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와 인간성 모두를 쟁취한 혁명이 가능한가?-마오쩌둥[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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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와 인간성 모두를 쟁취한 혁명이 가능한가?-마오쩌둥[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④

이철승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 연구교수
이원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13억의 혁명의 상징 마오쩌둥

최근 중국의 급성장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과 경계를 받고 있다. 중국이 급성장한 것은 과거 악마적 마오이즘과 결별하고 개과천선한 결과일까? 중국과 중국인들은 자신 있게 아니라고 말한다. 오늘도 천안문 앞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시신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중국인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그에 대한 중국인의 애착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아쉽게도 우리는 그에 대해 잘 모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오쩌둥은 대장정을 성공한 판타지스타이거나 문화혁명을 수행한 괴수이다. 그러나 이런 단편적 사건으로 13억 인구의 애착을 이해하긴 힘들다.에서는 4번째 시간으로 이철승교수(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 연구교수)와 함께 마오쩌둥과 그 사상인 마오이즘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마오쩌둥은 역사 속 인물이다. 그저 지나간 인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마오쩌둥과 마오이즘은 ‘갑자기 불어 닥친 광풍’도 아니고, 19세기말, 20세초 세계를 강타한 마르크스주의라는 ‘유행’에 무임승차한 것도 아니다. 이 교수는 중국역사 속에서 마오쩌둥을 봐야 하고, 그래야만 마오쩌둥을 이해할 수 있으며, 현대 중국을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현대 중국의 역사적 형성 과정에서 마오이즘을 이해해야한다. 이 교수의 말대로 현대 중국과 마오쩌둥은 구분되지 않는다.

흙을 딛지 않는 꽃은 없다. 마오쩌둥이 대륙을 설득하고 그의 이념이 정신적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오늘날까지 중국의 주요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에 맞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서방에서 날아와 중국대지에 잠시 앉은 나비가 아니라, 인민의 ‘바람’이라는 ‘바람’을 타고 날아온 민들레 꽃씨가 중국의 토양 속에서 싹을 틔운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 교수는 마오쩌둥에 관한 강연을 마오쩌둥의 출생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중국의 정치적, 사상적 동요를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의 시각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단지 1893년 어느 중농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봉건시대의 몰락과 그 후 다양한 위기 극복 시도,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도입과 그 시행착오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마오쩌둥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마오쩌둥이 뚝 떨어진 하늘은 중국의 역사였다.

중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심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부심일 것이다. 대륙을 지배하고, 감히 그곳을 ‘천하’라 칭하며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중국인들에게는 강한 중화사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교수는 이러한 자부심이 무너지는 계기를 아편전쟁으로 뽑았다. 그리고 이는 수천 년을 이어온 중국사상계에 큰 충격이었기에 많은 동요를 불러왔다. 이 교수의 지적대로 아편전쟁은 중국에게 정치적, 사상적, 문화적으로 큰 전환점이었다.

이철승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 연구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무너진 중국의 현실과 사상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19세기 후반부터 중국사상계에서는 백가쟁명이 일어났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당시 유행한 중체서용론은 이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서양을 방법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현실과 사상적 위기를 극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당시 중국의 현실이 “서양의 과학 등만을 받아들이는 문제, 즉 ‘도구’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사상에도 문제가 있다는 의식”이 나타났으며, 이를 바탕으로 입헌민주주의론이 나타났다. 이 교수는 이것이 신해혁명과 5·4운동의 기반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어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등장과 군벌의 난립 등으로 혼란을 겪어 입헌민주주의론은 크게 진척되지 못하고, 오히려 통치체제의 부재를 낳았다. 중국의 무정부주의는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사회에 등장했으며 30년대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는 이 무정부주의를 비판하면서 성장했다.

한편 혼란이 가중되면서 근대중국사상운동은 극단적 모습을 띄기도 했는데, 이 교수는 이러한 것으로 서화론과 동방문화파를 들었다. 서화론은 ‘이제 더 이상 중국은 전통을 유지하지 말고 서양을 완전히 받아들이자는 것’으로 서구적 자유주의화를 주장했다. 그에 비해 동방문화파는 ‘서양 자유주의의 근간인 이기주의를 비판하며, 이는 타자를 주변, 반주변으로 모는 배타주의이기 때문에 서화는 중국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였다고 비판하며 전통 도덕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근대중국의 노력은 자유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대한 담론을 끌어냈으며,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근대적 담론 속에서 그들을 비판하면서 성장했다. 그리고 그 결론이 마오이즘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이 교수는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의 계보를 소개하며 마오쩌둥에게로의 안내를 진행했다.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는 자유주의적 서양화에 대한 한계 체감으로 등장하기 시작해 1917년 볼셰비키혁명의 영향으로 사상적 통일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통일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중국마르크스주의 내의 시행착오와 사상투쟁 끝의 산물이었다. 이 교수는 이러한 과정에서 큰 영향을 준 사상가로 5명의 중국 마르크스주의자를 꼽았다.

이 교수 처음으로 꼽은 초기 중구 마르크스주의자 천두슈(陳獨秀)는 무정부주의를 비판하면서 초기 중국공산당을 이끌었으며 제1차 국공합작을 이루었다. 그는 당시의 문제를 사회적 관점에서 봐야지 개인적, 윤리적 관점에서 봐서는 그 해결이 요원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르주아도 필요하다고 여긴 그는 국공합작이 깨어진 후 우경기회주의자로 낙인 받고 당에서 축출되었다. 이 교수는 이어 북경대 도서관장으로서 마오쩌둥에게 사서보조원으로 근무하게 하면서 학습의 장을 마련해준 리다자오(李大釗), 사적유물론만 존재하던 중국 마르크스주의 진영에 유물변증법을 소개함으로써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지만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무리한 광저우 봉기를 시도하다 장제스(蔣介石)에게 패배하고 좌경모험주의자로 낙인 받은 취치우바이(瞿秋白), 뛰어난 저술활동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상세하게 소개한 리다(李達)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 교수가 가장 강조한 인물은 마오쩌둥의 이론적, 사상적 호위무사인 아이스치(艾思奇)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데 80~90년대 대학가를 강타한 『철학에세이』가 그의 저서 『대중철학(1934)』을 모티브로 한국 상황에 맞게 재서술 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철학에세이』가 그랬듯이 아이스치의 『대중철학』은 마르크스주의를 쉽게 풀이하면서 그 사상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이 책을 읽은 마오쩌둥이 그에게 편지를 하고, 이를 인연으로 그와 마오쩌둥은 정치적, 사상적 동지로서 마오이즘을 함께 형성해갔다.

 

실사구시, 유학과 마르크스주의가 만나다.

이 교수는 마오쩌둥사상의 성립 근거로 당시 중국의 실정,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전통사상 이 세 가지를 꼽았다. 반제반봉건 사회로서 당시 중국은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공존하는 사회였는데, 이 교수는 앞서 설명한 사상적 연원과 함께 이러한 중국의 실정이 마오이즘이 나타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유물변증법과 사적 유물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마오이즘의 가장 큰 핵심이다. 그러나 이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마오쩌둥이 중국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고 마오쩌둥이 중국인민들의 동의를 획득한 것에는 이미 중국 전통사상에 유물론의 단초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소비에트적인 혁명관을 가져들어온 왕밍(王明)과 충돌했다. 왕밍은 프롤레타리아 전위를 내세웠지만, 당시 중국은 노동자는커녕 도시조차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면서 중국적인 혁명을 준비했고, 이에 마오쩌둥은 전통사상을 가져온다.

이 교수는 중국 전통사상의 실사구시적 성향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사구시적 사고가 마르크스주의의 중국 안착을 도왔다고 분석했다. 맹자(孟子)와 성리학, 양명학으로 이어지는 리철학(理哲學)뿐만 아니라, 현실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치가 나온다는 순자(荀子), 왕충(王充), 왕부지(王夫之)로 이어지는 기철학(氣哲學)적 전통 역시 중국사상에는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성리학 일색인 한국과 달리, 중국의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전통사상을 고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물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했다. 이 교수는 특히 “현실에 부딪쳐 이치를 알아야지 관념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왕부지에 주목했는데, 이러한 기철학을 바탕으로 마오쩌둥은 낯설지 않게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접목 시킬 수 있었다.

이 교수가 주목하는 중국전통과 마르크스주의의 교차점은 기철학뿐만 아니다. 탕왕(湯王), 무왕(武王), 맹자 이래로 이어져 온 혁명 사상 역시 중국인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중국만큼 혁명에 익숙한 나라도 없을 듯 했다. 역사 속에 빈번하게 이어져 온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중국인들에게 백성이 국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가지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교수는 이어서 서로 마주하면서 서로를 이뤄주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을 설명하는 『주역』의 변증법적 사고, 『손자병법』의 전술 등을 들며 중국 전통사상에서 마오이즘의 단초를 찾았다. 마오쩌둥이 전통사상에서 주목한 것은 대부분 유학적 전통이었다. 마오쩌둥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유학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도덕주의를 견지하면서 ‘인간적 혁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의 도덕주의는 대장정 과정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는데, 당시 인민군이 보여준 인민에 대한 예의와 보은 그리고 낙오자에게 보여준 마오쩌둥의 인간적 이해는 그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지 간에 그람시가 말한 도덕적 헤게모니를 획득하여 혁명을 승리로 이끈 가장 큰 힘이 되었다. 버림받지 않고 배려 받은 낙오자들은 그 지역을 조직하여 훗날 마오쩌둥의 가장 큰 후원군이 되었다.

이 교수는 마오쩌둥의 주요 사상으로 모순론, 실천론, 그리고 인민민주주의론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모순론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간의 대립을 말하는 정통마르크스주의의 적대적 모순뿐만 아니라, 공산당 내부에도 모순이 존재할 수 있으며 이는 계급적 모순이 아니기 때문에 비적대적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론은 모순에 대해 교조적으로만 받아들여 현실의 대립을 외면하는 것을 관념론으로 보며 비판하는 마오쩌둥의 시각이 들어 있다. 그리고 앎과 행함의 우선 순위를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중국 전통사상에서 그 근거를 제시하는 실천론 역시 마오쩌둥만의 마르크스주의이다. 인민민주주의론은 마오쩌둥만의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설명하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인민민주주의에 이르는 방식에서 정통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전술을 구사한다. 당시 아직 사회주의에 이르지 못한 중국에서의 신민주주의론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뿐만 아니라 농민, 소유산계급, 민족자본가, 지식인의 연합으로서 현실 문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반제국주의 전선으로서 민족모순을 극복하고, 또 도덕적 헤게모니를 통하여 이들을 국민당이 아닌 공산당과의 협력관계를 유지시켜 혁명을 이룬다. 마오쩌둥의 인민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독재이기는 하지만, 당시 중국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피지배 혹은 양심적 구성원들로부터 형성되었다는 특징을 가진다.

 

마오쩌둥의 그림자와 개혁개방의 그늘

마오쩌둥의 혁명은 승리했고 전 중국이 붉은 깃발로 펄럭였지만 농민, 소유산계급,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 혼재되어 있었던 그 혁명대열은 혁명 이후에도 내부갈등이 존재했다. 이에 중국 내부의 반우파 투쟁이 발생했고, 인위적으로 사회주의를 만드는 인민공사와 대약진 운동이 진행되었다. 특히 노동자, 농민, 군인 등의 철학 배우기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 교수는 이를 일종의 사상투쟁으로 설명했다. 당시 유행하던 ‘하나가 나눠 둘이 되고, 둘이 합쳐 하나가 된다.’는 통일적인 변증담론을 계급조화론의 반영이라고 판단한 아이스치가 이 사상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이러한 사상투쟁은 내부의 자유주의적 담론이 너무 커져 중국이 ‘말만 사회주의’국가가 되는 것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는 다양성보다는 한 면만을 바라보는 경직성의 시작이기도 했다. 홍위병이 이를 계기로 조직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문화혁명은 반혁명적 자유주의와의 투쟁에서 지식인과 다양성에 대한 탄압의 상징이라는 오명으로 바뀌어버렸다. 이 교수는 문화혁명을 옹호할 의도는 없어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과정에서 나타났는지를 분명히 파악해야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 마오쩌둥과 현대중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다고 했다. 문화혁명의 끝자락에서 마오쩌둥과 그의 사상적 동지들은 세상을 저버렸지만, 그가 남긴 과제는 여전히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수의 강연도 그 사후 중국의 개혁개방을 설명하는 것으로 계속 이어졌다.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혁명이 끝난 후 중국은 문화혁명을 평균주의로 규정하고 실패를 선언한다.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한 도입을 서서히 진행하며 마오이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주요담론은 조금씩 폐기되었다. 이 교수는 이러한 것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사회주의 안에서도 소외가 발생할 수 있다.’는 소외 논쟁과 중국을 사회주의초급단계로 규정하고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간의 모순을 부정하는 생산력주의를 들었다. 이는 사실상 계급투쟁의 폐기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도입은 지역별, 개인별 양극화를 발생시켰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이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중국이 흘러가게 되었다. 천안문사건은 자유주의 도입을 시도하던 세력에 의해 오히려 진행되었다. 천안문사건을 이 교수는 밀려오는 자유주의에 대한 경계에 따른 속도조절론의 일환으로 진단했다. 자유주의는 가진 자들의 논리인데, 이것에 대한 무분별한 도입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로 받아들여졌기에 이것에 대한 중국의 심각한 고민이 생겼다. 개혁개방으로 인한 중국의 양극화 등 그 폐단을 이 교수는 그림자를 넘어 그늘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하며 중국 사회주의의 위기를 설명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최근에는 중국 내부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해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했다.’라는 자조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그러한 바람을 타고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마르크스와 마오쩌둥을 바라보는 신좌파가 등장하기도 했으며, 마오쩌둥사상의 재평가가 이뤄지기도 한다. 또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다른 이론적 힘으로서 자유주의에 대한 대책이 필요해 최근에는 중국학 열풍과 신중화사상이 퍼져나가고 있다. 단대공정은 이러한 운동의 일환이다.

한편 류샤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과 달리 후진타오(胡錦濤)에 이르러서는 빈부격차의 문제에 포커스를 두며 인민내부의 갈등을 화해해 중국의 미래를 만든다는 사회주의 화해사상을 말하고 있다. 이 교수는 사회주의 화해사상의 핵심을 유학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신중국은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혁명을 부정하면 국가정통성이 사라지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마르크스주의만을 바로 인민들에게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완충제로서 유학을 내세우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미덕인 이기심의 확산을 유학은 반대한다. 유학이 가지는 이타성은 21세기에 중국식 사회주의를 진행하는 측면에 중요한 사상으로 여겨진다. 최근 중국에서 왕성하게 부는 전통의 부활에 관한 열기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지금 지난 백 수십여 년 동안 잃었던 사상적 리더의 역할을 유학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으로 이루려고 한다. 이 교수는 이에 대한 상징적인 모습으로 베이징의 공자상 건립과 유학 열풍 증대, 마오이즘 재평가와 평등의식 확산 등을 들며, 이를 바탕으로 중국의 성장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21세기 한중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도모해야 한다고 설명하며 강연을 마무리 했다.

중국에 대한 가까운 정서적 거리감 때문인지, 아니면 마오쩌둥과 그 사상의 장대함 때문인지, 이날 강연은 넓은 중국대륙만큼이나 화려했으며, 청중의 집중도 어느 날보다 높았다. 68혁명 때처럼 그가 다시 혁명의 아이콘이 될 수 없을지 몰라도, 여전히 그의 혁명은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적셔주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날 밤 강연은 꿈속에서 떠다니던 ‘혁명’이라는 단어가 현실에서 실감나게 해준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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