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들지 않는 바위틈에서도 이끼는 자란다-안토니오 그람시[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⑤

Spread the love

햇볕이 들지 않는 바위틈에서도 이끼는 자란다-안토니오 그람시[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⑤

 

강사 : 이순웅(숭실대 외래교수)
후기 :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

혁명가에게 가장 잔혹한 것은 어쩌면 혁명의 좌절도, 혁명의 과정에서 당하는 희생도 아닌 혁명의 장, 그 자체를 박탈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는 그의 짧은 인생의 1/4가량을 감옥에서 보내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버린 불운의 혁명가이다. 그가 살았던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민주적 투표를 통해 집권하고 서유럽의 혁명의 열기가 전반적인 위기를 겪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 암울한 이탈리아의 정세와 자신의 갇힌 몸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혁명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위해 구명운동을 펼쳐준 로맹 롤랑의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경구로 삼았다. 아마 그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 혁명을 준비하고 이야기한 혁명가 중 하나일 것이다.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5번째 시간에서는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한철연 연구협력위원장)와 함께 그람시와 그의 꺼지지 않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교수는 그람시의 생애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 뒤 그의 사상을 안내하는 것으로 강연을 이어갔다.

그람시는 1891년 이탈리아 서쪽에 있는 섬 사르데냐에서 태어났다. 그는 척추장애를 앓았으며 어려서부터 병약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등기소 소장에 해당하는 공무원이었으나 지지하던 후보가 낙선하자 승리한 측의 ‘정치보복성 조치’로 감옥에 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람시의 가난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는 장학생으로 토리노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람시는 대학시절 훗날 이탈리아 사회주의운동의 주역이 되는 ‘보르디가’, ‘톨리아티’, ‘타스카’ 등을 만나고 이때부터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탈리아공산당을 사회당으로부터 분리하여 창당한 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 1926년 무솔리니로부터 구속되어 사망할 때까지 감옥과 병원에 있었다. 옥중수고를 기록한 기간은 1929년부터 35년까지로 약 6년간이며 1937년 4월 21일로 형기를 마쳤지만 건강이 악화된 상태라 귀향하지 못하고 27일 사망한다. 옥중수고는 갇힌 그의 육신을 대신해 온 대지에 혁명을 전달하는 그의 날갯짓이었을 것이다.

 

가장 잊기 쉬운 건? 당신이 지배받고 있단 사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율적 존재, 주체라 생각하면서 지배(domination)는 물론이고 지도(leadership)까지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람시에게 정치는 지배뿐만 아니라 지도하고 지도받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깨닫는 데 있다고 한다. 이 교수는 여기서 그람시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관계를 잊기 쉽다’는 점이라고 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의 정치와 지배는 세련되어 지배를 지도로 가장할 뿐만 아니라 피지배자로 하여금 자신이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지배하더라도 동의를 얻으면서 지배한다고 한다. 이러한 환상을 누군가는 깨주어야 하며 그것이 이 교수가 강조하는 그람시가 가지는 오늘날의 가장 큰 의의다.

 

혁명의 길, 극복과 투쟁

그람시는 공장평의회운동이 기존 노조 등과의 충돌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실패하자 농민 등 파시스트 세력에 반하는 다른 세력과의 통일전선전략을 강구한다. 그리고 이 전략에 따라 그는 다른 이론과 대립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그람시와 동시대에 혁명을 고민하지만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던 대표적 인물로 보르디가, 스탈린,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로 뽑으며 그들과 그람시를 비교하면서 강연을 이어갔다. 그람시는 어떤 면에서는 그들에게 공감하기도 했지만 이들의 노선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혁명의 길을 닦았다.

보르디가는 교육과 학습을 강조한 그람시와 달리 지식인의 영향을 부정하면서 코민테른의 ‘통일전선’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 교수는 코민테른의 결정에 대한 입장 차이가 그 둘의 간격을 명확하게 한 것으로 보았는데, 이때 코민테른의 결정은 “반동의 공격에 견뎌내기 위해 ‘사회당원’과 ‘통일전선’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보르디가는 이런 ‘일보우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중간단계도 생각할 수 없고 그러한 민주주의는 오히려 파시즘보다 더 유해하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현재 이탈리아의 인민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향해서 싸우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실의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그람시의 말을 인용하면서 보르디가에 대한 그람시의 반대 입장을 설명했다. 이 일로 그람시가 사회민주주의로 후퇴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대중으로부터의 통일전선을 통해 대중 속에 침투할 수 있다고 여긴 그람시는 농민과 노동자들로 구성된 국민적, 대중적 세력의 동질적인 블록의 창설이라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람시의 이러한 노선의 고수는 그를 이탈리아공산당의 지도자로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얼마안가 그를 고립시키는 비수가 되었다. 이 교수는 그람시가 코민테른과 이탈리아공산당으로부터 고립되는 결정적인 이유를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에서 ‘우익적 국면은 끝났다.’라고 정한 방침에 그람시가 불복한 것에서 찾았다. 그람시는 민족부르주아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등에 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스탈린으로부터 완전히 배제 당한다. 훗날 홉스봄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무솔리니가 감옥에 가두는 바람에 스탈린으로부터 구출된 그람시’라고 표현한다. 스페인의 상황은 그람시로 하여금 평소에 가졌던 신념을 더욱더 확고하게 했을 것이다. 1936년 2월 인민전선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단기적이고 공세적인 기동전과 장기적이고 수세의 공간에서도 활용 가능한 진지전을 자신의 혁명의 전술로 적용한다. 그는 러시아에 비해 서구는 진지전이 적합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가 기동전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닌데 상황과 정세에 따라 전술은 고려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람시는 비교적 레닌의 생각에는 충실했지만 로자 룩셈부르크와 트로츠키에게 있어서는 비판적 입장을 유지하기도 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그람시는 로자의 자생론을 경제주의의 하나로 보았다. 이 교수는 제임스 졸의 전기(이종은 역,, 까치, 1984)를 인용하면서 그람시가 로자의 혁명적 순교를 흠모하긴 했지만 그녀가 주장하는 자생론에 대해서는 비판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교수는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로자를 비판하는 내용을 소개하는데, 로자는 “공황이 발생했을 때 이는 자본의 방어망을 교란시키는 야포(野砲)로 역할하며 이가 순식간에 잠재되어 있던 아군의 역량을 조직하고 필요한 요원을 창출하며 이들은 공통목표에 요구되는 이념적 집중을 순식간에 가져온다.”고 말하는데 그람시가 보기에 이는 명백한 역사적 신비주의였으며 일종의 기적적인 빛에 대한 기대였다는 것이다.(『옥중수고1』 274~275쪽)

그람시가 보기에 러시아에서의 혁명 성공 이후에도 서유럽 등으로 혁명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기동전의 일환이다. 그러나 그람시는 서구에서는 기동전보다 진지전이 더욱 적합하기 때문에 트로츠키식의 혁명론과 슬로건에는 공감하지 않았다.

 

민주주의 문제는 헤게모니 개념과 함께 보아야

이 교수는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는 아감벤의 말을 인용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절대적 숭배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역시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그람시가 민주주의를 진지전의 요소로 보는 한편, 민주주의 일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람시가 민주주의를 완전히 신봉하지 않는 이유는 무솔리니나 히틀러 역시 민주주의의 제도를 통해 집권했기 때문이며 레닌의 ‘외부로부터 도입’과 같은 혁명노선에 상당부분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람시에 따르면 현대 민주주의의 구조들은 진지전의 전선에서 설치된 ‘참호’와 항구적인 요새를 구성한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그람시에게 ‘진지전’이 가능하게 하는 한편, 이전 전쟁의 모든 것이었던 ‘기동전’이 이제 부분적인 것이 되게 하는 구조이자 장치였다.

헤게모니와 관련해서는 지도받는 집단으로부터 지도하는 집단으로의 이동을 보장하는 한 두 집단 사이에는 민주주의가 존재한다고 그람시는 본다. 이 교수에 따르면 그람시는 헤게모니 개념을 혼용하여 사용한다. 지도와 지배를 합한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강제와 동의를 합한 뜻으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배’보다는 ‘지도’에 가까운 개념으로서 헤게모니를 다루었는데 이는 강제에 의해 지배하는 좁은 의미의 국가, 즉 정치사회로서의 국가에 대비되는 통합국가, 즉 동의의 기제를 발달시킨 ‘시민사회가 모든 것’인 통합국가의 특징이다. 그람시가 민주주의를 그 자체로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동의를 얻으면서 지배를 관철시키는 지배 계급의 헤게모니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람시에 따르면 피지배 계급이 지도 계급이 되려면, 이는 대항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길이기도 한데, 지배계급이 되기 전이든 후든 늘 지도해야 하며 때로는 경제적 조합주의적 측면에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진지전의 전술로서 활용할 수는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도시인이 농민을, 남성이 여성을 차별해서는 헤게모니를 확보할 수 없다.

 

타협은 강자가 하는 것, 어떻게 민중이 강자가 될 수 있나?

그람시는 러시아혁명은 『자본론』에 반하는 혁명이며 역사의 무대에 ‘철의 시간표’는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는 그람시는 반(反)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그람시는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렇듯 혁명에 관념이 아닌 현실성을 부여하고자하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토대결정론, 경제결정론을 거부하고 의식의 상대적 자율성, 의식이 토대에 미치는 영향도 중요시한다. 이 교수는 훗날 알튀세가 최종 심급에서만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말한 것과 이는 비슷한 맥락이라 지적하며 그람시는 상부구조를 토대의 부수현상으로만 보는 것을 부정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상부구조와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그람시의 시각은 엘리트주의로 보일 수도 있었다는 점은 이 교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이러한 비판에 앞서 당시 이탈리아 봉기의 무조직성과 공장평의회 운동의 실패원인 즉, 운동을 조직할 정당과 지도 부재 등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고 분석한다.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이 교수는 그람시가 당시 라디오, 영화와 같은 대중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무솔리니와 달리 문학 등 문자매체에 주목함으로써 문화적 영향력의 한계를 보이며 어느 정도 엘리트주의적인 지식인론을 펼친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어서 이데올로기 시대에서 환상의 시대로 옮겨가고 있는 지금, 그 환상이 갖고 있는 의미를 해석하고 그 환상이 가진 힘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자는 필요하지 않느냐고 질문을 던지며 그람시의 현대적 의의 찾는다. 그리고 이 교수는 지도와 당의 역할을 쉽게 폐기하는 것에도 경계를 보낸다. 즉 그간의 혁명 운동을 평가한다면, 잘했는데 잘 안 된 것이 아니라 잘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잘 못했다고 해서 당과 대중의 관계 자체를 폐기하기도 어렵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교수가 보는 오늘날의 한국정치의 위기는 그람시의 위기 즉, 전선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람시가 지적하는 문제 즉, 도덕적인, 능력적인 면에서 자격 없는 운동권이나 정당의 문제이며 또 주체 형성에 실패한 국민, 참여 정부의 문제라고 지적하며 이날 강연의 결론을 대신하였다.

자본이 이미 정치권력을 넘어서고 현 정부의 권력남용이 도를 지나치는 암울한 시대, 더 어두운 곳에서 촛불을 켰던 그람시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여전히 희망으로 다가온다. 전체 강연이 중반으로 접어들었음에도 이날 역시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 희망을 찾아온 청중들로 강의실이 가득 찼다. 이 희망이 강의실 넘어 멀리멀리 퍼지질 기대하면서 그날의 밤도 마무리 되었다.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