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떼르의 관용, 루소의 혁명 [천 하룻밤 이야기]
볼떼르의 관용, 루소의 혁명
2026 07 23 대서(大暑): 이때부터 배 위에 수건한 장으로 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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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사에서 프랑스에서는 중세 암흑기라고 부르지 않고, 새로운 사색(통감)의 시대라고 부르면서, 철학과 사상의 생성이 있었다고 한다. 통감은 중국의 자치통감에 비해 느리지만, 프랑스에서는 파리학파와 샤르트르학파의 영향으로 등장한 프란체스코학파는 알베르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학파와 달리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들을 다루어야 한다고 하면서, 신학적 담론들을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연관들을 예로 들어, 여러 논의 방식들을 제기하고, 그 방식들에서 합리적이고 시험 가능한 담론으로 평결하였다고 한다. 법정과 달리 사상에서 이런 평결론이 파리 대학에 영향을 주어 프란체스코파가 대학의 교과목을 장악할 정도였다. 꽁트는 12세기에서 13세기의 이 시기를 프랑스에서 중요한 문예부흥기라 보았다. 그럼에도 교회권력은 마남사냥을 하면서, 아퀴나스를 주축으로 삼아 지금까지도 파리대학은, 마치 사문난적의 주장처럼, 아퀴나스파가 현재도 주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시기는 종교의 시대였고 변혁기였는데, 토지를 너무 많이 소유한 있는 사찰에 대해 개혁을 하려는 신흥불교가 있었고, 다른 한편 변역의 주역이 될 유학자를 길러낸 이색(李穡, 1328-1396)이 있었다. 이 변역기는 새로운 불교든 유교 수입이든 ‘달리 생각하기’가 도래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서양사에서는 평결의 시대에 유명론을 낳았고, 우리에게는 통치체제의 기반을 위한 주자학(신유학)의 수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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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역(變易)기로서 서양사상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기는 18세기 인데, 일제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또는 윤석열에 경도된 자들이 ‘계몽’이라고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1700년대를 “빛들세기”라고 하고 앵들로색슨에서는 계몽기라 한다. “빛들 세기” 이전에 평결의 시대에는 화두가 신이었다. 그 신과 연관으로부터, 하늘 또는 이데아가 추상관념으로 실재하느냐를 선문답처럼 다루었는데, 교회는 변증법적 통일을 하려고 하나의 동일성, 완전성으로 가야만 한다고 했었다. 이에 비해 이상성과 관념성이 이름뿐이라고 하면서, 사실들에 대한 선문답에서 대답하는 이들마다 각자가 다른 측면에서 보기 때문에 여러 견해들이 등장하고, 이를 합의 또는 협약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에, 추론의 과정을 거쳐서 평결을 내렸다. 아마도 사법상의 처리는 하나의 체계로서 귀결이 필요하겠지만, “하나”라는 체계 속에서 진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설치면, 다양한 견해들이 마남사냥 시대에는 입을 닫는다(입틀막이다).
하나의 진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하나 이외 다른 것을 말하는 이들을, 예를 들어 갈릴레이나 브루노의 마남 사냥처럼, 종교재판에 부치거나, 일상의 백성들에서 먹고 살 것이 있다고 고집을 피우는 이들을 또는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을 듣지 않는 과부들을 마녀사냥으로 몰아붙이고 그 재산을 교회가 차지했다고들 한다. 중세 같은 폭압과 강압 속에서 그래도 ‘니르고자 홀배’ 있었던 백성 또는 인민은 심층(深層)으로 흐른다. 이런 저항이 조직화될 수 없었던 시절이다. 조직화라는 글쓰기는 라마르크와 꽁트 이후이다.
“빛들 세기”에는 빛이 화두였다. 신의 계명도 빛으로 전달한다고 설교하였지만, 인민은 빛이 교회에는 성직자에게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온세상에 골고루 비춘다는 것을 잘 느끼며 산다. 그래 알어(알았어), 나는 빛을 쬐러 저 들판과 산으로 가 볼 것이야, 이미 경험이 있었다. 페스트가 창궐했던 14세기 중반(1347-1351)에 신의 기적과 은총을 입으려 교회안에 갔던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잘 알았다. 자연에서 바람이 불고, 신선한 산 중에 모여 시간을 보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남긴 것이 데카메론(1353)이라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이시기에, 우리나라에서 불교의 왕사들이 탐진치(貪瞋癡)에 빠진 시기였다.
표면 밑으로 흐르는 심층의 조직화는 프랑스 대혁명과 둘째 혁명을 거친 1830년에서야 인민들에 의해 본격화되고 제반과학이 제각각으로 발달한다. 그런데 중세를 지나 백성이 표면 위로 오르기 전에, 그래도, 프랑스에서는 백성의 ‘니르고자 홀배인’ 프랑스 입말로 글쓰기를 하였다. 몽테뉴에서부터 데카르트에 이르러 프랑스 입말로 사상과 철학을 이야기했다. 왜 이 때일까, 유일신앙의 추론이 자연의 추론에 비해 억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와 더불어 믿음의 체계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에 대해 풍자한 에라스무스가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문학자 라블레가 있었다. 그리고 성직자도 귀족도 아닌 평민 신분들이 또는 몰락한 진보지식인이(실학 선비 같은 이들이) 세계의 중요한 사상들과 추론의 진리들을 프랑스어 번역하였다(제일 덕본이가 무학이었던 루소였다). 이런 100여년을 지나서 백성이 제 입으로, 제 삶의 터전의 이야기를 제 머리(영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체계를 가진 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중구난방이라 했을 것이고, 벩송을 표현의 빗대어 용어를 빌어 오면, 삶은 당연히 “우여곡절”을 겪는다.
“빛들세기(1700년대)”라는 명칭은 나중에 붙인 이름이지만, 자연을 다루는 이야기는 이미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가 전개했고,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인 데카르트는 기하학, 굴절광학, 기상학을 저술들에서 빛을 여러 방식으로 다루었다. 이런 학습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으로 그는 ‘서문’으로 짧게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썼다. 빛의 직진과 경로(궤적) 굴절도 자연의 것이었다. 그 종교가 숲속에 악마(데몬) 또는 요술사(마녀)가 살고 있다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한 것은 루소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는 고아가 되어 방황하다가 숲속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숲 속에는 밤에 악마 또는 간을 빼먹은 마녀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루소(1712-1778)의 청소년 시절이 1730년대이다.
“빛들세기”라는 것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니다. 신은 모든 이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푼다고 하는 것이, 중세의 유명론으로 보면 말 뿐이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 종교를 믿지 않은 이들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전설따라 오만리’에 퍼져있다. 빛은 말(유명)이 아니고 실재이다. 이 실재를 신이 창조했는지, 자연이 발산하는지를 선문답하듯이, 머리(오성, 지성, 이성)로 추리나 추론하여 토론할 필요가 없다. 자연에서 사실로서 경험하고 실험하여 보여주면 될 일이다. 인간은 머리에서 사유의 추론보다 더 많고 더 재미있는 사실들을 끄집어낸다. 이것은, 마치 빛의 무한한 확산처럼 무한한 경우들을 제시하듯이, 악마의 장난이 아니라는 자연의 자기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었다. 이 흥미로운 시대인 1730년대에서 인민의 대혁명이 일어나는 시기까지의 과정이 나로서는 철학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이라고 죽 여겨왔다. 그런데 들뢰즈/과타리가 “1730년대”를 서술한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당황했다. 이야기가 철학일 될 수 있을까하는 추론하는 머리에서는 회의를 느꼈다. 이 알량한 추론이 얼마나 세뇌 받은 교육인지를 깨닫게 되는 데는 사실 오래 걸렸다. – 간단히 이야기하면 삐아제, 뒤르껭, 프로이트, 푸꼬, 라깡, 스피노자 등의 추론적 사고를 오랜 시간 공부를 하면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하였고, 이로서 앵글로색슨사고에서 벗어나면서, 달리 읽기와 달리 생각하기로 들뢰즈/과타리를 읽으면서 무지 재미를 느꼈다. 각설하고.
들뢰즈/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을 썼는데 두세 번 읽으면서, 이 두 철학자가 철학사 또는 사상사를 달리 썼다고 느꼈지만 왜 일까? 일단 이들은 철학사를 서술하는 방식을 편년체로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철학사일까 하는 질문을 받았는데, 내가 그에게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그냥 편하게 이야기 해보라, 그러면 당신도 두 저자처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더 중요한 것이 있다.동서양을 막론하고 편년체 역사는 왕조사를 중심으로 한다. 그 왕조사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상부의 견해들(공론장이라고들 하지)이다. 말하자면 심층(백성, 인민)의 이야기들 중에 간혹 왕조사가 필요한 것만 끼워 넣었을 뿐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역사관에 대한 관점을, 왕조사에서 인민의 역사으로 바꾸기 이전에 중요한 인물이 있다. 미슐레이다. 그는 왕정역사를 연구하다가 루부르 궁 옆에 있는 혁명자료실에 들어갔다. 정돈된 역사서들의 반대편에서, 먼지가 쌓이고 낱장으로 이런 묶음과 저런 묶음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종이들이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 종이들이 혁명과정에 인민이 혁명공안위원회에 보낸 자술서와 의견서, 즉 소원수리였다. 미슐레가 방향을 바꾸면서 역사서술의 새로운 방향이 생겼다고 한다. 아날학파이다.
역사에 대한 통감(거울 비쳐보기)은 12세기에 있었다고 했었다. 역사의 과정에 대한 대조와 비교를 하는 것도 인류사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다. 성직자들에 의해 쓰여지던 왕조사의 시기가 끝난 것은 루이 14세(1638-1715)의 이후이다. 권력자가 또는 성직자가 아무리 자비로운 시혜를 베푼다고 해도, 그것은 강압과 명령, 인민의 피를 빠는 것이라는 한 것을 대중이 알아채기 쉽게 글쓴이는 니체였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그런 ‘사회 전체가 감옥’이라고 쓴 이는 루소이다. 루소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 1730년대를 생각해보면, 인물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시대)가 인물을 만든다. 그 인물이 두 저자 표현으로 용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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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저자, 들뢰즈/과타리의 이야기, 즉 1730년대의 이야기는, 모든 방면에서 모든 사유에서, 거대한 풍선 위의 찍힌 수많은 점들과 같은 이야기들이 백성들 사이에 흐르고 돌고 있었다. 새로운 사유, 상상, 공상 등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꾸물꾸물 솟아올라 풍선의 가장자리에 그림들을 그렸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에서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를 유모, 필연 모태, 자발성(원인) 등으로 표현한 것도 안에서 솟아나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 어쩌면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에 이어 김천택의 『청구영언(1728)』은 이런 이야기의 일부를 모았을 수도 있다. 세계사에서 인류는 그즈음에서 용출선을 내보였다. 탈주선이라고 하는 용어는 기존의 불판(귀족과 성직자의 놀이판, 하버마스의 공론장)에서 벗어나야하기 때문에 쓴 표현이리라.
『천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스키조프네니(1980)』의 제10장, 1730년: 강렬하게-생성, 동물-생성, 지각 불가능하게-생성에서, 얼마나 많은 자연의 생성작업과 같은, 즉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의 표면으로 분출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인류의 기나긴 의식 안에서 기억은 흐른다. 그 기나긴 기억 속에서 겹겹이 쌓여있어 이리저리 엉켜있던 추억들이 분출한다. 그 분출에는 순서가 있지 않다. 이것을 배치하고 배열하는 논리적 추론이 필요하다. 백과전서파는 인민들이 읽기 좋게, 게다가 합리적 추론으로, 배열하는 작업을 했으리라. – 우스게 소리 루이 18세가 취미가 열쇠 만들기인데, 백과전서에 상세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다가, 왜 이 책이 금서가 되었는지를 장관에게 거꾸로 물었다는 것이다. – 인민은 작업할 줄 알았고, 상층은 금지할 줄 알 뿐이었다.
제10장 안에서 다룬 내용들의 제목만 보아도 흥미롭다. 물론 이것이 철학이 되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다. 천국과 부활은 철학이 되고? – 어느 박물학자의 추억들(Souvenirs d’un naturaliste), 어느 베르그송주의자의 추억들 (Souvenirs d’un bergsonien), 어느 마법사의 추억1(Souvenirs d’un sorcier I), 어느 마법사의 추억들 2 (Souvenirs d’un sorcier II), 어느 마법사의 추억들 3(Souvenirs d’un sorcier III), 어느 신학자의 추억들(Souvenirs d’un théologien),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추억들1(Souvenirs à un spinoziste),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추억들 2(Souvenirs à un spinoziste II), 어느 <이것임>의 추억들(Souvenirs d’une heccéité), 어느 판 짜는 자의 추억들(Souvenirs d’un planificateur), 어느 분자의 추억들(Souvenirs d’une molécule), 비밀의 추억들(Souvenirs du secret)의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서, 저자들은 자연이라는 다양체에서 생성들을 이야기 할 것이다. ‘추억들과 생성들, 점들과 블록들(Souvenirs et devenirs, points et bloc)’, 점 체계들과 다선 체계들의 대립(Opposition des systèmes poctuels et des systèmes multi-linéaires), 음악, 회화, 생성들(La musique, la peinture et les devenirs),음악 되기(Devenir musique) 등을 제시한다.
추억들은 순서 없이(서수가 아니라 기수처럼) 마치 터전의 상황에 따라 기호로서 등장한다. 왜 이 시대의 백과전서파들이 사실들에 대해 연대적 배열과 달리, 항목들을 정하여 페이지처럼 작성에 따라 언제든지 다시 배열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사실들의 언어적 배열로서 추론도 있지만, 수학적 계열도 경의 수에 대한 조합도 논의 되는 시기였다. 이들 협력자들 중에는 수학자들이 많다. 게다가 뷔퐁과 같이 생물학적 발생의 계열이 있다고 하는 것도 수학의 계열에서 빌려왔다고 하고, 이런 발상으로부터 라마르크에 이르러 변형론(진화론)을 제시할 것이다. 이 많은 이야기가 철학사와 연관이 있을까?라고 아직도 걱정하는가!
통감(사변, 거울비추기) 시대와 평결의 시대를 지나서, 입말이 소통되는 “빛들세기”에 다양체의 발현을 보았던 것은 아마도 에밀 브레이어의 『철학사』(1934)”에서 일 것이고, 그는 이 시기를 재미있는 표현으로 “요상한 것들의 박물관”이라고 했다. 인간의 역사는 여러 갈래 중에서, 각 나라는 자기 터전에 맞게 사실들과 사건들을 배열하고 배치한다. 그런데 표현된 배열과 배치 이전의 수많은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 흐르고 있다. 언제 불쑥 나올 때, 추억의 지층을 마치 지각변동처럼 표면으로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빛들 세기”의 이야기를 로고스(추론)에 맞게 정리하는 과정이 디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그 시대의 진보 지식인들이었다. 그래도 역사적으로 그 시대의 화해와 불화의 중요 인물은 볼테르와 루소였다. 하나는 상층에게 관용을 부탁했고, 다른 하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민에게 심층의 자발성을 발휘하자고 했다. 디드로의 소설은 프랑스에 알려지기 전에 괴테에게 알려질 정도로, 이 시대의 프랑스어 입말의 소통은 심층에서 나와 표면에서 세계로 확산되는 시기였다. 라틴어가 아닌 그런 입말이 소통되는 데는 거의 200여년이나 걸렸고, 이에 힙입어 제3신분이 등장하고 인민의 혁명 그리고 인민의 제헌의회의 법률을 만드는 것이 대혁명이다.
우리도 통감의 시대를 거쳤으나, 새로운 시대를 열 변역(變易)의 시대를 제대로 형성하고 맞이하지 못한 것이 두 번의 큰 전쟁 때문일 것이다. 왜와 전쟁과 청과 전쟁이었다. 삶의 터전이 피폐해, 백성이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니, ‘니르고자 홀배’의 소통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실학을 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상층의 공론장을 돈독히 하여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이 후자에서 노론 지배가 백성과 지식인들의 입틀막을 하였으니, 그것이 “사문난적”이란 이름으로 마치 마남사냥하듯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일제가 “대전통고”를 통해 학파와 가문의 분파싸움을 시켰다고 하고, 지금도 사전이든 무엇이든, 인물을 표현할 때 성씨의 본을 표현하는 것처럼 가문을 먼저 드러내는 것도 상층의 지배의식이었다. 그가 어디서 태어나 무엇을 생각하며 자랐는지는 뒷전이다. 이런 ‘사문난적’ 기득권은 미국제국 아래서, 또 다시 노론이 집권의 연장을 위해, 미국의 ‘맥카시 선동’과 같은 빨갱이사냥을 빌려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말하면 악마취급하면서, 지금도 보안법이란 이름으로 사상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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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일제잔재와 미제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백성, 민중, 대중, 인민은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흐르고 있다. 민중운동은 동학에 끈을 연결하고 있고, 민주화라는 노동 해방의 이름으로 대중 운동도 죽 이어져 왔다. 사상사에서 사문난적 이래로, 사상의 자유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백성의 입말은 흐른다. 해방 후 80여년 동안, 입말을 한글로 문자화하면서, 인민의 소통이 활발해졌다. 게다가 프랑스의 백과전서와 같은 방식이 위키피디아가 형성되었고, 그보다 더 나아가 쳇GPT와 AI지식를 통한 소통도 되고 있다. 입말이 오랜 억압과 강제에 벗어난 것은, 촛불시위와 응원봉 불빛 항쟁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부터 이제서야 공화정이라는 입말이 터전에서 흐르고 있다. 대표자 선출에서 1인 1표제가 당연한데도, 이게 일제의 간화선을 배운 이들처럼 선문답하듯이 말장난 하려 든다.
프랑스 공화정의 등장은 대혁명에서였다. 이 공화정은 그리스의 직접 민주제와, 황제[참주]제 이전의 고대 로마의 원로원의 의회 제도를 함께 모방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귀족과 성직자의 놀이판에서 제3신분이, 즉 성직자 또는 귀족에서 기득권을 내려놓은 지식인들이, 백성 또는 인민과 더불어 현실의 표면에서 주인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직접민주제와 권력자들의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인민이 소환하는 소환제가 공화정의 기본이다.
민주당과 같은 한 정당에서 1인 1표제의 공화정을 실험하려고 한다. 볼테르처럼 시대의 깃발을 드는 유시민도 있고, 루소처럼 공화정을 추구하려는 조국도 있다. 게다가 독일식 사법체계가 노동자 억압과 인민 강제라는 것을 알리는 박은정 같은 조국혁신당의원과 재야에서는 이병철 변호사와 최강욱 변호사 같은 이들도 있다. 프랑스 혁명의 동인이었던 제3신분이 발언하는 것처럼,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은 문제를 제시한다, 즉 (1) 사회주의란 (붉은 칠) 낙인찍기, (2) 문조털래유로 돌팔매를 하는자들, (3) 검찰개혁의 기둥에 도끼질 하는 자에게 반격을 공언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길을 가도 된다고 하는 것을 실행하려는 진보당의 김재연도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우리 입말로 백성(민중, 대중, 시민, 인민)이 ‘제 뜻을 펼치는’ 시대, 즉 프랑스 에서는 2백여 년이 걸려 피의 혁명을 일으킨 다양한 생성의 시대를, 우리는 80여년 만에 촛불 또는 응원봉을 든 빛의 혁명을, 평결과 조화정의로서 이루어 갈 것이다.
입말의 시대가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고 알리는 목탁소리에 깬 새벽 새소리들처럼 유시민, 조국, 박은정, 이병철, 최강욱, 신장식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의 시험대에 오른 정청래 민주당 후보 대표에게 응원을 보낸다.
(5:32, 59RMC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5-내부와 외부의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5-내부와 외부의 관계
1)
본질적 관계는 세 단계로 전개된다. 전체와 부분, 힘과 드러냄, 내부와 외부의 관계다. 이 관계는 모두 개체 사이의 관계를 매개로 두 세계 즉 본질(요소의 관계)의 세계와 현상(관계를 이루는 요소)의 세계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여기서 본질이 현상의 자립성을 어느 정도 파고드는가(현상의 반성 또는 본질의 정립)에 따라서 세 단계가 구분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서 전체는 부분에 대해 외면적이며 다만 형식적인 관계에 머무를 뿐이다. 힘과 드러냄의 관계에서 힘은 물체와 외면적으로 관계하지만, 독립적으로 실존한다. 힘이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이르면, 상호작용의 양면으로서 내부와 외부가 출현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나 힘과 외화의 관계는 역학적 자연에 존재하는 관계다.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유기체적 조직이 다시 출현한다. 실존에서 현상을 거쳐 관계에 이르기까지 존재론에서 이미 전개되었던 생성의 운동이 다시 반복되었다. 마침내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본질론의 출발점이라고 할 유기체적 조직이 다시 출현한 것이다.
2)
현상 편은 실존 장, 현상 장, 관계 장으로 전개된다. 이는 판단 형식에 상응하는데, 실존이 정언판단 형식에 해당한다면, 현상에서 출현하는 법칙은 가언판단 형식에 해당한다. 그리고 관계 장에서 마침내 출현한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곧 선언판단 형식에 해당한다.
법칙이 가언판단 형식이란 것은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선언판단 형식이라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여기서 헤겔이 선언판단 형식이라 한 것은 배타적인 선언판단 형식을 말한다. 즉 두 선택지 p와 q가 서로 모순 관계에 있을 때 판단이 A= p or q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 (배타적) 선언판단이 된다.
이런 배타적 선언판단에서 p, q는 종적 본질이 실현되어 나타나는 개체의 집합을 이룬다. 이 배타적 선언판단에서 주어인 A는 p, q라는 개체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종적 본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배타적 선언판단은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말한다.
개체의 집합은 이런 배타적 관계에 있을 때 전체 집합이 된다. 만일 개체를 다른 방식으로 나누면 전체 집합이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생물체를 암수로 구분하면, 배타적 관계가 되고 여기서 암수의 개체는 종의 완결된 전체 집합을 이룬다. 그러나 생물체를 영양 기능에 따라서 분류하게 되면, 영양을 얻는 방식에 식물과 동물로 대체로 구분되더라도 그 사이에 다양한 중간 집단이 있고 그 중간 집단은 무한히 세분되므로 완결된 전체 집합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 헤겔은 배타적 전체 집합을 이루는 것과 종적 본질과 필연적으로 상관한다고 본다. 즉 배타적인 전체 집합이 그 집합을 구성하는 원리가 종적 본질인가를 결정해 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꾸로 종적 본질은 자기를 배타적인 집합으로 출현하게 한다.
그러므로 생물체를 암수로 나누면 배타적 집합이 되는데, 그러니 암수로 나누는 기준 즉 재생산 기능이 생물체의 종적 본질이 된다. 반면 그것은 영양 기능을 기준으로 나누었을 때 배타적 집합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종적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게 된다. 배타적 집합과 본질 사이의 이런 연관을 표현하는 원리가 곧 내부와 외부의 합일이라는 원리이다.
3)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립적인 실존이 동시에 가상이 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지양하면서 자기에 대립하는 타자로 되며, 타자로 반성하는 것을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며, 타자를 정립하는 것을 통해 자기가 존립한다.
여기서 자기 관계한다는 점에서 자립적인 실존이지만, 이것이 자기 부정을 통해 또는 대립하는 타자를 매개로 해서 나온다는 점에서는 가상이다.
“이제[힘의 상호작용 속에서] 공허하고 투명한 구별만이 즉 가상만이 현전한다. 그러나 이 가상은 매개이어서 이것은 자립적인 존립 자체이다. 대립된 규정은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지양하며 그들의 운동은 이행일 뿐만은 아니다. 부분적으로 그 출발점이 되어 타자로 이행되었던 직접적인 것은 다만 정립된 것으로서만 존재하며 부분적으로 이를 통해 규정의 각각은 그 직접성 속에서 이미 자기의 타자와 통일을 이루며 이를 통해 이행은 전적으로 그에 못지 않게 자기를 정립하면서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64-365)
이런 힘의 상호작용은 이미 이 힘들의 내적인 통일을 전제로 한다. 상호작용은 이런 내적인 통일이 자기를 드러낸 것이다. 이 내적 통일을 헤겔은 내부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생물체의 종적 본질인 재생산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힘이 상호작용하므로 여기서 자립적인 개체는 대립하면서도 상호작용하는 개체적 실존으로 분화된다. 이런 개체가 이루는 집합이 곧 외부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결합을 통해서 재생산하는 암수 두 개체의 집합이다. 이 집합은 종적 본질이 실현된 실존의 집합이다.
여기서 내부 즉 내적 본질과 외부 즉 개체의 집합은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적 조직을 토대로 한다. 그것의 양면이 곧 내부와 외부이다. 그러므로 내용으로 보면, 내부와 외부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형식상으로 보면, 양자는 내부와 외부로 구분된다.
4)
여기서 내부와 외부는 동일한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적 조직을 토대로 한다. 헤겔은 이 유기체적 조직을 ‘절대적 사태’[실체]라고 하는데, 내부와 외부는 이 유기체적 조직의 동전의 양면이며 다만 형식적인 구별이므로 내부와 외부는 상호 직접 이행한다.
“내부는 반성된 직접성 또는 본질의 형식이니 외부 즉 존재의 형식에 대립하여 규정된다. 그러나 양자는 다만 동일한 것이다. 이 동일성은 우선 양자가 충만한 내용을 지닌 토대로서 또는 절대적 사태로서 갖는 순전한 통일이며 그런 통일에서 두 가지 규정은 서로 무차별하고 외적인 계기이다.”(논리학, GW11, 365)
내부와 외부는 이처럼 동일한 사태가 지닌 양 측면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양자는 직접 자기의 타자로 이행한다. 즉 그것이 외부이므로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내부이며 거꾸로 그것이 내부이므로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외부이다. 예를 들어, 유기체 재생산의 기능은 오직 암수 개체로 분화되는 것을 통해서만 수행되며, 암수 개체의 분화는 곧 유기체의 본질이 재생산 기능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왜 유기체의 재생산 기능은 암수라는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는 개체로 분화되는가? 이는 암수 중간적인 또는 암수 양면적인 개체의 출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거꾸로 예를 들어 영양을 획득하는 기능으로 분류하면 식물과 동물로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그 중간에 다양한 집단이 있는데, 기생 식물이라든가 이동하는 식물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개체가 배타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그 기능은 생물체의 본질적 기능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헤겔은 이에 대해 대답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부가 본질로, 외부가 존재로 규정된다면, 하나의 사태는 다만 그 본질 속에 있는 한에서 바로 그 때문에 다만 직접적 존재이며 하나의 사태는 다만 존재하므로 다만 비로소 여전히 그 본질 속에 있다.”(논리학, GW11, 366)
즉 내부와 외부는 개념적으로 “각각이 다른 규정을 전제로 하며, 그 자신의 진리인 이 다른 규정으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내부는 “그의 타자 즉 외부에 관계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하며”, 외부는 “본질 즉 내부에 관계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한다.”(논리학, GW11, 366)
일반적으로는 유기체가 대립된 개체로 분화되는 경우, 유전자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어서 그 종적인 재생산을 더 강화할 수 있게 한다고 설명된다. 헤겔은 이런 설명보다도 개념적으로 내부와 외부는 유기체적 조직의 동전의 양면이라는 설명으로 대체한다.
이를 고려해 볼 때, 헤겔은 유기체적 조직은 그 본래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개체로 분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반적인 개념적 진리로 삼는 것으로 보인다.
5)
헤겔은 예를 들어 생물체의 종이 암수로 구분되는 것과 같은 것을 내부와 외부가 직접적으로 통일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양자는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적 조직이라는 절대적 사태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 사태가 내용이 되고, 내부와 외부란 다만 사태가 지닌 동전의 양면이며 형식적 차이에 불과하다.
여기서 외부와 내부의 통일은 유기체적 상호작용을 매개로 한다. 그러나 이 유기체적 상호작용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므로, 이를 매개로 한 외부와 내부의 통일 역시 우연하다. 예를 들어 종의 재생산은 암수의 결합을 통해 일어나는데, 암수의 만남 자체가 우연적이므로 이런 재생산은 우연적인 것으로 머무른다. 그 때문에 종의 재생산은 지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제 외부와 내부의 필연적인 통일이 요구된다. 이런 필연적 통일은 상호작용하는 개체의 필연적인 만남을 전제로 한다. 이를 통해 내부는 외부를 통해 자기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를 보자.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자연에 대해 노동하기 위해서는 상호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는 개체의 작용을 통해 자기를 지속하게 한다. 헤겔은 내부와 외부의 이런 필연적 관계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내부는 단순한 자기 내로 반성된 동일성인 한 직접적인 것이며 따라서 본질인 동시에 존재이며 외부적인 것이다. 외부는 다양한 규정된 존재인 한에서 다만 외부이니 즉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정립되면서 근거로 복귀하니 곧 내부로 존재한다.”(논리학, GW11, 365)
내부와 외부의 직접적인 통일에서 내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작용하는 개체 내에 머무른다. 반면, 내부와 외부의 필연적인 통일에서 내부는 이제 외부와 구분되는 독립적인 실존을 가지게 된다. 거꾸로 외부는 자체 내에서 내부를 지니게 된다. 그 결과 외부와 내부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유적 본질은 사회로서 개체들의 집합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실존을 가지게 된다. 또한, 상호작용하는 개체는 각자의 자기의식이라는 고유한 내면을 지닌다.
그 결과 인간은 본질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사회를 구성한다. 여기서 유적 본질을 사회로 실존하게 하는 것은 개인이 내적 의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매개한다. 내부와 외부는 매개적으로 통일하게 된다.
“즉 각자는 바로 그것이 본래 그러한 것인 자신의 타자를 통해 관계의 총체성이 된다. 또는 거꾸로 말하자면 각각의 측면이 지닌 규정성은 이 규정성이 그 자체에서 총체성이라는 사실을 통해 다른 규정성과 매개된다. 그러므로 총체성은 형식이나 규정성을 통해 자기 자신과 매개하고 규정성은 단순한 자기 동일성을 통해 매개된다.”(논리학, GW11, 365)
내부와 외부의 직접적인 통일은 이제 막 완성되었다. 앞으로 3편 실제성에 들어가면 직접적이고 우연적인 통일이 필연적이고 매개되는 통일로 발전하게 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4-힘과 드러냄의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4-힘과 드러냄의 관계
1)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각자 자립적이면서도 관계의 한 계기로서 부정적인 것이다. 처음에는 그 자립성 때문에 전체와 부분은 대립했다. 그러나 각자 타자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자기를 부정하여 타자로 이행하면서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가운데 모순에 부딪히고 이를 통해 힘과 드러냄[외화: Aeusserung]의 관계로 이행한다.
힘과 그 드러냄의 관계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보다 발전된 것이다. 여기서 전체와 부분이 갖던 자립성이 양자의 관계에 의해 침투되었기 때문이다. 헤겔은 전체와 부분의 내적인 모순이 극복되면서 이런 발전이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이행은 단순히 개념적인 이행만은 아니다.
논리적 범주의 이행은 이처럼 내재적으로 이행하지만, 항상 그 밑에 경험의 발전이 매개하고 있듯이 여기서도 경험의 발전이 매개한다. 처음 자연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통해 파악되었다. 그런 가운데 자연 속에 힘의 관계가 발견되면서 자연을 이해하는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일어난 것이다.
2)
그런데 처음에 힘은 물체에 외면적이다. 그것은 마치 뉴톤의 힘의 법칙이 물질에 외면적인 것과 같다. 그 힘은 “외적 강제에 의해 사물에 밀어 넣어진 것이다.”(논리학, GW11, 360) 힘은 독자적으로 출현할 수 없으니, 이런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체를 토대로 한다. 그러면서도 물체는 힘의 운동을 방해할 수 없다. 힘은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것이며 물체에 다만 부착되어 있을 뿐이다.
물체와 무관하게 힘은 실존하기에 힘은 하나의 물질[Materie]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기력이나 전기력 등 대신 자기 물질 또는 전기 물질 등의 말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 힘은 특정한 물질은 아니다. 힘은 자기를 드러내서 타자와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하는 직접성’으로서 실존이 아니라 ‘반성된 직접성’에 속하는 실존이다.
‘반성된 직접성’에 속하는 ‘전체’와 ‘힘’은 구별된다. ‘전체’는 자립적이더라도 부분을 밖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분을 통해 실존한다. 그러나 ‘힘’은 독자적인 자립성을 물체의 외면에 갖는다.
하나의 물체에서 힘은 그대로 머무르지 않는다. 힘은 반드시 전달되는 것이니, 힘을 통해 하나의 물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반발하게 하는 모순적인 것이 된다. 힘은 이렇게 전달되면서 직접 존재하는 물체를 힘으로 전환하게 하니, 직접적 물체는 부정되면서 이 힘의 관계 속의 한 계기가 된다.
3)
힘과 그 드러냄의 관계는 어떤 물체에서 힘이 다른 물체에 자기를 전달하는 관계다. 이는 하나의 성질이 다른 성질로 이행하는 관계가 아니며 타자를 무엇으로 규정하고 정립하는 근거도 아니다. 힘이 드러난다는 것은 물체가 지닌 하나의 힘이 다른 물체에 이동하는 것이다.
그 힘은 처음 그대로 유지되므로 헤겔은 드러냄의 관계를 “옮김[Uebersetzen]”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힘과 드러낸 힘 사이의 관계는 다만 동일성이 유지되는 통일이다. 동시에 이 힘은 움직이지 않던 타자를 움직이게 하면서 부정하는 것이니 곧 부정하는 통일이다.
“힘의 운동은 이행이 아니다. 차라리 힘은 자기 자신을 옮겨놓는 것이며 힘 자신에 의해 정립된 변화 속에서 힘의 있는 그대로가 유지된다.”(논리학, GW11, 360)
힘의 전달을 통해 힘과 물체 사이에 즉 반성된 직접성과 존재하는 직접성 사이에 통일이 이루어진다. 이 통일은 힘이 다른 물체로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므로 ‘전체’에서처럼 형식적인 통일에 머무르지 않고 실재적으로 통일하게 한다.
그런데 이런 전달은 하나의 힘이 어떤 물체에 있다가 다른 물체로 이동한 것이므로 하나에서 존재할 때는 타자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에서 존재하지 않으므로 비로소 타자에서 존재하게 된다는 관계를 맺는다. 헤겔은 이런 관계를 두 물체 사이의 힘이 동일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반성’인 동시에 전자에서 사라지고 후자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부정적 반성’이라고 한다.
“힘은 반성된 존립과 직접적 존립의 통일이거나 형식적 통일성과 외적 자립성의 통일이다. 힘은 양자를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다. 힘은 양자의 접촉인데 그 중 하나는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 존재하는 것이니, 이런 힘은 자기와 동일한 긍정적 반성이며 동시에 부정적인 반성이다.”(논리학, GW11, 361)
4)
힘이 이렇게 외면적이므로 물체에서 이 힘은 물체가 자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힘이 외면적이므로 필연적으로 이 힘은 자발성을 지니지 못하고 그 힘을 촉발하도록 하는 것이 외부에서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일정한 계열이 수립된다. A는 B에 힘을 전달하고 B가 힘을 드러내도록 촉발하며, B는 C에 힘을 전달하고 다시 촉발한다. 이런 관계가 발전하게 되면, 마침내 순환이 등장한다. 즉 A가 힘을 B에 전달했을 때, 이 A가 힘을 드러내게 촉발하는 것은 바로 B인 경우이다. 이렇게 되면 두 가지 물체 사이에는 서로 힘을 전달하는 관계 즉 힘의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처음에 물체와 힘은 외면적 관계에 있었다. 이 경우 물체와 힘은 외면적이며 긍정적인 통일 속에 있었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관계에 이르게 되면, 힘과 물체는 단순히 외면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힘을 전달받은 물체가 동시에 거꾸로 힘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 속에 힘에 대립하는 물체는 부정되고, 다만 두 가지 서로 대립적으로 작용하는 힘만이 남게 된다. 이제 물체란 두 대립하는 힘을 부정적으로 통일하는 것일 뿐이다.
5)
이 두 물체는 자신의 직접적 존재를 지양하고 상호 작용하는 힘으로 규정되면서 서로 촉발하고 타자에 의해 제약되는 관계를 이룬다. 이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힘을 개념적으로 보면, 힘은 자기를 드러내서 타자를 정립한다. 그러나 이런 힘은 타자를 전제로 하니, 이 타자로부터 힘을 전달받아 자기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타자가 힘을 전달하는 이유는 곧 힘 자신이 이 타자에 자기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타자를 정립하는 활동은 곧 타자를 전제로 하는 활동이다.
개념상 힘은 정립하는 활동이지만, 실재적으로는 다른 힘이 그 힘을 활동하도록 촉발한다. 여기서 어느 것이 먼저인가는 문제 되지 않는다. 두 가지는 모두 타자를 촉발하며 타자로부터 촉발되니, 양자는 동일한 것이다. 즉 촉발하는 것은 동시에 촉발되는 것이다.
“힘은 개념상 처음에는 자기를 지양하는 동일성으로서 규정되며, 그 실재상으로는 두 힘 가운데 하나는 촉발하는 힘으로서 다른 하나는 촉발되는 힘으로서 규정된다. 그러나 힘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의 동일성이며, 또는 반성된 통일과 직접적인 통일의 동일성이다. 이런 규정 각각은 다만 계기이고 통일 속에 있으며 따라서 타자를 통해 매개된 것으로서 존재한다.”(논리학, GW11, 362)
이렇게 보면 힘은 외부에서 촉발되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외부에서 촉발하는 힘은 사실 자기가 그렇게 하도록 촉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힘은 외적인 작용이 아니라 내적인 자발적인 작용이다.
이런 두 대립하는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볼 때, 힘은 본래 통일된 것이다. 이 통일된 힘이 실재적으로는 두 대립하는 힘으로 나타나며, 이 대립하는 힘은 상호작용을 통해 다시 통일된다.
“이 힘이 촉발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활동이다. 또는 다른 힘이라고 즉 일반적으로 말해 다른 힘이며 촉발하는 힘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촉발하는 힘은 자기의 타자에 부정적으로 관계함으로써 이 힘은 타자의 외면성을 지양한다. 그런 한 촉발하는 힘은 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촉발하는 힘이 자신을 다른 것에 대립하게 하는 것은 다만 전제를 통해서이다. 즉 그것은 자기에서 외면성을 얻어서 이를 통해 촉발되는 한에서만 촉발하는 것 자체가 된다.”(논리학, GW11, 363)
6)
최초에 힘은 유한한 힘이었다. 그것은 물체에 의해 제약된 힘이었다. 그러나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물체는 지양되며, 힘은 자기 매개하는 것이며 무한하다. 이런 힘은 더는 외적인 충격에 의해 자기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힘의 상호작용을 매개로 하여 본래적 통일과 반성된 통일이 구별된다. 전자는 내면적인 통일이며 후자는 외면적인 통일이다. 여기서 내면과 외면의 관계가 출현한다.
“힘을 활동하게 촉발하는 충격은 그 자신이 고유하게 촉발하는 것이다. 그런 힘에 다가온 외면적인 것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그 힘에 의해 매개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 자신의 본질적인 자기 동일성이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정을 통해 매개된 것과 같다. 달리 말하자면 힘은 그 외면성이 자신의 내면성과 동일하게 만든다는 것을 표현한다.”(논리학, GW11, 364)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3-전체와 부분의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3-전체와 부분의 관계
1)
먼저 간단하게 전체의 흐름을 잡아보자. 본질론 2편 현상편은 실존-현상-관계로 나간다. 실존이 긍정적인 것이라면, 현상은 부정적인 실존이며, 관계는 상호 부정적인 것 또는 자기 부정적인 것이다. 이런 이행에서 실존이 종적 개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현상은 법칙을 통해 종적 본질이 처음 등장한 것이며, 관계는 종적 본질이 외면적으로 실현된 것이니, 종의 집단 즉 무리로서 유를 의미한다. 헤겔은 이런 종의 무리를 실체라고 이름 붙인다.
관계 장은 이런 유적 실체가 처음 감추어져 있다가 마침내 자기를 외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현상 장에서 종적 본질이 개체 속에서 출현할 때, 개체들은 아직 단순한 집합으로서 무리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런 종적 본질이 실현되면, 무리는 단순한 집합에 머무르지 않고 그 속에 상호작용적인 관계가 성립한다. 이런 관계는 처음에는 동물 종에서는 단순한 암, 수의 관계이다. 이런 상호작용적 관계는 최종적으로 인간이란 종에 이르면 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사회 즉 유적 실체는 오직 인간의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인간을 유적 본질이라 하면서 생물체의 종적 본질과 구분한다.
2)
이런 전체 맥락에 따라서 이제 관계 장으로 이행해 보자. 현상이 법칙 관계로 이행하면서 구체적 법칙 즉 현상 세계와 일반적 법칙 즉 법칙 세계가 대립했고, 이는 일반적 법칙은 추상적인 것으로서 피안에 성립한다. 피안에 성립한 추상적 법칙이 현상 속에서 실현되면서, 법칙 세계와 현상 세계가 통일을 이루니, 여기서 관계가 출현했다.
이제 ‘관계’ 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개별자와 개별자의 관계를 매개로 일반적인 본질과 개별적인 현상 사이의 관계가 전개된다. 개별자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본질이 현상 속에 더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본질이 더 구체적으로 실현되면 그럴수록 개별자의 관계도 더 필연적인 동일성을 지니게 된다.
이 관계는 우선 이중성을 지닌 관계이다. 여기서 본질도 현상을 지니며 현상도 본질적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각자는 자립적이면서도 타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자기는 타자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기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전제되어야 하며, 타자를 부정(정립)하는 것은 곧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며 타자로 이행하는 것은 곧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타자로의 반성은 자기 자신으로의 반성이다. 이 관계는 두 측면을 갖는데 왜냐하면, 이 관계는 타자로의 반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계는 자신에서 자기 자신의 구별을 갖는다. 관계의 측면들은 자립적으로 존립한다. 왜냐하면, 이 측면들은 서로에 대해 무차별적인 상이성을 갖는 가운데 자기 자신 내에서 부서져 있으므로 각자의 존립은 그에 못지않게 다만 타자에 관계하고 서로 부정적으로 통일되는 가운데서만 의미를 지닌다.”(논리학, GW11, 353)
이런 관계는 반성운동에서 개념적으로는 이미 제시되었던 것인데, 이제 물체들의 관계를 통해 마침내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즉 반성운동은 종적 개체가 자기를 재생산하는 가운데, 본질을 지속하게 한다. 여기서 본질은 개체를 통해 자기로 되돌아오며, 개체는 본질을 통해 자기를 재생산한다.
헤겔은 이런 관계를 타자로 반성하는 것이 곧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이며, 양자의 부정적인 통일이라 했다. 그런데 이런 반성운동은 생물체가 전개하는 일반적인 운동을 추상적으로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이제 등장한 본질적 관계에서도 동일한 반성운동이 일어나지만, 이 운동은 자립적인 것들이 전개하니 실재하는 구체적인 운동이다. 여기서 개체는 자립적인 것이어서 서로 무차별하면서도 동시에 타자를 매개로 하여 반성되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일은 무차별성과 대립한다.
본질적 관계에서 각 요소는 자립성과 반성운동이 동시에 성립하므로 이런 관계는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것이다. 이런 모순의 극복되어 자립적인 요소들이 동시에 완전한 반성을 통해 통일을 이루게 되면, ‘실제성’이라는 범주로 이행하게 된다.
“본질적 관계를 이루는 측면들은 총체성이지만, 이 총체성은 자기의 피안을 본질적으로 대립된 것으로서 갖는다. 이 피안은 현상이다. 그 실존은 오히려 자신의 실존이 아니라 자신의 타자가 지닌 실존이다. 따라서 본질적 관계는 자기 내에서 부서진 것이지만, 이렇게 그 자신이 지양된다는 사실이 성립하는 근거는 그것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타자를 통일한 것 그러므로 전체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므로 이 관계는 자립적 실존을 가지며 동시에 본질적으로 자기 내로 반성한다.”(논리학, GW11, 353)
3)
관계 장은 이런 법칙 세계와 현상 세계의 통일이 발전해 나가는데 추상적 법칙이 그 자체로 구체적 현상을 지니게 되지만, 아직은 법칙을 내재하고 있는 자립적인 현상과 상호 공존하는 관계에 머무를 때,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서 양 측면은 자립적인 것이지만, 그 결과 각자는 다른 것을 자기 속에 비치게 하며[scheinen] 동시에 다만 이 양자의 통일성으로서만 존재한다. 이제 본질적 관계는 다만 최초의 직접적인 관계이므로 부정적인 통일과 긍정적인 자립성은 공존을 통해 결합한다.”(논리학, GW11, 355)
전체와 부분은 각자 이중적이다. 부분은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립적인 것이지만, 전체 속에서 한 부분을 이룬다. 전체는 부분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 관계는 자립적인 부분에 외면적이다.
반대로 전체는 한편으로는 부분의 전체이다. 즉 전체는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 관계로서 전체는 부분으로부터 반성되어 나온 것이지만, 동시에 독자적으로 자립하는 것이다.
전체와 부분은 이중적이고 각기 타자를 포함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각 측면이 지닌 지위는 구별된다. 전체에서 전체가 토대이며, 그것을 이루는 부분은 전체 속게 할당되면서 정립된 것이다. 반면 부분에서는 각 요소의 실존이 토대이며, 전체는 다만 외적인 관계일 뿐이다.
각자는 자립성 속에서 타자에 관계하며 직접 모순적인 것이어서 자기를 지양하게 된다. 자립적 전체에서 부분은 전체가 자기를 분할하여, 즉 자기에 부정적으로 관계하여 정립한 것이다. 그러나 전체는 부분의 통일이므로 부분에 의존하고 있어서 전체는 부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전체는 부분을 전제로 한다.
마찬가지로 자립적인 부분은 직접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분은 스스로 부서지니 전체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부분은 그 자신이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체와 부분은 각자 자립적이지만, 상호 제약하고 있어서 조건과 제약된 것이라는 관계를 맺는다. 이런 상호 제약 속에서 각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니, 각자는 무제약적인 자립적인 것이다.
“이런 관계의 두 측면은 각기 자기 자신에서 자신의 자립성을 가지지 않고 자신의 타자 속에서 자립성을 가지므로 다만 양자의 동일성만이 현존한다. 양자는 그런 동일성 속에서 다만 계기일 뿐이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 자신에서 자립적이므로 양자는 두 가지 자립적인 실존이면서 서로 무차별하다.”(논리학, GW11, 356)
4)
전체와 부분은 각기 자립적이면서도 상호 부정적이니 서로 순환하게 된다. 이런 순환의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네 가지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동일성과 구별이 교체된다.
우선 첫째 단계에서 전체는 부분과 동일하다. 자립적인 전체는 부분으로 해체된다. 전체는 이런 해체된 다양한 부분의 통일이다. 전체는 이런 부분의 반성된 통일이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에서 전체는 부분과 같지 않다. 전체는 해체된 부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이런 다양한 부분들의 집합과 같은 것이니, 이 집합이 곧 전체라면 전체는 다만 전체와 같은 것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 전체를 이루는 부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전체이다. 그러므로 부분과 전체는 동일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네 번째 단계에서 부분은 전체와 같지 않다. 부분은 다만 전체가 분할된 다양한 부분과 같을 뿐이기 때문이다.
전체와 부분은 상호 무차별하며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 자기 내에서 스스로 부서지면서 타자로 이행한다. 전체는 추상적 동일성이니, “이런 동일성인 전체는 동시에 자기 내에서 구별된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전체는 “자신의 타자로 반성한다.” 부분은 관계없는 다양한 상이한 것이지만, 그 자체가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이니 “그 자체로서 자기 자신의 타자이며 자신을 다만 지양하는 것이라고 할 자기 내에서 타자이다.”(논리학, GW11, 357)
이런 순환 속에서 본질적인 관계의 진리는 매개이다. 즉 양자는 각기 모순적이며 서로 모순적이다. 자기 부정은 자기 긍정이며 타자로 이행하는 것은 자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직접성은 정립된 것이며 자립성은 매개된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의 진리는 매개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 관계의 본질은 반성된 직접성과 존재하는 직접성이 모두 지양되는 부정적인 통일이다. 이런 관계가 모순적인 것이니, 자신의 근거로 돌아간다.”(논리학, GW11, 357)
이런 순환 속에서 처음 서로 독자적인 것으로 세워지고 외적으로만 관계하던 전체와 부분은 상호 이행하면서 순환하는 것으로서 밝혀지니, 이것이 곧 힘과 외화의 관계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2-현상에서 관계로의 이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2-현상에서 관계로의 이행
1)
개별적 현상에 내재하는 동일성이 곧 법칙이다. 이 법칙은 상대적이므로, 여기서 현상의 세계와 법칙의 세계가 구별된다. 전자는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법칙의 세계이며 후자는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의 세계이다.
이런 추상을 통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을 넘어 가장 완전한 추상적인 일반 법칙이 출현한다. 가장 추상적인 일반 법칙에서 법칙의 두 요소는 완전한 동일성을 이루며, 지금까지 그 요소를 지배했던 개별적 내용은 제거되고 오직 관계 속에서만 규정되는 형식적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이런 추상적 법칙은 주관적으로 추상된 것이니, 현상에 대해 외면적으로만 관계한다.
이런 추상적인 일반적 법칙과 구체적인 개별적 현상이 통일을 이루면서 처음 출현하는 것이 곧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이다. 이는 현상의 측면과 법칙의 측면을 동시에 가지는 총체성이다.
그런데 상대적인 현상의 법칙은 자기 내에 법칙의 동일성과 상호 무차별적 개별적 현상이 공존한다. 헤겔은 현상의 법칙 내에 들어있는 현상의 내용을 비본질적 현상이라 한다. 반면,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는 나타나는 현상은 ‘본질적 현상’이다.
법칙 세계의 본질적 현상은 현상 세계의 비본질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법칙을 이루는 두 요소는 서로 대립하고 각자 자립적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완전하게 통일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 법칙을 이루는 양자의 관계는 타자와의 관계이면서 자기 관계이다. 즉 자기를 타자로 삼아 자기에 관계하는 것이다. 즉 “각자는 자신의 타자를 자기 자신에서 포함하는 동시에 자립적인 것이 되어 이 타자를 자신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으로”(논리학, GW11, 348) 규정된다.
이전의 현상적 법칙은 내용이 무차별적이므로 그 내용은 법칙 관계 속에서 다만 형식적 자기 내 반성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 정립된 존재는 자기 자신에서 내적으로 반성하면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 헤겔은 이런 경우 동일성은 형식적 동일성이 아니라 실질적 또는 ‘실재하는 동일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타자는 동일한 것이며 현상하는 것은 그런 가운데 사실상 타자 속으로 반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으로 반성된다. 정립된 존재가 자기로 이처럼 반성하는 것이 바로 법칙이다. 그러나 정립된 존재는 현상하는 것으로서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비존재로 반성되거나 그 자신의 동일성은 그 자체 본질적으로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정성이며 자신의 타자이다. 그러므로 현상의 자기 내 반성인 법칙은 현상의 동일적인 토대일 뿐만 아니라 현상은 그 법칙에서 자신의 대립물을 가지며 그 법칙은 현상의 부정적 통일이다.”(논리학, GW11, 347)
2)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가장 추상적인 일반성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구체적인 개별성을 동시에 갖는다.
여기서 근거 관계가 다시 회복된다. 이전에 추상적인 법칙은 개별적인 현상의 토대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양자는 외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자기를 구체적으로 정립하며 개별적 현상이 되고 현상은 자기를 지양하여 법칙이 되니, 양자는 본질과 가상 사이의 매개 관계가 되며 이런 점에서 앞에서 설명한 근거 관계가 회복된다.
본질과 종적 개체 사이의 반성 관계가 여기서 다시 출현한 것이다. 여기서 법칙이 형식으로서 근거가 되고 현상이 토대가 되면서 현상은 자기 부정을 통해 근거로 복귀하고 근거는 자기를 정립하면서 현상이 된다.
“그러나 이제 법칙은 현상 세계의 총체적 반성이므로 또한 현상 세계의 본질을 결여한 다양성도 포함한다. 가변적이고 변화하는 계기가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본질적인 계기로 되면서 그것은 절대적 부정성이거나 일반적으로 말해 형식 자체가 되지만, 그 계기는 그 자체적인 동시에 대자적인 세계 속에서 자립적이지만 반성된 실존이라는 실재성을 갖는다. 거꾸로 이 반성될 자립성은 이제부터 자기 자신에서 형식을 갖고 이를 통해 내용은 단순히 다양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기와 합일하는 내용인 것과 같다.”(논리학, GW11, 348)
“나아가서 또한 본질 세계는 현상 세계를 정립하는 근거이다. 왜냐하면, 절대적 형식을 자신의 본질 규정 속에 포함하는 가운데 이 세계의 자기 동일성이 지양되며, 자신을 정립된 것으로 만들어 정립된 직접성으로서 현상 세계로 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49)
3)
그러나 이런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아직은 피안에 머무른다. 그것이 지닌 본질적 현상은 구체적인 자립성을 가지지만, 아직은 현실이 아니라 피안의 세계에서 가진다. 그러므로 현상의 세계를 감각적 세계라고 한다면, 이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세계의 초감각적 세계이다.
이 초감각적 세계는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처럼 감각을 넘어서서 순수하게 동일한 법칙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법칙이 구체적인 모습을 가지고 실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피안의 세계와 같다.
이와 같은 피안의 법칙은 현상에 내재하는 법칙과 마찬가지 내용을 지니지만, 그 내용은 전도되어서 표현된다. 그것은 마치 거울에 비추어진 상처럼 현상 세계와 반대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피안의 법칙에 관해서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지성 장에서 자기의식 장으로 넘어가는 가운데서도 제시한 바 있다. 정신현상학에서 설명된 전도의 내용은 여기 논리학에서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데, 즉 현상에서 남극은 피안에서는 북극이 되고 현상에서 -전기는 피안에서는 +전기가 되며, 현상에서 범죄는 피안에서는 타자에게 베푸는 은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세계는 서로 관계하면서 현상 세계에서 긍정적인 것은 그 자체적이며 대자적인 세계에서는 부정적이고 거꾸로 전자에서 부정적인 것은 후자에서 긍정적이다. 현상 세계에서 북극은 그 자체적이며 대자적으로는 남극이고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양전기는 그 자체로는 음전기이다. 현상 세계에서 악이고 불행 등은 그 자체적이며 동시에 대자적으로는 선이고 행복이다.”(논리학, GW11, 351)
헤겔이 이런 설명을 어디서 끌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기독교에서 피안에 관한 서술에서 끌어낸 것이 아닐까 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유사한 설명을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전개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상품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그것의 피안이라고 할 화폐에서는 전도된다고 한다. 상품에서 사용가치가 지배적이라면, 화폐는 교환가치가 지배한다. 이런 전도는 상품이 화폐로, 화폐가 다시 자본으로 발전하면서 계속해서 전도된 물신의 세계로 등장하는 데 헤겔의 피안 법칙,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이라는 개념이 지닌 전도와 유사하다.
또는, 현대 물리학에서 쌍생성의 개념과도 유사하다. 하나의 에너지(감마선)는 서로 대립하는 두 물질로 분열된다. 전자와 양전자가 나오니, 만일 현실에서 전자가 나온다면, 그 이면의 세계에서는 양전자가 나올 것이다. 이것은 헤겔이 말하는 현상의 법칙과 피안의 법칙 사이의 관계와 서로 닮았다.
4)
현상의 세계와 피안의 세계는 둘 다 현상과 법칙으로 이루어진 총체성이지만, 여기서 법칙의 측면은 서로 동일하고 현상의 측면은 서로 전도되어 있다. 그러므로 양자는 모순적인 관계에 있으니, 이 모순을 통해 현상의 세계와 피안 세계의 대립은 해소된다.
“이제부터 법칙은 실재화하며, 법칙의 내적 동일성은 동시에 현존하는 동일성으로 되고, 거꾸로 법칙의 내용은 관념성[자기 동일성] 속으로 고양된다. 왜냐하면, 각 측면은 자기에서 다른 측면을 가지고 따라서 진정으로 다른 측면과 동일하며 그 결과 자기와도 동일하기에 이 내용은 자기 자신에서 지양된 내용이며, 자기 내로 반성된 내용이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52)
양자의 대립이 해소되면서 법칙의 동일성이 이제 피안이 아니라 현상 속에서 출현하게 된다. 즉 피안의 세계가 현실에 실현되는 것이다. 이제 법칙은 반성된 총체성이고 현상은 직접적인 총체성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법칙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는 각자 타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 대립하니, 여기서 자기를 넘어서서 자신의 타자로 끊임없이 이행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제 출현하는 것은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반발하여 두 가지 총체성으로 되는 총체성이다. 하나는 반성된 총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총체성이다. 양자는 처음에는 자립적인 것이지만, 다만 총체성으로서만 그런 것이다. 양자는 그런 한 각자 본질적으로 자기에서 타자의 계기를 갖는 것이다. 각자는 직접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동시에 반성된 것으로 규정되므로, 각자의 자립성은 이제부터 다만 타자에 본질적으로 관계하면서 자신의 자립성을 이런 양자의 통일 속에서 갖는 것으로서만 정립된다.”(논리학, GW11, 352)
법칙과 현상의 이런 관계가 앞으로 2편 3장 관계 장에서 전개될 전체와 부분, 힘과 외화, 내면과 외면의 관계에 해당한다. 이 과정에서 처음 양자의 통일성은 내재하다가 마침내 마지막에 이르러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진다.
“세계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다양성의 형식 없는 총체이다. 이 세계는 본질적인 세계든, 현상하는 세계든 몰락한다. 왜냐하면, 다양성이 단순하게 상이한 것이기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총체성도 아니고 우주도 아니며 본질적으로 관계로서 존재한다.”(논리학, GW11, 352)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1-법칙 세계와 피안[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1-법칙 세계와 피안
1)
앞에서 실존에서 현상 즉 정립된 것으로 이행하면서 여기서 법칙 관계가 등장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현상 세계는 실존이 자립적이면서 동시에 서로 내적으로 관계를 맺는 세계다. 이 세계에 내재하는 관계가 곧 법칙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법칙의 독일어 표현인 ‘Gesetz’가 ’정립된 것[Gesetztsein]‘에서 나왔다고 본다. 법칙은 곧 정립된 것이므로 이미 타자를 전제로 한다. 이런 전제가 상호적이므로 여기서 하나의 정립된 것은 다른 정립된 것과 관계하게 된다고 본다. 그것이 곧 법칙이다.
여기서 법칙 관계를 이루는 요소 즉 현상은 두 측면을 지닌다. 한 측면은 직접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이며 다른 측면은 부정되고 정립된 측면이다. 현상 세계에서 자립적인 것들은 서로 무차별하며 반면 법칙의 세계에서 부정적인 것의 상호 관계를 통해 자기 동일적인 관계가 출현한다.
법칙은 현상의 반성을 통해 출현한 것이다. 현상의 무차별적 관계는 무실한 관계이고 이 반성을 통해 자기 동일성의 관계로 된다. 이런 반성은 아직 외적 반성이며 경험적인 추상화이며 일반화에 속한다. 이런 법칙은 아직 독립된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현상에 내재할 뿐이다.
2)
현상과 내재하는 법칙 사이의 관계를 좀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자. 우선 자립적인 현상의 자기 매개를 통해 대립이 해소되며 긍정적인 동일성이 출현한다. 이 동일성은 정립된 것이 정립된 것과 맺는 관계이다.
여기서 현상은 법칙을 내용으로 갖는다. 이 내용은 상호 관계를 통해 출현하는 본질적 내용이다. 동시에 현상은 그것 외에 직접적인 내용을 지닌다. 그러므로 법칙은 일반적이지만, 그것이 출현하는 현상 세계는 다양한 개별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낙하 법칙은 지구에서와 달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여기서 일반적인 법칙은 개별적인 현상의 토대[Grundlage]가 된다. 왜냐하면, 일반적 법칙은 개별적 현상에 다만 외면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 현상이 지닌 개별적 내용은 그 법칙이 지닌 본질적 내용에 내적인 관련을 지니지 않는다. 이 일반적인 법칙은 개별적 현상에 적용되는 추상적인 공통성일 뿐이다.
“법칙은 토대 자체이며 현상은 동일한 내용을 지니지만, 그에 더해서 그 직접적인 존재가 지닌 비본질적 내용도 포함한다. 현상 자체가 법칙으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현상이라는 형식 규정조차도 하나의 내용이며 더욱이 법칙의 내용으로부터 구별되는 내용이다.”(논리학, GW111, 345)
이런 법칙은 현상의 피안에 독립된 세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내재하며 “현상에 직접적으로 현현한다.” 그것은 “실존하는 또는 현상하는 세계의 고요한 모사”(논리학, GW111, 345)이다.
3)
그러나 여기서 좀 더 생각해 보면, 법칙의 일반성은 사실 상대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런 상대성 때문에 좀 더 일반적인 법칙과 좀 더 현상적인 법칙의 차별이 발생한다.
이제 현상적 법칙 세계를 헤겔은 간단히 현상 세계라 하고 일반적 법칙 세계를 간단히 법칙 세계라고 한다. 그러면 현상 세계에 이미 일반성으로서 법칙이 내재하며 거꾸로 법칙 세계도 완전한 동일성이 아니라 우연성과 개별성이라는 현상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현상 세계 속에도 이미 법칙이 들어있다. 여기서 법칙의 관계는 개별적 요소에 대해 더욱 외면적이며 이 법칙은 제한적으로 적용되며 동일한 법칙을 내용으로 하는 개별적이며 서로 무차별한 법칙들이 출현한다. 법칙의 개별적 내용이 곧 현상 세계를 현상 세계로 만드는 형식 규정이 된다.
일반적 법칙의 세계는 현상 세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이 출현하지만, 완전히 개별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법칙의 세계 자체가 나름대로 개별적인 현상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현상과 법칙은 각기 이중적으로 된다. 현상 내에서 일반법칙이 들어있으며 법칙도 개별적 현상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현상과 법칙은 모두 총체적이다.
“양자는 오히려 하나의 총체성을 이룬다. 실존하는 세계는 그 자체가 법칙의 왕국이며 이 법칙의 왕국은 단순한 동일한 것이지만, 이 동일성은 정립된 것 속에서나 실존의 자기 자립성을 스스로 지양하는 가운데서 자기 동일적인 것이다.”(논리학, GW111, 345)
4)
이런 법칙의 일반화의 과정에서 순수한 추상적인 법칙이 출현하게 된다. 순수한 법칙에 이르면, 법칙을 이루는 두 요소는 더는 자립적 무차별한 내용을 상실하고 법칙 관계를 이루는 한 요소로만 규정된다.
그럴 때 헤겔은 법칙은 긍정적 통일이 아니라 ‘부정적 통일’을 이루며, 즉 두 요소는 더는 구별되지 않고 개별 자립적 요소의 ‘내용’이 관계를 이루는 요소 즉 ‘형식’으로 되었다고 한다.
“[상대적] 법칙은 현상의 긍정적인 본질 규정일 뿐이며 그것의 부정적인 본질 규정은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 내용 규정이 형식의 계기가 되어서 그 자체로 자기의 타자로 이행하며 자기 자신에서 자신이 아니라 타자가 될 것이다.”(논리학, GW111, 346-7)
예를 들어 전기에 관한 과학의 발전에서 처음에 전기는 유리 전기와 섬유 전기로 출현했다. 과학이 발전하여 추상화가 일반적으로 되면서 이런 물질 전기는 사라지고 + 전기와 – 전기로 규정되는데, 유리나 섬유는 구체적 내용을 지니고 전기는 그것에 외면적으로 관계할 뿐이지만, + 전기나 – 전기는 더는 구체적 내용이 없고, 여기서 +. -는 서로 상대적인 규정 즉 형식적 규정만을 지닐 뿐이다.
이런 순수한 추상적 법칙의 세계는 사유를 통해 가정되지만, 과연 이런 법칙이 현실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유가 추상한 것은 주관이 개입하여 외면적인 것일 뿐이고, 현상의 객관적 본질이라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추상적인 법칙은 현상의 토대가 되기는 하더라도 현상의 근거라고 볼 수는 없게 된다.
“법칙은 현상의 자기와의 단순한 동일성이다. 따라서 현상의 근거가 아니라 그 토대이다. 왜냐하면, 법칙은 현상의 부정적 통일이 아니라 현상의 단순한 동일성으로서 직접적인 통일 즉 추상적 통일이다. 따라서 이 추상적 통일 옆에는 현상의 다른 내용이 발견된다.”(논리학, GW111, 347)
결과적으로 이런 추상적인 법칙을 현상 속에 집어넣는 또 제삼자 예를 들자면 플라톤적인 데미우르고스와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