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ead the love

문병호·남승석 지음,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국가 폭력의 관점에서』(갈무리, 2024. 1. 24.) 서평 ‘영화는 어떻게 시대의 예술이 되는가’ – 이주봉 [철학자의 서재]

영화는 어떻게 시대의 예술이 되는가:

신간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국가 폭력의 관점에서를 읽고.

 

이주봉(국립군산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영화는 19세기 후반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기술적 발명으로 등장하여, 당대 대중사회로의 이행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였으며,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미디어 중 하나로 위세를 떨친다. 영화는 여러모로 특별한 콘텐츠인데, 문화산업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매체 중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사이의 관계나 현실 및 세계에 대한 통찰 등을 제기하는 재현예술이라 할 것이다. 제임스 모나코같은 영화학자는 영화의 제작 및 수용 과정 등 그 생태계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요소들의 절대적 영향력을 염두에 둔다면, 영화가 예술이 된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디지털 전환 이후에도 영화는, 여전히 문화산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미디어로 그 위세는 굳건할 뿐만 아니라, 이전 세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시대와 현실을 관통하며 다양한 사회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 또 시대 이해 및 시대 비판의 단초를 제공하는 예술적, 미학적 논의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는 오랫동안 사회문화적으로, 그리고 예술‧미학적으로 비판적인 논의의 장을 제공한 중요한 대중문화의 공간이자, 예술적, 인문사회과학적 사유를 풍요롭게 해준 지적 저수지가 되어왔다. 그 저수지를 풍성하게 해준 많은 사상가 중에서 발터 벤야민과 테오도르 W. 아도르노는 단연 돋보이는 사상가라 할 것이다. 이 둘은 서로 교류하면서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 현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사상가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영화를 통해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커다란 지적 자극을 주었던 학자라고 할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라는 저작은, 바로 이 두 사상가가 주었던 이러한 세계와 인간에 대한 통찰의 가능성을 영화 작품들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확인하게 해주는 눈에 띄는 저작이다. 문병호와 남승석, 두 저자는 한국(<공동경비구영 JSA>, <택시운전사>), 중국((<여름궁전>), 대만(<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일본(<복수는 나의 것>) 등 다섯 편의 영화를 벤야민 및 아도르노의 사유와 함께 읽으면서, 이들 각각의 영화들을 통해서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개별인간들은 세계의 폭력 아래에서 고통받는 모습이 이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기하고, 나아가 두 사상가의 사유에 기대어, 영화 속 개별인간이 당하는 그러한 고통과 억압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구제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두 저자가 예시하는 다섯 편의 영화는 제작 시기나 제작 국가가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작품들이 다루는 소재는 모두가 국가권력 및 사회체계가 개별인간을 어떻게 비극적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는지를 다룬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문병호가 서문에서 쓰고 있듯이, “세계가 진행된 역사는 세계가 인간에게 자행한 폭력의 역사”(서론, 24쪽)이기에, 그 속에서 개별인간은 고통과 슬픔을 가질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병호와 남승석 두 저자는 벤야민의 ‘세계의 고통사’와 구제의 가능성)이나, 아도르노비판이론을 통한 ‘세계와 인간의 화해’의 가능성에 기대어, 이들 다섯 편의 영화들이 담고 있는 “충격적이고 추하고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들이 어떻게 “슬프고 추한 세계를 증언”(25쪽)하는지를 추적하여 제시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이 책의 강점이 자리하는데, 저자들이 이미 서문에서 여러 번 강조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 책은 영화라는 예술 매체가 갖는 사유의 힘을 바로 벤야민과 아도르노 두 사상가의 개념과 함께 추출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라는 저작에서, 영화는 “개념과 논리를 사용하는 논증으로써 인식을 제공하는 능력”(32쪽)이 아닌, “수수께끼와 같은 형상”(36쪽)에 담긴 알레고리를 통해서 구원의 가능성을 탐색하게 해주는 예술적 힘을 가진 매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예술의 부정성”(아도르노)이나 “수수께끼적인 성격을 가진 형상”과 관계하는 “알레고리”(벤야민)와 같은 개념을 통해서 문병호와 남승석은 영화라는 재현매체가 갖는 예술적 능력을 적절하게 설파한다고 할 것이다.

  문병호와 남승석의 신간에 담긴 영화 다섯 편이, – 물론 때로는 국가권력의 폭력이나 억압을 직접적으로 제기하기도 하지만, – 기본적으로 소위 ‘수수께끼’와 같은 성격을 가진 모호한, 벤야민의 개념을 빌리자면 ‘알레고리적’ 이미지들로 형상화되는 경우를 자주 보여주는 영화들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 책에 예시하는 영화 속에 공히 담겨있는, 충격을 주고 추하게 다가오는 이미지들은 어떻게 각각의 영화적 “세계를 증언”하는 “수수께끼적인 성격”(13쪽)을 가진 영화가 되는지에 두 저자는 집중하면서, 바로 이 “수수께끼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이미지의 연속들에서 국가권력의 폭력, 즉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국가권력의 메커니즘”(33쪽)이자 “폭력을 자행하는 이념”(34쪽)을 추출하고, 이에 대한 통찰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두 저자가 다루는 영화들이, 대체로 오래전에 제작된 영화들이지만, 이들 영화는 21세기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울림과 그 의미를 새로이 해주는 영화가 된다. 왜냐하면, “수많은 무력한 개별인간이 프레카리아트로 전락하는 고통과 슬픔에 대해 인식‧해명‧비판할 수 있는 모멘트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37쪽)

  더불어서 이 책의 장점은 전공이 상이한 두 학자가 함께 협업하는 방식이다. 두 저자가 각각 개별 영화에 대한 입장을 병렬적으로 제시하는 형식은 조금은 낯설고 투박해 보일 수도 있다. 먼저 영화학자이자 감독인 남승석이 영화적 맥락에서 분석 대상이 되는 영화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그 영화적 의미를 제시한 이후에, 아도르노 전문가인 문병호의 글이 뒤따르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개별 영화 작품에 대한 두 저자의 입장이 그저 병렬적으로 배치된 형식으로 불편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은 외려 영화 전반에 대한 영화학적인 맥락에서의 이해를 제시하고, 이어서 국가폭력과 개별인간의 고통이 갖는 사회적, 철학적 사유를 보다 깊이 있게 탐색하도록 해주면서, 독자들에게 영화에 대한 이해를 넘어 영화가 시대의 예술이 되는 여정을 함께 하도록 해준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비판이론 연구가와 영화학자 사이의 융합연구서로서 이 책은 영화와 비판이론가의 사유를 넘나들 수 있는 징검다리이자 융합적 사유를 위한 적절한 시도로 긍정하게 되는 저작이라고 할 것이다.

헤겔미학산책60-셰익스피어 비극과 몰리에르 희극(최종회)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60-셰익스피어 비극과 몰리에르 희극

 

1)

이제 헤겔의 극시론 가운데 마지막 부분인 낭만주의 시대 비극[1]과 희극을 살펴 볼 차례다. 그는 여기서 근대로 들어가는 입구인 바로크 시대 셰익스피어나 몰리에르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프랑스 혁명 이후 헤겔 당대에 등장한 괴테, 실러 등의 극시를 곁들여서 다루고 있다.

우선 근대 비극을 다루자면, 헤겔은 고전 희극을 분석할 때도 그러했지만 근대 비극의 원리를 파악할 때도 고전 비극에 비추어서 파악한다. 근대 비극의 첫 번째 원리는 근대 비극에서 인물은 주관적 개인일 뿐 더 이상 고전 비극에서처럼 실체적 목적을 실행하는 생동적 개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근대 비극의 인물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처럼 사랑과 같은 주관적 목적을 위해 행위할 수도 있고, 아예 어리석음, 질투나, 야망과 같은 범죄적인 목적을 추구하기도 한다. 또는 괴테나 실러의 시민극에서 보듯이 그 주인공이 물론 국가나 일반적 선을 위해 행위할 수도 있지만 추상적인 일반성에 그치면서 그것을 실행하는 수단은 “외적이며 인위적이어서”[2] 여전히 주관적 개인을 벗어나지 못한다.

 

2)

두 번째 원리로 그럼에도 근대 비극의 인물은 고전 비극의 인물과 닮은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고대 인물이 자신의 목적을 정당하다 믿으면서 주저 없이 단호하게 행동하는 파토스적 성격이듯이 근대 비극의 인물 역시 행동에 있어서 철저함을 지니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현실 앞에서 주저하면서도 끝내 “내적으로 굳건하고 일관된, 자기 자신과 자기목적을 단호하게 견지하며”[3], 그것은 어쩌면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맹목적 광기처럼 보인다. 이런 인물은 “심지어 몰락에 이르러서도 꺾임 없이 강인하고 태연하다.”[4] . 그 힘은 거의 무한성에 가까운 힘을 보여준다. 헤겔은 이를 ‘성격적 위대성’이라 규정한다.

이런 인물은 그런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그런 목적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인물은 자연적으로 태어나기를 그런 목적을 추구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는 근대 사회에 등장한 다양한 성격 가운데 하나이지만 특별하게 강한 의지를 지닌 존재일 뿐이다

세 번째 원리는 우연적 충돌이다.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런 주관적 목적의 대립 때문에 갈등하게 된다. 이 대립은 고전 비극에서처럼 실체 자체의 근본적 분열에 기인하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 대립은 외적인 여건과 외적 우연성의 작용이다. 이 우연성은 근대 비극의 인물에게는 “냉혹하게 다가오며 범죄적 본성을 지니기도 하는”[5] 운명이다.

헤겔은 근대 비극에 등장하는 서로 대립하는 다양한 성격의 차이를 세 가지로 파악한다. 첫째는 “사랑과 명예, 명성, 지배욕, 포악함” 등과 같은 특정한 따라서 추상적인 열정들 사이의 대립이다. 헤겔은 이런 추상적 성격을 구체적인 생동성 속에서 표현한다는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 그는 그들이 자신을 마치 예술작품처럼 이론적 객관적으로 관조하도록 만드는 이미지를 통해 그들 스스로를 그들 자신의 자유로운 예술가로 만들며… 그들은 개별적, 현실적이며 직접적 생동적이고 또 대단히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요소 요소에서 고상함과 괄목할 만한 표현력, 내면의 깊은 감정, 순간적으로 산출되는 이미지와 비유의 창안력, 수사능력을 갖추고 있다.”[6]

 

두 번째는 인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격적 분열이다. 인물은 이중적 열정에 속하고 있어서 이 이중성은 인물을 “ 하나의 결단, 하나의 행동으로부터 또 다른 결단 혹은 행동으로 내몬다.”[7] 구체적인 예로서 괴테의 청년기 작품 ‘괴츠’에 나오는 바이스링엔, ‘스텔라’에 나오는 페르난도, ‘클라비고’의 클라비고 등을 들고 있다. 실러의 ‘오를레앙의 처녀’도 마찬가지 작품이다.

헤겔은 셰익스피어에서 주로 발견되는 첫 번째 종류의 대립을 보여주는 극시에 대해서는 지극히 찬양적인 반면, 근대 비극에서 자주 발견되는 두 번째 경우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4)

네 번째 원리는 이런 파국이 도래하기는 우연적이지만, 이미 자연적 성격 속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 비극의 결말에서 주인공에게 도래하는 파멸은 세속적인 것의 무상함만을 보여주거나 공허하고 잔혹하고 외적인 슬픔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 힘은 이미 주인공의 내적 본질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며 그 본질이 실현되는 결과이다. 우연성은 필연적으로 도래할 결과가 발생하게 하는 외적인 계기일 뿐이다.

그러므로 햄릿에서 결말에 그가 우연하게 죽기 이전에 이미 그의 죽음은 그의 성격 속에 예고되어 있다. 햄릿에게 ‟유한성의 모래톱은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줄리엣의 죽음 역시 줄리엣에게 예고되어 있으니, 헤겔에 따르면 줄리엣은 ‟우연한 세계의 골짜기에 있는 연약한 장미처럼 거친 폭풍우에 의해 … 꺾이게”[8]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근대 비극의 대단원은 고전 비극의 대단원과 닮았다. 근대 비극에서 주인공의 몰락은 외적인 우연성을 계기로 하니, 그것은 냉혹한 운명이다. 그러나 냉혹한 운명이 객관적 정의인 한, 비극의 인물은 파멸에 이르러 마침내 객관적 정의를 자신에게 정당한 정의로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인물은 내적 상태의 변화를 겪는다. 이런 상태 변화가 곧 비극의 목적인 ‘불멸의 지복’이다. 이런 대단원은 고전 비극에서 분열된 실체가 마침내 상호 균형을 얻으며 주인공은 자신에 대립하는 파토스를 긍정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것과 유사하다. 다만 회복되는 것이 후자에서는 실체적 통일성이지만, 전자에서는 소외된 사회적 정의라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성격의 주관성에 곁들여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운명과 화해했음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이 즉각 요구된다. 이러한 만족은 심정이 자신의 현세적 개성의 몰락의 대가로 한층 높은 지복이 보장되었음을 인지할 경우에는 종교적일 수 있고 … 또한 모든 관계 및 불행에 맞서 자신의 주관적 자유를 불굴의 에너지 속에서 보존할 경우에는 형식적이되 현세적일 수 있다.”[9]

 

5)

극적 행위가 주관적 목적을 따라서 일어나고, 그것이 벌이는 충돌은 우연적인 상황에 의해 일어나는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는 근대 비극은 오히려 그리스 비극보다는 그리스 희극과 더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 희극과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근대 비극이 전혀 희극적이지 않은 이유는 이런 극적 인물의 자멸을 통해 민족적 실체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격의 충돌과 파멸은 우연적인 사건이지만, 그 우연성은 내적 필연성의 실현이라는 근대비극의 특징은 사실 근대 사회의 본래적 모습이다. 근대 사회는 시장을 통해 상호작용하는 소외된 사회다. 각자는 주관적 정의에 따라 행동하면서 그 행동의 결과는 시장에서 상호 교환되고, 최종적으로는 이런 상호 교환을 통해 각자에게 정당한 객관적 정의가 실현된다. 이런 정의는 각 개인에게는 알 수 없는 힘으로 즉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지배로 다가오기에 이 정의는 우연적인 결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정의는 본래 그 자신에 내재하는 정의의 실현일 뿐이며 그런 점에서 이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므로 고대 희극에서 우연적 충돌이라는 개념과 근대 비극에서 우연적 충돌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고대 희극에서 도시 국가가 해체된 이후 개인의 인격은 출현했지만 개인은 전적으로 맹목적인 충돌이 벌어지는 속에서 살아간다. 결국 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힘에 의해 최종적으로 승리한 황제의 자의이다. 개인은 이런 황제의 자의가 보여주는 변덕스러운 지배에 전전긍긍할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인격이 실현되는 자유 속에서 자신을 낙천적으로 긍정하면서 살아간다. 그게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모습이다. 다가오는 사회가 바로 황제의 변덕이 지배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고전 희극의 등장 인물이 낙천적인 가운데서도 어두운 기미를 보인다.

반면 근대 비극에서 이미 새로운 상호작용적 시장 사회가 출현했다. 이 시장 사회는 더 발전되면서 근대 사회로 이행하게 되는데, 여기서 우연적 충돌은 비록 그 자체로서는 비극적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근대 비극에서 인물의 몰락은 보이지 않는 힘인 사회적 정의가 자기를 관철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근대 비극의 인물은 파멸 속에서도 오히려 긍정적이다. 햄릿이나 줄리엣의 파멸이 전적으로 어둡고 비통한 것만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히려 햄릿이나 줄리엣을 통해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헤겔은 “우리를 엄습하는 이 쓰라림은 고통스러울 뿐인 화해, 불행 속의 불행한 지목이다”[10]라고 말한다.

헤겔은 근대 비극의 결말이 꼭 불행으로 끝날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어차피 우연적 충돌에 의해 대단원이 내려진다면 행복한 결말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미 근대 사회에서 주관적 정의의 몰락은 곧 객관적 정의의 실현이니, 비극에서처럼 객관적 정의가 암시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실현되어 구체적인 모습을 띄고 나타나더라도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11]

 

6)

마지막으로 헤겔은 근대의 희극을 다룬다. 그는 근대의 희극은 희극이라기보다 익살극이라 한다. 대표적으로 몰리에르의 희극을 볼 때, 거기서 주인공은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지만 자기가 기대하는 목적과 반대되는 결과에 이른다. 고대 희극과 달리 주인공 자신은 이런 가운데서 자기를 긍정하는데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불만에 빠져 다시 자기의 목적을 획득하려고 허우적거리는데, 이것은 관객의 비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헤겔은 몰리에르의 근대 희극보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더 높이 평가한다. 그 주인공은 몰리에르 식으로 비웃음과 풍자를 터뜨리도록 하지 않으며 마치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처럼 낙천성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양자의 차이점을 간과할 수 없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리스 사회의 해체기에 살았고 그가 부딪힌 것은 맹목적 운명이 지배하는 사회였다면 셰익스피어는 마침내 프랑스 혁명에 이르러 완성되는 근대 시장 사회를 향하여 다가가는 시대에 살았고 이 시장 사회는 비록 소외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객관적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파네스의 주인공이 낙천적이지만 몰락의 비애감을 드러낸다면, 셰익스피어의 주인공은 낙천적이면서 밝고 세속적으로 긍정적이다.

 

“온갖 실패와 그르침을 괘념하지 않는 심정의 유쾌함, 확신에 찬 방종, 자만, 근본적으로 즐거운 숙맥 내지는 주관성 일반의 대담성이 다시 기조를 형성하며, 또한 이를 통해 한층 깊은 충만함과 내면성을 갖는 유머 속에서 고대인의 경우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의 분야에서 가장 완벽하게 성취했던 것을 다시 산출한다.”[12]

 

헤겔이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헤겔이 실제 예로 들고 있는 폴스타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폴스태프는 셰익스피어의 <윈저 성의 명랑한 부인들>(1602년)이라는 소극의 주인공이다.

간단하게 그 줄거리를 소개한다. 전쟁이 끝나고 윈저로 돌아온 존 폴스태프 경은 배 나오고 뚱뚱하고 비겁하고 변명 잘하고 떠벌리기 좋아하고 낭비벽 심하고 무일푼인 술주정꾼이다. 그는 남편 있고 재력 있는 두 여자, 포드 부인과 페이지 부인을 유혹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오히려 두 부인과 그들의 남편의 계략에 빠져 모욕당하고 만다. 그는 광주리에 실려 더러운 강물에 던져지기도 하고, 하녀의 모습으로 변장해 간신히 빠져나가기도 하며, 숲에서는 장난꾸러기 요정들의 습격을 받는다.

폴스태프는 자신의 사악한 성격을 따라서 좌충우돌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거리를 취하고 스스로 자신을 우스꽝스럽고 가련한 존재로 여기는 인물이다.

—————————–

이로써 60회에 걸친 헤겔미학 산책을 종료한다.


[1] 헤겔은 근대 셰익스피어로 대표되는 비극을 근대 비극 또는 ‘낭만적 비애극’이라고 지칭한다. 그가 ‘낭만적 비애극’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벤야민에서처럼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대 흔히 비애극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으므로, 그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그저 낭만주의 시대 또는 근대 비극이라는 이름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2] 미학강의 3권, 564쪽

[3] 미학강의 3권, 570쪽

[4] 미학강의 3권, 572쪽

[5] 미학강의 3권, 571쪽

[6] 미학강의 3권, 568쪽

[7] 미학강의 3권, 569쪽

[8] 미학강의 3권, 573쪽

[9] 미학강의 3권, 572쪽

[10] 미학강의 3권, 573쪽

[11] 미학강의 3권, 573쪽 참조

[12] 미학강의 3권, 578쪽

헤겔미학산책59- 그리스 희극, 아리스토파네스와 발자크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59- 그리스 희극, 아리스토파네스와 발자크

 

1)

앞에서 헤겔이 제시한 그리스 비극의 기본 특징에 대해 살펴보면서 그의 이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 그리고 니체의 비극론과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았다. 이제 극시의 유형 가운데 두 번째 유형인 그리스 고전 희극에 관해 살펴볼 차례다. 헤겔은 희극의 특성을 주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을 중심으로 파악한다.

 

2)

헤겔에서 그리스 시대 비극에 대립하는 희극은 비극의 특성과 대조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헤겔은 그리스 희극의 특징을 세 가지 요소로 들고 있다. 첫 번째 요소는 희극에서 주인공은 더 이상 실체적 목적을 위해 행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주관적 목적을 위해 행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의 대표적 예가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이라는 희극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자기 빚을 없애기 위해 변론술을 배운다.

두 번째 요소는 주인공은 설사 실체적 목적을 실행하더라도, 지극히 취약한 무력한 수단을 통해 수행할 뿐이다. 이런 예 역시 아리스토파네스에서 찾을 수 있는데, 헤겔은 ‘뤼시스트라테’을 들고 있다. 여기서 여인은 전쟁을 없애기 위해 남자들과의 성관계를 거부한다.

세 번째 요소는 우연적 사건이다. 희극적 주인공은 스스로 자멸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몰락은 비극에서처럼 인륜적 실체의 분열에 기초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을 몰락은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나 수단 자체가 본래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며, 이런 허망한 것은 우연한 충돌을 통해 청산될 뿐이다. 주인공의 자멸을 통해 다시 회복되는 것은 곧 실체적 힘이다.

 

“[희극의] 세 번째 요소를 이루는 것은 외적 우연들의 사용인데 상황들은 이것들의 다양하고 특이한 분규를 통해 출현한다. 그리고 이 상황 속에서 목적들과 그 실행, 내적 성격과 그 외적 상태들은 희극적 대조를 이루며 또한 마찬가지로 희극적으로 해결된다.”[1]

 

희극의 이런 특징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대표적 희극 구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인공 스트렙시아스는 돈을 밝히고 색을 즐기는 전형적으로 세속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사치스러운 아내와 말 경주에 탐닉하는 아들 때문에 큰 빚을 지고 파산 직전에 있다. 그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빚쟁이에게 돈을 갚지 않는 방법을 찾는다.

스트렙시아스는 “현명한 영혼을 가꾸는 학원”의 소피스트 두목인 소크라테스를 찾아가 변론술을 배운다. 그 변론술은 “옳든 그르든 간에 이기는 법을 가르쳐 준다.”[2]  그들이 모시는 신은 이제 제우스가 아니라 구름이다. 그 여신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3] 신이며 궤변을 가르치는 신이다.

그러나 스트렙시아스는 워낙 머리가 나빠 소크라테스의 변론술을 배우지 못한다. 스트렙시아스는 대신 아들 페이딥피데스를 보내 싫어하는 그를 억지로 배우게 한다.

드디어 빚쟁이가 나타나자 스트렙시스는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운 황당한 것을 질문하면서 어리둥절한 빚쟁이를 무식하다고 하면서 쫓아내고 만다.

 

3)

그런데 아들인 페이듭피데스에게 스트렙시스가 얻어맞는다. 스트렙시스는 술자리에서 아들에게 시모니데스의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는데, 아들은 그 노래가 시대에 뒤떨어진 노래이고 요즈음은 에우리피데스의 노래를 부른다고 거부한다. 스트렙시스가 아들에게 화를 내자, 아들이 그를 때린 것이다. 스트렙시스는 아들을 고발한다고 날뛰지만 아들은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운 논증 방식을 써서 그의 주장을 꺾어놓는다.

마침내 스트렙시스는 소크라테스가 가르친 지식이란 것이 속임수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이렇게 한탄한다.

 

“아, 바보 천치. 나는 돌았어. 소크라테스 덕택으로 제신을 저버리려 하다니. 하지만 오 헤르메스님, 저를 노엽게 생각하지 마시고 나를 벌하지 마시며 지껄이고 수다를 부리는 미친 저를 용서하십시오.”[4]

 

희극은 그가 소크라테스가 주관하는 학원의 지붕에 불을 지르면서 끝난다.

이상의 극에서 잘 보듯이, 주인공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술을 통해 돈을 갚지 않으려는 목적을 추구한다. 그는 성공하는 듯했지만, 아들이 동일한 수단으로 그에게 대항함으로써 자멸하고 만다. 그가 기대했던 아들이 오히려 그를 파멸시킨다는 것은 우연적 상황의 중첩이지만, 희극적 대조를 보여준다. 극은 주인공이 실체성에 호소하면서 끝난다.

 

3)

이상의 내용을 보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실체적인 것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스트렙시스가 소크라테스의 학원의 지붕에 불을 지르면서 “횃불이여, 타오르는 불길을 뿜는 것은 네 의무다”[5]라고 외칠 때 아리스토파네스의 그런 심정이 노출된다.

헤겔 역시 희극의 이런 실체성을 인정한다.

 

“즉 희극의 묘사를 통해 이를 테면 즉자 대자적으로 이성적인 내적으로 전도되고 붕괴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되며 오히려 반대로 어리석음과 불합리, 잘못된 대립과 모순들은 현실에서도 승히할 수 없으며 또한 궁극적으로 존속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6]

 

그런데 그리스 희극 작가가 등장할 시기에 이미 그리스 도시국가라는 실체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국가이면서도 혈연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민족국가인데, 초기에 양자는 상호 보완적이었다. 즉 국가는 개인으로 해체되는 경향을 혈연이라는 자연적 통일성을 통해 단결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런 국가에서 개인의 자립성이 심화되면서 혈연적 통일성은 상실되고, 국가는 개인으로 해체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 결과 등장하는 것이 도시 국가 사이의 계급적 분열, 도시 국가 사이의 내전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 희극 작가가 인륜성, 신, 진리의 복권을 주장한다면 이것은 이미 사라진 과거로 돌아가려는 복고적 경향성을 의미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철학이 스파르타를 이상화하며, 내적 조화와 통일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복고성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아리스토파네스도 희극에서 최종적으로는 실체적인 것의 복권을 주장했다면, 그도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복고적이라는 말이 되는 것일까?

헤겔은 아리스토파네스 및 그리스의 희극을 이와 같이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 점은 그가 제시하는 희극의 개념과 관련된다.

 

4)

헤겔은 희극을 논하면서 처음부터 ‘우스꽝스러운 것[Laecherliche]’과 ‘희극적인 것[Komische]’을 구분한다. 그 어느 것이나 토대가 되는 것은 곧 ‘상반적인 것’이다. “현상이 자체 내에서 자신의 스스로 지양되도록 만드는 모순, 목적이 그 실현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표를 사장하도록 만드는 모순”, 또는 “어리석은 난센스, 우둔함”이나 “진부하고 몰취미한 것” 마지막으로는 “극히 중요하고 심오한 것들도…일상적 관점과 모순되는 완전히 무의미한 측면이 보이는” 등[7]의 현상은 모든 희극의 토대가 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희극의 토대는 대체로 웃음에 관한 부조화 이론가[8]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풍자 되고 조롱 되면 헤겔이 말하는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는데, 이는 그런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 즉 작가나 관객이 자신이 우월하다는 입장에서 그런 현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9]. 즉 이 경우 “웃음은 만족스러운 영리함의 표현… 즉 그들이 현명하기도 하다는 표시일 뿐이다”[10]

앞에서 예로 들었듯이 아리스토파네스는 자신은 실체적인 것, 진리, 신을 대변하면서 그의 극중에 등장하는 사람들 즉 그리스 시민들이나 그 정치적 지도자인 소피스트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대체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이런 풍자와 조롱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헤겔은 그리스 희극은 이런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니라 희극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희극적인 것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헤겔에 의하면 희극적인 것은 자멸하는 개인을 조롱하거나 풍자하지 않는다. 우수꽝스러운 것에 대립하는 희극적인 것에 관한 헤겔의 개념은 프로이드나 바흐친 등으로 이어지는 웃음의 해방이론이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프로이드는 억압된 무의식이 농담이나 웃음으로 표출된다고 했다. 바흐친은 중세에서 억압된 민중의 내적 욕망이 다양한 익살극으로 분출한다고 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중에서 주인공은 자멸하면서도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낙천성을 지니고 있으니, 희극적 개인은 이를 통해 자기 확신 속에서 평온하며 정신의 절대적 자유, 명랑성을 획득한다고 말한다. 자멸하는 개인의 낙천성, 그것이 헤겔이 말하는 희극적인 것인데, 이런 그 낙천성은 감추어진 욕망의 분출이며 이른바 실체의 세계라는 억압적 질서에 대한 반항이 아닐까 한다. [11]

 

“무릇 희극적인 것에는 그 자신의 모순을 철저히 극복하여 이를 테면 그 속에서 괴롭고 불행하게 머물지 않는 주관성의 끝없는 낙천성과 자기 신뢰, 그 희열과 편안함이 속하며 또한 자기 확신에 찬 이 주관성은 그 목적과 실현의 해체를 감당할 수 있다.”[12]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진력하는 유한성에 진지하게 매이지 않는다는 점, 오히려 그 위로 넘어가며, 또한 실패와 상실을 당하고서도 내적으로 공고하고 확신에 차 있다는 점을 통해 스스로를 한층 높은 본성들인 것으로 공표한다.”[13]

 

5)

이런 점에서 헤겔은 희극적 개인은 “비극의 종착점을 즉 내면에서 절대적 화해를 구한 밝은 심정을 자신의 토대이자 출발점으로 삼는다”[14]고 한다. 비극의 종착점이라면 예를 들어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와 같은 존재를 말할 것이다. 그는 스스로 저지른 죄를 짊어지고 자신의 눈을 찔러 처벌함으로써 마침내 자기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며 이를 통해 그는 복수의 여신의 추적을 벗어나 영원한 평안을 얻는 존재를 말할 것이다.

그가 여기서 깨닫는 것은 곧 자신의 유한성의 한계이며 거꾸로 말하자면 이를 통하여 무한한 신적 주관성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 무한한 주관성은 곧 새로이 등장하는 시대의 신 즉 기독교적 신의 모습이다.

 

“그의 먼눈은 밝아지고 그의 사지는 쾌유되어” “죽음 속에서 이러한 변용은 … 현대적 의미에서의 화해이기도 하다…. 그것은 신이 은총으로 용서하는 죄인의 모습이자 …기독교적 종교적 화해는 영혼의 변용으로 존재한다. 영원한 구원의 생물로 정화된 영혼은 그 현실과 행동들 너머로 솟으니, …영원하고 순수한 정신적 내면의 지복에 대한 확신으로 굳건히 대처하기 때문이다.”[15]

 

자기 내로 복귀하는 유한한 인간이 주관적 목적을 추구하다가 자멸하면서도 자신을 긍정하는 희극적 개인의 토대이자 출발점이다. 그는 현재로서는 몰락하지만 앞으로는 자기의 자립성을 확보하게 될 이행기적 인간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희극적 개인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그리스 쇠락의 거대한 징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현상하는 것의 지배자가 된다”[16]고 말한다.

 

‟그러나 …주관성의 이러한 승리 속에는 그리스 쇠락의 거대한 징후 역시 들어 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파네스는 한편으로 신들의 진정한 본질과 인륜적 현존재 다른 한편으로 그 의미 내용을 실현해야 할 시민적 개인적 주관성 사이의 절대적 모순을 노정하기 때문이다.”[17]

 

6)

헤겔이 주장하는 이 점을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에서 직접 확인해 보자.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 구름에서는 특이하게도 정론과 사론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서로 논쟁을 벌인다. 스트렙시스의 강요에 의해 아들 페이딥피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찾아가 변론술을 배우게 되는 장면에서 그 논쟁은 시작한다. 페이딥피데스가 그들의 논쟁을 들어보고 원하는 대로 선택하라는 취지이다.

정론은 관객 앞에서 인륜적 사회의 참된 질서에 관해 옹호하는데, 사론은 그것을 일일이 반박한다. 대체로 전자는 절조와 같은 사회적 덕목이고 후자는 색욕(“이불 속에서 기분 좋게 하는 법”)과 같은 개인적 행복을 추구한다. 그 논쟁에서 정론은 사론에게 패배하고 페이딥피데스는 사론을 배우기 시작한다.

사론의 반박을 살펴보면 정론이 덕목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시대에 뒤진 것이며, 겉으로는 덕목을 추구하는 체하지만 실제로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풍자하고 조롱하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겉으로는 정의를 사회적 덕목을 추구하는 것처럼 은폐하는 자, 자신을 이처럼 사회적 덕목으로 정당화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민중을 오도하는 소피스트나 정치적 지도자이다. 그것은 이미 아리스토파네스 역시 자신이 추구하는 질서, 참된 진리가 이미 낡은 것이며, 개인적 행복이 추구되는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내심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헤겔이 아리스토파네스를 통해 제시한 자멸적이면서도 자기 확신에 찬 개인을 슐레겔 등이 제시한 아이러니적 인간의 모습을 해석할 여지도 있다. 슐레겔의 아이러니의 작가는 자기가 만든 것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유한한 세계를 벗어나 무한한 자유에 이른다. 이 자유는 실제로 실현된 자유가 아니라 유한한 세계를 벗어나는 자유, 주관적 자유이지만 그럼에도 모든 고정된 것을 넘어선 무한한 자유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의 욕망을 추구하는 주인공은 자기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우연에 부딪혀 자멸할 뿐이며 그의 목적인 주관적 욕망에 머무른다. 그는 결코 세계를 벗어나려는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로마 말기나 중세 초기에 등장한 인격적 존재, 창 하나를 들고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보는 기사와 닮았을 뿐이다.

 

7)

아리스토파네스의 모습은 마치 발자크를 연상시킨다. 발자크 역시 구 시대 귀족적 질서를 옹호했지만 이미 그런 귀족의 세계에 부르주아적인 이익 추구가 개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편으로 표면적으로는 귀족의 타락에 대한 풍자이지만 다른 한편 내심에는 다가오는 욕망의 세계에 대한 긍정이다. 그의 작품 제목이 ‘인간 희극’인 것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아리스토파네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다가오는 세계에 대한 표면적인 부정에도 불구하고 내적 긍정이 시대의 타락에 대한 준열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희극의 자멸하는 주인공이 스스로에 대해 낙천적인 이유가 아닐까?


[1] 미학강의 3권, 536쪽

[2] 희랍극전집 3권, 28쪽

[3] 희랍극전집 3권, 36쪽

[4] 희랍극전집 3권, 68쪽

[5] 희랍극전집3권, 68쪽

[6] 미학강의 3권, 536쪽

[7] 미학강의 3권, 534쪽

[8] 18세기 칸트, 장 파울, 졸거 등 대부분의 이론가는 웃음은 다양한 부조화에서 나온다고 본다. 헤겔도 이 이론을 따른다.

[9] 이런 입장은 현대에 들어와서 대표적으로 베르그송이 취하고 있다. 베르그송은 웃음은 가볍게 처벌함으로써 교정하려는 의도를 가진다고 말한다.

[10] 미학강의 3권, 534쪽

[11] 류재국,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의 지향성에 관하여, 연극공연연구 30호, 2017. 그러나 여기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회적 덕목, 사회지도자이고, 비판하는 자는 주로 개인이고 행복을 추구하는 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억압의 해방이라는 측면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 미학강의 3권, 534쪽

[13] 미학강의 3권, 559쪽

[14] 미학강의 3권, 558쪽

[15] 미학강의 3권, 557-558쪽

[16] 미학강의 3권, 537쪽

[17] 미학강의 3권, 561쪽

헤겔미학산책58-니체와 헤겔의 그리스 비극론 [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58-니체와 헤겔의 그리스 비극론

 

1)

앞에서 그리스 비극을 둘러싼 아리스토텔레스의 헤겔의 논점을 파악해 보았다. 그 논점은 비극의 효과와 그 전개 과정의 관계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심리적 효과를 강조하면서 기꺼이 우연성을 용인했으나 헤겔은 비극의 필연적 전개를 강조하면서 파토스적 성격과 실체적 분열을 강조했다.

그리스 비극과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논의는 니체에 의해 제기되었다. 니체에 따르면 초기에 비극은 극적 전개가 없었고 다만 합창단만이 존재했다. 이 합창단은 음악과 춤, 그리고 서정적인 노래를 통해 극을 전개했는데, 니체는 이 가운데 특히 음악의 차원을 분석하는데 주력한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단순히 비극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두 종류 즉 조형 예술과 음악 예술을 낳는 예술적 충동 자체를 다루는 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그 핵심 문제는 음악이 이미지를 낳는 과정인데, 니체는 이 문제를 비극의 합창단을 분석하는 가운데 던지고 있다.

 

2)

비극을 미학적으로 분석하기 전 니체는 예술의 자연적인 두 충동을 제시한다. 하나는 아폴론적 충동인데, 이것은 흔히 그리스 고전적 미학이라고 지칭되는 사물의 이상적 비례, 상호 조화로운 세계를 낳는 예술적 충동이다. 이는 주로 조형예술에서 드러나는 이미지 형상의 원천이다.

그리스에서 아폴로적 예술 충동에서 서사시가 발전된다. 원초적 일자 속의 부조리와 모순 속에서 인간은 예술적 충동을 통해 아름다운 이미지의 세계를 꿈꾼다. 그 꿈의 형상이 곧 호머의 서사시인데, 그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부동 불변의 세계이지만, 부조리와 모순이 지배하는 바다인 삶의 세계에서 일시적인 위안의 섬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위협적인 파도는 곧 섬의 해안을 침식해 버린다.

이에 대립하는 또 하나의 충동이 있으니, 그것이 디오니소스적 충동이다. 이 충동은 사물의 근원적 일자, 끊임없이 자기를 생성하며 파괴하는, 자기 모순적이며 동시에 자기 창조적인 존재와 합일하는 충동이다. 이것은 개인이 자기의 자아를 넘어 근원적 일자와 합일하는 도취의 상태이며 원초적 환희의 세계이다. 이런 합일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맹목적 의지로서의 세계이다.

 

“디오니소스적 음악가는 어떤 이미지도 갖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이 근원적 고통이며, 이것의 근원적 반향일 뿐이다.” [1]

 

이 충동은 조형예술에 대립하는 또 하나의 예술적 형상을 낳는데, 그것이 바로 음악의 형상 즉 선율이다. 여기서 음악적 선율을 근원적 일자에 대한 직접적인 반향이며, 그 자체로는 이미지나 개념을 갖지 않는다.

니체가 음악적 선율이 디오니소스적 충동에서 나온다고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비극의 탄생 후반부에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을 예로서 끌어들이는데, 바그너의 음악이 고전 음악의 화성을 넘어서 고대 음악이 지닌 선율이 강조되며 그 속에 특히 불협화음이 지속된다는 것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선율은 협화음으로 이루어진 화성의 규칙을 지니지만 그 내부에 이미 불협화음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치 불협화음의 바다 위에 화성의 음들이 포말처럼 떠있는 듯하다. 니체는 이런 선율이 지닌 이중성을 가리켜 음악을 디오니소스적 형상화라고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파악하기 어려운 이 근원적 현상은 그러나 오직 직접적인 방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음악에서의 불협화음이라는 경이로운 의의를 갖는 것에서 직접 파악된다. “[2]

 

3)

디오니소스적 충동에서 나온 음악적 선율은 비극으로 전개되기 전 우선 서정시가 된다. 음악적 선율이 디오니소스적 의지의 직접적 반향으로서 감정적 상태에 머무른다면, 서정시에서는 그런 음악적 반향이 이미지와 개념을 통해 다시 형상화된다. 니체는 그리스 서정시의 선구자 아르킬리코스에서 서정시가 솟아나오는 과정을 아름답게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도취한 열광자 아르킬로코스가 쓰러져 잠들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고산의 초원에서 정오의 태양 아래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이제 아폴론이 다가와 월계수로 그를 만진다. 잘들어 있는 자를 사로잡고 있는 디오니소스적 음악적 마력이 자신의 주위에 형상의 불꽃을 발산한다. 이것이 바로 최고로 발전했을 때 비극과 주신찬가로 불리게 되는 서정시인 것이다.”[3]

 

근원적 일자가 곧 생성하는 의지라면 음악적 감정은 그 본질적 의지의 현상이다. 이 감정이라는 음악적 마력이 자신의 주위에 만들어낸 형상의 불꽃 즉 직관과 개념이 곧 서정시인데, 이런 형상의 불꽃은 아폴로의 월계수가 신비하게 시인을 건드리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다.

음악 즉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형상 즉 아폴론적인 것은 그 이전 삶과 서사시에서처럼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아폴로적 형상 속에서 내부에서 그것을 생성하는 힘이며, 여기서 나온 형상은 상호 침투하면서 다시 근원적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되돌아 간다. 니체는 그 관계를 약간 신비하게 아폴로의 월계수 잎이 건드리는 것으로 같이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가 서정시를 형상과 개념을 통해 음악을 모방하는 불꽃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은 형상과 개념의 거울에 어떠한 것으로 나타나는가 라고. 음악은 의지로 나타난다.”[4]

 

4)

음악과 서정시에 관한 이런 설명 끝에 마침내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설명한다. 비극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최초에 비극은 인물의 연기 없이 합창단의 노래로만 이루어졌다.

니체는 이 합창단을 이상적 관객을 표현한다고 보는 윌리엄 슐레겔의 주장을 비판한다. 아직 비극의 구체적 내용이 전개되기 전에 이미 합창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또한 합창단이 현실과 꿈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에 있으면서 현실의 침입을 막아주는 성벽이라는 쉴러의 주장도 비판적으로 본다. 그런 관계는 삶과 아폴론의 관계이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형상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 위에 니체는 이 합창단을 디오니소스의 신도들이 빠져들었던 도취 상태 즉 근원적 일자와의 합일 상태로 규정하며, 합창단의 주된 역할은 관객을 자기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연의 심장으로 되돌려지게” 하는 것이다.[5]

비극의 구체적 내용은 이런 디오니소스적 상태에서 떠오르는 형상이다. 그것은 마치 음악적 선율에서 서정시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떠오르는데, 비극에서 그 형상은 단순한 직관과 이미지가 아닐 이제는 하나의 개념이며 삶의 지혜가 된다. 즉 그것은 “자연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지혜”[6]를 고지한다.

관객은 합창단 속에서 자기를 재발견하면서 그 스스로 근원적 일자와 합일한다. 그런 상태에서 비극의 시인이 표현한 삶의 지혜를 마치 그 스스로 생생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체험한다.

 

“사티로스 합창단은 무엇보다도 디오니소스적 대중이 떠올리는 환영이며, 무대 위의 세계는 사티로스 합창단이 떠올리는 환영이다.”[7]

 

이런 환영은 관찰자의 시선으로 외부에서 바라보는 서사적 음유시인이 보는 것은 아니다. 그 환영은 무대 위에 재연된 삶을 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체험함을 통해 그가 직접 겪는 삶이다. 이제 무대 위에 나타난 비극의 구체적 내용은 아폴론적 형상이며, 그 자체 정확성과 명쾌성을 지닌다.

 

“디오니소스 신은 아폴론적인 현상 속에 객관화는 것이지만, 이 아폴론적 현상은 더 이상 합창단의 음악처럼 영원한 바다, 종횡으로 얽힌 삶, 불타는 생명이 아니며…. 이제 무대로부터 명료하고 확고한 서사적 형상이 디오니소스 시종에게 말을 한다.”[8]

 

하지만 그것은 삶과 떨어진 환영이 아니라, 삶 속에서 출현한 환상이니 “마치 어두운 벽에 던져진 빛의 형상”과 같다. 니체는 이를 다시 설명하면서, 마치 태양을 직접 바라보면 잠시 후 눈에 검은 반점이 생기듯 무대 위의 형상은 “자연 내부의 가공스런 것을 들여다 본 눈이 만들어낸” “빛나는 반점”[9]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구체적 내용 속에는 아폴론적 명확성과 명랑성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비애의 검은 호수에 비치는 밝은 구름과 하늘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10]고 한다.

 

5)

니체의 논의는 음악적 예술, 또는 서정시를 설명하는 미학적 이론으로서는 흥미롭고도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비극을 실제로 파악하는 문제에서는 니체의 논의는 비판 받는다. 특히 니체의 논의는 비극의 구체적 내용에 관한 설명이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이며 또한 니체의 논의는 주로 합창단의 성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과연 합창단의 성격이 니체가 가정하듯이 디오니소스적 음악적 상태인지가 문제 된다.

헤겔 역시 그리스 고전 비극을 논하면서 합창단의 성격을 분석한 바 있다. 헤겔은 합창에 서정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니체가 주장하는 것처럼 합창이 마치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헤겔은 합창은 관조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는 이상적 관객, 평가하는 관객이라는 슐레겔의 관점과 유사하다.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입장은 슐레겔의 관점과 구분된다. 왜냐하면, 헤겔은 합창단이 관객을 대변하면서 극중 인물의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평가하는 의식을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니체도 비판했던 윌리엄 슐레겔의 입장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슐레겔과 헤겔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헤겔은 비극이 실체적 분열의 상태에서 전개되는 충돌과 대립을 다룬다는 것에서 합창단의 성격을 규명한다. 헤겔에 따르면 합창단은 아직 분열되기 이전의 민족적 실체를 대변한다. 합창단은 분열된 민족적 실체를 다시 본래대로 되돌리고자 하는 관객의 소망을 대변한다. 비극의 관객은 더 이상 행동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실체적 통일성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합창단이 대변하는 관객이 이처럼 복고적 소망을 지니고 있으므로, 슐레겔이 말한 이상적 관객처럼 평가의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합창단은 극중 인물의 행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인물의 행위에 대해 평가하지도 경고하지도 않는다. 다만 합창단은 인물의 행위를 관조적으로 지켜보면서 그에 대해서 감정적 반응에 머무른다. 즉 주인공의 행위에 대해서는 경악하거나 행위의 결과로 얻어지는 처벌에 대해서는 탄식한다.

헤겔은 이런 합창은 그리스 비극이 일어나는 일종의 배경이라고 한다. 마치 신이 신전 안에 있듯이, 극장이 대지 위에 있듯이 극의 인물은 이런 민족적 실체를 대변하는 합창을 배경에 두고 행위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합창은 근본적으로 서정적이다. 헤겔은 이 서정성은 합창이 사용하는 언어의 운율이 서정시의 형식인 패안과 디티람보스라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고 한다. 합창단의 성격은 서정적이라 하더라도 니체가 말한 것처럼 근원적 일자와의 합일 상태는 아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이상적 관객도 아니며 오히려 어쩔 줄 모르고 다만 감정적으로만 반응하는 관객일 뿐이다.

실제로 이는 헤겔이 그리스 비극의 대표로 삼는 안티고네나 오이디푸스에서 합창단의 노래를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6)

오이디푸스에서 마지막 합창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조국, 테바이 사람들이여, 명심하고 보라.

이 이가 오이디푸스이시다.

그이야 말로 저 이름 높은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고, 권에 이를 데 없는 사람,

온 장안의 누구나 그 행운을 부러워했건만

아아, 이제는 저토록

격렬한 풍파에 묻히고 마셨다.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난 몸은 조심스럽게

마지막 날 보기를 기다려라.

아무 괴로움도 당하지 말고

삶의 저편에 이르기 전에는

이 세상 누구도 행복하다고 부르지는 마라.”

 

합창은 영웅의 몰락을 한탄한다. 이번에는 안티고네의 마지막 합창을 보자. 합창은 안티고네가 죽는 장면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그렇게 오래 지닌 다나에의 아름다움도

하늘의 빛을 버리고

청동의 벽으로 싸인 방에

무덤처럼 으슥한 그 방에 갇힌 몸이 되었다.

그러나 오오 내 딸이여 그도 고귀한 혈통으로서

그러나 운명의 신비로운 힘은 두렵기도 하고나

거기서는 부도 아레스도 성벽도

바다를 때리는 검은 배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 번에는 클레온의 몰락 앞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지혜야 말로 으뜸가는 행복,

신들께 향한 공경은 굳게 지켜져야 한다.

교만한 자들의 큰 소리는 언제나 큰 천벌을 받고

늙어서나 지혜를 배우게 된다.

 

합창단은 그 누구나 동정하며 그 누구에 대해서도 공감할 뿐, 적극적으로 옳다고 주장하거나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감정적인 반응인데, 그런 점에서 이상적 관객도 디오니소스적 상태라고도 볼 수 없을 것이다.


[1] 비극의 탄생, 95쪽

[2] 비극의 탄생, 286-287쪽

[3] 비극의 탄생, 94쪽

[4] 비극의 탄생, 106쪽

[5] 비극의 탄생, 115쪽

[6] 비극의 탄생, 119쪽

[7] 비극의 탄생, 121쪽

[8] 비극의 탄생, 128-129쪽

[9] 비극의 탄생, 130쪽

[10] 비극의 탄생, 136쪽

헤겔미학산책57-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그리스 비극론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57-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그리스 비극론

 

1)

극시의 종류에 관해 헤겔은 희극과 비극, 그리고 희비극으로 구분하며, 역사적 발전에 따라서 고대에는 비극이 없었으니[1] 그리스(고전) 비극과 근대(낭만적) 비극으로 구분한다. 종류와 역사를 조합하면 네 가지 극시가 나오는데, 헤겔의 경우 모든 극시를 파악하는 전범은 그리스 비극이다. 여기서 변형하여 희극이 설명되고, 다시 고대적인 극시를 발전시켜 근대적인 극시가 설명된다.

이미 앞에서 그리스 비극를 전범으로 한 헤겔의 극시론을 소개했다. 헤겔의 극시론은 자주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시론이나 니체의 비극론과 비교되는데, 여기서 이들의 입장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2)

비극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 전반적인 주장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모방에서 나왔다는 데서 출발하여, 서사시와 비극이 모방 대상이나 모방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서사시는 ‘우리들 이상의 선인’을 대상으로 하며, 주로 ‘서술체’이며 ‘장중한 운율(6보격)을 통해 전달된다. 반면 극시에서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묘사하니(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묘사한다) 서사시와 크게 다를 바 없으나, 묘사의 방식은 ‘실연’이어서 서사시와 다르다. 비극의 언어는 대체로 운문으로 된(3보 또는 4보격) 대화와 노래로 구성된다.

비극은 “일정한 크기를 지닌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는 데”에 있다. 여기서 비극은 ‘사건의 결합으로서’ 플롯을 가지고, 드라마적 형식을 취한다. 어떤 것이 드라마가 되기 위해서는 플롯상 반전이나 발견이 있어야 한다. 이런 플롯은 필연적이어야 한다. 행위는 인물의 “성격과 사상”에서 나와야 하며 행위는 필연적으로 반전과 발견[2]으로 이끌어져야 한다. 성격과 플롯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은 플롯이다[3].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되기 위해서는 독특한 심리적 효과를 자아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른바 공포와 연민이라는 비극적 효과를 제시한다. 이 효과가 관객의 감정을 카타르시스 함으로써 관객은 비극을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3)

이상 소개된 전반적 논의에서 플롯을 지닌다는 것과 심리적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서 핵심을 이룬다. 그는 두 가지 주장 가운데 후자 즉 심리적 효과를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의 철학이 전반적으로 목적론적(기능주의적)이고, 그것은 비극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므로 그런 선택은 그로서는 불가피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좋은 비극이 되기 위해서 그 심리적 효과가 플롯 즉 구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야 한다.

 

“공포와 연민의 감정은 장면에 의하여 환기될 수도 있고 사건의 구성 자체에 의하여 환기될 수도 있는데 후자가 더 훌륭한 방법이며 더 훌륭한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이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규칙을 제안한다. 우선 “덕과 정의에서 탁월하지는 않는”[5] 따라서 관객과 유사한 정도의 사람이 불행을 겪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관객으로부터 연민을 얻을 수 있다. 둘째로 보통 사람에게서 가장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은 바로 “친근자(가까운 혈연) 사이에 일어나는” “살인이나 이와 유사한 행위”[6]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통 사람이 이런 공포스러운 사건을 저지르게 되는 데에 어떤 필연성을 상정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그는 이런 사건이 그에게 일어나는 데에는 어떤 우연성이 개입한다고 말한다[7]. 이 우연성은 작품마다 다양한데,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아가 자기 자식을 죽이는 것은 분노이며,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것은 무지 때문이다.

 

“덕과 정의에 있어서 탁월하지는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을 당한 인물이 곧 그러한[비극의] 인물이다.”[8]

 

비극의 전개 과정에서 우연성이 강조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서 인물의 성격이 지니는 파토스적 측면이나 비극이 결말에 이르러 생겨나는 해소의 측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결여된다.

 

5)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은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전개했기에 설득력을 지니지만, 그 가운데 이미 그의 목적론적 철학이 노골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게 바로 비극을 심리적 효과로부터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심리적 효과를 강조하다 보니,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은 우연성이나 과실에 두고 말았으니, 결과적으로 비극의 극적인 전개에서 일어나는 필연성을 간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은 후일 사건의 우연성이 강조되는 근대 비극에 전범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고대 비극에 대한 충분한 설명인가는 의심스럽다. 이 점은 헤겔이 고대 비극에서 사건이 전개되는 필연성을 강조했다는 것과 대비된다.

헤겔은 극적 전개의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해 우선 등장인물이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보통의 인간이 아닌 영웅적 인물로 삼았다. 그는 개인적 목적이 아니라 실체적 목적을 수행하며 자신의 실체적 목적이 지닌 의무, 법, 정당성을 확고하게 믿으면서 일체의 주저 없이 단호하게 수행하는 영웅이다. 그런 실체적 목적은 그의 자연적 태생이나 주변 환경과 생동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비극적 영웅의 파토스이다.

또한 그런데 그리스 시대 인륜적 실체 자체가 두 대립하는 원리로 분열되어 있어서, 영웅이 수행한 행위는 필연적으로 자신과 대립하는 실체적 원리를 침해하며 그 결과 필연적으로 그것에 대립하는 행위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 결과 행위는 필연적으로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가 자기가 맞서 싸우는 것의 위력 속에 있으며, 그들 자신이 자신의 고유한 실존에 적합하려면 의당 존중해야 마땅할 바로 그것을 침해한다.”[9]

 

또한 헤겔은 이런 충돌이 필연적으로 다시 해소되는데, 왜냐하면 본래 인륜적 실체 자체가 두 대립하는 원리의 상호 균형을 통해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서로 대립하는 극단적 행위는 서로 충돌하면서 서로 해소되어 균형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적 성격은 자신이 알지 못하거나(또는 그 정당성을 파악하지 못한) 원리를 침해한 것에 대해 자신의 무지를 들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범죄를 저지르지만 그 범죄는 오히려 그에게서는 영예이다. 그는 정당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인은 자신의 무지에 의해 행위한 것도 비록 그의 고의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 한, 그에 대해 책임을 진다[10]. 그러므로 관객은 범죄를 저지르는 성격적 개인의 파멸에 대해 차라리 경탄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편파성은 지양되어야 한다면 개인은 하나의 파토스로서 행동했던 한에서, 희생되고 제거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개인은 단지 이 하나의 [파토스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이 개인이 이런 하나의 [파토스적] 삶으로서 독자적으로 확고하게 타당하지 않는다면 그 개인은 이미 파괴된 것과 다름 없다.”[11]

 

헤겔은 비극에서 사건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일차적 본질로 삼은 공포와 연민이라는 효과에 관해서는 별로 말이 없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한편으로 영웅의 행위 자체가 나름대로 실체적 원인을 가지므로, 관객 역시 그 목적에 공감하면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반면 영웅의 행위에 대립하며 영웅을 파멸시키는 것 역시 하나의 실체적 목적이기 때문에 관객은 그 앞에서 공포감을 느낀다.

전반적으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의 주인공은 보통 사람이고 헤겔의 비극론에서 주인공은 파토스적인 인물이라는 점이 양자의 결정적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은 당대의 비극에 대한 직접 경험에 기초한 만큼 비극을 설명하는 데 설득력을 지닌다. 반면 헤겔의 비극론의 전제가 되는 파토스적 인물과 실체적 대립은 그가 항상 고대 비극의 모범이라 생각하는 안티고네나 오이디푸스와 같은 제한된 비극에는 탁월한 설명력을 지니지만 그런 설명이 나머지 대부분의 비극에도 적용될 것인지는 문제가 있다.


[1] 헤겔에서 극시는 개인적 자아가 성숙한 이후 등장하니, 아직 개인의 자아가 출현하지 않은 고대에는 극시가 없다.

[2] 반전과 발견은 비극에서 대립이 충돌로 발전하고 다시 해소되는 전환을 의미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예를 든다. 반전의 예: 오이디푸스에서 사자가 오이디푸스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오이디푸스를 기쁘게 하려 했지만, 오히려 오이디푸스의 죄가 드러난다. 발견은 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인데,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살해한 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3] “비극의 제1원리 또는 비극의 생명과 영혼은 플롯이고 성격은 제2위인 것이다.” (시학, 53쪽)

[4]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1976, 84쪽

[5] 시학, 78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덕한 자가 불행해지거나, 악한 자가 행복해지는 것 또한 극악한 자가 불행해지는 것은 모두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고 한다.

[6] 시학, 85쪽

[7] 시학, 90쪽 참조

[8] 시학, 78쪽

[9] 미학강의3, 555쪽

[10] 법적 책임은 고의성이 전제된다. 하지만 정치적 책임은 고의성을 넘어서 그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무엇이든 책임지게 되니, 그리스 비극에서 죄와 책임의 문제는 정치적 책임에 가깝다고 보겠다. 비극의 주인공은 대체로 정치적 지도자, 영웅이니 법적 책임을 넘어 정치적 책임을 진다는 생각은 당연하다고 보겠다.

[11] 미학강의3, 555쪽

헤겔미학산책56-극시의 구성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56-극시의 구성

 

1) 극시의 구성과 전개과정

극시에서 행위와 사건은 극적 행위와 관련되는 것에 한정되므로 극시는 압축적으로 전개된다. 서사시는 우연적 연관을 따라서 다양하게 행위와 사건이 전개되니, 전체적으로 산만하고 진행은 느리다. 서정시의 경우는 비약과 압축을 통해 전개되지만, 그것이 다루는 내용은 표면적으로 서로 무관한 것이니 자칫하면 산만하게 된다. 그 때문에 서정시는 특정한 감정에 집중하는데 헤겔은 이를 ‘서정적 집중’이라 한다.

하지만 극시의 전개는 극적 행위와 관련되고 인물의 내면에 있는 객관적 파토스와 관련되지 않은 것은 제거되니, 내용적으로 서사시보다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전체 과정에서 갈등과 대립은 일어날 수밖에 없고 해결 역시 제거할 수 없으니, 서사시보다는 짧지만 서정시보다는 길어진다. 그럼에도 전개되는 사건은 필연적인 것이니 마치 어떤 강박에 의해 전개되면서 전체는 한 순간 전개된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1].

극시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일으키는 대립을 다루므로, 여기서 극시는 일정한 방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행위가 일어나 대립으로 치닫는 국면과 마침내 그 대립이 해소되는 국면으로 분화된다. 대체로 이 과정은 3개의 단계로 구분되는데, 그게 극시의 막의 구분에 해당한다. [2]

이런 전개과정에 관해서 헤겔은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을 따른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나 헤겔이 강조하는 것은 시작과 결과가 필연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3] 시작이 필연적이라는 것은 즉 이미 주어진 상황 속에서 갈등의 씨앗이 내재하고 있으니, 이 상황은 “미발이더라도 이후의 과정에서 갈등이 전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 장차 갈등을 낳을 행위가 출연한다는 것이다. 이 행위는 대립된 행위를 낳고 양자는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는데, 이 과정은 모두 행위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최종 끝이 역시 필연적이어야 하는데, 여기서 필연적이라는 것은 역시 이미 극중에 전개된 대립이 남김없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갈등과 대립이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것이라면 거꾸로 대립의 해소 역시 이미 상황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니, 해결되지 않는 갈등은 아예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4].

 

2) 통일의 원리

극시의 고유한 특징 때문에 작품을 구성하는 몇 가지 원칙이 전개된다. 헤겔은 그 가운데 첫 번째로 극의 통일성을 들고 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제시한 원칙인데 흔히 시간과 장소, 행위의 통일성이라 한다.

헤겔은 그 가운데 시간과 장소의 경우 통일성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5]. 반면 극의 경우 행위의 통일성은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의 통일성은 극의 압축적이고 필연적인 전개를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행동의 통일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행동의 통일은 우선 행위자의 목적이 행동을 일관적으로 관철해야 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행위가 구체적 현실에 관여하면서 그 목적이 지리멸렬하게 분산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충돌하는 서로 대립하는 목적은 전체적으로 총체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대립은 필연적이지 않다. 다른 중간의 가지를 통해 행위가 서로 빗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포클레스 안티고네에서 두 대립된 원리인 가족의 원리와 국가의 원리는 그리스 민족국가를 이루고 있는 민족과 국가라는 두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서 그 행위를 이끄는 파토스는 개인적인 자연적인 성질이면서 동시에 객관적 사회적 원리이어야 한다. 양자는 상호 연관성을 지녀야 하는데, 헤겔은 이럴 경우 생동적인 성격이 출현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안티고네에서 여성이 국가의 원리를 대변하고 가족의 원리는 남성이 대변한다면, 자연적 성질인 남성과 가족의 원리, 여성과 국가의 원리 속에 어떤 연관성을 발견하기 어렵게 된다.

마지막은 극시가 더 발전하면서 기본적 갈등과 부차적 갈등이 등장하게 될 때, 양자는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적 갈등이 해결되면 부차적 갈등도 해결되어야 한다. 헤겔은 로미와와 줄리엣에서, 가문의 불화로부터 연인의 시련이 생겨나는데, 연인의 시련만 해결하고 가문의 불화를 그대로 둔다면, 전체적으로 완결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결말에서 가문의 불화가 해결되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3) 문학적 요소와 운율적 요소

대체로 극은 대화를 통해 전개된다. 그러나 그 외에도 독백과 합창이 있으니 헤겔은 이 세 가지가 극의 전개에서 각기 고유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본다.

그 가운데 우선 합창은 민중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말한다. 즉 그 시대 “일반적인 신념과 감정”이 합창을 통해 표현되는데, 때로는 사회적 총체적인 “실체성에 호소하여” 행위를 평가하며 때로는 인물의 행위에 공감하는 “서정적 격정에 호소”한다. 헤겔은 근대 극시에 이르러 이런 합창은 사라지는데, 고대 극시에서 합창이 했던 역할이 근대 극시에서는 “행위하는 인물 자신의 입으로 옮겨지기”[6]때문이라고 한다.

이어서 독백은 “특수한 상황 속에 있는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독백은 “심정이 기존의 사건으로부터 벗어나서 단순히 자기 속으로 집약되는 순간이거나 천천히 다져지거나 갑작스럽게 내린 결단을 최종적으로 결심하는 순간”[7]에 등장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극적인 행위가 일어나기 직전의 순간이 될 것이다.

극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대화이다. 대화는 많은 것을 포함한다. 거기에 우선 행위자의 성격과 목적이 한편으로 “그 특수성에 따라서” 주관적 파토스가 다른 한편으로 “파토스의 실체성에 따라서” 객관적 파토스가 표현된다. 관객은 행위자의 언어적 표출을 통해서 행위가 일어난 원인이나 그런 행위에 반응하는 인물의 반응 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행위자는 이런 대화를 통해서 자신을 정당화하며 상대자를 비판하니 이를 통해 관객은 장차 전개될 대립과 그리고 해소의 과정을 이해하게 된다.

극시는 시문학적 작품이고 기호로 전달되는 한에서 운율과 같은 요소를 지니게 된다. 헤겔은 셰익스피어만 해도 극시는 이런 운율적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레싱은 프랑스 극시의 알렉산더격을 비판하면서 산문적 어법을 도입하려 했다고 한다. 이후 실러와 괴테가 레싱을 따르기도 했지만, 결국 레싱과 실러, 괴테도 다시 운율적 요소를 끌어들였다고 한다.[8]

헤겔은 그런 점에서 극시도 일정한 운율을 지니기를 원했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극시가 산문적 어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왜 레싱이 시작한 산문적 어법이 실패로 되었는지, 의문이다. 시어의 운율은 그 의미가 되는 관념과 충돌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관념은 운율과 “아주 먼, 혹은 전해내적이지 않은 관계를 가질 뿐”이고, 오페라의 레치타티보가 그것을 잘 보여주는데, 극시에서 대화를 운율에 맞추어 이야기한다면 이런 작위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헤겔이 운율을 옹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나 헤겔은 이런 비판을 반박하면서 예술가의 재능은 “그에게 가장 본래적이고 친숙한, 그를 저해하거나 짓누르지 않으면서 반대로 그를 상승시키고 지탱하는 요소 속에서 움직인다”[9]고 한다. 즉 기호적 운율이 오히려 예술가의 상상력을 강화시킨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헤겔을 따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극시가 전개되는 공간은 일상적 공간이 아닌 환상적 공간이니, 일상어의 산문적 문법은 극시의 환상을 깨트리지 않을까? 무대의 연기자가 일상적 행위가 아닌 무대적 행위를 하듯, 극시에서도 일상적 언어가 아니라 운율적 행위가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4) 작가와 관객

극시의 갈등과 전개, 해소는 사회적 총체성의 분열에 기초한다. 분열을 이루는 대린된 원리는 서로 대립된 인물의 행위 속에서 구현되면서 충돌을 이루고 또 해결된다. 작가는 이런 사회적 총체성에 관하여, 그리고 각각의 개성에 따라서 어떤 원리가 지배하고, 상황에 따라서 어떻게 행위가 나오게 되는지를 포괄적으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작가는 겉으로 보기에는 혼란스러운 착종이 일어나는 것에 불과하게 보이더라도 그 내부를 관철하고 있는 사회적 총체성을 파악해야 한다.

 

“어둠과 혼란이 지배하는 곳에서도 시인은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실제로 이행되고 있음이 계시되어야 한다.“[10]

 

극시에서 작가는 대중과 관계에서 다른 예술이나 시문학과 차별성을 지닌다. 조형 예술의 경우 작품은 공간 속에 자립적으로 존재하며, 작가는 미지의 무차별한 관객을 고려할 뿐이다. 조형예술의 질료는 대체로 직관적인 것에 의존하므로, 관객은 민족과 시대를 뛰어넘어 존재할 수 있다. 작가는 관객의 반응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니, 작품의 수용은 수동적으로 된다.

반면 시문학에 들어오면 관객은 상당히 제한된다. 왜냐하면 언어적 이해가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객은 대체로 민족적으로 한정되는데, 그럼에도 기호의 전달이 무차별하게 일어날 수 있으므로 무차별적인 측면을 가진다. 다만 여기서 독자는 같은 언어를 통해 반응을 표현할 수 있으므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상호적으로 되면서 이른바 시문학의 공동체가 생겨난다.

극시에 이르게 되면 작품은 항상 무대에서 재연되는 것을 통해서만 전달되니, 매우 제한된 관객에게만 전달된다. 관객은 객석에서 즉각적으로 작품에 대해 반응할 수 있으므로, 작가와 관객 사이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해 진다. 관객은 여기서 찬성과 비난의 원리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4)연기의 측면

극시와 연관하여 헤겔은 무대의 문제, 낭독의 문제, 배우의 연기 문제, 극장의 문제까지 상세하게 파악해 나간다. 이런 문제는 너무 전문적인 문제이니, 우리로서는 굳이 관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헤겔의 설명은 직접 읽어 볼 것을 권한다.


[1] 이 점과 연관하여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로써 드라마는 서정시와 비교할 때 다시 훨씬 넓은 범위로 펼쳐지고 다듬어진다. 이 관계를 일반적으로 규정하자면, 극시는 대략 고대 서사시의 외연성과 서정시의 집중성의 중간에 있다고 할 것이다.”(미학강의 3권, 496쪽)

[2] 이런 단계가 조금 더 복잡해지면 극의 진행을 돕거나 극의 진행을 방해하는 부차적인 갈등이 설정되면서 3막 극은 5막 극으로 발전할 것이다. 헤겔은 극이 전개하는 내용은 다양한 범위를 지닐 수 있다고 본다. 고전적 비극에서처럼 단순하고 본질적인 충돌로 집약될 수 있으며 근대 비극에 이를 수록 극의 내용이 포괄하는 범위는 확대된다. 여기서 주된 충돌 외에도 부차적인 충돌로, 극의 범위는 더욱 풍부해지는데, 이것은 근대적 사회가 고대 사회와 달리 더욱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불가피하다고 본다.

[3]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아래와 같이 재구성한다. “시작은 자체가 필연적이며, 다른 것을 통해 있지 않지만, 다른 것은 그로부터 있고 또 출현한다. 끝은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필연적이든, 혹은 통례적이든 간에 다른 것을 통해 성립하되, 그 자체를 뒤따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중간은 다른 것을 통해 출현하는 것이자 그로부터 다른 것이 출현하는 것이다.”(미학강의 3권 497쪽)

[4] 고대 연극은 아이스킬로스의 삼부작이나 소포클레스의 삼부작처럼 주인공이 계속 이어져서 전개되니,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헤겔은 인물이 동일하더라도 갈등의 종류가 각 작품마다 다르며 즉 “자체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전체이며”, 각 작품에서 제시된 갈등은 그 작품에서 해소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학강의 3권 495쪽, 498쪽 참조.

[5] 헤겔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하루로 제한했지만 장소의 일치는 언급하지 않았다. 프랑스인이 장소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소위 3 통일의 원칙이 확립되었다. 헤겔은 행위가 필연적으로 전개되려면 집중성이 필요하니 장소의 통일도 필요하다 말한다.

[6] 미학강의 3권, 501쪽

[7] 미학강의 3권, 501쪽

[8] 미학강의 3권, 292쪽 참조. 헤겔은 극시에 적합한 운율로서 단장격을 소개한다. 그 이유는 “단장격의 전진적 리듬은 행위의 진행 과정을 위한 최적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면서 당시 스페인에서 유행하고 있는 장단격은 “행위를 촉진하기보다는 차라리 멈추게 하는 예리한 지적 분석을 위해 최적의 것으로 증명된다”고 말한다. 미학강의 3권, 503쪽 참조.

[9] 미학강의 3권, 293쪽

[10] 미학강의 3권, 4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