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3)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3)
건국대학교 철학과 학부 김종범
(이어서)
– 「옹야」20
아래 인용은 「옹야」20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知之者不如好之者,好之者不如樂之者。」(자왈:「지지자불여호지자,호지자불여락지자。」)
재국: 선생이 이르길, “앎이 있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 좋아하는 이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며 좋아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알기만 하는 자는 그것을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그것을 즐기는 자만 못하다.」
「옹야」20의 번역에서 공유하고자 하는 부분은 ‘지지자(知之者)’와 ‘호지자(好之者)’, ‘락지자(樂之者)’의 의미이다. 『논어』 안에서 단계적으로 좋음과 나쁨을 설명하는 부분은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그 기준을 마음과 형식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은 「위정(爲政)」7, 「팔일」3, 4, 「양화(陽貨)」11이다. 네 구절 모두 형식만을 지키고, 마음이 없는 것에 비하여 실제로 마음이 있는 것이 더 낫다고 공통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그 이면에는 실제로 마음이 있으면서, 형식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는 암묵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대응하여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를 해석한다면 ‘지지자’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방법만을 알 뿐 알고 있는 그것을 실제로 행할 마음은 없는 사람인 것이다. 다음으로 ‘호지자’란 좋아하는 그것을 행할 마음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잘 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락지자’란 즐기는 그것을 행할 마음도 있으며, 그것을 잘 행할 방법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에 도움을 준다. 또한, 『논어』 안에서 다른 구절들과도 크게 모순이 되는 부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올바른 해석이라고 확언하기에는 부담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로 『논어』 안에서 단계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은 위의 예시가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씨(季氏)」9에서 공자는 네 가지 단계를 통해서 사람의 단계를 표현하는데 태어나면서 아는 자가 가장 위이고, 배워서 아는 자가 다음, 어려움이 있어 배우는 사람이 그다음, 어려움이 있지만 배우지 않는 자가 가장 아래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공자의 설명에 따른다면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는 충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논어』 안에서 ‘지(知)’와 ‘호(好)’, ‘락(樂)’이 앞서 설명한 단계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인가?”라는 점이다. 적어도 ‘지’는 『논어』 안에서 방법만 아는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로만 사용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논어』 안에서 ‘지’는 72단락에서 117번 사용된다. 이 중 ‘지자(知者)’와 ‘지지자(知之者)’로 그 사용을 줄이면 ‘지자’는 「이인」2, 「옹야」23, 「자한(子罕)」29, 「헌문(憲問)」28, 「위령공」8, 「양화」24에서 그리고 ‘지지자’는 「술이(述而)」20, 「계씨」9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지지’가 사용된 것을 확인해보겠다. ‘지지’의 사용은 크게 4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첫 번째는 ‘인자(仁者)’와 ‘지자’를 대비하여 인자를 높이고 지자를 낮추는 방식으로 서술한 것으로 「이인」2와 「옹야」23이 이에 해당된다. 두 번째는 ‘지자’와 ‘인자’, ‘용자(勇者)’를 병렬로 서술하여 이 셋의 특징을 서술한 것으로 「자한」23과 「헌문」28이 이에 해당된다. 세 번째는 지자를 단독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며 지자를 높이고 있다. 「위령공」8이 이에 해당된다. 마지막은 제자의 발화 안에서 ‘지자’가 나온 것으로 이때 ‘지자’는 살피는 지혜로 여기는 사람으로 엄연히 말하면 아는 사람으로 ‘지자’가 사용된 것이다. 「양화」24가 이에 해당된다. 첫 번째의 방식으로 「옹야」20의 ‘지지자’를 이해한다면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에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방식으로 「옹야」20의 ‘지지자’를 이해한다면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있다.
다음으로 ‘지지자’가 사용된 것을 확인해보겠다. 두 구절에서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현은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이다. 이는 주로 ‘태어나면서 아는 자’로 해석되며 「술이」20에서는 공자가 ‘생이지지자’가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고, 「계씨」9에서는 ‘생이지지자’가 가장 높고 그 아래로 순서대로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 즉 배워서 아는 자, ‘곤이학지(困而學之)’ 즉 부족해서 배우는 사람, ‘곤이불학(困而不學)’ 즉 부족하지만 배우지 않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지지자’의 해석은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의 근거가 되는 방법으로 해석을 할 수도 반대로 그 해석의 반례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해석에 근거가 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생이지지자’라는 것은 태어나자마자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닌 방법만을 아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즉, ‘생이지지자’ 또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 이후에 노력이 필요하다. 반례가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자면 ‘생이지지자’는 태어나자마자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즉 이미 마음과 방법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지자’ 중에서도 이미 마음을 다 갖춘 상태를 말할 수 있으며 이는 ‘호지자’와 ‘락지자’와는 구분되는 ‘지지자’의 특징과 모순되는 것이다.
– 글을 마치며
이렇게 『논어』 「옹야」13, 18, 19, 20의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 논해보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논어』를 읽으면서 고민해보지 않았을 부분에 대한 것을 보고 새로운 시각을 경험했을 수도 있고, 혹은 이미 독자가 해보았던 생각일 수도 있으며, 이 글에서 독자의 견해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수많은 감상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 전하고자 했던 『논어』가 단순한 격언 모음집이 아니라는 감상만큼은 전달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글이 독자들의 『논어』 읽기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기를 바란다.
(끝)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1)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1)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7장~17장)
7(Ζ)권의 7~9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에 대한 분석을 전개함으로써 형상이 생성 과정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생성 자체의 원인임을 밝히고자 한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의 3가지 유형, 즉 본성적 생성, 기술적 제작, 그리고 자생적 생성을 구분한다.
본성적 생성이란 본성에서 시작해서 생겨나는 것들의 생성이다. 이때 생성의 출처를 질료라고 하고, 생성의 작용인은 형상이라는 뜻에서의 본성이며, 생성의 결과물인 목적인은 일반적으로 실체라고 불리는 것으로 사람, 식물 등의 것들이다. 반면 기술적 제작은 기술, 능력, 사고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기술적 제작에서 형상은 제작하는 자의 영혼 속에 있다. 자생적 생성은 그 자체로 최종적인 동시에 생겨나는 것의 부분으로 있는 것으로, 예를 들어 제작과는 달리, 건축가의 개입 없이 돌로부터 어떤 것이 생성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들의 생성 모두에서 먼저 주어진 것, 즉 질료는 생성의 가능성 자체를 조건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생겨나는 것의 정식에 있어서도 질료는 속해야만 하는가? 생겨나는 것들을 그 질료의 이름에 따라 부를 때 우리는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으로 된’이라 부른다. 생겨나는 것들은 그 질료에 따라 정식화되지 않으며, 생겨나는 것의 정식은 질료 외의 다른 요소로부터 형성될 필요가 있다.
생성의 원인인 형상 자체는 생성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형상 역시 생성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라 가정했을 때, 형상인을 형상인의 생성 원인으로, 즉 형상인의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으로 다시 나눌 수 있을 터인데 이런 결론은 무한 퇴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0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분들에 대한 정식이 전체에 대한 정식에 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규명한다. 만약 전체에 대한 정식이 부분들에 대한 정식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가정했을 때, 부분들에 대한 정식은 전체에 대한 정식에 앞설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손가락이라는 동물의 부분이 동물이라는 전체로부터 따라 나오는데, 손가락은 동물과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지만 동물은 손가락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1~1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상의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정식이 정의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떻게 하나인가? 실체는 ‘이것’, 즉 어떤 것 하나인 바, 정의는 실체를 말하므로 정의 역시 병렬적 나열이 아니라 하나여야 한다. 정의에는 유와 차이(diaphora)가 있다. 이때 유가 그 유에 속하는 종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질료적이며, 정의는 차이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종적 차이는 유를 규정한다. 차이가 없는 것들에 이를 때까지 차이의 차이(tēn tēs diaphoras diaphoran)에 따른 분할은 진행되어야 하는바, 차이들의 수만큼 종의 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로 마지막 차이(teleutaia diaphora)는 각 사물의 실체이자 정의이고, 형상이며, 정의는 마지막 차이로 규정되는 정식일 것이다.
13~16장은 보편자와 개별자의 정의 가능성을 탐구함으로써 실체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하고 있다. 보편자는 실체일 수가 없는데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로, 실체는 고유하고 다른 것에 속하지 않아야 하지만, 보편자는 특정한 개체들에 대하여 있으며 그와 분리될 수 없다. 둘째로, 보편자는 여럿에 대해 술어가 되기 때문에 여러 개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실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이다. 한편으로 개별자는 정의될 수 있는가? 개별자로서의 복합체는 생성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감각적 실체들에 대해서는 정의도 없고 논증도 없다. 개별자는 질료적 우연성 때문에 정의될 수 없으므로, 실체의 정의는 복합실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질료 없는 형상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형상들이 실체라고 한다면, 이는 합당하다.
17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선 논의들로부터 실체에 대한 규정을 이끌어 내며 7권을 마무리 짓고 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이 그 자체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없으나,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이 그러한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있다. 고로 탐구 대상은 질료를 특정한 것으로 만드는 원인으로서, 질료들을 ‘어떤 것’으로 있게 하는 형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원인이 곧 실체인 것이다.
(계속)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9-물질 개념의 자기모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9-물질 개념의 자기모순
1)
앞에서 물 자체의 외면적 규정이 일반적 규정 즉 성질로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성질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물 자체의 내재적인 것의 표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타자[주관]에 반사하여 자기를 표현한 것이다.
즉 그것은 “외면성 속으로 이행해 들어가서 이를 통해 진정으로 자기 내로 반성된 근거”이며, “근거가 자신의 반발과 규정 속에서, 그 자신의 외적인 직접성 속에서 자기 관계하는 것”이며 “외적인 직접성인 동시에 본래적인 존재”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성질은 주관적인지 객관적인지 모호하다.
이제 경험의 발전은 이런 성질을 하나의 독립적인 물질로 규정하게 한다. 그 과정은 주어 술어 관계의 전도를 통해 일어난다.
한편으로 사물은 이제 여러 성질을 지니면서 다른 여러 성질을 지닌 사물과 구별된다. (헤겔은 물 자체가 성질을 지니면서 표현을 바꾸어 ‘사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성질은 규정성을 지니고 서로 대립하지만, 타자를 통해 반사된 것이므로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성질은 이런 여러 사물에 공통된 것이다. 그 때문에 이제 성질은 그 자체가 자립적인 존재로 된다.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면서 여러 사물을 자신에 귀속하는 성질을 헤겔은 물질이라 한다.
이제 성질은 사물에 속해 있는 속성이나 술어가 아니라 사물이 성질의 외연에 속하는 것이 된다. 여러 사물은 주어인 일반적 성질의 한 예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성질은 이제부터 사물의 일자를 이루는 무규정적이고 힘이 없는 결합에서 해방된다. 성질은 사물을 존립하게 하는 것인 자립적 물질이다. 성질은 단순하게 자기와 연속하는 것이므로 우선 그 자신에서 상이성이라는 형식을 갖는다. 따라서 그와 같은 자립적인 물질이 다양하게 성립하며, 사물은 이런 물질로 이루어진다.”(논리학, GW11, 334)
2)
헤겔은 성질로부터 물질로 이행하는 이 과정에 관한 예로 화학의 발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화학은 색깔이나 냄새, 맛 등의 성질을 물질적 원소로 규정해 색깔은 색소로, 냄새는 후각소로, 맛은 미소로 규정한다. 그 외 이런 물질로 열소나 전자기 물질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온도나 전자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성질을 자립적 물질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성질이 물질로 되면서 자립적인 것으로 된다.
물질은 한편으로 성질처럼 다른 것과 구별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물질은 사물처럼 자립적으로 존재하니, 때로 물질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 물질은 양극을 이루는 성질과 사물을 결합하며 양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는 것이다.
“성질이 물질로 이행하는 필연성 또는 성질이 진정으로 물질이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것은 곧 이 성질이 본질적인 것이고 따라서 진정으로 자립적인 사물이라는 사실이다.”(논리학, GW11, 334)
성질이 물질로 되면서 이제 물 자체의 규정도 변화한다. 성질은 서로 대립하지만, 사실 이는 타자를 통해 반사된 것이라는 점에서 모순을 회피하게 된다. 그것들은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면서 그 밑바닥에 사물은 자기 관계하는 통일성으로서 개별자로 다만 그 자체로는 아무 규정이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성질이 물질로 되면 물질이 자립적인 것으로 되면서, 하나의 사물을 벗어나 다른 사물 속에 연속되는 것이니, 이제 사물이 여러 성질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물질이 존립하는 텅 빈 그릇과 같은 우연적인 존재이고, 그것의 물질로서의 규정 외 다른 규정들은 그 물질에 외면적이며 그것과는 무관한 개별적인 우연성으로 된다.
이 사물은 그 속에서 일반적 물질이 실현된 하나의 예로서 개별적인 사물로 된다. 예를 들어 열소라는 물질은 이런저런 사물 속에 있는 온도로 실현한다. 이때 온도를 지닌 개별적 사물이 지닌 다른 성질들은 모두 무의미한 우연적인 성질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런 단일한 물질로 이루어진 사물은 있을 수 없다. 물질이 자립적이면서 동시에 규정성을 지니는 한, 혼자서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규정성을 지닌 것은 다른 규정성과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물질은 항상 다른 물질에 대립하게 된다. 이런 대립은 부정성을 낳으니 서로 배척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관계 속에 있게 된다. 이런 물질의 대립적 관계가 모순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성질은 한편으로 동일적으로 자기에 관계하는 단순한 자립성으로서 규정이니, 그 속에서 부정적 통일, 사물의 일자는 지양된다. 또한, 이런 성질은 다른 한편으로 타자에 대립하는 규정이지만, 마찬가지로 자기 내로 반성된, 본래 규정된 일자인 한에서 그러하다.”(논리학, GW11, 335)
3)
물질은 자립적이면서 다른 물질에 대립하는 규정적인 것이다. 물질들은 서로 밀쳐 내면서 자립적이니, 하나의 사물 속에는 여러 물질이 서로 물질들이 있다고 할 때, 그것들은 서로 무차별하게 공존한다고 설명된다. 이 경우 사물은 하나의 텅 빈 그릇에 불과하게 된다. 사물은 이런 물질들을 외적으로 결합하는 것이어서,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것은 그 속에 담겨 있는 물질들이 어떤 것이고 어느 만큼 들어있는지에 의해 구별될 뿐이다.
하지만 사물은 지속하는 개별자이므로 이 속에서 물질들은 단순하게 공존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부정적으로 통일되어 하나의 개별자를 이루어야 한다. 어떻게 여러 물질이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할 수 있을까?
이런 통일 가능성을 위해 우선[주로 고대철학에서] 제시되는 이론이 곧 구멍 나 있음[poros]이라는 개념이다. 하나의 물질은 자기 속에 구멍을 지니고 있어서 그 속에 다른 물질이 끼어들어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물질은 다른 물질의 구멍 속에 들어있다. 이와 같은 것을 상호 침투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서로 자립적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멍 나 있음의 개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왜냐하면, 어떤 물질이 구멍 나 있다는 것은 자기 속에 자기의 비존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물질은 자신의 절대적 타자 속에 자기의 존립을 가지며 자신의 비존재를 자신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이다.
“사물은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자신의 반대를 통해 즉 자신의 부정을 통해 자신과 자기 모순적으로 매개하는 것이 되며 또는 자립적인 물질이 다른 물질의 존립과 비존립을 통해 자기 모순적으로 자기와 매개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37)
이런 자기 모순적인 물질은 자기를 유지할 수 없으니 물질은 이제 자립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물질이 자립성을 상실하면서 현상으로 된다.
“실존은 이제 사물 속에서 자신의 완전성에 도달한다. 즉 본래 존재하는 존재 또는 자립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본질 실존이 하나의 존재 속에 있다. 따라서 실존의 진리는 그 비본질성 속에 그 본래적 존재를 가지거나 타자의 존립 그것도 절대적인 타자의 존립 속에 자신의 존립을 가지거나 자신의 무실함을 자신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은 현상이다.”(논리학, GW11, 337)
4)
헤겔은 주에서 표상이 이런 모순을 피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그 방법은 무한소라는 개념이다.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모순은 여기서 존재를 무한소로 나누면서 이 무한소에서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무한소는 존재하는 것이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무한소가 있다면, 모순은 회피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표상 작용은 이 안개 같은 대상 즉 구멍이나 작은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고찰할 때 그런 것들 속에 어떤 물질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물질의 부정을 인식하니, 여기 물질이 있고 그 옆에 그 부정 즉 구멍이 존재하며 그 옆에 다시 물질이 발견될 것이라는 말이다.”(논리학, GW11, 339)
“뿐만 아니라 그런 표상 작용은 이런 사물 속에 첫째 자립적인 물질과 둘째 그 부정 즉 구멍 나 있음을 지니면서 동일한 지점에서 다른 물질을 지니니, 이 구멍 나 있음과 물질의 자립적 존립은 서로 넘어 들어가 있어서 서로 부정하면서 침투를 침투한다.”(논리학, GW11, 339)
이런 주장은 수증기가 일정한 가스 속에 확산하더라도, 그 부피가 변함이 없다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입증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임시방편은 모순을 모순으로 보지 않는 방식인데, 이는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뒤로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헤겔은 오히려 모순을 모순으로 인정하고 여기서 운동을 찾아내려 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8-실존의 발전, 성질에서 물질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8-실존의 발전, 성질에서 물질로
1)
근거 관계는 주로 생물체의 분류에서 기준이 되지만, 이 기준은 주로 종적 개체의 기능 즉 형식을 통해 규정된다. 그러나 이런 형식은 분류를 위해 주관적인 것으로 선택된 것이며, 따라서 종적 개체의 실재적인 관계는 아니다.
이제 실존에서 하나의 개체와 다른 개체 사이에는 실재하는 관계가 발생한다. 실존은 그 개념 상 존재론에서 실재성,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타자와의 관계 속에 이미 들어서 있다. 왜냐하면, 마치 실재성이 여러 성질의 배타적 통일체이듯, 실존도 다양한 형식의 배타적인 통일체이기 때문이다. 헤겔에서 내적인 통일체란 곧 외적으로 통일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 잠시 실존[Existenz]이란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자. 현존은 ‘Da + Sein’이며 일정한 곳[Da]에 있는 존재[Sein]라는 의미다. 반면 실존 ‘Ex+Sistenz’에서 ‘Sistenz’는 라틴어 ‘Sisto’에서 나온 말로, 이 말은 ‘멈춰 서다’라는 의미니 “무언가의 바깥[Ex]으로 나와서 멈춰 서 있다”는 의미다. 이때 ‘멈춰 서다’라는 점에서 ‘현존’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지만, ‘무언가 밖에’라는 점에서 ‘무언가’와 연관되어 있다.
이 ‘무언가’는 ‘서 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 즉 ‘운동하는 것’이라는 의미니 헤겔은 이런 의미에서 현존은 존재론에서 다루고, 반면 실존은 본질이 운동을 통해 성립한 것으로 규정한다. 실존에 관한 헤겔의 정의는 실존에 관한 하이데거의 정의와 대비된다. 하이데거는 ‘실존’을 ‘현존’과 같은 의미로 보고, 이때 존재를 ‘있는 것’과 구별되는 ‘인 것’으로 해석하는데, 하이데거의 존재는 헤겔에서 본질과 가까운 의미다. 헤겔에서 실존이란 의미는 하이데거와 일치하지만, 현존은 하이데거와 다르게 해석된다.
여기서 하나의 실존은 이런 실재하는 관계 속에서 자기를 타자를 통해서 규정한다. 이 규정은 타자에 부딪혀서 외적인 반성을 통해서 규정되는 것이므로(헤겔은 ‘반사된 가상’이라고 말한다.) 실존 자체에 외면적으로 머무른다.
실존 자체가 어떤 타자에 부딪히는가에 따라서 다양한 외면적 규정이 출현한다. 이 규정성은 다양하고 서로 무차별적으로 존재하는 규정이다. 실존 자체는 자기 관계 속에서 이런 외면적 규정 너머에 있는 것이니, 물 자체와 같이 무규정적인 것이다.
여기서 실존에서 최초의 관계가 등장한다. 즉 무규정적인 물 자체와 그것에 대해 외면적인 규정 사이의 관계이다. 헤겔은 이 관계를 ‘물 자체’와 ‘실존’의 관계로 규정한다. (이 관계 속에서 거론된 실존은 타자를 통해 반성된 외면적 규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헤겔은 이 관계를 실존의 두 측면으로 보아서, ‘본질적 실존’ 또는 ‘비본질적 실존’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2)
물 자체와 외적 규정, 양자는 우선 무차별적이다. 왜냐하면, 이 규정은 타자에 부딪혀서 반성된 것이므로 자기에게 본래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 외면적일 뿐이며 물 자체와 외적 규정 각자는 그런 관계에서 서로 반발하여 서로 부정적이다. 물 자체는 외면적 규정이 아니며 외면적 규정은 물 자체가 아닌, 이미 타자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런 반발과 부정을 통해 서로는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각자 고립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서로는 이미 타자를 전제로 하여 규정된다. 물 자체는 외면적 규정을 넘어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외면적 규정을 전제로 하며 거꾸로 외면적 규정은 자기 관계하는 물 자체가 타자 관계에 들어간 것이니, 자기 관계하는 물 자체를 전제로 한다.
이런 상호 전제하는 가운데 반사된 규정성은 “중단 없이 자신을 자기 자신 속에서 반발하여” 자기를 부정하면서 물 자체가 되며, 거꾸로 물 자체는 “자기 관계하며” “그런 한 자기 내 반성의 부정성을 포함하는 한에서 자기동일성”이니, 외적 실존은 그 자신 속에 있는 한 계기다.”(논리학, GW11, 328)
3)
물 자체의 외면적 규정은 한편으로는 타자에 의해 규정된 것이며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외면적 규정성은 물 자체의 자기 관계를 포함한다. 외면적 규정은 타자 관계 속에 자기 관계하는 것이다.
처음에 물 자체는 자기에 대해 낯선 물 자체라는 타자에 부딪혀서 외적 규정을 낳았다. 그러나 이제 이 외적 규정이 다만 하나의 물 자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 자체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 발견된다. 그 결과 다양한 물체에 공통된 규정이 추상되니, 이를 통해 성질이 출현한다. 성질은 곧 지각적으로 일반화된 규정을 말한다. 이런 지각적 일반성은 일반적인 것이므로 외적 반성을 통한 것이 아니라 물 자체 자체에 속하는 규정이다. 그러므로 이는 사물의 속성이 된다.*
주*) 이런 일반적 지각의 추상화를 헤겔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① 하나의 물 자체가 다른 물 자체에 부딪혀 외적 반성이 출현했다. ② 여기서 다른 물 자체는 자기와 동일한 물 자체이다. 왜냐하면, 물 자체란 무규정적인 것이니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③ 그러므로 여기서 반성된 규정은 타자를 통해 반성된 것이 아니라 자기를 타자로 삼아서 반성된 것이니 곧 자기반성을 통해 나온 것이 된다. ④ 이런 자기반성을 통한 규정이 성질이다.
“그러므로 물 자체는 다른 물 자체[타자]에 대한, 그에게는 외적인 관계 속에 그리고 다른 물 자체가 자기에 대해 외적으로 관계하는 것 속에 이런 자기 규정성을 가지지 않는다. 규정성은 물 자체에 피상적으로 속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기가 자신의 타자로서 자신과 매개하는 것이다. 관계의 양극을 이룬다고 가정된 두 가지 물 자체는 사실상 하나로 합일한다.” (논리학, GW11, 329)
“물 자체는 다른 물 자체로서 다른 극단에 관계하므로 자기와 구별되지 않는 것에 관계한다. 두 극단 사이에 매개하는 관계를 이룬다고 가정되었던 외적 반성은 물 자체의 다만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로 되거나 본질적으로 자기 내 반성이다. 따라서 이 외적 반성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규정이거나 물 자체의 규정이 된다.”(논리학, GW11, 329)
4)
지각적 성질은 “반성의 부정성”을 통해 나온 것이다. 여기서 반성은 추상을 의미할 것이다. 이를 통해 이제 규정성으로서 실존은 “일반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무규정적 물 자체는 “자기 동일한 것” 즉 여러 가지 성질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 하나인 존재자 즉 개별자가 될 것이다. (논리학, GW11, 330)
그런데 이 성질은 물 자체에 고유한 것으로 아직 판명되지 않았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통해 규정된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성질은 여전히 ①타자(주관)를 통해 반사된 것이다. 다만 여러 물 자체에 공통된 일반적인 것이기에 성질이다.
이런 타자(주관)에 의해 반사된 것이므로 타자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물 자체의 성질은 변화하게 되며, 다시 말하자면 이런 성질은 규정된 것이어서 다른 규정성을 지닌 성질과 대립한다. 그 때문에 다양한 심지어 서로 대립하는 성질이 하나의 물 자체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성질들은 타자를 통해 규정된 것이므로 서로는 무차별하다. 하나의 사물 속에 대립적인 성질은 무차별하게 속해 있다.
하지만, 이 성질이 일반적인 것은 물 자체에 ② 내재하는 것과 관계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런 물 자체에 일반적으로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성질은 이제 물 자체의 속성이 된다. 즉 성질은 내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타자(주관)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무규정적 물 자체라는 표현 대신 자기규정을 지닌 어떤 것으로서 사물이라는 표면이 등장한다.
“하나의 사물은 성질을 갖는다. 첫째로 이 성질은 ① 타자에 대해 규정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성질은 상호 관계의 방식으로서만 현존한다. 따라서 성질은 외적인 반성이며 사물의 정립된 존재라는 측면에 해당한다. 그러나 두 번째로 사물은 이렇게 정립되는 가운데서 그 자체적이다. ② 사물은 타자와 관계하는 가운데 자기를 유지한다. 물론, 이런 정립된 존재는 다만 피상적인 것일 뿐이어서, 이를 통해 실존은 ① 존재의 생성에 즉 변화에 맡겨져 있다. 성질은 그런 가운데 ② 자기를 잃지 않는다. 사물은 이런저런 것을 타자 속에 성취하며 독득한 방식으로 자기를 이 관계 속에 표현한다는 성질을 갖는다.”(논리학, GW11, 330)
5)
물 자체는 이런 성질을 통해 타자에 대해 단순히 형식적인 근거 관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형식을 통한 근거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다. 이때 근거는 타자 속에서 자기를 정립한다. 여기서 사물의 성질을 통한 관계는 ③ 실재적인 근거 관계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실재적 근거는 “외면적인 것으로 이행하여 들어가는 것”이니, 즉 자기를 그대로 타자 속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성질은 독자적인 것으로 되면서 “진정으로 자기 내로 반성된 근거”이다. (논리학, GW11, 331)
“실존의 규정성은 근거가 자기에 외적으로 반성한 것이다. 전체는 근거가 자기로부터 반발하고 규정하는 가운데 자기를 외면적인 직접성으로 만들면서 그 속에서 자기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 자체는 본질적으로 실존한다. 즉 물 자체가 실존한다는 말은 거꾸로 말하자면 실존이 외면적 직접성인 동시에 그 자체 존재라는 것이다.” (논리학, GW11, 331)
실재적 근거에서 성질이 이행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성질이 다른 것의 성질로 옮겨간다는 말로 생각된다. 형식적 근거가 주관적 분류의 기준이라면, 그런 점에서 헤겔은 이제 물 자체의 성질이 다른 물 자체에 대해 미치는 일반적 영향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규정한다.
그러나 아직 물 자체의 성질로서, 이 성질은 아직 그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지닌 것일 뿐이며, 아직 실제로 그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원인은 아니다.
“사물은 그것이 지닌 성질을 통해 원인이며 원인이란 결과로서 자신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물은 다만 처음에는 여러 성질을 지닌 고요하게 머무르는 사물일 뿐이며 아직 실제의 원인으로서 규정되지 않는다. 사물은 다만 처음에는 본래[an sich: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반성이며 아직 그 자체로 자기의 규정을 정립하는 반성은 아니다.”(논리학, GW11, 330)
여기서 성질이 이제 “외면적 직접성인 동시에 그 자체 존재”로 되면 그것이 곧 물질을 말한다. 하나의 여러 사물에 공통으로 속하는 것이니, 개별 사물의 속성이기를 넘어서서 ④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된다. 이것이 곧 소재[Stoff]로서 물질[Materie]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논리27-실존의 이중성과 신의 현존 증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논리27-실존의 이중성과 신의 현존 증명
1)
실존은 본질인 형식과 관계하여 두 가지 운동을 전개한다. 한편으로 실존은 본래 근거가 되는 형식이 자기를 구체화해서 내용 그리고 현존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존은 제약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실존은 전제된 직접적인 것이며 여기서 자신을 내용으로 나가서 본질인 형식으로 즉 자기의 근거로 되돌아간다. 이 운동은 생성하는 운동이며 여기서 실존은 무제약적인 것이다.
실존의 제약성과 무제약성, 매개성과 직접성이라는 이중성 때문에 신 존재 증명에 관해 이중적인 증명이 출현한다. (존재론에서 현존과 본질론에서 실존은 헤겔의 논리학에서는 구별되지만, 일반적인 형이상학에서는 그 차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한편으로 존재론적 증명인데 이는 신의 현존이 제약된 것이라는 측면에서 나온다. 다른 현존은 무제약적인 것 즉 우연적인 것인데, 여기서 우주론적 증명이 나온다.
헤겔은 우선 신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의 한계를 지적한다. 알다시피, 안셀무스에 이어서 데카르트가 근대에 신의 현존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했다. 안셀무스는 신의 위대성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했지만, 데카르트는 신의 완전성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했다.
즉 신은 완전한 존재이고 완전하기 위해서는 그 속에 모든 실재성이 들어 있어야 하므로 현존 역시 하나의 실재성이니, 신 속에 그 개념상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실재성이 신이 창조한 신에 의해 제약된 것이듯이 실존 역시 신을 근거로 하는 것이라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칸트는 신의 현존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을 비판했는데 여기서 그는 현존과 실재성의 개념을 구별했다. 실재성은 어떤 존재자의 술어에 해당하는 것인데, 현존은 존재자의 술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그 유명한 백 탈러 예를 든다. 백 탈러가 현존하든 하지 않든, 백 탈러라는 실재적 내용은 아무 변함이 없다고 했다.
헤겔은 칸트가 신적 존재를 일반적인 사물과 혼동했다고 한다. 일반적 사물에서 그 현존은 실재성과 구별된다. 사물에 있어서 실재성은 규정성이므로 타자와 관계 속에 있는 것, 타자를 통해 매개되는 것이지만, 그것의 현존 즉 실존은 직접적인 것, 즉 매개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신적 존재는 그 자신이 무제약적 존재이고 직접적인 것이니, 그런 점에서 실존한다고 할 수 있다. 신적 존재 속에는 없는 것은 오히려 타자를 통해 매개된 것인 실재적인 규정성이다. 신은 질적이거나 양적인 규정성을 갖지 않는다. 신은 실존하지만, 무엇이라 규정되지는 않는다.
2)
다른 한편 신의 현존 즉 실존을 무제약적인 것으로 본다면, 여기서부터 우주론적인 신 존재 증명이 나온다. 우주론적 증명은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 우연성을 통한 증명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이 대표적이다.
그의 증명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세계는 우연적인 존재이다. 만약 세계에 오직 우연적인 것만 존재한다면, 언젠가 모든 것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연한 존재로 이루어진 세계가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신이 존재해야 한다.
이 증명에는 우연적인 것이 존재하려면, 그 근거가 필요하다는 충분 이유율이 전제된다. 이런 우연성을 통한 우주론적 증명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우연한 것은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인데, 그것에 근거를 인정한다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러셀이 그렇게 비판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비판에서 우연적인 것이 근거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우연한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존재하게 된 것이니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게 된 근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연한 무제약적 실존은 또한 제약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3)
실존의 이중성, 직접적인 것이며 동시에 정립된 것 즉 무제약적인 것이면서 제약된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 이상과 같이 헤겔은 신 존재 증명이 성립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한다는 모순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신 존재 증명이 모순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직접적인 실존이 동시에 제약된 것이라는 이중성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역설적인데, 이런 역설은 대표적으로 자유의지에서 잘 드러난다.
내가 무엇을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은 한편으로는 결정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연적인 것 즉 자유롭게(즉 자의적, 우연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다가오는 선택 앞에 서면 나는 자유롭다. 그러나 선택된 결과를 되돌아보면 그것은 나의 선택을 결정하게 만든 어떤 근거가 존재한다. 내가 선택의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자유롭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선택을 보면, 항상 결정된 것 즉 제약된 것이다.
헤겔은 이점과 관련해 실존에서 매개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실존에서 그 실존을 생성시킨 매개 즉 본질의 정립하는 운동은 실존이 출현하는 동시에 사라진다. 실존은 직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직접적인 실존을 사유하게 되면 그런 매개하는 것 즉 본질이 다시 출현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증명하는 반성은 이 매개의 본성을 알지 못한다. 그런 반성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단순히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통해 신 자체로부터 매개를 떼어놓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반성은 그 때문에 매개하는 운동을 즉 본질 자체 속에 매개가 존재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인식하지 못한다.”(논리학, GW11, 325)
“근거를 통한 매개는 자기를 지양하지만, 근거를 밑에 두고 이 근거로부터 나온 것이 정립된 것으로 되게 하고 그 본질을 다른 곳에 즉 근거에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근거는 심연으로서 매가가 사라진 것이다. 거꾸로 동시에 근거는 다만 매개로서 사라지는 것이니 이런 부정을 통해서만 근거는 자기 동일적인 것 직접적인 것[실존]으로 된다.”(논리학, GW11, 326)
그러므로 헤겔은 근거라는 말은 몰락[Untergang] 또는 심연[Zugrunde]과 근거[Grund]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고 한다. (논리학, GW11, 326 참조)
4)
이 점과 연관하여 실존이 먼저냐 본질이 먼저냐 하는 실존주의 논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은 한편으로 결정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자의적이듯 실존 역시 한편으로는 제약된 존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인 존재다.
전자의 측면에서는 실존을 제약하는 본질이 전제된다. 후자의 측면에서는 실존이 전제되고 이로부터 본질이 생성된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의 논쟁은 실존의 이중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실존의한 측면만 가지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 것이 된다.
실존과 신의 대립도 실존의 이중성을 망각한 것이다. 실존이 무제약적이라는 점에서 실존은 근거 없는 심연 위에 떠 있는 존재다. 그러나 실존이 제약적이라는 측면에서 실존은 궁극적 근거로서 신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심연이 곧 신이다. 여기서 신을 심연으로 규정한 뵈메의 신 개념이 다시금 상기된다.
실존은 이중적인데, 모든 개별자가 이렇게 이중적인 것은 아니다. 헤겔이 존재론에서 다룬 물체적 개별자는 이런 이중성을 지니지 않는다. 본질과 개체 사이에서 반성 관계가 존재하는 생물체에서 비로소 이런 이중성이 나타난다. 생명체 개체는 본질을 매개한다. 본질은 개체의 재생산을 통해 지속하지만, 그 스스로는 개체에 내재하며, 외적으로 출현하지 않는다. 개체는 본질을 통해 매개된 것이지만, 근거 없이 존재하는 직접적인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본질과 실존의 관계에서 본질이 주어이고, 실존이 본질의 술어로 볼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주어가 되는 것이 오히려 실존이다. 술어가 되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므로 본질이 실존으로 나가는 운동은 술어에서 주어로 반성하는 운동이다. 즉 본질인 술어의 자기 부정성을 매개로 해서 실존은 자신을 지속하는 것 즉 자기 동일적인 것이다.
“실존은 근거의 자기 내 반성이다. 즉 근거가 자신을 부정하는 가운데 성립하게 된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이다. 그러므로 이런 매개는 자기와 동일하게 자신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26)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6-본질론 2편 실존 장의 위치[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6-본질론 2편 실존 장의 위치
1)
지금까지 본질론 1편 3장 근거 장에서 헤겔은 종적 개체의 구성 요소를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 관계는 단순한 유기체에서 복합적인 유기체 즉 생물체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복합적 생물체에서 각 부분인 마디는 고유한 유기체적 조직을 이루면서 자신의 고유한 형식 즉 그 기능을 재생산한다. 그러면서 각 부분은 전체적으로 통일된 개체적 조직을 형성하며 그것에 따라서 형식적 기능도 통일된다.
예를 들어 꽃나무는 그 부분인 꽃과 줄기, 잎으로 이루어진 유기체적 통일체이며 여기서 꽃의 형식인 재생산 기능, 줄기의 형식은 유통의 기능, 잎의 형식은 광합성의 기능도 통일을 이룬다.
그 구성 요소는 동심원을 그리고 있는데 형식에서 출발하여 내용으로 그리고 현존으로 이행했다. 형식은 개별적 기능이며, 내용은 그런 형식의 통일이 일어나는 토대인 유기체 전체이며, 현존은 이 유기체적 개별 현존이 지닌 개별성, 즉 질적, 양적인 규정이다. 헤겔은 이런 형식과 내용, 현존 사이의 관계를 근거(A절)와 토대(B절), 조건(C절)의 관계로 다루었다.
2)
논리학에서 존재론이든, 본질론이든, 개념론에서 1편은 대체로 운동의 전체적 모습을 그리며, 본격적인 내용은 2편, 3편에서 다루어진다. 그것은 본질론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1편의 끝에서 실존이 등장하면서 본질론의 2편이 시작된다. 이 2편은 판단형식의 측면에서 보면 관계 범주가 다루어진다. 관계 범주(정언, 가언, 선언 판단형식)에서 발전은 생물의 종적 본질이 실체 즉 사회적 유적 본질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생물에서 종적 본질은 개체적 현존에 내재하며, 개체적 현존이 재생산하는 운동을 매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체 즉 사회적 유적 본질은 인간이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는 사회이며 이는 개체적 개인을 벗어나 그들 사이의 상호 작용하는 관계로서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내재하는 종적 본질이 밖으로 드러나서 독립적인 유적 본질로 이행하는 것이 관계 범주에서의 운동이다.
이 세 가지 단계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헤겔이 존재론에서 1편 2장 현존 장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본질론 2편 현상 편에서 전개되는 범주들은 존재론 1편 2장 현존 장과 3장 대자 존재 장에서 나오는 범주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헤겔은 개념론에서 판단형식을 다루면서 질적 판단 범주와 관계 판단 범주, 그리고 양적 판단 범주와 양상(개념) 판단 범주 사이의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질적 판단형식과 관계 판단형식은 주어를 전제하면서 술어에서 발전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반면 양적 판단형식과 양상 판단형식은 발전이 주어에서 일어난다.)
3)
존재론 1편 2, 3장과 본질론에서 현상 편에서 유사한 관계가 펼쳐지지만, 물론 차이가 있다. 존재론에서 주어 술어의 의미와 본질론에서 주어 술어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존재론에서 질은 물체적 개별자를 주어로 하고 그것의 술어인 성질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이것은 붉다’와 같은 판단에 성질 ‘붉다’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본질론에서 근거와 토대 역시 주어 술어 관계를 지니는데, 본질론에서 주어가 되는 것은 유기체적 개체 즉 생물체이다. 헤겔은 이를 ‘실존’이라 이름 붙였다.
존재론에서 술어는 질적 규정이나 양적 규정과 같은 것인데, 생물적 개체는 그와 같은 질적, 양적 규정으로 규정될 수 없다. (물론, 그런 생물적 개체도 하나의 물체적 개별자라는 점에서는 그런 질적, 양적 규정을 파악한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을 물체로서가 아니라 생물적 개체의 현존에 속하는 것이다.)
생물적 개체에서 그것의 술어라고 한다면, 그것이 지닌 고유한 기능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기능은 개체의 본질적 형식에 속하는 것이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이 꽃은 진달래다’와 같은 판단이다. 여기서 주어 ‘이 꽃’은 어떤 종적 개체를 지시한다. 술어는 ‘진달래’는 단순히 어떤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진달래’란 술어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곧 이 개체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결과 즉 재생산되는 종적 본질을 의미한다. 다만 이 종적 본질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다.
4)
본질론 1편 3장에서 다루어진 근거 관계는 형식적 관계다. 반면 2편에서 다루어지는 실존에서 종적 개체들 사이의 관계는 실재적인 관계이다. 그러므로 이 2편에서 생물체는 하나의 생물체가 아니라 하나의 실재하는 물체로서 다루어진다. 그렇기에 헤겔은 이 부분을 실존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즉 이 관계는 실존의 관계다. 이 실존하는 실재의 관계는 아직 완전한 객관적 관계는 아니며, 마치 성질처럼 주관적이면서도 일반성을 지닌 지각적 단계의 관계다. 2편 마지막 부분에서 내외의 관계가 나오면서 비로소 다시 종적 개체로서 생물체의 본래적 관계가 다루어진다.
이런 전개 과정은 마치 정신현상학에서 전개 과정과 유사하다. 정신현상학에서도 어떤 의식의 형태에서 새로운 의식의 형태로 시간적인 발전이 일어나면, 이 새로운 의식의 형태에서는 그 이전의 형태가 다시 하나의 논리적 계기가 되어 새로이 서술되면서 마침내 그 마지막에 이르로 새로운 의식 형태에 고유한 계기가 서술된다.
논리학의 실존 장에서도 근거 장 마지막에 생물적 개체가 출현했다. 그런데 실존 장에 이르러 다시 그 이전 존재론에서 물체의 계기로 제시된 범주들이 다시 출현하는데 이런 전개 방식도 정신현상학과 마찬가지다.
본질론에서 1편 3장에 이어지는 2편 현상 편의 출발점이 곧 1장에서 다루어지는 ‘실존’이다. 실존 장에서는 종적 개체를 한의 현존으로 보면서 전개해 나가니, 이 현존이 발전해서 마침내 본질의 개체적 현존으로 규정되면서, 종적 개체가 다시 되돌아온다. 종적 개체가 다시 출현하는 곳은 본질론 2편의 마지막 부분인 3장 본질적 관계 장이다.
이 상응 관계를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은 표로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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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판단 |
<현존, 질> |
정언판단 |
<실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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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체 존재와 타자 존재 |
물 자체와 실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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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성, 어떤 것> |
물 자체와 성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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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과 상태 |
물 자체와 질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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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판단 |
<유한성> |
가언판단 |
<현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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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성과 무한성 |
현상의 세계와 법칙의 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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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판단 |
<대자 존재> |
선언판단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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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인과 반발 |
촉발하는 힘과 촉발되는 힘 |
5)
이제 실존 장에서는 하나의 종적 개체가 다른 종적 개체와 사이에 전개하는 실재적인 법칙 관계가 제시된다. 이 실재적인 법칙 관계의 출발점이 곧 실존이다. 이 실존은 존재론에서 ‘실재성’ 또는 ‘어떤 것’ 개념에 상응한다.
존재론에서 실재성은 다양한 성질의 통일체다. 여기서 이미 각기 다른 성질을 지닌 개별자[‘어떤 것’] 사이의 관계가 문제 된다. 마찬가지로 본질론에서 실존은 다양한 형식의 통일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각기 다른 형식을 지닌 종적 개체[‘실존’]들 사이의 관계가 대두된다.
여기서 헤겔의 사유에서 구성 요소의 내적인 관계와 사물 사이의 외적인 관계가 상호 동전의 이면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헤겔은 관계를 통해서 사유하기에 이 관계를 통해 생겨나는 결과를 출발점에서 선취하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곧 이 출발점에 있는 이중성이 외면화하는 것으로 된다.
이제 실존이 출현하는 과정을 다시 되새겨 보자. 형식에서 현존으로 이행하는 운동은 본질인 형식이 자기를 구체적으로 정립하는 운동이다. 반면 현존에서 형식으로 가는 운동은 전제된 현존에서 점차 본질이 생성하는 운동이다.
이 전체의 운동을 매개하는 중심은 곧 내용이다. 이 내용은 종적 개체의 유기체적 조직을 말한다. 이 조직을 토대로 유기체적 기능이 출현하니, 그것이 곧 형식이고, 이 조직은 개별 요소를 통해서 자기를 재생산한다. 이 개별 요소가 곧 현존이다.
한편에서 현존을 매개하는 운동이 사라지고 그것이 직접적인 것으로 전제되면 그것이 바로 실존이다. 이런 점에서 실존은 아무런 근거 없이 출현하는 무제약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실존은 이미 자기 속에 자기를 매개하는 운동을 지니니, 이런 점에서 실존은 제약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