 산동네의 인적 드문 밤길을 홀로 다녔을 엄마다. 떡과 묵이 잔뜩 담긴 나무통의 무게보다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삶의 무게가 더 했을 그때,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나와 동생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이후 엄마는 가발공장엘 나가 미싱사로 일했다. 남성시장에서 아빠랑 같이 포장마차도 했었단다.

 

동작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돼서야 우리 남매는 감금에서 해방되었다.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기에 알아서 문도 잠그고 학교에도 갈 수 있었다. 당시 사당동의 인구밀도는 상상을 초월해서 2부제 수업은 기본이었다. 오후반 수업을 받을 때, 한번은 집에서 놀다가 학교 갈 시간을 놓쳤다. 1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내 울다가 어떤 삼촌이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사실 지각을 한 것인데 사정을 들은 담임선생님이 없던 일로 해주었다. 그 덕에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결석은 물론이거니와 지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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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 더하기 교통사고

 

’86 아시안 게임’이 한창이던 그 때, 사당동의 하늘에도 색색의 애드벌룬이 둥둥 떠 있었다. (<사당동 더하기 25>의 저자가 연구를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다.) 바람에 날리는 그 풍선을 따라가다 나는 생애 최악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뼈가 종아리를 뚫고 삐져나온 상황이었다고 들었다. 사고를 낸 아저씨는 이미 의식을 잃은 나를 안고 가까운 병원으로 뛰었다. 사당동 아이들은 늘 이런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시유지에 아무렇게나 지은 집들이나 축대는 언제 무너질지 아슬아슬했고, 구불구불 좁은 길에는 사각지대가 많아서 차 사고도 빈번했다.

 

가해자 아저씨는 적어도 양심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두 군데 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해야만 한다’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애써 나를 세 번째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 세 번째 병원이 고석주 정형외과다. (자리는 옮겼지만 지금도 이수역 근처에 있다.) 당시 원장선생님은 다른 곳과 달리 일단 수술을 해보겠다고 했단다. 만약 실패를 한다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7살 아이의 다리를 어떻게 쉽게 자르겠냐며. 휴대폰도 없던 시절, 길가에 뿌려진 아들의 핏자국을 따라 정신없이 당도한 병원에서 부모님의 하늘은 무너졌을 것이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20년 뒤에 나는 42.195킬로미터 마라톤 풀코스를 5시간 15분 만에 완주했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컸던 모양이다. 석 달 넘게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내게 아빠는 컬러텔레비전을 선물했다. 그렇게라도 미안함을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생애 첫 텔레비전을 나는 보물처럼 아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우리 살림에 텔레비전이란, 상상도 못할 물건이었다. 그 신통방통한 텔레비전을 통해 ’86 아시안 게임’을 실컷 볼 수 있었는데, 내가 교통사고 당시를 정확하게 1986년으로 기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텔레비전은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 집에 있었다.

 

100일을 넘기고서야 나는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 석 달 열흘 만에 나오는 것은 무리였을 테지만,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시골에 살던 아주 어린 시절, 나는 감기로 오랫동안 앓았던 경험이 있다. 피를 토할 정도였으니 감기보다 더 심한 병이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저 나는 감기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병원비가 모자라 엄마는 하나뿐인 결혼 패물이던 금가락지를 내다 팔았다고 한다. 더 이상 내다팔 물건이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 병원은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텔레비전을 되팔 수는 없었을 테니까.

 

사당동을 떠나다.

 

철거를 앞두고 부모님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대부분의 사당동 사람들이 같은 고민에 놓였다. 또 다른 사당동으로 옮기거나 근처 위성도시로 떠나야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또 철거를 당할 바에야 근처 지방으로 옮기는 게 나을 듯 했다. ‘안양, 시흥 등 서울 근처 위성도시로 빠져나간 경우도 상당했다.'(147쪽) 우리는 안양을 선택했다. 두 번째 도박이었다. 모은 돈을 모두 털어 철물점을 차렸지만 장사가 잘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비록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만 했지만 아빠에겐 ‘내 사업’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작은 방 하나가 딸린 가게로 이사했다. 역시 단칸방이었고 화장실도 밖에 있었지만 적어도 주인집의 눈치를 보지 않고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나는 이 시절을 행복으로 기억한다. 안양 호계동으로 이사한 뒤로는 늘 가게(집)엔 아빠와 엄마가 있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고,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다. 가난은 마치 그림자처럼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뒤로도 엄마는 꽤 오랫동안 하나뿐인 그 방에서 이런 저런 부업을 했다. 미싱을 돌려 가발을 만들기도 했고, 어떤 때는 전자부품을 끼우는 일도 했다. 전자부품 끼우는 일은 나도 참 열심히 했었는데, 파란색 플라스틱 가루가 많이 날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일을 하고나면 꼭 그 고약한 가루들이 밥 위로 올라와서 밥을 먹다가도 몇 번씩은 집어내야 했다. 귀찮아서 그냥 씹어 넘긴 일도 많았지만.

 

4학년이 되던 첫 날, 그러니까 1990년 3월 2일에 호계동으로 이사했는데, 그해 2학기에 나는 부반장으로 당선되었다. 부반장이 되고 얼마 뒤가 내 생일이었는데 나는 무턱대고 우리 반 아이들을 죄다 초대했다. 심지어 담임선생님까지. 네 식구 편히 눕기도 어려웠던 단칸방에 그 많은 아이들과 선생님을 초대할 발상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없는 살림에 무슨 음식으로 생일상을 차리겠는가? 1990년 그 해 생일에 30명이 넘는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왔다. 물론 천사 같았던 담임 홍금숙 선생님도 오셨다. 그날 엄마와 아빠는 열 마리가 넘는 통닭 값을 대야 했지만 나는 그날 받은 생일 선물(주로 노트나 연필)을 중학교 다닐 때까지 썼다.

 

당시 친구들을 적어도 내가 단칸방에 산다는 이유로 놀리지는 않았었다. 생일 초대에 응해준 친구들 중에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와 잘 어울렸다. 찻길 하나만 건너면 논밭이 펼쳐졌기에 개구리도 잡고 흙장난도 많이 했다. 이후 그곳은 수도권 신도시를 대표하는 ‘평촌’이 되었고, 나는 그곳에 새로 들어선 범계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가난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뒤에 ‘부끄럽진 않아도 내세울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라고 고쳐 생각하게 되었다. 으리으리한 68평대의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서 생일파티를 하고 나오면서였다. 단칸방으로 돌아온 그날 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 <사당동 더하기 22>의 한 장면. ⓒmovie.naver.com

▲ <사당동 더하기 22>의 한 장면. ⓒmovie.naver.com

 

다시 사당동으로

 

이듬해, 철물점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은 부모님은 의왕시 변두리에 21평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물론 융자를 많이 끼고 샀으며 오래도록 갚아야 했다. 어쨌든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단칸방을 벗어났다. 그러나 여유도 잠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자본은 밑바닥 경제까지 잠식해나갔다. 철물점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형마트에 밀려 점차 손님이 줄었고 대신 부모님의 한숨이 늘어갔다. 내가 안양시청에서 공익근무요원을 하던 때, 우리는 충남 공주로 내려와 떡방앗간을 시작했다. 세 번째 도박이었다. 또 다시 제로에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다시 또 10년이 넘게 흘렀고, 떡방앗간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목수였던 아빠의 빈틈없는 철저함과 악착같이 살아서 얻은 엄마의 넉넉한 마음이 근원이었다. 공주로 내려올 당시, 집안이 어려워 내놓았지만 팔리지 않았던 탓에 우리의 첫 ‘내 집’은 그대로 남았다. 나는 지금 부모님의 눈물과 피땀으로 얻은 그 집에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가난의 냄새는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그 냄새는 어쩌면 찌든 때처럼 그들 삶 깊숙이 박혀 있어 좀처럼 씻어 내기 힘들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303쪽)

 

그렇다. 가난이란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다. 지금 우리 가족이 이만큼이나 살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세 번의 도박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빠가 (비록 오른쪽 집게손가락 한 마디를 잃었지만) 건설현장에서 크게 다치지 않아서이고, 엄마가 (비록 미싱일 덕에 지금은 양쪽 눈이 성치 못하지만) 집을 나갔다거나 일수놀이에 돈을 떼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며, 우리 남매가 (비록 교통사고의 흉터를 훈장으로 남겼지만) 죽거나 큰 병에 걸리지 않아서이다. 억세게 운이 좋은 경우이기에 예외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예외는 예외일 뿐.

 

어떻게 우리 사회의 빈곤을 끊을 수 있을까?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고 게으른 사람은 가난해 진다’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거짓이라는 것쯤은 이제 부연이 필요 없는 명제가 되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양극화는 가속화되고 있으며, 생활고를 이유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웃들은 늘어만 간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분배보다는 성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공자 이래로 2500년 동안 우리는 늘 분배보다는 성장을 꿈꾸었고, 그래서 늘 부족하다고 여겼으며,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흙에 묻혔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게 (분배)되지 못함을 걱정하며,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치 않을 것을 걱정한다.’고 들었다. 고르게 (분배)되면 가난함이 없어지고, 조화를 이루면 부족함이 없어지고, 편안하게 되면 (마음을) 기울일 일이 없어지는 법이다.”(孔子曰, … 丘也聞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논어>, ‘계씨’)

 

나는 내일도 모교 강의를 하러 가기 위해 사당동을 지날 것이다. 인연은 인연인가보다. 지독한 가난의 냄새도, 은빛 스댕 요강의 기억도 이제는 가물거리는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이웃의 가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때마침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거짓말로 현혹하는 사람들을 걸러낼 시간이다.

 

 

있음과 없음의 연속성[철학을다시 쓴다]-27

있음과 없음의 연속성[철학을다시 쓴다]-27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파르메니데스(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존재론 및 인식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존재의 철학자라 불림)나 고르기아스 같은 사람 이름을 들어보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사실 파르메니데스는 아까 제가 했던 이야기의 뼈대를 세운 분입니다.?파르메니데스는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면, ‘있다’, ‘없는 것은 없다.’?있는 것은 굳이 형상화하자면 하나로 있고,?뭉쳐 있고,?구(球)형태, ‘스파이로에이데스’(sphairoeides)로 있다,이런 식 이야기를 합니다.?만일에 없는 것이 있다고 치자,?있는 것은 공간 속에 있거나 시간 속에 있어야 한다,?공간을 놓고 보면 여기 있는 것은 저기에 없고 저기 있는 것은 여기에 없다,?그런데,?없는 것은 없다,?따라서 공간은 없다.?아주 불친절하지만은 훨씬 더 정교한 논리를 그 제자인 제논이 개발을 해서 스승의 말을 뒷받침합니다.

다음으로 시간이 실제로 있다고 해 보자.?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누어지는데,?있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고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오,?미래는 아직 없는 것이다,?따라서 시간도 없다,?이 말도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를 그 제자 제논이 만들어냅니다.?그런데 제논은 얼마나 우직한 사람이냐 하면 파르메니데스도 그렇고 제논도 그렇고,?여러분들이 잘 아는 피타고라스도 그렇고,?어떤 사람은 유클리드까지 여기에 포함시킵니다.(피타고라스도 유클리드도 이탈리아반도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전부 이태리학파들입니다.?파르메니데스,?티마이오스,?제논 이 사람들이 전부 명석한 이태리학파 사람들이다,?그다음에 운동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적인 운동을 뒤집어버린 사람인 갈릴레오까지 이태리 사람입니다.)?워낙 명석한 사람들입니다.

파르메니데스와 고르기아스는 같은 이태리 사람들인데,?이 두 사람이 내세우는 주장은 정반대입니다.?이 파르메니데스는?‘있다/?없는 것이 없다’,?이렇게 주장을 하고 있죠.

이 말에 고르기아스가 정면으로 치받습니다. ‘없다.?있는 것이 없다’?반대죠.?파르메니데스는?‘있다’고 하는데,?고르기아스는 없다,?무엇인가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무엇인가 그 없는 것을 우리가 안다 치더라도 그걸 다른 사람한테 전달할 길이 없다,?입 밖에 낼 수도 없다,?이렇게 얘기합니다.

“한 사람은 있다고 하고,?한 사람은 없다고 하고.?그런데?‘있는 것’이?‘하나’라 하면 우리가 도대체 이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어요,?없어요?(대답 못하고 일동 웃음.)?조금 생략을 하려고 했는데 여러분들 표정을 보니까 생략을 못할 지점들이 자꾸 생겨납니다.?아까?‘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라고 했죠??이것이 참말이라고 그랬죠,?그렇죠?”

“네.”

“그리고 이것이 참과 거짓을 가리는 기준에도 들어맞죠??앞에 있는 것과 뒤에 있는 것이?‘이다’라는 잇는 말로 연결돼 있으니까.?그런데,?가만 있자, ‘앞에 있는 것’과?‘뒤에 있는 것’이라…….?그럼 있는 것이 둘로 있네요.?우선 있는 자리가 다르지 않습니까??하나는 주어의 자리에 있고 하나는 서술어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하나는 임자말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하나는 풀이말 자리에 있는데 이게?‘이다’로 연결이 되네요.?둘 이상이 되어야?‘이다/?아니다’로 연결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그렇죠? ‘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이게 말이 되요??아까 있는 것은 둘로 있을 수 없다고 그랬잖아요.?그런데 지금‘있는 것’이 둘로 나뉘어 멀쩡하게 저마다 자리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잖아요.?이게 말이 되냐고요.?말이 안 되죠.?이건?‘거짓말’이다. ‘참말’임을 보장해주는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근거라고 생각했던 게?‘거짓말’이 돼 버리네요. ‘둘’이 있으면?‘둘’이 차지하는 자리가 있기 때문에?‘이어짐’?곧 연장성이 나온다고 합니다. ‘공간’이 곧 거기에 딱 나와 버립니다.?아까?‘있는 것’과‘없는 것’?둘을 놨을 때?‘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이 둘을 나누는 경계가 되어서 이 세 개가 관계를 맺게 되지요??다 이어져 버리죠??그래서 연장선이 생겼는데…….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여러분들 가운데 수학을 잘 하시는 분 계시죠??뭘 기준으로 해서?‘하나’라 하죠??피타고라스는?‘하나’를 뭘로 봤습니까??점(point). ‘하나’?하면 한계가 하나인 것이죠.?한계가 하나인 것은 보입니까,안보입니까?”

“보여요.”

“연장성이 없는 것도 보입니까?”

“아,?아뇨 안 보여요.”

“안 보이죠??그렇죠??안 보여야 합니다.?그러면?‘둘’은요??점이 둘이 모이면 이건?‘선’(line)이라고 하는데 선분에는 한계가 둘 있죠.?양쪽에.?그렇죠?그런데 두 한계도 안 보이지만 그 사이에 있는 것도 안 보이죠??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연장성을 가진 것입니다.?그래서 눈에 들어오죠??그 다음에 이제?‘셋’?하면 무엇이 되죠?”

“면.”

“그렇죠. ‘면’,?한 계가 셋인 것은 면(plane).?삼각형.?삼각형이 최소의 한계로 이루어진 면이죠.?그러면?‘넷.’?한계점이 네 개 있는 것은 뭐죠??입체!?이렇게 한계가 넷이 있는 것을 입체라고 그러죠.?우주에 있는 삼라만상을 다 살펴봐라,?한계가 하나가 있거나 둘로 있거나 셋으로 있거나 넷으로 있거나 하지 않으냐, ‘점’, ‘선’, ‘면’, ‘입체’로 모두 이루어져 있다,?이 모든 것을 전부 보태면 몇입니까,?점이??열 개죠? 1+2+3+4는?‘열’이 되는데 이것은 신성한 숫자다,?테트락티스(tetraktys)는?‘신성한 수다’라고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주장합니다.?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수로 이 세상의 모든 다(多)와 운동을 규정하려고 들었습니다. ‘결혼’이란 건 수로 나타낼 때 몇이냐??이를테면?24다. ‘행동’이란 건 뭐냐? 36이다라든지 이렇게 모든 것을 수로 규정하려고 들었습니다.?여기서 합리적인 핵심을 여러분들께서 이해해야 합니다.?수와 비례관계로 삼라만상을 파악하려고 했다는 거.?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우주를 지배하는 합리적인 법칙을 찾아내려고 그 나름으로 무척 애를 썼다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우리 사고 내용을 들여다보자,?하나만 있으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입도 벙긋할 수 없다,?왜 그러냐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게 될 때 참과 거짓이 구별되려면 꼭 주어와 술어의 형태로 나와야 하는데,?같음과 다름을 구별하려는 순간에 있는 것이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 버린다,?또는?‘있는 것’이 아닌?‘없는 것’을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는 게 거짓말이라고 했죠.?그런데 없는 것을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와 운동을 설명할 길이 없고,?이것과 저것을 가려볼 길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이게?‘거짓말’의 여러 모습인 오류,?실수,?사기…….?이런 모든 것의 존재론적인 근거가 되는 겁니다.?우리가 말을 하면서 이 세상 살아가려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절반쯤 거짓말을 깔고 들어간다는 것을 이해하면 됩니다.?온전한?‘참말’은 입 밖에 낼 수가 없습니다.?온전한 참말이라는 것은 침묵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그래서 선불교에서 면벽수련하는 수좌들이?‘개구즉착’,?입만 벙긋하면 틀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입만 열면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한 이유를 이해하겠죠??이게 죄다 거짓말입니다.?귀가 왜 두 개 있느냐 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라고 양쪽에 있는 겁니다.?절대로 외우지 마세요.?여러분들에게 솔깃했던 말들도 다시 한 번 의심해 보십시오.?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설득술’이라고.?제가 이제까지 했던 말이 바로 그?‘설득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저도 모르는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국어: ‘뭐 하지?’?독일어: ‘Was tun?’?불어: ‘Que faire?’?영어: ‘What do?’

시제는 현재로 되어 있죠,?그렇죠??그런데 이게 현재입니까? (대답 없음.)현재라면 여러분께 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여러분들 멀쩡하게 제 강의 듣고 있잖아요.?뭐 하지??하고 질문 던질 시간도 없어요.?그렇죠??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지??이 이야기죠??미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그렇죠??올 날하고 연결이 되어 있는데…….

저도 사실은?‘할’?일은 많은 거 같은데?‘하는’?일 없이?‘되는’?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래서 그냥 실제로 뭐 할 일이 없을까??되는 대로 살지 않으려면 조금 정신 바짝 차리고 할 일을 찾아야지,?이런 생각을 해서 그 가운데서 골라낸 것이 시골 가서 농사짓는 일인데…….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1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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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로 메이(1909~1994), 미국의 실존주의 상담사ⓒLearnHub.com

롤로 메이(1909~1994), 미국의 실존주의 상담사ⓒLearnHub.com

마음속 깊이 진실로 자기를 아끼는 사람은 겸손하게 행동하는 데 반해 마음속에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자만심이라는 위안을 필요로 한다. – 롤로 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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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기를 원한다. 자신이 하루 학교를 가지 않으면 친구들이 모두 전화를 해대며 나를 걱정해주기를 바란다. 자신이 하루 회사를 가지 않으면 그 다음날 출근했을 때 사람들이 모두 내가 없어서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면서 내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하루 학교를 안 갔을 때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이라도 전화를 해주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루 회사에 결근했을 때 업무내용 확인차 전화 한 번 오고 다음 날 출근했을 때 멀쩡히 어떻게 어떻게 처리했노라고 전달해주는 것으로 끝이다. ‘나여야 한다.’고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세상은 ‘너가 아니어도 별 상관은 없어.’의 태도이다.

나는 세상의 일부다. 그런데 세상의 일부인 나는 세상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곤 한다. 이는 나의 생각의 폭을 넘어서는 세상이 나의 생각의 폭 안에 들어 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은 늘 나의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어 있다. 나같은 사람이 수십억 명 모여서 만들어내는 곳이기에 세상은 늘 나의 생각을 벗어난다.

그래도 옳고 그름이라는 게 있지 않냐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물론 인간다움을 저해하는 모든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다움이 어떠한 것이냐에 대한 합의는 어렵다. 여기서 상대주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 옳고 그름도 따지고 보면 내 입장에서의 옳고 그름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다움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원칙은 유지하면서 그 방법론과 관련해서 너무 자기 방식을 고집하려다 보면 세상을 나의 폭에서 제한하려는 우를 범하게 될 가능성이 높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은 나의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많고 많은 변인들이 복합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곳이기 때문에 내 눈에 옳은 것이 진짜 옳다는 보장도 없고 내 눈에 옳지 않은 것이 진짜 그르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내 수준에서 인간다움의 가치를 높이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내가 생각한 방식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에 지나치게 스트레스 받고 세상에 대한 원한을 가지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좋은 일이 아니다. 내가 세상의 현실의 복잡한 변인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즉 나의 생각의 폭이 좁기 때문에 세상이 내 생각대로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나의 좁은 생각의 폭 안에 세상이 들어온다면 그 세상은 나만 자유롭고 다른 모든 사람의 자유는 억압되는 곳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이 내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전제는 사실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가지게 되는 전제이다. 그런데 인간 누구나 가지게 되는 전제이기도 하다. 세상을 원망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려면 이 전제로부터 놓여 나야 한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전제로부터 얼마나 빨리 졸업하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길 바란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박탈하고 싶어 하는 셈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이 세상을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한 것 같다.

생각해보라. 모두의 자유를 존중하려면 이러한 모습의 세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에 조물주가 계시다면 그 조물주는 이 피조물들의 자유를 지나치다싶게 인정해주는 조물주이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의 자유의지까지 인정해주니 말이다. 원칙적으로 누군가의 자유의지가 다른 누군가의 자유의지를 제한할 수 없게 만들어놓지 않았는가 말이다. 물론 세상을 사는 인간들이 이러저러한 사회제도로 누군가의 자유의지는 쉽게 실현되도록, 누군가의 자유의지는 쉽게 실현되지 않도록 구조화해놓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나는 세상의 일부고 세상과 나를 비교해볼 때 극히 미미한 변인일 뿐인 나의 마음에 맞게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스스로에게 되뇌자. ‘세상은 나보다 큰데 어떻게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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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사고’에 빠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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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었으면 좋겠고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를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누구나 가지는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이다. 나는 이를 ‘100% 사고’라고 부른다.

우리는 100%를 바란다. 한 명이라도 나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 얼마나 괴로워지는가를 생각해보라.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세상 모든 사람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심리학에서 비합리적 전제라고 정리해놓은 것 중에 특히 중요한 것에는 다음 4가지가 있다.

1. 인간은 모든 사람에게서 항상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2. 인간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유능하고 성취적이어야 한다.

3. 어떤 사람은 악하고 나쁘며 야비하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비난과 저주와준엄한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4. 일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은 끔찍스러운 파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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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issus, Caravaggio(1573~1610)

Narcissus, Caravaggio(1573~1610)

내가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그런데 분명히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 굉장히 신경이 쓰인다. 이런 내용을 강의하러 다니는 나 자신도 전체적으로 상당히 좋은 강의평가에 한두 명이 약간만 안 좋은 소리를 해도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의 마음 생김새가 그러한 모양이다.

물론 선천적으로 이러한 100% 사고에 잘 시달리지 않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100% 사고에 매이지 않는 사람보다는 매이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사실 이 100% 사고는 스트레스의 원천이다. 이 100% 사고만 하지 않아도 많은 심리적 부담을 덜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80%에 만족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80%에 만족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잘 비판해내지 못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잘 비판해낸다. 그런데 그 나의 비판력으로 타인을 보면 타인에게서는 약점을 엄청 많이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나는 내가 원하는 부분을 채워주지 못하는 타인을 보며 실망하게 된다. 자칫하면 우리는 80점인 사람을 -20점으로 대하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의 마음에 안 드는 점에 주목하다보면 나의 장점은 모두 잊고 마치 내가 단점만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80%에 만족하자는 생각은 사실 사람들이 말하는 ‘팔자’라는 것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을 통해서 할 수 있었다. 팔자(八字)라는 것은 나의 생년월일시에 오행, 즉 화수목금토의 다섯 종류의 글자가 모두 8개 정해지는 것을 말한다. 연월일시 4가지의 갑자에 해당하는 오행이 무엇이냐에 따라 나의 팔자가 확인된다. 그런데 이 오행의 다섯 글자가 골고루 들어가는 것이 좋은데 칸이 8개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8개의 글자밖에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다섯 글자를 골고루 2개씩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팔자를 산출하는 방식에서도 인간에게는 아쉬운 부분,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팔자 산출 방식을 보며 ‘인간에게는 100%가 불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는 학문상의 객관적인 근거는 없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생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은 타인에게는 100%를 요구하면서도 자신에게서는 약점을 보지 못하기 쉬운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다. 인식의 편향성에 따라 자신은 100%가 아니면서도 타인에게 100%를 요구하게 되면 인간관계에서는 갈등만 커질 수밖에 없다. 서로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라며 상대방의 단점에만 골몰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야스퍼스(Jaspers)의 말대로 타인이 신이나 성자 같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요구는 모든 관계를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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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괴롭히는 완벽에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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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의 허상은 늘 우리를 괴롭힌다. 만약 스스로에게 어떠한 부족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는 혹시나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끝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잘못된 전제가 우리를 고통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언젠가 집근처 골목을 지나면서 수도 없이 틀리는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되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니 틀리는 부분이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더 세월이 지나니 이제는 몇 개의 음만 빼고는 틀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드디어 전혀 음이 틀리지 않는 연주를 기대해볼 수 있게 되었는데 결국 나는 완벽한 연주를 듣지 못했다. 하도 연습하는 것을 듣다 보니 나도 같이 연습하는 심정이 되었고 완벽하게 연주되는 것을 꼭 한 번 들어보고 싶었지만 연주하는 사람이 꼭 한두 음에서 틀리곤 했다. 한 두 음만 틀리지 않으면 되는데 틀리고 말 때에는 듣는 내가 다 안타까운 심정이 되곤 했다.

ⓒhttp://anngabriel.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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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엄청난 연습량을 목격하며 도대체 피아니스트들은 평생 동안 완벽한 연주를 얼마나 하게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피아니스트들이 곡을 연습할 때 틀리지 않고 연주하는 경우보다는 틀리면서 연주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틀릴 때마다 틀린다고 괴로워한다면 그 사람은 제대로 연주 연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연습과정에서 수많이 틀려봐야 연주회에서 틀리지 않고 연주해낼 수 있을 것이다. 설사 당일에 틀리지 않고 연주를 해도 연주한 당사자는 음은 틀리지 않았지만 어느 부분에서 연주기법 상의 실수가 있었다면서 또 괴로워하겠지만 말이다. 삶이 이렇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도 어딘가에서는 문제가 발생한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와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의 확률게임은 0.0001 vs 99.9999의 게임인 것이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수도 없이 시도하고 결과를 마음에 안 들어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시도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자기가 원하던 것과 조금 비슷한 결과를 얻게 되면 어느 정도 기뻐하고, 그러면서도 또 아쉬워하고…. 완벽한 연주 한 번을 하기 위해서 연주자는 수없이 틀린 연주를 하며 그 틀린 음들을 견뎌야 한다. 틀린다는 사실 자체를 견뎌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완전히 틀리지 않게 연주하기 전에는 연주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그것은 실질적으로 연주를 아예 하지 않겠다는 소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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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자본론 강독]-14

제 6 장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정리 : 김성심

 

 

앞에서 화페의 가치변화는 화폐 그 자체에서는 일어날 수 없고 또 상품의 재판매로부터도 발생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가치변화는 오직 그 상품의 사용가치로부터 다시 말해 그 상품의 소비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상품의 소비로부터 가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화폐소유자는 유통 분야의 내부 즉 시장에서 그것의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상품[즉 그것의 현실적 소비 그 자체가 가치의 창조로 되는 그러한 상품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노동능력 즉 노동력이다.

“노동력 또는 노동능력이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 속에 존재하고 있는, 또 그가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를 생산할 때마다 운동시키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의 총체를 가르킨다.”(219쪽)
 
 

A. 화폐소유자가 시장에서 노동력을 상품으로 발견하기 위한 조건은?

 

– 노동력의 소유자가 그것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만 한다.
– 노동력의 소유자가 그것을 상품으로 시장에 내어 놓아(을 수밖에 없어야)야만 한다.
 
 

B. 어째서 자유로운 노동자가 시장에서 화폐소유자와 대면하게 되는가?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연이 한편으로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를 낳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 노동력만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낳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계는 자연사적 관계도 아니며 또한 역사상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사회적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과거의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며, 수많은 경제적 변혁의 산물이며, 과거의 수많은 사회적 생산구성체의 몰락의 산물이다.
– 생산물이 상품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생산자 자신을 위한 직접적 생활수단으로 생산되어서는 안 되는데, (…)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아래에서만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자본의 역사적 존재조건은 결코 상품유통과 화폐유통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며 잉여가치의 생산가치 이다.”
 
 

C. 노동력이란?

 
–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가치를 가진다.
–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 노동능력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노동능력의 유지에 필요한 생활수단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 노동력의 판매에 의한 사용가치의 형식적 양도와 구매자의 현실적인 발휘는 시간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어 구매자의 화폐는 대체로 지불수단으로 기능한다.
– 화폐소유자가 교환을 통해 받는 사용가치는 노동력의 현실적 사용, 즉 노동력의 소비과정이라는 알 수 있으며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며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