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발전한 문자[철학을다시 쓴다]-24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발전한 문자[철학을다시 쓴다]-24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난번에 제가 이야기했죠.?지역 탐사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거래를 원만히 성사시켜야 하니까 다른 나라의 언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이렇게 해서 여러 나라 사이의 문화 융합이 일어납니다.?가치관이나 종교형태가 저마다 다르고 기록하는 방식들도 이집트사람이 기록하는 방식과 중국 사람이 기록하는 방식이 다 다른데 각 지역의 특수한 언어를 아우를 수 있는 일반 소통구조,?사람들 의식에 어떤 공통치가 있느냐 하는 것을 연구하다 보니까 언어학에 대한 관심과 일반 문법에 대한 연구들도 생겨나죠.

여러분들 가운데?‘뿌리 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본적이 있습니까??그 잡지를 보면?‘1976년’을 글자로 어떻게 표기했습니까??그냥 우리 한글로?‘천구백칠십육년’이라고 표기했습니다.?사람들이?‘6’을 써놓고 거기에 월을 붙일 때‘유월’이라고 읽어야 하는데, ‘육월’이라고 읽고, ‘3살’이라고 써놓고?‘세살’이라고 읽지 않고?‘삼살’이라고 읽는 일이 있습니다.?아라비아 숫자로 쓰인 글을 보고 하나,?둘,?셋,?넷,?하루,?이틀,?사흘,?나흘 이렇게 읽지 않고 일일,?이일,?삼일,?이런 식으로 읽는다고 개탄하는 분을 봤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답 없음)?사실 아라비아 숫자를 중국식으로 읽는 거죠.?그렇지 않습니까??일,?이,?삼,?사,?오,?육,?칠,?팔…?중국 한자를 우리식으로 발음한 것이죠.?아라비아 사람 탓이 아니죠??그리고 아라비아 숫자를 아라비아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안 읽죠??그러면 그것을 우리 방식으로 읽도록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거나 그렇지 않으면?‘뿌리 깊은 나무’처럼 정직하게 우리식 한자음인 천구백칠십육년으로 써야죠.?그런데 그걸 왜 아라비아 숫자로 쓰지 않았냐고 야단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왜 야단치겠어요??습관이 안 돼서 눈에 안 들어온다는 거지요.?이게 시각을 통해서 정보가 한순간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 건데,?이것은 도시사회에서 청각문화보다 시각문화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도시사회에서 문자가 발명되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정보가 시각화된 형태로 남아야 서로 믿고 의사소통을 원만히 할 수 있다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사람들이 시각 정보를 신뢰하고,?유기체와 함께 생겨나고 함께 사라지는 청각 정보에 대해서는 믿음을 잃었다는 것은 근본적인 사회변화의 출발을 알리는 현상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이집트를 방문한 그리스 사람들에게 이집트 사람들이?‘네오이’(neoi)라고 부릅니다. ‘네오이’라는 말이 뭐냐면?‘풋내기들’, ‘젊은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어린것들’이라는 뜻도 있지요.?문화의 지층을 두고 말하자면 표면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삶과 땅속 깊이 뿌리내린 사람들의 삶의 결이 다르다고 할까요??아마 이런 사실을 두고 한 말일 겁니다.

제가 초기에 그 이야기를 했지요.?생명의 시간,?모든 생명체의 몸을 관통하는?(의식이 있는 생명체는 의식도 관통하겠죠.)?그런 생명의 시간 가운데서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나누어지게 되는데,?농경민의 의식 속에서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하나였습니다.?달과 해의 순환이 자연의 시간을 규정짓는 것들이어서 자연의 시간은 순환하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하루해가 떴다 지면 하루가 지나고,?날마다 해는 동쪽에서 떠올랐다가 서쪽으로 지고,?달이 차오르고 기우는 것이 되풀이되어 한 달이 되고,?이십사절기를 지내서 한 해가 되고,?이렇게 순환하는 시간의 질서에 맞춰서 사람이 살아갔기 때문에 자연의 시간은 농경민에겐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유목 생활을 시작하는 집단이 나타나게 되면서 인간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에서부터 조금씩 갈라서게 된다,?목초지를 찾아다니는 동안 항구적인 계절을 유지해야 가축과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도려내서 그것을 항구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그래서 유목민의 경우엔 인간의 시간이 자연의 시간과 더불어 병행해서 나타나는데 그것이 완전한 독립변수로서 자리 잡지는 못했다,?그런데 해안도시 사회에 들어서면서 자연의 시간은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고 인간의 시간이 독립변수가 된다고요.?이 시간의식의 변화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입니다.?여러분들이 현재 알고 있는 시계로 측정하는 시간,?유클리드기하학적인 공간,?이런 게 전부 인위적인 시공간입니다.?자연에 바탕을 둔 시공간이 아닙니다.?아이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에 나오는 우주공간도 자연적인 공간이 아닌 인위적인 공간입니다.?여러분들은 하도 많은 학자들이 떠들어대서 이런 공간들이 실재하는 걸로 착각하기 쉽지만,?그런 시공간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운동을 규제하는?‘정지하는 것은 정지해 있고 마찰이 없는 한 움직이는 것은 일정한 속도로 수평운동을 한다’(관성의 법칙). ‘무게를 지닌 것은 중력에 의해서 낙하 운동을 한다’(중력의 법칙).?이런 이론들 모두 실재하는 운동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법칙으로 보기 쉽습니다.?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제가 여러분들 귀에 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현대인들이 받아들이는 인위적인 시공간 개념은 실재하는 시공간을 반영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이 이야기는 서양의 과학체계를 뒷받침하는 모든 가정들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저로서도 아주 조심스러운 화제여서 시간이 있으면 나중에 더 자세한 보충설명을 하겠습니다.

 

가네코 후미코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철학자의 서재]

가네코 후미코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철학자의 서재]

박종성(호원대학교 외래교수)

 

짧은 삶과 옥중수고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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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가네코 후미코 지음, 정애영 옮김, 이학사 펴냄)ⓒ이학사

이 책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정애영 옮김, 이학사 펴냄)는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에서 쓴 글이다. 그러니까 옥중수고인 셈이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이들이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아나키스트 박열의 동지이자 부인이었다고 한다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박열의 부인이자 동지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의 삶에 공감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으로서 혹은 부모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또는 세상을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녀가 옥중수기를 쓴 목적이기도 하다. 그녀는 23살이라는 짧은 생을 감옥에서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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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그녀의 연보를 보면, 그녀의 삶이 얼마나 처절하고 불행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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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1903년 1월 25일에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는 1903년생이나 실제 나이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그가 6살 무렵 아버지와 이모가 정을 통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아버지가 끝내 이모와 집을 나가자 어머니는 대장장이와 동거를 하였고, 대장장이와 헤어지고 난 뒤엔 항구의 노역꾼과 동거를 한다. 다음해 노역꾼인 고바야시의 고향으로 이주하여 고바야시의 형수의 친정집 오두막에 살기 시작하였고 그 다음 해인 1911년 고바야시와 헤어지고 외갓집으로 이사한다. 어머니는 후미코를 친정에 두고 잡화점을 하는 후루야 쇼헤이와 결혼한다. 그녀는 그때까지 무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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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에 그녀는 외할아버지의 5녀로 입적하여 친할머니가 사는 조선 충청북도 청주군(현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의 고모집으로 가서 살게 된다. 1915~1917년 부강공립심상소학교,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감동하였고 7년에 걸친 식모살이를 벗어나 야마나시의 외갓집으로 돌아온다. 그 다음해에 도쿄에 사는 작은 외할아버지의 집으로 옮겼고, 신문 보급소에서 생활하며 신문을 팔면서 영어 학교와 겐슈학관에 다녔다. 또 그해 연말까지는 도쿄 유시마의 신하나 초에 셋방을 얻어 살면서 가루비누를 팔았고 사탕가게 주인집에서 식모살이를 하였다. 그동안은 학교를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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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경이 조선인을 해치고 있다.

일본 군경이 조선인을 해치고 있다.

1921년 사회주의자 호리 기요토시의 집에서 일하며 기숙하였으나 호리의 생활방식에 염증을 느꼈고, 결국 작은 외할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일을 도우며 학교를 다녔다. 그때 사회주의자들을 알게 되고 사상을 접한다. 1923년 간토대지진이 일어나고 이것이 조선인 때문이라는 유언비어가 돈 것을 계기로 조선인이 6000~8000명이 학살된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대학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불령선인의 비밀 결사 사건’을 발표한다. 이 대중 조직에 박열과 후미코가 있었다.

1925년 후미코는 예심판사가 요구한 전향을 거부한다. 대심원으로 넘어가면 사형을 선고받는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26년 후미코는 박열과 결혼신고서를 구청에 제출하고 그 해 7월 23일, 그녀의 나이 23세에 형무소에서 목매달아 죽는다.?

다른 옥중수고와는 달리 이 저작은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자신의 삶을 모두 지워버리고자 쓴 것이다. 후미코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전 생활의 폭로이며 말살입니다. 저주받은 나 자신의 생활의 마지막 기록이며 이 세상을 하직하는 유품입니다. 아무 재산도 없는 나의 유일한 선물로 이를 택하(宅下, 수형자자 소지품이나 영치물 등을 친족에게 인도하는 것)합니다.” (7쪽)?

 

또한 그녀는 이 옥중수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로서는 누구보다도 이 세상의 부모들이 이것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아니, 부모들뿐만 아니라 사회를 좋게 하고자 하는 교육가, 정치가, 사회사상가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읽어주면 좋겠다.” (18쪽)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읽기를 그녀는 바랐던 것이다. 우리는 누구의 부모이거나 사회를 좋게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수기를 읽기 바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수기를 읽으면서 그녀가 자주 간절히 목 놓아 외치는 단어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과 그 이후에 사회주의 사상가들,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더욱더 자유에 대한 갈증이 확장되고 깊어짐을 느낀다.

그렇다면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 삶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희망했는지, 처참한 삶은 그녀로 하여금 어떤 이념을 자극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녀의 글 속에서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고 자신의 삶 전체를 음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노예의 삶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후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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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옥중수기는 참으로 슬펐다. 이런 사건도 있었다. 후미코는 친할머니 집에 살면서 식모로 일을 했다. 나물을 삶다가 솥을 깨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할머니는 그 솥 값 1엔 20전을 내라고 하였다. 할머니 집에 와서 식모로 일하면서 딱 한 번 10전을 받은 적 밖에 없던 후미코는 그 돈을 낼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그 솥 값은 일본을 떠나올 때 전별금으로 받은 12,3엔의 돈에서 변상하였다. 할머니 젓가락이 부러진 날은 “정초부터 웬일이냐. 후미, 넌 내가 죽어버리기를 비는 모양이구나. 좋아 단단히 기억하고 있으마.”(101쪽)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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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들이 생기면 후미코는 늘 아침에 밥도 먹지 못하고 겨울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벌을 받았다. 그 상황을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겨울 아침의 추위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저녁에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 추위와 피곤으로 얼굴은 나무판처럼 딱딱해지고, 다리는 막대기같이 굳어지고 저렸다. 꼬집어도 감각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배는 고파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103쪽) 그는 이러한 벌을 받은 뒤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이라도 사죄를 해야 했고, 할머니와 고모의 위엄을 위해 ‘앞으로는 절대로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맹세해야 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이러한 경험은 끝이 없었다. 그의 나이 12살 정도였다. 그는 이러한 체험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라. 자기 행동을 남에게 맹세케 하지 말라. 그것은 아이로 하여금 책임감을 빼앗은 일이다. 비겁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음에도 행동에도 겉과 속이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누구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남에게 약속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행위를 감시인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자신의 행위의 주체는 완전히 자기 자신이어야 함을 자각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사람은 누구도 속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진실로 떳떳하고?자율적인 책임감?있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104쪽)

 

그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자율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징벌을 두려워하게 되면서 접시 하나를 깨도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이러한 자율적 인간에 대한 그리움은 그녀를 언제나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늘 불안했고 겁에 질려 있고 차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그녀는 이 수기를 부모들이 읽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렇다. 위의 후미코의 말은 부모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아이를 자율적인 주체로 성장하게 만드는 일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인간이 아닌 자신의 행동에 자신이 책임지는 그러한 인간, 행위의 주체가 되는 인간, 그리하여 어떤 이들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진실로 떳떳한 자율적인 책임감을 지닌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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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미기_유럽2013.01 396그녀의 또 다른 경험도 소개해 볼 필요가 있다. 외할머니와 고모의 집에서 식모로 착취당하며 모든 아이들이 하는 생활을 금지당한 후미코는 어른이 되어 길가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게 된다. 거기서 아이들의 엄마가 달려와 기모노가 더러워지니 놀이를 하지 말하고 야단치는 장면을 본다. 아이는 놀이에 빠져 그만두려 하지 않으려 했고, 엄마는 울부짖는 아이를 억지로 잡아끌고 갔다. 그것을 보고 후미코는 마음 속으로 외친다.

 

“왜 그렇게 무리는 하는 거죠? 당신은 대체 아이가 귀한가요, 기모노가 귀한가요? 아이는 기모노를 위해 있는 게 아니랍니다. 아이를 위해 기모노가 있는 거죠. 그렇게 때 타는 게 무서우면 좋지 않은 허름한 기모노를 입혀놓으면 되잖아요.

어른은 자신의 체면이나 안락을 위해 아이를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어른은, 특히 어머니는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지키고 아이의 재능을 키워주는 게 일입니다. 아이의?자유(강조는 필자)를 빼앗고 아이의 인격을 빼앗는 것은 엄청난 죄악입니다. 아이를 자유롭게 놓아두세요. 자유의 천지에서 뛰어노는 건 자연이 아이에게 준 유일한 특권입니다. 그래야만 아이는 무럭무럭 인간다운 인간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128쪽)

 

그가 바라는 인간의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였다. 그리고 자유는 아이들의 유일한 특권인 것이다. 아이들은 자유를 먹고 자라나는 존재다. 따라서 그녀에게 자유의 억압은 가장 큰 죄악이었다. 이것은 아나키즘의 핵심적 주장과 같다. 물론 아나키즘이 자유방임을 허하는 논리가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의 자유, 그야말로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오히려 인간이 자본으로부터 착취당하는 자유를 옹호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이러한 자유와는 구분하여 그의 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녀는 스스로의 비참한 삶을 통하여 인간이 착취 받고 이웃이 고통 받는 것을 슬퍼하였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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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결코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가 얼마나 아이들의 자유를 질식시키고 있는지 다시금 반성해야 한다. 후미코는 할머니와 고모에 의한 고통과 위엄에 질식당한 자신의 모습 속에서 절절히 자유를 외치고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찾고자 했다. 타인의 노예가 아닌 자기 자신의 삶 말이다. 이러한 그의 말은 우리에게 공명한다. 그것은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보편성에 억압된 자아가 아니라 개별적인 자아에의 희구, 자율적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처절한 삶의 반성과 실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옥중수고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또 다른 것은 그의 문체다. 그는 화려하거나 추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지 않는다. 옮긴이가 인용한 쓰루미 슌스케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수기는 번역서에 떼어낸 추상어로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고 15년의 전쟁을 겪고도 별로 변하지 않았던 오늘의 일본 지식인들의 허를 찌른다.”(365쪽) 이 구절 또한 우리들에게 반성의 계기를 만든다. 우리는 추상적인 말을 통해서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는가? 비단 지식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사물과 사태를 이해하기 쉽게 하는 것은 중요한 글쓰기의 자세일 것이다.

 

이제 최초의 질문에 대한 고민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즉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이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녀는 수기를 마치며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나 스스로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단지 나의 반생의 역사를 여기에 펼쳐놓았으니 다행인 것이다. 마음 있는 독자는 이 기록으로 충분히 알아주리라. 나는 그것을 믿는다.”(353쪽) 그녀가 답을 하지 않은 이 질문에 대한 몫은 우리에게 남는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무엇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그녀의 삶을 둘러싼 시대였으며, 그녀의 삶을 둘러싼 가족이었고 교사였고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였다. 즉 그녀의 삶의 총체적 연관 속에서 그녀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더욱이 그것을 만든 것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이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러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제국주의로 전화하던 시기였다.

더욱이 다이쇼데모크라시로 명명되는 ‘안으로는 입헌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를 표방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3.1운동에 감동한 그녀는 삶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었다. 이렇듯 그녀의 처절하고 짧은 인생, 불꽃처럼 살다간 삶, 지지리 운도 없는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받아 안고 무엇에 공감하고 무엇에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그것은 이 슬픈 옥중수기의 저류에 흐르는 그의 희망이고 행복한 인간의 지향점이다. 그것은 자율적인 인간을 꿈꾼, 가족에 버림받고 가족에 착취당하며 놓고 싶지 않던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자 온전히 자신의 삶을 찾고자 했던 23년의 짧지만 결코 짧지 않은 삶이다. 그녀는 예언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며 수기를 마친다.

 

“머지않아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은 현상으로서는 멸해도 영원의 실재 중에는 존속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 그녀는 현상으로는 죽었지만 사상의 기억, 삶의 치열함과 그녀의 삶 자체는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그녀의 옥중수기를 읽으며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아를 찾아가는 그 고단하고 치열한 삶, 그것은 우리가 그녀의 삶 속에서 보다 따듯한 가슴으로 받아 안아야 할 영원의 실재가 아닌가!

그의 글을 읽다보면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자유’다. 어린 시절 자살을 시도하다가 그녀는 ‘내 안에 살아 있는 생명’, ‘생명의 의욕(意慾)’을 느끼고(150쪽), 이후에 그녀는 자신의 진실한 목적은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나 자신의 생명을 고양’시키는 일이었다고 서술한다.(221쪽)

그녀는 자신이 동정의 마음을 갖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쓴다. “나는 돈 있는 사람에게 혹사당하고, 가혹한 대우를 받고, 괴롭힘에 짓눌리며, 자유를 빼앗기고, 착취당하고, 지배받아왔다.”(304) 인간에 대한 공감을 자신의 비참한 삶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삶을 공감한다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다. 그것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을 통해 타자를 보고, 타자를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타자에 대한 공감은 다시 또 다른 이들의 삶을 공감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베르그송과 헤겔을 알게 되었다. 또 무엇보다 자신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로 슈티르너, 알티바세프, 니체를 들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실제로 그즈음 나는 그것(꼭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희망에 불탔던 나는 고학을 하여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왔다. 하지만 나는 지금 확실히 알았다. 지금 세상에서는 고학 같은 것을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될 턱이 없다는 것을. 아니 그뿐이 아니다. 소위 훌륭한 인간만큼 하찮은 것도 없다는 것을. 남들이 훌륭하다고 하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나는 남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진정한 만족과?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나는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타인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자의 장난감이었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나 자신의 일을 말이다. 그러나 그 나 자신의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알아서 그것을 실행하고 싶다.”(334-335쪽)

 

그녀는 삶의 목적이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며 타인의 노예로 살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녀는 사회주의 사상가, 혹은 아나키스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어린 시절부터 희망하고자 했던 자유의 추구를 더욱 확고하게 삶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진정한 자신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들은 아이들을 부모의 욕망을 관철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고민과 결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하고는 있는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찾고 희망하고 실천하고 있는 그러한 인간을 그녀는 추구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러한 삶의 추구는 타자에 의한 욕망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살면서 마치 그 욕망이 자신의 욕망이듯이 간주하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타인의 노예가 아닌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것, 그것은 더 많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처럼 자문한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녀는 이 물음에 자신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금 다음과 같이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혹은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이러한 물음의 중요성은 나의 행동 당신들의 행동과 말이 타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은 관계성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상호영향을 강하게 미치고 있는 존재이다. 이것을 가슴 깊게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과 타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데 모든 힘을 쏟으며 살아갔던 후미코의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자문해야 한다. 정말로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1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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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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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오스트리아 의사 및 정신분석학자로 개인 심리학을 세웠다.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오스트리아 의사 및 정신분석학자로 개인 심리학을 세웠다.

지금 발현되고 있지 않은 자신의 능력과 특성에 대한 잠재력을 마음껏 펼침으로써 우리는 궁극적으로 열등감을 우리의 창조성을 깨우는 연료로 사용할 수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이기고 더 괜찮은 나로 발전시키는 데 써야 할 것이다. – 아들러?

?현대인들은 남들과 다르기를 욕망하면서도 남들에게 뒤떨어질까봐 불안해한다. 광고는 “나는 달라요.” 하면서 남들과 달라보일 수 있는 물건을 구매하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물건을 같이 구매해서 남들과 같아진다. 남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하면 불안해하며 남들과 같은 물건을 가지려 하면서도 남들과는 달리 돋보이고 싶어 한다.

프랑스 철학자 르페브르(Lef?vre)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이라는 책에서 ‘일상성’이란 현대인들이 지겨워하면서도 놓치면 불안해하고 전전긍긍해하는 이상한 것이라고 했다. 일상성으로 인한 극도의 권태와 피로 속에서도 일상성에서 벗어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일상성은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벗어날까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복잡한 감정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남들에게 뒤떨어지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남들과 똑같이 도매금으로 취급되는 것도 싫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심리를 르페브르는 잘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르페브르는 일상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는 덧없음을 사랑하고 탐욕적이며 생산적이고 역동적이라고 진단한다. 유행과 같은 덧없음을 사랑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대해 늘 탐욕적이고, 이렇게 새로운 것을 갈구하니 역동적으로 생산해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인들은 현실에서는 자꾸 새로운 것을 찾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지속적인 것, 영원한 것을 갈구하게 된다. 핸드폰이 새로 나올 때마다 바꾸고 싶어지는 자신을 보면서 옆 사람이 나에게 진력낼까봐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나를 영원히 사랑해줄 사람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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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우리가 구매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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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의 소비 패턴을 보면 그 물건이 꼭 필요해서 사는 것만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은 기분 전환을 위해 쇼핑을 가는 경우가 많다.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 자체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패턴을 두고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인들은 기호가치를 얻기 위해 소비한다고 했다. 쉽게 말해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물건을 소유함으로써?얻게 되는 어떤 상징성 때문에 물건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꾸미기_2007_1~3저렴한 큐빅을 구매하지 않고 비싼 다이아몬드를 구매하는 데에는 기호가치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에는 ‘쉽게 살 수 없는 것’이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큐빅과 다이아몬드를 한 눈에 구분해내지 못하고 “그거 큐빅이야, 다이아몬드야?”라고 물으면서도 몇 백 배의 돈을 지불하고 다이아몬드를 구입하는 데에는 상징성이 개입된다. 이는 짝퉁과 명품을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명품가방을 들고 다니며 자부심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백화점에 가지고 가서 진품인지 짝퉁인지를 가려야 할 정도로 맨 눈으로는 진품과 짝퉁을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굳이 몇 십 배, 몇 백 배의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명품을 구입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명품에는 ‘아무나 들 수 없음’, ‘함부로 살 수 없음’이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엄청난 가격 차이를 감수하고서도 (그리고 명품과 짝퉁의 차이를 스스로 판별하지 못하면서도) 아주 높은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명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그래서 명품 마케팅의 비법은 가격을 올리는 것이라고도 한다. 가격을 올려야 더 잘 팔린다는 것은 비싸기 때문에 쉽게 구매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더 가지고 싶어진다는 구매심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원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명품의 상징성이다. 보드리야르가 현대인들은 상품의 구입과 사용을 통해 자신을 돋보이게 하며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위세를 나타낸다고 했는데, 명품구매는 이러한 소비 특성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례이다. 만약에 모두가 명품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어제까지 그렇게도 명품을 원하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명품에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남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바로 명품의 매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명품을 사는 행위에서 ‘남들이 사고 싶어하지만 함부로 살 수 없음의 상징성을 구매하는 것이고 결국은 ‘남들과의 차이’를 구매하는 것이다.

이는 부도 회사의 상품을 대하는 현대인들의 태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제까지 비싼 가격에 팔렸던 제품이 부도난 오늘 갑자기 덤핑 처리된다. 어제의 그 물건과 오늘의 그 물건이 다르지 않지만 품질도 변하지 않았고 기능도 디자인도 변하지 않았지만 어제의 가격과 오늘의 가격은 다르다. 이제 그 물건이 싸게 처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은 옛날과 같은 가격을 지불할 의사가 없는 것이다. (물론 AS를 받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가격 차이가 AS를 받을 수 없다는 단점으로 인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나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가격은 물건의 고유한 가치에 의해서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상황에 의해 매겨지는 것이다.

싸게 팔릴 것이라는 예측이 값을 싸게 책정하도록 하고 비싸게 팔릴 것이라는 예측이 비싼 가격을 책정하게 한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의 소비자들은 상품의 상대적인 사회적 위세 및 가치를 결정하는 의미작용의 질서에 지배받고 있다고 보았다. 부도 회사의 제품은 품질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이 가치결정의 의미작용의 질서에서 평가절하되는 제품이기에 선택될 가능성이 낮고 선택될 가능성이 낮기에 가격을 싸게 책정하는 것이다. 이 의미작용의 질서에서는 ‘쉽게 살 수 없음’, ‘남들이 부러워함’ 등의 요인이 높은 층위에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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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에 손상을 입은 현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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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제품을 한 번 사서 오래 쓰는 것이 미덕이 아니다. 새로운 제품이 나오고 그 물건이 소비되어야 시장체계가 역동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구매해야 시장이 성장하고 경제에 활력이 생긴다. 이러한 메커니즘 때문에 100만 화소 디지털카메라의 생산력을 확보하고도 5만 화소 디지털 카메라부터 팔기 시작하는 식의 기업의 행태가 일반화된다. 제품의 회전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물건에 대한 사람들의 인내력은 그만큼 떨어져간다. 불편함을 참으면서까지 기존의 제품을 쓰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기능이 있는 훨씬 더 편리한 제품이 늘 우리의 구매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모든 것이 빨리 변하는 시대, 그래서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이 없어진 시대에 나도 누군가를 인간으로 존중하기가 어렵고 나의 옆 사람도 나를 인간으로 존중하기가 어려워졌다. 사물이 주는 불편이 빨리 제거해버려야 하는 것으로 되어버린 시대에 사람이 주는 불편을 견뎌야 하는 이유를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옆 사람이 주는 불편을 견디지 않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옆 사람이 나를 불편해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게 된다. 사물과의 관계든, 사람과의 관계든 모든 관계가 인스턴트화하는 시대에 우리는 자꾸만 불안해진다.

인생 전체를 실업자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채워야 하는 현대인들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묻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가’를 묻는다.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조차 찾지 못한 채 방황한다.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인생의 가장 기초적인 물음조차 사치로 여기며 취업에 필요한 지식으로만 자신을 채워야 하는 상황이니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어떤 물건을 사고 싶은가는 알지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알지 못한다.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해 느끼게 되는 막막한 공허감과 고독감을 이기려고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물건을 산다. 공허감과 고독감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찾고 소비를 하지만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고 있음을 각자는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자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노력은 별 소용이 없다. 마음 저 밑바닥에서는 그런 노력을 통해서 채울 수 없는 공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꾸미기_성연현대인들은 공허감과 고독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무감각하고 느낌이 없는 상태에 처하기도 한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무감각하거나 느낌이 없는 상태는 마음속에 있는 불안을 느끼지 않기 위해 방어하는 상태이다. 불안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불안을 느끼는 센서 자체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소외된 채 살면서도 소외되어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상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불안하고 고독하고 공허하기는 한데 어떻게 하면 그 불안과 고독과 공허를 극복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공허감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제3자가 방향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기가 홀로 있지 않다는 위안이라도 얻고자 한다. 인간이 공허하고 불안해지면 혼자 있기가 두려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래서 텅빈 마음을 다른 사람이나 물건으로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이 현대인의 전반적인 특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 자존감과 힐링이 주요 화두가 되는 것같다. 서점에 가보면 대중서의 대부분은 자존감이나 힐링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는 역으로 현대인들이 그만큼 자존감에 상처를 입어 힐링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을 말해준다. ‘무한경쟁’이라는, 듣기만 해도 숨차는 단어가 난무하는 시대이니 그 무한경쟁에서 1등을 할 수 없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자존감에 손상을 입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지금의 사회에서 ‘나’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한 명일 뿐이다. 내가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다. 일자리가 모자라지 사람이 모자라지 않는 시대에 나에게 “너 아니면 안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우리는 너무도 그립다.

그런데 텅빈 공허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또 다른 공허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기대거나 친밀감을 느끼려 해도 그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공허한 각자 각자는 자신의 텅빈 내면 때문에 타인의 텅빈 내면을 들여다보거나 돌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면에 공허를 안고 있는 사람은 사랑으로 그 공허를 채우고 싶어 한다. 그렇게 자신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사랑을 갈구하기는 하지만 타인의 공허를 채우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사랑받으려만 하지 사랑하려 노력하지는 않기 때문에 사랑에 실패한다. 서로가 사랑을 달라고만 하지 사랑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서로 서로 사랑받지 못한다는 쓰라린 마음으로 지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악순환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친구가 되지 않고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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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의 윤리학에서 자유의 윤리학으로[대안도덕교과서]-1

금지의 윤리학에서 자유의 윤리학으로[대안도덕교과서]-1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청소년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결핍의 존재가 아니다

청소년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발전적 과정이다. 청소년은 어른이 아니지만 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자기 정체성이라는 말이 어렵지만 쉽게 말한다면 “나로서의 나다움을 갖고 나는 태어났다”는 뜻이다. 성숙함에서 볼 때 청소년은 어른만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다운 정체성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청소년 윤리학도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만약 어른이 청소년을 결핍된 존재로서만 일방적으로 다루려만 한다면, 그에 따르는 청소년 윤리학은 타이르고 훈계하고 지시하거나 못 하게하고 칭찬하거나 벌주는 등의 일방적인 규범윤리학이 될 것이다. 일방적 규범윤리학은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이기보다 어른을 위한 윤리학이 될 수 있다.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은 어른이 청소년을 주체적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은 청소년 스스로 미래를 찾아가도록 하는 범례를 제시하거나 청소년 스스로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게 하는 동반적 생활윤리학이다. 청소년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결핍의 존재인지 아니면 자기정체성을 지닌 존재인지는 어른이 청소년을 보는 관점이며, 이런 관점은 청소년 윤리학의 방향을 잡는 핵심이기도 하다.

 

2. 좋음, 착함, 선함

윤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착한 행동으로 이끄는 삶의 준칙이다. 이것이 윤리를 설명하는 언어적 정의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착하다는 것이 무엇이고 행동을 이끈다는 것에 대해서도 더 설명이 필요하고 그리고 삶의 준칙이라는 용어도 혹시 지나친 강령이 아닌지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행동을 자아내기 위하여 그런 착한 행동은 반드시 좋은 행동이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착하다는 것은 좋다는 것과 같은 뜻에서 나왔다. 영어로 말할 때는 다 같이 ‘굳’good이어서 별 문제없이 보인다. 그런데 우리말로 착한 것과 좋은 것을 말할 때 혹시 그 두 표현이 다른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선과 악이라는 대비된 말을 자주 들어보았을 것이다. 선이라는 표현은 추상적이어서 마치 저 높은 하늘에 존재하여 절대적인 도덕의 완성체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는 선도 역시 ‘굳’의 명사goodness로 쓰인 것이다. 영어로 말하면 다 하나거늘 우리말로 하면 ‘좋은’ ‘착한’ 그리고 ‘선善한’ 것처럼 다른 뜻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그 답을 말하자면 영어에서 ‘굳’은 사물이나 사람에게 같이 적용하여 사용하지만, 우리 국어에서는 ‘착한’이라는 표현은 사람에게만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이라는 수식어는 사람에게나 사물에게나 다 쓰고 있다. 윤리학은 사람의 행동을 문제삼는 것이지 물건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체계가 아니다.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좋음이란 결국 착함이 되어야 한다. 좋은 사람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다. 멋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 공부 잘 하는 사람, 건강한 사람, 인간관계에 능한 사람, 스포츠를 잘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착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여기서 어떤 학생이 질문할 수 있다. 어떤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착취되고 나쁜 일에 늘 이용당한다면, 그 착한 사람을 과연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가능하다. 그러난 이런 질문은 사물에 적용되는 좋음의 기준을 사람에 적용했기 때문에 생긴 의문이다. 이렇게 좋음을 해석한다면 인간을 위한 윤리학이 아니라 사물을 위한 윤리학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인간을 위한 윤리학을 원하며, 여기서는 특히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을 모색한다. 사람을 위한 윤리학에는 좋음이 바람직함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를 평소에 생각해 본 착한 사람은 나쁜 일에 자신을 이용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으로 자신을 이끌어야한다는 점에서 착하거나 좋거나 선이라는 말은 다 같은 뜻이다.

 

3. 바람직함

바람직한 행동은 또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것이 사람들 일반이 바라는 것과 같을 경우 나의 행동은 바람직한 행동이 된다. 여기서 사람들 일반이란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같은 경우 이를 바람직하다고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은 경험적 설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바람직함에는 대부분의 사람들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바라는 그런 바람직함이 있다고 한다. 그런 바람직함은 구체적인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형이상학 세계에 존재한다고 한다. 이런 설명은 형이상학적 설명이라고 한다. 우리는 경험적 설명을 먼저 살펴보려 한다.

경험적 의미에서 바람직하다는 것은 행동을 한 나 자신 말고 행동을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이 나의 행동을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기도 하고 혹은 나의 행동양식을 따라하기도 하는 그런 행동을 말한다. 그래서 바람직함이란 나의 특수한 관점이 아니라 남의 일반적 관점도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바람직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엄마와 갈등이 생겨서 한 동안 대화가 뜸할 때 엄마와의 화해의 표시로 엄마가 좋아할 듯한 행동을 시도한다. 평소 하지 않았던 방청소를 한다든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엄마가 나의 행동을 인정해주고 칭찬하다면 그런 나의 행동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바람직한 행동, 바람직스러움이라는 것은 내가 속한 가족, 학교, 지역, 사회, 국가가 일반적으로 원하는 것에 맞춰져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행동을 했지만 내 가족이나 학교 선생님은 의외로 나의 행동을 싫어할 수 있다. 이 경우 내가 좋아하는 행동유형과 집단이 원하는 바람직한 행동유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당황스러울 것이다. 다행히 우리 사회적인 인간은 성장하면서 사회가 원하는 바람직함에 대하여 자기의 행동유형을 조절해가는 탁월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조절의 연습기간이 바로 청소년기이다.

 

4. 모방하는 사회적 자아

청소년기는 바람직한 행동유형을 찾아가는 시기이다. 결국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라는 뜻이다.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바람직한 과정은 자기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판단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어른이 젖먹이 아이를 키우듯 벌과 상이라는 제도를 통한 일방적인 훈육의 윤리학이라면, 청소년 스스로의 자율적 판단으로 세상을 헤아리는 능력은 만들어지기 쉽지 않다. 아이들은 거울을 통해 어른을 바라보고 따라하면서 성장한다. 이미 교육은 학교 입학 이전부터 거울에 반사된 어른의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거울에 비춰진 모습은 고슴도치인데 토끼처럼 행동하라는 어른들의 강요된 윤리 책이라면 그런 윤리 책이 만 권이 된들, 우리들은 강요된 토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춰진 고슴도치를 자동적으로 따라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거울을 보면서 거울에 비춰진 모습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안다. 동물원에서 어느 정도 훈련된 침팬지 정도라면 모를까, 동물은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보고 자기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울을 향해 흥분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한다. 거울에 나타난 모습이 나임을 안다는 것은 인간다움의 기본이다. 그래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게 된다. 타인에 대한 의식은 윤리학의 출발이다. 왜냐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내가 다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첫째 나는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한다. 둘째 나는 남을 따라하면서 내가 성장한다. 즉 나는 남을 모방하면서 나의 자기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다. 그만큼 남을 모방하는 행위는 아주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아이는 어른을 모방한다. 우리 모두는 타인을 모방하면서 타인과 함께 하려는 의식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특히 우리 청소년은 어린이와 달리 또래와 어울리기를 시작한다. 또래 어울림은 이제 부모의 그늘아래서 벗어나서 스스로 정체성을 시험하는 중요한 성장단계이다. 또래집단의 특징은 내가 또래들의 친구들을 모방하면서 동시에 남의 모방을 서로 받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또래 모임의 출발은 나도 어엿하게 남의 거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데 있다. 나는 이제 남의 거울이 되어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비춰지는 지를 자각하고 그에 따라 나를 잘 가꾸어간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남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것을 나도 따라하게 되는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나의 사회화 과정이며 나의 나다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러나 또래와 어울리는 시간은 시행착오를 포함한다. 사회적 거울을 통해 타인에게 비춰지는 자아을 잘 닦는 시절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거울 자체를 부정하고 거울보기를 거부한다. 거울보기를 거부하는 시기에, 부모가 자기를 남과 비교하면 가장 싫고 가장 힘들어진다. 어찌보면 거울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다. 거울을 통해 자기가 남에게 비교당하는 그런 모습이 싫기 때문에 거울도 싫어진 것이다. 또래와의 시간은 이렇게 거울과 함께 하지만 어떤 때는 거울이 싫어지기도 하는 그런 기간이다. 즉 사회적 자아를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혼자서 만들어가는 나만의 자아를 추구한다. 모방을 통한 사회적 화해를 배우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만의 성곽을 쌓는 개성을 만들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조절과 타협을 배우며 나아가 주체와 개성을 키워가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뜻이다. 개성을 만들어가는 시간은 창의성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화해를 만들어가는 시간은 도덕을 위하여 정말 중요하다. 사회적 자아와 창의적 자아를 결합시키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의 미래이기도 하다. 모방하기와 개성쌓기의 행동양식을 배워가는 통로가 바로 청소년 윤리학이다.

 

5. 규범은 절대적인가

그런데 윤리가 딱딱하면 윤리는 사람 행동을 바꿀 수 없다. 윤리적 규범, 윤리 행동강령이 윤리적 강요로 된다면 너무 무서워 겉으로는 응하겠지만 속으로는 상황을 피할 궁리만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응대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윤리는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이어야 한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 같은 유명한 철학자는 윤리적인 마음이 원래부터 사람 마음속에 구비되어 있어서 자발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동양의 맹자 역시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누구나 다 자동적으로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고 말했다. 강요된 윤리가 아니라 상황을 잘 맞추어준다면 자동적으로 윤리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은 그런 마음이 속에 깊이 감춰져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평소부터 생활 속에서 윤리적 행동규범의 연습이 필요하다. 윤리적인 마음 혹은 측은한 마음이 곧 올바른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측은함을 느끼는 마음이 나의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는 생활의 연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올바름과 선함이 같은 것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올바름 역시 바람직함처럼 나 자신만의 문제이기보다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많은 여러 윤리학자들은 말한다. 철학적으로 반성한다면, 한 특정한 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정치지도자들이 올바른 행동의 규범을 지나치게 많이 가르치려 든다면 그 올바름이란 반드시 좋은 윤리가 아닐 수도 있다. 정말 올바른 행동 혹은 올바름이란 좋음이나 선한 행동에서 자동적으로 유발되기 때문에 억지로 가르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문명인으로서 올바른 행동양식은 상호간 다양한 약속들의 체계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약속을 존중한다는 행동규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길거리 신호등 지키기, 껌밷지 말기에서부터 인터넷 에티켓이나 공공장소에서의 금연, 전철안의 사회적 예절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행동규범은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 십년 전에는 식당에서 흡연이 부정한 것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 공공장소 흡연은 옳지 않은 행동의 표본이다. 시대와 문화의 차이에 따라 올바름의 기준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착함이나 좋음의 기준도 문화적 차이에 따라 바뀌는 것인가? 이에 대한 생각은 윤리학자마다 다를 수 있다. 우리 책 본문에서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6. 즐거운 윤리 : 자유 윤리학

결국 외부에서 강요된 딱딱한 윤리보다 내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윤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외부로부터 강요된 윤리를 종속윤리학이라면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윤리를 자유윤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자유윤리학을 내 삶의 토대로 만들어야 한다. 자유윤리학을 위하여 윤리규범에 따르는 나의 행동은 즐거워야 한다. 규범에 따라서 행동하기는 하지만 나의 행동이 억지스러워 짜증나기만 한다면 그런 윤리는 진정한 윤리행동이 아닐 것이다.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고통일 뿐이며, 이런 종류의 고통을 피하려는 것은 인간의 성향이다. 짜증나지 않는 윤리는 결국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결정한 행동을 하는데서 만들어질 것이다. 짜증나는 윤리보다 즐거운 윤리를 추구하는 것도 역시 사람의 상식적인 성향이다. 즐거운 윤리를 인생에서 구현하는 것이 곧 행복의 열쇠이다.

즐거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즐거운 상태란 고통이 적거나 거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아픔과 즐거움 사이에는 칼로 베듯 선명한 구획이 없다. 즐거움을 갖기 위하여 그 전에 아픔이 동반되는 경우도 있다. 청소년에서 청년에 이르는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갈등과 고민을 한다. 방황과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기정체성을 조금씩 확보해간다. 그런 아픔을 뚫고 새로운 즐거움이 잉태될 수 있다. 현재의 아픔이 아프더라도 미래의 즐거움이 예상되고 이 아픔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이 아픔은 아픔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변신한다. 반면에 혀에 달콤한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충치와 당뇨 그리고 비만의 원인이 된다면 그 달콤함의 즐거움은 고통의 씨앗이 될 것이다. 즉 즐거움과 아픔의 차이는 내가 스스로 선택한 나의 자율적 행동에 달려있다. 다시 말한다면 나의 짜증은 내가 하기 싫은 것은 억지로 하기 때문에 생긴 고통의 감정이지, 그 행동을 유발한 대상에 짜증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종속 윤리학에 따르는 나의 행동은 아무리 선하고 바람직하고 올바르게 보여도 즐겁지 않으며, 결국 나의 미래를 행복하게 설계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이 약간은 힘들고 어렵고 아파도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대로 행동하는 그런 자유윤리학에 수반하는 행동은 결국 즐거움을 자아내게 한다.

무어(G. E. Moore 1873-1958)

무어(G. E. Moore 1873-1958)

올바름과 바람직함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행동규범이라면 좋음과 착함 그리고 즐거움 등은 나의 주체적 자유를 유발하는 심적 동기와 맞닿아있다. 무어(G. E. Moore 1873-1958)라는 20세기 초 유명한 윤리학자가 있었다. 그는 윤리학의 많은 기준들이 자연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좋은 사과라고 말할 때 ‘좋음’이라는 것이 마치 사과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음, 착함, 선함은 곧 자연적인 대상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 안에 있는 심리적 판단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미적인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이란 어디에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실제로 나의 감정이 어떻게 발현되는가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많다. 이런 입장은 상대주의 윤리학의 극단적 경우이다. 이런 상대적 입장도 있지만, 최근에는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대한 대체로 일반적인 기준이 우리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과학적 주장들도 많다. 문화양식이나 역사적 변화에 따라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입장을 상대주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우리 문화나 관습에 관계없이 보편적인 기준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입장을 절대주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이런 기준은 윤리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좋음의 기준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다른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윤리학 이론이 있으며, 인간사회와 무관하게 좋음의 절대적인 윤리법칙이 존재한다는 절대주의 윤리이론도 있다. 좋음이라는 것이 나만의 느낌 혹은 공유된 느낌이라면 그런 좋음의 기준은 주관적이거나 상대적인 나의 마음에 소속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나아가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느낌에 의존한 것이라면 그런 윤리는 간주관적 혹은 공리주의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절대주의 윤리학은 느낌이나 정서 등의 인간의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윤리법칙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며, 형이상학적 윤리학이 여기에 속한다.

윤리학의 이론들은 이렇게 복잡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나 자신의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해주는 실질적인 윤리가 필요하다. 나 자신으로부터 형성된 동기에 의한 행동 준칙이어야 한다. 나로부터의 동기만이 지속적인 자발적 행동을 이끌 수 있다. 그런 행동을 자발적 행동이라고 부른다. 자발성에 의한 행동준칙들이 바로 자유윤리학의 기초이다. 이런 자유윤리학에 기초한 청소년 윤리학은 크게 두 가지 삶의 안내서를 제공한다. 하나는 욕망에 대한 안내서이며 다른 하나는 행동에 대한 안내서이다. 먼저 욕망에 대한 삶의 안내서를 살펴보자.

금지의 윤리학에서는 모든 욕망적 행동을 금지해야 한다는 규범만이 있다. “신발을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 “껌을 씹어서는 안 된다”, “떠들어서는 안 된다”, “10등 안에 들도록 공부를 해야 한다”, 등의 행동제약 규범은 많은데 내가 자율적으로 하는 행동안내는 없다.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윤리학 전체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렇지만 욕망을 스스로 다스리는 일과 욕망을 누구에 의해서 금지되는 일은 다르다. 욕망이 누구에 의해서 금지되는 그런 금지의 윤리학은 권력의 종속된 윤리학일 수 있다. “너는 오늘부터 날마다 매점에서 우유를 사다가 책상위에 놓아야 해” 라는 명령의 윤리학은 명령자의 욕망의 권력을 채우기 위하여 나의 욕망을 금지하는 일과 같다. 욕망은 나쁜 것이어서 제거되어야 할 무엇이라는 식으로 윤리학이 구성되었지만 그런 윤리학은 진정으로 삶의 행복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욕망은 한편으로 문화적 창의성을 생산하는 끊임없는 생명의 힘이기 때문이다. 금지의 윤리학으로 욕망을 금지시킬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 금지된 욕망 속에 창의성을 낳는 욕망도 같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금지의 윤리학이 아닌 자유의 윤리학이 필요하다.

도시사회에서 의사소통 수단의 변화[철학을다시 쓴다]-23

도시사회에서 의사소통 수단의 변화[철학을다시 쓴다]-2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난번에 농경민과 유목민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화,?의식,?관습 이런 것을 이야기했는데,?오늘은 도시사회 중에서도 전제군주가 다스리던 행정도시가 아니라 이오니아 식민지라는 지중해 해안도시에서 성립한 도시사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멈췄습니다.?제가 농경사회에서는 시간을 두고 쌓은 경험이 지혜의 함수가 되고,?유목사회에서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된다고 그랬죠.?그러니까 시간적인 경험의 축적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사회가 있고,?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사회가 있는데,?최초의 서양식 철학자인 탈레스가 태어나고 활동했다는 이오니아 지방의 식민지인 밀레토스,?이런 상업 중심의 도시사회에서는 실제로 두뇌의 회전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사회입니다.?물론 이 사람들은 뱃길을 통해 이곳저곳 많은 곳을 여행하고,?불평등 거래를 평등거래로 위장하는 데 필요해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그 지역 언어를 익히고,?말하는 최초의‘코스모폴리탄’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말하자면?‘세계인’들이죠.

지중해 연안 뱃길로 여러 군데를 다니면서 거래를 해야 하니까,?수시로 바다에 나가 장사를 하면서 자기들이 힘이 세고,?다른 사람들이 힘이 약할 때는 수시로 서로 노략질을 하는 해적으로 바뀌기도 하고,(호머 서사시의 주인공인 오디세우스도 해적선에 붙들려 가서 오랫동안 고생한 적이 있죠.)?때로는 떼강도로 바뀌기도 하고 때로는 장사꾼으로 거래를 하기도 하고 하는데,실제로 사업을 하는 사람이 대체로 도둑놈 기질이 있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혹시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상처되는 말이 아니기를 바랍니다.(하하.)

어쨌든 지난 시간에도 잠깐 이야기했습니다만,?조그만 해안도시에 아시리아인,?바빌로니아인,?리디아인,?페니키아인,?인도인,?이집트인 등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는데,?그 좁은 도시 공간 안에는 생산지가 없어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외부에서 의식주에 필요한 것도 끌어들어야 하고,?그 밖의 살림밑천이 될 만한 물건들도 끌어들여야 하는데,?그러기 위해선 내부 결속력이 생겨야 하고,?그것이 생기기 위해선 일정한 규율에 따라서 위계질서가 성립할 필요가 있습니다.?이?‘하이라키’(hierarchy)를 설립시키는 데 두 가지 계기가 작용할 수 있죠.?물리적인 강제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설득입니다.

‘폭력적인 국가 기구’와?‘이념적인 국가 기구’의 원초적인 형태가 이 도시에서 나타난다는 것,?어차피 도시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식민주의자의 습성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생산지에서 생산의 교란이 일어난다는 것은 도시민으로서는 목숨이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먹을 것이 제 때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도시 사람들은 굶어죽거나 도시를 떠나야 합니다.?생산지를 확보하고 생산물을 장악하는 것은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주변 생산 공동체를 설득해서 고분고분 양식을 내놓게 할 길이 막히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바로 이때가 폭력적인 국가 기구가 작동을 하는 순간입니다.?도시 거주자들은 외교관이나 교사 같은 설득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필요하지만 폭력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군대나 경찰도 그 내부에서 같이 길러 내야합니다.?살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시인들이 주변 생산 공동체를 식민화하는 작업은 불가피한 생존 조건이 됩니다.?한걸음 더 나아가 더 안정된 삶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해외식민지까지 두게 되는데,?델로스 동맹 이후로 아테네 제국주의가 걸었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습니다.(나중에 로마도 같은 길을 밟게 되지요.)

농경공동체에서는 마을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최소 단위였으니까 말로 소통이 가능했고,?유목민들도 소단위로 천막을 치면서 흩어져 다녔기 때문에 의사소통 수단이 말이었습니다.?그런데 지중해 연안의 광범한 지역에 장삿길이 열리고 삶터가 넓어지면서 말만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그 대안으로 글을 통한 의사소통이 요구되지요.?시골에서는 말과 행동이 다르면?24시간도 버텨내기가 힘듭니다.?유목사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나 도시인들의 삶은 대부분이 서로에게 은폐되어 있고,?거리로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말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길이 차츰차츰 막히게 됩니다.?서로 속셈이 달라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더라도 쉽게 가려볼 수가 없습니다.?말로는?‘그쪽에서 소 한 마리 보내면 여기서 곡식 세 말 보낼게’?하다가도 곡식을 구하기 힘들어지면 소 한 마리를 받고도?‘내가 언제 세말 보낸다고 그랬어??여기 흉년이라 한말 보낸다고 그랬지.’?하고 시치미를 떼면 할 말이 없거든요.?그러니까 계약을 글로 맺어야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온 거죠.

이렇게 세계의 온갖 생산물이 도시로 모이게 되면서 삶의 양식은 급속도로 바뀌게 됩니다.?단일 공동체에서는 생산하고 소비하는 양식이 비교적 단순합니다.?자산은 거의 모두 유기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농경사회에서 생산되는 것,?재산가치가 있는 것은 거의 모두 유기물이고,?유목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온갖 물류가 이곳을 거쳐 이동을 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는 도시사회에서는 상황이 바뀝니다.?돈으로 바꿀 수 있는 환전가치가 큰 무기물들이 유기물을 대신해서 도시인들의 자산가치를 무한히 부풀리게 하지요.

유기물이 의식주에 꼭 필요한 것인데도 교역품목에서 뒷전에 밀리고 무기물들이나 사치품들이 더 활발히 거래된 까닭은 어디 있을까요??유기물은 수요가 일정하지 않습니다.?도시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 보았자 곧 썩어버려서 하루아침에 자산가치가 없어져버리기도 하고 가격탄력성이 없어서,?이른바?‘한계효용의 법칙’이라는 기묘한 법칙이 작용해서 조금만 공급이 넘쳐버려도 똥값이 됩니다.?유기물은 도시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만 공급받으면 되고,?떼돈을 벌어 주는 것은 사치품이나 금,?은,?보석,?향신료나 비단 같은 것입니다.?다행히 사치품들은 무게도 적게 나가 짐이 가벼워요.오늘날에도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유럽과 교역을 하는데 흘수선이 잠기도록 과일이나 곡식 같은 것들을 잔뜩 실어 가지만,?내려올 때는 동당동당 기계 하나 달랑 싣고 내려오는 일들이 벌어지죠.?옛날부터 육로를 통해서건,해로를 통해서건,?장사꾼들은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장삿길에 나서야 했는데 위기의 순간에 짐이 가벼워야 빨리 달아날 수 있고,?싸워도 홀가분하게 싸울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된 측면도 있어요.?이런 이야기 웃자고 한 이야기죠?(일동 웃음.)

 

<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철학자의 서재]

<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철학자의 서재]

박지용(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예수님, 석가님, 공자님, 그리고 소크라테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철학자들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철학자들의 목록을 작성한다면 단연 1순위 후보에 오를 인물은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생존 당시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플라톤의 저작에서 주요 논객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연역 삼단논법에서도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남아 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철학자 하면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하면 철학자를 연상한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대변하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

 

(프리드리히 로렌츠 지음, 박철규 옮김, 도원미디어 펴냄). ⓒ도원미디어

<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프리드리히 로렌츠 지음, 박철규 옮김, 도원미디어 펴냄). ⓒ도원미디어

?그런데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그 이름에 걸맞게 그토록 빛나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테면 플라톤 하면 이데아, 헤겔 하면 변증법, 마르크스 하면 역사유물론, 칸트 하면 비판철학, 대강 이런 굵직굵직한 주제어들이 철학자들의 이름과 결부되어 왜 그 철학자가 유명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빛나는 이름과 함께 알려진 것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과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언 정도다. 이 두 가지 명언도 소크라테스 본인이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는 의혹이 있다. 우선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남겨진 낙서(?)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을 통해서 확인된 바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니 그리 큰 반론의 여지는 없다. 설령 소크라테스가 그 말을 했다 치더라도 그 말의 유래는 소크라테스가 아닌 것이다.

 

또 혹자들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도 정확하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데, 그 의혹의 대강은 이렇다. 시민들로 하여금 무조건적인 준법정신을 강제하려는 의도를 가진 이데올로그들이 소크라테스의 명성을 빌려 시민들의 비판정신과 저항적 실천을 약화시키고 독재자의 논리를 강화시킬 목적으로 그 말을 날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한 구실로 삼은 모종의 정치세력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명성은 소크라테스가 주장했다고 알려진 명제들과의 관계에서 보자면 허구에 기초한 것이 되어버린다. 쉽게 말하자면, ‘어?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 안 했대?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가 유명한 거지?’라는 황당한 상황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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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크라테스에게 남는 건 무엇인가? 예수와 석가는 인류 구원이라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맡으셨고, 공자도 유교라는 유사종교의 신격화된 숭배 대상인 점을 감안해 볼 때, 소크라테스가 성인의 반열에 속하기에는 뭔가 임팩트가 떨어져 보인다. 인류 전체를 통틀어 네 명의 성인을 선발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소크라테스에 대한 평가는 과장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불거질 수 있다. 예수의 위대함을 부정할 경우에는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겠지만, 소크라테스를 4대 성인의 반열에서 격하시키자는 목소리는 그리 충격적인 문제제기는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둘러싼 두 가지 상반된 시선

 

역사적인 실존 인물인 소크라테스를 조망하기 위한 기본 자료는 재판에 대한 기록이다. 그 기록은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배심원들의 법적인 판결을 통해 사형을 받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각각 그 기록을 남겼고 이 기록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인물로 승화되게 된다. 이 재판과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형 선고는 이후 역사적인 사건으로 비화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었다. 즉 무지한 대중이 죄 없는 뛰어난 현자 소크라테스를 죽게 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사건을 기화로 민주주의의 적대자가 되고 이상국가론, 철인정치를 펼치게 된다.

또 하나의 관점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법적 심판을 플라톤의 기록에만 의존하지 않고 당시 역사적인 배경, 정황, 사건들을 통해서 민주주의자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방식이며, 소크라테스가 일방적으로 희생당한 것은 아니라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당대의 정치적인 역관계 속에서 소크라테스를 조망하는 것이므로 다양한 맥락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충분한 혐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법적 판결에 있어서도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 후자의 관점들은 주로 현대에 들어서 제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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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 중 어느 관점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양자택일적으로 대립된 관점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전자의 관점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민주정치의 오류가 지적되고, 또 후자의 관점에서는 피할 수 있었던 사형을 의도적으로 피하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잘못이 지적된다. 여기서 드러나는 대립적 관점은 ‘역사적인 실존 인물 소크라테스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한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문제시될 수 있는 철학적인 현실비판의 의미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의 법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Socrates-1-

철학적인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생각해보기만 해도, 그 자체로는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는 현실적인 논리들이 있다. 유대인을 학살할 때 사람들은 그 현실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분단 이후 반공 집회에 동원되는 사람들도 그것을 당연하다고 믿었다. 이처럼 현실에서 나타나는 인간과 사회의 야만성을 당연한 현실로 인정할 것을 강요하고, 또 철학과 철학자로 하여금 하나의 당파를 강요하는 논리는 언제나 현실 논리에 기초해서 작용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철학의 보편성은 민주정치냐 과두정치냐의 양자택일적 상황 자체를 거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은 잘못된 현실 자체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법정은 철학적인 사유의 합법적인 권리 주장의 법정으로 볼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에 칸트는 ‘이성의 법정’에서 인간의 이성은 여러 현실적인 사안들을 검토하여 현실에 대해 어떤 주장을 펼칠 수 있고, 그러한 권리는 당연히 현실적으로도 보장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칸트는 당시 금기시되었던 종교적인 주제마저도 철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이성의 공적 사용 권리를 과감하게 주장하였지만, 너그러운 계몽군주마저도 그러한 주장은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고 금지시켰다. 철학은 권력의 검열 앞에서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철학적인 사유에서는 금기와 경계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철학이 짊어진 사회적인 역할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문제에 대해 계속 문제제기하고 공개적으로 간섭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자신을 일컬어 쇠파리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무뎌진 의식을 일깨우는 존재라는 뜻이다.?

잘못된 대립구도에서 강요된 선택의 문제를 지적하려면 그 대립구도 자체가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아도르노가 ‘잘못된 사회에서 올바른 삶이란 없다’고 지적한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철학은 잘못된 선택을 강요받는 삶을 조장하는 사회를 비판해야 한다. 민주냐 독재냐의 양자택일적 상황이 갖는 위험성을 잘 알고 있던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삶의 방식은 철학적인 물음을 끝없이 던지는 것이었다. 당시 아테네가 좀 더 여유로운 상황이었더라면 소크라테스를 애써 법정에 내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며, 소크라테스를 희생시켜 아테네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물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비판의식이 마비된 극단화된 사회에서 철학적인 물음 제기는 위험한 행위로 오인될 수 있다는 내적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생각함에 있어서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의 잘못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음흉한 의도를 경계해야 함과 동시에,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철학적인 문제로 다룰 경우에는, 그러한 잘못이 인간적인 삶의 가치와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소로서 여전히 잔존해 있다는 현실 비판이 결부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사생활 속으로, 악처 크산티페

 

대학 시절 나는 학과에서 새로운 소크라테스 해석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것은 작고하신 권창은 교수의 강의였다. 그분은 소크라테스의 논쟁자들이었던 소피스트들의 민주주의적 가치에 주목하셨고, 소크라테스-플라톤 연계로 이어지는 보편실재론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피력하셨다. 당대의 정치적인 권력관계 속에서 민주정치와 철학의 현실적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가 왜 죽었어야만 했는가라는 의문은 내 생각 속에서 말끔하게 정리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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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은 그의 철학적인 기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소크라테스의 기행은 그 개인의 기행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학문의 고유한 것이고 본래적인 기행이었다. 그가 보인 기이한 행동의 목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자기 일이 아님에도 시시콜콜 참견을 하고, 대화 상대자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기분을 상하게 하고, 홀로 생각할 때는 너무 골똘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정신이 나간 것으로 알고,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데몬이라는 분열된 자아와 대화를 나누는 그런 행동 방식이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기 내면에서 명령하는 데몬이 법정에서 단호히 나서라고 말했다고 변론인들에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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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전날 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삶과 죽음을 결정지을 법정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를 골똘히 생각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영혼(데몬)은 소크라테스에게 죽으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 상황은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할 수 있으면, 잔을 물러달라’고 호소했다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하고 자신에게 부과된 운명적인 짐을 진 예수의 고뇌와도 비견된다. 이 비교 자체는 매우 위험한 것인데, 인간 소크라테스를 성자 예수와 동급에서 비교하는 데에서가 아니라 유다와 바리새인들의 역할이 아니토스와 민주주의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자기 자신과의 대화 행위이다. 그것도 대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죽음 일반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적인 죽음, 죽은 자신과 나눈 대화의 경지는 그야말로 철학적이다. 그 철학적인 깊이는 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자기사유의 정점이 아니겠는가. 사유는 일종의 자기분열 행위이며, 이 분열은 때에 따라서 다중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철학자들은 분열증이라는 직업병을 겪지 않는데, 대화하는 의식이 집에서 나갔다가 항상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영혼인 데몬과의 대화에서 죽은 소크라테스에서 삶을 얻게 된 것이다. 육체적인 삶을 이끄는 소크라테스의 영혼은 이제 그 삶을 버리고 영혼 속에서 안주하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삶이자 철학적인 죽음의 아이콘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자신의 영혼에 대한 철학적인 자기 구제인 것이다.

socrates지금까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을 평가함에 있어서 조명되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인물이 그의 아내 크산티페가 아닐까 한다. 철학자는 저작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선대 철학자들도 저작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구전된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낮 시간 아고라에서 나눈 수많은 대화들로 전승된다. 하루 종일 철학 토론을 한 소크라테스의 삶의 방식이 철학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면 그의 아내 크산티페도 소크라테스 철학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 모두가 떠나 캄캄해진 아고라의 밤, 소크라테스는 유일한 대화 상대자 크산티페가 있는 집으로 가야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크산티페가 묘사된 유일한 곳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날을 서술한 <파이돈>이다. 독배를 마셔야 할 시간이 되어 소크라테스가 크산티페와 소크라테스의 어린 아들을 집으로 먼저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따름이다.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라는 무능하고 비현실적인 철학자와 어떻게 평생을 살 수 있었을까?

법정에서도 밝혀졌듯이, 소크라테스의 철학 토론 수업은 전체 무료강좌였다. 당시 소크라테스가 누렸을 유명세를 생각한다면 요즘 대치동 스타강사 정도는 되었을 수도 있었는데, 유독 소크라테스는 무료강좌 원칙을 정했다. 다른 소피스트들은 소규모 사설학당을 차려 많은 수업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라는 저작에서는 재산가 크리티아스가 자기 자식들을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프로타고라스를 가정교사로 초빙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경제적인 위기 상태였지만, 소크라테스는 돈벌이를 하지 않아 크산티페가 겪었을 생활고는 불을 보듯 뻔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남루한 옷을 입고 심지어 신발도 없이 맨발로 다녔다고 한다. 일생 연봉 무일푼인 그가 그래도 70세까지도 짱짱한 건강을 유지했다는 건 철학적인 사유가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것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그의 주된 사유 대상은 절제, 용기와 같은 도덕적인 덕목들이었다.

고대 아테네라고 해서 가정생활을 꾸리는 재테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크세노폰이 남긴 소크라테스의 대화록 <경영론>에서 소크라테스는 구체적이고 상세할 뿐만 아니라 최선의 재산축적 방법을 가르친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집안 살림에는 나 몰라라 했으니 크산티페는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러니 크산티페를 대놓고 악처라고 폄하하는 것은 공정치 못한 처사인 것이다.

소설 <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는 역사적인 배경 묘사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 사상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다소 빈약한 감이 들게 하지만 아내 크산티페의 관점에서 비친 소크라테스를 조망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보인다. 소설이므로 저자는 상당 부분 문학적인 상상력으로 묘사하고 있음에도, 현실감 있는 언어로 소크라테스의 부부관계를 잘 전달하고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크산티페의 최초의 구타를 소크라테스가 도덕적인 덕목으로 이겨냈다는 점이다. 경제적인 능력과 활동을 희생한 대가로 소크라테스는 상습적인 구타를 얻게 되어 고통을 즐기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크산티페는 평생을 불평하고 소크라테스를 개조시키려 노력했지만, 결국 그의 철학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용서하게 된다. 철학의 지속을 위해서는 아내의 용서를 구해야 하고 때때로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

 

 

 

 

도시의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2

도시의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한편으로는 시간 축을 따라서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 지혜의 함수인 사회가 있고,?공간 축을 따라서 경험을 확장하는 것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서로 다른 원초적인 사회를 살펴보았습니다.?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라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원형 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 일은 없는데요.?어쨌든 주어진 시간과 공간,?삶의 형태가 다름에 따라서 사람들의 의식이 어떻게 바뀌게 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고요.?이 두 공동체에서는 한 개인이 무엇을 할까,?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농경공동체에서는 마을 어르신들이,?유목공동체에서는 그 마을을 이끄는 수장들이 고민하고 결정을 내립니다.?그런데 도시사회에서는 지혜의 함수가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도 아니고,?시간적인 경험의 축적도 아닙니다.?개개인이 얼마나 똑똑하고 셈이 빠른지가 지혜의 함수가 되는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나는데,?그것이 바로 도시사회입니다.?전제행정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잠깐 빼고,?해안도시사회부터 이야기하지요.?원초적인 도시사회는 이오니아 식민지였던 지중해 연안의 바닷가에 여기저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지중해를 중심으로 배를 띄워서 무역을 하고,?사막으로 낙타를 타고 중국까지 장삿길을 연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오니아 식민지 가운데서도 서양철학이 가장 먼저 발생했다는 밀레토스라는 도시사회를 잠깐 머릿속에서 그려 봅시다.?이 도시사회는 이미 몇 천 년 전에 사라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정보나 유물,?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오로지 우리 상상력을 통해서 이 도시사회를 재구성해야 합니다.?그러니까 거짓말일 수 있다는 거 아시겠죠??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시는 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한 개인이 유목사회나 농경사회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특히 농경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큰 범죄를 저질러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거나 먹고 살길이 없어서 뿔뿔이 흩어지거나 마을 공동체가 규범으로 강제하는 관습을 지키지 않아 그 사회에서 추방되거나,?삶에 큰 변화가 생겨 집단으로 떠도는 그런 경우가 아니면 벗어나기 힘들지요.?대대로 뿌리내린 공동체에서 뿌리 뽑힌다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농사짓던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면 무엇을 해서 먹고 삽니까??이웃마을로 자리를 옮길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습니다.?왜 살던 마을에서 벗어났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거든요.?그러니까 마을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사형신고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유목사회도 마찬가지로 함부로 떠날 수가 없습니다.?수장을 따라 목초지에서 목초지로 옮겨 다니던 사람들이 거기를 떠나서 독립적인 삶을 개척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두 가지 경우죠,?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범죄 행위를 저질러서 야반도주를 하거나,?아니면 주민 전체가 뿔뿔이 흩어져서 여기저기 흘러 다닌다거나.?쫓겨나거나 굶주려서 거렁뱅이 노릇을 하지 않으면 남의 것을 훔칠 수밖에 없지요.?개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이 뜨내기들에 대한 대비책이 아니었을까요?

야밤을 틈타서 누군가가 와서 물건을 훔쳐가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칼 들고 와서 강도짓을 하고,?저항하면 죽이고 그럴까봐 인기척이 들리면 멍멍거리라고 개를 키우는 거거든요.?농경민들이 개를 기르는 것은 유목민들이 양 떼를 모는 데 쓰려고 개를 기르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경우죠.?다른 가축들에 견주어 개를 기르는 것은 식용으로는 대단히 비효율적입니다.?개는 엄청나게 식량을 축내는 짐승이거든요.?어쨌든 불량배가 되서 떠돌다가 강도나 절도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해코지하거나 먹이를 훔쳐가는 사람이 생겨나면서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사람보다 밥을 더 많이 먹는 개를 길러야 하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해안도시에 몰려든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굶주려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흘러든 사람들이거나 대체로 농경공동체나 유목공동체에서 미움받던 삐딱한 사람들입니다.?삐딱한 사람들이 누구냐면 어른 말 안 듣고 지도자 말 안 듣는 사람들이거든요.?대부분의 삐딱이들을 보면 머리가 잘 돌아갑니다.?우직한 사람은 삐딱이가 안 됩니다.?이 삐딱이들이 해안 도시사회에서 장사로 먹고 삽니다.?이 사람들은 살판났지요.?바보 같은 어른도 어른이라고 꾸벅꾸벅 죽어지내야 하는 일도 없고,?너 씩씩하고 용감하게 죽어!?하고 어거지로 전쟁터에 앞장세우는 사람도 없고.?대체로 머리 좋은 사람들 중에는 몸 쓰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없습니다.?몸 놀려서 살 수가 없으니까 머리를 굴려서 사는 겁니다.

여기에서 일어난 사회 변화가 얼마나 급격했으리란 건 상상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이집트에서 온 사람이 태양신을 상징하는 새를 믿는데,?그 새는 나에게 일주일에 두 번 쉬지 않으면 죄라 하고,?그래서 상점 문을 닫고 있는데,그날 문을 닫으면?‘너하고는 다시 거래를 안 해.’?하고 중요한 거래처에서 을러대면 어떻게 해야겠어요??또는?‘나는 아침시간엔 조용히 명상에 잠겨야 하는 종교적인 전통에서 자라왔는데,?니가 아침부터 찾아와서 거래를 하자고 하다니.?말이 돼??어림없는 수작이지.’?이렇게 저마다 자신이 태어난 문화적,?사회적,?종교적인 배경을 들이대면서 서로 가게 문을 닫거나 상거래에 지장을 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살길이 없죠??그래서 시골에서 땅을 파다가 왔든,?풀밭에서 짐승을 몰고 다니다 왔든,?인도에서 왔든,?이집트에서 왔든,?자기가 살았던 지역의 모든 관습과 전통을 버려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익힌 제 고장 말을 고집해서도 안 됩니다.?그리스 사람들이 야만인을 가리킬 때 바르바로이(barbaroi)라고 하였는데,?그것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그러니까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을 하고,?공동체를 이뤄 살고,?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지키려고 드는 사람은 죄다 이상한 사람들이고,?야만인이라 여기고 깔보게 되죠.?그런데 도시 공동체에서 인도 말을 하면 야만인이다,?혹은 페니키아 말을 하는 사람은 야만인이다 하면서 서로 상대를 하지 않으면,?좁은 지역에 모여살고 거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발붙일 곳이 없어집니다.(설상가상으로 해안 도시사회는 내부에 생산지가 없습니다.)

어쨌든 외부에서 먹고 살 것을 끌어들여야 살아갈 수 있는데,?이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지 않으면 주변의 유목공동체나 농경공동체에 가서 돈 될 만한 상품을 끌어올 수가 없습니다.?이런저런 이유로 해안 도시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주 삶의 형태가 다양하고 자기 정체성을 상황에 맞추어 그때그때 잘 바꾸어냈습니다.?그러니까 바다에서 장사를 하다가 갑자기 해적으로 바뀐다든지,?낙타를 타고 먼 길을 오가면서 정직한 장사꾼 흉내를 내다가 어느 순간에 도둑 떼로 돌변해서 마을을 습격해 물건을 약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이 사람들은 먼 길을 다니면서 중국에서 대진국인 로마까지 가기도 하고 또 거꾸로 지중해에서 비단길을 따라 중국까지 가서 중국에서 비단 같은 것을 수입해서 몸에 걸치고 살 수 있었습니다.?싣고 다니는 것 가운데 의식주에 필요한 유기물들,?밥이나 반찬을 해 먹을 수 있는 것은 도시 근처에 있는 농경공동체나 유목공동체에서 가지고 와야 합니다.?먼 길에서 가지고 오게 되면,?비를 맞아서 썩어 버리거나,?채소는 비를 맞지 않아도 하루 이틀 지나면 다 썩어 버리기 때문에 주변에 생산 공동체들이 널려 있어야 합니다.?다시 말해서 주변 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를 식민화해서 안정적인 식량 공급처로 만들어야 합니다.?먹고 사는 문제는 이렇게 해결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예를 들어 도시사회인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벼농사 짓는 곳이 어디입니까??김포평야,?여주 이천이죠.?김포평야에서 서울시민이 쌀을 가져다 먹는데 어느 해에 흉년이 들어 식량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고스란히 그곳에만 기대고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되죠.?그러니까 여주 이천에도 빨대를 대고 더 멀리는 호남평야까지도 빨대를 대야겠죠.?그래서 이곳에서 생산 교란이 일어나면 저쪽에서 끌어오고 저쪽에서 일어나면 이쪽에서 끌어와야겠죠??그러니까 도시는 자기 내부에 생산지를 갖추고 있지 못해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제국주의적인 확장정책을 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제국주의적인 확장정책을 펴는 데 필요한 일차적인 것은 무엇입니까??조직이죠.?그리고 잘 조직된 약탈자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창과 칼 같은 무기죠??무기 생산은 도시인들에게 목숨이 걸린 일이 됩니다.농사꾼은 낫과 호미,?괭이 같은 농사 도구가 필요해서 대장간을 찾아갑니다.?그러나 도시사람들이 대장간을 찾아가는 목적은 창과 활,?칼,?이런 것을 벼리기 위해서입니다.?농경민이나 유목민의 경우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잘 조절하면 살길이 열립니다.?이 사람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나 연장으로서 낫이나 칼,?이런 것을 벼리는 겁니다.

그런데 도시인의 경우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뒷전입니다.?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도시인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느냐 못하느냐의 관건이 됩니다.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각축하고 때로는 서로 맞서야 하는데,?칼과 창이라는 것이 뭡니까??인간 문제를 가장 빨리 해결하는 도구 가운데 하나입니다.설득을 해서 안 되고,?세뇌를 해서 안 되면 죽여야죠.?전쟁의 기원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닙니다.?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길,?그것이 전쟁입니다.

그런데 해안 도시사회 내부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습니까??공멸이죠.그리고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해도 엄청나게 큰 장애가 생기게 됩니다.어느 날 종교적인 천재가 나타나서 우리 이런 종교를 만들자 하더라도 모두가 약삭빠른 삐딱이들인데 누가 그걸 받아들이겠습니까??안 된단 말이죠.이 사람들을 묶을 길이 없어요. ‘사는 게 먼저고 철학하는 게 그 다음이다.’(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 ‘우선 살고 볼 일이다.’?모두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그러니까 도시민들은,?특히 장사꾼들이 모여 사는 해안도시 사람들은 이해관계로 뭉치는 수밖에 없다는 거죠.?이해관계를 따지다 보면 머리가 비상해져야 하고 계약을 어기면 안 되니까 규칙들이 생겨나야 하죠.?거기에서 자기 나름대로 인위적인 규범들과 약속들이 생겨나고,?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서 일치하는 점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제부터 말과 글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죠.?말이라는 게 어떻죠?우리 기억에도 한계가 있고,?말로 한 약속은 다음 순간 뒤집어 버리면 그만입니다.?이집트나 중국 같은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행정 중심 도시에서 상형문자가 생겨나고 그것을 써서 이런저런 통치에 필요한 일들을 하는데,?그것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특권층의 행적을 기록하는 것들과 연관되어 상형문자가 생겼는데,?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능의 하나가 피지배자들의 감성과 의식을 획일화하는 것이었습니다.?사상과 감정,?모든 것을 획일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문자다.?그래서 이 사람들이 문자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전제군주가 만들어낸 획일화의 도구로서 부여받은 기능과는 또 다른 기능이 글에 있다는 것을 밝혀낸 사람들은 장사꾼들이었습니다.?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에서 발명된 쐐기글자를 보면 점토판에 적힌 글이라는 것이 돼지 몇 마리,?소 몇 마리,?밀 몇 자루 죄다 이런 것들 투성이입니다.?그러니까 거래하는 사람들이 서로?‘돼지 열 마리 보냈으니 곡식 열 말 가져다 다오’?이런 식으로 쐐기글자를 만들어 쓴 겁니다.?이 문자의 발생과 연관해서 보면 재미있는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시골 장터에서 술집을 연 할머니가 막걸리를 외상으로 먹은 사람들을 벽에 적어놓는데,?박 서방을 나타내는 브이(V)?자를 그어 놓고 한 잔 외상으로 먹었다고 일(/)자를 그어 놓고,?홍 서방을 나타내는 동그라미(ㅇ)?그려 놓고 일자(/)?그어 놓고 하다보니,?벽이 다 차게 생겨서 다섯 잔째 마실 때는?/////?이렇게 그어 놓고 하는 것들을 문자 발생의 초기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종교도 버려야 한다.?가치관도 버려야 한다,?장사하는 사람들이 버려야 할 것은 정말 많습니다.?이해관계를 서로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소통을 잘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버려야 할 것이 아주 많습니다.?불평등 거래는 장사꾼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불평등 거래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상대편이 알아차리면 어떻게 됩니까??그러면 거래가 안 되겠죠.?그러니까 상대편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 하죠??돼지 키우는 마을에 가서 싼 값으로 돼지를 사오려면 파는 사람들을 그럴 듯하게 속여야 하고 그러려면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배워야겠죠??그 사람들의 정서,?사고방식을 익혀야겠죠.그 전에 농사를 짓거나 짐승을 키우고 살 때는 제 고장 말만 알아도 살 수 있었으니까 저마다 독특한 온갖 토템과 터부를 마련하고 섬기면서 자기들만의 세계에서,?몽상과 상상력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 고유한 신화와 신앙의 체계를 만들어 그 안에 안주할 수 있었는데 이제 실증적인 조사와 탐구가 필요하게 됩니다.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그러죠??헤로도토스는 장사꾼들을 따라 여기저기 탐사 여행을 합니다.?리디아 같은 곳에 가 보니까 아이들이 공기놀이를 하고 있어요.?이 놀이를 보면서 이렇게 유추합니다. ‘아이들이 굶주림을 잊어버리려고 공기놀이를 만들어 냈다.’?그러니까 현대식으로 말하면 종족학,?각 민족의 민속이라든지 풍습 같은 여러 가지 보고 들은 것을 기록에 남기고 조사 연구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해안도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낼 필요가 생깁니다.?농경사회나 유목사회는 모든 자산이 유기물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여기서는 증서,?약속어음 같은 것들이 양 백 마리와 바뀌기도 하고,?배 한 척과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가증권 같은 것들이 자산의 중요한 목록으로 편입됩니다.

유기물과는 달리 무기물로 이루어진 자산은 썩을 염려가 없어 무한축적이 가능해지니까,?부의 거대한 축적들이 이루어지면서,?변화들이 생겨납니다.그리고 지혜의 함수는 이미 시간적인 경험의 축적이나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아닌,?얼마만큼 셈이 빠르고,?속셈이 멀쩡하냐에 따르는 계산력이 됩니다.?누가 너 속셈이 뭐냐??할 때 네가 속으로 뭘 헤아리고 있느냐를 묻는 것이죠??상대방의 속셈을 알아내고 자기의 속셈을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불평등 거래를 하는데 주무기가 되니까 머리를 써도 자꾸 그 쪽으로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거죠.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인간이 단순한 마을 공동체와 유목공동체에서 벗어나 도시에 모여 살면서,?사고방식이나 감성에 거의 혁명적인 변화가 생겨나죠.?그래서 우리의 상상력과 몽상 같은 것들이 우리를 꿈의 세계에 머물게 만드는 신화공간이 아주 엄혹한 현실공간으로 바뀌게 되면서 누구 마음도 다치지 않고 어떤 종교나 신념체계도 침해하지 않으면서 이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그 길을 찾다보니까 하늘의 신(우라노스)과 땅의 여신(가이아)이 이 세상의 만물을 끌어안던 세계 해석이‘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식으로 우주의 근원에 대한 아주 밋밋하고 메마른 새로운 해석으로 탈바꿈하는 낯선 세계관이 싹트는 겁니다.

 

손석춘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학자의 서재]

손석춘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학자의 서재]

박민철(동남보건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진보에게 묻는다. ‘그대, 지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고 3에 진입한 1997년 봄쯤이었다. 칼럼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아주 잠깐 꾼 적이 있었다. 입시 관련 책보다는 다른 책을 보고자 동네 구립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던 그때, 손에 잡아든 책이 <신문 읽기의 혁명>(손석춘 지음, 개마고원 펴냄)이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보잘것없던 내 서재에서 가장 중앙에 꽂아둔 책이었다. 하지만 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 내 삶의 전환기를 함께 했던 그 책은 수백 권의 전공 책과 원서에 밀려 책장 맨 끝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나는 그 옛날 나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주었던 저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철수와영희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철수와영희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뭐라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던 마음 속 불만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기뻤다. 제목만 보고 이 책이 나의 사소한 고민을 덜어주길 바랐다. 솔직하게 말해 <여보게, 저승 갈 때 무얼 가지고 가지?>(석용산 지음, 고려원 펴냄)식의 통속적인 수양서 내지 에세이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국 사회로의 적응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나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산이었다. <신문 읽기의 혁명>의 저자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가 신문 논설문과 칼럼으로 잔뼈가 굵은, 한국 언론 운동을 이끌어 온 ‘손석춘’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 책은 어떤 특정한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제안을 담고 있는 냉철한 논설문이다. 짧은 책이지만 여기에 담긴 질문의 무게감은 꽤나 묵직하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진보적 운동 그리고 이를 이끌고 있는 진보 세력에 대해 ‘돌직구’를 던진다.

‘국격’이 높아지고 ‘세계 7대강국’에 진입했다는 찬가가 울려 퍼지던 2012년 6월 어느 날, 달동네 월셋방에서 15만 900원의 노인 수당으로 살아왔던 노부부가 생활고로 자살했다. 노부부가 남긴 유서의 첫 문장은 ‘그동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였다. 자신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는 참으로 어려웠고 그래서 단호했다. 삶을 부정하는 후회는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할 만큼 힘이 크다. 문제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후회들이 크게 번지고 있다는, 특히 ‘진보’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젊은 날의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꾸던 진보들은 일상 속에 매몰되어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져있다. 저자는 현실에 무력감과 회의를 느끼는 진보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대, 지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16쪽)

 

진보를 후회와 패배감으로 옭아매는 몇 가지 프레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보의 스펙트럼을 규정하는 저자의 시선이다. 저자가 규정한 진보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다. ‘4월 혁명, 5월 항쟁,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8월 연세대항쟁에 몸으로 참여했거나 마음으로 지지한 모든 사람’을 진보라 정의한다. 이렇게 보면 나도 ‘진보’다. 저자의 폭넓은 규정 덕분에, 실천력이 부족했다는 과거 선배들의 비판에 조금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저자가 진보를 생각보다 광범위한 범주로 규정한 이유는 단순히 자신이 자조적으로 말하는 ‘대동단결론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진보의 ‘가치’를 폭넓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진보는, 보다 구체적으로 진보 세력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분단체제에 고통 받는 민중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유·평등·자주·평화·복지·생태·인권·소수자 권리 등 다양한 진보적 가치에 대해 공감하거나 이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한국 사회만큼 진보적 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져온 사회는 드물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진보 운동이 활발하던 그때는 ‘별이 빛나는 시대’였다. 루카치의 저 유명한 문장,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처럼, 별이 빛나는 시대는 암울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별이 빛나는 시대는 이미 과거완료형이다. 구체적인 증거는 진보가 집권할 객관적 조건이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이다. 저자가 지적하듯 진보 세력의 집권에 필요한 1200만 표라는 기준은 비정규직 850만 명과 농민 300만 명, 청년실업자 100만 명, 정규직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2000만 명의 유권자로 이미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아직도 변화되지 않았다.

 

이렇듯 폭넓은 진보의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별이 없는 시대’가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내놓은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 권력의 프레임은 현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비틀어왔으며, 결과적으로 진보 세력이 대다수의 민중과 결합하지 못하게 만들었음이 첫 번째 이유이다. 현실 권력에 대한 아집 때문에 2010년 ‘진보 대통합’이 분열로 나아갔으며, 결과적으로 진보 세력의 제도 정치권으로의 진입이 무산된 것이 두 번째이다. 2000년 이후 우리 민중의 삶은 더욱 고달프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 세 번째 이유이다. 여기서 첫 번째 이유는 언론 권력의 작동과 연관되며, 두 번째 이유는 정치 권력, 세 번째 이유는 경제 권력의 교묘한 술책과 연관된다. 이른바, ‘철의 3각 동맹’인 정치 권력·경제 권력·언론 권력이 만들어내고 조종하는 각종 권력 프레임이 진보의 후퇴를, 진보의 멀어짐을, 진보의 패배감을 불러왔다.

일상에 매몰된 진보들에 묻는 또 다른 질문, ‘그 깨끗한 꿈, 무덤까지 가져갈 셈인가?’

 

별이 저물어버린 시대는 별이 빛나는 시대를 살았던 진보 세력 자신들에게 삶에 대한 후회를 가져온다. 저자의 진단처럼 진보의 위기를 지나 진보에 대한 조롱어린 사망 선고가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진보 세력은 깊은 패배감에서 벗어나올 줄 모른다. 별을 잃어버린 그들은 어떠한 목적도 없이 단순히 억척스러운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4월을, 5월을, 6월을, 7~8월을, 8월을 감동과 보람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도 더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다며 자신의 경제생활에 몰입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진보는 대안이 없다며 정치 현실 또는 정치 생활에서 눈 돌리고 경제생활에만 억척스럽게 매몰되어도 좋은가.”(103쪽)

 

이는 젊은 날의 깨끗한 꿈에 대한 자조적인 자포자기이거나, 몰감성적인 외면이다. 저자는 진보의 패배감이 커질수록 더 큰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진보의 꿈이 포기되는 순간, 나를 포함한 민중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진보는 마침내 막다른 길에 내몰린 노동자, 농민, 빈민이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 된다.

 

“4월에서 8월까지 모든 진보가 자신의 꿈을 무덤까지 가져갈 듯이 지레 자포자기하고 있는 것은 민중과의 소통에 실패했고 더 원천적으로는 자신과의 소통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맞아 죽거나 분신자살한 노동자와 농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빈민을 떠올리면, 오늘 진보정치 세력은 고통 받는 민중 앞에 도덕적 나태를 넘어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다. 그런데 과연 ‘나태한 공범’이라는 비판의 과녁은 진보정치 세력만일까? 혹시 모든 진보가 성찰해야 마땅한 자기 가슴의 ‘화살’이 아닐까.” (30~31쪽)

 

그렇다. 저자의 인식은 옳다. 자기 가슴으로 날아온 화살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아프다. 분명 나 그리고 우리는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라는 ‘사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1970년의 ‘전태일’은 2000년대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차이는 분명하다. 1970년의 ‘전태일’이 1980년대의 진보를 살아있게 만들었다면, 2000년대의 진보는 ‘전태일’에 무감각하다. 저자가 가슴 시리게 기억하는 고(故) 허세욱·박영재 동지는 2000년대의 ‘전태일’이다. 이렇듯 진보의 무력감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적 감수성을 잃게 만들었다. 여전히 신자유주의 체제와 분단 체제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의 삶에 고통을 증가시키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진보는 별을 찾는 마음으로 이 둘 체제에 저항하기 보다는, 자신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에게 보이는 진보에 대한 애정은 분명하다. 그러한 애정에 나는 감사한다. 저자는 젊은 날의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무덤까지 가져가지 않으려면 개인적 무력감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시작은 객관적인 현실 파악과 그에 기반을 둔 냉철한 자기반성이다. 그러한 자기반성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어느 순간 진보 세력이 잊고 있었던 문제, 다름 아닌 냉철한 현실 인식에 따른 ‘대중적인 소통’이다. 그렇다고 소통을 수구-기득권 세력 또는 집권 세력이 쓰는 그것과 혼동하지 말자. 우리들의 소통은 그네들과는 다르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무엇보다 진보가 할 일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97쪽)

 

우리는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저자가 말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은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아니 이것은 저자의 두 가지 질문에 호응하는 우리 자신들의 자문(自問)이다. 우리는 무덤에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이 젊은 날의 그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패배감과 우울감을 가져갈 것인가?

 

(손석춘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신문 읽기의 혁명>(손석춘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더러는 세월의 이끼 탓에 정의롭고 깨끗했던 꿈에 곰팡이가 피거나 아예 잊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체념에 잠기거나 우울할 일은 결코 아니다. 정반대다.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잊었기에 우울했던 나날에서 벗어나 체념의 곰팡이를 툴툴 털어내고 일상의 정치경제생활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옳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138쪽)

그렇다. 우리의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진보의 만장(輓章)이 한국사회 전반에 나부낀다고 해도 우리는 그 상여행렬을 조용히 따라갈 수만은 없다. 나, 나의 어머니, 내 아들의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분단 체제가 우리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꿈을 꾸지 않는 한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소박한 꿈을 꾸어본다. 내 아들이 사는 세상은 내가 살고 있는 지금보다 좀 더 ‘사람다운’ 냄새가 나는 세상이 되기를. 이제 귓가에 울리는 듯한 저자의 마지막 외침을 딱딱한 글로 전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로 학습하라, 대안사회를 토론하라, 국민과 소통하라.” 이 땅의 모든 진보들에게 전한다. 그들의 꿈을 이루기 위한 또 다른 출발점을.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밝혀야 할 사항이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진보 위기론에 대한 저자의 논리적 응답과 진보의 내적 성찰을 위한 냉철한 제안을 의도적으로 소개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지표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 및 정책들을 제외했다. 그것이 정의로운 꿈을 꾸었던 모든 사람들과 가슴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라는 저자의 저술 의도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와 더불어 한편에 밀어놨던 <신문 읽기의 혁명>을 책장 가운데로 가져왔다. 다시금 꿈을 꿀 때다.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2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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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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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1분에 100단어를 말하거나 들을 수 있는데 생각은 400단어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 외에 300단어에 해당하는 만큼 생각을 더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300단어에는 자칫하면 거짓말이 섞여 들어간다. ‘세상은 너를 원하지 않아, 그 사람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는 너무 못나서 아무도 너를 원하지 않아, 너의 실체를 알면 너를 조롱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걸.’ 이런 식의 거짓말이 너무나 많이 섞여 들어간다.

꾸미기_ST830089불교에서는 이러한 자기만의 소설을 ‘망집’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인생과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식의 허상을 덧씌워서 보기 때문에 망집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식의 허상을 덧씌우는지를 자꾸 살피게 되면 인식의 편향성을 느끼게 된다. 아니 자신의 인식의 편향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자신이 어떤 허상을 덧씌우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무의식 때문에 이러저러한 허상을 덧씌우게 된다고 설명한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자신의 소망하는 바에 영향을 받아서 객관을 객관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편파적으로 인식하면서 허상을 덧씌우게 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생각은 이러저러한 소망으로 덧칠되어 있기 때문이다. 증시에 진입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주식이 대박이 나기를 바라다 못해 대박이 날 것이라고 믿는다. 객관적으로는 깡통계좌를 차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아도 자신만은 그 대열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 근거 없이 믿고 만다. 이러한 인식의 편파성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데도 적용된다.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편향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고양적 편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자기고양적 편향이 너무 없으면 자기 자신을 너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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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성향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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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주 ‘딱 나일 수밖에 없음’에 절망하곤 한다.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될까?’ 하는 생각이 괴로움을 일으킨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성향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성향이 있다. 그 성향이 그 사람을 특징짓는다. 그런데 사실 성향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성향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밖에 없다. 성향은 성향일 뿐이다. 다만 그 성향이 좋게 발휘되기도 하고, 나쁘게 발휘되기도 할 뿐이다. 무슨 소리냐고?

생각해보자. ‘신중하다’와 ‘우유부단하다’는 것은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신중하다’와 ‘우유부단하다’는 모두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생각을 많이 하는데 결정해야 할 시점을 놓치지 않고 결정을 하면 ‘신중하다’고 하고, 결정해야 할 시점을 넘어서까지 생각하면 ‘우유부단하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이 좋게 발휘되면 ‘신중하다’고 평가받는 것이고,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면 ‘우유부단하다’고 평가받는 것이다.

나쁜 성향이란 없다. 성향 자체는 어떠한 경향성일 뿐이기 때문에 ‘나쁘다, 좋다’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다만 성향이 나쁘게 발휘될 때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나쁜 특성을 없애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특성 자체가 나의 존재에 속해 있는 것이라서 그 특성이 나쁘게 발휘되는 것을 완전히 통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그리스어: γν?θι σεαυτ?ν 그노티 세아우톤)

너 자신을 알라(그리스어:γν?θι σεαυτ?ν그노티 세아우톤)

그러니까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성향을 안다는 것이고, 자신의 성향을 안다는 것은 그 성향이 좋게 발휘될 때뿐만 아니라 나쁘게 발휘될 때도 파악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꾸고 싶다’는 것을 흔히 ‘성향을 바꾸고 싶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정확히는 ‘성향을 바꾼다’가 아니라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는 것을 조절한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어떤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성향 자체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나다’라고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나의 성향은 나의 존재방식과 연관되는데 갑자기 그 성향만 딱 빼서 버린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마치 ‘너의 지방만을 빼서 버려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요구이다. 지방이 나의 몸 전반에 걸쳐 있는데 그 부분만을 분리해서 버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다만 우리는 내 몸에서 지방의 비중을 줄이기 위해 지방이 잘 분해되는 음식을 먹고 지방 음식의 섭취를 줄이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지방이 과다하게 되지 않도록 조절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실제로 다이어트를 하는 경우 지방만을 빼지는 못하기 때문에 근육이나 칼슘 등 몸에 꼭 필요한 부분까지 같이 빠져서 문제가 될 때가 많다. 아무리 특별한 다이어트 방법이라 해도 지방만 추출해서 빼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하나의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고, 성향 자체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좋게 발휘될 때와 나쁘게 발휘될 때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러한 성향을 가진 나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나는 나의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통제하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은 나 자체가 문제여서가 아니라 나의 성향을 적절히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 성향이 어떨 때 좋게 발휘되고 어떨 때 나쁘게 발휘되는지를 잘 파악하고,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떤 것에 주의해야 하는지를 알아내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성향을 나쁘다고 규정해버리면 자신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 되어 버려서 자기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성향을 가진 나에게 실망하게 되면 그 성향을 조절하는 것도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성향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성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니 그 성향이 발휘되는 방식만 조절하면 되는 것이다.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주의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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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경향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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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 발현을 통제하려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면 ‘나는 잘난 인간이어야 하는데’와 같은 전제에 매여서는 안 된다. 지금도 이 말을 들으며 ‘그래, 나는 이런 전제에 매여 있는 것 같아.’ 하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대하다 ‘내가 만만해보이나?’ 하는 생각을 하며 기분 나빴던 적이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자주 이런 생각을 하는가?

어떤 사람은 자주 ‘내가 만만해 보이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어떤 사람은 ‘만만해보이나?’ 하는 질문을 전혀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내가 만만해 보이나?’ 하면서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은 사실 ‘내가 만만해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만만해보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런 질문은 애초부터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자꾸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전제하고 있는 것들을 잘 검토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마음의 결을 느끼게 된다. 철학적 객관적 인식을 방해하는 것은 사실 ‘우리 각자가 원하는 바’이다. ‘내가 잘난 인간이어야 한다’는 인간이면 누구나 매이게 되는 전제이다. 그래서 이 전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전제에 고착되어 있는 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도 ‘내가 원하는 바’에 고착되어 있으면, 상대방의 말보다는 ‘내가 원하는 바’에 더 생각이 매이게 된다. 그러면 객관적 인식과는 멀어진다.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말을 하는가, 원하지 않는 말을 하는가에만 주의를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다.

꾸미기_회전_사진 152인식을 객관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면 세상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소설을 쓰면서도 자신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바’에 매이지 않으면서 인식의 편향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할 때 자신의 마음의 결을 느끼게 된다. 내가 나를 배워야 한다는 말은 내가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하고 저럴 때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 사람인지를 알아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인식의 편향성의 특징을 느껴가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자신의 경향성을 알고 조절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오죽하면 “성격이 팔자”라고까지 하겠는가. 역술에서는 ‘팔자(八字)’로 사람의 경향성을 말하고, 인도에서는 ‘구나(guna, 공덕 또는 덕)’라는 말로 사람의 경향성을 지칭한다. 인도에서는 바로 이 ‘구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결국은 구나에 의해 좌우되지 말아야 마음의 평정이 온다는 소리이다.

자신의 경향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자신의 경향성이 나쁘게 발현되는 것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자신을 배우고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향성을 나쁘다고 규정하지 말고 경향성이 나쁘게 발현되는 것을 막자는 쪽으로 생각을 돌리자. 자신의 경향성을 알아야 자신을 가누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나 자체로 좋다. 나의 성향은 문제가 아니다. 나의 성향은 장점으로도 발휘될 수도 있고 단점으로 발휘될 수도 있다. 성향 자체를 문제시하지 말고 성향이 발현되는 방식을 조절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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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절 화폐(2)[자본론강독]-12

제 3절 화폐(2)

정리 : 나태영

 

 

제2편 :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제4장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제1절 자본의 일반적 정식

 

‘상품유통은 자본의 출발점이다. 상품 생산과 발달된 상품유통〔즉 상업〕은 자본이 설립하기 위한 역사적 전제이다.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됨으로써 자본의 근대적 생활사는 시작된다.

상품유통의 소재적 내용이나 다양한 사용가치들 사이의 교환은 무시한 채 이 과정이 만들어내는 경제적 형태만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이 과정의 최종 산물로 화폐를 발견하게 된다. 이 상품유통의 최종 산물은 자본의 최초의 현상형태이다.

역사적으로 자본은 어느 곳에서나 처음에는 일단 화폐의 형태로〔즉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이라는 화폐자산의 형태로〕 토지소유와 대립한다.’(225쪽)

‘화폐로서의 화폐와 자본으로서의 화폐는 무엇보다도 단지 양자의 유통형태의 차이에 따라 구별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형태 외에 그것과 구별되는 제2의 독자적 형태인 G-W-G라는 형태, 즉 화폐의 상품으로의 전화와 상품의 화폐로의 재전화, 또는 판매를 위한 구매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 운동을 통해 후자의 유통을 담당하는 화폐는 전화되어 자본이 되는 것이며, 이미 그 성격상 자본인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사라지고 남는 결과는 화폐와 화폐의 교환, G-G이다. 내가 100파운드스털링으로 2,000파운드의 목화를 사고 그 2,000파운드의 목화를 110파운드스털링에 팔았다면 결국 나는 100파운드스털링을 110파운드스털링과, 즉 화폐를 화폐와 교환한 셈이다.’(226쪽)

‘이와 반대의 형태인 G-W-G에서는 구매자가 화폐를 지출하는 것이 판매자로서의 화폐를 취득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상품을 구매하면서 화폐를 유통에 투입하지만, 그것은 그 상품을 팔아서 다시 유통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그가 화폐를 내놓는 것은 단지 그것을 다시 손에 넣으려는 숨겨진 의도에서일 뿐이다. 그러므로 화폐는 단지 선대(先貸)된(vorgeschossen) 것일 뿐이다.’(228쪽)

‘유통 W-G-W에서는 화폐의 지출이 화폐의 환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반면 G-W-G에서는 화폐의 환류가 화폐의 지출방식 자체에 따라서 결정된다.’

‘반면 순환 G-W-G는 화폐에서 출발하여 결국 똑같은 화폐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이 순환의 동기와 목적은 교환가치 그 자체이다.’(229쪽)

‘100파운드스털링을 주고 구매한 면화가 100+10파운드스털링〔즉 110파운드스털링〕으로 다시 판매된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더욱 정확한 형태는 G-W-G′이고, G′〓G+?G, 즉 ‘처음 투하된 화폐액+일정 증가분’이 된다. 이 증가분〔또는 처음의 가치 이상의 초과분〕을 나는 잉여가치(Mehrwert)라고 부른다.’

‘이 운동은 이 가치를 자본으로 전화시킨다.’(230, 231쪽)

‘물론 처음 투하된 가치 100파운드스털링은 유통을 통해서 부가된 10파운드스털링의 잉여가치와 일시적으로는 구별되지만 이 구별은 곧 없어져버린다. 과정의 끝부분에서는 원래의 가치 100파운드스털링과 잉여가치 10파운드스털링이 각기 따로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110파운드스털링이라는 하나의 가치이며, 이것은 시작부분에 있는 100파운드스털링과 마찬가지로 가치증식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바로 그 형태이다. 화폐는 운동의 끝부분에서 다시 운동의 시작부분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판매를 위한 구매가 행해지는 순환 각각의 끝부분은 자연히 새로운 각 순환의 첫 부분을 이루게 된다.

 

단순 상품유통-구매를 위한 판매-은 사용가치의 취득〔또는 욕망의 충족〕이라는 유통 외부의 최종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반면 자본으로서의 화폐유통은 그 자체가 목적(Selbstzweck)인데, 왜냐하면 가치의 증식이 끊임없이 갱신되는 이 운동 내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운동은 무한히 계속된다.’(232쪽)

‘화폐소유자는 이 운동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담당자로서 자본가가 된다.’“이재학에서는 유통이 부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재학은 화폐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화폐야말로 이러한 종류의 교환에서 시작부분이자 끝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재학이 추구하는 부에는 한계가 없다. 즉 목적을 위한 수단만을 추구하는 지식은 목적 그 자체가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에 무한한 것이 될 수 없지만, 목표가 수단이 아니라 궁극적인 최종 목적인 지식은 끊임없이 그 목적에 접근하려 하기 때문에 그 추구에는 한계가 없다….경제학은 이재학과 달리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다…. 전자는 화폐 그 자체와는 다른 것을 목적으로 삼으며 후자는 화폐의 증식을 목적으로 삼는다….”(아리스토텔레스, 앞의 책, 제1권, 제8장과 제9장)(233쪽)

‘화폐축장자는 화폐를 유통에서 구출해냄으로써 가치의 쉴 새 없는 증식을 추구하지만, 좀 더 영리한 자본가는 끊임없이 반복하여 화폐를 유통에 투입함으로써 가치의 끊임없는 증식을 달성한다.’‘스스로 증식하는 가치가 생명활동의 순환과정에서 번갈아 취하는 각각의 현상상태를 고정시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장을 얻을 수 있다. 자본은 화폐이다. 그리고 자본은 상품이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서는 가치가 전체 과정의 주체이며 가치는 이 과정을 통해 화폐와 상품으로 번갈아 형태를 바꾸면서 자신의 크기를 변화시키고 또한 자신의 본래 가치로부터 잉여가치를 만들어냄으로써 스스로를 증식시킨다. 왜냐하면 가치가 잉여가치를 부가하는 운동은 가치 자신의 운동이며 가치의 증식이고 따라서 자기증식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그것이 가치이기 때문에 가치를 낳는다는 신비한 성질이 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자식을 낳든가 아니면 적어도 황금의 알을 낳는다.’

‘화폐는 모든 가치증식 과정에서 항상 출발점과 종점을 이룬다.’

‘상품형태를 취하지 않고서는 화폐는 자본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화폐는 여기에서 화폐축장의 경우처럼 상품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자본가는 모든 상품이-비록 그것이 아무리 초라해 보이고 악취가 난다 해도-맹세코 진실에서는 화폐이며 내면적으로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고 나아가 화폐를 더 많은 화폐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는 수단임을 알고 있다.’

‘이제 가치는 상품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자기 자신에 대한 사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본원적 가치로서의 자신과 잉여가치로서의 자신을 서로 구별 짓는다.’(234, 235쪽)

‘사실상 G-W-G′는 유통영역에서 직접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의 자본의 일반적 정식이다.’(2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