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88)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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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강해(88)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1) 두 번째 증명 : 영혼의 세 부분에 상응하는 즐거움에 기초한 증명(580c-583a)

 

[580c-583a]

*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증명ἀπόδειξις을 시작하면서 우선 영혼의 세부분에 기초하여 세 가지 욕구와 즐거움을 구분하고 그에 상응하여 사람들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눈다.

1) 한 나라가 세 부류로 나뉘었듯 각 개인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셋으로 나뉜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여 즐거움ἡδονή도 욕구ἐπιθυμία와 다스림ἀρχή도 세 종류τριχῆ가 있다. 우선 영혼의 세 부분이란 사람이 ‘그것으로 배우는μανθάνει 부분’, ‘그것으로 화내는θυμοῦται 부분’,(580c-d) ‘욕구부분’ἐπιθυμητικὸν으로 나뉜다. 이 욕구 부분은 ‘돈 사랑하는φιλοχρήματος 부분’이라고도 했는데, 그건 그런 욕구들은 돈을 통해서 가장 잘 충족되기 때문이다.(580e)

2) 즐거움과 사랑φιλία의 관점에서 이 부분은 이득κέρδος을 향해 있으므로 ‘이득 사랑하는φιλοκερδής 부분’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기개부분 τὸ θυμοειδὲς은 지배하는 것과(581a) 승리하는 것, 좋은 평판 얻는 것εὐδοκιμεῖν을 ‘언제나 전적으로’ἀεὶ ὅλον 추구하므로ὡρμῆσθαι ‘승리 사랑하는φιλόνεικος 부분’이자 ‘명예 사랑하는φιλότιμος 부분’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가 배우는 부분’은 언제나 전적으로 진리가 어떠한지를 아는 것τὸ εἰδέναι으로 향해 있으므로τέταται ‘배움 사랑하는φιλομαθής 부분’ 그리고 ‘지혜 사랑하는φιλόσοφος 부분’이라 부른다.

3) 이 부분은 돈과 평판에 대해서는 세 부분 중에서 이 부분이 가장 관심 없다.(581b) 영혼의 이 세 부분 중 ‘어느 부분이 다스리는지ἄρχει에 따라’ 인간ἄνθρωπος의 경우도 세 부류 즉 ‘지혜 사랑하는 자’, ‘승리 사랑하는 자’, ‘이득 사랑하는 자’로 나뉘고 그에 따라 즐거움의 경우도 인간 각각에 하나씩 해당하는 것으로 세 가지로 나뉜다.(581c)

4) 이때 만일 이 세 부류의 인간 각각에게 세 종류의 삶 중 ‘어떤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인지’τίς τούτων τῶν βίων ἥδιστος를 차례로 묻는다면 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을 가장 찬양할 것이다.ἐγκωμιάσεται(581c) 돈벌이꾼은 재물χρῆμα에서 오는 즐거움만을, 명예를 사랑하는 자는 명예를 누리는 즐거움만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다른 즐거움은 연기καπνός 같은 것이자 헛소리φλυαρία라고 생각할 것이다.(581d) 그리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진리가 어떠한지 아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다른 것들은 ‘불가피한 것들’ἀναγκαίας이라고 부를 것이다.

5) 위와 같이 각 종류의 인간이 가지는 즐거움과 삶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ἀμφισβητοῦνται, 이때의 논란은 누구의 삶이 ‘더 아름답고 추한지’τὸ κάλλιον καὶ αἴσχιον도, 누구의 삶이 ‘더 낫고 못한지’τὸ χεῖρον καὶ ἄμεινον가 아니라, 단지 ‘누구의 삶이 더 즐겁고 고통 없는지τὸ ἥδιον καὶ ἀλυπότερον’에 대한 것이다.(581e)

6) 그렇다면 이들 중 누구 말이 진실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훌륭하게 가려내기 위한 판정κριθήσεσθαι 기준κριτήριον으로 경험ἐμπειρίᾳ 과 현명함φρόνησις 그리고 논변λόγος을 제시한다.(582a)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 판단 기준에 기초하여 우선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우리가 이야기한 모든 즐거움을 가장 많이 경험한ἐμπειρότατος 자인가’를 묻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이득을 사랑하는 자의 경우, 배움의 즐거움의 경험자가 될 그 어떤 필연성ἀνάγκη도 없지만οὐ ῥᾴδιον, 지혜를 사랑하는 자의 경우는 어려서부터 배움의 즐거움을 맛보는 일이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받아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과 관련해서 지혜 사랑하는 자가 이득 사랑하는 자를 크게 넘어선다πολὺ διαφέρει고 말한다.(582b) 명예 사랑하는 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넘어설 수가 없다. 그리고 ‘있는 것’το ὄν을 관조하는 것이 어떤 즐거움을 갖는지는 지혜 사랑하는 자 외에 어느 누구도 맛볼 수 없다고 말한다.(582c)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이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게 판정할 사람은 바로 그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이 사람의 경험만이 현명함을 동반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논변이 훌륭하게 판정하기 위한 도구ὄργανον라면 지혜를 사랑하는 자야말로 그 도구를 갖춘 자라고 말한다.(582d)

7)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즐거움과 삶 자체와 관련한 논란에서(581d-e)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훌륭하게 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이득을 사랑하는 자나 명예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자 논변을 사랑하는 자이고 그가 칭찬하는 삶이 가장 참될 수밖에ἀληθέστατα εἶναι 없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이득 사랑하는 자는 부와 이득으로, 명예를 사랑하는 자는 명예와 승리 그리고 용기ἀνδρείᾳ로 판정할 때나 가장 참된 판정을 내리는 자들이다(582e)

8)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이 지혜로운 사람을 판정관ὁ κριτὴς으로 삼아 영혼의 부분들 중에서 그것으로 우리가 배우는 부분의 즐거움이 이 세 가지 즐거움들 가운데 가장 즐거울 것이며 또한 우리 가운데서 영혼의 이 부분이 다스리는 사람의 삶이 가장 즐거운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현명한 자가 자기 자신의 삶을 찬양할 때는 분명 그렇게 할 권위를 지닌 자κύριος로서 찬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전사와 명예 사랑하는 자의 즐거움이 두 번째, 이득 사랑하는 자의 즐거움이 맨 마지막이라고 말한다.(58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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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0c ‘영혼에 세 부분이 있으니까 즐거움 역시 각 부분에 고유한 것 하나씩 세 종류가 있고, 욕구epithymia와 다스림archē도 마찬가지로 종류가 셋일 것 같네.’ : 우리는 영혼 관련 언급할 때 ‘욕구’epithymia하면 영혼의 ‘욕구 부분’epithymētikon을 떠올리고 그 욕구 부분만이 욕구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세 부분에 상응하는 세 종류의 욕구가 있다고 말한다. 즉 영혼의 이성 부분logistikon과 기개 부분thymoeidēs, 욕구 부분epithymētikon 모두 각기 욕구하는(사랑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영혼이 욕구하는 기능도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보면 영혼의 한 부분으로서 ‘욕구 부분’에서 쓰인 ‘욕구’라는 말은 ‘좁은 의미에서’ ‘돈, 이득 등 물질적 욕구’를 의미하고, 여기서(580c)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욕구’라는 말에서 쓰인 ‘욕구’는 영혼의 욕구 부분은 물론 이성 부분, 기개 부분까지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 ‘영혼의 욕구 일반’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영혼에서 욕구 부분to epithymētikon만이 욕구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부분을 포함한 영혼 전체가 명예나 돈을 욕구하고 추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주의할 것은 영혼의 세 부분에 상응하는 세 종류의 욕구가 있다고 해서 한 사람의 영혼에서 이 세 가지 욕구가 따로따로 세 가지로 분리되어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신분열증 환자에게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다. 그 세 가지 욕구들은 한 사람의 영혼 내에서 영혼의 세 부분들의 내적 관계 맺음을 통해 결정된 하나의 욕구로 표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혼의 세 부분 가운데 어떤 부분이 주도하느냐에 따라 하나로 표출되는 욕구의 성격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성 부분의 지배 내지 다스림에 따라 영혼의 나머지 부분의 욕구들이 관계를 맺으면 가장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이성적인 욕구, 지혜와 배움을 사랑하는 욕구로 표출되고 그 에 따라 정의로운 개인이 된다. 그러나 기개 부분 또는 욕구 부분의 지배 내지 다스림에 따라 영혼의 나머지 부분의 욕구들이 관계를 맺으면, 이성 부분부터 욕구나 기개 부분의 도구가 되어 영혼의 욕구는 오로지 승리와 명예, 돈에만 집착하는 욕구로 표출되고 그에 따라 각각 부정의한 개인들이 된다. 결국 최종적으로 판정의 대상이 될 사람들의 부류는 그 사람의 영혼이 갖는 욕구에 따라 세 부류, 즉 ‘정의로운 자로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과 ‘부정의한 자로서 명예를 사랑하는 자와 이득을 사랑하는 자’로 구분된다. 그리하여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 이상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삶은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명예 또는 돈을 사랑하는 것 이상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삶은 없다고 생각한다.

* 580d ‘즐거움’hēdonē : 즐거움의 원어는 hēdonē이다. 즐거움은 좋은 경우도 있지만 나쁜 즐거움도 있다.(500c) <국가>에서도 몇 가지 예외, 이를테면 ‘이야기를 나누려는 욕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329d), ‘그의 욕구들은 영혼 그 자체의 즐거움’(485d) 등을 제외하면 대체로 부정적이거나 최소한 비도덕적인 함축을 지니고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hēdonē는 ‘즐거움’ 보다는 ‘쾌락’으로 더 많이 번역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세 부분이 각각 hēdonē를 갖고 있고 욕구도 그에 상응하여 세 종류가 있으며(580d) 영혼의 욕구 부분만이 아니라 기개 부분, 배우는 부분 역시 각기 승리하는 것, 진리를 아는 것 등 뭔가 나름의 즐거움을 추구하거나 향해있다(581b)고 말한다. 이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영혼의 부분들 가운데 욕구 부분만이 아니라 나머지 부분들 모두 모종의 욕구를 갖고 있으며 hēdonē 또한 그것들 모두의 욕구 대상의 하나임을 보여준다. 영혼의 각 ‘부분’이 자기가 속한 ‘부분’의 성격에 따라 자신만의 즐거움(쾌락)과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이와 같은 견해는 <필레보스>뿐만 아니라 <니코마코스 윤리학> 10권 3~5장에서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쾌락 분석과도 연관되어 있다. 플라톤을 마치 금욕주의의 선구인 양 여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곳에서도 hēdonē는 행복한 삶과 관련하여 주요한 관심사이자 주제로 제시되어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에게도 정서적으로 즐거운 감정은 대중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행복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요건의 하나이다. 다만 플라톤이 말하는 좋은 즐거움에는 즐거움의 지속성과 도덕성을 담보하는 현명함이 포함되어 있다.

* 581b ‘그것으로 우리가 배우는 부분’ : 영혼의 세 부분은 이성 부분logistikon, 기개 부분, 욕구 부분으로 나뉜다. 이곳에서 기개 부분과 욕구 부분은 이름 그대로 언급되는데 이성 부분만 ‘그것으로 우리가 배우는 부분’으로 언급되고 있다.

* 581b ‘승리 사랑하는philoneikos 부분’ : philoneikos를 철자 그대로 ‘싸움neikē을 사랑하는’의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사실 당대 승리nikē에서 유래한 말들의 경우, 승리를 사랑하는 자는 투쟁 또한 사랑해야하기 때문에 i와 ei를 혼용하는 사례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philoneikos는 앞뒤 문맥상 philonikos 즉 ‘승리를 사랑하는’의 뜻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아예 philonikos로 표기되어 있는 사본(MSS)도 있다. J. Adam. 해당 노트 참고.

* 581e ‘불가피한 것들’anankaias :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먹는 즐거움, 성적 즐거움 등은 생물학적 자기 보전을 위한 행위들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것들이지 따로 그가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즐거움은 아니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 580e ‘돈 사랑하는philochrēmatos 부분이라고 했는데’ : 소크라테스는 앞서 욕구 부분을 돈을 사랑하는 부분이라고 말한 바 있다.(553c)

* 580e ‘먹을 것과 마실 것, 성적인 것 그리고 이것들을 뒤따르는 그 밖의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한 욕구들은 돈을 통해서 가장 잘 충족되기 때문’ : 욕구들은 앞서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에서 살폈듯이 필수적인 최소한의 물질적 생물학적 생존 욕구는 물론 필수적이지 않은 사치 욕구들과 온갖 종류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불법적 욕구 일체를 포함한다. 욕구 부분을 돈을 사랑하는 부분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은 그러한 욕구들 모두 돈이라는 교환가치를 통해 모두 충족되기 때문이다. 금전이 인간 욕망의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화신으로 자리 잡은 역사는 이토록 뿌리가 깊다.

* 581e 이때의 논란 : 앞서 세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란을 말한다. 그 논란은 단지 누구의 삶이 더 즐겁고 고통 없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진정 논란이 되어야 할 사안은 누구의 삶이 더 아름다운지, 수치스러운지 그리고 훌륭한지 못난지에 관한 것이다.

* 582b ‘누가 우리가 이야기한 모든 즐거움을 가장 많이 경험한empeirotatos 자인가’ : 이것은 언뜻 즐거운 경험의 많고 적음이 즐거움의 우위를 판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뜻으로 읽힌다. 누가 보더라도 ‘누구의 삶이 더 즐겁고 고통 없는 삶일까?’의 문제와 ‘누가 모든 즐거움을 가장 많이 경험한 자인가?’ 문제는 논점상 별개의 문제이다. 비록 남보다 경험의 종류는 적더라도 특정 경험의 깊이와 느끼는 정도에서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즐거운 상태에서 가장 즐거운 삶을 산다고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의 실제 취지는 이러하다. 우선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모든 즐거움’은 즐거움 일반이 아니라 앞서 이야기 한 ‘배우는 즐거움’, ‘승리하는 즐거움’, ‘돈 버는 즐거움’을 말한다. 그 기준에서 보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3가지 즐거움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고, 그에 비해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머지 두 가지. 돈 버는 사람은 마지막 한 가지를 경험한 사람이다. ‘모든 즐거움에서 가장 경험이 많다는 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점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경험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단순히 경험이 많다가 아니라 첫 번째 즐거움이 다른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독보적인 즐거움이라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이 판정자격을 갖추고 있음은 경험의 종류에서도 많지만 그의 즐거운 경험에는 다른 사람이 갖고 있지 않은 그 만의 고유한 특성이 독보적으로 수반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 582c ‘있는 것’to on : ‘있는 것을 관조 또는 구경하는 것’tēs tou ontos theas이란 표현은 이미 제7권(517b, 525a, 532c)에서 여러 번 언급된 바 있다. 동굴의 비유에서 그 말은 동굴 바깥으로 나가 궁극적으로 좋음의 형상을 보는 것을 뜻한다. 글라우콘의 이 말은 두 번째 증명이 필연적으로 세 번째 증명 즉 형이상학적 방식에 근거한 증명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 582e ‘지혜 사랑하는 자이자 논변 사랑하는 자가 칭찬하는 것이 가장 참될 수밖에 없습니다.’ : 즐거움과 가장 참됨을 연결하는 이 구절 역시 이 두 번째 증명이 세 번째 증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지혜로운 자가 판정관인 한 그의 칭찬은 곧 그의 판정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원어는 ‘ho philosophos’이다. 그 말은 보통 ‘철학자’로 옮기지만 이곳에서는 지혜, 욕구, 이득 등 욕구의 대상을 각각 드러내기 위해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는 말로 옮기고 있다. 

* 583a ‘이 판정관은’ : 행복 관련 비교 판정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대화자들이 판정 능력을 갖춘 척하자고 말하고(577b) 시작되지만, 이곳의 판정관은 문맥상 앞 문장의 ‘현명한 자’ 즉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판정의 권위자인 동시에 자신이 가장 즐거운 삶을 사는 사람임을 자임하고 있다. 그럼에도 형식상 자기가 자기를 판정하는 격인지라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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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증명은 인간 영혼에 기초한 증명 즉 일종의 심리학적 근거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그 요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개인의 영혼의 세 부분에 상응하여 세 종류의 즐거움, 욕구, 다스림이 있다.

2) 즐거움과 사랑(욕구)의 관점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은 배움을, 기개 부분은 승리와 명예를, 욕구 부분은 돈과 이득을 사랑(욕구)하고 그것의 획득을 즐거워한다.

3) 다스림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 영혼의 세 부분 중 어느 부분이 다스리느냐에 따라 인간도 지혜를 사랑하는 자, 승리하는 자, 이득을 사랑하는 자로 나뉜다.

4) 이 들 중 누구의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인지를 차례로 묻는다면 저마다 자신의 삶, 자신이 누리는 즐거움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5) 이때 이들의 논란은 누가 더 아름답고 추한지가 아니라 누가 더 즐겁고 고통 없는 자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일 뿐이다.

6) 그렇다면 이들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판정하는 기준으로 경험과 현명함, 논변을 제시하고 그 기준에 기초하여 우선 경험을 기준으로 ‘우리가 이야기한 모든 즐거움을 가장 많이 경험한 자’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꼽는다. 특히 ‘있는 것’을 관조하는 즐거움은 그만이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게다가 현명함을 기준으로도, 판정 도구인 논변을 기준으로도 지혜로운 사람만이 그 도구를 갖추고 있다.

7)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만이 판정관의 자격을 갖고 있다.

8)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지혜로운 사람인 판정관의 입을 빌려 결론적으로 세 인간들 중 지혜로운 사람의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이라 판정한다.

* 첫 번째 증명이나 이번 두 번째 증명 그리고 세 번째 증명 모두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를 판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두 번째 증명은 행복을 즐거움에 연관 지어 누구의 삶이 가장 즐거운지를 판정하려 한다. 일단 판정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영혼의 부분들이 욕구하는 즐거움에 상응하여 세 부류의 사람들이다. 즉 배우는 것을 즐거워하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승리를 즐거워하는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 돈 벌기를 즐거워하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판정 과정은 이 중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가장 즐겁다는 것을 밝히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세 부류의 사람들 중 지혜로운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이고 나머지 두 사람 부정의한 사람임을 말해 준다. 증명을 마친 후 ‘이제 이렇게 이 두 판에서 정의로운 자가 부정의한 자를 두 번 거푸 이겼다’(583b)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그것을 분명하게 뒷받침한다.

* 사실 증명 과정에서도 우리는 그들이 부정의한 자들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이곳에서 그들을 포함한 세 부류의 사람들은 영혼의 세 부분 중 ‘어느 부분이 다스리는지archēi에 따라’(581c) 구분된 사람들이다. 다만 이들 중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분업의 측면에서 분명 이상 국가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그들 자신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 이성의 다스림을 벗어나 있다는 데 있다. 즉 이곳에서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성의 지배에서 ‘언제나 전적으로’aei holon(581b)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부정의한 것이다. 이상 국가에서 전사계층이 가장 명예를 사랑하고 가장 용맹하면서도 정의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리고 생산자 계층이 가장 이득을 사랑하고 가장 생산적이면서 정의로울 수 있는 이유는 이곳에서처럼 자신의 기개 부분이나 욕구 부분이 아니라 영혼의 이성 부분의 다스림에 따르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나라에서 그들은 ‘절제’sōphrosynē의 덕을 통해 자신들의 욕구가 가장 극대화되고 다른 계층들과도 최선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요컨대 그들은 그 절제의 덕에 대한 앎을 통해 정의로운 나라에 걸맞은 자신의 분업적 역할에 따라 각기 정의로우면서 명예와 승리를 사랑하는 가장 용맹한 사람, 정의로우면서 돈과 물질을 사랑하는 가장 생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부정의한 사람들은 쉽게 말하자면 각각 타락한 정치체제의 하나로서 명예정과 과두정을 닮은 명예정적인 사람, 과두정적인 사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영혼의 ‘욕구 부분’이 필수적인 욕구와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불법적인 욕구로 세분화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더욱 타락된 형태로 ‘전적인 자유’exousia를 사랑하는 민주정적인 사람, 폭력적 지배를 사랑하는 참주정적인 사람 즉 최악의 비교 대상으로서 참주까지를 두루 포함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 두 번째 증명은 비교 판정의 기본 목표가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을 비교하는 것임에도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사람 즉 지혜로운 사람의 우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다른 사람들의 저열성은 경험의 가짓수가 적다는 것 외에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에 따라 두 번째 증명은 판정 기준 상 지혜로운 사람의 경험만이 갖는 적합성 내지 그들의 즐거움이 수반하고 있는 독보적 탁월함들(경험, 현명함, 논변)에 관한 논의에 집중되어 있다. 즉 누구의 삶이 더 즐거운가를 결정하는 관건은 누가 더 많이 그러한 탁월함들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살펴보니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러한 탁월함 내지 능력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증명은 궁극적인 비교 대상으로서 참주까지 살펴볼 필요 없이 곧 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최종 우승자로 결론 내리고 있다. 그 만큼 정의로운 사람은 즐거움과 관련해서도 그 자체로 우월한 사람이다. 그래서 두 번째 증명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아예 판정관으로 내세워 최종적인 우승자로 결정하는 형식을 취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것은 내용상 판정의 대상인 자가 스스로에게 우승을 부여하는 격으로 누가 보더라도 공정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한 플라톤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우리가 가질 법한 그러한 의구심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philosophos 즉 철학자란 곧 자기 객관화에 가장 능한 자라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이상 따로 설명할 사안이 아니다. 물론 오늘날 트럼프 같은 현대판 참주들은 물론 작금의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의 행태를 보면 자기를 객관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를 새삼 절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철학에 대한 플라톤의 정의를 토대로 그의 논증 과정 전체를 들여다본다면 정합적으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플라톤에게 철학은 그 자체로 완전한 자기객관화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토대이다. 그것을 담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극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자면 이 논증은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이념적 이상과 권위kyrios를 재확인하는 것이자 그 객관성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583a) 그 만큼 플라톤에게 철학과 지성은 현실의 삶을 넘어서기 위한, 정의로운 삶을 구축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토대이자 근본 조건이다. 그러나 철학의 지적 객관성이 곧 철학자의 지적 객관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철학과 철학자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그 어느 주제보다 철학과 철학자의 정의 그리고 철학 교육에 큰 비중을 두고 <국가>의 백미라고 부르는 제5권에서 제7권 전체에 걸쳐 매우 주도면밀한 문답을 전개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이 <국가>의 주제를 한마디로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실 제9권 말미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나라와 개인의 정의와 행복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말로 세운 이상 국가가 그러한 교육이 다가가야 할 하나의 본이자 푯대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에 따라 플라톤은 말년에 <법률>을 통해 현실에서 그 이상을 최선으로 구현하기 위한 현실적 실제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다. 현실에서 철학자란 자신이 도달한 신념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 자체 참된 것이라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신념을 중시하고 실천하되 그것에 이르기까지 견지해왔던 열정과 긴장 그대로 늘 그것의 진리성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면서 끊임없이 다듬고 보완 정련해가는 사람이다.

* 위와 같은 측면에서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경험만이 현명함을 동반한다.’(582d)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핵심적 덕목이 다름 아닌 ‘현명함’임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명함의 원어는 phronēsis이다. phronēsis는 보통 실천적 문제 해결 국면에서 요구되는 총체적 인식과 지혜(practical wisdom), 분별(prudence) 내지 슬기로움을 의미한다. <국가>에서도 phronēsis는 이곳을 포함해서 대체로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다.(559b, 571d, 586a, 591b, 621b, 621c) 특히 그 말은 실천과 관련하여 ‘욕구를 지배하는 것’(431d)으로 또는 ‘완력과 신체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432a, 461a, 518e), ‘습관과 훈련에 의해 얻어지는 신체의 덕과 달리 신적인 덕으로’(518e) 언급되기도 한다. (참고로 정암학당 역본은 ‘현명함’으로, 박종현 역본은 ‘분별(슬기)’로 옮기고 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플라톤은 <국가>의 모든 논의를 마무리하는 제10권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신들과도 친구 되고자 한다면 현명함을 동반한 정의를 모든 방법을 다해 실천하는 것’(621c,d)이란 말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현명함’은 어떤 개인의 좋음이나 이익을 위한 현명함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좋음과 이익과 관련하여 실천적 정치사회적 현실 영역에서 적용의 보편성을 담보하는 정의로운 앎이자 지혜를 의미한다. 이곳에서도 현명함의 덕(518e)은 ‘있는 것’으로서 현실의 삶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경험을 규정하는 독보적이고도 핵심적인 능력으로 제시되고 있다.

* 이 두 번째 증명에서 언급되고 있는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 즉 영혼의 명예 부분, 욕구 부분의 다스림에 지배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즐거운 삶을 누리며 산다고 믿고 있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경험이 갖는 특성 즉 현명함을 갖고 있지 못하는 한, 고결한 정신적 즐거움과 관련한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정서 상태로만 기준으로 할 경우 누구의 삶이 가장 즐거운지 우열을 가릴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즐거움과 고통은 사람에 따라 주관적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참된 즐거움은 현명함의 덕을 수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일상적 즐거움들과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다는 것도 함께 주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성적 탐닉이나 마약 같은 것이 가져다주는 찰나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은 반복을 거듭할수록 결국 고통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러나 이를테면 선행을 베풀거나 진리를 배울 때 느끼는 즐거움은 좋음과 현명함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어서 늘 마음을 채우고 오래남아 누구든 칭송하고 좋아한다. 이것은 즐거움과 관련한 판정에서 사람에 따라 갈리거나 다툼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모종의 객관적인 기준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러한 참된 실재를 관조할 수 있고 그것에 근원하는 현명함과 논변을 토대로 참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는 지혜로운 사람의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이다.

* 그런데 이곳 <국가>의 논의대로 거창하게 이상적인 나라와 개인의 영혼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리 평범한 일상의 현실 차원에서도 앞서 말한 현명함의 덕을 남달리 특별하게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남을 위한 봉사와 희생, 자신의 내적 갈등은 물론 다른 사람간의 갈등과 관련해서도 화해와 포용의 능력에서 남다르게 뛰어난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부처님의 열반의 즐거움까지는 아닐지라도 – 물론 다른 사람들처럼 감각적 즐거움은 물론 명예욕 인정 욕구에도 시달리며 살아온 경험도 있겠지만 – 자신의 현명함을 통해 비록 몸은 힘들어도 다른 사람들과 좋음과 기쁨을 함께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은 즐거움을 느끼는 자신만의 경험을 갖고 있다. 아무리 많고도 즐거운 경험들일지라도 현명함을 동반하지 않았을 경우 그들에게 그것들은 그저 연기처럼 사라지는 일양적인 것의 반복에 불과하다. 이처럼 오늘날 일상의 현실에서도 현명함의 덕을 갖춘 사람들은 참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가장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다. 현명함이 결여된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즐거움은 얼마 가지 않아 결핍에 시달리며 고통으로 바뀌거나 권태를 불러일으킨다.

*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즐거움을 안겨주는 현명함까지는 갖추고 있지 않아도 일상의 선을 추구하며 자신만의 소소한 행복 이른바 소확행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갖고 있는 능력 내지 탁월함은 앞서 언급한 현명한 사람들처럼 사회적 좋음이나 모두의 즐거움까지 아우르는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의 현실을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 현명함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제는 소확행이 개인주의 사회가 갖는 구조적 불행의 조건까지 뒤바꿔 놓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플라톤의 관심사는 그 구조적 불행을 전복할 수 있는 근본 원리와 조건들을 찾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철학은 여전히 현실적 삶과 관련한 문제들과 그 총체적 연관들을 근본에서 따져 묻고 그에 대한 총체적인 해결 방식 내지 원리를 탐색하는 형이상학이다.

*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관조하는 즐거움을 포함하여 현명함을 수반하는 경험과 논변을 독보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에 근거하여 곧바로 그에게 즐거운 삶과 관련한 판정관의 자격을 주고 그가 내린 판정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 두 번째 증명을 완성한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즐거움이 다른 즐거움보다 더 즐거운 근거가 과연 무엇인지 왜 참됨과 현명함을 비롯한 지혜로운 사람들의 특성들이 보다 크고 많은 즐거움의 근원이 되는 것인지 이제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논증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 세 번 째 증명을 통해 그 즐거움의 진리성 즉 즐거움들이 과연 얼마나 참된 실재에 기초해 있는가를 묻는 궁극의 탐구 방식 즉 존재론적 방식을 끌어와 철학자와 참주 중 누가 더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지를 판정해 내려 한다. 이곳에서 이미 소크라테스가 시종일관 시사하고 있듯이(581e) 결국 플라톤에게 가장 즐거운 삶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즐거움의 양상이 아니라 참된 형이상학적 실재로서 그 즐거움이 갖는 ‘좋음과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판가름된다.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3) 세 번째 증명 : 즐거움의 존재론적 구분에 기초한 증명(583b-58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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