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8-개념[양상] 판단 형식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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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8-개념[양상] 판단 형식에 관해

1)

흔히 ‘양상 판단’이라 알려진 것을 헤겔은 ‘개념 판단’이라 부른다. 양상을 표현하는 언어로 여러 종류가 있다. ‘좋다’, ‘나쁘다’와 같은 평가어 ‘해야 한다’나 ‘말아야 한다’와 같은 당위의 표현, ‘진리’나 ‘허위’와 같은 표현, 나아가서 시제를 나타나는 언어, 그리고 ‘아름답다’, ‘추하다’와 같은 미적 평가어 등이다.

이런 양상어는 어떤 대상이 지닌 성질이나 상태가 아니다. 양상어가 부가되더라도 어떤 것이 질적이거나 양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양상어는 흔히 어떤 대상에 대한 주관의 평가를 즉 진, 선, 미와 관련된 평가를 포함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양상어는 잘 보면, 어떤 사태에 관한 판단에 속하는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판단’ 또는 ‘명제’의 속성이라 말해진다. 이미 판단이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런 하나의 판단이 다시 주어가 되어 여기에 양상어가 술어가 되면서 새로운 고차적인 판단이 만들어지면서 양상 판단이 형성된다.

진리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하나의 ‘명제’ 또는 ‘판단’이 주어가 된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나머지 경우에 양상 판단은 흔히 단순한 판단으로 다루어지면서, 주어로서 대상이 술어로서 양상어가 결합한다. 예를 들자면, ‘이 집은 좋다’라거나 ‘그 행위는 아름답다고’ 말해진다. 그 결과 마치 양상어가 대상의 속성이나 상태로 여겨진다.

헤겔은 이런 양상 판단이 진리 판단처럼 하나의 ‘명제’나 ‘판단’이 주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즉 여기서 주어는 ‘어떤 대상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전제하면서 일어나는 판단이라는 것이다. 즉 위에서 언급된 예는 곧 ‘(이런 상태에 있는) 이 집은 좋다’거나, ‘(그런 상태에 있는) 그 행위는 아름답다’라는 판단이 생략된 또는 암시된 판단이라는 것이다.

2)

더구나 이런 양상 판단에서는 이미 평가를 위한 개념이 전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집이 좋다’라고 할 때, 이미 ‘좋다’라는 평가는 어떤 것[‘집’]의 일반적 본질 즉 당위나 개념이 전제되고 있다.

이런 당위나 개념은 물론 평가자의 주관적인 생각에 그친 것일 수도 있으니, 이런 점에서 양상 판단은 흔히 주관적인 평가를 담고 있으며, 사태에 대한 주관의 관계를 즉 헤겔적으로 말하자면 외적 반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개연[problematisch] 판단’은 주관이 임의적으로 내리는 것이며, ‘실연[assertorische: 단정] 판단’은 경험적 진리와 같이 개념에 적합한 우연한 현실을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필연[apodictishc: 자명] 판단’은 수학적 진리와 같은 주관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판단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헤겔에서 이런 당위나 개념은 앞에서 나온 [배타적] 선언 판단 형식을 통해 밝혀진 객관적인 개념이다. 즉 선언 판단에서 일반적 유는 배타적인 선택지의 통일[P or -P]로 규정된다. 이 배타적 선택지를 규정하는 원리가 곧 일반적 유의 객관적 본질, 개념이다. 헤겔은 이 원리는 P와 -P의 [미분적] 관계로 규정된다.

이런 객관적인 개념이 이미 선언 판단을 통해 출현했으므로 이는 평가자의 사유 속에 깃들어 있는 주관적인 것이더라도 객관적인 당위이며 개념이다. 이런 당위나 개념은 양상 판단의 술어에 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판단을 흔히 말하듯이 양상 판단이라 부르지 않고 개념 판단이라고 부른다.

“오히려 개념 판단은 객관적인 판단이며 그 이전의 판단에 대립하여 진리가 된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개념 판단에서 개념의 근거는 외적 반성 속에서나 주관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 즉 우연적 사유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개념으로서 그 자신의 규정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논리학 2부, GW12, 84)

3)

앞에서 본질론 3편 실제성 편에서 헤겔은 실제성, 가능성, 필연성과 같은 양상 개념을 다루었다. 이때도 헤겔은 이미 실체가 잠재적으로 출현한 것을 전제로 했다. 그 때문에 양상 개념은 극히 한정적으로만 사용되었다.

본질론의 양상 개념에 상응하는 것이 판단에서는 개념 판단인데, 이 개념 판단도 이미 일반적 개념이 출현한 것을 전제로 하므로, 상당히 제한적으로만 적용된다. 이는 일상적인 생각과는 대립한다. 일상적으로는 양상 판단은 주관적 개념을 전제로 하므로 예를 들어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이 집은 좋다’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헤겔이 ‘좋다’라고 판단할 때 이미 일반적인 개념이 전제되고 있다. 이는 선언 판단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서 개념[양상] 판단은 개별자가 이 일반적 개념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이것은 좋다’라고 할 때, 이런 판단은 일상적인 의미에서 양상 판단이기는 하지만, 개념 판단은 아니게 된다.

이런 제한성은 사실 다른 범주의 판단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상적으로 양의 판단에서 ‘몇몇은 빨갛다’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헤겔에서 양의 판단에 대응하는 반성 판단에서는 이미 술어가 ‘빨갛다’와 같은 추상적인 성질이 아닌 일반적인 속성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몇몇은 무게를 지닌다’라는 판단은 가능하지만, 위와 같은 ‘몇몇은 빨갛다’와 같은 판단은 가능하지 않다.

다른 모든 범주에서도 마찬가지다. 헤겔은 판단이 경험의 발전에 대응하여 발전하는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각 판단이 한정적으로 사용되는데, 물론 여기서 발전된 경험에 대응하는 판단이, 저급한 경우에 적용되는 퇴화적인 용법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므로 헤겔은 사람들이 ‘몇몇은 빨갛다’라거나, ‘이것은 [주관적 개념에 따라] 좋다’라고 말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용법은 판단 형식이 지닌 논리적 범주로서의 의미와는 무관한 용법이다.

결국, 판단 형식이란 그 자체가 인식적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판단 형식은 경험에 관한 반성을 통해 인식이 이루어진 이후 그 인식을 표현하는 방식이며, 판단 형식 자체를 가지고 거꾸로 인식의 수준을 가늠할 수는 있어도 판단 형식이 그 인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4)

따라서 ‘이 집이 좋다’라는 단순하게 보이는 양상 판단은 헤겔에서는 상당히 복잡한 판단이 된다. 즉 ‘(이런 상태에 있는) 이 집은 (집의 개념에 비추어 보면) 좋다’는 판단이 된다. 여기서 주어에는 사태가 은닉되어 있으며, 술어에는 개념이 은닉되어 있다.

이제 헤겔을 따라 양상 판단 대신 개념 판단이라 지칭하자면, 개념 판단에서 양상어는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앞에서 말했듯이 양상어는 대상의 속성이나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양상어는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헤겔은 양상어의 의미를 계사의 의미와 연관시킨다.

원래 계사란 주어가 지시하는 개별자가 술어가 의미하는 일반성과 일치 여부를 말해주는 것이다. 헤겔은 양상어가 사태와 개념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 역시 하나의 계사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사실 개념 판단의 주어 자체가 하나의 판단이다. 이 판단은 곧 ‘어떤 상태의 것이 일반적 본질이다’라는 판단이다. 양상어는 이런 판단에 대한 술어인데, 이는 곧 기초 판단의 계사가 자기를 밖으로 드러낸 것이다. 기초 판단에서 주어, 술어의 합치한다는 것이 술어에서 진리라든가, 좋다라는 양상어로 표현된 것이다.

“좋거나 나쁘며 진리거나 아름답고 정당하다 등의 술어는 사태가 전적으로 전제된 당위인 그 일반적 개념에 비추어 측정되고 그런 당위와 합치하는가를 표현한다.””(논리학 2부, GW12, 84)

그런 점에서 양상어는 사실 없어도 되는 것이다. 이미 전제된 기초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가 합치한다면, 진리이며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상어가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기초 판단에 대해서 이를 진리로 표현할 수도 있고, 도덕적 선이나 미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를 진리나 선이나 미와 같은 특정한 양상어로 표현했다는 것에 독특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는 전제된 기초 판단이 지닌 인식의 상태와 연관된다. 마치 절대정신이 이런 인식 상태에 따라서 종교, 예술, 철학으로 나누어지듯 양상어도 그런 상태의 차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5)

헤겔은 이런 개념 판단의 형식은 ‘단정 판단’에서 ‘개연 판단’으로 그리고 ‘자명한 판단’으로 나간다고 한다. 개념 판단 형식의 순서는 칸트와 구별된다. 칸트는 ‘개연 판단’, ‘실연[단정] 판단’, ‘필연[자명] 판단’으로 나간다.

이런 판단 형식의 발전은 본질론에서 3편 실제성 편에서 다룬 양상 개념과 상응한다. 거기서 ‘실제성’, ‘가능성’, ‘필연’성이라는 양상이 다루어졌는데, ‘단정 판단’은 ‘실제성’과, ‘개연 판단’은 ‘가능성’과 ‘자명 판단’은 ‘필연성’과 상응한다.

개념 판단 형식의 출발점 즉 단정 판단 형식에서 이미 개념과 당위가 술어 편에 내재하고 있다. 좋다거나 진리라고 할 때 그 일반적 기존, 원리, 본질은 이미 확립된 것이다. 다만, 아직 주어는 개별적인 사태이므로 이런 개념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연하게 들어맞을 수는 있지만, 필연적으로 그 개념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선언 판단에서 개념은 일반적 본성과 그것이 특수화한 것 사이의 동일성으로 정립된다. 그것에 따라서 판단에 속한 관계가 지양되었다. [주어인] 일반성과 [술어에서의] 특수성의 이런 구체적 관계는 우선 아직 단순한 결과일 뿐이다. 이제 더 나가서 보자면, 우선 이 관계가 포함하는 계기들이 그 속에서 몰락했지만, 특정한 자립성을 지닌 채 서로 대립하기에 이르지는 못했다.”(논리학 2부, GW12, 84)

“이 특수한 것들의 부정적 통일성은 다만 전자 즉 객관적 일반성 속으로 되돌아갈 뿐이며 아직 제삼자 즉 개별성에로 자기를 규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결과가 부정적인 통일인 한에서 그런 결과는 사실 이미 이런 개별성이지만, 다만 이 하나의 규정성은 이제 그 부정성을 정립해야 하며, 자신을 양극으로 분화하여 이런 방식으로 완전하게 추론으로 발전해야 한다.”(논리학 2부, GW12, 85)

여기서 객관적 일반성은 선언 판단의 주어인 일반적 유이다. 개념 판단에 이르면 이런 일반적 유가 실제적인 개별자 속에서 출현한다. 예를 들어 ‘집 일반’이 ‘이 집’ 속에 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판단의 운동은 주어인 개별적 사태가 일반적 유에 포섭되는 운동이다. 그러면 주어는 일반적 유가 되고 술어인 일반적 본성에 적합하게 되면서 자명한 필연적 판단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어나는 운동은 주어 편에서 일어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따라서 반성[양] 판단에서 일어나는 주어의 포섭 운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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